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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조선일보/ ① 성리학과 결별한 윤치호 - ⑪ 모스펫 발명한 강대원 [끝]

상림은내고향 2024. 5. 19. 11:26

[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조선일보

2023.12.20

① 성리학과 결별한 윤치호

100년前 조선판 카이스트 세워… 한국인 첫 양자역학 논문 씨앗 되다

▲러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간 윤치호·민영환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앞줄 가운데)과 윤치호(민영환의 왼쪽). 러시아와 조선 관리들의 복장이 대조적인데, 조선 관리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 황제 외에는 모자를 벗어야 했지만, 민영환은 조선의 전통을 고집했다. 윤치호는 이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중 독일 베를린 박람회에 들러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과학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우리 역사에서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는 책장을 덮고 싶을 정도로 가슴 아픈 순간의 연속이다. 하지만 어두운 시대를 과학으로 극복하려던 선조들이 있었다. 국권을 뺏긴 이유가 근대화에 뒤처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명백했기에, 과학은 절박한 현실이었다. 이미 100년 전 아인슈타인을 만난 이야기가 신문에 등장했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상대성 이론 대중 강연을 하던 청년들도 있었다. 한때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불과 몇 십 년 뒤 세계 10위권으로 도약한 것은 이 과학 선구자들 덕분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그 시대를 이겨낸 그들을 소개한다.

 

1896년 1월 독일 과학자 뢴트겐이 공개한 손가락뼈 사진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고 불과 몇 달 뒤 베를린 박람회에 엑스레이가 등장한다. 보불전쟁에서 독일에 패한 프랑스가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 에펠탑으로 재기하자, 독일은 1896년 베를린 박람회에서 엑스레이로 맞선 것이다. 서구 열강은 박람회를 통해 과학으로 경쟁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윤치호(1865~1945)가 이 베를린 박람회에서 엑스레이 사진을 본 이야기를 일기에 남겼다. 우리 민족이 엑스레이를 알게 된 최초 기록이다. 당시 윤치호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중이었다. 이처럼 윤치호는 서구 문명을 마주한 생생한 이야기를 일기에 남겼다. 이런 경험들로 성리학적 세계관과 결별한 윤치호는 우리 과학 여명기에 중요한 마중물 역할을 하게 된다.

서구 열강의 과학경쟁… 일기에 남겨

1897년 1월 귀국한 윤치호는 서재필을 만난다.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윤치호는 그냥 덤덤했다. 같은 개화파 동지였던 서재필이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의사가 되었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차가운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서재필은 서울에 오자마자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독립협회가 이상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이완용이 회장인 데다, 왕실 측근과 대원군 지지 세력, 여기에 친일파와 친러파 등 온갖 정파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윤치호 일기의 표현으로는 ‘웃음거리’였다.

 

그러던 윤치호의 생각이 바뀌는 결정적 계기는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 졸업식이다. 각국 외교관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 학생 이승만이 영어로 조선 독립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더 놀라운 일은 학생들이 공개 토론을 진행한 것이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연설과 토론을 가르쳤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논리를 펼치고 동의를 구하는 방식에 학생들은 빠져들었다. 이에 이승만, 주시경 등의 학생들이 ‘협성회’라는 토론 모임을 이끌었다. 불과 1년 만에 서재필이 이렇게 미래 세대를 키워내자, 윤치호는 진심으로 서재필을 존경하고 독립협회에 적극 가담한다.

 

1897년 12월 13일 윤치호 일기에 등장하는 자전거는 의미가 크다. 지금이야 흔한 일상이지만, 당시 조선 전체를 통틀어 자전거 타는 조선인은 서재필과 윤치호 단 두 명이었다. 자전거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고무 타이어가 개발되면서 시작된 1895년의 ‘자전거 붐’ 때였으므로, 당시 서구에서도 자전거는 최신 과학이었다. 서재필은 조선인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다. 그가 서울 도심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놀랐고, 윤치호는 그렇게 자전거를 배웠다. 두 사람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타고 다닌 자전거가 보부상들에게 위협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현실에서 보여주는 과학은 관념에 사로잡힌 지배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무렵 서재필의 발언은 과격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1897년 11월 30일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라는 연설은 파장이 컸다. 결국 조선 정부는 독립협회를 통제하려 들고, 여기에 여러 세력의 견제가 더해지며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윤치호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서재필의 두 번째 망명이다. 이후 반국가 단체로 몰린 독립협회는 해산된다. 간신히 체포를 피한 윤치호는 법부대신이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1899년 1월 원산의 지방 관리로 임명되지만, 동료들이 잡혀가는 상황에 갈등한다. 아버지는 원산으로 가는 척하며 해외로 도피하라고 권했다.

 

▲1935년 조선일보가 보도한 ‘과학데이’ 행사 - 조선일보 1935년 4월 20일 자 지면. 윤치호가 회장을 맡은 ‘과학지식보급회’가 추진한 1935년 4월 19일 제2회 ‘과학 데이’ 행사를 보도했다.

 

1899년 1월 30일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이승만이 협성회 동료 주시경이 건넨 권총으로 탈옥하다 붙잡히자, 상황은 급박해졌다. 2월 1일 윤치호는 송도(개성)에 ‘산업학교(industrial school)’를 만들기 위해 감리교에 기부하기로 결심한다. 윤치호는 조선 양반들이 스스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입으로만 떠드는 것을 혐오했다. 그래서 미션 스쿨을 원했던 감리교와 달리 “우리가 학교를 갖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한국 청년들이 노동이 불명예가 아니며, 한국의 미래가 노동에 달려 있다고 배울 수 있는 실업학교여야 합니다”라고 고집했다. 상황이 어찌 될지 몰라 윤치호는 다음 날 바로 땅문서를 감리교에 이전하고 원산으로 떠났다.

 

이후 함경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방 외직을 전전하면서도 산업학교 구상을 구체화하였고 1904년 외부협판이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1905년 윤치호의 일기는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찼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당일, 일본의 외교 고문 스티븐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그 조약에 서명하는 사람은 일본이 내세우는 무의미한 약속을 믿고 자신의 나라를 팔아버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서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압 속에서 조약이 체결되자 “내게는 수치스럽고 우리 동포에게 역겨운 일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내가 왜 동포에게 맹렬히 비난받는 자리에 올라야 합니까?”라며 사직한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윤치호는 그토록 오래 계획했던 산업학교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이렇게 1906년 개교한 학교가 바로 ‘한영서원(나중에 송도고등보통학교)’이다. 이공계 인력 양성을 꿈꾸었던 윤치호의 포부는 원대했다. 학교 부지는 개성의 고려 궁궐 터 옆에 6만6000평 규모로 조성했다. 서양식 석조 건물들이 들어서며 체육관, 과학관, 박물관, 수영장, 육상 트랙을 갖춘 운동장 및 기숙사 등을 갖춘 대학 캠퍼스 규모였다. 심지어 정구장은 코트가 16면이어서 당시 송도고보의 시설이 와세다 대학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을사늑약 체결날 일기에 “수치스럽다”

과학을 강조한 윤치호의 이상은 계단식 강의실과 실험, 실습실을 갖춘 송도고보의 이화학관(理化學館)에 드러난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 과학의 초기 역사가 만들어졌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최초 한국인 총장이 된 이춘호, 한국인 첫 번째 물리학 박사로 한국물리학회를 창립한 최규남, 나비 박사로 유명한 석주명,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하는 의사 장기려 박사가 모두 송도고보 출신이다. 교사진도 화려했다. 이춘호, 최규남, 석주명이 모두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도상록이 송도고보 교사 신분으로 1930년대 한국인 최초로 양자역학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학교의 환경 덕분이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윤치호는 일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에게 새로운 문명을 보여준 박람회가 1929년 조선에서 열렸을 때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행사일 뿐이라며 “박람회가 끝나자마자 곧 가을철 세금 징수가 들이닥치고 일본인 토지 수탈자와 고리대금업자들은 몸이 터지도록 살이 찔 것”이라고 비난했다. 1932년, 1935년, 1938년, 1940년 여러 차례 조선에서 열린 박람회 모두를 조선인의 고혈을 짜기 위한 전시 행정이라며 일관되게 비판했다. 철저히 과거와 결별해야 했던 그는 미래 세대가 말뿐이 아닌 현실에서 답을 찾길 바랐다. 관념론적 구질서를 극복하려면 과학이 필요했고, 이렇게 우리 과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024.01.10

② 1호 수학박사 최윤식

조선에 ‘아인슈타인 쇼크’… 최윤식은 전국 돌며 상대성이론 알렸다

1922년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했다.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나라 잃은 유대인에게 동질감을 가졌다. 이때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히브리 대학을 세웠고, 이를 주도한 인물이 아인슈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전에 대학부터 만든 것이다. 대체 아인슈타인이 누구길래, 상대성이론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없던 나라의 대학을 세우는지 놀랐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에 우리 신문들은 연일 일정을 보도하고 특집 기사를 실었다. 한 달 동안 일본 전역에서 열린 아인슈타인의 강연은 대성황이었다. 청중 중에는 도쿄제국대학 수학과에 유학 중이던 23세 최윤식이 있었다.

 

▲일본을 방문한 아인슈타인 부부 - 1922년 일본을 방문한 아인슈타인 부부.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고, 일본은 열광했다. 아인슈타인의 강연은 일본 학계에 큰 자극을 주었고, 그중에는 일본 최초의 노벨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도 있었다.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던 조선교육회도 급히 대표단을 일본으로 보내 아인슈타인을 조선으로 초청하고자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대신 일본에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들은 최윤식(아래 사진)이 조선에서 강연했다. /위키피디아

 

▲최윤식

 

1923년, 최윤식과 도쿄 유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조선에서 상대성이론 강연을 추진한다. 식민지 현실에서 아인슈타인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의미를 재빨리 파악한 것이다. 비록 아인슈타인이 방한하지는 못했지만, 유학생들의 강연에 청중의 호응은 엄청났다. 7월 7일 부산항에 도착한 당일 500명이 참석한 부산 강연을 시작으로, 8일 마산, 9일 진주, 10일 밀양 강연에 수백 명씩 모였고, 공주와 청주를 거쳐 무려 1000여 명이 참석한 14일 수원 강연 후 15일 서울에 도착한다. 그들의 강연은 가는 곳마다 대대적으로 환영받았다. 다음은 1923년 7월 15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한위건, 김영식, 최윤식, 세 사람은 지난 9일 하오 6시경에 진주에 도착하야 진주좌에셔 저녁 8시 반부터 문화 대강연을 개최하얏는대 젊은 사자후를 들으랴고 시작 전부터 청객은 가슴을 졸이며 장내에 만원의 대성황을 이른 중 김의진씨의 개회사와 사회로 강연이 시작되얏는대 강연자들이 열렬한 웅변을 토할 때마다 올소! 올소! 하고 박수갈채의 소래는 장내를 진동케 하얏스며 수천 청중으로 하야금 엄청난 감동을 주고 하오 12시경에 대 성황리에 산회하얏는대 당일 연제와 연사 성명은 아래와 같다더라. 1. 절대(絶對)와 상대(相對), 도쿄제국대학 이과생 최윤식군. 2. 문화운동의 경제적 고찰, 와세다대 정경과 김영식군. 3. 개성 발전과 사회 발달, 와세다대 정경과 한위건군.’

 

최윤식의 상대성이론 강연은 김영식과 한위건의 시국 강연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과학 강연 의도는 명확했다. 결국 16일 서울에서 경찰과 충돌이 발생한다. 연단에 경찰이 앉아 연사의 발언에 계속 참견하며 제지하자 관객들의 항의가 속출하고 강연은 중단된다. 굴하지 않고 강연단은 일정을 강행했다. 불볕더위와 큰비에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청중을 위해 독창과 바이올린 연주로 분위기를 잡았다. 최윤식의 강연은 어려웠지만, 모두가 끝까지 경청했다. 7월 17일 인천 강연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는 왜 이렇게 상대성이론에 집착했는지 절박함마저 느껴진다.

 

▲1923년 7월 15일 자 조선일보. '학우회강연대성황'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에서의 상대성 이론 강연을 소개하고 있다. 한위건, 김영식, 최윤식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선일보DB

 

“세 시간 동안을 계속한 최윤식씨의 강연은 첨부터 끗까지 수학 공식으로 발뎐되여 나갓슴으로 수학 지식이 잇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안타 하나 대부분은 역시 알어듯지 못하는 헛정성만 보엿다. 그러나 청중의 대부분을 점령한 학생들이 끗끗내 필긔를 계속함은 보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으로 하야금 저윽히 마음을 진덧게 하엿다.”

 

강연은 계속되어 18일 개성, 19일 연백을 거쳐, 20일 해주와 21일 사리원, 22일 평양, 24일 진남포, 25일 정주, 26일 최윤식의 고향 평안도 선천을 마지막으로 한 달간 조선 전역을 달구었다. 500명이 참석한 7월 25일 평안도 정주 강연은 당시 동아일보 정주 지국장 방응모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상대성이론 강연 사회를 맡은 신지식인 방응모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이듬해 광산 개발에 뛰어들어 금광을 발견한다. 1933년 방응모는 광산을 매각해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최윤식의 전국 순회 강연과 함께 일어난 상대성이론 열풍은 문인 이광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는 1927년 6월 <동광>에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원리, 시간 공간 및 만유인력 등 관념의 근본적 개조>라는 장문의 글을 싣는다. <동광>은 안창호가 주도한 수양동우회의 기관지로 1926년에 시작된 잡지다. 1928년 8월 22일 <중외일보>는 ‘상대성이론을 가르키라’는 사설을 실었고, 1932년 11월 <동광>은 일식 관측으로 상대성이론의 빛의 중력 굴절을 증명한 에딩턴의 <공간 시간 인력(1923)>을 필독서로 추천한다. 이제 아인슈타인은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1926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최윤식은 5년간 휘문, 전주고보에서 교사를 하며 대중 과학 강연을 멈추지 않았다. 1927년 경성 방송국이 탄생하자마자 라디오 강연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지 겨우 몇 년 뒤 일이다. 최윤식은 1931년 경성공업전문대학 교수가 된 뒤에도 수시로 라디오에서 최신 과학 동향을 알렸고, 1939년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로 옮긴 뒤에는 과학 대중화를 위해 ‘어린이 과학’ ‘과학과 여성’과 같은 주제로 라디오에 출연했다. 1940년 1월 3일 조선일보는 최윤식을 비롯한 학계 인사들과 학술 대담을 했다. 최윤식과 학자들은 당시 유일한 대학이던 경성제국대학의 변화를 요구하며 우리나라에도 학술 단체와 학회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1945년 8월 16일 해방 다음 날 우리 민족 최초의 학술 단체 조선학술원이 결성된다.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속히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서 최윤식은 유일한 수학자였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에는 수학과가 없었지만, 이들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1945년 가을 처음으로 수학 강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1946년 ‘국립종합대학 설치 계획안(국대안)’을 둘러싸고 학계는 이념 갈등에 휩싸인다. 어렵게 시작된 경성대 수학 강의였지만 교수들 모두가 월북하자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장이던 최윤식이 나섰다. 최윤식은 국대안으로 경성대학이 확대 개편된 서울대학교에서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를 맡아 수습에 나섰다.

 

혼란에도 1946년 10월 최윤식은 조선수물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갔다. 수학과 물리학을 합친 수물학회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중에 일본수물학회가 일본수학학회와 일본물리학회로 분리되자, 조선수물학회 역시 1952년 대한수학회와 한국물리학회로 분리되고, 최윤식은 다시 대한수학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일본 교과서에 의존하던 수학 교육에서 벗어나 독일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체계를 수입하며 오늘날 대한민국 수학 교과과정의 토대를 갖췄다.

 

그러나 정치권은 최윤식을 가만두지 않았다. 1954년 제자 정치인들이 인사차 방문해서 지나가는 말로 숫자 203의 3분의 2를 사사오입하면 얼마냐길래 큰 의미를 두지 않고 135라고 답한다. 정족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자유당은 이를 사사오입 개헌의 근거로 악용하며 최윤식은 결국 논란에 휩싸인다. 학계 제자들은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묵묵히 학자의 길을 가면 언젠가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최윤식은 4·19 직후인 1960년 8월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우리 수학의 토대를 쌓고 체계를 만든 선도적 인물로 기억되는 최윤식. 무엇보다 그는 100년 전 상대성이론으로 시대의 어둠을 극복하려던 선각자였다.⊙

 

③ 1호 물리학 박사 최규남

야구스타에서 물리학자로… 달 탐사·드론·로켓 알린 ‘과학 에이스’

▲송도고등보통학교 체육 교사 시절 야구부와 함께 사진을 찍은 최규남(가운데 양복 입은 사람). 야구 선수 출신으로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최규남은 미국 유학을 가 물리학을 공부했고 1932년 한국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후 귀국한 그는 연희전문 교수를 하며 양자역학을 조선에 알렸다./최규남 박사 추모 논문집

 

1926년 3월 16일 조선일보는 연희전문학교를 첫 우승으로 이끈 투수 최규남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훗날 한국의 과학과 교육을 이끌게 되는 최규남은 이처럼 야구 스타였다. 1898년 개성에서 태어난 최규남은 윤치호의 아들과 가깝게 지내며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야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윤치호가 ‘산업학교(industrial school)’로 설립한 이 학교는 이공계 교육을 강조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으로 조선에 상대성이론 열풍이 일던 1922년, 촉망받던 야구 선수 최규남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물리학을 가르치던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한다.

 

1927년 4월 29일 조선일보에 최규남의 미국 유학 기사가 실린다. “왕년 야구 선수로 지난봄 연희전문을 마티고 그동안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든 최규남씨는 수학과 물리를 더욱 연구하기 위하야 (...) 체미 동안에도 학과 외에 운동을 계속하리라는데 앞으로 미주의 운동 경기를 본지에 통신하기로 되엇다.” 여전히 세간의 관심은 스포츠 스타가 미국에서 펼치는 활약과 미국 스포츠 소식을 전해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바람과 달리 그는 물리학 연구에 몰두했고, 1932년 한국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남을지 말지 고민하던 그는 조선의 과학 발전을 위해 연희전문 교수로 귀국한다.

 

▲연희전문 야구 스타 최규남에 대한 1926년 3월 16일 자 조선일보 특집 기사. 최규남은 운동부 주장이었다./조선일보 DB

 

최규남이 귀국하던 무렵 현대 물리학은 상대성이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분야로 급속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 중심은 고전역학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양자역학이었다. 연희전문에서 양자역학 강의를 시작한 최규남은 대중에게도 이를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1936년 2월 8일부터 15일까지 최규남은 조선일보에 ‘신흥 물리학의 추향’이라는 6편에 걸친 긴 연재 기사로 양자역학을 설명한다. 서양에서조차 낯설던 양자역학을 조선에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리즈의 첫 단락은 이렇게 물리학의 새 시대를 선언한다. “최근 이십 년간의 물리학 발전은 실노 녯것을 보내고 새것을 맛기에 무가지감이 잇다. (...) 일즉이 전 세계 과학에 일대 혁명적 센세이슌을 일으킨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어언 간에 고전물리학으로 귀결되엿고 현대 물리학계에 가장 새로운 이론은 (...) 양자역학 및 양자론 등이라고 하겟다.”

 

양자역학에 이어 물리학 최신 동향도 알렸다. 1936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헤스(Victor Franz Hess)가 연구하던 ‘우주선(cosmic ray)’을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최규남이 당대에 가장 주목할 과학자로 소개한 헤스는 놀랍게도 그해 말 노벨상을 받는다. 5월에는 로켓 과학과 달 탐사 전망을 소개하고, 태양의 흑점과 코로나에 관한 연구를 알린다. 또한 1935년 처음 발견한 델린저 현상을 소개하며 전자기파와 태양 활동을 연결했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서구에서 막 시작된 TV 방송과 성층권 비행을 위한 터보 차저, 심지어 나중에 레이더와 전자레인지의 원리가 되는 마그네트론까지 이야기한다. 또한 드론을 이야기하며 무선 조종을 위한 전자기파 기술과 여기서 파생된 레이저도 소개한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양자역학과 현대 물리학은 더욱 발전했다. 중성자를 발견한 채드윅이 1935년 노벨상을, 양전자를 발견한 앤더슨이 1936년 노벨상을 받으며 입자물리학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었다. 최규남은 이 최신 연구들을 쉴 새 없이 신문에 기고하며 조선에 알렸다. 그는 1938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최근 세계 과학의 성과’에서는 전자, 양전자, 중성자, 알파입자, 중성미자, 광입자 등 그때까지 알려진 소립자에 대해 정리하고, 당시 막 발견한 중수소(重水素)까지 소개했다. 이 모두가 1930년대 대중 일간지에 실린 과학 칼럼이다. 열악한 환경이라 제대로 된 연구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시대 흐름에는 뒤처지지 않도록 했다.

 

해방되자 최규남은 서울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문교부 차관으로 새로운 교육 체계를 만들던 그의 포부는 1950년 6월 26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에 드러난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문과 이과 구분이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기이한 방식이라며 다음과 같이 통렬히 비판한다. “문과계의 학문만을 학습하여 가지고 교문을 나온 그네들은 자연과학에 아무 교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과학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반신불수의 대학 졸업생들이다. (...) 이와 같은 인문 계통 졸업생이 사회에 나와서는 정치, 경제, 법률 기타 모든 중요 방면에 지도자 격으로 군림하여 이공학부 출신의 기술자를 부리는 지도적 지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그의 개혁은 진전되지 못한다.

 

총장이 납북당한 서울대학교는 1951년 부산에서 최규남을 새 총장으로 임명한다. 전시였지만 그는 한국 과학의 미래를 위해 조금도 쉬지 않았다. 부산에 전시 연합 대학을 발족시키고 피란지 대학들의 소식지로서 1952년 ‘대학신문’을 발행했다. 이 신문은 전쟁이 끝난 뒤 서울대학교 신문이 되었다. 부산으로 피란한 서울대학교에서 최규남은 한국물리학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이 되었다. 또한 미네소타대학과 교류 협정을 맺어 전후 대학이 복구되는 기반을 마련한다. 서울대학교 총장을 마친 최규남은 1956년 문교부 장관, 1964년 한국과학기술원(KIST) 설립 준비 위원장을 맡아 교육과 과학에 헌신했다. 1992년 사망한 최규남은 어렵던 시절 양자역학과 최신 과학을 소개하며 끊임없이 미래를 고민하고 최선을 다한 선구자였다.

‘여성 성악가’ 조선일보 기사 보고… “사귑시다” 미국서 러브레터

1931년 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강의하던 성악가 채선엽에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낸 항공우편이 도착한다. “저는 미시간대학 물리과에서 피에이치디 과정을 밟고 있는 최규남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조선에서 온 신문에서 선엽씨에 대한 기사를 읽고 예가 아닌 줄 알면서도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조선일보를 보며 외로움을 달래던 어느 날 신문에서 채선엽의 이화여전 졸업 기사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사귀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야구 스타 최규남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33년 최규남과 채선엽의 약혼식 사진. /최규남 박사 추모 논문집

 

1932년, 한국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최규남은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고 바로 옆 이화여전의 채선엽을 찾아가 만나기 시작했다. 야구 선수 출신 물리학 교수 최규남은 연애도 남달랐다. 송도고보와 연희전문 시절 야구 이야기를 하며, 치기만 하면 홈런이었다고 음대 교수에게 자랑했다. 엉뚱했지만, 채선엽은 구김살 없는 물리학자 최규남에게 호감을 갖는다. 하지만 채선엽은 대부호 집안의 22세 아가씨였고, 최규남은 홀어머니에 35세 노총각이라 결혼은 쉽지 않았다.

 

이때 채선엽의 오빠 채동선이 나섰다. 벌교의 갑부였던 채동선의 아버지는 그를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유학 보냈다. 이때 채동선은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하지만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자퇴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와세다대학 경제과에 입학했지만 그의 관심은 온통 바이올린이었고 결국 독일로 음악 유학을 떠났다. 1929년 귀국한 채동선은 채선엽의 이화여전 친구 이소란과 결혼했다. 이후 채동선은 두 사람을 지지하고, 1934년 최규남은 채선엽과 결혼에 성공했다.

 

④ 첫 화학 박사 이태규

조선인 최초의 日 제국대학 교수… 1969년 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1902년에 태어난 이태규는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의 전신)를 졸업하고 1920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는 경성고보 선배 최윤식이 있었다. 최윤식은 1922년 도쿄제국대학 수학과에 진학하고, 이태규는 1924년 교토제국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이태규는 1931년 조선인 최초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과 29세였기에 국내 언론뿐 아니라 아사히신문 등 일본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 이태규와 동년배로 교토제국대를 같이 다닌 일본 최초 노벨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는 31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역시 교토제국대 동창인 일본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33세에 받았다.

 

▲1929년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태규(앞줄 가운데)와 시인 정지용(앞줄 오른쪽 끝). 1931년 조선인 최초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를 하다 해방 후 귀국해 과학 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써 한국 과학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태규는 동갑내기 친구 시인 정지용이 소개해준 박인근과 결혼했다. 이태규는 정지용의 손에 이끌려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태규 박사 전기

 

1935년 5월 4일 조선일보는 이태규의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임용 소식을 전했다. 당시 제국대학 조교수는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기에, 조선인이 이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큰 화제였다. 그만큼 젊은 과학자 이태규는 독보적이었고, 우리도 과학이 가능하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태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1938년 미국행을 결심한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대결 중이었지만 이태규는 아인슈타인이 있던 미국 프린스턴 대학을 고집했다. 비용은 경성방직을 경영하던 김연수가 댔다. 여기서 이태규는 당시 학계의 최대 관심사였던 양자역학을 화학과 접목한 이론을 발전시킨다. 1941년 일본으로 돌아온 이태규는 교토대에서 양자화학을 강의하고, 1944년 마침내 정교수로 승진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태규는 새 국가 건설에 힘을 합치기 위해 귀국한다. 일본 학계의 중심이던 그는 몇 년만 노력하면 충분히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도 있었다. 조선에 유일한 대학이던 경성제국대학은 법문학부와 의학부 두 곳만 운영하며 이공계 교육은 없다가 1940년대 들어 처음으로 이공학부를 설치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바뀌자, 이태규는 이공학부장을 맡아 1946년 7월 경성대학 이공학부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리고 며칠 뒤 조선화학회(현재 대한화학회)를 만들었다. 교육과정 개편에도 적극 참여한 이태규는 일제강점기 25%에 불과했던 과학 교육 비율을 75%로 올리는 안을 통과시킨다. 그만큼 이태규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하지만 이때 불어닥친 정치 논쟁이 이태규의 발목을 잡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와 1946년 미군정이 발표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으로 학계가 분열한다. 국대안은 경성대학과 여러 공립 전문학교를 합쳐 국립대학 하나를 설립하는 계획으로,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과 결합하며 학내 소요가 시작되었다.

 

교수가 무려 380명 해임되고 5000명에 이르는 학생이 제적돼 이제 막 독립한 나라의 교육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신설된 서울대학교에서 문리대 학장이 된 이태규는 사태 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나섰다. 1947년 2월 그가 발표한 “신성한 학원으로 돌아오라. 조국의 기대에 대한 보답은 바로 이때다”라는 성명서에 제자들의 요구를 미군정과 협상해 어떻게든 학교를 정상화하려는 대학자의 눈물 어린 호소를 담았다.

 

이후 이태규가 학생들에게 약속한 대로 미군 대위가 맡던 서울대 총장은 한국인으로 교체된다. 첫 한국인 총장 이춘호는 수학 교수였다. 제적된 학생들을 다시 학교에 불러들여 1947년 9월부터 국대안은 수습 국면에 들어간다. 그런데 10월 집무를 시작한 이춘호는 불과 7개월 만인 1948년 4월 사임한다. 문제는 이태규 학장까지 사임 압력을 받은 것. 이 사태는 공간 부족으로 법대가 문리대 건물의 일부를 요구하자 문리대 학장 이태규가 반발한 것이 배경이다. 결국 이태규는 그해 가을 미국으로 떠났고, 후임은 수학자 최윤식이 맡았다. 일본 못지않은 과학을 꿈꾸었던 이태규는 소모적 분쟁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지만, 그의 교토제국대 동료 교수였던 유카와 히데키는 1949년 일본 최초 노벨상을 받았다.

 

1950년 6월 14일 조선일보는 미국으로 떠난 이태규 박사가 유타주립대 교수로 부임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 정착한 이태규는 앞만 보고 더욱 연구에 매진했다. 얼마 뒤에는 고분자 유체의 점도를 규명하는 이론을 발표해 노벨상 후보까지 오른다.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 석학이 된 것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낸 경제학자 임원택은 해방 정국의 정치 과잉으로 이태규가 한국을 떠난 사실이 안타까워 이렇게 말했다. “정계 개편이나 민주주의 입문이나 엔조이하면서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적 화학자 이태규 박사를 이 땅에서 살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한국 민주주의의 치매성을 조소해 본다.”

 

그러나 정작 이태규 본인은 현실을 탓하기보다 끊임없이 조국의 과학을 고민했다. 한국에 두고 온 제자들이 혼란 속에서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미국으로 불렀다. 이들이 학위를 받고 귀국하며 대한민국의 과학계를 다시 세웠다. 과학기술을 강조한 박정희 정부의 등장으로 이태규의 존재는 더욱 부각된다.

 

KIST 설립 자문을 받고, 카이스트의 탄생에도 큰 역할을 하며 1973년 귀국해 한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2년 사망한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된 첫 과학자이다. 식민지 시절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된 최초의 화학 박사 이태규는 민족의 자랑이었고, 화학에 양자역학을 도입하며 세계적 연구로 노벨상에 근접한 첫 한국인이다. 무엇보다 그는 해방 후 혼란에도 굴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써 한국 과학의 토대를 만들었다.

시인 정지용, 육종학자 우장춘과 화학자 이태규의 인연

1902년생 동갑내기 정지용은 교토 유학 시절 이태규와 친구였다. 이태규는 정지용에게 이끌려 천주교인이 되었고, 정지용은 이태규의 대부가 되었다. 도시샤(同志社)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정지용은 교토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여성 박인근을 신붓감으로 소개한다. 그녀는 교토 유학생의 리더 이태규를 잘 알고 있었고, 1931년 이태규의 박사 학위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터라 정지용의 중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32년 이태규는 박인근과 결혼했다.

 

▲교토에 모인 조선 과학자들. 왼쪽부터 우장춘, 이태규, 이승기. 이승기 역시 당시 교토제국대학 화학연구소 조교수였다. /이태규 박사 전기

 

1937년 우장춘이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이태규를 찾아왔다.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우장춘은 그 업적으로 1937년 9월 교토에 있던 다키이 종묘 회사의 초대 연구농장장으로 취임했다. 우장춘이 박사 학위를 받을 무렵 그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그런 우장춘이 이태규를 직접 찾아오며 과학자들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우장춘은 일본인으로 살면서도 ‘우’라는 성을 끝까지 유지했고, 아버지 우범선이 만들어둔 한국 호적으로 1950년 귀국했다. 이태규 역시 제국대학 교수였지만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1948년 이태규는 미국으로 떠날 때 가족을 서울에 두고 갔다. 곧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이태규는 가족과 소식이 끊긴다. 유타대에서 이태규가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부산으로 피란 간 이태규의 가족을 찾은 것은 귀국 후 부산에서 종자 개발에 매진하던 우장춘이었다. 우장춘은 우리 사회가 “국보급 과학자와 가족을 모르는 체한다”며 생활고를 겪던 이태규의 가족을 도왔다. 이런 도움으로 전쟁이 끝난 뒤 이태규는 다시 가족과 무사히 만날 수 있었다.

 

⑤ 비날론 개발한 이승기 박사

인류 역사 두 번째 합성섬유… 독일도 못 한 조선 과학자의 쾌거

▲1939년 9월 29일 이승기가 합성 섬유를 개발했다는 조선일보 기사. 당시 조선일보와 우리 언론은 여러 기사와 사설에서 이를 민족의 자부심으로 높이 평가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7·4 남북공동성명을 준비하려고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 앞에 노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이후락에게 “이태규 박사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태규와 함께 교토제국대학 교수였던 이승기 박사였다. 이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은 미국에 있던 이태규 박사를 초청해 카이스트로 영구 귀국할 수 있도록 했다. 이태규와 이승기 두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 조선을 대표하는 과학자였으며 민족의 자랑이었다.

 

1939년 9월 29일 조선일보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이승기가 합성섬유를 완성했다는 소식을 실었다. 이 뉴스는 세계적으로 큰 화제였다. 그것은 나일론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세계 실크 시장의 80%를 차지했는데, 1938년 미국 듀폰사가 이를 대체하는 나일론을 출시하자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이승기의 합성섬유는 이런 상황에 등장했다. 나중에 비날론이라 부르는 이 섬유는 나일론에 이어 인류가 두 번째로 만든 합성섬유로, 독일도 못 한 일을 조선 과학자가 성공시킨 것이다.

 

▲서울대 공대 학장 시절의 이승기 박사.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를 했던 이승기는 해방 후 귀국해 경성대학 이공학부에서 후학들을 키웠다. 이후 서울대가 설립되자 공대 학장을 지내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월북했다. /조선일보DB

 

1905년에 태어난 이승기는 1931년 교토제국대학에서 공업화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학 부설 섬유 연구소 강사가 되어 합성섬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 성과로 1938년 7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되고 1939년 1월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공학 박사는 매우 드문 일이라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드디어 1939년 가을 합성섬유를 완성한 것이다. 이때 경성방직을 이끌던 김연수는 이승기에게 연구비 만원을 지원한다. 서울 시내 큰 기와집을 열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이승기의 비날론 연구는 중단된다. 1944년 5월 이승기는 교토제국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1945년 7월 22일 이승기는 일본의 패망을 이야기하다가 헌병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때만 해도 이승기는 조국에서 펼칠 비날론 개발에 꿈이 부풀었다. 듀폰의 나일론 역시 2차 대전에 군수용으로 전환되어 일반인은 구경도 못 했고, 종전 후에도 상품화는 더디기만 했기 때문이다. 흥남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학 단지가 있었고, 1941년 서울 공릉동에 세운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동양 최대 대학 건물과 최신 시설을 자랑했다. 하지만 11월 도착해서 목격한 상황은 기대와 달랐다.

 

▲1946년 7월 3일 경성대학 이공학부 제1회 졸업식. 당시 공릉동의 이공학부 캠퍼스는 미군이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 사진은 동숭동 캠퍼스에서 찍었다. 앞줄 우측 네 번째가 이태규 교수,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이승기 교수. 교토제국대학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두 사람은 여전히 가까이 지냈다. 이승기는 월북한 뒤에도 제자들의 소식을 궁금해했다. /서울대 기록관

 

맥아더 사령부는 점령지 대학에 군대가 주둔하지 못하도록 지시했지만,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훼손은 심각했다. 경성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뒤 총장을 맡은 미군 대위 크로프츠의 당시 일기는 시설 파괴와 탈취된 고가 장비를 추적하는 얘기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공학부장 이태규와 화학공학과를 맡은 이승기는 꿋꿋이 버텨냈다. 후학들을 키워 1946년 7월 졸업생을 처음 배출한다. 며칠 뒤 설립한 조선화학회(현재 대한화학회)에서 이태규는 회장을, 이승기는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정치 혼란이 이들에게 닥친다. 1946년 여름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으로 학계가 분열한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이공학부 교수와 학생이 월북한다. 이승기는 사표를 내고 낙향했다. 문리대 학장 이태규의 노력으로 서울대가 수습 국면에 들어가자, 이승기는 서울대로 복귀해 공대 학장이 되었다. 하지만 1948년 서울대 한국인 초대 총장 이춘호가 7개월 만에 사임하고 이태규는 미국으로 떠난다. 이춘호에 이은 두 번째 총장 장이욱 역시 8개월 만에 물러나 1949년 수학자 최규동이 세 번째 총장으로 부임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이승기는 공대 시설 복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1950년 봄 정부는 돌연 예산 부족을 이유로 어렵게 정상화되던 공대 캠퍼스를 비우기로 발표한다. 조선일보가 사설을 쓸 정도로 반대가 거셌다. 최규동 총장이 대통령을 면담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고 얼마 뒤 전쟁이 터졌다.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미처 피하지 못한 서울대 총장 최규동은 초대 총장 이춘호와 함께 납북되었다. 이승기 학장에게 집요한 월북 권유가 계속되자 여러 차례 거절 끝에 북쪽으로 향했다. 흥남 화학 시설을 비날론 공장으로 가동하게 해 주겠다는 회유가 주효했다. 제자들이 이승기를 따라갔지만, 이승기는 그들 일부를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얼마 뒤 흥남이 폭격당했다. 석유를 원료로 하는 나일론과 달리 석유가 없던 북한에서는 달리 선택이 없었다. 석탄과 석회석으로 만들 수 있는 비날론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의 연구는 1961년 비날론을 연간 1만톤 생산하는 공장이 만들어지며 비로소 상용화됐다. 같은 해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이라는 레닌상을 받으며 이승기는 세계적 과학자가 되었다. 이후 10년이 비날론의 전성기였다. CIA는 1971년까지 북한의 직물 생산이 한국을 앞섰다고 기록했다.

 

▲1938년 이태규가 미국 프린스턴으로 떠날 때 교토 유학생들이 환송하며 남긴 서명. 교토대 3인방 이태규, 이승기, 박철재가 크게 쓴 이름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의 서명이 채워져 있다. /이태규 박사 전기

 

이후 비날론은 북한식 사회주의 경제의 성공 사례로 선전되었지만, ‘주체 섬유’라고 하는 순간 발목이 잡혔다. 이 무렵 세계는 석탄이 아니라 석유를 재료로 한 합성섬유가 발달하고 있었고, 일본 역시 비날론의 원료를 석유로 바꿨다. 또한 비날론의 특성상 의류보다는 다른 용도가 적합했지만, 고려되지 않았다. 무모한 자립 경제는 고립을 초래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이승기에게 석탄이 아닌 다른 원료가, 옷이 아닌 다른 목표가, 더 정확히는 다른 시각을 가질 환경이 있었다면 그의 천재성은 더욱 빛났을 것이다.

교토대 3인방이라던 이태규, 이승기, 박철재의 우정

1930년대 교토 유학생 모임은 이태규, 이승기, 박철재가 이끌었다. 특히 일본제국대학 교수에 오른 사람은 이태규와 이승기 두 사람뿐이라 관계는 남달랐다. 이태규의 아들 이회인 박사는 이승기가 자주 찾아와 예뻐해 주었다고 기억한다. 이승기와 1905년생 동갑내기 박철재는 1940년 교토제국대학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아 최규남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물리학 박사가 되었다. 이 세 사람을 교토대 3인방이라 했다.

 

1945년 7월 이승기가 헌병에게 체포될 때 박철재와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일본 패망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교토대 3인방은 귀국을 서둘렀다. 하지만 미리 가족을 귀국시킨 이승기, 박철재와 달리 이태규는 아내가 만삭이라 시간이 필요했다. 이승기와 박철재는 남아서 이태규 가족을 도와 11월 함께 귀국했다. 조선 과학을 대표하던 이들을 사람들은 기다렸고, 박철재는 “우리 세 사람은 무사히 귀국했다”는 소식을 언론에 전했다.

 

1948년 이태규가 미국으로 떠나고, 1950년 이승기도 북으로 갔지만 박철재는 남아서 한국 학계를 이끌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맡은 그는 1952년 네 번째 서울대 총장 최규남을 도와 한국물리학회를 창립했다. 그러고 원자력 기술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1959년 우리나라 최초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해 공릉동 서울대 공대 캠퍼스에 설치했고, 원자력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부임했다.

 

서로 존경하던 세 사람 이야기는 북한에서 펴낸 이승기의 자서전에 여러 번 등장한다. 이승기는 1996년 사망하고 아내 황의분은 2000년 이산가족 상봉 행사로 서울에 와 가족을 만났다. 제자들의 건의를 당국이 받아들여 2005년 이승기 박사 탄생 100주년 학술 세미나가 남북 공동으로 베이징에서 열렸다.⊙

 

⑥ 나비 박사 석주명

하버드·스미스소니언도 후원… 조선 自然史 세계에 알린 르네상스인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1921년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안익태를 선배로 만난 그는 음악에 심취해 같이 음악극을 만들어 순회 공연을 떠나기도 했다. 숭실학교에서 동맹휴학 사태가 벌어진 1922년 어머니는 그를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전학시켰다. 당시 송도고보는 최고의 과학 교육을 자랑했고, 특히 박물관이 훌륭했다. 여기서 박물학(博物學)을 담당하던 조류학자 원홍구를 만나며 석주명의 운명이 바뀐다. 영어로 ‘Natural History(자연사)’라고 하는 박물학은 자연에 따른 생물 종의 변화,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지리와 광물, 더 나아가 지역학을 포함하는 학문이다. 잘 알려진 박물학자로는 찰스 다윈이 있다. 석주명은 자연사에 빠져들었다.

 

▲1932년 송도고보 박물관에서 연구 중인 석주명. 송도고보를 나온 뒤 일본 유학을 마친 석주명은 모교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박물학(博物學)을 담당하며 나비 수십만 마리를 채집, 분석해 조선 나비를 250여 종으로 정리하고 우리말 이름을 붙였다. /조선일보 DB

 

석주명은 1926년 원홍구의 모교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에서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교수를 만난다. 석주명의 재능을 눈여겨본 그는 나비는 미개척 분야라며 10년만 집중하면 세계적 학자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1929년 일본 유학을 마친 석주명은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박물 교사를 거쳐 1931년 모교 송도고보에서 스승 원홍구에 이어 박물학을 맡았다. 본격적인 나비 연구가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 학계는 조선의 나비가 921종이라고 했지만, 석주명은 그중 무려 844종이 동종이명(synonym), 즉 같은 종인데 이름만 다르게 붙은 것을 알아냈다. 새로운 종으로 보고해 업적을 쌓으려는 욕심이 만든 결과였다. 석주명은 나비 수십만 마리를 채집해 일일이 크기를 재며 과학적 통계 분석으로 조선 나비를 250여 종으로 정리해 우리말 이름을 붙였다.

 

교사 월급으로는 어림없는 연구였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일이 있었다. 고비사막 탐험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던 미국 학자가 도착역을 잘못 듣고 경성이 아닌 개성에 내린 적이 있다. 당황한 그는 미국 선교사가 있던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들렀다가 이 학교 박물관을 보고 깜짝 놀란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유명한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의 탐험대 소속이던 그는 송도고보의 전시물을 미국 박물관과 교환하자고 제안한다. 이를 계기로 석주명의 희귀 표본들이 미국에서 전시돼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석주명은 한술 더 떠 연구비가 필요하다며 재정 지원도 요청했다. 하버드 대학을 시작으로 스미스소니언 등 여러 박물관이 연이어 후원했다. 세계 유력 기관에서 지원을 받아 내자 석주명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7년 3월 27일 조선일보에 “과학 조선의 낭보, 영국왕립협회 기관지에 조선산 나비류 소개”라는 기사가 실렸다. 여기서 영국왕립학회는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RSA)로, 1824년 설립된 유서 깊은 학회다. 석주명의 명성이 높아지자 RSA가 영문 집필을 요청한 것이다. 이 책이 1940년 뉴욕에서 출판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 나비 목록)’이다. 컬러 사진까지 넣은 이 책은 한국인이 처음 쓴 영문 과학 서적이고, 현재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과 여러 기관이 보유한 세계적 저작이다. 석주명은 우리가 과학에서 뒤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후진국이라 할지라도 우리 땅의 자료를 계통 세우면 그것으로 선진국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언론에 자신 있게 말했다.

 

▲석주명이 직접 채집해 만들어 놓은 우리나라 희귀종 나비 표본. /석주선기념박물관

 

1942년 석주명은 경성제국대학 생약연구소 연구원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자청해 간 곳은 생약연구소 부설 제주도 시험장이었다. 나비 채집을 위해 한때 제주를 방문한 석주명은 제주도의 독특한 지리, 환경, 언어, 풍습에 매력을 느껴 연구를 위해 다시 찾은 것이다. 제주 언어가 한국어의 옛말에서 유래했음을 밝힌 석주명의 방언 연구는 지리와 문화를 연결하는 박물학의 연장이었다. 자신의 영문 이름에 평안도 사투리 발음 ‘석두명’을 드러내려고 ‘D. M.’으로 표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 나아가 오돌또기 등 제주 민요를 악보로 채보하기도 하고, 제주에 여성 인구가 많은 이유도 분석하며 이를 저서 여러 권으로 남겨 제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연환경에 따른 생물의 특수성을 파고든 박물학 연구는 다양성을 품는 보편성으로 확장되었다. 그가 에스페란토어 연구를 이끈 것도 특정 강대국 언어가 아닌 보편 언어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해방 후 1946년부터 석주명은 남산 자락에 있던 국립과학관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책 여러 권과 논문 수십 편으로 쉬지 않고 저술을 이어갔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국립과학관의 수많은 표본과 자료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공산 치하에서도 숨어서 미완 원고를 필사적으로 써 나갔다. 그러나 9월 24일 미군 폭격기 공습으로 과학관이 불탔다. 나비 표본 15만마리뿐 아니라 여기에 전시 중이던 수많은 한국 동식물의 자연 수집품이 사라졌다. 서울이 수복되자 그가 제일 먼저 서두른 일은 과학관 재건이었다. 10월 6일 복구 회의를 위해 집을 나섰다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그를 인민군으로 오인한 군인들 총에 맞아 사망했다. 대낮에 서울 한복판이었지만 누구도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시신은 방치되었다. 그날 집을 나서며 일기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Bela tago’, 에스페란토어로 ‘아름다운 날’이라는 뜻이다.

윤치호의 과학 교육 이상이 구현된 송도고보

윤치호는 이념에 빠진 조선을 뿌리부터 바꿀 방법은 과학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세웠다. 윤치호의 포부는 원대했다. 서양식 화강암 건물은 당시로는 드문 스팀 난방이었고, 과학 교육을 위해 이화학관(理化學館)을 별관으로 지었다. 이 건물은 120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강의실에 발전기까지 설치해 최신 전자기 실험을 할 수 있었고, 물리실험실과 화학실험실도 따로 갖췄다. 또 다른 별관에 지은 박물관은 프린스턴 대학 등 해외 유수 기관과 교류하던 세계적 수준이었다. 여기엔 석주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송도고보의 시설이 와세다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교원들도 뛰어났다. 서울대 첫 한국인 총장이 된 수학자 이춘호, 우리나라 최초 물리학 박사 최규남이 모두 송도고보 출신으로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도쿄제국대학 물리학과 출신 도상록이 석주명과 함께 송도고보 교사 생활을 하며 한국인 최초로 양자역학 논문을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무렵 홋카이도 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권영대 역시 송도고보에서 물리를 가르쳤다.

 

나중에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된 권영대는 후학들의 분발을 촉구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개성에 있는 송도고보에 있을 때 같이 지내던 석주명 선생에게서도 같은 사례를 보았다. 10년간 나비를 주무르다 보니까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나비 박사가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10년이면 확실히 큰일 하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나비 연구로 출발해 지리, 언어, 문화를 박물학으로 확장하며 42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논문 수백 편과 저서 수십 권을 남긴 석주명은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다.

 

⑦ 세계적 수학자 이임학

한국 최초 국제 학술 논문 주인공… 갈루아와 나란히 ‘최고 수학자’ 반열에

▲1996년 미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울펜손홀 앞 잔디에서 국내 수학 교수들과 함께 선 이임학(가운데). 당시 프린스턴대가 개최한 학술 대회 자리였다. 이임학은 학술 대회에 특별 초청됐다. 왼쪽부터 김대산 서강대 교수, 김동균 고려대 교수, 이임학, 양재현 인하대 교수, 채희준 홍익대 교수. /대한수학회

 

1947년 미국의 저명한 수학자 막스 초른 교수에게 서울대학교에서 보낸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이임학.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내용은 초른 교수가 ‘미국수학회보’에 발표한 미해결 문제를 자신이 풀었다는 것. 당시 25세의 서울대 수학과 교수였던 이임학은 해외 학술지에 어떻게 투고해야 하는지 몰라 초른 교수에게 편지로 보낸 것이다. 초른은 처음 받아 본 동양인의 논문을 대신 투고해 1949년 같은 학술지에 싣는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첫 국제 학술 논문이다. 이후 막스 초른은 1993년 사망할 때까지 더 이상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나중에 세계 수학계를 뒤흔든 이임학은 이렇게 국제 무대에 등장했다.

물리학과 전공한 수학 천재

1922년 함흥에서 태어나 1939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한 이임학은 1942년 이공학부로 진학했다.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은 조선 유일 대학이었지만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있었다. 과학은 가르치지 않다가 전시 동원 체제를 위해 1941년에야 이공학부를 만들었다. 이임학은 이 무렵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는 수학과가 없어 이임학의 전공은 물리학이었다. 여기서 천재적 수학 재능으로 명성을 얻은 이임학은 1944년 졸업 후 만주에 있던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 주식회사’에 취직한다. 1945년 8월 소련이 참전하자 만주 곳곳에서 일본 관동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 함흥으로 돌아온 이임학은 고향에서 해방을 맞아 서울로 향했다.

 

1945년 가을,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 학기를 준비했다. 우리 과학자들은 이공학부에서 일본인 교수들이 물러난 자리를 채웠다. 특히 일제강점기까지 없었던 수학과를 한국 최초로 만들어 간 과정은 흥미롭다. 처음 시작한 경성대학 수학과를 누가 맡을 것인지 수학자 15명이 모여 투표했는데, 대학을 갓 졸업한 이임학이 김지정, 유충호와 함께 뽑혔다. 당시까지 도쿄제국대학 수학과를 졸업한 조선인은 1923년의 상대성이론 전국 순회 강연으로 유명했던 최윤식을 비롯해 김지정과 유충호 세 사람이었다. 불과 24세의 이임학이 당시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였던 최윤식을 대신할 정도로 모두가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젊은 시절의 이임학.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 공훈록

 

1946년 여름, 경성대학에 경성의학전문, 경성광산전문, 경성공업전문 등 관립 전문학교 9곳을 합쳐 서울대학교를 만든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대학 자치를 둘러싼 논쟁으로 학계가 분열한다. 9월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 38명이 집단 사표를 내자, 북한은 이들을 김일성 대학으로 초청했다. 이에 수학과 교수 김지정, 유충호가 북쪽을 택했고 함흥에 가족이 있던 이임학도 합류했다. 10월 서울대학교가 개교하면서 이 세 교수의 빈자리는 최윤식이 맡아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가 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잠시 강의를 맡았던 이임학은 북한 정권에 반감을 느껴 가족과 탈출한다. 이후 휘문고등학교와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47년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다시 합류했다. 그를 부른 것은 최윤식이었다. 초른의 미해결 문제를 푼 논문은 이때 탄생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서울이 점령당하자, 월남 이력을 가진 이임학은 인민군을 피해 숨어 지냈다. 1·4 후퇴 때 일단 제주로 피신한 그는 부산에 전시 캠퍼스를 연 서울대학교에 합류한다. 전쟁 중이었지만 부산의 미국 공보원을 수시로 들러 미국 학술지를 보며 연구했다. 이때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제닝스 교수의 논문에서 오류를 보고 이를 지적하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은 제닝스 교수는 즉시 이임학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초청했다. 캐나다로 떠난 이임학은 2년 만인 1955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던 그는 여권 연장을 신청하지만, 대한민국 영사관은 거부한다. 여권까지 뺏겨 무국적자가 된 이임학은 캐나다 정부의 도움으로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국적 회복 못한 채 2005년 사망

1957년 군론(group theory) 연구를 시작한 그는 1960년 새로운 유한 단순군을 발견한다. 프랑스 천재 수학자 갈루아가 대수방정식의 풀이 가능성을 연구하기 위해 도입한 군론 연구는 20세기 들어 현대 수학의 주요한 흐름이 되었고 1950년대 새로운 단순군 발견이 뜨거운 관심사였는데, 이를 이임학이 해낸 것이다. 이임학이 발견한 ‘Ree군’은 세계 수학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그는 이 공로로 1963년 캐나다 왕립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된다. 이어 미국, 영국, 일본의 수학 사전에 이임학의 이름이 올랐다. 가장 권위 있는 수학 역사서인 ‘순수 수학의 파노라마(A Panorama of Pure Mathematics)’에는 군론 분야의 위대한 수학자 21인으로 선정되어 코시, 갈루아와 같은 전설적 수학자와 나란히 실렸다. 하지만 그는 캐나다인 이임학으로 소개되었다.

 

이임학은 196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수학자 대회에 참가해 월북한 경성대학 동료 수학 교수 김지정을 만난다. 가까스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남쪽으로 데리고 온 이임학은 함흥에 남은 친척 소식이 간절했지만 알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까워한 헝가리 수학자 에르되시가 북한에 남은 이들과 편지 주고받는 일을 도와주었다.

 

너무 기뻐한 이임학은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북한 친지들의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남쪽 가족은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많은 후학이 세계적 수학자 이임학의 국적과 명예 회복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1996년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행사로 한국에 왔지만, 국적 회복은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이임학은 캐나다 시민권자로 2005년 사망했다.

죽는 날까지 한국을 그리워한 이임학

2001년 국내 언론사와 통화할 때 “조선말로, 조선말로 해 주세요”

 

해방되자 일본 교재를 대신할 한국어 수학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임학은 영미권 대학 교과서나 학계 동향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정국 혼란으로 최신 학술 잡지나 도서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7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임학은 남대문시장에서 미군이 버린 서적들을 뒤적이다 막스 초른의 논문이 실린 미국수학회보를 본 것이다. 대한민국 첫 국제 학술 논문은 이렇게 탄생했다. 논문 투고 방법도 몰랐기에 자기 논문이 실린 사실도 몰랐다. 1953년 캐나다에 도착해서야 초른에게 보낸 논문이 미국수학회보에 게재된 사실과, 세계 수학계에서 자신이 유명해졌음을 알게 된다.

 

이임학은 1948년 미국 대학에서 널리 사용하던 ‘미적분학’ 교재를 번역해 한국어로 된 첫 고등 수학 교재를 만들었다. 이어 ‘평면해석기하학’, ‘대수학’ 등 대학 교재를 7권 저술해서 우리나라 대학 수학 교육의 기초를 만들었다. 캐나다에 정착하며 세계적 학자가 된 뒤에도 그는 한국을 잊지 않았다. 2001년 국내 언론사와 통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말로 해 주세요. 조선말로 해 주세요. 조선말을 들으면 다시 생각나는 것이 많습니다.”

 

2003년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던 그를 찾아간 서울대 수학과 김도한 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가족들의 연주에도 별 반응이 없던 이 선생님께서 제 아들과 조카들이 ‘고향의 봄’을 부르자 금방 눈물을 주르륵 흘리셔서 모두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2005년 타계한 이임학은 2006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최초 수학자이고, 2015년 우리나라 과학기술 대표 성과로 ‘Ree군’이 선정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세계 수학사에 이름을 남긴 첫 한국인이다.

 

⑧ 과학 행정가 최형섭

KIST 초대 소장·과기처 장관만 7년 7개월… 한국 과학을 이끌었다

1945년 12월 경남 진주의 최형섭은 서울에 출장 갔다가 와세다 동문에게 경성대학 이공학부 얘기를 듣는다. 1920년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충청도 여러 곳 군수를 지내며 대전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법대에 진학하길 원했지만, 최형섭은 공대를 고집해 1939년 와세다대학 채광야금학과에 진학한다. 졸업 후 진주에서 아버지의 견직 회사에 근무하던 최형섭은 경성제국대학이 해방 후 이름을 바꾼 경성대학 교원이 부족하다는 사정을 들은 것이다. 새 나라는 무엇보다 이공계 인력 양성이 시급하다는 동문의 호소에 경성대학 이공학부 강사로 합류한다.

 

1971년 최형섭(왼쪽) 과학기술처 장관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방문한 박정희(오른쪽) 대통령에게 KIST에서 개발한 제품들에 대해설명하고 있다. 1966년 설립한 KIST의 초대 소장을 지낸 최형섭은 1971년 과기처 장관을 맡아 약 7년 7개월 동안 장관직을 수행했다. 2004년 작고한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국가기록원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안(국대안)으로 경성대학은 격동에 휩싸인다. 경성대학 이공학부장 이태규가 사태 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대학은 혼란에 빠졌고, 최형섭은 진주에서 쉬다가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어수선한 정국에 고심하던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한다. 퍼듀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출국하기 보름 전 6·25전쟁이 일어나 고향 진주 인근 사천 공군에 입대한다. 그런데 이게 오히려 전환점이 되었다. 항공공학자로 유명한 장극 박사와 인연이 닿은 것이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중퇴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 장극은 1938년 베를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아인슈타인을 배출한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옮겨 1948년 노터데임대학에서 항공공학 박사가 되었다. 그의 큰형은 장면 총리, 둘째 형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 장발이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장극 박사는 귀국해서 공군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국 노터데임대학 최초 한국인 박사였던 장 박사의 추천으로 최형섭은 노터데임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최형섭은 노터데임에서 석사를, 이어 1958년 미네소타에서 금속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귀국한 그가 과학 행정가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원자력연구소였다. 일본을 무너뜨린 원자력 기술은 한국 과학자 모두가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분야였다. 이태규, 이승기와 함께 교토제국대학 3인방이라던 박철재 박사가 1959년 출범한 원자력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다. 이 무렵 금속공학자 최형섭 역시 원자력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4·19와 5·16 등으로 원자력연구소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새롭게 집권한 군사정부는 금속공학자 최형섭에게 대한중석의 자문을 부탁한다. 중석(重石)은 텅스텐을 말한다. 세계 최대 텅스텐 광산을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대한중석은 한때 수출의 60%를 담당하기도 했지만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경제 감각도 있던 최형섭은 대한중석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찾아내고, 기술을 개발한다. 이렇게 방향을 잡은 대한중석은 예편한 박태준(나중에 포항제철 사장)이 사장으로 부임하며 흑자로 전환했다. 군부의 신뢰를 쌓은 최형섭은 1962년 4월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된다. 그는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이며 연구소를 정상화했다.

 

최형섭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대한민국이 가진 것은 인력뿐”이라는 생각이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추진된 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였고, 최형섭은 1966년 2월 설립한 KIST의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다. 과학자의 역할이 연구 활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과학기술 정책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렇게 ‘장기 에너지 수급 계획(1967)’ ‘기계공업 근대화의 기본 방향(1969)’ ‘종합 제철 공장 건설을 위한 타당성 조사(1969~1975)’ 등이 이뤄지며 대한민국 경제의 기반을 만들었다.

 

1971년 6월 최형섭은 과학기술처 장관이 되었다. 이공계 인력 양성이 과학 발전의 핵심이라고 본 그는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라는 미국 스탠퍼드대학 터먼 교수와 친분을 쌓았다. 터먼이 한국을 방문해 만든 인력 양성 계획서로 한국과학원(현 카이스트)이 탄생한 것이 이 무렵으로, 최형섭은 설립 초기 큰 역할을 했다. 한국과학재단(현 연구재단)을 만들고,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했다.

 

최형섭은 1978년 12월까지 약 7년 7개월 동안 과학기술처 장관직을 맡았는데,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장수 국무위원이다. 5년 단임제인 현행 헌법이 계속되는 한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최형섭은 이렇게 회고했다. “과학기술 개발은 일관성 있게 꾸준히 추진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는데 이를 실천한 사람은 박 대통령이다. 나는 과학자로서 전공을 살리지 못했지만,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그런 의지를 가진 대통령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최형섭은 당시로는 생소했던 기술 투자를 수행할 국책 금융회사를 고민했다. 실리콘밸리와 같은 혁신 연구 생태계의 원동력이 벤처 투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양성된 이공계 인력들이 기술 스타트업으로 꿈을 펼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다. 이렇게 1981년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현 KTB)가 출범하며 나중에 대한민국의 벤처 열풍을 이끌게 된다.

 

최형섭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한국과학원 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 과학 발전은 그의 리더십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4년 작고한 그는 이태규에 이어 국립묘지에 안장된 두 번째 과학기술자이며,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아버지와 아들

1907년 고종의 강제 폐위는 군대 해산으로 이어졌다. 해산 명령에 박승환의 자결을 시작으로 군인들이 봉기하며 각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이 정미의병의 시작이다. 그런데 경남 진주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진주의 하급 경찰이던 25세 최지환은 단신으로 진주 군영으로 들어가 봉기를 준비하던 지휘관을 감금한다. 진주 봉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진압되고, 최지환은 이 공로로 일본 훈장을 받으며 충북 음성, 영동, 충주 등의 군수를 역임하고, 평안도 참여관을 거쳐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다. 최지환의 아들이 최형섭이다.

 

1969년 서울 동대문구 홍릉 KIST 본관 앞의 최형섭. /전자사료관

 

최지환은 사업 수완도 뛰어나 고향 진주에서 권번(기생 조합)을 만들기도 하고, 일본인들과 견직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의 일본식 이름을 후지야마(富士山) 다카모리(隆盛)라고 짓는다. 일본의 상징인 후지산(富士山)과 메이지 유신을 이끌고 정한론으로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1949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얼마 뒤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이듬해 6월 대법원에서 최종심이 진행 중이었으나 6·25전쟁으로 흐지부지되었다.

 

최형섭 박사는 아버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거의 없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연좌제는 이미 사라졌고, 본인 의지나 책임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지금 6자 회담이라는 좋은 일, 평화 프로젝트를 위해 힘쓰고 있는데 재를 뿌리면 되겠느냐.” 2008년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6자 회담을 위해 활동하던 성 김에 대해 한 말이다. 성 김의 아버지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⑨ 최초로 아인슈타인 만난 황진남

베를린 유학시절 첫 만남… 조선의 아인슈타인 열풍에 불 지르다

 

1922년 2월, 베를린 유학생 황진남이 독일 최고 학술 기구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1915년 아인슈타인은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빛이 중력 때문에 굴절된다고 예측했는데, 이 놀라운 현상이 1919년 개기일식에서 실제로 관측되며 세계적 스타가 된다. 힘을 얻은 아인슈타인은 팔레스타인에 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도 훨씬 전에 교육기관부터 세운 것이다. 나라 잃은 민족의 대학이 만들어지는 데에 고무된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과학이 독립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황진남이 있었다.

 

▲1919년 안창호(왼쪽)와 황진남. 황진남은 1916년 UC버클리에 입학했지만, 1919년 3·1운동 때 대학을 자퇴하고 캘리포니아 각지를 돌며 동포들에게 조국의 만세운동을 알렸다. 당시 미주 한인 사회 지도자였던 안창호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를 이끌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황진남은 임시정부에서 외교 업무를 맡았다. /독립기념관

 

황진남은 1897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황진남은 1916년 UC버클리에 입학한다. 이 대학은 현재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무려 110명 배출한 명문 학교. 이민자 출신으로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황진남의 인생이 바뀐 것은 1919년 3·1운동 때다. 기억도 희미한 조국의 소식에 벅찬 감정을 이기지 못한 그는 대학을 자퇴하고 캘리포니아 각지를 돌며 동포들에게 만세 운동을 알렸다. 당시 미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였던 안창호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 피 끓는 젊은이를 눈여겨보았다. 그래서 영어에 능통한 황진남을 데리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임시정부에서 외교 업무를 맡은 황진남은 1920년 8월 안창호를 모시고 여운형 등과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의원들을 면담했다. 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분에 빠지자, 미국에 가려고 유럽을 경유하던 황진남은 3·1운동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독일 베를린 대학에 입학했다. 이렇게 1922년 아인슈타인을 만난 황진남은 그해 가을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조선에 아인슈타인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1922년 11월 14일부터 4회에 걸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해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11월 18일부터는 3회에 걸쳐 아인슈타인을 만난 이야기와 그의 일대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황국주의를 배척하며 평화주의를 옹호하고 각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는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마침 1922년 11월 13일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다. 아인슈타인은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일본 전체가 들썩이며 아인슈타인 붐이 일었고, 이는 1923년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상대성이론 순회 강연으로 이어졌다. 원자폭탄의 원리가 되는 상대성이론의 유명한 공식 E=mc²의 내용까지 대중 일간지에 소개한 황진남은 아직은 젊은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을 이렇게 평가했다. “인류 문화사가 계속되는 한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영원할 것이며 또한 전 세계 인류가 갈릴레이와 뉴턴과 같이 숭배할 것은 부정 못 할 사실이다.” 이처럼 1920년대 조선에서 벌어진 아인슈타인 열풍에 불을 지른 것은 황진남이었다.

 

1923년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독일 신문에 조선인 학살 이야기가 실린다. 이를 목격한 독일인 오토 부르흐하르트(Otto Bruchhardt) 박사가 기고한 것이다. 기사를 읽은 황진남은 울분에 박사를 찾아가 일본의 만행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황진남의 학업은 순탄치 않았다. 이 시기 독일은 1차대전 패배로 물가가 폭등한다. 1923년 10월 한 달에만 300배가 올라, 11월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으로 나치가 급부상했다. 자신뿐 아니라 독일 유학생 전체가 곤란에 빠지자, 황진남은 미국에 있는 동포들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그의 호소로 1924년 미국에서 대대적 모금이 벌어진다. 하지만 황진남은 동포들이 보낸 후원금이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 프랑스 파리로 옮겼다. 박사 학위를 받기 불과 1년 전이었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 입학해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황진남은 1938년 고향 함흥으로 귀국했다. 파리에서 결혼한 프랑스인 아내 시몬뇨와 함께였다. 귀국 후 라디오에서 아인슈타인에 대한 과학 강연을 했으며, 함흥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45년 해방되자마자 황진남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합류해 새 국가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좌우 대립은 중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함흥에 아내와 아들을 두고 온 황진남은 필사적으로 좌우 합작을 추진했지만, 양쪽에서 거친 공격을 받았다. 결국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며 좌우 합작은 물거품이 되고, 이후 황진남의 정치 활동은 중단되었다.

 

6·25가 벌어지자, 황진남은 일본 도쿄에 있던 유엔군 사령부 방송사 VUNC(The Voice of UN Command)에서 대북 선전을 맡았다. 가족을 애타게 찾던 그에게 프랑스 외교부가 아내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북한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끌려다니다 프랑스 정부가 찾아냈을 때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황진남은 겨우 아들을 데려와 도쿄에서 같이 살았지만 결국 아들도 캐나다에 있는 아내의 친척에게 보냈다. 이후 홀로 살던 황진남은 VUNC가 오키나와로 옮기자 함께 이동했고, 1970년 혼자 지내는 숙소 침대에 누운 채 숨을 거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2019년 상하이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황진남은 건국 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가족이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훈장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1920년 항공 부대를 만든 미주 한인 농부들... 과학기술로 대한 독립을

1915년 6월 24일, 미주 한인들의 소식지였던 ‘신한민보’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린다. 황진남에 대한 첫 기록이다. 하와이 학생 황진남이 미국 본토로 떠난 아버지 소식을 묻자, 신문은 “콜루사 땅에서 벼농사를 하는 중”이라고 답했다. 콜루사(Colusa)는 샌프란시스코 북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우리 선조들은 이곳이 벼농사에 적합함을 알게 된다. 하와이에서 이 소식을 들은 황진남의 아버지 황명선은 가족을 두고 콜루사로 향했고, 여기에는 먼저 벼농사를 시작한 철도 노동자 김종림이 있었다. 김종림은 황명선의 고향 함흥 바로 옆 정평 출신이다. 이 무렵 콜루사 한인들에게 행운이 왔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곡물 가격이 폭등하자 한인들의 쌀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특히 김종림은 백만 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힘들게 번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다.

 

▲1920년 설립된 캘리포니아의 한인 비행대. 김종림 등 미주 한인 농부들 주도로 만들어진 한인 비행대는 임시정부 노백린 장군이 총괄했다. 안창호는 독립군 비행대 계획 과정에서 사들일 기종과 가격을 황진남에게 알아보게 했다. /미국 남가주대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 얼마 뒤 벌어진 1차대전 때 비행기가 최신 무기로 등장했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비행기의 위력을 주목했다. 독립군 편제에 비행대를 포함한 것이다. 특히 안창호는 비행대 계획을 구체화하며 사들일 기종과 가격을 황진남에게 알아보게 했다. 여기에 호응한 것이 벼농사를 짓던 미주 한인들이었고, 김종림을 중심으로 1920년 한인 비행대를 세우게 된다. 비행 학교 역할도 수행한 이곳은 임시정부 노백린 장군이 총괄했고 비행기를 여러 대 사서 파일럿을 수십 명 길러냈다. 비록 벼농사 흉작이 겹쳐 비행대 활동은 중단되었지만, 이미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과학기술로 독립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최신 과학과 첨단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⑩ 제주 만장굴 발견한 부종휴

다섯 시간의 행군… 그는 횃불과 줄 하나를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

▲부종휴 부부. 1972년 제주 한림 쌍용굴과 협재굴의 바닷가 쪽 입구를 발견한 이후 촬영한 사진이다. 두 사람은 1969년 5월 31일 제주 만장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46년 만장굴을 최초로 발견한 부종휴가 만장굴을 알리기 위해 결혼식을 동굴에서 한 것이다. /제주 세계자연유산 선각자 부종휴 사진집

 

1969년 6월 1일 자 조선일보는 다소 특이한 결혼식을 보도했다. 그 전날 5월 31일 지하 10m 동굴에서 결혼식을 올린 부종휴에 관한 기사였다. 이 굴은 만장굴로, 현재는 제주를 대표하는 용암 동굴이지만, 당시에는 생소했다. 부종휴는 1946년 만장굴을 최초로 발견하고 이름 지은 사람이다. 하지만 오래도록 만장굴은 잊혔고, 1967년부터 조금씩 공개되었지만 그해 만장굴을 다녀간 사람은 127명에 지나지 않았다.

 

부종휴는 어떻게든 자신이 발견한 만장굴을 알리려고 결혼식을 만장굴에서 열었다.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 행사에 수많은 하객과 기자들이 몰리며 이를 기점으로 만장굴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방문객은 폭발적으로 늘어 1975년 한 해 방문객이 11만 명을 돌파하고 1980년대에는 무려 100만을 넘어서며 유네스코가 주목한 제주의 대표 명소가 되었다. 부종휴가 만장굴을 발굴하고 알린 것은 과학이 어두운 시대를 밝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26년 제주에서 태어난 부종휴는 1945년 3월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가 김녕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같은 해 일본이 패망하자 19세 청년 부종휴는 해방된 조국에 과학자, 음악가가 필요하다고 소년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과학반과 음악반을 만들어 현미경을 사고, 자기 바이올린을 내주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얼마 전까지 황국신민 교육을 받던 학생들에게는 파격적이었고, 불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부종휴를 믿고 따르게 된다. 한 발 더 나가 이들 초등학생과 과학 탐사를 시도한다. 그는 ‘꼬마탐험대’로 이름 붙이며 동굴 탐험을 위해 안전교육과 기초 훈련을 했다.

 

1946년 4월, 부종휴는 어린이들을 이끌고 제주에서 아무도 가지 못했던 미지의 동굴로 들어갔다. 그날은 부활절이었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굴의 길이에 놀란 그는 일단 철수하고, 더 철저한 준비를 했다. 충분한 횃불과 길이를 측정할 긴 줄을 가지고 동굴 끝까지 갈 계획을 세운 그는 1946년 가을 재도전했다. 무려 다섯 시간의 어둠 속 행군 끝에 기적적으로 지상으로 통하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측정된 길이는 7㎞. 동굴 끝에서 발견한 이 구멍은 오래전부터 ‘만쟁이거멀’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새로 발견된 동굴의 시작점으로 확인되었다. 1947년 2월 24일, 부종휴는 김녕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 동굴의 이름을 ‘만장굴’로 발표하는 행사를 열었다.

 

부종휴는 “처음에 만장굴을 답사할 때의 사회란 해방 후이고 보니 이만저만 시끄러운 때가 아니었다. 좌우가 충돌하고 국민들은 방향을 못 찾고 있던 때”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랬던 이 시절에 굳이 과학 탐사를 했던 이유는 아이들 손을 잡고 어두운 동굴을 한발 한발 전진하며 그 끝에서 발견하게 될 빛을 희망으로 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며칠 뒤 제주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만장굴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다. 제주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가두시위로 시민이 여러 명 사망한다. 이를 기점으로 소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해 1948년 4월 3일, 제주 전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제주 4·3 사건이라고 한다.

 

▲제주 김녕초등학교에 세워진 부종휴 선생과 꼬마탐험대 기념비. /민태기 박사 제공

 

4·3 사건은 제주를 초토화했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어 1954년에야 마무리되었다. 김녕초등학교를 떠나 제주농업학교, 신성여고, 제주사범학교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부종휴는 과학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제주경비사령부는 폭도를 진압한다며 제주 중산간 거주민들을 해안 지역으로 강제로 소개하는 조처를 내려, 이 무렵 제주도에서 산간 지역을 들어간다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었다. 누구도 나서지 않던 이때 부종휴가 당국의 협조를 받아 제주 산간 지역 탐사에 나선다.

 

그는 수백 회에 걸쳐 한라산을 오르며 수많은 제주도만의 식물종을 발견하는 성과를 이룬다. 서울대 연구원으로 식물 연구를 이어가던 부종휴는 1962년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하며 다시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 학계와 벌였던 왕벚나무 원산지 논쟁에 쐐기를 박는 상징적 사건이다. 후속 연구로 제주도에 자생하는 왕벚나무는 일본 왕벚나무와는 다른 종으로 판명되어 원산지 논쟁은 의미가 없어졌지만, 아직 일본에서는 왕벚나무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부종휴는 4·3 사건으로 묻힌 만장굴을 알리기 위해 사방으로 뛰었다. 1966년에는 일본 지하수학회와 공동 발굴 연구를 했고, 이어진 연구로 1968년 만장굴이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동굴임을 발표한다. 이에 만장굴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기획한 이벤트가 1969년 만장굴 결혼식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제주의 지질을 연구하기 위해 동굴 탐사를 이어갔다. 1970년에는 성산읍 수산굴, 1971년 서귀포 미악 수직굴을 발굴했다. 1971년 다시 한번 세계가 놀랄 발견을 했다. 당시 세계 최장이던 길이 11. 7㎞에 달하는 빌레못동굴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속 탐사에서 구석기로 추정되는 유물도 발견되어 당시 고고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1976년 부종휴는 신설된 제주대 식물학과 교원이 되어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건강마저 좋지 않았다. 1980년 11월 22일 새벽,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그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향년 54세였다. 한라산 자락에 묻힌 부종휴의 묘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산과 식물, 커피와 파이프, 브람스와 카메라, 그리고 한라산을 진정으로 사랑하셨던 분”.

[노인이 된 꼬마 탐험대원은 선생님을 기리며 바이올린을 들었다]

2016년 만장굴 발견 70주년 행사에

탐험대원이었던 생존 노인 3명 참석

선생님에게 배운 바이올린 연주

 

제주는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화산 지형과 이에 따른 다양한 자연환경 및 식생을 가지고 있다. 이에 주목한 유네스코는 2002년 제주도 절반에 해당하는 면적을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리고 2009년 다시 유네스코는 제주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오래전부터 제주를 과학적으로 탐사하고 세계에 알리려던 부종휴가 있었다.

 

1980년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선구적 업적을 알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나섰다. 특히 부종휴와 손을 잡고 만장굴을 발견한 꼬마 탐험대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늘 부종휴와 함께했던 그들은 1969년 만장굴에서 열린 부종휴의 결혼식에도 장성한 청년으로 참석해 행사를 도왔다. 제자들은 선생님과 함께한 강렬했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했고, 이들의 감동적인 증언이 결국 세상을 움직였다. 그렇게 부종휴는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6년 제주에서는 만장굴 발견 70주년 기념행사에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70년 전 부종휴의 손에 이끌려 만장굴을 발견한 어린이 중 아직 생존해 있는 세 명의 노인이 참석했고, 부종휴가 가장 좋아했던 ‘브람스 교향곡 3번’이 행사장에 울려 퍼졌다. 배고팠고 어렵던 시절, 부종휴는 있는 힘을 다해 아이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었다. 제막식 식전 행사로 80대 노인이 바이올린으로 서툰 연주를 했다. 김녕초등학교 시절, 이 노인은 부종휴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노인은 비록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바이올린을 가르쳐준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이날 다시 바이올린을 들었다.⊙

 

2024.05.22

⑪ 모스펫 발명한 강대원 [끝]

美 특허청은 그를 에디슨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인류가 가장 많이 만들어낸 인공 구조물은 모스펫(MOSFET·금속-산화층-반도체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이라는 반도체다. 통계에 따르면 2018년까지 1.3X10²²개의 모스펫이 만들어졌다. 스마트폰에서부터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명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바로 모스펫인데, 이를 발명한 사람은 한국인 물리학자 강대원이다. 모스펫으로 조그만 칩 하나에 수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며 비로소 IT 산업이 꽃피기 시작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반도체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46년 탄생한 세계 최초의 전자식 범용 컴퓨터 에니악(ENIAC)은 진공관을 사용했다. 1만8000개의 진공관이 장착된 이 장치는 집채만 한 크기에 무게는 30톤이 넘었다. 소비 전력도 엄청나 인근 도시 전기 공급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이를 해결하며 등장한 반도체가 트랜지스터다. 1947년 등장한 트랜지스터는 컴퓨터 크기를 300분의 1, 소비 전력은 1500분의 1로 줄였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미국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 존 바딘, 월터 하우저 브래튼 세 사람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결정적 기술이 등장한다. 1958년 미국의 잭 킬비는 여러 전자 부품을 한 칩에 넣을 수 있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IC)를 개발한다. 잭 킬비 역시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캠퍼스에서 어린 딸과 나란히 손을 잡고 서 있는 강대원 박사. 195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강대원은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4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벨 연구소에 들어간 그는 입사 1년 만인 1960년 반도체 소자의 집적도를 높여 작은 면적에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는 모스펫 원리를 구현하는 발표를 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 공훈록

 

이 무렵 미국 유학 중이던 강대원은 새롭게 떠오르는 반도체를 주목했다.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중, 경기고를 월반해 가며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대입 검정시험에 합격했을 때 불과 15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진주중, 진주고 교장을 거쳐 보성고 교장, 부산사범대학 초대 총장을 지낸 강정용이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강정용의 동기로는 역사를 전공한 함석헌이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에서 복무한 강대원은 1955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4년 만에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그의 선택은 당시 반도체 혁신을 이끌던 벨 연구소였다. 1959년 입사한 강대원은 1년 만인 1960년 세계를 뒤흔든 발표를 한다. 모스펫이었다.

 

모스펫은 반도체 소자의 집적도를 높여 더 작은 면적에 훨씬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는 기술이다. 게다가 소비 전력도 훨씬 줄일 수 있다. 오래전부터 모스펫 원리는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구현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반도체 회로의 소형화, 집적화가 요구되면서 모스펫 개발이 절실했다. 바로 이때 신입 연구원 강대원이 최초로 동작하는 모스펫을 세상에 보인 것이다. 오늘날 최신 반도체에는 500억개가 넘는 트랜지스터가 들어가니, 무려 500억개의 진공관을 작은 칩 하나에 넣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강대원의 모스펫이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강대원은 한발 더 나아갔다. 벨 연구소에서 팀장이 되어 후속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 또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결과를 발표한다. 전원을 꺼도 저장된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플로팅 게이트 기술을 개발한다. 현재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USB와 대형 저장 장치에 쓰이는 낸드 플래시 메모리는 강대원 박사의 플로팅 게이트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기술 역시 세상을 바꾸었다. 지워지지 않는 메모리는 나중에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열어 100년이 넘는 전통 필름 카메라 업체들을 사라지게 했다. MP3 플레이어의 등장은 오디오 시장을 바꾸어 카세트테이프와 CD를 대체했다.

 

이제 세계 전자 업계에서 강대원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1975년 강대원은 미국 프랭클린 연구소의 스튜어트 밸런틴 메달을 받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을 기념하는 이 연구소는 메달 수상자를 엄격히 선정한다. 이 메달을 받은 인물들만 보아도 강대원의 업적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수상자에는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그리고 반도체 개척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 잭 킬비 등이 있다. 세계적 과학자만 받는 이 메달 수상자 중 105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1988년 강대원이 벨 연구소를 은퇴하자, 일본 최대 IT 회사 NEC가 글로벌 연구 센터를 미국에 설치하며 그를 초빙했다. 이곳에서도 계속 새로운 연구를 시도하던 강대원은 1992년 학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대동맥류 파열로 급사한다. 향년 61세였다. 많은 이가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트랜지스터와 반도체 집적회로로 노벨상을 받았으니 다음 순서가 모스펫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잭 킬비는 IC로 노벨상을 받으며 오늘날 반도체 산업이 이렇게나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것은 강대원의 모스펫 덕분이라고 했다.

 

2009년 미국 특허청은 IC 개발 50주년을 기념해 ‘무어의 법칙’ 창시자이자 인텔 창업자인 고든 무어, 공동 창업자인 앤드루 그로브와 함께 강대원을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앞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인물로는 에디슨, 벨, 라이트 형제, 노벨 등이 있는데, 강대원 박사가 이들과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2014년 서울대학교 반도체공동연구소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고, 2017년 한국반도체학술대회는 ‘강대원상’을 제정했다. 그는 오늘날 세계 반도체 산업을 가능하게 만든 선구자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시작

강대원 박사가 모스펫과 플로팅 게이트를 발명하던 무렵, 우리나라 현실은 첨단 산업과 거리가 멀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색하던 강대원 박사는 한국을 방문하곤 했지만, 국내 반도체 기반은 허약했다. 반면 일본에서 강 박사는 반도체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학자 에사키 레오나 박사와 동급 대접을 받았다. 그만큼 당시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컸다. 하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결국 한국에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다. 그중에는 강대원 박사의 3년 후배인 강기동 박사가 있다.

 

▲1959년 강기동 박사 결혼식. 왼쪽이 강기동 박사 부부, 오른쪽이 강대원 박사 부부. 강대원 박사 부부는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장만해 주고, 피로연 식사도 준비해 주었다. 강대원의 경기고, 서울대 후배인 강기동은 1974년 경기 부천에‘한국반도체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 반도체의 선구자로 불린다. /강기동 박사 자서전

 

1958년 강대원이 박사과정으로 있던 오하이오 주립대에 경기고, 서울대 후배 강기동이 도착했다. 이휘소와 경기고 동기였던 강기동은 강대원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산업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1962년 박사 학위를 받은 강기동은 이미 벨 랩에서 명성을 떨치던 선배 강대원과 진로를 상담했다. 강기동 박사가 결혼할 때 강대원 박사의 아내가 신부 들러리로 나설 정도로 가까운 사이. 반도체 공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강기동은 생산 현장을 배울 수 있는 모토롤라에 입사한다.

 

1974년 강기동 박사는 모험을 감행한다. 강대원은 시기상조라고 우려했지만, 강기동은 직접 한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다. 반도체 생산 기술을 한국에 이식하기 위해 강기동은 최신 3인치 웨이퍼로 반도체 칩을 양산하는 공장을 세운 것이다. 이렇게 자본금을 무려 100만달러 들여 부천에 세운 회사가 ‘한국반도체주식회사’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반도체 사업은 쉽지 않았다. 결국 삼성이 1977년 이 공장을 인수한다. 1983년 미국, 일본에 이어 한국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을 만든 것이 바로 이 부천 공장이다. 한국의 반도체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과 민태기 박사께 감사드립니다.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