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3-12/ 12-01(금) 헨리 키신저, 1923∼2023 - 12-30(토) ‘나의 아저씨’의 죽음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12/
12-01(금) 헨리 키신저, 1923∼2023

말년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구부정하고 어눌했다. 때로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래도 ‘올빼미 눈’이라고 불려온 그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지난달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비판하고 중동지역의 분쟁 확산을 경고하는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지난해 19번째 저서를 내고 최근까지도 각종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해온 키신저의 행보는 100세라는 나이에도 거뜬히 계속될 듯 보였다.
▷‘미국 외교의 전설’, ‘죽(竹)의 장막을 열어젖힌 미중 외교의 상징’, ‘동서 데탕트 외교의 주역’…. 30일 타계한 키신저에게 따라붙는 헌사는 끝이 없다. 국익을 앞세운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냉전시대 미국 외교의 밑그림을 그려낸 게 그다.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칭했던 그는 1, 2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의 역사와 세력 구도, 메테르니히와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에 천착했다. 핑퐁 외교로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과의 세력 균형을 시도한 외교 구상에는 이런 역사적 식견이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쟁, 아랍과 이스라엘 갈등, 중남미 정쟁까지 키신저가 현직에서 다뤄 보지 않은 글로벌 외교 현안은 없다. 기록해야 할 내용도 많았는지 그가 생전에 낸 회고록들의 분량만 3800페이지에 달한다. 퇴임 후까지 합쳐 그가 조언한 미국 대통령은 12명. 닉슨 행정부 때부터 유지돼온 대중 정책 기조를 뒤집어버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조차 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중국과의 물밑 통로로 그를 활용하려 했다. 트럼프가 북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한 과정을 놓고 “1971년 닉슨 방중을 성사시킨 키신저의 방식을 따라했다”는 학계 분석도 있다.
▷미국 외교안보를 좌지우지해온 거목이 100세까지 장수한 기록은 전례 없는 장면들을 연출해냈다. 50년간 봉인되는 기밀문서들이 그의 눈앞에서 해제돼 버린 것이다. 비정부기구(NGO) 등의 요구에 따라 국무부가 공개한 수천 페이지 분량의 녹취록에는 “소련이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넣는다고 해도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우려이지 미국이 걱정할 바가 아니다” 같은 냉혹한 발언들이 담겨 있었다. 미국의 대만 정책 선회 같은 민감한 결정 과정부터 기자들과 나눈 밀담까지 그대로 공개된 것은 그에게는 꽤나 민망한 일이었을 것이다.
▷키신저가 95세부터 인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삼았던 것은 인공지능(AI)이 세계 외교안보에 미치는 영향 연구였다. 그는 올해 에릭 슈밋 전 구글 CEO와 함께 쓴 책에서 핵무기보다 대응이 어려운 AI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이를 관리할 국가기구 설립과 전략 독트린 마련 등을 제언했다. 여기저기서 전쟁이 터지는데 미중 갈등은 심화하고 신기술의 위협까지 커지는 세상, 키신저의 경륜과 조언이 그리운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02(토)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조계종은 지난달 29일 입적한 자승 스님이 생전에 일찌감치 남겼다는 열반송(임종게)을 공개했다. 원래 열반송은 고승들이 숨을 거두기 전 평생의 깨달음을 압축해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뜻한다. 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초월의 경지와 폐부를 찌르는 성찰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열반송 중에선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이 남긴 것이 가장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는다/산 채로 지옥에 떨어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둥근 수레바퀴가 붉음을 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치 자기 죄를 고백하는 듯한 이 열반송은 구구한 해석을 낳았다.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였던 원택 스님은 “생전 신도들에게 ‘내 말에 속지 마라’고 자주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라는 스님 특유의 반어법이 담긴 것”이라고 풀이했다.
▷예전엔 보통 5언, 7언 절구의 한시(漢詩) 형태로 남겼지만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간결하게 한글로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내 대표적 비구니인 광우 스님은 2019년 ‘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가 갈 뿐이다’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의 열반송은 2010년 임종한 지 8년 만에 미발표 원고 등을 책으로 낼 때 함께 공개됐다. 그는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다. 간다. 봐라”라고 했다.
▷열반송조차 불필요한 겉치레라고 본 스님들도 있었다. 8대 종정을 지낸 서암 스님은 제자가 열반송을 남겨 달라고 하자 “나에겐 그런 거 없다. 정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라고 했다. 2021년 입적한 월주 스님(전 총무원장) 역시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가 바로 임종게가 아닌가”라고 했다. 그는 열반송이 마치 고승의 징표처럼 여겨지는 세태에 대해 “임종게 없이 돌아가신 분의 상좌들이 임종게를 (만들어) 발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자승 스님은 2009년부터 8년간 제33, 34대 총무원장을 지낸 뒤에도 조계종의 막후 실세로 활동해 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주변 스님들과의 다툼과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최근 대학생 전법을 위해 10년간 힘쓰겠다고 했던 그가 갑자기 분신과 흡사한 ‘소신공양’ 형태로 세상을 떠나자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분위기도 있다. 불교계에서 십수년 동안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그는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던 것일까. 사라지는 인연…. 그가 미리 남긴 열반송이 그의 마지막을 암시한 듯하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12-04(월) ‘유럽 흑사병보다 더 심각할 수 있는 한국 저출산’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로스 다우섯은 2일 ‘한국 소멸하나’라는 도발적 제목의 칼럼에서 “흑사병 창궐 이후 인구가 급감했던 14세기 중세 유럽 시기보다 더 빠르게 한국 인구가 감소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근거는 한국의 합계출산율인 0.7명을 적용하면 한 세대가 200명이라고 할 경우 다음 세대에는 70명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합계출산율은 15세 여성이 가임 기간이 끝나는 49세까지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숫자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올 10월 발표한 추계에 따르면 합계출산율이 0.7에서 반등하지 않고 유지될 경우 2040년 0∼14세 인구는 2020년의 절반가량으로 줄어든다. 0∼14세 인구가 200명이라고 한다면 20년 만에 100명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다우섯이 한 세대를 30년으로 봤다면 30년 만인 2050년에는 얼추 70명으로 줄어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흑사병은 1348년 이탈리아에 상륙해 4년 만에 유럽 총인구의 3분의 1을 사망케 했다. 파리 피렌체 런던 등 도시에서는 사망률이 50∼80%에 이르렀다. 전염병에 의한 단기간 급속한 인구 감소이긴 하지만 당시는 전염병 없이도 사망률이 높아 장기간 인구 회복이 쉽지 않았다는 점에서 낮은 출산율에 의한 장기간 감소와 비교하는 것이 꼭 어색한 것만은 아니다. 다만 한국의 총인구는 합계출산율 0.7이 유지되더라도 고령 인구로 인해 2040년에 2020년보다 5% 정도 감소한다는 사실은 기억해둬야 한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8년째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합계출산율이 1을 밑도는 유일한 나라로서 꼴찌에서 두 번째인 나라와 압도적 차이로 꼴찌다. 합계출산율이 1을 밑도는 상황도 5년째 계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나라가 겪는 기록적인 저출산이 이제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음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가 뉴욕타임스 칼럼일 뿐이다.
▷한국은 자원이 부족해 가공 무역을 통한 수출밖에는 먹고살 길이 없다. 그래서 우수한 인력을 키웠다. 인력을 키우는 데는 돈이 든다. 내부 경쟁은 점차 심해져 공교육으로는 따라잡지 못하고 사교육으로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비혼(非婚) 출산에 호의적이지 않은 문화 때문에 기본적으로 출산율이 떨어지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이 더 떨어지는 것은 사교육비 때문이다. 다우섯도 그 점을 지적했다. 성공한 그 이유 때문에 실패한다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공식을 피해 가야 진짜 성공한 나라가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05 한국인의 ‘인생수지’… 흑자 인생은 34년뿐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인생 전체에서 ‘플러스’인 시기는 34년에 불과하다. 부모에게 의존하다 27세가 되어서야 소득이 소비보다 많은 ‘흑자 인생’에 진입한다. 43세를 정점으로 노동소득은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61세부터 ‘적자 인생’이 시작된다. 그래프로 그려보면 좌우가 똑같은 데칼코마니 같다. 불교에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성경에선 ‘알몸으로 태어나 알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문제는 벌어놓은 돈으로 버텨야 할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는 점이다.
▷한국고용정보원 분석에 따르면 65∼79세 고령자의 56%가 계속 일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하는 즐거움보단 돈이 필요해서라는 응답이 더 많았다. 자녀 교육비에 대출금 상환에 빠듯하게 살다 보니 모아놓은 돈은 부족하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전국 20∼79세 남녀 3000명에게 물어보니 노후에 여유롭게 살려면 ‘적정 생활비’로 월 369만 원은 필요할 것이라고 답했지만, 실제로 조달 가능하다고 답한 생활비는 212만 원에 그쳤다. 응답자 절반 이상은 아직 노후를 위한 경제적 준비를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통계청이 내놓은 ‘2021년 국민이전계정’을 보면 한국 국민 전체로는 생애 동안 108조 원 적자다. 소득은 거의 없지만 교육비 등 지출이 많은 고등학생(17세) 때 1인당 3572만 원 적자로 적자 규모가 가장 컸다. 노동소득이 가장 많은 43세(1792만 원 흑자)를 정점으로 흑자가 줄어 61세부터는 다시 적자로 전환했다. 생애 초반기 적자는 부모에게 의존했지만, 인생 후반기엔 예전과 달리 자식 손을 빌리기가 어려워져 노후 파산의 위험도 커졌다.
▷인생의 적자 단계에 들어서기 전에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3층 연금구조를 마련해 노후 고정수입을 최대한 확보하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이와 함께 은퇴 후 현실에 맞춰 미리미리 씀씀이를 줄여 가려는 준비도 필요하다. 중대 질병 발생, 성인 자녀 지원, 창업 실패, 금융사기, 황혼 이혼 등 ‘5대 리스크’도 피해야 한다. 재무적인 준비와 함께 건강, 관계, 여가 등도 챙겨야 한다. 비상 상황에 대비해 재난훈련을 하듯, 노후 준비도 꾸준하고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적자 인생에 대한 대비가 시급하다. 노동연령층(15∼64세)이 돈을 벌어 유년층과 노년층에 나눠주는 구조인데, 저출산·고령화로 노동연령층 인구는 가파르게 줄고 있다. 지금 모래주머니 달고 뛴다면 앞으론 쌀가마니 들쳐메고 달려야 할 판이다. 국민이전계정 통계를 분석하면 자녀 1명을 독립시키기까지 2억8300만 원이 드니 아이 많이 낳으라고 말하기도 현재로선 민망하다. 미래 세대를 위한 구조개혁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이유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2-06 수학이 필수인 AI시대, ‘수포자’ 양산하는 수학교육

인류 문명의 진보에는 수학의 힘이 컸다. 산수와 대수학 덕분에 상업이 발달했고, 삼각함수로 선박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으며, 미적분으로 우주선의 정확한 궤도를 계산해 냄으로써 태양계 너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요즘 대세인 인공지능(AI)은 시작과 끝이 수학이다.
▷AI는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학습’해 정답일 확률이 가장 높은 답을 ‘추론’하는데 이 모든 과정에 다양한 수학 개념이 활용된다. 기계학습에 사용되는 텍스트 소리 영상 등 데이터는 컴퓨터가 알아듣도록 ‘벡터’로 표현되고, 이들이 수많은 ‘행렬’ 곱셈을 거치면 최종적으로 확률 함수를 이용해 추론해 낸다. 이러한 학습을 무한대로 반복하며 오차를 최소화하는 과정엔 ‘미분’이 사용된다. 2000년 넘는 수학의 역사가 없었다면 AI도 없었다.
▷AI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학생들의 수학 실력이 뒷걸음치고 있다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결과는 우려스럽다. 지난해 세계 81개국 15세(중3∼고1) 학생들의 수학, 읽기, 과학 분야 성취도를 평가한 결과 한국 학생들의 수학 평균이 527점으로 22년 전보다 20점 떨어졌고 순위는 3위에서 5위로 내려갔다. 여학생은 22년간 7점, 남학생은 29점 하락했다. 특히 다른 나라보다 학생들 간 점수 차가 컸다. 이른바 수학을 포기한 ‘수포자’가 많다는 뜻이다.
▷수학 성적의 하향세는 학습량 감소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초중고교의 수학 수업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보다 크게 모자란다. 중학교 3학년의 경우 연간 수학 시간이 93시간으로 OECD 평균의 76%밖에 안 된다(2019년 기준). AI에 필수적인 ‘행렬’도 너무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2011년 이후 고교 수학에서 빠졌다가 2025년부터 다시 넣기로 했다. 수포자가 늘어날까 봐 학습량을 줄였는데 수포자는 늘고 상위권 실력까지 떨어졌다. 올해 서울대 기초 수학시험에서는 이공계 신입생 10명 중 4명이 1학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인 학력 미달 성적을 받았다.
▷요즘 유튜브에는 수학이 싫어 문과를 택했다가 AI를 계기로 뒤늦게 코딩과 함께 행렬 미분 함수 벡터 확률 공부에 빠져든 사람들의 경험담이 올라온다. 이들은 “예전엔 영어를 잘하면 취업에 유리했듯 이제는 수학적 언어가 중요하다”고 한다. 영국이 수학 의무 교육 기한을 16세에서 18세로 늘리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와 개인의 경쟁력을 위해 수포자만 양산하는 수학 교육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제한된 시간에 정답을 찾아내는 ‘수능 수학’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력과 창의력으로 질문하는 힘을 키우는 진짜 수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07 현대차 300억弗, 기아 200억弗 ‘수출의 탑’

5일 열린 올해로 60번째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레드카펫의 주인공은 자동차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의 두 형제인 현대차와 기아는 나란히 ‘300억 달러 수출의 탑’과 ‘200억 달러 수출의 탑’을 받았다. 이날 수상을 한 1700여 개 기업 중 수출액 1, 2위였다. 자동차 업계가 최고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올해 수출 부진으로 한국 경제가 고전하는 동안 자동차는 역대 최대 실적을 앞세워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수출의 탑’은 한 회사의 수출 실적이 특정 구간을 넘어서는 신기록을 세울 때 주어진다. 스포츠로 치면 ‘커리어 하이’ 개념이다.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1년간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 기간 현대차가 310억2000만 달러, 기아가 234억8000만 달러어치의 자동차를 수출했다. 두 회사가 벌어들인 외화 545억 달러(약 71조 원)는 지난해 한국 전체 수출액의 8.0%, 국내총생산(GDP)의 3.3%에 해당한다. 자동차는 부품, 철강, 물류 등 다른 산업에 파급 효과도 커서 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
▷세계 경기 침체, 지정학적 위기, 보호무역 심화 등 악재 속에서도 현대차·기아는 고급화와 글로벌을 무기로 위기를 돌파했다.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와 고부가가치 모델인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판매 비중을 이전보다 크게 늘렸다. 불확실한 환경에 대비해 다양한 카드를 준비해 놓은 것도 주효했다. 미국, 유럽, 인도, 동남아 등으로 수출 전선을 다변화했다. 전기차가 잘나갈 때는 전기차로 테슬라를 추격했고, 전기차 수요가 위축되자 하이브리드차를 앞세워 도요타와 맞섰다.
▷최근 해외에선 현대차그룹 앞에 ‘멋진(cool)’이란 수식어를 많이 붙인다. 올해 5월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현대차는 어떻게 이토록 멋있어졌나’라는 기사에서 세계 3위의 자동차그룹으로 성장하기까지 과정을 집중 분석했다. 지난달 미 자동차 전문매체 오토모티브뉴스도 “한땐 ‘패스트 팔로어’(추격자)였지만 이젠 업계의 혁신자”라며 “‘멋진 한국’ 느낌을 내는 최첨단 브랜드가 됐다”고 평했다. 자동차를 넘어 로봇, 인공지능(AI),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노력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5일 무역의 날 기념식이 열린 서울 강남구 코엑스 전시관엔 국산 자동차 고유 모델 수출의 효시인 ‘포니 왜건’이 전시됐다. 1976년 남미 에콰도르로 차량 5대를 실어 보낸 것이 시작이었다. 부품 하나 설계해 본 적 없으면서 자동차 독자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던 1970년대의 무모한 도전이 지금의 수출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우리 미래를 먹여 살릴 다음 주력엔진은 무엇인가. 또 한 번의 도전과 혁신이 절실한 때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2-08 지역 가입자보다 많은 건보 피부양자, 그 중엔…

고위공직 후보자 인사 검증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란거리가 건강보험 무임승차 문제다. 퇴직 후 꽤 많은 소득이 있는데도 자녀의 피부양자로 이름을 올리거나, 해외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자녀나 지방에서 여유 있게 사는 노부모를 피부양자로 등록했다는 식이다. 불법 여부를 떠나 한국의 건보 제도가 피부양자를 지나치게 넓게 인정해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현행 건보 제도에서는 어느 한 사람이 직장에 다니면 그 배우자(사실혼 포함)와 아들딸,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장인 장모(또는 시부모), 손주와 증손주, 형제자매까지 피부양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건보 가입자 5141만 명 중 직장 가입자는 1960만 명, 이에 딸린 피부양자가 1704만 명으로 보험료를 내는 지역 가입자(1477만 명)보다 많다. 3명 중 1명이 돈 한 푼 내지 않고 건보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피부양자가 되려면 ‘연 소득 2000만 원 이하’ 같은 소득과 재산 기준을 충족해야 하지만 법망이 성글어 억대 외제차를 몰면서도 건보료 한 푼 안 내는 무임승차자가 3만 명이나 된다. 외국인에게도 같은 혜택을 주고 있어 한국에서 일하는 아들딸, 사위, 형제자매 덕에 아프면 한국에 입국해 바로 피부양자로 등록한 후 수천만 원어치 치료만 받고 나가는 외국인이 많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는 43억9000만 원어치 진료를 받은 외국인 피부양자 사례가 공개되기도 했다.
▷이달 중으로 예정된 정부의 건보 개편 방안 발표를 앞두고 건강보험공단이 피부양자 인정 기준 개선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피부양자를 배우자, 부모, 자녀로 제한하고 향후엔 더 축소해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에게만 자격을 주는 방안을 제안한다. 고령화로 건보 재정이 악화하고 있어 피부양자 무임승차로 새는 재정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건보 재정은 내년부터 적자로 돌아서 2028년이면 적립금이 바닥나고 2032년이면 누적 적자액이 6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퇴직을 앞둔 직장인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가 ‘건보료 폭탄’이다. “자식 밑으로 들어가 있는데 금융 소득이 늘어 피부양자 탈락 안내문이 왔다” “연금 수입 늘었다고 피부양 자격 박탈이 말이 되느냐”는 선배 퇴직자들의 경험담이 남 일 같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과 일본 정도 외엔 시행하는 나라가 없는 피부양자 제도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1977년 체제 경쟁 시절 북한의 무상의료를 의식해 도입한 건강보험은 세계적으로도 성공적인 사회보험으로 꼽힌다. 이런 제도의 혜택을 미래 세대도 누릴 수 있도록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09(토) “워싱턴이 열심히 일할수록 미국은 더 나빠진다”

케빈 매카시 전 미국 하원의장은 워싱턴에서 가장 굴욕적인 기록을 갖고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소속당인 공화당 강경파들의 반대로 올해 초 15번의 투표를 거치고서야 간신히 의사봉을 손에 쥐었고, 그마저 9개월 만에 내려놔야 했다. 예산안 처리를 위해 민주당과 손잡았다는 이유로 동료 의원들에게 당한 미 역사상 최초의 하원의장 해임이었다. 임기 내내 강성파에 휘둘리던 그가 쫓겨나자 하원의장직에 “워싱턴 최악의 일자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매카시 전 의장이 9선 중진으로 17년간 지속해온 정치 인생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퇴임의 변 차원에서 월스트리트저널에 낸 기고문의 한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워싱턴이 더 많은 일을 할수록 미국은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고 했다. 정치가 나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결과적으로 해악을 끼쳤다는 쓴소리다. 그의 해임 사유가 된 임시예산안만 해도 시한을 넘길 경우 연방정부가 셧다운되는 위태로운 상황이었건만 당내 강경파는 끝까지 반대했다.
▷정작 매카시 본인도 망가진 미국 정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불복과 극렬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사태를 옹호했던 게 그였다. 트럼프를 비판한 리즈 체니 하원의원 축출에 앞장섰고, 하원의장 시절에는 직권으로 바이든 대통령 가족에 대한 탄핵 조사를 지시했다. 트럼프가 “나의 케빈”이라고 부를 정도로 예스맨 역할에 충실했다. 그의 해임안이 통과된 시점에 나온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 의회 신뢰도는 13%까지 떨어졌다.
▷워싱턴 의회 활동이 다른 나라에서까지 정치 교과서처럼 여겨지던 시절은 옛말이다. 극심해진 양극화 속에 민주당과 공화당 간 갈등은 물론이고 당내 혼란과 충돌도 잦아지고 있다. 정치인들의 몽니와 거짓말, 버티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기댄 포퓰리즘이 ‘뉴노멀’이 되어가고 있다고 현지 언론은 전한다. 지난달 상원에서는 격투기 선수 출신의 의원이 청문회 증인과 말싸움을 하다 몸싸움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싸움을 말리던 버니 샌더스 상임위원장의 입에서 “미국인들은 이미 의회를 충분히 경멸하고 있다”는 시니컬한 경고가 나왔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등의 주제를 연구 중인 학자들은 “출구가 안 보인다”며 한숨이다. 망가지는 정치에 염증을 느낀다는 현역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공화당은 매카시가 던진 메시지를 자성의 계기로 삼기보다 줄어든 의석수가 가져올 표차 계산에 바쁘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면 정치인들은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여야 할 것 없이 민생 입법과 예산 처리, 협치와 혁신은 미뤄둔 채 강성 지지층만 보고 달리는 한국 여의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논리일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11(월) ‘21세기 차르’ 푸틴의 5번째 대선 출마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잔혹한 이반’ ‘이반 뇌제’로 불린 이반 4세를 칭송하곤 했다. 이반 4세는 말년에 아들을 몽둥이로 살해할 만큼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은 폭군이지만 시베리아로 영토를 넓히고 전제왕권을 확립한 러시아 최초의 차르. 스탈린은 그의 공포정치에 특히 주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반 뇌제는 보야르(특권 귀족)를 너무 적게 죽였다. 그들을 전부 죽였어야 한다. 그랬다면 통합되고 강력한 러시아를 더 일찍 만들었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년 3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대선 출마 요청에 화답하는 형식이었다. 그로선 다섯 번째 출마다. 최근 여론조사 지지도가 78.5%나 되는 상황에서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71세인 그는 2020년 개헌으로 두 차례 더 6년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내년 5선에 이어 2030년 6선까지 성공하면 84세까지 집권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한 ‘20세기 차르’ 스탈린을 능가하는 ‘21세기 차르’로 최장수 크렘린궁 지도자 자리를 예약한 셈이다.
▷푸틴은 안팎의 분쟁과 위기로 막강 권력을 키웠다. 소련 붕괴 이후 술통에 빠져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눈에 든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의 야심가 푸틴은 1999년 47세에 일약 제2인자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해 체첸 사태 때 대규모 공습 강행으로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과시하며 이듬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돈바스 전쟁 와중엔 크림반도를 병합함으로써 지지도 90%로 정점을 찍기도 했다.
▷푸틴의 정치적 입지가 커갈수록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야당 인사에 대한 구금과 암살이 판치면서 권력자와 주변 세력이 국가 재산을 훔쳐 끼리끼리 배 불리는 도둑정치가 횡행했다. 커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푸틴은 국민의 눈을 바깥으로 돌렸다. 영토 확장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환상을 심는 전형적 독재자 수법이었다. 작년 우크라이나 침공도 자신의 종신 집권을 위한 ‘피의 꽃길’ 깔기였을 것이다.
▷푸틴은 최근 암 수술설, 초기 파킨슨병 진단설 등 건강 이상설에 시달렸다. 과거 곰과 싸우는 모습을 연출하거나 상의를 벗고 말을 타며 ‘마초 카리스마’를 뽐낸 것과 대조적이다. 푸틴의 롤 모델은 표트르 대제. 그는 우크라이나 침공도 표트르 대제의 북방전쟁에 빗대며 “빼앗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그런 푸틴을 두고선 서구화 개혁을 상징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닌, 잔혹과 광기를 남기고 떠난 이반 뇌제와 겹쳐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2-12 90대 유모 쫓아내려던 전문직 아들과 소송으로 막은 아버지

70대 A 씨는 2014년 서울 성동구에 23.1㎡(약 7평)의 소형 오피스텔을 구입했다. 어릴 적 자신을 돌봐준 유모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투병 생활을 하느라 돌보지 못한 A 씨 등 5남매를 이 유모는 정성스레 키웠다. 그 고마움을 간직했던 A 씨는 뒤늦게 유모가 기초생활수급자로 폐지를 주우며 어렵게 산다는 걸 알게 됐고, 형제자매들과 상의해 거처를 마련해준 것이다. 다만 A 씨는 오피스텔 명의를 아들 B 씨의 이름으로 했다. 유모가 숨지면 자연스레 아들의 소유가 되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 됐다.
▷7년이 지난 2021년 40대 아들 B 씨는 돌연 유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오피스텔을 비워주고 그동안 안 낸 임차료 1300만 원까지 내라는 것이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아들은 그동안 모은 돈과 증여를 통해 오피스텔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90대에 치매를 앓아 거동조차 불편한 유모는 전혀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 아들이 자신의 명의로 해준 것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친어머니처럼 여기던 유모를 내쫓으려 했다는 것이 아버지로선 얼마나 야속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아버지는 아들 편이 아닌 유모 편에 섰다. 혈연관계가 아니어서 유모의 소송을 대리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자 대한법률구조공단 등을 찾아다니며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까다롭다며 난색을 표하던 공단 측도 그의 거듭된 호소에 소송에 나섰다. 유모의 성년후견인이 되는 복잡한 절차를 밟았고, 유모의 인적사항 등 기본 서류부터 다양한 재판 서류를 일일이 준비해 제출했다. 또 공인중개사를 설득해 매매 당시 아들에게 명의를 신탁한 것이라는 증언을 하게 했다고 한다. 오피스텔은 실제로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라며 소유권을 돌려달라는 소송도 별도로 냈다.
▷법원의 판단은 기른 정을 소중히 여긴 아버지의 편이었다. 오피스텔의 실질 소유주가 아버지라는 점, 아들의 주장은 무효라는 점, 그러니 소유권도 아버지에게 넘기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오피스텔 매매대금 등을 모두 아버지가 냈고, 이후 관리비와 재산세 등도 아들이 전혀 부담하지 않았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어릴 적 자신을 돌봐준 유모를 지키려는 70대 아버지,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으려 그런 아버지와 소송을 벌인 40대 전문직 아들의 사연에 감동과 씁쓸함이 교차한다. 아들은 머지않아 자신의 몫이 될 재산에 욕심을 부리다 오피스텔도 잃고 아버지도 잃고 말았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무섭다고들 하지만 길러준 유모에게 끝까지 보은한 아버지 A 씨의 마음 씀씀이에 고개가 숙여진다. 비록 재판까지 갔지만 아들도 깨닫는 바가 있었으면 좋겠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12-13 맥킨지 ‘개구리 보고서’ 2탄 “이젠 끓는 물에서 꺼내라”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온도 변화를 느끼지 못해 결국 죽음을 맞는다. 위기에 둔감한 상황을 경계할 때 많이 인용하는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다. 한국에선 2013년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가 한국 경제를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해 큰 충격을 안겼다. 중대한 위기가 닥쳐오는데 문제도 못 느끼고 뚜렷한 해결책 역시 없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맥킨지가 ‘한국 경제 개구리론’ 2탄으로 10년 만에 다시 쓴소리를 했다.
▷맥킨지는 ‘한국의 다음 S-커브(상승곡선)’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10년 사이에 냄비 속 물의 온도가 더 올라갔다”고 지적했다. 인구구조 불균형 심화와 노동 생산성 감소,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와 모험 자본시장의 정체, 국가 기둥 산업의 글로벌 경쟁 심화 및 중소기업 생산성 부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젠 “물의 온도가 내려가기만 기다릴 순 없다”며 “개구리를 냄비 밖으로 꺼내는 과감한 시도와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보고서는 한국 경제를 종합 진단한 맥킨지의 세 번째 보고서다. 1998년 1차 보고서 ‘한국 재창조의 길’은 한국이 과거의 방식을 버리고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2013년 2차 보고서 ‘신성장 공식’에서 개구리 비유가 나왔다. 특히 가계대출과 교육비 부담, ‘고용 없는 성장’, 저출산 등의 문제를 지적했고, 여야 정치인들이 앞다퉈 보고서를 돌려봤다. 3차에 다시 개구리가 등장한 건 서글프다. 10년 동안 제대로 숙제를 하지 않았단 뜻이다.
▷맥킨지는 보고서에서 노동, 자본,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8대 과제를 제시했다. 정유·석유화학, 철강, 건설 등 중후장대 제조업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플랫폼,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 고부가가치 산업 비중을 확대하고, 반도체, 모빌리티, 바이오 등 원천기술에 기반한 신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이 지금보다 5개는 더 있어야 하고, 중소기업 생산성은 2배로 향상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경제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맥킨지는 2040년 한국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 7만 달러를 달성해 세계 7대 경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평균 성장률을 4%대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생산성 혁신에 진력한다면 해낼 수 있다. 사실 과학적으로 보면 개구리는 물이 뜨거워지기 전에 뛰쳐나간다고 한다. 한국도 장딴지 근육을 탄탄하게 키우면 다시 힘껏 뛰어오를 수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2-14 일상 복귀 막막한 고립·은둔 청년 54만 명

코로나가 끝나고 해방감에 들떠 있을 때 전문가들은 곧 정신건강의 위기가 온다고 경고했다. 재난이 닥치면 막아내느라 정신없어서, 다 같이 힘들다는 생각으로 버티다 막상 이겨내고 나면 피해를 수습할 일이 암담해서, 나만 뒤처져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우울해진다는 경고였다.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코로나로 자립의 기회를 놓친 청년들이 취약집단으로 지목됐는데 우려가 현실이 됐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19∼34세 청년 1000만 명 중 은둔형 외톨이, 즉 사회와 단절된 채 방에 갇혀 지내는 고립·은둔 청년이 54만 명으로 5%나 된다. 2019년엔 3%였다. 팬데믹이 고립을 악화시킨 것이다. 대학 진학과 취업에 실패한 청년들은 사람 마주치기 두려워 집 밖을 나가지 않게 되고, 그 상태에 편안함을 느끼다, 갈수록 고통스러우나 제 의지로는 빠져나오기 힘든 지경이 된다. 은둔형 외톨이의 절반이 일상 복귀를 시도하다 고립 상태로 되돌아갔다.
▷은둔형 외톨이는 다차원 빈곤을 겪는다. 직업이 없고 주거 환경이 열악한 경제적 빈곤, 활력과 자존감이 바닥인 심리적 빈곤, 너무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은 의지의 빈곤, 가족도 일주일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관계의 빈곤이다. 대부분 시간을 스마트폰 들여다보며 지내는데 소셜미디어 속 남의 화려한 일상을 보며 좌절감을 키운다. 깊은 고립감을 경험한 사람은 자살 시도를 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 조사에선 4명 중 3명이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일반 청년의 33배다.
▷코로나 이후 청년층의 고립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구에서는 이를 ‘극단적 사회 탈퇴(extreme social withdrawal)’라고 한다. 특히 일본의 히키코모리와 한국의 은둔형 외톨이 현상이 심각한데 연구자들은 한일 양국의 치열한 경쟁과 높은 기대감을 원인으로 꼽는다. 단일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문화와 학력주의가 저출산 사태와 결합해 청년들에게 중압감을 준다는 진단이다. 요즘 한국 청년들은 자신감이 없고, 완벽주의 성향에 본인을 다그치며, 주위의 기대를 높게 지각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은둔형 외톨이는 어느 연령대에나 있다. 75세 이상은 10명 중 1명이다. 그럼에도 청년층에 주목하는 이유는 고립된 장년, 고립된 중년, 고립된 노년으로 살아갈 위험이 높아서다. 선제적 대응에 실패한 일본은 80, 90대 부모가 50, 60대 히키코모리 자녀를 부양하는 ‘8050문제’ ‘9060문제’를 안고 있다. 정부는 처음으로 관련 대책을 마련하고 내년엔 1341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은둔형 외톨이들이 바라듯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뛰는 반주형(伴走型) 지원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15 “물가 도둑 잡아라”… 뒤늦은 ‘슈링크플레이션’ 단속

‘모든 데이터가 물가 인상은 없다고 보여주는데 왜 모든 사람이 생활비 부담에 점점 짓눌린다고 느낄까.’ 영국 경제학자 피파 맘그렌이 2009년 자신의 저서 ‘시그널’에서 제기한 의문이다. 그는 기업들이 가격은 놔둔 채 상품의 양이나 부피를 줄이는 현상에서 답을 찾는다. 이를 설명하면서 줄어들다(shrink)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슈링크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 단어는 지난해 9월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공식 등재됐다.
▷소비자가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 슈링크플레이션으로 사실상 가격을 올린 기업들은 1950년대 이후 계속 존재했다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알음알음 진행되던 이 교묘한 꼼수 인상이 사회, 경제적 문제로 불거진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치솟는 물가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업체들이 너도나도 슈링크플레이션에 나선 것이다. ‘인색하게 군다’는 뜻의 영어 단어(skimp)와 인플레이션을 합친 ‘스킴플레이션’ 등도 거론되는 횟수가 늘었다.
▷초콜릿칩 아이스크림에 검은 점(초콜릿)은 보이지 않고, 베이글은 중간에 구멍이 더 커지고, 오레오 쿠키 속 크림 두께는 얇아지고…. 해외 소셜미디어에는 슈링크플레이션 제품을 찾아 변화 전후를 비교하는 콘텐츠들이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다. 용량 수치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확연히 차이를 느낄 정도로 쪼그라든 제품들도 있다. 그렇게 줄어든 비율이 최대 25%에 이른다고 한다. 용기 크기를 줄인 회사가 “끝까지 다 먹기 어렵다는 소비자 불만을 반영한 것”이라거나 “손에 잡기 쉽도록 홀쭉하게 만든 것”이라는 식으로 내놓은 해명에는 조소가 터져 나온다.
▷정부가 그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슈링크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대책들을 내놨다. 식품과 생활용품의 용량, 규격, 성분 등을 변경할 경우 이를 포장에 표시하거나 판매 장소에서 고지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를 어기는 기업은 3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각오해야 한다. 이제라도 대응책이 나온 것은 다행이지만 이미 용량과 부피를 줄여버린 제품들이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하는 조치다. 한국소비자원의 최근 조사 결과 슈링크플레이션이 확인된 제품은 아몬드와 소시지, 핫도그, 만두 등 37개에 이른다.
▷재료값과 에너지 등의 비용 인상을 반영한 가격 조정이 기업으로선 불가피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를 소비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것은 신뢰를 갉아먹는 기만행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외국 기업 중에는 이렇게 줄여놓은 제품을 묶음 판매하면서 오히려 ‘대박 할인’이라는 식으로 홍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투명하고 정직한 가격 정책을 펴지 않으면 결국 시장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이제라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16 지지율 17% 찍은 日 기시다

일본인이 뽑은 올해의 한자는 ‘세(稅)’였다. 증세와 감세가 뒤섞인 정책이 일본인 마음을 흔들었다는 뜻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방위비 증액과 저출산 대책을 위해 세금 인상을 공언해 왔다. 인기 없는 정책이었다. 그러다가 10월 들어 “더 걷은 세금을 돌려 준다”며 난데없이 감세 정책을 꺼냈다. 이게 역풍을 맞았다. 총리가 내년에 있을지 모를 총선을 앞두고 “인기에 영합한다”는 이유였다. 5월만 해도 50% 선이던 지지율은 어제 공개된 지지(時事)통신 조사에선 17.1%까지 추락했다. 이 숫자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결정타는 총리 취임 2년을 넘기며 터진 자민당 파벌 비자금 사건이었다. 아베파(派)는 후원금 모금을 위해 기업이나 단체에 파는 행사 티켓(20만 엔·180만 원)을 의원 1인당 50장씩 할당했다. 할당량보다 더 팔면 의원들이 갖도록 했는데, 이렇게 챙겨둔 돈 45억 원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게 도쿄지검 특수부가 보는 혐의다. 여론이 나빠지자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 등 장관 4명을 경질했고, 부대신 5명도 교체를 예고했다. 9명 모두 아베파 소속이다.
▷기시다 총리가 아베 파벌 색깔 지우기에 나섰지만 결국은 제 발등 찍기에 가깝다. 이들 도움 없이는 총리직 지탱이 어렵다. 당내 역학관계가 그렇다. 기시다파는 아베파(의원 99명)에 비해 한참 모자란 4번째 파벌(45명 전후)이다. ‘아베시다 정권’이란 별칭에서 보듯 총리 이름이 오히려 뒤에 붙었다. 총리가 주도자가 아니란 뜻이다. 그가 내세운 ‘한국과 중국에는 엄격히’ 구호도 강경한 아베파를 의식한 것이었다.
▷자민당은 1955년 출범한 뒤로 64년 가까이 통치했고, 4년만 야당이었다. 민주국가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정권교체란 파벌끼리 권력 넘겨주기와 동의어가 됐다. 그만큼 쉽다 보니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단명(短命) 총리가 속출했다. 아베(1년), 후쿠다(11개월), 아소(1년), 하토야마(8개월), 간 나오토(15개월), 노다(16개월), 2번째 아베(7년 8개월), 스가(1년)…. 거대 계파의 확실한 리더(작고한 아베 전 총리)만 예외였다.
▷소수파 리더인 기시다 총리는 스캔들을 견뎌낼까. 당내 경쟁자는 용퇴론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당 기반도 약한데, 지지율은 바닥이다. 기시다 총리가 출산율 제고, 반도체 등 첨단산업 회생, 방위력 증강처럼 장기간 뒷심이 필요한 정책을 주도해 내기란 기대 난망이다. 신냉전시대를 맞은 지금 한미일 3각 협력은 더없이 중요해졌다. 3국 지도자의 위상과 협력 고리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고령의 바이든이 치를 내년 대선도 변수고, 자민당 내 온건파인 기시다도 휘청이고 있다. 우리만 고비를 맞은 게 아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2-18(월) 네덜란드 방문 과잉의전 논란

네덜란드 정부가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앞두고 한국 대사를 초치했다는 국내 언론 보도가 나왔다. 네덜란드 측이 최형찬 주네덜란드 대사를 불러 경호와 의전에 대한 한국의 요구에 ‘우려와 당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한국이 경호에 필요하다며 방문지 엘리베이터 면적 같은 정보까지 달라고 한 것,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의 기밀 시설인 ‘클린룸’에 제한된 인원수 이상의 방문을 요구한 것 등을 조목조목 열거했다고 한다.
▷‘초치(招致)’는 한 국가의 외교 당국이 상대국에 주로 불만을 제기하거나 항의하기 위해 상대국 대사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을 놓고 우리 외교부가 가장 먼저 내놓는 대응이 일본 대사 초치다. 네덜란드 측이 한국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불과 열흘 앞두고 최 대사를 초치한 것은 그만큼 준비 과정에서 인식한 문제가 가볍지 않았다는 의미다. “소통의 일환”이었다는 외교부의 해명은 군색하다.
▷윤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1961년 양국 수교 이후 첫 국빈 방문이었다. 네덜란드는 윤 대통령이 탄 비행기에 자국 F-35 전투기 2대를 붙여 호위했고 붉은 카펫과 21발의 예포, 화려한 왕실 만찬 등으로 극진히 예우했다. 분 단위로 움직이는 순서와 타이밍, 동선, 외교 프로토콜을 놓고 초긴장 상태의 신경전도 벌어졌을 것이다. 그럴수록 상대국을 존중해 가며 세부 사항들을 매끄럽게 조율해 내야 하는 것이 외교다. ‘정상 외교의 꽃’이라는 의전에서 잡음이 불거진 것은 이런 기본이 흔들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의 잦은 교체와 공백은 상황을 악화시킨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올해 3월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블랙핑크 공연을 둘러싼 논란 속에 의전비서관이 사실상 경질됐고, 이벤트 대행회사 대표 출신으로 자질 시비가 붙은 후임자는 약 6개월 만에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로 사퇴했다. 지난달 임명된 신임 의전비서관 역시 외교와 의전 경험이 전무하다. 비(非)전문성에 과잉 충성심이 덧대어지면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아닌지 복기해 볼 일이다.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의전 업무는 “잘해야 본전”이라고 한다.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상대국을 당혹하게 하는 요구들을 지나치게 밀어붙였다간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우를 범할 우려가 있다. 가뜩이나 해외 순방에서 제기된 윤 대통령의 의전 관련 논란들이 누적돼 온 상황이다. 취임 후 16번째인 해외 방문 횟수와 578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놓고 비판도 커지고 있다. 정부가 내세우는 정상외교의 성과마저 이런 문제들에 묻히고 빛바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국가적 낭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19 나란히 ‘올해의 피노키오’ 명단 오른 바이든-트럼프

‘4년간 틀렸거나 진실을 오도하는 발언 횟수 3만573건. 평균으로 따지면 매일 21건.’ 미국 워싱턴포스트(WP) 팩트체커 팀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발언을 분석한 결과다. WP가 주요 인사들의 거짓말을 분석해 선정하는 ‘올해의 피노키오’ 명단에 트럼프는 올해까지 9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이달 초 아이오와주 유세에서만 12초마다 사실과 다르거나 부정확한 주장들을 내놓은 것으로 집계됐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가 소방관들과의 간담회에서 꺼낸 자택 화재의 경험, 젠더 평등을 거론하다가 1960년대 남성들끼리 키스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의 스토리 등은 세부 내용이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선 후보 시절 “아들(헌터 바이든)이 중국과 관련해 돈을 받은 일이 없다”고 했는데 이후 헌터 본인이 시인하면서 거짓말이 됐다. 가족의 비리 혐의를 부인한 바이든 또한 ‘올해의 피노키오’ 명단에 포함되면서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이 모두 발언의 신뢰가 흔들리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정치인들이 청중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극적으로 스토리를 포장하는 과정에서 세부 내용을 부풀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80대 고령인 바이든 대통령은 스스로 “실수 제조기”라고 부른 적도 있다. 기억이 흐려진 상태에서 말실수를 했다는 식이다. 반복된다면 거짓임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내놨다고 보는 게 맞다. 바이든 대통령이 예산과 관련해 잘못된 주장을 한 횟수가 최소 30차례에 이른다는 외신 보도도 있다.
▷미국 언론들이 문제 삼는 내용은 명백한 거짓말뿐 아니라 잘못된 수치부터 과장된 표현과 아전인수식 평가,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주장까지 포함한다.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 인사의 발언을 평가하는 잣대는 그만큼 엄격해야 한다는 의미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백신 관련 청문회에서 코로나로 입원한 어린이 수를 실제보다 부풀려 말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피노키오 리스트에 올랐다. WP 팩트체커 팀은 잘못된 주장을 최소 20회 이상 반복한 ‘(추락의) 바닥 없는 피노키오’ 리스트도 따로 관리한다.
▷정치인의 반복된 거짓말은 어느 순간 습관이 되고, 이는 국민들을 호도해 결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이 아니지만 특정 우호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이른바 ‘푸른 거짓말(blue lie)’이 늘어나고 있다고 학자들은 우려한다. 가뜩이나 인공지능(AI)을 이용한 허위 정보의 위협이 커지는 시대에 정치인들이 이를 만들어 퍼뜨리는 데 앞장서서야 되겠는가. 과거 발언이나 공약의 번복, 거짓 논평, 허위 선동 논란 등으로 늘 시끄러운 우리 정치권에 울리는 경종이기도 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20 美 자존심 건드린 日제철의 ‘US스틸’ 인수

기업명에 국가 이름이 들어간 회사는 국가대표의 위상을 갖고 자국민의 애정도 담뿍 받는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미국 은행일 수밖에 없고, 독일 기업 아닌 도이치텔레콤을 상상할 수 없다. 철강산업에서 미국의 ‘US스틸’도 이런 회사다. 세계 최초 빌리어네어(10억 달러) 기업이자 다우지수 원년 멤버였던 역사적인 회사가 외국에 넘어가게 됐는데 하필 인수 기업이 ‘일본제철’이다. 미국이 일본에 먹힌 셈이니 미국인들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18일 일본제철은 US스틸 지분 전량을 주당 55달러의 현금으로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총 인수가격은 141억 달러(약 18조3000억 원)로, 40%의 경영권 프리미엄이 붙었다. 일본제철이 US스틸 인수에 성공하면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4위에서 3위로 한 계단 뛰어오르게 된다. 최근 일본제철은 국내 시장의 한계를 절감하고 해외 사업에 주력하며 인도, 태국 등에서 적극적인 인수합병에 나서고 있다.
▷US스틸은 미국 산업화의 상징과 같은 회사다. 1901년 ‘금융황제’ 존 피어폰트 모건이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카네기스틸 등을 묶어 초대형 철강회사로 세웠다. 한때 세계 1위 철강 생산국 미국의 철강산업에서 3분의 2의 비중을 차지한 회사였다. 제너럴모터스 등 미국 자동차회사들이 모두 US스틸의 철강으로 차를 만들었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등 미국 마천루의 뼈대를 US스틸이 세웠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일본, 한국, 중국 등의 연이은 부상으로 경쟁력을 잃고 쇠락해 지난해 기준 북미 3위, 세계 27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에 대해 미국철강노조(USW)와 일부 정치인들은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국가 안보와 밀접한 철강산업을 외국 기업에 넘길 순 없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는 1980년대 일본이 미국 주요 기업을 마구 사들였던 아픈 기억도 한몫하는 것 같다. 록펠러센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컬럼비아픽처스, 유니버설픽처스 등을 일본인들이 싹쓸이해 갔던 때다. 1989년 10월 9일자 뉴스위크는 ‘일본, 할리우드를 침공하다’는 제목하에 승리의 여신이 기모노를 입고 횃불을 든 모습을 표현했다.
▷최종 인수가 성사된다면 한국으로선 철강을 매개로 미국과 일본이 산업 동맹을 강화할 수 있어 신경이 쓰인다. 전기차, 풍력발전, 전력 인프라 등을 중심으로 친환경 철강 수요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미일이 핵심 공급망을 정비하게 된 것이다. 일본제철이 US스틸을 업고 미국 자동차 강판 시장 등을 선점하면 포스코 등 국내 철강업체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가뜩이나 수요 부진으로 머리 아픈 철강업계에 고민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2-21 콜로라도 대법원 “州 경선서 트럼프 이름 빼라”

정치가 자기 일을 제때 못하고 법원에 번번이 판단을 맡기는 걸 두고 ‘정치의 사법화’라 부르곤 한다. 이런 일이 미국서도 생겼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내년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면서 내년 1월 공화당 주(州) 경선 절차에서 그의 이름을 투표용지에서 빼도록 명령했다.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 뒤 2021년 의사당 습격을 선동한 행위가 국가 반란에 해당한다고 봤다. 트럼프에겐 4가지 형사재판과는 다른 차원의 사법 리스크다.
▷수정헌법 14조 3항이 근거였다. 미 의회는 남북전쟁 후 헌법에 14조를 추가했다. 노예에게 시민권을 주는 조항과 함께 “공직자가 국가 반란에 가담했다면 공직을 못 맡는다”는 내용을 3항에 담았다. 노예해방에 반대한 남군 핵심의 공직을 제한하는 155년 전 조치였지만, 어느 대선 후보도 이 조항을 걱정한 적은 없다. 미국에는 유죄 판결을 받은 후보일지라도 공직선거 출마 제한법이 없다. 트럼프에게 14조 3항은 느닷없는 폭탄이 됐다.
▷후보 자격이 최종 박탈된 것은 아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용지 인쇄 전인 내년 1월 4일까지 효력 발생을 늦췄고, 연방대법원에 상고할 경우도 집행을 늦추겠다고 했다. 동일한 소송이 미네소타, 뉴햄프셔주에선 기각됐으니 결과를 짐작하기 어렵다. 미시간주 법원에선 1심 판사가 “민감한 정치 사건은 연방의회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판사가 결정하지 않겠다”며 각하했다. 법원의 권한 행사를 절제하겠다는 판단이었다.
▷민주당은 트럼프가 1위를 달리자 역풍을 우려해 이 사안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처럼 정치권 뜻과 무관한 연방대법원의 대선 개입은 과거에도 있었다. 아들 부시와 앨 고어가 붙은 2000년 대선이 대표적이다. 펀칭 기계로 투표용지에 구멍을 뚫던 플로리다주에서 무효표가 쏟아졌다. 고령 은퇴자에게 익숙지 않은 방식이 도입되었고, 민주당 강세 지역인데도 부시가 앞섰다. 그 방식 도입 책임자가 부시의 친동생이어서 민주당은 반발했다. 재검표, 수작업 검표를 거치며 혼란이 한 달 넘게 지속되자 연방대법원이 나섰다. 검표 중단을 결정했고, 부시 승리가 확정됐다.
▷후보 자격은 연방대법원 심리 동안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다. 현재는 6 대 3으로 보수 대법관이 많다. 3명은 트럼프가 직접 임명했다. 자격 박탈 가능성이 낮다는 견해가 많다. 파문을 일으킨 콜로라도 대법원도 4 대 3으로 가까스로 과반(過半)이었다. 주 대법원 판사 7명 모두 민주당이 지명했는데도 그랬다. 트럼프 캠프는 “마녀사냥이다. 뭉쳐야 한다”며 지지표 결집을 시도했다. 미국 대선은 분열과 갈등이 지배할 공산이 지금보다 더 커졌다. 지지층 결집이 셀지, 중도층이나 덜 열성적인 트럼프 지지자의 이탈이 클지가 승부처가 됐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2-22 인공지능이 여는 블루칼라의 시대

올해 7월 미국 물류업체 UPS는 파격적인 임금 협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노사 합의로 정규직 택배기사의 연봉을 연 14만5000달러(약 1억9000만 원)에서 17만 달러(약 2억2000만 원)로 올리기로 한 것이다.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 이후 화이트칼라들이 고용불안에 떠는 것과 달리 육체노동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직의 몸값은 금값이 됐다. 이달 초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블루칼라 직종이 노다지가 되고 있다”고 했다.
▷미국 직장 평가사이트 글래스도어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으로 미국의 마스터급 배관공은 연 9만6351달러(약 1억2600만 원)를 번다. 배관공, 용접공, 수리공 등 숙련공의 상당수가 억대 연봉을 자랑한다. AI가 대신해줄 수 없는 기술인 데다 고령화로 젊은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몸값이 뛰었다. 미국 조사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는 고장·수리 서비스, 접객 및 요리, 농업, 헬스케어 등을 AI로 대체하기 어려운 분야로 꼽았다.
▷산업혁명이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 운동’을 촉발했듯 그동안 기술의 발전은 대개 육체노동을 대체하면서 블루칼라의 일자리를 위협했다. 하지만 최근 생성형 AI의 공습은 정반대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올해 7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고용전망 보고서를 보면 OECD 국가 일자리의 16.8%가 AI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데 주로 법률, 문화, 과학, 공학, 관리자, 최고경영자 등 화이트칼라 직종이 주요 타깃이 됐다.
▷현장직, 기술직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한국도 달라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 현대차가 10년 만에 기술직(생산직) 채용에 나서자 ‘킹산직’(왕과 생산직의 합성어)으로 불리며 취업시장에서 화제가 됐다. 한 채용플랫폼이 취준생 2400여 명에게 물어보니 월급, 워라밸 등 조건이 괜찮다면 생산직으로 취업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77%나 됐다. 연봉과 성취감을 중시하는 요즘 청년들에게 땀 흘린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손노동’은 매력적이다. 유튜브 등을 보면 목공, 타일, 배관, 인테리어 등의 기술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젊은 기술자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전 부모들은 아이의 성적이 시원찮으면 “그냥 기술이나 배워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이젠 ‘안 되면 기술이나’가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반드시 익혀야 할 시대가 됐다. 애매한 사무직은 AI로, 단순노동직은 로봇으로 쉽게 대체된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고급 블루칼라와 AI를 다루는 고급 화이트칼라만 살아남는다.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 교육시스템도 바뀌어야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에 ‘킬러문항’이 있나 없나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닌 듯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2-23(토) 노인 은퇴자금 노리는 ‘로맨스 스캠’

요즘 청년들은 연애도 귀찮아한다지만 황혼 연애 열기는 뜨겁다. 65세 이상 인구가 900만 명, 이 중 22%가 혼자 사는데 건강하고 재력 있는 ‘액티브 시니어’들은 사랑에도 적극적이다. 대학 CC(캠퍼스 커플)처럼 복지관에는 BC(복지관 커플)들이 부러움을 사고, 5070 전용 데이팅 앱도 회원 수를 불려가고 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을 악용해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도 덩달아 많아져 문제다.
▷특히 소셜미디어로 ‘연애’하듯 접근해 ‘금융 사기’를 치는 ‘로맨스 스캠’ 피해가 늘고 있다. 최근에는 65세 남성이 ‘호주 출신 46세 여성’과 4개월간 메신저로 밀어를 주고받다 “괜찮은 가상화폐가 있다”는 말에 속아 1억2000만 원을 뜯긴 사건이 화제가 됐다. 공무원으로 은퇴한 60대 남성은 채팅앱으로 만난 여성이 “수술비가 필요한데 해외에 돈이 묶여 있다”고 호소하자 800만 원을 먼저 보내고 노후 자금 5100만 원까지 보내려다 은행 직원이 금융 사기 가능성이 있다며 경찰에 신고한 덕에 추가 피해를 면했다. 올 1∼10월 로맨스 스캠 신고 건수는 111건, 피해액은 48억 원인데 피해자의 상당수가 고령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 들면 쉽게 속는 이유를 의학계에선 뇌 기능 저하로 설명한다. 경계심이나 진위 구분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퇴화해 못 믿을 얼굴을 가려내는 능력이 떨어진다. 사회심리학에서는 돈, 건강, 외로움이 사기꾼들에게 좋은 미끼가 된다고 본다. 평균 수명이 늘어 노후 자금이 부족할까 불안한 마음에 속고, 자산이 넉넉한 사람도 “내가 누군데” 하며 방심하다 속는다. 은퇴하면 대인관계가 좁아지고 외로워져 조금만 친절하고 살갑게 굴어도 마음을 주기 쉽다.
▷해외에서도 그레이 로맨스가 로맨스 사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로맨스 스캠 피해액이 2021년 4억3000만 달러(약 5600억 원)로 2년 전보다 2배로 늘었다. 이에 고령자안전법을 제정해 고령자의 금융 사기 피해가 의심될 때는 금융기관이 본인 동의 없이 금융당국에 보고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두었다. 일본도 고령자가 고액 출금 시 경찰에 통보하게 하고 고령자의 ATM 인출 한도액을 축소하는 사기 방지 대책을 시행 중이다.
▷로맨스 스캠 보이스 피싱 등 노인 대상 금융 사기 피해 규모가 614억 원으로 전체 피해액 중 37%다(2021년). 큰돈을 거래할 때는 주변에 반드시 물어보는 것이 안전하다. 사기당한 사람들은 민망해서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고해야 추가 피해를 막는다. 혼자 살거나 병이 있으면 사기당할 확률이 30% 높아진다고 한다. 친지들과 수시로 왕래하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해야 감언이설에 은퇴 자금 날리는 피해를 막을 수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25(월) 에어백 충돌시험도 조작… 무너진 ‘신뢰의 도요타’

일본 자동차 회사 도요타는 전 세계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모노즈쿠리’(장인정신)를 바탕으로 항상 최고의 품질을 표방했다. ‘겐바(現場)’에서 답을 찾아내며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고쳐 나가는 ‘가이젠(改善)’ 정신은 이른바 ‘도요타 웨이(Toyota Way)’라는 경영학 용어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인증시험 데이터를 조작하는 등의 부정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품질과 신뢰의 도요타’ 대신 ‘조작의 도요타’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얻고 있다.
▷최근 도요타의 자회사이자 경차 전문 브랜드인 다이하쓰공업은 자동차 품질인증 시험 과정의 부정을 인정하며 전 차종의 출고를 중단했다. 일본 내에서는 사실상 무기한 생산 중단에 들어갔고, 동남아시아에서도 출하를 멈췄다. 제3자 조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다이하쓰는 충돌 시험, 배기가스 시험, 연료소비효율 시험 등에서 1989년부터 총 174건의 부정을 저질렀다. ‘프로박스’, ‘루미’ 등 도요타의 22개 차종, 스바루 9개 차종, 마쓰다 2개 차종 등 64개 차종에서 문제가 발견됐다.
▷일본 사회를 가장 충격에 빠뜨린 것은 에어백 충돌 검사 부정이었다. 사고가 나면 충격 센서가 감지해 에어백이 터져야 하는데, 충돌 검사 시 미리 타이머를 설치해 놓고 충돌할 때쯤 에어백이 작동하도록 손을 썼다. 충격 센서 개발이 늦어지자 일단 인증을 통과하려고 이런 위험천만한 꼼수를 동원했다. 충돌 시험에 사용한 장치를 실제 판매되는 제품에는 달지 않거나, 운전석의 충돌 검사를 하지 않고 조수석의 시험 결과를 허위 기재하기도 했다.
▷도요타의 시험 조작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에는 도요타의 상용차 자회사인 히노자동차가 20년 동안 트럭과 버스의 배기가스와 연비 데이터를 조작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2021년에는 판매 자회사인 모빌리티 도쿄가 배기가스 성분 검사를 하지 않고 주차 브레이크 수치를 고치는 부정이 적발됐다. 도요타 외에도 자동차, 전기, 철강, 건설, 항공, 화학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무자격자 검사와 데이터 조작 등 품질 부정이 일본 제조업 전반에 만연해 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일본은 제3자 조사위원회를 통해 원인을 조사하는데 내용이 대개 비슷하다. 문제가 있어도 말할 수 없는 폐쇄적 조직 문화가 제일 먼저 지적된다. 이번 다이하쓰 보고서도 “현장에서 목표 달성과 일정 엄수의 압박이 심했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없었다”고 했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생산설비 노후화와 인력 부족이 각종 부정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안전 문제와 타협하고 소비자 신뢰를 잃으면 기업의 생명은 끝나게 된다. 우리 기업들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2-26 내년은 선거의 해 “인구 42억 사는 71개국서 투표”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옛 유고 연방의 일부였던 동유럽 세르비아에선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1주일째 진행 중이다. 시위대 수천 명은 “대통령이 선거를 강탈했다”며 선거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2주 전 출범한 폴란드 정부는 “공영방송이 전임 정부의 선전도구였다”며 뉴스 전문채널의 방송을 중단시켰다. 전임 정부, 새 정부 모두 비교적 자유 선거로 집권한 나라에서 했는데 벌어진 일이다.
▷선거가 언제부턴가 두려움이란 표현과 쓰이곤 한다. 일부 정치인이 민주의 외피(外皮)를 입고 전횡을 저질러 그럴 것이다. 이런 우려 속에 내년은 71개국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독일 우루과이 등 자유 선거 43개국, 베네수엘라 튀르키예 등 불완전 선거 28개국 등 모두 71개국이라고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집계했다. 71개국 인구는 42억 명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유권자가 투표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작년과 올해 선거를 치른 나라의 인구는 모두 약 12억 명이다. 2024년 선거는 그래서 지구적 현상이다. 1월 대만, 2월 인도네시아, 3월 러시아 이란, 4월 한국 인도, 11월 미국까지….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란 믿음이 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정보 왜곡, 부정 선거, 여론 조작 시비가 잦아졌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트럼프의 재등장을 걱정할까. 선거 아닌 선거를 치르는 푸틴, 시진핑 등이 ‘선거란 참 좋은 발명품’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24년 장기집권 푸틴은 5선에 도전하고, 지난해 3연임 한 시진핑 국가주석은 인민대표 2952 대 0이라는 만장일치 형식을 갖췄다.
▷1년 전 탄생한 생성형 인공지능(AI)은 가짜 공포를 더 키웠다. 메타(옛 페이스북)는 AI 정치 광고를 금지시켰다. 구글은 AI에 묻는 대선 질문을 제한한다는 원칙은 정했지만, 무엇을 막을지는 결정 못 했다. 미국도 11월 대선을 앞두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떨고 있다는 말이다. “대외 개입을 줄이겠다”는 트럼프의 당선이 유리하다고 여긴다면 여론 왜곡에 나서지 말란 법도 없다. 푸틴, 시진핑, 하마스라면 유혹이 적잖을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경제 공급망과 안보 지도로 촘촘히 엮여 있다. 1월에 뽑힐 새 대만 총통이 친중이냐 반중이냐는 중국의 북태평양 군사행동에 영향을 준다. 한미일 3국에게 중요하다. 우크라이나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5년 임기가 3월에 끝난다. 전쟁 탓에 연기됐지만 우크라이나 대선은 우리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 외교정책과 주식시장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 투자액이 85조 원을 넘나드는 수백만 서학(西學) 개미에게 지구 반대편 선거가 내 앞마당 선거인 것이다. 어느 선거 하나도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2-27 日軍 문서로도 확인된 간토대학살, 더는 묻을 수 없다

“정부 내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설명은 한결같다. 2017년 아베 정부도, 현 기시다 정부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언제까지 묻어둘 수 있을까. 당시 조선인이 무참하게 살해됐다는 구체적 내용이 담긴 일본군의 보고서가 25일 공개됐다.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소장된 ‘간토지방 지진 관계 업무 상보’에는 지진 발생 사흘 뒤 사이타마현에서 40여 명의 조선인이 “살기를 띤 군중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적혀 있다. 이 지역의 병무 담당 기관이 같은 해 12월 육군성에 보낸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지진 피해 지역의 모든 부대에 보고를 지시했던 만큼 다른 지역에서 올린 보고서가 더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100년 전에 일본 정부가 간토대학살에 대해 인지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뚜렷한 물증이다.
▷있는 사실을 부인하려다 보면 말이 꼬이기 마련이다. 지난달 일본 참의원에서는 국립공문서관에 보관 중인 1924년 각의 문건이 공개됐다. “대지진 당시 조선인 범행의 풍설(소문)을 믿은 결과 살상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한 특사를 논의하는 내용으로, 일본 내각이 학살을 알고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다. 그런데 ‘이 문서가 정부 내 문서인가’를 묻는 질의에 관방장관은 “공문서관은 독립행정법인”이라는 등 동문서답을 내놓으며 답을 피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무회의 회의록에 해당하는 문서조차 공식 문서로 인정하길 꺼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요즘도 일본에서는 대형 사건이 발생할 때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인을 탓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엔 ‘조센진(조선인)을 죽이자’는 구호가 등장했고, 34명이 숨진 2019년 교토 애니메이션센터 화재 때는 ‘방화는 한국인의 습성’이라는 글이 포털사이트에 올라왔다. 미국 법학자 브라이언 레빈은 편견과 선입견이 차별, 폭력을 거쳐 집단학살로 발전하는 현상을 ‘혐오의 피라미드’라고 표현했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또 다른 불상사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일본 정부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한국 정부 역시 1950년대 초 이후 간토대학살 피해자에 대한 실태 파악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렇다 보니 상하이 임시정부가 집계한 한국인 희생자는 6661명인데,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500명 정도에 불과하다. 더 늦기 전에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공동조사를 요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과거사를 덮은 채 이뤄지는 한일관계 개선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2-28 ‘국민 여러분’ 대신 ‘동료 시민 여러분’

서양의 국가는 도시국가로 출발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같은 말을 사용했지만 그리스 국민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이나 스파르타 시민이었을 뿐이다. 고대 로마는 도시국가 로마에서 시작해서 제국을 이뤘지만 사도 바울처럼 로마에 살지 않아도 로마시민권을 갖는 게 중요했다. 근대에 들어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 한 국가를 이루려 하면서 뒤늦게 민족국가(nation-state)가 등장했다. 서양인에게는 시민의 정체성이 먼저이고 국민의 정체성은 나중이다.
▷우리는 서양과 달리 일찍부터 민족끼리 왕조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다만 우리는 왕의 신민(臣民·subject)에서 바로 국민(國民)으로 넘어왔다. 서양에서는 절대국가의 신민에서 민주국가의 국민으로 넘어오는 사이에 시민혁명이 존재한다.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시민혁명이 없었다. 그래서 영미권에서 시티즌(citizen), 프랑스인이 부르주아(bourgois), 독일인이 뷔르거(Bürger)라고 말할 때의 시민 개념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에게 시민은 행정단위의 구성원일 뿐이다. 서울시민이나 부산시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한국 시민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 말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국민이라고 쓴다. 미국 대통령은 연설할 때 ‘마이 펠로 시티즌스(my fellow citizens)’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모은 유명한 책 이름이 ‘마이 펠로 시티즌스’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은 연설할 때 ‘국민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26일 취임사에서 ‘동료 시민’이란 말을 여러 차례 썼다. ‘마이 펠로 시티즌스’의 직역이다. 어제도 기자들 앞에서 같은 말을 수차례 썼다. 그는 2022년 법무부 장관에 취임할 때만 해도 국민이라고 했다. 다만 그때도 ‘동료 공직자’란 말을 썼다. 얼마 전 법무부 장관에서 퇴임할 때 처음 ‘동료 시민’이란 말을 썼다. 이번 취임사에는 ‘국민의힘 동료’라는 표현도 나온다. 갑자기 쓴 게 아니라 숙고하면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한 위원장은 ‘개딸 전체주의’에 대항해 싸우기 위한 용기와 헌신을 당부했다. 동료들끼리 형제애로 함께 꾸려 가는 게 민주주의다. 그렇기에 동료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용기를 요구할 수 있다. ‘동료 시민들이여, 국가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달라’는 케네디 모멘트와도 연결된다. 다만 언어는 사회의 것이다. ‘동료 시민’이 한 개인이 혼자 별나게 쓰는 말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이 될지는 의문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29 뉴욕 타임스스퀘어처럼… 광화문광장의 ‘디지털 변신’

대형 스크린들 위로 수백만 개의 LED 불빛이 꺼지지 않는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장은 24시간이 현란하다. 그 한복판에서는 “여기저기서 샴페인이 펑펑 터지는 파티장 가운데 서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건축학자인 유현준 홍익대 교수는 말한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등장하는 광고가 쏟아지니 “세계적인 연예인 수십 명이 한 장소에 있는 대종상 시상식 레드카펫 위 같다”고도 했다. 연간 60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을 붙잡는 매력으로 꼽힌다.
▷자생적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지속해 왔다는 도시의 진화는 이제 첨단 디지털 기술이 뒷받침한다. 건물 외벽 등에 대형 스크린과 LED 조명을 설치해 디지털 영상을 펼쳐내는 미디어 파사드는 그 핵심 중 하나다. 개별 전광판을 넘어 스크린이 벽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스케일이 커졌다. 그 위에서 구현되는 다채로운 색과 디자인, 역동적 움직임들이 도시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보행자가 찍은 사진이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뜨도록 하는 식의 상호 작용도 가능해졌다.
▷미디어 파사드 설치는 주변의 빛 공해와 건물 일조권 등의 문제로 규제가 까다로운 편이다. 범람하는 상업적 광고가 거리의 전통이나 품격을 되레 해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영국 ‘피커딜리 서커스’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1800년대 초 형성된 원형 광장은 고풍스러운 대리석 건물 위 스크린에서 화려한 광고 영상들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거리의 버스커들과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공간으로 변신했다. 코카콜라부터 삼성,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신제품이 광고를 통해 가장 먼저 공개되는 산업 정보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울 광화문광장과 명동,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이 국내 대형 디지털 광고 무대로 활용된다. 7년 전 처음으로 시도된 서울 강남 코엑스 일대에 이어 제2차 ‘옥외광고물 자유표시구역’으로 지정된 것이다. 유동인구가 많고 관광지와 고궁, 박물관 등 상징적 공간들이 위치해 있는 공간들이다. 이 세 곳은 광고물의 모양, 크기, 색깔, 설치 방법 등 규제가 대폭 완화돼 자유로운 디지털 광고 설치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한국판 타임스스퀘어’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서울과 부산은 이제 전 세계인들이 오가는 글로벌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연간 외국인 관광객 수를 코로나 팬데믹 이전보다 많은 2000만 명까지 늘리겠다는 게 정부 목표다.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는 미디어 파사드는 그 주요한 동력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딱딱한 아스팔트와 회색 빌딩에 색을 입히고, 각 공간의 개성과 테마를 살리는 콘텐츠를 채워 넣는 숙제가 던져졌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살아 숨쉬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30(토) ‘나의 아저씨’의 죽음

어제 영면에 든 배우 이선균 씨는 영화 ‘기생충’으로 연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지만 그의 인생작으로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가수 아이유와 함께 호흡을 맞춘 이 작품에서 그는 세상을 향해 가시를 세운 상처투성이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참된 어른’의 역할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샀다. 평소 드라마와 거리가 먼 중년 남성 중에도 이 작품을 보고 오랜만에 눈물샘이 터졌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 ‘국민 아저씨’가 마약 혐의로 조사를 받는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에 더 크게 놀랐다. 그는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인근 공터의 차량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죽기 전날 변호인을 통해 거짓말탐지기 조사까지 요구하며 억울해했던 그의 죽음에 동료 연예인들과 팬들은 아연실색했다. 부인 앞으로 ‘어쩔 수 없다’ ‘이 길밖에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는 보도도 나왔다. 마약 의혹이 제기되기 전인 10월 초 미국 한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기는 내 일기, 앞으로 또 다른 일기를 쓰고 싶다”고 한 것이 대중을 향한 마지막 인사가 됐다.
▷고인은 수사 과정에서 3차례나 포토라인에 섰다. 흉악범도 포토라인에 한 번 설까 말까 한데 유명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모두 공개리에 소환됐다. 특히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검사에서도 마약 음성으로 나온 뒤 이달 23일 세 번째 소환 때는 고인 측이 비공개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를 협박한 A 씨의 진술밖에 없는 상황에서 경찰은 그를 거듭 포토라인에 세웠다.
▷미리 약속된 시각에 맞춰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은 경찰 수사공보 규칙에서도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법무부 훈령에도 사건 관계인이 원하지 않을 경우 언론 등과 접촉하게 해선 안 된다고 돼 있다. 특히 결정적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경우엔 더욱 그렇다. 최근 마약 무혐의를 받은 지드래곤 역시 포토라인에 설 수밖에 없었다. 마약 혐의로 기소된 유아인도 두 번째 소환부터는 비공개를 요구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의 아저씨’의 명대사 중에는 이선균이 연기한 박동훈이 곤욕을 치르는 상황에서 “아무도 모르면 돼. 그럼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절절한 자기 위안으로 어떻게든 힘든 상황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공감을 산 대사였다. 하지만 현실 속의 그는 포토라인에 서고, A 씨와의 녹취록까지 공개되면서 ‘모두가 아는 일’의 주인공이 됐다. 심리학자들은 그렇게 누적된 수치심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라고 한다. 포털의 악성 댓글로 유명 배우들이 자살한 뒤 댓글이 금지된 것처럼 연예인을 무작정 포토라인에 세우는 관행도 이번에 바로잡아야 한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