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直說 2024-05/ 05.01(수) 국민 미래 걸린 ‘연금 개혁’ 5월 중 처리할 기회 있다 - 05.31 용의주도 '사법 개혁' 對 한밤 홍두깨 '의료 개혁'
正論直說 2024-05/
05.01(수) 국민 미래 걸린 ‘연금 개혁’ 5월 중 처리할 기회 있다

▲주호영 국회 연금개혁특위 위원장이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연금개혁특위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24.04.30 이덕훈 기자
국회 연금개혁특위가 30일 산하 공론화위가 보고한 연금 개편안을 논의했다. 공론화위에 올라간 방안은 내는 돈을 현행 소득의 9%에서 13%로 올리고 받는 돈은 현행 40%에서 50%로 늘리는 것이 1안이다. 내는 돈을 12%로 올리고 받는 돈은 지금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2안이다. 공론화위는 시민대표단을 선정해 토론·학습을 진행한 다음 투표를 통해 1안을 다수안으로 특위에 보고했다. 민주당은 이 1안을 지지하고 있다.
문제는 1안은 미래 세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방안이라는 사실이다. 1안대로 하면 국민연금 기금 고갈 시점은 2055년에서 2062년으로 7년 늦춰지지만 받는 돈이 늘어나면서 2062년부터 2093년까지 누적 적자가 기존 대비 702조원이 더 늘어난다. 현재 10대인 세대부터 문제가 발생하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연금 제도와 복지 제도가 다 무너질 것이다. 시민대표단은 이런 문제를 제대로 모른 채 투표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소폭이라도 내는 돈 인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국민연금 내는 돈을 26년째 못 올려 이제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미래 세대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빨리, 5월에 끝나는 21대 국회에서 내는 돈 인상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우리나라 연령층별 인구수가 가장 많은 40대와 50대가 은퇴하기 전에 보험료를 가능한 한 많이 적립하는 것이 재정 안정에 필수적이다. 민주당이 연금 개혁에 찬성 입장을 밝힌 지금이 기회일 수 있다.
방법이 없지 않다. 1안과 2안을 절충하는 것이다. 내는 돈과 받는 돈을 1안과 2안의 평균(각각 12.5%, 45%)으로만 절충해도 받는 돈을 어느 정도 늘리면서 미래 세대의 부담도 훨씬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특위 민주당 간사도 “특위 논의 과정에서 소득 보장, 재정 안정 둘 다 잡을 절충안을 찾겠다”고 했다. 1안과 2안을 선택한 비율 격차가 그렇게 크지도 않다. 두 안을 절충해 5월 중에 통과시킨다면 ‘최악’ 평가를 받는 21대 국회는 나라를 위해 정말 큰 일을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5-01 깜짝 성장 명암과 물가 안정 중요성
한국은행이 지난 26일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을 전분기 대비 1.3%(전년 동기 대비 3.4%)로 발표하자 경기회복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기대가 나온다. 정부와 한은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인 2.2%와 2.1%를 넘을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게 한다. 한은의 발표에 기획재정부가 직접 백브리핑한 것만 봐도 정부가 얼마나 고무됐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세계적인 고금리가 계속되는 상태에서 정부의 별도 경기부양 정책이 없이도 달성된 성과여서 더욱 그렇다.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를 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먼저, 민간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민간의 기여도는 1.3%로 정부(0%)를 압도한다. 다음으로, 내수와 대외거래의 성장 기여도가 각각 0.7%와 0.6%만큼 경제성장률을 같이 견인했다. 내수에서도 최종 소비지출 기여도는 0.4%였고, 투자는 0.5%로 같이 성장을 주도했다. 대외거래도 반도체와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수출 확대가 두드러졌다. 올해는 일본의 수출을 넘어서는 기대를 해 본다. 이미 1분기 수출은 일본의 97%선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렇다고 안심하거나 자만하기엔 아직 이르다. 당장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높일 필요는 더욱 없다. 국내외적 환경은 장밋빛 전망을 하기에 녹록잖기 때문이다. 이번의 높은 성장률은 지금까지 낮은 성장률의 기저효과 요소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지난해의 경우 2분기부터는 전분기 대비 성장률이 모두 마이너스였다. 물론 최근 우려되는 미국의 1분기 경제성장률(연율 기준 1.6%)은 역기저효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해 4분기 경제성장률(연율 기준 3.4%)에 비해 하락한 것으로 미국이 경기침체에 들어갔다고 판단하긴 이르다.
단순히 통계적 문제로만 치부할 것도 아니다.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사태 등에 의한 유가 상승 기조가 아직 꺾이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거의 4년 이상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스태그플레이션 구름이 아직도 걷히지 않고 있다. 국내 상황도 어렵다. 지속된 고금리와 경기침체로 자영업자를 비롯한 저소득층의 누적된 부채 부담은 가계소비 증가를 억누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에 의한 연체율 증가도 금융기관에 불안을 주어 기업 투자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나 정치권은 경기부양 정책을 만지작거리면 위험하다. 아직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중앙은행의 목표치인 2%를 웃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3.1%로 3개월 연속 3%를 넘었다. 농산물 가격은 안정됐지만, 국제유가나 고환율에 의한 외부 요인이 물가를 끌어올렸다. 지난 3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을 보면 많은 국가가 2%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미국(3.5%)이나 영국(3.2%) 독일(3.1%)은 아직 높은 수준이다.
현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가안정이다. 거론되는 이자율 인하나 추경을 통한 경기부양은 물가를 올려 경제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이들은 정책의 원인이 아니라 물가안정의 결과로 채택돼야 한다. 특히, 야권의 ‘전 국민 25만 원 지급’은 고통 완화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재정적자 악화 및 물가만 올릴 것이다. 원한다면, 진정으로 고통받는 저소득층과 영세 자영업자를 가능한 재정 범위에서 더 많이 도와야 한다.

문화일보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05.01(수) “세자”와 점수 빈칸, 말문이 막히는 선관위 채용 비리

▲경기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23.6,7/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전국 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10년간 291차례 진행한 경력직 공무원 채용 전부에서 비리나 규정 위반이 있었던 것으로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적발된 채용 비리가 1200여 건에 달한다. 선관위 전현직 직원의 아들딸과 예비 사위 등 21명이 합격했고, 이 중 12명은 부정하게 채용됐다. 감사원은 전직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장관급) 1명과 사무차장(차관급) 1명 등 전현직 27명을 검찰에 수사 요청했다. 다른 사무총장 등 22명의 비리 의혹 자료도 검찰에 넘겼다. 선관위는 4급 이상이 350명 정도인 조직인데 전현직 49명이 한꺼번에 비리 혐의를 받는 것이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감사원이 밝힌 채용 비리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선관위는 전 사무총장 아들을 뽑으려고 없는 자리를 만들더니 면접관은 ‘아버지 동료’들로 구성했다. 면접에서 거의 최고점을 받아 합격한 아들에게 근거 규정도 없이 관사까지 제공해 줬다. 선관위에서 총장은 최고 권력자나 다름없기 때문에 아들은 “세자”로 불렸다고 한다. 다른 전 총장의 딸을 선발할 때는 면접위원에게 ‘빈 점수표’를 제출하라고 한 뒤 점수를 조작했다. 전 사무차장의 딸도 채용 공고 없이 특정인의 지원만 받는 인사를 통해 원하는 자리를 얻었다. 부패가 만연한 국가에서나 벌어질 법한 비리 행태에 말문이 막힌다.
감사원에 따르면 지방선관위 6급이 2019년 군수를 찾아가 선관위 4급 자녀 관련 인사 청탁을 했다. 군수가 처음엔 거절했다. 그러나 “다음 선거에서 다시 출마하려는데, 선관위가 계속 압박하니 동의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선관위는 모든 선거를 지도·감독하기 때문에 선출직 공무원이나 출마 생각이 있는 사람은 그 눈치를 봐야 한다. 국회의원도 선관위 앞에선 신경을 쓴다. 선출직에게 선관위는 권력 기관이다.
선관위는 그동안 ‘헌법상 독립 기구’를 내세우며 설립 6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감사원의 직무 감찰을 받지 않았다. 채용 비리 의혹이 불거졌는데도 자체 감사를 고집하더니 면죄부를 줬다. 조사가 진행 중인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을 징계 전에 면직 처리해 공직 재임용이나 연금 수령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했다. 감시 사각지대에서 자기들끼리 특혜를 주고받으며 ‘신의 직장’을 만들었다. 이러니 제 일을 제대로 할 리가 없다. 대선 때 투표용지를 소쿠리에 담아 옮기고 이미 기표한 용지를 유권자들에게 나눠줬다. 주요 선거가 다가오면 무더기로 휴직한다. 북한의 해킹 공격을 8차례 받고도 알지 못했다. 해킹 조사도 거부했다. 이 선관위는 그대로 둘 수 없다.
조선일보 사설
05-01 “사무총장 아들은 세자”… 선관위 자녀 특혜 오죽했으면
중앙선거관리위 고위직과 중간관리자 27명이 특혜 채용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어제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시행된 291차례 경력 채용을 전수조사한 결과 법·규정 위반 건수가 1200건이 넘는다고 한다. 선관위 간부가 인사 담당자들에게 자녀 채용을 청탁하면 이들이 면접위원을 바꾸거나 합격 순위를 조작하는 등 조직적인 불법 행위가 벌어졌다. 사무처 1인자인 사무총장의 아들이 채용과 전보 등에서 잇달아 특혜를 받자 선관위 직원들이 내부 메신저에서 그를 ‘세자’로 지칭할 정도였다고 한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김세환 전 사무총장이 사무차장 재직 당시인 2020년 아들이 지역 선관위에 지원하자 별다른 사유 없이 선발 인원이 예정보다 늘었고, 인사 담당자들은 그의 아들에게 유리하도록 채용 조건을 ‘8급, 35세 이하, 인천 출퇴근 가능자’로 제한했다. 면접위원도 김 전 사무총장과 가까운 인사들로 구성돼 그의 아들은 거의 만점을 받았다. 박찬진 전 전남선관위 사무총장 딸의 경우도 면접관들이 사전에 조율한 대로 점수 칸을 비워 둔 채 제출했고, 인사 담당자가 높은 점수를 써넣어 합격시켰다. 한마디로 ‘아빠 찬스’를 실현시키기 위한 맞춤형 채용이었다.
상임위원의 아들이 채용될 수 있도록 인사 담당자가 면접관들에게 평정표를 연필로 작성하도록 한 뒤 지우개로 지워 순위를 뒤바꾼 경우도 있었다. 직원 자녀가 소속 기관인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전출 동의서를 받지 못하자 과장급 간부가 지도·감독 대상인 선출직 지자체장을 압박해 동의를 받아오기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선관위 간부 자녀들이 채용되면서 합격권에 들었던 지원자가 탈락한 사례도 확인됐다.
선관위는 지난해 채용 비리 의혹이 불거졌을 때 독립적인 헌법기관임을 내세워 자체 감사를 고집했다. 하지만 이번 감사로 직원 자녀들에게 국가공무원이 될 수 있는 ‘프리패스’를 남발해 온 실상이 밝혀졌다. 선거가 공정하도록 관리해야 할 기관이 ‘불공정의 끝판왕’을 보여줬다는 비판에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앞으로 이어질 검찰 수사는 선관위 채용 비리의 깊은 뿌리를 더욱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동아일보 사설
05-01 비리·방만 복마전 선관위, 해체 수준 대개편 나설 때
선거관리위원회의 채용 비리와 방만한 조직·운영 등이 복마전 수준인 것으로 거듭 드러났다. 감사원이 30일 발표한 감사 결과에 따르면, 중앙선관위와 각 지역 선관위가 지난 10년간 진행한 291차례 경력 채용에서 법 규정 위반이 1200여 건에 이른다. 전·현직 직원 27명에 대한 수사가 의뢰됐다. 자녀 등 12명의 부정 채용이 적발됐다. 일각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일당으로 비칠 정도여서, 해체 뒤 재구성하는 식의 대개편이 필요하다.
김세환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의 아들은 채용 과정과 채용 이후 전보, 관사 제공, 교육선발 과정 전반에서 특혜를 받았고, 세자(世子)로 불릴 정도였다. 서울선관위 상임위원 아들 면접에서는 “평가표를 연필로 작성해 달라”고 주문한 뒤 지우개로 점수를 지워 조작했다. 불법과 특혜가 관행화한 ‘그들만의 비리 짬짜미’ 기관이었던 셈이다.
선관위는 1963년 설립 이후 헌법기관이라며 한 번도 감사원의 직무감찰을 받지 않았다. 지난해 6월 ‘아빠 찬스’ 비리가 불거져 따가운 비난이 일자 채용 부문에 한해 감사를 받은 결과가 이 정도다. 선거 준비를 위한 선거관 해외 파견 제도는 해외 연수용으로 전락했고, 선거를 앞두고 대거 휴직하는 등 기강 해이도 심각하다. 외부 감사위원회 설치 등만으로는 실효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방만한 조직 축소가 시급하다. 1963년 348명에서 현재 약 3000명으로 늘어났다. 비상근인 중앙선관위원장을 상근 체제로 바꿀 필요도 있다. 헌법상 9명 선관위원 중 위원장을 호선하게 돼 있지만, 대법원장이 지명한 대법관이 선관위원장을 겸임하는 게 관례였다. 현행 체제로는 한계가 크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전직 대법관을 선관위원장으로 선출해 상근하도록 개편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도 있다.
문화일보 사설
05.02 [단독] 선관위 사무총장은 ‘깡통 폰·노트북’ 제출…직원은 면접서류 갈아버려

▲감사원이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박찬진(오른쪽) 전 사무총장과 송봉섭 전 사무차장의 감사 방해 혐의를 보강 수사해 달라며 검찰에 관련 자료를 보냈다. 두 사람은 ‘자녀 채용’ 의혹으로 사퇴했다. 사진은 지난해 5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에 출석한 박 전 총장과 송 전 차장./연합뉴스
감사원의 선거관리위원회 특혜 채용 비리 감사 결과, 선관위가 관련 자료를 은폐하는 등 조직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감사를 방해해 온 정황이 드러났다.
1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감사원은 2022년 정기 감사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인사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선관위가 인력 운영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감사원이 요구한 자료엔 선관위의 직원 승진 심사 자료도 포함됐다. 승진 심사가 규정과 절차에 맞게 진행되는지 확인하려는 것으로, 감사원이 다른 기관을 감사할 때도 통상적으로 들여다보는 항목이다.
자료 제출 요구를 받은 선관위는 사전 점검 과정에서 5급 승진 심사 업무에 잘못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승진 대상이 되려면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 ‘교육 점수’를 쌓아야 하는데, 점수 산정이 잘못돼 애초 승진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승진한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선관위는 감사원에 5급 승진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하면서 다른 직급 승진 심사 자료만 제출했다. 감사원이 여러 차례 자료 제출을 독촉했지만 선관위는 응하지 않았고, 결국 당시 감사에선 문제가 적발되지 않았다.

▲그래픽=김성규
선관위의 이런 자료 은폐 사실은 감사원이 지난해 7월 선관위 간부 자녀 특혜 채용 의혹에 대해 감사에 착수하면서 꼬투리가 잡혔다. 감사원이 선관위 직원들의 업무용 PC를 포렌식해 봤더니, 2022년 감사에 대비해 5급 승진 심사 자료를 숨기는 방안을 담은 내부 보고서가 발견된 것이다. A4 용지 1쪽짜리 보고서에는 ‘교육 점수를 채우지 못한 사람을 승진시키는 것이 법령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선관위에는 그래도 되는 재량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과 함께, ‘감사원에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시된 것으로 전해졌다.
감사원은 이 보고서가 당시 박찬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과 송봉섭 사무차장에게 보고된 것으로 파악했다.
이에 따라 감사원은 박·송 두 사람이 감사를 방해한 혐의가 있다는 내용의 수사 참고 자료를 지난달 29일 검찰에 보냈다. 감사원 관계자는 “선관위가 자료 제출 요구 대부분을 거부해, 비위가 더 있을 가능성이 의심된다”고 했다. 선관위가 자료를 은폐한 2022년 감사에서도 선관위 직원 128명이 청탁금지법을 어기고 금품을 받고, 선거관리위원들이 법령에 근거도 없이 매달 수당 200만원을 받아온 사실이 적발됐다.
선관위는 이번 감사에서도 자료 제출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감사원이 선관위 직원 친·인척이 특혜 채용됐는지를 확인하려고 각 지역 선관위에 경력직으로 채용한 직원들의 인사 기록 카드를 요구하자, 지역 선관위들은 이들의 가족 관계와 얼굴 사진 등을 펜으로 까맣게 칠해 가린 자료를 내놨다.
박찬진 전 총장의 전임자인 김세환 전 사무총장이 선관위 내에서 ‘세자(世子)’로 불린 아들의 인사 비리 관련 증거를 없앤 정황도 포착됐다. 김 전 총장은 재직 중 선관위에서 휴대폰과 노트북 컴퓨터를 지급받아 사용했으나 2022년 3월 퇴임하면서 이를 반납하지 않았다. 감사원이 최근 김 전 총장이 무단 반출한 휴대폰과 노트북을 확보해 확인해 봤더니 모든 데이터가 지워져 있었다고 한다. 감사원은 김 전 총장에 대해 일단 선관위 물품을 횡령한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수사 참고 자료를 보냈다.
박 전 총장 딸을 특혜 채용해 준 혐의를 받는 전남선관위 직원들은 감사가 임박하자 관련 문서 파일을 변조했다가 적발됐다. ‘외부 면접 위원들에게 점수란은 비워둔 평가표를 받으라’는 등 특혜 채용을 위한 요령이 담겨 있는 문서 파일이었다. 전남선관위 직원은 이 파일을 열어 다른 내용을 입력하고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은폐를 시도했으나, 감사원이 다른 업무용 PC를 포렌식해 원본 파일을 찾아내면서 혐의가 드러났다.
신우용 전 서울선관위 상임위원 자녀 특혜 채용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서울선관위 직원도 감사를 앞두고 관련 문서를 파쇄했다가 적발됐다. 이 직원은 선관위 자체 감찰에선 ‘면접 위원들에게 신 전 위원 자녀의 가족 관계를 삭제한 인사 기록 카드를 제공했다’고 거짓으로 진술했다고 한다. 감사원 관계자는 “선관위 직원들이 자녀 특혜 채용 등 중대한 인사 비리에 대해 ‘관행’이라며 별것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거나 관련 증거를 인멸하는 등 감사에 강하게 저항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김경필 기자
05.03 차라리 지방자치제를 폐지하라
경기북도 새 이름 공모 결과 ‘평화누리 특별자치도’ 1등… 이 무슨 웃지 못할 희극인가
美日의 지방자치 성공 이유는 원래 각 지방, 별도 국가였기 때문… 반면 우리는 왕건 이래 중앙집권
저성장 고령화 국가적 난국… 지금 필요한 건 담대한 혁신이다

▲1일 오후 경기도 의정부시 경기도북부청사에서 열린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새 이름 대국민 보고회에서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새 이름 '평화누리특별자치도'가 공개되고 있다. /연합뉴스
외신 칼럼을 읽다 보면 종종 접하게 되는 표현이 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요술 막대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이다. 현실에서 달성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 상상의 힘을 빌려서라도 공유하고픈 의제를 강조하기 위한 화법이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평화누리특별자치도’ 때문이다. 지난 1일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발표한 ‘경기북도’의 새로운 이름 공모 결과다. 그 웃지 못할 희극을 보며 필자의 소망은 염원으로 바뀌었다. 내게 요술 막대가 있다면 지방자치제를 폐지할 것이다.
곧장 돌아올 반론.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의 초석 아닌가? 미국, 독일, 일본 등 민주주의 선진국을 봐도 모두 지방자치제를 충실히 지키고 있는 나라 아닌가? 이는 1987년 직선제 개헌 당시 지방자치제를 추진한 표면상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보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듯, 지방자치 선진국은 근대 국가 건설 이전부터 각 지방이 별개의 나라(state, 国)를 이루고 살던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지역민이 스스로의 일을 알아서 처리하되, 중앙정부가 필요한 사안에서 연방을 이루는 ‘상향식 지방자치’가 탄생한 이유다.
반면 우리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지금껏 천 년의 역사 동안 중앙집권 체제로 살아왔다. 일제의 식민 통치 및 해방과 분단을 겪은 후에도 중앙집권 체제는 고스란히 유지됐다. 그러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 우리는 각 지역에 맞는 산업을 국가가 특정해 육성하는 수출 주도 경제 체제를 갖추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선진국의 지방자치와 달리 우리의 지방자치는 ‘국가 주도형 지방자치’, ‘하향식 지방자치’라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일본이나 미국의 지방자치와는 전혀 다른 단어다. 각 지역이 스스로의 일을 자신의 예산 내에서 알아서 처리한다는 뜻이 아니다. 중앙의 예산을 타내기 위해 무한 경쟁을 벌인다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선거철마다 예타 평가를 무시하는 온갖 의제와 특별법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공항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대신 고추를 말리고 있는 이유, 직선으로 달리며 진짜 ‘거점’에만 서야 할 KTX가 오송분기점에서 굳이 한 번 꺾고 내려가는 등등의 이유다.
지방자치제는 대한민국을 ‘원 팀’이 아니도록 갈가리 찢어놓고 있다. 소위 ‘잘사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내가 내는 세금을 저 ‘못사는 동네’에 쓴다며 못마땅하게 여긴다. 반대로 ‘못사는 동네’ 사람들은 너희가 혜택을 독식해서 ‘잘사는 동네’가 된 것 아니냐며 고까워한다. 불필요하게 큰 시청, 도청, 구청을 지어가며 예산을 펑펑 낭비하는 건 그러한 심리의 반영이다. 서로 밥그릇을 힐끔거리며 남 주기 아까우니 내가 다 먹어치워야겠다는 놀부 심보로 나라가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다른 나라가 어찌 됐건 우리의 지방자치제는 그런 제도다. 이제는 그 누구도 국가적 차원의 어젠다를 떠올리거나 추진할 수 없다. 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자체의 지자체에 대한 투쟁’만 남았다. 게다가 그러한 ‘국가 실종’은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지방 소멸을 막고 인구를 분산하여 출산율을 회복하려면 서울·수도권과 별도의 메가시티 광역권을 만들어야 한다. 지역별 산업 플랜, 중소도시의 통폐합, 인프라의 재구축을 해도 이룰까 말까 한, 제2의 건국에 버금가는 사업이다. 지방세 수입과 지출을 둘러싼 갈등이 ‘경기북도’ 분도로 치닫고, 그 위에 특정 연령대의 정치 세력이 북한을 향한 기괴한 집착을 담아 ‘평화누리특별자치도’라는 이상한 이름을 붙이려 드는 이 나라에서, 과연 그게 가능할까?
지방자치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랜 군사정권 시기를 마무리 짓고 민주화의 첫발을 내딛는 과정에서 여론의 상향식 창구 역할을 어느 정도 해냈다. 하지만 이제는 온 국민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지자체, 기초의회 의원 선거 따위가 아니다. 저성장 고령화의 시대를 돌파할 수 있는 신중하고 대담한 국가적 플랜이 절실하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요술 막대를 흔들어 지방자치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조선일보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05-03 어린이 위한 최고의 선물은 연금개혁
어린이 문제를 오랫동안 다뤄오면서 얻은 결론은, 아동의 현재성과 미래 가능성 두 가지를 모두 면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는 5일 어린이날을 이틀 앞두고, 아이들의 창창한 미래 발전 가능성은 외면한 채 현재성에 함몰하는 정치권 행태가 답답할 따름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진보 세력의 학생인권조례 결사 옹호다. 만시지탄이지만, 충남과 서울시의회가 여러 측면에서 잘못된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했다. 이에 서울시교육감은 재의를 요구하고, 야당 대표는 국회가 개원하면 아예 ‘학생인권법’을 제정하겠다고 한다.
대다수 언론은 이번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지난여름 한 초등학교 여교사 사망을 계기로 드러난 교권 추락 때문에 이뤄진 것으로 본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학생인권조례 폐지의 근본 원인은 그 자체의 결정적인 결함에 있다.(문화일보 2023년 7월 24일 자 ‘포럼’)
첫째, 학생인권조례는 교육이 지향하는 가치와 상황을 아예 무시한 채, 학생을 사회제도와 가르치는 교사에 맞서 대항하는 자연인으로 설정한다. 학생 인권이 소중하고 존중돼야 하지만 그것은 교육제도 안에서 성립돼야 한다. 그런데도 기존 7개 학생인권조례는 천편일률적으로 학생을 ‘감옥’인 학교에 갇힌 존재로 규정할 만큼 비교육적이다.
둘째, 학생인권조례는 지방의회가 제정하는 법규인데도 그 내용이 초헌법적이라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학생의 권리가 헌법이 규정하는 권리를 넘어서 존재하며, ‘교사 대 학생’의 대립 구도를 임의 설정해 학생의 저항권으로 타도해야 할 것처럼 규정한다.
셋째, 이 조례에 담긴 학생의 행복추구권은 학생들이 당면한 현재성만을 부각해 그들의 미래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러한 폐해가 학생인권조례가 마땅히 폐지돼야 할 논거다.
이처럼 잘못된 학생인권조례의 폐지를 무력화하기 위해 국회에서 입법화하려는 시도가 현장 교육 최고 책임자인 현직 교육감과 한때 법학 교수였던 한 야당 대표 간 정치적 야합에서 나왔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국회는 학생인권조례의 해악을 확대재생산하는 악법을 절대로 제정해선 안 되며, 나머지 5개 학생인권조례도 조속히 폐지돼 한다. 현행 조례는 진정한 사제동행이 비대칭적 관계임을 부정하는 비교육적 해악임은 물론, 거시적 안목에서 학생의 발전 가능성을 철저히 외면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자라나는 세대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그들이 장차 짊어질 짐을 덜어주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나랏빚이 엄청 늘어난 데다, 국가가 지급 보증한 내용까지 포함하면 명시적 통계로 나온 수치 이상의 나랏빚을 다음 세대가 갚아야 한다.게다가 국민적 총의를 모은다면서 마련한 국민연금 개혁안은 현행보다 나쁜 대안으로 미래 세대의 짐을 더 키운다.
‘진보’가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뜻인 만큼 자칭 진보 세력이 다음 세대인 오늘의 어린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현재성에 함몰된 학생인권조례 집착이 아니라, 국민연금을 비롯한 사회구조 개혁에 진력하는 것이다. 우리 선대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번영하는 대한민국을 일궜듯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후대의 ‘인권’을 도모하는 지름길이다.

문화일보 김정래 칼럼니스트, 前 부산교대 교수
05.04 한은 총재 “전제 다 바뀌었다” 고금리 장기화 경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현지 시각)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 총회 참석차 방문한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국내 기자단과 간담회를 갖고 "지난달까지 생각했던 통화 정책의 전제가 모두 바뀌었다"면서 '연내 금리 인하' 전망에 찬물을 끼얹었다./연합뉴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까지 생각했던 통화 정책의 전제가 모두 바뀌었다”면서 ‘연내 금리 인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동안 금융시장에선 미국이 하반기에 금리를 적어도 2~3차례 내리면,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0.5~0.75%포인트 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 총재는 ‘바뀐 전제’의 구체적 내용으로 미국의 금리 인하 지연, 1분기 경제 성장률의 예상 밖 호조, 중동 지정학 리스크 증대 등을 지적했다.
미국 경제 성장세가 꺾이지 않고 물가도 3%대 고공 행진을 이어가면서 미 연준은 금리 인하 시점을 계속 미루고 있다. 올 연말쯤 한 차례 소폭 인하에 그치거나, 올해는 금리 인하 없이 그냥 넘어갈 가능성마저 거론되고 있다. 한미 간 기준금리가 2%포인트 이상 역전된 상황에서 한국이 금리를 먼저 내리긴 어렵다. 1분기 GDP 성장률이 예상보다 훨씬 높은 1.3%(전 분기 대비)를 기록한 점도 금리 인하를 제약하는 요소다. 성장세가 견조한데 금리를 내리면 물가만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중동 리스크 고조로 국제 유가가 불안정하고 환율이 달러당 1400원대를 위협하면서 금리 인하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보고서에서 “금리가 내려가야 국민이 체감 경기 회복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상황이 매우 어렵게 된 셈이다. 고금리가 장기화되면 부채가 많은 취약 계층, 영세 소상공인, 한계 기업의 어려움을 더 가중시킬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당 주장처럼 ‘전 국민 25만원 지원금’을 뿌리는 것은 물가만 더 자극해 금리 인하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고금리발 난국을 일거에 타개할 묘책은 없다. 가계, 기업, 정부가 각자 위치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다. 기업은 생산성을 높여 고금리 충격을 흡수하고, 가계는 허리띠를 졸라매 빚을 줄여야 한다.
정부는 가계와 기업의 고통을 덜어줄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 소상공인 이자·세금 부담 경감 등 현재 시행 중인 취약 계층 지원 정책을 재점검해 추가 대책을 내놔야 한다. 고금리 직격탄을 맞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구조조정 작업을 신속히 마무리해 파급 효과가 큰 건설 경기가 선순환되도록 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5.04 보수는 왜 ‘내 편’을 끝까지 지키지 않나
[서민의 정치 구충제]
KBS 편파보도에 맞섰다 해고된
이영풍 기자 복직 불허 타당한가
▲일러스트=유현호
“KBS를 상대로 해임 취소를 위한 행정소송 절차에 돌입하겠습니다.”
지난달 23일 이영풍 전 KBS 기자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쓴 글이다. 먼저 이것부터 알아보자. 이영풍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해임됐을까. 2023년 초, KBS는 현 정부에 대해 말도 안 되는 편파·왜곡 보도를 쏟아내고 있었다.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와 함께한 일본 의장대 사열이 대표적인 예. 당시 KBS는 그 장면을 영상으로 내보내며 다음과 같은 해설을 내보냈다. “일장기를 향해서 윤 대통령이 경례하는 모습을 방금 보셨어요. 의장대가 우리 국기를 들고 있을 것 같지는 않고요.”
이 뉴스는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로 퍼져 나갔고, 좌파는 친일파 운운하며 대통령을 신나게 까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카메라 각도를 달리해 보면 의장대가 일장기와 함께 태극기도 들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문제가 되자 KBS는 “상황 설명에 착오가 있었다”며 사과했지만, 이 사건은 KBS에 시청료를 내지 않겠다는 불만이 폭주한 계기가 됐다.
이쯤 되면 KBS도 정신을 차려야 하지만, 편파 보도는 계속됐다. 그러는 가운데 희대의 ‘영상 바꿔치기 사건’이 터졌다. 그해 5월 18일, KBS 이소정 앵커는 뉴스에서 민노총 건설노조의 집회를 보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찰은 며칠 전 건설노조의 1박 2일 집회를 불법이라고 못 박고 강하게 처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이 집회시위법에 어긋나느냐는 논란이 불거졌고, 경찰은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당일 백 브리핑에서 경찰은 민노총 건설노조 집회에서 어떤 행위가 불법인지 구체 사례까지 제시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KBS가 이런 왜곡 보도를 한 이유는 구성원 대부분이 민노총 언론노조에 속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민노총 간첩단 사건이 터졌을 때, 유독 KBS만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은 것도 자신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이었으리라.
▲지난해 5월 18일 방영된 KBS '뉴스9' 보도 화면(왼쪽)과 이튿날 수정된 화면. 9시 뉴스 진행자인 이소정 앵커의 옷이 다르다. /KBS노동조합
하지만 KBS 안에는 소수일지라도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로운 기자들이 있었다. 이소정의 왜곡 보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 그러나 KBS가 보여준 대응은 코미디 그 자체였다. 잘못된 부분에 대해 사과하고 관련자를 징계하는 게 맞지만, KBS는 그렇게 하는 대신 18일 뉴스에서 문제가 된 부분만 재녹화해, 저장된 영상을 슬쩍 바꿔치기해버렸다. 이게 탄로 난 것은 해당 부분에서 이소정 앵커가 입은 옷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뉴스를 말할 때는 줄무늬 옷을 입었는데, 건설노조 집회 건을 보도할 때만 민무늬였으니까. 19일 뉴스를 진행할 때 입은 옷이 민무늬인 걸 보면, 다음 날 출근한 김에 바꿔치기 영상을 찍은 모양이다.
시청자를 속이려 든 것도 괘씸하지만, 들키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안 한 게 더 문제. 그런데도 KBS는 반성하지 않았다. 대신 여기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 이영풍 기자를 민노총 위원장 출신인 성재호 보도국장이 자기 방으로 불러 겁박했다. 성재호는 이전에도 민노총 간첩단 사건에 대해 KBS가 보도하지 않은 일을 비판한 정철웅 기자를 방으로 불러 겁박한 적이 있는데, 그 때문에 정 기자는 공황장애로 치료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성재호는, 이번 건에 대해서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보도국장실에서 나온 이영풍은 “국민 여러분, KBS를 살려 주십시오”라는 호소문을 만들어 보도국에 뿌린 뒤 김의철과 성재호의 사퇴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두 달간 계속된 그의 투쟁에 KBS 정상화를 바라는 시민들 성원이 답지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KBS는 이번에도 반성하지 않았다. 기자 정신을 제대로 보여준 이영풍에게 해고를 통보한 것이다.
해고를 당했지만, 이영풍의 투쟁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사장직에서 구차하게 버티던 김의철은 결국 KBS 이사회에서 해임됐고, 문화일보 출신 박민이 새로운 사장이 됐다. 취임 다음 날 박 사장은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고 한동훈 당시 검사장을 거짓으로 음해한 검언 유착 오보,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의 생떼탕 의혹, 지난 대선 때의 김만배·신학림 녹취록 보도, 윤 대통령의 일장기 경례 오보 등등 그간 KBS가 자행한 각종 공정성 훼손 사례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고 밝혔다. 많은 이가 가출했다 돌아온 공영방송 KBS를 환영해 줬다. 아쉬운 대목은 다음이다. 오늘의 KBS를 만드는 데 공을 세운 이영풍 전 기자의 복직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 화해 권고를 했으니 받아들이면 되는데, KBS 측은 이를 거절했다.
▲박민 KBS 신임 사장이 지난해 11월 14일 서울 영등포구 KBS 아트홀에서 열린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이유가 뭘까. 박민이 KBS 사장이 될 당시 이 전 기자가 사장직에 응모한 게 불쾌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경선에서 지긴 했지만, 국민의힘 소속으로 지난 총선에 출마한 게 꺼림칙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 해임된 이가 자의로 정치적 행동을 하는 건 기자로 복직하는 데 결격 사유가 될 수 없다. KBS 측도 이 대목을 걸고 넘어지진 않는다. 대신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댄다. “외부 로펌 등 4곳에 법률 자문을 해보니 이 전 기자를 복직시키는 게 회사에 배임이 될 수 있다.”
이영풍이 한 일이 다 옳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정 방송을 외치며 회사에 항의한 게 해고당할 만큼 큰 잘못일까? 왜곡 방송으로 KBS의 명예를 떨어뜨린 이소정·성재호 등은 건드리지 못하면서 왜 이영풍에게만 이러는가. 정 배임이 걱정된다면 일단 복직시킨 뒤 그에 걸맞은 징계를 내리면 될 터, 그런데 이런 것조차 안 한다면 우리가 박민의 KBS에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갑자기 ‘채널A 검언 유착 사건’의 피해자인 이동재 전 기자가 생각난다. 그 사건은 MBC와 김어준, 그리고 좌파 정치인들이 만든 공작이었지만, 당시 채널A는 이동재를 지켜주는 대신 해고해 버렸다. 이동재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은 뒤 해고 무효 소송을 벌이며 복직을 시도했을 때도, 채널A는 사력을 다해 그의 복직을 막아냈다. 그래서 이동재는 지금 백수다. 좌파에게 배울 점이 하나 있다면, 자기 사람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다른 건으로 퇴사시키긴 했지만 MBC는 검언 유착이 공작임이 드러났음에도 이 사건을 주도한 장인수를 해고하지 않았고, ‘바이든’ ‘날리면’을 보도한 이기주도 여전히 MBC에서 근무 중이다.
보수가 이런 자격 미달자들까지 지키자는 건 물론 아니다. 최소한 이영풍이나 이동재처럼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낸 이들은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비슷한 일이 또다시 벌어졌을 때 제2, 제3 이영풍이 앞장서서 싸울 수 있으니 말이다.
조선일보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05.06 김 여사 수사와 ‘채 상병’ 회견, 만시지탄이다

▲2020년 1월 2일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과 이원석 기조부장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신년 다짐회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윤 대통령은 취임 2주년인 5월 9일쯤 기자회견을 갖고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며, 이 총장은 김건희 여사 명품백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장련성 기자
이원석 검찰총장이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과 관련, “전담 수사팀을 꾸려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해 진상을 규명하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2주년인 9일쯤 기자회견을 열어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 특검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 한다. 만시지탄이지만 둘 다 국민 관심이 높고 민주당이 집중 공격하는 사안들이다.
검찰은 명품백 사건 고발장이 접수된 지 5개월이 되도록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그러다 야당이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에 명품백을 더한 특검법을 발의하고 강행 처리하려 하자 뒤늦게 수사 방침을 밝힌 것이다. 이 사건은 특검까지 할 만큼 복잡한 사안이 아니다. 친북 목사와 친야 유튜브가 기획한 ‘함정 몰카 공작’ 성격이 짙다. 대통령 직무와 관련한 청탁이 오간 정황이 없고 대통령이 가방 수수를 인지했다는 증거도 없다. 김 여사는 공직자가 아니여서 청탁금지법상 혐의 구성이나 처벌도 힘들다.
그런데 검찰이 수사를 미루면서 봐주기라는 의심을 자초했다. 야당의 특검 공세가 본격화한 뒤 뒤늦게 수사한다고 하니 “특검을 피하려 수사 시늉만 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이 ‘특검 피하기 꼼수’라는 의심을 벗으려면 김 여사 사건을 공정하고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 몰카 당사자뿐 아니라 김 여사도 소환해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 검찰은 문재인 정부 검찰이 1년 반 넘게 수사하고도 혐의점을 찾지 못했던 주가 조작 사건도 이번에 함께 조사해 결론을 내야 한다. 그래도 야당이 특검을 고집한다면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
민주당이 여야 합의 원칙을 무시한 채 ‘채 상병 특검법’을 강행 처리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특검 추천권을 민주당이 행사하고 언론 브리핑을 통해 정치적으로 악용할 여지를 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애초에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 피의자인 이종섭 전 국방장관을 호주 대사로 임명해 출국시킨 대통령실의 대처가 논란을 키웠다. 만일 윤 대통령이 회견에서 사건 경위를 소상히 밝히지 않은 채 무조건 거부권 행사의 당위성만 강조한다면 국민 의구심은 커질 것이다. 특검 회피용 회견이라는 비난을 자초할 수 있다.
이번 대통령 회견은 채 상병 의혹 수사 막기가 아니라 사건 진상을 밝히고 국민에게 설명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월 1일 의료 파행 사태 관련 담화에서 의대 증원의 당위성을 강조하다 되레 의료계의 반발을 키웠다. 이번엔 대통령의 일방적 주장을 펴기보단 국민이 가진 의문을 해소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 회견과 검찰 수사가 조금이라도 ‘특검 물타기용’으로 비친다면 국민이 바로 알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5-07 명품 백 전담팀 꾸린 檢, 몰카 공작과 함께 엄정 수사해야
2년 가까이 정치 공방과 고소·고발 사태가 이어진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 문제와 관련, 이원석 검찰총장이 7일 “증거와 법리에 따라서만 신속하고 엄정하게 수사하고 또 처분할 것”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몰카 정치공작이냐,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법) 위반이냐의 논란은 총선 쟁점으로도 부상했고, 압승을 거둔 야당 측은 이 문제 등을 포함한 김 여사 특검법을 더욱 압박하는 상황이다. 이런 조건에서 이 검찰총장의 발언은 만시지탄이지만, 불가피한 결정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이 총장의 “신속 철저한 수사” 지시에 따라 전담 수사팀을 꾸렸다. 지난해 11월 27일 유튜브 매체 ‘서울의소리’는, 김 여사가 2022년 9월 친북성향 목사로부터 300만 원 상당의 명품 가방을 받는 영상을 보도했고, 같은 해 12월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대검에 청탁금지법 위반 등 혐의로 고발했다. 정치 공방은 요란했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총선을 앞둔 지난 2월 윤 대통령은 이른바 특별 대담에서 “시계에다가 몰카를 들고 온 정치공작”이라며 “대통령이나 대통령 부인이 어느 누구한테도 박절하게 대하긴 참 어렵다”라고 밝혔다. 결국 검찰이 대통령 심기를 살핀 게 아니냐는 의혹에 불을 질렀고, 여당 내부에서도 너무 안이한 대응이라는 불만이 쏟아졌다. 이와 별개로 해당 목사에 대해선 경찰이 명예훼손·무고·주거침입 등의 혐의에 대해 별도로 수사 중이다.
명품 가방은 물론 몰카 공작에 대해 엄정하고 신속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특검법 거부권 행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쇼라는 지적을 받을지도 모른다.
문화일보 사설
05.07 尹 “기초연금 40만원”, 정권마다 10만원 인상 현실화되나

▲어버이날 기념식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어버이날 기념식에 참석해 기초연금을 임기 내 40만원까지 늘리겠다고 했다. 지난 대선 때 공약을 재확인한 것이긴 하지만 기초연금을 인상하려면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65세 이상 중 소득 하위 70%가 받는 기초연금은 1인가구에 최대 33만4810원, 부부가구에는 53만5680원을 주고 있다. 2008년 제도 도입 당시 10만원 안팎에서 출발했지만, 대선 때마다 10만원씩 올라 40만원 지급을 약속하는 데 이르렀다. 기초연금을 받는 사람은 2014년 435만명에서 올해 701만명까지 늘어났다. 올해 기초연금 예산만 24조원이다. 월 40만원으로 올릴 경우 노인 인구와 금액 증가를 고려하면 연간 최소 30조원 이상이 필요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기초연금에 한 해 수십조원을 쏟아부어도 노인 빈곤율이 좀처럼 줄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아직도 30%대 후반에 머물러 OECD 국가 평균의 3배 수준이다. 소득 수준을 가리지 않고 기초연금을 소득 하위 70%에 똑같은 액수를 주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많은 전문가들이 빈곤율이 높은 75세 이상과 여성 등 취약계층에 기초연금을 더 두껍게 지원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기초연금을 40만원으로 올리면 국민연금과 관계에도 문제가 생긴다. 현재 국민연금 평균 받는 액수는 62만원 정도다. 그런데 기초연금을 40만원으로 올리면 부부의 경우 20% 감액하더라도 64만원을 받는다. 기초연금은 본인이 보험료를 내지 않고 전적으로 세금으로 주는 것이다. 평생 꼬박꼬박 국민연금을 낸 사람들만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기초연금의 당초 취지에 맞게 소득 하위 30~35%를 집중 지원하고 그 이상은 국민연금과 형평성을 고려해 조정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소득 하위 70%인 선정 기준도 기준 중위 소득의 일정 수준 이하로 바꿔야 받는 사람 수를 점차 줄여갈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초연금 인상은 국민연금 구조를 개편할 때 개편안의 부족한 부분, 불만이 있는 부분을 보완하는 데 긴요하게 쓸 수 있다. 불쑥 기초연금을 인상하면 이런 문제들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5-07 복마전 선관위 ‘재설립’ 서두를 때다
왜 사람들은 다른 경쟁에 비해 운동경기의 결과에 더 쉽게 승복할까? 평탄한 운동장에서 정해진 경기규칙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즉, 공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선수의 개인적 여건에서 비롯한 유불리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경기장 안에서만큼은 같은 조건에서 겨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판의 공정한 경기 진행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거라는 게임도 운동경기와 마찬가지로 결과가 수용되기 위해서는 엄격하고 공정한 경기규칙의 집행이 중요하다. 그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 각급 선거관리위원회이다. 바로 이 역할 때문에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특별한 지위와 권한을 누린다. 하지만 정치적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하게 선거관리를 하라고 부여한 이 지위와 권한을 선관위의 수많은 간부가 남용해 온 사실이 지난달 30일 감사원이 발표한 채용 비리 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다.
지난해 7월부터 선관위 고위직 자녀의 특혜 채용 감사를 진행했던 감사원은 부당 채용에 관여한 혐의로 전·현직 직원 27명을 4월 29일 대검찰청에 수사 의뢰했다. 비위 혐의에 대한 추가 확인이 필요해 수사 참고 자료를 송부한 22명을 더하면 감사원이 검찰에 넘긴 선관위 직원은 49명이나 된다. 그 명단엔 선관위 자체 고발 등으로 경찰과 검찰 수사를 받았던 중앙선관위 김세환 전 사무총장과 송봉섭 전 사무차장도 포함됐다. 박찬진 전 사무총장은 수사 참고 대상자로 검찰에 넘겨졌다.
감사원은 2013년 이후 치러진 지방선관위와 중앙선관위의 경력채용 전수조사 결과, 사실상 모든 회차에서 규정 위반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전체 선관위 직원 3000명 중 약 10%나 되는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이 있었다. 점수 조작, 사전 내정, 특혜 부여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됐다. 그 결과 선관위 내부에서도 선관위를 ‘가족회사’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선관위의 감시 감독 기능을 무기 삼아 지방자치단체에 자녀의 인사를 청탁한 사례도 여럿 있었다. 감사원 감사가 시작되자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작, 내정, 특혜, 청탁, 인멸’이 감사원 발표에 사용된 표현이다. 복마전도 이런 복마전이 없다.
이런데도 선관위는 독립기관임을 내세워 1963년 설치 이래 감사원의 감사를 단 한 차례도 받지 않았다. 이번 감사도 내부고발 등으로 문제가 불거지고야 마지못해 인사 비리에 한정해 동의해서 겨우 진행될 수 있었다. 전반적인 감사를 벌이면 더 많은 비리와 방만한 운영이 드러날 개연성이 크다. 예컨대, 선관위가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4.7%에 불과한 재외국민투표율을 62.8%라고 발표한 것도 재외국민 투표 관리를 명목으로 직원 22명을 해외 파견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함이라는 비판이 있다.
복마전이 된 선관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원의 정기적인 감사부터 받게 해야 한다. 선관위는 지금도 헌법재판소에서 외부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받으려고 한다. 그리고 재건축 수준의 조직 개편과 인력 물갈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국회는 다른 모든 특검에 앞서 선관위특검부터 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관리하는 주체가 이 지경으로 썩었는데도 보고만 있을 것인가.

문화일보 이영조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05.09 상습적 공기관 채용 비리, 일상화된 점수표 조작

▲국민권익위원회 정승윤 부위원장이 8일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공공부문 채용비리 근절대책 추진 및 향후 계획 브리핑을 마치고 신문고를 두드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권익위원회가 작년 1월 공공 부문의 채용 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신고센터를 설치해 운영한 결과 최근까지 181건이 신고 접수됐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66건은 실제 불공정 채용의 혐의가 짙어 수사·감독기관에 넘겼고 28건은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작년 한 초등학교는 기간제 교원을 뽑는 과정에서 시험위원들에게 전체 응시자가 아닌 특정인 3명의 평가표만 작성하고 점수란은 공란으로 비워두게 했다. 이들 3명을 뽑기 위해 나머지 응시자들을 들러리로 세운 것이다. 이처럼 특정인을 뽑기 위해 점수표를 조작한 사례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특정인을 뽑기 위해 맞춤형 응시 조건을 내건 기관도 있었다. 한 공공기관이 산하 연구소장을 선발하면서 합격 내정자의 이력에 맞춰 지원 자격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식이었다. 권익위는 관련자들의 중징계를 요구했다.
권익위의 이번 발표는 작년 말 권익위가 발표한 825개 공공기관 전수조사 결과와는 별개의 건이다. 당시 권익위는 공기업과 지방공사·공단, 정부·지자체 출연·보조 기관 825곳 중 454곳에서 채용 비리 867건을 적발해 임직원 68명을 수사·징계 의뢰했다고 밝혔다. 권익위의 채용비리 신고센터는 시행 초기인데도 181건이 신고 접수됐고 이 중 3분의 1 이상에서 불공정 채용 혐의가 나왔다. 권익위 자체 조사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소규모 말단 기관에서의 채용 비리들이 대거 적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공공기관들이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부정 채용을 저질러 왔는지가 짐작된다.
지난주엔 선관위가 지난 10년간 291차례 진행한 경력직 공무원 채용 전부에서 비리나 규정 위반이 일어난 사실이 감사원 감사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선관위 전현직 직원의 아들딸과 예비 사위 등 12명이 부정하게 채용되는 등 적발된 채용 비리가 1200여 건에 달했다. 중앙과 지방, 고위 공직자와 말단 직원을 가리지 않고 채용 비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가 아무리 공공기관 채용 비리를 근절하겠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
05.09 연금 ‘대체율 44%’로 합의할 만하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주호영 위원장은 지난 7일 제21대 국회에서 추진해 오던 연금개혁 협상이 결렬됐다고 선언했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13%로 인상하는 데는 여야가 합의했으나, 소득대체율에 대해서는 국민의 힘 43% 인상안과 더불어민주당 45% 인상안 사이의 2%포인트(p) 격차를 극복하지 못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연금 공론화 과정에서 시민대표단의 56% 선택을 받았던 보험료율 13%와 소득대체율 50% 소득 보장성 강조 방안은 지속가능성을 강화해야 하는 연금개혁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개혁 역행안(案)이었다. 현행 국민연금 보험료율 9%와 소득대체율 40%의 급여-부담 구조에 비해 기금 고갈 연도는 6년을 연장시키지만, 2093년 기준 재정적자 폭은 오히려 4598조 원 증가시켜,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는 개악 방안이었다.
이처럼 ‘13%, 50%’안은 지속가능성 강화라는 전 세계적 연금개혁의 권고 방향과는 역행하는 방안임에도 시민대표단의 선택을 받았다. 그것은, 공론화 숙의 과정에서 노후소득 불안은 더 증폭된 반면, 부담에 대해서는 현세대 책임을 강조하는 담론보다는 국가 책임론이 시민대표단에 더 매력적으로 각인된 때문으로 보인다. 재정 안정 강조 측에서는 미래세대의 과중 부담 우려와 세대 간 형평성 있는 고통 분담 강조에 열중한 반면, 소득 보장 강조 측에서는 국가 책임 강조, 국고 지원론, 고소득층 세금 귀착론 등으로 미래세대에 대한 부채 의식을 덜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보험료율 3∼4%p 인상에 대한 수용성을 보여준 것은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런데 이후 국회 연금개혁특위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연금 공론화 결과로 확인된 민의(보장성 강화 및 보험료 인상)를 존중하면서도 재정적으로 지속가능한 방향성을 담보한 개혁안으로 합의안의 범위를 좁혀 냈다. 보험료율은 13%로 인상하되, 소득대체율은 현행보다는 높이고 공론화안보다는 낮춘 43% 또는 45% 인상안을 각각 제안했다. 두 개혁안 모두 현행 보혐료율 9%와 소득대체율 40%의 급여-부담 구조에 비해 지속가능성을 개선하는 방향인 동시에 소득 보장성을 강화하는 방향의 개혁안이다. 두 방향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모수 개혁 해법의 가능한 범위는 매우 좁은데, 두 개혁안 모두 그 해법의 범위 안에 있다. 또한, 공론화 과정에서 시민의 수용성이 확인된 보험료율 인상 폭이라는 점도 개혁에 청신호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낸 것과 받는 것을 일치시키는 세계적 연금개혁 문법을 장착하지 못한 채 세계에 유례없는 속도와 수준의 초고령사회를 맞게 됐다. 소득대체율 2%p의 작은 차이를 이유로 개혁을 중단하는 것은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두 개혁안 모두 제22대 국회로 미루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다. 1%p씩 양보한 13% 보험료율, 44% 소득대체율도 좋은 해법이다. 이번 모수 개혁에 성공해야 구조 개혁도 모색할 수 있다. 대선을 앞에 두고 후순위로 밀릴 개연성이 큰 제22대 국회로 연금개혁을 미루는 것은 역사적 책무의 방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한 연금개혁 과업을 완수할 좋은 기회다. 야당도 협조적인 상황에서 미룰 이유가 없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연금개혁으로 초고령사회를 맞이해야 한다.

문화일보ㅡ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05.09 尹 "아내 현명하지 못한 처신 사과…특검, 정치공세 아닌가" [취임 2주년 회견]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룸에서 열린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2022년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 이후 1년 9개월 만이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은 9일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께 걱정 끼쳐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김건희 여사 의혹과 관련한 입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윤 대통령은 “지금 검찰에서 수사를 시작한다고 발표한 데 대해서는 검찰 수사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언급하는 것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오해가 일어날 수 있기에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이어 “특검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정해진 검경, 공수처 이런 기관의 수사가 봐주기나 부실의혹이 있을 때 하는 것”이라며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한 특검 문제도 지난 정부 2년 반정도 사실상은 저를 타깃으로 해서 검찰에서 특수부까지 동원해서 정말 치열하게 수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수사가 지난 정부에서 저와 제 가족을 봐주기 수사했다는 것인지, 봐주기 수사를 하면서 부실하게 했다는 것인지, 저는 거기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며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특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할 만큼 해놓고 또 하자는 것은 특검의 본질이나 제도 취지와는 맞지 않는, 어떤 면에서는 정치 공세, 정치 행위 아니냐. 진상을 가리기 위한 것은 아니냐라는 생각,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총선 패배, 국정운영-소통 부족했다는 평가”
윤 대통령은 ‘4·10 총선 패배 원인’을 묻는 질문에 “국정을 운영해 온 것에 대해 많이 부족했다는 국민들의 평가가 담긴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어 “그동안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은 민생에 있어서 아무리 노력했더라도 국민들께서 체감하는 변화가 많이 부족했다”며 “그리고 정부의 정책 같은 것들을 국민들께 설명해 드리고, 소통하는 것이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언론을 통해 국민들께 설명하고 이해시켜드리고 미흡한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이런 기회를 계속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등과 만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제가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하고 특히 언론, 정치권과의 소통을 더 열겠다고 말씀드렸다”며 “어떤 정치인도 선을 긋지 않겠다”고 말했다.
‘여당과의 협치 강화 방안’에 대해서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났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협치가 되지는 않는다”면서 “끈기와 인내, 진정성, 신뢰, 대화, 성의 등 자세를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채상병 수사 납득 안되면 먼저 특검 하자고 할 것”
윤 대통령은 채상병 순직 사건 수사와 관련해선 “이런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고 희생자의 명예 회복과 책임소재를 가리기 위해 진상 규명이 엄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수사 결과를 보고 국민께서 봐주기 의혹이 있다, 납득이 안 된다고 하시면 그때는 제가 먼저 특검을 하자고 주장하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순직 소식을 듣고 국방부 장관에게 질책을 했다”며 “앞으로 대민 작전을 하더라도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수사에 대해서는 “수사 관계자나 향후 재판 관계자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열심히 진상규명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어떻게 이 사건을 대충 (수사)할 수 있겠느냐”며 “진실을 왜곡해서 책임 있는 사람을 봐주고, 책임이 없거나 약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단 진행 중인 수사와 사법 절차를 지켜보고 수사 관계자들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좀 믿고 지켜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韓과 갈등설엔 “오해 풀어…정치인 길 잘 걸어갈 것”
윤 대통령은 ‘총선 전 참모 통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사퇴를 요구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비서실장, 원내대표, 한동훈 위원장이 점심 먹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가 나온 것 같은데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바로 문제를 풀었다”고 답했다.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은 정치 입문 기간은 짧지만 주요정당의 비대위원장 겸 총괄선대위원장으로 총선을 지휘했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잘 걸어나갈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영혜 기자 han.younghye@joongang.co.kr
◎윤석열 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
요즘 많이 힘드시죠?
봄은 깊어 가는데, 민생의 어려움은 쉬 풀리지 않아 마음이 무겁고 송구스럽습니다.
지난 2년, 힘든 일도 있었고, 보람찬 일도 많았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국민들의 안타까운 하소연을 들을 때면,가슴이 아프고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간절하게 바라시던 일을 하나라도 풀어드렸을 때는 제 일처럼 기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국민 여러분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지난 2년간 쉴 틈 없이 뛰어왔습니다.
저는 오늘 국민 여러분께,지난 2년 정부의 국정운영과 정책 추진 상황을 보고드리고, 앞으로 3년의 국정운영 계획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동안 정부는 시장경제와 건전재정 기조를 정착시키고, 우리 경제의 체질을 민간주도 성장으로 바꾸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국가채무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서,경제의 펀더멘털을 더 단단히 하고 국가신인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기업 투자를 막은 킬러 규제를 혁파해서 성장동력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재정으로 만드는 일회성 일자리가 아니라 양질의 민간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를 힘들게 했던 징벌적 과세를 완화해서,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글로벌 중추국가 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의 외교 지평도 크게 넓혔습니다.
150여 회의 정상회담을 포함한 활발한 세일즈 외교를 통해, 5000만 시장에서 80억명 시장으로,우리 기업의 운동장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원전 수출, 방산 수출, K-콘텐트 수출로 경제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핵 기반의 확장 억제력을 토대로 힘에 의한 진정한 평화를 구축했습니다.
작년 4월 워싱턴 선언으로, 한미동맹을 핵 기반의 안보동맹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한미 글로벌 포괄 전략동맹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한미 연합연습을 다시 시작하고 한국형 3축 체계를 구축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억제하는 우리의 방어능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했습니다.
한미동맹이 안보동맹을 넘어 첨단기술동맹으로 확대되어,우리의 산업 경쟁력에도 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미국이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 기업들이 혜택을 받고 있으며,한미 간의 긴밀한 경제협력은 우리의 대외 신인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새롭게 구축한 한미일 협력체계는 우리의 안보를 강화할 뿐 아니라, 경제적 기회를 더욱 확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정부는 기초수급자의 생계급여를 역대 최고로 인상하는 등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를 더 두텁게 보호해왔습니다. 돌봄과 간병을 비롯해서 국민적 수요가 높은 서비스 복지를 확대해, 일자리를 늘리고,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고용세습도 혁파해 왔습니다.
경제력의 차이가 교육의 격차로 이어지지 않도록,장학금 확대, 교육비 지원과 함께 일자리, 주거, 자산 형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국가균형발전은 국가성장의 동력입니다.
좋은 축구 경기를 하려면 운동장을 넓게 써야 하듯이, 우리 국토를 구석구석 모두 활용해야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부는, 지역이 스스로 비교우위 산업을 발굴하고 이를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균형발전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도로와 철도를 비롯해서,우리나라의 모든 지역이 공정한 교통 접근성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노동시장도 과감하게 개혁하며,합법적인 노동운동은 적극적으로 보장하되,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응하여 노사 법치주의를 확립해 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파업에 따른 근로 손실 일수와 분규 지속 일수가 역대 정부의 3분의 1 수준으로 현격히 줄어들었습니다.이러한 결과는 노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 돌봄과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퍼블릭 케어’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안심하고 아이를 맡기고 아이들은 안전하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는 늘봄학교를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영유아들이 양질의 교육·돌봄 서비스를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도록,유치원과 어린이집 관리 체계를 교육부로 일원화하였습니다. 3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관리주체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첨단산업 기반을 강화해서, 622조 원 규모의 세계 최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에 착수했습니다.
신한울 3·4호기 원전 건설을 재개하고, 신속한 일감 공급과 금융지원을 통해 무너진 원전 생태계도 복원했습니다. 원전 생태계의 복원은 우리의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수백조 원에 달하는 국제 원전 시장 진출의 토대가 될 것입니다.
현재 정부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의료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는 한편, 증원된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담당할 수 있도록, 공정한 보상체계와 지역의료 지원체계, 그리고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난 2년 저와 정부는 시급한 민생정책에 힘을 쏟으며, 우리 사회의 개혁에 매진해 왔습니다.
하지만, 국민 여러분의 삶을 바꾸는 데는 저희의 힘과 노력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앞으로 3년, 저와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더욱 세심하게 민생을 챙기겠습니다.국민과 함께 더 열심히 뛰어서 우리 경제를 도약시키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열겠습니다.
다행히, 곳곳에서 우리 경제 회복의 청신호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최근 OECD는 한국의 올해 성장률을 2.6%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이는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G20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 푸어스는, 2026년 우리 1인당 GDP가 4만 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국민과 기업, 정부가 함께 뛰며 이뤄낸 소중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힘을 모아, 민간이 주도하는 경제 성장의 추세를 잘 유지한다면, 국민소득 5만 달러도 꿈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국가가 저성장의 늪에 빠지면, 계층 이동이 어려워지고 사회의 양극화가 고착됩니다. 양극화에 따른 계층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도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국민 소득이 높아져야만,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수준도 획기적으로 향상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성장의 길로 이끌 수 있도록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더욱 높이고,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도 더 적극적으로 펼쳐가겠습니다.
우선, 국가 비상사태라고 할 수 있는 저출생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겠습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더 자유롭고 충분하게 쓸 수 있도록 하고, 이에 따른 기업의 부담은 정부가 확실히 지원하겠습니다. 시차 출퇴근, 근무시간 선택제 등 육아기 유연근무를 제도화해서, 일과 육아의 양립 환경을 든든하게 조성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가기 위해 기다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상생형 어린이집과 국공립 어린이집 확대를 포함해서, 어린이집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대상도 확대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보육교사 처우 개선을 적극 추진해서, 마음 놓고, 언제라도 자녀를 맡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출산 가구들의 주거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실효적 대책도 강구하겠습니다.
저출생 원인의 하나인, 우리 사회의 불필요한 과잉 경쟁을 개선하기 위해 지방균형발전 정책과 사회 구조개혁을 힘차게 추진하겠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 저출생 고령화를 대비하는 기획 부처인 가칭 ‘저출생대응기획부’를 신설하겠습니다.
저출생대응기획부 장관이 사회부총리를 맡도록 해서, 교육·노동·복지를 아우르는 정책을 수립하고,단순한 복지정책 차원을 넘어 국가 아젠다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저출생대응기획부’ 신설을 위한 정부조직법 개정에 국회의 적극적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서민은 중산층으로 올라서고 중산층은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서민과 중산층 중심 시대’를 열어가겠습니다.
경제의 역동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한편, 교육 기회의 확대로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굳건하게 재건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복지정책과 시장정책을 따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추진할 것입니다.
고용정책과 복지정책을 통해 사회적 이동성을 높이고, 산업정책과 시장정책을 통해 중산층을 더 단단하게 만들겠습니다.
경쟁에서 아쉽게 뒤처진 분들도, 국가가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입니다.
생계급여 대상을 확대하고 지원 수준을 인상해서, 가장 어려운 분들의 삶을 끌어올리겠습니다. 사회적 약자 지원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르신이나 아픈 가족의 부양을 국가가 책임진다면, 경제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마음 편히 더 열심히 일하실 수 있습니다. 실패를 겪으신 분들을 국가가 도와서 다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 이는 국가 전체로도 큰 이익이 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사 문제 역시, 계층 간 대립 구도로 보는 낡은 시각에서 벗어나, 노사 모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목표입니다.
세제지원, 규제혁신을 통해 기업이 성장하면 근로자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또 그로 인해 임금 소득이 증가하면 기업과 근로자 모두가 윈-윈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우리 기업들이 더 많은 일자리와 더 높은 임금을 창출할 수 있도록 제대로 지원하는 한편, 정부의 지원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공정하게 근로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지 꼼꼼하게 점검하고 확인할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터널은 벗어났지만,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매출 감소와 고금리 부담으로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정책자금 확대와 금리부담 완화를 포함해서,적극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정부는 서민과 중산층 중심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해서, 체감할 수 있는 민생의 변화를 반드시 이루어 내겠습니다.
천만 어르신 시대를 맞아, 어르신의 삶도 더욱 꼼꼼하게 챙기겠습니다. 임기 내에 기초연금 지급 수준을 40만 원으로 인상하겠습니다.
어르신 일자리를 확대하는 가운데, 요양과 돌봄 체계를 강화해 ‘활력 있고 편안한 어르신의 삶’이 가능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돌봄 사각지대에 있는 최중증 발달장애인 지원을 대폭 강화하고, 수요자 중심의 장애인 개인예산제도 시행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현장의 어려움을 직접 확인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만, 세계적인 고물가·고금리·고유가 상황에서 민생의 어려움을 다 해결해 드리지 못했고,정책의 속도도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3년, 국민의 삶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겠습니다. 현장 중심으로 민심을 청취하고, 수요자 중심으로 정책 아젠다를 발굴해서 적극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정부 부처 간 벽은 물론, 부처 내 각 부서 간 벽도 과감하게 허물어서, 각 분야 공직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빠르게 민생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정부의 노력이 실질적인 민생의 변화로 이어지도록 더 세심하게 더 열심히 챙기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정부가 민생을 위해 일을 더 잘하려면 국회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앞으로 여야 정당과 소통을 늘리고 민생 분야 협업도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국회에도 당부 말씀을 드립니다.
정쟁을 멈추고 민생을 위해 정부와 여야가 함께 일하라는 것이, 민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의 비과세 한도를 확대하는‘조세특례제한법’과 금융투자소득세를 폐지하는 ‘소득세법’ 개정은 많은 국민들께서 간절히 바라셨던 법안들입니다.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도록 아이돌보미 국가자격제도를 도입하는 ‘아이돌봄 지원법’을 비롯해서 당면한 국가적 현안인 저출생 극복을 위해 시급한 법안들도 있습니다.
가칭 ‘저출생대응기획부’ 신설을 위한 정부조직법 개정도 국회의 협력이 절실합니다.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야당도 힘을 모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이 우리에게는 ‘하이타임’입니다. 우리 경제를 다시 도약시키고 외교의 새 길을 열기 위해, 이 중요한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 바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정작 할 일은 뒤로 미뤄놓은 채 진영 간 갈등을 키우는 정치가 계속되면 나라의 미래도, 국민의 민생도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국가의 미래가 걸린 정책 과제와 민생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선진국 정부와 의회들이 어떻게 이해집단의 갈등을 조정하고,어떠한 협의 구조를 통해 국가적 아젠다와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지 앞선 국가들의 선례를 잘 살펴서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일하는 방식을 바꿔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저와 정부부터 바꿀 것을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국회와의 소통과 협업을 적극 늘려 나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난 2년 안팎의 어려움 속에서도 정부를 믿고 함께 뛰어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와 정부를 향한 어떠한 질책과 꾸짖음도 겸허한 마음으로 더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오로지 민생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길에 저와 정부의 모든 힘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05.09 고개 숙인 尹대통령, 소통 강화하고 국정 중심 잡아야
윤석열 대통령의 9일 기자회견은 오랜만에 열린 만큼 다양한 현안에 대한 문답이 오갔지만, 특별히 예상을 뛰어넘는 내용은 없었다. 국민 입장에서는 세부 설명과 진솔함 등의 측면에서 미진해 보이지만, 국정과 법치를 책임진 대통령으로서 화끈하고 파격적 입장을 내놓긴 어려웠을 것이다. 기자회견에 앞서 ‘윤 정부 2년 국민보고’를 별도로 한 것을 보면, 국민이 국정 성과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는 섭섭함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만큼 국민과의 소통을 더 강화해야 할 당위성을 새삼 보여주었다.
윤 대통령은 “민생의 어려움은 쉬 풀리지 않아 마음이 무겁고 송구스럽다”며 고개를 숙였다. 총선 패인에 대해서도 “결국 총선은 정부에 대한 그간 국정 운영의 평가”라며 “국민이 체감하는 변화가 많이 부족했다”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 문제에 관해선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께 걱정을 드려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검 도입에 대해선 “진상을 가리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반면, 해병대 채 상병 특검 문제와 관련해선 현재 진행 중인 수사를 지켜보자면서도 “국민께서 봐주기 의혹이 있다, 납득이 안 된다고 할 때는 제가 앞장서서 특검을 주장하겠다”고까지 하면서 조건부 수용을 시사했다.
지난 2년을 돌아보면,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 기조를 전환하는 데 힘을 쏟았다. 부동산 시장 안정화를 이뤄내는 데 일정 정도 성과를 냈다. 문 정부가 만든 400조 원이 넘는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해 건전 재정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탈원전을 폐기하는 등 에너지 정책을 정상화했다. 방산 수출도 급속히 늘어났다. 노조개혁, 한·미·일 관계 복원 등의 성과도 뚜렷하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과가 정치의 실패로 빛이 바랠 수도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초당적 협력 필요한 저출생대응部 신설
윤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처지이지만 앞으로 3년 동안 국정의 중심을 잡고 성과를 극대화해야 할 막중한 책무가 있다. 윤 대통령은 “여야 정당과 소통을 늘리고 민생 분야 협업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이와 관련한 저출생대응기획부 신설은 주목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사회부총리가 맡는 부처로 승격시킨다는 것인데, 여야가 정부조직법 개정 등 지혜를 모아 신속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문화일보 사설
05-10 “의료개혁 뚜벅뚜벅 가겠다” 尹, 실질 소통도 강화해야
윤석열 대통령은 9일 기자회견에서 “로드맵에 따라 의료개혁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겠다”고 밝혔다. “다행히 야당에서도 많은 공감과 지지를 해주고 있는 상황”이라며 흔들림 없이 의대 증원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거듭 분명히 했다. 의료개혁은 국민이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여·야가 합의한 공론이다. 그 방향에 있어서는 의사단체 요구와 정부의 4대 정책 패키지가 크게 다르지도 않다.
의료개혁이란 대원칙에서 후퇴는 없어야 하지만, 의대 2000명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이 여전히 문제다. 특히 다음 주가 변곡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보건복지부는 10일 의료개혁특별위원회 2차 회의를 열고 사회적 논의를 본격화했다. 대한의사협회는 기자회견에서 “원점 재검토가 우리의 통일안”이란 강경 입장을 재확인했다. 특히, 서울고등법원의 의대 증원·배정 가처분 결정이 태풍의눈이다. 정부는 10일 회의록 등 관련 자료를 법원에 제출했으나,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소명할 필요가 있다.
돌아보면 지난 3개월 동안 의·정은 자극적 표현을 쏟아내면서 갈등 봉합은커녕 더욱 격화돼왔다. 더 이상의 감정싸움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나마 상급종합병원 입원 환자가 전주 대비 9.4% 늘고 응급실도 96%가 병상 축소 없이 정상 운영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주요 의대 교수들이 10일 하루 휴진에 들어갔으나 의료 현장에는 큰 혼란이 없었다. 국민의 병원 이용 자제가 일등공신이다.
정부는 의료개혁의 큰 방향은 맞았지만 거친 추진 과정으로 인해 반발을 키운 측면이 있다. 의료개혁특위가 가동된 만큼 정책을 보다 정밀하게 가다듬고, 회의체 구성이나 공식 입장 요구를 넘어 의료계와 실질적 소통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의료계도 더 이상 환자를 위기로 내모는 실력 행사를 중단하고 대화에 응해야 한다. 법원 역시 월권적 개입으로 혼란을 부추겨선 안 된다. 행정심판의 대원칙대로 행정처분의 적법성 여부만 따져야지 행정부 고유 권한인 정책의 적절성까지 판단하려 해선 안 될 것이다.
문화일보 사설
05.10 “국가 비상사태, 부총리급 저출생부 신설” 巨野도 협조를

▲(서울=뉴스1) 민경석 기자 =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7일 오후 서울 구로구청 사랑채움어린이집을 방문해 직장어린이집 운영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저출산위는 이달 초 일·가정 양립 지원 확대 등을 목표로하는 '저출산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2024.5.7/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9일 기자회견에서 “국가 비상사태라고 할 수 있는 저출생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겠다”며 “저출생 고령화를 대비하는 기획 부서인 ‘저출생대응기획부’를 신설하겠다”고 말했다. “저출생대응기획부 장관이 사회부총리를 맡도록 해서 교육, 노동, 복지를 아우르는 정책을 수립하고 (저출생 해결을) 국가 어젠다가 되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지금 우리 저출생 상황은 ‘국가 비상사태’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최근 민간 연구기관 보고서에 따르면 9년 뒤 초등학교 신입생은 현재 40여 만명에서 22만명으로 반 토막이 나고, 2044년이면 일할 수 있는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현재 3650만여 명에서 2717만명으로 1000만명 가까이 감소한다. 앞으로 7년 뒤 국민 절반이 50세를 넘고 2050년이면 인구의 40% 이상이 65세를 초과해 세계에서 가장 늙은 국가가 될 전망이다. 2049년엔 5가구 중 1가구가 ‘노인 혼자 사는 집’이 된다. 작년 말 뉴욕타임스 경고처럼 우리 저출생은 흑사병 창궐로 인구가 급감하던 14세기 유럽보다 더 심각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바닥부터 무너지고 있다. 예식장이 사라지고, 산부인과가 안 보이고, 산후조리원이 없어지고 있다. 길에 임산부가 안 보인다. 유치원은 노인 시설로 바뀌고, 서울 초등학교 신입생은 5만명대로 떨어졌다. 예식장을 장례식장으로 바꾼 곳도 있다. 이제 중·고교 신입생이 급감하고 대학이 줄줄이 문을 닫을 차례다. 이 여파는 도미노처럼 국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얼마 안 돼 군 입대 가능 남자가 1년에 10만명 안팎에 그칠 것이다. 인구가 없으면 국가도 없다.
올해는 출생률 0.6명대라는 전무후무한 숫자를 찍을 수 있다.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는 데 반대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저출생대응기획부 신설은 입법 사항이다. 민주당도 이 문제만큼은 협력하기 바란다.
조선일보 사설
05.10 “반도체 첨단 공장 한국 떠나 미국 올 것” 아찔한 8년 뒤 전망
2032년엔 10나노(10억분의 1m) 이하 첨단 반도체의 한국내 생산 비율이 현재의 31%에서 9%대로 급락할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와 보스턴 컨설팅 그룹이 분석한 전망치다. 현재 대만 TSMC와 함께 세계 첨단 반도체 시장을 양분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최신 공장을 한국 대신 미국에 짓는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내 생산 비율은 현재 0%에서 8년 뒤엔 28%로 늘어난다. 527억달러(약 71조원) 규모 보조금을 제공하며 공장 유치에 나선 미 정부 전략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이란 예고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전략에 호응해 삼성전자는 텍사스주에 첨단 파운드리 공장, 하이닉스는 애리조나주에 패키징 공장을 새로 짓고 있다. 64억달러(약 9조원)의 보조금을 받는 삼성전자는 차세대 최첨단 반도체인 2나노급도 미국 공장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2030년까지 첨단 반도체의 20%를 미국 안에서 생산하겠다며 반도체 지원법을 만들었는데, 이대로 가면 목표를 훨씬 초과 달성할 전망이다.
반면 한국은 정부가 2043년까지 반도체 클러스터를 용인에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계획대로 추진될지 미지수다. 송전선 문제로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 건설이 5년간 지연되고, 하이닉스 용인 공장이 용수 문제에 발목 잡힌 바 있다. 세계에서 가장 경직적인 주52시간 근무제, 중대재해처벌법 같은 온갖 규제로 얽어맨다면 반도체 기업의 탈(脫)한국은 더 가속될 것이다.
반도체 첨단 공정은 경제적 필요성뿐 아니라 국가 안보를 위해서도 반드시 국내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 대만이 범국가적 지원을 퍼부어가며 TSMC 공장 사수에 총력전을 벌이는 것도 지정학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미 반도체협회 예측대로 첨단 반도체의 국내 생산 비율이 급감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된다면 국가적 재앙이 빚어질 수도 있다.
조선일보 사설
05.11 부인 연줄 비서관·행정관 ‘용산’ 밖으로 내보내야
국민, 가족 문제로 다시 사과하는 대통령 모습 원치 않아
대통령 일하는 곳·사는 곳은 九重宮闕 아닌 투명한 유리 어항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룸에서 열린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대통령 기자회견을 보고 과거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였다. 답변하는 태도나 사용한 단어가 다듬어졌기 때문인 듯했다. 어쩌면 기대를 너무 낮게 잡은 데서 비롯된 착시(錯視)효과인지도 모른다. ‘좋은 방향으로 변했다’는 내 느낌은 심증(心證)뿐이었다.
몇 사람에게 전화를 돌렸다. ‘회견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100점 만점으로 하면 몇 점을 주겠는지’ ‘그런 점수를 매긴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응답자 10명 가운데 극단적 점수를 준 여당 의원과 야당 의원은 제외했다. 한쪽은 80점 다른 한쪽은 30점을 줬다. 여당 의원도 ‘야당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대담한 제안은 없었다’는 단서를 달았다.
나머지 응답자 8명의 연령은 40대에서 80대까지 고른 분포였다. 남성이 여성보다 많았다. 직장을 찾는 20대 청년, 첫 아이를 낳아 키우는 30대 주부, 동네 마트 주인 같은 영세 자영업자와는 선이 닿지 않았다. 수공업(手工業) 방식 간이(簡易) 여론조사의 한계다.
회견 느낌은 전원이 ‘나아졌다’고 했다. 달라진 정도가 ‘조금’이라는 것도 공통됐다. ‘훈계조(訓戒調)가 줄어서’ ‘부인 문제를 늦게나마 사과한 게 뭉개버린 것보다는 낫다’ ‘전(前) 정권 탓이 사라진 듯해서’ ‘이런 회견을 두어 달에 한 번이라도 했더라면…’이라는 소감(所感)을 달았다. ‘대통령의 동문서답(東問西答), 영수회담 비선(秘線) 의혹 등을 ‘추가 질문’ ’보충 질문’을 통해 따졌더라면 당장은 난처해도 결과적으론 대통령에게 득(得)이 될 텐데…'라며 기자 탓도 했다.
응답자들 6명은 60점, 2명은 70점을 줬다. 평균 62.5점이다. 답안지대로 채점한 게 아니라 대통령이 앞으로 변화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점수를 줬을 수도 있다. 야당은 낙제점을 줬다. 야당 입장을 수용하거나 구미를 돋울 제안이 없었으니 그럴 만하다.
협치(協治) 자세를 보일 소재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연금 개혁 법안이 그렇다. 여야는 현재 9%인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 그런데 ‘얼마를 받느냐’는 소득대체율을 두고 ‘여당 43%’ ‘야당 45%’라는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대통령이 ‘야당 안을 받겠다’ 혹은 ‘서로 1%씩 물러서 44%로 하자’는 새 제안으로 물꼬를 텄더라면 협치의 첫 시범이 됐을지 모른다.
대통령은 ‘부인 특검’과 ‘해병대원 특검’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응답자 일부는 해병대원 특검은 공수처 수사 결과를 기다려야겠지만 특검을 해야 하는 쪽으로 굴러갈 수도 있다고 봤다. 부인 특검에는 관심도 작고 ‘전(前) 정권 때부터 팔 만큼 팠다’는 대통령 설명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검찰이 디올백 수사를 가혹할 정도로 엄정하게 한다면 부인 특검에 대한 여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어느 분의 마지막 말에 뼈가 있었다. 이번 기자회견은 ‘대통령이 부인 문제로 국민에게 사과할 수 있는 마지막 자리’라고 했다.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더라도 사과할 기회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사과는 ‘잘못 인정’ ‘반성’ ‘재발(再發) 방지 제도 도입’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이번 대통령 사과는 첫째 요건(要件), 넓게 보면 둘째 요건도 포함된 발언이다. 그러나 핵심인 재발 방지 제도 개선이 빠졌다. 특별감찰관 임명은 이번에도 거론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일하는 곳, 사는 곳을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부르던 것은 옛일이다. 용산 시대 대통령 환경은 안에선 밖을 내다보지 못해도 밖에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어항이다. 비서실에 대통령 부인 연(緣)줄로 들어온 비서관·행정관이 꽤 된다고 한다. 그 명단이 오래전부터 나돌았다. 입 밖에 내지 않아서 그렇지 공인(公認)된 비밀이라고 한다.
이 상황인데 회의에서 ‘부인 문제’를 누가 꺼낼 수 있겠는가. 논의도 못 하는데 대통령에게 보고할 용기를 누가 내겠는가. 설혹 한 번 용기를 냈더라도 대통령이 이마를 찌푸리는데 다시 보고할 바보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보고도 받지 못한 대통령이 어떻게 그 상세한 내용을 알겠는가.
‘부인 문제로 다시 사과할 기회는 대통령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무서운 말이다. 대통령이 바뀔 것이라고 믿고 싶은 국민들은 대통령의 좋은 변화를 뒷받침할 물증(物證)을 원한다. 부인과 선(線)을 대고 있는 비서관·행정관을 내보내는 건 중요한 물증이자 대통령실 정상화를 향한 큰 걸음이다.
조선일보 강천석 기자
05.13 송전선 없어 발전소 멈추는 나라

▲2024년 5월 8일 강원도 동해시 GS동해전력의 화력발전소 모습. 송전선 부족으로 지난달부터 가동을 전면 중단하면서 석탄 저장고가 텅비어 있다. /김지호 기자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낼 송전 선로가 없어 동해안의 대형·신규 화력 발전소들이 속속 가동을 멈추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GS동해전력과 강릉에코파워, 삼척블루파워, 삼척빛드림 등이 운영하는 석탄화력 발전소 8기가 지난달 중순부터 전력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고 한다. 이들 8기의 발전 총량은 삼성전자가 300조원을 들여 건설하고 있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수요를 댈 수 있는 막대한 규모다.
이런 사태가 빚어진 것은 한국전력의 송전선 건설 계획이 7년 이상 미뤄지면서 전기를 보낼 송전선이 과포화됐기 때문이다.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송전선로 용량은 11.4GW인데 동해안권의 원전과 석탄 발전,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은 18GW에 이른다. 자동차를 만들고도 도로가 없어 멈춘 것과 같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2019년까지 8GW짜리 송전선로가 추가 건설돼야 했다. 하지만 탈원전·탈석탄을 밀어붙였던 문재인 정부는 주민 반발 등을 이유로 선로 신규 건설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신규 사업자들이 스스로 발전소 건설을 포기할 것을 기대하면서 계획된 선로 건설 사업을 사실상 방치했다. 에너지 백년대계를 생각해야 할 정부로선 있을 수 없는 무책임한 일이었다.
지금 수도권에선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과 데이터센터 건설 등으로 전기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송전선로 부족으로 송전을 못 받는 바람에 발전 원가가 석탄보다 30% 이상 비싼 LNG 발전이나 공해 물질 배출이 2배 이상인 구형 석탄 발전에 의존하는 상황이 됐다. 문 정부 때 호남 등 서해안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태양광과 풍력 발전 시설 또한 송전선이 부족해 수시로 생산을 중단·제한하고 있다. 이는 전기 요금 인상으로 이어지고, 여름철 대규모 정전 사태도 우려된다. 지방에선 송전선이 없어 발전소가 전기 생산을 못 하고, 수도권은 전력이 부족해 법으로 데이터센터를 못 짓도록 막는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작년 10월 국민의힘 의원 주도로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발의됐다. 정부가 직접 주민과 갈등을 중재하고 각 부처의 인허가 절차를 통합해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토록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민주당이 다른 법안 처리를 조건으로 논의를 미루는 바람에 폐기될 상황에 몰렸다. 문 정부 시절, 한전에 5년간 26조원의 탈원전 부담을 떠안긴 민주당이 이젠 송전선 건설까지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고도 어떻게 반도체와 빅데이터 등 미래 먹거리 산업을 키울 수 있겠나.
조선일보 사설
05-16 송전선로 부족 심각…시급한 전력망法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인공지능(AI)과 탄소중립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전기 수요의 폭증이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정부가 강력히 추진하는 반도체·첨단바이오·양자 기술과 전국에 속속 들어서는 데이터센터가 전기 먹는 하마다. 삼성전자가 300조 원을 투입해 2042년까지 완공하겠다는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도 한국형 원전 5기에 해당하는 7GW나 된다.
발전소를 짓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소비자에게 실시간으로 전기를 공급해 주는 ‘송전선로’를 만드는 일도 만만찮다. ‘송전탑’이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주민 혐오 시설로 각인돼 있어 더욱 그렇다. 10년 전의 밀양 송전탑 사태는 우리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난달 중순부터 동해안 지역의 석탄화력발전소 8기(7.4GW)의 불이 꺼져 버린 것도 송전선로 부족 때문이다. 강릉에서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연결된 11.4GW의 송전선로는 원전 8기(8.7GW)와 태양광·풍력(1.9GW)이 차지해 버렸다. 지난 4월 울진의 신한울 2호기가 상업 운전을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접근로를 빼놓고 신도시를 완공한 것과 같다.
대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당초 한전은 신한울 1·2호기의 완공에 맞춰 2019년까지 8GW 규모의 초고압 직류 송전 방식(HVDC)의 송전선로를 완공할 예정이었다. 송전탑 건설에 대한 주민 반발을 고려해 지중화가 가능한 최첨단 신기술을 도입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난 정부의 맹목적인 탈원전·탈석탄으로 한전의 부실이 심각해지면서 상황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민간 발전사가 스스로 포기하기를 기대했던 정부도 송전선로 건설에서 손을 떼 버렸다.
이제 동해안 송전선로 건설은 2026년 말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민간 발전사만 궁지에 내몰린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석탄보다 30% 이상 더 비싼 LNG 화력과 2배 이상의 오염물질을 쏟아내는 구형(舊型) 석탄화력에 의존해야 하는 소비자의 부담도 작지 않다.
송전선로 문제는 동해안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역시 탈원전·탈석탄으로 공사가 지연된 새울 3·4호기가 올해와 내년 말에 상업 운전을 시작하는 고리·울산의 사정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리·새울 원전과 연결된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에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원전 5기의 가동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자칫하면 2011년 9·15 순환정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재앙적인 광역 정전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난 정부 때 호남에 무분별하게 들어선 태양광·풍력 설비의 계통 연결 문제도 심각하다. 전력 수요가 줄어드는 봄·가을에 발전설비의 출력을 강제로 제한하고, 원전의 출력을 줄이는 비정상적인 ‘감발(減發)’을 하는 것도 송전선로 부족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계통 접속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서해안의 해상풍력 신규 사업을 줄줄이 불허 판정하는 일도 벌어졌다.
송전망 부족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굼뜨기만 하다. 지난해 말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서해안 해저 전력고속도로’는 2036년에야 빛을 보게 된다. 송전선로 때문에 지역에서는 발전소를 멈춰 세우고, 수도권에서는 데이터센터 건설을 억제하는 황당한 일이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여당이 발의한 ‘국가 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안’의 국회 통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문화일보
05.16 연금 개혁 ‘내는 돈’ 13% 합의만이라도 먼저 처리하라
국회 연금특위가 일주일 이상 개점휴업 상태에 있다. 막판 간사단 협상에서 국민연금 내는 돈(보험료율)을 현행 소득의 9%에서 13%로 올리는 데 합의했지만, 국민연금 받는 돈(소득대체율)에서 국민의힘은 현행 40%를 43%로, 민주당은 45%로 올리자고 맞선 이후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호영 국회 연금특위 위원장은 “이 논의를 토대로 22대 국회 때 조속한 연금 개혁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종 합의에는 실패했지만 매년 연금 내는 돈을 4%포인트 올리는 데 여야가 의견을 같이한 것은 의미가 있다. 1998년 이후 26년 동안 9%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받는 돈’은 생애평균소득의 40%인데 ‘내는 돈’은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9%인 연금 구조가 재정 파탄을 부르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국회 연금특위는 2022년 10월 첫 회의를 시작으로 2년 가까이 다양한 논의와 공론화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여야가 각각 주장하는 ‘받는 돈’ 단 2%포인트 차이 때문에 그동안의 논의 자체가 무산되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다.
연금 전문가들은 두 안 중 어느 것을 받아들여도 현행 9%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얘기하고 있다. 양쪽 주장을 1%포인트씩 양보하는 44%로 합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내는 돈 13%, 받는 돈 44%에 합의해도 기금 고갈 시기를 2055년에서 2063년으로 8년 늦추고 2093년 누적 적자는 1293조원이나 줄어들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국민연금 개혁에 대해 “지금 조급하게 하는 것보다 22대 국회로 넘겨서 좀 더 충실하게 논의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국회에서 막판 조율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데 왜 미리 가능성을 차단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직 21대 국회가 2주 정도 남아 있다. 22대 국회에 가더라도 연금을 개혁할 여건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대선이 기다리고 대통령 임기도 후반부에 접어들어 지금보다 여건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일단 이번에 급한 불을 끄고 22대 국회에서는 다소 여유를 갖고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관계 등 연금 구조 개혁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5.16 [단독] 김 여사 ‘함정 취재’ 원팀이던 그들, 檢 수사 시작되자 서로 딴 소리
최재영 목사와 서울의소리
증거·직무 관련성 놓고 이견

▲13일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와 관련해 서울중앙지검으로 조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최재영(왼쪽) 목사와 백은종 서울의소리 대표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에게 ‘디올 백’을 건네고 이를 촬영해 폭로한 재미 교포 최재영 목사와 유튜브 채널 ‘서울의소리’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15일 전해졌다. ‘함정 취재’에서 ‘폭로’까지 한 팀으로 움직였던 이들이 ‘증거 제출’과 ‘직무 관련성’ 등 범죄 혐의와 직접 관련된 부분에서 견해차를 보이는 것이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최 목사는 지난 13일 검찰 조사에서 김 여사에게 건넸다는 선물이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성이 있는지에 대해 사실상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샤넬 향수 등은 대통령 취임 축하 선물로 줬고, 디올 백은 김 여사의 인사 청탁 의혹을 취재하기 위해 줬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 목사가 받고 있는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에서 핵심 쟁점인 윤 대통령의 직무 관련성을 부인한 것이다.

▲그래픽=김현국
청탁금지법은 공직자의 배우자가 공직자의 ‘직무와 관련해’ 금품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김 여사가 명품 가방을 받았더라도 윤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이 없다면 윤 대통령은 물론, 선물을 준 최 목사 역시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 직무 관련성이 인정되면, 최 목사는 3년 이하 징역형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직무 관련성에 더해 ‘인지 여부’까지 증명돼야 처벌 가능성이 생긴다. 한 검찰 관계자는 “최 목사가 직무 관련성을 부인하면 이 사건은 누구든 처벌이 어려워진다. 이른바, 사건이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함정 취재를 함께 기획해 폭로한 서울의소리는 “윤 대통령이 통일 운동가인 최 목사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직무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최 목사와 김 여사가 나눈 카카오톡 대화에도 윤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된 부분이 있다”고도 주장한다.
증거 제출에 대해서도 양측은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최 목사는 앞서 검찰 조사에서 “명품 백 수수 장면을 촬영한 손목시계형 몰래카메라, 김 여사와 연락을 주고받은 휴대전화, 노트북 등을 모두 잃어버리거나 팔아버려서 현재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실에 들어가기 전 기자들과 만났을 때는 “김 여사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 영상 원본 등을 제출할 것이냐”는 기자들 질문에 “모 기자에게 자료를 모두 넘겨줬고, 나는 안 갖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 변호사는 “몇 달에 걸쳐 김 여사에게 치밀하게 접근했던 최 목사가 ‘모든 증거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면서 “사실상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 같다”고 했다.
반면 서울의소리는 “최 목사와 김 여사 간 카카오톡 대화를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백은종 서울의소리 대표는 본지에 “검찰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해 오는 20일 고발인 조사 때 자료 전부를 제출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검찰이 김 여사를 소환하면 제출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이처럼 양측이 수사 과정에서 입장 차이를 보이는 것은 서로 고발된 혐의도, 처벌 가능성도 다르기 때문이다. 최 목사는 청탁금지법을 비롯해 주거 침입, 위계에 의한 공무 집행 방해, 명예훼손 등 여러 혐의가 걸려있지만, 서울의소리는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만 고발됐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처벌될 가능성도 처벌 수위도 최 목사 쪽이 훨씬 커 보인다”며 “그렇다 보니 최 목사 진술이 폭로 당시보다 서서히 물러서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최 목사와 서울의소리는 이번 ‘함정 취재’를 함께 기획했다. 2022년 9월 최 목사는 김 여사에게 디올 백을 건네면서 손목시계에 달린 몰래카메라로 촬영했고, 그 디올 백은 서울의소리 관계자가 사서 줬다. 이후 1년 2개월이나 지나 서울의소리는 이 영상을 폭로했다. 양측을 모두 아는 한 관계자는 “최 목사와 서울의소리가 검찰 조사를 앞두고 입장 차이를 보이더니, 최근엔 서로 연락도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유종헌 기자
05.17 7명 중 1명꼴 못 주고 못 받는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 도입을

▲2001년 대비 지난해(2023년) 최저임금, 물가 및 명목임금 인상률. /한국경영자총협회
경총 조사 결과, 지난해 법정 최저임금(시급 9860원)을 받지 못한 근로자가 301만명으로, 1년 새 25만명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근로자 7명 중 1명꼴이다. 최저임금을 위반한 고용주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는다. 1차 피해자는 근로자들이지만, 최저임금을 감당하지 못해 ‘범법자’로 사는 소상공인들도 ‘못 지킬 법’의 피해자들이다.
최저임금 과속 인상은 취약 계층 일자리부터 망가뜨린다는 걸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었다. 문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을 하겠다며 2018년 16.4%, 2019년 10.9%로 최저임금을 급속히 끌어올렸다. ‘고용 참사’ 부작용이 불거지자 인상률을 낮추긴 했지만, 기저효과 탓에 문 정부 이후 7년간 최저임금 인상률이 52%에 달했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최저임금은 근로자 중위 임금(전체 근로자 임금 순서에서 중간 지점)의 62%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57%)은 물론이고 미국(28%), 일본(46%), 독일(54%) 등 주요 선진국보다 훨씬 높다. 이것이 지속 가능하겠나.
이제라도 ‘지킬 수 없는 최저임금’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업종별 최저임금 차등화가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현행법으로도 업종별 차등화가 가능하지만 최저임금 도입 첫해인 1988년 한 해만 시행되고 사문화돼 왔다. 지난해 편의점, 음식·숙박업, 택시운송업에만 차등 적용하자는 안건이 최저임금위원회에 부쳐졌지만 부결됐다.
업종과 지역에 따라 고용 요건과 고용주의 지급 능력이 크게 다른데 전국 모든 작업장에 똑같은 최저임금을 주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에선 업종·지역별은 물론이고, 연령별로도 최저임금을 차등화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행은 돌봄 서비스 부담 완화 방법으로 외국인 근로자에게는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말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적극 검토해야 할 제안이다.
조선일보 사설
05-17 필사적인 1류 기업, 천하태평 3류 정부
이철호 논설고문
삼성전자 등 대미 로비에 공들여
반도체 운명 걸린 미·중 패권경쟁
8년 뒤 美 생산 3배↑ 한국 ⅓↓
1분기 1.3% 성장에 도취한 정부
미·중 코끼리 싸우면 풀만 죽어나
3류 정부라도 직무 유기는 안 돼
역대 방한한 미국 대통령들의 첫 일정은 항상 미군 기지 방문이었다. 그다음에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2017년 11월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부터 찾았다. 2022년 5월 조 바이든 대통령은 뜻밖이었다. 바로 삼성전자 평택공장부터 방문해 그곳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바이든 옆에는 ‘저승사자’라는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이 따라다녔다.
두 정상의 연설은 단상 위에서 미국 국적의 삼성전자 직원 30여 명이 지켜보았다. 단상 아래에 양국 수행원 50여 명이 앉았는데, 유독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 두 달 전 삼성전자 대외협력 부사장으로 스카우트 된 마크 리퍼트 전 대사였다. 대표적 지한파인 그는 주한 미국대사 시절 괴한에게 습격당하기도 했고, 미 민주당 내에 탄탄한 인맥을 갖춘 인물로 꼽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보고 싶다, 형제여(brother)’라는 이메일을 보낼 만큼 최측근이었다. 바이든의 삼성 방문을 성사시킨 숨은 주역이다.
삼성전자가 대미 로비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절박함 때문이다. 당장 2000억 달러(약 262조 원) 규모의 현지 반도체 공장을 무리 없이 지어야 한다. 미 정부가 약속한 보조금도 받아내야 한다. 사소하지만, 까다로워진 미 전문직 취업비자(H-1B)도 문제다. 2022년 전체 H-1B 비자 중 한국에 발급된 것은 고작 1.04%였다. 기술 인력 부족으로 자칫 반도체 공장을 못 돌릴 판이다.
더 중요한 숨겨진 이유는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의 유탄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불길한 조짐이 감지된다.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 수출은 중국·베트남에 쏠렸고, 그곳에서 스마트폰·컴퓨터로 조립돼 세계로 퍼졌다. 하지만 지난해 74%였던 대중 수출 비중이 올 1분기 40%로 급감했다. 다행히 미국·대만으로 나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출이 늘었다. TSMC 등에서 인공지능(AI)용 반도체로 조립돼 미국 엔비디아에 납품되는 물량이 급증한 것이다.
하지만 HBM 선두주자인 SK하이닉스의 최태원 회장은 최근 뜻밖의 고백을 했다. “반도체 롤러코스터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며 “이제 미세화가 어려워 기술보다는 캐펙스(CAPEX·설비투자)가 더 중요한 숙제”라고 털어놓았다. 반도체 팹 하나에 30조 원이나 들다 보니 리스크 분산을 위해 보조금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칩스법에 따라 2032년 전 세계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10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 비중이 지금의 3배인 28%로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은 31%에서 9%로 급락한다.
정부는 1분기 1.3% 깜짝 성장에 도취된 분위기다. “재정 중독에서 벗어나 민간이 주도한 성장”이라며 자화자찬이 한창이다. 하지만 환율 급등 덕분에 1∼4월 전체 수출은 9.7% 늘었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3.2% 증가에 그쳤다. 반도체 보완재로 평가받던 2차전지 수출은 21% 급감했다. 여기에 미국이 14일 2차 관세 전쟁에 돌입했다. “중국의 과잉 생산과 보조금은 경쟁이 아니라 반칙”이라며 중국산 전기차·배터리 등에 관세를 두 배로 끌어올렸다. 중국이 “이성을 잃은 횡포”라고 반발했지만, 도미노 관세 인상은 막기 어려워 보인다. 같은 날 미국의 중국 커넥티드 카 규제 방침이 나오고 미 의회엔 중국산 드론 관세 인상 법안이 제출됐다. 하루 하나 꼴이다.
코끼리끼리 싸우면 풀만 죽어난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다. 신냉전 시대에 한국은 한미동맹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면서 한·중 관계도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다. 이런 역사적 환절기에 기업들이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반면, 정부는 느긋한 분위기다. 지난해 8월 윤 대통령의 구애로 미 AMAT가 오산에 연구개발용 부지를 매입했는데, 불과 석 달 뒤 국토교통부가 아파트 부지로 선정해 버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뒤늦게 대체부지를 찾아 준다고 하지만 애초 계획은 엉망이 됐다. 2022년에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늑장 대응으로 12조 원을 날릴 뻔하더니 이번에는 일본 정부의 네이버 축출에 뒷북을 치고 있다. 민간 주도가 중요하지만, 정부 직무 유기까지 허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우리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기업은 2류”라는 어록은 29년이 흘러도 여전히 명언이다.
문화일보
05.20 위기의 대한민국 정통 세력, 되살아날 방도는?
여당이 패배한 근본적 이유는
汚名이 된 ‘보수’라는 이름 때문
‘젊은 보수’ ‘따뜻한 보수’ 외쳐봐야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아프지만 보수 이름 도려내고
‘자유’의 연고를 바르자
“우린 보수파 아니라 자유파다”
이름 바로잡아야 나라가 산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한 시인의 절창처럼 인간은 언어로써 세계를 인식한다. 사물에 알맞은 명칭이 부여되면 ‘하나의 몸짓’은 ‘꽃’이 될 수 있다. 이름이 잘못되면 격렬한 ‘몸짓’도 뿌연 재가 되어 흩날리고 만다. 매사 명(名)과 실(實)이 들어맞아야 세상의 질서가 바로 선다. 산을 물이라 하고 바다를 뭍이라 한다면, 인간세(人間世)의 규약이 무너지고 개개인은 속임수에 빠져든다. 그렇기에 춘추의 혼란 속에서 공자(孔子)는 정치의 최우선으로 정명(正名)을 외쳤다.
최근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이는 대통령의 오만을 거론하고, 어떤 이는 여당 대표의 미숙을 지적하지만, 진부한 남 탓은 아닐까? 더 근본적인 원인이 케케묵은 이름에 숨어 있을 듯하다. 여당을 패배로 몰고 간 음험한 이름은 ‘보수(保守·Conservative)’라는 낙인이다.
물론 자유주의 전통이 깊은 북미나 유럽에서 보수는 오명이 아니다. 프랑스 자코뱅의 광란을 거울삼아서 영국의 버크(Edmund Burke·1729~1797)는 개량과 실용의 보수주의를 제창했다. 그 이후 보수주의자들은 좌·우파 양극단을 피해 점진적 개혁과 실용적 발전을 도모했다. 디즈레일리, 비스마르크, 처칠, 레이건 등의 유능한 정치인, 벌린, 아렌트, 하이에크, 프리드먼 등의 탁월한 이론가, T S 엘리엇, 헤밍웨이, 톨킨 같은 저명한 문인들까지 19~20세기 서양에선 급진주의와 극단주의에 맞서 사회 발전의 균형을 잡았던 다양한 보수주의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보수주의는 오늘날 한국의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한다. 전통의 지혜는 망실됐고, 자유의 역사는 짧디짧고, 법치의 경험은 얇디얇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보수는 낡고, 썩고, 칙칙하고, 냄새나고, 고리타분한 뉘앙스를 풍긴다. 반면 진보는 젊고, 발랄하고,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그런 식의 단순·무식한 개념 규정은 폐기돼야 마땅하지만, 언중의 일상어를 바꾸려는 시도는 밀물에 맞서려는 노력만큼 무모하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이미 멸칭이 돼버렸다. 보수의 멍에를 진 세력이 진보의 날개를 단 세력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젊은 보수’ ‘따뜻한 보수’ 등의 구호를 외쳐봐야 비탈길을 오르는 싸움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단 평지로 나아가는 정공법이 필요하다.
한국 현실에서 보수 세력이 다시 일어서려면 보수의 이름을 도려내는 길밖에 없다. 상처가 나겠지만, 그 환부엔 ‘자유’의 연고를 바르면 된다. 이미지 쇄신용 신장개업의 목적만은 아니다. 보수주의란 그 자체로 정연한 정치 이념이라기보단 급진과 과격, 극단과 맹목을 경계하며 전통의 지혜와 경험적 지식을 활용하려는 신중하고 사려 깊고 실용적인 삶의 태도를 이른다. 지난 200여 년 서양 문명을 일으킨 보수주의의 이론적 기초는 자유주의였다.
한국 헌정사도 마찬가지다. 구한말 6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자유의 깊은 뜻을 깨달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공산 전체주의 세력에 맞서 민주공화국을 지킨 자유주의 혁명가였다. 대한민국은 식민지의 유습을 끊고 전근대의 모순을 깨는 자유민주주의 혁명으로 시작됐다. 대한민국 정통 세력은 보수가 아니라 자유의 기치 아래서 근대화·산업화·선진화의 혁명을 이룩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개발 독재의 시기를 거쳤지만 경제적 자유화가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지면서 권위주의는 지양되었다. 대한민국 정통 세력은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놓고 자유의 신장에 매진했던 개혁적 진보 세력이었다. 유럽이나 북미라면 개혁적 진보 세력이 보수를 자임할 수 있겠지만, ‘보수=수구=꼴통’의 등식이 지배하는 한국적 토양에서 보수의 이름은 주홍글씨다.
대한민국 정통 세력은 이제 보수의 족쇄를 벗고 자유의 영예를 되찾아야 한다. 한국 현대사를 긍정하고, 극단·급진주의를 반대하고, 법치 파괴의 권모술수를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보수파가 아니라 자유파다!”라고 외칠 때다. 그래야만 주체사상에 혼을 팔고, 중국에 “셰셰”하고, 떼 지어 “미국 소, 미친 소”를 부르짖고, 무조건 FTA를 반대하고, 반일 몰이를 일삼는 낡고 어둡고 부패한 비자유(illiberal) 선동 세력이 진보라 불리는 언어 착란을 시정할 수 있다. 동서고금 언제 어디서나 이름을 바로잡아야 나라가 산다.
조선일보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05.21 세계 최악 저출생 국가에서 세금은 자녀 많을수록 불리

/이철원
선진국들이 가족 친화적 세금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세계 최악의 저출생 국가인 한국은 자녀 많이 키우는 가족에게 불리한 세제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20세 이하 자녀에 대한 소득공제액은 1인당 150만원으로 16년째 똑같은 금액이다. 소득 없는 자녀인데도 만 20세가 넘으면 무조건 공제 제외다. 심지어 만 20세 이하 자녀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연간 500만원 이상 근로소득을 올리면 공제에서 제외한다.
다자녀 가구가 자동차를 구입할 때 취득세를 감면해 주는 제도도 2010년 도입 후 한 번도 기준을 바꾸지 않아 감면액이 15년째 그대로다. 전세 대출 원리금 소득공제나 월세 세액공제 같은 각종 주택 관련 세금 역시 다자녀 가족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전세 대출 원리금에 대해 연간 이자 상환액의 40% 범위에서 최고 400만원을 공제해 주는데 적용 대상이 수도권 기준 전용면적 85㎡(비수도권은 100㎡)까지다. 방이 많이 필요한 다자녀 가구가 이보다 넓은 집을 전세로 얻으면 공제를 못 받는다.
주요 선진국은 저출생 극복을 위해 세금 제도부터 가족 친화적이다. 독일의 경우, 자녀 소득공제액을 지난 16년간 1932유로(약 280만원)에서 3192유로(약 470만원)로 65.2% 올렸다. 맞벌이 부부에겐 자녀 공제도 각각 해준다. 부부 공제액을 합치면 혜택이 자녀 1인당 6384유로(약 940만원)까지 늘어난다. 나라에서 세금 안 걷을 테니 아이 많이 낳아 잘 키우라는 뜻이다.
저출생 극복의 성공 국가로 꼽히는 프랑스는 육아 도우미 비용까지 세액공제해 준다. 가족 수가 많을수록 세율을 낮게 적용하는 차등 소득세율 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일본도 자녀 1인당 공제액이 우리의 2배에 달하는 38만엔(약 330만원)이다. 자녀가 19세 이상 성인이 되어도 소득이 없는 학생이면 23세까지 25만엔을 공제해 준다. 싱가포르의 경우, 일하는 여성에게는 자녀 수에 따라 차등적으로 소득공제 혜택을 주는 ‘직장 여성 자녀 공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6년간 280조원의 저출생 예산을 쏟아붓고도 출산율 급락을 거듭하고 있다. 현금성 지원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자녀 키우는 부모에게 실질적으로 혜택이 돌아가는 세금 제도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자녀 키우는 가구에는 소득공제를 더 해주고 선진국에 비해 과도하게 높은 소득세 안 내는 사람들 비율은 대폭 줄이는 등 저출생·고령화에 맞춰 소득세 부과 방식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사설
05.21 라인 사태는 축구 한일전이 아니다
日 정부의 어설픈 관치가 라인 갈등 유발했지만
21세기 原油 데이터에 대한 소유·통제권 강화가 핵심 배경
韓 정부 적절히 대응했으니 이젠 비즈니스로 풀어야

▲5월 13일 서울 서초구 라인프렌즈 플래그십스토어 강남점 모습./뉴스1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터지자 네이버의 일본 사업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10년 가까이 공들인 일본 검색 사업이 아무런 성과 없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일본 전역을 초토화한 대재앙을 맞은 것이었다. 직원들은 일본 지사 건물이 여진(餘震)으로 흔들릴 때면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해진 창업자는 2019년 한 강연에서 “직원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내면 일본 사업을 재개하기 어렵고, 직원들이 현지에 남으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압박감에 사무실에서 펑펑 울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모바일 메신저 ‘라인’이 탄생했다. 지진으로 유·무선 전화는 먹통이 됐지만 인터넷망은 멀쩡한 것에 착안해 문자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메신저를 개발한 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라인은 일본 국민의 80% 이상이 사용하는 국민 메신저로 성장했고, 한국 플랫폼의 유일한 해외 진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라인으로 돈을 버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라인 메신저를 활용해 수익을 내려면 쇼핑·금융·오락 등 다양한 부가 서비스를 접목해야 하지만 그때마다 일본 정부의 규제와 함께, 외국 기업에 배타적인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맞닥뜨리는 데다 일본 최대 포털 기업 야후재팬과도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실제로 라인 부문은 결제 서비스 ‘라인 페이’ 확산을 위해 야후재팬과 출혈 경쟁을 벌인 탓에 2019년 매출 2조4000억원에 50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냈고, 2020년에도 적자 규모를 줄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와 야후재팬의 손정의 회장이 찾은 돌파구가 라인과 야후재팬의 통합이었다. 이해진 창업자가 2000년 자신의 지분율이 희석되는 것을 감수하고 ‘한게임’과 합병을 통해 국내 경쟁 포털 업체들을 따돌렸듯이, 일본에서도 적(敵)과의 통합이라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서로의 강점을 살려 실질적인 경영권은 야후 측에서 행사하고 시스템 운영 등 기술 개발은 네이버가 맡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 두 회사의 통합은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후 3년 만에 라인야후의 매출은 60%, 영업이익은 2배 가까이 성장했고 네이버의 지분 가치는 8조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라인이 일본의 모바일 인프라로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자 일본 내에서는 경제 안보의 차원에서 데이터 주권(主權)과 디지털 인프라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갈수록 커진 게 사실이다. 왜 자국민의 개인 정보와 소중한 데이터를 한국 측이 공짜로 이용하거나 악용할 우려가 있는 데도 그대로 방치하느냐는 것이다. 유럽연합이 자신들의 데이터를 지키려고 최대 우방국인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을 상대로 강력한 규제 법안을 쏟아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일본 우익에서는 “대일 강경파였던 문재인 정부의 홍보수석이 네이버 부사장 출신”이라고까지 비판했다. 여기에 2021년 이후 라인야후에서 개인 정보 유출 등 크고 작은 보안 사고가 잇따라 발생한 것도 이 같은 기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한 인터넷 전문가는 “만약 일본 기업이 카카오톡의 시스템 운영을 맡다가 보안 사고가 났다면 우리는 더 난리가 났을 것”이라며 “알리·테무 등 중국 이커머스 사용자가 급증하면서 우리 국민의 데이터가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도 께름칙하다”고 말했다.
이번 라인 사태가 라인야후의 자본 관계를 재조정하라는 일본 정부의 어설픈 관치(官治)에서 촉발됐지만 이 사안은 근본적으로 우리 편이 무조건 이겨야 하는 축구 한일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21세기 원유(原油)로 불리는 데이터의 소유·통제권, 네이버의 향후 비즈니스 전략, 한·미·일 간의 데이터 공유 문제 등 수많은 변수를 놓고 냉정하게 득실을 따져야 한다. 네이버가 이번 참에 확장성에 한계를 보인 라인을 매각하고 AI(인공지능) 검색이나 클라우드 분야에 집중 투자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비즈니스에 배신은 없다. 선택만 있을 뿐이다.
조선일보 조형래 부국장
05-21 최저임금위 가동, 사업 종류 따른 차등화 도입 우선해야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할 최저임금위원회가 21일 첫 전원 회의를 개최했다. 첫날부터 위원장과 공익위원 간사 선출을 놓고 진통을 겪은 데서도 보듯 올해 심의 역시 난항이 예상된다. 1만 원에 육박하는 시급(時給)의 추가 인상, 외국인 돌봄 인력에 대한 최저임금, 업종별·기업 규모별 차등화 도입 등이 당면 현안이지만 입장 차가 극명하다. 최임위는 다음 달 27일까지 최저임금을 결정해 고용노동부에 제출해야 하지만, 합의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올 최저임금은 시급 9860원으로, 140원(1.42%)만 더 오르면 1만 원이다. 1만 원대 진입이라는 상징성도 부담이지만, 경제계에선 지금도 너무 높다며 동결을 주장한다. 노동계는 고물가로 실질임금이 감소한 만큼 대폭 인상을 요구한다. 일본보다 높은 최저임금의 폐해는 이미 심각하다. 식당 등 자영업과 영세·중소기업은 한계에 처해, 알바를 모두 줄인 1인 자영업자가 급증했다. 일자리 감소에다 최저임금 미만을 받는 근로자가 300만 명으로 늘어나는 역설이 벌어진다. 하한액이 최저임금의 80%인 실업급여의 부정·반복 수급자를 늘리는 왜곡도 심각하다.
영세 자영업 외에 가계의 돌봄 인력 비용 경감도 시급하다. 고령자·육아 등 돌봄 인력 수요가 급증해, 높은 최저임금이 적용되면 가계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는 게 한국은행의 평가다. 가사·육아 도우미의 최저임금 미만 비율이 60%나 된다는 경총 분석도 있다. 오는 9월부터는 서울시의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도 시작된다. 차등화 도입은 발등의 불이다. 이번에는 업종별 적용 원칙을 우선 논의해 도입한 뒤, 그 뒤에 업종별 시급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을 사업의 종류별로 구분하여 정할 수 있다’고 규정한 최저임금법 제4조를 적용하면 된다.
문화일보 사설
05.22 ‘AI 기초 모델’은 美 109개, 中 20개, 韓 0개… AI 독립이 위태롭다

▲일러스트=김성규
경주 바닷가에 봉길해수욕장이 있다. 맞은편 동해에는 신라를 지키는, 작은 바위섬으로 만든 문무왕릉이 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감은사지(感恩寺址)가 자리 잡고 있다. 감은사지에서는 세월을 이겨낸 초석(礎石)과 쌍탑이 1200년을 넘어 신라의 역사를 말해 준다. 초석(礎石)은 비바람을 견뎌내고 세월을 견디는 힘의 뿌리다. 그리고 초석은 기초(基礎)의 상징물이다. 마찬가지로 공학에도 기초가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고체물리학, 전자기학, 전자회로, 논리회로가 기초이고,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수학, 컴퓨터, 그리고 소프트웨어가 기초다. 기초가 튼튼해야 융합(融合)과 창조(創造)가 가능하다. 그 위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이 성장한다. 이렇게 인공지능 모델 분야에서도 ‘기초 모델(Foundation Model)’ 없이는 모두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조그만 지진에도, 바람에도 무너진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도 없다. 그래서 국가뿐 아니라 기업으로서도 ‘인공지능 기초 모델 확보’가 당면한 최고 과제다.


▲그래픽=김성규
인공지능에서 기초 모델이란 다양한 생성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된 초거대 인공지능 모델이다. 오픈AI의 챗GPT가 대표적 기초 모델이다. 특징으로는 초거대 크기, 사전 학습, 일반성, 확장성, 그리고 멀티모달 생성 기능이다. 인간과 비교하자면, 대학 졸업생 정도의 지능과 기능을 가진 인공지능이다. 기본 교육은 받은 모델이다. 특히 언어 능력, 수리 능력, 창조 능력과 소통 능력을 갖는다. 거대 언어 모델(LLM)이 대표적이다. 앞으로는 여기에 더해 추론 능력도 갖출 예정이다. 인공지능이 수학 문제도 풀고, 도표도 해석하고, 미래도 예측하게 된다.
대학 졸업생 수준으로 사전 교육을 받은 기초 모델을 한 단계 더욱 발전시켜 전문 인공지능으로 확대 학습을 시키는 과정을 ‘미세 조정 학습(Fine Tuning Training)’이라고 한다. 이제 제대로 된 전문가로 육성하는 작업이다. 공학으로 비유하면 석박사 대학원 교육과정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법률 학습을 심화하면 인공지능 변호사가 되고, 회계학을 학습시키면 인공지능 회계사가 된다. 의학을 집중 교육하면 인공지능 의사가 된다. 신약 개발 인공지능, 교육 전문 인공지능이 나올 수도 있다. 이처럼 기초 모델이 있으면 응용 분야로 확대할 수 있다. 새로운 사업이 창출된다. 어느 정도 전문 교육이 지난 이후 주기적으로 시험을 본다. 교육 수준을 가늠하거나 윤리적, 사회적으로 문제될 만한 질문을 해 본다. 이에 대한 대답을 평가하여 점수를 매긴다. 그 평가에 따라 재교육을 실시한다. 자격증을 딴 뒤에도 주기적으로 재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른다. 인간의 전문가 교육과 유사하다. 인간도 평생 학습하듯이 인공지능도 평생 학습한다. 최신 기술을 학습해야 한다. 이처럼 기초 모델 없이는 전문 모델도 없고 인공지능을 이용한 신산업도 없다.
기초 모델을 확보하면 마지막 단계에서 초경량화 모델로 전환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서 인공지능을 사용할 경우 메모리나 배터리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기초 모델 인공지능을 초경량화하지 않으면 바로 사용할 수 없다. 인공지능 학습이나 생성 과정에서 배터리가 금방 소진될 수 있다. 학습은 인공지능 수퍼컴퓨터에서 사전에 하더라도 바로 스마트폰, 자동차, TV, 로봇 등 이동 물체에 담아서 쓸 수 없다. 그래서 꼭 모델 초경량화 작업을 거친다. 경량화 언어 모델(s-LLM)이 대표적이다. 모두 기초 모델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초 모델이 없으면 사서 쓰거나 사용료를 내야 한다. 사업 주도권이 없고 경쟁력이 없다.
지난달 16일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인간중심인공지능연구소(HAI)는 ‘AI 인덱스 2024′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괄목할 기초 모델을 가장 많이 개발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총 109가지를 만들었다. 2위는 20건을 개발한 중국이었다. 이스라엘이 2건, 싱가포르가 2건으로 보고되었다. 여기에 영국, 아랍에미리트, 캐나다, 독일, 핀란드, 대만,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도 포함되었다. 한국은 하나도 없었다. 아쉽게 지난해 네이버가 개발하고 출시한 ‘하이퍼클로바x’는 이번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하이퍼클로바X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해외 홍보가 부족했거나 사용자 수 또는 관련 논문 수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국내 기업들과 스타트업들도 글로벌 인공지능 서비스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기초 모델은 해외에서 오픈 소스를 들여오거나, 조정(Parameter Tuning)하거나 변형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파악된다. 심각한 경고음으로 들린다.
국가의 자주독립 조건으로 헌법, 국토, 언어 그리고 국민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국방력이 있어야 한다. 외교적으로 동맹과 연합해서 안정된 질서를 구축한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세계에서도 자주독립 국가의 조건이 있다. 바로 자체 경쟁력이 있는 ‘기초 모델 확보’이다. 자체 인공지능 기초 모델이 없으면 모두 구매하거나 허락을 받고 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PC의 운영체제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Window)를 쓰고, 스마트폰에서 모바일 운영체제로 구글의 안드로이드(Android)나 애플의 iOS를 써야만 했던 상황이 똑같이 재현된다. 그러면 산업 생태계 주도권이 종속된다. 특히 한글과 우리 문화에 익숙한 기초 모델 확보가 독도를 지키는 만큼이나 중요하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삼성전자, LG, SK, KT, 현대자동차도 자체 기초 모델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공지능 수퍼컴퓨터에 대한 투자와 인공지능 고급 인력 확보가 필요하다. 기초 모델 없이는 인공지능 시대의 자주 독립은 없다.

05-22 ‘헛발질 정부’와 K-반도체 사면초가
동지도 적도 없는 AI 新경제
라인 사태는 日 AI 만회 전략
TSMC는 韓 주도 HBM 넘봐
美·日·中에 밀리는 韓 경쟁력
반도체, 보조금도 전력도 부족
정책 혼선과 공직자 이반 조짐
인공지능(AI) 시대의 신경제 질서가 글로벌 경제를 혼돈으로 몰아간다. 하루가 지나면 신기술이 발표되는 무한 패권 전쟁이다. 빅테크와 반도체 업체들은 협업과 동시에 경쟁하며 새로운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판짜기에 여념이 없다. 기존 영역의 파괴를 넘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공격·수비가 교차하는 대격변기다.
한국엔 우려할 변화가 잇따른다. 네이버의 지분 매각을 압박한 라인야후 사태는 대표적이다. 인터넷에 이어 AI도 뒤진 일본의 필사적인 만회 전략의 산물이다. 소프트뱅크의 AI 패권 야심이 뒤를 받치고 있다. 손정의 회장은 중동 자금까지 모아 무려 88조 원을 투자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일본 정부는 미래를 지향하는 한일관계에 해를 끼치는 것은 피하려 하지만, 저변에는 AI 패권 회복이 더 우선이라는 인식도 보인다.
빅테크들과의 협업·경쟁은 더 험난하다. 시스템 반도체 1위인 대만 TSMC는, AI 반도체의 핵심으로 한국이 주도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까지 넘본다. SK하이닉스가 생산한 것을 TSMC가 조립해, 엔비디아에 납품하는 게 지금의 3자 연합 구도인데, 현재의 5세대(HBM3E) 다음 6세대(HBM4)부터는 직접 생산도 하려는 것이다. 삼성전자를 압박하는 전략이다. 또, 구글은 10년에 걸친 삼성과의 반(反)애플 동맹을 접고 삼성에 맞서 자신의 AI폰 판매를 위해 TSMC와 손잡았다. 그렇지만 삼성은 AI폰의 두뇌(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전쟁에선 구글과 동맹 관계다. 삼성은 또 엔비디아와 HBM에선 협업을 추진하지만, AI 가속기에선 경쟁자다. 비즈니스에선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말이 실감 난다.
이 와중에 한국의 경쟁력은 경쟁국에 밀리고 있다.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에 따르면 25개 첨단산업에서 미국과의 기술 격차는 2017년 1.5년에서 2021년 0.8년까지 줄었다가, 2023년엔 0.9년으로 커졌다. 일본과의 격차도 2021년 0.4년에서 지난해 0.5년으로 확대됐다. 중국과의 기술 격차는 여전히 0.3년 앞서 있다고 하지만, 조선은 역전당했다. 2차전지·차세대 반도체·나노·지능형 로봇 등에서도 경쟁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반도체의 경우 보조금 전쟁이 치열하지만, 한국으로선 힘겨운 경쟁이다. 반도체는 공장 하나 짓는 데 수조∼수십조 원이 든다. 1년 예산이 656조 원인 형편에서 미국(약 75조 원)·중국(100조 원)처럼 재정을 투입하는 것은 무리다. 윤석열 정부가 삼성 등 제조업체엔 세제를 지원하고, 소·부·장 등 생태계 활성화와 연구·개발에는 민관 합동으로 10조 원+알파를 투입하기로 방향을 잡은 것은, 물론 턱도 없이 부족하지만, 이게 우리의 현주소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어이가 없는 것은, 반도체가 쓸 전력조차 부족하다는 점이다. 송전선로 건설이 7년이나 지연된 탓에 경기도로 전력을 보내기로 돼 있는 동해안 석탄발전소 8곳이 가동을 멈춘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화를 불렀지만, 윤 정부 들어 개선된 것도 없다. 선진국들도 AI발(發) 전력 대란 예고에 초비상인데 한국은 남의 일처럼 여긴다. 국회, 지자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경쟁국들은 반도체 패권을 위해 민관이 똘똘 뭉쳐 총력을 쏟는데 한국은 보조금도 전력도 부족하다. 기업 홀로 뭘 갖고 싸울 수 있겠나.
이런 판에 윤 정부는 임기 초도 아닌 때에 뜬금없이 ‘5·7·5 경제 로드맵’을 운운하고 있다. 남은 임기의 동력이 걱정되는 시기에 14년 전인 2010년 MB 정부가 폐기했던 7·4·7 공약을 흉내 내는 셈이다. 경제 살리기 의지라고 해도 철 지난 캠페인이 감동을 줄 리 없다. 정부 주도가 아닌 시장·민간 중심 경제로 가겠다는 그나마 초심조차 걷어찰 모양이다. 라인 사태 방관, 해외 직구 금지 철회, 저가 중국산에 안방을 내준 태양광 닮은꼴인 해상풍력 방치 같은 정부의 무능이 속출해 불신을 산다. 국민이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의대 증원 등 의료개혁조차 헛발질하지 않을지 불안하다. 위기 불감증이 더 커지는 모양새다. 공직자들의 복지부동과 이반 조짐도 보인다. 청사진이라면 이미 충분하다. 약속을 실천해 하나라도 제대로 뒷받침하는 데 전력투구해야 한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반도체에서 전력에 이어 용수마저 차질을 빚으면 파국뿐이다.

문화일보
05.22 문재인 회고록에 대한 10가지 반박
역대 국내 대통령들의 회고록은 주관적인 견해의 나열이거나 미화(美化)의 성격이 강하다. 일부는 솔직한 기록보다는 재임 중 추진했던 정책에 대한 자화자찬이거나 합리화 및 불가피성 등을 기술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당한다. 일반적으로 외교 안보 및 대북관련 부분은 상대국이나 상대 지도자 등이 관련되어 있고 외교적 마찰을 고려하여 공식적 기록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주말 발간한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는 공식적인 외교문서를 토대로 기술한 정통 외교안보 분야 회고록이라기 보다는 최종건 전 외교부 차관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기술되어 사건과 정책에 대한 감성적 의견과 소회로 평가된다. 따라서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미국 대통령들의 회고록이 사료나 당시 외교문서 등을 토대로 치밀하고 꼼꼼하게 기록된 것과는 대조가 된다.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 집필 계기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이룬 일과 이루지 못한 일의 의미와 추진 배경, 성공과 실패의 원인과 결과를 성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며 “설명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록이나 문서를 인용하지 않고 김정은의 발언을 거두절미하고 일부만 소개하거나 부분적으로 모호한 이야기 등을 나열하여 과연 역사적 사료로서 의미가 어느 정도일지 애매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미화하고 북한의 핵 개발과 대남정책을 속칭 내재적 입장에서 지나치게 옹호하고 대변하여 일반 국민들이 향후 김정은의 의도와 대남정책을 오판할 가능성이 큰 만큼 세부적인 지적과 반박은 불가피하다. 통상적으로 과거 북한 최고 지도자의 행태나 관행, 평양의 선전과 실제 행동 등에서 평가할 때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김정은에 대해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판단하거나 감성적으로 해석하여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김정은의 녹취파일이 없는 만큼 사실관계 확인은 한계가 있다. 주로 김정은 관련 발언이나 북핵 정책을 중심으로 열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회고록에 나온 문 전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고 이를 반박하고자 한다.
1. 김정은이 직접 연평도 포격전으로 고통받은 주민을 위로하고 싶다고 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놀라웠다.
연평도 포격전은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쯤, 북한이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의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하자 대한민국 해병대가 피격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를 향해 대응사격을 가한 사건이다. 선대 지도자인 김정일의 군사행동에 대한 남한 주민들의 피해에 대해 아들인 김정은 자신이 현장을 방문하여 위로한다는 발언은 선대의 선군정치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과거 사례에서 평가할 때 불가능 수준이다. 과거 2008년 8월 금강산 관광 당시 북한군의 총격에 민간인 박왕자씨가 사망하였지만 북한은 선군정치 원칙을 내세워 끝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필자는 당시 현대아산 관계자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북한에서는 군대의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사과도 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김정은의 발언이 실제 존재했는지 혹은 다른 의도로 언급하였는데 문 전 대통령이 비틀어서 왜곡 표현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실제 이런 발언은 북한의 최고지도자 행태로 봐서 가능하지 않다.
2. 정상간의 소통은 이메일로 하자고 했다.
수많은 해커를 양성하고 남한은 물론 전 세계를 해킹하는 등 인터넷 해킹 수법에 대해서 정통한 김정은이 정상 간의 소통을 이메일로 하자는 것은 농담 수준의 발언에 불과하다. 보안에 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있는 김정은이 보안 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이메일로 정상 간의 소통을 하자고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발언이다. 세계 정상들 간에 이메일로 소통하는 경우는 없다.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3.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여러번 당부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2019년 2월 하노이 정상회담에 참여했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020년 6월 발간된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에서 가능한 문 전 대통령이 미북 대화에 개입하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이 원치 않았다고 주장했다. 문 전 대통령이 지나치게 북한에게 양보하려고 해서 판문점 회담 등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문 전 대통령이 스스로 자칭 ‘운전자론’을 내세워 과잉 중개자 역할을 하려는 시도를 시간이 갈수록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4. 트럼프는 북한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비핵화를 하려고 해도 프로세스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노하우가 없으니 한국이 그 방안을 강구해서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외교부 국정원 최고전문가들이 평화프로세스를 위한 로드맵을 작성해서 트럼프에게 전달했다.
미국은 대북 협상에 관해서는 우리보다 한 수 위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유엔대표부 채널을 비롯해서 한국보다 더 많은 협상 경험과 자료를 축적하였다.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은 평양을 적접 방문해 억류자를 구출하기도 했다. 대북협상 채널은 유엔, 베이징, 스웨덴 대사관 채널 등 다양하다. 미국이 노하우가 없다고 한국에게 방안을 강구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은 한국의 속내를 알고 싶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트럼프와 김정은 간 친서는 2018년 4월 1일부터 2019년 8월 5일까지 모두 27통이 교환돼 양측은 이미 충분한 소통을 하고 있었다. 김정은은 폼페이오 등 고위 관료들과의 협상에 대해 불신했고 문 전 대통령이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의 협상에 끼어드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러한 의사를 친서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각하의 의중을 충실히 대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폼페이오와 설전을 벌이기 보다는 각하와 직접 만나 비핵화를 포함한 중요한 현안들에 관해 심층적으로 의견을 교환함이 더 건설적(2018.9.6.)“,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각하와 직접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길 희망(2018.9.21.)” 등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문 전 대통령이 미북 정상회담에 개입하려는 것을 반대해서 형식적으로 한국의 복안을 내라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존 볼턴 전 보좌관은 문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문 전 대통령에 대해 매우 불편해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문 전 대통령이 잘못된 거래를 하도록 트럼프를 혼란스럽게 했다고 평가했다.
김정은은 2018년 9월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親書)에서 “앞으로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는 남조선 대통령 문재인이 함께 하는 게 아닌, 각하와 제가 직접 논의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문제들에 문 대통령이 보이는 과도한 관심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문 전 대통령을 북·미 간 대화에서 배제할 것을 주장했다.
볼턴 전 보좌관은 회고록에서 2019년 6월 남·북·미 판문점 회동에 대해 “트럼프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근처에 없기를 바랐지만, 문 전 대통령은 완강하게 참석하려 했다”고 했다. 또한 “김정은은 문 전 대통령을 위한 시간도, 존경심도 없었다”고 했다.
5. 트럼프는 평화프로세스의 내용과 로드맵을 전화로 설명하면 페이퍼로 정리해서 보내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기도 했다.
백악관 재입성을 노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대거 집필에 참여한 책 ‘미국 안보를 위한 아메리카 퍼스트 접근법(An America First Approach to U.S. National Security)’이 5월 9일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모건 오테이거스 전 국무부 대변인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해 “트럼프는 문 전 대통령의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가 원했던 것보다 더 북한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며 “문 전 대통령이 너무 북한에 양보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고의로 그를 싱가포르 회담에서 배제시켰다”고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트럼프가 문 전 대통령의 평화프로세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6. 김정은은 예의 발랐다. 김정은은 남북 공동 정상회담에 대해 자신에게 상의해왔다. 김정은이 기자회견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고 내게 물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와서도 자기가 잘했냐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거냐고 내게 물었다.
기자회견을 자신에게 물었다고 예의가 바르다고 평가했는지 의문이다. 기자들을 상대해본 적이 없는 독재자 김정은 입장에서 문 전 대통령이 기자들을 잘 관리해달라는 의미를 전달했는데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 간의 사담이 주제가 아닌 정상회담에서 대화는 예의가 있고 없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각국의 국익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하고 관철하였는가가 핵심이다. 김정은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발언에 불과하다.
7. 김정은이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1년만인 2021년 5월 친서를 보내왔다. 김정은이 그 일(연락사무소 폭파)이 미안했던지 연락사무소를 군사분계선 일대에 다시 건설하는 문제를 협의해보자고 제안했다.
김정은이 미안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행동을 위장하기 위해 변환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대한민국 예산 600억원이 투입된 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해 배상 요구도 못했던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변명하는 발언에 불과하다. 군사분계선 일대에 용도도 분명치 않은 연락사무소를 거액을 투자하여 새로 건설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혀 현실성이 결여된 발언이다.
8.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당시 트럼프와 미국 협상팀은 북한의 제안 내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트럼프도 나중에 내게 후회한다는 말을 하며 미안해했다.
북한은 영변핵 포기와 유엔안보리 제재 11건 중 민생 분야 5건을 해제하는 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영변핵은 북한핵 개발의 성지(聖地)이지만 현재 북한 핵의 50%가 안된다. 분강, 강선 등 다른 핵시설의 폐기는 언급하지 않고 무조건 현금 거래를 푸는 5건의 해제는 전체 제재를 무력화시킨다. 트럼프는 부분 비핵화로 대북제재 전체를 무력화시키는 거래를 할 수 없었다. 미국 협상팀은 이러한 사실을 전부 인식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의 제안을 받고 “당신은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You are no ready for the deal)”고 언급하고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트럼프는 회담이 노딜로 종료된데 대해 후회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9. 하노이 노딜은 트럼프 대통령 때문이 아니라 존 볼턴 등 미국 대통령 참모들때문이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부분 비핵화로 대북제재를 해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사전에 참모들로부터 충분히 인지하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북한의 의도를 간파하였다. 참모들이 반대해서 협상이 노딜로 끝난 것이 아니다. 북한은 김정은이 개인적으로 트럼프를 유혹하면 즉흥적인 트럼프가 합의안에 서명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트럼프와 김정은 간에 오간 친서들은 트럼프 측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서 의문 부호를 떼지 않았으며 동시에 안보적 대가를 주는 것에 대해서 매우 절제되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10. 김정은이 그런 표현을 썼다. 핵은 철저히 자기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사용할 생각 전혀 없다. 우리가 핵 없이도 살 수 있다면 뭣 때문에 많은 제재를 받으면서까지 힘들게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겠는가. 딸 세대한테 까지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는 것 아니냐. 핵을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
과거 김정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비핵화는 김일성의 유훈(遺訓)’이라고 단골 멘트를 하여 남측을 기만하였다. 최근 김정은은 “유사시 핵 무력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박차를 가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의 비핵화 발언은 핵을 개발하고 보유하는 것을 방어하는 상투적 궤변에 불과하다. 김정은은 2022년 핵무력 법제화를 비롯하여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금년 들어 한반도 2국가론을 내세워 남한 역시 외국이기 때문에 핵공격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05.23 문 전 대통령 부인 외유를 英 여왕 국빈 방문에 빗대다니

▲김정숙 여사가 2018년 11월 7일 우타르프라데시주 아그라 타지마할을 방문해 건물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더불어민주당 진성준 정책위의장이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의 2018년 인도 타지마할 방문에 대해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 안동을 방문한 것과 유사한 외교 일정”이라고 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 하회마을을 찾은 것은 1999년 4월 국빈 방문의 한 부분이었다. 3박4일 일정으로 부군 에든버러공과 함께 방한해 국립묘지 헌화, 공식 환영식, 정상회담과 같은 일정을 치른 뒤 한국 정신문화의 주요 장소인 안동을 찾아 양국 친선을 다졌다. 이것을 외유 의혹으로 점철된 김 여사의 인도행과 비교한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김 여사의 인도 여행 의혹에 대해 “악의적 왜곡”이라고 했다. 자신이 인도 측 초청을 고사하자 인도 측에서 대신 김 여사를 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정부 문건을 보면 인도는 원래 김 여사가 아니라 문체부 장관의 방문을 희망했다. 지난 20일 외교부도 김 여사의 방문이 우리 정부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확인했다. 김 여사는 대통령 전용기를 이용했고, 타지마할에서 다른 관광객을 물린 채 독사진을 찍었다. 공식 일정표에 없었고 문체부의 ‘출장 결과서’에서도 빠진 일정이었다.
김 여사의 인도 방문이 ‘배우자 첫 단독 외교’였다는 문 전 대통령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2002년 5월 정부 대표단 수석대표 자격으로 뉴욕 유엔본부에서 아동 특별 총회 기조 연설을 했다. 이 여사의 단독 외교는 그 뒤로 3차례 더 있었다. 고민정 당시 청와대 부대변인이 김 여사 인도 출장 엿새 전 기자회견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당시 회견에선 김 여사의 인도 체류 일정도 공개했는데 타지마할 방문만 뺐다. 이런 여행을 어떻게 영국 여왕 방한에 빗대나.
문재인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진 의장은 김 여사의 타지마할 방문 논란을 “김건희 물타기용 생트집”이라고 했다. 하지만 5년 이상 잊히다시피 했던 김 여사 외유 의혹을 다시 떠올린 건 회고록을 낸 문 전 대통령 자신이다. 문 전 대통령이 ‘김건희 물타기’를 하고 있다는 건가. 정당과 정치인이 자기편을 옹호할 수 있고 때로 무리한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정숙씨의 여행을 엘리자베스 여왕 국빈 방한에 빗댄 것은 그 상식을 의심케 한다.
조선일보 사설
05-23 대통령실과 내각 잇단 엇박자, 악화하는 공직 복지부동
정부 부처가 정책을 발표하면 대통령실과 여당이 즉각 부인하는 엇박자가 잇따르고 있다. 가뜩이나 집권 세력의 총선 참패로 공직 사회에 ‘레임덕 현상’이 조기에 나타날 우려가 커졌는데, 이런 일이 잦아지면서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신뢰 추락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해외 직구 물품에 KC 인증 의무화를 발표했다가 여당의 반발로 철회되고 대통령실이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번엔 윤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6월 중 공매도 일부 재개’를 언급하자 대통령실이 즉각 부인했다.
이 원장은 지난 16일 “개인적 욕심이나 계획은 6월 중에 공매도 거래 일부를 재개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공매도는 외국인이나 기관투자가가 자금력을 이용해 주식을 빌려 팔았다가 나중에 주가가 내리면 싸게 사서 갚아 이익을 내는 투자 기법인데, 정부는 지난해 11월 개미투자자 불만이 쏟아지자 전면 금지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국제 기준에 맞지 않고, 그에 따른 문제점도 적지 않기 때문에 재개 요구가 강했고, 이 원장이 이를 언급한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실이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개인적 희망” 운운하며 묵살한 것이다. 사전 협의가 없었던 것도 문제이지만, 정책 책임자에게 면박을 주는 식이 되면 다른 공직자들은 용산 지침만 기다릴 것이다. 16개 부처가 참여한 KC 인증 의무화 경우엔 대통령실이 전면 뒤집고 문책성 조치까지 취하는 바람에 담당 공무원들은 허탈해 했다.
이런 정책 혼선의 원인은, 대통령실이 규모만 커졌지 정책 조정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무적 판단 기능이 약하고,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만 난무하다 보니 빚어진 결과다. 각 부처의 에이스 공무원들은 정치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해 대통령실 파견을 꺼리고 복지부동하고 있다. 세종시 이전에 따른 후유증, 앞으로 4년 더 국회를 장악할 야당에 대한 눈치 보기 등도 영향을 미쳤다. 세종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여당은 참패했다.
정책 헛발질이 계속되자 대통령실은 정책 협의를 강화하겠다고 한다. 저출생수석실 등 조직을 신설한다지만 옥상옥이 될 위험성도 크다. 대통령실은 이미 너무 비대해졌다. 차라리 장관과 부서에 권한과 책임을 과감히 넘기고, 대통령실은 조정과 특별 개혁 과제에 집중하는 게 낫다.
문화일보 사설
05-23 저출생部 카드의 뻔한 한계
김만용 전국부장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기자간담회와 주요 정책이 저평가 받는 이유를 경제학의 합리적·적응적 기대 이론에 빗대 설명하려는 시각이 있다. 이른바 ‘합리적 기대’란 모든 경제 행위자는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설이다. 로버트 루커스 미국 시카고대 명예교수가 이 가설을 통해 199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즉, 저출생 극복·물가 완화·기업규제 해소 등 정부 정책이나 김건희 여사 의혹 등에 대한 대국민 사과가 파격적이지 않다면 합리적 기대를 하는 국민은 쉽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냉담한 여론의 반응은 적응적 기대 가설로도 설명할 수 있다. 적응적 기대는 과거의 자료·사례를 통해 조금씩 오차범위를 수정해 미래를 예측한다는 가설인데, 국민은 윤 대통령의 정책이나 사과가 근본적 인식이나 방향 전환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부정적 반응이 커지자 어쩔 수 없이 찔끔찔끔 톤 조절을 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평가절하한다는 것이다.
과거 문재인 정부도 합리적 국민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해 부동산 정책 등이 대실패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도 같은 길을 걸으며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대한민국 소멸 위기까지 불러일으킨 저출생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도 국민의 기대에 크게 어긋난다. 정권 출범 초기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으로 방향을 상실한 뒤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나 주형환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앞세워 저출생 문제를 다루도록 하는 것 같더니, 최근엔 돌연 저출생대응기획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위기의 최일선에 있는 지방 정부들은 제법 기대 이상의 정책을 내놓고 있다. 최근 경북도는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7년까지 1조2000억 원을 투입하기로 하고 이색 정책들을 시행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도가 결혼정보회사로 나서 커플이 된 미혼 남녀에게 국제 크루즈 여행을 보내주기로 했다. 3자녀 이상 가족이 40평대 집에서 살 수 있도록 주택 매입 비용 3억 원도 저리에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자영업자가 출산하면 6개월간 일할 사람을 채용하도록 월 200만 원도 지원하기로 했다. 앞서 인천시도 인천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게 1억 원을 지원하기로 한 바 있다.
저출생이 민간 기업에도 생존의 위기로 다가오는 만큼 기업들도 무릎을 칠 만한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부영그룹이 지난 2021년 이후 출산한 임직원에게 출산장려금 1억 원을 쾌척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콜마도 첫째와 둘째 출산 시 1000만 원, 셋째는 2000만 원으로 출산장려금을 늘리기로 했다. 그런데 기업과 지방자치단체를 이끌어야 할 윤석열 정부는 한가하게 조직 타령만 하고 있으니 국민이 쉽게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합리적·적응적 기대 가설대로라면 정부의 저출생 해법은 전면적이고 파격적이면서도 섬세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국민의 신뢰도 얻을 수 있다. 지금처럼 지자체나 민간 기업보다도 한참 낮은 수준의 카드라면 그 한계가 너무 뻔하다. 연이은 정책 실패와 메시지 관리 실패를 이어온 윤 대통령이 저출생 문제에서도 실패의 길로 들어선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문화일보
05.23 ‘빚 수렁’에 사장이 인상 읍소…전기·가스요금 정상화해야
가스공사 미수금 13조5000억, 매일 47억 이자로
탈원전, 요금 포퓰리즘에 한전 203조원 빚더미
한국전력공사(한전)와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요금 인상을 읍소하고 나섰다. 비정상적으로 낮은 에너지 요금으로 ‘빚 수렁’에 빠진 탓이다. 정치 논리에 휩싸인 ‘가격 포퓰리즘’으로 인해 한전과 가스공사는 이미 만신창이다. 빚으로 버티는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요금 정상화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최연혜 가스공사 사장은 어제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미수금 규모는 전 직원이 30년간 무보수로 일해도 회수가 불가능하다”며 “이자 비용 급증과 국제유가 및 환율 불안 속 벼랑 끝에 선 심정”이라고 말했다. 동절기 안정적인 가스 공급을 위해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은 여름철에 요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스의 원가 보상률은 74% 수준이다. 이런 역마진 구조가 장기화하며 올해 1분기 미수금(천연가스 수입 대금 중 가스요금으로 회수되지 않은 금액)은 13조5000억원이다. 부족한 돈은 공사채 등을 발행해 조달한다. 미수금 증가가 금융 비용 급증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가스공사에 따르면 이미 이자 비용으로만 매일 47억원이 나간다.
빚 수렁에 빠진 곳은 가스공사만이 아니다. 한전도 전기요금 정상화를 호소하고 있다. 매년 수조원씩 이익을 냈던 한전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드라이브와 ‘전기요금 포퓰리즘’으로 43조원에 이르는 누적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총부채만 203조원으로, 연간 이자 비용만 4조5000억원에 달한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지난 16일 “한전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최후 수단으로 최소한의 전기요금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금리 장기화 속에 물가도 들썩이며 가계와 기업의 어려움은 커지고 있다. 전기와 가스요금 인상은 물가를 더 자극할 수 있다. 특히 냉방 전기 수요가 급증하는 여름철 전기요금 인상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물가와 가계 및 기업 부담을 앞세워 국제 시세 대비 현저히 낮은 에너지 요금을 강요하며 막대하고 심각한 부실을 이어갈 수는 없다. 과도하게 억누른 전기와 가스요금으로 인한 에너지 과소비도 막아야 할 때다.
에너지 공기업의 부실은 전력망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 및 설비 투자를 위축시키고, 관련 산업 전반의 생태계를 훼손할 수 있다. 이들 공기업의 적자를 해소하지 못하면 결국 세금으로 국가가 보전할 수밖에 없다. 적자를 견디지 못한 EDF(프랑스전력공사) 지분 100%를 국유화한 프랑스의 사례가 남 일이 아니다. 요금 인상이 당장 어렵다면 정부는 단계적인 인상 계획을 밝히고, 충격과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취약 계층 대책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요금 결정권을 독립적인 위원회에 넘기는 방안 역시 고민해야 한다.
중앙일보 사설
05.24 與 연금개혁 납득못할 태도, 그간 개혁 주장 거짓이었나

▲주호영 국회 연금개혁 특별위원장과 여야 간사들이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유럽출장 취소 및 연금개혁특위 활동 종료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간사, 주호영 특위위원장, 유경준 국민의힘 간사./뉴스1
민주당이 정부·여당을 향해 이번 21대 국회에서 국민연금 개혁안을 처리하자고 했다. 여야는 이미 국민연금 내는 돈(보험료율)을 현행 소득의 9%에서 13%로 올리기로 합의했지만 받는 돈(소득대체율)을 국민의힘은 43%, 민주당은 45%로 하자고 주장해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절충안으로 제안한 적이 있는 44% 안에 대해 “여당이 마무리할 의지가 있다면 진지하게 협상에 임할 생각”이라고 밝혀 사실상 수용 의사를 보였다. 하지만 국민의힘 소속인 주호영 국회 연금특위 위원장은 “내는 돈 13%, 받는 돈 43%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여야가 거의 합의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혁안을 처리하지 않으려 꼬투리를 잡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9일 기자회견에서 “22대 국회로 넘기자”고 평소와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야가 매년 연금보험료로 내는 돈을 13%로 올리기로 합의한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연금 내는 돈은 1998년 이후 26년 동안 9%에 묶여 있었다. 여야가 연금 개혁안에 합의할 경우 국민이 내는 돈은 내년부터 0.5%포인트씩 8년에 걸쳐 오른다. 보험료는 나중에 결국 자신이 받을 돈이지만 당장은 나가는 돈이니 이것이 오르는 것을 좋아할 국민은 없다. 여야가 국민에게 인기 없지만 반드시 필요한 개혁에 합의한다면 우리 정치사에 남을 좋은 사례가 된다. 특히 13%로 합의된 것은 가장 큰 고비를 넘는 것이다. 그런데 ‘받는 돈’ 2%포인트 차이 때문에 이 중대한 기회를 놓친다면 책임자들은 정치인이 아니라 사라져야 할 정상배들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태도는 조금 불분명하다. ‘받는 돈’ 44%와 45%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정부 여당의 모호한 태도다. 윤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연금개혁을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로 강조해왔다. 개혁으로 지지를 잃더라도 하겠다는 언급도 했다. 책임 있는 공직자의 자세였다. 이번 국회에서도 개혁안을 처리하지 못하면 지금 청년 세대의 부담이 매년 50조원씩 늘어난다.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갑자기 “다음 국회로 넘기자”고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때문인지 국민의힘은 90% 이상 여야 합의가 이뤄졌는데도 타협안을 깰 궁리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동안 연금개혁 주장은 ‘어차피 되지 않을 일’이라고 보고 ‘소신 발언’을 해왔는데 막상 일이 될 듯하자 인기를 잃기 싫어 핑계를 찾는 건가. 총선 참패로 대통령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지자 인기 없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건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내는 돈’ 13%, ‘받는 돈’ 44% 안은 국민의힘이 검토하던 안이기도 하다.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의힘은 다소 아쉬움이 있더라도 민주당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이 기회를 살려 연금개혁안을 일단 마무리해야 한다. 미흡한 점은 다음 국회에서 보완할 수 있다. 민주당도 빨리 ‘받는 돈’ 44%로 입장을 확정하기 바란다. 지금은 놓쳐서는 안 되는 국민연금 개혁의 기회다. 여야 모두 자식 세대에 씻지 못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5-24 연금개혁·간호법 등 21代 국회 마지막 기회와 尹·李 책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3일 “정부·여당이 결단만 하면 28일 본회의에서 연금개혁안이 처리될 수 있다”며 “이 문제와 관련해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개최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제22대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처리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우선 모수 개혁(보험료와 소득대체율 조정)부터 마무리하고, 제22대에서 연금 구조 개혁에 착수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연금에 대해 “한꺼번에 모두 개혁하겠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간의 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국민연금법 제4조 3항은 ‘연금보험료, 급여액, 급여의 수급 요건 등은 국민연금의 장기재정 균형 유지, 인구구조의 변화, 국민의 생활수준, 임금, 물가, 그 밖에 경제사정에 뚜렷한 변동이 생기면 그 사정에 맞게 조정되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이다. 하지만 지난 16년간 국민연금이 장기재정 균형을 유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인구·물가 등에 엄청난 변동이 생겼는데도 ‘사정에 맞게 조정’된 일도 없었다. 그나마 제21대 국회에서 여야가 보험료율을 13%로 끌어올리는 역사적 합의를 이뤘고, 소득대체율도 어렵사리 1%포인트 차이로 좁혀 놓았다. 연금 전문가들은 “여야 안(案)은 적립금 고갈 시점이 1년쯤 다르고, 수령액도 1만 원 정도 차이 날 뿐”이라며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이든 통과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치에 발목 잡힌 주요 현안이 숱하게 널려 있다. 대한간호협회 간호사 2만여 명은 23일 ‘NO! TISSUE!(우리가 소모품이냐)’를 외치며 간호법 제정 촉구 시위를 벌였다. 전공의 이탈 공백을 메우기 위한 간호 시범 사업도 보이콧을 선언했다. 야당의 채상병특검법 강행에 맞서 여당이 국회 일정을 거부하면서 복지위 개최 일정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간호법은 여야 간 이견이 없고 의료개혁의 핵심 사안인데도, 기가 막힐 따름이다. 여기에다 여야가 사실상 합의한 방사능 폐기물 특별법과 예금자 보호법 등 주요 민생 법안들도 줄줄이 자동 폐기될 위기다.
21대 국회 임기가 오는 29일 만료된다. 하루 전인 28일 마지막 본회의가 예정된 만큼 이번 주말과 월요일인 27일이 마지막 담판 기회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주저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다른 정치 현안과 연계하지 말고, 국가적으로 절박한 연금개혁과 비정치적 법안들을 일괄 타결하기 바란다. 정치 상황과 당선인 면면을 보면, 22대 국회에서는 합의가 더욱 힘들 것이다.
문화일보 사설
05-24 尹, 구속 수사했던 ‘朴 문고리’를 비서관에… 뜨악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시민사회수석실 3비서관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을 기용했다고 한다. 아무리 비서 채용은 대통령 고유 권한이지만 박 전 대통령 탄핵에 결정적 작용을 했던, 그리고 자신이 구속 수사해 엄벌했던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을 다시 대통령실로 불러들인다는 사실은, 여러 측면에서 부자연스럽다.
우선, 모양새가 좋지 않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일 때부터 비서관으로 근무하다 청와대 부속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수행, 비서 업무와 메시지 전달 등 ‘문고리’ 업무를 담당했다. 국정농단 사건 자체에 대한 정치적 논란은 있지만,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법 절차를 거쳤고, 관련된 불법 혐의에 대한 사법적 처벌도 이뤄졌다. 당시 수사 책임자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수사했던 부분에 대한 잘못의 인정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수사로 고생한 데 대한 보상 차원으로 비칠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윤 대통령 주변에 인재가 그렇게 없느냐는 비판을 자초한다. 기존 사회통합·시민소통·국민공감 비서관이 이번엔 1·2·3비서관 체제로 바뀐다고 한다. 기능보다 분야 중심으로 역할이 나뉘는 것 같다. 정 전 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과 보수 단체 등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 여권에서 그런 일을 할 인재는 수두룩하다.
문화일보 사설
05.25 검사 때 수사한 사람을 대통령 돼 참모로 기용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박근혜 정부 시절 이른바 ‘문고리 3인방’으로 불렸던 사람 중 한 명인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을 용산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실 비서관으로 기용했다. 정 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 지시로 청와대 기밀 문건을 최순실씨에게 유출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돼 유죄 확정 판결을 받고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당시 수사 책임자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첫 해 정 비서관을 사면하더니 이번엔 비서관으로 발탁했다. 비서관 인사는 대통령 고유 권한이지만 자신이 수사한 사람을 다른 자리도 아닌 대통령실 참모로 임명하자 여러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박 전 대통령 측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분위기라고 한다.
발탁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수사해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사람을 중용하는 것은 거의 없던 일이고 그만큼 정상이라고 하기 어렵다. 민주당은 “국민 무시 행태”라고 했다. 시민사회수석실 비서관은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자리다. 적임자가 정 비서관 외에 정말 없었나.
윤 대통령은 총선 참패 직후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겠다”고 했다.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조치가 인사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선거에서 떨어지거나 공천받지 못한 사람들을 대거 용산으로 불러들였다. 4비서관 체제로 확대 개편된 정무수석실의 경우 수석과 3명의 비서관이 4·10 총선 낙선·낙천자로 채워졌고, 나머지 비서관 한 자리도 낙선자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것을 쇄신으로 보기는 어렵다. 윤 대통령은 이달 초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국민들께서 체감하는 변화가 많이 부족했다”고 했다. 그래 놓고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인사를 또 했다.
조선일보 사설
05.27 윤증현 "경제에 공짜 점심 없다… '여소야대' 선택한 대가 치를 것"
[김윤덕이 만난 사람]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돌파한
윤증현 前 기획재정부 장관

▲2024년 5월 20일 서울 여의도 윤경제연구소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 공직 은퇴 후 윤경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에만 전념해온 윤 전 장관은 지난 총선 결과가 우리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다. /김지호 기자
이명박 정부의 경제 사령탑으로,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돌파했던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제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했다. 그는 지난 총선이 가져올 여파를 우려하고 있었다. “고금리, 고물가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대처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나 이 엄중한 시기에 ‘여소야대’를 초래한 국민의 선택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정책의 내용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태도나 이미지에 감성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 나라 앞날이 걱정된다”고도 했다.
◇서민, 영세업자 고통 가중될 것
-’대파’ 논란 등 지난 총선은 경제와 민생이 흔들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에는 책임이,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이번 총선의 선택으로 자산이 없는 서민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경제뿐 아니라 법치가 실종되고, 사회 도덕률, 국민의식도 추락했다.”
-국민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건가?
“이 나라 앞날이 걱정되는 것이 어떤 집단의 정체성이나 추구하는 가치, 정책의 내용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 태도나 이미지로 감성적 판단을 하는 국민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고금리, 고물가의 고통이 너무 컸다.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외부적 요인이 컸다. 코로나에 이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 등으로 공급망에 차질이 생겨 곡물, 석유 등 원자재 값이 치솟았다. 문재인 정권의 유산도 발목을 잡았다.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교과서에도 없는 정책으로 5년간 나라를 거덜 낸 후유증이 지금도 이어지거나 현실화되고 있다.”
-언제까지 전(前) 정부 탓을 할 거냐는 지적이 많다.
“서민과 영세 자영업자들이 지금 왜 어려운가? 최저임금의 일괄적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때문이다. 모든 나라가 최저임금을 인상할 때는 업종별, 지역별로 다르게 적용한다. 근무시간도 업종에 따라 큰 차이가 있어 일률적으로 52시간으로 정한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경제가 정치 논리에 휘둘리면 망한다. ‘경제는 정치인들이 잠든 밤에 성장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래도 민생의 어려움에 대해 대통령과 경제 수장들이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정부가 경제 위기의 원인과 실태를 설명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점은 사실이다. 그런데 여소야대에 막혀 불가항력적인 요인도 있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한국 경제의 기적은 끝났나’란 기사를 봤나? 대한민국 정권 교체는 사실상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는 책임은 안 지고 권한만 행사한다. 사법부는 어떤가. 정부가 혁신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반도체지원특별법만 해도 그렇다. 반도체는 기업 간 전쟁을 넘어 국가 간 대항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 일본, 대만은 반도체 생산에 사활을 걸고 막대한 지원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재벌 특혜라고 한다. 양곡관리법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쌀을 제외한 밀, 보리, 옥수수, 콩 등 5대 곡물의 수입 비율이 90%가 넘는다. 쌀만 짓는 농업 구조를 바꿔야 곡물 공급망 와해에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 남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수하라는 법을 만들면 농업 구조 조정은 물 건너간다.”

▲사과에 이어 배 가격이 1년 새 두 배 넘게 오른 가운데 3일 오후 서울 시내 전통시장에서 배, 사과 등이 진열돼 있다./뉴스1
◇사과값 폭등, 빨리 수입했어야
-세계 각국이 어렵지만 물가만 오르고 임금은 그대로인 한국의 인플레이션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건 착시라고 생각한다. 한국 인플레가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 그렇게 높지 않다. 한국 소비자물가가 3.5%로 오를 때 유럽 국가들은 4~6%까지 올랐다.”
-사과값은 최고 176%까지 폭등했다.
“정부가 신속하게 대응했어야 한다. 사과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과일 중 하나다. 기후 이변으로 인한 흉작에 수요를 감당할 공급량이 절대 부족했다면 정부가 빨리 수입 조치를 했어야 한다.”
-자영업자들은 IMF 외환 위기, 코로나 때보다 살기 힘들다고 한다. 제2의 외환 위기 운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현재 외환보유고가 4000억불이 넘는다. 경상수지도 흑자를 지속하는 등 우리 경제의 체질이 향상돼 있다.”
-KDI는 한국은행이 점진적으로 기준금리 인하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은행이 11번째 동결하고 있는 금리에는 물가 안정 추세, 해외 금리 등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KDI 제안엔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국내 물가가 아직 2%대에서 머물고 있고, 미국 기준금리보다 우리 금리가 2% 낮은 점 등 금융통화위원회의 고민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연초 3개월간 7.3%나 상승한 원달러 환율도 문제다.
“환율은 외환시장에서 수요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메커니즘을 존중해야 한다. 정부가 함부로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경상수지 흑자 기조, 상당한 외환보유고 등으로 단기적으로는 등락을 거듭해도 균형을 찾아갈 것으로 본다.”
-반도체 수출 증가세로 민간 소비가 개선되고 1분기 국내총생산(GDP)도 1.3% 성장하는 등 회복기로 들어섰다고 진단하는 경제학자도 있던데.
“올해 1분기에 1.3% 성장했다는 건데, 이걸 지난해 4분기와 비교했느냐, 전년도 동기와 비교했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전년도 같은 기간에 GDP가 너무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기저 효과로 올라갔을 가능성도 있다. 아직 회복기에 들어섰다고 보기는 조심스럽다.”

▲지난 3월 18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서초구 농협하나로마트 양재점을 방문해 대파 등 채소 물가를 점검하고 있다./뉴시스
◇25만원 지원? 반헌법적 행위
-이재명 대표의 ‘전 국민 25만원 민생지원금 지급’ 주장을 강하게 비판하셨다.
“총예산만 13조원이다. 그 돈으로 우리 경제에 필요한 투자나 인프라 건설에 투입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 13조원을 일시에 살포하면 물가만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야당은 22대 국회에서 이걸 법률로 강제하겠다는 건데, 예산 편성권을 가진 정부와 삼권분립에 맞서는 위헌적 행위다.”
-’25만원’이 총선 민심을 흔든 것도 사실이다.
“스위스 국민들은 기본소득 정책을 70%가 반대해 무산시켰다. (포퓰리즘에 환호한) 그리스나, 아르헨티나 국민의 예를 명심해야 한다.”
-내수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정부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경기가 어려울 땐 국가 재정을 늘려서 부양시키는 게 옳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1000조원에 달하는 국가채무를 남겼다. 600조였던 채무가 문 정부 5년 만에 400조원이 늘어난 것이다.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은 윤석열 정부가 국가 재정을 함부로 확장할 수 있겠나.”
-결국 내수를 회복하는 것이 관건 아닌가.
“내수는 투자와 소비가 견인한다. 그런데 우리는 규제가 너무 많다. 환경 규제로 설악산, 한라산에 케이블카 하나 설치하기 힘든 나라다. 문화재라도 나오면 개발이 올스톱된다. 국토의 70%가 산이다. 중국 태산, 황산에는 케이블카가 수십 개다. 요새는 기술이 발달해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도 않는다. 스위스는 산 정상까지 산악 열차가 다니지 않나.”
-기업 규제 완화는 왜 더딜까?
“수출과 제조업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도 기업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여건을 조성하려고 하면 정경 유착이라는 시대착오적 주장이 나온다. 현재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 기준이 2009년 기준인 자산 규모 5조원인데, 대기업에 포함되는 순간 적용받는 규제가 300개에 달한다. 중견기업들이 대기업으로 승격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이유다. 이게 말이 되나? 과도한 상속증여세로 가업 승계도 어려워져 일본이나 독일처럼 100년 기업이 나오기도 어렵다. 글로벌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법인세율부터 인하해야 한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한다.
“구조 조정, 인수 합병 등 경제 체질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 분담이 따른다. 일본 국민은 이를 불평하지 않고 함께 견뎌왔다.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높은 인식은 배워야 한다.”
◇尹, 원칙 없는 협상은 안 돼
-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를 돌파한 윤증현 리더십은 여전히 회자된다.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정부를 중심으로 여야가 협조했고, 무엇보다 국민이 함께 고통을 견뎌주셨다.”
-부임 직후 마이너스 성장을 선언해 화제가 됐다.
“정부는 플러스 3% 성장으로 발표할 예정이었는데 내가 입각하면서 마이너스 2% 전망으로 변경했다. 정부가 정직해야 국민과 시장의 신뢰를 얻고, 정부 정책이 제대로 작동한다. 근거 없는 장밋빛 전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28조원이라는 사상 최고의 추가경정예산도 단행했다.
“전 국민의 소비 수요를 살리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데 모두가 공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매주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경제 상황을 챙겼다. 그런 노력이 합해져 이듬해 6%가 넘는 성장을 일궜다. 세계에서 글로벌 금융위기를 교과서적으로 극복한 사례라는 찬사를 받았다.”
-저출생 대책으로 이민청 설립을 가장 먼저 제안한 관료도 윤증현이더라.
“저출생과 이민 문제를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단일 부서가 시급하다. 여성의 생애주기별 지원 문제, 재능과 기술을 보유한 젊은 이민자들 받아들이는 문제를 이 부서에서 함께 다뤄야 한다.”
-의료 대란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의료를 산업화하고 투자를 개방해야 한다. 의사 증원은 필수 의료, 지방 의료, 의과학자 수요 증가를 고려할 때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문제는 의료계 반발을 사전에 예측하고 대비했어야 할 정부의 치밀한 대책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2년 넘게 한 장관직을 사임할 때 이명박 대통령이 만류했다던데.
“불면증이 너무 심해 검사를 받았더니 원인이 햇볕 부족이었다. 새벽에 출근해 새벽에 들어오니 햇볕 쬘 시간이 없었던 거다. MB에겐 죄송했지만 계속 일하면 죽을 것 같았다(웃음).”
-윤석열 대통령에게 고언 한말씀.
“여소야대 국면이라 협치가 불가피하겠지만, 원칙 잃은 협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만기친람도 길이 아니다. 권한과 책임을 대폭 하부로 위임하고 인재 풀을 넓혀야 한다.”
☞윤증현
1946년 경남 마산 출생. 서울고, 서울대 법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뒤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 아시아개발은행 이사를 거쳐 노무현 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을,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 국무총리 대행을 지냈다. 공직에서 물러난 2011년부터 윤경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 왔다.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05-27 국민 생명을 정책 변방에 뒀던 文정부
김석 국제부장
文 “美 협상팀 北 제안 이해 못 해”
트럼프는 北 비핵화 빅딜 고수
후회 언급 없고 대북 입장 여전
“김정은, 핵 사용 생각 없어”
김정은 “핵 동원해 남조선 평정”
적 선의에 국운 거는 정권 안 돼
문재인 전 대통령의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읽은 뒤 혹시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워싱턴 특파원 근무 당시 쓴 기사와 읽었던 책들을 다시 살펴봤다.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2019년 하노이 노 딜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미국의 협상팀은 북한의 제안 내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했고, “트럼프 (전) 대통령 본인도 나중에 내게 후회하는 말을 하며 미안해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 존 볼턴 미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등 백악관 내 대북 강경파뿐 아니라 미국 정치권과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의 속셈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와 제재 해제라는 ‘빅 딜’이 아닌, 영변 핵 시설 등 일부 핵 시설 폐쇄와 제재 완화라는 ‘스몰 딜’을 통해 핵 능력은 유지한 채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 정치권과 전문가들의 걱정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국내 정치 스캔들을 덮기 위해 북한의 스몰 딜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이자 해결사인 마이클 코언이 하노이 정상회담이 열리는 2월 27일 하원 감독위에서 증언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트럼프 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와 제재 해제라는 빅 딜을 고수했다. 밥 우드워드 기자가 트럼프 전 대통령과 17차례 인터뷰를 통해 발간한 ‘분노(Rage)’에는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영변 핵 시설 폐쇄만 내놓은 김 위원장을 압박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하나는 도움이 안 되고 둘도 도움이 안 되고 셋도 도움이 안 되고 넷도 도움이 안 된다”며 “다섯 개는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양보안을 제시하지 않자 “당신은 협상할 준비가 안 됐다”는 말을 세 차례 반복하고 자리를 떠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회담 결렬 후 기자회견에서 “비핵화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또 굉장히 중요한 단어다”며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모르지만, 나에겐 분명하다. 핵무기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스몰 딜 수용 시 사실상 북핵을 용인하고 제재만 풀어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하노이 정상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일을 후회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자신의 북핵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을 뿐이다. 지난해 12월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북한의 핵 보유를 허용하되 신규 핵무기 제조 중단을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보도하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즉각 “폴리티코의 가짜뉴스는 북핵에 대한 내 입장이 약화됐다고 주장했다”며 “허위 정보”라고 반박했다.
오히려 트럼프 측은 문 전 대통령의 행동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고, 여전히 그러한 의구심을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 정부에서 국무부 대변인을 지낸 모건 오테이거스는 미국우선주의연구소(AFPI)가 발간한 정책집에서 “문 당시 대통령은 북한에 양보하려고 했기 때문에 미국은 문 대통령을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밝혔다. 국가 수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국민의 안위를 적의 선의에만 맡기려는 태도를 보이는 점을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북핵은 한국에는 존망이, 한국민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그런데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김 위원장이 “(핵을) 사용할 생각 전혀 없다”고 말했다며 신뢰를 표시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해 말 노동당 중앙위에서 “유사시 핵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계속 박차를 가해나가야 한다”고 지시한 것은 없던 일로 치부했다.
이러한 북한에 완전한 비핵화 이전에 제재를 해제해주자는 주장을 고수하는 것은 한 손에 핵을 쥐고 있는 북한의 다른 한 손에 돈다발이라는 트로피마저 안겨주자는 말과 같다. 한국민을 영원히 북한 핵 그늘에 살게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외교·안보 정책의 중심에 김씨 일가의 안정을 두고, 국민 생명을 변방으로 밀어내는 정부가 결단코 다시 들어서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문화일보
05-27 우주 선진국 앞당길 KASA 3대 과제
김경민 한양대 명예교수, 前 국가우주위원
2024년 5월 27일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우주항공청이 중앙 행정기관으로 출범한 날이기 때문이다. 우주항공 분야는 제조업 중 가장 최첨단 기술이 적용되므로 선진국들만의 영역이다. 우리나라는 우주 개발 부문에서는 선진국이 아니다. 한참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따라잡아야 할 우주 기술이 많은 상태라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우주항공청이 우주 개발을 전담하게 된 만큼 개발 속도를 가속화해 우리나라가 우주 선진국으로 불릴 시간을 앞당겨 줄 것이다.
그러면 오늘 발족한 우주항공청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첫째, 한국만의 로켓 개발을 완성해야 한다. 가장 어려운 분야가 엔진인데, 발사에 성공한 누리호는 2027년까지 3회를 더 발사해서 성공해야 대한민국 최초의 순국산 로켓으로 인정받게 된다. 1.5t의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로켓으로 북한 김정은의 움직임을 세밀히 살필 수 있는 정밀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수준이니 자부심이 크다. 차세대 로켓은 6t가량의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대형인데, 2030년 1차 발사가 목표다. 이 로켓이 개발되면 달 탐사도 원만하게 진행될 것이므로 우주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우주항공청 발족으로 그 시간이 좀 앞당겨질 수도 있다.
둘째, 인공위성 산업을 크게 육성해야 한다. 인공위성은 기상, KPS(한국형 위성항법 시스템), 군사첩보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날씨뿐 아니라 자율 주행차, 대북 정찰 등을 수행할 수 있어 우주 정보는 국가안보에서 일상생활까지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특히, 최근에는 소형 인공위성이 각광 받는 추세다. 50㎏에서 500㎏대의 인공위성이 성능도 좋아지고 가격도 비싸지 않아 우리도 소형 인공위성을 산업화해 우주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분야가 되고 있다. 일본은 소형 인공위성 50개를 쏘아 올려 북한 미사일이 발사되는 순간부터 비행경로를 실시간으로 탐지할 수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우리나라도 소형 인공위성을 100개 정도 쏘아 올리면 일본보다 더 면밀하게 북한 미사일을 탐지할 수 있고, 이 경험을 토대로 소형 인공위성 수출에도 나설 수 있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우주 개발 산업이 될 것이다.
셋째,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우주 개발을 늦게 시작해 인재가 부족하다. 인재 육성은 그 어느 분야보다 어려운 만큼 우주항공청이 특별히 노력해야 한다. 민간 우주 기업과 협력해 일자리 창출이 동시에 이뤄져야 우주항공 분야에 고급 인재들이 몰려든다. 우주 개발은 가 보지 않은 길을 가는 만큼 그 과정에 참여하는 고급 인력들이 안심하고 도전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 줘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우주 개발에 힘을 쏟았던 항공우주연구원의 축적된 기술과 경험을 민간 기업들이 이전받아 더 높은 기술에 도전해 미래를 열고 돈을 벌 수 있는 환경, 즉 민간 우주경제가 실현돼야 상승효과가 난다.
대한민국만이 가진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출되면 우주 산업은 다음 세대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첨단 산업이 될 것이다. 신라 시대에 첨성대를 만들었던 우리의 저력을 모은다면 반드시 우주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다. 우주항공청의 출범을 축하하며, ‘우주항공 선진국’ 대한민국을 선도하기를 기대한다.

문화일보
05.31 용의주도 '사법 개혁' 對 한밤 홍두깨 '의료 개혁'
대통령에게는 핵심 책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행정’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이다. 의사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치료’이고 후자는 ‘수술’인 것이다. 당연히 수술은 치료보다 훨씬 어렵고 리스크도 크다.
지난 몇 달간 진행된 소위 ‘의료 개혁’이라 불리우는 것은 대표적인 ‘수술’에 해당된다. 개혁이란 어려운 것이다. 본질적으로 기득권자들의 ‘밥그릇’을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발과 저항은 거의 필연적이다. 그런 반발을 제어하고 개혁을 제대로 이루어 내려면 반드시 용의주도한 전략이 있어야 한다. 어떤 전략인가? 무엇보다 그 개혁이 ‘정권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개혁이라는 강력한 인상을 당사자들에게 줘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좋은 예가 있다. 바로 김영삼 정권 때 있었던 소위 ‘사법 개혁’이다. 그 개혁은 지금의 의료 개혁과 본질이 같았다. 즉 변호사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자는 것이었다. 그 개혁의 핵심 추진자는 당시 청와대 박세일 정책수석이었다. 서울 법대 교수 시절부터 열렬한 개혁 논자였던 그는 취임하자마자 개혁의 칼을 뽑았다. 그가 첫 번째로 시도한 게 ‘사법 개혁’이었다. 신임 변호사 수를 당시의 연간 50~100명 수준에서 장기적으로 15~20배까지 늘리자는 내용이었다.
그 개혁이 발표되자 법조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막강한 법조계, 판검사와 변호사로 구성된 그 집단은 박 수석의 시도를 법조 전체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놀라움과 분노로 충만된 법조계의 거대한 반발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혁은 불과 두어 달 후, 양쪽의 합의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그 개혁 덕분에 오늘날 구두닦이 소년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자기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졌다.
실질적으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직업군에 대한 개혁이 어떻게 그렇게 부드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개혁의 실질적 추진 주체가 ‘정부’가 아니라 바로 ‘국민’임을 법조계로 하여금 깨닫게 한 것이다. 어떻게? 박 수석은 취임하자마자 먼저 개혁 추진의 주체가 될 민간 기구를 하나 만들었다. ’세계화 추진 위원회’라는 것이었다.
박 수석은 소위 ‘사법 개혁 백서’라는 것을 만들었다. ‘세계화 추진 위원회‘ 이름으로 발간된 그 백서는 사법 개혁의 절실한 필요성을 논리와 데이터로 쉽게 설명하는 두껍지 않은 책자였다. 백서는 위원회 이름으로 사실상 전국에 있는 거의 모든 언론사에 뿌려졌다. 그것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언론이 그 자료를 바탕으로 소위 ‘사법 개혁’ 시리즈를 싣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개혁을 향한 거대한 공감대로 연결되었다. 국민의 이런 거대한 공감대, 그리고 외침을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법조계라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개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연간 50~100명에 불과했던 신임 변호사 수는 2001년 1000명을 넘게 되었고 지금은 1500명을 넘나드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개혁이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즉, 주도는 정권이 하되 그 뒤에 막강한 ‘국민의 힘’이 버티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줘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때 이번 의료 개혁은 지극히 ‘아마추어’적이다. 무엇보다 그 중차대한 개혁을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갑자기 발표해 버린 것이다. 제일 기가 막히는 것은 시기였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던져진 개혁, 그것은 그 개혁에 ‘악취’가 진동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그런 개혁에 개혁 대상이 어떻게 순순히 응할 수 있겠나?
한마디로 30년 전 사법 개혁과 너무 대조적이다. 사법 개혁처럼 ‘개혁 백서’까지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공청회 같은 것이라도 해야 했다. 시민과 언론들을 초청해 ‘의사 부족’이 야기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체계적으로 지적하는 공청회 말이다. 물론 의료계 대표에게 반박하는 기회도 줘야 한다. 언론들은 당연히 보도했을 것이고, 그것은 사회적 토론으로 연결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개혁을 위한 토양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 정도 작업은 기본 상식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선거 직전 어느 날 불쑥, ‘정치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개혁을 발표해 버린 것은 아마추어적 통치의 ‘끝판왕’급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의료계의 격렬한 반발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개혁은 본질적으로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법률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행복과 너무나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나라에서 의사 부족 때문에 국민들이 겪고 있는 각종 애환은 심각한 상황이다. 종합병원에 가면 2~3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그 애환을 토로하며 울분을 터뜨리는 수많은 시민의 고통을 의사들이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황당한 개혁 접근법에 대한 의료계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내가 이 개혁의 불가피성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사법 개혁’을 통해 온 국민이 누리게 된 그 행복감을 이제 의료계가 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정권의 아마추어적 접근법에 대해서는 의료계가 그동안 웬만큼 교훈을 주었다고 본다. 국민 삶의 기본 터전을 지키는 신성한 사명을 수행하는 최상위 엘리트 직군이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너무 열심이라는 인상은 솔직히 의사분들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국민을 위해 정말 필요하면 희생도 할 수 있는 넓이와 깊이가 그 직역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약 2500년 전 의사가 가져야 할 기본 정신을 설파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번 읽어 보았다. 나에게 특히 인상 깊은 구절은 이것이었다. “내가 어떤 집을 방문하건 나는 환자의 이익을 위해 그곳에 갈 것이며 모든 의도적인 잘못과 해악을 삼갈 것이다.” 이제 이 나라 의료계의 대국적 시각을 기대해 본다.
조선일보 전성철 변호사·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