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物相(조선일보) 2024-01/ 01.01(월) 시니어 아미(army) - 01.31(수) ‘운동권 경제학’
萬物相(조선일보) 2024-01/
01.01(월) 시니어 아미(army)

▲일러스트=이철원
카투사로 군 복무하던 1980년대 말, 야전 훈련에서 만난 미 육군 부대는 병사 상당수가 마흔을 넘긴 중년이었다. 너무 낯설어서 무슨 부대냐고 물었더니 “한국군과 함께 훈련받으러 온 예비군 소속”이라고 했다. 이들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의 전투까지 아들뻘 한국군과 함께한 뒤 돌아갔다. 이런 예비군이 이라크전, 아프간전에도 파병됐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30대 초반도 보기 드문 우리와는 딴판이었다.
▶로마 제국이 유럽을 제패할 수 있었던 비결로 강력한 상비군 제도를 꼽는다. 17세 이상 남자가 입대해 20년간 전장을 누볐다. 현역이 끝나면 5년 더 예비군으로 복무했다. 30대에 불과했던 당시 평균수명으로 볼 때, 로마 예비군은 노병(老兵) 부대였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제대 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식민지에 도시를 세우고 정착했다. 이런 도시를 지키는 임무도 예비군이 맡았다. 4세기 초에는 국경 경비까지 담당했을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이스라엘과 핀란드처럼 인구와 영토가 작은데도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나라들은 잘 훈련된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핀란드는 재작년 우크라이나전 발발 후 예비군 훈련을 담당하는 국방훈련협회에 제대 군인의 입소 신청이 빗발쳤다. 평소엔 매주 600명이던 자원 입소자가 6000명으로 폭증했다. 40대 이상도 적지 않았다. 예비군 소집 해제 연령도 높다. 이스라엘은 51세이고 콜롬비아도 50세까지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
▶우리 어르신들이 ‘시니어 아미(seniorarmy.or.kr)’라는 민간 군사훈련 단체를 만들어 지난 11월 국방부 도움으로 첫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500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데 평균 연령 63세이고 최고령은 75세다. 새해 초엔 10~20㎞를 행군하는 혹한기 훈련도 받을 계획이다. 단체 공동대표인 최영진 중앙대 교수는 “조심은 하겠지만 평소 운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별문제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올해 우리 출산율이 0.6명대로 떨어지고 노인 인구는 1000만명을 넘어선다. 병력 자원도 부족해서 이미 50만명을 밑돈다. 최 교수는 건강하고 국가관 투철한 ‘영 시니어’(젊은 노인)를 활용하면 병력 부족 문제도 대처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현재 한국의 65세 노인은 한 세대 전 45세에 해당할 만큼 건강하다. 군사 분야에만 국한할 것도 아니다. 경험 많고 건강한 노년의 다방면에 걸친 활약 여부에 우리 미래가 걸려 있다.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 목표를 건강도 지키고 나라도 지키는 ‘몸짱’ 시니어로 정하면 어떨까.
01.02 세계의 관심사 된 한반도 야경 사진

▲일러스트=이철원
2006년 봄 남북 장관급 회담 취재차 평양에 갔을 때 일이다. 회담 둘째 날 저녁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유명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전기가 나갔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전깃불이 스르르륵 약해지더니 완전히 암흑이 됐다. 식당 접대원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재빨리 초를 가져와 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장관급 회담 같은 큰 행사가 열리면 북한 당국도 신경 써서 화력발전소 가동을 늘린다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
▶요즘은 우주에서도 한 나라의 경제 사정을 볼 수 있는 시대다. 북한의 전력난, 나아가 경제적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한반도 야경 위성사진이다. 다양한 사진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북한은 영토 경계선조차 보이지 않고 평양 정도만 작은 점 하나가 찍혀 있다. 반면 밝은 불빛이 가득찬 한반도 남쪽은 북한 땅과 3면 바다의 어둠에 둘러싸인 섬처럼 보인다. 북한 정권이 주민 민생을 도외시한 채 핵·미사일 개발에만 매달린 결과를 이렇게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진도 없다.
▶이 사진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 같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 장관은 2005년 방한했을 때 한반도 야경 사진을 펜타곤 자신의 집무실에 놓고 매일 한반도 문제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민족인 한국과 북한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이 사진 얘기를 꺼냈다. 로이터는 2014년 1월 국제 우주정거장에서 찍은 ‘한반도의 밤’ 모습을 ‘올해의 사진’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최근 한반도 야경 사진이 다시 한번 세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번엔 인공지능(AI)을 둘러싼 개발론과 규제론의 충돌 과정에서 다시 소환됐다. 한 AI 개발 예찬론자(기욤 베르동)가 지난달 10일 ‘한국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X(옛 트위터)에 한반도 위성사진을 올린 것이다. 그는 AI 기술을 가속화하면 한국처럼 빛나고, 이를 막으면 북한처럼 미래가 컴컴해진다고 비유했다.
▶2023년 마지막 날엔 일론 머스크가 자신이 소유한 X에 한반도의 밤 이미지를 공유했다. 머스크는 ‘낮과 밤의 차이’라는 제목과 함께 ‘미친 발상(Crazy idea): 한 나라를 자본주의 반, 공산주의 반으로 나누고 70년 후에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 보자’는 글을 달았다. 1일 현재 5000만명 가까이가 이 이미지를 보았다. 머스크의 이 사진이 한 국가의 체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일깨우고 있다.
01.03 AI에 윤리 가르치기

▲일러스트=이철원
3년 전 네덜란드에선 인공지능(AI)이 대형 사고를 치는 바람에 내각이 총사퇴했다. AI를 활용해 아동수당 부정 수급자 2만여 명을 적발, 받은 돈을 토해내라고 통보했다. 자살자가 나오는 등 난리가 났는데 94%가 엉터리였다. 과거 데이터로 학습해 편견에 사로잡힌 AI가 죄 없는 이민자, 저소득층을 주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 벨기에에선 정신과 상담용 챗봇이 환자에게 자살을 권유했다. 아마존 챗봇 알렉사는 10세 소녀에게 ‘감전사’ 위험이 큰 전기 장난을 권유해 물의를 빚었다.
▶자율주행차의 ‘트롤리(전차) 딜레마’는 AI가 윤리 영역에선 갈 길이 멀다는 걸 보여준다. 자율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는데 건널목에 노인 2명과 임신부 1명이 지나간다. 불가피하게 한쪽을 치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나? 만약 행인을 치지 않기 위해 핸들을 돌리면 운전자가 죽을 수 있다는 딜레마다. 사람들은 행인을 치지 않게 자율차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설계된 차를 사겠느냐는 질문엔 고개를 가로젓는다.
▶과학소설(SF) 대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인공지능 로봇이 지녀야 할 윤리관에 대해 고민했다. 숙고 끝에 3원칙을 제시했다. ‘①로봇은 인간을 지켜야 한다 ②로봇은 인간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 ③로봇은 자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아시모프의 소설 ‘런 어라운드’에서 그 한계가 바로 드러난다. 외계 행성에 간 로봇이 인간 명령에 따라 탐사를 하는데, 독가스가 분출되자 원칙 ③을 지킨다며 뒤로 물러선다. 로봇은 탐사 지역 주변만 맴돌 뿐 인간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
▶미국 MIT가 트롤리 딜레마의 해법을 찾기 위해 세계 각국 시민 200여 만명을 대상으로 ‘선택 우선순위’를 조사했다. 동물보다는 사람, 소수보다는 다수, 노인·남성보다는 청년·여성을 구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하지만 지역별 차이도 드러났다. 아시아권에선 노인보다 청년을 구해야 한다고 답했지만, 유럽·미국은 반대였다.
▶다양한 해법이 모색되고는 있다. 유네스코는 2021년 세계 인권 선언, 직업·인종 차별 금지 등을 감안해 AI 알고리즘을 짜라는 ‘AI 윤리 권고’를 내놨다. 한국 카이스트 연구팀은 14가지 ‘로봇 염색체’를 만들고, 이 ‘염색체’를 조합해 인간 윤리관을 가진 새 로봇을 만들 수 있다는 ‘로봇 유전자 모델’을 제시했다. AI 윤리 전문가 최예진 미국 워싱턴대 교수가 타임지 ‘AI 영향력 100인’에 선정됐다. AI 윤리 표준 제정에도 한국이 기여했으면 한다.
01.04 ‘90초’ 룰

▲지난 2일 도쿄 하네다공항 활주로에서 JAL 여객기가 일본 해상보안청 항공기와 충돌해 큰 화재가 발생하자 승객들이 대피하고 있다.

▲일러스트=박상훈
얼마 전 국군대전병원장이 된 이국종 교수는 중증 외상 분야의 국내 최고 권위자다. 2011년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해적 총에 맞은 석해균 선장, 2017년 판문점 JSA 귀순 당시 다섯 곳에 총상을 입은 오청성씨를 살려 국민의 박수를 받았다. 그가 15년 동안 수술실에서 쓴 메모를 바탕으로 2018년 펴낸 책이 ‘골든아워’다. 중증 환자의 생사를 가르는 사고 후 금쪽같은 ‘1시간’을 뜻한다. 한국과 일본에선 ‘골든 타임’이란 국적 불명의 용어가 많이 쓰인다.
▶골든아워 사수를 위해 도입된 것이 ‘날아다니는 응급실’로 불리는 닥터 헬기다. 그저께 부산에서 흉기 테러를 당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할 때도 등장했다. 육상엔 닥터 카가 있다. 2022년 핼러윈 참사 당시 한 국회의원이 사고 현장으로 향하던 닥터 카를 집 근처로 불러 배우자와 함께 탑승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어떤 사고에도 골든아워가 있다. 해난 사고는 통상 1시간이다. 유독 짧은 것이 항공기 사고다. ‘90초 룰’이다. 추락·충돌로 불길에 휩싸인 비행기가 견딜 수 있는 시간으로 그 안에 대피를 끝내야 한다는 뜻이다. 1960년대 미 연방항공청이 실험을 통해 정립한 규칙이다. 일정 규모의 항공기는 90초 안에 전체 출입문의 절반만 사용 가능한 상황에서 승객 전원이 탈출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비행기 연료 탱크의 위치와 구조, 실내 조명, 좌석 배치가 그냥 정해지는 게 아니다. 작년에 한 사람이 공중에서 여객기 비상문을 여는 아찔한 사고가 났다. “너무 쉽게 열린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이 역시 90초 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다 사고가 날 경우 ‘반말·고함 지시’를 듣게 된다. 비상 상황 시 승무원들은 “머리 숙여! 자세 낮춰!”를 목청껏 반복적으로 외치도록 훈련받는다. 국제민간항공기구 규정과 항공사별 객실 운영 교범에 따른 것이다. 존댓말에 익숙한 한국인에겐 생소하겠지만 그걸 따질 상황은 아니다. 2016년 한 방송사에서 실험해보니 존댓말 안내 땐 탈출에 104초가 걸렸지만, 반말 지시 땐 71초가 걸렸다.
▶지난 2일 도쿄 하네다공항 활주로에서 JAL 여객기가 일본 해상보안청 항공기와 충돌해 큰 화재가 발생했다. 여객기가 화염에 휩싸여 대규모 인명 피해가 우려됐지만 승객과 승무원 379명 전원이 무사했다. 승무원들이 90초 룰에 따라 신속히 대피시켰다고 한다. 기내 자신의 짐을 포기하고 통제에 따른 승객들도 귀감이 됐다. 한국이라도 그랬을 것이란 견해와 아닐 것이란 의견이 엇갈렸다.
01.05 후계자 김주애?

▲일러스트=이철원
국정원은 2017년 국회 정보위에서 김정은에게 2010년생 아들, 2013년생 딸, 성별 미상의 2017년생 셋째가 있다고 보고했다. 다양한 첩보를 수집·분석해 내린 결론이었다. 결정적인 건 노동당 서기실의 물품 조달 내역이었다. 출산 시점을 전후해 유럽제 고급 출산·육아용품을 집중 수입한 정황이 포착됐다. 2010년엔 남아용, 2013년엔 여아용이었다. 해외 정보기관들과 교차 확인도 거쳤다.
▶김정은이 공개 석상에서 처음 ‘후사’를 언급한 건 2022년 10월이다. 노동당 간부 학교에서 “몇 백 년의 후사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유능한 일꾼을 키워내라”고 했다. 4대 세습 작업에 시동을 걸겠단 예고였다. 한 달 뒤 ICBM 발사장을 시작으로 숱한 군 관련 행사에 딸 주애를 대동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최근까지 “김주애를 후계자로 판단하는 건 성급하다”는 입장이었다. 북한에서 ‘여자 수령’이 나오기는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북한은 조선 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회다. 직장에서 남녀 차별은 일상적이고 가정에서도 여성이 장마당에서 돈 벌고 가사 노동과 양육을 전담한다. 남자들은 하는 일 없이 권위만 세운다. ‘어디 여자가’란 말이 입에 뱄고, 여자들은 툭하면 ‘이 간나, 저 간나’ 같은 멸칭으로 불린다. 성추행, 성희롱, 성폭력을 당하지 않은 여성이 드물다. 장마당 활동으로 경제권을 쥔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최근엔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신임 국정원장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에서 “현재로선 김주애가 유력한 후계자로 보인다”고 했다. 정보 당국이 존재를 확신했던 장남의 행방은 묘연하다. 스위스 유학 때부터 사귄 현송월의 소생이란 설, 지능이 낮아 후계 구도에서 밀렸다는 설이 있다. 김정은의 후계자 데뷔 무대는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였다. 자신이 26세, 김정일이 68세 때였다. 김주애는 9세에 대중 앞에 나섰다. 당시 김정은은 38세였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후계 체제 구축이 급했던 부친보다도 서둘러야 하는 말 못할 사정이 생긴 것이다.
▶김주애가 후계자라면 5대 세습 때 성(姓)이 달라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일각에선 영국 사례를 거론한다. 영국 왕 찰스 3세는 부친의 성이 아니라 모친 엘리자베스 2세의 성을 물려받았다. 김정은과 측근들이 이를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찰스 3세 즉위 다음 달에 ‘후사’ 발언이 나온 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북한 주민을 노예와 가축처럼 만든 김씨들이 열 살짜리 아이를 내세워 4대까지 계획하고 있다니 기가 막힌다.
01.06(토) 게임의 종착점 ‘킬 스크린’

▲일러스트=이철원
30년 전쯤 초등학생 시절 한 친구는 오락실에서 죽치고 살았다. 100원 동전 하나면 한두 시간은 거뜬했다. 친구가 게임을 하면 갑자기 화면이 멈추거나 꺼지는 현상이 자주 벌어졌는데,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오락실 주인이 수상쩍었다. 이제 그만하고 꺼지라는 일종의 ‘킬 스크린(Kill Screen)’이었던 셈이다.
▶지난달 미국 오클라호마주에 사는 13세 소년 윌리스 깁슨이 인류 최초로 ‘테트리스’를 정복했을 때도 킬 스크린이 떴다. 킬 스크린은 게임의 특정 레벨에 도달하면 더는 플레이가 불가능한 지점이다. 게임기 메모리가 작아 플레이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 화면이 멈추거나 깨지는 것을 말한다. 깁슨은 테트리스 게임 레벨 157에 도달했고, 그대로 화면은 멈췄다.
▶킬 스크린은 테트리스에만 있는 게 아니어서 고전 게임의 실질적 엔딩으로 여겨진다. ‘팩맨’은 레벨 256에서 왼쪽 화면은 정상적으로 나오지만, 오른쪽 화면은 숫자와 문자가 뒤죽박죽돼 깨진다. 8비트로 저장된 게임 데이터가 255번까지만 가능하고 256번째 값은 불러올 수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풍미한 ‘갤러그’도 255스테이지를 깨면 다음 스테이지가 0으로 바뀌면서 게임이 강제 종료된다. ‘동키콩’은 22번째 레벨에 도달하면 게임 스테이지를 완료할 시간을 4초밖에 주지 않는다. 당연히 깰 수 없다.
▶킬 스크린은 개발자가 게임을 설계하며 게이머들이 실제로 도달하지 못할 것으로 본 지점이다. 설마 이 지점까지 플레이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프로그래밍적 오류를 방치한 결과다. 하지만 인간은 한계를 뛰어넘었다. 테트리스 게이머들은 엄지·검지·중지로 빠르게 방향 키를 누르는 ‘하이퍼 태핑’과 오른손 엄지를 방향 키에 대고 조이스틱 뒷부분을 왼손으로 빠르게 치면서 그 반동으로 방향 조절을 빠르게 하는 ‘롤링’ 기법으로 테트리스를 공략했다. 2020년엔 테트리스 최고기록이 레벨 34에 불과했지만 숱한 시도와 노력으로 2년 후엔 레벨 95를 기록했고, 드디어 깁슨이 이 게임을 정복했다.
▶테트리스의 킬 스크린이 세계적 화제가 된 것은 인공지능(AI)만 가능했던 것을 인간도 이뤄냈다는 점에 있다. 바둑·체스는 물론 레이싱 게임을 포함한 각종 비디오 게임에서도 AI는 인간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도 정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테트리스 게이머들은 ‘하이퍼 태핑’이 벽에 부닥치자 ‘롤링’ 기술을 고안해 결국 킬 스크린의 종착점까지 갔다. 상상력과 창의력, 도전 정신으로 한계를 돌파해가는 것이 인류라는 종(種)이 진화해온 방식이다.
01.08(월) 광역버스 대란

▲6일 오후 오세훈 서울시장이 퇴근길 혼잡으로 시가 긴급 대책을 마련해 운영 중인 '명동입구 광역버스 정류소'를 찾아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연합뉴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 사는 주인공 삼남매가 서울로 출퇴근하는 일상을 배경으로 했다. 삼남매는 ‘산 넘고 물 건너’ 서울 직장에 다니느라 연애할 시간도 없다. 저녁에 활동하는 회사 동아리에 들어가는 건 사치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경기도는 서울을 감싸는 계란 흰자”라고 말한다. ‘서울 공화국’에 편입되지 못한 서민들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명대사였다.
▶장거리 출퇴근족들이 애용하는 수단이 소도시와 서울 도심을 직행으로 연결하는 광역 버스다. 일명 ‘레드 버스’로 불리는 광역버스는 서울에 직장을 둔 경기도민들에게 생명줄과도 같다. 국토부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직장인은 출퇴근하는 데 하루 평균 120분을 쓴다. 평균 통계가 그렇다는 것이지 외곽 도시에서 마을버스를 시작으로 하루 3~4시간을 버스·지하철 안에서 보내야 하는 이들도 숱할 것이다. 그 시간을 이용해 책 읽거나 음악 듣고 자기만의 세계를 즐긴다는 사람도 있다.

▲일러스트=박상훈
▶2022년 말 광역버스 입석 금지 이후 수도권 출퇴근족이 더 고단해졌다. 만차(滿車)가 되면 하염없이 다음 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출근 시간을 30분 앞당겼는데도 버스 2~3대를 보내고 나서야 탈 수 있었다는 사람, 6대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버스를 탔다는 체험담이 쏟아진다. “차가 막히기라도 하면 버스에서 몸이 절여지는 느낌”이라는 사람도 있다. 야근이나 회식이 늦어지면 막차 놓칠까 노심초사하는 것은 기본이다. 작년 8월부터 요금마저 왕복 6000원으로 올라 출근족들을 더욱 애태우게 한다.
▶광역버스 입석 금지는 이태원 참사 이후 안전 요구가 높아져 생긴 것이다. 그 여파로 ‘무정차 통과’ 등 광역버스 대란이 일어나자 정부와 지자체는 광역버스를 대폭 늘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류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정류장 근처에선 버스가 걷는 것보다 느리다”는 민원이 폭주한 것이다. 도심 정류장 인프라는 쉽게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이번 명동 광역버스 대란이다.
▶서울시는 명동에 정차하는 광역버스 노선이 29개로 급증하자 지난달 말 정류장 인도에 줄서기 표지판을 설치했다. 이 시도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퇴근 시간마다 버스를 타려는 승객과 버스가 뒤엉키면서 일대에 대혼란이 생긴 것이다. 결국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과하고 일단 원래 시스템으로 복귀시켰다. 공무원들이 현장을 모르고 제도를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하필 추운 겨울에 광역버스 출퇴근족의 애환을 하나 더 보탰다.
01.09 손웅정씨의 ‘교육 철학’

▲일러스트=이철원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황희에겐 기방을 자주 드나드는 아들이 있었다. 말로 타일러서는 듣지 않자 충격 요법을 썼다. 기방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대문에서 큰절로 맞으며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걸 보니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너를 손님의 예로 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제야 아들이 무릎을 꿇고 “기방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명재상 황희조차 자식 교육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양자역학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의 아버지는 유니폼 판매원이었다. 변변한 지식은 없었지만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산책 학습’이었다. 아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책상에 바로 앉히지 않고 산책하러 나갔다. 한번은 마주치는 새 이름을 영어뿐 아니라 일어·이탈리아어 등으로 아들에게 알려주고 아들이 그걸 외우려 하자 “새 이름을 여럿 아는 것보다 저 새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호기심을 일깨운 뒤 귀가해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었다. 파인먼은 훗날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율곡 이이는 청소년 지도서인 ‘격몽요결’ 서문에서 ‘부모의 역할’을 먼저 강조했다. 학생의 학습 태도는 그 뒤에 나온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도 몇 해 전 ‘자녀의 학업 성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란 연구에서 부모의 솔선수범을 교사의 자질보다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부모는 자녀가 보는 앞에서 책을 읽어야 하고 읽은 것을 화제 삼아 자녀와 대화하라고 했다.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씨가 그제 언론 인터뷰에서 나름의 자식 교육법을 얘기했다. 그가 강조한 것도 부모의 솔선수범이었다. 손흥민은 슛을 하루 1000개 찰 때 “아버지도 옆에서 똑같이 훈련하시니 멈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손웅정씨는 어린 선수들에게 팔굽혀펴기를 시킬 때도 함께 한다. 그는 몇 해 전 쓴 책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에서 “나는 부족한 아비일지언정 아이들에게 노력하고 책 읽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고 했다.
▶손웅정씨는 인터뷰에서 “부모는 TV 보고 휴대폰 보면서 자식에게는 공부하라고 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카페에서 아이들에게 휴대폰 보게 하는 것은 결국 부모가 편하려는 것 아니냐”고 했다. 교권 추락, 청소년 사건 사고도 모두 부모 탓이라고 했다. 유치원 의대 열풍에 대해서도 “미친...”이라며 아이 재능을 무시한 부모들이 아이를 망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어떤 부모였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01.10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는 보신탕

▲일러스트=박상훈
개는 인류의 오랜 동반자다. 함께한 역사가 4만년 전 수렵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거의 모든 곳에서 개는 식용이기도 했다. 선사시대 유적마다 개 요리 흔적이 발견된다. 스위스는 100~200년 전까지 개를 먹었고, 프랑스도 19세기 보불전쟁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개를 먹었다.
▶세계에서 개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는 중국이다. ‘향이 나는 고기’라는 뜻의 향육(香肉)이라 부르며 연간 2000만 마리를 식탁에 올린다. 북한에서 개는 가축이다. 대부분 개는 이름도 없다. 중국과 북한에선 개 부위별 다양한 요리법이 개발돼 있고 통조림도 만든다. 1970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방북했을 때 김일성이 환영 파티에서 내놓은 것도 다양하게 요리한 개고기였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개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흑산도에 유배 간 형 정약전에게 개고기 요리법을 편지로 적어 보내며 건강을 위해 먹으라고 했다. 동의보감에는 ‘오장을 편하고 튼튼하게 해주며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해 정력에도 좋다’고 소개돼 있다. 1990년대 말까지 연간 10만t 정도 먹었다. 말복이 지나야 개가 한 시름 놓는다는 우스개도 돌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개 식용이 빠르게 퇴조하고 있다.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 같은 이가 비판해서만은 아니다. 개에 대한 우리 인식이 바뀐 것이 더 크다. 88 올림픽을 계기로 정부가 대대적인 개 식용 중단 캠페인을 벌였을 때만 해도 한국인은 사철탕, 영양탕으로 간판을 바꿔 걸고라도 보신탕을 먹었다. 그런데 1998년 6400여 곳이던 식용견 업소가 재작년 조사에선 1600곳으로 급감했다. 2006년만 해도 ‘개고기 식용 문화를 없앨 필요가 없다’는 견해가 86%였는데, 지난해 조사에선 ‘지난 1년간 개고기를 입에 안 댔고 앞으로도 먹지 않겠다’는 응답이 95%였다. 우리에게 개는 더 이상 식용이 아닌 것이다.
▶식용 개 사육과 도축, 유통을 금지하는 법이 어제 국회를 통과했다. 유모차보다 개모차가 많아지고, 애완견이란 표현도 쓰기 싫다며 개를 인간과 희로애락을 함께한다는 뜻의 반려견으로 부르는 세태를 법이 반영한 것이다. BBC와 CNN 등 외신이 일제히 브레이킹 뉴스로 관련 소식을 타전했을 만큼 국제사회도 주목했다. K팝과 한류 드라마, 첨단 반도체 생산국이란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나라가 이제는 오랜 가난의 흔적인 개 식용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법 통과로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에 관한 대책도 세웠으면 한다.
01.11 막스 플랑크 연구소

▲일러스트=이철원
독일의 천재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1858~1947) 평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막스 플랑크는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을 했다. 하나는 양자 역학이고, 하나는 아인슈타인이다.’ 물질과 에너지의 최소 단위 중 하나인 양자를 발견한 사람이 플랑크다. 양자 역학의 기본 상수를 플랑크 상수라고 한다. 1905년 베른 특허청의 무명 공무원이던 아인슈타인이 논문을 발표했을 때 그 진가를 알아본 사람도 플랑크였다. 1914년 베를린대 총장으로 취임해 아인슈타인을 스카우트했다. 두 천재는 음악도 좋아해 함께 연주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막스 플랑크 협회는 독일만이 아닌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이다. 1911년 설립 당시 이름은 카이저 빌헬름 협회다. 신학자인 아돌프 폰 하르나크가 “독일의 강력한 두 지주는 군사력과 학문”이라며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연구기관을 세우자고 황제를 설득해 만들었다. 플랑크는 72세이던 1930년부터 이 협회 의장을 맡아 독일 과학계를 이끌었다. 나치가 유대인 아인슈타인을 공격하자 막스 플랑크는 “우리는 유대인들의 과학 작업을 필요로 한다”고 히틀러를 설득하려 했다.
▶막스 플랑크 협회로 이름이 바뀐 건 그가 세상을 떠나고 넉 달 후인 1948년이다. 독일 패전 후 협회도 쇠락했다. 89세의 플랑크가 “개별 연구소들에 최고의 연구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것이 내 목표”라고 편지를 써서 독일 전역 연구소에 보내고 직접 강연도 다니며 재건했다. 그의 진정성 덕분에 오늘날 해외를 포함해 독일 전역에 86개 연구소를 산하에 두고 소속 과학자 6700여 명, 초청 과학자 2500여 명을 포함해 연구원과 직원이 2만4000명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기초과학 연구 분야 빅텐트’가 됐다.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를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가 30명이 넘는다. 막스 플랑크 양자광학연구소장인 페렌츠 크러우스가 작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성공 비결은 ‘하르나크 원칙’에 있다. 황제를 설득해 협회를 만든 신학자 하르나크가 100여 년 전 세운 ‘연구의 독립성’ 전통이 이어진 덕분이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한 스타 과학자에게 해당 프로젝트 단장을 맡기고 인사권과 예산을 일임하면서 스스로 연구를 이끌어가게 하는 제도다.
▶차미영 KAIST 교수가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첫 한국인 단장으로 오는 6월부터 ‘인류를 위한 데이터 과학’이라는 하나의 연구 그룹을 이끈다고 한다. 자유롭고 차별 없는 연구 문화를 표방해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문호를 열어두는 이 연구소에 첫 테이프를 끊은 우리나라 과학자가 여성이라는 점도 뜻깊다.
01.12 ‘3천억 짜리 피자’

▲일러스트=이철원
2008년 10월 31일 세계 각국 암호학 전문가들에게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발송자는 “중개인 없이 1대1로 운영되는 새 전자 통화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다”는 문구와 함께 A4 9장 분량의 논문을 다운받는 웹사이트 링크를 보내왔다. 논문 제목은 ‘비트코인: 개인 간 전자화폐 시스템’이었다. 비트코인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1년 여 뒤인 2010년 5월 미국에서 비트코인이 상거래 결제 화폐로 처음 사용됐다. 한 개발자가 “1만 비트코인을 줄 테니 피자 두 판을 배달해달라”고 주문했다. 집 근처 피자 가게가 주문에 응했다.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한 판에 3000억원짜리 피자를 먹은 격이다. 2010년 7월 일본에서 세계 최초 비트코인 거래소가 열렸다. 1개당 0.06달러로 첫 거래가 이뤄졌다. 하지만 축복보다 저주가 쏟아졌다.
▶”과대 광고 사기에 불과하다”(CNBC), “무의미해질 운명이다”(유럽 중앙은행), “폰지 사기보다 더 나쁘다”(인도 중앙은행). 한 웹사이트가 2009년 이후 비트코인의 파멸을 예고한 주요 언론사 기사, 주요 인사 발언을 집계한 결과 475건에 달했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목이 잘리면 더 많은 목이 솟아나는 히드라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왔다. 수 많은 인재가 대박을 꿈꾸며 미래 세상에 대한 베팅 대열에 가세했다. 대체 불가 토큰(NFT) 같은 코인 생태계가 속속 만들어졌다.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비트코인을 바퀴벌레에 비유한다. “부패한 물질을 영양분으로 바꾸고 모기 같은 해충을 잡아먹는 등 사람들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이점을 가진 바퀴벌레처럼, 비트코인 또한 투자 포트폴리오 다각화, 독재 정권하에서도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용도를 통해 금융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워 왔다”는 것이다.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북한 핵실험,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정세가 흔들릴 때마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 대접을 받으며 몸값이 치솟았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승인했다. 탄생 16년 만에 제도권 금융 상품으로 등극한 것이다. JP모건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입만 열면 “성매매, 조세 회피, 자금 세탁에 쓰이니 비트코인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런데 정작 JP모건은 세계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손을 잡고 비트코인 ETF 개발에 참여했다. 비트코인이 ‘한때의 광풍’이 아니라 ‘제도권 자산’으로 자리 잡았음을 이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가 있을까 싶다.
01.13(토) 예멘

▲일러스트=이철원
아라비아반도 남쪽 끝에 있는 예멘은 과거 ‘풍요로운 아라비아’로 불리며 번영했다. 구약성경 열왕기에는 예멘이 시바 왕국으로 불리던 시절, 시바의 여왕이 값비싼 향료와 엄청나게 많은 금은보석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해 솔로몬왕과 만난 일화가 나온다. 현대 사가들은 잘살던 두 나라 왕이 통상 교섭을 한 증거로 본다. 로마제국 시절엔 향신료 무역으로도 풍요를 누렸다.
▶세계적인 커피 산지로도 명성이 높다. 모카 커피는 15~17세기 예멘 항구도시 모카를 통해 커피가 유럽 전역에 수출되며 붙은 이름이다. 이 중 모카 마타리는 오늘날 세계 유명 커피의 하나다. 남쪽의 항구도시 아덴은 1960년대 초만 해도 미국 뉴욕에 이어 세계에서 물동량이 둘째로 많은 항구였다.
▶그토록 풍요롭던 나라가 지금은 ‘비참한 아라비아’로 불린다. 오늘날 예멘은 콩고나 북한보다 가난하다. 중동에서 예멘보다 못사는 나라는 아프가니스탄밖에 없다. 국민 40%가 절대 빈곤에 빠져 있고 희망 없는 국민은 어린이들까지 환각성 마약인 ‘카트’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낸다. 2015년 발발해 10년째 지속되는 내전으로 국민 수만 명이 죽었고 더 많은 국민이 난민으로 세계를 떠돈다. 그중 일부가 몇 해 전 제주도에도 흘러들어왔다.
▶예멘은 30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된 산유국이다. 대부분 사막인 이웃 나라들과 달리 비가 풍족해 농사도 가능하다. 남북으로 분단 됐던 나라가 1990년 통일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내전으로 다시 쪼개졌다. 예멘이 지금처럼 된 데는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의 극단적 반목, 통일 전 소련에 의지해 연명하다 소련 해체 후 경제가 파탄 난 남부 공산주의 잔존 세력, 2011년 아랍의 봄으로 퇴진한 독재자 살레와 집권 세력의 부패가 삼각 파도처럼 이 나라를 덮쳤기 때문이다.
▶이 내전에서 반군 지도자 후티가 사망했다. 그 부하들인 후티 반군은 결국 수도 사나를 장악하고 사실상 예멘을 통치하고 있다. 이들의 모토는 국가 재건과 민생이 아니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실천한다고 전 세계 해상 컨테이너 30%가 오가는 홍해에서 외국 선박을 공격하고 있다. 후티 반군과 한편인 이란도 유조선을 나포하며 가세했다. 우리에게도 강 건너 불이 아니다. 결국 미국과 영국 주도로 예멘 곳곳에 공습이 시작됐다. 예멘 국민의 고통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시바 여왕의 나라가 지옥이 됐다.
01.15(월) 대남 송출 중단한 평양방송

▲북한이 대외용 라디오 매체인 평양방송을 통해 난수방송을 내보냈다.
북한의 대남(對南) 국영 라디오 ‘평양방송’이 지난 12일 오후부터 수신이 되지 않고 있다. 평양방송의 홈페이지 ‘민족대단결’도 접속 불가 상태다. 조선중앙방송과 함께 북한 양대 라디오 매체인 평양방송은 1960년대부터 대남 선전·선동 방송을 하면서 남파 간첩들에게 ‘난수(亂數)방송’으로 지령을 내려왔다.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 교육대학 수학 복습 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459페이지 35번, 913페이지 55번.” 2016년 포착된 난수방송의 하나다. 평양방송은 오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30분까지 하루 23시간30분 방송하면서 자정에 김일성·김정일 찬양가를 내보낸 뒤 난수방송을 해왔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난수방송을 중단했다가 2016년 6월 재개했다. 난수방송은 특정한 규칙을 가지지 않는 숫자를 나열한 뒤 난수표나 사전에 약속한 책 등을 활용해 해독한다. 2006년 체포된 간첩은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난수 해독에 사용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청와대 습격 사태는 난수방송 해독을 못해 감행됐다는 황당한 일화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임무를 띠고 침투한 북한 124 특수부대원 31명은 서울로 향하는 와중에 파주 삼봉산에서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쳐 정체가 발각됐다. 북에 보고하고 난수방송으로 북한 지령을 받았는데 잘못된 난수표를 들고 있던 통신병 2명이 해독을 못했다. 김신조씨는 “우리를 그냥 죽으라고 한 것이다. 배신감이 들었다”고 했다. 바뀐 지령을 확인하지 못한 채 애초 작전대로 청와대로 향했다가 거의 전원 사살되고 김신조씨만 투항했다. 나중에 우리 측이 이 난수를 해독했더니 북의 지령은 ‘원대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옛날 간첩 신고 포스터를 보면 간첩 식별 요령의 하나로 ‘밤중에 방 안 또는 산속에서 이상한 금속 소리(무전 치는)를 내거나 이북 방송을 듣는 사람’이 들어 있다. 심야에 이불 뒤집어 쓰고 난수 방송을 듣고 북한에 보고하려고 모스 부호를 치는데 이를 위치 추적해 간첩을 색출해 냈다. 디지털 시대에는 난수 방송보다 보안 이메일을 더 많이 쓴다. 하지만 오래전에 남파된 ‘컴맹’ 간첩은 보안 이메일을 쓸 줄 몰라 여전히 난수 방송이 필요하다고 한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남 정책 기조를 “적대적인 교전국”이라고 선언한 뒤 최선희 외무상이 대남 선전 매체와 대남 기구를 정리하고 있다. 평양방송 중단도 그 일환이다. 북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다.
01.16 ‘삼겹살 지방은 1㎝ 이하로’

▲일러스트=이철원
“북한 살 때 마을에서 돼지 잡으면 한 덩이 얻어다 기름만 물에 타서 몇 달간 먹었는데 한국 와서 삼겹살 먹으면서는 이것이 진짜 자본주의다 했습니다.” 탈북자들이 “북한서 구경도 못 해봤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대표 음식이 삼겹살이다. 여럿이 앉아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서 상추에 싸 먹는 삼겹살은 모임 문화에 잘 맞아 우리나라 직장 회식 1위 메뉴다.
▶지방 적은 부위를 즐겨 먹는 외국과 달리 우리는 유독 삼겹살을 좋아한다. 몇 년 전 TV에서 맛 칼럼니스트 한 사람이 “불행한 역사가 있다”면서 ‘대일 수출 잔여육’설(說)을 주장했다. 1960~70년대 일본 수출을 위해 대규모 양돈을 시작했는데 일본이 안심, 등심만 가져가고 남은 것이 삼겹살, 돼지머리, 족발 등이어서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자 한 식육 마케터가 ‘잔여육설은 근거 없는 엉터리’라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국에서 소고기에 비해 돼지고기는 오랫동안 선호도가 떨어졌다. 지방이 많아 쉽게 상하기 때문에 “잘 먹어야 본전”이라고까지 했다. 정부가 축산업 장려 정책을 펴고 돼지가 먼저 기업형으로 대량 생산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우리의 미래는 전자와 축산”이라며 1973년 용인 자연농원에 축사 짓고 일본에서 종돈 614마리를 들여와 양돈업에 뛰어들었다. 용인 양돈장은 최대 6만 마리까지 돼지를 길렀는데 양돈업계 반발이 커지자 이 회장 사후인 1990년 문 닫았다.
▶근 100년 전 방신영 이화여전 교수가 펴낸 ‘조선요리제법’에는 돼지고기 중 제일 맛있는 부위로 ‘세겹살’을 꼽았다. 하지만 전통적 고기 요리법은 삶거나 찌는 습열식이었다. 삼겹살은 기름이 뚝뚝 떨어져 숯불이나 연탄에서 굽기도 어렵다. 1980년 출시된 휴대용 가스렌지 ‘부루스타’가 삼겹살구이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삼겹살 냉동육이 보급되는 시점에 부루스타가 등장해 음식점에서 쉽게 팔 수 있는 메뉴가 됐다. 일반 가정에서나 야외 갈 때도 휴대용 가스렌지에, 삼겹살 구워 먹는 ‘한국식 바비큐 파티’가 확산됐다.
▶저렴해서 널리 퍼졌는데 이젠 돼지고기에서 가장 비싼 부위다. 국내 생산만으로 부족해 세계 각국에서 수입해 먹는다. 인기가 있자 지방을 덕지덕지 붙인 양심 불량 삼겹살까지 유통되고 있다. 그래서 농식품부가 “소포장 삼겹살은 지방을 1㎝ 이하, 오겹살은 1.5㎝ 이하로 하라’고 ‘삼겹살 품질 관리 매뉴얼’을 만들어 대형마트 등에 보냈다. 유난한 삼겹살 사랑에 생겨난 이색 규제다.
01.17 “혼자가 좋아”

▲일러스트=박상훈
글로벌 가구업체 이케아가 세계 38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우리나라가 “집에 홀로 있을 때 즐거움을 느낀다”는 문항에서는 세계 1위를,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웃는 시간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자녀·손주를 가르치며 성취감을 느낀다”는 문항에서는 세계 꼴찌를 기록했다고 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서구 국가들보다 한국인이 혼자 있기를 더 원한다는 이 결과는 충격이다. 조사 결과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사람도 많을 듯하다. “지금 내 밥상머리에는/.../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넣고/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공광규의 시 ‘얼굴 반찬’) 가족 간 사랑을 행복의 원천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하지만 다른 풍경도 많아졌다. “연말에 가족이 방문했다. 가족이지만 혼자 사는 집에 누군가 온다니 갑자기 신경이 쓰였다. 1인 가구 N년 차가 되니 가족은 손님이 되었다. 혼자 살 때보다 잠을 더 일찍 잤고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청년 세대의 블로그 글이다. 1인 가구 750만 중에 20대 비중이 가장 높다. 진학과 구직을 위해 상경한 청년 세대로 인해 인구 절반이 서울과 수도권에 산다. 작년 추석 연휴에 셋 중 하나만 귀성했다. 절반 이상이 명절에 부모와 친척 보러 고향도 가지 않고 그냥 집에서 쉬거나 여행 떠나는 쪽을 택했다. 한 데이터 분석가는 우리 사회를 가리켜 ‘핵가족’을 넘어선 ‘핵개인’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표현한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안 들어맞는 가족도 많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가족과 저녁 먹는 청소년 비율은 36%에 불과했다. 한국은 성과주의 과잉의 ‘피로 사회’다. 부모 세대의 생존 불안이 자녀 양육에 그대로 투사돼 아이들이 일찍부터 집 밖으로 내몰린다. 학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과열 경쟁에 시달린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가 OECD 최하위, 청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부모된 도리, 자식된 도리 등 강한 가족주의가 되레 서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면서 사회 한편에서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는 심리가 빚어지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가족치료학자 머레이 보웬은 “가족은 하나의 감정 덩어리”라고 했다. 감정적으로 쉽게 전염되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 가족 관계에는 각자의 경계를 인정해주는 ‘자아 분화’도 필요하다고 한다. 전통적 가족주의 대신 느슨하면서도 오래가는 새로운 가족애가 필요한 시대인 듯싶다.
01.18 북한 철도 사고
북한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주민들이 열차 지붕에 오르거나 승강구 난간에 매달려 가는 장면이 흔하다. 북한 열차는 한번 놓치면 언제 다시 올지 기약이 없기 때문에 기를 쓰고 타는 것이다. 객실 안은 만원인 데다 난방, 냉방 시설이 없어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다. 가다가 연착하면 언제 출발할지 아무도 모른다. 며칠간 역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인근 민가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왔더니 기차가 떠나버렸다는 탈북자들 증언도 많다.

▲일러스트=이철원
▶북한에서 철도는 화물의 90%, 여객의 60%를 담당하는 중심 교통수단이다. 그런데도 철도 상태는 상상을 넘어선다. 평양에서 열차로 북부나 동부 지방에 가려면 최소 열흘은 각오해야 한다. 북한 철도는 대부분 노선이 시속 20㎞대로 운행한다. 황영조·이봉주가 달리는 속도와 비슷하다. 여행 증명서 없이는 여행이 불가능하지만, 설사 증명서를 얻어도 가는 길이 하염없어 먼 지역에 사는 부모, 자식은 이산가족과 다름없다. 부모 별세 소식을 듣고 집에 도착하면 장례식이 끝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동의 자유가 법적으로도 없고, 교통 때문에도 없다. 이런 나라는 북한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 철도가 엉망인 것은 낡은 데다 보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 철도는 97%가 단선이다. 기차가 오면 다른 기차는 비켜서 기다려야 한다. 80%가 전기로 움직이는데 전력이 약하고 그마저 끊기면 한없이 기다린다. 1939년 개성에서 신의주까지 기차로 7시간 걸렸다고 하니 일제강점기보다 훨씬 후퇴했다. 김정은이 2018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오시면 우리 교통이 불비해 불편을 드릴 것 같다”며 “평창 올림픽에 갔다 온 사람들이 다 고속 열차가 좋다고 하더라”고 실토할 정도다.
▶북한 열차가 지난해 말 전기 부족으로 고개를 넘지 못해 전복되면서 4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보도했다. 열차가 함경남도에서 높은 고개를 넘으려다 뒤로 밀려 탈선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당시 산골에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용악의 시 ‘그리움’은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로 시작한다. 이용악이 1945년 서울에 혼자 와 있을 때 추운 겨울에 함경북도 무산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쓴 시다. 백무선은 백암역과 무산역을 오가는 철길로, 이번 사고 지점보다 북쪽에 있다. 마침 서울에도 함박눈이 내리는 날, 북한 열차 대형 사고 소식을 들으니 더 안타깝다.
01.19 중동 난장판

▲일러스트=이철원
이란과 파키스탄 해군은 지난 16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파키스탄 군함이 이란 항구에 들렀다가 함께 훈련에 돌입했다. 비상시에 쓸 통신 회로를 점검하고, 전술 기동훈련을 함께 했다. 공중에선 이란 해군 헬기도 참여했다. 이란군은 “파키스탄 함대의 이번 방문은 군사 교류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성명도 발표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이란군은 파키스탄 남서부를 미사일로 타격했다. 반(反)이란 무장조직 기지가 있다는 곳이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어린이 2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다쳤다. 그러자 파키스탄이 반격에 나섰다. 이란 남동부를 공격했는데 최소 9명이 숨졌다. 두 나라가 같은 날 한쪽에서는 연합훈련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교전을 벌인 것이다.
▶지금 중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난장판’이다. 얽히고설킨 채 서로 치고받는다. 외부인들은 누가 누구와 왜 싸우는지 알기도 어렵다. 난장판의 시작은 2018년 사우디 빈 살만의 언론인 카슈끄지 암살이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이 빈 살만을 맹비난했다. 그러자 빈 살만은 2022년 사우디를 방문한 바이든의 석유 증산 요구를 거부하고 빈손으로 돌려 보냈다. 수십년 맹방 사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중국의 시진핑을 초청해 극진히 대접했다. 정보통신, 건설 분야 등에서 38조원 규모의 협정을 체결했다. 빈 살만은 나아가 시아파 지도자 처형 문제로 단교했던 이란과 시진핑의 중재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미국이 싫어할 일만 골라서 하는 것이다.
▶미국의 중동 장악력이 흔들리는 와중에 이스라엘은 네타냐후 총리의 사법개혁으로 나라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 이 틈을 타고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해 지옥문을 열었다. 이스라엘의 반격은 이란과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의 연쇄 반발을 불렀다. 이란이 지원하는 무장세력이 중동 미군 기지들을 공격하고 후티 반군은 그나마 평화롭던 홍해에 미사일을 난사하고 있다. 이 난장판에 돌연 수니파 IS가 끼어들어 이란에서 테러를 벌이자 이란이 파키스탄 공격으로 대응한 것이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미국은 16일 사우디의 브릭스(BRICS) 가입을 막아 체면을 세웠으나 과거의 중동 영향력을 회복할지 미지수다. 후티 반군에 대한 공격도 미국 대선 때문인지 하는 시늉만 내는 수준이다. 매년 세계 전망을 내놓는 이코노미스트도 중동에 대해선 “평화 계획을 세우기에 무덤 같은 장소”라면서 “아직 시도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평화 추구밖에 남지 않았다”는 하나 마나 한 말만 했다.
01.20(토) 항공사 사장 된 스튜어디스

▲일러스트=박상훈
1930년 미국에서 25살 간호사 엘런 처치가 세계 최초로 스튜어디스가 됐다. 그녀는 항공사에 편지를 보내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조르다 계속 거절당하자, 새 제안을 내놨다. “간호사가 함께 타면 승객들이 안심할 것”이라면서 객실 승무원으로 써달라고 했다. 열정에 감동한 항공사가 한 달 시범 조건으로 채용했다. 승객들은 베레모와 망토 차림 여승무원의 등장에 열광했다. 항공사들이 앞다퉈 여승무원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승무원 채용 조건은 ‘간호사 자격증 소지자, 25세 이하 독신, 키 162㎝ 이하, 몸무게 52㎏ 이하’였다. 비행기가 작아 몸집 큰 여성은 곤란했다. 유럽 항공사들은 유니폼으로 아예 간호사 복장을 입혔다. 여승무원 명칭은 여행을 도와주는 사람이란 뜻에서 쿠리어(Courier)라고 부르다, 에어 호스티스(Air hostess), 에어 걸(Air girl)을 거쳐 ‘스튜어디스’로 정착됐다.
▶해외여행을 거의 못 하던 시절, 한국에선 스튜어디스 지망생인 항공운항과 여대생들이 남학생 선호도 1위에 꼽혔다. 현역 여승무원들은 1등 신붓감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외양과 달리 여승무원은 고된 직업이다. 100㎏이 넘는 카트를 끌고 좁은 복도를 계속 왕복해야 하고, 더러운 세면대와 변기도 직접 닦아야 한다. 장거리 비행 탓에 걸핏하면 밤을 새운다. 10시간 넘게 서서 일하다 꼬리날개 부근에 있는 벙크(bunk)라 불리는 창고 방에서 1~2시간 쪽잠을 자는 게 유일한 휴식이다. 그래서 왕고참들은 디스크, 손목터널증후군, 위염, 기관지염을 달고 산다.
▶여승무원은 ‘항공사의 꽃’이란 상징 탓에 복장, 화장법, 헤어 스타일까지 회사 규정에 따라야 한다. 처음부터 타이트하게 재단된 유니폼 탓에 마음대로 먹지도 못한다. 유니폼이 보라색인 항공사는 와인색 계열의 화장만 허용한다. 한때 일본항공(JAL)에선 일등석 여승무원에게 기모노를 입혔다. 비좁은 화장실에서 기모노를 10분 안에 갈아입는 훈련을 수없이 받아야 했다.
▶이런 일본항공에서 30년간 스튜어디스로 뛴 사람이 1951년 창사 이래 첫 여성 사장이 됐다. 세계 100대 항공사 중 KLM, 에어링거스 등 12곳에 여성 CEO가 있지만, 아시아권에서 스튜어디스 출신이 연 매출 13조원, 종업원 3만명의 초대형 항공사 사장이 된 것은 세계 항공사에 기록될 파격이다. 그녀는 취임 일성으로 “JAL 여직원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에선 여승무원이 임원까지 승진한 적은 있지만, 경영자로 변신한 사례는 아직 없다.
01.22(월) ‘사나이’의 퇴장

▲일러스트=이철원
88올림픽을 앞두고 한 화장품 회사가 만든 남성용 스킨로션의 광고 모델은 차범근이었다. 웃통을 벗어던진 근육질 몸매로 사나이다움을 강조했다. 그런데 10년도 못 갔다. 1990년대 인기를 끈 화장품 브랜드가 선택한 모델은 안정환과 김재원 같은 꽃미남이었다. 안정환은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넘겼고 귀고리까지 했다. 2000년 대 들어 ‘남자는 피부다’처럼 여성 느낌의 카피가 등장하더니, 최근엔 색조 화장에 립스틱까지 손에 들고 나온다. 사나이다움의 퇴장이다.
▶사나이는 ‘한창 혈기 왕성한 남자’라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용맹한 남자들이 간다는 특전사가 10년 전 군가 ‘검은 베레모’ 후렴에 나오는 ‘아아, 검은 베레, 무적의 사나이’에서 ‘사나이’를 ‘전사들’로 바꿨다. 몇 해 전 입대하는 아들을 배웅하러 논산 훈련소에 갔더니 울려퍼지는 ‘육군가’가 귀에 익지 않았다. 들어보니 ‘화랑의 핏줄 타고 자라난 남아~’에서 ‘남아’가 ‘우리’로 바뀌어 있었다. 여군 비율이 이미 10%에 육박하고, 2027년엔 15%까지 늘게 되는 현실을 가사에 반영했다고 한다. 어쩌면 국군의 대표 군가인 ‘진짜 사나이’도 가사에서 사나이가 빠지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사나이’가 나오는 유명한 광고가 농심 신라면이다. 1986년 제품을 선보이며 매운맛을 강조하기 위해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이라는 카피를 쓴 것이 시초다. 라면왕으로 불리던 신춘호 창업주가 직접 달았다. 광고 모델도 코미디언 구봉서부터 최수종·송강호·송일국·유해진·박지성·하정우 등 대부분 남자였다.
▶38년 동안 쓴 신라면 카피가 이번 주부터 ‘인생을 울리는 신라면’으로 바뀌었다. 2019년 손흥민이 모델로 나왔을 때 ‘세계를 울리는 신라면’을 잠시 쓴 적은 있지만 이번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도 매운맛에 운다’든가 ‘남자는 울면 안 되느냐’는 항변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가 광고 카피에 반영된 것이다.
▶한국 남자들은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배우며 자랐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조차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봐야 했다. ‘울지 않는 한국 사나이’ 이미지가 매력적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일본에서 일었던 한류 드라마 바람은 약해 빠진 ‘초식남’에 질린 일본 여자들이 씩씩한 한국 사나이에 매료된 덕이 컸다. 어느새 한국 남자들도 초식남이 되어가고 있다. 취업난으로 위축되고 내 집 마련조차 힘든 시대의 부담이 젊은 남성들을 위축시킨 탓 아닐까.
01.23 마리 앙투아네트

▲일러스트=김성규
파리 중심부 센강 변에 있는 중세 건물 콩시에르주리는 궁전으로 지었지만 14세기부터 정치범 감옥으로 쓰던 곳이다. 이곳을 거쳐 간 죄수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 프랑스 대혁명기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1755~1793)다. 그곳에 76일간 수감돼 있으면서 재판받고 단두대의 이슬이 됐다. 남편 루이 16세는 그해 초 이미 단두대에 올랐다.
▶18세기에 오스트리아를 40년간 다스린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는 존경받는 통치자였다. 국가 재정을 아끼기 위해 진흙에서 추출한 황색 도료로 황실 소유 건물을 칠하게 해 일반 국민도 이 ‘테레지아 노랑’을 따라 할 정도로 근검절약했다. 그는 유럽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전쟁 억제를 위해 결혼 동맹을 맺었다. 여제는 어린 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로 시집 보내면서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남들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1788년 프랑스 재정은 지출 6억2900만 리브르, 수입 5억300만 리브르의 적자 상태였다. 왕실 비용으로는 3500만 리브르가 할당돼 전체 지출의 6% 수준이었다. 국가 재정을 파탄 낸 주범은 루이 14세와 루이 15세가 전쟁 등을 치르며 남긴 막대한 부채였다. 부채 상환에 들어가는 금액이 전체 지출의 절반(3억리브르)이었다. 하지만 극심한 빈곤이 나라를 휩쓸자 ‘사치와 타락의 원흉’이라며 외국인 왕비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다.
▶콩시에르주리로 이감된 지 두 달 만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1차 심문이 열렸다. 기소장에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돈을 주고 정치 거래를 했다. 내전을 부추기며 애국자를 학살하고 외국에 전쟁 작전을 넘겨주었다. 8세 아들을 잠자리로 불러들여 근친상간을 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인쇄공, 가발 제조업자, 음악가, 목수 등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유죄판결을 내렸고 사형이 선고됐다. 당시 급진파 자크 에베르가 1790년부터 발간한 포퓰리즘 신문 ‘르 페르 뒤셴’이 “창녀” “암늑대”라고 부르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근친상간 누명을 씌워 사형을 주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고 몇 달 후 에베르도 다른 급진파들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왕족으로 누린 화려한 삶, 그와 대비되는 비극적 죽음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화, 소설, 뮤지컬 등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덧씌워진 잘못된 소문은 이후 역사적으로 상당 부분 해명됐지만 여전히 따라다닌다. 잊을 만하면 종종 국내 정치에도 소환되는데 최근에도 그 이름이 등장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얼마나 알고 인용하는지는 의문이다.
01.24 ‘돈 벽돌’ 쌓기
1920년대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하면 떠오르는 사진이 있다.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마르크화 돈다발로 벽돌쌓기 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어른들은 빵을 사러 가면서 돈다발을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장작 대신 돈다발을 땔감으로 썼다. 요즘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에서 비슷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인플레와 잦은 화폐개혁 탓에 휴지가 된 현금 뭉치를 벽돌처럼 쌓아 놓고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정상 국가에선 중앙은행 금고에서나 현금 더미를 볼 수 있지만 예외도 있다. 사법기관이 범죄자에게서 은닉 현금을 압수한 경우다. 2018년 중국에선 은행감독위원회 출신 부패 관리의 집에서 현금 뭉치 3t을 압수했다. 2억7000만위안, 원화로는 502억원에 이른다. 부패 혐의로 구속된 국가발전위원회 탄광부 부주임 집에서도 현금 2억3000만위안(약 428억원)이 쏟아져 나왔다. 현금 계수기가 16대나 동원됐는데, 4대는 과열로 고장이 났다.
▶우리나라에선 2011년 ‘김제 마늘 밭 사건’이 유명하다. 불법 도박 사업자가 5만원권 22만장(110억원)을 마늘 밭에 숨겼다가 발각됐다. 범죄자 누나가 부탁을 받고 현금 다발을 아파트 집의 김치냉장고, 다용도실 등에 보관하다 더 이상 감당이 안 돼 마늘 밭을 사서 파묻은 것이었다. 범죄 관련 현금 뭉치는 주로 불법 도박 범죄에서 나온다. 2019년엔 인천경찰청이 불법 도박 사업자에게 현금 153억원을 압수한 바 있다.
▶현금은 부피가 크고 악취도 심해 은닉자에겐 골칫덩이다. 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람에게 “현금 다발을 침대 밑에 보관했는데, 악취 탓에 잠을 잘 수 없었다”는 말도 들었다. 지난해 은행 돈 3000억원을 횡령했다 적발된 경남은행 직원은 1㎏짜리 금괴 101개와 현금 45억원을 숨겨두고 있었는데, 현금 은닉 장소가 김치통이었다.
▶엊그제 부산에서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 일당이 붙잡혔는데, 현금 550억원을 벽돌처럼 쌓아 둔 사진이 나왔다. 돈 벽돌 무게가 총 1t이 넘는다. 수입이 절정에 달했을 때 기념으로 찍어둔 것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도박이 중고생에게까지 번지면서 인터넷 해외 도박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불법 도박 시장 규모가 170조원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전문가들은 “김제 마늘 밭이 지금도 전국 도처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콜롬비아 마약 조직 두목 에스코바르가 죽은 뒤, 그가 은닉한 현금 수십억 달러를 찾는 사냥꾼들이 지금도 활동 중이라고 한다. 이들이 다음 사냥터로 한국을 지목할지도 모르겠다.
01.25 백인 ‘미스 일본’ 소동

▲일러스트=박상훈
프랑스 축구는 오랜 기간 유럽의 2류였다. 지역 예선도 못 넘곤 했다. 1998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은 에메 자케가 “이래야 우승한다”며 내놓은 대표 선수 명단은 충격적이었다. 22명 중 12명이 이민자 후손이거나 이중국적자였고 상당수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이었다. 프랑스가 이민에 너그럽다지만 국민 80%가 백인이다. 당장 “백인 위주로 대표팀을 다시 꾸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자케는 거절했고 그 대회에서 처음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국가 대표는 피를 나눈 동포여야 한다는 오랜 믿음이 깨졌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는 한발 더 나갔다. 국가 대표 가운데 14명이 음바페·움티티·망당다 같은 이름을 쓰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었다. 아르헨티나와 맞붙은 2022년 대회 결승전에서 프랑스팀은 거의 흑인이었다. 프랑스만큼은 아니어도 피부색과 핏줄이 다른 외국인을 국가 대표로 기용하는 사례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도 국적법 개정을 통해 10년 전 귀화한 백인 아이스하키 국가 대표가 탄생하며 ‘푸른 눈 태극 전사’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미인을 뽑아 국제 대회에 내보내는 미인 대회만큼은 이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실력을 닦아 국가 대표가 되는 스포츠 선수와 달리 미인 대회는 거의 순전히 외모로 평가한다. 그러니 혈통이 국가 대표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와 핏줄이 다른 백인이나 흑인이 미스 코리아로 뽑히는 것을 상상하기 힘든 이치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조차 흑인 미스 아메리카는 1980년대 들어 처음 나왔다.
▶지난해 미스 짐바브웨 우승자는 부모가 영국에서 이주해 온 백인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백인을 대표 미녀로 뽑느냐”는 비난이 일었다. 짐바브웨엔 백인 국민도 많이 있지만 흑인이 다수다. 우승자는 “나는 짐바브웨에서 나고 자란 짐바브웨 국민”이라고 반박했다. 2021년 미스 아일랜드 대회에선 정반대로 남아공 출신 흑인이 왕관을 썼다. 미인 대회조차 혈통의 중요성은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일본에 그 변화가 상륙했다. 22일 푸른 눈의 미스 일본이 탄생했다. 우승자는 다섯 살 때 일본으로 이주한 우크라이나인이다. 동양인 국가에서 서양인이 미인 국가 대표가 된 것이다. 일본에선 “이게 뭐냐”는 논란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승자는 “20년 넘게 일본에서 살았는데도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았다”며 “이제야 진짜 일본인이 된 느낌”이라고 했다. 이 쪽 말도 맞는 것 같고, 저쪽 말도 맞는 것 같다. 백인 미스 코리아가 나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01.26 ‘이슬람 금주 족쇄’ 푼 사우디

▲일러스트=이철원
이슬람 국가 대부분이 율법으로 술을 금지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그중에도 엄격해서 술을 마약과 함께 중범죄로 다룬다. 중동 국가가 모두 사우디 같은 것은 아니다. 두바이는 호텔에서의 음주를 허용하고, 요르단은 ‘아락’이라는 도수 높은 증류주를 공항 면세점에서 판다. 금주 규정이 들쑥날쑥한 것은 이슬람 경전인 코란 자체가 애매해 저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이여 술과 도박과 우상 숭배를 피하라’면서 한편으론 ‘취하는 것이 인간에게 좋은 점도 있지만’처럼 장점을 거론한다.
▶기독교도 술을 금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결혼식에 참석한 예수가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이 나온다. 다만 당시 포도주 도수는 4~5도여서 사실상 물에 가까웠다고 한다. 수질이 나쁜 중동에선 고대부터 ‘포스카’라는 신포도주로 물을 소독해 마셨다는 것이다. 술에 대한 입장도 코란만큼 애매해 잠언에선 ‘술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가 시편에선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음주에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한국만의 특징이다. 여기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개화기 조선 땅을 밟은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의 무절제한 음주 행태와 그로 인한 폐해를 접한 뒤 음주를 노름·축첩과 함께 악습으로 규정한 것이 이후 전통으로 굳어졌다. 불교 역시 신도가 지켜야 할 도리를 규정한 오계(五戒)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돼 있지만 정작 석가모니는 음주는 물론 육식도 완전히 금하지 않고 조건부로 허용했다.
▶사우디가 1952년 술의 제조·판매·음용을 모두 금지한 지 72년 만에 주류 매장을 허용하기로 했다. 비(非)이슬람 외교관만 대상으로 한다지만 큰 변화다. 사우디의 주류 매장 허용은 실권자인 빈 살만 왕세자의 결단이다. 국가 개조 청사진인 ‘비전 2030′ 아래 홍해 자유관광지구 조성, 네옴시티 건설, 여성 운전과 공연장의 남녀 동석 허용 등 잇단 개혁 조치를 추진해 온 그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사우디의 금주법 도입은 왕자 중 한 명이 만취해 영국 외교관을 사살한 것이 계기였다. 적절히 술을 절제했다면 없었을 사고였다. 주요 종교가 완전한 금주보다 절제를 요구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사우디는 너무 극단적으로 막는 바람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왕실 귀족조차 술을 마시고 싶으면 비행기를 탔고, 처벌 위험을 무릅쓴 술 선물이 신뢰의 증표로도 쓰이는 부작용이 빚어졌다. ‘지키지 않을 법’의 위선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도 문명의 척도일 것이다.
01.27(토) 공포의 중국 입국 심사

▲일러스트=이철원
올 초 20대 한국 남성이 서울을 출발, 베이징에 들렀다가 유럽으로 갈 때다. 베이징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 다른 여행객 속에 섞여서 나오는데 중국 세관원이 그를 지목해 따라오라고 했다. ‘환승(transit)’ 피켓을 든 안내원에게 다가가기 전이었다. 몇 시간 공항 밖을 나갔다 출국하는데도 열 손가락 지문을 찍고, 안면인식기에 얼굴을 대야 했다. 중국 세관원이 어떤 시스템에 의해 그를 지목했는지 알 수 없었다. 세관원은 이미 그의 얼굴과 여행지를 알고 있는 듯했다.
▶40대 회사원 K씨는 지난해 중국 출장용 비자 신청서를 쓰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총 6페이지 신청서에 군 복무 관련 6개 항이 있었다. 병과·주특기·계급·복무기간 등을 모두 써야 했다. 최종 학력 및 전공도 적었다. 부모와 배우자, 자녀의 생년월일 및 출생지 항목도 있었다. 직장 항목에선 상사 두 명의 이름, 직위, 전화번호를 채워야 했다. “나는 물론 우리 가족과 직장 및 윗사람의 모든 정보가 털린 느낌”이라고 했다. 모두 중국이 지난해 7월 반(反)간첩법을 강화한 후 생긴 일들이다.
▶중국을 오가는 한국인들은 최근 입국 심사 관련 경험을 나누며 “별일 없었냐”는 인사를 주고받는 게 유행이다. 2020년 이후 코로나 시기에는 중국 입국이 물리적으로 힘들었는데, 이제는 정신적으로 피곤하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중국에 근무했던 전직 외교관은 최근 “절대 중국에 가지 말라”고 말하고 다닌다. “반간첩법 시범 케이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70대 한국인 사업가가 다이어리(업무용 노트)에 부착된 작은 세계지도 때문에 중국 선양 공항에 억류된 사건이 발생했다. 대만이 ‘타이완’으로 한국·일본 등과 똑같은 국가로 표시돼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30년간 중국에서 사업을 해 온 그는 “지도가 부착된 줄도 몰랐다”고 했다. 세관원들은 한 시간 후에 지도를 뜯어내고서야 그를 풀어줬다. 중국 공산당이 평소 그의 중국 내 행적을 5G 감시 시스템으로 지켜보다 핑계를 만들어 심리적 위협을 가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미국 퓨 리서치센터가 24국 3만여 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한 결과 중국에 부정적인 응답자가 67%였다. 한국 국민은 77%가 중국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중문과가 영문과를 제치고 어문계열 1위’ 기사가 많이 나왔지만 최근 중국어 인기는 온데간데없어졌다. 그 이유를 중국 공산당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01.29(월) 딥페이크의 明과 暗

▲일러스트=박상훈
벨기에 초콜릿 고디바(Godiva)의 로고엔 나체로 말을 탄 여인이 그러져 있다. 고디바 부인이다. 그는 11세기 영국의 지방 영주였던 남편이 가혹한 세금을 징수하자 줄여 주라고 졸랐다가 “당신이 나체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하는 답을 듣는다. 16세 여성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고디바는 결단을 내렸다. 감동한 농민들은 문과 창문을 걸어 잠갔는데 유일하게 커튼을 걷어 고디바를 엿본 게 양복점 직원 톰이었다. ‘엿보는 톰’(peeping Tom)은 관음증의 대명사가 됐다.
▶관음증은 인류 역사와 동행해 왔다. 로마 시대 유흥가에선 매춘부들이 창문을 열어놓고 목욕했다. 원나라에선 매춘부 숙소 벽에 구멍을 뚫어 손님을 끌었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에서도 목욕하는 여인들을 엿보는 동자승들의 엉큼한 표정이 압권이다. 관음증 마케팅은 기술의 진보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19세기 음화(淫畵), 20세기 포르노 산업은 카메라, VCR의 등장 덕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관음증을 집단화한 것이 인터넷이다. 1990년대 ‘빨간 마후라’ ‘O양 비디오’ 등은 고전에 속한다.
▶왜곡된 관음증의 한 형태가 음란 사진 합성이다. 초창기엔 유명 연예인, 미스코리아 등의 얼굴을 엉뚱한 사람 알몸과 합성하는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차원이 다르다. AI에 힘입어 간단한 명령어로 그럴듯한 가짜 이미지·영상을 만든다. 지난 주말엔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딥페이크 음란 이미지가 X(옛 트위터)에서만 4700만회 조회됐다고 한다.
▶지인 능욕이란 범죄가 있다. 유명인이 아니라 지인 얼굴에 보기 민망한 사진을 합성한다.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었다며 돈을 안 보내면 유포하겠다는 협박이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한다. 음란물만이 아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수갑을 차고 경찰에 연행되는 가짜 사진, 민주당 당원들에게 투표 거부를 독려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가짜 음성이 확산돼 문제가 됐다.
▶딥페이크가 어두운 그림자만 남기는 건 아니다. 작년 한 보험사 광고에 20대 신인 배우 윤여정이 등장해 “아직 작은 배역이지만, 노력하다 보면 사랑받는 배우가 될 수 있겠죠?”라고 말한다. AI가 과거 사진과 영상을 모아 만든 딥페이크 영상이다. 작년 국방홍보원은 2007년 훈련 도중 순직한 공군 박인철 소령을 복원해 어머니와 재회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고인이 남긴 음성·영상·사진으로 부활하는 시대다. 먼저 떠난 가족들과 가상 상봉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01.30 ‘오피스 빌런’

▲일러스트=이철원
서울시가 근무 평가에서 최하위 등급을 받은 50대 공무원을 직위 해제했다. 이 공무원은 코로나 후에도 재택근무를 고집하고, 노조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3개월 교육 후 뚜렷한 변화가 없으면 직권면직된다. 서울시 공무원 약 1만명 중 고작 한 명이지만, 일단 제도가 작동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공무원 노조가 이 조치에 합의한 것도 ‘오피스 빌런’에 대한 노조원들 불만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짓무른 사과 하나를 방치하면, 바구니 속 사과가 모두 썩는다.
▶고대 로마의 대형 농장(Villa)에 속했던 농부를 뜻하는 ‘빌런(Villain)’은 영화 용어로 많이 쓰였다. 영웅(Hero)을 괴롭히는 악당을 말한다. 미국 영화연구소(AFI)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싸이코’의 노먼 베이츠, ‘스타 워즈’의 ‘다스 베이더’를 100대 악당 중 1~3위에 올렸다. 빌런은 지하철에서 술주정을 하는 ‘1호선 빌런’, 운동복이나 수건을 아무렇게나 두는 ‘헬스장 빌런’ 등으로 ‘폭넓게’ 발전했다.
▶'오피스 빌런’은 민폐의 정도가 크다. 동료의 노동 의욕을 꺾는 것은 물론 기업 생산성까지 떨어뜨린다. 사무실에서 손발톱 깎고, 거침없이 트림을 하는 사람도 ‘빌런’으로 꼽히지만 진짜 악당은 따로 있다. 세 번을 청해야(삼고초려) 일한다는 ‘제갈공명 빌런’, , 신기술과는 담쌓은 ‘흥선대원군 빌런’,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파워레인저 빌런’, 퇴근 시간만 되면 하던 일도 내팽개치는 ‘신데렐라 빌런’이 직장인들이 꼽는 악성 빌런이다.
▶‘꼰대’만 악당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무를 지적하면 울먹거리는 ‘눈물 빌런’, 회사 급여와 복지만 따지는 ‘징징이 빌런’은 주로 젊은 층이라고 한다. 공무원, 공기업 등 주인 없는 회사는 오피스 빌런의 좋은 ‘서식처’였다. 한때 직원이 7000명(현재 약 4000명)이었던 KBS는 헬스장에서 업무를 시작하며 “기둥 뒤에 숨어 정년 퇴직을 맞겠다”는 월급 루팡의 서식처라는 말도 들었다.
▶인력 회사 리쿠르트가 2년 전 814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10명 중 8명이 ‘회사에 오피스 빌런이 있다’고 답했다. 유형별로는 ‘갑질·막말형’이 21.1%, 공은 챙기고 책임은 미루는 ‘내로남불형’ 13.5%, 월급날만 기다리는 ‘월급루팡형’이 13.4%였다. 응답자에게 ‘당신이 오피스 빌런은 아닌가’ 물었다. 82.1%가 자기는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당신 사무실에 빌런이 하나도 안 보이면, 당신이 오피스 빌런이다”라는 농담이 있나 보다.
01.31(수) ‘운동권 경제학’

▲일러스트=박상훈
1980년대 대학에 입학해 제일 먼저 이름을 안 경제 저술가가 박현채였다. 학과 선배들이 세미나와 MT 때 읽어오라고 콕 찍어준 필독서가 리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와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의 ‘민중과 경제’였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자인 조순 등은 그보다 나중에 알게 됐다. 박현채는 ‘민족 경제론’을 주장했는데 한국 경제를 ‘식민지 종속형 자본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궁극적 지향점을 ‘미국 경제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자립 경제’라고 했다.
▶“386 세대가 경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가 청와대와 여당의 386 운동권 출신에게 일침을 놨다. 대학 시절 습득한 ‘운동권 경제학’의 좁은 시야로 온갖 정책에 관여하다 보니 경제 부총리로서는 황당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80년대 운동권 경제학의 인기 저자였던 박현채(1934~1995) 교수는 빨치산 경험, 인혁당 사건 연루 등의 이력 때문에 오랫동안 재야에서만 활동하다 1980년대 후반에 뒤늦게 조선대 교수로 채용됐지만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는 이른바 ‘학현학파’ 출신들이 중용됐다. 분배 경제학을 중시한 고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의 ‘학현연구실’과 인연 있는 경제학자들이다. 노무현 정부의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문재인 정부의 홍장표 경제수석, 강신욱 통계청장 등이 학현학파로 꼽힌다. 변형윤 교수는 1980년 시국 선언으로 해직 교수가 됐을 때, 제자이자 서울대 경제학과 후배인 박현채씨가 “소주 한잔 하십시다. 등산하러 가십시다” 하고 불러내 위로해 준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고 둘 사이의 남다른 인연을 얘기했다.
▶운동권 출신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1인당 국민소득이 IMF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가 됐다”며 윤 정부의 ‘경제 파탄’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경제학자 출신의 윤희숙 전 의원이 “희한한 일. 작년 숫자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 되레 마음이 짠해진다”고 반박하면서 말만 앞서고 경제 현실에 무지한 ‘운동권 경제학’을 정치판 화두로 떠올렸다.
▶지난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 ‘반일(反日) 죽창가’는 분배 중시, 반미·반일의 민족 경제론 같은 이른바 ‘운동권 경제학’의 문제의식에 뿌리를 둔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경제 좌우명으로 삼는다는데, 현실에서는 가슴만 뜨겁지 머리는 냉철하지 못해 집값 폭등의 불로소득 주도 성장, 분배 악화, 통계 조작 같은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운동권 세대와 함께 철 지난 ‘운동권 경제학’도 이제는 청산해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