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좋다 2023-2/ 부산 가덕도신공항 부지에 가다 - 부산과 가요
부산이 좋다 2023-2
■르포 / 부산 가덕도신공항 부지에 가다
가덕도신공항은 부산의 신형 엔진
2029년 12월 개항 예정인 가덕도신공항도 어쩌면 서울공화국을 향한 부산의 성실한 ‘독립선언’일지 모른다. 메트로폴리탄치고 공항 없는 곳이 없다.
부산에 가덕도신공항은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신형 엔진이다. 이 엔진에 희망을 걸고 있다.

▲가덕도신공항이 들어설 대항선착장 모습이다.
부산에 내려와 도시 부산을 생각해보았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이 문장이 떠올랐다.
〈부산 사투리 ‘하소’ ‘마소’의 직설적이면서도 친근한 삶의 태도는 평등성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친화력 있는 코드가 부산다움이다.〉
‘하소’와 ‘마소’의 도시 부산은 유무형의 자산(資産)이 가득한 곳이다.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두바이 같은 도시국가를 꿈꾸는 부산은 여느 지방도시가 그렇듯 새로운 돌파구에 목말라 있다.
수도권으로, ‘서울공화국’으로 사람과 자본이 몰려들 때마다 부산은 몸부림쳤다. 1980~90년대에는 항만물류도시 전략을, 2000년 이후에는 해양수도 전략을 내놓았다. 2030 부산 개최도 이런 몸부림의 하나다. 2030부산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부산이 “대한민국을 바꿀 밑그림을 그리겠다”고 소리치고 있다.
2029년 12월 개항 예정인 가덕도신공항도 어쩌면 서울공화국을 향한 부산의 성실한 ‘독립선언’일지 모른다. 메트로폴리탄치고 공항 없는 곳이 없다. 부산에 가덕도신공항은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신형 엔진이다. 이 엔진에 희망을 걸고 있다.
배를 타고 가던 섬
지난 9월 25일 부산역에 도착한 후 가덕도로 향했다. 고맙게도 부산시 양홍선 홍보기획팀장이 운전대를 잡고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양 팀장의 말이다.
“가덕도는 과거 부산에서 가장 큰 섬이었으나 지금은 부산신항 건설을 위해 서쪽을 매립하면서 지도상으로는 육지가 되었어요.”
― 작년에 가덕도 취재를 한 적이 있는데 부산과 가까운 곳이지만 시골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네, 다양한 역사적 흔적과 자연 그대로의 해안을 끼고 있어요. 옛 방식으로 숭어잡이를 하는 이도 있고요. 이곳이 상전벽해(桑田碧海)될 날도 머지않았죠.”
― 이런 조용한 섬에 공항이 세워진다니, 아직 실감이 안 나요.
“지금은 가덕대교가 있지만, 예전에 가덕도로 가려면 경남 용원(창원시 진해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야 했지요. 오래전에 제가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에 근무할 때 가덕도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땐 배를 타고 갔었어요.”
동북아 국제 물류·비즈니스 항만인 부산신항이 생기고 신항 배후도로를 건설하며 녹산대교(2005년 완공)가 생겼다. 이후 가덕대교(2010년 완공), 거가대교(2010년 완공), 여기다 눌차대교(2011년 완공), 가덕 해저터널(2011년 완공)까지 생겨 가덕도는 더는 섬이 아니었다.
가덕도신공항이 들어서면 신항에서 공항까지 철도가 연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산업·교통·물류 인프라의 3박자가 완벽하게 갖춰지게 된다.
“저쪽에 다리가 보이지예?”

▲부산시 신공항개발본부 김선용 팀장과 이권희 주무관이 가덕도신공항 예정 부지를 설명하고 있다.
부산·마산·진해 등지의 낚시꾼들이 주말에 몰려들 뿐 ‘보통섬’에 불과한 가덕도에 대해 개발 얘기가 나돌기 시작한 것은 가덕도가 경남 의창군(현 창원시)에서 부산시로 편입된 1988년 1월부터다.
직간접으로 공식·비공식으로 정부와 기업들이 갖가지 가덕도 개발 청사진을 내놓았지만 부산시 편입 이후에도 가덕도의 모습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다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드디어 공항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기자는 가덕도 대항선착장이 바라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바다는 조용했고 햇살도 포근했다. 저 멀리 HMM(현대상선의 새 이름)이라고 쓴 거대한 컨테이너선이 물살을 가르며 부산신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떤 배는 컨테이너 2만4000개를 운반할 수 있다고 한다. 수직으로 세우면 높이 400m, 갑판은 축구장 4개를 합한 면적보다 넓다. 멀리서 봐도 어마어마한데 가까이서 보면 입이 쩍 벌어질 것이다.
대항선착장 인근에서 부산시 신공항개발본부 김선용 팀장, 이권희 주무관과 만났다. 김선용 팀장이 선착장 앞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다리가 보이지예? 거가대교입니다. 저 밑으로 내려가면 가덕도와 연결된 해저터널이 있습니다. 저기, 컨테이너선이 지나가지예? 저게 가덕 수도(水道)라고 우리 (부산)신항으로 입출항하는 배들이 드나듭니다.”
김 팀장은 “대항선착장이 모두 가덕도신공항 부지 안에 들어간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 보이는 봉우리(국수봉) 있지예? 저기 안테나가 보이는…. 해발 264m인데 저거를(저 봉우리를) 절취(截取)해가지고 해수면에서 31.5m 높이로 조성됩니다.”
― 200m 이상 산을 깎아내는군요.
“저거를 다 발파해가지고 이쪽이랑 대항새바지 쪽이랑 매립을 합니다.”
곁에 있던 이권희 주무관이 도면을 꺼내 들어 설명했다.
“지금 이 앞에 보이는 데가 터미널 부지가 되고, 저기가 새바지항인데 공항 부지에 편입되는 걸로 계획이 잡혀 있습니다. 산을 깎아 바다 쪽을 매립합니다.”
대형 항공기 이착륙 가능한 3500m 활주로

▲부산신항의 모습이다. 부산신항은 환적화물 세계 2위, 물동량 세계 6위다.
김 팀장은 “가덕도신공항은 해상이 한 60%, 육상 40% 정도로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새바지항으로 이동해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히 배가 보이는데 저곳까지 공항 활주로가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활주로 길이는 3500m입니다. 이 정도 길이면 대형 항공기의 이착륙이 가능해요. B747기나 A380 같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취항할 수 있는 장거리 여객기 운용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계속된 김 팀장의 말이다.
“부산신항은 환적화물이 세계 2위, 물동량이 세계 6위입니다. 가덕도신공항과 바로 인접해 있어요. 약 8km 정도 거리에…. 싱가포르 창이공항이라든지 홍콩공항이라든지, 네덜란드 스키폴공항, 중국 상하이 푸둥공항을 봐도 항만하고 인접해 있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거든요. 복합 운송체계를 갖춰서 말이죠.”
도면을 손에 든 이권희 주무관이 말을 이었다.
“도면에 나타난 이 선이 ‘소음 등고선’입니다. 가덕도신공항은 24시간 뜨고 착륙할 수 있는 공항입니다. 소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공항이죠. 군(軍)공항인 김해공항만 해도 운항 시간이 제한되잖아요. 밤 11시부터 오전 6시까지는 이착륙을 못 합니다.”
― 가덕도는 바람이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오늘은 조금밖에 안 부네요.
이: “바람을 염려하는 분들이 많은데 우리가 기후를 측정해보니 인천보다 훨씬 적어요.”
― 남해안 태풍이 가덕도를 지나 내륙으로 향하지 않나요?
김: “공항을 100년 빈도(頻度)로 설계합니다.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갑작스러운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게 말이죠.”
― 안개는 어떤가요?
김: “안개는 거의 없습니다. 데이터를 보면 1년에 며칠이 안 됩니다.”
매립식 방식으로 확정

▲국토부가 제작한 가덕도신공항 조감도.
활주로가 펼쳐질 새바지항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 활주로를 통해 하루에도 수많은 비행기가 날아오를 것이다. 어떤 비행기는 사람을, 어떤 비행기는 물류를 내려놓거나 실을 것이다. 저 바다 위의 공항이 부산의 관문으로 변신하게 된다.
가덕도신공항은 ‘매립식 해상공항(안)’을 확정한 상태다. 한때 매립식과 부유식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방식의 ‘플로팅(부유식)’ 공항을 국토부에서 검토는 하였으나 육상부를 절토해 100% 해상을 매립하는 매립식 공항으로 확정했다. 여객터미널과 화물터미널은 육상부에 위치하며 활주로와 계류장은 매립부지에 위치한다.
구체적으론 활주로를 포함해 총 길이가 4.2km다. 산봉우리(국수봉)를 완전히 깎아 그 위에 마련하는 육상 구간(1.6km), 바다를 메워 활주로를 닦는 해상 구간(2.6km)으로 나뉜다. 이 경우 산을 절개한 내륙 활주로 구간과 바닷속 연약 지반 위의 활주로 구간이 서로 침하 속도가 달라 ‘부등침하(不等沈下)’가 발생할 수 있다.
― 활주로 침하 이야기가 있던데요.
이: “육상과 해상 매립 부분에서 부등침하 우려가 있지만, 건설 방식은 연약 지반을 배양한다든지 아니면 방파제를 쌓는다든지 일반적으로 해오던 토목 공정입니다. 물론 국토부나 전문가들도 심도 있게 보고 있어요.”
사통발달 가능
현재 부산시는 가덕도 대항동과 송정동을 잇는 9.3km에 달하는 4차로 공항 접근도로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 도로는 해상교량 2곳과 육상교량 2곳, 터널 2곳을 지나간다. 교통량이 2065년 기준으로 일일 4만7000여 대가 이 도로를 이용할 것으로 추산한다. 김 팀장의 말이다.
“기존 도로 외에 저기 녹산(국가산단)에서 바로 공항까지 들어오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갖게 됩니다. 한쪽이 사고라든지 도로 통행이 어려우면 이쪽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양홍선 팀장이 김 팀장에게 “남해고속도로에서 가덕도신공항으로 접근하는 도로를 구상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김 팀장은 “남해고속도로 동김해IC에서 부산신항 나들목까지 접근할 수 있게 한국도로공사가 설계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또 부산신항에서 철도가 복선으로 들어오거든요. 신항 배후 철도(화물선)에서 분기해 공항까지 전 구간을 지하로 복선 철로가 신설(일반 철도)됩니다. 노선연장이 16.5km입니다.”
김: “부전역에서 마산 간 복선 전철이 내년 연말쯤 개통되거든요. 지금 동해남부선의 경우 부전역에서 태화강까지 전철이 운행됩니다. 그것과 연계해 부산신항에 들어오는 철도를 복선화하고 신항 철도와 연결해 향후 부전역에서 바로 공항으로 들어올 수 있게….”
현재 부산 강서구 가덕도신공항과 기장군 오시리아관광단지를 잇는 ‘차세대 부산형 급행철도(BuTX)’ 건설이 본격 논의되고 있다. 가덕신공항을 출발해 강서구 명지동, 사하구 하단동, 동구 북항 재개발지, 부산진구 부전동, 해운대구 센텀시티 등을 거쳐 기장군 오리시아관광단지까지 54km 구간을 운행한다.
부산시는 이 급행철도를 2030년 가덕신공항 개통에 맞춰 완공해 연결한다는 계획이다. 또 급행철도가 완공되면 부산 시내를 30분대로 연결하는 것은 물론 울산과 경남 창원시까지 철도로 묶을 수 있다.
보상을 둘러싼 숙제들

▲왼쪽부터 가덕대항 신공항 생존 대책위 김영석 위원장, 주민 김상수씨, 김상환 사무국장.
기자는 가덕도 주민들을 만나보았다. 가덕도 대항선착장에 자리한 한 컨테이너에 ‘가덕대항 신공항 생존 대책위’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문이 열려 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죽음의 삽질을 멈추어라’는 현수막이 보였다.
가덕도에 오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점점 대형 신축 건물이 늘고 있었다. 오래전 신축허가를 받았다고 해도 최근 1~2년 사이 들어선 건물이었다.
김상환(61) 대책위 사무국장은 평생 물질을 하며 가덕도 대항에서 살아왔다고 했다.
“저희가 뭐 아는 거는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것밖에 모르죠. 막막합니다. 가덕도신공항특별법이 제정된 즈음엔 주민 수가 280가구쯤 됐는데 지금은 150가구 정도로 파악되고 있어요. 생활 터전을 잃는데 아무런 이주대책도 없이 공항을 짓겠다고 하니 걱정입니다.”
김 국장과 이런저런 걱정을 나누는데 김영석(61) 대책위원장이 왔다. 김 위원장은 “주민들 땅이 대개가 국유지이고 사유지는 별로 없다”고 했다. 공항개발 예정지의 95%가 국유지 내지 공유지란다.
“주민들이 가진 토지가 적기 때문에 보상을 받는다 해도 굉장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요. 눈에 보이는 재산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재산도 있거든요. 현행 보상 규정만으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가덕도에서 태어나 몸으로 습득한 것이 주변의 조류나 수심인데 다른 바다에 가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지금까지 하던 어업을 못 하게 됩니다.
그래서 특별법에다 피해 주민에 대한 지원 항목을 넣어달라고 호소했지만 안 넣어줬어요. 나중 시행령에 한 줄 들어갔습니다. 그것으론 한계가 있거든요.”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서는데 김 국장이 속마음을 털어놨다.
“지금 부산시 강서구 관내에는 에코델타라든지 명지국제신도시라든지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거든요. 주로 LH건설이나 수자원공사가 사업을 주관하는데, 우선 그런 곳에라도 저희를 이주시키는 방향으로 충분히 검토해볼 수 있지 않으냐 하는 것이 저희 바람입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2030부산세계박람회, 왜 부산인가?
한국의 성공 경험 세계와 공유하는 ‘가치 세계박람회’
부산은 아시아 4위, 세계 9위의 국제도시로 글로벌 전시 역량이 뛰어나다.
200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2014·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등 다수의 국제행사 경험을 갖고 있다.

▲2023년 2월 22일에 열린 ‘엑스포 골든벨을 울려라’에 참석한 박형준 부산시장.
2030부산세계박람회의 대(大)주제는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Transforming our world, navigating toward a better future)’이다. 그리고 ‘자연과 지속가능한 삶’ ‘인류를 위한 기술’ ‘돌봄과 나눔의 장’이라는 세 가지 소(小)주제를 통해 대주제의 목표를 달성할 계획이다. 핵심 전략은 ‘부산 이니셔티브(Busan Initiative)’다. 부산 이니셔티브는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 안에 이뤄온 발전의 경험과 각 분야 최고의 기술들을 활용해 세계 각국이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프로젝트다.
부산시는 2014년부터 세계박람회를 기획했다. 2018년 기획재정부 국제행사 타당성 심사를 통과했고, 2019년 국무회의를 통해 국가사업으로 확정했다. 부산을 ‘준비된 도시’라 부르는 이유다.
부산은 아시아 4위, 세계 9위의 국제도시로 글로벌 전시 역량이 뛰어나다. 200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2014·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등 다수의 국제행사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산원아시아페스티벌, G-STAR 등 한류 확산의 중심지이다.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이 좋다. 세계 5대 항만 등 국제적 물류 금융 네트워크 구축 및 물류, 금융, ICT 신기술을 융합·연계한 산업 역량을 확보하고 있다. 유라시아 게이트웨이로 글로벌 교통 접근성이 높은 것도 내세울 점이며, 풍부한 관광자원도 자랑거리다. 천혜의 관광자원과 숙박시설 등 관광 인프라도 부족함이 없다.
개최가 확정되면 부산광역시 북항(옛 부산항을 새로 개발한 마리나 지역) 일원이 주 무대가 된다. 세계박람회는 2030년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6개월간 진행되며, 200여 개국, 5050만여 명이 참석할 것으로 추산된다. 부산시는 이를 통해 생산 유발효과 43조원, 부가가치 유발효과 18조원, 일자리 창출 50만 명의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 부산시가 유치에 성공하면 우리나라는 벨기에, 프랑스, 미국, 아이티, 캐나다, 일본, 스페인, 독일, 중국, 이탈리아,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전 세계 12번째, 아시아에서는 4번째로 등록엑스포 개최 국가가 된다. 올림픽과 월드컵에 이어 3대 주요 국제행사를 모두 개최한 7번째 국가로 올라선다.
정부·기업·시민까지 3축 유치전

▲2030부산세계박람회 홍보대사 이정재 위촉식.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전은 3축으로 가동 중이다. 부산시와 중앙정부 등 관(官)이 한 축을 이루고, 대한상의를 필두로 기업들이 다른 한 축을 담당한다. 지난 2022년 7월 8일에는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민관합동위원회’가 닻을 올렸다. 국무총리 직속 위원회로, 한덕수 국무총리와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마지막 한 축은 세계박람회 개최 여론을 형성하는 ‘시민의 열기’다. 이들은 부산세계박람회의 핵심 전략인 ‘부산 이니셔티브’를 기치로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월 18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UN) 총회에 참석해 막판 유치전에 나섰다. 윤 대통령은 뉴욕에 도착한 직후 곧장 산마리노, 체코, 투르크메니스탄 등과 정상회담을 갖고 2030부산세계박람회 개최의 의미 등을 소개하는 등 4박 6일간의 미국 방문 일정 동안 30개국에 달하는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 정상과 만나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호소했다. 유엔 총회는 193개 회원국 정상이 참여하는 가장 큰 국제 무대로 사실상 세계박람회 개최지 투표권을 가진 BIE 회원국 정상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세계박람회 개최지는 170여 BIE 회원국의 투표로 결정된다. 170여 모든 회원국이 공평하게 1표를 행사하기에 각국의 표심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윤 대통령이 BIE 회원국 정상들에게 ‘맞춤형 외교’를 한 것도 그래서다. 나나 아도 단콰 아쿠포아도(Nana Addo DanKwa Akufo-Addo) 가나 대통령 부부와 오찬 회담 때는 디저트 접시에 가나와 이름이 같은 가나 초콜릿으로 ‘Busan has everything(부산은 모든 걸 가졌다)’이라는 문구를 새기는 등 섬세한 배려로 표심을 공략했다. 모나코 대공에게는 디지털 분야 협력 강화, 수리남 대통령에게는 산림 조사와 복원 협력, 레소토 총리에게는 새마을운동 기반 농업 협력을 각각 맞춤형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9월 20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총회 기조연설에서는 ‘세계박람회’를 14번이나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지닌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을 강조하며 세계박람회 유치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실사단 “부산은 모든 것을 갖췄다”
부산시민들의 자발적이고 뜨거운 지지세는 유치전에서 빠질 수 없는 무기다. 2023년 4월 4일 부산을 방문한 BIE 실사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5500명의 시민이 실사단을 환영하기 위해 부산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사단은 “팝스타가 된 기분”이라며 시민들의 열기를 높이 평가했다. 이들은 인위적 동원이 아니었다. 박은하 ㈔부산월드엑스포 범시민유치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부산역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과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보고 실사단이 굉장히 놀라워했으며, 어디 가서 경험해보지 못한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했다”고 했다.
실사단은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5박 6일 일정 동안 6·25전쟁 당시 사망한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는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했고,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 유치기원 불꽃쇼’를 관람했다. 실사 일정을 마친 실사단은 4월 6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부산은 정말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호평했다. 파트릭 슈페히트(Patrick Specht) BIE 현지실사단장은 “이번 실사를 통해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부산에서 개최할 수 있는지, 재정적인 여건과 물류 인프라는 타당한지, 정부·기업·시민들의 지지 여부 등을 봤다”며 “한국에 와서 정부와 관료, 부산시민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 4차 PT에서는 가수 싸이와 학계·스타트업 인사의 현장 발표와 함께 걸그룹 에스파의 카리나, 성악가 조수미씨가 영상 발표를 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연사로 나서 눈길을 끌었다. 지난 2, 3차 PT 당시 한덕수 국무총리가 연사로 나선 데 이어 4차에서는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면서 한국은 대통령과 총리가 모두 직접 PT를 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 윤 대통령은 4차 PT에서 한국은 준비된 후보국임을 강조했다. “부산은 준비됐습니다. 2030년 부산에서 만납시다”라는 윤 대통령의 발언은 강한 울림으로 남았다.
유치위 민간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세계박람회 유치전을 위한 투혼도 인상적이다.
그동안 최 회장은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을 시작으로 유럽과 중남미, 아시아 등을 오가며 대역전극을 준비해왔다. 올해만 20여 개국을 방문했으며, 100여 개국 대통령, 총리, 대사 등을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오일머니’ 리야드, ‘역사도시’ 로마
후보지는 부산을 포함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이탈리아 로마, 우크라이나 오데사다. 이탈리아는 2022년 10월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뒤늦게 속도를 내고 있으며, 러시아와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는 ‘전쟁의 아픔을 딛고 세계박람회를 유치하는 상징성’을 부각하며 완주를 다짐했다.
리야드는 중동의 새로운 경제·문화 메카가 되겠다는 국가 혁신 프로젝트 ‘비전 2030’을 중심으로 사우디 왕실 주도로 적극적 유치 외교를 펼치고 있다.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추진 중인 초대형 인프라·도심 건설 프로젝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동시에 ‘친환경 세계박람회’ 구현을 약속했다. 사우디는 2030 리야드세계박람회를 탄소중립을 뛰어넘은 ‘탄소 네거티브’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태양에너지로 전시관을 운영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을 보장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간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온 인권 측면에서도 국제 최고 수준의 노동권 담보, 장애인 이동성 보장 등 ‘평등, 포용, 지속가능성의 원칙’을 내걸었다.
이탈리아는 1906년과 2015년 밀라노에서 2번의 세계박람회를 개최한 데다 유럽, 중남미 등에 전통 우호국이 포진해있어 강하다. 관광 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13%를 차지할 정도로 국제 인지도가 높은 나라다. 이탈리아는 ‘역사도시’라는 키워드를 내세웠다.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이탈리아 총리는 BIE 총회에서 “찬란한 역사와 혁신적인 미래 기술이 공존하는 로마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로 친환경 세계박람회를 약속했다. 세계박람회 전시관마다 태양광 발전 설비를 마련해 건물을 운영하는 식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태양광발전소를 선보인다는 방침이다.
오는 11월 개최지 투표에서 3분의 2 이상 지지를 얻은 국가가 없으면 최저 득표국을 떨어뜨리고 곧바로 2차 투표를 진행한다. 그래도 3분의 2 이상 얻은 국가가 나오지 않을 경우, 최종 2개국이 남을 때까지 진행하고 마지막 투표에서 많은 표를 얻은 국가가 유치 자격을 얻는다.Ⓑ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
■재미있게 읽는 세계박람회의 역사
인류 발전을 견인해온 세계박람회 / 1851 런던박람회부터 2030부산세계박람회까지
“박람회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진보시키고, 전 세계 모든 나라의 평화와 유대를 강화할 것입니다.”

▲최초의 세계박람회인 런던박람회(1851)를 위해 지어진 전시장 ‘수정궁’.
아이스크림 콘, 토마토케첩, 텔레비전, 미니 스커트, 페리스 휠(대관람차), 놀이공원의 공통점은? 바로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됐다는 점이다. 1851년 처음 시작, 172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박람회는 매회 인간과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세계박람회에서 인류는 미래를 만나왔다.
1851년 런던박람회로 첫 시작
현재와 같은 형태의 세계박람회는 1851년 런던박람회가 효시(嚆矢)다.
1851년 5월 1일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런던박람회 개막식이 열렸다.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1819~1901년)의 남편 앨버트 공은 연설 도중 이런 말을 했다.
“세계박람회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진보시키고, 전 세계 모든 나라의 평화와 유대를 강화할 것입니다.”
인류의 ‘진보’와 ‘평화’는 지금까지 세계박람회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로 남아 있다. 당시 영국은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남극을 포함한 모든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펄럭이는 영국 국기 유니온 잭에 하루종일 해가 비추는,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런던박람회는 대영제국의 위용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계기가 됐다.
원래 영국은 세계박람회 개최에 소극적이었다. 자국의 산업 기술이 외국으로 유출될까 빗장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프랑스에서 국제박람회를 개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사실을 알자 영국이 선수를 쳤다. 앨버트 공이 직접 나섰다. 박람회 조직위원회 명예회장을 맡아 후원금 모금에 앞장섰다.
당시 출품된 물품 중엔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는 브랜드가 여러 개 있다. 찰스 굿이어의 고무 타이어, 새뮤얼 콜트의 총기류, 매코믹이 출품한 농기구가 대표적인 예다.
에르메스와 루이뷔통 소개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오른쪽). 앨버트 공은 런던박람회(1851) 개최를 지휘했다
4년 후인 1855년 파리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34개국이 참가한 파리박람회는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보르도 와인 공식 등급’과 ‘박람회에서의 미술품 전시’다. 오랜 라이벌이었던 영국이 공업이 발달한 데 반해 프랑스는 농업에 비교우위가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있던 보르도 와인에 주목했다. 세계박람회를 앞두고 등급 체계를 정했다. 당시에 만든 보르도 등급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세계박람회에 ‘미술의 전당’을 따로 세워 조각과 회화 작품을 선보인 것도 특징이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0년)의 작품이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의 세계박람회에도 미술 작품들이 소개되는 전통이 이어졌다.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Hermes)’와 ‘루이뷔통(Louis Vuitton)’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세계박람회이기도 하다.
1862년 다시 영국이 런던에서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초기부터 난항을 겪은 행사였다. 첫 세계박람회를 이끌었던 앨버트 공이 42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했다. 사촌 남매 사이기도 한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은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다. 슬픔에 빠진 빅토리아 여왕은 세계박람회 개막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중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6개월 동안 610만 명이 입장했다. 영국은 두 번(1851·1862년)의 세계박람회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세계박람회를 열지 않았다. 세계박람회의 기능 변화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이전까지 세계박람회는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국력을 과시하고, 대내적으로는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했다.
영국은 두 번의 세계박람회를 통해 당대 최고의 제국임을 과시했다. 더이상 대국임을 추인받을 이유가 없었다. 막대한 예산을 들일 바엔 인도박람회 등 소규모 박람회를 열고, 도시 빈민을 구제하는 편이 나았다. 반면 다른 제국들은 달랐다. 프랑스의 경우 파리에서만 총 7번(1855·1867·1878·1889·1900·1937·1947년)의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약 11년 주기다. 이 때문에 한때 ‘발전 주기상 박람회는 같은 도시에서 11년 주기로 개최하는 게 적절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1889년 파리박람회가 열렸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였다. 이때 ‘에펠탑’이 등장했다. 박람회장 입구로 세워진 에펠탑은 원래 1910년까지만 세워두고 철거할 예정이었다. 세계박람회가 끝난 후에도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자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출품된 발명품 중 에디슨의 컬러전구와 축음기가 단연 주목을 받았다.
세계박람회 통해 도시 개발
1876년, 미국이 세계박람회 역사에 첫 등장한다.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도시들을 바꿔가며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필라델피아(1876년), 시카고(1893년), 세인트루이스(1904년), 샌프란시스코(1915년), 시카고(1933년), 뉴욕(1939년), 시애틀(1962년), 샌안토니오(1968년), 스포캔(1974년), 녹스빌(1982년), 뉴올리언스(1984년) 등 총 11곳이다.
필라델피아박람회(1876년)는 미국의 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했다. 미국이 이제 강대국이 되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행사였다. 그레이엄 벨의 전화기와 필로 레밍턴의 타자기, 하인즈 케첩이 등장한 전시회이기도 했다.
시카고 박람회(1893년)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열렸다. 실제 400주년이 되는 해는 1892년이지만 준비가 늦어져 1983년에 열렸다. 이때 바로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놀이공원이 등장한다. 미드웨이 플레이선스(Midway Plaisance)다. 서커스단, 음악회, 스트립쇼, 카지노, 술집, 식당가 등이 한곳에 모여 있는 그야말로 ‘놀이동산’이었다.
이곳의 랜드마크는 바로 페리스 휠(Ferris Wheel)이다. 높이 80.4m의 원형 바퀴에 36개의 관람차가 부착돼 천천히 돌아가는 대관람차다. 건축가 조지 페리스가 고안해 지었다. 페리스 휠은 큰 인기를 끌었다. 세계박람회 개막 7주 후에 완공됐는데, 폐막 때까지 4개월 10일 동안 160만여 명이 탑승했을 정도다. 폐막 후엔 해체된 후 세인트루이스박람회(1904년)에 다시 세워졌다. 이후 세계 각국은 누가 더 큰 대관람차를 짓는지 경쟁에 돌입했다. 2023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대관람차는 두바이의 ‘아인 두바이(Ain Dubai)’다. 높이 250m로 현대건설이 지었다. 시카고박람회 이후 세계박람회장엔 놀이공원이 필수적으로 들어섰다.
세계 최초의 TV 중계… 1939년 뉴욕박람회 개막식
뉴욕박람회(1939년) 개막식은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막 연설이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미국 전역에 전해졌다.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중계였다.
전기·전자기업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가 개발한 기술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송신탑을 이용해 NBC가 이룬 위업(偉業)이다. 텔레비전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1967년, 캐나다에서 몬트리올박람회가 열렸다. ‘Exposition(박람회)’의 줄임말인 세계박람회(Expo)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미니 스커트’를 전 세계에 알린 세계박람회이기도 하다. 짧은 치마를 입고 있는 영국 전시관의 여성 안내요원들의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니 스커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많은 나라의 전시관에서 안내요원의 유니폼을 미니 스커트로 바꿨을 정도다. 참고로 대한민국 전시관은 미니 스커트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렇듯 세계박람회는 백화점, 놀이공원, 미술관 탄생에 영향을 미치며 근대를 형성했다.
세계박람회와 ‘자포니즘’
1970년 세계박람회 역사에서 동아시아 시대가 시작됐다. 일본이 열었다. 세계박람회 개최는 일본의 오랜 꿈이었다. 일본은 세계박람회 역사의 초기부터 등장했다. 런던박람회(1862)에 일본의 칠기, 목판화, 칼 장식품이 출품됐다. 정식 참가는 아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보낸 사절단은 개막식에 직접 참석해 현장을 지켜봤다. 그때 기록한 상세한 관찰기가 남아 있다.
1867년 파리박람회에 일본은 정식으로 참가한다. 종이, 의복, 칠기, 인형, 다색 목판화 등을 출품했다. 전시장에 찻집을 차렸는데 크게 화제가 됐다.
파리박람회를 기점으로 유럽에서 일본 문화가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포니즘(Japonism)’이다. 지금의 한류(韓流) 격이다. 일본의 채색 판화와 풍속화인 우키요에는 프랑스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빈센트 반 고흐, 에두와르 마네, 클로드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엔 일본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국제박람회를 열기로 결의한다. 일본 정부는 1940년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국제박람회를 열기로 하고 입장권까지 팔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세계박람회 개최는 멀어졌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렸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일본은 국제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흔히 3대 글로벌 행사로 세계박람회, 올림픽, 월드컵을 꼽는다. 세계박람회와 스포츠 행사는 차이가 크다. 일단 장기간 열린다. 올림픽은 2주가량 열리는 데 반해, 세계박람회는 3개월에서 길게는 반년 동안 열린다. 경제력은 물론 과학 기술, 문화의 수준이 올라가야 치를 수 있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회체제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치러봤지만 세계박람회는 한번도 치러보지 못한 나라들이 있다.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등이다.
대성공한 오사카박람회
1970년 오사카박람회가 열렸다. 대성공이었다. 76개국, 4개 국제기구가 참가했다. 국제박람회가 열린 이래 가장 큰 규모였다. 183일간 6422만여 명이 방문했다. 국제박람회 역사상 최다 관람객이다(이후 2010 상하이세계박람회가 그 기록을 경신한다).
오사카박람회를 통해 일본은 100년의 꿈을 이뤘다. 패전 25년 만에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세계박람회 기간 중엔 내셔널 데이, 스페셜 데이 등을 계기로 각국의 원수(왕·대통령·총리)와 정부의 주요 인사가 세계박람회 행사장을 찾는다.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전범국으로서 오랜 기간 국제사회와 단절됐던 일본은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국제사회로 완전히 복귀했다. ‘높은 기술력이 뒷받침된 기술 강국,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 온화하고 친근한 국민’이라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이때 형성됐다.
다음은 중국 차례였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하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다. 2년 뒤엔 2010 상하이세계박람회를 연다. 주제는 ‘더 나은 도시-더 나은 삶’. 190개국, 56개 국제기구가 참가했다. 역대 최다 규모. 북한과 대만이 처음으로 참가했다. 흥행 면에서도 대성공이었다. 184일 동안 7308만 명이 행사장을 찾았다. 오사카(1970년)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중국은 상하이세계박람회를 통해 개혁·개방 30년의 성과를 당당히 과시했다.
1893년 박람회 데뷔한 조선

▲한국이 개최한 최초의 엑스포인 1993년 대전엑스포의 상징 한빛탑. 사진=조선DB
한국은 어떨까. 한국도 세계박람회와 인연이 깊다. 시작은 1883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기술공업박람회다.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 일행은 보스턴박람회를 방문해 화병, 주전자 등 특산물을 전시물로 출품했다. 국제 규모가 아닌 소규모 전시였지만 세계박람회를 경험하기엔 충분했다.
처음으로 공식 참가한 세계박람회는 1893년 시카고박람회다. 고종의 지시 아래 조선 대표단원들은 미국으로 떠난다. ‘제조와 교양관’ 내 25평 공간에 전시실을 차렸다. 기와를 구워 장식하고 가마와 관복, 조총, 장기판, 연 등을 전시했다. 개막식 날 미국전시관 앞에서 조선 아악을 연주했다.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었다. 케이팝(K-pop)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다.
대한제국은 1900년 파리박람회에도 참가한다. 시카고박람회 때와 달리, 독립적인 국가관을 세웠다. 1368㎡의 대지에 들어선 ‘대한제국관’은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 목조 한옥으로 지었다. 설계는 프랑스인 페레(E. Feret)가 맡았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걸고 생활용품들을 전시했다.
한반도에 암흑기가 찾아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다. 한국은 잠시 세계박람회장에서 퇴장한다.
대한민국이 다시 세계박람회에 등장한 건 1962년 시애틀박람회에서다. 326㎡ 규모의 전시관을 당당히 자력으로 지었다. 식민지배와 전쟁의 참화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전 세계에 알렸다. 이후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 박람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드디어 1993년 한국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대전세계박람회’다. 대전세계박람회를 계기로 세계박람회라는 이름이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계박람회는 두 종류로 나뉜다. 등록박람회와 인정박람회다. 세계박람회를 관장하는 BIE는 1996년 규약을 개정했다. 세계박람회 주기를 5년으로 하되, 0과 5로 끝나는 해에 열기로 했다. 또한 5년 주기로 열리는 세계박람회는 ‘등록박람회(registered exposition)’로, 등록박람회 사이에 열리는 작은 규모의 박람회는 ‘인정박람회(recognized exposition)’로 나누어 정리했다.
새 규정은 2000 하노버세계박람회부터 적용됐다. 2005 아이치, 2010 상하이, 2015 밀라노, 2020 두바이, 개최 확정된 2025 오사카·간사이로 이어진다. 이사이에 2008 사라고사, 2012 여수, 2017 아스타나 등 인정박람회가 열렸다.
BIE는 공식적으로 등록박람회는 ‘월드엑스포(world expo)’로, 인정박람회는 ‘전문엑스포(specialized expo)’로 부른다. 월드엑스포와 전문엑스포는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차이가 꽤 크다. 개최 기간을 보면 월드엑스포는 6개월 이내, 전문엑스포는 3개월 이내로 열게 되어 있다. 월드엑스포는 인류와 미래에 대한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전문엑스포는 특정 분야를 다룬다.

▲2030부산세계박람회 부지로 활용될 부산 북항 일대 예상 조감도. 총 343만㎡로 축구장 480개 면적이다.
박람회장 규모도 다르다. 월드엑스포는 규모의 제한이 없다. 전문엑스포는 25만㎡ 이내로만 지을 수 있다. 월드엑스포에서는 개최국이 제공하는 부지에 참가국이 자국 경비로 전시관을 짓는다. 전문엑스포는 개최국이 지어서 제공한다.
1993 대전세계박람회와 2012 여수세계박람회 모두 전문엑스포(인정박람회)였다. 부산이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에 성공하면 한국은 처음으로 세계박람회(등록박람회)를 치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월드) 엑스포, 올림픽, 월드컵을 모두 유치한 세계 7번째 나라가 된다. 지금까지 세 행사를 모두 치른 나라로는 프랑스, 미국, 캐나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있다.
사실 중요한 건 통계가 아니다. 세계박람회를 치르며 한국은 인류의 미래와 화합에 대해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 2002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인이 한마음이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면,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통해서는 사상적으로 한 단계 더 높아질 수 있다. 한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어떤 국가인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통찰하고 단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란 얘기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부산 기자’ 조갑제가 말하는 ‘부산과 바다’
‘욱’하면서도 균형감각 있는 부산 사람들의 기질은 바다로부터 왔다
가장 부산적인 사나이, 가수 나훈아는 북한에 가서 공연하지 않은 이유를 “나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곳에선 노래 안 부릅니다”라고 했는데 이게 부산의 기질이고 정의감이다.

▲2019년 7월 29일 부산항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무에 휘감긴 영도구 봉래산. 사진=조선DB
바다로, 세계로 열린 부산은 살기에 좋다. 살아봐서 알고 여러 나라, 특히 항구 도시들을 많이 돌아봐서 안다. 사람이 좋고, 자연이 좋고, 역사가 좋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는 시드니도, 나폴리도 아닌 부산이다. 바다, 강, 산이 거대한 항만과 이렇게 다이내믹하게 어우러진 곳은 달리 없다. 큰 부두, 해운대 백사장, 태종대 절벽, 낙동강의 낙조(落照), 시가지를 굽어보는 금정산·장산·구덕산, 색깔이 다른 동해와 남해의 만남 등.
부산은 해양수도(海洋首都)이다. 1876년 개항 이후 본격화된 약 150년의 해양화 과정에서 부산은 그 중심에 있었다. 매축(埋築) 등으로 거주면적과 항만이 커지고 관부(關釜)연락선으로 일본과, 경부선을 통해 대륙과 연결됨으로써 한반도는 15세기 조선왕조가 바다에서 철수한 이후 500년 만에 처음으로 해양 문화권과 대륙 문화권을 연결하는 땅값을 비싸게 치르게 되었다. 그 땅값은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치러지기도 하고 경제 및 민주 발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38도선 분단 이후 한국이 사실상 섬으로 변하여 무역과 해외 진출이 생존의 조건이 됨으로써 무역 전초기지 부산의 역할은 더욱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세계의 주(主)항로와 연결된 항도(港都)에선 해양 문화의 중추 세력인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시민층이 성장했다. 이들은 외래 문물을 맨 먼저 받아들였고, 공산 침략에 맞서 부산 교두보를 지켜냈으며, 임시수도 때는 타지(他地)에서 몰려드는 동포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고, 국제시장은 이들을 먹여 살렸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 줄 아는 습관을 익힌 부산 사람들은 체험적으로 자유의 가치나 개인의 존엄성에 대하여 민감하다. 가장 부산적인 사나이, 가수 나훈아는 북한에 가서 공연하지 않은 이유를 “나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곳에선 노래 안 부릅니다”라고 했는데 이게 부산의 기질이고 정의감이다.
4·19의 선도 세력은 마산·부산 사람들

▲1979년 부마민주화운동은 유신체제의 종말로 이어졌다. 사진=조선DB
1960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붕괴를 부른 4·19의 선도 세력은 마산·부산 사람들이었다. 3월 15일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난 마산시민들을 향하여 경찰이 발포, 사상자가 생기고 시위가 격화되었는데 이를 부산이 받아 확산시키고(주력은 고등학생들) 불씨가 서울로 튀어 대학생 시위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부산은 1960~70년대 박정희(朴正熙) 정부에 의한 수출입국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이기도 하다. 한일국교 정상화와 월남 파병, 그리고 무역 붐으로 부산은 생동했다. 해양대학과 부산수산대학이 배출한 우수한 선장들이 외항선과 원양어선을 몰면서 5대양을 누비고, 목재 및 신발 산업으로 시작된 수출 산업은 울산·창원·마산의 중화학 공업으로 바통 터치되어 지금은 부·울·경으로 불리며 수도권 못지않은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중화학 공업의 성공은 아파트와 마이카로 상징되는 중산층을 키웠고 배가 불러지니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다.
1975년 나는 부산역 앞 광장에서 조총련 모국 방문단의 상봉 장면을 취재하고 있었다. 그 전해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에 대하여 박정희 정부는 조총련 동포들의 고향 방문을 허용,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식의 고차원적 대응을 했다. 이게 북한노동당의 일본 지부인 조총련을 거의 소멸로 몰고 가는 시작이 되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타고 리바이벌되어 크게 히트한 노래가 조용필이 새로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이 노래에선 1970년대 부산 냄새가 난다.
1979년 10월 16일 밤 남포동. 나는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로 시위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감했다. 부산 출신 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 의원 제명으로 촉발된 부마(釜馬)사태는 장기 집권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그날 오전 부산대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하다가 해산당하자 오후에 남포동, 중앙동으로 옮겨서 시위를 계속했다. 부가가치세 실시에 불만이 많던 상인들이 이들을 응원했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이 사태를 민란(民亂)이라고 본 이유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과격해졌고 경찰 작전차를 뒤집어 새어 나온 기름에 불을 붙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철통 같았던 유신체제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였다.
2년 차 기자로서 1972년 10월 17일, 청천벽력 같은 비상계엄령 선포와 유신체제 출범을 맛보았던 나는 그 순간 “내일은 계엄령이 선포되겠다”고 동료 기자에게 중얼거렸다. 부산 지역에 비상계염령이 선포된 다음 날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고 위수령(衛戍令)이 발동되었다. 그리고 10월 26일의 궁정동 총성. 박정희는 경상도에서 일어난 시위와 경상도 사람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985년 2·12 총선 이변과 ‘욱’하는 성격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30년을 결정했다. 18년의 박정희 통치를 마감하고 12년 이어질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정권의 문을 열었다. 군인 출신 세 대통령 시절에 이승만 통치 12년을 보태면 42년, 대한민국 나이의 딱 절반을 차지한다. 이 네 대통령의 영도하에 대한민국은 해양화(海洋化)의 길을 질주했는데 모든 해양 문화의 본질은 개방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법치 및 민주화이다. 그런 역사의 대세(大勢)를 타고 발전한 도시가 부산이고 그런 시대정신을 집단적으로 표출한 이들이 부산시민이다.
이승만·박정희 정권 퇴장에 큰 역할을 한 부산시민들은 경남 합천 출신 전두환 정부에 대한 저항도 멈추지 않았다. 거제도 출신 부산 사람 김영삼이 지휘한 1985년 2·12 총선은 전두환 정권의 야권 분열책을 뒤엎고 대이변(大異變)을 만들었다. 이것이 그 2년 뒤의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분수령(分水嶺)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2·12 총선 드라마의 주인공도 부산 사람들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984년 11월 30일에 그동안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야권 성향 정치인들을 풀어주면서 출마의 길을 터주었다. 그렇게 하면 야권이 강경 신한민주당(신민당)과 온건 민주한국당(민한당)으로 분열되어 여당인 민정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신민당은 고분고분한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선거 결과는 이런 예측을 뒤엎어버렸다. 1980년 봄 이후 5년간 눌려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 기간 중 폭발한 것이다. 이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이었다. 전국에서 민정당 후보 다섯 사람이 낙선했는데(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을 때) 세 사람을 낙선시킨 곳이 부산이었다. 당시 내가 만난 부산의 한 30대 유권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생처음 유세장에 나갔습니다. 야당 후보는 정권의 부패, 광주(光州)사태, 직선제 쟁취 등 굵직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여당 후보는 어디 어디에 다리 놓겠다는 식의 작은 이야기만 늘어놓았습니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격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선심성 공약은 먹히지 않았습니다. 야당 후보의 연설을 듣고 있자니 내 가슴도 뜨거워졌습니다. 그동안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들이 분노로 변해 ‘욱!’하고 치받치는 것이었습니다.”
부산 사람들이 투표를 가장 잘한다
부산 사람들의 특징인 ‘욱!’하는 성깔이 1987년 6월 18일 다시 한 번 역사를 뒤흔든다. 그날 밤, 10만 명의 시위대가 밤중에 부산시청을 포위, 함락 직전까지 갔다. 이 무렵 전두환·노태우(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막후에서 6·29 선언을 협의하고 있었다.
부마민주화운동으로부터 29년이 흘러 2008년 4월 총선 때 부산 유권자들은 친박(親朴)연대와 무소속 후보를 일곱 명이나 당선시켜 2·12 총선에 이어 또 한 번의 이변을 연출했다(한나라당 후보는 11명 당선, 민주당 후보도 한 명이 당선되었다). 부마민주화운동 때는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으나 이명박(李明博) 세력이 박정희의 딸을 구박한다고 생각한 부산시민들이 격분한 것이다. 부산식 정의감의 발로라고 할까? 내가 부산 사람들이 투표를 가장 잘한다고 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산 사람들은 ‘욱’하면서도 균형감각이 있다. 좀처럼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산 사람들의 특질은 거의가 바다로부터 온 것이다.
바다에서 결정된 신라의 삼국통일

▲2023년 8월 1일 부산 중구 부산항 옛 연안여객선부두에서 출항하는 조선통신사선 재현선. 조선은 조선통신사 왕래를 제외하면 나라의 문을 닫아걸었다. 사진=조선DB
우리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제1법칙 또한 “바다를 가까이하면 흥하고 멀리하면 망한다”이다. 그리스, 로마, 바이킹(노르만), 베니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일본, 미국, 명(明) 이전의 중국 또한 바다를 통해 번영했다.
선진 문명과의 교류, 과학과 군사 기술의 발전, 무역을 통한 돈벌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그러나 규칙을 지키는) 인간형의 탄생 등 대부분 바다를 통해 이뤄졌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지배층은 말 달리던 북방기마민족(아마도 흉노 계통) 출신인데 신라에 정착하면서 배도 잘 모는 사람이 되었다. 말 잘 타고 배도 잘 모는 민족은 속도를 장악함으로 바이킹과 노르만처럼 세계사의 최강이 된다.
신라 진흥왕은 서기 553년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를 빼앗아 오늘날 서울의 모태인 신주(新州)를 설치, 서해를 통하여 중국과 통하는 관문을 장악했다. 새로운 바닷길을 연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과 통하고 서해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지정학적 우위(優位)에 서게 되었다.
676년 신라 해군은 서해 기벌포 해전에서 당의 해군에 이겨 7년간 계속된 나당(羅唐)전쟁을 승리로 마감했다(이해 당은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를 만주 지역으로 물리고 한반도를 한민족의 보금자리로 내어준다). 문무왕은 선부를 병부로부터 독립시키는데 신라 말기까지 존속한다. 그 뒤 조선은 바다와 배를 관장하는 중앙부처를 만들지 않았다.
고려도 해양 국가적 면모를 이어갔다. 몽골의 침략에 고려가 수십 년간 저항한 것은 세계적 기록인데 그 힘은 해군·해운·조선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삼별초(三別抄)의 영웅적 저항과 두 차례 일본 원정은 그 저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이 바다에서 철수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조선의 바다에서의 철수는 명의 해금(海禁) 정책 및 주자학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자폐증과 연관된다. 15세기, 명나라가 바다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조선도 내륙화(內陸化)의 길을 간다. 명과 조선 사이의 서해는 외항선이 다니지 않는 바다가 되어 400년이 흘러갔다. 명이 자유통항을 금지하니 사신들도 육로로 다녀야 했다. 명과 조선의 서해 폐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기현상이었다. 조선왕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섬을 대상으로 강제로 인구를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취한다. 이영훈(李榮薰)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경제사》에서 “조선왕조에 이르러 바다는 넓은 개방의 통로가 아니라 높은 쇄국(鎖國)의 장벽으로 바뀌었다”고 썼다.

▲한국 해군 최초의 포함 백두산함은 6·25 개전 직후 부산 앞바다에서 북한 무장선을 침몰시켜, 부산 함락을 막았다. 사진=조선DB
바다에서 철수했던 한국인을 다시 바다로 재진입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는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1905년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갔고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란 수준 높은 해양법 관련 박사 논문을 썼다.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를 처음으로 소개한 이 논문은 해양 문화와 해양 세력에 대한 이승만의 깊은 사고(思考)의 시작이었고, 1951년의 평화선 선포(독도 영토화), 1953년의 한미동맹으로 결실되었다.
신라가 동북아의 바다를 누빈 것처럼 한국인은 태평양을 포함한 5대양 6대주로 뻗어나가게 된다. 박정희의 수출입국과 조선·해운 육성, 전두환의 경제 개방 정책, 노태우의 북방 정책은 이승만의 바다 재진입 전략의 확대판이었다. 이제 한국은 신라처럼 해양강국이 되었고 부산은 한국 해양화의 선도자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부산항을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의 경주였다. 1950년 6월 26일 새벽 부산 근해에서 백두산함이 북한군 600명을 태운 적선(敵船)을 발견, 격침시키지 않았더라면 부산 교두보가 구축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부산을 향하여 밀려내려 오는 북한군을 최초의 한미연합작전으로 다부동에서 저지함으로써 부산 교두보는 무너지지 않았고,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길이 열렸다. 한국전에서 경상도 출신이 다수인 약 2500명의 소년병이 전사했는데, 대부분이 이 교두보를 지키기 위하여 투입된 아이들이었다.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
부산수산대학 출신으로 원양어선 선장을 거쳐 동원그룹을 만든 김재철(金在哲) 전 무역협회 회장은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고 말하는 분이다. 한반도 지도를 180도 돌려놓으면 부산이 국토의 맨 앞에서 바다로 뛰어들 듯 웅크리고 있다. 부산 앞에 열린 태평양과 인도양, 그곳에 한국 문명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최근, 1980~90년대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 기자를 만났다. 그는 서울 특파원을 지낸 뒤엔 방콕 특파원으로도 근무했는데 “한국 언론이 동남아를 너무 경시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지역에 특파원을 많이 두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국 기자들은 선진국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아픈 지적이었다. 머지않아 GDP 규모에서 인도네시아가 한국을 능가할 것이고 중국의 침체와는 달리 인도·베트남·태국이 올라오는데 언론이 무관심하니 한국인도 이 지역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인도는 이미 중국을 젖히고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이 되었고,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 또한 인구가 각 1억 명이 넘는다. 그는 인도의 모디 수상이 21세기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했다. 21세기 부산이 나아갈 방향을 시사(示唆)한 충고로 생각되어 소개했다.Ⓑ
조갑제
1945년생. 부경대(부산수산대) 2년 수료. 부경대 명예학사 / 《국제신보》 기자, 《월간 마당》 편집장, 《월간조선》 편집장, 월간조선사 대표, 현 조갑제닷컴 대표
■인도인 ‘부싼’ 사람, 로이 알록 명예교수
“부산만의 개성은 외국 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역동성”
“잠재력은 아직도 해나갈 숙제가 많다는 뜻이다. 부산은 제1의 도시가 아니기에 슬로 앤 스테디(slow and steady·느리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하게 접근해야 한다.
단발적인 변화가 아니라 장기적인 비전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잠재력이다.”
로이 알록
1955년생. 인도 네루대 물리학부, 델리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네루대 대학원 한국어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 박사 과정 수료 / 부산외대 인도어과 교수, 부산국제교류재단 사무총장 역임. 현 부산외대 명예교수, 부산다문화국제학교 다원화연구원 원장

10만 번째의 귀화 한국인인 부산외대 로이 알록 쿠마르(68·부산다문화국제학교 원장) 명예교수는 누가 뭐래도 ‘부싼’ 사람이다.
대학교수로 부산에 처음 정착한 해가 1989년이지만 도시 부산을 그만큼 깊이 이해하고 체감하려 노력한 외국인, 아니 ‘부싼인’이 또 있을까.
지난 2015년부터 부산시 글로벌 도시재단(구 부산국제교류재단) 사무총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며 부산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또 부산시 국제협력분과위원회, 외국인 근로자 지원센터 등 다양한 부산의 국제 관련 기관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이야기해”
부산을 한국을 대표하는 2대 도시가 아니라 ‘도시국가’ 부산으로 생각하는 그에게 부산론(論)을 들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 최근 인도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인도 젊은이들에게 부산을 어떻게 소개할까 궁금하다.
“눈, 코, 입을 즐겁게 해주는 아주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간, 오감(五感)을 만족시킬 수 있는 도시가 부산이라 말한다.”
― 부산에 대한 극찬으로 들린다.
“부산을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슬로비디오를 보는 느낌이다. 속도를 줄여 이곳저곳을 다양하게 볼 기회를 준다. 왜냐하면 부산역 인근 북항 재개발이 때로 지루하게 오랫동안 진행되어왔다. 그런데 이곳을 2030부산세계박람회 개최지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놀랍고 반갑다. 무엇보다 이후 부산의 변신이 기대된다.
부산국제교류재단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당시 부산시가 새로운 도약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한 적이 있다. 2016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월드컵 유치 이야기가 나왔지만 나는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제안했었다. 월드컵도 큰 이벤트이긴 하지만 2030부산세계박람회는 또 다르다. 국제도시로서 부산의 성장과 장기적인 도시 발전을 꾀할 수 있다. 그 무렵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 인도 친구들과 대화하며 세계박람회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세계박람회(2021년 10월~이듬해 3월)가 열렸고 지금 두바이는 세계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 직접 경험한 부산의 어제와 오늘을 간략하게 말해달라.
“1989년 처음 부산에 왔을 때는 제조업 수출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선 사람이 양복과 넥타이를 맨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면, 부산에서는 당시 작업복을 입은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거리마다 컨테이너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 당시엔 무섭기도 생소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운전할 수 있다면 세상 어디에서도 운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조급함 때문에 옛것을 보존하기보다 개발에 치우쳐 있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땐 손을 내밀면 바다였고 다른 손을 내밀면 바다에 닿을 것만 같았다. 용두산공원에 올라가면 부산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산과 바다를 보려면 높은 아파트와 건물들 사이로 볼 수 있다. 부산 곳곳에 위치한 문화마을들, 그리고 천혜의 자연이 있는 부산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이란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다양한 색채를 지닌 도시는 세계 어디를 가도 많지 않다. 독보적인 색깔을 가진 부산은 정체(停滯)되지 않는 도시이자 새로움을 주는 공간이다.”
“준비하는 과정보다 2030부산세계박람회 이후가 더 중요”
― 부산의 날씨에선 어떤 매력을 느끼나.
“고향 인도와 비교할 때 부산의 갑작스러운 계절 변화는 매력적이다. 물론 부산은 살인적인 추위나 살인적인 더위도 없다. 살다 보면 무척 고마운 부분이다. 그래서 부산 사람들이나 부산을 찾는 여행객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단도직입적으로 부산의 매력은 무언가. 어디를 인도 벗들에게 추천하고 싶나.
“예전에 만났던 어느 대사 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서울에선 주부로서 하루하루가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부산에 오니 시인이 되었고 화가가 되었다’고.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바닷길을 걷든, 산에 가든 노래를 흥얼거리는 부산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아마 부산의 자연이 우리 안의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 같다.
나는 영도의 갈맷길 걷기를 좋아한다. 영도의 선착장 앞은 항상 분주한 것이 뭔가 살아 있는 느낌이다.
영도의 일출과 석양은 꼭 사진으로 담아야 하는 아름다운 풍광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부산은 1988년 하계올림픽 요트경기,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월드컵, 2005년 APEC 정상회담,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개최하면서 도시 브랜드가 한층 높아졌다. 국제적인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부산시장에게 어떤 변화를 주문하고 싶나.
“국제행사를 치르는 것보다 그 이후를 팔로 업(follow up)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과제다. 행사의 성공 여부는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후 어떤 ‘물결’을 계속 일으켜 나가는지,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유익하고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결국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준비하는 과정보다 2030부산세계박람회 이후가 더 중요한 것이다. 쉽게 간과되는 포인트다.”
― 좋은 말씀이다. 부산이 ‘물결’을 일으키기 위해 어떤 개성을 가졌으면 좋겠나. 그 개성을 드러낼 부산만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
“부산을 ‘도시’나 ‘항구’로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사람의 취향은 한국이나 해외나 다양하다. 편협한 한 가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제각각 부산에 와서 ‘그들이 좋아하는 부산’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가 아닌 다원적인 경험을 제시하고 찾을 수 있는 공간이 글로벌 스탠더드에서는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다른 도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부산을 찾고 있다. 부산 곳곳의 아름다운 공간에서 커피를 마신다. 새로운 공간이 새로운 취향을 가진 인구를 불러온다.
사실, 항구는 선박과 함께 외국의 문화가 머무르는 곳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부산만의 개성은 외국 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역동성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 부산은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도시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다. 부산시민들의 개방성 정도를 어떻게 보나.
“외국인이 많다는 것을 나도 느낀다. 항구도시 부산이 국제도시로 성장한 배경에는 인구 구성의 개방성이 한 몫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내가 어딜 가도 사람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내게 출신지를 묻지 않는다. 어느 면에서 개방적으로 변해 타인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듯하다.
‘개방성’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도시 발전은 인프라도 중요하지만 인구 구성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잠재력이 더욱 중요하다. 잠재력과 비전을 지닌 전문 인력이 풍부해야 한다. 부족할 경우 필요한 인력자원을 외부에서 충원할 수 있는 개방성이 더 필요하다.”
로이 알록 교수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인도는 사용되는 언어 수가 1652개에 이른다. 이 중에서 인구의 3분의 2가 사용하는 언어는 무려 100개나 된다. 방송매체(24개 언어, 146개 지역방언), 신문(34개 언어), 문학작품(80개 언어) 등에서 다양한 언어가 통용된다.
그러나 언어의 수만큼이나 다양성과 타 언어권에 대한 존중이 있다. 이것이 인도의 상상력과 경쟁력의 원천이다.”
“부산 친구들은 All weather friend”

▲2011년 1월 24일 오전 경기도 과천 법무부 회의실에서 열린 귀화자 국적증서 전달식 당시 로이 알록 쿠마르 원장의 모습이다
로이 알록 교수는 “글로벌 도시가 되려면 옛것을 보존하면서 역사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도시 정책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과거의 지혜를 바탕으로, 개방적이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과거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을 모두 끌어안았을 정도로 포용력이 크고 남을 배려하는 성향이 강했다.
이 같은 장점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받아들여 다양성이 살아 있는 글로벌 도시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부산이 ‘차별과 배제의 다문화’에서 ‘통합의 다문화’로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나.
“1990년대 부산에는 외국인 CEO와 호텔 지배인, 선박회사 오너도 많았다. 하지만 2000년 무렵에 모두 부산을 떠났다. 부산은 이들에게 자녀교육 문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지금 오는 외국인들은 근로자, 교사, 교수, 유학생 등 다양하다. 그들이 부산을 보는 시각도 각각 다양하다. 차별과 배제를 느끼는 강도도 각각 다를 것이다.
그러나 다들 부산 사람들이 ‘솔직하다’라고 표현을 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겉치레가 적은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글로벌화가 덜된 것일 수도 있다. 친구가 되면 부산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친구 역할을 하는, ‘올 웨더 프랜드(All weather friend·전천후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 부산의 잠재력을 어디서 찾으면 좋을까.
“잠재력은 아직도 해나갈 숙제가 많다는 뜻이다. 부산은 제1의 도시가 아니기에 슬로 앤 스테디(slow and steady·느리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하게 접근해야 한다. 단발적인 변화가 아니라 장기적인 비전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잠재력이다.”
“인정은 자연히 얻게 되는 것이지 갈구한다고 얻는 거 아냐”

▲부산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의 전경이다. 커피숍이 10년 만에 4개에서 144개로 늘어난 영도는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특색 있는 카페들이 잇따라 들어서고 있다.
― 부산의 먹거리는 어떤가.
“스트리트 푸드(street food)에 대한 부산의 실험은 한국 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성공 사례다. 물떡, 씨앗호떡, 동래파전, 밀면, 국밥 등등….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먹거리가 요즘 디지털 세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 부산 공무원들을 접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 그들의 생각, 적극성, 전문성, 친절도, 문제해결 능력 등에 대해 말해달라.
“국제행사를 많이 접하면서 더 세련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가야 할 길은 멀다. 특히 다언어 사용 그리고 비교문화적 이해에 있어서 더 배워야 한다.”
― 부산 대학들의 인문학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나. 부산이 인문학 도시로 발전하려면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까.
“대학의 인문학 수준은 말하기 어렵지만 부산에는 많은 예술인이 있다. 인문학 도시는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 부흥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형성되는 것이다. 조급한 결과를 바라는 것보다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정은 자연히 얻게 되는 것이지 갈구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부산 속 현대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국토의 최후 보루에서 세계박람회 준비하는 일류 도시로
〈황소〉를 그린 화가 이중섭도 이곳에 머물렀다.
함흥에서 온 피란민이 우암동에서 냉면집을 차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산 밀면의 기원이다.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관저를 그대로 재현한 임시수도기념관
소설가 김동리는 1·4후퇴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는 부산역 앞 중구 광복동의 한 다방 ‘밀다원’에서 벌어진 당대 예술가들의 고뇌를 담은 소설 《밀다원 시대》(1955)를 펴냈다. 이 소설에서 부산은 이렇게 묘사된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떠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곳….”
2023년 8월 18일, 경부선의 시작이자 종착점인 부산은 ‘피란수도’ ‘전시(戰時) 수도’가 된 지 73년 째를 맞았다. 정부는 6·25전쟁이 터지자 수도를 옮겨야 했다. 대전(6월 27일), 대구(7월 16일)를 거쳐 부산까지 내려갔다.
‘국토 수호의 최후 보루’가 된 부산은 1953년 8월 15일 정부가 서울로 환도(還都)할 때(1차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2차 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5일)까지 두 차례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피란 정부는 당시 경남도청 청사(현 동아대 석당박물관·서구 부민동)를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삼아 국난을 극복해나갔다. 1925년에 만든 경남도청사는 붉은 벽돌로 지은 르네상스 양식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였다. 임시정부가 입주해 ‘임시 중앙청’이라고도 불렀다. 경남도청(1925~1950년), 제1차 임시수도 정부청사(1950년 9월 29일~10월 27일), 제2차 임시수도 정부청사(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5일), 경남도청(1953~1983년), 부산지방검찰청(1984년 11월~2001년 9월)을 거쳐 현재는 동아대가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동아대 석당박물관을 나와 왼쪽 언덕길로 약 200m를 걸어 올라가면 ‘부산 경무대’로 표현했던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서구 부민동·현 임시수도기념관)가 나온다. 동서양의 양식을 혼합한 2층 목조 기와 건물로 1926년에 만들어졌다. 피란기에는 경남도지사 관사(1926~1950년)였던 이 곳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있는 서양식 응접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 지도부가 이곳에서 국정과 외교를 논했다.
대통령 내외와 수행비서들이 피란 생활을 한 이 관저는 1953년 환도 이후 1983년까지 경남도지사 관사였다.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도청을 옮기자 1984년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개관했다. 관저 뒤편에는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이 있다.
정부가 수도를 옮기자 피란민들도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1945년 광복 당시 인구 28만 명이었던 부산은 1950년 말 89만 명을 기록했다. 부산은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 집을 지을 만한 공간이 부족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부산의 적정 인구를 30만 명으로 봤다.
집을 구하지 못한 피란민들은 깡통, 가마니, 판자 등을 이용해 산비탈이나 개울가에 움집과 판잣집을 지었다. 부산역을 빠져나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면 산비탈에 빼곡히 자리 잡은 알록달록한 집들을 볼 수 있다. 부산의 지형과 전쟁, 피란민이 만들어낸 흔적이다.
확인된 판잣집 2만8619호
전쟁 직후 시작된 피란을 ‘1차 피란’, 1950년 10월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이북·이남 지역 주민의 대규모 피란(1·4후퇴)을 ‘2차 피란’이라 한다. 피란민 수는 1차가 약 150만 명, 2차가 약 480만 명이었다. 1차 피란민은 주로 남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과 10월 19일 평양 탈환으로 정부가 환도(1차)하자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북에서 온 피란민의 대다수는 부산, 거제 등 피란지에 정착했다.
부산시는 피란민이 몰리자 피란민 수용소를 마련했다. 영도구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영도 청학동, 남구 대연고개, 서구 남부민동, 사하구 괴정·당리 등 40여 곳에 수용소를 세웠지만, 피란민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공터만 보이면 판잣집을 지었다.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한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부산항을 배경으로 한 동구 범일동, 초량동, 수정동, 중구 영주동 등지에 판잣집이 세워졌다. 피란을 온 남성은 주로 부둣가에서 하역 등의 육체노동을 했고, 여성은 자갈치시장·국제시장·부평시장 등지에서 어물을 나르거나 좌판을 벌였다.
피란민들의 흔적이 남은 주거지로는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과 남구 우암동 소막(牛幕)마을 등이 있다. 아미동 비석마을의 출발은 공동묘지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 거류민이 늘자 1892년 산비탈 빈민촌인 아미동에 약 8만㎡(2만5000평)의 일본인 공동묘지가 조성됐다. 약 9000기의 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갑작스러운 광복으로 수습되지 못한 채 방치됐다.
아미동 비석마을과 우암동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 사진=비짓부산
피란수도 시기에는 빈번한 화재와 부산 시내 판잣집 철거 정책으로 수많은 피란민이 산으로 떠밀려 갔다. 일부는 아미동 공동묘지를 거처로 삼았다. 이곳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과 상석(床石)이 널려 있었다. 피란민들은 비석과 상석에다가 손에 잡히는 각종 자재를 덧대 집을 만들어 나갔다. 계단과 담벼락, 주춧돌, 옹벽으로 재활용된 비석과 상석이 마을 곳곳에 노출돼 있어 이곳이 공동묘지였음을 지금도 알려주고 있다.
아미동 사람은 묘지 위에 집을 지은 미안함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면 제사상에 밥 한 그릇을 더 올려놓는다고 한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아미동 비석마을은 2022년 1월 부산의 첫 등록문화재가 됐다.
일본은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에서 소를 수입했는데, 우암동 일대에는 소를 반출하기 위한 소검역소(우역검사소)와 소 2400마리를 수용하는 막사(40개 동)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우암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를 일본으로 이출(移出)한 곳이었다.
막사 한 개 동은 폭 9m, 길이 42m의 목조 건물이었다. 소 막사의 한 칸 규격은 폭 2.5m, 길이 4m로 약 4평이다. 사람들이 이 한 칸 한 칸에 나무판을 벽 삼아 살다가 시간이 흘러 시멘트로 벽을 세우며 지금의 골목 형태를 갖추게 됐다. 그 흔적은 여전히 좁고 빽빽한 골목길로 남아 있다.
〈황소〉를 그린 화가 이중섭도 이곳에 머물렀다. 우암동 일대에는 북한에서 피란 온 이들이 많았다. 함흥에서 온 피란민이 우암동에서 냉면집을 차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산 밀면의 기원이다.
소막마을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1919년 북한에서 동춘면옥으로 시작해 흥남철수 후 우암동에 자리 잡은 내호냉면이다. 10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이곳에서 부산 최초의 밀면이 만들어졌다. 당시 냉면의 원재료인 메밀과 고구마 전분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데 미국의 원조 물품 중에 밀가루가 많았고, 메밀가루에 밀가루를 섞어 지금의 밀면이 탄생했다.
영도대교, 한국 최초의 연륙교

▲부산 남구 부경대에 있는 워커하우스. 사진=비짓부산
1934년 11월에 개통한 영도대교는 육지(중구 남포동)와 섬(영도구 대교동)을 잇는 한국 최초의 연륙교이자 동양 최대의 도개교였다. 영도대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도선(渡船)으로 하루 평균 1만 명이 육지와 섬을 오갔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현인도 영도에서 태어났다. 급히 피란길에 올라야 했던 이들은 헤어지면서 훗날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부산에서 서로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곳이 영도다리였기 때문이다. 2013년 새롭게 단장한 영도대교는 총길이가 214.6m, 폭이 25.3m이다.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영도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기 위해 사이렌이 울리고 주변 교통이 통제된다.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릴 때면 ‘굳세어라 금순아’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옛 노래가 흘러나온다.
73년 전, 낙동강까지 밀려난 국군과 유엔군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두고 전투를 벌일 때 그 전투를 지휘했던 건물이 아직도 부산에 남아 있다.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Harris Walker)의 이름을 딴 ‘워커하우스(Walker House·현 부경대·남구 대연동)’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워커 장군은 당시 대구에 있던 미 8군 사령부 지휘본부를 1950년 9월 6일 부산수산전문대학(현 부경대)으로 옮겼다. 워커하우스는 18일간 미 8군의 지휘본부로 활용됐고 사람들은 ‘돌집’이라고 불렀다. 바닷가에서 자연석을 모아 콘크리트와 섞어 벙커 모양으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1995년 개· 보수를 한 이 건물은 현재 학생들의 배를 채워주는 학생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4년 개장한 부산시민공원(부산진구 범전동)은 캠프 하야리아(Camp Hialeah)가 있던 곳이다. 하야리아 부지는 부산의 도심인 서면과 인접해 있으며 면적은 54만3360㎡(약 16만 평)다. 일제강점기에는 경마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 시설이었다. 6·25전쟁이 터지고는 미 극동사령부 산하의 부산기지사령부가 됐다. 초대 사령관의 고향인 미국 플로리다주 하야리아시(市)에서 부대 명칭을 따왔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주한미군 부대로 활용됐고, 2006년 8월 하야리아 부대 폐쇄가 결정되자 부산시는 6679억원을 들여 47만749㎡(약 14만 평) 규모의 공원을 조성했다.
유엔기념공원

▲부산 남구 대연동에 있는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 사진=조선DB
남구 대연동에는 고마운 나라의 고마운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이곳은 1951년 1월 18일 유엔군사령부가 조성한 유엔기념공원(UNMCK)으로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1951년 4월 묘지가 완공된 후 유엔군 전몰장병의 유해가 이곳으로 왔다. 현재 11개국 2320구의 유해가 이 곳에 있다.
기념공원에 들어서면 공동묘지라는 인상보다 경건하게 잘 정돈된 정원에 온 느낌이다. 공원 관계자는 “이곳이 묘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오히려 더 화려하게 조경을 한다”고 말했다. 미처 피지도 못하고 져 버린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인지 형형색색의 꽃들로 묘역을 꾸몄다.
우리나라 국회는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유엔기념공원 일대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묘지를 성지(聖地)로 지정했다. 유엔은 이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하고 유엔 총회에서 결의문 제977(X)호로 채택했다. 1974년부터는 한국을 포함해 전사자가 안장된 11개국으로 구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가 관리를 맡고 있다.
유엔기념공원에는 ‘전쟁고아의 아버지’ ‘부산시민들의 은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리처드 위트컴(1894~1982년) 예비역 육군 준장이 잠들어 있다. 위트컴 장군은 세계 1·2차대전에 참전하고 6·25전쟁 당시에는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11월 부산역 대화재가 발생하자 군수창고를 개방해 2만3000여 명분의 식량과 의복 등을 이재민들에게 지원했다.
위트컴 장군은 부산 메리놀병원 등 의료기관 건립은 물론 전후 재건을 지원하는 데도 힘썼다. 그는 퇴역 후에도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를 돕는 데 여생을 바쳤다. 장군은 89세의 나이로 영면할 당시 ‘한국에 머물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 부인 한묘숙(1927~2017년) 여사와 함께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그는 2022년 11월 8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제1등급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부산시민들은 위트컴 장군을 추모하고 알리기 위해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부산 남구갑)과 함께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을 위한 시민위원회’를 조직해 동상 건립 모금 운동을 벌였다. 2022년 10월부터 ‘1인당 1만원씩 총 3억원’ 모금 활동을 벌여 8개월 만에 목표 금액을 달성했다. 위트컴 장군을 기리는 조형물은 오는 11월 11일 남구 대연동 유엔평화공원에 들어선다.Ⓑ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INTERVIEW
박수영 국민의힘 국회의원
“‘피란수도부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이 있는 곳을 지역구로 둔 박수영(朴洙瑩·59·부산 남구갑)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1964년 부산 남구 문현동의 산동네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박 의원은 당시 보통 부산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똑같이 겪었다. 겨울이면 판자 사이로 파고드는 살이 에일 듯한 바람을 맞아야 했다. 그는 “부산이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유치하는 도시가 된 것은 부산시민의 땀과 노력,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며 “대한민국의 번영은 부산과 함께한다. 전쟁 당시에는 최후의 보루로서, 경제발전기에는 관문 도시로 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피란수도가 남긴 유산이 가득한 부산 남구를 찾는 이들에게 그가 추천하는 ‘박수영 남구 추천 코스’가 있다.
“유엔기념공원 방문으로 시작합니다. 사전 예약을 하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참배를 할 수 있습니다. 유엔기념공원 맞은편에는 유엔평화기념관이 있습니다. 6·25전쟁과 부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부경대에 있는 워커 장군 지휘소도 꼭 방문해보십시오. 시간이 되면 남구청과 용호동 일대도 좋습니다. 6·25전쟁 당시 남구청 자리에는 미 제5전투비행단이, 용호동에는 미 해병 2사단이 주둔했습니다.
우암부두로 넘어가는 언덕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밀면집인 ‘내호냉면’이 있습니다. 밀면의 원조입니다. 꼭 맛보시고 우암동 ‘소막마을’도 들러보십시오. 아픈 과거를 함께 나누기 위해 만든 전시관도 있습니다. 우암부두는 2030부산세계박람회가 유치되면 전 세계 국가관이 설치되는 곳이므로 꼭 가셔야 합니다. 이곳은 유엔군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상륙할 때 꼭 거쳐야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부산항대교와 영도, 오륙도를 바라보면 대한민국과 부산이 만든 기적에 절로 미소가 나올 겁니다.”
박수영 의원은 위트컴 장군이 지난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을 수 있도록 윤석열 대통령에게 앞장서 건의했다.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에도 앞장섰던 그는 모금 운동과 관련해 일화를 들려줬다.
“부산의 한 기업가가 동상 건립에 필요한 3억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혀오셨어요. 종일 고민한 끝에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부산역 대화재 당시 3만 명의 이재민을 도와주신 위트컴 장군의 뜻을 기려 3만 명의 부산시민이 십시일반 1만원씩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의원은 ‘피란수도부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데 앞장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부산에 대한 단순 홍보 차원을 넘어 부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전 세계에 피란수도부산의 의의를 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아주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며 분야별 전문가와 힘을 합쳐 부산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국민의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 원장직도 맡은 박 의원은 윤석열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지방시대를 위해서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권을 수도권 버금가는 성장축으로 발전시키겠습니다. 2030부산세계박람회는 부산의 재도약, 부산 경제 발전의 동력이 돼 지방시대를 앞당길 것입니다. 부산의 가장 큰 저력은 바로 시민과 바다입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법도 적극적으로 만들겠습니다.”Ⓑ
이경훈 기자
■내가 은퇴 후 부산을 선택한 이유
한강뷰보다 오션뷰, 게임이 안 된다!
낙동강을 봐라. 강폭은 한강과 비교해 봐도 엄청나게 넓다. 저녁에 낙조를 보면 장관이다.
가장 큰 비교우위는 역시 바다다. 서울의 한강뷰 보다가 오션뷰를 보면 느낌이 확 다르다.
한마디로 게임이 안 된다.

나는 아침마다 설렌다. 오늘 해운대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 아침 기상 후 해운대 해변으로 뛰쳐나가듯 한다. 9년 내내 매일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기분으로 살았다.
서울에서 51년을 살아온 나는 공기업 지방 이전이라는 정부 정책으로 2014년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부 정책 때문에 억지로 부산에서 살게 되었지만 부산에서 만 9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부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퇴직 후에도 계속 부산에서 살 거라고 말하면, 지인과 친구들은 “정말?”이라면서 안 믿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실제 올해 3월 정년퇴직을 한 후 나는 부산 정주를 감행했다. 그리고 부산에서 살면서 아침마다 이렇게 설레는 기분을 매일 경험하다 보니 이제는 서울로 쉽게 못 올라가게 되었다.
“부산 사람들이 느긋하고 의외로 여유 있네”
부산이 머나먼 외국도 아닌데 “진짜 부산에서 살 거야?”라고 하던 그들의 반응이 오히려 이상하고, 나는 그런 반응의 근저에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서울 토박이였던 부산 모(某) 대학의 한 교수는 강의에서 말하기를 언젠가 동창회에 나갔더니, “동창들이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사는 나를 루저(loser)로 보더라”고 했다. 그는 “서울을 떠나면 안 된다는 이런 생각이 수도권의 집중화와 과밀화를 야기시키고, 이로 인해 집값 앙등과 삶의 질 저하 문제가 발생한다”고 진단했다.
한국인들은 지방분권을 경험 못 했다. 오직 중앙집권화된 국가 경험밖에 없다. 나는 자주 여행 가는 일본 후쿠오카를 통해 일본의 지방균형 발전을 실감했다. 한국은 너무 수도권 한 곳으로 쏠린다. 전 인구의 50%가 수도권에 몰려 사는 나라인 한국은 점점 싱가포르와 같은 도시국가가 되어가는 듯하다. 일본은 전 인구의 20% 정도만 도쿄 및 수도권에 모여 산다고 한다.
서울에서 살 때에는 나도 아파트가 빼곡하게 밀집한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에서 살았고, 여의도에 있는 직장으로 출퇴근했다. 아침저녁으로 너무 붐비는 지하철에서 이리저리 밀치고, 뛰다시피 걷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부산에 내려오니 억센 경상도 사투리에 행동도 빠르고 거칠 것 같았지만 전혀 달랐다. 그래서 부산 출신 후배 직원에게 “부산 사람들이 느긋하고 의외로 여유 있네” 했더니, 그 후배가 하는 말이 참 재미있었다.
“빠르고 똑똑한 친구들은 다 서울로 올라가 여기는 2등 이하만 있어서 그래요.”
나는 이 말을 듣고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은퇴 후에 꼭 서울을 고집해야 하나?

▲해변을 따라 만들어진 데크. 부산에서는 서울 못지않은 문화 인프라를 누릴 수 있다.
물론 서울은 부산을 비롯해 지방 사람들에겐 선망의 도시다. 좋은 기회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도시가 서울인 것은 틀림없다.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서울에 올라와서 야망을 실현하려는 모험·도전 정신은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은퇴한 시니어의 경우, 꼭 서울에서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직장과 비즈니스를 위한 네트워킹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서울을 떠나서 사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지 않은가 싶다.
정부 차원에서 은퇴 시니어들이 서울 집을 전월세 놓고, 수도권 이외의 집에 거주하는 조건으로 1가구 2주택 정책 예외의 혜택을 마련해준다면 필자와 같은 시니어 또한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서울에서는 워킹 주니어(working junior)들에게 싼값으로 주택을 공급하는 효과를 볼 수 있어 세대 간 윈-윈(win-win) 전략인 셈이다.
도대체 부산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부산에 내려가 살면서,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손짓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첫째, 낙동강을 봐라. 강폭은 한강과 비교해 봐도 엄청나게 넓다. 저녁에 낙조를 보면 장관이다. 가장 큰 비교우위는 역시 바다다. 서울의 한강뷰 보다가 오션뷰를 보면 느낌이 확 다르다. 한마디로 게임이 안 된다.
물가, 서울보다 30% 저렴

▲해운대 해변에서 가족들과의 즐거운 한때.
둘째, 값싼 물가다. 서울보다 체감적으로 30%는 싸다. 외식 물가와 서비스 가격이 싸고 특히 서울에 비해 집값은 얼마나 싼가? 서울 집 팔아 부산에서 가장 좋은 집 사고, 나머지 돈을 연금저축에만 넣어두어도 생활비의 50% 이상이 충당된다. 이 부분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셋째, 약 340만 명의 적당한 인구 규모 덕분에 서울에 있는 문화·편의 시설을 다 누릴 수 있다. 그것도 여유롭게 누릴 수 있다. 동부산 이케아, 아웃렛, 해운대 백화점, 공연장, 전시장 등을 붐빔 없이 즐길 수 있다. 전철의 경우도 서울 전철과 비교하면 훨씬 덜 붐빈다. 이리저리 밀리면서 하는 출퇴근 전쟁은 잊은 지 오래되었다.
넷째, 볼거리, 즐길거리가 즐비하다. 동부산 지역에만 한정해 이야기하면 광안리 해변, 해운대 해변, 송정 해변, 기장 해변 일대는 365일 관광객으로 붐빈다. 나는 그사이에 끼어 행복한 표정의 관광객들의 행복 바이러스에 365일 노출되어 있다.
다섯째, 특히 해운대는 전국구다. 외지인들이 살기 힘든 위화감이나 장애가 없다. 미국인들도 특히 뉴요커들은 퇴직 후 플로리다 해변으로 이주해 정착한다는 이야기는 부산 해변 일대에 많이 사는 서울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내가 살았던 해운대 마린시티의 주민 중 30%가 서울 사람이라고 공인중개사들이 말했다.
평생 서울을 떠나본 적 없어서 부산으로 선뜻 이주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분들은 은퇴 후, 서울 집을 팔지 말고 전월세를 놓고 부산으로 이주하여 직접 한번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서울에서 살면서 알게 된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경험을 꼭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매일 설레는 이 기분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지방 이주자를 위한 인센티브 필요
이렇게 지방으로 내려와 살려는 이들을 위한 정부의 정책이 부족한 것은 참 아쉽다.
우선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노무현 정부 이후 추진되어온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이 문재인 정부 이후 제자리걸음이다. 노무현 정부 때 지방 이전을 통한 지방균형 발전을 위해 혁신도시 건설과 공공기관 지방 이전 정책이 펼쳐졌고,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이어져 왔지만, 문재인 정부는 지방균형 발전을 입으로만 외쳤다. 양잿물도 같이 마시면 훨씬 쉽다는 이야기도 있듯이, 문재인 정부 때 후속 공기업 지방 이전이 이루어졌다면, 제1기 지방 이전 공기업 직원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텐데, 문재인 정부 때는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이 한 곳도 없었다. 거대 야당이 산업은행 부산 이전을 반대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정부가 산업은행 부산 이전과 동남권 메가시티 건설, 2030부산세계박람회 개최 등을 통해 지방균형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거시적인 정부 정책에 병행하여 지방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선 미시적인 정책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은퇴 후 지방 이주를 할 경우 그 지방에서 보유하는 주택은 구입 시 취득세, 재산세 감면 등의 세제 인센티브를 준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주택연금의 담보비율도 상향하여 지급하는 금융 인센티브 도입도 생각해볼 수 있다.Ⓑ
김건태
1963년생. 부산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 전 주택도시보증공사 부장
■커피의 도시, 부산
부산 커피에는 특유의 ‘부산의 정(情)’이 묻어 있다
“부산의 커피 문화는 굉장히 프렌들리(Friendly·친근)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청주에서 태어나 수상 이력도 서울에서 쌓았어요.
근데 여기 와보니 분명히 부산만의 커피 문화가 있더군요.”

▲사진=정형용 대표 제공 Ⓒcohwi_
“애환(哀歡) 뷰라고 할 수 있네요, 애환 뷰.(웃음)”
가파른 시멘트 언덕길을 지나 부둣가에 다다랐다. 바리스타 추경하씨가 창고에서 나왔다. 이런 곳에 고급스러운 커피 바(bar)가 있는 줄 모르고 주위만 몇 바퀴째 돌던 참이었다. 그는 “가장 부산스러운 뷰(view)”라고 소개했다. 어디서나 보이는 크레인과 컨테이너가 영도(影島)에 온 걸 실감케 했다. 코앞에 있는 육중한 바지선. 모모스 커피 바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이었다. 추씨가 다가왔다.
“커피는 분위기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광안리나 해운대 같은 아름다운 관광지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곳엔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WBC)에서 우승한 추경하씨와 전주연 대표가 있다. 이 대회에서 6위로 입상한 직원도 있다. WBC는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바리스타 대회다. 전(全) 세계 커피 업계에서 ‘모모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는 얘기다. 이들이 아무리 부산 출신이라고 해도, 굳이 영도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추씨가 말했다.
“여기 보시면 영도 앞바다가 있잖아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아름다운 바다와 다르죠? 거친 모습이에요. 영도는 소외된 지역이고 노령 인구도 많아요. 동구, 남포 지역과 함께 6·25 때 피란민들이 몰려든 곳이죠. 공장과 판자촌이 들어서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사람들이 많이 떠났고요. 그래서 저희는 로컬(local·향토) 기업으로서 부산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자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전국, 해외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옵니다. 그 옛날 부산의 애환을 보여주는 곳이 영도입니다.”
영도의 ‘애환’을 담으려는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부산에서 활동한 근현대 미술가 김종식 화백(金鍾植·1918~1988년)의 작품 〈귀환동포〉를 상품 겉면에 새겨 넣었다. 메뉴 가운데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맛 사탕’이 있었다. 영도 할머니 댁에 놓여 있을 법한 별사탕에 오렌지 즙을 넣고 에스프레소 밀크에 타 먹는 커피였다.
향을 음미하던 중, 유리벽 너머로 커피콩을 가공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국내로 들어오는 원두의 90% 이상이 부산항으로 들어온다. 모모스도 부산항을 통해 1년에 컨테이너 25개 분량의 커피콩을 들여온다. 13개국에서 온 300여 종류의 콩 400톤이다. 이렇게 다양한 커피콩이 들어오는 길목이니 부산은 ‘커피 만들기 쉬운 곳’일까. 아쉽게도, 한 가지 장애물이 있다.
부산 커피 업계에선 하나같이 “부산의 물이 커피를 만들기엔 불리하다”고 말한다. 부산의 물은 낙동강에서 끌어온다. 이곳 바리스타들은 낙동강 물에 미네랄과 기타 성분이 과하게 함유돼 있다고 지적한다. 추씨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고의 바리스타인 그도 “부산의 물은 경도(硬度·물속에 칼슘염과 마그네슘염이 함유되어 있는 정도)가 높다. 물 자체에 들어간 성분이 많아서 커피 향의 발현을 방해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물을 한 번 더 걸러내기 위해 특수한 필터 설비를 들여놓은 곳도 흔하다. 하지만 추씨는 불리한 여건이 부산의 커피를 발전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커피는 사실 대부분이 물로 이뤄져 있잖아요? 간과하기 쉬운 물의 중요성을 한 번 더 짚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이 불리하면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커피를 만들다가 국제대회에 나가면 모래주머니를 떼고 달리는 셈이 되죠.”
이처럼 커피에 유·불리한 점이 공존하는 독특한 환경이다 보니 부산의 커피 업계에선 정보 공유도 잦다. 남들은 선뜻 알려주지 않는 레시피도 스스럼없이 공개한다. 부산의 바리스타들은 이걸 커피 향에 묻어나는 ‘부산의 정(情)’이라고 표현한다.
부산진구 연지동에 있는 카페 겸 바리스타 트레이닝 센터 ‘뉴스커피’에서 김정진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지난해 이카와코리아 로스팅 챔피언십 1위에 올랐다.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WBC)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한다. 김 대표도 자신의 비법을 아낌없이 공개한다.
“타지에서 현직 바리스타 분들이 교육을 받으러 오면 ‘부산 바리스타들은 참 순수하다’고들 말해요. 자기가 가진 걸 아낌없이 내놓는다고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좋은 생두(生豆)를 알게 되면 나만 팔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변에 다 알려줘요. 지식과 정보를 나누는 게 부산의 정(情)이라고 볼 수 있죠. 부산에선 모든 바리스타가 좋은 커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합니다. 근데 사실, 레시피나 정보를 아무리 알려준들 100% 따라 하는 건 쉽지 않거든요(웃음). 누군가 제 비법을 잘 따라 하면 오히려 기쁘고요.”
부산대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 ‘코스피어’의 정형용 대표는 부산의 정을 이렇게 소개했다.
“부산의 커피 문화는 굉장히 프렌들리(Friendly·친근)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저는 청주에서 태어나 수상 이력도 서울에서 쌓았어요. 근데 여기 와보니 분명히 부산만의 커피 문화가 있더군요. 부산에선 바리스타들이 손님에게 말도 더 잘 걸고, 가깝게 지냅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부산의 어느 커피숍에 가도 바리스타들이 다 친근할 겁니다.”
산미의 매력, 부산에서 알려드릴게요
한국 브루어스컵 챔피언십(Korea Brewerscup Championship·KBrC) 우승 이력이 있는 정 대표가 직접 커피 한잔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진한 산미에 놀랐다. 입 안에 침이 돌 정도는 아닌, 맑고 가벼운 느낌의 부담 없는 정도였다. 커피 한잔과 함께 정 대표의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 부산 사람들은 주로 어떤 커피를 좋아하나요.
“워낙 제각각이고 맛있는 커피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라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특징은 있는데요, 아이스커피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추워도, 더워도, 아이스커피를 찾습니다. 부산은 다른 지역보다 차가운 커피를 좋아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느낍니다.”
― 빨대로 마시니까 산미(酸味)가 더 진해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요.
“아닙니다, 제대로 느끼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커피를 온전히 맛보려면 빨대로 마시지 않는 걸 추천해요.”
― 부산 사람들은 산미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 것 같나요.
“부산은 확실히 예전부터 산미가 있는 커피에 더 익숙한 것 같아요. 요즘 수도권에서도 산미가 있는 커피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절대다수는 산미가 적은 커피를 소비합니다. 저는 식문화의 영향도 조금 있다고 봅니다. 남쪽 지방 음식이 아무래도 간이 더 세고, 새콤달콤한 음식들이 많잖아요? 자극에 익숙해진 식문화 때문에 낯선 산미에도 좀 더 관대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커피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산미’를 알아보기 위해 월드컵 테이스터스 챔피언십(World Cup Tasters Championship·WCTC)에서 우승한 문헌관 먼스커피 대표를 찾아갔다. 부산진구 사무실에서 만난 문 대표는 “부산을 출발점으로 ‘산미’의 매력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문 대표의 설명이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커피 소비자들이 산미를 많이 어려워한다고 느꼈습니다. 커피에서 신맛이 나는 데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죠.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정작 자기가 무슨 커피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사실 산미라는 게 신맛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신맛과 단맛, 다양한 풍미가 어우러지는 게 산미이기 때문에 실제로 신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산미가 있는 커피를 소개해도 그렇게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도 부산 출신입니다. 부산은 산미에 대한 거부감이 국내 다른 지역보다는 비교적 덜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호기심이 모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私財 사재 털어 만든 ‘커피 박물관’
부산엔 커피 박물관만 두 곳이다. 둘 다 입장료가 무료다. 동구 좌천동에 있는 ‘국제커피박물관’은 부산시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이곳은 2000여 점의 커피 기구를 보유하고 있다. 원래 부산진역이었던 이곳이 박물관이 된 계기도 독특하다. 커피에 조예가 깊은 한 부산시민이 40여 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커피 기구들을 부산시에 기증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다른 한 곳은 부산진구 전포동 카페거리에 있는 ‘부산 커피박물관’이다. 여긴 아예 개인이 사재(私財)를 털어 만들었다. 이곳 관계자가 말한 바로는, 현재는 박물관 위치를 옮기기 위해 임시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이 있는 전포동에선 지난해 10월 부산진구가 주최하는 ‘전포커피축제’가 열렸다. 참여한 인근 업체만 98곳에 달했다. 이때 문헌관 먼스커피 대표가 커피 세미나(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부산 커피박물관 홍보도 진행됐다. 부산 커피박물관을 만든 김동규 관장은 “부산 커피박물관을 세계 최대의 커피박물관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위해 오늘도 세계 곳곳의 커피 유물을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INTERVIEW
도경백 베러먼데이 대표
카페인 충전소? 월요병 날려버리는 곳!

부산의 커피는 각자의 특색을 담고 있다. ‘베러먼데이’는 보다 큰 틀에서 ‘카페’의 개념을 바꿨다. 도경백 베러먼데이 대표는 카페와 함께 커뮤니티 플랫폼을 운영한다.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교류할 수 있는 ‘베러먼데이 클럽’이다. 도 대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이력을 갖고 있다. 사람들에게 설레는 월요일을 제공하는 것이 그가 창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부분이다. 창업을 하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생각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회사를 이렇게 소개한다.
“베러먼데이(BETTER MONDAY)는 현대인들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회사입니다. 직장인들의 월요일이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회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베러먼데이는 음료만 파는 곳이 아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지식을 교류하는 장이 된다.
“베러먼데이 커피를 라이프스타일 드링크 숍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고요, 또 온라인에서도 직장인과 현대인들의 삶을 조금 더 개선할 수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온라인 교육 플랫폼인 BETTER MONDAY 클럽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베러먼데이 1호점. 사진=베러먼데이 홈페이지
베러먼데이의 주요 고객은 직장인이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BETTER MONDAY는 현재 굉장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스타트업입니다. 오프라인에서는 BETTER MONDAY 커피를 통해 굉장히 많은 고객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희망을 주는 일상의 즐거운 공간으로 만들고 있고요, 또 온라인에서는 BETTER MONDAY 클럽을 운영함으로써 직장인들이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베러먼데이는 2.5평의 컨테이너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베러먼데이의 창업 철학은 ‘즐거운 일상, 기대되는 월요일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월요일은 자살률, 우울증, 퇴사율의 수치가 가장 높은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도경백 대표는 ‘어떻게 하면 현대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일주일의 시작을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베러먼데이는 각 분야의 역량 있는 전문가 및 브랜드와도 협업한다. 지난 6월엔 전남 고흥군청과 ‘농산물을 활용한 음료 개발과 브랜드화(brand化)’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지난해 7월엔 ‘푸드트래블’과의 MOU를 통해 직장인들을 찾아가 응원하는 다양한 캠페인을 기획했다. 버스 광고를 통해 ‘여름휴가비 100만원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김광주 기자
■외지인을 위한 부산 부동산 투자 가이드
해운대구·수영구, 전국 평균보다 아파트 가격 상승률 높아
부산의 동부산권 중 해운대구와 수영구의 바다 조망이 가능한 부동산은 높은 매입 가격에 대한 부담만 감당한다면 사용후 처분 시 투자 수익까지 얻을 수 있다

부산은 가장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순서로 세계 143위의 도시(2022년 기준)다. 부산은 고층 건물 보유 도시다. 2021년을 기준으로 35m 이상 고층 건물 1184동을 보유해 세계 10위다. 부산은 세계적인 항만물류도시(세계 7위·2021년 기준)다. 세계적인 국제회의 개최 도시이기도 하다. 성공적인 MICE 행사 개최를 위한 최고의 목적지인 부산은 국제회의 개최 순위 아시아 5위, 세계 17위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부산은 거주 목적이 ‘내 집 마련’이라면 부산 어디든 편한 도시 편익을 누릴 수 있기에 장소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다만 거주 목적뿐 아니라 거주 투자수익까지 얻고자 한다면 무주택자와 상급 주거지 이전 실수요자들은 부산 지역 내 주거 입지의 공간적 분화, 주거 선호 여건 차별화, 가격양극화가 점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상황에 꼭 유의해야 한다.
아파트 가격, 3극화 현상
최근 부산은 광역 지자체 중 지역 내 아파트 가격 편차가 가장 크다. 아파트 매매가를 가격순으로 5등분해 상위 20% 가격에서 하위 20% 가격을 나눈 값인 5분위 배율이 2022년 기준 6.0으로 서울 4.8, 인천 4.2, 대구 4.8, 대전 4.8, 광주 5.1, 울산 5.6보다 크다. 부산 지역 내 비싼 아파트와 싼 아파트의 가격 차이가 다른 지역보다 높고 뚜렷하다는 뜻이다.
이런 부산 지역 부동산 시장 변화 속에서 거주 목적뿐만 아니라 거주 투자수익까지 얻고자 하는 무주택자와 상급 주거지로 이전하려는 실수요자들은 내 집 마련에 있어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도 사야겠다면 어느 지역을 택할 것인가’ ‘어떤 주택 종류를 택해야 하나’ ‘언제 할 것인가’다.
첫째, 부산 어느 지역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무엇보다도 부산 지역 내 아파트 가격이 양극화를 넘어 삼(三)극화 현상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동의대학교 부동산연구소에서 부산 지역 16개 구·군을 대상으로 공시된 5년간의 아파트 가격 변동률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전국 평균보다 아파트 가격 상승률이 높은 지역은 해운대구·수영구였고, 전국 평균 아파트 가격만큼 상승한 지역은 동래구·연제구·남구·금정구·부산진구·강서구, 나머지 지역은 전국 평균보다 낮게 상승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가격 변화가 양극화보다 공간적으로 더 세분화돼 세 가지 변동으로 삼극화가 굳어져 오르는 곳이 더 확고히 될 가능성이 앞으로 더 커진다는 것을 인지한 전략이 필요하다.
주택 수요 측면을 통해 내 집 마련 지역을 고려해볼 필요도 있다. 최근 자주 발표되고 있는 지방소멸에 관한 자료를 보면 부산은 16개 구·군 중 영도구·중구·동구·서구가 지방소멸 위험분류 중 4단계인 소멸위험진입단계에 놓여 있고, 강서구만이 2단계 소멸위험 보통단계로 분류되고 있어 앞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주택 수요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제2의 정비사업 호황기
둘째, 어떤 주택을 사야 할 것인가를 보자. 부산 지역의 주택 유형은 아파트가 59.6%로 가장 많고, 단독주택이 25.3%, 다가구주택 12.0% 등으로 가장 먼저 아파트를 내 집 마련 유형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만 아파트를 내 집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무주택자와 상급 주거지로 이전하려는 실수요자는 최근 확연히 변하는 주거 선호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 동의대학교 성인학습자 4년제 정규 대학 과정인 부동산자산경영학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조사 분석한 부산 지역 최고의 주거 선호 여건은 ▲가격상승 선도 인기 주거 지역 ▲역세권 ▲초등학교 입지 ▲도심 내 친환경 여건(바다 조망·공원 인접 등) ▲주거편익시설(스타벅스 이용생활권·맥도날드 배달서비스 가능지역 등) ▲건설사 브랜드 ▲대단지 등을 꼽고 있는데 이 중 최소 5개 여건을 갖춘 아파트를 고르는 전략이 필요하다.
‘몸테크’를 고려한 정비사업 대상 지역 내 노후주택을 내 집 마련 대상으로 고려해볼 필요도 있다. 부산은 최근 제2의 정비사업 호황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만큼 도심 지역 내 양호한 아파트 공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인데, 재개발·재건축 대상 지역 내 노후주택에 일정 정도 거주하면서 조합원 입주권을 얻어 신규 아파트를 내 집으로 장만하는 전략이다.
몸테크는 다소 불편함은 있지만, 거주 투자수익을 얻고자 한다면 주거 선호도가 월등한 해운대구·수영구·동래구 내의 초기 재개발(사전타당성 검토 통과 전후 단계) 추진 지역의 단독주택·다가구주택·연립주택과 초기 재건축(안전진단 통과 전후) 추진 지역 내의 아파트 매입을 적극적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부산 강서권 및 동부산권 내 조성 중인 신도시 내 주택용지 구입을 통한 주택 신축도 고려해볼 만하다. 강서권에서는 현재 공사 중인 에코 델타도시·명지국제신도시 2단계 이외에 제2에코델타시티·대저신도시 등이 추진 중에 있으며 동부산권에서는 제2센텀신도시 등이 추진되고 있다. 이들 신도시 내에서 공급되는 주택용지(전용주택 또는 점포 겸용)를 청약 당첨 후 주택 신축도, 최근 거주 및 임대수익을 얻는 장점과 비교적 신도시의 쾌적한 주거환경을 누릴 수 있는 장점으로 각광을 받는 내 집 마련 방안이다. 다만 적지 않은 건축비, 건축규제 등을 자세히 검토 후 공략해야 한다.
공격적 설계 필요
신규 아파트 분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최근 부산 지역은 약 3000여 가구의 미분양이 남아 있긴 하지만, 입지와 가격경쟁력을 갖춘 주거 선호 지역 내 신규 분양은 분양가가 3.3㎡당 3000만원대 전후인 청약단지에서도 20~30대 1의 높은 청약경쟁률을 기록하고 있다. 도심 인기 주거 지역 내 신규 아파트의 희소성을 높이 평가해 입주 시점에 추가 가격 상승을 예측한 무주택자와 실수요자들 적극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청약가점제로 인한 당첨 기회 확대와 초기 비용의 최소화 등의 장점을 인지하고 도심 인기 주거 지역 내 분양단지에 적극적인 청약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신혼부부, 다자녀가구 무주택자들은 특별공급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셋째, 언제 사야 할까는 전문가도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이론상으로는 금리인상 속도가 느려지고, 규제 완화가 가속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어 내 집 마련 적기를 놓칠 수 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따라서 거주와 거주 투자수익을 고려하는 무주택자의 경우, 과거 가격상승 또는 개발 여력 충족 지역(매입 꿈꿔왔던 곳)은 공간적 범위는 축소되지만, 가격상승폭은 중장기적 우상향 상승곡선이 지속 예상됨에 따라 지금 바로 공격적 설계가 필요하다.
좀 더 기다려야 할 곳도 있다. 거주 투자수익보다는 거주 목적인 무주택자들의 경우, 과거 가격상승이 작았거나 개발계획 등 호재가 적은 지역은 가격이 지금보다도 더 정체에서 하락으로 전환될 것에 대비하여 보수적 관점에서 서서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세컨드하우스’ 마련 전략
도시 내 근접한 바다, 산, 강과 함께 즐비한 먹을거리, 볼거리, 놀거리가 가득한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에서의 휴가, 한 달 살기는 누구나 한 번은 꿈꾸는 로망일 것이다. 세컨드하우스는 이런 멋진 꿈을 위해 필요한 거주시설이다. 일각에서는 나이 들면서 가지지 말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 중의 하나로 별장을 꼽는다. 돈만 들어가고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근래 별장이 아닌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그러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세컨드하우스’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은데, 구입 후 다른 부동산과의 세금 문제, 관리 문제 등이 대두하기 때문이다.
결국 부산이라고 하면 바닷가 조망에 대한 선호가 당연히 월등할 것이다. 부산의 바다는 동부산권과 서부산권에 접해 있는데 동부산권 중 해운대구와 수영구의 바다 조망을 염두에 두는 경우는 높은 매입 가격에 대한 부담만 감당할 수 있다면 사용 후 처분 시 투자수익까지 얻을 수 있어 1석2조가 될 것이다. 사용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둔다면 동부산권의 기장군과 서부산권의 명지신도시권이 적합할 것이다. 최근 가격 대비 효용성 상승에 따라 주목을 받는 영도 지역과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산복도로) 일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바다 조망 지역, 추가 상승 가능성 커
바닷가 조망에 대한 선호가 월등한 지역 내에서 주목받는 세컨드하우스 구입 대상은 아파트 등 공동주택, 단독주택, 레지던스(생숙), 오피스텔 등이다. 최근 부동산 시장 환경 변화에 따라 종류별 장단점이 막상막하하기에 단적으로 최상인 상품을 특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부산 부동산 시장의 특성을 고려하면 결국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든 상품순으로 사용 가치뿐만 아니라 앞으로 처분의 용이성 및 투자수익까지 커진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상시(常時) 거주 목적의 구입이 아니라 세컨드하우스 목적이기에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진 시기가 구입의 적기다.
그중 해운대구, 수영구의 바닷가 조망이 가능하며, 바닷가 접근이 쉬운 아파트와 정비사업 대상 공동주택의 경우는 현재 시점에서 가격이 상승 반전됐고 추가 상승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여 보다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강정규 동의대학교 부동산대학원 원장
■MZ 세대 기자가 발품을 팔아 뽑은 부산의 핫 플레이스!
부산에는 자갈치시장이나 해운대 해수욕장만 있는 게 아니다.
MZ 세대를 중심으로 유명세를 타는 새로운 명소들도 많다. 소셜미디어(SNS)와 블로그를 갈무리해 선정한 ‘MZ 세대 맞춤형 부산 핫 플레이스 10곳’을 소개한다.

워터프런트(water–front) 복합 문화 공간
밀락 더 마켓


부산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곳이다. 깔끔한 갈색 벽돌의 외관과 삼각 지붕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마켓을 연상시킨다. 내부엔 카페·식당·옷가게·팝업 스토어 등이 들어차 있다. 건물 뒤편으로 크게 난 유리창은 이곳의 명물. 창 너머로 낡은 고기잡이 배들과 거대한 광안대교가 동시에 눈에 들어온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풍경이야말로 부산의 본모습이 아닐까? 지난해 여름 문을 연 부산의 새로운 관광 명소.
수영구 민락수변로 17번길 56
을숙도 생태공원 한가운데 자리한 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수직 정원’으로 이루어진 외벽 덕분에 미술관마저 자연의 일부처럼 보인다. 숙명일까? 부산현대미술관의 전시 주제도 생태 문제와 환경 문제에 젖줄을 대고 있다. 학제 간 융합 전시 〈2023 부산모카 플랫폼 재료 모으기〉,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자연에 대한 공상적 시나리오〉,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비인간과의 소통을 촉구하는 〈노래하는 땅〉 등이 절찬 진행 중이다.
사하구 낙동남로 1191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산의 정취
168계단, 초량 이바구길, 86번 마을버스

까마득한 오르막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며 개수를 세어보니 168개가 딱 맞다. 여기서부터 이바구길이 이어진다. 이바구는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를 뜻한다고 하니, 언덕 위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저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지 짐작이 간다. 이바구길 끝에서 86번 버스를 타고 산복도로를 훑어 내려온다. 멀리 부산항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할아버지 한 분이 말을 건다. “부산에 놀러 오셨십니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버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은 관광객뿐이라고 한다. 부산 사람들에게 바다는 낭만의 대상이 아닌, 삶 그 자체인가 보다.
동구 영초길 191번길 10–2 일대
적산가옥을 개조한 카페
초량 1941

이바구길 정상에 다다르면 자그마한 사찰 하나가 나온다. 이 사찰 바로 옆에 초량 1941이라는 카페가 있다. 1941년 일본인이 지은 목조 주택, 이른바 적산가옥(敵産家屋)을 개조한 것이다. 카페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포근한 나무 냄새가 손님을 반긴다. 그다음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들리는 ‘삐걱’ 나무 소리. 크림과 과일로 꽉 찬 과일 산도를 주문해 마당 옆 창가에 앉는 것을 추천한다.
동구 망양로 533–5
수리조선소의 흔적이 남은
깡깡이 예술마을

부둣가에선 더는 ‘깡깡’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연장을 손질하는 철물점 노인의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릴 뿐. 그도 젊었을 적엔 힘찬 망치질을 하지 않았을까. 피란민들로 북적이던 영도는 제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잠들어 있다. 거뭇한 수염에 짙은 쌍꺼풀, 발갛게 달아오른 ‘부산 아재’의 얼굴도 옛 추억이 되어가는 걸까.
영도구 대평북로 36
4.8km의 낭만
해운대 블루라인파크

청량한 색감의 계절이 돌아왔다. 가을 바다, 파란 파도가 덧없는 물거품을 일으키는 때다. ‘푸른 모래’라는 뜻의 청사포가 실감이 난다. 조용한 열차 플랫폼에선 오르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서서히 다가오는 열차에 홀로 몸을 싣는다. 12분 남짓한 시간, 구덕포를 지나 송정 해수욕장에 도착한다. 피서철이 끝난 한산한 바다가 보인다. 낮잠이나 실컷 자다가 일어나 무작정 와도 좋다. 열차는 기껏해야 30분에 한 대씩 새로 오니까. 좀 더 높은 곳에서 경치를 즐기고 싶으면 탑승장 2층으로 올라가 모노레일을 타자.
해운대구 청사포로 116 청사포정거장
100년 근대 건조물
브라운핸즈 백제

부산엔 유독 재생 공간이 많다. 과거 공장이었던 곳 혹은 과거 발전소였던 곳을 다른 용도로 탈바꿈시켰다. 이곳 브라운핸즈 역시 과거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인 백제병원이었다. 1927년 지어진 이 건물은 1932년에는 중국 요릿집으로, 1942년에는 일본 아카즈키 부대 장교 숙소로, 해방 후에는 중화민국 임시 대사관 등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러다 전쟁 직후인 1953년에는 예식장이 되었다가 1972년엔 화재로 건물 일부가 철거되는 아픔을 겪었다. 아픈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카페가 아닐 수 없다.
동구 중앙대로 209번길 16
‘부산다움’의 상징
국제시장

다소 뻔한 추천 장소인지 모른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만 갈 법한 국제시장에 생기가 돌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레트로 열풍을 등에 업고 국제시장은 전국의 젊은이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이 때문인지 상인들도 이른바 ‘업종 변경’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이제는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와 개성 넘치는 구제 옷가게도 여럿 생겼다. ‘힙한’ 구제 옷을 사다가 시장을 배경으로 인증 샷 한 컷 남기는 건 어떨까?
중구 신창동 4가
파충류를 체험하는 이색공간
비바리움 파충류숍

광안리의 한 허름한 건물 지하에 들어서면 놀라운 세상이 펼쳐진다. 동물원에 온 듯 수십 종의 동물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뱀·도마뱀·거북 등 파충류다. 위험하지 않은 동물들은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 파충류 외에도 토끼·돼지·몽구스 등도 볼 수 있다. 알고 보니 동물 전문 유튜버들의 단골 가게라고. 입장료 7000원.
수영구 광남로 88 지하 1층
대한민국 서핑의 메카
송정 해수욕장 서핑


부산의 여름은 다른 곳보다 조금 길다. 송정 해수욕장은 8월을 끝으로 폐장했지만, 여전히 많은 젊은이가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연거푸 넘어지는 초보 서퍼부터 돌고래처럼 능숙하게 파도를 타는 고수까지, 실력은 제각각. 그러나 즐거운 웃음소리만큼은 모두 같았다. 일일 레슨과 장비 대여를 모두 합쳐도 5만원 남짓. 이 가격이면 한나절 알뜰하게 즐길 수 있다. 파도 때를 잘 맞춰 가야 보다 즐거운 서핑을 즐길 수 있으니 참고할 것.
해운대구 송정동
글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외국인이 뽑은 부산 핫 플레이스 10선
외국인이 보는 부산은 어떤 모습일까? 색다른 안목으로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진 않았을까? 《월간조선》은 실제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들과 만나 이들의 ‘최애(最愛) 장소’가 어디인지 들어봤다. 이들이 직접 추천하는 부산의 핫 플레이스 10곳은 어딜까? 지금 바로 소개한다.

Fantastic Drone Show!
광안리 드론쇼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광안리 해수욕장 하늘에 화려한 별이 떠오른다. 500여 대의 드론이 모여 형형색색 빛을 뿜어낸다. 드론은 매주 바뀌는 주제에 따라 공연을 선보인다. 회, 어묵 등 부산의 대표 음식을 본뜨기도 하고, 6·25전쟁을 추모하는 그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떤 때는 삼성 등 기업과 협업해 상업 광고를 내보내기도 한다. 이란에서 온 파르나즈 씨는 “이처럼 환상적인 쇼는 처음”이라며 “기술과 창의성 그리고 재미로 가득한 부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볼거리”라고 광안리 드론쇼를 평가했다.
Best Sunset Spot!
다대포 해수욕장

희고 고운 모래는 다대포 해수욕장의 자랑. 해수욕장 옆으로 해안 산책길도 조성돼 있다. 해운대나 광안리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아 비교적 한산하다고. 적도기니에서 온 비센테 씨는 “부산 최고의 노을 명소”라면서 “부산의 해변 중 딱 한 곳만 추천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다대포 해수욕장을 꼽겠다”고 말했다.
Enjoy Busan in one day!
부산 시티투어 버스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부산의 관광 명소를 누빈다. 부산역에서 출발해 해운대 방향으로 가는 레드라인과 부산역에서 출발해 오륙도 쪽을 지나는 그린라인, 2가지 노선이 있다. 매일 9회, 정해진 시각에 운행하니 시간표를 참고하면 된다. 인도에서 온 카브야 씨는 “한정된 시간에 부산의 이모저모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Flying in the Busan sky!
송도 암남공원 케이블카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를 때의 짜릿함.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케이블카는 송림공원부터 암남공원까지 1.62km를 운행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맥스 씨는 “케이블카를 타고 있으면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든다”면서 “부산에 외국인 친구들이 놀러 오면 꼭 데려가는 장소”라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Memory·Culture·Pleasure
부산시민공원

부산시민공원은 이전까지는 캠프 하야리아(Camp Hialeah)로 불렸다. 6·25전쟁 이후 주한 미군 부산 사령부 기지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2014년, 공원의 모습으로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중국에서 온 주교예 씨는 “이곳은 부산 시민의 쉼터”라며 “계절에 따라 꽃축제 등 여러 행사가 열리니 때를 잘 맞춰가면 더욱 풍부한 볼거리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The serenity of 1,000 years
범어사 템플 스테이

범어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로 꼽힌다. 요즘엔 템플 스테이 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외국인들에게 인기 만점이라고. 콜롬비아에서 온 카밀라 씨는 “부산의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에 최고의 장소”라면서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온다”며 웃었다.
Colorful Village
감천문화마을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산비탈을 개간해 마을을 일군 것이 시작이었다. 2009년 마을은 미술 프로젝트에 선정돼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필리핀에서 온 진 씨는 “마을까지 올라가는 버스가 마치 탐험을 방불케 한다”면서 “마을에 도착하면 알록달록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고 말했다.
The Biggest Karaoke in Korea
사직 야구장

‘야구의 도시’ 부산에선 “어느 팀 응원하세요?” 같은 질문은 있을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롯데의 피가 흐르는데,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니. 질문 자체가 틀렸다. 부산 시민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사직 야구장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갖고 있다. 응원 문화는 또 어떤가.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응원가가 터져 나오면 사직 야구장은 거대한 노래방으로 변한다. 이런 풍경이 외국인의 눈에도 신선했나 보다. 러시아에서 온 제니 씨는 “야구 경기를 즐기는 것은 물론, 부산의 응원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며 “부산에 산다면 꼭 한 번은 가야 하는 곳”라고 강조했다.
Healing Space in the city
F1963

F1963은 공장을 뜻하는 Factory의 앞글자 ‘F’와 고려제강이 처음 공장을 지은 해인 1963년을 합쳐 탄생한 이름이다. 2008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현수교와 자동차 타이어 등에 들어가는 와이어로프 생산 공장이었다. 지금은 껍데기만 남아 문화 복합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중국에서 온 주교예 씨는 “미술품 전시 공간부터 대나무 숲길, 카페와 서점이 들어선 도심 속 힐링 공간”이라고 F1963을 소개했다.
Day and Night are different
용두산 공원

매년 새해를 맞이하는 시민의 종, 꽃밭에 설치된 꽃시계가 관광객을 반긴다. 용두산 정상의 부산 타워는 서울N타워보다도 먼저 지어졌다고 한다. 이란에서 온 파르나즈 씨는 “부산항대교와 부산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부산의 대표 명소”라고 말했다.
글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부산과 영화
영화의 도시…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흥행불패’
큰 스크린을 통해 비춰지는 부산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파도가 일렁이는 물결이 있는가 하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전통시장이, 입안에 군침을 돌게 하는 먹자 골목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 〈국제시장〉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내가 니 시다바리가?’가 ‘내가 너의 심부름꾼이니?’,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가 ‘그만해 많이 찔렀잖아’였다면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 신드롬은 없었을 것이다.
부산은 영화의 도시다. 1996년 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최와 함께 영화의 도시로 떠오른 부산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다수를 지원하면서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영화도시로 자리 잡았다.
부산시는 2001년 국내 최대 규모의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를, 2011년 아시아 최초 버추얼 스튜디오를 개관했다. 또 부산시는 항만·철도 등 접근이 어려운 시설에서의 촬영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정지욱 평론가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부산 문화와 분위기를 잘 아는 부산 출신 감독들이 사투리 등 지방색을 잘 녹여내 만든 영화들이 흥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프라가 좋은 부산에서 찍은 영화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흥행작도 많아져 ‘부산 영화는 성공한다’는 속설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산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한다. 사실 부산이 영화, 또는 영상의 도시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산 출신 배우 누가 유명하고, 부산을 배경으로 한 어떤 영화,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했는지는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월간조선》은 좀 색다른 관점에서 영화의 도시 부산을 바라봤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 속 화제가 된 장소의 매력을 살펴보는 식이다.
드라마 〈마이 네임〉의 다대포 해수욕장
2021년 〈마이 네임〉과 〈더킹: 영원의 군주〉 촬영지는 다대포 해수욕장(사하구 다대동)이다. 이곳은 부산에서 유일하게 남해를 끼는 해수욕장이다. 수심이 얕고 모래사장이 넓어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바다 건너 서쪽 하늘로 해가 질 때는 해수욕장 전체가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영화 〈공작〉의 부산항대교, 드라마 〈D.P〉 속 광안대교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광안대교 촬영 장면. 사진=넷플릭스
영화 〈공작〉의 촬영지는 부산항대교(부산 남구 감만동)이다ㅠ. 거대한 주탑에 화려한 조명이 켜지면 부산 사람들도 놀라는 ‘하버 뷰’가 완성된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서 봐도 좋고, 멀리서 봐도 좋다.
드라마 〈D.P〉 속 광안대교(수영구 남천동)는 명실상부 부산의 랜드마크다. 광안대교를 빼놓고 부산 야경을 말할 수 없을 만큼 낮보다 밤이 아름다운 다리다.
설명이 필요 없는 국제시장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용궁길 86에는 해동용궁사가 있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 위에 세워진 사찰이다. 소박한 절집 건물과 바다 풍경의 조화가 이채롭다. 아침에는 마당에서 바다 위로 불쑥 솟아오르는 태양을 마주할 수 있다. 이곳에서 드라마 〈마이 네임〉을 촬영했다.
회사에서 버려진 남자가 우여곡절 끝에 성공과 사랑을 쟁취하는 내용의 드라마 〈드림〉의 배경이 된 중성드림세트장이 있다. 짙푸른 바다와 예쁜 성당 건물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풍경을 연출한다. 누구나 카메라만 들면 작품이 된다.
영화 〈국제시장〉은 말이 필요없다. 1000만 관객 영화 〈국제시장〉의 시작과 끝에는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으로 먹자골목, 팥빙수골목, 화장품골목, 구제골목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지금도 넘쳐난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하는 세월의 흔적은 국제시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올드보이〉의 군만두와 〈택시운전사〉의 칠백장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볼 만큼 봤으니 이제 배를 채워보자.
올드보이는 질려서 못 먹겠지만, 우린 아니다. 〈올드보이〉의 군만두를 먹으러 장성향(부산광역시 동구 대영로243번길 29)으로 가자. 일반 만두의 2~3배는 돼 보이는 큼직한 만두를 한 입 베어 물면 육즙을 머금은 담백한 고기소가 입안에 가득 찬다. 매일 먹으라고 해도 먹을 수 있는 맛이다.
2017년 8월 개봉 이후 1000만 명의 관객을 돌파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배경이었던 칠백장(부산광역시 동래구 미남로 67)이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불판에 양념고기를 얹어 지글지글 구워준다. 저렴하면서도 맛깔난 음식에다 기사식당 특유의 서민적 분위기가 눈길을 끈다.
영화 〈친구〉의 칠성식당

▲영화 〈친구〉 속 칠성식당. 사진=영화 〈친구〉 캡처
2001년 영화 〈친구〉 때 알려져 핫플레이스가 된 칠성식당(부산광역시 남구 지게골로7)은 문현동 곱창거리의 터줏대감이다. 아직도 옛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1호점은 70~80년대 분위기가 여전히 느껴진다. 쫄깃한 식감의 곱창과 매콤 달콤한 양념의 조화가 찰떡이다.
기자는 부산에 가면 꼭 곰장어를 먹는다. 기자의 개인 의견이긴 하지만 서울에서는 부산의 곰장어 맛을 느낄 수 없다. 취재를 위해 부산을 1박 2일 방문했을 때도 곰장어집을 두 번이나 찾았다.
먹방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었던 〈식샤를 합시다3〉 속 원조 짚불곰장어 기장 외가집(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공수3길 5-1)에서는 기장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곰장어를 먹을 수 있다. 짚에 불을 붙여 1600도 고온에서 순식간에 구워낸 덕에 담백하고 부드럽다. 코끝으로 번지는 은은한 짚불 향이 식욕을 돋운다.
2030부산세계박람회 실현, 영화화되길
부산은 영화의 도시다. 부산 배경의 영화가 흥행해서, 부산 사투리가 인기를 끌어서, 영화를 다수 지원해서뿐만이 아니다. 영화로 인해 글로벌 미식관광도시로 발돋움했으며, 영화로 인해 과거가 재조명됐다. 한국 영화 산업 태동기부터 서울과 함께 영화 산업의 양대 축이었던 부산이 필연적으로 ‘영화의 도시’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역사를 통해 되짚어본 책(부산대 영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영화연구자, 향토사학자, 독립영화감독, 영화평론가, 기자 등 15명의 저자가 참여한 《부산영화사》)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이 된 곳은 유명 관광지가 됐다. 영화의 도시 부산이 2030부산세계박람회의 도시가 되길 기원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영화화되길 기대해본다.Ⓑ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부산과 스포츠
철완 최동원, 야생마 김주성의 부산갈매기 바통, 허웅이 받는다
“마, 함 해 보입시더” 강병철 감독이 최동원에게 ‘1984년 한국시리즈 경기 7차전에 등판이 가능한지’를 물었을 때, 최동원은 이렇게 말했다. '불멸의 투수' 최동원의 말은 곧 부산의 정신이 됐다.

▲롯데 자이언츠 투수 시절의 최동원 선수. 사진=조선DB
“부산은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 도시구나!”
부산에선 1910~20년대부터 부산2상(옛 부산상고), 동래고보 등에서 조선인 야구 팀이 만들어졌다. 부산은 1940년대부터는 ‘야구 도시’로 불렸다. 경남중학교(6년제)가 청룡기 대회를 2연패 하고 황금사자기 대회를 3연패 할 때다.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로 불렸던 강속구 투수 장태영은 최고 인기 스타였다. 1970년대 고교야구 전성기 때는 야구 명문 경남고, 부산고, 경남상고(현 부경고), 부산상고(현 개성고)의 라이벌 대결도 대단했다. 라이벌에 진 학교 선수들과 학생들이 “학교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며 비 오는 운동장에서 무릎을 꿇을 정도였다고 한다.
부산 야구의 상징이 된 연고 팀 롯데 자이언츠는 프로 원년(元年) 팀이다. 롯데 자이언츠는 삼성 라이온즈와 더불어 모기업도, 팀 이름도 바뀌지 않은 유이한 팀이다. 정규리그 1위는 한 번도 없다. 그래도 롯데를 향한 부산 사람들의 열성은 타 지역민들과 비교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오죽하면 “신(神)은 부산에 최악의 야구팀을 주셨고 또한 최고의 팬을 주셨다”는 말이 나왔을까.
롯데를 ‘꼴데’로 욕하고 다시는 야구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가도 또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게 부산 사람들이다. 부산 야구 간판스타는 단연 최동원이다. 정면 승부, 불꽃 직구, 동료에 대한 의협심, 에두르지 않는 직설 등 그의 이런 상징들은 부산 갈매기들의 심성, 정서와 딱 맞아떨어진다.
최동원은 연세대와 한국전력을 거쳐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최동원은 1988년까지 투수로 사직구장의 마운드를 지켰다. 최동원이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던 시기는 불과 6년이다. 그런데도 최동원이 부산 야구와 롯데 자이언츠의 상징이 된 것은 그가 보여준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다.
최동원은 1984년 무려 한국시리즈 5경기에 등판해 4승 1패로 팀 승리를 모두 책임졌다. 1차전을 4대 0 완봉승으로 거둔 뒤 이틀 쉬고 마운드에 올라 완투승(3대 2)으로 기염을 토했다. 다시 2일 휴식 후 3일 만에 마운드에 오른 그는 패전의 멍에를 썼지만, 6차전과 7차전에 연이어 등판하며 2승을 다시 따냈다. 그는 피로도 잊은 듯 7차전에서 4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혼자 팀 승리를 책임졌다. 최동원이 당시 등판 가능 여부를 묻는 강병철 감독에게 승리에 대한 투지를 드러내며 “마, 함 해 보입시더”라고 한 말은 부산의 정신이 됐다.
부산이 낳은 ‘불멸의 투수’ 최동원의 이 명언은 2030부산세계박람회 부산 유치를 위한 사실상의 슬로건이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알긋나?”

롯데 자이언츠 출신 야구 스타는 많다. 그래도 최동원 다음 선수를 꼽자면 투수로는 염종석, 타자로는 박정태, 이대호일 것이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의 마음에 전설로 남은 1992년 ‘신인’ 염종석의 성적은 35경기(선발 22) 등판, 17승 9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3이었다. 이 해에 염종석은 롯데 구단 역사상 단 2번뿐인 우승을 이끌었다.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 순간에는 항상 ‘안경 에이스’가 있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 4승의 최동원, 그리고 1992년 불멸의 우승 신화를 쓴 염종석이 그 주인공이다.
야구 사랑이 별난 부산에서 ‘박정태’는 고유명사로 통한다. 부산 사람들은 지금도 박정태를 ‘작은 거인’ ‘악바리’ ‘탱크’ ‘돌격대’ ‘오뚝이’ 등 다양한 별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박정태는 1991년 롯데에 입단해 2005년 4월 은퇴할 때까지 롯데에서만 뛰었다. 통산 성적은 타율 0.296, 85홈런, 1141안타, 638타점, 531득점이다. 평범한 내야 땅볼을 치고도 1루까지 전력 질주하고, 포수를 부숴버릴 것처럼 홈으로 쇄도하는 근성은 박정태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박정태는 1999시즌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할 때 주장을 맡아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한국시리즈 진출권이 달린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마지막 7차전때였다. 롯데는 삼성 이승엽과 김기태의 연속 홈런으로 0대 2로 지고 있다가 6회초 외국인 타자 호세의 홈런으로 1점을 따라붙었다. 이때 일부 대구 관중이 호세를 향해 오물을 던졌고, 흥분한 호세가 관중석을 향해 야구방망이를 날렸다. 호세에게 퇴장이 선언되자 당시 주장이었던 박정태는 “이런 상황에선 경기를 할 수 없다”며 롯데 선수들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몰수패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박정태는 코치진의 만류로 선수들과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경기 재개에 앞서 박정태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알긋나? 안 그러면 다 지기삔다.”
롯데는 기적처럼 경기를 뒤집었다.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한화 이글스에 고배를 마셨다. 박정태는 당시 선수로서도 최정점을 찍었다. 1999시즌 박정태는 타율 3할2푼9리, 11홈런, 83타점을 기록했다. 박정태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추신수(현 SSG 랜더스)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추신수는 박정태를 동경하며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박정태는 일명 ‘흔들타법’으로 유명했다.
‘조선의 4번 타자’의 고향은 부산

▲2022년 8월 31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키움 히어로즈 경기에서 이대호가 1타점 적시타를 날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는 경남고 시절 투수로 더 유명했다. 1998년에는 팀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며 1998년 청룡기와 봉황기 우승을 이끌었다. 2001년 롯데의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은 이대호는 계약금 2억1000만원을 받을 만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입단 직후 어깨 통증에 시달렸던 이대호는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했다. 이대호는 2006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시작했다. 2010년 사상 첫 타격 7관왕 등극과 9경기 연속 홈런 신기록을 세우며 국내 최고의 타자로 명성을 떨쳤다.
이대호는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에서도 활약했다. 2012~2013시즌 오릭스 버팔로스 소속으로 뛰었고, 이후 소프트뱅크로 이적해 2014~2015시즌에 활약했다. NPB 통산 성적은 570경기 타율 2할9푼3리, 622안타, 98홈런, 348타점이다. 소프트뱅크에서 뛰던 두 번째 시즌인 2015년에는 31홈런, 98타점을 기록했다. 상위권 성적을 냈던 이대호는 2015시즌을 마치고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고,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2016시즌을 보낸 후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로 복귀했다. 이대호는 끝내 평생소원이었던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지 못했다.
4명의 슈퍼스타 외에도 롯데가 배출한 스타들은 즐비하다. 고(故) 유두열, 김용희, 김용철 등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부터 1992년 우승을 이끈 고(故) 박동희가 대표적이다. 1999년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던 마해영, 주형광 등도 있고, 2005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팀에서 배출한 최초의 MVP인 손민한부터 강민호, 송승준, 손아섭, 전준우, 황재균 등이 있다,
부산시, 2029 개장 목표로 사직구장 재건축

▲2029년 개장 예정인 사직야구장 조감도.
사직야구장은 스타들의 땀과 혼이 깃든 곳이다 . 사직구장이 전용 야구장으로 사용된 것은 2008년부터였다. 개·보수 공사를 통해 종합운동장에서 전용 야구장으로 바뀌고 나서도 사직구장은 근본적인 노후화로 크고 작은 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부산시는 총사업비 2344억원을 투자해, 2029년 개장을 목표로 사직야구장을 재건축한다. 복합스포츠 문화 공간으로 활용될 사직야구장은 관중의 안락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햇빛으로 경기 관람에 방해되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구장의 방향을 변경했다. 전체 면적 중 8.8%는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된다.
대우 로얄즈의 추억
부산에서는 축구도 인기가 많았다. 부산 아이파크의 전신(前身)인 대우 로얄즈가 K리그 ‘최강’으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대우 로얄즈는 1983년 한국 프로축구 슈퍼리그에 원년 멤버로 참가, 4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3년 뒤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최정상에 섰다. 또 1991년에는 K리그 21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펼쳤었다. 로얄즈의 간판은 김주성이다. 그는 로얄즈에 입단한 1987년부터 1999년까지 255경기 35골을 넣으며 팀에 공헌했다. 입단 첫해 김주성은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데 기여하며 신인선수상을 받았다. 김주성의 별명은 ‘야생마’였다. 폭발적인 질주력, 돌파 능력은 마치 야생마를 연상케 했고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머리의 그를 ‘아시아의 삼손’이라 부르기도 했다.
축구 명가 대우 로얄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스타는 말총머리의 안정환이다. 안정환은 몸싸움에 약한 듯하면서도 요리조리 뚫고 나가는 드리블이 무기였다. 2000년 대우 로얄즈를 인수한 현대산업개발은 2005년 ‘부산 아이파크’로 구단 명칭을 바꾸고 명가 부활을 노렸다. 하지만 1부 리그에서 고만고만한 성적을 내다 10년 만에 2부 리그로 떨어졌다. 그렇게 강등된 아이파크는 2019년 시즌까지 ‘2부 리그 강팀’ 구단으로 전락했다. 2020년 아이파크가 5년 만에 1부 리그로 승격하자 ‘축구 명가 귀환’에 팬들의 관심이 쏠렸지만, 1년 만에 2부 리그로 ‘귀환’해버렸다. 부산의 축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이유다.
‘허웅 경기 예매는 하늘의 별 따기’

▲농구선수 허웅. 사진=뉴시스
축구의 빈자리는 농구가 채울 전망이다. KCC는 10월 개막하는 2023-2024시즌부터 팀 명 ‘부산 KCC 이지스’로 새롭게 출발한다.
KCC는 부산을 연고로 하는 네 번째 프로 농구팀이다. 1997년 기아 엔터프라이즈가 부산에서 창단해 우승을 거머쥔 뒤 2001년 현대모비스에 인수되면서 울산으로 떠났다. 2년 공백 후 여수 코리아텐더 푸르미가 2003년 부산에 입성했다. 팀 이름을 부산 코리아텐더 맥스텐으로 바꾸고 맞이한 2003-2004시즌이었지만 1개월 만에 KTF에 매각되면서 부산 KTF 매직윙스(현 KT 소닉붐)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러고 2009년 팀 이름을 KT 소닉붐으로 바꾸고 18년 동안 부산에서 뛰다가 2021-2022시즌을 앞두고 수원으로 이전했다.
부산은 ‘야구의 도시’로 롯데 자이언츠가 인기를 누리지만 우승은 1992년이 마지막이다. KBL(한국농구연맹) 최고 인기 팀 KCC가 온다면 지역 스포츠 열기에도 호재가 될 전망이다. 이상민 코치와 최준용, 이승현, 허웅, 귀화 선수 라건아 등 스타 선수가 많다. 특히 ‘KBL 아이돌’ 허웅은 프로 농구를 대표하는 스타다. 전국 어디를 가든 그의 경기에 여성 팬들이 몰리고 있다. ‘허웅 경기 예매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도 나온다. 원정경기서 홈팬보다 허웅 팬이 더 많은 광경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부산 KCC 이지스는 올 시즌 가장 주목되는 팀이다. KCC는 막강한 전력이지만, 세부적 약점이 존재한다. 핵심 주전들이 대부분 새롭게 손발을 맞춘다. 비시즌 공수 조직력을 어떻게 갖추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이승현, 최준용, 송교창, 허웅의 롤 분배와 로테이션도 신경 써야 한다. KCC 전창진 감독은 “(우리가) 2강은 아닌 것 같다. 나머지 팀들도 만만치 않다. LG는 지난 시즌 상당히 강했고, KT는 허훈이 돌아온다. DB도 선수 구성만 놓고 본다면 상당히 탄탄하다”며 “우리가 공수에서 상승세를 탄다면 그 과정에서 팀이 상당히 탄탄해질 수 있다. 반면, 초반 조직력을 살리지 못한다면 고전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돼지국밥에서 피자까지 부산 음식 10선
만호갈미샤브샤브

한국인 식단의 끝은 ‘국물’이다. 맛있는 음식을 한껏 먹었어도 ‘국물’을 먹지 않으면 허전한 이 기분. 그것을 한 방에 날려주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샤부샤부, 수육, 구이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갈미조개를 요리하는 갈미조개 전문식당이다. 갈미샤브샤브와 갈미수육이 대표 메뉴.
- 강서구 르노삼성대로 602
- 051–271–4389
- 11:00–21:00 2·4주 월요일 휴무
오스테리아 어부

부산에서 정통 이탈리아 식당을 찾는다면 단연코 베스트로 꼽힌다. 한국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맛일지라도 이탈리아의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탈리아 현지의 맛을 기준으로 조리하는 곳이다. 이곳은 부산이지만, 이 공간만큼은 분명히 이탈리아다.
- 부산진구 동천로 58
- 051–802–8858
- 17:00–14:30 / 17:00–24:00 화요일 휴무
동백섬횟집

부산까지 가서 회 한 접시 안 먹고 돌아오면 너무 섭섭하지 않을까. 해운대 그랜드호텔 인근에 있는 자연산 활어회 전문 횟집인 이곳은 생선회를 주문하면 문어숙회, 멍게, 전복, 가자미구이, 새우튀김 등 다양한 밑반찬과 식사 후 매운탕 등의 요리가 함께 제공된다. 대부분의 생선은 시가에 따라서 가격이 변동된다.
-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 209번 나길 17
- 051–741–3888
- 12:00–22:00 명절 휴무
장수장꼬리곰탕

역사가 깊은 식당은 늘 외지인뿐 아니라 현지인의 관심을 사로잡기 마련이다. 이곳은 1983년에 개업해 40년 이상 운영해온 곳으로, 김치와 젓갈을 직접 만들어 항아리에서 숙성시킨다. 뼈와 도가니는 한우, 꼬리는 호주산으로 엄선한 재료를 사용하며 변하지 않는 꾸준한 맛으로 인기가 높다.
- 북구 사상로 581
- 051–303–7096
- 10:30–20:30 일요일 휴무
고옥
부산에서 히쓰마부시(장어덮밥)를 유행시킨 곳이다. 장어는 숯불을 사용해서 굽고 그날 사용할 장어가 떨어지면 조기 마감한다. 예약을 받지 않고 찾아오는 순서대로 식사를 제공한다.
- 수영구 광남로 6
- 0507–1360–1638
- 11:30–15:00 / 17:00–21:00 월요일 휴무
삼형제오리

중국 현지의 음식을 부산에서 맛볼 수 있다면?’
진짜다. 이곳은 중국 현지 북경오리 프랜차이즈의 국내 유일 지점이다. 숯불에 구운 오리바비큐가 대표 메뉴지만, 양갈빗살로 만든 양꼬치도 인기다. 오리바비큐를 먹기 위해선 예약이 필수다.
- 영도구 태종로 73번길 23
- 051–417–7043
- 12:00–14:00 / 15:00–22:00 2·4주 일요일 휴무
미청식당

부산으로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은 한 번쯤 지역 특산물 요리를 맛볼 기회를 엿본다. 일광 해수욕장 해변에 자리한 이곳은 성게의 한 종류인 양장구(말똥성게) 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해산물 식당으로 한정적인 메뉴를 취급하고 있다.
- 기장군 일광읍 기장해안로 1303
- 051–721–7050
- 10:00–15:30 / 17:00–20:30 2·4주 수요일, 명절 휴무
몽실종가돼지국밥

언제부터였을까. 돼지국밥은 부산을 대표하는 ‘솔푸드’로 자리 잡았다. 이곳은 감천문화마을 근처에 있는 돼지국밥 전문점이다. 사골뼈를 24시간 이상 푹 고아 만든 국물이 유명하고, 국밥에 들어가는 고기 양과 고기 종류를 선택할 수 있다.
- 서구 까치고개로 197번길 3
- 051–256–0133
- 09:00–2100 / 명절 휴무
이재모피자

30년째 운영 중인 피자 전문점. 부산에서 피자가 대중화된 시기를 생각하면 상당한 전통을 자랑한다. 국내산 임실치즈를 사용하는 푸짐한 토핑의 피자가 특징이며, 변함없는 맛을 지키고 있다. 치즈가 대박이란다.
- 중구 광복중앙로 31
- 051–256–0133
- 09:00–2100 명절 휴무
칠암사계

부산에도 있다, 유명한 베이커리가. 넓은 매장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리는 이곳은 기장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다양한 빵과 음료수를 즐길 수 있는 카페다. 모든 주변 경관이 예쁘고, 모든 빵이 맛있다. 소금빵과 칠암동만주가 특히 유명하다.
- 기장군 일광읍 칠암1길 7-10
- 0507-1318-4900
- 10:00–21:00 명절 휴무
글 : 월간조선
■부산과 가요
“부산과 해운대는 트로트의 산실을 넘어 대중가요의 요람”(설운도)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동백섬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이 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국토 수호의 마지막 보루였던 부산은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노래 소재로 쓰였다.

▲대중가요 중에 부산항을 소재로 삼은 곡이 많다. 사진은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크루즈선.
이승만 정부는 1950년 6·25 남침 전쟁으로 북한군이 남하하자 수도를 옮겼다. 수도는 대전(6월 27일), 대구(7월 16일)를 거쳐 부산까지(8월 18일) 내려갔다. 이승만 정부가 대구 북방을 둘러싼 낙동강 방어선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토 수호의 최후 보루가 된 부산은 1953년 8월 15일 정부가 환도(還都)할 때(1차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2차 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5일)까지 두 차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대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지명은 역사적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현장이 많다. 특히 피란수도부산을 배경으로 한 노래가 많았다는 점은 이 시기 대중가요에 뚜렷이 나타난 특징이다.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임시수도 역할까지 담당했던 부산이 피란민들에게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상도 아가씨’와 ‘굳세어라 금순아’
시인 겸 문학평론가인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는 “어떤 가수든 부산 테마 가요를 한두 곡씩 부르지 않은 경우는 드물었다. 부산 테마 노래는 가수들이 서로 부르고 싶어 했던 로망의 대상이었다”라고 밝혔다. 1951년 미도파 레코드에서 가수 박재홍이 취입해 대히트한 곡 ‘경상도 아가씨’는 부산 피란살이를 그린 노래의 대명사다.
노랫말엔 40계단 거리에 늘어선 판잣집들과 계단에 앉아 우는 나그네들이 그려져 있다. 경상도 아가씨의 눈에 비친 실향민의 생활상을 풀어낸 노래에선 타향살이의 설움과 함께 부산의 살가운 인정을 느낄 수 있다.
노래의 중심 배경으로 떠오르는 공간은 40계단 층층대와 국제시장, 영도다리 부근이다. 이곳은 전쟁 시절 피란민들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이다.
이동순 명예교수는 지역의 《국제신문》에 쓴 글을 통해 “좋은 노래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시대적 역할과 책무를 노래 ‘경상도 아가씨’는 유감없이 나타내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우리나라 최초 국민가수 부산 출신 현인이 1953년 발표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피란민으로 뒤덮인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를 부산 국제시장과 영도다리 위를 헤매며 찾아다니는 애끓는 이야기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린 노래다.
이회택이 지원한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록된 조용필의 1972년도 앨범. 이 앨범은 1979년 발매한 정규 1집보다 7년 앞선 ‘가왕의 초고’로 알려져 있다.
《부산일보》에 의하면 부산을 배경으로 한 대중가요는 2500곡이 넘는다. ‘부산’이란 지명이 들어간 최초 노래는 ‘경부텰도의 노래(경부철도가)’다.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만들어졌다.
〈부산항 개항 141주년 기념/노래로 돌아보는 부산항〉 심포지엄을 진행한 바 있는 박성서 음악평론가·저널리스트는 당시 행사에서 “최남선이 쓴 이 ‘경부철도가’는 각 행이 정확히 7·5조로 총 67장으로 되어 있다. 스코틀랜드 민요 ‘들놀이(Coming Through The Rye·밀밭 사이로)’의 음률에 맞춰 불리도록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박 평론가의 설명에 따르면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는 1937년에 발표되어 크게 히트했다. 이 노래는 부산의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광복 이전까지는 관부연락선이라 부름)’을 통한 이별의 슬픔을 그렸다. ‘연락선은 떠난다’는 이후 영화로도 제작됐고, 일본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지역명이 들어간 노래 중에 가장 사랑받는 곡은 단연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앨범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하며 국내 최초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 재일동포들의 잇단 모국 방문의 대열 속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해 광범위한 대중적 사랑을 확보해갔다. 탁성의 진한 감성으로 부른 노래는 어두웠던 시절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축구가 최고의 국민스포츠였던 1960~1970년대 167cm의 작은 키에도 귀신같이 골을 만들어내던 ‘국민스타’ 이회택은 조용필의 첫 매니저였다. 이회택 현 OB축구회 회장과 조용필이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초다. 조용필이 보컬그룹의 연주자로 있던 시절 이 감독과 인연을 맺었고 의기가 투합한 두 사람은 곧바로 형(이회택)-동생(조용필)이 됐다. 이후 이 회장은 1975년 조용필이 공전의 히트를 친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음반을 낼 수 있게 지원했다.
당초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트로트 냄새가 싫어 접으려 했다. 그걸 이 회장이 앨범에 넣으라고 권했고, 대박이 났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인기 바통은 1982년도에 나온 ‘부산 갈매기’가 이어받았다. 김중순이 작사·작곡하고 문성재가 부른 히트곡 ‘부산 갈매기’는 발표 4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부산시민 사이에서 일종의 지역 주제가로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문씨에 따르면 멜로디 자체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편곡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1980년대 히트곡 제조기로 이름을 떨친 그룹 ‘사랑과 평화’ 출신의 김명곤이 편곡했다. ‘띠띠리~ 띠리띠~’로 시작되는 기타 사운드가 귀에 착착 들러붙는다. 특히 이 지역 연고 구단 롯데 자이언츠 홈 경기 시 이 노래가 울려 퍼지며 구도(球都)를 자처하는 부산과 사직야구장의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가수 문성재씨의 이야기다.
“(1982년 당시) 제가 유성 나이트클럽 밴드에서 노래하고 있었어요. 저랑 절친한 나이트클럽 ‘형님’ 한 분이 계셨죠. 그쪽이 대부분 ‘주먹’이잖아요. 그 형님이 하루는 ‘성재야, 이왕이면 주먹들을 위한 노래 좀 해봐라’ 하더군요. 왜 있잖아요? ‘눈물도~ 한숨도~’ 맨발의 청춘 같은 거 말이에요. 일본에는 ‘야쿠자풍’의 노래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런 게 없었거든요. 그래서 작곡자에게 ‘특별부탁’을 했습니다.”
앞서 부산을 테마로 삼은 가요가 2500곡이 넘는다고 했다. 이 중 부산항을 매개로 한 노래가 800여 곡이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마도 부산항은 전 세계에서 노래로 가장 많이 불린 항구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부산항이 들어간 최고의 히트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비롯 1939년 발표된 ‘울며 헤진 부산항’ ‘이별의 부산정거장’ ‘마음의 부산항’ ‘항구의 사랑’ ‘잘 있거라 부산항’ ‘안개 낀 부산항’ ‘님을 보낸 부산항’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 3대 미항(美港) 중 하나인 이탈리아 나폴리항도 관련 노래가 부산항보다 적다. 1876년(고종 13년) 부산포란 명칭으로 개항한 부산항은 일제강점기 징용·징병 등으로 가족이 이별해야만 했던 슬픔의 항구였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귀국 동포를 반갑게 맞이하는 기쁨의 항만이었다.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된 외항선과 원양어선, 베트남전쟁 파병 군인들을 떠나보낸 곳도 부산항이다. 역동성, 멋과 낭만, 애환을 담은 ‘부산항’은 대중가요의 주제로 많이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부산시 동구 초량 2동 415번지 7통 3반입니다”

▲지난 7월 나훈아가 발매한 앨범 〈새벽〉(2023)
부산은 ‘가요계 대부(代父)’를 배출한 도시다. 나훈아와 현철, 그리고 설운도. 최규성 음악평론가는 “나훈아는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뛰어넘어 ‘황제’라고 불러도 무방한 가수”라고 평했다. 이어 “공연에서 그는 무대의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인물”이라며 “평범한 트로트 가수가 아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황(歌皇)’ 나훈아는 남다른 ‘부산 사랑’을 드러낸다. 나훈아는 방송 출연이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2020년 9월 드물게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고향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부산시 동구 초량 2동 415번지 7통 3반입니다.”
나훈아는 ‘초량 이바구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바구’는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곳엔 부산의 기억과 근대 한국의 역동적인 변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훈아는 지난 7월 새 앨범 〈새벽〉을 내놨다. 그는 “늘 그랬듯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신곡을 발표한다”며 6곡을 공개했다. 모두 나훈아가 작사·작곡했다. 모든 노래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기장갈매기’가 성인가요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액션 영화 같은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기장갈매기’는 의리를 첫 번째 덕목으로 삼는다는 부산 사나이의 모습을 그린 곡이다.
‘기장갈매기’는 부산 일대 상공을 날아다니는 갈매기의 시선으로 부산을 소개한다. 노래는 “동쪽에서 바라보면 여섯 개로 보이고/ 서쪽에서 쳐다보면 다섯 개로 보이는/ 오륙도 돌고 돌며 나래 치는 내가 바로/ 내가 바로 기장갈매기다”로 시작한다. ‘기장갈매기’ 가사에는 오륙도, 해운대, 영도, 남천동, 다대포, 송도, 광안대교와 기장 등 부산의 명소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앞서 나훈아는 ‘자갈치 아지매’ ‘내 고향은 부산입니더’란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봉선화 연정’ 현철
현철은 트로트 4대 천왕(태진아, 설운도, 현철, 송대관)으로 불린다. 1942년 부산 태생인 현철은 1969년 ‘무정한 그대’를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한 후 그룹사운드 ‘현철과 벌떼들’로 활동했다. 1982년 당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히트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솔로로 전향해 꾸준한 사랑을 누리다 1988년에 발표한 ‘봉선화 연정’에 이어 ‘싫다 싫어’(1990년)로 연거푸 KBS 가요대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98년에 발표한 ‘사랑의 이름표’ 역시 현철을 대표하는 곡으로 손꼽힌다.
현철은 지난 2018년 방송된 KBS 1TV 〈가요무대〉에서 몸이 불편한 듯한 모습을 보인 이후 가수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지난 2020년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에 하춘화와 함께 레전드 가수로 출연한 것이 대중 앞에 선 마지막 모습이다. 이에 대해 현철의 아내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년 전쯤) 경추 디스크를 다치며 신경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인지 기능이 저하돼 재활운동을 하고 있다. 병원에서 재활치료도 병행하고 있는데 연세가 높으셔서 회복이 잘 안 된다”고 했다.
무대에서 다시 볼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 자연인이죠. 오랜 기간 현철로 살았으니까, 남은 시간 강상수로 살아야죠.”
“부산 사람인 것이 정말 좋다”(설운도)

▲‘항구의 나그네’가 수록된 설운도 2집(1990)
‘누이’ ‘다 함께 차차차’ ‘사랑의 트위스트’ 등을 히트시킨 설운도는 부산 해운대 출신이다. 해운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부산은 한국의 대중가요를 견인한 나훈아·현철 선배에 최백호, 김수희, 정훈희 등 전설 같은 가수들이 태어났고 활동한 곳입니다. 대한민국의 한 도시가 이렇게 트로트에 대한 역사성을 가진 도시가 없으며, 부산과 해운대는 트로트의 산실을 넘어 대중가요의 요람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설운도 또한 고향 사랑이 대단하다. 그는 2010년 부산 금정구 홍보 노래를 무료로 작곡하고 노래까지 불렀다. 또 1990년 ‘항구의 나그네’란 노래를 발표했다.
“인천에서 고깃배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니 어느덧 하루해가 저물었네/ 자갈치서 소주 한잔 하룻밤을 지새고/ 통통배는 떠나간다 속초항구로/ 설악산과 경포대에 정이 드는 나그네.”
설운도는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부산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하고 정겨운 사람들이 모여 인정이 넘치는 역동적인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산 사람인 것이 너무 좋고 부산이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몸은 비록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해운대 앞바다와 용두산공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가수 생활 40년 동안 축적된 트로트 콘텐츠 제작 경험과 인프라,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고향 부산과 해운대를 위해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습니다.”
나훈아, 현철, 설운도를 필두로 그룹 2PM의 장우영, 씨엔블루의 정용화, 에이핑크 정은지, 2AM의 이창민, 글로벌 아이돌 그룹으로 우뚝 선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정국과 지민 등이 부산 출신 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