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2023-12/ 12.01 청와대보다 셌던 ‘청장 스폰서’ - 12.30 조선일보 선정 2023년 10대 뉴스
세상사 2023-12/
12.01 청와대보다 셌던 ‘청장 스폰서’
브로커 통해 승진 경찰 간부 파문
과거엔 청와대 인사 청탁 증언도
대학 의혹 드러나도 수사 무관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선 2차대전 중 전사한 군인의 가족에게 위로의 문구를 담아 전사통지서를 작성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성 군무원이 타자를 하던 도중 뭔가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이 작성한 전사통지서와 비교한다. 또 다른 통지서까지 찾아낸다. 서로 다른 전장에 투입된 라이언 형제 네 명 중 셋이 전사한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다.
이 장면이 떠오른 것은 신종 사기 범죄 피해자들이 경찰의 수사 결과 통지서를 보다가 J 경감이라는 인물을 추려내는 과정을 접하면서다. 이 신종 사기는 검사 출신인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직접 시연했을 정도로 악질 범죄다. 서민에게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던져 거액을 뜯는다. 무서운 속도로 퍼지는데도 경찰은 범죄단의 정체조차 파악 못 한다.

▲신종 사기 피해자들이 파악한 범행 관련 계좌의 대학 입금 내역. 피해자들은 전국서 속출하는 부업 사기 범죄와 대학 계좌 입금의 관련 여부를 수사해 달라고 요구한다.
수사에 실망한 피해자들이 모여들었다. 우편으로 받은 수사결과 통지서를 채팅방에 공유하던 이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서울 모 경찰서에서 서울·인천·남양주·오산에 사는 피해자 4명에게 보낸 문서 내용이 피해자 인적사항만 제외하면 복사-붙여넣기를 한 것 같다는 사실이다. “특정할만한 단서가 없어 더는 수사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결과도 실망스럽지만, 이들이 경악한 건 범죄 경로다. 모임을 주도하는 임모씨는 “피해자 중 세 명은 범행 경로가 문자메시지와 인스타그램인데, 이들에게도 범인이 ‘당근마켓 게시판’을 통해 사기를 했다고 복사해 보냈다”며 공식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럴 만도 하다. 이 채팅방에 모인 피해자만 370명이 넘었는데 경찰 통지서는 “추적에 실패했다”는 내용뿐이다. 채팅방엔 경찰의 무성의와 무능함에 대한 성토가 이어진다.
요즘 경찰은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수사 무능보다 심각한 수사 비리가 튀어나왔다. 고위 간부가 사기범이 매수한 브로커에게 수사 내용을 알려 준 혐의가 드러났다. 서민 피해자에겐 ‘복붙’ 내용을 보내지만, 거액을 주무르는 브로커에겐 은밀한 수사 사항을 알려준다. 이 브로커가 경찰 간부들에게 돈을 받고 승진 인사까지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장이 커진다. 수사 권력이 막강해진 경찰이 돈으로 진급하는 후진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승진 비리는 경찰의 고질적 병폐다. 범인을 검거하는 게 경찰관의 임무지만, 이들의 관심은 승진에 쏠려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경찰관이 승진해야 하나, 이번 사건은 능력보다 브로커의 입김이 관건인 현실을 보여준다.
평생 경찰 인사를 봐온 전직 간부들은 승진 청탁 효과가 가장 확실했던 곳으로 청와대를 꼽았다. 수석·비서관이 청탁하면 거의 100%라고 말한다. 매년 경찰서장급인 총경만 100명, 간부인 경위는 3000명 이상 승진하니 청와대 부탁이 안 먹힐 리 없다고 말한다. 청와대부터 승진을 청탁했으니 악습이 사라질까. 거기에 비리가 끼어든다.
한 전직 경찰 간부는 “청와대 민원의 효과가 크지만, 더 확실한 사람은 ‘청장의 스폰서’”라고 말한다. 경찰 고위 간부 중 오랜 스폰서를 둔 사람이 꽤 있고 이들을 찾아내 로비하면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번 브로커 사건은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보여준다. 승진에 안테나를 바짝 세운 경찰관은 어떻게든 귀신같이 스폰서를 찾아낸다고 한다.
간부가 줄줄이 구속되지만, 곧 지나가리란 예상이 많다. 범인의 행방보다 스폰서나 청와대에 촉각을 세워야 승진을 했던 역사가 쉽게 바뀔 리 없다는 자조가 나온다. 범죄자 검거는 우선순위가 밀린다. 알바 사기처럼 서민들이 당하는 범죄는 더하다.
지난 1년간 드러난 사실은 사안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범인들은 미국·싱가포르 등지의 국외 도메인을 사용하고 중국발 VPN을 통해 접속하는 국제 조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주부로 가장해 닷새간 25명을 속여 한 명 계좌로만 약 3억원을 가로챘다.
피해자들이 찾아낸 범행 계좌에선 성균관대·동국대·한국외대·국민대·명지대·중앙대·서강대로 자금 이체가 이뤄진 의혹이 드러났다.
주범은 전부 ‘추적 불가’다. 몇 개 조직인지도 모른다. 경찰은 “전국 관서에 접수된 사건을 분석해 16개 지방경찰청에서 집중 수사 중”이라며 “사이버 수사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1년 넘게 지켜본 피해자들은 더는 못 참겠다는 분위기다.
2차대전 전사 통지서에서 공통으로 발견한 이름은 라이언 일병을 목숨 걸고 찾아내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계기가 됐다. 분노한 범죄 피해자들이 수사결과 통지서에서 찾아낸 J 경감은 무관심의 증거로 지목됐다. 대다수가 경력 단절 여성인 피해자들이 그를 찾아 나서야 할까. 악질 범죄자를 붙잡는 것만큼 추락한 경찰의 명예를 효과적으로 회복하는 방법은 없다.

중앙일보 강주안 논설위원
12-04 “서울편입 찬성” 김포 57% 광명 55% 구리 68% 하남 57%

▲‘지옥철’ 김포골드라인 4일 오전 경기 김포시 고촌역 김포골드라인 서울 방면 승강장에서 시민들이 이미 만원인 열차를 타기 위해 애쓰고 있다. 김포골드라인은 대표적인 ‘지옥철’로 꼽힌다. 문화일보·케이스탯리서치 여론조사에서 김포시의 서울 편입을 찬성하는 이유로 가장 많은 응답자가 ‘교통난 해소’를 꼽았다. 백동현 기자
■ 문화일보- 케이스탯 여론조사
찬성 이유 “교통난 해소” 1위
“교육 등 서비스 개선” 도 기대
네 곳 모두 과반 “총선에 영향”

국민의힘이 띄운 ‘메가시티 서울’ 구상이 내년 22대 총선의 수도권 민심을 좌우할 태풍의 핵으로 부상하는 가운데, 경기도 김포시뿐 아니라 구리·광명·하남시에서도 자신이 사는 지역의 서울 편입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은 것으로 4일 문화일보 여론조사 결과 드러났다. 네 지역 모두 편입에 찬성하는 이유로 ‘교통난 해소’를 가장 많이 꼽았다.
문화일보가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국민의힘이 서울 편입을 추진하는 김포, 그리고 서울 편입이 함께 거론되는 구리·광명·하남 등 네 곳 주민을 대상으로 지난 1∼2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네 곳 모두에서 편입 찬성 응답이 반대 응답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았다. 김포시 서울 편입에 대해 김포 지역 응답자의 57%가 찬성했고 반대는 40%로 조사됐다. 광명시 서울 편입에 대해선 광명 지역 응답자의 55%가 찬성했으며 반대는 43%로 나타났다. 구리 지역 응답자 가운데 서울 편입에 찬성하는 비율은 68%나 됐다. 반대는 29%로 조사대상 4개 지역 중 가장 낮았다. 하남 지역 응답자들의 찬성과 반대는 각각 57%와 40%였다.
네 지역 응답자들 모두 경기도 중소도시들의 서울시 편입 이슈가 다음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했다. 김포의 경우 ‘영향을 미칠 것’ 응답이 67%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30%를 압도했다. 구리와 하남에서도 영향이 있다는 응답이 각각 65%로, 영향이 없다는 32%의 2배 이상이었다. 서울시 편입의 총선 영향력을 가장 낮게 평가한 광명 응답자들도 과반인 54%가 영향이 있다고 답해 영향이 없다는 44% 응답보다 10%포인트 높게 조사됐다. 서울 편입 찬성 응답 이유는 4개 지역에서 모두 ‘지하철 연장, 광역버스 연계 등 교통난 해소’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른바 지옥철로 불리는 김포골드라인을 안고 있는 김포에서 교통난 해소를 편입 찬성 이유로 꼽은 응답자는 53%나 됐다. 광명(31%), 구리(33%), 하남(35%)에서도 교통난 해소가 1순위로 꼽혔다.
■ 어떻게 조사했나
이번 조사는 문화일보가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2월 1일부터 2일까지 양일간 이뤄졌다. 경기 김포·광명·구리·하남시에 거주하는 만 18세 이상 남녀를 대상으로 통신 3사가 제공하는 휴대전화 가상번호(100%)를 이용한 전화면접 조사로 실시했다. 표본의 크기는 김포 501명, 광명·하남 500명, 구리 508명이고 응답률은 각각 김포 20.4%, 광명 15.4%, 구리 15.4%, 하남은 16.5%다.
2023년 10월 말 행정안전부 발표 주민등록인구 통계를 기준으로 성·연령·지역별 가중치를 부여했으며 표본오차는 김포·광명·하남은 95% 신뢰 수준에서 ±4.4%포인트, 구리는 95% 신뢰 수준에서 ±4.3%포인트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문화일보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12-05 중도층서도 “서울편입 찬성” 높아… 구리 60% · 광명 54% · 하남 52% · 김포선 49%

■ 문화일보 - 케이스탯, 4곳 여론조사
총선 핵심키 쥔 중도층서 호응
선거향배 좌우 핵심이슈될 듯
중도층, 이슈 자체엔 부정 평가
광명 73% · 하남 71% “부적절”
편입,40代보다 30代서 호응 커
김포선 각각 39% - 64% “찬성”

▲국힘 원내대책회의 윤재옥(가운데)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의동 정책위의장, 윤 원내대표, 이만희 사무총장. 곽성호 기자
문화일보가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김포·광명·구리·하남 주민을 대상으로 지난 1∼2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자신이 사는 지역의 서울시 편입에 관해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의 핵심 키를 쥔 중도층도 어느 정도 호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편입론이 수도권 중도층 민심에 일정 부분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메가시티 서울’ 구상이 선거 향배를 좌우할 핵심 이슈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5일 문화일보와 케이스탯리서치 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중도층만 떼어내어 따로 분석하면, 중도층은 경기도 중소도시들의 서울시 편입 이슈 자체에 대해선 ‘총선용으로 급조된 정책’이라며 부적절한 정책이라고 평가하는 여론이 높았다. 김포 지역 중도층에서 ‘적절한 정책’이란 응답은 32%에 그쳤고, ‘부적절한 정책’이란 응답은 65%나 됐다. 광명 중도층에서도 적절한 정책이란 응답은 24%에 그친 반면, 부적절한 정책이란 응답은 73%였다. 서울시 편입 찬성 여론이 높은 구리에서도 중도층의 60%는 부적절한 정책이라고 응답했고, 적절한 정책이란 응답은 36%에 불과했다. 하남 중도층에서도 상황은 비슷해 ‘적절’ 응답은 24%였고 ‘부적절’ 응답은 71%에 달했다.
하지만 ‘본인이 사는 지역’의 서울시 편입에 대해선 판단이 달라졌다. 구리 중도층의 경우 구리시의 서울시 편입에 대해 찬성이 60%나 됐고 반대론은 35%에 그쳤다. 광명 중도층 가운데서도 찬성 응답이 54%로 반대 44%보다 높았고, 하남 중도층 사이에서도 찬성이 52%로 반대 45%보다 우세했다. 중도층의 여론이 가장 비등하게 엇갈렸던 김포의 경우도 찬성이 49%로, 반대 47%와 비등했다. 정책 자체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서울 편입은 찬성하는 모양새다. 여권 관계자는 “서울과 생활권을 공유하지만 서울로 출퇴근하며 교통지옥을 겪고 있는 중도층에도 소구하는 공약이라는 점이 확인된 셈”이라고 평가했다.
연령대별로 서울시 편입을 바라보는 시선이 엇갈린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김포 30대 응답자 중 찬성 비율은 64%나 돼 반대 30%의 곱절을 넘었다. 반면 40대에선 찬성 응답이 39%에 그쳤고 반대는 57%나 됐다. 광명·구리·하남에서도 30대의 찬성 응답이 40대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다. 교통난 해소·서비스 개선 등에 민감한 30대가 서울시 편입에 적극 호응하는 반면, 야당 지지세가 강한 40대에서는 상대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하남 등지에서 최근 5년간 1인 가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라며 “서울 외부로 밀려난 사람들 입장에선 서울이 커지면서 재편입되는 데 대해 호응이 높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 편입이 내년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도 4개 지역 모두에서 50%를 넘었다. 특히 김포·구리·하남에서는 총선에서 서울시 편입에 찬성하는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이 반대하는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응답보다 높았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해당 지역에는 빅뱅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고, 특히 더불어민주당 강세인 지역에서 영향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12-07 내년 외국 인력 16만 명 한국行… ‘불법체류 43만’ 대책 급하다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입국장에 외국인 근로자가 입국하고 있다. 뉴스1
내년에 단순기능 외국인 근로자 16만5000명이 국내로 들어온다. 산업 현장의 인력난과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비전문 취업비자(E-9)로 일할 외국인 인력을 역대 최대로 늘린 결과다. 2021년 5만 명 수준이던 비전문 외국인 근로자가 올해 12만 명으로 급증한 데 이어 내년에 또 큰 폭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노동력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불법 체류자 양산, 산업 재해 등 관리 부실에 대한 우려도 만만찮다. 내년이면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도입된 지 20년이지만 산업 현장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어서다. 대표적인 게 허술한 제도를 악용한 외국인의 잦은 이직이다. E-9 비자로 들어온 외국인은 휴·폐업, 임금 체불 등 예외적 사유에 한해 3년 내 3차례 사업장을 옮길 수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중앙회 실태조사 결과 중소기업 26%가 입국 3개월 내 근로계약 해지를 요구받았고,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근로자 대다수가 태업, 꾀병, 무단이탈 등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갖은 일탈을 부추겨 새 직장을 알선하는 대가로 수수료를 챙기는 브로커도 적지 않다. 이런데도 부당 행위에 나서는 외국인 근로자를 관리하거나 처벌할 규정이 없어 업체들은 속을 끓이고 있다.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단이탈하거나 월급을 더 주는 곳을 찾아 옮기다 보니 미등록 체류자로 전락하는 일도 다반사다. 2013년 18만 명이던 불법 체류 외국인은 10월 현재 43만 명으로 급증해 전체 체류 외국인의 17%에 달한다. 한국보다 인구가 2배 많은 일본의 외국인 불법 체류 비중이 2020년 기준 3%도 안 되는 것과 대비된다. 일손이 부족한 농번기에 몇 달간 일하는 외국인 계절 근로자 등도 불법 체류 양산의 통로가 되고 있다.
이 같은 부작용에도 인구절벽에 서 있는 한국에 외국인 고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산업 현장은 외국인 근로자 없이 정상 가동이 불가능해진 지 오래됐고 저출산·고령화에 따라 이 추세는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불법 체류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외국 인력 선발 및 관리 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 비전문 외국인 근로자가 한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숙련 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각도로 지원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동아일보 사설
12-07 성과 보이는 노조 불법 척결, 尹정부 노동개혁 지속해야
정부가 전세 사기·마약에 이어 ‘건폭과의 전쟁’을 국민 체감 3호 약속으로 내걸고 집중 단속을 펼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건설 현장의 법치를 바로 세우겠다”고 선언한 이후 1년 만에 건설 현장 분위기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지난 1년간 공갈·특수강요 등으로 4829명이 입건됐고, 기소된 144명은 전원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거대 노조를 등에 업고 사익을 챙기면서 피해는 시민에게 떠넘긴 심각한 범죄”라며 상당수에게 징역 10월∼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16명의 건폭 구속에 그쳤던 문재인 정부 5년과 대비된다.
‘깜깜이’로 운영돼온 노조의 회계 투명성도 높아지고 있다. 정부가 올해 처음 도입한 노조 회계 공시 제도에 따라 조합원 1000명 이상의 대형 노조 739곳 가운데 675곳(91.3%)이 회계를 공시했다. 자율 공시이지만, 공시하지 않을 경우 조합비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을 없애면서 한국노총 가맹 노조의 94%, 민주노총 가맹 노조의 94.3%가 회계 빗장을 풀었다. 일부 노조는 조합비의 88%나 접대 등 업무추진비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불법 노동 행위 척결 의지가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경찰청 설문 조사 결과 90% 이상의 건설 현장에서 30년 악습이던 타워크레인의 월례비와 노조원 채용 강요나 태업 등이 사라져 작업 효율이 높아졌다. 하지만 노조 회계의 투명성 강화도 노사 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일 뿐이어서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야당은 “과도한 건폭몰이”라며 어깃장을 놓고, 노조도 여전히 “노동 탄압”이라며 저항하고 있다. 정당한 이유 없이 건설 장비 운송을 거부하면 사업자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건설기계관리법 개정안 등 건폭 방지 법안들도 국회에서 발목이 잡혀 있다. 이럴 땐 행정력이라도 최대한 동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노동개혁 의지가 흔들려선 안 된다.
문화일보 사설
12.07 건폭과 전쟁 1년... “노조 채용 강요·태업 사라졌다”
법원 건폭 엄벌, 달라진 건설현장

▲지난 2019년 6월 4일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의 대형 타워크레인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멈춰 서 있다./김영근 기자
이달 초 수도권의 1000가구 규모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근로자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구조물을 가설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타워크레인이 무거운 철제 부품을 고층부로 올리면 작업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조립했다. 이 현장은 작년 연말 건설노조가 노조원 채용을 강요하며 출입구를 막고 시위를 하는 바람에 한 달에 일주일 정도 정상 작업을 못 했다. 시공 업체 관계자는 “올해 봄부터 현장에서 노조 시위는 완전히 사라졌다”며 “노조원들이 일부러 태업하던 것도 없어져 작업 효율이 20%는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가 작년 12월 건설노조의 각종 불법행위와 부조리를 근절하기 위한 ‘건폭(建暴·건설 현장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1년 가까이 지난 지금, 건설 현장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예전엔 건설노조의 채용 강요 때문에 현장소장은 노조와 몇 명을 채용할지 협상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건설사가 직접 타워크레인 기사 등 작업자를 선택해 고용하고 있다.

▲그래픽=김성규
경찰청이 최근 전국 주요 건설 업체 80여 곳 관계자들을 상대로 ‘건폭 특별 단속으로 바뀐 건설 현장 분위기’를 물어본 결과, 이 중 90%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정태진 부산·울산·경남 철근·콘크리트 협의회 회장은 “1년 전만 해도 노동조합들은 자신들의 요구 조건이 수용되지 않으면 사업장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집회를 수시로 열고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명목으로 고소·고발을 남발했다. 특히 외국인 불법 노동자 신고 등으로 사업 대표를 압박하기 일쑤였다”며 “정부가 엄중 단속을 벌이면서 이전보다 노조의 채용 강요, 집회 등 압박 행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했다.
정부는 작년 12월부터 건설협회 등을 통해 노조의 채용 강요 등 불법행위 신고를 받고, 경찰을 투입해 불법행위자를 단속했다. 올해 3월부터는 타워크레인 기사가 급여 외에 금품을 수수하면 최대 12개월간 면허가 정지되도록 했다. 이런 정부 조치에 노조는 초반에는 의도적으로 작업 속도를 늦추거나 안전을 이유로 조업을 거부하는 ‘준법투쟁’으로 대응했지만, 정부가 고의적인 태업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하기로 하면서 노조 집행부의 장악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고 있다.
건폭에 대한 검찰과 법원의 엄벌 기조도 이런 변화에 영향을 줬다. 검찰 관계자는 “과거 노조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피해 진술을 주저하던 업체들이 최근 수사 의지를 보고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고 했다.
‘건폭’으로 최근 1년간 기소돼 1심 재판을 마친 144명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수원지법은 지난 8월 공동 공갈 및 업무 방해 혐의로 기소된 한국노총 산하 한 건설노조 지부장 A씨에게 징역 2년 4개월 실형을 선고하면서 “거대 노조 지위를 등에 업고 근로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할 것같이 외관을 꾸미고는 실질적으로 사익을 취하기 위해 건설 현장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 상당한 돈을 갈취했다”고 했다. A씨는 건설 현장에서 확성기로 장송곡을 틀고 덤프트럭으로 출입구를 막고선 “회사를 박살 내겠다”며 협박해 7000만원을 뜯어낸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A씨는 항소했지만 2심도 “다른 근로자들이 이 같은 행태에 배신감과 허탈함을 보이고 있다”며 1심 형량을 유지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10일 서울·경기도 일대의 건설 현장 20여 곳에서 공사를 방해하겠다고 건설사를 협박해 2억여 원을 뜯어낸 혐의로 기소된 전국 연합 건설현장 노조 위원장 임모(53)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면서 “건설사들에 피해를 야기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건설 비용 증가와 부실 공사로 이어져 우리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고 건전한 노동시장을 왜곡한다”고 했다.
다만, 일부 지역에선 아직도 건폭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청 관계자는 “노조원들의 편법적인 공사 방해, 집회 등 불법 재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어 철저히 대응할 방침”이라고 했다.
12.08 ‘건폭’ 1심서 100% 유죄 선고, 조폭 범죄를 수십 년 방치했다는 뜻
지난 1년간 건설 현장에서 불법과 공사 방해 등으로 금품을 뜯어낸 ‘건폭(建暴)’으로 기소돼 1심 재판을 마친 144명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작년 말부터 건폭을 집중 단속해 4829명을 입건하고 이들 중 상당수를 공동 공갈, 공동 강요, 특수 강요 미수, 업무 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이 중 1심이 끝난 전원에 대해 법원이 예외 없이 유죄로 엄벌에 처했다. 당연한 일이다.
‘건폭’은 현 정부 들어 특별 단속을 시작하기 전까지 수십 년간 행해졌다. 근래에는 건폭들이 노조를 결성해 서로 자기 조합원을 쓰라고 강요하며 불법 파업과 태업은 물론 폭력까지 휘두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작업을 빨리 해달라며 웃돈을 주고받는 월례비 관행만 해도 20~30년 이어져 온 고질병이었다고 한다. 정작 자신들은 노조의 간부라며 근로시간 면제자로 등록해 일을 거의 하지 않고 임금을 받아내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경찰은 ‘노조’라며 수수방관했다.
정부가 단속을 벌인 이후 월례비 요구, 노조의 채용 강요, 태업, 집회 등 압박 행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번 판결 결과와 건설 현장 정상화는 그동안 건설 현장에서 수십 년 동안 조폭과 같은 범죄행위가 방치돼 왔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난 정부는 노조 불법을 눈감아주면서 건폭이 활개 치도록 방조했다. 전 정부 시절 검찰이 건폭 혐의로 구속한 인원은 5년간 16명에 그쳤다. 단속 시늉만 낸 것이다.
이 밖에 대형 노조에 대해 회계를 공개하도록 해 양대 노총 등 90% 이상의 노조가 회계 공개에 참여하면서 투명성이 조금이나마 높아진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여전히 야당은 “과도한 건폭 몰이”라며 정부 단속에 비판적이고 노조도 “노동 탄압”이라며 저항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선 아직도 건폭이 남아 있다. 빈틈을 보이면 건폭은 언제라도 다시 활개를 치며 과거로 돌아가려고 할 것이다. 노사 법치주의, 건설 현장에서의 상식 회복은 불법과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단속으로만 가능하다.
조선일보 사설
12.08 고속道·고속鐵은 세계 최강, 보도블록은 세계 꼴찌?
가로수·환풍구·소화전·맨홀 등 수많은 시설물 지면에 돌출
보도블록 마감은 원래 고난도 ‘조각가의 정성’ 요구하는데 우리와 선진국은 30년 격차 혹평
‘걷기 좋은 길’은 상식인데 고속철, 고속도만 좋으면 뭐하나
사랑의 온도탑, 구세군 자선냄비, 크리스마스 장식과 조명, 군밤·군고구마 노상 매대 등 각종 세모 풍경이 거리마다 설렌다. 하지만 결코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연말 풍물도 하나 있다. 보도블록 교체 공사다. 멀쩡해 보이는 길이 졸지에 공사판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실제 국토교통부의 공공공사 발주는 연말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회계연도 독립의 원칙에 따라 세출예산을 해당 연도 내에 모두 집행코자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도블록 교체공사는 사업비 구조가 단순하고 시각적 변화 효과도 커 지자체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서울 세종대로에서 관계자들이 인도 보도블럭을 재정비 하고 있다./장련성 기자
이러한 연말 보도 교체 공사는 오랫동안 민원(民怨)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십수 년 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은 ‘보도블록 시장’을 자임하며 ‘보도블록 십계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예산 낭비를 줄이고 부실공사를 막겠다는 취지였는데, 그중 하나로 ‘보도공사 closing 11′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관용구’(官用句)를 창안하기도 했다.
모든 공사를 11월까지 마치겠다는 약속이었다. 연말 직전 예산 소진이라는 세간의 인상을 묽게 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이후에도 일반 시민이 체감하기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사실 보도블록 교체 공사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해야 한다. 상하수도나 통신선로 같은 지하 지장물(支障物) 설치, 공중선(空中線) 매설, 신규 건축물 인입 등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파헤쳐지고 메꾸어지는 것은 보도의 태생적 숙명이다.
보도블록 공사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이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보도 이용 환경이 전반적으로 너무나 불편하고 추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보다 부실시공의 결과로서, 깨지거나 비뚤어지고 꺼지거나 망가진 보도블록이 주변에 지천으로 많다. 가로등, 신호등, 환풍구, 가로수, 소화전, 우체통, 맨홀 등 수많은 시설물이 지면에 돌출되어 있어서 보도블록 마감 시공은 ‘조각가의 정성’을 요구한다는데, 이 분야에 관한 한 우리와 선진국 사이의 기 술격차는 30년 이상이라는 평가다(박대근,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속도로나 고속철도, 국제공항을 자랑하는 나라가 보도블록 하나 제대로 못 깔거나 안 까는 것이다.
시민의식이나 정치문화의 책임도 크다. 가게들이 공용 인도를 무단 침범하는 경우가 예사일 뿐 아니라 불법 광고물에 의한 통행 방해 또한 다반사다. 보도 위 불법 주정차 행위가 볼라드(차량 진입 억제용 말뚝)를 훼손하면서까지 만연되어 있지만, 지자체의 단속은 있으나 마나다. 선거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볼라드의 실제 효능도 애매할 때가 많다. 이처럼 우리나라 보도에는 지뢰나 암초, 복병(伏兵)이 도처에 숨어있다. 도로 관련 정책을 관장하는 고관대작들이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혹은 유모차를 밀며 이런 동네 길을 한 번이라도 직접 걸어봤을까?
지난 10월 서울시는 ‘서울관광인프라 종합계획’ 세부안을 발표했다. 서촌이나 익선동 등 도심 관광지 보행로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목표가 포함되어 있는데, 환기구나 전봇대, 공중전화 부스 등 시설물의 위치 조정 혹은 지중화(地中化), 흡연 부스 및 쓰레기통 설치 등이 주요 사업 내용이다. 서울시가 보행 환경 쪽에 관심을 늘린 것은 물론 반갑다. 하지만 그것이 외국인 대상 관광 인프라 증진 차원에서 논의된 사실은 적잖이 아쉽다.
이른바 ‘걷기 좋은 도시’의 혜택과 매력은 일반 시민이 먼저 누려야 하는 것 아닌가? 최근 시내 곳곳에 다양한 명목의 ‘보행특화거리’를 조성하려는 노력에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사람 다니라고 만든 길이 걷기에 편해지는 것은 상식이나 원칙일 뿐, 새삼 특별히 강조할 사안은 아니지 않을까?
보행 환경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누는 척도 가운데 하나다. 선진국의 경우 보도블록 공사에서도 장인정신(匠人精神)은 어김없이 발휘된다. 토목에 예술을 가미하는 서구 건축문화의 전통인 셈인데, 말하자면 ‘신(神)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details)고 믿는 직업적 소명의식의 승리다. 그 결과, 대부분 동네 길은 인프라와 어메니티(amenity, 쾌적한 장소감)를 자연스레 겸한다. 더군다나 지금은 ‘보행일상권’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다. 코로나 펜데믹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15분 도시’ 개념은 장보기나 외식, 학원 다니기나 병원 이용, 취미나 여가 생활과 같은 일상적 소비활동은 가급적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범위를 넘지 말자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걷기 나쁜 도시’는 목전의 고충이나 남부끄러운 차원을 넘어 보행친화적 미래 도시를 대비하는 측면에서도 더 이상은 이대로 둘 수 없다.
조선일보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12.08 [단독] 국내 송환 피하려...필리핀서 사고친 한국 범죄자 50여명
필리핀 교도소에서 꼼수 최초 전파한 사기꾼 윤모씨, 지난 8월 강제 송환
경찰 “셀프 사건 일으키기 전 최대한 빨리 송환 추진”

▲경찰이 지난 10월 필리핀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조직 ‘민준파’ 총책을 붙잡아 국내로 강제송환했을 당시 모습. 이들은 4년간 저금리 대출을 미끼로 피해자들을 유인, 총 108억 원을 가로채 빼앗은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민준파 총책 A씨 등 필리핀으로 도피한 일당에 대해 2020년 9월 인터폴 적색수배를 발부받아 필리핀 경찰과 공조 수사를 벌여왔고, 2년여 간의 추적 끝에 지난 9월 필리핀에서 검거했다./경찰청
경찰청은 국내에서 유명 작가로 행세하며 수천만원의 사기를 저지른 뒤 필리핀으로 도피한 윤모씨를 지난 8월 강제 송환한 것으로 8일 파악됐다. 윤씨 송환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그가 필리핀 교도소 수감 중인 한국 범죄자들에게 강제 송환을 피하기 위한 ‘꼼수’ 수법을 최초로 전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윤씨가 퍼뜨린 수법은 간단했다. 필리핀 현지에서 추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필리핀 현지에서 죄를 지어 형(刑)을 선고받게 되면, 그만큼 국내 송환 절차가 지연된다는 점을 노리는 셈이다.
윤씨는 필리핀 교도소 내에서 “한국으로 송환돼 수십 년 동안 교도소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필리핀 교도소에 있는 게 낫다”는 취지로 필리핀 교도소 내 한국인 흉악 범죄자들에게 이른바 컨설팅 역할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필리핀 교도소 수감 중에 이런 수법을 공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윤씨로 인해 필리핀으로 도피한 범죄자 중 상당수가 국내 강제 송환을 피할 목적으로 필리핀 현지에서 추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정 당국에 따르면 필리핀 현지 교도소엔 한국인 80~90 명이 수감 중이다. 이 중 절반이 넘는 50여 명이 국내 송환을 피하기 위해 현지에서 사건을 일부러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 교도소 수감자 상당수가 현지에서 붙잡힌 뒤 한국 송환을 앞두고 조력자에게 본인을 다른 사건의 피고소인으로 신고하라고 지시한 정황이 발견돼 필리핀 수사 당국과 공조하고 있다”고 했다.
보이스 피싱범인 일명 ‘김미영 팀장’ 박모(52)씨가 윤씨로부터 전수받은 수법으로 송환을 회피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박씨 일당은 지난 2012년 ‘김미영 팀장입니다’로 시작하는 대출 상담 문자를 보낸 뒤 이에 반응한 사람들에게서 수백억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지난 2013년 이 조직의 국내 조직원 28명을 검거했지만, 총책 박씨와 주요 간부들은 필리핀 등으로 도피했다. 박씨는 지난 2021년 10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검거됐지만, 2년 넘게 국내 송환 절차는 지연되고 있다. 박씨가 검거 직후 필리핀 경찰에 “내가 현지서 사기 등 다른 범죄를 저질렀다”는 취지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충남 서산에서 아내를 살해한 뒤 태안의 한 저수지에 유기한 혐의를 받는 강모(38)씨도 마찬가지다. 강씨는 범행 이틀 만에 필리핀으로 도피했다가 지난 2월 필리핀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검거 직후 필리핀 이민국 수용소에서 탈출했다가 8일 만에 검거됐는데, 당시 강씨가 시가 2억3000만원 상당의 마약류 1㎏을 소지한 채 붙잡혔다. 필리핀 경찰은 강씨를 불법 약물 등 혐의로 기소한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법상 외국인이 마약 거래를 하면 종신형에 처해지기 때문에 국내 송환은 사실상 어려워진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 경찰은 필리핀 현지 경찰과의 공조로 범인을 붙잡을 때 최대한 빠르게 송환을 추진하고 있다.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범죄자가 추가 사건을 일으켜 송환이 연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범죄자들은 자해를 시도하며 송환을 거부하기도 한다. 경찰청은 지난달 필리핀 이민청에 수감 중이던 전화금융사기 조직 총책을 국내로 송환했다. 총책은 2016년 6월부터 2017년 4월까지 필리핀 바기오를 거점으로 전화금융사기 범죄단체를 조직한 후 검찰·금융기관을 사칭해 91명에게서 11억4207만원 상당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필리핀 당국으로부터 강제추방 승인 결정을 통보받고 호송관 2명을 파견해 송환을 추진했다. 그러자 총책은 현지에서 자해 난동을 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조선일보 주형식 기자
12-08 채점 결과로도 확인된 2024 수능 변별력, 이게 정상이다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변별력을 제대로 갖춘 출제였다는 사실이 채점 결과로도 확인됐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7일 발표한 채점 결과에 따르면, 국어·수학 과목의 만점을 받은 수험생이 각각 64명·612명으로 전년도 371명·934명보다 대폭 줄었다. 절대평가인 영어도 원점수 90점 이상의 1등급이 4.71%로, 전년도 7.83%보다 크게 낮아졌다. 모든 과목 만점자는 1명이었다. 지난 11월 16일 시험을 치른 직후 수험생과 진학지도교사 등이 이구동성으로 “‘킬러 문항’은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까다롭게 출제됐다”고 밝혔던 체감 난이도 그대로인 셈이다.
고등학교 공교육 과정을 벗어난 ‘킬러 문항’을 배제하면서 성적 최상위 그룹까지도 변별력을 보이게 출제한 것으로, 이게 정상이다. 교육부가 지난 6월 “올해부터 수능에 ‘킬러 문항’은 출제하지 않겠다”고 밝힌 데 대해, 일각에선 “‘킬러 문항’ 없이 너무 쉽게 출제해서 만점자가 쏟아지면 최상위권 학생들이 상대적 불이익을 받는다” 하는 걱정도 했다. 하지만 기우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득점자만 양산하는 출제는 ‘수능 무력화’와 다름없다.
이른바 ‘물 수능’이 입시 혼란을 키운다는 사실은 거듭 입증돼왔다. 쉬운 수능이 사교육을 없애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변별력은 수능의 생명이다. 대학별 지필 본고사가 금지된 현실에선 더 그렇다. 2024학년도 수능의 변별력 기조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 물론, 박사 과정에서나 다룰 수 있는 초고난도의 난해한 문항으로 공교육만 받은 학생은 용어나 개념부터 이해할 수 없는 ‘킬러’ 출제는 앞으로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다.
문화일보 사설
12-12 첫발 뗀 노조개혁과 대체근로 필요성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아일랜드와 그리스는 유럽의 병자였다. 아일랜드는 금융위기 직후인 2009, 2010년 2년 연속 역(逆)성장하며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가장 큰 경기 침체를 겪었다. 2010년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850억 유로의 구제금융도 받았다. 그리스도 2010년 유럽 재정위기 당시 국가부도 사태를 겪었다.
그런 두 나라가 환골탈태했다. 포퓰리즘 대신 구조개혁으로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꾼 결과다. 아일랜드는 긴축재정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24%였던 법인세율을 12.5%까지 낮춰 구글과 애플 등 다수 빅테크 기업의 유럽 본사를 유치했다. 그리스도 2019년 7월 집권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가 친시장, 부채 감축 정책으로 경제를 빠르게 정상화시켰다. 지난 10월 말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그리스의 국가신용도를 투자적격 등급으로 상향 조정했다. 그리스의 올해 실질 GDP 증가율 전망치는 2.3%다. 우리나라의 성장률 전망치는 1.4%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경제가 침체 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 중 하나는 ‘노(勞)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노동개혁으로 노사 간에 평평한 운동장을 만든다면, 우리 경제도 웅비할 것이다. 고무적인 것은, 최근 부족하지만 3가지 점에서 노동개혁의 첫발을 뗐다는 점이다.
노조 회계공시 제도 도입이다. 민주노총은 ‘회계 투명성을 빌미로 한 정부의 노동 탄압과 혐오 조장’으로 맞받아쳤다. 한국노총도 소속된 상급단체가 회계공시를 하지 않을 경우 조합원에게 세액공제를 해주지 않겠다는 것은 ‘명백한 연좌제’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조합비를 실제 납부하는 조합원의 ‘알 권리와 회계 투명성 제고’라는 명분에 밀린 노동계는 꼬리를 내렸다. 양대 노총은 세액공제 혜택 중지라는 불이익을 감내할 수 없다며 ‘회계 공시’를 수용했다. 이로써 ‘노조 정상화’의 첫 단계인 노조 회계 투명성이 확보된 셈이다.
건설 현장의 폭력 이른바 ‘건폭’이 평정된 것도 노동개혁의 작은 성과다. 건설기계를 활용한 부당 금품수수, 공사 방해, 태업 등의 불법·부당 행위를 저지른 타워크레인 등의 건설기계조종사에게 최대 12개월간 면허정지 조치가 내려졌다. 4000명의 타워크레인 노조에 철퇴를 내린 것이다. ‘월례비’ 명목의 부당 금품수수는 타워크레인 독점 노조의 횡포였다. 타워크레인 기사의 급여에는 승무수당·위험수당 등 모든 것이 포함돼 있으므로 ‘정식 급여’ 이외의 가욋돈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건폭이 없어지면서 현장이 잘 돌아간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이른바 ‘노란봉투법’이 지난 8일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지 못해 폐기됐다. 이 법안은 ‘파업조장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악법이다. 예컨대, 노조의 불법행위로 사용자가 피해를 봤다면, 불법행위자 ‘인별(人別)’로 손해를 구분해 청구하라는 식이다. 이는 부당행위의 공동책임 원칙을 부정하는 폭거다.
이제 제도적 측면과 현장에서 그리고 입법적 측면에서 노동개혁의 토대가 마련됐다. ‘무기 대등의 법칙’이 지켜질 때 진정한 의미의 노사 간 균형이 이뤄지는 법이다. 노조의 파업권에 맞설 수 있는 사측의 조업권이 보장되도록, 노조가 파업에 나설 때 대체근로를 허용하는 문제가 전향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문화일보
12-14 ‘교권 붕괴’ 학생인권조례 옹호 시위 조희연의 反교육
친(親)전교조 성향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또 반(反)교육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3일 1인 시위에 나선 조 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교육 현장을 다시 혼란과 갈등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시의회가 다음 주 본회의에서 폐지안을 표결할 예정인 학생인권조례의 옹호에 궤변까지 동원했다. 각 구를 순회하며 22일까지 1인 시위를 이어가겠다고도 한다.
경기도의회의 2010년 제정 이래 6개 시·도로 확산한 학생인권조례는 ‘교권 붕괴’의 학교 난장판을 불렀다. 수업시간에 잠자는 학생을 깨우는 것조차 ‘휴식권 침해’로 몬다. 학생 개인 칭찬마저 민원 대상인 ‘차별’로 둔갑시킨다. 충남도의회도 조례 폐지안을 15일 표결하는 이유다. 교육부가 교사·학생·학부모의 권리·책임을 모두 명시한 ‘학교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 예시안’을 지난 11월 29일 일선 교육청에 배포한 배경도 달리 없다.
조 교육감은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 4명 등 5명을 불법 특채한 혐의로 1심 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지난 1월 27일 선고받았다. 징역 2년이 구형된 2심 재판의 선고 예정일이 내년 1월 18일이다. 현행 조례의 옹호를 당장 접어야 한다. 교육감이 일방적 주장을 선동하는 팻말을 치켜들고 거리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일 자체부터 낯뜨거울 반교육이라는 사실이나마 깨달아야 할 때다.
문화일보 사설
12.16 남현희-전청조 사건으로 본 로맨스 스캠의 세계
⊙ 사기 범죄, 하루에 917건 넘게 일어나
⊙ 여성 사기범들 잡고 보니, 전과 9범 이상이 많고 50대에 사기 행각 많이 벌여
⊙ 20년간 여자 행세하며 가짜 출산까지 한 중국 스파이 스페이푸, 전청조와 판박이
⊙ 사기꾼에게 걸려들지 않을 수 있는 세 가지 방법

▲사진=조선DB
사기꾼은 늘 흥미롭다. 정확히 말하면, 사기꾼들이 벌이는 범죄의 모든 페이지엔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흥미롭게 압축되어 있다. 욕망, 사랑, 약점, 조종, 절망, 우리가 무엇을 갈구하고, 급소는 어디인지 사기 범죄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
지난 10월 23일 《여성조선》이 남현희-전청조 인터뷰를 보도했다. 이후 한 달여간 대한민국은 전청조 이슈가 지배했다. 급기야 무성(無性) 임신, 고환 이식까지 등장하면서 거의 초(超)자연적 주제로 번지는 모양새다. ‘I'm 신뢰예요, Next time에 놀러 갈게요’처럼 쉬운 단어만 영어로 쓰는 일명 ‘휴먼청조체’가 대대적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평범한 소녀가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기 용의자가 되기까지 어떤 길을 걸어온 걸까. 과연 전청조가 특이한 경우일까.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내는 〈분기별 범죄동향 리포트〉와 대검찰청의 〈2022 범죄분석〉을 통해 사기꾼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그려보자.
사기 범죄, 하루 평균 917건 발생
사기는 형법에서 ‘재산범죄’로 분류된다. 재산범죄는 타인의 재물을 빼앗거나 불법적으로 재산상 이익을 얻는 걸 뜻한다. 살인 등 흉악범죄나 폭력범죄 등을 제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범죄다.
재산범죄에는 절도, 장물, 사기, 횡령, 배임, 손괴가 있다. 이 중 사기는 거짓말을 해서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얻은 행위를 뜻한다. 거짓말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면 사기가 아니다. ‘공갈’은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가는 걸 뜻한다. 물건을 절도로 빼앗을 경우엔 ‘절취’, 강도로 빼앗으면 ‘강취’, 사기로 빼앗아갈 땐 ‘편취’, 공갈일 경우엔 ‘갈취’라고 한다. 전청조는 편취 혐의를 받고 있단 얘기다.
재산범죄는 대한민국에서 발생건수가 가장 많은 범죄다. 성폭력이나 폭행 범죄보다 더 자주 일어난단 얘기다. 올해 1분기엔 15만6960건이 일어났다. 하루에 1744건이 일어났단 얘기다. 2022년 1분기에 비해 9.6% 증가했다.
재산범죄자 중엔 전과자가 많다. 전과자 수가 가장 많은 범죄 유형이다. 한번 남의 돈을 훔치는 맛을 보게 되면 계속 범죄를 저지른단 얘기다. 처벌과 교화의 효과가 적다는 뜻이기도 하다. 2023년 1분기 재산범죄자 중 3만8483명이 전과자였다.
재산범죄 중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게 바로 ‘사기’다. 2021년 기준 한 해 동안 사기범죄는 29만7981건 일어났다. 인구 10만 명당 577건이다. 1000명이 있으면, 그중 6명은 사기를 당한단 얘기다. 올해 1분기에는 8만2600건의 사기 사건이 일어났다.
속일 수 있는 방법 총동원
문제는 사기범죄가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이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22.6% 증가했다. ‘대한민국은 사기공화국’이라 해도 영 틀린 말이 아닌 이유다.
검거된 사기범죄 범죄자를 보면 8대 2 비율로 남성이 압도적이다(2021년 기준). 77.1%가 남성이고, 22.9%가 여성이다. 범죄자의 연령을 살펴보면, 19~30세가 27.2%, 51~60세(21.7%), 41~50세(19.3%) 순이다. 쉽게 말해 사기범이 주로 분포하는 특정 연령대는 없다. 전 연령대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사기꾼들은 주로 어떤 수법으로 사기를 칠까. 사기 수법 분류는 사실 의미가 없다. 매매가장(24.2%), 가짜속임(19.8%)이 가장 많긴 하지만 ‘기타 수법’이 절반(48.9%)이다. 그냥 속일 수 있는 방법은 뭐든 총동원한다고 보면 된다.
성별에 따른 특징도 있다. 여성 사기 범죄자를 살펴보면 10대에서 시작해 중장년으로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범죄자 비율이 올라간다. 51~55세에서 정점을 찍는다. 거짓말 솜씨가 점점 좋아져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직업별로 보면 역시 무직자가 압도적이다.
사기범죄는 어떤 사람들이 당할까. 남녀 비율은 6대 4 정도다(남성 60.2%, 여성 39.8%).
사기범죄 피해자의 연령을 살펴보면, 51~60세가 21.7%로 가장 비율이 높긴 하지만 나머지 연령대도 골고루 높다. 돈을 벌기 시작하는 20대부터 60대까지 전 연령대가 범죄 대상이다.
사기범죄의 가장 큰 특징은 친 놈이 계속 친다는 점이다. 재산범죄 자체가 그렇기도 한데, 그중에서도 사기범죄가 가장 악질적이다. 2021년 사기범죄자 17만 명 중 7만 명 이상이 전과자였다. 이 중 전과 9범 이상이 2만6000명으로 압도적 수치를 보였다. 9범 이상이라면, 숨 쉴 때 빼고는 늘 거짓말을 하며 살아왔다고 보면 된다.
사기범들을 보면 감옥에서 교화되기는커녕 거듭된 감옥 생활을 거치며 범죄 수법이 더 대담해지기도 한다. 전청조도 지난해 말에서 올해 초 사이 출소했다. 감옥에서 펜팔로 만난 남자와 ‘옥중 결혼’까지 했다고 한다. 그다지 특이한 경우는 아니다. 남녀 수감자들끼리 펜팔로 교류하는 건 무척 흔하다.
《새길》이란 잡지가 있다. ‘수용자 종합문예지’를 표방하며, 수감자들의 글을 싣는 교도소용 계간지다. 여기에 실린 글과 이름을 보고 편지를 보내 펜팔이 시작되기도 한다. 가장 흔한 건 이미 펜팔을 하고 있는 수감자들이 다리를 놔주는 경우다.
수감자들끼리 펜팔 교류

▲20년간 여성 행세를 한 중국 스파이 스페이푸(왼쪽)와 바바라 월터스, 스페이푸가 입양한 아들 스두두. 사진=이베이 캡처
요즘엔 남녀 수감자들 사이에 펜팔을 중개해주는 업체도 있다. 이런 업체도 남성 수감자가 다음에 해당하면 펜팔을 주선해주지 않는다. 1. 남은 형량이 6개월 미만인 죄수 2. 강도살인범·성폭력범 3.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으로 5년 이상 선고받은 죄수 4. 일명 ‘법자’. 법자는 ‘법무부의 자식’, 즉 누범(累犯)을 뜻한다.
여성 수감자들은 매우 인기 있다. 수형자(受刑者) 남녀 비율 때문이다. 2022년 기준 전체 수형자 3만4475명 중 남성이 3만1870명(92.4%)이고, 여성은 2605명(7.6%)이다. 편지가 몇 번 오가면 애인 행세를 하며 남성에게 용돈을 타 쓰기도 한다. 전청조가 펜팔로 알게 된 남성 수감자와 혼인신고를 했을 때는 일정한 대가가 오갔을 걸로 추정되는 이유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기 중에서도 ‘로맨스 스캠’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됐다.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은 애정을 가장해 피해자의 호감을 얻은 다음, 돈이나 재산상 이익을 빼앗는 걸 뜻한다.
로맨스 스캠의 역사는 오래됐다. 워낙 특이한 경우라 유명해진 사건도 있다. 바로 중국 스파이 스페이푸(時佩璞·1938~2009년)다. 중국인 경극 배우였던 스페이푸는 스물여섯 살이던 1964년 베이징에서 열린 외교관 파티에서 프랑스 외교관 베르나르 부르시코(Bernard Boursicot)를 만난다. 부르시코가 여섯 살 연하였다. 첫 만남 당시 스페이푸는 남성의 모습이었다. ‘원래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남자로 길러졌다’고 스페이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부르시코는 근무지를 옮겨 다녔고 두 사람은 관계를 이어나간다. 어느 날 스페이푸가 임신을 했다고 고백했다. 이후 출산한 아이를 보여준다. 두 사람 사이의 아이라며 말이다. 사실은 신장 지역에 사는 위구르족 의사에게 사온 아이였다. 부르시코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럴 만했다. 위구르족은 튀르크 계통의 민족이다. 민족 자체가 유럽에 사는 인종과 동아시아 인종의 유전자를 고루 갖추고 있어, 마치 동서양 혼혈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다.
20년간 같이 산 아내, 알고 보니 남자
부르시코는 중국 정부의 계략에 넘어간다. 스페이푸와 아들 스두두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프랑스의 기밀 문서를 중국 정부에 건네준다. 부르시코는 1979년 파리로 돌아간다. 1982년 그는 스페이푸와 스두두를 파리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비로소 가족이 함께 살게 됐다. 행복은 잠시였다. 1983년 프랑스 정부는 두 사람을 간첩 혐의로 체포한다.
부르시코는 스페이푸가 남자라는 설명을 믿지 않았다. 둘은 성관계도 했지만, 부르시코는 스페이푸가 여성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스페이푸는 남성 성기를 몸속으로 밀어 넣어 마치 여성 성기처럼 보이도록 하는 데 능숙했다고 한다. ‘터킹’이라 불리는 방법이다. 스페이푸가 요청해 두 사람은 항상 불을 꺼놓고 성관계를 했다. 부르시코는 중국 여자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환한 곳에서 스페이푸의 본래 성기를 보자, 그때서야 실체를 알게 됐다.
두 사람은 6년형을 선고받았지만, 1년 남짓 복역했다. 미테랑 대통령이 사면을 해줬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였다. 부르시코는 감옥에서 자살 시도도 했다. 출소 후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스페이푸는 중국으로 돌아가 경극 배우로 활동했다. 그러다 파리로 다시 돌아와 정착했다. 2009년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하기 직전 ‘여전히 부르시코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무대에 올려졌다. 중국계 미국인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이 1988년 쓴 희곡 〈엠 버터플라이(M.Butterfly)〉다. 1993년엔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제러미 아이언스가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스페이푸가 성별을 오가며 부르시코를 속인 대목에서 전청조가 연상된다.
남현희가 속은 이유
전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는 어쩌다 전청조에게 속았을까. 두 가지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첫째, 남현희의 성장 배경이다. 남현희는 평생 운동만 해온 운동선수였다. 기자는 평생 운동을 해온 여성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다 놀란 적이 있다. 잠시 터놓고 대화를 했더니 의아할 만큼 과도하게 심리적으로 기대 오는 거였다. 대회에서의 승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날들, 옆 선수와의 만성적인 경쟁 상황이 자칫 심리를 취약하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남현희는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어린 시절 부친이 사업에 실패해 압류까지 당했다.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빨간 딱지를 보며 ‘가난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내가 잘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내가 우리 집을 살릴 수 있기에 펜싱에 집중했다.”
해괴한 일에 휘말려서 그렇지, 남현희는 펜싱 실력만 놓고 보면 대단한 선수다. 베이징올림픽 은메달,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포함해 국제대회에서 딴 메달 수만 99개다. 한국 펜싱 사상 처음으로 세계랭킹 1위 자리에 올랐다. 아이를 낳은 후 실력이 쇠퇴했나 했더니, 피나는 훈련 끝에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따낸 건 가히 인간 승리급이다.
대회에서 우승해 번 돈으로 부모님의 빚도 모두 갚아줬다고 한다.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서부터 종종 비극이 시작된다. 남현희는 전청조와 만남을 이어가며 의심이 들어도 상의할 사람이 없었을 거다. 부모나 동생은 자신이 챙겨야 할 부양자니 의논 대상이 안 된다. 더 이상 선수가 아니니 코치와 상의할 수도 없다.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 자신의 실력으로 성공한 선수들이 자주 겪는 어려움이다. 이 딸이 실질적인 가장(家長)이니, 뭐를 하든 부모는 참견할 수 없다. 집안 내 의사소통 구조 자체가 오랜 기간 그렇게 흘러왔을 가능성이 높다. 성공한 여성 메달리스트들에게서 익히 목격한 비애(悲哀)다.
이혼 직후 위축되는 여성들

▲이지훈 변호사. 사진=이지훈 변호사 인스타그램
둘째, 이혼이다. 남현희는 다섯 살 연하 공효석 전 사이클 국가대표 선수와 2011년 결혼했다. 그러다 지난 8월 이혼을 발표했다. 이혼 사유가 뭐든 남현희는 전 남편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됐을 터다.
이지훈 변호사에게 이혼과 여성 심리에 대해 물었다. 이 변호사는 유튜브에서 ‘아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이혼과 재혼을 두고 예리한 조언을 해준다. 그의 말이다.
“이혼하면 외로움을 많이 느끼거든요. 그걸 다시 사랑으로 풀려고 해요. 그러다 나락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누구나 외롭거든요? 그런데 그분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이혼 직후라면, ‘내가 배우자가 없어서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옆자리를 채우려 필사적으로 노력해요.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없죠.”
― 그러면 또 실패하겠군요.
“보통 이혼은 원인이 양쪽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상대 탓이라고 생각하죠. ‘난 원래 이혼할 팔자가 아닌데 너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됐다’ 이렇게 생각하면 쉬워요. 배우자만 바꾸면 되거든요.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전혀 안 보고 이혼을 하죠. 그런 상태에서 재혼하면 또 실패합니다.”
― 자신을 돌아봐야 되는군요.
“이혼은 분명 실패거든요. 관계에서 오는 실패이기 때문에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이혼하고 최소 3년은 자신을 돌아봐야 해요. 자신이 바로 서고, 결핍에서 자유로워질 때 재혼하는 건 괜찮아요. 남현희씨도 결국 경제적인 측면, 사업 경영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 것에 큰 비중을 둔 걸로 보이잖아요. 그건 결혼이 아니고 그냥 투자자를 찾은 거죠.”
― 이혼 후 사기를 당하는 여자들이 많나요?
“정말 많아요. 감방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기꾼인데 외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대요. 나중에 알아보니 전과자예요. 심지어 얼굴이 잘 생기지도 않았어요. 나이도 많고 돈도 없어요. 데이트 비용도 여성이 다 냅니다. 빌려서까지 돈을 건네줍니다. 전문직 여성들도 당해요. 외로움에 압도되면 사리분별이 안 되는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저를 찾아옵니다. ‘내가 봐도 미친 짓을 했구나’ 그때서야 깨닫는 거죠.”
― 남현희씨의 경우가 특이한 게 아니군요.
“매우 흔합니다. 전청조는 나이라도 어리죠. 보통은 나이 많은 사람, 심지어 할아버지 같은 사람한테도 넘어갑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조심해야
사기를 안 당하는 방법은 없을까.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자신의 고민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 변호사의 말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고민글을 올려요. 예를 들면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데 임신을 했다. 낙태를 하라고 한다’ ‘남편과 이런이런 문제가 있다’ 그러면 누가 댓글을 달아요. 댓글을 주고받다 만나요. 이건 일반적인 게 아니에요. 카페에 고민을 올릴 수는 있는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이성을 만나서 털어놓는다? 이건 이 사람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겁니다.”
이런 식이다. 서울에 사는 A씨는 여성들이 많이 가입한 네이버 ‘레몬테라스’ 카페에 이혼 고민을 올렸다. 다른 여성들에게 조언을 듣고 싶어서였다. 그랬더니 한 무리의 남성들에게 쪽지를 받았다고 한다. ‘만나서 고민 상담을 해주겠다’ ‘나도 비슷한 고민 중인데 만나서 얘기해보자’는 식의 내용이었다. 손쉬운 타깃이 된 셈이다.
여기서 유명인들의 고충이 시작된다. 불우한 가정사나 어려움이 실시간으로 알려진다. 전준수(왕진진)에게 사기 결혼을 당한 낸시 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낸시 랭은 아버지와 절연하고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어머니는 암 투병 17년 끝에 돌아가셨다.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 낸시 랭의 심리는 방송을 통해 여과없이 알려졌다. 전준수 일당에게 낸시 랭은 손쉬운 표적이었을 터다.
남현희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가족사가 방송을 통해 여러 번 소개됐다. 전청조로서는 너무나 중요한 정보였을 거다.
틴더 이용해 120억원 사기

▲틴더에서 활동하며 혼인빙자 사기를 친 사이먼 레비에프의 인스타그램. 사진=사이먼 레비에프 인스타그램 캡처
둘째, 사기꾼들의 사냥터에 가지 마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데이트 앱 사기: 당신을 노린다(Tinder Swindler)〉에는 전 유럽을 무대로 벌인 결혼 빙자 사기가 등장한다. 데이트 어플 ‘틴더(Tinder)’를 통해 일어난 실제 사건이다. ‘틴더’는 세계 매출 1위의 데이팅 어플이다. 이스라엘 출신의 사기꾼 ‘사이먼 레비에프(Simon Leviev)’는 틴더를 통해 만난 여성들에게 120억원을 뜯어냈다. 결혼을 약속했기에 피해 여성들은 대출까지 받아서 돈을 보내줬다.
사기범들은 틴더, 카카오 오픈채팅, 채팅 어플을 이용해 사냥감을 찾는다. 위험한 곳엔 애초부터 가지 않는 게 방법이 될 수 있다. 로맨스 스캠으로 분류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가평 계곡 살인 사건’의 이은해가 사망한 남편 윤모씨를 만난 곳도 채팅 어플이다. ‘조건만남’으로 처음 만났다.
셋째,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지 마라. 2018년 뉴욕 상류사회가 한 20대 여성 때문에 발칵 뒤집어졌다. 1991년생 애나 소로킨(Anna Sorokin)이 주인공이다. 애나는 독일 출신의 부유한 상속녀 애나 델비로 가장하고 뉴욕 상류사회에 진입했다. 명품을 두르고 VIP파티에 참석하며 유명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비싼 호텔에 묵으며, 비싼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유력자들과 친구가 된다. 자산가들, 스타트업 경영자, 언론인, 월스트리트 투자회사 모두 속았다. 애나는 뉴욕 최상급 호텔에서 무전취식을 하고 급기야 전용 비행기를 타고(물론 돈은 안 내고) 워런 버핏의 파티에도 참석한다. 애나의 무기는 바로 인스타그램(instagram)이었다. 유명인들과 찍은 사진이 올려져 있는 애나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상류사회 사람들은 쉽게 그녀가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사기당한 걸 알고서도, 이토록 허술한 사기에 속아 넘어갔다는 게 창피해 피해 사실을 숨긴 이들도 있다고 한다. 사기 행각은 결국 발각되고 애나는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스스로 보호하는 게 상책

▲애나 소로킨의 집 옥상에서 열린 패션쇼를 비판하는 《뉴욕타임스》의 기사. 사진=뉴욕타임스 캡처
그 많은 사기꾼은 결국 어떻게 됐을까. 혼인 빙자 사기꾼 사이먼 레비에프는 출소 후에도 맹활약 중이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엔 호화 리조트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온다. 책을 쓰고 화술을 가르쳐주는 컨설팅업체, 부동산 컨설팅 등을 한다고 한다.
애나 소로킨은 형기를 4년도 안 채우고 가석방됐다. 체류 기간이 끝났다는 이유로 가택 연금을 당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32만 달러를 주고 그녀의 이야기를 사들였다. 그 결과가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애나 만들기(Inventing Anna)〉다. 지난달엔 그녀의 집 옥상(루프톱)에서 패션쇼도 열렸다. 뉴욕패션위크 기간 중 샤오 양(Shao Yang)이라는 중국계 디자이너의 쇼였다. 뉴욕의 수많은 장소 중 애나 소로킨의 집을 고른 디자이너 측의 안목은 정확했다. 쇼 자체가 화제가 됐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장문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유명해지려고 도대체 어디까지 갈 건가?’
전청조 역시 출소 후 비슷한 길을 걸을지 모른다. 애석하게도 한국의 출판 시장이 미국보다 작아서 그렇지, 비슷하기라도 했다면 책부터 냈을 거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전청조입니다’ 뭐 이런 제목으로 말이다. 사기범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첫째, 전청조 사건을 코미디 소재로 소비하면 안 된다. 돈을 건넨 피해자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둘째, 피해자를 비난하는 서사로 가도 안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사기범죄에 노출되지 않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12.16 새만금 잼버리 대회
누구 하나 정책 실패 책임지는 이가 없었다
⊙ “계장 한 명만 깨어 있어도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것”
⊙ 잼버리 실패 후 ‘애물단지 새만금’ 다시 손본다… 내년 새만금 SOC 예산 78% 삭감
⊙ 이미 매립한 땅이 아니라 새 갯벌인 ‘공유수면’에 잼버리 유치
⊙ 여가부 장관 “(잼버리) 조직위로부터 상당한 부실 보고를 받았다”
⊙ 하늘도 저버렸다… 7월 한 달 총 19일간 647.2mm 비 와(전년 같은 기간 5배)
⊙ “인천공항 건설 당시 강동석(신공항 건설공단 이사장)은 2년 반 정도 간이 숙소에서 기거”
⊙ 전북 환경단체 “예타 면제한 새만금신공항 사업 철회하라”
⊙ 새만금에 아직 매립이 안 된 곳은 항만 배후부지, 첨단산업복합단지 부지 등 8773만 평
⊙ “잼버리 백서 발간 맡은 업체는 전북도청 입점 문구점”

▲새만금 잼버리 세계대회의 메인 시설인 글로벌 청소년 리더센터 앞 모습이다. 여전히 곳곳에 물웅덩이가 보이고 땅이 파헤쳐져 있다
제25회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대회(8월 1~11일)가 파행으로 끝이 났다.
취재를 시작하며 기자는 전직 고위 공직자와 만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두고두고 그의 말이 울림을 주었다. 대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지금 사람들이 여성가족부가 잘못했느니, 전라북도가 잘못했느니, 한덕수 총리가 잘못했느니 싸웁니다. 제가 볼 때 아니에요. 공무원이 다 풀어진 겁니다. 공무원들이 (이렇게 될지) 아무도 생각을 안 했어요. 기강이 무너졌다고, 해이했다고 그러는데 아닙니다. 그냥 널브러진 겁니다. 단 한 사람만 깨어 있어도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겁니다. 계장!”
― 6급 계장…?
“정부나 지자체에서 일해봐서 아는데, 문제점이 있으면 차관이, 아니면 핵심 국장이 나서서 반드시 장관에게 보고했어야 합니다. ‘장관님! 캠핑장이 물바다입니다. 그냥 두시면 큰일 납니다. 이걸 이렇게 챙기셔야 합니다’라고 말이죠. 왜냐? 뻔하니까…. 수십 년간을 그 계통에 있었던 사람이니까. 만약에 차관이 멍한 사람이다. 그럼 국장이 나서야 해요. 그 마지막 실무선이 계장입니다. 계장이 사태를 파악해 직소(直訴)했다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 겁니다. 다 풀어진 거예요. 그럼, 왜 풀어졌나? 정치적인 이용을 당하면 나만 손해이기 때문에. 괜히 나섰다가 시끄럽게 만들면 눈총만 받으니까. 뭔가 공(功)을 세우면 정권이 바뀌었을 시 찍힐 수 있으니까. ‘엿 먹어봐라’ 가만히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여가부 장관, 不實報告 받았다”

▲새만금 잼버리 파행 이후 처음 열린 11월 2일 국회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정복 의원과 김현숙 장관이 설전을 벌이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11월 2일 여성가족부의 국회 국정감사장.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잼버리 사태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파행 책임은 잼버리 조직위의 ‘부실보고(不實報告)’에 있다고 못 박았다.
김 장관은 “왜 7월 25일(잼버리 일주일 전) ‘모든 준비가 다 됐다’고 발표했나. 7월 24일 현장 점검도 했는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근거가 뭐였나”는 지성호 국민의힘 의원의 질문에 “(조직위 사무국으로부터) 상당한 부실보고를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김 장관의 주장이다.
“조직위 사무총장을 포함한 사무국에서 ‘준비가 완벽하다’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이야기를 계속 했기 때문에, 저는 이게 일종의 상당한 부실보고라고 생각합니다.”
‘준비가 완벽하다’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엉터리 보고에 속아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 의원이 “엄중 문책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나?”라고 다시 묻자, 김 장관은 “허위에 가까운 부실보고를 조직위 사무국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고 이 부분은 감사원 감사를 통해 명명백백히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잼버리 조직위의 최고위급은 물론 현장의 최종 실무를 꿰뚫고 있는 인물 중에도 똘똘하고 정의감 있는 ‘계장’은 없었던 것일까.
잼버리가 그렇게 끝이 났지만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잼버리 조직위원장이나 사무총장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현장을 지켰을 공직자들, 자원봉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해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기자는 잼버리 파행의 원인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고위직 공직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익명을 전제로 대화를 나눴다.
“정말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일들이 일어난 겁니다. 당초 야영지에 숲을 조성하겠다고 그랬는데 초지(草地) 조성도 안 됐어요.
애초에 잼버리를 하겠다고 할 때 바다 위(공유수면)에 선을 그었던 겁니다. 바다와 갯벌 위에 선을 그어 그걸 메워가지고 대회를 하려 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야영지 조성을 2022년 12월에 끝낸 겁니다.”
‘2023년에는 풍성한 숲 공간 조성’
그는 기자에게 관련 문건을 보여주었다.
전북도가 새만금을 대상지로 하여 잼버리 유치가 확정됐을 때, 그러니까 2015년 9월에 ‘야영지 땅’은 관광레저용이었다. 나무를 잼버리장 곳곳에 심어 2023년에는 풍성한 숲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정부 문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잼버리 유치활동 결과보고서(전북도, 2018) : 무더위를 해결하기 위해 간척지에서 가장 잘 자라나는 나무를 잼버리장 곳곳에 심어 2023년에는 풍성한 숲 공간 조성.〉
기자가 새만금으로 내려가 두 눈으로 확인한 잼버리 야영지에는 숲은커녕 나무 한 그루 없었다. 새만금처럼 간척지에 세계대회를 열었던 일본 잼버리(2015년 야마구치현 키라라하마)와 달리 매립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공유수면(公有水面)이었다. 행정용어인 공유수면은 강이나 바다, 하천을 말한다.
2015년 7월 28일부터 8월 7일까지 일본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열린 제23회 세계 잼버리 대회의 부지는 1964년 갯벌을 매립한 땅이었다. 그리고 1988년 이뤄진 개발로 이미 갯벌이 아닌 ‘육지’가 되었다. 당시 전 세계 155개국 3만4000명의 스카우트 대원 및 지도자가 참가했다. 일본은 간척지 특성상 나무가 없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대책을 세웠다. 2012년 전국 식목 행사를 개최해 참가자들이 한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한 것이다.
한국스카우트연맹 관계자는 “‘폭염 대피’와 관련해 일본과 한국의 야영지 차이는 나무에 있었다. 같은 환경이라도 일본 야마구치현 잼버리는 ‘나무’가 있어 그늘에서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새만금은 나무도 없었고 그늘도 부족했다”고 했다.
아직 공유수면인 곳에 나무 심는다?
만약 일찌감치 간척지 매립을 끝냈더라면 나무를 심을 수 있었으리라. 2017년 8월 기준으로 새만금은 전체 용지 조성 계획부지 291㎢ 중 약 35%인 103.2㎢를 매립, 간척지를 조성했다. 1989년 11월 6일에 ‘서남해안 간척농지개발계획’이 확정되면서 새만금 간척사업이 추진되는 계기를 마련한 뒤 햇수로 34년이 흘렀다. 이미 ‘뻘’에서 ‘뭍’으로 천지개벽한 ‘땅’에서 행사를 치르면 되었다. 그런데도 부랴부랴 새로 갯벌을 매립하려 한 게 화근이었다. 아직 공유수면인 곳에 나무를 심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북도가 2018년 발간한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유치활동 결과보고서〉에도 ‘전북도가 잼버리를 새만금에 유치한 또 다른 이유는 새만금 개발의 조속한 추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결국 잼버리를 명분으로 새만금 간척사업에 속도를 붙이려는 무리수가 이런 사태를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정부 문건의 내용 중 일부다.
〈2010년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된 후 전라북도는 새만금 내부 개발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으나 당초 2020년까지 계획 SOC 등이 더디게 추진되고 있었다. 이에 전라북도는 국제공항 건설 및 SOC 구축 등 새만금 내부 개발에 박차를 가할 명분이 필요했다.〉
계속된 정부 관계자와의 대화다.
― 갯벌이 육지로 바뀌는 데 상당한 기간이 걸리지 않나요?
“갯벌을 매립하면 자연적인 안정화 기간이 필요하다고 토목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지반이 굳기까지, 심지어 10여m까지 땅이 꺼지는 것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물이, 바닷물이, 염분이 완전히 빠져나가도록 가라앉아야 하니까요. 오랜 성토 작업을 거쳐 갯벌이 육지로 바뀌는 오랜 기간의 안정화 기간이 필수적인데, 2022년 12월에야 부지 조성을 완료했으니 처음부터 불가능했어요.”
‘벌거벗은 임금님’

▲새만금 잼버리 당시 많은 폭우가 내렸지만 폭염으로 온열 환자가 속출했다. 8월 2일 노르웨이 대원들이 숙영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일부 대원들은 더위에 지쳐 바닥에 누워 있다. 사진=조선DB
― 대회를 앞두고 비도 많이 내렸더군요.
7월 한 달, 총 19일간 647.2mm의 비가 내렸다. 하늘이 갠 날보다 비가 온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니 강수량이 전년 7월(126.1mm)보다 무려 5.1배나 많았다. 야영장 부지가 농지 용도로 매립되어 경사면이 없이 평탄해 원활한 배수에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5월 초부터 집중 폭우가 내렸어요. 야영장과 활동장이 침수가 되어 공사차량 진입이 어려워 상부시설 설치가 지연되었죠.
간척지는 기본적인 안정화 기간이 필요한데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많이 내렸어요. 그 빗물이 빠지겠어요? 그런 현장의 문제점을 점검하기 위해 2022년 8월 2~7일 사이에 프레 잼버리를 하게 돼 있었던 겁니다. 부지 마련조차 안 돼 포기했잖아요. 그때 김 장관이 현장에 내려갔어야 했어요. ‘아무 문제없다’ ‘계획대로 잘 되고 있다’는 부실보고만 믿었던 겁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것이죠.”
김현숙 여가부 장관이 새만금 잼버리 현장을 방문한 것은 모두 4차례다. 작년 9월 21일, 올 4월 27일과 5월 17일, 7월 24일이다.
잼버리 대회 개최를 일주일 앞둔 지난 7월 24일 김 장관은 부안에 내려가 상부시설 현장을 처음으로 둘러보았다. 당시 폭우와 장마로 현장이 어지러웠다고 한다.
참고로 부안 지역 강우량을 조사해보니 7월 16일 2.3mm, 17일 22.6mm, 18일 69.2mm, 22일 11.5mm, 23일 104.3mm, 24일 17.3mm, 25일 20.5mm의 비가 내렸다. 대회 이틀 전인 30일에도 1.6mm가 왔다. 이렇게 비가 쏟아졌으니 현장 상황은 엉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 스카우트 대원들이 속속 입국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직위 사무국으로부터 “행사 추진하는 데 준비가 다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터무니없는 거짓 보고였다.
하늘도 새만금을 돕지 않았다

▲새만금 개발에 투입된 SOC 예산.
김 장관은 현장에서 물웅덩이가 다수 눈에 띄어 추가적으로 확인을 요청했다. 조직위 사무국은 “다음 주면 다 마를 것이기 때문에 행사 개최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다음은 입수한 정부 문건에 담긴 당시 상황이다.
〈계속되는 호우 등으로 7월 27일 기준으로 재확인 파악해보니 (화장실, 텐트, 샤워장, 글로벌리더센터 등 상부시설) 설치가 잘 되지 않아, 조속한 이행을 다시 지시함.
또한 행사 직전인 7월 31일에는 차관이 현장을 방문하여 전북도지사, 행안부 차관 등과 배수로 점검 후 침수 우려에 따라 포클레인 추가 설치 등을 제안하였으며, 그 외에도 그늘막 설치, 개영식 개최 장소인 대(大)집회장 등 현장을 꼼꼼히 살펴보았음.〉
‘꼼꼼히 살펴’본 것이 아니라 ‘문제없다’는 허황된 보고만 믿고 싶었던 것이다.
대회가 시작되고도 비가 많이 내렸다. 8월 9일 20mm, 10일 69mm, 11일 5mm가 쏟아졌다. 사흘간 94mm가 내린 것이다. 야영지 바닥에 물이 몇 차례 차올랐다가 빠지기를 반복했다. 추가 예산을 투입해 간이 펌프 100대를 야영장 곳곳에 설치했지만 새발의 피였다. 또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폭염으로 이어졌다. 행사 기간 낮 평균기온이 34.5도를 웃돌아 결국 경증 온열 질환자가 다수 발생했다. 8월 1일 156명에서 4일 누적 578명, 8일 누적 854명으로 환자가 급증했다. 결국 폭염과 폭우에 시달리다가 잼버리 대원들은 조기 퇴영, 한국을 떠나고 말았다. 어찌 보면 하늘도 새만금을 돕지 않은 것이다.
“일일이 다 체크하고 소리 지르고 악 쓰고”

▲1998년 11월 9일 열린 국회 건설교통위 국정감사 당시 강동석 이사장이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공사현장에서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기자는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개발자문위원과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을 지낸 조용경(趙庸耿)씨와 만났다. 그는 새만금 간척사업과 인천 영종도 공항 건설 당시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초 인천공항을 처음 건설할 때 간척지 매립 과정에서 부실시공 논란이 많았어요. 인천국제공항 건설은 영종도와 용유도를 연결하고 두 섬 사이에 있는 신불도, 삼목도를 깨부수고 갯벌을 매립하는 대역사(大役事)였습니다.
다행히 강동석(姜東錫·훗날 인천국제공항공사 초대 사장, 건교부 장관 역임)이란 인물을 픽업해 당시 수도권 신공항 건설공단 이사장을 맡겼는데, 제가 알기로 그 양반이 2년 반 정도를 간이 숙소에서 기거하며 건설 현장에서 아예 살았다고 합니다.”
강동석 전 장관은 1997년 9월부터 2년 넘게 현장 직원들과 똑같이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생활하며 영종도 신공항 건설 현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경기도 안양의 자택에서 출퇴근하는 데 걸리는 하루 4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8시30분부터 저녁 7시30분까지 종일 공항 건설 지휘에 매달렸다. 교통부기획관리실장, 해운항만청장을 지낸 고위 관료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사장이 이런 생활을 하는 게 볼썽사납다”고 했을 정도다. 휴일과 일요일에도 컨테이너 생활을 ‘사수’했다고 전한다. 강동석 전 장관은 “배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대로 자신도 건설공법을 배우며 현장을 지휘했다.
계속된 조용경 전 부회장의 말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현장에서 소리를 질러대고 감시 감독한 거지요. 건설 기술자가 아닌데도 어디서 배워가지고 설계도를 들고 다니며 부실공사 여부를 따지고…. 예를 들어 암반에 파일이 제대로 박혔나 일일이 다 체크하고 소리 지르고 악 쓰고 다녔기 때문에 오늘의 인천국제공항이 된 거란 말입니다.”
― 새만금 현장에는 강동석 같은 인물, 건설 현장을 지키던 지휘관이 없었군요.
“부안에 내려가 잼버리 현장을 둘러본 적이 있어요. 강동석 전 장관 같은 분만 있었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모래사장 위에 포철을 세웠던 박태준 당시 총리가 인천공항 건설 현장을 둘러보시고 그를 격려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캠핑의 가장 기본적인 게 산림”
기자는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 장경우(張慶宇) 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 총재는 2024년 제94회 ‘세계캠핑캐라바닝대회’를 강원도 고성에 유치한 인물이다. 내년 6월 대회를 앞두고 준비가 한창이다. 마침 고성군 토성면 인흥리 세계잼버리수련장에 내려가 있었다. 1991년 8월 제17회 세계 잼버리 대회가 강원도 고성 신평리 일대에서 열렸었다. 세계캠핑캐라바닝대회는 바로 그곳에서 다시 열린다.
장 총재는 “아무래도 새만금 잼버리가 어려움을 겪었기에 더 신경을 쓰고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3년 전입니다. 김제 시장을 3번이나 연임한 이건식 전 시장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세계캠핑대회를 새만금에서 하면 어떠냐고 해서 답사를 간 적이 있어요. 그 무렵, 세계대회를 유치했지만 장소 확정은 안 된 상태였어요.”
장 총재는 당시 강원도 삼척, 경북 경주, 충남 부여 등의 후보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새만금 현장을 둘러보니 이건 전혀 안 돼. 왜냐하면 나무 한 그루가 없는 완전히 벌판이야 벌판! 막 진흙투성이고요, 캠핑의 가장 기본적인 게 산림(山林)입니다.
그리고 물이 있어야 해요. 새만금처럼 허허벌판에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난 여기서 못 하겠다’고 했었죠. 그래서 다시 찾은 게 강원도 고성입니다. 얼마 전에 작고한 쌍용 김석원(金錫元·1945~2023년) 회장이 27년 전에 마련한 그 터입니다.”
해마다 전 세계를 돌며 ‘캠핑계의 올림픽’을 여는 ‘세계캠핑캐라바닝연맹(FICC)’은 회원국이 40개국이며 회원 수가 600만 명이다. 각국의 서로 다른 자연을 체험하며 국경과 언어, 인종을 초월한 풍습과 문화를 즐기는데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포함해 일본, 중국, 대만 등 4개국이 가입돼 있다.
“우리는 이미 공식·비공식 대회 포함해 세 번 대회를 치른 경험이 있어요. 2002년 강원도 동해 망상, 2008년 가평 자라섬, 2015년 전북 완주에서 개최했죠. 그때만 해도 캠핑이 지금처럼 활성화하진 못했지만 지금은 캠핑에 대한 관심이 뜨겁죠.
대회장에 텐트 수천 동이 세워지고, 카라반 수백 대가 설치됩니다. 참가자들은 낮엔 주변을 여행하고 저녁에 캠핑을 즐기는데 새만금 잼버리를 타산지석 삼아 공연과 체험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자체 한탕주의’

▲지난 8월 11일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폐영식 모습이다. 사진=조선DB
탈 많고 말 많았던 새만금 잼버리 대회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조선일보》는 8월 10일 자 사설을 통해 ‘잼버리 한탕으로 예산 2조원 따낸 전북도, 대가는 나라 망신’이라는 글을 냈다. ‘지자체의 한탕주의’라고도 했다.
어쨌거나 전북도는 잼버리를 계기로 총 2조6000억원 규모의 직간접 예산 혜택을 입게 되었다. 잼버리 이후 착공된 새만금 고속도로엔 4239억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앞으로 들어설 연계도로와 새만금 국제공항에도 수조원이 더 들어갈 예정이다. 향후 국가예산이 얼마나 새만금 블랙홀에 더 투입될지 알 수 없다.
얼마 후 정부는 내년도 새만금 SOC 예산의 78%를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SOC 10개 사업의 부처 반영액 6626억원 중 5147억원을 삭감, 1479억원만 반영하겠다는 것이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내년도 SOC 사업은 모두 원점 재검토 원칙에 따라 새만금 SOC 사업도 사업별 진행 상황과 거기 따른 필수 요소를 반영해 편성했다”고 말했다. 한덕수 총리는 “새만금에 대한 발전을 위해 10년 내지 5년에 한 번은 새만금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며 “새만금 기본계획을 발전적으로 수립해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정부 예산만 바라보거나 국가보조금에만 의존하는 새만금 개발 대신 친(親)시장 기조로 새만금 사업의 정책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새만금 국제공항만 하더라도 잼버리 대회 개최가 명분이었고 정부가 이를 받아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했었다.
종자 산업 클러스터도 난항 중
기자는 몇 해 전 군산공항(전북 군산시 옥서면 산동길 2)에 간 적이 있다. 공항 바로 코앞이 새만금 국제공항 부지다. 1.3km 떨어진, 걸어서 10분 거리다. 허허벌판 매립지와 갯벌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 인근에 김제공항 건설을 추진하다가 실패한 사례도 있다. 김제시 공덕면 공덕리와 백산면 조종리 일대 156ha(축구장 220개가 넘는 규모)에 1800m 길이 × 45m 폭의 활주로 1개와 보잉 737급 여객기용 계류장을 갖춘 김제공항을 추진했었다. 사업비가 확정되고 부지 매입까지 모두 끝냈으나 2008년 전면 취소되었다.
이 김제공항 터를 활용해 최근 농식품부가 ‘종자 산업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얘기가 있다. 정책 실패로 20년간 버려진 땅에 뭔가를 해볼 계획을 세운 것이다. 누구도 정책 실패를 책임지는 이가 없었다. (다시 확인하니 국토부와 농식품부의 이견으로 종자 산업 클러스터 사업 또한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 옛 김제공항과 군산공항까지 35km 정도 떨어져 있다. 승용차로 30분 남짓 한다. 그런데 군산공항 바로 곁에 새만금 국제공항을 짓겠다는 것이다.
우선 잼버리 파행 이후 새만금 국제공항의 내년도 SOC 예산은 어떻게 반영됐을까.
가덕도신공항, 대구경북신공항, 울릉공항 등 다른 지역공항 예산은 부처에서 요구한 그대로 반영되었다. 오로지 새만금 국제공항 예산만 전체 580억원을 요구했지만 89%를 삭감해 66억원만 반영되었다. (부산 가덕도신공항은 올 예산이 135억원이었지만 내년 예산은 5363억원이다. 41배나 늘었다.)
“전북 탄압” “호남 차별”
새만금 국제공항은 턴키 공사에 대해 입찰공고 중이다. 그러나 예산 89%를 삭감해 향후 입찰이 불투명해졌다. 그러자 전북도와 지역 정치권은 “잼버리 탄압” “전북 탄압” “호남 차별”이라며 펄쩍 뛰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양경숙 의원은 지난 11월 3일 국회 예결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재부가 삭감해버린 예산 때문에 새만금 신공항·내부 개발·수목원 사업 등의 공사를 중지해 발생하는 추가 비용만 해도 최대 113억원으로 추정되는, 기가 막힌 ‘예산 폭거’가 지금 진행되고 있다.”
기자는 기재부 관료 출신의 모 국회의원에게 새만금의 미래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기재부 시절, 새만금 마스터플랜 마련을 지휘했었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한 문장이었다.
“(향후 새만금 개발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가 없네요.”
새만금 개발은 정말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일까. 추경호 부총리의 말이다.
“새만금 개발사업의 변경이 잦았고, 차제에 제대로 된 그림을 만들자, 그리고 이것이 대한민국 경제, 그리고 전북 지역에 정말 성장동력, 발전의 기폭제가 될 수 있도록 틀을 잡아서 하자, 그런 차원에서 적정성 검토 용역을 지금 발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산도 내년 예산에 반영이 돼 있습니다.”
수십 년간 하다 말다 하던 사업을 다시 원점에서 검토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군산·부안·김제 등 전북의 지역사회가 불안해하며 화들짝 놀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안일한 잼버리 준비가 이런 파장으로 미칠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새만금 국제공항에 매달리는 지역사회

▲새만금 잼버리 실패 후 새만금 신공항 백지화를 요구하는 전북 지역 환경시민단체들의 반대 시위 모습이다. 이들은 “새만금의 생태 학살을 멈추고 갯벌을 복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자는 새만금 잼버리 현장을 찾기 앞서 군산공항을 먼저 찾았다. 지난 11월 4일 오전 승용차로 군산공항에 도착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거쳐 군산 시내에서 공항까지 길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고 차들이 거의 없었다.
놀랍게도 공항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공항 청사 내부는 텅 비어 있는데 말이다.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량은 누구의 것일까. 제주로 놀러 간 여행객들의 것이리라. 그래도 매년 30억원의 적자를 보고 있다고 한다.
군산공항은 사실상 미군기지다. 전북과 군산시는 연간 평균 3억원가량의 공항 착륙료를 미군에 낸다.
군산공항은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여객기 운항이 전면 중단되었었다.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9월에야 겨우 정상화됐다. 미군 측이 지반 침하와 노면 노후화 등으로 시설보수 동안 비행기 이착륙을 금지시켜버렸다. 지역사회로서는 새만금 국제공항이 더 간절했을 것이다.
현재 제주~군산 간 비행기는 하루 3차례 운항한다. 제주에서 오는 비행기가 오전 10시15분 군산공항에 도착하면 오전 11시15분 다시 제주로 향한다. 또 13시30분, 17시35분 제주발 비행기가 군산공항에 도착하면 14시35분, 18시15분 다시 제주로 향하는 식이다.
올해 들어 8월 말까지 군산공항 이용객은 7만8000명에 불과하다. 무안국제공항(14만4000명), 원주공항(13만8000명), 여수공항(40만2000명), 양양공항(15만8000명) 등 어디와 비교해도 절반 수준이다.
이런 가운데 군산시가 지난 11월 5일 ‘군산공항 활성화를 위한 재정지원 조례 일부개정 조례안(이하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항공사업자에 대한 재정지원 대상을 확대한다는 내용이다. 피 같은 세금을 물같이 써서라도 항공사를 붙잡겠다는 고육책이다.
2018년과 2022년 국토부가 실시한 사전타당성 용역에서 새만금 공항은 비용 대비 편익 비율이 0.479, 0.53으로 경제성 판단의 기준(‘1’)에 훨씬 못 미쳤다.
인근 새만금 국제공항이 들어설 갯벌 매립지로 이동했다. 허허벌판이었다. 고추잠자리 몇 마리가 날아다녔다. 새소리가 들리고 억새가 바람에 흔들렸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생활 쓰레기도 보였다. 비행기 굉음이 들리고 저 멀리 새만금 방파제가 보일 듯 말 듯했다. 그만큼 넓고 광활(廣闊)했다.
이곳 주민들에게 새만금 국제공항의 미래를 물어보았다. 이들은 공항 소음에 익숙한 갯벌 토박이들이다. 60대 노인의 말이다.
“이 나이에 공항이 들어서면 다들 좋아진다고 하지만 듣기에 얄미운 소리죠. 몇몇 ‘환경 생각하시는 분들’도 반대할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다른 ‘환경 걱정하는 분들’은 또 갯벌이 죽는다고 그러고. 편익 논리를 자꾸 이야기하니까 이야기가 안 되는 거죠.”
‘편익 논리’라는 어려운 말을 써서 놀랐다. 아침부터 갯벌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갯벌에 가 보면 껍데기만 남은 조개들만 보입니다. 갯벌이 점점 말라가고 있어요.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코끝을 자극하던 갯벌의 냄새도 점점 썩은 냄새로 바뀌고 있고요. 공항을 하든 말든 얼른 결론이 났으면….”
새만금 잼버리 파행 이후 전북 지역 환경단체들은 ‘예타’가 면제된 새만금 국제공항에 대해 전면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망한 잔치는 끝났다. 새만금신공항 사업을 철회하라”고 했다. ‘새만금신공항백지화 공동행동’ 등은 신공항 사업을 주관하는 국토부, 서울지방항공청에 전화와 팩스, 전자우편 등으로 사업 철회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공동행동에 따르면 공항 부지인 수라갯벌은 간척사업으로 매립되지 않고 남아 있는 새만금의 마지막 갯벌이자 연안습지라고 한다. 저어새(천연기념물 제205호)를 비롯해 정부가 지정한 50종 이상의 멸종위기 보호종 등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 특히 수라갯벌은 202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서천·고창갯벌과 같은 생태권역을 이뤄 보존가치가 크다고 한다. 작년 9월 국민소송인단 1308명이 새만금 국제공항 계획을 취소해달라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내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생판 갯벌 위에다 아들(아이들) 데려다가…”

▲위·아래 사진은 잼버리 대회가 끝난 뒤 새만금 현장의 모습이다. 몇몇 포클레인이 여전히 지반 작업을 하고 있었고 땅에 물이 고여 있었다.
군산에서 4번 국도를 따라 새만금 잼버리 현장으로 향했다. 새만금개발청 앞 사거리(엑스포 교차로)는 새 도로로 포장돼 있었다. 교통 표지판을 보니 새만금국가산업단지 쪽은 붉은색 가위표를 해 진입을 막고 있었다. 현재로선 산업단지 조성이 불투명하다는 방증으로 보였다.
간혹 화물 트럭이 지나고 몇몇 오토바이가 속력을 냈지만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주말 오전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렇다 해도 도로가 너무 한산했다. 새만금 남북10교차로를 지나 계속 차를 몰았다. 남북도로를 타고 아무리 가도 길은 한 길밖에 없었다. 교통 표지판대로 산업단지로 진입하는 길은 막혀 있었다. 언제쯤 공장이 빽빽이 들어설까.
4번 국도 부안~군산 구간은 지난 7월 26일 개통되었다. 새만금 잼버리 대회 시작을 닷새 앞둔 시점이었다. 부안~군산은 그간 바다 외곽의 새만금 방조제길(33km)을 통해서만 왕래할 수 있었는데 27.1km에 달하는 내부도로(새만금 남북도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새만금 만경대교를 지나는데 탄성이 절로 나왔다. 활을 뒤집어놓은 초승달 모양의 아치교였다. 길이는 1968m. 조금 더 달리니 동진대교(1258m)가 나왔다. 차를 세워 주변 경관을 보고 싶었지만, 비록 지나다니는 차량은 없었으나 지나쳐 왔다. 어느덧 수조교차로를 지나 새만금 남북도로를 빠져나왔다. 조금 더 달려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건물이 보였고 몇백 m 더 가 새만금 잼버리 졸음쉼터에 차를 세웠다. 쉼터 전망대에 오르니 잼버리 야영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관광버스 몇 대가 와서 사람들이 내렸다. 사진을 찍으며 저마다 한마디씩을 했다.
“생판 갯벌 위에다 아들(아이들) 데려다가 엔간치 했어야지.”
“북새질(북새통) 하던 아들이 잘 돌아갔을까. 그래도 가슬(가을)이 찾아오는가베. 쓸쓸하네.”
다시 찾은 야영지 현장에서

▲기자가 찾은 새만금 잼버리 현장. 덩굴터널의 덩굴식물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대회 기간 때도 덩굴식물의 생육이 부진해 제 기능을 못 했었다.
잼버리 참가 국가의 국기도 보였다. 뻥튀기를 파는 차량에서 트로트 음악이 너무 크게 들렸다.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쉼터 안내소를 보니 다른 일을 보러 자리를 비운 것인지 직원이 없었다.
쉼터에서 잼버리 야영지를 내려다보았다. 실제로 보니 더 놀라웠다. 멀리 섬이 보이고 바다가 보였다. 포클레인과 트럭 몇 대도 보였다. 초록색 지붕을 얹은 덩굴터널을 철거하고 있었다.
야영지로 가기 위해 다시 차를 몰았다. 현장 출입길은 통제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진입로에 들어섰다.
야영지 바닥은 수많은 바퀴 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소금쟁이 같은 빠르게 움직이는 생물들이 가득했다. 땅인지 갯벌인지 헷갈렸다.
바닥엔 여전히 물기가 있었고 디디니 구두가 푹푹 빠지는 느낌이었다. 성토한 흙은 일반 흙과는 다른 느낌이었는데 무척이나 고운 흙이었다. 붉은색을 띠었다. 그 위로 군데군데 풀들이 나 있었다. 소금기 때문인지 다 죽은 것처럼 붉은빛, 혹은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그 옆으로 메뚜기가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러고 보니 이곳도 가을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늘이 무척 낮아 보이고 회색 구름이 어둡게 드리워졌다. 야영지 현장의 유일한 그늘이던 연두색 덮개로 씌운 덩굴터널로 걸어갔다. 폭 6m가량의 시설물은 대부분 해체되고 몇 안 남아 있었다. 칡, 등나무, 머루, 호박, 수세미, 여주, 박 등을 심어 인공 그늘을 만들려고 했지만 지금은 죄다 말라죽었다.
게다가 잼버리 기간에도 생육이 부진해 제 기능을 못 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에서 사실상 유일한 폭염 대책 시설이었다. 당시 덩굴식물로 폭염의 햇살을 가릴 수 없다고 판단한 전북도는 부랴부랴 연두색 차광막을 설치했지만 애초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전북도 관계자는 “직원들이 화분에 심은 덩굴식물이 잘 자라도록 현장에 머물며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시간이 부족했고 터널도 늦게 설치돼 그늘을 만드는 데 부족함이 많았다”고 했었다.
덩굴이 말라죽은 덩굴터널을 걸었다. 바닥은 여전히 푹푹 꺼졌다. 땅엔 여러 종류의 흙들이 보였다. 자갈도 보였다. 계속 물이 땅 위로 차올라 계속 외부에서 흙을 가져다 급히 덮었던 것이었다. 당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작업을 하던 공무원이나 봉사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를 지켜보던 스카우트 대원들은 또 어떻고….
아직 완공 안 된 글로벌청소년리더센터
글로벌 청소년 리더센터에 도착했다. 행사는 모두 끝났는데 아직 완공이 안 됐다. 480억원의 예산이 들었다고 한다. 포클레인 3대, 땅을 다지는 롤러기 1대, 트럭 몇 대가 보였다. 분주히 땅을 다지고 덮고 트럭이 무언가를 나르거나 정차해 있었다.
글로벌 센터 주변 땅은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땅속 내장을 모두 끄집어낸 것처럼 여기저기 붉은 흙들이 보였다. 바닥은 갯벌에서 솟아오른 바닷물로 인해 곳곳이 웅덩이져 있었다. 도저히 걸어갈 수 없었다. 물을 메우면 계속 차올라 와서 계속 성토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센터 앞 잼버리5교 밑으로 돌무더기가 보이고 강이랄까 바닷물이랄까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물은 얕아 발목까지만 잠길 정도. 곳곳에 터진 모래자루가 널브러져 있었다. 모래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래도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이 잼버리5교는 2020년 1월 20일부터 2022년 12월 16일까지 작업이 이뤄졌고 발주자는 한국농어촌공사, 시공사는 남양건설이었다. 폭은 13.9m, 총연장 길이는 45.1m였다. 이 센터 주변에 스카우트 대원들이 우글우글거렸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 아이들이 이 글로벌 센터를 어떻게 기억할까. 부디 좋은 기억만 가졌기를 바랄 뿐이다.
잼버리 난맥상 ① 계약 문제

▲새만금 개발 기본 구상도.
지난 5월 잼버리 조직위는 백서(白書) 작성을 위해 A업체와 4890만원의 수의계약을 체결했다. 조직위는 백서 제작 경험 등을 토대로 업체를 선정했다. 그러나 백서 제작 업체는 전북도청사에 입점한 문구점이었다.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0월 24일 전북도 국정감사에서 “잼버리 백서 발간을 맡은 업체가 전북도청에 입점한 문구점이었다. 백서 편찬 전문업체도 아니고 전북도의 실책(失策)에 대해 공정하게 기록할 업체도 아니다”고 했다.
문구점 A업체는 2017년 10월부터 2018년 2월까지 잼버리 유치 백서 제작을 수행했다는 ‘용역수행 실적증명원’을 허위로 제출한 것이 곧 탄로가 났다. 실적증명원은 전북도 잼버리지원단 B사무관이 사인하고 발급해줬다. 이 사무관은 잼버리가 끝나자마자 사직했으며, 현재 전북도 산하기관에서 근무 중이다.
새만금 잼버리 행사 기간에 세계 각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에겐 간식이 제공됐다. 간식 납품업체는 프린터 잉크와 토너를 싸게 판다는 동네 가게였다. YTN과 인터뷰한 조직위 관계자는 “겉보기에는 문구점으로 보이지만, 음식료품 관련해서 업종이 돼 있고 늦게까지 (음식료품 조달과 배달을) 해주실 수 있다고 해서…”라고 했다. 부득이할 수 있겠지만 주먹구구식이란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나무로 만든 잼버리의 출입문인 ‘영문(營門)’ 제작에는 3000만원이 들었다. 이 계약을 따낸 한 업체는 속눈썹 시술업체였다. 잼버리가 끝난 후 YTN이 이 업체 주소지로 찾아갔더니 간판은 사라졌고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고 한다.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6년간 잼버리 전체 계약의 30%가 대회 한 달을 앞두고 급히 체결됐다”며 “업체들에 ‘왜 당신들이 전공도 아닌데 이렇게 급하게 일을 맡았느냐’고 물었더니 ‘전북도 공무원이 조직위에 파견됐는데 그분들이 제발 좀 사정 봐달라, 편의를 좀 봐달라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도와주는 심정으로 했다’고 말하더라”고 말했다.
계약 업무가 치밀하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예산이 허투루 쓰였을 개연성이 높다. 조 의원은 10월 24일 열린 전라북도 국정감사에서 이런 주장도 했다.
“본 의원실이 파악하는 문제점은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대회장의 셔틀버스 운행은 전북 지역 업체들이 서로 짜고 투찰률을 맞춘 뒤 특정 업체가 높은 투찰률로 낙찰받을 수 있도록 들러리를 쓴 정황도 있습니다.”
현재 감사원 감사가 진행 중이다. 조직위와 조직위 파견 공무원들의 비위, 업무 미숙과 태만, 방관, 침묵, 미숙한 일처리까지 제대로 파헤쳐 공직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희생과 봉사의 상징이던 대한민국 공직자들이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잼버리 전북도 제한 입찰은…
잼버리 계약 관련 법령상 입찰 시 지역 제한이 가능했다고 한다. 호남 업체로 입찰 대상을 제한해도 계약에 문제가 없었다는 얘기다. 조직위가 밝힌 ‘지역 제한’ 입찰 건수는 총 54건의 계약 입찰 중 25건. 이 25건은 전북 지역 업체만으로 입찰에 참여했다.
잼버리의 1000만원 이상 소요된 각종 계약 중에 전북 지역 업체와 맺은 계약은 모두 182건이었다. 전체 건수(281건)의 64.8%. 대략 1000만원 이상 계약 중 3분의 2를 전북에 소재하는 업체가 맡았다. 다만 액수는 서울 소재 업체가 많았다. 서울 소재 업체의 계약금액은 241억원(37.7%), 전북 업체는 199억원(31.3%), 경기 173억원(27.2%) 순이었다. 대구, 경북, 제주 업체는 한 곳도 없었다.
잼버리 난맥상 ② 인력 문제
▲제25회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 모습이다. 156개국 4만2646명의 대원들이 새만금 잼버리 현장을 찾았다.
잼버리 준비가 미흡한 것은 조직위 인력 부족이 원인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조직위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작년 5월부터 올 초까지 민간 전문 인력을 8차례 공개 모집했다. 또 공무원 파견도 확대했다.
작년 4월 조직위의 민간인 전문 인력은 8명이었으나 대회 당시인 8월엔 44명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공무원 수도 36명(지자체 28명)에서 71명(53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8차례 공개 모집을 했을 정도로 구인난을 겪었다. 왜 그랬을까. 왜 세계 스카우트 청소년들의 축제를 꺼렸을까. 기자가 입수한 정부 문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단기 채용에 대한 기피, 지방 정주 여건 불편, 지방 근무에 대한 급여 수당 등 유인책 부족으로 민간 인력 채용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음.〉
민간인 채용이 어려웠다면 공무원을 충분히 파견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여가부 관계자는 “당초 조직위가 잼버리 행사의 경우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행사로 판단하고 공무원보다 스카우트 전문 인력을 희망했기에 민간 전문가 채용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결국 민간 전문가 채용이 원활하지 못했기에 올해 공무원 정원을 확대하여 증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잼버리 조직위는 전북 부안에 위치해 있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 중 파견을 나가고 싶어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북도청 공무원, 전북도 내 14개 시·군 공무원조차 부안행을 마뜩잖게 여겼는데 중앙 부처 공무원은 말할 것도 없다. 업무에 대한 보상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고 격오지(隔奧地) 근무로 여겨 죄다 기피했다.
심지어 잼버리 조직위에서 2~3년 이상 책임감을 가지고 근무한 공무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1년 단위로 아니 1년도 채우지 않고 담당 공무원들이 바뀌어 나갔고 그 속에서 잼버리 준비는 뒷전으로 밀렸다.
지난 8월 8일, 잼버리 행사 화장실 청소에 동원됐던 공무원이 쓴 글이 한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전북 지역 공무원 노조 관계자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글이었다. 그 글을 종합해보면 파견 공무원들에게 휴게 공간이 없었다. 사전 협의된 업무와 다른 일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지시하는 일이 허다했고, 업무 현장까지 차량 이동을 금지시켜 도보로 40분을 걸어간 이도 있었다.
업무분장 문제로 자주 갈등이 빚어졌고 대학생 자원봉사자가 지원 나간 공무원들을 지시하는 등 혼선이 일었다고 한다. 원활한 식사 또한 불가능했다. 모두 눈치껏 먹었다.
결국 전북도에서 파견된 14개 시·군 공무원들은 주먹구구식 업무를 보이콧하고 현장을 떠났다. 전북도청 공무원들만 남아 새벽 4시 반부터 오후 2시까지, 오후 2시부터 23시까지 근무하는 조를 짜 화장실 상태를 체크하러 다녔다.
잼버리 난맥상 ③ 화장실 문제
▲새만금 잼버리 조직위 관계자가 더러운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다. 사진=조선DB
한덕수 총리는 8월 6일까지 전북 새만금 숙영지 곳곳을 다닌 뒤 “오늘 둘러보다 화장실에 남이 안 내린 물을 내리고, 묻은 것도 지웠다”고 했다. 총리의 화장실 청소가 전해지면서 조직위가 발칵 뒤집어졌다. 이후 현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급수 문제나 ‘쿨링 버스’ 투입 등 폭염 대비책도 개선되고, 청소 용역 인력도 기존 70명에서 542명까지 늘었다.
총리의 화장실 청소 사태는 공복(公僕)이어야 할 공직자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현실이었다. 세월호 참사, 핼러윈 참사 같은 행정 참사를 반복하는 비극에는 공직자의 희생과 용기의 부재도 포함돼 있다.
잼버리 ‘푸세식’ 재래 화장실은 어떻게 해서 결정된 것일까.
기자는 관련 정부 자료를 확인해보았다. 2020년 8월 기재부에 제출한 〈국제행사 개최 변경 계획서〉에 따르면 총 사업비 규모를 491억원에서 1190억원으로 증액 요청하며 그 사유 중의 하나로 ‘비데가 있고 에어컨 시설을 갖춘 화장실 마련’이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해 여가부 쪽에서는 조직위 사무국으로부터 “계획대로 (비데+에어컨이 설치된) 화장실이 다 이행되는 것으로 보고받았으나 실제로는 계획과 같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장에 설치된 화장실 414개 중 비데가 설치된 화장실은 46개에 불과했다. 이 비데도 이슬람 지역 참가자를 위해 설치된 핸디형 비데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쓴 이동식 화장실 262개에는 에어컨은 설치됐으나 비데는 없었다. 장애인 화장실 46개에는 에어컨은 물론 비데도 없었다.
정부 관계자는 재래식 화장실과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
“재래식 화장실은 현대건설 후원으로 설치되었다. 재래식이어서 설치하지 않으려 했으나 현대건설에서 국무조정실 협조 요청으로 설치해야 한다고 해, 설치 및 관리를 현대건설이 책임지는 조건으로 허가하였다.”
잼버리 난맥상 ④ 농지 전용 문제
새만금 잼버리가 열린 부안군 하서면은 당초 관광레저용지였다. 새만금청이 시행 주체였다. 2023년 8월 대회 때까지 부지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농지관리기금을 매립 예산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난 2017년 12월 6일 열린 제19차 새만금위원회(위원장 이낙연 총리)에서 잼버리 부지를 ‘관광레저용지’에서 ‘농생명용지’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관련 예산이 1817억원에서 1846원으로 증액되었다.
용지 변경과 관련해 법률자문을 한 김앤장 측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농식품부에 전달했다.
〈1. 잼버리 대회는 보이스카우트 세계 야영대회로서 농지관리기금의 설치목적과 관계가 없다.
2. 잼버리 부지 매립공사가 농지 농업과 관련된 사업이나 농지관리기금 관련 사항에 해당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3. 농지로 활용되는 것이 주된 목적도 아니고 향후 농지로서 전혀 활용이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잼버리 부지 매립공사를 농지관리기금을 사용할 수 있는 사업으로 보기 어렵다.
4. 농어촌공사는 농지관리기금의 용도 및 사용에 있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농식품부는 2017년 11월 이 같은 자문을 받고도 또 다른 법률자문을 받은 뒤 용지 변경을 승인하고 말았다. 정치적 타협이었던 셈이다. 이 땅은 일정 기간 농업용지로 활용한 뒤 관광레저용지 수요 발생 시 새만금개발공사 등에 매각하여 활용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그래서 당장은 농업용지 땅에 잼버리 시설물을 지을 수 없다. 향후 시설물 철거 등의 원상회복이 필요하다. 다음은 정부 문건에 적힌 사항이다.
〈농지기금으로 조성된 부지임에도 농지가 되었을 때 시설 설치 제약 때문에 공유수면을 농지로 바꾸는 행정 절차를 유보한 채 사실상 바다에서 세계잼버리 개최.〉
농지법에는 화장실, 샤워실, 식음료 판매점은 물론 잼버리 기초시설인 야영장 역시 설치가 제한되는 시설물로 명시돼 있다. 정부는 문제점을 파악했으면서도 용지 변경을 강행해 향후 예산 낭비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농지 변경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다음은 정부 문건 내용.
〈농업용지 특성상 경사면이 평탄하여 배수가 잘 이뤄지지 못해 폭우에 취약한 한계가 있었고, 간척지 염분 등으로 나무 식재가 어려워 고온 문제에도 대응이 어려운 근본적 한계가 있었음.〉
다시 개발이냐 환경이냐
잼버리는 막을 내렸지만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었다. 당장 애물단지 새만금을 어떻게 경제허브로 키울 것이냐에 대한 화두를 다시 갖게 했다. 새로 용역을 줘서 청사진을 그린다고 한다. 지금까지 숱하게 청사진을 그렸을 텐데 말이다. 새만금에서 매립이 아직 안 된 곳은 항만 배후부지, 복합 개발 용지, 첨단산업복합단지 등 2만9000ha(290㎢, 8773만 평)에 이른다.
전북 지역 환경단체들은 갯벌이라는 수만 년 동안 형성된 자연의 유산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잼버리 실패가 이들에게 갯벌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새만금 사업은 어떻게 될까. ‘표로흥정하려는 정치꾼들의 미끼’가 된 새만금 사업이 개발이냐 환경이냐를 넘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할 수 있을까.⊙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12.19 도덕 불감증 한국의 은행, 증권사들 이제 노골적 범죄까지

▲홍콩H지수 연계 ELS(주가연계증권)에서 내년 상반기 대규모 손실 가능성이 불거진 가운데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홍콩지수 ELS 피해자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피해사례를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미래에셋·하나·NH투자 등 9개 대형 증권사들이 고객에게 미리 약속한 수익률을 맞춰주려고 다른 고객들 돈으로 돌려막기를 해 오다가 금융감독원에 적발됐다. 증권사별로 돌려막기 한 금액이 수백억~수천억원에 달했다. 한 증권사는 만기가 임박한 고객의 계좌에서 손실이 발생하자 이 계좌에 든 CP(기업어음)를 B증권사에 비싸게 팔아 수익을 맞추고, 아직 만기가 남은 다른 고객의 계좌에서 B증권사의 CP를 비싸게 되사줬다. 이런 수법으로 다른 증권사와 6000번 넘게 거래하면서 고객 사이에서 5000억원 규모 손익을 떠넘긴 것으로 드러났다. 주로 법인 등 큰손 고객의 수익률을 보장해주기 위해 다른 고객들에게 피해를 돌린 것이다.
증권사뿐 아니라 은행들의 도덕 불감증도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은행들은 증권사가 만든 ELS 같은 고위험 파생 상품이나 자산운용사의 각종 펀드를 고객들에게 팔면서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아 큰 손실을 끼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ELS는 홍콩 H지수를 기초 자산으로 한 것으로, 주가가 일정 범위를 벗어나 폭락하면 원금을 잃을 수 있는 초고위험 파생 상품인데도 전체의 48%를 60대 이상에게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90대 이상에게도 91억원어치를 팔았다. 이 ELS 상품은 홍콩 주가가 폭락하는 바람에 내년 상반기부터 만기가 돌아오면 원금이 반 토막 날 수 있다. 금융 상품을 사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지만 우리 사회에선 은행에서 산 상품이니 안전할 것이란 인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고령층에서 이런 인식이 크다. 그렇다면 은행은 고령층에게 이런 상품을 판매할 때 각별한 주의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은행은 없고 모두 판매에만 혈안이 돼 있다.
은행들은 직원들에게 실적 경쟁을 부추기며 고위험 투자 상품을 팔고 판매액의 1%에 달하는 수수료 수입을 챙겨왔다. 하지만 라임·옵티머스·젠투 등의 사모펀드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은행원들은 상품 구조가 어떤지도 모른 채 사기성 불량 상품을 별로 위험이 높지 않은 것처럼 선전해 고객에게 팔았다. 이렇게 고위험 상품을 마구 팔아 놓고는 문제가 생기고 손실이 나도 책임도 지지 않는다. 어느 선진국도 한국처럼 은행 창구에서 고위험 상품을 마음대로 팔도록 하는 곳은 없다. 은행 창구를 통한 고위험 투자 상품 판매를 제한하는 등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
조선일보 사설
12-20 美뉴욕경찰 178년 사상 최초 ‘한국계 총경’ 탄생

▲178년만에 처음으로 미국 뉴욕경찰에서 총경 승진이 내정된 한국계 허정윤 경정. 연합뉴스
미국 뉴욕경찰(NYPD)에서 최초로 한인 총경이 탄생했다.
NYPD는 18일(현지시간) 뉴욕시 퀸스 광역지구대의 허정윤 경정을 총경 승진자로 내정했다.
허 내정자는 오는 22일 진급식에서 다음 보직을 통보받을 예정이다.
한인이 총경이 된 것은 1845년 설립된 NYPD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NYPD는 3만6천 명의 경찰관과 1만9천 명의 민간 직원이 근무하는 미국 최대 규모의 경찰 조직이다.
허 내정자는 1998년 NYPD의 한인 첫 여성 경관으로 임용됐다.
이후 맨해튼과 퀸스 등 한인 거주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은 그는 지난해에는 한인 최초로 경정으로 승진하는 등 NYPD에서 ‘최초’ 기록을 양산했다.
NYPD에서 경감까지는 시험을 통해 진급할 수 있지만 경정 이상은 지명을 받아야 승진할 수 있다.
실력은 물론이고 조직 내에서 신망이 있어야 NYPD의 고위 간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김의환 뉴욕 총영사는 "뉴욕총영사관은 뉴욕시와 NYPD에 한인 총경의 탄생 필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며 "한인 최초 총경 탄생을 계기로 뉴욕 동포 사회의 안전도 증진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황혜진 기자
12-21 8000억 손해 끼치고 “470억 손배소 취하하라”… 금속노조 ‘적반하장’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대우조선해양 독·선박 점거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 열어
한화오션, 취하 가능성 일축
창원=박영수 기자 buntle@munhwa.com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지난해 7월 19일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옥포조선소 독 화물창 바닥 구조물 안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선박을 불법 점거하고 한 달간 농성을 벌여 수천억 원대 손실을 입힌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가 한화오션에 파업을 주도한 지회 간부 5명을 상대로 제기한 470억 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취하해 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노조는 소송 취하를 위해 박완수 경남지사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청할 계획이다. 하지만 박 지사가 노조의 불법행위에 강경한 국민의힘 소속이어서 소송 취하를 위해 역할을 할지는 불투명하다. 한화오션도 소송 취하 의향은 전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금속노조 거통고하청지회는 21일 오후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한화오션 470억 손해배상 소송 취하’ 기자회견을 연다. 기자회견에는 소송 당사자인 김형수 금속노조 거통고하청지회장 등이 참석한다. 하청지회는 파업 노조원에 대한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를 막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 법률안(노란봉투법)’이 여당 반대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지난달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자 여론전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하청지회는 기자회견에 앞서 배포한 자료에서 “경남도 사회대통합위원회가 지난 6월 박완수 지사에게 ‘470억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하도록 노력해 달라’는 권고안을 전달했고 박 지사도 한화오션을 만나는 등 역할을 찾겠다고 밝혔다”며 “하지만 이 같은 사회여론과 경남도의 노력에도 한화오션은 여전히 470억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하청지회는 “지난 11월 27일부터 한화오션 사내에서 원하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 취하를 촉구하는 서명을 받았고 지금까지 1500명이 넘는 한화오션 노동자들이 서명에 동참했다”며 “두 번째 재판 기일인 이날 오후 도청 프레스센터에서 노조 탄압을 목적으로 한 한화오션의 470억 손해배상 소송 취하를 촉구하고 박 지사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하청지회는 임금인상 30%, 노조 전임자 인정, 조선소 내 사무실 제공 등을 요구하며 지난해 6월 2일 대우조선 거제 옥포조선소에서 파업을 벌였다. 하지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같은 달 22일부터 옥포조선소의 핵심 선박건조시설인 1독에서 작업 중이던 반건조 선박에 7명이 들어가 불법 점거농성을 하며 선박 진수와 후속 공정을 방해했다. 이들의 점거농성은 31일 만인 7월 22일 협상이 타결되면서 끝났다. 사 측은 협상 타결 직후 손실분 등을 산출해 파업 손실액으로 알려진 8000억 원의 5.8% 수준인 470억 원을 손해배상금액으로 확정하고 불법 점거농성을 주도한 지회장 등 노조 간부 5명으로 소송 대상을 한정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대우조선이 지난 5월 한화그룹에 인수돼 ‘한화오션’으로 사명이 변경되면서 원고 지위도 승계됐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막대한 피해를 본 회사로서는 법원의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소송 취하 가능성을 일축했다.
문화일보
12-22 간병비 지원, 건보 개혁과 병행한 단계적 접근이 필수다
보건복지부가 국민 등골을 휘게 한다는 간병비에 대한 지원 계획을 제시했다. 병원 간호 인력이 돌보는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는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해 현재 연인원 230만 명에서 2027년 400만 명으로 늘리고, 요양병원 간병비도 국고 지원을 점차 늘려 2027년엔 건보 적용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복지부는 21일 이 같은 내용의 ‘국민 간병비 부담 경감 방안’을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간병 부담은 간병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라며 대책을 주문한 지 이틀 만이다.
건보를 통한 지원이 핵심이다. 간호·간병 서비스는 2026년부터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은 6개 병동, 비수도권 상급종합병원은 제한 없이 건보를 적용한다. 요양병원 간병비 지원은 내년부터 2026년까지 일부 요양병원을 대상으로 1∼2차 시범사업을 시행한 뒤, 2027년부터는 전국 병원에 건보나 장기요양보험을 적용할 방침이다. 2027년까지 국민의 간병비 직접 부담을 10조 원 이상 줄이는 게 목표다. 요양병원 간병비 건보 적용은 윤 대통령의 국정과제이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내년 총선 1호 공약이다. 여야 합의로 급속도로 진전될 수도 있다.
사적 간병비가 2008년 3조6000억 원에서 지난해 10조 원으로 급증했다.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취지야 부언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재원이다. 정부 계획대로면 매년 요양병원 간병비 지원에 15조 원 넘게 들고, 간호·간병에도 수천억 원이 추가 소요될 전망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건보가 내년부터 적자로 전환돼 2028년엔 누적 적립금(25조 원)이 고갈될 것으로 분석했다. 간병비 지원은 건보 낭비 요인 해소·지출 축소 등 구조조정, 보험료 인상을 포함한 개혁과 병행해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필수다.
문화일보 사설
12.23 반가운 간병비 대책, 문제는 실행전략이다
‘간병지옥’ 고통에 과감한 메스 평가할 만
윤 정부 국정과제, 이재명 대표 1호 공약
재원 및 인력 등 꼼꼼한 후속책 뒤따라야
정부가 간병비 부담 완화 대책을 내놨다. 간호인력이 간호·간병을 책임지는 통합 병동을 늘리고 요양병원의 간병비를 급여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퇴원 환자의 집으로 찾아가 의료·간호·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도 들어있다. 가족의 피눈물을 조금이라도 닦아주려는 첫 시도여서 반갑기 그지없다.
서울대 김진현 교수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간병비 부담은 10조원으로 추정된다. 최근 5년 새 연평균 6.3%씩 가파르게 올랐다. 간병의 96%는 가족이 떠안는다(나머지는 간병인 고용). 하루 생산성 손실액이 11만4830원이다. 게다가 간병 책임을 두고 동기간에 등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다. 몸과 마음이 골병든다. 유급 간병인을 쓰면 월 60만~365만원이 든다. 요양병원 평균 입원기간이 5.3개월이다. 1년 넘는 환자도 수두룩하다. 간병비에 녹아날 수밖에 없다. ‘간병 지옥’임이 분명하다. 이럴진대 한국 의료가 세계 최고이면 뭐 하나.
선진국은 병원의 간호진이 간병을 책임진다. 대신 입원료가 비싸다. 우리는 자원이 부족해 싸게 입원하는 대신 가족에게 간병을 떠안겼다. 의료인이 아닌 이가 병실을 마구 드나드는 기묘한 상황이 됐다. 감염에도 매우 취약하다. 간병 해법을 찾기 위해 20년 간 갖가지 꾀를 냈지만 묘안을 찾지 못했다. 2015년 시행한 간호·간병 통합서비스가 그나마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이 병동에 입원하면 간호·간병료가 2만원(상급종합병원 기준)도 안 된다. 하지만 병원들이 경증환자를 여기에 넣고 중증은 가족 간병으로 돌린다. 대신 높은 수가를 챙긴다.
이번에 75개 대형병원에 치매 등의 중증환자를 전담하는 통합병실을 만들고, 중증이 많을수록 수가 보상을 확대하며, 내년부터 종합병원의 통합병동 통째 전환을 유도한다. 환자 가려받기 방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2026년 비수도권 상급종합병원이 원하면 통째로 통합병동으로 전환한다. 향후 4년 170만 명이 혜택을 보게 된다. 다만 숙련된 간호 인력 구하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상황을 보며 진행해야 한다.
요양병원 간병비 부담에 손대는 점은 더 평가할 만하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중국동포 간병인이 병실 한켠에 간이침대에서 숙식하며 6~7인 공동 간병을 하는 데가 많다. 월 간병비가 60만원 넘는다. 2인 간병을 하면 180만원이 든다. 질도 떨어진다. 정부는 2년 반 시범사업 후에 2027년 모든 요양병원 간병비 부담 완화에 나선다. 건강보험을 적용할 가능성이 크다. 중환자로 분류되는 5.3%(약 2만5000명)가 적용 대상이다. 병원이 집인양 사는 ‘사회적 환자’ 줄이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참에 반드시 요양병원 구조조정이 같이 가야 한다. 65세 이상 인구 1000명당 요양병원 병상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11배에 달한다. 중환자나 치매전문 등으로 재편하고 요양시설이나 회복기병원으로 바꿔야 한다. 안 그러면 건보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간병비 부담이 낮아지면 입원을 부를 수도 있으니 퇴원환자·재택환자 서비스를 더욱 다양화해야 한다. 간호·간병 인력 전문화를 위해 전문대가 양성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 돌봄인력을 도입한다는데, 속도전이 중요하다.
간병 문제는 더는 방치할 수 없다. 필요하면 건보료 좀더 내자고 설득해야 한다. 간병비 해결은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이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1호 총선 공약이다. 모처럼 ‘정책 궁합’이 맞다. 정부도 야당에 충분히 설명해서 빈틈없이 실행 전략을 짜길 기대한다.
중앙일보 사설
12.26 경직된 주 52시간 근무제, 대법원이 먼저 제동 걸었다

‘하루 8시간’ 기준 계산한 원심 파기…기업 선택 넓혀
말만 요란한 정부, 근로자 건강 위해서도 보완책 내야
주 52시간제 근무 방식을 유연하게 허용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하루 8시간 근로’를 기본으로 설정하고 이를 초과한 근로시간을 더해 52시간 준수 여부를 엄격하게 판단한 1, 2심 판결보다 기업에 근무 형태의 선택 폭을 넓혀준 첫 판례다.
항공기 객실청소 업체 대표 A씨가 근로자 B씨에게 ‘3일 연속 근무 후 하루 휴무’를 주는 ‘집중 근무’ 체제로 일하게 하면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재판에서였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하급심이 유죄로 판단한 이 소송의 사례 중 일부에 대해 “근로기준법 규정을 위반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지난 7일 파기 환송했다. ‘하루 8시간 근로’ 기준이 아니라 주간 전체 근로시간을 더해 52시간이 넘지 않으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이로써 2018년 도입된 주 52시간제는 보다 유연한 적용이 가능해졌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에서 2~3일 집중적으로 코딩하고 나머지 4~5일을 쉬는 형태가 폭넓게 허용된다. 산업 경쟁력을 고려할 때 바람직한 방향이다. 주 52시간제는 도입 당시부터 경직되고 과도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반 관리 업무 등 일정한 패턴으로 이뤄지는 근무에는 적합하지만, AI 관련 기업처럼 단기 집중력이 관건인 분야에선 경쟁력 저하가 우려됐다. 특히 미래 유망 산업일수록 엄격한 주 52시간제 적용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잇따랐다. 이번 대법원 판단으로 첨단 산업이나 스타트업 분야는 다소나마 숨통이 트이게 됐다. 생산성을 높일 근무 방식 설계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대법의 판단은 현행 법률의 틀 안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그동안 산업계에서 제기해 온 ‘주 단위’ 초과근무 제한 등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이 난제를 풀어야 하는 주체는 정부와 국회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노동개혁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변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근로시간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혼선만 반복했을 뿐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월·분기 등 단위로 연장근로를 운영하려던 구상은 ‘(최대) 주 69시간 근무제’라는 비판에 맞닥뜨리자 흐지부지됐다. 전면 개편에서 후퇴해 일부 업종과 직종에 한해 연장근로를 개편하겠다는 방침을 내놨지만, 이 역시 진전이 없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아니었다면 기업들은 말만 무성한 각종 개혁 구상을 들으며 기약 없는 ‘희망 고문’에 시달렸을 게 분명하다.
대법원 판례가 나온 만큼 정부는 서둘러 회사와 근로자가 모두 수긍할 근로시간 혁신 방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당장 이번 판결로 인해 근로자가 과도한 연속 근무에 건강을 해칠지 모른다는 걱정이 나온다. 근로자 보호를 위해서라도 정부는 신속하게 주 52시간제 개선 방안을 제시하라.
중앙일보 사설
12-26 大法이 제동 건 52시간제 경직성과 노동 유연화 당위성
대법원의 새로운 ‘초과 근로시간 계산법’ 판결은 현행 주 52시간 근무제도가 얼마나 경직되게 운영되고 있는지 새삼 보여준다. 지금까지는 근무일마다 8시간을 넘는 연장근로 시간을 주(週) 단위로 단순 합산해 12시간을 넘지 못하게 했는데, 대법원은 1주일 단위로 총 근로시간에서 40시간을 뺀 시간이 12시간을 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월요일에 4시간 연장근로를 하고, 화요일에 4시간을 단축 근무할 경우, 기존 계산법으로는 4시간 연장근로가 발생하지만, 이번 대법(大法) 판례에 따르면 연장근로 시간은 없게 된다. 이에 대해 하루에 12시간 연장근로도 할 수 있는 ‘20시간 노동법’이라고 비난하지만, 그런 극단적 경우는 발생하기 어렵다. 근로자도 사용자도 그런 노동의 위험성과 비효율성을 알고 회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이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민유숙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대법원 2부에서 나온 것도 의미가 있다. 재판부는 지난 7일 “연장근로가 12시간을 초과하였는지는, 근로 시간이 1일 8시간을 초과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1주간의 근로 시간 중 40시간을 초과하는 근로 시간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연장근로 한도를 130회 초과해 일하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모 씨의 혐의 일부를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그간 법원 판결과, 2018년 7월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이후 근로기준법에 대한 정부의 행정 해석도 잘못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 판결로 52시간제 탄력 적용 여지가 다소 넓어졌지만 갈 길이 멀다. 연장근로 계산 단위를 1주 아닌 1개월·분기·반기·연간 등으로 더욱 유연화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기회로 근로시간 개혁안을 제대로 추진하고, 국회는 관련 입법 보완과 시정을 서두르기 바란다.
문화일보 사설
12-27 주 52시간 유연성 높인 대법 판결… 폭넓은 제도 개선 급하다

▲동아일보DB
한 주에 일한 시간이 52시간을 넘지 않으면 하루 이틀 밤샘 근무를 하더라도 위법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주 52시간제는 1주일에 기본근무 40시간, 주말을 포함한 연장근무 12시간까지 허용한다. 그런데 하루 12시간 넘게 연장근로를 했더라도 주중 다른 날 이를 벌충할 만큼 쉴 수 있으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대법원은 그제 항공기 객실 청소업체에서 일하다 숨진 근로자 A 씨에게 과도한 연장근로를 시킨 혐의를 받는 B 씨 사건의 원심을 일부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앞서 1, 2심은 A 씨가 8시간 기본근무와 13시간 연장근무, 하루 총 21시간 일한 날은 모두 근로기준법을 어긴 것으로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하루에 몰아서 연장근로를 한 건 문제가 없고, 주중 다른 날 쉬어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만 넘지 않으면 위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연장근로를 주 단위로 계산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첫 결정이다. 일각에선 ‘크런치 모드(쥐어짜기)’라 불리는 벤처기업 등의 근무 방식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하지만 그보다는 불명확한 연장근로의 기준을 제시하고 경직적 주 52시간제의 유연성을 높였다고 봐야 한다. 개발시한에 쫓기는 연구 업종, 업무 폭주로 철야 근무가 불가피한 기업들로선 근로시간 위반과 관련한 불확실성이 줄어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올해 초 정부가 추진했던 근로시간 개혁과 이번 판결은 큰 틀에서 궤를 같이한다. 정부는 주간 단위 근로시간 평가기간을 선진국들처럼 월·분기·반기로 늘려 일할 때 더 일하고, 쉬고 싶을 때 몰아서 쉴 수 있도록 근무 형태를 바꾸는 방안을 내놨다가 ‘주 69시간 근무 논란’에 부딪혀 논의를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동아일보 사설
12-27 정부 주도 불가피한 노동 유연화 개혁

박영범 한성대 명예교수·경제학
윤석열 정부 노동개혁의 주요 과제로 추진됐다가 ‘주 69시간 근로’의 덫에 걸려 좌초 위기에 빠진 근로시간 제도 개편이 최근의 대법원 판결로 다시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대법원은 주 52시간 근무제의 준수 여부 산정 기준을 일주일로 해야 한다고 지난 7일 판결했다. 고용노동부의 행정 해석에 따라 일(日)단위로 초과근로시간을 합산해 주 12시간을 넘어서 위법하다고 보아 ‘4일 연속 근무 후 하루 휴무’를 주는 ‘집중 근무제’를 운영한 항공기 객실 청소업체 대표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판단한 1, 2심 판결을 뒤집었다. 1주일간 총 근로시간이 52시간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을 위반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정부는 “합리적 판결로 존중한다”는 입장이나, 노동계는 “시대착오적이고 현장 혼란을 자초한 판결”이라며 반발한다.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은 연장근로 시간의 한도를 1주간을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을 뿐, 1일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노동계는 “대법원이 현행 근로기준법이 1주당 연장근로 상한선만 명시하고 하루 연장근로 시간 상한선을 명시하지 않은 입법 공백을 틈타 장시간 노동을 가능케 하는 판결”이라며 비난했다.
노동계와 일부 언론은 ‘이틀 연속 21.5시간 근무’, 밤샘 근무를 가능케 하는 시대 역행적 판결이란 프레임을 씌운다. 그러나 21시간 연속 밤샘 근무는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세태에선 논쟁 속에만 있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OECD 회원국 중 최장시간 근로라는 오명을 씻는다는 명분으로 문재인 정부 첫해에 여야 합의로 철저한 준비가 없이 도입된 주 52시간제는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300인 이상 대기업부터 2018년 7개월부터 시행하기로 돼 있었으나, 두 차례 유예돼 2019년 4월부터 시행됐다. 버스 대란을 막기 위해 시민 세금으로 충당되는 버스 요금 인상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당시 여당 더불어민주당은 한국노총과의 노사정대화 중단 위협에도 탄력근로제와 선택근로제의 단위기간을 늘렸다.
현행 주 52시간제는 연구소, 벤처기업, 스타트업, 게임 및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 업종 특성상 집중 근무가 필요한 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는다. 우리와 경쟁하는 일본·독일·프랑스 등은 노사 협의 내지 단체교섭을 통해 탄력근무제의 단위 기간을 1년까지 허용한다. 미국은 연장근로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고, 프랑스는 단체협약을 통해 연장근로 시간을 정할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20인 미만 기업은 개별 근로자와 협상을 통해 근로시간을 정할 수 있다.
‘주 69시간 근무’ 논란으로 중단됐던 근로시간 제도 개편의 동력을 되살리기 위해 11월에 발표된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보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일부 업종과 직종에 대해 노사 협의를 거쳐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할 계획인데, 정부의 실태조사 결과에 대해 노사 간 해석이 다를 뿐 아니라, 노사정 합의를 통해 제대로 된 노동개혁이 이뤄진 예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노사정 합의에 기대지 말고 정부가 나서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주도해야 한다. 근로자의 건강권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대안도 같이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문화일보
12.28 최정상급 배우까지 비극으로 내몬 마약 파문

▲마약 투약 혐의를 받는 배우 이선균씨가 19시간에 걸친 경찰조사를 마치고 24일 오전 인천 남동구 인천 논현경찰서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연예인 이어 청소년까지 노출, 전문 수사청 시급
제보만으로 혐의 공표하는 수사 적절한지 살펴야
배우 이선균씨가 어제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마약 투약 혐의로 수사를 받아 오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카데미 작품상 등을 받은 영화 ‘기생충’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세계에 얼굴을 알린 배우를 마약 때문에 잃었으니 큰 충격이자 손실이다. 이씨는 그동안 세 차례 경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그는 유흥업소 실장 등에게 속았다며 “마약인 줄 몰랐다”고 말해 왔다. 이들에게 협박을 받아 3억5000만원을 뜯겼다는 주장도 했다.
실제로 한국은 영문도 모른 채 마약을 복용하고 속아서 중독에 빠질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서울 강남 학원가에선 청소년들이 길거리 시음용 음료인 줄 알고 마약을 마시는 일까지 벌어졌다.
배우 유아인씨가 재판에 넘겨지는 등 연예계에 파문이 잇따랐고, 청소년 마약 사범도 계속 증가 중이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 대학가에는 액상 대마 광고물이 뿌려졌다.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자 수사당국은 강력한 대처에 나섰다. 지난해 경찰의 날(10월 21일)에 윤석열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주문한 이후 대대적인 검경 합동수사를 벌여 올 8월까지 1만2700명의 마약사범을 검거했다. 작년 전체 실적(1만2387명)을 넘어선 규모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단속 체제로는 마약 확산을 막기엔 역부족이란 지적이 나온다. 국내 마약 공급이 늘면서 가격이 내려가고 있고, 특히 10~20대 사범이 급증하는 상황이다. 한국 마약 사범이 늘면서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한국인이 사형당하는 일도 잇따른다. 태국·캄보디아 등 해외 마약 밀매 조직들은 한국을 활동 무대로 삼고 있어 국제 공조가 시급하다. 경찰·검찰·관세청·해양경찰청·국가정보원 등이 마약 범죄 차단을 위해 활동해 왔으나 검경이 마약 수사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등 한계가 드러났다. 마약 수사를 전담하는 마약수사청 설립을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한다. 국경을 넘나들며 청소년까지 무차별로 표적 삼아 한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는 마약 밀매 조직에 맞서려면 보다 체계적이고 강력한 대응과 예산 투입이 절실하다.
이선균씨의 비극을 계기로 경찰의 수사 방식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약 관련 의혹 제기만으로도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는 연예인들이 사실 확인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혐의가 공개됐다. 최근 경찰이 소환했으나 혐의가 없어 불송치로 결론 난 가수 권지용씨(지드래곤)는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웃다가 끝났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씨의 경우도 체내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제보에만 의존해 유명인의 혐의를 공표하는 게 적절했는지 수사 원칙을 재점검해 봐야 한다.
중앙일보 사설
12.29 비극을 정치화하는 사람들, 거울 속 제 얼굴부터 보길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배우 이선균씨의 빈소./뉴스1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마약 투약 혐의로 수사를 받던 배우 이선균씨의 사망을 두고 “국가 수사 권력에 의해 무고한 국민이 또 희생됐다”는 글을 썼다 지웠다. 이씨 죽음은 안타깝지만 불행히도 마약 투여 혐의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대장동·백현동 비리,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등 총 7개 사건 10개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는 이 대표가 갑자기 이선균씨 동정에 나선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자신도 부당한 수사의 희생양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주당 인사들은 엉뚱하게 검찰 탓을 하고 나섰다. 황운하·노웅래·양이원영 의원과 조국 전 법무장관 등이 피의사실 공개 등 검찰의 수사 관행을 비판했다. 이씨 사건은 검찰이 아닌 경찰에서 담당했다. 문재인 정부의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마약 투약’의 경우 검찰이 직접 수사할 수도 없게 돼있다. 민주당은 ‘검수완박’으로 검찰의 마약 전담 부서를 없애고 예산도 삭감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검찰 비판을 쏟아낸 것은 이들 대부분이 각종 비리 혐의로 검찰의 수사선 상에 올랐거나, 이미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놀랍게도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가세했다. 그는 “수사 기관과 언론의 행태가 극단적 선택의 원인”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주도한 이른바 ‘적폐 청산’ 수사를 받다 무려 4~5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당시 피의 사실 공표와 피의자 욕보이기는 최악이었다. 최소한의 도리가 있으면 멋진 말을 하기 전에 거울 속 제 얼굴부터 봐야 한다.
이선균씨 사건의 본질은 마약의 전방위적인 확산이다. 마약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지 못한 미국과 유럽 대도시들엔 ‘좀비 거리’까지 생겼다. 민주당은 수사 능력을 갖춘 검찰이 마약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SNS에서 협박과 폭로가 횡행하는 문제도 국회에서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12.30 “의사는 먹고사는 일… 내가 꿈꾸는 세계는 링 위에 있다”
여자 복싱 세계챔피언 도전하는 순천향대 천안병원 의사 서려경

▲펀치를 날리는 ‘의사 복서’ 서려경은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이다. 링에 오르면 눈빛부터 바뀌는 그녀는 내년 세계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이겨야만 한다. 물러설 곳이 없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천안=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링 위의 그녀는 시선부터 매섭다. 8전 7승(5KO) 1무. 복싱을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만들어낸 화려한 전적. 흥미로 시작한 복싱이 이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제 주먹을 맞을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 주먹을 맞았다면 복싱은 못 했을 것 같아요. 펀치력이 그 정도로 세거든요.
”최근 한국복싱커미션(KBM) 여자 라이트 플라이급(48.98kg 이하) 챔피언에 오른 서려경(32·천안비트손정오복싱)을 지난 13일 천안 복싱장에서 만났다. 그녀가 한물간 복싱판에서 이토록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어릴 때부터 권투를 해온 선수가 아니라 의사여서다. 링을 벗어나 하얀 가운을 입고 환하게 웃으면 영락없는 소아과 의사다. 그는 현재 순천향대학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일하고 있다.
“인생은 닥치는 대로 해나가는 거 아닌가요? 저는 제가 선택한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그에 맞는 책임을 다할 뿐이에요. 의사로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복서로서 내년에 세계 챔피언이 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후회 없이요.”서려경은 최근 세계 챔피언 타이틀 매치 전초전(계약 체중 47kg급)을 승리했고 내년 2~3월 여자국제복싱협회(WIBA) 미니멈급(47.62kg 이하) 세계 타이틀전을 앞두고 있다. 이후 가능하다면 세계 복싱 4대 기구인 세계복싱협회(WBA), 세계복싱평의회(WBC), 국제복싱연맹(IBF), 세계복싱기구(WBO) 챔피언 타이틀도 도전할 계획이다. “왜 복싱을 하냐고요? 세계 챔피언도 가능할 것 같거든요.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만둘 수가 없죠.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안녕할 것 같아요.”
◇복싱하는 내 모습이 너무 좋다
복싱은 2018년 친하게 지내던 선배 마취과 의사의 권유로 시작했다. “그 선생님이 술 친구였거든요. 제가 운동을 좋아하니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해서 체육관에 가게 됐어요. 그때는 프로 선수가 될지 꿈에도 몰랐고요.” 호기심에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딱 맞는 운동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고. 그리고 1년 뒤 프로 테스트를 거쳐 데뷔전까지 치렀다. “관장님이 선수 한번 해볼 거냐고 해서 하겠다고 했죠. 역시나 그때도 안 된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했어요. 붙으면 이긴다고 생각했죠.”
-원래부터 운동을 좋아했나요?
“어릴 때는 저보다 달리기가 빠른 여자를 본 적이 없었어요. 운동 신경이 있는 편이었죠. 힘도 셌어요. 유치원 땐 대장이었고요. 2차 성징 전까지 남자아이들도 저보다 강하지 못 했어요. 팔씨름도 다 이겼고요. 그래서 제가 강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아요.”
-왜 복싱이었나요?
“저는 용감한 여성인데도 복싱 체육관 가는 건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험하게 생겼잖아요. 그런데 친한 의사 선생님이 ‘나 있으니까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부터 소질이 있었나요?
“남달랐죠. 관장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고요. ‘잘한다’ ‘잘한다’는 당근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죠. 하하.”
-선수 제안은 언제 받았나요?
“운동하고 1년 됐을 때 프로 테스트를 받아보자 하더라고요. 아마추어급인 생활체육 대회가 아니라 곧바로 프로 대회로 갔어요. 당연히 쉽게 이겼고요. 몇 달 있다가 바로 데뷔전을 치렀죠.”
-데뷔전은 어땠나요?
“지금까지 경기 중에 가장 힘든 날이었어요. 너무 긴장을 해서요. 판정승으로 이겼어요. 2라운드 끝났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어요. 복싱은 호흡이 중요해서 강약강약으로 공격을 해야 하는데, 그날은 강강강강으로 몰아붙여서(웃음).”
-무슨 생각을 했나요?
“포기할 수는 없으니 일단 이기자. 경기 중에는 다시는 경기를 안 뛰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벌써 8경기를 뛰었네요.
“이기면 못 그만둬요. 중독이죠. 승리의 쾌감도 있고요. 왜 복싱을 하냐, 무엇 때문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저 스스로도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왜죠?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인 것 같아요. 세계 챔피언도 굉장히 높은 확률로 저는 이룰 거 같거든요. 그래서 못 그만둬요.”
-솔직히 이해는 잘 안 돼요.
“어떤 기자는 ‘고통을 즐기시나요?’라고 물어요. 아니,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너무 괴롭고 하루하루 죽을 것 같은데요. 지금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걸 내가 해봐야겠다는, 그 생각뿐입니다.”
-이겼을 때 쾌감을 설명한다면.
“이기고 나면 제 경기 영상을 백 번, 이백 번 돌려봐요. 너무 좋아요. 이겨본 사람만 알 수 있어요. 운이 좋아서 이긴 게 아니에요. 죽을 것 같지만 그걸 이겨내서 운동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이죠.”
◇진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서려경은 2018년 프로 데뷔 후, 2021년까지 다섯 경기를 뛰었다. 2022년 서울 삼성병원에서 펠로우 2년 차에는 경기를 뛰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의사로서의 삶도 살아내야 했다. “그래도 목표가 있었으니까 운동은 쉬지 못했어요. 하루종일 논문 쓰고 환자 보고 나서 퇴근하면 또 운동을 했죠. 평생 흘릴 눈물을 그 1년에 다 흘린 것 같아요. 그 정도로 힘들었어요.”
지옥 같은 해를 보낸 뒤 올해 세 경기를 뛰었다. 1년을 쉬었지만 경기력은 더 향상돼 있었다. 모두 KO로 이겼다. 그녀의 주먹을 맞고 링을 멀쩡하게 걸어나간 상대는 없었다. 지난 7월 한국 챔피언 타이틀전에선 임찬미 선수를 가볍게 꺾었다. “귀를 세게 맞아서 피멍이 들었는데요. 찬미 언니도 링을 내려갈 때 살짝 보니까 온몸에 멍이 들었더라고요. 이길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왜냐면 그만큼 열심히 했거든요.”
-작년엔 경기를 하지 않았어요.
“의사로서도 할 일은 해야 했으니까요. 큰 규모의 병원에서는 중환자도 많고요. 그래도 기량이 떨어지지 않아야 선수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울면서 운동을 했죠.”
-그리고 나서 1년 만에 올해 초 중국 선수와 붙었어요.
“체중이 55kg였는데 7kg을 빼야 했어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운동을 했어요. 못 먹으면서요. 생리까지 끊기더라고요.”
-그 정도로 힘든데 또 해냈어요.
“병이에요. 하하. 완벽주의. 생각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 스타일이거든요. 이미 최소 한국 챔피언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때였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죠.”
-경기 전에 질 수도 있겠구나 했나요?“전혀요. 운동을 많이 하면 질 것 같지 않아요. 질 생각도 없었고 KO로 끝냈죠. 제 주먹이 스치면 다 가는 거죠. 하하.”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되네요.
“저와 스파링을 했던 어떤 선수 분이 맞아 본 여자 선수 중에 제일 세다고 할 정도예요.”
-2020년에는 유일하게 무승부 판정이 난 경기도 있긴 했어요.
“저는 이긴 경기로 생각했는데요. 더 확실하게 이겼어야 했죠.”
-너무 세게 맞아서 아팠을 때도 있나요?
“보디(배와 가슴)를 제대로 맞으면 진짜 아프거든요? 저는 그렇게까지 아프게 맞은 적이 없어요. 데뷔전 때 눈이 파랗게 멍든 거 빼고는 피 한번 안 흘려봤어요. 눈을 맞아서 잠깐 두 개로 보인 적은 있지만. 그런데 관장님이 그럴 수 있다고 여러 번 워닝(경고)을 줘서 안 그런 척했죠.”
-안 아픈 척이 되나요?
“빨리 정신 차리고 제가 더 세게 때려야죠. 아프다고 그러고 있으면 안 돼요.”
-가장 기뻤을 때는 언제죠?
“한국 챔피언이 됐을 때요. 타이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 다릅니다.”
-그 타이틀전에서 질 거란 예측도 많았어요.“댓글도 봤어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지지?’ 생각했죠.”
-슬럼프도 있었나요?
“심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체력적인 슬럼프는 없었어요.”
-은인을 꼽자면.“
당연히 손정수 관장님이죠. 관장님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복싱을 가르치는 스킬은 따라갈 자가 없을 거 같아요. 국내 톱이죠.”
-서로 존대를 하더라고요.
“이 바닥에선 욕은 기본이고 ‘이 새끼야’라고 불러요. 그런데 관장님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내가 선생님을 존중해야 다른 사람들도 막 하지 않는다’면서요. 안 그랬다면 제가 애정을 못 붙였을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하죠.”
◇“그만하라”는 걱정은 이제 실례
서려경은 지난 5년 동안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다. “신나게 두들겨 맞아봐야 정신 차리지.” “잘못 맞으면 진짜 죽어.” 이기고 올 때마다 병원 사람들도 한숨을 쉬었다. “또 이겼다고? 하....” 엄마도 오빠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끙끙 앓았다. “이해는 해요. 그래도 저는 복싱하는 제 모습이 너무 좋아요. 힘들어도 너무 좋아요. 복싱이 제 삶을 지탱해줘요.”
-처음에 복싱한다고 했을 때 가족 반응은 어땠나요?
“좋아했죠. 운동한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할 줄은 몰랐겠죠.”
-가족들이 경기장에도 왔나요?
“엄마는 새가슴이라 덜덜 떨어요. 오지도 못하고 생중계도 못 봐요. 한 살 위 오빠는 저를 끔찍하게 생각하는데 한번 왔다가 충격받은 모양이에요. 관장님이 경기 도중에 보니까 오빠가 울더래요.”
-왜 울었대요?
“제 경기 전에 남자 경기가 있었는데 ‘어떻게 저런 걸 우리 려경이가 하지? 쟤가 의사까지 돼서 저런 흉악한 걸 왜 하고 있지?’ 하면서 멘붕이 왔다더라고요.”
-지금은 어떤가요?
“매번 ‘이것까지만 하고 그만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 챔피언이 되니까 ‘이제는 그런 말 자체가 실례다’ 하더라고요. 자주 안 보는 친척들이나 초면인 사람들이 너무 쉽게 걱정한답시고 그만하라고 하잖아요. 제 노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얘기하면 안 되죠.”
-병원에선 어떤가요?
“대놓고 싫어하는 분도 있고, 애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분도 있어요. 한번 져야 정신차릴 텐데 왜 또 이겼냐고도 하고요. 그래도 센터장님은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늘 이해해주셨어요.”
-이제 좀 달라졌나요?
“확실히 한국 챔피언 되고는 많이 바뀌었어요. 병원장님도 불러서 ‘대단하다’ ‘응원한다’ 해주셨고요.”
-그래도 복싱이 험한 운동은 맞잖아요.
“선입견이에요. 체육관에는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만 모여요. 순수하고 맑죠. 운동 좋아하면 안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어쨌든 유명해졌어요.
“알아보시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저는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도 신기하긴 하죠.”

▲서려경 순천향대 부속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소아과 의사의 삶도 쉽지 않아
서려경은 솔직했다. 재는 게 없다. 앞뒤 가리지 않고 숨기지도 않았다. “의사요? 공부도 잘했고요. 돈도 많이 벌고 멋있어 보이니까 했죠. 하하.” 이럴 땐 딱 MZ였다. 소아과 의사의 현실에 대해선 뼈 때리는 말도 꺼내놓았다. “의사로도 만족합니다.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그것도 다 이겨냈고요. 다만 소아과 의사로서는 부담이 있어요. 타과 의사와 비교하면 스트레스는 크고 보상은 적죠. 동료들도 비슷한 고민을 해요.” 돈만 많이 준다면 직업 복서의 삶도 괜찮을 것 같다고 농담 같은 진심도 털어놨다.
-공부로도 1등만 했나요?
“내신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모의고사는 그랬던 것 같아요.”
-의사는 왜 됐나요?
“공부 잘하면 의사해야 한다는 말에 세뇌된 것 같기도 하고. 멋있긴 하잖아요. 경찰, 의사 둘 중 하나가 돼야겠다고 생각은 했어요. 형사가 됐어도 잘했을 것 같아요. 경찰이 돈을 더 잘 벌었다면 경찰이 되지 않았을까요?”
-소아과를 택한 이유라면.
“성형외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경쟁이 너무 셌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남녀 차별도 있었고요. 일반외과를 가려고 했는데 지원자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쩌다가 소아과에 왔네요. 하하.”
-통상 이런 질문을 하면 ‘아이가 좋아요’라고 하는데.
“동기들이 ‘서려경이 소아과를 간다고? 진짜 안 어울린다’고 했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오구, 오구’ 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신생아 중환자실은 잘 맞아요. 특수성이 있으니까요.”
-요즘 소아과 지원율이 낮아요.
“바보가 아닌 이상 스트레스 많고 보상 적은 곳을 왜 가려고 하겠어요. 소아과 전문의 따고도 성형외과, 피부과에서 페이닥터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심각하네요.
“피부과에서 100만원 내는 건 안 아까우면서 소아과에선 1만~2만원 나오면 난리가 나요. 진료를 할 수 없게끔 전화해서 따지죠. 착한 친구들이 현장에서 인격이 다 변해요. 수명이 단축되는 느낌을 받아요. 시스템이 변해야 합니다.”
-나중에 개업할 생각도 있나요?
“저는 대학병원에 있을 생각이에요. 여기를 나간다면 저도 소아과를 계속할지, 다른 선택을 할지 모르겠어요.”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일이라면.
“제가 있는 신생아중환자실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아기들이 많아요. 제가 맡은 아기가 극적으로 좋아지고 퇴원하고 나중에 걸어서 진료받으러 오면 그 기분은 말로 할 수 없죠.”
-의사 서려경과 복서 서려경, 하나만 택한다면요?
“더 애정이 가는 건 복서예요.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잖아요. 지금까지 의사를 하려고 들인 노력이 너무 커요. 이제 의사는 할 만한데 복서는 계속 힘들 테니까 지금은 의사가 낫죠.”
-직업 복서는 돈 벌기 쉽지 않죠?
“진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돼야만 벌 수 있는 구조예요. 파이트 머니 개념인데, 이번에(태국 선수와 맞붙은 세계 타이틀 매치 전초전) 200만원 받았어요. 그나마 좀 유명해서요. 그 전엔 20만원, 40만원 이렇게 받았던 것 같아요. 몇 달 준비해서 고작 이 정도죠.”
◇이제는 세계 챔피언이 꿈
그녀의 눈은 링 위에서 더 빛이 난다. 노려보면 쳐다보기조차 무섭다. “제가요? 저는 제가 그런지도 몰랐네요. 사실 아무 생각이 없어요. 맞기 싫으니까 빠르게 집중하느라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선천적으로 한쪽 발가락이 네 개뿐이다. 발 사이즈도 양쪽이 1cm 차이가 난다. “친한 친구들도 몰라요. 숨겼죠. 그런데 다 극복했어요. 이제 어렵지 않게 다 얘기해요. 다들 이런 상처쯤은 갖고 있잖아요.” 유명해지니까 정계 입문을 권유받기도 했다. “운동하기도 힘든데 정치요? 저는 복잡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단칼에 거절했죠.”
-정계에서 혹시 영입 제안이 왔나요?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얼마 전에 전화를 받았어요. 누가 연락이 와서 정계 입문? 이런 처음 듣는 말을 했어요. 저는 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사람 일은 모르잖아요.
“저는 운동하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나중 일은 모르긴 하죠. 지금으로선 정치는 절대 안 할 것 같긴 합니다.”
-아직 미혼인데요.
“결혼은 해야죠. 그렇다고 막 아무하고 하고 싶진 않아요. 그런데 남자를 만날 일이 없네요. 도대체 어디서 만나죠? 하하. 저더러 눈이 높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거든요. 듬직하고 아빠 같은 쿨 가이를 좋아합니다.”
-롤모델은 있나요?
“세계적으로도 여자 선수는 별로 없어요. 일본의 이노우에 나오야를 가장 좋아해요. 움직임, 타이밍 모든 게 완벽한 선수죠. 최대한 배우고 싶어요.”
-언제까지 복싱을 할 건가요?
“세계 4대 복싱 기구 중 하나만 따도 찐이거든요. 그런데 관장님은 통합도 가능하다고 해요. 마음이 정해지고 그 목표를 이루면 저는 딱 뒤돌아서 나올 것 같아요.”
-MZ 친구들과는 다른 삶인데요.
“그러니까요. 오래 남지 않았어요. 1~2년 안에 결정짓고 빠져나와야죠. 원래 알코올중독이란 소릴 들을 정도로 매일 술을 먹었거든요. 주량은 소주 세 병. 지금은 경기 잡히면 몇 달이고 술은 입에 안 대요.”
-특별히 몸보신하는 음식이라면.
“다 잘 먹어요. 전주 사람이다 보니 엄마가 음식에 대한 긍지가 있어요. 엄마가 와서 밥해주면 다 잘 먹습니다.”
-의사인데 따로 먹는 약은?
“저는 영양소를 약으로 채우지 않아요. 고기 등 음식 위주로 먹지, 강박적으로 하진 않아요. 감기 걸려도 병원 안 가고, 운동하다가 다쳐도 파스 한번 붙여본 적 없어요.”
-왜죠?
“크게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면 다 이겨내게 돼 있거든요.”서려경의 목표는 지금 하나다. 세계 챔피언. “이겨야만 하죠. 이제 물러설 곳이 없어요.” 복서로서 이루고자 하는 걸 이루고 난 뒤에는 또 무얼 할지 벌써 행복한 고민도 한다. “다이빙을 좋아해요. 한번은 제주도에 가서 다이빙을 하다가 정착할까 심각하게 생각했어요. 그사이에 복싱에 빠져서 이렇게 됐지만요. 복서 은퇴하고 나면 일본, 필리핀 같은 데 가서 열대 과일 먹으면서 원 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쉬고 싶어요.”
조선일보 김아진 기자
12.30 조선일보 선정 2023년 10대 뉴스 국내
1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회의’ 통해 3각 공조 강화

▲사진=AP 연합뉴스
한·미·일 3국 정상이 8월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첫 별도 정상회의를 열고 군사·경제안보 협력을 동북아를 넘어 인도·태평양 등 글로벌 차원으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역내 안보 위협 발생 시 3국이 협의를 통해 공동 대응하기로 했고, 공급망·금융 등 협력 대상도 확대됐다. 한국으로서는 1953년 한미 동맹, 1965년 한일 수교에 이어 새로운 차원의 국제 협력 체제를 갖춘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4월 확장억제의 실행력을 높이는 핵협의그룹(NCG) 창설을 담은 ‘워싱턴 선언’을 발표했다.
2 이재명 체포동의안 가결, 구속영장 기각으로 기사회생

▲사진=국회사진기자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 동의안이 9월 21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이 대표는 ‘불체포 특권 포기’를 선언했지만,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가 임박하자 단식에 돌입했고 표결 하루 전날엔 부결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내며 스스로 약속을 깼다. 하지만 야권에서 최소 29표의 반란표가 나오면서 가결을 막진 못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이 대표는 구속영장 기각으로 기사회생했다. 법원은 이 대표의 ‘위증 교사’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정당의 현직 대표로서 증거인멸 염려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3 정찰위성·ICBM 이어 9·19 파기… 더 심해진 北의 폭주

▲사진=연합뉴스
북한의 핵·미사일 ‘폭주’는 올 한 해 더 심해졌다. 북한은 11월 3차 시도 끝에 군사 정찰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우리 정부가 대응 차원에서 9·19 군사합의 일부 조항을 효력 정지하며 대북 정찰력을 복원하자, 북한은 즉각 합의 전면 파기를 선언했다.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역대 최다인 5차례 발사했는데, 기습 타격이 가능한 신형 ICBM 화성-18형만 3차례 쐈다.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지 1년 만인 올 9월 헌법에까지 ‘핵무기 발전의 고도화’를 명시하고, 그달 첫 전술핵공격잠수함 진수식도 공개했다.
4 고물가에 신음… 용량 줄이고 값싼 원료 쓰는 꼼수 인상까지

▲사진=박상훈 기자
우리나라 국민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고물가에 시달렸다. 작년 5.1%를 기록했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 1월도 5.0%로 여전히 높게 시작했다. 7월 2.4%까지 상승 폭을 줄이는가 했더니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8~11월 4개월 연속 3%대에 머물렀다. 특히 서민들이 자주 찾는 라면, 빵, 우유, 생수, 햄버거 등의 물가 상승률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10여 년 만에 기록적인 수준이었다. 가격은 그대로 두면서 제품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 값싼 원료로 대체하는 ‘스킴플레이션’이라는 꼼수 가격 인상까지 나타났다.
5 우리 기술 우주발사체 ‘누리호’ 성공… 7대 우주 강국 도약

▲사진=공동취재단
5월 25일 국산 우주발사체 ‘누리호’가 실제 위성을 우주로 실어 나르는 첫 실전 발사에 성공했다. 이로써 한국은 국가와 민간이 함께 개발한 기술을 활용해 우리 땅에서 우리 기술로 만든 로켓으로 우리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며 우주 강국으로 향하는 첫발을 디뎠다. 한국은 자력으로 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일곱 번째 국가가 됐다. 다음은 달과 화성이다. 정부는 올해부터 10년간 2조원을 투입, 2032년 달에 국산 착륙선을 보낼 수 있는 차세대 발사체 개발에 나선다. 2045년에는 화성에 태극기를 꽂는 것이 목표다.
6 한달치 비가 하루에 내리기도… 오송 지하차도 14명 사망

▲사진=김지호 기자
올여름 전국 곳곳에 한 달 평년 강수량 규모가 하루 사이 내리며 폭우 피해가 잇따랐다. 7월 충북 청주에선 폭우로 임시 제방이 무너지면서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에 물이 들어차 차량 17대가 침수되고 14명이 사망했다. 경북 예천 등에선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25명이 숨졌다. 8월엔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해 전국 곳곳에 피해를 입혔다. 그런가 하면 폭염이 기승해 열두 달 중 여덟 달(1·3·4·5·6·9·11·12월)이 ‘월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웠다. 올해 첫 폭염경보(6월 20일)도 작년보다 20여 일 빨랐다.
7 ‘사라진 아이’ 2000여 명… 출생통보·보호출산제 법제화

▲사진=김지호 기자
지난 6월 감사원 감사를 통해 병원에서 출산된 기록은 있지만,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영·유아가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2123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생존 여부를 알 수 없는 ‘사라진 아이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생모가 아기를 낳은 뒤 곧바로 냉장고에 유기한 사건 등이 드러났다. 이에 국회와 정부는 부모의 출생 미신고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라진 아이’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출생통보제와 보호출산제를 법제화했다. 법 시행은 내년 7월부터다.
8 ‘교권 추락’ 이슈화시킨 서이초등학교 2년 차 교사의 죽음

▲사진=고운호 기자
7월 18일 서울 서이초등학교의 2년 차 교사가 교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학부모의 괴롭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주장이 나와 교육 당국이 조사에 나섰고 경찰 조사까지 시작됐다. 4개월간 조사에서 학부모의 갑질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서울에 모여 11차례 대규모 집회를 열면서 ‘교권 추락’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전국 곳곳에서 학부모 갑질 피해를 당한 교사들의 고발이 쏟아졌다. 이후 정부·국회는 교권 회복을 위해 법을 개정하고 정책을 마련했다
9 미흡한 준비로 파행 운영된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대회

▲사진=신현종 기자
전북 부안군 새만금 일대에서 지난 8월 열린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파행 운영됐다. 153국 4만3000명의 세계 스카우트 대원이 참가한 이 대회는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릴 기회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새만금 야영지의 폭염 대비 미흡과 비위생적 환경 등 각종 문제가 노출됐다. 다수의 잼버리 대원들이 온열 질환에 걸렸고, 일부 국가 대원들은 조기 퇴영했다. 태풍 북상으로 대회 기간 도중 새만금 야영지에서 전원 철수한 대원들은 기업, 대학, 종교계 등의 총력 지원으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잼버리 프로그램을 마쳤다.
10 지구 495바퀴 돈 ‘부산 엑스포’… 사우디 벽은 못넘어

▲사진=김동환 기자
한국은 지난해 6월 민관 합동으로 엑스포유치위원회를 꾸려 509일간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전선에서 뛰었고, 한덕수 총리 및 정부 관계자들은 물론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이재용(삼성)·정의선(현대차)·구광모(LG) 등 주요 그룹 회장을 포함한 기업인들이 전 세계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들이 비행한 거리는 지구 495바퀴, 만난 고위급 인사는 3472명에 달한다. 총력을 기울였지만, 선발 주자인 사우디의 벽을 넘지 못하고 11월 개최지 선정 투표에서 119대29표로 완패했다.
조선일보 선정 2023년 10대 뉴스 국제
1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다시 불붙은 ‘중동의 화약고’

▲사진=AP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10월 7일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고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에 나서면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가운데 ‘두 개의 전쟁’이 현실화됐다. 레바논 무장 단체 헤즈볼라도 가세, 충돌은 신(新)중동 전쟁으로 번졌고 2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을 납치·살해한 하마스에 대한 비난이 거세진 가운데,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를 야기하고 자국 인질을 적으로 오인 사살한 이스라엘도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2 바그너 그룹 수장인 프리고진의 반란에 체면 구긴 푸틴

▲사진=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이끄는 용병 단체 바그너 그룹이 6월 24일 군부를 겨냥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가 하루 만에 철수했다. 바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전 최전선에도 투입됐지만 이 사건으로 존재감이 크게 줄었다. 프리고진은 두 달 뒤 폭발로 의심되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독재자’ 푸틴의 리더십엔 금이 갔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푸틴은 내년 3월 대선 출마를 이달 초 선언해 종신 집권 의지를 공식화했다.
3 오픈AI의 생성형 인공지능 챗GPT 대유행과 빅테크 암투

▲사진=뉴스1
올해 전 세계 AI(인공지능) 열풍은 사람처럼 말하는 오픈AI의 생성형 AI ‘챗GPT’가 주도했다. 사용자가 2억명에 육박할 정도로 챗GPT가 인기를 끌면서 AI가 인류에게 가져올 혜택과 위험에 대한 토론이 뜨거웠다. 챗GPT 출시 1년 만인 11월 17일 AI의 안전한 발전에 집중하길 원하는 오픈AI 이사회가 상업화를 내세운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를 해고하는 일이 발생했다. ‘쿠데타’ 후 직원 750명과 최대 주주 마이크로소프트가 올트먼 편을 들면서 올트먼은 닷새 만에 복귀했다.
4 동일본 대지진 12년 만에… 日후쿠시마 오염 처리수 방류

▲사진=연합뉴스
일본 도쿄전력은 8월 24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 처리수 7800t을 바다로 방류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원전에서 폭발 사고가 난 지 12년 만이다. 11월까지 3차에 걸쳐 2만3400t이 방류됐다. 일본은 바닷물로 희석한 오염 처리수가 안전하다고 밝혔지만, 중국·러시아 등은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전면 중단하는 등 반발했다. 도쿄전력은 내년 2월 4차 방류를 포함, 30여 년간 총 134만t의 오염 처리수를 해양 방류할 예정이다.
5 머그샷 찍은 트럼프… 美전·현직 대통령 최초로 기소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뉴욕 맨해튼 대배심이 3월 30일 ‘성추문 입막음’ 의혹을 받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전·현직을 불문하고 미 사상 최초 대통령 기소다. 트럼프는 ‘의회 난입 선동’ 등으로 올해만 네 차례 기소됐고, 8월 조지아주 선거 결과 번복 시도 혐의로 법원에 출두해 미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머그샷(범죄인 식별 사진)도 찍었다. 내년 대선의 공화당 유력 후보인 트럼프는 기소를 ‘정치적 마녀사냥’으로 규정하고 지지층 결집에 활용했다.
6 新아편전쟁… 美·캐나다 휩쓴 ‘사상 최악의 마약’ 펜타닐

▲사진=조선DB
쌀알 두 개 분량만 복용해도 사망할 수 있어 ‘역사상 최악의 마약’으로 불리는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이 미국·캐나다 등에서 빠른 속도로 확산했다. 미국 곳곳은 허리나 팔다리를 꺾은 중독자들이 배회하는 ‘좀비 랜드’가 됐다. 펜타닐 원료가 서양발(發) 아편으로 전쟁을 겪은 중국에서 주로 생산돼 ‘신(新)아편전쟁’이란 말도 나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1월 15일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펜타닐 퇴치에 협력하기로 했다.
7 관측 사상 가장 뜨거웠던 지구… 산불·홍수·지진 잇따라

▲사진=연합뉴스
미국 국립 해양 대기국(NOAA)은 올해 8월 지구가 174년 관측 사상 가장 뜨거웠다고 밝혔다. 평균기온이 20세기 평균보다 1.25도나 높았다고 했다. 같은 달 ‘지상 낙원’ 하와이 마우이섬에서는 고온과 가뭄으로 사상 최악의 산불이 발생,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9월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선 열대성 폭풍에 따른 대홍수로 사망자가 2만명에 육박했다. 이상기후로 인한 재난이 곳곳에서 발생해 피해가 큰 한 해였다. 2023년은 관측 사상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8 정찰 풍선부터 경제 전쟁까지… 날 세운 美·中

▲사진=로이터 뉴스
미국과 중국의 갈등 국면은 올해도 지속됐다. 지난 2월 중국에서 날아온 풍선이 미 영공에 침입했다가 미군이 발사한 미사일에 격추됐다. 미국은 이 풍선이 ‘정찰용’이라고 단정했고, 중국은 기상·과학 연구용 민간 비행체라고 반박했다. 미국은 반도체 부품과 기술, 중국은 전략 광물의 수출을 서로에게 막는 등 세계 양대 경제 대국인 두 나라의 ‘경제 전쟁’도 이어졌다. 바이든과 시진핑이 지난 11월 1년 만의 정상회담을 했지만, 갈등 봉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9 인도, 인류 최초로 달 남극에 착륙하고 G20까지 개최

▲사진=인도우주연구기구(ISRO)
인도의 무인 탐사선 찬드라얀 3호가 8월 23일 달의 남극 부근에 착륙했다. 인도는 소련·미국·중국에 이어 넷째로 달 착륙에 성공했고, 물이 존재한다고 추정되는 달 남극에 인류 최초로 착륙한 국가가 됐다. 탐사선은 14일간 달 표면을 이동하며 남극 표면 사진 촬영에 성공했다. 인도는 이어 9월 9일~10일 G20 (20국)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국제사회의 ‘제3지대’로 우뚝 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부 통계에 따르면 인도 인구는 올해 중국을 앞질렀다.
10 美기준금리 22년 만에 최고… 하지만 끝은 보인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7월 세계 기축통화국 미국의 기준금리가 22년 만의 최고치인 연 5.5%까지 올랐다. 경기 과열이 이어진 가운데 팬데믹·전쟁 여파로 물가가 고공 행진하자 ‘인플레이션 전사(戰士)’를 자처한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올 초 4.5%였던 기준금리를 4차례 올린 결과다. 고물가 속 고금리가 장기화하면서 글로벌 주식·부동산 시장 등이 타격을 입었다. 파월은 지난 13일 “인플레이션 하락이 진전을 보이고 있다”며 내년에 금리를 내리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