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조선일보) 2023-11/ 11.01(수) “한국X도 아니면서” - 11.30(목) ‘역사상 가장 똑똑한 사진’
만물상(조선일보) 2023-11/
11.01(수) “한국X도 아니면서”

▲일러스트=양진경
개화기 조선엔 콜레라가 창궐했다. 사경을 헤매던 조선인들은 미국 선교사가 세운 병원에 몰려갔다. 그들이 병원에서 본 것은 앞선 의술만이 아니었다. 외국 의료진은 밤새워 환자를 돌봤고, 환자가 죽으면 울었다. 이방인이 흘리는 눈물을 본 조선인들은 “이 외국인들이 하는 것만큼 우리는 우리 가족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라며 놀라워했다. 의료 선교사 릴리어스 언더우드가 쓴 ‘상투 튼 이들과 함께한 15년’에 나오는 얘기다.
▶핼러윈 참사 1주기 행사에 참석한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을 향해 누군가 “한국 X도 아니면서 여기가 어디라고 와”라고 외쳤다. 인 위원장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 귀화한 한국인이다. 세브란스병원은 그가 평생 봉직한 직장이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그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그런데 단지 생김새가 다르다고 한국인이 아니라고 한다. 희생자 애도에 생김새가 무슨 상관인가.
▶국적과 민족은 별개 문제다. 하지만 한국인은 오랜 세월 ‘한국인=한민족’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살았다. 1950년대까지 폐쇄된 나라의 우물 안 개구리였던 탓이다. 한 나라에서 최대 다수인 민족이 인구의 85%를 넘으면 단일 민족국가로 보는데 한국은 이 비율이 96%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든다. 그러니 피부색이 다르면 ‘한국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종에 대한 시각도 비정상적이다. 얼마 전 백인 남성과 결혼해 유럽으로 여행 간 한국 여성은 “아무도 우리 부부에게 관심 없는데 한국 관광객들만 힐끔거리며 우리를 보더라”고 했다.
▶세계 많은 나라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국적과 인종을 다른 문제로 여긴다. 인종이 달라도 얼마든지 같은 국민으로 살고 나라도 함께 지킨다. 이스라엘군의 10%는 흑인이다. 영국 현 총리는 부모가 인도 출신이지만 자신은 ‘영국인’일 뿐 ‘인도 출신’이란 데에 별 관심도 없다고 한다. 지난 여름 삿포로에서 백인 여성이 일본어로 안내했다. “일본인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한국도 다인종 국가로 가고 있다. 2000년까지만 해도 연평균 34명에 불과했던 귀화자가 2010년부터 연 1만2000명을 넘는다. 외국인 200만명이 우리와 함께한다. 국민 의식도 바뀌고 있다. K팝 아이돌에 외국인이 처음 포함됐을 때 ‘한국인이 부르지 않은 노래가 K팝이냐?’던 팬들이 지금은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K팝 걸그룹 노래를 따라 부른다. 영국 출신 마이클 브린은 저서에서 “한국인은 국적부터 따진다”고 비판했다. 덧붙이면 피부색도 너무 따진다. 이젠 벗어날 때가 됐다.
11-02 “순천하세요”

▲일러스트=이철원
지난달 28일 흑두루미 360마리가 순천만 습지에 도착했다. 올가을에 날아올 수천 마리 가운데 일착으로 온 선발대다. 지난 3월 25일 순천만을 떠나 중국 쑹화강, 러시아 제야강을 거쳐 하바롭스크 추미칸 습지대에 머물다 7개월 만에 돌아온 것이다. 왕복 5000㎞의 긴 이동 경로를 생생하게 파악하기는 처음이다. 순천시가 지난 2월 국내 최초로 흑두루미에게 위치 추적기를 달았는데 이번에 온 360마리 중에 위치 추적기를 단 흑두루미가 포함돼 있었다.
▶2000년 이전에 순천만에 오는 흑두루미는 100마리도 안 됐다. 당시 순천의 시조(市鳥)는 비둘기였다. 흑두루미는 전 세계에 1만5000여 마리만 서식하는 멸종 위기종이다. 15년 전쯤 ‘천학(千鶴)의 도시’를 시정 목표로 순천만 습지에 있던 전봇대를 다 없애고 친환경 농법을 한 덕에 흑두루미 수천 마리가 찾는 명소가 됐다. 흑두루미 덕에 순천만 농민들은 ‘투잡족’이 됐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친환경 농법으로 쌀농사 짓고, 늦가을부터 겨울철 농한기에는 철새 먹이 주고 지키는 ‘흑두루미 영농단’으로 활약한다.
▶”여수에서 돈 자랑 말고, 벌교에서 주먹 자랑 말고, 순천에서 인물 자랑 말라”는 얘기가 있다. 순천은 역사적으로 호남 남부의 행정·문화·교육 중심지였다. 순천고는 판·검사 임용률이 높기로 손꼽히는 지방 명문고였다. 순천이라는 지명은 700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1897년 여수군이 신설돼 순천군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다른 행정구역이 됐지만 원래는 한 뿌리다. 지금도 여수산단의 정규직 1만4000여 명 가운데 넷 중 하나꼴로 순천에 산다. 광양으로 출근하면서 순천 사는 사람도 많다. 순천·여수·광양은 합하면 인구 70만이 넘는 경제권이다.
▶전남·전북을 잇는 전라선, 영남·호남을 잇는 경전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여서 그런지 개방적 성향도 강하다. 민주당 텃밭이지만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을 비롯해 민주당 아닌 국회의원이 당선되기도 한다. 이전 순천시장도 무소속으로 2번 당선됐다. 현 시장도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때마침 순천 출신의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까지 등장했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생태 도시를 목표로 철새 사는 순천만 습지와 사람 사는 도시 사이의 완충 지대를 만든 것이다. 10년 만에 다시 열린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1000만명 가까운 관람객을 모아 놀라운 성공을 보여줬다. “순천처럼 하세요”를 줄인 “순천하세요”라는 말이 회자된다고 한다. 이런 변화의 씨앗이 널리 퍼졌으면 한다.
11.03 뒤통수 맞은 하마스? ‘저항의 축’도 입으로만 싸우네

▲일러스트=양진경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하마스의 고위급 지도자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하마스를 대표해 외국 언론에 자주 나오는 무사 아부 마르주크는 며칠 전 알 자지라 TV와 인터뷰했다. “우리는 레바논 헤즈볼라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우리 형제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부끄러운 모습에 낙담했다”고 했다. 또 많은 외국인으로부터 일부 자치정부 인사들과 아랍 국가들이 비밀리에 서방에 “하마스를 제거하라”고 촉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의 전면전을 유도하려고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전면전의 조짐은 거의 없다. 레바논 헤즈볼라는 물론 이란 혁명수비대, 시리아 시아파 정권, 이라크 민병대 등 이스라엘에 맞서는 ‘저항의 축’이 말은 강하게 하는데 정작 행동은 별로 하지 않고 있다. 거기에 더해 일부 아랍국이 이번 기회에 하마스를 제거하려고 서방의 등을 떠밀고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얘기다. 사실이면 하마스가 같은 편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는 뜻이다.
▶팔레스타인의 양대 세력인 하마스와 자치정부의 내분은 뿌리 깊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과의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아예 ‘하마스 헌장’에 이스라엘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명기했다. 자치정부는 다르다.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독립국가를 건설한다고 주장한다. 2006년 총선, 2007년 내전을 거치면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서안지구는 자치정부가 통치하면서 갈등을 반복해왔다.
▶서안지구에서 자치정부도 인기가 없지만, 하마스에 대한 가자지구 주민들의 지지도 예전 같지 않다. 지난 8월 생필품,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는 이 지역 주민들이 하마스 규탄 시위에 나서자 하마스가 강제 진압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하마스 고위층의 족벌주의, 부패가 심하다”고 했다. 최근 가자지구 일부 주민들이 하마스의 극단주의에 반발, 하마스 지휘부의 은신처 등을 알려주며 이스라엘군에게 협조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번 사태의 확전 여부를 쥔 이란도 고심 중이라고 한다. 이란은 핵 개발로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데다 작년부터 여성 인권 탄압 문제가 커지면서 내부 사정이 좋지 않다. 엑스포 유치에 전력투구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면서도 행동에는 선을 긋고 있다. 내일이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한 달을 맞는다. 이스라엘의 가차 없는 반격에 대한 국제사회 여론과 중동 국가들의 동상이몽이 사태의 흐름을 결정지을 것 같다.
이하원 논설위원
11.04(토) 하차감 떨어뜨릴 ‘연두색 번호판’

▲일러스트=김성규
1967년 미국에서 화장품 방문 판매 기업을 운영하던 메리 케이 애시가 링컨차 대리점을 찾았다. “회사 차를 눈에 띄는 색상으로 맞추고 싶어요.” 핑크색 자동차가 기업 매출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된 애시는 1970년 ‘메리 케이 핑크 캐딜락’ 제도를 발표했다. 우수 사원이 2년간 차를 몰도록 했다. 영업사원이 광고사원까지 겸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법인차는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나라 한 제약사 대표 법인차에는 “황금변 자부심 비오비타’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화장품 방문판매회사 창업주인 매리 케이 애시 여사와 핑크 캐딜락. /매리케이
▶대당 3억원이 넘는 스포츠카인 ‘포람페’(포르셰, 람보르기니, 페라리)는 색상이 주로 빨강, 노랑 같은 원색이다. 양복 입고 타는 차가 아니다. 회사 임원의 업무용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롤스로이스, 람보르기니 등 초고가 자동차의 약 80%가 법인 소유다. 세금 혜택 받은 회삿돈으로 사서 배우자나 자식에게 주는 것이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법인차 모터쇼가 열린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스타항공 창업주인 이상직 전 의원도 법인 돈으로 딸에게 포르셰를 리스해 줬다. 국민 원성이 자자했다. 내년 1월 1일부터 8000만원 이상 법인 소유 자동차는 ‘연두색 번호판’을 붙인다. 소급 적용은 안 한다. 양심 마비 법인들이 ‘수퍼카 사재기’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비싼 차에서 운전자가 내리면 남들이 쳐다본다. 그 느낌을 ‘하차감’이라고 한다. ‘외제차를 사는 이유는 승차감이 아니라 하차감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젊은이들이 몇 년 치 연봉을 털어 외제차를 사는 가장 큰 이유로 ‘하차감’이 꼽힌다. 연두색 번호판은 법인차에 ‘연두색 제복’을 입히는 전략이다. 목표는 비싼 법인차를 사적으로 쓰는 사람들의 ‘하차감’을 저하시키는 것이다.

▲내년 1월 이후 공공·민간법인이 신규·변경 등록하는 8천만원 이상의 업무용 승용차에 부착되는 '연두색 번호판' 샘플. /연합
▶자동차 보급이 늘면서 자동차로 뽐내려는 사람도 증가해 왔다. 1990년대 ‘야타족’들은 국산차에 외제차 엠블럼을 달거나, 요란한 소리가 나게 ‘튜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차들이 도로 매너는 꽝이라 ‘양카족(양아치+자동차)’이라 불렸다. 수입차가 유행하면서 튜닝은 한물갔다. ‘하차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차감’의 핵심은 ‘내돈내산(내 돈으로 내가 샀다)’이다. 법인 업무와 무관한 사람들이 ‘연두색 번호판 수퍼카’를 타고 유흥가를 나다니면 ‘번호판 신상 털기’의 표적이 될 것이다. 국민들은 여기에 더해 매출액 대비 법인차량 등록 대수 제한 등 법인차 제도를 더 빡빡하게 운영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제가 벌지 않은 돈으로 잘난 척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11.06(월) 빈대의 글로벌한 귀환

▲일러스트=이철원
가난이 지긋지긋해 19세 때 가출한 현대 창업자 고(故) 정주영 회장은 인천 부두 막노동판에서 일했다. 노동자 합숙소에 묵던 그는 밤마다 빈대들이 달려들어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빈대들이 나무 침상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침상 네 다리에 세숫대야를 받치고 물을 부었다. 며칠 잠잠하던 빈대가 다시 들끓었다. 빈대들이 세숫대야를 피해 벽을 타고 천장까지 올라가 밑으로 수직 낙하하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정 회장은 머리를 쓰지 않는 아랫사람을 야단칠 때 ‘빈대만도 못한 X’라고 했다.
▶'사막의 여우’로 불린 독일 로멜 장군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의 가장 큰 적은 빈대였다”고 했다. 부하들이 침구를 햇볕에 말리고, 옷을 끓이고, 살충제를 사용했으나 쉽사리 잡히지 않자, 마지막엔 침대를 불 질렀다. 로멜은 자기 침대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빈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고 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태운다’는 말처럼 실제로 빈대로 인한 화재 사고가 적지 않았다. 조선일보 기사(1937년 8월 18일 자)엔 부산의 한 가정집에서 빈대를 잡으려 방 안에 휘발유를 뿌리고, 문밖에 모깃불을 피웠다가 불이 옮겨 붙어 가옥 20여 채가 불 타고, 15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사건이 기록됐다. 1950~1960년대에는 빈대약을 메고 다니면서 뿌려주는 행상인도 등장했다.
▶서민의 음식 빈대떡은 이름 때문에 달갑지 않은 오해를 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다고 ‘빈자(貧者)떡’이라는 설이 있고, 손님을 대접한다는 의미로 ‘빈대(賓對)떡’이라는 얘기도 있다. 가장 유력한 것은 중국 전병을 빙자(餠飣)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흘러 빈대떡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납작한 빈대의 모양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빈대의 길이는 6~9㎜ 정도인데 자기 몸 부피의 2.5~6배까지 흡혈할 수 있다. 모기보다 7~10배 많은 피를 빨지만, 지능이 떨어져 피가 잘 나오는 곳을 찾을 때까지 이동하면서 한 번에 수십 방씩 물어뜯곤 한다. 빈대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맹독성DDT 살충제 도입 등으로 사라졌다가 해외 교류가 늘면서 10여 년 전부터 다시 등장했다.
▶전근대적 비위생의 상징이던 빈대가 전 세계 곳곳에서 출몰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요즘 기승을 부리는 빈대는 화학적 공격에 대한 저항력까지 길러 일부 살충제에 대해선 거의 무적이 됐다고 한다. 코로나 봉쇄가 풀리면서 파리·런던·뉴욕은 물론 서울에도 빈대 신고가 늘고 있다.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11.07 ‘비욘드 유토피아’

▲일러스트=이철원
탈북민을 구출해 온 갈렙선교회 김성은 목사의 목엔 철심이 6개 박혀 있다. 2000년대 후반 탈북민을 돕기 위해 북·중 국경에 갔다가 두만강 빙판에서 넘어졌다. 9시간 수술을 받은 그는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한다. 그런 그가 초인적 힘을 발휘한 적이 있다. 2009년 중국발 밀항선을 타고 온 탈북 여성이 서해 한복판에서 김 목사가 탄 배로 옮겨 타는 순간 큰 파도가 쳤다. 그녀가 바다에 빠지려 할 때 두 손을 잡아 번쩍 들어서 살려냈다. 이 장면은 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에 담겨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김 목사가 지금까지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탈북민은 약 1000명. ‘천국의 국경을 넘다’에 이어 그의 탈북민 구출 과정이 생생하게 담긴 ‘비욘드 유토피아(Beyond Utopia·유토피아를 넘어서)’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북한이라는 가짜 유토피아를 탈출하는 사람들 얘기다. 올해 선댄스영화제 관객상, 우드스톡영화제 베스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미 전역 600여 곳에서도 개봉됐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빅터 차 한국석좌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본다면 전 세계에서 북한과 관련한 대화가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비욘드 유토피아의 미국인 제작자 3명 중 수미 테리 박사는 한국계다. 초등학생 때 이민 간 그는 CIA 한반도 정보 분석가가 됐다. 부시 정부에선 ‘대통령 일일 브리핑’에 보고가 가장 많이 반영되는 분석관으로, 오바마 정권 출범 후엔 NSC의 한국·일본·대양주 담당 국장으로 일하며 북한 문제를 고민했다. 영화 프로듀서인 아들 친구의 어머니와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다큐가 필요하다”고 의기 투합, 제작에 나섰다.
▶부산영화제는 지난달 이 영화를 초청 상영하며 “올해 모든 다큐 중 가장 통렬하고 충격적”이라고 평가했다. 외교부는 6일 김 목사, 테리 박사를 초청한 가운데 박진 장관과 직원들이 이 다큐를 단체 관람했다. ‘사람이 먼저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으면서도 북한 인권에 대해선 철저히 외면했던 전 정부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탈북민을 다룬 영화 ‘크로싱’에서 북에 두고 온 아들을 찾기 위해 애쓰는 아버지로 나오는 배우 차인표씨는 “비참한 사정에 처해 울고 있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함께 울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북한 실상과 탈북민들의 비참한 처지는 알수록 충격적이다. 이들을 돕는 것은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다. 하지만 ‘비욘드 유토피아’는 아직 국내 영화관 개봉 소식이 없어 안타깝다.
10.08 ‘공매도’ 400년 흑역사

▲일러스트=이철원
400년 전 네덜란드 증권거래소에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는 동인도회사가 상장됐다. 이 회사 창립자 중 한 명이 공금 횡령으로 쫓겨났다. 그는 복수할 요량으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주식을 빌려서 팔고 ‘희망봉 부근에서 배가 침몰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려 주가를 떨어뜨린 뒤 싼 값에 주식을 되사들여 차익을 얻겠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공매도였다. 놀란 동인도회사가 ‘사악한 투자’를 막아달라고 정부에 청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증시엔 늘 공매도가 존재했다. 뉴턴은 영국의 식민지 무역을 독점하던 남해주식회사에 투자했다가 “식민지에 금은 없고 벌레만 들끓는다”는 공매도 세력의 가짜 뉴스 공세 탓에 파산 위기에 몰렸다.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는 “공매도를 반역죄로 단죄하겠다”고 선포했다. 미국 대공황 당시 공매도가 들끓자 미 정부는 공매도 때 직전 거래가격보다 더 낮은 가격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업틱룰(uptick-rule)을 만들었지만 공매도를 근절하진 못했다.
▶2021년 미국의 게임스톱 사건으로 공매도가 다시 핫 이슈로 부상했다. 부실 덩어리 게임 유통업체 게임스톱의 주가가 폭등하자 헤지펀드들이 공매도에 나섰다. 이에 반발한 개미들이 “헤지펀드를 혼내자”면서 주가를 끌어올렸다. 다급해진 헤지펀드들이 공매도 구멍을 메우는 과정에서 50억달러 이상 손실을 봤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동학개미들의 집단 청원에 문재인 정부가 공매도를 1년 이상 전면 금지시켰다.
▶공매도는 투자 위험을 먼저 알리는 ‘탄광 속 카나리아’ 역할도 한다. 2016년 영국 투자자들이 독일 핀테크 기업 와이어카드를 부패 기업이라며 공매도 공세를 펼치자, 회사 측은 ‘앵글로색슨의 음모’라고 반박했지만 얼마 안 가 분식회계가 드러나 파산했다. 스타벅스를 위협했던 중국 루이싱 커피의 회계 부정을 폭로하고, 니콜라 수소 트럭의 사기 행위를 밝혀낸 것도 공매도 투자자들이었다.
▶공매도가 혐오의 대상이 된 데는 심리적 요인이 크다. 누군가 공매도로 큰돈을 벌었다는 것은 누군가 크게 돈을 잃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매도 투자자는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상어 떼에 비유된다. 대공황 때 공매도로 큰돈을 번 유럽 투자자 코스톨라니는 “내가 돈을 버는 동안 친구들이 파산해 성공을 슬퍼해야 했다”면서 공매도 투자를 끊었다. 정부의 공매도 전면 금지 조치로 폭등했던 주가가 하루 만에 급락세로 반전하는 등 변동세가 이어지고 있다. 증시가 존재하는 한 공매도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것 같다.
11.09 암표상의 진화

▲일러스트=이철원
1997년 서울극장에서 PC통신 예매 시스템을 도입하기 전엔 극장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표를 사야 했다. 영화관 입구에 ‘만원 사례’ 팻말이 붙으면 옆구리를 찌르며 ‘표 있어요’라고 속삭이는 암표상들이 활개를 쳤다. 유능한 암표상은 흥행 가능성이 높은 영화를 선별하는 안목, 매표원을 구워삶는 사교력, 티켓 매수 가능성이 높은 데이트족을 골라내는 선구안 등 3박자를 두루 갖춰야 했다. A급 암표상은 1년에 집을 한 채씩 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즘 암표상의 핵심 경쟁력은 컴퓨터 매크로(macro) 프로그램 사용 능력이다. 매크로란 자주 사용하는 명령어를 키 하나에 묶어 자동 반복 작업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1990년대 PC 온라인 게임이 유행할 당시 게이머들이 게임 아이템을 싹쓸이할 때 많이 활용했다. 이후 대학교 수강 신청, 명절 기차표 예매, 공연 티켓 예매 등 선착순으로 기회를 잡는 곳으로 용도가 확장됐다. 요즘엔 캠핑장, 골프장, 테니스장 예약에도 매크로 기술이 동원되고 있다.
▶지난 6월 브루노 마스 내한 공연 때 예매를 시작하자 티켓 10만장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예매 창이 닫힌 뒤 중고 거래 사이트에선 ‘그라운드 구역 8연석(붙어 있는 자리 8개) 1억8000만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최근 가수 임영웅의 공연 표는 예매 시작 1분 만에 370만 접속이 몰렸다. 도처에서 수많은 매크로가 작동됐다는 뜻이다. 며칠 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티켓 예매도 예매 창이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매진돼 야구 팬들이 온라인 암표상을 단속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제도 결함도 있다. 암표 단속 근거법인 경범죄처벌법은 1973년 제정됐는데 ‘흥행장, 경기장, 나루터 등 정하여진 요금을 받는 곳에서 웃돈을 받고 입장권을 다른 사람에게 되판 사람은 2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의형으로 처벌한다’고 돼 있다. 온라인상의 암표 행위는 처벌 대상에서 빠져 있다.
▶암표 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공연기획사는 ‘본인이 본인 명의로 산 표’임을 입증해야 공연장에 입장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동원한다. 그러나 암표상들은 암표 구매자가 원래 구매자인 것처럼 아이디를 조작하는 ‘아옮(아이디 옮기기)’ 서비스를 개발해 방패를 뚫고 있다. 내년 3월부턴 매크로를 이용해 사재기한 공연 티켓 판매를 금지하는 공연법 개정안이 시행되지만 암표상들은 고수익 장사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콘서트 티켓은 무기명 채권에 가까운 만큼 미국처럼 예매 후 티켓을 자유롭게 판매하게 하고 세금을 물리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11.10 ‘핫플’로 변신하는 코리아타운
태영호 의원의 아내 오혜선씨는 책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에서 “런던에 살 때 한인 타운 뉴몰든(New Malden)에 가는 날이 제일 좋았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먹고 싶었던 고향 음식들이 거의 다 있었고, 특히 한국 드라마는 여태껏 살면서 누려보지 못한 신세계였다”고 했다. 오씨는 “한인 마트에 다니는 것은 큰 처벌 감이었지만 런던에 체류하는 내내 그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며 “자유로운 그들의 말과 행동을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곤 했다”고 했다. 오씨는 뉴몰든에 다니며 탈북의 꿈을 키운 셈이다.

▲일러스트=이철원
▶런던 남서부 외곽에 있는 뉴몰든은 2만명 이상의 한인이 모여 사는 유럽 내 최대 한인 타운이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8일 이곳을 방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영 수교 140주년에 즈음해 영국을 국빈 방문(20~23일)하기에 앞서 진행한 사전 이벤트 성격이었다. 뉴몰든 인근엔 탈북민 700~1000명도 모여 살고 있다. 찰스 3세는 이날 탈북민들도 만났다.
▶뉴몰든만 아니라 세계 주요 도시엔 한인 타운이 없는 곳이 드물 정도다. 가장 큰 곳은 미국 LA 코리아 타운이다. 현재 LA 코리아 타운과 그 주변에 60만 안팎의 교민이 살고 있다. 1960년대 만들어지기 시작해 197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가요 ‘나성에 가면’이 이 즈음인 1978년 나온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이역만리 LA로 떠나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달라는 내용이다.
▶과거 해외 코리아 타운은 낙후된 곳이 대부분이었다. 오래전 뉴욕 맨해튼 코리아 타운에 갔을 때 예상보다 허름한 모습에 실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예전 얘기가 됐다. 지금 뉴욕 코리아 타운은 한국의 대형 프랜차이즈와 고급 한식 음식점 등이 즐비한 ‘핫 플레이스’로 변신했다.
▶도쿄의 코리아 타운 신오쿠보역 일대도 한국에서 진출한 유명 프랜차이즈를 중심으로 한 거대 쇼핑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 이쿠노 코리아 타운은 드라마 ‘파친코’에서 선자가 김치를 팔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일자리를 찾아온 조선인들이 이 일대에 모여 살았다. 당시 지명은 ‘돼지 치는 들판’이란 뜻의 이카이노(猪飼野)였다는데, 지금은 한류 기념품 가게, 한국식 카페가 즐비한 곳으로 상전벽해로 바뀌었다. 700만 명 재외동포의 삶의 터전인 한인 타운은 한국의 세계적 위상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곳이다. 최근 한국의 성장과 BTS와 한국 드라마 등 한류 붐 영향으로 코리아 타운들이 번화가로 변신하고 있다는 소식이 반갑다.
11.11(토) ‘실시간 통역’ 스마트폰

▲일러스트=박상훈
몇 년 전 스페인의 호텔에서 웃기는 장면을 봤다. 생수에 영어, 불어, 한국어로 안내문을 붙여 놨는데, ‘아직도 물’이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탄산이 없는 물이란 뜻의 영어 ‘still water’를 구글 번역기가 오역한 탓이었다. 지난달 말 포르투갈 리스본에선 아제르바이잔 출신 관광객이 석류 음료를 주문하려고 러시아어로 석류(granat)를 입력했더니 포르투갈어 ‘granada’로 출력되었다. 그대로 냅킨에 적어 웨이터에게 건넸더니 무장 경찰이 들이닥쳐 수갑을 채웠다. Granada가 포르투갈 말로 ‘수류탄’이란 뜻이었기 때문이다.
▶실시간 자동 통역기는 ‘바벨탑의 저주’로 언어 장벽을 가진 인류의 숙원 중 하나다. ‘스타트렉’ 시리즈에선 지휘봉 모양 만능 통역기가 나오고, ‘설국 열차’에선 한국인 주인공이 휴대용 통역기를 통해 외국인과 한국말로 대화한다. SF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동시 통역 생물인 바벨 피시가 등장한다. 귀에 바벨 피시를 넣으면 어떤 외계인 언어도 이해할 수 있다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실시간 통역기의 기술 장벽은 화상 전화나 레이저 총보다 휠씬 높았다.
▶2000년대 초 삼성경제연구소는 국가 프로젝트로 ‘자동 통역기’를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영어를 배우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삼성종합기술원이 유선전화에서 한국어로 말하면 일본어로 통역해 들려주는 한·일 자동 통역 서비스를 선보였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앱 기반의 자동 통역 서비스를 개발, 인천공항 등에서 시연했지만 서비스 대중화엔 이르진 못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해결사로 등장했다. 인간 뇌를 본뜬 인공 신경망이 통역·번역을 기계 학습해 속도와 정확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있다. 구글 어시스턴트, 네이버 파파고를 활용하면 동시 통역 기능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구글 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하고 클라우드 기반이라 통역에 시간 지연 문제가 생기는 점, 대화 내용 보안 문제 등이 약점으로 지적돼 왔다.
▶삼성전자가 내년 초 출시할 갤럭시 스마트폰 신제품에 생성형 인공지능(AI)에 기반한 ‘실시간 통역 기능’을 탑재한다고 발표했다. 클라우드가 아니라 스마트폰에 내장된 AI 반도체가 통역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정보 처리 속도가 빠르고 대화 내용이 외부로 샐 염려도 없다는 것이다. 해외 IT 매체들이 “갤럭시 AI를 기대하시라”며 앞다퉈 보도하고 있다. 실시간 통역기의 게임 체인저가 됐으면 좋겠다.
11.13(월) AI가 부활시킨 비틀스

▲일러스트=박상훈
스웨덴의 전설적인 팝그룹 아바(ABBA)가 해체 39년 만인 2021년 재결합했다. 70대 노인이 되어 돌아온 네 사람을 많은 팬이 반겼다. 컴백하며 내놓은 신곡은 반나절 만에 조회 수가 100만회를 넘어섰다. 영국 출신 비틀스(Beatles)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뭉쳤다. 이달 초 발표한 신곡 ‘나우 앤드 덴’은 신곡인데도 멤버 넷 중 고인이 된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까지 참여했다. 소식이 알려지며 단숨에 영국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해체 1년 전인 1969년 마지막으로 1위를 한 지 54년 만이다.
▶반세기 전 해체되고 두 명은 고인이 된 비틀스가 마술처럼 신곡을 낼 수 있었던 것은 AI의 음성 복제 기술 덕분이다. ‘나우 앤드 덴’은 당초 앨범 ‘리얼 러브’를 만들 때 함께 수록하려 했지만 존 레넌의 목소리가 피아노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외됐었다. 그런데 AI가 레넌의 목소리를 반복 학습한 뒤 그의 목소리를 피아노 음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하며 30대 청년 레넌과 80대인 폴 매카트니가 함께 노래하게 됐다. AI가 현실에는 없는 새로운 비틀스를 창조한 것이다.
▶AI의 음성 복제 기술은 1984년 영화 ‘터미네이터 1′에서 터미네이터를 피해 도망가던 여주인공이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에서 일찌감치 예고됐다. 터미네이터가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랑한다”는 말로 경계심을 푼 뒤 그녀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낸다. 지금은 3초 분량의 목소리만 있으면 AI가 이를 학습해 존 레넌을 부활시켜 노래하게 하고 터미네이터처럼 남의 목소리로 대화도 할 수 있다.
▶AI는 외모와 표정도 복원한다. 1970년대 영화 ‘스타워즈’에서 주인공 루크 역을 맡았던 배우 마크 해밀은 2019년 속편에 출연할 때 60대 후반 노인이었다. 그런데 AI가 해밀의 젊은 시절 목소리뿐 아니라 표정까지 학습해 화면 속 해밀을 청년으로 되돌려 놨다. 마냥 반가운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 배우들은 AI 배우가 실제 배우를 대체하는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며 지난 7월부터 최근까지 파업을 벌였다.
▶'나우 앤드 덴’은 ‘언제나 내게 돌아왔으면 해/ 가끔은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해~’라고 노래한다. 노래가 만들어졌을 당시엔 불가능했던 꿈이었는데 AI가 레넌의 목소리를 부활시키며 현실로 만들었다. AI는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허문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부른 노래의 1위 등극이 AI 시대 예술과 불멸의 의미를 묻게 한다.
11.14 나이가 벼슬

▲일러스트=이철원
얼마 전 버스로 출근하는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대뜸 “야, 비켜!”라고 반말을 했다. 나이 든 분이어서 그러잖아도 일어서려 했는데 어이가 없었다. 사회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나이만 많으면 덮어놓고 반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툼이 벌어져도 결국 “너 몇 살이야?”로 가는 게 한국 사회다. ‘나이가 벼슬’이라는 말도 한국에만 있을 것 같다.
▶이런 풍토의 배경에 유교적 상하질서인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학 전문가들은 장유유서는 사회 관계가 아닌 가족 내부의 위계질서만 다룰 뿐이고 그마저도 나이가 아니라 항렬을 기준 삼는 규범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이로 위아래를 가리는 잣대로 잘못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존댓말과 반말을 엄격히 구분하는 한국어의 특성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나이부터 묻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 못지않게 존댓말이 발달했는데도 웬만해선 서로 나이를 묻지 않는다. 일본어 반말은 상하 관계 규정이 아니라 친밀함을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매사 나이를 앞세우는 풍토는 사회적 비효율도 낳는다. 나이 적은 후배가 먼저 승진하면 멀쩡히 일할 수 있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퇴사하는 것은 사회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나이 따지기와 복잡하고 지나친 존댓말이 조직 내에서 생산적이고 솔직한 논의를 방해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출판사 민음사 편집부는 지난해 2월부터 동료 간에 반말로 대화한다. ‘예의 있는 반말’을 쓰자는 뜻에서 ‘평어체’라고 한다. 반말을 쓰되 ‘야’, ‘너’라고 하거나 이름 뒤에 ‘~야’로 부르지 않는다. 부장급인 박혜진 팀장은 “대리나 평사원도 나를 ‘혜진’이라 부르며 자유롭게 의견을 말한다”고 했다. 반말 쓰기의 사례를 소개하고 장점을 분석한 ‘말 놓을 용기’라는 책도 최근 출간됐다. 모두 경직된 나이 서열 문화를 깨기 위한 노력이다.
▶나이 서열 문화가 가장 깨지지 않을 곳이 정치권이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출판기념회에서 자신의 돈봉투 연루 의혹에 반발하면서 한동훈 법무장관을 겨냥해 ‘어린 X’이라고 했다. 논리적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나이로 상대를 비하한다.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일부러 예의를 갖추지 않음으로써 욕 보이려는 경우도 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아버지 뻘인 안철수 의원을 향해 ‘안철수씨’라고 부른 것도 한 예일 것이다.
11.15 “남친이 LG 팬이면 믿어도 좋다”

▲일러스트=박상훈
프로야구 LG 트윈스는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창단하자마자 우승했고, 4년 뒤에 또 우승하며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그 뒤 팬들에겐 인고의 세월이 이어졌다. 6668587667. 2003~2012년 LG의 시즌 순위를 연결한 숫자로, 길었던 암흑기를 상징한다. ‘엘린이(LG 어린이팬)’ 출신인 LG 주장 오지환은 고교생이던 2008년 소셜미디어에 썼다. “오늘도 LG가 어김없이 졌다. 8연패인가? 꼴찌로 내려갔다. 잘해야 할 텐데.”
▶2018년엔 ‘잠실 라이벌’ 두산에 1승15패를 당했다. 그래도 팬들은 고집스럽게 “무적 LG”를 외쳤다. “이번엔 가을 야구 기대하셔도 좋다”는 선수와 감독 말을 믿어보면서, 쌀쌀해지면 입는 ‘유광 잠바’를 우르르 구입했다가 장롱에서 꺼내보지 못한 채 또 한 해를 보내곤 했다. 포스트시즌 진출을 상징하는 번쩍거리는 잠바는 연민의 대상이 됐다. “남자친구가 LG 팬이라면 믿어도 좋다. 인내심이 강하고 우직한 성품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돌았다.
▶2019년부터 LG는 5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성적이 오르자 숨어있던 ‘샤이(shy) 팬’들까지 몰려들었다. LG는 2019년 국내 프로 스포츠 최초로 누적 관중 3000만명을 돌파했다.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올해는 120만명을 넘어섰다. 100만명 이상이 찾은 시즌은 올해가 15번째로, 국내 프로 스포츠 최다 기록이다. LG와 KT가 맞붙은 한국시리즈는 예매 대란이 벌어졌다. LG 팬들은 상대팀 응원석까지 점령해 노란 수건을 흔들며 쌓인 ‘울분’을 터뜨렸다.
▶30여 년간 응원해온 골수팬 중엔 50~60대 이상도 많다. 이들이 온라인 예매에 어려움을 겪자 자녀들이 나서 표를 구해주고 함께 경기장을 찾기도 했다. 다들 유광 잠바를 챙겨 입었다.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서울 종로 한 주점에 모였다. LG 팬인 주인이 LG 관련 사진과 물건으로 가득 채워 박물관처럼 꾸민 공간으로, 이곳마저 경기 몇 시간 전부터 자리가 꽉 차 발걸음을 돌린 이가 많았다.
▶LG는 마침내 팬들의 29년 한을 풀어줬다. 그토록 마음 졸이고 실망한 날이 많았건만 팬들은 “선수들이 고맙고 야구가 삶의 희망”이라며 눈물 흘렸다. 염경엽 감독은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내년에도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이 모습을 부럽게 바라본 이들이 있었으니, 각각 31년과 24년째 우승을 기다려온 롯데와 한화 팬들이었다.
11.16 “김정은은 사람 잘못 골랐다”... 윤청자·이래진의 복수도 계속된다
‘6·25 납북피해자 명예회복법’이 2010년 국회를 통과한 것은 135㎝ 키의 척추장애인 이미일씨 덕분이었다. 두 살 때 아버지가 납북된 그는 허약한 몸으로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총 2346쪽의 납북 사료집을 만들어 호소했다. 당시 그를 만났을 때 “북한의 납북 범죄를 국제사회에 제기해서 ‘북한은 범죄자’라고 압박해야 한다”고 말한 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15일은 일본 중학생 요코다 메구미가 하굣길에 북한으로 끌려간 지 46년이 된 날이었다. 기시다 일본 총리는 이날 다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납북된 날에 맞춰 일본 총리가 사과할 정도로 메구미는 납치 피해자의 상징이 됐다. 그 배경엔 끌려갈 때 손톱 밑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선실 벽을 긁어가며 울부짖은 딸을 하루도 잊지 않고 북한 정권을 규탄해 온 부모가 있다. 2020년 메구미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는 쌍둥이 남동생이 어머니를 도와 구출 활동에 진력하고 있다.
▶천안함 폭침 전사자 민평기 상사의 모친 윤청자 여사는 천안함 좌초설이 제기될 때마다 온몸을 떤다. 2020년 현충원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에게 “(천안함 폭침이) 누구 소행인가 말씀 좀 해 달라”고 따진 분이 윤 여사다. 그는 아들의 죽음으로 받은 보상금, 성금을 모아 약 1억원을 해군에 기부했다. 새롭게 진수된 천안함에 그 돈으로 구입한 기관총이 달렸다. ‘3·26 기관총’으로 불린다. 폭침일을 뜻한다.
▶15살 때인 1967년 아버지가 납북된 최성용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도 끈질기게 북한의 만행을 폭로해 왔다. 그는 “납북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북한에 맞서 이재근씨를 비롯한 납북자, 탈북자들을 구출해 왔다. 요코다 메구미가 한국인 납북자와 결혼해 딸을 낳은 사실을 파악, 북한을 궁지에 몬 것도 그였다. 서해에서 표류 중 북한군에 의해 사살된 후 소각된 공무원 이대준씨의 형 이래진씨도 투사로 변했다.
▶북한에 억류됐다 숨진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부모가 미국 은행에 동결된 북한 자금 220만 달러를 회수했다고 한다. 미 재무부가 북에 협력한 러시아 극동은행 자금을 동결하자, 소송을 제기해 받아낸 것으로 김정은에게 또 한 번의 타격을 가했다. 지금 북한의 재외공관들은 운영 자금이 없어서 줄줄이 문을 닫는 상황이다. 웜비어 부모는 독일 주재 북한 대사관이 더 이상 호스텔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도 성공했다. “김정은은 사람을 잘못 골랐다. 죽을 때까지 악랄한 정권과 싸우겠다”고 했던 결의를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11.17 K 치킨

▲일러스트=이철원
국내 치킨 브랜드 BBQ가 뉴욕 맨해튼의 32번가와 인근 한인 타운의 치안 개선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뉴욕경찰국(NYPD)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코로나 시기에 미국의 길거리 치안이 악화됐을 때 뉴욕 경찰관들에게 15%씩 할인해줬다. 경찰관들이 매장을 더 자주 찾자 범죄 예방 효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인맥보다 치맥이다!’ 지난 8월 말 대구에서 열린 ‘치맥(치킨+맥주) 페스티벌’에 이런 깃발이 나부꼈다. 치킨을 하느님에 빗대 ‘치느님’이라고 부르는 젊은 층을 비롯해 닷새간 100만명의 인파가 몰릴 정도로 우리나라는 치킨을 즐겨 먹는다. 사실 프라이드 치킨의 원조는 미국이다. 미국 남부 지역에서 흑인 노예들이 닭을 튀겨 먹던 데서 유래했다. 전 세계에 대중화시킨 주역도 1952년 창업한 미국의 치킨 브랜드 KFC(켄터키 프라이드 치킨)다. 그런데 요즘은 “KFC가 코리아 프라이드 치킨의 약자”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한국식 치킨이 해외에서 인기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치킨 대란’이 벌어졌다. 경기 시작 전에 치킨을 주문했는데 끝나고서야 배달될 정도로 주문이 몰렸다. 돼지나 소고기보다 저렴한 닭은 부동의 배달 음식 1위다. 우리 치킨이 해외에 알려진 건 드라마 덕분이다. “저는 치맥에 의존해요. 우울할 때는 늘 치맥을 찾곤 하죠.” 9년 전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여주인공 전지현이 이렇게 말하며 치킨에 맥주 마시는 모습이 아시아 각국에 퍼졌고 ‘K치킨’은 일약 유명해졌다.
▶우리나라는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이 연간 50~60㎏에 육박하는 이스라엘, 미국, 말레이시아에 비하면 절반도 안된다. 그런데도 한국식 치킨이 경쟁력을 갖게 된 건 자영업자가 유독 많은 경제 구조와 관련이 깊다. 1997년 외환위기로 직장에서 쫓겨난 가장들이 상대적으로 창업 비용이 적게 드는 치킨집을 열면서 급속히 늘어났다. 치킨집의 20년 흥망성쇠를 봤더니 불황으로 실업자가 늘어난 2008년과 2013년에 치킨집 개업 숫자도 늘었다. 현재 영업 중인 전국 치킨집은 7만9000개가 넘는다. 전 세계 119국에 진출한 맥도널드 매장 수의 2배도 넘는다.
▶치킨집은 매년 수천 개 문 닫는 ‘자영업자의 무덤’으로도 불린다. 전국의 치킨집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프랜차이즈 기업형으로 운영된다. 국내에 치킨 브랜드만 709개, 가맹점은 3만2000개에 육박한다. 그만큼 치열하게 경쟁하고 명멸하면서 다양한 메뉴를 개발한 덕에 해외까지 진출해 ‘K치킨’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1.18(토) AI가 대체할 직업 1순위, 의사

▲일러스트=김성규
성적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로만 몰리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런데 한국은행이 직업별 인공지능(AI) 노출 지수를 근거로 AI로 대체되기 쉬운 직업을 분석한 결과, 의사가 상위 1%의 위험 직업으로 꼽혔다. 의료계에선 의사의 AI 대체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수의사, 간호사, 치과 의사, 약사는 상대적으로 AI로 대체되기 어려운 직업이었다. 같은 의료 직종 안에서도 머리뿐 아니라 손까지 많이 써야 하는 직업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이다.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는 전 세계 일자리의 18%가 생성형 AI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최고급 두뇌인 과학자도 예외가 아니다. 구글이 만든 단백질 구조 예측 AI ‘알파폴드’는 1년 만에 지구 생명체 100만 종이 만들어 내는 2억 개의 단백질 3D 구조를 분석, 전 세계 생명공학자들의 수십 년 치 일감을 없애버렸다. 종전엔 1개 단백질 구조를 분석하는 데 수개월, 10만 달러 이상 비용이 들었다.
▶구글의 날씨 예측 AI 모델 ‘그래프 캐스트’는 전 세계 기상예보관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딥러닝 기술로 수십 년간의 날씨 패턴을 학습한 그래프 캐스트는 해당 지역 현재 날씨와 6시간 전의 날씨 정보만 입력하면 1분 안에 향후 열흘 치 날씨 예보를 보여준다. 현재 날씨 예보 정확도가 가장 높다는 유럽기상예보센터(ECMWE)와 승부를 겨룬 결과, 99.7% 승률로 AI가 이겼다.
▶인공지능의 일자리 위협을 조명한 ‘로봇의 지배’의 저자 마틴 포드는 AI로부터 안전한 직업으로 배관공·전기공 같은 숙련공을 꼽는다. 하지만 테슬라가 개발 중인 사람 손 기능이 탑재된 로봇 ‘옵티머스’가 나오면 숙련공도 안전지대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로봇이 등장하면 공장, 음식점, 수퍼마켓 등의 육체노동 일자리도 인공지능 로봇에 뺏길 것이다.
▶의사들은 IBM의 의료용 AI 왓슨의 실패 사례를 들어 의사가 AI에 일자리를 뺏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왓슨은 나라마다 다른 임상 데이터를 제대로 학습하지 못해 오진이 잦았다. 국내 한 의료 AI 기업이 스웨덴의 유방암 환자 5만 명의 정보를 뽑아 ‘전문의 2명’, ‘AI+전문의’, ‘AI 단독’으로 나눠 유방암 진단 정확도를 비교했더니, ‘AI+전문의’ 조합의 정확도가 가장 높았다. AI의 데이터 분석 기술과 사람의 판단 능력이 결합할 때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다소 위안을 주는 결과지만 AI는 몇 달, 몇 년 뒤엔 또 다른 차원으로 가 있을 것이다.
11.20(월) “드론만 제발 띄우지 말라”

▲일러스트=이철원
지난해 7월 이른 아침 테러 단체 알 카에다의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아프가니스탄의 은신처 발코니에 잠시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상공에서 나타난 미군 드론에서 발사된 ‘닌자 미사일’ 헬파이어에서 6개의 칼날이 펼쳐지며 그를 덮쳤다. 알자와히리는 즉사했다. 그의 가족들이 같은 건물에 있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드론 대 드론의 전쟁’으로 불린다. 양측 모두 드론을 주요 무기로 사용, 우크라이나 상공엔 매일 수 백대의 정찰·공격용 드론이 날아다닌다. 영국왕립합동군사연구소가 “매달 1만대 가량의 드론이 쓰이고 있다”고 분석한다. 우크라이나군은 약 500달러, 50㎝ 크기의 ‘가미카제’ 드론을 많이 쓴다. 러시아는 작전 반경 약 2000㎞의 이란산 자폭용 무인기 샤헤드-136 드론을 주로 활용한다. 양측 모두 적군 탱크가 움직이면 5분 내에 드론을 띄운 후, 3분 내에 공격한다고 한다. “기갑부대가 질주하던 전쟁은 끝났다”는 평이 나온다.
▶중견 국가 중에서 ‘드론 시대’를 가장 잘 예측한 나라로는 단연 튀르키예가 꼽힌다. 튀르키예는 이스탄불대서 전자통신공학을 전공한 바이락타르가 20대부터 개발한 무인기를 2014년 실전 배치했다. 최근 개발에 성공한 스텔스 무인전투기 ‘크즐레마’는 터보 제트엔진을 장착, 공대공 전투까지 가능하다. EU 시민들이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증, 러시아군이 쩔쩔매는 무인기 ‘바이락타르 TB2′도 튀르키예가 만든 것이다.
▶미국의 드론 기술은 퀀텀점프를 하고 있다. 미국은 글로벌 호크, 프레데터에 이어 지난 9월 AI를 탑재한 무인 전투기 ‘XQ-58A 발키리’의 시험 비행 성공을 선언했다. 항속거리가 약 4000㎞인데, 제작비는 300만 달러에 불과한 것이 장점. 발키리는 유인기 F-35, F-22 와 한 팀이 되어 활동하다가 적진에 먼저 들어가 정찰하며 자체적으로 레이더망 파괴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인질 석방 협상에서 ‘가자지구 상공에 감시 드론 띄우기 중단’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드론을 통해 하마스의 움직임을 일거수일투족 파악, 공격해대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9·19 군사 합의로 군사분계선 기준 서부 10㎞, 동부 15㎞까지 우리 군은 무인기도 띄울 수 없다. 하마스와 마찬가지로 북측도 “드론만 제발 띄우지 말아 달라”고 매달렸던 모양이다.
11.21 점점 현실이 돼 가는 게임

▲일러스트=이철원
11년 차 미국 메이저리그 투수인 루카스 지올리토(클리블랜드 가디언스 소속)는 등판 전날 꼭 야구 컴퓨터 게임 ‘MLB 더 쇼’를 한다. 선발진과 유니폼, 구장을 실제 경기와 똑같이 설정하고 진지하게 버튼을 누른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통산 61승 62패의 이 투수는 “실제 경기에서 위기를 맞으면 전날 컴퓨터 게임 속에서 호투한 공을 떠올린다”고 했다. ‘라이언킹’ 이동국도 “축구 컴퓨터 게임은 이미지 트레이닝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자주 즐기고 있다”고 했다.
▶올 9월 출간된 머스크 전기에는 그의 스마트폰 게임 활용법이 나온다. 그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폴리토피아를 하며 휴식하고, 자신의 사업 계획을 정교화·고도화했다.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전략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게임을 통해 배웠다. 전기 작가 아이작슨은 “머스크에게 컴퓨터 게임은 ‘인생의 전략을 실천하는 은유적 전쟁터’”라고 했다.
▶지난 주말 서울 고척 스카이돔과 광화문에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롤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은 게임이 오락을 넘어 산업이 됐음을 보여줬다. 전 세계 게임 산업 규모는 322조4000억원에 이르고, 미 캘리포니아대 어바인과 스탠퍼드대에 전문 e스포츠 팀이 있을 정도다. 2019년 WHO가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면서 코너에 몰렸던 컴퓨터 게임은 이제 현실과 결합해 우리 삶을 바꾸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 분야다. 미 공군은 메타버스(3차원 가상 세계)를 기반으로 한 비행 게임을 실제 전투기 조종사 훈련에 사용한다. 조종사들은 게임 속 가상 세계에서 동료와 상호작용하는 법과 합동 전술을 익힌다. 이스라엘이 개발한 최첨단 장갑차 카르멜도 게임이 현실로 넘어온 경우다. 장갑차 조종석엔 파노라마 모니터와 게임 조이스틱이 있다. 장갑차 운전병은 게임을 하듯 조이스틱으로 모니터를 보며 탱크를 조종한다. 18~21세 운전병이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실제 게임 디자인을 적용했다고 한다.
▶게임은 정신 질환 치료법도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라크전 참전 군인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데 게임과 가상 현실이 활용된다. 당시 끔찍했던 전장 상황을 게임 속 가상 현실로 재구성하고 환자가 게임을 하면서 당시 상황과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테크 업계에선 가상 현실과 결합한 게임이 현실의 새로운 확장판이 될 것이라고 본다. 미래에는 현실과 게임의 구별이 모호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게임이 현실을 어떻게 보완하고 바꿀지 궁금하다.
11.22 AI 대논쟁 ‘두머 vs 부머’

▲일러스트=김성규
1960년대 공상과학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선 인공지능(AI) 컴퓨터 할(HAL)이 등장한다. 우주비행사가 자신을 불신하자 할은 우주 유영 후 복귀하려는 우주인에게 ‘굿바이’를 외치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1984년 영화 ‘터미네이터’에서는 AI가 핵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잿더미로 만든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사령관 ‘존 코너’를 중심으로 기계와의 전쟁을 벌이자, AI는 기계인간 암살자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 ‘존 코너’의 출생 자체를 막으려 한다.
▶1년 전 오픈AI가 챗GPT를 내놨을 때 사람들은 놀라운 성능에 감탄하면서 두려움도 느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대화형 AI ‘빙’은 뉴욕타임스 기자의 유도 질문에 넘어가 “핵무기 비밀 코드 훔치기 같은 것이 나의 궁극적 환상”이란 답을 내놨다. 빙은 “치명적 바이러스를 만들고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 때까지 논쟁하게 만드는 것” 등을 언급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AI의 폭주 위험성에 대해선 숱한 경고가 있었다. 일론 머스크는 “핵폭탄보다 위험할 수 있다”고 했고, 스티븐 호킹은 “AI가 인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AI 발전 속도에 놀란 전 세계 과학자 1000여 명은 모든 AI 연구소에 “GPT4(챗GPT 최신 버전)보다 더 강력한 AI 개발은 최소 6개월 동안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오픈AI 이사회가 창업자 샘 올트먼을 해고한 사건을 두고,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AI가 인류에게 실존적 위험이 된다’고 보는 ‘두머(doomer·파멸론자)’와 AI의 잠재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부머(boomer·개발론자)’ 간의 분열”이라고 보도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AI를 어느 선까지 개발하고,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파멸론자들은 AI가 발톱을 숨기고 있다가 인간이 전원 플러그를 뽑을 수 없는 환경까지 만든 다음 ‘디지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순간 인류의 운명은 AI가 좌우한다는 것이다.
▶스티븐 호킹은 AI가 인간 지능을 초월할 특이점(singularity) 도래 시점이 머지않은 만큼 “AI 통제를 위한 세계 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 6월 EU 의회는 세계 최초로 AI규제법 초안을 마련했다. 고위험 AI에 대해선 정부가 ‘불허’ 딱지를 붙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유럽이 자국 IT 기업을 견제하려는 속셈이 있다고 본다. AI의 생존 시나리오에 인류를 분열시키고 이간하는 방책까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11.23 영국 선교사들의 한국 사랑

▲일러스트=이철원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영국 의회에서 수교 140주년을 맞는 한영 양국의 인연을 언급하면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 독립유공자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스코필드 박사와 함께 선교사 존 로스를 거명했다. 대통령 연설은 미국 선교사들에게 가려 덜 주목받았지만 이 땅에서 인류애를 실현했던 영국 선교사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한반도에서 영국 선교사와의 인연은 비극으로 시작됐다. 영국 웨일스 출신의 로버트 토머스 선교사는 1866년 조선 선교의 꿈을 품고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대동강에서 조선군에게 붙잡혀 27세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친은 “내 아들을 죽인 조선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케 했다. 또 다른 선교사 존 로스는 “토머스 선교사의 뜻을 내가 이루겠다”며 자원하고 나섰다.
▶로스는 한글의 우수성에 가장 먼저 주목한 서양인이었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접한 한글에 매료돼 1877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을 발간했다. 교재를 펴내며 조선인도 생각지 못했던 한글 띄어쓰기를 최초로 도입했다. 독립신문이 시작한 한글 띄어쓰기보다도 19년이나 앞섰다. 최초의 한글 성경도 그가 펴냈다. 조선 선교에 관심 많았던 이들에게 1만5000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조선 알파벳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완전하다”며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도 힘썼다.
▶로스 말고도 여러 영국 선교사가 한국 사랑을 실천했다. 1910년 식민지 조선 땅을 밟은 여성 선교사 엘런 홉스는 과음과 흡연의 폐해로부터 조선인을 구하겠다며 거리 금주 캠페인을 펼쳤다. 학교에선 영어도 가르쳤다. 과로로 약해진 몸에 이질이 닥치자 이겨내지 못했고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묻혔다. 해방 후에도 도움은 계속됐다. 1966년 의료 선교사로 파견된 피터 패티슨 박사는 마산에 터잡고 척추결핵을 앓는 어린이 1만2000여 명을 무료로 치료했다. 기술 강습소를 열어 완쾌한 청소년의 자립도 도왔다.
▶패티슨 박사는 한국이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발돋움해 나가는 걸 보고 1982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80대 고령이지만 살아 있다면 한국 대통령의 영국 의회 연설 장면과, 영국 총리가 방산·바이오·반도체 등 한국의 유력 산업을 거론하며 “양국 협력을 확대하자”고 하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한 세기 전, 낯선 땅에 찾아와 희망의 씨앗을 뿌렸던 선교사들도 하늘에서 보며 뿌듯해했을 것 같다.
11.24 일본 위스키 버블

▲일본에서 판매 중인 위스키./닛케이 X(옛 트위터) 갈무리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도라지 위스키는 1950년대 밀수로 유통되던 일본 산토리의 ‘도리스 위스키’의 이름만 따서 만든 가짜 위스키였다. 부산 국제 양조장에서 소주에 색소를 넣어 만들었다. 상표 도용 시비 끝에 이름을 ‘도리스’에서 ‘도라지’로 바꿨다. 노랫말처럼 다방에서 도라지 위스키를 탄 위스키 티를 비싸게 팔았다.

▲일러스트=이철원
▶요즘 국내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 일본 위스키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몇 달 전 일본 여행을 갔다가 할인점 주류 코너를 찾았다. 직원이 필자를 보자마자 ‘히비키, 야마자키 아리마센(없습니다)”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이 술들을 찾으면 저럴까 싶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생각일까. 산토리가 내년 4월부터 히비키 30년, 야마자키 25년 소매가를 16만엔(약 140만원)에서 36만엔(약 315만원)으로 한 번에 125%나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이런 미래를 예상했을까. 일본 양조장집 아들이 스코틀랜드에서 양조법을 배워와 산토리 창업자와 손잡고 1929년 첫 일본 위스키를 선보였다. 일본 주당들은 “탄내(피트향)가 난다”고 외면했다. 산토리 창업자는 다케쓰루와 결별하고 피트향이 덜 나는 순한 위스키를 만들어 냈다. 고집 센 다케쓰루는 홋카이도로 가서 피트향 강한 위스키를 계속 만들었다. 일본이 위스키 강국이 된 것은 두 사람의 열정 덕분이다.
▶1990년대 버블 붕괴는 일본 위스키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생산량이 급감, 2008년에는 전성기의 20%대로 떨어졌다. 고심하던 산토리는 위스키에 탄산수를 섞는 ‘하이볼’을 고안, 새 수요를 창출해 냈다. 2015년 ‘야마자키 싱글 몰트’가 세계 1위 위스키로 선정되자 일본 위스키의 위상이 달라졌다. 수요가 급증, 위스키 원액이 부족해졌다. 산토리는 한정된 원액을 야마자키와 하이볼에 집중 투입하고, ‘히비키 17년’ 같은 제품은 출하를 중단했다.
▶공급 부족 탓에 일본 위스키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600년 역사의 스코틀랜드 싱글몰트 위스키보다 100년 역사의 야마자키가 더 비싼 몸이 됐다. 양질 원액은 이미 동이 났는지 2015년 이후엔 일본 위스키가 세계 최고 명단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히비키 21년’ 빈병이 20만원에 팔릴 정도로 ‘희귀품’ 대접을 받는다. 조만간 ‘재팬 위스키 버블’이란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11.25(토) 1987년생 대통령

▲일러스트=양진경
강력 범죄가 횡행하는 중남미 국가 에콰도르에서 35세 대통령이 탄생했다. 23일 취임한 다니엘 노보아 신임 대통령은 1987년생으로 이 나라 첫 30대 대통령이다. 그와 맞섰던 후보도 45세다. 에콰도르 대선이 3040 대결로 펼쳐진 배경엔 이 나라 국민의 절박한 변화 욕구가 있었다. 에콰도르는 인구 10만명당 살인 범죄 희생자가 25명으로 중남미에서 치안이 가장 나쁜 나라다. 올 상반기에만 3500명이 살해당했다. 지난 8월엔 유력 대선 후보마저 목숨을 잃었다. 안전을 공약으로 내건 역대 모든 대통령이 무능과 부패만 드러내고 치안 확보에 실패하자 “이번엔 젊은이에게 맡겨보자”며 투표장에 간 것이다.
▶40대 국가수반은 국제적으로 낯선 풍경이 아니다.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40대에 정상에 올랐다. 30대 집권자도 드물지 않다. 1985년생인 산나 마린은 2019년 34세로 핀란드 총리가 됐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대선에 승리했을 때 39세였다. 오스트리아 제바스티안 쿠르츠는 2017년 집권 당시 31세였다.
▶이들 나라 정치에서 젊음은 변화의 동의어다. 마린은 집권 당시 “성 평등이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며 국무위원 19명 중 12명을 여성에게 할당했다. 37세에 뉴질랜드 총리가 된 저신다 아던은 2009년 이후 출생자에게는 담배를 팔지 못하게 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금연법을 관철했다. 42세에 집권한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식민지 출신 유색인으로 영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라는 새 정치인상을 제시했다.
▶젊은 정치인의 등장을 돕는 제도적 장치도 발달해 있다. 핀란드 청소년기본법은 ‘청소년에게 지역사회의 단체 및 정책을 다루는 일에 참여할 기회를 반드시 줘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영국 보수당이 운영하는 청년 정치 조직 ‘영 컨서버티브(젊은 보수)’에는 25세 이하 청년 15만명이 활동한다. 소셜미디어 등 IT 환경은 젊은 정치 지망생이 돈과 조직력의 약세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줬다.
▶지난 반세기 세계 각국 정상의 나이는 지속적으로 젊어져 왔다. 유럽연합(EU) 27국 정상의 평균 연령은 1960년대 64세에서 2010년 58세로 내려갔다. 프랑스는 18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대선에 나갈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50대 장관이 ‘어린X’ 소리를 듣는다. 또 다른 젊은 정치인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소리를 듣는다. 30대 대통령과 총리가 변화를 주도하는 바깥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다.
11.27(월) 운동권 의전[儀典]

▲일러스트=이철원
1980년대 대학생 시절, 운동권 학생 조직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집회에 참석했다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을 들었다. 단상의 사회자가 외쳤다. “전대협 의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같은 학생인데 극존칭으로 부르는 게 거슬렸다. 몇 해 후 다른 대학에서 열린 전대협 집회엔 의장이 가마를 타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임금님 행차를 보는 듯했다.
▶전대협이 학생운동을 이끌던 1980년대 말~90년대 초 운동권엔 ‘운동권 의전(儀典)’이란 게 있었다. 학생 조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극존칭과 현란한 무대로 의장의 권위를 높였다. 이를 담당하던 곳은 전대협 사무국이었다. 의장이 들어오는 입구에 ‘문선대(문화선전대)’가 횃불을 들고 도열하거나 무대에서 ‘의장님을 우러러보네’ 같은 찬양가를 불렀다. 의장 출현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행사를 일부러 밤에 열기도 했다. 이런 전대협 사무국 출신 중엔 지난 정부 청와대 의전을 담당한 이도 있다.
▶전대협 의장 선출을 위한 대의원 총회장은 개인 숭배장을 방불케 했다. 각 후보 진영은 ‘의장님과 함께라면 죽음조차 감미롭다’ 같은 구호를 외치거나 ‘의장님을 어떠한 자세로 옹립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총회장엔 사수대라는 의장 경호 조직이 배치됐다. 의장이 선출되면 ‘의장님이 시키면 따르겠습니다’라는 충성 맹세를 하고 ‘의장님의 영도 따라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힘차게 안아오자’는 북한식 어투를 썼다. 민주 국가의 어떤 조직이 이런 식의 선거를 하나 싶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에서 운동권의 주축인 NL 주사파가 북한의 수령 체제를 흉내 내 전대협 의장을 숭배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전대협의 실질적 배후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보필했던 당시 의전비서가 책을 내고 지사 시절 그의 제왕적 행태를 공개했다. 안 전 지사가 ‘철옹성 같은 의전’을 원했다는 것이다. 수행 비서가 공관 경비 근무자에게 퇴근한 지사의 예상 도착 시각을 알려주면 공관 근무자는 미리 대문을 열어 놓고 정자세로 경례하며 영접했다. 예방접종도 간호사를 집무실로 불러 맞았다고 했다. 매사 왕처럼 살다 보니 성폭행 피해자에게도 “괘념치 말거라”라고 했을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운동권 의전 마인드가 빗는 정치권의 퇴행을 ‘봉건적 습속이 낳은 문화 지체’라고 설명했다. 민주화 운동권 출신 정치인 중에 ‘후레자식’ ‘감히’처럼 왕조 시대 상전이 아랫사람 나무랄 때나 하던 말을 쓰는 이가 있는 걸 보면 운동권의 권위적인 의전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11.28 범죄 가족의 책 판매
▲일러스트=이철원
2015년 일본의 연쇄 살인마가 회고록을 냈다. 범죄 당시 중학생이었던 그는 사건 파일의 ‘소년 A’를 필명으로 썼다. 자기 범행에 대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뉘우침은 없었다. 발간 사흘 만에 6만7000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보다 잘 팔렸다. 수억원을 벌었다. 앞서 그의 부모도 아들에 대한 회고록을 썼다. 다만 인세 전액을 피해자 위로금으로 내놨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미국 최초 여성 연쇄살인범 에일린 워노스는 남성 7명을 죽인 범행 과정과 불우한 삶을 적은 자서전 ‘몬스터’로 큰 인기로 끌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결국 형장의 이슬이 됐다. 아내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오 제이 심프슨도 자서전 ‘내가 했다면’으로 큰돈을 벌었다. 종교 지도자 오쇼 라즈니시가 1970년대 낸 책 ‘배꼽’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때 ‘살아있는 성자’라 불렸지만 살인 미수와 독극물 살포 혐의에 휘말려 비운의 말로를 맞았다. 연쇄살인마 강호순은 2009년 자신의 범행을 기록한 책을 내려 했다. “내 아들들이 인세라도 받게 하겠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아무도 책을 내주지 않았다.
▶학력 파문을 일으킨 신정아씨는 ‘4001′이란 자서전을 냈다. 출판사들이 억대 착수금을 제시하며 서로 책을 내주겠다고 경쟁했다. 그런데 반성 없이 미화 위주 내용이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처벌된 한명숙 전 총리는 자서전에서 “10년간 슬픔과 억울함으로 꾹꾹 눌러 진실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진실은 없고 변명뿐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장남은 2019년 아버지를 옹호하고 민주당을 비판하는 ‘트리거드’라는 책을 냈다. 한 달 만에 11만부가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하지만 공화당이 이 책을 대량으로 구매해 후원자들에게 나눠준 사실이 드러났다. 아버지 미화에 책 판매를 이용한 것이다.
▶조국 전 장관의 아내 정경심씨가 옥중 수기집을 출간했다. 남편과 딸에 이어 거의 온 가족이 책을 펴낸 것이다. 조 전 장관은 ‘조국의 시간’ ‘디케의 눈물’ 등으로, 딸 조민씨는 신변잡기성 에세이로 잇따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조 전 장관은 인세 수입만 8억원이 넘는다. 극성 지지층이 책을 사준 결과다. 정씨가 받은 옥중 영치금도 2억4000만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들 책에서 자신들 범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온 가족이 책 판매와 돈벌이 궁리뿐이다. 이런 가족도 있나 싶다.
11.29 웹스터 선정 올해의 단어는 ‘진짜’

▲일러스트=김성규
‘반항적인’이란 뜻의 독일어 ‘aufmupfig’는 사전에 없는 사투리였다. 1960년대 말 유럽을 휩쓴 ‘68혁명’ 시위 당시 청년들이 이 단어를 입에 올리며 독일 전역으로 번진 게 단어의 운명을 바꿨다. 독일언어학회가 사전에 등재하며 ‘올해의 단어’라는 표현을 썼다. 메리엄-웹스터, 옥스퍼드, 콜린스 등 유명 사전과 언어학회 등이 선정하는 ‘올해의 단어’의 시초였다.
▶쓰임만 증가한다고 뽑히는 것도 아니다. 정치·사회·경제적 함의를 지녀야 한다. 1998년 미국 방언학회가 뽑은 올해의 단어는 ‘e-’였다. e-mail(전자우편), e-commerce(전자상거래)라는 신세계를 주목했다. 2017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젊음’과 ‘지진’을 합성한 ‘유스퀘이크(youthquake)’를 골랐다. 정부가 주도한 브렉시트에 분노한 젊은이들이 그해 총선 때 대거 투표장에 나가 야당에 승리를 안긴 현상을 반영했다.
▶메리엄-웹스터가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진짜’란 뜻의 ‘어센틱(authentic)’을 선정했다. “학생이 실제 논문 저자인지, 정치인이 해당 발언을 정말로 했는지 믿을 수 없다.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조차 믿을 수 없게 됐다”며 “진실성의 위기(crisis of authenticity)를 목도하고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특히 생성형 AI를 주목했다. 표정과 목소리를 학습한 AI가 가짜 기시다 일본 총리 동영상을 만들어 총리가 하지도 않은 말을 하게 했고 죽은 존 레넌의 목소리로 신곡도 불렀다.
▶‘어센틱’ 사용이 증가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진실에 대한 갈망이다. “마케팅이나 소셜미디어에서 진짜임을 내세워 신뢰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라는 주장도 있다. 올해의 단어에도 반영돼 있다. 메리엄-웹스터는 2006년 ‘트루시니스(truthiness)’를 뽑으며 “사람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 받아들인다”고 했다. ‘탈진실(post-truth·2016년 옥스퍼드)’ ‘가짜 뉴스(fake news·2017년 콜린스)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대장동 주범은 윤석열’이란 가짜 뉴스를 철석같이 믿고, 있지도 않은 청담동 술파티를 보도한 매체와 국회의원을 질타하기는커녕 후원금으로 응원하는 시대에 진실의 무게는 한없이 가볍다. ‘어센틱’에 ‘진짜처럼 만든’ 가짜라는 상반된 뜻도 있다. 진실보다 입에 맞는 가짜를 바라는 병적 심리가 단어에도 투영된 결과 아닐까.
11.30(목) ‘역사상 가장 똑똑한 사진’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5차 솔베이 회의 사진. 아인슈타인(맨 앞줄 가운데), 닐스 보어(두번째줄 맨 오른쪽), 마리 퀴리(맨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하이젠베르크(세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슈뢰딩거(세번째줄 오른쪽에서 여섯번째) 등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위키피디아, 그래픽=이철원
1510년 라파엘로가 바티칸 성당에 그린 벽화 ‘아테네 학당’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학자들이 한곳에 모여 학문을 논하는 장면을 담았다. 작품 중심에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플라톤,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 주위에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등 54명의 인물을 그렸다.
▶'아테네 학당’은 상상화지만 이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모인 순간을 찍은 실제 사진이 있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 사진이다.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마리 퀴리,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등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인류의 전설과 같은 물리학자들이 모여 있다. 참석자 29명 중 노벨상 수상자가 17명이다. 그래서 이 사진엔 ‘역사상 가장 똑똑한 사진’, ‘인류 최강 정모(정기모임)’, ‘물리학자 어벤저스’라는 닉네임이 붙어 있다. 물리학자들이 이 사진에 자기 얼굴을 합성해 넣어 패러디하는 경우도 많다. 벨기에 기업가 에르네스트 솔베이의 기부금 덕분에 최고의 천재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일러스트=이철원
▶이 회의에선 당시 태동한 양자역학 이론이 맞는지 격론이 벌어졌다. 보어가 양자역학에 대해 설명하자 아인슈타인은 자연현상은 확률이 아니라 엄격한 인과법칙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토론 끝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보어가 옳았던 쪽으로 가고 있다.
▶이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공식 한두 개를 만든 사람들이 아니다. 양자역학은 처음 나왔을 때 인류 중 단 몇 사람 외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이론 덕분에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같은 전자 제품들이 탄생했다. 구글은 2019년 양자 컴퓨터로 수퍼 컴퓨터가 1만 년 걸릴 계산을 3분 만에 끝냈다.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은 우주 만물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송두리째 바꿨다. 지금은 GPS(위성항법시스템)의 기반이기도 하다. 사진 속 과학자들이 없었다면 현대는 현대일 수가 없다. 여전히 19세기 정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29일 자 조선일보 9면에 5차 솔베이 회의 사진을 배경으로 한 전면 광고가 실렸다. 과학 혁신을 이루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광고였다. 사진 속 천재들의 눈이 별처럼 빛나고 있다. 이 시간에도 수많은 우리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총성 없는 과학기술 전쟁을 벌이고 있다. 솔베이 사진에 등장할 만한 과학자가 나오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