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공화국/ 2023.11.인터뷰-무라트 타메르 튀르키예 대사 - 2024.03.04 키이우까지 1150㎞, 가자까지 1151㎞… 이스탄불은 오늘도 ‘지정학적 고민 중’
튀르기예(구 터키) 2023 - 2024
2023.
월간조선 11월 호 특집/튀르키예공화국 100주년
■인터뷰-무라트 타메르 튀르키예 대사
“튀르키예는 유럽·중동·아프리카 진출 전진기지로 활용도 높아”
⊙ 올해는 튀르키예공화국 건국 100주년 행사와 대한민국과의 수교 70주년
⊙ “제국의 흥망성쇠에서 배운 뼈아픈 가치들이 튀르키예인들의 DNA에 각인되어 있다”
⊙ “이스탄불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는 것… 느리게 걸으며 고대·근대·현대가 어우러진 거리 즐겨야”
⊙ “딸을 가진 아빠로서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무척 감사”
柳鐘守
1962년생. 연세대 보건학 박사 / 美뉴욕플러싱 YMCA 이사장, 뉴욕가톨릭재단 부총장, 유엔재단 새천년개발사업 고문, 現 바레인왕국 국가보건의료최고위원회 고문, 남미개발은행(IDB) 남미국가 진단검사역량 강화사업 수석책임역, 서울의과학연구소(SCL) 국제사업 고문, 연세대 보건대학원 초빙교수

▲사진=조준우
튀르키예는 올해 공화국 건국 100주년, 한국과의 수교 70주년을 맞이했다. 정신없이 분주할 무라트 타메르 대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대사는 이렇게 답했다.
“형제를 위해서는 만 리 길이라도 기꺼이 즐겁게 찾아가는 것이 우리 튀르키예 사람입니다. 형제를 위해 시간을 못 내겠습니까?”
그는 대한민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했다.
튀르키예는 한국전쟁 때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튀르키예는 육군 2만1212명을 파병해 2365명의 사상자를 냈다. 2개 사단 규모의 지상군을 파견한 것이다.
세상을 돌아다녀 보면, 우리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나라가 딱 두 나라가 있다. 몽골과 튀르키예다. 한국전쟁 때 병력을 파견한 유엔 회원국 16개국 가운데 우리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참전국은 튀르키예뿐이다.
형제의 나라
수만 리 떨어져 살아온 우리와 튀르키예 사람들이 왜 형제지? 얼굴 생김새가 이렇게 다른데…. 필자 주변의 많은 이가 이런 얘기를 하곤 한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튀르키예를 방문해 에르도안 대통령을 예방했던 우리나라 정·관계 인사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주저 없이 ‘형제의 나라에서 온 분들’이라며 환영하는 데 놀랐다고 얘기한다.
동서양의 역사에 밝은 필자의 벗이 얼마 전 튀르키예 사람들이 우리를 형제로 부르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비잔틴 중심으로 1000년, 동서양을 통합한 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600년을 살아온 민족이다. 그 나라 사람들이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형제라고 부른다? 턱도 없는 소리다. 이 사람들의 뇌리 깊숙이 자리 잡은 큰 서사(敍事)가 없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고구려와 돌궐은 혈맹이었다. 두 나라는 중원을 장악한 수(隋)와 당(唐) 두 제국에 맞서 싸웠다. 혈맹인 고구려가 멸망하자 돌궐족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됐다. 그래서 서쪽으로 민족 대이동을 했다. 중동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과 융합했고, 이들이 튀르크족이 되어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거쳐 오늘의 튀르키예공화국으로 이어진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민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꾼 7세기의 대서사시를 잊지 않고 있다. 당나라 제국에 맞서 피 흘려 싸운 고구려의 후손인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왜 우리는 튀르키예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지 않느냐? 승자인 신라는 고구려와 튀르키예 간 역사를 알기 어렵다. 조선 500년은 당 제국에 맞서 싸웠던 그 역사가 부담스러워 모든 사서에서 그 기록을 다 지워버렸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우리를 형제로 부르는데 정작 우리는 당황스러워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역사적 연원은 여기에 있다.
튀르키예는…
수도: 앙카라
언어: 튀르키예어
화폐단위: 튀르키예 리라(YTL)
면적: 7853만5000㏊ / 세계 36위 (2021 국토교통부, FAO 기준)
인구: 8581만6199명 / 세계 18위 (2023 통계청, UN, 대만통계청 기준)
GDP: 9059억8782만 달러 / 세계 19위 (2022 한국은행, The World Bank, 대만통계청 기준)
1인당: GDP 1만1931달러 / 세계 71위
접경국: 이란, 그리스, 시리아, 불가리아, 이라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종교: 이슬람교 99%, 기독교, 유대교 등
역사: 1919년 5월 19일 튀르키예 독립전쟁, 1923년 10월 29일 튀르키예공화국 건국
발품 부지런히 파는 대사

▲지난 5월 29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대선 승리 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5년 더 재임하게 되었다. 사진=신화 / 뉴시스
무라트 타메르 대사는 서울의 외교가에서 발품을 부지런히 팔기로 정평이 나 있다. 올해는 더군다나 ‘장날’이었다. 튀르키예공화국 건국 100주년 행사와 대한민국과의 수교 70주년 행사에 참석하는 양국 정부 고위 인사들을 맞이하고, 경제협력·문화교류 활동들을 지원하느라 분주했다.
타메르 대사는 주한 외국 공관들이 개최하는 행사에 열심히 참석한다. 지난 6월 말 필자는 대구에서 열린 인도네시아 문화의 밤 행사에 참석했다가 타메르 대사와 조우했다. 여러 나라의 행사장을 활기차게 누비는 타메르 대사의 모습을 보노라면, 모차르트가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1번 〈터키 행진곡(Rondo Alla Turca)〉의 경쾌한 음악이 들려오는 듯하다.
타메르 대사는 건장한 체격이다. 오스만 제국의 최정예 부대이자 술탄의 근위대 ‘예니체리’ 소속의 장군이 힘차게 전장을 휘젓고 다니듯 그는 소리 없는 전쟁터인 국제 외교무대를 누비고 있다.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는 지난 2월 튀르키예의 중부와 남부를 강타한 진도 7.5의 대지진을 겪었다. 진앙(震央)은 가지안테프였다. 6만 명이 사망하고, 12만 명이 부상당한 끔찍한 대재앙이었다. 피해 규모가 100조원으로 추정된다.
“튀르키예와 한국이 동고동락한 또 하나의 기억”

▲2021년 3월 18일 부산 남구 재한유엔기념공원 내 상징구역에서 튀르키예 전사자의 날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유엔기념공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 전사자 1100여 명 중 462명이 안장되어 있다. 튀르키예의 지상군은 1950년 10월 17일 부산에 도착했고, 휴전 이후에도 의장대가 남아 1971년까지 유엔의 평화 활동을 지지했다.
― 올해 초 엄청난 자연재해가 있었습니다. 지진 복구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2월 6일 발생한 튀르키예 대지진은 불행하게도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지진이었습니다. 180km의 광범위한 길이로 발생한 지진은 10개 도시에 걸쳐 엄청난 피해를 끼쳤습니다. 세계적인 지진 전문가들조차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대형 지진이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의 300배에 달하는 파괴적 에너지를 보인 지진이었습니다. 1400만 명의 튀르키예 국민들이 피해를 입었지요. 여기에는 어린이 700만 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파괴된 지역은 한국 영토보다도 큽니다. 어떤 도시는 전체 건물의 절반 이상이 무너졌고요. 너무나 고통스럽고 참담한 상황입니다.
이런 불행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불행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우리 국민 모두가 튀르키예의 대재앙에 내 일처럼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납니다.
“대한민국 국민, 언론, 정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튀르키예 정부를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감동했습니다. 한국 언론들이 형제의 나라를 돕자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한국 사회의 지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목숨을 바치고, 전쟁 후에도 남아 수백 명의 한국 전쟁고아를 돌봤던 튀르키예 장병들의 진심이 한국 국민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과 튀르키예 사람들이 동고동락(同苦同樂)한 기억이 하나 더 추가됐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거고요.”
대한민국 정부는 지진 발생 다음 날인 2월 7일 120명의 수색 구조대를 재난 현장에 파견했다. 열흘간 구조 활동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구했다. 이후 85명의 2차 구조대도 파견했다.
“저는 튀르키예로 떠나는 구조대원들을 배웅하면서, 모두가 건강하고 무탈하게 귀국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여진의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동입니다.”
튀르키예 찾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은…

▲윤석열 대통령이 2월 9일 오후 튀르키예 대지진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서울 중구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을 찾아 무라트 타메르 대사를 위로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타메르 대사는 윤석열 대통령께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께서 지난 2월 9일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을 방문해 대지진 희생자를 위해 애도하셨습니다. 조문록에 ‘대한민국은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 국민이 슬픔과 좌절에서 용기와 희망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함께할 것입니다’라고 쓰셨어요. 윤석열 대통령님의 정중한 호의에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께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 대지진의 피해 지역이 우리 인류의 중요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곳들이라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번 지진의 진앙인 가지안테프를 비롯한 주요 피해 지역이 인류 문명사에 기록될 만한 지역입니다. 유네스코는 2015년 튀르키예 도시 중 최초로 이번 지진의 진앙인 가지안테프를 ‘미식(美食) 도시’로 지정했습니다. 지진 피해 지역인 하타이는 튀르키예 정교회의 첫 발생지이고요. 샨르 우르파는 1만 년 전에 인류가 살았던 도시 주거지 흔적이 발견된 곳입니다. 흔히 우리가 농경이 시작된 후 도시가 출현했다고 보는데, 농업혁명 이전에 도시가 출현했다는 놀라운 사실에 인류학자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구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지만, 파괴된 문화유산들을 완전히 복원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불가능한 작업이지요.”
― 우리나라의 미식가들이 많이 안타까워할 소식입니다.
“이 지역은 실크로드가 지나던 곳답게 다양한 향신료를 사용한 요리들이 발달했습니다. 일반적인 튀르키예 음식보다 풍미가 아주 강합니다. 이곳을 찾았던 한국분들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양고기 수프와 ‘베이란 초르바스’입니다.
일반적으로 튀르키예식 아침 식사는 여러 종류의 치즈와 버터, 튀르키예식 스크램블 에그, 전통 빵 시미트와 차이로 구성됩니다. 가지안테프에서는 ‘베이란 초르바스’를 아침 식사로 즐깁니다. 잘게 찢은 양고기와 쌀, 마늘, 고추, 양고기 육수 등을 넣고 저온에서 10시간 이상 푹 끓이는데, 한국 여행객들은 여기에 매운 고춧가루를 첨가하면 한국에서 즐기는 육개장과 비슷한 맛이 난다고 하더군요.”
고향 이스탄불에서 외교부 대표 대사로 활동

▲2월 7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위치한 중앙119구조단에서 61명의 국제구조대 대원들이 최악의 지진이 발생한 튀르키예로 급파되기 앞서 현지 상황을 듣고 있다.
타메르 대사는 그간 주 쿠웨이트 대사, 우크라이나 오데사 총영사 등의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고향인 이스탄불에서 외교부 대사를 지낸 경험이 특별했다고 소개했다.
“우리 집안 선조들은 대대로 이스탄불에서 살았습니다. 저도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제 고향 이스탄불시에서 4년 가까이 튀르키예 외교부 대표로 활동했던 시간이 저를 더 성숙한 외교관이 되도록 했습니다.”
한국에도 외교부 소속 외교관들이 서울, 부산 등 지자체 협력대사로 일하는 제도가 있다. 대개 은퇴를 앞둔 대사들이 2년 정도 받는 보직인 경우가 많다. 타메르 대사는 한국의 지자체 협력대사와는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지자체에 파견된 대사들은 지방자치 단체장의 예산과 지휘권에 속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튀르키예 외교부의 이스탄불시 대표 대사는 외교부 장관의 지휘를 받습니다. 이스탄불은 튀르키예의 행정 수도 앙카라에서 465km 떨어져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 정도의 거리입니다. 매력적인 국제도시인 이스탄불에서는 국제기구와 정부 부처, 국제기업들이 주최하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됩니다. 튀르키예 외교부 대표 대사는 이스탄불을 공식 방문하는 모든 정상을 영접하고, 수많은 국제행사에서 튀르키예 외교부와 정부를 대표합니다. 이스탄불 대표 대사만큼 많은 국가 정상을 만나고, 국제기업과 국제기구 리더들을 만나는 외교관은 유엔본부에서 근무하는 고위급 외교관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스탄불을 가장 잘 즐기려면, 걸어라!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전경. 6세기 세워진 비잔티움 제국 최고의 건축물로 꼽힌다. 사진=게티이미지
‘서울 사대문 안에서 대대로 살아왔다’는 사대부 집안의 자긍심이 살짝 느껴졌다.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라 이스탄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고, ‘이스탄불 대사’를 지내며, 이스탄불 골목골목에 정통한 타메르 대사에게 이스탄불을 찾는 한국인이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타메르 대사의 이스탄불 문화유산 해설이 지체 없이 시작됐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아시아와 유럽 두 개의 대륙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요. 매년 4000만 명 이상의 여행객이 튀르키예를 방문하는데, 대부분의 관광객이 이스탄불을 먼저 방문합니다. 2016년 한국의 현대건설과 SK건설이 만든 보스포루스 제3 대교는 전 세계 현수교 중에서 최대 규모지요. 개통식에 참석한 에르도안 대통령이 ‘우리는 다리로 동서양을 잇고 있다’ ‘인간은 죽지만 업적은 불멸한다’는 멋진 말씀을 하셨어요.
에르도안 대통령의 표현들이 이스탄불의 존재 의미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인종이 교차하는 허브 도시이자 문명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역사 도시, 전설 같은 고대 역사의 유물들을 간직한 도시입니다.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객들이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살찌우는 음식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도시, 머무는 매 순간 감탄을 선사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멋진 유산은 위대한 선조들이 혼과 호흡으로 만들어낸 불멸의 업적입니다.”
보스포루스 제3 대교는 폭 58.5m, 길이 1408m, 왕복 8차선 도로에 복선 철로가 함께 깔려 있다.
― 이스탄불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걸어 다녀야 합니다. 그게 이스탄불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느리게 걸으며 고대와 근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거리를 즐겨야 합니다. 이스탄불은 버스, 지하철, 트램, 택시 등의 교통편이 잘 갖추어져 있긴 합니다. 멋진 카페와 식당들이 거리의 곳곳에 숨어 있어요. 작은 거리에서 은밀한 역사의 비밀들과 신비한 스토리들을 찾아내는 재미를 느껴야 해요. 이스탄불의 호텔이나 유명한 카페에서 브런치를 처음 먹어본 외국 손님 중에 튀르키예인들이 크루아상 빵을 즐겨 먹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옹졸하지 않다”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사막에서 수행한 수도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풍부하게 만들어줬다. 사진은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유적이다. 사진=조선DB
― 크루아상이 튀르키예에서 시작된 빵인가요?
“330년 전 오스만튀르크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빈성을 공격했을 때, 튀르크 군대는 은밀하게 땅굴을 파서 성 내부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땅굴 파는 소리를 들은 제빵사가 재빨리 수비군에 신고를 해서 땅굴 공격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죠. 이에 합스부르크 왕실은 공훈을 세운 제빵사에게 영예로운 문장(紋章)을 수여합니다. 이 제빵사는 튀르크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으로, 먹을 때 오스만을 연상하며 잘근잘근 씹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빵을 만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탄생된 이 빵이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프랑스 왕에게 시집간 마리 앙투아네트에 의해서 프랑스로 전해졌습니다. 이게 크루아상 빵입니다.
이런 스토리를 아는 외국인들은 튀르키예인들이 크루아상을 즐기는 모습을 의아해합니다. 이스탄불과 튀르키예의 역사는 1000년의 기독교 세력인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문화와 유산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크루아상 빵을 먹지 않을 만큼 튀르키예 사람들이 옹졸했다면, 이런 위대한 문명들의 공존이 가능했겠습니까? 튀르키예인들은 역사의 흥망성쇠를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유연하게 현대적 해석으로 포용하고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이스탄불의 정신입니다.”
― 한국과 싱가포르는 의료 서비스를 중동 지역과 아시아권 환자들에게 제공하는 의료관광에 관심이 큽니다. 튀르키예가 양호한 의료의 질과 서비스로 의료관광에서 상당한 성과를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19년 4500만 명의 외국인들이 튀르키예를 방문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2021년에는 2470만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의료관광 또한 감소 추세를 보였고요. 말씀하신 대로 2019년까지 모발이식 등을 위해 유럽과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UAE 등지에서 많은 환자들이 왔습니다.
유럽과 미국에 비해 저렴한 가격, 국제기준을 충족하는 고품질 의료 시설, 최신 기술을 사용하는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 많은 시술 경험을 가진 의사와 전문가들이 우리의 강점입니다.
제가 쿠웨이트 대사로 근무할 때 튀르키예 관광청과 의료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역사상 가장 많은 쿠웨이트인들이 이스탄불 관광을 하고, 의료관광 프로그램을 선택했습니다.
튀르키예 관광청은 ‘튀르키예에서 치유를’이라는 웹 포털(healinTrkiye.gov.tr)을 2024년부터 국제 의료관광 소비자들에게 제공할 예정입니다. 모발 이식 클리닉, 웰니스 온천 센터, 노인 및 장애인 케어 센터, 헬스케어 에이전트 등이 이 포털에 공급자로 참여하여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튀르키예에서 치유를’
― 의료관광 이외에 제공 정보에는 어떤 게 있습니까.
“이 포털에서는 특정 지역을 방문하면 무엇을 즐길 수 있는지,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 모든 숙박, 교통, 문화, 기후 정보 등이 함께 제공됩니다. 튀르키예에는 1500여 개의 온천이 있는데, 질 좋은 스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객 만족도 조사에서 유럽의 온천 가운데 늘 1위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힐링이 필요한 한국분들이 몸과 마음의 치유를 받는 시간을 친지들과 함께 갖기를 추천합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한 선택은 다양해야”

▲튀르키예 에페소의 로마시대 유적지 ‘셀수스 도서관’(왼쪽 건물)에 찾아온 관광객들 모습이다. 사진= 조선DB
― ‘튀르키예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제재하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다’는 서방 진영의 비판 여론이 거셉니다.
“튀르키예와 러시아의 관계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안보, 번영을 위한 전략에 한 가지 길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다양한 선택이 있고, 유연하고 융합적인 전략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우크라이나인입니다. 저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총영사를 지낸 우크라이나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외교관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주권을 침해한 것은 분명히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처사입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흑해를 통해 우크라이나 곡물들이 식량이 부족한 국가들로 운송되도록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중재하는 역할 또한 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국제사회의 분쟁 해소를 위해서 신뢰받을 수 있는 중재자 역할들을 해나갈 것입니다.
한국도 미국 정부의 대중국 제재와 압박에 동참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까. 하지만 중국 시장과 한국의 지정학적인 환경,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대(對)중국 정책을 간단하게 결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타메르 대사는 “비잔틴 제국 1000년, 오스만 제국 640년의 역사 속에서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튀르키예(T)는 한국(K)과 더불어 멕시코(M), 인도네시아(I), 호주(A)와 연대하는 5 대 중견국 연합체(MIKTA)의 멤버입니다. 강대국들의 논리와 주장도 있지만, 중견국들도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돕기 위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함께 내기 위해 협력하고 있는 겁니다.”
“370여 개 한국 기업이 튀르키예 진출”
― 이제 곧 부임 1년을 맞습니다. 앞으로 몇 년 더 한국에서 튀르키예 대사로 일할 텐데 욕심 내는 사업이 있다면 소개해주십시오.
“우선 제가 쿠웨이트에서 의료관광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뤄냈듯이, 제 재임 기간 중에 가장 많은 한국인이 튀르키예를 방문하는 기록을 만들고 싶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지방자치 단체들과 민간 교류 플랫폼을 만들려고 합니다.”
잠시 숨을 돌린 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는 한국과 튀르키예 사이의 통상과 경제 협력을 확대하는 일입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한국 기업의 튀르키예 투자가 이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튀르키예는 인접한 유럽 국가들과 중동 국가 아프리카 국가들에 진출할 수 있는 전진기지로 활용도가 높습니다. 현지 생산 후 제3국에 수출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미 튀르키예에 370여 개 한국 기업이 진출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튀르키예 학생들이 한국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와 협의할 계획입니다. 대한민국에 와서 자신과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는 튀르키예의 젊은 동량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도록 길을 열겠습니다.”
― 한국 생활에는 만족하십니까.
“딸을 가진 아빠로서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내와 서울의 국제학교를 다니는 중학생 막내딸이 서울과 한국 생활을 아주 좋아합니다. 서울은 무척 안전하고 교통이 편리한 K-문화의 메카입니다. 딸을 가진 아빠로서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통과 현대화의 갈등으로 점철된 튀르키예 현대사
에르도안, 아타튀르크의 반대자가 아니라, 그 한계 극복한 인물로 받아들여져
케말주의 공화인민당의 패배는 국가 수호·현대화에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통 문명을 향한 인간의 본원적 향수를 지워낼 수 없음을 보여줘
⊙ 케말 아타튀르크, 건국 후 탈이슬람 근대화 노선 추구… 한국 등에 군부 주도 근대화 모델 제시
⊙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케난 에브렌, 경제 자유화를 지지하는 이슬람주의 우익과 결탁
⊙ 1980~1990년대 경제 자유화·세계화 거치면서 아나톨리아 내륙의 신흥 중산층 등장… 에르도안의 기반 돼
⊙ 케말 파샤 계승한 공화인민당, 오랫동안 군부에 의존하면서 무기력해지고, 새로운 비전 제시에 실패
⊙ 앞으로의 시대는 에르도안·모디처럼 현대성과 전통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류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이들이 주도할 것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 저서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K를 생각한다》

▲지난 8월 30일 전승기념일 행사에서 연설 중인 에르도안 대통령 뒤로 국부 아타튀르크가 그려진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에르도안 페이스북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3년 3월 14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튀르키예공화국의 총리직에 오르면서 ‘에르도안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3년 튀르키예공화국이 건국한 지 8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고 20년이 흐른 지금, 튀르키예는 여전히 ‘에르도안 시대’로 건국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튀르키예의 5월을 뜨겁게 달구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에르도안이 또다시 승리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경제난과 미국과의 관계 악화, 무엇보다 지난 2월에 동남부 가지안테프 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 등 악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건국 100주년에 에르도안이 20년 집권을 끝내고 권좌에서 내려올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승자는 에르도안이었다. 이제 그는 1923년 튀르키예의 새로운 수도가 된 앙카라에서 튀르키예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같은 위치에서, 튀르키예공화국 100년의 역사를 결산하고 새로운 100년의 비전을 천명할 지도자가 되었다.
에르도안과 시작될 튀르키예의 새로운 세기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에르도안은 어떻게 장기 집권에 성공했을까? 이 기나긴 ‘에르도안 시대’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그리고 에르도안의 튀르키예는 앞으로 세계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도고 헤이하치로와 무스타파 케말

▲탄지마트 개혁을 추진한 압둘메지드 1세.
이를 알기 위해서는, 튀르키예공화국이 건국되기 이전, 1905년 쓰시마(對馬島) 해전에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러시아 제국의 발틱함대를 무너뜨린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그 순간에, 대륙 반대편에 있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사관학교를 갓 졸업하고 임관한 25세 젊은 장교 하나가 이 소식을 접하면서 전율(戰慄)하며 각성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1881~1938년)로, 훗날 아타튀르크로 알려지며 1923년부터 오늘날까지 튀르키예의 100년 역사를 규정짓는 인물이다.
무스타파 케말이 전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보여준 결정적 승리가 그의 조국 오스만 제국이 150년 동안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905년의 오스만 제국은 유럽 열강을 상대로 그런 승리를 꿈조차 꿀 수 없게 된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본래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과 마주한 경쟁자인 유럽의 힘이 급속도로 강력해졌고, 힘의 차이가 너무나 극명해진 결과 1774년 크림 칸국을 빼앗아간 러시아와의 조약, 이집트를 순식간에 유린한 1798년의 나폴레옹 원정 등에 오스만 제국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19세기 내내 오스만 제국은 서구 열강의 압력으로부터 생존하고자 숱한 노력을 기울였다. 1839년 압둘메지드 1세(1823~1861년)는 제국을 근대적으로 전면 재조직한다는 귈하네 칙령을 발표하고 탄지마트 개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국을 소생시키기 위한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유럽 민족주의가 제국 내부에서 커다란 동요를 일으키면서 안정적 정책 추진을 어렵게 만든 데 있었다. 제국의 여러 무슬림 지역도 분권화, 혹은 유럽에 의한 식민화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집트와 그리스가 이탈하며 제국은 큰 타격을 받았다. 사실상 제국의 생명은 러시아를 전략적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 영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제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결정하면서 연장될 수 있었다. 크림전쟁에서 영불 연합군은 러시아를 무릎 꿇리고 오스만의 생존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사이에 제국 내부의 비무슬림 상인들과 연계한 유럽 열강이 제국 내에서 상업적 이익을 최대로 취하고 있었다.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과 그들을 지원하는 영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이 제국의 경제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청년튀르크당

▲압둘하미드 2세.
1878년에 절치부심한 러시아가 오스만군을 완전히 패퇴시키고 제국의 존속 자체를 다시 위협하자, 황제(술탄) 압둘하미드 2세(1842~1918년)는 기존의 서구화 개혁으로는 제국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영국의 외교적 지원으로 제국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발칸 북부의 영토를 전부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 인구가 줄어든 것을 두고 압둘하미드는 차라리 이슬람 정체성(正體性)을 제국 통합의 기제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칼리프(이슬람교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이 모든 무슬림의 수호자임을 호소했다. 압둘하미드는 헌정(憲政)을 중지, 의회를 폐쇄하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며 물질적 근대화를 신속히 추진해나갔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압둘하미드 시기에 철도, 학교, 병원 등 여러 근대적 인프라가 확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서구를 문명의 척도로 생각하고, 제국을 위해서는 급진적 서구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새로운 세대의 엘리트들은 황제 전제정(專制政)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881년에 태어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들에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거둔 승리는 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급진적 근대화 개혁을 통해 일본은 오스만이 150년 동안 이기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적인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일본의 승리는 오스만의 젊은 엘리트들에게, 비서구인이라고 태생적으로 열등한 것이 아니며, 지도자와 국민이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음을 입증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일본이 러시아를 무찌른 가장 큰 요소에는 헌법이 있었다. 헌법이 없는 러시아 전제정과 비교해 입헌군주정, 즉 더 문명적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이 국가의 빠른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압둘하미드 2세의 헌정 중지에 불만을 품고 여러 조직을 결성했던 제국의 청년 장교들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단일 조직으로 결집하였고, 1906년 연합진보위원회를 창설했다. 아타튀르크는 1907년에 이 조직의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들은 ‘청년튀르크(Young turks)’로 불렸다. 청년튀르크는 헌정을 복원하고 조국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1908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압둘하미드 전제정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황혼, 영웅의 탄생
하지만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심각한 적신호였다. 영국은 이로써 19세기 내내 러시아와 벌여온 전략적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끝났다고 판단하여 러시아를 새로운 위협인 독일에 맞서는 동맹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러시아는 독일에 맞서는 동맹의 대가로 중동(中東)에서의 자신의 지분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정교회(正敎會)의 수호자를 자임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도 분할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영국의 지원은 러시아에 맞서 오스만 제국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었다. 이제 그 지원이 사라지며, 제국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살기 위해서라도 영국과 러시아를 당해낼 수 있는 또 다른 강대국인 독일과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독일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불구덩이로 뛰어들게 되었다.
오스만 입장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대재난이나 다름없었다. 승리를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 하는 총력전(總力戰)을 수행하기에 오스만의 국력과 사회 통합력, 조직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북동쪽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밀고 내려왔고, 남쪽에서는 영국군이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스만의 여러 민족 집단을 선동하여 오스만의 전쟁 수행 능력에 타격을 입히고자 했다. 러시아와 오스만 양측에 걸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 벌어졌다. 영국은 아랍 부족장들을 상대로 새로운 아랍 국가 건설을 약속했고, 그 결과 ‘아랍 대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제국의 근대화를 향한 노력은 아예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로 향하는 문턱,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에 상륙하는 영국군을 무찔렀다. 무시무시한 영국군을 무찌르고 제국을 지켜낸 인물은 30대 중반의 대령 무스타파 케말이었다. 포연이 자욱하고 시체가 즐비한 해안선에서 제국의 젊은 군인은 민족의 영웅으로 변모해나갔다.
공화국의 출범

▲1923년 10월 19일 케말 아타튀르크는 새 수도 앙카라에서 튀르키예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제국을 구할 수는 없었다. 1918년이 되었을 때, 제국의 전쟁 수행 능력은 완전히 고갈되었다. 동맹국인 독일도 새로 도착한 미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4년에 걸친 대전쟁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승전국들은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마저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마침내 1920년 체결된 세브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아랍 영토를 모두 잃는 것은 물론이고, 제국의 본토인 아나톨리아마저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에 분할당했다. 패배한 제국의 황제는 조약에 무력(無力)하게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굴욕과 무력한 지배층에 분개한 이들은 승전국의 점령에 맞서 봉기했다. 봉기군은 갈리폴리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앙카라에서 튀르키예대국민의회를 열어 모든 튀르키예인의 항전을 호소했다. 3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 끝에 케말의 군대는 영국군, 프랑스군, 그리스군을 몰아내고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과 이스탄불을 지켜낼 수 있었다. 1923년, 세브르 조약을 대신할 새로운 조약인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 열강과의 전쟁 및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운동으로 점철된 오스만 제국의 ‘기나긴 19세기’는 마침내 끝날 수 있었다.
케말은 앙카라를 새 수도(首都)로 정하고 이제 이 나라는 오스만 제국이 아니라 ‘튀르키예공화국’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튀르키예 의회는 조국을 구해낸 그에게 튀르키예인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아타튀르크’라는 성(姓)을 헌정(獻呈)했다.
‘세브르 트라우마’와 케말주의
공화국의 지도자가 된 아타튀르크와 그의 동료들의 문제의식은 간명했다. 세브르 조약은 서구 열강이 무력(武力)을 앞세워 얼마든지 튀르키예를 분할할 수 있음을 보여줘 전 국민적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아타튀르크의 사명이 되었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이 어째서 그렇게 허약했는지, 개혁은 왜 성공할 수 없었는지를 숙고하며 신생 튀르키예의 새로운 비전을 정립했다. ‘케말주의’의 탄생이었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이슬람교 전통의 영향력을 일소해야 하고, 하나로 묶기 어려운 다민족(多民族) 사회를 튀르키예인이 중심이 되는 단일민족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계몽된 군인과 관료 엘리트가 주도하는 국가 기구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당연하게도, 반대자는 철저히 억압되어야 마땅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그 절정인 세브르 조약이 남긴 트라우마는 아타튀르크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막대한 사명감을 안겨주었고, 사명감은 강력한 억압을 정당화해주었다.
아타튀르크와 그의 후계자들은 근대적 교육과 민법 체계를 도입하고, 공적(公的) 영역에서 이슬람의 존재감을 지웠다.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히잡 착용도 해제했다. 구습(舊習)을 일소하고 문자를 빠르게 보급하기 위해 아랍 문자 대신 라틴 알파벳이 채택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한 아타튀르크의 승리와 그가 추진한 과감한 개혁은 18년 전 도고 헤이하치로의 승리만큼이나 큰 울림을 주었다. 군부(軍部)가 주도하여 국가를 빠르게 근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반대자들은 억압해도 무방했던 모습은 20세기 아시아의 수많은 지도자가 공유(共有)하는 신화(神話)가 되었다. 이란의 레자 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와 같은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5·16 군사혁명을 일으킨 장교들 또한 아타튀르크에게서 큰 영감을 받았다. 서구에 뒤처진 아시아 민족을 재건하고 국가를 근대화하는 지도자 신화의 시작이었다.
멘데레스 정권

▲케말 아타튀르크의 후계자인 제2대 대통령 이스메트 이뇌뉘.
아타튀르크는 15년간 튀르키예를 통치하고 1938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死後)에도 케말주의 노선에 따른 근대화 프로그램은 계속해서 추진되었다. 그의 후임자인 이스메트 이뇌뉘(1884~1973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키면서 튀르키예를 안전하게 지켜냈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새롭게 떠오른 초강대국인 공산주의 소련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노출되게 되었다. 독일을 무찌른 소련은 동유럽에서 지배권을 강화했으며, 이를 계기로 이스탄불 인근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했다. 튀르키예 내부에서도 좌경 공산 세력이 더욱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스메트 이뇌뉘는 공산 세력으로부터 튀르키예를 지키기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공화인민당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지던 튀르키예는 자유선거가 실시되는 다당제(多黨制) 민주국가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선거는 공화인민당에 패배를 가져왔다. 사반세기에 걸친 공화인민당 정부에 대한 불만에 표심이 민주당의 아드난 멘데레스(1889~1961년)로 결집되었고, 1950년 튀르키예는 최초의 정권 교체를 경험한다.

▲아드난 멘데레스 전 총리.
같은 해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남침을 목도하고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튀르키예군을 파병한 것은 멘데레스가 취한 거의 최초의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다. 튀르키예는 한국전쟁에서 공산군에 맞서 분투하며 자유 진영을 지킬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튀르키예의 숙적(宿敵)인 그리스의 반대에도 튀르키예의 나토(NATO) 가입을 지지했다. 튀르키예가 공산 세력에 맞선 안보 우산을 확보하며 자유 진영에 공식적으로 속하게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튀르키예 군부는 멘데레스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멘데레스가 점점 독단적인 통치를 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멘데레스는 공화인민당이 오랜 기간 억압해온 이슬람에 지지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군부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슬람이 부활하는 것은 케말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간주하며 분노했다. 1960년 군부는 최초의 쿠데타를 감행해 멘데레스를 처형한 뒤 민선 정부를 새로 꾸리도록 지시했다. 이 경험은 국가의 발전과 아타튀르크의 ‘개혁’을 위해서는 선도적 존재인 군(軍)이 나서서 쿠데타를 감행해도 된다는 관념으로 자리 잡았다.
박정희 군부와 튀르키예 군부의 차이점
문제는 군부와 연계된 케말주의 세력이 계속해서 안정적 지지를 확보할 만큼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 데 있었다. 여전히 다수의 튀르키예인이 갖고 있던 이슬람 신앙을 억누르는 것은 점차 다수의 반감에 부딪히고 있었다.
경제 발전이 정체(停滯)된 것도 큰 문제였다. 아타튀르크와 동료들은 오스만 제국 시기에 기독교계 민족들이 유럽 열강을 등에 업고 제국의 상업을 장악한 것을 기억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군과 관료 엘리트들이 국가 경제 발전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믿음은 케말주의가 사회주의에 우호적이 되도록 이끌었다. 물론 소련식 공산주의는 배격했지만, 국영기업을 중심으로 국가가 경제 전반에 개입하고, 대외무역과 외자(外資) 유치를 꺼리는 좌파적 경제 정책이 계속해서 시행되었다. 이 점에서 케말주의 군부는 똑같이 군 엘리트가 국가적 동원을 통해 발전을 이끌었지만, 대외무역과 외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박정희(朴正熙) 정부 및 대한민국 군부와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멘데레스 이후 시기에는 국가를 운영하는 케말주의 엘리트들은 대체로 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을 띠는 가운데, 이슬람과 자유경제를 주장하는 우익과 친소적(親蘇的)인 좌익이 부딪히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인기 없는 정부 대신에 급진적인 전환을 주장하는 재야(在野) 세력들이 세를 불려 나갔다.
그 결과 1971년 극심해진 좌우 갈등으로 내각 및 사회 혼란이 지속되자 군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사태를 정리해야만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좌익과 이슬람주의 우익의 성장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군부와 이슬람주의의 결탁
1970년대는 정치·경제적으로 자유 진영이 위기에 처하며 좌익 세력이 약진한 시기였고, 중동에서는 이슬람주의가 발호한 시기이기도 했다. 1979년에는 이란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케말을 모방한 이란 팔레비 왕정(王政)을 무너뜨리는 혁명이 일어났다.
결국에는 1980년 튀르키예 또한 새로운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을 때, 튀르키예 군부는 좌익과 우익 중에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혈 낭자한 쿠데타를 또다시 일으킨 군부 지도자 케난 에브렌이 선택한 동맹은, 소련을 등에 업은 좌익이 아니라, 경제 자유화를 지지하는 이슬람주의 우익이었다. 1980년대 내내 케난 에브렌 정부는 이슬람주의자들을 끌어들이고자 노력했고, 세속주의(世俗主義) 원칙을 다소 후퇴시켜 튀르키예 민족과 이슬람이 얼마나 잘 화합할 수 있는지를 역설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을 튀르키예 애국자로 포섭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총리직을 맡은 투르구트 외잘은 경제 자유화 개혁을 이끌면서 훗날 튀르키예 경제 성장의 초석을 닦았다. 이슬람주의자의 정치적 지지 및 경제적 성과가 이어지면서 좌익 세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마침내 소련이 붕괴되며 냉전(冷戰)이 끝났다.
소련과 국내 좌익의 안보 위협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슬람에 우호적인 우익이 본격적으로 약진했다. 1980년대의 경제 자유화와 1990년대의 세계화는, 이스탄불과 이즈미르 같은 서부 해안 도시의 전통적 중산층(中産層)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내륙의 신흥 중산층, ‘아나톨리아 호랑이’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수출 주도형 중소기업을 통해 부(富)를 축적하고, 교육을 통해 중산층에 진입했다. 경제 자유화 및 이슬람 포용의 결과 탄생한 신세대 중산층들은 이슬람의 종교적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원했는데, 현대 도시 사회에 걸맞은 현대적 형태의 이슬람을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군부는 1997년 ‘연성(軟性) 쿠데타’를 통해 신흥 우익 세력의 정치 진입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민심을 돌릴 수는 없었다. 케말의 정당 공화인민당은 오랜 군부 의존 때문에 서부 지역의 전통적 지지층으로부터도 인기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이스탄불 시장을 역임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은 2002년 선거에서 말 그대로 압승을 거두었고, 에르도안은 총리직에 올랐다.
집권 초 에르도안의 전략은 간단했다. 경제 발전과 현대화를 이룰 수 있는 이슬람이 있으며, 그것이 서구 자유주의와도 합치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를 실제로 입증할 수 있다면 ‘세브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군부도 정치에 개입할 수 없을 터였다.
에르도안은 경제 개방을 가속화하여 튀르키예 경제를 새로운 성장 가도에 올려놓았고,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여 내륙 지역의 인프라를 혁신적으로 개선하였다. 그동안 경제 성장에서 배제되어 있던 도시 빈민과 농민이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중산층으로 변신했고, 모스크는 그들에게 사회적 자본과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공간이 되었다. 에르도안은 또한 유럽연합(EU) 가입을 천명하고, 이를 위해 유럽연합이 요구하는 시민 자유와 인권 문제의 개선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모두 군부의 정치 개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치였지만, 그 목표가 튀르키예의 오랜 숙원인 ‘완전한 유럽화’에 있는 것이었기에 군부 입장에서도 딱히 반발할 이유가 없었다.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에서의 전쟁으로 ‘이슬람과의 화해’를 도모하고자 했던 서구인들은 에르도안의 등장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자유경제와 민주주의를 모두 외치고, 이를 ‘현대적 이슬람’을 통해 정당화한 ‘에르도안 모델’은 이슬람 문명이 앞으로 나아갈 길로써 상찬(賞讚)을 받았다.
포퓰리즘
하지만 서구화를 충실히 따르는 것 같은 ‘에르도안 모델’은 2010년대 들어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한다. 대외 환경의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유럽연합은 튀르키예의 가입을 다양한 이유로 거부했고, 이는 튀르키예인들에게 자신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유럽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2011년 유로존 위기는 유럽연합이 과연 모델로서 따를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키웠다. 반대로 2011년에 권위주의 정권을 연쇄적으로 무너뜨린 아랍 봉기는 튀르키예의 새로운 방향을 동남쪽에서 열어주는 것같이 보였다. 많은 아랍 군중은 세속주의적 독재자 대신에 에르도안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토론했다.
이런 상황에서 2013년에 이스탄불에서 정권의 부정부패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에르도안의 선택은 명확해졌다. 에르도안은 서구의 눈치를 보며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보다는 강경한 진압 조치를 명령했다. 튀르키예의 야권은 격렬히 반발했고, 서구에서는 에르도안의 튀르키예가 권위주의로 다시 방향을 선회할까 우려했다.
에르도안은 자신에 대한 대내외적 반발을 포퓰리즘을 통해 돌파하기로 했다. ‘현대적 이슬람’ 대신에 국가적 자긍심과 도덕의 원천으로써 이슬람을 외치는 빈도가 더욱 잦아졌고, 이 과정에서 현대적 이슬람의 이데올로그였던 페툴라 귈렌(82)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서구화된, 전통적인 공화인민당 지지층인 서부 중산층들은 튀르키예 민족과 이슬람을 버린 이들,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위스키나 마시는 신(新) 귀족 집단’으로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수사법은 에르도안의 주요 지지층인, 오랜 기간 케말주의의 경제적 실패로 낙후함을 감내해야 했던 중동부 지역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新오스만주의

▲2016년 7월 16일 군부가 감행한 쿠데타는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끝났다. 사진=AP/뉴시스
2010년대를 거치며 에르도안은 케말주의라는 튀르키예의 오랜 국시(國是)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 이념을 모색하고 홍보했다. 그는 이슬람에 우호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란의 호메이니와 같은 이슬람 신정(神政)체제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튀르키예인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으면서도 국제적으로 튀르키예의 영광을 떨칠 수 있는 주제가 필요했다.
결국 그가 찾아낸 것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었다. 케말주의하에서 오스만 제국의 역사는 대체로 후진성(後進性)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대신에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전통이 그 빈자리를 채울 때가 많았다. 그러나 대중은 이슬람의 칼리프로서 3개 대륙을 호령했던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여전히 기억하고 싶어 했다. 에르도안은 공식 행사와 대중문화에 걸친 전 영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강조하며, 튀르키예가 서구와 각을 세우고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 적극적인 행보를 펴는 것을 정당화했다. 국내적으로는 칼리프를 내세우고 이슬람과 현대화를 동시에 추구한 압둘하미드 2세를 더욱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이러한 튀르키예의 새로운 국가 이념 및 대외 정책을 몇몇 사람은 ‘신(新)오스만주의’라고 칭했다.
포퓰리즘 수사와 신오스만주의 등을 통해 핵심 지지층의 지지를 견고히 할 수 있었던 에르도안은 2016년 위기를 맞이한다. 그를 축출하려는 쿠데타가 발발한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힘이 이미 약화되었고, 시민들이 군부의 정치 개입을 더는 지지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쿠데타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나토 회원국이면서 상하이협력기구 가입
쿠데타를 빌미로 에르도안은 ‘세브르 트라우마’를 더욱 본격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케말주의는 유럽 열강의 침탈과 내부의 불온 세력이 세브르 조약이라는 굴욕을 만들어냈다는 트라우마를 활용해 권력을 유지했다. 그 점에서는 에르도안도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세력과 그들의 앞잡이인 불온 세력(주로 귈렌의 지지자들)이 튀르키예를 위협한다고 호소하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구도를 활용했다.
국내적으로는 자유주의자들과의 기존 동맹 관계를 대부분 청산하고, 대신에 극우적인 민족주의행동당과의 연대(連帶)를 구축하여 정치적 좌표를 더욱 오른쪽으로 옮겼다. 대내외적 위협에서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와 관료, 언론, 지식인층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진행되었고, 에르도안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에르도안은 미국에 페툴라 귈렌의 송환을 요구했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에르도안의 튀르키예와 서방 국가와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튀르키예는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미국과 중국의 갈등 격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겪으며 가시화된 자유주의 질서의 위기를 십분 활용하기 시작했다. 튀르키예는 나토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협의체인 상하이협력기구(SCO)에 가입을 신청했다. 튀르키예의 국내 담론 지형에서는 러시아 푸틴의 이데올로그인 알렉산드르 두긴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유라시아주의자’ 그룹이 더욱 목소리를 크게 내게 되었다.
물론 튀르키예가 그렇다고 완전히 반서방 진영으로 기울지는 않았다. 튀르키예는 자국산 드론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했고, 여전히 나토 가입국으로서 역내(域內) 안보 협력에 참여하고 있다.
에르도안주의

▲지난 5월 28일 에르도안 현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자 지지자들이 에르도안의 사진이 들어 있는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하지만 에르도안의 외교적 독자 노선은 물론이고, 국내적 권력 극대화를 위하여 경제에 자주 개입한 일들은 에르도안의 대표적인 치적이었던 경제 발전을 해칠 수밖에 없었다. 서구 지향적 전문가 계층이 국가에 더 환멸을 느끼고, 서구가 튀르키예의 금리(金利) 정책을 우려하면서, ‘에르도안으로는 안 된다’라는 반감이 청년층을 통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케말주의 시대에 계획경제와 세속주의에 반발한 청년층은 이슬람주의자가 되어 정권을 교체했다. 이제 그들은 중년층이 되었고, 대신에 이슬람을 지향하는 에르도안 시대에 반발하는 새로운 청년층이 등장하여 시대를 다시 ‘정상화’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튀르키예 국내외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하지만 2023년의 대통령 선거는 다수의 튀르키예인이 생각하는 ‘정상성(正常性)’은 케말주의보다는 ‘에르도안주의’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론 조사에서 공화인민당 후보 케말 클르츠다르올루가 우세를 점할 때도 있었으나, 실제 투표 결과는 에르도안의 낙승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를 알고 나서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 공화인민당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에르도안은 어쨌든 집권 초에는 케말주의의 실수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다수의 튀르키예인이 원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발표하여 열광적인 지지층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것은 케말주의의 완전한 청산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에르도안은 케말주의 시대부터 유구하게 지속되어온, ‘국가가 약해진다면 언제든지 서구의 위협이 가시화되고 내부의 적이 국가를 혼란하게 할 것이다’라는 세브르 트라우마를 계승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에르도안이 아타튀르크의 반대자가 아니라, 그의 한계를 넘어 그의 사상을 초극(超克)하고 완성한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야당 공화인민당, 새로운 비전 제시 실패
반대로 공화인민당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요컨대 야당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케말주의를 이슬람주의로 극복해낸 것처럼 그에 비견되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에는 에르도안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만들 수 없었다. 선거에서 이미 여러 번 패배했던, 무색무취의 노인 후보 케말 클르츠다르올루는 공화인민당이 새롭게 일신(一新)하기는커녕 여전히 노화(老化)된 채로 선거에 임했음을 보여준 명확한 상징이었다. 그에 비하면, 에르도안의 신오스만주의는 적어도 튀르키예가 과거를 극복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확실한 지향점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성공적으로 구현될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말이다.
2023년의 대통령 선거는 튀르키예의 미래가 ‘오스만 제국의 고차원적 부활’이 될 것인지, ‘서구 지향적 튀르키예공화국의 수복’이 될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양대(兩大) 세력의 결전이었다. 결국에는 승리자가 1923년부터 100년을 이어온 튀르키예공화국의 역사, 나아가서 그 앞 600년을 이어온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 갖는 의미를 규정할 것이었다.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600년 제국사와 100년 공화국사를 지배하게 된 2023년의 에르도안 정부는 앞으로도 튀르키예의 미래를 계속 지배하게 될 것이다.
역사관 차이 따른 정치적 대립 구도 재편
이 결과가 우리 세계에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21세기가 사반세기 가까이 진행되면서, 이미 20세기 역사의 많은 순간이 ‘100주년’으로서 기념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 20세기는 서구 제국주의가 끝나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자민족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새로운 정체(政體)를 수립한 탈식민(脫植民)의 시대로 기억될 때가 많다. 1905년의 러일전쟁, 1923년의 튀르키예공화국 건국은 세기 초에 선구적으로 아시아의 시대가 다시 시작될 것임을 선포한 사건들이었다.
그러고 1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아시아 각국에서 지난 100년을 새롭게 기억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늘어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2017년에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는커녕,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의 성스러운 전통을 훼손한 불온한 좌익들의 난동이었다고 암시하는 드라마 〈트로츠키〉를 방영하게 했다. 인도에서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자와할랄 네루의 세속주의 전통을 뒤집고 힌두교에 기반한 새로운 애국주의를 만들고자 한다. 그도 아마 2047년의 인도 독립 100주년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중공(中共)은 2021년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과 2049년 신중국 건국 100주년이라는 시간표를 바탕으로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요컨대, 고전적인 좌우 갈등 대신에 20세기에 본격화된 ‘아시아의 부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싼 역사관의 차이에 따라 정치적 대립 구도가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셈이다.
1923년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1947년의 자와할랄 네루는 아시아의 부흥을 서구 근대성을 아시아 민족들이 빠르게 수용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은 그 수단으로써 내향적(內向的) 국가 계획 경제에 의존했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대신에 시장경제와 전통을 결합시키고, 서구와 근대 대신에 ‘문명’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새로운 우익 집단들이 튀르키예와 인도 등지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들은 ‘아시아의 부흥’을 ‘전통의 현대적 재창조’라고 주창하고, 서구 근대성은 아시아 문명에 맞지 않으며, 문명은 각자만의 길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새뮤얼 헌팅턴은 이미 이런 경향을 면밀히 관찰하고 지난 세기 말에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정확히 예견한 바가 있다. 이제 서구적 보편주의에 입각한 이데올로기의 시대 대신에, 문명 간의 다원적 경쟁이 시작되면서 서구 근대는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이다. 지난 100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튀르키예에서는 이미 문명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아직 끝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오스만 전통을 지지하는 이들이 100주년을 맞이하여 중요한 승리를 거둔 것은 분명하다.
에르도안과 모디의 성공

▲에르도안 대통령과 모디 인도 총리는 현대성과 전통 사이에서 고민하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사진=AP/뉴시스
자연스럽게 한국의 100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올해로 건국 75주년을 맞이했다. 사반세기가 더 지나면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그간 대한민국의 역사는 북한, 중공, 소련의 공산 세력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수호해온 역사로 기억되고는 했다. 그리고 극동 지역에 공산당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좌우 이념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는 점은 튀르키예나 인도와 명백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지난 100년의 역사를 서구적 근대성을 빠르게 수용하고자 하는 문명개화 세력과 성리학적 전통에 입각한 과거를 계속 기념하고자 하는 신(新) 사대부 운동권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논의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좌우 이념 대립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 그 내용은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전통과 현대 사이의 역사 전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도 아마 2027년의 대통령 선거가, 2048년 건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 역사 전쟁의 승자를 정하는 중요한 정치적 기점이 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튀르키예는 한국의 중요한 참조가 되어준다.
그래서 여기서 단순히 서구적 근대화, 문명개화 세력의 승리를 기원하기만은 어렵다. 케말주의 공화인민당의 패배는 그들이 아무리 국가 수호와 현대화에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통 문명을 향한 인간의 본원적 향수를 지워낼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현재 유럽과 아시아의 숱한 극우 세력이 서구 근대를 대신할 전통 사상의 깃발 아래 결집하고 있음은 이런 의미에서 심상치 않은 흐름이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 새로운 시대는 현대성과 전통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류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이들이 주도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싶다. 물론 전통을 외치며 자신들의 삐뚤어진 권력욕을 정당화시키는 북한과 같은 극단적인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인도의 모디 정권이나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정권을 만들어낸 그 힘은 분명히 함부로 야만적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뿌리가 있다.
‘건국 100주년’을 향한 역사 전쟁
사실 대한민국도 전통과 현대를 초극하고자 했던 전례가 있다. 1978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설립했다. 이는 한국 철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한뫼 안호상(安浩相·1902~1999년)과 열암 박종홍(冽巖 朴鍾鴻·1903~1976년)의 유지를 따른 것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이루어진 한강의 기적이라는 서구적 근대화와 한국 전통을 조화하고자 했던 중요한 시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이러한 시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한뫼와 열암의 지적 전통도 대중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지 않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시도를 계승하여, 대한민국 국가 수호와 발전의 관점에서 전통과 현대를 종합하고자 하는 새로운 지적 흐름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48년이 다가올수록, 튀르키예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관과 세계관을 둘러싼 쟁투는 더욱 격해질 것이다. 아시아와 세계를 보며 우리는 어떻게 100주년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월간조선 11월 호 글 : 임명묵 작가
■에르도안 정권 이후 변화하는 튀르키예의 대외 정책
비자유주의 러시아·이란·중국과 밀착, 미국·유럽과 멀어져
⊙ 에르도안, 이념적으로 상충되는 민족주의·신오스만주의·유라시아주의 추구
⊙ 건국 초기에는 친서구-중립 정책, 냉전 시기에는 한국전쟁 참전 후 나토 가입
⊙ 에르도안, 집권 초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시리아 내전, 이란 핵 합의 등에서 중재자로 활약
⊙ 튀르키예, 나토 회원국이면서도 최근 러시아의 S-400 방공 시스템 도입
張志向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어과 졸업, 同 정치학 석사(중동 지역학과),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학교 정치학 박사 /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아산서원 교수 역임. 現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 산업통상자원부·법무부·대외경제정책연구원 자문위원 / 논문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아산정책연구원, 2018) 등

▲2022년 8월 25일 셀주크튀르크 제국군이 비잔틴 제국군에게 승리한 만지케르트전투 951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사진=튀르키예 대통령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정부가 영국·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그리스 등 연합군의 영토 분할에 속수무책이자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연합군은 케말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에 밀렸고 양측은 1923년에 로잔 조약을 체결해 현재 튀르키예공화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최종 국경선에 합의했다. 이로써 다민족(多民族)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제국은 아랍과 유럽 영토를 모두 잃은 후 해체되고 세속주의(世俗主義) 튀르키예 국민국가가 새롭게 탄생했다. 1923년 튀르키예공화국의 선포와 함께 케말 장군은 초대(初代) 대통령이 됐다.
튀르키예공화국은 강경 세속주의자 엘리트 주도의 권위주의 일당 체제로 출발했다. 케말 대통령과 군부(軍部)가 설립한 공화인민당 체제에서는 강압적이고 급진적인 세속화 정책이 시행됐다. 1934년 의회는 케말 대통령에게 ‘튀르키예인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칭호를 부여해 신격화(神格化)했다.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한 군부는 케말주의로 대표되는 튀르키예 민족주의와 강경 세속주의를 오스만 제국과 이슬람 전통을 대체할 국시(國是)로 제도화했다. 튀르키예 내 쿠르드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세력을 국가 통합의 적으로 여겼다.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갈등
이후 현대 튀르키예 정치는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세력 간의 갈등 속에 발전해왔다. 국가는 쿠르드 민족의 존재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이들에게 ‘산에 거주하는 튀르키예인’이라는 정체성(正體性)을 강제로 부여했다. 함께 박해받던 이슬람주의와 쿠르드 민족주의 세력은 민주화의 구호 아래 종종 연합하기도 했다.
소수(少數)의 서구화된 도시 엘리트인 세속주의자 군부와 관료는 중앙집권화와 민족의 동질화를 강조했다. 구체제의 상징인 이슬람 관련 조직들은 해체됐다. 이슬람 정당의 결성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종교 이용이 법으로 금지됐다. 종교의 공식 활동은 국가의 허가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권위주의 국가가 강권기구를 앞세워 행한 이슬람 통제는 지방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1946년 공화인민당 정부가 복수 정당제 시행을 약속하면서 일당 지배 체제는 끝이 났다.
1950년 첫 민주 선거에서 20년 넘게 일당 체제를 지켜온 공화인민당은 이슬람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인 민주당에 크게 패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정권을 잡은 지 10년 만인 1960년 포퓰리즘을 확산해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이유로 군부에 의해 해산됐다.
군부의 정치 개입은 이후 10년 주기로 1971년과 1980년 두 차례 더 나타났다. 1970년에 이슬람 정당 설립이 처음으로 허가되면서 민족질서당이 창당됐으나 1년 후 군부에 의해 불법화됐다. 뒤를 이은 민족구세당은 선거에서 선전해 1974년과 1977년 두 차례 연립정부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1970년대에 등장한 연립정부들은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혼란에 빠진 정국을 수습하지 못했다. 결국 1980년 군부는 3차 개입을 단행해 주요 정당을 해산했다.
이슬람 정당의 대두
3년여 군부 개입이 끝난 1983년부터 튀르키예는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 시기에 들어섰고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조직 간의 불안한 공존이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경제 전문가이자 쿠르드계인 투르구트 외잘이 총리에 당선돼 시장경제 활성화와 이슬람 통제 완화 정책을 펼치면서 튀르키예는 자유화 물결 속 번영기를 맞았다. 그러나 외잘 총리 시대가 끝나고 1990년대에 들어서자 강경 세속주의자 엘리트의 과도한 영향력, 우파의 부정부패, 좌파의 무능으로 튀르키예는 정치 불안정과 경제 침체기에 들어섰다.
이슬람 정당은 1970년 처음 결성된 이래 1971년, 1980년, 1998년, 2001년 군부에 의해 네 차례 해산됐다. 민족구세당이 1980년에 해산된 후 1983년 복지당이 조직됐으나 1998년 다시금 해체됐다. 이슬람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복지당이 해산된 후 결성된 미덕당 내에서는 튀르키예 이슬람 정당의 30여 년 역사상 처음으로 심각한 분열이 생겨났다. 강경 세속주의 국가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온 결속이 전통 보수파와 신진 개혁파 사이의 첨예한 갈등으로 무너진 것이다. 이스탄불 시장을 역임(1994~1998)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개혁파를 이끌며 종교 색채가 짙은 당 강령을 수정하고 지금껏 보수파가 불투명한 인선 과정으로 장악한 당 지도부를 민주적 절차로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또 20년 넘게 이어진 네지메틴 에르바칸 당대표의 일인 체제, 급진적인 하부 활동가 조직을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미덕당은 당 역사상 최초로 지도부 선거를 치렀고 보수파가 개혁파를 적은 표 차로 간신히 따돌렸다. 보수파의 권위와 지도력이 실추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01년 미덕당은 군부에 의해 다시 불법화됐다.
나토에 가입한 이슬람 국가

▲튀르키예는 1974년 키프로스를 침공, 북키프로스튀르키예공화국을 수립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이슬람 제국의 과거를 철저히 부정하며 출발한 튀르키예공화국은 친서구(親西歐) 정책을 펼치며 서구 블록의 우방국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신생 공화국의 엘리트는 아직 국가 기틀을 확립하지 못한 자국의 상황을 고려해 중립 입장을 결정했다.
이후 국경을 접한 소련이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무력(武力)시위를 계속 벌이자 튀르키예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한 후 마셜 플랜의 원조 대상국으로 튀르키예를 지정했다. 미소(美蘇) 갈등 구도에서 자유 진영의 소속임을 명확히 한 튀르키예는 1949년 이스라엘의 건국 직후 무슬림 국가 가운데 최초로 이를 인정했다. 1950년 한국전쟁에도 참전,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튀르키예는 1952년에는 나토 가입에 성공했다.
1970년대 튀르키예는 튀르키예계와 그리스계가 갈등을 빚어온 독립국 키프로스를 두고 그리스와 전쟁을 벌여 북키프로스튀르키예공화국을 세웠다(북키프로스튀르키예공화국은 튀르키예 외에는 그 어느 나라로부터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와의 갈등은 1959년에 튀르키예가 신청한 유럽경제공동체(EEC) 회원국 가입 협상을 순탄치 않게 했다.
그럼에도 튀르키예는 나토 회원국으로서 서구와의 동맹 관계를 지켜왔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튀르키예는 미국에 자국의 군사기지 사용을 허락했고 이 때문에 이라크는 튀르키예에 선제(先制)공격을 선포해 양국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다. 나토 사무총장은 만약 이라크가 튀르키예를 공격한다면 강력하게 보복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1990년대에 걸쳐 튀르키예는 미국의 대(對)이라크, 대이란 봉쇄 정책에 적극 참여했다.
이슬람주의자 에르도안의 부상
2001년 친이슬람주의 정당인 미덕당이 군부에 의해 해산되자 이스탄불 민선 시장 출신인 에르도안은 개혁파 성향의 신진 이슬람주의자를 모아 정의개발당을 세웠다. 정의개발당은 에르도안과 경제학자 출신인 압둘라 귈의 연합 리더십 아래 전문직을 다수 충원했고 중도 실용 노선을 내세웠다. 젊은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스탄불 시장 시절 깨끗한 시정(市政)으로 높은 인기를 누린 카리스마 넘치는 에르도안에 열광했다. 새로운 이슬람 정당은 시장경제, 선거 경쟁, 다원주의(多元主義), 법치(法治)를 강조하고 반(反)서구주의 대신 민영화와 세계화를 지지했으며 튀르키예의 유럽연합 가입을 적극 옹호했다. 1980년대 외잘 총리의 보수적 자유주의를 계승해 시장과 전통의 조화를 강조한 이들은 이슬람이 큰 정부와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닮았다고도 할 수 있다.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층 세속주의 정당에 지친 유권자는 정의개발당에 매료됐다. 정의개발당은 기성 정당의 대안 정당으로서 입지를 확실히 어필했다. 에르도안 정의개발당 설립자는 이슬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며 화려하게 부상(浮上)했다.
온건 이슬람주의 성향의 정의개발당은 창당 이듬해인 2002년 돌풍을 일으키며 총선에서 압승했고 2003년 단일 정부를 구성했다. 튀르키예 정치권에서 다수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해 단일 정부를 꾸리기는 1987년 이후 처음이었다. 10년 가까이 삐걱거리는 연립정부로 이어가던 불안한 정국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 후로도 10여 년간 정의개발당은 큰 어려움 없이 단일 정부를 구성했다.
정의개발당 정부는 군부의 정치 개입 금지, 쿠르드 소수민족 보호, 사형제 폐지 개혁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국제규범과 다자주의(多者主義)를 앞세운 중견국 외교를 활발히 벌여 튀르키예의 국제적 평판을 끌어올렸다. 이에 더해 에르도안 총리의 재임 10년여간 튀르키예의 1인당 국민소득이 세 배 이상 늘었고 2010년에는 44년 만에 최저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팔레스타인 정치 조직 파타와 하마스의 갈등, 시리아 내전, 이란 핵 합의 등에서 역내(域內) 중재자로도 뛰었다. 2011년에 일어난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 직후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가 실시한 아랍권 여론조사에서 에르도안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꼽혔다. 2009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튀르키예 국회 연설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끈 에르도안 총리의 리더십을 치하했다. 나토와 G20 회원국이자 유럽연합 후보국인 튀르키예는 2013년 중견국 협의체 믹타(MIKTA)를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창립했다. 이들 중견국 회원국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 중심의 힘의 논리에 반대하고 국제규범과 가치,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도모를 주장했다.
튀르키예는 특히 중동 내 인도주의 확산과 테러리즘 강경 대응을 강조했다. 당시 아흐메트 다부트오울루 외교부 장관(2009~2014)은 ‘이웃과 문제없이 지내기(Zero Problems with Neighbors)’ 원칙을 선언하며 국제사회 공조를 역설했다. 이를 두고 시리아·리비아·예멘 내전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ISIS의 발호로 인해 역내 혼란과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자국 입지를 강화하려는 시도라는 일부 비판이 있었으나 튀르키예의 중견국 외교는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페툴라 귈렌 문제로 미국과 관계 멀어져

▲2017년 5월 22일 법정으로 출두하는 아킨 오즈투르크 전 공군사령관 등 쿠데타 주모자들. 쿠데타 연루 혐의로 16만 명 이상이 해직되거나 투옥됐다. 사진=AP/뉴시스
2003년 총리직에 오른 에르도안은 2007년에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직선제(直選制)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7년 단임(單任) 임기를 5년 연임(連任)으로 바꿨다. 많은 사람이 에르도안 총리의 은퇴 이후 국가 원로 자리쯤을 마련하는 것이라 여겼지, 제왕적 대통령제를 위한 첫 단계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2011년 세 번째 연임에 성공한 후부터 에르도안 총리는 권위주의적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3년 이스탄불 게지 공원의 재개발에 항의하는 평화 시위를 진압하고, 이에 반대하는 당내 온건파와 갈등을 벌였다. 이와 함께 정의개발당을 함께 키웠던 옛 동지인 이슬람 은행과 기업 및 수니파 종단 회원들을 축출했다. 그의 권위주의적 의사 결정 방식과 친인척 비리를 비판했다는 게 이유였다. 3회 연임으로 더는 총리직을 맡을 수 없게 된 에르도안은 2014년 실시된 대선(大選)에서 51.7%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6년 7월 자신을 겨냥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강도 높은 공안 정치를 실시했다. 2년간 국가 비상사태가 이어지면서 군(軍)·경찰·검찰·행정 관료는 물론 교사와 언론인을 포함해 16만 명 이상이 해임되거나 투옥됐다. 소신을 피력한 총리와 장관이 줄지어 경질되고 대통령의 40대 사위가 에너지부와 재무부의 수장이 됐다.
쿠데타는 군부 내 페툴라 종단 소속 온건 이슬람주의 성향의 장교단이 주도했다. 세속주의자 군인도 일부 포함된 쿠데타 가담자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향한 사회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나머지 군부와 시민 다수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는 주변 동료의 의중과 군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는 성숙한 민의(民意)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2000년대 초 이래로 정의개발당 정부가 케말주의의 수호자였던 군부를 길들이면서 군의 응집력이 급격히 약해진 사실도 계산하지 못했다.
쿠데타 진압 직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 3대 종단의 하나인 페툴라 종단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고 종단의 창시자이자 대표적 이슬람 자본가인 페툴라 귈렌을 국가전복 혐의로 기소했다. 과거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에 머무는 귈렌의 즉각 소환을 미 정부에 요청했으나 미국은 증거 부족으로 거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7년에 의원내각제 폐지와 제왕적 대통령 중심제 도입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찬성 51.4%로 개헌에 또 성공했다. 이로써 초장기 집권 기반을 마련했다. 2018년 대선에서 52.5%, 2023년 대선에서 52.1%로 3연임에 성공했다. 오스만 제국의 최고 지도자인 술탄이 누린 ‘절대 권력’을 에르도안 대통령의 막강 파워에 비유하는 이유다.
상충하는 이념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0년 10월 7일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를 박물관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되돌린다고 선언했다. 사진=튀르키예 대통령실
매년 전 세계 200여 나라의 민주주의 정도를 측정하는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2023년 튀르키예의 민주주의 지수는 32로 역내 왕정 국가인 모로코와 요르단보다 낮고 장기 권위주의 국가인 알제리와 같다. 튀르키예처럼 민주주의 없는 선거제도를 시행하는 ‘하이브리드 정권’은 이란을 비롯해 전 세계에 다수 존재한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G20 회원국인 튀르키예를 우간다, 탄자니아 등이 속한 투자 ‘주의’ 등급으로 구분했다.
에르도안의 권위주의 체제가 모습을 드러낸 2010년대 중반 이후 튀르키예의 외교 정책도 팽창주의 행보를 보였다. 정책의 기조는 튀르키예 민족주의, 신오스만주의, 유라시아주의로 서로 양립하기 어렵고 상충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포퓰리스트의 단골 메뉴인 배타적 민족주의와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신오스만주의는 튀르키예에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다. 이슬람주의자 에르도안이 다민족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의 향수를 소환하는 건 어색하진 않다. 하지만 튀르키예 민족주의는 국부(國父)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의 칼리프제를 폐지하고 세운 세속주의 근대국가의 국시다. 에르도안은 정계에 입문한 1970년대부터 군부의 탄압을 받았으며 소속된 이슬람 정당이 세 차례 해산되고 본인이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에르도안이 집권 10여 년 후 이슬람주의자를 짓밟던 아타튀르크 코스프레에 나서며 자신을 21세기 국부로 묘사했다. 모순되고 당황스러운 돌변이다. 당시 불거진 에르도안의 권위주의 행보로 유권자가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에르도안이 당내 온건파를 숙청하자 2015년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해 13년 만에 처음으로 단일 정부 구성에 실패했다. 반면 쿠르드계 정당은 제4당으로 약진했다. 에르도안은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앞세워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민족운동당과 연합을 맺고 이들의 도움으로 2017년 제왕적 대통령제 개헌을 51%로 통과시켰다. 민족운동당은 튀르키예 민족 우월주의와 외국인 혐오를 외치는 네오파시즘 정당이다.
신오스만주의
돌연 골수 민족주의자가 된 에르도안은 인구의 20%에 달하는 쿠르드계를 테러리스트로 몰고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2011년 이래 자국으로 피신해온 시리아 난민 370만 명을 쫓아내겠다고 선언했다. 집권 초기 쿠르드 민족의 권익 보호를 역설하며 선한 무슬림의 덕목을 강조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로써 무슬림 민주주의 구호 아래 시행한 쿠르드 소수민족 보호 제도는 폐기되고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시리아 내전과 ISIS 격퇴전에서 맹활약한 쿠르드계 시리아 민병대가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자 2019년 튀르키예 정부는 이들 민병대가 자국 내 분리주의 테러 조직인 쿠르드노동자당의 연계 조직이라며 시리아 내 쿠르드계 자치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신오스만주의 정책은 과거 발칸반도까지 지배한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자며 역내 패권(覇權) 추구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튀르키예는 2019년 장기 내전 중인 리비아의 서부 이슬람주의 정부와 그리스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침범하는 동지중해 협정을 일방적으로 체결해 국제법을 어겼다. 이미 한 해 전부터 동지중해의 에너지 자원 개발 문제로 그리스, 키프로스, 유럽연합과 대립해왔고 같은 문제로 역내 이스라엘, 이집트와도 충돌했다. 2020년에는 리비아에 자국군을 파병해, 동부 투브루크 세속주의 리비아 국민군과 싸우는 서부 트리폴리 이슬람주의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을 본격화했다.
중국·러시아에 접근
같은 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박물관을 모스크로 전환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교분리 원칙으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와 싸우겠다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정신감정이 필요하다며 독설을 쏟아냈다.
더불어 유라시아주의를 앞세워 튀르키예가 나아갈 방향은 서쪽의 유럽이 아닌 동쪽의 유라시아라고 주장하며 러시아, 중국과 빠르게 밀착했다. 나토 회원국인 튀르키예는 러시아제 지대공미사일 S-400 시스템을 인도받아 2020년에 시험 발사까지 마쳤다. S-400 시스템은 미국의 차세대 주력 기종인 F-35 전투기와 같은 스텔스기를 탐지할 수 있다. 나토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군대를 보유한 튀르키예에는 나토의 탄도미사일 방어 레이더 시스템과 미국의 핵무기가 있다. 미국과 유럽 회원국이 제재를 경고했으나 튀르키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또 튀르키예는 유엔이 아닌 러시아가 주도하는 시리아 종전 협상에 이란과 함께 적극 협력해왔다. 중국이 신장위구르 자치 지역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무슬림의 통제 관리에 협력을 요청하자 대테러 정책의 일환이라며 기꺼이 응했다. 이렇듯 역내외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질서를 주도하는 러시아와 이란, 중국과 밀착하면서 인권·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하는 미국, 유럽과는 멀어졌다.
미국의 탈중동 정책

▲에르도안 대통령은 9월 4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AP/뉴시스
나토 회원국 튀르키예의 외교 정책 일탈에는 탈중동 전략 선언 후 미국의 신뢰도 하락, 시리아 내전에서 급부상한 러시아의 영향력, 무슬림 난민 위기와 극우 민족주의 발호에 따른 유럽의 관망으로 요약되는 지정학의 지각 변동이란 배경이 있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중동 내 역할 축소를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장기 참전에 따른 전쟁 피로감과 여론 악화, 셰일 에너지 자원 개발에 따른 중동 의존도 하락, 중국 견제를 목표로 한 아시아 중시 정책의 부상 때문이었다.
오바마 정부는 시리아 내전에서 민간인을 향한 알아사드 정권의 화학무기 공격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 역시 중동에서 발 빼기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며 시리아 철군(撤軍)을 강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의 친분을 과시했지만 2019년에 이란의 지원을 받은 예멘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유시설을 공격했음에도 대응하지 않았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거래식 동맹관, 신고립주의는 미국의 입지 약화, 러시아의 틈새 진출, 역내 미 동맹 우방국의 일탈을 부추겼다. 2021년에 출범한 바이든 정부 역시 ‘인도-태평양’을 대외 정책의 중점 지역으로 선언하고 그해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강행하면서 탈중동론에 쐐기를 박았다.
반면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서 역내 후원국 시리아를 끝까지 보호했고 이란도 이를 적극 도왔다. 시리아에 자국 공군과 해군 기지를 둔 러시아는 반군, 민간인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전투병, 용병, 무기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이란 혁명수비대도 대규모 지상군과 민병대를 보냈다. 나아가 러시아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제출한 시리아 정부의 인권유린 및 화학무기 사용 진상 조사 결의안 12건, 시리아 이들리브 지역 휴전 촉구 결의안 1건 모두를 반대하면서 후원국 시리아를 감쌌다. 이후 시리아 재건 복구 시장에 러시아와 이란 기업이 대거 참여했고 중국도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다.
또 튀르키예가 시리아 내 쿠르드계 자치 지역을 기습 공격했을 때 미국 정부는 방관했으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점령 지역을 안전지대로 지정해 공동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중동에서 발을 빼겠다는 미국 대신 러시아에 밀착했다.
중동 지정학의 혼란
튀르키예의 이런 행동들에 대해 유럽 국가들도 국내 반(反)이민 여론을 의식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유럽행을 원하는 자국 내 시리아 난민에게 문을 활짝 열겠다며 위협했기 때문이다. 2016년 이미 유럽연합(EU)은 튀르키예와 난민 송환 협약을 맺어 그리스에 머물던 시리아 난민을 튀르키예로 보내 튀르키예 정부의 관리하에 두기로 합의했다. 튀르키예는 유럽연합이 제공한 시리아 난민 지원금을 시리아 쿠르드계 자치 지역을 압박하는 국경지대 군사비로 전용(轉用)하더니 유럽연합에 추가 지원까지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럼에도 유럽 국가는 튀르키예의 ‘난민 비즈니스’ 앞에서 인권과 민주주의에 기초한 관여 정책이 아닌 관망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에르도안 대통령 같은 권위주의 지도자는 유럽에서 퍼지는 국수주의(國粹主義)와 반세계주의를 환영한다. 권위주의 체제를 향한 비판에서 점차 멀어지기 때문이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여러 나라가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해 우크라이나를 지지했다. 그런데 미국의 역내 동맹 우방국을 포함한 중동 국가 대다수는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미국이 요청한 제재 참여와 원유(原油) 증산을 거절했다. 튀르키예와 이스라엘도 제재 동참 대신 대화를 강조했다. 중동의 시민들은 7년여 전 시리아 내전에서 러시아가 시리아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했을 때와 사뭇 다른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러시아 비난에 이중 잣대라며 곱지 않은 눈으로 봤다. 러시아가 과거 만행을 저질렀을 당시 즉각 응징했더라면 푸틴 대통령이 지금처럼 기고만장하지 못했을 거라며 혀를 차기도 했다.
중동에서도 미중 경쟁은 치열하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려고 중동을 떠나 아시아로 향한다지만 중국은 에너지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튀르키예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 이란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어 협력을 다져왔다. 현재 중동에서는 트럼프 정부 시기에 굳어진 미국의 신뢰도 추락과 힘의 공백을 틈타 튀르키예와 이란이 제국의 영광을 불러내 패권주의 행보를 드러내며 경쟁과 협력을 오가고 있다. 오늘날 중동 지정학의 혼란에는 이들의 반미(反美) 연대 공고화도 포함된다.
최근 이웃 국가들과 관계 개선 모색
2019년 이래 튀르키예의 국내 총생산은 줄었지만 공격적인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해 국방비는 늘어났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3년의 선거를 1년여 앞두고 극심한 경제난으로 정권 재창출이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는 대외 관계 회복에 나섰다. 2022년 2월에는 9년여 만에 처음으로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해 투자 유치에 나서며 화해를 모색했다. 이어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 이스탄불에서 일어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반정부 언론인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궐석재판을 사우디아라비아 법원에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두 달 후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튀르키예를 방문해 양국 투자 강화 협정에 서명했다. 또 에르도안 대통령은 4년 만에 주이스라엘 대사를 다시 임명해 두 나라 간 대사급 관계를 회복했다. 이에 더해 2013년 쿠데타로 무슬림형제단 정부를 축출한 시시 이집트 대통령과도 관계 회복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2023년 5월 대선에서 승리한 후에도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장기 집권해 ‘21세기 술탄’이라 불리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한 튀르키예의 외교 정책은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의지에 흔들릴 것이다.⊙
월간조선 11월 호
11.04 땅의 이야기를 듣다,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하늘을 수놓은 열기구. 이 열기구들은 매일 아침 일찍 동시에 떠오른다.
주인은 쉴 새 없이 바뀌어 왔다. 땅은 숨을 죽인 채 격동의 역사를 견뎌냈다. 그렇게 아나톨리아(Anatolia)는 신비로 가득 찬 땅이 됐다.
‘인류 최초의 철기 민족’ 히타이트인이 문명을 이룩한 곳도, 트로이 전쟁의 배경이 됐던 곳도 바로 아나톨리아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도 이곳은 성지(聖地)다. 사도 바울은 아나톨리아 곳곳을 여행하며 선교에 힘썼다. 신약 성경의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등이 이곳에서 쓰였다.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의 주인이 된 뒤로는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가 됐다. 그중 오스만 제국은 한때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할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 지금의 튀르키예는 켜켜이 퇴적된 역사 위에 서 있다.

▲이스탄불 루멜리 히사르 요새 타워. 오스만 제국 초기 건설됐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데니즐리 히에라폴리스. 12사도 중 한 사람인 사도 빌립이 이곳에서 순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나톨리아의 신비로운 이야기는 매년 전 세계 수천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쓴 ‘인류 최고의 이야기꾼’ 호메로스가 이곳 출신이니 이야기는 차고 넘쳐날 수밖에.
열기구를 타고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奇巖怪石)을 내려다본다. ‘카파도키아를 보니 굳이 달에 갈 필요가 없었다’는 닐 암스트롱의 출처 불분명한 말이 꼭 진실처럼 다가온다. 석회 온천 파묵칼레도 그냥 지나치기 아쉽다. 해질 무렵의 파묵칼레는 그야말로 핑크빛 장관이다. 클레오파트라도 이곳을 자주 찾아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천년고도(千年古都)’ 이스탄불의 뒷골목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홀짝인다. 고양이들이 다가와 무릎에 앉는다. 튀르키예에 길고양이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했더니 무슬림들은 고양이를 신성한 동물로 여긴단다. 튀르키예 남부 안탈리아의 10월은 여전히 여름이다. 지중해 푸른 바다에 뛰어들어 여름의 끝을 붙잡아본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튀르키예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안탈리아 아스펜도스 극장. 고대 로마 극장 중 가장 완전한 보존 상태를 자랑한다.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성당. 6세기 건립됐다. 현재는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안탈리아 뒤덴 폭포. 토러스 산맥 위 눈 녹은 물이 절벽을 타고 40m 아래 바다로 떨어진다.
월간조선 11월 호 글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사진제공 : 주한튀르키예대사관
11.29 칠면조와 튀르키예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
‘튀르크인의 나라’ 튀르키예는 오랫동안 터키라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그 호칭을 사양했다. 영어로 터키는 칠면조를 뜻하는데, 그 새는 날지 못해서 멍청이, 실패자, 겁쟁이로 통한다. 그러니 용맹을 자랑하는 튀르크인들은 터키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랍인들은 칠면조를 ‘디크 하바시’ 즉, ‘에티오피아 새’라고 부른다. 프랑스인들은 칠면조를 ‘댕드(dinde)’ 즉 ‘인도 새’라고 부른다. 옛날 인도는 에티오피아를 포함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칠면조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가 아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이다. 그곳을 식민지로 삼았던 포르투갈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칠면조를 ‘얄리냐 도 페루’ 즉 ‘페루 닭’이라고 불렀다. 15세기의 페루는 아메리카 대륙을 의미했다.
그런데 포르투갈 상인들이 ‘페루 닭’을 유럽 다른 나라에 팔 때는 ‘튀르크 닭’이라고 속였다. 비싸게 팔기 위해서였다. 당시 유럽에 ‘튀르크 닭’으로 알려진 새가 있었는데, 칠면조와 생김새가 비슷하면서도 맛과 영양가가 좋았다.
‘튀르크 닭’이라 부르던 그 새의 정식 이름은 기니파울이다. 튀르크 제국 맘루크 술탄이 에티오피아에서 잡은 그 새를 유럽에 선물했기 때문에 ‘튀르크 닭’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포르투갈의 상술이 칠면조를 끌어들여 그 혼란을 증폭했다. 그 바람에 기니파울, 에티오피아, 인도, 칠면조, 페루, 튀르크가 뒤엉켜 버렸다. 그래서 독일어에는 칠면조를 부르는 단어가 여섯이나 된다.
칠면조와 튀르키예는 관계가 없다. 칠면조와 튀르키예가 얽히게 된 복잡한 일화 속에 한 가지 진실이 있다. 기니파울을 선물하던 시절 튀르크 제국은 유럽인들에게 공포와 경외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앞다투어 ‘터키 행진곡’을 작곡한 이유도 터키, 즉 튀르크 제국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고 보면, 터키라는 나라 이름이 나쁘지만은 않다.
조선일보 차현진 예금보험공사 이사
2024.02.10 겨울의 이스탄불
가성비 좋고 제주도보다 따뜻한 ‘유럽 속의 이슬람 도시’

▲아야 소피아 사원. 그리스 정교회의 성당에서 이슬람 모스크로, 박물관으로 바뀌었다가 2020년 7월 에르도안 대통령에 의해 다시 모스크로 돌아갔다.
작년 12월 말, 6년 만에 이스탄불을 여행했다. 유럽의 끄트머리이고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터키) 땅이지만, 그래도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은 것이다.
이스탄불은 한국의 경주, 일본의 교토(京都)와 함께 세계 3대 천년고도(千年古都) 중 하나다.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된 이래 1600년 가까이 제국의 수도였다. 1100년간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500년은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수도였고, 오늘날에는 튀르키예의 ‘경제수도’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스탄불은 ‘유럽 속의 이슬람 도시’다. 동로마제국 시절의 수도교(水道橋)와 테오도시우스성벽,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의 성당, 이슬람교의 모스크, 현대식 마천루들, 그리고 바다가 어우러진 도시가 세상에 또 있을까?

▲마르마라해(海)와 보스포루스해협을 바쁘게 오가는 선박들. 왼쪽에 술레이마니예 모스크가 보인다.

▲‘난공불락(難攻不落)’으로 이름을 떨쳤던 비잔틴 성벽. 대부분이 세월의 무게 속에 무너져내려 황성(荒城)이 되어버렸지만,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의 메메드 2세가 입성한 이곳은 근사하게 복원되어 있다.
봄날의 이스탄불도 좋았지만, 12월의 이스탄불도 좋았다. 우기(雨期)여서 비가 오면 날씨가 추워진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이스탄불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기온은 15~16℃ 정도로 제주도보다 따뜻한 날씨였다. 걸어 다니기 딱 좋았다. 현지 젊은이들 중에는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이들도 많았다. 하늘은 눈부시도록 새파랬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오후 4시 반이면 해가 떨어진다는 것 정도였다.
이스탄불은 관광객들에게 가성비가 좋은 도시다. 1튀르키예리라(TL)가 44원 정도. 6년 전에는 285원이었다. 튀르키예인은 고단하겠지만, 관광객들은 행복하다. 호텔의 경우 파리나 로마에서 15~18㎡ 정도의 방에서 묵을 정도의 비용이면 30㎡ 이상 되는 넓은 방을 이용할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 요금은 15TL(한화 660원 정도)인데, 환승은 안 된다. 음식 값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무척 싼 수준이다. 특히 면으로 된 매트와 같은 토산품(土産品)은 아주 착한 가격에 살 수 있다.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아드난 멘데레스(1883~1961년) 전 총리의 영묘(靈廟). 멘데레스는 이슬람 전통을 다소간 회복하려다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후 처형됐다.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작가였던 피에르 로티(1850~1923년)가 연인과 사랑을 나누었다는 피에르 로티 언덕의 카페. 금각만(金角灣)이 내려다보인다.
이스탄불은 애연가(愛煙家)들의 천국이다. 길거리에서는 물론이고 식당, 카페, 호텔에서도 마음대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이스탄불은 개와 고양이의 천국이기도 하다. 아야 소피아 사원 앞이건, 이슬람 성인을 모신 아야 에펜디건, 도로나 테이블, 벤치를 차지하고 쿨쿨 자고 있는 개나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다. 송아지만 한 개가 스타벅스 가게 안을 어슬렁거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젊음의 거리’ 이스티크랄. 오후 5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해가 지고 있다.

▲2021년 이스탄불의 중심지 탁심광장에 들어선 탁심모스크의 야경. 이슬람 정체성을 회복해가는 튀르키예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평범한 식당에서도 국부 아타튀르크의 사진을 걸어놓은 것이 인상적이어서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종업원이 잽싸게 달려와 포즈를 취한다.

▲2023년 튀르키예공화국 건국 100주년을 맞아 거리 곳곳에는 국부 아타튀르크의 사진과 국기가 내걸렸다.

▲세계 3대 스타벅스’ 중 하나라는 스타벅스 베벡의 테라스에서 본 보스포루스해협. 아침 9시인데도 여명의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디.

▲피에르 로티 언덕 카페의 고양이. 버젓이 테이블 위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슬람 성인 에펜디를 모신 아야 에펜디에서 만난 고양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주무시고 있다.
글·사진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03.04 키이우까지 1150㎞, 가자까지 1151㎞… 이스탄불은 오늘도 ‘지정학적 고민 중’
이스탄불은 아름답다. 풍광도 수려하지만 이질적인 것들이 다투지 않고 어우러지는 공존의 미학이 핵심이다. 동로마 기독교의 심장이었던 성소피아 사원과 이슬람 술탄의 상징인 블루모스크가 나란히 서 있다. 중세 오스만 제국 유적들의 실루엣은 신도시 마천루들의 스카이라인과 이어지며 묘한 대비를 이룬다. 최대 번화가 이스티클랄 거리에는 이슬람 복식으로 몸 가린 여성들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거리낌 없이 섞여 걷는다.
도시는 두 대륙을 하나로 품는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는 세 개의 대교와 두 개의 터널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다. 바다 위로 페리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시민들을 실어 나른다. 옆 동네 마실 가듯 대륙을 넘나드는 이른바 유라시아시(市)다.
공존의 미학에는 필연적인 긴장이 따른다. 이스탄불은 경계가 갖는 고단함을 품고 있다. 두 가지다. 하나는 지질학의 경계, 즉 충돌하는 지각판 위를 살아가는 지진의 공포다. 다른 하나는 주변의 이질적 국가들과 충돌하며 지정학적 경계를 살아가는 이의 부담이다.

▲그래픽=송윤혜
작년 2월 튀르키예 남부 대지진은 이 땅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새삼 각인시켰다. 튀르키예는 유라시아판, 아라비아판 그리고 아프리카판 등 세 개의 거대한 지각판 사이에 자리한다. 작년 지진이 이 판들이 맞물리는 동아나톨리아 단층에서 일어났다면 다음 지진은 북아나톨리아 단층대에 있는 이스탄불을 덮칠 것이라는 공포감이 퍼져있다. 인구 1600만 이스탄불에 작년 수준의 대지진이 찾아온다면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을 의미한다. 25년 전 이스탄불 근처 마르마라 대지진의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내진설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전문가 중 일부는 아예 주민들을 안전지대로 이주시키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은 내진 테스트 이후 도서관 출입을 제한하고 있고, 기숙사도 흑해 지역으로 옮겼다. 지진의 빈도도 급증하고 있다. 지난주만 해도 마르마라 바다 서쪽 다르다넬스 해협 근처 차나칼레에서는 하루에 다섯 차례 이상의 약진이 발생하기도 했다.
갑자기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넘치는 지질학적 자연재해는 어찌할 도리 없는 천형에 가깝다. 내진 설비 보강에 최선을 다하면서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반면 또 다른 판의 경계, 즉 지정학의 단층선에서는 선택이 미래를 가른다. 리더의 전략과 비전에 나라의 흥망이 달려있다. 튀르키예는 국제정치의 지정학 판도상 중동판, 유럽판, 중앙아시아판, 그리고 러시아판의 단층선 위에 있다. 대륙 러시아를 머리에 이고 있고,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와 이란을, 남쪽으로는 분쟁의 본산과도 같은 중동과 접해 있다. 서쪽엔 불구대천 원수인 그리스의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있다.
만만치 않은 환경이다. 하지만 지진과 달리 이 지정학적 현실은 활용하기 나름이다. 잘 다루어내면 국운을 끌어올릴 수 있다. 반면 우매하게 처신할 경우 나라는 순식간에 추락한다. 냉전기 튀르키예는 자유진영을 선택했다. 한국전쟁에도 파병했고, 나토에도 가입했다. 견고한 반공 국가로 자리 잡았다. 흑해를 사이에 두고 소련의 붉은 군대와 마주하는 부담은 작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진영에 서는 것이 튀르키예 공화국이 사는 길이라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부 케말의 신념이었고 당시 그 선택은 옳았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이후 이념의 진영이 해체되자 환경이 달라졌다. 유럽 국가들이 튀르키예를 암암리에 멀리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세계적으로 퍼진 반이슬람주의는 튀르키예의 유럽 지향에 제동을 걸었다. 2002년 현 집권 여당의 등장 이후 튀르키예는 독자 외교 노선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정학적 환경을 활용하며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적극적·공세적 외교를 폈다. 이를 에르도안 정부 초기의 이른바 ‘분쟁 제로(zero conflict)’ 전략이라고 한다. 이 노력은 가시적 성과를 냈다. 마침 고속 경제성장과 맞물려 튀르키예의 소프트파워는 급등했다. 중견국 연대의 외교 공간을 직접 만들어내기도 했다. 2012년 아랍의 봄 당시 정권이 무너진 아랍 국가들의 국민들 다수는 자국도 에르도안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고 나아가 튀르키예처럼 되고 싶노라 말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분쟁 제로 전략은 틀어졌다. 미묘한 지정학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하는 게 외교다. 튀르키예는 공세적으로 치고 나갔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오스만 제국의 향수를 연상시키며 전 방위로 관여하다가 여기저기서 분쟁에 휘말렸다. 지금은 믿고 의지할 만한 친구가 딱히 없다. 미국과 각을 세우고, 러시아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고, 신장 위구르 문제로 인해 중국도 경원하고 있다. 유럽과의 교역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나 상호 불신은 막을 길이 없다. 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을 물밑 지원하다가 아랍 국가들과도 척을 졌다. 하마스를 돕다가 이번 가자사태 초기에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나토 회원국이면서도 우크라이나 문제에 뜨뜻미지근하다. 일부 전략가들은 이를 ‘값진 고독(precious loneliness)’이라는 희한한 수사학으로 정당화한다. 어색하다.
이스탄불에서 우크라이나 키이우까지 1150㎞ 떨어져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까지 1151㎞다. 유럽과 중동 두 전쟁터와 신기할 만큼 같은 거리에 있다. 비행거리 3시간 이내에 전 세계 분쟁의 50% 이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스탄불은 지정학의 중심에 있다. 이를 공존의 미학이 작동하는 국제 정치의 공간으로 만들어낼 상상력이 절실하다. 분쟁의 문제를 다루기엔 제네바나 뉴욕, 빈 못지않은 곳이다. 역사와 문명을 품은 이스탄불이 제 몫을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곳이 평화롭고, 사람들이 낙천적이어서가 아니다. 지진과 전쟁과 난민, 테러의 공포에 익숙하고 그 처참한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스탄불이기에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