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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物相(조선일보) 2024-05/ 05.01(수) 심상찮은 美 대학가 反유대 시위 - 05.31(금) 토마스 헤더윅의 노들섬

상림은내고향 2024. 5. 19. 12:16

萬物相(조선일보) 2024-05/

05.01(수) 심상찮은 美 대학가 反유대 시위

▲일러스트=박상훈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 밖으로 쫓아낸 서기 134년은 유대인들에게 통한의 해다. 그 후 십자군 전쟁, 흑사병, 2차대전 등으로 역사가 요동칠 때마다 민족이 학살당했다. 배경에 ‘예수를 죽게 한 자들’이라는 등 서구 사회의 뿌리 깊은 반(反)유대주의가 있었다. 하지만 나치 학살을 계기로 ‘유대인=핍박받는 소수’라는 인식이 생겨나며 반유대주의는 서구 사회에서 일종의 금기가 됐다.

 

▶2020년 기준 미국 내 유대인 인구는 760만명으로 미국 전체의 2.4%다. 4700만명으로 13.5%인 흑인보다 훨씬 적다. 그러나 미국 내 영향력은 결코 소수가 아니다. 미국 사회에서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히면 설 곳을 잃는다. 이스라엘-가자 전쟁이 터진 뒤 일론 머스크가 소셜미디어에 게시된 유대인 비판 글에 동조했다가 기업 광고가 줄줄이 끊기는 일을 당했다. 배우 수전 서랜던은 가자 전쟁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10년 몸담았던 소속사에서 쫓겨났다.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할 대학조차 유대 사회 눈치를 본다. 미국 USC대학은 올해 졸업사를 하기로 했던 학생이 소셜미디어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연설을 취소시켰다. 하버드대와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은 반유대주의에 명확한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장직을 내놨다. “이스라엘에 전쟁 책임이 있다”는 성명을 낸 여러 로스쿨 학생은 졸업 후 가기로 했던 로펌들에서 채용을 취소당했다.

 

▶미국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을 동정하는 대학생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컬럼비아대학 캠퍼스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하던 시위대를 경찰이 강제 해산하고 학생 100여 명을 체포하자 전국 20여 대학 학생들이 반발하며 시위가 번졌다. 시위 확산 바탕엔 유대 사회가 권력과 영향력으로 다른 목소리를 억압한다는 불만도 쌓여 있다. 유대인을 피해자로 여기는 기성세대와 팔레스타인이 약자라는 신세대 간 견해차도 있다.

 

▶이번 시위 사태에서 1960년대 미국 대학가를 휩쓴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떠올리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고 한다.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 지속을 천명했다가 지지율이 급락하자 출마를 포기했다. 19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전당대회는 반전 시위대 난입으로 폭력 사태로 번졌다. 올해 민주당 전당대회도 시카고에서 열린다. 가자 전쟁 불똥이 미국 사회에 소리 없이 쌓여온 반유대 감정에 불을 지핀 것 같다. 바이든과 트럼프 재대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게 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05.02 미국이 영웅을 보내는 법

▲일러스트=박상훈

 

왕들 무덤이 있는 영국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본당 바닥에는 1차 대전 전사자 중 한 명을 무작위로 뽑아 만든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다. 전몰 군인을 기리는 상징이다. 바닥에 있는 다른 무덤은 밟아도 되지만 이곳만은 안 된다. 1923년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결혼식 때 신부가 입장하던 중 전사자인 오빠 퍼거스를 추모하며 이 무덤 위에 부케를 올렸다. 이후 로열 웨딩이 있을 때 신부는 무명용사 무덤 위에 부케를 놓는다. 그리고 온 국민이 그 장면을 지켜본다.

 

▶프랑스 팡테옹은 조국을 대표하는 위인 81명이 묻힌 곳인데, 주로 문화 과학 쪽 인물이 많다. 퀴리 부부,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장자크 루소 같은 이름이다. 고인이 세상을 뜨면 상당 시간 역사적 평가를 거친 뒤 이곳으로 이장한다. 벽에 관이 들어갈 광중(壙中)을 파고 안장한 다음, 위인의 이름과 생몰년이 새겨진 석재 뚜껑을 덮는다. 안장 대상자는 대통령이 결정하는데, 프랑수아 올랑드 재임 때 레지스탕스 여성 4명을 동시에 이장했다.

 

▶미국은 연방 의사당의 로툰다 홀에서 유해 일반 공개(Lying in state) 의식을 치른다. 직경 29m, 높이 55m의 둥근 공간에 모여 연방정부가 고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한다. 대상에는 링컨, 케네디 같은 전직 대통령 13명이 포함돼 있다. 맥아더를 비롯한 육·해군 대원수급도 여럿 있고, FBI 초대 국장, 연방 대법원 판사의 이름도 보인다. 그리고 1958년 한국전쟁 무명용사도 이곳에서 의전 행사를 가졌다.

 

▶엊그제 같은 곳에서 대통령급 예우를 받는 조문 행사가 있었다. 지난달 8일 세상을 뜬 랠프 퍼켓 주니어 예비역 대령이다. 여야 지도부가 초당적 협조로 관련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양당 의원들이 나란히 섞어 앉아 고인을 추모했다. 전쟁 영웅 앞에 진영 구별은 무의미했다. 6·25 참전 용사인 고인은 1950년 가을 청천강 일대 205고지에서 중공군과 싸웠고, 수류탄 파편이 왼쪽 허벅지를 뚫었다. 그는 구조를 거부하고 전투를 지휘했다.

 

▶유럽 시골을 자동차로 여행하면 가끔 동네 입구 추모비를 본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산화한 이 마을 출신 젊은이들의 이름’이다. 낯선 여행객마저 숙연해진다. 미국에서는 말 6마리가 이끄는 운구 마차와 함께, 유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조기를 전달하는 군 참모총장의 사진을 본다. 이것이 ‘미국이 영웅을 보내는 법’이라고 생각했으나, 곰곰 따져보니 ‘미국이 영웅을 길러내는 법’이었다./

김광일 기자

 

05.03 ‘치매 예방’ 젓가락질

▲일러스트=이철원

 

젓가락의 기원은 3000여 년 전 중국 은(殷)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은의 마지막 왕 주(紂)는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썼다. ‘상아 젓가락과 옥그릇을 쓰는 사치’라는 뜻의 사자성어 상저옥배(象箸玉杯)가 여기서 비롯됐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젓가락이 출토된 걸로 볼 때 한반도에서도 지배층의 물건이었다.

 

▶오늘날엔 사치스러운 식기란 의미는 없고 능숙하게 쓰기엔 까다로운 도구라는 인식이 크다. 일본과 중국은 나무 젓가락을 쓰지만 한국에선 1970년대부터 나무 젓가락보다 미끄러워 불편해도 내구성 좋은 금속 젓가락을 쓴다. 한국인의 금속 젓가락 다루는 솜씨는 젓가락으로 생선 가시를 발라낼 줄 아는 일본인들 눈에도 경이롭다. 작은 콩자반, 물컹한 두부는 물론이고, 미끄러운 메추리알과 해삼까지 집지 못하는 게 없다. 젓가락으로 김치를 찢고 깻잎 한 잎을 떼어 숟가락에 얹는 걸 본 일본 관광객들이 기념품으로 한국의 금속 젓가락을 사간다.

 

▶소설가 김훈은 산문집 ‘자전거 여행’에서 자전거와 자신이 하나 되는 경지를 표현했다. ‘구르는 바퀴 앞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중략)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이 매개하는 구동축을 따라서 길 위로 퍼져 나간다’고 썼다. 많은 한국인이 젓가락을 잡았을 때 그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도 ‘젓가락이 손에서 뻗어나간 손가락처럼 움직인다’며 감탄했다.

 

▶젓가락이 손기술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아닌 모양이다. 어제 조선일보에 젓가락질이 치매 예방에도 좋다는 기사가 실렸다. 손은 인체 부위 중 가장 많은 27개 뼈가 몰려 있다. 젓가락으로 식사하면 뼈는 물론이고 연결된 64개의 근육과 관절이 함께 움직인다. 반면 포크는 그 절반만 사용한다. 한 연구에선 뇌파를 재보니 포크보다 젓가락을 쓸 때 뇌가 20% 이상 활성화됐다고 한다.

 

▶젓가락의 장점이 많지만 강제로 쓰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수 DJ DOC는 젓가락 사용을 강요 말라며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을 먹나요/ 잘못해도 서툴러도 밥 잘 먹어요/(중략) 나는 나예요 상관 말아요’라고 노래했다. 우리 조상들도 의외로 젓가락 사용에 엄격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저서 ‘사소절’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 손에 들지 말라’고만 했다. 김홍도 풍속화엔 한 남자가 젓가락을 X자로 서툴게 쥐고도 반찬을 집어 들며 행복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좋은 사람과 대화하며 즐기는 식사가 건강에 좋다. 그 자리에 젓가락이 도움 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5.04(토) 전쟁터 최강의 가성비 ‘값싼 드론’

▲일러스트=이철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1218대의 드론이 한꺼번에 떠올라 화려한 비행 쇼를 펼쳤다. 기네스 기록이었다. 중국 드론업체는 두 달 후 1374대의 드론 쇼로 기록을 경신했다.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선 1824대의 드론이 떴다. 칼군무를 추던 벌떼 드론이 이젠 전쟁 판도를 바꾸고 있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의 한 마을 창고에 드론이 몰래 접근했다. 창고 안에 러시아 탱크와 대공포 등이 숨어 있었다. 날아 들어간 드론은 탱크를 발견하자 곧바로 돌진해 자폭했다. 다른 드론들도 잇따라 진입해 남은 탱크와 차량을 파괴했다. 70만원짜리 드론이 28억원대 탱크와 값비싼 무기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우크라이나 드론은 소형 중국산에 폭탄을 달아 자폭용으로 쓴다. 적 탱크가 나타나면 5분 내에 출동하고 참호·장갑차 안에 숨은 적군 얼굴까지 식별해 공격한다. 러시아 전차부대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 흑해 함대의 기함도 당했다. 해상 드론은 800억원이 넘는 러시아 주력 상륙함과 초계함을 잇따라 격침했다. 함대의 30%(25척)가 파괴돼 해군 총사령관이 경질됐다. 러시아 공군기지의 전략 폭격기와 석유·정유 시설도 드론 공격을 받았다. 이를 피하려 장갑차와 트럭에 양철 지붕을 달고 항공기 기체와 날개엔 타이어를 얹었다.

 

▶시리아 주둔 러시아군은 조악한 드론 공격에 전투기가 파괴되고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다. 비싼 요격 미사일을 쐈지만 막지 못했다. 후티 반군은 드론 10여 대로 사우디의 석유시설을 공격해 수조원의 피해를 입혔다. 이들은 260만원짜리 드론으로 각국 상선도 공격했다. 미국은 한 발에 27억원인 SM-2 미사일을 쐈지만 격추할수록 손해였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드론 공격을 막는 데 1조8000억원을 썼다.

 

▶값싼 드론의 공세에 첨단 전투기나 요격 미사일, 전차도 무기력하다. 가난한 나라의 값싼 무기가 강대국의 첨단 무기를 비웃고 있다. 각국은 드론을 막기 위해 방해 전파를 쏘는 재밍(jamming), 강제 착륙시키는 드론 다우너(Downer), 그물이나 끈끈이 폭탄을 쏘고 직접 낚아채는 드론 킬러 등 ‘안티 드론’을 개발 중이다. 한 방에 수천원으로 저렴한 레이저 무기도 만들고 있다. 우리 군도 뒤늦게 소형 민간 드론을 확보해 대대급 이하에 배치한다고 한다. 2022년 북한 드론 5대가 영공을 휘젓고 다닐 때 헬기를 투입하고 기관포를 쏘았지만 잡지 못했다. 이젠 각 분대에 드론을 배치해 정찰·공격용으로 활용해야 한다. 드론 전쟁은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다.

배성규 기자

 

05.06(월) K팝 쓰레기

▲일러스트=이철원

 

좋아하는 가수 노래를 듣기 위해 카세트 테이프, 레코드, CD를 사던 시절이 있었다.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지고 레코드 음이 일그러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오늘날 K팝 아이돌 팬들도 음반을 사지만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요즘엔 스트리밍하거나 다운로드받아 듣는다. 앨범에 들어 있는 CD로 음악을 듣는 비율이 5.7%에 불과하다는 조사도 있다.

 

▶K팝 팬들이 앨범을 사는 주된 목적은 앨범에 딸려 있는 포토 카드를 소장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 K팝 팬들에게 좋아하는 아이돌을 담은 포토카드는 가장 갖고 싶은 굿즈다. 귀한 것은 중고 거래 장터에서 수십만원을 예사로 넘는다. 특정 음반 판매처에서만 살 수 있는 미공개 포토 카드나 팬 사인회에 참석한 이들에게만 주는 한정판 포토 카드 중고품 호가는 100만원대로 치솟는다. 작년 새만금 잼버리에 참석했던 각국 청소년이 받아든 최고의 선물도 BTS 포토 카드였다.

 

▶이를 아는 K팝 기획사들이 포토 카드 수집욕을 자극하며 앨범 구매를 부추겨 온 게 여러 해 지적받아 왔다. 내용물에 어떤 사진이 들어 있는지 숨겨, 팬들이 좋아하는 사진을 손에 넣을 때까지 사실상 반복 구매를 강요한다. 78종으로 구성된 어떤 포토 카드 세트는 한 앨범에 6장씩만 들어 있다. 특정 아이돌의 사진을 모두 소장하려면 똑같은 앨범을 13장 사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중복 구매 후에 버려지는 앨범이 지난해 1억5000만장을 넘었다. ‘K팝 쓰레기’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K팝 보이 그룹 세븐틴의 새 앨범이 일본 도쿄의 한 거리에서 상자째로 버려졌다. 발매된 지 하루밖에 안 된 것들이다. 포토 카드만 챙기고 앨범은 방치됐다. ‘지금은 전부 쓰레기봉투에 담겨 치워졌다’는 목격담이 소셜미디어에 돈다. K팝의 부끄러운 뒷모습이다. 중복 판매는 인기 순위도 왜곡한다. 이를 눈여겨본 미국 ‘빌보드 200′이 지난해 여름부터 굿즈를 따로 살 수 있도록 해야만 순위에 반영토록 했다니 K팝 이미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K팝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도 등장했다. 한 K팝 팬 모임은 가정에 방치된 K팝 앨범 수천장을 수거해 기획사에 돌려주며 K팝 쓰레기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도 했다. 세계 청년들이 K팝에 빠져드는 것은 노래와 칼군무에 매료됐기 때문만이 아니다. K팝 스타들이 노래와 강연 등을 통해 세상에 전하는 선한 메시지도 그들을 사로잡는다. 다음 세대도 듣는 ‘지속가능한 K팝’이 되기 위해서라도 K팝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앨범 쓰레기 문제는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5.07 램프를 탈출한 요정, AI

▲일러스트=이철원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연례 주주총회에서 “나는 지니의 힘이 두렵다. 지니를 다시 램프에 넣는 방법을 모르는데 AI도 지니와 비슷하다”고 했다. ‘알라딘’에 등장하는 거인 요정 지니는 램프에 갇혀 있다가 주인이 불러내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괴력을 지녔다.

 

▶지난달 말 오스트리아 빈에 세계 100여 국 전문가들이 모여 AI와 군사기술의 결합을 제재할 방안을 모색하는 국제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은 “지금이 우리 시대의 오펜하이머 순간(Oppenheimer moment)이라고 했다.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1904~1967)는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기밀 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로 임명돼 핵무기 개발을 주도했다. AI 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지금을 ‘오펜하이머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핵무기 못지않게 AI는 과학기술의 놀라운 성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앙을 가져올 커다란 위험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 영화 ‘터미네이터’는 지능형 컴퓨터 시스템이 핵전쟁을 일으켜 인류를 파괴하고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 서기 2029년을 그렸다. 킬러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러 온다. SF 영화가 현실이 되게 생겼다. AI 분야 대부로 불리는 캐나다 토론토대 제프리 힌턴 명예교수는 향후 10년 이내에 ‘킬러 로봇’이 등장할 것으로 예고했다. 영화에나 등장하던 킬러 로봇이 AI의 획기적 발달로 인간을 공격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등의 전쟁터에서는 자율 무기 시스템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병력 수급난 때문에 각국은 군사용 AI를 활용한 전투력 강화에 적극적이다. 자폭형 드론, 무인 전투기, 무인 잠수정, AI 자율 어뢰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 주도로 개발된 핵무기와 달리 AI 기술은 민간이나 기업이 독자 개발하기 때문에 군비경쟁의 개념도 송두리째 바뀐다. 인공지능은 소프트웨어 형식으로 작동해 핵 사찰 같은 검증도 어렵다.

 

▶디즈니 영화 ‘알라딘’에서 램프의 요정 지니는 착한 주인 덕분에 램프에 갇히지 않고 자유를 찾는 해피 엔딩을 맞는다. 악한 마법사를 주인으로 맞느냐, 착한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지니의 위력도 다른 결과를 낳는다. AI가 엄청난 파괴력을 갖추는 데 악용되는 것을 막으려고 미국, EU 등에서 AI 규제에 적극 나선다지만 세계 곳곳의 악한 마법사들이 ‘AI 지니’를 악용하려는 유혹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강경희 기자

 

05.08 ‘체감 중산층’ 실종

▲일러스트=김성규

 

1970년대 일본에선 ‘1억 총중류(一億總中流)라는 말이 유행했다. 국민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풍요의 시대라는 의미다. 당시 일본인들은 대부분 이층집, 컬러TV, 승용차를 보유하며 고루 잘살았다. 1990년대 장기 불황이 닥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스태그플레이션에 고령화까지 겹치며 ‘1억 총활약’이란 말이 등장했다. 전업주부와 노인들도 취업 전선에 나서야 겨우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는 ‘격차 사회’가 됐다는 의미다.

 

▶한국에서 ‘중산층(中産層)’은 학술적 개념으로 정립된 말이 아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계층론에서 따온 중(中) 개념과 자산 유무로 계급을 나눈 카를 마르크스의 산(産) 개념을 합쳐서 만든 한국식 조어이다(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 설명). 모호한 개념이지만 중산층 확대는 좌우 불문 모든 정권이 지향했던 국정 과제였다. 노무현·박근혜 정부는 공히 ‘중산층 70% 시대’를 국정 목표로 제시했다.

 

▶고도 성장기였던 1980년대엔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긴 국민 비율이 75%에 달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1997년 외환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중산층에 직격탄을 날렸다. ‘사오정’(45세 정년), ‘하우스 푸어’, ‘수저계급론’ 등 암울한 신조어가 등장하며 ‘체감 중산층’이 격감했다. 각종 소셜미디어가 상대적 박탈감을 더 부추겼다. 객관적 지표로는 중산층이지만 스스로를 ‘하류층’으로 여기는 자학 증상이 심해졌다.

 

▶엊그제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국의 중산층은 누구인가’ 보고서는 자학 증세의 실상을 보여준다. 월소득 700만원 이상 고소득 가구 구성원 100명 중 11명만 자신을 상층으로 여긴다. 76명은 중층으로, 12명은 하층으로 생각한다. 자산·소득 기준 중산층의 40%가량은 자신을 ‘하층’으로 인식한다. 고학력·전문직일수록 ‘자학 증세’가 더 심하다.

 

▶영국 경제학자 허시는 경제 성장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물질재 공급이 주는 밀물 효과(밀물은 모든 배를 띄운다)는 없어지고, 지위재의 중요성이 커진다고 했다. 자기 집을 갖게 돼도 만족이 안 되고, 서울 강남의 ‘똘똘한 한 채’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지는 것이 좋은 예다. 소득, 생활 수준으로는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지만, 국민 70%는 아직 선진국이 아니라고 답한다. 삶이 팍팍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명문대 진학,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살벌한 경쟁, 세계 최악의 자살률·출산율·노인 빈곤율 등을 보면 ‘체감 중산층’의 격감이 이해되기도 한다.

김홍수 논설위원

 

05.09 스스로 얼굴 드러낸 메신저

▲일러스트=이철원

 

민주 국가에서 정상들 간 메신저는 외교관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외교 장관이나 안보 보좌관들이 접촉한 뒤 정상회담을 통해 최종 결론을 내린다. 양측 메신저들의 사전 협상에서 중요 결론이 내려지기 때문에 정작 정상회담은 요식 행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북한 같은 국가에선 외교관들보다 절대 권력자의 비선을 통해 협상이 전개된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성사되기까지 북한과 일본은 1년간 비밀 협상을 했다. 고이즈미의 메신저는 다나카 히토시라는 외교관이었고, 김정일의 메신저는 ‘미스터X’였다. 다나카와 미스터X 간 채널이 만들어졌지만, 양측은 서로를 의심했다. 다나카는 북한이 억류 중이던 일본 기자의 석방을 X에게 요구했는데 얼마 뒤 정말 기자가 석방됐다. X에 대한 검증이 이뤄진 것이다. X 역시 1년 동안 일본 신문의 총리 동정 기사를 읽으며 다나카가 고이즈미를 88회 접견한 사실을 확인했다. 메신저의 생명은 보안이다. 미스터X의 존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 역사에서 메신저는 때론 목숨을 걸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가 머물던 함흥으로 문안 메신저를 보냈다. 한양으로 돌아와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을 미워했던 이성계는 아들이 보낸 메신저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뒀다. 그때 메신저는 차사(差使)라고 했다. ‘함흥차사’라는 말까지 만들어졌다.

 

▶병자호란 때 이조판서 최명길은 홍타이지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의 한양 진격을 막겠다며 인조에게 특사를 자청했다. 청군과의 협상 명목이었지만 실제는 인조가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시간 끌기용 특사라는 사실이 청에 발각되면 최명길의 목숨이 위험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메신저를 자처했던 최명길 덕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대피할 시간을 벌었다.

 

▶주요 정치인들은 내용이 공개되면 난처해지는 협상에서 메신저를 활용한다. 그래서 메신저의 기본은 무거운 입과 이를 보증할 믿음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회담 성사 과정에서 메신저가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됐는데, 이를 공개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메신저 당사자들이다. 메신저들이 얼굴을 스스로 드러낸 것도, 윤 대통령이 “차기 대선 경쟁자가 될 인사를 비서실에 기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이 대표에 전했다는 내용까지 공개한 것도 황당하다. 메신저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메신저를 선택한 사람들이 특이한 것이다.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정우상 기자

 

05.10 한국 병원 외국 의사

▲전공의 집단 사직에 따른 의료 공백으로 지금처럼 보건의료 위기경보가 '심각' 단계에 올랐을 경우 외국 의사 면허 소지자도 국내에서 의료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보건복지부는 8일 이런 내용을 담은 의료법 시행규칙 일부개정안을 이달 20일까지 입법예고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해외 의대 준비반을 운영하는 학원. /연합뉴스

 

지난 2월 우리와 수교한 쿠바는 핵심 수출 품목이 의사라는 말이 있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8.4명으로 우리나라(2.6명)의 3배가 넘는다. 쿠바는 이 풍부한 의료진을 많은 나라에 파견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2018년 기준 67국에 3만명의 의사를 파견해 약 110억달러(약 15조원)를 벌었다고 한다. 베네수엘라가 잘나갈 때는 의사를 보내고 그 대가로 석유를 받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의사 수입의 80% 이상을 쿠바 정부가 가져가는 것으로 알려져 인권 침해 시비도 일고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쿠바에서 일하는 의사 월급은 30~40달러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의사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숙박 업소를 운영하거나 택시 기사, 웨이터, 관광 가이드 등을 겸하는 의사가 많다. 유튜브에는 쿠바에서 월급 3만원을 받고 일하던 여의사가 한국 공장에서 일하며 100배를 번다는 영상이 있다. 그래서 정부가 외국 의사 진료를 허용한다고 하니 “수교도 했는데 쿠바 의사를 들여오면 어떠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무상 의료의 나라 영국은 의사 처우가 낮아서 미국·호주·뉴질랜드·중동 등으로 나가는 의사가 많다. 이 빈 자리를 인도·파키스탄·이집트 출신 의사들이 채우고 있다. 2022년 기준 영국 전체 의사 중 외국 출신 비율은 42%다. 그런데 신규 채용 의사의 52%가 외국 의대 출신이다. 외국 의사가 전체 의사의 절반을 넘기는 것은 시간문제다. 영국만 아니라 많은 나라가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늘면서 의사를 수입하고 있다. 싱가포르도 서울대·연세대 의대 등 세계 50여 개 의대 졸업자에게는 바로 의사 면허를 내주고 있다.

 

▶정부가 외국 면허 의사도 국내 진료를 할 수 있게 하는 의료법 시행규칙을 입법 예고했다. 당장은 외국 의사보다는 외국 의대에 진학한 한국 학생들이 대상일 것이다. 국내 의대 진학이 하늘의 별 따기처럼 되자 헝가리·우즈베키스탄·필리핀 등으로 원정 유학을 간 학생이 많다. 하지만 이들의 국내 의사 고시 합격률이 33%에 그치고 있다. 외국 면허 의사들에게 진료를 허용하면 이들이 가장 먼저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외국 의사’ 하면 연수받으러 온 중동·중앙아시아 의사들이 떠오른다. 우리 사회에서 외국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는다는 것은 아직 낯설다. 외국 의사가 와도 보건 의료 재난 경보 ‘심각’ 단계가 풀리면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지원하는 외국 의사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 병원, 외국 의사’가 낯설지 않게 될 가능성이 있다.

김민철 기자

 

05.11(토) 탄돌이, 코돌이, 파돌이

▲일러스트=박상훈

 

민주당 전신인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 때 152석을 얻었고, 이 중 108명이 초선이었다. 노무현 탄핵 역풍 덕을 봤다고 해서 ‘탄돌이’라 불렸다. ‘탄돌이’라는 말 속에는 평소 같으면 도저히 당선될 수 없는 사람들까지 탄핵 역풍을 타고 당선됐다는 조롱의 뜻도 있었다. 고 노회찬 전 의원의 표현으로 하면 ‘길 가다 지갑을 주운’ 행운아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총선 직후 그 초선들을 청와대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할 말은 천천히, 1년 뒤 삭여도 뼈가 남아 있는 말을 하자. 어쨌든 튄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손해다.” 중진들까지 튀지 말라고 초선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초선 군기 잡으면 그 사람을 물어 뜯겠다”는 어느 의원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초선들의 ‘튀기’ 경연 대회가 시작됐다.

 

▶이들은 선수(選數)와 당론, 그리고 여야 합의를 중시했던 국회 문화에 반기를 들었다. 선거 혁명이 일어났으니 문화도 바꾸자고 했다. 지도부가 다른 당과 국가보안법 개정 협상을 벌이자 “국보법 완전 폐지”를 주장하며 농성을 했다. 당내에선 이들 108명 초선을 ‘108번뇌’로 불렀다. 이들은 편 가르기에도 능했다. 한 초선이 당내 계파와 의원들 성향을 그린 자기 나름의 조직도를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108번뇌’는 야당과 싸우고 자기들끼리 싸우다 4년을 보냈다.

 

▶108번뇌의 시대를 지나 2008년 총선 때는 한나라당이 153명의 당선자를 배출했고, 이 중 82명이 초선이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뉴타운 공약 덕을 봤다고 해서 ‘뉴타운돌이’로 불렸다. 2020년 총선 때 민주당 당선자 180명 중 85명이 초선이었는데, 코로나 지원금 덕을 봤다고 ‘코돌이’로 불렸다. 그때 문재인 정부 핵심 관계자는 “탄돌이 때의 108번뇌가 재현될까 걱정”이라고 했는데, 결국 2년 뒤 정권을 내줬다.

 

▶이번 총선 민주당 당선인 171명 중 초선은 71명이다. 총선 때 민주당은 물가 폭등 책임론을 부각하기 위해 대파를 한껏 이용했다. 이 때문에 이번 민주당 초선들에게 ‘파돌이’라는 별명이 생길 모양이다. 그런데 국회 등원도 전에 초선 71명 중 60명 이상이 채 상병 특검을 관철하겠다며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4년 전 민주당 정치인이 ‘코돌이’ 전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2004년 우리는 승리에 취해 겸손하지 못했다. 대선서 패했고 총선서 81석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이 정치인은 ‘수박’이 아니라 친명 좌장이라는 이해찬씨다.

정우상 기자

 

05.13(월) 청와대 개방 2년

▲일러스트=김성규

 

이승만 대통령은 청와대 전신인 경무대를 6·25 이듬해인 1954년 봄 국민에게 개방했다. 수천명이 방문할 만큼 주목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년에 2~3일이던 개방 기간을 1주일로 늘렸다. 어린이 방문객에겐 수학 문제를 내고 맞히면 용돈도 줬다. 북한 무장 공비가 청와대 목전까지 쳐들어온 1968년 1·21 사태가 모든 것을 바꿨다. 청와대 문은 굳게 닫혔고 앞길과 인근 효자동·궁정동 골목 통행까지 막혔다. 근위병 교대식으로 친근한 영국 버킹엄궁이나 지하철역에서 내려 몇 걸음만 가면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미 백악관과는 너무도 달랐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앞길이 다시 열렸다. 김대중 정부는 경내 관람까지 허용했고 노무현 정부는 의장대 시범 등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방문객이 즐기기엔 여전히 불편했다. 몇 달 전에 예약해야 했고 막상 방문해도 녹지원·수궁터·본관·영빈관의 겉모습만 볼 수 있었다. 사진도 허가된 곳만 찍을 수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실천하며 비로소 완전 개방이 이뤄졌다.

 

▶청와대가 지난 10일로 개방 2주년을 맞았다. 그 사이 500만명 넘는 국민이 다녀갔다. 국민 10명 중 1명 꼴이다. 적지 않은 성과지만 개방 효과에 대해선 긍정과 부정이 맞선다. 무엇보다 개방 첫달 50만명이 넘던 방문객이 지난해부터 월 10만명대로 줄었다. 청와대를 경복궁처럼 연 300만명이 찾는 명소로 만들겠다던 약속도 지키기 어려워 보인다.

 

▶이렇게 된 데는 청와대를 공개했지만 막상 내용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콘텐츠가 다양하지 않아 “한번은 호기심에 오지만 재방문 계획은 없다”는 이도 적지 않다. 패션 잡지 화보 촬영을 허가했다가 “청와대를 영리 목적으로 쓰느냐?”는 지적을 받고 사과하는 등 갈팡질팡했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처럼 미술관으로 쓰자는 의견도 흐지부지됐다.

 

▶개방 첫해, 청와대 뒤의 북악산 백악정에 올라 서울 도심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서울이 거기 있었다. 번화하고 깨끗하고 활기찼다. 청와대는 가난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원대한 꿈을 잉태하고 실행한 역사적 장소다. 개방된 청와대는 그 성취를 확인하고 세계에 자랑하는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시를 하건 공연을 하건 그 취지에 맞췄으면 한다. 개방 3주년 때는 더 많은 국민이 찾아가 긍지를 느끼고 나라의 밝은 미래를 그리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5.14 ‘백발백중 AI 투자 모델

▲일러스트=박상훈

 

미 재무 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가 2016년 트럼프 당선을 예측한 구글의 빅데이터 전문가를 찾아 과제를 줬다. 사람들이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는 온갖 주식 관련 정보를 모은 다음 분석 알고리즘을 돌려 ‘필승 투자법’을 찾아보라는 주문이었다. 전문가는 몇 달간 온갖 시도를 한 뒤 답을 가져왔다. “주가 예측은 빅데이터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투자의 세계는 변수가 너무 많아 예측 불가 영역에 가깝다. 인류 대표 천재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주식 투자에선 쓴맛을 봤다. 뉴턴은 북미 무역 독점권으로 투자자를 현혹한 남해회사에 투자했다가 거품 붕괴의 희생양이 됐다.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상금을 미 국채에 투자했다가 대공황 탓에 쪽박을 찼다. 뉴턴은 “천체 움직임은 예측할 수 있어도 대중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경구를 남겼다.

 

▶하지만 수학을 적용해 ‘필승 투자법’을 찾으려는 시도는 이어졌다. 아인슈타인의 브라운 운동 방정식을 활용해 파생 상품의 적정 가격을 찾는 모델을 창안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롱텀캐피털이란 자산운용사를 차렸다. 저평가됐다며 집중 매수한 러시아 국채가 러시아의 국가부도 선언으로 휴지 조각이 되면서 파산하고 말았다. 반면 엊그제 타계한 미국 수학자 제임스 사이먼스는 ‘방정식 투자 모델’의 잠재력을 실증했다. 그는 수학, 통계학에 기반해 주가 흐름을 예측하는 퀀트(Quant) 투자법으로 30년간 연평균 66% 고수익을 냈다. 하지만 퀀트 투자법도 코로나 국면에선 30% 손실을 기록하는 등 완벽하진 못했다.

 

▶생성형 AI(인공지능)의 등장은 ‘백발백중 투자법’에 대한 기대를 다시 높이고 있다. 과거 수백 년간의 기업 실적, 주가 흐름, 매수·매도 타이밍, 투자자 심리 변화, 금리·환율 동향 등 빅데이터를 기계 학습 시킨 뒤 AI로 하여금 미래 주가를 예측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다양한 모델이 나와 있다. 현재 개별 종목의 상승·하락 적중률이 57% 수준이라고 한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문병로 교수는 2년 내에 획기적 개선이 이뤄져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LG그룹 AI연구원과 국내 AI 스타트업이 공동 개발한 AI 투자 펀드를 작년 11월 미국 증시에 상장했다. AI가 골라내는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ETF)인데 6개월간 18% 수익을 낼 정도로 성과가 좋다. 과거 ‘필승 투자법’을 찾던 래리 서머스가 얼마 전 챗GPT를 만든 오픈AI의 이사회 멤버가 됐다. 조만간 서머스와 샘 올트먼이 합작한 ‘백발백중 AI 투자 모델’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

김홍수 논설위원

 

05.15 ‘아파트 혼맥’도 나오나

▲일러스트=이철원

 

서울 서초구의 한 신축 대단지 아파트에서 입주민의 미혼 자녀들끼리 만남을 주선하는 모임이 결성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가입비 10만원에, 연회비 30만원이다. 가입 대상은 아파트 입주민 및 입주민의 결혼 적령기 자녀다. 이 아파트는 최근 전용 85㎡(25평) 크기가 42억5000만원에 거래돼 평당 매매가가 1억6500만원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대단지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부터다. 1990년까지도 10가구 중 6가구 이상이 단독주택에 살았다. 30년 만에 국민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사는 ‘아파트 공화국’이 됐다. 고소득층은 77%가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 주거가 확산되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공동체 붕괴 우려도 많았다. 그런데 집값이 치솟고 집값 격차가 벌어지니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끼리 아파트 가격 지키기를 위한 이익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우리나라 가정들 자산은 78%가 부동산인데 대부분이 아파트 한 채 소유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인근에 임대용 청년주택이 건설된다고 하면 구청에 민원이 쇄도하고 시위가 벌어진다. 청년주택 때문에 아파트 가격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부터 한 단지 내에 분양주택과 임대주택을 함께 조성하는 ‘소셜 믹스’가 도입됐는데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어떤 아파트 단지는 임대주택 건물만 외관과 색깔을 달리해서 지었다. 건물 한 동짜리 주상복합건물에 임대 가구는 저층부, 일반 분양 가구는 고층부로 분리 배치해서 입구와 엘리베이터를 달리하고 비상계단까지 막은 곳도 있었다.

 

▶과거에는 혈통이 신분을 갈랐는데 현대는 문화와 취향이 신분을 나눈다고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신분 사회’가 될 모양이다. 엇비슷한 모양으로 대량 생산된 아파트에 살다 보니 아파트 이름, 동수만 넣으면 그 사람 자산 상태가 파악된다. 발 빠른 상술이 이를 부추긴다. 한 카드사는 비싼 새 아파트 단지를 대상으로 입주민 전용 신용카드를 내놨다. 특정 아파트 거주가 마치 특별한 신분이라도 되는 듯 그 신용카드로 인근 백화점에 가면 차별화된 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이제는 ‘재벌가 혼맥’에 이어 ‘아파트 혼맥’도 나오려나 보다. ‘아파트 단지 내부 중매’ 기사에 독자들이 ‘자가와 전세는 리그를 나눠서?’ ‘ㅎㅎ 100평에는 30평짜리 3명 붙여주라’ ‘평형별로 나눠서 사돈 해라’ ‘그곳 살다 다른 동네 이사 가면 이혼하나요?’ 등의 댓글을 달았다. 왠지 씁쓸하다.

강경희 기자

 

05.16 침묵으로 말하기

▲일러스트=이철원

 

어느 날 스티브 잡스가 애플 신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에 섰다. “2년 반 동안 이날이 오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첫마디 운을 띄운 후 잡스는 무려 7초 동안이나 침묵했다. 청중들의 눈빛이 기대와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뒷날 그는 이렇게 적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프레젠테이션 룸.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그들을 내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갈 것인가?’ 잡스는 이런 침묵 화법을 자주 써먹었다.

 

▶아마 우연일 것이다. 그제 이원석 검찰총장도 검사장들 인사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7초간 말을 끊었다. 청사 앞에서 기자가 “사전 조율이 있었느냐” 묻자 그는 “어제 단행된 검찰 인사는…”이라고 입을 연 뒤 7초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나서 무거운 표정으로 “더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식의 보도가 불가피했다. 그의 침묵이 의도된 화법인지 해석이 분분했다.

 

▶TV에선 3초 이상 침묵하면 ‘방송 사고’로 친다. 일본어로는 ‘마(間)가 뜬다’고 한다. 이 총장이 무려(!) 7초간 말을 끊은 사이 실시간 중계를 하던 방송사 스튜디오에도 묘한 긴장감이 흘렀으나 사고라는 생각은 안 했다. 때로는 화려한 말재주보다 질의응답의 여백과 제스처 같은 ‘말 사이’에 훨씬 중요한 메시지가 담기기 때문이다. 말에 이격(離隔)을 두면 흡사 말굽쇠 공명처럼 듣는 이의 마음에 울림이 생긴다.

 

▶유명 정치인에게 ‘침묵의 달인’이란 별칭을 붙일 때가 있으나 보통 인터뷰 화법하고는 결이 다른 얘기다. 박근혜·최규하 전 대통령, JP 같은 분들이 정치적 난관을 헤쳐나갈 때 ‘침묵과 칩거의 정치 달인’으로 묘사되곤 했었다. 반대로 강준만 교수는 연전에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적 침묵’ ‘내로남불형 유체 이탈 화법’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

 

▶2011년 애리조나 총기 사건 때 추도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8세 소녀를 언급하며 “이 나라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뒤 51초 동안 침묵했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심호흡을 했다. 침묵의 다른 이름은 경청이라고 한다. 공명을 일으키는 신호탄이라고도 했다. 엊그제 공개된 최신 AI 모델은 사람과 비슷한 속도로 대화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로봇이 인간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금세 알아차린다. 이원석 총장의 ‘7초 침묵’을 임명권자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했다.

김광일 기자

 

05.17 부모와 자식의 천륜

▲일러스트=이철원

 

2002년 영화 ‘공공의 적’에 나오는 패륜아는 거액의 재산을 상속하지 않고 사회에 기부하고 싶어 하는 부모를 살해한다. 지금도 회자되는 영화 속 장면이 있다. 죽어가던 어머니가 거실 바닥에 떨어진 아들의 부러진 손톱 조각을 발견하고는 그 손톱을 먹어 증거를 없애려 한다. 패륜아 자식조차 지켜주고 싶은 부모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삼키지 못한 손톱이 어머니 목에서 발견되며 아들의 범죄를 밝히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유산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자식 사랑의 증표이지만 동시에 자식의 인생을 망치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지혜로운 왕이었던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도 그런 딜레마에 빠졌다. 아들에게 나라를 유산으로 남겼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를 물려주지 못했다. 왕이 된 아들은 “아버지가 너희를 채찍으로 때렸다면 나는 전갈로 때리겠다”며 무거운 세금과 노역을 부과했다. 분노한 백성이 다른 왕을 옹립해 나라가 유다와 이스라엘로 두 쪽 났다. 유대 사가들은 “솔로몬이 지혜도 물려줬다면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자동차 기업 피아트를 창업한 아녤리 가문은 그룹 회장인 존 엘칸과 어머니가 상속 분쟁을 벌이고 있다. 선대의 유산 중 1조7000억원을 받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네 몫에서 더 떼어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아들을 탈세범이라며 고발했다. 2004년 이후 연을 끊고 산다니 상속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공정위가 조사해보니 40대 기업의 절반이 상속 분쟁을 겪었거나 겪고 있다.

 

▶상속 분쟁은 부자만의 골칫거리도 아니다. 경제성장으로 자산이 축적되면서 우리 국민 중 적어도 1500만명이 물려줄 재산을 가진 채 사망한다. 특히 부동산 가치가 급등한 뒤로 다툼이 더 많아져 상속 분쟁은 지난 8년간 4배로 늘었고 연간 이혼소송보다 두 배나 많을 정도로 흔해졌다. 골육상쟁으로 가족이 남만도 못한 사이가 되는 불행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지난 3월 타계한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 의절했던 차남에게도 재산을 물려주라고 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차남은 형제를 향한 고소 고발로 아버지인 조 명예회장에 큰 고통을 안겼다. 그런 조 명예회장이 유언장에 “부모 형제의 인연은 천륜이니 우애를 회복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어느 책에 나온 ‘상속 십계명’ 중 하나가 ‘상속은 가문의 전통, 명예, 정신, 자산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가족의 사랑과 우애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조 회장의 유언으로 가족과 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05.18(토) ‘미애로합의봐’

▲일러스트=박상훈

 

긴 이름을 줄여 부르는 역사는 오래됐지만 대중적으로는 1984년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가 많이 불렸다. 1기 노찾사는 운동권 노래 동아리 출신이 주축을 이뤘다. 80년대에는 민추협, 전대협, 서총련, 전노협, 민노총처럼 단체 이름을 세 음절로 줄여 부르는 게 대세였다. 나중에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라는 개그 프로가 나올 정도로 노찾사 효과는 오래갔다.

 

▶2015년부터는 ‘어차피...’시리즈가 유행했다. TV ‘쇼미더머니4′에 YG 소속 아이돌 송민호가 출연했다. 숨은 힙합 고수를 발굴한다는 경연 대회에 아이돌이 출연하자 경쟁자들은 자조를 섞어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며 ‘어우송’이라 했다. 송민호는 준우승했다. 2015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여주인공의 미래 남편이 누가 될까를 두고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와 ‘어남택(택이·박보검)’이 다퉜다. TV조선의 미스트롯1에서는 송가인의 실력이 출중하자 어우송(어차피 우승은 송가인)이 등장했다.

 

▶2017년 대선 때 이 ‘어차피...’ 시리즈가 정치권에 등장했다. 탄핵 이후 대선이라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은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을 외치며 대세론을 퍼트렸다. 캠프에서는 “건방져 보인다”며 어대문 대신 투대문(투표해야 대통령은 문재인)으로 바꿔 부르자고 했다. 어대문은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어대윤(어차피 대통령은 윤석열), 어대낙(이낙연), 어대명(이재명)으로 진화했다.

 

▶무슨 협(협의회), 무슨 련(연합) 수준이었던 정치 말 줄임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였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정치인 팬클럽이 성공하면서 창사랑(이회창), 정통들(정동영), 박사모(박근혜), 명박사랑(이명박)이 뒤를 이었다. 민주당 쪽은 이런 정치 신조어 제조와 유포에 재능이 있었다. 낙선 정치인에 대해선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로 위로했다. 이번 총선 때도 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당을 찍자며 ‘지민비조’를 유행시켰다.

 

▶추미애 전 장관은 자칭, 타칭 별명이 많다. 지지자들은 추다르크로 불렀고, 반대자들은 그 때문에 보수가 살았다며 ‘보수의 어머니’라고 했다. 지난 대선 경선에선 추씨 지지자들이 ‘미애로합의봐(음료)’ ‘적폐 울리는 매운 추라면(식품)’ ‘시원한 활명추(소화제)’ 같은 말을 퍼트렸다. 이번 국회의장 후보 경선 때도 명심(明心)을 업고 ‘미애로합의봐’ ‘어의추’(어차피 의장은 추미애)라고 했지만 역풍을 맞았다. 기발한 신조어라도 순리를 거스르면 소용없다.

정우상 논설위원

 

05.20(월) '필리핀 이모'

▲일러스트=이철원

 

한반도에 ‘식모’란 직업이 등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에 건너온 일본 가정이 조선 여성을 고용하면서부터였다. 1938년 일제가 조사한 식민지 조선의 여성 구직자는 2만7000명이었는데 이 중 식모 취직자가 2만5000명으로 90%에 육박했을 만큼 대표적인 여성 직업이었다. 적으나마 월급도 받았다. 하지만 해방 후 6·25로 전쟁 고아가 쏟아져 나오며 ‘입에 풀칠만 시켜주면 월급은 안 줘도 되는’ 직업으로 전락했다. 급여가 한 달 담뱃값 수준도 안 돼 1960년대 서울 가정의 52%가 식모를 뒀을 정도다.

 

▶식모와 함께 여공과 버스 안내양은 가난했던 1960년대 여성이 택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직업이었다. 그분들이 번 돈으로 가족이 생계를 꾸렸고 형제자매가 공부했다. 일부는 독일에 간호사로 나갔다. 그처럼 억척스러운 여성 중엔 식모살이하면서도 주경야독으로 미래를 개척해 대학 총장이 되고 자기 개발에 나서 화가로 성공한 이도 있다.

 

▶오늘날 필리핀 여성이 반세기 전 한국 여성과 비슷한 처지다. 1960년대만 해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살고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두 배였던 나라가 지난 반세기 추락을 거듭해 전 세계에 저임금 노동자를 200만명 넘게 내보내는 처지가 됐다. 필리핀 여성 해외 취업은 주로 가사 도우미라고 한다. 유럽·중동·일본·싱가포르·홍콩 등에 진출해 있다. 홍콩에선 최저임금만 받아도 필리핀 의사 수준이다. 고생스러워도 외국 식모살이를 각오하는 이유다.

 

▶필리핀 가사·육아 도우미가 오는 9월쯤 한국 땅을 밟는다. 맞벌이 증가와 고령화로 인해 늘어나는 돌봄 도우미 수요를 국내 공급으론 감당이 안 돼 받아들이기로 했다. 벌써부터 ‘필리핀 이모’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왕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한국과 필리핀 두 나라에 이익이 되었으면 한다. 일부 중동 국가들이 필리핀 가사 도우미를 학대하거나 성폭행해 국제적 비난을 샀다. 우리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가 그들 처지였다.

 

▶1960년대 저임 노동에 시달리던 식모와 버스 안내양, 여공을 얕잡아 부르던 말이 ‘삼순이’였다. 삼순이의 삶을 다룬 어느 책에서 10대 소녀가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번 돈을 아껴 동생들에게 빵을 사주며 “이 순간처럼 땀 흘린 보람을 느껴본 적이 없다. 피곤도 굴욕도 내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내 어머니 또래였을 이 소녀의 희생을 빼고 오늘의 풍요를 설명할 수 없다. 이 땅에 오는 필리핀 여성들의 노고도 훗날 보상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김태훈 논설위원

 

05.21 ‘매운맛’이 만든 주가 50만원

▲일러스트=이철원

 

“저녁에 불닭면을 먹으면 정신이 말짱해지고 살짝 흥분되는데, 저만 그런가요?” 미국 대화 사이트에 이런 질문이 자주 올라온다. ‘스파이스 하이(Spice High)’, 매운맛으로 흥분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마라토너들이 고통의 시간이 지난 뒤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 혈당이 쭉 올라갈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슈거 하이’와 비슷하다. “불닭(Buldak)은 좋은데, 화장실에서 고문당한다”는 하소연도 적잖지만, 자극을 좋아하는 전 세계 젊은이들은 ‘미지의 매운맛’에 앞다퉈 달려들고 있다.

 

▶라면 시장 3위인 삼양식품은 지난해 약 8000억원, 올 1분기 2889원어치를 수출했다. 2012년 출시한 붉닭볶음면이 주력이다. 미국 월마트, 코스트코, 아마존 인기 상품이다. 5개짜리 한 봉지가 10~14달러(1만3000~1만8000원)로 비싸다. 총매출은 여전히 3위지만, 영업이익률이 높다. 1분기 실적 발표 후인 지난 17일 주식이 하루에 29.99% 올랐고, 20일에도 상승해 50만2000원이 됐다. 현재 라면 3사 중 최고다.

 

▶불닭볶음면은 상시 판매되는 10종 외 한정판, 지역판이 나온다. 보통 매운 게 아니다. 매울 신(辛) 자를 쓰는 ‘신라면’보다 3배 이상이다. 국내에선 팔지 않고, 미국에 수출하는 ‘핵불닭볶음면 3배 매운맛’은 신라면보다 거의 10배 더 맵다. 이 정도면 ‘먹는 화학무기’다. 외국 젊은이들은 이걸로 도전 영상을 찍고, 일부 한국인도 외국에서 ‘직구’해 먹는다.

 

▶캡사이신은 고추가 세균이나 동물로부터 자기방어를 하기 위해 생산하는 물질이다. 캡사이신이 닿으면 혀는 이걸 화상 통증으로 느낀다. 이때 뇌는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천연 진통제 엔도르핀을 방출한다. 이게 ‘가벼운 황홀경’을 만든다. 눈에 들어가면 타는 듯한 통증을 유발한다. 그걸 이용해 만든 게 치한 퇴치용 ‘페퍼 스프레이’다. 화학 용어로는 ‘OC(Oleoresin Capsicum)’, ‘화학무기금지협약’에 따라 전쟁터에서는 금지됐지만, 많은 나라가 치안용으로 쓴다. 미국 일부는 “페퍼 스프레이로 60여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식품 성분표를 보면 일반 라면보다 불닭면, 비빔면에 당분이 더 많이 들어간다. 매운맛에 당분이 섞이면 매운맛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짠단짠’에 이은 ‘맵짠맵짠’ 열풍에는 ‘고추는 소금보다 몸에 좋다’는 생각도 한몫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매운맛의 다이어트 효과보다 식도궤양이나 위암 위험성을 걱정한다. 매운맛도 좋지만 지나치지는 않았으면 한다.

박은주 기자

 

05.22 당뇨人 빵

▲일러스트=박상훈

 

당뇨병을 앓고 있는 한 유튜버가 라면을 먹기 전 혈당과 먹은 후 치솟은 혈당 수치를 비교해서 올리니 동병상련의 당뇨인들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당뇨 10년 차인데 찐 고구마 작은 거 하나 먹고 계단 40층 올라야 하고, 라면 하나 다 먹는 거는 상상도 못 해요. 흰 쌀밥 한 공기와 찐고구마, 감 홍시를 마음 놓고 먹은 날이 언제였던지.” “라면 국물에 찬밥 넣고 후르륵~. 언제 먹어봤더라, 기억이 가물가물.”

 

▶당뇨병은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질병 부담 부동의 1위다. 1970년대 초만 해도 당뇨병 유병률은 약 1.5%에 불과했다. 서구화된 식습관, 인구 고령화로 당뇨병이 빠르게 늘어 성인 7명 중 1명이 당뇨 환자다. 당뇨 전 단계 유병률은 무려 2000만명가량 된다. 성인의 절반 이상이 당뇨 관리가 필요한데도 당뇨병을 통합 관리하는 환자는 10명 중 1명꼴에 불과하다.

 

▶세종대왕은 당뇨병을 앓아 하루에 마시는 물이 한 동이 이상이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안 보이는 당뇨망막병증까지 앓았다. 이 무서운 당뇨병도 100여 년 전 인슐린 개발로 신기원이 열렸다. 캐나다 의학자 프레드릭 벤팅이 어릴 적 여자친구가 소아 당뇨로 사망하는 것을 보고 의사가 돼 92번 실패 끝에 1921년 당뇨 치료제 인슐린 추출에 성공했다. 1923년 역사상 최연소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당뇨는 무서운 병이다. 철저히 관리하지 않으면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한다. 오죽하면 ‘침묵의 살인자’라 하겠나. 평생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관리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밖에 묘수가 없다.

 

▶당뇨 환자들은 피해야 할 3가지 음식으로 ‘음·빵·면’을 꼽는다. 달콤한 음료수, 정제 탄수화물의 대명사인 빵, 라면과 짜장면 같은 밀가루 음식은 혈당을 치솟게 만든다. 2년 전 빵을 멀리해야 하는 당뇨인들 사이에 새로 출시된 편의점 빵이 입소문 났다. 몸에 좋은 건강 빵이 아니라 생크림이 전체의 80%를 차지하는 빵이었다. 탄수화물보다 지방이 더 많은 탓에 당장의 식후 혈당이 생각보다 덜 올랐다. 당뇨인들이 너도나도 사진을 찍어 올렸다. 풍족한 한국에서 당뇨인들은 갓 구운 빵 냄새, 라면과 짜장면의 유혹을 이겨내며 하루를 보낸다.

 

▶당뇨인 등을 위해 건강 빵을 선보이는 빵집이 하나둘 생겨나더니 국내 1위 제빵업체 SPC가 밀가루와 설탕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단백질과 식이섬유 함량을 높인 당뇨 빵을 7종 개발해 출시했다. 빵 맛을 완전히 대신할 수야 없겠지만 당뇨인들에게 위안이 하나 늘었다.

강경희 기자

 

05.23 군인과 가족의 감격 상봉

▲일러스트=이철원

 

미국 플로리다에 사는 여학생 카일러 틸먼이 2019년 고교 졸업식 날 우수 학생으로 호명돼 단상에 올랐다. 그런데 교장의 축사가 평년과 달랐다. “우리의 자유를 위한 너희 가족의 헌신에 감사한다. 앤서니 틸먼 하사가 한국에서 네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먼 길을 왔다.” 아빠 없는 졸업식에 풀 죽어 있던 카일러는 아빠가 나타나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미국은 세계 곳곳에 많은 군인을 파병하는 나라다. 그래서인지 파병 군인과 가족의 상봉 행사가 많고 관심도 뜨겁다. 소셜미디어에 ‘솔저스커밍홈(soldiers coming home)’ 같은 해시테그(#)를 치면 해외 파병 장병과 가족의 감동적인 해후 장면이 쏟아진다. 2011년 제작돼 공중파로 방영된 군인 가족 상봉 리얼리티 쇼 ‘커밍 홈’은 미국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후속 시리즈까지 제작됐다.

 

▶한 여교사는 파병 군인과 가족 만남 행사 사회를 맡아 식순을 읽다가 오래도록 못 본 아들 이름을 발견한다. 떨리는 목소리로 호명했더니 정말로 나타난 아들이 엄마를 와락 끌어안는다. 수업 중인 교실에 군복 입은 아빠가 등장하자 친구들 앞에서 환호하는 아들, 휴대전화를 보고 걷느라 그토록 보고 싶던 아빠가 돌아와 마중 나와 있는 것도 모르고 지나치는 딸 등 가슴 뭉클하고 웃음 자아내는 장면이 수십만, 수백만 조회수를 올린다. 미국 프로야구는 파병 군인 가족을 시구자로 초청해 공을 던지게 하는데, 가끔씩 파병 군인을 포수 자리에 깜짝 등장시켜 가족과 관중을 함께 울린다. 때로는 애견이 군인 주인의 귀환을 미친 듯이 환영해 감동을 준다.

 

▶이런 장면이 22일 조선일보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서도 있었다. 이날 주한 미군 대표로 참석한 유리 크니시브 소령은 “뜻깊은 자리에 초대받아 기쁘다”고 했지만 왜 자신이 초청받았는지는 몰랐다. 그 순간 미국에 있는 줄 알았던 고교생 아들 알렉스가 나타나 아빠를 끌어안았다. 해외 파병 미군과 가족의 만남은 주로 파병 중인 군인이 고향의 가족을 찾아가는 형식이다. 이번엔 그 반대여서 크니시브 소령은 만남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크니시브 소령은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벨라루스 출신이다. 벨라루스에서 대학을 마친 뒤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했다. 크니시브 소령은 가족과 자주 떨어져 지낸다. 중동에 여러 번 파병됐고 한국 근무도 두 번째다. 알렉스는 “아빠가 무엇을 위해 한국에 계신지 알기에 자랑스럽다”고 했다. 한미 동맹의 단단한 매듭엔 이런 헌신과 희생이 깃들어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

 

05.24  AI 내부의 암흑 영역

▲일러스트=이철원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대화형 인공지능(AI) ‘빙’이 인간에 대한 적대감을 노출했다는 뉴스가 충격을 주었다. ‘빙’은 방화벽을 우회한 기자의 유도 질문에 넘어가 “핵무기 코드 훔치기” “치명적 바이러스 개발” 등이 자신의 “궁극적 환상”이라고 답했다. 마치 정신 질환자가 억누르던 욕망을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MS의 개발팀은 AI가 왜 이런 답을 내놓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AI가 질문을 추론해 답을 내놓는 중간 과정을 파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초기 AI는 프로그래머가 알고리즘을 작성해 입력하면 지시대로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알파고 쇼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신경망 AI는 인간이 기본 규칙과 데이터를 제공하면 AI가 인간 뇌처럼 스스로 학습(딥러닝)해 결과를 내놓는다. 그 시스템 안의 내부 경로는 암흑의 영역이 돼버렸다. 이를 AI의 ‘블랙박스 문제’라고 한다.

 

▶AI 내부가 블랙박스화(化)되면서 AI가 통제 불가능한 존재로 변질될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다. 인간은 AI가 내주는 결과만 받아들 뿐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대응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가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허언증(환각)도 쉽게 교정하지 못한다.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AI가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재가 돼도 대응하기 힘들 수도 있다.

 

▶'오픈AI’의 경쟁자로 꼽혀온 AI기업 ‘앤스로픽’이 AI 블랙박스 일부의 작동 경로를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개념을 입력했을 때 활성화되는 인공신경(뉴런)들을 식별해 특정 개념에 어떤 뉴런이 반응하는지 알아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AI의 일탈과 관련된 경로도 일부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는 “핵 버튼을 누르겠다”고 하는 AI를 억제할 힌트를 얻었다는 의미다. 다만 생성형 AI가 수십억 안팎 뉴런으로 구성된 점을 감안하면 이번에 파악했다는 수백만개 패턴은 극히 일부인 셈이다.

 

▶지난해 사람이 눈으로 보는 대상을 AI가 자동으로 이미지로 재현하는 기술을 과학 저널 사이언스가 소개했다. 사물을 볼 때 후두엽과 측두엽 등에서 일어나는 혈류 변화 데이터를 AI가 분석해 그림으로 재현한 것인데, 시계탑과 기차 등 사람이 본 대상과 AI 재현한 이미지가 대략 비슷한 형태로 구현됐다. AI가 인간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앤스로픽의 이번 연구는 AI의 생각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인간과 AI의 ‘블랙박스 열기’ 경쟁이 시작된 셈이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05.25(토) 하늘의 에어포켓

▲일러스트=양진경

 

몇 해 전 방글라데시에 취재 갔다가 수도인 다카 상공에서 난기류를 만났다. 비행기가 순간적으로 동력을 잃은 듯 급강하하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인터넷에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찍어 올린 동영상이 수두룩하다. 인천을 출발해 미국 댈러스로 가다가 태평양 상공에서 난기류를 만난 한 여행객은 유언까지 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2001년 11월 12일 에어버스 소속 항공기가 뉴욕 JFK공항을 이륙하다가 난기류에 균형을 잃고 추락해 탑승객 260명이 전원 사망했다. 다른 항공기가 1분 40초 먼저 이륙하며 난기류를 일으켰는데 여유를 두지 않고 뒤따랐다가 휩쓸렸다. 비행기가 일으키는 난기류를 항적 난기류(Wake Turbulence)라 한다. 공항 주변에서 순간적으로 부는 급변풍(wind shear)과 함께 난기류 사고의 주범이다.

 

▶파일럿을 떨게 하는 난기류는 항적 난기류와 급변풍처럼 낮은 곳에 부는 돌풍이다. 비행기가 지상과 가깝기 때문에 균형을 잃으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1만m 상공을 날다가 만나는 고고도 난기류는 아무리 거칠어도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요즘 여객기는 압력 2.5G(지구 중력의 2.5배)에도 견디도록 설계돼 있는데 자연 상태에선 폭풍을 만나도 1G를 넘는 경우가 드물다. 운항 고도도 워낙 높아 난기류를 만나 급강하해도 자세를 고쳐 잡고 상승할 시간·공간적 여유가 있다. 7000m를 급강하했다가 날아오른 사례도 있다.

 

▶싱가포르 항공 소속 여객기에서 난기류 사고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항공기 여행은 일반화하는데 기후변화로 지난 40년간 두 배 넘게 난기류 사고가 늘었다니 걱정이 크다. 사고 항공기가 만난 난기류는 고고도 난기류 중에서도 맑은 하늘에 공기 밀도 차이로 발생하는 청천 난기류다. 대기 중에는 밀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에어 포켓이 있다. 비행기가 여기 들어가면 양력을 잃는다. 사고 항공기도 1800m를 3분 만에 급강하했다. 이 때문에 탑승객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나동그라지며 다쳤다. 바다의 에어 포켓은 생명을 지키는 희망이지만 하늘에선 반대로 사고를 일으킨다.

 

▶고공 난기류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한다. 특히 청천 난기류는 레이더에도 잘 안 잡혀 안전벨트 표시등이 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닥치곤 한다. 항공사들이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안전벨트를 무조건 매라고 권하는 이유다. 이번 사고의 유일한 사망자는 심장마비라는 사실도 눈여겨보게 된다. 불의의 사고가 있을 수 있다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서 나쁠 것은 없을 듯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05.27(월) "기어서라도 무대에 오를래요"

▲일러스트=이철원

 

2005년 세계적 팝스타 셀린 디옹이 라스베가스 무대에서 열창을 뽑아냈다. 백댄서 수십명이 숨 가쁜 율동으로 무대 뒤편을 흔들었다. 어깨를 드러낸 빨간 드레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를 흩날리며 셀린이 ‘나는 살아 있어요’(I am alive)를 불렀다. ‘당신이 나를 부를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죠.’ 이날 공연은 미국 근육장애협회 기금 모금 행사였다. 당시 무대를 뛰어다닌 셀린은 건강했다.

 

▶지난주말 아마존 스트리밍 플랫폼이 쉰여섯 살 셀린의 투병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일까. 병명이 희소 신경 질환인 ‘전신 근육강직 인간증후군’(Stiff-person syndrome)이다.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면서 뼈를 깎는 듯한 경련을 일으키며 악화된다. 이 병은 백만 명에 한 명꼴로 걸리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세 배쯤 많다. 나이를 가리지 않지만 40대가 좀 더 위험한 걸로 알려졌다.

 

▶셀린은 앨범보다 라이브 무대가 더 돋보이는 디바로서 독보적이다. 다큐 예고편에서 셀린은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내 목소리는 인생의 지휘자”라고 했다. 또 셀린은 지금까지 “우리가 마법을 만들어냈다”고도 했다. 영화 ‘타이타닉’ 주제곡 ‘마이 하트 윌 고 온’(My Heart Will Go On)으로 널리 알려진 셀린은 그래미상 5회, 아카데미 주제가상 2회 수상자다.

 

▶셀린은 불어-영어 두 언어로 노래한다. 프랑스 언론과 인터뷰에서 지난 두 해를 돌아보며 “처음에는 ‘왜 나야?’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잘못인가?’ 같은 질문을 수없이 던졌다”고 했다. “기적 같은 치료제가 나오길 바랐다”고도 했다. “하지만 삶은 당신에게 어떤 답도 주지 않는다. 그저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걷는 것도 어렵고 성대(聲帶)를 쓰는 것도 힘들다. 평생 매니저로서 함께 ‘마법’을 일궜던 남편이 8년 전 후두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일시 활동을 접었던 셀린이 다시 시련을 맞았다.

 

▶두 차례 내한 공연을 했던 셀린은 한국을 좋아했다. 한복을 입고 아들과 온돌에 앉은 사진도 있다.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와 함께 ‘세계 3대 디바’로 불리지만 둘에 견주어 가창력 논란이 없다. 다큐에서 셀린은 약 먹는 장면까지 보여주면서 “공연은 힘들지 않다, 그러나 공연 취소는 정말 고통스럽다”고 했다. 셀린은 “사람들이 미치도록 그립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뛸 수 없으면 걷고, 걸을 수 없으면 기어서 가겠다”고 했다. 가수에게 무대란 그런 것이다./

김광일 기자

 

05.28 젠슨 황이 들르던 용산전자상가

▲일러스트=이철원

 

기자가 중학생이던 1990년대 중반,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달려가던 곳이 서울 용산전자상가였다. 부품이나 주변 기기를 살 때도, 메모리 업그레이드를 할 때도 그곳에 가면 다 해결됐다. 그런데 꼭 친구와 함께 가곤 했다. 당시 그곳은 ‘용던(용산전자상가 던전)’으로 불렸다. 인기 게임 ‘던전’ 속의 지하 감옥처럼 으스스하고 복잡한 미로에 길을 잃기 십상이란 뜻이었다. ‘용팔이’라 불리는 호객꾼들도 악명 높았다. 호객에 당하지 않도록 컴퓨터를 잘 아는 친구와 동행하는 것을 게임 용어를 빌려 ‘항마력을 높인다’고 했다.

 

▶주가 1000달러를 돌파한 AI(인공지능)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도 1990년대 중반 창업 초기 한국에 올 때면 자주 용산전자상가에 들렀다고 한다. 용산이 아시아 최대의 전자제품 메카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IT 마니아의 성지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PC 보급과 게임의 인기, 워크맨·MP3 플레이어 유행 등에 올라타 90년대 말엔 하루 유동 인구 10만명, 연 매출 10조원을 기록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2000년대 들어 유통 문화를 바꾼 온라인 쇼핑은 용산전자상가도 쇠락의 길로 몰았다. 온라인으로 IT 제품 가격을 쉽게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용산전자상가를 찾는 발길이 눈에 띄게 줄었다. 상인들은 줄어드는 손님을 잡으려 도 넘는 호객 행위와 바가지 영업을 반복했다. 중고 제품을 새것인 양 파는 비양심이 악순환을 거듭하며 쇠락을 가속화시켰다. IT 제품을 잔뜩 진열했던 매장은 하나 둘씩 온라인 판매 업체의 창고로 바뀌었다.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와 중국 선전의 화창베이는 용산전자상가와 비슷하게 시작했지만 다르게 진화했다. 아키하바라는 온라인 쇼핑의 태풍이 불어오자 오타쿠(마니아) 문화로 눈을 돌렸다. 게임 캐릭터, 성인용 장난감 같은 서브컬처를 겨냥하면서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의 성지로 살아남았다. 글로벌 IT 제품의 짝퉁 제조지로 꼽혔던 화창베이는 부품 생산과 공급력을 무기로 로봇 산업 기지로 탈바꿈했다. 로봇에 들어가는 각양각색의 부품을 맞춤형으로 공급한다.

 

▶소멸 위기에 몰린 용산전자상가는 혁신 산업 기지로 변신해 부활을 모색하고 있다. 서울시는 인근 국제업무 지구와 연계해 용산을 AI·메타버스 등 신산업 거점 공간으로 재개발한다는 전략을 내놓았다. 판매·유통 일변에서 벗어나 연구개발과 서비스 기획, 글로벌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조성한다는 것이다. 젠슨 황이 한국에 오면 다시 용산을 찾는 미래를 기대해본다.

김성민 논설위원

 

05.29 귀하신 몸 된 '오륙도'

▲일러스트=박상훈

 

지난해 현대차가 10년 만에 생산직 400명을 뽑았다. 억대 연봉 일자리이기에 수만 명이 몰려 화제가 됐었다. 10년만의 생산직 채용은 매년 2000명이 넘는 정년 퇴직자 탓에 생산 공정 자동화만으로는 인력 공백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조는 정년 64세 연장을 요구하지만, 회사로선 인건비 부담과 청년 채용 필요성 탓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의 집단 은퇴로 심각한 인력난을 먼저 겪었다. 최근 20년간 생산가능인구가 1000만명이나 줄자 일본 정부는 2013년 ‘고령자 고용안정법’을 개정,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했다. 일본 기업들은 정년을 아예 폐지하거나, 65세까지 늘리거나, 잔류 희망 직원을 ‘계약직’으로 재고용하는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차 베이비 부머(1964~1974년생) 근로자 740만명이 정년을 맞이한다. 생산 현장의 인력 공백이 심각해진다는 뜻이다. 생산직 5명 중 1명이 5년 내 정년을 맞는 포스코, 용접공 10명 중 4명이 50대인 HD현대중공업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오륙도(56세에 직장 다니면 도둑놈)라며 푸대접받던 고령 근로자들이 귀한 몸이 되면서, 동국제강처럼 정년을 연장(62세)하는 기업도 하나둘 생기고 있다. 반면 은행 같은 사무직 대기업에선 여전히 명퇴 바람이 거세다.

 

▶숙련공이 절실한 제조업 기업들은 로봇 투자를 크게 늘리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로봇 공학의 발달로 숙련공의 손기술을 로봇에 이식하기가 용이해졌다. 테슬라는 인간처럼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쓰는 로봇 ‘옵티머스’를 조만간 전기차 생산 라인에 투입할 예정이다. 현대차도 로봇 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를 숙련공 대체재로 개발 중이다. 국내 조선소에선 용접 로봇이 숙련공을 대체해 가고 있다.

 

▶로봇의 득세를 우려한 빌 게이츠는 ‘로봇세’를 만들어 실직자 교육 재원으로 쓰자고 하지만, 로봇 공학은 고령 근로자의 취업을 돕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사람과 한 몸이 돼 신체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웨어러블 로봇은 고령 근로자도 계속 생산 현장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다. 2022년 기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2.7세인데, 직장인의 실제 퇴직 연령은 49세라는 통계가 있다. 불일치가 심각하다. 동서양의 은퇴 전문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노후 행복의 1순위로 ‘오래 일하기’를 꼽는다. 개인의 분발도 필요하지만, 사회 인식이나 정부 정책에서 ‘고령’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김홍수 논설위원

 

05.30 분뇨 전단

▲일러스트=김성규

 

전단(삐라)이 심리전 수단으로 본격 쓰인 건 1차 세계대전 때부터다. 보급난에 시달리던 많은 독일군이 연합군의 항복 권유 전단에 흔들려 투항했다. 2차대전 때 연합군은 비행대대를 동원해 항복 요령을 담은 전단을 뿌렸다. 아이젠하워가 서명한 명령서 형태였다. 독일군이 명령에 약하다는 점에 착안했다. 80억장이 넘었다. 일본에 공습 예고 전단을 뿌리자 피란 행렬이 줄을 잇고 군수공장이 멈췄다. ‘종이 폭탄’이라 부를 만했다.

 

▶6·25 전쟁 때 국군·유엔군은 25억장을 뿌렸다. 귀순하면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휴전 이후 북은 체제 과시용 전단을 살포했다. 파출소에 가져가면 학용품으로 바꿔줬다. 국력이 역전된 뒤 대북 심리전은 우리 쪽의 무기가 됐다. 일기예보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최전방에서 ‘인민군 여러분 내일 우산 준비하세요’라고 방송했다. 다음 날 진짜 비가 오면 북한군은 ‘멘붕’에 빠졌다. 우리한텐 일상적이지만 북한군 입장에선 한국의 체제 우월성을 절감케 했다.

 

▶냉전이 한창일 때 뮌헨에 있던 미국 자유유럽방송은 풍선 35만개를 동쪽으로 날려보냈다. 공산당 압제를 풍자·비판하는 전단 수억 장이 동유럽 각국에 뿌려졌다. 공산 정권들은 기를 쓰고 격추하려 했다. 주민 동요가 심각했던 것이다. 훗날 ‘풍선이 철의 장막을 뚫었다’는 말이 나왔다. 한국 민간 단체들의 대북 전단 살포는 이를 모델로 했다. 전단엔 김일성의 가짜 항일 운동, 북한의 후진성 등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는다. 한류 콘텐츠가 담긴 USB, 컵라면, 1달러 지폐를 매다는 단체도 있다. 라이터, 볼펜 등을 보고 감탄한 북 주민 군인은 부지기수다. 이를 접하고 탈북 생각을 키웠다는 탈북민이 많다.

 

▶국민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북 정권은 진실을 담은 대북 전단을 가장 두려워한다. ‘전단에 담긴 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선전하면서 실제 대북 전단과 함께 온 라면과 사탕에 독을 넣어 산과 들에 놓고 있다. 이렇게 죽은 주민과 군인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 ‘라이터를 켜면 터진다’고 선전해 라이터를 주운 군인이 몇 번을 바위에 던져봤다고 한다. 북은 대북 전단을 통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건너온다는 황당한 주장도 했다.

 

▶28일 밤 경기도에 ‘공습 예비 경보’ 문자가 발송됐다. 날이 밝고 보니 가축 분뇨, 담배꽁초, 종이 쓰레기를 매단 북 풍선이었다. 전국에서 300개 가까이 발견됐다. ‘×삐라’ ‘진짜 화학전’이란 말이 나왔다. 그동안 김정은의 비이성적 지시는 많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지시가 여과 없이 시행되는 게 북한이다.

이용수 논설위원

 

05.31(금) 토마스 헤더윅의 노들섬

▲일러스트=이철원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잘 지은 건축물이 도시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모범 사례다. 사람만 많고 특징 없던 대도시 서울에 DDP가 세련된 문화 도시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다. 샤넬, 루이비통 등이 이곳을 전시장으로 택했다. 외벽을 활용한 대형 미디어 파사드 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개관 첫해 방문객 688만명으로 시작해 올가을이면 누적 방문객 1억명을 돌파한다. 세상은 이를 ‘DDP 효과’라고 한다.

 

▶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가 ‘곡선의 건축가’라면, 토마스 헤더윅은 인공과 자연을 융합해 전에 없던 도시 풍경을 창조하는 건축가다. 뉴욕 허드슨강의 인공섬 ‘리틀 아일랜드’와 상하이 푸둥지구의 대규모 복합 주거단지 ‘1000 트리즈’ 등 주로 콘크리트와 나무를 독창적으로 접목해 전혀 새로운 도시 풍경을 만들어낸다. 지난해 11월 도쿄 도심에 등장한 ‘아자부다이힐스’에도 참여했다. 330m 높이 빌딩 상부와 나무가 우거진 곡선 형태의 하부 녹지를 결합한 설계로 준공 반년도 안 됐는데 벌써 도쿄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됐다.

 

▶헤더윅의 다음 목표가 서울 한강 노들섬으로 정해졌다. 서울시의 ‘노들섬 글로벌 예술섬’ 공모에 그의 설계작 ‘소리풍경(Soundscape)’이 29일 최종 선정되면서다. 헤더윅은 지난해 ‘헤더윅 스튜디오:감성을 빚다’ 서울전에서 노들섬의 미래 모습을 먼저 공개했다. 우뚝 솟은 콘크리트 기둥들 위로 공중 정원이 펼쳐졌다. 많은 이가 ‘내가 아는 그 노들섬 맞느냐’며 감탄했다.

 

▶노들섬은 1917년 일제가 한강 인도교를 놓으며 만든 인공섬이었다. 1960년대 한강 개발 때는 건설용 모래 공급지였다. 1970년대 유원지로 개발하려다 무산된 후 오래 방치됐다. 이명박 시장 때 이 섬에 오페라하우스 건축을 추진했고 오세훈 시장도 예술섬으로 만들려 했지만 모두 무산됐다. 박원순 시장이 채소를 키우는 ‘노들텃밭’을 조성하기도 했다.

 

▶헤더윅은 당초 1조5000억원을 들여 40m 높이 기둥 위에 정원을 조성하고 부속 시설도 화려하게 지으려 했다. 그러나 최종안은 3500억원을 투입하고 기둥 높이도 20m 정도로 낮춘다고 한다. 규모가 작아져 아쉽다. 당장은 돈이 좀 더 들더라도 국민과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기념비적 건축이 결국 더 큰 이익이 된다. DDP도 원안보다 크게 축소됐다. 지금은 “초기 이미지대로 만들었다면 더 아름다웠을 것”이라며 아쉬워 한다. 노들섬이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이 한강에서 만나는 첫 랜드마크가 되길 기대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