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반도 2023-12/ 12-01 엑스포 불발, 韓 소속 국가그룹 없는 한계 확인 - 12-29 新중동붐과 경제영토 확대
위기의 한반도 2023-12/
12-01 엑스포 불발, 韓 소속 국가그룹 없는 한계 확인… 다자외교 지평 넓혀야

엑스포 유치 실패의 교훈
한국, 국제무대에 소속된 그룹 없어 고립… ‘엑스포 유치’ 같은 큰 경쟁에선 치명적
경제력은 강국 반열이나 외교력은 취약… 정체성 공유하는 집단 국제 원군의 확보 절실
지난달 29일 새벽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의 2030년 엑스포 개최지 선정 1차 투표 결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는 3분의 2가 넘는 119표를 얻음으로써 29표의 부산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돌이켜보면 패배라기보다는 불가항력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만큼 유치 추진 초기 단계부터 회의론이 많았던 도전이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소속 ‘국가 그룹’이 없는 고립된 존재다. 경제력에서는 강국 반열에 올랐지만, 외교력에서의 국제 위상은 여전히 취약하다. 엑스포 유치전 같은 큰 경쟁 무대에서는 집단적 국제 원군의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불가항력 경쟁
교섭보다 어려운 건 교섭 결과의 분석이다. 그 같은 분석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외교무대에서는 아무도 부정적 응답을 하지 않으며 경쟁국 쌍방에 모두 지지를 약속하는 나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평가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외교부 유엔 담당 부서에는 그런 전문가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 그들은 유엔과 각종 국제기구의 사무총장 선거, 이사국 선거, 결의안 표결 등을 둘러싼 외교전쟁을 매년 몇 차례씩 치르면서 교섭 대상국들의 ‘외교적 수사’ 속에 숨겨진 진실성에 다가가는 기술과 지혜를 배운다. 외교 교섭에서 지지 요청을 받은 나라들이 보이는 반응은 일반사회의 언어와 많이 다르다. ‘적절히 검토하겠다’는 건 다분히 부정적 반응이고, ‘호의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건 중립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반응이다.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나라만이 확실한 지지국이다.
지지를 약속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변심하지 못하도록 이를 문서로 통보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웬만하면 그 정도로 그치지만, 문서로도 믿을 수 없는 경우엔 지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선언할 것을 요구하는 극단적 방식을 쓰기도 한다. 그런 요청을 받은 나라는 다른 경쟁국과의 관계 손상을 감안해 여간해서 이에 응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유치국 선정 표결을 앞두고 사우디는 무려 122개 회원국으로부터 공개 지지성명을 받아냈고, 그중 119개국이 실제로 사우디에 투표했으니 얼마나 엄청난 교섭을 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고립적 외교 입지
한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교섭전쟁에서 치명적이고 태생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어디에도 ‘소속 그룹이 없는 고립된 존재’라는 점이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의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아프리카·중동그룹 70여 개국의 집단적 지지를 받는다. 유럽국은 유럽연합(EU)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의 지원을, 중남미 국가는 중남미그룹 35개국의 지원을 받는다. 심지어 구소련 국가들은 독립국가연합(CIS)과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지원을 받고,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는 10개 회원국의 배타적 지지를 받는다. 그 밖에도 이슬람 국가는 이슬람회의기구(OIC) 57개 회원국으로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52개 영연방 회원국으로부터 집단적 지지를 받는다.
한국은 그 어느 그룹에도 소속되지 않은 외로운 나라다. 과거엔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 그룹의 동정표라도 받았으나 개도국을 졸업했으니 이젠 그것도 안 된다. 이 때문에 한국은 국제사회의 표 대결에서 경쟁 상대국들이 기본자산으로 등에 업고 시작하는 수십 개의 지지표는 꿈도 꿀 수 없고, 맨바닥에서 시작해 한 표 한 표 힘겹게 얻어 와야 한다.
혹시라도 이번 사우디와의 경쟁처럼 대규모 그룹의 지지를 받는 나라가 경쟁 상대가 되면 힘겨운 싸움을 하다 패하거나 아예 경쟁을 포기해야 한다. 이웃 일본도 유사한 상황이나, 그래도 일본은 주요7개국(G7) 회원국이자 쿼드(QUAD) 회원국이니 우리보다는 사정이 조금 낫다.

◇과거 성공 사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1988 올림픽, 2002 월드컵, 2018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그때는 성공했고 2010 여수 엑스포 와 2030 부산엑스포 유치에는 실패한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 성공했던 유치 경쟁은 이번 사우디와의 무제한 대결과는 성격이 다른 ‘약자들 사이의 제한적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1988 서울올림픽의 경우, 대륙별 순환 개념에 따라 아시아에서 개최해야 한다는 데 대한 국제적 컨센서스가 있었기에 서울과 나고야(名古屋) 두 도시의 경쟁으로 좁혀졌고, 따라서 더 강력한 상대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경제력이 막강했으나 외교력 면에서는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고, 개도국의 일원이던 한국은 ‘올림픽이 선진국의 전유물이 돼선 안 된다’는 논리로 개도국 그룹의 집단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2002 월드컵의 경우도 약체 일본과의 대결이었다. 일본은 일찌감치 월드컵 유치 출사표를 내고 2002년 ‘월드컵 유치는 아시아의 몫’이라는 양해를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국은 일본의 단독 유치 신청이 예상되던 상황에서 일본보다 5년 늦은 1994년 출사표를 냈다. 예측 불허의 첨예한 대결이 되자 패배 시의 정치적 후폭풍을 우려한 한·일 양국 정부가 공동 개최안에 동의함으로써 합의가 이뤄졌다.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는 강력한 경쟁 상대가 없는 가운데 3수 도전에 나선 평창이 동정표까지 끌어모아 압승한 결과였다.
◇실패로부터 배울 것
한국이 유치에 실패한 대표적 사례는 2010·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 2010·2030년 엑스포 유치 실패 등 4건이다. 이들 실패 사례의 공통점은 1988 올림픽이나 2002 월드컵과는 달리 아시아에 국한된 제한 경쟁이 아니었고, 한국보다 외교력이 강한 상대국이 총력을 기울여 유치에 노력했다는 점이다. 또한 경쟁 상대가 밴쿠버(캐나다), 소치(러시아), 상하이(上海·중국), 리야드(사우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인 반면 한국이 내세운 개최지는 평창, 여수 등 국제적으로는 생소했다.
실패 사례 중 가장 아쉬운 것은 2010년 엑스포 유치를 둘러싸고 2002년 여수와 중국 상하이 사이에 벌어진 경쟁이었다. 그때 88개 회원국이 참가해 4차 투표까지 간 끝에 여수가 20표 차이로 패했다. 당시 한국은 단지 국내 정치적 고려에서 개최지를 여수로 선정했었는데, 여수는 국제적 지명도도 없었고 준비 상태도 엉망이었다. 만일 그때 유치 도시로 서울이나 인천을 내세웠다면 상하이를 누르고 승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향후 엑스포 유치를 위한 세 번째 도전을 하게 될 경우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실패의 교훈이다.
■ 용어 설명
‘엑스포’는 국제박람회기구에서 주관하는 세계 최대의 공공 박람회로, ‘등록박람회’와 특정 주제에 의한 소규모 ‘인정박람회’가 있음. 한국은 대전(1993)과 여수(2012) 등 인정박람회 개최.
‘외교적 수사’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국제무대에서 말로 인한 예절 문제가 실용적인 논의를 덮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발전한 어법. 외교가에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금기시됨.
■ 세줄 요약
불가항력 경쟁 : 사우디는 2030 엑스포 유치전에서 회원국 182개국 중 122개국의 공개 지지성명을 얻고 이 중 119개국의 찬성표를 이끌어 냄. 이번 유치전 결과는 한국의 패배를 넘어 불가항력이었던 상황이었음.
고립적인 외교 입지 :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소속 ‘국가 그룹’이 없는 고립된 존재. 이는 교섭전쟁에서 치명적이고 태생적인 결함으로 작용. 경제력에서는 강국 반열에 올랐지만 외교력에서의 국제 위상은 여전히 취약.
성공과 실패에서 배우다 : 한국의 국제행사 유치전 성공 사례들은 과거 ‘약자들 사이의 제한적 경쟁’에서 틈새를 찾은 결과. 향후 다자외교의 지평을 넓혀 세계적 경쟁 무대에서 집단적 국제 원군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
문화일보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 전 외교부 북핵 대사
12-01 잇단 ‘정보 실패’ 걱정된다
민병기 정치부 차장
원내대표 선거는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선거다. 좀처럼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운 국회의원 100명 안팎이 유권자여서다. 산전수전 다 겪은 중진 의원들도 표 계산을 하다 고개를 젓는다. 능구렁이 의원님들은 당연히 표를 줄 것처럼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가는 큰코다친다. 각 진영이 꼽은 확실한 ‘내 표’를 합치면 전체 의석수의 두 배가 나온다. 오죽하면 가장 고마운 게 ‘너 안 찍는다’고 확실히 얘기해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판세를 정확히 읽어야 제대로 된 전략을 짜고,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이, 대한민국이 29표를 받은 세계박람회(엑스포) 개최지 선정 투표도 딱 원내대표 선거 같다. 냉혹·냉정하기 그지없는 외교전이고,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외교관·정치인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렇지만, ‘2차 투표에서 대역전’ 운운했던 판세 예측과 실제 결과 사이의 간극은 그간의 땀과 노력만으로 메꿀 수 없다. 예측하기 어렵다는 조건이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가 열린 프랑스 파리 현지에서 투표를 불과 서너 시간 앞두고 한국에 올린 보고는 ‘2차는 무조건 간다’였다. 복수의 대통령실 관계자는 투표 몇 시간 전까지도 기자의 거듭된 질문과 회의적인 예상에 ‘이긴다’거나 ‘박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끝까지 박빙이라고 주장하는 게 전략이었거나 아니면 정말 그렇게 믿었거나. 전자면 하지하책(下之下策), 후자면 답도 없다.
사실 징후는 있었다. 한 더불어민주당 보좌관은 “지난해와 올해 재외공관에서 올린 해당 국가의 엑스포 지지 판세를 보면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는데도 ‘사우디 지지’가 ‘경합’으로, ‘경합’이 ‘대한민국 지지’로 바뀐 경우가 꽤 있다. 그 나라 대통령이나 총리, 외교부 장관이 사우디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는데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격 인사의 ‘덕담’을 우리 지지로 보고한 경우도 있다”며 “부정적 보고를 알아서 피했거나 장밋빛 전망만 골라 보고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이게 올해 국정감사 때였다. 엑스포 유치 주무부처들끼리의 눈치 싸움도 있었다. 끝까지 박빙 열세를 주장해 온 대통령실과 달리 중간에 ‘패색(敗色)’을 직감한 A 부처가 패인(敗因)을 ‘B 부처’로 돌리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B 부처가 반박 논리 개발에 나섰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최선을 다하고 지는 건 박수받을 일이다. 패배를 직감하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역시 칭찬감이다. 하지만 현재 판세와 내 위치, 상황을 마지막 순간까지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철저히 복기하고 또 갈아엎어야 한다. 이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어서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국민의힘의 참패로 끝난 뒤 윤석열 대통령은 ‘멘토 격’ 모 인사에게 전화해 선거 판세를 정확히 보고하지 않은 주변을 한참 질책했다고 한다. 애초 명분도, 바닥 민심도 우호적이지 않은 선거였는데, 대통령실 주변만 그 기류를 제대로 못 읽었다는 뒷얘기도 있다. 실패한 강서구청장 선거·엑스포 선거, 대통령실과 물리적·화학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판세를 낙관했다. 윤 정부 명운이 걸린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 판세 예측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문화일보
11.01 엑스포 실패에서 생각해볼 것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전이 참패로 끝났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몇 가지 짚어볼 게 있다. 무엇보다 엑스포 유치에 국가의 에너지를 너무 썼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것처럼 집착한 건 이해할 수 없다. 애초에 승산이 적은 싸움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32년 건국 100주년이다. 왕실 권력 다툼 끝에 집권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왕위 계승을 전후해 국민에게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 그 일환으로 1조 달러 이상 들여 세계 최대 스마트시티(네옴시티)를 계획했다. 100주년 즈음해 2027 동계아시안게임, 2030 엑스포, 2034 월드컵·하계아시안게임 같은 국제대회를 쓸어담는 것도 같은 이유다. 돈이 남아돌아 오일머니를 뿌리는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다.
승산 적은 싸움에 정부·기업 총동원
디지털시대, 엑스포 경제 효과 의문
2025년 오사카도 흥행 부진 먹구름
유치 못한 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손자병법에 나와 있듯 상대가 강하면 피해 가는 게 현명하다(强而避之, 강이피지).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성과를 내려고 조급했거나 잘못된 정보로 오판했던 것 같다. 대통령에게 보고가 제대로 됐는지도 의문이다. 도중이라도 버겁다고 판단했으면 세련되게 발을 뺐어야 했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정부가 끝까지 이길 것처럼 밀어붙여 의아했다. 실패했을 때의 출구전략도 딱히 없어 보였다. 우리가 모르는 비장의 카드가 있는 줄 알았다. 뚜껑을 열어 보니 별게 없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이 과도하게 동원됐다. 과거에도 몇몇 기업이 국제대회 유치에 앞장섰지만 이번처럼 4대 그룹, 10대 그룹 하는 식으로 죄다 나선 건 이례적이다. 분초를 아껴 써야 하는 대기업 회장들이 사업을 뒤로한 채 대통령을 따라다녔다. “회장이 올해 회사 일보다 엑스포 때문에 해외 출장 다닌 게 더 많다”(모 대기업 관계자). 단순히 한국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애국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회장들은 대부분 고민과 약점이 있다. 사업 부진, 인수합병, 승계 같은 현안이 있다. 이런저런 재판도 진행 중이다. 문재인 정부와 가깝게 지낸 죄(?)로 잔뜩 얼어 있는 기업도 있다. 정부에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 대통령이 ‘나를 따르라’고 하면 만사를 제쳐둘 수밖에 없다. 재계에선 “회장들끼리 함께 해외를 다니면서 친해진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라는 말이 나온다.
더 근본적인 의문은 엑스포가 온 나라가 매달릴 정도로 경제 효과가 크냐는 점이다. 과거 엑스포는 각국이 한데 모여 산업·과학기술 성과를 알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지금은 디지털의 발달로 굳이 모이지 않고도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필요한 것을 얻는다.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국경의 개념도 사라지고 있다. 정부가 판을 깔아주지 않아도 기업·개인이 할 수 있는 게 많다. 엑스포 같은 국가 대항전 성격의 오프라인 행사는 매력이 줄었다.
2025 일본 오사카 엑스포도 위기다. 2018년 러시아를 제치고 유치했을 때만 해도 경제 효과가 2조 엔(약 18조원)이 넘는다며 축제 분위기였다. 개막 1년여를 앞둔 지금은 사뭇 다르다. 50여 개국이 자국 부담으로 전시관을 짓겠다고 했으나 실제 건설에 착수한 곳은 한국과 프랑스·룩셈부르크 등 손에 꼽힌다. 멕시코·러시아·에스토니아처럼 자국 정치 상황, 비용 문제로 불참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행사장 건설비는 2018년 1250억 엔에서 최근 2350억 엔으로 두 배로 뛰었다. 그사이 자재비와 인건비가 많이 올랐다. 건설비를 3분의 1씩 내야 하는 중앙정부와 오사카 지방정부, 재계 모두 근심이 깊다. 재계는 “기부금을 더 모으기 어렵다”며 난색이다. 기업들은 엑스포 입장권을 수만~수십만 장씩 떠안는다.
일본 여론은 싸늘해졌다. 경제 효과가 불투명한 데다 늘어난 비용을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결국 국민 부담이다. 고령층 의료 등 돈 쓸 곳이 많은데 일회성 행사에 재정을 쏟아붓는 게 맞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달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오사카 엑스포가 ‘필요 없다’는 응답이 68%에 달했다. 사회학자인 요시미 신야 도쿄대 교수는 “이제 일본에서 올림픽도, 엑스포도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런데 국내 연구기관들은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면 일자리 50만 개를 창출하고, 61조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전망했다. 근거가 약하다. 5050만 명이 엑스포를 찾을 것이란 예측도 수긍하기 어렵다. 밀라노(2015년)·두바이(2021년) 엑스포는 방문객이 2000만 명대 초반이었다. 오사카 엑스포는 2820만 명(외국인 350만 명 포함)을 기대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다. 일본 인구의 절반이 안 되는 한국에서 오사카의 두 배 가까운 방문객은 무리다. 게다가 2030년이면 65세 이상 고령층이 130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한다. 엑스포 구경 다닐 사람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얘기다. 행사 후 관련 시설을 어떻게 활용할지의 고민도 고스란히 남는다.
정부가 엑스포 유치에 공들일 시간에 연금·노동·교육 3대 개혁이나 저출산 문제에 매진했으면 지금쯤 뭐라도 진전이 있지 않았을까. 엑스포를 유치하지 않고, 여기서 멈춘 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중앙일보 고현곤 편집인
12.05 “김정은과 좋은 관계” 공언한 트럼프 복귀 리스크 대비하고 있나
미 대선에 출마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 유세에서 “김정은은 나를 좋아한다. (내가 대통령이었던) 4년간 북한과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말했다. “핵무기와 다른 많은 것들을 보유한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도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에도 “중국 시진핑 주석과 김정은 위원장을 알게 되고 북한과 잘 지내서 핵전쟁을 막았다”며 “김정은과 두 번 만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트럼프의 근거 없거나 과장된 화법은 익히 알려진 것이지만 트럼프 임기 4년은 그의 말대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고도화되고 한미동맹은 흔들린 최악의 시기 중 하나였다. 참모들 증언에 따르면 트럼프는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대선에 승리하면 김정은과의 이벤트를 재개하고 한미동맹을 경시할 가능성이 높다. 한미 경제 관계도 뒤집을 수 있다.

▲미국 대선 경선에 출마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세장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 로이터
그는 지금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과 양자 대결에서도 앞서는 여론조사가 많다. 내년 11월 대선에서 이겨 대통령에 복귀한다면 한반도 안보와 경제에 어떤 격랑이 몰아닥칠지 예상하기 힘들다.
그는 재임 때 방위비 분담금 5배 인상을 요구하며 주한미군 완전 철수를 검토했다. 국무장관이 “두 번째 임기 우선순위로 하자”고 해 이를 겨우 막았다고 한다. 한미동맹이 무너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트럼프는 주한미군 가족들에게 대피령을 내리려 했고, 사드 철수도 고려했다. 그는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철강 관세 부과 등 경제 압력도 전방위로 가했다. 그가 돌아온다면 한국을 향해 또다시 ‘안보·경제 무임승차론’을 제기하며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다. 더구나 한 차례 집권 경험까지 있어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압박할 수 있다.
한미는 워싱턴 선언 등을 통해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역내 군사·경제 위협에 공동 대응해 핵협의그룹을 내실화하고 한·미·일 3각 협력 체제를 정례화·제도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런 기존 합의를 전혀 중시하지 않는다. 어떤 약속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다.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 핵우산 제공 거부 등 한미동맹을 뿌리째 흔들 것에 대비해 우리 자체 핵무장 등 북핵 억제 방안 등을 미리 검토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하고 미군은 철수하자’는 식의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지금부터라도 트럼프 2기 주요 인물들과의 대화를 넓혀 나가 어떤 경우든 무방비로 당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12.06 징비록 남겨야 할 엑스포 참패

겉으로 드러난 양상으로 보면 엑스포 유치전의 참패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와 닮은꼴이다. 17%포인트 차로 여당이 패배했다는 구청장 선거 결과가 나오던 날 밤, 윤석열 대통령은 왜 정확한 상황을 진작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참모들을 질책했다고 한다. 이미 선거 현장의 표심은 기울어져 있었고, 여당 내부에서조차 두 자릿수 득표율 차로 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대통령에게는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엑스포 유치전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표결 결과를 보고 나서야 그동안 올라온 보고와 전망이 부풀려진 것임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대국민 담화에서 “저희가 느꼈던 예측이 많이 빗나간 것 같다”고 한 것이 그 증표다.
판세 잘못 읽고 ‘역전승’ 희망고문
대통령과 국민에게 허위 보고한 셈
해외 정보망 갖춘 국정원은 뭐 했나
하지만 두 사안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엑스포 유치전의 경우 대통령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이 허위 보고를 받았다는 점이다. 많은 국민이 ‘박빙’이란 정부의 홍보를 믿고 ‘희망고문’을 당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정부는 국제박람회기구(BIE) 182개 회원국의 지지 동향을 시시각각 수집하고 확보된 표의 숫자를 매일같이 집계했다. 필자는 9월께에 더블스코어로 열세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대략 70표를 확보했고, 한국은 그 절반을 약간 넘는 수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이 수치도 ‘따따블’로 진 실제 표결 결과에 비하면 희망이 많이 섞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윤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30여 개국 정상과 양자회담을 하는 등의 노력으로 격차를 좁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더니 막판에는 ‘박빙’으로 추격 중이란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당국자들은 2차 투표까지 가는 걸 기정사실처럼 얘기하며 뒤집기가 가능하다고 호언했다. 1차 투표에선 사우디를 지지하지만 2차 투표에서는 한국을 지지하는 ‘교차투표’를 약속한 나라가 15개국 정도 있다는 것이 역전론의 근거였다. 솔직히 그런 나라가 있을까 싶었는데, 결과는 2차까지 가보지도 못했다. 정부의 최종적 판세 분석은 사우디 90표, 한국 50표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결과보다 한국은 20여 표 부풀려졌고, 사우디는 30표 정도 과소평가한 수치였다.
필자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 이런 가공의 숫자에 취해 있을 때 누군가는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가감없는 대통령에게 보고했어야 옳았다. 외교공관 못지않게 촘촘한 해외 정보망을 갖춘 국가정보원은 그런 임무를 하라고 있는 조직이다. 그런데 그 무렵 국정원은 지휘부가 서로 알력을 빚다 한꺼번에 교체되는 내홍에 휩싸여 있었다. 만일 국정원이 독자적으로 판세 분석을 하지 않았다면 임무의 방기고, 분석은 했지만 결과가 정부 부처의 것과 대동소이했다면 능력 부족이다. 만일 정확한 분석은 했는데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느라 직보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존립 근거에 대한 부정으로 최악의 사태다. 어느 경우든 안보는 물론 ‘국익 정보’까지 챙겨야 할 국정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크로스체크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엑스포 실패는 결코 가벼이 지나칠 일이 아니다. 지더라도 당장은 크게 잃을 것이 없는 엑스포 유치전이었기 망정이지,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안전이 걸린 안보 문제에서 이런 오판이 벌어졌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생각해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유치운동 과정에서 얻은 것도 많다”는 ‘정신승리’적인 자평으로 넘어가거나, ‘따따블’의 ‘참패’를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로 둔갑시키는 것은 국민 눈높이에 한참 어긋난다. 촘촘히 작동해야 할 국가 기구의 시스템이 어느 부분에서 문제를 일으켰는지,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정보가 가지 않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반드시 징비록을 써야 할 일이다. “모든 것은 제 부족의 소치”라고 한 대통령의 말에 담긴 충심을 의심치 않지만, 그것이 모든 실패와 실책에 면죄부를 주는 말이어서는 곤란하다.
예영준 중앙SUNDAY 편집국장
12.06 국가 주권 넘어서는 동아시아 협력체제를 촉구한다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 보니 나라마다 제 입장서 말 바꿔
中 핵오염수 우려에 日 “국가주권”
우리가 탈북민 강제북송 항의하자 이번엔 중국이 “국가주권”
낡은 민족주의적 관념 버리고 인권·생명권으로 발상 전환을

▲한중일 외교장관이 지난 11월 26일 부산 해운대구 APEC누리마루 인근에서 산책하고 있다. 왼쪽부터 왕이 중국 외교부장,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상, 박진 외교부 장관.2023.11.26 /외교부
박진 외교부 장관,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대신,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참석한 제10차 한·중·일 3국 외교장관회의가 지난 11월 26일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회의는 2019년 8월 제9차 외교장관회의 이후 4년 만이다.
한국 외교부에 따르면, 3국 외교장관회의는 “한·일·중 협력이 3국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도록 3국 간 실질 협력을 심화해 나가기로 했다.” 그동안 동아시아 지역 전체 차원의 초국가적 협력이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회의에서 열거된 6대 협력 분야 중 특히 ‘지속가능개발 및 기후변화’나 ‘평화·안보’는 더 오리무중이다.
회의 기간 중 별도로 열린 일·중 외교장관회의는 어려운 현실을 잘 보여준다. 문제는 외교 당국의 정책적 차원에서 이 어려움을 풀기 어렵다는 데 있다. 후쿠시마 ‘처리수’ 대 ‘핵 오염수’라는 용어의 차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동아시아 3국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같은 초국가적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이론적·사상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다.
일본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 측은 ‘핵 오염수’의 안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각 이해 관계자들이 독립적으로 장기적인 감시 메커니즘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회담을 마치고 기자단을 만난 가미카와 일본 외상은 “국가의 주권, 국제원자력기구의 권위와 독립성의 원칙을 강조했다.” 중국의 초국가적 해법에 대해 일본은 국가 주권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원칙으로 응대한 것이다.
한반도를 마주한 황해 연안에 짓고 있는 수십 개의 원전에 대한 중국 정부의 기본 입장도 가미카와 외상의 입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국 당국이 동아시아에 미치는 환경 문제를 고려해 국가 주권 못지않게 이웃의 생명권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할 것 같지 않다.
한편, 한일 외교장관회의에서 가미카와 외상은 서울고등법원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 승소 판결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며 한국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 일본은 한국의 법집행관할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권면제의 원칙이 그 밑에는 자리 잡고 있다. 인권에 대한 국가 주권의 신성불가침을 강조한 셈이다.
그에 앞서 지난 10월 30일 도쿄 고등법원은 재일 조선인 등의 북송 사업 피해자 4명이 북한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4억엔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심 판결을 깨고 북한의 불법적 인권 침해로 발생한 침해 전체의 관할권은 일본에 있다고 판결했다.
가미카와 외상의 논리대로라면 이 역시 주권면제의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만약 북한 정부나 친북 단체들이 북한의 통치행위는 일본의 법집행관할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항의해 온다면, 일본 정부나 가미카와 외상이 어떻게 반박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또 거꾸로 서울고등법원의 위안부 손해배상 판결을 대환영하는 한국의 좌·우 민족주의자들이 도쿄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다. 두 판결은 국가 주권보다 초국가적 인권이 우선될 수도 있다는 판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21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시 부산의 3국 외교장관회의로 돌아가 보자. 본회의에 앞서 오전에 열린 한중 외교장관회의에서 박진 장관은 북한이 추가 도발을 중단하고 비핵화의 길로 나오도록 중국 측의 역할을 당부하고 중국 내 탈북민 강제 북송과 관련해 한국 정부의 엄중한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왕이 외교부장은 국내법·국제법·인도주의에 따라 적절히 처리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국내법은 물론이고, 국제법 또한 국가들 사이의 법이니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중국의 신성한 국가 주권과 탈북민의 기본적 생명권 사이의 갈등과 모순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난 5월 칼럼에서, 나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에 대해 테크노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초국가적 해결 방안을 촉구했다. 환경뿐 아니라 인권 문제도 마찬가지다. 낡은 민족주의적 관념과 결별하고, 모든 사람의 인권과 생명권이 ‘우리’의 국가 주권보다 소중하다는 발상의 전환 아래 동아시아연합을 구상할 수 있는 초국가적 상상력이 중요한 것이다.
21세기의 지구화는 상상력의 지구화이다.
조선일보 임지현 서강대 교수·역사학
12.07 개도국 눈높이 못 맞춘 K엑스포

▲윤석열 대통령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 관련 대국민 담화를 위해 단상으로 올라서고 있다./뉴시스
사후에 결과만 놓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쉽다. 2030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를 놓고 나오는 비난들이 대체로 그렇다. 직접 보고 들은 것 대신 외신 몇 줄과 데이터 몇 개, 그리고 추론에 기반해 가시 돋친 말들이 날아든다. 유치전 현장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결국 구구절절 옳은 듯싶다가 어쩔 수 없는 현실과의 괴리를 드러낸다.
국민총생산(GDP)이 사우디의 1.4배에 이르는 한국이 ‘오일 머니’를 핑계 삼는다는 비판도 그중 하나다. 사우디는 왕과 왕실이 석유 수입을 독점해 막대한 비자금과 비선 조직을 굴리는 나라다. 반면 한국은 국민이 감시하는 예산과 조직을 제한된 규모로 운영하는 ‘민주국가’다. 경제 규모와 무관하게 두 나라가 동원 가능한 ‘수단과 방법’엔 압도적 격차가 있다. 양국이 파리에서 벌인 각종 유치 행사만 살펴봐도 그 호화로움과 ‘답례품’의 수준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오일 머니는 핑계가 아닌 현실이었다.
차라리 돈으로 붙었더라면 참패는 면했을지도 모르겠다. 파리의 외교 현장에선 “한국의 득표 전략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쓴소리가 있었다. 우리 유치위원회는 사우디가 현금을 내세워 개도국 공략에 나서자 “물고기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주는 전략으로 차별화하겠다”고 했다. 1회성 지원보다 지속가능한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 주겠다며 한국과의 산업 연계, 대기업을 통한 투자 등 중장기적 경제 협력을 내세웠다.
백번 맞는 말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한 아프리카 외교관은 “내 임기 후에나 받을 ‘혜택’을 원하는 관료나 정치인은 드물다”며 “국가판 ‘자기개발서’를 내민 한국보다, 우리 눈높이를 맞춘 사우디가 더 반가웠다”고 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는 오만에 빠져 개도국들을 너무 ‘내려다봤다’는 말로 들렸다.
현장에는 다른 비판도 있다. 일부 유치위 인사는 의전 업무를 양산하고, 기업에 갑질을 하는가 하면, 냉정해야 할 판세 분석을 주관적 판단으로 덧칠했다. 동료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여성 교민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가라오케까지 간 공무원, 유치 활동보다 와인에 더 관심을 보인 민간 위원이 있었단 말도 나왔다. 무엇보다 “전문가보다 ‘낙하산’의 입김이 더 셌다”는 지적이 뼈아프다.
하지만 지난 1년 6개월간 우리 외교관과 기업 관계자가 치른 희생은 인정해줘야 한다. 180여 국과의 교섭을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 것도 모자라 주말마저 반납했고, 예정된 결혼식을 미룬 이도 있었다. 장관, 대사, 기업 총수 등은 물론 현지 말단 직원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다. 덕분에 한국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크게 넓어진 것이 사실이다.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가린 ‘백서’라도 만들어 다음번 유치전의 매뉴얼로 삼았으면 한다.
조선일보 파리=정철환 특파원
12.11 반 토막 난 전세계 北 외교 공관… 그들은 우회로를 찾고 있다
1980년대 100국서 현재 46곳… 유엔 제재로 외화벌이 한계
중·러 등거리서 무게중심 러시아… 김정은·푸틴 더욱 밀착
니카라과 등 서방 감시 적고 가상화폐 등 해킹 가능한 국가로

▲일러스트=박상훈
외교관 출신 탈북자 K는 재외공관 근무 시절 주업무가 대사관 운영 경비 마련과 주석궁 충성 선물 조달이었다고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이던 필자에게 고백하였다. 2000년대 중반 전 세계 60국에 북한 외교 공관이 개설되어 있었다. 평양 외무성에서 보내오는 예산은 전체 경비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경비는 현지에서 조달하였다. 이탈리아 대사관 등은 김씨 일가의 생활용품과 사치품을 매달 컨테이너에 실어 남포항으로 보내는 특수 과업을 수행했다. 경비를 조달하느라 공관원들은 허리가 휘었다. 합법과 불법적인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칭 외화벌이에 나섰다.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에서 면세 벤츠 자동차를 외교관용으로 구매하여 3개월 만에 시중 가격으로 되파는 수법은 약과다. 외교 시설을 불법으로 임대하고 세관을 무사 통과하는 외교 행낭을 활용하여 코뿔소 뿔 등 수상한 물자 거래에 나섰다. 외교관 여권을 활용하여 담배와 코냑, 금괴와 달러 뭉치, 보석 등의 불법 거래에도 관여하였다. 외교관인지 밀매꾼인지 구분이 모호했다.
평양 외무성은 군 및 보위부 등과 손잡고 마약과 무기 거래 등 대담한 외화벌이에 나서기도 한다. 아프리카 및 중동 국가를 중심으로 범죄, 테러 조직 및 일부 독재자와 비밀 거래를 하였다. 1994년 당시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였던 장승길은 무기 거래가 핵심 업무였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중동 미사일 판매 총책이었던 장승길을 주시하였고, 장승길은 미국에 망명했다.

▲그래픽=박상훈
북한이 경제난 속에서도 전 세계에 공관을 유지했던 이유는 1991년 유엔 남북한 동시 가입 전후로 국제 무대에서 남북한 표 대결 때문이었다. 북한은 1970년대 비동맹 세력의 지원을 받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안 된다’며 단독 유엔 가입을 추진하였다. 아프리카 국가들에 무상 원조를 약속하며 지지를 확보하는 데 국력을 쏟았다.
우리 정부도 1975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아프리카 가봉의 봉고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하는 등 대응 외교를 전개했다. 남북한이 각각 한반도 유일 합법 국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우방 국가 확보에 주력하였다. 남북한 모두 자국과만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에 주력하던 시기라 외교 수요가 크지 않은 국가들까지 공관을 설치하고 소모적인 경쟁을 전개했다. 국제 무대에서 치열한 남북한 경쟁 구도는 한·소 수교(1990) 및 한·중 수교(1992) 이후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완되었다.
159국과 수교한 북한은 최근 51년간 외교 관계를 이어온 우간다와 앙골라, 기니, 세네갈에 이어 스페인, 방글라데시, 네팔 등 최대 10개 지역에서 외교 공관의 방을 빼고 있다. 대사관 유지 국가는 46국 내외로, 과거 1980년대 최대 100여 국가와 비교하여 반 토막 수준이다. 향후 더욱 축소될 수 있다. 북한 외무성은 외교 역량의 효율적 재배치라고 밝혔지만 대체 신규 공관을 단기에 개설하지 못할 것 같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북한은 전방위 외교에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주체 균형 외교를 내세운 평양 외무성은 최근 들어 중·러 등거리(等距離) 전술에서 모스크바에 무게중심을 두는 전술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9월 푸틴과 김정은 정상회담 이전에 평양은 이미 6000억원 상당 포탄을 담은 2000여 개 컨테이너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선적시켰다. 크렘린궁의 러·북 무기 거래 부인에도 지난달 중순 러시아 텔레그램에 “북한 다중 로켓 발사기(MRL) 사거리 연장 포탄 지원 감사” 동영상이 올라왔다. 러시아 기술진이 평양을 방문하여 밀담을 나누더니 2차례 실패했던 정찰 군사위성 발사에 성공하였다. 든든한 큰 형님의 지원을 받아 무기 개발에 날개를 달았다. 유엔에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러와 연합하여 대북 제재 채택을 저지하는 반미(反美) 외교를 모색하고 있다.
다음은 경제난과 유엔 제재에 따라 공관 유지 효용성이 떨어진 것이 요인이다. 2016년 4차 핵실험 이후 발효된 유엔 안보리 제재안 11건은 북한의 불법 무역 및 외교 공관의 탈법 거래를 막았다. 중·러가 교묘하게 제재를 피하면서 거래에 나서지만 대놓고 위반하는 것은 쉽지 않다. 2019년 2월 미국과 북한의 하노이 노딜 이후 대북 압박은 촘촘해졌다. 외교 공관들은 임차료는 물론 운용 경비 조달이 어려워졌다. 아프리카 주재 공관들의 동상 제작이나 무기 수출, 의료 인력 송출 등을 통한 외화벌이들이 일부 차단되었다. 공관의 자력갱생 운영이 한계에 부딪혔다.
마지막으로 외교관들의 탈북 차단도 중요한 이유다. 이미 유럽과 동남아 국가 주재 북한 고위급 외교관들의 탈북 사례가 빈발하였다. 과거와 달리 공관 차석 대사급으로 평양 고위층과 연결된 외교관들이 탈북하는 사례는 북한 보위부를 긴장시켰다. 북한 외교관들은 자녀 중 하나를 평양에 인질로 남겨 놓고 해외로 나오는데 일부 고위층과 연결된 힘 있는(?) 외교관들은 이러한 규정에서 예외다. 가족이 모두 해외로 나온 외교관들은 국제 정세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언제든지 탈북할 수 있다.
향후 북한은 탈법 행위가 가능하고 해킹이 용이한 국가에 공관을 설치할 것이다. 중미의 니카라과와 같이 서방의 감시가 덜하고 러시아와 밀착되어 불법 거래로 크게 ‘한탕’할 수 있는 지역이다. 가상화폐 해킹 등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북한 사이버 범죄는 추적이 가능한 물리적인 외교 공간보다는 은밀한 온라인 지역을 모색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외교 수요 증가에 따라 향후 공관 12곳을 신설할 방침이다. 북한은 공관을 축소하고 우리는 확대할 방침이니 격세지감이다. 비록 국력 경쟁은 끝났지만 최근 평양이 ‘큰 형님’ 러시아에 매달리는 군사 결탁 외교는 새로운 동북아의 안보 위협 요인이다. 공관 수를 줄이는 대신 확실하게 ‘뒷배’를 봐주는 모스크바-평양 커넥션은 악마의 거래가 될 수 있다. 6·25 남침 직전인 1950년 초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남침 무기를 애걸복걸하던 김일성의 행태가 오버랩되는 이유다. 73년 전 기시감(旣視感)이 떠오르는 북한 외교는 과거와는 다른 엄중한 도전이다. 평양이 외교 공관을 철수하는 것은 상황 종료가 아니라 마약 유통 조직이 단속을 피해 새로운 우회로를 찾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북한 외교 전략 전술 변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조선일보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12-12 ‘친러 정책이 안보·에너지 위기 불렀다’ 獨사민당 후회
독일의 집권당인 독일사회민주당이 “러시아와 경제협력을 강화하면 러시아가 민주화할 것이라는 당의 가정은 잘못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민당은 10일 전당대회 폐막 때 발표한 결의문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등 주권 국가 정복을 추진하는 한 대(對)러 관계 정상화를 거부한다”고도 했다. 독일은 소련 시절부터 유럽의 대러 유화정책을 주도해왔고, 사민당은 독일 내 친러 정책의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국제 정세의 중대한 변화를 상징한다.
독일 정부는 빌리 브란트가 ‘무역을 통한 변화’를 내걸고 추진한 동방정책을 계승해왔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경협이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고, 러시아 민주화를 촉진할 것이라는 낙관론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파탄났다. 사민당 안팎에서 ‘친러 정책이 에너지 종속과 안보 위기를 불렀다’는 지적이 광범위하게 나왔고, 이번에 이를 수용한 것이다. 독일은 역성장하는 등 다시 ‘유럽의 병자’ 신세가 됐다. 러시아산 에너지에 중독돼 탈원전을 밀어붙였고, 공급이 끊기자 비싼 천연가스를 수입하면서 가스료는 11배, 전기료는 85% 상승한 탓이 크다.
사민당은 결의문에 “군대는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정책 수단”이라고 못 박았다. ‘무역이 평화’라는 브란트식 망상을 청산하고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의미다. 미국도 ‘중국의 경제성장이 민주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국가 전략의 잘못을 인정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 정부 이후 대북 햇볕정책을 고수한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 핵무기도 사실상 묵인했다. 정책 잘못을 후회하고 시정하는 것이 백 년 정당의 대전제임을 사민당에서 배우기 바란다.
문화일보 사설
12-12 트럼프·시진핑 리스크 함께 커진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2024 세계정세 중대한 변곡점
11월 美대선 후폭풍 예측 불허
민주주의-권위주의 대결 혼돈
가드레일 없는 美中 대치 예고
중국은 벼랑 끝 전술 강행할 것
모든 위험에 사전 대처 나서야
새해 2024년은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에도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년 11월에 치러질 미국 대통령 선거의 판도에 따라 미중 전략 경쟁과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경쟁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게다가 중국 나름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셈법이 따로 있어 미중 전략 경쟁도 더욱더 심해질 수 있다.
82세가 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내년 선거는 ‘동맹 재조정’을 지킬 뿐 아니라 미국의 제도 자체를 지키는 싸움이 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2기 정권은 1기보다 더 트럼프적일 것 같다’는 월터 R 미드의 말이 공감을 얻고 있다. 미국의 고립주의적 외교정책은 더욱더 강화될 가능성이 짙다. 트럼프는 일률적으로 10%의 높은 관세, 온난화 대책의 파리협정으로부터 재이탈, 우크라이나 지원 중단, 동맹국에 부담 증가 등으로 지금과 정반대인 외교정책을 모색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러시아의 공세는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유럽의 우크라이나 지원도 주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전쟁 상황에 따라 중동의 정세도 요동칠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도 북한의 공세와 중국의 대만에 대한 개입은 노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단합하고 세계 안정에 노력해야 할 시점에 미국의 정책 혼선은 국제관계의 일대 변혁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신뢰는 추락하면서 주요국을 포함한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증대할 것이다. 내년 미국 대선을 전 세계가 우려 속에 지켜보는 이유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미국이 연속성을 가질 가능성이 큰 것은 대중정책이다. 트럼프는 바이든보다 대중(對中) 강경정책을 주장하지만, 중국에 대한 입장 차를 놓고 ‘매파’와 ‘비둘기파’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앤터니 블링컨이 주장한 것처럼 ‘대중 관계에서 필요할 때는 경쟁하고, 가능할 때는 협력하고, 불가피할 때는 적대적으로’라는 전략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미국 정계는 컨센서스가 존재한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에서 보듯이 미국은 대중정책을 ‘관리되는 경쟁 구도’로 변화시키려 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군사 대화를 유지하고, 만일의 경우 핫라인 등으로 대화를 제안한 것이다. 미국이 적대적 경쟁 일변도에서 타협을 모색한 셈이다. 자동차의 레이스에 비유하자면, 경쟁이 지나쳐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드레일(위기관리체제)을 마련하자는 발상이다. 미국은 군사나 하이테크 부문에서는 강경한 대중정책을 유지하지만, 미중 갈등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립이 격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식한다.
미국이 대화 국면을 만들더라도 중국의 대미정책은 군사적으로는 강경해질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2개 전선(유럽의 우크라이나전쟁, 중동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미국이 곤란한 상황에 놓일수록 자국의 군사적 공간은 확대될 것이라고 계산한다. 시진핑 정권은 어디까지나 대등한 상대로서 미국이 중국을 대접하기를 바란다. 그 대국 의식은 미중 양국의 평온한 공존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어 국제관계의 군사적 대결을 부추길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미국이 주장하는 가드레일을 설치하게 되면 오히려 자국의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보기에 미국은 바다와 하늘에서 수시로 중국을 압박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은 오히려 충돌 위험을 방치함으로써 중국 주변에서의 미군 활동에 제동을 걸 수 있다고 인식한다. 이른바 벼랑 끝 전술이다. 앞으로 미중 간 군사 대화를 하더라도, 중국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성과는 미미할 것이다. 미국 대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대만 문제 등으로 양국의 긴장이 고조되면 중국은 항의의 표시로 군사 대화를 중단할 것이다. 미국이 재개를 요구하면 대가를 요구하면서 이득을 취하려 할 것이다. 즉, 중국은 미중 군사 대화를 위기관리 수단이 아닌 외교 협상용 카드로 보는 것이다. 내년은 대한민국에도 국제관계에서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 미국 리스크와 함께 중국 리스크도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슬기로운 대처가 요구된다.
문화일보
12-13 한·네덜란드 반도체 동맹 합의, 국내 지원 총력 다해야
한국과 네덜란드의 ‘반도체 동맹’이 형성됐다. 이로써 향후 반도체 시장을 좌우할 2㎚(나노) 기술 경쟁에서 함께 앞서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네덜란드를 국빈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13일 마르크 뤼터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반도체 동맹을 공식화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대통령실은 “양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평시에 각별한 협력을 도모하고, 위기 발생 시 즉각적이고 효율적인 위기 극복 시나리오를 함께 이행해나가는 관계”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윤 대통령이 12일 세계 유일 반도체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생산기업 ASML의 심장인 클린룸을 방문한 것은 상징적이다. 네덜란드의 자존심인 ASML이 핵심시설을 외국 정상에게 처음 공개하고,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이 함께한 것은 한국에 대한 네덜란드의 국가적 기대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도체 장비와 제조 분야에서 최강인 양국의 협력은 상호 보완 효과가 크다. 이날 3건의 양해각서(MOU)도 체결됐다. 삼성전자-ASML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 연구개발 센터 한국 설립, SK하이닉스-ASML의 EUV용 수소가스 재활용 기술 개발, 양국 정부의 첨단 반도체 아카데미 신설 등이다.
첨단 반도체는 AI·양자·바이오·첨단무기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자 안보 자산이다. 이번에 최첨단 반도체 장비를 선점할 기회가 마련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반도체 전(全)주기를 아우르는 나라로 도약할 길이 열리게 됐다. 대만 TSMC와의 치열한 2㎚ 기술 경쟁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윤 대통령은 “양국 협력의 성공을 위해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했다. 지난 3월 반도체 설비투자 세액공제 관련 K-칩스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부지·전력·용수 등 남은 문제도 많다. 지방자치단체 몽니도 여전하다. 반도체 산업은 이미 국가 대항전이 됐다. 반도체 동맹 효과를 극대화할 범국가적 총력 지원이 더 절실해졌다.
문화일보 사설
12-14 반도체동맹, 후속 조치가 중요하다

정인교 전략물자관리원 원장
윤석열 대통령의 네덜란드 방문은 1961년 수교 이래 우리 정상의 첫 국빈방문이다. 전략적 동반자관계 격상 1주년을 맞아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외교·산업 장관이 참여하는 2+2 장관급 대화체를 신설키로 했다. 또, 경제안보 대화 채널을 신설해 공급망 모니터링 협력 및 정보 교환 네트워크 구축, 정책 연구기관 간 교류 확대를 하기로 했다.
‘한-네덜란드 경제안보 협력’을 포함한 다수의 양해각서(MOU) 체결, 투자의향서(로테르담 콜드체인 물류센터), 원전사업 타당성조사 연구용역 등 다양한 성과를 거뒀다. 양국은 향후 인공지능(AI), 양자역학, 사이버 보안, 스마트 농업, 뇌 연구 등 첨단 미래 전략 분야에 대한 기술 협력을 추진할 것이다.
최대 관심 분야는 반도체동맹과 경제안보 대화다. 네덜란드는 우리나라 반도체 제조장비의 총수입액 중 27%를 차지한다. 윤 대통령은 이번 방문을 ‘한-네덜란드 반도체동맹’으로 규정했다. 세계 1위 반도체 제조장비 기업인 ASML을 방문해 첨단 반도체 인력 육성을 위한 아카데미 개설에 협력하기로 했고, 장비 공급망 협력에도 합의했다.
ASML은 세계 반도체 제조장비 기업 중에서도 최첨단 기업이다. 이 기업만이 7나노(㎚) 이하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할 수 있다. 고사양 EUV 장비는 대당 2000억 원이 넘는다. ASML은 이미 2나노 공정이 가능한 EUV 노광장비까지 개발했다. 지난해 생산설비를 배증했지만, EUV 장비는 까다로운 생산 공정으로 출하 기간이 긴 데다 수요가 폭증해 늘어선 줄이 매우 길다. ASML은 현재 반도체(위탁생산) 제조 기업은 물론, 재진입 기업의 러브콜을 받는 ‘슈퍼 을’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ASML은 대(對)한국 투자도 적극적이다. 2025년까지 2400억 원을 투자해 경기도 화성에 반도체 장비 클러스터인 ‘뉴 캠퍼스’를 구축한다. 여기에는 EUV 장비 부품 재(再)제조센터와 기술트레이닝센터 등이 운영될 예정이고, 중장기적으로 연구·개발(R&D) 센터 및 제조시설 설립도 검토 중이다. 이번에 체결된 양국 간 첨단 반도체 아카데미 협력 MOU는 향후 ASML의 뉴 캠퍼스 운영과도 연계될 수 있다.
미국의 경제안보 및 기술 패권 정책의 핵심 분야는 첨단 반도체다. 미국은 중국과 같은 우려국으로의 첨단 장비 유출을 막고 있다. 미국의 수출 통제 정책으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사활을 건 설비 경쟁 국면에 진입했다.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가 3나노 반도체 생산 경쟁에 들어간 상태에서 2나노 EUV 공정 장비를 먼저 확보하는 기업은 앞으로 경쟁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텔,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도 EUV 장비 구매 대열에 뛰어들었다. 따라서 기업의 첨단 EUV 장비 확보를 위해 국가적 지원과 외교 활동은 절실하며, 이런 의미에서 이번 윤 대통령의 네덜란드 국빈방문은 아주 적절했다.
오늘날 반도체는 기술을 넘어 안보·전략 자산으로 통한다. MOU 차원에서 시작한 반도체동맹을 어느 수준으로 견인할지는 경제안보 대화에 달렸다. 경제안보 대화를 통한 네덜란드와의 파트너십 강화는 첨단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유지와 우리 정부의 가치 기반 글로벌 중추국 비전 실현에 기여할 것이다.
문화일보
12.14 집단사고의 오류가 부른 참사, 발상의 전환 필요해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는 국민에겐 실망과 충격을, 나라밖엔 국격의 실추라는 망신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더 참담한 건 투표 당일까지도 판세를 오판하고 역전 드라마를 믿은 ‘정보의 실패’와, 할 수 있다는 희망 고문으로 국민과 여론을 호도하며 국정운영의 미숙과 무능을 드러낸 점이다. “윤석열 정부가 집단 편견과 확증편향에 빠졌고, 이 때문에 국민도 속았다”(The Diplomat)는 외신 보도가 과장이 아니다.
정부는 엑스포 유치를 위해 대통령과 총리·장관·기업 총수 등이 지구를 495바퀴(1989만1579㎞) 돌았고, 182개 국가의 대표급 인사 3472명을 만났다고 밝혔다. 국가 예산만 5744억원이 들었다. 국가적 역량과 에너지를 모두 갈아 넣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받아든 성적표가 29표(총 165개국 투표)다. 열세로 판단, 사실상 중도 포기하다시피 한 이탈리아(로마 17표)보다 12표 더 얻었을 뿐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집념·의욕 앞서 정세 잘못 판단
대통령 사과…물러난 참모 없어
냉철한 판단과 전략적 선택 절실
전시 행사보다 퍼스트 무버 돼야
윤 대통령은 “모든 것은 저의 부족 탓”이라고 사과했다. 기업 총수들을 이끌고 “Busan is beginning(부산은 다시 시작한다)”을 외쳤다. 부산시도 2035 엑스포 재도전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자”고 해서 모든 문제가 눈 녹듯 사라지고 뒤죽박죽 난맥상을 보인 국정 시스템이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을까.
“대통령 유엔 방문이 판도 바꿔” 주장

▲2030년 엑스포 개최를 위해 뛰었던 한국 대표팀이 지난달 28일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 1차 투표에서 부산이 탈락한 것으로 드러나자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사진 국무총리실]
한국이 엑스포 유치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난해 7월,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세론을 굳힌 상태였다. 사우디 실권자 MBS(무함마드 빈살만)는 한 손엔 두둑한 오일 머니를, 다른 한 손엔 ‘비전 2030’이란 청사진을 들고 유치전을 진두지휘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 이어 중국·이스라엘·튀르키예 등이 줄줄이 공개 지지 선언을 했다. 특히 프랑스가 유럽연합(EU)의 일원인 이탈리아를 외면하고 사우디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세가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후발 주자인 한국 정부는 올해 들어 “엑스포 판도가 바뀌고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지난 9월 윤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이 분수령이었다. 장성민 특사 겸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윤 대통령이 47개국 정상을 만났고 상당수 중립 성향 국가들이 부산 지지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냈다”며 “엑스포 유치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육개장에 밥 한 숟갈 말아먹고 저녁 늦게까지 정상들과 만났다. 부산을 글로벌 자유무역항으로 성장시키려는 대통령의 열망과 신념이 엑스포 유치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낙관론을 폈다. 이후 “사우디와 박빙 승부”(박형준 부산시장)라거나 “어느 정도 따라왔다”(한덕수 총리), “2차에서는 이길 수 있다”(박진 외교부장관) 같은 장밋빛 전망이 이어졌다. 구두 지지나 외교 서한을 보내온 국가가 50개국 이상이라는 분석이 대통령실에 보고됐고, 결선투표에서 로마를 찍었던 표와 리야드 이탈표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사우디가 3분의 2가 넘는 119표를 얻어 1차에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 불러
“정보를 객관적이고 신중하게 판단했다”(박진 장관)는 설명과 달리 현장 실무자들과 지휘부 사이엔 상당한 온도 차가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유치전에 관여한 정부·기업 실무자들 사이엔 “열세라고 판단한 현장 보고서가 위로 올라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라거나 “제대로 뛰어보지도 않고 비관적 보고를 한다는 질책이 떨어지니, 좀 더 노력하면 상대국이 부산을 지지할 의향이 있는 것처럼 여지를 두고 보고서를 쓰게 된다”는 볼멘 얘기가 나왔다.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을 불렀다는 지적이다.
엑스포 유치위와 산자부·외교부·국정원 등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특히 해외 정보망을 통한 냉철한 정세 분석을 해야 했을 국정원이 유치전이 한창일 때 지휘부 간 알력 다툼으로 분란에 휩싸였다는 건 뼈아픈 대목이다. 일각에선 대통령실에 설치된 부산 엑스포 유치 특임기구의 운영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부산 엑스포 유치를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대통령실에 미래전략기획관실을 신설, 장성민 전 의원을 기획관에 임명했다. (현재는 대기발령 상태다.) 장 전 기획관은 대통령 특사를 겸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남미 카리브 연안국 등 “100개 이상의 국가”를 방문했다. 전략을 짜고 정보를 수집·평가하고 대통령 보고까지 하게 되면서 사실상의 컨트롤타워처럼 인식됐다. 오히려 실질적 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유치위 사무총장(윤상직 전 산자부장관)이 로펌 근무를 이유로 비상근으로 일해 온 것과 대비된다.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우디 지지 국가의 지도부를 비밀리에 만나보면 공개 지지한 적 없다고 한다. 한국 지지 국가가 늘고 있다”(장 전 기획관)는 아프리카 출장 보고를 듣고 “엑스포 유치 현황과 전략을 국무위원들에게 설명하는 게 어떠냐”고 했을 만큼 힘을 실어줬다.
국제 행사 유치 실무에 밝은 외교가에선 “대통령실이 직접 실행 업무에 관여하면서 상황 평가와 보고의 균형추가 무너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유치전 사정에 밝은 전직 대사는 “대통령 어젠다의 실행 동력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며 프로세스를 관리해야 할 수석급 비서실이 직접 교섭·출장·지휘·보고를 떠맡게 되면 정보를 왜곡하거나 잘못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고 동시에 지휘도 하는 통로로 자리 잡으면 전권을 갖고 지휘해야 할 유치위나 다른 조직은 보조적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시스템 문제를 제기했다. 유럽 지역 공관장을 지낸 다른 전직 외교관도 “국제사회는 실리로 움직인다. 이번에 우리를 밀어주면 다음에 도와준다는 약속하에 철저히 기브 앤드 테이크(주고받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냉철한 상황 파악을 못 하면 쉽게 오판할 수 있다”며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과 실제 표가 오가는 건 전혀 다른 얘기”라고 말했다. 엑스포 유치에 대한 집념과 의욕이 앞서 객관적 정세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집단 사고의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우디와 빅딜 설로 혼선 빚어
엑스포 유치전 와중에 사우디와의 이면 합의 빅딜 설이 흘러나오면서 혼선을 빚은 것도 미스터리다. 윤 대통령은 투표 한 달을 앞둔 지난 10월 사우디를 국빈 방문, MBS와 정상회담을 갖고 건설·인프라 분야 협력 강화 등을 담은 한·사우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세일즈 외교의 일환이었다고는 하나, 표를 놓고 대결을 벌이다 별안간 국제사회에 잘못된 사인을 줄 수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내 재계에도 이면 합의설이 파다했다. 의도치 않은 오발탄이었다면 외교 전략의 부재이거나 컨트롤타워의 무능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외교적 자산으로 생각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었다”(한 총리)며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외칠 게 아니라 구멍 난 국정 시스템부터 손봐야 한다.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했는데도 물러나는 참모 하나 없고, 책임 있는 인사들이 오히려 진급하거나 총선에 차출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서울올림픽 유치 당시 국회 문공위원장을 지낸 이영일 전 의원은 “과거엔 장관·수석이 자신이 대통령인 것처럼 뛰었다”며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서 대통령이 제대로 된 보좌를 받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2035 부산 엑스포는 가능할까
이번 실패의 이면엔 ‘중국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 못 한 측면도 크다. 2035년 엑스포 유치를 노리는 중국은 ‘2025 오사카-2030 부산’ 구도는 부담이다. 그래서 비동북아 국가인 사우디를 지지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슬람 같은 강력한 종교 연대나 지역협력 연대 같은 ‘뒷배’가 없는 한국은 한표 한표 쌓아가는 외교를 해야 하는데, 아프리카·중동·남미에 상당한 교두보를 확보한 중국과의 표 대결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부산의 재도전을 전략적인 틀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근래 외교무대에선 “한국이 출마하지 않는 데가 어딘지 알려달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들 간 국제대회 유치 경쟁, 유엔 등 국제기구의 선출직 출마가 남발되면서 피로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ILO(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에 출마해 참패했고,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연임에 실패한 것도 이런 정서와 무관치 않다.
높아진 국격만큼 냉철하게 정세를 따져보고 전략적 선택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엑스포 유치전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외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K팝·K드라마 등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높아졌는데 왜 엑스포 같은 전시성 행사에 집착하느냐”며 “라스베이거스의 CES(소비자가전쇼)나 바르셀로나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같이 한국의 발전한 IT기술과 독창성으로 미래지향적인 퍼스트 무버로 가는 게 낫지 않은가”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면 된다는 정신승리법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2.15 북한이란 ‘루비콘강’ 건넌 러시아

기원전 49년 명령을 어기고 로마로 진군하던 줄리어스 시저는 당시 반역죄에 해당하는 그 강을 건너겠다고 장군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로 루비콘강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올랐으며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난 30년간 러시아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 차원에서 동북아에서 이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때론 미국과 한국에 압력을 가해 북한에 양보하도록 하면서도 북한의 유엔 안보리 결의안 위반에 대해서는 눈 감고 제재 이행에는 소홀했다.
러, 북에 정찰위성 기술 제공한듯
SLBM 프로그램 지원도 시간문제
한·미·일, 러가 대가 치르게 해야
그러나 러시아도 중국도 그동안 한국·일본·미국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무기를 지원하지는 않았다. 러시아에 지정학적 리스크가 너무 큰 데다 많은 러시아 전문가와 관료가 북한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러시아가 포함된 핵무기 보유 클럽에 들어오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러시아가 오랜 관례를 깨고 지난주 루비콘강을 건넜다. 지난 8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웹사이트(Beyond Parallel)에 발표된 상업 인공위성 이미지를 활용한 리포트를 보면 미국 백악관의 경고에도 북한이 나진항에서 선박을 통해 러시아로 무기를 보내고 있다. 한국 국가정보원은 러시아가 최근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를 위한 기술을 지원했고 반대급부로 북한산 포탄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제 한국과 미국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다지 효력 없는 한 가지 선택지는 러시아를 회유해 대북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다. 푸틴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전쟁 승리, 미국의 동맹 네트워크 와해, 그리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지만 북한의 핵 위협 봉쇄다. 사실 어떻게 보면 푸틴 입장에서는 북한의 위협을 증대시켜 미국의 전략 역량을 유럽과 우크라이나에서 거둬들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채찍도 있다. 한국은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많은 민주주의 국가와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러시아의 협력을 더 끌어낼 가능성도 없다. 양안 관계에서 중국이든 북한의 도발이든 그 어떤 독재 국가가 무력을 사용하려 한다면 민주주의 국가의 단결만큼 효과적인 억제는 없다.
미국의 동맹 및 파트너국의 우크라이나를 위한 연대는 민주주의 국가를 공격하면 경제 제재와 지정학적 외톨이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이러한 확신이 부족해 보이지만, 전 세계 경제·기술·외교 최강국의 힘을 모두 합치면 러시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침략자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러시아의 유엔 안보리 제재 위반에 대해 가할 수 있는 대가에는 적어도 모든 미국 동맹국들의 공동 규탄과 추가적인 징벌적 경제 제재를 포함해야 한다. 러시아의 거부권으로 인해 안보리에서 다뤄지긴 힘들겠지만, 추가 제재에 대한 법적 근거는 분명하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따른 제재에 포함되는 무기를 실어 나르는 해양 선박 금지와 확산방지구상(PSI)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의 무기 거래는 결의안 이행을 명백히 저해하는 행위다. 러시아의 호전성을 볼 때 해양 선박 금지는 집행 측면에서도,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리스크가 크다.
그러나 억제 측면에서 러시아의 긴장 고조 행위에는 상응하는 조치가 따라야 한다. 아직은 북·러의 무기 거래가 북한이 러시아에 포탄과 재래식 무기를 공급하고, 러시아가 북한에 로켓 발사 관련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프로그램도 지원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의 위성 발사 기술뿐만 아니라 핵무기에 필수적인 재진입 기술 지원까지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러시아가 과연 어느 지점에서 선을 그을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유엔 안보리 제재 위반과 미국·한국·일본의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 러시아가 심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너무 늦기 전에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을지도 모르지만, 억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중앙일보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국 CSIS 키신저 석좌
12-15 잘해온 안보외교마저 허물 우려 키우는 새 라인 하마평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대를 맴돌지만, 외교·안보 분야에선 잘했다는 평가가 50%를 넘나든다. 전임 정부가 망가뜨린 한미동맹을 정상화한 데 이어 한미일 협력 틀을 만들어낸 것이 지지율을 받쳐준 기반이다. 그런데 부산엑스포 유치전 참패 후 박진 외교부 장관 경질설이 확산하고, 김규현 전 국가정보원장 후임 인선과 맞물리면서 외교 라인의 대폭 변화가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하마평이 나도는 가운데 몇 대목에선 우려가 앞선다.
첫째, 외교장관에는 조태열 전 유엔 대사가 유력하다고 한다. 윤 대통령과 같은 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조 전 대사는 유능한 통상전문가로 분류된다. 동맹 외교를 비롯해 4강과의 양자 협상 경험은 많지 않다. 북·중·러 밀착에 따른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란 점에서 외교사령탑은 동맹 및 양자 외교 전문가를 선택하고, 다자 외교와 통상외교는 2차관과 통상교섭본부 등을 활용하는 게 낫다. 이른바 ‘북미통’인 장호진 현 1차관 얘기가 새삼 나도는 것도 이런 고심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둘째, 국정원장에는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이 거론된다는 데,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지난 4월 한미정상회담 전야 블랙핑크 공연 문제 등으로 흔들리던 국가안보실을 안정시킨 조 실장을 8개월 만에 교체하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 주미 대사로 내보낸 후 9개월 만에 불러들였다가 또 내보내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엑스포 오판 책임 등과 관련한 온갖 뒷얘기도 심상찮다. 국정원은 대공 수사권 문제 등 정무적 감각, 내부 분란을 해결할 결단력을 갖춘 정보·안보 전문가를 기용하는 게 옳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리스크까지 가중되는 상황에서 그를 국정원으로 보내는 것은 외교 자산의 발을 묶는 결과도 낳는다.
셋째, 외교부 2차관엔 손지애 외교부 문화협력 대사가 거론된다. 유창한 영어와 탁월한 언론 감각 등은 장점이지만, 경제안보 외교의 복잡성과 중대성을 고려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마지막으로, 윤 대통령이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을 그렇게 높이 평가한다면 역설적으로 그를 안보실장이나 외교장관으로 기용하는 게 정직한 인사일지 모른다.
문화일보 사설
12-16 “北, 핵공격시 김정은 정권 종말”…한미, NCG 2차 회의 공동성명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3.04.27. 뉴시스
한미 양국이 1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제2차 핵협의그룹(NCG) 회의를 열어 “미국 및 동맹국에 대한 북한의 어떠한 핵 공격도 용납될 수 없고, 김정은 정권의 ‘종말’로 귀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핵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확장억제의 실행력을 높이기 위한 미 전략자산의 전개 계획을 비롯해 공동기획, 연습·시뮬레이션·훈련 계획도 논의됐다. NCG는 윤석열 대통령의 4월 국빈 방미 당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채택한 ‘워싱턴선언’을 이행하고 북핵‧미사일 위협에 맞선 확장억제 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만든 한미 양자 협의체다.
한미 당국은 언론 성명에서 “핵을 포함한 모든 범주의 미국 역량으로 뒷받침되는 대한민국에 대한 확장억제 공약이 확고함을 재확인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북핵 도발시 김정은 정권의 ‘종말’을 언급한 뒤 “한국에 대한 북한의 어떠한 핵 공격도 즉각적, 압도적, 결정적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NCG 대표들은 회의에서 확장억제 실행력을 높이기 위한 향후 미 전략자산 전개 계획도 함께 논의했다. 7월 NCG 출범에 따라 7월 미 전략핵잠수함 USS 켄터키함의 부산항 기항, 10월 B-52 전략폭격기의 한반도 상공 비행 및 착륙, 11월 미국 ICBM 시험 발사의 공동참관 등이 이뤄진 상태다. 정부 관계자는 “미 핵심 전략자산의 빈번한 전개를 통해 북한의 핵 미사일 도발에 대한 강력한 억지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국은 △지침 △보안 및 정보공유 절차 △위기시 및 전시 핵 협의절차 △핵 및 전략기획 △한미 핵 및 재래식 통합(CNI) △전략적 메시지 △연습·시뮬레이션·훈련·투자 활동 △위험감소 조치 등을 논의했다.
미국에서 처음 열린 이번 회의에서 양측은 7월 서울에서 열린 1차 NCG 회의 이후 빈번한 실무회의를 거쳐 한미 간의 핵 억제 협력이 심화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NCG 대표들은 이어 지난달 한국의 범부처 관계관들을 대상으로 핵 억제 집중교육 과정이 개최되는 등 양국 범부처 협력이 실질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과 마허 비타르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 및 국방정책 조정관이 이번 회의를 주최했으며, 허태근 국방부 국방정책실장과 비핀 나랑 미 국방부 우주정책수석 부차관보가 협의를 주도했다. 한미 NSC·국방·외교·정보·군사당국 관계관들도 회의에 참여했다.
NCG 대표들은 2024년 전반기 NCG 임무계획과 향후 주요 이벤트를 승인했다. NCG 대표들은 NCG의 과업과 진전사항을 양국 대통령에게 각각 보고하기로 했다. 제3차 NCG 회의는 2024년 한국에서 개최된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12-18 한미 핵·재래戰 ‘작전계획 연계’ 신속히 구체화해야
북한의 핵 공격 가능성에 실질적으로 대비하는 일이 화급해 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북한 핵무기 역량은 급속히 고도화하고, 헌법까지 바꾸며 핵 공격 의사를 노골화했다. 둘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 가능성과 미국 우선주의 경향 확산 등을 볼 때 마냥 핵우산 ‘공약’에만 기댈 수는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핵협의그룹(NCG) 2차 회의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재래식 무기에 한정된 한미 연합사령부 ‘작전계획 5015’와, 핵무기를 총괄하는 미국 전략사령부 작전계획이 연계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난 15일 NCG 회의 후 “양국이 핵전략 기획·운용 가이드라인을 내년 중 완성하고, 연합훈련 때 핵 작전 시나리오를 포함해 함께 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내년 8월 말 시작될 을지자유의 방패(UFS) 연습은 핵과 재래 전력이 함께 운용되는 첫 훈련이 될 전망이다. 이 경우, 그 동안 별개로 작동하던 연합사 ‘작계 5015’와 미 전략사 작계의 통합 운용도 이뤄지게 된다. 이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내년 상반기 중 3차 NCG 회의에서 확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작계 5015에는 북한 침략에 대한 전면적 반격은 물론, 도발 징후 시 김정은 집무실과 영변 핵시설 등 700곳을 사전 타격한다는 점도 명시돼 있다. 현무-5 등 핵무기급 고위력 무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재래식 무기를 사용한 작전일 뿐, 핵무기 반격은 포함되지 않았다. 연합사 권한 밖이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는 이런 한계를 넘어섰다.
한미가 핵 작전의 공동 계획·실행을 서두르는 것은 미국 대선 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선언에 명시된 확장억제 강화 약속을 양국 정치 변화와 무관하게 이행하기 위한 ‘안전 장치’의 의미도 있다. 한미 정상 간 ‘핵 핫라인’ 합의도 그 일환이다. 북한이 17∼18일 잇달아 탄도미사일 도발을 하면서 “(NCG 합의는) 노골적인 핵 대결 선언”이라며 맹비난한 배경일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한미 ‘일체형 핵우산’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최종 목적은 북한의 핵무기 우위를 완전히 무력화(無力化)하는 일이다.
문화일보 사설
12-18 사우디에 밀린 건 엑스포만이 아니다

이미숙 논설위원
사우디 원전 연료시설 허용 美
韓엔 핵확산 우려론 펴며 반대
核보유론은 확장억제로 눌러
미국의 한국·사우디 이중 잣대
빈 살만 같은 집요한 협상으로
북핵에 맞설 핵 능력 확보해야
대한민국이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전에서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에 큰 표차로 패배한 것은 충격적이다. 2차 투표에서 20여 표 차이로 승리한다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장담이 있었기에 더 그렇다. 올해 사우디에 밀린 것은 엑스포만이 아니다. 미국을 상대로 한 핵 외교에서도 사우디는 원자력발전소 연료인 우라늄농축시설을 사실상 얻어냈다. 한국이 우라늄 농축을 제기할 때마다 뜯어말렸던 미국은 사우디가 이스라엘과의 수교 조건으로 핵연료 시설을 내걸고 버티자 들어줬다. 엑스포 유치 실패는 사우디의 오일 머니 때문이라고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후자는 명백한 외교적 패배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외교·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북핵이 심각해지면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미국엔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워싱턴의 압박 탓인지 대통령실은 이내 “핵 보유 추진 뜻이라기보다 국제사회에 북핵의 심각성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수위를 낮췄다. 10여 일 후 윤 대통령은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현재로서는 우리가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를 존중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발언 후퇴(dial back)”라고 WSJ가 평했을 정도로 톤을 확 낮췄다.
한미 양국은 4월 한미 정상회담 때 ‘워싱턴선언’을 발표했는데, 당시 외교부는 ‘미국이 핵을 포함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한국을 지원한다’는 것을 약속한 문건으로 기존의 확장억제가 한층 더 강화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정상회담 직전 백악관 고위 인사는 백그라운드 브리핑에서 “한국이 자체 핵 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확장억제 강화 조건으로 한국이 핵 개발 포기 의사를 밝힌 게 이 선언의 핵심이란 얘기다.
미국은 윤 대통령의 자체 핵 개발 의지를 외교적 압박과 확장억제 강화란 당근과 채찍으로 주저앉힌 반면,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MBS)의 우라늄농축시설 요구는 수용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권위주의 왕정국가인 사우디의 외교 상황을 단순 비교하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협상을 시도조차 않은 채 백기를 든 것과 달리 사우디는 핵 강국의 꿈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년에 걸쳐 집요하게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물론, 미국 측 인사들은 사우디에 들어설 우라늄농축시설은 100% 미국 기술로 지어지고 통제도 미국이 완벽하게 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사우디 땅에 지어질 뿐 미국에 의해 운용되는 농축시설이라는 얘기인데 그럴듯한 해명일 뿐 설득력은 없다. 핵무기 비확산은 세계 평화를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이지만, 이스라엘-사우디 수교가 미국의 중동 전략에 중요하니 빈 살만의 요구를 예외적으로 수용하겠다는 편의적 발상이다.
미국은 늘 그랬다. 핵 비확산을 절대불변의 원칙처럼 강조하다가도 언제든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꿨다. 핵무기를 개발한 인도와 원자력협정을 맺었고, 중국 지원으로 핵실험을 한 파키스탄에 대해서도 제재를 하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도움이 필요하자 슬그머니 풀었다. 최근 트랜스퍼시픽다이얼로그(TPD) 회의 때 필자가 ‘워싱턴 비확산 진영의 구루’로 통하는 로버트 아인혼에게 “미국이 한국의 우라늄 농축에 반대하면서 사우디에 농축시설을 제공하는 것은 이중잣대(double standard)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한 채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 후 사우디 프로젝트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했다. 또, “사우디에 농축시설이 만들어지면 한국에도 반대할 명분이 약해질 것”이라고만 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미국에서 북핵 위협 감소를 앞세우는 논객이 부쩍 많아졌다. 핵 감축 대가로 대북 제재를 완화하자는 얘기로, 북한과 군축협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핵 능력을 저지해온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대우하는 것은 동맹의 배신이다. 윤 대통령이 연초 독자 핵 보유 의지를 밝힌 것은 의미가 있지만, 빈 살만식(式) 협상 한 번 하지 않은 채 ‘핵우산 신뢰’로 돌아선 것은 유감스럽다. 미국과 얼굴 붉히며 협상을 해본 경험이 없는 인사들이 대통령 귀를 막고 있는 탓일까? 사우디에 번번이 밀린 해를 보내며 든 생각이다.
문화일보
12.20 “트럼프 당선되면 힘이 곧 정의인 세상 맞게 될 것”
미·중 정상회담 이후 2024년 세계 정세

▲미·중 정상이 지난달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양국의 이견이 충돌로 이어지지 않게 상황 관리하는 데 합의했다. 새해 미·중 관계는 미 대선과 중국 국내 경제 등 서로 내부 문제에 집중하느라 안정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AP=연합뉴스]
세상은 바람 잘 날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지구촌은 내년에 선거의 해를 맞는다. 무려 40개 국가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우선 1월 13일 대만 총통선거도 관심이지만 11월 5일 미 대선은 그 결과에 따라 세계를 또 한 번 요동치게 할 것이다. 한중비전포럼은 지난 18일 서울 HSBC 빌딩에서 ‘미·중 정상회담 이후 2024년 세계정세’를 주제로 모임을 갖고 내년도 한·중 관계와 국제 정세 등을 살폈다.
대만 선거 결과 큰 영향 없을 듯
러·우 전쟁은 출구 찾기 본격화
중국, 분배보다 성장 우선할 것
트럼프 집권 대비한 정책 필수
트럼프 승리, 1930년대 혼란 예상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외교부 장관
▶윤영관(사진)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전 외교부 장관(발제)=새해 미·중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미국은 대선의 해를 맞았고 중국은 국내 경제의 어려움으로 서로 상황 관리에 협력해 갈 듯하다. 1월 초 대만 선거가 있지만, 누가 당선돼도 현상 유지의 틀을 벗어나진 않을 전망이다. 국민당이 이기면 양안 관계가 회복될 것이고, 민진당이 승리해도 가시적인 독립 추구로 상황을 악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유럽에 전쟁 피로증후군이 퍼지고 있어 2024년엔 종전 협상 등 출구 전략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미국의 리더십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중동 사태는 전쟁 종결→가자 지구 거버넌스 확립→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공존 순서로 해결될 텐데, 관건은 바이든 미 정부가 대선 캠페인 와중에서 과연 어느 단계까지 진전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미 외교가 고립주의로 회귀하는 대신 중국과 러시아 등의 영향력은 확장될 것이다. 미국의 국제정치적 리더십이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며 세계 도처의 민주주의 역시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무시되고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극심한 보호주의와 함께 다른 나라 경제를 희생시키며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근린 궁핍화 정책이 만연할 것이다. 트럼프의 당선은 국제 질서를 1930년대의 혼란기로 밀어 넣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에 대한 공세 거세질 듯
▶신정승 동서대 석좌교수, 전 주중대사(사회)=세계가 맞고 있는 변화의 시기 그 중심에는 미·중 경쟁이 위치한다. 특히 내년은 미 대선의 해로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중국에 대한 공세적 비판이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관계가 과연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트럼프가 당선되면 동맹과 파트너를 중시했던 바이든의 외교 정책엔 어떤 변화가 생길까. 또 한반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깊이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겠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2024년은 4불(不) 즉 불확실성, 불안정성, 불명확성, 불가예측성의 한 해가 될 전망이다. 가장 큰 변수인 미 대선과 관련해 바이든과 트럼프의 세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에 잘 대처해야 한다. 에너지와 기후 정책, 국제기구와의 협력, 동맹과의 파트너십 등이다. 트럼프가 당선돼 미국과 유럽이 기후나 에너지 등 미래 이슈에서 분열할 경우 한국은 가치외교 차원에서 어떻게 유럽과 접맥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트럼프는 또 바이든의 전략적 인내와는 다른 방식으로 북한에 접근할 수 있고, 동맹인 한국에 방위비 증액 등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선택지 좁히지 말아야
▲지난 18일 서울 중구 HSBC빌딩에서 열린 한중비전포럼.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 위성락 한반도평화만들기 사무총장, 신정승 전 주중대사, 이하경 중앙일보 대기자, 최필수 세종대 교수,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 문흥호 한양대 교수, 김재철 가톨릭대 교수, 김진호 단국대 교수, 이희옥 성균관대 교수. 김종호 기자
▶김재철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미·중 경쟁과 관련해 ‘전략 경쟁’이나 ‘패권 경쟁’과 같은 용어 사용에 신중히 해야 한다. 최근 미국조차도 미·중 경쟁의 성격을 장기적이고 관리적인 경쟁이라 말한다. 전략 경쟁이라고 하면 미국이 중국을 봉쇄하고 높은 상호 의존을 해소해야 하는데 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미국 스스로에 자멸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한데 한국에선 이 말이 너무 일상화돼 있다. 이는 한국의 선택지를 너무 좁히는 행동이다. 미·중이 피할 수 없는 전략 경쟁 중이라고 본다면, 자연히 누가 승리하는지에 집중하게 되고, 미국이 이긴다는 전제에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는 결국 동맹 강화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김진호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대만 총통선거가 미·중 대리전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미·중 양국은 손해 보지 않는다. ‘하나의 중국’을 말하는 국민당이 승리하면 양안(兩岸) 관계가 안정돼 미국이나 중국 모두 충돌의 위험이 사라진다. 대만의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이 이길 경우에는 미국은 대만을 중국의 압박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게 된다. 한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입장에선 민진당을 외부의 적으로 규정하며 중국 내부를 단속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어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중국 자원 확보에 집중해야
▶문흥호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우리가 미·중 관계를 볼 때 이 두 나라는 수교 이래 늘 국내 정치적 이유로 만났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미·중은 만남 속에서 갈등을 조절하면서도 자기 원칙은 고수하는 일정한 패턴을 보여왔다. 대만 총통선거와 관련해선 대만의 선거 지형이 크게 바뀐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만 유권자들은 미·중을 의식하기보다 각 후보에 대한 평가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국민당=친대륙’ ‘민진당=독립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접근이 줄었다. 어떤 후보가 본인에게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를 따지고, 후보의 능력과 자질을 중시하고 있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얼마 전 열린 중국 경제공작회의에서 먼저 세우고 나중에 부순다는 키워드 ‘선립후파(先立後破)’가 나왔다. 이는 내년도 중국 경제 기조가 분배 중심이 아니라 성장이 우선할 것임을 뜻한다. 중국 경제가 위기인가를 보려면 중국 내 미국 기업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 테슬라·애플·포드·GM 등은 왜 중국서 떠나지 않나. 이런 기업들이 중국서 빠져나올 때가 진짜 위기다. 한국은 앞으로 중국을 중동처럼 볼 필요가 있다. 감정이나 이념, 가치를 논하지 말고 중동의 석유처럼 중국의 자원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무형의 기술전쟁이 유형의 무역전쟁으로 바뀔 것이다. 트럼프가 말하는 미국 수입품에 대한 10% 관세 부과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기 등은 한국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다.
▶최필수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중국에선 미국의 제재 때문에 제한된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검약형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진정한 혁신이 아니기에 수율은 낮고 원가가 높다. 그러나 시간과 비용을 투입해 계속 생산하다 보면 원가가 떨어지게 된다는 ‘학습 곡선(Learning Curve)’ 이론에 따르면 중국은 정부가 ‘인내 자본’을 계속 투입할 여력이 있어 결과적으론 원가가 낮아질 것이라고 본다. 미국도 한국과 대만 기업을 불러들여 자국에서 반도체를 만들겠다고 한다. 반도체 원가가 높지만 이를 상쇄하기 위해 미 정부가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 역시 인내 자본이다. 미·중이 학습곡선 이론대로 원가가 떨어지고 공급망에서 각자 독립하게 되면 한국에 큰 위협이다.
중국의 반도체, 한국에 큰 위협
▶이하경 중앙일보 대기자=과거 소련의 경제력이 취약했던 미·소 냉전기에는 한국이 미국 편에만 서면 안보와 경제가 모두 해결됐다. 그러나 중국의 종합 국력이 강화된 미·중 대결 시대에는 어느 일방에 서면 문제가 발생한다. 미국도 중국을 관리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 샌프란시스코 미·중 정상회담은 양국 관계가 대결보다 협력을 통해서 관리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한·미·일 협력만 잘되면 한국의 입지가 강화돼 중국이 한국을 더 존중할 거라는 생각은 지나친 낙관론이다. 한국은 한·미, 한·미·일 관계를 최우선시하되 중국과의 협력관계도 흔들리지 않게 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특히 트럼프 재집권 변수를 상정한 철저한 대비는 지금부터 이뤄져야 한다.
▶위성락 한반도평화만들기 사무총장=글로벌한 정세를 배경으로 한·중 관계를 봤을 때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이 분수령이었다. 중국 입장에선 수교 이래 30년간 한국을 중국 쪽으로 견인하려 노력했는데 성과가 없었다고 인식할 수 있다. 중국은 강성 대응을 하고 싶지만, 그 경우 한국이 미국 쪽으로 완전히 돌아설 것을 우려하는 듯하다. 이런 중국의 느린 대응이 한국 내 오해를 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입지가 올라가 중국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부정확한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종합적인 대미, 대중 정책이 필요한데 고위급 대화만 하면 다 해결될 것이란 흐름으로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다시 등장한다면 한국의 대중 정책은 또다시 요동치게 될 것이다.
정리=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12.21 조태열 외교 장관 후보자의 “한중 관계도 중요” 인식

▲조태열 썸네
조태열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20일 “한중 관계도 한미 동맹 못지않게 중요하다”며 “조화롭게 양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날 “(문재인 전 정부에서) 한미 동맹, 한일 관계, 한·미·일 안보 협력이 다소 소홀해져 윤석열 정부에서 복원에 매진하다 보니 한미, 한일, 한·미·일 쪽에 치중된 현상이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실제 그런 측면이 있다. 정부는 지난 3월 한일 관계의 발목을 잡았던 일제 징용 배상 문제를 ‘제3자 변제’ 안으로 수습했다. 8월에는 정상화된 한일 관계를 바탕으로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선언을 통해 3국 협력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대한민국이 가야 할 외교의 방향을 명확히 설정했다는 면에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이 같은 흐름에 반발하는 것은 유념해야 한다. 한중 간 무역 규모가 한미, 한일 간 교역 금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크다. 중국은 북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국가라는 사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동아시아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 응답자의 72%는 사드 보복 등 중국의 강압적 정책으로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82%는 한중 관계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미국은 우리의 유일한 동맹국이고,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다. 양자를 조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국익을 위해 필수적인 문제다.
조 장관 임명을 계기로 한미 동맹, 한·미·일 3국 협력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대중 정책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중국 관련 외교 진용을 쇄신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 중국의 사드 보복 이후 한중 간 물밑 채널은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다. 양국 간 1.5 트랙 차원의 협의를 넓혀가는 것도 한중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내년 1월부터 2년간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하면서 6월에는 안보리 의장국을 맡을 예정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조 후보자는 미국과 중국·러시아의 갈등으로 “안보리 차원의 대북 제재 결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지만, 유엔을 통한 대북 압박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중·러는 2006년부터 대북 제재 결의에 10차례 이상 찬성한 국가다. 이를 스스로 어기고 있는 데 부담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들을 정상 궤도로 이끄는 데 외교력을 집중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12-26 중국 사이버 공작과 대응 입법 시급성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교수, 국제지역연구센터장
작금의 국가안보 영역은 전통적 외교안보와 군사안보에 경제안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대됐다. 이 복합 환경에서 체제와 가치가 다른 북한·중국·러시아를 상대하는 한국 상황은 더 특수하다. 특히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불리면서 합법을 가장해 은밀하게 추진되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 공작에 상대적으로 무심해 매우 우려된다.
이른바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은 목표 국가의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투사해 여론을 움직이고, 자국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데 목표가 있다. 중국은 자국의 긍정적 이미지 형성과 상대방의 정치체제·사회제도·가치 등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는 ‘대외선(大外宣) 전략’을 구사한다. 또, 샤프 파워 기반의 ‘정보전’, 여론 분열 등의 사회 분위기 조장을 위한 ‘심리전’과 ‘사이버전’을 적극 활용한다.
중국은 일단 자국에 유리한 담론 경쟁을 위해 악의적 댓글부대인 트롤 팜(troll farm)을 동원한 중화주의 내러티브의 확산에 가장 적극적이다. 또, ‘비밀경찰서’ 설치로 자국민을 감시하고, 공자학원·차하얼학회(察哈爾學會) 등을 통해 학생·지식인·기업가·정계 인사들에게 접근한다. 얼마 전에는 중국 언론 홍보 업체가 국내 언론 위장 사이트 38개를 통해 친중·반미 콘텐츠를 무단 유포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미국이나 유럽 등도 중국의 글로벌 차원의 영향력 공작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 공작이 자국 정치와 사회에 가하는 위협을 경고하면서, 미국의 국익에 손상을 준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유럽연합(EU)도 ‘해외 정보 조작 및 개입 위협’(FIMI)에 관한 1차 대외관계청(EEAS) 보고서를 출간, 경각심 제고에 나섰다.
문제는 대응이다. 고도의 디지털 과학기술 시대에 허위 정보나 가짜뉴스 등의 생산 자체를 막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허위 정보의 유통 및 확산 제어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선천적 어려움이 있다. 또, 인권 침해 소지나 민주주의 절차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부담감도 있고, 외교 문제를 일으킬 소지도 다분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 발생한 중국 비밀경찰서 사건에서 우리 당국은 국외 스파이 활동이나 영향력 공작을 수사·처벌할 법령이 없어 조사를 포기했다. 우리나라 보안 관련법의 모든 초점이 북한 및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단체에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시행하는 ‘외국 요원 등록법’(FARA)과 음모법(conspiracy law), 그리고 ‘해외 악의적 영향력센터’(FMIC)를 운영하는 것이나, 대만이 국가안전 관련 5개 법을 정비하고 침투방지법(反渗透法·반삼투법)을 제정한 점은 참고할 만하다.
중국도 국가 이익을 내세우며 반간첩법을 7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꼭 중국을 겨냥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비전통적 안보 위협에 맞서려면 간첩죄의 적용 대상을 ‘외국’이나 ‘외국인 단체’로 넓히는 형법 개정이 필요하다. ‘외국 대리인 등록에 관한 법률안’도 속히 제정해야 한다. 실질적인 법적 정비를 통해 영향력 공작을 규범적으로 차단하고, 가짜뉴스감별센터 설치나 사이버보안법 제정 등을 통해 사회적 경각심을 제고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문화일보
12-27 트럼프 귀환, 헤징(위험 분산) 전략 있나

김남석 워싱턴 특파원
19일(현지시간) 미국 테네시주 주도 내슈빌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클라크스빌에서 열린 LG화학 테네시 양극재 공장 착공식 현장을 찾았다. LG화학은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전기차 세액공제 요건을 100% 충족하도록 맞춤 설계한 새 공장을 통해 10년간 최소 수천억 원 혜택을 볼 것으로 추산했다. 향후 수요에 따라 시설 2배 확장도 검토 중이지만, 장밋빛 전망을 한순간에 뒤엎을 악재가 상존한다. 내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지명이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그는 IRA를 겨냥해 “역사상 가장 큰 세금 인상” “전기차는 모두 중국에서 만든다”며 취임하면 첫날 IRA를 무력화하고 석유·천연가스 생산을 늘릴 것을 공언했다. IRA, 반도체법 등에 발맞춰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555억 달러(약 72조 원)를 미국에 투자키로 한 한국 기업들에는 악몽 같은 시나리오다. 이날 착공식에 앞서 대선 결과에 따른 IRA 폐기 가능성을 묻자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불확정성에 대해 걱정이 되지만 헤징을 통해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측은 지난해 11월 출마선언 이후 1년간 어젠다47이라는 집권계획과 4월 헤리티지재단이 내놓은 프로젝트2025 등을 통해 재집권 시 트럼프표 정책의 단상을 드러냈다. 경제 쪽만 훑어봐도 친환경정책 폐지, 모든 수입품에 10% 기본관세, 보복관세 부과 등 한국과 글로벌 경제 전반에 핵폭탄급 충격을 줄 내용이 가득하다.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동맹·가치외교를 중시한 바이든 행정부와 정반대인 신고립주의를 택할 전망이다. 북핵 위협에 대응해 한미 핵협의그룹(NCG)을 통한 일체형 확장억제 제공, 한미일 공조체제 강화 등은 천문학적 계산서를 동반하거나 아예 공염불이 될 수 있다. 재임 때 주한미군을 철수하려 했다 측근 만류로 미룬 에피소드나 재집권하면 북핵 동결을 대가로 대북 제재를 완화하는 거래를 구상하고 있다는 뉴욕타임스(NYT) 보도 역시 예사롭지 않다.
대선의 해인 2024년 새해를 코앞에 두고 최근 워싱턴DC에서 정부 부처나 싱크탱크 등이 개최하는 행사를 찾으면 주최가 누구든, 주제가 뭐든 가릴 것 없이 반드시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바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되면 어떻게 되느냐다. 한반도 안보·경제 관련 행사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재집권을 걱정하는 우려·경고는 넘쳐나는데 아직껏 리스크를 줄일 해법·시나리오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좀체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 지지율로 1년 뒤 대선 예측은 무리” “트럼프도 마냥 제멋대로 하진 못할 것” 등 막연한 낙관론이 팽배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이던 2020년 10월 당시 정무직 4000명, 이하 직급 5만 명을 충성파로 채우는 행정명령 스케줄 F를 만들었고 당선하면 바로 실행한다는 계획이다. 국정 시스템을 제2 건국 수준으로 탈바꿈하겠다며 착착 준비 중인 트럼프 전 대통령 측과 확실한 소통 채널이라도 구축됐는지 정부·기업 모두에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에 하나 2016년 그의 첫 당선 이후 온 나라가 트럼프 인맥을 찾아 헤맸던 상황이 재연된다면 트럼프 집권 2기는 그야말로 재앙이다.
문화일보
12-28 최태원의 脫중국 위기감

김만용 산업부 부장
미·중 무역 분쟁이 5년 이상 이어져 오면서 우리 기업이 느끼는 피로감이 극대화하고 있다. 민간 기업에 미국이냐, 중국이냐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은 마치 이혼하는 엄마랑 살 것이냐, 아빠랑 살 것이냐를 강요하는 것만큼 가혹하면서도 유치한 일이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도 최근 “기업에 있어 중국은 생존의 문제이고,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게임”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좋든 싫든 아직도 중국이 최대 교역국으로, 협력해야 할 것은 계속해야 한다”며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 기업이 훨씬 더 중국을 많이 방문하고 계속 투자를 약속한다”고 토로했다. 실제 미국 기업들은 조 바이든 행정부와 180도 다르다. 올해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등 다수 미국 대기업 CEO들이 중국을 찾아 거꾸로 미국 정부를 비판했다. 미국 3대 반도체 대기업 임원들은 지난 7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을 만나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반도체에 대한 규제 정책을 포기하도록 로비하는 등 압박하고 있다. 주상하이 미국 상공회의소도 양국 정부를 향해 미·중 무역 관계 확대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도 중국과 ‘디커플링’을 시도하기보다 현상 유지에 방점을 둔 모습이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 등 민관 유력 인사들도 연이어 중국에서 “디커플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미국의 경제적 이득만 보장받는 선에서 절충점을 찾아갈 수 있다는 전망이 이래서 나온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끊임없는 안보 위협 속에 미국·일본과 동맹 관계를 굳건히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한국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이 우리에게 줄을 설 것을 요구한다면 우리의 답은 정해져 있다. 눈앞 경제적 이득 때문에 미국과 서먹한 관계가 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하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이 떠안았다는 점도 더는 못 본 척하기 어렵다. 미국은 우리 기업이 미국을 택한 대가를 보장해주지 않았다. 윤 대통령도 여소야대의 구도 속에 지지율이 낮다 보니 기업에 무엇을 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딱한 처지다.
이제 기업에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실리적으로도 옳지 않다. 시장으로서 중국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안보동맹을 강화한 현시점에선 그동안 서먹했던 중국, 러시아 등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다시 급변할 평화의 시대에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목소리가 우리 기업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국책 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도 지난 10월 중국 산업경제 브리프 자료를 통해 “중국과 한국의 경제는 여전히 매우 동기화돼 있다. 단순히 중국 시장을 분리하거나 이전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 협력 모델을 모색하고 신흥 산업 분야의 협력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면서 “한·중 경제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때마침 지난 20일 한국과 중국 기업인·전직 관료들이 4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만나 새로운 협력에 뜻을 모았다. 이제 정부가 나서 민간이 뿌린 씨앗에 물과 거름을 줄 시점이다.
문화일보
12.29 2024년 지구촌 주의보 “2차대전 이후 가장 위험해질 수도”

“온 사방에 화재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10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한국-유럽 회의에서 EU 고위 관계자가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세계정세를 평가하면서 한 말이다. 세계정세 진단과 전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지정학적·지경학적·지기술적 그리고 가치체계의 단층선을 따라 분열이 점점 더 깊어지며 이러한 파편화가 상당히 장기화할 것이라는 점에는 공감대가 있다.
이는 구질서가 사라졌지만 새로운 질서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데 기인한다. 새로운 권력 중심이 복합 위기를 해결할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한 채 질서 전환이 진행됨에 따라 주요국들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합종연횡 중이다.
미·중 벼랑끝 경쟁 더 거세질듯
미국 등 세계 70여 국가서 선거
트럼프 복귀 여부가 최대 변수
한국의 국제적 역할 키워가야
유엔도 사무총장의 ‘새로운 평화 의제’ 보고서를 통해 지정학적 분열 극복과 집단안보장치 강화를 포함한 12개 조치를 건의하고 내년 9월 미래정상회의에서 논의할 예정이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금융기구들도 경제 질서 파편화(GEF) 대책 보고서를 냈다.
인태 지역, 21세기 지정학 진원지

▲한반도평화워치
미래 글로벌 지형을 형성할 주요 요인에 대해 2023 뮌헨 안보회의 보고서는 인권, 글로벌 인프라, 개발협력, 에너지 안보와 핵질서 등을 세계 질서 형성의 핵심 영역으로 제시했다. 2023 NEAR 글로벌 보고서도 미·중 전략 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 리더십 쇠퇴, 경제 기술 안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간 대립, 핵확산 및 핵무기 사용 정책, 글로벌 거버넌스 약화 등을 주요 전선으로 제시했다.
미국은 동시다발적 위기에도 새 국제질서 형성의 결정적인 요소는 미·중 전략 경쟁이고 인태 지역이 21세기 지정학의 진원지라는 입장이다. 지난 11월 미·중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최근 합참의장급 군사 채널 재개로 최소한의 안전판을 마련했지만, 대만해협 위기는 단기간 내는 아니더라도 가장 위험한 지정학적 위기로 부상하고 있다. 리청 홍콩대 교수(전 미 브루킹스연구소 중국석좌)는 12월 초 NEAR 국제회의에서 미·중 전쟁은 ‘일어날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언제’의 문제이고 최초의 AI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고 키신저 국무장관이 현 미·중 관계가 1차 대전 이전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미·중 경제 기술 패권 경쟁은 ‘작은 마당, 높은 담장’ 정책 표명에도 불구하고 첨단 반도체, AI, 양자 등 하이테크 기술 분야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경제안보에서 나아가 에너지 안보, 사이버 및 우주 안보 등 신안보 위협으로 확산 중이다.
올해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G7 정상회의 공동성명 등은 민주주의 유사 입장국 간 입장 표명의 대표적 사례이다. 반면 중·러 정상회의, 브릭스(BRICS) 확대정상회의, 일대일로 정상회의는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는 세력의 맞불 전략이다. 이 사이에서 ‘글로벌 사우스’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지정학적 부동층으로 불리는 T-25(중립적 성향 25개국) 국가들의 강대국들에 대한 양다리 걸치기 등 새로운 형태의 (비)동맹 현상이 대두하고 있다. 이러한 비전·가치와 전략적 이해의 충돌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유엔 총회의 분열된 결의이다.
국내 정치와 외교안보의 경계선이 엷어짐에 따라 새로운 세계 질서를 요동치게 할 미국의 대선과 주요국들의 선거 동향도 지정학적 지각 변동 못지않다. “외교정책은 국내정치에서 시작된다”라는 경구와, 새해의 잠재적 최악의 뉴스가 트럼프 복귀라는 달더 시카고세계문제협의회장의 경고는 미국이 최대의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주장이 힘을 받는 이유이다.
2024년은 세계 70여 개 국에서 최소 20억 이상의 유권자가 참여하는 21세기 최대의 선거판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다. 미국·러시아·우크라이나·대만·인도·인도네시아·유럽 의회와, 경우에 따라 일본 등이 대표적이다. 선거판이 지정학 지각판을 흔드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하스 미국외교협회 명예회장은 “글로벌 도전, 유럽과 인태 지역에서의 강대국 간 전쟁 가능성의 증가, 이란의 중동 불안정 초래 능력의 신장 등이 하나로 합쳐져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미국과 동맹 우방국들 사이에서도 동시다발적 전쟁이나 충돌에 대처할 능력에 관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북한이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의 전쟁과 향후 대만해협에서의 긴장 고조 등을 악용할 것이며 동맹의 관여 능력이 분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러한 시대전환에 맞추어 한·미 동맹, 한·일 관계, 한·미·일 안보 협력을 계속 강화하고 EU·NATO·아세안·중동아·남태평양·중남미 등 외교 지평을 확대하면서, 한·중·일 정상회의 추진 등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알려진 도전’ ‘알려지지 않은 위험’
그럼에도 앞으로 다가올 ‘알려진 도전’과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 유의할 사항들이 많다. 첫째, 동시다발적 복합위기 시대에 도전의 상호 연계성에 부합하는 통합적 전략과 위기관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북핵은 최우선 순위이지만, 캠프 데이비드 합의에 따라 인태 지역에서 오는 도전이나 위협·도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우크라이나· 중동 등 다른 지역의 나비효과도 무심할 수가 없다. 경제 기술 안보도 마찬가지다.
둘째, 내년도 2차 한·미·일 정상회의와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주최는 물론이고 유사한 입장의 중견국 연대를 주도해야 한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맞춤형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우리가 내년부터 유엔 안보리 이사국을 다시 맡는 만큼 글로벌 의제 활성화 및 유엔 개혁에 중심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넷째, 2차 대전 와중에 발표된 대서양 헌장은 유엔 헌장과 함께 유럽 통합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최근 NEAR 글로벌 보고서가 향후 인태 헌장을 모색할 필요성을 제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다섯째, 내년 미국의 대선 결과가 한·미, 한·미·일간 합의를 포함한 지역·세계 질서에 미칠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 한·미 핵협의그룹과 후속 조치를 되돌릴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약 30년 만에 오는 대전환기에 우리가 시대 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역할을 해 나가느냐에 미래가 달려 있다.
중앙일보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12-29 新중동붐과 경제영토 확대

박수진 경제부 차장
지난 2일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취재차 방문한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국경일을 맞아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高) 건축물 부르즈 칼리파(Burj Khalifa) 외벽은 UAE 국기를 상징하는 붉은색, 초록색, 흰색, 검은색 조명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UAE 국민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내외부 발 디딜 틈 없는 828m 높이의 이 구조물은 2009년 10월 완공된 뒤 자연의 힘을 이겨낸 마천루로, 두바이 개발의 상징이 됐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상층부를 즐기고 온 관람객들은 지상층에서 부르즈 칼리파 건설에 기여한 인물 사진 전시 공간을 마주치게 되는데, 여기에는 부르즈 칼리파를 시공한 삼성물산 소속 한국인이 다수 포함돼 있다. 삼성물산은 부르즈 칼리파 건설을 성공리에 마치고 세계적인 건설사로 도약했다.
UAE에서 K-건설 파워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비단 두바이뿐만이 아니다. 두바이 남서쪽에 위치한 UAE 수도 아부다비에서 차로 2시간쯤 더 내려가면 나오는 바라카 원전은 한국전력공사, 한국수력원자력, 두산에너빌리티, 현대건설 등이 팀을 꾸려 최초로 수출한 한국형 원전이다. 최근 4호기가 연료 장전을 마치고 운영 단계에 진입하면서 내년 중 바라카 원전 1∼4호기 모두 상업운전에 들어가게 된다. 최고액권인 1000디르함 신권 뒷면에 이 바라카 원전 그림을 새겨 넣을 정도로 UAE도 바라카 원전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예산 내 적기 시공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바라카 원전 건설 덕에 우리 원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으며 각국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한류는 이 같은 중후장대(重厚長大)산업뿐 아니라 UAE 국민 생활 곳곳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UAE 마트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제품 중 하나가 한국의 ‘불닭볶음면’인데 실제 지난해 한국의 대(對)UAE 라면 수출액은 1740만 달러로 UAE 전체 라면 수입액의 40%나 됐다. UAE는 K-팝과 K-콘텐츠의 주요 소비국이기도 하다. 한국과 UAE 간 우호적 관계는 올 1월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방문으로 한층 더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UAE가 한국에 300억 달러(약 40조5000억 원)를 투자하기로 한 데 이어 지난 10월에는 한-UAE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이 공식 타결되면서 시장 확대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이미 UAE 순방을 계기로 경제사절단에 참가한 몇몇 중소기업의 경우 21억 달러의 수출 창출이 예상된다.
UAE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중심으로 올해 신(新)중동붐의 기틀을 잡았다면 내년에는 성과 가시화에 속도를 내야 한다. 걸프협력이사회(GCC) 6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돼 중동붐 확산의 제도적 기반도 마련됐다. 특히, 중동 각국이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산업 새판 짜기’에 나선 가운데 경제대국 한국의 기술력과 경험은 한-중동 협력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토대가 될 수 있다. 1970년대 중동붐은 ‘오일머니’ 공략에 초점을 맞췄다. 지금 거세게 불기 시작한 제2의 중동붐은 한발 더 나아가 ‘기회의 땅’ 중동으로 경제 영토를 넓히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정교한 전략 아래 중동 진출에 대한 전방위 지원·투자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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