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사]/ 〈281〉트로이 예언자들의 경고 - 〈300〉고려거란전쟁의 영웅들
[임용한의 전쟁사] 역사학자 동아일보 2023
2023-09-19
〈281〉트로이 예언자들의 경고

헬레니즘 시대는 대리석 조각의 전성기였다. 그중에서 최고의 걸작이 라오콘 상이다. 거대한 바다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아버지와 두 아들을 묘사한 이 작품의 배경은 트로이 전쟁이다. 오랜 포위에 트로이 최고의 장수, 헥토르까지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연합군은 도저히 트로이를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포기 직전에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 작전을 제안한다. 트로이 목마 안에 병사를 숨기고, 그리스군은 철군한 척한다. 트로이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리스군이 남겨둔 목마를 승리의 상징으로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때 트로이의 예언자 라오콘과 카산드라가 이것은 그리스군의 흉계라고 경고한다. 라오콘이 목마의 배를 창으로 찌르는 순간, 그리스 편이었던 포세이돈이 거대한 바다뱀을 보내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물어 죽인다. 라오콘 상은 이 극적인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카산드라도 목마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그리스 신들이 이미 카산드라가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저주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날 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성문을 열었고, 트로이는 멸망한다.
작품으로 라오콘 상은 절망하는 인간, 죽음의 공포, 자신과 아들의 죽음과 조국의 멸망을 막지 못하는 좌절을 온몸과 표정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듣는다. 그런데 라오콘의 진짜 고뇌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이 아닐까? 트로이 시민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에 너무나 뻔한 계략에 넘어갔고, 라오콘과 카산드라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트로이 멸망의 교훈인 동시에 고대 그리스 민주정의 고뇌였다. 그리스는 민주정의 전성시대를 열었지만, 진실보다는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망, 그 욕망을 이용하는 교활한 정치인들의 선동을 이겨내지 못했을 때 무너지고 말았다. 라오콘의 절망과 카산드라의 저주는 민주정의 고뇌에 대한 경고이자 절망이다. 작가는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282〉독립의 영웅, 그러나 나의 적

영국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거의 병합했을 때, 스코틀랜드를 구한 2명의 독립영웅이 있다. 윌리엄 월리스와 로버트 브루스다. 월리스는 영국군에 잡혀 처형된다. 브루스는 보다 끈질기고 운도 좋았다. 망명과 도망을 반복하며 저항하다가 마침내 영국군을 몰아내고, 로버트 1세로 즉위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브루스는 월리스를 배신하고 그를 영국군에 넘기지만 나중에 이를 후회하고, 영국군과 싸우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독립전쟁이란 거국적 투쟁의 장에서 두 사람이 데면데면했던 것도 사실이다. 두 사람의 정치적 지지 기반이 달랐고, 개인적 야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독립전쟁이란 대의 앞에 두 사람의 정치적 혹은 계급적 갈등을 융합하고 화해하는 것은 두 사람의 몫이 아니라 역사의 몫, 후대인의 몫이다. 월리스와 브루스의 화해는 쉽다. 두 사람을 갈랐던 정치적 분열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은 그렇지 못하다. 20세기를 나눈 이념의 벽은 현실 사회에도 그대로 존재한다.
육사에서 홍범도 흉상 철거론을 두고 한쪽에서는 홍범도의 독립운동 공적은 인정하지만 공산당 활동, 심지어 우익 독립군을 공격한 일은 찬양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쪽에서는 흉상 철거는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행위이고 심지어 친일 행위라고 비난한다.
육사에서 세계의 전쟁영웅, 알렉산드로스와 나폴레옹, 로멜의 흉상을 세웠다면 어떨까? 그것이 학살과 약탈, 침략전쟁, 파시즘을 지지한다는 메시지일까? 역사적 평가는 학자의 몫이고, 역사 인물의 교훈은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정치가 개입할 필요가 없는 곳에 정치가 개입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지만, 해결책은 올바른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정치 과잉의 해소이다. 티셔츠 색깔만 봐도 “당신 저쪽 아니오?”라고 추궁당하는 사회가 정상은 아니다. 정치인이고 지식인이고 그걸 해소하려는 사람보다 이용하고 앞장서는 사람이 더 많은 건 비정상을 넘어 위험 단계이다.
〈283〉 나라가 열리고, 군대가 생기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선선하고, 설악에 단풍이 우거지는 때, 1년 중 가장 놀기 좋은 시기에 국경일이 붙어 있다. 아니 있었다. 10월 1일 국군의 날과 3일 개천절이다. 지금은 10월 1일이 공휴일이 아니지만, 1991년까지는 최고의 황금연휴였다.
국군의 날과 개천절이 이어진 건 순전히 우연이지만, 생각해 보면 운명적인 만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가와 군대는 한 몸이다. 군대가 없으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군대의 창설과 유지가 국가의 탄생 목적이었다.
국가의 탄생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국민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고, 소수의 지배 집단이 다수를 억누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국가의 존재 이유와 의무가 한 가지만은 아니며, 인간은 자신이 만든 모든 제도와 도구를 악용하는 놀라운 재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탄생의 본질은 군대, 즉 국방이다.
국가의 역할이 복지와 정의 구현이든, 지배층의 폭압이든 국가는 권력이 된다. 질서와 가치를 강요하고, 물리력을 행사하고, 조세라는 명목으로 내가 열심히 번 돈을 뜯어갈 권한을 보유한다. 정치가와 관료는 권력이 되어 군림한다.
옛날 사람들이라고 바보가 아니다. 이유 없이 복종하고 굴종하지 않는다. 이런 강압과 굴종조차 정당한 체제로 받아들였던 이유는 우리를 보호할 힘, 무력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고, 누군가에게 살해되거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선동가들은 언제나 군대를 비난하고, 국가의 의무를 땀 냄새 나는 역할보다 달콤한 이익, 당장 내 손에 쥐어지고, 눈을 감으면 향내가 떠오르는 이익으로 변질시키고자 한다. 국방비를 없애면 오만가지 복지정책이 가능하다. 병역이 노예 생활과 무엇이 다른가? 전쟁은 노인이 결정하고, 전장에서 죽어 가는 건 젊은이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점토 문서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도 이런 주장들이 소개되어 있다. 아마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은 우리가 아는 경우보다 몇만 배는 더 많을 것이다. 대부분이 파멸하고, 그들의 문명은 땅에 묻혔기에 덜 알려졌을 뿐이다.
〈284〉나라의 품격

우회적인 포탄 지원을 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군사 지원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한국이 벌써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수혜 국가로 지목되고 있다. 그 이유가 한국 방산 제품의 급격한 수출 증가이다. 이 선봉에 선 파트너가 폴란드이다. 폴란드는 한국과 손잡고, 현지에 생산시설을 세우고, 유럽의 한국 방산기지가 되고자 한다. 나아가 여러 산업 전반에서 한국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유럽의 많은 나라 중에서 폴란드가 한국에 호의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폴란드는 영토도 작지 않고, 군대와 국민의 무풍도 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유럽의 중간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겪을 수 있는 수모와 비극은 다 겪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 러시아 침공의 선봉대가 폴란드군이었다. 5만의 폴란드군이 선두에서 싸우다가 산화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국민들이 자유폴란드군, 러시아군 소속, 독일군 소속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최전선에서 정말 열심히 싸웠다. 대서양 항공전, 노르망디 전투, 마켓가든 작전, 몬테카시노 전투 등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냉전이 시작되자 모두에게 배신당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래서 폴란드인들은 강한 나라의 의미를 안다. 나토 회원국들이 정규군을 축소하고, 종이 군대로 전락할 때도 폴란드는 16만의 상비군, 20만의 예비군을 유지했다. 나토 소속이면서도 폴란드가 한국을 파트너로 환영하며, 독일, 영국, 미국의 무기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속셈도 과거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배경이 있다. 아직 꺼지지 않은 국가정신이다. 국가정신이란 단어가 권위주의를 연상시키는 어감이 있지만, 마땅한 단어가 없다. 폴란드도 근래에 징병제를 폐지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강군을 유지하며, 강한 군대의 필요성을 국민이 잊지 않고 있다. 역사를 보면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라도 많다. 고난을 겪었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더 비굴해지고 몰락하는 나라도 많다. 국방은 국민의 강한 의지와 역사에 대한 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두 나라가 방산과 산업만이 아니라 건전한 국민적 투지도 공유하며, 시너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285〉중동 문제에 해법이 있을까?

하마스의 습격이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이스라엘은 복수 작전을 시행 중이다. 지난 며칠간 세계 여론은 하마스의 야만적인 행동과 학살을 규탄했지만,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유린하면 여론의 방향이 또 바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좀 더 나아가 중동 문제의 고민은 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목할 수 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유엔이 이 문제를 좀 더 현명하게 처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을 돌이킬 수도,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울 수도 없다.
이스라엘에 전 세계가 압력을 넣어서 팔레스타인인에게 더 많이 양보하고, 지원해서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면 어떨까? 1990년대 이후로 그 방법을 시도해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강경파는 이 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는데, 현 이스라엘 정부와 하마스가 강경파의 대표주자다.
이스라엘의 주장은 화해 정책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오히려 하마스를 키웠고, 이스라엘 경제에 부담만 늘린다. 팔레스타인이 독립 국가로 자리 잡으면, 온건파와 강경파가 합세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한다.
팔레스타인의 주변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에 팔레스타인 정착촌을 확대하고 국가 형성을 지원하라고 요청하면 어떨까? 모두가 도리질이다. 팔레스타인인의 한이 넘쳐 극렬 세력이 확산되었다. 정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은 모든 정부가 꺼려 한다. 솔직히 1948년부터 이스라엘과 서방을 비난만 했지, 팔레스타인을 제대로 지원한 국가는 단 한 나라도 없었다.
유대인이 동정을 받은 건, 2000년간 나라 없는 백성의 수모를 겪을 대로 겪은 탓이었다. 지금은 그 설움을 팔레스타인에 전가하고 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정의로운 폭력은 없다. 누가 원인 제공자인가? 강대국, 제국주의의 횡포, 약자의 설움,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인도주의적이고 정의로운 해법은 찾을 수가 없다.
〈286〉우리는 머스킷을 왜 못 만들었나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주인공들과 달타냥은 검술의 달인들이다. 그런데 이 ‘총사’란 원래는 검이 아니라 머스킷으로 무장한 보병(Mousquetaires)이다. 머스킷은 임진왜란 때 들어온 조총에서 진일보한 총이다. 조총은 화약 접시에 흑색 화약을 뿌리고, 담뱃불처럼 끈으로 만든 심지에 붙인 불로 점화했다. 심지가 젖거나 바람이 불면 발사할 수가 없었다. 머스킷은 심지가 아니라 부싯돌을 사용한다. 방아쇠를 당기면 격발 장치가 부싯돌을 마찰하고, 여기서 발생한 불꽃이 화약을 점화한다. 간단한 아이디어 같지만 이 발사 장치를 만들려면 나사와 정밀한 금속 가공 기술이 필요했다.
조총은 왜군이 조선에 소개했지만, 머스킷은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하멜 일행이 가지고 왔다. 머스킷을 본 조정의 대신들은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복잡해서 만들 수 없는 총이라고 제작을 포기해 버렸다. 그러고는 19세기 말 열강의 침략이 닥쳤을 때까지 화승총에 만족하며 버텼다.
이젠 제발 이런 이야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현재 우리나라는 제철, 금속 기술 강국이다. 나사를 못 만들지도 않는다. 머스킷은 포기했어도 K9 자주포는 세계 1위 제품이고, 방산은 전차, 전투기로 발전하고 있다.
그래도 궁금해진다. 이런 저력을 가진 나라와 국민이 300년 전에는 왜 그랬을까? 가장 중요한 원인은 농본사회와 통제경제 체제이다. 국가가 전 산업을 관장하고 자원과 산물을 분배한다. 이익을 죄악시하고, 초과이윤이란 요상한 개념을 만들고, 자본은 범죄시한다. 평민, 노비가 돈을 벌면, 아니 돈을 벌 자유로운 기회를 주면 신분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술자, 상인을 천시하고 육성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기술을 천시하게 되고, 공무원 시험에만 목을 맨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 장영실과 거북선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국가가 신무기와 기술 개발에 노력은 했다. 하지만 자유와 경쟁의 가치를 부정하고, 민간의 자유로운 경쟁과 노력을 막으니 머스킷에서 막혀 버린 것이다. 차라리 그때는 이해가 가는데, 21세기인 지금도 꽉 막힌 사고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287〉뉴 밀레니엄과 가자지구의 폭음

이유는 모르겠는데, 세기가 바뀔 때마다 인류는 장밋빛 꿈을 꾼다. 19세기 때도 그랬고, 20세기, 21세기도 그랬다. 사람들은 기술의 혁신, 인류의 이성과 양심의 진보라는 기대로 가득 채워진 밀레니엄이란 애드벌룬을 띄웠다. 그러나 이 풍선이 벌집이 되고 피를 쏟아내는 데는 10여 년이면 충분했다. 벌써 3번째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공습하면서 최대한 정밀타격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민간인 희생이 없지는 않겠고, 더 큰 희생은 전기, 식수, 의료, 생필품의 결핍에 의해서 발생하겠지만, 반세기 전에 도시 상공에 떨어지던 무자비한 공습과 비교하면 놀랍기는 하다. 정밀타격 기술이 발전한 건 인정해야 한다.
과거에 전쟁은 발생 자체를 막아야지,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약탈, 폭력, 무자비한 전쟁범죄를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군용식량이 보급되었지만, 전쟁의 잔인함을 막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전자유도 폭탄, 위성카메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인류는 이제 전쟁도 야수의 얼굴을 벗고, 폭력의 최소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기대도 무너졌다.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인간의 이기적인 사고이다. 다른 나라 전쟁에는 수십만 명이 죽고 고통을 받아도, 지극히 이상적이거나 이성적인 평가를 내리던 사람이 자기 손가락에 작은 가시만 박혀도 바로 이기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으로 돌변한다. 가시가 작은 가시가 아니라 폭탄이면 이성의 붕괴는 상상을 초월한다.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는 폭탄에 의한 합리의 붕괴를 보고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논의는 진영논리와 이념에 의한 지성의 붕괴를 보여준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정말 답이 없다. 앞으로 오랫동안 우리는 반복되는 비극을 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분열은 아직 기회가 있다. 우리 사정과 전쟁 중인 저쪽 상황을 비교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닐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인간이 이기심을 버리고, 합리를 붙잡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저곳의 극렬함을 남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288〉소크라테스의 좌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해 곳곳에서 “결국 선을 넘었다”는 탄식이 들린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선을 넘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하마스의 총성이 울린 그날부터 상황은 철로 위로 달리는 기차와 같았다. 놀람의 역, 참혹의 역, 충격의 역을 차례로 지나고 있을 뿐이다. 이 불 뿜는 기차를 세울 방법이 없다. 제3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이스라엘이나 하마스나 자신들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들 각자가 피해자이고, 각자가 분노하고 있고, 중단과 타협은 패배이자 더 큰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피는 피를 부르고, 분노와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부른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사정은 우리가 제일 잘 안다. 지난 80년간 겪었고 겪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유는 신을 믿지 않고 청소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명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 탄압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처음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패권 전쟁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민주정과 과두정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전쟁이 됐다.
그냥 전쟁과 이데올로기 전쟁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동족, 동지, 이웃은 일반 전쟁에서 같은 편이 되지만, 이데올로기 정치 투쟁에서는 모두가 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원수처럼 가혹하게 제거하는 적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과격함을 비판했고, 자신이 그 제물이 됐다.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론을 읽어 보면 별로 자신을 변호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자신을 구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헛된 노력임을 자신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제일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행동으로 소크라테스는 불멸의 명예를 얻었지만 자기 생명도, 증오와 이기심의 늪으로 빠져들어 타락하고 멸망하는 아테네도 구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도 동료 시민을 화해시키지 못하는데, 이 전쟁의 분노를 누가 제지할 수 있을까. 더 무서운 건 세계로 확산되는 분노와 갈등이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대전 앞에 서 있다.
〈289〉종교 갈등만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날 중동 정세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이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정복 군주였다. 아라비아 부족들의 힘을 결집해 왕성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무함마드의 두 아들은 일찍 죽었고, 그는 후계 방식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죽었다. 무슬림 지도자들은 회의 끝에 후계자를 선출하고 그에게 칼리프란 명칭을 붙였다.
칼리프 자리를 두고 내전이 발생했다. 3대 칼리프 우스만이 살해되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였던 알리와 우스만의 집안인 우마이야가(家)가 대립했다. 이때 알리를 추종하던 집단은 무함마드의 후손만이 칼리프가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시아파의 시초이다. 반면 우마이야가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능력을 지닌 자격자가 칼리프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이 수니파이다.
680년 알리는 소수의 추종자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가 우마이야 병사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 공격에 카와지리파가 가담했다. 이들은 알리 추종자였다가 알리가 우마이야가와 휴전을 맺은 것에 분노해서 탈퇴했던 집단이었다. 이 사건은 시아파의 숙명을 함축한다. 시아파는 무슬림 사회에서 소수파로 탄압받는다. 현재도 약 16%만이 시아파이며, 수니파가 83%를 차지한다.
소수자의 숙명인지 시아파 내에서는 카와지리파 같은 극단적인 강경파가 득세하거나 활약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극단적이고 극적이었던 종파가 ‘어새신’으로 알려진 암살자 집단 이스마일파였다. 이 전설적인 집단은 이란을 지나 아프가니스탄까지 갔다가 마지막에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까지 쫓겨 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시아파라고 다 강경파는 아니지만 소수파라는 사정, 투쟁의 역사, 편견이 겹치면서 오늘날에도 강성 이미지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물론 종교가 모든 현상의 원인은 아니다. 현재 시아파의 종주국이 이란인데, 이란이 수니파 지역과 척을 진 것은 이슬람이 탄생하기도 전,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 수메르 문명 시절부터였다. 말 그대로 문명이 탄생하던 시기부터 라이벌이었다. 여기에 종교와 국제 정세, 이데올로기가 얽히고 뒤엉켰다. 이래서 중동 문제가 쉽지 않다.
〈290〉거란전쟁과 병자호란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거란이 고려를 집요하게 침공했다. 1018년 마지막 침공 때, 거란의 맹장 소배압은 기필코 고려를 굴복시키겠다는 마음에 과감한 시도를 한다. 기병의 기동력과 현지 조달 능력을 무기로 거점도시, 중간 보급기지 확보를 생략하고 단숨에 개경까지 달려 단기 승부를 노린다.
소배압의 모험은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개경 사수를 결심한 현종의 더 대담한 결정과 고려군의 맹렬한 추격 덕에 실패하고 만다. 개경 입성에 실패하는 바람에 거란군은 굶주림과 피로를 해소할 기회를 놓쳤다. 지치고 낙담한 몸으로 회군하던 거란군은 귀주성 앞 벌판에서 강감찬의 고려군을 만나 전멸한다. 이것이 귀주대첩이다.
거란의 진짜 목표는 송나라 정복이었다. 전군을 동원해 송을 침공했을 때 배후에 있는 고려나 여진이 거란을 치면 양면협공에 걸린다. 거란은 먼저 여진과 고려를 정복해 이런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600여 년 후에 청이 조선을 침공했다. 병자호란이다. 이 침공의 이유도 거란과 똑같았다. 중국의 왕조가 송에서 명으로 바뀌어 있었을 뿐이다. 전술적 목적은 좀 다르지만, 선봉 부대가 기병으로 전격전을 시도한 것도 유사하다. 하지만 척화파는 청이 조선을 침공하는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청이 설명해 줘도 믿지 않았다. 청의 군대가 밀어닥쳐도 허세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청 태종이 직접 왔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청 태종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겠는가. 이 전쟁은 변방의 장수가 감정적인 이유로 침공한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사람들이 거란전쟁의 교훈은 왜 망각했을까. 이념과 사상을 먼저 세우고, 역사에서 교훈을 찾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배운다기보다는 역사를 이용한다. 목적에 맞춰 현실을 왜곡하고,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외쳤다. 그 결과가 삼전도의 굴욕이다. 다시 400년이 지났다. 비슷한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걸까. 인간의 지성에 한계가 명확한 것일까. 2023-11-21
〈291〉땅굴, 난징 성을 무너트리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서 땅굴이 화제가 되고 있다. 전쟁사에서도 지하터널은 자주 등장한다. 공성전에서 땅굴은 특별히 유용했다. 고대 아시리아의 전쟁화 부조 중에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서 성 아래 지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수비하는 측도 이를 예상했는지, 지하에 맹수를 풀어 놓았다.
중국에서는 수비 측이 땅굴을 파는 소음을 감지하기 위해 대나무나 항아리를 박아 지하에서 나는 소음을 탐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때 탐지자로 청각이 발달한 시각장애인을 고용했다고 한다. 터널을 탐지하면 위에서 폭발물을 터트리거나 충격을 주어 무너트렸다.
태평천국의 난 때, 태평천국의 수도였던 난징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청군은 성벽 아래로 터널을 팠는데, 적의 탐지를 피해 몰래 파는 땅굴이 아니라 대놓고 거대한 터널을 뚫었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자동차나 기차가 들어갈 만큼 컸다고 한다. 성벽 아래로 깊은 지하에 크고 튼튼한 터널을 구축하니 수비 측이 탐지해도 무너트리거나 작업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청군은 터널 안에서 폭약을 터트려 성벽을 무너트렸다.
북한도 남침용 땅굴을 여러 개 팠다. 지금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땅굴이 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돈다. 오래전 민간인 탐사대가 활약한 적도 있다.
전쟁에서 지하터널의 용도는 공성전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병력의 배치와 이동을 숨기고, 적을 기습하기에도 유용하다. 이오시마(이오섬) 전투, 베트남 전쟁에서 이런 식의 땅굴 운용이 미군을 무척 괴롭혔었다.
하마스의 땅굴도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거나 우려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모든 전술은 완벽하지 않다. 장단점이 있고,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상대의 준비와 대응 전술을 연구해야 한다. 난징 성을 함락시킨 청군의 터널은 기존의 관행과 적의 탐지 방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반면 하마스의 지하터널은 그 반대였다. 이스라엘은 대비를 철저히 했고,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준비한 전술을 예측하거나 대응하는 데 실패했다. 이것이 이번 전쟁의 군사적 교훈이다.
〈292〉12월의 전쟁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미군들은 푹푹 삶는 여름의 무더위, 체감기온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악몽처럼 기억한다. 고통스럽기는 겨울의 추위가 더 기억에 남는 듯하다. 장진호 전투, 1951년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등, 최악의 전투가 겨울에 몰려 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겨울은 전쟁의 계절이었다. 거란, 여진, 후금 등 만주의 유목민족은 가을에 군대를 소집해서 겨울에 한반도를 침공했다. 유목민족은 민과 군이 일치하는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1월이 되면 생업 전선에 복귀하기 위해 전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음력과 양력에 따라 달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거란전쟁, 병자호란의 주요 전투가 12월에 몰려 있다.
현대인에게 12월은 한 해의 소회, 밤거리를 밝히는 크리스마스의 불빛, 송년회로 채워진 달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가장 야속하게 느껴지는 달인데, 희한하게 이 한 달에 시간의 속도가 제일 빠르다.
사실 과거라고 12월이 전쟁의 위협으로 채워진 시기는 아니었다. 조선 500년 동안 북방민족의 겨울 침공은 정묘, 병자호란 2번 있었다. 크리스마스와 백화점은 없었지만 조선시대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소회로 연말연시를 맞이하고 보냈을 것이다.
산업사회가 된 현대에는 꼭 겨울을 택해 싸워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굳이 12월에 전쟁을 떠올려야 할 마지막 이유도 사라졌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전쟁은 잊고 평화로운 세모를 즐기면 되는 걸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번째 12월을 넘기고 내년까지 지속될 기세이다. 이스라엘-하마스의 전쟁 또한 종전의 해법도 기약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는 외국의 전쟁을 알 수도 없었지만, 지금은 바로바로 소식이 들어오고 세계 경제가 연결되어 지구 반대편의 전쟁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 이젠 1년 365일이 전쟁의 계절이다. 12월이 선물하는 특별한 평화와 소망의 감정을 평생토록 영위하고 싶다면 우리는 불편하더라도 12월이 전쟁의 계절이었다는 사실을 마음 한편에 걸어 두어야 한다.
〈293〉역사는 진보한다

대학 캠퍼스에 하루 종일 최루탄 냄새가 자욱했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필자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짓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역사에 관한 지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지, 군사독재가 언젠가는 끝날 거야라는 소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역사의 진보가 기술문명의 진보를 의미한다면 맞다. 기술문명은 언제나 발전하고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법과 제도는? 진보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다. 반역제는 삼족을 멸한다는 식의 가혹한 연좌제, 고문, 노예제도, 그 외에도 어이없고 잔혹하고, 몰상식한 수많은 제도가 이젠 사라졌다. 과거에는 합법이고 상식이고 관행이던 수많은 일들이 지금은 불법이고 어쩌다 공개되면 대중의 무서운 지탄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것이 진보라면 진보지만, 나는 변화에 적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어른 앞에서 안경을 쓰면 실례였다. 그땐 안경이 귀하고 고급 수입품이어서 보통 사람은 만질 수도 없었기에 그랬다. 지금처럼 안경 쓴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안경을 벗으라고 요구했다간 사회가 멈춰버릴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어떨까? 전혀 달라진 바가 없다. 21세기 전쟁에서도 몰상식하고 잔혹한 범죄가 여전히 저질러지고 있다. 그래도 옛날보다 인도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기술의 발전과 비밀 유지의 어려움 때문이다. 눈을 가리면 야수성은 바로 폭발한다.
전쟁을 지켜보는 사람들, 지식인의 편협함, 당파성, 무지도 달라진 바가 없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인간의 양심과 분별력은 태초의 크기를 못 벗어난다.
내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게든 결론이 날 것 같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1차 종결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의 길은 아니다. 우리는 곧 새로운 야수를 발견할 것이다.
〈294〉강한 것과 파멸적인 것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지하 터널에 바닷물을 집어넣는 방안을 생각 중이라는 보도를 처음 들었을 때, 설마 했다. 전쟁 중에는 별별 아이디어와 별별 소문이 다 도는 법이다. 이스라엘의 수공도 그런 유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정말로 해변에 펌프를 설치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이스라엘은 원래 전쟁에서 ‘공학적 괴물’을 창조하는 데 도가 튼 나라다. 욤키푸르 전쟁 때는 수에즈 도하를 위해서 초대형 롤로부교를 만들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수입한 전차가 가솔린을 원료로 사용하는 약점이 있었다. 가솔린은 발화가 쉬워 쉽게 폭발한다. 이스라엘은 바로 디젤 연료로 개조했다. 말이 쉽지, 엔진이 아예 다른데, 이런 능력은 탁월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무기 개조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국가가 됐다.
무기 개조 능력은 능력이고, 뭐든 과하면 탈이 난다. 손자병법 12장 화공편에 “수공으로 공격을 돕는 것은 강한 것이다. 수공은 적을 단절시킬 수 있고, 화공은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릴 수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화공을 폭격이라고 보면 손자가 말한 화공, 수공의 의미가 현재 전쟁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터널 침수는 하마스의 혈관, 팔레스타인 주민과 하마스의 신경회로를 끊는다.
손자병법은 원칙과 사고에 중심을 둔 병서다. 유일하게 기능적인 파트가 화공과 첩보전이다. 굳이 화공과 수공을 넣은 의미가 무엇일까? 효과가 강력해서가 아니다. 그만큼 파괴적이고, 무차별적이란 의미다. 그만큼 후유증도 크다. 그만큼 사용을 조심하라는 의미가 크다. 무차별 살상은 전쟁의 승리로 얻는 자신의 성과마저도 파괴할 수 있다.
테러도 하다 보면 점점 과격해지고, 효과에만 집착하면서 후유증, 역작용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하마스가 저지른 실수가 그것이다. 이스라엘도 하마스에 대한 맹공에 성공하면서 똑같은 길로 빠져드는 것 같다.
〈295〉크리스마스와 전쟁의 그늘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소설과 영화의 낭만적인 소재였다. 2023년에 세계는 정말로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경험하게 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가자 지구, 레바논, 예멘, 미얀마, 남수단, 세계 곳곳에서 포성이 요란하다. 진짜 현실의 전쟁에서 크리스마스의 낭만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동방정교회 지역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휴전은 고사하고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펼쳐질 것 같다.
더 암울한 전망은 내년 크리스마스도 세계는 전쟁의 그늘 속에서 맞이해야 할 것 같다는 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서로 지쳐가고 있으므로 내년에 휴전까지는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휴전은 말 그대로 숨 고르기 작업일 뿐이다. 당장의 포성은 그친다고 해도 유럽 전체와 러시아, 세계는 군비 확장과 집단안보 체제 강화에 돌입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동원군이 집으로 귀환하고, 하마스의 도발은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 수 있지만, 가자 지구의 긴장은 여전히 높을 것이고, 우리는 테러, 암살, 불법 감금, 폭력적 진압, 인권유린과 같은 불유쾌한 소식을 계속 들어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의 분쟁은 지속적으로 여기저기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곳곳의 나라에 군벌, 부족전쟁의 시한폭탄이 여전히 존재한다. 소련과 중국의 무기와 자본까지 활발하게 진입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자그마한 힘의 변화, 원조, 무기 지원이 힘의 균형을 당장에 역전시키고, 분쟁을 유발한다. 세계적으로 집단안보 체제와 신경제블록이 가속화되면 아프리카나 중동의 정치 지형은 더 쉽게 영향을 받는다.
과거에는 강대국들이 경제적 안정과 성장을 무기로 접근했다면 2024년부터는 무기와 힘을 협상 소재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첨단 무기는 고액이고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력의 결집이라는 공식이 있었다. 드론과 로봇의 등장은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하이테크 장비의 보편화라는 우려할 만한 상황을 조성해 놓았다.
국지적 분쟁은 늘고, 테러는 과감해지고, 강대국들은 진짜 거대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을 비축해 가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2024-01-02
〈296〉1월은 위기의 달이었다

1011년 1월 1일, 음력 날짜지만 거란 성종이 고려의 수도 개경에 입성했다. 26년간 지속된 고려와 거란의 전쟁 중에서 수도가 함락된 유일한 날이었다. 거란군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철수했지만, 고려는 건국 초의 기록을 상실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참전해서 중부 전선까지 밀고 내려오자 정부는 다시 서울을 버리고 철수한다. 다 이겼고 통일이 목전이라고 생각했던 우리 국민은 중공군의 개입과 한순간에 무너지는 유엔군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개전 3일 만에 수도를 빼앗긴 것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이때는 겨울이어서 피란길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개전 초와 달리 이때는 북한에서 대규모 피란민이 같이 남하하면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나라가 국방에 실패하면 국가가 사라지기도 하고 민족 자체가 소멸하기도 한다. 나라와 수도를 되찾는다고 해도 후유증이 수십 년, 수세대 이어진다. 고려는 결국 거란족을 몰아냈고 오히려 거란족이 국방의 실패로 소멸해 버렸지만 우리는 1000년을 지나 지금까지 생존하고 번영 중이다.
분단과 남북한의 대치 상태도 60년대, 70년대의 위기감은 많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인구 감소로 인한 소멸 위기이다. 설마 국방력 소멸과 민족 소멸로까지 이어지겠나. ‘무슨 방법이든 대안을 찾겠지’라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이 황당한 위기의 근원을 생각하면 그 믿음이 싹 사라진다. 산아 제한 정책이 도를 넘어서 한 자녀 낳기 정책이 탄생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고 분노하는 분들이 있었다. 인구가 경제, 산업, 교육, 국방에 미치는 요소를 정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예상도 못 한 정책이었다. 아마 훗날 역사가들이 탁상에서 만든 최악의 정책을 꼽는다면 1위권에 들어갈 정책이다.
그때도 혜안을 지닌 분들이 있었겠지만, 분명히 묻혔을 것이다. 이것이 권위주의, 관료주의 시대의 또 하나의 유산이다. 신년에 희망찬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세계는 전쟁 중이고 우리는 전쟁과 마찬가지의 위기 앞에 섰다. 2024년, 슬기롭게 마무리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297〉중장보병과 민주주의

우리는 민주정의 근원을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찾는다. 이미 노예도 있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도 커졌던 시대였지만, 적어도 자유민 남자에게는 참정권과 투표권,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제한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인권, 법적 보호, 소송권까지는 보장했다. 노예는 유전적으로 열등한 인간 취급을 하긴 했지만, 사람 이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말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라는 말을 인간을 도구 취급하자는 말로 이해하는데, 원뜻은 노예의 권리는 제한하지만 그들도 인간이니 도구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실상을 나열해 놓으면 민주적이 아니라 차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지금부터 2700년 이전의 세상이라는 점을 감안해 주어야 한다. 특히 대단한 부분은 참정권에 차이가 있었다고는 해도 가난한 시민에게도 최대한 권리를 부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오랫동안 오해가 있었다. 그리스 민주정이 중장보병대를 형성하는 부유한 시민층에 의해 탄생했다는 설이다. 중장보병의 장비를 갖추려면 아마 지금도 최하 수천만 원 이상 억대까지 올라갈 것 같다. 그렇다 보니 가난한 시민은 민주적 권리에서 소외되었다는 오해가 생겼다.
중장보병 전술이라고 해서 중장보병 홀로 싸울 수 없었다. 경보병, 궁수, 투석병에 보조 인원까지 다양한 인력이 필요하다. 서로 협력하며 함께 싸워야 했다. 역할과 대우에 차이는 있지만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물론 역할과 대우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전투에서도, 사회에 돌아와서도 그랬다. 갈등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벌어지면 함께 싸우고,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나면 역할을 조정하고 시민적 특권을 양보할 때 민주정은 승리하고 번창했다.
반대로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심지어 외국 군대까지 끌어들이고, 부자든 빈자든 승자가 정의가 되고 패자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게 되면서 그리스 민주정은 소멸했다.
고대의 민주정과 현대의 민주주의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변치 않는 진리는 있다. 탐욕과 증오를 다스리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괴물이 된다.
〈298〉동시다발적인 화약고 폭발

이상한 일들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하마스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란도 후원했다. 그래도 헤즈볼라나 이란이 지상군을 투입하는 정규전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아슬아슬하지만 실제로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러자 역으로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치겠다고 액션을 보이며, 행동하기 직전이다. 헤즈볼라와 이란은 정말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각오가 돼 있는 걸까? 그렇다면 예전에 시작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극한의 도발을 하고 있다.
후티 반군은 민간 선박을 넘어 미국 군함을 공격하더니 이란은 미국 유조선을 납치했다. 후티가 미국을 공격한다. 작년만 해도 누구도 믿지 않았을 일이다. 수에즈와 홍해에서 이미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었던 세계 물류가 심각한 위협에 봉착했다.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제는 북한까지 나서서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있다.
전 세계의 모든 화약고가 연기를 내뿜고 있다. 미국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걸까?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분쟁이 발생하면 천하의 미국도 여력이 없다고 확신하는 걸까?
이 동시다발적인 폭발로 제일 덕을 보는 사람은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우크라이나는 탄약과 무기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미국이 애초에 판세를 잘못 읽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동시에 서방세계의 전쟁 유지 능력이 형편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초단기적으로 해결할 전쟁이 아니라면 장기적인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없다. 미국만 바라보며 살았던 거다.
미국은 대만 해협이 너무 큰 부담이라, 우왕좌왕하면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선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전부터 국내에서도 전쟁과 국제 정세에 관한 리더십이 실종 상태다. 서유럽 국가들은 전체가 달려들어도 우크라이나에 필요한 탄약 공급조차 어렵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세계 각처의 분쟁 지역, 분쟁 위기 지역은 이상할 정도로 무모하고 용감해지고 있다. 마치 여기저기서 치킨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조직적인 큰 그림이 있는 걸까? 이래저래 24년 전반기는 혼돈의 세계가 펼쳐질 듯하다.
〈299〉홍해와 수에즈

후티 반군의 위협에 이란 구축함까지 홍해에 진출하면서 세계 물류에 비상이 걸렸다. 유럽에는 혹한이 찾아왔고, 유럽 경제와 우크라이나 전선은 더 추워졌다. 미국은 인플레이션만 걱정할 정도로 경제가 호황이지만, 군사력과 의지의 한계를 노출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망신을 당하고 있다.
미국의 굴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미국 대선의 결과가 답을 주지도 않는다. 대선 공약과 무관하게 상황에 따라 미국의 대응은 달라질 수 있다.
홍해에서 후티의 기세가 줄어들지 않자 문득 이런 질문이 생긴다. 이집트는 왜 가만히 있을까? 수에즈를 이용하는 선박이 줄어들면서 이집트는 막대한 재정 손실을 입고 있다. 이집트의 올해 예산이 약 87조4000억 원인데, 이 중 수에즈 운하 수입이 약 11조 원이다. 홍해 사태로 운하 수입의 80%가 감소했다고 한다. 이미 심각한 국가부채에 거액의 이자로 부도 직전인 상황에서 후티는 이집트를 말려 죽이고 있다.
이집트는 왜 가만히 있는가? 이집트야말로 중동의 군사 강국이 아닌가? 이집트군은 예멘에 아픈 추억이 있다. 1960년대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무려 7만의 병력을 파병해 예멘 내전에 개입했다가 낭패를 보았다.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고, 이것이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집트군이 대패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세기 전의 사례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바가 없다. 오히려 후티 반군은 더 강해졌다. 이집트도 곤혹스럽다. 개입하면 군사비 지출을 감당할 수 없고 개입하지 않으면 수입 감소를 해소할 수 없다. 후티는 이집트의 이런 사정도 계산했을 것이다.
1960년대에 이집트는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미국은 이집트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지금 이집트가 개입한다고 하면 러시아가 분노하고,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미국이 고맙다고 밀어줄 상황이다.
우리는 지금 냉혹하게 변하는 세계를 보고 있다. 우리의 바다와 영공만 지킨다고 우리의 이익과 생존권을 지킬 수 없다. 약한 자의 정의는 내동댕이쳐졌고, 강한 자의 정의조차 조롱받고 있다.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 그러나 이미 말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2024-01-30
〈300〉고려거란전쟁의 영웅들

필자가 고려거란전쟁에 관한 책을 썼던 때가 벌써 20년 전이다. 그때 양규의 활약에 대해 최대한 지면을 할애하면서 양규의 공적을 부각해 보려고 노력했었다. 30년 가까운 거란 전쟁 중에 최대 규모의 침공이며, 고려를 최고의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때가 1010년의 2차 침공이다. 거란의 성종이 친정을 했으며, 동원한 병력도 역대 최대 규모였다.
이 전쟁에서 양규는 3번의 공적을 세운다. 첫 번째, 흥화진을 사수해서 시작부터 거란군의 전략이 틀어지게 만들었다. 전쟁 초기에는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지만,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지면 시간이 지날수록 뒤틀림은 커지고, 잘못된 결정과 판단을 유도하게 된다.
두 번째,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 전쟁에서 결정적 포인트는 서경 포위전이었다. 서경이 함락되었더라면 거란군은 완벽한 중앙 거점을 가지게 되고, 고려를 분단국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거란의 중간 기지인 곽주성을 탈환해 거란군이 서경 포위전을 포기하게 만든 사람이 양규였다. 거란군은 개경으로 직공해 개경을 함락하지만 무리한 진격으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피로에 지친 몸으로 귀국하게 된다.
양규는 이 지친 거란군을 공격해서 3만 명에 가까운 포로를 되찾았다. 이것이 세 번째 공적이다.
거란군을 습격하던 양규는 무리하게 작전을 진행하다가 거란군의 본대에 포위되어 전멸한다. 양규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군인 정신뿐 아니라 삶을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교훈을 전해 준다.
전쟁터에서 영웅이란 어떤 사람일까? 주어진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다. 평소에는 두렵고 그런 영웅심도 없지만, 막상 자기 앞에 그 순간이 닥쳤을 때, 운명의 의무를 피하지 않는 병사이다. 때로 그 의무의 순간은 5초, 1분, 20분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누구의 생명이 5초에서 20분의 행동보다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양규는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거란전쟁을 통해 이름 석 자라도 알린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잊혀졌다. 지금 전쟁이 난다면 우리는 이런 영웅들을 기록하고 보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