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반도 2023-11/ 11.03 ‘중동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린 북한 - 11-30 안보리 뒤흔드는 ‘무책임 대국’ 중국
위기의 한반도 2023-11/
11.03 ‘중동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린 북한

하마스가 10월 7일 이스라엘 기습 공격에 사용한 무기의 10%가 북한산으로 추정된다고 이스라엘군이 최근 발표했다. 이에 대해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무근거한 자작 낭설”이라고 일축하며 북한의 하마스 무기 공급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이 압수한 무기 중에 북한제 F-7 로켓(사진 원 안)이 발견됐다. 일부 전문가는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하마스에 무기를 공급한 지 이미 오래됐다고 본다. 북한은 일축했지만 이미 북한은 중동 사태의 소용돌이 휘말려 들었다.
북한의 하마스 지원은 일부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의 환영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북한의 외교적 여건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특히 북·미 관계가 그렇다. 미국 정치에서 중동은 북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슈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많은 의원은 한반도 문제엔 큰 관심이 없다. 그러나 미국 의회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열정적이고 초당적이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북한이 연루된 사실을 미국 의회가 인지하게 됐다. 이란을 바라보듯 북한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의 시각에서 북·미 관계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군이 전망하듯이 이번 분쟁이 몇 달씩 지속하고 더 많은 북한제 무기가 하마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면 북·미 관계에 대한 미국 의회의 여론은 심각하게 악화할 것이다.
북한의 하마스 무기 지원 포착돼
이스라엘 지지하는 미국 반감 커
미국, 대북 강경으로 회귀 가능성

▲에버라드 칼럼
내년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북한-하마스 연계는 아마 더 중요한 대선 이슈로 떠올라 공화당과 민주당 후보 모두 더욱 강경한 대북 노선을 취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만약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 가능성도 물 건너가게 된다. 친이스라엘 성향의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 추진보다는 2017년의 대북 강경 기조로 회귀할 가능성이 더 크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미국에서 대북 관련 양보나 대화가 설 자리가 줄어들 것이고, 누가 당선되든지 그런 기조가 차기 대통령까지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북한 정권의 악재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북한 외교 및 경제 정책 악재와 맞물려 더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북·러 관계에 내재된 불안정성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러시아가 북한에 식량과 석유를 지원할 것이기에 북한에 경제적 이득이겠지만 이 관계는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북한이 가용한 모든 노동력을 러시아에 보내고 마지막 남은 포탄이나 미사일까지도 지원한다면 국내외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한 러시아로서는 더는 북한을 지원할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북한은 외부 원조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경제 관계 다각화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김 위원장이 북·러 관계가 최우선이라고 언급하는 바람에 체면을 구긴 중국은 선뜻 북한 돕기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회원국도 아닌 북한에 예전처럼 관대한 지원을 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원조를 기대할 수도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남한의 지원을 얻어내려던 노력은 수포가 됐고, 윤석열 정부에서도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북한과 하마스 관계가 북한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다. 러시아에서 더 이상의 지원이 불가능하고, 중국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한국이나 유럽연합(EU)으로부터 원조가 불가능하다면 북한은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을까. 북한은 아마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9년 2월 하노이 정상회담의 실패로 북한 내부에서 이미 체면이 구겨진 김 위원장에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선택일지 모른다. 하지만 하마스와의 연계는 미국 국내 정치적으로 북한엔 독으로 작용해 북·미 관계 개선도 어려워질 수 있다.
북·러 관계가 효용가치를 다하면 북한은 출구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한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 핵무기를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미국 국가정보위원회가 지난 1월 발표하고 지난 6월 15일 일부가 공개된 보고서와도 일맥상통한다. 김 위원장이 강압적 행동으로 또다시 오판하면 북한 내부가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10월 7일은 이스라엘과 가자지구뿐 아니라 북한에도 불행한 날이었다.
중앙일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월간조선 11월 호
■중·러의 해외 선거 개입과 영향력 공작
중국의 내년 한국 총선 개입 가능성 경계해야
⊙ 美 국토안보부, 선거제도를 국가 핵심기반시설로 지정… ‘해외악의적영향력센터(FMIC)’ 신설
⊙ 러시아, 2017년 대선 당시 해킹 등을 통해 힐러리에 대한 부정적 뉴스 전파해 트럼프 당선에 일조
⊙ 러시아의 선거 개입·영향력 공작 역량이 中·北으로 전수될 개연성 경계해야
⊙ 中 핵티비스트들, 사드 사태 당시 롯데·한국 정부기관 향해 ‘겁주기’ 공작 감행… 인민해방군 연계설 돌아
⊙ 중국 인민해방군 61398부대(총참모부 3부 2국)… 2만여 명의 해커·애국적 핵티비스트·댓글부대 지휘
윤민우
1972년생.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 인디애나주립대 범죄학과 석사, 샘휴스턴주립대 형사사법학대학 범죄학 전공 박사, 서울대 외교학과 국제정치학 박사 / 가천대 경찰정보학과 교수, 現 국가정보원 자문위원, 국군방첩사령부 자문위원 / 저서 《폭력의 시대 국가안보의 실존적 변화와 테러리즘》

중국이나 북한 같은 적대 세력이 내년 4월 한국의 총선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지난 10월 6일 《조선일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 업무 관련 내부 시스템이 북한 등 적대 세력의 해킹 공격에 취약한 상태”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의하면,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전 선거 과정에서 선관위 내부망과 장비가 북한이나 중국의 해킹에 뚫렸다는 정황은 현재로선 발견되지 않았다”면서도 “현 수준의 보안 상태로는 언제든 한국 정치에 개입하려는 세력의 해킹 공격에 당할 우려가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이나 북한이 내년 총선에 개입한다면, 그 개입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까?
중국이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들을 대상으로 선거와 관련하여 특정 정당 및 후보에 대한 은밀한 자금 지원과 반대 정당 및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 등 선거 개입, 댓글부대와 소셜미디어(SNS)를 통한 여론조작 등을 해왔다는 의혹은 그동안 계속 제기되어왔다.
실제 중국이 해외 국가들을 대상으로 선거 개입을 한 사례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중국이 2020년 미국 대선에 개입하였다는 것은 미국 국가정보국(DNI)이 공식 확인한 바 있다. 2022년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도 중국의 페이스북 등을 통한 선거 여론조작 시도가 있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바도 있다.
이 같은 사례들로 미루어볼 때 내년 한국 총선에 대한 중국의 개입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외국에 대한 선거 개입과 여론선동은 중국의 전유물은 아니다. 사실상 중국보다 앞서 이 같은 영향력 공작의 전략과 전술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 실제 미국을 포함한 해외 국가들의 선거와 여론에 개입한 국가가 있다.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 2016년 美 대선 개입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대선캠프와 러시아 간의 내통 의혹을 수사하던 제임스 코미 FBI국장을 경질한 다음 날인 2017년 5월 11일 백악관 앞에서는 트럼프를 ‘푸틴의 꼭두각시’라고 조롱하는 시위가 열렸다. 사진=AP/뉴시스
러시아는 일찍이 2008년 조지아 침공 시부터 조지아 정부 웹사이트에 디페이스(deface·자동화된 툴로 웹사이트의 취약점을 찾아 특정 웹페이지를 삽입시키거나 변경하는 수법) 공격을 가해 히틀러 등 파시스트들의 이미지와 사카슈빌리 당시 조지아 대통령의 이미지를 함께 포스팅한 바 있다. 2014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선거 기반시설에 대해서도 사이버 공격을 감행한 바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는 APT 28과 APT 29로 알려진 해커그룹들이 러시아 정보기관인 FSB(연방보안국)와 GRU(러시아군 정보총국)의 은밀한 지원에 따라 동원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네덜란드 정보부는 해당 사건의 배후에 연방보안국이나 정보총국이 아니라 러시아의 또 다른 정보기관인 SVR(해외정보국)이 있다고 추정한다. 어쨌거나 러시아가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한 것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2016년 미국 대선 과정에서 러시아는 해킹 툴과 봇네트(botnet·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위해를 입은 여러 컴퓨터의 집합. 사이버 범죄자가 트로이 목마, 또 이 밖의 악성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빼앗은 다수의 좀비 컴퓨터로 구성되는 네트워크), 그리고 트롤(troll·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특정인이나 그룹을 고의로 괴롭히거나 방해하는 사이버 공격)을 감행했다. 이를 통해 힐러리 민주당 후보의 이미지를 공격,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킴으로써 미국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미국의 대선 결과에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정부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코지베어(CozyBear·APT 29)팀과 펜시베어(FancyBear·APT 28)팀은 각각 DNC(민주당전국위원회·Domocratic National Committee) 네트워크와 힐러리의 이메일을 해킹하여 디씨리크스(DC Leaks)와 위키리크스(WikiLeaks) 등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와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타임스》, 그리고 《워싱턴포스트》 등의 저명한 미디어 등을 통해 민주당 지도부가 버니 샌더스보다 힐러리 클린턴을 더 대통령 후보로 선호한다는 사실을 민주당 전당대회 직전에 폭로함으로써 후보 선출의 정당성을 훼손시켰다. 또 힐러리가 국무장관 재임 시절 개인 이메일을 사용하여 정부 문서를 처리했다는 사실도 폭로, 힐러리의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자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스캔들은 미국 대선 결과에서 러시아가 선호했던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러시아는 유사한 방식으로 2017년 프랑스 선거에도 개입하였다. 2017년 11월 테레사 메이 당시 영국 총리는 러시아의 유럽 국가들에 대한 선거 개입과 해킹에 대해 보복 공격을 경고했다. 이 같은 선거제도에 대한 공격은 사람들 사이에서 민주주의 절차와 제도, 과정 자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확산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美, 선거제도 보호=국가안보

▲해외악의적영향력센터(FMIC) 로고.
러시아와 중국의 선거 개입과 여론선동은 오늘날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는 분명하고 임박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의 ‘선거안보에 관한 의회 태스크포스(congressional task force on election security)’에서는 미국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주요 위협 국가들로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을 지목하고 있다.
미국의 국토안보부(Homeland Security)는 선거제도 자체를 전력(電力), 원자력, 수도, 정보통신망, 교통체계 등과 함께 국가의 핵심기반시설(critical infrastructure)의 하나로 지정하고 이의 보호를 국가안보 차원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미국은 날로 진화하는 해외 선거 개입 및 영향력 공작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22년 9월 23일 CIA(중앙정보국), FBI(연방수사국), NSA(국가안보국) 등을 포함한 18개 정보기관으로 구성된 정보공동체의 최상위기관인 국가정보국(ODNI·Office of Directorate of National Intelligence) 산하에 ‘해외악의적영향력센터(FMIC·The Foreign Malign Influence Center)’를 신설하고 해외로부터의 선거 개입과 각종 영향력 공작 위협으로부터 미국의 선거제도를 포함한 국가안보를 수호하는 핵심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럽연합(EU)도 미국처럼 러시아와 중국 등에서 시도하는 ‘해외정보조작 및 개입위협(FIMI·Foreign Information Manipulation and Interference Threats)’을 유럽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그리고 선거제도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2023년 2월 EU 산하 EEAS(The European External Action Service)에서 해외정보조작 및 개입위협에 관한 1차 EEAS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이는 EEAS의 전략커뮤니케이션 분과에서 작성하였으며 러시아와 중국 등의 해외로부터의 선거 개입과 영향력 공작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분석보고서라는 의미가 있다. 해당 전략커뮤니케이션 분과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선거 개입과 여론조작을 포함한 해외로부터의 내러티브 공작과 허위조작정보에 효과적·체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EEAS 1차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10월 1일과 12월 5일 사이에 탐지되고 분석된 100건의 FIMI 사례 가운데 러시아에 의한 것이 약 85% 정도, 그리고 중국에 의한 것이 약 15% 정도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전략적 핵심 이해관계 지역인 유럽에서도 중국의 온라인을 통한 영향력 공작이 15% 정도나 탐지되었다는 것은 중국의 전략적 핵심 이해관계 지역인 한국을 포함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중국의 선거 개입과 여론조작이 얼마나 거셀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게 한다.
해외 영향력 공작 생태계
이 같은 해외 영향력 공작의 생태계는 러시아와 중국 모두 공통적으로 ①공식적 커뮤니케이션 채널(Official Communication Channels) ②국가-통제 채널(State-Controlled Channels), 그리고 ③국가-연계 채널(State-Linked Channels)의 세 가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공식적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국가기관의 공식 웹사이트나 외교부나 대사관 등의 소셜미디어 계정 등과 같은 국가기관이 직접 운영하는 공식 채널이다.
국가-통제 채널은 국가행위자와 직접 연계되어 있는 미디어 채널이다. 이는 러시아의 경우 RT(Russia Today), 스푸트니크 등과 같은 국가 기간(基幹) 미디어 매체이며, 중국의 경우 신화통신, 《환구시보(環球時報)》 《글로벌타임스》 등과 같은 정부나 집권당과 직접 연계된 미디어 매체이다.
국가-연계 채널은 국가행위자와 명확한 또는 공식적 연계는 없지만 다양한 국가기관(주로 정보기관이나 중국공산당 통일전선부 등)의 은밀한 사주를 받아 운영되는 유튜브, 소셜미디어, 댓글, 인터넷 커뮤니티, 민간 방송 또는 온라인 매체들이다. 다양한 온·오프라인 정보소통 플랫폼, 매체, 수단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해킹과 멀웨어(Malware·‘Malicious Software’의 준말로 대상자의 시스템을 파괴하거나 정보를 변조, 유출하는 등 악의적인 작업을 하도록 만들어진 소프트웨어) 공격과 같이 악성코드를 이용한 사이버 기술 공격과 마찬가지로 이 같은 사이버 영향력 공작도 TTP(Tactics, Technologies, and Procedures·전술, 기법, 그리고 과정)를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영향력 공작 교리와 사례 분석을 통해 이제까지 알려진 TTP의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같은 TTP가 알려주는 바는 이 같은 영향력 공작이 전략적 가이드에 따라 의도적으로 수행되고 분명한 공격목표와 공격대상이 있다는 점이다.
영향력 공작의 5가지 전술목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힘에 의한 타이완 해협의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고 말하자 중국 《글로벌타임스》는 원색적인 비난을 했다. 사진=인터넷 캡처
먼저, 영향력 공작의 전술목표는 5가지로 나뉜다. 버리기(Dismiss), 비틀기(Distort), 흐트러뜨리기(Distract), 겁주기(Dismay), 그리고 갈라치기(Divide)다.
‘버리기’는 비판에 대한 반발이나 혐의를 부인하거나 출처를 폄하하는 전술목표를 지향한다. ‘비틀기’는 프레임을 바꾸거나 내러티브를 왜곡, 변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흐트러뜨리기’는 다른 행위자나 내러티브로 주의를 돌리거나 책임을 전가(轉嫁)하는 것을 기도한다. ‘겁주기’는 상대를 위협하고 겁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라치기’는 커뮤니티와 그룹 내에서 하위 그룹 간 갈등을 만들고 분열을 넓히는 것을 추구한다.
예를 들면,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힘에 의한 타이완 해협의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는 발언에 대해 중국은 ‘겁주기’를 목표로 영향력 공작을 수행했다. 이때 중국 외교부장이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를 통해 “대만 문제에서 ‘불장난’을 하는 자는 반드시 스스로 불에 타 죽을 것”이라는 위협적 메시지를 냈다. 이에 연계하여, 중국 관영매체인 《환구시보》와 영문판 《글로벌타임스》는 공동사설을 통해 “한국 외교가 계속 이런 방향으로 간다면 그 결과는 한중 관계가 소원해지고 한국의 국격(國格)이 손상되는 것만이 아니다”라면서 “동북아 정세의 불균형과 붕괴를 자극해 한국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전형적인 ‘겁주기’에 해당한다.
‘코비드(COVID)-19의 중국 우한(武漢) 기원’에 대한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해 중국은 “코비드-19의 기원은 미군의 실험실이며 이로 인한 피해에 대해 미국은 전 세계에 막대한 배상을 해야 한다” “2019년 우한에서 열린 세계 군인체육대회 미군 참가자가 코비드-19 바이러스를 전파했다” 등의 내러티브를 유포했는데, 이는 ‘비틀기’나 ‘흐트러뜨리기’의 사례들이다.
EEAS 1차 보고서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는 공격의 42%가 ‘흐트러뜨리기’를 목표로, 다음으로 35%가 ‘비틀기’를 목표로 공격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실행한 것으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의 경우에는 사례의 56%가 ‘흐트러뜨리기’를 전술목표로 공격이 실행되었다. 특히 중국이 유럽에 대한 공격에서 주로 채택한 내러티브는 “미국이 EU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하면서 서구를 폄하하는 동시에 중국이 신뢰할 만한 파트너이며, 세계의 리더라고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공격의 1단계는 ‘편견의 닻 내리기’
다음으로 공격 과정 역시 다음의 5단계로 나뉜다. ①편견의 닻 내리기(anchoring bias) ②선택적 인식(selective perception) ③이용가능한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 ④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 ⑤블라인드 스폿 편견(blind spot bias)이다.
‘편견의 닻 내리기’는 공격자가 공격 대상 대중의 인식에 자신의 정보해석을 심어 넣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최초로 해석하는 것은 프로파간다의 닻을 대중의 인지 영역 속에 확고히 정박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는 현재 사건이나 에피소드를 인지적(認知的)으로 정의하는 초기 진술(陳述)에 의해 달성된다. 가짜 뉴스, 음모론의 최초 제기가 이에 해당한다.
‘선택적 인식’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미디어나 각종 매체, 학자, 유튜버, 소셜미디어, 온라인 커뮤니티 등은 현 상황에 대한 특정 의견이나 시각만을 대변하는 정보들을 선별적으로 대중에게 제공함으로써 대중의 선택적 인식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속칭 ‘퍼 나르기’ 또는 ‘부풀리기(amplification)’에 해당한다.
‘이용가능한 휴리스틱’은 이용 가능한 정보의 중요성에 대한 과대평가와 관련이 있다. 이 단계에서는 정통성과 권위를 갖춘 기관 또는 개인을 통해 정보의 ‘출처 세탁(source laundering)’을 수행한다. 저명하고 외견상 객관적으로 보이는 미디어 채널, 신문, 학술논문, 싱크탱크, 전문가, 정부기관, 대변인, 정치인, 국제기구, NGO들이 이전 단계에서 주장되고 부풀려진 내러티브에 권위와 신뢰를 부여한다. 대중은 이와 같은 저명한 메신저들이 의도하는 바대로 앞선 단계에서 형성된 왜곡된 인식을 강화시키면서 자신들이 완전한 진실 또는 팩트를 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적을 좀비화·비인간화 시켜라
‘밴드왜건 효과’는 집단사고(集團思考)와 관련이 있다. 집단사고는 사건과 상황에 대한 핵심 프로파간다의 시각을 반박하거나 부정하는 개인적 견해에 대한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대중을 동원하여 과대평가된 프로파간다에 올라타게 함으로써 견고한 집단사고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다시 ‘퍼 나르기’가 작동된다. 댓글이나 소셜미디어, 온라인 커뮤니티 등이 이를 위해 동원된다.
‘블라인드 스폿 편견’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말과 논박을 통해 실수나 오류(誤謬)를 보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는 영향력 공작의 이전 단계들에서 형성된 편향된 인식의 지속과 잔존(殘存) 효과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자신보다 열등한 수준(less than human)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의 대중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TV나 매체들에 의해 좀비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의도에 따라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적(敵)을 좀비화시키고 비인간화(非人間化)시킴으로써 내 편의 인원들로 하여금 내 편이 의도하는 내러티브에 상충(相衝)되거나 비판적인 정보에 눈을 감게 만듦으로써 영향력 공작의 효과가 최종적으로 공고히 완성된다.
러-中-北 연계 가능성
EEAS 1차 보고서는 중국의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와 다양한 소셜미디어 채널이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 또한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중국의 ‘공식적 커뮤니케이션 채널’ ‘국가-통제 채널’ 그리고 ‘국가-연계 채널’ 등과 다양한 소셜미디어, 온라인 커뮤니티, 틱톡, 유튜브, 미디어 매체, 댓글, 웹사이트 등이 연계되어 있다. 여기에 다시 북한이나 러시아의 미디어 매체와 다양한 온라인 채널이 연계될 수 있다.
이 같은 다양한 온라인상의 내러티브 전달 플랫폼들의 연계망과 시계열 분석을 통해, 앞서 언급한 5단계의 공격수행 과정에 따라, 이들 다양한 채널이 서로 연계되어 각 단계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이른바 해킹과 같은 사이버 기술공격과 선거 개입과 같은 사이버 영향력 공작이 융합되고 있는 현상이 관찰된다. 해킹을 통한 개인 이메일 탈취나 개인정보 수집은 이후 선거 개입과 스캔들 조장, 여론공작 등의 수단 또는 통로로 활용된다. 2016년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은 이 같은 해킹과 영향력 공작의 통합공격의 전형이었다. 특정 후보나 특정 정당의 민감 정보가 대중에게 알려지거나 가짜 뉴스 생산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러시아의 사이버 영향력 공작의 기술과 노하우가 중국으로 전파(傳播)된 정황도 있다. EEAS 1차 보고서에 따르면 일정 정도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 공작 채널이 서로 연계되어 있다고 한다. 2017년경 무렵까지 러시아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진 수준에 머물렀던 중국의 선거 개입과 영향력 공작 수준이 최근 들어 정교해지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러시아의 뛰어난 선거 개입과 영향력 공작의 역량이 중국으로, 그리고 북한으로 전수될 개연성은 상당히 높다.
사드 사태 당시 中의 ‘겁주기’ 공작

▲2008년 4월 27일 2008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 당시 탈북시민단체가 중국을 비판하는 시위를 하자 국내 중국인 유학생들이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했다. 사진=조선DB
중국의 선거 개입과 영향력 공작 수행 추진 체계는 매우 정교하고, 은밀하며, 조직적이다. 어쩌다 눈에 띄는 중국의 소행으로 보이는 댓글은 소셜미디어, 온라인 커뮤니티, 중국의 관영매체, 정부기관, 그리고 국가나 공산당의 최상위 전략지도부까지 연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를 정점(頂點)으로 인민해방군 총참모부가 위치하며, 그 산하에 사이버와 신호정보(SIGINT)를 담당하는 3부가 있다. 다시 그 예하에 이른바 61398부대로 알려진 2국이 위치한다. 이 부서는 중국의 해커와 애국적 핵티비스트(Hacktivist, 정치·사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해킹하거나 목표물인 서버 컴퓨터를 무력화하고 이런 기술을 만드는 운동가들), 댓글부대 등을 은밀히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기간 통신사인 차이나텔레콤은 이 61398부대와 MOU를 맺고 각종 사이버 기술공격과 영향력 공작을 위한 인프라를 지원하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지휘 통제되는 중국 해커 그룹과 댓글부대인 우마오당(五毛黨) 등은 약 20여 개 그룹 2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인민해방군 산하에 61486부대가 있으며, 우주와 사이버 전쟁을 담당하는 전략지원군(SSF) 역시 사이버 작전에 관여한다. 인민해방군 이외에도 국가안전부(MSS) 산하에 기술정찰국이 사이버 공작에 관여하며,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부 역시 온라인을 통한 선거 개입과 영향력 공작의 핵심 기관 중 하나이다.
실제로 2017년 한국의 사드 배치 당시 홍커연맹, 중국매파연합, 톤토팀 등의 중국의 애국적 핵티비스트들이 롯데그룹과 한국의 주요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거센 ‘겁주기’ 형태의 영향력 공작 공격을 감행하였을 때, 인민해방군과 연계되었다는 주장이 해외 사이버 안보 전문가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필자가 작년에 수행한 연구에서 식별된 약 40여 개의 중국의 해커와 애국적 핵티비스트들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자금 지원, 인민해방군 또는 국가안전부와 연계되지 않은 집단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에 쫓기는 중국
중국의 과거의 행적, 러시아와의 연계, 중국의 전략적 목표와 필요성, 그리고 국내외 여러 전문가와 매체의 경고 등은 분명히 중국이 내년 한국 총선에 개입할 개연성을 말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들이 인식하는 것처럼 선거제도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는 국가핵심기반시설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위협은 우리 국가에 대한 심각한 도발이다.
중국은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시간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편이다. 시진핑(習近平)이 허세를 부린다고 해서 객관적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2050년이 되면 중국의 인구는 2020년 현재 약 14억 명에서 약 13억 명으로 감소한다. 2100년이 되면, 중국의 인구는 약 7억7000만 명이 된다. 반면 미국의 인구는 2020년 현재 약 3억3000만 명에서 2050년에는 약 3억7000만 명, 그리고 2100년이 되면 약 4억 명이 된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 수준, 1인당 GDP, 인구 증감의 속도, 인구 구조의 변화 등을 고려할 때 사실상 2050년 이후가 되면 중국이 ‘인구 감소’의 벽에 부딪혀 미국의 국력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초강대국(超强大國)의 패권(覇權) 교체는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인적자원은 초강대국을 떠받치는 가장 핵심적인 근간이다. 인구 규모, 특히 노동 가능 인구 규모의 안정적 증가 없이 초강대국이 될 수는 없다. 중국은 심각한 노동가능인구 감소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는 2050년이 되면 심각한 국가위기 상황으로 변할 것이다.
미국과 같은 열린사회와 달라 해외로부터의 이민이 중국의 위기를 치유하지는 못할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매력적인 목적지를 두고 중국으로 향하는 전 세계 이민자들이 몇이나 될까? 제3세계의 이민자와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미국 또는 유럽으로 향하는 뉴스는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하지만 중국으로 향한다는 뉴스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국가의 매력도 역시 중요한 국력의 한 요소이다.
결국 중국이 강대한 힘을 유지하는 기간은 지금부터 2050년까지 약 25년간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 시기에 중국은 가능하다면 주변 국가들을 중화문명권의 일원으로 강제 합병하여 충분한 인적자원을 확보해야만 한다. 중국은 2050년이라는 시간에 쫓기고 있으며, 그 전에 주변국들의 노동가능인구를 중국경제권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중국의 대만과 한국 등 주변국에 대한 선거 개입과 영향력 공작의 전략목표는 이 같은 중국의 다급함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2027년 중국의 타이완 침공 가능성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년 한국 총선에 중국이 개입할 동기와 역량은 충분해 보인다. 중국은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친애하는 중국 친구들! 우리가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다.⊙
11.09 北 공격에 101명 전사…주한미군에 60·70년대는 ‘제2의 6·25’ 였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미군 장교 2명을 북한군이 도끼를 휘둘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진은 당시 유엔군 관측소에서 촬영한 참사 현장./조선일보DB
6·25전쟁 이후 비무장지대(DMZ) 인근에서 북한군 공격으로 전사한 주한 미군이 101명으로 확인됐다. 6·25 기간 미군 5만4000여 명이 전사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휴전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군 복무 도중 북한군의 적대적 행위로 숨진 주한 미군이 100명이 넘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확인됐다.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는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지난 1년간 한국국가전략연구원(KRINS)과 함께 한미 관련 기관의 전사자 기록을 조사·연구한 결과 이렇게 집계했다고 8일 밝혔다. 전사자 101명 명단과 전사 날짜 및 당시 상황 기록까지 모두 확인했다. 전사자는 대부분 북한군의 총격, 수류탄 및 지뢰 공격, 미그기 공격 등으로 숨졌다. 1963년 데이비드 세일러 이병은 북한군의 매복 공격으로 등에 총상을 14발 입고 숨졌다. 1967년 커티스 리버스 일병은 병영 식당 근처에서 저녁 식사 대기 줄에 서 있다가 북한군 침투 조의 무차별 총기 난사에 전사했다.
신경수(예비역 육군 소장) 한미동맹재단 사무총장은 “6·25 이후 전사자 기록을 찾느라 상당히 애먹었다”며 “구체적 역사 자료의 부재는 그만큼 이들의 희생에 관심이 부족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정승조 전 합참의장은 “한반도가 6·25 이후에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사자 101명”이라며 “이제라도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작업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재단과 전우회는 동맹 70주년을 맞이해 서울 용산에 이 101명을 기리는 추모 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재단과 전우회는 또 미국 재향군인의날인 오는 11일, 한미 동맹을 만들어낸 복무 장병들을 기리는 메시지를 한미 공동으로 낼 예정이다.
◇주한미군에게 60·70년대는 ‘제2의 6·25′
1977년 7월 3일 북한 김일성 주석은 일본 언론에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하며 미국을 향해 “남조선에서 공군도 지상군과 함께 철거하라”고 했다. 그로부터 약 열흘 뒤인 7월 14일 로버트 하인스 하사 등 미군 장병 3명이 타고 있던 육군 CH-47 헬기가 북한군의 대공포 공격에 격추됐다. 비무장지대(DMZ)에서 작전 중 비행착오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바람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항공기 탑승 장병 3명은 북한군이 쏜 대공포에 맞아 전사했고 조종사는 북한에 57일간 억류된 뒤 송환됐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8일 저녁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해 전용기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고 있다. 블링컨 장관이 한국을 찾은 것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다. 그는 9일 박진 외교부 장관과 회담을 갖는다. 윤석열 대통령 예방과 조태용 국가안보실장과의 만남도 예정돼 있다./연합뉴스
주한미군 장병들 사이에서 1960·70년대는 ‘제2의 6·25전쟁’ 시기로 불린다고 한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북한군의 국지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DMZ 인근에서 복무한 주한미군 101명이 북한군의 매복 총격, 지뢰 매설, 전투기 공격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런 희생 대부분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76년 8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살해당한 ‘도끼 만행 사건’ 정도가 예외다. 예비역 육군 소장인 신경수 한미동맹재단 사무총장은 8일 “197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 군의 역량이 부족한 시기여서 주한미군이 DMZ를 지켰다”며 “37년 군 생활을 한 나도 전사자 확인 작업을 하기 전까지 6·25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북한군 공격에 이렇게 많이 전사한 줄 몰랐다”고 했다.
정전 이후 DMZ에서 처음 전사한 주한미군 장병은 찰스 브라운 대위다. 1955년 8월 17일 그가 타고 있던 훈련기가 북한 항공포대에 격추당했다. 당시 해당 훈련기 조종사는 부상으로 북한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엿새 만에 송환됐다. 북한 김일성이 8·15 해방 10주년 경축대회 연설에서 조국 통일 문제를 논의하자며 남북 대표자회의 개최를 제의한 지 이틀 뒤 벌어진 일이었다. 1961년엔 훈련용 비무장 전투기를 조종하던 병사가 DMZ를 이탈해 북한 온진 지역 근처에서 북한군 미그기 2대 공격으로 비상착륙 중 추락해 숨졌다.
1955년 1명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 92명, 1970년대에 7명이 전사했다. 김일성이 우리 당국과 통일 문제 협상 용의를 표명한 1967년에만 17명이 전사했다. 1960·70년대는 DMZ 철책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북한군이 수시로 침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62년 일병과 소위 등 미군 장병 3명이 DMZ 경계근무 도중 북한군의 경기관총 사격과 수류탄 공격에 숨졌다. 같은 해 DMZ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는 북한군으로부터 머리에 총상 4발, 가슴에 8번의 흉기 공격을 당해 전사했다. 1963년엔 DMZ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장병 3명이 북한군의 매복 공격으로 전사했고 1967년엔 북한군 침투조의 막사 폭파 시도에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부상했다. 같은 해 북한군이 DMZ 인근 언덕에 위치한 미군 참호 여러 곳에 침투해 4명이 전사했고 주한미군 7사단 트럭이 30여 명의 부대원을 태우고 이동하던 중 북한군 침투조의 수류탄 공격에 차량이 폭파돼 3명이 전사했다. DMZ 남쪽 2km 떨어진 곳을 이동하던 장병 3명은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에 트럭 두 대가 폭발해 사망했다. 병영 식당 근처에서 저녁 식사 대기 줄에 서 있다가 북한군 침투조의 무차별 총기 난사에 전사한 일병도 있다. 이듬해엔 판문점 근처를 순찰 중이던 병사 3명이 북한 무장공비와 교전을 벌이다 숨졌다. 북한군 매복과 무장공비 침투가 잦다 보니 순찰 임무 중 다른 순찰대원이 북한군으로 오해하고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다.

▲추모비 건립 추진 - 6·25 이후 주한 미군 전사자 101명을 기리기 위해 서울 용산에 건립 추진 중인 추모비 모형도. /한미동맹재단
1969년 미 해군 EC-121 워닝스타 조기경보기에 탑승한 31명은 임무 수행 중 북한 미그 전투기의 대공 공격을 받고 전원 전사했다. 같은 해 DMZ 인근에서 근무하던 미군 장병 4명은 대낮에 발생한 북한군 매복 공격으로 소화기와 수류탄에 머리 관통상을 입고 전사했다. 1994년엔 DMZ 인근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군 공격으로 헬리콥터가 추락하면서 1명이 전사했다.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는 6·25 이후 미군과 함께 싸우다 숨진 카투사 장병 전사자들도 40여 명 확인했다.
재단과 전우회는 동맹 70주년을 맞이해 서울 용산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주한미군 전사자 101명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 시설 건립을 추진 중이다. 용산은 한미연합사, 유엔사, 주한미군사가 작년 10월 경기 평택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44년간 주둔한 한미동맹의 상징적 공간이다. 연구용역을 맡은 한국국가전략연구원(KRINS)은 추모비와 전사자 명패, 추모 조형물 등을 조성하는 데 약 45억원이 들 것으로 판단했다. 재단과 전우회는 정부 지원과 민간 모금을 통해 비용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한미동맹 재단 관계자는 “전쟁 이후에도 한반도를 지키다 북한군의 공격에 숨진 이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이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한반도 안보를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렵게 전사자 명단을 확인한 만큼 이들 전사자를 위한 추모 시설 건립이 원활히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민서 기자
11.13 푸틴의 주문 목록이 김정은에 전달됐다… 북·러의 위험한 군사 밀월
러 국방장관 평양 방문, 탄약·포병장비 등 무기 거래 확대 시도
김일성, 스탈린에 전차 지원받아 남침… 지금은 푸틴이 김정은에 요청
북·러 무기 거래는 동북아 안보 위협… 한·미·일 협력이 효과적 대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7월 26일 평양 ‘무장 장비 전시회’에서 세르게이 쇼이구(앞줄 왼쪽) 러시아 국방 장관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일본의 북한 전문가인 에야 오사무(惠谷治, 1946~2018)씨는 1998년 도쿄에서 개최된 세미나에서 북한 경제를 4중(重)경제라며 북한 정권의 돈줄을 분석했다. 북한 경제는 내각의 제1경제, 군수 경제인 제2경제, 김정은의 궁정(宮庭) 경제인 제3경제, 마지막으로 장마당 시장경제 등 4바퀴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이 중 궁정 경제와 군수 경제가 북한 정권을 지탱하는 핵심 축이다. 수령의 비자금 조달을 위한 궁정 경제(court economy)는 노동당 39호실이 담당한다. 1970년대 중반 조직된 39호실은 김일성, 김정일 등 김씨 일가의 외화벌이를 총괄한다. 20여 곳의 해외 지부와 국영 기관을 운영한다. 과거에는 궁정 경제가 4중 경제 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으나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제2경제가 빠르게 증가해 30%를 상회하며 제2경제위원회가 맡고 있다. 반대로 내각과 장마당의 민수(民需) 경제는 점점 쪼그라들어 40% 미만이다. 식량이 부족하여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인민들이 의식주 부족에 허덕이는 이유다.
일찍이 일본의 북한 전문가들이 북한의 무기 개발과 거래 등 국가 기밀 사항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평양이 일본 조총련을 통해 신무기에 들어가는 각종 센서, 회로 등 전자 부품을 조달했기 때문이다. 필자도 세미나 이후 오사무씨와 소통하며 일본 측 자료를 확보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북한은 1980년대 들어서 제2경제위원회 산하에 항공우주 산업을 총괄하는 8총국을 신설했다. ICBM 등 각종 미사일 개발을 전담하기 위해서다.
제2경제위원회는 산하 용악산, 부흥무역, 창광무역, 연합무역 등 무역회사를 통해 홍콩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돈줄의 거래 통로를 마련했다. 용악산과 부흥무역은 러시아와, 창광무역은 중동을 주요 무대로 활동하였다. 연합무역은 미사일 부품과 기술의 수입을 담당하였다. 특히 잠수함과 전차 등 무기 제조에 필요한 집적회로(IC) 기판(基板)과 미사일 유도 시스템에 사용되는 스펙트럼 분석기를 일본에서 조달하였다. 일부 제품은 수화물로 위장하여 중국 등 제3국을 경유해 북한으로 운반하였다. 북한 기업과 거래했던 조총련계 회사는 도쿄, 오사카, 니가타 등지에서 한때 약 30소에 달했다. 조총련을 통한 신무기 부품 조달은 2006년 1차 북핵 실험 이후 발동된 유엔 대북 제재 11건으로 한계에 도달했다. 신무기 부품 조달 루트는 미국의 감시가 미흡한 중국, 러시아, 파키스탄 및 이란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그래픽=이철원
평양시 강동군에 위치한 제2경제위원회는 우리의 기재부는 물론 국방부, 방위사업청 및 전체 방산 업체 등이 결합된 무소불위 부서다. 노동당 군수공업부 직속 기구로 산하에 160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무기 수출을 통해 획득한 외화로 외국 신무기를 사들여 철저하게 분석도 한다. 지난해 북한은 100발 이상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부당한 무기 판매를 통해 얻은 이익을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재투자하고 있다. 3개월 동안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두 차례 실패하고 10월 재발사를 선언하는 이유는 제2경제의 금고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군수 산업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 각종 거래를 확대함으로써 대목을 맞고 있다. 지난 7월 전승절 행사를 빌미로 김정은은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을 평양 ‘무장 장비 전시회-2023′에 초청하여 600㎜ 초대형 방사포, 미국이 보유한 정찰기 RQ-4 글로벌호크와 모양이 비슷한 전략무기 정찰기 및 무인 공격기 등 최신 무기를 과시하며 세일즈에 나섰다. 미 백악관은 김정은과 푸틴이 친서를 교환하며 무기 거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과거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사정하여 무기를 구매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김일성은 6·25 남침을 3개월 앞둔 1950년 3월 소련이 약 1억3000만루블어치 무기를 제공하면 그 대가로 총액 1억3305만루블 상당의 금 9t, 은 40t 및 우라늄이 함유된 희귀 광물인 모나자이트 1만5000t을 인도하겠다고 사정하였다(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2023). 당시 북한이 자체적으로 생산 가능한 무기는 7.62㎜ 기관단총에 불과했다. 결국 김일성은 당시 최강의 소련제 T-34 전차 242대를 지원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지금은 모스크바가 평양에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묘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지난 26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함께 무장장비전시회장을 찾았다.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뉴스1
김정은은 지난달 2박 3일간 다수 군수 공장을 돌아보며 ‘국방 경제 사업’의 강화로 무기와 군수 물자의 대량생산을 강조했다.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만큼 수출용 무기 생산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다. 24시간 공장을 가동하고, 러시아의 주문 목록이 북한에게 전달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구소련에서 사용했던 표준형의 보병 및 포병 장비와 탄약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야전에서 가성비가 높은 무기들이다. 북한의 지대공(地對空) 미사일(SA-5)은 부품 상당수가 러시아제여서 무기 호환성이 높다.
북한은 보유 중인 재래식 무기들을 러시아에 넘기고 원유, 각종 신무기 부품 및 식량 등과 현물 거래를 시도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제재로 달러와 유로화의 결제는 어렵고 루블화는 용도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는 기존 노후 무기들을 실속 있게 정리하면서 신무기 개발에 나서는 등 일거양득이다.
북한의 수출용 무기 대량생산은 동북아는 물론 인도·태평양 지역에 안보 불안 요인이다. 이제 북한의 군수 산업과 군사적 위협은 한국 단독으로는 대응하기 쉽지 않은 수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북·러 간에 무기 거래는 단순 군수품을 넘어 북한군의 약점인 전투기 및 각종 미사일 무기 등으로 확대될 것이다.
동북아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평가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만남이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이다. ‘언제든지(whenever)’, ‘어디서든지(wherever)’, ‘무엇이든지(whatever)’ 3국 간 협력이 가능한 ‘핫라인 구축’은 동북아 현실주의 국제정치에서 불가피하다. 북·러 간에 확대되는 군사협력은 동북아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고 우리 대응 중의 하나가 한미일 3국 간 협의에 대한 공약(Commitment to Consult)이다. 김정은이 대한민국 지도를 짚어가며 점령훈련을 하는 상황에서 한·미·일 공약보다 효과적인 정책 대안은 없다.
조선일보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11-15 유엔사 회원국 확대는 北억지력 강화

신원식 국방부 장관
국방부는 지난 14일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한·유엔사회원국 국방장관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했다. 회의에는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영국·호주 등 17개 유엔사(司) 회원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했다. 처음 열린 회의였는데도 많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참여해 한반도 평화 수호에 대한 회원국들의 뜨거운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유엔군사령부는 북한의 불법적인 남침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해 1950년 7월 24일 창설됐다. 유엔사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연대하겠다는 국제사회의 강력한 의지의 표상이었으며, 유엔헌장의 집단 안전보장 제도를 실현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유엔참전국들은 1953년, 북한의 무력공격 발발 시 재참전하겠다는 ‘워싱턴선언’을 발표했다. 이와 같이 유엔사는 전후 70년 간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계속해 오고 있다.
이번에 우리는 지금까지 유엔사의 역할과 성과를 돌아보고 미래 비전을 논의했다. 회원국들은 유엔군사령부가 지난 70여 년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는 데 모두 공감했다. 또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비롯한 끊임없는 도발 행위를 규탄하고, 북한에 정전협정과 국제규범을 준수하라고 촉구했다. 무엇보다, 유엔사를 주축으로 협력과 연대를 강화하고 유사시 한 깃발 아래 다시 모여 싸울 것을 확인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정전협정을 이행하는 유엔사를 지원하고 한반도 안보에 대한 유엔사의 기여를 확대하는 방안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과 유엔사 회원국 간의 연합훈련을 확대하고 상호 운용성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또, 유엔헌장의 원칙과 결의에 기반해 우리와 가치를 함께하는 국가들의 유엔사 참여를 통해 유엔사 회원국을 확대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충돌에서 보듯이 최근의 전쟁 양상은 점차 국제전의 형태로 변하고 있다. 즉, 우리와 함께 싸울 국가가 많을수록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커져 북한이 감히 우리에게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진정한 평화는 압도적으로 강한 힘이 뒷받침될 때 지켜 나갈 수 있다. 상대방의 선의에 기댄 평화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1950년대 초에 우리가 겪은 전쟁의 참혹함을 역사에서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아직도 일각에서는 ‘종전선언’과 연계해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주장한다. 북한이 지금도 유엔사를 한반도 적화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로 인식하는데, 유엔사 해체 주장은 결국 우리의 적을 이롭게 하자는 것과 다름없다.
이번에 개최한 한·유엔사 회원국 국방장관회의를 통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에 국제사회가 뜻을 함께하고 있음을 거듭 확인했다. 이번 한·유엔사 회원국 국방장관회의는 대한민국과 유엔사 회원국들 간의 결속과 협력을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분명한 계기가 됐다. 정부는 앞으로 한·유엔사 회원국 국방장관회의의 정례화를 추진해 회원국들과 자유와 평화를 위한 가치를 구축하고 공유해 나갈 것이다. 이 같은 노력에 국민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기대한다.
문화일보
11-16 美中관계 조정기 진입…북핵·핵심소재 외교 강화할 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15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양국 관계가 전면 충돌에서 대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신호탄이다. 공동성명은 없었지만, 미·중 정상이 발리회담 후 1년 만에 4시간여 대화를 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경쟁이 충돌로 비화되지 말아야 한다”고 한 데 대해 시 주석이 “충돌은 감당 불가”라고 화답한 것은 양측 모두 충돌보다 관계 관리를 원한다는 뜻이다.
정상회담 후 미·중 군사 대화 채널 복원 및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대미 수출 규제 합의가 발표됐다. 모두 바이든 행정부가 요구했던 현안이다. 회담 후 바이든 대통령은 “오늘 우리는 실질적인 진전을 이뤘다”는 내용을 엑스(구 트위터)에 올렸다. 그러나 첨단 기술, AI 문제 등엔 팽팽히 맞섰다. 시 주석은 “대국간 경쟁은 시대착오적”이라면서 미국의 과학기술 정책 전환을 압박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에 맞서는 데 사용될 기술은 중국에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과 기후변화 등 사안별 협력을 해도 국가안보에 필요한 첨단 기술 수출 통제 등의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은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미중관계는 조정기로 진입하고 있다. 내년 11월 대선을 앞둔 바이든 대통령과, 경기침체에 직면한 시 주석이 위기관리 쪽으로 선회한 것은 윤석열 정부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미·중 갈등이 관리 단계로 가면 윤 정부가 움직일 외교적 공간이 넓어진다. 중국이 탈북자를 북송하며 김정은의 핵 개발을 더 이상 묵인하지 않도록, 그리고 갈륨·게르마늄 등 수출 통제를 핵심 소재 전체로 확산하지 않도록 한미동맹을 지렛대로 한중 전략적 소통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윤 대통령과 시 주석의 정상회담도 거론되고 있다. 미·중 사이에 끼인 한국 외교력이 중요한 시험대에 올랐다.
문화일보 사설
11-16 영국의 우호적 손짓과 ‘FTA+’ 필요성

고상두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명예교수
영국은 겉보기에는 신사의 나라이며 격식과 품위를 중시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실용주의 사고가 강하게 작용한다. 산업혁명의 발상지로서 자본주의가 일찍 융성해 근대 물질주의를 꽃피웠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기치를 내건 18세기 영국의 식민지정책은 기업의 자유로운 해외 진출을 돕는 것이었다. 영국에 식민지는 공산품을 수출하고 자원을 수입하는 자유 교역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교역에서 비교우위를 가진 동인도회사가 식민지 경영의 핵심 역할을 했고, 정부는 주로 해외 진출 기업의 이익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주재하는 외국 공관 중에서 자국 기업의 홍보를 위해 가장 열심히 뛰는 곳은 영국 대사관이다. 영국대사는 한국 백화점에서 자국 제품 소개 행사가 있으면 기꺼이 참석한다. 영국대사의 실적 평가에서 기업 활동 지원이 중요한 항목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왕실이 우리에게 협력 제스처를 계속 보내고 있다. 지난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에서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빈은 초대해 준다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윤석열 대통령 내외에게 밝혔고, 올해에는 한영수교 140주년을 맞아 찰스 3세 국왕이 런던 뉴몰든에 있는 한인타운을 방문하고 각종 기념행사를 참관했다. 지난 11일 영국 현충일에는 국왕과 총리가 참석한 행사에서 6·25참전용사를 기렸다.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이후 영국은 유럽을 넘어 글로벌 차원에서 동반자를 찾고 있다. 하지만 아태지역에서 영국과 함께 자유·평화·번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을 갖춘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영국은 6·25전쟁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여 명의 병력을 보내줬고, 한국은 활기찬 민주주의와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강국으로 성장해 영국과 협력할 수 있는 상대가 됐다.
한국과 영국 간의 경제 협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다. 브렉시트 직전 한국은 긴급하게 영국과 FTA를 체결했지만, 무관세 교역에 합의한 낮은 수준의 협정이었다. 이제 양국은 서비스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보장하는 격상된 포괄적 경제 파트너십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함께 대비하는 차원에서 숙련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에 합의한다면 높은 수준의 FTA 플러스(+) 협정이 될 것이다.
영국은 외국인 투자와 인재에 개방적인 국가다. 대부분의 토종 자동차회사가 외국 기업에 인수됐지만, 영국인은 자국에 소재한 기업은 모두 영국 기업이라고 간주하는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난민과 저숙련 이주민의 수용에는 소극적이지만, 숙련 노동자에게 영주권을 주는 그린카드 제도를 유럽에서 가장 선구적으로 도입한 나라다. 리시 수낵 총리가 상징하듯이, 과거 식민지 인도 출신 배경을 가진 정치인에게 국정을 맡길 정도로 영국에 도움이 된다면 외부의 자본과 인재를 환영한다.
우리는 비교우위인 IT 제품의 수출과 해당 분야 인력의 영국 취업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영국의 금융 인력을 유치해 IT 기술과 융합된 첨단 금융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곧 영국을 국빈방문(20∼23일)하는 윤 대통령이 한·영 양국의 경제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큰 틀을 마련하기 바란다.
문화일보
11.20 트럼프의 귀환, 현실이 된다면
내년 81세, 바이든 고령 리스크
여론조사, 트럼프 압도적 우세
한미관계 우려 커지지만
친중·친북 정책 폐기한 지금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 낮아
방위비 문제도 발상 대전환
日처럼 美軍 주둔 비용 부담하되
주한미군 화력 대폭 증강 요구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일(현지 시각) 뉴욕 맨해튼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 휴정 시간에 법정을 나서며 입에 지퍼를 채우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내년 11월 5일 실시될 미국 대통령선거 일정의 개막을 알리는 아이오와주와 뉴햄프셔주 예비선거를 두 달 앞둔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압도적 강세가 지속되고 있다. 지난주 미국 언론사들의 여론조사 통계에 따르면 트럼프 후보는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59.1%의 지지로 확고한 1위를 점하고 있다. 금년 3월 이래 여배우 입막음을 위한 자금 유용, 국가 기밀문서 유출, 의사당 폭동 선동, 조지아주 대선 방해 등 혐의로 4차례나 기소되었으나, 이는 지지율 상승과 모금액 급등에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수위를 점하고 있는 바이든 현 대통령과의 본선 게임 전망에서도 트럼프 후보는 2~4%포인트 차이로 우세이며, 선거의 향방을 가를 6개 경합 주 중 5개 주에서 우세다. CNN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후보는 바이든 대통령에 비해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성 측면에서 59% 대 37%의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고, 국가 안보 정책에 대한 신뢰도 역시 현저히 높다. 그에 대한 미국민의 비호감도는 56%로 여전히 높으나, 바이든 대통령의 비호감도는 59%로 더 높은 상황이다.
지난 2020년 대선 때도 그러했듯이, 내년 대선에서 양측의 최대 리스크는 트럼프 리스크와 바이든 리스크다. 트럼프 후보는 현재 진행 중인 4건의 형사 기소가 최대 리스크다. 1심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나올 경우 일부 지지층의 이탈 가능성이 있으나, 오히려 지지층 결집이 이루어질 수도 있어 상황은 예측 불허다. 바이든 대통령의 경우 내년 81세의 고령이 최대 리스크다. 유권자의 71%는 바이든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4년 더 수행하기엔 너무 고령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내년 미국 대선은 어쩌면 호감도의 경쟁이 아닌 비호감도의 경쟁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미국 대선을 바라보는 국제사회는 걱정이 많다. 그 이유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과거 보여준 극단적 미국 우선주의와 동맹 경시 성향, 그리고 그로 인해 초래될 국제정치·경제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도 벌써부터 한미 관계의 미래를 우려하는 사람이 점증하는 추세다. 우려의 핵심은 ①제3차 미북 정상회담 속개를 통해 북한과 엉뚱한 합의를 할 가능성, ②주한 미군의 대폭 감축을 다시 시도할 가능성, ③방위비 분담금의 무리한 증액을 재차 요구할 가능성 등 세 가지다. 이들은 쉽지 않은 문제들이나, 그것들이 제기된 배경을 냉철히 들여다보고 사전에 합당한 대응책을 준비한다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기 전에 얼마든지 조기 진화가 가능한 사안들이다.
첫 번째 우려 사항인 미북 정상회담은 당초 문재인 정부가 북한을 도와 유엔의 대북한 제재 해제를 실현할 목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내세워 미국 정부를 호도한 결과 야기된 회담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동맹 정신에 합치되는 합리적 입장을 정해 대북 정책을 리드해 간다면 미국이 한반도 문제의 최우선 당사국인 한국의 뜻에 반해 대북한 행보를 강행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두 번째 우려 사항인 주한 미군 철수 문제는 2017년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존망이 걸린 미중 패권 대결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당시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안보 지원을 누리기만 할 뿐 철저히 친중·친북 일변도의 비우호적 대외 정책을 고수한 데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가 반영된 사안이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와 친중·친북 정책 폐기와 한미 동맹 복원이 이루어지고 대중국 공급망 통제를 위한 경제 안보 협력이 본격화된 현 상황은 그 당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세 번째 우려 사항인 방위비 분담 문제도 전향적 해결이 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했던 방위비 분담금 5배 증액 요구 중 2배 증액은 미국이 그간 지향해 온 ‘주한 미군 현지 비용 전액 부담’ 목표의 연장선 위에 있는 사항이며, 미군 훈련비 지원 등 나머지 3배 증액 요구는 근거 없는 부당 요구이므로 거부해도 무방하다. 한국은 가난하던 시절부터 주한 미군 현지 비용 부담을 조금씩 늘려 현재 약 50%를 부담 중이나, 일본은 1996년부터 건설비, 노무비, 공공요금을 포함한 주일 미군 현지 비용 전액을 심사를 거쳐 부담하고 있다. 이제 한국도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만큼 일본처럼 주한 미군 현지 비용을 대부분 부담하되, 그 대신 주한 미군 화력의 대폭 증강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발상의 대전환을 해야 할 때다.
11.22 탈북자 북송 계속한다는 중국, 규탄 결의안 하나 못 내는 국회

▲강제 북송된 탈북자 가족이 지난달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강제 북송 문제 해결을 촉구하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중국 정부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보낸 서한에서 자국 내 탈북민들에 대해 “난민이 아닌 불법 체류자”라며 “북송된 탈북자들이 고문을 받는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 사실이 밝혀졌다. 탈북민 강제 북송을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달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나자마자 구금 중이던 탈북민 500~600명을 기습 북송했다. 추가로 북송을 앞둔 탈북민도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민 북송은 귀국이 아니라 지옥행이다. 수많은 탈북민이 생생히 증언했다.
이번 중국 서한은 지난 7월 북한 인권, 이주민 인권, 여성 폭력 등 유엔 특별보고관 3명과 인권 관련 실무그룹 3곳이 중국의 탈북민 강제 북송 중단을 요청하며 발송한 공동 서한에 대한 답변 성격이다. 중국 측 답변서는 지난 9월 13일 도착했다고 한다. 기존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답변서를 보내고 한 달 뒤 대규모 강제 북송에 나선 것이다.
탈북자는 거의 대부분 굶주림을 참지 못해 탈출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잡혀서 돌아가면 가혹한 구타와 구금을 당하고 정치범수용소까지 간다. 배고파 국경을 넘은 것이 무슨 죄인가. 북송되면 심하면 목숨까지 잃는다. 유엔도 2014년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를 통해 탈북민들을 ‘난민’으로 인정해야 하며, 강제 북송은 국제난민법과 국제인권법상 강제 송환 금지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난민지위국제협약과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했으면서도 유엔 권고를 무시하고 있다. 아무리 공산당이라지만 이것은 도를 넘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반문명적 행태를 저지하려면 국제사회와 연대해 중국이 문명국가가 아니란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야 한다. 패권국을 지향하는 중국은 이런 평판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역대 한국 정부는 이런 일을 외면했다. 최근에도 주유엔 대사는 강제 북송 문제를 거론하며 ‘중국’ 대신 ‘제3국’이란 표현을 썼고, 주중 대사는 “중국의 체제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국회도 다를 게 없다. 대규모 강제 북송이 일어난 지 6주가 지나도록 상임위 차원의 규탄 결의안 하나 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이런 나라를 의식해 행동을 조심할 리 없다.
조선일보 사설
11.22 ‘시진핑 방한’ 위해 탈북자 600명 북송 눈감았나
2000년 ‘7인의 탈북자’ 북송 때
DJ는 외교장관 경질하며 경고
尹, 死地의 탈북자 외면하고
저자세면 文처럼 하대당할 것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5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발리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2.11.16/뉴스1
2000년 새해 벽두에 한국 사회를 강타한 사건은 ‘7인의 탈북자 북송’이었다. 탈북자 7명이 1999년 11월 중국·러시아 국경에서 러시아 측에 체포됐다가 중국을 거쳐 70일 만에 북한에 강제 송환됐다.
유엔이 난민 지위를 인정했음에도 중·러가 핑퐁 게임 하듯이 탈북자를 북송, 큰 충격을 줬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사건이 확대되자 외교부 장관을 경질했다. DJ는 새 외교장관에게 “북한에 송환된 탈북자 7명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지시했다. 신임 외교부 장관이 첫 기자 간담회에서 “외교적 노력을 했으나 결과적으로 잘못됐다. 외교부를 대표해서 마음 아프고 국민에게 죄송스럽다”고 사과한 게 잊히지 않는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 중국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절망스럽다. 지난달 항저우 아시안게임 폐막식 다음 날 중국은 군사작전 하듯이 탈북자를 동시다발적으로 북송했다. 지린성, 랴오닝성에 수감돼 있던 탈북자 600명을 트럭에 태워 사지(死地)로 보냈다. 탈북자가 6명, 60명도 아니고 600명이 다시 지옥으로 갔는데도 한국 사회는 무덤덤하다. 윤석열 정부에서 누군가 책임을 지거나 질책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2000년 7인의 탈북자 사건 때처럼 사과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도 전혀 언급이 없다. 중국의 탈북자 집단 송환이 알려진 후, 4일 만에 통일부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중국 측에 엄중하게 문제 제기했다”고 밝힌 것이 사실상 전부다.
정부 안팎에서는 윤 정부가 “시진핑 방한을 성사시키려고 탈북자 문제에서 중국에 저자세를 보이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윤 정부는 올가을 들어서 갑자기 시진핑 방한 가능성을 띄우기 시작했다.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9월 “시 주석이 지난해 발리 G20 회의에서 윤 대통령에게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면 기꺼이 한국에 가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같은 달 시진핑이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국무총리를 만나 “방한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말했다는 정부의 발표도 나왔다.
시진핑은 2014년 이후 9년째 한국을 방문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한국에서는 박근혜·문재인 대통령이 각각 세 차례, 두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1992년 양국 수교 후 이런 불균형은 없었다. 그의 방한은 2016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을 계기로 악화된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일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중국이 이 같은 한국의 희망을 잘 알고, 시진핑 방한을 외교 무기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진핑 방한 가능성을 슬쩍 흘리면서 중국에 할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이다. 시진핑이 지난주 샌프란시스코 APEC 회의에서 미·일 정상과 만나면서도 굳이 윤 대통령을 만나지 않은 것은 ‘몸값 높이기’ 전술로 봐야 한다.
중국 사정에 밝은 이들은 시진핑이 당장 방한할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는다. 정부는 리창 총리가 참석하는 한·중·일 3국 정상회의라도 먼저 개최하려고 올해 내내 공을 들였으나 중국은 여전히 뭉그적거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2025년 20년 만에 다시 APEC을 개최하는데, 시진핑이 이때서야 방한을 검토할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다.
시진핑의 ‘방한 검토’ 한마디에 정신이 팔려 저자세로 나가다가는 중국의 기만 전술에 당할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중국을 중시하며 취임한 지 반년 만에 서둘러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로 치켜세운 그에게 돌아온 것은 ‘베이징 혼밥’과 중국 외교부장이 아랫사람 대하듯 팔을 툭툭 치는 하대(下待)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이하원 기자
11.23 北 정찰위성 발사 도운 러시아, 좌시하면 더 큰 위협 맞을 것
북한이 21일 밤 군사 정찰위성 만리경-1호를 발사했다. 지난 5월과 8월 발사 땐 실패했지만 이번엔 일단 우주 공간까지 날려 보내는 데는 성공했다고 한다. 궤도에 정상 진입해 지상 기지국과 신호를 주고받는지가 확인돼야 최종적으로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일본에선 궤도 정상 진입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1·2차 발사 때에 비해 어느 정도 기술 진전을 이룬 것은 사실로 보인다. 국정원은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기술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국방장관도 “러시아 도움을 받아 로켓 엔진 문제점을 거의 해소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은 지난 9월 북·러 정상회담 때 예견됐다. 당시 회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탄약 부족에 시달리는 러시아가 북한 포탄을 지원받기 위해 어떤 대가를 제공 하느냐가 관심사였다. 푸틴은 북의 위성 개발을 도울 것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핵 개발에 따른 유엔 제재로 어떤 무기 거래도 할 수 없다. 위성 발사도 금지돼 있다. 이 제재는 러시아가 찬성해 채택된 것이다. 국제 평화 수호의 의무가 있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주권국을 침략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스스로 만든 유엔 결의를 다 위반하고 있다.
▲북한의 정찰위성 '만리경-1호'를 탑재한 로켓 '천리마-1형'이 21일 밤 평북 철산군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노동신문·뉴스1
심각한 것은 러시아가 우리 안보까지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북 정찰위성은 극히 초보적인 것으로 군사적 효용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러시아의 도움을 계속 받게 되면 달라질 것이다. 러시아는 북한 포탄을 받고 위성만이 아니라 각종 무기체계도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빠른 기간 안에 수 개의 정찰위성을 추가 발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북의 숙원 사업은 무기 현대화다. 러시아가 북한 포탄에 목매는 상황이 길어지다 보면 최신 전투기나 방공 시스템을 제공하지 말란 법도 없다.
푸틴이 대북 지원을 공언한 데엔 한국을 얕잡아 본 측면도 있다. 한국이 러시아를 실질적으로 압박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고 봤을 것이다. 정부는 러시아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줘야 한다. 정부가 러시아의 한국민 위협 행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미·일과의 군사협력을 더욱 강화해 러시아에 부담을 지워야 한다. 동해상에서 한·미·일 연합훈련의 강도와 빈도를 높이고, 점점 빈번해지는 러시아의 한·일 방공식별구역 무단 진입 시 한·미·일 공중 전력이 동시 출격해 대응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대러시아 제재망에도 적극 참여해 실질적으로 러시아에 피해를 줘야 한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한국 안보를 계속 위협하면 특단의 대책도 불사해야 한다. 지금 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행동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조선일보 사설
11-24 ‘日 정부가 위안부 배상’ 2심 판결, 司法自制 저버렸다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직접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첫 2심 판결은, 지난 2012년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김능환 판결’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건국하는 심정” 운운한 김능환 당시 대법관의 판결과 2018년 김명수 체제에서의 계승 판결을 둘러싼 문제가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으로 겨우 봉합을 향해 나아가는 상황에서 훨씬 심각한 사법적·외교적 과제를 던진 것이다.
서울고등법원 민사 33부(재판장 구회근)는 23일 “일본 정부는 이용수 할머니 등 피해자 1인당 위자료 2억 원과 이에 대한 지연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앞서 1심은 2021년 4월 “국제법상 ‘국가 면제’에 따라 소송이 허용되지 않는다”며 기각했는데, 이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일본이 한국 영토 안에서 한국민에게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 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국제관습법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논거로 뒤집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민국을 식민 지배하면서 저지른 만행을 고려하면, 이보다 더한 판결도 당연하게 보이지만, 국제법 일반 원칙과 1965년 한일 기본조약 및 청구권 협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죽창가식 민족주의 판결’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힘들다.
국가 면제 등을 수용하는 사법 자제(司法自制), 즉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의 공권력 행사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국제법 원칙은 대다수의 나라에서 통용된다. 국가별로 애국적 판결이 나오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판결을 집행하기도 힘들다. 대다수 선진국은 외교 문제가 관련된 재판의 경우에는 정부 공식 해석을 존중한다. 3권분립을 준수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한목소리를 내기 위함이다. 영국 법원은 재판 때 행정부 확인서를 외교부에서 받아 반영하고, 프랑스 법원도 판결에 앞서 행정부 의견 조회를 필수로 규정한다. 한일 양국은 지난 2015년 위안부 합의 때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선언을 한 바도 있다. 일본 정부는 아예 무대응으로 일관해 대법원에서 시정할 기회도 없을 것 같다.
문화일보 사설
11-24 북중러 核공세와 韓美 다키스트 아워

이미숙 논설위원
중러 核연대로 국제위협 증대
북핵폐기 협상도 현실성 없어
美 핵전략 바꿀 필요성 더 커져
美 핵우산은 현상유지 미봉책
동시 다발 전쟁 시 이행 어려워
전술핵배치·핵역량 확보 필요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안보 위협에 직면해 있다. 수년 내 핵탄두를 2배로 늘리려는 러시아와 중국, 북한, 이란 등 4개 적대국의 위협에 동시 대응해야 하는 상황으로, 6·25전쟁 이후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처럼 강력한 군사적 도전을 당해본 적이 없다.’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부 장관은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11·12월호에 실린 논문 ‘기능 장애에 빠진 슈퍼 파워(Dysfunctional Super Power)’에서 미국이 처한 안보 상황을 이렇게 비관적으로 진단하면서 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5년간 국방부 수장이었던 게이츠 전 장관의 인식은 충격적이다. 중국의 부상이 경제 위기 속에서 한풀 꺾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중·러·이란 등 권위주의 독재 4국의 핵 증강이 미국 주도의 국제 안보 질서를 뒤흔든다는 평가다. 게이츠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국방력 강화를 위해 의회와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핵전략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적대국의 핵 증강에 맞서기 위해 억제 위주의 기존 핵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주문이다. 동맹국과 핵 역량을 집단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조지프 윤 전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는 한국이 핵으로 북핵에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최근 방한 때 가진 필자와의 대화에서 “북한 비핵화는 더 이상 실현 가능하지 않다”면서 “한국은 이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나아가 “한국은 협상을 통한 북핵 폐기에 집착하지 말고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나 자체 핵 개발로 남북 핵 균형을 맞춘 뒤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고도 했다.
윤 전 대표는 “개인적 견해”라고 했지만, 40년 가까이 국무부에서 일해온 커리어 외교관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최종현학술원이 ‘기로에 선 미국 외교정책’을 주제로 최근 주최한 한미 전문가 비공개회의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2년 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는 윤 전 대표의 상황 인식은 게이츠 전 장관의 포린 어페어스 글과 일맥상통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러, 북·러의 핵 밀착이 뚜렷해지면서 한미 양국 및 자유 진영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인식이다. 권위주의 독재국의 핵 공세가 강화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핵전략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하며, 한국도 북한 비핵화라는 신기루에 집착하지 말고 핵에는 핵으로 대응하는 현실적 방안을 동맹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미 외교안보 주류 인사들의 권고인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연초 외교·국방 업무 보고 때 “북핵이 심각해지면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한미 정상은 한국에 대한 핵우산을 강화하는 워싱턴선언을 채택했다. 이어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를 통해 확장억제를 3국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핵우산 강화는 현상유지책일 뿐이다. 미국 대통령이 바뀐 뒤에도 워싱턴선언이 지켜질지 미지수인 데다 국제 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져 미국이 여러 개의 전장을 감당해야 할 때 약속 이행이 힘들어질 수 있다. 미국 핵에만 의지하다간 북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
미국이 6·25 이후 최악의 국가 안보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게이츠 전 장관의 진단은 제2차 대전 당시 영국이 처했던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와 같은 상황인 만큼 바이든 대통령이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처럼 결단을 해야 한다는 주문으로 들린다. 처칠은 1940년 독일의 유럽 침공에 맞서는 고독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영국을 살렸고 자유 진영을 지켰다. 한국도 북핵 위협으로 6·25 이후 최대 위기다. 윤 대통령은 영국 국빈방문 중 찰스 3세로부터 처칠의 연설문 모음집을 선물 받았다. 영국을 구한 처칠 같은 지도자가 되라는 응원으로 보인다.
83년 전 처칠처럼, 윤 대통령도 중·러의 지원으로 핵 증강에 나선 북한에 맞서기 위해 가장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할 국면이다. 최근 아산정책연구원과 랜드연구소는 공동보고서에서 전술핵 재배치를 제안했다. 우리 예산을 들여서라도 미국의 전술핵을 보수해 우선 사용권을 갖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핵 능력 확보를 위해 미국과 조용히 협상을 해야 한다. 미국이 더 기능 장애에 빠지기 전에 신속하고 치열하게 해야 한다.
문화일보
11.24 배상 판결 15명 중 11명 변제안 수용… 공탁 거부 4명 현금화 땐 다시 파국
윤석열 정부가 지난 3월 일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 ‘제3자 변제’ 해법을 밝힌 지 8개월이 지났다. 윤 대통령의 결단은 2018년 10월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 이후 악화된 한일 관계를 단숨에 개선시켰다. 8월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한미일 3국 협력 선언’을 낳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제3자 변제안에 대법원 배상 판결을 받은 일제 징용 피해자 15명 중 11명이 응해 73%의 수용률을 기록 중인 가운데, 지난 16일 샌프란시스코 APEC 회의에서 만난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제3자 변제안이 한일 화해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비교적 높은 평가를 내리지만, 국내적으로는 찬반 논란이 여전하다. 지난달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일본의 겐론(言論) NPO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제3자 변제안은 한국에서 ‘긍정 평가 28.4%, 부정 평가 34.1%, 어느 쪽도 아니다 29.7%’였다. 일본에서는 ‘긍정 평가 34.2%, 부정 평가 16.7%, 어느 쪽도 아니다 17.1%’였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이달까지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 15명 중 11명에게 판결금과 지연 이자를 지급했다. 73%의 원고가 제3자 변제안을 수용한 것이다. 이 중에는 생존자도 1명 포함돼 있는데 그는 대법원에 계류 중인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한 특허권 특별현금화명령도 취하했다.
원고 1명당 배상금과 5년간 지연 이자를 포함, 2억3000만~3억1000만원씩 수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원(財源)은 1965년 한일 협정으로 도움을 받은 포스코가 기부한 40억원을 바탕으로 했다.
▲그래픽=박상훈
원고 15명 중에서 생존자 2명을 포함한 4명이 배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피해자지원재단은 생존자와 사망한 2명의 유족 10명의 거주지 법원 12곳에 배상금을 공탁하려 했다. 그러나 법원 공탁관들이 ‘채권자의 의사에 반해 제3자가 변제할 수 없다’는 민법 제469조를 근거로 공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피해자들이 받으려는 의사가 없는데 제3자가 공탁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해자지원재단은 민법 487조 “채권자가 변제를 받지 아니하거나 받을 수 없는 때는 변제의 목적물을 공탁할 수 있다”는 조항을 근거로 “공탁관의 재량을 벗어났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의 1심에서 피해자재단이 패소, 2심이 현재 진행 중이다. 정부 변제안에 반대하는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정부의 공탁 이의신청에 대한 법원의 기각은 사실상 윤석열 정부의 강제 동원 제3자 변제에 대한 파산 선고”라고 주장한다. 법원 안팎에서는 이 문제도 대법원에서 최종 결정이 날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의 ‘제3자 변제’ 결단의 완전한 성공을 포함, 앞으로의 한일 관계도 대법원에 달렸다는 관측이 나온다.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징용 피해자들에게 6000억원을 보상한 2005년 민관위원회 결정을 무시한 징용 배상 판결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일본과는 달리 정부의 결정에 적극 개입하는 ‘사법 적극주의’ 여파였는데, 이 같은 기조가 계속된다면 한일 관계가 다시 악화될 소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을 거부한 원고 4명은 대법원에 신속하게 ‘특별현금화 명령’을 내려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대법원의 배상 판결 후, 피고 기업이 배상에 응하지 않자 원고인 이춘식 할아버지는 일본 제철 주식을 압류하고, 양금덕 할머니 등 3명은 미쓰비시 상표권과 특허권을 압류했다. 그래도 피고 기업이 응하지 않자 압류 명령에 따른 특별현금화명령을 신청했다.
법원은 2021년 9월 미쓰비시의 국내 압류 재산에 대해 매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미쓰비시가 이에 불복해 항고에 이어 재항고, 이 사건은 2022년 4월부터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대법원이 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비판하며 하루속히 현금화 명령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한 사건과 유사한 징용 배상 소송도 전국에서 약 80건 진행 중이다. 1~3심에 계류 중인 사건의 원고는 약 1200명이다. 정부에서는 이 중에서 약 200~300명이 증거를 모두 갖춰 승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난 9일에도 징용 피해자 정신영 할머니가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정 할머니가 직접 참석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가 진심 어린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14세 때 동해를 건너 미쓰비시의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일했다고 한다.
징용 배상 문제에 밝은 한 전문가는 “원고 4명에 대한 배상금 공탁이 끝내 이뤄지지 않고, 피고 기업 자산의 현금화 명령도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 한일 관계는 다시 악화될 수 있다”며 “이 경우 국민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특별법을 만들거나 다른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고 기업, 내년 총선 전에는 안 움직일 것”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제3자 변제안’의 성공과 한일 관계의 안정적 발전은 우리 측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 시민사회, 피고 기업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현재까지 일본의 반응은 우리의 기대에는 미흡하다는 평가가 많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5월 서울을 방문,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향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같은 달 히로시마 G7 회의 때 윤 대통령과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한 것이 사실상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입장 표명의 전부다.
지난 3월 박진 외교부 장관은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면서 일본 기업의 참여와 관련, “물컵에 비유하면 물의 절반이 찼다고 생각한다”며 “일본의 호응에 따라 나머지 물컵이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는데 물컵이 아직 채워지지 않고 있다.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이 한경협과 함께 미래 파트너십 기금에 10억원씩 내놓은 것 외에는 큰 움직임이 없다. 특히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 두 피고 기업은 아직까지 참여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일본의 한 소식통은 “일본에서도 윤 대통령의 제3자 변제안에 호응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지만, 두 기업은 여전히 내부 논의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본 내에서 “원래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된 문제를 한국이 다시 제기해 문제를 만들었다가 한국이 해결했는데 왜 일본이 나서야 하느냐”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피고 기업이 호응하더라도 내년 4월 총선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일본 기업들이 윤 대통령과 여당의 승리를 지원하려고 총선 전에 돈을 냈다”는 논란에 휩싸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소극적 대응은 아베 신조 총리 이후 쉽게 변화하기가 힘들다”면서도 “하지만 한일이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야 하기에 피고 기업을 포함한 일본 사회가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하원 기자
11.27 4년 만에 만난 한·중·일 외교 장관, 3국 정상 회의도 속히 열려야

▲박진 외교부 장관(가운데)과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대신(왼쪽),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26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누리마루에이펙(APEC)하우스에서 제10차 한일중 외교장관회의를 하기에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일중 외교장관 회의가 열린 것은 2019년 8월 이후 4년 3개월 만이다./김동환 기자
한·중·일 외교 장관 회담이 26일 부산에서 개최됐다. 2019년 8월 중국 청두에서 열린 이후 4년 3개월 만이다. 3국은 사전 회의에서 정상 회의를 ‘상호 편리한 가장 빠른 시기’에 개최하기로 실무 합의했지만,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개최시기에 대한 확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 부장은 ‘시간이 없다’며 공동 기자회견에도 반대했다. 지난 4년여 동안 중단된 3국 정상 회의가 산적한 현안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중국의 소극적 태도로 연내 개최는 어렵게 됐다.
한·중·일 3국은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도가 높으면서도 정치·안보 갈등을 계속하는 ‘아시아 패러독스’ 상황에 놓여 있다. 한일이 윤석열 대통령의 ‘강제 징용 제3자 변제’ 결단으로 관계를 정상화한 상황에서 3국 갈등이 지속되는 가장 큰 책임은 중국에 있다. 시진핑 정권이 패권주의적 대외 정책을 펼치며 기존 질서를 허물고 한일과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2016년 대북 자위권 차원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 결정을 트집 잡아 한국 기업을 쫓아내고 경제 보복으로 한중 관계를 망가뜨렸다. 이달 중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 회의 때는 시 주석이 미국·일본 정상과 만나면서도 한중 정상회담엔 응하지 않아 여전히 ‘한국 길들이기’를 시도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국에서 역대 최고의 혐중(嫌中) 여론이 조성된 것은 중국이 자초한 책임이 크다.
중국은 윤 정부 출범 이후 한·미·일 3국 협력이 강화되는 데 불만을 갖고 있지만 이 또한 중국의 책임이 작다고 할 수 없다.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북한이 유엔 안보리 제재를 수도 없이 어겨가며 미사일 발사 등으로 도발하는 상황을 중국은 지켜만 보고 있는데, 한일이 가만히 있어야 하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국제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에서 동북아의 안정적 관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중국은 인식해야 한다. 즉각 한·중·일 3국 정상 회의에 나와 북한 등 민감한 현안을 논의할 시점이다. 우리 정부도 한미 동맹과 한·미·일 3국 협력을 굳건히 하면서 우호적인 한중 관계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11-27 3국 정상회의 날짜 못 잡은 장관 회의와 지나친 中 몽니
한국과 일본, 중국의 외교부 장관들이 26일 부산에서 회의를 갖고 3국 정상회의 개최 문제를 협의했지만, 날짜도 잡지 못한 채 산회한 것은 3국 관계의 실상을 보여준다. 3국 외교장관은 4년3개월 만에 한자리에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동 기자회견은 물론 만찬도 하지 않았다. 박진 장관이 “정상회의를 상호 편리한 가장 빠른 시기에 개최하기로 한 합의를 재확인했다”고 밝혔을 뿐이다.
3국 외교장관이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린 3국 고위급회의의 합의 사항을 반복한 것은 일정 조율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당시 우리측은 12월 개최안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이번 회의에서도 합의되지 않은 만큼 연내 개최는 물 건너간 셈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보여준 고압적 행태는 실망스럽다. 그는 예정됐던 기자회견과 만찬을 취소하고 출국했다. 이유가 어떻든 외교적 결례다. 회의 때에는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 등 잇단 도발은 논외로 채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대화 재개가 필요하다”는 말만 했다.
한·일·중 정상회의는 1999년 아세안+3 회의 때 3국 정상이 조찬 회동을 가진 것을 계기로 시작돼 2008년부터 매년 열렸다. 2011년엔 서울에 3국 협력사무국(TCS)이 설립될 만큼 제도화도 이뤄졌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 취임 후 패권주의가 강화되며 3국 정상회의는 급격히 동력을 잃어 지난 10년간 단 3번 열렸을 뿐이다. 미·중 패권 경쟁으로 신냉전 양상이 빚어지고, 그런 핑계로 중국이 3국 협력을 경시한 탓이다. 더구나 중국의 갈륨, 게르마늄 등 핵심 광물 수출 제한 정책으로 공급망 교란이 본격화하면서 협력은 더욱 위축됐다. 중국은 몽니를 접고 3국 간 외교 정상화에 나서야 한다. 특히 정상회의는 이견이 있더라도 매년 1회 열리도록 하는 게 3국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다.
문화일보 사설
11-27 위안부 2심 판결이 오해한 ‘국가면제’

성재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교수·국제법
최근 들어 국내 법원에서 국제법과 관련된 판결이 드물지 않게 나온다. 우리 헌법 제6조가 국제법에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인정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때마다 깊이 유의하면서 지켜본다.
지난 23일 서울고등법원 민사 33부가 내린 위안부 손해배상 판결도 그 한 사례이다. 2021년 4월 서울중앙지법은 이용수 할머니 등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국가면제(주권국가를 다른 국가 법정에 세울 수 없음)를 이유로 각하했다. 그러나 2년여 만에 서울고법은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 금액을 전부 인정한다고 판시했다.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한 논거로는 국제관습법의 변화를 제시했다. 고등법원의 법리는 국가면제 법리가 종래의 ‘절대적 면제’에서, 비주권적 행위는 면제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제한적 면제’로 변했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비주권적 행위란 상업적 행위 등을 일컫는 것으로, 이를 따르게 되면 일본의 전쟁위안부 강제행위가 상업적 행위가 돼 버린다. 이와 함께 판결 근거로 예시한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지난해 4월 14일 판결에서 러시아의 적대 행위는 불법행위여서 주권면제의 예외에 해당한다고 했다. 러시아의 침공은 국제법의 핵심 원칙을 노골적으로 위반한 것으로, 주권 행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러시아에 주권면제를 인정하면, 유럽인권협약과 우크라이나 헌법상의 피해자 권리 보호를 위한 공정한 재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며, 테러방지협약 하의 우크라이나 의무를 침해한다고도 했다. 이 판결은 러시아의 무력공격에 초점을 맞춘 국제법 위반을 핵심 쟁점으로 삼은 것으로, 침략행위는 주권면제 대상이 아님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와는 다른 판결을 내린 바 있다. 2012년 독일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제소한 국가의 관할권 면제 사건에서 재판소는 국제관습법상 영토적 불법행위의 예외는 조약법이나 국제관습법상 허용되는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고, 해당 행위가 강행규범 위반이어서 면제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기각했다. 국가면제에 관한 규칙은 일국의 법원이 타국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일 뿐, 해당 쟁송의 적법성이나 불법성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일국의 행위가 타국 또는 타국민에 피해를 줄 경우라도 타국 법원이 재판토록 두기보다 국제법을 기반으로 정부 간 해결토록 하는 게 현 국제법상 더 적절하다는 데 기반한다. 국가면제의 근본적 이유와 필요성을 정확하게 판시한 것으로, 우리 법원은 이 점을 간과한 것이다.
국제법이 제정 당시의 모습대로 불변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국가면제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일국의 법원이 타국의 정부를 재판하게 되는 경우 해당 국가가 타국의 주권 아래 놓이게 될 것을 우려한 국제법상의 법리가 여전히 유효하고 국가 간의 평화적 해결 방안이 유의미한 것이라면, 어떠한 접근이 적합한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일본 군대위안부로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겪은 분들에게 사죄와 더불어 합당한 피해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본은 전쟁위안부 강제동원이 갖는 함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정부 또한 기울여야 할 노력의 높이와 깊이를 정확히 가늠해야 할 것이다.
문화일보
11-28 ‘원팀코리아’ 로 뛴 1년6개월… 부산, 이제는 ‘진인사대천명’

▲모두의 염원 담아… 28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 이벤트 광장에 설치된 2030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응원 벽 앞에서 부산 시민들이 점프를 하며 부산이 개최지로 선정되길 기원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엑스포 개최지 내일새벽 결정
2030 부산 세계박람회(엑스포) 대표단이 유치를 위한 18개월간의 공식활동을 마무리하고 28일 오후(현지시간) 열리는 결선투표를 앞두고 있다. 부산은 유력 경쟁도시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비하면 늦은 출발이었지만 투표를 앞둔 현재 리야드와 경합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정부가 끌고 재계가 밀며 ‘원 팀 코리아’(One Team Korea)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주 프랑스 파리에서 막판까지 유치전에 힘을 쏟은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무회의에서 “이번 순방 기간에도 각국 정상들과 쉴새 없이 통화하면서 2030 부산 엑스포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며 “‘원 팀 코리아’는 오늘 자정이 지나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뛸 것”이라고 했다.
정부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제173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는 2030 엑스포 유치 경쟁국의 최종 프레젠테이션(PT)과 개최지 결정 투표가 이뤄진다. 부산과 로마, 리야드 순서로 PT에 나서 막판 경쟁을 펼친다. 한국시간으로 29일 오전 1시를 전후해 개최지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오늘(27일)까지 다져놓은 유치활동이 대한민국의 지지표로 이어지도록 마지막 PT 준비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대표단의 공식 활동은 윤석열 정부 출범 후인 지난해 7월에서야 본격 시작됐다. 유치전 초반 부산은 리야드에 비해 약체로 평가됐지만 현 시점에는 만만치 않은 경쟁 상대로 떠올랐다. 중앙과 지방 정부가 합심한 것은 물론이고 재계와 민간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분으로 평가된다. 윤 대통령이 지난 23∼25일 파리를 방문해 표심에 호소했고 우리나라 주요 기업의 고위 관계자들이 최근 일주일간 파리에 머무르며 부산 지지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김유진 기자 klug@munhwa.com
11-28 공동 회견도 발표문도 없이 끝난 4년 만의 한중일 외교회의

▲손 맞잡은 한중일 외교 박진 외교부 장관(가운데),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상(왼쪽),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26일 부산 해운대구의 ‘누리마루 APEC 하우스’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해 손을 맞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부산=뉴스1
박진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상이 그제 부산에서 4년 3개월 만에 만나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 문제를 협의했지만 “3국 협력을 조속히 복원하자”는 원론적 합의 외엔 구체적인 일정을 잡지 못했다. 한중일 외교장관회의 때면 진행되던 공동 기자회견이나 만찬도 왕 부장이 바쁘다며 회의 직후 귀국길에 오르는 바람에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공동 발표문도 없이 3국 외교부가 각자 회의 결과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마무리됐다.
이번 외교장관회의의 핵심 의제는 4년간 중단된 한중일 정상회의의 복원이었다. 한중일은 9월 서울에서 열린 고위급회의(SOM)에서 3국 정상회의를 ‘상호 편리한 가장 빠른 시기’에 개최하기로 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리창 중국 총리가 참석하는 3국 정상회의를 연내 서울에서 개최하고 이어 내년 초 시진핑 주석의 방한을 내다보며 한중 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중국은 이번 장관회의에서 끝내 정상회의 일정을 제시하지 않았다.
중국의 이런 태도는 최근 미국과의 관계 변화에 따른 변심(變心)일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까지 미중 갈등의 격화 속에 한미일 3국이 밀착하자 중국은 역내 협력을 빌미로 한일 양국을 미국에서 떼어 놓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미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갈등 국면이 누그러지면서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기류로 바뀐 것이다. 그러면서 주변 국가 간 경쟁과 반목을 부추기는 밀고 당기기 외교를 가동한 듯하다. 중국은 이번에도 한미일 연대에 불편함을 드러내며 “경제의 정치화, 과학기술의 도구화, 무역의 안보화에 공동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분간 중국은 대미 관계에 주력하면서 한일과의 관계는 현상 관리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일단 한중일 정상회의의 연내 개최는 물 건너갔고 시 주석 방한도 언제라고 기약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우리가 그런 중국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만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북한의 대남 위협과 북-러 군사협력 등 안보적 불안정 요인이 쌓이는 데다 경제적으로 중국 의존도가 높은 처지에서 경제안보의 불확실성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마침 미중 간 해빙 기류가 형성된 만큼 우리 정부도 중국과 소통을 강화해 협력의 기반을 만들면서 외교의 폭을 넓혀야 한다.
동아일보 사설
11.29 호주의 당당한 대중 외교 배워야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26일 부산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에서 “앞으로 (3국) 정상회의 개최가 머지않은 시점에 가시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공을 들였던 한·중·일 정상회의 연내 개최가 중국의 비협조로 사실상 무산됐다는 뜻이다.
이번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는 4년 전 회의와 비교해 대북 공조에서도 후퇴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박 장관과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상은 모두 발언에서 북한 문제를 거론했지만,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겸 외교부장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4년 전 회의 때는 3국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소통을 이어나가기로 했을 뿐이다. 중국 측은 당사국들이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일관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계열 글로벌타임스는 중국 전문가들을 인용해 한·미·일 협력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려면 한·일이 대만·동중국해·남중국해 등 중국의 핵심이익을 존중하고 더 많은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중일 정상회의 연내 개최 무산
중국, 한반도 비핵화에도 소극적
대중 관계는 의연하고 일관되게
중국은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도 한국을 외면하는 행보를 보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4시간 동안 회담하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반면, 윤석열 대통령과는 별도 회담 없이 3분 정도 만나는 데 그쳤다.
윤 정부 들어 한국은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는 한·미·일 공동성명 중에선 최초로 ‘중국’을 명시하면서 남중국해와 대만해협 등에서의 불법·강압적 활동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일에 밀착하는 한국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길들이려 한다고 진단한다. 중국은 과거에도 한국 길들이기를 해왔다. 2016년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산 문화 콘텐트의 중국 수출을 차단하고, 중국 여행사들의 한국 단체여행 모집을 사실상 금지했다. 중국은 올해 초 ‘제로 코로나’ 정책 폐기에 따라 태국 등 60개국에 대한 자국민 단체여행을 허용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지난 8월에야 풀었다.
한국 정부는 과거 중국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왔다.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이며 미·일과 멀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에 한국은 압박하면 물러나는 물렁한 나라라는 인식을 줬다.
이는 호주의 중국 대응과 대비된다. 호주가 2020년 4월 중국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자, 중국은 호주산 육류·와인·석탄 등의 수입을 제한했다. 이로 인해 호주의 중국 수출 비중은 2020년 40.5%에서 2022년 29.5%로 떨어지는 등 타격을 입었다. 중국도 호주산 석탄 수입 금지로 2020년 겨울 심각한 전력난을 겪었다. 호주는 2021년 9월 미국·영국과 안보 삼각 동맹인 오커스(AUKUS)를 맺어 미국 주도의 중국 견제에 힘을 보탰다. 호주가 대중 외교에서 일관된 행보를 보이고 지난해 5월 친중 성향의 노동당이 집권하며 양국 관계는 정상화되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 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앤서니 앨버리지 호주 총리와 7년 만의 정상회담을 갖고 “건전하고 안정적인 중국·호주 관계는 양국의 공동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중국은 한국에서 미국을 밀어내 한반도를 자국 영향권 아래 두려고 하고, 미국은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 등을 통해 대중국 견제에 한국을 더욱 끌어들이려 한다. 한국은 북한 위협 때문에 한·미 동맹이 필수이지만, 중국과의 경제 관계도 중요하다. 미·중 대결이 더욱 치열해지며 한국이 양국 사이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한국은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북한 위협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해방 이후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통해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뤘다. 미래에도 한국의 국익은 자유민주주의에 있다.
호주 사례에서 보듯 중국의 압박에는 국익에 기반해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중국이 언제까지나 한국을 무시할 수는 없다. 중국은 20% 이상의 청년 실업률과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 막대한 지방정부 부채 등으로 인해 경제 회복이 시급하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일관되게 내세우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의연하게 추진한다면 한·중 관계도 머지않아 정상화될 것이다.
중앙일보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11.29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사우디 오일머니’ 벽 못 넘었다

▲29일 오전 부산 동구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린 2030부산세계박람회 성공유치 시민 응원전에서 부산의 2030엑스포 유치가 무산되자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연합뉴스
대한민국 부산이 2030년 세계 박람회(엑스포) 유치를 위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와 피를 말리는 경쟁에서 패했다. 지난해 5월 말 엑스포 유치 추진위원회를 결성, 547일간 치열한 유치전을 벌여왔으나 ‘오일 머니’를 앞세워 한발 먼저 유치전에 뛰어든 사우디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29일 새벽(한국 시각) 프랑스 파리 외곽의 ‘팔레 드 콩그레’ 행사장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부산은 29표를 받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119표를 받아 승부가 났다. BIE 고위 관계자는 “지금까지 있었던 거의 모든 엑스포 개최지 결정투표에서 1차 투표 1위 도시가 최종 개최국이 됐다”며 “부산이 이번에 선례를 깰 것이란 기대도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8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외곽 팔레 데 콩그레에서 열린 제173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2030년 세계박람회 개최지 선정 투표결과 부산이 탈락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한국은 앞서 1993년 대전 엑스포(과학), 2012년 여수 엑스포(해양과 환경) 등 특정 분야를 주제로 열리는 ‘전문엑스포(인정 박람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와 달리 2030 엑스포는 모든 분야를 포괄하며, ‘월드 엑스포’로 불리는 등록 박람회다. BIE 주관 엑스포 중 가장 격이 높은 행사다. 올림픽·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3대 행사로 꼽히나 한국은 아직 유치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 3대 행사를 모두 개최한 나라는 미국·캐나다·독일·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이른바 G7(7국) 소속 6국뿐이다.
조선일보 파리=정철환 특파원 류정 기자
11-29 부산엑스포 유치 불발 교훈과 경제·외교 지평 확장 성과
부산이 2030엑스포(세계박람회) 유치에 실패했다. 부산시가 도전에 나섰던 2014년 이후 9년,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9년 5월 부산엑스포 유치를 국가사업으로 결정한 뒤 4년 반, 윤석열 정부 들어 지난해 7월 민관 합동 유치위원회 출범 이후 500여 일 동안 기울인 노력을 돌아보면 허탈감까지 느껴진다. 29일 국제박람회기구(BIE) 투표 결과(리야드 119표, 부산 29표, 로마 17표)를 보면 더욱 그렇다. 유치 불발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훈과 성과도 남겼다. 이번 경험을 활용해 2035년 엑스포 유치 재도전에 나설 수 있고, 경제·외교 지평을 주요 국가에서 벗어나 획기적으로 넓힐 계기도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짚어볼 문제는, 국가사업으로 결정하고도 너무 늦게 실질적 유치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우디아라비아보다 1년 이상 늦었다. 정부·기업·지자체가 ‘원팀’ 정신으로 나섰지만 10조 원을 투입한 ‘오일 머니’ 벽은 높았다. 182개 회원국이 동등하게 한 표씩 행사하다 보니 사우디의 지원 약속을 받고 이미 지지 선언을 한 이슬람권과 아프리카·아시아 등지에서 몰표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한국 관계자들이 만난 대표단을 바로 뒤에 만나는 ‘방석 뒤집기’식으로 밀착 로비도 전개했다. 유치위나 대통령실, 심지어 언론까지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낙관적 전망에 휘둘린 것은 아닌지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엑스포 유치는 무산됐지만 그 과정에서 정부와 기업이 얻은 성과는 적지 않다. 우선, 부산이 ‘글로벌 허브 도시’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글로벌 스마트센터지수(SCI)에서 부산시는 세계 77개국 중 19위, 아시아에선 싱가포르와 홍콩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인기 여행지로도 급부상했다. 자매·우호 도시도 37개에서 49개로 늘었다. 삼성과 현대기아차 등 대기업들은 유치전을 통해 아프리카 등지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기업 총수들이 한 번도 가지 않은 나라를 방문, 사업 영역도 크게 넓혔다. 정상급 인사가 수교 이후 처음으로 방문한 나라도 수두룩하다. 막판 일본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것도 성과이다.
최근에는 국가 단위의 엑스포보다 세계가전전시회(CES) 같은 기업 단위 전시회가 더 큰 관심을 끄는 추세이긴 하다. 야당은 유치 좌절을 정쟁에 끌어들이지 말고, 유치위는 문제점을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평창동계올림픽도 3수 끝에 유치에 성공했다. 재도전도 검토할 만하다.
문화일보 사설
11.30 ‘엑스포 올인’ 분위기에… 정부도 기업도 객관적 보고 못해 오판
사우디에 119대 29 완패, 왜…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2030 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와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다. 오른쪽엔 김대기 비서실장, 조태용 국가안보실장 등이 굳은 표정으로 윤 대통령의 담화를 듣고 있다./연합뉴스
2030 엑스포 유치전은 부산의 조기 탈락으로 끝났지만, 한국은 대통령부터 정부 부처, 주요 기업까지 한 몸처럼 뛰는 과정에서 외교와 기업 활동의 무대를 넓히는 성과를 거뒀다. 윤석열 대통령도 29일 “고맙게도 우리 기업들이 함께하겠다고, 민관이 공동으로 하겠다고 참여해줬다”며 “지난 1년 반 동안 정말 아쉬움 없이 저희는 뛰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과 별개로 우리 정부와 기업이 사우디의 압승으로 귀결된 흐름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읽어내지 못한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정보 수집과 판단 역량에서 문제를 드러냈고, 대통령이 앞장선 ‘엑스포 올인’ 분위기 속에서 객관적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가다듬지 않으면 훗날 주요 국제 행사 유치전을 벌일 때에도 잘못된 판단으로 국력을 낭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엑스포 개최지를 경선으로 정하기 시작한 1990년 이래, 3곳 이상의 도시가 도전했는데 1차 투표만으로 개최지가 확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우디는 투표 참가국 165국 가운데 119국(72.1%)의 지지를 얻어, 곧바로 유치를 확정 지었다. 120여 국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사우디의 공언과 외신의 보도에 거의 부합하는 결과였다.
반면 한국은 29표(17.6%)를 얻는 데 그쳤고, 이는 한국 정부와 재계의 판세 예측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29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투표일 직전까지 정부 내에선 1차 투표에서 70표 정도를 얻을 수 있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한국이 1차 투표에서 떨어진다고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사우디가 유리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정부와 재계는 2차 투표에서 한두 표 차이로 승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보고, 사우디에 투표하겠다고 이미 약속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2차에서는 한국에 투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집중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판세를 오판한 결과 잘못된 접근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부산 엑스포 민관 합동 유치단이 28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제173차 총회에서 투표 결과를 바라보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장성민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한덕수 국무총리, 박형준 부산시장,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국무총리실
정부가 처음부터 부산의 유치 가능성이 높다고 오판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 유치위원회를 민관 합동으로 개편하면서 정부가 유치전에 가세할 때만 해도 정부는 사우디의 유치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올해 초까지도 정부의 입장은 “유치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 대통령과 한 총리를 비롯한 정부 최고위 관계자들이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 182국 정상 대다수를 만날 정도로 유치전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희망적 사고가 냉정한 현실 인식을 대체했다. 개최지 결정 몇 달을 앞두고 일부 인사들은 ‘초근접’ ‘역전’ 등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이에 유치 교섭 일선에서 ‘아직 한국이 확보한 표가 훨씬 부족하다’는 보수적인 보고를 올렸는데, 정부 고위층에선 “왜 사기를 꺾는 보고를 올리느냐”는 질책성 반응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민간유치위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을 하면서 판세를 오판했다. 재계에 따르면, 민간유치위는 1차 투표에서 사우디와 한국이 각각 90표, 70표 정도를 얻을 것으로 예상했고, 이탈리아 지지 10여 표, 부동표 10여 표가 2차 투표에서 상당 부분 한국으로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사우디는 1차 투표에 승부를 결정 내겠다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사우디가 회원국들에게 ‘2차는 부산을 찍어도 상관없으니 1차에선 무조건 우리를 찍어 달라’면서 각종 물량 공세를 했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과 주요 유치 위원들이 실적 경쟁을 벌이며 자신이 담당하는 국가의 입장을 다소 낙관적으로 보고하면서 우리 측 지지표가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민관이 합심해 엑스포에 전력투구하는 상황에서 우리만 비관적인 보고를 하기 쉽지 않아, 애매한 나라들은 우리 표라고 보고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11-30 안보리 뒤흔드는 ‘무책임 대국’ 중국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중국은 1999년 전국 정치협상회의 보고를 통해 자신들이 ‘책임대국의 모습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면서 ‘책임대국론(論)’을 선언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모습은 책임대국(responsible great power)과는 맞지 않게 위선적이다. 지난 21일 북한이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하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북한의 행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규탄했는데, 11개나 되는 안보리 대북 결의는 탄도미사일 기술을 응용한 발사체의 발사 금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북한을 대상으로 한 제재 결의에 찬성했던 중국의 최근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 중국은 지난 22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각 당사국은 냉정과 자제를 유지해야 한다…각측은…각자의 합리적 우려를 균형 있게 해결해야 한다”고 했고, 27일 안보리에서는 대북 규탄 결의안의 채택을 막고 북한을 감쌌다. 북한의 위험한 도박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유엔의 권위를 무시하며 국제비확산 체제를 뒤흔드는 행위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이에 침묵하며 뒤에서 지원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중국의 이런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71년 유엔 회원국이 되기 전에는 물론 그 후에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면서도 중국은 유엔을 존중하지 않는다. 1947년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 아래 ‘남북총선거안’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1948년 5월에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치러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1950년 6월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부산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북한에 점령되기에 이르렀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미국·영국·프랑스·터키·호주를 포함한 16개국이 전투병을, 스웨덴·인도·이탈리아 등 6개국이 의무병력을 제공해 유엔 깃발 아래 침략자인 북한에 맞서 싸웠다. 그런데 중국은 연 290만 명을 파병해 북한을 도왔다. 침략자의 편에 서서 유엔을 상대로 전쟁을 한 것이다.
1971년 유엔 가입 이후 중국은 50년 넘게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누려 왔는데, 중국이 그 지위에 부합하는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2022년 한 해 동안 북한은 미사일 65발을 시험발사 했다. 이는 안보리 결의 위반인 만큼 안보리에서 조치를 해야 하는데,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북한의 합리적 우려를 해소해야 한다”며 북한을 감싸고 두둔했다. 이런 중국의 모습은 ‘책임대국’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이 자국 이기주의와 일방주의에 몰입해 북한과 같은 국제질서의 파괴자들을 감싸는 것은 안보리를 형해화하는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동시 추구라는 ‘쌍궤병행(雙軌竝行)’을 외치는 것이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공산화라는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중국의 이런 입장은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 협력을 더 강화시킬 뿐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 개발이 한반도는 물론 세계의 안정과 평화를 해친다는 점을 지적하고, 북한의 태도 변화를 위한 국제적 압력에 동참해 ‘책임대국’의 역할을 다할 때 국제사회의 신뢰와 호응을 얻게 될 것이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