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午後餘談(문화일보) 2024-05/ 05-01(수) DJ도 못한 ‘야당 지존’ - 05-31(금) 돌아온 ‘문고리’

상림은내고향 2024. 5. 19. 12:17

午後餘談(문화일보) 2024-05/

05-01(수) DJ도 못한 ‘야당 지존’

 

오승훈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난 29일 회담 여파가 대치 정국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오는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재명 대표 연임론에도 증폭 효과를 내는 듯하다. ‘찐명’ 몇몇이 분위기를 띄우는 수준이었으나 대세론으로 굳어지고 있다. 원래 친문인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30일 “운명론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차기 대선의 유력 후보로 지지율 1위이고, 이번 총선에서 압도적 의석수를 받았으니 “그 책임감은 대통령 못지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상왕’으로 불리는 방송인 김어준 씨가 창립한 ‘여론조사 꽃’이 29일 발표한 정례여론조사에서 이 대표가 당 대표를 연임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51.7%, ‘공감한다’는 44.5%로 조사됐다. 하지만 민주당(76.2%), 조국혁신당(67.0%), 진보당(61.2%) 지지층에선 ‘공감한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어대명’(어차피 당 대표는 이재명)이다.

그뿐이 아니다. 원내대표에는 찐명 박찬대 의원이 최고위원직을 내려놓고 단독 입후보했다. 후보로 거론된 10여 명 인사가 줄줄이 사퇴했다. 5월 3일 당선자 총회에서 등극만 남겨놓고 있다. 거기에 원내 제1당이 차지하는 국회의장 자리를 놓고서도 ‘명심’(이재명 마음) 경쟁이다. 선수나 나이를 고려하는 관례는 안중에 없다. 당내 신(新)주류로 부상한 강경파 ‘더민주전국혁신회의’의 29일 간담회에 국회의장 후보들이 참석해 지지를 호소했는데, 혁신회의가 추구하는 국회의장 기준을 발표한단다. 그들 마음에 들어야 된다는 뜻이다.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회법에 ‘무소속’을 규정한 취지도 묻히고 있다. 국회 17개 상임위의 민주당 독식론까지 나왔다.

‘제왕적 대통령’은 물론 ‘제왕적 총재’ 시절에도 없던 일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최재성 전 의원은 “김대중 총재도 못 했던 일이 지금 이 대표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고 했다. 민주당은 당연하고 국회도 ‘이재명 당’, 사당의 직할 체제가 될 수 있다면 이 대표의 대권 가도에는 장애물이 없을 것이란 판단인 듯하다. 이 대표를 두고 ‘여의도 지존’ ‘일극 체제’라는 말이 무시로 나온다. 그게 약이 될까, 독이 될까.

 
 

05-02 국회의장과 중립

 

이현종 논설위원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5년 3월. 당시 집권 여당 민자당이 기초자치단체 선거의 정당공천 배제를 추진하자 야당이 이를 막으려 서울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을 점거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경호권을 발동해 법안을 처리하라 요구했지만, 황낙주 의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7일 동안 야당 의원들이 공관을 점거하는 바람에 외부적으로는 심각한 상황으로 알려졌으나 공관 내부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24부작 ‘모래시계’ 드라마의 비디오테이프를 누군가 가져왔는데 공관 접견실에서 황 의장과 야당 의원들, 기자들이 이를 시청하느라 모두 정신이 팔렸다. 황 의장이 야당 의원들에게 감금당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지만, 사실 황 의장과 야당 의원들은 ‘모래시계’를 같이 시청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7일 만에 경찰에 의해 끌려 나오기는 했으나 당시 여야 관계는 그나마 낭만과 여유가 있었다.

지난 2002년 3월 이만섭 국회의장 주도로 국회법이 개정돼 의장이 당적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자동으로 당적이 상실되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탈당계를 제출하도록 했고, 이런 관행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정계 은퇴로 연결된다. 그만큼 중립성과 독립성을 중요시한 것이다. 그런데 제22대 국회에서는 다수당인 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들이 앞다퉈 중립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회 선진화법 이후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이 ‘천재지변·국가 비상사태·여야의 합의’ 등으로만 한정돼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국가 의전서열 2위의 위상은 갖고 있다. 제21대 전반기 박병석 의장과 후반기 김진표 의장은 민주당 출신이긴 하지만, 국회 본회의나 중요 법안은 여야가 합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야당의 유력한 차기 의장 후보인 추미애 당선자는 이런 의장들을 비판하면서 “중립은 없다”고 선언했다. 정성호·조정식 후보도 마찬가지다. 극렬 지지층인 ‘개딸’의 위력을 체감한 만큼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진표 의장이 여야가 합의하지 않은 채상병특검법을 상정할 수 없다고 하자 이젠 박지원 당선자가 ‘개××’라고 욕했다. 국회가 ‘개○’이 돼 버렸다.

 
 

05-03(금) 이창용의 金사과 고언

이철호 논설고문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요즘 농민들의 공적 1호다. 지난달 12일 ‘금(金)사과’의 불편한 진실을 입에 올렸기 때문이다.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해(납품 단가 지원금 등 보조금을 주는) 지금과 같은 정책을 계속할지, 아니면 수입을 통해 근본적으로 해결할지 고민해야 한다.” 전국농민총연맹은 “수입에 의존하면 국내 생산기반이 부실해지고 결국 소비자 가격만 다시 오른다”며 반발했다. “식량 안보”만 외치는 ‘그냥 이대로…’의 보호론이다.

수입 금지된 사과·배·감귤 값이 폭등한 반면 수입 자유화된 포도만 안정적 가격을 유지한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정부가 지난 1월 사과·배 대체재로 수입 과일에 긴급 할당 관세 0%를 적용하자 대형마트의 망고값은 최대 56.6%, 오렌지는 44.7% 떨어졌다. 지난달 폭등한 양배추·당근도 마찬가지다. 1일부터 할당관세로 수입 물량이 풀리자 중간도매상의 매점 물량이 쏟아지면서 도매가격이 꺾였다.

작황 부진으로 공급이 줄었는데 수입마저 금지해놓고 물가를 잡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논리다. 선진국들은 가격 안정을 위해 탄력적인 수입량 조절을 지렛대로 삼은 지 오래다. 농산물 수출 대국인 미국은 지난해 수출(1787억 달러)보다 수입(1953억 달러)이 더 많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밀·옥수수 가격이 치솟자 수입을 확 늘린 것이다. 농민 이익만큼 소비자 후생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당연히 해야할 말을 했다. 한국은행법 1조1항에 “물가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못 박혀 있는 만큼 한은 총재가 이런 쓴소리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직무 유기다.

“과거엔 정부가 산업정책을 짜고 모두 밤새워 일했다. 이제 민간 주도의 창의적이고 질적인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2022년 4월 그의 취임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지난 2년간 그가 던진 고언들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넘길 게 없다. “재정·통화정책은 단기 대책일 뿐, 돈을 풀어 해결하는 것은 나라 망가지는 지름길이다.” “구조 개혁을 하면 성장률이 2%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선택은 정치에 달려 있다.” 진영 싸움이 거칠어지면서 어느새 제 목소리를 내는 전문가들이 멸종 희귀종이 됐다. 인신공격과 인격 살인이 다반사다. 그래서 이 총재의 바른 소리가 더 소중하고, 반갑다.

 
 

05-07 월왕 구천의 인구 증가책

 

김세동 논설위원


‘오월동주(吳越同舟·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를 타다)’ ‘와신상담(臥薪嘗膽·장작 위에서 자고 쓸개를 핥다)’의 사자성어를 남길 정도로 중국 춘추시대 말기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수지간이었다. 월나라 구천에게 부왕(합려)을 잃은 오나라 부차는 ‘와신’하며 절치부심한 끝에 구천을 패배시키고 노예로 삼는 등 치욕을 안겼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난 구천은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17년간 ‘상담’하며 나라를 일으켜 기원전 473년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2500년이나 지난 중국 얘기를 꺼낸 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맞아 구천이 나라를 부강케 하려고 사용한 인구 증가책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었으니 필사적으로 인구를 늘리려던 구천은 2024년 한국에도 시사점을 주는 혁신적인 정책을 폈다. 임신을 관가에 알리면 즉시 의원을 보내 해산을 돌봤다. 출산하면 술과 고기를 보내 치하했다. 아들 셋을 낳으면 관에서 보모를 붙여줬고, 둘을 낳으면 양식을 대줬다. 자녀를 많이 낳으면 세금도 면제하거나 줄여줬다. 당근만 준 게 아니다.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는 결혼은 못 하게 하고 젊은 남녀의 결혼을 권장했다. 여자는 17세, 남자는 20세가 지나도 혼인하지 않으면 부모를 처벌했다.

한국이 저출생으로 망할 것이란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지난해 0.72명으로 충격을 준 합계출산율은 올해는 0.68명으로 더 떨어진다. 지난해 신생아는 23만 명으로 8년 새 반 토막 났다. 유치원은 물론 초·중·고교 폐교가 빨라지고 있다. 2022년 5002만 명이던 인구가 20년 후엔 4677만 명으로 준다. 경제활동 인구는 급감하는데 부양해야 할 노인은 급증해 국민연금 파탄은 예정돼 있다.

이런데도 정부와 여야는 별다른 긴박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이재명 대표의 더불어민주당은 조금 더 내고 매우 많이 받는 ‘연금 개악안’의 이번 21대 국회 처리를 요구할 정도로 무신경하다. 현행 9%인 보험료율을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0%에서 50%로 올리는 안인데, 2061년에 기금이 고갈되고 2093년 누적적자가 702조 원으로 늘어난다. 후세대는 죽든 말든 오늘만 살자는 안을 국회 제1당 대표가 태연스레 주장한다. 뭘 잘 모르는 걸까, 알면서도 그러는 걸까.

 
 

05-08 슈퍼 엔저 속 일본 관광세

 

문희수 논설위원


일본 엔화의 가치가 급락하는 추세다. 1달러당 환율이 최근 160엔까지 급등해 엔화 값이 1990년 4월 이후 34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른바 ‘슈퍼(super) 엔저’다. 미국의 금리 인하가 지연되는 가운데, 일본 중앙은행이 당분간 통화 완화 정책을 유지해 금리를 올리지 않을 뜻을 밝힌 것이 결정적이다. 여기에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 1일 또, 금리를 동결했다. 현재 연 0∼0.1%인 일본 기준금리와 연 5.25∼5.5%인 미국 기준금리 간 격차가 줄어들지 않는 한, 강(强)달러 속 엔화의 초약세가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물론 일본을 찾는 관광객에겐 슈퍼 엔저가 반갑다. 당장 여행 경비를 절감할 수 있어서다. 그렇지만 우호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값싼 일본에 해외 관광객들이 몰리며 오버투어리즘(관광 공해) 문제가 생기면서,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이탈리아·뉴질랜드 등처럼 관광세 부과를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사카의 경우 현행 숙박세 외에 내년 4월 개최될 간사이 엑스포에 맞춰 관광세를 부과할 예정이라고 한다. 심지어 도쿄·교토 같은 유명 관광지에선 일부 식당들이 자체적으로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일본 내국인보다 비싼 가격을 받는 이중가격제를 시행하는 정도다. 엔화 약세가 지나쳐 “일본이 싸구려가 돼 간다”는 현지 여론의 불만이 그 배경이다. 최근 현지 언론에 따르면 대표적인 서민 음식인 라면 가격이 일본은 880엔인 데 비해 미국 뉴욕에선 4배 가까운 3100엔(21.5달러 기준)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인도에서조차 두 배를 넘는 1800엔에 팔리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런 일본의 분위기는 특히, 한국에 부담이다. 탈(脫)중국과 중국의 반(反)간첩법 여파로 중국 관광이 급감한 대신, 일본 여행 수요는 갈수록 늘고 있어서다. 관광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교토에서 외국인에 대해 게이샤 거리로 유명한 기온 지구의 골목길 출입을 금지했다고 한다. 촬영 금지에도 굳이 사진을 찍으려고 좁은 길을 막는 등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탓이다. 무엇보다 현지 규칙과 관광 매너 준수는 필수다. 일본 여행까지 엔저의 역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게 한일 모두에 좋다.

 
 

05-09 美 대선 ‘케네디 주니어’ 변수

 

이미숙 논설위원


로버트 F 케네디(1925∼1968)는 미국 및 세계 자유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형 존 F 케네디(1917∼1963)처럼 암살된 데다가 미국의 꿈과 이상을 설파한 점에서 닮은꼴이다. RFK는 1968년 “우리에겐 온 세계의 도덕적 리더십을 가질 권리가 있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공동의 선에 입각한 정치를 설파한 RFK는 나의 우상”이라고 한 바 있다. RFK가 대통령이 됐다면, 리처드 닉슨의 시대는 없었을 것이고, 미국은 베트남전으로 실추된 도덕적 리더십을 회복했을 것이란 기대다.

미국의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인사’인 RFK가 탄생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미 대선 국면에 소환됐다. 장남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70)가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면서 미 대선 변수가 되고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도는 최근 들어 팽팽해진 상태다. 그런데 케네디 주니어가 가세하면서 선거 예측이 어려워졌다. 1∼2%포인트 차로 승패가 갈리는 위스콘신과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등 7대 경합주에서는 케네디 주니어 지지도가 10% 안팎을 기록해 민주·공화 양당에 비상이 걸렸다. 그는 구글 공동창립자 세르게이 브린의 전 부인 니콜 섀너핸을 러닝메이트로 지명, 완주 의지를 보이고 있다.

케네디 주니어는 수많은 논란을 몰고 다닌 인물이다. 헤로인 중독에서 벗어난 후 환경변호사로 활동했고 코로나 팬데믹 때엔 거대 제약사를 비판하며 반(反)백신 캠페인을 벌였다. 10년 전 뉴욕포스트는 “2001년 37명의 여성과 밀애를 즐겼다”는 그의 일기장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RFK 자녀들은 최근 “바이든은 우리 아버지와 삼촌이 옹호했던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라면서 지지 선언을 했다. 바이든이 미완으로 남겨진 RFK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케네디 주니어가 경선을 접어야 한다는 압박이다. 제3 후보는 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992년 대선 때 로스 페로는 민주당의 빌 클린턴, 2000년 대선 때 랠프 네이더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의 당선을 도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케네디 주니어의 마이 웨이가 가족의 우려를 넘어 선친 RFK의 꿈을 이루는데 기여할 수 있을까.

 
 

05-10(금) 당·대권 분리 22년史

 

오승훈 논설위원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대선 이후 대통령직과 총재직을 분리하겠다.” 지난 2002년 1월, 연말 제16대 대선을 겨누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대선 후 당권·대권 분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1인 지배정당 체제 종식”을 요구하던 박근혜 부총재는 미진하다며 탈당했다. 한나라당은 그해 3월 대선 후보의 당 대표 겸직을 금지하고, 최고위원회의가 정점인 집단지도체제를 결정했다. 당시 여당에 이어 보수 정당사에서 ‘총재’라는 명칭이 사라졌다. 분권이 화두였던 시절이다. 대선 진영은 새천년민주당 후보 노무현-당 대표 한화갑,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당 대표 서청원 구도가 됐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복당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2005년 홍준표 의원에게 혁신위원장을 맡겼다. 홍준표 혁신안은 대선 1년 6개월 전 당권·대권 분리, 후보 선출 시 여론조사 50% 반영이 핵심이었다. 당권·대권의 대선 전 조기 분리가 이뤄진 것이다. 현재 국민의힘 당헌에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 시 ‘선출직 당직에서 선거일 1년 6개월 전 사퇴’ 규정이 들어가게 된 계기였다. 더불어민주당은 ‘선거일 1년 전 사퇴’를 해야 한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불공정을 없애자는 취지다. 그러나 당 대표가 갖는 위상과 이슈 주도력, 공천·당직 인사 등 당 장악력을 키울 수 있는 권한이 많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전당대회 때마다 당권·대권 분리 규정은 갈등의 제1 요인이 됐다.

그 논쟁이 벌어진 지 22년이 지났는데, 최근 국민의힘에서 또 시작됐다. 전당대회 시기를 두고 옥신각신 와중에 일부 잠룡들이 당권·대권 분리 규정을 손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행 규정대로 하면 7∼8월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대표는 차기 대선(2027년 3월 3일) 1년 6개월 전인 2025년 9월 이전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1년여짜리 대표다. 2026년 6월 지방선거를 치르지도 못한다. 김태호 의원은 “대표직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대권에도 도전할 수 없는데 제한해야 하느냐”고 했다. 정치적 숙제는 쌓여 있고 매력은 없는 자리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오는 8월 전당대회에서 연임될 경우 대선 1년 전인 2026년 3월까지 대표직을 유지, 지방선거 공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선은 3년이나 남았지만, 잠룡들의 득실 계산과 정중동은 시작됐다.

 
 

05-13(월) 파란만장 추미애

 

이현종 논설위원


추미애 당선인의 정치인 기질을 일찍이 알아본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DJ가 야당 총재 시절 추 당선인의 남편인 전북 정읍 출신의 서성환 변호사가 부인과 함께 찾아와 정치 입문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 출신에 판사였던 추 당선인을 본 DJ는 서 변호사가 아닌 추 당선인에게 정계 입문을 제안했고,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을에 공천해 당선시켰다.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서울지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됐다.

대구에서 태어난 추 당선인은 반골 기질이 타고난 모양이다. 한양대 법대 재학시절 고교 때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남편과 연애를 했는데, 집안에서 크게 반대했다. 격분한 부친에게 심하게 질책당했다. 부친은, 쌍용그룹 설립자로서 자유당·공화당 의원을 지낸 성곡 김성곤의 비서 출신이다. 당시 추 당선인이 태어났으며, 부친은 5·16 뒤 세탁소를 차렸다. 대학 동기인 남편은 자신보다 3년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그해 결혼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춘천지법에서 초임 판사를 할 때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100권이 넘는 책이 불온 서적으로 지정돼 전국 출판사·서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됐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추 판사만 영장을 기각해 파문이 컸다.

정치 입문 뒤에는 2009년 야당 출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인데도 노조법 개정과 관련, 야당 의원들이 반대하자 여당 의원들만으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찬성한 것이 ‘원죄’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 때 당 대표를 하면서 인터넷 댓글 수사를 요청했는데, 공교롭게 당시 문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지사가 연루된 ‘드루킹 특검’을 잉태시키면서 유력한 대선 후보 한 명을 잃어버렸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추 당선인을 법무 장관에 임명했고, 추 장관은 윤석열 대통령을 부각시키는 바람에 ‘보수의 어머니’ ‘추나땡’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이재명 대표는 차기 국회의장으로 추 당선인을 반신반의해 초기엔 오랜 측근인 정성호 의원에게 무게를 실었다. 그러나 박찬대 원내대표만으론 돌파력이 부족하다고 판단, 추 당선인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한다. ‘신의 한 수’가 될지 ‘신의 악수(惡手)’가 될지 궁금하다.

 
 

05-14(화) 日 라인 사태의 이면

 

이철호 논설고문


‘라인 사태’가 한·일 대항전으로 번졌지만, 정보기술(IT) 업계가 보는 시각은 좀 다르다. 네이버는 지분을 비싼 값에 넘기고, 그 자금으로 인공지능(AI)에 투자하겠다는 계산이다. 이미 이사회가 일본에 넘어간 상황에서 지분만 들고 있는 건 의미가 없다. 지난 10일 “지분 매각을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협의 중”이라는 신중한 입장을 밝힌 배경이다.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10조 엔(약 88조 원)을 쏟아부어 자신이 장악한 Arm을 통해 AI 반도체에 승부를 걸겠다는 게 큰 그림이다. 네이버의 지분 가치는 약 1조 엔. 라인야후 지주사 A홀딩스의 지분 1주만 추가 매입해도 경영권을 장악하는 만큼 굳이 네이버 지분을 많이 사들일 이유가 없다. 손 회장 입장에선 AI 투자용 종잣돈 확보가 훨씬 다급하다.

이미 거대 범용 AI는 ‘오픈AI-마이크로소프트(MS) 연합’의 독주 체제다. 유대계 자본과 네트워크가 장악하는 모양새다. 구글과 아마존의 AI는 각각 검색과 클라우딩·물류에 특화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여기에 AI용 반도체를 공급하는 게 TSMC·엔비디아·AMD의 CEO인 대만계 모리스 창·젠슨 황·리사 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대만 동맹에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만들어 공급하는 구도다. 네이버와 소프트뱅크가 이런 AI 동맹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다. 투자 재원 확보부터 어려운 숙제다. 이런 판에 네이버는 올 들어 중국 알·테·쉬의 공습으로 시가총액이 6조5000억 원 넘게 날아갔다.

AI의 학습과 추론에 들어가는 비용도 천문학적이다. 이미 MS·구글·아마존 등은 100조 원 이상 투자를 공언했다. 보름 전 메타가 과감한 AI 진출을 선언하자 주가가 11% 폭락했다. 이제 빅테크조차 신주 발행이나 유상 증자로 AI 투자 재원을 조달하기 쉽지 않다.

야당은 ‘이토 히로부미’를 입에 올리고 ‘독도 방문’까지 강행하고 있다. 네이버 노조도 라인 매각 반대에 나섰다. 대일 협상력이 올라가 공동 경영이 유지되거나 가격을 올려 받으면 다행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지분 매각도 못 한 채 분쟁이 장기화하는 것이다. 라인의 시장 가치가 훼손되고 네이버는 앉아서 손해 보게 된다. 라인 사태가 반일 프레임에 갇히자 네이버가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05-16(목) ‘국회의장’의 추락

 

김세동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에 더불어도, 민주도 없다는 말이 어제오늘 나온 게 아니지만, 최근에 그 정도가 더욱 심해 거의 전체주의 정당화하는 것 같다. 민주당은 16일 당선인총회를 열고 제22대 국회의장 후보로 5선의 우원식 의원을 선출했다. 민주당 의석이 압도적인 국회 과반인 171석이라 국회의장에 선출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좌충우돌에 싸움닭 이미지가 강한 추미애 당선인이 국회의장 되는 일은 피했지만, 더 큰 문제는 의장을 뽑는 과정에서 드러난 비민주성의 극치다.

 국회의장은 입법부의 수장으로 국가 의전서열 2위다. 기존의 국회의원 보좌진 외에 차관급 비서실장, 1급 수석비서관 3명, 2급 비서관 4명, 3급 비서관 2명, 4급 비서관 2명 등 총 23명의 별도의 보좌인력을 둘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입헌민주주의이자 의회민주주의로, 국회가 행정부나 사법부보다 근본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국회의 대표이자 얼굴인 국회의장을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낙점했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기 몇 달 전인 2008년 7월 말에 워싱턴의 한 대학으로 연수를 갔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흑인 대통령에 대한 테러를 공공연히 겁박하던 때라서 뉴욕이 고향인 유대계 미국인 조교에게 “대통령에 이어 부통령마저 유고 되면 누가 승계하냐”고 다소 불순한 질문을 했는데, 하원의장이란 답을 들었다. 상원의장은 부통령이 겸직한다. 한국은 대통령 유고 시 국무총리, 기획재정부 장관, 교육부 장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순으로 승계된다. 선출되지도 않은,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 대통령을 승계한다는 게 정당성에 문제가 있어 ‘국회의장 승계’가 더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야당 대표가 국회의장을 사실상 정리하는 걸 보면서 그 생각이 싹 바뀌었다. 한때 추 당선인과 국회의장을 놓고 경쟁하던 6선 조정식, 5선 정성호 의원이 스스로 접은 배경엔 이 대표 의중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 뜻을 읽은 다른 후보들의 포기로 추대된 박찬대 원내대표가 이 대표를 대리해 친명 의장 후보 조율을 했다는데, 4·10 총선 후 더욱 높아진 이 대표의 당내 권력 위상과 국회의장의 전락을 동시에 보여준다. 민주당 내 권력서열은 이 대표→원내대표→국회의장 순으로 정리된 것 같다. 

 
 

05-17(금) FTA 20년, 더 커진 농축산업

 

문희수 논설위원


한국 농축산업의 경쟁력이 한층 강해졌다. 시장 개방 이후 생산성이 높아지고 수출도 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경쟁력이 가장 취약해, 개방하면 다 무너질 것처럼 여겨졌던 것을 상기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2004년 칠레와 첫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지 올해가 꼭 20년이 되는 시점이기에 더욱 주목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FTA 20년 농식품 교역 변화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농식품 교역액은 지난해까지 20년간 약 세 배 늘었다. 수출 증가율(연평균 6.2%)이 수입 증가율(6.0%)을 앞섰다. FTA로 개방된 포도는 고급화(샤인머스캣) 등으로 생산량 감소에도 소득은 늘었다. 미국산 오렌지에 밀린다던 제주 감귤도 한라봉·천혜향 등 고급품이 나오며 농가 소득을 높였다. 딸기 역시 설향 등 국산 품종 개발로 수출 효자가 됐다. 축산업에선 한우의 도약이 극적이다. 광우병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미국·호주 등 고급 소고기 수입 급증에도 한우는 사육도 늘고 품질은 프리미엄 급으로 격상했다. 지난해 생산량은 한미FTA 발효 전인 2011년의 두 배로 늘었고, 가격도 미국산의 거의 두 배다. 한우를 벤치마킹한 돼지고기와 닭고기도 개방 이후 소비가 늘며 산업이 더 커졌다. 이런 성장은 김밥·라면·김치 등 K-푸드의 세계화에 길을 텄다.

이런 와중에 국회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가 남는 쌀을 의무적으로 추가 매입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농산물 가격 보장을 핵심으로 한 농안법 개정안을 재추진하고 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법안을 다시 강행하려는 것이다. 두 법안이 확정되면 지금도 재정 부담이 큰 쌀 공공 비축·의무매입과 차액지급제 등에 연간 4조 원 이상이 더 들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콩생산자협회·낙농육우협회 등 농민단체들마저 예산 지원이 줄고, 현장 갈등을 부추길 것이라며 반대한다.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2.9%로 내려왔지만, 금사과·금배는 여전하다. 수확량·저장량이 적은데 수입을 금지하니 가격이 좀처럼 안 떨어진다. 사과가 새로 출하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게 통계청의 분석이다. 농산물은 날씨 등에 따라 생산량이 들쭉날쭉하기 마련이다. 개방을 막는 게 성장을 보장하지 않는다. 수입·개방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

 

05-20(월) ‘예언자 마크롱’의 경고

 

이미숙 논설위원


에마뉘엘 마크롱(46) 프랑스 대통령이 최근 들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1886∼1944)의 저작 ‘이상한 패배’를 강조하고 있다. 마크롱은 소르본대에서 가진 연설에서 “유럽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전쟁 확대라는 안보 위기 속에 미국·중국에 비해 산업 및 기술이 뒤떨어지면서 경제 쇠퇴 위기까지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2시간여 이어진 연설에서 유럽 상황을 1940년 독일 함락 전야 프랑스와 비교하기도 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도 “블로크의 책을 읽어야 할 때”라면서 “80여 년 전 프랑스 엘리트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바람에 아돌프 히틀러에게 패했는데 지금 유럽이 그런 꼴”이라고 했다.

독일 나치에 총살당한 블로크의 ‘이상한 패배’는 ‘프랑스판 징비록’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프랑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정파를 초월해 애국심을 회복하도록 만드는 국민적 각성제와 같은 책이기도 하다. 마크롱이 이 책을 유럽인들에게 권한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 3년 차를 맞아 핵전쟁 위협을 공개적으로 얘기하며 전쟁을 확대할 야심을 노골화하는 상황이 제2차 대전기 프랑스와 유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마크롱은 유럽의 치명적 위기 상황 타개를 위해 대미 안보 의존 축소, 유럽연합(EU) 회원국 및 비회원국들이 참여하는 유럽 방위군 창설, 우크라이나 파병론을 제기했다.

유럽이 푸틴의 도발을 패배주의적으로 수용하면 안 된다는 마크롱의 호소에 대해 유럽 각국은 시큰둥한 반응이다. 프랑스와 함께 EU의 양대 지주인 독일도 냉담하다. 대중 수출 의존도가 높은 경제 탓인지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프랑스와 공조보다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더 신경을 쓰는 기류다. 이코노미스트는 “프랑스 카산드라의 경고에 귀를 닫고 있다는 데 유럽의 비극이 있다”고 꼬집었다. 마크롱을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트로이의 여인들’의 예언자 카산드라에 비유한 것이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전쟁 때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가면 화를 당한다고 예언했는데 트로이군이 이를 무시하면서 그리스에 패했다. 2027년 5월 퇴임하는 재선 대통령 마크롱의 유럽 위기 경고가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들어맞을까?

 

05-21 국회의원 선서의 쓸모

 

오승훈 논설위원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제22대 국회의원들이 개원식에서 해야 하는 선서 문구다. 임기는 5월 30일 시작되는데, 의원 선서를 해야 취임 공표가 된다. 국회법(제24조)에 정해진 절차다. ‘총선 후 첫 임시회는 임기 개시 후 7일에 집회’(제5조)라는 규정이 지켜지면, 오는 6월 5일 첫 본회의에서 국회의장·부의장을 뽑고 나서 개원식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의원들은 선서문을 의장의 선창에 따라 읽는다. 다만, 여야 간 원 구성 협상이 지연되면 개원식이 미뤄질 수 있다. 제21대 국회 개원식은 임기 시작 48일 만에 열려 역대 최장 ‘지각’ 기록을 세웠다.

일각에선 “의원 선서가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21대 의원 세 명 중 한 명은 고발·수사·기소·재판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공직자로서 취임 선서가 갖는 의미가 적지 않다. 2003년 재선거에서 당선된 유시민 전 의원은 이른바 ‘빽바지 캐주얼’ 차림으로 등원해 선서를 하려다 야당 의원들이 반발하며 퇴장해버리는 바람에, 다음 날 정장을 입고 다시 선서를 해야 했다. 그는 “다름에 대한 존중과 관용”을 주장했으나, ‘품위 유지 의무’(제25조)를 거스를 순 없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두 번의 임기 동안 각 두 번씩 취임 선서를 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2009년에는 대법원장이 취임 선서 문구를 잘못 읽는 바람에 다음 날 백악관에서 다시 취임 선서를 했다. 법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2013년에는 취임일이 일요일이어서 백악관에서 먼저 선서를 한 뒤, 다음 날 취임식 때 또 선서했다. 법 절차가 그 정도로 중시된다.

국회에서도 의원 선서가 의원 사명과 행동지표를 제시하는 선언적 규정 이상의 의미가 있는 만큼 상징적 절차여도 더 강화하자는 의견이 있다. 박성민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의원 임기 시작 때만 하는 선서를 매 정기·임시 국회 때마다 하자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반복적인 절차를 통해 경각심을 갖게 함으로써 “국회의원 선서의 실효성을 높이자”는 취지다. 범법자와 막말 의원을 줄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22대 국회에서 충분히 재론할 만하다.

 

05-22 오염된 백서

이현종 논설위원

 

백서(白書·white paper)는 원래 영국 정부의 연차경제보고서 표지가 흰색이었던 것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주로 경제 분야 보고서에 많이 쓰인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경제기획원이 간행한 ‘1962 경제백서’가 처음인데 ‘부흥백서’ ‘노동백서’ ‘외채백서’ ‘북한백서’ 등 다양한 보고서에 백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랑스에서는 황서(黃書), 이탈리아에서는 녹서(綠書), 러시아 제국에서는 귤서(橘書·orange book),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소련에서는 적서(赤書), 영국 의회와 일본에서는 청서(靑書)가 있다. 반대로 기밀을 지켜야 하는 문서는 흑서(黑書·black paper)라고 하며, 기밀까지는 아니지만, 비공식적이거나 열람이 어려운 문서는 따로 회색 문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로 경제와 외교 분야에서 발간됐던 백서가 이젠 정치권에서도 일반화됐다. 지방선거·총선·대선이 끝나면 주로 패배한 정당에서 백서를 발간해 패배 원인과 책임 소재를 가려 왔다. 백서에는 당 대표와 대선 주자 등의 잘잘못을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작업이다. 그래서 백서는 아주 극비리에 제작돼 공개되는 것이 상례였다. 지난 2016년 제20대 총선에 패배한 새누리당은 극비리에 백서 발간 작업을 벌여 공개했다. 총선 공약·선거운동 전략·홍보 전략 등 분야별 패배 원인을 분석하고 수도권·부산경남(PK) 지역 주민의 여론조사, 공천 파동을 생생하게 경험·목격했던 경선 탈락자들의 인터뷰 등이 포함됐다.

제21대 총선 패배 이후에도 전문가들이 집필한 백서가 만들어져 중도층 지지 회복 부족 및 외연 확장의 실패, 퇴행적 보수 이미지, 표심 공략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 부재 등을 패배 원인으로 꼽았는데, 이번 선거 패배 원인과 닮았다. 더불어민주당도 지난 대선 패배 이후 백서 발간 작업이 진행됐으나 이재명 대표의 책임 문제 때문에 흐지부지됐다.

그런데 이번 총선 참패 이후 국민의힘이 만드는 백서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위원장을 맡은 조정훈 의원이 당 대표 출마를 시사했다가 비판이 일자 불출마를 선언하고, 내용도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책임을 기정사실화하고 만드는 조짐이다. 정작 제일 중요한 유권자가 왜 여당을 지지하지 않았는지 알아보는 절차는 빠졌다. 이미 오염된 백서는 의미가 없다.

 

05-23 상처 받은 팬덤

최현미 논설위원


2021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는 팬덤을 본격적으로 다뤄 주목받은 작품이다. 주인공 아카리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짐짝 취급받지만,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살아간다. ‘최애’인 아이돌 그룹 ‘마자마좌’의 멤버 우에노 마사키 덕질이다. 아르바이트해서 CD를 사고 콘서트에 가고 팬들과 이야기하는 게 삶이고 행복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에노가 팬을 때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추락이 시작된다. 하지만 아카리는 이 사랑을 접을 수 없다. 실망한 팬들이 내버린 굿즈와 CD를 수십 장씩 사들인다. 콘서트 취소 표를 재구매하는 김호중 팬덤이 겹쳐 떠오른다.

광신자(fanatic)에서 파생한 ‘팬’이라는 단어는 1884년 한 행사 기획자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칭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 찰스 디킨스는 신간을 내면 수천 명이 줄을 서 기다렸을 정도로 대단한 팬덤을 가졌다. 1926년 미국 과학소설(SF)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는 처음으로 팬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팬들의 힘이 커지면서 집단행동도 시작됐다. 1967년 NBC가 스타트렉을 두 시즌 만에 중단하려 하자 팬들은 11만5893통의 편지를 보내 상황을 바꿔놓았다. 영국 왕립협회 연구원 마이클 본드의 책 ‘팬덤의 시대’에 따르면 팬덤은 2000년대 들어 드디어 주류 일상이 되고, 인터넷·SNS로 정치 팬덤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21세기 새로운 부족’인 팬덤은 양날의 칼이다. 기존 관계가 해체되는 이 외로운 시대, 소속감을 주고 삶을 풍부하게 하며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지만, 김호중 방탄 팬덤처럼 나쁜 영향을 낳기도 한다. 광기 어린 팬덤은 맹목적 사랑을 화력 삼아 법과 윤리, 정의와 진실은 물론 인간성까지 훌쩍 뛰어넘는다.

팬덤을 등에 업고 마지막까지 콘서트를 강행하는 현실의 김호중과 달리 소설의 우에노는 결국 은퇴한다. 그리고 최애가 사라진 현실에서 아카리는 남루한 자신을 마주하며 아픈 성장의 걸음을 내디딘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한 번쯤 누군가의 팬이 된다. 팬덤이 맹신과 광신이 되어 나와 상대 그리고 딛고선 땅 전체를 태워 버리지 않기를,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사랑이 되기를. 모든 팬덤의 안녕을 빈다.

 

05-24(금) 마늘 흉작

이철호 논설고문


19세기 쌀이 주식인 아시아에선 각기병으로 수백만 명씩 죽어 나갔다. 영국 식민지였던 스리랑카가 대표적이었다. 쌀을 찧는 편리한 증기 방앗간이 도입되면서 두드러졌다. 그 전에는 도정하지 않은 현미를 먹다가 백미를 먹는 바람에 쌀겨 속의 티아민 섭취가 부족해진 때문이었다. 하지만 100년 넘게 영문을 몰랐다. 20세기 초 네덜란드 군의관이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비밀이 풀렸다. 백미를 먹고 쩔뚝거리던 닭이, 주인이 현미를 주자 멀쩡하게 걸어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자바섬 교도소를 조사한 결과도 놀라웠다. 백미를 먹은 죄수들의 각기병 발병률이 현미를 먹은 쪽보다 300배나 높았다.

1911년 폴란드 화학자인 캐시미어 풍크가 쌀겨에서 티아민을 처음 분리해낸 뒤 비타민이라 명명했다. 생명(vital)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민(amine)이란 뜻이다. 일본도 메이지유신 이후 절반 가까운 군인이 각기병으로 고생했다. 군국주의가 대두하면서 당시로선 귀한 백미를 최우선적으로 공급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도 백미를 먹었지만, 각기병은 드물었다. 그 비밀은 김치에 숨어 있었다. 김치에 들어간 마늘을 통해 부족한 티아민을 보충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피로해소용 ‘마늘 주사’도 마찬가지다. 수액에서 마늘 냄새가 난다는 속설 때문만은 아니다. 마늘에 풍부한 비타민을 푸르설티아민이란 성분으로 보다 활성화시켜, 피로 유발 물질인 젖산이 몸속에 축적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원리다.

‘금(金) 사과’에 이어 마늘 흉작으로 농민과 소비자들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제주도부터 전남까지 ‘벌마늘 사태’가 북상하고 있다. 잦은 비와 일조량 감소로 마늘쪽이 자잘하게 갈라져 제대로 여물지 않는 것이다. 올봄 남녘엔 평년 대비 배 이상인 239.5㎜의 비가 내렸다. 2∼4월 일조량은 평년보다 24% 적은 159시간에 그쳤다.

이런 이상기후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아라비카 커피 최대 산지인 브라질의 이상기후로 국제 원두 가격이 전년 대비 80%나 뛰었다. 국제커피기구(ICO)는 아예 30년 뒤 아라비카 커피 경작지 75%에서 재배가 어려워질 것이라 경고했다. ‘기후 인플레’로 인해 언제 ‘모닝커피’마저 사치스러운 기억이 될지 모른다.

 

05-27(월) 검사 인사권

 

김세동 논설위원


2주 전인 지난 13일 갑자기 단행된 검사장 39명에 대한 인사는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수사 지휘부의 전원 교체와 이원석 검찰총장의 참모인 대검찰청 부장검사 대폭 자르기로 요약돼 검찰 안팎의 큰 반발이 나왔다. 검찰총장 임기 만료를 4개월 앞두고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과 디올백 수수,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수사하는 1·4차장을 포함해 중앙지검의 차장 네 명 전원을 승진시켜 한직으로 보내고 대검 부장 7명 중 6명을 바꿨다. 4년 전 문재인 정부 때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패싱해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조국 일가족 비리 등의 수사를 지휘하던 한동훈 대검 반부패강력부장과 박찬호 공공수사부장을 부산과 제주로 좌천한 수사방해 인사를 빼다 박았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사흘 뒤 출근길에 검찰총장 패싱 비판을 의식한 듯 “총장과는 협의를 다 했다”며 “시기를 언제 해달라는 부분이 있었다면 그 내용을 다 받아들여야만 인사를 할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두어 달 뒤 지명될 후임 검찰총장 후보자와 협의해 검찰 인사를 해 달라는 이 총장의 의견을 무시했다는 걸 시인한 것이다. 전국 검사를 지휘할 후임 총장이 자신이 함께 일할 검찰 간부 인사에 관여해야 한다는 이 총장의 주장이 백번 옳다. 후임 총장이 임명됐는데 검찰 간부 인사가 이미 끝나 있다면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검찰 수사가 법무부 장관과 민정수석의 의도대로 굴러갈 가능성이 크다.

박 장관은 이 총장과 협의를 했다는 입장인데, 상식적으로 이 총장이 이런 인사에 동의했을 것 같지 않다. 총장을 패싱하는 검찰 간부 인사는 자주 논란이 됐는데, 법에 규정된 검사 인사권을 악용한 탓이다.

검찰청법 제34조 제1항은 ‘검사의 임명과 보직은 법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한다. 이 경우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검사의 보직을 제청한다’고 돼 있다. 이 규정은 검찰총장의 뜻을 가급적 인사에 반영하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들은 ‘총장과 인사안을 논의했으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식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정권 때 윤석열 검찰총장은 “인사안을 그냥 보여주는 게 협의가 아니다”라며 추 장관을 비판한 바 있어 더 입맛이 쓰다.

 

05-28 ‘AI 로봇’ 비서 對 킬러

문희수 논설위원


1인 1로봇 시대가 수년 내에 열릴 것이라고 한다.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전으로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가 스마트폰, 자동차처럼 곧 필수품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AI 개인 비서’가 10년 안에는 상용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고정밀 기어·모터·감속기 등 주요 부품 가격이 낮아진 것이 AI 로봇 활성화 요인으로 꼽힌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2035년 휴머노이드 출하량이 140만 대, 세계 시장 규모는 380억 달러(약 52조 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전망보다 각각 4배와 6배가량 커졌다. 휴머노이드 제조 비용이 지난해 5만∼25만 달러에서 올해는 3만∼15만 달러로 낮아진 덕이다. 보급 속도가 빨라지면서 위험 작업·간호·노인 요양 등에서 중심이 될 것이라고 한다. 휴머노이드 상용화는 인간을 능가하는 범용인공지능(AGI)의 탄생을 전제한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2년 이내에 AGI가 나올 것이라고 한다.

AGI 탄생이 축복만은 아니다. 인간을 살상하는 킬러 로봇의 현실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오스트리아 자율무기 콘퍼런스에선 140여 개국 전문가들이 모여 AI 킬러 로봇을 막을 장치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인류가 두 번째 오펜하이머 모멘트를 맞고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킬러 로봇이 핵무기만큼 위험하다는 뜻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엔 이미 킬러 드론이 투입됐다. 최근 미·중이 첫 고위급 접촉을 갖고 AI 무기화는 공멸이라는 공감대를 확인한 것은 의미가 크다.

지난주 서울에서 제2차 AI 정상회의가 열렸다. 런던의 제1차 정상회의 주제인 안전에 포용과 혁신을 추가한 서울선언문, 안전에 대한 국제 협력을 위한 서울의향서를 채택했다. 상충하는 목표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정상들의 고심을 보여준다. AI 시대를 연 오픈AI에선 사업화에 밀려 AI 통제법을 연구하는 안전팀이 전격 해체되기도 했다. 유럽연합이 첫 AI 규제법을 만들어 2026년부터 시행키로 한 것은 AI에 뒤진 보복으로 볼 일이 아니다. AI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라고 하지만, 80억 명이나 되는 인간을 믿는 것으로 끝난다면 불량국가·테러집단 등 사각지대를 못 막는다. AI를 통제할 인류의 집단 이성이 필요하다. 한국으로선 즉각 AI 기본법부터 만들어야 한다.

 
 

05-29 文의 ‘트럼프 노벨상’ 미끼

이미숙 논설위원


문재인 전 대통령이 최근 펴낸 대담 형식의 회고록에는 그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의외로 많이 나온다. 문 전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만큼이나 기자들과의 직접 문답을 꺼렸던 탓에 개별 현안에 대한 그의 솔직한 견해는 알 길이 없었는데 ‘변방에서 중심으로’에는 그의 당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당시 한미관계는 한미연합훈련 중단, 방위비 협상 등으로 갈등이 많았지만, 회고록에서 문 전 대통령은 트럼프에 대해 우호적으로 기술했다.

회고록에는 “트럼프와 단둘이 만날 때 평화적 방식으로 비핵화를 해내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하지 못한 위대한 업적이 될 것”이라고까지 띄우면서 미북정상회담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노벨평화상 욕심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트럼프는 “북한이 충분한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면 김정은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싱가포르와 하노이, 판문점에서 회동이 이뤄졌다.

문제는 이후 문 전 대통령의 행동이다. 트럼프가 싱가포르 회담 후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독단적으로 발표했음에도 문제 삼지 않았다. 또, 정상외교에 나설 때마다 유엔 대북 제재 해제를 촉구했다. 문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미끼로 트럼프를 유혹한 것은 기발하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 사기극 전말이 드러났음에도 “김정은은 비핵화 진심을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고민을 토로했다”고 쓴 것을 보면 대한민국의 안위보다 김정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걱정한 듯하다. ‘북한에 가스라이팅 당했나’는 의구심마저 든다.

트럼프는 문 전 대통령이 운을 뗀 노벨평화상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지 2018년 후보 추천을 해달라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를 압박했다. 이 사실이 공개된 후 일본 국회에서 논란이 되자 아베는 “트럼프가 요청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일본의 국익을 위해 내키지 않는 일을 했다는 뉘앙스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노벨평화상 프로젝트를 다시 가동할까. 김정은이 ‘핵무기는 남한 정복용’이라고 헌법에까지 넣은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한다면 진짜 노벨상감이다.

 

05-30 검사 출신 영국 총리?

오승훈 논설위원


키어 스타머(61) 영국 노동당 대표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보수당의 리시 수낵 총리가 오는 7월 4일 조기 총선으로 승부수를 띄웠지만, 14년 만의 정권 교체 가능성이 큰 것으로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스타머 대표는 “보수당 집권 14년, 이제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 없다”면서 “재건을 시작하자”고 외치고 있다.

의원내각제로, 현재 여론조사로는 노동당이 압도적 1위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각종 여론조사를 종합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노동당 지지율은 45%로, 22%인 보수당의 두 배 수준이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의 역풍과 코로나19 사태가 보수당에 치명타였다. 노동당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제3의 길’을 주창해 659석 중 418석을 휩쓸었던 1997년 총선처럼 이번에도 과반으로 단독정부 구성을 노리고 있다.

스타머 대표는 리즈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인권 변호사를 거쳐 잉글랜드·웨일스를 관할하는 왕립검찰청(CPS) 수장인 검찰국장을 지냈다. 검찰국장은 CPS를 감독하는 검찰총장과 차장에 이어 영국 검찰 조직의 3인자란다. 영국은 검사만 아니라 경찰도 기소권(경죄)을 갖고 있어 검사만 형사소추권을 가진 한국과는 다르지만, 법무부와 검찰청으로 나뉘어 있는 구조는 비슷하다. 중죄 사건은 CPS만 기소할 수 있고, 경찰 재수사도 요청할 수 있다. 스타머 대표는 2015년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2020년 노동당 대표로 선출됐다. 강경 좌파인 전임 제러미 코빈 대표와 달리 중도 노선으로 호감을 얻었다. 경제 안정, 병원 대기시간 단축, 에너지 안보, 신규 교사 6500명 채용 등 실용성 공약이 먹히고 있다.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 대통령과는 구면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영국 국빈방문 중 스타머 대표와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한 적이 있다. 당시 대통령실이 홈페이지에 스타머 대표의 이름 대신 지역구 이름을 잘못 기재했다가 수정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스타머가 이념보다 중도층으로 산토끼 사냥에 나선 실용 노선의 총선 전략을 펴는 반면, 중도층 지지세가 무너져 총선 참패의 책임론에 휩싸였던 윤 대통령은 사뭇 대조적이다. 검사 출신 국가 리더의 다른 행로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05-31(금) 돌아온 ‘문고리’

이현종 논설위원


‘권력은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멀리 가면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도 증명된 바 있다. 대통령 중심 체제에서 매일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의 핵심이다. 그래서 가장 측근에서 보좌하는 부속실장 등이 ‘문고리 권력’으로 불린다.

그래서 이런 권력 속성을 잘 아는 인사들은 비서실장이나 수석이 아니라 부속실장을 1순위로 챙긴다. 가끔 용돈과 선물을 주면서 관리한다. 대통령의 심기가 어떤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부속실장이어서 언제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 좋은지를 귀띔해 준다. 장관들도 언제 보고해야 대통령이 흡족해 할지를 알기 위해선 부속실장과 연이 닿아 있어야 한다. 온갖 민원과 청탁이 쏟아지다 보니 유혹도 많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실 부속실장의 말로가 좋지 않았다. 김영삼 정권 때 장학로·홍인길 씨가 모두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양길승·최도술·정상문, 이명박 정부 때 김희중·김백준, 박근혜 정권 땐 정호성·안봉근·이재만 씨가 ‘문고리 3인방’으로 불렸다.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 때 이들의 폐해가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호가호위하다가 결국 3명 다 구속되는 처지가 됐다.

이들 중 정호성 전 청와대 제1부속 비서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최순실) 씨 중간에서 메신저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린 정 씨는 대통령이나 최 씨의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전화 통화 내용을 모두 녹음했다. 그런데 이 녹음이 판도라의 상자가 됐다. 최 씨는 정 씨에게 “받아 적으라”고 지시하는 등 비선 활동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탄핵의 핵심 증거가 됐다. 당시 특검에 파견 갔던 윤석열 대통령이 그를 수사해 기소했고,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지난 2022년 윤 대통령은 그를 사면·복권했고, 최근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 아래 3비서관으로 채용했다.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고 간 참모를 윤 대통령이 다시 기용한 이유에 대해선 대통령실 내에서도 설왕설래가 있다. 야당은 ‘탄핵 대비용’이라는 분석까지 내놓는다. 성실하다는 이유로 채용했다고 보기엔 상식을 벗어난 인사다. 제2부속실은 안 만들면서 이런 인물을 기용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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