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속의 雜事 2024/ 01.03 사진으로 본 1940년대 대구 근로보국대 학생들 - 04.19 진압군 얕본 이괄, 안산의 바람 방향 바뀌자 패퇴
韓國史 속의 雜事 2024/
● 01.03 사진으로 본 1940년대 대구 근로보국대 학생들
잉걸불처럼 뜨겁던 일제강점기 선배들의 눈물, 땀…
⊙ 낙동강 철교 공사장 ‘대륜중학교 근로보국대’의 활동 사진
⊙ 학생들, 일제 신사(神社) 주변 청소, 낙동강 철교 공사, 도로 공사, 사방 공사, 황무지 개간 등에 징발
⊙ 학교 근로보국대 설치는 황국신민 육성 방안… 방학 이용해 하루 6시간 노동

▲철교 위에서 찍은 학생들의 단체 사진이다.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입은 이들도 보인다. 지역 유지, 교사, 군인, 경찰로 추정된다. 이들 뒤로 세로로 쓴 현수막 〈대륜중학교 근로보국대〉가 보인다. 배경이 되는 현장은 낙동강 철교 공사장. 《대구시사》(1995) 제5권에 따르면 1938년 대구사범학생의 ‘왜관사건’을 설명하면서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여름 방학 동안 낙동강 철교 복선 공사에 동원되었다고 적고 있다. 참여한 학생들이 여름 방학 때마다 낙동강 철교 공사에 강제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 사진을 보면 기록으로 남은 대구사범학생 외에 대륜중학교 학생들도 참여했던 것으로 유추된다. 경부선의 주요 지선인 낙동강 복선 철교(왜관 철교)는 1941년 11월 30일 개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 속 철교를 유심히 살펴보니 복선이라기보다 단선에 가까워 보인다. 낙동강 복선 철교에서 남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낙동강 구(舊) 철교(칠곡 왜관 철교)가 아닐까 싶다.
이하 모든 사진=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제공
《월간조선》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0년대 초 대구 지역 학생들의 근로보국대와 단체활동 사진을 입수했다.
19장의 사진 중에는 ‘1941년 3월 하순’이라고 적힌 5명의 대륜중학교 3학년 학생들과 ‘대륜중학교 근로보국대’의 활동 사진이 포함돼 있다. 나머지 사진들도 교복을 입은 대륜중 학생들과 ‘국민복’을 입은 성인이 등장한다. 이 성인은 일본 육군의 군모와 비슷한 ‘국민모’를 썼는데 교사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일제가 쇼와 덴노(昭和天皇)의 칙령(1940년 11월 2일)에 따라 남성들에게 착용케 한 국민복과 국민모는 일본 육군의 황록색 군복, 군모와 비슷하다. 당시 여성에게는 ‘몸뻬’를 입게 했다.

▲학생들이 등산용 가방을 어깨에 멘 채 산을 오르고 있다. 교모를 쓰고 일부는 교복 상의를 벗었다. 학생들이 무슨 이유로 산에 오르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송근유(松根油)를 채취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면서 모자라는 석유를 대신할 기름으로 송근유를 선택했다. 커다란 솥 같은 틀에 소나무의 뿌리를 집어넣고 뜨겁게 가열을 해 송근유를 추출했다. 조선총독부는 각 학교 학생들을 강제 동원해 송진이나 소나무 뿌리를 채취하도록 시켰다.
기자와 만난 이어령(李御寧·1933~2022년)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은 ‘200그루 소나무면 비행기는 한 시간 난다’는 구호 아래 책을 덮고 송진을 채취하러, 소나무 뿌리를 캐러 산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을 강제 동원해 착취해낸 송근유는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 번도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한 채 버려졌다.
훗날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송근유 일부를 지프에 넣고 운전을 해보았는데, 며칠 후 엔진이 고장 나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근로보국대 활동과 관련된 사진의 배경은 일제가 강압적으로 설치한 신사(神社·대구 달성공원 소재), 일본 군인을 추모하는 충령탑(대구 대명동)을 비롯해 낙동강 철교, 수성못, 천주교 대구교구청 주교관, 대구 성모당 등지이다.
일제는 학생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신사와 충령탑 주변 청소, 도로 공사, 사방 공사, 황무지 개간, 매립 공사, 수로 공사, 항공부대 확대를 위한 정지 작업, 격납고 설치, 방공호 굴 파기, 수류탄 만들기 등을 강제로 시켰다. 당시 천주교 시설들을 군수공장, 방공 훈련소 등의 용도로 징발했다.

▲귓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듯 감동이 느껴진다. 오랜 창백한 시간을 견뎠을 흑백사진을 통해 학생들의 눈물겨운 땀이 전달된다. 어린 학생들은 고된 작업 후 도시락을 먹고 있다. 숟갈에 밥이 가득하다. 군용 반합을 든 이가 보이고, 작고 둥근 통조림을 든 이도 보인다. 아무리 힘들어도 점심시간만큼은 즐겁다. 반찬이 제대로 있을 리 없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교모를 쓴 학생도 보이고, 국민모를 쓴 교사로 추정되는 성인도 보인다.
일제 시대 때 ‘히노마루 벤토’라는 말이 있었다. ‘히노마루’는 태양의 동그란 모양을 이르는 말로 일장기를 연상케 한다.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인들은 우메보시(일본식 매실 장아찌)라는 소금에 절인 매실을 도시락 한복판에 박아 넣었다. 전시 내핍을 위해 그 시고 찝찔한 우메보시 한 개를 도시락 밥 한가운데 꽂아 반찬으로 먹었다.
김능진 전 독립기념관장은 “중등학교 3학년 이상의 남녀학생 전부가 학교 근로보국대에 소속되었고 재학 중 2회 이상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며 “동원된 학생들은 학교와 가까운 농산어촌에서 규율적 단체생활을 하며 대개 방학을 이용해 10일간, 하루 6시간 한도의 노동에 종사했다”고 말했다.
학교 근로보국대 설치는 노동력 동원의 자발적 내면화를 통해 국가 총동원에 이바지할 황국신민 육성 방안이었다. 사진을 오래 보고 있자니 슬픈 서사(敍事)가 밀려왔다. 캄캄한 어둠 속 불빛이 빤히 새어 나오는 집을 만나듯 어떤 설렘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견디던 선배들의 눈물과 땀이 잉걸불처럼 다가왔다.
교남학교와 대륜
대륜중은 1921년 대구에서 개교한 6년제 중고등 과정의 민족사학이다. 개교 당시 교명은 교남학교였다. 교남(嶠南)은 조령(鳥嶺) 남쪽의 경상도를 의미하는 단어로 ‘영남(嶺南)’의 별칭이다. 교남학교에서 대륜(大倫)중학교로 교명이 바뀐 것은 언제일까.
《대륜 50년사》(1971)에는 ‘1940년 10월 1일부로 교명 변경 신청을 제의(提議)하였던 바 동년 10월 30일부로 대구교남학교를 대륜학교로 경정(更正)할 것을 인가(認可)한다는 통첩(通牒)이 전달되었다’고 적고 있다.

▲학생들이 무거운 군장을 메고 왼쪽 어깨에 총을 기댄 채 행군하고 있다. 군화를 신고 각반을 찼다. 군사훈련이나 교련 활동으로 보인다. 등에 짊어진 군장의 모양이나 형태가 학생마다 다르다. 긴 신작로길을 걷고 있다. 대륜중학교 학생들의 교련수업인지 군사훈련인지 알 수는 없다. 교모 대신 군인 모자를 썼다. 완전군장이지만 왠지 군기가 빠져 있다.

▲사진 속 배경은 대구 달성공원 내에 있던 관풍루(觀風樓)로 보인다. 현판이 보이지 않지만 그 시절 찍은 사진들과 대조해 얻은 결론이다. 같은 달성공원에 있던 신사는 일제가 학생들을 강제 동원해 깨끗하게 단장했지만, 관풍루 누각은 왠지 초라하고 퇴색되어 보인다. 당시 달성공원에 위치한 망경루(望京樓)·관풍루는 신사(神社)와 대조되는,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의 설움이 담긴 공간이다. 민족사학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그곳에서 독립을 꿈꾸었을지 모른다. 이 사진이 기자에게 오래 여운을 주었다. 학생들이 흙바닥에 앉아 있다. 바람이 불면 눈과 코, 입으로 흙이 들어갈 것이다. 식민지를 이겨낸 ‘조선의 흙먼지’야말로 한국인의 숨결이 담긴 실체가 아닐까.

▲학생들이 대구 신사(神社) 앞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신사가 달성공원을 차지하면서 시민들이 산책할 공간이 사라져 버렸다. 신사는 전시 체제기에 내선일체를 기저로 하는 황국신민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현장이었다. 신사 안에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을 지어 국체와 정신 함양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했다. 소학교(초등학교) 1학년에게까지 매월 2차례 정도 신사 참배를 강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동아일보》 1940년 7월 24일 자 5면 〈참가 생도 2000여 근로보국대를 결성〉 기사에 따르면 대구 부내(府內) 중등학교 상급 생도들이 근로보국대를 결성해 20일 오후 1시 반 대구 신사에 2000여 명이 집합했다고 적고 있다. 같은 신문 1938년 7월 17일 자 3면 기사 〈대구학생동원 근로보국〉에 학생들이 ‘대구 신사 어조영(御造營) 공사’에 동원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조영은 미화, 존경의 뜻을 지닌 접두사 어(御)를 붙여 집을 짓는[造營] 것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번에 발굴된 사진 뒷장에 ‘1941년 3월 하순’이라 적힌 글을 근거로 대개 1941년 전후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모두 교남학교에서 대륜중으로 바뀐 이후에 찍은 것들이다. 이 중에 ‘대륜중학교 제3학년 말기/ 모장(帽章)ハ교남(嶠南)ノ교()’라고 적힌 사진도 있다. 풀이하자면 ‘학교 모자에 달린 상징은 교남의 교’라는 뜻이다. ‘교남’의 교(嶠)는 뫼 산자가 왼쪽에 있다. 교표는 뫼 산 자가 위에 들어간 교()자를 썼다. 당시 교남학교에서 대륜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음에도 학교 마크는 교남학교의 것을 그대로 썼음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사진의 촬영 시기는 학생들이 동복(冬服)의 교복을 입었고 수풀이 우거진 숲이 나오는 점을 들어 늦봄이나 초여름일 가능성이 높다.

▲학생 5명이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네 명은 교모를 썼지만 한 명은 쓰지 않았다. 제법 머리가 길다. 가운데 학생 교복의 왼쪽 팔에 갈매기 문양이 있다. 일본 해군의 군복일 수도 있다. 물자가 귀한 시절에 학생들은 일본 군복을 염색해 교복 대용으로 입었을지 모른다. 아래는 뒷장이다. 이렇게 설명이 손글씨로 적혀 있다. 〈1941년 3월 하순/ 대륜중학교 제3학년 말기/ 대구삼광(三光)사진관/ 모장(帽章)ハ교남(嶠南)ノ교(㠐)/ 이춘우(李春雨), 김춘기(金暙基) 이진홍?(李鎭洪?) 김문희(金文熙) 진영규(陳永圭)〉
교모에 박힌 학교 마크가 교남학교의 ‘교(㠐)’다. 대륜으로 교명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교남학교 시절의 상징을 쓰고 있다. 모자엔 흰색 한 줄(혹은 검은색 두 줄)이 그어져 있다. 교복 주머니엔 뭐가 들었는지 두툼해 보인다. 요즘이라면 당연히 스마트폰이겠지만 그 시절엔 뭐가 들었을지 궁금하다.

▲학생 15명은 서 있고 10명은 앉아 있다. 몇몇 앉은 학생의 등 뒤로 란도셀이 보인다. 그들 뒤 두 개의 십자가와 입수한 다른 사진들과 비교할 때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청 내 성직자묘지(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로4길 112)로 추정된다. 1911년 이래 초대 대구교구장이었던 드망즈(한국명 안세화[安世華]·Florian Demange) 주교를 비롯해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 선종한 성직자 100여 명이 잠들어 있다.

▲형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았다. 진한 눈썹, 코의 길이와 콧방울, 입술의 두께, 눈과 눈동자의 크기 등이 비슷하다. 또 하관이 두툼해 보이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오른쪽에 선 학생은 두 주먹을 야무지게 쥐고 있다. 옷깃에 달린 교표에 일(一)자가 4개다. 4학년생이다. 당시 중학교는 6년 과정이었다. 앉은 학생은 교복의 단추를 풀었다. 양손을 잡았는데 사진의 음영 때문에 손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인 교사 없는 ‘별천지 학교’
대륜학교는 어떤 학교였을까.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교남학교 혹은 대륜중은 ‘별천지 학교’로 불렸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의 무섭고 급박한 상황인데도 학교에 일본인 교사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대륜 개교 100주년 대륜총동창회사》(2023)에 실린 정원용 동문의 회고 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는 1939년 교남학교에 입학했다.
〈소학교에서는 조선말을 잊어버릴 정도로 일본어만 사용해왔는데, 교남학교에 진학하니 전교생 모두가 조선말을 쓰는 게 아닌가! 일본말을 안 쓰면 처벌받고 관청에서도 일본말을 안 쓰면 일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대구 성모당을 배경으로 찍었다. 이 성모당은 프랑스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 가브(Gave) 강가에 있는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크기는 물론 바위 모양까지 똑같다. 내부는 암굴처럼 꾸며졌고 오른쪽 상단에 마리아상을 모셨다. 돌로 된 성모상은 당시 대구교구 프랑스인 사제와 한국인 사제들의 헌금으로 마련됐다고 전한다.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펴낸 《은총의 100년, 감사의 100일 기도》(2010)에 따르면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설치되면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하느님께서 교구에 꼭 필요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을 이뤄주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여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 모든 신자가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허원(許願)을 드렸다고 한다.
교남학교 교사를 지낸 이상화(李相和·1901~1943년) 시인의 시 ‘나의 침실로’의 배경이 성모당으로 알려져 있다. 학생들이 이상화 시인의 인솔로 성모당을 찾은 것은 아닐까. ‘나의 침실로’에서 ‘마돈나’는 곧 성모당의 성모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성모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상화 고택(故宅)이 있다. 고택 주소는 ‘대구 중구 서성로 6-1’이다. 기자가 확인해보니 성모당과 800여 m 떨어져 있고 도보로 13~14분 거리다.
교남학교에 처음 입학한 학생들은 ‘여기는 별천지로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당시 학생들의 회고 글에 이런 문장도 나온다. ‘잊어버릴 뻔했던 나의 말을 되찾았다.’
《대륜 70년사》(1991)에 따르면 1923년에 일본에서 건너온 교사가 있었으나 1926년 그만두었고, 10년이 지난 1936년 무렵 일본어 교사인 이등(伊藤)이 다시 부임했지만 1년 만에 그만두었다. 1941년에야 일본인 도변(渡邊)이 교두(교감)로 발령받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근무했다고 한다. 《대륜 개교 100주년 대륜총동창회사》에 일본어 교사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시간이 되면 교무실 문에 파수를 세워 그가 교무실에서 나오는 즉시 “온다!”고 손을 흔들어 신호를 하면 일제히 “이다(이등의 우리말 변형음)” “이다” 하고 외치며 책상 뚜껑을 여닫고 발을 굴러 소란을 피우다, 그가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들 좌상(坐像)처럼 조용히 했다.
그가 성이 나서 퇴장하면 또 전과 같은 소란을 피우고, 약이 바싹 올라 또 돌아오면 또 조용히, 아주 얌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는 짓을 되풀이하기로 작정했다. 시작한 지 사흘째,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중지해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이 단순한 장난이 아니고 왜놈을 축출하려는 데 있는 이상 그따위 간사한 눈물 따위로 그만둘 리 없어, 더욱 심하게 굴었다.
나중에 그도 견디다 견뎌내지 못했음인지 사표를 내고 퇴각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거사한 지 채 일주일도 못 됐던 1937년 2월경이었다. 우리는 3년 묵은 체증이 단번에 내려간 것 같아 일제히 쾌재를 외쳤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한 소란이 있었는데도 다른 선생님들의 꾸지람이 없었던 것은 마음속으로 늘 우리를 성원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어떤 작업을 마치고 쉬는 모습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저마다 편한 자세로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잡풀 속에 비스듬히 몸을 누인 모습도 보인다. 사진 속 배경이 되는 건물은 서양식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탐문 끝에 대구 샬트로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원 코미넷관으로 확인되었다. 주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로4길 111’. 대지는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인 서상돈(徐相敦·1851~1913년) 선생이 자신이 경영하던 화원을 무상으로 기증하였고, 건물의 설계는 드망즈 주교가, 공사는 중국인들이 담당하였다고 전한다. ‘코미넷관’은 1915년 준공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군수공장 등으로 징발됐다.

▲천주교 대구교구 주교관 건물 앞에 학생들이 서 있다.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대구에 도착한 것은 1911년 6월 26일. 서상돈의 소개로 주교좌성당(계산성당) 근처 한옥집에 임시 거처를 정해 2년 6개월가량 머물렀다. 1913년 12월 23일 주교관이 건립되었는데 그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주교관 공사를 위한 물 확보도 어려웠다. 드망즈 주교는 우물이 나올 수 있도록 요셉 성인께 기도를 청했고 그렇게 해서 우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주교관을 중심으로 신학교, 성모당, 수녀원 등의 건축이 이어져 현재 대구 가톨릭의 토대가 되었다.
대륜과 ‘유리빙 구다사이’의 자부심
《대륜 70년사》에는 1942년 무렵 일본인 교련 교관이 와서 10개월 정도 근무했고, 1943년에는 일본인 교사가 부임해 역사(일본 역사), 독어, 교련, 일어를 담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들 일본인은 거의 광복 때까지 있었다고 한다.
대구 지역사회에서 교남학교, 대륜중 학생들의 별명이 있었으니 ‘유리빙 구다사이’였다. 학생들은 당시 뜻도 모르고 그렇게 불렀다.

▲멀리서 찍어서인지 학생 표정이 안 보인다. 확대해서 보면 서로 손을 흔들며 즐겁게 인사하는 모습이다. 고된 작업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것만 같다. 나뭇잎이 무성해 학생들의 푸른 시절을 연상케 한다.
이유인즉 이랬다. 교남학교 학생들은 일본말을 열심히 안 배웠고, 그 때문에 거리에 나가서 일본 학생과 무슨 충돌이라도 생기면 항상 불리했다고 한다. 행여 경찰서에 연행이라도 되면 다른 학교 학생들은 일본말을 막힘없이 술술 하는데, 대륜 학생들은 일본말이 서툴렀다. 예를 들어 “용서해주십시오”의 일본말인 “유루시테 구다사이(許して下さい)”를 어눌한 발음으로 “유리빙 구다사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별명처럼 붙어 대륜을 ‘유리빙 학교’, 학생들을 ‘유리빙 구다사이’라 했다.
공립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학생들도 배운 것이 일본의 조선인 비하여서 그런지 우쭐대며 조롱의 대열에 동참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멸시 내지 무시당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학생들은 “일본말을 잘 쓰지 ‘않아서’ 된 결과이니 애국심, 곧 대륜 정신의 발로라 생각돼 거꾸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교복을 입은 학생 11명과 국민복을 입은 2명의 교사로 추정되는 성인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맨 오른쪽에 안경을 쓴 남성은 학생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니 긴 가죽장화를 신었다. 모자도 조금 다르다. 일본 경찰관으로 추정된다. 배경은 대구 대명동 공설운동장 옆 언덕에 있던 충령탑이다. 현재 남구종합사회복지관 인근으로 알려져 있다. 충령탑은 만주사변 전사자를 추모하고 전쟁으로 숨진 일본군 유골을 안치한 곳으로 탑의 높이가 30m에 달했다. 낙성식을 1936년 11월 11일 거행했다고 전한다.(《매일신보》 1936년 11월 13일 자) 일제는 학생들을 동원해 강제로 충령탑을 참배하게 만들었다.
1946년 8월 15일 ‘8·15 해방 1주년 기념행사’을 맞아 대구시민들이 시가행진 후 ‘충령탑 파괴식’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학교가 교남에서 대륜으로 바뀐 뒤 초대 교장은 이효상(李孝祥·1906~1989년) 선생이었다.
그는 1926년 도쿄제대 독문학과 1학년 시절, 강사로 처음 교남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해방 후 경상북도 초대 학무국장으로 공직에 가기까지 교남, 그리고 대륜중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륜 50년사》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선생은 동경제대를 나오자 허다한 관직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가난한 본교에 몸을 던졌다.〉
이효상은 1952년 경북대 문리대학장을 지냈으며, 1963년 12월부터 1971년 6월까지 7년 6개월간 국회의장(6~7대)을 역임했다. 이는 역대 국회의장 중 최장 재임기간이었다.⊙
월간조선 2023.01월 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01.05 왕건 앞세워 이룬 중앙-지방 권력 교체의 대사건

▲이익주 역사학자
한국 역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왕조의 수명이 길고, 왕조교체가 매우 드물다. 고구려·백제 600년 이상, 신라 1000년, 고려·조선 500년이다. 왕조교체는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된 것밖에 없다. 이것을 가지고 역사 발전이 더뎠다는 정체론(停滯論)의 근거로 삼기도 하고, 전복 세력의 등장을 허락하지 않은 선정(善政)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한국 역사에서 왕조교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 민심이었다. 신라에서 고려로 교체될 때도 민심이 요동쳤다.
신라 말 재정 시스템 붕괴가 반란 촉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청동상. 북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 안에 있는 왕건의 무덤 현릉에서 출토됐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말이던 서기 889년,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나라 안의 모든 주군(州郡)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 비고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자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지금의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의 왕은 신라의 세 여왕 중 한 사람인 진성여왕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사람은 여왕의 실정을 부각하려 했지만, 이게 어디 국왕 한 사람의 잘못을 탓할 일이었겠나. 또 국가의 세금 독촉에 저항한 사람이 어디 몇몇 도적뿐이었겠는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쓰는 국가 시스템이 무너진 결과이고, 그 때문에 전국에서 헐벗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원종과 애노를 시작으로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양길과 궁예, 죽주(지금의 안성)에서 기훤, 전주에서 견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신라 조정은 이들을 진압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자 ‘도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된 지방민들이 촌주(村主) 같은 유력자를 중심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도 있었다. 견훤은 본래 신라의 군인이었는데, 도적을 토벌하러 파견되었다가 오히려 그들을 규합해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출발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독립된 세력을 이루었고, 신라의 통치에 반발하는 민심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이런 사람들을 지금 우리는 호족(豪族)이라고 부른다.
호족의 지지를 받아 후삼국 통일

▲경북 안동의 태사묘. 이 지역 호족으로 왕건에게 협력한 김선평·권행·장정필 삼태사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호족들은 서로 싸우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궁예가 양길과 싸워 이긴 것이 전자의 예라면,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이던 용건(왕건의 아버지)이 스스로 궁예 밑으로 들어간 것은 후자의 예이다. 이렇게 해서 지방의 독립 세력이 하나, 둘 통합되었으며, 최종적으로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 후고려를 건국하고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그 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뒤 후삼국 통일을 달성했다(936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는 호족들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 왕건은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각지의 호족들에게 ‘중폐비사(重幣卑辭)’의 뜻을 전했다. 선물을 넉넉하게 주고(중폐) 겸손한 말을 쓰겠다(비사)는 뜻이니, 자기 아래로 들어오면 후하게 대접하고 우대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이 말을 듣고 왕건 밑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심지어는 왕건과 패권을 다투던 견훤의 아버지, 상주 호족 아자개조차 왕건에게 귀부해왔다. 또, 유명한 얘기지만, 왕건은 부인이 스물아홉 명이나 되었다. 그 많은 정략결혼을 통해 지방 호족의 지지를 끌어냈던 것이다.
지방 호족들의 협력은 왕건에게 큰 힘이 되었다. 930년에 고창군(지금의 안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고창군에서는 견훤과 왕건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왕건이 불리했으나 그 지방 호족 세 사람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여기서 승리하면서 왕건은 전체 판세를 뒤집고 6년 뒤에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고창군(郡)은 안동부(府)로 승격했고, 세 사람의 호족은 왕건으로부터 김씨, 권씨, 장씨 성을 하사받아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라는 성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각각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 기득권 극복이 근본 과제

▲경기도 광주 하사창동에서 출토된 철조 불상. 광주 지역의 호족이며, 왕건의 장인인 왕규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왕건은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가며 후백제의 견훤과 싸웠지만, 정작 더 중요한 상대는 신라였다. 비록 군사력은 와해되고 실제 통치 범위도 경상도 지역에 한정되었지만, 신라에는 1000년 왕조의 전통과 권위가 있었다. 경주가 서울이던 시절, 벽지이던 송악 출신의 왕건이 과연 통일 왕조의 임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새 나라를 만들고 송악으로 서울을 옮기는 것을 사람들이 용납할 수 있었을까?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동원된 논리가 마침 그때 당나라에서 들어온 풍수(風水)였다.
신라 말 재정 파탄 민심 요동쳐
지방 독립세력이 호족으로 성장
“복종하면 후히 대접” 지지 유인
풍수가 고려에 새로운 권위 부여
왕건은 건국, 호족은 이익 실현
서울과 지방이 공존했던 나라
풍수란 땅에 보이지 않는 기운, 즉 지기(地氣)가 있어서 성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한다는 믿음이다. 이에 따르면 경주가 영원히 변치 않는 서울일 수 없었다. 경주의 기운도 시간이 지나면 쇠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송악도 때가 되면 서울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풍수는 경주의 전통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고려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 묏자리 잡는 음택(陰宅) 풍수로 쪼그라들기 전, 우리 역사에서 풍수가 가장 멋진 역할을 한 순간이었다.
왕건을 비롯해서 신라 말에 등장한 지방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투쟁했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극복해야 했던 것은 신라의 전통이었다. 고려 이전, 통일신라까지는 왕경인(王京人), 즉 서울 사람들의 독무대였다. 신라 골품제 아래서는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사이에 엄격한 신분 차별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방 사람들이 보기에는 맨 아래 두품조차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분이었다. 골품제는 서울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신분제였고, 지방 사람들은 모두 ‘골품 외’였다. 이렇게 된 것은 신라 국가가 처음 만들어질 때 경주 일대의 사로국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로국의 후손들은 1000년 가까이 건국 세력의 기득권을 누렸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대는 왕경인이 통치한 사회’(전덕재, ‘한국고대사회의 왕경인과 지방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말의 사회 변동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권력이 교체된 대사건이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고려, 조선과 큰 차이

▲『고려사』에 인용되어 있는 『편년통록』. 왕건의 조상에 대한 기록으로, 풍수를 이용해서 왕건의 출현을 예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왕건이 지방 호족의 협력에 힘입어 후삼국을 통일했다면, 호족의 입장에서는 왕건을 통해 이익을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 사람은 관직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 즉 1000년의 소외에서 벗어나 새 나라 고려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고려 왕조에서 지방 호족들은 중앙의 관리가 되거나 지방의 향리가 되는 길을 선택했고, 향리로 남더라도 본거지에서 영향력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중앙의 관리가 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이 점에서 광종 때 시작된 과거제도의 의미가 재해석 되어야 한다. 실제로 고려 내내 지방 향리들은 과거를 통해 끊임없이 서울로 올라갔고, 지배 세력을 정화하는 새로운 피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고려는 지방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나라다. 따라서 서울과 지방의 관계도 새롭게 설정되었다. 개경이 서울로서 우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독점은 더 이상 용인되지 않았다. 서울과 지방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 모색되었고, 고려 특유의 본관제(本貫制)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공존을 통해 고려는 500년을 버텼다. 서울 사람이 모든 것을 독차지했던 신라가 그것 때문에 멸망한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고려는, 우리 역사 속에서 신라와 조선 사이에 500년 가까이 존속한 나라, 남녀 차별이 덜 심했고, 남녀 간의 사랑은 자유로우며, 대외적으로 개방적이고, 거란과 싸워 이긴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가장 잘 모르는 나라가 아닐까.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을 몇백 년 앞으로 끌어다 놓으면 그것이 곧 고려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불교 국가 고려와 유교 국가 조선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조선과 다른 500년의 역사가 있었다.
◆이익주=역사학자이며 서울시립대 교수다. 고려 역사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주로 연구하고, 학계의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일도 열심히 한다. 『이색의 삶과 생각』(2013)을 썼고, 유튜브 ‘이익주는 역사’ 강의를 진행한다.
중앙일보
01.04 해외 古지도 속 독도와 동해를 만나다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가 1735년 출간한 《Description de la Chine(中國志)》에 삽입된 〈조선왕국전도〉. 이 지도는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D'Anville)이 제작하였고, 조선을 단독으로 그린 유럽에서 제작된 최초의 지도다. 울릉도는 Fan–ling–tao(판–링–타오·鬱陵島), 독도는 Tchian–chan–tao(챤–찬–타오·千山島)로 표기하였다. 이 표기는 18세기와 19세기 초중반까지 지속되었다. 붉은색 원 안이 울릉도와 독도다.
고(古)지도 수집가이자 한국해연구소 소장인 이돈수(李燉帥) 전문 컬렉터는 수십 년 전부터 독도가 담긴 외국 고지도를 찾아왔다. 1500년대부터 1910년 사이 세계 10여 개국에서 제작한 ‘독도’ ‘동해’가 한국의 영역임을 증명하는 사료다.
일본의 독도 도발에 맞서 독도가 확실한 우리 땅임을 밝히는 방법 중 하나가 외국 고지도 속 독도를 찾아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Antoine François Prévost)의 《일반 여행의 역사(Histoire générale des voyages)》 제6권에 수록된 〈조선전도〉. 당빌의 〈조선왕국전도〉를 기초로 하여 1748년 벨렝(Jacques-Nicolas Bellin)이 제작한 지도다. 동해는 프랑스어로 한국해인 ‘Mer de Corée’로 표기되었다. 붉은색 원 안이 울릉도와 독도다.
이돈수 소장은 “외국 고지도 속 동해 표기와 독도 영유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
“해양경계선이 그려진 고지도는 독도의 영유권과 관련해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독도 관련 새로운 지도 발굴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돈수 소장은 〈미발굴 외국 고지도 수집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그는 “앞으로 찾아야 할 미발굴 고지도가 전 세계에 많이 존재한다. 후원과 펀딩을 받아 계속 고지도를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돈수 소장이 확보한 독도 관련 고지도들이다.⊙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1527~1598년)의 지도첩 《세계의 무대》 1595년 판본에 수록된 〈일본 열도 지도〉에 섬으로 묘사된 조선.

▲프랑스 지도 제작가인 기욤 드릴(Guillaume Delisle·1675~1726년)이 1705년 제작한 〈인도와 중국 지도〉를 바탕으로 코벤스와 모르티에(J. Covens & C. Mortier)가 암스테르담에서 1720년경 제작한 지도. 동해를 ‘동양과 한국해(Mer de Corée)’로 병기하고 있다.(붉은색 원 안)

▲1705년 드 페르(De Fer)가 제작한 〈동부 아시아 지도〉. 일본을 Niphon, 동해를 “달단인들이 동양(Mer Orientale)이라고 부른다”고 표기하고 있다.

▲독일의 천문학자 요한 토비아스 마이어(Tobias Mayer·1723~1762년)가 1749년 제작한 〈달단령 중국 및 일본 지도〉. 지도 동쪽 해안에 “Kaoli Koue(고려국) 또는 Royaume de Corée(코리아 왕국), Tchao-Sien(조선), 그리고 만주에서는 Sol Ho Kouroun 또는 Royaume de Solgo라 부른다”고 표기되어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당빌의 표기를 따르고 있다. 붉은색 원 안이 울릉도와 독도다.

▲기욤 드릴이 1723년 제작한 〈아시아 지도〉. 동해를 ‘한국해(Mer de Corée)’로 표기했다.(붉은색 원 안)

▲프랑스 파리에서 1757년 벨렝이 제작한 〈조선전도〉. 동해는 프랑스어로 한국해인 ‘Mer de Corée’로 표기되었다. 울릉도와 독도는 당빌의 표기를 따르고 있다. 붉은색 원 안이 울릉도와 독도다.
사진 : 이돈수
01-08 서울의 또 다른 이름 ‘한양’은 어떻게 탄생했나

조선의 수도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고 ‘수도 서울’을 뜻하는 일반명사인 경도(京都)·경(京)·왕경(王京)·경성(京城)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공식 명칭도 일반명사도 아니지만,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로 한양(漢陽)이 있다. 이는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부 읍치(邑治·고을 중심지)로 옮긴 뒤 관성적으로 쓰이게 된 지명이다.
한양의 역사는 삼국시대 ‘북한산주(北漢山州)’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산주는 통일신라 때 북한산군이 됐다가 ‘한양군’으로 바뀌게 된다. 신라 경덕왕 18년(759) 전국 모든 고을 이름을 주(州) 앞에는 한자 한 글자, 소경(小京)과 군(郡)·현(縣) 앞에는 한자 두 글자로 바꾸는 원칙을 적용한 결과였다. 북한과 한양에서 한(漢)은 ‘한강’을 가리키며 흔히 강의 북쪽은 산의 남쪽에 해당돼 음양(陰陽)으로는 햇빛이 비치는 양(陽)의 지역이다. 따라서 북한(北漢)과 한양(漢陽)은 글자 조합만 다를 뿐 같은 뜻으로 ‘북한산’에서 ‘산’ 한 글자를 떼어버리고 두 글자 한양으로 바꾼 결과 한양군이 된 것이다.
한양의 탄생을 ‘서울 도성 안’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고대 북한산군과 한양군 읍치는 서울의 도성 안에 있지 않았다. 한강을 중심으로 양(陽)은 남산의 북쪽인 도성 안이 아니라 남산의 남쪽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한양군의 읍치는 옛양주(古楊州)에 있었다고 나오는데, 조선 시대 한강의 신에게 제사 지내던 양진사(楊津祠)가 있던 광진구의 광나루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한강의 북쪽을 가리키는 한양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렇게 옛양주에 있던 한양군은 고려 들어 양주로 불리다 문종 21년(1067) 그 읍치를 명당 형국을 갖춘 ‘조선의 도성 지역’으로 옮기면서 ‘남경’으로 승격된다. 그 뒤 한양부를 거쳐 조선의 수도 한양에 이르게 된다.
문화일보 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01-17 잘해도 티 안나는 천막 관리… 재수 없어 ‘경신환국’ 꼬투리 되기도

▲정조가 화성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연과 여러 행사를 치른 장면을 담은 ‘화성행행도’ 8폭 병풍 중 3폭. 그림 속에 넓게 펼쳐진 장막과 차일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일이 전설사의 몫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장막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전설사
햇빛 가릴 때 사용했던 차일
우천시 쓰는 기름칠 한 유악
예식 때 쓰는 장막 관리 관청
세조 땐 유악에 빗물 새 처벌
성종 땐 엉뚱한 장막 펴 국문
유악은 왕 소유의 ‘군수물자’
남인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
집안 행사에 유악 몰래 사용
숙종, 왕을 능멸한 사건 간주
남인 세력 쳐내는 빌미 삼아
#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은 관청
전설사(典設司)는 예식을 할 때 쓰는 장막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고려시대의 상사국에서 비롯되었다. 상사국은 고려 목종대에 설치되어 충렬왕 때엔 사설서로 불리다가 공양왕 때는 상사서로 개칭된 곳이다. 이후 조선 왕조에 들어와 사막(司幕), 즉 장막을 다루는 관청이라는 뜻으로 불리다가 세조 때에 전설사로 굳혀졌다.
관원으로는 제조 1인과 정4품의 수(守) 1인이 있었으며, 그 아래로 제검 2인, 별좌 2인, 별제 2인이 있었다. 그리고 하급 관원으로 서원 1인, 일꾼 14인, 사령 4인, 군사 2인이 있었다.
이들의 주 업무는 장막과 유악, 차일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유악은 기름칠을 한 장막인데 비가 올 때 사용하는 것이고, 차일은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는 것이다.
전설사는 오로지 장막에 관련된 일에 한정되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의외로 전설사는 사건 사고에 많이 휩쓸렸다.
전설사 관원에게는 단순히 장막을 관리하는 임무뿐 아니라 장막을 설치하는 임무도 있었다. 장막은 대개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사용했고, 큰 행사에는 고관대작이나 임금이 참석했다. 이 때문에 나라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전설사 관원들은 몹시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특히 행사가 있는 날에 비가 내리게 되면 십중팔구 문책을 당하곤 했다. 비가 내리면 유악을 설치해야 하는데, 유악이 조금 오래되면 찢기거나 기름기가 날아가서 비가 새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세조 13년(1468년) 8월 11일의 실록 기록을 보면 전설사 별제 강거정을 죄 주는 내용이 있다. 이날 비바람이 몹시 불자, 세조가 환관 안중경을 시켜 장막과 유악을 점검하게 했는데, 빗물이 새는 것이 많아 벌을 줬던 것이다.
사실, 유악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었다. 비가 올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자주 사용하지도 않는 데다 기름칠을 아무리 잘해도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새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 그저 보관만 해두고 수선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유악에 바른 기름이 휘발되어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비와 바람이 동시에 몰아치는 날씨라면 웬만큼 잘 만든 유악이라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유악 관리에 늘 신경을 써야만 했지만, 전설사에 속한 일꾼은 고작 14명뿐이었다.
이 14명의 인원이 그 많은 장막과 유악을 제대로 관리하고 수선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전설사 관원들은 날씨가 좋기만 빌어야 했다. 그들이 바라는 좋은 날씨는 너무 맑아 해가 쨍쨍한 것도 아니고 비가 오는 것도 아닌 적당히 흐린 날이었다. 물론 바람이 불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날씨란 것이 하늘에 달린 조화이니, 결국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성종 6년(1475년) 9월 15일에는 전설사 관리를 국문하게 했는데, 이유가 황당했다. 성종이 광릉에 행차하는데 장막을 엉뚱한 곳에 설치한 것이다. 이날 날씨도 괜찮았고, 비도 내리지 않았지만 정말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일로 전설사 관리들이 모두 국문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필시 일꾼들에게 전달이 잘못되어 벌어진 일일 텐데, 그야말로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이렇듯 전설사 관원들은 날씨나 운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무리 잘해 봤자, 별다른 포상이 이뤄지는 곳도 아니었다. 또한 임무를 잘 수행해봤자 눈에 띄지도 않았고, 눈에 띄어봤자 잘못이나 지적받고 벌이나 받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니 전설사 관원이 되는 것을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말하자면 전설사는 관원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는 대표적인 관청이었던 것이다.
# 유악 하나 때문에 졸지에 죄인이 된 전설사 관원들
조선의 정치사를 살피다 보면 전설사에서 관리하는 유악 때문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장막을 관리하는 전설사에 웬 정치 사건이냐고 의문을 가질 만하지만, 재수가 없으면 무슨 일이든 벌어지는 곳이 바로 전설사였다. 그 정치 사건은 1680년에 남인 일파가 대거 축출된 경신환국인데,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680년 3월, 당시 집권당이던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허적은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이날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그래서 숙종은 허적에게 유악(油幄)을 내어주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미 유악은 허적이 빌려간 상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심하게 분노하며 패초(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것)로 군권 책임자를 모두 불러들였다.
사실, 유악은 엄밀히 따지자면 군수물자였다. 이 때문에 개인이 사사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혹 유악이 필요할 때는 왕이 선처하여 빌려주는 형태를 취했는데, 거의 형식적인 절차였다. 대개 고관대작들이 유악이 필요하면 전설사에 요청하여 빌려 가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관행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이 관행을 문제 삼았다. 숙종은 군수물자인 유악을 왕의 허락도 없이 빌려 간 것을 두고 왕을 능멸하는 일이라며 분노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당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들에게 넘겨버린다. 훈련대장직은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서인 김철을, 수어사에는 서인 김익훈을 임명한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서인 김석주가 맡고 있었으므로 보직을 유임시켰는데, 이로써 서인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을 구실 삼아 일거에 정계 개편을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왕 남인들을 대거 몰아내기로 작정한 숙종은 남인들을 또 하나의 사건에 엮어버렸다. 이른바 ‘삼복의 변’과 남인을 엮어 대대적인 남인 숙청 작업을 감행했다.
서인이자 외척인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 삼복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했던 것이다.
고변 내용을 살펴보면 허견과 삼복 형제들은 숙종이 즉위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또한 도체찰사부에 소속된 군대에 몇 차례에 걸쳐 특별한 군사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 골자였다. 도체찰사부의 군대를 사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도체찰사였던 영의정 허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요소였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이 이 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중앙 군영의 지휘권도 거의 남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던 것인데, 허적의 유악남용사건으로 서인이 다시 중앙 군영의 군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한편, 허적의 아들 허견과 복창, 복선, 복평군 삼형제의 모반 행위에 대한 고변의 주요 내용이 도체찰사부의 군사를 동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역모에 연루되게 되었다. 그래서 허견과 삼복 형제뿐 아니라 허적, 윤휴, 유혁연, 이원정, 오정위 등 남인 중진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또한 고변자 정원로 역시 역모자의 하나로 지목받아 처형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대폭 등용되어 조정은 서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처음에 단순히 유악남용사건에 불과했던 이 사건은 대대적인 남인 숙청으로 이어져 정권이 바뀌는 환국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대대적인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저 관행대로 유악을 내줬던 전설사 관원들은 졸지에 엄청난 형벌을 받고 쫓겨나야만 했다. 아무 죄도 없었던 그들은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사건으로 순식간에 직장을 잃고 죄인으로 전락해야만 했으니, 지독하게 재수가 없었던 셈이다.
■ 용어설명 - 도체찰사(都體察使)
조선시대 의정이 맡은 임시관직. 왕의 명을 받아 할당된 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해 다스렸다. 보통 1개 이상의 도(道)를 관할했고, 종사관이 휘하에 있었다. 도체찰사라는 직명은 고려 공민왕 때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면서 처음 등장했고 조선시대에 이러한 봉명출사(奉命出使) 체제가 계승됐다. 품계에 따라 정1품은 도체찰사, 종1품은 체찰사, 정2품은 도순찰사 등으로 부르다가 세조 때 품계와 관계없이 모두 순찰사로 했다.
문화일보 박영규 작가
01.18 3대 이념이 격돌했던 인류 최대의 전쟁… 臨政은 민주주의를 고수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대한독립투쟁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전 가미카제(神風)호가 도쿄-런던 비행에 성공했다. 영국왕 조지 6세의 대관식 축하를 겸해 일본의 항공력을 과시한 것이다. 다음 해 9월 영국, 프랑스는 소련의 팽창을 의식하며 나치 독일과 뮌헨협정을 체결했다. 1939년 8월 소련도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아시아는 중일전쟁 중이었지만 유럽은 계속 평화를 구가하는 듯했다.
불과 한 달 후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으로 평화의 꿈은 깨졌다. 이때의 충격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신속한 파병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1921년 피우수트스키 장군을 중심으로 러시아 공산군을 무찔렀던 폴란드였지만 독일, 소련의 분할 점령은 막지 못했다. 폴란드군 6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직면한 이후 폴란드가 K무기들을 대량 구매하고 있는 슬픈 배경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 장교로 복무 중이던 도산 안창호의 장녀 안수산(오른쪽 첫째)이 동료들과 함께 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안수산 등 수백 명의 재미 한인들이 2차 대전 때 미 군복을 입고 일본과 싸웠다. 1942년 미 해군에 입대한 안수산은 최초의 동양인 여성 미 해군 장교였다. 1946년 전역한 후에도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암호 해독가로 일했다. 2015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한 그는 2016년 타임지의 '이름 없는 여성 영웅'에 선정됐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Asian Art Museum)
동서(東西) 전쟁이 중첩된 제2차 세계대전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독일은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프랑스 파리까지 점령했다(1940년 6월). 그 사이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 국제연맹에서 제명되었다. 독일이 손쉽게 파리를 점령하자 일본은 3개월 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격했다. 서양의 동아시아 식민지들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이 북진 대신 남진을 선택한 것은 1939년 9월 할힌골(노몬한)에서 소련·몽골군에 참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동쪽으로 진격했다(바르바로사 작전). 동맹국 일본이 소련을 협공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불과 2개월 전 소련과 체결한 중립조약의 파기를 망설였다. 덕분에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한 독일계 소련 간첩 조르게는 일본에서 사형에 처해졌지만 소련에서는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2월 8일을 기점으로 일본은 영국령 코타바루(말레이반도)와 미국령 하와이, 필리핀, 괌 등을 공격했다. 석유 등 전쟁 자원이 풍부했던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도 차지했다. 서양 식민주의자들과 싸우던 동남아 독립운동가들은 누구 편을 들지 난처했다. 일본은 ‘대동아’를 명분으로 이들을 끌어들였다.
독립 투쟁의 중심이었던 대한민국임정
1943년 일본군이 버마(미얀마), 인도로 진격하자 한국광복군 9명이 영국군과 협력했다. 이들은 일본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며 일본군(조선 출신 포함)을 상대했다. 1940년대 일본군을 직접 상대한 진귀한 참전 기록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 공산주의 항일 투쟁을 하던 김일성 등은 소련에 있었다.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한 소련에서 30세를 넘긴 김일성의 정치적 위상은 빠르게 성장했다. 선배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중국공산당의 민생단 학살과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사라졌거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있었다. 한반도 해방 이후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소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주와 백두산에서 계속 항일 무장투쟁을 했다는 건국신화를 만들어 체제를 유지했다. 소련은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빠르게 만주, 한반도 이북, 그리고 쿠릴열도를 차지했다.
김일성을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만든 평양의 건국신화와 달리 사실은 대한민국임정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립 외교는 물론 무장투쟁의 중심이었다. 1940년 2월 2일 이승만은 김구에게 서한을 보내 “우리나라, 일본, 중국, 러시아 각 나라 항구와 요지에 (중략) 거사 계획을 약속했다가 무르익으면 한꺼번에 일어날 것”을 계획했다. 일본의 “군함·병영·관공서·군수공장 등을 파괴·방화하는 일, 사보타주, 비행기를 포격하고 시위할 것, 군인 수백 수천으로 습격 항전할 것” 등이 계획에 포함되었다. 아직 미국 국민의 90% 이상이 전쟁에 반대하던 때였다.
실제로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공습으로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듬해 6월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에서 연설했다. “...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이 연설은 경성방송국에 있던 조선인들이 청취해 국내에 확산됐다.
안창호의 자녀들을 포함한 수백 명의 재미 한인들이 미 군복을 입고 일본과 싸웠다. 언더우드, 윌리엄스 등 일제가 추방한 미국 선교사들과 그 자녀들도 참전했다. 김구의 아들 김신은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에 이어 미국 랜돌프 비행학교에서 공부했다. 이승만은 평생에 걸쳐서 “나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면 군대에 보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민주주의를 고수했던 대한민국임정
제2차 세계대전은 국가의 인력과 자원을 오직 승전을 위해 투입하는 총력전(total war)이었다. 이러한 총력전에는 민주주의보다 민족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더 적합해 보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싸우던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는 유효한 체제이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국민들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으며 정신을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유연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국가는 전쟁을 할 때 작전의 마지막 세세한 부분까지 사전에 확정해 놓은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초반에는 꽤 좋은 전과를 올릴 수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계획상 차질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중략) 독재국가들은 전쟁을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려고 애썼지만, 실제에 있어서 전쟁이란 하나의 예술이다.”
이승만을 매개로 민주주의 미국과 연대했던 김구, 지청천, 이범석 등은 1945년 8월 시안에서 미국 CIA 전신인 OSS 책임자 도노반(William J. Donovan)과 한반도 해방 작전을 협의했다. 비록 이 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한반도가 해방되었지만 그 경험은 소중했다. 그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이어진 지정학적 고민의 산물이기도 했다.
1896년 독립협회 이래로 독립운동은 외세에 맞선 저항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서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 수백만 명의 군대들이 충돌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비록 군사적 기여는 미약했지만 대한민국임정이 선택한 길은 옳았다. 그 길 위에 현재의 대한민국이 서 있다.
3대 이념들이 충돌했던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은 약 5000만명 이상이 죽은 인류 최대의 전쟁이었다. 그 배후에는 더 나은 삶을 약속했던 3대 이념 간의 충돌이 있었다.
첫째, 공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대자본가들에게 돌리며 공동 소유를 통한 평화를 주장했다. 내세의 천국 대신 현세의 천국을 약속했다. 러시아정교 성당들이 갑자기 무신론 학원으로 변했고, 저항하던 사제와 수녀들은 죽임을 당했다. 문화예술인들은 공산주의적 인간을 만들기 위해 복무해야 했다. 1936년 이후 공산주의는 인민민주주의를 내세웠다.
둘째, 민족사회주의는 국제공산주의에 맞서 민족을 내세우면서 자본가들을 통제했다. 특히, 독일의 민족사회주의자들은 대자본가들이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모두 유태인들이라며 제노사이드를 자행했다. 일본의 민족사회주의는 야마토 민족의 상징인 덴노(天皇)와 사회주의를 결합시켰다. 베이징의 천자 중심적 세계관을 천황 중심적 세계관으로 바꾸어 놓고, 천하가 “하나의 집(八紘一宇·팔굉일우)”이라고 선전했다. 대동아의 “황국신민”은 “귀신, 짐승 같은 영·미(英美鬼畜)”와 싸우라고 독려했다.
셋째,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에 입각한 행복을 약속했지만 공산주의나 민족사회주의에 비해 나약해 보였다. 독일 바이마르민주공화국은 허망하게 무너졌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02.01 美蘇는 한반도의 38선으로 일본 제국을 분할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한반도 해방

▲1945년 9월 말 돈 오브라이언(Don O' Brien, 왼쪽)이 38선 인근에서 소련군을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군 소속 사진가 돈 오브라이언은 1945년 해방 직후 한국에 도착해서 다음해 1월 떠날 때까지 해방 직후의 한국 모습을 기록했다./돈 오브라이언 flickr 계정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전개된 미·일 전쟁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 개전 때와 달리 일본군은 승전에 대한 확신 없이 개전했다. 미국에서 유학했던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하와이 공습을 성공시킨 후 의심했다.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
일본은 중화민국을 지원하던 미국과 영국의 기세를 제압한 후, 유리하게 평화협정을 체결할 생각이었다. 1942년 2월 잠수함을 보내 캘리포니아 해안을 포격했지만 본토 상륙작전은 없었다. 4개월 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4척 등을 잃으며 대패했다.
이후 일본군은 계속 밀렸다. 승전에 기반한 평화협상이 불가능해지자 패전에 대비한 외교가 시작되었다. 일본이 패전 외교로 시간을 끌지 않고 좀 더 일찍 항복했다면 한반도는 소련 참전 이전에 해방되어 분단을 피할 수 있었다.
“덴노(天皇)와 한반도는 포기 불가”
이기기 위한 승전 외교 이상으로 힘든 것이 패전 외교다. 난파선의 선원들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승객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 일본 제국의 외교관들은 최대한 유리하게 지려고 했다.
일본에 가장 유리했던 종전 방식은 교전선(交戰線)에 따른 공간 분할(uti possidetis) 방식이었다. 이 방식에 따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일본은 동남아시아, 대만, 한반도, 만주 등을 계속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침략전쟁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스팀슨 독트린과 충돌했다.
다음으로 일본에 유리했던 것은 전쟁 이전 상태 회복(status quo ante bellum) 방식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전쟁 이전 시점을 어디로 보느냐가 중요했다. 1941년 12월 미·일 전쟁 개전 이전인가? 아니면 1937년 중일전쟁, 또는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전인가? 1931년 이전 상태, 즉 베르사유 평화체제로의 회복을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일본은 대만과 한반도에 더해서 서태평양 일대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와 처칠은 이미 1943년 1월 카사블랑카에서 “무조건 항복” 원칙을 천명해놓았다. 미국, 영국, 그리고 중화민국(현재의 대만)은 1943년 12월 카이로에 이어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전쟁 책임에 따른 징벌적 재조정 방식으로 공간을 재획정했다. 일제는 마지막까지 천황제 폐지나 히로히토의 퇴위, 그리고 한반도 해방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945년 7월 9일 미 육군 공보처에서 발행한 전황 지도의 개략도. 회색으로 표시된 곳이 당시 일본군 주둔 지역이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참전한 후 소련군과 미군의 작전구획선으로 38선이 설정됐다. /그래픽=양진경
일본 항복은 소련군 참전 덕분?
1945년 8월 15일 항복에 반대하는 일본군의 궁정 반란을 뚫고 히로히토의 녹음 연설이 방송되었다. 그의 항복 결정에는 히로시마(8.6)와 나가사키(8.9) 원폭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최근 미국의 원폭보다 유럽에서 독일군을 꺾은 소련군의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의 중재를 통한 평화교섭이 불가능해지면서 항복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소련 참전의 영향을 강조하는 주장은 일본이 불필요하게 원폭 피해자가 되었다고 보는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도쿄 전범재판 당시부터 미국이 지정한 미군 변호사는 일본의 전범들을 변호하면서 미국의 원폭 결정을 물고 늘어졌었다.
1959년에 만들어진 “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프랑스-일본 합작 영화는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미국의 원폭에 대한 적개심을 널리 확산시켰다. 독일군과 동거했던 프랑스 여인이 종전 후 프랑스인들에게 머리를 깎이는 등의 수모를 당한 것과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오버랩시킨 영화였다. 피해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원폭에 대한 공포는 이후에도 여러 영화들의 흥행을 촉진하며 미국의 가해와 일본의 피해를 부각시켜왔다.
원폭으로 전쟁을 끝낸 이유
소련군의 참전이 일제의 항복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8월 9일 소련군의 참전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이후의 일이었다. 히로히토의 항복 결정은 제3의 원폭이 도쿄 황궁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와 무관하지 않았다. 반인반신처럼 조작된 덴노의 이름으로 전쟁이 수행되었던 것처럼 종전에서도 히로히토의 결정이 필요했다. 당시 미국은 2개의 원폭밖에 없었지만 그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1945년 6월에 끝난 오키나와 전투는 미국의 원폭 사용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군 약 8만 명 이외에도 오키나와 주민 약 8만 명이 일본군의 결사작전에 희생되었다. 미군도 태평양 지역 단일 전투 최대 전사자(약 1만2000명)를 기록했다.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 미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면 훨씬 더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원폭 이후 한반도 해방과 삼팔선
“(한반도)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도둑같이 왔다.” 당대를 살았던 ‘씨알 사상가’ 함석헌의 회고다. “전쟁이 몇 해만 더 계속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해방을 다시 도둑질당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경고였다.
대한민국 임정 주석 김구에게 일본의 항복 소식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미국 육군성과 긴밀한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이제껏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앞일이 걱정이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자 8월 15일 이전에는 참전하기 어렵다던 소련은 8월 9일 만주에서부터 경성(서울)을 향해 빠르게 진격했다.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미국은 소련에 북위 38도선으로 작전구획을 나눌 것을 제안했다. 38도선 이남에 서울, 그리고 일본군이 만든 미군과 영연방군 포로수용소가 있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랴오닝(遼寧)반도 남단의 다롄(大連)과 평양 남쪽을 확보할 수 있는 북위 39도선도 고려되었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러일전쟁 때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던 다롄을 소련이 양보할 리 없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정책 결정자들이 삼팔선을 그어 분할 점령하려고 했던 것은 한국이 아니라 항복 이전의 일본제국이었다.
공간은 나뉘었지만... 시간과 인간은 쉽게 나뉘지 않는다.
한반도 분단은 임정 주석 김구의 탄식처럼 한민족이 해방의 주역이 되지 못했던 데 큰 원인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대한민국 임정이 국제적으로 승인되고 한반도 해방 작전의 주역이 되었다면 삼팔선은 미군과 소련군의 작전분계선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군과 미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한인들의 수는 일본군으로 참전한 조선인들에 비해서도 턱없이 적었다.
종전 이후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은 이승만이나 김구의 귀국보다 빠르게 원산에 상륙했다(1945.9.19.). 김일성을 원산까지 수송한 소련 선박도 사실은 미제(美製)였다. 그 배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용으로 대량 생산한 2700여 척의 리버티 선박들 중 한 척으로 1943년 미국이 소련에 원조한 것이었다.
한반도에 들어온 김일성은 자신을 “조국 해방전쟁”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미화된 김일성은 흑백투표함 선거 등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 1945년 일제에 맞선 “조국 해방전쟁”에 참전한 적이 없던 김일성은 1950년 미제에 맞선 “조국 해방전쟁”이라며 6·25전쟁을 일으켰다. 배후에는 1949년 미국의 원폭을 복제한 스탈린과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이 있었다. 이후 3년 이상의 전쟁을 통해 삼팔선은 군사분계선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위성사진이 보여주는 군사분계선 이남과 이북의 차이는 확연하다. 이 선을 국경선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남북 양쪽에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자칫 북한 지역도 과거 간도처럼 상실 될 수 있다. 군사분계선 이남만의 평화와 발전도 일장춘몽에 그칠 것이다. 약 80년간 공간이 나뉘었다고 해서 수천 년 한반도의 시간(역사)과 인간(민족)이 쉽게 나뉠 리 없다.
02.02 호족 품고 정치보복 멀리한 왕건, 민심은 그를 택했다
견훤·궁예·왕건의 갈림길
우리 역사에는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왕이 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견훤, 궁예와 왕건의 의미는 각별하다. 이 중 두 사람은 2대를 채 가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왕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미래를 알고 있는 후대인의 생각일 뿐, 당시로서는 자기 힘으로 나라를 세운 영웅이 아닐 수 없었다. 사주 관상이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말 그대로 ‘왕이 될 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끝은 같지 않았다. 견훤과 궁예는 실패했고, 왕건은 성공했다. 무엇이 달랐을까?
견훤은 장군, 궁예는 도적 출신

▲철원의 태봉 도성터.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으며, 군사분계선이 중앙을 관통한다. 내성(둘레7.7㎞)과 외성(둘레 12.5㎞)으로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견훤은 867년 상주 가은현(지금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짓고 살다가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고 했으니, 신라 말 지방에서 일어난 호족 가운데 세력이 약한 중소호족이었다. 견훤이 젖먹이일 때 부모가 일하느라 수풀 속에 혼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는 전설이 있다. 장성해서는 체구가 컸고, 그에 어울리게 군인이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신라 진성여왕 치세로 전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농민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창끝을 돌려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했다고 하는데, 거기서 자신감을 얻어 무진주(지금 광주)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892년의 일이었다.
백제·고구려 각각 계승 견훤·궁예
복수심 불탄 지역 맹주라는 한계
포악하지 않은 왕건 정치가다워
세금 3분의 1로 줄이는 위민정치
시대 과제 잘 풀어야 좋은 군주
역사의 승자로 평가받아 마땅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궁예가 왕자라는 사실은 다른 데서는 확인되지 않고, 당시에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니, 궁예 혼자만의 주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삼국사기』에는 왕자로 태어났으나 불길하다는 예언이 있어 왕이 죽이라고 명했고, 유모가 극적으로 구해다 키웠고, 그 과정에서 눈을 찔려 한 눈이 멀게 되었다는, 상투적인 스토리가 이어진다. 10대에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가 마침 농민 반란의 혼란 속에 기훤의 부하가 되어 도적의 길로 들어섰다. 곧 기훤을 버리고 양길 휘하로 들어갔지만 얼마 뒤 양길마저 배신하고 자립했다. 그 뒤 세력을 키운 끝에 901년, 스스로 왕이 되어 견훤과 대결을 벌였다.
고려 국호에는 복수욕 안 드러나

▲논산 개태사 석조 삼존불입상. 후백제 견훤의 아들인 신검이 고려군에 항복한 장소에 세워진 불상이다. 개태사는 936년 후백제 멸망 후 창건하기 시작해서 940년에 완성됐다. [사진 문화재청]
왕건은 송악군(지금 개성)의 호족 출신이었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해서 뒷날 고려 왕실에 용손(龍孫) 전설을 남겼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 이야기는 왕건의 조상이 서해를 무대로 당나라를 오가며 무역을 했던 사실을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먼 조상부터 집안 형편을 얘기할 때는 언제나 부유했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신라 말 농민 반란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되자 왕건의 아버지 용건은 궁예에게 귀부해서 멸문을 피하는 길을 택했다. 그와 동시에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었고, 그 아래에서 20여 년 동안 꾸준히 실력을 키우다가 918년 궁예를 축출하고 왕이 되었다. 왕이 되는 과정이 견훤이나 궁예만큼 극적이지 않지만, 그 대신 안정적이었다.
세 사람은 왕이 되는 길이 서로 달랐다. 궁예는 도적에서 출발해서 왕이 되었고, 견훤은 도적을 진압하는 군인으로 시작해서 왕이 되었다. 왕건은 유력한 호족으로서 실력을 쌓아 왕이 되었다. 왕이 된 뒤에는 나라 이름을 새로 정했는데, 여기서도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 견훤은 900년에 완산주(지금 전주)에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정했다(※후백제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앞의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후고려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당과 신라가 함께 백제를 공격해서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완산에 도읍하고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어찌 씻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궁예도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에 군사를 요청해서 고구려를 깨트렸다.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당시에는 고구려·고려를 혼용했다).” 두 사람 모두 200년도 더 지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꺼내 들며 신라에 대한 복수를 선언했다. 아마 그 지역 사람들을 결집하고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로는 다른 지역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없었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없었다. 반면, 왕건의 국호 고려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담고 있을 뿐 신라에 대한 복수 의지가 들어있지 않았다.
견훤·궁예 호족 지지 못 얻어 실패

▲강진 무위사 선각 대사비. 946년에 건립된 선각대사의 탑비다. 선각대사는 917년 궁예에 의해 처형당했다. 비문에 나오는 ‘대왕(大王)’이 궁예인지 왕건인지를 두고 논쟁이 진행 중인데, 궁예가 맞다면 궁예가 수군을 이끌고 나주를 점령한 것으로 되어 기존의 통설이 바뀌게 된다. [사진 문화재청]
국왕으로서의 자세도 달랐다. 가장 정치가다운 모습을 보인 사람은 왕건이었다. 왕건은 후삼국의 경쟁이 각 지방의 독립 세력, 즉 호족들의 지지에 따라 판가름나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즉위 직후부터 호족들에게 ‘중폐비사(重幣卑辭·후하게 대접하고 높히 대우함)’를 약속했고, 스물아홉 번이나 되는 정략결혼을 통해 호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견훤은 많은 것을 군사력에 의존했다. 실제로 견훤의 군사력은 왕건보다 강했고, 백제군은 930년 고창군(지금 안동) 전투에서 충격의 패배를 당할 때까지 고려에 진 적이 거의 없었다. 궁예도 전쟁을 통해 세력을 키워 한때는 신라 영토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강성했다. 나라 이름을 마진, 태봉으로 고치면서 대동방국(大東方國)을 꿈꿨으며, 말년에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이상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다른 호족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자신만의 꿈이었다. 왕건과 달리 견훤과 궁예는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고, 이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지난해 말 태봉의 연호 ‘정개(政開)’가 적힌 목간(木簡·글씨를 쓴 나뭇 조각)이 발굴된 경기도 양주 대모 산성의 집수시설. 목간에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목간 중 가장 많은 글자(총 8행·123자)가 적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합뉴스]
후삼국의 분열은 신라 말의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한 민심 이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의 성패를 결정짓는 근본 요인은 민심의 향배였다. 왕건은 왕이 된 지 34일 만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어 토지 1경(頃, 1경은 100부)의 세금이 6석(石, 1석은 150승)에 이르니 백성들이 농사짓고 살기가 어렵다. 내가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노니, 지금부터는 마땅히 십일조의 법을 써서 토지 1부(負)의 세금이 3승(升)이 되도록 하라.” 이 말에 따르면 고려 농민들의 세금은 3분의 1로 경감될 것이었다. 전쟁 중에 세금을 줄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왕건은 민심을 택했고, 이 결정을 왕건의 ‘위민(爲民) 정치’ 즉 백성을 위하는 정치라고 평가한다. 견훤과 궁예에게서는 이런 정책을 찾아볼 수 없다.
난폭한 권력자의 끝 안 좋아

▲충남 논산의 견훤왕릉.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은진현조의 “후백제왕 견훤의 묘가 현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무덤을 견훤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마지막으로, 견훤과 궁예에게는 왕건에게 없는 모습이 있었다. 포악함이다. 927년에 견훤이 신라 서울 금성(지금 경주)을 침략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군사들을 풀어 약탈하고, 신라왕을 잡아다가 보는 앞에서 죽였으며, 왕비를 능욕했다. 일국의 왕이 도적 두목이나 하는 짓을 했던 것이다. 궁예는 더했다. 직언하는 신하를 철퇴로 때려죽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미륵관심법을 터득했다면서 의심 가는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다. 심지어는 자기 부인과 두 아들도 죽였는데, 부인을 죽일 때는 불에 달군 쇠몽둥이로 음부를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평소 힘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기가 가장 힘이 세다고 생각했을 때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난폭한 권력자의 끝은 언제나 좋지 못했다.
견훤과 궁예와 왕건 가운데 누가 좋은 사람인가? 당연히 왕건이다. 역사에서 좋은 사람이란 도덕적인 판단이 아니라 시대의 과제를 잘 해결한 사람을 말한다. 왕건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왕건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승리한 사람일 뿐이며, 승리했기 때문에 미화되었고 패배한 견훤과 궁예는 악마화된 것이란 주장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역사를 그렇게만 보면 성공한 사람에게서 승리의 비결을, 실패한 사람에게서 패배의 원인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역사란 결국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불신이 힘을 얻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기 어려운 세태를 반영한다. 그래서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중앙일보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02.09 본처에겐 데면데면, 젊은 첩 죽자 “훗날 자네 곁에…”
이괄의 난 진압한 이시발의 사랑
“자네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는가. 내 늘 자네에게 말했지, 나보다 열여섯 살 적으니 뒤에 죽어야 한다고. 자네는 또 ‘내가 먼저 죽길 원하오’라고 했지. 사생(死生)은 인연 따라 정해지고 명(命)에는 운수가 있다지만 자네가 어떻게 나보다 먼저 죽을 수 있단 말인가.”(제측실문·祭側室文)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 1569~ 1626)이 눈물로 쓴 아내 제문의 도입부다. 이시발은 문관이면서 병법에도 탁월하여 이괄의 난을 진압했고 후금(後金, 청나라)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해 남한산성 보수를 진행한 인물이다. 중국어(漢語)에 능통하여 군사·외교 대책을 기획하는 막중한 직책을 소화했다. 또한 이른 나이부터 각 도의 관찰사를 거치며 지방 행정의 역량을 보여주었고 병조참판을 지냈다. 이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는 죽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후손들 또한 고관대작에 오른 이가 많았다.
동갑 정실 민씨와는 애정 부족
첩 이씨는 재색 겸비한 이상형
이씨 죽자 눈물의 제문 직접 써
민씨 묘지명은 최립에게 부탁
후손들 민씨 곁에 이시발 묻어
지금과 다른 적서 관념의 단면
조선시대 사대부로서 아내의 죽음을 이렇게 애절하게 표현한 사람이 있었던가. 제문의 주인공 이씨 부인은 네 번째 아이(딸)를 낳고 산후열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겨우 스물다섯인 그녀가 사경을 헤매던 날 평안도 관찰사인 마흔한 살의 남편은 의주에서 외국 사신을 응접하느라 몸을 뺄 수 없었다. 아내가 죽은 지 12일 만에 평양의 관아로 돌아온 남편은 간담(肝膽)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만남에서 사별에 이르기까지 부부의 10년 역사를 회상한다.
천재로 소문난 사임당의 손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있는 이시발 무덤의 묘비. 아내 민씨를 왼쪽에 묻었다는 문장이 보인다(貞敬夫人驪興民氏祔左).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죽은 아내 이씨는 사임당의 손녀이자, 옥산 이우(1542~1609)의 서녀이다. 아버지 이우(李瑀)는 사임당의 화풍을 계승하여 시·서·화·금(琴)에 모두 능해 4절(四絶)이라 불렸는데, 딸 이씨가 이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은 다방면의 천재로 소문난 구미의 명문 규수 이씨에게, 아니 그 아버지 이우에게 반년을 매달린 끝에 허락을 얻어낸다.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거문고와 바둑 실력이 뛰어났으며 자수와 서화에도 능했다. 내 정이 자네에게 특별히 깊은 것은 어찌 재색의 아름다움에만 있겠는가.”(제측실문)

▲왼쪽이 이시발, 오른쪽이 정실 민씨의 무덤이다.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그런데 신부 이씨의 위치는 정실이 아닌 측실이었다. 조선사회는 처첩제(妻妾制)를 통해 일처(一妻)와 첩을 법적 가족으로 인정했는데, 그 안에는 또 복잡한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양반의 서녀로 태어나면 대개는 양반의 측실이 되었다. 옥산과 이시발 사이에 오간 글들을 보면, 젊은 나이에 방백(方伯, 각 도의 으뜸 벼슬)이 될 만큼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두 배나 많은 나이 때문인지 청혼을 거절하는 아버지의 고통이 느껴진다. 학술과 예술로 조선 최고의 가문이고 보면 까짓 권력에 홀려 측실의 자리에 딸을 내줄 리 만무했을 수도 있다.
제문은 이씨가 남긴 자녀들을 잘 돌보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아내 이씨는 외지로 도는 자신과 늘 함께 했는데(汝常隨余, 同我旅食), 여기 평양 관사에까지 이르렀다. 함께 옮겨 다니면서 아들 달아(達兒, 慶忠)와 민아(敏兒, 慶善)를 차례로 낳았고, 해아(海兒)를 낳았다. 그런데 해아는 병을 달고 있어 아내는 이 아이를 늘 걱정했는데 엄마가 죽고 며칠 후 해아가 뒤따라 죽었다. 그리고 갓 난 딸 가린(可憐)은 엄마 없이 살아날지 점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열 살 남짓한 두 아들 달아와 민아는 더한 정성과 사랑으로 양육하여 어른으로 성장시키겠다며 남편은 굳게 다짐한다. 그리고 정리가 되는 대로 천릿길 고향으로 데려가 새 산소에 묻을 것이며 훗날 자신도 자네 곁에 묻히겠다고 한다.
아들들 활약에 훗날 이씨 정실 자격 얻어

▲벽오 이시발과 그의 측실 이씨 사이에 태어난 이경선을 기리는 충신정려문.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이씨의 장남 경충(慶忠, 1599~1648)은 무과에 급제하여 아버지를 따라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고, 차남 경선(慶善, 1600~1636)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씨의 아들들은 나라에 공을 세운 대가로 서자의 굴레를 벗고 적자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경주이씨세보』에는 이씨를 이시발의 배(配) ‘정경부인 덕수이씨’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녀 또한 아들들의 활약으로 정실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남편의 호를 따라 그녀를 ‘벽오부인’이라 불렀다. 작품으로 묵죽(墨竹) 4폭이 전해온다. 애정과 의리를 모두 구현한 벽오 부부의 이야기는 정실이나 측실을 떠나 진정성이 느껴진다.
조선의 가족제도에는 아내가 생존한 상황에서 다시 아내를 얻는 것, 양처병존(兩妻竝存)은 불법이었다. 고려의 다처제(多妻制)가 파생한 사회적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마련된 조선의 처첩제는 가부장제 가족의 다양한 욕망과 결합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파생했다. 처의 지위가 확고해서 합당한 사유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혼은 불가능했다. 이를 보완하는 남자 쪽의 요구가 첩의 승인이다. 하지만 제도로 열려있다고 해서 모든 양반이 첩을 들였던 것은 아니다. 색을 밝히는 것으로 비칠까 봐 첩 장가에는 늘 자기변명이 따랐다. 벽오 이시발 역시 “후사를 얻으려고 자네를 측실로 맞았다(求嗣卜姓)”라고 하지만 이상형의 여성을 만난 것이다. 정실 민씨는 얼마나 속을 끓였을까.

▲벽오 이시발과 그의 측실 이씨 사이에 태어난 이경선을 기리는 편액. 충북 진천 이시발 묘소 아래에 있다.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정실부인 민씨는 열아홉 동갑의 신랑을 만나 시집을 오는데, 처가 가족들은 남길만한 어떤 특징이 없었는지 이시발은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후하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혼인 11년에 남편이 다른 아내를 얻는데 그것도 ‘후사를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딸만 둔 서른 살의 그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녀는 측실이 아들을 낳자, 뒤이어 자신도 아들을 낳았고, 남편이 지극정성으로 애정하던 측실이 여름에 죽자 그해 겨울 그녀도 죽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은 ‘본처의 지독한 투기’로 읽힐 소지가 있다. 정실의 타이틀을 쥐긴 했지만 그녀는 늘 외로웠다. 이러한 추측은 민씨 부인 묘지명에서 어느 정도 사실화된다.
이시발은 부인 민씨의 제문을 직접 쓰지 않았다. 측실 이씨의 주검 앞에서 “오호애재(嗚呼哀哉)”를 연발하며 거의 쓰러질 듯 울부짖었고, 제문 말고도 여러 편의 애사(哀詞)를 남긴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는 아내 민씨가 죽자 일선에서 은퇴하여 평양에 은거하고 있던 최립(1539~1612)에게 묘지명을 부탁한다. 남편 이시발이 부르고 최립이 기록한 ‘민씨묘지명(『簡易集』)’의 내용을 간추려보자.
“제 아내 민씨, 특기할 아름다움 없어”

▲측실 이씨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묵죽도.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제 아내 민씨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 무슨 특기할 만한 아름다움은 없었습니다. 다만 부도(婦道)를 행하면서 집안일을 잘하고 있다는 것만은 대강 알았고, 모친께서 ‘나를 잘 섬기고 있으니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그런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혼인하고 몇 년 뒤 제가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자 서울로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진란이 터지자 모친을 찾아 저는 혼자 고향으로 내려갔고 전란의 와중에 서로 연락이 끊긴 나머지 생사를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약간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後稍得之), 주변에 친정의 조모와 백숙부가 있는데도 민씨는 어린 딸을 데리고 시백부에게 의탁하였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제천 향리까지 왔기에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내를 공대(恭待)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1년도 되기 전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시발의 자필 서간(1601).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아내와 어린 딸을 서울에 남겨두고 혼자 고향으로 내려가 어떻게 생사를 모를 지경이 될 수 있으며, 아내의 일을 “들어서 대강 알고 있다”는 식의 강 건너 불 보듯 한다면 남과 다름이 없다. “이제 아내를 공대하기로” 한 남편의 태세 전환은 측실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전적으로 그 남편의 말에 따라 묘지명을 작성한 최립은 민씨를 가리켜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근본정신을 미루어 실천”하였고, “사군자의 행동과 다름이 없었다”는 논평으로 끝을 맺는다. 측실 이씨 곁에 묻히고자 한 이시발의 바람과는 반대로 후손들은 그를 정실 민씨 곁에 묻어주었다.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제도와 이념으로만 재단한다면 중요한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태어나는 순간 승자팀과 패자팀으로 나뉘는 이런 구도에서는 어디에 속하든 삶의 온전한 의미를 구현하기 어렵다.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교만과 상처로 얼룩진 적서(嫡庶)의 유산은 청산되어야 한다.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02.12 “조선의 집은 말발굽 모양 초가집”...美 의회도서관 소장 사진 공개
서울역사박물관, 美언론사·외교관·조선총독부 사진 등 163점

▲상공에서 내려다 본 안국동 일대 (1950.6.26.), 뉴욕 월드 텔레그램&선 컬렉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이 조선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의 사진 163점이 수록된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서울 사진: 네 개의 시선’을 발간했다고 12일 밝혔다.
구한말 미국 외교관과 저널리스트, 미국 언론사 등이 촬영하고 미국 의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들이 담겼다. 해방 직후 미국이 일본에서 입수한 조선총독부 문건에 수록된 사진들도 포함됐다.

▲숭례문과 성벽 바깥의 민가 모습 (1884-1885) /서울역사박물관

▲남산에서 내려다본 숭례문과 서울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에 외교 무관으로 파견된 미 해군 장교 조지 C. 포크가 촬영한 숭례문 사진은 현존하는 숭례문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추정된다. 숭례문 성벽 인근 민가의 모습,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전경 등이 찍혔다.

▲종로 2가 엿 파는 아이(1911년 이전) 모습. 미국의 여행 작가 카펜터 촬영. /서울역사박물관
미국의 여행 저널리스트 카펜터(Frank George Carpenter)는 1925년 저서 ‘카펜터의 지리학 교재: 아시아’, ‘일본과 한국(Japan and Korea)’ 등을 통해 한국의 평범한 민가의 모습을 기술하고 사진을 남겼다. 그는 “조선의 어린 소년들은 어깨 위에 줄을 매단 쟁반을 들고 다니며 사탕을 판다”, “조선의 집들은 말발굽 모양을 띠고 있으며 주로 나무로 지은 집이나 짚을 얹어 돌과 진흙으로 만든 초가집에 산다”고 기록했다.

▲말발굽 모양을 한 초가집 모습 (1911년 이전), 프랭크 G. 카펜터 컬렉션 /서울역사박물관

▲종로 3가에서 바라본 남산 일대 시가지 전경(일제강점기) /서울역사박물관
해방 직후 미국이 일본에서 입수한 조선총독부 문건 속 사진에도 조선의 구한말 모습이 상세히 기록돼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생활상태, 경제사정, 상업지, 부락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긴 사진들로 경성 외에도 평양‧인천‧수원‧대전‧강릉‧경주‧부산‧광주‧제주‧황해도‧함흥‧간도 등 전국이 담겼다. 촬영자는 당시 경성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던 무라카미 텐코(村上天紅)로 추정된다.
특히 종로 3가 일대에서 바라본 남산 일대 시가지의 모습이 생생히 담겼다.

▲1946년 1월 19일 신탁통치 반대 집회 /서울역사박물관
1920~1967년 간행됐던 미국의 일간지 ‘뉴욕 월드 저널 트리뷴(New York World Journal Tribune)’이 촬영한 미공개 사진들도 공개됐다.
모스크바 회의에서 한국을 5년간 신탁 통치하기로 결정한 데 반대해 모여든 시위 행렬이 현 조계사 사잇길을 지나는 모습, 상공에서 바라본 안국동 일대 안동별궁과 풍문여학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폐허가 된 을지로, 명동 일대(1952.6.22.), 뉴욕 월드 텔레그램&선 컬렉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일보 김휘원 기자
02.23 청·일 각축 속에 좌절된 조선인에 의한 개혁
견지동 우정국 청사와 갑신정변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큰 한옥이 보인다. 조선말 우정총국 청사인데 개관식 날 갑신정변이 일어난 건물로 유명하다. 갑신정변은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해 삼일천하로 끝난 정변이다. 처음에는 고종도 이들과 손잡고 민씨 정권 배후의 청나라 세력을 추방하려 했지만, 청의 개입으로 실패하는 바람에 조선은 점점 더 청에 종속되고, 고종도 민씨 정권에 의해 더욱 휘둘렸다. 역참제에서 벗어나 근대적 체신 행정을 펴려 했던 홍영식의 꿈도 무산돼 우정총국 건물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졌다.
일본 등에 업은 개화파 거사 현장
청 개입해 실패 후 뿔뿔이 망명길
일 대중은 “김옥균은 조선의 쑨원”
책임 캥긴 일 정부는 외딴섬 가둬
피습 암살, 시신 유린에도 무관심
청일전쟁 몰아가는 데 죽음 활용
사람들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안타깝게 여긴다. 이 정변이 성공해 내정개혁을 이루었다면 조선이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당시 서구 열강은 동아시아에 탐욕의 손길을 뻗었는데 이를 뿌리치기 위해선 한·중·일 세 나라의 화합과 공동보조가 중요했다. 이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 대표되는 일본 지식인들은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주창했다. 안중근 의사가 피력한 동양평화론도 삼화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김옥균도 삼화주의에 심취해 리훙장(李鴻章)과 담판을 벌이기 위해 상하이로 떠날 때 여권에 이와타(岩田) ‘미와(三和)’란 이름을 사용했을 정도다.
조선 내정개혁에 청·일 딴생각

▲서울 견지동 조계사 경내에 있는 우정총국 청사. 1884년 12월 4일 개관식 현장에서 김옥균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당시 삼화주의 구현을 위해선 한·중·일 내정개혁이 전제돼야 했다. 이에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내정개혁을 이뤄냈고, 청은 양무(洋務) 및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을 통해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조선의 내정개혁만 더뎌져 삼화주의 구현에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심지어 조선은 동아시아의 병자(病者)란 소리를 들었지만, 조선의 후견인을 자처한 청나라조차 조선의 내정개혁에 무관심했다. 반면 일본은 조선이 내정을 개혁해야 청에서 독립할 수 있다고 믿어 개혁을 채근했다. 조선의 내정개혁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은 이런 물과 기름의 관계였다.
청의 이런 태도에 일본 지식인들은 분개했다. 조선의 개혁이 늦어져 조선이 동아시아의 병자로 계속 남으면 구미 열강의 좋은 먹잇감이 돼 일본 안보가 위태로워져서다. 한반도 부근에서 부동항을 찾기 위해 눈알을 부라렸던 러시아의 행보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래서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의 내정개혁을 위해서라도 메이지유신과 같은 쿠데타가 조선에서 일어나길 바랐다. 또 청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일본 힘을 빌려야 한다는 사람들도 조선에서 생겨났는데 개화당 내지는 독립당을 자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본 힘을 빌리려고 했으니 당연히 친일파다.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터진 청불전쟁은 조선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좋은 여건을 만들었다. 청은 이 전쟁을 지원하느라 조선에 주둔한 군사 3000명 중 절반을 빼냈는데 주둔군 수가 줄면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도 줄게 마련이다. 이처럼 정세가 청에 불리해지자 일본은 자신의 국익에 부합하는 정권을 조선에 수립하려 했고, 조선의 급진개혁파도 이에 호응해서 그해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청과의 정면충돌을 우려해 쿠데타 지원을 주저했지만, 청불전쟁을 틈타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일소하려 했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일, 프랑스에 정변 후원 100만 달러 요청도

▲서울 북촌로5길 정독도서관 안에 있는 김옥균 집터 표지석.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일본의 자유민권운동 지도자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와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도 쿠데타를 후원하기 위해 주일 프랑스 공사 생퀴지를 만나 100만 달러를 요청했다. 조선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면 가장 큰 이득을 볼 나라가 청과 전쟁을 벌이는 프랑스여서 조선에 경제적 원조를 해줘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일본의 야권도 조선의 내정개혁에 대해 이처럼 관심이 높았다.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이 이런 분위기를 감지해 프랑스와 서둘러서 협상을 체결하려 하자 이를 눈치챈 청의 조선 감독관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무력으로 갑신정변을 신속히 제압했다.
쿠데타가 실패하자 갑신정변 주역들에게 곧바로 재앙이 닥쳤다. 홍영식은 붙잡혀서 처형됐고, 영의정을 지낸 그의 아버지 홍순목은 손자와 함께 자살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행과 제물포로 가서 배를 타고 일본에 망명하려 했다. 이때 다케조에 공사가 이들의 지토세마루(千歲丸) 승선을 거부했다. 공사 자신이 개입했음에도 정변이 실패해 정변의 증인들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게 꺼림칙해서다. 또 이들의 망명이 일본 정부에 큰 부담을 주어서다. 공사의 이런 처신에 분노한 일본인 선장의 거친 항의로 간신히 승선할 수 있었다.
이들이 망명했어도 일본 정부로부터 찬밥 신세였다.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는 갑신정변이 자신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대내외에 보여주고 싶어서다. 그러면서 즉시 미국으로 떠날 것을 요구해 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은 미국으로 향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 남은 김옥균을 체포해서 인도해 달라고 계속해 요청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이용했던 인물을 손바닥 뒤집듯이 사지로 내몰 순 없어도 그렇다고 눈에 띄게 보호해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김옥균은 한때 태평양 위의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에 보내졌다가 다시 홋카이도 삿포로로 옮겨지기도 했다.
김옥균, 리훙장과 담판하려다 피살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한편 일본 민간에선 ‘조선의 쑨원(孫文)’이라며 김옥균을 뜨겁게 맞이했다. 이런 큰 환영을 받았어도 9년여에 걸친 망명 생활 중 조선 개혁을 위해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낙천주의자였던 김옥균도 점점 좌절감에 빠졌다. 그래서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청의 실력자 리훙장을 만나 조선에서 손을 떼라는 데서 이를 찾으려 했다. 이 담판을 위해 그는 상하이로 건너갔는데, 이 여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한 조선 정부의 음모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의 총에 맞아 44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차준홍 기자
그의 시신이 한강 양화진에서 효수된 뒤 조각난 살점들은 전국 8도에 뿌려졌다. 그런데 상하이 영국 조계지에서 피살된 그의 시신이 어떻게 해서 조선에 인도되었을까? 김옥균에 치를 떨던 민씨 정권이 청나라에 로비한 결과이지만 시신 인도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일본 정부도 한몫했다. 김옥균 시신이 조선에 가면 처참히 처리될 걸 뻔히 아는 일본 정부였어도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게 오히려 낫다고 봐서다. 그리고 ‘청이 김옥균의 시신까지 빼앗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라는 식으로 청에 대한 일본인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활용했으니 무관심은 일종의 음모였다.
김옥균의 시신이 부관참시되자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文麿) 공작,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 일본의 유력 정치인 100여 명이 모여서 ‘김옥균 사건 연설회’라는 미증유의 집회를 열었다. 이런 분위기가 청일전쟁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옥균이 암살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청일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고, 조선도 청나라 영향권에서 일본 영향권으로 그 소속이 바뀌었다. 그러니 일본 정부는 김옥균의 죽음을 최대로 활용해 오랜 목표를 이룬 셈이다.
김옥균 묘비 “비상한 재주 비상한 시대 만나”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다. 쿠데타를 도모하지 않았으면 특권층 자녀로 부족함이 없이 누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힘든 길을 택했다가 불우하게 삶을 마쳤다. 『장자』 '인간세'에서 “길을 걷지 않기란 쉬워도 땅을 밟지 않고 걷기란 어렵다”라고 말한다. 이들이 누리면서 사는 쉬운 길을 버리고, 도전하며 개혁하는 어려운 길을 택했으니 바른길을 걸은 셈이다. 그렇더라도 쿠데타에 외세를 끌어들이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하는 인식에선 안이하지 않았나. 갑신정변으로부터 26년이 지난 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됐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도쿄 아오야먀 레이엔(靑山靈園)의 외국인 묘지에 있는 김옥균 묘비에 이렇게 쓰여있다.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으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 못한 채
비상하게 죽은 김옥균 공이여.

중앙일보 김정탁 노장사상가
02.27 프랑스 화가가 그려 영국잡지에 실렸던 고종 황제 캐리커처
화정박물관, 인물 소재 옛 그림들 모은 고인물(古人物) 전

▲조선의 황제 고종황제프라이 (프랑스, 1890년대 활동) 영국 1899년 석판화 36.0cm x 24.0cm[화정박물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제공: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초상화나 옛사람들이 지향한 이상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들의 일화 등 사람을 소재로 한 옛 그림들을 모은 전시가 열린다.
서울 종로구 화정박물관은 3월 5일부터 박물관 소장 인물화를 소개하는 '고인물'(古人物)전을 연다고 26일 밝혔다.
네 개 섹션으로 나눠 사람을 중심으로 표현한 그림을 위주로 회화와 공예품 약 90점을 선보인다.
첫 번째 섹션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초상화를 통해 각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 예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정영(李正英, 1616~1686) 초상과 프랑스 화가이자 풍자만화가인 프라이가 그려 1899년 10월 19일 자 영국 잡지 '베니티 페어'에 실린 고종황제의 캐리커처 등이 전시된다.

▲삼국지 내용 중에서 예형이 조조를 욕보이는 장면을 다룬 그림. 작자 미상. 청 1883년, 액자 지본채색 45.5cm x 63.0cm[화정박물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제공: 연합뉴스
두 번째 '이상적인 삶'(Ideal Life) 섹션은 청렴 고결한 인격, 지조와 절개, 속세를 떠난 은자의 삶 등 옛사람들이 지향했던 이상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의 일화를 묘사한 작품들이 소개된다. '서원아집도', '동파입극도' 등이 전시된다.
중국 당나라인으로 팔선(八仙)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여동빈'을 묘사한 지운영의 부우제군부검도(孚佑帝君負劍圖) 등 신선이 된 인물이나 신비한 능력이 있는 승려처럼 신기한 이야기를 다룬 그림은 세 번째 섹션에서 소개된다.
마지막 섹션은 당시 생활상이나 '삼국지'처럼 당대 인기를 누린 대중문화를 구현한 그림으로 구성됐다. 이 중 '어제경직도'는 중국 청대 강희제 때 궁궐에서 간행된 경직도다. 경직도는 농사짓는 일을 의미하는 '경'(耕)과 비단 짜는 장면인 '직'(織)을 표현한 그림으로, 자칫 궁궐 안에서 세상의 돌아가는 모습을 모르고 사치 향락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의미로 제작됐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유료 전시로, 네이버나 전화로 예약한 뒤 볼 수 있다.

▲전시 포스터[화정박물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제공: 연합뉴스
zitrone@yna.co.kr
03.02 패전 후 일본인 71만명, 단돈 1000엔씩 들고 조선을 떠났다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한강의 기적 마중물 된 일본인 귀속 재산

▲일러스트=한상엽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공공기관, 단체, 회사, 개인 등이 소유한 일체의 재산은 1945년 9월 25일부로 미군정청이 접수하고 그 소유권을 행사한다.”(미군정 법령 제33호, 제2조. 1945.12.6.)
해방 당시 한국은 ‘세계 최빈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본 축적 면에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2위에 해당하는 상대적으로 산업화된 지역이었다. 1930년대 이후 공업화 정책에 따라, 한반도의 산업 구조는 광공업 비율이 53%, 제조업 중 중화학공업 비율이 51.3%에 달했다. 다만, 그중 80%가 일본 정부와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에 산업화의 과실이 한국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해방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인이 소유한 한국의 국부(國富) 총액은 52억달러로, 중화학공업 투자가 집중되었던 북한이 29억달러(55.8%), 남한이 23억 달러(44.2%)였다.
진주한 지 넉 달이 지난 1945년 12월, 미군정은 해방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인 소유의 재산 일체를 몰수해 미군정에 귀속시켰다. 이를 일컫는 공식 용어는 ‘귀속재산’이었지만, 한국인들은 적국의 재산이라는 의미에서 ‘적산(敵産)’이라는 용어를 더 자주 사용했다. 귀속재산 중 정부 소유의 국공유 재산은 19%에 불과했고, 법인 소유의 기업체 재산(67.6%), 개인 소유의 재산(13.4%) 등 사유 재산이 전체의 81%를 차지했다.
조선에 거주하던 71만여 일본인은 패전 이후 예금, 유가증권, 부동산은 물론 가재도구까지 미군에 몰수당하고, 말 그대로 빈손으로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귀국길에 민간인이 소지할 수 있는 현금은 1000엔에 불과했고, 군인은 그보다 적었다. 일본인의 귀국이 본격화된 12월에야 일본인 사유재산의 귀속이 결정되는 바람에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서울 2만3000여 개, 부산 2만2000여 개의 탁송 화물이 일본으로 송출되지 못하고 미군정 소유로 몰수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미군정이 일본인의 사유재산까지 몰수한 것은 1907년 개정된 ‘헤이그 육전(陸戰) 조약’ 제46조 “어떠한 경우에도 점령군은 적지의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손댈 수 없다”는 소위 ‘사유재산 불가침 조항’ 위반이었다. 억측은 구구하지만 ‘자본주의 진영의 수호자’ 미국이 무리하게 패전국 일본 국민의 사유 재산까지 귀속시킨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한 존 하지(왼쪽부터)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과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 점령군 사령관, 이승만 대통령.
1951년 9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일본은 태평양전쟁 전후 처리 종식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귀속재산의 국제법상 적법성 논란을 의식한 이승만 정부의 요구로 조약의 ‘제4조 b’에는 “일본은 한국 내의 미군정이 실행한 귀속재산 접수, 처리 등에 따른 모든 행정 조치의 적법성을 인정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미군정은 관리가 어려워 민간에 불하(拂下)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귀속재산을 3년 동안 관리하다가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했다. 미군정이 불하한 대표적인 귀속재산은 민간 주택 8만2000여 채, 100만엔 이하의 소규모 사업체 500여 개사, 남한 농경지의 13.4%에 달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경지 32만여 정보 등이었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주택(적산 가옥) 불하는 무주택 서민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기회를 제공했고, 전재민(戰災民), 월남민으로 극심해진 대도시 주택난 해소에도 도움을 주었다. 미군정은 신한공사(New Korea Company)로 이관해 관리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농경지를 소작민 60여 만 가구에 불하했다. 토지 가격은 연평균 생산량의 300%, 20%씩 15년간 분납하는 조건이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고 선전하면서 경작권만 인정한 채 25% 이상의 현물세를 징수한 북한의 토지개혁보다 오히려 나은 조건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된 귀속재산은 건수로 29만여 건이었고, 그중 기업체는 2200여 건이었다. 귀속재산 규모는 3000억원 정도로 추정되는데, 1948년 국가 예산 351억원의 8배 이상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귀속재산 불하는 농지개혁과 보조를 맞춰 1950년부터 본격화되었다. 농지개혁 당시 정부는 지주에 대해 토지 가격에 상응하는 지가증권을 발급하고 나중에 귀속 사업체를 불하받을 때 그것으로 매수 대금을 납부할 수 있게 했다. 지주를 산업자본가로 전환하기 위해 의도된 정책이었지만, 90.8%에 달하던 100석 이하의 군소 지주들이 발급받은 지가증권으로 대부분 중견기업 이상이었던 귀속 사업체를 불하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지가증권이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수납된 규모는 41.7%에 달했지만,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지주에게서 지가증권을 헐값에 구입한 브로커에 의한 수납이 대부분이었다.
관리인, 임차인에게 최우선권이 부여된 귀속 사업체 불하 과정에서 정실 불하, 정경 유착, 부정 축재 등 비리가 속출했다. 또한 6·25전쟁, 기술과 자본 부족, 관리인의 무능 탓에 귀속 사업체의 경영도 대체로 부실했다. 하지만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SK그룹으로 키운 최종건, 쇼와기린맥주를 불하받아 OB맥주, 두산그룹으로 키운 박두병, 조선화약공판을 불하받아 한화그룹으로 키운 김종희, 한국특수제강을 불하받아 동국제강으로 키운 장경호 등 몇몇 유능한 관리인은 귀속 사업체를 불하받아 ‘한강의 기적’을 주도할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귀속재산은 1951년부터 15년 동안 이어진 한일청구권 협상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적 성격의 청구권을 제기하자, 일본은 패전 이후 한국에 두고 온 재산 특히 민간의 사유재산에 대한 역청구권을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군정의 일본인 재산 귀속의 합법성을 인정했지만, 헤이그 육전 조약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인 귀속재산을 보상해야 한다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상대방에게 청구권을 주장하려면 정확한 금액을 제시해야 하는데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 그 정확한 금액을 산정하지 못했다. 결국 양측은 상대방에 대한 청구권 주장을 포기하는 것으로 상쇄하자는 데 합의했다. 그 대신 일본은 한국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자금을 제공했다. 한국 정부는 그 자금이 “한국인들이 35년간 일본 식민지 지배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경제 수탈에 대한 보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에 따른 대일청구권은 일본의 귀속재산 청구권으로 상쇄되었으며, 그 자금은 ‘경제협력자금’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해 대한민국 정부에 넘겨주었다. 그 덕분에 한국은 일본이 35년 동안 한반도에 쌓아놓은 부를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귀속재산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끈 마중물이 되었다.

▲2014년 1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촬영한 한반도의 위성사진 /미국 항공우주국(NASA)
<참고 문헌>
배석만, ‘해방 후 귀속재산 처리의 전개과정과 귀결’, 한일민족문제연구 제26집, 2014
오두환, ‘해방 후 적산처리의 실태와 특징’, 황해문화 제5호, 1994.12
이대근, ‘귀속재산 연구’, 이숲, 2015
이연식, ‘해방 직후 서울 소재 적산요정 개방운동의 원인과 전개과정’, 향토서울 제84호, 2013
조선일보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03.17 100년 역사가 흘러온 안국동 8-1번지, 나는 집이다
서울 안국동 윤보선 가옥 100년사

▲서울 종로구 안국동 8-1번지 윤보선 가옥 사랑채. 1870년대 여흥민씨 민영주가 처음 만든 이래 1970년대까지 구한말~대한민국 주요 사건 주역들이 살았던 공간이다. 오른쪽 향나무는 정보과 형사 눈을 피하려는 가림막이고 앞의 연못가는 민주화 가족들이 모였던 곳이다. /박종인 기자.
서울 종로구 안국동 8-1번지에 큰 집이 있다. 집 이름은 ‘윤보선 가옥’이다. 도로명 주소는 ‘윤보선길62′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살던 집이다. 지금은 아들 윤상구가 살고 있다. 국가 사적이다.
구한말에서 식민지, 전쟁과 전란 후 격랑 속에서도 집은 자리를 지켰다. 집을 지었던 사람은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여흥 민씨 권력자 민영주였다. 이후 집은 갑신정변 주역 박영효를 거쳐 일본인, 그리고 한 나라 대통령과 그 가족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하나같이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끌고 간 주역들이다. 규모와 외형 또한 거듭 바뀌었지만 그 역사가 집에 박아놓은 흔적은 변함이 없다. 그 집이, 100년 자기 역사를 말한다.

▲안국동 8-1번지 윤보선 가옥 대문. 역사가 왕래했던 역사적인 문이다.
내가 태어났다
1870년 어느 날 내가 태어났다. 나는 집이다. 나를 잉태한 존재는 역사고 나를 만든 이는 여흥 민씨 권력자 민영주다. 민영주는 장터를 떠돌며 떡과 된장을 파는 장돌뱅이였다.(황현, 국역 ‘매천야록’1 上 14.장탕반과 망나니 민영주, 국사편찬위) 그런데 1866년 음력 3월 21일 골목 하나 아래 감고당에 살던 친척 민씨 여자가 시집가면서 팔자가 피었다. 그녀가 명성황후로 추존된 왕비 민씨, 민비다.(1866년 3월 21일 ‘고종실록’) 민비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또한 장인이 여흥 민씨 민치구이고 민영주 할아버지 민치우는 이 민치구의 동생이다. 이 겹사돈 관계 덕에 나를 만든 민영주는 왕비 쪽으로도 친척 조카뻘이요 대원군 쪽으로도 처조카뻘인 막강 권력자가 되었다. 권력을 가진 망나니.
그 덕에 안국동 언덕 아래에 내가 태어났다. 100칸이 넘는 대저택이다. 민망나니 영주가 긁어모은 돈이 대궐 같은 집으로 변했다.
나는 화려하였다
봄이면 꽃이 만발하였다. 언덕 북쪽까지 펼쳐진 내 동산 꽃나무 사이로 정자들이 들어섰다.
내가 얼마나 컸느냐. 375칸이었다. 99칸 상한을 넘어도 한참 넘는다. 첫 주인 민영주에게 고종이 묻는다. “궁궐을 짓는다며?” “대궐이 아니라 절이올시다.” 고종은 웃고 만다. 민망나니가 가진 다른 별명이 ‘민부처’였으니까. 망나니처럼 잔인하게 모은 재물로 부처처럼 행복히 산다고 하여 또 다른 별명이 부처였으니, 웃은 것이다.(황현, ‘매천야록’3 1899 10.성균관에 박사제 설치)
훗날 나를 차지했던 일본인 쓰네야 모리후쿠는 나를 ‘주변에서 가장 깊숙하고 한적하고 아름다운 정자가 많아 겨울만 빼면 책 읽기 좋은 집’이라고 했다.(쓰네야 모리후쿠(恒屋盛服), ‘朝鮮開化史’ 서문, 東亞同文會, 1904) 또 어느 날 윤치호가 나에게 왔다. 민영주가 기둥에 걸어놓은 주련을 보고 한참 웃었다. 망나니 민영주가 ‘독성현서 행인의사(讀聖賢書 行仁義事: 성현이 쓴 책을 읽고 인의로운 행동을 실천하라)’고 적어놓은 게 아닌가.(1920년 11월 5일 ‘윤치호일기’)
갑신정변, 사라질 뻔했던 나
내가 있던 북촌에는 민씨들 집이 많았다. 1882년 6월 군인들의 반란 ‘임오군란’ 때 많은 집이 불탔다. 1년 넘게 군인 월급을 주지 않은 선혜청 당상이 민씨였고, 군인들은 ‘진살제민(盡殺諸閔: 민씨들을 다 죽인다)’이라며 집들을 불태웠다. 그리고 1884년 옆집 살던 홍영식과 언덕 위에 살던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은 대실패로 끝났다. 옆집 주인 홍영식은 거리에서 죽었고 집은 병원으로, 여고로 변했다. 나와 맞붙어 있던 김옥균 집은 학교로 변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모두 집이 북촌이었다. 내 주인 민영주는 이후에도 매일 밤 고종과 민비가 벌이는 심야 파티에서 노래자랑대회를 주관하며 권력을 누렸다.(황현, ‘매천야록’2, 1894 1 19. 궁중의 아리랑타령) 나는 건재했다.
내가 궁궐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심야파티를 벌이는 국왕 부부에게 가난한 백성이 죽창을 들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다. 진압을 핑계로 일본군이 들어왔다. 일본 지원을 받은 개혁 갑오정부가 들어섰다. 민씨들은 몰락했다. 잠깐 몰락했다.
고종과 왕비 민씨는 일본으로 갔던 박영효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주었다. 국왕 부부는 옛 주인 민씨를 버리고 박씨를 택했다. 민비는 박영효에게 관복 제작용 옷감과 직녀공을 보내고 저택을 하사했는데(‘주한일본공사관기록’5-五-(14)조선 정황 보고 제2, 1894년 12월 28일) 그 저택이 바로 나였다. 박영효는 함께 망명했던 서광범과 함께 새로운 내 주인이 되었다. 갑오정부 간섭을 옛 정적과 손잡고 물리치려는 계책이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나를 일러 ‘임금이 사는 집과 반대’라고 수군거렸다.(황현, 앞 책 2권 2권, 1895년 ① 8.박영효의 기복) 나는 이후 박영효 군호를 따 금릉위궁이라고 불렸다.
내가 불탔다
국왕 부부 계책은 실책이었다. 금릉위 박영효 또한 궁궐로 변한 내 사랑채에서 다시 반역을 꿈꿨다. 고종 부부에게는 배신이었고 박영효에게는 두 번째 정변이었다. 불과 6개월 만에 박영효는 가족을 남기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박영효 측근과 내각 고문이던 쓰네야 모리후쿠가 내 새 주인이 되었다.
그러던 1899년 6월 13일 저녁 폭탄이 폭발했다. 박영효 일파가 만들던 폭탄이 터져버렸다. 임오군란 방화를 견뎌낸 내가 불탔다. 폭탄을 만들던 두 사람이 죽었다. 세상이 흉흉하여 곳곳에서 사람들이 관리들 집에 폭탄을 던지던 때였다. 겁에 질린 고종도 경운궁(덕수궁)에서 미국-영국 공사관 틈에 있는 중명전으로 피할 정도였다.
경찰이 들이닥쳤다. 함께 살던 주인집 가족이 모두 끌려갔다. 하지만 주인 박영효가 일본에 있으니 결론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대신 나는 크게 부서졌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3-8-(46) 망명자 귀국 운운에 관한 풍설과 폭렬탄 1건, 1899년 6월 27일) 나를 나눠 함께 살던 박영효 친구 쓰네야는 겁에 질려 귀국했다. 나는 대한제국 황실로 넘어갔다.

▲윤보선 가옥 사랑채. 박영효가 제2의 쿠데타를 꿈꿨던 공간이며 야당 지도자 윤보선이 동지들과 회의를 했던 공간이다.
나를 스쳐간 사람들
1902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제국 농상공부 고문 가토 마스오에게 나를 주었다. 가토는 나를 철도국 사무실 겸용으로 삼았다.(1902년 11월 22일 ‘황성신문’ 등) 가토는 고종이 준 현금 2000원(현시세 200만달러)으로 파괴됐던 나를 완벽하게 부활시켰다. 1907년 귀국했던 옛 주인 박영효가 잠시 머문 뒤 나는 사업가 김영달에게 팔렸다. 김영달은 경성직뉴라는 섬유회사 주주였다. 김영달은 나에게 엄청난 돈을 퍼부어 새집으로 만들었지만 본인은 파산하고 말았다. 경성직뉴는 같은 주주였던 김성수라는 사람이 인수해 경성방직으로 흡수됐다. 김성수는 훗날 동아일보를 차렸다.
은행으로 넘어간 나를 살린 사람은 조선 귀족 조동윤이다. 조동윤은 이 화려하고 넓은 나를 자기 첩에게 주었다. 젊고 예뻤던 그 여주인에게 무당이 말했다. “집이 불길하다.” 그녀는 며칠만에 달아나 버렸다.(1918년 6월 3일 ‘윤치호일기’) 나를 잡은 사람은 모두 망하거나 불우했다.
1918년, 버려진 나를 되살린 사람이 윤치소다. 개화파 기업가다. “나라 판 일 회개하라”며 내가 있는 땅 북쪽 언덕에 살던 조선 귀족 박제순으로부터 기부받은 돈으로 교회를 신축하고, 그 옆에 있는 나를 윤치소가 샀다.
교회 이름은 안동교회다. 교회는 지금도 내 옆에 있다. 그 사이 첫 주인 민영주는 왕실 땅을 가로채려다 걸리고 이토 히로부미 동상을 세우자고 설치다 일본인으로부터까지 욕을 먹었다.(황현, 앞책 6권, 1909년 ④ 1.안중근의 이등박문 사살) 집은 고쳐도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
전쟁이 터졌다. 부산으로 피란 간 집주인 대신 인민군이 나를 병원으로 만들었다. 양쪽 공격을 무사히 넘겼다. 내가 지금까지 온전하게 버틴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인민군이 징발했던 이웃집 큰 거울이 지금도 나에게 있다.
대통령이 살았다
윤치소 사촌형 윤치호는 “크기만 할 뿐 품격이 없다”며 나를 싫어했다. 하지만 이후 나의 주인은 지금까지 윤치소와 그 아들 그 손자 가족이다. 윤치소 아들 이름은 윤보선이다. 대한민국 전 대통령이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을 나오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윤보선은 나를 획기적으로 변신시켰다. 옛 조선식 큰 상을 테이블로 만들어 온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남녀불문 노소불문이었다.

▲윤보선 가옥 안채 식당.
박영효가 또 다시 반란을 꿈꿨던 사랑채는 야당 회의실로 변했다. 아침이면 정치인들이 나에게 와서 사랑채 안방 방석에 앉았다. 방석은 서열이다. 자기 앉을 방석 위치 하나 옮기는 데 5년이 걸린다고 했다. 젊은 정치가 김영삼은 응접실에 대기하다가 회의 결과를 기자들에게 발표하곤 했다.
주인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나를 떠났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그가 돌아왔다. 그는 자기를 ‘정원사’라고 불렀다.
골목 건너편 100년 된 출판사 명문당에 종로서 경찰들이 옥탑을 지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출판사 사장 어머니가 내 주인과 주인 아들에게 “우리 때문에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한 건 나였고, 내 주인들인데.

▲정보과 형사가 상주했던 명문당 옥탑. 윤보선은 키 큰 나무를 심어 형사들 눈을 가렸다.
어느 날 주인 윤보선이 사랑채 앞에 전나무를 심었다. 어느덧 나무는 옥탑 경찰 눈과 사랑채 회의실 사이를 가려버렸다. 전나무는 죽고, 지금은 우람한 향나무들이 거기 산다. 야당 지도자가 사는 집이다. 민주화 바람에 흩날리던 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내 주인 윤보선과 그 아내 공덕귀에게 “내 아들, 내 남편 찾아달라”며 울었다. 부부가 어렵게 아들 행방을 찾아주면 그녀들이 내 마당 연못가에서 너울너울 춤을 췄다. 주인집 아들 윤상구가 말했다. “저들이 아들과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는구나.” 지금은 주인이 된 그 아들이 나에게 박혀 있는 흔적들을 매만지며 산다.
그랬다. 내가 태어난 1870년부터 1970년대까지 내 안에서 100년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다. 그 사랑채, 그 연못, 늙어가는 그 향나무 그리고 나. 그렇게 내 안에 역사가 고였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노거수처럼, 내가 늙고 있다.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03.28 독일영화 뜬 이 男배우, 안중근 사촌이었다…85년전 희귀사진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1887~1945?)이 짚신을 삼고 있는 모습. 독일 드레스덴 박물관이 1920년대 촬영한 것으로 당시 독일 학예사들에게 짚신 삼는 법을 시범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가 박물관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처음 공개했다. 사진 드레스덴 박물관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1887~1945?)이 1920년대 독일로 망명 후 드레스덴 민족학박물관(이하 박물관)에서 근무하고 베를린에선 영화배우로도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희귀 자료가 발견됐다. 안중근과 여덟살 터울인 안봉근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안중근의 ‘영적 아버지’ 니콜라 빌렘 신부의 복사(服事, 가톨릭 사제를 시중드는 사람)였다.
이번에 발견된 사진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후 안봉근이 풍비박산 난 집안을 떠나 독일에서 활동할 때 것으로 그의 행적이 구체적인 사료로 뒷받침된 것은 처음이다. 독일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는 김영자 전 레겐스부르크 대학 교수,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와 함께 밝혀낸 연구 결과를 최근 본지에 공개했다.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황해도 해주 태생인 안봉근은 지역에 성당을 개소한 프랑스 선교사 빌렘 신부를 10여년간 곁에서 보좌했다. 빌렘 신부는 1910년 3월 뤼순 형무소를 방문해 안중근을 면회하고 사형 직전 고해성사와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이후 안봉근은 빌렘 신부를 따라 1914년 4월 유럽으로 갔다가 2년 만에 귀국길에 올랐는데, 일제 정보기관의 ‘용의조선인명부’에 따르면 해외 반일단체에 투신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언론 보도와 재독소설가 이미륵(1899~1950, 『압록강은 흐른다』 저자)의 회고를 종합할 때 안봉근은 1920년 초 상하이에서 일가친척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다가 그해 5월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1887~1945?)이 두루마기 차림에 탕건을 쓰고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 독일 드레스덴 박물관이 1920년대 촬영한 것으로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가 박물관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처음 공개했다. 사진 드레스덴 박물관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1887~1945?)의 필체가 남아있는 유물카드. 안봉근은 당시 제주도 민속 문화재(이른바 ‘스퇴츠너 컬렉션’)를 다수 입수한 드레스덴 박물관에서 한국 전문가로 활동했다.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가 박물관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처음 공개했다. 사진 드레스덴 박물관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1887~1945?)이 독일 드레스덴 박물관에서 직접 제작해 남긴 한국 농기구 모형(총 14점)을 한데 모았다.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가 촬영했다. 사진 윤재원
이번에 윤 교수가 찾은 사진과 유물은 안봉근이 1920~30년 박물관에서 한국 농기구 모형을 제작하고 담당 학예사를 교육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새끼를 꼬아 짚신을 삼는 모습이나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사진에서 안중근을 연상시키는 다부진 이목구비가 돋보인다. 최근 내한해 기자를 만난 윤 교수는 “안봉근이 박물관에서 일했다는 학계 연구를 토대로 조사하니, 100년 전 아카이브에서 그의 사진 3장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안봉근이 직접 제작한 겨리쟁기 등 농기구 모형 14점도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독일어 유물카드에는 안봉근이 한국어 명칭을 병기한 친필이 남아 있다.
안봉근은 당시 제주도 민속 문화재(이른바 ‘스퇴츠너 컬렉션’)를 다수 입수한 박물관에서 한국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당대 최고의 인류학자 마르틴 하이드리히의 논문 ‘한국의 농업’(1931) 완성에 크게 기여했다. 일어·독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했던 안봉근은 현지에서 한국 문화 관련한 강연과 저술을 하면서 ‘중국인 미망인’(1931)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1887~1945?)이 1930년대 독일 베를린 거주 당시 출연했던 영화 ‘남자들은 그래야 한다’(1939)의 스틸 컷. 안봉근은 대사 몇 마디의 인도계 사육사 역할을 소화했다.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가 영화 필름을 입수해 안봉근 출연 장면을 캡처했다. 사진 윤재원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1887~1945?)이 1930년대 독일 베를린 거주 당시 출연했던 영화 ‘남자들은 그래야 한다’(1939)의 스틸 컷. 안봉근은 대사 몇 마디의 인도계 사육사 역할을 소화했다.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가 영화 필름을 입수해 안봉근 출연 장면을 캡처했다. 사진 윤재원
윤 교수는 1930년 안봉근이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출연한 영화 두편의 필름도 입수·조사했다. ‘대제의 밀사’(1936)에선 엑스트라, ‘남자들은 그래야 한다’(1939)에선 인도계 사육사 단역으로 확인됐다. 이들 필름 스틸 컷도 국내 처음 공개됐다. 윤 교수는 “한국인이 독일 사회에서 인정받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안봉근은 적극적으로 예술과 창작 활동에 나섰고 현지 오피니언층과 교류를 이어갔다”고 평했다.
당시 안봉근은 두부 공장을 차려 운영했는데, 이 자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설도 있다. 다른 초기 이민자에 비해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안봉근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남승룡 선수가 마라톤 금·동메달을 각각 땄을 때 동포들을 모아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1945년 광복 후 귀국을 희망했지만 그해 이탈리아에서 병으로 급작스레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10년 3월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이 면회 온 동생들(안정근·안공근)에게 유언하는 모습. 동생들과 같은 쪽에 앉아 뒷모습만 보이는 이가 빌렘 신부다. 중앙포토
이번 연구는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지원으로 유럽 내 한인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 지역에 이주하기) 100년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윤 교수는 “안중근의 의거 후 가족이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의 유지를 받드는 활동이 이어졌다”면서 “사촌동생 안봉근도 독일 내 한인 정착사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며 한국 알리기에 앞섰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윤 교수 등 3인은 조만간 이 같은 성과를 학술논문으로 발표하고 안봉근의 독립운동 지원설 등을 추가로 뒤쫓을 계획이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04.05 처에서 첩으로 천당·지옥 오갔던 아내들의 수난
550년 전 조선 성종 7년, 황효원(黃孝源)은 이혼과 결혼을 멋대로 한 혐의로 사헌부의 리스트에 올랐다. 30세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며 청현직을 두루 거친 황효원은 42세 때 세조의 즉위를 도운 대가로 좌익공신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대사헌, 각 도의 관찰사, 한성부윤(서울시장) 등 요직에 몸을 담근 세조 시대 인사이더였다. 게다가 관향 상주의 이름을 따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지며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확고한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런 그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법의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숨기고 싶었을 가족사가 만천하에 까발려지게 되었다.
아내 신분 따라 자녀들 신분 갈려
육순의 공신 황효원 간절한 호소
성종은 “정리 따져 처로 인정해야”
사헌부 “난신의 딸” 물고 늘어져
처 둘 금지 처첩분간법 역폐단
정치는 유능했지만 오만·탐욕

▲경기도 여주에 있는 황효원 사당. 황효원은 상주 황씨 중시조다. 황효원의 시호였던 양평(襄平)을 새긴 편액 ‘양평묘’가 보인다. [사진 용인시민신문]
사헌부의 보고에 따르면 황효원은 처음 아내 신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버리고(棄之), 임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두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목하지 못하다 하여 버리고 처음 아내 신씨와 재결합하였다. 부인 신씨가 죽은 뒤에는 과거에 공신(功臣)으로 하사받은 여비(女婢) 작은조이(小斤召史)를 첩으로 삼았다가 이후 처로 변경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첩을 처로 바꾼’(以妾爲妻) 세 번째 아내인데, 국법대로 그녀를 다시 첩으로 돌려놓으라는 것이다. 사헌부가 주장하는 황효원의 죄는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사욕을 채웠고 대신으로서 체통을 잃어 윤리를 훼손한 것이다. 그런데 왕은 첫 보고를 받은 날 황효원의 세 번째 아내 이씨는 후처임을 분명히 했다. (『성종실록』 7년(1476) 5월 2일)
사헌부·사간원 한 달간 왕 흔들어

▲역시 경기도 여주에 있는 황효원의 신도비. [사진 용인시민신문]
그러자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 협공으로 5월 한 달 하루도 빠짐없이 “황효원 비(婢)의 후처 논정을 환수하라”며 왕을 흔들어댔다. 왕은 황효원의 아내 이씨는 법리(法理)보다는 정리(情理)로 접근해야 할 사람이라고 한다. 즉 이씨는 단종복위에 가담한 죄로 멸문의 화를 입은 이유기의 딸로 원래 명족(名族)이자 왕실의 척족이라는 점, 오래전에 면천되어 사족의 신분을 회복한 점 등을 들어 후처로 삼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난신(亂臣)의 딸을 여종으로 받아 첩으로 삼았다가 방면되자 처로 삼은 것”은 “난신의 외손을 조정에 서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대간(臺諫)의 경고에 열아홉살의 어린 왕은 굴복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후처 이씨는 첩으로 변경되었다.
15세기 조선사회를 달군 핫 이슈는 처첩분간(妻妾分揀), 즉 누가 정실이고 누가 측실인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들은 신유학적 가족 이념에 따라 처첩 및 적서의 제도화를 추진하는데, 그들 사이에 일종의 질서를 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건국 20년 태종 13년에는 “예에는 처가 둘 일수 없다”(禮無二嫡)는 유교의 혼인관을 따라 일처(一妻) 외는 모두 첩으로 논정(論定)하는 ‘처첩분간법’이 발효되었다. 아버지의 자식으로 누리던 동등한 권리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강등되거나 박탈되는 법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귀족이나 사족의 경우 특히 민감하여 내부에서 해결이 안 되어 소송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주 황씨는 용인시 기흥구 일대에 집성촌을 이뤘다. 입향조는 중시조 황효원이다. 용인에 있는 묘역. [사진 용인시민신문]
황효원은 한 때 형조와 사헌부의 수장이었던 만큼 국법의 처첩제 내용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처는 오직 1인’이라는 말은 병처(幷妻) 또는 유처취처(有妻娶妻, 처가 있는데 또 처를 맞이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첩은 처와 양립이 가능하다. 그래서 황효원은 선처(先妻) 신씨와 이혼을 한 후에 임씨를 후처로 맞았고, 임씨와 이혼한 후에 신씨와 재결합한 것이며, 신씨와 사별 후 이씨와 혼인 예를 치렀기에 세 아내 모두 처라고 주장한다. 사실 처나 첩이나 그 자신은 크게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존귀(尊貴)와 비천(卑賤)의 신분으로 갈리는 소생 자녀들이 문제인 것이다.
황효원은 세 번째 아내 이씨가 첩이 아닌 처임을 증명하기 위해 혼서(婚書)와 예장(禮狀) 등의 자료를 제출했지만 대간들의 교묘한 언술에 걸려 보다시피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바로 다음 날 대사간 최한정은 황효원의 두 번째 아내 임씨도 첩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쯤에서 한 집안을 가루로 만들 작정이라도 한 듯 덤비는 대간들이 의아하게 여겨진다. 당시 임씨 소생의 두 아들 황석경과 황준경은 생진시(生進試)와 한성시에 응시 원서를 제출했는데, 서자일 수 있다며 보류된 상태였다. 논정에 돌입하자 예조에서는 임씨의 혼서(婚書)와 공신록에 아들들이 적자로 기록된 사실을 알려왔다. 그럼에도 양사는 황효원의 혼인 생활을 염탐하고 한성부 장적까지 샅샅이 뒤져 한 가족을 능멸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황씨 가의 쟁송 법정다툼 번져

▲황효원의 초상.
대사간 최한정에 의하면, 황효원은 신씨에게 아들이 없자 한 양녀(良女)를 첩으로 삼아 아들 둘을 낳았다. 그들을 적자로 만들기 위해 혼서(婚書)를 조작하고 신씨를 버린 것으로 꾸며 임씨를 후처로 만들었다. 한성부의 장적에는 신씨와 임씨를 고쳐 쓴 흔적이 있고 두 아들을 “버린 첩의 자식”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에 황효원은 사실관계를 바로 잡는 글로 대응한다. 처음 아내 신씨와 이혼할 때 그 오라비가 까닭 없이 처를 버린다며 고소한 사실과 어머니의 뜻으로 사족녀 임씨와 혼인하게 되었는데, 그 혼례에 참석한 명단까지 제출했다. 그리고 한성부 장적에 대해서는 아비 된 자가 어떻게 ‘버린 첩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지, 조작된 “원수의 짓”이 분명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황효원은 후처 임씨를 이름도 모르는 양녀로 둔갑시켜 아들을 얼자(천인 신분의 첩에서 난 자식)로 만들려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대사간 최한정에게 묻는다. 황씨 가의 처첩 쟁송은 황효원과 최한정의 법정 다툼으로 번지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편 이쪽저쪽의 말을 다 듣고 난 왕은 “임씨를 황효원의 후처로 논정한다”고 판결한다. 그럼에도 대사간은 물고 늘어지며 황효원의 두 아내를 다시 조사할 것을 건의한다. 왕은 “나는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데, 경은 어찌 그리 고집스러운가”라고 하며 법과 인정은 서로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한다. 갓 스무살을 넘긴 청년 왕이 두 번의 혼인에 많은 자식과 손자까지 둔 노년의 최한정에게 인생의 원리를 가르치는 형상이다. 황씨 가의 처첩 논정이 시작되기 2개월 전, 5품 교리이던 최한정은 몇 단계를 뛰어넘어 당상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덕망과 재능이 검증되지 않은 자라며 임명을 철회하라는 비판이 거세었다. 무능함을 상쇄할 기회로 무리수를 둔 것인가, 아니면 뒤틀린 심사 때문인가. 아니나다를까 대사간 최한정은 황효원 처첩논정을 기획하여 사건을 주도해 간 것 외에 별다른 업적이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 임씨가 후처로 논정되고 아들들이 사족의 일원으로 제자리를 찾자 황효원은 세 번째 아내 이씨의 첩 논정을 상고해 줄 것을 건의한다. 즉 이씨는 아비의 죄로 노비가 되었는데, 그녀의 외가와 자신의 집안이 연족(連族)인 관계로 공신이 된 자신에게 배정되었다고 한다. 이씨는 줄곧 외가에서 살았는데, 늙은 홀아비가 된 아들의 배우자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어머니와 이씨의 외조모가 함께 도모한 일로 이 혼례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신의 자녀는 출생 전 외조(外祖)가 범한 죄로 사족과 혼인을 맺지 못하니 신의 자녀가 인류에 복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왕은 노대신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며 이씨를 다시 후처로 논정했다. 조정은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대간들의 집요한 공격이 두달 간 지속되면서 이씨는 다시 첩이 되었다. 훗날 중종 2년에는 황효원의 외손자가 서출이라며 관직 제수가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사위 박영문은 처모 이씨의 사건을 담은 『적첩상고일기초(嫡妾相考日記草)』를 제출함으로써 이씨의 딸 황씨는 박영문의 정실로 논정된다.
100차례 조정회의 국정 마비 지경
황효원의 나이 63세, 성종 7년 5월 2일에 시작된 ‘황효원 처첩논정’은 성종 12년 9월 19일 68세의 황효원이 “피를 토하며 죽은” 후에야 끝이 났다. 그가 죽은 이후 재개된 적서 논쟁은 치지 않더라도 5년이 넘도록 100여 차의 조정회의를 잠식하며 국정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태산이 닳아 숫돌이 되고 황하가 좁아져 허리띠가 되도록(山礪河帶)” 대대손손 영광을 누리라는 왕의 교서를 받은 상산군 황효원(1414~1481), 그 노년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다. 그는 행정가로서 유능했지만 사람을 오만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단점이 있었고, 재산 증식에 재능이 있어 화가옹(貨家翁)으로 불리었다. (『황효원졸기』) 그의 인생이 이후 역사에 던진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04.13 순국선열추념탑 ‘의병 처형상’ 속 의병, 진짜 의병인가 떼강도인가?
부실 검증이 낳은 혼돈… 서대문 순국선열추념탑

▲서울 현저동 서대문독립공원에 있는 순국선열추념탑. 주요 독립운동 8개 장면을 탑 뒷면 화강암에 조각해놨다. /박종인 기자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독립공원에는 ‘순국선열추념탑’이 있다. 해마다 순국선열의 날인 11월 17일이면 탑 앞에서 기념식이 열린다. 탑은 1992년 광복절에 서울시가 설치했다.
뒷면에 설치된 대형 화강암에는 ‘독립 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부조 8개가 조각돼 있다. 그런데 이 부조들 가운데 하나는 의심스러운 장면이 조각돼 있다. 서민을 괴롭힌 잡범 처형 장면과 흡사하다. 왼쪽에서 셋째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은 의병이 아니라 대한제국 시대 ‘상습 절도’와 ‘집단 강도’를 저지른 ‘강력범 처형 장면’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니까 탑이 설치된 1992년 이래 32년 동안 대한민국 시민들은 민중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잡범들을 추모하고 그 범죄 행각을 기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학계와 정계가 정확한 사료(史料) 검증 없이 독립운동사를 기록해 온 잘못된 관행 탓이다.
순국선열 기념탑
‘순국선열’은 ‘국권 피탈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사람’을 뜻한다(’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4조). 순국선열 기념일은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을사조약 체결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정한 이래 건국 이후에도 기념해 온 날이다.
1992년 8월 15일 서울시는 이들을 기리는 순국선열추념탑을 제막했다. 높이 22.3m짜리 탑에는 14도(道)를 뜻하는 태극기 14개가 조각돼 있다. 뒷면 폭 40m짜리 화강암에는 순국 선열 활동상이 부조돼 있다. 모두 여덟 가지 활동상은 ‘항일 의병 무장상’ ‘윤봉길·이봉창 열사 상징상’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 열사 운동상’ ‘3·1 독립 만세상’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 ‘순국선열 의병 체포 처형상’ ‘청산리 전투상’이다.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부조들
맨 왼쪽에는 의병 활동상을 촬영한 유일한 사진인 ‘양평 의병 사진’을 모티브로 항일 의병 무장상이 조각돼 있다. 1907년 9월 정미의병 활동상을 기록한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Mckenzie)가 촬영한 사진이다.

▲1907년 9월 매켄지가 촬영한 양평(지평리) 의병들. 순국선열추념탑 첫째 부조 모티브다.
매켄지는 그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다. ‘열여덟 살에서 스물여섯 살 정도. 병사 6명 가운데 5명은 총기 종류가 다 달랐다. 모두 쓸모없는 총이었다. 한 사람은 옛 조선군 화승총과 화승과 화약통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선군 라이플을, 한 사람은 미국에서 할아버지가 열 살짜리 손주에게나 선물할 딱총을 가지고 있었다. 녹슨 중국제 피스톨도 보였다.’(매켄지, ‘The Tragedy of Korea’, E.P. Dutton&Co., 1908, pp.200~201) 부조에는 사진에 등장하는 의병 13명 가운데 인상적인 인물 7명을 추려서 조각해 놨다. 대한제국 군복을 입은 지휘관과 앳된 소년병까지 매켄지가 본 의병들 모습이 새겨져 있다.

▲매켄지가 찍은 의병 사진을 모티브로 제작한 '항일 의병 무장상'.
이봉창·윤봉길 거사와 유관순, 3·1 만세, 안중근, 의병 체포와 처형, 청산리까지 다른 부조상도 해당 인물이나 사건을 쉽게 연상시키는 장면들로 구성돼 있다. 문제는 왼쪽에서 셋째,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이다. 이 작품에는 ‘집단 교수형을 당한 의병들’이 조각돼 있다.

▲순국선열추념탑 의병 처형상 부조.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의 원본 사진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에는 한복을 입고 집단 교수형을 당한 인물 7명이 조각돼 있다. 통나무를 얼키설키 묶은 처형대에 밧줄로 처형당한 의병들이 담담하게 묘사돼 있다. 이 장면 또한 모티브가 된 사진이 존재한다. 식민 시대 일본 기념품점에서 유통시킨 사진들 가운데 하나다. 이 사진에는 추념탑 부조 속 처형대와 유사한 처형대에 한복을 입은 남자들이 걸려 있다. 모두 12명인데, 상투를 한 남자도 보인다. 추념탑에는 1. 사진 왼쪽 끝 4명 중 3명과 2. 오른쪽 8명 가운데 왼쪽 끝 삭발 인물과 상투를 하고 등을 보인 인물, 가슴을 드러낸 인물을 순서를 바꿔 조각하고 3. 기둥 뒤쪽 겹친 사람들을 한 사람으로 조각한 뒤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이라고 명명했다. 과연 이들이 ‘집단 처형당한 의병’일까.

▲'한국풍속: 죄인의 교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식민시대 사진엽서. 의병 처형상의 모티브가 된 사진이다.
언제 촬영한 사진인가
사진 자체에 이들 정체를 알려주는 힌트들이 숨어 있다. 우선 이 사진엽서 아래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국 풍속: 죄인의 교살(絞殺)’. ‘한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 시대 조선과 구별해 부르던 명칭이다. 이 형 집행 시기가 1910년 이전임은 확실하다.
더 구체적으로 보자. 이 사진은 1904년 1월 2일부터 1905년 10월 26일 사이에 촬영된 사진이다. 기간을 확정할 수 있는 힌트는 배경에 보이는 흰옷과 흰 갓을 쓴 군중이다. 흰 갓, 백립(白笠)은 조선과 대한제국 국장(國葬) 때 백성이 착용했던 복식이다. 국장이 벌어지면 1년 동안 상하를 막론하고 백성은 흰 갓을 써야 했다. 대한제국 시대에 국장은 두 차례 있었다. 1904년 1월 2일 헌종비 홍씨 명헌태후가 죽었다.(1904년 1월 2일 ‘고종실록’) 이후 1년간 대한제국 황민은 모두 백의와 백립 착용이 의무였다. 이 국장이 끝나기 두 달 전인 1904년 11월 5일 황태자인 순종비 민씨가 죽었다(1904년 11월 5일 ‘고종실록’). 그래서 대한제국 사람들은 이날부터 음력으로 1년이 지난 1905년 10월 26일까지 또 백립과 백의를 착용했다. 따라서 이 사진은 1904년 1월 2일~1905년 10월 26일 촬영한 사진이고 형 집행 또한 그 기간에 있었다.
집단 처형된 절도, 강도범
서울특별시는 이 장면을 일본군에 의한 의병 처형 장면이라고 단정하고 추념탑에 조각해 놨다. 과연 그럴까.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을 본다. 아래 이 사진은 1906~1907년 조선과 만주, 일본을 여행한 프랑스 무관 레오 바이람(Leo Byram)의 기행문 ‘작은 일본이 크게 되리라(’Petit Jap deviendra grand’, Berger Levrault, 파리, 1908)’라는 책 75페이지에 실려 있다.

▲1908년 출간된 프랑스 무관 레오 바이람의 책에 나오는 처형장면 사진. 누군가의 국장기간이라 군중과 조선인 형리들 모두 백립과 백의를 착용했다. 오른쪽 아래에는 서양식 모자를 쓴 서양 혹은 일본 여성들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보인다. /위키피디아
처형대 주변에 서 있는 형리(刑吏)들 또한 백립과 백의를 착용했다. 조선인이다. 처형장 어디에도 일본군은 보이지 않는다. 바이람은 ‘몇 페이지의 역사’라는 챕터 속 일본의 침략 부분에 이 사진을 싣고 ‘일제의 탄압-교수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사진은 바이람 본인이 촬영한 게 아니라 구매한 사진이다. 바이람은 1906년 대한제국에 입국했고 이때는 국장이 종료되고 일반 복장으로 환원된 이후다. 또 구한말 이래 조선 풍물을 촬영한 사진이 인화 혹은 엽서로 대량 제작돼 일본과 서구로 유통됐다. 바이람의 사진 설명은 구매 과정에서 생긴 착오거나 본인 선입견일 확률이 크다. 당시 조선 혹은 대한제국을 미개국으로 보는 일본이 무작위로 생산한 사진들을 서양 언론이 검증 없이 인용해 기사 방향에 맞게 마음대로 설명을 붙인 탓이다.
추념탑 부조 왜곡을 추적해온 부산과기대 경찰행정학과 이덕인 교수는 “1909년 7월 12일 사법권이 통감부로 넘어갈 때까지 사법권은 대한제국 정부가 행사했다”고 했다. 일본이 출판한 각종 사진첩에는 의병토벌작전 때 체포하거나 처형한 조선인 사진에 대해서는 자기들 행위임을 은폐하지 않고 기록해놓았다.
그렇다면 사진 속에 등장한 이들은 누구인가. 떼강도요 도둑들일 가능성이 크다. 사형은 국왕 허가 사항이다. 실록에 따르면 1904년 1월 2일~1905년 10월 26일 국장 기간 국왕 고종이 교수형을 허가한 사람은 모두 144명이다. 고종은 1904년 2월 7일 ‘살인 강도범’ 42명, 3월 9일 ‘살인범’ 14명과 ‘강도범’ 6명, ‘절도범’ 10명, 3월 15일 ‘강도범’ 등 27명, 1905년 7월 22일 ‘강도, 절도, 살인범’ 45명에 대해 교수형을 윤허했다(해당날짜 ‘고종실록’). 이 가운데 사진에 나오는 죄인 12명과 숫자가 일치하는 형 집행은 1904년 3월 15일 27명 가운데 한성재판소 관할 죄수 12명이다.
대한제국 사법 기록인 ‘사법품보’ 보고서 1904년 3월 17일자에 따르면 죄인 이름은 임복만, 차선익, 이치경과 최대유, 김학준, 한사수, 서윤명, 이보경, 김용근, 박천만, 천응택, 정용기 12명이다. 앞 세 명은 폭력을 동반한 상습 절도범이고 나머지는 떼강도다. 집행한 사람은 한성부재판소 검사 윤방현이고 보고를 받은 사람은 대한제국 법부대신 이지용이다.(‘사법품보(司法稟報)’(乙) 43책 5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들은 3월 15일 밤 9시 한성감옥 교수대에서 처형되고 다음 날 그 시신들이 군중에게 공개 전시된 뒤 사람을 시켜 매장(使之出埋·사지출매)됐다(위 ‘사법품보’). 다른 교수형 죄수들은 ‘곧바로 매장(卽埋·즉매)’ 처리했지만 이들은 즉시 매장하지 않았다. 나무 기둥 부근에 이들을 운구해 온 지게들이 보인다.

▲1904년 3월 15일 절도-강도범 12명 집단처형 집행 및 명단을 보고한 사법품보.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하필이면 사흘 전인 1904년 3월 12일 대한제국 법부에서 ‘대낮에도 약탈과 살인이 비일비재하니 특별히 엄히 단속하고 처벌하라’는 특명이 전국에 떨어졌다(1904년 3월 12일 ‘훈령 13도6항1목재판소건’ 법부, 訓指起案(奎17277의5) 제11책. 도면회, ‘1895~1908년간 서울의 범죄 양상과 정부의 형사 정책’ ‘역사와 현실’74, 한국역사연구회, 2009, 재인용). 이 잡범 12명은 그 시범 케이스가 됐으리라 추정된다. 을사조약 1년 뒤 대한제국 외교는 물론 내치까지 실질적으로 장악해 버린 통감부는 ‘잔인하고 효과도 없는 공개 사형을 폐지하라’고 대한제국 법부에 권고하기도 했다(1906년 8월 26일 ‘황성신문’).
왜곡의 시작, 국사편찬위
원본 사진이든 당시 법률적 환경이든 사진 속에 처형된 사람들은 잡범들이다. 이들을 의병이라고 단정한 서울시와 해방 후 지금까지 의병으로 의심없이 주장해온 국사학계는 진실이 뭔지 살펴볼 의무가 있다. 해방 후 이 사진을 일본군에 의한 의병 처형장면이라고 처음 주장한 국가기관은 ‘국사편찬위원회’다. 국편위는 1966년 12월 ‘한국독립운동사2′ 단행본에 이 사진을 싣고 ‘1919년 3월 시가에서 학살되는 만세시위자’라고 설명했다. 사진 속 백립 차림 군중, 바이람의 여행 일정과 책이 나온 날짜를 비교해보면 1919년 만세운동과는 무관한 사진임에도 국사편찬위는 검증없이 3·1운동 희생자로 못을 박았다.

▲1966년 12월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독립운동사2' 화보. 1904년 잡범 처형 장면이 1919년 만세운동 시위자 학살 장면으로 둔갑했다.
국편위 같은 책 같은 페이지에는 또 ‘1919년 3월 일군경에게 학살되는 만세시위자’라는 설명과 함께 조선인 3명이 총살당한 장면을 담은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사진 또한 1919년이 아니라 프랑스잡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1907년 8월 10일자에 보도된 사진이다. 이 잡지 기사에는 총살형이 벌어진 장소가 ‘전라남도 담양’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군 만행임은 분명하지만 평화적 시위인 3·1 만세운동과는 무관하다.(1907년 8월 10일 ‘L’illustration’ pp.90, 94)

▲1907년 8월 10일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지에 실린 총살형 사진.

▲1966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2’에 실린 ‘1919년 만세운동 희생자’ 사진. 3·1운동 이전 사진을 만세운동 학살사건이라고 왜곡했다.
왜곡의 계보
1919년 3·1운동 직후 미국에서 활동한 구미위원부(한국위원회)가 ‘한국에서의 일본의 잔혹행위들’이라는 선전 문건에 이 사진을 삽입했다. 구미위원부는 ‘국제영화서비스(International Film Service)’라는 업체로부터 2달러 25센트에 구입했다고 밝혔다. 구미위원부는 ‘정당한 군사 작전’이라는 일본 정부 주장을 근거가 없다고 배척하고 이를 3·1운동 당시 만행이라고 주장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구미위원부2 Ⅱ.선전문건류 2.필라델피아통신부·한국친우회 발행 문건 3)
국편위는 이를 시기나 사건에 대한 검증없이 1966년 책에 게재한 것이다. 그해 출판된 ‘경남독립운동소사’(변지섭, 삼협인쇄사, 1966년 10월)에도 이 사진과 위 강도 처형사진이 3·1운동 관련 만행으로 설명돼 있다. 임정 차원에서 면밀한 검증 절차 없이 이뤄진 선전물이 역사적 사실로 굳어진 계기다. 이후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동아일보사, 1969), 재일교포 학자 신기수의 ‘한일병합사(1987)’(눈빛, 2009, p63)를 비롯한 국내외 출판물에 이 집단처형사진이 의병 처형 장면으로 완전히 굳어버렸다. 특히 ‘한일병합사’는 오류가 일일이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위한 과장 혹은 선동 작업 결과물이 지금까지 검증없이 역사적 사실로 단정돼 왔다. 이렇게 온갖 독립운동 관련 사진집이나 자료집에 엉뚱한 잡범들이 의병으로 둔갑해 등장해오더니 마침내 강도와 절도범을 영문도 모르고 추념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책임은 이제 누가 지는가. 이덕인 교수가 말한다. ‘아무리 목적이 정당해도 수단이 왜곡돼 있다면 그 사실의 정당성은 반감되거나 퇴색될 수밖에 없다.’ 투쟁도 선동도 사실(Fact)에 기반해야 승리하는 법이다.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04.19 진압군 얕본 이괄, 안산의 바람 방향 바뀌자 패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건 위화도에서 회군해서다. 회군이 조선 건국에 있어 이처럼 중요한 전환점이었기에 건국의 주역들이 개국의 정당성을 아무리 미화해도 조선은 반란으로 세워진 나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조선 왕조 600년 동안 반란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에서 두 개가 성공했는데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이다. 반란이 성공하면 반정(反正), 즉 바른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지만 실패하면 역적의 난이 된다. 그런데 실패한 반란 중에서 거의 성공할뻔한 게 있었는데,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李适, 1587~1624)의 난이다.
인조반정 수훈 무관은 찬밥 대접
아들 역모죄 씌우자 군사 일으켜
의기양양 한양 입성 새 왕 추대도
전세 뒤집히자 민심 변덕 등돌려
임금이 충청까지 피난 초유의 일
국방력 손실 호란 패배로 이어져
휘하에 임란 때 투항 왜군까지 거느려

▲이괄의 반란군을 제압한 안산의 동쪽 봉우리에는 승전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왕산에서 바라 본 안산의 승전봉. 인왕산과 승전봉 사이가 무악재다. [사진 김정탁]
이괄은 인조반정에서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김류(金瑬)가 총대장으로 반정군을 지휘하기로 돼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거사 당일 약속된 시간보다 한참 후에 나타나서 이괄이 임시 총대장이 돼 반정군을 지휘했다. 그런데도 공신 책봉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무관 출신이라 문관들이 낮춰 봐서다. 내심 못마땅했어도 부원수 겸 평안병사 직을 부여받고는 국경 방위 임무에 충실했다. 후에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이 당시 세를 크게 확장하던 터라 평안도 방면의 방위가 중요해져서다. 이 때문에 그의 휘하에는 조선 최고의 정예병과 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군까지 있어 군세가 막강했다.
그런데 이괄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누군가 고자질했다. 반정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어도 정국이 불안해서 밀고를 장려한 탓이다. 의금부 도사가 평안도로 가 이괄의 아들을 역모죄로 체포하려고 하자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할 수 있느냐?”라며 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베고 반란의 기치를 들었다. 그리고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내달렸다. 먼저 평안도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의 장만(張晩) 군대는 피한 뒤에 황해도와 경기도를 거치면서 관군을 제압했다. 마침내 거사 20일 만에 서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했는데 인조와 조신들은 전날 피난길에 올라 입성이 쉽게 이루어졌다.
이괄이 백마를 타고 의기양양하게 입성하자 반란군과 호응했던 수천 명의 군사가 마중을 나왔다. 이괄의 기병들이 ‘도성 사람들은 놀라지 마라. 새 임금이 즉위했다’라고 앞에서 소리쳤다. 그러자 관아의 구실아치와 하인들이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면서 맞이했고, 백성들은 길을 닦고 새 황토를 깔아서 영접했다. 그리고 선조의 열 번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조정도 새 인물로 갈아치웠다. 조정에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붐벼 인선 작업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한강 건널 때 서로 배 타려 아우성

▲승전봉에서 바라본 인왕산.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사진 김정탁]
인조는 반란군이 임진강까지 남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계획을 바꾸어서 충청도 공주산성으로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간신히 구한 배로 한강을 건널 적에 왕을 수행하던 사람들이 서로 배에 타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인조를 호송하던 병조 좌랑 이경석(李景奭)이 칼을 뽑아 이 혼란을 수습했다. 이경석은 훗날 병자호란(1637) 때 누구도 꺼린 삼전도 비문을 기꺼이 작성했던 소신 있는 인물이다. 인조가 배를 타고 한강 한가운데 이르니 궁궐은 이미 불타서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한편 진압군 책임자인 장만은 한양의 도성 백성들이 이괄의 반란군에 동조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되도록 빨리 공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반란군이 한양에 입성한 바로 다음 날 이들과 운명을 건 승부를 무악재의 안산에서 벌이기로 했다. 진압군이 안산에 진을 친 건 방어사 정충신(鄭忠信)이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면서 안산을 먼저 점거할 것을 주장해서다. 또 안산에 진을 치면 도성이 내려다보이므로 반란군이 덤비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반란군은 올려다보며 싸워야 하지만 진압군은 도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므로 진압군 쪽이 유리해서다.

▲안산과 인왕산을 연결하는 다리. 다리 밑이 무악재. [사진 김정탁]
이괄은 안산을 점거한 진압군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도성 백성들에게 ‘장만의 군대를 단숨에 무찌르겠다. 싸움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성 위에 올라가서 구경하라’라는 포고문을 곳곳에 써 붙였다. 이에 따라 도성 백성들은 아침부터 인왕산 성벽에 올라타서 싸움을 구경했는데 이 모습은 성벽 위에 백로가 앉아 있는 듯했다. 반란군은 경기감영(현 서대문 로터리 서울적십자병원 자리) 부근에서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경기중군영(현 동명여중 자리)에서 안산을 향해 올라갔고, 다른 한 부대는 아현을 지나 대현 쪽에서 안산으로 진격했다.
처음에는 동풍이 휘몰아쳐 싸움하기에 반란군이 유리했다. 이에 반란군이 바람을 등에 업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 진압군은 후퇴해야 했다. 그런데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어서 동쪽에서 불던 바람이 서북풍으로 변해 반란군은 바람과 마주하며 싸워야 했다. 또 휘날리는 흙먼지로 눈을 뜰 수가 없어 시간이 흐를수록 전황이 반란군에게 불리해졌다. 이때 진압군이 총공세를 펴니까 전세가 삽시간에 역전되었다. 싸움은 진압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싸움이 벌어진 안산 동쪽 봉우리에는 승전봉(勝戰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무악재에서 바라본 서대문 풍경. 오른쪽에 서대문독립기념관(구 서대문형무소)이 있다. [사진 김정탁]
반란군은 안산과 가까운 서대문을 통해 다시 성안에 들어오려고 했지만, 백성들이 서대문은 물론이고, 서소문까지 닫아버렸다. 조금 전만 해도 반란군이 이기길 내심 바랐던 백성들이었는데 어째서 태도가 이렇게 급변했을까? 반란군에게 훼방을 놓아 싸움에 지게 만들어야 했는데 구경만 했으니 처벌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니었겠는가. 반란군은 어쩔 수 없이 남대문을 통해 입성한 뒤 광희문으로 빠져나가 이천으로 향했다. 이괄은 가는 길에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이괄의 반란군이 장만의 진압군을 서둘러서 공격하지 않고 안산을 포위한 채 기다렸다면 결과가 어떠했을까? 이겼을 가능성이 크다. 반란군에 의해 보급이 차단돼 진압군이 안산에서 오래 버티기가 힘들어서다. 그러나 이괄은 자신만만했기에 진압군이 패배하는 것을 백성들 앞에서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이에 따라 반란군은 진압군이 의도한 대로 한양에 입성한 바로 다음 날 싸움을 벌이고 말았는데 이는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 이것이 거의 다 이룬 반란의 성공을 나락에 빠트린 결정적인 패착이 되었다.
이괄의 난은 반란군이 한양에까지 침입해 왕이 충청도로 피난 가는 사태에 이르렀기에 조선 왕조 초유의 일에 해당한다. 그러니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양은 재건되기도 전에 또다시 심한 진통을 앓아야 했다. 또 왕의 피난으로 생긴 공백으로 한양은 무질서와 혼란에 다시 빠져들었고, 창경궁의 주요 건물인 통명전·양화당·환경전 등의 건물들도 모두 불탔다.
노련한 장수들 반란으로 잃어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피해가 있었으니 그건 유능한 장수들의 죽음이다. 진압군의 핵심 무장이었던 정충신이 안산 싸움에서 승리한 뒤 탄식하며 말했다. “다행히 전투는 이겼어도 작년에는 (인조반정으로) 박엽을 죽이고 올해는 이괄을 죽였으니 북쪽 오랑캐는 누구를 시켜서 방어할 수 있을까?” 이괄과 박엽을 비롯해 한명련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장수를 반란으로 잃은 건 국방력의 관점에선 뼈아픈 손실이다. 게다가 이괄의 난을 치르면서 평안도 방어 병력도 급감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한양에 빨리 입성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 따르면 북한산 인수봉은 어린애가 누군가 등에 업혀서 달아나는 형상이라 부아암(負兒岩)으로 불렀다. 그래서 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산을 어미 산, 즉 모악(母岳)이라 규정했다. 이런 모악에서 이괄의 난을 분쇄했으니 등에 업혀서 달아나는 어린애를 차단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병자호란에서 한양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등에 업힌 어린애는 결국 달아난 게 아닌가. 그렇다면 반란 진압에 골몰한 나머지 나라 안보는 소홀히 한 셈이다. 지금의 정치권도 싸움에만 골몰하니까 이렇게 되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중앙일보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