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物相(조선일보) 2024-04/ 04.01(월) 섬유의 반도체, 스판덱스 - 04.30(화) 미용 전문 의사
萬物相(조선일보) 2024-04/
04.01(월) 섬유의 반도체, 스판덱스

▲일러스트=박상훈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섬유, 스판덱스는 1959년 미국 화학 기업 듀폰이 처음 만들었다. 여성 속옷용 고무의 대체재로 개발됐다. 고무는 오래 쓰면 늘어나고 급격히 탄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스판덱스는 원래 길이의 7배까지 늘어나면서 강도가 고무의 3배나 돼 속옷용 고무를 대체하기에 최적의 소재가 됐다.
▶듀폰은 “잘 가, 헐렁한 팬티!’란 광고를 앞세워 여성 속옷 시장을 석권했다. 패션 아이콘 오드리 헵번에게 스판덱스 바지를 입혀 일반 의류로도 용도를 확장해 갔다. 1970년대 여성 해방운동 여파로 스판덱스 소재 거들 판매가 격감하자, 듀폰은 에어로빅 의상에 스판덱스를 집어넣었다. 레깅스 바지의 시초인 셈이다. 1968년 동계 올림픽에선 프랑스 스키팀에 스판덱스 스키복을 입혀 다시 붐을 일으켰다. 수영복, 등산복, 스키니 청바지 등 용도가 계속 확장됐다. 특수 섬유 12겹으로 만드는 우주복에도 몸에 잘 밀착되도록 맨 안쪽 층은 스판덱스가 들어간다.
▶스판덱스란 명칭은 ‘늘어나다’라는 뜻의 영어(ex/pand/s)를 거꾸로(s/pand/ex) 뒤집은 것이다. 폴리우레탄에 특정 화학물질을 섞어 만든다. 현미경으로 분자 구조를 보면 위아래 단단한 섬유층 사이에 코일 모양의 섬유질이 결합돼 있다. 양쪽에서 당기면 코일 섬유가 펴지면서 늘어나고, 놓으면 코일이 감기면서 수축한다. 배합된 원료를 방사(紡絲) 기계를 이용해 실로 뽑는데, 배합 비율과 방사 공정은 기업의 1급 비밀이다.
▶듀폰에 뒤이어 일본 기업들이 1970년대에 스판덱스 개발에 성공했다. 한국에선 태광산업이 일본 기업 기술을 빌려 스판덱스를 처음 만들었다. 한국이 종주국 미국을 제치고 스판덱스 세계 1위 생산국이 된 것은 1992년 효성이 제조법을 독자 개발한 덕분이다. 엊그제 타계한 조석래 효성 회장이 1989년 연구소에 “독자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오너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개발팀은 3년간 숱한 시행착오 끝에 세계에서 네 번째로 스판덱스 제조법을 찾아냈고 글로벌 1위 업체에 올랐다.
▶현재 전 세계에서 고품질 스판덱스를 양산하는 기업은 한국의 효성, 미국의 인비스타(듀폰의 후신), 일본의 아사히카세이 등 세 회사 정도다. 효성은 중국, 터키, 베트남, 브라질 등 7국에 생산 거점을 구축, 연 20만t을 생산하며 세계 시장을 30% 이상 점유하고 있다. 스판덱스는 높은 기술 장벽 탓에 고부가가치 섬유의 위상을 갖고 있다.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 분야에서 세계 최강이 된 것은 조석래라는 남다른 기업가의 도전 정신 덕분이다.
04.02 한국 거리의 세계적 셀럽들

▲일러스트=박상훈
네덜란드 항해사 하멜이 남긴 ‘하멜 표류기’엔 세상과 단절된 17세기 조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하멜은 조선이 ‘태국 너머로는 가본 적도 없고 태국보다 멀리서 온 외국인과 교류해본 경험도 없다’고 썼다. 19세기 말 나온 ‘은둔의 나라, 코리아’나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 등도 한결같이 조선의 폐쇄성을 강조했다. 조선인이나 서양인이나 서로 너무 낯설었다.
▶신생 한국에 1955년 6월, 프랑스 국적 유람선을 타고 31명이 입국했다. 첫 외국인 단체 관광이었다. 첫 ‘한국 방문의 해’였던 1961년 방한 외국인은 1만1000명이었다. 지금은 연간 1000만명을 넘는다. 한류 드라마·영화·K팝 팬들이 곳곳을 누빈다. 서양인만 보면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하던 나라가 외국인이 지나쳐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나라가 됐다.
▶세계적 셀럽(명사)들도 수시로 한국을 찾는다. 과거엔 일본 가는 길에 잠시 들러 공연이나 판촉 행사만 했다. 지금은 행사 후 며칠씩 머물며 패션 매장과 맛집 등을 찾아다닌다. 먹자골목을 산책하다가 거리에서 만난 팬들과 셀카도 찍는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는 한국 팬들 사이에서 ‘톰 형’ ‘진짜 동네 형’ 등으로 불린다. SF 영화 ‘듄2′로 유명한 배우 샬라메, 축구 스타 베컴, 지난달 고척돔구장에서 열린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개막전에 나선 선수들도 서촌 카페, 광장시장 등을 찾아 삼겹살과 호떡을 먹었고 소셜미디어에도 그런 모습을 자랑삼아 올렸다.
▶가상화폐 이더리움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도 ‘한국 길거리의 셀럽’ 대열에 합류했다. 국내 블록체인 행사에 참가한 그는 지난달 30일 판교 거리를 반팔 차림으로 걸었다. 그저 서울을 찾은 수많은 외국인 중 한 명 같았다.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장면이 인터넷에 오르자 그제야 ‘이재용보다 돈 많으신 분이 동네 작은 카페에서 커피 다섯 잔 주문해서 마시는 게 신기하다’는 반응이 떴다.
▶댓글 중에 ‘카페에 갔는데 이 아저씨 만날 확률은?’이란 질문이 있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그 가능성은 거의 0%였다. 지금은 머스크나 저커버그를 카페에서 봐도 이상하지 않다. ‘은둔의 나라’를 쓴 그리피스 목사는 ‘조선이 지금은 비록 금단의 땅이지만 이 마지막 은둔 국가가 빛나는 진보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때는 누구도 그럴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140년이 흐른 지금, 한국 길거리를 세계 최고 갑부가 그냥 행인으로 걸어 다니는 나라가 됐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땀흘려 남기신 선물이다.
04.03 “한국 최고의 수출품, K감독”

▲일러스트=이철원
지난해 아세안축구연맹 챔피언십에서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4강에 진출했다. 태국을 제외한 3국 모두 감독이 한국인이었다. 2017년 베트남 대표팀을 맡은 박항서 감독이 국민 영웅으로 떠오르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도 한국 신태용과 김판곤 감독을 앞다퉈 영입했다. 2018년 베트남 축구가 사상 처음 아시안게임 4강에 올랐을 땐 제과점에서 박 감독 얼굴을 그려 넣은 ‘4강 케이크’를 팔았다.
▶박항서 감독 이전에 베트남에선 또 다른 한국인이 스포츠 역사를 새로 썼다. 베트남 사격 대표팀 박충건 감독이 지도한 선수가 2016 리우에서 베트남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캄보디아 태권도 선수가 2014 인천에서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조국에 안겼을 때, 아프가니스탄 태권도 선수가 이 나라 최초 올림픽 메달을 2008 베이징에서 따냈을 때도 그 뒤엔 한국인 감독이 있었다.
▶양궁, 쇼트트랙, 태권도 등 한국이 전통적 강세를 보이는 종목 지도자들은 세계에 퍼져 있다. 2021년 도쿄올림픽 당시 양궁 종목 참가국 중에서 미국, 호주 등 해외 7국 사령탑이 한국 출신이었다. 최근엔 한국 코치에게 골프를 배우려는 외국 프로·주니어 선수도 늘고 있다. 한국식 시스템을 접목해 강한 정신력을 심어주면서도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은 박주봉 감독은 일본말이 서툴던 부임 초기, 국제 대회에서 남자 선수 전원이 탈락하고도 돌아오는 버스에서 웃음소리가 나자 한국말로 호되게 야단쳤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이긴다. 느그들은 바로 그것이 없다!” 신태용 인도네시아 감독은 훈련에 늦기 일쑤고 튀김을 많이 먹던 선수들에게 분 단위로 쪼갠 훈련 시간표를 만들어줬고 단백질 보충 식단도 짜 줬다. 성공한 K감독들은 선수들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선수에게 직접 마사지기로 발 마사지를 해주고 생일 축하 손편지를 써준 박항서 감독의 ‘파파 리더십’에 베트남이 열광했다.
▶지난달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인도네시아 경기 관중석에 응원 현수막이 등장했다. ‘한국 최고 수출품은 신태용. 미안해요, 삼성.’ 최초 아시안컵 16강 진출 등 부임 후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는 신 감독이 요즘 인도네시아에서 아이돌 그룹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고 한다.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과 책임감, 근성과 프로 정신을 K감독들이 세계 무대에서 보여줬으면 한다.
/최수현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04.04 ‘억만장자’ 테일러 스위프트

▲일러스트=이철원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2일 발표한 올해 억만장자 명단에 미국 여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포함됐다. ‘오직 노래와 공연 작곡만으로 10억달러를 번 최초의 음악인’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스위프트의 재산은 11억달러(약 1조4800억원)다. 17세이던 2006년 데뷔한 스위프트는 수많은 ‘최초’ 기록을 써왔다. 지난 2월 그래미상 중 최고 영예로 꼽는 ‘올해의 앨범’을 네번째 받으며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다. 빌보드 최고 인기곡인 ‘핫100′ 에 가장 많은 톱 10 곡을 올린 이도 그녀다. 가수가 자선 등 사회 활동 아닌 노래만으로 시사 주간지 타임지 표지에 오른 것도 그녀가 처음이다.
▶스위프트의 영향력은 경제와 학문까지 뻗고 있다. 지난해 3월 시작한 미국 투어는 11월까지 티켓 41만장이 팔렸다. 숙박·오락·민간 소비에서 60억달러 GDP 증가 효과를 일으키며 ‘테일러노믹스’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하버드·스탠퍼드 등 명문대들도 ‘예술가와 기업가 정신’ ‘스위프트의 스토리텔링’ 등 강좌를 잇달아 개설했다.
▶인기 비결로 마약이나 성추문 없는 깨끗한 사생활, 삶을 대하는 열정적 태도, 세상에 전하는 선한 메시지 등이 꼽힌다. 스위프트는 러닝머신 위를 6개월 동안 달리며 숨차지 않고 40여 곡을 부르는 게 가능해진 뒤에야 무대에 선다. 성과를 독차지하는 법도 없다. 지난해 미국 투어가 끝난 뒤엔 스태프는 물론이고 공연장마다 짐을 실어나른 트럭 기사들에게 1인당 10만달러(약 1억3000만원)씩 총 5500만달러 보너스를 지급했다.
▶가수 인생이 끝날 뻔했을 때 그녀가 보여준 용기도 박수를 받았다. 2016년 한 남자 가수가 낸 신곡에서 ‘나는 스위프트와 동침할 자격이 있다’는 가사를 넣고 “스위프트도 가사 내용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스위프트는 1년간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남자 가수의 주장이 허위로 밝혀져 다시 무대에 서게 된 그녀는 ‘남들은 나를 밀어내려 하지만 나를 밀어낼 수 있는 이는 오직 새로운 나일 뿐’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런 스위프트에게 매료되는 것이다.
▶미식축구 선수 트래비스 켈시와 당당히 공개 연애를 하고, 애인이 속한 팀이 우승하자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보란 듯 키스를 나누는 모습은 연애하다 걸리면 사과를 강요당하는 한국 아이돌 풍토를 돌아보게 한다. 스위프트가 올해 초 아시아 투어를 시작하며 한국 공연을 원했지만 7만명 넘게 몰리는 관객을 수용할 공연장이 없어 무산된 것이 못내 아쉽다.
04.05 ‘접대부’로 전락한 파티 주최자

▲일러스트=이철원
‘역사학자’라는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경기수원정 국회의원 후보가 2022년 유튜브에서 “김활란이 미 군정 시기에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 장교에게 성상납시켰다”고 했다가 사과했다. 여성계에서 “사과 대신 사퇴” 요구가 번지자 조상호 민주당 법률위원회 부위원장이 이렇게 옹호했다. “김활란 총장이 총재로 있던 낙랑클럽이 호스티스 클럽이며 실제 매춘에 이용됐다는 묘사가 나온다.”
▶1953년 작성된 미군 CIC(방첩대) 정보 보고서는 ‘낙랑클럽’을 묘사하며 “단체의 목적은 외국 귀빈, 한국 정부 고위 관리 및 군 장성, 외교관들을 엔터테인(entertain)하기 위한 것” “회원은…여성들로 교양 있는 파티 주최자들(hostesses)”이라 적었다. 좌파 학자들이 주인, 파티 주최자인 ‘호스트’의 여성형 명사 ‘호스티스’를 ‘술집 호스티스’로, ‘여흥’을 ‘접대’로 번역해 누명을 씌워왔다.
▶ ‘번역은 실패의 예술’이라고 한다. 아무리 잘해도 흠잡힐 구석이 있다는 얘기다. 미국 영화 ‘가을의 전설(Legends of the Fall)’은 한국 개봉 후 원작자가 “추락의 전설이 틀림없다”고 했지만 제목 오역 덕에 영화가 대박났다. 실수가 예술이 된 것이다. 문화적 차이는 아예 단어도 바꾼다. 양복 속에 입는 드레스 셔츠가 일본을 거쳐 오며 ‘와이셔츠(화이트 셔츠의 일본식 줄인 말)’가 됐고, 주인이 호의로 제공하는 유무형 서비스 ‘컴플리먼터리(complimantary)’는 그냥 ‘서비스’가 됐다.

▲4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이대 총동창회 회원들이 김준혁 후보자의 망언을 규탄하며 사퇴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
▶”마담이 살롱에서 남자 가수와 만나 밤새 이야기를 하더라.” 이 문장에 한국 사람은 음침한 상상을, 프랑스인은 귀부인이 예술가와 교류하는 살롱 문화를 떠올릴 것이다. 기혼 여성에 대한 존칭 ‘마담’은 한국에서 ‘술집 여주인’, 교류의 거점이었던 ‘살롱(거실)’은 고급 유흥업소가 됐다. 80년대에는 프랑스어 살롱에 영어 ‘룸’을 합친 ‘룸살롱’이 널리 퍼졌다. 룸살롱, ‘방거실’ 술집이라니.
▶대통령 부인을 유흥업소 ‘줄리’라 우기고,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청담동 고급 바’에서 밤새 술을 마셨다는 가짜 의혹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 2000년 5·18 전야제날 ‘새천년NHK’ 유흥주점에서 접대부와 술 마시다 여성 동료를 폭행했던 사람들, 2011년 방통위원을 하면서 피감기관으로부터 고급 룸살롱 접대를 받은 사람과 같은 편 사람들이다. ‘성 상납’ 발언은 무식의 발로가 아니라 ‘확증편향’이다. 확증편향이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이론이다.
04.06(토) 내진 설계

천년 고찰 불국사는 고려 때 지진으로 석가탑이 두 번이나 무너졌지만, 불국사 전체를 떠받치는 석축과 청운교, 백운교는 멀쩡했다. 자연석을 먼저 쌓고 자연석 면에 맞춰 인공 장대석을 쌓은 ‘그랭이 공법’, 석축 중간중간 땅속 깊이 박는 ‘동틀돌’을 배치해 석축의 안정성을 높인 점, 백운교 아래에 이중 아치(쌍홍예) 구조를 넣어 절대 무너지지 않게 만든 점 등 3가지 내진(耐震) 설계 덕이었다. 첨성대도 맨 위에 설치한 정자(井字)석이 균형추 역할을 해 지진 충격을 견뎌낸 것으로 밝혀졌다.
▶로마 건축의 걸작, 판테온은 43m 높이 돔 건축물이다. 기둥 하나 없는데 2000년간 온갖 지진을 견뎌냈다. 벽이 기둥 역할을 하는 아치형 구조인 데다, 위로 갈수록 가벼운 재료를 써 충격을 잘 흡수하는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반면 12세기 작품 피사의 사탑은 만들자마자 5도 이상 기운 부실 건물이었다. 그런데 피사의 사탑이 천년 동안 온갖 지진에도 쓰러지지 않은 건 왜일까. 사탑의 심층에 있는 연약 지반이 지진 충격을 흡수해왔다는 뜻밖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진의 나라 일본은 충격 흡수 기능이 좋은 목조건물을 주로 짓는다. 그런데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도쿄의 목조건물은 다 무너졌는데, 서양식 석조 건물 제국호텔만 멀쩡했다. 설계를 맡은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지반이 진흙층임을 알고, 물 위에 배를 띄우는 구조로 건물 기초를 만들고, 마치 기차를 연결하듯 건물 동을 배치하는 내진 설계를 한 덕분이었다.
▶며칠 전 대만에서 발생한 규모 7.2 강진에도 초고층 빌딩 ‘타이베이 101′은 멀쩡했다. 건물 꼭대기에 설치한 무게 660t의 쇠뭉치 진자가 지진 충격을 흡수한 덕분이다. 지진·강풍 같은 외부 충격이 건물을 흔들 때, 이 진자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건물의 균형을 잡아준다. 123층 롯데월드타워도 중심 기둥을 감싸는 보조 기둥, 대나무 마디 기능을 하며 충격을 흡수하는 벨트 트러스트 등 최첨단 내진 구조를 갖춰 진도 9 강진도 견딜 수 있다.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 대만의 TSMC는 지진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 빛으로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극자외선(EUV) 장비는 진동에 극도로 취약해 적잖은 피해를 본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EUV 관련 엔지니어들에게 대만 긴급 출장 명령이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반도체 클린룸도 내진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이번에 다시 점검해 볼 필요는 있겠다.
04.08(월) 봄마다 잠깐 피는 ‘벚꽃 엔딩’

▲일러스트=이철원
계란은 7분 삶으면 반숙란이 되는 게 공식이지만, 꽃 피는 시기는 공식이 없다. 기상 전문 업체도 자주 틀린다. 3월 말 ‘벚꽃 없는 벚꽃 축제’를 열었던 지자체들은 축제 기간을 연장하며 꽃 피길 기다렸다. 전국이 핑크로 물든 지난 주말, 벚꽃 놀이로 한반도가 출렁였다. 벚꽃은 개화 시작 3일 후 만개하고, 그로부터 7~10일 후쯤 ‘꽃비’가 되어 떨어진다. 벚꽃 철, 길어야 2주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한국인의 ‘봄 캐럴’이라는 ‘벚꽃 엔딩’이 귀에 새겨지는 것도 바로 이때. 가수 장범준이 작곡, 작사한 이 곡은 2012년 3월 29일 발표 직후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꽃놀이하는 연인들을 질투하며 “꽃이 빨리 지면 좋겠다”는 마음에 ‘벚꽃 엔딩’으로 제목을 지었다는데, 반대로 전 국민의 ‘야외 활동’을 부추기는 곡이 됐다. 발표 이듬해부터 ‘벚꽃 시즌’에만 역주행하는 현상이 반복돼 왔다. 7일 현재,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멜론의 ‘톱 100′ 18위에 올랐다. 12년 전 노래의 대단한 기록이다.
▶산림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전국 4만3223㎞ 거리에 가로수 823만그루가 심겨 있다. 벚나무류가 가장 많아 150만그루가 훌쩍 넘고, 이어 은행나무 이팝나무 느티나무 순이다. 일부에서 ‘벚꽃은 일제 잔재’라며 뽑아댔지만 소용없었다. 열매 악취로 밉상이 된 은행나무는 점점 줄고, 벚나무 이팝나무 회화나무 같은 화사한 수종이 가로수로 인기다.

▲7일 서울 여의서로(윤중로)를 찾은 상춘객들이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기념 촬영을 하며 봄을 만끽하고 있다. /뉴스1
▶'벚꽃 연금’이라는 말도 있다. 이 곡 저작권 수입이 ‘2015년까지 4년간 46억원’ ‘6년간 60억’ 이런 말이 있어서지만, 당사자는 액수를 말한 적이 없다. 노래 한 곡이 해마다 수억 원을 벌어주니 이런 고액 연금은 없다. ‘벚꽃이 그렇게도 예쁘디 바보들아’라는 가사의 ‘봄이 좋냐’(10cm 노래)라는 곡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딴지가 ‘벚꽃 엔딩’ 인기를 실감케 한다.
▶오랫동안 한국의 봄은 서글펐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슬프지만 울지 않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상징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백설희의 1954년 노래 ‘봄날은 간다’도 단조곡이 서글프다. 진달래꽃잎을 따서 ‘화전’을 부쳐 먹는 것도 사는 집의 ‘봄 호사’였을 만큼 ‘춘궁기’는 혹독했다. 꽃이 피어 더 서럽던 계절을 살던 민족이 ‘핑크 벚꽃 축제’ 시대를 누리고 있다.
04.09 ‘침대 이혼’

▲일러스트=이철원
30년을 함께 산 한 부부는 얼마 전부터 잠자리에서 귀마개를 쓴다. 코 고는 남편 때문에 아내가 먼저 준비했는데 언제부턴가 아내도 코를 골자 부부가 모두 쓴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다 서로 눈을 찌르거나 뺨을 쳐서 깨운 적도 있다. 남자가 직장 동료 식사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냈더니 “아직도 한방을 쓰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모임에 나온 이 중 절반 이상이 각방을 쓴다고 했다.
▶미국에서 부부가 각방을 쓰는 ‘수면 이혼(sleep divorce)’이 증가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전체 부부의 35%가 따로 잔다고 한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지난달 통계를 보니 한 침대를 쓰는 부부는 절반도 안 되는 42%였다. 대표적 노령 국가인 일본은 100세 시대 행복한 노년을 위한 주거 형태로 ‘1인 1방’을 제시한다.
▶각방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코골이다. 인간은 소음이 35데시벨을 넘으면 잠을 설치는데, 코 고는 소리는 평균 50~60데시벨로 헤어드라이어 소음에 맞먹는다. 각자 쾌적하게 느끼는 침실 온도라든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다른 것도 각방을 쓰는 이유다. ‘각방 예찬’을 쓴 프랑스의 한 교수는 이런 문제로 다투느니 따로 자는 게 수면의 질을 높이고 부부 금슬도 좋게 해 준다고 권했다. ‘한 침대 쓰는 부부’는 인류사에서 보면 최근 일이란 분석도 있다. 부부 침대의 대명사인 더블 침대는 인구 밀집이 빚어진 산업혁명 이후 보편화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예전엔 부부가 안방과 사랑방에서 따로 지냈다.
▶각방 쓰기가 부부 관계를 해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각방을 쓰면 화해할 기회를 잡기 어렵다. 노년에 따로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수면 중 호흡곤란 같은 돌발 상황에 혼자 대처하기도 어렵다. 자녀에게 부모 사이가 좋지 않다는 오해를 줄 수도 있다. 김사인 시인은 한 이불 덮고 살며 서로 의지하는 부부의 모습을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 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 본다’고 시 ‘지상의 방 한 칸’에 썼다.
▶각방을 쓸지 한 이불을 덮고 살지는 부부가 결정할 문제다.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정을 하건 부부가 대화하고 합의하느냐일 것이다. 불편한데도 참고 속으로 쌓아두는 것도, 대화 없이 독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도 모두 부부 사이를 금 가게 한다. 고령화로 부부가 함께 사는 기간이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길어지고 있다. 부부가 백년해로의 길을 함께 찾아야 한다.
04.10 ‘조커스’

▲일러스트=이철원
1942년 일본군이 호주 북부 다윈항을 폭격했다. 남태평양 장악을 위한 공격이었다. 당시 호주군 주력은 영국을 위해 유럽 전선에 있었고, 싱가포르에서 영국군과 함께 방어전을 벌이다 포로가 되기도 했다. 믿을 곳은 미국뿐이었다. 미군이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해 태평양 전쟁의 흐름을 뒤집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호주군도 크게 활약했다. 1차 대전까지 호주는 영국과 밀접했지만 2차 대전을 계기로 미국의 핵심 동맹이 됐다.
▶중국이 패권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 호주와 중국 관계는 좋았다. 호주는 ‘세계의 공장’ 중국에 석탄·철광석 등을 수출해 큰돈을 벌었다. 호주 수출에서 중국 의존도가 40% 가까이 치솟았다. 그런데 2015년 중국인이 호주 부동산을 싹쓸이하자 집값이 폭등했다. 호주 정치인에게 뇌물을 뿌리고, 중국인 유학생이 홍콩 민주화를 지지하는 호주 학생들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 중국 기업은 요충지 다윈항 운영권도 확보했다. 위기를 느낀 호주가 2020년 미국이 주도하는 지역 협력체 ‘쿼드(미·호주·일본·인도)’에 동참했다. 그러자 중국은 한국 사드 때처럼 호주산 석탄·보리·와인 등에 경제 보복을 했다.
▶'쿼드’에서 인도가 군사 공조에 소극적이었다. 그사이 중국은 호주와 가까운 남중국해를 ‘내해(內海)’로 만들려 했다. 미국이 중국의 팽창을 막으려고 2021년 만든 것이 ‘오커스(AUKUS)’다. 호주(AU)·영국(UK)·미국(US)의 영문 앞글자를 딴 군사 동맹이다. 3국은 앵글로색슨의 언어·문화·혈통까지 공유한다. 심지어 미국은 호주에 핵 추진 잠수함을 주는 파격적 결단까지 내렸다. 한국엔 일절 허용하지 않고 있다.
▶10일(현지 시각) 워싱턴에서 미·일 정상이 만나 일본의 ‘오커스’ 사실상 가입을 추진한다고 한다. 일본이 들어가면 ‘조커스(JAUKUS)’가 된다. 중국을 막을 극초음속·AI·우주군 등 전력 개발에 일본의 첨단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에 한미연합사 같은 통합 지휘부 설치도 장기적으로 검토한다고 한다. 5만4000여 주일 미군의 위상이 주한 미군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이러는 것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했을 때 미국과 함께 싸워줄 나라가 일본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워게임에 일본이 참전하지 않으면 미국은 중국을 제압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앵글로색슨 동맹이 다른 인종·문화권인 일본을 끼워주려는 것이다. 앞으로 미국은 한국과 뉴질랜드도 오커스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시킬 것이라고 한다. 우리 안보 당국자들의 지혜와 능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04.11 한강과 한라산의 라면 국물

▲일러스트=이철원
한국인의 라면 사랑은 각별하다. 1인당 연간 70개 이상으로, 매주 한두개씩 먹는다. 전 세계 라면 소비 1위 자리를 놓고 베트남과 경쟁한다. 문학작품에도 그 애정이 녹아 있다. 소설가 이문열은 대하소설 ‘변경’에서 1960년대 이미 한국인의 라면 사랑이 유별났음을 기록했다. 특히 국물을 예찬했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깨어 넣는 생계란이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한다고 썼다. 소설가 김훈도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국물을 강조했다. 맛있는 라면을 만들려면 물의 양은 조리법에 나오는 550㎖가 아니라 700㎖여야 하고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야 한다고 썼다.
▶그런데 라면 먹고 남은 것, 특히 국물은 문제다. 애물단지다. 라면 국물 맛을 결정하는 수프는 사실상 소금국과 같다. 나트륨이 약 1800㎖로 1일 권장 섭취량 2000㎖에 육박한다. 남아서 버려진 국물 속 염분은 토양을 오염시키고 풀과 나무를 고사시키는 등 생태계를 교란한다. 종이컵 하나 분량인 200㎖ 라면 국물을 정화하려면 그 7300배인 1460ℓ의 맑은 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버려진 국물에서 나는 악취도 고약하다. 대표적으로 악취에 시달리는 곳이 한강공원이다. 한강 편의점의 즉석 조리기에서 끓인 라면은 워낙 인기여서 ‘한강 라면’이란 표현까지 생겼다. 그런데 먹다 남긴 국물을 한강으로 연결된 하수구에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엔 건강 생각한다며 면만 건져 먹고 국물은 버리는 이도 많다. 10일 오전 인근 한강공원에 나가보니 하수구마다 전날 밤 버려진 라면 국물 악취가 진동했다. 지난주 벚꽃 축제가 열린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도 버려진 라면 국물로 몸살을 앓았다.
▶전국의 산들도 라면 국물로 신음한다. 1994년 화기를 사용한 취사가 금지된 뒤 등산객 사이에 컵라면이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일부 등산객이 먹다 남은 국물을 산이나 계곡, 심지어 등산로 화장실 변기에 버린다. 얼마 전부터 소셜미디어에 컵라면 인증샷을 남기는 게 유행하면서 피해가 더욱 확산하고 있다.
▶한라산 국립공원이 이달 들어 ‘라면 국물 남기지 않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버려진 라면 국물 때문에 맑은 물에 사는 날도래, 잠자리 애벌레, 제주 도롱뇽 서식지가 위협받는다고 한다. 음식 냄새를 맡은 까마귀와 산짐승까지 꼬인다. 라면 국물도 엄연한 쓰레기다. 산이라면 비닐봉지에 담아 보온병에 넣어 하산하고 한강공원에선 지정된 수거함에 버려야 한다. 몸에 해로운 국물은 자연에도 해롭다.
04.12 ‘청도 미라’와의 대화

▲일러스트=이철원
3000년 전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은 10대 때 일찍 죽는 바람에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람세스 못지않게 유명한 파라오가 됐다. 그의 무덤만 유일하게 도굴을 면했기 때문이다. 황금 마스크 등 유물 수천점과 그의 미라가 3000년 전 고대로 가는 문을 열었다.
▶투탕카멘 미라는 장기를 모두 제거하고 40일간 건조한 뒤 톱밥을 넣고 아마포로 감아 만들어졌다. 자연 상태에서 미라가 되기도 한다. 1991년 알프스 빙하 지대에서 발견된 ‘얼음 인간 외치’는 추운 환경 덕분에 시간의 무게를 견뎠다. 외치는 키 160㎝, 몸무게 50㎏, 혈액형은 O형이었다. 몸에 문신을 새겼고 등에 화살 상처가 있는 그는 용맹한 전사였을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 식사는 밀과 고사리, 염소와 사슴 고기였다. 그의 몸이 5300년 전 선사시대 인류의 삶을 들려줬다.
▶우리나라에서도 미라가 적지 않은데 대부분 15~16세기에 유행했던 회곽묘(灰槨墓)에서 나온다. 석회로 목곽을 둘러싸는 회곽묘는 석회 두께가 최대 35㎜여서 물과 짐승이 침범하지 못한다. 석회는 굳을 때 고열을 낸다. 이때 내부가 건조되고 미생물도 사멸해 미라가 만들어지고 유물도 온전하게 보전된다는 것이다.
▶가슴 절절한 사연도 함께 세상 빛을 보곤 한다. 경북 안동에서 미라로 발견된 이응태는 1586년 31세로 죽었다. 관을 열었더니 아내가 저승 가는 남편에게 신고 가라며 자기 머리를 깎아 만든 신발과 남편에게 보내는 한글 편지가 출토됐다. ‘당신, 항상 내게 이르시기를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먼저 가시나요’로 시작한다. ‘여보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중략) 내 마음 어디다 두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으니 이 편지 보시면 내 꿈에 나타나 자세히 말해 주세요’라 적혀 있다. 중세 한국어를 파악할 수 있어 자료 가치도 크다.
▶국립 대구박물관이 경북 청도에서 10년 전 발굴된 미라를 연구해 그 성과를 최근 공개했다. 미라 주인공은 1642년 숨진 이징이란 인물이다. 회곽묘에 안장된 덕분에 누비저고리와 도포 적삼 등 당시의 복식에서부터 기생충 4종과 헬리코박터균에 감염됐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미라가 시공을 초월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풍성한 문화의 샘도 된다. 1932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영화 미라(The Mummy)를 선보인 걸 계기로 많은 영화가 제작됐다. 우리도 이응태 부부의 사연이 소설과 창극, 오페라로 만들어져 사랑받는다.
04.13(토) 무효표에 담긴 ‘양심’

▲일러스트=박상훈
1954년 자유당은 4년 중임 제한을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 없애는 개헌을 추진했다. 재적 203석의 3분의 2인 136표 이상이 필요했다. 자유당은 야당과 무소속 의원을 회유해 137표를 확보했다. 결과는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 무효 1표였다. 자유당은 “사사오입 원칙에 따라 개헌 정족수는 135표”란 논리로 부결을 가결로 뒤집었다. 만약 무효 1표가 찬성이나 반대로 갔다면 사사오입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국회 표결 때 의사국장은 ‘가·부·可·否’ 4개 이외의 문자나 기호를 표기하면 무효 처리된다고 거듭 안내한다. 기표소 벽에도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붙는다. 그래도 무효표가 나온다. 의원들이 표기법을 모를 리 없다. 무효표는 고민의 산물로 기권보다 더 적극적인 의사 표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표결에서 자주 나온다.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표결에선 무효표가 7장 나왔다. 작년 9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체포 동의안 표결에선 4명이 무효표를 던졌다. 찬성표를 던지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민주당 의원들이었을 것이다.
▶일반 유권자들도 무효표로 의사 표시를 한다. 2014년 일본 오사카 시장 선거에서 무효표는 역대 최대인 13.5%였다. “장난치지 마세요” “세금 낭비하지 마세요”라고 적거나 백지를 냈다. 위안부 망언을 일삼던 하시모토 시장의 불통 행정에 대한 경고다. 지난달 러시아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은 87.3%를 득표했다. 재외국민 투표에선 72.3%로 차이가 났다. 무효표가 7% 가까이 쏟아진 영향이었다. 대선 직전 의문사한 푸틴의 정적 나발리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적는 등 저항 움직임이 일었다.
▶이번 총선 세종갑에선 무효표가 6700장 나왔다. 전체의 5.5%였다. 세종을(1.2%)의 4배가 넘었다. 선거 직전 민주당 후보가 부동산 갭 투기 의혹으로 공천 취소된 곳이다. 덕분에 민주당을 탈당한 새로운미래 김종민 후보가 당선됐다. 무효표 대부분은 국민의힘 후보를 찍기는 싫고 그렇다고 김 후보에게도 표를 주기 싫은 민주당 지지층에서 나왔을 것이다.
▶경기 수원정에서 ‘이대생 미군 성상납’ ‘퇴계는 성관계 지존’ 같은 말로 큰 논란을 일으킨 민주당 김준혁 후보가 2377표 차로 신승했다. 그런데 그 두 배인 4696표의 무효표가 나왔다. 나머지 수원 지역구 4곳은 1400~1900표 수준이었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차마 이런 사람은 못 찍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이 담긴 무효표일 것이다.
04.15(월) 男女 구분 기준, 몸 대신 마음이라니

▲일러스트=박상훈
영화 ‘인셉션’에 출연한 여배우 엘런 페이지가 몇 해 전 트랜스젠더 선언을 하고 남자가 됐다. 이름도 엘리엇 페이지로 바꿨다. 소셜미디어엔 웃통을 벗은 모습으로 등장해 운동과 호르몬 투여 덕에 울퉁불퉁해진 근육과 절제 수술로 납작해진 가슴을 ‘증거’로 공개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성전환을 하려면 페이지처럼 수술해야 했다. 법원은 신체 기관 변화를 확인한 뒤에야 성전환을 인정했다.
▶그런데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일부 주에서 자기 성별을 정할 수 있게 하는 법을 도입하고 있다. 독일 연방의회는 지난주 14세 이상이면 법원 허가 없이 신고만으로 자기 성별을 정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성을 바꾸기 위해 수술을 받거나 호르몬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된다. 페이지도 조금 늦게 성전환을 택했다면 수술하지 않고 ‘법적 남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성별 선택 범위도 다양해져서 양성애 성향이 있다면 ‘다양’을 고를 수 있고 이마저도 싫으면 성별 선택란을 비워둘 수도 있다. 덴마크·아일랜드·노르웨이·포르투갈·스위스·스페인·핀란드 등도 유사한 법을 이미 도입했다.
▶개인의 인권을 키우기 위해서라지만 ‘내 맘대로 성 고르기’의 혼란도 만만찮다. 미국에선 성전환 수술 없이 호르몬 주사만 맞고 여자가 됐다고 주장하던 남자가 여자 탈의실에 들어갔다. 여자들이 항의하자 “여자 탈의실에 들어가겠다”는 소송을 걸어 승소했다. 어느 미국 고교는 “남자 화장실을 쓰겠다”는 여학생과 7년이나 소송을 벌인 끝에 패소했다. 기업들은 분란을 피하기 위해 남녀와 성 소수자를 가리지 않는 ‘성 중립 화장실’을 잇달아 설치한다.
▶스포츠 분야에선 공정성 시비가 일고 있다. 미국의 한 남자 수영 선수는 성적이 오르지 않자 여성 호르몬을 맞은 뒤 여성부 경기에 출전해 정상을 휩쓸었다. 그가 출전하는 대회마다 ‘여자로서 경쟁하는 남자를 거부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국제사이클연맹도 성전환 선수가 다관왕에 오르자 ‘여자로 성전환하면 여성부 출전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신설했다.
▶‘성별 결정 기준이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주장이 번지는 배경엔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중시하는 세태 변화가 있다. 개개인의 선언만으로 성별을 정한다는 발상에 당혹해하는 반응도 만만치 않다. 여성이 성범죄를 당할 우려도 있다. 스코틀랜드에선 성폭행범이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고 여자로 인정받아 여자 교도소에 수감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신이 성을 정해준 이유를 곱씹게 된다.
04.16 낭패 볼까 두려운 ‘세컨드 홈’

▲일러스트=김성규
선사시대 라스코 동굴벽화로 유명한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 지방엔 영국인 마을 ‘에이메’가 있다. 영국 은퇴자 300명이 따뜻한 날씨와 싼 물가를 찾아 이곳에 ‘세컨드 홈’을 마련했다. 저가 항공 덕에 수시로 영국을 오간다. 10년 전 갔을 때 거리에 영어 간판을 단 수퍼마켓, 펍(pub), 부동산 중개 업소들이 즐비했다. 부동산 중개 업자가 “중국인들의 주택 구입이 늘고 있다”고 말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유럽에선 세컨드 홈 소유자가 흔하다. 파리에 살 때 이웃은 알프스 몽블랑 부근에 세컨드 홈이 있어 스키 철엔 그곳에서 살았다. 코로나 사태 후 재택근무가 확산되면서 세컨드 홈 인기가 급상승했다. 풍광 좋은 영국 남서부 해안에선 신축 주택의 30%가 세컨드 홈 용도이다. 영국 정부는 주택 신축에 따른 일자리 창출, 지역 소비 촉진 등 경제 활성화 효과가 좋다고 보고 세컨드 홈 소유자에게 주민세 50% 감면 등 다양한 장려책을 쓰고 있다. 이탈리아에선 외국인에게 1유로만 받고 시골 빈집을 파는 ‘1유로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주민을 늘리려 애쓰고 있다.
▶갖고는 싶지만 갖자마자 후회하는 3가지가 별장, 요트, 애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가끔 쓰는 데 비해 비용과 품이 너무 많이 드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귀농·귀촌 바람이 불면서 속초, 제주 등지에 세컨드 하우스 구입 붐이 일었었다. 가격도 급등해 투자로도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금리 상승이 촉발한 부동산 침체와 더불어 세컨드 홈 거품도 꺼졌다. 요즘 속초, 제주엔 미분양 아파트가 넘쳐난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 지인은 시골 기와집을 전원주택 삼아 5도 2촌(닷새는 도시, 이틀은 농촌)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 별안간 다주택자로 취급돼 종합부동산세가 수천만원씩 나오자 화가 나 기와집을 부셔버렸다. 정부가 이런 상황을 막고, 시골 주택 구입을 장려하기 위해 인구 감소 지역에 4억원 이하(공시가격 기준) 주택을 사면 ‘1주택자’로 대우하고, 재산세·종부세·양도세 감면 혜택까지 주는 ‘세컨드 홈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정부 말 믿었다가 나중에 낭패를 보는 거 아니냐’고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 정부 시절, 세제 혜택에 혹해 ‘주택 임대 사업자’로 등록했다가 다주택자들이 뒤통수를 맞았고, 종부세도 정권에 따라 춤을 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세컨드 홈 정책도 입법이 필요한데, 야당이 “무주택자가 수두룩한데”라며 딴지를 걸 수 있다. ‘세컨드 홈’ 정책 역시 총선 후폭풍을 비켜가기 어려울 듯하다.
04.17 성공한 세습 독재의 평화적 이양

▲일러스트=박상훈
말레이 반도 끝에 붙어있던 가난한 섬나라 싱가포르가 말레이연방에서 1965년 쫓겨났을 때 이 나라 미래는 끝난 듯했다. 변변한 자원도 없었다. 식량과 물도 부족해 말레이시아에 의지해야 했다. 그런 나라를 청년 리콴유가 떠맡았다. 1959년 36세로 집권해 31년간 통치하며 물고기잡이로 살던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을 400달러에서 1만2700달러까지 끌어올렸다.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잘살게 만든 비결로 ‘공포의 효능’을 꼽은 적이 있다. 일본 식민지 시절, 범죄자가 교수형 등 엄벌을 받는 걸 보며 “국가를 다스리고 사람을 지배하는 다양한 방식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나태한 국민을 채찍으로 일으켜 세우는 ‘엄한 아버지’ 리더십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마약 사범은 처형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자는 태형으로 다스렸다. 굵기 1.27㎝ 회초리는 석 대만 맞아도 살이 터지고 유혈이 낭자해진다.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선고한 매질 횟수는 다 채우는 철저한 법 집행으로 국민 뇌리에 준법 의식을 심었다.
▶장남 리셴룽 총리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는 국제 금융 지수 3위, 인적 자원 경쟁력 2위 등 모든 국가 경쟁력 지표를 세계 최상위로 올려놓았다. 법인세를 줄이고 상속세를 없애 사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 세계적 기업이 몰려들었다. 2022년 1인당 GDP 8만달러를 돌파해 아버지 때보다 6배 넘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다. 문화 인프라도 약진했다. 한국에선 7만명을 수용할 공연장이 없어서 무산된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 아시아 투어를 올해 초 유치해 동남아 전역의 팬을 불러 모았다.
▶성공의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도 짙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잘사는 북한’ ‘사형 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라는 말을 듣는다. 집회·시위·언론의 자유가 없다. 엄벌주의에 대한 불만도 높다. 집권 인민행동당의 인기도 전만 못하다. 2020년 총선에선 처음으로 야당에 두 자릿수 의석인 10석을 내줬다. 갤럽의 국민 행복도 조사에선 세계 148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국민이 변화를 원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리셴룽 총리가 20년 집권을 끝내고 다음 달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아버지의 31년 통치를 더하면 51년간 나라를 번영시킨 ‘리콴유 가문 통치’를 스스로 끝내는 것이다. 세습 독재가 성공하는 것도, 그 독재가 정변 없이 물러나는 것도 유례가 드물다. 리콴유는 생전에 “인생의 마지막 날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싱가포르의 성공”이라고 했다. 물질적 풍요에 이어 정치 민주화에도 성공하기를 하늘에서도 바라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04.18 사라지는 산부인과 의사

▲일러스트=박상훈
서울대병원에 산과(産科) 전임의가 한 명도 없다는 보도가 나왔다. 최근 2년간 산과 전임의 지원자가 없었던 데다 작년까지 일하던 전임의 2명이 교수 자리를 얻어 이직하면서 공백이 생겼다. 전국을 덮친 산부인과 기피 현상이 서울대까지 닥쳤다.
▶국내에 산부인과 1호 의사는 남성이다. 1904년 세브란스 병원이 개원하고 미국에서 제시 허스트 박사가 내한해 산부인과를 창설하고 초대 주임 교수로 취임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골반 모형으로 의대생을 가르쳐 제자들을 길러냈다. 남녀가 유별한 시절이니 산부인과 진찰이나 수술 때 여성 환자들이 부끄러움을 덜 느끼도록 눈을 가려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모성보호에 앞장선 여의사들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춘원 이광수의 부인으로 잘 알려진 허영숙은 국내 여성 개업의 1호로 전공이 산부인과였다. 1920년 5월 1일 서대문 인근에 산부인과·내과 등을 진료하는 ‘영혜의원’을 열었다. 1938년에는 효자동에 해산 전문 병원 ‘허영숙 산원’을 개원했다. 당시 월간지 기자였던 시인 노천명이 온돌방 입원실을 갖춘 이 산부인과 탐방기를 썼다. 종합병원으로 성장한 가천대 길병원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여의사 이길여 가천대 총장이 1958년 인천에 자신의 이름을 따 개원한 산부인과에서 출발했다. 환자가 문 밖까지 줄 서는 통에 진료실에 진찰대를 세 개 놓고 바퀴 달린 회전의자에 앉아 발로 밀치며 빠르게 움직여 환자를 진료했다고 한다.
▶새 생명을 맞는 이 고귀한 일이 의사들 사이에서 기피 전공 1호가 되고 있다. 지난해 5월 뇌성마비 신생아의 분만을 담당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12억원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가혹한 판결”이라고 성명을 냈다. 한 해 배출되는 신규 산부인과 전문의는 100명 남짓. 20년 전의 절반도 안 된다. 그조차 부인과를 택하지, 산과는 기피한다. 4년차 전공의 및 전임의 절반(47%)이 “분만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의료사고’로 인한 의료 소송 우려(79%)가 가장 컸다.
▶우리나라는 신생아와 산모 사망률이 OECD 평균보다 낮은 의료 선진국이다. 그럼에도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산부인과 분쟁 391건의 40%가 분만 관련이다. 그만큼 분만에는 위험이 따른다. 일본·대만 등은 분만 사고를 국가가 배상한다. 우리나라도 뒤늦게 관련 제도를 도입했지만 최대 보상금이 3000만원이어서 유명무실하다. 태어나는 아기는 적고 산모 고령화로 분만 위험도는 높아지는데 분만 수가는 낮고 사고 책임만 엄청 높으니 기피 현상이 심해지는 게 당연하다. “분만 사고 배상 책임에 국가가 저출생 대책의 0.1%만 투입해도 산부인과 기피 현상이 크게 해소될 것”이라는 의사들 호소를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04.19 임원의 애환

▲일러스트=이철원
모 기업 사주는 관리자급 직원이 마음에 안 들면 ‘임원’으로 승진시킨 뒤 얼마 안 가 해고하는 꼼수를 쓴다는 얘기를 들었다. 2000만 월급쟁이의 꿈인 ‘임원’ 자리가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임시 직원’일 수 있다는 뜻이다. 대기업 대졸 신입 사원 중 0.6%만 임원 타이틀을 단다. 1000명 중 6명이란 확률은 수능 응시자 중 의대 합격자 비율과 비슷하다. 수능은 3년 농사지만, 신입 사원이 임원이 되기까지는 평균 21년이 걸린다.
▶임원이 되면 연봉이 2~3배 뛰고, 출장 갈 때 비즈니스석을 타고 비싼 부부 건강검진도 회사 비용으로 받는 등 신분이 달라진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요즘은 일반 직원들도 잘 하지 않는 새벽 출근에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한다. 주 52 시간 근무는 언감생심, ‘월화수목금금금’을 각오해야 한다. 첫 임원 승진 나이는 49세, 퇴임 나이는 54세로 평균 재직 기간이 5년이지만, 신규 임원의 30%는 2년 이내에 짐을 싼다.
▶임원이 엄청난 연봉을 받는 ‘샐러리맨 갑부’ 시대를 연 사람은 삼성그룹 고(故) 이건희 회장이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초일류 인재를 데려와 사장보다 연봉을 더 주라”고 인사팀을 닦달했다. 이 회장의 임직원 연봉 대폭 인상 지시에 인사팀장이 30% 인상안을 들고 갔다가 “너부터 집에 가라”는 면박을 당했다. 그 결과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연봉이 250억원대까지 치솟았다. 삼성발 임원 연봉 인상이 타 기업으로 확산됐다.
▶외국에서도 임원에겐 회사를 위해 몸과 영혼을 갈아 넣을 것을 요구한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세상을 바꾸려면 주 80시간 이상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한 뒤 “성공하기 위해선 극도의 하드코어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자 한 여성 임원은 사무실 바닥에서 안대를 하고 침낭에서 자는 모습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다. “아첨꾼”이란 비아냥도 들었지만 머스크는 중용했다.
▶삼성그룹이 전 계열사 임원들에게 주 6일 근무를 지시했다. AI 반도체 경쟁에서 뒤지는 등 위기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기사엔 “글로벌 기업답지 않은 구태의연한 대응”라는 댓글도 있지만 “조직이 위기일 때 시대 흐름 운운하는 자는 임원 자격이 없다”는 등 지지 의견이 훨씬 많았다. SK그룹도 20년 만에 ‘토요 사장단 회의’를 부활하는 등 비상 경영에 나섰다. 한 임원에게 소감을 묻자 “주 7일 근무도 좋으니 오래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한민국 모든 임원의 바람이지 않을까.
04.20(토) 4천원 커피 양 속여 파면 된 日 교장

▲일러스트=김하경
일본의 한 중학교 교장이 편의점에서 ‘레귤러’ 사이즈 컵에 ‘라지’ 분량 커피를 내려받아 마신 게 들통나 파면당했다. ‘레귤러’와 ‘라지’ 컵의 금액 차가 고작 70엔(630원)이고 총 7차례 범행해 490엔(4410원)을 득 봤다. 그 죄로 30년 봉직한 교단에서 쫓겨나고 억대 퇴직금도 못 받는다. 가혹한 징계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일본 주류 사회는 ‘범죄는 범죄’라는 반응이다. 몇 해 전엔 폐기 대상인 학교 급식을 집에 가져간 교사가 징계당했다. 빵 100개와 우유 4200개를 4년간 가져갔다. 교사는 “어차피 버리게 될 것 아까워서”라고 했지만 교육 당국은 “학생 급식을 교사가 왜 손대느냐”며 감봉 처분했다.
▶일본은 그 직업에 직접 관련된 의무를 위반했을 때 더 무겁게 징벌한다. 파면당한 교장은 형사 불기소 처분을 받았는데도 “교육자가 해선 안 될 행위였다”며 교육 당국이 중징계했다. 한 판사는 살인 사건 피해자가 겪은 불행을 소셜미디어에 자세히 올렸다가 유족에게 상처를 줬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이 판사는 “범죄가 아니지 않으냐”고 항변했지만 일본 대법원은 “재판을 안정적·지속적으로 수행하려면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절대적이고, 판사는 인격과 품위를 해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며 법복을 벗겼다.
▶이를 보며 우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몇 해 전 버스 기사가 잔돈을 두 차례 따로 챙긴 게 들통나 해고됐다. 법원은 ‘운전원의 수익금 착복은 금액을 불문하고 해임을 원칙으로 한다’는 노사 합의서에 따라 해임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당연한 판결이었지만 거리에 판사를 비판하는 플래카드가 나붙고, 버스 회사에는 몰인정하다는 비난이 쇄도했다.
▶우리나라에선 공직자가 법인 카드를 개인적으로 사용해도, 대학교수가 서류를 위조해 입시 부정을 저질러도, 시민운동가가 불법 대출로 강남에 고가 아파트를 사도, 턱도 없는 성 관련 궤변을 해도 국민이 이들을 지지해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다. 인터넷엔 ‘부끄럽다’는 반응도 나오지만 소수다.
▶19세기 영국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한 인간의 내면에 깃든 선과 악이란 주제를 다뤘다. 그 못지않게 ‘선량했던 지킬이 어떻게 악당 하이드로 변해가는가’도 공들여 그렸다. 지킬은 처음 악의 유혹을 느꼈을 때 하이드가 되기 위해 변신용 약을 많이 썼다. 하이드가 될 때 큰 고통도 겪는다. 그런데 악행을 거듭할수록 약이 덜 필요하고 변신에 따르는 고통도 줄었다. 잘못을 눈감아주는 그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잘못과 일탈이 일상이 된다.
04.22(월) 미·이스라엘 ‘뒤집힌 갑·을’

▲일러스트=이철원
미국의 거듭된 자제 요청에도 이스라엘이 지난 19일 새벽 이란을 공격했다. 이란의 미사일과 무장 드론 공격을 받은 지 엿새 만에 재보복을 강행했다. 이스라엘은 미국 반대에도 가자지구 라파의 지상전 준비도 착착 진행하고 있다. 미국이 민간인 피해 우려를 제기하며 아무리 제동 걸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미국의 가이드라인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중동 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는 것은 11월 대선을 앞둔 미 바이든 대통령의 지상 과제다. 사망자 3만4000명을 낸 가자 전쟁의 조기 휴전도 필요하다. 재선이 급한 바이든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확전을 자제하라는 당부를 계속하고 있지만 먹혀들지 않는다. 외신 영상에 나오는 바이든의 모습을 보면 마치 이스라엘에 사정하는 듯한 어조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원조도 세계 어느 우방국보다 가장 많이 받았다. 2차 대전 이후 약 2636억달러의 원조를 받았는데 대부분 군사 원조다. 미국은 주변 아랍국에 대해 이스라엘의 질적 군사적 우위(QME)를 유지시킨다는 원칙 아래 각종 무기와 방위 물자를 제공하고 있다. 다른 나라엔 전력 자산 수출을 엄격히 통제하지만 이스라엘은 예외다. 이스라엘이 사고 싶은데 미국이 안 파는 군사 관련 장비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번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도 F-35 스텔스기 등 미국이 해외 이전을 제한하는 최첨단 공격 수단이 동원됐다고 한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왜 이스라엘 앞에선 쩔쩔매는 것일까. 미국 내 유대인은 700만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2% 수준이지만 이들은 정·재계, 학계, 언론, 문화·예술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의 유대계 이익 단체 ‘미·이스라엘 공공 정책위(AIPAC)’는 막강한 자금력으로 미국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최대의 로비 단체다. 정계 인사는 물론 대통령도 유대인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바이든 대통령 자신이 대표적인 친이스라엘 정치인으로 꼽힌다. 바이든 백악관의 직원 33%가 유대계로 알려졌고 바이든의 두 며느리가 유대계다.
▶무조건 이스라엘 편만 드는 것이 중동에서 반미 감정을 심화시켜 미국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스라엘 편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통상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이 갑이고 이스라엘 같은 나라는 을일 수밖에 없는데 미·이스라엘 관계는 갑을 관계가 뒤바뀐 것 같다.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미국은 이스라엘의 위성국가”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외교·안보·경제 모두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 우리로선 이스라엘이 부럽기만 하다.
04.23 밀가루 두 포대의 기적, 대전 성심당

▲일러스트=이철원
한국전쟁 때 흥남 철수선을 타고 탈출한 실향민 임길순씨가 진해에서 서울로 가려다 열차에 문제가 생겨 대전에서 내렸다. 생계가 막막하던 그에게 대전 대흥동 성당이 구호물자였던 밀가루 두 포대를 내줬다. 임씨는 가족 끼니를 해결하고 남은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나무 간판에 ‘성스러운 마음’이란 성심(聖心)을 새겨 넣었다. 대전의 명물 빵집, 성심당의 시작이었다.
▶북한을 탈출할 때, 임씨는 ‘이번에 살아남으면 남은 인생은 남에게 베풀기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임씨는 하루에 만든 빵 중 100개는 이웃에게 나눠줬다. 당일 만든 빵 중 안 팔린 빵은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는 성심당의 전통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지난해 성심당이 지역사회에 베푼 나눔 빵은 10억원어치가 넘는다. 직원들은 매일 각지에 보낼 나눔 빵을 포장하며 ‘사랑’을 체감한다.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 임영진 대표가 1981년 소보로, 앙금빵, 도넛을 합친 듯한 ‘튀김 소보로’를 개발, 히트를 쳤다. 2005년 화재로 매장과 빵 공장이 모두 소실되는 위기가 찾아왔다. 사장은 장사를 접으려 했지만, 직원들이 ‘잿더미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는 플래카드까지 내걸고 재건에 나섰다. 성심당은 직원 인사 고과에 ‘사랑’ 항목을 만들어 배점 40%를 주고, 퇴사 직원에겐 ‘재입사 권리’를 보장하며 화답했다.
▶2012년 부친의 창업지였던 대전역에 분점을 낸 것이 ‘전국구 빵집’ 도약을 이끌었다. 대전을 방문한 외지인들이 성심당 빵을 앞다퉈 사가면서 군산 이성당과 함께 ‘전국 2대 빵집’ 반열에 올랐다. 하루 내방객이 1만7000명이 넘는 성심당은 1년에 하루 직원 체육대회 날에만 문을 닫는다. 그날이 되면 “재난 문자로 휴업 알려주세요” “KTX가 대전역 무정차 통과하게 해주세요”라는 등의 광(狂)팬들 요청이 소셜미디어를 달군다.
▶성심당이 지난해 1243억원의 매출을 올려 동네 빵집 최초로 1000억원을 넘어섰다. 영업이익은 무려 315억원에 달해, 파리바게뜨(199억원), 뚜레쥬르(214억원) 등 대기업 빵집 프랜차이즈를 앞질렀다. 작년에 선보인 ‘딸기 시루’가 가성비 케이크로 입소문을 타면서 매출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성심당 임 대표 책상 위엔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적힌 명패가 놓여 있다. 동네 가게가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겨 향토 기업이 되고,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 ‘성심당 모델’이 계속 나오면 좋겠다.
04.24 입막음 돈

▲일러스트=김성규
TV 드라마 ‘살인자ㅇ난감’ 주인공은 지나가던 여자에게 살인 범죄 현장을 들킨다. 여자는 “내 입을 막으려면 돈을 달라”고 했다가 목숨을 잃는다. 여자가 입막음의 대가로 요구한 돈을 영어로 ‘허시 머니(hush money)’라 한다. ‘허시’는 ‘쉿’이란 뜻이다. ‘허시 머니’란 표현은 1709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던 리처드 스틸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멍청하거나 사악한 짓을 저지른 자들이 허시 머니를 쓴다’고 한 게 문헌에 나타난 첫 표현이다.
▶미국에서 허시 머니 추문에 처음 휘말린 이는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혼혈 노예였던 헤밍스란 소녀를 정부(情婦)로 들였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키자 돈으로 입을 막으려 했다. 훗날 5대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먼로에게 1801년 보낸 편지에서 그 돈이 ‘불우한 사람을 돕는 자선금’이라고 했다가 화를 불렀다. ‘제퍼슨이 30살 연하의 14세 여자아이를 정부로 삼아 자식까지 여럿 뒀다’는 폭로 기사로 이어졌다.
▶허시 머니가 목적을 달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평생 돈을 뜯기거나 그 덫에서 벗어나려다 더 깊은 범죄의 나락으로 빠진다. 시트콤 ‘코스비 가족’으로 사랑받던 미국 국민 배우 빌 코스비는 혼외자 아들로부터 “내 입을 다물게 하려면 돈을 내놓으라”는 협박에 시달렸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은 혼외정사 상대 여성에게 허시 머니를 주려고 선거용 공금에 손을 댄 게 들통나 정계에서 퇴출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8년 전 관계가 있던 포르노 배우에게 “입을 다물라”며 건넨 13만달러 때문에 법정에 섰다. 추문을 숨기려다가 미국 역사상 형사 피고인이 된 첫 전직 대통령이 됐다. 허시 머니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 측이 건넨 돈 상당액이 회삿돈이며 장부에 ‘법률 자문료’로 허위 기재돼 있는 게 기소의 근거가 됐다. 처음부터 실수였다고 사과했다면 법정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허시 머니는 진실을 영원히 숨기지도 못한다. 토머스 제퍼슨은 혼혈 노예와의 관계를 평생 부인했다. 그러나 200년 뒤인 1998년, 헤밍스 자손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자기 몸에 제퍼슨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영국 속담에 ‘하루 행복하려면 이발하고, 한 해 행복하려면 새집 짓고, 평생 행복하려면 정직하라’고 했다. 허시 머니를 써가며 돈은 돈대로 날리고 추문이 드러나 망신을 사느니 진실을 인정하는 게 낫다.
04.25 축소되는 네옴시티

▲일러스트=이철원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해온 ‘네옴시티’ 프로젝트가 대폭 축소될 것이라고 한다. 네옴시티의 핵심은 사막에 높이 500m 초대형 거울벽 건물을 양측에 길게 두 동 세워서 직선형 도시 ‘더 라인’을 건설하는 것인데 그 길이가 170㎞에 달했다. 그것이 2.4㎞로 대폭 줄어든다는 것이다.
▶사막에 상상 이상의 건축물을 세운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군 기원전 바빌로니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복자이자 건설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메디아 왕국의 아미티스 공주와 결혼했다. 북부 산악 지대에서 사막으로 시집와 향수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왕은 수도 바빌론에 산(山)처럼 7층 계단식 구조 건물을 짓고 테라스와 옥상을 정원으로 꾸몄다. 500㎞ 떨어진 메디아 왕국에서 수백종의 나무와 꽃을 가져오는 엄청난 역사(役事)였다. 7층 높이 꼭대기까지 물을 끌어올려 거대한 정원에 물을 줬다. 이 ‘공중 정원’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고대 7대 불가사의 건축물의 하나로 꼽았다.
▶UAE의 수도 아부다비는 세계 최초로 루브르 해외 분관을 유치했다. 2017년 개장한 루브르 아부다비는 바다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축물 그 자체가 거대한 예술품이다. 사막인 사디야트섬 해안에 건물 공사를 끝낸 후 바닷물을 채우는 방식으로 건설했다. 55개나 되는 건물의 집합체인데 그 위를 직경 180m 금속제 돔이 덮고 있다. 석유가 나기 전 아부다비는 대추야자 재배가 전부였다.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은 야자 잎사귀 사이로 떨어지는 비에 착안해 미술관을 설계했다. 금속망을 겹쳐 만든 거대한 돔은 구멍이 숭숭 뚫려 빛도, 비도 통한다.
▶두바이 빈 라시드 알막툼은 온갖 기록적 건축물을 세우고 두바이를 중동의 금융·물류 허브로 탈바꿈시켰다. 높이 828m의 세계 최고층 건물 부르즈 칼리파, 바다를 매립한 3개 인공 섬으로 이뤄진 야자수 모양의 팜 아일랜드 등으로 두바이는 일약 사막의 신기루 같은 도시가 됐다. 최근에는 ‘부르즈 칼리파’를 중심에 두고 주위에 550m 높이로 거대한 기둥을 5개 세워 그 위에 반지 모양 구조물을 만드는 ‘다운타운 서클’ 구상도 발표했다.
▶중동 산유국들은 오일머니의 힘으로 상상 초월의 ‘21세기 바벨탑’, ‘현대판 공중 정원’을 세우고 있다. 최대 산유국 사우디의 빈 살만 왕세자가 단숨에 이를 능가할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진짜로 가능할까 싶던 그 구상이 결국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건설비 때문에 상상만으로 끝나는 모양이다.
04-26 유류분

▲일러스트=박상훈
10여 년 전 국내 제화 업체 창업자가 1000억원대 재산 대부분을 장남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딸 둘이 법원에 소송을 냈다. ‘유류분(遺留分)’ 청구 소송이었다. 유류분은 재산 물려주는 사람이 상속받을 권리를 가진 유족에게 재산을 전혀 물려주지 않을 경우 등에 대비해 법으로 일정 재산은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로마법에서 유래해 1977년 우리 민법에 도입됐다. 남존여비 구습을 피해 여성 상속권 일부라도 보장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법이 보장하니 장남으로선 안 줄 도리가 없었다. 소송은 장남이 일정액을 동생들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당시 언론은 ‘딸들의 반란’이라고 했다.
▶몇 년 뒤 혼외자(婚外子)들도 나섰다. 전 재벌 회장, 전직 대통령 아들이란 사실을 법원에서 인정받고는 유류분 청구 소송을 냈다. 우리 법은 상속에서 혼외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도입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유류분 소송이 이젠 재벌가에선 예삿일이 됐다. 지금도 몇몇 기업의 오너 가족 사이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상속 전쟁’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번졌다. 2012년 590건이던 유류분 소송은 지난해 2035건이 돼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소송 과정에서 가족들이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8년 전,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어느 50대는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단독주택을 상속받았지만 형제들에게 유류분 소송을 당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지 않은 형, 누나가 무슨 권리가 있냐”고 항변했지만 결국 패소했다. 법정 밖에서 멱살잡이까지 하면서 형제들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어느 변호사는 “‘돈이 피보다 진하다’는 걸 보여주는 소송”이라고 했다.
▶유류분 제도가 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것은 ‘가족 공동체’다. 그런데 가족 해체를 조장하는 역설이 벌어지는 것이다. 불효자에게도 당당히 재산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서 ‘불효자 상속권’ ‘불효자 양성법’이란 지적도 나왔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그늘이 큰 듯하다.
▶어제 헌재가 유류분 제도를 규정한 민법 일부 조항에 대해 위헌과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불효자 등은 상속에서 배제하거나 제약해야 한다는 취지다. 부모를 오래 부양하거나 재산 형성에 기여한 자녀는 상속을 더 받게 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사회 상식과 국민 법 감정에 맞는 결정이다. 상속 독식도 안 되지만 가족 간 상속 전쟁과 반목도 안 된다. 이번 결정이 유류분 소송을 줄여 상속 전쟁을 막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04.27(토) 방시혁과 민희진의 K팝

▲일러스트=김성규
1990년대 등장한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는 보이 그룹 H.O.T와 걸그룹 S.E.S를 선보이며 K팝 탄생의 신호탄을 쐈다. JYP·YG엔터테인먼트와 함께 K팝 시대를 열었다. 세 기획사는 이수만·박진영·양현석이라는 걸출한 가수 출신이 이끌었다. 2005년 등장한 방시혁은 달랐다. 가수 출신이 아닌 순수 경영인으로서 K팝 최고 히트 브랜드인 BTS를 탄생시켰다.
▶'사장님 방시혁’은 K팝 기획사에 미국식 멀티레이블 체제를 도입했다. 레이블은 모기업에 딸린 자회사라 할 수 있다. 방시혁이 의장으로 있는 하이브(HYBE) 아래 BTS가 속한 빅히트뮤직을 비롯해 쏘스뮤직, 플레디스, 빌리프랩, 어도어 등이 포진해 있다. 어도어 소속 걸그룹 뉴진스가 지난해 1100억원 넘는 매출을 기록하며 BTS의 군 입대로 인한 공백을 훌륭히 메웠다. 레이블 육성에 과감히 투자한 사업가 방시혁의 안목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도 엑소와 소녀시대를 키워낸 이 분야 기린아다.
▶그랬던 방시혁·민희진 두 대표가 어도어 경영권을 둘러싸고 볼썽사나운 다툼을 벌이고 있다. 지분이니 풋옵션이니 하며 K팝을 사랑해온 팬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문화와는 무관한 두 대표의 갈등에 대한 반감을 엿보게 하는 사건이 그제 민 대표 기자회견에서 있었다. 그날 민 대표는 그런 자리에 어울릴 투피스 정장이 아닌 맨투맨 티에 모자를 눌러쓴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섰다. 방송사 유튜브로 그 장면을 본 이들은 민 대표 말에 귀 기울이는 것 못지않게 패션에도 관심을 쏟았다. 민 대표가 입고 나온 옷과 모자가 완판된 것이다.
▶패션 업계에선 이런 현상을 ‘디토(ditto)’라는 이탈리아어로 설명한다. ‘나도 그래’라는 뜻이다. 디토는 성공한 연예인의 스타일을 따르고 싶은 대중의 욕망이 일으키는 현상이라고 한다.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코리아 2024′에서 디토는 단순히 대세를 따르는 유행이 아니라 특정 분야에 관심 있는 이가 그 분야에서 먼저 성공한 셀럽들을 선망하는 문화 현상이라 설명한다.
▶방시혁 의장은 하이브 영어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연결과 확장을 지향하는 뜻’이라고 했다. 하이브는 벌집(hive)도 떠올리게 한다. 많은 K팝 팬은 여러 레이블을 거느린 하이브가 큰 벌통이 되어 레이블이란 방을 키워주길 기대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장르가 차별화되지 않은 레이블들 간 지나친 경쟁도 한 이유라고 한다. 유니버설 뮤직처럼 각각을 개성 뚜렷한 레이블로 키우는 방안도 고민했으면 한다.
04.29(월) 나훈아의 은퇴 무대

▲일러스트=이철원
노벨문학상을 받은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는 2012년 13번째 소설집 ‘디어 라이프’를 내며 절필도 선언했다. 조용히 작품 활동을 멈춰도 될 것을 굳이 선언까지 한 것은 “80세가 된 내가 더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 했다. 끝내야 할 때를 아는 소설가의 결단 덕에 ‘디어 라이프’는 먼로의 마지막 걸작으로 남아 있다. 국내에선 프로야구 선수 이대호가 재작년 팬들의 박수 속에 그라운드를 떠났다. 3할 타자로 선수복을 벗은 그는 은퇴하는 해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유일한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
▶멋진 은퇴 대열에 가수 나훈아도 이름을 올렸다. 지난 주말 인천 송도 공연에서 “마지막 은퇴 투어”라며 올 연말을 끝으로 58년 지켜온 무대를 떠난다고 했다. 1966년 ‘천리길’로 데뷔한 이래 ‘갈무리’ ‘잡초’ ‘사랑’ ‘영영’ ‘무시로’ 등 2600여 곡을 발표했다. 작사·작곡도 뛰어나 1200여 곡을 직접 지었다. 120곡 넘는 히트곡으로 전국 노래방 반주기에 가장 많이 곡이 수록된 국민 가수이기도 하다.
▶나훈아의 노래에는 한국 현대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고향역’과 ‘물레방아 도는데’에는 1970년대 타향살이의 애환을, ‘녹슬은 기찻길’과 ‘대동강 편지’엔 북녘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의 눈물을 담았다. ‘테스형’처럼 세대를 넘나드는 곡을 불러 청년들에게 ‘노인돌’(노인+아이돌)로 불린다.
▶북한에서도 인기 가수다. 우리 가수들의 평양 공연 때는 김정은이 당시 우리 문화부 장관에게 “나훈아는 왜 안 왔냐?”고 물었다. 그 후 남한 유행가 단속이 시작됐을 때, 북한 청년들이 나훈아 노래 ‘사내’를 부르다가 불잡혔다. 왜 그 노래를 불렀느냐는 당국의 질책에 청년들은 “‘사내답게 살다가 사내답게 갈 거다’라는 가사가 가슴에 와 닿아서”라고 했다는 사실이 북한 내부에서 큰 화제가 됐다.
▶송도 공연에서 나훈아는 ‘고향역’부터 ‘18세 순이’까지 숨찬 기색 하나 없이 내리 불렀다. ‘물레방아 도는데’를 부를 땐 30대이던 1986년과 40대이던 1996년 공연 동영상을 함께 틀었다. 고희를 훌쩍 넘긴 나훈아 목소리가 청년·중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객석에서 “이런데 왜 은퇴하느냐?”고 묻자 나훈아는 “저는 아직 더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이크를 내려놓는 것”이라 했다. 시인 이형기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시 ‘낙화’에 썼다. 나훈아가 남긴 노래의 꽃은 국민의 마음에 떨어져 오래도록 시들지 않을 것이다.
04.30(화) 미용 전문 의사

▲아침 9시부터 긴 줄 - 2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피부비만성형학회 춘계 학술 대회 입구 ‘전공의 이벤트 상품권 수령처’에 소속 수련 병원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목에 건 전공의들이 줄 서 있다. 이날 학회는 학술 대회에 방문한 전공의들에게 백화점 상품권 3만원을 증정했다. /정해민 기자
피부과에 처음 간 것은 건강검진 서비스 중 하나인 점 빼기 때문이었다. 호기심에 갔는데 “하면 좋다”는 항목이 많아 추가 요금을 냈다. 요즘 피부과 서비스 목록엔 ‘피부 오마카세’도 있다. 오마카세가 요리 종류와 방식을 셰프에게 맡기는 것이라면, 피부 오마카세는 ‘의사에게 내 얼굴 맡기기’다. 100만원 등 정액을 결제하면 금액 한도 내에서 기본적인 점 빼기, 필러·보톡스, 레이저 등 모든 미용 시술을 받는 식이다. 개인 맞춤형 피부 관리를 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인기라고 한다.

▲일러스트=이철원
▶우리나라 미용 성형 시술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용 성형 강국인 미국이나 남미에서도 한국 기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올 정도다. 서울 강남의 호텔 로비에 가면 얼굴을 붕대로 싸맨 외국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미용성형 시술을 받은 외국인들이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환자는 전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해 60만명을 넘었는데, 피부과, 성형외과를 찾은 환자 수가 1, 2위였다.
▶한편으론 미용 성형 강국인 점이 의료 왜곡도 불러오고 있다. 레이저로 점 빼기 등은 어려운 기술이 아니다. 영국은 간호사가 보톡스나 필러, 레이저 시술을 할 수 있다. 미국도 일부 주에서 간호사·레이저 치료사가 미용 의료를 하고, 일본도 간호사가 의사 관리하에 제모 등 레이저 시술을 할 수 있다. 한국에선 의사만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전공이든 모든 의사가 다 할 수 있다. 그러니 갓 의사가 된 일반의나 산부인과 등 다른 과 의사들이 이곳에 몰리고 있다. 전문의 자격이 없어도 세금 공제 후 월 1000만원을 거뜬히 번다고 한다. 이런 의사를 ‘월천 도사’라고 부른다.
▶의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미용성형 시술로 의사들이 몰리는 것은 실손보험 증가와 함께 필수의료 붕괴의 원인으로도 꼽히고 있다. 우리도 간단하고 반복적인 미용 시술은 간호사 등 다른 직역에 허용해야 비용도 떨어뜨리고 의사는 ‘의사다운’ 진료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거의 비의료인들이 하는 문신도 법적으론 의사들만 할 수 있다.
▶28일 열린 피부비만성형학회 학술대회에 의대 증원에 반대해 사직 중인 전공의들이 긴 줄을 섰다고 한다. ‘필러 시술법’ 등 미용 시술 강연을 들으려는 행렬이다. 평소에는 일반 개원의가 많았는데, 올해는 전공의 비중이 대폭 늘었다고 한다. 전공의들도 점 빼주려고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줄을 선 그들 마음도 착잡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