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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동아일보) 2023-10/ 10-03(화) “하늘만큼 감사합니다” 소록도 ‘작은 할매’ 잠들다 - 10-31(화) “美 점잖게 이끌 지도자를”… 트럼프 때리며 경선 하차한 펜스

상림은내고향 2023. 10. 23. 19:51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10/

10-03(화) “하늘만큼 감사합니다” 소록도 ‘작은 할매’ 잠들다

 
 

2005년 11월. 시작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우유를 타서 환자들에게 나눠 줬다. 그 뒤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조용히 소록도를 떠났다. 20대 청춘에 처음 한국에 왔을 때처럼 70대의 노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손엔 여행가방 하나씩만 들려 있었다. 9월 29일 마가렛은 그 가방마저 내려놓은 채 고향 오스트리아에서 영원한 길을 떠났다. 향년 88세. 세상에 유일하게 남긴 시신마저 의대에 기증했다.

▷마가렛은 평생의 벗 마리안느(마리아네 스퇴거·89)와 함께 40여 년간 한센인을 돌봤다. 흔히 수녀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수녀가 아니라 평신도 재속회 소속이었다. 간호사를 구하는 동양의 한 가난한 나라의 요청에 응해 1959년 12월 한국에 왔다. 경북 왜관, 전북 전주 등의 한센인 정착촌에서 봉사하다 1961년 순명의 삶을 살기 위해 수녀원에 들어갔다. 건강이 나빠져 1964년 수녀원을 나왔는데 희한하게도 몸이 좋아졌다. 달리 쓰임이 있나 보다 생각하고 1966년 10월 전남 고흥군 소록도로 들어갔다.

▷폴란드계 오스트리아인인 마가렛의 본명은 마르가리타 피사레크. 가족들은 마르기트라고 불렀다. 하지만 소록도 사람들은 처음에 잘못 알아듣고 ‘마귀’라고 했다. 편하게 영어식으로 마가렛으로 부르라 했다. 백수선이란 한국 이름도 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때쯤부턴 사람들이 한 살 많은 마리안느를 ‘큰 할매’, 마가렛을 ‘작은 할매’라 했다. 1970년대 초까진 또 다른 간호사 마리아 디트리히 씨까지 소록도의 ‘세마’로 불렸다. 소록도에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세마비’가 있다.

▷과거 ‘나병’ ‘문둥병’이라 불리던 한센병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의료진조차 방역복과 마스크, 장갑으로 완전 무장한 채 환자와 거리를 두고 진료했다. 하지만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태연하게 환자들의 짓무른 손발가락을 소독하고 피고름을 직접 짜냈다. 환자의 상처에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치료하다 보니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늘 타인의 눈빛에서 전염의 공포를 보았던 한센인들은 이들의 진심에 마음의 문을 열었다.

▷유럽 내륙에서 나고 자란 마가렛은 소록도에 와서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고 했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설산을 보면서도 소록도의 푸른 바다를 그리워했다. 치매를 앓는 중에도 소록도의 추억은 또렷했다. ‘죽어서도 소록도에 묻히고 싶다’던 그가 한국을 떠난 건 나이가 들어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온전히 베푸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큰 사랑과 신뢰를 받아서 하늘만큼 감사합니다”라는 편지를 남겼다. 이젠 우리가 하늘만큼의 감사와 존경을 돌려 줄 차례다. 고인의 영면을 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0-04 축구 응원으로 불거진 ‘차이나 게이트’ 논란

 
 

한국과 중국의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시안게임 4강 티켓을 따내기 위해 맞붙은 1일. 중국 광저우에서 경기가 열린 만큼 현장에선 중국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이 쏟아졌다. 그런데 당시 국내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진행된 ‘클릭 응원’에서도 92%가 중국을 응원하고 한국 응원은 8%에 그쳤다는 결과가 나왔다. 같은 경기에서 네이버가 실시한 ‘터치 응원’에선 한국을 응원한 비율이 94%, 중국은 6%였다. 이렇게 상반된 결과가 나온 이유가 뭘까.

▷다음의 응원하기에서 한국보다 다른 나라를 압도적으로 응원한 사례는 여럿 있었다. 지난달 13일 열린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축구 친선 경기에선 사우디 응원 비율이 52%였고, 한국과 키르기스스탄의 아시안게임 축구 16강전에서는 키르기스스탄이 85%의 응원을 받았다. 여자 축구에서도 남북한이 맞붙은 아시안게임 8강전에선 북한에 75%, 한국과 홍콩 간의 예선전에서는 홍콩에 91%의 응원이 몰렸다. 이 정도면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의심스러운 대목은 더 있다. 평소 이용자는 네이버가 다음보다 6배가량 많다(마케팅 조사 업체 샘러시 8월 집계 기준). 반면 축구 한중전 응원 클릭 수는 다음이 네이버보다 3배 이상 많았다. 누군가 매크로 프로그램(특정 작업을 반복하는 소프트웨어)을 통해 대량으로 클릭을 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 만하다. 로그인을 해야 응원에 참여할 수 있는 네이버와 달리 다음은 누구나 횟수에 제한 없이 클릭을 할 수 있어서 조작에 취약하다는 측면도 있다. 결국 다음은 “클릭 응원 숫자가 과도하게 부풀려질 수 있다”며 이 서비스를 잠정 중단했다.

▷문제는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느냐다. 여권과 일부 누리꾼은 중국을 배후로 지목하고 나섰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이용해 친중국 메시지를 전파하고 외국의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아온 터다. 2020년 한국 총선 때에도 중국 측이 온라인에서 보수진영에 불리한 여론을 조성했다는 ‘차이나 게이트’ 의혹이 불거진 적이 있다. 여당에선 해외에서 접속하는 이용자들은 댓글에 국적을 표기하도록 하는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음 클릭 응원에 중국이 개입했다는 근거가 없다. 일각에선 한국 누리꾼이 장난으로 한 짓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번 사건을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고, 정치권으로까지 논쟁이 번진 만큼 유야무야 넘길 수는 없어 보인다. 다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번 일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급선무다. ‘차이나 게이트’의 증거가 될 사안인지, 아니면 해프닝으로 끝날 일인지는 그다음에 따져봐도 늦지 않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0-05 우울증 환자 100만 명… 젊은층까지 파고든 ‘마음의 감기’

 
 

‘벌레가 사과 속을 파고들 듯 우리 영혼 속을 파고들어 자아정체감을 좀먹고 살아갈 이유를 빼앗아가는 병.’ 20년 넘게 우울증과 싸워온 영국의 정신과 의사 린다 개스크는 우울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의학 전문가답게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했는데도 고립감, 불안감, 절망감, 생기 고갈, 자기 비하 같은 부정적 감정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밤마다 베개를 땀과 눈물로 적시며 잠드는 날이 계속됐다”고 했다.

▷‘마음의 감기.’ 우울증은 누구나 감기처럼 겪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 증세까지 감기처럼 가볍게 봐선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증으로 만성화하면 뇌의 구조까지 변형시키고 극단적 자해나 자살로 치닫게 되는 게 우울증이라는 것이다. ‘정신운동지연’이라 불리는 극도의 무기력증이 육체마저 약화시킨다. 장기간 이 질병과 싸워온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나는 평생 ‘검은 개(black dog)’ 한 마리를 데리고 살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국내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한시적으로 우울감을 느끼는 수준을 넘어 병의원에서 상병코드가 F32, F33인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다.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가 확연하다. 연령별로 20대(18.6%)와 30대(16%)가 가장 많은데, 경쟁이 치열한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의 강도가 그만큼 세다는 의미일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코로나 블루’ 환자도 크게 늘었다. 젊은이들이 정신과 진료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비교적 적극적으로 진단과 치료에 응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우울증 환자는 여성이 67만여 명으로 남성보다 2배 이상 많다. 특히 20대 여성의 증가세가 가팔라서 지난해에만 12만 명 넘게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과거 갱년기 우울증 등의 이유로 중장년 여성 환자가 많던 것과는 달라진 흐름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인생 단계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취업의 벽은 높고 기업 문화는 여전히 불리한 게 현실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증폭시키는 SNS 활동, 외부 자극이나 변수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여성호르몬 등 다양한 이유들이 거론된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뉴스는 기성세대엔 낯설다. 고령화시대에 정작 관심을 쏟아야 하는 문제는 노년기 우울증 아니냐는 항변도 나온다. 그러나 나이 외에도 유전, 주변 환경과 경험, 가족력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는 게 우울증이다. “의지로 이겨내라”는 식의 어설픈 조언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과도한 경쟁과 비교 문화 등 우울증을 악화시키는 우리 사회의 스트레스 요인들을 해소하는,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06 일상화한 매크로 조작, 안 막나 못 막나

 
 

온라인에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유명 공연의 티켓을 유료로 대리 구매해준다는 글을 흔히 볼 수 있다. 올 6월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의 방한 공연 때가 대표적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구매 홈페이지에 접속하기도 어려울 정도인데 이들은 어떻게 표를 구한다는 것일까. 대개 겉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매크로(자동 반복) 프로그램을 돌렸을 것으로 본다. 실제 한 30대 남성은 매크로로 7개월간 공연 티켓 1200여 장을 구매한 혐의로 지난달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단순·반복의 입력 작업을 대신하기 위해 만든 매크로는 본래 목적과 달리 엉뚱한 곳에 사용돼 피해를 주는 일이 적지 않다. 각종 예매는 물론 수강 신청, 쇼핑몰 마케팅 등 단순·반복 입력을 남들보다 빨리, 많이 해야 하는 곳이면 두루 쓰인다. 매크로가 범람하는 것은 구해서 쓰기가 쉽기 때문이다. 관련 프로그램을 구해 실행시키는 데 5분 정도면 충분하다.

▷1일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한국과 중국 축구 8강전 당시 포털 ‘다음’이 진행한 ‘클릭 응원’ 역시 매크로를 통해 3분의 2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 응원 클릭이 전체의 93%인 약 3000만 건에 달했는데 그중 네덜란드와 일본 IP를 통해 2000만 건의 응원 클릭이 있었던 것이다. 로그인도 필요 없고 응원 횟수에도 제한이 없어 매크로를 통해 쉽게 클릭 수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예매나 응원 클릭 등을 위한 매크로는 프로그램 면에선 비교적 단순한 축에 속한다. 위험한 건 전문적이고 고도화된 매크로를 이용해 순위나 댓글 조작을 시도하는 것이다. 특정 키워드가 자동 반복되도록 해 네이버의 검색 순위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광고주들로부터 200여억 원을 받은 일당이 최근 적발된 적이 있다. 또 매크로와 인공지능(AI)을 결합해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기사에 수백 건의 댓글을 달아주겠다는 불법 업체들도 등장했다. 내년 총선에서 상대 후보를 깎아내리거나 자신을 부각시키는 댓글 조작이 가능할 수 있단 얘기다.

▷업계 전문가들은 매크로의 경우 컴퓨터 바이러스나 해킹처럼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방어하기 힘들다고 한다. 로그인 요청, 복수 응답 제한, 복수 IP 차단 등 조치를 취해도 이를 무력화하는 매크로가 나온다는 것이다. 처벌도 미흡하다. 매크로 불법 사용은 큰 틀에서 업무방해로 처벌할 수 있지만 사례는 극소수다. 공연계에선 법 개정으로 매크로를 통한 암표 처벌이 가능해졌는데 내년 3월에나 시행된다. 여야가 ‘클릭 응원’ 사태를 놓고 국기문란이니 침소봉대니 하는 정치적 공방을 벌일 일이 아니다. 여야가 번갈아 피해자가 된 드루킹 사태에서 보듯 누구나 매크로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이참에 매크로를 차단할 사회적 보안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10-07(토) 김행 여가부장관 후보자의 ‘청문회 실종 사건’

 
 

국무위원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 도중 사라지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그제 오후 10시 50분 일시 정회가 선포된 뒤 청문회장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권인숙 여성가족위원장은 어제 이틀째 청문회를 열었으나 여당 의원들은 “합의한 적 없다”며 불참했고, 김 후보자는 종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청문회 파행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의정사에 청문회 도중 ‘후보자 실종’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남기게 됐다.

▷주가조작 논란이 발단이었다. 주가조작에 연루된 회사에 후보자가 한때 사외이사로 등록됐다는 점을 야당이 지적하자 후보자는 “알지 못하는 일로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다.…차라리 고발하라”며 반박했다. 공방이 반복되자 권 위원장은 “그런 태도를 유지할 거면 본인이 사퇴를 하든가”라고 했고, 국민의힘 의원들은 “위원장은 중립을 지키라”며 퇴장했다. 고성 속에 “10분간 정회”가 선포되자 김 후보자는 자료를 챙겨 떠났다. 청문회는 다시 열렸지만 후보자 없이 오전 1시가 넘어 끝났다.

▷김 후보자가 청문회 절차를 끝까지 마무리하지 않은 것은 적절치 않다. 야당의 의혹 제기가 타당했는지와는 별개로 국회 청문회라는 제도와 절차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국무위원 후보자의 기본에 속한다. 게다가 김 후보자는 파행 이튿날인 어제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여가부 폐지를 두고 “드라마틱하게 엑시트(극적인 부 폐지)” 하겠다고 했는데, 청문회장 이탈이야말로 드라마틱한 엑시트(전에 없던 중도 이탈)라 해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다 답변하겠다”던 10년 전 백지신탁 논란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소셜뉴스(위키트리 운영사) 창업자인 후보자는 박근혜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됐었다. 그때 이해충돌이 큰 인터넷뉴스 주식을 정부에 백지신탁해 제3자에게 매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공동창업자와 남편의 시누이에게 주식을 사적으로 팔았고, 7년 뒤 되샀다. 이 주식 가치가 110억 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법 조항은 안 어겼고, 지금 다시 생각해도 (지인에게) 매각 그 방법밖에 없었다”는 식의 답변만 되뇌었다. 그의 인터넷뉴스가 선정적이고 여성 혐오를 담은 보도로 클릭 수를 늘려 돈을 벌었다는 지적이 나오자 “나도 부끄럽지만 이게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이라는 엉뚱한 해명을 내놓기도 했다.

▷이번 청문회 파행으로 ‘청문회 무용론’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김 후보자는 자료를 충실히 내지 않았고, 의원들 질문에는 동문서답과 긴 설명으로 피해 갔다. 의원들끼리의 고성과 말싸움도 빠지지 않았다. 청문보고서 채택에 여야가 합의하지 못한 채 장관급으로 임명된 인사가 윤석열 정부 들어서만 17명이다. 그러다 여야 대치 끝에 청문회 중도 포기라는 초유의 일까지 봐야 하는 지경이 됐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0-09(월) 푸틴의 ‘미치광이’ 전략… 핵추진순항미사일 개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주 2가지 핵 협박을 들고 나왔다. 하나는 핵순항미사일 발사 성공을 알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33년 만에 핵실험을 재개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푸틴은 “제정신이라면 러시아에 도전 못 한다”고 했다. 반(反)러시아 연대를 펴는 서방을 향한 으름장이다. 동계올림픽의 도시 소치에서 열린 행사장에서 무려 3시간 41분에 걸쳐 한 말이다. 발언 내용도 형식도 세상을 놀라게 했다.

▷푸틴이 꺼내 든 핵순항미사일(부레베스트니크·바다제비)은 미국도 중국도 보유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무기다. 이 미사일은 주입한 연료를 태우며 날아가는 일반 추진체가 아니라 초소형 원자로를 품고 다닌다. 비행 사거리가 무제한에 가깝다. 오늘 발사해도 저공으로 날아다니다가 내년쯤 목표물 주변 방공망이 허술할 때 때리는 식이다. 순항미사일은 탄도미사일보다 비행 속도가 느리고 요격이 쉬워 덜 위협적인 것으로 여겼었다. 유엔이 북한의 탄도미사일만 제재한 것도 이런 이유다. 푸틴의 ‘바다제비’는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게임 체인저’로 불리게 됐다.

▷핵실험 재개 발언의 파장은 더 넓고 깊다. 러시아는 1990년에 먼저, 미국은 뒤따라 1992년에 핵실험을 중단했다. 핵실험이 더는 필요 없을 정도로 핵탄두를 쌓아놓았던 두 나라는 이때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을 맺었다. 하지만 2000년 의회 비준까지 마친 러시아와 달리 미국은 의회가 비준을 거부했다. 푸틴은 이 점을 거론하듯 “러시아는 더 공정한 세계를 만들겠다”고 했다. 조약이 휴지조각이 되면 북한 핵실험을 규탄할 근거는 줄어들게 된다.

▷러시아의 핵확산 공갈은 처음이 아니다. 푸틴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불량국가 벨라루스에 러시아 핵무기를 옮겨놓겠다고 선언했고, 6월 이후 실제로 옮기기 시작했다. 핵확산방지조약(NPT)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고, 냉전 종식 이후 핵무기의 제3국 이전은 전에 없던 일이다. 크렘린궁 대변인은 작년부터 “러시아가 실존적인 위협에 처한다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전문가들은 푸틴의 미치광이(Madman) 전략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 푸틴은 광기에 휩싸여 정상 대화가 어렵다. 내가 바라는 걸 쥐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50년 전 베트남전쟁을 끝내고 싶은 닉슨 미국 대통령이 썼던 방식이다. 실제로 푸틴은 광기 어린 발언과 이성적 발언을 뒤섞고 있다. 지난주에도 “핵무기란 국가 존립을 위협당할 때 방어적으로만 쓴다”는 핵 독트린을 바꿀 뜻이 없다고 했다. 핵실험금지조약 비준 파기, 핵 어뢰와 미사일 실험 지속, 시베리아 핵실험 등 러시아 전문가들이 꼽는 ‘미치광이’ 시나리오는 끝이 없다. 위험천만한 푸틴을 전 세계는 당분간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게 됐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0-10 “삼겹살로 깻잎 싸먹을 판”

 
 

요즘 고깃집이나 횟집 메뉴판에서 바뀐 건 가격만이 아니다. 메뉴판 구석에 ‘쌈채소 리필은 한 번만 가능’ ‘상추·깻잎 리필에 3000원’ 등을 써 붙인 식당이 갈수록 늘고 있다. 여름 성수기와 추석 연휴를 지나고도 고공 행진하는 채소값 때문이다. 청상추 100g이 1821원으로 작년 이맘때보다 50% 넘게 뛰었고, 같은 양의 깻잎은 3165원으로 15% 올랐다(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6일 소매가 기준). 국산 삼겹살 100g이 2700원대에 판매되고 있으니 깻잎이 삼겹살보다 비싸진 것이다. “삼겹살로 깻잎 싸먹겠다”는 얘기가 나올 판이다.

▷과일값도 다르지 않다. 추석을 앞두고 사과와 배 1개씩 사면 만 원을 넘겼는데 지금은 더 올랐다. 곧 마트에 풀릴 가을 대표 과일 단감은 가락시장 도매가격이 지난해보다 최고 40% 넘게 급등했다. 올해 유독 심했던 폭염·폭우 등 극한 기후의 여파가 여전히 농산물 수급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6, 7월 두 달간 내린 집중호우로 서울 여의도 면적의 236배에 달하는 농지가 침수, 낙과 등의 피해를 입었으니 쉽게 진정될 가격 상승세가 아닌 듯하다.

▷이상 기후가 불러온 농산물 가격 급등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선 오렌지 가격이 연일 뛰고 있다. 최근 뉴욕상품거래소에서 농축·냉동 오렌지주스 선물(先物) 가격은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허리케인이 강타한 플로리다의 오렌지 생산량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탓이다. 사탕수수 최대 산지인 인도와 브라질의 가뭄으로 설탕 선물 가격도 12년 만에 최고가를 찍었다. 남유럽의 전례 없는 폭염과 가뭄으로 올리브 수확이 급감하면서 국제 올리브유 가격은 1년 새 2배 넘게 치솟았다.

▷국제 농산물 가격 급등은 시차를 두고 국내 식품가격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올리브유를 고집하던 국내 치킨 프랜차이즈는 18년 된 레시피를 바꿔 해바라기씨유를 절반 섞어 쓰기로 했다. 원유(原乳) 가격 인상 여파로 우유에 이어 아이스크림 가격도 뛰면서 ‘밀크플레이션’에 시동을 걸었다. 거의 모든 음식에 들어가는 설탕의 가격 상승이 이끌 ‘슈거플레이션’이 현실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 7월 영국 BBC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기후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를 처음 소개했는데, 불과 몇 달 새 우리 밥상을 위협하는 최대 요인이 됐다. 이상 기후가 농산물 작황 부진으로 이어져 식품물가를 끌어올리고 전체 물가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2035년이면 기후 변화가 세계 식품물가 상승률을 최대 3.23%포인트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무분별한 탄소 배출이 지구 온도뿐만 아니라 물가까지 끌어올리는 기후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0-11 1년 새 134조 원 빚 낸 2030 세대

 
 

무섭게 치솟던 가계빚 증가세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작년 4분기 들어서다. 가계대출은 지난해 통틀어 7조8000억 원이 줄었는데 통계 편제 이래 첫 감소다.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10년 만에 연 3%대로 올라선 데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얼어붙은 영향이 컸다. 대출금리 인상을 알리는 은행 문자메시지에 벌벌 떨고, 상투에 집을 사서 물렸다며 땅을 치는 ‘영끌족’이 한둘 아니었다. 전세를 끼고 갭투자에 나섰던 사람들이 ‘갭거지’가 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도 반짝이었다. 올 들어 한은이 줄곧 금리를 동결하고 금융당국의 은행권 ‘이자 장사’ 질타에 대출금리가 하락세로 돌아서자 빚을 갚으려던 사람들이 생각을 바꿨다. 특히 봄 이사철 이후 집값이 바닥을 쳤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영끌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에선 배터리 투자 광풍이 빚을 내서 돈을 벌려는 ‘빚투족’의 귀환을 부추겼다.

▷영끌·빚투에 앞장선 이들은 이번에도 2030 청년층이다. 팬데믹 시기에 아파트 ‘공포 매수’를 주도하고, 주식 투자에 뛰어든 ‘동학개미운동’ 세대다. 국감 자료를 보면 올 7월까지 1년 동안 5대 시중은행과 6대 증권사에서 이들이 새로 받은 대출은 134조 원에 육박한다. 1년간 해당 은행들에서 162조 원의 주택담보대출이 나갔는데 절반가량이 20, 30대 몫이었다. 상반기 전국 아파트 매매의 3분의 1을 30대 이하가 사들였다고 하니 곧장 주택담보대출로 이어진 셈이다.

▷한국부동산원 집계로 전국 아파트 매매가는 12주 연속 상승세다. 서울에선 ‘미친 집값’으로 불리던 급등기의 80∼90% 수준을 회복한 아파트가 속출하고 있다. 집값이 다시 꿈틀대자 이번에도 때를 놓치면 나만 소외될지 모른다는 포모(FOMO) 심리가 2030세대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어렵게 취업한 일자리마저 저소득 비정규직이 많다 보니 착실히 돈을 모으기보다 주식이나 코인 투자로 한방을 노리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문제는 고금리와 저성장이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다시 최고 7%를 돌파했고, 미국발 고금리 시대는 더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소득과 자산이 적은 청년들이 감당하기 힘든 나락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얘기다. 벌써부터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는 20, 30대가 늘고 있다고 한다. 부동산·주식 거품이 빠지면 대박을 노린 섣부른 투자가 쪽박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한은 총재가 “다시 낮은 금리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집을 산다면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젠 ‘아파트 때문에 나라 망하겠다’는 아파트 망국론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됐다.

정임수 논설위원

 

10-12 대형 로펌 사건 회피로 대법원 ‘민폐’가 된 권영준 대법관

 
 

대법관 한 명이 한 해 주심을 맡아 처리하는 사건이 지난해 평균 4038건이었다. 2000년대 후반 2000건대에 진입했고 2010년대는 대체로 3000건대였으나 지난해 4000건대로 올라섰다. 매주 77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셈이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해도 매일 11건씩 처리해야 할 정도로 사건이 많기 때문에 상고법원 얘기도 나오고 대법관 증원 얘기도 나온다.

▷권영준 대법관은 7월 중순 취임 후 사건 59건의 주심을 회피했다. 회피는 재판관 본인이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고 여기는 사건의 취급을 피하는 제도다. 권 대법관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때 대형 법무법인(로펌) 7곳이 맡은 사건 38건에 대해 법률의견서를 써주고 18억 원을 받았다. 권 대법관은 이 사실이 논란이 되자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대법관이 되면 제가 관여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해도 관계를 맺은 로펌의 사건은 2년간 모두 회피 신청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으로 한정한 것은 이해충돌방지법에서 이해당사자로 간주되는 기간이 2년이기 때문이다.

▷59건은 대법관 한 명이 두 달간 처리하는 사건의 약 10%에 해당한다. 권 대법관이 약속을 지키려면 매년 350여 건씩, 2년간 700여 건을 회피해야 한다. 물론 본인이 회피하는 사건의 수만큼 다른 사건을 넘겨받기 때문에 처리하는 사건 수는 차이가 없다. 다만 대형 로펌이 수임한 사건은 복잡할 가능성이 커 다른 대법관들이 처리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수 있다.

▷회피는 본래 사건의 주심을 맡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고를 위한 합의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회피를 제대로 한다면 권 대법관은 다른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사건이 대형 로펌과 관계돼 있을 때도 합의에 참여할 수 없다. 대법원 사건은 일단 소부(小部) 처리가 원칙이다. 소부에서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파장이 예상되는 사건만 전원합의체에 회부된다. 대법원에는 3개 소부가 있고 각 소부는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다. 대법관 각자가 주심을 맡은 사건 중 대형 로펌 사건이 약 10%라고 한다면 권 대법관은 자신이 속한 소부의 사건 약 10%에 대해 ‘없는 재판관’이나 다름없다.

▷대법관은 자신이 주심을 맡은 사건도 산더미이기 때문에 다른 주심이 맡은 사건까지 세세하게 검토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법리적으로는 엄연히 4인 합의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소부의 선고다. 권 대법관이 속한 소부는 상당수 사건을 3인 합의로 부실하게 선고하는 셈이 된다. 권 대법관도, 국회도 논란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과도한 약속으로 우회했다가 대법원 운영에 2년 내내 부담을 주게 됐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13 ‘기계적인 자료수집만 한다’는 법무부 인사검증단

 
 

11일 법무부에 대한 국정감사의 쟁점은 인사검증 부실 문제였다. 야당 의원들은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의 재산신고 누락,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주식 파킹’ 의혹 등을 지적하며 ‘법무부가 제대로 확인했느냐’ ‘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냐’고 추궁했다. 이에 한동훈 장관은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인사검증단)은 프로토콜(정해진 절차)에 따라 기계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의견 없이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 넘긴다”고 답했다. 단순히 실무 작업만 한다는 취지다.

▷인사검증을 전담했던 대통령민정수석실이 폐지된 이후 1차 검증은 인사검증단, 2차 검증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맡는 것으로 역할이 나뉘었다. 대통령실은 지난해 6월 인사검증단을 신설할 당시 “대통령실은 정책 중심으로 가니까 고위공직자들의 검증 과정은 내각으로 보내는 것이 맞는다”고 했다. 인사검증의 무게중심이 공직기강비서관실보다는 인사검증단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법무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진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이중으로 검증이 이뤄지는 만큼 부실 검증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하지만 인사검증의 수준은 여전히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친다. 인사검증 업무는 인사혁신처가 권한을 위임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므로 시행령에서 정하기에 따라 어느 부처로든 넘길 수 있다. 인사검증단에는 검찰 경찰 국세청 국가정보원 등 여러 기관에서 직원이 파견되므로 부처 전반을 조율하는 국무조정실 산하에 두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법무부에 설치한 것은 사실 확인과 법적 쟁점 파악에 전문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자료 취합으로 역할이 한정된다면 인사검증단을 굳이 법무부에 둬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인사검증에 대한 책임 소재도 불분명한 상태다. 한 장관은 지난해 7월 국회에서 인사검증과 관련해 “국민적 지탄이 커지면 제가 책임져야 할 상황도 생기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올 2월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가 낙마할 당시에는 “정무적 책임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역시 부실 검증 책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인사검증단 설치의 또 다른 명분이었던 ‘인사검증의 투명성 제고’ 역시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음지’에 있던 인사검증을 ‘양지’로 끌어내 감시 가능한 통상의 시스템으로 만들겠다던 법무부의 당초 설명과 달리 국회에서 검증 과정을 물어도 ‘통상적으로 업무를 했다’는 식으로 답변을 피하고 있다. 인사검증단이 출범한 지 1년 4개월이 지났지만 이 조직이 왜 필요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형으로 남아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0-14(토) 퇴직 공무원 수명, 소방관 가장 짧고 판검사 가장 길다

 
 

정상적으로 은퇴한 공무원 가운데 평균 사망 연령이 가장 낮은 직군은 소방직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평균 74.7세다. 가장 높은 판검사 직종의 82.4세보다 8년 가까이 먼저 세상을 떴다. 매년 연말이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화상 환자를 지원하기 위해 발매되는 ‘몸짱 소방관’ 달력에서 소방관은 젊음과 활력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흘러 은퇴한 소방관들은 다른 공무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셈이다.

▷공무원연금공단 자료를 보면 주요 9개 직군 가운데서도 소방직이 유독 사망 연령이 낮다. 판검사에 이어 지도직(81.7세) 교육직(81.6세) 기능직(79.3세) 연구직(79.1세) 경찰(78.8세) 일반직(78.3세) 공안직(78.1세)은 모두 78세 이상이다. 평균치인 79.7세와는 5년의 격차가 난다. 이 수치는 공무원연금 수급자 중 사망자의 평균 연령이어서 전체 평균 수명과 꼭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방관이 더 빨리 세상을 떠난다는 경향성은 분명히 보여준다.

▷소방관의 수명이 짧은 건 수백 도의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가 난무하는 극한의 화재 현장과 무관치 않다. 인명 구조를 위해 건물에 들어갔다가 추락하거나 구조물이 붕괴될 위험도 크다. 소방관들은 “화재 현장에서 불에 데고 부상을 입는 건 다반사”라고 덤덤히 얘기한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유독가스와 유해 화학물질도 소방관을 괴롭힌다. 이 같은 유독물질로 호흡기나 피부 질환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론 암 같은 중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그 인과관계를 입증해 공상 처리를 받는 것은 쉽지 않다.

▷더 심각한 건 정신적 충격이다. 화마 속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긴장감은 무엇과도 비할 바가 아니다. 여기에 자신의 삶도 온전할 수 없다는 두려움, 인명을 구하지 못한 자책감, 동료들의 사고 등으로 인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노출될 확률이 크다. 24시간 주야 교대근무로 인한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최근 10년간 자살한 소방관 수는 순직자의 3배에 달할 정도다. 전문 심리 상담이 필수지만 해당 인력은 소방관 600여 명당 1명꼴로 사실상 방치되는 수준이다.

▷밤새 화재 진압을 한 뒤 검게 그을린 얼굴을 닦지도 못하고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는 소방관의 모습이 인상적인 건 그 안에 그들의 애환이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인력 부족과 열악한 처우 속에서도 하루 평균 100여 건에 달하는 크고 작은 화재 대응은 물론이고 응급환자 이송, 위험에 빠진 시민 구출, 벌집 제거 등 생활 속의 온갖 긴급 민원을 묵묵히 처리한다. 그래서 공무원 가운데 국민들로부터 가장 욕먹지 않는 직군으로 꼽힌다. 은퇴 후라도 더 오래 안락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10-16(월) “킁킁 뭔가 비싼 냄새가…” 강남구의 천박한 홍보 영상

 
 

“킁킁 뭔가 비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서울 강남의 화려한 거리를 걷다가 감탄사를 연발한다. 서민들에게 난다는 ‘지하철 냄새’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나 보다. 친구가 핀잔을 준다. “너무 킁킁대면서 다니지 말자. 같이 다니기 창피하잖아” “촌스럽게 그만 쳐다봐. 완전 시골에서 온 사람들 같아 보이거든”. 다른 지역을 얕잡아보는 듯한 영상은 재미있기는커녕 불쾌하다. 애들이 장난삼아 만든 게 아니라 서울 강남구의 공식 홍보 영상이란 게 더 어이없다.

▷12일 강남구 공식 유튜브 채널에 강남구 주요 관광명소를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로 구현해 홍보하는 내용의 영상이 올라왔다. ‘강남빌리지’ 구경에 나선 이들은 찬탄하면서도 한편으론 “만날 와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며 위축된 모습을 드러낸다. 구는 이런 영상을 세금 770만 원을 들여 유명 유튜버에게 제작 의뢰했다. 구 측은 “다른 채널에 먼저 공개했을 땐 반응이 좋아 문제 될지 몰랐다”고 했다. 현재는 삭제된 상태다.

▷뭐라도 달라야 선택받는 마케팅 시장에선 차별화를 넘어 차별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아이는 특별하다”고 하고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고 속삭인다. 올해 6월 서울 서초구에 들어서는 한 주상복합 아파트 광고에는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는 문구까지 들어갔다. 평범함을 거부한다는 정도라면 봐 줄 만했을 텐데 불평등을 찬양하는 노골적인 우월감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민간 기업이 해도 문제가 될 차별과 비하를 공공기관이 조장한다면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행복주택을 홍보하는 광고로 ‘흙수저 조롱’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광고 속에서 “너는 좋겠다. 부모님이 집 얻어 주실 테니까”라는 한 청년의 말에 다른 청년이 “나는 네가 부럽다. 부모님 힘 안 빌려도 되니까”라고 했다. 유행에 편승하다가 사고를 치기도 한다. 지난해 기획재정부는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무지출 챌린지’를 따라 했다. 어쩔 수 없이 아끼는 청년들의 짠한 마음에 상처를 주고 정부가 소비 억제를 장려한 꼴이 됐다.

▷‘B급 감성’을 내세운 충북 충주시의 정책 홍보가 대박을 치자 다른 공공기관들이 너도나도 따라 하면서 무리수가 남발됐다. 국제 스포츠 대회를 홍보하는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영상은 40대 남성이 대회에 출전한 뒤 10세 어린 여성을 만난다는 식으로 그려졌다. 지자체 주최 퀴즈대회를 홍보하면서 “아이가 ‘왕의 DNA’가 있다면 퀴즈왕에 도전하라”고 한 경우도 있다. 자녀에게 특별대우를 요구한 갑질을 재미의 소재로 삼은 거다. 세금이 투입되는 공공기관의 소통이라면 적어도 친숙과 무례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0-18 1년반 앞으로 다가온 日 2025엑스포, 지금 유메시마섬은

 
 

5년 전 가을 일본 오사카는 들떠 있었다. 2025년 세계박람회(엑스포) 개최지로 오사카가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새벽 시간임에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해냈다”며 만세를 불렀다. 전후 일본의 부흥을 만방에 알렸던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엑스포 개최를 1년 6개월 남겨두고 특파원이 전하는 현지 분위기는 개최지 선정 때와는 다르다.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개최 지역은 인공섬 유메시마다. 특파원들이 헬기를 타고 둘러본 유메시마는 ‘꿈의 섬’이란 뜻과 달리 아직 허허벌판이다. 엑스포 상징물은 지름 615m의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이 될 ‘링’인데 둥그런 윤곽을 드러냈을 뿐이다. 링 안쪽엔 ‘엑스포의 꽃’인 해외 각국의 전시장이 들어설 예정이나 텅 비어 있다. 현지 건설업체들이 원자재와 인건비가 급등했다며 건설 수주를 꺼린다. 엑스포 현장 건설비는 당초 예상의 2배인 2350억 엔(약 2조2920억 원)으로 불어났다.

▷오사카 현지에서는 지난해 초부터 “행사 개최 전 전시관 완공이 어려울 수 있다”고 호소했지만 중앙정부는 올여름에야 건설업체와 참가국들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느리게 움직였다. 이대로 가면 2820만 명이 방문해 18조 원의 경제효과를 내리라는 기대와 달리 역대 올림픽 중 가장 많이 쓰고 최악의 적자를 본 2021년 도쿄 올림픽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코로나로 연기돼 무관중으로 치러진 도쿄 올림픽은 계획했던 예산의 2배인 13조5000억 원이 들어 최소 7조 원의 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오사카 엑스포는 올림픽과는 다를 것이라는 낙관론도 여전하다. 엑스포 개최 기간은 6개월로 3주간 열리는 올림픽보다 길어 훨씬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가장 성공한 엑스포로 꼽히는 2010 상하이 엑스포는 7500만 명이 방문해 직접적 경제효과만 베이징 올림픽의 3.5배인 13조 원을 거두어 중국 국내총생산(GDP)이 2%포인트 높아졌다고 한다. 엑스포 이후 코로나 이전까지 연간 상하이 방문객은 엑스포 전보다 배로 늘어났고 외국인 투자도 15% 증가했다.

▷상하이 엑스포는 지역 행사가 아닌 국가 프로젝트였다. 중국 정부는 상하이 엑스포를 통해 중국 전체의 경제 성장을 이끌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개최지 선정 후 7년간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며 전력을 쏟았다. 공교롭게도 2030 엑스포 유치에 도전한 부산은 상하이의 자매 도시다. 부산 엑스포를 침체 일로의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회로 만들려면 ‘한국 엑스포’인 듯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전후 폐허 속에서 첨단 도시로 성장한 부산이 엑스포를 개최해 평화 속에서 인류 번영을 이끄는 기술의 경연장이 되길 응원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18 장례비 800만 원 남기고 떠난 모녀… 상속포기제도 알았더라면

 
 

빚에 시달린 모녀가 목숨을 끊는 비극이 16일 광주 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80대 노모 A 씨와 50대 딸 B 씨는 17층 집에서 투신했다. 이들은 “빚이 많아 너무 힘들다”는 유서를 남겼다. B 씨는 공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A 씨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으로 월 110만 원을 받고 있었다. 아파트도 B 씨 명의였다. 겉으로 보기엔 생활이 어려운 정도로 수입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2019년 사망한 A 씨 남편이 남긴 3억 원가량의 빚이었다. 그로 인해 모녀는 빚 독촉을 심하게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법상 상속받을 재산보다 빚이 많을 경우 상속의 포기나 한정승인을 택하면 빚을 더 갚지 않아도 된다. 한정승인은 물려받은 재산 내에서만 빚을 갚는 것이다. 상속 포기 등은 상속 개시를 알게 된 날로부터 3개월 내에 가정법원에 신고해야 한다. 기간 내 하지 않으면 ‘단순 승인’으로 자동 간주돼 재산과 채무를 모두 상속하게 된다. A, B 씨는 나중에야 상속 포기를 알게 됐으나 이미 신고 기한이 지난 후여서 계속 빚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빚 상속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별거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겐 큰 재앙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지난해 8월 어머니와 두 딸이 가난과 지병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은 ‘수원 세 모녀 사건’도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빚 상속 때문이었다. 그들은 2020년 숨진 남편이 오래전 사업 부도로 남긴 빚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 왔다. 그래서 동사무소에 신고한 주소와 다른 곳에 살면서 기초생활수급이나 긴급복지 혜택 등을 전혀 받지 않는 등 세상과 단절돼 살았다. 적어도 남편 사망 후 상속 포기를 했으면 빚 문제만큼은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이를 모르고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다.

▷미성년자들도 상속 빚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해 11월 민법 개정 이전만 해도 미성년자들도 성인과 마찬가지로 ‘3개월 내 신고’라는 상속 절차를 거쳐야 했다. 법적 대리인을 통해 절차를 밟지 못한 미성년자들은 사망한 부모나 조부모의 빚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졸지에 빚쟁이가 된 미성년자들은 사회생활을 하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언론의 문제제기 이후 정부와 국회는 성인이 되고 난 뒤 한정승인 등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키긴 했다.

▷광주 모녀는 유서와 함께 마지막 관리비 40만 원과 장례비 800만 원이 든 봉투를 남겼다. 끝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이 상속 포기라는 법 절차를 몰라 비극을 맞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부가 미성년자 상속제를 개선한 것처럼 취약계층의 빚 상속을 해결할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사망신고 시 동사무소에서 빚 상속에 대한 안내라도 충실히 해주면 비극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10-19 김치플레이션 빵플레이션 우유플레이션 설탕플레이션…

 
 

김치플레이션, 라면플레이션, 빵플레이션…. 생활물가가 치솟으면서 장바구니 품목에 ‘∼플레이션’을 붙인 신조어가 쏟아지고 있다. 가격이 급등하는 제품군에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붙인 표현들이다. 설탕과 우유, 소금 가격이 오른 것을 놓고는 영어 단어를 조합한 슈거플레이션, 밀크플레이션, 솔트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월급 빼고는 다 오른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니 무슨 품목으로 유사 신조어를 만들어도 어색하지 않다. 김치플레이션만 해도 올해는 유난하다. 배추 한 포기 값이 6600원으로 평년보다 13% 올랐고 고춧가루와 열무, 마늘 같은 원·부재료 값도 모두 올랐다. 생강의 가격 상승률은 68%가 넘는다. 국수 같은 면류나 햄버거로 부담 없이 한 끼를 때울 수 있었던 것도 옛말이다. 누들플레이션, 버거플레이션 등으로 직장인들의 지갑은 더 얇아진다. “점심 먹으러 나가기가 무섭다”는 하소연은 ‘런치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노량진 고시생들은 ‘컵밥플레이션’에 울상이다.

▷가격은 오르지 않았는데 더 비싸진 것들도 적잖다. 식품업체들이 재료 함량이나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 혹은 ‘스킴프플레이션’의 결과다. ‘줄어든다(shrink)’ ‘지나치게 아낀다(skimp)’와 인플레이션을 합친 조어로, 소비자들이 느끼지 못하게 슬쩍 값을 올리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교묘하다. 일부 참치캔과 분유통 용량, 만두 같은 가공식품 중량은 이미 10∼20g씩 줄어들었고 주스 과즙 함량도 낮아졌다. 해외 상황도 다르지 않아 프랑스 카르푸 매장에는 이런 제품들이 30종류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인플레이션은 코로나19 기간 각국의 경기부양책과 이로 인한 과잉 유동성, 가뭄 등 이상기후 여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커진 에너지 시장의 불안정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여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까지 벌어지면서 국제 유가마저 더 오를 조짐이다. ‘이란 참전’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유가가 배럴당 최대 15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는 충격적 전망도 나왔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내놓은 ‘글로벌 인플레이션 재점화 가능성’ 경고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폭발적인 물가 상승으로 국내 실질임금은 5개월 연속 하락세다. 실제로 손에 쥐는 월급은 계속 줄어드는데 물가상승률은 4%대에 재진입할 태세다. ‘소리 없는 도둑’이자 지갑을 갉아먹는 좀벌레라는 인플레이션이 심지어 끈적끈적해지고 있는 것이다.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경기에 쌓여가는 가계 부채, 고금리 부담까지 겹치면서 삶은 점점 팍팍해지는 중이다. 더 공격적으로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서민들의 허리는 휘다 못해 부러져 버릴지도 모른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20 현대차 중고차시장 본격 진출, 속임수·바가지 사라질까

 
 

한국의 소비자가 지난해 중고차 구매에 쓴 돈이 38조 원이다. 새 차를 사는 데 쓴 59조 원보다 적다. 하지만 거래량으로 따지면 중고차가 238만 대로 신차의 1.4배나 됐다. 그래도 중고차 시장 규모가 신차의 2배가 훌쩍 넘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작은 규모다. 중고차 시장에 나갔다가 바가지를 쓰거나, 두고두고 고장으로 속 썩을까 봐 겁내는 소비자가 많아서다.

▷현대자동차가 어제 국내 완성차업체 중 처음으로 ‘인증 중고차’ 시장에 진출했다. 자동차 제조업체가 자사 중고차를 사들여 진단·정비를 한 후 판매하는 차를 인증 중고차라고 한다. 수입차 업체 20여 곳은 이미 국내에서 인증 중고차 사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중소 중고차 업체들의 반발에 막혀 역차별을 받아 왔다. 작년에 정부가 중고차판매업을 ‘생계형 적합 업종’에 포함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현대차는 24일부터 현대차와 제네시스 브랜드의 인증 중고차를 판매한다. 두 브랜드는 작년 국내 중고차 거래의 38%를 차지했다.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차는 연식과 주행거리가 짧은 무사고 차량으로 판매 차량을 제한했다. 정밀 진단, 품질 개선, 검사, 인증 과정을 거쳐 품질을 높인 중고차다. 상품 검색, 비교부터 견적, 계약, 결제, 배송 모두 온라인에서 가능하다. 기아, 르노코리아, KG모빌리티의 인증 중고차 시장 진출도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신뢰성이 낮았던 한국 중고차 시장은 급속히 재편될 전망이다.

▷판매자는 차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알지만, 구매자는 결함을 알아채기 힘든 게 중고차 시장의 구조적 문제다. 한국에선 여기에 더해 주행거리 조작 차량, 침수 차량 등을 속여서 파는 사기성 거래가 자주 발생해 왔다. ‘중고차 사면서 뒤통수 안 맞는 법’과 같은 콘텐츠가 높은 조회수를 올리는 이유다. 그 해법으로 나온 게 제조사가 직접 참여해 품질을 보증하는 인증 중고차 제도다. 현대차는 중고차를 팔면서 1년간 2만 km 무상보증을 제공할 예정이다.

▷중고차 비즈니스는 금리에 민감한 일종의 ‘금융 산업’이다. 미국에선 코로나19 발생 초기 정부가 가계 지원금을 풀고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낮춘 데다, 대중교통 이용을 꺼리는 분위기까지 겹쳐 중고차 시장이 폭발적인 호황을 맞았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기준금리가 높아지고, 할부금융 대출금리가 10%를 크게 넘어서자 판매량이 줄고 가격도 급락해 심한 침체를 겪고 있다. 과도한 빚에 짓눌려 있는 한국의 가계, 청년들로선 중고차에 대한 신뢰도만큼 얼마나 합리적인 가격과 조건에 살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0-21(토) “가짜뉴스는 언론에 무례한, (정치인의) 음흉한 표현”

 
 

뉴스의 형식은 갖췄지만 ‘조작 정보’와 오보는 명확히 다르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WTOE5 TV라는 매체로 미국 지방 방송사의 하나처럼 보였다. SNS상에서 급속히 퍼져 갔지만 조작된 정보였다. 이런 방송사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멀쩡한 김일성이나 덩샤오핑(鄧小平)을 사망했다고 한 것은 오보로 분류된다. 정보 접근이 어려운 공산국가의 정보를 잘못 전해 들은 뒤 충분히 확인하지 못해 생긴 결과다.

▷정확한 이름, 정명(正名)을 쓰는 것은 본질 이해에 중요하다. 아서 그레그 설즈버거 뉴욕타임스 회장 겸 발행인은 정치인들이 자신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그제 서울대 강연에서 “우리 신문은 가짜뉴스라는 말을 안 쓴다”며 “언론에 무례한 표현이고, 굉장히 음흉한(insidious) 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잘못된 정보(misinformation)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의도적 조작 정보를 가짜뉴스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뉴스라는 외피를 입게 되면서 언론의 공신력이 훼손된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가짜와 뉴스는 같이 쓰는 자체가 형용 모순이란 뜻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뉴욕타임스를 인수한 옥스-설즈버거 가문의 6대손인 그는 2017년 발행인에 취임했고, 이후 가짜뉴스 논쟁을 피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집권한 후 뉴욕타임스 CNN 등 주류 언론의 비판적 기사를 “가짜뉴스이니 관심 두지 말라”는 식으로 깎아내리고 있었다. 트위터(현재의 X) 횟수만 2년 동안 600번이 넘었다. 트럼프는 1930년대 독일 나치가 자신들의 선전 선동과 다른 기사를 보도하면 뤼겐프레세(Lügenpresse·거짓 언론)라고 몰아세웠던 그 방식을 가져다 썼다.

▷설즈버거 회장은 강연에서 “잘못된 정보의 시대를 맞아 저널리즘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며 “언론에는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음모론과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는 현실 속에서 사실에 기반한 뉴스를 만드는 언론사의 영향력은 더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

▷“미래에는 온라인 콘텐츠의 90%를 인공지능(AI)이 만들게 되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더 모호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보듯이 의도적으로 만든 가짜 희생자 사진이나 폭발물 영상물이 생사를 가르는 사안에서 판단을 그르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설즈버거 회장은 “두 번 세 번 사실관계를 크로스 체크하고, (뉴스를 가진 힘 센 사람을 향해) 어렵고 불편한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언론이 자기 자리를 지켜줄 때 오해와 혼돈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0-23(월) 초등 3학년이 2학년에게 전치 9주 상해가 사랑의 매라니

 
 

초등학교 3학년 여아가 2학년 여아를 도대체 어떻게 때리면 전치 9주의 상해가 나올 수 있을지 폭행 상황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안와골절은 돼야 전치 9주가 나온다. 화장실에서 주먹 리코더 등으로 때려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마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막 유치원을 나온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부모의 걱정은 얼마나 클지 그것부터 걱정된다.

▷가해자 여아의 어머니는 딸의 폭행을 일종의 ‘사랑의 매’로 언급했다고 한다. 부모나 교사가 훈육 과정에서 자식이나 학생을 체벌하는 것을 과거 사랑의 매라고 부를 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 2학년을 때리는 걸 사랑의 매라고 하는 게 제정신일까. 그 집안은 사랑의 매로 전치 9주가 되도록 때리기도 하는가. 전치 9주가 아니라 전치 0주라도 그렇게 부를 수 없다. 딸의 폭행으로 경황이 없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다.

▷가해자 여아의 어머니는 딸의 학교 출석이 정지된 날 SNS 프로필 사진을 당시 대통령 의전비서관이었던 남편 김승희 씨와 윤석열 대통령이 같이 있는 사진으로 바꿨다. 김 씨는 이벤트 대행회사 대표로 재직하던 중 김건희 여사와 어느 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같이한 인연으로 김 여사를 보좌하다가 의전비서관까지 됐다. 딸의 학교 출석이 정지된 날 남편의 위세를 과시할 생각이 들었을 정도라면 웬만한 상황에서는 경황이 없고 할 사람도 아닌 듯하다.

▷대전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얼마 전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학부모가 SNS로 입장문을 냈는데 “아들 손이 친구 뺨에 맞았다”며 물리적 움직임을 설명하듯 썼다가 지탄을 받고 삭제했다. 자세히 읽어 보면 ‘같은 반 친구와 놀다가 손이 친구 뺨에 맞았다’고 쓴 것이긴 하다. 의도치 않은 일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설혹 그렇더라도 용서를 구할 쪽은 ‘친구 뺨에 가 맞은 손’을 가진 아들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는데도 아들의 반성을 요구한 교사를 끝까지 괴롭힌 모양이다.

▷세종의 한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교육부 사무관이 담임교사에게 자신의 아이는 ‘왕의 DNA를 가졌다’고 언급했다가 자신이 욕먹은 건 물론이고 직장까지 욕먹였다. ‘듣기 좋게 돌려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는 그 다음 말로 충분했을 텐데 ‘왕의 DNA’를 내세웠다. 터무니없는 표현에 담긴 사고는 서로 통해서 ‘왕의 DNA’를 가진 아이가 만약 친구를 폭행하면 ‘사랑의 매’ 그 이상의 말도 나올 듯하다. 젊은 학부모 세대의 사고가 일부이긴 하겠지만 지독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 되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24 빈대 ‘40년 만의 습격’… 佛·英 이어 한국도

 
 

매캐한 흰색 연기를 내뿜는 방역차가 골목을 누비던 시절이 있었다. 벼룩, 머릿니와 함께 최악의 3대 실내 해충으로 꼽히는 빈대를 퇴치하기 위해 1960년대에 전국 곳곳에 DDT 살충제가 살포됐다. 그 유해성이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때, 어린이들은 신기한 듯 ‘방구차’를 따라다녔다. 매번 손으로 눌러 잡아도 수시로 빈대가 출몰했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는 등 관련 속담이 10여 개에 이를 정도로 흔했던 게 빈대였다.

▷독한 살충제와 위생환경 개선 등으로 이후 40여 년간 사라지다시피 했던 빈대가 다시 국내에 나타났다. 학교 기숙사와 찜질방, 고시원 등지에서 빈대가 나왔다는 신고가 잇따르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이 사용했거나 외국인이 자주 이용하는 장소라는 점으로 볼 때 빈대가 외부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해외 관광객의 유입 증가, 일부 숙박업소의 위생 문제, 살충제에 대한 빈대의 내성 강화 등이 이유로 거론된다.

▷사람이나 동물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빈대는 매트리스나 소파 같은 곳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나와 활동하는 특성상 영어로는 ‘베드버그(bedbug)’로 불린다. 흡혈량이 모기의 7∼10배에 이른다는 빈대는 물렸을 경우 새빨간 피부 발진과 가려움증, 심해질 경우 고열을 유발한다. ‘잠든 사이 언제 내 몸 위로 올라와서 피를 빨아먹을지 모른다’는 심리적 불안과 혐오감은 더 문제다. 빈대가 ‘국가적 정신병’을 유발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공중보건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미 빈대의 습격이 거세다. 프랑스에서는 최근 영화관과 기차 같은 대중시설은 물론 학교 도서관 등에서 잇따라 빈대가 발견되면서 비상이 걸렸다. 영국에서도 지하철 좌석 틈새에서 꿈틀대는 빈대 동영상이 퍼지면서 시민들이 질겁했다. 후진국형 해충으로 알려진 빈대가 파리나 런던 등 화려한 도시에서 다시 기승을 부리는 것은 선진국에는 적잖은 굴욕이다. 도시 당국들은 방역 활동을 강화하고 탐지견까지 투입하며 ‘빈대와의 전쟁’에 나선 상태다.

▷100개에서 250개의 알을 낳는다는 빈대는 1억 년 넘게 지구에 존재해온 끈질긴 생존력을 갖고 있다. 완전히 없애기가 쉽지 않아 한 번 옮겨져 번식하기 시작하면 사람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퍼져나간다. 빈대 확산을 해외 이민자들 탓으로 돌리는 일각의 인종주의적 시각은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2010년대에는 미국 뉴욕 등지의 고급호텔에서 빈대에게 물렸다는 투숙객들이 1000만 달러대 소송을 내기도 했다. “빈대 습격의 원인은 세계화”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게 돌아온 빈대는 더 강해지고 집요해졌다. 박멸이 시급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25 애물단지 된 교육청의 무상 보급 태블릿PC

 
 

서울 마포구 중학교 2학년 딸을 둔 A 씨는 지난해 학교에서 무상으로 나눠 준 태블릿PC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집에서 태블릿을 끼고 사는 딸이 못마땅하지만 학습용이라고 하니 휴대전화나 컴퓨터처럼 쓰지 못하게 하는 게 쉽지 않아서다. 유해 앱, 유해 동영상 등은 차단된다고 하지만 유튜브나 웹툰을 보는 것만 해도 신경 쓰인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552억 원의 예산을 들여 중학교 1학년생 7만여 명에게 태블릿PC ‘디벗’을 나눠줄 예정이다. 디벗은 ‘디지털’과 ‘벗(친구)’의 합성어다. 하지만 A 씨와 같은 걱정을 하는 학부모들의 반발이 적지 않아 배포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달 말까지 ‘학생 개인정보 활용 동의서’를 받고 이달 안에 모두 배포할 계획이었으나 90% 이상의 동의서를 받아 배포가 이뤄지고 있는 곳은 지난주 기준으로 전체의 3%에 불과한 실정이다.

▷총 3000억 원 넘는 예산이 책정된 디벗 배포는 ‘1인 1스마트기기’의 교육 환경을 조성하겠다며 실시하는 정책이다. 내년 2학기에는 고교 1, 2학년생, 2025년 1학기에는 초교 3, 4학년생에게 디벗을 지급할 계획이다. 교육청은 원래 디벗을 집에 가져가 ‘하교 후 교육’에도 쓰도록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불만이 커지자 시교육청은 24일 방침을 바꿨다. 초등생의 경우 학교에 놔두도록 하고, 중고생은 학교와 학부모 등의 협의를 통해 집에 가져갈지 정하도록 한 것. 하지만 하교 후 학습이 어려워진다면 원래 정책이 반쪽짜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서울뿐 아니라 인천 광주 등에서도 수백억 원을 들여 태블릿PC나 노트북을 무상으로 나눠줬다. 남아도는 예산을 주체할 수 없는 시도교육청의 선심 쓰기라는 지적이 많았다. 내국세의 20.79%를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자동 배정받는 시도교육청은 예산이 늘 풍족하다 못해 남아돈다. 초중고 학생 수는 2010년에 비해 200만 명이 줄었는데 교부금은 2배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태블릿PC를 공짜로 나눠주는 것 외에도 건물 도색비, 입학 준비금, 교육 회복 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예산을 물 쓰듯 썼다.

▷10대 자녀를 둔 부모치고 휴대전화 등 디지털기기 사용 문제로 갈등을 겪지 않은 경우를 찾기 어렵다. 교육청은 디지털기기를 무료로 나눠주면 당연히 받겠지 하는 안일한 인식을 가졌겠지만 자녀와 ‘디지털 불화’를 겪는 학부모로선 달가울 리가 없다. 외국도 집중력과 문해력 저하를 이유로 학교에서 디지털기기 사용을 금지하는 나라가 느는 추세다. 우리도 과연 디지털기기를 나눠주는 것이 디지털 교육의 첫걸음인지, 디벗 같은 정책이 예산 낭비의 소지는 없는지 근본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10-26 中에 삼성반도체 복제공장이?

 
 

애플의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폭스콘이 2018년 10조 원 이상을 투자해 중국 주하이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국내외 반도체 관련 기업 60여 곳을 현지로 초청해 사업 설명회까지 열었다. 이 과정에서 공장 설립을 돕는 컨설팅업체가 ‘진세미’라는 게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만 28년간 일하며 ‘반도체 공정(工程)의 달인’으로 불리던 최모 씨가 2015년 싱가포르에 설립한 회사였다.

▷최 씨는 18년 몸담은 삼성전자에서 한 번 타기도 힘들다는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세 번이나 탔다. 2001년 옮겨간 하이닉스에선 빚더미 애물단지 회사를 세계 D램 2위 업체로 끌어올리며 사장 후보까지 올랐다. 국내 반도체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탑산업훈장도 받았다. 그런 그가 중국, 대만 등 해외에서 컨설팅을 해주며 현지 반도체 공장 가동에 기여한다는 소식에 퇴직한 고급 인력을 우리가 활용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다.

▷돌연 최 씨의 구속 소식이 들려온 건 올 6월이다. 2018년 중국 시안의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이 공장을 본뜬 ‘복제 공장’을 지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공장 BED(반도체 클린룸 최적화 기술), 공정 배치도, 설계 도면 등을 대거 빼돌렸다고 한다. 최소 3000억 원, 최대 수조 원대 가치가 있는 핵심 기술들이다. K반도체의 산증인이 산업 스파이가 됐다는 소식에 산업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복제 공장을 짓기 위해 최 씨는 삼성, 하이닉스 출신 등 반도체 엔지니어 200여 명을 영입했다. 기존보다 2배 많은 연봉은 물론이고 체류비, 자녀 교육비 등 파격 조건을 제시하며 ‘친정 식구’들을 데려온 것이다. 검찰은 최 씨가 이들에게 삼성전자 자료를 입수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봤다. BED는 삼성전자를 퇴사한 직원이 근무 당시 훔쳤고, 설계 도면은 삼성 시안 공장의 감리회사 직원이 빼돌렸다.

▷시안 공장에 8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던 폭스콘이 발을 빼면서 공장 설립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최 씨는 청두로 눈을 돌렸다. 2020년 청두시에서 4600억 원을 투자받아 반도체 합작회사를 만들고 공장까지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 개발한 20나노급 D램 반도체에 삼성의 핵심 기술이 활용된 정황을 최근 경찰이 포착했다고 한다. 다행히 최 씨가 구속되면서 양산은 못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삼성의 ‘준(準)복제 공장’쯤은 생긴 셈이다. 넋 놓고 있다가는 중국에 첨단 기술과 인력들을 다 빼앗길 판이다. 산업 스파이를 간첩죄에 준해 엄벌해야 하는 이유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0-27 “노인 평균 연금소득 월 60만 원”… 연금격차도 심각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자 10명 중 9명은 재작년 기준으로 1개 이상의 연금을 받았다. 하지만 국민연금, 기초연금과 사적연금을 통틀어도 1인당 연금소득은 월 60만 원에 불과했다. 올해 1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는 124만6700원, 2인 가구는 207만700원. 부부가 동시에 연금을 받아도 어디서라도 소득을 보충하지 않으면 최저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은퇴한 부부가 여유롭게 여행을 다니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인생 2막’은 중년층의 로망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좀처럼 실현하기 힘든 꿈이다. 평생 번 돈 대부분을 자녀교육 등에 써버린 바람에 은퇴 후 삶을 즐길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이들이 많다. 한국 노인의 빈곤율은 2021년 37.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다. 그러다 보니 배우자가 있는 60세 이상 가구 10쌍 중 3쌍은 남편과 아내가 맞벌이로 일한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게 연금 등을 통한 노후 준비다.

▷통계청이 어제 내놓은 ‘포괄적 연금통계’에 따르면 한국 노인의 1인당 연금소득은 올해 처음 60만 원에 턱걸이했다. 매년 4만 원 안팎씩 늘어나는 추세다. 연금 수급자 비율은 남성이 여성보다 높고, 수급액도 남성이 78만1000원으로 44만7000원인 여성보다 많다. 남성이 직장생활을 더 많이, 오래한 영향이다. 그 결과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평균 6년을 더 살지만 여성 1인 가구의 빈곤율은 65.1%로 남성의 2배가 넘는다.

▷더 큰 문제는 은퇴 후 연금소득 격차까지 크다는 점이다. 최상위 5%의 수급액은 월 200만 원 이상인데, 최하위 21%는 25만 원 미만이다. 집을 가진 노인의 한 달 수령액은 76만2000원으로 47만2000원을 받는 무주택자보다 훨씬 많다. 무주택자의 노후 주거비 부담이 더 큰데 연금소득은 적은 것이다. 집이 있다고 다 편안한 것도 아니다. 이달부터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집값이 공시가 9억 원에서 12억 원으로 높아지자 집을 담보로 노후생활 자금을 마련하려는 이들이 평소보다 40%가량 급증했다.

▷국민연금만 보면 평균 월 수급액이 38만5000원으로 여전히 ‘용돈연금’ 수준이다. 가입 기간이 짧은 노인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니 정부가 제공하는 월 30만 원짜리 쓰레기 줍기, 산불 감시 ‘세금 알바’에 노인들이 몰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60세 이상 고용률은 지난달 47%로 역대 최고를 찍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일터를 못 떠나는 빈곤층 노인들을 더 두텁게 지원할 수 있도록 연금제도를 서둘러 손봐야 하는 이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0-28(토) ‘배니티 페어’에서 길을 잃은 남현희 선수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의 7가지 죄악을 거론하는데 그중 하나가 허영(vanity)이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가 허영이란 도시의 휘황찬란한 시장(fair)에 들어섰다가 인간의 탐심을 자극하는 물건들의 유혹에 시달리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배니티 페어라는 말이 나왔다. 19세기 영국 작가 윌리엄 새커리의 소설 제목이 되고 20세기에는 패션과 정치 등 상류사회의 관심거리를 다룬 미국 유명 잡지의 이름이 됐다.

▷전 국가대표 펜싱 선수 남현희 씨가 재벌 3세를 사칭한 사기극에 말려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야권에서는 김건희 여사의 측근이었던 김승희 전 의전비서관 딸의 학폭 의혹을 뒤엎으려고 검찰이 유명 연예인 이선균과 지드래곤의 마약 의혹을 흘렸다고 논란을 삼고 있지만 정작 요 며칠 사이 압도적 관심을 끈 건 남 씨와 전청조 씨의 결혼 발표 인터뷰 이후 터진 두 사람의 스토리다.

▷전 씨는 남 씨와의 첫 만남에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은행 앱(아마도 가짜 앱)을 열어 공인인증까지 해가며 은행 잔액으로 0이 몇 개인지 세기도 힘든 51조 원을 보여줬다. 롯데타워의 고급 레지던스 아파트 시그니엘에도 들어와 같이 살도록 했다. 한번은 전 씨가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같이 갔더니 기자(실은 기자 대행 아르바이트)가 “대한민국에서 자산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라고 물었다. 허영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속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남 씨는 전 씨와 만나면서 임신이 됐다. 실은 임신은 아니고 전 씨가 준 개봉된 임신 테스트기로 검사해 보니 두 줄(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남 씨 자신이 확인차 구입해 검사한 임신 테스트기로는 한 줄이 나왔다. 전 씨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사실을 언제 알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성전환 남성이 과연 여성을 임신을 시킬 수 있는지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혼하기로 직진한 이유가 무엇일까 묻게 된다.

▷남 씨는 국가대표 입소훈련 때 훈련소를 빠져나와 쌍꺼풀 수술을 했다가 징계를 받았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번 사건만 없었어도 작은 체구로도 뛰어난 펜싱 실력을 보여줬고 이혼해서도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그에게 박수를 보냈을 텐데 ‘허영의 시장’에 들어섰다가 희대의 사기꾼을 만난 듯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 씨가 남 씨의 이름을 이용해 이미 많은 사기성 투자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래도 막판에 국민들이 SNS로 이런저런 제보를 해서 더 험한 꼴을 당할 뻔한 남 씨를 구한 셈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30(월) “개미 마음 이해”… 이번엔 ‘공매도 전면 금지’ 논의 급물살

 

“이런 식이니 항상 개미들만 돈을 잃지….” 의심은 사실이었다. 이달 15일 금융감독원이 불법 공매도를 일삼은 글로벌 투자은행(IB) 2곳을 처음 적발했다고 밝히자 개인투자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IB들은 주식을 빌리지도 않고 미리 팔아버리는 ‘무차입 공매도’를 장기간 관행적으로 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적발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금융당국은 판단했다. 그만큼 한국 자본시장을 우습게 본 것이다.

▷공매도에 대한 금융당국의 시각이 바뀐 건 이때부터다. 한시적으로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2020년 공매도를 전면 금지했다가 2021년 5월부터 코스피200과 코스닥150 종목에 한해 허용한 상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다시 원점에서 공매도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했다.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장을 신뢰하지 않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이해하게 됐다”고도 했다. 11일 국감에서 “(이미) 개인투자자들이 요청하는 대로 다 해드렸다”고 말한 것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개인투자자들은 공매도 세력이 주가 하락을 부추긴다며 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기관의 공매도 비중은 98%에 달해 공매도 제도는 ‘개미들의 무덤’으로도 불린다. 최근 10년간 불법 공매도의 타깃이 된 종목만 1212개, 거래 주식은 1억5000만 주가 넘지만 형사처벌은 단 한 건도 받지 않았다. 이달 초 한 개인투자자가 공매도 제도 개선을 내용으로 국회 국민청원을 제출했는데, 8일 만에 5만 명 이상이 동의해 요건을 충족했다.

▷그간 금융당국은 공매도 제도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전면 허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국내 증시의 선진국 지수 편입을 추진하며 연내 공매도 전면 재개를 저울질하기도 했었다. 4월 라덕연 일당의 주가 조작과 최근 영풍제지 주가 폭락 사태 등이 잇따르자 일각에선 공매도를 전면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공매도가 가능했다면 작전세력이 터무니없이 주가를 올리진 못했을 거란 주장이다.

▷하지만 공매도를 허용하기에 앞서 외국인·기관에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부터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현재 개인은 공매도 상환 기간이 90일로 제한돼 있지만 외국인과 기관은 사실상 무제한이다. 담보 비율도 개인은 120%인데 기관과 외국인은 105%다. 공매도 거래 기록이 전산화되지 않고 수기 등으로 주먹구구로 이뤄지는 것 역시 문제다. 불법 공매도에 대한 처벌 수위를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많다. 이제는 한국 주식시장이 ‘글로벌 공매도 맛집’, ‘외국인 현금인출기’ 같은 부끄러운 이름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0-31(화) “美 점잖게 이끌 지도자를”… 트럼프 때리며 경선 하차한 펜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를 뽑는 경선에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이 지난 주말 중도 하차를 선언했다. 그는 사퇴 연설에서 “미국을 점잖게(with civility) 이끌 지도자를 뽑아 달라”고 호소했다. 공화당 경선 1위를 달리는 옛 상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저격한 것이자, 팬덤 정치에 일그러진 미국을 건드린 말이었다. 부통령 자격으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에 왔고,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과 기념사진을 찍지 않기 위해 “일부러 지각했다”고 회고록에 썼던 그 펜스다.

▷점잖음, 정중함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말(civility)은 펜스가 즐겨 쓰지만, 미국 SNS 정치에선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한 표현이다. 펜스는 이날 “우리 본성 안의 더 좋은 천사에 호소하는 정치인, 미국의 승리만이 아니라 점잖고 정중하게 이끌 정치인에게 나라를 맡기자”고 했다. 남북전쟁 발발 직전 미국인에게 외치던 링컨 대통령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펜스의 눈에는 갈등 유발형 트럼프가 50%대 지지율로 앞서가는 현실이 남북전쟁 전야처럼 비쳤을지 모르겠다.

▷펜스의 트럼프 비판은 배신자 논란을 일으키곤 한다. 인디애나주에서 하원의원 12년, 주지사 4년을 지낸 펜스는 2016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받았다. 뉴욕시 출신으로 여성 편력이 심한 부동산 재벌 트럼프 후보로선 그가 필요했다. “아내 캐런 외에는 여성과 일대일로 식사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펜스 규칙’을 지킨 그는 잘 알려진 신앙인이자 신중함으로 트럼프의 빈 곳을 채울 인물이었다. 변방의 펜스가 누구 덕분에 전국적 인물이 됐는데 나를 비판하느냐는 것이 트럼프가 심어놓은 배신자 프레임이다.

▷결정적인 것은 2020년 트럼프의 대선 패배 직후 벌어졌다. 트럼프는 “부정선거였고,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며 부통령이자 당연직 상원의장인 펜스에게 의회의 선거 결과 승인을 막으라고 요구했다. 펜스는 거절하면서 “당신이 헌법과 민주주의 위에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또 이 과정을 특별검사 앞에 진술했다. 반헌법적 요구라면 ‘정중하고도 당당하게’ 거절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다. 하지만 펜스는 배신자 덫에 걸려 지지율이 4% 선을 맴돌았다.

▷펜스가 점잖은 리더십을 지녔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SNS에서 소비되는 ‘재미있고 자극적인’ 짧은 동영상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에 “바이든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 엉터리 주장을 믿는 공화당원이 80%대에 이른다는 몇몇 여론조사는 펜스가 설 자리를 더 좁게 만들었다. 그의 사퇴 소식에 공화당 후보들은 “원칙과 신뢰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만이 “정치인들은 매우 불충(disloyal)할 수 있다”고 깎아내렸다. 떠나고 남는 두 후보의 극명한 대비는 옳고 그름이 뒤엉킨 요즘 미국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