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재상 열전 1/ 월간조선 2023.01월 호 1 宰相이란 무엇인가? - - 12 정광필(鄭光弼)전
조선 재상 열전/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월간조선 2023
01월 호
1 宰相이란 무엇인가?
⊙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을 다스리고… 안으로 백성들이 서로 친목하게 하고, 경대부로 하여금 각자 그 맡은 자리에서 충실하게 일하게 하는 자”(진평)
⊙ 재상은 청절한 절의와 법치에 대한 확고한 의식 그리고 큰 계책을 정할 줄 아는 술가의 면모를 고루 갖춰야
⊙ 조준(趙浚), 황희(黃喜), 신숙주(申叔舟), 이준경(李浚慶) 등이 國體에 이른 최상급 재상
⊙ “마음대로 자기 뜻에 맞는다고 사람을 쓰게 되면 반드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소순)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 황희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에게 육가(陸賈·?~?)라는 신하가 《시경》과 《서경》을 강술하려 하자 유방이 욕하며 말했다.
“내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 어찌 《시경》과 《서경》이 도움을 주었겠는가?”
이에 육가가 말했다.
“말 위에서 얻었다고 해서 어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유방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던 육가가 유방 사후 권력이 유씨(劉氏)에서 여씨(呂氏)로 넘어가자 승상 진평(陳平)을 찾아가 장군 주발(周勃)과 힘을 합쳐 권력을 다시 유씨에게 돌려놓을 것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천하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재상(宰相)을 주시하고 천하가 위태로울 때는 장군을 주시합니다.”
재상과 장군을 보는 눈과 쓰는 잣대는 다르다

▲소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인 북송(北宋) 때 정치인 소순(蘇洵·1009~1066년)은 ‘재상을 임용할 때는 예로써 하라[任相]’는 글에서 장군과 달리 재상이 훨씬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옛날에 다른 나라를 잘 살필 줄 아는 사람들은 오직 그 나라 재상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필 뿐이었다.
이 문제를 평하는 사람들은 늘 ‘장군과 재상은 그 중요도가 같다’고 하는데 장군은 단지 한 사람의 큰 관리일 뿐이요 재상과는 같을 수가 없다.
나라에 정벌과 같은 전쟁 등이 있고 나서야 장군의 권위는 무겁게 되지만 정벌 등이 있건 없건 재상은 단 하루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재상이 뛰어나면 모든 관리가 뛰어나게 되고 장군 또한 뛰어나게 된다.
장군이 뛰어나고 재상이 뛰어나지 않다고 해도 장군을 재상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장군은 단지 한 사람의 큰 관리일 뿐이요 재상과는 같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어 소순은 재상을 임용하는 잣대와 장군을 쓰는 잣대를 명확히 구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군이 된 자는 대개 재주는 많지만 간혹 우둔하고 부끄러움이 없으니 모두가 절조(節操) 있고 염치가 있으며 예(禮)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예로 우대하지 않지만 그가 구속에 얽매이지 않아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그를 일반적인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강하고 방종해서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것은 실로 장군의 일반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한 무제(武帝)가 대장군을 대할 때 종종 평상에 걸터앉은 채로 대했고 이광리(李廣利)가 대완국(大宛國)을 쳐서 승리했을 때 많은 군졸을 희생시킨 죄에 대해서는 들추지도 않고 불문에 부쳤다. 이것이 장군을 임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재상의 경우에는 반드시 절조 있고 염치가 있으며 예(禮)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강하고 방종해서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천자는 재상에게 예를 갖추어 우대하고 책임을 엄중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임금의 禮待와 신하의 盡禮
이미 공자는 《논어》에서 임금이 신하를 예대(禮待)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팔일(八佾)편 19다.
〈(노나라) 정공(定公)이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자가 대답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는 예로써 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충직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때 신하를 재상으로 고치면 그대로 소순이 한 말과 통한다. 바로 앞 팔일편 18에서 공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임금을 섬기면서 예를 다했더니 사람들은 그것을 아첨이라고 여겼다.”
임금은 재상에게 예대(禮待)하고 재상은 임금에게 진례(盡禮)해야 한다. 예를 다하는 것이 충(忠)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 오히려 아첨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서경》 주서(周書) 군진(君陳)편에 나오는 글 하나를 보자. 상-중-하로 보자면 충이 상, 진례가 중이고 군진은 하인 셈이다.
“너에게 아름다운 모책과 계책이 있거든 즉시 들어와 안에서 너의 임금에게 고하고 네가 그것을 밖에 말할 때에는 ‘이 모책과 계책은 오직 우리 임금 덕분이다’라고 하라.”〉
재상과 책임
이를 흔히 군진지충(君陳之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아첨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금과 신하는 일의 이치[事理=禮]를 연결고리로 맺어진 것이지 일을 떠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돌아간다. 힘에 의한 복속 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례하지 않는 신하는 신하다운 신하가 아니고 예대하지 않는 임금은 임금다운 임금이 아니다.
다시 소순의 말이다.
“예로써 재상을 우대한 다음에 책임을 엄중히 물으니 원망하는 말이 없게 될 것이고, 책임을 엄하게 묻고 난 다음에 예로써 대우하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를 차리지 않으면서 책임만 엄중히 묻는다면, 그는 ‘주상께서는 저를 무슨 예로 대우하셨기에 저를 이같이 엄하게 문책하십니까? 너무 심하십니다’라고 할 것이다.
책임은 가볍고 예가 중하면, 그는 장차 게을러져서 자신이 할 일에 힘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써 우대하여 재상의 마음을 묶어두고, 엄중한 책임으로 재상에게 게으르지 않도록 격려한 이후에야, 재상 된 자는 조정에 충성을 다할 것이다.”
論相 1
논상(論相)이란 임금 입장에서 재상 감을 논한다는 뜻이다. 먼저 임금이 뛰어난 이를 재상으로 두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유향(劉向)이 편집하고 저술한 《설원(說苑)》(이한우 옮김, 21세기북스) 제1장 임금의 도리[君道]에 실린 두 글은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1-13

▲은 탕왕의 재상 이윤.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에게 물었다.
“삼공(三公), 구경(九卿), 이십칠 대부(大夫), 팔십일 원사를 (뽑아 씀에 있어) 알아보는 데 어떤 도리가 있는가?”
이윤이 대답해 말했다.
“옛날에 요(堯)임금은 사람을 보는 순간 알아보았고 순(舜)임금은 일을 맡긴 다음에 알아보았고 우왕(禹王)은 일을 (맡겨) 이룬 다음에 그를 들어 썼습니다. 무릇 세 임금이 뛰어난 이를 들어 쓴 것은 모두 도리는 달랐지만 공업(功業)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여전히 잘못된 것이 있었는데 하물며 아무런 법도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에 맞는다고 사람을 쓰게 되면 반드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신하에게 자기가 가진 능력을 바치게 한다면 만의 하나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
1-14
임금 된 자는 어떤 잣대로 뛰어난 이를 뽑아야 하는가?
무릇 임금 된 자란 뛰어난 재목을 얻어 자기를 보필하게 한 다음에야 다스리는 것이니 비록 요순과 같은 눈 밝음이 있더라도 고굉(股肱·팔다리)과 같은 신하들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임금의 은혜는 널리 퍼지지 않고 교화로 인한 은택은 행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눈 밝은 임금이 위에 있게 되면 선비를 고르는 데 신중하고 뛰어난 이를 찾는 데 힘쓰며 사방의 보좌를 두어 자기를 보필하게 해 영준한 인재들로 하여금 관직을 맡게 하여 그 작위를 높이고 그 봉록을 무겁게 해 뛰어난 이는 (벼슬에) 나아와 눈부신 영예를 누리고 능력이 떨어지는 자는 물러나 자기 일에 힘쓰게 한다. 이 때문에 임금은 더 이상 남은 근심이 없고 아래에서는 사특(邪慝)한 마음을 갖지 않아 백관은 능히 다스려지고 신하들은 직무에 즐거이 임해 은혜는 많은 백성에게 펼쳐지고 윤택함은 초목에까지 미치게 된다.
옛날에 우순(虞舜·순임금)은 왼쪽에 우를, 오른쪽에 고요를 두어 (자기는) 당(堂)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서도 천하는 다스려졌으니 이것이 바로 능력 있는 사람을 잘 부린 결과다.
論相 2

▲송시열
조선 현종 12년(1671년) 11월 30일 우레 등의 변고가 있자 우의정 송시열이 사직을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중에 바람직한 정승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신(臣)은 또 임금의 일 중에 정승을 논하는 것[論相]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승을 논하여 적임자를 얻으면 어지러움을 다스릴 수 있고 망할 것을 보존시킬 수 있지만, 진실로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안정이 필시 위험해지고 융성이 필시 쇠퇴해질 것입니다. 전하와 같은 명성(明聖)으로 어찌 이것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또한 신 같은 자를 그사이에 채워 넣으셨습니다. 신은 그 적임자가 결코 아니며 또 조석 간에 쓰러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진용할 기회가 없고 나라 상황은 불 속에서 구하고 물속에서 건지듯 급해질 것입니다. 모름지기 신의 직을 빨리 갈고 그 적임자를 빨리 구하여 그 지위에 놓는다면 나라의 상황이 가망 있게 될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일찍이 인군논상(人君論相)의 설을 가지고 그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승을 논해야 할 사람이 자기에게 맞는 자를 구할 뿐 자기를 바로잡아주는 자를 구하지 않고, 사랑할 만한 자를 취할 뿐 두려워할 만한 자를 취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임금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이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부합하여 뜻을 받드는 것을 능사로 삼으며, 세상을 경영할 때 사물을 주관하는 것을 마음먹지 않고 자신을 용납받고 총애를 굳히는 것을 기술로 삼는다면, 재상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자기를 바로잡아주고 두려워할 만한 자를 뽑는다면 반드시 자중하는 사람을 얻게 될 것이고, 내가 그에게 맡기는 것도 부득불 무겁게 될 것이다. 맡기는 것이 무거우면 그가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려는 뜻을 다할 것이며, 세상을 경영하고 사물을 주관하려는 그 마음을 행할 것이다. 또 곧고 우직하며 과감히 말하는 천하의 선비를 공정히 뽑아 대간(臺諫)으로 삼고 관직을 주어 의논에 참여케 할 것이다. 내 복심이목(腹心耳目)의 임무 부여가 항상 뛰어난 사대부에게 있고 군소배들에게 있지 않게 하며, 옳고 그름을 상벌하는 권한이 항상 낭묘(廊廟)에 있게 하고 사문(私門)에서 나오지 않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설은 실로 임금이 정승을 논하는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전하께서 시험 삼아 이렇게 정승을 구하신다면 반드시 그 적임자가 있을 것입니다.”
주희 특유의 임금을 바로잡는 정군(正君), 즉 격군론(格君論)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뛰어난 재상의 덕목[賢相之德]
《논어》 위령공(衛靈公)편 9에 나오는 일화부터 보자.
〈자공(子貢)이 어짊을 행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장인(匠人)이 일을 잘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도구들을 예리하게 한다.
이 나라에 있으면 그 나라 사대부들 중에서 뛰어난 이들을 (스승처럼) 섬기고 그 선비들 중에서 어진 사람을 벗 삼아야 한다.”〉
이 글은 장인을 임금으로 바꾸면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장인이 일을 잘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자기 연장을 잘 가다듬고 예리하게 하는 것이다. 임금 입장에서는 재상을 잘 골라 쓰는 일이 이에 해당한다.
스승처럼 여길 신하[師臣]와 벗처럼 여길 신하[友臣]를 찾아내라는 말은, 스승과 같은 재상, 벗과 같은 경대부(卿大夫)와 대간(臺諫)들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재상은 어떤 덕목과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공자는 곧음[直]을 들었다. 안연(顔淵)편 22다.
〈번지가 안다는 것[知]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가 말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知人]”
번지가 (특히 사람을 아는 것과 관련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말했다.
“곧은 사람[直]을 들어 쓰고 모든 굽은 사람은 제자리에 두면, 굽은 자로 하여금 곧아지게 할 수 있다.”
번지는 물러나와 자하(子夏)를 찾아가 물었다.
“내가 스승님을 뵙고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스승님께서 ‘곧은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굽은 사람은 제자리에 두면, 굽은 자로 하여금 곧아지게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무엇을 말함인가?”
자하가 말했다.
“풍부하도다! 그 말씀이! 순(舜)임금이 천하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고요(皐陶)를 들어 쓰시니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고, 탕왕(湯王)이 천하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이윤(伊尹)을 들어 쓰시니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다.”〉
고요나 이윤 모두 옛날의 뛰어난 재상이다.
유소의 《인물지》
이번에는 위(魏)나라 조조(曹操·155~220년)의 신하 유소(劉劭)의 《인물지》가 제시하는 뛰어난 재상이 갖춰야 할 덕목을 살펴보자.
지인지감(知人之鑑)에 관심이 많았던 조조의 명을 받아 유소는 《인물지》를 지었다. 이는 앞으로 조선 재상들을 구체적으로 파고들 때 유용한 잣대가 될 것이다.
〈청절(淸節)의 다움은 (후사를 가르치는) 사씨(師氏)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도리와 다움을 담당하며 주자(胄子)들을 가르치고 인도한다.]
법가(法家)의 재능은 (범죄를 막고 처벌하는) 사구(司寇)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형벌과 법률을 담당하며 간사한 자와 난폭한 자들을 막는 일을 한다.]
술가(術家)의 재능은 (재상을 보좌하는) 삼고(三孤)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묘당(廟堂·정승이나 삼공의 근무처)에서 계책을 내는 일을 담당하며 삼공을 도와 바른 도리를 논한다.]
삼재를 순전하게 갖춘 경우 삼공(三公)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지위는 삼괴(三槐)이며 삼괴를 보고 앉아서 큰 도리를 논한다.] [譯註-삼괴란 옛날에는 조정(朝廷)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삼공(三公)이 이것을 향하여 앉았다는 데서 온 말로 삼공(三公)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삼재를 미미하게 갖춘 경우 총재(冡宰)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천관(天官·이조판서)의 경(卿)으로 백관을 총괄한다.]
장부(臧否)의 재능은 사씨(師氏) 보좌에 어울린다. [原註-옳고 그름을 분별함으로써 사씨(師氏)를 보좌한다.]
지의(智意)의 재능은 총재 보좌에 어울린다. [原註-사(師)의 일을 마땅함으로 제어해 천관을 보좌한다.]
기량(伎倆)의 재능은 사공(司空·토목 담당)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생각을 섞어 정교한 해법을 찾아내는 사람은 그래서 동관(冬官·조선 시대 공조판서)을 담당한다.]
유학(儒學)의 재능은 안민(安民·백성 교화)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다움과 떳떳함을 담당하며 그 사람됨을 보호하고 지켜낸다.]
문장(文章)의 재능은 국사(國史·역사 서술)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법도가 되는 모범을 서술함으로써 후대에 드리운다.]
변급(辯給)의 재능은 행인(行人·외교관)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저쪽의 제안에 이쪽이 제대로 반응하며 길에서 다른 나라의 외교관을 잘 보낼 수 있다.]
효웅(驍雄)의 재능은 장수(將帥)의 임무에 어울린다. [原註-군사를 통할하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들을 토벌하고 평정한다.]〉
재상 감이란?

▲신숙주
먼저 유소는 기본적인 세 가지 신하 유형을 제시한다.
그 첫째가 청절가이다. 주자(胄子)는 원래는 임금의 맏아들만 가리키다가 점점 확대되어 천자부터 경대부까지 이르는 뜻으로 바뀌었다. 주자는 그래서 나라 사람의 아들이라 해서 국자(國子)와 통하며 성균관 전신이 바로 국자감이나 주자감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대체로 조선 시대에 이런 인물들은 정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주로 성균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성균관 좨주(祭主)가 대표적이다. 조선 초 권근(權近·1352~1409년)이 이에 속한다.
청절가가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司徒)에 어울린다면 법가는 범죄를 막는 일을 하는 사구(司寇)에 어울린다. 형조판서의 뿌리라 하겠다.
술가는 계책에 능한 사람이다. 삼고(三孤)란 조선 시대 삼정승 바로 아래 찬성(贊成)과 참찬(參贊)에 해당한다.(찬성은 정승이 일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는 뜻이고 참찬은 그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재상 감을 논한다. 이상 세 가지 재능을 고루 갖춘 이를 국체(國體)라고 부르는데 바로 재상 감이다.
재상은 청절한 절의와 법치에 대한 확고한 의식 그리고 큰 계책을 정할 줄 아는 술가의 면모를 고루 갖춰야 한다. 대체적으로 청절한 절의만을 강조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신하관 혹은 재상관과는 다르다. 실제로 재상은 정(正)보다는 중(中), 상도(常道)보다는 권도(權道)에 능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소가 제시하는 재상관이 훨씬 현실적이다. 유소는 이런 최고 수준에 이른 재상으로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을 꼽는다.
조선 초 조준(趙浚·1346~1405년)이나 황희(黃喜·1363~1452년), 신숙주(申叔舟·1417~1475년) 그리고 조선 중기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 등이 바로 국체(國體)에 이른 재상이라 하겠다. 하륜(河崙·1347~1416년)의 경우 큰 계책을 정하고 제도 정비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술가와 법가의 면모는 출중했지만, 청절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다 하겠다.
國體와 기능가
청절가·법가·술가 세 가지 재능을 고루 갖추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재상 감에 비해 떨어지는 인물을 유소는 기능가(器能家)라고 이름지었다. 조준 아래에서 정승을 지낸 김사형(金士衡·1333~1407년)이나 황희의 파트너 맹사성(孟思誠·1360~1438년)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학재(學才)가 단연 출중했던 정인지(鄭麟趾·1396~1478년) 또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큰 계책을 결단하는 술가 덕목이 떨어지는 유형이다.
대체로 조선 재상들은 국체보다는 기능가들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집중하는 장부가는 청절가의 아류(亞流)이고 큰 계책이나 원대한 안목은 없으나 맡은 관직은 빈틈없이 수행할 수 있는 기량가는 법가의 아류로 주로 유능한 경조윤(京兆尹),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직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지의가는 새 제도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임기응변에 능하고 잔재주가 많아 술가의 아류라 할 수 있다.
나머지 문장, 유학, 변급, 효웅은 재상의 덕목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 문장가는 사마천, 반고처럼 역사를 쓸 수 있고 유학가는 옛일을 전수만 할 뿐 일을 맡기기에는 적합지 않다. 말재주에 능한 변급가는 외교를 맡길 만하고 웅걸은 한신(韓信·?~기원전 196년)이 대표적이다. 조선 역사에서는 이순신(李舜臣·1545~1598년)이 이에 속한다.
재상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진평

▲진평
사마천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는 재상 혹은 승상이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나라) 문제(文帝)가 즉위하여 태위(太尉) 주발이 몸소 병사를 이끌고 여씨들을 죽인 공이 많다고 여겼다. 이에 진평은 주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고 했다. 효문제가 막 즉위하여 진평이 병을 핑계 대는 것이 괴이하여 물었다. 진평은 “고제(高帝·한 고조 유방) 때 주발의 공은 신 진평만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씨들을 죽인 일에서 신의 공은 주발만 못합니다. 바라건대 우승상을 주발에게 양보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효문제는 강후(絳侯)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하니 서열 제1위였다. 진평을 좌승상으로 옮기니 서열이 두 번째였다. 진평에게 금 1000 근을 내리고 식읍 3000 호를 더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효문제는 갈수록 국가의 일에 익숙해졌다. 한번은 조회에서 우승상 주발에게 “천하에서 1년 동안 처리하는 사건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었다. 주발은 사죄하며 “모릅니다”라고 했다. 이어 “그럼 천하에서 1년 동안 들어오고 나가는 돈과 곡식이 얼마나 되오?”라고 묻자 주발은 또 모른다고 사죄했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이에 상이 다시 좌승상 진평에게 물었다. 진평은 “담당자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담당자가 누구인가?”라고 묻자 진평은 “폐하께서 사건 처리를 물으시려면 정위(廷尉)를 찾으시면 되고, 돈이나 곡식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치속내사(治粟內史)를 찾으면 됩니다”라고 했다.
상이 “정말 각자 담당하는 자가 있다면 그대가 맡은 일은 무엇이오?”라고 묻자 진평은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하들을 주관합니다. 폐하께서 신이 모자란 사람이란 것을 모르시고 재상이란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을 알맞게 기르고, 밖으로는 사방 오랑캐와 제후들을 어루만지며, 안으로는 백성들이 서로 친목하게 하고, 경대부로 하여금 각자 그 맡은 자리에서 충실하게 일하게 하는 직입니다.”
효문제는 좋다고 칭찬했다. 우승상은 크게 부끄러워 조정에서 나오자 “그대는 어째서 평소 나에게 그런 대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단 말이오?”라며 진평을 나무랐다. 진평이 웃으며 “그대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임무를 몰랐단 말이오? 그럼 폐하께서 장안의 도둑들 숫자를 물으면 그대는 억지로 대답하려고 했소?”라고 했다. 이에 강후는 자신이 능력 면에서 진평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뒤 강후는 병을 핑계로 승상직 사퇴를 청했고, 진평이 홀로 승상을 맡게 되었다.〉
사마천은 진평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진 승상 평은 젊었을 때부터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법술을 좋아했다. 또 그가 도마 위의 고기를 나눌 때부터 그 뜻이 이미 원대했다. 그 뒤 초나라와 위나라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다 마침내 고제에게로 갔다. 늘 기이한 책략을 내서 얽히고설킨 어려움을 풀고 국가의 근심을 털어냈다. 여후 때 일들이 많았으나 진평은 결국 자기 힘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 종묘를 안정시키고 영예로운 명성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뛰어난 재상[賢相]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 어찌 처음과 끝이 다 좋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의 지혜와 모략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런 어려움을 감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2 조준전(趙浚傳)
조선의 ‘宰相다운 재상’ 1호
⊙ “국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가 늠연(澟然)… 조그만 장점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조선왕조실록)
⊙ “성품이 강명정대(剛明正大)하고 과감하여 큰일을 결단할 때 의심하지 아니하며, 비록 대내(大內·임금)에서 지휘를 내릴지라도 옳지 못함이 있으면, 문득 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리지 아니하여도, 동렬들이 숙연하여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조선왕조실록)
⊙ 충렬왕 때 역관 조인규의 증손
⊙ 우왕 말기 은둔하다가 위화도 회군 후 정계 등장… 토지개혁 주도
⊙ 태종 이방원에게 제왕학 책인 《대학연의》 선물하며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
만일 조선 정승학(政丞學)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진다면 그 첫머리는 논란의 여지없이 조준(趙浚·1346~1405년)이 차지할 것이다.
조준은 평양(平壤) 사람으로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우재(吁齋), 송당(松堂)이다. 먼 조상은 한미했다. 조준 집안은 증조부 인규(仁規·1237~1308년) 때에 이르러 신분이 급상승한다. 조인규는 몽골어 역관이었는데 성실하게 몽골어와 한어(漢語)를 익혀 실력을 인정받았다. 《고려사》 열전에 ‘조인규전’이 있는데 세 가지 사항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충렬왕이 원(元)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보낸 글이다.
“나의 신하인 조인규는 몽골어와 한어를 통달하여 조정에서 보내오는 조서, 칙서 등의 내용을 조금도 틀림없이 번역해 냅니다.”
또 하나는 쿠빌라이 칸(원나라 세조)에게 가서 고려 일을 보고한 적이 있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듣고서는 칸은 이렇게 말했다.
“고려 사람이 몽골어를 이렇게 잘하는데 강수형에게 통역을 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강수형은 고려 포로 출신으로 칸의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다.
세 번째는 원나라 사신이 고려에 악감정을 품고 고려 고유 풍속을 바꿔야 한다고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조인규가 혼자 황제를 알현하고서 잘 설득해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이뤄냈다.
그에 관한 《고려사》 평이다.
“그는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짧은 시일 내에 국가의 중요한 관직을 얻었고 사람됨이 겉으로는 단정, 장중하고 화색(和色)이 있어 왕의 총애를 받아 항상 왕의 침소에까지 출입하였으며 많은 전민(田民)을 긁어모아 부자가 되었다. 게다가 국구(國舅·충선왕 장인)가 되어 그 권세가 한때 가장 유력하였으며 아들들, 사위들이 모두 장군,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있어 누구도 감히 그에게 비길 자가 없었다.”
청렴강직했던 아버지
조인규에게는 서(瑞), 련(璉), 후(珝), 위(瑋) 이름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련의 아들이 조준의 아버지 조덕유(德裕·?~?)이다. 조련의 경우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데 반해 조덕유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정적 내용이 없다.
“그는 성품이 청백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영화나 이익을 바라지 아니하여 비록 친척, 친우라 할지라도 국가사업을 하게 된 때부터는 결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판도판서(版圖判書·조선의 호조판서. 현재의 기획재정부 장관 격-편집자 주)에 이르렀고 아들들 이름은 후(煦), 린(璘), 정(靖), 순(恂), 준(浚), 견(狷)이다.”
만일 조선 정승학(政丞學)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진다면 그 첫머리는 논란의 여지없이 조준(趙浚·1346~1405년)이 차지할 것이다.
조준은 평양(平壤) 사람으로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우재(吁齋), 송당(松堂)이다. 먼 조상은 한미했다. 조준 집안은 증조부 인규(仁規·1237~1308년) 때에 이르러 신분이 급상승한다. 조인규는 몽골어 역관이었는데 성실하게 몽골어와 한어(漢語)를 익혀 실력을 인정받았다. 《고려사》 열전에 ‘조인규전’이 있는데 세 가지 사항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충렬왕이 원(元)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보낸 글이다.
“나의 신하인 조인규는 몽골어와 한어를 통달하여 조정에서 보내오는 조서, 칙서 등의 내용을 조금도 틀림없이 번역해 냅니다.”
또 하나는 쿠빌라이 칸(원나라 세조)에게 가서 고려 일을 보고한 적이 있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듣고서는 칸은 이렇게 말했다.
“고려 사람이 몽골어를 이렇게 잘하는데 강수형에게 통역을 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강수형은 고려 포로 출신으로 칸의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다.
세 번째는 원나라 사신이 고려에 악감정을 품고 고려 고유 풍속을 바꿔야 한다고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조인규가 혼자 황제를 알현하고서 잘 설득해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이뤄냈다.
그에 관한 《고려사》 평이다.
“그는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짧은 시일 내에 국가의 중요한 관직을 얻었고 사람됨이 겉으로는 단정, 장중하고 화색(和色)이 있어 왕의 총애를 받아 항상 왕의 침소에까지 출입하였으며 많은 전민(田民)을 긁어모아 부자가 되었다. 게다가 국구(國舅·충선왕 장인)가 되어 그 권세가 한때 가장 유력하였으며 아들들, 사위들이 모두 장군,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있어 누구도 감히 그에게 비길 자가 없었다.”
“체통이 엄하고 기강을 떨쳤다”
조준의 졸기(卒記)다.
〈준(浚)이 수상(首相)이 되어 8년 동안 있었는데, 초창기(草創期)에 정사가 번거롭고 사무가 바쁜데, 우상(右相) 김사형(金士衡·1333~1407년)은 성품이 순근(醇謹) 자수(自守)하여 일을 모두 준에게 결단하게 하였다. 준은 성품이 강명정대(剛明正大)하고 과감(果敢)하여 큰일을 결단할 때 의심하지 아니하며, 비록 대내(大內·임금)에서 지휘(指揮)를 내릴지라도 옳지 못함이 있으면, 문득 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리지 아니하여도, 동렬(同列)들이 숙연(肅然)하여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체통(體統)이 엄하고 기강(紀綱)을 떨쳤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을 독점하고 권세를 오래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조준에게 다시 위기가 찾아오니 바로 1차 왕자의 난이 그것이다. 1398년 8월은 요동 공략 문제로 정도전과 갈등이 극에 이른 때이기도 했다. 8월 26일 마침내 정안군 이방원이 거사를 감행했다. 이방원 세력은 형세를 장악하자 박포(朴苞)와 민무질(閔無疾)을 좌정승 조준에게 보냈다. 《태조실록》 7년 8월 26일 자다.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
〈조준이 망설이면서 점(占)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거취(去就)를 점치게 하고는, 즉시 나오지 않으므로, 또 숙번으로 하여금 그를 재촉하고서, 정안군이 중로(中路)에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 조준이 이미 우정승 김사형과 더불어 오는데 갑옷을 입은 반인(伴人)들이 많이 따라왔다.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의 다리에 이르니 보졸(步卒)이 무기(武器)로써 파수(把守)해 막으며 말했다.
“다만 두 정승만 들어가십시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말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지나가자 정안군이 말했다.
“경들은 어찌 이씨(李氏)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는가?”
조준과 김사형 등이 몹시 두려워하면서 말 앞에 꿇어앉았다. 이에 정안군이 말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꼭 세우려고 하여 나의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내가 이로써 약자(弱者)가 선수(先手)를 쓴 것이다.”
조준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저들이 하는 짓을 우리는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정안군이 말했다.
“이 같은 큰일은 마땅히 국가에 알려야만 될 것이나, 오늘날의 일은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였으니, 공(公) 등은 마땅히 빨리 합좌(合坐)해야 될 것이오.”〉
합좌란 거사를 공식적으로 도당에서 추인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훗날의 정종을 내세워 일단 이성계로부터 왕위를 넘겨받는 계책을 낸 장본인도 조준이다.
‘正人君子’
다시 조준의 졸기(卒記)다.
〈애초에 정비(靜妃·태종비 민씨) 동생 무구(無咎)와 무질(無疾)이 좋은 벼슬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준(浚)이 막고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진년(庚辰年·1400년, 정종 2년) 7월에 이들 두 사람이 가만히 대간(臺諫)에게 사주(使嗾)하여 몇 가지 유언(流言)을 가지고 준(浚)을 논(論)하여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순위부(巡衛府) 옥(獄)에 가두었다. 임금(태종)이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일이 민씨(閔氏)에게서 나온 줄 알고 노하여 말했다.
“대간은 마땅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직사(職事)에 이바지해야 될 것인데, 세도가(勢道家)에 분주히 다니면서 그들의 뜻에 맞추어 일을 꾸며 충량(忠良)한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해치니, 이는 실로 전조(前朝·고려) 말기의 폐풍(弊風)이다.”
죄를 묻는 위관(委官) 이서(李舒)에게 일러 말했다.
“(준과 같은) 재신(宰臣)은 정인군자(正人君子)이다. 옥사(獄辭·법정에서 피고가 자백한 범죄 내용의 기록)를 꾸며서 사람을 사지(死地)에 넣을 수는 없다.”
그러고 곧바로 상왕(上王·정종)에게 아뢰어서 준(浚)을 풀려나오게 했다.〉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종 2년(1400년) 8월 1일 평양백(平壤伯) 조준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풀어주는 일이 있었다. 배경은 이렇다. 애초에 경상도 감사 조박이 지합주사(知陜州事·합주 지사) 권진에게 말했다.
“계림부윤 이거이(李居易·1348~ 1412년)가 내게 말하기를 ‘내가 조준 말을 믿은 것을 후회한다’라고 했다. ‘무슨 까닭이냐’고 물으니 거이가 말하기를 ‘조준이 사병혁파할 때를 당해 나와 말하기를 ‘왕실을 호위하는 데는 강한 군사만 한 것이 없다’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믿고서 패기(牌記)를 곧 삼군부에 바치지 않았다가 죄를 얻어 오늘에 이르렀다’라고 했다.”
권진이 간의대부로 있으면서 조박 말에다가 사사로이 자기가 더 보태 좌중(坐中)에 고했다. 이에 헌신(憲臣·사헌부 관리) 권근과 간신(諫臣·사간원 관리) 박은 등이 교장(交章)해 상언해서 조준·이거이 등의 죄를 말하니 상이 말했다.
“조준이 어찌 이런 말을 했겠는가?”
권근 등이 다시 글을 올려 대궐에 나와 굳게 청하니 이에 조준을 옥에 가두고, 문하부 참찬사 이서·순군만호 이직·윤저·김승주 등에게 명해 추국하게 하니 조준은 강개(慷慨)한 성품이므로 화가 나서 말했다.
“신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울기만 할 뿐이었다. 지합주사(知陜州事) 전시(田時)는 조준과 이거이가 믿는 사람이었다. 조준 등의 죄를 입증하려고 해 서리(書吏)를 보내 잡아오고, 상(上·정종)이 조준·이거이·조박을 한곳에서 빙문(憑問)하게 하려고 하는데 권근 등은 다른 곳에 두고 국문하기를 청했다. 상이 의심해 화를 내며 말했다.
“어찌 죄상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형을 가할 수 있겠는가?”
이방원, “개국 등은 모두 조준의 공”
대간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곧 순군 관리에게 명해 이거이·조박을 잡아왔다. 세자(이방원-편집자 주)가 윤저(尹抵·?~1412년)를 불러 말했다.
“경은 상께서 경을 순군만호로 삼은 뜻을 알고 있는가?”
윤저가 대답했다.
“신은 본래 혼매하고 어리석어 이사(吏事·관리 업무)를 익히지 못했는데 지금 신에게 형관 임무를 명하시니 조처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해 밤낮으로 황공하고 송구합니다.”
세자가 말했다.
“경은 본래 세족(世族·오랜 명문가)이며 작은 절조에 구애하지 않고 세태에 아첨하지 않으며 오직 너그럽고 공평한 것을 힘쓰기에 형관 임무를 명한 것이다.”
대간(臺諫)의 소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태상왕(이성계-편집자 주)께서 개국하신 것과 상(정종-편집자 주)께서 대위를 이으신 것과 불초한 내가 세자가 되어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른 것이 모두 조준의 공이다. 지금 전날 공을 잊고 허실을 가리지 않고, 다만 유사(攸司)의 소장만 믿고 국문한다면 황천 상제(皇天上帝)가 심히 두려울 것이다. 조준이 만일 이 말을 했다면 크게 죄가 있는 것이다. 경은 가서 조심하라.”
윤저가 재배하고 나오는데 정승 민제(閔霽)가 비밀리에 윤저에게 말했다.
“조준 등이 나와 하륜을 해치고 인연을 연결해 세자에게까지 미치려고 한다. 지금 잡혀 갇혔으니 끝까지 추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성(臺省)이 모두 대궐 뜰에 나와 다시 위관(委官·조사 책임자)을 이거이와 조박이 있는 곳에 보내 조준이 말한 것을 질문하도록 청하니 상이 말했다.
“무릇 질문하는 일은 마땅히 한곳에 두고 빙문해야 할 것이지 어찌 사람을 보내 물을 수 있는가?”
대간이 극력 간쟁하니 상이 일을 보지 못하도록 명해 각각 사제(私第)로 돌려보내고 조박을 순군옥에 가두고 물으니 조박의 말이 대성의 소장 뜻과 같지 않았다. 또 권진을 가두고 물으니 권진의 말도 소장 뜻과는 달랐다. 상이 권진 등을 크게 미워해 이거이를 순군옥에 가두고 조박과 빙문하니 이거이가 말했다.
“나는 조준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조박이 맞대고 질문했다.
“그대가 계림 동헌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이거이가 말했다.
“말한 일이 없다. 그대가 나에게 술 두세 잔을 먹였지만 내 마음은 달랐고 취하지 않았다. 그대가 기묘년에 이천으로 폄출되었다가 경상도 감사로 나간 것은 우리 부자 때문이었다. 내가 조준과의 정사(定社·1차 왕자의 난) 맹세를 바꾸지 않았는데 조준이 비록 그런 말을 했더라도 내가 어찌 그대에게 얘기하겠는가!”
조박이 말했다.
“내 자식 조신언이 회안공 딸에게 장가들 때 조준이 안마(鞍馬)를 주었고 내가 감사로 나갈 때 금대(金帶)를 주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나를 향해 불평이 있었다.”
이거이가 큰소리로 말했다.
“조박의 말은 모두 사사로운 감정이다. 바라건대 제공(諸公)들은 들어보시오.”
조준과 이거이는 석방돼 각각 그 집으로 돌아갔고, 조박은 폄출하고, 권진은 축산도로 유배를 보냈다.
태종, “내가 조준을 아낌을 하륜을 아낌만 못했다”
태종이 마침내 즉위하고 조준은 다시 좌정승에 오른다. 그러나 이미 하륜(河崙)의 세상이었다. 조준 졸기(卒記)다.
〈준(浚)이 다시 정승이 되어 일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자기와 뜻이 다른 자에게 방해를 받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아니 되어 다시 파(罷)하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죽은 나이가 60이다.〉
뜻이 다른 자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륜이다. 조준이 재상으로 경세(經世)를 펼친 것은 태조 때였고 정작 태종과 호흡을 맞춰 일할 기회는 1, 2차 왕자의 난을 함께했던 하륜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태종은 조준을 한결같이 극진하게 예우했다.
〈준(浚)이 만년(晩年)에 비방을 자주 들었으므로, 스스로 물러나 피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과 대우는 조금도 쇠(衰)하지 아니하여, 임금이 일찍이 공신(功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준에게 이르자, 임금이 수(壽)를 빌고, 그를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죽은 뒤에도 뛰어난 정승[賢相]을 평론(評論)할 적에 풍도(風度)와 기개(氣槪)에서는 반드시 준을 으뜸으로 삼았고, 항상 ‘조 정승(趙政丞)’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공경하고 중히 여김이 한결같았다.〉
國體에 이른 조선 1호 재상
사관의 평이다.
“준(浚)은 국량(局量)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風采)가 늠연(澟然)하였으니,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현재(賢才)를 장려 인도하고, 엄체(淹滯·재주가 있는데도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를 올려 뽑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그만 장점(長點)이라도 반드시 취(取)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 예위(禮闈·예조)를 세 번이나 맡았는데, 적격자라는 말을 들었다. 이미 귀(貴)하게 되어서도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면, 문(門)에서 영접하여 관곡(款曲)히 대하고, 조용히 손을 잡으며 친절히 대하되, 포의(布衣)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유소의 《인물지》 유형론에 따르면 조준은 도리가 깊고 견실해 청절가(淸節家)로 손색이 없고 법제를 개혁해 민생을 이롭게 했으니 법가(法家)의 면모 또한 분명한데다가 큰 결단을 의심 없이 내릴 줄 알았으니 술가(術家)의 계책을 갖추고 있어 국체(國體)에 이른 조선 제1호 재상이라 할 것이다.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조대림(大臨·1387~1430년)이다. 태종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했으니 조준과 태종은 사돈이기도 했다.⊙
03월 호
3 하륜(河崙)전
‘조선의 길’을 만든 현실주의 경세가
⊙ “하륜은 충직한 신하이므로 그 덕의를 높여서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항상 스승으로 대접”(태종)
⊙ ‘관상’ 앞세워 태종 이방원에게 접근, 왕자의 난 등 추진
⊙ 고려 말 權臣 이인임의 조카사위
⊙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건의한 것이 대단히 많았고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

▲경남 진주에 있는 하륜의 무덤. 사진=조선DB
정도전(鄭道傳·1342~1398년)과 하륜(河崙·1347~1416년)은 상극(相剋)이다. 조선 500년 현실 역사에서 하륜에 대한 평가가 올라갈수록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내려갔다. 정도전이 이상주의 경세가(經世家)였다면 하륜은 현실주의 경세가였다. 정도전은 실패한 사상가였던 반면 하륜은 성공한 경세가였다. 현실 속의 조선은 정도전의 길을 버리고 하륜의 길을 따랐다.
그래서일까? 오늘날에는 정도전은 알아도 하륜은 모른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역전돼버렸다. 어쩌면 정도전의 ‘실패한 꿈’이 주는 묘한 매력 때문에 정도전에게 이끌리는 경향은 앞으로 더 강해질지 모른다. 반면 하륜은 현실정치에 깊이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해 건강함을 잃은 우리 학계 풍토가 만들어낸 학문적 천박성의 한 단면이라 하겠다.
하륜을 망각의 늪에 빠트려놓고서는 조선(朝鮮) 탄생의 온전한 비밀을 알 수 없다. 반쪽도 안 되는 사실(史實)에 허구를 집어넣는 팩션이 우리 역사일 수는 없다. 역사는 역사로 보고 상상은 그저 상상으로 그쳐야 한다.
7년간 《조선왕조실록》 읽기를 통해 새롭게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큰 인물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었다. 임금의 경우 이미 6명에 대한 조명 작업을 마쳤기 때문에 이제 국가를 이끈 재상(宰相)에 주목하고자 한다. 뛰어난 재상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런 인재를 알아보고 중용한 임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륜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곧 태종의 인사(人事)를 살피는 길이기도 하다. 하륜 없이 태종 때의 치세(治世)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황희(黃喜) 없이 세종 때의 치세를 설명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인임의 형 이인복의 조카사위
▲이인임의 조부 이조년.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유명하다.
하륜이 조선이라는 새로운 배에 올라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하륜은 1347년(충목왕 3년) 당시 순흥부사 하윤린(河允潾)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륜이 문과에 급제한 때는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다. 전형적인 소년등과(少年登科)였다. 《태종실록》 16년 11월 6일 하륜 졸기(卒記)다.
“좌주(座主)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이인복은 성주(星州) 이씨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형이며 학식이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해 옳은 일이라면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기뻐했고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다고 한다. 동생 이인임과는 달리 관리로서도 정도(正道)를 걸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최대 명문가이자 실력자 집안인 성주 이씨 집안 사위가 됐다는 것은 하륜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절이 녹록지 않았다. 마침 그때는 신돈(辛旽)의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 15년(1366년) 이존오(李存吾)와 정추(鄭樞)가 정식으로 상소를 올려 신돈을 비판하다가 관직에서 축출당하고 유배를 가야 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개혁 성향의 신진사대부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신돈에 맞섰다.
하륜도 예외는 아니었다. 춘추관검열, 공봉(供奉)을 거쳐 1368년(공민왕 17년) 관리 3년 차이던 하륜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어 신돈 문객을 규탄하다가 좌천을 당하게 된다. 감찰규정이란 조선 시대의 사헌부 감찰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종6품직이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으니 혈기왕성할 때다. 그로서는 첫 시련이었다.
복직되어 관리 생활을 하던 하륜은 1388년(우왕 14년) 최영(崔瑩)이 주도한 요동 정벌에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결국 하륜은 유배지에서 조선 개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하륜 졸기와 달리 《고려사절요》에는 하륜이 이인임 인척이었기 때문에 유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악 천도 주장
즉 배경 자체가 이성계(李成桂)와는 다른 쪽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하륜은 개국 1년이 지난 1393년(태조 2년) 9월 13일 경기좌도 관찰출척사로 관직에 복귀한다. 이때 그는 흥미롭게도 풍수지리학을 통해 여러 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륜은 이색(李穡)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태조 2년 12월 11일 글을 올려 계룡산 신도(新都) 건설론을 중단시킨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후에도 천도론이 제기되자 하륜은 일관되게 무악(지금의 연세대 자리)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조 3년 8월 12일 그가 올린 글이다.
“우리나라 옛 도읍으로 국가를 오래 유지한 곳은 계림과 평양뿐입니다.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과 평양에 비하여 궁궐터가 실로 넓고, 더구나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의지할 만하여, 우리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관철되지 않았다. 지금의 한양 천도로 결정이 났다. 이후 태종 때 다시 천도 문제가 불거지자 하륜은 그때도 무악 천도설을 주장했다.
‘관상’ 내세워 태종에게 접근
▲하륜의 정적이었던 정도전.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권력을 향한 그의 노력은 집요했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李芳遠·태종)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 한 인물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 “하륜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 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南誾)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이야기이고 다시 태조 때로 돌아간다.
하륜은 태조 때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줄곧 맡은 관직은 충청도 도관찰사(都觀察使)이다. 실록 졸기이다.
〈갑술년(甲戌年·1394년)에 다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병자년(1396년)에 중국 고황제(高皇帝·명 태조 주원장)가 우리 표사(表辭·외교문서)가 공근(恭謹)하지 못하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문장을 쓴 사람 정도전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태조가 비밀리에 보낼지 안 보낼지를 정신(廷臣·조정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서로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반드시 보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하륜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정도전이 원망하였다. 태조가 하륜을 보내 경사(京師·남경)에 가서 상주(上奏)하여 자세히 밝히니, 일이 과연 풀렸다.〉
이방원과 ‘왕자의 난’ 모의
이 무렵부터 정안군 이방원과 하륜이 더욱 밀접해지며 거사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졸기에 이어지는 글이다.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어린 서자)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륜이 일찍이 임금(태종)의 잠저(潛邸·임금 되기 전 사저)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륜이 말했다.
“이는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
임금은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말했다.
“이는 다만 아들이 아버지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것일 뿐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 하륜은 충청도 도관찰사로 있었다.
실제로 이미 무인정사(戊寅定社) 1년 전부터 이방원과 하륜은 밀접해 있었고 정도전은 이를 경계해 하륜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내보냈다.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으려는 것이었다. 태조 6년(1397년)에 일어난 박자안(朴子安·?~1408년) 사건은 흔히 태종이 박자안의 아들 박실(朴實·1367~1431년)의 요청으로 박자안을 구원해준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실은 하륜과도 무관치 않았다.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박자안 사건
태조 6년(1397년) 5월 18일 경상전라 도안무사 박자안이 왜적을 제대로 막지 못해 태조 이성계가 크게 화를 내며 목을 베라고 명했다. 그때 박자안의 아들 박실이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정안공의 집에 찾아와 울며불며 애걸했다. 박실은 정안공 휘하 사람이었다. 왕자 정안공도 마땅한 길이 없었다. 그도 처음에는 “국가의 큰일을 내가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박실은 땅에 엎드려 떠날 줄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사이는 안 좋지만 태조에게 총애를 받는 남은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남은은 “사자가 이미 떠났으니 어찌하겠는가?”라며 외면했다.
일이 어렵게 되었지만 남은 앞에 꿇어앉아 대성통곡하는 박실을 보고 불쌍하게 여긴 정안공은 다시 자기 집에 있던 영안공 이방과(李芳果·훗날 정종)와 의안공 이화 등 종친들에게 함께 주상을 찾아뵙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들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이는 국가 기밀사항인데 상감께서 만일 어디서 알았느냐고 물으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렵니까?” 정안공은 “그 책임은 내가 지겠소”라고 답한다.
종친과 함께 대궐에 간 정안공은 내시 조순을 시켜 청을 올리게 했다. 그때 조순이 물었다. “비밀스러운 사안인데 여러 종친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안공은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일인데, 바깥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답한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이성계는 처음에는 화를 내며 “너희는 자안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했다가 잠시 후 중추원에 명을 내렸다.
“급히 말 잘 타는 사람을 보내 자안의 죄를 용서한다는 명을 전하라.”
중추원 심구수가 힘차게 말을 달렸다. 한 사람의 목숨이 자기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어쩔 수 없이 역참 관리로 하여금 대신 자기가 받은 명을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다행히 박자안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기 직전, 그 역리는 사형장에 도착해 사면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때 아들과 정안공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박자안은 3년 후 정안공이 왕위에 오르자 왕위 계승에 대한 승인을 구하는 습위주문사(襲位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간다. 귀국 후에는 의흥삼군부사 참판사와 경상도 도절제사를 거쳐 1405년에는 오늘날 해군참모총장 격인 수군 도절제사까지 겸하게 된다.
물론 정안공이 움직인 이유는 아들 박실의 효심 때문이기는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숨어 있었다. 5월 27일 자 실록이다. 박자안 공사(供辭)에 계림부윤 하륜이 언급돼 모두 옥으로 불려 온 것이다. 이에 하륜은 수원 감옥에 갇혔다. 정안공이 박자안에 대해 손을 쓰지 않았다면 하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1년 동안 관직에서 배제된 하륜은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한 달여 전인 태조 7년 7월 19일에야 다시 관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역시 충청도 도관찰출척사였다.
그만큼 정도전 일파는 하륜을 경계했으나 끝내 막지는 못했다.
이거이 제거
하륜은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차 왕자의 난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올랐다. 공로로 보자면 이미 조준(趙浚)을 앞서고 있었다.
즉위 초 하륜이 가장 먼저 태종의 뜻을 헤아린 일은 이거이(李居易) 제거다. 당시 태종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인물은 이거이 부자였다. 이거이는 왕자의 난으로 태종이 권력을 장악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출세하기 시작하였다. 왕자의 난 직후, 정사공신에 올랐으며, 또한 태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좌명공신에 책봉되었다. 이거이는 조선 왕조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즉 이거이 아들 이저(李佇)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 경신공주(慶愼公主)와 혼인하였으며, 또 다른 아들 이백강(李伯剛)은 태종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특수한 관계가 조선 왕조 건국 이후에도 이거이의 정치적 진출을 쉽게 하였으며, 나아가 태종 집권 이후에도 이거이가 공신이 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정종 때 세자 이방원 주도로 시행된 사병혁파(私兵革罷) 조처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토로한 것이 연유가 되어 한때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때 태종이 불러 올려 좌정승에 임명했다. 그만큼 부담이 컸다.
이에 우정승 하륜이 물귀신 작전을 펼쳤다. 자기가 먼저 변괴 등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 결국 이거이도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 1년 3월 28일 자 실록이 전하는 그때 배경 설명이다.
〈즉위(卽位)한 뒤에 이거이를 좌정승으로 삼았으니, 대개 그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요, 오래 맡기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이거이가 이를 알지 못하고 조금도 사면할 뜻이 없으므로 하륜이 가만히 임금께 고하고 재이(災異)를 칭탁하여 사직한 것이었다.〉
明君과 賢臣
이거이가 물러난 이후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실권(實權)은 하륜에게 있었다. 아직 정승에 오르기 전인 태종 2년 9월 17일에 태종은 하륜이 비방으로 인해 관직을 사직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4일 김사형을 갈고 하륜을 좌정승으로 임명한다. 이때 하등극사(賀登極使) 사신을 가야 하는데 김사형과 이무 모두 사양하니 하륜이 나서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임금이 기뻐서 울고 하륜도 울었다”고 기록했을까?
정승 하륜은 무엇보다 일을 알아 계책을 낼 줄 아는 정승이었다. 실록에 “하륜의 의견을 따랐다”는 표현이 수도 없이 나오는 이유다.
태종 즉위와 더불어 하륜은 오랜 기간 좌정승으로 있으며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태종을 지근거리에서 도왔다. 관제(官制) 개혁을 통해 새로운 국가의 관료제도를 확립했고 의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啟制)를 추진하던 태종의 구상을 앞장서 실현시켰다. 《태종실록》은 네 차례나 좌정승에 있으며 국정을 이끌었던 그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건의한 것이 대단히 많았고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사실 이 대목은 《서경(書經)》 ‘군진(君陳)’편에 나오는 재상의 바른 도리와 그대로 일치한다. 주(周)나라 성왕(成王)은 군진이라는 신하에게 정사를 맡기며 여러 가지를 부탁했는데 그중 한 대목이다.
“너는 아름다운 꾀와 아름다운 계책이 있거든 들어와 안에서 네 임금에게 고하고 너는 마침내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꾀와 이 계책은 우리 임금님 덕분이다’라고 하라.”
훗날 하륜이 세상을 떠나고 다른 신하들이 태종에게 하륜을 그토록 총애했던 까닭을 물은 적이 있었다. 이에 태종은 말했다.
“하정승의 귀로 들어간 일이 그의 입으로 나오는 것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륜이 태종이 총애하는 측근이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탁월한 경륜으로 태종 개혁정치를 뒷받침했다. 그런데 하륜은 자기 세력이 없었다. 어쩌면 키우려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륜은 태종과 민제 사이를 오가며 힘든 줄타기를 해야 했다. 사실 태종과 하륜을 연결해준 인물이 민제다. 그와 민제의 교제는 계속된다. 그러면서도 너무 태종에 기운다 싶으면 민제의 비판이 따랐고 민씨 집안으로 기울 때는 태종의 견제가 따랐다. 어쩌면 그것은 테크노크라트의 숙명이기도 했다.
태종 7년(1407년) 6월 하륜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원래 중국 사신 황엄이 태종 집권 초 한양을 방문했을 때 중국 황녀와 태종의 세자를 결혼시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태종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 별말이 없자 태종은 과거 동기생인 김한로의 딸과 결혼시키기로 약속을 했다.
이런 와중에 하륜이 태종의 동서인 조박과 함께 민제를 만나 세자와 황녀의 결혼 문제를 은밀하게 논의하다가 김한로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여느 때와 달리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함이었다”며 “하륜은 공신이니 책임을 묻지 말라”고 말한다. 얼마 후 가뭄을 이유로 좌의정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면서 하륜의 사위 이승간을 ‘특별히’ 동부대언으로 임명했다. 실록은 “하륜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고 쓰고 있다.
실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태종 7년이라는 해는 사실 태종과 민씨 형제들 간의 치열한 암투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세자 혼인 파동이 6월에 있었고 7월에는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연금(軟禁) 상태에 들어가고 11월 11일에는 두 사람의 직첩(職牒)마저 빼앗았다. 바로 이날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현 대통령비서실장) 황희는 태종과 하륜 사이를 오가며 태종의 조치에 대한 하륜의 평가를 태종에게 전했다.
태종, “그 충성하고 곧음을 사랑”
▲황희
이때 하륜이 “민씨 형제가 세자를 제거하려고 한 게 아니라 다른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 것이니 그렇게 중하지는 않다”고 잘못(?) 답변을 했다. 황희가 다시 태종에게 이 말을 전하자 태종은 대신들이 앉는 자리 중 한 곳을 가리키며 조용히 이른다.
“전에 하륜이 여기에 앉아서 정사를 논할 때 내가 한심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는 빨리 다시 가서, ‘이 말을 다른 사람과 말한 적은 없는가?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하라.”
그러면서 황희에게도 “이 말이 만일 누설된다면, 내가 아니면 네 입에서 나온 것이다”고 다짐을 받는다. 하륜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이 말을 황희로부터 전해 들은 하륜은 “살길을 가르쳐주시니, 몸 둘 곳이 없습니다”며 땅에 엎드려 감읍했다. 이를 보고 돌아온 황희에게 태종은 “(하륜은) 내가 아니면 보전하기 어렵다. 그 충성하고 곧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고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태종 8년 10월 1일 태종은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죄를 10가지 구체적으로 열거한 다음 신료들은 이들 집안과 내왕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그런데 11월 7일 대간(臺諫)들이 국문(鞫問) 과정에서 민제와 하륜이 내왕한 사실을 밝혀내 하륜을 탄핵했다. 태종은 오히려 대간들을 옥에 가두고 추국(推鞫)했다. 오죽했으면 하륜이 자신 때문에 대간들이 고초를 겪으니 민망하다며 그들을 풀어줄 것을 간청할 정도였다. 이때도 태종은 한사코 “이씨 사직에 하륜만큼 특별한 공덕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며 하륜을 감쌌다.
하륜의 마지막
또 하륜은 죽기 4개월여 전인 태종 16년 6월 22일 봉투에 밀봉한 글을 태종에게 올렸다. 이를 읽어본 태종은 지신사 조말생(趙末生)을 불러 이 글을 보여준다. 심온(沈溫)과 황희는 간악한 소인배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이 인사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었다. 조말생이 다 읽고 나자 태종은 큰 실망감을 표시한다.
“진산(晋山·진산부원군 하륜)은 충직한 신하이므로 내가 그 덕의를 높여서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항상 빈사(賓師·스승)로서 대접하였다. 그러나 이 글을 보니 내가 심히 마음이 편치 못하다. 황희는 내가 일찍부터 한 집안으로 대접해왔고, 더구나 심온은 충녕대군의 장인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임금이 치밀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치밀하지 못하면 몸을 잃는다’고 하였다.”
특별한 사실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아마도 자신의 감이 그랬다는 것 같다. 그러고 11월 6일 하륜은 세상을 떠난다. 황희는 두고두고 명재상으로 칭송을 받게 되고 심온은 태종의 손에 죽게 된다.
하륜은 태종 16년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에 있는 왕실 조상들의 능침(陵寢)을 돌아보던 중 그곳 정평군아(定平郡衙)에서 죽었다. 충신다운 죽음이었다.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하륜이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 차림으로 묘당(廟堂·정승 집무실)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다른 사람이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계옥(啓沃·건의)한 것이 대단히 많았고,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으며, 종족(宗族)에게 어질게 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실(信實)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동복(僮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인재(人材)를 천거하기를 항상 못 미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하였으나, 조금만 착한 것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집에 거(居)하여서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잔치하여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성질이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유유(悠悠)하게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까지도 모두 지극히 정통하였다. 후생을 권면(勸勉)하여 의리를 상확(商確)함에는 부지런히 하여 권태를 잊었다. 국정(國政)을 맡은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 사대(事大)하는 사명(辭命)과 문사의 저술이 반드시 윤색(潤色)·인가(印可)를 거친 뒤에야 정하여졌다.〉
세종, 하륜에 대해 인색한 평가
하륜에 대한 조선 후대 평가를 보면 다양하다. 그중 세종은 매우 인색한 편이었다. 세종 13년 3월 8일 자 실록이다.
“태종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하륜의 문장을 권근(權近)에 비한다면 마치 문부(文簿·문서)를 알아보고 처리하는 아전과 같다’라고 하셨는데, 그 뒤에 내가 하륜에게 경서(經書)를 물었던바, 과연 깊이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장에는 비록 짧았으나 이재(吏材)는 뛰어난 데가 있었다.”
같은 해 9월 8일에는 신하들과 과거 인물들을 평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전에 지나간 대신들을 말하자면 하륜·박은·이원 등은 모두 재물을 탐한다는 이름을 얻었는데, 륜(崙)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를 도모하는 신하이고, 은(訔)은 임금의 뜻에 맞추려는 신하이며, 원(原)은 이(利)만 탐하고 의(義)를 모르는 신하였다.”
세종의 이 같은 평은 하륜이 청절가(淸節家) 면모는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주역》 대과괘(大過卦·䷛)로 보는 태종과 하륜
대과괘(大過卦·䷛)의 밑에서 네 번째 양효(陽爻)에 대해 주공(周公)은 “구사(九四)는 들보 기둥이 높아지는 것이니 길하지만 다른 마음을 가지면 안타깝다”라고 했고 공자(孔子)는 이를 “들보 기둥이 높아지는 것이 길하다라는 것은 아래로 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풀었다.
구사는 군주와 가까운 대신의 자리에 처해 대과(大過)의 임무를 맡은 자다. 구사의 처지를 보면 양효로 음위에 있어 자리가 바르지 못하고 초륙(初六)과 호응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대과(大過)의 시대다. 큰 것이 아주 지나친 대업을 이루려 할 때에는 양강의 임금인 구오(九五)를 양강의 재상인 구사가 보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이천(程伊川)이 말한 “역(易)을 말하는 사람은 형세의 가볍고 무거움, 흘러가는 때의 변역(變易)을 아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의 깊은 의미다. 구사에 대한 정이천 풀이를 보자.
〈대과(大過)의 때에는 양강이 아니면 구제할 수 없고 양효로 음위에 처한 것은 (자리는 바르지 못하나) 마땅함을 얻은 것이니 만약에 또 초륙의 음과 서로 호응하게 되면 지나친 것이 된다. 이미 굳셈과 부드러움이 서로 마땅함을 얻었는데 뜻이 다시 음(陰·초륙)에 응하려 하면 이는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다. 다른 마음이 있으면 구오에 누가 되니 비록 큰 해로움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안타깝게 여길 만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도 ‘들보 기둥이 높아진다’라는 것을 이와 관련해 풀었다. 즉 뜻이 아래로 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강명(剛明)한 군주인 태종을 만나 나라의 기초를 다진 하륜에 해당하는 효라고 할 수 있다. 하륜도 만만치 않은 굳센 신하[剛臣]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때가 바로 대과를 성취하려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04월 호
4 황희(黃喜)전
24년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世宗 치세를 도운 賢相
⊙ “寬厚하고 沈重하여 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正大하여 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썼다”(실록)
⊙ “성품이 지나치게 寬大하여 齊家에 短點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실록)
⊙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과단성 있고 곧은 성품
⊙ 지신사 박석명의 추천으로 태종에게 중용… 훈구대신·외척에 맞서며 신뢰 얻어

▲황희
실록을 통해 황희(黃喜·1363~ 1452년)를 직접 접했을 때 받은 인상은 당혹감이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식의 능수능란, 우유부단의 황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결과론적인 초상화의 한 단면이고 위인전식 인물 서술의 폐단에 지나지 않는다. 당혹감의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지나칠 정도의 과단성 혹은 곧은 성품 때문이었다.
황희는 본관이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이다.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경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났다. 황희는 27세 때인 1389년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1390년(공양왕 2년)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에 보직(補職)됐다.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 3년에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무하고, 조금 후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을 맡았다가 사헌감찰(司憲監察)과 우습유(右拾遺)로 전직(轉職)됐는데, 태조 7년(1398년) 7월 5일 어떤 일로 경원교수관(慶源敎授官)으로 폄직(貶職)됐다. 어떤 일이란 이성계 조상 도조(度祖)의 비 순경왕후(順敬王后) 박씨의 능이 너무 사치스럽다 하여 여러 사람과 그 일을 비판했다가 폄직된 것이다. 그러고 얼마 후 1차 왕자의 난이 터진다.
박석명의 추천으로 중용되기 시작
1차 왕자의 난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태종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썩 좋지 않았다. 황희 졸기(卒記)다.
〈태종(太宗)이 사직(社稷)을 안정시키니 다시 습유(拾遺)의 벼슬로 불러 조정에 돌아왔는데, 어떤 일을 말하였다가 파면됐고 얼마 후에 우보궐(右補闕)에 임명되었으나 또 말로써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파면됐다.〉
습유나 보궐은 모두 간언을 맡은 언관(言官)이다. 황희는 태조 때나 태종 때 곧은 말을 꺼리지 않다가 자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런 성품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그와 가까운 태종 심복 박석명(朴錫命·1370~1406년)이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장)로 있다가 병이 들자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황희를 천거하고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박석명은 태종과 어릴 때 친구로 공양왕의 동생 왕우(王瑀)의 사위였던 관계로 태조 때는 줄곧 은거했다. 사람 보는 안목이 깊었다고 한다. 그 후 태종 초 지신사로 온갖 기밀 업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그 박석명이 황희를 천거한 것이다.
애초에 박석명이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자 태종이 말했다.
“경과 같은 사람을 천거해야만 마침내 그대 자리를 바꿔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종 5년(1405년) 12월 6일 지신사에 오른 황희는 얼마 안 가서 박석명 못지않은 총애를 태종으로부터 받게 된다. 황희로서는 처음으로 지우(知遇), 즉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만난 것이다. 실록은 당시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후하게 대우함이 비할 데가 없어서 기밀사무(機密事務)를 오로지 다하고 있으니 비록 하루이틀 동안이라도 임금을 뵙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러서 뵙도록 했다.〉
훈구대신·외척들과 갈등
그런데 그의 졸기에는 그의 성품을 추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언급도 나온다.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혹은 그 간사함을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다.〉
하륜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또한 마찬가지였다. 훈구대신과 황희의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록이 《태종실록》 8년 2월 4일 자에 나온다.
〈예전 제도에 좌·우정승(左右政丞)이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겸해 맡아서 전선(銓選·인사업무)을 관장(管掌)하였는데, 지신사 황희가 지이조(知吏曹·이조 담당 승지)로서 중간에서 용사(用事)한 지가 오래되어, 비록 두 정승이 천거한 자라도 쓰지 않는 것이 많고, 자기와 친신(親信)한 사람을 임금께 여러 번 칭찬하여 벼슬에 임명하게 하니, 재상들이 매우 꺼려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으므로, 매양 전선할 때면 사양하고 회피하여 물러갔다. 이에 좌·우상(左右相)이 모두 겸령(兼領)하는 것을 사면(辭免)하니, 황희의 공정(公正)치 못한 처사를 갖추어 익명서(匿名書)를 만들어서 두세 번 게시(揭示)한 일이 있었다. 황희가 조금 뉘우치고 깨달아, 이때에 이르러 계문(啓聞)해서 예전 제도를 회복하게 하였으나, 역시 재상의 의논을 쓰지 않고 붕당(朋黨)을 가까이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황희는 오직 임금에게만 충성을 바쳤다. 공신의 힘을 약화시켜야 하는 태종 입장에서 이런 황희를 총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 처남들을 제거할 때 비밀리에 일을 처리한 인물들로 실록은 이숙번(李叔蕃), 이응(李膺), 조영무(趙英茂), 유량(柳亮)과 더불어 황희도 포함시키고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도 깊이 간여했던 것이다. 당시 태종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신중히 하여 빈틈이 없게 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러 민씨(閔氏)가 마침내 몰락했다. 여기서 황희는 분명하게 민무구·무질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 신하 네 사람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목인해 무고 사건’
목인해(睦仁海·?~1408년)는 우왕 기첩(妓妾)의 자손이다. 처음에는 김해 관노로 있다가 활을 잘 쏘아 이제(李濟)의 가신이 되고, 뒤에는 잠저(潛邸)의 이방원(李芳遠)을 섬겼다. 태종은 목인해의 무재(武才)를 아껴 호군(護軍)으로 삼았다. 1398년(태조 7년)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연루되어 청해수군(靑海水軍)에 충군(充軍)되고 1400년(정종 2년) 2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402년(태종 2년) 처가의 재물을 훔쳐 형조에 고발되고, 1405년 남편을 잃은 지 3년도 안 된 여동생을 다시 혼인시키려다 사헌부로부터 탄핵받았다. 1408년 반역을 꾀하려다 탄로 나자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해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趙大臨)을 무고하여 조정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후처가 일찍이 조대림의 가비(家婢)였던 점을 이용하여 수시로 조대림의 집을 내왕하였는데, 이때 조대림이 말을 조리 있게 못 해서 스스로를 변명하지 못하고 화(禍)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지신사 황희의 노력으로 조대림의 무죄가 밝혀지고 그는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이를 흔히 ‘목인해 무고 사건’이라고 하는데 1408년 당시 실록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변고가 일어나니 황희가 마침 집에 있었으므로 태종이 급히 황희를 불러 말했다.
“평양군(平壤君·조대림)이 모반(謀反)하니 계엄(戒嚴)하여 변고에 대비(待備)하라.”
황희가 아뢰어 말했다.
“누가 모주(謀主)입니까?”
태종이 말했다.
“조용(趙庸·?~1424년)이다.”
황희가 대답해 말했다.
“조용의 사람됨이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弑害)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종의 知人之鑑
후에 평양군이 옥(獄)에 갇히자 황희가 목인해를 아울러 옥에 가 대질(對質)하도록 청하니 태종이 그것을 따랐는데, 과연 목인해의 계획이었다. 태종이 대신(大臣)들을 모아놓고 친히 분변하니 곧음[直]이 조용에게 있었다. 태종이 황희에게 일러 말했다.
“예전에 목인해의 변고에 경(卿)이 말하기를 ‘조용은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더니 과연 그랬다.”
조용이 비로소 그 말뜻을 알고 물러가서는 감격하여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황희가 했다는 이 말은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계자연(季子然)이 공자에게 물었다. “중유와 염구는 대신(大臣)이라고 이를 만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는 그대가 남과는 다른 빼어난 질문을 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기껏 유(자로)와 구(염유)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구나! 이른바 대신이란 것은 도리로써 군주를 섬기다가 더 이상 도로써 섬기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그만두는 것이다. 지금 유와 구는 숫자나 채우는 신하[具臣]라고 이를 만하다.”
이에 계자연은 “그렇다면 두 사람은 따르는 사람[從之者]입니까?”라고 묻는다.
공자가 말했다.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실로 따르지 않을 것이다.”〉
《논어》를 활용한 지인지감(知人之鑑) 능력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듬해인 태종 9년 황희는 의정부참지사(參知事)로 자리를 옮긴다. 지신사를 매우 중시했던 태종은 지신사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신하의 경우 의정부지사로 특진시켰다. 이에 앞서 지신사를 황희에게 물려준 박석명도 의정부지사로 옮겼는데 실록은 “개국 이래로 없었던 일”이라고 평하고 있다. 파격 승진이라는 말이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의정 활동을 하는 정승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의정부지사로 승진했다. 태종 11년 전후에는 형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건 누가 보아도 태종이 황희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후 예조판서로 옮겼고 한성부판사로 있을 때인 태종 18년(1418년)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가 찾아온다.
곧음[直]이라는 잣대로 황희를 재는 태종
어떤 사람이 곧은지 곧지 않은지[直不直]를 살피기는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태종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사람이 정말로 곧은지 아닌지를 점검하고 또 점검해 찾아냈다.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다.
그가 태종의 불신을 받고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배경에는 곧음 문제가 있었다. 병신년(丙申年·1416년)에 세자가 덕망을 잃자 태종은 황희와 이원(李原)을 불러 세자의 무례한 실상을 걱정했다. 황희는 세자가 경솔히 바꿀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자는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된 것이니 큰 허물은 아닙니다.”
태종은 이 말이 황희의 본심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곧지 못하다[不直]고 판단한 것이다. 태종의 생각은 이랬다. 황희는 일찍이 여러 민씨(閔氏)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종이 볼 때 황희는 즉위가 머지않은 세자에게 붙어 민씨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쪽으로 힘써서 향후 자기와 자손들 안위를 보장받으려 한다고 거의 확신했다. 태종은 황희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공조판서에 임명했다가 다음 해에는 평안도도순문사(都巡問使)로 내보냈다. 바로 내치지는 않고 단계단계 멀리했다. 이는 훗날 태종의 발언을 통해서 확인된다. 태종 18년(1418년) 5월 10일 박은·이원과의 자리에서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승선(承宣·승지) 출신인 자를 우대하기를 공신 대접하는 것과 같이 하기 때문에 희(황희)로 하여금 지위가 2품에 이르게 해 두텁게 대접하는 은의(恩誼)를 온 나라가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심히 간사하고 굽었으므로[奸曲] 평안도관찰사로 내쳤다가 지금 다시 한성부판사로 삼아 그를 멀리했다[疎之].”
2년 후인 무술년(戊戌年·1418년)에 한성부판사(判漢城府事)로 다시 불러들였지만 세자 폐위 때 황희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파주 교하로 폄출시켰다. 더 이상 조정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나마 모자가 함께 거처할 수 있게는 허가했다. 5월 28일에는 남원으로 내려가게 했다. 이때 형조와 대간(臺諫)에서 소(疏)를 올려 황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상께서 친히 물었을 때 황희는 곧음으로 대답하지 않았으니[不以直對] 그에게 충성스럽고 곧은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에 태종은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이 모두 황희를 간사하다고 하나, 나는 간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심복(心腹)에 두었는데, 이제 김한로의 죄가 이미 발각되고, 황희도 또한 죄를 면하지 못하니, 지금이나 뒷날에 곧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황희는 이미 늙었으니, 오로지 세자에게 쓰이기를 바라지는 않겠으나 다만 자손(子孫)의 계책을 위해서 세자에게 아부하고 묻는 데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어찌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겠느냐?”
그럼에도 태종은 “그대의 간사함을 미워한다”며 경기도 교하로 유배를 보냈다가 충녕대군으로 세자가 교체되자 전라도 남원으로 멀리 내쫓았다.
태종은 그의 본심이 과연 곧은지를 가리기 위해 황희의 생질 오치선을 폄소(貶所·유배지)에 보냈다.
〈오치선이 복명(復命)하자 상이 물었다.
“황희가 무슨 말을 하더냐?”
오치선이 아뢰어 말했다.
“황희의 말이 ‘살가죽과 뼈는 부모가 이를 낳으셨지마는, 의식과 복종(僕從)은 모두 상의 은덕이니 신이 어찌 감히 은덕을 배반하겠는가? 실상 다른 마음은 없었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상이 말했다.
“이미 시행했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
“漢나라 史丹과 같은 사람”
말은 이렇게 했지만 태종은 보고를 듣고서 황희가 곧다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4년 후인 임인년(壬寅年·1422년) 2월 태종은 그를 다시 불렀다. 태종은 사왕(嗣王)을 위한 정지 작업을 마치고 이제 충심으로 신왕을 도울 신하를 찾아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희만 한 인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불러올린 것이다.
황희가 태종을 알현(謁見)하고 사은(謝恩)할 때 세종이 곁에 있었다. 태종이 말했다.
“내가 풍양[豊壤·상왕이 되어 머물던 이궁(離宮)이 있던 곳]에 있을 적에 매번 경의 일을 주상(主上·세종)에게 말했는데 오늘이 바로 경이 서울에 오는 날이로다.”
명하여 두텁게 대접하도록 하고,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돌려주게 하고 세종에게 임용을 당부했다.
훗날 세종은 황희를 불러 일을 토의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경이 폄소에 있을 적에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황희는 곧 한(漢)나라 사단(史丹)과 같은 사람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사단과 같은 사람이란 ‘곧은 신하[直臣]’라는 말이다. 사단은 중국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시중(侍中·재상)을 지낸 명신(名臣)으로 원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부소의(傅昭儀)의 소생 공왕(恭王)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세자를 폐하고 공왕을 후사로 삼으려 하자 극력 간(諫)하여 마침내 폐하지 않게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세종과 악연을 풀다
▲세종
사실 세종의 입장에서 황희는 불쾌한 존재였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세자 즉위를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신하이기 때문이었다. 10월에 세종은 황희를 의정부참찬에 임명했다. 한직(閑職)이었다.
이런 황희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듬해 7월 강원도에 혹심한 기근이 들었는데 당시 관찰사 이명덕이 구황(救荒)과 진휼(賑恤)의 계책을 잘못 써서 백성들의 고통이 심화됐다. 이에 세종은 당시 61세던 황희를 관찰사로 임명해 기근을 구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황희는 놀라울 정도로 단기간에 강원도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때부터 황희는 일을 통해 세종의 신임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당시 그가 맡았던 관직이 이를 말해준다.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직했다. 1424년(세종 6년) 의정부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세종 8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병조판사를 겸직했다. 이제 건강만 허락한다면 그가 최고의 실세인 좌의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원(李原)이라는 인물을 떠올려야 한다. 만일 그가 계속 좌의정으로서 업무를 잘 해냈다면 어쩌면 ‘명재상 황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원은 아버지 태종의 신하이자 세종 또한 크게 신뢰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세종 1년 사실상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왕 태종은 좌의정에 박은, 우의정에 이원을 임명했다. 그리고 이런 체제는 계속 이어졌다. 세종 4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박은이 세상을 떠났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세종은 이원을 좌의정으로 올렸다. 우의정은 정탁, 유관 등이 번갈아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비워두었다. 세종은 좌의정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이조판서 허조(許稠)의 3두 마차 체제로 정국을 이끌면서 젊은 신왕으로서의 입지를 하나하나 굳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원은 세종 8년(1426년) 3월 15일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공신에게 주는 공훈사령장)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복권의 기회도 없이 생을 마쳤다.
이로부터 1년도 안 된 세종 9년 1월 25일 잠시 우의정을 거쳤던 황희는 마침내 좌의정에 오른다.
황희에 대한 세종의 평가
세종 13년 9월 황희가 교하수령에게 땅을 청하고 그 수령 아들에게 관직을 주었다 하여 정승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간언이 연일 이어졌다. 이런 와중에 9월 8일 세종은 지신사 안숭선(安崇善)을 불러 이 문제를 이야기한다. 먼저 안숭선이 말했다.
“이번 일은 진실로 황희의 과실입니다. 그러나 정사를 도모하고 의견을 세움에 있어 깊이 사려하고 멀리 생각하는 데는 황희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세종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경의 말이 옳다. 태종께서 황희를 지신사로 삼고자 하여 하륜에게 의논하시니, 하륜이 말하기를 ‘황희는 간사한 소인(小人)이오니 신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태종께서는 듣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제수하셨는데, 이로부터 하륜과 황희는 서로 사이가 나빠져 매번 단점(短點)을 말하였다. 조말생은 하륜 편인데, 하륜이 집정(執政)하여 조말생에게 집의(執義)를 제수하자 그때 황희가 대사헌으로 있어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았다. 하륜이 두 번이나 황희의 집까지 가서 청하였으나, 황희가 듣지 않았다. 하륜은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태종께서 황희를 지신사로 삼기를 의논하시기에 내가 헐뜯어 말했더니, 황희가 이 말을 듣고 짐짓 내 말을 이처럼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황희의 과실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는 것을 내가 이미 보았다.”
세종은 하륜이나 박은 등은 모두 직권을 남용하거나 사사롭게 일을 처리한 데 반해 황희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공정하고 바르게 처신한다고 보았다. 공신이자 대선배인 하륜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황희의 강직함을 태종도 좋게 보았고 세종도 좋게 보았던 것이다. 황희에 대한 이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황희는 20년 넘게 재상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인사행정에 공정
황희는 무엇보다 인사행정(人事行政)에 공정했다. 황희가 평안도도순문사가 되었을 적에 행대(行臺·행대감찰) 이장손(李長孫)이 대등한 예(禮)로써 황희를 모욕하고, 황희와 더불어 서로 글장을 올려 논핵(論覈)하므로 태종이 양편을 화해시켰는데, 이때 황희가 정권을 잡으니 이장손은 통진수령(通津守令)으로서 교대를 당하게 되었다. 황희가 말했다.
“이 사람은 관직에 있으면서 명성(名聲)이 있었다.”
마침내 천거하여 사간원헌납(獻納)으로 삼았고, 또 천거하여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사인이란 의정부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자기 바로 밑에 두었다는 말이다. 졸기가 전하는 정승 황희의 모습이다. 젊은 시절 강직하기만 했던 황희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다.
〈황희는 관후(寬厚)하고 침중(沈重)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후(豊厚)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세종(世宗)이 중년(中年) 이후에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니, 황희는 생각하기를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 하여, 홀로 반박하는 의논을 올렸으니, 다 따르지 않고 중지시켜 막은 바가 많았으므로 옛날 대신(大臣)의 기풍(氣風)이 있었다. 옥사(獄事)를 의정(議定)할 적에는 관용(寬容)을 주견(主見)으로 삼아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일러 말했다.
“차라리 형벌을 경(輕)하게 하여 실수할지언정 억울한 형벌을 내릴 수는 없다.”
비록 늙었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항시 한쪽 눈을 번갈아 감아 시력(視力)을 기르고, 비록 잔글자라도 또한 읽기를 꺼리지 아니하였다. 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뛰어난 재상[賢相]’이라 하였다. 늙었는데도 기력(氣力)이 강건(剛健)하여 홍안백발(紅顔白髮)을 바라다보면 신선(神仙)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송(宋)나라 문노공(文潞公)에 비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寬大)하여 제가(齊家)에 단점(短點)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齊家에서는 문제 드러내
▲문언박
문노공은 북송 때 재상 문언박(文彦博·1006~1097년)을 가리킨다.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장상(將相)으로만 50년을 재임하면서 정계 원로로 활동했다.
황희는 제가(齊家)에서 종종 문제점을 드러냈다. 가족 문제를 처리하는 데서는 단호하지 못했다.
처(妻)의 형제(兄弟)인 양수(楊修)와 양치(楊治)의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풍문(風聞)에서 나왔다고 변명하여 구원하였다. 또 그 아들 황치신(黃致身)에게 관청에서 몰수(沒收)한 과전(科田)을 바꾸어주려고 글을 올려 청하기도 하였다. 또 황중생(黃仲生)이란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 집안에 드나들게 했다가, 후에 황중생이 죽을죄를 범하니, 곧 자기 아들이 아니라 하고는 변성(變姓)하라고 하니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문종 2년(1452년) 2월 8일 그가 졸하자 나라에서는 익성(翼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것이 익(翼)이고 재상(宰相)이 되어 종말까지 잘 마친 것이 성(成)이다. 아들은 황치신(黃致身), 황보신(黃保身), 황수신(黃守身)이다.
황치신은 훗날 성종 때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는데 아버지처럼 장수해 88세에 졸했다. 그의 이름 치신(致身)과 관련해서는 태종과의 일화가 황치신 졸기에 남아 있다.
〈태종(太宗)께서 일찍이 황희에게 물으시기를 “경(卿)의 아들 중에 벼슬할 만한 자가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장자(長子)가 바야흐로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벼슬을 구할 겨를이 없고, 나머지는 모두 어립니다”라고 하니 태종께서 이르시기를 “동중서(董仲舒)도 하유독서(下帷讀書·휘장을 내리고 글을 읽는다는 말)하였으니, 경의 아들은 이름을 동(董)이라 할 만하다” 하며, 공안부부승(恭安府副丞)을 제수하고, 뒤에 다시 지금의 이름을 내려주었다.
치신(致身)은 《논어》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말로 사군능치기신(事君能致其身)에서 따온 것이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황치신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그중 다섯 아들이 급제하니 조정에서 황치신을 우의정에 추증했다.〉
吏才 뛰어난 法家 면모 강해
둘째 황보신은 현달하지 못했고 황수신(黃守身·1407~1467년)은 1423년(세종 5년) 사마시에 응시하였다가, 학문이 부진하다고 시관(試官)에게 모욕을 당한 뒤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음서(蔭敍)로 감찰·지평·장령 등을 지냈다. 세조 13년(1467년) 5월 21일 황수신 졸기가 전하는 그의 모습이다.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여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고, 좌참찬(左參贊)에 올랐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승진되고, 다시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다가 마침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그 사람됨이 골모(骨貌)가 웅위(雄偉)하고, 성자(性資)가 관홍(寬洪)하여, 재상(宰相)의 기도(器度)가 있었으며, 경사(經史)를 조금 섭렵(涉獵)하여 이치(吏治)에 능하였고, 정승이 되어서 대체(大體)는 힘썼으나, 처세하는 데 능히 방원(方圓)하게 하고, 세상과 더불어 부침(浮沈)하여, 누조(累朝)를 역사(歷仕)하면서 크게 건명(建明·건의)함이 없었고, 회뢰(賄賂)가 폭주(輻輳)하여 한 이랑 밭을 탐하고, 한 사람의 노복을 다투어서, 여러 번 대간(臺諫)의 탄핵(彈劾)을 받는 데 이르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이 황(黃)이니, 마음 또한 황(黃)하다”고 하였다.〉
유소의 《인물지》 유형론에 따르면 황희는 이재(吏才)가 뛰어난 법가(法家) 면모가 강했으나 국면을 바꿀 줄 아는 술가(術家) 면모는 약했고 청절가(淸節家)에는 이르지 못했다.⊙
05월 호
5 맹사성(孟思誠)전
外柔內剛의 淸節家
⊙ 최영의 사위… 拙直한 성품으로 황희와 함께 세종 치세를 이끈 쌍두마차
⊙ 《태종실록》 감수 맡았을 때, 세종이 보려 하자 거부
⊙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仁柔], 큰일을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 단점이 있었다”(실록)

▲맹사성
태조 때 좌의정 조준(趙浚)에게 우의정 김사형(金士衡)이 있었다면 세종 때 좌의정 황희(黃喜)에게는 우의정 맹사성(孟思誠·1360~1436년)이 있었다. 황희가 양(陽)이면 맹사성은 음(陰)이라 조화를 이루며 세종 치세를 이룩해낼 수 있었다.
맹사성은 신창(新昌) 맹씨로 조부 맹유(孟裕)는 최영(崔瑩)과 친구 사이였다. 아버지 맹희도(孟希道)는 고려 말 한성윤 등 중간 관리를 지낸 인물이며 정몽주 등과 교분이 있었다. 명문가는 아니어도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던 셈이다.
맹사성은 26세이던 우왕 12년(1386년) 병인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2년 후 이성계(李成桂)가 단행한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은 몰락했지만 아직 초급 관리였던 맹사성에게 역사의 파고는 덮치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가 망할 때까지 춘추관 검열을 비롯해 사간원 우헌납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 나가 수원판관과 면천군수 등을 지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맹사성은 벼슬에 대한 뜻을 접고 고향 온양으로 내려갔다. 맹사성이라는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때는 태조 5년(1396년) 8월 29일이다. 어떤 문제로 여러 사람이 탄핵당할 때 예조의랑 맹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관직으로 복귀하게 되는 때는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 때이다. 우간의대부, 좌산기, 문하부 낭사 등이 그가 맡았던 관직인데 모두 언관(言官)이었다. 아마도 그는 관리로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이재(吏才)보다는 간언(諫言)에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생의 후원자 성석린
태조 때나 정종 때 그리고 태종 때 맹사성이 관직으로 돌아오는 데는 선배 성석린(成石璘·1338~1423년)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 성석린은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웠고 앞에 나서지는 않았어도 태조-정종-태종으로 이어지는 정치 노선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그래서 태조와 태종 모두로부터 큰 신망을 얻어 두 임금을 화해시키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태종 때에는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낼 만큼 현달했지만 자기를 크게 내세우는 성품이 아니었다.
성석린은 일찍부터 맹사성을 눈여겨보았다. 아마도 태조 5년 맹사성이 관직으로 돌아오는 데는 성석린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스승 권근(權近)의 권유도 있었을 것이다.
맹사성은 태종 3년(1403년) 좌사간대부에 오른다. 역시 간관(諫官)이었다. 이듬해 기밀 누설죄로 온양으로 유배를 가지만 1405년 동부대언으로 복귀한다. 이는 태종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성석린과 권근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2년 동안 승정원 대언(훗날의 승지)으로 활동하며 태종 지근거리에서 일을 도왔고, 지신사(후일의 도승지·오늘날의 비서실장) 황희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예문관 제학으로 있을 때는 세자를 보필해 명나라에 다녀온다. 훗날 이 사행(使行) 덕분에 맹사성은 세자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게 된다.
너무 곧기만 했던 대사헌
그는 오로지 관리의 바른길을 걷는 사람일 뿐 시세(時勢)에 곁눈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곧은 직무 수행으로 인해 죽을 고비가 오기도 했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에 오른 그는 태종의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한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잠시 역모의 혐의를 받고 있을 때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했다. 조대림은 태종이 가장 신뢰했던 재상(宰相) 조준(趙浚)의 아들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는 태종도 조대림을 의심했다가 진행 과정을 면밀히 지켜보면서 목인해(睦仁海·?~1408년)라는 자의 농간에 조대림이 놀아난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서는 상황을 즐기고 있던 터였다. 즉 태종으로서는 사위 조대림을 처벌할 생각은 없었고 일단 일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맹사성은 대사헌으로서 원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실제로 처형될 뻔했으나 영의정 성석린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일은 흔히 ‘목인해 무고사건’으로 불린다. 당시 지신사 황희는 이 사건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 오히려 태종으로부터 큰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태종실록(太宗實錄)》 8년 12월 11일이다. 맹사성 등에 대한 옥사(獄辭)가 올라오자 태종은 이렇게 명했다.
“맹사성·서선·박안신·이안유와 맹귀미(孟歸美)를 모두 극형에 처하라.”
맹귀미는 맹사성의 아들로 이때 사헌부 감찰이었다. 부자(父子)가 모두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틀 전 감옥 안에서 박안신이 죽음을 직감하고서 맹사성에게 서로 한마디라도 하고 죽자고 말했다. 먼저 맹사성은 이렇게 적었다.
“충신이 그 직책으로 인해 죽는 것은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요, 조종(祖宗)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박안신은 이렇게 썼다.
“내 직책을 수행하지 못해 달갑게 죽음에 나아가지만 임금이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오명을 얻게 될까 염려된다.”
‘謀弱王室’
다시 12월 11일이다.
태종이 이들에게 지운 죄명은 모약왕실(謀弱王室), 즉 왕실 약화를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나서 태종을 말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날 여러 대신이 보여준 장면은 맹사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태종은 평상심을 잃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실록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기록했겠는가?
이때 태종의 총애가 깊은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이 나서 맹사성을 적극 변호했다. 언관의 직분에 충실했을 뿐인데 역적으로 모는 것은 너무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은 화를 내며 “누구의 지도를 받고 이런 말을 하느냐?”고 오히려 이숙번에게 따져 물었다. 이숙번은 물러서지 않았다.
“신은 젊어서부터 전하를 따랐으니, 전하께서 신의 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신은 지도를 받은 일도 없고, 두려워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았는지 태종은 ‘이숙번이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이숙번은 태종이 평상시에 즐겨 쓰던 말, 즉 ‘모진 매 밑에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랴?’를 인용하며 맹사성도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모약왕실’이라는 초사(招辭·조서)에 승복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극형에 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불똥이 지신사 황희에게 튀었다. 왜 많은 재상이 이렇게 말하는데 지신사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임금을 생각해 직언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숙번도 순금사 사직 김이공을 불러 “남 판서(남재)와 박 참지(박은)는 모두 도리를 아는 재상인데, 어째서 다시 아뢰지 않고 모두 임금의 뜻에만 아첨하여 옥사(獄事)를 이렇게 처리하는가? 그대도 명색이 선비인데 어째서 이같이 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면서 이숙번은 “주상께서 만일 이 사람들을 반드시 사형하려고 하신다면, 나는 머리를 깎고 도망하겠다”고 말했다.
뒤이어 병중에 있던 권근, 영의정 하륜(河崙), 좌의정 성석린, 삼군영사 조영무(趙英茂) 등 문무 최고 관리들이 대궐 뜰에서 태종에게 맹사성을 사형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말을 올렸다.
拙直한 성품
태종은 “맹사성은 모반한 것도 아니며, 무고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공사(公事)를 처리하면서 실수를 했을 뿐인데 극형에 처하면 어찌 사람의 정리(情理)에 맞겠습니까?”라고 한 하륜의 말꼬리를 잡아 화를 벌컥 내며 이렇게 말한다.
“경은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다 하는 것인가? 공사를 처리함에 있어 어찌 실수할 수 있는가?”
태종의 말이라면 대부분 복종하던 하륜도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명재상 양운(楊惲)을 죽이려 할 때 신하들이 제대로 간하여 사형을 저지하지 않은 중국 고사를 길게 인용한 다음 “신은 동방에 그런 임금은 없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였는데 오늘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고 정면으로 맞섰다.
태종은 정확히 반걸음 물러섰다.
“내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그런데 아무리 반복하여 생각해보아도 사성의 죄는 죽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들이 이렇게까지 간하니, 내가 우선 생각해보겠다.”
이후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이 서둘러 사형 집행 결정을 철회해줄 것을 청하자 마침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말 끝머리에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사안이 극히 중대하고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가볍게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임금이 혼자서만 국가를 다스릴 수 없고, 경들도 어찌 나를 불의(不義)에 빠뜨리고자 하겠는가? 경들의 말을 따르겠다. 대신 경들도 왕실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모하라.”
이렇게 해서 맹사성 등은 극형 대신 유배를 떠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태종 9년 1월 1일 신년하례를 마치고 세자 및 대언들과 식사를 하던 중에 세자 이제가 가만히 아뢰었다.
“맹사성이 신을 따라 중국에 입조(入朝)하여 간난(艱難)한 일들을 같이 겪어, 그때 그 성품이 졸직(拙直·성격이 고지식하다는 뜻)한 것을 알았습니다. 성상의 뜻을 거슬러 죄를 받을 때에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천위(天威)를 범할까 두려워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태종은 가납(嘉納·권하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뜻)했다. 직(直)은 태종이 좋아하던 말이다. 졸직이란 다소 서툴기는 해도 그 마음속은 곧다는 뜻이다.
아들 맹귀미도 이때 풀려났지만 이듬해 장인 이무(李茂)가 민씨 형제들과 연루되어 사형당할 때 다시 고초를 겪고는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실록을 통해 맹사성의 관력(官歷)을 추적해보면 이 일 말고는 특별한 허물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저 중앙의 요직과 지방의 관찰사를 오가며 치적(治績)을 쌓아간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비결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남에게는 너그러운 그의 천품이 흔히 환해풍파(宦海風波)라고 부르는 벼슬살이의 고단함을 순항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禮는 허조, 樂은 맹사성
조대림 사건이 있고 정확히 2년 후인 태종 10년 8월 10일 맹사성은 직첩(職牒)을 돌려받는다. 일단 다시 벼슬에 나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얼마 후에 맹사성은 예악(禮樂)을 관장하는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태종 11년 윤 12월 7일 맹사성이 외직인 충주목사에 제수되자 예조에서 아뢰었다.
“관습도감제조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하여 거의 선왕(先王)의 음악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근일에 판충주(判忠州)를 제수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건대 한 고을의 정무(政務)는 사람마다 능한 이가 많지마는 선왕의 음악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맹사성을 도성에 머물게 하여서 정악(正樂)을 가르치소서.”
이에 얼마 후 그는 공안부윤(恭安府尹)이라는 내직을 맡았다. 그다지 중요한 자리는 아니다. 태종은 맹사성에 대해 마음을 다 풀지 않았던 것이다.
1412년 5월 3일 맹사성이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영의정 하륜이 태종에게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해달라 아뢰었다.
“본국의 악보(樂譜)가 다 폐결(廢缺)되어 오직 맹사성만이 악보에 밝아서 오음(五音)을 잘 어울리게 합니다. 지금 감사의 임명을 받아 장차 풍해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머물러서 악공(樂工)을 가르치게 하소서.”
이처럼 태종과 세종 대에 예(禮)를 정비하는 일을 허조(許稠)가 맡았다면 맹사성은 악(樂)을 정비하는 일을 책임졌다.
태종 16년 6월 24일 맹사성은 이조참판이 되고 3개월 후에 마침내 예조판서가 되어 판서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이후 호조판서, 공조판서를 거쳐 세종 1년에는 인사를 책임지는 이조판서가 됐다. 이때는 상왕(上王) 태종이 인사를 하던 때이므로 마침내 태종이 맹사성의 진가를 인정하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황희보다 1년 늦은 1427년에 우의정이 되어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이라는 세종 치세 쌍두마차의 탄생이다. 이후 《세종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 중의 하나가 “황희·맹사성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이다. 정사(政事) 하나하나를 두 정승과 토의해가며 결정했다는 것을 이 표현만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먼저 맹사성은 상왕 태종이 살아 있던 때에 이조판서를 거쳐, 한성부판사,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다음 다시 이조판서에 제수된다. 처음에는 두 달여밖에 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 이조판서는 2년 이상 하게 된다.
태종의 총애를 받은 조말생
▲조말생
태종의 구상에 이때 황희는 남원에 유배 중이었기 때문에 이조판서 맹사성,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1370~1447년)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을 세종에게 재상감으로 물려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구상은 결국 황희가 막판에 복귀하고 조말생은 끝내 세종에게 배척당함으로써 황희-맹사성 구도로 가게 된다.
세종 3년 12월 7일 맹사성은 이조판서에서 의정부찬성사로 옮긴다. 우의정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자리이다.
조말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먼저 세종 29년(1447년) 4월 27일 졸기(卒記)를 통해 알아보자.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학문에 힘써서 신사년(辛巳年·1401년 태종 1년)에는 장원급제로 뽑혀 요물고부사(料物庫副使)에 제수되었고 감찰(監察)·정언(正言)·헌납(獻納)을 거쳐 이조정랑으로 영전했다가 정해년(丁亥年·1407년) 중시(重試)에 (변계량에 이어) 둘째로 뽑혀 전농부정(典農副正)에 제수되었다. 이윽고 사헌장령에 제수되어 직예문관(直藝文館)을 담당했고 신묘년(辛卯年·1411년)에는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선공감판사)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대언에 잠시 제배(除拜)되었으며 여러 번 승진해 지신사가 되고 무술년(戊戌年·1418년)에는 이조참판에 제수되어 품계를 뛰어 정덕대부(靖德大夫)로 가자(加資·품계 승진)하니 말생(末生)이 사양하여 말했다.
“신이 오래 출납(出納·임금의 말과 신하의 말을 전달함)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조금도 계옥(啓沃·의견을 내어 임금에게 도움이 되는 것)한 것이 없사온데 등급을 뛰어 제수하시오니 성은(聖恩)이 너무 지중해서 진실로 부끄럽습니다.”
태종이 말했다.
“경을 대신 자리에 두고자 하나 아직 천천히 하려 하니 사양하지 마라.”
다음 달에 형조판서로 승진시켰다가 곧 병조판서로 옮겨서 군정(軍政)에 관한 시종(侍從)을 맡게 하여 태종이 총애하는 대우가 더욱 융숭했다.〉
뇌물죄가 조말생의 발목 잡아
이것만 봐서는 ‘정승 조말생’은 시간문제다. 상왕 태종이 신왕 세종에게 조말생을 정승감으로 꼽았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끝내 조말생은 정승에 오르지 못했다. 졸기 중에서 세종 때를 살펴보자.
〈병오년(丙午年·1426년)에 장죄(贓罪·장물죄)에 연좌되어 외직(外職·지방 관직)으로 좌천되었다가 무신년(戊申年·1428년)에 불러들였다가 임자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봄에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겨울에 병으로 사면했는데 갑인년(甲寅年·1434년) 9월에 중추원사에 제수되고 을묘년(乙卯年·1435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중추원판사)가 되고, 예문관대제학으로 옮겼다가, 무오년(戊午年·1438년)에 도로 중추원판사가 되었으며 기미년(己未年·1439년)에 궤장을 받고 임술년(壬戌年·1442년)에 숭록대부(崇錄大夫·종1품)에 승진하고 갑자년(甲子年·1444년)에 보국(輔國·정1품)으로 가자를 받고 병인년(丙寅年·1446년)에 중추원영사가 되었는데 이해(1447년)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78세였다.〉
세종 즉위년부터 병오년까지 8년 동안 조말생은 줄곧 병조판서로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의정부가 아닌, 원로원에 해당하는 중추원에서 품계만 영의정에 준하는 영중추에 머물러야만 했다. 중앙정치에서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을까?
졸기는 그가 끝내 정승에 오르지 못한 까닭을 뇌물죄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말생은 기개와 풍도가 넓고 컸으며[氣度恢洪·기도회홍] 일을 처리함에 너그럽고 두터워[處事寬厚·처사관후] 태종이 소중한 그릇으로 여겼으나 옥에 티(뇌물죄)가 신상에 오점이 되어 끝끝내 국무대신이 되지 못했다.〉
국무대신, 즉 정승이 되지 못한 점이 조말생에게 천추의 한이었음을 졸기가 인정하고 있다. 사람됨에 있어 “넓고[恢] 크며[洪] 일 처리가 너그럽고[寬] 두터웠다[厚]”면 타고난 정승감 아닌가?
권세를 즐긴 잘못
사실 태종 때도 뇌물 수수는 흔했다. 하륜이 그랬고 박은이 그랬다. 그렇다면 왜 세종은 결국 조말생을 정승의 자리에 올리지 않았을까? 그 해답은 세종 8년(1426년) 3월 7일 자 실록에 담겨 있다. 세종의 말이다.
“옛날에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생각하니 이해가 간다. 대체로 모든 관원을 임명함에 있어서, 임금이 그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무를 맡은 대신에게 이를 맡기는 것이요, 대신이 사람을 쓰는 것은 반드시 과거부터 알던 사람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무를 오래 잡으면 아무리 마음을 정직하게 가지는 사람일지라도, 남들이 반드시 그가 사사로운 정실(情實)을 행사한다고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지신사로부터 병조판서까지 10여 년간이나 오랫동안 정무를 잡은 사람으로는 조말생처럼 오래된 사람이 없더니 과연 오늘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세종은 조말생의 뇌물 수수를 단순 뇌물죄가 아니라 사사로이 자기 권력을 행사한 문제로 인식했다. 정승은 임금을 돕는 자일 뿐 임금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조말생은 세종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던 것이다.
이 질문, 즉 “왜 세종은 조말생을 정승으로 삼지 않았을까?”는 “왜 태조는 정도전을 정승으로 삼지 않았을까?”만큼이나 흥미로운 문제 제기다. 게다가 태종에서 세종으로의 권력 이양기에 줄곧 병조판서를 맡아 병권(兵權)을 쥐었던 인물이 바로 조말생이다. 사실 조말생은 아버지의 신하였다. 그럼에도 세종은 《논어》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명심했기에 8년 내내 조말생을 병조판서에 그대로 두었다.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뜻을 조금도 잊지 않고 따른다면 그것은 효라고 이를 만하다.”
우선 세종은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태종이 조말생에게 맡긴 병조판서 자리를 그 후에도 4년 동안 그대로 맡겼다.
조말생으로서는 오히려 자신을 내치지 않은 세종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단지 그는 본인의 처신에서의 잘못, 즉 권세를 즐긴 잘못으로 인해 끝내 정승까지 올라갈 수 없었을 뿐이다. 그 반대쪽에 맹사성이 있었던 것이다.
公堂 문답
맹사성이 우의정으로 있을 때 눈길을 끄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세종은 세종 12년 4월 26일 황희와 맹사성에게 《태종실록》 편찬의 감수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려고 했다. 그러자 맹사성이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도 이에 따랐다. 즉 성군(聖君)이라는 세종도 실록을 보고 싶어 했고 그것을 저지한 사람이 바로 맹사성이었던 것이다.
조선 초의 관리이자 문필가인 성현(成俔)의 책 《용재총화(慵齋叢話)》(1525)에는 그의 넉넉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려 있다.
고향인 충청도 온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그가 비를 만나 경기도 용인의 어떤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방에 들어가니 경상도에서 올라온 부호(富豪)가 패거리를 잔뜩 거느린 채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고 우의정 맹사성은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부호는 맹사성을 불러 함께 장기를 두자고 했다. 이에 응한 맹사성과 한창 장기를 두던 중에 그는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서로 공(公)자와 당(堂)자를 끝에 붙여가며 문답을 하자는 것이다.
이에 맹사성이 먼저 물었다.
“무엇 하러 한양에 가는공(公)?”
“녹사(錄事) 벼슬을 얻기 위해 올라간당(堂)?”
“내가 그대를 위해 그 자리를 얻어줄공(公)?”
“우습구나. 당치도 않당(堂).”
이들의 공당(公堂) 문답은 여기서 끝났다. 한양으로 돌아온 맹사성이 의정부에 있는데 그 사람이 녹사 시험을 보러 들어왔다가 맹사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떠한공(公)?”
그 사람은 물러가 엎드리며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당(堂)!”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맹사성이 전후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함께했던 재상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 사람은 실제로 맹사성의 추천으로 녹사가 되고 훗날 지방의 유능한 관리가 됐다고 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맹사성의 면모는 여유로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다. 그 여유로움이 환난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고 그 눈이 그를 이조판서와 정승 자리에까지 올렸기 때문이다. 그 후 1432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치적보다 행실 뛰어나
맹사성은 고려 말부터 태조, 정종, 태종, 세종까지 마치 하나의 임금 밑에서 일을 한 듯이 관품이 높아졌다. 태종 때 고초를 겪은 것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정치 바람을 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윗사람에게 아첨을 일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논어》 태백(泰伯)편에서 공자가 말한 이 한마디가 아닐까?
“그 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윗자리를 넘보지 않고 윗자리에 나아가서는 아랫사람들의 일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79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그의 치적보다는 그의 행실을 높이 평가해 이렇게 말했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제(階梯)가 얕은 자라도 만나보고자 하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은 맹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의 집이 맹사성의 집 아래에 있었다. 맹사성은 늘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성석린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위(魏)나라 유소(劉邵)의 《인물지》 재상 유형에 따르면 맹사성은 일을 하는 술가(術家)나 법가(法家)라기보다는 청절가(淸節家)라고 할 수 있다. 태평성대에 꼭 필요한 유형이니 세종 때 재상을 지낸 것은 본인이나 나라로서 모두 큰 행운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미 《이한우의 주역》(21세기북스)에서 맹사성을 절괘(節卦) 육사(六四), 즉 밑에서 네 번째 음효(陰爻)로 풀어낸 바 있다. 이 효에 대해 공자는 “자연스럽게 절제해 형통한 것은 위의 도리[上道·상도]를 받들기 때문이다”라고 풀었다.
육사는 부드러운 자질로 부드러운 자리에 있으니 바르고 육삼(六三)과는 친하지 않지만 구오(九五)와는 가깝다. 또 초구(初九)와도 호응 관계이니 여러 가지로 좋다. 정이천(程伊川)의 풀이다.
“육사는 굳세면서 중정(中正)을 이룬 구오의 도리를 고분고분 따르며 받드니 이것이 중정함으로써 절제하는 것이다. 음의 자질로 음의 위치에 있어 바른 도리에 편안하니 절제함이 있는 모습이고 아래로 초구에 호응한다. 육사는 감괘(坎卦)의 몸체에 있으니 물에 해당한다. 물이 위로 넘치는 것은 절제가 없는 것이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은 절제가 있는 것이다. 육사와 같은 사람의 마땅한 의리는 억지로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함에 편안하니 형통함에 이를 수 있다. 절제는 우러나서 편안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억지로 절제하면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를 써서 안정을 이루지 못하면 오래도록 지속할[常] 수가 없으니 어찌 형통할 수 있겠는가?”
즉 위에 있는 구오를 받드는 마음이 억지스러움이 없고 우러나서 하는 편안함이기에 형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사성의 단점
이는 《논어》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안인(安仁)과 이인(利仁)의 차이를 통해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도리를 통해 자신을) 다잡는 데 오랫동안 처해 있을 수 없고, 좋은 것을 즐기는 데에도 오랫동안 처해 있을 수 없다. 어진 자는 어짊을 편안하게 여기고[安仁] 사리를 아는 자는 어짊을 이롭게 여긴다[利仁].”
여기에는 오래도록 지속함의 문제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조선 재상 중에 절괘의 육사에 가까웠던 인물로는 맹사성을 빼놓을 수 없다. 실록 졸기는 맨 마지막에 그의 단점을 지적하고 있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仁柔] 무릇 조정의 큰일이나 거관처사(居官處事)에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 단점이 있었다.”
술가나 법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06월 호
6 신숙주(申叔舟)전
세 임금 밑에서 재상 지낸 ‘일을 할 줄 아는 신하’
⊙ “대의(大義)를 결단함에 있어 강하(江河)를 터놓은 것과 같이 막힘이 없어 조야(朝野)가 의지”(실록)
⊙ 세조, “한명회는 나의 장자방(張子房·장량), 신숙주는 나의 위징(魏徵)”
⊙ 《해동제국기》에서 일본과의 우호가 궁극적으로는 조선에도 도움이 됨을 강조
⊙ “한명회·신숙주는 죄과(罪過)가 없지 않으니, 무례(無禮)하게 마음대로 한 것이 그 죄이다”(세조)

▲신숙주
신숙주(申叔舟·1417~1475년)는 1417년(태종 17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공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신장(申檣·1382~1433년)은 신숙주가 17세이던 세종 15년(1433년) 세상을 떠났는데 공조참판을 지낸 덕에 실록에 졸기(卒記)가 실려 있다.
〈사람됨이 온후(溫厚)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隷書)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 죽음에 미쳐 허조가 듣고 탄식하기를 “이런 선량한 사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라고 하였다. 치부(致賻)하기를 명했다. 아들 다섯이 있는데,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숙주(申叔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였다.〉
신장은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초대(初代) 부제학을 지냈고 당시 집현전 학사 정인지(鄭麟趾), 윤회(尹淮·1380~1436년) 등과 가까웠다. 윤회는 일찍이 태종(太宗)으로부터 “경은 학문이 고금을 통달했으므로 세상에 드문 재주이고, 용렬한 무리의 비교가 아니니, 경은 힘쓰라”는 당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졸기에도 신장과 마찬가지로 “천성이 술을 즐기니 두 임금께서 여러 번 꾸짖어 금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능히 그치지 못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두 사람은 술친구였다. 윤회에게는 윤경연(尹景淵), 윤경원(尹景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윤경연이 신숙주의 장인이다.
넓은 아량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신숙주 생가 마을에 있는 쌍계정. 정가신이 처음 세웠는데, 신숙주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사진=조선DB
어려서 신숙주가 윤회에게 공부를 배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모습을 졸기는 “어려서부터 기량(氣量)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서 글을 읽을 때 한 번만 보면 문득 기억하였다”고 적고 있다.
게다가 신숙주는 넓은 아량의 소유자였다. 1439년(세종 21년) 과거에 급제하고 처음 맡은 보직이 전농직장(典農直長)이었는데 이조(吏曹)의 담당 관리가 깜빡하고 그에게 첩(牒)을 주지 않았다. 첩이란 일종의 공무원증과 같은 것이다.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관리를 탄핵해 파직시켰는데 신숙주는 스스로 이조에 나아가 “그 관리는 첩을 전했지만 내가 스스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그 관리는 복직됐지만 신숙주는 파면당했다.
불과 2년 후인 세종 23년(1441년) 신숙주는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제수됐다. 그의 가장 큰 행운은 세종이라는 성군을 모시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주로 예조에서 활약을 했다. 실록이 전하는 당시 그의 활약상이다.
〈신숙주는 천자(天資)가 고매(高邁)하고 관후(寬厚)하면서 활달(豁達)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하고 의논(議論)에 항상 대체(大體)를 지녀서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하지 않았다. 대의(大義)를 결단함에 있어 강하(江河)를 터놓은 것과 같이 막힘이 없어서 조야(朝野)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오랫동안 예조(禮曹)를 관장하여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사명(詞命)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정음(正音)을 알고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하였으며, 한음(漢音)을 배우는 자들이 많이 이에 힘입었다.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무릇 그 산천(山川), 관제(官制), 풍속(風俗), 족계(族系)에 대하여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를 지어 올렸다. 세종이 《오례의(五禮儀)》를 찬술했으나 아직 반포하지 못했는데 임금이 신숙주에게 명해 간정(刊定)하여 이를 인행(印行)하게 했다. 문장(文章)을 만드는 것은 모두 가슴 속에서 우러나왔고, 각삭(刻削)을 일삼지 않았다.〉
《해동제국기》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
그는 무엇보다 일을 할 줄 아는 신하였다. 세종 25년(1443년) 신숙주는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 서장관(書狀官)이 됐다. 정사는 변효문(卞孝文·1396~?)이었다. 이때의 일화는 그가 문약(文弱)한 선비라기보다는 강명(剛明·성질이 곧고 두뇌가 명석함)함을 갖춘 대인배였음을 한눈에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사신의 일을 마치고 귀국할 때 태풍을 만나 모두 공포에 떨었으나 그는 홀로 태연자약하며 이렇게 말했다.
“장부(丈夫)가 사방(四方)을 원유(遠遊)함에 이제 내가 이미 일본국(日本國)을 보았고, 또 이 바람으로 인하여 금릉(金陵)에 경박(經泊)하여 예악문물(禮樂文物)의 성(盛)함을 얻어보는 것도 또한 유쾌한 것이 아니겠느냐?”
금릉이란 명나라 초의 수도였던 남경(南京)을 가리킨다. 아마도 예전에 표류한 배들이 중국 남쪽 해안으로 표류해 간 일들이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맹자(孟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란 이런 것이다.
이때의 일을 기반으로 저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일본의 정치 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異同),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등을 모두 기록해 이후 조선의 일본 정책의 근간이 됐다. 특히 이 책에서 신숙주는 일본과의 우호가 궁극적으로는 조선에도 도움이 됨을 강조했다.
귀국길에 동승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선원과 승선한 사람들이 모두 “아이 밴 여자는 배가 가는 데에 꺼리는 바인데 오늘의 폭풍(暴風)은 이 여자의 탓”이라고 하면서 바다에 빠뜨리려 하자 신숙주 홀로 “남을 죽이고 자기 삶을 구하는 것은 차마 할 바가 아니다”며 막아섰는데 얼마 뒤에 바람이 잦아들어 일행이 모두 무사하였다. 세종 때 그는 사헌부의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 등을 두루 역임했다.
신숙주와 훈민정음
세종 25년(1443년)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6일 집현전 교리(集賢殿 校理) 최항(崔恒), 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副修撰) 신숙주·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돈녕부 주부(敦寧府 注簿) 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과 진양대군(晉陽大君·후일 수양대군으로 개명. 세조) 이유(),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여 모두 상(上·임금)의 판단에 품의하도록 하여 거듭 상(賞)을 내려주고 공억(供億)하는 것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운회》란 원나라 초기 황공소(黃公紹)가 편집한 운서(韻書) 《고금운회(古今韻會)》를 그의 제자 웅충(熊忠)이 간략하게 하고 주석을 더하여 1297년에 펴낸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말한다.
여기에 참여했던 멤버들은 거의 그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도 참여해 세종 30년에 간행되는데 그 서문을 신숙주가 썼다.
수양대군과 인연
문종(文宗)은 신숙주를 사헌부 장령에 제수한다. 일반적으로 학재(學才)가 강한 집현전 학자들에게는 정사(政事)를 맡기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니 파격이었다. 학자 신숙주가 점차 정치 쪽으로 이동하게 된 계기였다.
그의 인생에 새로운 계기가 찾아온 것은 1452년(문종 2년·단종 즉위년) 9월 14일 세조(世祖·당시 수양대군)가 사은사(謝恩使)가 돼 중국에 갈 때 서장관으로 따라가면서였다. 세조는 신숙주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해 함께 갈 것을 청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세조와 정치노선을 함께하게 된다. 그보다 한 달여 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실록에 실려 있다. 8월 10일 자다.
〈정수충(鄭守忠·1401~1469년)이 세조의 집에 가니, 세조가 그와 더불어 서서 이야기를 하는데, 마침 집현전 직제학 신숙주(申叔舟)가 문 앞으로 지나갔다. 세조가 불렀다.
“신 수찬(申修撰)!”
신숙주가 곧 말에서 내려 뵈었다. 세조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찌 과문불입(過門不入)하는가?”
이끌고 들어가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농담으로 말했다.
“옛 친구를 어찌 찾아와 보지 않는가? 이야기하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이 비록 죽지 않을지라도 사직(社稷)에는 죽을 일이다.”
신숙주가 대답했다.
“장부가 편안히 아녀자(兒女子)의 수중(手中)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재가부지(在家不知)라고 할 만하겠습니다.”
세조가 즉시 말했다.
“그렇다면 중국에 가자.”〉
과문불입(過門不入)이란 《맹자》에 나오는 말로 우(禹)가 나랏일에 힘쓰느라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로 집안일도 잊은 채 공무에 힘쓴다는 뜻이다. 이에 신숙주도 재가부지(在家不知)라는 말로 화답했다. 집안에 머물며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처럼 신숙주는 애당초 명분을 앞세우는 도학자보다는 실천을 지향하는 장부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듬해(단종 1년·1453년) 명나라에서 돌아온 신숙주는 그해 2월 지병조사(知兵曹事)를 거쳐 곧바로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6월 우부승지로 옮기는데 같은 해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난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이때 신숙주 나이 37세였다. 수양대군과는 동갑이었다.
한명회와 신숙주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을 척살한 정난(靖難)이 있고 닷새 후에 공신책봉이 이루어지는데 정인지·이사철(李思哲)·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이 1등이고 신숙주는 2등에 올랐다. 성삼문(成三問)은 3등에 이름을 올렸다.
계유정난 이후 신숙주는 말 그대로 초고속 승진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정난 이듬해(1454년) 2월 6일 신숙주는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된다. 수양대군의 신임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이때 1등공신 한명회(1415~1487년)는 동부승지를 맡는다. 세조는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張子房·장량)”, 신숙주를 “나의 위징(魏徵·중국 당나라 초기 공신)”이라 불렀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신숙주는 공신으로 책봉됐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낸 다음 세조 4년(1458년)에 우의정, 그리고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그가 거친 자리는 한명회가 물려받았다.
신숙주와 한명회 두 사람은 대장부라는 면에서 의기투합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예종(睿宗)·성종(成宗) 대에 이르기까지 한명회와 신숙주는 한결같이 같은 길을 걸었다. 아마도 신숙주가 조금이라도 한명회를 앞서려 했다면 두 사람의 동지 관계는 깨졌을 것이다. 《세조실록》 3년(1457년) 3월 15일 경복궁 사정전에서 연회를 벌였는데 세조가 우찬성 신숙주에게 명해 술을 올리게 하니 양녕대군 이제(李禔)가 말했다.
“신숙주는 서생이지만 뛰어나고 재능이 많습니다.”
이에 세조는 이렇게 말한다.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지장(智將)이고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이다.”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장부’ 신숙주의 면모를 재확인할 수 있다.
변방을 안정시키다
신숙주는 군사에도 조예가 있었다. 당시 북쪽 오랑캐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자 세조는 정토(征討)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의견이 갈려 갈피를 못 잡았는데 이때 신숙주가 홀로 계책을 세워 치기를 청했다. 신숙주가 몸소 강원도 함길도 도체찰사(江原道咸吉道都體察使)가 돼 나아가 토벌에 성공했다. 세조 6년(1460년) 9월 27일 자 실록이다. 세조와 신숙주의 돈독했던 군신(君臣)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함길도 도체찰사 신숙주가 전문(箋文)을 올려서 잔치와 표리(表裏)를 내려준 것에 대하여 사례(謝禮)하였다.
“삼가 성상(聖上)의 계책(計策)을 받들고 천위(天威)를 멀리까지 폈으나, 돌이켜보면 아무런 기념할 만한 공(功)도 없는데 도리어 전(前)에 없던 은총(恩寵)을 입으니, 은혜가 바라던 생각 밖에서 나왔으므로 감격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일어납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적로(賊虜)들이 흉악(兇惡)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 변방의 여러 고을을 도둑질하면서 인정(仁政)을 저버리고 덕(德)을 배반(背反)하는 등 악(惡)을 쌓고 완악(頑惡)함을 길렀습니다. 신이 양재(良才)가 없는 몸으로서 곤외(閫外·변방)의 직임을 감히 받아, 이에 제장(諸將)과 더불어 편사(偏師)를 나누어 독려하고 번개같이 많은 무리들을 공격하여 개나 쥐 같은 저들의 소혈(巢穴)을 모조리 소탕하고 수많은 부락(部落)을 불태워서, 이미 사막과 같이 텅 빈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 주상 전하께서 천운(天運)에 응하여 저들을 무휼(撫恤)하고 시기에 임(臨)하여 무력(武力)을 사용하여 계책에 유감이 없으셨던 것이니, 한 번 노하자 (국경이) 안정되었습니다. 신 등은 다만 분주(奔走)하게 근로(勤勞)하였을 뿐이요, 오로지 그 계책을 받들기에 겨를이 없었는데, 어찌 남다른 포장(褒奬)이 하찮은 노고(勞苦)를 빠뜨리지 않으리라고 뜻하였겠습니까? 어찰(御札)이 밝게 빛나고 거룩한 유서(諭書)가 못내 정(情)을 아쉬워하면서 진귀한 내탕(內帑·궁중 재물 창고)의 물건을 나누어 주시니 아직도 어로(御爐·궁중의 향로)의 연기를 띠었고, 취하여 성상의 주신 표주박을 드니 황홀하여 궁중의 뜰 아래에 있는 듯합니다. 이와 같은 영광(榮光)은 전고(前古)에 드물었던 바이니, 신은 제장과 더불어 감히 상호(桑弧·웅대한 뜻을 세움)의 뜻을 두지 않겠으며, 일에 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몸이 싸움터에서 말가죽에 싸여 죽더라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은혜를 갚을 것을 맹세합니다.”
어찰(御札)로 회유(回諭)했다.
“경이 큰 공이 있어 은총이 남다르니, 진실로 더욱 충성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글의 뜻이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내가 감격의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이 때문에 답서(答書)하여 나의 지극한 정(情)을 말하는 것이다.”〉
兵漕船 제작 건의
▲충북 청주에 있는 묵정영당. 신숙주 초상을 모셨다. 사진=조선DB
신숙주는 실무에도 밝았다. 좌의정 신숙주는 세조 7년(1461년) 10월 2일 조선(漕船)과 병선(兵船)을 겸한 병조선 제작을 건의한다.
“신(臣)이 경기·충청도 여러 포(浦)의 병선(兵船)을 보니, 임의(任意)대로 만들어 체제(體制)가 각기 달라서 모두 쓸 수가 없었습니다. 선군(船軍)은 여러 곳의 요역(役)에 흩어져 나아가서 배를 지키는 자는 한두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조선(漕船)에만 뜻을 두고, 병선(兵船)은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그 폐단이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선과 병선을 둘로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나의 배로 두 가지를 겸용(兼用)하는 것은 제작하는 기교(技巧)에 있으니, 청컨대, 전선색(典船色·배를 만드는 병조 소속 관청)으로 하여금 조선을 고쳐 만들게 하되, 판자(板子)로 막아서 설치할 수도 있고 철거할 수도 있게 하여, 조선으로 사용할 때에는 이를 설치하고, 전선(戰船)으로 사용할 때에는 철거하도록 하소서. 이와 같은 체양(體樣)을 여러 포에 나누어 보내어 이를 모방하여 만들게 하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 될 것입니다.”
세조는 즉각 그리하라고 명했다.
또 신숙주는 충남 태안에 운하를 팔 것을 건의했다. 그곳은 물결이 거칠어 종종 조운선이 침몰하곤 했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늘 운하 건설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년) 3월 신숙주가 직접 가서 살펴본 결과 물길이 바르지 않고 흙이 물러 운하를 파기에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세조 12년(1466년) 1월 15일 영의정에 오른 신숙주는 4월 18일 자신이 고위직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이유로 영의정에서 사직했다. 그의 후임은 구치관(具致寬)이 맡았고 좌의정에는 황희의 아들 황수신(黃守身), 우의정에는 박원형(朴元亨)이 임명되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투옥
세조 13년(1467년) 5월 전 회령 절제사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켜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암살하고 길주를 장악했다. 이시애는 곧장 조정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강효문이 중앙의 한명회, 신숙주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해서 죽였다.”
한 달도 되지 않아 함길도 일대가 이시애에게 가담해 6진(鎭)을 비롯한 함경도 정예병 수만 명이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당시 함길도관찰사는 신숙주의 아들 신면()이었다. 세조는 한명회·신숙주 두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민심을 다스리는 차원에서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이시애의 글이 올라온 지 나흘 후인 5월 19일 세조는 두 사람과 그 아들들을 가둘 것을 명한다.
“근자에 신숙주와 한명회 등이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뭇사람의 입에 구실감이 되었으니, 비록 반역(反逆)한 것은 아닐지라도, 반종(伴從)을 신칙(申飭)하지 못하고 임금을 배반하였다는 악명(惡名)을 받아서, 원근의 의혹을 일으킨 것은 진실로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다. 나도 또한 어리석고 나약하여 위엄이 없는데, 백성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방편(方便)을 생각하지 않음은 옳지 못하니, 우선 이들을 가두어 두는 것이 옳겠다.”
곧 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선전관(宣傳官)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신숙주와 그 아들 신찬(申澯)·신정(申瀞)·신준(申浚)·신부(申溥) 등을 잡아다가 의금부에 가두게 하고, 한명회는 단종(丹腫·종기)이 발병하여 집에 있으므로 영천군(鈴川君) 이찬(李穳)으로 하여금 보병(步兵) 30명을 거느리고 가서 지키게 하고, 그 아들 한보(韓堡)와 사위 윤반(尹磻)을 가두게 했다. 세조의 본심은 6월 5일 자 실록에 나온다.
“한명회·신숙주는 죄과(罪過)가 없지 않으니, 무례(無禮)하게 마음대로 한 것이 그 죄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구성군 이준(李浚)을 총대장으로 삼아 진압군을 지휘하게 했다. 이준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의 아들로 이때 27세였는데 세조가 매우 아꼈다.
다행히 보름쯤 지난 6월 6일 세조는 한명회·신숙주 두 사람을 풀어줄 것을 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위엄을 동하여 형세를 견고하게 하고, 어려움을 제압하는 방편도 또 스스로 취하였으며, 공을 믿고 오로지 함부로 한 것이 있으나, 그러나 실지(失志)는 나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시애의 난은 8월 4일 이시애의 군대가 대패하면서 끝났다. 8월 9일 이시애는 자기 부하들에게 생포되어 이준 총대장 앞으로 끌려갔다. 이때 이준이 한명희·신숙주와 관련해서 묻자 이시애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정의 우두머리 재상을 다 죽인다면 일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무근이었던 것이다. 이듬해 세조가 서거했다.
공신을 불신한 예종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卽位)했다. 세조의 유명(遺命)으로써 원상(院相)을 설치하여 신숙주도 참여하였다. 원상이란 일종의 원로원 정치로 임금이 아직 어릴 때 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과 더불어 임금을 보좌하는 정치기구다. 신숙주의 생애에서 예종의 시대는 어쩌면 가장 힘든 시기였는지 모른다. 예종은 아버지 세조와 정치를 함께했던 한명회·신숙주 등 훈구(勳舊)그룹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예종은 마치 연산군의 전조(前兆)를 보여주는 듯했다. 물론 세조도 실토했듯이 한명회·신숙주 두 사람의 권력이 너무 커져 있기도 했다.
1469년 예종 1년의 기록이다.
“임금이 법을 세운 것은 반드시 행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죄를 범한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근래에 형벌을 받는 사람이 자못 많아서 바깥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다만 사람을 형벌하는 것만 듣고 나를 가지고 새로 임금이 되어 함부로 형벌한다고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내가 깊이 근심한다.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내 뜻을 자세히 알리도록 하라.”
이런 단호함이 훈구파를 직접 향한다면 한명회를 비롯한 원로대신들로서는 여간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예종은 선전관(宣傳官)이라 해서 암행 감찰요원을 종친(宗親)과 공신들의 집에 비밀리에 파견해 고령군 신숙주, 우의정 김질(金礩), 구성군 이준, 박중선, 성임 등의 집에 심부름을 하러 왔던 부하나 하인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당장 죄를 내리기에는 너무나 막강한 거물들이 한꺼번에 걸려들었다. 그래서 예종은 일단 편법으로 “분경(奔競·벼슬 얻기 위한 엽관운동)을 금하지 못한 것은 사헌부에 책임이 있다”며 사헌부 지평 최경지를 의금부에 가뒀다. 최경지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예종은 대간(臺諫)에게 “요즈음 대소조관(大小朝官)이 경계하여도 믿지 아니하고 죄를 주어도 징계되지 아니하니 나는 매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군기(軍紀)를 잡겠다는 것이다.
예종의 급서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때문인지 그해 12월 23일 한명회는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한다. 얼마 전 역적으로 몰려 죽은 남이(南怡)가 그 과정에서 자신을 물고 들어간 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훈구파에 대한 예종의 곱지 못한 시선도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남이는 친국(親鞫)을 받던 중 갑자기 한명회도 자신과 함께 모의를 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한명회로서는 여러모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물러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한명회다운 처세술이다. 그렇다고 예종의 입장에서 한명회를 내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권력은 훈구파들에게 있었다. 예종은 한명회의 청을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런 불안감은 신숙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급서한다. 예종이 사망한 1469년 11월 28일의 기록을 정밀하게 해독해보자.
〈이날 예종께서 병세가 위독하니 고령군 신숙주, 상당군 한명회, 능성군 구치관, 영성군 최항(崔恒), 영의정 홍윤성(洪允成), 창녕군 조석문(曺錫文), 좌의정 윤자운(尹子雲), 우의정 김국광(金國光)이 사정전(思政殿) 문 밖에 모였다. 진시(辰時)에 예종이 훙서(薨逝)하니 대비가 내관 안중경에게 명하여 나가서 신숙주 및 도승지 권감을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여기서 인물들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신숙주와 한명회가 뒤바뀌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대로 권력 순이다. 진시라면 대략 오전 8시 전후다. 예종이 경복궁 자미당(지금은 그 터에 자경당이 들어서 있다)에서 숨을 거둔 시각이다. 결국 밤사이에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졌다는 말이 된다.
성종을 왕위에 올리다
신숙주 등이 들어오자 정희대비가 물었다.
“누가 상례(喪禮)를 주관할 만한가?”
신숙주 등은 신하들이 의논할 바가 아니라며 대비에게 미루었고 대비는 곧바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山君)을 지명했다. 예종의 아들은 아직 포대기 속에 있고 의경세자의 첫째 아들 월산군(月山君)은 “본래 질병이 있다”며 불가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잘산군이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결정하고서 신숙주가 사람을 보내어 잘산군을 맞이하려고 했다. 그런데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미처 아뢰기 전에 잘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말인가? 방금 정희대비와 잘산군을 다음 왕으로 결정하고서 그것을 통보하려 하는데 통보도 하기 전에 이미 잘산군이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사관이 실수를 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적어 넣은 것일까? 아니면 신숙주조차 모르는 시나리오가 있었음을 사관은 이렇게 해서라도 후세에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권력투쟁에 관한 한 철저하게 한명회의 편에 섰던 신숙주였음을 감안한다면 미리 알았을 가능성도 있고 정말로 정희대비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신숙주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시나리오는 쓰여 있었다. 사실상의 주연은 한명회였고 어쩌면 정희대비를 포함한 신숙주 등은 조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도학적 비판에서 벗어나야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신숙주묘. 아내 윤씨와 합장돼 있다. 사진=조선DB
실록 졸기(卒記)에 이런 표현이 있다.
“예종조(睿宗朝)에는 형정(刑政)이 공정함을 잃었는데 광구(匡救)한 바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한마디로 예종의 횡포가 극에 달했는데 원상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바로잡으려 힘쓰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원상이라고 해서 임금의 폭정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신숙주에 대한 비판은 다른 지점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신숙주는 한명회와 정치 노선을 함께했다.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신숙주는 늘 한명회의 바로 반걸음 뒤에 있었다. 정치적 선택과 관련된 그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훗날 한명회에 대한 비판의 절반은 그를 향했다. 하지만 당시 실록의 사관들도 업적이 큰 신숙주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부담스러웠던 듯 아들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는 것으로 신숙주에 대한 비판을 대신한 듯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넷째 아들) 신정(申瀞)도 또한 주살을 당했으니, 슬프도다!”
성종 때 신숙주는 영의정에 다시 오르기는 하지만 활동은 크게 줄어든다. 신숙주가 빛난 시대는 세종과 세조 때라 하겠다. 다만 성종 초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지어 올린다. 그리고 성종 6년(1475년) 세상을 떠났다.
우리 지식인 사회에는 지금도 옛날 임금에게 한결같은 충성을 바친 인물을 칭찬은커녕 비난하는 습성이 있다. 그것은 실은 도학(道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성리학의 오랜 폐습이 무의식 중에 이어진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명분과 도덕만을 앞세워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려는 오만한 태도 또한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신숙주의 본모습을 보려면 바로 이런 도학의 안경부터 벗어야 한다.⊙
07월 호
7 구치관(具致寬)전
올곧음 하나로 정승에 오르다
⊙ “생업(生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죽던 날에는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실록)
⊙ “성품이 정직하여 진취(進取)에 염치 있는 행동을 취하였으므로, 아무도 높이 등용되도록 이끌어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서거정)
⊙ 정난공신이 아니면서도 치밀한 일 처리로 세조의 눈에 들어 출세
⊙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편벽되어 사람들이 자못 비난”(실록)

▲경기도 광주에 있는 구치관 신도비(神道碑).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구치관(具致寬·1406~?)은 흔히 구정승, 신정승의 야사(野史)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애초에 구치관이 우의정에 제수됐을 때 당시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와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워낙 술을 좋아했던 세조는 이에 두 사람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러고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자신의 물음에 바르게 답하지 못하면 벌주(罰酒)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세조가 “신정승” 하고 부르자 신숙주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신(新)정승을 불렀는데 왜 신(申)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먹였다. 이번엔 “구정승” 하고 불렀다. 구치관이 “네” 하고 대답하자 “구(舊)정승을 불렀는데 왜 구(具)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먹였다. 다시 “신정승”을 부르자 아무도 대답을 못 하니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감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며 둘 다 벌주를 마셔야 했다. 이렇게 술잔이 오가다 보니 두 정승의 어색한 관계도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세조 9년(1463년) 8월 29일 이후의 일이다. 구치관이 우의정, 한명회가 좌의정에 오른 날이기 때문이다. 즉 당대 최고의 실력자 한명회가 좌의정, 구치관이 우의정, 실권은 없지만 영의정에 신숙주가 있었던 시절의 일화다.
그러면 과연 구치관은 어떤 배경으로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세조는 정란(靖亂)을 통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적어도 정승이 되려면 정란에서 큰 공로가 있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구치관은 오직 본인의 실력과 강직함 하나로만 이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 시대에 한직 맴돌아
1406년에 태어난 구치관은 남들보다 조금 늦은 28세 때인 1434년(세종 16년)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세종의 치세에 집현전 학사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평범한 관리로 지낸 것을 보면 크게 현달했다고는 할 수 없다.
구치관이라는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때는 《세종실록》 21년 7월 16일 자이다.
이때 구치관은 황해도관찰사 허조(許稠)를 보좌하는 도사(都事)에 임명되어 세종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임지로 떠났다. 세종 시대에 구치관은 그저 한직을 맴돌았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그가 무관(武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 쪽에 몸을 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문종 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즉위년인 1450년 11월 24일 문종은 여진족이 국경을 넘어와 약탈을 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조정랑 구치관을 급파할 것을 명했다. 또 12월 14일 자에는 당시 최고 실력자 김종서가 구치관을 평하는 대목이 실려 있다.
“이제 병조정랑(兵曹正郞) 구치관을 신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병조는 일이 번잡하니 오랫동안 비워둘 수가 없습니다. 또 구치관은 재능이 가히 쓸 만하고 나이가 장차 50이 되니, 병조에서 체임(遞任·해임)시켜 우대하여 탁용(擢用)을 더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에 다른 여러 신하도 같은 말로 구치관을 천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종 때도 구치관은 요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로 김종서나 황보인의 종사관 정도를 지냈을 뿐이다.
“惡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그 이유를 곁에서 지켜본 서거정(徐居正)은 이렇게 말했다.
“공은 지조가 굳고 확실하였으며 식견이 고매하여, 당시 일을 논의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때는 대범하고 엄격하며 언행이 바르고 곧았다. 그러나 공은 성품이 정직하여 진취(進取)에 염치 있는 행동을 취하였으므로, 아무도 공을 치켜세워 추천하거나 높이 등용되도록 이끌어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낮은 벼슬에 배회한 지가 10여 년이었는데 공은 높이 보고 큰 걸음으로 걸었을 뿐이다.”
이는 《세조실록》에 실린 졸기(卒記)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몸가짐을 청백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전후(前後)하여 인재 선발의 임무를 맡았으나 자기 집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뽑아 쓰기를 모두 공평하게 하였다. 혹 간청하는 자가 있으면 관례상 응당 옮길 사람이라도 끝내 옮겨주지 아니하였다. 생업(生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죽던 날에는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한마디로 곧음[直]으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조가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된 계유정난(癸酉靖難)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종 1년(1453년) 5월에 일어난 계유정난은 구치관의 삶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해 10월 안평대군 당여(黨與)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이때 구치관은 사복소윤(司僕少尹)으로 있다가 의금부도사가 되어 안평대군 당여인 경성도호부사 이경유를 베었다.
“경을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세조)
이징옥(李澄玉·?~1453년)은 뛰어난 무장(武將)으로 관직 생활의 반 이상을 경원첨절제사·경원절제사·영북진절제사·판경흥도호부사·함길도 도절제사 등 함경도에서 보내면서 4군(郡)과 6진(鎭) 개척의 공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김종서를 오래 섬겼다.
1453년 5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고, 이어 이징옥을 김종서의 일당으로 몰아 파면하고 그 후임으로 박호문(朴好問)을 보냈다. 이징옥은 중앙에서 일어난 정변 소식을 듣고 분개해 박호문을 죽이고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가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였다. 그러고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에게 후원을 요청하였다.
이징옥은 일찍이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얻은 여진족 사회에서의 명성을 의식하고, 일이 여의치 않을 때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단종은 수양대군을 중외병마도통사(中外兵馬都統使)로 임명했다. 수양은 두 차례 도통사를 사양했으나 단종은 윤허하지 않고 대호군(大護軍) 구치관을 도통관 종사관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수양대군과 구치관은 관계를 맺게 된다.
구치관은 이듬해 2월 6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된다. 처음으로 중앙 요직을 맡는 순간이었다. 이때 신숙주는 도승지, 박팽년(朴彭年)은 좌승지가 되었다. 물론 수양대군이 행한 인사였다고 보아야 한다.
세조가 아직 즉위하기 전 영의정으로서 국정(國政)을 맡고 있을 때 구치관과 함께 일을 해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경을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
그 후 구치관은 승지가 되어 지근거리에서 세조를 보필했다. 구치관의 일 처리는 한마디로 빈틈이 없고 주도면밀했다. 승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1455년(세조 1년) 세조가 즉위하자 책훈(策勳)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됐다. 실은 세조 즉위 과정에서는 아무런 공로가 없었지만 정란 이후 즉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업무 능력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에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고 다른 공신들보다 훨씬 빠른 출세의 길을 걷게 된다.
세조 즉위 후 구치관은 승지로서 여러 업무를 맡으며 좌승지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은 도승지뿐이었다. 이때 북방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세조는 핵심 신하들과 대책을 토의했는데 그때마다 구치관은 반드시 포함되었다. 세조의 신임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이다. 세조 2년 7월 구치관은 승지에서 이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고 10월에는 병조참판으로 옮긴다. 두 자리 모두 각각 문관과 무관의 인사를 책임지는 자리이다. 이 무렵 구치관에 대한 세조의 신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은 세조 3년 6월 17일 자 기록이다.
文武兼全한 直臣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조회)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참판 구치관, 도승지 한명회에게 머물도록 명하여 정사(政事)를 토의했다.〉
구치관은 세조 3년에서 4년 사이에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한명회와 함께 명(明)나라에 다녀온다.
세조는 평안도를 북문(北門)의 자물쇠로 아주 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절도사(節度使)는 무신(武臣) 가운데에서 등용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그곳 백성들을 어루만져 잘 다스리는 데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문무(文武)를 겸비한 중신(重臣)으로 이 지역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을 임명키로 생각하고선 구치관을 보냈다. 세조 4년 윤(閏) 2월 19일이다. 이때 세조가 한 말은 구치관에 대한 그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이 부임한 뒤에는 나는 다시 서쪽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세조의 뜻대로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오자 보상은 컸다. 세조 5년 7월 3일 이조판서에 임명된 것이다. 이때 사대부들은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바른 사람이 전형(銓衡)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공도(公道)가 시행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인사권을 쥔 당시 이조판서 구치관의 모습을 서거정은 이렇게 전한다.
“비록 작은 벼슬 낮은 직책일지라도 일찍이 한 번도 혼자 천거하는 일이 없었고, 또 친한 친구라고 하여 개인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일도 없었다. 한편 간청(干請·청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미워하여, 간청의 대상자는 꼭 자리를 옮겨서 서용(敍用)하지 않았다. 일찍이 위에 건의하여 도태시킨 용관(冗官·쓸데없이 자리만 지키는 사람)만도 백수십 명이나 되었다. 또 고관이나 귀인(貴人)이 자제(子弟)를 위하여 좋은 벼슬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으면 이들 먼저 도태시켰다.”
세조 7년 1월 19일 함길도(함경도) 지방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세조는 구치관을 불러 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맡겨 현지로 파견한다.
함길도 도체찰사 구치관이 하직하니 인견(引見)하고 구치관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구치관에게 일러 말했다.
“경(卿)이 평안도(平安道)를 관할(管轄)하면서 그 수염이 점점 희어졌는데, 이제 함길도로 가게 되었으니 마음이 매우 편치 않다. 그러나 변방의 일이 지극히 중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곤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신숙주 및 모든 재추(宰樞·재상)를 불러서 구치관을 전송하도록 하였다. 또한 물품을 후하게 하사하였으며, 형조판서 박원형(朴元亨)과 환관(宦官) 안로(安)에게 명하여 보제원(普濟院)까지 전별하게 하였다.
구치관에게 한 세조의 하교다.
“경이 함길도 군무(軍務)를 맡아 살피도록 명하니, 경의 지휘에 따르지 않는 자는 군법(軍法)대로 일을 처리함이 가할 것이다.”
함길도 순찰사(咸吉道巡察使) 강효문(康孝文)과 함길도 도관찰사 정식(鄭軾), 도절제사 강순(康純)에게도 유시했다.
“이제 구치관을 도체찰사로 삼고, 경을 부관(副官)으로 삼으니 경은 마땅히 그를 본받도록 하라.” “이제 구치관에게 명하여 도내의 군무를 살피도록 하였으니, 경 등 이하 모든 장수는 구치관의 지휘를 듣도록 하라.”
세조의 비밀 어찰
이틀 후 구치관에게 보낸 비밀 어찰을 보면 세조가 구치관을 얼마나 극진히 아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경을 보내지 않았을 때는 근심스러운 마음을 놓지 못하겠더니, 이미 경을 보낸 뒤에는 즐거운 마음이 뭉게뭉게 생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경이 승부(勝負)에 대한 까닭을 알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하나 도리어 우려되는 바가 있으니, 나는 비록 이겼어도 교만하고 저들은 비록 졌더라도 근심하기 때문에 그 형세가 어려운 것이 첫 번째 까닭이고, 한 번 이기면 한 번 지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이므로 그 형세가 어려운 것이 두 번째 까닭이고, 경은 비록 까닭을 알지만 휘하(麾下)의 장사(將士)는 그 까닭을 모르니 어찌 능히 교만함을 다 없애겠는가? 그 형세가 어려운 것이 세 번째 까닭이다. 경이 다시 이 세 가지 까닭을 살핀다면 하늘같이 큰 공을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룩하게 될 것이다.
이에는 대개 세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족한 것을 알고 너무 공을 탐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고, 둘째는 적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며, 셋째는 때를 보아 움직여서 경솔히 거병(擧兵)하지 말고 너무 신중히 거병하지도 말며, 반드시 공벌(攻伐)하지 말고 반드시 공벌하지 않으려고도 말 것이며 깊기는 못[淵]과 같고 움직이기는 우레[雷]와 같이 하며, 간사함도 없고 우직함도 없이 권도(權道)로 지혜를 돕는 것이 그것이다. 경이 나의 고유(告諭)하는 바를 살핀다면 글자 한 자도 헛된 것이 없을 것이니, 경은 말하지 않더라도 믿을 것으로 안다.”
글의 후반부는 《주역》에 능했던 세조의 말솜씨를 살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야인(野人·여진족)들과 전투가 한창이던 세조 7년 6월 3일 세조는 구치관을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한다. 이제 정승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6월 21일 구치관이 돌아와 복명했다.
《주역》으로 읽는 구치관의 관리 생활
필자는 이미 《이한우의 주역》이라는 책에서 태괘(兌卦· ) 밑에서 네 번째 자리에 있는 양효에 대한 풀이를 통해 구치관을 읽어낸 바 있다.
먼저 구사(九四)에 대해 주공(周公)은 이렇게 말을 달았다.
“구사는 헤아리면서 기뻐해 편안치 못한 것이니 절조를 지켜[介] 미워하면 기쁨이 있다.”
이를 공자(孔子)는 다음과 같이 짧게 풀이했다.
“구사의 기쁨은 좋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태괘의 구사의 처지를 보자. 양강의 자질로 음유의 자리(4)에 있으니 바르지 못하고 육삼(六三)과는 음양이 달라 친하고 구오(九五)와는 같은 양효라 친하지 않다. 초구와도 같은 양효라 호응관계가 아니다. 여러 가지로 불안정하고 불안하다. 정이천(程伊川)의 풀이다.
“구사는 위로 중정의 다움을 지닌 구오를 받들고 아래로 유약하고 사악한 육삼과 가까이 있으니 양강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처한 자리가 바르지 않다. 육삼은 음유한 자질의 사람이니 양효가 기뻐하는 자이므로 단호하게 결단할 수가 없어 헤아리느라고[商=商量]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 이는 따라야 할 사람을 비교하고 계산하지만 결단하지 못해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두 개의 사이[兩間]를 개(介)라고 하니 나누어진 경계다. 사람이 절도를 지키는 것을 개(介)라고 한다. 단호하게 바른 도리를 지켜 사악한 자를 미워하면서 멀리하면 기쁜 일이 있다. 구오를 따르는 것은 바른 것이다. 육삼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다. 구사는 군주와 가까운 자리이니 강직하고 단호하게 바른 도리를 지켜 사악한 자를 미워하고 멀리하면 군주의 신임을 얻어서 도리를 시행해 복과 경사가 사람들에게 미칠 것이니 기쁜 일이 있는 것이다. 구사와 같은 자는 얻고 잃음[得失]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자신이 따르는 것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까지 구치관이 보여준 행적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위기
세조 8년 1월 구치관은 좌찬성(左贊成)에 제수된다. 정승의 자리에 한발 더 다가선 것이다.
세조 8년 9월 27일 세조는 강원도 철원 쪽에서 강무(講武·사냥)를 벌이기 위해 전라도·경상도·황해도에서 군사를 징집했는데 규모는 기병 7800여 명, 보병 2400여 명이었고 서울에서는 기병 2400여 명, 보병 3600여 명이었다. 이때 구치관은 지응사(支應使)가 되어 모든 병사를 지휘하는 일을 떠맡았다.
그런데 어가(御駕)가 철원 남산(南山) 밑 사장(射場)에 이르자 마침 비가 내려 주장(主將) 구치관이 급히 파진(罷陣)하였다. 저녁에는 영평현(永平縣) 굴동(堀洞)에서 머물렀는데, 병조(兵曹)에서 구치관이 마음대로 파진한 죄를 들어 추국(推鞫)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잠시 후에 승정원에서 아뢰었다.
“구치관의 죄는 가볍지 아니하니, 청컨대 의금부에 내려서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그러나 세조는 만류하며 “내가 마땅히 면대(面對)하여 타이르겠다”고 말한다. 다음 날 영의정 신숙주까지 나서 구치관을 국문할 것을 청하자 세조는 이렇게 말한다.
“‘대궐 밖의 일은 장군이 제어한다’고 하는 것은 임금과 장수가 각기 따로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데도 구치관이 아뢰지 아니하고 파진한 것은 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뜻은 군사를 불쌍히 여기는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군신 간에 틈[隙]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정승에 오르다
세조 9년(1463년) 8월 29일 권람(權擥)이 좌의정에서 물러나고 그 후임으로 한명회가 제수됐다. 한명회 후임 우의정에는 구치관이 제수됐다. 정난공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치관이 권람, 한명회 같은 1등 공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치밀한 일 처리와 더불어 기밀을 잘 지킨 데 따른 것이다.
다시 《주역》 계사전(繫辭傳)이다.
〈“집안의 뜰[戶庭]을 나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无咎].” 공자가 말하기를 “어지러움[亂]이 생겨나는 것은 언어(言語)가 사다리[階]가 된다. 임금이 주도면밀하지 못하면[不密] (좋은) 신하를 잃게 되고[失臣] 신하가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몸을 잃게 된다[失身]. (특히) 기밀을 요하는 일[機事]을 하면서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해로움이 이뤄지니 이 때문에 군자는 신중하면서도 주도면밀하여[愼密] 함부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不出]”라고 했다.〉
구치관은 주도면밀해 세조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고 세조는 주도면밀해 좋은 신하 구치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세조 10년(1464년) 1월 22일 세조는 우의정 구치관에게 이렇게 명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수찬(修撰)할 때 반드시 착오(錯誤)가 많았을 것이므로 이제 내종친(內宗親)과 승지 등으로 하여금 좌우(左右)로 나누어 틀린 것을 찾도록 하였으니 경이 이를 살펴보도록 하라.”
인사 문제와 관련해 구치관에 대한 세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러한 일화는 또 있다. 세조 10년 2월 4일 자 기록이다.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했다.
“윤씨(尹氏)의 족친(族親)으로서 아직 서용되지 못한 자를 이제 모두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이에 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을 불러서 말했다.
“내가 중궁(中宮)의 족친으로서 서용되지 못한 자를 다 쓰고자 하였더니, 중궁이 내게 이르기를 ‘관작(官爵)은 마땅히 뛰어난 사람을 선택하여 제수(除授)하여야 하는 것인데, 윤씨가(尹氏家) 자제(子弟)는 하나가 아닌데 어찌 현부(賢否)를 가리지 않고서 다 쓰겠습니까? 또 이씨(李氏)·심씨(沈氏)의 족친으로서 아직 서용되지 못한 자도 오히려 많은데, 홀로 윤씨의 족친만 쓰겠습니까? 마음에 실로 미안(未安)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매우 옳은 것이므로 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너는 구치관 등과 더불어 이씨·심씨·윤씨의 족친 중에 가히 쓸 만한 자를 널리 의논하여서 아뢰어라.〉
세조, “능성군은 나의 만리장성”
▲신숙주
세조 10년 2월 23일 구치관은 드디어 실권을 가진 좌의정에 오른다. 이때 그의 후임으로 우의정에 오른 이는 황희(黃喜)의 아들 황수신(黃守身)이다.
구치관은 2년 2개월 동안 좌의정에 있다가 세조 12년 4월 18일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고 10월 19일 영의정에서 물러나 원로 자리인 능성군(綾城君)으로 간다. 그러나 북방에서 변고가 벌어지면 세조는 늘 능성군 구치관을 찾았다. 졸기의 한 대목이다.
〈병술년(1466년·세조 12년)에 성만(盛滿)으로 사임하고, 도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중국 황제의 명에 의하여 건주위(建州衛) 야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여 패배시켰는데, 그 잔당이 변경을 엿보므로, 국가에서 근심하여 구치관을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 삼아서 보냈다. 세조가 좌우에게 말하기를 ‘능성은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하였다.〉
세조 13년 5월 전 회령절제사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고 신숙주·한명회를 끌어들였다. 5월 19일 세조는 이렇게 말한다.
“근자에 신숙주와 한명회 등이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뭇사람의 입에 구실감이 되었으니, 비록 반역(反逆)한 것은 아닐지라도, 반종(伴從·수행인)을 신칙(申飭)하지 못하고 임금을 배반하였다는 악명(惡名)을 받아서, 원근의 의혹을 일으킨 것은 진실로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다. 나도 또한 어리석고 나약하여 위엄이 없는데, 백성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방편(方便)을 생각하지 않음은 옳지 못하니, 우선 이들을 가두어 두는 것이 옳겠다.”
그런데 실록은 말미에서 “이날 구치관이 밀계(密啓)하여 신숙주와 한명회 등을 가두도록 청한 까닭에 임금의 이 같은 명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구치관에 대한 세조의 총애가 신숙주·한명회 두 사람을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세조는 실상을 살핀 다음에 신숙주·한명회 두 사람의 죄는 “무례하게 자기 마음대로 한 죄”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정치에 복귀하게 된다.
“거짓으로 행동하여 이름을 낚는다”는 비방 듣기도
예종 때 진서대장군을 맡아 잠시 평안도를 다스리는 일을 맡았던 구치관은 성종 1년(1470년) 9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젊어서는 불우(不遇), 즉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나 중년에 이르러 세조의 알아줌을 만나 이렇다 할 공로도 없이 오직 곧은 성품과 탁월한 일 처리 능력으로 영의정에까지 오른 것이다. 이로 인해 능성(綾城) 구씨는 조선이 끝날 때까지 명문가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그의 졸기(卒記)는 맨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편벽되어 사람들이 자못 비난하였으며 심지어는 거짓으로 행동하여 이름을 낚는다고 비방하는 자도 있었다.”
비방의 사실 여부를 떠나 흔히 곧은 자들이 쉽게 받게 되는 비난이기도 하다. 공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 예(禮)를 다했는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아첨한다고 하더라!”⊙
08월 호
8.한명회(韓明澮)전
布衣에서 단숨에 정승에 오른 책략가
⊙ “마음속에 항상 國務를 잊지 아니하고… 성격이 과대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色을 즐겨서”(실록)
⊙ 계유정난 주도하고 사육신의 단종 복위 시도 저지
⊙ 할아버지 한상질은 명나라로부터 ‘조선’ 국호를 받아 와
⊙ 유교 경전 간행 건의하고 私財를 보태서 사림의 찬사 받기도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
도학(道學)에 물든 후의 조선 성리학은 한명회(韓明澮·1415~1487년)를 매도했지만 사실 한명회는 조선 역사 최대 거물 중 한 사람이다. 위(魏)나라 유소(劉邵)의 《인물지(人物志)》 분류에 따르면 한명회는 청절가(淸節家)도 아니고 법가(法家)도 아닌, 전형적인 술가(術家)이다.
유소는 청절가의 아류(亞流)를 장부가(臧否家)라고 했는데 그저 남의 옳고 그름만 따지는 자들이다. 조선 시대 도학 혹은 주자학에 젖은 이들은 청절가에도 이르지 못한 삼류 장부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가 한명회의 삶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1415년(태종 15년) 세상에 나온 한명회의 할아버지는 1392년 7월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해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이듬해 2월에 돌아온 한상질(韓尙質·?~1400년)이다.
그의 동생 한상경(韓尙敬·1360~ 1423년)은 개국공신이다. 고려 말 밀직사 우부대언으로 있다가 이성계 추대 모의에 참여하고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에게 바쳐 개국공신 3등에 올랐다. 태종의 지우(知遇)를 받았던 한상경을 통해 당시 한씨 집안 가풍을 미루어 헤아려 볼 수 있다.
《논어》로 맺어진 태종과 한상경
《세종실록》 5년(1423년) 3월 7일 자 한상경 졸기(卒記)를 보자.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경기좌도 도관찰사 한상경에게 일러 말했다.
“내가 큰 왕업을 계승하였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을 알지 못해 마음속으로 실상 어렵게 여긴다.”
상경이 말했다.
“옛사람의 말에 임금이 임금 노릇 하기를 어렵게 여긴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그 어려움을 능히 아시니 실로 우리 동방의 복이옵니다. 그러나 이는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태종은 이 말을 옳게 여겨 받아들이고 의정부 참지사에 임명했다.〉
의정부 참지사에 임명했다는 말은 장차 그를 정승으로 삼기 위한 예비과정에 편입시켰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상경은 태종으로부터 큰 총애를 받아 훗날 정승에 오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사람 대화의 소재가 된 《논어》의 관련 대목이다.
〈(노나라) 정공(定公)이 물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말이 있는가?”
공자가 대답해 말했다.
“말(의 효험)이 이와 같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임금 노릇이 어렵고 신하 노릇도 쉽지 않다’는 것이 있으니 만일 임금 노릇의 어려움을 안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기를 바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공이) 말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고 하는데 그런 말이 있는가?”
공자가 대답해 말했다.
“말(의 효험)이 이와 같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나는 임금이 된 것에 즐거운 것이 없고 오직 내가 말을 하면 아무도 나를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 있으니 만약에 임금 말이 좋아서 아무도 그것을 어기지 않는다면 실로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임금 말이 좋지 않은데도 아무도 그것을 어기지 않는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게 되는 것을 바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상경이 재상감임을 알아본 태종
한상경은 이 대화를 녹여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행을 강조했고 《논어》에 정통했던 태종은 이를 통해 그가 재상감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호조판서 시절 한상경은 삼공신 연회에 참석해 태종에게 술잔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때 장면이다.
〈태종이 일러 말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처음에 경이 나에게 ‘임금은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아야 하며, 아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했는데 내가 지금도 잊지 않았다.”
한상경이 대답했다.
“임금께서 신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고 하니, 다시 한 말씀 아뢰기를 청합니다.”
태종이 “무슨 말인가”라고 하자 대답했다.
“시작은 없지 않으나 좋은 끝마침이 있기는 적습니다[靡不有初 鮮克有終].”
또 칭찬하였다.〉
이는 신시이경종(愼始而敬終)을 말한 것이다.
한명회의 집안 자체는 조선 혹은 조선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아버지 한기(韓起)는 이렇다 할 행적이 없고, 일찍 죽어 한명회는 어려서 고아가 됐다. 의지할 데가 없자 작은할아버지인 한상덕(韓尙德·?~1434년)을 찾아가 몸을 맡겼다. 한상덕은 태종 때는 대언, 세종 때는 호조참판에 올랐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다만 매우 진중한 성품이었음을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태종 11년 6월 14일 한 연회에서 태종은 한상덕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일찍이 대간(臺諫)이 되어 바른말[直言]을 숨기지 않고 하였으므로,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기어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터이다.”
한상덕은 어린 한명회의 남다른 언행을 주의 깊게 살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그릇이 예사롭지 않으니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浩然之氣를 품었던 청년 한명회
실록 졸기는 일반적으로 매우 건조하다. 그런데 성종 18년 11월 14일 한명회 졸기는 파격적으로 시작한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임신한 지 일곱 달 만에 한명회를 낳았는데, 배 위에 검은 점이 있어, 그 모양이 태성(台星)과 두성(斗星) 같았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가난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글을 읽어 자못 얻은 바가 있었으나, 여러 번 과거(科擧)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에 권람(權擥·1416~1465년)과 더불어 망형우(忘形友)를 맺고, 아름다운 산이나 수려(秀麗)한 물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함께 가서 구경하고, 간혹 한 해를 마치도록 돌아올 줄 몰랐다. 경태(景泰) 임신년(1452년·문종 2년)에 경덕궁직(敬德宮直)에 보직(補職)되어, 일찍이 영통사(靈通寺)에 놀러 갔었는데, 한 노승(老僧)이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그대의 두상(頭上)에 광염(光焰)이 있으니, 이는 귀징(貴徵)이다”라고 하였다.〉
망형우(忘形友)란 서로의 용모나 지위 등을 문제 삼지 않고 마음으로 사귀어 교제하는 벗이라는 뜻이다. 권람은 권근(權近)의 손자로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기책(奇策)이 많았다.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한명회와 서로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의 교우는 관포(管鮑·관중과 포숙아)와 같았다. 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에 향시와 회시(會試)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고, 전시(殿試)에서 4등이 되었다. 그러나 장원인 김의정(金義精)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장원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 교리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함께 《진설(陣設)》을 편찬하는 데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수양대군과 가까워졌으며, 한명회를 수양대군과 연결시켜준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나이가 장성하도록 여러 차례 낙방(落榜)했다. 그러나 이를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개의하지 않았다. 간혹 위로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
“궁달(窮達)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사군자(士君子)가 어찌 썩은 유자[腐儒]나 속된 선비[俗士]가 하듯이 낙방에 실망하고 비통해하겠는가?”
어린 나이에 벌써 공자가 말한, 50세에 이르러야 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결국 훗날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한명회는 권력을 장악한다.
한명회·권람·수양대군
한명회의 졸기는 계유정난 과정을 이렇게 압축해 전달한다.
〈이때 문종(文宗)이 승하하고 노산(魯山·단종)이 나이가 어리어 정권(政權)이 대신(大臣)에게 있었는데, 한명회가 권람에게 일러 말했다.
“지금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운데, 간사한 무리가 권세를 함부로 부리고, 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마음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대신(大臣)들과 친밀하게 교결(交結)하며, 여러 소인을 불러 모으니, 화기(禍機)가 매우 급박(急迫)하오. 듣자니 수양대군이 활달(豁達)하기가 한고조(漢高祖)와 같고 영무(英武)하기가 당태종(唐太宗)과 같다 하니, 진실로 난세를 평정할 재목이오. 그대가 문필[筆碩]에 종사하는 즈음에 모신 지가 오래인데, 어찌 은밀한 말로 그 뜻을 떠보지 아니하였소.”
권람이 한명회가 한 이 말을 아뢰니 세조(世祖)가 한명회를 불러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한 번 만나보고 의기가 상통하여 마치 옛날부터 사귄 친구와 같았다. 마침내 무사(武士)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인을 천거하고, 계유년(1453년) 겨울 10월 초 10일에 세조가 거의(擧義)하여,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誅殺)하고, 한명회를 추천하여 군기녹사(軍器錄事)로 삼고,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號)를 내려주고, 곧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올렸다.〉
한명회, 단종 복위를 좌절시키다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사육신공원. 서울 노량진에 있다. 사진=동작구
일일구천(一日九遷), 하루에 아홉 번 승진한다는 말로, 다름 아닌 한명회를 두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된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이듬해 동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올랐다.
그해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오르며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실록이 전하는 그날의 현장이다.
〈병자년(1456년) 여름에 성삼문 등이 노산을 복립(復立)할 것을 꾀하고, 은밀히 장사(將士)들과 교결하여, 창덕궁(昌德宮)에서 중국 사신들[華使]을 연회(宴會)하는 날에 거사(擧事)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날에 이르러 한명회가 아뢰기를 “창덕궁은 좁고 무더우니, 세자(世子)가 입시(入侍)하는 것은 불편(不便)하고, 운검(雲劍·의장용 큰 칼)의 제장(諸將)도 시위(侍衛)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장차 연회가 시작되려 하자, 성삼문의 아비 성승(成勝·?~1456년)이 운검으로서 장차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가 꾸짖어 저지하기를 “이미 제장들로 하여금 입시하지 말게 하였소”라고 하니, 성승이 마침내 나갔다.
성삼문 등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말하기를 “세자가 오지 아니하고, 제장이 입시하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무리 가운데에 한명회를 해치려는 자가 있자, 성삼문이 말하기를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비록 한명회를 제거한다 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튿날 일이 발각되어,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세조, “한명회는 다른 공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를 풀어보자.
아주 흥미롭게도 좌익공신 3등에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이 포함돼 있었다. 외견상 책봉 이유는 수양이 왕위에 오를 때 승지로서 옥새를 올린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들을 포용하려는 수양의 전략적 구상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사실 충절(忠節)이라는 면에서 성삼문의 기개는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실록에 따를 경우 단종 복위에 결정적인 실기(失機)를 가져온 장본인이 바로 성삼문이고 반대로 그것을 정확히 포착한 인물이 바로 한명회다.
권력 찬탈 이후에도 한명회는 여전히 우승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중궁과 함께 수시로 한명회에게 술을 하사하며 “한명회는 다른 공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며 각별한 총애를 표시하곤 했다. 이런 한명회가 또 한 번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집권 2년째인 1456년(세조 2년) 6월 1일 유응부(兪應孚·?~1456년)와 성승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세력이 마침내 행동에 들어갔다. 창덕궁에서 열리는 명나라 사신 환영연을 거사의 무대로 삼기로 한 것이다.
별운검(別雲劍), 운검이란 국왕의 좌우에 무장을 하고 시립하는 2품 이상의 무관을 말한다. 이날 행사에는 성삼문의 아버지이자 조선 초 대표적인 무장 성달생의 아들인 성승과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무과 출신 중추원 동지사 유응부가 별운검을 맡도록 돼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세조와 세자를 제거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해서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을 처단키로 했다.
반왕(反王) 세력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한명회는 모반의 기미를 알아차렸다. 원래 정보전의 1인자 한명회 아니던가? 일단 한명회는 세조를 은밀하게 찾아가 “행사장인 창덕궁 광연전은 좁고 날씨가 무더우니 세자 저하는 오시지 말게 하시고 운검도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세조도 순순히 따랐다. 그러고 칼을 찬 성승이 연회장에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는 어명이라며 “운검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갈림길이었다. 여기서 무장인 성승과 유응부는 칼을 뽑았으니 거사를 계속 진행하자고 말했다. 성승은 한명회부터 죽이자고 했다. 그러나 정작 아들 성삼문이 “세자가 오지 않았으니 한명회를 죽인들 무슨 소용이 있냐”며 거사를 늦출 것을 제안했다. 유응부는 “이런 일은 번개같이 해치우는 것이 상책”이라며 강행 의사를 밝혔으나 결국 성삼문과 박팽년(朴彭年·1417~1456년)의 연기론이 먹혀들었다.
세조의 총애, 한명회의 출세
▲수양대군의 왕위 등극에 공헌한 문신인 한명회의 일대기를 새긴 지석. 사진=천안시
역사의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거사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1422~1478년)이 장인 정창손(鄭昌孫·1402~1487년)에게 의논했고 정창손이 그 길로 김질을 세조에게 데려갔다. 이로써 단종 복위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고 사육신과 생육신(生六臣)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1년 후인 1457년 6월 21일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금성대군은 마침내 9월 거사를 결심했다. 그러나 관노의 밀고로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더불어 혜빈 양씨도 한남군, 영풍군과 함께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그러고 10월 21일 더 이상의 후원 세력을 잃은 단종도 목을 매 자살한다. 아니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한명회는 1457년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등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 1463년 좌의정에 올랐다. 계유년이 1453년이니 일개 포의(布衣)였던 한명회는 정확히 10년 만에 최고 정승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1466년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신문을 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됐다.
“풍류 즐겨 압구정 그 이름이 자자하네”
한명회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했다가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나고 성종이 즉위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자 성종의 장인이기도 했다.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했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 확충을 위해 경사(經史) 관계의 서적을 많이 인출해 비치하게 하였다. 1484년 70세로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세조 즉위 이래 성종조까지 고관 요직을 두루 역임, 군국(軍國) 대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세조는 그를 총애해 “나의 장량(張良)”이라고까지 하였다. 4차례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권세와 부를 누렸다.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압구(狎鷗)’라 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압구정에 올라 지은 시다.
승상이라 공명은 청사에 빛나는데 / 丞相勳名國史靑
풍류 즐겨 압구정 그 이름이 자자하네 / 風流尙說狎鷗亭
삼한의 주옥 비단 자리에 전부 쌓였고 / 三韓玉帛全堆席
팔부의 가수 악기 뜰에 모두 있었다오 / 八部歌鍾盡在庭
가련할사 뜬세상은 흐르는 물 똑같은데 / 浮世可憐同逝水
고깃배는 어인 일로 빈 물가에 떠 있나 / 漁舟何意汎空汀
지는 꽃 향기로운 나무 찾을 만한 곳은 없고 / 落花芳樹無尋處
석양빛만 낡은 난간 쓸쓸하게 비추누나 / 唯有殘暉照古欞
한명회를 이야기하면서 압구정 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성종 12년(1481년) 6월 24일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성종을 찾아와 “중국 사신이 신의 압구정을 구경하려 하는데 이 정자는 매우 좁으니 말리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종도 우승지 노공필을 시켜 중국 사신에게 “압구정은 좁아서 놀기에 적합지 않다”고 전했으나 중국 사신은 굳이 “좁더라도 가보겠습니다”고 말했다. 사실 한명회가 느닷없이 “매우 좁다”며 말려달라고 한 것은 나름의 수 계산이 있었다. 그 수는 바로 다음 날 드러난다.
한명회를 넘어서지 못한 성종
▲1994년 KBS 대하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이덕화가 한명회 역을 맡아 열연했다
6월 25일 한명회가 다시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내일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고자 하니 신의 정자는 본래 좁으므로 지금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해당 부서를 시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
바로 전날 한명회의 이야기는 결국 중국 사신을 모시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압구정이 좁다는 이야기였다. 성종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함인가? 그렇게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濟川亭·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던 정자)에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자 한명회는 한술 더 떠 성종의 지시는 무시한 채 압구정의 처마를 잇대어 정자를 넓히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다. 중국 사신의 위세에 기대어 성종에게 간접적으로 협박을 하는 것이다. 성종은 “내일 제천정에 사신들을 위한 오찬을 차리고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말도록 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한명회의 대답이 걸작이다.
“신은 정자가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가 본래 오래된 질병이 있는데 이제 더 심해졌으므로, 내일 그 병세를 보아서 심하면 제천정일지라도 신은 가지 못할 듯합니다.”
한명회가 물러간 즉시 승정원 승지들이 들고일어났다. 아내가 아프면 중국 사신이 구경하려고 해도 사양했어야 할 텐데 이제 와서 성종이 압구정 연회를 허락하지 않으니 아내의 병을 핑계 대며 ‘제천정일지라도 가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임금에게 대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성종은 한명회를 법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한명회는 이미 성종의 이 같은 유약함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한명회의 사리(事理)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사건이다.
한명회는 성리학의 교조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의 혼자 힘으로 왕조 시대 신하가 누릴 수 있는 정점(頂點)에 이른 독특한 존재다. 정승이 되는 길은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소박하고 솔직하여 다른 뜻이 없어 그 勳名 보전”
한명회는 전형적인 술가이다. 따라서 성종 시대가 안정되자 술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할 기회가 적었다. 어찌 보면 권간(權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명회는 선을 넘지 않았다. 졸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담겨 있다.
〈하루는 소대(召對·왕명으로 입시하여 정사에 관한 의견을 올리는 일)에서 흥학(興學·학교를 융성시키는 일)의 중요함을 진술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성균관(成均館)에 서적이 없으니, 마땅히 경사(經史)를 많이 인쇄하고, 각(閣)을 세워 간직하게 하소서”라고 하여, 임금이 그대로 따랐는데, 한명회가 사재(私財)를 내어 그 비용을 돕게 하였으므로, 사림(士林)에서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한명회는 70세가 되던 갑진년(1484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유종지미(有終之美)를 아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뒤에 가서는 나태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바라건대 그 끝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소서.”
평범해 보이면서도 깊은 통찰을 담은 이 멋진 말은 1487년(성종 18년) 11월 14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풍운아 한명회가 자신이 임금으로 만들어 올렸고 한때 사위이기도 했던 성종에게 남긴 유언이다. 한상경이 즉위 초 태종에게 했던 말과 통한다.
졸기에 달린 사평(史評)은 지금 보아도 빼거나 더할 곳이 없다.
〈한명회는 젊어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았으나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충순위(忠順衛)에 속하여서, 뜻을 얻지 못하고 불우(不遇)하게 지내다가, 권람과 더불어 문경교(刎頸交)를 맺고, 권람을 통하여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알아줌을 만나[知遇], 대책(大策)을 찬성(贊成)하여, 그 공(功)이 제일(第一)을 차지하였으며, 10년 사이에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마음속에 항상 국무(國務)를 잊지 아니하고,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건설(建設)한 것 또한 많았다. 그러므로 권세(權勢)가 매우 성하여 추부(趨附)하는 자가 많았고, 빈객(賓客)이 문(門)에 가득함에도 응접(應接)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일시(一時)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관(朝官)으로서 말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 성격이 번잡(煩雜)한 것을 좋아하고 과대(夸大)하기를 기뻐하며, 재물(財物)을 탐하고 색(色)을 즐겨서, 전민(田民)과 보화(寶貨)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어, 그 호부(豪富)함을 일시에 떨쳤다. 여러 번 사신(使臣)으로 명나라 서울에 갔었는데, 늙은 환자(宦者) 정동(鄭同)에게 아부하여, 많이 가지고 간 뇌물을 사사로이 황제에게 바쳤으나, 부사(副使)가 감히 말리지 못하였다. 만년(晩年)에 권세가 이미 떠나자, 빈객이 이르지 않으니, 초연(愀然)히 적막한 탄식을 뱉곤 하였다. 비록 여러 번 간관(諫官)이 논박(論駁)하는 바가 있었으나, 소박하고 솔직하여 다른 뜻이 없었기 때문에 그 훈명(勳名)을 보전(保全)할 수 있었다.〉
두 딸을 왕비로 만들어
아들은 한보(韓堡·1447~1522년)이고, 딸은 장순왕후(章順王后·예종비)와 공혜왕후(恭惠王后·성종비)이다.
한보는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다. 13세 때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아갔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1466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1469년(예종 1년) 낭성군(琅城君)에 봉해졌다.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 1475년 공조참의 겸 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가 양모(養母) 조씨(曺氏)에게 불효하였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476년 복직되었고, 1492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5년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공신 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처신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몸을 삼갈 것을 주문하였다.⊙
09월 호
9. 정인지(鄭麟趾)전
관리보다 학자로 능력 발휘한 조선 제1호 장원급제 출신 정승
⊙ 세종이 길러낸 김종서와 정인지… 김종서는 강직함과 행정 능력, 정인지는 학문적 능력 발휘
⊙ 문종·단종 때 득세했던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쿠데타 때 피살… 정인지는 정난 후 정승 자리에 올라
⊙ “자질이 호걸스럽고 특출 나며 마음이 활달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실록)
⊙ 임금에게 아부할 줄 몰라 直諫했으나, 나이 든 후에는 재산 늘리기에 몰두

▲정인지
정인지(鄭麟趾·1396~1478년)는 경상도 하동 사람으로 석성현감 정흥인(鄭興仁)의 아들이다. 조선이 세워진 후인 1396년 태어났다. 그러고 태종 14년(1414년) 18세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해 3월 11일 춘추관 영사 하륜, 지사 정탁, 예조판서 설미수 등이 의논하여 급제자들 답안지 중 가장 뛰어난 3인을 태종에게 올렸다. 태종이 다시 한 번 “3개의 시권(試券·답안지) 중에는 잘되고 못된 것을 가릴 수 없는가?”라고 묻자 신하들은 “두 개는 비슷하고 하나는 조금 처집니다”고 답했다. 태종은 “그렇다면 내가 집는 것이 장원이다”며 두 개의 시권을 내밀게 한 다음 하나를 골라 집었다. 정인지의 시권이었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 8월 27일 상왕 태종은 직접 세종에게 “대임을 맡길 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며 정인지를 병조좌랑에 임명한다. 반면 세종 1년(1419년) 1월 19일 병조좌랑 정인지는 명(明)나라로부터 세종의 즉위를 승인하는 외교문서 고명(誥命)을 맞는 의식을 행할 때 황색 의장(儀仗)을 빼놓았다가 예조좌랑 김영, 병조정랑 김장 등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된다. 주 책임자로 밝혀진 정인지는 열흘 후 장(杖) 40대를 맞고 병조좌랑에 복귀한다.
세종 3년 3월 28일에 정5품 병조정랑 정인지는 또다시 투옥된다. 상왕 태종의 지시였다. 병사들의 비상조치에 대비한 출동 훈련을 지시했는데 정인지가 이를 태만히 했다가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후에도 정인지는 사소한 잘못으로 자주 견책을 당하곤 했다. 이는 정인지에게 관리로서의 재주, 즉 이재(吏才)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학문적 재능, 즉 학재(學才)가 뛰어난 정인지는 집현전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세종은 종종 극비를 요하는 심부름을 자신의 비서실장인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대신 신뢰하는 집현전 관원에게 시키기를 좋아했는데 실록을 보면 세종 7년부터 정인지가 주로 그 임무를 맡았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 태종의 신하가 아니고 사실상 세종 자신이 키워낸 신하로 정인지는 김종서와 더불어 제1세대의 대표주자였다. 세종 9년 3월 20일 정인지는 이미 관직에 나온 신하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시(重試)에서 문과 장원급제자의 문재(文才)를 다시 한 번 보여줌으로써 정4품 직전(直殿)을 뛰어넘어 종3품 직제학에 오른다. 그러고 9월 7일 정인지는 세자(훗날의 문종)의 교육을 맡는 좌필선으로 임명된다. 세종 10년 12월 20일에는 집현전 전담 관리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정3품 부제학에 오른다. 당상관이 된 것이다. 그의 승진 배경에는 이처럼 고비고비에서 학재가 큰 역할을 했다.
세종이 기른 두 신하

▲정인지가 잡은 아버지 정흥인 묘(원 안) 앞 와영담(蛙泳潭). 사진=김두규
김종서(金宗瑞)는 1383년(고려 우왕 9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정인지는 1396년 경상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나이로는 13세 차이다. 김종서는 얼마 후 한양으로 올라와 서대문 밖에서 살았고 태종 5년 문과에 급제했다. 23세 때였다. 정인지는 권근의 동생인 권우에게서 배우고 태종 14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18세 때였다. 김종서의 기록은 뒷날 참화를 당하는 바람에 별로 없다.
두 사람 다 집안 배경은 그저 그런 편이었다. 문과 급제 후에도 하위직을 맴돌던 김종서는 10년 후인 태종 15년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으로 임명을 받았다. 상서원이란 국왕의 옥새와 인장 등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도승지 지휘하에 종5품 판관 1명, 종7품 직장 1명, 정8품 부직장 2명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김종서가 처음으로 정7품직에 오른 것이다.
반면 장원급제한 인지는 곧바로 예빈시(禮賓寺) 주부로 발령을 받았다. 예빈시란 조정을 방문하는 빈객의 접대를 전담하는 기관이며 주부는 종6품이었다. ‘장원’의 파워는 그만큼 컸다. 김종서가 상서원 직장에 임명되던 무렵 정인지는 승문원 부교리였다. 정6품이었으니 김종서보다 한 등급 높았다. 그러나 지신사 유사눌이 요동에 보낼 자문(咨文·외교문서)을 검토하던 중에 승문원 지사 윤회와 부교리 정인지가 날인을 잘못한 것을 찾아내 두 사람 모두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김종서는 종6품인 죽산현감을 거쳐 세종 즉위년인 1418년 병조좌랑에 오른다. 정6품이다. 김종서와 정인지는 같은 해에 같은 직위를 역임한 것이다. 순서는 간발의 차로 김종서가 먼저였다. 보통 인연이 아니다. 바로 이때의 일과 관련해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는 김종서에 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최홍효 제학이 이조낭청으로 입시하여 사람들의 고신(告身)을 쓰는데 붓을 꼼지락대며 오래도록 이루어내지 못하자 김종서가 병조낭청(좌랑)으로 옆에 있다가 한 붓으로 수십 장을 휘둘러 써내고 쓰기를 마친 다음 옥새를 찍는데 글씨와 옥새 자국이 모두 단정하였다. 태종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쓸 만한 인재구나’라고 하니 김종서는 이로 말미암아 피어나기 시작했다.〉
강직함으로 인정받은 김종서

▲세종
세종 즉위년 11월 29일 사헌부 감찰(정6품)로 옮긴 김종서에게 세종은 특명을 내린다. 강원도 관찰사 이종선은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으니 세금을 감면해달라 했고 경차관(敬差官·임시파견요원) 김습은 풍년이라고 보고했다. 세종은 엇갈리는 두 사람의 보고를 확인하기 위해 강직한 인물을 찾던 중 김종서에게 일종의 암행어사 임무를 맡긴 것이다. 김종서의 보고는 흉년에 기민(飢民)까지 발생했으니 조세를 감면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에 세종은 변계량의 반대를 물리치고 감면 조치를 취했다. 동시에 김습을 국문(鞫問)해 거짓 보고의 진상을 밝혀내도록 사헌부에 엄명을 내린다.
김종서의 직무 수행에 크게 만족한 세종은 세종 1년 3월 전국적으로 기근이 발생해 백성들이 유리걸식을 하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각도에 행대(行臺·임시)감찰을 파견할 때 다시 김종서를 충청도 행대감찰로 명했다. 굶주린 백성이 12만249명이고 이들을 구휼하기 위해 지급된 쌀은 1만1311석, 장(醬)은 949석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직접 현장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올릴 수 없는 보고였다. 늘 지방 수령들의 전횡을 우려했던 세종은 세종 2년 윤1월 김종서를 정5품직인 광주(廣州)판관으로 승진시켜 지방 행정 일을 맡긴다. 여기서 김종서는 세종 5년 5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근무한다.
반면 정인지의 시련은 계속된다. 앞서 본 대로 세종 3년 3월 28일 정5품 병조정랑을 맡고 있다가 병사들의 비상조치에 대비한 출동 훈련을 태만히 했다가 태종의 명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미 김종서는 강직한 면으로 세종의 인정을 받아가고 있는 반면 정인지는 행정이나 일처리에서 허점을 보이고 본인도 최선을 다하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방 100리를 맡길 만하면 군자”

▲세종시 장군면에 있는 김종서의 묘.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김종서가 외직인 광주판관을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오기 두 달 전인 세종 5년 3월 23일 정인지는 집현전 학사를 거쳐 응교(종4품)에 올라 있다. 행정에는 미숙했으나 학술에는 일찍부터 재능을 보인 정인지였다. 세종은 정인지의 행정 능력은 버리고 학술 재능을 취한 것이었다.
김종서는 같은 해 5월 27일 내직으로 복귀해 모두 정5품으로 핵심 요직인 사간원 우헌납,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을 거친 다음 세종 9년(1427년) 1월 18일 오늘날의 국무조정실장이나 국무총리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승진한다. 정4품직이다. 그해 2월 황해도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세종은 김종서를 경차관으로 임명해 실정을 파악해서 보고토록 명했다.
이처럼 자신의 뜻을 받들어 현장의 일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세종은 늘 김종서를 찾았다. 강직했고 발로 현장을 뛰어 확인하는 인물됨 때문이었다. 《논어》 태백(泰伯)편에 나오는 말이다.
“사방 100리를 맡길 만하면 군자로다.”
바로 김종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무렵 정인지도 다른 방면에서 세종의 총애를 얻어가고 있었다. 집현전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세종은 종종 극비를 요하는 심부름을 자신의 비서실장인 지신사 대신 신뢰하는 집현전 관원에게 시키기를 좋아했는데 실록을 보면 세종 7년부터 정인지가 주로 그 임무를 맡았다. 세종의 본격적인 신임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 7년이면 세종이 양녕대군이나 불교 문제를 끌어들인 신하들의 무차별 공세를 극복하고 본격적인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해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 태종의 신하가 아니고 사실상 세종 자신이 키워낸 신하로 정인지는 김종서와 함께 제1세대 대표주자였던 셈이다. 김종서가 사인으로 발탁되던 세종 9년 3월 20일 정인지는 이미 관직에 나온 신하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시(重試)에서 문과 장원급제자의 문재(文才)를 다시 한 번 보여줌으로써 정4품 직전(直殿)을 뛰어넘어 종3품 직제학에 오른다. 그러고 9월 7일 정인지는 세자(훗날의 문종)의 교육을 맡는 좌필선으로 임명된다. 정인지가 김종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김종서도 황해도 사건 처리의 공으로 3개월여 후인 7월 4일 종3품인 사헌부 집의로 진급한다.
“정인지는 政事에 경험 없어”(세종)
세종 10년 사헌부 집의 시절 계속 불법을 자행하던 양녕대군에 대한 김종서의 탄핵은 집요했다. 15차례나 상소를 올려 양녕대군의 대군 작위를 회수하고 도성 출입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시적으로 세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 전농시(典農寺)윤으로 좌천당하기까지 했다. 전농시란 국가의 제사용품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그러나 세종은 세종 11년 9월 30일 정3품인 우부대언(右副代言·훗날의 우부승지)으로 김종서를 불러들인다. 여기서 김종서는 훗날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되는 좌부대언 황보인(皇甫仁)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김종서를 정3품 당상관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에 해당하는 자리를 맡긴 것이다. 다음 해 7월 좌부대언으로, 12월에는 우대언으로 승진한다. 이때 황보인도 승정원 최고위직인 지신사에 오른다. 이때 김종서의 나이 47세, 정인지의 나이 34세였다.
한편 정인지는 김종서보다 10개월쯤 빠른 세종 10년 12월 20일 집현전 전담 관리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정3품 부제학에 오른다. 당상관이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김종서는 대언으로, 정인지는 부제학으로 지근(至近)거리에서 세종을 보좌하고 있다.
그러나 정인지는 관리로서 재능에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세종 17년 6월 29일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지방행정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해 12월 17일 영의정 황희(黃喜)는 “충청도 감사와 수령들이 농정에 실패하고 현장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과거에 비옥했던 땅들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세종은 “정인지는 내직에 있을 때에도 문학만을 전담했고 정사에 경험이 없어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정인지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다고 하니 죄를 묻지 마라”고 답한다. 다음 해 7월 21일에도 정인지가 나름대로 흉년 구제책을 올렸는데 황희는 현실성이 없음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정인지의 구제책을 기각(棄却)시켜버렸다. 사실 이렇게 되면 정승은 말할 것도 없고 판서에 오르는데도 큰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에서 예문관 제학과 집현전 제학을 거쳐 마침내 1440년(세종 22년) 5월 형조판서에 오른다.
김종서의 북방 개척
김종서가 승정원에서 차근차근 진급을 하고 있던 세종 12년(1430년) 11월 15일 정인지는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總制)로 임명을 받았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군사령관 정도의 직위다. 그러나 전형적인 문사(文士)였던 그는 군사 분야의 일보다 주로 세종을 도와 음악, 도량형, 천문, 역법 심지어 아악(雅樂) 등을 정리하는 작업에 힘을 쏟았다. 세종 14년 3월 18일에는 예문관 제학 겸 춘추관 동지사를 지낸다. 역사 편찬과 관련된 첫 번째 직위를 맡은 것이다.
세종 15년 12월 김종서는 함길도(함경도) 관찰사로 제수받았다. 김종서는 22개월 전인 세종 14년 2월 25일 세종이 좌대언인 자신을 불러 활과 화살을 하사하면서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보거든 쏴라”고 했던 말뜻을 마침내 깨달았다. 또 그해 6월에는 “경은 최윤덕(崔潤德)을 아는가?”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세종의 북방 개척 구상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세종 14년 들어 문신 김종서와 무신 최윤덕을 투톱으로 해서 자신의 구상을 실현키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윤덕은 세종 15년 1월 이미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을 받았다.
예문과 제학 겸 춘추관 동지사 시절 정인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연로한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며 지방수령직을 내려줄 것을 요청, 세종 17년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갔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관리로서의 실적은 좋지 못했다.
그동안 김종서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보람 있는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6년 이상을 지금의 함경북도(6진) 개척에 쏟아부었다. 그러고 1440년 12월 3일 정인지에 이어 형조판서에 오른다. 병조좌랑에 이어 두 번째로 같은 해에 같은 직위를 맡는 우연이 겹친 것이다.
김종서는 1441년(세종 23년) 11월 14일 예조판서로 자리를 옮겨 장장 5년 동안 재직하면서 국가의 중대 길흉사를 무리 없이 처리해 세종의 더없는 총애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북방 문제에 관한 조언도 수시로 했다. 그러다 세종 28년(1446년) 1월 24일 김종서는 의정부 우찬성(종1품) 겸 예조판서로 승진한다. 예조판서 때 북방의 일을 겸하도록 한 것처럼 우찬성이 되어서도 예조의 일을 맡길 만큼 김종서의 예조판서 5년에 대한 세종의 평가는 후했던 것이다.
김종서가 우찬성이 되었을 때 정인지는 같은 의정부의 우찬참(종2품)이었다. 마침내 김종서가 정인지를 제치고 반발 앞섰다. 그런데 또 우연이 겹친다. 김종서가 물러난 예조판서 자리가 정갑손에게 갔다가 3개월 만에 사직하는 바람에 4월 25일 정인지가 예조판서가 된 것이다. 김종서와 정인지, 두 사람의 지독한 인연이다.
세종이 기대한 모습, ‘역사가’ 정인지
세종이 정인지에게 역사가의 길을 걷게 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다. 이 점에서 김종서와는 구별된다. 세종 5년(1423년) 3월 23일 세종은 집현전 응교인 정인지 등을 불러 사마광의 《자치통감》 중에서 범조우(范祖禹)가 쓴 ‘당감(唐鑑)’ 부분을 필사(筆寫)하도록 지시한다. 필사는 당시 최고의 학습법이기도 했다.
세종은 같은 해 6월 24일 《고려사》가 중국의 《통감강목》에 비해 너무 소략하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사관(史官)의 부족을 꼽았다. 그러면서 집현전 관원들로 하여금 사관의 업무도 병행하도록 지시한다.
집현전 관원이 항상 궐내에 있었으니, 사관의 업무 또한 맡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면서 세종은 (집현전 관원 중에서) 신장·김상직·어변갑·정인지·유상지를 지정하여 모두 춘추를 겸직시켰다.
정인지에게 춘추 업무를 보게 한 것이 역사 서술의 실무를 익히도록 한 것이었다면 세종 7년 11월 29일 기사는 정인지가 역사 이론가로서의 자질을 갖추도록 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대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사학(史學)을 읽을 만한 자를 뽑아 올리라고 하였다. 변계량이 집현전의 정인지와 설순, 인동현감 김빈을 천거했다. 임금이 즉시 김빈에게 집현전 수찬을 제수하여, 3인으로 하여금 모든 사서를 나누어 읽게 하고, 임금의 고문에 대비하게 하였다.”
세종 12년경 세종은 경연에서 《자치통감 속편》을 강독하고 있었는데 가장 빈번하게 세종의 물음에 답하는 신하는 정인지였다. 이것은 적어도 역사 분야에 관한 한 세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중 한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세종 12년 윤 12월 23일 자 기사다.
《용비어천가》에 관여
〈경연에 나아가서 《자치통감 속편》을 강하다가 요나라 임금인 분와사열(奔訛沙烈)의 대목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적(夷狄)은 마음이 본시 순후(純厚)하므로, 그들이 대우하는 것도 이렇게 후하다. 지금 왜인(倭人)이 매우 강악(强惡)하지만, 윗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절조(節操)를 위하여 죽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다” 하니, 정인지가 대답하기를 “그들의 마음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사람은 행동거지도 똑똑하고 말도 재치 있다. 그러나 그 마음 씀씀이가 좋지 못하고 풍속이 박하여, 한 사람도 임금을 사랑하는 자가 없다. 내관(內官) 같은 것들은 책망할 가치조차 없다. 김만(金滿)이 요동에 가서 태종 황제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도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일어나서 춤을 추고 조금도 애통해하는 심정이 없어 보였고, 그는 ‘황제의 명령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니, 그가 이렇게 못되었다. 어쩌면 중국 사람이 이 모양일까. 아마도 북경에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니, 정인지가 아뢰기를, “우리나라만 가지고 보더라도 시골 백성은 순박하고 도시 사람은 똑똑합니다” 하였다.〉
세종 14년(1432년) 3월 정인지는 예문관 제학 겸 춘추관 동지사에 오른다. 이에 앞서 정인지는 대제학 정초(鄭招)를 도와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한 바 있다. 그리고 12월 10일 세종은 대제학 정초와 제학 정인지 등을 불러 자신이 명했던 태조와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악장(樂章)을 보고받는다. 내용은 ‘아름다울사 빛나는 태조시여, 천명에 응하시고 인심에 순하시와 문득 대동(大東)을 두셨도다.… 아름다울사 밝으신 태종이시여, 차례를 이어 공(功)을 더하셨도다. 덕은 공경으로 밝히셨고, 다스림은 어짊으로 높이셨도다’는 식이다. 여기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싹을 보게 된다. 이 악장과 훗날의 《용비어천가》 모두에 정인지는 깊이 관여했다.
계유정난으로 엇갈린 운명

▲충북 괴산에 있는 정인지 부부의 묘. 앞의 무덤이 정인지, 뒤의 무덤은 그 부인 묘. 사진=김두규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훙(薨)했다. 5일 후 문종이 즉위했다. 다음 해인 문종 1년 10월 정인지의 라이벌 김종서는 우의정에 제수된다. 같은 날 김종서의 콤비인 황보인은 영의정에 오른다. 반면 정인지는 좌찬성으로 김종서의 바로 아래 직급이었다. 그러나 문종은 김종서-정인지를 투톱으로 생각했고 심지어 수양대군도 품어 안았다. 문종 1년 6월 19일 기록이다.
문종은 자신이 직접 지은 진법서(陳法書)를 내놓으며 수양대군과 정인지, 김종서 등에게 교정을 명한다. 진법서 교정을 이 세 사람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에 대한 총애가 깊었다는 뜻이다.
문종이 즉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4일 훙하고 4일 후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김종서와 정인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단종 즉위년(1452년)에 정인지는 병조판서에 오르지만 당대 실력자인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의 배척을 받아 한직(閑職)인 중추부 판사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고 1년 후인 1453년 10월 8일 수양대군이 정난(靖難)을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아마도 이 정난이 없었다면 정인지는 이후 한직을 맴돌다가 관직을 마쳤을 것이 분명했다. 정난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김종서는 죽어 대역죄인이 됐고 정난공신에 오른 정인지는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지면서 좌의정이 됐다. 사실 정인지는 정난에 관여하지 않았고 신망이 있는 중신(重臣)으로 정난에 반대하지 않은 공로였다고 할 것이다. 2등 공신에 책록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실권은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정난공신들이 쥐고 있었다.
3년 후인 1456년 9월 세조는 흔히 사육신 사건으로 알려진 상왕(단종)복위 기도 사건이 실패로 끝난 후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명(命)을 내린다. 사건 관련 주모자들의 부인이나 딸들을 정난공신들에게 나눠주도록 한 것이다. 그중에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 딸 내은금, 첩의 딸 한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귀속되었다.
세조에게 “너”라고 하기도
정인지는 1458년(세조 4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佛書) 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논죄(論罪)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 곧 고신을 돌려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됐다. 이런 점에서 정인지는 유학자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459년에는 취중에 직간(直諫)한 일이 국왕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종편(從便)됐다. 그러나 그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돌려받고, 그 이듬해 하동부원군에 복직됐다. 조금은 위태로운 처신이었다.
정인지는 성종 9년에 83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흥미로운 것은 실록 졸기(卒記)에 그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주로 세종 때의 일만 기록돼 있고 세조, 예종, 성종 때의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아부를 몰라 심지어 취중이긴 하지만 임금 세조에게 “너[爾]”라고 했다가 봉변을 당할 뻔하기도 했던 성품의 소유자였으니 세상과 비켜 지낸 것으로 보인다. 대신 그가 관심을 보인 쪽은 재산 모으기였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 말 그대로이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경계함이 있다. 어려서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으니 경계함이 색(色)에 있고 장성해서는 혈기가 바야흐로 한창이니 경계함이 다툼에 있고 늙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하였으니 경계함이 (이득을) 얻으려 함에 있다.〉
정인지는 다툼에 있어 임금도 꺼리지 않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이득을 얻는 데만 힘썼다. 먼저 실록은 그의 장점을 이렇게 말한다.
〈정인지는 타고난 자질이 호걸스럽고 특출 나며 마음이 활달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그는 이런 자질로 천문과 역법에 달통하였고 역사를 익혀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 《고려사》 발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세종실록》 편찬을 책임졌다. 그의 학재가 빛나는 대목이다.
나이 들어서는 이득 얻는 데 힘써
그러나 졸기에 있는 그에 관한 평가는 따뜻하지만은 않다.
〈정인지는 성품이 검소하여 자신의 생활도 매우 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산 늘리기를 좋아하여 여러 만석(萬石)이 되었다. 전원(田園)을 널리 차지했으며 심지어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의 것까지 많이 점유했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정숭조는 아비의 그늘을 바탕으로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렀으며, 그 재물을 늘림도 그의 아비보다 더하였다.〉
그에게는 정현조(鄭顯祖·1440~ 1504년), 정숭조(鄭崇祖·1442~ 1503년), 정경조(鄭敬祖·1455~ 1498년), 정상조(鄭尙祖) 네 아들이 있었다. 그중 정현조는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에게 장가들었고 예종을 사실상 독살하고 성종을 세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해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했으나 말년에 첩을 많이 두고 불교에 심취해 대간으로부터 자주 탄핵을 받기도 했다.
정숭조도 좌리공신에 참여해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성종 때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호조판서를 지냈으나 수뢰 혐의로 파직되었다. 경사(經史)에 밝았다고 한다.
정경조는 성종 16년(1458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1497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사망했다.
그리고 막내 정상조의 아들 정세호(鄭世虎·1486~1563년)의 딸은 중종 서자인 덕흥군과 혼인했는데 그사이에서 난 셋째 아들이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선조(宣祖)다. 사족(蛇足)이지만 왕위에 오르기 전 선조의 군호도 정현조와 같은 하성군(河城君)이었다. 하성은 하동을 달리 부르는 명칭이다.⊙
10월 호
10 노사신(盧思愼)전
말년에 임금을 잘못 만난 ‘학자형’ 정승
⊙ 學才와 吏才, 文才 겸비…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편찬 참여
⊙ 연산군 때 영의정 지내면서 臣權 앞세우는 士林과 王權 강화하려는 연산군 사이에서 어려움 겪어
⊙ “사옥(史獄)이 일어나자, 사신은 홀로 강력히 구원… 선비들이 힘입어 온전히 삶을 얻은 자가 많았다”(실록)
⊙ 명문가의 후예로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사치·거드름 멀리해

▲노사신이 최항과 더불어 편찬을 총괄한 《경국대전》
노사신(盧思愼·1427~1498년)은 고려 때부터 명문가로 유명했던 교하 노씨 출신이다. 할아버지 노한(盧閈·1376~1443년)은 태종의 아랫동서로 태종 때인 1408년 한성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처형될 때 이에 연좌되어 파직당하고 14년간 양주별장에서 은거해야 했다. 상왕(上王) 태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4년(1422년) 노한을 불러 뜻을 전한다.
“경은 본래 의심 나는 일로 인해 죄를 얻었으니 내가 지금 용서하겠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편한 대로 거주하라.”
그 후 세종은 세종 7년에 직첩을 돌려주었다.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고 2년 후에는 파직당할 때의 직책인 한성부윤으로 복직했다. 이후 노한은 순조롭게 승진해 우의정에까지 이르게 된다. 노한의 졸기(卒記) 일부다.
〈한(閈)의 아내 민씨(閔氏)는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기축년에 민씨가 패(敗)하게 되자 한의 관직을 삭탈(削奪)하고 밖으로 쫓아내어 양주(楊州) 전장(田莊)에 살고 있었는데, 임인년에 태종이 세종에게 일러 말했다.
“한이 비록 민씨와 연루(連累)되었으나, 실상은 죄가 없다.”
이에 서울로 소환(召還)하게 명하였으니, 뒤에 드디어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정미년에 세종이 다시 한성부윤을 제수하고, 조금 있다가 형조판서로 승직되었고, 여러 번 옮겨서 의정부 참찬·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으며, 임자년에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으로 승직되었다. 그때에 중국에서 환관(宦官)을 보내 매와 개를 구함이 거의 해마다로, 그들의 주구(誅求)가 한이 없었는데, 한(閈)이 빈객(賓客)을 잘 대접함으로 인해 매번 접반(接伴)이 되었다. 마침 한의 어머니가 병이 있어서, 한이 접반을 사면하니, 상이 말했다.
“사신(使臣)을 맞아 대접하는 데에 한이 아니면 안 된다.”
드디어 명했다.
“낮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밤에는 돌아가 시탕(侍湯)하라.”
갑인년에 찬성으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겸하였고, 을묘년에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이 되었다. 아내 민씨(閔氏)가 궁내에 들어가 사은(謝恩)하니 상이 말했다.
“이것은 나의 은혜가 아니요, 태종(太宗)의 유교(遺敎)이다.”
정사년 가을에 어떤 일로 파면되어 한가하게 있은 지 7년,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68세였다.〉
“노가의 아이는 참으로 원대한 그릇”

▲노사신의 할아버지 노한이 한강변에 지은 정자 효사정. 현판 글씨는 노사신의 후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썼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아버지 노물재(盧物載·?~1446년)는 심온의 사위로 부인은 소헌왕후 심씨(沈氏)의 동생이다. 딱히 재능은 없었는지 실록은 “척리(戚里)인 이유로 관위가 2품에까지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노사신은 1427년(세종 9년)에 태어났으니 그의 인생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노사신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사치나 거드름을 멀리했다.
어려서 홍응(洪應·1428~1492년)과 더불어 홍응의 외숙인 참찬(參贊) 윤형(尹炯·1388~1453년)에게 배웠는데 사람을 볼 줄 알았던 윤형은 처음 노사신을 보자마자 홍응에게 이렇게 말했다.
“노가(盧家)의 아이는 참으로 원대(遠大)한 그릇이다. 마침내는 그 명성과 지위가 아마도 너와 비등할 것이다.”
실제로 홍응도 훗날 정승에 올랐다. 1453년(단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한 것을 보면 다행히도 당시의 격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사촌이기도 했던 세조는 노사신을 중용하려고 1462년(세조 8년) 세자 좌문학으로 있던 그를 5자급(資級·품계)이나 뛰어넘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했다. 특히 같은 해 4월 11일 노사신은 우부승지로 옮기는데 이때 도승지가 홍응이었다.
1463년 세조는 노사신을 도승지에 임명했다. 세조는 그의 학식과 부지런함을 높이 평가했다. 같은 해 8월 28일 세조는 신하들과 정사를 토의한 다음 몇몇 신하에 대한 인물평을 한다. 특히 우부승지 최선복(崔善復·?~?)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신하를 아는 데 임금만 한 이가 없으니, 경(卿) 등의 재주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경도 또한 재주가 있어서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지만 그러나 노사신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노사신은 재주가 탁월(卓越)하고 그 지기(志氣)가 남보다 빼어난데, 내가 척속(戚屬)이라는 사정(私情)을 두어서가 아니라 곧 공론(公論)이 그러한 것이니 경도 또한 그리 알라.”
세조, 《주역》 주석서 증보 작업 맡겨
홍귀달(洪貴達·1438~1504년)이 지은 그의 비명 중 한 대목이다.
〈자문(諮問)하기 위해 늘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였고 경(經)과 사(史)를 강론함에 있어 공이 분변하여 대답하는 것이 소리의 울림과 같았다. 임금이 늘 밤중에도 권태를 모르고 책을 봄으로 인해 금중(禁中)에서 유숙하는 날이 많았고, 때론 휴가(休暇)로 나갔다가도 곧 부름을 받고 들어와 하루도 집 안에서 쉬는 일이 없었다.〉
도승지를 맡고 있던 노사신에게 세조는 홍문관 직제학을 겸하게 하고서 자신이 주석한 《역학계몽(易學啓蒙)》 주석서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의 증보 작업을 맡긴다. 누구보다 《주역(周易)》에 관한 조예가 깊었던 세조가 이 작업을 노사신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의 학문을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각종 불경(佛經) 작업을 맡기기도 했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崔恒)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총괄했다. 그중에서도 호전(戶典)의 집필은 그가 도맡았다. 노사신은 아주 드물게 학재(學才)와 이재(吏才)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같은 해에 호조판서로서 충청도 가관찰사(假觀察使)를 겸하여 지방 행정의 부정을 낱낱이 조사했고 이듬해 실시된 발영(拔英)·등준(登俊) 양시에 응시하여 각각 1등과 2등으로 합격하는 영예를 얻었다. 관리를 대상으로 한 과거에서 선두를 달렸다는 말이다.
그의 관리로서의 능력은 특히 예종을 거쳐 성종 때에 큰 빛을 발하게 된다.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겸했다. 이는 사람을 보는 데 눈 밝지 않고서는 맡을 수 없는 자리다.
1482년(성종 13년) 평안도에 기근(饑饉)이 들었고 다음 해 경기에 또 기근이 들었는데 노사신은 두 곳 모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양 도의 백성들이 그에 힘입어 생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황해도는 지역은 넓으나 인구가 적어 조정에서 백성을 이주시켜 채우려 하였는데 이때도 그가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선발에 타당성을 잃지 않으니 이주된 자에게 원망이 없었다.
르네상스적 지식인
그에게는 학재에 문재(文才)까지 있었다. 1476년 12월에는 서거정(徐居正)·이파(李坡)와 함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찬진하고, 1481년에는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 수찬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강희맹(姜希孟)·서거정·성임(成任)·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을 총괄했으며, 이를 위해 1476년부터 동국문사시문(東國文士詩文)을 수집했다. 한편 1482년에는 이극돈(李克墩)과 함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신증(新增)하고, 이듬해에는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서거정·어세겸(魚世謙) 등과 같이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홍귀달이 지은 비명 중 한 대목이다.
〈공은 독서하길 좋아하여 평소에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는데, 무릇 경서(經書)·사서(史書)·백가서(百家書)와 석전(釋典·불가서)·도질(道帙·도가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널리 통하였고, 성리학(性理學)의 연원(淵源)에 있어서는 그 심오한 뜻에 밝아 당시 넓고 정미(精微)한 이로는 대체로 일인(一人)이었다. 성종(成宗)이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려는데, 강관(講官)이 구두(句讀)를 제대로 띄지 못하는 경우가 있자 공에게 명하여 구결(口訣)을 붙이게 하였고, 《율려신서(律呂新書)》 《황극경세(皇極經世)》와 같은 책 및 사람이 풀이하기 어려운 책 등을 명하여 모두 나아가 질정(質正)하게 하거나 혹 번역하여 그 뜻을 나타내게 하니, 사람들은 세남비서(世南秘書·우세남)에 견주었다. 그리고 비록 문사(文詞)를 좋아하진 않았으나 굳이 지을 일이 있을 경우 그 수단은 문장가(文章家)가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라에 큰 논의가 있을 때에 공은 고사(古事)를 인용하고 금세(今世)를 증거로 하여 붓을 날려 그 편의(便宜)를 주석(注釋)하여서 모두 시행할 만한 것이었으니, 일시의 논자(論者)들이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말 그대로 르네상스적인 지식인이자 청렴한 관리였다. 아마도 그가 세종 시대에 중견 관리로 살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업적을 쌓았을지 모를 정도다.
성종 말기인 성종 18년 9월 28일에 노사신은 우의정에 오른다. 이때 좌의정이 홍응이었다. 그러고 성종 23년(1492년) 5월 19일 노사신은 드디어 좌의정에 오른다. 우의정은 허종(許琮)이었다.
托孤之臣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나이 18세였다. 아직 홀로서기에는 애매한 나이였다. 성종은 당연히 죽음을 앞두고서 세자를 좌의정 노사신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이를 탁고지신(托孤之臣), 즉 고아나 마찬가지인 어린 임금을 부탁받은 신하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는 태조 이성계의 비 강씨가 정도전과 남은에게 세자 방석을 부탁했고, 문종이 김종서에게 단종을 부탁했으며, 선조가 유영경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했다.
이제 노사신은 좌의정으로서 정치의 전면에 나선다. 무결점(無缺點) 노사신의 인생에 오점(汚點)이 생겨나는 기간이기도 하다.
연산군 1년 성종 장례 때 대비들의 청을 받들어 연산군이 불교식 재(齋)를 설치한 것을 두고 공격의 화살이 노사신을 향했다. 1월 2일 성균관 생원들이 글을 올렸다. 그중 일부다.
〈신들이 또 듣기로는 ‘임금의 허물을 조장(助長)하는 것은 그 죄가 작고, 임금의 허물을 자진하여 유발하는 것은 그 죄가 크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노사신이 정승 자리에 있어 선왕의 탁고(托孤)의 명을 받았으니, 전하가 정시(正始)하는 처음을 당하여 이야말로 마땅히 시청(視聽)을 넓혀 임금을 인도하되 도리에 맞게 할 시기인데도, 총애를 굳힐 꾀만 힘써, 안으로는 궁중의 뜻을 맞추고 밖으로는 충성스러운 간언(諫言)의 길을 막고서, 흥망에 관계되지 않는 일로 여깁니다. 사신 이 불교의 화(禍)가 흥망에 관계되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전하를 의롭지 않은 데 빠지게 하였으므로, 이것은 임금의 허물이 싹트기 전에 먼저 인도한 것이니, 임금의 허물을 유발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신이 불경을 해독하여 거의 세조(世祖)를 그르칠 뻔하였는데, 지금 또 그 술책으로 전하를 농락하려 합니다. 신 등은 엎드려 바라건대, 특히 재(齋)를 베풀라는 명을 거두시고 노사신이 탁고의 명을 저버린 죄를 빈전(殯殿) 앞에 고하고 중형에 처하시어, 일국의 이목을 쾌히 씻어주소서.〉
이런 식의 공격은 노사신이 연산군의 조정에 있는 내내 받아야 했던 것이다. 연산군 1년 3월 20일 노사신은 영의정이 되고 좌의정에는 신승선(愼承善·1436~1502년), 우의정에는 정괄(鄭佸·1435~1495년)을 제배했다. 신승선은 세종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사위로 아들 신수근(愼守勤), 신수겸(愼守謙), 신수영(愼守英)을 두었는데 딸은 연산군과 혼인했다. 정괄은 정창손의 아들이다.
‘이사·이임보를 합친 큰 간신’
당시 연산군은 아버지의 정치 방식을 뜯어고치려 했다. 무엇보다 홍문관을 비롯한 언관(言官)들의 권한을 제어하려 했다. 이에 대간(臺諫)은 결사적으로 맞섰다. 노사신은 유감스럽게도 이 사이에 끼이게 됐다. 조금만 임금 편을 들면 젊은 사대부들로부터 권력에 아첨한다는 맹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연산군 1년 7월 11일 홍문관에서 올린 소(疏)의 일부다.
〈진(秦)나라 임금 이세(二世)에 독단할 것을 권하여 권세가 신하에게 있지 않게 한 것은 이사(李斯)가 나라를 망친 말이요, 대간에게 장마(仗馬)로서 위협하여 감히 말을 못 하게 한 것은 이임보(李林甫)가 당(唐)나라를 어지럽힌 술책인데, 이제 노사신이 이사·이임보를 합친 한 사람이 되었으니, 성명하신 전하께서 처음으로 즉위하셨는데, 이와 같은 큰 간신(奸臣)이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뜻밖이고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역사를 끌어들인 인신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서 연산군과 면대할 것을 청하니 19세 연산군이 대간과 홍문관을 향해 말한다.
“만약 반란을 꾀하는 대역(大逆) 사건이 있다면 면대를 청함직하지만, 대신(大臣)이 언어(言語)의 조그마한 실수가 있었다 해서 면대까지 청한다는 것은 불가(不可)하며, 만약 이로 인해 국문(鞫問)한다면 권력이 대각(臺閣)으로 돌아가고, 대신은 수족을 놀리지 못할 것이니, 나는 이것이 바로 나라를 그르칠 조짐이라 여긴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미 세조 때를 지나 성종 때 들어서면서 신권(臣權) 이론으로서의 주자학은 무서운 속도로 신하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성종은 이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서 심지어 홍문관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신권 강화 기관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반면에 연산군이 주자학의 위험성을 어느 정도까지 감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은 세조를 모델로 삼아 강한 왕권을 추구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그럴수록 홍문관과 대간의 노사신을 향한 공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아예 노사신을 나라를 망칠 신하라고 부르면서 당장 내칠 것을 요구하고 급기야 국문을 할 것을 청했다.
이때 노사신과 더불어 홍문관과 대간의 표적이 된 인물은 윤탕로(尹湯老)이다. 사실 노사신은 윤탕로를 두둔하다가 이런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윤탕로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오빠로 행실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 또한 연산군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7월 18일 대간 등이 글을 올리자 이렇게 말한다.
臺諫의 거듭되는 도전
“때로는 특은(特恩)을 쓸 수도 있다. 윤탕로의 마음을 살펴보면 정말 더럽거니와, 형적이 뚜렷하지 않고 또 국가에 관계되는 것도 아니며, 이미 사면(赦免)를 거쳤으므로 나는 듣지 않은 것이다. 대간이 사무를 폐하고 여러 달을 논쟁하며 고집만 부리므로 사신(思愼)은 이것을 큰 과오로 여기어 이와 같이 말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나라를 망칠 말이며, 또 어찌 나에게 아첨한 것이겠느냐. 탕로의 일은 경들이 말을 하기 때문에 이미 파직을 시켰는데, 이제 만약 다시 국문한다면 사면을 내린 의의가 어디 있겠느냐.”
같은 날 홍문관에서는 비수(匕首)와도 같은 글을 올린다. 아버지 성종을 끌어들인 것이다. 신하들 천하였던 성종 시대 말이다.
〈신들이 성종의 어서(御書)를 보니, 이르기를 ‘대간의 소임을 내가 어찌 가벼이 여기겠느냐. 임금의 이목이 되어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임금의 과실을 논하고 재상의 시비를 공박하므로, 이른바 말이 임금에 미치면 천자도 얼굴빛을 고치고, 일이 조정에 관계되면 재상이 대죄(待罪)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그 예기(銳氣)를 기르고 그 중권(重權)을 부여해주어야 간사한 싹이 끊어지고 정치가 맑아진다’라고 하셨습니다.
신들은 우리 성종께서 26년 동안 태평을 누리신 근본이 다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오며, 이는 사신이 직접 면전에서 받든 하교이니, 성종의 이 하교를 가지고 전하를 돕고 인도해서 억만년 끝없는 복의 터전을 마련해야 할 것인데, 지금 사신의 간사하고 교활한 말이 낱낱이 성종의 하교와 서로 반대되어 대간이 강력히 논쟁을 벌일 경우에는 사신이 그 폐단을 고칠 방법이 없다 하고, 대간이 옥에 갇히게 되어서는 사신이 기뻐서 치하하기에 겨를이 없다 하였으니, 임금의 이목을 가리고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리며, 대간의 예기를 꺾어 임금의 과실을 논하고, 재상의 시비를 공박할 수 없게 하며, 간사한 술책은 날로 싹이 트고 정치는 날로 문란하여져서 억만년 끝없는 화근이 되게 하니, 그렇다면 사신은 실로 성종의 죄인이옵니다. 전하께서 성종의 자리를 이어받으시고서 성종의 죄인을 두둔하신다면 되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성종의 영혼이 달갑게 여기어 ‘나는 후계자가 있으니 옛 업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더욱더 성념하시어 쾌히 결단하시고 머물러두지 마소서.〉
이처럼 성종은 연산군의 친모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을 업신여기는[無君] 신하들을 대거 길러서 연산군에게 넘겨준 것이다.
결국 두 달여 만인 9월에 노사신은 정승에서 물러난다. 명예직으로 부원군(府院君)을 받았다. 일단 정치 한복판에서 물러서자 노사신을 향한 공격은 점점 잦아들었다.
戊午史禍의 시작
연산군 4년 7월 1일 윤필상(尹弼商·1427~1504년),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韓致亨·1434~1502년), 무령군 유자광(柳子光)이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 비사(秘事)를 아뢸 것을 청한다. 그러고 그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경상도로 급파했는데 외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경상도 청도에 내려가 있던 김일손(金馹孫)을 압송해오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史禍)가 터진 것이다.
윤필상은 노사신과 마찬가지로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 도승지를 지냈으며 이재(吏才)가 뛰어나 예종·성종·연산군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성종 때 영의정에 올랐다. 연산군 2년(1496년)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이때 원로로서 무오사화에 관여했다. 그러나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 생모 윤비의 폐위를 막지 않았다고 추죄(追罪)되어 사사(賜死)의 명을 받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예종과 성종 때는 군공(軍功)도 세웠으나 조정 대신으로 임금의 뜻에만 영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치형은 무관(武官)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아와 세조 때 승지를 지냈고 성종 때 호조·병조 판서를 지낸 뒤에 연산군 때 우의정·좌의정을 지내고 1500년에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윤필상과 마찬가지로 연산군 생모 윤비의 폐위를 막지 않았다고 추죄되어 한명회 등과 함께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연산군은 즉위 초 《성종실록》 편찬을 명했다. 이때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로 실록청 당상관에 임명된 이극돈(李克墩)은 미리 사초(史草)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사초에 훈구파(勳舊派) 대신들의 각종 부정과 비리가 상세히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중 사림파의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는 이극돈 자신과 관련한 비리가 들어 있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내용 삭제를 부탁했으나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자 이극돈은 실록 편찬에 기초가 되는 사초는 실록 편집이 끝나면 파기하여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사초를 유출하여 훈구파였던 유자광과 의논하였다. 이에 유자광이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과 논의하여 이 비사를 연산군에게 고한 것이다. 그 후 7월 한 달 동안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실록, 비난하면서도 칭찬
그러나 세조의 총애를 받은 노사신으로서 윤필상·유자광이 주도하는 사림파 제거에 미온적으로나마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동시에 그는 억울한 피해를 줄이려고 온 힘을 다했다. 아직 사건의 여진이 끝나지 않은 1498년(연산군 4년) 9월 6일 노사신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졸기를 보면 그의 흠결을 억지로 찾아내려 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성종조에 정승이 되었으나 건명(建明·건의)한 바는 없었고 금상(연산군)이 즉위한 처음에 수상(首相)이 되었는데 왕이 대간(臺諫)에게 노여움을 가져 잡아다가 국문하려 하니, 사신이 아뢰기를 ‘신은 희하(喜賀)하여 마지않는다’라고 하였고, 태학생(太學生)이 부처에 대해서 간(諫)하자 귀양 보내려고 하니, 사신이 또한 찬성했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 성품이 남을 기해(害)하는 일은 없었다.
사옥(史獄)이 일어나자, 윤필상·유자광·성준(成俊) 등이 본시 청의(淸議)하는 선비를 미워하여,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고 붕당이라 지목하니, 사신은 홀로 강력히 구원하면서 ‘동한(東漢)에서 명사(名士)들을 금고(禁錮)하다가 나라조차 따라서 망했으니 청의(淸議)가 아래에 있지 못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선비들이 힘입어 온전히 삶을 얻은 자가 많았다.〉
반정(反正) 공신들이 편찬한 실록이 이 정도로 기록했다는 것은 오히려 극찬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연산군 대에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삶의 후반부가 옥에 티로 남게 된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재상은 어떤 임금을 만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11월 호
11 어세겸(魚世謙)전
오고당상(午鼓堂上), 좌의정에 올랐으나 폭군을 만나 뜻을 펴지 못하다
⊙ “子弟들을 위해 恩澤 구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卒한 후 보니 집안에 남은 곡식이 없었다”(실록)
⊙ 연산군 때 좌의정에 올랐으나, 연산군과 臺諫 사이에서 곤욕
⊙ 명나라와의 외교, 홍문관 대제학으로 이름 떨쳐
⊙ 아버지 어효첨은 이조판서, 동생 어세공은 형보다 앞서 공조·병조·형조·호조판서 역임
어세겸(魚世謙·1430~1500년) 집안은 할아버지 어변갑(魚變甲·1381~ 1435년) 때부터 현달하기 시작한다. 어변갑은 태종 8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했고 세종 때 집현전이 생기자 응교, 지제교 등을 거쳐 1424년 직제학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정인지(鄭麟趾)와 나란히 벼슬살이를 했다. 그런데 어변갑은 직제학을 끝으로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후 세종은 그의 효심을 아름답게 여겨 세종 14년(1432년) 사간원 지사로 삼기 위해 그를 불렀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어세겸의 아버지 어효첨(魚孝瞻·1405~1475년)은 아버지 어변갑의 학문과 곧은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어효첨은 세종 11년(1429년) 문과에 급제해 얼마 후부터 아버지 어변갑과 마찬가지로 집현전에서 경력을 쌓았다. 세종·문종 등이 모두 그의 학문을 극찬했고 세조 때 이조·호조·형조·공조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했다. 이 당시 세조는 신하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어효첨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모두 실록에 기록된 일화다.
“이 사람은 내가 경중(敬重)하는 바이며 일찍이 세종에게 천거된 자이다.”
또 정2품 자헌대부로 승급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경은 정직한 사람이다. 대신 중에 경의 아들 어세겸을 천거하는 자가 있으니 내가 집안 뜰의 가르침[家庭之訓]이 있음을 안다.”
과정지훈(過庭之訓)
세조가 말한 가정지훈(家庭之訓)은 아버지로부터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인데 《논어》 계씨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강(陳亢)이 (공자 아들) 백어(伯魚)에게 물었다.
“그대는 특별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백어가) 대답했다.
“(그런 특별한 것은) 들은 적이 없다. 일찍이 홀로 서 계실 때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는데[過庭] ‘시(詩)를 배웠느냐?’라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고 했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시므로 내가 물러나와 시를 배웠다. 다른 날에 또 홀로 서 계실 때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는데 ‘예(禮)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물러나와 예를 배웠다. 이 두 가지를 들었을 뿐이다.”
이에 진강이 물러나 기뻐하며 말했다.
“하나를 물어 세 가지를 얻었으니 시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듣고 예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듣고 또 군자가 그 아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遠=公]을 들었구나!”〉
맹모삼천(孟母三遷)이 어머니로부터 받는 교훈임과 마찬가지로 과정지훈(過庭之訓)은 아버지로부터 받는 교훈이다. 세조가 말한 가정지훈(家庭之訓)은 바로 뜰을 지날 때 받는 아버지로부터의 가르침인 과정지훈(過庭之訓)과 같다.
어효첨은 세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으나 그 후 주로 중추원 지사, 판사, 영사를 지내면서 현실 정치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태종 때 좌의정 박은(朴訔)이 그의 장인이며 아들은 어세겸과 어세공(魚世恭·1432~1486년)을 두었다. 어효첨에 이르러 명문가로 자리 잡은 것이다.
순탄한 벼슬 생활
세조 2년(1456년) 동생 세공과 함께 문과에 급제한 어세겸은 순조롭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로 있던 세조 4년 5월 22일 세조는 어세겸 등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국가에서 지금 너희를 선임한 것은 한훈(漢訓) 이문(吏文)을 정통하게 하려 함이니 너희는 각각 그 업에 최선을 다하라.”
즉 중국어와 더불어 관리용 문자 이문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후 이듬해인 세조 5년 천추사(千秋使) 이극배(李克培)의 수행관원인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되어 명(明)나라를 다녀온다. 학술과 문장에도 능했던 어세겸은 동생 세공과 함께 세조의 명을 받아 편찬한 《주역구결(周易口訣)》과 권근(權近)의 구결을 비교 토의하는 모임에도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문명(文名)을 얻게 된 어세겸은 예문관 대교(待敎), 봉상시 직장(直長), 성균관 주부(主簿), 예문관 봉교(奉敎) 등을 거치는데 모두 임금이 직무상 필요로 하는 글을 짓는 요직이었다. 이어 어세겸은 이조정랑을 거쳐 세조 13년(1467년) 8월 우부승지에 제수되고 이어 우승지에 이른다. 권부(權府) 핵심에 이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대 실력자 김국광(金國光)이나 한계희(韓繼禧) 등의 천거를 받기도 했다.
이런 어세겸에게도 살짝 위기가 찾아온다. 세조 14년 5월 1일 세조가 서현정(序賢亭)에 나아가 조정 신료와 종친들을 불러 활쏘기를 한 다음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공조판서 남이(南怡)가 술에 취해 실언(失言)을 했다.
“상(上)께서는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신은 남몰래 그것이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이준은 세종 4남 임영대군의 아들이다. 세조의 조카다. 이시애의 난을 토평(討平)한 공로로 20대 때 영의정에 오를 정도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미 이때 남이의 난이 예고된 셈이다.
화가 난 세조는 당장 남이를 옥에 가두었다. 그러고 여러 신하에게 “남이 말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 물었는데 모두 남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어세겸은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어세겸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승지가 된 이후부터는 그 옳음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어세겸은 기밀 업무를 계속 수행했다. 세조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형보다 앞서간 동생 어세공
예종 1년(1469년) 남이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어세겸은 이를 다스리는 데 참여한 공로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함종군(咸從君)에 봉해졌다.
그런데 형 어세겸이 정3품 승지에 있을 때 동생 어세공은 이미 세조 말 정2품 병조판서에 오른다. 세조 13년(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함길도 관찰사에 중용되어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됐기 때문이다. 이후 아성군(牙城君) 어세공은 성종 때 공조·병조·형조·호조판서를 두루 지내고 재상에 이르는 계단이라 할 수 있는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는데 형보다 먼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재상에 이르지는 못했다. 실록이 전하는 그의 졸기(卒記)다.
〈어세공은 영민(英敏)하여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하였고, 무격(巫覡·미신)·부도(浮屠·불교)·지리(地理·풍수)의 구기(拘忌)에 대해서는 일절 거론하지 않았으며, 늘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남들이 그 효성에 감탄하였다. 다만 심정원(沈貞源)이 버린 아내에게 재산이 매우 많았는데, 이를 후처(後妻)로 삼았으므로 남들이 비루하게 여겨 비웃었다.〉
심정원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손자이자 소헌왕후의 동생 심결(沈決·1419~1470년)의 아들이다. 실록에 따르면 세조 9년(1463년) 정인지의 아들 공조정랑 정숭조(鄭崇祖)와 심결의 아들인 세자참군 심정원이 까닭 없이 아내를 버렸다 하여 조정으로부터 견책을 받은 일이 있었다.
성종 초 어세겸은 함종군 자격으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성종 1년(1470년) 5월 26일 어세겸은 홍제원에서 명나라 사신단을 송별하고 돌아와 이렇게 아뢴다.
“중국 부사가 말하기를 ‘전하의 춘추가 열넷이라고 하는데 말과 행동이 실수가 없고 또 총명형철(聰明瑩澈)하니 참으로 조선의 성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성종 2년(1471년) 10월 23일 어세겸은 예조참판에 제수된다. 성종 3년, 성종이 인정전에 나아가 선비들에게 시험문제를 내는데 이때 독권관(讀券官)이 좌의정 최항(崔恒), 좌찬성 노사신(盧思愼), 그리고 예조참판 어세겸이었다.
성종 9년(1478년) 어세겸은 부총관에 제수된다. 그러나 동생 어세공이 병조판서였기에 형제가 함께 병권(兵權)을 쥐어서는 안 된다며 부총관 제수는 취소된다. 상피법(相避法)에 따른 것이다. 이에 다시 함종군 자격에 머물렀다. 하나 어세겸은 동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10년(1479년) 2월 10일 도승지 홍귀달(洪貴達)이 성종에게 아뢰었다.
“이극돈(李克墩), 어세겸은 큰일을 맡길 만한데 지금 한산한 곳에 두었으니 신은 뛰어난 이를 등용하는 것이 지극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이에 성종은 “내가 마땅히 쓸 것이다”라고 답했다. 홍귀달은 당대 명신이었다. 실제로 3개월 후인 5월 11일 어세겸은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된다. 그러나 다음 날 어세겸은 성종을 찾아가 아뢰었다.
“신의 아우 어세공이 지금 병조판서로 있습니다. 사헌부와 병조는 서로 분경(奔競)을 살피고 또 인사의 잘못을 탄핵하는 자리이니 신의 직책을 갈아주소서.”
이리하여 같은 날 한성부 좌윤으로 자리를 옮긴다.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공자의 민어사(敏於事) 신어언(愼於言) 가르침을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같은 해 8월 1일 어세겸은 핵심 요직인 이조참판에 제수된다. 와중에도 그는 국가 현안이 있으면 북경으로 가서 문제를 잘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 무렵 태평을 누리는 임금과 신하의 훈훈한 장면 하나가 실록에 실려 있다.
《논어》 증점고슬도(曾點鼓瑟圖)에 대한 시를 짓다
성종 11년 10월 14일 성종은 병풍 12폭을 내어 문신 중에서 시에 능한 12명을 뽑아 각각 칠언율시 1편씩을 지어 올리게 했다. 어세겸은 《논어》에 나오는 증점고슬도(曾點鼓瑟圖)에 대한 시를 지어 올렸다. 증점이 비파를 켜는 장면은 선진(先進)편에 나온다.
〈자로(子路), 증석(曾晳),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너희보다 나이가 조금 많다고 하여 나에게 말하는 것을 어려워 마라. 평소에 너희는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혹시 사람들이 너희를 알아준다면 어찌하겠느냐?”
자로가 경솔하게 나서 대답했다.
“전차 천 대를 가진 제후의 나라가 대국들 사이에 끼여 군사적 침략이 가해지고 그로 인하여 기근이 들게 되거든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릴 경우 3년이 지나면 백성들을 용맹하게 하고 또 의리를 향해 나아가는 법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
“구(求)야,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염유가 대답했다.
“사방 넓이 60~70리 혹은 50~ 60리쯤 되는 작은 나라를 제가 다스릴 경우 3년이 지나면 백성들을 풍족하게 할 수 있으나 그 예악에 있어서는 군자를 기다리겠습니다.”
“적(赤)아,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공서화가 대답했다.
“제가 잘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를 원합니다. 종묘의 일이나 제후들이 회동할 때 현단복(玄端服)과 장보관(章甫冠)을 갖추어 집례를 돕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점(點)아,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비파 타는 소리가 희미하게 가늘어지더니 쨍그랑 소리와 함께 증석이 비파를 놓고 일어나서 대답했다.
“세 사람이 늘어놓은 것과는 다릅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실로 각자 그 뜻을 말하는 것이다.”
증석이 말했다.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청년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서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
공자는 “아!” 하고 감탄하며 “나는 증석을 허여한다”고 말했다.
나머지 세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증석은 맨 뒤에 남아 공자에게 물었다.
“저 세 사람의 말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실로 각자 자기 뜻을 말했을 뿐이다.”
증석이 물었다.
“그런데 왜 선생님께서는 자로를 비웃으셨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예로써 해야 하는데, 그 말이 겸손하지 않기에 웃었다.”
증석이 말했다.
“저 염유가 말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아닙니까?”
공자가 말했다.
“사방 60~70리나 50~60리이면서 나라 다스리는 것이 아닌 것을 어디에서 보겠느냐?”
증석이 말했다.
“저 공서화가 말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까?”
공자가 말했다.
“종묘의 일과 다른 나라 사신과 회동하는 일이 제후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공서화가 소(小)가 된다면 누가 능히 대(大)가 되겠느냐?”〉
이에 대해 어세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제자(弟子)들이 공자님을 조용히 모셨는데,
행단(杏壇)의 봄빛이 꽃가지에 사무쳤네.
태산(太山)이 멀리 서 있으니 우러를 만하구나.
기수(沂水)에 바람이 이니 노래하여 돌아오네.
비파 줄 위의 천지조화가 손을 따라 움직이니,
개중(個中)에 그 마음을 누구가 알랴?
자연과 함께하는 이치를 찾고자 하려거든,
반드시 크게 한바탕 퉁기고 비파를 놓던 때를 기억하시오.
성종의 신임을 얻어 탄탄대로를 걷다
성종 1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어세겸은 이후 전라도 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한성판윤,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두루 거쳤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의 일화 하나가 지금도 전한다.
〈공이 요동(遼東)에 도착하자 (명나라 관리인) 태감(太監) 및 총병관(摠兵官)·도어사(都御史) 등이 공을 위해 연회석을 마련했는데 공이 읍(揖)만 하고 무릎을 꿇지 않자 어사가 “왜 무릎을 꿇고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나는 우리 전하(殿下)의 명(命)으로 경사(京師)에 내조(來朝)하는 중인데 대인(大人)들이 특별히 이 자리를 베풀어서 나를 예(禮)로써 위로했을 뿐이거늘 내 어찌 무릎을 꿇고서 술을 마셔야 한다는 말이오?”라고 하였다.〉
사실 이때는 명나라 사신의 파워가 하도 커서 한명회(韓明澮)조차 명나라 사신에 기대어 자신의 권력을 키워갔다는 점에서 어세겸의 이 같은 대응은 분명 남다른 것이었고 그것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도 칭송이 잇따랐다.
성종 13년(1482년) 8월 13일 어세겸은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같은 날 동생 어세공은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에 어세겸은 다시 형제가 나란히 형조와 대사헌을 맡을 수 없다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성종의 대답이 달랐다.
“부득이 갈아야 한다면 형조판서를 마땅히 갈아야 할 것이다. 경은 그대로 직무를 수행하라.”
대사헌을 마치고 한직(閑職)에 머물며 대명(對明) 외교 업무를 담당하던 어세겸은 성종 14년(1483년) 8월 27일 형조판서에 오른다. 같은 날 김종직(金宗直)은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형조판서였지만 성종은 명나라나 북방 여진 대책 등을 논할 때는 반드시 어세겸을 참여시켜 의견을 물었다. 성종 16년(1485년) 윤 4월 27일 어세겸은 경기관찰사로 자리를 옮긴다. 이듬해에는 한성부 판윤으로 옮긴다. 성종 18년(1487년) 6월 호조판서에 되었다가 9월에 병조판서에 제수된다. 말과 행실에 잘못이 없어 어세겸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유배형을 받은 일이 없었다. 성종 21년(1490년) 4월 4일 어세겸은 종1품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종1품이란 이미 재상을 향해 가는 길목이었다. 같은 해 11월 어세겸은 의정부 우찬성이 되고 얼마 후 좌찬성으로 옮긴다.
文衡 어세겸
문형(文衡)이란 국가 문서를 짓는 최고 책임자를 말한다. 조선에서는 역대로 권근(權近), 윤회(尹淮), 변계량(卞季良), 최항이 맡아왔고 그 뒤를 어세겸이 잇고 있었다. 흔히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이 이 일을 맡았는데 이 무렵 문형은 어세겸이 맡고 있었다.
그런데 성종 23년 어세겸이 모친상을 당해 문형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해 3월 19일 이 자리를 어떻게 채울 것인지를 두고서 조정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새로운 사람을 천거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어세겸이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는 임시변통으로 하다가 다시 어세겸에게 문형을 맡기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었다. 굳이 교체한다면 우의정 노사신이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그만큼 어세겸의 문장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종은 결국 홍귀달(洪貴達)을 승진시켜 문형을 담당하게 하라고 명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신의 평이 실려 있다.
〈대제학은 문형을 담당하는 자이다. 노공필(盧公弼)은 문사(文詞)에 부족(不足)하였으나 직위가 상당하다고 하여 제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이때에 와서 체임(遞任)시키고 홍귀달을 제수하였는데, 홍귀달은 젊어서부터 저술(著述)에 마음을 두어 시문(詩文)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청렴하지 못하였으니, 재주는 넉넉하나 덕(德)이 모자라는 자이다.〉
성종 25년(1494년) 상을 마친 어세겸은 홍문관 대제학을 겸직하며 문형에 복귀한다.
그는 1483년 서거정(徐居正), 노사신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했고 1490년 임원준(任元濬) 등과 함께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등의 악사(樂詞)를 개찬(改撰)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성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어세겸에게도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다.
연산군 때에 정승이 되다
연산 1년(1495년) 10월 14일 조정에서는 새로운 정승 후보를 두고서 연산군과 기존 정승들이 토의를 하고 있었다. 윤필상 등은 모두 어세겸의 이름을 적어 냈는데 연산군은 홍귀달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내보였다. 그러나 이틀 후 발표에서 연산군은 어세겸을 우의정에 제수했다. 그러고 이듬해인 연산 2년 2월 4일 어세겸은 좌의정, 정문형(鄭文炯)은 우의정에 제수된다. 정문형은 정도전(鄭道傳)의 증손자이다.
좌의정 어세겸은 전임 노사신의 길을 따라 걸을 뿐이었다. 연산군과 대간(臺諫) 사이에 끼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수시로 사직 의사를 밝혔고 그때마다 연산은 반려했다.
어세겸은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임금에 대한 직언을 꺼리지 않았다. 연산군 2년 봄에 좌의정이 된 그는 가을에 경연(經筵)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당(漢唐) 시대는 환관(宦官)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했는데 인주(人主·임금)는 이를 깨닫지 못하여 끝내 난망(亂亡)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대저 불은 염염(焰焰·불꽃이 활활 이는 모양)할 때 끄기 쉽고 물은 연연(涓涓·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모양)할 때 막기 쉽습니다.”
연산군의 미래상을 예감한 때문이었을까? 또 이듬해 경연에서는 후한(後漢)의 명제(明帝)에 관한 대목을 진강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임금은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 학문을 닦은 연후에야 능히 이단에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명제의 학문은 장구(章句)일 뿐이며 대도(大道)를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교에 현혹되어 만세(萬世) 화근의 기본을 만든 임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성종께서는 불교를 엄히 배척(排斥)하여 도승(度僧)을 폐지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릉(宣陵·성종의 능) 곁에 절을 짓는 것은 비록 대비의 명이라 할지라도 전하께서 대의(大義)를 들어 못 하도록 청함이 마땅합니다. 내수사(內需司)의 비축은 모두 나라 물건이 아닌 것이 없는데, 이를 사찰(寺刹)의 창건에 쓰고 나라에서 빼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어찌 옳겠습니까?”
어세겸은 결국 사초(史草) 사건으로 대간의 공격을 받아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실은 연산군이 직언을 꺼리지 않는 세겸을 물리친 측면도 있었다.
무오사화
그러는 사이에 1498년 음력 7월 무오사화(戊午史禍)가 발생했다. 여기에 실록 총재관 어세겸도 말려들었다.
즉 이극돈이 사료를 살피다가 김일손(金馹孫)이 자신을 비방하는 내용을 역사에 담으려 하는 것을 발견했다. 또 세조의 일을 비방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이극돈은 어세겸을 찾아가 말했다.
“일손이 선왕을 무훼(誣毁)하였는데, 신하가 이러한 일을 보고 상께 주달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나는 그 사초를 봉하여 아뢰어서 상의 처분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 후환(後患)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어세겸은 깜짝 놀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에 이극돈은 유자광을 찾아갔고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어세겸은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러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실록 졸기(卒記)는 그의 평소 성품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천품이 확실(確實)하고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어 첩(妾)을 두지 않았고 용모를 가식하지 않았으며, 청탁을 하는 일이 없고 소소한 은혜를 베풀지도 않았다. 천성이 또한 청렴하고 검소하여 거처하는 집이 흙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벽은 흙만 바를 뿐 붉은 칠은 하지 않았다. 경사(經史) 읽기를 즐기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손님이 오면 바로 면접하여 종일토록 마시었다. 문장을 만들어도 말이 되기만 힘쓰고 연마(硏磨)는 일삼지 않았으나 자기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평생동안 사벽(邪辟)하고 허탄(虛誕)한 말에 미혹(迷惑)되지 아니하여 음양풍수설(陰陽風水說) 같은 것에도 확연(確然)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젊을 때부터 나아가 벼슬하는 일에는 욕심이 없어 요행으로 이득 보거나 벼슬하는 것과 같은 말은 입 밖에 내지를 않았고, 활쏘기와 말타기 하는 재주가 있었지만 일찍이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편지 한 장 하여 자제(子弟)들을 위해 은택(恩澤)을 구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졸(卒)한 후 보니 집안에 남은 곡식이 없었는데, 세상 평판이 추앙하고 존중하여 재상(宰相)감이라고 하였다.〉
어세겸은 할아버지 어변갑이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통 유학을 공부하고 인격적 수련 또한 겸비한 인물이다. 어쩌면 조선 왕조가 길러내려 했던 전형적인 관리였는지 모른다.
더불어 그의 독특한 업무 스타일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또 하나 있다. 한성판윤으로 있을 때는 출퇴근 시각에 개의하지 않아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 불렸다. 정오 북소리가 나서야 등청한다는 비유다. 그러나 정치를 능률적으로 하여 결송(決訟·소송의 결정)이 지체되지 않았다 한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다
연산군 10년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끔찍한 보복을 단행했다. 실록을 샅샅이 뒤져 정창손(鄭昌孫)·어세겸·심회(沈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 부관참시보다 더한 형벌은 쇄골표풍(碎骨飄風)이었다. 연산은 ‘갑자육간(甲子六奸)’을 지목했는데 좌의정 이극균(李克均), 예조판서 이세좌(李世佐),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 성준(成俊), 한치형(韓致亨)과 더불어 어세겸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또 연산군은 어세겸 증손까지 나누어 귀양을 보내도록 명했다. 광기(狂氣)의 임금을 만나 일평생 지켰던 지조와 도리가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동생 어세공은 형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연산군의 폭정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어세겸의 집안은 족멸에 이르렀지만 어씨의 가세는 어세공으로 이어진다. 먼 훗날 경종(景宗)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魚氏)가 바로 어세공 후손이다. 선의왕후 묘지문에 그 세계가 잘 정리되어 있다.
〈후(后)의 성은 어씨(魚氏)로 세계(世系)는 함종(咸從)이다. 원조(遠祖)는 화인(化仁)인데 여조(麗朝)에 비로소 드러났으며, 국초(國初)에는 직제학(直提學) 어변갑이 염퇴(恬退)한 절개가 있었고, 판중추(判中樞) 어효첨과 호조판서 양숙공(襄肅公) 어세공에게 전해 와서는 이들 부자(父子)가 훈덕(勳德)으로써 3세(三世)에 현양(顯揚)되었으며, 좌참찬(左參贊) 어계선(魚季瑄)은 또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에 현달(顯達)하였다. 고조(高祖) 어한명(魚漢明)은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증(贈) 좌찬성(左贊成)이고, 증조(曾祖) 어진익(魚震翼)은 강원도 관찰사로서 증(贈) 좌찬성(左贊成)이며, 조부(祖父) 어사형(魚史衡)은 한성우윤(漢城右尹)으로서 증(贈) 영의정(領議政)인데, 이분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를 낳았다. 어유귀는 해미현감(海美縣監) 이하번(李夏蕃)의 따님에게 장가갔는데, 중종대왕(中宗大王)의 6세손(六世孫)으로서 완릉부부인(完陵府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후께서는 어려서부터 단중(端重)하여 함부로 유희(遊戲)하지 않았으며, 행동거지가 저절로 법도에 맞았다. 말수가 적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늘 해어진 옷을 입고 남의 화식(華飾)을 보아도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성품이 효순(孝順)하였다.〉
이처럼 좌의정에 오른 어세겸은 오히려 그 후손이 쇠미한 반면 일찍 죽어 연산을 피한 어세공 후손은 크게 현달했으니, 명(命)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외천명(畏天命)하라고 했는지 모른다.
어세겸은 노사신과 더불어 명재상감으로 지목되었으나 연산군을 만나는 바람에 패가망신하고 말았다.⊙
12월 호
12 정광필(鄭光弼)전
庸君(어리석은 임금) 중종 밑에서 훈구와 사림의 조화 꾀한 명재상
⊙ “도량이 넓고 생각하는 바가 심원하여, 모든 일에 규각(圭角·모남)을 드러내지 않았고, 중의를 모은 다음에 자신이 결단”(실록)
⊙ 조광조의 향약 제안에 반대했으나, 기묘사화 때에는 중종에게 눈물로 士林들의 구명 호소
⊙ 연산군에게 간언, 權奸 김안로와 충돌해 귀양살이하기도
⊙ 상진·이준경 등 후배 정승감 알아보고 이끌어줘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정광필
정광필(鄭光弼·1462~1538년)은 동래 정씨로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을 지낸 정난종(鄭蘭宗·1433~1489년)의 둘째 아들이다. 위로 정광보(鄭光輔)가 있고 밑으로 정광좌(鄭光佐), 정광형(鄭光衡)이 있다.
아버지 정난종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해 세조에게 큰 총애를 받아 승지를 지냈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이시애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성종 때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참찬에 올랐다. 정난종은 훈구(勳舊)임에도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점은 정광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462년(세조 8년)에 태어난 정광필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배움에 힘써 경전(經傳)과 자사(子史)를 독송(讀誦)해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을 묵묵히 이해하고 환하게 연구하여 널리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신도비(神道碑)에 따르면 “《좌씨춘추(左氏春秋·춘추좌씨전)》와 《주자강목(朱子綱目·자치통감강목)》을 좋아해 손에서 잠시라도 놓는 일이 없었으니 속유(俗儒·지식 등이 모자란 선비)가 다른 사람의 글귀를 표절하여 필요할 때에 써먹거나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고 한다.
연산군 시절 간언하다 유배 생활
정광필은 1492년(성종 23년)에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초급 관리 시절이 끝나기도 전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 연산군 시대를 맞이했다. 속 깊고 학식이 뛰어나 전도유망한 인재 정광필은 과연 연산군(燕山君)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을까?
간관(諫官)을 중심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정광필은 1503년(연산군 9년)에 등급을 뛰어넘어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에 제수(除授)됐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겼다. 이때부터 이미 폭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연산은 자신에 대해 간언(諫言)하는 자를 원수처럼 미워했다. 그럼에도 정광필은 일찍이 소(疏)를 올려 연산군이 사냥에 탐닉하는 것을 간언했다가 이듬해 아산현(牙山縣)으로 귀양을 갔다.
“이때 법령(法令)이 준엄하여 귀양 처벌을 당한 자는 자유롭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공은 빗자루를 들고 관문(官門)을 지키면서도 짜증내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정광필도 유배에서 풀려나 날개를 달았다. 훈구와 사림(士林) 모두에게 신망이 컸던 그는 중종 초기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다. 1507년(중종 2년) 특별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됐고, 1508년(중종 3년) 병조(兵曹)로 전직됐다.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등급을 뛰어넘어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고 얼마 있다가 예조판서로 옮겼다. 이조에서 예조에 이르기까지 항상 경연 춘추관을 겸직했다. 역사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정광필은 《성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한 바 있었다.
성희안의 지원
그는 관리로서 이재(吏才)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신도비 중 일부다.
〈1510년(중종 5년)에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되었다. 이해 여름에 삼포(三浦)의 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남쪽 지방이 소란하였는데, 전라도 지역과 서로 접한 곳이라 중신(重臣)을 얻어서 제압해야만 하였다. 이에 정광필을 명하여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위무(慰撫)하게 하자, 정광필은 바닷가 지역을 순찰하며 돌아다녔는데, 대체로 성진(城鎭)의 멀고 가까움과 방수(防戍)가 탄탄한지 허술한지며, 사졸(士卒)의 강하고 약함과 군기(軍器)의 날카롭고 무딘 상태를 직접 발로 뛰면서 눈으로 조사하지 않음이 없었는 바, 그 계획이 모두 그때그때 상황에 합당하였으므로 남쪽 지방이 안정되었다. 돌아와서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전선(銓選·인사 행정)이 공평하고 성실하였으며 군정(軍政)이 이내 다스려졌다.〉
그의 이런 빠른 승진은 무엇보다 반정 일등공신 중 한 사람인 성희안(成希顔·1461~1513년)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성희안은 일찍부터 정광필이 정승감임을 알아보고서 계속 초탁(超擢·빠른 승진)했다. 마침내 정광필은 1513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다. 중종 8년(1513년) 4월 11일 우의정 자리가 비어 이를 고를 때 후보자로 김응기(金應箕), 정광필, 신용개(申用漑) 세 사람이 올랐는데 성희안은 정광필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세 사람 중 김응기는 그 한 몸의 재행(才行)과 학문에 흠이 없지만, 정광필은 젊어서부터 침착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아[喜怒不形] 신망이 높으니 정광필을 먼저 써야 되겠습니다.”
너무 빠른 승진으로 인해 간관들의 비판도 있었지만 당시 이 인사에 대한 사신(史臣)의 평은 정광필이 어떤 인물인지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앞서 의정(議政·의정부)에 결원이 생겨 상이 성희안과 송질()에게 누가 합당한가를 묻자 성희안이 김응기·정광필·신용개 세 사람 이름을 써서 아뢰었는데, 상이 다시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묻자 성희안이 아뢰기를 ‘응기는 사람됨이 단아하고 후중하여 몸가짐이 성인과 다름이 없으나, 국가의 큰일은 광필이 아니면 해낼 수 없습니다. 응기는 이미 영중추(領中樞·중추원 영사)가 되었으니 지위가 부족하지 않으며 용개는 재주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찌 열 사람의 용개로 광필 한 사람과 바꾸겠습니까! 오늘날 상께서 지성으로 복상(卜相·재상 선발)하시니 실지로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고 송질은 아뢰기를 ‘응기는 성종조(成宗朝)에 이미 현임(顯任)에 제수되어 물망이 그에게로 돌아간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니, 응기를 정승으로 삼아야 됩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각각 자신의 의견으로 아뢰었는데, 응기는 사람됨이 온순하고 단아하며 신중하고 과묵하여 일거일동에 부정한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벼슬하기 전부터 남들이 안자(顔子·공자 제자 안회)로 지목하였다. 그러므로 복상할 때 인망이 많이 돌아갔고, 이 때문에 전조(銓曹)의 주의(注擬·인사안)에 역시 수위(首位)로 삼았었는데, 상께서 희안을 신임하였으므로 마침내 광필을 정승으로 삼았다. 광필의 사람됨은 도량이 넓고 생각하는 바가 심원하여, 모든 일에 규각(圭角·모남)을 드러내지 않았고, 정승이 된 뒤에도 국정을 의논할 때에는 중의(衆意)를 모은 다음에 자신이 결단하므로, 여러 사람이 모두 흡족히 여기어 참다운 재상이라 하였으며, 사람들은 희안의 그 명철한 감식에 감복하였다. 응기는 겨우 ‘예, 예!’ 하며 순종할 뿐이므로 조정에서 실망하였다.〉
향약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다
뒤에 정광필이 좌의정이 되었을 때 김응기는 우의정으로 기용된다. 또 정광필이 영의정이 되었을 때 김응기는 좌의정에 오른다.
말수가 적은 정광필이었지만 국가의 중대 사안에 대해서는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 자리에 오르려 하자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해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한 것은 그 한 가지 예일 뿐이다.
《중종실록》 13년(1518년) 9월 5일 자에 매우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실려 있다. 경연에서 참찬관 조광조(趙光祖·1482~1519년)가 향약(鄕約) 실시를 건의한다.
“신이 듣건대 온양군 사람이 향약을 잘 행한다고 합니다. 만약 향약을 잘 이행한다면 진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향약이란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취지로 한 향촌(鄕村)의 자치 규약이다. 본래 북송(北宋)의 여대균(呂大鈞)이 주창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뜬 것으로, 덕업(德業)으로 서로 권하는 것, 과실을 서로 경계하는 것, 예다운 풍속으로 서로 사귀는 것, 환난(患難) 시 서로 구휼하는 것, 이 네 가지를 강령(綱領)으로 삼았다. 이는 오늘날 시민운동과 흡사한 것인데 성리학자들이 지방을 통제하려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주자학을 받아들인 사림들이 조선 초부터 줄기차게 실시를 요구했지만 임금들은 백성을 이중으로 통치하는 것이 된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정광필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향약이 좋기는 좋지만 모인 무리가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수령의 권세가 도리어 약해질 것이니 살펴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 초 태종을 비롯한 여러 임금이 반대했던 논리와 같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조광조의 폭주가 시작된다.
조광조의 득세

▲조광조
무난해 보였던 중종 시절 관리 생활 중에서 첫 번째 위기가 1519년에 찾아왔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것이다.
1506년 9월 1일 연산군을 축출한 반정 핵심 세력은 곧바로 정국(靖國)공신 책봉에 들어갔다. 중종반정은 누가 뭐래도 박원종(朴元宗·1467~1510년), 성희안, 유순정(柳順汀·1459~1512년) 3인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9월 7일 발표된 101명의 공신 명단에 세 사람은 없었다. 1등공신에 유자광,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 다섯 명의 이름만 올라 있었다. 그러나 영의정 유순 등이 나서 3인을 다시 포함시켜 공신은 104명으로 늘어났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공신이 추가되어 117명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명분이 약한 반정을 뒷받침해줄 정권 지지 세력 확보 차원에서 이뤄진 조처였다.
그러나 ‘공신 3훈’의 위세가 등등할 때에는 이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했다. 다만 뜻이 있는 사림 사이에서는 이들을 ‘위훈(僞勳)’이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가짜 공신이라는 것이다.
조광조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종 5년(1510년) 무장(武將) 출신의 박원종은 불과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년 후에는 유순정이 53세로, 그리고 다음 해에는 성희안이 52세로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다. 실세(實勢)가 떠난 자리는 ‘위훈’ 공신이 차지하고 들어왔다. ‘사림의 청년 지도자’ 조광조가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것도 이들 위훈공신을 견제하려는 중종의 구상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19년 새해를 조광조는 종2품 대사헌으로서 맞았다. 국왕의 총애를 받는 대사헌이란 자리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년 이상 끌어오던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게 되었다. 모두 120명이 천거되어 28명이 급제했다. 이 중에는 이미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가 다시 응시한 사람도 여러 명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훗날 조광조의 눈치를 살폈다 하여 비판을 받게 된다. 이때 현량과에서 장원은 사헌부 장령을 지낸 바 있는 김식(金湜·1482~1520년)이었다. 조광조와 김식은 38세 동갑이었다. 김식이 조광조와 아주 가까운 데서 알 수 있듯이 28명 중 상당수가 ‘조광조 사람’이었다.
이로써 조정 내 사림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실제로 중종은 김식을 종3품인 성균관 사성으로 임명했다가 열흘 후 정3품인 홍문관 직제학으로 승진시켰다. 장령이 정4품인 것을 감안한다면 불과 보름 만에 2계급 특진이었다. 그런데도 사림들은 중종을 압박해 김식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정도 되면 중종 아니라 세종대왕이라도 기분이 상할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거듭 김식의 성균관 대사성 임명을 청하는 이조판서 신상의 요청에 대해 중종은 “부제학의 적임자를 기다린 후에 대사성에 임명하면 어떻겠는가?”라고 나름의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기세가 오른 사림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중종은 김식을 대사성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종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중종이 원했던 것은 왕권(王權) 강화였지 또 다른 신권(臣權) 세상을 노리는 사림의 집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훈 삭제
마침내 10월 대사헌 조광조가 칼을 뽑았다. 대사간 이성동과 함께 위훈 삭제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반정 3훈’은 세상을 떠났지만 가짜 공신들은 여전히 중앙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국공신 1등에 올랐던 홍경주는 살아 있었다. 중종은 훈구와 사림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는지 모른다. 조광조는 이 점을 과소평가했다. 내친김에 훈구의 뿌리를 통째 뽑아버리려 했다. 훈구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조광조는 11월 일곱 차례의 주청을 통해 위훈 삭제를 관철시켰다. 2, 3등 공신 일부와 4등 공신 전원이 훈작(勳爵)을 삭탈당했다. 전체의 4분의 3에 달하는 76인의 훈작이 날아갔다. 당위(當爲)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반동(反動)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훈구의 전횡도 싫었지만 사림의 독선(獨善)에도 중종은 넌덜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위훈 삭제가 이뤄진 지 불과 4일 만에 훈구파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중종의 생각이 반(反)사림으로 돌고 있음을 간파한 두 사람이 있었다. 남곤(南袞·1471~1527년)과 심정(沈貞·1471~1531년)이 그들이다. 남곤은 묘하게도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그 뿌리로 보자면 사림파였다. 심정은 정국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가 위훈을 삭제당해 훈작과 토지, 노비를 하루아침에 빼앗긴 주인공이었다. 두 사람은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의 아버지이기도 한 정국공신 1등 홍경주를 찾아갔고 홍경주도 두 사람의 사림 제거론에 쉽게 동의했다.
홍경주는 딸 희빈 홍씨를, 심정은 자신과 가까운 경빈 박씨를 통해 중종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백성들이 모두 임금보다 조광조를 더 좋아한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희빈 홍씨는 아버지의 밀명에 따라 비원의 나뭇잎에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고 꿀로 써놓은 다음 벌레가 갉아먹은 것을 중종에게 갖다 바치기도 했다. 조(趙)씨, 즉 조광조가 곧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것을 중종이 진심으로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되는 두 후궁의 참소(讒訴)에 불안감은 더해갔을 것이다.
기묘사화
결국 중종은 당파를 형성하려 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광조 일파를 잡아들인다. 처음에는 국문도 않고 죽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단 조광조·김정·김구·김식·윤자임 등을 옥에 가두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와 김정·김구·김식 등은 사형을 시키기로 했으나 중추부 영사 정광필이 눈물로 호소하여 일단 능주로 유배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훈구파의 김전(金詮·1458~1523년), 남곤, 이유청(李惟淸·1459~1531년)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올라 유배 가 있던 조광조 일파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중종을 설득했다. 결국 한 달 후인 12월 20일 조광조에게 사약(賜藥)이 내려왔다. 기묘사화의 시작이었다. 당시 기묘사화를 지켜보는 정광필의 입장은 중종 14년(1519년) 11월 6일 중종 앞에서 한 말 속에 그대로 들어 있다.
“저 사람들은 임금께서 다 뽑아서 현요(顯要)의 반열에 두고 말을 다 들어주셨는데 하루아침에 죄를 주면 이는 함정에 빠트리는 것과 같습니다.”
논란 끝에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던 김식은 선산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사약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으로 피했다가 목을 매 자살했다. 훗날 영의정에 오르는 김육(金堉)이 그의 증손자다.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폐비(廢妃) 신씨 복위 논쟁을 유발했다가 고초를 겪은 후 조광조의 집권 후 관직에 나와 형조판서에까지 올랐던 37세의 김정은 제주도로 안치되었다가 1521년 사약을 받았다. 아산으로 귀양을 갔던 기준(奇遵·1492~1521년)은 김정과 같은 무렵 사약을 받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조카가 선조 때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기대승(奇大升)이고 아들은 기대항(奇大恒·1519~1564년)이다. 사화(士禍)의 피바람으로 조선의 사림은 다시 깨어나기 힘든 깊은 잠에 빠져들어야 했다.
당시 정광필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그의 신도비가 잘 압축해서 기록하고 있다.
〈기묘년(己卯年·1519년, 중종 14년)에 두세 명의 신하가 거짓으로 벌레 먹은 나뭇잎과 참서(讖書)를 만들고는 액정(掖庭·후궁 경빈, 박씨를 말함)을 통해 몰래 아뢰어 천총(天聰)을 의혹시켰다. 그러고는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자, 천위(天威·임금의 위엄)가 진동하여 앙화(殃禍)를 장차 예측할 수 없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조정의 대사(大事)를 수상(首相·영의정인 정광필을 말함)이 알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공을 불렀는데, 공이 상(上) 앞에 이르러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구원하여 화해시키려 하자 상이 진노하여 일어나 버렸다. 이에 공이 상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면서 눈물이 말을 따라 흐르자 상 또한 느껴 깨닫고서 마침내 부월(斧鉞·사형의 형벌)을 너그러이 했으니 이는 공의 힘이었다.〉
정광필은 국량(局量)이 크고 바른 재상이었다.'
權奸 김안로와의 충돌
두 번째 위기는 당대의 권간(權奸) 김안로(金安老·1481~1537년)와의 충돌에서 찾아왔다. 처음에 김안로가 아직 현달하지 않았을 때 정광필이 그를 ‘간사한 사람’으로 지목한 바 있었다. 그가 임금과 인척이 되자 내전(內殿) 세력에 의지하여 호곶(壺串)의 목장을 차지해 전답(田畓)을 만들려고 했다. 정광필이 태복시 제조(太僕寺 提調)로 재임하면서 법을 끌어대어 허락하지 않자 또 임금의 명령이라고 일컬으면서 반드시 그곳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정광필이 굳게 거부하고 따르지 않자 김안로는 앙심을 품었다. 김안로가 폄척(貶斥·참소하여 벼슬을 박탈함)되어 지방에 있을 적에 그를 방환(放還·귀향보낸 죄인을 돌려보냄)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정광필이 또 자주 그 일을 중지시켰다. 이윽고 김안로가 권력을 쥐게 되자 사사로운 원한을 복수하고자 꾀하여 조정에 화근(禍根)을 빚어냈는데 정광필이 재상인 이행(李荇)에게 말하기를 “김안로는 결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원한을 쌓아 온갖 방법으로 공을 함정에 빠뜨렸다. 결국 정광필은 영의정에서 물러나 중추부 영사가 됐다. 실권(實權)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김안로의 계략에 의해 1537년 유배를 떠나야 했다.
다행히 6개월 만에 김안로 세력이 패망하는 바람에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중추부 영사를 맡았는데 그가 한양으로 돌아올 때의 모습과 더불어 그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신도비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서울로 들어오던 날에 도성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구경하느라 저잣거리가 텅 비었으니, 마치 사마광(司馬光)이 낙양(洛陽)에서 궁궐로 나아오던 때에 조야(朝野)가 목을 빼고서 그가 재상으로 복직하는 것을 바라보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질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으니 무술년(戊戌年·1538년, 중종 33년) 12월 갑신일(甲申日)로 춘추는 77세였다.〉
정광필은 바르고 곧았으며 이재(吏才)와 인품을 겸비해 굽은 자를 물리치고 곧은 자를 치켜 올리려 했다. 나라의 중대한 일을 당해서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신도비는 그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했다.
〈기국과 도량이 넓고 크며 공명정대한데다가 학문으로 보충하여, 뜻하지 않은 좌절이나 굴욕에도 일찍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늙어갈수록 더욱 깊었으므로 조야는 시구[蓍龜, 점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처럼 의지하였고 사림은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렀다. 몸이 국가의 안위(安危)와 경중(輕重)을 논하는 자리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었으니, 아! 공과 같은 분은 진정 이른바 사직(社稷)을 지탱하는 신하라고 하겠다.〉
정광필은 후배를 보는 눈도 밝았다. 명종 19년 윤(閏) 2월 24일 상진(尙震·1493~1564년) 졸기 일부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도량이 있었으며 침착하고 중후하여 남과 경쟁하지 않았다. 보는 사람들이 정승감으로 기대하였다. 어렸을 적에 멋대로 행동하면서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같은 재사(齋舍)의 생도에게 욕을 당했었다. 이에 드디어 분발하여 독서하면서 과거 공부를 하여 날로 더욱 진보되어 오래지 않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기묘년에 선비들이 몸가짐을 조심하는 것을 일로 삼았는데 상진은 그것을 미워하였다. 이때 반궁(泮宮)에 유학하면서 짐짓 관(冠)을 쓰지 않고 다리도 뻗고 앉아서 조롱하고 업신여기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광필을 찾아뵙고 나가니, 광필이 말하기를 “조정에 게으른 정승이 나왔다”라고 하였다.〉
상진은 실제로 1551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또 영의정으로 있을 때 좌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과 함께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썼다. 이준경을 지원하고 이끌어준 인물도 정광필이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공자(孔子)는 《주역》 곤괘(坤卦) 맨 아래 음효(陰爻)를 풀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일을 쌓은 집안[積善之家]에는 반드시 그로 인한 경사가 있고 좋지 못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그로 인한 재앙이 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하는 것은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일어나는 변고가 아니라 그렇게 된 원인이 점점 쌓이는 데도 그것을 분별하기를 빨리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易)에 이르기를 ‘[초륙(初六)은]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에 이르게 된다[履霜堅氷至]’라고 했으니 이는 대개 이치가 그러함을 말한 것이다.〉
정광필 형제 이름을 보면 다 신하의 본분과 관련이 있다. 보(輔), 필(弼), 좌(佐)가 그렇다. 정광필에게도 네 아들이 있었는데 겸(謙)이 돌림자로 노겸(勞謙), 휘겸(撝謙), 익겸(益謙), 복겸(福謙)이다. 노겸과 휘겸은 각각 《주역》 겸괘(謙卦) 밑에서 세 번째 양효와 네 번째 음효에 대한 풀이에 나오는 말이다. 노겸은 신하가 공로를 세워도 내세우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의 말이다.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하니[勞謙] 군자가 잘 마침이 있어[有終] 길하다.”
공자가 말하기를 “수고로움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공로가 있어도 자기 덕이라고 내세우지 않는 것은 (그 다움이) 두터움이 지극한 것이니 이는 자신이 공로를 세우고서도 다른 사람에게 몸을 낮추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움으로 말하자면 성대하고 예갖춤으로 말하자면 공손한 것이니 겸손함이란 공손함을 지극히 함으로써 그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스란히 신하의 도리이다. 휘겸은 두루두루 겸손하다는 말이다. 정광필 생애가 아들 이름에 담겨 있다.
자손 가운데 정승이 10명 넘게 나와
정광필의 아들 중 강화부사를 지낸 정복겸의 장남 정유길(鄭惟吉·1515~1588년)이 조부를 이어 선조 때 정승에 오른다. 정유길은 정광필이 세상을 떠나던 바로 그해에 문과에 장원급제했는데 이때 중종이 특별히 정광필에게 잔치를 내려주었다.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鄭昌衍·1552~1636년)도 광해군 때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해 벼슬을 내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이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다시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창연의 아들 정광성(鄭廣成)은 돈녕부 지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정태화(鄭太和·1602~1673년), 정치화(鄭致和·1609~1677년)가 효종과 현종 때 돌아가면서 정승 자리를 차지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정태화는 특히 당색(黨色)이 서인(西人)-노론(老論) 계통이면서도 붕당을 맺지 못하도록 늘 자손들을 단속했다. 정태화의 아들 정재숭(鄭載嵩·1632~1692년)도 우의정을 지냈다.
이렇게 해서 정광필 이후 세대에서만 재상이 10명 넘게 나왔으니 정광필의 여경(餘慶)은 참으로 깊다고 할 것이다.⊙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