[1]-1 미국 보수주의의 교훈/ ① 보수주의 이념의 뿌리 - ⑤ 보수주의와 음모론 - [2]한국의 보수/ 무너진 보수,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 미국, 일본, 한국
[1]-1 미국 보수주의의 교훈/ ① 보수주의 이념의 뿌리 - ⑤ 보수주의와 음모론 - [2]한국의 보수/ 무너진 보수,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 미국, 일본, 한국
[1]미국 보수주의의 교훈
조평세 런던대 킹스컬리지(KCL) 종교학 학사, 월간조선
2024.01월 호
① 보수주의 이념의 뿌리
‘保守’이기 전에 ‘個人’이어야
⊙ 주권의 주체로 미국 독립혁명은 ‘개인’, 프랑스혁명은 ‘민족’을 상정
⊙ 윌리엄 F. 버클리, 러셀 커크, 에드윈 퓰너 등은 1950년대에 보수주의 운동 시작하면서 ‘개인주의자’ 자처
⊙ 개인주의적 전통은 기독교, 특히 종교개혁에서 시작돼
⊙ 이승만, 《독립정신》에서 ‘개인의 독립’ 강조
⊙ 대한민국 보수도 집단·당파에 의존하지 말고, 먼저 온전한 ‘개인’으로 독립해야
조평세
1983년생. 런던대 킹스컬리지(KCL) 종교학 학사, 전쟁학 석사, 고려대 북한학 박사 졸업 / 現 1776연구소 대표, 《월드뷰》 부편집장, 전국청년연합 바로서다 이사 / 역서 《레이건 일레븐》 《모든 사회의 기초는 보수다》 등

▲미국 독립선언 모습
“보수주의(保守主義)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수년 전 당시 미국보수연합(Ameri can Conservative Union)의 댄 슈나이더 사무총장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내가 미국 보수주의를 공부하고 있다고 소개하자 그는 이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내가 보수주의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테스트하는 질문이었다. 정확히는 “보수주의를 다섯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느냐(Can you define Conservatism in five words)”고 물었다.
잠시 당혹감이 스쳤지만 나는 곧 대답했다.
“All men are created equal(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미국 독립선언문 두 번째 문단의 두 번째 문장이다. 나는 보수주의 정신이 미국 독립선언문에 가장 잘 녹아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1776년 독립선언문의 두 번째 문단은 미국 정치권, 특히 보수 진영에서 가장 많이 읊는 구절이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들을 자명(自明)한 것으로 여긴다. 곧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일정의 불가침(不可侵)의 권리를 부여받았는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러한 권리들을 담보하기 위하여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그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同意)로부터 나온다.”
나의 대답에 슈나이더 사무총장은 제법이라는 느낌으로 웃어 보였다. 그러곤 자신의 답을 말했다. “Sovereignty resides in the person(주권은 개인에게 있다).”
‘주권은 개인에게 있다’
당시 나는 슈나이더가 단지 개인의 주체성(agency)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의 핵심 가치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후 보수주의 정치철학을 더 깊게 공부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주권이 개인에게 있다’라는 표현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구체적인 보수주의의 맥락이 내포되어 있었다.
우선 1776년의 미국혁명과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을 살펴보자. 혁명의 물결이 한창이던 1789년, 프랑스혁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la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이하 인권선언)’이 제창되었다. 프랑스 ‘인권선언’ 제3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Le principe de toute souveraineté réside essentiellement dans la Nation. Nul corps, nul individu ne peut exercer d’autorité qui n’en émane expressément.
해당 내용의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The principle of all sovereignty resides essentially in the nation. No body nor individual may exercise any authority which does not proceed directly from the nation.
온라인상 찾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우리말 번역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잘못) 번역하고 있다.
“모든 주권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떠한 단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유래하지 않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국민’이란 무엇인가
이 번역으로 보면 마치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주권은 국민에게 있고”)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런데 프랑스 인권선언의 ‘Nation’은 ‘시민 개인’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민족’이라는 집단을 뜻한다. 만약 주권이 각 인간이나 시민 개인에게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당연히 해당 선언의 제목에도 들어간 ‘l’homme(인간)’나 ‘citoyen(시민)’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미국 독립선언문, 헌법과 같이 ‘peuple(사람들)’ 정도를 썼어야 한다. 굳이 ‘Nation’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어떤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위 내용과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더 명확해진다. ‘민족이 아닌 개인(individu)에게는 주권이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보수주의의 정의와 전면 배치된다. 그렇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비판적 고찰(《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에서 보수주의가 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어 번역으로만 읽었을 때는 이 차이를 전혀 알아차릴 수 없다. ‘Nation’은 ‘국민’으로 번역되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본질이 감추어졌다. ‘국민’은 국민 개인, 즉 “국가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나라 헌법에 의한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자유민”을 뜻하는가, 아니면 국민이라는 어느 집단의 단위를 의미하는가.
앞서 슈나이더가 강조했듯이 보수주의의 정치철학은 주권이 개인에게 있음을 내포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근대 민주국가운동의 시초라고 알고 있는 프랑스혁명은 보다시피 이와 완전히 상반된 가치관을 담고 있다.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은 동시대에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라파예트와 같은 위대한 프랑스 장교가 참전했고,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문 작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상식》이라는 팸플릿을 통해 미국혁명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던 토머스 페인은, 10년 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혁명에 화력을 지원하고자 《인권》과 《이성의 시대》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혁명은 주권의 주체 단위와 같은 본질적인 대목에서 ‘개인’과 ‘집단’이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전자는 성공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유민주공화국을 낳았고, 후자는 처절히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육을 겪었다.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의 부정’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했던 프랑스혁명은 단두대로 상징되는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정치적 인식과 행동의 주체성이 각 개인이 아닌 집단에 있다는 정치이념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이후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프랑스혁명 역시 결국 단두대(斷頭臺)의 공포정치와 대량 학살로 막을 내리고 또 다른 철권 통치자 나폴레옹과 제국주의를 낳았다.
나폴레옹은 이 혁명가들을 이데올로그(idéologues)라고 폄하했지만, 결국 이 집단주의 이데올로기(idéologie)는 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낳았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유물사관과 결합해 국제사회주의(코민테른)를 낳고, 아리안 민족주의와 결합해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나치주의)를 낳았다.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반인륜적 극우(極右)와 극좌(極左)가 모두 프랑스혁명의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스펙트럼으로 따지면 북한 체제는 초창기 극좌에서 점차 극우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수주의는 버크를 통해 이 위험천만한 프랑스혁명의 경향성에 대해 경종(警鐘)을 울리며 태동했다. 그래서 러셀 커크는 보수주의를 ‘이데올로기의 부정(negation of ideology)’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곧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의 이 본질적 차이를 분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국내 대다수의 백과사전과 정치개념서는 프랑스혁명은 깊게 다룸과 동시에 심지어 미화(美化)하기도 하지만, 미국혁명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부분 근대국가운동의 시초로 프랑스 시민혁명을 언급한다. 미국혁명은 단지 프랑스혁명, 영국의 명예혁명과 더불어 ‘세계 3대 대표적인 시민혁명’ 중 하나로 묘사될 뿐이다.
개인인가 집단인가
다시 ‘Nation’의 우리말 번역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 독립선언문과 헌법의 ‘people’도 종종 ‘국민’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국민’도 시민·개인보다 국가가 우선한다는 오해의 여지를 갖고 있어 나름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인민’은 이미 오래전 공산주의자들이 선점(先占)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은 사전 정의상으로나 인식상 우선 “시(市)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또한 전달력이 약하다.
한편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의 두 번째 부분(“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은 위에서 언급한 미국 독립선언문의 표현(“정부의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로부터 나온다”)과 대동소이하다.
그렇다면 우리 헌법의 ‘국민’이라는 표현은 프랑스 인권선언의 ‘nation’을 따라 ‘한국 민족 집단’을 뜻하는가, 아니면 미국 건국 문서의 ‘people’ ‘governed(피통치자)’를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 개인’을 뜻하는가. ‘주권재민’의 민은 ‘민족(民族)’인가, 아니면 ‘시민(市民)’인가. 우리나라 ‘자치(self-government)’의 주체는 ‘민심(民心)’인가, 아니면 각 시민의 양심인가. 이 양자택일은 대한민국이 국가 정체성(正體性)을 정립하는 데 있어, 그리고 보수주의 정치철학을 한국에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북한 체제와 대한민국 체제를 나누는 인민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구분도 사실상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의 차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 중대한 본질적 차이가 당장 우리말 번역에서부터 완전히 사라져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주의 정치철학이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먼저 ‘개인’이었던 미국의 ‘보수’

▲1988년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 윌리엄 버클리. 버클리가 1950년대에 시작한 현대 미국 보수주의 운동은 ‘레이건혁명’으로 이어졌다.
보수주의의 핵심 주체 단위는 ‘개인’이다. 이는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태동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국 보수주의의 최초 조직은 1953년 프랭크 초도로브와 헨리 레그너리에 의해 세워진 ISI(Intercollegiate Studies Institute)이다. ISI의 초대 회장은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윌리엄 F. 버클리였다. 또 당시 《보수의 정신》으로 유명해진 러셀 커크가 이 단체의 기관지인 《Modern Age》의 편집장을 맡았다. 우리가 잘 아는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창립자를 포함한 수많은 보수주의자와 보수 성향의 기자, 평론가, 정치인들이 이 조직을 통해 발굴되고 배출되었다. 지금도 ISI는 델라웨어에 본부를 둔 대표적인 청년 보수 단체이자, 여러 대학생·청년 보수 단체 중 가장 지적(知的) 기반이 튼튼한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사실 이 단체의 원래 이름은 바로 Intercollegiate Society of Individualists, 즉 ‘개인주의자들의 대학캠퍼스 모임’이었다. 실제로 커크가 《보수의 정신》을 통해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계보(系譜)와 인물들을 정립하기 전까지는, 오늘날 ‘보수주의자(conservative)’라고 지칭하는 그들 모두 스스로를 ‘개인주의자(individualist)’로 여겼다. 빌 버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예일대를 졸업하며 예일대 교수들의 세속화와 사회주의적 경향을 폭로한 《예일대의 신(神)과 나》(1951)에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개인주의(individualism)’로 통칭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에 저항했던 경제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하이에크와 미제스 등의 유럽 지식인들은 미국에 와서도 ‘고전 자유주의자(classical liberals)’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20세기 초 진보주의와 우드로 윌슨의 ‘행정국가’ 확대를 통해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빼앗긴 후,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개인주의자’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
ISI를 설립한 경제학자 프랭크 초도로브도 《징세는 도둑질이다》 《한명도 군중이다: 어느 개인주의자의 고찰》 《소득세: 만악의 근원》 등의 저작을 펴내며 반(反)국가주의적(anti-statist) 의미의 개인주의자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그의 사상적 스승이자 존 듀이의 도구적 실용주의를 맹렬히 비판했던 앨버트 제이 노크도 가히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극단적 개인주의자였다. 이렇듯 현대 미국 보수주의 운동은 거대해진 국가의 집단주의적 간섭으로부터 악착같이 각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사수(死守)하려 했던 개인주의자들에 의해 태동하였다. 미국의 보수는 ‘보수’이기 전에 먼저 ‘개인’이었던 것이다.
개인의 탄생
‘개인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이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다. 그는 19세기 중반 미국에 와서 프랑스에서 실패했던 민주주의의 성공을 목격하였다. 그는 미국의 특수한 지정학적 조건, 그리고 초기 정착민들의 청교도적 문화와 법 의식이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았다. 또 이러한 점이 프랑스혁명과 달리 미국인들에게 도덕성과 주체의식을 제공하였고, 나아가 민주시민으로서 진정한 ‘자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토크빌은 개인주의를 현대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보고 우려하였다. 그는 개인의 자각이 과해질 때 세상에 자신이 혼자라는 극단적 고독이 엄습하여 집단 앞에 무기력함과 위축됨을 드러낼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개인주의가 결국 ‘다수(多數)의 폭정(暴政)’과 ‘연성(soft) 폭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토크빌은 이에 대한 견제로 종교의 공동체적 기능과 개인적 삶에 대한 의미 부여의 기능을 중요하게 여겼다.
사실 인류가 ‘개인’을 발견함에 있어 종교, 특히 기독교는 가히 근원적인 기여를 하였다. 기독교는 결정적으로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장론(萬人祭司長論)’, 즉 모든 사람이 성경(聖經)을 통해 신의 은총을 입고 나아갈 수 있다는 만인평등사상을 역설했다. 성경에서는 대표적으로 바울의 다음 구절을 그 근거로 꼽는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옥스퍼드대 정치철학자이자 이사야 벌린의 제자이기도 한 래리 시덴톱은 자신의 저서 《개인의 탄생》에서 개인의 인식과 자유주의의 개념이 헬라 철학이나 르네상스가 아닌, 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을 변증했다.
종교개혁과 미국 독립혁명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은 개인의 발견과 미국혁명으로 이어졌다.
서양법제사의 권위자인 헤롤드 버만도 그의 역작 《법과 혁명》에서, 서양법 전통에 기독교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밝혔다. 그는 특히 12세기 교황혁명(그레고리오개혁)과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그리고 17세기 영국 청교도혁명이라는 3대 기독교혁명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 담론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보여주었다. 구체적으로는 12세기 교황혁명의 불꽃은 영국으로 건너가 마그나카르타로 열매를 맺어 영국의 보통법으로 발전했고, 16세기 종교개혁과 17세기 영국혁명은 칼뱅주의와 청교도 정신을 낳았다. 그리고 이 정신은 미국 독립과 건국의 정치사상적 기초와 사회문화적 토대를 제공했다.
“미국을 건국한 것은 사실상 칼뱅이다.”
근대사학의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레오폴트 폰 랑케가 한 말이다.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이 하나님과 일반인들 사이의 중재자라는 교리를 거부하였다. 대신, 각 개인이 성경을 읽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적 종교관을 세웠다. 이 세계관이 미국인들의 ‘개인주의’, 즉 1776년의 독립정신과 보수주의 정치철학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종교개혁에 앞서 개인주의적 인간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빼놓을 수 없는 문명적 요소가 있다. 바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가동형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가히 혁명적인 ‘문자 폭발’을 일으켰다. 마셜 맥루한은 저명한 미디어이론가이자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학자인데, 그는 근대의 인간을 아예 ‘구텐베르크 인간’이라고 불렀다. 구텐베르크 이전의 인간은 청각-촉각 등을 포함한 오감을 통해 정보를 수용했다. 그러나 ‘활자인간’은 그 선형적이고 정형화된 질서에 의해 보다 내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문자 문명의 도래는 인류를 집단주의적 세계관에서 해방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표준화된 객관성과 자율성을 추구하는 독립된 개인들로 근대 자유민주공화체제를 맞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대한민국의 ‘개인’은?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개인’은 언제 태어났을까. 유럽에서와 같이 개인을 탄생하게 한 결정적인 종교사회적 혁명이나 기술문명적 돌파구가 있었을까.
금속활자보다 무려 80여 년이나 앞섰던, 1377년 고려 청주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은 인류는커녕 한반도에서조차 아무런 사상의 도약이나 혁명을 일으키지 못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개발과 거의 동시대에 있었던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1446)도 마찬가지다. 한글이라는 언문(諺文)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어떠한 개화(開化)도 일으키지 못했다.
결국 한국인에게 ‘개인의 발견’을 가져다준 것은 서구문물이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결정적 매개 역할을 종교개혁의 열매인 개신교(改新敎)가 감당했다. 심지어 한글에 띄어쓰기를 더해 실제 활용 가능한 언문으로 만들어준 인물도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 선교사였다. 물론 한글로 된 최초의 단행본도 성경이었고, 한글로 된 최초의 신문 《독립신문》도 선교사들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창간되고 발행되었다. 함재봉 교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추적하는 대작 《한국 사람 만들기》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글이) 재발견되고 재창제”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인도, 미국인이 그러했듯이, 자유민주공화국 시민으로 재탄생하기 전에 신 앞에 모두 동등히 선 종교인으로 먼저 ‘거듭’나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2023년 4월 27일 미국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된 자유와 연대의 가치는 19세기 말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에 의해 우리에게 널리 소개됐다.”
한국 보수도 먼저 ‘개인’으로 독립해야

▲이승만
이승만(李承晩)도 《독립정신》에서 초반에는 민족의 ‘독립’을 말하는 듯했지만 말미로 갈수록 사실 ‘개인’의 독립을 설파했다.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독립심을 가질 것, 동시에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할 것. 그의 ‘독립정신’은 이 두 가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가서는 아예 모든 사람이 오직 신상필벌(信賞必罰)하는 신을 믿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선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신 앞에 홀로 선 개인이 되어야만 나라의 독립은 물론 새 나라의 정치도 바로 설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우남(雩南)에게 있어 종교, 특히 기독교는 정치와 문명과 관습의 뿌리로써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바탕이었다.
그렇다. 대한민국에도 분명히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기초적 주체인 ‘개인’과 그 자유 및 평등사상의 바탕이 있다. 단지 그 사실이 여러 우연과 의도에 의해 지금까지 가려지고 왜곡되었을 뿐이다. 20세기 초 개인을 소멸시키는 집단주의적 진보주의 역사를 미국의 개인주의자들이 가로막아 서면서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씨앗이 되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보수도 집단과 당파에 의존하려는 유혹을 털어내고, 먼저 온전한 ‘개인’으로 독립해야 한다.⊙
② ‘렘넌트’들의 세력화
美 보수운동, 소수의 개인들을 텍스트를 통해 각성시키는 것으로 시작
⊙ 진보좌익은 대중선동으로 충분… 보수의 주체 단위는 개인이기 때문에 진실을 담는 텍스트가 필요
⊙ 로널드 레이건, 윌리엄 버클리의 《내셔널리뷰》 읽으며 보수주의로 전향
⊙ 윌리엄 버클리의 《예일대의 신과 인간》,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 등
⊙ 레너드 리드·헨리 해즐릿, 경제교육재단(FEE) 창설, 고전 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을 길러내기 위해 대학에 ISI 설립

▲1988년 1월 21일 백악관에서 만난 레이건 대통령과 윌리엄 버클리. 레이건은 버클리가 펴낸 《내셔널리뷰》를 읽고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1925~ 2008년)는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린다. 그의 청소년 시절, 버클리가(家)의 저녁 식탁에는 종종 한 노(老)신사가 초대되었다. 자칭 ‘철학적 무정부주의자’였던 앨버트 제이 녹이었다. 제이 녹은 버클리의 아버지와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코네티컷 샤론에 있는 버클리가의 저택에 주기적으로 찾아와 만찬을 함께하며 말년의 소회를 털어놓곤 했다. 이 ‘자유로운 영혼’과 보냈던 시간은 어린 버클리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제이 녹은 겉보기엔 마치 패잔병(敗殘兵)이나 다름없었다. 사회의 거센 시류(時流)와 싸우다가 결국은 막아내지 못한 비운(悲運)의 인물로 여겨졌다. 그는 젊은 시절 성직자가 되었지만, 더 많은 대중에게 영향력을 끼치고자 그 길을 접고 가족도 뒤로하였다. 그가 맞선 현대사회는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가, 철학적으로는 상대주의가, 정치사회적으로는 실용주의와 공리주의가, 문명의 기초가 되는 도덕과 질서를 갉아먹는 시대였다. 우드로 윌슨의 행정국가 건설과 국제 간섭주의부터,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철학과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까지, 바야흐로 ‘진보’의 파도가 물밀듯이 들어오는 국가주의의 전성기였다. 그는 이러한 시류에 수많은 글로 저항했지만 현대의 ‘진보’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1920년 《자유인(The Freeman)》이라는 이름의 리버테리언 잡지도 창간했지만 끝내 자금난으로 폐간해야만 했다.
어린 버클리와 함께 저녁 식사를 같이하던 제이 녹은 언뜻 보기에 사회에 깊은 환멸을 느끼며 자포자기에 빠진 듯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대중을 설득하겠다는 목표의 허망함을 깨닫고 일찍이 그 목표를 내려놓았다. 대신, 그는 다른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소수(少數)의 ‘남은 자(Remnant·렘넌트)’를 찾아 길러내는 것이었다.
렘넌트 정신

▲앨버트 제이 녹. 사진=퍼블릭 도메인
제이 녹은 1936년 《디 애틀랜틱》에 〈이사야의 사명(Isaiah’s Job)〉이라는 글을 실었다. 대중을 설득하는 ‘사명’을 가지고 열의에 가득 찬 어느 지식인에게 했던 충고를 전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구약(舊約) 시대 이사야 선지자가, 대중의 변화를 목표로 삼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일으켜 세워 문명 쇠퇴의 시기를 버티게 하는 것을 소기의 사명으로 삼았던 것에 주목했다. 그는 이 황혼의 때에 이사야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당장의 대중이 아니라 훗날 무너진 문명을 다시 일으킬 소수의 ‘렘넌트’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바로 거기에 그가 가졌던 ‘비관적 낙관’의 비밀이 있었다.
대중을 설득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거나 오히려 불리했다. 개인성을 감추는 집단은 양심의 작용을 억제하고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설득하는 것은 모든 사상가 및 지도자의 바람이지만, 이런 무리한 시도는 줄곧 선전선동 구호의 비중을 높이고 급기야 기만을 합리화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스스로의 정체성(正體性)마저 잃게 만들곤 했다.
반면 렘넌트 정신은 비교적 소박했다. 아직 조직화되지 않은 어설픈 개인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거센 시류를 막아내거나 방향을 바꾸는 게 아닌, 단지 흐름에 쓸려나가지 않을 소수의 남은 자를 그저 지키는 것이었다. 문명 수호와 같은 거창한 열매를 거둘 가능성도 적었다. 단지 문명의 황혼이 지나고 살아남아 있을 소수에게 희망을 걸고, 덤덤히 해야 할 일과 내야 할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야말로 선지자의 좁은 길이라 할 수 있다. 영광의 대로(大路)와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제이 녹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제이 녹의 렘넌트 정신은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그의 사상은 훗날 윌리엄 버클리를 비롯한 수많은 보수주의 사상가들에게 있어 중요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 무엇보다 대중을 설득하기보다 소수의 남은 자들을 발굴하겠다는 발상은 전략적으로 매우 유효했다. 현대주의의 거센 흐름 속에서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허덕이던 많은 사상가에게 거창하지 않아도 무언가 해볼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다.
렘넌트들의 모임

▲헨리 해즐릿
당장 제이 녹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레너드 리드와 헨리 해즐릿은 1946년 경제교육재단(FEE·Fou 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을 창립했다. 마침 정부의 사회주의적 간섭에 위기의식을 느끼던 많은 기업인이 자금을 지원했다. 시어스, 듀폰, 하워드 퓨, 제너럴 모터스 등이 기꺼이 동참했다. FEE는 당시 정부의 개입주의에 저항하던 라스바드, 미제스, 하이에크 등을 미국에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단체다. 이듬해 하이에크는 FEE의 지원을 받아 고전적 자유주의 지식인 모임인 몽펠르랭(Mont Pelerin) 소사이어티를 창립하기도 했다.
FEE의 목표는 단순했다. 대중을 상대로 한 거창한 설득이 아니라 소수의 개인, 즉 렘넌트들을 찾아내 키우는 것이었다. 당시 G. I. 빌(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제대 군인들에게 대학 교육을 지원하는 정책)로 인해 대학 캠퍼스가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FEE는 캠퍼스에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을 담은 소책자를 배포하는 문서사업에 주력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캠퍼스 잡지를 발행하도록 지원했다. FEE는 폐간해야만 했던 제이 녹의 《자유인》 잡지도 30년 만에 부활시켰다.
그들은 캠퍼스에서 더 효과적으로 고전 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을 길러내기 위해 ISI(Interco llegiate Society of Individualists)도 설립했다. 제이 녹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보수운동가 프랭크 초도로브가 총대를 멨다. ISI의 주요 사업은 FEE가 제작한 리소스를 가지고 각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공부 모임을 갖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집단 대중이 아닌 소수의 렘넌트를 설득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조급함을 버리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텍스트 구축에 주력할 수 있었다. 대중 집회와 집단의 구호는 뜨거운 열기를 발생시키지만 금방 식기 마련이다. 내성(耐性)과 피로 현상도 생겨 그러한 열기는 재생산하기 어렵다. 대중의 열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한 점점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진실과 거짓, 억측과 비약이 뒤섞인 각종 음모론이 파생되기도 한다. 든든한 사상적 토대가 구축되지 않은 보수는 또 다른 맹목과 교조주의(敎條主義)를 만들어 결국 보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된다. 러셀 커크가 정의했듯, 보수주의는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의 부정(negation of ideology)’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차분한 호흡 속에서 각 개인에게 스며들어 사상을 구축하는 힘이 있다.
윌리엄 버클리와 헨리 레그너리

▲윌리엄 버클리의 《예일대의 신과 인간》.
미국 보수운동의 시작은, 결국 어떤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텍스트였다. 제이 녹의 반(反)국가 사상을 담은 《우리의 적, 국가(Our Enemy, The State)》(1935)는 점점 거대해지는 정부에 대해 보수주의자에게 기본적인 불신을 심어주었고, 그의 렘넌트 정신은 폭주하는 현대사회의 시류 속에서 큰 닻이 되어 위대한 보수주의 고전을 남길 수 있는 ‘폭풍 속 고요함’을 제공해주었다.
그러고 10여 년 뒤, 미국 현대 보수주의의 최초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리처드 위버의 《사상은 결과를 낳는다(Ideas Have Consequences)》(1948)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진리의 절대성을 부정한 중세의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이 어떻게 서구문명의 쇠퇴로 이어졌는지 그 과정을 추적했다. 위버는 이 책에서 서구 사회가 어떻게 차례차례 진리를 ‘상품화’하여 인간을 그 도덕적 뿌리로부터 근절시켰는지 낱낱이 보여주었다. 또한 이렇게 무너져가는 서구 문명을 다시 소생시키기 위한 현대 보수의 대응책도 제안하였다. 구체적으로, 언어에 도덕적 가치를 다시 부여하는 것과 소유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소유권은 인간의 ‘마지막 형이상학적 권리(last metaphysical right)’라고 불렀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로 인해 언어가 가치와 분리되고 사적(私的) 소유가 죄악시되는 오늘날 여전히 매우 유효한 처방전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다 마침내 1951년, 윌리엄 버클리의 《예일대의 신과 인간(God and Man at Yale)》이 출간되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예일대학교에서 ‘사회주의를 가르치는 경제학 교수’와 ‘무신론(無神論)을 가르치는 신학(神學) 교수’ 등을 고발했다.
이 책은 예일대뿐 아니라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하며 미국 보수운동의 첫 신호탄을 쏘았다. 예일대학 측의 강한 반발과 버클리의 졸업을 취소하려는 위협도 있었지만, 버클리의 예일대 지도교수 윌모어 켄달이 그를 적극 변호하며 지지했다. 26세의 그는 이 사건으로 단번에 ‘미국 보수운동의 아이콘’이 되었고, 2008년 사망할 때까지 반세기 이상 그 타이틀을 유지했다.
버클리의 《예일대의 신과 인간》을 출간한 출판업자 헨리 레그너리는 이후 미국의 보수주의 책을 도맡아 출간했다. 그는 버클리의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시카고대학과의 거대 출판 계약을 파기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레그너리는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을 찾아내 그들의 책을 출판했다. 그의 결정적인 업적은 1953년 러셀 커크의 박사 학위 논문을 발굴해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커크가 원제(原題)로 달았던 《보수의 참패(Conservatives’ Rout)》를 《보수의 정신(Conservative Mind)》으로 바꾼 것도 레그너리였다. 커크는 이 책을 통해 많은 혁명적 철학가의 얕은 추상주의(抽象主義)와 비인간성을 폭로하며 영미식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자랑스러운 유산을 정립했다.
사미즈다트

▲《보수의 정신》 저자 러셀 커크.
《보수의 정신》과 더불어 그 해 두 권의 또 다른 보수주의 고전도 탄생했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자연권과 역사(Natural Right and History)》와 로버트 니스벳의 《공동체의 추구(Quest for Community)》다. 지난 2023년 9월 열린 ISI 창립 70주년 행사에서 헤리티지재단 창립자 에드윈 퓰너는, 70년 전 출판된 이 세 권의 책이 30년 후 ‘레이건 보수 혁명’의 초석을 놓았다고 회고했다. 스트라우스는 사회를 허무주의로 이끄는 현대의 상대주의를 비판하며, 서구 문명이 자연권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스벳은 국가의 탄생 이후 소멸하기 시작한 ‘개인과 국가 사이’의 공동체 회복을 주장했다.
1년 뒤 또 하나의 위대한 보수주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휘태커 챔버스의 《증언(Witness)》 또한 나왔다. 바로 미 국무부에 침투한 소련 간첩 앨저 히스를 고발한 챔버스의 회고다. 이 저작이 여전히 보수주의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인 서문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이 서문에서 챔버스는, 자신이 왜 이기는 쪽(공산주의)에서 지는 쪽(서구)으로 전향(轉向)했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신(神)이 부여한 양심을 따라야 하는 보수주의자의 숙명을 강력히 호소한다. 챔버스 또한 제이 녹과 마찬가지로, 절망 속에서 살아남을 소수의 렘넌트들을 통해 옅은 희망을 보았던 비관적 낙관론자였다.
제이 녹의 ‘렘넌트 정신’에 고무되어 FEE를 창립했던 헨리 해즐릿과 레너드 리드도 각각 고전자유주의 문학의 대표 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학 1교시(Economics in One Lesson)》(1946)와 《나는 연필입니다(I, Pencil)》(1958)를 남겼다.
흥미로운 것은 지구 반대편 공산권에서도 같은 ‘문학 전쟁(literary warfare)’이 펼쳐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치하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지식인들은 사미즈다트(samizdat)를 통해 수많은 렘넌트를 양성했다. 사미즈다트란 사회주의 치하에서 국가의 검열을 피해 자유인들이 문학작품과 평론을 자체적으로 출판하여 배포했던 지하운동, 또는 그 인쇄물을 말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바츨라프 하벨의 《힘없는 자들의 권력》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지하세계를 통해 밀수, 유포되며 남아 있는 자유인들을 버티게 하고 자유의 때를 준비하게 했다.
‘낙관적 비관’으로 시작한 《내셔널리뷰》

▲《내셔널리뷰》 창간호.
미국 현대 보수주의 운동의 출발 시점을 콕 집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1955년 11월 19일을 꼽는다. 바로 윌리엄 버클리가 보수주의 주간 평론지 《내셔널리뷰(National Review)》를 창간한 날이다. 《내셔널리뷰》 창간호 발행사 〈우리의 사명 선언(Our Mission Statement)〉에는 버클리가 어릴 적 식탁에서 만났던 제이 녹의 ‘비관적 낙관’과 텍스트의 중요성이 녹아 있다.
〈[《내셔널리뷰》는], 아무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할 것을 바라지도 않는 이 시대에, 역사를 가로질러 서서 ‘멈춰’라고 외친다.… 적어도 ‘뉴딜’과 타협할 수 없는 우리 보수주의자들은 정부의 주제넘는 ‘허가’를 거부한다. 이것은… 리버럴이 장악한 오늘날 세상에서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사상을 만들거나 보전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교환의 매체는 인쇄된 텍스트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지름길을 독차지한 듯 환희에 젖은 공산주의자들의 일심이 울려 퍼지는 이 세상에서… 절망감을 품고 출판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좋은 징조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상당한, 그리고 신중히 고려된 낙관을 가지고 이 일을 시작한다.〉
버클리는 2년의 준비 기간 동안 수많은 투자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며 ‘인쇄된 텍스트’를 통한 보수주의 사상 교환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많은 기업인이 함께했지만, 결국 상당 부분은 버클리가의 사비(私費)를 털어 충족해야 했다. 3명의 상주 직원 중 한 명은 무보수로 봉사한 버클리의 누이였다. 하지만 분명 가치가 있는 투자였다. 《내셔널리뷰》는 이후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주축이 되었을 뿐 아니라 보수의 방향을 설정하고 조정하는 포럼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수많은 잡지가 폐간되는 와중에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을 탄생시킨 잡지

▲휘태커 챔버스. 사진=퍼블릭 도메인
결정적으로 《내셔널리뷰》는 보수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을 만들어냈다. 할리우드 영화배우 출신으로 1950년대까지 민주당원이었던 그는 《내셔널리뷰》가 창간될 당시 제너럴일렉트릭(GE)의 홍보대사로 활약하며 전국의 GE 공장을 순회했는데, 당시 GE의 랄프 코디너 회장이 《내셔널리뷰》의 초기 투자자였다. 코디너 회장은 비행기를 싫어했던 레이건을 위해 출장 시 기차 이용을 배려하며 그에게 매번 《내셔널리뷰》를 쥐여주었다. 레이건은 이동시간 내내 꾸준히 《내셔널리뷰》를 읽었다. 그러고 앞서 열거한 보수주의 고전들을 모두 섭렵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 렘넌트들이 남긴 텍스트는 그를 뼛속까지 보수주의자로 변화시켰다. 레이건은 훗날 당시 8년의 GE 홍보대사 시절이 자신에게 ‘정치학 대학원 과정’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재미난 일화가 있는데, 휘태커 챔버스를 칼럼니스트로 끌어들이는 일은 윌리엄 버클리가 《내셔널리뷰》 편집이사회를 꾸릴 때 가장 큰 난관 중 하나였다. 챔버스는 당시 《증언》을 탈고한 후, 매카시 상원의원과 함께 ‘매카시즘’의 주역으로 주류 리버럴 언론에 낙인찍혀 심각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칩거 중이었다. 버클리는 챔버스에게 수차례 《내셔널리뷰》에 합류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보수운동을 일으키는 데 있어 전직 공산주의자 전향파의 대표 아이콘인 챔버스를 제외할 순 없었다. 버클리는 챔버스의 집까지 찾아가 원고를 부탁했다. 챔버스는 “어차피 몰락하게 될 서구 문명인데 글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냐”며 완강히 거절했다. 이때 버클리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보수주의자들이 다 죽고 서구 문명이 종국(終局)에는 몰락한다 하더라도, 문명의 마지막까지 문명의 적(敵)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먼 훗날 미래 세대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다시 자유 문명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이 잡지는 그들을 위해 우리의 기록을 남기려는 것입니다.”
비관에 빠져 있는 챔버스 앞에서 버클리는 다름 아닌 ‘렘넌트(남은 자) 정신’을 설파했던 것이다. 어렸을 적 식탁에서 들었던 제이 녹의 말이었을 수도 있다. 챔버스는 버클리의 이 말을 듣고 《내셔널리뷰》에 선임편집위원으로 합류한다. 그러고 1961년 사망할 때까지 주옥같은 칼럼들을 남긴다. 챔버스가 남긴 글들은 훗날 레이건 대통령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필자가 부편집장으로 있는 또 다른 기독교 보수주의 잡지의 편집회의에서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적이 있다. 잡지의 구독층을 확장하고 더 많은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도입하고 편집 기조도 느슨하게 바꾸어야 하지 않겠냐는 논의가 한창 오가던 중이었다. 그때 한 편집위원이 논쟁을 단숨에 종결하는 말을 남겼다.
“우리의 목표는 설득이기보다 증언이어야 합니다.”
보수의 설득 대상은 집단 아닌 개인
미국 보수의 뿌리 깊은 렘넌트 정신과 텍스트를 통한 사상 구축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첫째, 보수의 주체가 먼저 개인이어야 하듯이, 보수의 설득 대상도 집단이기 이전에 개인이어야 한다.
둘째, 개인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텍스트가 필요하다. 보수에게는 더욱 그렇다. 진보좌익의 선동 대상은 집단이기 때문에 들끓는 군중을 일으키기 위한 자극적 거짓과 선전구호면 충분하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영화 한 편’으로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보수의 주체 단위는 개인이기 때문에 진실을 담은 텍스트가 필요하다. 진보좌익의 선동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텍스트는 개인에게 스며들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보수의 싸움은 애초부터 사회를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한 사람씩 상대하는 장기전이었다.
유튜브와 쇼츠 영상이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오늘날에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말초적인 유튜브와 카드뉴스로 정보를 접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결국 개인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개화(開化)를 이루어내는 것은 텍스트다. 물론 화려한 영상물과 문화콘텐츠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학습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유익하다. 하지만 그렇게 끌어들여진 그들이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능동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사상을 차곡차곡 쌓아나갈 수 있는 텍스트가 없다면 잠깐 모인 관심은 금방 흩어져버린다.
대한민국 보수의 미래는…

▲최근 국내에서도 외국에서 나온 보수주의 명저들이 활발하게 번역되고 있다.
지난 정권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라’를 겪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보수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매우 고무적이게도 이 운동들은 단발성이거나 캠페인으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텍스트 생산과 사상 구축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학가에서 보수우파 대자보로 화제를 일으켰던 ‘트루스포럼’과 ‘신전대협’ 등은 그 불씨를 구심점으로 계속해서 다양한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 공부 모임과 포럼을 열고 있다. 또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해왔던 보수주의의 고전들이 차곡차곡 번역되고 있다. 《보수의 정신》(2018), 《보수주의자의 양심》(2019), 《보수의 뿌리》(2022), 《하룻밤에 읽는 보수의 역사》(2022) 등이다. 필자도 점점 모여드는 보수주의자들의 사상적 기초를 탄탄히 다질 수 있는 주요 저작물을 번역하면서 보수주의 텍스트 구축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쌓인 텍스트는 교환을 통해 사상적 기반과 구심점을 만들고, 무장(武裝)된 렘넌트를 양성한다. 그리고 오늘의 렘넌트는 보수의 미래를 만든다. 참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보수의 미래는 어둡지만은 않다.⊙
③ 서구 ‘유대-기독’ 자유문명
미국, ‘유대–기독 문명’ 위에 국가 건설
⊙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공화주의적인 책”(존 애덤스)
⊙ 미국 國父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문헌은 〈신명기〉 등 구약의 모세5경
⊙ “미국의 정치체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종교적 신앙 위에 기초”(아이젠하워)
⊙ 미국, 냉전 시대에 ‘神 아래서’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는 공식 표어 채택
⊙ 한국도 이승만과 필라델피아한인회의 등 통해 ‘유대-기독’ 전통 위에 立國

▲1776년 국장위원회가 제시한 미국 국장 초안. 구약성경의 출애급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몇 년 전 여름, 미국 미시간주의 깊숙한 시골 마을 메코스타(Mecosta)를 찾아갔다. 러셀 커크(Russell Kirk·1918~1994년)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러셀 커크의 23세 연하 아내 아넷(Annette)은 1994년 러셀이 사망하자 그의 서재를 개방하고, 그의 지적 유산을 보존·전파하기 위한 싱크탱크를 설립했다. 그렇게 시작된 커크센터(Russell Kirk Center for Cultural Renewal)는 이내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사상적 거점이자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아넷은 커크센터를 찾아온 일본인과 중국인은 있었지만 한국인은 처음이라며 필자를 매우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아시아 3개국에서 출간된 《보수의 정신》 역본을 책장에서 꺼내어 보여주었다. 검은 표지와 금박 제목의 반가운 한국어판 양장본이 책장 위칸 중간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한국 책이 가장 세련되어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며 자랑했다. 그런데 책이 가장 잘 팔리는 곳은 의외로 중국이라며 의아해했다. ‘보수의 정신’이 보전하려는 서구문명은 중국보다 한국에 더 가깝지 않으냐면서 말이다. 본질보다 외형에 치중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왠지 씁쓸했다.
80세의 아넷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리고 역시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지프 랭글러를 직접 몰며 메코스타 마을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주었다. 러셀 커크의 외증조부가 19세기 말 처음 정착해 세운 이 마을은 한 번도 인구가 500명을 넘은 적이 없는 매우 작은 동네다. 사실상 커크 가(家)에 의해 시작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공동체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회관, 마을도서관, 서점 등 곳곳에 러셀 커크의 흔적과 그를 기념하는 표시가 남겨져 있었다. 마을에 단 하나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커크의 막내딸이 최근에 열어 운영하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러셀 커크의 묘지였다. 묘비명은 이랬다.
“죽은 자의 소통은 산 자의 언어를 능가하는 불의 혀를 지니고 있다(The communication of the dead is tongued with fire beyond the language of the living).”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1888~1965년)이 그의 마지막 시(詩) ‘리틀 기딩’(1942)에 남긴 글귀다. 영국 유학 중 봤던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엘리엇 기념비에도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커크는 엘리엇을 ‘영원한 것’을 보전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보수주의 시인으로 여겼다. 《보수의 정신》의 부제(副題)가 ‘버크에서 엘리엇까지’인 이유다.
엘리엇의 글귀는 참으로 적절한 묘비명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을 찾아오는 필자를 포함한 많은 보수주의자에게는 더욱 절묘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불의 혀’가 전하는 말을 곱씹기 위해 멀리 외국에서까지, 인구 500명의 미시간 시골 마을을 찾아와 죽은 자의 묘비를 구경하고 있으니 말이다.
“죽은 자의 소통”에 귀 기울이라는 엘리엇과 커크의 조언은 또 다른 위대한 보수주의 문학 작가를 떠올리게 했다. 영국의 문인 G. K.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1874~1936년)이다. 그는 그의 대표작 《정통》(1908)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전통을 경시하는 현대 풍조를 비판하며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전통이란 모든 계층 중 가장 낮은 계급, 즉 우리의 선조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다. 전통은 단지 어쩌다가 산 채로 권력을 쥐게 된 거만한 소수(小數) 지배층에 굴복할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의 토론장에 죽은 자들을 참석시킬 것이다.… (그들은) 그들 무덤의 비석으로 투표할 것이다.”〉
그렇다. 보수주의란 우리보다 먼저 살고 떠난 선조들의 충고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말했다. 정치에 있어서도 “우리 선조들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그들은 무엇을 선택할까”를 묻는 것이다. 즉 과거 전통과 경험의 교훈을 현재에 충실히 반영하려는 이 겸허한 태도가 바로 보수주의의 기본 태도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전통과 경험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보수주의자는 ‘무엇’을 보전하려는 것인가

▲러셀 커크의 서재에서 아넷 커크와 필자. 사진=조평세
커크의 묘지에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커크센터에는 곧 약속된 멤버들이 미국 전역에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이 모임은 12명의 보수주의 교육자가 이곳에서 만나 4박 5일 동안 커크의 보수주의 사상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전할지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회동이었다. 원래 취지는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세미나였지만 결국 정치인부터 도서관장, 보수주의 운동가, 대학교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물론 비(非)미국인은 필자가 유일했다.
주(主) 교재는 커크가 1974년에 출간한 《미국 질서의 뿌리(Roots of American Order)》였다. 이 책은 커크가 미국 고등학교 고전인문 ‘대안(代案)’ 커리큘럼으로 구상한 책이다. 《보수의 정신》 출간 이후 바로 착수해 20년 만에 완성한 장기 프로젝트였다.
당시 미국의 공교육은 이미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철학에 완전히 매몰되어 서구문명의 사상적 뿌리에서 절연된 상태였다. 1950년대 자신이 크게 일조한 보수주의 운동을 통해 정치권에서는 나름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사실 사회문화권, 특히 교육계는 상대주의 철학과 현대주의 물결에 완전히 휩쓸려 간 상황이었다. 커크는 이 책을 통해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현대주의 사조에 맞서, 보수주의자는 과연 ‘무엇’을 보전하려는 것인지 대답하고자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인류 역사 3500여 년을 망라해 미국이 정치체제로 구현한 서구 ‘자유문명’의 줄기와 뿌리를 추적해낸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구현된 독립정신과 헌정(憲政)질서가 대략 네 개의 문명적 근원에서 흘러나왔다고 이야기한다. 각 문명을 도시로 표현했을 때 그것은 역순으로 런던, 로마, 아테네, 그리고 예루살렘이다. 훗날 커크는 이 책의 줄거리를 ‘네 도시 이야기(A Tale of Four Cities)’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보수의 정신’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문》과 《헌법》을 통해 국가 헌정질서의 형태로 구현되기까지는, 과거 영국의 자연권 및 보통법(관습법) 전통과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적 실험, 그리고 헬라(아테네) 문명의 정치철학적 고찰과 히브리 민족의 천부(天賦)적 도덕법(moral law)이 그 뿌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커크가 서구문명의 줄기를 대다수의 교양서가 말하는 상식처럼 아테네의 헬라 철학에서 끊지 않고 예루살렘의 종교성까지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우리는 4박 5일 동안 각 네 개 문명에 대해 토론하며 미국과 서구 사회가 그 잃어버린 문명적 뿌리를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새롭게 풀어주고 전달해 오늘날 망가진 정치 사회와 문화를 회복해야 할지 생각을 나눴다. 레이건이 말했듯이, 자유문명의 세대 간 전수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개혁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불변의 가치들을 전하지 않는다면 자유의 소멸은 결코 한 세대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유대-기독’ 자유문명

▲커크센터에서 필자와 참가자들.
커크는 예루살렘이 대표하는 초월적 상위 도덕법, 즉 신(神)의 계시와 권위에서 비롯된 인간 질서를 자유문명, 특히 미국 질서의 가장 주요한 근원으로 보았다. 사실상 이후 두 도시문명은 이 가장 깊은 종교적 뿌리의 부재(不在)로 인해 실패했다고 말한다.
고대 아테네는 신적 존재를 인정하여 그리스 신화를 통해 수많은 신을 상상해내었지만, 그것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 내면을 투영한 허상(虛像)에 불과했기 때문에 비극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멸했다. 로마공화국은 인간 공통의 보편적 상위 질서를 인정하며 공화정과 법치를 이루어냈지만,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의 함정에 빠져 정치 지도자의 우상화(偶像化)와 제국주의로 귀결되었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이 서구의 자유문명을 이야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수식어가 바로 ‘유대-기독(Judeo-Christian)’ 전통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서양철학의 줄기와 평행선에 있지만 구별된, 보다 더 오래된 맥락을 말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인간 상위의 법질서를 인정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신조이며, 이는 히브리 문명에 뿌리를 두고 기독 교회사를 통해 발전되고 정립되어온 세계관이다.
‘유대-기독교 전통’은 유대교나 기독교, 또는 그 어떤 신학적(神學的) 합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분명 완전히 다른 종교로서, 유대교는 기독교를 거부하기 때문에 유대교인 것이고, 기독교는 유대교를 거부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기독’ 가치관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맥락에서 미국 정치 담론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神을 믿는다”
1952년 12월 22일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 한 달을 앞두고 한 즉석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권리에 대해) 우리 국부(國父)들은 (독립선언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창조주로부터 그 권리들을 부여받았다’고 말입니다. 즉 (인간의 권리는) 어떤 출생의 우연이나 피부의 색깔, 또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미국의 정치체제가 어떤 아주 깊은 종교적 신앙 위에 기초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종교가 어떤 것이든 말이죠.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 유대-기독교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종교입니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유물론(唯物論)·무신론(無神論)적 세계관에 입각한 공산주의 소련과 냉전(冷戰)에 돌입하면서 미국이 신을 믿는 나라임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이 누리는 자유의 본질과 그 종교적 근원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앞서 약 2년 전 6·25전쟁의 전장에 선 매튜 리지웨이 연합군 사령관이 미8군 장병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재천명했던, “이 싸움은 두 세계관의 대결”이라는 전쟁의 본질이었다.
〈“문제의 본질은 서구문명의 힘, 신께서 우리 사랑하는 조국에 꽃피도록 하신 그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패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고, 포로들을 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는 독재 세력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신성한 것(천부적인 것)으로 보는 민주 세력을 뒤집어엎을 것인가이다. 문제의 본질은, 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가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신이 없다고 하는 세상에서 시체처럼 사라질 것인가이다.”〉
취임 전부터 유대-기독교 가치관의 회복을 외쳤던 아이젠하워는 그의 재임 기간 내내 이 가치가 미국 사회에 공적으로 심길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다. 그는 1954년 ‘국기에 대한 맹세’에 ‘신 아래서(Under God)’라는 표현을 법령으로 추가한다. 그리고 1956년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미국 동전에 새겨 넣었던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미국의 공식 표어로 채택하고 모든 화폐에 새겨 넣는다.
美 國父들, 로크보다 모세로부터 영감 받아
결국 유대-기독교 가치관이란, 모세를 통해서 광야의 히브리인들에게 도덕률을 부여한 창조주 신을 믿는 세계관을 말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국부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나라를 건국했을 때 정말 그들은 유대-기독교 가치관을 전제하고 있었을까.
정치학자 도널드 루츠(Donald Lutz)는 미국의 독립과 건국 당시 약 45년, 즉 1760년부터 1805년까지 당시 13개 아메리카 식민주에서 생산된 1만5000건의 정치 문헌들을 분석했다.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국부들이 영국의 존 로크와 윌리엄 블랙스톤, 그리고 프랑스의 몽테스키외의 말을 가장 많이 인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국부들은 그 어떤 정치학자나 철학자보다 성경 모세의 말을 가장 많이 인용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나라를 세우면서 〈창세기〉에서 〈신명기(申命記)〉까지의 ‘모세오경’을 가장 많이 참고했다. 특히 모세의 마지막 설교를 담은 〈신명기〉는 대부분의 학자가 미국 체제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하는 존 로크의 말보다 두 배 이상 인용되었다. 또한 신약(新約)의 사도 바울(바오로)서신도 몽테스키외와 윌리엄 블랙스톤의 말만큼 인용되었다.
더욱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이 있다. 1776년 7월 4일 국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직후, 대륙회의는 독립선언문을 써낸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에게 미국의 국장(國章)을 그리라는 임무를 내렸다. 이 ‘국장 3인 위원회’는 머리를 맞대고 토론한 지 한 달 반 만인 8월 20일 미국의 국장 초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제안한 미국의 국장은, 홍해에 휩쓸려가는 애급(이집트) 병사들과 모세의 인도에 따라 구름기둥 아래서 갈라진 홍해 사이를 뚫고 걸어 나온 히브리인들의 모습, 즉 출애급 사건의 묘사였다.
이후 약 7년 동안 대륙회의는 3번의 ‘국장위원회’를 거쳐 1783년 오늘날의 ‘독수리’ 문양을 결정한다. 그런데 독수리 역시 성경에서 출애급 사건을 묘사할 때 주로 언급된 상징적 동물이었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애급에서)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애급기 19:4).”〉
美 민주주의의 아버지 토머스 후커

▲연방대법원 페디먼트 중앙에 새겨진 모세와 십계명.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 헌정질서의 성경적 근원, 즉 유대-기독 뿌리는 더욱 분명해진다. 최초의 성문(成文)헌법으로 여겨지는 1638년 《코네티컷 근본 질서(Fundamental Orders of Connecticut)》는 다름 아닌 토머스 후커라는 목사의 설교문을 바탕으로 쓰인 문헌이다. 토머스 후커 목사는 자신이 이끄는 회중 100여 명을 데리고 하트퍼드(Hartford)시를 개척해 코네티컷주를 설립했다. 그는 1863년 5월 31일, 정치 지도자를 피통치자가 선출하는 대의(代議)민주제를 주장하는 설교를 했는데, 바로 〈신명기〉 1장 15절을 본문으로 삼았다.
〈“너희 지파(支派)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으로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고…”〉
사실상 대의민주제의 시초가 되는 성경 구절이다. 훗날 미국의 다른 식민주 또한 이 《코네티컷 근본 질서》를 토대로 각 주의 헌법을 만들었고, 1787년 제헌의회에서 13개 주 대표들은 이 문헌을 뼈대로 신생독립국 미국의 헌법을 구상했다. 코네티컷주의 별칭이 ‘헌법 주(Constitution State)’인 이유다. 미국 역사학계는 토머스 후커를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부르며 그의 설교를 “아메리카 식민지 시대 가장 중요한 설교”라고 평가한다.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 또한 성경을 “세상에서 가장 공화주의적인 책”이라고 말하며, “성경은 지구상 가장 심오한 철학과 가장 완벽한 도덕, 그리고 가장 섬세한 정책들을 담고 있다. 우리 헌법은 도덕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 영어사전 편찬자로 유명한 노아 웹스터도 성경을 “공화주의 원칙들의 최고의 원천이고 근간이다. 평등과 권리와 책임의 원칙들이 성경에서 비롯되고, 성경은 모든 폭정을 금지함과 동시에 법치와 질서를 존중하게 한다. 기독교의 가치관을 버리거나 파괴하면, 이 공화국의 기초가 흔들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자유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 탄생의 정신적 배경에는 매우 실제적으로 유대-기독 문명의 경전, 즉 성경이 있었다. 지금도 미국 의회나 연방대법원 건물 곳곳에서 수많은 인류 역사의 입법자들 중 가장 중심의 위치에 모세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승만과 필라델피아한인회의

▲1919년 필라델피아한인회의 당시 행진하는 모습. 이승만과 서재필이 주도했다.
대한민국은 과연 어떨까. 우리는 과연 자유문명의 줄기에 얼마나 잘 ‘접붙임’되어 있을까. 우리의 독립과 건국도 미국처럼 ‘유대-기독’ 가치관에 접목해 일어난 사건이었을까.
이것은 필자가 커크센터에서의 4박 5일 내내 다른 참가자들에게 받았던, 그리고 또 한편으론 나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답을 찾아 재확인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틈틈이 대한민국의 탄생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어떻게 ‘은둔의 왕국’ 조선에 와서 교육과 의술(醫術)과 교회를 통해 자유사상 및 평등사상을 가르쳤는지, 자유문명의 섭리(攝理)는 어떻게 이승만(李承晩)이라는 사형수를 발굴하고 다시 일으켜 독립과 건국의 대표주자로 삼았는지 설명했다. 이것은 어쩌면 나도 이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회동에 함께할 자격은 물론 의무도 있다는 명분이었다.
커크센터의 참가자들은 1919년 3·1운동 직후 4월 14~16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韓人)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들은 당시 필라델피아에 한인들이 그렇게 많았냐고 물었다. 필라델피아 한인은 서재필을 포함해 단 3명뿐이었고 100여 명의 한인회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서부 캘리포니아나 하와이에서까지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러면 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회의를 열었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의 국부들이 다름 아닌 미국의 독립과 건국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대회의 이름도 미국 1·2차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를 연상시키는 ‘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라고 정한 것이라고 답했다. 더 나아가 이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국부들은 장차 생겨날 독립국 한국이 미국의 정치체제를 따를 것을 결의했다고 말해주었다. 마침 필라델피아에서 온 참가자는 자신의 출퇴근길에 그 회의가 열렸던 델란시(Delancey)가(街)의 극장(당시 리틀시어터)을 매일 지나간다며 반가워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감옥에서의 회심(回心)과 《독립정신》 집필, 미국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조지워싱턴대학 학부 졸업,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을 배출한 프린스턴대학 박사 졸업, 하와이에서의 독립과 건국 준비, 훗날 대한민국을 구할 맥아더 장군과의 친분 등의 이야기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마음을 자긍심으로 뜨겁게 달구기 충분했다.
“기독교는 민주주의 사상의 교육자”

▲《보수의 정신》 한국어판이 전시된 커크의 서재.
대한민국의 ‘유대-기독 입국(Judeo-Christian founding)’에 대해서는 건국의 기운이 한창 무르익을 때인 1947년 한경직(韓景職·1902~ 2000년) 목사의 주일 설교에 매우 잘 녹아나 있다. 당시 서울에서 베다니교회(영락교회 전신)를 담임하고 있던 한경직 목사는 당시 설교를 엮어 《건국과 기독교》(1949)라는 제목의 설교집을 출간했는데, 다음 대목이 우리나라 ‘유대-기독 입국론’의 핵심이다.
〈“나라보다 교회가 먼저 서는 것은 당연한 순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나올 때에 시내산에서 먼저 교회가 서고, 그 후에 나라가 가나안 복지에 섰습니다. 북구에서 내려오는 (야)만족들이 먼저 기독교의 감화를 받은 후에 오늘의 구주(歐洲) 제국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이 북미에 가서 먼저 교회를 세우고 그 후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중략)
과거 50년 역사에 있어서 오직 기독교만이 지금 많이 듣고 말하는 소위 민주주의 사상의 교육자였습니다. 개인의 생명, 인격, 권리에 대한 존중사상, 인간의 자유사상과 인간의 평등사상은 오직 기독교만이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이 사상의 근본인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에 대한 견지인 까닭입니다. 또 왜정(倭政)이 기독교를 압박한 이유도 사상적으로 기독교는 일본 제국주의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까닭입니다. (중략)
미국이 1776년 독립선언을 한 후에 헌법과 모든 정치를 민주주의로 한 것은 그들은 이미 각자 교회에서 그러한 정치 훈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금일 대한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정치 훈련을 받은 이는 기독교 신자밖에 없습니다.”〉
4월 10일 중대한 선거를 앞두고, 민주주의를 비롯한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문명질서의 근원을 돌아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올해 전 세계 각지에서 세계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투표권을 행사한다고 한다. 이 인류의 ‘자치(自治·self-government)’는 과연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보수주의자들이 귀 기울여 본 ‘죽은 자의 소통’은 유대-기독 문명이 시작된 히브리 민족의 출애급 광야를 가리키고 있다.⊙
④ 남북전쟁–링컨의 미국 재(再)건국
노예제 묵인한 ‘반쪽짜리 건국’, 내전 감수하며 ‘건국의 완성’ 달성
⊙ “노예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건국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독립선언문 서명자 벤저민 러시)
⊙ 링컨, “절반은 자유인, 절반은 노예로서는 미국이 지속될 수 없다”
⊙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미국처럼 ‘자유로 잉태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바쳐진’ 나라
⊙ 휴전 후 첫 3·1절 행사에 등장한 대학생 현수막, “3·1 정신 받들어 북한 동포 구출하자!”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하는 링컨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관련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큰 화제다. 개봉한 지 한 달 만에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덕분에 그동안 왜곡과 거짓으로 먹칠됐던 이승만과 그의 건국정신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고(故) 유영익 교수 등 많은 이승만 연구자들을 통해 이미 제대로 밝혀진 진실들이 그간 묵혀져 있다가 이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되살아나 대중의 뇌리에 박히고 있다. 문화의 놀라운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건국전쟁〉에 대한 관람평은 대체로 우리 국부(國父)에 대한 ‘미안함’으로 요약된다. 이토록 위대했던 우리나라 초대·건국 대통령을 제대로 못 알아준 정도를 넘어, 그동안 그를 ‘친일파’ ‘런(run)승만’, 심지어 ‘살인마’라고 거짓말하는 일부 반(反)대한민국 세력의 준동(蠢動)에 대해 반박은커녕 모른 체 침묵하고 오히려 편승해왔던 우리의 비겁함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 보수의 지동지서(之東之西)는 다름 아닌 이승만과 그의 건국정신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보수(保守)는 말 그대로 나라의 체제와 정신을 보전하고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를 일으켜 세운 국부의 사상과 업적을 외면한 채 과연 무엇을 제대로 보수하겠는가. 이유가 어떠했든 박정희 정권 때부터 소극적이었던 이승만 재평가는 이후 반대한민국 세력의 대두(擡頭)와 지금껏 이어져 온 정권 찬탈(簒奪)에 대해 보수 세력이 아무런 대응을 못 하는 속수무책의 지경을 초래했다.
〈건국전쟁〉에서 그려진, 너무도 외롭고 쓸쓸한 국부 이승만을 보고 있노라면 필자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떠오른다. 그는 19세기 중반, 80여 년 전 미국을 세운 건국정신을 지키고자 전쟁까지 불사했다. 그러고 그 ‘건국전쟁’을 통해 남부의 노예를 해방함과 동시에 합중국을 지켜내는, 실로 불가능한 사명을 완수했다. 그러나 끝내 그 ‘건국의 완성’을 목격하지 못하고 때 이른 죽임을 맞이했다.
링컨의 ‘건국전쟁’
지난해 6월 필자는 아내의 유학 생활을 외조(外助)하기 위해 머물렀던 미국을 떠나면서 야심 찬 대륙 횡단을 계획했다. 아내와 함께 일곱 살과 두 돌이 된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동부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와 미주리 캔자스시티를 거쳐 서부 LA까지 약 4700km를 열흘 만에 돌파하는 것이었다. 굳이 스프링필드와 캔자스시티를 끼워 넣은 이유는 단순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대한민국의 은인 해리 트루먼의 고향에 들러서 두 대통령의 박물관을 꼭 방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으로 90여 년 전 이승만 대통령도 200달러짜리 중고차를 타고 미주 대륙 횡단을 했다는 기록을 접하고 자신감이 붙었다. 여정의 길목에 있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생가(일리노이 딕슨)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박물관(캔자스 애빌린)은 자연스레 추가됐다.
첫 번째 경유지인 링컨 박물관에서 본 링컨 대통령의 임기 시작점과 마지막 순간의 모습을 비교한 사진은 잊을 수가 없다. 4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었지만 대충 20년은 더 늙은 듯했다. 실제로 그의 임기는 1861년 2월 취임 후 두 달 만에 발발한 남북전쟁이 1865년 4월 암살 직전까지 계속되면서 그를 막중한 책무로 짓눌렀던 극심한 고뇌의 연속이었다.
링컨은 설문조사 때마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또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1, 2순위로 꼽는 인물이다. 그래서 생전에도 나름의 인기를 누렸을 것이라고 마냥 생각했다. 하지만 박물관 초입에 전시된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의 만평은 링컨에 대한 조롱과 비난 일색이었다. 도대체 분열과 내전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루려 했던 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미국 건국은 ‘반쪽 건국’

▲벤저민 러시
1776년 선포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명한 진리”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흑인 노예의 해방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후에야, 그것도 처절한 내전을 치른 끝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독립선언문에 토머스 제퍼슨이 적었던 “모든 사람”은 흑인 노예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의미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국부들의 기록에 따르면 최소 1760년대부터 북부 주(州)는 물론이고 남부 주의 미국인들도 노예제에 대한 반성과 언젠가는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사실 담배 수요의 감소로 노예제의 필요성도 낮아지고 있었다. 노예 문제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대부분 노예제 폐지의 시기와 방법에 있었지 그 당위성에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국의 국부들은 미국의 독립과 노예 해방을 같은 ‘자유’의 확대로 이해했다.
한 예로 독립선언문 서명자인 벤저민 러시(Benjamin Rush)는 1773년 기고문에서 “미국의 자유는 인류 전체의 자유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노예제와 같은 악행(惡行)에 마땅히 반대해야 한다”면서 “노예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건국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노예제를 유지하는 한, 미국의 건국은 미완의 상태이며 반쪽짜리 건국이라는 것이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 자신도 당시 150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버지니아의 농장주였다. 하지만 그는 분명 노예제의 악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 2년 전 쓴 글에서 그는 이미 노예무역의 폐지를 주장한 바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노예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때문에 제퍼슨은 자기 자신부터 끊어내지 못하는 노예제로 인해 평생 죄책감과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무너진 미국의 양심
클렘슨(Clemson)대학의 정치철학 교수 브래들리 톰프슨(Bradley Thompson)은 미국의 독립이 사실상 ‘노예제를 끝내기 위한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1776년 독립선언 이후 노예제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던 북부 주들은 연이어 노예제도를 불법화했다. 버몬트는 1777년에, 뉴햄프셔는 1779년에, 펜실베이니아는 1780년에, 로드아일랜드는 1784년에 노예제를 전면 금지했고, 코네티컷은 1784년부터 노예들의 점진적 해방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북부 주에서 가장 노예 인구가 많았던 뉴욕과 뉴저지에서도 노예해방운동가들의 오랜 투쟁 끝에 결국 노예제가 폐지됐다(각각 1799, 1804년).
심지어 노예 인구가 전체 인구의 거의 40%나 차지했던 남부 버지니아주에서도 1782년 소유주들이 자발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미국 연방 차원에서는 오하이오강 이북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하는 ‘북서부 조례(Northwest Ordinance)’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같은 해 상정된 연방헌법에는 치열한 토론 끝에 노예제는 명시하지 못했지만, 1808년부터 노예무역을 폐지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담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제는 그렇게 점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담배 수출은 감소했지만 19세기 초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면(棉) 수출은 19세기 중반 미국 전체 수출의 60%를 차지했다. 노예제에 대한 남부 농장주들의 의존성은 건국 때보다 더욱 깊어졌다. 노예 인구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사회적 현실과 그 건국정신은 완전히 괴리되어버린 것이다.
급기야 1854년에는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에서 노예제 허용 여부를 주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Kansas-Nebraska Act)’을 통과시킨다. 일리노이 출신 상원의원 스티븐 더글러스가 제출한 이 법안은 북서부 조례는 물론이고, 미주리주를 제외한 북위 36도 30분 이북에서는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1820년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도 폐기하는 것이었다.
명분은 다름 아닌 ‘주민 주권(popular sovereignty)’이었다. 주민 투표를 통한 ‘민주적’ 다수결 원칙이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천부인권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심지어 1857년에는 연방대법원마저 드레드 스콧 대(對) 샌퍼드(Dred Scott vs. Sanford) 판결을 통해 연방의회는 새로 편입되는 변방 주에 대해 노예제도를 금할 권리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판결을 주도한 대법원장 로저 태니(Roger B. Taney)는 미국의 국부들이 독립선언문에서 명시한 “모든 사람”이 흑인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제멋대로 해석했다. 미국도 이렇게 ‘민주’라는 이름으로 그 건국정신을 망각하고 양심이 무너져 갔다.
미국을 깨운 리버티 벨

▲미국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공원에 전시된 ‘리버티 벨’ 모습.
이때 미국인 사이 경종을 울린 하나의 상징물이 있는데 바로 현재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공원에 전시된 리버티 벨(자유의 종)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리버티 벨은 1776년 7월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선포되었을 때 크게 울렸다 한다. 이 18세기 유물은 매년 2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맞으며 미국 최고의 관광 자원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이 종은 전면에 뚜렷한 균열이 있어서 다른 종과 확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종의 머리 부분에는 “Proclaim LIBERTY Throughout all the Land unto all Inhabitants Thereof. Lev. XXV. v X(이 땅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레위기 25:10)”라는 성경 구절이 부조돼 있다.
노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반쪽 건국’으로 남게 된 미국을 안타까워하던 미국인들은 이 종에 부조된 레위기 구절을 기억했다. 이 구절은 오십 년째 해를 ‘희년(禧年)’으로 지키며 포로 잡힌 자들에게 놓임을 선포하라는 신(神)의 명령이었다. 미국인들, 특히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건국 이후 50년이 지나가고 있음을 상기하며 이제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1835년에 한 노예제 폐지운동 단체가 처음으로 〈더 리버티 벨(The Liberty Bell)〉이라는 글을 통해 건국정신을 일깨워 다시 노예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주문했다. 연방헌법 제정 50주년인 1837년에는 《리버티(Liberty)》라는 노예제 폐지운동 잡지의 표지에 ‘자유를 공포하라(Proclaim Liberty)’라는 제목과 함께 이 종의 삽화가 실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리버티 벨’이 미국인들의 잠들었던 독립정신과 양심을 깨우며 오늘날에 이르도록 미국 자유의 상징이 된 것이다.
리버티 벨은 1885년에서 1915년까지 8개의 세계박람회를 거치며 약 400개 도시에서 전시되었다.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등 수많은 국가 지도자와 관료들이 리버티 벨을 보러 왔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한 이승만도 시가행진 후 당시 독립기념관 내부에 있던 리버티 벨을 만지며 영감(靈感)을 얻었다.
1950년 트루먼 행정부는 리버티 벨의 복제품을 여럿 제작해 당시 미국 48개 주와 기타 영토 및 수도 워싱턴에 비치했고, 히로시마와 베를린 등의 도시에도 기증한 바 있다. 독립선언 200주년인 1976년에는 예루살렘에도 리버티 벨이 세워졌다.
한국에는 특별히 ‘살아 있는 리버티 벨’이 와 있었다. 바로 한국전쟁 당시 판문점에 창설된 캠프 리버티 벨이다. 1986년부터 캠프 키티호크와 통합되어 캠프 보니파스로 개명되었지만, 여전히 판문점 기지는 미군 장군들 사이에서 ‘캠프 리버티 벨’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링컨의 공화당과 ‘블러디 캔자스’

▲1865년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오른쪽)이 버지니아주 애퍼매톡스에서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면서 남북전쟁은 끝이 났다.
리버티 벨을 통해 일깨워진 미국인들의 양심은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본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을 지내고 정치계를 떠났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에 격노하며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함께 공화당을 창당했다. 링컨은 이때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스티븐 더글러스를 상대로 한 일곱 차례의 토론을 벌였다. 링컨은 선거에서는 졌지만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게 되며 공화당 대표 주자로 우뚝 서게 된다.
당시 남북전쟁의 전조(前兆)를 보여준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블러디 캔자스(Bloody Kansas)’로 불리는 유혈(流血) 충돌이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이 통과되자 노예제에 찬성하는 남부 주민들이 캔자스와 미주리주 경계 지역에 대거 몰려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순전히 노예제 도입 법안 표결에 투표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생활은 미주리주에서 했지만 한쪽 발을 캔자스주에 걸쳐 주민투표권을 얻은 것이다. 동시에 노예제에 반대하는 북부 주민들도 같은 이유로 이 지역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독특하게도 캔자스주가 아닌 미주리주 쪽 경계에 위치한 캔자스시티도 바로 이때 이 지역에 사람들이 모이면서 형성되었다. 불과 20년 전 미국을 방문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우려했던 민주주의의 왜곡과 남용이 일어난 것이다.
링컨은 노예제를 미국의 종양이라 표현했다. 미국의 국부들이 가졌던 자유와 독립의 정신을 훼손하면서 국민 주권과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종양이 퍼지도록 놔두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국가의 자살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절반은 자유인, 절반은 노예로서는 미국이 지속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후 6년 만에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링컨은 1861년 2월 22일, 워싱턴DC로 향하는 길에 필라델피아에 들러 리버티 벨을 마주한다. 그러고 이렇게 말한다. “만약 이 (건국) 정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저는 이 자리에서 암살당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목숨을 내건 다짐을 하며 백악관으로 들어간 링컨은 이미 예견된 내전을 담담히 맞는다. 그러고 만 4년 동안 미국 인구의 2.5%에 달하는 7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북전쟁을 치른다. 이 사망자 수는 1·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 중 미국인 사망자 수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것이다. 이후 남부군 장군 로버트 리(Robert Lee)의 항복을 받아낸 지 6일 만인 1865년 4월 15일 부활절에 암살당한다. 링컨은 2년 전 이미 노예 해방 선언을 했지만 실제로 남부 주 텍사스 갤버스턴에서 마지막 노예가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것은 1865년 6월 19일이었다. 그는 노예 해방, 즉 건국의 완성을 결국 보지 못하고 죽었다.
미국을 再건국한 게티즈버그 연설
남북전쟁의 전환점이자 하이라이트는 단연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치러진 게티즈버그 전투다. 이 전투는 양측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그런데 전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국가적 순간은 이 전장을 국립묘지로 헌정(獻呈)하는 그해 11월 19일 행사에서 나왔다. 바로 불과 약 2분에 걸친 약 12개의 문장으로 이뤄진 링컨의 연설이다. 이 연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여겨지며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외우고 인용되는 연설로 자리매김했다. 1년 전 윤석열 대통령도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인용하며 연설을 시작한 바 있다.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에”로 시작해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로 끝나는 이 헌정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바쳐진 이 나라”를 국민들에게 상기시키며 “하나님 아래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선언하고, 이 시간은 사실상 미국을 재(再)건국하는 순간이 되었다. 이 연설을 통해 링컨은 미국의 국가 정체성을 재확립하며, 미국의 궤도를 다시 국부들의 건국정신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한 가지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에(Fourscore and seven years ago)”라는 표현이다. ‘score’는 ‘20(스물)’을 뜻하는 영어의 고어(古語)로서, ‘Fourscore’는 ‘여든’을 의미한다. 왜 링컨은 대중 연설인 만큼 직관적인 이해가 쉽도록 “87년 전에”라고 하지 않고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에”라는 표현을 구사했을까. 이것은 단순히 운치를 고려한 수사적(修辭的) 선택이 아니었다. ‘예순’을 뜻하는 ‘threescore’와 ‘여든’을 뜻하는 ‘fourscore’라는 표현은 다름 아닌 당시 미국에 널리 보급되었던 킹제임스 흠정역, 제네바 성경에 각각 89번과 35번이나 나오는 계수법이었다.
링컨은 특히 성경, 특히 시편의 여러 장을 거의 외울 정도로 완전히 통달하고 그 문맥과 언어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아메리칸대학의 대니얼 드라이스바흐(Daniel Dreisbach) 교수는 이 게티즈버그 연설에 “킹제임스 성경의 운율(rhythm)과 어법(phrase), 주제(theme)가 곳곳에 담겨 있다”고 하면서, 특히 “Fourscore”라는 표현이 시편 90편 10절의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fourscore years)…”이라는 구절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링컨은 미국의 건국 실험이 길어야 80년인 인간의 연수를 7년이나 더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참혹한 전쟁의 한 장면이 지나간 현장에서 그는 더욱 인간 한계를 통감하며 신의 은총을 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 짧은 연설에 담아낸 것이다.
링컨과 성경

▲링컨은 1865년 4월 15일 남부 지지자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됐다.
미국 대통령 중 대중 연설과 일상 언어 표현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은 단연 링컨이다. 게티즈버그 연설 다음으로 유명한 그의 1865년 2차 취임식 연설에도 700단어에 불과하지만 성경이 최소 네 구절이 인용되었고 ‘하나님’은 14번, ‘기도’는 3번 언급된다. 이 2차 취임식 연설을 통해 링컨은 남북전쟁으로 인한 미국인의 상처를 단번에 치유한다. 워싱턴DC 내셔널몰에 위치한 링컨기념관에는 게티즈버그 연설과 2차 취임식 연설이 각각 좌우 양옆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링컨은 공식 연설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성경을 곁에 두고 매사를 성경으로 해석하며 일상에 적용했다. 링컨의 공화당을 탈당해 새로운 급진 노예해방론자 정당(Radical Democratic Party)을 창당한 존 프레몽(John C. Fremont)의 유세 현장에 불과 400명이 모인 것을 두고 참모들이 조롱하자 링컨은 곧바로 성경을 꺼내 들어 사무엘상 22장 2절(“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400 명가량이었더라”)을 찾아 읽으면서 400명을 무시하지 말라고 참모들을 야단치기도 했다.
링컨은 농담을 할 때에도 성경 구절을 사용했다. 스티븐 더글러스와 토론장에 나설 때도 링컨은 스데반(Stephen)을 돌로 쳐 죽였던 무리가 사울에게 옷을 맡겼던 것(행 7:58)을 인용, 옆 사람에게 “내가 스티븐을 돌로 치는 동안 내 외투를 맡아주시오”라는 농담을 던졌다. 1864년 1센트 동전에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넣은 것도 링컨이다. 이때 지폐에도 어떤 문구를 넣으면 좋을지 의논하는 자리에서, 링컨은 “은과 금(동전)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사도행전 3:6)”라는 구절을 넣으면 어떻겠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링컨은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조차도 성경을 통해 미리 예견한 바 있다. 그가 암살당하기 꼭 1년 전인 1864년 부활절 즈음, 그는 백악관을 찾아온 어느 목사에게 자신이 신명기(申命記) 3장을 계속 반복적으로 묵상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인해 요르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모세가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내가 받은 약속(흑인 노예 해방)을 보기 전에 나를 데려가신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으렵니다.”
게티즈버그 연설의 영감이 된 시편 90편도 요르단강을 앞에 두고 죽음을 맞은 모세의 마지막 기도이다.
대한민국 재건할 자유통일의 목표

▲휴전 이후 첫 3·1절인 1954년 3월 1일 학생들은 “3·1정신 받들어 북한 동포 구출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
놀랍게도 게티즈버그 연설 속에는 우리 대한민국을 연상케 하는 내용도 있다. 두 번째 문단의 다음 대목이다.
“우리는 [미국]이, 또는 [미국과 같이] 그렇게 [자유로] 잉태되고 바쳐진 그 어떤 나라라도 과연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위대한 내전을 치르고 있습니다(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other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그렇다. 우리 대한민국이야말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미국을 꼭 빼닮은, ‘자유로 잉태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바쳐진’ 나라가 아닌가. 그 나라가 과연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링컨의 건국전쟁과 재건국을 통해 증명되었다. 이제 우리 국부 이승만의 사상과 정신을 다시 살리는 건국전쟁을 치르고, 북한의 동포들을 기억하며 자유통일을 꿈꾸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도 같은 뜻을 밝혔다. “3·1운동은 모두가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통일로 비로소 완결되는 것”이고 “이제… 모든 국민이 주인인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기미 독립선언의 정신을 다시 일으켜, 자유를 확대하고 평화를 확장하며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 길 끝에 있는 통일을 향해 모두의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도 했다.
놀랍게도 휴전 후 첫 3·1절 행사에서도 한국의 대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
“3·1정신 받들어 북한 동포 구출하자!”
사실 기미독립선언서가 밝히고 있듯이 3·1운동의 정신은 애초부터 일본을 미워하는 ‘구구한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에 의거해 “우리 국민도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시대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양심에 따라 진리와 함께 나아가며” 북한 동포에게도 “오직 자유로운 정신을 드날리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에서도 나온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미국의 국부들을 언급하고 링컨의 말을 인용했다.
“이러한 이상과 원칙들은 바로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인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서 선양됐고, 그 후 ‘절반의 자유인과 절반의 노예로는 지속할 수 없다’며 연방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주저하지 않았던 위대한 해방자 에이브러햄 링컨에 의해서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절반의 공산주의, 절반의 민주주의의 세계에는 평화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름 아닌, 보수의 정신이다. ‘미국 보수주의의 교훈’은 우리에게 진작부터 이미 이승만이 보여주었다. 보수의 길은 우리 모두 ‘리틀 이승만’이 되는 것이다.⊙
⑤ 보수주의와 음모론
음모론을 거부한 미국의 보수주의자들
⊙ 골드워터·버클리·커크 등, 음모론 펴는 존 버치 협회의 로버트 웰치 배격
⊙ 음모론, 수세에 몰려 위기감 가지는 보수에 자신들만의 공동체적 소속감 제공
⊙ 음모론 의존하기 시작하면 냉소·패배주의에 사로잡혀 현실로부터 괴리
⊙ 정치적으로 보수주의는 헌정공화국, 대한민국의 건국정신과 정체성을 지키는 것

▲레이건이 퇴임을 앞둔 1988년 1월 21일 백악관에서 만난 레이건과 윌리엄 버클리. 두 사람은 미국 보수운동의 축이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미국기업연구소장 윌리엄 바루디.
1962년 1월, 미국기업연구소(AEI) 소장 윌리엄 바루디(Baroody Sr.)는 플로리다 팜비치에 있는 브레이커스 호텔에서 보수주의 지도자들을 긴급 소집했다. 바루디는 1938년에 세워졌다가 유명무실해진 미국기업협회(American Enterprise Association)를 떠맡아 ‘연구소(Institute)’로 이름을 바꾸고, 진보 성향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브루킹스(Brookings) 연구소에 맞서는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로 키운 인물이다. 그는 당시 여러 기업인과 함께 애리조나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를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바루디가 소집한 긴급 회동에는 골드워터,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 러셀 커크 등 현대 미국 보수주의를 일으킨 주역들이 모였다. 안건은 로버트 웰치(Welch)의 존 버치 협회(John Birch Society)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음모론을 거부한 배리 골드워터
성공한 제과기업가 웰치가 세운 존 버치 협회는 강력한 반공주의 단체로서 창립 4년 만에 10만 명의 회원을 둘 만큼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존 버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된 미국인 선교사 이름이었다. 존 버치 협회는 미국 내 암약하고 있는 공산주의 세력을 색출하자고 주장하며 매우 열성적인 반공 캠페인을 벌였다.
문제는 로버트 웰치가 너무 극단적인 음모론에 심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령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조차도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는 아주 헌신적이고 의식적인 공산주의 요원이라고 주장했다. 웰치가 1958년에 작성해 은밀히 배포한 《정치인(The Politician)》이라는 책은 ‘미국 내 공산주의 요원’으로 대통령 외에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 CIA 국장 알렌 덜레스, 전 국무장관 조지 마셜 등도 지목했다. 배리 골드워터는 이 책을 보자마자 자신은 이런 주장에 함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책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다며 돌려주었고, 웰치에게 “당신이 현명하다면 가지고 있는 이 책의 모든 사본을 태워버릴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웰치는 스스로 1957년 타계한 조 매카시 상원의원의 정계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을 계승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단지 공개할 수 없었던 상당한 기밀 증거를 가지고 의혹을 제기했던 매카시 의원과 달리 웰치의 주장은 대부분 근거가 전혀 없는 소설에 불과했다. 보수주의 운동 초창기부터 웰치의 후원도 받으며 그와 교류했던 윌리엄 버클리는 점차 그의 극단성에 선을 그어야만 했다. 존 버치 협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협회원들의 주장이 보수주의 전체의 주장으로 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버클리, 웰치의 극단적 주장 배격

▲존 버치 협회를 이끈 윌리엄 웰치.
1961년 봄, 버클리는 자신의 잡지 《내셔널리뷰》 사설에서 존 버치 협회의 주장에 대해 “어떤 사람의 행동으로 인한 객관적 결과로부터 그의 주관적 의도를 자동적으로 유추(類推)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다소 완곡하게 웰치의 지적(知的) 오류를 지적했다. 쉽게 말해 아이젠하워가 헝가리의 자유를 위해 핵전쟁을 감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문제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배리 골드워터가 본격적으로 대선 후보 물망에 오르자 존 버치 협회 회원들이 열성적으로 골드워터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골드워터는 자신의 많은 후원자가 존 버치 협회 회원이고 자신의 고향 애리조나에서도 존 버치 협회의 영향력이 매우 크지만,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그들의 음모론과 극성 지지 때문에 확장성이 현저히 제한된다면서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매우 곤란해했다.
이때 윌리엄 바루디 소장이 보수주의 리더들을 소집한 것이다. 바루디와 골드워터는 버클리와 커크 같은 주요 보수주의 리더들이 존 버치 협회에 대한 입장 정리를 해주기를 바랐다.
버클리는 뉴욕 《내셔널리뷰》 본부로 돌아온 즉시 〈로버트 웰치 문제에 대하여〉라는 사설을 썼다. 존 버치 협회나 그 회원들이 아닌 로버트 웰치 개인의 극단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버클리는 웰치가 “활발한 공산주의자와 무능한 반공주의 리버럴을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보수의 설득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곧바로 다음 호에서는 웰치를 팜비치 모임에서 ‘또라이’라고 불렀던 러셀 커크의 같은 논조의 원고를 실었다. 골드워터 본인도 결국 “미국 내 반공주의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웰치 대표가 사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달았다.
많은 평론가들은 로버트 웰치와 존 버치 협회의 음모론과 선을 그은 윌리엄 버클리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내셔널리뷰》의 독자들은 물론 편집위원회 내부에도 존 버치 협회 회원들이 있었지만, 버클리는 일시적인 피해와 비난의 화살을 감수하며 원칙 있는 소신을 따랐다. 결국 골드워터는 극단적이며 반(反)지성적인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벗어버리고 공화당 경선에서 당내 리버럴인 록펠러를 꺾었다. 보수주의의 공화당 탈환이었다.
보수, 음모론적 사고에 취약

▲배리 골드워터. 사진=퍼블릭 도메인
골드워터는 물론 대선(大選)에서 케네디의 후광을 업은 린든 존슨을 이길 수는 없었지만, 보수주의가 존 버치 협회와 그은 선은 이내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유쾌하고 대중적인 인물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실제로 버클리는 존 버치 협회를 ‘저격’하는 글을 발행하기 직전에 당시 신인 정치인으로 부상하고 있던 레이건에게 편지를 써서 지지를 호소했다. 레이건은 ‘편집자에게 쓰는 편지’로 응답해주었다.
신(神)의 존재와 선(善)과 악(惡)을 비롯한 영적(靈的) 세계를 의식함과 동시에 모든 지도층, 특히 국가를 불신(不信)하는 보수는, 그 체질상 음모론에 취약하다.
음모론은 모든 것에 대한 ‘배후설’을 제공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수많은 지지층을 쌓는다. 웰치는 동유럽의 배신과 중국의 공산화, 한국 전쟁의 장기화, 심지어 주요 공화당원의 죽음 뒤에도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떤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령 ‘미스터 공화당(Mr. Republican)’이라고 불리던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을 죽인 췌장암도 태프트 의원이 앉는 의자에 공산주의자들이 라듐 튜브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시류(時流)와 유행을 냉소적(冷笑的)으로 바라보며 수세(守勢)에 몰려 위기감을 가지는 보수에 음모론은 비밀스러운 자신들만의 공동체적 소속감을 제공한다. 존 버치 협회의 회원들이 모두 존 웰치의 극단적 음모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부 회원에게 이 조직은 실제로 반유대주의 정서와 불법적 폭력의 플랫폼이 되었다. 한때 《내셔널리뷰》에도 기고를 했던 웰치의 측근 레빌로 올리버(Revilo Oliver) 교수는 음모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시온의정서》를 근거로 반유대주의를 주장했고, 로버트 데퓨(DePugh)라는 사람은 공산주의를 숙청하기 위해 300~400명에 달하는 민병대를 조직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음모론은 지적 성장 가로막아

▲휘태커 챔버스. 사진=퍼블릭 도메인
보수주의자가 음모론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꼭 거짓이거나 반지성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음모론에는 ‘이론’만이 아닌 실제 ‘음모’ 또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모든 의혹 제기를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매카시의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은 여전히 근거 없는 적색(赤色) 공포로 여겨지며 ‘매카시즘’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냈지만, 1995년 기밀 해제로 공개된 ‘베노나(Venona) 프로젝트’는 매카시의 많은 의혹 제기가 상당 부분 사실이었음을 증명했다. 이럼에도 보수주의자가 음모론적 사고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더 이상의 토론과 논의를 통한 지적 성장과 성숙을 불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언제나 사실관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합리적 의심’이라고 충분히 둘러댈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극적인 내용으로 흥미를 유발하기 때문에 빠져들기 쉽다. 하지만 음모론은 결국 ‘모든 현상에는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배후가 있다’는 배타적 전제와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의도가 있다’는 강력한 설명력을 제공하는 일종의 ‘세계관(世界觀)’이다. 이것은 서구 문명 초기부터 정통(orthodoxy)을 위협했던 영지주의(靈知主義·gnosticism)에 뿌리가 있다.
막강한 세계관이나 다름없는 음모론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매사에 냉소와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현실로부터 괴리되고, 결국 보수주의의 천적인 맹목적 획일주의와 집단성만 남게 된다. 무엇보다 자유와 진리라는 보편적 가치관을 호소하는 보수의 확장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보수 진영에서도 종종 목격되는 뼈아픈 현실이다. 보수주의의 설명력은 오직 개인의 양심과 역사적 경험, 그리고 자연법칙에 있다.
보수주의는 ‘삶에 대한 원칙 있는 태도’

▲러셀 커크. 사진=퍼블릭 도메인
버클리가 보수 내 반유대주의 음모론과 선을 긋고 결별했을 때 휘태커 챔버스는 이렇게 격려했다고 한다.
“(보수주의자가) 원칙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실로 선하고 강한 것이오. 그것은 경계를 정하는 것이고, 경계를 정함으로써 자유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오.”
러셀 커크가 말했듯이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의 부정이며, 삶에 대한 원칙 있는 태도이자 입장이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의 원칙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보수주의가 아닌 것을 규정하는 것이 더 용이하다.
먼저 미국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보수주의는 ‘보수적이다’는 사전적 의미와 거리가 있다. 영어로 말하자면 소문자 ‘conservatism’이 아닌 대문자 ‘Conservatism’이다. 단순히 옛것이나 기존의 것을 고수하는 것이 보수주의가 아니다. 그런 ‘보수주의’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고,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유교(儒敎) 조선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철학적 의미의 보수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보수주의는 ‘예전이 좋았다’고 한탄하는 과거 회상적 낭만주의도 아니다. 유럽의 보수주의는 일부가 실제로 그렇다. 그들은 보수주의를 ‘88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왕정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물론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대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수구주의(守舊主義)가 아니다.
그리고 보수주의는 ‘유토피아를 향해 가되 천천히 가자’고 주장하는 점진주의, 또는 ‘슬로-모션 진보’도 아니다.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가 함부로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유토피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프랑스혁명 당시 구분 지어진 좌우 스펙트럼에서 우파로 규정하는 것도 탐탁해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는 오히려 진보주의자의 주제넘은 유토피아 설계 시도를 막아선다. 그러한 시도가 인류를 불행하게 할 것을 역사의 경험과 상식을 통해 잘 알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보수주의가 기꺼이 맞서 반대하는 것은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인간 이성(理性)의 신봉이다. 프랑스혁명 당시에도 이것은 획일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냈고, 19세기 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와 그 열매인 공산주의체제로 절정을 이루었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도 이 프랑스혁명의 정신은 과학주의, PC주의, 문화막시즘 등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3F–자유·신앙·가정
그렇다면 이러한 ‘개인과 자유의 적’에 맞서 보수주의자가 보수(保守)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개인과 자유의 원천인 가정과 신앙이다. 정치적으로는 헌정(憲政)공화국을 보전하는 것이다. 미국 보수 평론가 조지 윌은 미국의 경우 보수주의가 단순히 미국의 건국을 보전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행히 미국의 건국정신을 빼닮은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정신과 정체성을 지키는 것을 보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수주의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인간 상위의 도덕 질서, 그리고 신의 섭리를 믿는 서구 자유문명 또는 유대·기독교 전통을 보전하고 지키는 것이다. 최근 미국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3F’, 즉 자유(Freedom), 신앙(Faith), 가정(Family)으로 정리한다.
윌리엄 버클리는 《내셔널리뷰》를 창간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음과 같이 썼다.
〈누군가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선언할 때, 불행하게도, 그 즉시 ‘불의 혀’를 받는 것마냥 모든 것을 알게 되지 않는다. 일련의 기본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다. 이후 우리 보수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마다 우리의 전제를 테스트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며 숙고하는 것을 쉬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매번 우리가 가진 입장의 강점과 약점, 일관성과 모순, 영광과 취약점을 증거에 비추어 면밀히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과 성장을 위해 맹목적 헌신이 아닌 분별 있는 헌신을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올해 11월 미국 대선이 다가오면서, 리버럴 좌익과 보수 간의 갈등은 물론이고 미국 보수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오랫동안 힘을 겨루던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충돌도 더욱 고조될 전망이다. 또한 이를 바라보는 한국 보수 내에서도 뜨거운 논쟁이 예상된다. 이럴 때일수록 보수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적들로부터 지키려는 보수의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월간조선 07월 호
월간조선 05월 호
■무너진 보수,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미국 보수는 어떻게 부활했나
1964년 골드워터 참패 속에서 레이건 발굴, ‘보수혁명’ 성공
⊙ 보수 재건의 바탕은 ‘5P’, 사상가(Philosophers), 재정후원자(Philanthropists), 대중보급가(Popularizers), 정치인(Politicians), 그리고 문화예술인(Poets)
⊙ 자유를 위한 미국 청년들(YAF), 미국보수연합(ACU), 보수주의정치행동집회(CPAC) 결성
⊙ 헤리티지재단, 리더십연구소 등 싱크탱크는 물론 리버티대학, 패트릭헨리대학 등 대학도 설립
⊙ 고전 자유주의자 하이에크, 보수주의자 러셀 커크의 토론 이후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연대 형성
⊙ 〈샤론선언문〉 통해 보수주의 원칙 천명
조평세
1983년생. 런던대 킹스컬리지(KCL) 종교학 학사, 전쟁학 석사, 고려대 북한학 박사 졸업 / 現 1776연구소 대표, 《월드뷰》 부편집장, 전국청년연합 바로서다 이사 / 역서 《레이건 일레븐》 《모든 사회의 기초는 보수다》 《웨인 그루뎀의 성경과 정치》 등

▲1964년 배리 골드워터(왼쪽)의 LA 유세에서 지원 연설을 하는 로널드 레이건. 골드워터는 그해 대선에서 참패했지만, 레이건은 보수 정치인으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1964년 11월, 애리조나 출신의 공화당 대선 후보 배리 골드워터는 민주당 후보 린든 존슨에게 비참하게 패배한다. 존슨은 44개 주와 워싱턴 DC에서 승리한 반면, 골드워터는 6개 주에서 승리하는 데 그쳤다. 확보한 선거인단 수는 존슨이 486명, 골드워터는 52명에 불과했다. 득표율로 봐도 존슨은 61.1%, 골드워터는 38.5%였다. 민주당에 역대 최고의 득표율을 안겨준 기록적인 참패였다.
하지만 역사는 골드워터를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미친 패배자(the most consequential loser)’로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골드워터의 패배는 16년 후 공화당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당선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명한 정치 시사평론가 조지 윌(George Will)은 위트 있게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골드워터는 (사실상) 1964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단지 표를 세는 데 16년이 걸렸을 뿐이다.”
골드워터에서 레이건까지, 즉 보수(保守)의 참패에서 보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기까지 16년 동안 미국 보수는 무엇을 했을까? 유럽의 68혁명과 맞물린 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히피 ‘반문화(counter-culture)’ 물결을 그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그리고 대한민국 보수는 과연 이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현실 직시와 희망
미국 보수 진영이 어떻게 그 16년의 힘겨운 세월을 묵묵히 견뎌내며 보수의 재건을 치열하게 일궈낼 수 있었는지는, 당시 보수주의 운동을 견인한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다. 버클리는 1964년 9월,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두고 열린 유세 현장에서 갑자기 집회를 비공개로 바꾸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곧 닥칠 골드워터의 패배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참패 이후 극심한 혼란이 뒤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 패배는 어느 위대한 ‘11월의 그날’로 열매 맺을 희망의 씨앗이 되어야 합니다.”
뜨거운 유세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었지만, 1년 전 암살당한 존 F. 케네디에 대한 동정 여론과 온갖 더러운 흑색선전으로 선거운동을 펼치던 린든 존슨을 이길 수 없다는 냉철한 판단이었다. 버클리의 ‘예방접종’은 대선 패배 후 미국 보수 진영이 신속히 절망을 털고 일어나 본격적인 보수주의 운동에 돌입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11월의 그날’을 착실히 준비하게 했다.
사실 1964년 골드워터가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기 4년 전 미국 보수 진영에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최초의 보수주의 행동조직이 결성된 것이다. 당시는 베스트셀러 《보수주의자의 양심》(1960)을 써내며 ‘원칙 있는 보수’로 이름을 날렸던 골드워터가 공화당 경선에서 탈락하고, 공산주의와의 투쟁에 뜨뜻미지근했던 공화당을 진정한 보수 정당으로 탈환하는 데 실패한 때였다. 그는 경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료 보수주의자 여러분, 우리가 공화당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바로 그 일에 착수합시다!”
그리고 그날 저녁,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支柱) 역할을 했던 윌리엄 버클리에게 젊은 보수주의자들을 조직할 것을 주문한다.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탄생일’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의 저택에서 열린 YAF 첫 모임 장면을 담은 YAF 창립 60주년 기념 포스터. 사진=YAF 페이스북
1950년대부터 러셀 커크와 버클리 등을 통해 조금씩 지적(知的)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미국의 젊은 보수주의자들은 골드워터의 ‘소집 명령’에 따라, 1960년 9월 11일 코네티컷 샤론(Sharon)에 위치한 버클리의 저택에 모여든다. 미국 24개 주 44개 대학에서 모인 90명의 대학생과 청년들이었다. 모두 버클리가 5년 전 창간한 《내셔널리뷰》의 애독자들이었고, 대학가에서 각자 보수주의 공부 모임을 이끌던 증명된 보수주의 리더들이었다. 그들은 샤론에서 보수주의의 원칙과 청년운동 조직화 방안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자유를 위한 미국 청년들(Young Americans for Freedom·YAF)’이라는 정치 행동 조직을 결성한다.
YAF는 2년이 채 안 된 1962년 3월 8일,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반공(反共) 보수주의 집회에 1만8000명의 청년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많은 역사학자는 이날을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탄생일’로 기록한다. 이 운동력은 2년 후 골드워터 보수주의자들의 공화당 바로 세우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YAF가 당시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버클리와 커크 등의 보수주의 사상가들이 차곡차곡 쌓아놓은 텍스트였다. 《내셔널리뷰》를 비롯한 보수주의 정론지와 각 대학의 보수주의 및 고전 자유주의 공부 모임 등으로 농축되어 임계점(臨界點)에 달했던 에너지는 YAF를 통해 분출되었다.
특히 당시 이들이 채택하고 발표한 YAF의 창립선언문이자 보수주의 사상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샤론선언문(Sharon Statement)〉은, 현재까지도 미국의 보수주의 정신을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기념비적인 명문(名文)으로 여겨진다. 당시 26세 청년이자 주요 일간지(《인디애나폴리스 뉴스》)의 전국 최연소 편집장이었던 M. 스탠튼 에반스가 초안을 작성했다. 이 짧은 문건에는 보수주의의 원칙과 고전적 자유주의 및 시장경제의 원리, 그리고 보수의 마땅한 대외 정책 기조까지 담겨 있다. 샤론선언문의 국문(國文) 번역은 아래와 같다.
샤론선언문
이 도덕적·정치적 위기의 시기에 미국의 젊은이들은, 다음의 몇 가지 영구불변한 진리들을 재확언(再確言)해야 할 시대적 책임을 진다.
우리 젊은 보수주의자들은,
1. 인간 상위의 초월적 가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신(神)이 부여하고 그 어떤 인위적 강제력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가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그 자유는 양도할 수 없다는 것과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 없이 오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2. 또한 정부의 목적은 내부 질서와 국방, 그리고 정의(正義)의 집행을 통해 이 자유를 지키는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정부가 이 최소한의 기능 이상의 역할을 감행하려 할 때, 질서와 자유를 감소시키는 경향을 가진 권력을 축적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
3. 미국의 헌법은, 정부가 그 적법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줌과 동시에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최선의 정부 구성임을 믿는다. 권력분립이라는 헌법의 진수는, 연방정부에 명시적으로 위임된 영역 외에는 각 주(州), 혹은 각 국민에게 우선권을 보장하는 원칙에 있음을 믿는다.
4. 또한 공급과 수요의 자유로운 균형원리를 통해 자원을 배분하는 시장경제는, 자유로운 개인의 요구와 입헌(立憲)정치에 가장 적합한 경제체계라는 것과 동시에 이것이 인간 필요를 가장 잘 충족하는 생산적인 공급자라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정부가 시장경제의 원리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경우, 그것이 국민의 도덕적·물리적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음을 믿는다. 가령 정부가 어느 한 사람의 것을 뺏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경우, 그것은 첫 번째 사람의 인센티브와 두 번째 사람의 정직성, 그리고 두 사람 모두의 도덕적 자율(moral autonomy)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믿는다.
5. 또한 미국의 국가주권이 보장되어야만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과… 자유의 적(敵)으로부터 스스로의 권리를 수호하려는 국민들이 함께 협력해야 자유를 유지할 수 있음을 믿는다.
6. 그리고 현재 이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국제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과의 공존을 추구하기보다 그 위협에 대한 승리를 강조해야 함을 믿는다.
7. 그리고 미국의 모든 외교 정책은 ‘그것이 미국에 정당한 이익을 제공하는가?’라는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샤론선언문이 아우르는 지적 흐름은 세 가지다. 바로 개인의 자유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보수주의와 자생적 시장경제를 최상의 공급자로 보는 자유주의, 그리고 두 사상이 공통의 적(공산주의)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반공주의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전 자유주의의 거장인 하이에크가 어떻게 미국 보수주의 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종종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와 같은 전체주의(全體主義)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두 지적 흐름이 반드시 연합된 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함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커크와 하이에크의 토론

1957년 하이에크는 그가 회장으로 있던 고전(古典)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인 몽페를랭 소사이어티에서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비공개 논문이었지만 당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반격을 꿈꾸고 있던 미국 보수 진영은 이에 당황했다. 《보수의 정신》(1953)으로 보수주의의 사상적 줄기를 재정립했던 러셀 커크가 하이에크에게 급히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곧 몽페를랭 소사이어티에서 커크를 토론장으로 초청했고, 그렇게 ‘20세기 비(非)좌익 진영에서 가장 중요한 토론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하이에크-커크 논쟁’이 열리게 된다.
하이에크는 보수주의를 반지성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면서 인간 상위의 도덕적 권위에 호소하여 항상 최후의 발언을 차지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커크는 자유주의가 인류 역사의 경험적 교훈을 등한시하며 자유시장을 과하게 신봉해 (불가능한) 인간의 완벽성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보수주의’를 각자 다르게 이해(理解)하고 있는 데 있었다. 하이에크는 권위와 전통 자체의 보전을 추구하는 유럽식 보수주의를 비판하고 있었다. 커크는 권위와 전통 그 자체보다 그것을 있게 한 불변의 질서에 중점을 두었던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 즉 미국 혁명이 뿌리내린 유대기독교(서구) 자유문명의 보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실제로 하이에크는 자신의 에세이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에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보수주의와 그 속에 내재된 ‘민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유럽식 보수주의와 전혀 반대되는 고전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하이에크는 사실상 “나는 왜 ‘유러피언’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를 주장했던 것이다.
‘보수주의 빅 텐트’ 형성

▲YAF운동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보수주의 청년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YAF 페이스북
아니나 다를까 스위스 몽페를랭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3년 후 미국에서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많은 이견(異見)과 대립이 누그러져 있었다. 1960년 커크와 하이에크를 포함한 14명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시카고 모리슨 호텔에 모여 주말 내내 열띤 토론을 가졌다. 두 진영의 연합을 도모했던 프랭크 메이어와 스탠튼 에반스가 회합을 중재했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큰 정부에 반대했고 개인의 자유를 중시했으며 고전 자유주의 사상에 공감했다. 또한 개인의 자유가 자칫 방종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공감하면서, 단지 이것이 도덕적 차원의 문제이지 어떤 체제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다. 우려와 달리 하이에크도 자연권의 존재와 인간 상위 질서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같은 해 하이에크는 그의 《자유헌정론》(1960) 말미에 그의 에세이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를 삽입해 출간했는데,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글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심지어 프랭크 메이어가 《보수주의란 무엇인가》(1964)라는 책을 펴내면서 하이에크의 에세이도 포함시켰다(이 책은 최근 한국어로 《보수의 뿌리》라는 제목을 달고 출판됐다). 버클리의 《내셔널리뷰》는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20세기 100대 위대한 논픽션 단행본’ 중 9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보수주의 빅 텐트(big tent)’가 펼쳐진 것이다. 메이어의 ‘융합주의(fusionism)’라고도 알려진 이 지적 연대(連帶)는,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슬로건 아래 폭주했던 사회주의적 거대 국가 팽창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분명한 통일전선을 제공했다. 이는 대한민국 보수 진영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CPAC 참가자 절반 이상이 25세 미만 신규 참가자

▲2020 CPAC 행사.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동시에 이들은 ‘빅 텐트’ 안에서도 각자의 지적 흐름을 끊지 않고 개별적인 성장과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재 미국 보수 정치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싱크탱크의 설립이 이를 잘 나타낸다. 대표적으로 허드슨연구소(1961년), 미국기업연구소(AEI·1962년), 헤리티지재단(1973년), 케이토연구소(1977년), 리더십연구소(1979년), 아틀라스 네트워크(1981년)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지적 기반이 형성되고 있는 가운데 1964년 공화당의 대선 패배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집단행동, 즉 미국보수연합(American Conservative Union·ACU)의 창립을 촉진했다. 개인의 자유와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것을 주 정치적 목표로 삼은 ACU는, 최근까지도 미국 보수 진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보수주의 로비 단체다.
10년 후인 1974년 ACU는 YAF와 함께 첫 대규모 보수주의정치행동집회(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CPAC)를 개최하는데, 이후 CPAC은 세계 최대의 연례(年例) 보수주의 행사로 성장했다. 약 3박 4일 동안 워싱턴DC 인근의 호텔에 1만여 명의 보수주의 활동가들이 모여 촘촘히 짜인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정치 훈련을 받고 행동전략을 공유하는 행사다. 연단에는 공화당 대통령과 부통령을 포함한 전·현직 정치인들과 보수단체 대표 등 약 100명의 연사들이 섭외되고, 수백여 개의 단체와 기업이 홍보와 협찬을 통해 자금을 제공한다. 차기 공화당 대선(大選) 주자들도 종종 여기서 발굴된다. 도널드 트럼프, 마이크 펜스 등도 사실상 모두 CPAC에서 발굴되어 대선 주자로 키워진 바 있다.
필자가 미국에 있는 동안 참석한 세 차례의 CPAC 행사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미국 전역에서 모인 1만 명 이상의 참가자 중 절반 이상이 25세 미만의 신규 회원이라는 사실이다. 제대로 제시된 보수주의의 매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청년들에게 따로 제공되는 세션 주제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었다. 가령 ‘매력적인 보수주의 동아리 운영하기’ ‘메일링 리스트 관리하기’ ‘효과적인 글쓰기 및 캠퍼스 잡지 창간하기’ ‘화내지 않고 좌파들과 대화하기’ 등의 실질적 도움이 되는 주제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레이건의 등장

▲레이건 대통령은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의 《내셔널리뷰》의 영향을 받아 확고한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보수 재건 16년’ 동안 가장 큰 성과는 단연 로널드 레이건의 발견과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버클리의 《내셔널리뷰》를 통해 강력한 보수주의자로 거듭난 레이건은, 1964년 10월 골드워터의 유세 현장에서 미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연설을 남긴다. 바로 ‘선택의 시간(A Time for Choosing)’으로 잘 알려진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레이건은 미국에 주어진 선택지가 더 이상 좌우 따위가 아니라 ‘위아래’임을 역설한다. 개인의 자유라는 최상의 높은 길과 전체주의라는 최하의 바닥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설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에서는 “‘평화냐 전쟁이냐’라는 기만적 말장난이 아니라, 공격하는 적에 맞서 ‘싸우느냐 항복하느냐’를 선택하는 ‘운명과의 조우(遭遇)’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골드워터의 찬조연설에 불과했던 이 연설은 곧 보수주의 정치인 레이건의 출발을 알렸다. 과거 민주당원이었던 레이건의 호소는 훗날 ‘레이건 민주당원’이라고 여겨지는 수많은 민주당 지지층을 보수주의 공화당으로 이끌어냈다. 이듬해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출마해 압승을 거뒀을 때 무려 40만 명의 민주당원이 탈당해 레이건에게 표를 던졌다. 이때부터 미국 보수 진영은 레이건의 매력을 알아보고 일찍이 그를 공화당의 비밀병기로 낙점하여 키워냈다.
‘도덕적 다수’
로널드 레이건의 성장 배경에는 무엇보다 도덕적 중추 역할을 했던 보수 기독교인들이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전통적 가치와 도덕적 권위를 무시하고 방종과 타락을 부추기는 소위 ‘68혁명’과 히피 반(反)문화에 맞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먼저 일어나 ‘도덕적 양심의 회복’을 외쳤다. 특히 1973년 낙태를 사실상 전면 합법화하는 ‘로 대(對) 웨이드(Roe vs. Wade)’ 대법원 판결로 인해 ‘프로라이프[친(親)생명, 반(反)낙태]’를 단일 어젠다로 삼은 생명운동이 1974년부터 전국적으로 발동되어 세력화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작되어 지금도 50년째 워싱턴DC에서 매년 열리고 있는 ‘생명행진(March for Life)’은 결국 2022년 대법원이 낙태 합법화 판결을 뒤집게 하는 역사적인 결과를 끌어냈다.
또한 기독교 가치관을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정책 연구·로비 조직들도 생겨났다. 1976년에는 ‘유대기독교 전통을 정치와 법과 문화에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윤리와 공공정책 연구센터(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가 개소했다. 1977년에는 서던캘리포니아 의대 교수였던 제임스 돕슨이 자녀 체벌권, 남녀 상호보완주의, 반동성애 등의 전통적 가족 가치를 내세우는 ‘포커스온더패밀리(Focus on the Family)’를 창립했다. 이후 돕슨은 가정 친화적 정책을 만들어 정치권에 제시하는 ‘가족연구회의(Family Research Council)’를 설립해 워싱턴 정계를 압박했다.
당시 대학가의 좌경화(左傾化)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존 기독 명문대였던 힐스데일대학, 그로브시티대학 등의 이사진에 적극 합류하여 대학의 좌경화를 막아냈다. 이 중 일부는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기독교인의 정치 세력화와 기독 유권자 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침례교 목사 제리 폴웰은 1971년 리버티대학을 설립했다. 가장 최근에는 홈스쿨링 및 가정 보호 운동과 기독법률지원단체인 ‘자유수호연합(Alliance Defending Freedom)’을 이끈 마이클 패리스가 2000년에 패트릭헨리대학을 설립했다.
결정적으로 제리 폴웰을 비롯한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1979년에 ‘도덕적 다수’라는 뜻의 ‘모럴 매저리티’라는 기독 유권자 조직을 창설한다. 이 조직은 순식간에 미국 22개 주에 400여만 명의 회원을 갖추며 레이건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레이건 행정부가 보수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대한민국 보수 재건에 필요한 다섯 ‘P’
미국 보수주의 운동사(史)가 우리 대한민국 보수에 주는 교훈과 로드맵은 자명하다. 보수주의 사상의 활발한 교환과 정립(예: 《내셔널리뷰》), 보수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한 정치적 원칙의 확립(예: 〈샤론선언문〉), 청년운동가 양성 및 조직화(예: YAF), 자금력 확보(기업 및 개인),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연대와 분업, 끊임없는 정책 연구와 생산(예: 싱크탱크), 운동력 있는 시민사회 육성, 원칙 있는 보수주의 정치인 발굴 및 지원, 기독교 세력 등의 도덕적 기반 구축 등이 그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길이다. 단지 길이 너무 멀어 보여서 자꾸만 다른 어떤 ‘한 방’의 쉬운 길을 찾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되는 좌익 혁명가들과 달리, 벽돌 하나부터 쌓아야 하는 보수우파에게는 ‘왕도(王道)’가 있을 수 없다. 보수 운동에 있어 가장 우선되는 바탕은 무엇보다 현실인식이다. 미국 현대 보수주의 운동의 초창기부터 깊이 몸담았던 저명한 보수주의 역사학자 리 에드워즈는 미국 보수주의 재건의 배경에는 다섯 가지 ‘P’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사상가(Philosophers), 재정후원자(Philanthropists), 대중보급가(Popularizers), 정치인(Politicians), 그리고 문화예술인(Poets)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수 진영을 살펴보면, 보수주의 사상가들과 대중보급가들이 몇몇 떠오른다. 재정후원자와 정치인도 간혹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화예술인은 물론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귀하다. 할 일이 많다. 바로 그 일에 착수하자.⊙
●총선 참패 33개월 만에 재집권한 일본 자민당
아베노믹스 통해 지지자들에게 현실적 이익 제공
⊙ 돈을 통한 국가·국민 생활 향상이 자민당 1강 장기체제의 기반이자 근본 이념
⊙ 아베노믹스 시행 과정에서 자민당의 지역 지지 기반인 ‘풀뿌리 경제단체’와 긴밀한 협의
⊙ 자민당 지지자들은 대를 이어가는 ‘族당원’들… 민주당은 풀뿌리 기반 약해
⊙ 한국 좌파, 이권 카르텔 구축 성공… 보수도 “어떤 이익 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2016년 7월 10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다음 날 기자회견을 하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최근 5년 만에 서울에 들렀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과거에는 들을 수 없었던 기묘한 질문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었다. “우(右)인가 좌(左)인가, 보수인가 진보인가”라는 단도직입형 물음이다. 30여 년 전 미국에 처음 갔을 당시 자주 들었던 “당신은 공화당, 민주당, 어느 쪽인가”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에서처럼, 상대의 의견을 듣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이냐, 적(敵)이냐’를 가늠하기 위한 테스트로서의 질문일 뿐이다. 한국 정치의 상식이지만,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다. 중간은 없다. ‘우리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으로 취급된다. 우리 편이 아닌 이상, 서로 얘기를 나눌 이유도 목적도 사라진다. ‘소통’이란 단어는 신문·방송의 키워드일 뿐, 현실은 ‘단절’ 그 자체다.
미국인의 정치 성향은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나타난다. 총기 보유, 동성애, 이민, 낙태, 정부의 역할, 무역 정책, 자유와 공정 등에 관한 개개인의 판단이 정치 성향의 기준점이다. 부분적으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보수, 리버럴, 중도로 구분한다. 한국에서 접한 좌우의 개념은 칼로 가르듯, 흑백으로 확연히 나누어져 있다.
한국 보수의 활력 재생·재구성에 관한 얘기가 많다. 여기저기서 대안(代案)도 많고 논의도 활발하다. 필자까지 거들자면, ‘좌우를 넘어선, 국민 전체에 맞춰진 정책 발굴’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너무나 뻔한 답으로 들릴 듯하다.
정답은 ‘돈’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가 좌우 모두를 만족시킬 만병통치 정책이 될 수 있을까? 2024년 글로벌 차원에서 본 정답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다. 바로 돈, 즉 경제다. 부연하자면, 당장 내 손안에 꽉 잡히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현실로서의 돈’이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머릿속에 떠도는 이념·이상(理想)’이 아니다.
정치인 아니 정치에 관심 있는 한국인치고, 필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달라진다. ‘돈과 경제’가 핵심이라고 말하지만, 내막으로 들어가면 ‘이념과 이상을 전제로 한 돈과 경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순서를 바꿔야 한다. ‘돈과 경제를 전제로 한 이념과 이상’이다.
“돈은 교환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단순히 이익을 축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400여 년 전 고대(古代)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말이다. 경제학 기본서에도 나오는 상식적인 얘기지만, 한국에서 통하는 돈의 개념은 다르다. 개인 축적의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의 기능이나 효능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통계로 보면, 한국은 이미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선 국가다. 그러나 실제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한국인의 일상은 사뭇 다르다. 실업급여 수령자만도 수십만 명 단위에 오른 지 오래다. 청년실업도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반면 1만 달러가 넘는 명품 브랜드 가방이 오픈 런 상태에서 팔리고, 수억원대 자동차 판매도 수직상승 상태다. 부(富)의 균형점이 깨지면서, 모두를 위한 교환이 아닌, 소수(少數)에 집중된 ‘축적으로서의 돈’이 대세가 되고 있다.
좌파 카르텔 구축 성공한 한국 좌파
좌파 세력 또한 마찬가지다. 2024년 현재 한국의 좌파는 계급·계층·지역 이해(利害)에 공헌하는 ‘안티(Anti) 이념’에 기초한 이권(利權) 카르텔 구축(構築)에 성공했다. 대상이 국가와 국민 전체가 아니다. 카르텔은 실업급여 같은 단기적 차원의 지원만이 아닌, 장기적 차원의 직업적 관계를 통해 완성도를 높여간다. 한번 맺어지면 장기간 함께하는 구조다.
이런 카르텔이 본격화된 것은 문재인(文在寅) 정권 때부터다. 워낙 급하게 카르텔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인 불법과 집단 부패가 판을 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되고 풍부한 재원(財源)으로 무장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카르텔로 진화(進化)하고 있다.
중국·러시아에서 보듯, ‘돈+이념’은 ‘장수만세(長壽萬歲)’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순간 무너질 수도 있지만, 돈이 공급되는 한 공산당과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의 수명도 계속될 것이다. 국가·국민은 망해도 공산당·올리가르히, 나아가 한국의 좌파는 살아남을 수 있다.
의료 대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저런 이유를 달지만, 결론은 자신만의 이해관계에 올인하는 것이 2024년 한국의 대세다. 형이하학으로서의 돈을 내세우는 것을 공산당과 올리가르히가 행하는 식의, ‘악마와의 타협’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보수와 우파는 계급·계층·지역을 넘어선, 국가·국민 차원의 ‘이해관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좌우 정치를 넘어선, 국가·국민 모두의 행복을 위한 대국적(大局的) 차원의 정책이자 이념이란 점에서 ‘전혀’ 다르다. 보수와 우파의 정통성·품격·권위는 국가·국민 전체에 주목하는 세계관에서부터 시작된다. 계급·계층·지역을 앞세우며, 내 편 네 편으로 나눈 뒤 결국 자신의 밥그릇에 눈이 먼 내로남불 세계와 다르다. 도덕과 윤리의 승리이자, 사상과 철학이란 측면에서 우위에 서 있다.
그러나 한국 보수와 우파는 스스로의 정당성과 권위에 만족하는 동안, 국민들에게 연결돼야만 하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에는 무심하다. 정신승리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손안에 들어올 구체적인 빵이 제공되지 않는 한, 정신승리도 오래가지 못한다.
‘빵의 승리’

▲일본 민주당은 2009년 8·30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장기 집권이 점쳐졌으나 33개월 만에 정권을 내놓고 말았다. 사진=신화/연합뉴스
일본 보수 정당, 즉 자유민주당(자민당)은 정신만이 아닌, 빵의 승리에도 성공한 대표적인 본보기다. 필자가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곳곳에서 들었던, ‘한국 보수의 활력 재생·재구성’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자민당이다.
자민당 집권 역사는 창당한 1955년 이래 지금까지 무려 65년에 달한다. 자민당이 야당 생활을 한 것은 2009년 8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33개월간에 그친다. 공산당 1당 독재를 제외할 경우 보수 자민당 장기 집권 역사는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로 장구하다.
자민당의 33개월 야당 체험은 시련에 빠진 한국 보수와 우파를 위한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왜 졌는가’라는 점보다 33개월 야당 생활 이후 ‘자민당이 어떻게 부활했는가’에 관한 부분이다.
2009년 8월 총선에서 자민당이 참패할 당시, 정치평론가 대부분은 민주당 장기 집권과 자민당 대분열을 예언했다. 자민당은 전후(戰後) 20세기 정치 무대의 주역이었을 뿐, 21세기 정치는 좌파의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구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 같은 어두운 예측에도 불구하고 33개월 야당 생활 뒤 자민당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1강(强)’이란 수식어와 함께 출발한 ‘자민당 1강 체제’가 2024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자민당 부활과 장기 집권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의 관점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어떻게 33개월간의 야당 생활을 끝내고, 참의원·중의원 모두 대승리를 거두면서 자민당 재집권에 들어설 수 있었는가?
둘째, 재집권 이후 2024년 4월까지 무려 12년 동안 자민당 1강 체제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는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두 가지 사안에 걸쳐진 공통분모는 돈, 즉 경제다. 돈을 통한 국가·국민 생활 향상이 자민당 1강 장기체제의 기반이자 근본 이념이다.
‘자민당=평화·안정’
한국 신문·방송만 본다면 일본은 우익(右翼) 광신도들이 날뛰는, 당장이라도 험한 상태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한 나라로 느껴진다. 개헌(改憲)에 혈안이 돼 있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지지율도 20%대에 그치는, 뭔가 과격하면서도 어두운 나라다. 통일교 스캔들과 파티 티켓을 둘러싼 금품수수 문제에서 보듯, 자민당 내부 모순도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다. 목표를 잃은 젊은이, 엔저(円低)로 떠밀려가는 일본 경제에 이르기까지, 당장이라도 공황이나 혁명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것이 한국 미디어에 나타나는 일본의 초상화다.
현실은 어떨까? 한국 미디어가 분석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잃어버린 30년’이었다고 하지만, 실업률이 3% 이하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해외에서 일본을 찾는 여행객 규모가 팬데믹 이전에 매년 2000만 이상에 달했다. 해외투자금이 3조 달러로 매년 3000억 달러 정도의 이자가 보장되는 금융 대국이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한국인조차 전체 국민 15%인 700만 명 정도가 지난해 ‘공황 또는 혁명 전야 나라’로 관광길에 올랐다.
정치와 사회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에 해당된다. 정치를 보면 사회가, 사회를 이해하면 정치도 파악할 수 있다. 일본 사회의 특징인데, 평화와 안정이 기본이다. 이 같은 평화와 안정을 이끄는 중심이 바로 자민당이다. 평화와 안정은 자민당이란 정당에 배인 이미지 그 자체다. ‘자민당=부패=금수저 족벌(族閥) 정치 집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평균 일본인의 정서는 ‘자민당=평화·안정’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평화와 안정은 경제적 번영을 기반으로 할 때 의미를 갖는다. 간단히 말해 돈이다. 이것이 바로 2012년에 자민당이 33개월 공백을 허물고 1강 체제에 컴백한 근본적인 원인이자 배경이다. 이런 부활극(復活劇)을 만들어낸 1등 공신은 아베 전 총리다. 그는 2024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본 경제 부활의 주춧돌이 된 지도자이다. 바로 2012년 말 집권 즉시 시행한 아베노믹스 정책 기안자이기 때문이다. 과감한 금융 완화와 재정지출 확대, 마이너스 금리를 기반으로 한 구조개혁 경제구조가 아베노믹스의 핵심이다.
필자가 아는 한 한국에서 아베노믹스를 긍정적으로 얘기한 사람은 제로에 가깝다.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 반(反)트럼프 관련 분석과 평가가 그러하듯, 반일 정서와 더불어 일본 리버럴 미디어의 편견에 기초해 ‘아베노믹스=일본 침몰’로 몰아간 곳이 한국 미디어다. 특히 좌편향 한국 미디어의 경우, ‘아베=극우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직계’라 보면서 전쟁광에다 경제도 망칠 정치가로 비하했다. 희극적 상황이지만, 좌파 문재인 정권은 아베노믹스 정책을 120% 흉내 낸, 금융 완화 퍼주기 정책에 몰입했다. 아베를 비판한 좌편향 한국 미디어 그 누구도 ‘문재인 경제 정책=아베노믹스 짝퉁’이라 비난하지 않았다.
‘세기적 기회’ 맞은 일본
일본 경제계는 2024년을 100년 만에 맞이한 ‘세기적 기회’로 보고 있다. 미·일 경제안보 일체화가 구체화되면서 일본의 역할과 기능이 급신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은 미국의 원칙에 따르는 것만이 아닌, 원칙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글로벌 룰(rule)’을 직접 만들고 있다. 미국은 원칙을, 일본은 룰을 제정하는 식이다. 중국 전기 자동차(EV)가 아무리 대단해도, 일본이 만드는 글로벌 룰 하나만으로도 간단히 사라질 수 있다. ‘중국 폭망=일본 급부상’인 셈이다.
기시다 총리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지만, 사실 진짜 공헌자가 죽은 아베 전 총리라는 사실을 의심할 일본인은 극히 드물다. 12년 전에 구축한 아베 전 총리의 유산들이 열매를 맺으면서 나타난 결과가 ‘세기적 기회’의 배경이다.
2024년 일본 급부상은 글로벌 정치 플레이어로서의 일본의 재등장인 동시에, 보수 자민당 체제의 장기화를 의미한다.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20%대라고 하지만, 당장 총선이 실시될 경우 자민당 패배를 전망하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글로벌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아 지금 당장 장수(將帥)를 바꿀 수는 없다. 더불어 야당인 민주당과 소수 정당들에 일본의 오늘과 내일을 맡기려는 일본인도 거의 없다. 아무리 부패하고 늙은 자민당이라 해도, 특별한 대안도 없다는 점에서 자민당 1강 체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 같은 상황과 관련해, 아베의 최대 유산인 아베노믹스의 ‘정치적 의미와 가치’에 주목한다. 금융정책·재정정책·구조개혁이란 3개의 화살에 기초한 아베노믹스의 ‘경제적 의미와 가치’가 아닌, 정치적 차원의 관점이다.
대대로 이어지는 자민당 후원 조직
일본 자민당 당원은 약 112만 명 정도다(2022년 기준). 일본 인구로 보면, 110명 중 한 명인 셈이다. 한국의 경우, 국민의힘이 410만 명, 더불어민주당이 480만 명의 당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5명 중 한 명이 정당 가입자인 셈이다. ‘비밀 당원’들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필자 주변을 보면 정당 당원이 거의 없다.
자민당 당원 112만 명은 명실상부 똘똘 뭉친 정치 집단이다. 선거 때만 만났다가 사라지는 유령 단체가 아니다. 자민당 정치의 특징이지만, 각종 명목의 후원회가 많다. 지역 내 원로들과 자영업자와 중소상인들로 연결된 후원회가 곳곳에 존재한다. 자민당 후원회는 할아버지-아버지-손자 3대(代), 대대손손(代代孫孫) 이어지는 조직이다. 자민당 당원 112만 명은 이들 후원회를 통해 단단히 연결돼 있다. 정치적 지지는 물론, 각종 명목의 기금을 통한 물적(物的) 지원도 확실히 한다. 정치가 돈이고, 돈이 정치다.
한국 정치도 여기저기 후원회가 많다. 그러나 질적·양적, 심적·물적으로 보면 일본 정치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필자가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에서 공부할 당시 체험한 것인데, 정치인으로 나선 숙생(塾生)들을 보면 ‘주말 라이프 제로’가 기본이다. 주말 일정은 후원회와의 만남이 기본이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매주 인사를 한다. 지방 출신 정치인의 경우 신칸센(新幹線)으로 지역구에 내려간 뒤, 후원회 사람들이나 지역구 경제인들과의 만남에 매달린다. 주말에 지역구 후원회와 만나지 않는 정치인에게는 낙선만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중앙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도, 지역 내 후원회와 당원을 멀리할 경우 차기 당선에서 멀어진다.
지역구에 자주 안 내려가도 당선이 보장된 의원들도 있기는 하다. 바로 ‘족(族)의원’으로 불리는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지역구에 내려가는 대신 반대로 도쿄에 후원회 관계자들을 초대한다. 도쿄 내 유명인사들과 연결시켜주면서 후원회 사람들을 상전 모시듯 접대한다.
‘마쓰리 정치’

▲2013년 7월 참의원 선거 당시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도쿄에서 자민당 소속 후보 지원 유세를 하는 모습. 자민당은 풀뿌리 조직이 강하다. 사진=로이터/뉴스1
한국에서는 ‘족의원’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일본, 특히 지방정치에서는 정치인 ‘장인[職人]’이란 차원에서 대한다. ‘세습정치’라고 비난하기보다, 장인이 대대손손 직업을 이어가듯 정치도 계속해서 이어가는 직업으로 여긴다.
정치인만이 아니라, 후원회 대표들도 ‘족(族)당원’들이다. 하루 이틀이 아닌, 수십 년, 백 년 이상 함께하는 관계다. 족의원은 대를 이어 연결된 후원회를 통해 한층 더 심화된다. 일본 풍경 중 하나지만, 주기적으로 크고 작은 마쓰리(祭り), 즉 축제가 곳곳에서 열린다. 자민당 정치가는 이들 마쓰리에도 반드시 참가한다. 수백 년 이어온 마쓰리 운영회 대부분이 자민당 후원회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기시다 총리가 참석할 경우, 마쓰리도 살고 마쓰리 운영회는 물론 자민당 후원회의 권위도 올라간다.
마쓰리 정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장려하고 응원해야 할 풍경이다. 야당인 민주당은 자민당식 풀뿌리 네트워크가 약하다.
자민당 후원회 입장에서 볼 때 자민당 1강 체제는 어떤 의미일까? 보수 이념에 기초한 평화·안정·구현이란 점도 있겠지만, 역시 핵심은 돈에 있다. 자민당 후원회 대부분은 지역 경제단체장들이다. 지지하는 자민당 의원의 당선은 자신의 이익 보장으로 직결된다. 나쁘게 말하면 정경유착(政經癒着)이지만, 좋게 보면 소통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로 해석할 수 있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아베노믹스를 거시 경제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지방 경제에 기초한 미시 경제로 이해하면, 마쓰리 운영회나 자민당 후원회와의 경제소통이란 식으로 볼 수 있다. 국가·국민적 차원에서의 아베노믹스만이 아니라, 자민당 정권을 지지하는 지역 내 풀뿌리 경제단체와의 협력 기반으로서의 경제 정책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될지에 관한 논의는 아베노믹스 발표 전부터 이미 시작된다. 후원회를 통해 서로 논의를 하기 때문이다. 불법·특혜·정경유착과 같은 단어들이 난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이나 기존의 룰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시행하는 것이 자민당 후원회와 112만 당원의 수완이자 능력이다.
‘내 주머니에 뭐가 떨어지는가’
‘일본 재생, 강한 정치’는 2012년 아베 재등장 당시의 자민당 슬로건이다. 아베노믹스는 일본 재생과 강한 정치를 동시에 구현할 수단이다. 출발은 아베노믹스를 통한 경제 활성화의 단맛을 실감할 자민당 112만 당원에서부터 시작됐다.
필자는 2024년 4월 총선에 즈음한 한국 보수와 우파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내가 보수 정당을 지지할 경우, 내 주머니에 구체적으로 뭐가 떨어지는가? 대한민국 정통성 재확립과 같은 보수 이념 실현만이 아니라, 형이하학적으로 떨어지는 구체적인 이익이 과연 무엇인가?”
이해(理解)는 해도 나의 이해(利害)와 맞아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멀어지게 된다. 자민당은 이해(理解)와 이해(利害)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국민 모두에게 제시하고 있다. 112만 당원은 이해(理解)와 이해(利害)를 동시에 체감(體感)하는 자민당 1강 체제의 창이자 방패다.
500년 주자학(朱子學)의 전통과 세계관은 21세기 한국 보수 정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손과 발이 아니라 ‘머리로서의 정치’에 매달린다. 한국 보수의 활력 재생·재구성을 얘기할 때, 정신·이념이란 단어보다 돈·경제·경영이란 단어부터 떠올리길 기대한다.
트럼프 식으로 설명하자면, 하루 만에 세계 500대 부자로 등극시켜준 소셜 네트워킹 ‘트루스 소셜(Truth Social)’ 상장(上場)이나, 날개 돋친 듯 팔린 399달러 황금 스니커가 최적의 본보기다. 트럼프도 지지하지만, 돈도 벌 수 있다. 건국 대통령 기념사업이나 한국 전쟁 희생자와 천안함 부상자 돕기는 기본이다. 하지만 숭고한 이상과 희생을 한층 더 기리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돈·경제·경영적 비즈니스 사고가 필요하다.
팬데믹 이후 정치와 비즈니스가 동전의 양면처럼 나아가는 상황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일본에서 아베노믹스의 그림자와 영향력은 아베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층 더 강해지고 있다. 정치를 정치로 풀어나가는 것이 정도(正道)이던 시대도 있었다. 2024년 글로벌 시대정신은 정치를 비즈니스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젊은 동양철학자의 통렬한 보수 정치 비판
늙은 건물주와 퇴물 판검사의 ‘인질 정치’는 이제 그만!
⊙ 지금 우파의 곤경은 87 체제 이후 “허비해온 세월의 복수”… ‘박근혜 탄핵’ 때 이미 파산
⊙ 우파, 트럼프처럼 제도권 정당·언론 금기시해온 의제 적극적으로 공론화하는 충격요법 써야
⊙ 윤석열·한동훈,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도, 지지 계층을 위한 정책도 내놓지 못해
⊙ 우파는 ‘성 밖 사람들’, 20~30대 남성, 50대 여성 지지 얻었어야
⊙ 한국에서 계층 문제는 세대 문제와 겹쳐
⊙ ‘새 보수’ ‘개혁우파’도 비전 제시보다는 좌파 따라 하기, 내부 분탕질로 인지도에만 급급
任建淳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 저서 《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해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등

▲22대 총선 당일인 4월 10일 밤 텅 비어 있는 국민의힘 총선 개표 상황실. 국민의힘, 보수 정치 세력의 파산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사진=조선DB
대통령이 할 일은 두 개 범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국가를 위한 일이 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일이다. 당장의 고통과 출혈이 요구되고 지지층들이 이반(離反)해도 필요하다 싶으면 추진해야 하고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인기 없는 해법일지라도 더욱 용기를 가지고 말이다.
두 번째로 진영(陣營)을 위한 일이 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지지 세력이 원하는 일, 그들을 이롭게 해주는 일도 대통령의 임무이다. 절반만의 국민만을 위한 일이다. 나머지 국민을 비(非)국민화시키는 행위일 수 있고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겠지만, ‘현실로서의 정치’란 것을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국가의 미래를 생각지 않아도 절반의 국민만 챙기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이들에게 전리품(戰利品)을 풍성하게 나눠주고 이롭게 해주면 끝까지 인기를 누리고 퇴임 이후에도 자신은 편안히 살 수 있다.
윤 정권, 지난 2년 동안 무엇을 했나?
윤석열 정권 출범 후 2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대통령 윤석열은 일들을 했어야 했다. 아무리 거대 야당이 발목을 잡아도 일을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고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 좌초되는 모습이라도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연금(年金)개혁을 했는가? 제조업 경쟁력을 위해 주(週) 52시간 제한 철폐를 했는가? 정규직 기득권을 제한하고 고용유연화를 시도했는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한 일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을 위해 한 일도 없어 보인다. 자신을 지지해준 20·30 남성들을 위해 한 일이 있는가? 여성가족부 폐지는 말뿐인 공약 아니었나? 남성들이 겪는 사법적 불공정함을 비롯해 젊은 남성들이 생각하는 기울어지다 못해 뒤집힌 운동장의 현실, 역차별(逆差別)에 신음하는 현실을 고치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한 일이 있기는 하다. 이준석을 몰아냈고 의사 집단과 싸웠다. 심하게 의사들을 겁박했다. 의사와 의사의 가족들이 지난 대선 때도 지지하다 못해 충심도 가득하고 가장 우수한 우파(右派) 지지 세력인데도 거침없이 찍어 눌렀다. 윤석열 정권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한 일이 없고 지지 세력을 챙기는 일도 없었다. 선거 폭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참으로 이상하게도 윤석열 정권에는 국정(國政) 슬로건도 없었다.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 어떤 대원칙하에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없었다. 망해가는 집구석도 가훈(家訓)이란 게 있는데 윤석열 정권은 국정 슬로건이 없었다.
역시나 이상한 일이지만,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총선 승리를 위한 메시지가 없었다, 총선 이후 무슨 일을 해내겠다는 대(對)국민 슬로건이 없었다. 그냥 앞으로도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인데 왜 국민들이 지지를 하고 표를 주었어야 했을까?
한 일도 없고 하겠다는 일도 없고 선거 기간에는 상대방이 나쁘다는 말만 했다. 운동권이 정권을 잡을 경우 만들어질 파국(破局)을 가지고 겁만 주었다. 늘 해왔던 전형적인 인질극이다. 우파 정치는 자신의 지지자를 인질·볼모로 안다. 이번에도 틀림이 없었다.
한동훈에게서는 운동권과 이재명 나쁘다는 소리만 들린 것 같은데 청산할 것들은 분명히 청산해야 한다. 부패한 특권(特權) 세력으로 변해버린 운동권을 청산해야 한다는 데는 분명히 동의한다. 하지만 대안(代案)과 해법들을 생산해낼 의지와 준비, 역량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국민들이 보기에 국민의힘은 그럴 역량과 준비가 없었던 것 같다. 운동권을 청산하자는 말만 할 게 아니라 최악의 저출산, 사실상의 인구대란 그리고 신냉전(新冷戰) 시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재편되는 와중에 국민국가의 틀마저 흔들리는데 어떤 대안들을 생산해낼지 역설했어야 했다.
하지만 한동훈에게는 그런 대안적인 콘텐츠가 없어 보였다. 이러니 어떻게 우파 시민, 더 나아가 국민들이 지지하고 표를 준단 말인가?
성 밖 사람들, 성 안 사람들
어느 나라든 우파 집권의 조건은 1%와 하위(下位) 계급 간의 연대(連帶)다. 중산층(中産層)을 에워싸는 계급 포위의 구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상위 중산층을 스킵하고 하위 계층과 상위 1% 간의 연대로 중산층들을 포위할 수 있어야 우파 집권이 가능하다.
어느 국가든 고(高)자산 계층은 우파, 고학력-고소득 계층은 좌파, 저(低)학력-저소득 계층은 다시 우파인 경우가 많다. 지난 대선만 해도 그렇다. 실제 지난 대선은 세대 간 포위라는 말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계층 포위이기도 했다. 상위 1% 성(城) 밖에 사는 생활인, 서민 간의 연대로 성 안에 사는 상위 중산층을 이겨버린 것이다. 집권을 위해서 늘 성 밖에 사는 생활인과 저학력, 저소득 국민들을 포섭할 생각을 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던 가장 큰 실책은 어쩌면 담뱃값의 급격한 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표를 줬고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준 행위였다. 하위 계층,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을 담뱃값으로 얄팍하게 만들어버렸다. 애초에 서민들 표를 끌어와서 이른바 성 밖 사람들의 표로 대통령이 된 우파의 리더가 자신의 지지자를 배신해버린 것이다.
우파는 성 밖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하고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런 계층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한국에서 계층의 문제는 사실 세대의 문제와도 적지 않게 겹쳐지고 포개진다.
성 안에는 40, 50대들이 많이 살고 성 밖에는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많이 산다. 성 안에는 전문직, 정규직, 화이트칼라 등 안정된 소득 기반의 중산층들이 많이 사는데 40, 50대들이 대부분이다시피 한다. 지대의 틀에 안착하고 선점(先占)한 이들이 대부분 좌파들이다. 민주당 핵심 지지 세력이다. 87년 체제가 허락한 지대의 틀을 움켜쥔 이들 중 적잖은 사람들이 1960년대, 1970년대생들이고 이들 대부분이 민주당 핵심 지지 세력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우파 집권을 위해서는 성 밖 사람들의 표를 가져와야만 한다. 부유한 성 안의 노인, 성 밖 가난한 노인들의 표만 가지고는 힘들다. 실제 지난 대선 때 20, 30대 특히 젊은 남성들의 표를 많이 가지고 와서 이기지 않았는가?
윤석열 지지했던 ‘아들 가진 50대 여성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당시 청년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집권 후 그들이 원하는 정책들을 실천하지 못했다. 사진=조선DB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정권 출범 이후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앞으로도 어떤 것을 할 준비가 되었는가’라고 질문하면 생각나는 것이 없다.
이들을 앞으로 자신들의 코어(core)한 지지 세력으로 굳히기를 해야 이번 총선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우파는 선거에서 겨우 해볼 만한 구도가 만들어지는데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동훈 전 위원장은 이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했거나 목소리를 냈는가? 자신들 지지 세력이기도 하고 소득과 자산 수준을 생각했을 때 하위 계층이기도 하니 더더욱 20, 30 남성들을 챙기고 우군(友軍)으로 붙들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애초에 우파의 집권 조건에 대해 인식이나 있었는지나 모르겠다. 20, 30 남성들을 붙들어두지 않으면 거대한 인구집단이자 민주당 콘크리트가 많은 40, 50대 유권자들을 상대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50대 여자들도 살펴야 하는데 사실 젊은 남성들 포섭 문제와 같은 이야기다. 40, 50대는 민주당 지지가 매우 강하지만 해당 범주 안에서 50대 여자들이 유독 민주당 비토가 심했고 적지 않게 지난 대선 때 윤석열 후보에게 표를 줬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우파 정치인들은 그 이유를 알기나 할까 모르겠다.
왜 50대 여자들이 민주당을 싫어했고 윤석열 후보에게 표를 줬을까?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민주당과 좌파에 반감이 많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아들을 둔 어머니들이기 때문이다. 좌파들이 계속 득세하면 내 아들이 인간답게 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이다. 아들 둔 엄마로서 본능적인 촉이 작동을 한 것이다. 페미니즘에 잡혀 먹힌 민주당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기에 우파를 지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의힘은 총선 때도 아들 둔 어머니들에게 공천도 하고, 마이크를 쥐여주고, 공세적 프레임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려는 생각을 해봤어야지 않을까? 페미니즘과 젠더 문제로 공세적 프레임을 전개했다면 꼭 50대 어머니들이 아니어도 아들을 둔 어머니들과 젊은 남자들까지도 지지 세력으로 만드는 데 있어 큰 힘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비동의간음죄를 발의한 나경원,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처음으로 재판에 도입한 판사 출신 전주혜, 남자 대학생들을 비하한 김민전을 지역구와 비례로 공천해버렸다. 이런데도 젊은 남자들과 남자들의 어머니가 무슨 이유로 표를 줬어야 했을까?
우파 정치는 퇴물 판검사들의 인생 이모작
우파들 대부분은 늙었다. 의사 결정 권한을 가진 우파, 소위 한자리하는 우파, 선거 이후에 전리품을 챙기는 우파들은 대부분 나이가 아주 많다. 그리고 고자산가인 경우가 많다. 지지자와 유권자 중 늙은 건물주들이 유독 많다. 그리고 실제 우파 정치를 하는 경우 은퇴한 판검사들이 많다. 일찍부터 정치에 투신해 젊은 시절부터 훈련받는 좌파들과 달리 퇴물 판검사들의 인생 이모작(二毛作)이 우파 정치다. 판검사들이 화려한 자기 스펙의 마지막 공간을 끝까지 빛나게 채우려고 하는 게 겨우 우파 정치란 것이다.
늙은 건물주와 퇴물 판검사가 우파 정치의 현실인데, 이들은 젊은 남성들을 이해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고 또 너무 잘산다. 세대 차이, 계층 차이로 인해 이해 불가다. 그들은 아시려나? 미혼 총각들 최대 70%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짝을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을. 짚신도 짝이 있다고? 아니다. 구두만 짝이 있다. 비싼 구두만. 미혼남 70%는 가정을 꾸릴 수 없고 반려자를 찾을 수 없다. 정치 권력이 좌우 담합하다시피 하면서 남성들 문제를 외면하고 젊은 남자들의 남성성을 모조리 거세해버려 야심과 생활 의지, 강인한 생활력은커녕 많은 젊은 남성이 열패감(劣敗感)을 가지고 ‘체제가 날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페미니즘에 잡아먹힌 민주당이라면 몰라도 노인들 지지만 가지고는 집권이 불가능한 우파는 그들의 편이 되어주려 노력했어야 했다. 성범죄에서 유죄추정(有罪推定)이 관철되는 법 앞의 불평등을 고치려 했어야 했다. 불합리한 결혼 문화와 관습을 고치자고 계몽도 해보고, 저출산 지원의 패러다임을 여성 지원에서 동(銅)수저, 흙수저 남성 지원으로 바꾸는 방향 전환을 했어야 했다. 이민청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국제결혼도 지원하는 등 국제결혼 관련 기구도 만들겠다면서 젊은 남성들을 살폈어야 했다. 그런 정치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전 위원장이 하거나 약속했어야 했는데 그들이 젊은 남성들을 위해 한 일은 없었다.
젊은 남성 문제는 체제 수호의 문제
심각한 것은 젊은 남성 문제가 선거와만 상관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체제 수호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대만의 1인당 GDP는 우리나라하고 비슷하다. 그런데 대만에서는 월급 160만원 받는 사람이 중간 이상의 월급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반도체 관련 회사에서 일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박봉을 받으면서 생활한다고 한다. 200만원 이하 월급으로도 많은 사람이 산다고 하는데, 대만처럼 박봉에 시달린다거나 혹은 한국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짝을 절대 만날 수 없다면, 그것이 현실이라면 체제를 지킬 이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신냉전 시대라지만 싸울 이유가 없다.
젊은 남성 문제는 눈앞의 선거를 떠나 정말로 이 체제를 지켜야겠다면 좌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혼 남성의 최대 70%는 아무리 용을 쓰고 열심히 살아도 사랑스러운 자기 짝 만나 가정 꾸리거나 자기를 존중하는 이성(異性)을 만날 수 없다. 이런데도 그들에게 ‘체제를 위해 싸워라’ ‘뭔가를 희생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한국과 대만은 최전선(最前線)이다. 전체주의 공산국가, 전근대(前近代) 대륙 야만 문명과 맞서는 프런티어이다. 사실 그 방패값을 서방 진영에 톡톡히 받아냈기에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이다. 신냉전이 시작되고 격화되면서 이런 프런티어적 성격, 전선의 성격이 다시 매우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중국의 야욕이 흉포해도, 북한이 나쁘다 해도, 대한민국의 젊은 남성들이 무슨 이유로 싸워야 하고 어려운 시간을 인내해야 하나? 중국과 북한이 싫은 것과 그들과 직접 싸워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말이다.
신냉전 시대라는 국제 정세까지 생각하면 정치 권력은 절대 젊은 남성들이 겪는 소외감과 분노, 차별의 문제를 무시하시거나 못 본 척해서는 안 되지만, 현실은 참으로 난망해 보인다.
영화 〈건국전쟁〉이나 보면서 감읍해하는 일로 자신들 할 일 다 한 것이 아닌데, 정말이지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 늙은 건물주와 퇴물 판검사들에게 젊은 남성들의 이반과 절망이 눈에 들어오기나 할지 모르겠다. 국가 차원의 국제결혼 지원을 해볼 생각, 이민청만이 아니라 국제결혼지원청을 만들어볼 생각, 성매매·성인물을 합법화할 생각, 성인지 감수성·피해자 중심주의를 삭제하며 법 앞에서 남녀가 동등하게 설 수 있도록 해볼 생각…. 이런 것들을 챙기면서 젊은 남성들을 향해 어필해보고, 호명해보고, 그러면서 선거도 이기고 체제도 지켜보자는 구상을 했어야 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열리기로 했던 성인엑스포가 여성단체들 항의와 민주당 소속 지역단체장들의 방해로 취소되었을 때가, 그나마 선거전에서 젊은 남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우파 정치는 젊은 남성들을 안고 가기에는 세대적·계층적으로 너무 거리가 멀다. 인구 구조와 지형까지 생각하면 앞으로 계속 이길 수 없는 선거를 치러야 할 것이다.
‘소 키우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우파 정치의 기본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국민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국민들을 지켜야 한다. 사실 우파와 좌파의 문제를 떠나서 권력이 권력다워지는 전제는 국민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전쟁과 분쟁, 재해로부터 구성원들을 보호해야 권력이 권력으로서 성립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갈수록 국민들을 지키기 어려워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이공계 위기가 심화되고 제조업 분야 최정예 인사들이 국외(國外)로 유출되고 있다. 외화(外貨)라는 생명수를 길어올 사람들이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오 분야나 필수 의료 인력들 역시 이탈하고 있다. 이탈한 사람들을 불러 모을 대안을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다. 의사와 정부 간의 대치에서 보듯이 권력의 힘으로 겁만 주고 있다. 부사관과 장교들 역시 이탈하고 있다, 너도 나도 전역(轉役)하고 있고, 장교와 부사관이 되겠다는 지원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마디로 ‘소 키우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거다. 생명수를 길어오고 시스템의 중심부와 최일선에서 싸우고 버틸 사람들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이렇게 ‘소 키우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한동훈 전 위원장은 뜬금없이 격차 타령을 했다.
한동훈 전 위원장은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하면서 첫날에 격차 사회를 운운하며 뮤지컬 이야기를 했다. 부당한 격차를 없애거나 줄여야 한다면서 난데없이 뮤지컬 이야기를 했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이동해 뮤지컬을 보기 불편하다나.
그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소 키우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는 마당에 말이다. 어떻게든 ‘소 키웠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 중 우수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을 어떻게든 축사(畜舍)로 불러와 일하게끔 고민해야 한다. 의사 집단과 벌인 극한의 대치를 보라. 윤석열 대통령은 축사 앞에서 몽둥이 들고 눈 부라린 채 서 있으면 되는 줄 아는데 한동훈 전 위원장도 문제의식과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잘못짚은 ‘격차 타령’

▲‘함께 가면 길이 된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구호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담아내지 못했다.
왜 소 키우는 사람들이 도망갔을까? 간단하다. 국가의 인센티브 체계가 왜곡되고 망가졌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소 키워봤자 소고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축사 청소조차 한 번을 안 한 사람들이 소고기 뜯으며 와인 마시고 있다. 이게 이 사회의 실정이다. 열심히 여물을 먹이고 꼴 베어오고 소똥 치우고 하는 것보다 정육점 앞에 가서 나도 피해자고 약자라면서 울면서 떼쓰는 게 소고기 먹는 데 가성비가 훨씬 좋은 인생이라는 것을 너도 나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소 키우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소를 돌보는 사람들이 없으면 국민들을 누가 지킬 것인가? 외화 벌어오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바이오와 필수 의료 종사자들이 다 사라져도 괜찮을까? 부사관 장교의 씨가 말라도 별일 없겠는가?
더 심각한 것은 이렇게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을 제대로 살피고 대안을 만들겠다는 리더십도 없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한동훈 전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소 키우는 사람들이 소고기 먹게 하겠다. 충분한 보상과 명예와 존경까지 누리게 할 것이며 소고기 먹고 싶으면 꼴 한 번이라도 베어 와야 한다. 이게 인간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양심이다!” 이렇게 정치에서 메시지를 주고 분명히 천명해야 한다. 뒤틀려버린 사회 인센티브 구조를 뜯어고치겠다고 하면서 시스템을 복구하고 국민들의 정신도 다잡아야 한다.
사실 늦었다. 많이 늦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와 위기, 그 위기의 중심적 원인이 어디 있는지 파악해보고 국민들에게 대안을 말하면서 설득을 한다고 해도 지금 한참이나 늦은 게 아닌가 싶은데 ‘부당한 격차 해소’라니, ‘함께 가면 길이 된다’느니, ‘지방사람들이 뮤지컬 보지 못해 큰일’이라니 했다. 한동훈 전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국민의힘은 국가 운영의 근본과 국가 장래에 대한 준비와 고민이 없음을 처음부터 드러냈다.
‘격차 타령’만 해도 그렇다. 외려 정당한 격차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국가가 약속하고 보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소 키울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 판국에 소 키우고 돌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국민들 사이에는 격차가 분명히 있어야 하고 커져야 한다. 그 정당한 격차가 없어 무너져가는 나라에서 그 격차는 정부와 권력이 보증해야 하는 것이고.
근성도 이념도 없는 ‘개혁보수’

▲새로운보수당은 ‘개혁보수’를 내걸고 출발했지만, 2년여 후 다시 ‘구보수’인 미래통합당과 합쳤다. 사진=연합뉴스
우파 정치가 이렇게 망가지고 답이 없는 것을 추적하자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탄핵은 사실 우파 정치의 총체적 파산이었다. 정확히는 탄핵으로 망했다기보다는 망했기에 탄핵을 당한 것이다. 사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를 밀어붙여 대선 승리를 겨우 일궈내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우파 정치는 파산이 확정된 것이다. ‘박근혜’ 말고 그때 우파가 내세운 게 뭐가 있었나?
탄핵 이후 우파는 어떤 거듭남의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는가? ‘새로운보수당(새보수)’이 나와서 개혁보수, 새로운 보수의 기치를 내걸기는 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는지는 미지수다. 그나마 2020년 총선을 앞두고 구세력과 살림을 다시 합쳤다. 그저 국회의원 배지에 눈이 멀어 통합이란 미명하에 살림을 합친 것이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신(新)우파와 구(舊)우파가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이별한 채 서로 경쟁하며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어야 했다. 통합 운운하며 어설프게 미봉(彌縫)한 채로 동거(同居)하지 말고 영원히 갈라서 서로의 비전과 경쟁력을 가지고 경쟁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호남 유권자들도 선거 때 우파를 찍을 수 있는 옵션의 범위로 둘 수 있게 되며 운동권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을 것이다. 그랬으면 무엇보다 우파가 리더십과 대안, 후계자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불임(不姙)의 정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유능한 청년들이 치고 들어와 운신할 공간도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개혁우파, 새로운 보수라는 사람들은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1, 2년도 버틸 용기와 근성이 없었다. 그러니 통합의 깃발 아래 다시 군색하게 돌아온 것인데 그들은 근성과 용기만이 없는 게 아니라 이념과 노선도 없었다.
사실 개혁보수, 새보수란 사람들의 생각과 노선은 다 거기서 거기다. 안보와 외교 빼놓고는 다 좌파들을 따라 하자는 것이다. 좌파들 의제 수용하고 내 것으로 삼으면 중도층이 우리 편이 될 것이고, 그래서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만 한다. 같은 우파 진영의 경쟁자들을 구태(舊態) 어쩌고 하면서 얼마든지 공격하고, 그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면, 내부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게 전부다. 춥고 배고픈 시간을 견딜 인내심과 용기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 확신과 노선도 없다.
기준을 만드는 좌파, 따라가는 우파
87년 체제 성립 이후 우파는 한 번도 자신들이 독자적 어젠다를 가지고 공세적으로 상대를 밀어붙이지 못했다. 기준은 늘 좌파들이 만들었다. 그렇기에 선거 때마다 막말 논란에 시달리고 캔슬 컬처(cancel culture·주로 저명인을 대상으로 과거에 잘못한 행태에 대해 비판이 쇄도함으로써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만드는 소셜미디어상의 현상이나 운동)에 취약한 것이다. 기준은 늘 좌파들이 만들고 우파들은 만들지 못했기에 수세적으로 검증만 당하고 공격당한다.
우파는 늘 그러했다. 구보수와 다른 새보수라면 개혁우파라면 과거의 우파와는 달라야 했다. 새로운 어젠다, 독자적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상대의 기준에 재단(裁斷)만 당하는 게 아니라 기준을 만들 수 있는 역량과 준비가 있어야 했다. ‘새보수’는 이름만 ‘새보수’고 ‘개혁보수’라는 이름만 내걸었지 기준과 어젠다, 비전을 창출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구보수’와 다른 게 없었다.
그냥 억지로 통합하고 봉합해서 눈앞의 선거만 이기자, 안에서 분탕질 가끔 쳐서 인지도나 올리자, 공천만 받아 정치생명 연장하고, 대선만 이겨서 좌파 집권만 막아보자, 심지어는 대선 이기든 말든 정권 되찾든 말든 당권(黨權)만 장악해서 공천권만 휘두르자, 이런 생각만 했던 게 소위 ‘새보수’ 계열 사람들 아니었나?
이러니 우파 정치가 어떻게 살아나고 주류(主流)의 위상을 되찾고 국민들에게 ‘저 사람들 믿고 따라가자’는 신뢰를 줄 수가 있었겠는가? 그저 돈 많은 노인들 사교클럽, 은퇴한 퇴물 판검사들의 인생 이모작, 좌파들 이념 공세와 언어 검증에 그저 겁만 먹고 사과만 하는 것들이란 인식밖에 국민들에게 없는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우파 내부에서 불가역적 분화(分化)가 일어나고 새롭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 국민들 선택을 받겠다는 결기와 각오를 가진 ‘신 우파’들이 등장해야지 않을까. 국민의힘 외에 새로운 우파 정치 세력이 등장해야 한다. 인내심과 이념적 준비도 모두 갖춘 새 우파 세력이 등장해 영남에 중심을 둔 국민의힘과 불가역적으로 갈라선 상태에서 경쟁해 국민들의 선택을 받고 결국 국민의힘을 무너뜨리고 잡아먹을 수 있어야 한다.
트럼프처럼 제도권 정당과 언론이 금기시하는 의제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하는 충격요법을 써야만 우파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좌파 흉내 내기는 안 된다
“오늘 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報復)이다.”
나폴레옹의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허비해온 세월의 복수(復讐)다. 대한민국 우파는 세월을 허비만 해왔다. 87년 체제 이후 독자적 어젠다, 노선을 가지고 밀어붙이고 국민들을 설득해온 적이 없다. 어떤 이념과 언어와 철학의 기반 위에 서야 할지 고민해보지도 않았다. 사람을 키우고 미래를 대비해 사과나무를 심어온 역사가 없다.
그 결과가 탄핵이라는 총체적 파산이었다. 그 이후에도 세월만 허비해온 과거와 단절하지 못했다. 부지런히 사과나무를 심으며 미래에 대비하지 못했고 당장의 국가·사회의 근본적 문제와 싸우려고 애쓰지 못했다.
이재명 집권을 막아내고 들어선 윤석열 정부도 세월을 허비만 해온 기존의 우파와 다를 게 없었다. 우파는 앞으로도 얼마나 시간과 세월을 허비할까? 얼마나 더 허비해온 세월의 복수의 매질에 당해야 할까.
대한민국은 현재 저출산과 시스템의 중심부와 일선을 지키는 이들의 이탈로 국민국가의 틀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 상황이다. 신생아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소 키우는 사람들 또한 죄다 도망가고 있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 좌파들 어젠다의 맹목적 수용, 좌파들 흉내 내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눈앞의 선거만 바라봐서도 안 된다.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담아낸 독자적 어젠다를 가지고 공세적으로 나서야 한다. 87년 체제 이후의 체제, ‘제7공화국’ 헌법의 기본틀을 만들어내야 한다. 새로운 국가 비전으로 국민들을 설득하고 이끌자며 깃발을 드는 우파 정치와 리더십이 등장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늘 그러했듯 앞으로도 시간만 허비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 무모함이 참 대단하다. 늙은 건물주와 퇴물 판검사들은 국가가 무너져도 자신과 자기 가족의 삶이 그저 평안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허비해온 세월의 복수가 배의 맨 위층이라고 못 본 척하고 지나갈까?
배라 가라앉으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허비한 세월의 복수만큼 잔인한 것이 없다는 것을…. 다음 선거 때까지 놀다가 선거 임박해서 또 국민들과 우파 시민들 상대로 인질극이나 벌이면서 협박질이나 할 것인가?⊙
●25년 시민운동가가 본 좌우파 시민운동
우파, 장기적 헌신 없이 ‘반짝 운동’으로 공천·공직 얻으려 해
⊙ 우파 정권, 시민단체를 ‘대통령실 외곽 경비대’로 여겨
⊙ 그람시 영향받은 좌파, 지방자치단체장·공직을 좌파 진영 지원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
⊙ 재계, 자유시민운동에 눈과 귀와 주머니 닫아
도희윤
1967년생.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리베르타스 대표, 행복한통일로 대표, 한국자유회의 사무총장, 뉴라이트전국연합 북한인권특별위원장,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역임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운동은 우파가 시민운동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사진=조선DB
4·10 총선은 집권여당, 보수정치 세력의 참패로 끝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여러 가지 진단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파가 특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시민사회운동이다.
좌우(左右) 세력은 타고난 토양이 다르고 이로 인한 인식 또한 크게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면 좌파는 시민운동 자체가 그들의 목표이자 수단이며 삶의 방식이다. 신앙생활에 비유하면 ‘매일 기도’인 셈이다.
반면에 우파가 겨우 시민사회운동에 눈을 뜬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태극기 부대’의 활동에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우파 시민운동의 역사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를 계기로 일부 전문 시민운동가의 영역이었던 공간이 일반 우파 시민들에까지 확장되었다는 의미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스팔트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많은 분은 과거 산업화·근대화에 매진하느라 시민사회와 거리를 두었던 분이다. 하지만 그런 분들 덕분에 저변의 우파 시민들이 어렵사리 시민운동이라는 영역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좌우의 ‘지방자치단체 사용법’
시민사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좌파의 활동이 활발한 영역이 지방자치와 관련된 부분이다. 1961년 5·16 이후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도는 1991년 3월 시·군·자치구의회(기초의회) 의원 선거가, 1995년 6월 광역 기초단체장 선거와 광역 기초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면서 부활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지방자치제 부활을 강력히 요구했었다. 이렇게 시작된 지방자치제도는 우파와 좌파 중 어느 쪽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을까.
오늘날 ○○시나 ○○군, ○○구라는 곳들을 살펴보자. 좌파에게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자신들의 장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마당이다. 좌파는 이 기회를 백분 활용하고 있다. 좌파는 시·군·구의 시장, 군수, 구청장 등이 되면 주변 세력과 함께 입성한다. 초기부터 좌파의 영역을 넓히겠다는 전략하에 행정과 예산이 운용된다. 우파는 비서 한 명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고작이다. 주민들의 혈세(血稅)를 함부로 쓸 수 없다며 돈 한 푼 쓰는 것도 어렵게 생각한다.
주민들은 어느 쪽을 선호할까? 결국 주민들은 눈앞에 푸짐한 먹거리를 펼쳐놓는 쪽을 택한다. 포퓰리즘이라 말하는 정책들이 하나하나 주민들 사이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이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고 만다. 우파 지방자치단체장이 들어서도 이런 흐름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종교계도 좌파 세력 강해
다시 시민사회 얘기로 돌아가보자. 필자는 젊은 시절 흥사단(興士團)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그 유명한 ‘낙천·낙선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필자는 수많은 군소(群小)단체들로 구성되었지만 역사가 오래된 ‘공명선거실천시민단체협의회(공선협)’라는 조직의 실무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시민사회가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박원순의 참여연대를 필두로 하는 ‘총선시민연대’와 흥사단, YMCA가 주도했던 ‘공선협’으로 대결 아닌 대결 국면이 펼쳐진 것이다. 갓 태어난 총선시민연대는 버스를 동원하여 전국을 휘젓고 다녔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름뿐인 ‘공선협’은 ‘공명선거’ 구호 하나로 고군분투했다.
총선시민연대는 출범하면서 ‘낙천·낙선운동’을 천명하는 광고를 일간신문들에 냈다. 며칠도 안 되어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의 후원금이 답지했다. 서울시청 바로 앞의 영국성공회 주교좌교회에는 ‘100인 선정위원회’가 자리 잡고 총선 국면 내내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일들이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들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정권의 뒷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을 품고 있다. 당시 일본 시민단체가 찾아와서 “한국의 시민사회는 이런 동력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영국성공회 한국교회는 그때부터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그람시류의 시민사회 세력들에게 성지가 되었다. 탁현민 등으로 대변되는 문화기획의 달인 중 상당수가 성공회대 출신이라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한국 종교 내부의 좌우 세력 추이는 어떨까? 개신교의 특정 대형 교회를 제외하면 아예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좌파 세력이 강하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弱者) 편에 서야 하고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좌파는 자기들이 국가권력을 쥐었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시절 때도 여전히 자신들은 기득권이 아니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파동이 몰아쳤을 때의 일이다. 필자는 KBS 주최 생중계 토론에 뉴라이트 대표로 나간 적이 있다. 참여연대를 대표해서 나온 이는 이번 총선 과정에서도 이름을 떨친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이었다. 어느 정도 토론이 열기를 더해갈 무렵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당신네들이 기득권 아니냐? 김대중을 이은 노무현 권력의 힘은 참여연대에서 나온다. 대다수 각료나 주요 자리에 참여연대 멤버들이 얼마나 많았냐.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기득권이라고 본다.”
난리가 났다. 저쪽에서는 필자가 그 말을 취소하지 않으면 방송을 못 하겠다고 주장했다. 생방송 중이었는데 10여 분간 방송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람시와 그 후예들

▲안토니오 그람시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언론·종교 등등의 영역에서 좌파 카르텔이 강고하게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영향이 크다. 이제는 제법 많이 알려져 있지만, 현대사회, 특히 한국의 시민운동 역사에서 그람시는 결코 ‘작은 거인’이 아니다. 그람시가 없었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일컬어지던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은 벌써 막을 내렸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람시의 진지전(陣地戰) 및 문화헤게모니론은 시민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경제 제도에 중점을 둔 반면, 그람시는 문화와 사상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바로 ‘헤게모니’와 ‘시민사회’다.
그람시에 의하면, 헤게모니는 지배 계급이 단순히 물리적인 강제력이나 경제적 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상과 문화·언론 등을 통해 사회적 동의(同意)를 얻어내는 과정이다. 즉 지배 계급은 자신들이 보유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전 사회의 보편적인 것처럼 제시함으로써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한다고 했다.
그람시는 또한 시민사회를 국가와 경제 구조 사이의 중간 영역으로 보았다. 이 영역에는 가족·학교·언론·종교단체 등이 포함되며, 이들은 문화와 사상을 형성하고 전파(傳播)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람시는 시민사회를 지배 계급에 저항하는 주요한 ‘대항(對抗) 헤게모니’로 보았고, 대중문화·교육·언론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회의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람시는 피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사상과 문화를 시민사회에 퍼뜨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전 세계 누구보다도 충실한 그람시의 한국인 후예들은 김대중 정권 이후 27년의 세월 동안 정계·법조·언론·시민사회는 물론 심지어 금융계·재계·스타트업 등에도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들은 좌파 정치의 인적(人的) 예비군을 넘어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하는 후견인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진출’인가
하지만 우파에게는 그람시 같은 문화사상적 메시아가 없었다. 그 결과 우파 시민운동은 좀처럼 발전하지 못하고 실패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재계(財界) 등은 당장 기업의 손익에 결부된 환경, 인권(인사, 채용, 복지) 등에 대해 좌불안석이지만, 정작 기업의 가치와 자유시장경제를 수호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핵심 기제인 자유시민운동(북한인권 포함)에는 눈과 귀와 주머니를 닫고 있다.
정치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좌파 정권 시절에는 조금 관심을 보이다가도 정권만 잡으면 “이제 너희의 역할은 끝났으니 의병은 해산하고 집에 가라”는 식이다. 공직이나 공천에는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던 이력서 잘난 사람들만 등용되다시피 한다. 그러다가 또다시 정권이 위기에 처하면 우파 시민단체를 ‘대통령실 외곽 경비대’처럼 동원하려 든다.
우파 정권하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실을 보면, 우파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출세주의자들이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껏 시민운동을 좀 해봤다는 정도로는 좌우의 ‘정치사상문화전쟁’에서 이를 주도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일부 우파운동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가 지방자치, 국회 등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시민운동가들이 정계로 진출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이를 장기적인 시각으로 넓고 길게 보면서 헌신하기보다는 운동을 자기 출세의 도구로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대선이나 총선을 앞두고 눈에 띄는 반짝 운동으로 발탁되면, 조직을 팽개치고 바로 공천받아 출마하거나 공직으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달려가는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국회나 공직으로 진출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위한 ‘진출’이냐를 따지는 것이다.
가톨릭 사제 중에 이런저런 공직이나 민간단체의 임원직을 많이 맡는 이들이 있다. ‘성직자가 세속의 일에 무슨 관심이 저리도 많을까’ 하고 비판을 받지만,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적(公的) 기회를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료들(예를 들면 수녀들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이나 자기 진영을 지원하고 연대(連帶)하면서 조직화하는 기회로 활용한다.
우파들은 그들을 ‘악(惡)의 세력’이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각종 공직 등에 발을 담고 있으면서도 현장에서 뛰고 있는 우파 활동가들, 특히 청년들과 연대해서 공동의 가치들을 실현해보려는 우파가 과연 얼마나 될까?
부패를 부패로 생각하지 않는 좌파들
제22대 총선은 일단 좌파의 승리로 끝났다. 국민들이 어떻게 온갖 범죄로 점철된 세력에게 표를 몰아주었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나 많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는 제자들과의 공부 모임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부정부패? 대장동? 조국 입시 비리? 김남국 코인? 여러분 한 가지 알아야 합니다. 한국의 좌파들은 이런 것들을 부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혁명을 하는데 그런 게 무슨 대수냐고 인식합니다. MBC를 보세요. 자신들이 투쟁할 때는 언론의 자유를 말하지만 자신들이 권력을 가졌을 때는 그 구성원들에게 전체주의(全體主義)를 맛보게 했다고 내부 고발자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좌파 세력은 그런 존재들입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한참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국가권력이 그나마 균형추 역할을 했는데 김대중 정부의 출범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이것이 무너졌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천신만고 끝에 국가권력을 가져왔지만 뒤집어진 운동장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전략이 없었다. 그 결과 사기 탄핵으로 박근혜 정권이 무너졌고, 국회 권력이 계속해서 좌파에게 넘어갔다.
이제 대한민국은 좌파와의 싸움에서 기로(岐路)에 서 있다. 굴복할 것인가? 맞서 싸워 이길 것인가? 역사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는 패배한 적이 없다. 잠시 사람이 잘못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적은 있지만, 결국 그걸 바로잡고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또한 사람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우파는 사람에게, 시민단체에게 투자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