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4/ 2023-02/ 07월 호 ⑱ 지구가 한복을 입는다면 - 12월 호 〈21〉집과 한국인의 유목민 기질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4/ 월간조선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023-02
07월 호
⑱ 지구가 한복을 입는다면
다양하고 아름다운 보자기 ‘조각보’ 문화
⊙ 옷은 문화이고 문명… 인간이 입는 옷과 사회의 체제는 동일
⊙ 인간의 문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두 동사(動詞) ‘싸다’와 ‘넣다’
⊙ 보자기는 싸는 문화, 가방은 넣는 문화에서 파생… 보자기 문화의 특성은 혼합, 융합, 포용
⊙ 가방을 든 사람과 보따리를 든 사람은 서양과 동양, 도시와 시골, 외래문화와 재래문화, 전근대성과 근대성이라는 이항(二項)대립
⊙ 후기 산업 사회의 문명과 그 문화적 특성은 이 ‘싸기’로의 회귀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서울 365-광화문광장 한복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전통한복을 재해석해 만든 한복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조선DB
근대화 시기 한국의 문화는 한복을 양복으로 갈아입는 시기였다. 문화가 달라지고 도시가 달라지고 모든 가치관이 변했다. 또한 문명이 바뀌어 산업 시대가 후기 산업 시대, 정보문화 시대로,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로, 소프트 시대가 스마트웨어(라이브웨어)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후기 산업 사회에서의 한복의 의미를 다시 찾는다. 옷은 문화이고 문명이다. 인간이 입는 옷과 사회의 체제는 동일하다. 프랑스혁명 당시 퀼로트(Culotte)와 상퀼로트(Sans Culotte)로 불린 옷에 따라 혁명의 두 개 파(派)가 자연스레 나뉘었듯 오늘의 문명도 양복과 한복에 의해 산업 시대와 후기 산업 시대로 분리된다.
기술과 예술의 분리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데 가장 유효한 모델이 바로 옷이다. 옷이야말로 실용적 기술과 예술적 기술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복합물이다. 옷은 동물의 털과는 다르게 추위나 바람을 막기 위해서만 입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신화에서도 최초의 의상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였지 춥기 때문은 아니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옷을 짓는 기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남부끄럽다’는 말이 있듯이 부끄러움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시선에서부터 비롯된다. 아담과 이브가 나무 잎사귀로 앞을 가리는 순간 진정한 두 사람의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게 됐다. 의상은 타인의 시선으로 비롯됐고 이 타인의 시선이 의상의 기술을 낳는다. 입는다는 것은 곧 남에게 말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나의 몸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 하나의 매체로 존재하고 있는 의상은 언어요 하나의 글인 것이다.
여자들이 치마를 입는 것은 “나는 여자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고, 남자가 바지를 입는 것은 “나는 남자요”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설빔은 오늘이 보통날과 다른 명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즐거운 카드의 메시지와 같은 것이고, 반대로 소복(素服)은 상을 당한 슬픔을 표현하는 부고(訃告)의 검은 테와 같은 것이다.
심지어 실용적 목적으로 옷을 껴입은 사람이 아무렇게나 털목도리를 두르고 다닐 때에도 그 옷차림은 하나의 기호(記號)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지금은 겨울이오” 또는 “오늘은 매우 춥소”라는 언표(言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옷이 타자에게 보내는 일종의 발신(發信)이라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나는 남의 시선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소탈한 사람이오”라는 자기 성격의 또 다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낳은 他人의 시선

▲공장제 공업이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옷의 형태란 바로 군복(軍服)과 같은 제복이다. 사진은 충남 계룡대 대강당에서 열린 ‘장교 임관식’ 모습이다. 사진=조선DB
더구나 실용적 기능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것이 우리가 매고 다니는 넥타이이며 그 옷색깔이며 양복 디자인이다. 양복저고리에 달린 단추는 보통 채우지 않는데도 단추가 떨어지면 누구나 당혹감을 느낀다. 불편해서가 아니다. 마치 자기 글에 오자가 생겼을 때와 같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입고 있는 옷에는 옷감을 만드는 제조 기술, 그것을 재단하고 꿰매는 재봉 기술, 그리고 옷을 미학적으로 꾸미는 디자인 기술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각기 다른 기술 체계가 한데 어우러질 때 비로소 옷 입기가 시작된다. 옷만은 기능과 장식 예술과 기술이 분리될 수가 없다.
산업혁명은 옷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목화와 무명에서 비롯된 기술혁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해 간 이는 두말할 것 없이 공상인(工商人)들이었다. 산업혁명의 옷 만들기는 장식보다 기능이었고 옷을 만드는 디자인보다는 옷감의 재료를 만들어내는 직조술이 우선이었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해서 대규모의 기계시설을 사용하는 공장제 공업이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옷의 형태란 바로 군복(軍服)과 같은 제복(制服)이었다.
동일 규격의 상품을 다량으로 만들어내고 동일한 동작으로 조립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 기계이다. 단위당 생산 단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대형화, 다량화, 규격화의 방향으로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 몸이 제각기라거나 입는 사람마다 옷 색깔이나 모양을 고르는 취향이 다 다르다는 것은 기계를 통한 생산에서는 가장 골치 아픈 장애요소이다.
옷감은 직조공장에서 대량, 다량 생산이 가능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는 그 옷만은 양산 체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산업 사회의 생산 방식에 브레이크 역할을 한 것이 의상문화이며 다량 생산의 공산품 체제에 의해서 점령되지 않았던 시장이 의류시장이었다.
정보화 사회, 탈공업화 사회의 징조를 가장 빨리 보여준 것도 의상이다. 의상 값의 분포를 보면 처음엔 옷감이 제일 비쌌지만 다음엔 재봉삯, 그리고 요즘에는 디자인값이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옷과 신발의 상징
식(食)과 주(住)는 가족 단위에서 집단으로 함께하지만 의(衣)는 개인화되어 있다. 박목월(朴木月·1916~1978년)의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1968)에 실린 시 ‘가정(家庭)’이 떠오른다.
지상(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의 시 ‘가정’ 전문
이 시의 저마다 다른 ‘아홉 켤레 신발’은 9명의 가족을 뜻한다. 치수와 모양, 색깔이 서로 다른 신발을 통해 ‘연민한 삶의 길’ ‘아홉 마리 강아지’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 헤어졌을망정 ‘아홉 켤레’가 소중한 공동체를 이뤄 시인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옷에는 사회성도 들어 있다. 음식과 집은 남에게 보이지 않고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옷만은 금세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다.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고승(高僧)의 이야기다. 존경받는 법사가 남루한 옷을 입고 다회에 갔다가 문전에서 거절당했다. 자신이 누구라고 밝혀도 넣어주지 않았다. 결국 새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가자 이번에는 두말없이 넣어줬다. 다회에 들어간 법사는 음식이 나오자 자기 옷에 가져다 부었다. 사람들이 놀라 왜 그러냐 묻자 법사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들은 나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옷을 초대한 것이니 음식도 옷이 먹어야지.”
이번에는 《흥부전》 이야기다. 흥부는 가난해서 아이들 옷을 각각 한 벌씩 입힐 수 없었다. 멍석에 아이들 수만큼 구멍을 뚫어 단체로 입혀야만 했다. 그래서 한 녀석이 뒷간에 가면 모두가 함께 움직여야 했다. 옷이 지닌 개인과 집단의 특성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우리의 고전이다.
인간 문화의 두 動詞

▲수 조각보. 사진=초전섬유퀼트박물관
인간의 문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두 동사(動詞)가 있다. ‘싸다’와 ‘넣다’이다.
‘나무 이파리로 물건을 싸고, 나무 등걸 파진 구멍에 물건을 넣었다.’
이 ‘싸다’에서 보자기 문화가 생겼고, 이 ‘넣다’에서 상자의 문화가 생겼다.
‘싸는’ 행위야말로 한국의 ‘깁는’ 문화를 상징한다. 이 깁는 문화는 ‘조각보’와 ‘버려둬’의 문화와 연결된다.
조각보는 우리 할머니, 어머니, 누나들의 바느질에서 재탄생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자투리 천을 모았다가 색깔과 모양이 잘 어우러진 조각보로 변신한 것이다. 놀랍게도 지금 보아도 현대적인 구성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헝겊 조각을 이어 만든 조각보는 서양에도 중국에도 없다고 한다.

▲지난 2013년 9월에 설치된 청주 국제 공예 비엔날레의 상징 작품인 대형 조각보 모습이다. 사진=조선DB
조각이란 원래 작고 짧은 것을 뜻한다. 조각조각 잇는 건 연장한다는 장수(長壽)의 개념과 상통한다. 보자기는 명칭에서부터 ‘복(福)을 싼다’는 뜻이 강하다.
백남준(白南準·1932~2006년)은 완전히 버린 것으로 세계를 제패한 사람이다. 백남준이 설치한 비디오 아트를 보면 전부 넝마(낡고 해어져서 입지 못하게 된 따위)를 주워다가, 혹은 버린 것을 가져다가 만들었다.
이처럼 버릴 걸 그냥 둠으로써 새로운 자원으로 재탄생시키는 놀라운 재능이 우리 민족에게 있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버려둬’ 문화는 음식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버려두는 ‘5G’, 예컨대 누룽지-묵은지-우거지-콩비지-짠지다. 여기서 욕 문화, 막사발, 막춤 등 막 문화로까지 이어졌다. 싸이, BTS, 블랙핑크의 성공은 막 문화와 관련이 깊다.
싸는 문화, 포대기 문화, 어부바 문화

▲한국의 전통 포대기. 포대기는 싸서 업어주는 도구로 한국인만이 쓴다.
한국인은 태어나자마자 싸는 옷을 입는다. 포대기다. 포대기는 어부바 문화와 관련이 깊다. 어부바는 일종의 감탄사로 어린아이에게 등에 업히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집안이 떠나갈 듯 울며 보채던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엄마 등에 업히면 금세 잠이 든다. 신기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포대기는 싸서 업어주는 도구로 한국인 엄마의 필수품이다. 요즘 K-한류 바람을 타고 포대기가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안을 때 포대기로 안아주고, 업을 때도 포대기로 업을 수 있다. 안겨도 업혀도 품는 문화고, 포대기를 둘러 등으로 업으면 어부바가 된다.
포대기 하나로 깔고 덮고 안고 업는다. 포대기는 끈까지 달린 그야말로 ‘원 소스 멀티 유스’의 융통성 있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도둑이 들어올 때에는 ‘쓰고’ 와서, 나갈 때에는 ‘싸’ 가지고 나가는 보자기 문화의 연장이다.
한국의 옛날 어머니들은 포대기 하나로 아기를 가슴에 품고 등에 업었다. 아기들은 낯선 세상 밖으로 나와도 이 포대기의, 한국 특유의 ‘품는’ 문화와 ‘업는’ 문화, 즉 양수와 다름없는 따스한 환경 속에서 지낸다. “안아줘도 깽깽, 업어줘도 깽깽, 어쩌라고 깽깽”이라고 애 업고 꾸짖듯이 부르던 동요가 생각난다.
아이들은 철이 없다. 말이 통하지도, 힘이 통하지도 않는다. 우는 아이 앞에 장사 없다. 이 노래를 뒤집어 해석하면 아무리 깽깽 대던 아이라 해도 가슴에 안고 등에 업으면 금세 잠잠해지고 거짓말처럼 잠이 든다. 본래의 천사로 돌아간다. 우는 아이를 그치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 안아주고 업어주는 수밖에 없다.
‘업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업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약자가 강자를 업는 것은 어부바 문화가 아니다. 가마꾼이 가마 탄 사람을 메는 관계도 아니다. 이것은 이해관계에 불과하다. 업혀서 미안하고, 업어서 힘겨운 관계가 아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어부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부바 문화의 원형은 모자(母子) 관계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어른이 아이를 업어주는 관계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어주는 거다.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장성한 자녀가 연로한 부모님을 업는다. 이는 생명에 대한 배려이자 상대에 대한 사랑이다.
업어서 좋고 업혀서 좋다. 아이를 업는 건 보릿자루를 메고 다니는 것과 다르다. 보릿자루는 그저 무거운 짐일 뿐이다. 어부바 문화에는 사랑과 정(情)이 서로 오간다. 지배와 의존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 속에 업고 업히는 관계, 이것이 상생(相生)이다. 수렵·채집 시절부터 우리의 어부바 문화는 상생 관계였다.
한국인의 복식(服飾)과 수난사
한국인의 옷자락도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밖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外勢]에 나부껴야만 했다.
백제나 신라에서는 긴 내리닫이 옷을 입었으나, 당나라의 세력이 이 땅을 휩쓸고부터는 당풍(唐風)을 따라 상의(저고리)와 하의(치마)로 구별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또 원나라의 압박 밑에 있었던 고려 때의 의상은 ‘몽고 옷과 중국 옷을 본떠 남자의 바지 너비와 여자의 웃옷 소매가 각기 줄어들어 갔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서면 이번엔 또 명나라의 복장이 지배한다. 중종 31년에는 조정에서 직접 명나라 옷을 그대로 모방하여 입으라고 하였고, 이미 세조 10년에는 광주 목사 김수(金修)가 ‘우리나라의 제도는 모두 중국 것을 모방하였으나 오직 부녀자의 수식(首飾)과 복색(服色)만이 고습을 따르고 있으므로… 집찬비(執饌婢)와 통사(通事)를 불러 궁중의 의녀(醫女)나 기생들에게 그(명나라) 복색과 장식을 가르쳐주어 보급토록 하자’고 상소문을 올렸었다.
그런가 하면 중국 대륙의 바람이 서풍(西風)에 몰리기 시작하는 조선조 말기에 이르면, 조관(朝官)의 복색이 양복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으로 망명할 때는 벌써 일반인으로서도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한국인의 의복과 장신구는 한국인의 수난사(受難史)와 다를 것이 없다. 일제 시대의 ‘국민복’ ‘몸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86, 3판) 참조]
보자기 이야기
보자기와 가방은 동서양 문화의 상징이다. 보자기는 싸는 문화, 가방은 넣는 문화에서 파생되었다. 보자기 문화의 특성은 융통성이다. 혼합, 융합, 포용이다. 용도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가방에 붙어 다니는 동사는 ‘넣다’와 ‘메다’뿐이지만 보자기에는 이렇게 ‘싸다’ ‘메다’ ‘가리다’ ‘덮다’ ‘깔다’ ‘들다’ ‘매다’ ‘이다’ ‘차다’와 같이 가변적이고 복합적인 무수한 동사들이 따라다닌다.
무엇보다도 예기치 않던 일이 일어날 때 이를테면 손이 부러지거나 풀숲의 독사에게 발을 물리게 되면 보자기는 금세 응급치료의 삼각대로 변신한다. 보자기는 가방처럼 어깨에만 메는 것이 아니라 옆구리에 끼기도 하고 등에 매기도 하며 허리에 차기도 하고 심지어 머리에 일 수도 있다. 어머니가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장에 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보자기는 풀밭에 앉을 때에는 깔개가 되고, 햇살이 눈부실 때에는 유리창을 가리는 가리개가 되며, 지저분하게 어질러놓은 물건을 금세 덮어버리는 덮개가 되기도 한다. 보자기는 어떤 형태, 어떤 시스템이라도 거기에 적응하며 받아들인다. 둥근 것, 네모난 것, 긴 것, 짧은 것, 딱딱한 것, 부드러운 것, 상황에 따라 싼 보따리의 형태는 달라진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그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며 버리고 싶어 했던 그 보자기의 기호성(記號性)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 암호부터 서둘러 해독해보자.
일본의 문헌들을 뒤져보면 보자기는 일본민의 독창적인 생활용기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보자기가 일본 고유의 문화는 아니다.
고려 말기의 자주 무늬의 보자기가 지금도 전주 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궁전문헌인 《상방정례(尙方定例)》(1752)에 235 종류의 보자기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인이 보자기의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손꼽는 것은 오사카 사천왕사(四天王寺) 소장의 선면(扇面) 고사경의 밑그림이다.
여성이 옷가지를 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 그러져 있다. 지금 재일동포들이 “사천왕사 왔소”의 행사를 벌이는 그 의미를 덮어두더라도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풍습은 일본의 경우 교토(京都) 근처의 오하라(大原)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보자기 문화의 원류(源流)는 한국이라는 뜻이다.
원류라는 역사성만이 아니라 그 기능미나 형태에 있어서도 한국 보자기는 일본 것을 훨씬 앞서 있다. 한국의 보자기는 양끝에 끈이 달려 있어서 보자기의 생명인 신축성이 한결 높다. 큰 것을 쌀 때 그 끈이 있어 포용의 폭이 아주 넓다.
가방과 가죽 책가방, 란도셀

▲일본에서 건너온 란도셀 가방. 사진=조선DB
반면 가방은 문명의 상징이다. 서구의 근대문명을 상징하는 기차나 비행기 같은 것도 가방에 비하면 먼 지평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란도셀’이라 불리던 그 책가방에서 현대문명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옆에 할아버지의 상투처럼 남아 있는 책보가 있었던 덕이다.
정말 책보를 옆에 끼고 다니는 아이들은 전근대에서 살고 있는 시골뜨기였고 멋진 가죽 란도셀을 메고 다니는 아이들은 대명천지의 도회지 아이였다. 국민학교 교실에서 배운 서구의 개화문명은 교과서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란도셀 자체 속에 있었다. 하루빨리 부끄러운 무명 보자기에서 벗어나는 것, 며칠을 굶더라도 란도셀을 사서 등에 메는 것, 그것이 학교에 다니는 의미였다. 가방이 이른바 근대화요, 개화요, 서구화요, 그리고 ‘모던’이라는 그 신비한 단어를 해독하는 사전이었고 꿈이었다. 주문 같은 구구단을 외우고 낯선 나라의 이름들이 적힌 세계지리부도를 넘길 때에도 란도셀의 그 신비한 가죽 냄새가 났다.
정말 교실에서는 김칫국물이 흘러내린 얼룩진 무명 보자기가 하나둘 사라져 갔고 그만큼 빨갛고 까만 가죽 책가방이 늘어갔다. 아침과 함께 새 가방을 메고 온 아이들의 어깨는 떡 벌어져 있었고 그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미소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빛바랜 보자기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뒤얽힌 눈물이 고여 있었다. 책가방 너머에는 서울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현해탄 건너 동경(東京)이, 그리고 간절한 그리움의 동경(憧憬)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 뒤에는 멀고 먼 서양나라 동화책 표지 같은 파리와 런던과 뉴욕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가방 체험과 좌절의 꿈
란도셀을 멘 아이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과연 책보와 함께 버리려고 했던 그 부끄러움이란 무엇이었던가. 이제 어른이 되고 허리가 구부러지는 나이가 되니, 그리고 초등학교 교실이 넓은 도시로 변하고 그 도시가 세계로 확산되고 나니 이러한 새 질문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실 란도셀을 메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자랑과 편리성을 얻은 대신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까지 숨겨왔거나 자기 자신을 속여 왔던 것이다.
다시 책보를 가방으로 바꾸던 날을 회상해보자.
우선 교실에 들어가 책보를 풀면 그것은 한 장의 보자기로 바뀐다. 책을 쌌던 보자기들은 알라딘의 램프에서 나온 거인처럼 필요로 하기 전까지는 공책과 책 밑에 깔려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란도셀은 보자기와는 아주 달랐다. 책을 꺼내도 넣을 때와 다름없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부피나 모양 모두 그대로였다. 책을 다 꺼냈는데도 텅 빈 란도셀은 눈치도 없이 가뜩이나 좁은 책상이나 의자를 점령하고는 자기의 주인을 구석으로 밀어냈다. 책가방은 주인만이 아니라 좁은 책상 사이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에게도 방해물이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밭에서 일하던 동네 아저씨가 뜻하지 않게 개구리참외 하나를 따주셔도 란도셀은 넣을 구석이 없었다. 책보 같으면 어떤 모양의 것이라도 금세 싸버릴 수가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서구문명이, 근대문명이 우리에게 준 판도라의 상자였던 것이다.
사실 가방과 보자기는 용기라는 물질이 아니라 문명의 의미 작용인 하나의 기호(記號)로 보는 게 맞다. 국민학교 교실에서는 시골뜨기와 ‘모던 보이’를 식별하는 기호로서 작용했던 가방과 보자기에 높은음자리표가 붙게 되면 전근대(프레 모던)에서 근대(모던)로, 근대에서 후기 근대(포스트 모던)로 굴절해 가는 시대적 차이를 나타내는 문화적 기호로 확대된다. 동시에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텍스트를 읽는 코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사로운 나의 경험만이 아니다. 라프카디오 헌(1850~1904년, 《신시내티 커머셜》 특파원. 훗날 《낯선 일본과의 만남》을 펴내 명성을 얻었다)이 일본에 처음 왔을 때 그의 손에는 커다란 두 개의 가방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훗날 고이즈미 야쿠모라는 이름으로 귀화하고 사무라이 집안의 딸과도 결혼했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1867~ 1907년)가 최초로 서구여행을 하였을 때 세상 사람들의 눈을 끌었던 것도 바로 그 가방이었다고 전한다.
일본은 물론 한국의 개화기 때 가방이라고 하는 것은 물건을 담는 도구라기보다는 서구문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종의 매체였다. 가방을 든 사람과 보따리를 든 사람은 서양과 동양, 도시와 시골, 외래문화와 재래문화, 전근대성과 근대성이라는 이항(二項)대립의 기호 체계를 만들어냈다.
보자기와 가방, 한복과 양복의 차이
유럽에서 가방이 사용되고 있을 때 어째서 아시아에서는 보자기가 애용되었는가. 그것은 증기기관이나 면직기를 만들어내는 기술문명이라기보다는 사고 체계에 속하는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해야 좋을 것이다.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도구로서 보자기는 싸고 가방은 넣는다. 그러므로 가방과 보자기를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 차이점은 동사의 이항대립에 의해 밝힐 수 있다. 즉 넣다와 싸다의 두 행위의 차이이다. 인간은 무엇을 간수하고 운반하려고 할 때 두 가지 방법을 택한다. 무엇으로 싸든지 혹은 무엇에다 넣든지이다. 이 선택의 차이에서 문화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자면 서양의 근대 산업주의는 ‘넣기’ 패러다임의 산물이며 동양의 전통문화는 ‘싸기’ 패러다임으로 구축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후기 산업 사회의 문명과 그 문화적 특성은 이 ‘싸기’로의 회귀선상 위에서 전개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측 불허의 포스트 모던 세계에서는 보자기형 문화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싸기’로의 회귀선상

▲양복과 한복. 꽃그림 병풍 뒤에 드리운 화문석으로 미뤄 볼 때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온 지운영이 1884년 3월 서울 묘동에 낸 사진관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 인물은 서광범(왼쪽)과 김옥균.
같은 옷이라 해도 서양 옷(양복)은 넣기 체계로 되어 있고 동양 옷(한복)은 싸기 체계로 되어 있다. 양복은 인간의 몸을 싸는 것이 아니다. 마치 가방처럼 인간의 몸을 그 안에 넣도록 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서양 옷은 입체적인 자기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극단화하면 중세의 기사들이 입었던 갑옷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우리 옷은 몸을 감싼다. 그래서 사람이 입을 때에만 입체성을 지닐 뿐 벗어버리면 보자기처럼 2차원의 평면으로 돌아가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양복은 걸어두고 한복은 개켜둔다.
신발 역시 그렇다. 서양 구두는 발을 넣는 작은 상자와 같다. 안 들어가면 구둣주걱으로 발을 집어넣어야 한다. 서양 옷이나 구두의 치수가 정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짚신은 보자기처럼 발을 감싼다.
근대에는 양복이 이겼다. 그러나 미래에는 한복 유형의 싸는 문화가 넣는 문화를 앞설 것이다. 단언컨대 보자기, 한복은 트랜스포머의 원조다. 현대 행정에서 일반적인 관료제 구조와는 달리, 융통적·적응적·혁신적 구조를 지닌 임시 조직을 애드호크라시(adhocracy)라고 칭한다. 애드호크라시의 21세기적 시스템이 바로 임시 조직, 태스크포스의 유용성이다. 보자기의 특성과 흡사하다.
한국의 도시는 싸는 도시다. 서양의 도시는 넣는 도시다. 신(新)문명도시는 보자기형 도시여야 한다. 주상복합형 도시를 떠올려보라. 상상력을 발휘해 건축물의 소재를 다양화하고, 벽과 벽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신축성 있게 시대의 변화와 스피디한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구조다.
21세기의 문익점 神話

▲고려 말기 학자이자 문신으로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가지고 돌아온 문익점. 사진=태서출판사
컴퓨터의 출현으로 산업 시대의 획일적인 기성복과 달리 주문품과 같은 수준의 기계 제작이 가능한 옷의 패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예술과 기술의 분리가 산업 시대의 특성이었다면 탈산업 사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예술이 기술과 다시 융합하고 기술생산을 예술창조의 방식으로 돌려놓는 새로운 힘인 것이다. 자동차는 달리기만 해서는 팔리지 않는 시대, 카메라가 찍히기만 하면 사랑을 받던 시대가 아닌 것이다.
처음부터 옷의 가치는 옷감을 어떻게 의상으로 짓느냐 하는 패션 감각에 의해 주도되어 왔던 것이다. 문익점(文益漸·1329~1398년)의 신화(神話), 21세기의 문익점의 붓이 지닌 그 패러다임은 공상(工商)의 텍스트에 다시 사농(士農)의 창조적인 예술성과 재생산의 텍스트를 접목시키는 역할이다.
글과 옷의 패러다임을 절묘하게 맞붙여놓은 것이 바로 문익점의 붓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맨 먼저 붓대를 잡아야 한다. ‘파악(把握)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생각을 잡고 시상(詩想)을 잡는다. 창조의 원천은 이 붓대를 잡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선비문화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문익점의 붓대는 잡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화씨를 넣는 장치로써,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씨를 감추는 비장의 공간으로 존재했다. 그러므로 붓대를 잡고 글을 쓰는 행위가 문익점의 붓대에서는 씨앗을 땅에 심는 행위로 나타난다.
글씨는 문자 그대로 글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씨를 쓰는 흰 종이는 밭이 되고 글을 쓰는 행위는 밭갈이로 변한다. 그것이 필경(筆耕)이라는 말이다. 목화꽃이나 목화송이는 하나하나의 창조적인 어휘이다. 그리고 글 전체의 문장은 무명 짜기의 직조술이다. 영어로 ‘텍스트’라고 하면 ‘옷감’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문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처럼 글씨가 글이 되는 과정처럼 목화섬유는 무명이라는 직조물과 병렬 관계에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옷감은 새로운 레토릭을 기다린다. 즉 옷 만들기이다. ‘문채(文彩)’라는 말이 있듯이 옷에는 무늬가 있으며 탁월한 문장력을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하듯이 옷감을 마르고 깁는 솜씨가 수사학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재봉과 디자인 기술은 예술로서의 기술과 더욱 상생성을 지니며 하나의 옷을 만들어낸다.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 벌거벗은 왕들의 행렬
옷을 만들면 마지막 단계는 옷 입기다. 그것은 바로 글 읽기에 해당한다. 쓰기에서 읽기로 변환되는 것은 생산에서 소비로 전환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창조된 옷은 입기에 의해 완성된다. 문익점의 붓은 선비적 텍스트인 글쓰기와 글 읽기를 옷 만들기와 옷 입기로 대체함으로써 그 생산 기술이 지금까지 지배해 온 공업 기술의 다량 생산, 다량 소비의 패턴을 횡단하는 방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목화와 무명을 산출한 것은 공과 상이 아니라 선비의 붓이었다. 정보 사회와 탈산업 사회의 생산 양식은 선비의 붓에서 나왔다. 그것이 생산의 소프트화라는 것이다. 공산품을 글 쓰듯이 만드는 것, 옷 입듯이 소비하는 것, 이 창조의 원리, 글을 쓰는 원리의 밑바닥에는 정보가 정서로 이행하는 감동의 가치가 있다.
기능에서 감동으로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생산과 소비 사회에서는 효율이 있느냐보다 그것이 나에게 감동을 주느냐 하는 마음의 가치를 더 요구하게 된다.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감동을 나누는 것이며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깊은 교감을 창출하는 데 있다.
예술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감동을 교환하는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니까 산다.
좋은 그림, 아름다운 음악은 일정한 수요의 지수가 없다. 베스트셀러가 나오면 갑자기 독서시장이 넓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1000권의 책을 공급해도 한 권의 책보다도 수요가 없을 수가 있다. 시장 자체가 소프트 시스템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프트 시스템과 정보 시스템 속에서 가장 위험한 옷은 다름 아닌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이 입은, 그 보이지 않는 옷이다. 옷이 완전히 옷감에서 소프트로 정보화하면 보이지 않는 실로 짠, 보이지 않는 옷감으로 만든,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 벌거벗은 왕들의 행렬이 시작된다.
정보의 조작과 패션화는 옷을 입는 주체를 소외시켜버리고 타인의 시선과 풍문을 낳게 할 우려가 있다. 그림값을 결정하고 그것이 시장에서 매매되는 유통은 실용성이나 기능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왕의 옷처럼 남들이 다 입었다고 하니 입은 것으로 보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한다.
매스미디어에서 나온 옷, 정보 시스템에서 만들어낸 가상현실의 실, 이런 것이 지배하는 그 위험성은 상업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선비의 붓이 공상을 지배하는 것, 공상의 텍스트를 선비의 텍스트로 탈구축시키는 것, 그래서 예술이 기술과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 21세기의 문익점의 붓이 할 일이다.
한국의 의상과 한국적 美

▲한 대형마트에서 아이들이 전통 물레를 통해 선조들의 실 뽑는 과정을 체험하고 있다. 사진=조선DB
한국의 의상에는 분명히 한국적인 미가 있는 것 같다.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나라 옷은 북방적(北方的)인 폐쇄성과 남방적(南方的)인 개방성이 한데 어울려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옷이란 몸을 감추면서도 드러내놓는 데에 그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여성의 옷이 그런 것이다. 중세의 서양 의상 ‘로브’나 일본의 ‘기모노’는 한국의 옷에 비하여 지나치게 복잡하고 부자연스러운 감을 준다. 옷이 인체의 선(線)을 죽이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옷으로 먼저 눈이 간다.
그리하여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들에 있어서는 하얗게 드러낸 목덜미가 특이한 매력으로 되어 있고, ‘로브’를 입은 서양의 여인들에 있어서는 앞가슴을 내놓는 것이 또한 아름다움이다.
즉 살결을 드러내놓은 육체미와 그것을 감싼 의상미는 서로 대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미를 강조시키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비키니 스타일’처럼 의상은 한낱 수영복 같은 것이 되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육체미를 살리려면 의상미를 죽여야 하고, 의상미를 살리려면 육체미를 죽여야 했던 것이 서양 의상의 비극성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 있어서는 의상미와 육체미가 각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융합되어 비로소 하나의 미를 꾸민다. 그 증거로서 서양 옷은 벗어 놓아도 의상 자체의 독립된 입체성(立體性)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치마는 벗으면 하나의 보자기와 다를 것이 없다. 몸에 감아야 비로소 입체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서양 옷은 ‘걸어두고’ 한국 옷은 ‘개어두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의 의상은 자연스러움에 그 특징이 있다. 또 몸을 완전히 드러내놓는 것도 아니며 또한 완전히 감추어버린 것도 아니다. 얇은 모시 적삼으로 얼비치는 싱싱한 육체의 탄력이 바로 그런 것이다. 허리를 감고 흐르는 치마의 선이 그런 것이다.
모시야 적삼 앞섶 안에
연적 같은 저 젖 보라
많이야 보고 가면 되나니
손톱만치 보고 가소
모를 심으며 부르는 농부들의 민요 가락을 보더라도 한국 옷의 육감성은 비키니족의 그것처럼 노골적인 것이 아니라 안타깝고 은근한 데에 있다. 한층 더 기막힌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저고리가 짧아 치마와 적삼 사이로 겨드랑이의 하얀 살결이 약간 드러나 보이는 수도 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의 풍속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열녀문(烈女門)이 마을 어귀마다 서 있던 조선 영조 시절 당대의 선비 이익(李瀷·1681~1763년)은 이렇게 말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풍속이 변천해 감에 따라 여자의 의복이 많이 변했다. 소매는 꼭 끼도록 좁아졌고 저고리 뒷자락은 대단히 짧아졌다. 어떤 요태(妖態)를 꾸미기 위한 옷과 비슷하다. 나는 이것을 매우 좋지 않은 풍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온 세상이 모두 따르고 있는 풍속인즉 또한 어쩔 도리가 없구나….”
이 말은 흰 수염이 근엄하기 짝이 없는 톨스토이(1828~1910년)의 한숨과도 일맥상통한다. 그의 한숨을 들어보자.
“여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남자의 육감(肉感)을 자극시키는 무서운 무기로 바꾸고 말았다. 육감을 도발시키는 행위, 오늘날의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를 나타내 보이려는 그런 행위, 그것을 어째서 이 사회가 용서하고 있었는지, 세상 사람들이 깨닫고 놀랄 시대가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공원이나 길에 올가미를 놓아두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백방사 속곳 가랑이가 동남풍에 펄럭펄럭”
옷을 입으면서도 육체를 드러내 보이려는 여성의 의지(意志)는 열녀 춘향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춘향이 밖에서 그네를 타지 않았다면, 이도령과 어떻게 사랑의 손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인가? 열두 폭 치마를 입는다 해도 그네는 여인들에게 거의 오늘날의 미니스커트와 다름없는 효과를 낸다.
여인이 그네를 탄다는 것은 자신의 노출증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붉은 옷자락 펄럭펄럭, 백방사 속곳 가랑이가 동남풍에 펄럭펄럭, 박속같은 네 살결이 구름 속에 희끗희끗.”
이렇게 그네를 타는 춘향을 야유하는 방자의 말을 음미해보더라도 그것은 명백한 일이다. 마치 100여 년 전 서구의 여자들이 비 오는 날이면 신바람이 났던 것과 같은 이치다.
비가 오면 여인들은 장화를 신고 거리를 쏘다녔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그녀들은 수치심을 다치지 않고도 스커트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옷을 입고도 나체로 보이게 하라’는 이 옷의 제2 본능은 이익이나 톨스토이 같은 단순한 도학자(道學者)의 한숨만으로는 둑을 쌓아둘 수 없었다.(계속)⊙
09월 호
⑲한국인의 색채
白衣와 색동옷의 나라…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 예(禮)와 효(孝)를 중시했던 ‘색의 영도(零度)’ 문화 1000년 이상 이어져
⊙ “조선의 흰색은 백옥같이 밝은 흰색에서 거칠고 투박한 흰색까지 마치 음색의 향연”
⊙ 어떤 민족이 과연 이렇게 오색현란한 색을 옷소매에 두르고 다니는 것을 보았나
⊙ 고려청자, 이조백자의 청색, 백색 뒤에 무당의 원색, 색동옷이 숨겨져 있어
⊙ “우리 복식의 힘은 달항아리와 색동저고리의 양극단 포용”

▲흰옷 입은 노인. 1967년 6월 2일 경남 사천지역에서 열린 공화당 선거 연설회장을 방문한 한 갓 쓴 할아버지의 모습. 사진=조선DB
색채는 문화적 의미 작용의 은유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색이라면 흰색, 회색의 무채색이었다. 동양 유교권 문화는 붓의 문화, 즉 먹의 문화다. 그 문화의 기조색은 언제나 수묵화와 같은 흑색이었다. 그리고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불렸던 한국인에게는 백색처럼 친숙한 빛깔도 없다.
정확하게 말해 우리는 ‘색(色)의 영도(零度)’라 불리는 흑백(黑白) 문화 속에서 1000년 이상을 살아왔다. 근대화 이후에도 그 색채의 문화적 의미 작용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서도(書道) 같은 활자 문화 역시 ‘색의 영도성’을 상속받았다.
이러한 흑백의 무채색 문화가 지닌 특성은 위엄, 억제, 그리고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위의 패러다임을 지향한다. 가령 의상 하나를 놓고 보더라도 승려나 신부들, 그리고 모든 식장에서 입는 예복도 ‘채색의 영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예(禮)와 효(孝)를 중시했던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었을망정 누구보다 흥이 많은 민족이었다. “자연을 닮은 순수한 복색과 고름, 띠, 색동이 어우러진 활기찬 복식”이 있었다.
프랑스인 드 라 네지에르는 “조선의 흰색은 백옥같이 밝은 흰색에서 거칠고 투박한 흰색까지 마치 음색의 향연 같다”고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문헌연구실의 이민주 선임연구원은 이를 두고 “우리 민족이 즐겨 입었던 삼베, 모시, 무명 등 직물에 관한 통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해석”이라고 했다.
장도칼에 가죽신

▲이어령 선생의 모습이다. 《동아일보》 1983년 12월 28일 자 5면에 실렸다.
사람들은 공기(空氣)에 대해 말하는 일이 드물다. 우리는 항상 그 공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통치와 분단 그리고 전쟁은 공기와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일본인들은 우리 옷을 ‘조선옷’으로 불렀고 해방 후 한동안 우리 역시 습관처럼 ‘조선옷’과 ‘한복’이라는 명칭을 구별 없이 사용했다.[참조: 《한국인, 어떤 옷을 입고 살았나》(2017)]
해방 당시 여성들의 평상복은 한복이었다. 물론 이른바 ‘몸뻬’라는 일본식 작업복도 있었지만 일반적인 의생활은 한복이 주류를 이루었다. 36년의 식민 통치의 흔적을 지울 틈도 없이 6·25전쟁을 겪으면서 낙하산이든, 구호물자든 닥치는 대로 옷을 해 입어야 할 현실 속에서 우리 옷을 우아하게 갖춰 입고 생활한다는 건 대부분의 서민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대두된 것이 바로 카키색 문화이다.
그 시절, 달팽이의 껍데기처럼 몸의 일부로 느껴지던 옷이자 색이었지만 불과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그것은 낯선 옷, 낯선 색깔이었다. 옛날 민요(民謠) 한 곡조를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어디 군산가. 경상도 군사제.
몇천 명인가. 삼천 명일세.
몇백 바퀴 돌았나. 삼백 바퀴 돌았네.
무슨 칼을 찼나. 장도칼을 찼네.
무슨 신을 신었나. 가죽신을 신었네….”
전쟁놀이 같은 민요인데, 장도칼에 가죽신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군사 보고 “이겼느냐 졌느냐”가 아니라 기껏 “몇 바퀴 돌았느냐”고 묻는 말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이와 같은 민요 가운데는 “몇 바퀴 돌았냐”가 아니라 “몇천 냥 벌었냐”라고 묻는 것도 있고 또 “무슨 옷 입었나. 베옷 입었네”라는 것도 있다.
민요에 나타난 군대 문화만이 아니라 개화기의 실제 군사들도 대동소이하다 할 수 있다. 구한말 대원군이 만든 군대에는 무부광대(巫夫広大)로 편성된 난원군(欄援軍)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싸움보다는 굿을 장기로 하는 군이었다.
전래의 한복 밀어내고 이 땅에 들어온 카키색
우리의 전통문화가 비(非)군사적 문화였다는 것은 흰옷으로 상징되는 한복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복의 옷소매와 바짓가랑이는 전쟁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넓고 헐렁한 것이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년)이 한복을 벗어던지고 옷소매나 바짓가랑이가 좁은 호복(胡服)으로 갈아입자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야 싸움터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일본 작가도 지적한 것처럼 임진왜란의 잘못은 일본이 비무장국가와 다름없는 나라를 침공했다는 데 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나이만 되면 칼을 차고 다녔던 일본인의 눈으로 볼 때 숭문주의(崇文主義)의 선비들이 지배했던 조선왕조는 거의 비무장국가와 다를 게 없었다. 군대가 있어도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문관(文官)들이 지휘하는 일이 많았다. 싸우기 위해서는 카키색이라야(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군복은 땅과 풀 색깔을 기조로 삼고 있다)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해방 후 가장 큰 변화는 백의에서 카키색 제복으로의 전환이었다. 해방 후 미국 문화의 접촉도 따지고 보면 군정하에서의 경험이므로 이것 역시 카키색 체험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카키색의 의미는 경쟁이 투쟁이 되고 그 투쟁이 전쟁이 되는 이를테면 경쟁의 정점에 있는 색채라는 데 있다. 즉 전쟁의 승부는 죽느냐 사느냐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은 극한상황(極限狀況)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거기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힘이라는 사실뿐이다. 이 가열성 속에서 한국인들은 태어나 자라난 것이다. 미국 여성들이 드센 것은 개척민의 전통, 남자와 함께 라이플 총과 곡괭이를 들었던 그 생활에서 온 것이고, 한국 여성들의 바이탈리티와 거센 치맛바람은 피란 시절에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살아남은 그 가열한 전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쓰이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은, 그리고 극한적 용어의 대부분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이런 카키색 문화의 발로인 것이다. 1970~80년대만 해도 입을 옷이 없던 대학생들은 군복을 입거나 물을 들여 입고 다녔고, 고교생 역시 교련복을 입었다.
한국인의 원색적인 생명력
한국인이 아무리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마치 목욕탕에서 나온 사람처럼 전신에서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는 사람들, 얼굴은 조금씩 상기되어 있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다.
옷을 걸치고 있는데도, 어쩐지 알몸을 느끼게 하는 원색적인 생명력(生命力), 조금도 과장이 아닌 것은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도 바로 이 활력에 찬 모습일 것이다. 거짓말 잘하는 어른들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순진한 아이들이 쓴 작문에 나타나 있는 한국의 모습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1970~80년대 산업화로 몸부림치던 시절, 서울에 있는 일본인 학교 중1 학생(上田洋一)이 쓴 글을 잠시 들여다보자.
〈나는 한국에 와서 아직 2년 8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이 짧은 동안에도 집 가까이에 있는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제1 한강교의 확장, 반포대교의 건설과 한강쇼핑센터의 내부 신축, 그리고 학교 부근에는 개포동아파트와 양재천의 새로운 다리. 처음에는 논밭과 숲뿐이던 데가 이렇게 빨리 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놀라워할 뿐입니다.〉
물론 이 학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록 지진이 없고 지반이 견고하다고는 하나, 너무 빨리 짓는 것 같다”는 한마디 걱정을 남기고 있기는 하나, 어찌 되었든 일개미로 소문난 악바리 일본인 아이가 한국인의 활력 앞에서 오히려 기가 죽어 있는 것이다.
세계인들이 한국인들의 무한동력(無限動力) 같은 이 활력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 달리는 한국인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높여 자문하고도 있다.
주베일 항만 공사
군청(群青)빛 페르시아만에서 반마일쯤 들어간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 지대인 주베일항에는 세계 최대의 독이 있다. 당시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라 일컬어지던 역사적인 프로젝트였다. 공사 금액이 무려 9억6000만 달러나 투입되어 단일 회사가 맡은 공사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공사였다고 한다. 또 110만㎥의 콘크리트 작업량은 웬만한 항만 공사의 흙 매립량보다 많은 양이었다.
사막의 가열한 자연조건과 오일달러를 에워싼 치열한 경쟁을 물리치고 이 거대한 독을 완성한 사람들이 대체 누구인가. 바로 한국인들이었다. 이 공사에는 200여 명의 토목, 건축, 기계 및 설비 분야의 상주기술자와 관리자를 비롯하여 100종에 이르는 각 분야의 기능공이 하루 최대 3600명까지 참여하였다. 이를 연 인원으로 보면, 국내에서 구조물 제작과 현장까지의 수송에 동원된 인원을 제외하더라도 총 250만 명에 달했다. 이 공사에 투입된 자재는 약 1000종, 이 중 별도로 자재 공급원을 지정하거나 특수시방을 요구한 자재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 조달을 원칙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러한 물음 앞에서 한국인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면 무엇인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힘을 느끼게 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어린이날 기념 대운동회에서 서울 불암초등학교 학생들과 교환학생으로 온 필리핀 초등학생들이 색동저고리를 입고 강강술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렇다. 우리는 가끔 한국인 자신의 변화에 스스로가 놀란다. 가령 명절날 거리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한국인은 누구나 자신을 백의민족이라 생각해 왔고, 남들도 한국을 모노크롬 문화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색동옷을 보면 어떤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어떤 민족이 과연 이렇게 오색현란한 색을 이발소 간판처럼 옷소매에 두르고 다녔나. 옛 한옥에 칠하던 단청은 또 어떤가. 무당들의 번쩍이는 색채들은 또 무엇인가?
이불이나 베개나 한국인들이 내실에서 쓰는 것들은 예외 없이 색채가 풍부하지 않던가. 밖의 문화는 백의였지만, 내실 문화는 색실 문화였다. 색동옷처럼 한국인의 그 힘은 지금껏 억제되었던 색채의 분출과 같은 것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파랑, 초록, 노랑, 빨강, 자주 등 화사한 빛깔은 흰옷과 어울려 ‘색동의 축제’ 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 색은 어디에 쓰였을까. 어린아이는 남녀 할 것 없이 색동 소매를 단 저고리와 함께 오방장두루마기며 까치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민주 연구원에 따르면 여성은 남색 또는 붉은색 치마를 입고 깃과 고름, 끝동이 자주색이나 남색 단의 저고리를 입었다. 남성도 바지저고리 위에 배자를 입고 그 위에 흰색의 두루마기를 입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한국의 파란 하늘과 회색 돌, 빛바랜 담장은 순수함을 즐긴 한국인의 복색과 어우러져 순수하면서 활기찬 조화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복식의 힘이었다.
‘고려자기는 神에 이르는 길’

▲‘강진고려청자’ 국내 순회전이 열린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시민들이 각양각색의 청자들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래서 “달항아리와 색동저고리, 양극단을 포용하는 게 한국의 미(美)”(디자이너 정구호)라는 말이 나온다. 예부터 스타일의 다양성을 추구해 온 것은 한국 복식의 포인트다.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막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시리어
곧 흰 구름장이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 청자기
- 박종화의 시 ‘청자부(靑磁賦)’ 일부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빛깔을 노래한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1901~ 1981년)의 시 한 구절이다.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외국의 여러 미학자(美學者)들도 고려자기 앞에서는 고개를 수그린다. 단순한 미의 정취를 지나 어떤 숭고한 종교적인 신심(信心)까지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어떤 외국인은 고려자기를 신(神)에 이르는 길이라고까지 하며 감탄한 일이 있다. 자기의 형태도 형태지만, 그 신묘한 빛깔에 대해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감히 창조해내지 못한 이 고려청자의 신비한 색채미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밝고 자극적인 원색을 피했을 뿐이지 색채 그 자체의 심미의식(審美意識)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색채의 성격이 달랐을 뿐이다. 고려청자처럼 보다 복잡하고 음미(陰微)한 푸른 색채, 혹은 이조백자와 같은 백색, 이것이 한국인이 발견한 색채다.
색동옷의 생명력

▲3월 23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국제교육원에서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 등 25개국에서 온 외교관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셀카’를 찍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러면 과연 그 색채의 성격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독일의 문호 괴테는 푸른빛을 정의하여 ‘자극하는 무(無)’라고 했다. 푸른빛은 정지[無]의 의식이며, 신처럼 멀리,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늘, 어둠, 침묵, 마치 죽음의 심연 속에서 은은히 흐느끼는 영혼과 같은 색채이다. 고려청자의 ‘청색’은 이와 같은 푸른빛의 요소를 최대한으로 승화시켜서 얻은 색채이다. 그 청색은 완전히 도자기의 내면 속에 묻혀 있다. 해맑은 푸른색이지만 쑥빛에 가까울 정도로 깊이가 있다. 결코 어두운 빛깔이 아니다. 푸른 채로 내부로 젖어들어 깊이를 얻는 색채라고 할까. 그야말로 영원과 무한! ‘무’의 빛이라고 할 수 있다. 나타나면서 숨어 있고, 즐거운 듯하면서 슬프디 슬픈 신비한 색채감이다.
현세의 즐거움보다는, 그리고 타오르는 생명의 찬미보다는, 어둠 속에서 빛을, 죽음 속에서 생을 얻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거친 땅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듯이, 바다를 넘겨다보듯이 고뇌 속에서 발돋움 치며 무엇인가를 희구하려던 이 민족의 눈앞에 어리었던 것은 바로 이 고려청자의 푸르디푸른 빛이었으리라. 이것이 바로 한국인들이 휴식하였던 색채의 고향이다. 여인들이 즐겨 입는 옥색 치마, 옥색 고무신, 그리고 비취로 만든 비녀, 아니 저 한국의 가을 하늘빛도 마찬가지다.
고려의 청색이나 조선조의 백색 뒤에는 무당들에게서 볼 수 있는 원색, 색동옷 같은 것들이 숨겨져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채색의 열정과 쾌락 그리고 그 활력이 승화되었을 때만이 우리는 청자의 푸른빛과 백자의 백색과 같은 무채색에 가까운 그 빛을 비로소 얻어낼 수 있다. 한국 문화의 밑바탕에 있는 색동옷의 생명력을 어떻게 승화시켜 갔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조각보를 잇는 마음
고려청자, 이조백자, 울긋불긋 색동옷을 생각하니 조각보가 떠오른다. 조각보를 만들던 옛날 우리 할머니네들의 정성도 잊을 수 없다. 그분들은 옷을 만들고 남은 조각난 그 헝겊들을 결코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다. 아무리 쓸모없는 자투리라 할지라도, 마치 바다에서 따온 산호나 산에서 캔 옥돌이나 되는 것처럼 고이 간직했다.
그것들은 일시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느질을 할 때마다 우연히 그리고 조금씩 얻어지는 헝겊 쪼가리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참고 견뎌야 한다. 그렇게 해서 색채와 형태가 제각기 다르고 크기와 결이 다양한 헝겊 쪼가리들이 모인다.
그러면 이제 이 빛깔과 빛깔들을 어울리게 하고 저마다 다른 조각난 형태와 형태를 맞추어가는 배합의 슬기를 필요로 한다. 그분들은 주어진 소재 앞에서 묵묵히 순응한다. 그러나 단지 순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한된 색채와 형태를 구성의 의지와 혜지로 극복해 간다.
보아라. 예기치 않던 그 빛의 만남과 그 모양들의 교묘한 접합을. 거기에서 아름다운 무늬와 눈부신 색조를 띤 조각보가 완성된다. 옛날 우리 할머니네들은 이렇게 해서 또 다른 생의 면적을 얻어냈다.
버려진 헝겊들을 모아 조각보를 만드는 마음으로 그러한 슬기로 한 해를 보내는 이 순간을 생각해봐야 한다. 쓸모없었던 생활의 쪼가리들. 길바닥에 버려두었던 시간의 무수한 파편, 그리고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멀리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얼굴과 음성, 노동 뒤의 작은 휴식들….
무의미하게 찢겨나간 이 모든 생의 헝겊들을 그냥 버릴 것이 아니다. 모으고 배합해서 다시 구성을 해야 한다.
애초의 빛들을 가려내고 서로 만나게 해야 한다. 세모꼴 네모꼴이 어울리게 하기 위해서는 그 빈칸을 메우는 또 다른 조각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쓸모없는 나날들이 예기치 않던 현란한 한 연대(年代)의 조각보로 완성된다.
‘노 3S’의 의상 시대
이제 인간의 옷은 앞으로 어떤 운명의 길을 걷게 될 것인가. ‘노(No) 3S’의 의생활은 이미 지나갔거나 경험하고 있다. 3S란 옷을 지배해 온 시즌(Season), 섹스(Sex), 스타일(Style)을 말한다. 계절에 따라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는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춘추복이 있고 여름옷과 겨울옷이 다르다.
그런데 도시의 빌딩이나 아파트들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에서 벗어나 상춘(常春)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길에 나간다 해도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겨울에 두꺼운 오버코트를 입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점차 겨울옷이 얇아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이카족(族)들은 두꺼운 오버를 입고 다니지 않는다.
둘째로 옷에는 반드시 남녀 구별이 있다. 구약성서의 〈신명기〉를 보면 남자는 여자 옷을 여자는 남자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계율까지 있다.
그러나 남녀평등의 현대에서 여자가 남자처럼 바지를 입는 일이 예사이다. 이미 히피들은 유니섹스[單性]를 부르짖었다. 티셔츠나 스웨터의 경우 단추가 왼쪽에 붙었느냐, 오른쪽에 붙었느냐로 겨우 그 옷의 성별을 식별할 정도이다. 남자 옷이 여자 복장처럼 울긋불긋해지고 윗저고리가 블라우스형으로 바뀐 지 오래다. 헤어스타일 또한 남녀 구별이 사라졌다.
셋째로 일정한 전통적인 스타일이 사라졌다. ‘옷은 꼭 이렇게 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다. 이른바 언밸런스 스타일이 유행하고 있다. 왼쪽 소매는 긴데 오른쪽 소매가 짧다든지, 오른쪽은 체크 무늬, 왼쪽은 물방울 무늬라든지, 말하자면 짝짝이 옷이 생겨나고 있다. 양말도 짝짝이로 신는 시대다.
한마디로 말해서 계절과 성과 스타일(규격)에 얽매여 있던 인간 의상이 해방되어 노 3S로 나갔다는 것은 곧 인간의 의식과 생활 자체의 자유화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머지않아 닥칠 인간 운명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시켜준 또 하나의 깃발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계절도 성도 스타일도 없는 자유의 벌판으로 인간은 달려가고 있다. 생각할수록 인간의 옷은 인간 문명을 상징하는 원죄의 깃발인 것만 같다.⊙
한복의 변신
봉황문 크롭톱, 두루마기 재킷…
▲2020년 7월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을 발표할 당시의 블랙핑크의 한복 의상. 사진=YG 엔터테인먼트
분명 한복인데, 익히 알던 그 모습이 아니다. 한국 전통 문양이 그려진 상의는 배꼽 위로 껑충 올라갔고, 길고 까만 도포는 속이 훤히 비친다.
지난 2020년 7월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을 발표한 블랙핑크의 의상이다. 블랙핑크는 컴백 첫 무대였던 미국 방송 NBC의 토크쇼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과 신곡 뮤직비디오에서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블랙핑크 의상을 두고 “한복이다, 아니다”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니의 분홍 봉황 무늬 두루마기 재킷은 조선 선비가 입던 도포를 변형한 것이었다. 도포를 잘라서 아랫부분은 치마로, 윗부분은 저고리 재킷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로제 옷의 가슴가리개는 조선 시대 속옷이다. ‘크롭톱’ 같다.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궁중 보자기’에 있는 봉황문 패턴을 그렸더니 한국만의 분위기도 살아났단다. 겉옷은 무관이 입던 철릭이었다.(참조: 《어린이조선일보》 2020년 7월 28일 자 기사 〈크롭톱·재킷처럼 보이는 한복, 고정관념 깨니 정말 세련됐죠?〉)
⑳ 한국적 맛에 담긴 ‘코드5’
찌고 고고 끓이는 게 한국의 ‘물맛’… “참기름만 주면 모든 풀을 나물로 무쳐 먹는” 민족
⊙ “한국 사람들은 왜 낙엽(삭힌 콩잎장아찌)을 반찬으로 먹는가?”
⊙ 김치, 된장 등 발효 음식은 한국 음식의 基底
⊙ 한국의 요리 코드는 음식의 건더기(고체)와 국물(액체)을 함께 먹는 혼합체계… 김치와 김치 국물
⊙ 나물 캐고, 열매 따고, 줍고…의 메타언어는 ‘채집하다’… 채집 시대, 혈거민의 전설이 숨 쉬고 있어
⊙ 나물의 쓴맛과 독기를 우려내 먹을 수 없는 걸 먹을 수 있게 만들어. 물에 살짝 데친 후 갖은양념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 아무 맛이 안 나는 나물에 맛을 더해
⊙ 상추, 깻잎, 호박잎, 김, 미역 등등에 밥과 반찬, 된장을 넣어 싸 먹는 ‘쌈(包)’은 음식을 싸기 위한 수단이면서 목적
⊙ ‘고소하다, 구수하다’ ‘짭짤하다, 찝찔하다’ ‘칼칼하다, 컬컬하다’ ‘심심하다, 슴슴하다’ 속에 음양오행 원리 담겨
⊙ 비빔밥이야말로 ‘맛의 교향곡’… 단순한 ‘통합’이 아닌, ‘충돌’을 통해 ‘화합’을 이뤄내는 일등공신이 기름
⊙ 짜고 달고 시고 맵고 쓴 五味에 더해 밍밍하고 맛없는 無味의 맛 존재
⊙ 한식은 발효 문화이자 국물 문화, 나물 문화이자 융합 문화… 藥食同源,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다’는 원칙에 충실

▲비빔밥은 여러 재료를 넣고 비벼서, 혼합해서, 섞어서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서로 충돌하면서도 결국은 화합해 제3의 맛을 보여주는 것이 비빔밥이다. 사진=조선DB
음식이란 한 나라의 기후조건과 지리적 특성, 민족성 등을 한데 응축한 고유한 문화이다. 또한 인간 본연의 특성과 연결되는 문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냥이나 낚시를 해 짐승을 포획하든, 식물이나 열매를 채집하든 그 자리에서 바로 먹는 법이 없다. 집으로 가져와 불로 요리를 해 먹거나 저장해두었다가 먹는 등 기다림의 시간을 거친다. 재료를 익히는 시간, 우려먹는 시간, 발효(醱酵)하는 시간을 거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시간이고 음식이 탄생하는 시간이다.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는 맛의 비밀
인간은 또한 여타의 다른 동물들과 달리 수렵과 채집을 통해 획득한 음식을 혼자 독식(獨食)하는 법이 없다. 대개 가족과 ‘함께’ 먹는다. 말하자면 공식(共食·Common Meal)이다. 공식은 ‘가족·친족, 지역공동체의 성원이 모여 같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일’을 의미하는데, 이때 음식은 사회적 단결과 친목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례(祭禮)나 축제(祝祭) 등 공동사회의 여러 행사에 음식과 술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도 음식은 가족과 친족, 지역공동체의 친목과 화합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세시(歲時) 명절 같은 연중행사나 모내기, 추수 같은 농경사회의 주요 행사를 치를 때면 항상 음식과 술을 넉넉하게 준비하는 게 상례(常例)였다. 그리고 이 같은 전통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음복(飮福)’이나 ‘식구(食口)’ 같은 단어의 뜻을 되새겨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음복은 제례가 끝난 후 제사상에 올렸던 술과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절차를 의미한다. 함께 음식을 먹음으로써 제례에 참여한 모든 이가 조상이 내리는 복을 받는 것이다. 식구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식구는 ‘가족’이라는 말과 통한다. 식구는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한국 문화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음식을 요리해서 여럿이 함께 먹는 행위를 통해 가족처럼 친밀한 커뮤니티, 식사공동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음식이라는 결과에는 요리라는 과정이 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과정 없는 결과가 없듯 각 나라의 고유한 음식은 고유한 요리 방법에 의해 탄생한다. 서양 음식은 굽고 볶고 튀기는 게 기본이라면, 한국 음식은 대개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는 방법으로 요리한다. 한국적 맛의 비밀 또한 이 고유한 요리 방법에 담겨 있다.
첫 번째 코드: 담그고 삭히다
삭혀야 제맛인 발효 문화
어떤 형태의 요리든 맛의 근원적인 의미는 ‘날것’과 ‘익힌 것’, 즉 ‘생식(生食)’과 ‘화식(火食)’의 대립항에 의해 구분된다. 요리의 코드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의 코드가 그렇게 돼 있는 것이다. 신화의 상징에서도 그 유효성이 밝혀졌듯이 ‘날것은 자연’ ‘익힌 것은 문명’이라는 대응관계를 나타낸다.
날것, 익힌 것의 요리 코드는 서양 음식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바비큐처럼 서양의 육식 요리는 불로 구운 정도(rare, medium, well-done)로 맛을 차별화한다. 이와는 반대로 서양 음식에서 야채는 수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날것 형태로 요리된다.
문명과 자연의 이항 대립이 육식과 채식의 대립으로 나타나며, 서양의 요리체계는 이렇게 익힌 것과 날것의 대립항을 강화하고 더욱 심화해가는 데 있다. 그러나 한국의 요리 코드는 화식, 생식의 대립 코드에서 일탈해, 그것을 융합하거나 매개하는 제3항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날것도, 익힌 것도 아닌 삭힌 것의 맛, 바로 발효(醱酵)식이다. 생식과 화식 사이에 발효식이 개재됨으로써 요리는 새로운 삼각구도를 지니게 된다.
발효식은 시간의 맛… 어둠의 시간도 필요

▲김치, 된장·간장·고추장, 젓갈 등 발효 음식은 한국 음식의 기저(基底)에 해당한다. 사진=조선DB
실제로 김치, 된장·간장·고추장, 젓갈 등 발효 음식은 한국 음식의 기저(基底)에 해당한다. 발효식이 여타의 많은 문화권에 존재함에도 한국 음식의 패러다임을 발효식에서 찾는 이유는, 발효식이 한국 요리의 시스템이나 코드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음식 코드를 주거(住居) 코드로 옮겨보면 된다. 한국의 주택에는 앞마당과 그에 대립하는 공간인 뒷마당이 있다. 이 뒷마당을 상징하는 게 장독대다. 장독대는 된장·간장·고추장과 같은 발효식품을 발효, 저장하는 기물(독)을 놔두는 곳으로, 장독대를 중심으로 한 주거 배치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발효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김치와 장류라고 한다면, 그것이 주거 형태로 나타난 것이 장독대다.(화식 위주의 서양 문화 코드를 주거 코드에 대입하면 스토브나 바비큐 세트를 장치한 정원이 된다.)
화식이 성급한 불의 맛이라고 한다면 발효식은 시간의 맛이다. 한국의 대표적 발효 음식인 장(醬, 된장·간장·고추장)은 기다리고 용해하고 변화하는 시간의 지속 속에서 이루어진다.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말려 간장과 된장을 담그기까지, 그리고 독에 담아둔 간장과 된장이 발효돼 제맛이 들기까지, 대개 수개월, 혹은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맑은 날에는 장독 뚜껑을 열어 햇빛을 쐬고 흐린 날에는 뚜껑을 닫아 비를 피하며 삭힌다. 한국 종가의 씨간장은 수백 년간 대를 이어 전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삭힌 장은 그 시간만큼 깊은 맛을 품는다. 장에 박아 맛을 내는 장아찌 역시 마찬가지다. 깻잎, 고추, 양파 같은 채소는 물론, 콩잎, 수박껍질, 참외껍질처럼 응당 버려지는 재료마저 장에 묻은 후 일정 시간 삭히면 아삭하고 짭조름한 장아찌가 된다.
김칫독은 ‘단군신화’ 속 동굴
한국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김치야말로 삭힌 맛의 전형이다. 김치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배추도 고춧가루도 아닌, 시간이다. 김치는 샐러드나 겉절이처럼 즉석에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특히 김장김치는 겨우내 쉽게 무르거나 상하는 일 없이 시원한 맛과 아삭한 식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땅을 깊게 파고 그 안에 독을 묻어 보관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과 김치로 대변되는 한국 음식 문화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콩이나 배추, 무가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물은 시들고 사그라지고 썩지만, 발효식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부패의 시간성을 역이용해 새로운 맛을 창조해낸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음식의 고유한 특징이자 발효식의 지혜다.
발효의 맛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시간도 필요하다. 한국의 김장독은 겨우내 땅속에 묻어 0도에서 영하 1도 사이 저온 환경을 마련하고, 산소 노출을 최소화한다. 야생의 풋것들은 어둠 속에서 점점 길들여지고 성숙해진다. 포도가 발효되면 술이 되는 것처럼 야채는 발효되어 김치가 된다. 불의 맛이 빛에서 태어난다면 발효식의 맛은 어둠에서 빚어진다. 김칫독은 한민족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 속 동굴 같은 작용을 한다. 동굴 속에서 곰이 아름다운 웅녀로 변신하듯, 김치는 김장독의 어둠 속에서 제3의 맛으로 변신한다. 이러한 신화 속 변신은 곧 김치의 발효 작용과 매한가지일 것이다
두 번째 코드: 끓이고 고다
국물 맛이 일품인 濕食 문화

▲밥상에 매끼 빠지지 않고 오르는 것이 국, 탕, 찌개, 전골로 대표되는 국물 음식이다. 사진은 팔팔 끓인 꽃게탕. 사진=조선DB
국물은 한국의 맛을 해독하는 중요한 코드 중 하나다. 서양의 요리 코드가 ‘고체-액체’ ‘건식-습식’의 대립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한국의 요리 코드는 이 대립의 경계를 없애고 음식의 건더기(고체)와 국물(액체)을 함께 먹는 혼합체계로 되어 있다.
서양 요리에선 (수프처럼 정식으로 국물 요리를 만들 때를 제외하면) 조리 시 생기는 국물은 음식을 익히는 수단으로, 일종의 노이즈(noise)로 생각해 철저히 없애버린다. 반면 한식에서 국물은 수단이자 목적이다. 면을 끓이기 위해 부은 물도 버리지 않고 국수와 함께 그냥 요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칼국수나 라면, 그리고 한식화한 국물 스파게티 등이 좋은 예다.
김치는 어떠한가. 김치가 같은 문화권인 중국의 차사이나 일본의 오싱코와 다른 점은, 국물이 있느냐 없느냐, 국물과 함께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있다. 차사이나 오싱코는 조리 과정 중 생긴 국물을 덜어내고 건더기만 남긴다. 하지만 한국에선 김치의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국물을 버리는 법 없이 함께 먹는다. 국물 김치가 아니더라도 김치나 깍두기에는 꼭 국물이 따라다닌다. 국물과 건더기는 맛에서도 보완 작용을 해, 국물이 마르면 건더기의 맛도 죽어버린다. 건더기와 국물은 동양사상의 음과 양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한국인은 김치 국물을 활용해 전골도 만들고 찌개도 끓인다. 남들은 불필요하다 생각하는 것, 부수적이고 잉여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고 포섭하는 것이다. 노이즈를 허용할 뿐 아니라 그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살려 맛의 체계를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한식에 담긴 또 하나의 지혜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서양 음식 문화를 배제적(exclusive)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음식 문화는 포함적(inclusive)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한국인의 밥상에 매끼 빠지지 않고 오르는 것이 국, 탕, 찌개, 전골로 대표되는 국물 음식이다. 설렁탕·갈비탕·곰탕 같은 ‘탕’ 종류, 김치찌개·된장찌개·두부찌개 같은 ‘찌개’ 종류, 쇠고기전골·해물전골·곱창전골 같은 ‘전골’ 종류는 한국인이 즐겨 먹는 국물 음식이다. 끓이고 고아 만든 한국의 국물 음식은 원재료의 깊은 맛을 우려내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한국인은 이렇게 진하게 우려낸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 밥을 다 먹은 후에는 국물까지 후루룩후루룩 마신다. 밥과 국, 건더기와 국물이 함께 뒤섞여 있는 한국식 국물 문화는 ‘음식’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음식의 음(飮)은 마시는 것이고 식(食)은 씹어 먹는 것으로, 한국의 음식은 반드시 고체식과 유동식을 한데 묶어 생각한다. 마시는 것과 먹는 것이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한자문화권인 일본에서는 음식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음식을 ‘다베(食)모노(物)’라고 해 마시는 것을 제외한다. 마시는 것과 먹는 것을 다른 층위에 놓는 것이다. 영어의 푸드(food)에도 음료 개념은 포함되지 않는다. 서구의 고체/액체의 요리 코드로 볼 때 우리의 국물 음식은 빵이나 비프스테이크를 수프에 말아 먹는 것과 같다. 다분히 탈코드적인 요리로 보일 것이다.
한국에서만 수저 문화가 발달한 이유
한·중·일 삼국이 같은 젓가락 문화권에 속하지만 유독 한국에서만 젓가락과 숟가락을 짝지어 사용하는 수저 문화가 발달한 것도 국물 문화 때문이다. 숟가락은 국물을 떠 마시기 위해 필요하고, 젓가락은 건더기를 집어 먹을 때 주로 사용한다. 음(飮)이 음(陰)이라면 식(食)은 양(陽)이다. 건더기의 양(陽)은 젓가락이 맡고, 국물의 음(陰)은 숟가락이 맡는다. 형태도 젓가락은 길쭉해서 양이고, 숟가락은 움푹해서 음이다. 세상만물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듯 음식과 수저는 함께일 때 조화롭다.
이처럼 한국의 음식 문화는 ‘물’이 핵심이다. 이에 비해 서양은 ‘불’이 더 중요하다. 한국에선 물을 이용해 시루로 떡을 찌지만, 서양에선 물 없이 오븐으로 빵을 굽는다. ‘물맛’과 ‘불맛’, ‘시루’와 ‘오븐’, ‘떡’과 ‘빵’, ‘찌다’와 ‘굽다’가 대립항을 이루는 것이다. 찌고 고고 끓이는 게 한국의 ‘물맛’이라면 굽고 볶고 기름에 튀기는 것이 서양의 ‘불맛’이다. 한식이 국물이 주가 되는 가정식 중심의 인도어(indoor) 음식이라면 서양 음식은 스테이크나 바비큐를 중심으로 하는 아웃도어(outdoor) 음식인 셈이다.
이 같은 전혀 다른 요리 방식은 조리도구나 식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식은 고고 끓이는 게 기본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요리를 솥으로 한다. 한때 부엌의 중심에 솥이 놓였던 이유다. 이처럼 과거에는 커다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국과 탕, 찌개도 끓였다면, 지금은 압력솥이나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고 국과 탕, 찜 등의 요리도 한다.
이에 비해 서양은 오븐으로 빵과 고기, 생선을 굽거나, 불로 돌을 뜨겁게 달군 후 꼬챙이에 꿴 고기와 야채, 생선을 롤링(Rolling)해가며 구워 먹는다.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서양의 부엌은 오븐이 중심이다. 오븐이 있는 곳에 신이 머무른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서양의 거실 중앙에 벽난로(Fireplace)가 있는 것도 비슷한 개념이다.
조리도구뿐 아니라 식기도 한국과 서양은 완전히 다르다. 국물 문화가 발달한 한국에선 국물을 담을 움푹한 공기, 사발, 종지, 뚝배기 등이 필수지만, 서양은 접시만 있으면 어떤 음식이든 담을 수 있다. 한국을 사발 문화, 서양을 접시 문화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 번째 코드: 캐고 무치다
나물 민족의 식생활, 채집 문화

▲한국 음식 문화의 본류가 바로 채집 문화에서 시작된 나물 문화다. 한국 음식에는 유독 나물류가 많다. 사진=조선DB
옛날 우리 누이들이 집 밖에 나올 때 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핸드백이 아니었다. 마치 기구처럼 배가 부풀어 있는 둥근 바구니였다. 그리고 그 바구니는 단순히 물건을 간직해두거나 소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구니를 낀 채 봄에는 나물을 캐고 여름에는 뽕잎을 따고 가을에는 빈 밭에서 이삭을 주웠다. 나물 캐는 여인네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한국 특유의 정경이었다. 캐고, 따고, 줍고…. 그 기능의 메타언어는 ‘채집하다’이다. 그 바구니 속에는 인간들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조차 모르던 채집 시대, 혈거민들의 전설이 숨 쉬고 있다. 빈 바구니를 들고 산과 들을 걸었던 수렵 채집민들의 느림과 여유의 정신이 나물 문화에 담겨 있다. 농경 문화와 산업 시대를 지나면서 서구 사람들은 채집 문화를 망각했으나, 유독 한국인만은 문명의 변화 속에서도 채집 시대의 흔적인 나물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한국 음식 문화의 본류가 바로 채집 문화에서 시작된 나물 문화다. 한국 음식에는 유독 나물류가 많다. 한국어사전에서 ‘나물’이 들어 있는 한국말을 검색하면 ‘가는갈퀴나물’부터 ‘흰 바디나물’에 이르기까지 무려 250가지나 된다. 아마도 한국인은 “참기름만 주면 모든 풀을 나물로 무쳐 먹는” 민족일지도 모른다. 달래·냉이·도라지처럼 뿌리를 캐 먹는 나물, 시금치나 취나물처럼 잎으로 먹는 나물, 콩나물이나 숙주나물처럼 열매의 싹을 틔워 먹는 나물까지 식물의 잎, 열매, 줄기, 뿌리, 껍질, 새순 등 거의 모든 부분을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다. 말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식물은 거의 다 나물이 된다. 들나물이나 산나물을 캐다 먹은 한국의 식문화가 가난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임금님도 나물을 들고, 입춘이 되면 신하들에게 오훈채(五葷菜)를 내렸던 옛 풍습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무엇보다 한국인은 이 나물들을 생으로 그냥 먹기도 하지만, 살짝 데쳐 참기름, 깨소금 등 갖은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무쳐 먹기도 한다. 나물은 덩이와 입자형의 음식물과는 달라 금세 다른 것과 뒤엉겨 결합될 수 있다. 그래서 나물의 요리법은 ‘무치는’ 것이고, 나물의 맛은 맵고 달고 시고 짜고 쓴 오미(五味)가 된다. 무치는 것 외에도 나물죽, 나물국, 나물찜, 숙채, 생채, 강회, 나물장아찌까지 한국인의 나물 조리법은 매우 다양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요리 삼각형에서 날것은 자연을, 익힌 것은 문화를 의미한다고 했지만, 날것과 익힌 것의 대립구조로는 한국인의 나물 문화를 설명할 수 없다.
나물의 맛은 맵고 달고 시고 짜고 쓴 五味

▲시래기는 배추 겉잎을 푹 삶아 찬물에 우렸다가 겨우내 처마 밑에 걸어 말린 식재료다. 사진은 시래기 정식이다. 사진=조선DB
한국인의 나물 사랑에는 해조류 채집 문화도 한몫한다. 삼면이 바다에 면한 지정학적 특성은 미역, 김 같은 해조류를 즐겨 먹는 문화를 낳았다.
그중에서도 미역국은 한국을 대표하는 통과의례 음식이라 할 만하다. 한국인에게 미역국은 아이를 낳은 산모의 첫 식사이자, 해마다 생일상에 오르는 음식이다. 특히 산모가 먹는 미역은 ‘해산미역’이라 해서 가장 질 좋은 미역을 값을 깎지 않고 사는 게 관례였다. 현대에 들어 미역과 김은 ‘한국의 슈퍼 푸드’로도 불린다. 흔하지만 영양가가 풍부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카본 페이퍼(Carbon Paper·복사용으로 사용하는 먹지)’라 부르며 놀라워한 김은, 지금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선물목록이 되었다. 주로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바른 후 소금을 뿌려 구워 먹거나 부각으로 만들어 먹는데, 김에 찹쌀풀을 발라 말려 두었다가 기름에 튀겨 먹는 김부각은 바삭하면서도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이 일품이다. 이 밖에 다시마로는 육수를 내거나 튀각을 만들어 먹고, 파래나 톳은 고추장이나 된장으로 무쳐 먹는데, 모두 몸에 좋은 건강식으로 손꼽힌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나물 중에는 도라지, 고사리처럼 쓴맛 나는 것이 많다. 본래 식물의 쓴맛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막이다. 인간이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자연의 생태적 시스템인 셈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러한 시스템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낸다. 입에 쓴 것,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새로운 맛, 건강한 음식으로 재창조한다. 일례로 겉껍질을 벗긴 도라지는 소금을 넣고 바락바락 문지른 후 물에 헹궈 쓴맛을 없앤다. 어린잎을 꺾어다 한 번 삶아낸 고사리는 물에 한참 우려내 독기를 빼낸다. 삶은 후 말렸다가 다시 물에 불린 후 조리하기도 한다. 질경이나 씀바귀 같은 나물들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쓴맛을 상쇄한다. 이 쓴맛을 우려내기 위해 발달한 도구가 바로 독으로, 독은 진흙만으로 구워 만든 기물이다.
본디 요리란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맛없는 걸 맛있게 만드는 과정이자 결과다. 쓴맛과 독기를 우려내 먹을 수 없는 걸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 물에 살짝 데친 후 갖은양념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 아무 맛이 안 나는 나물에 맛을 더하는 것이다. 한민족이 나물을 조리하는 방식이야말로 요리 본연의 의미를 충족한다.
이 밖에도 한민족을 나물 민족이라 부를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한민족처럼 일부러 콩의 뿌리를 키워 콩나물을 만들어 먹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콩은 전 세계인이 즐겨 먹는 흔한 곡물이지만, 콩으로 나물을 만들어 먹는 문화는 한·중·일 삼국에서도 중국 일부 지방과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특성이다. 콩나물뿐이랴. 미니멀 아티스트 도널드 저드가 “한국 사람들은 왜 낙엽을 반찬으로 먹는가?” 놀라워했다는 삭힌 콩잎장아찌는 어떠한가.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콩잎이나 깻잎 등 식물 이파리를 간장이나 된장에 담가 오래 삭힌 후 밑반찬으로 즐겨 먹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버려’ ‘두어’ 새로운 식재료로 변모되는 시래기는 또 어떠한가.
시래기는 김치를 담그고 남은 부산물인 무청이나 배추 겉잎을 푹 삶아 찬물에 우렸다가 겨우내 처마 밑에 걸어 말린 식재료다. 한국인은 이 시래기를 갖은양념 한 후 기름에 볶아 시래기나물로, 된장을 걸러 붓고 끓여 시래깃국으로, 된장과 쌀을 함께 넣어 시래기죽으로 겨우내 즐기며 부족한 비타민을 보충했다.
네 번째 코드: 싸고 섞다
비비고, 섞고, 쌈 싸 먹는 융합 문화
서양의 음식 문화는 분리가 핵심이다. 그들은 고기는 고기만, 야채는 야채만 먹는다. 절대 섞어 먹지 않는다. 음식 하나를 맛보고 난 후 그다음 맛으로 넘어간다. 섞지 않으려니 입을 씻어내야 한다. 그래서 빵이나 셔벗(Sherbet) 같은 걸로 씻어 입을 백지화한다. 음식이 바뀔 때마다 포크와 나이프도 바꾼다. 앞선 맛이 그 도구에 묻어 있을 테니까. 음식마다 철저히 칸막이를 만드는 것이다. 디저트 역시 마지막에 입안을 씻어내는 개념이다. 이렇게 서양 음식은 ‘다 되어 있는 맛’, 즉 ‘있다’ ‘Being’의 상태이며, 차려놓은 사람이 완전히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 것이므로 완성품이다. 이는 존재론의 개념이다. 또한 ‘Exclusive’, 즉 ‘배제적’ 문화인 셈이다.
하지만 한국 음식은 먹는 사람의 입안에서 하나의 음식으로 완성‘된다’. 매끼 밥과 국, 야채, 고기, 생선, 심지어 후식으로 드는 떡, 식혜까지 동시에 한 상 위에 차린다. 이들은 홀로 있는 음식도, 독자적인 맛을 지닌 음식도 아니다. 김치든, 국물이든, 나물이든 반드시 밥과 함께 먹기 때문이다. 다른 음식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맛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갖는다. 그 병렬적 동시(同時) 구조의 상차림 앞에서 한국인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능동적으로 입안에 넣는다. 밥 한 술에 김치 한 조각 얹어 먹었다가, 갈비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가 하면, 남은 밥을 국에 말아 먹는다. 먹는 사람이 밥에 뭘 섞어 먹느냐에 따라 짜고, 싱겁고, 매운 것이 다 조정된다. 먹는 사람이 음식 맛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음식 문화는 ‘되다’ ‘Becoming’의 상태이며, 생성론의 개념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는 ‘Inclusive’, 즉 ‘포함적’ 문화다.
① 싸다-쌈

▲융합 문화의 대표 격 중 하나가 쌈밥이다. 온갖 재료를 싸 통째로 입안에 넣는다. 사진은 정어리 쌈밥이다. 사진=조선DB
이 같은 융합 문화의 대표 격 중 하나가 쌈밥이다. 한국인은 김이든 상추든 평면성과 넓이를 가진 것이라면 그것을 펴고 온갖 재료를 싸 통째로 입안에 넣는다.
상추, 깻잎, 호박잎, 김, 미역 등등에 밥과 반찬, 된장을 올려 싸 먹는다. 여기서 ‘쌈(包)’은 음식을 싸기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음식 자체, 바로 목적이다. 안에 든 밥과 반찬도 음식, 이를 감싼 쌈도 음식인 셈이다. 이 두 가지 음식은 입안에서 하나로 섞이면서 어우러진다. 쌈의 문화는 한국인의 보자기 문화와 하나로 이어져 있다. 한국의 보자기는 서양의 가방과 달리 싸는 물건의 부피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물건의 성질에 따라 그 형태도 달라진다. 때로는 보자기 밖으로 물건이 삐져나오기도, 반듯하고 단정하게 꼭꼭 여며지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풀어버리면 3차원의 형태가 2차원의 평면으로 돌아간다. 이 융통성과 다기능의 보자기가 상 위로 올라온 것이 바로 ‘쌈’이라 할 수 있다.
쌈밥은 먹는 방법도 독특하다. 입을 최대한 벌려 입안이 꽉 차게 먹어야 한다. 푸짐하게 먹어야 더 맛있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한국인은 뭘 먹든 위가 꽉 차도록, 즉 ‘포만감’을 넘어 ‘팽배감’을 느끼도록 먹는 걸 좋아한다. 배 터지게 먹어야 잘 먹었다고 생각한다. 보쌈이 대표적인 예다. 보쌈은 쌈 안에 고기, 야채, 해산물을 모두 넣고 볼이 미어지도록 먹는 게 상책이다. 이때 쌈과 쌈 안의 내용물은 각각의 맛을 품고 서로 섞이고 융합된다. 속 맛과 겉 맛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② 비비다-비빔밥
융합 문화의 또 다른 대표는 비빔밥이다. 비빔밥은 밥 위에 여러 가지 나물, 고기, 계란 등을 얹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섞은 ‘한 그릇 음식’이다. 산과 들판·강가에서 뜯어온 온갖 나물, 익힌 고기와 계란이 들어 있는 비빔밥이야말로 ‘맛의 교향곡’이라 할 만하다. 날것도 익힌 것도 아닌 그 중간항, 자연과 문명을 서로 조합하려는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낸 음식이다.
비빔밥은 여러 재료를 넣고 비벼서, 혼합해서, 섞어서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선 ‘섞는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부드럽게 또 매끄럽게 한다는 뜻, 또 하나는 거꾸로 헝클어뜨린다는 뜻이다. 섞고 비비는 과정에서 단순한 ‘나눔’이나 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면서도 결국은 화합해 제3의 맛을 보여주는 것이 비빔밥이다.
맵고, 짜고, 시고, 쓰고, 단 오미(五味)가 한 그릇 안에서 어우러져 만든 제3의 맛. 그런데 그 맛의 교향곡을 만드는 이는 바로 ‘음식을 씹는 나’다. 상을 받은 이가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잘 비벼 입안에 넣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오미가 비빔밥의 미각 기호라면 오색(五色, 靑·赤·黃·黑·白)은 비빔밥의 시각 기호다. 흰밥, 빨간 고추장, 푸르고 검고 누런 나물이 들어간 비빔밥을 섞으면 그게 곧 우리 태극기의 색이 된다. 바로 태극이다. 태극이란 것은 우주를, 음양을 나타낸다. 한국인들이 우주 공간을 상징할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오방색(五方色)이다. 푸른색은 동(東), 붉은색은 남(南), 흰색은 서(西), 검은색은 북(北), 노란색은 중앙(中央)을 가리킨다.
다섯 가지 색채는 공간의 방향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춘하추동과 그 계절의 변화를 일으키는 중심, 즉 우주의 시간 또한 상징한다. 자연과 인간의 현상을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로 구조화한 동북아시아의 음양오행설을 음식 문화에 적용시킨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요리체계는 한국인의 우주론적인 체계(Cosmology)와 상동성(Homology)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비빔밥은 ‘충돌’을 통한 ‘화합’
비빔밥 속 여러 맛이 한데 섞이기 위해서는 기름이 꼭 필요하다. 한국의 참기름과 들기름은 밥과 나물과 고기와 계란이 한데 섞이고 융합하는 데 윤활유 역할을 한다. 아울러 고소한 맛까지 더한다. 비빔밥이 단순한 ‘통합’이 아닌, ‘충돌’을 통해 ‘화합’을 이뤄낼 수 있게 하는 일등공신이 바로 기름이다. 한식 특유의 기름 문화는 언어에도 잘 반영돼 있다. 음식이 ‘매끄럽다’ ‘맛깔스럽다’라는 말은 대개 기름 맛과 통한다. ‘고소하다’도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건 이 ‘고소하다’라는 말에는 해학적 의미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이가 미운 사람이 잘못되면, ‘거 참 고소하다’라는 말을 한다. ‘속이 시원하고 재미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소하다’의 큰말 격인 ‘구수하다’에는 이런 의미가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 이처럼 맛을 나타내는 ‘고소하다, 구수하다’ ‘짭짤하다, 찝찔하다’ ‘칼칼하다, 컬컬하다’ ‘심심하다, 슴슴하다’와 같은 한국어에는 음양오행의 원리가 반영돼 있다. 한국어 특유의 모음조화에 따라 각각의 대립항을 가지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한국말의 묘미다.
이 외에도 한식은 뭐든 섞는 게 기본이다. 시각적 재미를 더하고 입맛을 돋우는 고명도 청(靑), 적(赤), 황(黃), 흑(黑), 백(白) 등 오방색을 사용한다. 더불어 양념 역시 여러 가지 재료를 한데 넣어 섞는다는 의미인 ‘갖은양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색과 맛이 잘 섞여야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다섯 번째 코드: 밍밍하고 슴슴하다
無味가 만드는 순환과 역설의 문화
한식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음양오행의 원리, 순환의 원리가 내재돼 있다. 동양문화권에서 태어난 해의 띠를 결정하는 십이지(十二支)의 경우, 대개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라고 읽는다.
하지만 한국적 개념의 십이지는 ‘해자축(亥子丑)’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자’에서 시작해 ‘해’로 끝나는 선형적 개념이 아니라 ‘해’에서 시작해 다시 ‘해’로 돌아가는 순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라비아 숫자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선 ‘123456789’를 일렬로 배치한다. 설령 수가 무한으로 간다 해도 어딘가에 끝은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에선 ‘1234’의 아래에 ‘8765’를 배치한다.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가는 형태다.
그렇게 배치한 아래위 두 수는 합하면 동일하게 ‘9’로 수렴된다. 계절 역시 비슷한 패턴이다. 서양에서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끝난다. 여기에 순환의 개념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계절은 ‘겨울’에서 시작해 다시 ‘겨울’로 돌아간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김소월(金素月)이 자신의 시 ‘산유화’에서 ‘가을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라고 읊은 이유다. 이 같은 개념은 언어에도 잘 반영돼 있다. ‘종시(終始)’, 즉 끝을 시작의 앞에 둔다든지, ‘사생결단(死生決斷)’같이 죽음을 생의 앞에 두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 순환과 역설의 미학은 사계절을 오계절로 만들고, 오미에 무미(無味)의 맛을 더한다. 그렇다면 사계절은 어떻게 오계절이 될까? 겨울은 12월·1월·2월, 십이지로 따지면 ‘해자축’에 해당한다. 여기서 ‘해자’는 완전한 겨울이지만, ‘축’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인터페이스다. 이런 식으로 적용하면 봄은 3월·4월·5월, ‘인묘진’, 여름은 6월·7월·8월, ‘사오미’, 가을은 9월·10월·11월, ‘신유술’이 된다. 이렇게 겨울에서 봄,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축’ ‘진’ ‘미’ ‘술’을 한데 모은 게 오계절이다.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 겨울이 더 추워져야 온다. 마찬가지로 새벽은 밤이 더 깜깜해져야 온다. 환해질수록 어두워지고, 달은 차오를수록 다시 이지러진다.
밥은 無이며 텅빈 공허

▲오미(五味)에 무미(無味)의 맛을 더하는데, 밍밍하고 맛없는 무미의 맛이 밥맛이다. 사진=조선DB
이 순환의 원리에 따르면 한식의 맛은 짜고 달고 시고 맵고 쓴 오미가 끝이 아니다. 밍밍하고 맛없는 무미의 맛이 존재한다. 그 대표가 밥맛이다. 밥은 그 맛이 아주 싱거워서 무(無)이며, 텅 빈 공허다. 그래서 빵처럼 밥 하나만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짜고 매운 여러 반찬과 어울리면 밥은 새로운 맛을 띠게 된다. 밥은 국물 음식, 마른 음식, 매운 것과 짠 것, 딱딱한 것과 연한 것 등 온갖 반찬들의 맛을 차별화시키면서 동시에 융합시킨다. 말하자면 밥을 먹는 것은 입을 씻어 맛을 지우는 ‘지우개’ 같은 역할을 한다. 매운 음식을 먹었어도 일단 밥이 들어가면 입안에는 언제든지 새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백지(白紙)가 마련되고, 그 백지 속에서 모든 음식이 제맛, 제 표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밥은 동시에 그 맛 둘을 합산한다. 반찬은 밥의 텅 빈 맛 때문에, 그리고 밥은 반찬의 맵고 짠 자극적인 맛 때문에 싱싱하게 살아난다. 한국의 음식은 이 관계의 틈새에서만 존재한다.
밥뿐이랴. 백석(白石)의 시 ‘국수’에 등장하는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표현은 평양냉면 특유의 심심한 맛을 잘 표현한 절창(絶唱)이다. 흰 떡의 심심한 맛은 또 어떠한가. 이 무미의 맛은 아직 맛이 형성되기 직전의 맛, 뭔가 하나 빠지고 결여돼 채우고 완성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맛, 만월이 되기 직전의 약간 이지러진 달 같은 맛, 막사발처럼 아직 조금 더 손이 가야 하는, 완성되기 일보 직전의 맛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맛이다.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 한국적 맛의 특징인 것이다.
① ‘버려둬’의 미학
앞서 ‘채집 문화-나물 민족’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식의 또 다른 특징으로 ‘버려둬’의 미학을 들 수 있다. 한국의 토박이말에 ‘버려둬’라는 아주 흔한 말이 있는데, 사실 이 안에는 이미 모순이 내재돼 있다. 버리면 버리는 것이고 두면 두는 것이지 버려둔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한국인은 ‘버리다’와 ‘두다’라는 대립항을 한데 합쳐 다이내믹한 개념을 만들어낸다.
‘버려둬’의 대표 격인 누룽지를 예로 들어보자. 누룽지는 원래 밥이 타서 바닥에 눌어붙을 때 생긴다. 일반적으로 음식이 타면 버리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이를 버리지 않고, 누룽지로 만들어 먹는다. 물을 붓고 끓여 눌은밥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묵은지도 비슷하다. 한국인들은 매년 김장김치로 겨울을 난 후 시어버린 김치도 결코 버리는 법이 없다. 묵혀뒀다가 ‘묵은지’로 먹는다. 오래 발효시켜 신맛이 강해진 묵은지는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여 먹거나, 물에 씻어 물기를 꼭 짠 후 수육 등 고기와 함께 쌈으로 먹는다. 김장할 때 따로 빼둔 배추의 겉껍질 부분과 무청 역시 버리지 않고 잘 말려둔다. 이렇게 만든 시래기는 푹 삶아서 찬물에 우려 뒀다가 찌개를 끓여 먹기도 하고 나물로도 무쳐 먹는다. 이게 바로 우거지다. 두부를 만들고 남은 콩 찌꺼기도 버리지 않고 뒀다가 콩비지로 만들어 먹는다.
흥미로운 건 이런 ‘버려둬’의 대표 사례들이 버려두기 이전과 비교해 영양성분이나 맛 측면에서 전혀 뒤질 게 없다는 점이다. 한국인은 남들 눈에 쓸모없어 보이는 버려야 할 것들로 더 맛있고, 더 독창적인 음식을 만들어낸다. 부정을 긍정으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음식 문화가 아닐 수 없다.
② ‘막문화’

▲막걸리와 전. 막걸리는 찹쌀, 멥쌀, 보리, 밀가루 등의 곡물을 쪄서 누룩, 물과 섞어 발효시킨 한국 고유의 술이다. 사진=조선D
한식에 계급적 층위를 적용한 ‘막문화’도 특이하긴 마찬가지다. 막걸리, 막국수, 막김치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막문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빈자(貧者)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그중 막걸리는 찹쌀, 멥쌀, 보리, 밀가루 등의 곡물을 쪄서 누룩, 물과 섞어 발효시킨 한국 고유의 술이다. 막 걸렀다고 해서 ‘막걸리’라 불리며, 맑지 않고 탁하다는 의미에서 탁주(濁酒), 농부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뜻에서 농주(農酒)라고도 불린다. 막국수는 값비싼 밀에 비해 흔하고 저렴한 메밀을 주재료로 해 면발이 다소 거친 게 특징이며, 시원한 맛의 김치 국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막김치는 배추를 포기째 담그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크기로 썰어 김치 양념으로 막 버무려 담근 김치로, 포기김치보다 모양은 없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어디서나 즉석에서 담가 먹을 수 있다. 이들 ‘막문화’를 대표하는 음식은 모자라고 부족한 재료로 식재료 본연의 맛, 자연에 가까운 맛을 구현해낸다. 마구, 혹은 대충 만든 듯하지만, 막바로 만들어낸 듯한 신선함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무심하게 대충 빚어 어딘가 모르게 조금 부족해 보이는 막사발, 일정한 형식 없이 몸과 맘이 가는 대로 마구 흔들어대는 막춤 역시 ‘막문화’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막문화’와 BTS의 몸짓

▲시중에 파는 막걸리.
세계가 열광하는 BTS의 몸짓은 달리는 관광버스에서도 춤을 추는 우리의 막춤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막사발, 막걸리, 막춤 등 한국 특유의 생명력과 독창성을 가진 문화에 지금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다.
한식은 발효 문화이자 국물 문화다. 또한 나물 문화이자 융합 문화이기도 하다. 이 모두는 순환과 역설의 원리를 품은 채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배제적’이 아니라 ‘포함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화합한다. 또한 한식은 약식동원(藥食同源), 즉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다’는 원칙에 충실하다. 채식 중심의 건강식을 지향하고, 음식 궁합을 중시해 함께 먹으면 좋은 음식과 상극인 음식을 가린다. 한식 최고의 맛은 이미 완성돼 끝난 맛이 아니다. 여전히 진행형인 덜된 맛이다. 이 역설의 미학이야말로 한식이 가진 최고의 경쟁력이자 K-푸드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비결이다.⊙
12월 호
〈21〉 집과 한국인의 유목민 기질
만주 벌판 달리던 유목민 피가 몽고반점 속에 남아
⊙ ‘집 짓고 편안하게 자식 낳고 그냥 살자’는 정착의 ‘토포필리아(topophilia)’
⊙ ‘집을 나와서 뭔가 새로운 것을 탐구하자’는 이동의 ‘네오필리아(neophilia)’
⊙ “행진이 끝나면 美 문화는 죽는다”(터너)… 케네디의 뉴 프런티어 정신에 영향 줘
⊙ 그네 타는 피를 가진 한국 여인… 박제상 부인, 떠나간 남편 기다리며 바닷가 떠돌아
⊙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아들 둘 데리고 주몽 동명성왕에게 쫓겨 내려와… 소서노는 日 건국신화 인물과 비슷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튀르키예와 독일의 그린피스 자원봉사자들이 제작한 현대판 ‘노아의 방주’. 튀르키예 아라라트산 정상에 놓여 있다. 사진=로이터/뉴시스
집이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집이다. 집이 있기에 가족이 모여 이야기하고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편히 쉴 수 있다. 더러 우리는 집에 살면서 소중한 집을 잊고 산다.
언제부터 집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지 더듬어 보니 내가 처음으로 성경을 읽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예전에 나는 성경만 보면 ‘뭔가 조금이라도 욕할 것이 없나’ 하고 찾았었다. 어릴 적 한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이렇게 따졌다.
“목사님, 노아의 방주가 뭐예요? 노아의 방주에 별 짐승이 다 탔다면서요? 물고기도 탔나요? 물고기는 어디 갔대요? 물고기는 노아의 방주에 타면 죽는대요?”
그랬더니 “사탄아 물러가라” 하셨다.
지금도 안 잊어버리는 성경 구절이 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땅에 핀 백합화를 보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마태복음 6장 25절)
유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내 어린 마음에 이 성경 말씀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먹을 것, 염려하지 마라’는 식(食)이다. ‘입을 것, 염려하지 마라’는 의(衣)다. 그런데 ‘사는 집[住] 이야기는 왜 안 나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한테 따지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이 두 개만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더 큰 것이 집이잖아요. 엑토르 말로(Hector Malot)의 소설 《집 없는 아이》를 읽어보면 배고픈 아이보다, 기운 옷을 입은 아이보다 집 없는 아이가 제일 불쌍해요.’
예수님은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마라”시면서 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집 말씀은 안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람쥐도 구멍이 있고 곰도 제 굴이 있다. 하물며 인간에게 살 집이 없겠느냐. 설마 하니 너희를 이슬과 비를 맞혀 죽게 하겠느냐’는 말씀을 예수님이 왜 빠뜨리셨을까 참 궁금했다.
한자로 살펴보는 집, ‘주(住)’

▲주(主)자는 등잔불을 올려놓은 대의 모양을 딴 글자다.
그러다가 한자를 배우게 되었다. 사람들이 한자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부터 흔들지마는 한·중·일이 서로 말은 안 통해도 세 나라가 다 한자를 쓰니까 서로 소통할 수는 있다. 배가 고픈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치자.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영어도 안 통한다. 그럴 때 종이에다 ‘먹을 식(食)’자를 써서 보여주면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줄 게다. 목이 마르면 ‘수(水)’자를 쓰면 된다. 예수님이 “먹을 것 걱정하지 마라. 입을 것 걱정하지 마라”셨는데 나는 맨날 젊은 사람들 보고 “한자 걱정하지 마라”고 말한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쓴 조지프 니덤(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이 “만리장성이 아무리 높아도 눕혀봐라. 만리장성을 눕히면 길이 된다”고 말했다.
멋진 상상력이다. 로마가도를 세우면 만리장성이 되고, 이 만리장성이 아무리 높고 험해도 눕혀 놓으면 돌로 만들어진 석포장 길이 된다. 그러니까 ‘만리장성을 뛰어넘을 생각을 하지 말고 눕혀보라’는 것이다. 눕히는 방법이 뭐냐? 왜 저런 모양이 되었을까 하고 상형문자의 근원을 생각하는 거다. 그 글자 모양만 보면 다 풀린다.
우리가 ‘살다’ 할 때의, 의식주 할 때의 ‘주’자를 한자로 한 번 써보라. 의식주의 주(住)는 ‘사람 인(人)’ 옆에다가 ‘주인 주(主)’를 쓴다. 그런데 ‘사람 인’을 안 쓰면, 주의(主義), 민주주의(民主主義) 할 때의 ‘主’가 된다. 이 ‘主’자가 민주주의에 두 개나 들어간다. 요즘 민주주의가 대세이듯이.
‘主’를 가만히 보면 등잔불 올려놓는 대(臺)의 모양이다. 등잔불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등잔 위에 불꽃이 있고 그 아래 등잔대가 있다. ‘主’는 등잔불과 똑같다. 이 등잔불은 훅 불면 꺼진다.
그런데 실제로 그 불이 확 꺼지면 큰일 난다. 등잔불이 움직여도 큰일이 난다. 이 등잔불이 다른 곳으로 옮아 붙을 수 있으니까. 주인(主人)이나 주체성(主體性)의 主는 모두가 확고한 위치를 지키고 있는 부동성(不動性)을 가리킨다. ‘주’는 움직이지 않는다. ‘주인 주’의 의미 그대로 주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객(客)이 움직인다. 손님이 움직이지 주인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손님이 들어왔다 나가지 주인은 자기 집을 지켜야 한다.
人 + 主 = 살 주(住)
‘주인 主’ 옆에 ‘사람 人’을 놓으면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 된다. ‘사람 人’을 놓으면 주거(住居)할 때의 ‘주’가 되는 거다. 사람에게는 내 거점이 있어야 떠돌이가 안 된다. 집 없는 사람은 끝없이 떠돌아다닌다. 집이 있어야 안정된다. 그러니까 결혼할 때 집부터 장만한다. 따로따로 떨어져가지고 동가식서가숙하면 안 되니까. 집은 딱 버티고 있는 거다.
그런데 떠돌아다니는 집이면 이것을 어떻게 할까? 신문에 범죄자나 이상한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주거불명이라 쓴 것을 볼 수 있다. 주거불명이면 형사도 못 잡는다. 그러니까 이 ‘주’자만 붙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 붙박이로 있는 것, 딱 중심에 있는 것이다.
木 + 主 = 기둥 주(柱)
‘主’에 ‘나무 목(木)’을 더하면 ‘기둥 주(柱)’가 된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는 평생 한자리에서만 산다. 집의 대들보나 기둥이 움직이면 난리가 난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특히 장자를 보고 “네가 우리 집안 기둥이다, 기둥”이라고 한다. 기둥을 받치는 서까래도 무너지면 안 된다. 그래서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기둥, ‘기둥 주’자는 ‘나무 목’자를 쓴다.
馬 + 主 = 머무를 주(駐)
제일 재미난 게 자동차가 돌아다니다가 어디를 가면 꼼짝을 못 한다. 그렇다. 모든 차가 도로를 질주하다가도 주차장(駐車場) 앞에선 멈춰 선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다녔으니까 ‘말 마(馬)’를 ‘主’ 옆에 붙여서 ‘말이 머무르는 곳, 머무를 주(駐), 주차장의 駐’가 된다.
宀 + 亥 = 집 가(家)
집을 나타내는 한자로 집 가(家)도 있다. 家는 집 면(宀)과 돼지 시(豕)자를 합한 회의문자다. ‘家’의 뜻은 주거와 마찬가지로 붙박혀 생활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宀자는 집을 그린 상형문자다. 이 宀부에 속하는 글자들은 대부분 ‘집’과 관계있는 뜻이 많다. 집 택(宅), 집 또는 지붕을 의미하는 우(宇), 집 주(宙), 집을 찾아오는 손님을 뜻하는 객(客), 집 실(室), 집 궁(宮) 등이 그렇다.
집
한국말로 ‘집’이라는 말은 어원이 ‘짓다(作)’에서 나온 것으로 집의 고어는 ‘짓’이었다.
의미론적으로 집의 전의어를 살펴보면 칼집의 경우처럼 무엇인가를 싸서 감춘다는 내밀 공간을 뜻한다. 특히 한국어에서 ‘집’은 영어의 경우처럼 하드웨어의 하우스(HOUSE)와 소프트웨어인 홈(HOME)을 구별하지 않고 동시에 융합하고 있다.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의미와 가족이 생활하는 가정이라는 의미 둘 다 가진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한자는 유목민이 만들었을까? 농경민이 만들었을까? 중국 글자니까, 한족(漢族)이 만든 것이니까 농경민이 만들었으리라. 만약 유목민, 기마민족이 만들었다면 몽골 사람들이 만든 몽골글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한자를 가만히 보면 대부분이 농경적 발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농경민들은 움직일 수가 없다. 곡식을 다 심어놨는데 바람이 나서 남자가 다른 데로 가버렸다. 여자도 화가 나서 가버렸다. 그러면 먹고살아야 할 그 곡식들은 누가 거둘까?
미국 남북전쟁 때 딱 한 번 휴전이 된 적이 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 곡식을 거둘 사람이 없으니까 휴전을 한 것이다. 이것은 토인비도 얘기한다. 농사철 곡식 거둘 때는 남군이고 북군이고 없었다. “이거 농사 안 지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어.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싸움하지 말고 곡식 거둘 동안 휴전합시다”고 한 것이다. 농경민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유목민이라면 계속 말 타고 싸웠을 게다. 유목민들에게 양식은 조달하면 되는 것이다. 침략해서 남의 곡식을 빼앗거나 훔치는 거다.
天高馬肥

▲국내 캠핑 인구가 늘고 있다. 유목민 기질을 타고난 것일까. 노동을 끝내고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떠난다. 한국관광공사 자료를 보면 캠핑 이용자는 2019년 399만 명(산업 규모 3조원)에서 2020년 534만 명(5조8000억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천고마비(天高馬肥)란 말은 ‘가을 하늘은 높고 말은 뚱뚱해진다’는 뜻이다. 살찐다고 하니까 천고마비가 좋은 뜻인 줄 안다. 그렇지 않다. 원래 한자는 ‘하늘이 높아지니 말이 살이 찌겠구나. 그러면 이것들이 우리가 논밭에서 거둔 곡식을 빼앗으러 오겠구나. 전쟁이 일어나겠구나’ 한숨이 담겨 있는 말이다. 농경민들이 높다란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유목민들이 무서워서, 천고마비의 계절이 무서워서 쌓은 것이다.
생각하는 재미를 들이면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왜 성경에는 ‘하늘을 나는 새, 땅에 백합화’라고 해서 입는 것, 먹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주거는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왜 한자에서 ‘주거’라는 말은 꼼짝 못 하고 갇혀서 못 움직이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이른다.
예수님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계속 돌아다니셨다. 석가모니도 마찬가지로 돌아다니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집은 어디일까? 서른 살 이후에는 없으셨으리라.
제자들 집에도 가고 어디든 가면 재워주니까 평생 집 걱정을 안 하셨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내 아버지의 집이 하늘나라에 있으므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셨다.
사마리아인이 본래는 이스라엘과 같은 종족이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피의 섞임으로 완전히 혼혈아가 되고 종교도 달라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더 미워하였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의 집에 불을 지를까요?” 하니 “아서라. 하지 마라” 하셨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해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도 성경에 있다.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이방인도 만나고 들판도 지나고 개울도 지나게 된다. 유목민들은 양떼를 몰아 풀 있는 데를 찾아다니니까 멈추는 곳이 집이고 텐트 치는 곳이 집이다. 그러니 유목민에게 집 개념은 없다.
예수님 또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사는 집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쉬는 데가, 자기가 텐트 치는 데가, 집이고 쉬는 곳이다.
만주벌판에서 고구려로 그리고, 고구려에서 백제로
한국 사람들이 유목적인가 농경적인가를 질문하면 다들 ‘농경’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백제가 어떻게 탄생했나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제는 북방에서, 고구려에서 왔다. 고구려 사람들은 만주벌판에서 말을 타고 뛰어다녔다. 백제는 비류(沸流)의 고향이던 압록강 중류의 졸본(卒本) 부여에서 남하해 미추홀로 온 것이 아닌가? 온조(溫祚)가 동생이고 비류는 형인데 온조가 서울에서 떨어지고 인천 미추홀까지 간 게 비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고구려에서 온 것이다.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는 아들 둘을 데리고 주몽 동명성왕에게 쫓겨 이곳까지 내려왔다. 도망 온 사람들이 왕이 되었던 게다. 말 타고 말 기르는 것 잘해서 좋은 말을 봐뒀다가 도망을 온 거다.
여기에 무슨 정치자금이 있어서 왕국을 세웠을까를 생각해보라. 옛날이나 오늘이나 정치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들은 무얼 했을까? 내 짐작으로는 소금 장사를 한 것 같다. 만주벌판에는 바다가 없어 소금 장사로 돈을 벌어 여러 부족을 합해 고구려를 건국했으니까. 이 사람 머리에는 ‘아, 이 땅 필요 없어. 소금만 있으면 나는 어디 가서든 나라 만들 수 있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일행이 인천 미추홀까지 간 거다. 그런데 작은 아들인 온조는 가다가 지쳐 “형, 나는 더 못 가겠다. 나는 여기 있을래. 여기 강물도 좋고 하니 나는 여기서 살래”라고 했다.
오늘날 서울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나쁘게 말하면 탈락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살 수 있었다. ‘한 발이라도 더 가야지’ 하는 유목정신을 가진 비류는 미추홀에 들어가 참패를 당한다. 미추홀은 갯벌이니 먹을 것이 없었다. 이것은 내 추측이다. 내가 소설 쓴 것인데 그럴듯하지 않나.
어떤 경우는 ‘팩트’보다는 ‘픽션’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틀림없다. 소서노하고 비류가 미추홀에다가 나라를 만들어가지고 성공했으면 온조 백제가 아니라 비류 백제가 됐을 텐데…. 미추홀이라는 것이 원래 ‘물이 많다’는 뜻인데 물이 얼마나 짜겠나.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비류가 일본으로 가서 거기에 야마토(大和), 일본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수사노오 노미코토(素戔鳴尊) 또한 소서노와 이름이 조금 비슷하다.
우리의 몸 안에는 원래 ‘노마딕’한 유목민 기질이 있다. 만주벌판을 달리고 저 발칸에서부터 수만km를 달려 바이칼호를 건너, 시베리아를 넘어 여기까지 와 보니까 큰일 난 거다. 여기는 더 이상 갈 데가 없고 풀만 자라서 유목 생활을 못 하니까 할 수 없이 농경 생활을 하게 된 거다. 그렇게 농경 생활을 2000년 가까이를 했으니 농경민이 된 것이다. 우리 몸에는 지금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
박제상 부인에게 유목적 기질이

▲뛰는 피를 가진 한국 여인들은 그네를 ‘타지’ 않고 ‘뛴다’. 신라 박제상의 부인처럼 말 타고 달리는, 뛰는 피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또 《삼국유사》를 봐도 말 타고 다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박제상(朴堤上·생몰년 미상. 신라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한 인물)의 부인을 보더라도 남편이 일본에 간다고 하니까 “가지 말라”는 데도 남편이 간다. 화가 나니까 박제상의 부인이 그냥 말 을 타고서 쫓아갔다. 박제상의 부인이 김소월처럼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고 읊는 여자일까? 아니다. 박제상의 부인은 바다를 보면서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고 다소곳이 기다릴까? 아니다. 말을 타 달리면서 남편을 쫓아가는데 너무 화가 나니까 땅을 치면서 몇십 리나 되는 바닷가를 떠돌아다녔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망부석(望夫石)처럼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린 것이 아니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야! 너 안 와” 소리 지르면서 쫓아간 거다. 집에서 못 기다리는 게다.
뛰는 피를 가진 한국 여인들, 보통이 아니다. 그네 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전 세계 여성들을 보라. 그들이 타는 그네는 대개 앉아서 탄다. 그네 그림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여성들은 그네를 서서 탄다. 이 피에는 박제상의 부인처럼 말 타고 달리는, 뛰는 피가 있는 게다. 소위 벌판에서 양 기르고 사는데 여자, 남자가 어디 있었겠는가? 함께 달리던 가락이 있는데 세월이 흘러 농경족이 되고, 들판이 아닌 집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농경민은 집을 존중, 유목민은 터를 존중”
농경족들은 끝없이 땅에 머무르려고 하고 유목족들은 끝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집을 존중하는 것은 농경민, 집을 존중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아무 데나 터만 있으면 된다는 게 유목족이다.
우리가 캠핑 가면 우선 뭘 찾나? 어디다 텐트를 치면 좋을까 하고 터부터 찾는다. 집이 아니라 터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다가 터를 잡아 건축을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거기서 농사지으려니까 집부터 잘 지어놓아야 한다. 집을 떠나면 안 되는 거다. 아들이 전쟁하러, 혹은 사냥하러, 혹은 물건 팔러 집을 떠날 수도 있다.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이사를 가면 안 된다.
청바지는 유목문화 상징
리바이스 청바지 탄생 과정

▲청바지와 포티나이너. 청바지는 금광 광부들의 바지가 너무 쉽게 찢어져 텐트용 천으로 만든 게 계기다. 포티나이너(forty-niner)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49년에 온 사람들’이라는 데서 유래된 단어이다.
청바지는 원래 텐트였다. 옷이 아니라 집이다. 청바지의 대명사 리바이스(Levi’s)는 독일 출신 광부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가 만든 청바지다. 그의 이름을 따 리바이스가 되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도 포티나이너(forty-niner)다.
‘포티나이너’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을 의미하고 ‘49년에 온 사람들’이라는 데서 유래된 단어이다. 1849년에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골드러시(gold rush)’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프로 미식축구팀 이름이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SF, San Francisco Forty-niners)’다.
1800년대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어떤 사람이 사금(砂金)을 발견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광산을 차려 땅을 파기만 하면 돈이 생기니까 대부분의 미국 개척민이 서쪽으로, 캘리포니아로 일확천금을 노리며 몰려왔다. 그렇게 몰려온 사람들이 집이 있었을까? 없었으리라.
남들이 금광 가서 돈을 벌어온다고 하니 뒤늦게 따라갔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 그 사람들은 집이 없을 거야. 내가 텐트를 팔아 돈을 벌겠다’라고 생각한 스트라우스는 텐트 천을 잔뜩 사가지고 갔다. 마침 군 천막을 발주받아 계약을 했는데 군대도 떠나버렸다.
스트라우스는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다. 화가 나서 잔뜩 술을 먹고 있는데 금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됐다.
“야, 이거 엊그제 입은 옷인데 말이야. 오다가 광석도 넣고 그랬더니 벌써 찢어졌어.”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텐트 진으로나 바지를 만들면 모를까. 이거 하루 이틀도 안 가” 하며 한숨을 쉬는 게 아닌가. 그때 스트라우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천막 천을 가지고 바지를 만드는 게다. 바지에 말굽 징 같은 것이 박혀 있었는데, 천막에 쓰던 징을 바지 주머니가 찢어지지 않게 박아 넣은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을 사이버 노마드(Cyber Nomad)라고 한다.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은 농경적이 아니고 노마딕한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사람에게 집은 별 관심이 없다. 옷이 집이다. 텐트 천으로 바지를 만든 리바이 스트라우스, 집이었던 텐트가 옷이 된, 그 정신이 철학이 되어버린 거다. 멈추지 않고 노동하는 사람, 금을 쫓아서 수십 마일을 달려오는 사람, 이것이 바로 양 떼를 몰고 끝없이 끝없이 지평선을 향해 행진하는 미국 문화다.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라는 사람은 “행진이 끝나면 미국 문화는 죽는다”고 했다. 미국 문화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오고, 동부에서 서부로 가서 서부에서 베트남, 한국으로 왔던 게다. 그런 행진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하와이로 해서 한국까지 왔다. 터너의 프런티어 사관은 케네디의 ‘뉴 프런티어 정신’에도 영향을 주었다.
장소를 사랑하는 ‘토포필리아’ vs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서 떠나는 뉴 프런티어 ‘네오필리아’
이 세상은 ‘집 짓고 편안하게 자식 낳고 그냥 살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니다. 한 발짝이라도 집을 나와서 뭔가 새로운 것을 탐구해야지’ 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한 군데 멈춰서 지내는 것을 ‘토포필리아(topophilia)’라고 한다. ‘장소’를 뜻하는 희랍어 ‘토포(topos)’와 ‘사랑한다’는 의미의 ‘필로스(philos)’를 합친 개념으로 장소애(愛)로 번역한다.
그리고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양 떼를 몰고 지평선으로 향하는, 케네디 대통령이 말했던 뉴 프런티어를 찾아 나서는 것을, ‘네오필리아(neophilia)’라고 한다.
그런데 끝없이, 끝없이 프런티어로 세상 밖을 향하다가 굶고 어려워지면 홈리스(homeless)가 된다. 홈리스는 거지가 아니다. 홈리스는 집이 있건 없건 집을 뛰쳐나와 거리가 내 집이고 하늘이 내 집인 거다.
예수님도 집 이야기를 안 하셨다. ‘떠돌이’라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떠돌이 유목민들이 새로운 것을 만든다. 독일에서 제일 잘나가는 벤처기업 중 직원들의 국적이 100종이 넘는 회사가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세계 최고의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세상은 지금 둘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 ‘하늘을 지붕 삼아 떠도는 영광, 끝없이 새것을 찾아다니는 사람’, 즉 네오필리아와 ‘텐트가 아니라 고대광실을 지어놓고 잘 지키는 사람’, 즉 토포필리아가 싸우고 있다.
네오필리아, 벤처, 해양족들도 끝없이 바깥으로 나가고 초원에서도 끝없이 바깥으로 나간다. 그런데 농경은 곡식을 심어놓고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자식 대대로 ‘땅 파먹고’ 살려고 하지만 땅은 요만한데 어떻게 할까?
우리는 농경족의 피가 흐르지만 또 반은 유목족의 피가 흐른다. 만주벌판 발칸에서 여기까지 온 가락이 우리에게서 점점 흐려지고 있지만 몽고반점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에서 깜짝 놀라게 경제 성장한 게 농경적인 것만 가지고 이렇게는 안 된다. 지금 세계 제일 많이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에서 한국이 인구 비율로 보면 단연 1, 2위라고 한다. 농경족들이 그렇게 나가겠는가? 옛 유행가 중에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하는 노랫말이 있다.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라고 하는데 한편에서는 끝없이 바깥으로 나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농경인의 피만 있지 않다. 유목족으로 만주벌판을 뛰던, 소서노가 자식을 데리고 미추홀까지 오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 간 그 피가 담겨 있다. 그 어느 한쪽만 있었더라도 오늘의 우리는 안 됐을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은 농경과 유목의 그것,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유목적인 것과 농경적인 것을 결합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