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直說 2024-04/ 04.01 세계 최고 상속세가 촉발한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 - 04.30 前사무총장 아들 '세자'라 불렸다…"충격적" 선관위 채용비리
正論直說 2024-04/
04.01 세계 최고 상속세가 촉발한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
대주주 모녀와 아들 형제가 대결한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은 상속세 때문에 촉발됐다. 2020년 창업주가 별세하면서 유족에게 총 5400억원의 상속세가 부과되자 납부 자금 마련을 위해 송영숙 회장 모녀가 OCI그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아들 측과 갈등이 빚어지며 소송전이 벌어지고 주총 표 대결까지 간 것이다. 지난주 주총에서 모녀 측이 지명한 이사 선임안이 전원 부결되면서 두 아들 측 승리로 일단락됐지만 그 과정에서 경영이 악화되고 주가는 최고점 대비 반 토막 났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속세가 우량 제약 기업의 경영을 흔든 것이다.
그동안 유족들은 한미약품 주식을 담보로 잡히고 대출받아 상속세 절반을 납부했지만 아직 2700억원이 미납으로 남아 있다. 세금 납부를 위해 주식을 팔면 지분율이 낮아져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 송 회장 모녀는 OCI와의 통합을 추진했다. OCI 대주주 측과 상호 지분 매각을 통해 2000여 억원 현금을 조달하면서 경영권도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통합안은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를 희석시키게 돼 결국 52% 주주의 반대로 무산됐다. 두 아들 측은 표 대결에서 이겨 이사회를 장악했지만 상속세를 어떻게 해결할지 해법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경영권 분쟁 전까지 한미약품은 한국을 대표하는 우량 기술 기업이었다. 2015년 한 해에만 글로벌 제약 업체들과 6건의 계약을 맺어 총 8조원 규모 기술 수출에 성공했었다. 하지만 창업주 사후 대주주들이 상속세 문제에 매달리면서 신약 개발이 부진에 빠지고 연구개발 투자도 지연되고 있다. 핵심 연구 인력도 빠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대주주 상속세 실질 세율은 최고 60%에 달해 주요국 중 가장 무겁다. 미국(40%)·프랑스(45%)·독일(30%)은 물론 일본(55%)보다도 높다. 기업 승계조차 ‘부(富)의 대물림’으로 간주해 징벌적 세금을 매기면서 중견·중소기업 대주주가 가업을 포기하거나 세금 내려 회사를 파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기업 경영의 발목을 잡는 징벌적 상속세를 대폭 수정하거나 나중에 기업을 팔 때 부과하는 자본이득세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4.02 다시 온 반도체 호황, 이 기회 놓치면 한국 반도체 쇠락할 것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5월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뉴스1
3월 반도체 수출이 117억달러를 기록해 1년 전보다 36% 늘어났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에 따른 반도체 수요 급증과 메모리 반도체 가격 상승 덕분이다. 반도체 수출이 급증세를 보이며 연관 산업의 생산과 투자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2월 반도체 생산이 1년 전보다 65%나 늘었다. 반도체 생산을 뒷받침하는 기계장비 투자도 10% 이상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각각 8만원대, 18만원대로 올라서며 연일 52주 최고가를 갈아 치우고 있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관련 150여 개 상장 기업 주가도 동반 상승하며 증시 전체에 훈풍을 불어넣고 있다. 전체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 호조가 경제 전체로 파급되며 생산·투자와 기업 실적 등을 연쇄적으로 끌어올리는 선순환 효과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3년여 동안 침체했던 글로벌 반도체 경기는 작년 8월 D램 가격이 바닥을 찍고 상승기로 돌아섰다. 챗GPT 열풍을 계기로 전 세계적인 AI 투자 붐이 일면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호황의 최대 수혜국은 메모리 반도체 세계 최강인 한국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기술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메모리 세계 1위 삼성전자는 AI 반도체에 필수적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경쟁에서 뒤처졌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대만 TSMC 등에 밀려 2021년 18%에서 2023년 11%로 오히려 후퇴했다.
그 사이 경쟁국들은 차세대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한 몸이 되어 공격적 투자에 나서고 있다. 미국 인텔은 2027년부터 1나노(10억분의 1m) 반도체를 양산해 2030년까지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2위 파운드리가 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30년 전 반도체 패권을 한국에 빼앗긴 일본은 미국 인텔, 대만 TSMC와 손을 잡고 하루 24시간 공사를 강행하는 놀라운 속도전으로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삼성전자 평택 공장이 송전선 문제로 5년을 허비하고, SK하이닉스 용인클러스터가 용수 문제로 3년간 첫 삽도 못 뜬 것과 대조적이다.
이번 반도체 상승 사이클은 한국 반도체가 재도약하느냐, 도태되느냐를 가를 분기점이다. 반도체 기업들은 다시 한번 혁신의 불꽃을 피우고 적극적인 투자 전략으로 시장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국회는 연구원들을 사무실에서 내쫓는 경직적 주 52시간제를 비롯, 기업 발목을 잡는 각종 규제를 풀고 국가 차원의 지원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경쟁국들이 천문학적 보조금을 퍼붓는 상황에서 우리도 투자액의 15%에 불과한 세액공제 폭을 대폭 확대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총선 후 22대 국회가 개원하면 반도체 지원법 업그레이드를 최우선 의제로 다뤄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4.03 자치경찰 3년, 달라진 건 없이 세금 먹는 위원회만 100여 개

▲크리스마스 이브인 작년 12월 24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경찰이 인파관리를 하고 있다./뉴스1
2021년 자치경찰제 도입으로 만들어진 18개 시도 자치경찰위원회가 각각 평균 10개 안팎의 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제도 도입 3년 만에 만들어진 산하 위원회가 100여 개에 이른다. 운영비만 수십억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자치경찰제는 문재인 정부 때 경찰의 범죄 예방, 교통 단속 업무 등을 지자체 지휘 감독에 맡겨 주민 밀착형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도입한 제도다. 하지만 경찰 업무는 달라진 게 거의 없고, 국민도 무엇이 바뀌었는지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위원회만 잔뜩 생긴 것이다.
위원회 운영도 엉망이다. 경기남부자치경찰위는 지난해 심의 안건 중 지역 민생 치안 사업 발굴이 ‘0건’이었다. 자치경찰위들이 이제껏 처리한 안건도 경찰이 제안한 것에 도장만 찍은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몇몇 자치경찰위들은 최근 선진국 사례를 배우겠다며 미국 LA, 뉴욕 등으로 ‘겹치기 출장’을 떠나고 있다. 그런 자치경찰위 보직의 상당수는 전직 경찰이 차지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전국 자치경찰위 비상임위원 123명 중 29명(23.6%)이 경찰 출신이었다. 자치경찰제가 국민에게 달라진 모습은 전혀 보이지 못하면서 퇴직 경찰관들 자리만 만들어 준 셈이다. 이런 제도가 왜 필요하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치경찰제는 문 정권 때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너무 비대해지는 경찰 권한을 줄이려고 급조한 제도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검토 없이 도입해 허점투성이다. 자치경찰 업무는 대부분 지구대·파출소 소관인데 이곳에서 근무하는 경찰은 국가경찰 소속이다. 가정 폭력 예방은 자치경찰 업무인데, 가정 폭력 수사는 국가경찰 업무다. 만약 예방하려다 범죄가 포착되면 바로 국가경찰로 업무를 넘겨야 한다. 제도 자체가 기형적이고 비효율적이다. 자치경찰위는 “인사·예산권이 없다”고 불만이지만 그것을 부여한다고 해도 지금으로선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미국도 자치경찰제를 두고 있지만 업무 처리 과정에서 비효율을 해소하기 위해 마약·테러 등을 수사하는 광역 수사 기관을 따로 두고 있다. 우리도 자치경찰제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사설
04.02 국회 세종시 이전, 사회적 합의가 우선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3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의 완전한 세종시 이전으로 여의도 정치를 종식하는 동시에 국회의사당을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고 공약하였다. 이에 질세라 더불어민주당도 국회 이전에 찬성한다며 숟가락을 얹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여야가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금방이라도 세종시로의 국회 이전이 이루어질 기세다.
헌재 2004년 “서울이 수도” 결정
대통령실 견제·감시 기능에 차질
정부가 여기저기 찢겨서도 문제
포퓰리즘으로 이용해서는 곤란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국회의 이전이 가능한지, 또 바람직한지부터 살펴보자. 우선 헌법재판소의 2004년 10월 결정(2004헌마554)이라는 법적 장애물을 넘어서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임은 관습헌법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봤다. 국회의 이전은 수도의 이전, 즉 천도(遷都)라고 해석될 여지가 많은데, 그렇다면 위헌적이다. 이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는 명시적으로 개헌을 하거나, 최소한 헌법재판소가 지난 2004년의 결정을 번복해야 한다. 둘 다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회의 이전이 현재 대한민국 상황에서 바람직한 것인가? 국회의 근본적 역할 중 하나는 행정부 감시이다. 비록 많은 중앙행정부처들이 세종시로 이전했으나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서울 용산에서 집무를 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업무를 감시해야 할 국회가 세종시로 이전하는 것이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 정부의 기본 원리에 부합하는 모습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10여 년전 수도를 꼭 세종시로 옮겨야한다면 정부, 국회, 법원의 일부만 갈 것이 아니라 모두 다 가야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세종시의 현재 상황도 국회 이전을 무리 없이 수용하는 데 많은 문제를 노정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실상을 살펴보자. 국회와 사법부, 그리고 일부 행정부처는 서울에 잔류하고, 총리실과 대부분의 행정부처는 세종시로 이전했다. 광의의 정부가 이리저리 찢긴 모습이다.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입법수도, 행정수도, 사법수도를 따로 둔 나라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같이 행정부처를 두 곳으로 나누어 배치한 나라는 아무 데도 없다. 어쩌면 국회 이전 과정에서 일부 상임위나 지원조직은 서울에 잔류하는 형태로 국회도 분할될 수 있다. 자칫하면 대부분의 행정부처와 국회의 상당 부분이 포진하는 세종시와 사법부 전체 및 국회와 행정부처 일부 그리고 대통령실이 존재하는 서울시가 쌍봉을 형성하는 기형적인 수도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하드웨어가 사분오열된 정부 조직 형태가 그 정부를 운영해야 할 소프트웨어의 퇴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모습은 이미 현재의 세종시에서도 엿보인다.
사회에 진출하려는 젊은이들이 지방 근무를 꺼려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이가 줄었다. 이미 공무원이 된 사람도 이탈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들의 상사가 빈번히 서울을 왕래하거나 아예 서울에 상주하는 사람까지 있어 상사와 자주 만나지 못하므로 일을 배우지 못한다.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 주도로 세종시 건설이 추진된 핵심적인 논거는 ‘국토 균형발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세종시 건설로 인해 충청권 국민은 그 혜택을 맘껏 누리고 있을까? 세종시는 2022년 말 기준으로 출범 후 10년 동안 약 26만5000명의 인구 증가가 있었다. 이들의 직전 거주지를 보면 충청권이 63.4%, 수도권(서울, 경기, 인천)이 23.5%로 나타난다. 수도권의 경우, 공직자와 그 가족을 제외하면 수도권 집중 완화에 대한 기여는 기대보다 훨씬 낮다. 결국 세종시 인구 증가는 주로 충청권 내에서의 ‘제살깎아 먹기’로 이루어진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세종시는 블랙홀이 되어 인근 도시의 인구를 빨아들였고 어떤 곳은 아예 인구소멸 지역으로 분류되어 가는 중이다.
국가 정책은 신중히 해야 한다. 기본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하고, 추진 방향은 적법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당초의 정책 의도와 실제 정책의 결과 사이에 괴리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보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시 이전은 그 자체로 냉정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재평가도 없이 국회 이전 논의가 총선 공약으로 등장하는 것은 생경하다.
세종대왕은 어떤 정책을 최종적으로 추진하기에 앞서 끊임없이 사전에 실험을 했다. 한글의 창제와 반포 사이에 3년의 실험 기간이 있었고, 『농사직설』을 통해 새로운 농사 기술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거나 공법(貢法)이라는 조세제도를 시행할 때에도 치밀하게 그 현실성을 점검했었다. 21세기가 시작되었지만, 우리 정치권은 아직도 15세기의 세종대왕 발끝도 못 따라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중앙일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04.05 현직 부장판사 “요즘 판사들 웬만하면 유력 인사 법정구속 안하려 한다”
조국 ‘불구속 실형’ 논란
“조국 대표는 2심에서 실형이 나왔는데도 법정 구속이 안 돼 창당하고 활동합니다. 그런데 저는 1심 선고도 안 났고 무죄를 주장하며 싸우는데 활동을 못 하는 게 수긍이 안 됩니다.”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6일 재판부에 보석을 요청하면서 한 말이다. 법원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에게 자녀 입시 비리와 청와대 감찰 무마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해 1·2심 연속으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하면서 법정 구속은 하지 않았다. “증거 인멸·도주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방어권 보장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1심에서 무죄를 다투는 자신은 왜 풀어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송 전 대표는 그동안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많이 했지만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다 맞는 얘기도 아니지만 상식선에서 보면 다 틀린 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법원은 “증거 인멸 우려가 있다”며 송 전 대표의 보석 청구는 기각했다. 그는 여전히 불공평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법조계 인사들은 “애초의 문제는 서울고법이 2심에서 조국 대표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법정 구속을 하지 않은 데 있다”고 말한다. 이 사건 1심은 선고까지 3년 2개월, 2심은 1년이 걸렸다. 이렇게 오랜 기간 재판을 통해 재판부가 유죄 확신을 갖고 실형을 선고했다면 법정 구속하는 게 맞는다는 것이다. 사건 실체가 드러나기 전인 수사 단계의 구속과는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2심 재판부가 ‘방어권 보장’ 등을 이유로 법정 구속하지 않은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범죄 행위에 대한 사실 판단은 사실상 2심에서 끝난다. 최종심인 대법원 판결은 원칙적으로 2심 판단에 법리 위반이 있는지 등을 따지는 법률심이다. 피고인이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슨 방어권 보장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2심 재판부가 조 대표를 법정 구속할 경우 예상되는 극렬 지지자들의 반발을 의식해 법정 구속을 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재판부로서도 고민이 있었겠지만 법정 구속을 안 한 것은 비겁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은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인 2021년 1월 법원행정처가 ‘인신구속사무의 처리에 관한 예규’를 개정한 것과 무관치 않다. 기존 예규는 ‘피고인에 대해 실형을 선고할 때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법정에서 피고인을 구속한다’고 돼 있었는데, ‘구속 사유와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법정에서 피고인을 구속한다’로 바꾼 것이다. 개정 전엔 실형을 선고하면 ‘원칙상 법정 구속’이었는데, ‘예외적 구속’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대법원은 당시 “형사소송법상 구속영장 발부 기준에 따라 법정 구속 여부도 정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했다. 사실상 법정 구속도 수사 단계의 영장 발부 기준과 비슷해진 것이다. 형사소송법상 구속영장은 범죄가 어느 정도 소명되는 것을 전제로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도주·증거 인멸 우려가 있을 때 발부하게 돼 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로또 영장’이란 지적이 많았는데 법정 구속에도 같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법정 구속 여부를 정하는데 판사들에게 더 큰 재량을 주면서 기준도 모호해지고, 이전엔 법정 구속했을 사안도 잘 하지 않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예규 개정 전후의 사례를 비교해봐도 그런 경향이 드러난다. 개정 전인 2019년엔 여비서 성폭행 혐의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심에서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같은 해 자신이 성추행한 여 검사에게 인사 보복을 한 혐의로 기소된 안태근 전 검사장도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반면 개정 후인 지난해 11월, 문재인 정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으로 기소된 송철호 전 울산시장, 황운하 의원은 1심에서 각각 징역 3년의 실형이 선고됐지만 법정 구속을 면했다. 함께 기소돼 징역 2년의 실형이 선고된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 권력과 경찰 조직을 이용해 선거 부정에 개입한 심각한 사건인데도 “도주와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법정 구속을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안 전 지사나 안 전 검사장이 이들보다 도주·증거 인멸 우려가 더 크다고 볼 이유는 딱히 없다. 무슨 차이인지 알기 어렵다. 더구나 법정 구속됐던 안 전 검사장은 나중에 무죄가 확정됐다.
이런 추세는 통계로도 나타난다. 사법연감을 보면 2015~2018년까지 1심 법정 구속 비율은 20% 후반대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2018년 기준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4만1171명 중 법정 구속된 이는 1만2314명으로 29.9%였다. 그러나 2019년 이 비율은 27.8%로 감소한 뒤 대법원 예규가 개정된 2021년엔 24.07%로 떨어졌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도 “최근 판사들이 법정 구속을 잘 하지 않는 추세인 것은 분명하다”며 “특히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 등 논란이 되는 인물이 피고인인 경우 판사들이 법정 구속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최근 조국 대표 등을 법정 구속하지 않은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법정 구속 여부가 피고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좌우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지난 3월 제주지법은 화살로 떠돌이 개를 쏜 40대 남성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지난 2월 광주지법은 위험 운전을 해 뒤따르던 차량의 사고를 유발한 사람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한 변호사는 “이들의 범죄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보다 무겁다고 할 수 없다”며 “이런 판단을 국민 법 감정이 용납하겠느냐”고 했다.
“2심서 실형 선고하면 ‘원칙적 구속’ 기준 세워야”
법정구속 기준 더 구체화해야
법정 구속 기준이 모호하다 보니 판사들 판단도 제각각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2017년 대선 때 인터넷 댓글 조작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경수 전 경남지사 사건이다. 1심은 그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지만 2심은 같은 징역 2년을 선고하면서도 “도주 우려가 없다”며 구속하지 않았다. 그가 1심 선고 이후 77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에서 2심 재판을 받긴 했지만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실형을 선고하면 보통 1심보다 2심에서 법정 구속하는 일이 많다. 범죄 행위에 대한 사실 판단은 사실상 2심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그 반대였다. “대체 무슨 기준이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법조계 인사들은 법정 구속 기준을 더 구체화해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들쭉날쭉한 판단 기준이 형사 사법에 대한 신뢰를 해친다는 것이다. 한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적으로라도 2심에서 실형을 선고하면 원칙적으로 법정 구속하는 기준이나 관행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1심은 몰라도 적어도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이 끝나는 2심에서 실형을 선고하면 ‘원칙적 구속, 예외적 불구속’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도 조국 대표 경우와 같은 ‘불구속 실형 사건’에 대해선 미루지 말고 최대한 신속하게 판결해야 한다”고 했다. 피고인이 구속된 사건은 1심 6개월, 2심 8개월, 3심 8개월 등으로 구속 기간 제한이 있지만 불구속 사건은 그런 제한이 없다. 하지만 실형을 선고한 취지를 살려 대법원도 신속하게 선고해야 제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최원규 논설위원
04-05 100년의 역사가 병들고 있다
철들면서 25세까지는 ‘내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다. 해방이 되었다. 내가 경험한 북한의 공산 정치는 모든 기대와 희망을 빼앗았다. 진실과 정의는 물론이고 자유와 인간애까지 희생시키면서 살 수 없었다. ‘나라다운 나라’에 살기 위해 탈북민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6·25전쟁을 겪었다. 자유민주국가에서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찾아 누릴 수 있는 조국을 위해 여생을 바치고 싶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세 가지 사명이 있다. 그 첫째는 문맹자가 없고 중등 교육까지는 나라가 책임지는 과제다. 우리는 그 과정을 성공시켰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가는 교육적 책임을 성취했다. 두 번째는 모든 국민이 직장을 찾아 일하고, 일할 수 없는 사람은 나라의 보호를 받는 경제정책이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신생 국가나 후진 사회가 부러워할 정도의 경제성장 가능성을 창출했다. 한강의 기적을 인정받을 정도가 되었다. 셋째로 부과된 책임은 전 국민이 균형된 양질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의 확립이다. 지난 몇 해 동안 그 의무를 달성하기 위해 방법과 과정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시설과 기술이 선진국 수준이 되었다. 정부와 의료계가 지혜롭게 협력하여 성공하기를 바란다. 지금은 나라다운 나라와 인간다운 삶의 기반을 끝내고, 정치적으로도 법치 민주국가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 독재정치의 과정도 있었고 군사정권의 기간도 뒤따랐으나 아시아를 대표하는 중견 국가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겪어야 할 역사적 과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대학을 비롯한 운동권 정치세력이 정계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변화가 생겼다. 문재인 정부는 그 세력과 뜻을 같이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밖으로는 국민 통합을 호소하면서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심지어는 ‘촛불 혁명’이라는 구호까지 삼가지 않았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국민 분열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되고, 경제정책과 질서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후퇴시켰다. 권력으로 국민 평등화를 호소하는 정의관으로 ‘내로남불’의 모순을 현실화시켰다. 북한 동포에 대한 홀대와 세계가 염원하는 인권의 희망까지 저버렸다.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의심케 했다.
지금은 휴머니즘의 장래를 위한 자유민주 정신의 위기를 느낄 정도로 이념을 위한 정권욕에 몰입하는 민주당으로 전락하고 있다. 민주당 안에서는 그 잘못된 정책과 방향을 반성하거나 수정하려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재명 당 대표나 그 뒤에서 폭력까지도 삼가지 않는 ‘개딸’들, 사회의 건전한 윤리와 정신적 질서를 역행하면서도 우리가 다시 정권을 쟁취해야 한다는 지도자가 늘어나고 있다. 민주정치의 근본정신인 대화와 협력을 배제하고 투쟁해서 이기면 그것이 정의가 되고 역사의 정도(正道)가 된다는 집념과 주장을 노골화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전개되고 있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평한다면 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후진성을 그대로 연출한다. 대한민국의 장래가 우려스러울 정도로 퇴락했다. 정치계의 주역을 맡았다고 권력으로 법치 사회를 유린하고, 법조계 출신임을 이용해 선한 민주 질서와 사회윤리까지 훼손시켜도 된다면 그 책임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국민에게 주어진 선택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애국심이 국가의 새로운 장래를 결정지을 수 있다. 국민은 여야를 편 가르는 싸움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인간다운 삶은 정부와 국민의 진실을 위하는 지혜와 정직을 목숨같이 여기는 정신적 가치의 산물이다. 진실을 왜곡하고 범법까지 은폐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진실과 정의의 기반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 폐쇄적인 진보는 좌파가 될 수는 있으나 선한 역사의 주인공은 아니다. 국민 모두에게 나와 같은 사람이 되어 달라고 공언할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
정의와 자유는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의무와 가치다. 인간을 수단 삼거나 정치를 위한 제물로 여기는 지배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와 같은 유일 절대의 이념주의자는 인간성 파괴와 인간다운 삶을 제물로 삼는다. 북한의 동포들이 잘못된 정치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았는가. 인간애와 인권을 배제하거나 거부하는 정치는 최악의 범죄가 된다.

동아일보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04-05 긴 터널 탈출 반도체, 초격차 확대에 국가 역량 더 쏟아야
삼성전자가 올 1분기에 깜짝 실적을 올렸다. 영업이익은 지난해 1분기의 10배 수준이고, 매출은 2022년 4분기 이후 처음으로 70조 원대를 회복했다. 특히 반도체는 5분기 만에 흑자를 달성, 마침내 불황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SK하이닉스는 앞서 지난해 4분기 주력인 반도체 D램의 선전에 힘입어 흑자 전환했다. 반도체는 올 1분기 수출도 50% 넘게 급증, 본격적인 재도약을 예고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5일 발표한 올 1분기 잠정실적에 따르면 영업이익은 지난해 전체보다 많은 6조6000억 원으로 931.2% 급증했다. 매출도 71조 원으로 11.3% 늘었다. 관심인 반도체는 1조 원에 근접한 영업이익을 내며 흑자 반전에 성공한 것으로 분석됐다. 인공지능(AI) 칩 등의 수요 급증으로 향후 전망도 밝다. 그렇지만 갈 길이 여전히 멀다. 특히 반도체는 글로벌 대전이다. 대만 TSMC, 미국 엔비디아 등 선두 주자들은 격차를 더 벌리고, 경쟁자들은 빠르게 따라오고 있다. 특히 미국 인텔·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은 천문학적인 정부 보조금 지원을 바탕으로 첨단 제품의 양산 시기를 크게 앞당기며 정면 도전해오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선도 투자를 통해 개발한 혁신 기술을 속속 상용화하며 공격적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혼자의 힘만으론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반도체의 미래는 초격차에 달렸다. 정부와 국회는 민간에만 맡기지 말고 국가 역량을 더 모아 지원해야 한다. 여야 모두 이번 총선에서 반도체 지원 공약을 제시한 것은 다행이지만, 투자세액공제(15%) 연장 수준을 넘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2047년까지 수도권 남부에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하는데 민간 중심으로 622조 원이 투자된다. 대규모 보조금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 투자가 늘어야 고용도 늘고, 소재·부품·장비 등 생태계가 커져 내수도 활성화하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문화일보 사설
월간조선 04월 호
●대선 개입 여론 조작’ 몸통 서서히 모습 드러내다
‘윤석열 수사 무마 의혹’ 보도한 기자, 이재명캠프에서 자료 받았나?
A 변호사→李 캠프 법률지원단장→尹 은폐수사 특위→기자 순으로 유포 의심
⊙ 검찰, ‘이재명 캠프’가 대장동 일당에 소개한 A 변호사 통해 ‘남욱 수사기록’ 유출 판단
⊙ 수사팀, 처음 기사 쓴 기자 남욱 검찰 진술서 어떻게 입수했는지 주목
⊙ ‘윤석열 수사 무마’ 의혹, JTBC 보도로 촉발
⊙ 이재명 측근 변호사 이화영 재판 기록, 수사자료 민주당 유출 혐의 사건과 비슷
⊙ “곧 의미 있는 결과 나올 것”(특별수사팀)

▲검찰은 2023년 9월 7일 ‘대선 개입 여론 조작 특별수사팀’을 구성, 조사를 하고 있는데 아직 관련자 구속은 물론 기소도 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김대업 병역 비리 조작 사건’보다 심각한 사건이 묻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수사팀은 봉지욱 기자(전 JTBC, 현 뉴스타파)가 ‘윤석열 수사 무마’ 의혹을 보도한 근거인 남욱 변호사의 검찰 진술조서를 어떻게 입수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남 변호사의 검찰 진술조서를 유포한 세력이 ‘대선 개입 여론 조작’의 몸통일 수 있는 까닭이다.
수사팀은 조사 과정에서 의미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포렌식 결과, 봉 기자 측 휴대전화에서 지난 대선 당시 민주당의 화천대유 토건비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특위) 조사팀장 김모씨가 만든 자료가 발견된 것이다. 이 자료 속에는 윤석열 수사 무마 의혹과 관련한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2022년 2월 21일 JTBC 소속이던 봉지욱 뉴스타파 기자는 대장동 민간사업자 남욱(천화동인 4호 소유주) 변호사의 2021년 11월 검찰 진술조서 등을 근거로 ‘2011년 2월 조우형씨가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관련해 두 번째 대검 조사를 받을 때 주임 검사가 커피를 타 줬고, 당시 주임 검사는 윤석열 중수2과장’이라고 보도했다. 사진=JTBC 캡처
봉 기자는 ‘윤석열 수사 무마’ 의혹을 처음으로 보도한 인물이다. 2022년 2월 21일 JTBC 소속이던 봉 기자는 ‘2011년 2월 조우형씨가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관련해 두 번째 대검 조사를 받을 때 주임검사가 커피를 타 줬고, 당시 주임검사는 윤석열 중수2과장’이라고 보도했다.
봉 기자의 첫 보도 후인 2022년 3월 6일 오후 9시40분 인터넷 매체 ‘뉴스타파’는 ‘[김만배 음성파일] 박영수-윤석열 통해 부산저축은행 사건 해결’이란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대장동 사건 주역인 김만배씨와 신학림 전 언론노조위원장의 인터뷰를 편집해 ‘윤석열 후보가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건 수사 때 브로커 조모씨에게 커피를 타 줬다’며 봐주기 수사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민주당은 “커피 한 잔에 덮은 윤석열 게이트의 시작(강병원 의원)” “윤석열이 직접 타 줬다는 커피는 1805억원짜리 ‘대장동 커피’(조승래 의원)” “커피 타 주고 죄 덮어준 스폰서 검사 윤석열(박찬대 의원)” 등 해당 보도를 근거로 총공세에 나섰었다.
찐명 측과 尹 의혹 첫 보도 기자가 주고받은 자료
봉 기자 측에 ‘윤석열 수사 무마 의혹’과 관련한 자료를 보내고,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는 김모씨가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던 민주당 진상규명 특위는 나중에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윤석열 은폐수사 및 50억클럽 진상규명 특위’로 이름을 바꾼다. 이 특위를 이끈 인물은 김병욱 민주당 의원. 그는 ‘찐명’(진짜 친이재명)이다.
이재명 대표가 2010년 성남시장에 출마할 때부터 선대위를 이끌었다. 김 의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 대표가 성남시장에 도전할 당시 당내 경선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었다. 소위 친노로 분류되는 후보들과 경쟁했고 이 대표가 여론조사는 앞섰지만, 당원 투표에서는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며 “이 대표가 민주당 분당을 지역위원장으로 복귀해 도와달라고 했고, 고민 끝에 지지를 선언했다”고 했다. 이후 김 의원은 친명계 7인회 소속으로 당내 핵심 역할을 맡아왔다. ‘친명횡재 비명횡사’ 논란이 나온 이번 민주당 공천 과정에서도 단수 공천(분당을)을 받았다.
종합하면 찐명 현역의원이 이끄는 특위의 조사팀장이 ‘윤석열 수사 무마’ 의혹을 처음으로 보도한 기자 측에 해당 자료를 제공하고,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게 포렌식 수사 결과 드러났다는 것이다.
의혹 규명의 ‘키’를 쥔 A 변호사의 정체

▲정민용 전 성남도개공 전략사업실장. 사진=뉴시스
수사팀은 증거를 토대로 봉 기자가 김씨 또는 ‘화천대유 토건비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그러니까 찐 친명인 김병욱 의원을 통해 남욱의 검찰 진술조서를 입수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2021년 11월 구속 상태였던 남욱 변호사는 서울구치소로 접견을 온 자신의 변호인에게 “정민용 변호사에게 연락해 김용을 만나보라고 해달라”며 쪽지를 전달했다.
정 변호사는 남 변호사의 서강대 법대 후배다. 정 변호사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 밑에서 전략사업실장을 지낸 인물로, 당시 불구속 상태로 수사받고 있었다.
남 변호사의 요청대로 그의 변호인은 정 변호사에게 남 변호사의 말과 쪽지를 전했다.
쪽지에는 ‘대장동 사업을 주도한 건 내가(남욱) 아니고 김만배다’ ‘이재명 캠프에 이야기해 검찰 수뇌부와 대화가 통하는 변호사를 소개해달라’는 취지의 글이 적혀 있었다.
정 변호사는 남 변호사의 말대로 공중전화 등을 통해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에게 연락했다. 정 변호사를 통한 남 변호사의 구명(救命) 요청에 김용 전 부원장은 처음엔 난색을 보였다고 한다. ‘이재명 후보가 아직 대통령이 아니라 100% 힘을 쓸 수 없다’는 취지로 답을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남 변호사는 “그냥 돌아오면 어떡하느냐”고 정 변호사를 채근했고, 정 변호사는 이후 2번 더 김 전 부원장을 만나 변호사 소개를 요청했다.
정 변호사의 이야기다.
“김 전 부원장을 마지막(3번째)으로 만난 다음 날일 겁니다. 공사(성남도시개발공사)에 있는 사람을 통해 ‘어제 전화하신 분이 전화하랍니다’란 메시지만 전하더군요. 잠시 ‘뭐지?’ 했다가, 아, 김용 전 부원장이구나 싶어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자기네 캠프(이재명 캠프)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이분한테 전화하면 된다고 하더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줬습니다.”
― 김용 전 부원장이 이재명 캠프 사람을 통해 남욱 변호사를 변호할 변호사를 소개받았다는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 그 변호사, A 변호사라 칭하기로 하죠. 그 법조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재명 대선 캠프 법률지원단장이었던 분의 대학, 사법연수원 동기였습니다.”
― 이재명 대선 캠프 법률지원단장이 A 변호사를 소개한 겁니까.
“저는 김용 전 부원장에게 ‘자기네 캠프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이분한테 전화하면 된다’고 듣고, (남 변호사 측에) 전달한 게 다입니다.”
前 이재명 캠프 법률지원단장
이재명 대선 캠프 법률지원단장은 이재명 대표는 물론 김 전 부원장과도 각별한 사이로 보인다. 잠시 샛길로 빠지겠다. 이 법률지원단장의 이름은 ‘이재명 대표의 대북송금 의혹 수사’ 과정에서도 거론된다.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이 2019~ 2020년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측근인 김용씨와 세 차례 만났는데 법률지원단장을 맡은 이 법조인(변호사)이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이 변호사는 이재명 대표의 2018년 선거법 위반 사건을 수임했으며, 쌍방울이 그 변호사비를 대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김 전 회장과 김용씨의 만남은 2019년 쌍방울이 북한으로 800만 달러를 불법 송금한 시점을 전후해 이뤄졌다고 한다. 이 변호사는 2019년 12월 쌍방울 계열사 비비안의 사외이사를 지내다 그만뒀고, 지난 대선 때 이재명 캠프의 법률지원단장을 맡았다.
‘쌍방울 불법 대북송금’ 사건도 점점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지난 3월 5일 법정에서는 핵심 피의자인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재명 대표에게 쌍방울그룹의 방북 비용 대납을 보고했다는 진술 내용이 공개됐다.
이화영 전 부지사는 지난해 검찰 조사에서 “쌍방울 김성태 회장이 (도지사의) 방북 비용을 알아서 전부 처리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이재명 대표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전 부지사는 또 “이 대표가 ‘잘 진행해보면 좋겠다’고 대답했다”고 검찰에 말했다.
“A 변호사 인간적으론 좋은 사람”

▲2023년 10월 11일 검찰이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압수수색을 하기 위해 들어서는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다시 ‘대선 개입 여론 조작’ 사건으로 돌아와 남욱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 변호인이 ‘김용 전 부원장이 이재명 대선 캠프 법률지원단장으로부터 A 변호사를 소개받아 저에게 추천한다’고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법률지원단장이 A 변호사를 연결해줬다고 판단했고, 검찰 조사에서도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A 변호사가 ‘이재명 캠프’에서 추천했다는 사실입니다.”
― A 변호사에게 이재명 대표 측에 말을 좀 잘 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까.
“했어요. 제가 주범이 아니라고 이재명 대표 측이나 검찰 쪽에 잘 좀 전달해달라고 했죠. A 변호사님이 굉장히 공감을 해주셨어요. 인간적으로는 정말 좋은 분이셨습니다.”
― 그런데 왜 해임한 것입니까.
“해임한 게 아닙니다. 대선이 끝나고 한 번인가 오더니 그 뒤로는 안 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변호 활동이 중단된 것이지요.”
― 언론 보도를 보니 A 변호사의 말을 들었다가 추가 기소를 당했다고 나오던데요.
“제가 A 변호사를 2021년 12월 말 즈음에 선임했습니다. 검찰이 저에게 참고인으로 곽상도 사건에 대해 진술을 하라고 하던 시기였는데, 전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A 변호사께서 ‘자기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만 검찰에 가서 곽상도 전 의원 관련 조사를 받아달라’고 하더군요.”
당시는 검찰이 곽 전 의원에 대해 1차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당한 직후였다.
― 그래서 받았군요?
“네. 검찰에 ‘곽 전 의원에게 2016년 변호사비 명목으로 5000만원을 건넸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곽 전 의원이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더군요. 저는 변호사비라고 했는데, 당시 수사팀은 불법 정치자금으로 판단한 겁니다. 저도 불법 정치자금 제공 혐의로 추가 기소됐죠.”
― A 변호사가 대장동 수사를 민주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남 변호사를 이용한 것 아닙니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는데, 제가 사람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A 변호사가 南 진술조서 이재명 캠프에 전달?

▲김용 전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부원장. 사진=뉴시스
검찰은 남욱의 변호인으로서 그의 검찰 진술조서를 복사할 권한이 있는 A 변호사가 그의 대학, 사법연수원 동기인 이재명 캠프 법률지원단장에게 남 변호사의 검찰 진술조서를 넘겼고, 이 변호사가 화천대유 토건비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위원장이자 이재명 캠프의 핵심 중 한 명인 김병욱 의원에게 전달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후 김 의원이 자신의 수하에 있는 특위 조사팀장 김씨에게 진술조서를 넘겼고, 김씨가 이를 봉 기자에게 전달했다는 것이 검찰이 의심하는 내막이다. 사실이라면 대선 조작 가짜뉴스의 배후이자 뿌리는 이재명 캠프인 셈이다.
이미 이재명 대표의 최측근인 현근택 변호사는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외국환거래법 위반 사건의 변호를 맡을 당시 재판 기록과 수사 자료를 더불어민주당에 유출했다는 혐의(형사소송법 위반)를 받고 있다.
이 전 부지사의 수사 기록 등 유출 의혹은 2023년 3월 19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페이스북에 ‘가짜뉴스 생산과정’이라는 게시물을 올리고 이 전 부지사 재판의 증인신문 녹취록 사진을 첨부하면서 불거졌다. A 변호사가 의심받는 상황이 현 변호사 사건과 비슷해 보인다.
이와 관련 A 변호사는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변호 활동에 대해서 따로 언론에 드릴 말씀은 없다. 죄송하다”고만 했다. 다만 그는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남 변호사의 변호를 맡은 건 대학, 사법연수원 동기인 이재명 캠프 법률지원단장이나 김용씨와는 전혀 관련 없다”고 했다.
특위 관계자들도 “결백하다”며 “김병욱 의원은 전혀 이 사건(대선 개입 여론 조작)과 관련이 없다”고 했다. 이재명 캠프 법률지원단장을 맡았던 법조인도 “남 변호사에게 A 변호사를 소개해줬다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했다. 모두 혐의를 부인하는 상황이다.
검찰 관계자는 “포렌식 절차 및 관련자 출석 문제 등으로 다소 일정이 지연되고 있다”며 “당시 특정 대선 캠프 관여 여부 등도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어 사안의 전모를 규명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곧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봉 기자가 ‘윤석열 수사 무마’ 의혹을 보도하면서 근거로 삼은 남욱 변호사 진술조서의 관련 부분 ○검찰 문: 자세히 진술해보세요. ○남욱 답: 조우형이 2011. 2경 검찰에 처음 출석했을 때는 10시간 이상 조사를 받고 나왔고 그날 밤에 대법원 주차장에서 조우형을 만났는데 그날은 얼굴이 하얘져가지고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첫 조사 전에 김만배에게는 부탁을 했었는데, 김만배가 아직 검찰에 이야기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검찰 문: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남욱 답: 제 기억으로는 일주일 안쪽으로 2회 조사가 있었는데, 저, 김만배, 조우형이 2회 조사 출석 전에 대법원 주차장에서 만났었습니다. 그때 김만배가 조우형에게 “오늘은 올라가면 커피 한 잔 마시고 오면 된다. 물어보는 질문에 다 협조하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우형이 검찰에 출석해서 2회(번째) 조사를 받고 나왔는데 실제로 주임검사가 조우형에게 커피를 타 줬다고 했고, 첫 조사와 달리 되게 잘해줬다고 말을 했습니다. 조우형도 당연히 수사에 협조했을 것입니다. ○검찰 문: 조우형을 처음 조사한 검사와 두 번째 조사한 검사가 달랐나요. ○남욱 답: 처음 조사한 검사와 두 번째 조사한 검사가 같은 사람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검찰 문: 처음 조사한 검사가 누구인가요. ○남욱 답: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형?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조우형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검찰 문: 두 번째 조사한 검사가 누구인가요. ○남욱 답: 윤석열 중수2과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임검사가 믹스커피도 타 주었고 그날은 화기애애했다고 들었습니다. ○검찰 문: 조우형과 함께 출석한 변호인은 누구였나요. ○남욱 답: 박영수 변호사를 선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검찰 문: 두 번째 조사한 검사가 윤석열 중수2과장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요. ○남욱 답: 조우형이 두 번째 조사를 받고 나와서 주임검사가 커피를 타 줬다고 했었고, 그 사람이 윤석열 중수2과장이라는 것을 김만배로부터 들은 것 같습니다. |
‘윤석열 수사 무마’는 가짜뉴스

▲남욱 변호사. 사진=뉴시스
수사팀이 작년 후반기부터 수사 중인 ‘대선 개입 여론 조작’ 사건의 골자는 간단하다. 2022년 대선 직전 윤석열 후보를 대장동 몸통으로 몰아가려 일부 기자들과 ‘친이재명’으로 볼 수 있는 인물들이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유포한 것이다.
가짜뉴스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2011년 대검 중수부가 부산저축은행을 수사할 당시 윤석열 주임검사가 수사를 받으러 온 대출 브로커 조우형씨에게 커피를 타 주고 수사를 덮었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는 검사 시절 윤석열 대통령의 상관이었던 최재경 전 중수부장이 “윤석열이 ‘조우형(김양 부산저축은행 전 부회장의 심부름꾼이다)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대선 8일 전 《한겨레》 출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언론 ‘리포액트’는 이와 관련해 ‘최재경 전 검사장과 부산저축은행 관계자 이철수씨의 대화 녹취를 입수했다’며 보도했다.
‘리포액트’는 당시 보도에서 “이철수씨가 ‘김양 부회장이 구속되기 전 조우형이 김 회장의 심부름꾼이었거든요. 솔직히’라고 말하자 최 전 대검 중수부장은 ‘윤석열이 그런 말 했다’고 맞장구쳤다”고 보도했다. 이철수씨는 박연호 전 부산저축은행 회장의 처남으로, 조우형씨와는 사촌 관계다. ‘리포액트’의 보도는 “윤석열 대선 후보가 2011년 부산저축은행 수사에서 조우형씨 사건을 무마해줬다”는 ‘가짜뉴스’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두 의혹 모두 ‘허위’로 판명이 났다. 윤 대통령은 조우형에게 커피를 타 준 사실 자체가 없었다. 2011년 당시 대검 중수부가 수사했던 ‘부산저축은행 불법 대출 사건’은 저축은행 비리 전반에 대한 수사로 확대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 전직 청와대 홍보수석·정무비서관,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 등이 처벌됐다.
‘문재인 검찰’도 2021년 10월부터 김오수 당시 검찰총장의 지시로 ‘윤석열 수사 무마 의혹’을 수사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게다가 소위 ‘최재경 발언’은 민주당 김병욱 의원 보좌관인 최모씨가 최재경 전 부장인 것처럼 속여서 대화를 꾸민 것이었다.⊙
봉 기자는 당사자인 조우형이 윤석열 검사를 만난 적이 없다고 진술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보도하지 않았다. 다음은 2021년 11월 24일 검찰 조사 때 조우형씨와 검사와의 문답 ○검찰 문:당시 대검찰청 중수부에 출석할 때 진술인이 만난 검사는 P 검사뿐인가요. ○조우형 답:네, 그렇습니다. ○검찰 문:당시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윤석열 중수과장을 만나거나 조사받은 적이 있는가요. ○조우형 답:아니오. 없습니다. 저는 윤석열 검사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검찰 문:위와 같이 진술인은 검찰 조사를 받은 후 남욱에게 그 사실을 얘기한 적이 있는가요. ○조우형 답:그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검찰 문:당시 진술인은 남욱에게 ‘윤석열 중수과장이 커피를 타 주고 친절하게 조사를 해주었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는가요. ○조우형 답:아니오. 없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조사가 완전히 끝난 후 한두 달 지나서 P 검사님이 저에게 ‘사건과 관련된 일은 아니고 간단히 물어볼 게 있으니 커피 한 잔 마시러 와라’고 해서, 제가 혼자 대검 중수부에 잠시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검 중수부 조사실에서 P 검사님이 저에게 커피 한 잔을 주면서 부산저축은행 관계자들의 가족관계 등에 물어봤는데, 그에 대해 답변을 하고 귀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커피라는 단어를 들으니 갑자기 위 기억이 났습니다. |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세월호 10년’ 전국 세월호 관련 시설 현황
지금까지 쓴 돈은 약 2200억원… 향후 예정 지출액은 최소 ‘3623억원+α’
⊙ 280억원 들여 만든 ‘국민해양안전관(진도)’ … 하루 운영비 685만원, 관람객은 10~15명
⊙ 1523억원에서 급증하는 ‘세월호생명기억관(목포)’ 사업비… 해수부는 2513억원 요구?
⊙ 506억원 투입되는 ‘세월호 사망자 추모 시설’ 4·16생명안전공원(안산)
⊙ 현재 420억원 들여 건물 올리는 ‘안산마음건강센터’… 연간 운영비 100억원
⊙ 해수부, 사고 3년 만에 세월호 끌어올리는 데 1020억원 써
⊙ 세월호 관련 시설 운영비로만 매년 수백억원을 세금으로 지원해야

▲사진=월간조선
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언론 매체들은 매년 이맘때 세월호 관련 기사를 내놓는다. 그중에는 ‘세월호 사고 흔적’을 찾는 기사들도 있다. “세월호 단체들에 대한 지원이 줄었다”는 내용도 단골 소재다. “전국에 산재한 세월호 사고 관련 시설 조성이 지지부진하다”는 지적도 매년 제기된다. 소위 보수 정권이 세월호 사고를 외면한다는 식의 기사도 빠지지 않는다.
이는 올해도 반복되고 있다. 연초부터 ▲304명 앗아간 참사에도 국가 재난대응 없었다(1월 1일, 뉴시스) ▲다가오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끝까지 진상 규명해야”(1월 10일, 노컷뉴스) 등의 기사가 보도됐다. 아직 4월이 되지 않았지만, 최근에도 ▲세월호 유가족 참사 10주기 행진…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3월 5일, 뉴스1) ▲세월호 참사 10주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3월 5일, KBS)와 같은 식의 ‘세월호’ 관련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 이후 10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세월호’를 내걸고 진행되는 사업들의 현황을 살피는 기사는 없다. 그 타당성을 검증하거나, 사업 추진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없다. ‘세월호 사업’에 대한 비판은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진다. 이런 까닭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시설 건립 또는 그 계획안이 정말 ‘세월호 사고’ 사망자 또는 피해자를 위하는 일인지, ‘국민 안전’ 제고에 일조하는 길인지 따질 기회가 없었다. 그 효과도 불분명한 사업들에 막대한 세금이 투입되는 실상을 《월간조선》이 알렸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난 만큼, 이제는 그간 추진했던 각종 사업과 앞으로 진행될 사업들의 실상을 정확히 알릴 필요가 있다. 이에 해양수산부와 유관 지방자치단체의 문건 분석과 현장 취재 등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이미 운영되고 있거나, 향후 건립될 ‘세월호 사고 관련 시설’들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세월호와 서해훼리호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인근 해상에서 좌초했다. 이후 전복된 세월호는 곧 침몰했다. 이 사고로 승선자 476명 중 304명이 사망(미수습자 5명 포함)했다. 사진=뉴시스
세월호 침몰 사고는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했다. 이날 오전, 청해진해운 소속으로 인천-제주 항로를 운항하던 연안여객선 ‘세월호’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전복·침몰했다. 이 사고로 승선자 476명 중 304명이 사망(미수습자 5명 포함)했다. 생존자 172명, 생존율 36.1%다.
사고 당시 세월호 탑승객 중 상당수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세월호 전복·침몰 당시 구조된 단원고 학생은 전체 325명 중 75명뿐이다. 나이에 따라 생명의 ‘경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10대 후반에 불과한 단원고 학생들이 전체 세월호 사고 사망자 304명 중 82%라는 사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고 당일 오전, 일부 매체의 ‘전원 구조’란 ‘오보’에 잠시나마 안도했다가 이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 “속았다”는 생각에 분개한 이들이 많았다. 잘못된 보도 탓에 갖게 된 ‘기대’ 또는 ‘희망’이 꺾인 데 이어 구조된 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 원인을 떠나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세월호가 전복·침몰하는 과정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본 점 역시 해당 사고의 비극성을 배가했다. 300명 이상이 구조되지 못한 채 배가 조금씩 가라앉는 걸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봤기 때문이다. 사고 현장 특성, 구조 과정의 난항과 무관하게 화면으로 세월호를 지켜보던 이들은 허탈감을 느꼈다. 이런 요인들이 뒤엉켜 세월호 사고에 대한 국민적 감정은 여느 사고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세월호 침몰’은 ‘사고’다. ‘사고’란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이다. ‘사고’의 경위, 사상자 발생 규모 등을 감안했을 때 ‘충격적’이란 표현이 부족하지는 않다. 또 많은 이가 지금도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서해훼리호 추모 시설, 위령탑이 전부
그래서일까? 세월호 사고에 대한 정부·지자체의 대응, 세금 지출 규모 등은 다른 사고들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있다. 일례로, 1993년에 발생한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와 비교해 봐도 여러 면에서 차이가 크다. 1993년 10월 10일, 높은 파도와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출발지로 회항하려던 서해훼리호가 전북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중심을 잃고 전복·침몰했다. 이 사고로 위도 주민 58명을 포함해 총 292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세월호의 경우처럼 전국적으로 추모제를 지내지도 않았고, 지원법을 만들어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관련 활동을 지원하지도 않았다. 매년 사고 발생일에 부안군과 유족이 ‘위령제’를 지낼 뿐이다.
추모 시설도 마찬가지다. 도비(道費)와 군비(郡費) 1억1000만원과 국민 성금 1억8000만원 등 총 2억9000만원을 들여 1995년에 사고 해역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위도 북서쪽 진리(鎭里)에 건립한 위령탑이 전부다.
이와 달리 세월호 사고의 경우에는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세월호 사고 추모’ 등의 이름을 내걸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련 사업을 추진한다. 당연히 막대한 세금이 집행된다. 그 세금은 ‘사고 재발 방지’ ‘국민 안전 강화’란 명목으로 집행되지만, 실상은 그와 무관한 ‘기관 신설’ ‘건물 신축’에 사용된다.
수천억원을 쏟아부어서 방방곡곡에 대형 시설들을 세우는 것이, ‘세금’으로 보여주기식 행정을 하는 것이 ‘피해자 추모’ ‘사고 재발 방지’ ‘국민안전 강화’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세월호 사고 추모’와 거리가 먼, 집행기관 그들만의 ‘돈 잔치’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내세운 각종 시설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도 불확실하다. 필요하다고 해도 여기저기에 중복으로 설치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도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세월호 사고란 비극이 발생한 원인을 명심하고 그런 불행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금 들여 할 수 있는 일이 전시관, 체험관, 기록관, 추모관, 공원을 짓는 일밖에 없을까.
선체 인양·관리에 1203억원 지출

▲전남 목포시 용당동 소재 목포 신항에는 세월호가 육상에 거치돼 있다. 신항 북문 앞에는 ‘세월호 사고 사망자’들 사진과 함께 “왜 구하지 않았니?”란 문구를 적은 게시판이 있다. 사진=월간조선
3월 8일 정오, 전남 목포시 용당동 소재 목포 신항으로 갔다. 이곳에는 세월호 선체가 거치돼 있다. 2015년 4월, 정부는 ‘세월호 인양’을 결정했다.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굳이 침몰한 배를 끌어올려야 할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찬반 논쟁이 격렬했다. 인양 결정 후 2년이 지난 2017년 3월 23일, 세월호 선체가 인양됐다. 이에 따른 비용은 1020억원이다. 목포 신항 철재 부두 위에 거치된 날은 4월 11일이다.
세월호 거치장으로 들어가는 목포 신항 북문으로 가는 길에 설치된 철제 펜스는 ‘노란 리본’으로 뒤덮여 있었다. 북문 앞에는 “윤석열 정부는 세월호 지우기 즉각 중단하라(국회의원 강은미, 세월호 잊지 않기 목포 지역 공동실천회의, 정의당 전남도당)”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음성군여성농민회)”와 같은 문구를 담은 현수막들이 게시돼 있었다. 그 옆에는 “기억과 진실의 약속,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전교조 전남지부)”란 문구가 있는 기단 위에 놓인 세월호 모형이 있었다. 북문 옆에는 세월호 사고 당시 실종돼 지금까지 시신이 수습되지 않은 5명의 사진이 있었다. 출입 초소를 지나 세월호 선체로 가는 길 옆에는 ‘세월호 사고 사망자’들 사진을 내건 게시판이 있었다. 그 게시판 밑에는 “왜 구하지 않았니?”란 문구가 있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해양수산부의 세월호 사고 관련 지출 내역에 따르면 해수부는 세월호 육상 거치 후 선체 관리 등을 위해 2018년에 53억800만원을 지출했다. 이후에는 세월호 육상 거치 부두 임차료와 세월호 현장 관리 비용 등의 명목으로 ▲2019년 23억9900만원 ▲2020년 27억7100만원 ▲2021년 26억1800만원 ▲2022년 26억4800만원 ▲2023년 25억5800만원 등을 썼다. 지난 5년 동안 ‘세월호 선체 관리’에 129억9400만원을 집행했다는 얘기다. 앞서 언급한 세월호 인양 비용과 2018년도 지출분을 더하면 총 1203억원을 썼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목포시는 ‘세월호 거치’ 이후 ▲세월호 추모 분위기 조성 ▲세월호 유족 샤워장과 화장실 설치 ▲노란 리본 제작 ▲유족용 컨테이너와 에어컨 임차 ▲전기요금 납부 등에 6년 동안 3억94만원을 지출했다.
2029년에 완공될 ‘국립세월호생명기억관’

▲해양수산부는 목포 신항에 거치 중인 세월호 선체를 목포 해상케이블카 고하도 탑승장 근처 공유수면으로 옮기고 그 일대를 소위 ‘세월호생명기억관’으로 만들 예정이다. 출처=해양수산부
‘세월호 선체 관리비’는 앞으로 ‘부두 임차료’ 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수부가 세월호 선체를 목포 관내 다른 곳으로 옮겨, 이를 소위 ‘세월호생명기억관’으로 조성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해수부가 작성한 〈국립세월호생명기억관 건립사업 기본계획(안)〉에 따른 해당 사업 추진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보다 안전한 사회 건설을 위한 재난예방·교육을 담당하도록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 제43조에 따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가 수립한 ‘세월호 선체 보존·처리계획서’를 이행하기 위한 기본계획 마련
—선체조사위원회가 2018년 8월 수립한 ‘세월호 선체 보존·처리계획서’를 통해 선체를 파손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으로 확정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울 수 있는 기념관 및 교육체험관을 건립〉
이에 따라 해수부는 2021년 기본계획 용역을 발주하고, 2029년 사업 완료를 목표로 해당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소위 ‘국립세월호생명기억관’ 건립 예정지는 목포시 달동 901번지 근처 공유수면이다. 이곳은 목포 해상케이블카 고하도 탑승장 바로 옆이다. 사업내용은 목포 신항에 거치된 세월호 선체를 이곳으로 옮기고, 이 일대에 3만4000㎡(1만303평) 규모 부지를 조성해 각종 시설을 짓는 것이다. 해수부는 ▲“세월호 희생자와 방문객이 교감할 수 있는” 세월호 선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4·16 기억관 ▲“추모가 치유로 전이되는” 생명공원 ▲“생명존중의 가치를 몸으로 익히는” 생명체험관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현재 추산 인건비만 年 21억~45억원

▲해양수산부가 ‘세월호생명기억관’을 조성하려고 하는 목포시 고하도 소재 공유수면과 그 일대다. 사진=월간조선
현재 계획대로라면, 들어설 건물의 전체 면적은 총 1만3058㎡(3956평)에 달한다. 이를 위한 사업비는 애초 1523억원이었는데, 해수부가 중간에 227억7000만원을 증액해 1768억원이 됐다. 지금은 거기서 또 2117억원으로 늘었다. 사업 계획 당시보다 39% 증가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594억원이나 증액됐다. 사업비 세부 항목은 ▲공사비 1604억5200만원 ▲부대비(설계비 등) 177억3600만원 ▲용지 보상비 142억5700만원 ▲예비비 192억4500만원 등이다.
〈국립세월호생명기억관 건립사업 기본계획(안)〉에 따르면 해수부는 2117억원에서 396억5000만원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해수부 변경 요구가 수용될 경우 사업비는 2513억4000만원에 달한다. 최초 사업비보다 990억원 많은 금액이다.
해수부는 해당 시설과 관련해서 “수요 추정 결과 연간 약 37만 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각종 국책사업이나 지방사업들을 하면서 공공기관이 내놓았던 잘못된 경제성 분석 또는 수요 예측 탓에 국민 세금이 지금 이 시각에도 전국에서 허비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같은 예측을 신뢰해도 될지 의문스럽다.
한편, 해수부는 국립세월호생명기억관 운영 방안을 ‘직영’과 ‘특수법인 설립’ 등으로 구상하고 있다. 직영으로 할 경우 필요 인력은 대표 포함 41명이다. 위탁으로 할 경우 총 88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직영이든지, 특수법인 운영이든지 해당 시설이 운영되는 한 인건비를 포함한 운영유지비는 모두 ‘세금’으로 지원해야 한다. 보수적으로 2024년 최저임금(연 2472만원)을 적용해 계산하면, 직영일 때는 인건비만 매년 10억원이 나간다. 특수법인 운영일 경우에는 22억원이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이 나갈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해수부와 인천광역시가 보조하는 ‘인천 일반인희생자(기자 주: 세월호 사고 당시 단원고 학생 외 사망자) 추모관’의 1인당 인건비 5160만원을 적용해 현재 시점에서 국립세월호생명기억관의 연간 인건비를 추산하면 ▲직영 21억원 ▲특수법인 운영 45억원이란 결과가 도출된다.
280억원 들어간 ‘진도 국민해양안전관’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는 여전히 ‘4·16 세월호 참사 가족 협의회’가 관리하는 ‘불법 시설’들이 있다. 사진=월간조선
세월호 거치장이 있는 목포 신항에서 나와 인근의 국립세월호생명기억관 건립 예정지를 둘러본 뒤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으로 갔다. 이곳은 2013년에 ‘진도항’으로 개명됐으나, 그 이듬해 세월호 사고 당시 전국에 ‘팽목항’으로 알려졌으므로 기사에서도 팽목항이라고 표기한다. 팽목항 부지 한 편에는 이른바 ‘4·16 세월호 참사 가족 협의회’가 관리하는 세월호 관련 ‘불법 가설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진도군은 이 ‘불법 시설물’들 때문에 ‘진도 국제항 개발사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고 호소한다.
전라남도와 진도군은 팽목항 일대에 ▲종합 해양 레저 시설(마리나항) ▲수상비행기 계류장 ▲수산물 가공 ▲신재생 에너지 ▲전통테마파크 등 문화 시설 ▲한옥 성채(城砦) 등 주거 시설 ▲각종 숙박 시설과 전시 시설 등을 지을 계획이다. 사업 부지 면적은 531만6000㎡, 사업비는 총 4조2815억원(민간자본 포함)이다.
이 사업 부지 안에 세월호 관련 ‘불법 시설물’이 자리하고 있다. 진도군은 여느 불법 시설물을 처리하는 것처럼 ‘행정 대집행’을 해도 되지만, ‘세월호 사고’에 대한 국민적 감정 탓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진도군은 ‘4·16 세월호 참사 가족 협의회’가 자진 철수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국민해양안전관이다. 280억원을 들여 만든 이 시설의 연간 운영비는 25억원가량이다. 사진=월간조선
팽목항을 뒤로하고 500m쯤 떨어진 국민해양안전관으로 갔다. 이 역시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국민의 해양 안전 의식을 높이고 해상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체험형 교육을 전문적으로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시설이다. 총 사업비 280억원 중 정부가 270억원, 진도군이 10억원을 냈다. 2022년에 완공됐지만, 개관은 2023년 12월에 했다. 정부와 진도군이 연간 운영비 25억원의 분담 비율을 놓고 이견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국민해양안전관의 연간 운영비로 세금 25억원이 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하루 운영비가 현재 기준으로 685만원인 셈이다.
국민해양안전관은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건물 면적은 4462㎡(1362평)다. 지난해 12월 시범운영 기간을 거쳐 올해 1월에 정식 개관한 국민해양안전관 부지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인 건물은 국민해양안전관 유스호스텔이다. 지상 3층에 면적이 1582㎡(479평)인 유스호스텔 좌측에는 세월호 사고 사망자 추모 공간을 조성했다. 이곳에는 ‘SEWOL’이란 문구가 있는 배 형상 모자이크, “세월호 참사로 인한 슬픔과 고통을 상징한다”는 높이 12.5m의 조형물, 시신이 수습되지 않은 세월호 탑승자 5명을 추모하는 ‘기억의 벽’ 등이 있다. 국민해양안전관 건물 안에는 ▲해양안전 체험장 ▲재난안전 체험장 ▲해양 관련 직업 체험관 등이 있다.
개관 이후 국민해양안전관을 찾은 이는 몇 명일까. 구체적인 통계는 아니지만, 이 시설의 김민서 운영대표가 2월 17일 지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약 700명이 방문했다. 개관일을 작년 12월 7일로 잡으면, 그간 국민해양안전관의 1일 방문객 또는 체험자는 9.6명이다. 하루에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식 개관일을 1월 1일로 잡는다고 해도 1일 체험객은 14.6명에 불과하다. 물론 이는 휴일까지 계산한 것이다. 휴일이라고 해서 해당 시설의 운영비가 지출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16 민주시민교육원 건물에 128억원
세월호 사고 당시 관내 단원고 학생들이 많이 사망한 까닭에 경기도 안산시는 ‘세월호 사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다른 광역·기초단체들은 2014년 세월호 사고 직후 국비(國費)를 받아 ‘합동분향소 설치·운영·관리’를 하고 관련 사업을 끝냈지만, 안산시는 지금까지 계속 세월호 관련 사업을 진행한다. 안산시는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정부합동분향소 유지 관리 ▲세월호 참사 추모행사 지원 ▲세월호 참사 피해 유가족 지원 ▲세월호 참사 추모 기록물 수집 및 보존 등의 명목으로 총 99억원을 썼다.
한편, 안산시에는 세월호 사고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시설들이 많다. 세월호 사고 사망자를 추모하거나,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시민교육’ ‘트라우마 치료’ 등을 명목으로 신설된 시설들이 다수다.
4·16 민주시민교육원은 “4·16의 의미를 성찰하고 인성과 역량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을 목표로 하는 경기도교육청 직속기관이다. 여기서 말하는 ‘4·16’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사고를 말한다. 해당 기관은 “4·16을 기억하고, 존중과 배려하는 문화를 확산하며, 다양한 교육활동 운영을 통해 경기 교육 주체들이 인성과 역량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고 자부한다.
2016년 9월, ‘4·16 안전교육 시설 건립 기본 계획 수립’을 통해 처음 제시됐고, 2019년에 구체화했다. 4·16 민주시민교육원 건물은 2019년에 경기도와 경기도교육청이 각각 64억원, 총 128억원을 들여 안산교육지원청 부지에 지하 1 층·지상 4층으로 들어섰다.
세월호 관련 시설에는 국립안산마음건강센터도 있다. 이 시설 설립 이유는 ‘심리 상담’ ‘트라우마 치료’ 등이다. 보건복지부가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추진한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서 센터 건물 골조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완공 시기는 올 연말쯤이 될 것이라고 한다. 해당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토지 보상비와 건축비로 420억원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사업비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또 연간 운영비는 100억원 정도 들 것이라고 한다.
건립 예정인 4·16생명안전공원은 세월호 사고 사망자를 추모하는 시설이다. 안산시에 따르면 국비 425억원·도비 43억원·시비(市費) 40억원 등 508억원이 투입된다. ▲추모비 ▲추모기념관 ▲추모공원 ▲편의 시설 등으로 구성될 4·16생명안전공원은 안산시 단원구 소재 화랑유원지 안 2만3000㎡(6970평) 부지 위에 건립된다.
182억원 들여 안산공동체 복합 시설 건립 추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 소재 ‘경기해양안전체험관’이다. 400억원을 투입해 만들었다. 사진=뉴시스
안산시는 또 ‘세월호 사고 이후 공동체 회복력 증진을 위한 거점 공간 조성’이라는 이유로 ‘안산공동체 복합 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건립 예정지는 화랑유원지 인근 원고잔공원이다. 안산시는 면적 3200㎡(970평) 규모, 지하 1층·지상 3층 구조로 건물을 올릴 계획이다. 이 건물은 강당, 공유주방, 강의실, 프로그램실, 마을 쉼터 등으로 구성된다. ‘안산공동체 복합 시설 건립’ 사업비는 국비 127억2000만원과 시비 54억5000만원 등 약 182억원이다.
이 밖에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 방아머리 문화공원 안에는 경기해양안전체험관이 있다. 안산시가 면적 5000㎡(1515평) 부지를 제공하고, 국비 300억원·도비 100억원 등 총 400억원을 들였다. 해당 시설은 지하 1층·지상 3층이다. 건물 면적은 9833㎡(2980평)다. 지하 1층에는 해양 생존 체험을 할 수 있는 수상 체험장이 있다. 지상 1층에는 해양안전 매뉴얼 교육, 지상 2층에는 선박 비상상황 체험, 지상 3층에는 응급처치 실습관 및 편의시설이 있다. 진도군 팽목항 옆에 있는 국민해양안전관과 유사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매년 21억원에 추모관 운영권까지…
인천광역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 내부에는 ‘세월호 사고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 있다. 2016년 4월에 개관한 해당 시설에는 세월호 사고 당시 단원고 학생이 아닌 일반인 사망자 45명(인천 18명, 경기 18명, 서울 4명, 제주 5명)의 영정과 위패가 안치돼 있다. 국비 30억원을 들여 1497㎡(454평) 부지 위에 지상 2층 건물을 만들었다. 건물 면적은 504㎡(153평)이다. 건물 내부는 추모관, 안치단, 제례실, 화장실, 사무실, 유족대기실로 구성돼 있다.
애초 인천시설공단이 관리하던 해당 시설은 2020년부터 ‘재단법인 4·16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4·16재단’은 세월호 사고 사망자를 추모한다는 명목으로 유족들과 시민단체 인사들이 만든 단체다.
해수부 자료에 따르면 이후 연도별 ‘세월호 사고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 운영비는 ▲2020년 3억5000만원(인건비 5명×4420만원+운영비 1억2900만원) ▲2021년 3억5600만원(인건비 5명×4680만원+운영비 1억2200만원) ▲2022년 3억5600만원(인건비 5명×4680만원+운영비 1억2200만원) ▲2023년 3억5600만원(인건비 5명×5160만원+운영비 9800만원) 등이다.
‘4·16재단’은 ‘추모관 운영비’와 별도로 해수부 지원도 받고 있다. ‘4·16재단’에 대한 해수부 지원금은 ▲2020년 20억3200만원(인건비 14명×4410만원+사업비 11억1700만원+운영비 2억9700만원) ▲2021년 21억1000만원(인건비 14명×4460만원+사업비 11억7800만원+운영비 3억700만원) 등이다. 2022년과 2023년도 지원금 규모는 2021년과 같다.⊙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thegood@chosun.com
●전남 화순군의 ‘정율성 고향집 조성비’ 12억원 사용처
초가집 건축비가 평당 1598만원… 서울 용산 특급 호텔의 2.2배
⊙ ‘중국인 관광객’ 유치한다며 12억원 들여 ‘정율성 고향집’ 등 만든 화순군
⊙ 초가집이 ‘기와·단청’ 한옥 형태 능주면사무소 청사보다 평당 건축비 2배 비싼 이유는?
⊙ ‘정율성 고향집’ 전시 콘텐츠에서는 ‘9100만원’의 가치 찾기 어려워
⊙ 4000만원 주고 샀다는 ▲잔디 ▲조경수 ▲경계석은 어디로 갔나?
⊙ 연평균 방문객 497명… 하루 2명도 안 되는 1.36명
⊙ ‘중국인 관광 명소화’ 외쳤는데 관련 통계는 작성 안 해

▲사진=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 2012년 8월호(2012년 7월 17일 발간)에서 ‘광주광역시의 정율성(鄭律成) 사랑’에 관한 기사를 썼다. 기사 제목은 〈대남적화 선동한 작곡가 기념하는 ‘민주·평화 도시’ 광주〉였다. 사실상 국내 언론 매체 최초로 정율성의 실체, 광주광역시의 정율성 기념사업·시설 현황, 정율성 관련 행사에 집행된 우리 국민 세금 내역 등을 추적했다.
2015년 1월에는 〈김백일과 정율성〉, 2016년 7월에는 〈참전유공자 박대하는 광주시의 중국인 사랑〉, 2022년 7월에는 〈‘6·25 남침’ 때 ‘중·북 군가 작곡자’를 추앙하는 광주〉 등을 보도했다. 이 기사를 통해 마오쩌둥(毛澤東)을 찬양하고, 중국공산당에 충성한 인사를 광주광역시와 전남 화순군이 기리는 행태를 비판했다. 정율성 관련 사업에 국민 세금을 쓰는 행태를 지적했지만, 이들 자치단체의 행태는 갈수록 심화했다. 시정 조치 없이 더 경쟁적으로 정율성기념사업을 강조했다.
정율성 논란과 화순군
그랬던 광주광역시의 ‘정율성 추앙’ 행태는 지난해 박민식(朴敏植) 당시 국가보훈부 장관의 문제 제기에서 비롯된 ‘정율성 논란’ 이후 표면적으로 중단된 상태다. 광주광역시는 올해부터 사업비를 지원하던 ‘정율성 음악제’ 이름을 바꾸고,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국민 대다수는 그간 전혀 알지 못했던 ‘친중(親中)·친북(親北) 반(反)민족·국가 행위자 정율성’의 실체를 알게 됐다.
하지만 또 다른 ‘정율성 고향’인 전남 화순군의 경우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화순군이 12억원을 들여 조성한 ‘정율성 전시관’, 정율성이 잠시 다녔다는 능주초등학교에 설치된 정율성 기념 시설들도 철거되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고 있다. 왜 이런 것일까. 현재 화순군의 정율성 관련 시설 현황을 살폈다. 또 화순군이 ‘정율성 집터’에 전시관을 12억원을 들여 조성했다는 사실을 접할 때부터 품었던 ‘예산 과다 집행’ 의혹도 점검했다.
광주 출신 ‘중국인 정율성’
2023년 8월 22일, 박민식 당시 국가보훈부 장관이 ‘정율성 기념공원’ 사업을 추진하는 광주광역시를 직격했다. 정율성은 광주광역시 또는 전남 화순군이 각각 자기 고장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인’이다. 현행 외국인명 표기법에 따르면 ‘정율성’은 ‘정뤼청’으로 써야 하지만, 본 기사의 이해를 위해 우선 정율성으로 통일했다. 앞서 밝혔듯이, 정율성은 중공에 충성을 다했던 ‘작곡가’다. 중국에서는 ‘혁명 음악가’라고 한다. 정율성은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를 작곡했다. 6·25 당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와 우리 민족의 염원이던 ‘자유 민주 통일’을 훼방한 중공군이 부르고 다닌 노래가 바로 정율성이 작곡한 ‘중공군가’다. 정율성은 중국공산당을 찬양하고, 독재자 마오쩌둥을 칭송하는 노래를 다수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정율성은 1945년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가 6년 동안 ‘선전·선동꾼’으로 일했다. 그는 1950년 북한의 불법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에 북한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지은 노래가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이다. 지금 북한의 이른바 ‘조선인민해방군가’ 역시 정율성의 곡이다.
혈연적으로는 한국인이지만, 정신적으로 정율성은 철저한 중국공산당원이었다.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어떤 공헌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군과 중공군이 우리나라를 적화하려는 데 동참했고, 이를 독려했다. 이런 자를 우리가 기려야 할 이유는 아예 없다. 문재인(文在寅) 전 대통령은 ‘혼밥 논란’을 일으킨 중국 방문 당시 중국과의 선린을 강조하며 ‘정율성’을 언급한 일이 있다. 그 삶을 고려하면 정율성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랑스레 내세울 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다.
정율성은 항일과 거리가 먼 중국공산당 활동에 주력했다. 북한의 남침을 독려하고 적화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중국 귀환 후에는 당시 우리 ‘적성국’의 국민으로 살았던 자에 불과하다. 설혹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해도, 정율성은 그 재능을 ‘중국 공산혁명’과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바쳤을 뿐이다.
‘중국인 관광 명소화 사업’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소재 ‘정율성 고향집’ 앞 주차장에 소위 ‘정율성 선생 유적지 안내도’가 설치돼 있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는 ‘정율성 고향집’이 있다. 정율성이 세 살이던 1917년 화순군 능주면으로 이주해 1923년까지 7년 동안 거주했다고 화순군은 주장한다. 이 기간, 정율성은 능주면 소재 능주공립보통학교(현 능주초등학교)에 재학했다. 화순군은 정율성 거주 사실을 내세워 중국 관광객 등을 유치할 생각인지 그 ‘생가’를 조성했다. 사업명은 ‘중국인 관광 명소화 사업’이다. 화순군은 사업 추진 사유로 “화순군에 산재한 중국 관련 콘텐츠인 주자묘(朱子廟), 적벽(赤壁) 등과 연계하여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화순군은 정율성이 능주면 거주 당시 잠시 다녔다는 능주초등학교 교내에 ‘정율성 교실’을 만들고, 정율성 대형 벽화를 그렸다. 관련 조형물, 기념 시설도 설치했다.
화순군 소재 ‘정율성 시설’들을 소개하기 위해 2022년 6월 당시 《월간조선》이 보도한 〈‘6·25 남침’ 때 ‘중·북 군가 작곡자’를 추앙하는 광주〉란 제목의 기사 중 일부를 인용한다.
〈6월 5일 오후 2시쯤, 화순군 능주면으로 진입했다. 능주면으로 들어가는 도로 초입에는 ‘정율성 선생 고향집 1.2km’란 표지판이 서 있었다. 얼마 더 이동하자, ‘정율성 선생 고향집 600m’란 안내문을 또 마주할 수 있었다. ‘정율성 고향집’ 앞 주차장에는 ‘정율성 선생 유적지 안내도’란 대형 표지판이 있었다. (중략) 동족상잔을 응원하고, 적화통일을 독려했고, 평생 공산혁명 망상에 사로잡혔던 자를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전남 화순군은 ‘군(郡)’ 차원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선생’으로 모시는 것이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282번지, ‘정율성 고향집’에 도착했다. 화순군은 공터였던 이곳에 12억원을 투입해 초가를 모방한 건물을 짓고, 주차장과 진입로를 조성했다. 화순군이 만든 ‘정율성 고향집’의 면적은 전시관과 관리동을 합쳐 67.86㎡(20.6평)다.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이후 30분 동안 전시관을 찾은 이는 단 2명에 불과했다. 해당 시설 안내인에게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내인은 “저분(정율성)이 중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이라서 공자학원 사람들이 온다”고 밝혔다.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가 중국어 교육 및 중국의 사상, 체제와 문화를 전파·홍보한다는 명목으로 세계 각지에 세운 기관이다. 표면적으로는 ‘교육’ ‘대외 협력’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중국공산당의 통제·지시를 받는 선전기구, 간첩 양성소란 비판을 받는다. 이런 이유 탓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공자학원을 퇴출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버젓이 ‘김일성 포상장’ 소개한 의도는?
화순군 능주면 소재 ‘정율성 고향집’의 방은 3개다. 이 중 한 곳은 정율성 관련 사진과 각종 기록물을 영상화해 이를 반복해서 틀어주는 공간이었다. 2022년 취재 당시 그 영상을 보다가 충격적인 대목을 발견했다. 북한 김일성이 정율성에게 준 포상장을 버젓이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상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포상장
우(右) 동지(기자 주: 정율성)는 확고한 민주사상과 애국적 열성으로 1947년경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함에 헌신참가하여 책임 있게 사업을 수행하였으므로 이를 포상함.
1948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대한민국 지자체가 ‘항미원조’ 운운

▲‘정율성 고향집’에 전시됐던 정율성 사진첩이다. 평생을 중국과 북한을 위해 음악 재능을 바쳤던 정율성의 행각들이 긍정적으로 묘사돼 있다.
첫 방문 당시 그곳에 전시된 정율성 사진첩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해당 사진첩에는 인민군 방한모를 쓴 정율성이 악보를 쳐다보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의 설명에는 “정율성이 항미원조 시절 남긴 소중한 사진으로 전쟁 중 열악한 환경에서 창작하는 정율성의 헌신과 혁명의 낭만주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고 써놨다.
항미원조란, “북한을 돕기 위해 미국에 대항한 전쟁”이란 뜻을 가진 6·25의 중국식 표현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불법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각종 전쟁범죄를 자행한 김일성 세력을 격퇴하려는 우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좌절시킨 중공군의 억지 주장이 국내에서 거리낌 없이 유포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전남 화순군이 조성한 ‘정율성 고향집’은 ‘과연 이곳이 대한민국이 맞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비상식적인 전시물과 각종 주장, 표현들로 가득했다. 그 건물 마루 한쪽에 쌓인 〈위대한 음악가 정율성 선생의 삶의 자취〉란 제목의 홍보물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율성 선생 연대기 ▲항일 독립운동가 정율성 선생 ▲정율성 선생 연표 ▲정율성 선생의 고향집 재현 ▲정율성 선생을 기리기 위한 화순의 노력과 자원들 등으로 구성된 해당 홍보물은 그야말로 정율성 찬양 일색이었다.
지금까지 화순군이 세금 12억원을 들여 만든 ‘정율성 고향집’의 조성 사유와 운영 내용 등에 대해 살폈다.
다시 찾은 ‘정율성 고향집’
그렇다면 해당 시설의 현황은 어떨까. 전남 화순군은 해당 시설에 대해 “2023년 9월부터 운영 중단”이라고 밝혔다. ‘정율성 논란’ 이후 ‘정율성 고향집’을 폐쇄했다는 얘기인 셈이다. 실제로 그럴까.
기자는 2월 초, ‘정율성 고향집’을 다시 찾았다. 정율성 전시물을 들여놨던 각 방의 문들은 닫혀 있었다. 각 문에는 ‘수리 중’이란 문구가 있는 빨간 팻말들이 걸려 있었다. 방 밖에 있던 정율성 사진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놓은 소위 ‘포토존’도 철거돼 있었다. 화장실과 그 옆 안내소도 잠긴 상태였다. 화순군은 ‘정율성 고향집’ 관리를 위해 2명을 고용해 연간 3263만원(2023년 기준)을 지출했는데, 관리인의 흔적 또한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3월 초,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관리인으로 추정되는 이가 안내소에서 나왔다. 그에 따르면 “운영을 잠시 중단했지만, 곧 재개할 예정”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렇다면, 이는 화순군이 ‘정율성의 친중·친북, 반민족·반국가 행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해당 시설을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곳에 국민 세금을 계속 쓰겠다는 화순군의 행태는 타당한 것일까. 화순군은 2023년 기준 전남 도내 22개 시·군의 평균치인 23.9%에도 한참 못 미치는 14.1%에 불과한 재정자립도를 기록했다. 이런 자립 불가능한 지자체가 지원받은 국민 세금을 정율성과 같은 인물을 추앙하는 데 지출하는 행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평당 건축비 1598만원

▲화순군이 평당 건축비 1598만원을 들여 만든 ‘정율성 고향집’이다. 전기, 통신 공사비를 포함한 총 건축비는 3억2917만원이다.
화순군의 ‘정율성 고향집’과 관련해서 추가로 의혹이 제기될 소지가 있는 대목이 있다. 바로 ‘사업비 12억원’의 용처다. 화순군은 공터였던 이곳에 12억원을 투입해 초가를 모방한 건물을 짓고, 주차장과 진입로를 조성했다. 지금부터는 이 사업에 화순군이 투입한 12억원의 지출 명목과 그 타당성을 살펴보자.
화순군이 조성한 ‘정율성 고향집’은 주민 650여 명에 불과한 능주면 관영리에 있다. ‘정율성 고향집’ 부지 면적은 360㎡(109평)다. 이 부지는 화순군이 2016년 관영리 주민 박모씨로부터 사들인 땅이다. 관영리 282번지 대지 면적은 원래 307㎡(93평)였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이곳에는 면적 109㎡(33평)인 주택이 있었다. 화순군이 해당 부지를 사들인 2016년 당시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282번지’ 소재 주택의 공시지가는 2180만원이다. 또한 화순군은 해당 부지 바로 옆 ‘관영리 281-1번지(53㎡)’를 사들여 ‘282번지’로 합병했다. 화순군은 이 두 필지와 주차장 부지를 사들이는 데 총 2억6021만원을 썼다.
현재 ‘정율성 고향집’의 건물 면적은 약 68㎡(20.6평)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정율성 고향집’은 ‘일반목구조 초가지붕 단층 문화 및 집회시설’로 등록된 ‘전시관(48.96㎡)’과 ‘안내소(18.9㎡)’로 구성돼 있다. 화순군은 다 합쳐서 20.6평 남짓 하는 초가 건물 2개 동을 짓는 데 2억6235만원을 썼다. 평당 건축비가 1276만원이나 들었다는 얘기다. 이마저도 ▲설계비 ▲전기공사비 ▲통신공사비 등이 빠진 금액이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화순군의 〈‘정율성 생가’ 조성 관련 세부 사업 내역〉에 따르면 ▲음악가 정율성 선생 전시관 신축공사 실시설계 용역 1665만6000원 ▲중국인 관광 명소화 사업(음악가 정율성 선생 신축공사, 전기공사) 2576만5000원 ▲통신 공사 567만6000원 ▲전기공사 준공금 1872만원 등 6682만원을 건축비에 포함해야 한다.
이럴 경우 화순군이 만든 ‘정율성 고향집’의 총 건축비는 3억2917만원, 평당 건축비는 1598만원으로 뛴다. 이는 2014년에 착공하고 2017년에 개장한 서울시 용산구 소재 5성급 호텔 ‘드래곤시티’의 평당 건축비 712만원(건물 면적 5617평, 건축비 4000억원)의 2.2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드래곤시티’는 ▲구름다리(스카이브릿지) ▲용의 승천 형상화 등 ‘독특한 외관’을 만들기 위해 각종 첨단 공법을 적용했다고 선전하는 서울 중심 소재 ‘객실 1700개’ 규모 특급 호텔이다. 이런 곳보다 면 소재지 외곽의 초가 형태 전시관 건축비가 2배 이상 비싸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러 기준을 고려했을 때 국민적 공감을 얻기 쉽지 않은 대목이다.
능주면사무소도 건축비 비싸지만…

▲화순군이 2012년에 신축한 능주면사무소 청사다. 평당 건축비는 ‘정율성 고향집’의 1/2 수준인 812만원이다.
2017년 당시 국토교통부가 고시한 ‘신축 아파트(11~20층 이하, 주거전용면적 60㎡ 초과~85㎡ 이하 기준)’ 기본 건축비는 평당 461만원이다. ‘정율성 고향집’ 건축비의 36%에 불과하다. 새 아파트를 지을 때 쓰는 만큼만 ‘정율성 고향집’ 건축비로 썼다면, 화순군의 세금 지출은 9497만원에 그쳤을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한편, 조달청이 2018년에 펴낸 《2017년도 공공건축물 유형별 공사비 분석》에 따르면 당시 공공건축물의 단위면적(㎡)당 공사비는 213만원이다. 평당 703만원인 셈이다. 이는 ‘정율성 고향집’ 건축비의 55% 수준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인근의 ‘능주면사무소’ 청사와 비교해도 ‘정율성 고향집’의 ‘건축비 과다 사용’ 의혹을 체감할 수 있다. 정율성이 다녔다는 능주초등학교 후문 맞은편에는 거대한 한옥 형상 건물이 있다. 그 주변에는 오래된 누각이 서 있다. 이곳을 처음 본 사람들은 과거 토호의 저택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이는 조선조 때 능주 동헌이 있던 자리에 약 81억원을 들여 신축한 능주면사무소 청사다. 건축 시기는 2011년 11월~2012년 3월이다. 해당 청사가 자리한 부지의 면적은 6434㎡(1950평), 건물 면적은 328.5㎡(100평)다. 화순군은 “능주면 역사문화자원과 연계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전통문화유산을 복원했다”고 신축 사유를 밝혔다. 평당 건축비는 812만원이다. ‘정율성 고향집’의 절반 수준이다. 두 건물을 수차례 오가며 관찰했지만 ‘정율성 고향집’의 평당 건축비가 능주면사무소 청사보다 2배 비싼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9100만원 쓴 ‘콘텐츠’의 수준

▲화순군 ‘정율성 고향집’ 방 안에 전시된 물품들이다. 화순군은 해당 시설 전시 콘텐츠 또는 물품 구입에 약 9100만원을 썼다.
화순군은 ‘정율성 고향집’ 조성과 관련해 건축비 외에도 ▲포토존 설치 2101만원 ▲주방소품 구매 480만원 ▲입구 안내판과 전시음향 콘텐츠 구매 590만원 ▲전시콘텐츠 제작·설치 공사비 4854만원 ▲외부 조성 공사 준공금 1127만원 ▲전시관 방염·방충 사업 준공금 2090만원 등 1억1186만원을 지출했다. ‘콘텐츠’에만 9100만원가량을 쓴 셈이다.
다시 ‘정율성 고향집’으로 돌아가 해당 지출 내역과 실제 전시 현황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수리 중’이란 명목으로 ‘정율성 고향집’을 폐쇄한 상태이므로 2022년 6월 사진을 통해 해당 사업들에 대한 비용 지출의 타당성을 살핀다. 포토존은 중공군 복장을 한 정율성 등신대와 정율성과 그 가족의 등신대를 배치한 마루 한쪽과 실제 크기로 만든 플라스틱제 말 모형이 놓인 마당 한편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율성 고향집’ 내부의 실제 말 크기 모형이 있는 마당과 함께 ‘포토존’으로 추정되는 공간이다. 화순군은 포토존 조성에 2101만원을 썼다.
현재 네이버에서 ‘등신대 제작’으로 검색한 뒤 가장 위에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조회한 결과 ‘업체 추천’ 조건으로 가장 비싸게, 제일 큰 등신대 1개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14만4260원이다. 2점을 만들어도 3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현재 온라인에서는 누가 봐도 ‘정율성 고향집’에 있는 말 모형보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중국산 실물 크기 청동제 수공예 말 모형’이 105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이를 고려하면, 등신대와 말 모형 구입비는 150만원이면 충분하지만, 화순군은 그의 14배에 달하는 2101만원을 썼다.
잔디 블록·조경수·경계석은 어디에?

▲화순군은 ‘정율성 고향집’의 주방소품 구매 명목으로 480만원을 썼다.
화순군이 사들였다는 ‘주방소품’은 또 무엇일까. 2022년에 찍었던 사진 수십 장을 살핀 결과 주방소품으로 분류될 수 있는 전시품은 ▲바가지 2점 ▲소반 1점 ▲채반 1점 ▲바구니 1점 ▲추를 달아 무게를 재는 소위 ‘쌀가게 저울’ 1점 ▲수동 탈곡기 1점 ▲무쇠 솥 2점 ▲양동이 1점 ▲대야 1점 ▲돌절구 1점 ▲옹기 8점 등이다. 이 같은 품목의 골동품은 가격이 파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므로 ‘시세’를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정율성 고향집’의 입구 안내판은 여느 관광지, 시설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표지판이다. 주차장의 대형 안내판과 그 옆 표지판, 집 앞에 있는 안내판 모두 그렇다. ‘전시음향’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정율성 음악인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판과 음향 콘텐츠, 주방소품은 화순군과 수의계약을 체결한 광주광역시 동구 소재 업체가 총 1070만원에 공급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시콘텐츠 제작·설치 공사비 4854만원’은 또 무엇일까. ‘정율성 고향집’에서 이와 관련한 흔적을 굳이 꼽는다면, ▲‘김일성 포상장’ 등이 포함된 정율성 관련 영상과 액자형 스크린 ▲‘항미원조’ 운운하는 설명이 기술된 사진첩 ▲축음기 2점과 기타 1점 ▲철제 스프링으로 엮은 공책 9권 ▲과거 좌식 책상과 옛날식 트렁크 ▲이불 1채와 대바구니 2점 ▲목재 수납장 1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 다른 전시 콘텐츠는 찾을 수 없다.
이 밖에 화순군은 ▲잔디 블록 구입비 1815만원 ▲펜스 구입비 1100만원 ▲경계석 구입비 1064만원 등 총 3979만원을 썼지만 ‘정율성 고향집’에서는 그 돈을 쓴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잔디블록, 펜스, 경계석이 없기 때문이다. 조경수도 마찬가지다. 화순군은 조경수 구입에 2161만원을 썼는데, 식재된 나무는 다 해봐야 10여 그루에 지나지 않는다. 이마저도 사람 키보다 조금 큰 나무가 2~3그루, 나머지는 사람보다 키가 작다.
화순군 관계자는 “주차장과 ‘정율성 고향집’ 가는 길에 펜스, 경계석, 조경수가 있다”고 했다. 실제 그가 말한 주차장에서 누렇게 메마른 풀과 드문드문 심은 소나무 몇 그루를 볼 수 있었다. 잔디와 나무를 심는데 투입된 4000만원의 가치를 느끼기는 어려웠다.
아무도 찾지 않는 ‘관광명소’

▲화순군은 ‘정율성 고향집’ 조성과 관련해 12억원을 쓰면서 다수 계약을 실시했다.
이런 식으로 12억원을 써서 만든 ‘정율성 고향집’은 화순군의 바람대로 ‘관광명소’가 됐을까. 그렇지 않다. 해당 시설의 관리인이 집계하고, 화순군에 보고한 내역에 따르면 ‘정율성 고향집’은 다른 걸 떠나서 ‘가성비’도 좋지 않다. 화순군은 2명을 고용해 ‘정율성 고향집’ 관리인으로 두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1명이 관리한다. 화순군은 작년에 관리인 인건비로 3263만원, 지난 5년 동안 1억2354만원을 썼다. 12억원을 들여 만들고, 매년 3200만원을 들여 관리하는 ‘정율성 고향집’을 찾는 관광객은 ▲2019년 546명 ▲2020년 394명 ▲2021년 637명 ▲2022년 534명 ▲2023년 372명에 불과했다. 하루에 찾는 이가 2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는 내·외국인 구분이 안 된 통계다. 화순군이 방문객 수만 집계하기 때문이다. ‘중국인 관광 명소화’란 목적으로 12억원을 들여 해당 시설을 만들었지만, ‘중국인 관광객 통계’를 따로 생산·관리하지 않는다. 매년 관리인 인건비로 3000만원 이상을 지출하면서도 이 같은 단순 업무조차 하지 않는다. 이 같은 화순군의 행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서 언급한 의혹과 함께 향후 ‘정율성 고향집’ 운영 방향, 재개 여부와 관련해서 화순군 문화예술과 담당자에게 물었다.
“사업비 집행 금액은 사실”
화순군 문화예술과 담당자는 올해 1월부터 ‘정율성 고향집’ 업무를 맡게 돼 과거 사업 내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정율성 고향집’의 존폐 여부는 현재 확정된 바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다음은 그와의 문답이다.
— ‘정율성 고향집’ 건축비가 평당 약 1600만원, 이게 과연 적정한 금액인가요. 제게 주신 자료의 수치는 맞는 거죠.
“예. 사업비를 전용면적으로 나누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은데요, 그 금액이 적정한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 그럼 전시 콘텐츠와 집기류 구입에 1억원가량을 썼는데요, 이게 ‘정율성 고향집’이 아닌 다른 곳에 보관돼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따로 보관된 건 없습니다.”
— ‘정율성 고향집’ 운영 당시 전시됐던 콘텐츠와 물품이 전부라는 얘기죠?
“예.”
— ‘정율성 고향집’ 방문객도 하루에 2명이 되지 않던데요.
“많지는 않죠.”
“용도 전환 가능 여부 검토 중”
— ‘정율성 고향집’ 관리인이 곧 관람을 재개할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정말 그럴 계획입니까.
“저희 내부에서는 그런 말이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 그런 말을 한 적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했는지 여쭤봐야겠습니다.”
— ‘정율성 고향집’, 이거 나중에 어떻게 처리할 계획입니까.
“우리 사업비로만 한 게 아닙니다. 중앙부처 승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금 존폐, 전용 여부에 대해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 화순군은 ‘정율성 고향집’ 존폐 여부와 관련해서 정부에 검토를 요청한 일이 있습니까.
“예, 있죠. 이 일에 국민들 관심이 크고, 찬반 민원도 많잖아요. 전임자가 작년 8~9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에 문의했지만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했거든요.”
— 그럼 화순군은 ‘정율성 고향집’을 없앨 겁니까, 아니면 지금처럼 ‘관람 중단’ 식으로 유지할 겁니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용도로 전환해 운영할 겁니까.
“결정된 건 없지만, 다른 용도로 전환할 수 있는지 계속 알아보고 있습니다.”⊙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thegood@chosun.co
04.08 탈원전 폐기하자 2년 연속 온실가스 배출량 줄었다

▲경북 경주에 위치한 월성 원자력 본부 모습. 둥근 지붕의 건축물이 원전으로, 오른쪽부터 월성 1~4호기다. /월성 원자력 본부
2년 연속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감소한 것으로 정부가 추산했다. 2050탄소중립녹색성장위와 환경부가 에너지·산업·건물·수송 등 4개 부문의 지난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추산한 결과, 재작년보다 1727만t가량 줄었다는 것이다. 국내 배출량 중 에너지와 산업 부문이 70%가량을 차지하기 때문에 전체 배출량도 감소했을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이는 재작년에 이어 2년 연속 배출량이 줄어든 것이다. 국내 배출량이 국가 탄소 감축 원년인 2018년보다 13.1% 줄어들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줄어든 것은 산업계 노력도 있었지만 원전·신재생 등 무탄소 전원 비중을 늘리고 화력발전을 줄인 효과가 핵심적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고집했던 탈원전 정책을 폐기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는 원전 발전 비중을 문재인 정부 때 23.9%에서 32.4%로 조정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이어받아 지속했다면 화력발전을 늘릴 수밖에 없어 온실가스 배출량은 오히려 늘어났을 것이다.
탈원전은 문재인 정부가 국민과 나라에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남긴 사례였다. 문 정부는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하고 7000억원을 들여 거의 새로 만든 원전을 경제성 평가를 조작해 폐쇄해 버렸다. 그리고 고비용·저효율의 신재생에너지 보급에만 매달렸다. 원전 감소분을 단가가 비싼 LNG 발전으로 대체하는 바람에 한전은 문 정부 5년간 26조원의 추가 비용을 떠안아야 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전기요금 인상으로 국민에게 돌아오고 있다.
탈원전은 세계적 조류와도 정반대였다. 원자력은 어떤 전력 생산 방식보다 온실가스를 적게 배출하기 때문에 각국은 ‘원전 적극 수용’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원전을 친환경 무탄소 에너지로 인정했다. 한번 연료를 채우면 2년을 가동할 수 있어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도 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 정부는 탈원전을 하면서도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2018년 대비 40% 감축하겠다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국제사회에 발표해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자 2년 연속 온실가스 배출량이 줄었다는 것만큼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책임했는지 보여주는 수치도 없다.
조선일보 사설
04.08 조선업 신규 인력 86%가 외국인… 共生 말고는 답이 없다
한국 조선, 중국 제치고 수주 1위 탈환했지만 기초 체력 약해져
장기 불황 때 부품 업체 폐업, 노동력 이탈… 최근 수요 감당 못 해
이제 대한민국은 돈은 많지만 노동력 부족 국가… 육성·공생 시급

▲2023년 11월 14일 울산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이른 아침부터 모든 도크가 건조 중인 선박들로 가득 찬 채 선박 제조 공정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극심한 불황을 겪었던 조선업은 모처럼 호황을 맞아 국내 조선소는 3년 치 주문이 밀려있다./오종찬 기자
지난 2월 미국의 카를로스 델 토로 해군부 장관이 HD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와 한화오션 거제 사업장을 방문해 함정 건조와 유지·보수·정비(MRO) 역량을 확인했다. 미국 해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흔들림 없이 세계 최강 지위를 유지해왔지만 중국 해군이 급속도로 전력 확대를 추진하면서 큰 위협을 느끼고 있다. 중국 해군은 세계 선박 건조 능력의 50%를 보유하고 자국 조선 역량을 활용해 현재 370척인 전투함 보유 규모를 2030년까지 440척으로 늘릴 계획이다. 하지만 미국의 조선 역량은 세계 시장 점유율 0.13%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폭적 전력 확대는 고사하고 290여 척 현상 유지도 벅찬 실정이다. 미 해군으로서는 동맹국인 한국의 조선 역량을 활용해 전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24년 1분기 우리나라 선박 수주액이 약 136억달러를 기록해 중국을 앞질러 세계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 선박 수주액이 1위를 달성한 것은 2021년 4분기 이후 3년 만의 일이다. 1분기에 발주된 LNG 운반선(29척)과 암모니아선(20척) 모두를 우리가 수주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새로 발주되는 선박 가격을 지수화한 신조선가 지수도 2023년 2월 183.2를 기록했는데 2008년 8월 191을 기록한 이후 180을 넘은 것은 15년 만이다. 수주 물량 확대에 선가 회복이 겹치면서 삼성중공업은 2014년 이후 9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폐업과 구조조정이 이어지던 조선업이 어려운 시기를 버텨내고 훈풍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업의 부활이 본격화되고 있지만 마냥 미래가 밝지는 않다. 대한민국 조선업의 장점은 조선업과 관련된 각종 업종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클러스터를 형성하면서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화된 불황을 거치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분포한 많은 조선 기자재 업체가 폐업하거나 생산 역량을 축소했기 때문에 늘어나는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고 있다. 클러스터를 떠받치고 있던 기초가 약해진 상태인 것이다. 이에 따라 납기 준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선박 건조의 핵심인 블록을 중국에서 수입하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그래픽=이철원
조선업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인력난이다. 불황을 거치면서 상당수 인력이 타 산업 또는 수도권으로 향했는데 이들이 조선소로 돌아가고 있지 않는 것이다. 임금을 올려주면 된다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이제 흑자로 전환하기 시작한 업체로서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양호한 선가로 최근 수주한 선박의 수주 대금은 2~3년 후에나 들어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청년층의 지방 근무 기피 경향이 강해지면서 최근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인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현재 조선업계 전체 인력의 16%인 1만5500명이 외국인이다. 2023년 1분기부터 3분기까지 신규로 고용한 인력이 총 1만4359명인데 이 가운데 내국인은 2020명(14%)에 불과하다. HD현대중공업은 울산 조선소와 현대미포조선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2023년 말 기준 5210명으로 2022년 말 2460명과 비교해보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거제는 1년 사이에 외국인 근로자가 4265명 늘어 총 6977명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95.9%가 한화오션(3123명)과 삼성중공업(3568명)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대 삼호중공업이 있는 전남 영암군은 외국인 인력이 전체 인구의 18.4%에 해당하는 9657명 활동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업 및 관련 업체에서 일한다.
사실 조선업 인력 문제는 우리나라만 겪는 것은 아니다. 일본도 조선업 전체적으로 구직자 수에 대한 구인 수의 비율을 의미하는 유효 구인 배율이 2.5에 이르고 있으며, 도장·철공 같은 직종은 4배 이상에 이르는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는 2019년부터 조선업에 대해서는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서 체류 기간 제한 없이 가족과 함께 거주할 수 있도록 하며, 동일 직종에 한해 자유로운 전직도 허용함으로써 인력 확보를 지원하고 있다. 최근 일본 정부는 외국인 근로자를 저렴한 인력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탈피하여 외국인 인력을 ‘육성’하고 이들과 ‘공생’하는 사회로 전환하는 분위기를 이끌어내 일본 산업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가 일본 조선업 유지와 경쟁력 강화의 핵심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업의 외국 인력 확대에 많은 이는 우려를 표하지만 현재 조선업이 걷고 있는 길이 결국 우리나라의 다른 산업 분야도 따라가야 하는 길임은 분명하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조선업 분야에서 장기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갖춰 외국인 근로자의 숙련도를 높이고 조선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선업계의 시도는 조선업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산업의 미래 경쟁력 유지를 위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지 50년이 지났다. 가진 것은 없지만 노동력이 풍부했던 대한민국은 돈은 많지만 노동력이 부족한 국가로 변화하고 있다.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했기에 대한민국의 조선업은 세계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2023년 제20회 조선해양의 날 기념식에서는 두 외국인 근로자가 ‘우수조선해양인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시상식에 참가했다. 지난 3월 27일에는 HD현대중공업이 영빈관에 외국인 근로자 42명을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 무엇이 중요하고 필요한지 기업들은 이미 알고 있다. 국제 안보 협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조선업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최준영·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04.09 기업 사외이사 제도, 정·관계 로비스트로 변질되고 있다
남구준 전 경찰 국가수사본부장이 ‘사교육 카르텔’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입시학원 기업 메가스터디의 사외이사로 선임된 사실이 알려졌다. 수사 대응용이란 의혹이 크지만 남 전 본부장은 어떤 해명도 없이 사외이사 직을 유지하고 있다.
사외이사는 외환 위기 이후 대주주의 경영 독단을 견제하고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 상법으로 도입한 제도다. 하지만 경영 전문가 대신 판검사, 고위 관료, 국세청 등 힘 있는 기관 인사를 뽑아 로비스트나 바람막이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 관행처럼 자리 잡고 있다. 지난 3월 주총에서 30대 그룹의 71사가 사외이사 103명을 추천했는데, 이 중 40%가 법조계·관료 출신이었다.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는 삼성그룹은 신규 사외이사 18명 중 13명(72%)을 전직 판검사·관료들로 채웠다.
이렇게 선임된 사외이사들은 경영진 견제와 투명 경영이라는 본연의 의무는 외면하고 100% 찬성하는 ‘거수기’가 됐다. 전문성이 없으니 경영 이슈를 판단할 수도 없다. 그 대가로 고연봉과 각종 혜택을 누린다. 100대 기업의 사외이사 평균 연봉은 8042만원에 이른다. 포스코홀딩스 사외이사들이 전세기를 타고 식비로만 1억원을 지출하는 호화 여행을 한 것이 한 사례다.
삼성전자의 경쟁자인 대만 TSMC의 사외이사 6명 중 5명은 브리티시텔레콤 전 회장, 인텔 전 부사장, MIT 전 총장 등 세계 최고의 IT·반도체 전문가들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사외이사 6명 중 IT 전문가는 1명뿐이며, 전직 관료와 금융인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사외이사 구성으로 어떻게 주주 가치를 높이고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나.
조선일보 사설
04.09 불법 대출 드러난 새마을금고, 감독 체계 바꿔야 한다

▲행정안전부가 8일부터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와 함께 새마을금고 정부합동감사를 실시한다. 이번 합동감사에선 건전성 악화의 주요 요인인 부동산 관련 대출의 관리 실태와 내부통제 체계, 대출의 용도 외 유용 등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볼 예정이다. 사진은 7일 서울의 한 새마을금고 영업점 모습. 뉴스1
지난해 뱅크런 위기 겪고도 또 ‘작업 대출’ 파문
행안부 감당 못할 ‘수신 257조’, 전문적 감독으로
행정안전부가 금융감독원·예금보험공사와 함께 어제부터 새마을금고 합동감사에 들어갔다. 지난해 새마을금고의 대규모 자금 이탈(뱅크런) 사태를 겪은 뒤, 행안부와 금융위원회가 올해 2월 감독 공조 강화를 위해 맺은 업무협약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감사 대상 금고가 20개에서 40개로 늘어나는 등 강도가 세졌다. 딸 명의로 개인사업자 대출을 받아 아파트 구매 자금으로 전용한 양문석(경기 안산갑)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편법 대출’ 논란 때문이다.
이번 감사에 앞서 금감원은 새마을금고중앙회와 함께 문제가 터진 대구 수성 새마을금고를 검사했다. 그 결과 위법·부당 혐의를 발견했고, 이를 수사기관에 통보한다고 지난주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금감원이 새마을금고 측에 먼저 검사 인력 지원을 제안했다는 점을 들어 ‘금감원의 선거 개입’이라고 비난했다. 총선을 앞두고 금감원이 야당 후보의 불법 확인에 신속하게 나선 데에 야당 심기가 불편할 순 있다. 하지만 금감원이 양 후보 이외에도 다수의 작업대출을 적발했다는 점에서 민주당의 비판은 지나친 감이 있다. 총선 전에라도 감독기관이 마땅히 할 일은 해야 한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주택 구입 목적으로 사업자 대출을 받았다면 편법이 아니라 명백한 불법”이라고 했다.
새마을금고는 서민 금융기관을 표방한 협동조합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단위농협 같은 다른 상호금융회사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행안부가 관리·감독의 주무부처이다 보니 금융당국의 관리와 감독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였다. 지난해 새마을금고 사태로 홍역을 치르고 나서야 금감원 등과의 정보 공유와 협력을 확대했지만 금감원 등의 공동검사는 여전히 행안부 요청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사이 새마을금고 경영은 더 나빠졌다. 전국 새마을금고 1288곳 중 지난해 적자를 낸 금고가 431곳이다. 세 곳 중 하나는 ‘적자 금고’다. 2022년보다 10배 가까이 급증했다. 지난해 연체율이 10%를 넘어선 금고가 80곳이나 된다. 관리·감독이 느슨하고 내부 통제가 허술한 탓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지역 금고의 일탈을 막아야 하는 새마을금고중앙회도 문제가 있다. 민주당 당직자 출신이 중앙회 전문이사 자리를 꿰찰 정도로 정치적 외풍에 취약했다. 민주당 정권 시절이던 2018년에 벌어진 일이다.
새마을금고 수신 규모는 257조원에 달한다. 저축은행의 2.5배, 신협의 1.9배에 달하는 거대 금융기관이다. 그러니 금융을 잘 모르는 행안부가 감당이나 할 수 있겠는가. 행안부가 요청할 때에만 가능한 공동검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금융회사 감독에 전문성이 있는 금융위와 금감원에 관리·감독 책임을 맡길 때가 됐다.
중앙일보 사설
04.12 국가채무 비율 50% 첫 돌파, 여야 선심 공약 재검토를
지난해 국가채무가 1126조7000억원으로 1년 사이 60조원 가까이 늘고, GDP 대비 채무 비율도 처음으로 50%를 넘어 50.4%를 기록했다. 세수 감소 여파로 1년 나라 살림도 87조원 적자를 내, 정부가 당초 예산안에서 제시한 전망치(58조원)보다 약 29조원 더 많았다(관리재정수지 기준). 이에 따라 GDP 대비 재정수지 적자 비율도 2022년의 5.4%에서 3.9%로 내려가긴 했지만 여전히 EU(유럽연합)가 제시한 건전재정 권고안 3.0%를 상회했다. 문재인 정부 때 촉발된 급속한 재정 악화 기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재정 수지는 윤석열 정부가 편성해 집행한 첫 재정 성적표로, 온전히 현 정부의 몫이다. 윤 대통령은 국가부채 1000조원을 야기한 전임 정부에 대해 “무원칙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지만 스스로도 건전재정 원칙을 강도 높게 견지하진 못했다. 불요불급한 재량 지출을 줄였지만 경기 위축과 부동산 침체로 국세 수입이 51조원 줄고 세외수입도 25조원 줄어 적자 살림을 운영했다. 이 같은 작년 재정 결산은 이례적으로 국가재정법이 명시한 ‘4월 10일’을 하루 넘겨 발표했다. 총선을 의식해 부정적 지표 공개를 미룬 것이다.
총선 때 여야가 쏟아낸 각종 포퓰리즘 정책의 청구서가 지금부터 날아온다. 여당은 핵심 생필품에 대한 부가가치세 인하,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자녀 세액공제 확대 등 각종 감세 정책을 약속했고, 윤 대통령은 올해 들어 24차례 민생 토론회를 열고 철도 지하화, 국가장학금 대상 확대, 한국형 아우토반 건설 등 대규모 재원이 소요되는 정책을 연달아 발표했다. 야당은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 지원금, 8∼17세 자녀 1인당 월 20만원 지급, 국립대·전문대 전액 무상교육 등의 현금성 공약을 쏟아냈다. 거대 의석을 확보한 야당은 당장 13조원 규모의 민생 지원금 공약을 위해 추경 편성을 요구할 것이다.
여야 총선 공약이나 대통령이 내놓은 민생 토론회 정책들은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추진돼야 한다. 재정 악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씀씀이를 아껴 저출생 대책이나 성장동력 확보 같은 시급한 정책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4-12 尹, 총리·비서실장부터 ‘변화’ 상징할 인사 발탁해야
비록 여당이 총선에 참패했지만 윤석열 정부는 일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고립무원의 식물 정부가 될 뿐이다. 초거대·초강경 야권에 앞서 기사회생한 여당 내부에서부터 ‘용산’에 대한 불만이 폭발할 것이다. 그러면 윤 대통령의 불행을 넘어 국민의 불행이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미 해답은 나와 있다. 지난 2년 동안 수없이 제시됐지만, 윤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국민 마음을 얻는 정치를 배우고 지독한 ‘불통’에서 벗어나면 된다. 윤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변화가 문제의 원인이고 해법이다.
변화를 보여줄 가장 효율적 방법은 인사 쇄신이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관섭 대통령실 비서실장 등 수석비서관들이 사의를 표명했다. 후임이 변화를 상징할 리트머스시험지이다. 지난 100일 이상 악전고투해 개헌 저지선이나마 지킨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물러났다. 후속 지도부 구성도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그런데 용산 안팎에서 나돌기 시작한 총리 하마평을 보면, 변화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편한 사람보다는, 정부에 대한 지지를 넓힐 수 있는 사람을 파격적으로 발탁할 필요가 있다. 애국심과 자유민주주의 신념만 확고하다면, 다소 버겁더라도 중도·진보·청년·호남 민심까지 아우를 사람을 삼고초려 해서라도 모셔야 한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100가지 중 99가지가 달라도 정권교체 뜻 하나만 같다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했다. 그런 초심으로 돌아갈 때다.
신임 총리와 비서실장 인선의 제1 기준은 ‘대통령이 변했구나’하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윤 대통령과 이런저런 사정으로 부딪쳤던 사람이면 금상첨화다. 비서실의 정무·민정 역량을 강화하고, 김건희 여사 관련 조치도 기대 이상으로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과의 쌍방향 소통을 제대로 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 다시 기자와 만나고, 가차없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기자회견은 대통령 뜻을 가장 빨리, 효율적으로 알릴 기회다. 대국민 담화, 국무회의 지시 형식의 발언은 권위주의 모습으로 비치기 쉽다.
문화일보 사설
04-12 타락한 정치, 더 중요해진 사법권 독립
해방 후 분단된 한반도 유일의 자유민주공화국으로 건립된 우리 ‘대한민국 공동체’는 세계 10대 경제 강국의 반열에 올랐을 뿐 아니라, 자유통일과 항구적인 인류평화 및 인류공영에 이바지해야 할 목표와 사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10일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 결과 여당인 국민의힘이 90석을 확보하고, 더불어민주당은 단독 개헌선에는 못 미쳤으나 범야권을 아우르면 192석도 만들 수 있어 입법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161석이나 획득했다.
이제 정치권은 이러한 판세 형성의 원인과 결과 분석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느라고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의 대한민국 공동체가 도달해야 할 방향과 목표를 다지며 전 국민 차원의 협치(합치)의 길을 모색하는 데는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걱정을 하게 한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국민 대표이자 입법기관의 구성원인 국회의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나라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재음미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권력 획득을 위한 ‘정치가 모든 영역을 말아먹는’ 정치문화를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게 아닌가 싶다. 여야가 대국하는 것을 보면, 군주주권에 기반한 조선 시대의 사색당파 싸움과 오늘날의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민주정(영수 중심)의 당파 싸움, 분열을 거듭하는 계파 싸움과 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솔직히 분별키 어렵다. 당파·계파 싸움으로 표출되는 정치가 모든 것을 말아먹는 정치문화를 생산적으로 승화한 것이 산업화를 성취케 한 한가지 모습인 1972년의 권위주의 독재정권의 등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 정치문화도 목표가 뚜렷하고 대동단결(협치)에 도달하면, 권위주의의 방편 없이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경제·사회·문화적 국력과 국위 향상에 기여하는 요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정치문화를 순화하는 장치의 하나가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장착한 권력분립의 원리·원칙이다. 이 정치문화는 역으로 권력분립의 원리도 쉽게 무력화한다. 당파나 계파적 인연(맥)에 기반하는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의 임명이나 추천은 그 한 예이다. 기본적으로 (헌)법은 정치로부터 독립돼야 한다. 사법권의 독립은 법의 정치·경제·사회로부터의 독립에 기초한다. 법의 독립 없이는 사법권의 독립도, 사법권의 독립 없이는 권력분립의 원칙도, 권력분립의 원칙 없이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도, 재산권보장·계약의 자유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의 원칙도 불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의 바탕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세계를 누비는 K-팝, K-컬처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사유재산권·시장경제·권력분립의 원리를 거부하며 민주주의 중앙집권제와 노동당 독재를 바탕으로 하는 전체주의 체제의 북한 실정과 대비하면 자명하다. 북한에서는 근래에 K-팝, K-컬처가 젊은이 사이에서 인기라고 한다. 북한 당국은 이를 단속하느라 혈안이라고 한다. 한편, 북한 젊은이 사이에서 유행하는 K-컬처는 남북 간의 문화적 동질성을 증대시켜 통일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란 생각도 든다. 지난 2월 하순 CGV피카디리1958에서 상영된 ‘죽어도 한류’가 이를 잘 보여준다.

문화일보 최대권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헌법학
04-12 총선 결과와 무관한 脫탈원전 당위성
환경부에 따르면 에너지·산업·건물·수송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지난 1년 동안 1727만t이나 줄었다고 한다. 온실가스 총배출량이 2021년의 6억7660만t에서 2년 연속 줄어 2010년 수준(6억5510만t)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총배출량이 탄소중립의 기준연도인 2018년의 7억2500만t보다 13.1% 이상 줄어든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특히, 에너지 전환과 수송 부문에서 지난해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1130만t이나 줄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강력한 탄소중립 정책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산업 활동이 위축됐는데도 온실가스 총배출량이 2220만t이나 늘었던 2021년과는 확실히 비교된다.
에너지·산업 부문에서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성과는 무모하게 추진됐던 탈원전 정책의 폐지로 얻어진 게 확실하다. 팬데믹 종식으로 산업 활동이 되살아나면서 지난 2년 동안 총발전량은 11.4테라와트시(TWh)가 늘었다. 가장 확실한 무탄소 전원인 원자력의 발전량은 2021년 무려 22.5TWh나 늘었다. 탈(脫)탈원전을 선언한 현 정부가 원전의 발전 비중을 문재인 정부의 23.9%에서 32.4%로 상향 조정하고, 무작정 세워뒀던 원전을 안전하게 가동한 덕분이다. 실제로 원자력의 발전 비중이 27.4%에서 30.7%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석탄과 액화천연가스(LNG)를 연료로 사용하는 화석연료 발전은 23.7TWh나 줄었다. 원전 가동률을 탈원전이 극에 달했던 2021년 수준으로 유지했더라면 온실가스 배출량은 오히려 더 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전력 수요를 감당하려면 탄소중립에 역행하는 화석연료 발전소를 더 많이 가동해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광·풍력에 숨겨진 변수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태양광·풍력 등의 재생에너지 발전도 13.6TWh나 늘어난 건 사실이다. 지난 정부가 탈원전과 함께 밀어붙였던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 덕분이다. 현재 전국의 태양광·풍력의 설비용량은 무려 30GW로 폭증했다. 하루 24시간 가동했다면 260TWh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그러나 실제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로 생산한 전력은 56.7TWh에 지나지 않았다. 재생에너지의 연평균 발전효율이 연평균 20% 수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중위도 지역에 자리한 우리나라의 재생에너지 자원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의 극심한 간헐성과 계절에 따른 변동성도 심각한 부담이다. 현재의 기술로 재생에너지의 간헐성·변동성을 보완하려면 온실가스를 내뿜는 LNG 발전소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저장장치(ESS)는 여전히 미완성의 미래 기술이다. 결국, 우리에게 태양광·풍력은 온전한 무탄소 전원일 수 없다. 오히려 과도한 재생에너지 설비가 전력의 계통 안정성을 위협한다. 실제로, 제주도·호남·경남에서는 어쩔 수 없이 출력제어를 시행한다.
최악의 에너지 빈국인 우리에게 탄소중립은 절대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어설픈 민간 캠페인인 ‘RE100’(재생에너지 100%)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원자력을 포함한 ‘무탄소에너지(CFE) 이니셔티브’가 현실적인 대안이다.

문화일보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04.15 방심위, ‘바이든-날리면’ MBC에 과징금 3000만원 부과
윤석열 대통령의 2022년 뉴욕 방문 당시 불거진 MBC ‘자막 논란’과 관련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15일 과징금 3000만원을 부과하기로 의결했다.
방심위는 이날 오후 3시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여권 위원 전원 동의로 이같이 의결했다. 이날 회의에는 윤석열 대통령 추천 이정옥 위원을 뺀 위원 7명이 참석했다.
이 논란은 2022년 9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재한 뉴욕의 회의 장소를 나서던 윤 대통령의 발언에서 비롯됐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는 윤 대통령 발언을 보도하며 ‘(미국) 국회에서 이 ××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자막을 달았다. 대통령실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말한 것이고, 미 의회가 아닌 우리 국회를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지난 1월 1심은 이 자막 논란과 관련해 MBC에 정정 보도를 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 판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전문가의 음성 감정 결과 등을 근거로 MBC 보도가 허위라고 봤다.
여권 추천 류희림 위원장과 황성욱 상임위원, 김우석·허연회 위원은 과징금 3000만원 부과 의견을 냈으며, 야권 추천 김유진·윤성옥 위원은 퇴장해 의결에 불참했다.
김유진 위원은 “정치심의라는 여론의 거센 비난에도 과징금 액수를 정하기에 이르렀다”면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며, 정치심의로 방심위 신뢰를 추락시킨 분들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질 것”이라고 했다.
윤성옥 위원은 “과징금은 경제적 탄압이고, 오늘 결정은 방송사 재허가에 반영되기에 인허가 제도를 통해 언론을 탄압하는 것”이라며 “대통령 관련 사항은 설령 후에 오보로 밝혀져도 언론이 다룰 수 있다. 방심위가 대통령 입장이 돼서 일방의 편을 들어 언론사를 제재한 사건”이라고 했다.
류희림 위원장은 “언론 탄압, 정치 심의란 말을 했는데 관계자 의견진술, 소위, 전체 회의를 거쳤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한 데 대해 심의 규정에 따라 내리는 결정”이라며 “굉장히 유감”이라고 했다.
방심위는 앞서 MBC 해당 보도의 후속 보도 4건에 대해서도 법정 제재를 의결한 바 있다.
방심위 결정은 ‘문제없음’, 행정지도 단계인 ‘의견제시’와 ‘권고’, 법정 제재인 ‘주의’, ‘경고’, ‘프로그램 정정·수정·중지나 관계자 징계’, ‘과징금’으로 구분된다. 법정 제재부터는 방송사 재허가·재승인 시 감점 사유로 적용돼 중징계로 인식된다.
조선일보 김명진 기자
04.15 법원 고위공무원, 민사집행 업무 투입된다… “신속 재판 기대”
법원이 ‘재판 지연 해소’를 위해 사법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일반직 고위 공무원들을 민사 집행 관련 업무에 투입한다고 15일 밝혔다.
법원행정처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의 사법보좌관 규칙 개정안이 대법관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다. 개정안은 각급 법원의 사무국장 중 사법보좌관 교육을 이수했거나 경험 있는 이들을 사법보좌관에 겸임하도록 했다.
사법보좌관은 각급 법원에서 정형적이고 당사자 사이에 큰 다툼이 없는 재판 업무나 공증 성격의 업무를 처리한다. 주로 부동산‧자동차 경매 등 민사 집행 절차, 상속의 한정 승인·포기 신고 수리, 자녀가 없는 부부의 협의 이혼 절차 등을 맡고 있다.
그런데 최근 민사 집행 사건이 폭증하면서 사법보좌관의 업무 부담이 늘고, 재판 절차가 늦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작년에 법원에 접수된 민사 집행 사건은 10만1147건으로 2022년(7만7459건) 대비 30% 이상 늘었다. 임차권 등기 사건도 작년 한 해 6만31건 접수돼 2022년(1만8717건) 대비 3배 이상 증가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사법보좌관 교육을 받았거나, 관련 업무 경험이 있는 각급 법원의 사무국장을 사법보좌관 업무에 투입하기로 했다. 고등법원이나 지방법원의 사무국장은 일반직 고위 공무원인 이사관(2급) 또는 부이사관(3급)이 맡고 있다. 사법행정 실무를 총괄하는 고위 공직자들을 집행 업무에 투입하는 것이다. 개정안은 올해 7월 일반직 공무원 정기인사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법원행정처는 “이번 규칙 개정은 법원 구성원이 혼연일체가 돼 신속한 재판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사법보좌관이 담당하는 재판 업무에서도 신속한 재판을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방극렬 기자
04-16 흔들려선 안 될 ‘신속한 재판’ 원칙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대표적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인공 미카엘은 본래 천사였다. 어느 날 두 딸아이를 갓 출산한 엄마의 생명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은 미카엘은 그 엄마가 불쌍하고 아이의 생명도 염려된 나머지 이를 어긴다. 신의 벌을 받은 미카엘은 오랜 시간 후에 그 아이들이 새로운 인연을 만나 사랑으로 양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소명(召命)보다는 지나치게 많은 미래의 고민과 상황을 고려해서 결정을 미루고 실행하지 않은 미카엘의 심정을 헤아려 봤다. 하지만 잠시의 아픔과 슬픔이 있었으나 신은 결국 미카엘의 걱정과 달리 올바르고 행복한 방향으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최근 사법부의 재판 과정과 속도를 두고 이 소설의 줄거리가 떠오른다. 헌법상 재판은 공정해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속해야 하며, 원칙적으로 재판 외의 다른 일체의 사항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신속한 재판의 원칙’이라 함은, 피고인이 신속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일찍이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도 “사법은 신선할수록 향기가 높다”고 했다.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매우 높은 반면 재판의 신속성에 대해서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최근에는 법원 전체가 이를 주제로 토론과 보고서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할 정도로 재판 지연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정치인들이나 선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건들은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신속하게 진행돼야 한다.
신속한 재판의 원칙은 수사와 공소 제기 절차, 공판 절차, 상고심 절차에 공통으로 적용돼야 한다. 특히, 형사사건의 신속한 처리는 헌법상 형사절차의 기본 이념이다. 최초의 범죄 혐의 발견부터 확정판결까지의 소송 기간을 최대한 줄여 피의자·피고인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체적 진실 발견, 소송경제,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형벌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도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종결돼야 한다. 형사사건의 경우 형 선고 때까지 발생할지 모르는 증인의 변심, 증거의 멸실·훼손 방지라는 측면에서도 신속한 재판의 진행과 종결이 필요하다.
헌법상 삼권분립의 원칙 아래서 사법 적극주의와 소극주의의 대립은 사법부의 오랜 과제 중 하나다. 사법부가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지나치게 위헌으로 결정하거나 정치적 행위에 개입하는 경우에는 사법이 아니라 재판 자체가 ‘법창조행위’나 ‘입법행위’가 돼 재판이 정치행위로 비칠 가능성이 있어 법원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반대로 사법 소극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법원이 현재 문제 된 사건들에 대한 판결을 통상적인 법감정이나 기대보다 훨씬 미룰 경우 재판의 지연 자체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입법행위로 비칠 위험성도 없지 않다. 권력분립의 원칙 아래서 행정부나 입법부가 대개 다수파로 구성되더라도, 사법부는 ‘소수자와 약자’의 이익 보호를 위해 외풍을 이겨내고 오직 법에 따라 재판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 원칙이다.
행정부나 입법부의 구성이 여야 어느 편에 유리한 형세가 됐든 간에 사법부는 언제나 오롯이 국민의 편임을 믿는다.

문화일보 지성우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04-17 대통령실의 잇단 이상 징후와 ‘용산 시스템’ 난맥 의혹
집권 세력이 선거에서 참패하면 어느 정도 허둥대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수도 나올 수 있지만, 최근 용산 대통령실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런 불가피한 일시적 혼선과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중요한 대국민 메시지에 대해, 불과 몇 시간 뒤에 참모가 나서 취지를 수정하는 일이 반복되고, 17일 오전에는 박영선·양정철 기용 소동까지 빚어졌다. 이와 관련, 공(公)조직 대신 비선 조직이 작동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증폭됐다.
이날 오전 6시쯤 일부 방송 매체가 차기 총리 후보에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박영선 전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후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검토한다는 내용을 ‘단독 기사’라며 보도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공식적으로 “검토된 바 없다”고 부인하면서 일단 수그러들었다. 문제는, 공조직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하마평이 주요 언론이 보도할 만큼의 근거와 배경을 갖고 유포된다는 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윤 대통령 취임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비선을 자처하는 사람이 보도할 만한 신뢰를 갖춘 취재원이 됐다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무분별한 보도로 치부하기에 앞서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내부 점검부터 해야 할 것이다.
최근 윤 대통령 발언을 둘러싼 논란은 ‘발표문 작성자’가 따로 있지 않으냐는 의심을 자초하기에 충분하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참모가 기조를 누그러뜨리는 브리핑을 해야 할 정도라면, 작성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윤 대통령은 16일 생중계된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 총선 참패의 책임을 인정하지도, 거대 야당과의 관계 재설정 입장을 밝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몇 시간 뒤에 참모가 ‘비공개회의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지난 1일 의대 증원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 때에도 참모들이 뒤늦게 증원 숫자 조정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 때에도 대통령의 터무니없는 낙관론을 두고 비선 의혹이 일었다. 이런 메시지와 인사 혼선이 거듭될수록 도대체 ‘용산 심처(深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문화일보 사설
04-17 의료·노동·연금 개혁은 초당적 책무다
총선 결과 제22대 국회도 175석의 압도적 제1 야당이 등장하면서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입법과 행정의 구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법치국가에서 법률제정권을 가진 입법부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헌법은 권력분립 원칙을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으나, 국가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누고 있어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적용된다. 물론 이번 총선 결과인 야당의 압도적인 의석수가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작용은 국가권력 한쪽만으로 정상 운영되기 어렵다. 그래서 결국에는 권력 간에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정이 운영된다고 볼 수 있다.
권력분립 원칙이 헌법상 핵심적인 원칙이 된 것은, 권력의 집중으로 인한 과도한 권력 행사가 집권자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를 몰락시켰다는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회를 장악하게 된 거대 야당은 국정 운영에 대한 책임과 의무도 힘과 규모에 맞게 비례적으로 커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정부·여당도 효율적이고 원만한 국정 운영을 위해 사안에 따라 야당의 협력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차기 국회까지 야당이 장악하게 되면서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제동이 걸리고 추진 중인 개혁 과제가 진행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렇지만 국가권력 구도가 변하는 것과 별개로 국정 과제인 의료·교육·노동 등의 개혁은 계속 추진돼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개혁은 정부가 바뀌어도, 국회의 의석수가 변하더라도 추진돼야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게 된다.
어떤 제도든 시대의 변화에 따르지 않으면 정체 또는 퇴보하게 된다.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법과 제도는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의대 정원 확대 등 의료개혁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할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국가 과제다. 대학 입시에 매몰된 교육도 개혁 대상이다. 향후의 AI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교육제도의 근간부터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2015년 독일 노동부는 4.0의 새로운 노동자상(像)이 출현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노동개혁을 추진했다. 우리나라도 과학기술의 발전과 AI로 인한 새로운 노동시장에 대비하는 개혁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이 밖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시대에 맞는 연금개혁도 필요하다. 이렇게 국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도의 개혁은 미룰 수 없는 국가의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
이번 총선의 결과에 대해 정부·여당의 충격은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선거 결과에는 민심이 반영돼 있다. 국민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국정 운영이 필요하다. 대통령과 야당이 대립하게 되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간다. 선거 결과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대통령과 국회는 알아야 한다.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대통령은 유연한 자세로 야당과 파트너십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국정 운영에 국회를 주도하는 야당도 예외일 수 없다. 대통령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국익과 민생을 위해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문화일보 김상겸 동국대 명예교수·헌법
04.18 전기 전성시대에 다시 온 탈원전의 악몽
주식시장만 본다면 전기(電氣)의 전성시대다. 인공지능(AI)발 전력 수요 증가 기대감에 변압기 등 전력 인프라 생산 업체들의 주가가 올해 들어 가파르게 뛰었다. 연초부터 이달 16일까지 주가 상승률은 HD현대일렉트릭(151.2%), 제룡전기(120.4%), LS일렉트릭(81.6%) 등이다. 한국 증시 투자자라면 사명에 ‘전기’, ‘일렉트릭’이 붙은 회사만 골랐더라도 올해 짭짤한 수익률을 기록했을 것이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거침없는 AI 열풍으로 콘스텔레이션 에너지 등 발전회사들이 수혜를 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원자력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다. 데이터 센터에는 24시간 내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원자력 발전은 연중무휴 안정적으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데다 탄소 배출량도 적다. 샘 올트먼 오픈 AI 최고경영자 등이 원자력에 꽂힌 이유다.

▲핵심 설비를 국산화 한 한국형 원전인 신한울 원자력발전소 1호기(왼쪽)와 2호기. 1호기는 2022년 12월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뉴스1]
미국이 ‘원자력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는 보도도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다. 미국 정부는 소형모듈원전(SMR) 개발 업체 등 원자력 업체에 대한 각종 지원을 쏟아내고 있다. 재생에너지만으로는 2050년까지 탈탄소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고려와, 러시아와 중국 중심의 원자력 생태계 중심을 다시 미국으로 돌리겠다는 정치적 고려까지 포함된 결과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번 정부 들어 살아났던 원자력 부흥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사그라들고 있는 모양이다.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인 탈원전 정책 폐기 및 원자력산업 생태계 강화에도 반대한다는 뜻을 명확히 밝힌 상태다. 대신 2035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40%까지 늘리는 내용의 공약을 제시했다. 야권의 압승으로 끝난 총선 다음날인 11일 원자력 발전 관련주들이 많게는 10% 가깝게 하락한 이유다.
미국 하원은 지난 2월 28일 SMR 등 차세대 원자로 설계에 대한 승인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의 각종 지원책을 담고 있는 원자력 발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찬성한 의원은 365명, 반대는 36명 불과했다. 해당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는 “원자력은 당파 또는 이념적 분열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분석을 전했다.
같은 법안이 한국 국회에 올라갔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념논쟁만 벌이다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원자력이 만병통치약이 아니지만 2050년까지 탈탄소를 달성하려면 원자력은 반드시 ‘에너지 믹스(energy mix·다양한 에너지원을 활용해 효율성 극대화)’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민주당 다이애나 드제트 하원의원)고 말할 한국의 야당 의원이 있을지 상상이 쉽게 되지 않는다.
중앙일보 안효성 증권부 기자
04-22 위헌 소지 큰 ‘중처法’과 헌재의 책무
서울 시내 금싸라기 땅에 초고층 빌딩을 지으려고 계획했던 기업인이 끝내 꿈을 접었다고 한다. 공사 기간이 5∼6년 걸릴 텐데, 그 기간 내에 안전사고가 나지 말라는 법은 없고, 인명사고가 날 경우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 위반으로 사업자인 자신이 감옥에 갈 수도 있으며, 그 경우 가정과 사업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고, 운영하는 회사의 사내이사 취임도 국민연금의 반대로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을 생각해 보면, 굳이 자신이 모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마침 헌법재판소가 지난 9일 중소기업중앙회 등이 청구한 중처법 헌법소원 심판에 대해 전원재판부 회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업계로서는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인데, 헌재가 기업인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중처법은 2022년 1월 시행 전부터도 위헌 논란이 있었다. 이 법률의 광범위하고 불명확한 의무 부여와 과도한 처벌 때문이다. 본래 이 법률의 입법 목적 자체가 ‘처벌법’이었다. 그래서 박주민·이탄희·박범계·강은미 각 의원이 내놓은 법률안 명칭이 다 같이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법안’이었다. 이처럼 처벌법, 즉 형사법이라면 이 법률은 형사법에 적용되는 죄형법정주의 등 헌법의 기본 원리에 합치해야 한다.
헌법의 죄형법정주의에서 나온 파생원칙의 하나는 ‘명확성 원칙’이다. 중처법에는 ‘인력·예산 등 안전보건 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 ‘안전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 이행에 필요한 관리상 조치’ 같은 의무조항이 열거돼 있는데, 그 구체적인 것은 시행령에 위임하고 있다. 시행령을 보면 다시 ‘필요한’ 조치, ‘필요한’ 예산 편성, ‘충실히’ 수행, ‘필요한’ 권한과 예산 부여와 같은 모호하고 추상적 용어로 규정하고 있다. ‘재발방지 대책’의 수립 및 이행 범위도 불명확하고, 개선·시정에 대한 관계 법령의 범위 또한 불분명하다. 이들은 모두 명확성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
‘실제 행위자인 수급인 등’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혹은 업무상과실치사죄의 적용을 받아 통상의 처벌을 받는데, ‘관리 감독상 책임자 등 제2차적 책임자인 도급인 및 사업주’는 중처법에 따라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은 책임주의 위반이다. 비례성 원칙 위반도 엿보인다. 중처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이 동일한 수준의 구성 요건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두 법의 적용 결과, 형량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망자 1명이 발생할 때, 산업안전보건법상 치사죄는 법정형이 ‘7년 이하의 징역 및 1억 원 이하의 벌금’이고, 중처법상 중대재해 치사죄는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의 벌금(병과 가능)’을 부과한다. 신체를 구속하는 자유형을, 그것도 하한형(1년 이상)으로 규정하는 것도 기업인을 과도하게 차별해 형평성을 잃었다. 자유형보다는 금액이 다소 과도하더라도 재산형(벌금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한국은 사업자 또는 CEO의 형사책임 리스크가 크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제임스 김 회장은 중처법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훌륭한 CEO들이 한국행을 꺼린다”고 했다. 잘못된 법률 하나가 한국 산업을 파괴하고 기업가 정신을 말살시키며 국가를 범죄공화국으로 만든다. 헌재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문화일보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04-23 국회 연금案 개악 조짐, 정부가 제대로 된 대안 다시 내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시민대표단의 56%가 ‘더 내고 더 받자’는 1안(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에 찬성해 ‘조금 더 내고 그대로 받자’는 2안(보험료율 12%, 소득대체율 40%) 찬성(42%)을 앞섰다. 기초연금은 소득 하위 70%에 주자는 ‘현행 유지’가 더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1안은 ‘조금 더 내고 더 많이 받자’는 것으로, 개혁 아닌 개악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안은 향후 70년간 국민연금 누적 적자를 1970조 원 줄이는데, 1안은 오히려 702조 원 늘린다. 연금의 지속 가능성을 악화시키는 1안은 세계의 조롱거리가 될 정도다.
이는 시민대표단을 구성할 때부터 예고된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기계적으로 인구 비례로 선정하는 바람에 향후 연금을 부담할 청년들의 비율이 너무 적었다. 500명의 패널도 소득 보장에 찬성하는 쪽 245명, 재정 안정에 찬성하는 쪽 172명이어서, 애초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향후 70년간 1268조 원에 달하는 두 안의 누적적자 차이를 토론 자료집에 넣지 않고 전문가 설명으로 그쳤다고 한다. 소득보장론의 입김이 세졌고,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포퓰리즘 방안’이 힘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고통 분담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정치가 지배하는 국회에서 이런 인기투표 방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뻔했다.
연금개혁은 더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이지만, 이런 제21대 국회에서 제대로 된 개혁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다. ‘정권 초기에 힘있게 연금개혁을 하겠다’던 윤석열 정부의 장담도 빈말에 그쳤다. 지난해 보험료율·소득대체율 등 핵심을 뺀 맹탕 개혁안을 국회에 넘겼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을 놓으면 미래세대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진다. 정부가 책임 있는 자세로 제대로 된 대안을 다시 제시해야 한다. 선진국들의 사례를 봐도 정부가 객관적인 재정계산과 전문가 의견을 종합해 최선의 개혁안을 만들어내고 국민을 설득해 관철했다. 다행히 다음 지방선거(2026년 6월 3일)까지 2년 이상 전국 규모 선거도 없다.
문화일보 사설
04.24 만성 질환에 정치 장애, “한국 경제 기적은 끝났다”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정치 리더십의 분열 문제를 지적하며 한국 경제 위기론을 제기했다. 22대 총선에서 국민의 힘의 참패로 여소야대 정치 지형이 그대로 이어지게 됐다. /뉴시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한국의 경제 기적은 끝났나’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값싼 에너지, 노동력에 의존한 한국식 국가 주도 성장 모델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분석했다. FT는 제조 대기업에 치우친 성장 모델, 대·중소기업 간 격차 심화, 저출생·고령화 문제, 중국 기업들의 추월, 대기업 3세 경영자들의 ‘현실 안주’ 등을 한국 경제의 위기 요인으로 꼽았다.
FT는 증시 코리아 디스카운트, 낙후한 에너지 산업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4·10 총선 결과 정치 리더십이 분열돼 개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지적했다. “좌파가 장악한 입법부와 인기 없는 보수 대통령이 지휘하는 행정부로 정치 리더십이 분열돼 2027년 대통령 선거까지 3년 이상 교착상태가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설명 자료를 내고 “성장률 하락세를 반전시키기 위해 노동·교육·연금 3대 구조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비현실적 설명이다. 윤석열 정부 2년 동안 노동·교육·연금 개혁에서 야당에 막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치 지형을 바꿔 개혁 추진 동력을 살리는 것이 유일한 개혁 실행 방안이었는데, 도리어 반윤석열 바람을 자초하고 방치해 선거마저 망쳤다. 이제 무슨 수로 산적한 개혁 과제를 추진하나.
외국 언론과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경제의 약점뿐 아니라 정치의 극한 대립 문제까지 우려하고 있다. FT가 지적한 한국 경제의 문제점은 어제오늘 생긴 문제가 아니라,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무한 정쟁을 되풀이하며 문제 해결을 미루고 미룬 결과 만들어진 만성 질환 같은 것이다.
한국 경제는 다른 나라의 신제품, 신기술을 빠르게 쫓아가는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고속 성장을 일구어냈다. 하지만 산업의 고도화, 중국의 부상과 경쟁의 격화로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등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창의적 인재를 중심으로 선도자(first mover)가 돼야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교육·노동·연금·규제 개혁은 경제 체질을 바꾸고, 미래 세대의 역동성을 끌어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은 낡은 생각과 포퓰리즘에서 벗어나 인기 없더라도 교육·노동·연금·규제 개혁에 앞장서 ‘퍼스트 무버 대한민국’을 만드는 해법을 찾기 바란다.
조선일보 사설
04.24 [경제 톱10 이끈 FTA] [상] 자유무역협정 20년, 선진국 길 열어
美·中·EU·아세안과 FTA 맺은 건 한국뿐… 무역 규모, 日 턱밑 추격

▲2004년 4월 1일 서울시내 전통음식점 삼청각에서 열린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발효 축하행사에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과 페르난도 슈미트 주한 칠레 대사(다섯번째), 박관용 국회의장(여섯번째) 등 참석자들이 칠레산 포도주로 건배를 하고 있다./조선일보DB
2004년 우리나라 첫 FTA(자유무역협정)인 한·칠레 FTA가 발효될 당시 포도는 ‘뜨거운 감자’였다. 국내 5대 소비 과일인 포도가 관세 철폐 대상에 포함되자 포도 재배 농가에선 ‘우린 이제 끝났다’는 말이 나왔다. 2003년 37만6000t이던 포도 생산량은 칠레산 포도가 국내시장에 밀려들어 오면서 2006년 33만t으로 줄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나지는 않았다. 2006년 우리 농가는 일본에서 ‘샤인머스캣’ 묘목을 들여와 개량을 시작했고, 2017년 중국을 시작으로 수출에 나섰다. 2010년 188만달러(약 26억원)인 포도 수출은 지난해 24배인 4469만달러까지 불었다. 이제 우리와 FTA를 체결한 싱가포르,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등에서 한국산 샤인머스캣은 명품 과일로 꼽힌다. 2005년 1000㎡당 연간 312만원이던 포도 농가 소득은 2020년 598만원으로 늘었다. 포도 농가를 다 죽인다던 FTA가 소득을 늘린 것이다.

▲2003년 11월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한-칠레 FTA 비준저지 전국농민대표자 대회에서 농민들이 사과를 발로 밟고 있다./조선일보DB
◇20년 만에 일본의 85%까지 추격
23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나라별 무역 규모와 수출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우리 수출과 수입을 합한 무역 규모는 1조2752억달러(약 1757조원)로 일본(1조5028억달러)의 85%에 달했다. 우리나라가 FTA에 막 뛰어들던 2003년, 일본의 무역 규모는 우리의 2.3배에 달할 정도로 격차가 컸었다. 우리가 3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동안 FTA에 소극적이었던 일본은 증가세가 크지 않았다.

▲그래픽=양인성
FTA는 정체기에 접어들었던 우리 수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1983년 무역(수출+수입) 규모에서 세계 12위, 수출과 수입은 각각 13위와 14위로 15위 안으로 진입했지만, 이후 20년 동안 그 어느 항목도 한 자릿수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섭게 성장하던 중국이 해마다 순위를 높이는 상황에도 우리는 G7(7국)과 네덜란드·벨기에·홍콩 등 중계무역 강국의 벽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했다. 2003년 당시 외교통상부에 근무했던 조수정 고려대 교수는 “이대로 가다간 톱10 진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2차 한미자유무역협상(FTA)협상이 재개된 2006년 7월 1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웬디커틀러 미국수석대표(왼쪽)와 김종훈 한국대표가 협상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조인원 기자
칠레에 이어 2006년 싱가포르 및 EFTA와 FTA가 발효됐고, 초(超)세계화 흐름 속에 아세안(2007년), 인도(2010년), EU(2011년), 미국(2012년), 중국(2015년) 순으로 FTA가 발효되며 2017년엔 무역(9위)·수출(6위)·수입(9위) 모두 톱10을 기록함과 동시에 1인당 GDP(국내총생산)도 3만달러 벽을 돌파했다.
◇세계 85% 확보… 미·중·EU와 모두 체결은 유일
우리나라는 칠레를 시작으로 21건의 FTA를 59국과 맺으며 세계 GDP의 85%를 ‘경제 운동장’으로 확보하고 있다. 중계무역국인 싱가포르(87.3%)에 이어 2위다. FTA 선진국으로 꼽혔던 칠레(3위)도 제쳤다.

▲그래픽=양인성
우리나라는 G2(미국·중국)를 비롯해 EU, 아세안 등 주요 경제권과 모두 FTA를 체결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한 통상 전문가는 “FTA 협상은 분야별로는 일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윈윈하자는 것”이라며 “우리는 농업 부문이 개방에 대한 반발이 거셌음에도 국익 차원에서 양보하며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보호무역주의가 확대되는 가운데에도 FTA는 우리 무역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동안 촘촘하게 짜놓은 FTA망은 WTO(세계무역기구) 체제가 사실상 와해한 상황에서 교역의 통로가 되고 있으며, 미국이 IRA(인플레이션감축법)와 같은 장벽을 쌓는 국면에서도 FTA 상대국으로서 혜택을 누리게 하고 있다.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과거 빠르게 FTA를 확대한 것이 지금과 같은 탈(脫)세계화 국면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04.25 “광복 100주년 화성에 태극기” 우주항공청 닻 올렸다

▲우주항공청 초대 청장에 내정된 윤영빈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왼쪽부터), 우주항공청 1급 우주항공임무본부장에 내정된 존 리 전 미국 항공우주국(NASA) 본부장, 우주항공청 차장에 내정된 노경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정책실장이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인사브리핑에 참석해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의 소개 발언을 듣고 있다./연합뉴스
‘한국판 NASA(미국 항공우주국)’를 표방하며 오는 5월 출범할 우주항공청(KASA)의 청장과 임무본부장 등 고위직 인선이 마무리됐다. 우주항공청은 과학기술부·산업부·항공우주연구원·천문연구원 등 여러 부처·조직에 쪼개져 있는 관련 업무를 통합해 우주 개발과 우주 산업 육성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기구다. 가장 핵심인 연구 개발 총괄 임무본부장에 대해 정부는 연봉을 대통령과 같은 2억5000만원으로 책정하고, 외국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는 등 파격 조건을 내걸고 모집했는데, 존 리 전 NASA 본부장이 낙점됐다.
그는 미국 국적의 이민 1.5세대 한인으로, 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등에서 29년간 재직하며 각종 우주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백악관 행정예산국에서 예산 업무도 맡았다. 미국의 우주 개발 노하우를 전수받고 NASA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인선으로 보여진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 재미 한국인 기업인 김종훈 전 벨연구소 소장이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내정됐다가 야당이 이중 국적 등을 비판하는 바람에 중도 하차한 적이 있다. 이런 시대착오적 논란이 재연돼선 안 되겠다.
지난해 5월 ‘누리호’ 발사 성공으로 중량 1t 이상 위성을 자력 발사할 능력을 갖춘 일곱 번째 우주 자립국이 됐지만, 우주 선진국과 비교하면 초보적 수준이다. 미국 등에선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 등 민간 기업들이 우주 산업에 뛰어들어 지구 전역을 커버하는 위성 인터넷망 구축, 재활용 로켓, 유인 달 착륙 프로젝트 등 ‘우주 산업혁명’을 이끌어가고 있다. 민간의 기술 혁신 덕에 로켓 발사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면서 우주가 안보·군사의 공간에서 경제·산업의 공간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각종 우주 산업의 시장 규모는 현재 520조원에서 2040년엔 1400조원으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우주항공청 앞에는 발사체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로켓 회수 및 재활용 기술, 더 무거운 인공위성과 탐사선을 쏘아 올릴 기술 개발 등 숱한 난제가 놓여 있다. 정부는 2032년 달을 탐사하고, 광복 100주년인 2045년엔 화성에 무인 탐사체를 보내 태극기를 꽂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허황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역사는 꿈을 현실로 이뤄온 여정이다. 우주항공청이 우주 개발의 첨병이 되어 한국 우주개발의 역사를 써주길 기대한다.
조선일보 사설
04-25 파탄으로 가는 ‘광주형 일자리’와 억지 고용의 허구성
문재인 정부는 2019년 ‘광주형 일자리’를 만들었다. 무노조·무파업과 낮은 임금을 전제로, 광주광역시(21%) 산업은행(10.87%)과 함께 현대차의 출자(19%)를 받아 자동차 위탁생산 회사인 광주글로벌모터스(GGM)를 설립한 것이다. 노동계, 광주광역시, 지역 시민단체들까지 참여해 ‘완성차 업계보다 적은 연봉으로 누적 생산 35만 대까지 파업을 하지 않겠다’는 신사협약을 맺었다.
이런 GGM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노조가 들어섰다. GGM 노조는 지난 2월 설립된 데 이어, 지난 22일엔 민노총 금속노조 소속이 됐다. 앞으로 임금·단체 협상은 금속노조가 한다.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지만, 차량 생산 2년7개월 만에 대놓고 협약을 파괴함으로써 GGM 존립의 근거인 ‘상호 신뢰’는 파탄났다. 더 근본적으로, 기업 지원에 의존하는 일자리는 사상누각이다. 현대·기아차 평균 연봉은 1억 원을 넘는데, GGM은 평균 3500만 원 수준이니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주력인 경차 캐스퍼는 최저 1375만 원 수준이고, 지난해까지 누적 생산량은 11만 대다. 지난해 매출이 1065억 원인데도 영업이익률(22.2%)이 높았던 것은 현대차의 지원 덕이다.
올해 캐스퍼 전기차가 나오지만, 전기차 시장은 침체다. 현대차에 추가 물량 배정도 요구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현대차의 노사 합의 대상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기득권 노동계에 자극을 주긴커녕 구태를 답습하려 한다. 억지 일자리의 허구성을 보여준다. GGM 설립 때 이용섭 광주시장은 직접 노동계를 설득했다. 현대차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광주시가 나설 때다. 그러지 않으면 결말은 파국이다.
문화일보 사설
04-26 ‘효자에 더 많은 상속’ 헌재 결정대로 입법 서두르라
헌법재판소가 25일 고인의 유언으로 상속에서 제외한 자녀·배우자·부모·형제자매도 무조건 법정 상속분의 일정 비율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현행 ‘유류분(遺留分)’ 제도에 대해 위헌 및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1977년 민법에 도입된 이래 47년 만이다. ‘패륜적 자녀와 부모는 상속에서 배제해야 한다’ ‘부모를 오래 부양하거나 재산 형성에 기여한 자녀는 상속에서 혜택을 받게 해줘야 한다’는 취지로, 바뀐 시대상을 반영한 합당한 판결이다.
이번 헌재 결정이 유류분 제도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고인을 유기하거나 학대한 패륜적 자녀나 부모에게 상실 사유를 규정하지 않고, 효자녀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 것이 국민 법 감정이나 상식에 어긋나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헌재는 또 고인의 형제자매에게 유류분을 인정하는 조항에는 위헌 결정을 내려 즉시 무효로 했다. “재산 형성에 대한 기여 등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데도 유류분을 주는 것은 타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민법 조항에 대해 국회는 내년 12월 말까지 개정해야 한다. 관련 규정을 꼼꼼히 살피면서도 시급히 후속 입법에 나서야 한다.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은 매년 증가해 지난해에만 2000건 넘게 제기됐는데, 이번 헌재 결정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2021년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유류분 관련 민법개정안과 ‘구하라법’이 아직도 법사위에 계류돼 있다. 헌재의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국회가 개정해야 하지만 아직도 처리 안 된 법률이 33개나 된다. 15년째 방치되고 있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비롯해 국회의 직무유기가 심각하다.
문화일보 사설
04-26 ‘검수완박’ 이후 부패 우려하는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뇌물방지작업반(WGB)이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개정 입법 이후 한국의 부패 대응 역량 약화와 수사 지연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올 상반기 중 부패 대응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실사단을 우리나라에 파견한다고 한다.
문재인 정권 당시 더불어민주당 등 좌파 연합이 졸속 처리해 2021년 1월 및 2022년 9월부터 시행한 검수완박 입법은 범죄 수사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놨다. 검사는 부패·경제범죄와 경찰·공수처의 공무원 범죄 외에는 직접 인지수사를 못 하도록 제한함으로써 경찰이 대부분의 범죄 수사를 독점하게 했다. 그나마 수사검사는 직접 기소할 수도 없게 함으로써 세계에 유례가 없는 비효율적인 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종전에 검사가 해 오던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는 경찰 내부의 경찰서장이나 수사 부서 상관 등이 도맡게 함으로써 이제 경찰의 수사권은 견제 장치가 없다시피 한 무소불위의 권력이 됐다. 종전에 검사가 하던 불기소 결정도 사실상 경찰이 일방적으로 행사하게 했다.
이로 인해 경찰 고위직은 권력이 막강해지니 흐뭇하겠지만, 직접 수사를 해야 하는 사법경찰로서는 할 일은 많아지는데, 복잡한 사실관계의 규명이나 어려운 법리 판단에는 한계가 있어서 수사 부서는 기피 부서가 돼 버렸고 수사는 장기간 지연되기 일쑤다.
우리나라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의 ‘수사 절차’는 증거를 충분히 수집해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 확실해야만 기소할 수 있으므로 수사관은 판사와 마찬가지로 증거 및 법리의 판단 역량을 갖춰야 한다. 이 점이, 수사 절차가 아닌 조사 절차를 거쳐 상당한 이유(probable cause)만 있더라도 기소해 법정에서 증거를 갖춰 가는 영미법계 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대륙법계 국가의 수사는 본질적으로 판사와 동등한 자격을 갖춘 검사의 업무에 속하므로 검사의 수사권을 제한하는 법이 없고, 1차적 수사권을 사법경찰이 행사하더라도 검사는 사법경찰에 대한 수사 지휘를 통해 수사의 적정성과 효율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이러한 수사 절차를 갖춘 다른 국가들과는 정반대의 수사 시스템을 만든 것이므로 OECD 회원국들이 걱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검수완박이 시행된 2021년 이후의 범죄 처리 통계를 보면, 대표적 부패범죄인 뇌물수수죄의 기소 인원수가 2020년 249명에서 2021년에는 134명으로 대폭 줄어들었고, 그 전후의 인원수 추이도 마찬가지다.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의 OECD 회원국 중 순위는 2020년 37개국 중 23위에서 2021년 38개국 중 22위로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위 기소 인원수의 감소는 부패범죄가 줄었기 때문이 아니라, 경찰 등 수사기관이 제대로 수사를 못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2021년 전후를 비교하면, 강력·절도·폭행·마약·환경·사이버 범죄 등의 기소 인원수는 대체로 비슷한데, 사기·횡령·배임·경제·지식재산권 범죄의 기소 인원수는 3분의 1 또는 2분의 1 정도 대폭 감소하는 추세다. 이는 복잡하고 법리가 어려운 재산·경제 범죄의 경우 경찰의 수사 지연으로 기소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제는 공정하고 효율적인 수사 시스템으로 바뀌도록 지혜를 모을 때다.

문화일보 한석훈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 前 성균관대 교수
04-26 반도체는 인프라, 국가 투자 당연하다
반도체 산업 특성은 치킨 게임
위험 감수하며 투자해야 승리
일본은 재역전 노리고 총력전
대기업 특혜 시각은 위험천만
투자 위험 상쇄할 지원 불가피
반도체 활용 산업 성장도 중요
세계 주요국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인텔에 85억 달러(약 11조9000억 원), 대만 TSMC에 66억 달러(9조2000억 원), 그리고 삼성전자에 64억 달러(8조9000억 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일본도 TSMC 공장 건설에 이미 약 4조 원을 지원한 데 이어 추가로 약 8조 원을 지원할 계획이며, 독일도 인텔에 최대 14조 원 지원 계획을 세웠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기업들은 생존하기 위한 치킨 게임을 벌여야 했다. 공장 건설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불경기에도 생존하면서 경쟁사를 도태시켜 왔다. 대규모 투자에 따른 위험 때문에 새로운 공장 건설을 주저하다가, 결국 시장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동안 우리나라 기업들은 과감한 투자로 치킨 게임의 승자가 되면서 오늘날의 위치에 올랐다. 반면, 1980년대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을 다수 보유했던 일본은 치킨 게임 과정에서 투자를 망설이다 오늘날처럼 몰락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치킨 게임에서 승리해 왔지만,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삼성전자의 위탁생산 시장 점유율은 약 12%로, 대만 TSMC의 60%에 크게 못 미친다. 더구나 반도체 위탁생산 후발 주자인 미국 인텔이 삼성을 따라잡고 2위가 되겠다는 계획을 최근 발표했다. 두 회사 모두 세계 각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어 삼성은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 치킨 게임에는 세계 주요국의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즉,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반도체 기업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투자를 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이렇게 각국의 개입을 촉발한 계기는 미·중 간의 기술 경쟁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반도체 없이는 제품 생산이 어렵다는 데 있다. 즉, 도로망·전기·용수 등과 같이 주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인 것처럼, 산업 생산의 인프라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반도체 생산 공장을 확보하는 것이 정부의 몫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대만 TSMC에 설립 비용의 약 4조 원을 지원해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유치한 일은 반도체 산업의 인프라적 역할을 잘 보여준다. 일본은 반도체 공장 건설을 통해, 자국의 자동차 기업이나 이미지 센서 생산 기업을 위한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했다. 반면,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대만의 TSMC가 가져가고 일본 기업에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 산업에서 TSMC 공장의 주요 역할은 반도체 생산에 따른 직접적인 이익보다는 반도체를 사용하는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반도체 기업에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지만, 국내 일각에서는 여전히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대기업에 특혜를 준다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반도체가 국가 산업의 인프라라고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투자는 정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는 게 대기업에 주는 혜택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국가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투자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반도체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다양한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와 민간 기업이 역할을 나눠서 맡거나, 자금 투자 및 회수를 위한 방법도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 반도체 기업에 대한 지원도 인프라 구축의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반도체 공장 건설은 정부 보조금보다 훨씬 더 큰 투자가 필요한 경우가 많아서, 그것만으로는 개별 기업이 선뜻 투자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미국의 경우에도 정부가 지원하는 보조금에 비해 삼성전자의 투자비가 6배 이상이나 되기 때문에 여전히 투자 위험이 크다. 그러므로 정부는 단순히 보조금을 지급하는 일 외에도 다양한 자금 지원 및 그 회수 방안을 통해 투자 위험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중요한 산업 인프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도 보조금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반도체 산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이를 통해 반도체 산업은 물론 반도체를 활용하는 산업의 동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문화일보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04.27 서울도 학생인권조례 폐지, 학생·교사 권리 책임 균형을

▲26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서 집회 참석자들이 각각 학생인권조례 폐지 찬반에 대한 피켓을 들고 있다. /뉴스1
서울시의회가 관련 특위와 본회의를 잇따라 열어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처리했다. 2012년 이 조례를 제정한 지 12년 만이다. 다만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이 조례 폐지에 반대하며 재의를 요구할 방침을 밝혀 논란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서울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될 경우 지난 24일 최종 폐지된 충남 학생인권조례에 이어 두 번째 사례다.
학생인권조례는 2010년 경기도에서 처음 제정된 뒤 광주, 서울, 전북, 충남, 인천, 제주 등 주로 진보 성향 교육감 당선 시·도에서 차례로 제정됐다. 모든 교육 활동에서 학생 인권이 우선 보장돼야 하고 성별, 성적 지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학생들을 차별할 수 없도록 규정한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취지와 달리 조례가 학생 인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교권 붕괴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 7월 서울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을 계기로 이 조례 폐지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었다.
이 조례 영향으로 학생들이 잘못된 인권 의식을 갖고 ‘학칙을 어기고 수업을 방해해도 교사와 학교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사나 다른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한국교총이 지난해 7월 전국 교사 3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84.1%가 학생인권조례가 교권 추락에 영향을 미쳤다는 데 동의할 정도였다. 반면 이 조례가 없는 시도에서는 조례가 없다고 학생 인권을 소홀히 한다는 증거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교육계의 대체적 얘기다. 조례의 본래 목적은 유명무실해지고 부작용만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인권은 학생인권조례 유무와 관계없이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에는 상호 존중이 중요하고 자신의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점도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 자체가 중요한 교육이다. 이번 조례 폐지는 서울시의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 단독으로 처리한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를 대체하는 ‘학교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도 함께 처리했지만 역시 충분한 논의 없이 처리한 것이다. 시의회가 시간을 갖고 의견을 더 수렴할 필요가 있다. 교사·학생·학부모의 권리와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새로운 조례안이 나와 시의회 여야가 함께 처리한다면 교육에 한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4-29 日 추월하는 韓 수출 기적… 정치가 기업 발목 잡지 말아야
올해 1분기 한국 수출액이 1638억 달러로, 일본 수출(1683억 달러)의 97%까지 육박해 역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전년 동기 대비 8.3% 증가한 1분기 흐름이 이어지면 올해 수출은 처음으로 7000억 달러를 돌파해 일본을 추월할 가능성이 크다. 수출 입국 60년 만에 100배의 격차를 뒤집는 기적을 일궈내는 것이다. 한국은 중국·미국·독일·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5위 수출국에 오른다.
이런 물량 측면을 넘어 수출의 내용도 좋은 편이다. 일본은 자동차(전체 수출 비중의 17%)라는 ‘단발 엔진’에 치우친 반면, 한국은 반도체(수출 비중 15.6%)·자동차(11.2%)·일반기계·화학·정유 등이 골고루 호조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수출은 3배 가까이 늘었지만, 일본은 7000억 달러 박스권에 갇혀 있었다. 일본은 최근에야 수출 확대가 디플레이션 탈출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고 필사의 반격에 나서고 있다. 달러당 158엔을 수직 돌파한 초(超)엔저에다 강력한 리쇼어링 정책, 대만 TSMC의 구마모토 반도체 공장 유치 등 전방위적으로 총력전 양상이다. 올해 양국의 수출 경쟁은 한국의 반도체 업황 회복, 일본의 엔저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분석된다.
기적의 최대 비결은 개방경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주영·이병철·박태준·이건희 같은 걸출한 산업화 주역들도 큰 몫을 했다. 반도체·자동차 등에 승부수를 던지고 디지털화도 한발 앞서 성공시켰다. 하지만 과거의 신화가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수출 5위에 경합 중인 일본·이탈리아·프랑스 등에 언제 덜미를 잡힐지 모른다. 미국은 반도체 패권을 노골화하고 중국은 26일 보복관세를 명문화한 새 관세법을 통과시켰다. 글로벌 무역 환경 악화 속에서도 수출 기적을 이어가려면 더 과감하게 기업 자율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는 좌파가 장악한 입법부와 인기 없는 보수 대통령으로 인해 한국 경제의 기적이 끝나가고 있다고 했다. 후진적 정치가 문제다. 노란봉투법·중대재해처벌법 같은 반기업 노선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기업의 발목을 잡지 않는 게 예산 지원이나 환율 인상, 공급망 확보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문화일보 사설
04.30 과학기술계 고사시키는 ‘의사들의 천국’
경제가 발전하면 의료 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같이 증가한다. 그래서 지난 25년 동안 의사 수가 한국보다 많은 나라조차 의사 수를 꾸준히 늘려왔다. 하지만 한국은 2000년 의약 분업 사태 당시 의대 정원을 줄인 상태로 지금까지 오고 있다. 세계적 추세에 역행한다.
게다가 농어촌 특별전형, 중도 이탈자 충원 등을 폐지해 실질적으로 의대 정원은 더 축소됐다. 의대 입학 정원 축소로 인해 ‘2023 보건 통계’에 따르면 국민 1000명당 의사 수는 기존에 알려진 2.6명보다 훨씬 적은 2.23명으로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과 비교해도 가장 적을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까지 포함해도 최저 수준이다
세계는 의사 증원, 한국은 역행
한국 전공의 소득, 세계 최상위
고임금으로 과학 인재도 쓸어가
의사의 희소성 때문에 임상 현장에서 의사들의 임금(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한국 의사의 소득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의대 정원을 확대하지 않으면 더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전공의가 주 80시간을 근무한다고 가정할 경우 한국과 미국을 한번 비교해보자. 한국을 제외하고 의사 임금이 가장 높은 미국의 경우 전공의 평균 연봉이 8500만원(6만3400달러)이다. 한국 전공의의 평균 연봉인 7280만원(필수 과는 정부보조금 포함하면 8480만원)과 큰 차이가 없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의 절반에 못 미치는 것을 고려하면, 한국 전공의의 실질 연봉은 미국의 2배가량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한국에서 의사를 보조하는 의료전문인, 즉 PA(Physician Assistant)의 평균 연봉은 4500만원이다. 하지만 미국의 PA 평균 연봉은 1억6400만원(12만6010달러)이나 된다. 이처럼 한국의 전공의와 PA 연봉을 미국과 비교해보면 전공의를 포함한 한국 의사들이 얼마나 고소득자인지 자명해진다.
전공의는 직업인이라기보다는 수련생 신분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전공의는 과학기술 분야 수련생 신분인 포스트닥 연구원과 비슷한 위치다. 미국의 경우 포스트닥 연구원과 전공의의 평균 연봉은 8500만원 내외로 비슷한 수준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한국은 박사 학위 취득 후 포스트닥 연구원으로 취업했을 때 평균 3500만원 수준의 연봉을 받는다. 포스트닥 연구원의 연봉은 전공의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미국은 의학전문대학원 체제라서 배출되는 의사는 박사학위에 준하는 학위를 받은 인력이다. 하지만 한국의 의사는 학사학위에 준하는 학위를 받은 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면 한국 전공의의 연봉 수준은 비교할 나라가 없을 정도다. ‘의사 천국’이나 다름없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연봉 3500만원 수준의 수련생 신분인 과학기술계 분야의 포스트닥 연구원은 안정적 일자리조차 찾기 힘들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처참한 현실이다.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국가 예산을 몽땅 과학기술계에 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박사 후 수련생인 포스트닥 연구원과 학사 후 수련생인 전공의의 처우를 비교하면 적성을 따질 것도 없이 이공계 인력은 10수를 하더라도 의대에 진학하는 것이 개인에겐 합리적 선택일 것이다. 실제로 10수를 해서라도 의대에 가려는 기현상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거의 모든 이공계 인재가 목숨을 걸듯이 의대에 진학하려고 발버둥 치는 나라는 아마도 대한민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학생이 의대 진학을 위해 재수·삼수를 넘어 ‘N수’에 매달리다 보니 과학기술계는 과학을 이해하는 인력을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학문 후속세대 인력이 고갈되면서 과학기술계 전체가 고사하고 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정부가 국가 연구비를 아무리 많이 투자해도 과학기술 분야 경쟁력은 갈수록 뒷걸음질 치고 있다. 의대에서조차 의과학을 연구할 최소한의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전 세계 의대 순위에서 한국 순위가 점차 내려갈 지경이다.
반도체·원전·자동차·철강 등 지금 대한민국 경쟁력의 원천은 의대 블랙홀이 없던 1980~90년대에 과학기술계로 진출했던 인재들이 일군 성과다. 이 세대를 이어갈 과학기술 인재가 없다면 국가의 장래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부는 의대 개혁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길 바란다.

중앙일보 홍성출 전북대 의과대학·미생물학교실 교수
04.30 前사무총장 아들 '세자'라 불렸다…"충격적" 선관위 채용비리

▲지난해 5월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이 고위직 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 관련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긴급회의에 참석하던 모습. 연합뉴스
‘조작, 내정, 특혜, 청탁, 인멸’
감사원이 30일 발표한 ‘선거관리위원회 채용 등 인력관리실태’ 수사요청 발표문에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지난해 7월부터 선관위 고위직 자녀의 특혜채용 감사를 진행했던 감사원은 이날 부당채용에 관여한 혐의로 “선관위 전·현직 직원 27명을 지난 29일 대검찰청에 수사 의뢰했다”고 밝혔다. 비위 혐의에 대한 추가 확인이 필요해 수사 참고자료를 송부한 22명을 더하면 감사원이 검찰에 넘긴 선관위 직원은 49명에 달한다. 수사의뢰 명단엔 선관위 자체 고발 등으로 경찰과 검찰 수사를 받았던 중앙선관위 김세환·박찬진 전 사무총장과 송봉섭 전 사무차장도 포함됐다.
감사원은 2013년 이후 실시된 지방 선관위의 경력채용(167회) 전수조사 결과 모든 회차에서 규정 위반(800여회)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중앙선관위 경력채용(124회)에서도 400여회의 규정 위반이 적발됐다. 전체 선관위 직원 규모가 3000명인 점을 고려하면 약 10%에 달하는 직원 채용에서 문제점이 있었다는 뜻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브리핑에서 선관위를 ‘가족 회사’라 지칭하며 “감사원 생활 24년 동안 이렇게 공직자를 뽑는 기관은 처음이라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자녀 특혜 채용 의혹을 받는 송봉섭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차장이 지난 3월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송 전 차장은 2018년 1월 충북선관위 공무원 경력 채용 당시 한 모 전 충북선관위 관리과장에게 딸의 채용을 청탁한 혐의를 받는다. 법원은 당시 영장을 기각했다. 뉴스1
감사원에 따르면 김세환 전 사무총장 아들 김모씨는 강화군청에서 일하다 2020년 1월 인천시 선관위로 이직했다. 정원 초과였던 인천선관위는 김씨 지원 뒤 경력 채용 인원을 추가로 배정했고, 김씨 결혼식 때 축의금 접수를 했던 선관위 직원이 김씨 면접에 투입돼 만점을 줬다. 선관위 직원들은 김씨를 세자라 불렀다.
김 전 총장의 후임 총장이었던 박찬진 전 사무총장 딸 박모씨는 광주 남구청에서 근무하다 2022년 3월 전남선관위에 경력 채용됐다. 박씨 채용 과정에서 전남선관위는 외부 면접위원에게 점수 없이 서명만 기재한 평정표를 요구했고, 선관위 인사담당자가 사후에 면접 점수를 조작하며 박씨는 합격했다.
송봉섭 전 사무차장은 충남 보령시에서 일하던 딸 송모씨가 2018년 3월 충북 선관위로 이직하는 과정에서, 인사담당자 등에게 채용을 청탁했다. 일주일 뒤 송씨만 참여하는 비공개채용이 진행됐고, 송씨는 만점을 받고 합격했다.

▲이번 감사를 지휘한 최달영 감사원 사무총장이 지난 2월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한덕수 국무총리의 발언을 듣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지방 선관위 상임위원과 국장·과장 자녀가 부당 채용된 사례도 즐비했다. 서울선관위 상임위원으로 근무했던 A씨의 자녀는 2021년 10월 서울선관위에 경력 채용됐는데, 당시 면접위원이 평정표를 연필로 작성했고 이후 인사담당자가 점수를 조작해 합격할 수 있었다. 관련 업무를 맡았던 선관위 관계자는 내부 감사가 시작되자 서류함을 “갈아버리라”고 지시한 정황도 적발됐다. 감사원은 선관위 관계자들이 직원 자녀가 속해있던 군청의 군수를 찾아가 전출 동의를 압박해 경력 채용을 진행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감사원의 조치가 이중 수사의뢰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 전 사무총장은 2022년 12월 자녀 특혜채용 의혹과 관련해 경찰에서 무혐의를 받았고, 박 전 사무총장과 송 전 사무차장은 지난해 5월 중앙선관위 자체 수사의뢰로 검찰 수사 및 재판을 받는 상태다. 김 전 총장은 2022년 3월, 박 전 총장과 송 전 차장은 지난해 5월 각각 자녀 특혜채용 의혹이 불거진 뒤 사퇴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추가 수사 의뢰와 관련해 “일부 새로운 혐의가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선관위는 감사원의 선관위 감사 적법성을 두고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진행 중인 양 기관의 권한쟁의심판을 주목하고 있다. 감사원 관계자는 브리핑에서 “수사 사안에 무혐의가 나오면 후폭풍이 클 것”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것은 두렵지 않다. 헌법기관인 선관위는 상식에 맞지 않는 조직 운영을 해왔다”고 밝혔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