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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023/ [221] 투표권이 없는 ‘요람’을 지켜라 - [240] 경찰관에 대한 포상

상림은내고향 2023. 11. 15. 17:05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소설가 조선일보 2023.

07.05 

[221] 투표권이 없는 ‘요람’을 지켜라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아기가 죽었다. 장난감 더미 위에 부유하듯 널브러진 아기를 회색 커버 안에 누이고 뼈마디가 비틀어진 몸 위로 지퍼를 채웠다. 여자아이는 구급대가 도착했을 때 아직 살아 있었다. 그 아이는 사나운 짐승처럼 맞서 싸웠다. 싸움의 흔적들. 아이의 말랑한 손톱 아래 박힌 살점들이 발견되었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구급차 안에서 아이는 몸부림쳤고 경련으로 꿈틀거렸다. 두 눈을 부릅뜬 모습이 애타게 공기를 찾는 것 같았다. 목구멍에는 피가 가득했다.”

-레일라 슬리마니 ‘달콤한 노래’ 중에서

 

아기 시신을 냉장고에 넣어놓고 어떻게 살았을까. 냉장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꽁꽁 얼어붙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귀에 쟁쟁했을 텐데, 어떻게 재료를 꺼내 요리하고 밥을 먹었을까. 보건복지부 감사 과정에서 부모 손에 살해되어 냉동 칸에 보관된 두 아기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지난해까지 8년간, 출생신고 되지 않은 아기는 2000명이 넘는다.

 

태어나고 2년 넘게 나 또한 세상에 없는 아이였다. 예전에는 본적지에서 출생신고를 했는데 지방에 계신 조부가 출생신고를 미룬 탓이었다. 힘들게 서울살이하던 부모님이 평일에 내려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당시엔 일찍 죽는 아기가 많아서 늦은 신고가 드물지 않았다.

 

 ▲퍼팩트 내니 콩구르상을 받은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 장편소설.

 

소설은 살해된 두 아이의 죽음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한다. 보모 루이즈는 불행한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돌보던 아이들을 제물 삼아 자살을 시도했다. 루이즈에게 맡기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며 폴과 미리엄 부부는 울부짖는다. 아기를 낳아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미리엄도 ‘얘들이 날 산 채로 잡아먹는구나’라며 산후 후유증과 양육 스트레스로 힘들어했다.

 

출신 지역을 알지 못하도록 2008년에 호적법이 폐지되면서 태어난 지역에서 출생신고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신고하지 않아도 과태료 5만원, 영아를 살해하고 유기해도 법은 무거운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인구 절벽, 국가 소멸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뒤늦게나마 출생신고 관련법이 바뀐다. 특정 집단에게 이익을 주고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이태원참사특별법, 노란봉투법 등과 달리 투표권이 없는 ‘요람’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 충분한 검토와 꾸준한 관찰, 세심한 보완이 지속되는지 지켜볼 일이다.

 

 

[222] ‘더러운 평화’와 ‘이기는 전쟁’

 
 

“전우의 편지는 끼엔의 가슴을 덥혀주었다.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다. 전쟁을 겪을수록 파멸의 힘보다 더욱 강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전쟁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힘을 가졌다 해도, 모든 것을 파멸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점점 믿게 되었다. 모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추악한 것도 남아 있었고, 아름다운 것도 남아 있었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본래의 자기 자신만은 바뀌지 않았다.”

-바오 닌 ‘전쟁의 슬픔’ 중에서

 

지난 정부는 ‘가장 좋은 전쟁보다 가장 나쁜 평화가 더 가치 있다’고 했다. 현재 야당도 ‘비싼 평화, 더러운 평화가 이기는 전쟁보다 낫다’고 한다. 개성 연락사무소 폭파, 미사일 발사, 북방한계선 침범, 서해 공무원 피살 등 북한의 끝없는 도발에도 전 정권은 비굴한 평화를 위해 노력했고, 야당은 자유를 찾아온 청년들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어 사지로 돌려보내면서까지 잔인한 평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뜻일까.

 

“아무리 좋은 전쟁도 가장 나쁜 평화보다 나을 수 없다’는 말은 베트남의 소설가 바오 닌이 2012년에 우리나라의 어느 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작가의 참전 경험을 녹여낸 소설 ‘전쟁의 슬픔’은 미군과 한국군을 괴뢰군이라 부르며 맞서 싸운 북베트남군의 시선으로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이야기한다.

 

‘우파 기회주의자, 사상이 의심스러운 불만분자라는 비판을 받고 숙청된’ 아버지와 사회주의 사회를 답답해하는 연인을 이해할 수 없던 주인공 끼엔은 자원 입대한다. 그러나 이념과 승패를 떠나 전쟁이 남긴 건 죽음과 파괴, 상처와 고통뿐이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조국 통일, 민족 해방 전쟁’을 영광스럽게 미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0년 넘게 이 소설을 판매 금지했다.

 

북한은 무력을 사용하지 말자던 군사 합의를 깨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주적을 어떻게 도와줄까, 고민하고 편들고 감싸기 바쁘다. 부국강병을 위한 의지와 노력도 전쟁하자는 거냐며 비난한다. 그들은 왜 북한을 향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더러운 평화가 승전보다 나으니 당장 무릎 꿇고 항복하라’며 호통치고 설득하지 않는가.

 

 

[223] 명예로운 ‘불멸의 초대장’

 
 

“일단 불멸의 배에 오르면 영원히 내려갈 수가 없어요. 이건 공포예요. 공포라고요. 내가 죽어 널브러져 있을 때, 나는 보았어요. 내 시신 옆에 쪼그리고 앉은 마누라는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모조리 끄적거렸고, 그 뒤에서 아들 놈도 뭔가 써 갈기고 있더군요. 친구들은 나에 대해 들은 온갖 뒷공론과 중상을 해댔고 수백 명의 저널리스트도 마이크를 들고 앞다투어 몰려들었지요. 대학에서는 교수들이 그 얘기들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발전시켜 수많은 논문과 책으로 펴냈답니다”

-밀란 쿤데라 ‘불멸’ 중에서

 

정치인은 말로 매혹하고 뜻으로 산을 옮긴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과 목적이 있어도 정치인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눈에 훅, 귀에 쏙, 마음을 움직이는 구호가 필수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어지럽던 국론을 모았다. ‘하면 된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슬로건으로 국민의 공감을 끌어낸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가 놀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정치인은 입으로 현혹하고 혓바닥으로 싸운다. 큰 사람을 적으로 설정하고 호통치면 실제보다 커 보이는 착시 효과를 얻는다. 그래서 일부 정치인은 두 대통령에게 독재자, 친일파, 원조 적폐라는 오명을 씌우고 이제야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왔다며 저항과 투쟁 이미지를 키워왔다. 그들의 무덤 위에 민주화라는 깃발을 꽂고 마음껏 침을 뱉으며 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해왔다.

 

소설 속 헤밍웨이는 불멸의 세계에서 괴테를 만나 불평한다. 사람들이 작품으로 기억해주지 않고 살아생전에 부린 허풍을 비판하거나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까지 꾸며 거짓으로 떠벌린다고 억울해한다. 괴테는 말한다. “그것이 불멸인 걸 어쩌겠소. 불멸은 영원한 소송이라오. 하지만 죽은 뒤 뭘 어쩔 수 있겠소.”

 

영생이나 후대에 길이 남을 영광을 바라며 많은 사람이 불멸을 꿈꾼다. 하지만 변론할 수 없는 사후 악명도 불멸의 일부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국가보훈부가 이승만대통령기념관을 건립한다. 이장호 감독은 두 대통령의 나라 사랑을 바로 알리기 위해 다큐멘터리 영화 ‘하보우만의 약속’을 제작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선물해준 분들께 보내는 명예로운 불멸의 초대장이 고맙고 반갑다.

 

 

[224] 공무원을 위한 세금과 징벌

 
 

“그는 절망적인 운명과 싸우겠다는 즉각적이고도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다시 참된 인간이 되자. 내일은 시내로 나가 일자리를 구해야지. 이 세상에서 떳떳한 사람이 되어 보는 거야. 그는 누군가 자기 팔을 잡는 걸 느꼈다. 돌아보니 틀림없는 경찰의 얼굴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나?’ 경찰관이 물었다. ‘뭐 별로.’ 소피가 대답했다. ‘그럼 따라와.’ 경찰관이 말했다. 이튿날 아침 즉결 재판소의 치안 판사가 판결했다. ‘징역 3개월.’”

-오 헨리 ‘경찰관과 찬송가’ 중에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세금 확보에 혈안이다. 한 마리에 10만원, 두 마리면 깎아서 15만원의 반려동물세가 좋겠다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인구 절벽 시대라지만 자식이 없는 가구엔 무자녀세, 싱글세를 부과하자고 한다. 난임, 불임 부부는 제외한다는데 산부인과 검사를 강제할 작정일까. 부부가 동침을 했는지 안 했는지, 결혼은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 증명하라 할 속셈일까.

 

경찰은 스쿨존 과속 차량을 강제로 정지시키거나 바퀴를 펑크 내는 차단막과 쇠말뚝 같은 장치를 개발 중이라고 한다. 어린이 안전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강제 급정거로 운전자가 다쳐도 괜찮을까. 범칙금 10만원도 모자라 개인 재산을 국가가 파손해도 될까? 2차 사고나 교통 정체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나? 제어 능력을 상실한 차가 어린이를 다치게 하면 누구 책임일까?

 

노숙자 소피는 한겨울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려고 감옥에 갈 계획을 세운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도망치고, 상가 유리창에 돌을 던져 깨뜨려도 경찰은 못 보거나 외면하거나 알고도 체포하지 않는다. 신세를 한탄하며 걷던 그는 교회 앞에서 찬송가를 듣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때 부랑자라는 이유로 경찰이 소피를 체포하고 판사는 감옥행을 선고한다.

 

우리나라에는 세금으로 운영되고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기초지방자치단체 226곳과 117만1400명이 넘는 공무원이 있다. 그들이 제안한 시스템이 법이 되면 국민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무능한 공권력은 꼭 필요할 때는 모르는 척하다가 세금과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가능성에 철퇴를 가한다. 그래도 아직은 역사책이나 해외 토픽에서 본 곤장이나 주리 틀기, 침실세, 창문세, 호흡세 같은 법이 없는 것을 위안 삼아야 할까.

 

 

[225] 법을 악용하는 ‘교활한 천사들’

 
 

“법이란, 사람과 생명과 돈을 닥치는 대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이다. 당사자주의, 억제와 균형, 정의의 추구 같은 개념은 부식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키고 품어야 할 법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곳엔 오직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이다. 나도 무죄냐 유죄냐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람들은 나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나는 다만 교활한 천사일 뿐이다.”

- 마이클 코널리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중에서

 

‘간첩 신고는 113.’ 한때는 흔한 표어였지만 언제부턴가 ‘간첩 없는 나라’가 되었다. 전 정부 시절에는 간첩을 신고하면 신고한 사람을 잡아간다는 말까지 흘러 다녔다. 간첩은 뿔 달린 괴물이 아니다. 이쪽에서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 저쪽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간첩이다. 약점을 잡혔거나 세뇌됐거나 돈과 출세를 약속받았을지 모른다. 인간의 욕망, 기업 간 경쟁, 국가의 주적을 부정하는 사람만 간첩이 없다고 말한다.

 

북한 공작원과 접선, 지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충북동지회 등 간첩 혐의로 기소된 재판 여러 건이 2년 넘게 지지부진한 상태다. 사건을 맡은 변호팀이 국민 재판을 하자, 담당 판사를 바꿔달라, 변호사를 교체한다며 재판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구속 기간이 만료된 피고인들은 방면되어 자유롭게 활동 중이다.

 

미키는 실력이 뛰어난 변호사다. 마약, 폭행, 살인이 확실해도 법을 이용해 무죄로 만들거나 형량을 줄이는 데 명수다. 재판에 도움이 될 만한 하급 공무원들에게 때마다 현찰을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의 정의와 진실은 돈이었다. 살인마가 그와 가족에게 총구를 겨누기 전까지는.

 

사고나 자살이 발생하면 억지로 가해자를 색출,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 책임을 물으면서도 정작 범죄 사건이 터지면 피해자보다 범법자의 인권 보호에 충실한 것이 요즘의 법이다. 특히 좌파 관련 재판은 오래 걸리고 그 외는 속전속결이 법조계 관행이라는 말도 나온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은 법을 악용하는 ‘교활한 천사’를 이길 수 없다. 간첩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일까? 살인은 소수를 죽이지만 법이 간첩에게 눈 감으면 국민의 안전과 나라가 무너진다.

 

 

[226] 범죄가 활개 치는 이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단순함을 강조했어. 단순함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으라고 했지. 범인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첫 번째 원칙은 뭘까? 그는 왜 사람을 죽일까?” “분노, 사회적 소외, 성적 좌절감 때문에….” “아니야.” “그럼 뭔데요?” “탐욕이야. 그것이 그의 본성이야. 우린 어떤 식으로 탐욕을 품게 될까, 클라리스? 맞아. 우리는 매일 보는 무언가를 탐하게 되는 거야. 당신도 다른 무언가를 향해 늘 눈을 이리저리 굴리지 않아?” - 토머스 해리스 ‘양들의 침묵’ 중에서

 

신림동에서 네 명을 칼로 찌른 피의자는 ‘열등감이 든다, 살기 싫다,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분당에서 14명의 사상자를 낸 용의자는 ‘누군가가 나를 청부살인하려 한다’고 했다. 제주 관광객 가격범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고, 대전 고등학교 교사 피습범은 조현병 환자다. 인터넷에는 살인을 예고하는 글들이 올라온다.

 

‘10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무죄추정의 기본원칙은 범죄자들이 법을 얕잡아보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정신질환자들조차 그들이 원할 경우, 즉시 퇴원시켜야 한다고 법으로 못 박았다. 무고할까 봐 풀어준 범죄자 100명의 자유와 정신질환자들이 누리는 인권의 대가는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이다.

 

1988년에 출간된 ‘양들의 침묵’은 범죄자를 영웅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불을 붙였다. 정신과 의사였던 한니발 렉터는 범인을 잡게 도와달라며 감옥으로 찾아온 수사관에게 조언하는 뛰어난 지력의 소유자다. 그는 수감 중에도 의학잡지에 글을 기고해서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무례한 사람만 죽인다며 신사적 면모도 과시하지만 ‘취미로 살인에 맛을 들인’ 살인마일 뿐이다.

 

인간의 마음엔 악마와 천사가 함께 산다. 착한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는 천사를 죽이고 뛰쳐나온다. 요즘 유행하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는 분노와 복수, 범죄조차 권리라고 가르친다. 범인보다 무능한 경찰, 죄보다 가벼운 처벌, 심신미약으로 감형, 정당방위는 폭력이라는 판결이 뉴스를 도배한다. 입법기관인 국회의원 3명 중 1명이 전과자라는 사실도 최근에 발표되었다. 묻지 마 범죄의 증가와 범법자에게 관대한 법, 모든 현상과 결과에는 이유가 있다.

 

 

[227] 범죄자와 가족

 
 

“여길 떠나야겠어. 사람들의 입방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구나.” 엄마가 말했다. “하지만 난 이사 가고 싶지 않아요.” 갑자기 엄마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사람들이 우리가 여기 사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우리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가 우리의 삶을 망가뜨린 것이다. 엄마의 삶과 내 삶은 물론 아버지 자신의 삶마저도.

- 비외른 잉발젠 ‘우리 아빠는 도둑입니다’ 중에서

 

새만금 잼버리는 특정 지역과 조직위원회의 축제였다. 공식 예산액 1170억원 중 870억원이 조직위 운영비 및 사업비 명목으로 사라졌다. 야영장 실태를 보면 시설비 130억원도 기반 시설에 쓰였을지 의심스럽다. 99번의 해외여행, 127억원의 후원금도 챙겼다. 새만금을 중심으로 주변 도로, 공원, 공항 건설 등에 투입되었거나 예정된 사업비는 20조원에 달한다.

 

철근 누락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언제 무너질지 모를 악몽으로 바꿔 놓은 한국토지주택공사는 임원들의 사직서를 받아 거듭나겠다고 했다. 신도시 투기 의혹 당시 ‘내부에선 신경도 안 쓴다. 차명으로 해놨는데 어떻게 찾냐? 투기하며 정년까지 꿀을 빨겠다’는 글이 직원 게시판에 올라왔듯, 공기업의 부정부패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절도 혐의로 아빠가 경찰에 체포되자 소년과 엄마는 이웃에게 따돌림당한다. 범죄자의 가족을 비난하는 것은 옳은가, 소설은 묻는다. 가족은 아빠의 도둑질 덕에 부족함 없이 살았다. 피해자와 이웃이 가해자 가족에게 친절하긴 쉽지 않다. 내 가족이 돌 맞는 일 없도록 힘들어도 정직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먼저여야 한다.

 

정치와 세금 관련 범죄는 규모가 크고 관련자가 많을수록 원상복구, 피해보상이 없다. 하급 관리자만 잘라내고 임원은 사표를 받아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꿔 앉히면 책임은 끝난다. 기소돼도 재판은 길고 처벌은 약하다. 피의자가 사고로 죽거나 자살하면 수사는 종결된다. 남은 가족은 성실한 일반인보다 풍족하게 살 수 있다. 헐렁해진 국고는 국민의 고혈로 금세 채워질 것이다.

 

범죄가 가족 사랑, 성공과 부의 원천이 되었다. ‘왜 우리 남편은 도둑질도 못 하나, 아빠가 크게 한탕하고 죽어주면 좋을 텐데….’ 무서운 가족이 탄생하지 않을 거라 안심해도 될까?

 

 

[228] 뿌리지 않았는데 거두기를 바라는 사람들

 
 

“당신은 11년 동안 소식 한 장 없었어요. 양육비도 보내지 않고 자기 아들을 똥 싸듯 내갈겨버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법이지요.” 로자 아줌마는 열이 난다는 듯 부채질을 했다. “저는 운명의 희생자입니다. 아이샤를 되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기 전에 아들을 한번 안아보고 싶습니다.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저를 위해 신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인 척하면서 요구사항까지 들고나오는 그가 나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중에서

 

아들의 사망 보상금을 딸과 나누지 않겠다는 팔순의 노파가 화제다. 남편이 죽자 어린 자식들을 시댁에 맡기고 재가한 뒤 54년간 연락 없이 살았어도 상속권은 친모에게 있다. 바다에서 시신도 찾지 못한 아들, 엄마 없이 고생했을 딸을 생각하면 마음 아플 것 같은데 배 아파 낳은 자식도 돌아서면 남이다. 재혼해서 얻은 자식이 있는 걸까? 그들을 향한 또 다른 모정일까?

 

상속 권리만 주장하는 냉정한 모성과 달리 자식 사랑과 양육 의무에 눈이 멀어 부정을 저지르는 부모도 있다. 자녀에게 A+학점을 주는 교수 아빠, 입시 비리로 수감 중인 교수 엄마, 조력한 혐의로 재판 중인 전 법무부 장관 아빠, 자녀를 특혜 채용하고 부정 승진시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임원들.

 

위탁 가정에서 자란 모모에게 아버지가 찾아온다. 그는 모모의 엄마를 죽였지만 너무나 사랑해서 질투 때문에 한 짓이었다고, 정신병원에서 치료감호를 받아 어쩔 수 없었을 뿐, 아들을 버린 건 아니라고 변명한다. 그가 아들을 되찾고 싶어 한 이유는 이해나 용서를 바라서만은 아니었다. 병들어 죽어도 남길 핏줄이 있다는 위안, 죽은 다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자식이 있다는 확신이었을 것이다.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욕심이 권리가 되고, 남들이 애써 뿌리고 가꾼 것을 훔치는 일이 권력이 되는 사건들을 볼 때마다 제자들이 열어준 칠순 축하 모임에서 했던 은사의 말이 떠오른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으냐고 사람들이 물어요. 당연히 외롭지요. 하지만 나는 출산의 고통도 겪지 않았고 양육의 힘겨움이나 자식을 교육해야 하는 그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뿌리지 않았는데 거두기를 바랄 수는 없지요. 그래도 이렇게 나를 아껴주는 제자들이 있어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229] 무 한 조각 썰고 칼을 칼집에 넣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 수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아들여.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점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추락은 편한 점도 있으니까. 그건 마치 파산 직전에 있는 상인이 그걸 감추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후 평생 그 이자를 갚느라 늘 불안하게 사는 것과 같지. 나는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초등학생 때 어린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 있다. 반 친구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거나 이야기 듣고 손뼉 치는 게 전부였지만 ‘어른 마음 아이 마음 한마음이 된대요’라던 가사는 지금도 기억한다. 조명이 태양처럼 내리비치고 커다란 방송 카메라가 여기저기 돌아가는 무대에 선 경험은 어린 시절이 남긴 강렬한 기억 중 하나다.

 

광주 MBC가 주관해 온 ‘정율성 동요 경연 대회’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던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9년간 열렸다. 학교장 추천으로 참석한 어린이 합창단은 자유곡과 함께 정율성 작곡 동요 한 곡을 의무적으로 부른다. 노랫말 속 ‘노동자 아저씨’도 이상하지만 ‘우리 조선 대원들, 조국을 사랑하죠’의 조국은 중국일까, 북한일까?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에 이어 월북 후 ‘조선인민행진곡’으로 6·25 남침 때 북한군의 사기를 높인 작곡가를 기념하는 사업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다. 공원 하나 못 짓게 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국제 음악회, 동상과 초등학교 담벼락 벽화도 없앨 수 있나?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와 함께 북한을 찬양한 통영의 윤이상 기념관을 비롯, 전국 각지에 만개한 이념의 전시장을 모두 걷어낼 작정인지 먼저 묻고 싶다.

 

참가 팀이 적어서인지 논란이 되는 탓인지 ‘더 알차고 풍성하게 준비하겠다’던 10주년 동요제 공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9년간 대회에 참석했던 아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어린 시절에 바라본 어떤 빛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평생 그 빛을 추구하며 산다. 그에 맞서 칼을 뽑았다는 건 전쟁이다. 무 한 조각 썰고 칼집에 넣는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할 수 있다. 또 한 번 패배이자 공식적인 수용이 될 테니까.

 

 

[230] ‘통장 협박’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보니

 

“난 널 믿어. 너의 착한 마음을 믿고, 너의 성실한 노력을 믿고, 너의 밝은 미래를 믿지. 너에 대한 믿음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거야. 너도 네 자신과 너의 미래를 믿어보렴. 난 그런 널 언제나 지켜보며 응원할 거야! TMTU. Trust Me! Trust You! 나믿너믿! 너믿나믿!” TMTU는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 타인에게 떳떳한 사람,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믿는 사회,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세상을 만듭니다.

-김규나의 ‘TMTU 캠페인’ 문구 중에서

 

올봄 초중고 학생들에게 인용문을 넣은 책갈피 11만장을 무료 배포했다. 내 장편소설 ‘트러스트 미’에서 발화된 ‘TMTU, 트러스트 미, 트러스트 유’ 캠페인은 신뢰 사회를 위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청소년에게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자는 취지로 독자들의 후원을 받아 진행했다. 그때 소셜미디어를 통해 내 계좌 번호가 몇 달간 노출되었다.

 

얼마 전 마트에서 체크카드가 결제되지 않았다. 최근 내 계좌에 1만2000원을 입금한 사람이 ‘대포 통장’이라고 신고해 은행은 지불 정지, 금감원은 ‘전자 금융거래 제한 대상자’가 됐다는 통지를 보내왔다. 3개월간 해당 계좌와 동일 명의의 계좌 모두 자동이체, 현금 인출, 체크카드 사용 등 비대면 거래가 중지된다. 이의 제기가 인정되지 않으면 불법 거래 예금주 명단에 올라 5년간 제재를 받는다.

 

한 해 수천 건씩 발생하는 ‘통장 협박’이라는 사기 범죄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기 위한 제도를 악용한 가해자는 개인이나 기업의 법인 계좌를 신고하고는 풀어줄 테니 합의금을 보내라고도 한다. 대포라고 하면 전쟁 무기만 떠올리다가 ‘대포 통장으로 신고됐다’는 은행 직원의 설명에 머리가 하얘지기도 했다.

 

부당한 일을 신고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장난이나 악의로 허위 신고하는 자에겐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궁금하다. 몇 달 전 금감원이 통장 협박의 억울한 피해자 보호 대책을 내놓았다는데, 당하고 보니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칼럼에서 내 소설을 소개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캠페인과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럼 소재도 얻었다. 되돌려 긍정하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쁜 일 하나에 감사할 일은 열 가지다. 트러스트 미! 트러스트 유! 2023.09.06 

 

 

[231] 한국 반도체의 아버지, 강기동 박사

 
 

공사가 정지된 건설 현장엔 사람 그림자도 없이 계절풍만 불고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높이 80미터의 고로와 수리 중인 열풍로, 전로, 주상 건물, 원료를 나르는 벨트 컨베이어 같은 거대한 최신 설비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뎃페이는 고로 건설 현장이 한눈에 보이는 안벽에 올라 철강인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걸어온 설비들을 홀린 듯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지력, 체력, 정신력을 모두 쏟아 넣은 것을 가동 한 발짝 앞에서 빼앗겨 버린 것이다.

-야마사키 도요코 ‘화려한 일족’ 중에서

 

2008년 10월 29일 ‘제1회 반도체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반도체 공헌자들에게 정부 포상과 공로패를 주었다. 그날 특별 공로상을 받은 김충기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강기동 박사가 이 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3년 만에 귀국해서 한국에 머물던 강 박사는 행사가 있는 줄도 몰랐다가 기념식 전날 미국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한 번도 행사에 초대받은 적 없다.

 

미국 최초의 반도체 연구소 책임자였고 모토롤라에서 핵심 기술을 연구한 그는 미 군사 기밀이던 반도체 기술을 한국으로 가져오는 대가로 많은 것을 포기했다. ‘유학은 가되 반드시 돌아와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한 부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세계 반도체 제조 방법의 표준이 된 그의 CMOS 공정이 없었다면 스마트폰과 같은 수많은 전자 기기의 발전은 없었을지 모른다.

 

‘나는 실패 안 했다’는 가제로 회고록을 쓰고 있는 90세의 그를 만났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묻자 “반도체 안 할 거야!” 하고 단호히 답했다. 평생의 업적을 몰라주는 데 대한 서운함이다. 그래도 반도체 최강국의 명성을 되찾고 한국이 세계적 허브가 되길 소망하는 모습에서 이 나라와 반도체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선구자의 업적을 인정받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이인자나 계승자임을 자긍하지 못하고 너도나도 원조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정부 수립을 부정하며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시작이라 한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창설된 국군을 외면하고 독립운동가가 군인의 뿌리라 한다. 정치적, 금전적 이권에 따라 첫 번째 개척자는 종종 역사에서 추방된다.

 

오는 10월 26일 제16회 반도체의 날 기념식이 열린다. 한국 반도체의 아버지 강기동 박사가 동료와 후배들의 박수를 받길 바란다.

 

 

[232] 카프카의 단식 광대

 
 

어쨌거나 버릇이 잘못 든 단식 광대는 어느 날 즐거움을 쫒는 대중들로부터 자신이 버림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구경거리를 찾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 것이었다. 공연 매니저는 어디선가 옛날처럼 다시 관심을 보여주는 곳이 없을까 하고 유럽의 절반을 그와 함께 또 한 번 돌아다녔다. 그래 보았자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서로 몰래 약속이라도 한 듯 어딜 가나 단식 쇼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 ‘단식 광대’ 중에서

 

야당 대표의 단식이 19일 만에 끝났다. 그의 이름과 단식을 검색 창에 쓰면 ‘단식 이유, 단식 출퇴근, 단식 텀블러’와 같은 연관 검색어가 함께 떴지만, 그에게 큰절을 하거나 병원에 데려가라며 난동을 부리는 지지자들도 있었다. 야당과 여당 모두 건강을 생각하라며 단식 중단을 요청했고, 법원도 대장동 관련 1차 공판을 연기해 주었다.

 

전라북도 의원들은 새만금 예산 삭감에 항의하며 삭발했다. 사람들은 멋과 위생을 위해, 탈모를 감추려고, 목표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할 때 머리를 민다. 잼버리에 참가한 외국 청소년들이 템플스테이 체험 후 승려가 되고 싶다고 해서 삭발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반항심을 드러내며 공포심을 주려고 삭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카프카의 소설 속 단식 광대는 한때 인기 절정 스타였다. 그는 관객이나 감시자가 없어도 물 말고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40일 단식이 끝나면 영웅처럼 사랑받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은 더 이상 단식 쇼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광대가 단식을 고집하자 “이제 치워버려!” 하고 단장은 지시한다. 단식 광대는 땅에 묻히고 사람들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마트에서 장난감 상자를 끌어안고 발버둥치며 우는 아이를 본 적 있다. 달래다 지쳤는지 아이 엄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며 다른 코너로 가버렸다.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눈물을 닦고 슬그머니 장난감을 내려놓고는 엄마를 부르며 뛰어갔다.

 

아이들도 눈치가 있다. 굶는 게 죽음과 직결되던 배고픈 시절은 가고, 건강을 위해 간헐적 단식이 유행하는 요즘이다. 머리 밀고 밥 안 먹겠다고 떼를 쓰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건 우리나라 철부지 정치인들뿐이다.

 

 

[233] 정치적 우상에 열광하는 사람들

 

“당신더러 츠랑 집에 갔다 오라고 한 건.” 그가 말했다. “당신을 그, 페슈라는 자에게서 멀리 떼어놓으려고 그랬던 거야. 그 작자가 돌아갈 때 당신에게 인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왜 이 섬에 온 건지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은 게 분명하군. 그는 자기가 어떤 병에 걸린 게 아닌가 하고 잔뜩 겁을 먹고 있었어. 그리고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지. 원주민에게서 옮은 거야. 그 섬에서는 흔한 병이니까. 그런데 엘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로맹 가리 ‘폭풍우’ 중에서

 

고려대 입학과 의사 면허가 취소된 조민의 에세이가 출간 즉시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그녀의 아버지 조국도 ‘나는 정의, 세상은 불의’라고 주장한 책을 출간, 한 달도 되지 않아 20쇄를 돌파했다. 수많은 독자를 거느린 조국 일가는 자녀의 입시 비리로 4년형을 살다 가석방된 정경심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추석을 보낼 것 같다.

 

야당 대표 체포 동의안이 가결되자 지지자들이 국회로 몰려가 ‘배신자 나오라’며 분노하고 울부짖었다. 단식 시위하는 대표에게 절하고 그를 지키겠다며 난동 부리던 사람들은 체포 동의안에 찬성한 의원들의 정치적 생명을 끊겠다고 색출 작업에 나섰다. 소총을 사용하겠다는 테러 예고 글도 올렸다.

 

이웃 섬에서 온 사내를 진찰하던 남편은 아내 엘렌을 내보낸다. 남자에게 묘한 열정을 느낀 엘렌은 진료 후 힘없이 떠나는 그를 발견한다. 폭풍우가 치는데도 그를 보낸 남편을 원망하며 엘렌은 사내에게 달려간다. 작은 배에서 짧고 격렬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엘렌에게 남편은 사내가 불치의 전염병에 걸렸다고 말한다.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옮진 않겠지만.

 

인기 있는 젊은 연예인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돌(idol)’은 우상(偶像)을 뜻한다. 북한의 3대 세습을 비웃지만 지지와 추앙을 증명하려 정치적 아이돌의 책을 사고, 그들을 맹신하고 열광하며 호위하는 우리 사회의 정치인 우상화도 그에 못지않다.

 

사람 마음은 곧잘 헛된 영웅을 만들고 우상에 의지하며 숭배하길 원한다. 무엇에 매혹되고 무엇에 빠져드는가, 그 판단이 개인과 가족의 행복과 불행, 때론 그가 속한 사회의 미래까지 결정한다.

 

 

[234] 판결에 영향 미치는 판사의 성향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금 내리신 판결의 근거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몰토가 물었다. 한번 붙어 보겠다는 듯 판사석을 올려다보고 있다. 서로 증오하고 있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원한을 파헤치자면 고고학적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원한의 일부는 캐롤린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몰토는 원시인같이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북부 지원에 있을 때도 리틀 판사가 캐롤린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것을 알았을까?

-스콧 터로 ‘무죄 추정’ 중에서

 

영장 전담 부장판사는 ‘위증 교사 혐의는 소명되는 것으로 보인다. 관여가 있었다는 상당한 의심, 부적절한 개입을 의심할 만한 정황들’이 있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하지만 현직 대표라는 점을 감안, 야당 대표의 구속을 불허했다.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근거가 높은 자리,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애인과 가족, 친척의 개인 정보를 부정 열람한 공무원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잘못한 점이 없진 않지만, 권한을 넘어 정보를 취득했으나’ 정상 업무를 볼 때처럼 ‘자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이용해 로그인’했으므로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이 공무원의 권한 남용을 인정한 셈인데 카드사나 통신사, 금융사 직원이 고객의 개인 정보를 들여다봐도 같은 결과가 나올까?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영화 ‘의혹’의 원작 소설은 수석 부장검사 러스티가 동료 여검사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받는 과정을 그린다. 판사는 검찰의 무리한 수사 방식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재판을 중단시키고 러스티를 석방한다. 공정한 판결처럼 보였지만, 죽은 피해자와 함께 뇌물을 받고 무죄 방면해주던 과거가 드러날지 모른다는 판사 자신의 두려움이 더 컸다.

 

솔로몬왕은 어미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아기를 칼로 잘라 반씩 나눠 가지라고 했다. 한 명은 좋다고 했지만 다른 여인은 포기할 테니 아이를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DNA 대신 왕의 지혜로 친모를 가려낸 판결이었다.

죄의 유무는 법이 판단한다지만 그 기준이 되는 법도 사람이 만들고 판결도 사람이 한다. 재판관의 정치적 성향과 인간관계, 성품과 인격, 경험과 지혜가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235] 세련된 거짓, 촌스러운 진실

 
 

런던에 새로운 은행을 설립하겠다며 영국재정청에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신청인은 국내 및 해외 금융기관들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인상적인 국내의 저명한 이름들을 줄지어 세웠더군요. 정무차관 오브리 롱리그와 우리의 예비 장관께서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원에서 늘 밑바닥을 훑으며 살아가는 친구들도 합류했습니다. 법률 고문으로는 유명한 팝햄 박사가 있습니다. 드살리스 전 해군 대령은 홍보 공세의 선봉에 나섰습니다.

-존 르 카레 ‘우리들의 반역자’ 중에서

 

아시안게임 축구 한·중전 당시, 국내 포털 사이트의 중국 응원 클릭 수가 2300만건이 넘었다. 평소엔 관심 없어도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자국팀을 응원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늦은 시간, 국민 절반이 다른 나라를 응원했을 리 없다. 실제로 해외 인터넷 주소를 통해 클릭이 2000만건 이상 유입됐다. 평소 여론도 ‘드루킹’처럼 조작됐으리라는 의심의 목소리가 높다.

 

잊히고 싶다던 전 정권 수장의 자기 자랑은 끝이 없다. 2007년 10·4 남북 공동선언까지 끌어와 9·19 군사 합의를 자화자찬, ‘파탄 난 남북 관계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나 녹취록 논란이 있던 16년 전처럼 2018년에도 NLL(북방 한계선)을 부정, 북한이 우리 해역을 침범한 ‘경비 계선’을 고집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를 용인했다면 평화로 위장한 국민 기망, 영토 농간을 넘은 매국 행위다.

 

마피아 조직은 은행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비리 정황을 모두 아는 부하와 가족을 몰살한다. 수십 년간 자본 세탁을 책임져 온 디마는 다음 살해 대상이 자신인 걸 알고 영국 정보국과 접촉한다. 거액 뇌물을 받고 마피아 뒤를 봐주는 정치 거물들의 명단을 주는 조건으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부패 정치인들은 청소됐을까? 소설은 묻는다. 누가 반역자인가? 마피아의 내부 고발자? ‘피 묻은 돈’에 홀려 나라와 국민을 팔아 자기 배만 불리는 높은 분들?

 

권력은 거짓과 조작, 상상 못 할 위선과 비밀로 유지된다. 그런데 진위를 가려야 할 법은 누가 만들까? 접속국 표기, 인터넷 실명제를 해도 여론 조작은 가능하다. 권력은 눈부시다. 검은돈은 달콤하고 청렴은 비루하며 거짓은 세련되고 진실은 촌스럽다. 심지어 애국은 진부하고 반역과 매국은 뻔뻔하다.

 

 

[236] 100점으로 위조한 31점 낙제생

 
 

낙제 카드를 받았을 때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숨겨진 위조 재능을 발견해 낸다. 토드가 2학기와 3학기 성적표에 잉크 지우개를 사용하여 부모에게 보이기 전에 성적을 고치고 사인을 받아 학교에 제출할 때는 원래대로 고쳤을 가능성도 있다. 잉크 지우개를 두 번 사용한 흔적은 잘 보면 눈에 띄게 마련이지만 담당 교사는 평균 60명의 학생을 담당하고 있다. 반환된 성적표의 고친 흔적을 조사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스티븐 킹 ‘타락의 여름, 우등생’ 중에서

 

개인이 쇼핑 사이트에 가입할 때도 연속되는 숫자는 위험 경고를 하고 알파벳과 특수 문자를 섞어 만들도록 한다. 그런데 국정원이 선거관리위원회를 가상 해킹한 결과, 인터넷망에 들어가는 비밀번호가 ‘12345′, 또는 설정 초기 비밀번호와 같아 보안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민투표를 관리하는 기관이 ‘마음대로 조작해 주십시오’ 하고 해커들 손에 열쇠를 맡긴 셈이다.

 

사전 투표용지 무단 인쇄, 도장과 서명 위조, 투표 참가자 명단과 득표 수 조작 가능성은 선거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선관위는 해킹과 부정선거 의혹을 일축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변경했으니 됐고 관리 부실도 내부에서 조사하겠단다. 지난해 선관위는 자체 보안 점검에서 100점을 받았노라 국정원에 통보했다. 하지만 국정원이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 재평가한 결과 받은 실제 성적은 31.5점.

 

토드는 마을 노인 듀샌더가 어두운 과거를 감추고 살고 있다는 걸 알고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악행을 이야기해달라고 협박한다. 영악한 소년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던 노인은 자신의 범죄를 낱낱이 털어놓는다. 악에 매료되어 공부를 게을리한 토드는 추락한 성적표를 위조한다. 듀샌더는 토드의 조부라고 속여 학부모 면담에 참석한다. 잠자고 있던 노련한 악과 이제 막 눈을 뜬 어린 악은 서로 공조하며 점점 더 끔찍한 범죄의 세계로 빠져든다.

 

소설은 ‘적당한 일련의 상황이 갖추어지면,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어두운 단면들이 기꺼이 밖으로 기어 나온다’고 말한다. 헌법상 독립기관임을 이유로 자녀 특혜 채용, 특혜 승진 혐의도 감사를 거부했던 선관위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법과 무관한 치외법권 단체라는 주장을 넘어 국민 위에서 무소불위 힘을 휘두르는 독립 공화국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237] 역사의 복원

 
 

어쩌면 나는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아니면 전과 똑같은 역설이거나. 즉, 바로 우리 코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교통 혼잡을 초래했던 오랜 공사를 끝내고 광화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 백성과 소통하던 월대를 복원했다고 한다. 중국 사대의 표상이라며 세종대왕이 반대했던 경복궁 월대는 1866년에 만들었다. 국사 수업의 기억을 더듬어봐도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의 목적은 왕권 강화였다. 원납전 강요, 당백전 발행, 높은 세금과 무리한 인력 동원은 조선의 몰락을 가속했다.

 

화폐에는 보통 그 나라 대통령, 국왕, 정치인의 얼굴을 새긴다. 일본과 유럽의 국가들은 과학자, 작가, 예술가의 초상을 넣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화폐는 조선 시대, 그중에서도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 기린다. 다른 성씨를 가진 여성도 이씨 집안에 시집와 아들을 낳은 사람이다. 대한민국 돈으로 보이는 건 무궁화를 새겼으나 거의 사라져 버린 1원짜리 동전뿐이다.

 

보수를 자처하는 국민의힘의 영어 표기는 ‘People Power Party’다.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도 ‘People’이다. 조선을 이상적인 국가라 믿고 북한에 대한 경계심은 지우고 일본을 적대시하는 게 대세다. 조선을 아끼고 인민을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으뜸 덕목으로 여기자며 ‘조선인민민주주의’로 나라 이름을 바꾸자고 하면 반대의 목소리만 나올까?

 

소설 속 토니가 기억하는 고등학교 시절은 40년 후 알게 된 실제 과거와 전혀 달랐다. ‘역사란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결국 역사의 복원이란 상상력을 더해 현재의 주장을 덧칠하는 작업이다.

 

광화문은 왜 고작 57년간 존속하다 1923년에 없어진 형식을 고집할까? 과거를 해석하는 방식이 현재의 자화상이자 그 사회의 미래다. 100년 후엔 대한민국 발전사를 복원하는 열풍이 불기를 바란다.

 

 

[238] 재판 불출석과 법정의 권위

▲요시카와 에이지 ‘미야모토 무사시’

 
 

“분명 이길 수 있죠?”

“이오리, 걱정하지 말거라. 지더라도 깨끗이 지고 싶다고 바랄 뿐이다.”

“스승님. 이길 수 없으실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먼 나라로 빨리 떠나면….”

“세상 사람들의 말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네가 말하는 대로 어리석은 약속이기는 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도망친다면 무사도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무사도를 저버리는 것은 나 혼자만의 수치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까지 저버리는 것이 된다.”

-요시카와 에이지 ‘미야모토 무사시’ 중에서

 

당 최고위원 회의에 참석한 야당 대표는 ‘잘못된 국정 운영을 심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대북 강경 입장을 고수하는 국방부 장관에게 ‘균형 감각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같은 날 그는 피고인 자리에 서야 하는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엔 출석하지 않았다. 균형 감각을 갖고 정부를 심판하느라 자신이 심판받을 시간은 없었다.

 

단식투쟁을 시작으로 벌써 네 번째 결석이다. 부득이 재판에 참석하지 못할 수 있다. 2022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불출석 의견서를 내고 바이든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났다. 그러나 야당 대표는 국정감사를 핑계로 재판에 불참하고는 감사장에 나가지 않기도 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사건 두 번째 재판 때는 지각했다.

 

일본의 난세를 살았던 미야모토 무사시는 세간의 출세와는 인연이 없었으나 검(劍)으로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바로 세우려던 무사였다. 그는 목숨을 건 60차례의 대결에서 한 번도 진 적 없을 만큼 강했지만 어떤 상대도 얕보지 않았고 비겁하게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는 ‘아무리 많은 적과 싸워 이겨도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면 진정한 도(道)라고 할 수 없다’고 ‘오륜서’에 적었다. 북한은 품고 일본은 배척하는 야당 대표에게 ‘한낱’ 일본 검객의 무사도를 바란다면 큰 무례가 되려나.

 

권위주의 상징이라며 법정에서 사라진 의사봉을 날마다 힘차게 휘두르는 국회의원이 재판에 지각하면 “다음엔 일찍 오세요” 하고 판사는 당부한다. 결석하면 “오늘도 안 나오시는 겁니까?” 묻고 한숨만 쉰다. 재판에 성실히 임하리라 믿고 구속을 불허했던 영장 전담 부장판사는 권력 앞에 권위를 상실한 법정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239] 혁신의 아이디 ‘광주’, 패스워드 ‘5·18′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들’

 
 

자신들의 시대에는 해독의 어떤 약속이나 지침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제각기 녹이 슬어 삐걱대기만 할 뿐 열리지 않는 자물쇠가 되어버린 사람들 모두가 자물쇠에 맞는 열쇠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패스워드가 있어서 집단에 편입될 수 있으며, 희생양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결속된 구성원들 간의 은밀한 희열과 더불어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제물이 마련된다. 피스톤이 있어서 단두대와 분묘에 불과한 사회의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들’ 중에서

 

‘희생, 통합, 변화,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는 여당 혁신위원장의 첫 공식 외부 일정은 광주 5·18 묘지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광주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있다는 글을 남겼고 ‘피해자 후손들’까지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헌법 전문 수록, 국가 유공자 제정에 힘쓰겠다는 약속도 했다. 국립현충원 방문은 그의 두 번째 공식 일정이었다.

 

2016년, 광주 시민에게 호남 홀대론을 변명하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18 헌화 분향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2020년엔 보수당 최초라며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의원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 이준석 전 당대표, 나경원 당대표 후보, 김은혜 경기도지사 후보 등은 비석을 쓰다듬거나 눈물을 떨구었다.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까 싶을 만큼 인간과 세상과 역사를 천착한 문장들이 퍼즐처럼 그림을 완성하는 ‘떠도는 그림자들’에는 죽은 아내가 오래전 죽은 남자를 마음 깊이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고통받는 늙은 어부가 등장한다. 아내의 유령이 냉정히 말한다. “당신 품에 안겨 행복했을 때조차 죽은 그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이 내겐 더 큰 기쁨이었어요.”

 

혁신은 필요하다. 그러나 여당은 남편 곁에서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살다 죽은 어부의 아내를 닮았다. 표를 주고 실망하면서도 다시 기대하기를 반복하는 국민에게 야당의 이념과 지지층이 먼저라며 매번 더 큰 희생과 더 긴 인내와 더 넓은 포용을 요구한다. 그 결과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질 ‘새로운 미래’에 가입하는 공식 아이디는 ‘광주’ ‘결속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입력해야 하는 패스워드는 ‘5·18′이다.

 

 

11.15 

[240] 경찰관에 대한 포상

▲오 헨리 ‘20년 후’

 

“자넨 10분 전에 체포된 거야, 밥. 시카고 경찰은 당신이 뉴욕에 올지도 모른다고 했어.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하더군. 순순히 함께 가는 게 좋을 거야. 자네에게 전해 줄 게 있네. 여기 창가에서 읽어 봐. 웰스라는 경찰관이 준 거야.” 서부에서 온 남자는 작은 종이를 폈다. 읽던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밥, 나는 제시간에 그곳에 갔었네. 그리고 시카고에서 찾는 지명 수배범의 얼굴을 보았지. 내가 직접 자넬 체포하고 싶진 않았어. 그래서 다른 형사를 보낸 거라네. 지미가.

-오 헨리 ‘20년 후’ 중에서

 

도주한 특수강도 피의자를 체포한 경찰관들이 1계급씩 승진했다. 특진은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며 범인을 쫓아 찻길을 달린 형사들의 몫이 아니었다. 범인의 인맥과 동선, 위치를 파악하는 건 중요하다. 그래도 현장 형사를 배제하고 피의자의 연인을 전담한 여성 경위, 공중전화 위치를 파악한 경사가 수혜자라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경찰 조직의 표창과 특진 기준이 모호하다. 등산객을 구조하고 겉옷을 벗어주었다고 특진시키고, 코로나 검사를 먼저 받는 모범을 보였다며 표창했다. 삼단봉 하나 들고 범인과 맞서며 수갑을 채운 공이 등산객을 구조한 것만 못할까? 동료와 선후배 진급의 들러리가 될 뿐이라면, 어느 누가 사명감과 책임감만으로 목숨 걸고 범죄자를 체포하려 할까?

 

젊은 시절, 밥과 지미는 20년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시간은 많은 걸 바꿔 놓았다. 밥은 친구를 몰라봤지만 경찰관이 된 지미는 그가 지명 수배자인 걸 단번에 알아챘다. 차마 친구에게 수갑을 채울 수 없던 지미는 다른 형사를 보내 체포하게 한다.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만, 만약 공을 치하한다면 누구를 특진시켜야 할까? 밥이 뉴욕에 올 거라고 알려준 시카고 경찰? 다른 경찰관을 찾아가 체포를 부탁한 지미? 신고받고 현장에 나가 밥을 체포한 형사? 혹은 셋 다? 아니면 경찰이 범인 잡는 건 당연한 일이니 포상은 없다고 할까?

 

직장인에게 가장 큰 동기를 부여하는 건 잘했다, 수고했다며 주어지는 승진의 기쁨과 그 명예에 적합한 물질적 보상이다. 정의 구현이나 민중의 지팡이란 말은 신기루다. 경찰의 월계관은 선행이나 정보 제공보다 범죄자를 체포한 현장에 먼저 주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