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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속의 잡사/ 2023.09.22 중국에 가까웠던 오키나와, 어떻게 일본 땅이 됐나 - 2024.02월 호 ① 일본의 아시아주의

상림은내고향 2024. 5. 11. 19:57

일본 역사 속의 잡사 

2023

09.22 중국에 가까웠던 오키나와, 어떻게 일본 땅이 됐나

‘대륙과 해양 충돌의 현장’ 류구(琉球) 열도

규슈(면적 3만6782㎢)와 타이완(3만5808㎢)은 세계에서 37번째, 39번째로 큰 섬이다. 두 섬 사이를 동북-서남으로 잇는 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수백 개 섬이 류구(琉球) 열도다. 이 섬들의 면적을 모두 합하면 약 4642㎢다.

 

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타이완과 류구 중 대륙에서 가깝고 덩치도 큰 타이완보다 류구가 역사의 무대에 먼저 등장하고 더 화려한 배역을 맡은 사실이 일견 뜻밖이다. 류구의 존재는 7세기 초에 중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 알려졌다. 그런데 타이완의 실체는 중국에서 14세기까지도 명확하지 않았고, ‘타이완(臺灣)’이란 이름은 17세기에야 확정되었다.

 

『수서(隋書)』(636)에 나오는 ‘류구(流求)’란 이름이 타이완을 가리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 류구를 ‘대(大)류구’로, 타이완을 ‘소(小)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덩치 큰 타이완보다 먼저 알려져
백제 멸망 후 중·일 항로로 부각

15세기 해상 요충지에 류구왕국
바다 건너온 중국인이 지배계층

‘메이지유신’ 일본, 1872년 정복
7년 뒤 사라져 오키나와현으로

 

7세기 동아시아 문명권 성립

 ▲1761년 무렵 청나라 연경(베이징)을 방문한 류구왕국 사절단의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류구가 역사 무대에 등장한 때가 타이완보다 빠른 까닭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아직 못 봤다. 추측건대 한반도와 일본 남부를 포함하는 동아시아문명권의 7세기경 성립에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다. 7~9세기 일본 견당사(遣唐使)의 항로 변천에서 알아볼 수 있다.

 

630~665년 기간에는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가는 항로였다. 백제가 멸망 전에 왜(倭)의 중국 왕래를 도와주던 상황을 보여준다. 702~752년에는 류구 항로를 이용하다가 773~838년에는 규슈 연안에서 닝보(寧波) 방면으로 곧장 건너가는 항로로 바뀌었다. 중국 직항이 가능한 선박과 항해술이 확보될 때까지 류구 항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1830년 중국으로 향하는 류구왕국 사절단 선대(船隊). [사진 위키피디아]

 

7~8세기에 류구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이 커지던 상황이 『일본서기(日本書紀)』(720)와 『속일본기(続日本紀)』(797)에 나타나 있다. 류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배경의 중국 때문이었고, 중국의 관심은 배경의 일본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타이완의 존재도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타이완의 배경에는 망망대해뿐이었다.

 

타이완이 해양문명권에 머물러 있던 반면 류구는 대륙문명권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일찍 알려진 것이다. 타이완이 머물러 있던 해양문명권을 중국에서는 ‘남도(南島)’ 문명이라 부른다. 서쪽으로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하와이와 이스터섬까지 태평양-동남아-인도양 일대에 널리 분포된 어족(語族) 이름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를 번역한 말이다. 이 글에서는 “남양(南洋)”으로 쓰겠다.(‘-nesia’는 폴리네시아·인도네시아 등 용례에서 ‘섬’만이 아니라 섬들을 둘러싼 바다까지 포괄하는 뜻이다. ‘양(洋)’은 동양·서양 등 용례에서 ‘바다’가 아니라 광대한 지역과 해역을 포괄하는 의미다.)

 

해양 세력 앞지른 대륙 세력

 

▲에도(江戶) 시대의 류구왕국 사절단(1832). 악대를 포함해 98인으로 구성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타이완 원주민의 언어가 남양어족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확인되어 있다. 타이완은 이 어족 분포 지역의 중앙이 아니라 경계선 위에 있다. 이 어족이 타이완으로부터 확산해 나간 것이라면, 왜 한 쪽 방향으로만 확산해 나갔는지 의문이 따른다.

 

대답은 간단하다. 해양문명인 남양문명이 대륙문명에 밀려난 결과다. 남양어의 지금 분포 지역은 거의 모두 섬들이다. 로저 블렌치가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지도』(2009)에서 추정하는 이 어족의 최대 확장기 분포 지역에는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안지대가 많이 들어 있었다. 애초에는 대륙의 해안지대까지 자리 잡고 있다가 대륙문명의 압력이 강해지는 데 따라 밀려난 것이다.(남중국 선사유적의 유전자 채취 연구를 통해 남양인이 꽤 깊숙한 내륙까지 자리 잡고 있던 상황이 밝혀지고 있다.)

 ▲집개 모양의 두 개 돛살로 만든 게집개돛(crab claw sail)은 소형 범선의 평형을 지켜주는 아웃리거(outrigger)와 함께 범선 디자인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다. 필리핀 엽서(1940)에 그려진 오스트 로네시아 배에는 두 가지 요소가 갖춰져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류구열도는 물론 규슈 남부까지 한때는 남양문명권에 속해있었던 것으로 블렌치는 본다. 류구의 존재가 중국과 일본에 알려지는 7세기경이 갈림길이었다. 대륙세력의 생산력 발전이 해양세력을 앞지르기 시작한 때였다. 대륙문명권의 경제적-문화적 영향이 커지는 데 따라 류구인의 사용 언어가 남양어에서 대륙의 언어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언어 다음으로 남양문명이 널리 공유한 요소는 항해술이다. 단순하고도 효율적인 디자인의 배들이 일찍부터 만들어져 남양문명의 확산과 광대한 해역의 교역활동에 이용되고 중국의 정크선(junk)을 비롯한 많은 선박 형태의 모델이 되었다.

 

10세기경까지는 인도양과 남중국해 교역활동의 주역이 남양인이었다. 중화제국이 남해안까지 확장되고 이슬람제국이 인도양 연안까지 확대되면서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했지만, 두 문명권 사이 중계무역은 16세기 초 유럽인이 나타날 때까지도 남양인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

 

중·일 사이에서 번영한 류구 왕국

 ▲류구국 왕궁 슈리(首里)성에서 나하(那覇)시를 내려다본 풍경. [사진 위키피디아]

 

8세기 말부터 일본 기록에서 사라졌던 남쪽 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997년, 해적 활동을 통해서였다. 7~8세기에 강했던 육지세력의 압력이 9~10세기에 줄어들면서 해상세력의 힘이 해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11세기 들어 육지세력의 반격이 시작된다.

 

류구열도 중 오키나와현에 속한 것은 남쪽의 절반이다. 북쪽 절반은 사쓰난(薩南·사쓰마의 남쪽이란 뜻) 제도라 하여 가고시마현에 속한다. 11~15세기 중에 규슈 영주들의 확장 노력이 미친 것이 사쓰난의 범위였다. 그 남쪽의 오키나와섬에는 그 사이에 삼산(三山)시대를 거쳐 류구국이 세워졌다.

 ▲김경진 기자

 

오키나와섬은 면적이 약 1199㎢, 제주도보다 작은 섬이 북산·중산·남산으로 쪼개져 있었다니 제주도의 삼성혈(三姓穴)이 떠오른다. 그중 중산이 강성해져서 1429년까지 경쟁자를 물리쳤는데, 이미 류구왕으로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1422) ‘상(尙)’이란 성을 하사받고(1428) 있었다.

 

류구국은 일본보다 중국과 가까웠다. 1392년에 명 홍무제가 푸젠성 주민 36가구를 보내주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황제가 보내주지 않아도 수요는 공급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많은 중국인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선진기술을 전파하며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명나라의 해금(海禁) 정책 아래 류구국은 조공국의 특혜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16세기 중엽 일본의 중국 조공이 끊기면서 류구왕국의 황금시대가 펼쳐졌다. 1609년 사쓰마번(藩)의 류구 정벌은 임진왜란 때의 비협조를 빌미로 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류구의 번영을 탐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황금알 사라지자 잡아먹힌 거위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1769년경)에 등장하는 류구인. [사진 위키피디아]

 

구메무라(久米村)는 홍무제가 보내준 36가구로 출발한 동네라 하는데, 학술과 문화의 본산으로서 많은 학자-관료를 배출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일반인은 구메무라 주민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

 

1609년 정벌에 항복한 왕과 신하들이 사쓰마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받았을 때 단 한 명 거부하고 처형당한 대신이 있었다. 구메무라 출신이었고, 이름도 중국식인 정동(鄭迵)으로 전해진다. 류구 조정 내의 친일-친중 대립을 말하기도 하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사상계에서 구메무라의 역할이 워낙 크고 경제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워낙 중요했기 때문이다.

 

류구국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었다는 사실은 정벌 후 일본 측의 조치가 말해준다. 잡아간 왕과 신하들을 2년 후 돌려보내고 구메무라를 오히려 더 키워주었다. 사쓰마에 정복당한 사실을 명나라에서 알아채지 못하게 하도록 애를 썼다. 거위를 잡아먹는 대신 계속 황금알을 낳도록 키우려는 것이었다.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1769년경)에 등장하는 류구인. [사진 위키피디아]

 

류구는 두 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260여 년을 지내게 되었다. 이 이중성을 중국에서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임진왜란 후 중국 조정은 일본을 공식적으로는 외면했지만, 이웃의 작지 않은 나라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7~19세기를 통해 류구는 두 나라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로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19세기 후반의 격변 속에 류구의 이중성은 가치를 잃었다. 1872년 일본이 류구국을 합병, ‘류큐’번(藩)을 선포할 때 청나라는 제 앞 가리기에 바빴다. 1874년에는 일본군이 타이완에 출병했다. 타이완에 표류한 ‘류큐인’ 수십 명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이었다. 1879년 류큐번을 오키나와현으로 개편할 때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상당수 류구인이 중국으로 망명했을 뿐이고 류구국왕은 류큐번주를 거쳐 일본국 귀족에 편입되었다.

 

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

 

12.09 도쿄 속 메이지유신 사적지를 찾아서

대타협으로 일본을 구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

⊙ 막부나 번보다 일본을 먼저 생각, 타협으로 외세 개입 막아
⊙ 막부의 총리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사쿠라다몬
⊙ 가쓰 가이슈의 자취 어린 센조쿠이케
⊙ 만화 〈슬램덩크〉 마니아들의 성지가 된 첫 번째 막부의 설립지 가마쿠라
⊙ 프로레슬러 역도산이 묻힌 이케가미혼몬지
⊙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묻힌 야나카묘지
⊙ 막부 잔당들이 최후의 저항을 했던 우에노공원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사진=배진영

 

오늘날 일본 도쿄(東京) 우에노(上野)공원 일대는 일본의 문화와 예술, 과학의 전당이다. 도쿄국립박물관, 도쿄국립박물관 헤이세이관(平成館), 국립서양미술관, 도쿄도미술관, 도쿄국립과학박물관, 도쿄예술대학…. 여기에 더해 우에노동물원도 있다. 공원은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 잊고 휴식을 취하러 온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144년 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종언(終焉)을 고하는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공원 남쪽 입구에는 평상복 차림으로 개를 끌고 산책하는 뚱뚱한 사내의 동상(銅像)이 있다. 오래전부터 우에노공원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동상이다. 사내의 이름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1828~1877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3걸(傑) 중 하나이자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번 도쿄 역사 기행은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신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에 100만 인구가 사는 에도(江戶)가 전화(戰火)에 휩싸이는 것을 막고 일본이 새 시대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던 두 사나이,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년)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짓시공원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장소인 짓시공원에는 쇼인 추모비, 시비 등이 있다.

 

 도쿄에 도착한 때는 10월 24일 오후. 오후 5시가 일몰(日沒) 시각이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돌아볼 수 있는 곳을 가야 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숙소가 있는 우에노에서 전철로 15분 거리에 있는 고덴마초(小傳馬町)의 짓시(十思)공원이다. 동네 어린이공원 수준의 작은 공원이다.

이곳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년)이 최후를 맞은 곳이다. 요시다 쇼인은 막부의 공안 책임자였던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1859년 10월 27일 이곳에서 참수(斬首)됐다. 당시 이곳에는 감옥이 있었다.

늦은 오후의 공원은 이리저리 뛰노는 아이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젊은 엄마들로 활기가 차 있었다. 공원 한구석에 요시다 쇼인의 추모비와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시(詩)를 적은 비석 등이 있었다.

기자의 일본 역사 기행 기사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던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유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메이지유신의 한 축(軸)이던 조슈(長州·현 야마구치현) 태생의 사무라이던 요시다 쇼인은 소가손주쿠(松下村塾)라는 사설 학교를 만들어 메이지 시대의 인물들을 길러냈다. 유신 3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1877년.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라고도 함],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년), 일본 육군의 대부(代父)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년), 유신 지사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1839~1867년),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1840~1864년)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 세력이 몰려오던 시기에 일본의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신체제를 수립한 후 한반도, 연해주, 시베리아, 만주,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제도(諸島), 호주까지 일본의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가 일본의 장래 판도로 상상했던 영역은 후일의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과 얼추 비슷하다. 조슈 인맥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뿌리인 셈이다.

‘초맹굴기’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아베 신조(安倍晉三·1954~2022년) 전 일본 총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아베 전 총리는 재직 중 요시다 쇼인의 소가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登載)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에서도 10여 년 전부터 일본의 메이지유신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특히 교육과 인재 양성을 통한 국가 개혁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요시다 쇼인에 주목해왔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요시다 쇼인이 과대평가됐다는 얘기도 많다. 후일 메이지 시대 일본 정치를 쥐고 흔들었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조슈 인맥들이 자기들의 정통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요시다 쇼인이라는 우상(偶像)을 하나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요시다 쇼인이 최근에 일본 교과서에서 퇴출(退出)되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역사에서 실제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쇼인이 없었어도,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경우에도 군국주의·제국주의로 나아갔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역사를 만든 것은 쇼인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일본의 역량에 비해 터무니없는 야심을 설정하고 이를 위해 헐떡이며 달려갔던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를 보면 쇼인의 그림자가 짙게 느껴진다. 역사를 만들고, 역사에 색깔을 입히는 것은 결국 구체적인 인간들의 생각, 개성, 성취, 실수 같은 것일 게다.

 

우리 입장에서 요시다 쇼인은 마냥 상찬(賞讚)하기엔 거북한 인물이다. 하지만 격변의 시대에 일본의 운명을 두고 불면(不眠)의 밤을 보냈을 그의 마음엔 많이 공감이 간다. 특히 상층 사무라이 등 가진 자들은 믿을 것이 없고,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는 하층 사무라이, 민중들의 힘으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초맹굴기론(草萌崛起論)이 그렇다. 요시다 쇼인은 죽기 전에 이런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내 몸은 비록 무사시노(武藏野)에 썩더라도, 영원히 남겨지는 야마토 타마시(大和魂).”

1917년 일단의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이 요시다 쇼인의 뜻을 이어받아 “일본의 장래를 담당하는, 국가의 주석(柱石)이 될 진지식자(眞智識者) ‘국사(國士)’를 양성한다”는 목표로 학교를 세웠다. 오늘날의 고쿠시칸(國士館)대학이다. 교기(校旗)에는 욱일기(旭日旗) 문양이 들어가 있고, 교가(校歌)에서는 ‘황국(皇國)’이라는 말과 요시다 쇼인의 이름이 보인다. 재임 중 반일(反日)선동으로 재미를 봤던 어느 한국 대통령의 딸이 이 학교를 나왔다.

사쿠라다몬 사건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한 사쿠라다몬.

 

10월 25일. 고쿄(皇居·황궁) 밖 사쿠라다몬(櫻田門)을 찾아갔다. 도쿄의 중심부인 히비야(日比谷)공원, 관청가인 가스미가세키(霞が關)에서 멀지 않다. 에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垓子) 바깥쪽에 있는 이 사쿠라다몬은 1860년 3월 24일 다이로(大老·막부의 총리 격)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1815~1860년)가 암살당한 곳이다.

앞에서 말한 요시다 쇼인이 극형에 처해진 것은 당시 일본이 안세이대옥(安政大獄)이라는 공안통치의 와중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1853년 페리 제독의 함대가 에도만에 나타나 개항(開港)을 요구하고 막부가 이를 받아들여 미일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일본 정국은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젊은 사무라이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치면서 막부 타도 운동에 나섰다. 한편 도쿠가와 막부는 제1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1824~1858년)의 후계 문제를 놓고 내홍(內訌)을 겪고 있었다.

히코네(彦根)번의 번주(藩主·영주)로 당시 다이로였던 이이 나오스케는 이런 상황에서 1858년부터 존왕양이파와 정적(政敵) 등 100여 명을 숙청하는 공안통치를 자행했다. 이이 나오스케의 입장에서는 서양과의 통상(通商)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미증유(未曾有)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막부 정권의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하면 부러지는 법. 이이 나오스케는 결국 1860년 3월 24일 출근길에 에도성 사쿠라다몬 밖에서 미토(水戶)번 출신 낭인(浪人) 무사들의 습격을 받아 참살(斬殺)당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더 이상 막부를 지탱할 만한 강단 있는 리더는 나오지 않았다. 도쿠가와 막부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七生報國’ 구스노기 마사시게

 

▲고쿄가이엔에 있는 구스노기 마사시게의 동상.

 

 사쿠라다몬과 외(外)사쿠라다몬을 지나면 고쿄 앞 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우치보리(內堀) 거리를 건너면 고쿄가이엔(皇居外苑)이 나온다. 도쿄역 앞 마루노우치 광장이 멀지 않다.

고쿄가이엔 중심에는 말을 탄 무사(武士)의 동상이 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말의 근육과 무사의 비장한 표정이 잘 살아 있다. 무사의 이름은 구스노기 마사시게(楠木正成·1294~1336년). 그는 14세기 초 가마쿠라 막부에 맞서 정권을 탈환하려 했던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1305~1358년)의 군대에 패한 후 자결한 지방 호족(豪族)이다. 그는 죽기 전에 ‘칠생보국(七生報國)’을 외쳤다.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천황을 위해 죽겠다’는 다짐이다. 메이지유신을 전후(前後)한 시기에 존왕양이파 지사들은 구스노기 마사시게를 재발견했고 그를 자신들의 롤모델로 여겼다. ‘메이지유신의 이데올로그’였던 요시다 쇼인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사나이라 함은 자기의 일생을 한 편의 시(詩)로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스노기 마사시게는 한 줄의 시도 쓰지 않았으나, 그의 일생은 그대로 비길 데 없는 크나큰 시가 아니겠는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도쿠가와 쇼군의 거성(居城)이던 에도성을 접수해 천황이 기거하는 황궁으로 바꾼 후, 그 바깥에 구스노기 마사시게의 동상을 세운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구스노기 마사시게는 유신 지사들뿐 아니라, 1930~1940년대 쇼와(昭和) 군국주의자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도 ‘칠생보국’을 외치며 죽음의 길로 떠났다. 인간을 도구로 밖에 여기지 않는 전체주의(全體主義)의 극치였다.


메이지유신이 끝난 곳, 히비야공원

고쿄가이엔 건너편 히비야공원 한가운데 있는 마쓰모토로(松本樓)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120년 된 오래된 양식점이다. 야외에서 식사를 하려면 줄을 서야 했다. 날씨가 조금 쌀쌀해서 실내에서 식사를 했다. 사실 해외여행을 할 때에는 식사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가 “식사도 여행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인데, 하루 한 끼라도 좀 잘 먹고 다니지”라고 조언을 해 이번에는 식사에 신경을 좀 썼다.

히비야공원을 찾은 것은 식사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히비야공원은 메이지유신이 종언을 고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1905년 9월 5~7일 이 공원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일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문을 연 지 불과 2년 후였다. 폭동이 일어난 이유는 러일전쟁을 마무리 짓는 포츠머스강화조약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전쟁 중 일본 국민들은 일본군이 만주와 쓰시마해협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고 있다는 정부와 군부(軍部)의 선전에 취해 지냈다. 국민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연해주를 할양받고,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받게 될 줄 알았다. 언론은 국민들의 그런 기대감을 부추겼다. 하지만 사실 일본은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군사적·경제적으로 더 이상 전쟁을 이끌어갈 여력(餘力)이 없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일본 정부와 군부는 결국 사할린 남부를 할양받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 기간 중 온갖 희생을 강요받았던 국민들은 이를 납득하지 못했다. 폭동이 일어났다. 내무대신 관저와 어용신문 국민신문사가 불에 탔다. 결국 계엄령이 선포되고 나서야 사태는 수습됐다. 17명이 죽고 311명이 체포, 기소되었다.

어떻게 보면 히비야 폭동은 단순히 러일전쟁 사후 처리에 대한 불만의 표현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보다는 메이지유신 이후 40년 가까이 열강을 따라잡겠다면서 숨 쉴 틈 없이 달려온 긴장이 러일전쟁 승리로 확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0년을 허위허위 달려온 덕에, 한때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나라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세계 7대 강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국민들은 허탈했을 것이다. 정치는 유신의 주역이었던 조슈-사쓰마 출신들이 전횡하고 있고, 잘살게 되었다지만 그 과실(果實)을 국민들이 느낄 수는 없었고,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정체성(正體性)은 흔들리고…. 이런 모순이 히비야 폭동으로 폭발한 것이다. 마치 1961년 이후 근대화를 위해 질주했던 한국인들이 1987년 이후 민주화 요구 시위로, 노사분규로 폭발한 것처럼 말이다. 메이지 천황이 죽은 것은 7년 후인 1912년이었지만, 메이지유신은 러일전쟁의 승리와 히비야 폭동으로 사실상 끝났다. 이후 일본은 메이지유신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1910~1920년대에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를 만끽하다가, 다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쇼와 군국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에도 開城 담판

 ▲옛 에도 사쓰마번저 자리에 있는 에도개성담판 기념비.

 

 전철 편으로 JR다마치역으로 이동했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전철역 역사(驛舍) 인근 NEC 본사 건물에 세워져 있는 비석을 보기 위해서였다. 원형의 비석에는 ‘사쓰마번장옥부적(薩摩藩蔵屋敷跡) 에도개성 사이고 난슈·가쓰 가이슈회견지지(江戶開城 西鄉南州·勝海舟會見之地)’라고 새겨져 있다. 공들여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이고 난슈는 이 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말한다[난슈(南州)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아호(雅號)].

1868년 3월 13~14일 이곳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육군총재(육군장관 격) 가쓰 가이슈와 메이지 신정부의 동정군(東政軍) 참모 사이고 다카모리가 만났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실상의 동정군 사령관이었다. 그해 1월 교토 인근 도바·후시미(鳥羽·伏見) 전투에서 패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1837~1913년)는 바로 오사카성을 포기하고 군함을 타고 에도로 탈출했다. 조슈와 사쓰마가 중심이 된 신정부군은 막부의 마지막 명줄을 끊기 위해 에도성으로 진격했다. 요시노부는 신정부군과의 교섭을 가쓰 가이슈에게 맡기고 자신은 우에노(上野)의 간에이지(寛永寺) 다이자이인(大慈院)에 칩거했다.


서로에게 반한 가쓰와 사이고

 ▲사이고 다카모리(왼쪽)와 가쓰 가이슈의 개성 담판 모습.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있는 사이고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쓰마번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막부의 중신인 가쓰 가이슈는 1864년 10월경부터 교분이 있었다.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가쓰 가이슈는 막부와 웅번(雄藩·사쓰마, 조슈, 도사, 센다이 등 세력이 강한 번들)이 연합하는 공화정부를 수립하자고 역설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막부의 중신이면서도 막부나 번의 이익을 넘어 전체 일본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는 가쓰 가이슈에게 경탄했다. 사이고는 이렇게 술회했다.

“실로 놀라운 인물이다. 두들겨 패줄 생각으로 만났지만, 완전히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만큼 지략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정말 반해버렸다.”

가쓰도 사이고에게 반했다. 그는 “식견과 논리 면에서는 내가 오히려 더 나았지만, 이른바 천하대사를 짊어지는 것은 결국 사이고가 아닐까?”라고 여겼다.

이렇게 서로 상대에 대한 존숭의 마음이 있었기에, 승자와 패자의 입장에서 만났지만 대화가 잘 풀렸다. 가쓰는 이렇게 술회했다.

“사이고는 나에 대해 막부 중신의 예우를 잊지 않았다. 담판할 때에 시종 자세를 바로 하고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조금도 승리한 위광으로 패장(敗將)을 경멸하는 듯한 모습은 없었다.”(박훈 서울대 교수의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담판 기념비 바닥에는 이 두 사람의 회견 장면을 담은 청동부조(靑銅浮彫)가 있다.

가쓰 가이슈의 회고에 의하면, 회담이 끝난 후 사이고는 “어떠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의 일은 가쓰 선생께서 어떻게든 해주시겠지요”라고 하고 그대로 에도를 떠나버렸다고 한다. 정말 쾌남아(快男兒)였다.

가쓰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도쿠가와 가문의 존속이었다. 두 사람은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를 4분의 1로 삭감하고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가문의 수장[首長·당주(當主)라고 함] 자리를 내려놓고 칩거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대신 에도성을 평화롭게 신정부군에게 내주기로 한 것은 물론이다.

이로써 100만 명이 사는 에도성이 전화(戰火)에 휩싸이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메이지 신정부와 막부 간에 내전이 벌어지고, 영국·프랑스 등 외세가 개입하는 상황도 피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시기 일본의 지도적 인물들은 막부 측이건 유신정부 측이건 간에 외세가 개입할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는 데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후 1년여에 걸쳐 일본 동북 지역과 홋카이도에서는 보신전쟁(戊辰戰爭)이라고 하는 내전이 이어졌지만, 만약 가쓰와 사이고의 담판이 아니었다면 비극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막부의 탄생지 가마쿠라

 ▲가마쿠라 막부의 창설자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묘.

 

 10월 25일. 메이지유신의 시대로부터 700년을 건너뛰어 가마쿠라로 향했다. 고토쿠인(高德院)에 있는 대불(大佛)로 유명한 이 도시는 일본 체제의 막부 체제가 성립된 곳이기도 하다.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1147~1199년)는 라이벌인 다이라(平) 가문을 타도하고 난 후인 1192년에 조정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줄여서 ‘쇼군’이라고 함) 칭호를 받고 이곳에 막부를 개창했다. 천황과 조정은 그대로 교토(京都)에 존재했지만, 정치의 실권은 무사 집단의 수장인 쇼군에게 넘어온 것이다. 대통령과 총리, 각부 장관은 그대로 있었지만, 실권은 전두환(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과 군 장성들이 이끄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로 넘어갔던 1980년 여름의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1980년의 이중권력 체제는 3개월 남짓이었지만, 일본의 이중권력 체제는 이후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도쿠가와 막부를 거치면서 676년간 이어졌다.

가마쿠라까지는 도쿄역 요코스카(橫須)선 전철을 타고 1시간10분 남짓 거리. 서울 근교를 운행하는 전철을 생각하면 된다. 출근 시간대에 타더라도 도쿄 시내를 떠나기 전에 빈자리가 나기 때문에 굳이 지정석 표를 살 필요는 없다.

가마쿠라를 찾는 이들의 목적은 대개 고토쿠인의 ‘가마쿠라 대불’을 보려는 것이지만, 나는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묘를 먼저 찾았다. 역 앞 고마치도리(小町通) 거리 상점가는 아침부터 활기가 차 있었다. 역시 세계 각국에서 관광객이 몰려오고 돈이 도는 곳은 다르구나 싶었다. 고마치도리를 지나자 커다란 신사(神社)가 나타났다. 쓰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신사.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모시는 신사다. 아까 전철에서 봤던 젊은 부부를 여기서 다시 봤다. 다시 보니 부부뿐 아니라 아기도 나름 성장(盛裝)을 하고 있고, 주변을 여러 사람이 둘러싸고 있었다. 고향의 친척들과 함께 아기를 데리고 신사 참배를 온 듯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성장을 한 젊은 부부들이 역시 성장을 한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막부 탄생 공신의 후손들이 막부를 타도하다

신사를 지나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묘 입구에 이르러 보니 안내판과 함께 ‘오에 히로모토(大江廣元)의 묘’ ‘시마즈 다다히사(島津忠久)의 묘’라는 간판이 나란히 있다. ‘아니, 시마즈라면 규슈 사쓰마의 영주 가문인데, 그의 무덤이 왜 여기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시마즈 다다히사(1179~1227년)는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할 때 그를 도운 측근 중 하나라고 한다. 그의 후손들은 이후 메이지유신 때까지 700여 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규슈 일대를 호령했다. 오에 히로모토(1148~1225년)가 어떤 인물인지도 궁금해졌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그 역시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창업공신 중 하나로 조슈번을 이끈 모리(毛利) 가문의 선조(先祖)라고 했다. 모리 가문 역시 서부 일본에 세력을 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자웅을 겨루었던 유서 깊은 무사 가문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유신의 두 주역인 조슈와 사쓰마의 선조가 실은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한 공신들이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묘는 작은 석탑이었다. 일세를 풍미하고, 일본 역사의 큰 흐름을 만든 이의 무덤치고는 너무나 초라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무덤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어딘가 싶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최충헌(崔忠獻·1149~1219년)의 묘는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지역의 역사 인물을 논하는 초등학생의 글

오에 히로모토, 시마즈 다다히사의 묘를 찾아갔더니, ‘법화당 터’라고 하는 빈 공간이 나왔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대박! 호조 요시토키(北條義時·1163~1224년)의 유적이었다. 호조 요시토키는 2022년에 방영한 NHK의 61번째 대하 사극 〈가마쿠라도노의 13인〉의 주인공이다. 호조 요시토키는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핵심 공신 13인 중 하나였지만,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죽은 후 싯켄(執權)이 되어 쇼군의 권력을 무력화(無力化)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사실은 호조 가문의 막부였다. 허수아비 천황-실권자인 쇼군이라는 이중권력 체제가 이때에는 허수아비 천황-허수아비 쇼군-실권자 싯켄이라는 삼중권력 체제로 변질됐던 셈이다.

가마쿠라 막부가 있던 오쿠라(大藏) 막부 터는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묘에서 200m쯤 떨어진 세이센(淸泉)소학교 입구에 있다. 막부 터가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석 옆에는 소식지 상자가 있다. 열어보니 소학교 학생들이 가마쿠라의 역사에 대해 쓴 글들을 복사해 넣어놓고 누구나 가져갈 수 있게 해놓았다. ‘요시쓰네(義經)의 실패점’이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동생인 미나모토 요시쓰네(源義經·1159~1189년)는 출중한 무공으로 형이 패권(覇權)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결국 형과의 싸움에서 패해 죽은 비운의 무장으로 일본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높다.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어린 초등학생이 이런 식으로 지역의 역사 인물에 대해 논하고 그걸 널리 공유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슬램덩크〉 마니아들의 성지

 ▲가마쿠라 고토쿠인에 있는 청동대불은 가마쿠라뿐 아니라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가마쿠라의 지역 전철인 에노덴(에노시마전철선)을 타고 하세(長谷)역에서 내려 고토쿠인의 대불을 관람했다. 13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높이 11m의 청동(靑銅)대불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고, 이 불상을 보기 위해 세계인들이 가마쿠라를 찾아온다. 하지만 내게는 이 대불보다는 훨씬 작고 초라한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묘나 호조 요시토키의 법화당 터가 더 감흥이 있었다.

 

 ▲에노덴 가마쿠라고교역 인근 건널목은 만화 〈슬램덩크〉 마니아들의 성지가 되었다.

 

 명승지 에노시마로 가는 길에 에노덴 가마쿠라고등학교역에서 내렸다. 가나가와현립 가마쿠라고등학교는 1990년대를 풍미했던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일본명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모교(?)다. 만화 속에서는 ‘북산고등학교’로 나온다. 강백호가 역 근처 건널목에서 에노덴 전철이 반쯤 지나갔을 때 건너편에 서 있는 세 명의 여학생들을 지켜보는 장면이 유명하다. 때문에 이 건널목은 〈슬램덩크〉 마니아들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우리가 건널목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으로 떠들면서, 전철이 지나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차단기가 내려가고 전철이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자 모두들 정신없이 스마트폰을 눌러댔다. 만화에서와 같은 호젓한 모습이 아니라 북새통이었다. 이곳에 사진 찍으러 온 사람 중에서는 우리 부부가 최고령인 듯 싶었다.

내친김에 5분 거리에 있는 현립가마쿠라고등학교 외관을 본 후 에노시마를 돌아보고 도쿄로 돌아왔다.


센조쿠이케

 ▲센조쿠이케의 풍경에 반한 가쓰 가이슈는 이곳에 집을 지었고, 나중에는 이곳에 묻혔다.

 

 10월 26일. 여행 나흘째. 내심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들을 찾았다. 센조쿠이케(洗足池)와 이케가미혼몬지(池上本門寺)였다. 둘 다 앞에서 말한 가쓰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개성 담판과 관련된 곳이다.

도쿄 중심부에서 동서쪽에 있는 센조쿠이케는 지하철 이케가미선 센조쿠이케역에서 내리면 바로 보인다. 가쓰 가이슈는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개성 담판을 위해 이케가미혼몬지(앞에서 말한 사쓰마번저 외에 이케가미혼몬지에서도 회담을 가짐)로 가는 길에 이 연못을 발견하고 그 풍광에 반해 나중에 이곳에 센조쿠켄(洗足軒)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자기 부부의 묫자리도 이곳에 봐두었다.

공원 입구 휴게소 옥상에 올라가서 보니, 연못도 아름답지만 전날 밤 비가 와서인지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일품이었다. 인근 오타(大田)구립도서관 앞 오모리다이로쿠(大森第六)중학교 담장에는 센조쿠이케가 있던 곳이라는 표지가 있었다. 거기서 150m쯤 떨어진 곳에 오타구립 가쓰가이슈기념관이 있었다. 가쓰 가이슈 사후(死後)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그의 서책과 자료들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었던 세이메이(淸明)문고를 바탕으로 2019년 개관했다.

그리 크지 않은 기념관에는 금년에 탄생 200주년을 맞은 가쓰 가이슈의 일생을 보여주는 유품 등이 알차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쓰 가이슈는 쇼군 직속의 가신단(家臣團)인 하타모토(旗本) 출신이지만, 전래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꼴통’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서양에 대한 학문인 난학(蘭學)과 서양 병학(兵學)을 공부했다. 페리 함대의 출현 이후 가쓰 가이슈는 안보 대책에 골몰하던 막부의 눈에 띄어 승진 가도를 밟기 시작했다.

가쓰 가이슈는 1854년 나가사키 해군전습소(해군사관학교 격) 전습생 감독이 되었고, 1860년에는 간린마루(咸臨丸)의 부함장으로 방미(訪美)사절단을 태우고 태평양을 건넜다. 가쓰가이슈기념관의 영상물에서는 ‘이때 가쓰 가이슈가 미국의 도시, 빌딩, 교통 등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엘리트들이 이런 경험을 한 것은 거의 100년 후인 1950년대였다. 미국으로 군사 유학을 갔던 박정희(朴正熙)·김종필(金鍾泌) 같은 청년 장교들이나 이한빈(李漢彬) 같은 젊은 유학생들은 미국을 경험하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를 절감했다. 그들은 충격과 비애(悲哀)를 ‘조국 근대화’의 의지로 승화시켰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었다.

료마를 설복시킨 가쓰

미국에서 돌아온 가쓰 가이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양 각국과의 통상(通商)과 막부 체제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여차하면 가쓰 가이슈를 죽여버리겠다고 그의 집으로 뛰어들었던 도사(土佐) 출신의 청년 무사가 있었다. 바로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1836~1867년)였다. 하지만 그는 일본이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설파하면서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가쓰 가이슈에게 감복되고 말았다. 료마는 “지금 공의 설(說)을 듣고 나니 제 고루함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지금부터 공의 문하생이 되겠습니다”고 했다. 다른 존왕양이파 지사들이 가쓰 가이슈를 노린다는 말을 듣고는 그의 경호를 자처하고 나서기도 했다.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가쓰 가이슈를 ‘일본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하면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으스대기도 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죽는 날까지 조슈-사쓰마의 동맹, 막부 체제의 점진적 변혁, 해군 및 해상대(海商隊)의 건설 등을 위해 진력했는데, 그 대부분은 가쓰 가이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가쓰 가이슈는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후 초대 해군경(海軍卿·해군장관) 등을 지내고 백작(伯爵) 작위를 받았다. 그는 의리남(義理男)이었다. 자기가 모셨던 도쿠가와 집안에서 양자를 들였고,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전쟁(西南戰爭·1877년)에서 패해 역적의 수괴(首魁)로 죽은 후에는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진력했다. 센조쿠이케공원 내에 있는 가쓰 가이슈 부부의 무덤 근처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유혼비도 그가 세운 것이다.

역도산의 무덤

 ▲이케가미혼몬지의 묘지에는 전설적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묘도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위령비 등을 살펴보고 공원에서 늦가을의 정취를 잠시 즐긴 후 이케가미혼몬지로 향했다. 이케가미혼몬지는 일련종(日蓮宗)을 일으킨 니치렌(日蓮·1222~1282년)이 입적(入寂)한 곳으로, 일본 불교의 성지이다. 일련종은 일본의 현실에 토착화된 불교 종파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로 널리 알려진 일본의 창가학회(創價學會·SGI)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도큐(東急)선 이케가미역에서 내려 혼몬지로 향했다. 안내판이 잘 되어 있어서 15분 거리의 절까지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본전을 앞에 두고 오른쪽 묘지 구역으로 향했다. 스마트폰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가 회견을 가진 장소를 검색하다가 195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1925~1963년. 일본어로는 ‘리키도잔’)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의 거한(巨漢)들을 거침없이 박살 내는 역도산을 보면서 패전 후 서양인들에 대해 품고 있던 콤플렉스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1960~1970년대 한국의 국민적 영웅이었던 김일도 그의 제자다. 흉상(胸像)이 있는 역도산의 무덤 앞에서는 일본 할머니 셋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역도산은 어린 시절 추억의 영웅이었나 보다.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역도산 이야기를 해주시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역도산이 김일성을 존경하고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던 친북(親北)인사라는 건 몰랐다. 알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스마트폰이 안내해주는 대로 가쓰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회견 장소를 찾아갔지만 아쉽게도 출입금지 구역이어서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라스트 쇼군’

 ▲‘라스트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일가의 묘역은 역대 쇼군의 묘역과는 떨어진 곳에 있다.

 

 10월 27일. 마지막 날. 우에노역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닛포리(日暮里)역 근처에 있는 야나카(谷中)묘지를 찾았다. 일본의 유명 정치인, 작가, 가수, 화가, 과학자, 기업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내가 찾고자 하는 곳은 두 사람의 무덤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1840~1931년). 다행히 두 무덤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라스트 쇼군’이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傍系)인 미토(水戶)번 마쓰다이라가(松平家)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영명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림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중흥시킬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가 1866년 쇼군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대세가 기운 후였다. 미일수호조약 이후 서양 세력의 침투가 본격화되고, 일본 국내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존왕양이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계를 느낀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런 흐름을 반전시키기 위해 1867년 10월 14일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 이래 700년간 무가(武家)가 행사해온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요시노부에게는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도쿠가와 가문은 여전히 전국 최대 규모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260년간의 통치 경험을 갖고 있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나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을 섬겨온 다이묘(영주)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요시노부는 자신이 일단 통치권을 반납하더라도 다이묘평의회의 의장이 되어 국정을 주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근대 초 네덜란드공화국 같은 일종의 귀족공화정을 구상했던 것이다. 이는 가쓰 가이슈,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도사번 등 유력 번에서 지지하는 방안이기도 했다.


‘적의 사상에 물든 지도자’

 ▲도쿠가와 요시노부

 

 하지만 이미 막부 타도를 획책하고 있던 사쓰마와 조슈는 대정봉환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교토의 치안을 교란시키는 한편,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영지를 모두 내놓으라고 압력을 가했다. 참다못한 요시노부는 1869년 1월 천황에게 직접 호소하겠다며 군대를 교토로 진격시켰지만,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천황을 상징하는 금기(錦旗)를 앞세운 조슈-사쓰마군에게 패했다. 그야말로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이 되는 세상이었다. 이후 막부 측은 오사카성에 집결해 결전을 다짐했으나 요시노부는 싸워보지도 않고 군함을 타고 야반도주했다. 그리고 에도로 돌아온 후에도 싸울 생각은 않고 가쓰 가이슈를 앞세워 결국 에도성을 내주고 말았다.

요시노부가 이랬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미토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미토는 천황을 받드는 국수주의 학문인 미토학의 본산이었다. 요시노부도 어려서부터 천황 존숭의 사상을 교육받으면서 자라났다. 때문에 요시노부는 결정적 순간에 막부를 지키기 위해 천황에게 대적(對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혈(流血) 없이 에도성을 신정부에 넘겨준 결과 요시노부는 목숨을 부지했고, 후일에는 공작(公爵)의 작위까지 받았다. 일본은 더 큰 비극을 피해 메이지유신 후의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자신이나 일본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었지만, ‘막부 체제의 수호’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는 커다란 실패였다. 그는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적의 사상에 물든 지도자였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 그런 국가지도부를 가지고 있었다.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지는 일이다.

야나카묘지 인근은 도쿠가와 가문의 사찰(寺刹)인 간에이지(寬永寺)와 이웃하고 있다. 간에이지 경내 곳곳에는 도쿠가와 막부의 역대 쇼군들의 묘역이나 사당들이 있는데, 요시노부의 무덤은 거기서는 조금 떨어져 있다. 요시노부가 원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대(代)에 이르러 막부의 문을 닫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일본(식)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내년부터 사용되는 1만 엔권 지폐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이 들어간다.

 

 메이지 시대의 기업인인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내년부터 도입되는 1만 엔권 새 일본 지폐 속 초상(肖像) 인물이다. 지난 40년간 1만 엔권 지폐 속 얼굴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년)는 퇴장한다. 시부사와건 후쿠자와건, 그리고 5000엔, 1000엔권 속의 인물들이건 모두 메이지 시대 이후의 근대인(近代人)들이다. 우리나라 지폐 속 인물들이 죄다 조선 시대 인물들(그것도 중기 이전)인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원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가신(家臣)이었다. 그의 무덤이 도쿠가와가의 무덤 근처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메이지유신 직전 유럽을 순방하면서 세계의 흐름을 익힌 그는 유신 후 잠시 대장성(大藏省) 관료로 근무했다. 하지만 관료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사표를 내고 나온 후 실업계에 투신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기업을 일구기도 했지만, 일본을 위해 새로운 사업을 전개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내주었다. 그런 회사들이 500여 개가 넘는데 오지(王子)제지, 도쿄전력, 도쿄가스, 제국호텔, 도쿄제철 등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그는 도쿄증권거래소 설립에도 참여했다. 워낙 많은 사업에 관여하다 보니 경부선 철도 건설 등 조선 식민지 경영과 관련된 사업들에도 관여했다. 때문에 국내 일각에서는 그를 ‘경제 침략의 선봉’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부사와는 그렇게 간단한 인물은 아니다. 《논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부(富)를 이루는 근원은 인의(仁義) 도덕이며, 올바른 도리에 따라 쌓은 부가 아니면 그 부는 영속(永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업가로서의 업적과 이러한 경영철학 때문에 그는 ‘일본(식)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간에이지와 창의대

 ▲간에이지의 근본중당(根本中堂). 사찰 건립 400주년을 알리는 깃발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이 들어 있다.

 

 야나카묘지에서 우에노공원으로 넘어오는 길에 간에이지가 있다. 절 곳곳에는 사찰 창건 400주년을 알리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깃발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접시꽃 문장(紋章)이 그려져 있었다. 이는 이 절이 홈페이지에서 소개하고 있듯이 1625년 도쿠가와 막부의 안태(安泰)와 평안(平安)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절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간에이지는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을 고하는 전쟁의 중심지가 됐다. 막부 잔당들은 창의대(彰義隊)를 결성, 최후의 일전을 도모했는데 그 근거지가 바로 간에이지였다. 창의대 대장은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사촌인 시부사와 세이이치로(澁澤成一郞)였다. 이들은 7월 4일 봉기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1824~1869년) 등이 이끄는 신정부군에게 참패하고 거의 전멸당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도쿄를 탈출, 일본 동북부와 홋카이도 하코다테 등지를 전전하면서 이듬해 5월까지 싸웠다.

도쿠가와 막부의 사찰로 반란의 중심이 되었던 간에이지는 주요 건물들이 불탔을 뿐 아니라, 사찰이 소유하고 있던 땅의 대부분을 내놓아야 했다. 오늘날 우에노공원은 그 땅 위에 조성된 것이다.

간에이지 구내에 있는 우에노전쟁기비(上野戰爭記碑)와 우에노공원 입구에 있는 창의대전사자비가 막부의 마지막을 증언하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가망 없는 싸움으로 내몰았을까? 자신들을 벼랑 끝으로 몬 조슈-사쓰마 세력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까? 에도 무사로서의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싸워보지도 않고 성을 내준 높으신 분들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라스트 사무라이’

창의대전사자비 인근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이 서 있다. 1876년 세이난전쟁을 일으켰다가 죽은 사이고는 1889년 헌법 공포를 기념한 대사(大赦) 때에 명예를 회복했다. 이 동상이 세워진 것은 1898년이었다. 동상이 제막(除幕)되기 전에 군복 차림의 당당한 무사의 모습을 상상했던 사람들은 게다에 강아지를 끌고 산책하는 모습의 동상을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부인은 “내 남편과 안 닮았어!”라고 투덜댔다던가? 하지만 이후 이 동상은 ‘우에노의 사이고씨’라고 불리면서 120년 넘게 도쿄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유신의 1등 공신이면서도 유신 이후 소외된 사무라이들에게 추대되어 억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결했다. 어쩌면 그는 구체제(舊體制)의 모순을 모두 끌어안고 산화(散花)한 것인지도 모른다.

놀라운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은 지 13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고, 그로부터 다시 9년 만에 수도 도쿄에 그의 동상이 섰다는 사실이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金玉均·1851~1894년)을 상하이(上海)까지 쫓아가 기어코 죽이고 그 시신을 능지처참한 고종(高宗)의 협량(狹量)과 비교된다. 메이지 천황도, 당시 조슈-사쓰마 출신 집권 세력도, 국민들도 사이고를 진정한 ‘마지막 사무라이’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2003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속 사무라이 가쓰모토(와타나베 겐 연기)는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월간조선 12월 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2024.02월 호

청년 논객 임명묵의 ‘역사로 세계 읽기’ ① 일본의 아시아주의

●‘인도-태평양 구상’으로 이어진 ‘서구에 대한 첫 반란’

⊙ 메이지유신 후 일본에서 등장한 동양의 고유 문화와 서구 근대성을 창조적으로 융합해야 한다는 사상
⊙ 도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오카쿠라 덴신, 오카와 슈메이 등, 일본 중심의 아시아 連帶論 주장
⊙ 일본, 서구 열강으로부터 ‘2류 강국’ 취급받고 좌절한 후 ‘아시아주의’를 ‘대동아공영권’으로 변질시켜 침략 전쟁 개시
⊙ 인도·인도네시아·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 영향
⊙ 일본, 아시아주의의 유산 활용해 ‘인도-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전략적 구상 창안
⊙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중국·러시아·인도·튀르키예 등이 서구 중심의 ‘규칙 기반 국제 질서’ 거부하고 있는 상황과 흡사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일본의 대표적 아시아주의자 오카쿠라 덴신.

 

2024년이 시작되면서 21세기도 벌써 사반세기의 전환점을 목전에 앞두게 되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여명을 지배했던 새천년의 환희는, 전쟁이 귀환하고 세계 전역에서 정치적 분열이 극심해지며 눈 녹듯이 사라졌다.

돌아온 혼란의 근원에는 지난 200년 동안 세계의 질서를 써온 서구(西歐) 문명, 그리고 지난 100년 동안 세계의 규칙을 주도해온 미국의 상대적 약화가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유라시아 제국을 부흥시키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대만해협에는 중화제국의 귀환을 완수하겠다는 중국의 열망과 함께 전운(戰雲)이 드리우고 있다. 튀르키예(터키)의 에르도안은 건국 100주년을 맞아 대통령에 재선되며,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여정을 이어갔다. 이 밖에 인도,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서구 바깥의 지역 강국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 정체성(正體性)을 내세우며 ‘규칙 기반 국제 질서’를 온전히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모양새다. 21세기의 다음 사반세기는 점점 영향력을 키워가는 비(非)서구의 지역 강국들과 서구 세력에 속한 전통적 강대국들의 긴장, 갈등, 협력이 교차하는 복잡한 이합집산(離合集散)과 수싸움의 시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아시아주의’

그러나 비서구 지역 강국이 서구 문명의 보편성에 반기(反旗)를 들며 제기하는 도전은 오늘날에 갑작스럽게, 처음 등장한 일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도, 흡사 지금의 러시아나 인도에서 쓰일 법한 구호를 내걸던 나라가 있었다. 바로 지금은 서구 진영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맹국으로 신뢰하는 일본이다. 한국인이라면 역사 교육을 통해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은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탈을 비판하는 명목으로 전쟁을 개시했고, 일본군의 군홧발이 닿는 영역을 모든 아시아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고 칭하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런 일본 제국의 ‘침략 야욕’은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 루스벨트의 미국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와 군국주의(軍國主義)라는 과거의 오욕을 청산하고 아시아 자유민주 진영의 기둥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서사(敍事)이다.

 

하지만 서구 문명의 충실한 ‘학생’이었던 일본이 잠시 군국주의로 ‘일탈(逸脫)’하고, 소위 ‘아시아 해방’이라는 미명을 내걸며 전쟁에 나섰다가 패배하고, 전후에는 미국이 재편한 자유 진영의 일원으로 돌아왔다는 서사는 실제 일본과 아시아가 겪었던 기나긴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축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메이지(明治)유신 시기에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미국의 지식과 제도, 문화까지 철저히 학습하고 연구했던,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너무나 잘 알았던 일본의 엘리트들은 어째서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전쟁에 나섰을까?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나 인도의 찬드라 보스같이,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은 일본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일본의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협력했던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 짚어 보아야만 하는 사상이 있다. 바로 20세기 전반을 뒤흔들었던 일본의 아시아주의이다. 아시아주의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흥미로운 과거의 사실로 그치지 않는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서구에 대한 반란’이 번지고 있는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메이지유신

서구에 맞서는 아시아 민족의 지도국으로서 일본이라는 자기 상상은 사실은 서구화 개혁으로 이해되는 메이지유신 때부터 내재된 것이었다. 에도(江戶) 시대부터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세계 정세를 이해하고 있었던 일본은 서구 열강의 막강한 힘이 청(淸)나라를 무릎 꿇린 것(아편전쟁)을 인지하고 있었다.

마침내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이끌고 일본에 개항을 강요하자, 서구의 ‘오랑캐’로부터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막부에 대해 누적된 반발을 반외세 정서와 결합시킨 막부 말엽의 지사(志士)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높이고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메이지유신 신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유신 신정부는 서구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동양’보다 발전한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메이지 시기의 서구화 개혁은 일본이 곧 서양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메이지 개혁가들은 ‘문명(文明)’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서구가 보편적 문명의 척도로 보았을 때 일본보다 발전해 있음을 인정하고, 서구화는 일본의 전통 문명의 가치와도 합치되는 것임을 각종 동양 고전의 문구를 인용하며 정당화했다. 달리 말해, 메이지 시기 서구화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가장 잘 지켜낼 수 있는 효과적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아시아연대론, 脫亞論

 ▲탈아론’을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일본의 엘리트들의 시선은 일본 바깥에 있는 중국과 조선으로 향했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유럽 제국주의의 침탈이 이어지고 있었고, 조선에서는 러시아의 세력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었다.

당시 일군(一群)의 일본 지식인은 서구의 동아시아 점거를 막기 위해서 중국과 조선에서도 일본과 같은 전면적인 근대화 개혁이 필요하고, 일본이 그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서구에 대한 위협감의 발로임과 동시에,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한 공동체가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는 1893년 이와 같은 생각을 담은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발표했고, 이는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와 같은 지식인의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과 중국에서 근대화 개혁이 보수파들에 의하여 좌절되면서 아시아 연대(連帶)를 향한 일본 지식인들의 주장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를 보며 일본의 지식인들은 조선에서 일본과 같은 개혁은 당분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쳤다. 이 무렵에 나온 그 유명한 논설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이다. 탈아론이 단순히 일본이 ‘후진적(後進的) 아시아’를 뛰쳐나가서 ‘선진적(先進的) 유럽’으로 향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당대의 절박한 시대 인식의 발현이었음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웃 국가처럼 전통의 구습(舊習)에 얽매여 잠을 자고 있으면 유럽 열강에 침탈당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탈아론의 무의식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현양사와 흑룡회

 

 이와 같은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탈아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민간의 다른 인사들은 일본이 더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아시아 이웃을 이끌어야 한다는 ‘흥아론(興亞論)’을 내세웠다. 일본과 조선, 중국이 수평적인 연대를 이루며 아시아 부흥에 함께해야 한다는 메이지 초기의 인식은 ‘더 개명(開明)된’ 일본이 ‘아직 잠을 자고 있는’ 조선과 중국을 일깨운다는 더 수직적인 아시아관으로 변모했다.

1881년에는 도야마 미쓰루(頭山滿)가 주도하는 현양사(玄洋社)가 세워졌다. 1901년에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현양사의 해외 공작 분파인 흑룡회(黑龍會)를 설립하면서, 흥아론자들은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구한말 한일합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국에서도 그 악명(惡名)을 떨친다. 현양사와 흑룡회는 각종 아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일본 유학과 망명을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범(汎)아시아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하였다.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며 열강의 일원으로 나아가고 있던 일본 정부 입장에서 이런 민간의 아시아주의자들은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유신의 열기가 세이난(西南) 전쟁(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를 수장으로 하는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메이지 신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편집자 주)을 끝으로 안정되고, 일본은 구미(歐美) 제국주의 열강과 국가 대 국가로 외교를 펼쳐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식민지 해방 운동’을 전개하는 현양사나 흑룡회의 존재는 외교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일본은 남하(南下)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과 동맹을 맺고,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러일 전쟁을 벌였는데, 이는 영국의 아시아 지배를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시아는 하나다”

그러나 러일 전쟁의 승리는 일본으로서도 상상하지 못한 효과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 퍼트렸다. ‘황인종(黃人種)의 일본이 백인종(白人種)의 러시아를 무찔렀다’는 소식은 제국주의 열강이 설치한 전신선과 교통망을 타고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부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페르시아의 테헤란과 인도의 콜카타까지 수많은 사람이 일본의 승리에 환호했다. 조선의 청년 안중근(安重根)도 러시아를 이긴 일본의 승리에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방침은 여전히 대영제국 및 미국과의 협력이었지만, 일본이 아시아 전역에서 받게 된 놀라운 관심은 민간의 흥아론자들과 지식인들을 고무시켰다. 아시아의 대부분이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게 된 20세기 여명의 상황에서 흥아론자들은 아시아를 일깨워 서구에 맞서야 한다는 사명감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러일 전쟁을 전후로 흥아론은 ‘아시아주의’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주의자들이 인식하는 ‘아시아’의 범위도 중국, 조선, 일본을 넘어서 동남아시아와 인도로까지 확장되었고, 자연스레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는 유럽 제국주의의 존재를 더 자주 의식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상적 변화를 주도한 인물은 일본의 미술사 연구자인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이었다. 오카쿠라는 메이지 시기 일본의 정체성을 미술을 통해 모색하면서, 일본 미술의 뿌리인 중국과 인도의 미술도 연구하였다. 불교를 매개로 중국과 인도의 미술이 일본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것을 포착한 오카쿠라는 서세동점 이전 전통 아시아의 연결망을 강조하며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오카쿠라는 불교에 주목하면서 불교의 고향인 인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인도에 방문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타고르(1861~1941년)를 비롯한 인도의 유명 예술가,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영국 식민지 인도의 처지에 공감하고, 공동체를 해체하는 서구 근대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인도 지식인의 고민을 흡수하면서 아시아주의의 기틀을 놓았다. 이후 아시아주의는 그 시야를 전체 아시아로 확대하고, 미래의 지향을 서구 근대성과 계몽주의를 넘어서는 ‘아시아적 정신’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게 되었다.


일본의 좌절

오카와 슈메이

 

그래도 아시아주의는 여전히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민간의 움직임이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편에 참전하여 독일의 아시아-태평양 식민지를 공격했고, 승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동방 인민의 봉기’를 촉구하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면서 아시아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여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개시했다. 인도에서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이 더욱 거세졌다.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물질적 근대화에만 매진한 유럽 문명이 자멸(自滅)의 길을 걷고 있다고 진단하고, 아시아의 해방을 지원하며 일본이 동서 문명을 융합한 새로운 표준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였다. 일본에 온 인도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교류하고, 오카쿠라 덴신의 강의를 들으며 아시아주의자가 된 오카와 슈메이는 영어로 출간된 오카쿠라의 글을 일본에 번역하여 전파하는 데 주력했고, 인도의 식민화 역사와 독립운동의 현황을 일본 조야에 알리며 반영(反英) 사상을 퍼트리고자 했다.

이제 오카와를 비롯한 아시아주의자들의 활동은 1920년대 일본이 처했던 국제적 상황과 맞물려 대중 여론 차원에서도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담에서 일본은 ‘인종 차별 철폐’를 국제연맹 규약에 삽입하고자 노력했으나, 식민지 문제를 우려한 영국과 흑인 노예 문제에 민감한 미국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는 일본의 서구주의자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일본이 아무리 서구화에 매진하여도 서구 열강이 일본을 동등한 강대국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본이 보기에 서구 열강은 ‘문명국 클럽’이 아니라 ‘백인 클럽’이라는 분노가 야기된 것이다. 이후 1921년과 1922년에 진행된 워싱턴 군축(軍縮) 조약에서 일본의 전함(戰艦) 보유가 영국, 미국에 비하여 현격히 적은 숫자로 제한되자 일본을 ‘2류 강대국’으로 여기는 영미 세력에 대한 반발심은 더욱 커졌다.


만주국

이시와라 간지

 

한편으로는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아시아의 민족 지도자들이 일본에 대한 저항을 더욱 거세게 시작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조선에서 3·1운동을 촉발시켰고, 이는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를 비판하지만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는 긍정하는 일본 아시아주의자들의 이중성과 위선(僞善)에 대한 증거로 여겨졌다.

동시에 일본식 근대화 모델에 감명을 받았던 중국의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점차 거세지는 일본의 중국 진출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본은 승전을 통해 독일로부터 독일령 칭다오(靑島)를 인수받았고, 만주와 화베이(華北)에서 더욱 많은 이권(利權)을 얻어내려 했다. 중화민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은 1924년 고베에서 행한 ‘대아시아주의’ 연설에서 아시아의 자립과 자강을 위한 일본의 노력을 칭찬하면서도, 일본의 정책이 동양왕도(東洋王道)가 아닌 서양패도(西洋覇道)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1920년대가 끝나갈 즈음에, 일본 조야(朝野)는 제국이 안과 밖 모두에서 도전을 받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상태였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충실한 협력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협력 대상으로서 일본을 바라보지 않는 듯했다. 민족자결주의의 확산은 조선과 중국에서 일본의 통치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 민족의 지도국’이자 ‘아시아 해방의 기수(旗手)’로서 일본을 바라보는 국내외의 인식은 일본의 엘리트와 대중 모두에게 특별한 사명감과 의무감을 부여했다. 이런 사명감에 공감하는 이들 중에서, 일군의 장교 집단이 지정학적(地政學的) 대지진을 일으켰으니 바로 1931년의 만주사변이었다. 육군 중좌(중령)에 불과한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는 만주사변을 통해 중국 동북부의 드넓은 영역에 만주국을 수립했다. 만주에 거주하는 다섯 민족이 왕도(王道)에 입각하여 협력하고 화합한다는 오족협화(五族協和)의 기반에도 흥아론과 아시아주의가 깔려 있었다.

만주국 건국자들은 일본이 주도하여 만주에 서구 문명보다 더 진보한 아시아의 신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 믿었고, 아시아 각 민족의 엘리트를 길러내는 요람으로써 ‘아시아대학’의 설립까지도 추진했다. 아시아대학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대신에 건국대학(建國大學)이 세워져 아시아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시도했다. 만주국의 존재는 일본이 영국, 미국, 소련과 동등한 광역권(廣域圈)을 확보한 국가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아시아주의와 협화라는 새로운 이상(理想)은 대내적으로 일본 제국에 제기되는 민족자결의 도전을 무마할 대안(代案) 이데올로기로서 수용되기 시작했다.


아시아夢의 폭주

 ▲수바스 찬드라 보스

 

만주국 건국을 계기로 만개한 일본의 아시아몽(亞細亞夢)은 제동장치 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만주의 성공에 자극받은 일본군 장교들은 화베이에서 군사 활동을 늘리며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를 자극했고, 이는 파괴적인 중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아시아주의 지식인들은 동아협동체(東亞協同體)를 내세우며 전쟁을 정당화했지만, 중일 전쟁은 오히려 항일(抗日)을 중심으로 중국 민족주의를 결집시켰다. 일본의 팽창이 국제 질서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한 영국과 미국도 일본을 압박해 들어갔다.

결국 일본은 대외적 압박을 타개하고자 유럽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공격하고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개시했다. 일본은 이를 아시아 해방을 위한 대동아성전(大東亞聖戰)으로 선전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지역에서 이 선전이 꽤 효과적으로 작동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일본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든, 혹은 일본 아시아주의에 진심으로 공감했든 간에 일본이 막강한 영국군과 미군을 무찌르는 것을 보고 환호했다. 인도의 찬드라 보스는 일본과 협력하여 인도국민군을 결성해 영국령 인도로 진공하고자 했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도 일본의 동인도제도 점령을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한 준비로써 활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아시아주의의 사상적 지도자가 된 오카와 슈메이는 이슬람권도 반서구 전쟁의 대오에 합류시켜야 한다며 이슬람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주의의 유산

라다비노드 팔

 

하지만 일본의 ‘대동아성전’은 파멸적 결과를 남기기에 이르렀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일본이 궁지에 몰리면서, 점령지에서의 가혹한 수탈이 시작되었고 일부 아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일본 점령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반공(反共)을 외치며 시작된 중일 전쟁은 중국공산당의 부활이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막강한 힘은 일본이 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고, 1945년에 일본은 항복하면서 제국은 모조리 해체되었다. 일본 내부에서는 반세기에 걸쳐 일본과 아시아를 휩쓸었던 ‘아시아 해방의 대의(大義)’를 비판하고, 무엇이 일본 군국주의의 폭주를 만들었는지 밝혀내 반성하자는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럼에도 아시아주의는 무척이나 많은 유산을 남겼다. 일본군이 떠나간 동남아시아에 다시 진주한 유럽 제국은 이전보다 훨씬 거센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과 마주해야 했다. 도쿄 전범(戰犯) 재판에서 인도 출신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는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서구 제국주의가 무슨 차이가 있었는지 물으며 서구의 위선에 대해 고발하며 충격을 안겨주었다.

동양의 고유 문화와 서구의 근대성을 창조적으로 융합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의 비전은 전후 아시아의 제도와 문화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본의 국체론(國體論)과 네덜란드·독일 법철학을 결합한 판차실라(Pancasila)가 국가 이념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기 한국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열암(冽巖) 박종홍(朴鍾鴻)도 아시아주의와 연관된 전시(戰時) 교토학파의 영향 속에서 ‘근대성의 위기’를 고민한 인물이었다. 아시아주의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받았던 인물들은 탈(脫)식민화와 냉전(冷戰)의 시대인 20세기 후반에 신생 독립국의 민족 상징으로 추앙받거나, 살아남아서 국가 건설의 주역을 계속 맡았다.

‘인도-태평양’ 구상으로 이어진 아시아주의

다시 2024년으로 돌아와서, 100년 전 아시아주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아시아주의는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 수사(修辭)에 불과했을까. 아시아주의는 19세기 서구화의 기수이자 현재는 서구 진영의 대표 국가인 일본이 주창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크다.

아시아주의는 ‘서구에 대한 반발심’이 흔히 생각되곤 하는 ‘비이성적 광기(狂氣)’를 넘어서,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다. 서구 근대성과 자국의 전통을 조화시키고자 고민한 당시 일본의 사유(思惟) 또한 여전히 많은 비서구 국가들이 공유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튀르키예, 러시아, 인도, 이란, 중국 등의 국가가 전통의 현대적 부활을 외치며 서구와는 다른 독자적 노선을 천명하는 오늘날의 아시아에는 100년 전 아시아주의의 메아리가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 서구 진영의 일원으로서 일본이 아시아주의의 유산을 활용해 ‘인도-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전략적 구상을 창안(創案)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히 미국의 안보 구상에 발을 맞추겠다는 수동적 움직임이 아니라,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합하는 드넓은 공간적 시야를 보여주며 일본이 아시아 안보의 상황을 주도하겠다는 능동적인 활약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핵심 파트너인 인도를 껴안으며, ‘아시아주의 동지’였던 찬드라 보스, 라다비노드 팔 등과의 역사적인 우애를 다시 소환한 것도 인상적인 일이다. 비록 끔찍한 침략 전쟁으로 끝나긴 했지만,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고자 했던 과거 일본의 유산은 일본이 서방 동맹국이 된 오늘날에도 면면히 계승되어 미국, 중국, 러시아 등과는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아시아 전략 구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한민국은 ‘아시아觀’이 있는가?

물론 이러한 일본의 전략적 구상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이전에, 세계의 주요 국가 중 하나로 부상(浮上)한 대한민국은 과연 일본에 견줄 만한 아시아관(觀)이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전히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은 구미 선진국과 일본, 중국 등 인접국의 사례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하지만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한국은 아시아에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아시아 제(諸)국가의 움직임은 한국에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100년 전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중국·러시아 협력체와 미국 중심 자유 진영 간 대립의 그림자가 한반도에도 짙게 드리우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생존은 인접한 아시아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구축(構築)하고 어떤 공통의 목표를 발굴해내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후 아시아의 대표적 지식인인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가 이야기한 ‘방법으로서 아시아’를 모색하는 것이 대한민국에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고 있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