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조선일보) 2023-10/ 10.03(화) 100세의 선물 ‘청려장’ 지팡이 - 10.31(화) 땅굴 작전
만물상(조선일보) 2023-10/
10.03(화) 100세의 선물 ‘청려장’ 지팡이

▲일러스트=이철원
어제는 ‘노인의 날’이었다. 해마다 이날이면 복지부가 그해 100세를 맞는 어르신들께 무병장수를 빌며 대통령 명의의 ‘청려장(靑藜杖)’ 지팡이를 선물해 왔다. 올해 청려장을 받은 주인공은 2623명이었다. 할머니들이 2073명으로, 남성보다 서너 곱 많다. 주민등록상으로 100세 되신 분은 물론이고, 이와 무관하게 해당 지자체에서 100세가 틀림없다고 확인한 분도 포함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그 숫자가 곱절 이상 늘었다.
▶청려장은 명아주라는 잡초로 만든다. 한해살이풀인데도 잘 말리면 줄기와 뿌리가 단단하기가 쇠지팡이 저리 가라다. 요즘이 한창 명아주를 거둬들일 때라는데, 어른 키보다 한 자 넘게 자란 명아주를 뿌리째 뽑아 다듬은 후 솥에 찌고 껍질을 벗겨 그늘에 오랫동안 말린다. 그러곤 사포질, 기름 먹이기, 옻칠 처럼 갖은 정성을 들여 가공하면 마치 옹이 진 고목으로 만든 것처럼 멋스럽게 모양새가 뒤틀린 지팡이가 된다. 망치로 부수려 해도 금도 안 갈 만큼 굳은데도 겨우 250~300g 정도라 하니 힘없는 노인도 가볍게 들 수 있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작품 ‘모귀(暮歸)’에도 청려장이 나온다. 그는 ‘내일도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바라보겠네’라고 읊고 있는데, ‘청려장’에서 한자 ‘려(藜)’가 명아주란 뜻이다. 신라 시대 김유신이 나이를 핑계 삼아 은퇴하겠다고 하자 임금이 그를 말리면서 이 지팡이를 내렸다고 한다. 경북 안동에는 퇴계가 짚던 청려장 유물이 있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에서 받은 선물도 청려장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아비가 쉰 살이 되면 자식이 청려장을 바쳤는데 그것이 가장(家杖)이요, 예순이 됐을 때 마을 사람들이 선사하면 향장(鄕杖)이며, 일흔이 됐을 때 나라에서 주는 것을 국장(國杖), 여든에 왕이 하사하면 조장(朝杖)이라고 했다. 그때 청려장은 쇠약해진 몸을 의탁하라는 의미를 넘어서 집안·마을·국가를 위해 헌신해 온 생애를 공경한다는 뜻이 더 깊었을 것이다.
▶이렇듯 청려장 지팡이에는 노인의 지혜와 자존감이 공동체를 지켜내는 힘이라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최근 정치권에선 노인 공경은커녕 “살날이 짧은” 노인에게 참정권을 제한하자는 막말까지 횡행했는데, 단식 중이던 그 당 대표가 엊그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뜨악했다. 청려장 전통이 무색할 만큼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중 최악이다. 추석 연휴와 겹친 ‘노인의 날’을 보내면서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청려장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김광일 논설위원
10.04 성급한 세리머니

▲일러스트=이철원
미국에서 몇 해 전 3000m 달리기에 출전한 선수가 1위로 달리다가 결승선 수십m 전부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세리머니를 했다. 10m 넘게 뒤처져 달리던 다른 선수가 이걸 보고 전력질주해 결승선 2m 앞에서 추월했고 우승을 빼앗긴 선수는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떨궜다. 유튜브엔 성급한 세리머니를 펼쳤다가 낭패를 겪은 경기 동영상이 돌아다닌다. 축구 페널티킥이 골대를 맞고 튕겨나가자 골키퍼가 기쁨의 세리머니를 펼치며 골문을 비운다. 그런데 튕겨나온 공이 회전을 먹어 빈 골문으로 들어가고 이번엔 실축한 줄 알았던 선수가 환호한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롤러 스케이팅 남자 스피드 3000m 계주 결승에 나선 한국팀이 다 잡았던 금메달을 놓쳤다. 레이스 내내 맨 앞에서 달렸지만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선두를 내줬다. 그 차이가 0.01초였다. 마지막 주자가 결승선 통과 직전 두 팔 들어 금메달 세리머니를 미리 한 게 화근이었다. 역전 우승을 이룬 대만 선수는 “상대가 축하하는 동안 여전히 내가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호주전 역전패 단초도 성급한 세리머니였다. 2루타를 친 우리 선수가 더그아웃을 향해 손을 번쩍 드는 자축 세리머니를 하다가 베이스에서 발이 떨어졌다. 호주 2루수가 기다렸다는 듯 태그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호주 선수는 “어쩌면 아웃을 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순간에 최선을 다한 것이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를 지낸 공격수도 유럽 리그에서 비슷한 실수를 했다. 시즌 첫 골을 터뜨리고 공중제비를 돌다 무릎을 다쳐 교체됐고 공격수를 잃은 팀은 역전패했다.
▶많은 선수가 우승의 순간을 그리며 세리머니를 연습한다. 세리머니를 연습하며 땀과 고통에 맞서는 힘을 얻기도 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이용대가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금메달 확정한 뒤 카메라를 보며 한 윙크 세리머니는 지금도 많은 국민 기억에 멋진 세리머니로 남아 있다.
▶‘세리머니’의 매력은 멋진 제스처가 아니다. 그 직전까지 선수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에너지의 관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작에 관중은 절로 환호하게 된다. 피니시라인을 깨부수듯 치고 들어온 스프린터가 활짝 가슴을 펴며 환호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최선을 다한 뒤 받아든 결과를 자축하는 세리머니라면 국민도 함께 축하해 줄 것이다.
10.05 국가 스포츠 폭력단

▲북한 남자축구 대표팀이 항저우 아시안게임 8강전에서 일본에 패한 뒤 주심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있다. 2023.10.1/AP 연합뉴스
영화·드라마에 나오는 악당 캐릭터를 빌런(villain)이라 한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선 북한이 빌런이다. 그 빌런의 역사가 북의 올림픽 첫 출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뮌헨 대회 50m 소총에서 북에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리호준은 소감을 묻자 “미제의 심장을 보고 쐈다”고 했다. 세계 스포츠계가 충격을 받았다.

▲일러스트=이철원
▶스포츠 경기에서 흥분해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는 있지만 북한 경우는 상습적이다. 폭력을 저질러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되지도 않는 것 같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북한 축구팀은 준결승전에서 패하자 심판을 집단 폭행했다. 심판 머리에 피가 낭자했다. 방콕 대회에선 북한 남자 농구선수가 심판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려 흔드는 장면이 생중계되기도 했다.
▶북한 스포츠의 폭력성은 평양에서 극대화된다. 외국 팀에 진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승부에 폭력도 이용한다. 2011년 평양에서 북한과 겨룬 일본 축구대표팀은 경찰 감시 등 주위를 둘러싼 공포 분위기에 질려 혼자 자는 것도 겁난다며 조를 짜 객실을 함께 썼다. 경기에 나선 일본 선수들은 거친 태클을 당하며 다치지 않는 데 급급했다. 2019년 평양 원정 경기를 무관중 무중계로 치르고 돌아온 손흥민도 “안 다치고 온 것만으로 큰 수확”이라고 했다. 우리 선수들은 북한 경찰 3개 조가 30m 간격으로 배치된 숙소에 사실상 격리됐다. 가져간 고기는 빼앗겼고 김과 김치만 먹었다. 북한 관중의 폭력성도 선수 못지않다. 2006년 월드컵 예선 평양 경기에서 북한이 이란에 패배하자 평양 관중 수만 명이 이란 선수들을 경기장 밖에 못 나가 게 1시간이나 막아섰다. 이란 선수단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지난달 30일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축구 8강전 한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우리나라를 '괴뢰'로 표기한 경기 장면을 2일 보도했다./조선중앙TV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축구 남북 대결을 중계하던 북한 방송이 우리 팀을 ‘괴뢰’라고 표기했다. 중계까지 폭력적이다. 남자 축구 8강전에서 진 북한 선수가 일본 스태프를 주먹으로 위협했다. 일본 신문은 ‘북한 선수단의 주요 타깃은 한국과 일본’이라고 했다.
▶코로나로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던 북한 스포츠가 돌아오며 그들의 폭력적 행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더 심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한말 일본인이 한반도를 정탐하고 쓴 ‘조선잡기’는 조선을 ‘우물 안 개구리’라고 했다. 지금 북은 그 조선 시대 폐쇄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북에서 스포츠가 김씨 왕조를 찬양하는 수단이 됐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데 실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결국 남는 것은 폭력이다.
10.06 눈물의 파독 60년

▲일러스트=이철원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차관(借款)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할 때 고민 중의 하나는 비행기 편이었다. 나라 살림이 전 세계에서 꼴찌에 가까웠기에 독일까지 갈 비행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서독 정부에 부탁해 서울로 날아온 루프트한자기(機)는 박 대통령 일행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홍콩·방콕·뉴델리·로마 등을 거치며 일반 승객들을 태웠다가 내리기를 반복한 후에야 서독 상공에 들어섰다. 꼬박 28시간이 걸렸다.
▶한국과 서독은 1960년대 들어 이색적인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1년 전에 시작된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파견은 독일 사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경제적인 이유로 서독에 간 근로자들은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했다. “독일 막장은 지하 1000m까지 파고 들어간다. 온도는 최고 38도. 땀이 질퍽해져 양말을 7~8차례 짜야 하루가 끝났다.”(파독 광부 김태우씨) 한국 간호사들은 독일인들이 꺼리는 장애인 돌보기, 야근을 도맡아 했다. 일부는 시체 처리도 군말 없이 했다고 한다.
▶독일 방문 중 파독 근로자를 만난 육영수 여사가 눈물을 흘리는 영상이 남아 있다.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은 애국가를 핑계 삼아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흐느끼게 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이들 앞에서 다짐했다.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파독 근로자들을 사실상의 담보로 서독 정부로부터 1억5900만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광부 8000명, 간호사·간호조무사 1만1000명이 국내로 송금한 돈과 함께 고속도로, 철도를 깔고 공장을 세웠다.
▶독일에 자주 가본 이들은 안다. 2만명에 가까운 파독 근로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놓았는지를. 지난해 베를린에서 열린 한독 포럼에서도 독일 측 참석자들이 파독 근로자들의 근면함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올해 수교 140주년을 맞은 한독 관계의 근간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취임식에 처음으로 파독 근로자를 초청했다. 정부 공식 초청으로 고국 땅을 밟은 분들은 감격에 겨워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독일 파견 근로 60주년 기념식에서 “여러분의 삶이 곧 우리 현대사”라고 했다. “약 2만명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보내온 외화를 종잣돈 삼아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고 했다. 우리는 그때 그분들의 눈물을 기억하자. ‘코리안 드림’을 만들려고 오는 외국 노동자들도 좀 더 따뜻하게 맞았으면 한다.
10.07(토) 6·4 숫자만 봐도 기겁하는 중국

▲지난 1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100m 허들 결승에서 1·2위로 골인한 중국 린위웨이(왼쪽) 선수와 우옌니 선수가 포옹하고 있다. 각각 6번과 4번의 번호를 달고 있어 '6·4 천안문 사건'을 연상시킨다. - CCTV 갈무리

▲일러스트=양진경
지난해 6월 3일 밤 팔로어가 1억명 가까운 중국 인플루언서가 아이스크림 홍보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가 아이스크림을 층층이 쌓고 옆에 둥근 과자를 붙인 다음 맨 위에 초코스틱을 비스듬히 꽂자 우연히 탱크 비슷한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갑자기 방송이 끊겼다. 천안문 사태 기념일(6월 4일) 전야에 중국 당국이 민감해진 탓일 것이다. 당시 한 시민이 탱크 부대를 가로막은 일이 천안문 사태의 상징이 됐다.
▶중국 당국은 특정 IP와 검색어를 차단하는 강력한 인터넷 통제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른바 ‘만리 방화벽(Great Firewall)’이다. 천안문 외에도 티베트, 대만, 신장위구르, 남중국해, 파룬궁, 홍콩 시위 같은 관련어가 중국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말이다. 곰돌이 푸도 검열 대상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을 풍자할 때 자주 쓰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2011년 아랍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나자 ‘재스민’ 등을 차단하면서 꽃집에서 재스민 꽃도 못 팔게 했다.
▶지난 1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육상 100m 허들 결승전 직후 두 중국 선수가 포옹하는 사진이 사라질 때도 만리 방화벽이 가동했을 것이다. 금메달을 딴 선수가 은메달을 딴 동료를 포옹하는 사진이 중국중앙TV 위챗 계정에 실렸다가 1시간 만에 사라졌다. 포옹할 당시 두 선수 유니폼 속 숫자 ‘6′과 ‘4′가 나란히 붙으면서 우연히 천안문 사태 기념일인 ‘6·4′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부 중국 네티즌은 당국 검열을 피하려고 다양한 창의적 방법을 쓰고 있다. 6월 4일을 변형해 ‘5월 35일’이라고 쓰거나 로마 숫자 표기로 ‘VIIV’로 쓰는 식이다. 백지(白紙)도 검열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20년 홍콩에서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가 일어났을 때 백지가 등장했고, 지난해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코로나 봉쇄 항의 때도 시위대는 백지를 들었다. 곰돌이 푸가 손에 든 백지를 보면서 어찌할 바 모르는 창작물도 등장했다. 백지의 의미를 곰돌이 푸만 모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당국의 검열이 뜻밖 효과를 내기도 한다. 천안문 사태를 아예 몰랐던 중국 젊은 세대가 갑작스러운 사진 삭제, 라이브 방송 중단 등을 계기로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불씨 하나가 광야를 불사른다’는 마오쩌둥이 애용한 말이다. 아직까지는 중국 당국이 작은 불씨들을 잘 끄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
10.09(월) 고독한 승부사 박종환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 부속 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박종환 전 축구대표팀 감독의 빈소. /뉴스1
▶황해도 태생 박종환은 월남 후 강원도 춘천에 정착해 소년 시절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했다. 대학 다닐 때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식당에서 일하며 축구 선수로 뛰었다. 선수 시절 박종환은 왼발을 단련하려고 한 달 동안 오른발에 붕대를 감고 왼발만 쓰는 훈련을 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스스로를 혹독하게 밀어붙이는 독종 스타일이었다.
▶그는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1983년 멕시코 세계 선수권에서 4강 신화를 이루면서 일약 국민 스타로 등극했다. 한국은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는데, 북한이 심판 폭행으로 국제 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받으면서 우리에게 기회가 돌아왔다. 당시 한국은 30년간 월드컵 본선 진출조차 못 했던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다. 축구협회는 박종환에게 티켓을 반납하고 출전하지 말라고 압박했지만 박종환은 기회를 차버리는 게 말이 되느냐며 싸웠다. 결국 엄청난 일을 내고 말았다.

▲일러스트=김성규
▶박종환의 별명은 ‘독사’였다. 혹독하고 강압적인 훈련과 강한 카리스마로 선수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다. 선수들에게 태릉선수촌 가파른 뒷산을 매일 아침 뛰게 했다. 박종환은 “웬만한 공수부대 훈련보다 힘들었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해발 2000m 넘는 멕시코 고지에서 대회가 열린다는 점을 고려해 마스크를 쓴 채 400m 트랙을 20바퀴 이상 달리게 했다. 처음 마스크를 착용하고선 선수들이 5분을 못 버텼다고 한다. 엄격한 규율과 체벌을 병행했다. 선수들은 “감독님 눈빛만 봐도 무서웠다”고 고백한다.
▶멕시코에서 대표팀은 멕시코, 호주, 우루과이를 차례로 꺾었고 4강에서 세계 최강 브라질에 졌다. 기동력과 체력에 감탄한 해외 언론이 ‘붉은 악령’이란 찬사를 보냈다. 현지 멕시코인들은 차고 있던 시계까지 풀어주고 선수단 버스를 에워싸며 환호를 보냈다. 당시 출전했던 한 선수는 “죽기 살기로 뛰는 우리 모습에 감동받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멕시코 4강 이후 한국에 축구 열풍이 불었고, 박종환은 폭발적 인기를 바탕으로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다섯 번 역임했다.
▶화려한 축구 지도자 경력을 쌓았지만, 말년에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하고 사기까지 당하면서 배신감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방송에 출연해 “자존심이 있어서 누구한테 신세 지는 걸 싫어하다 보니 전국을 돌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고 했다. 한국 축구에 누구보다 강렬한 족적을 남긴 박종환이 7일 별세했다. 절대 권위를 가진 카리스마 리더십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
/최수현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10.10 훈민정음 돌민정음 아민정음

▲일러스트=이철원
영어 알파벳의 역사는 기원전 12세기 소아시아 해양 민족의 문자인 페니키아 문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 상형문자로 시작해 표음문자로 발전했고 이후 그리스 문자, 로마 문자, 러시아의 키릴 문자, 아랍 문자 등으로 가지를 뻗었다. 그중에도 로마자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자라 할 수 있다. 유럽을 비롯해 일부 동남아 국가까지 로마자를 쓴다. 600년 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사람’이 아니라 ‘saram’이라 썼을지 모른다.
▶문자도 언어처럼 흥망성쇠를 거친다. ‘나랏말싸미~’로 시작하는 15세기 ‘훈민정음언해’ 속 한글은 지금의 한글과 사뭇 다르다. 아래 아(·)나 ‘순경음 비읍’은 음가(音價)가 사라지면서 철자도 사라졌다. 지금은 종성에만 쓰는 ‘ㅄ’을 초성에도 쓰는 등 표기법도 낯설다. 문자를 누가 쓰느냐에 따라 문자의 위세도 달라진다. 한글은 과학적으로 뛰어나지만 오래도록 우리 스스로 ‘아녀자의 글’이라며 괄시했다. 국권 상실 시기엔 우리말 사전조차 발간하지 못할 정도로 위축됐다.
▶그랬던 한글이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다. 한류 드라마와 K팝이 주도한 덕분이다. 한국 아이돌 가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위해 로마자로 우리말 가사를 적는 ‘돌민정음’이 세계적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다”며 한글을 배운다. 이를 주도해 온 아미(BTS 팬클럽)가 따라 부르는 BTS 노래 속 한글을 ‘아민정음’이라 한다.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유튜브 동영상 누적 시청수는 수십억 뷰에 이른다
▶세계적으로 한글 사용자가 늘면서 창제 당시 28자였다가 자음 14개, 모음 10개로 축소됐던 한글 자모를 늘리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박재갑 서울의대 명예교수와 김민 국민대 대학원장 등이 다양한 외국어 표현을 위해 3년 전 개발한 ‘재민체’가 대표적이다. ‘커피’(coffee)처럼 한글에 없는 ‘F’ 발음을 표기할 수 있도록 ‘ㅍ’ 밑에 ‘ㅇ’을 더하는 식이다. 올해 나온 5.0 버전은 자음 94개와 모음 30개, 우리말에 없는 성조(聲調)를 표현하는 기호 등을 합해 기본 134자라고 한다.
▶한글은 패션과 디자인 분야로도 진출했다. 한글 서체만 6000개를 넘는다. 이탈리아 명품 패션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몇 해 전 한글 서체로 자사 브랜드명을 새긴 점퍼와 니트를 선보였다. 샤넬 디자인을 총괄했던 유명 디자이너 라거펠트는 “추상미술의 큐비즘”이란 말로 한글 디자인이 지닌 입체적 아름다움을 평가했다. 한글은 한국인의 문자에서 세계인의 문자로 진화하고 있다.
10.11 예비군이 진짜 정예인 이스라엘

▲일러스트=양진경
프러시아는 1807년 나폴레옹에게 패한 뒤 영토를 빼앗기고 상비군도 4만2000명으로 제한됐다. 군사력을 키우려 군 수뇌부가 짜낸 아이디어가 예비군이었다. 4만여 명을 징집해 훈련한 뒤 귀가시키고 새로 징집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상비군의 3~4배에 이르는 예비군을 키웠다. 훗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설욕하는 토대가 됐다.
▶예비군을 가장 먼저 도입한 곳은 대영제국이다. 전투 경험과 자질을 갖춘 장교를 미리 키우려 반민반군(半民半軍)을 뽑았다. 평소 생업을 하며 군사훈련을 치르고 급여의 절반을 받았다. 전시가 되면 현역으로 투입돼 신규 부대를 지휘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1200만명이던 정규군을 150만명으로 줄이면서 예비군을 85만명 뒀다. 6·25 때 한국에 보낸 병사의 3분의 1이 예비군이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에도 수십만 명을 파병했다. 연간 38일 훈련을 받고, 급여·교육·의료·연금 혜택에 진급도 한다.
▶예비군 최강국은 이스라엘이다. 병역 자원이 부족한 이스라엘은 예비군을 46만여 명 두고 있다. 현역(17만명)의 2.5배다. 남녀 모두가 2~3년씩 현역 복무한 뒤 여성은 34세, 남성은 40~45세까지 예비군으로 연간 55일을 훈련한다. 말이 예비군이지 현역보다 전투 경험도 많고 숙련도도 높은 핵심 전력이다. 전투기 조종, 특수 작전, 정보 분석 등에선 역할이 절대적이다. 예비군 장교가 현역을 지휘하기도 한다.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 밀리던 전세를 뒤집은 것도 뒤늦게 투입된 예비군이다. 2014년 하마스와 충돌할 때도 예비군 4만명이 상대 땅굴과 요새, 무기고를 찾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이스라엘 예비군 상당수는 현역 때 함께한 부대원들과 같이 복무한다. 최소 20년 동안 전우애를 키운다. 가족이 말려도 “전우들이 전장에 있는데 나만 빠질 수 없다”며 자발적으로 나선다. 하지만 지난 7월 네타냐후 총리의 사법부 무력화 입법 후 균열이 생겼다. 전투기 조종사, 특수 부대원 등 예비군 수만 명이 법 통과에 반대하며 복무 거부 운동을 벌였다. 그러자 하마스와 이란 혁명수비대가 은밀히 만났고, 레바논 무장 단체 헤즈볼라는 접경 병력을 늘렸다. 이스라엘 안보의 틈을 본 것이다.
▶하지만 하마스가 기습 공격하자 예비군이 다시 뭉쳤다.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유학생·사업가 등이 “조국을 구하겠다”며 자발적으로 귀국했다. 네타냐후를 비판했던 베네트 전 총리도 51세에 예비군으로 합류했다. 그렇게 30만명이 모였다. 이스라엘의 진짜 힘이다.
10.12 젖과 꿀이 흐른다던 ‘가자’

▲일러스트=이철원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 가자(Gaza)에서 벌어지는 피의 분쟁 역사는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던 가나안의 주인 자리를 놓고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과 에게해를 통해 들어온 해양 민족 블레셋인이 맞붙었다. 가자는 블레셋인들이 가나안에 세운 도시였다. 구약의 유대인 판관 삼손을 죽음으로 내몬 델릴라는 가자에 살던 블레셋 사람이다. 사울왕은 블레셋과 싸우다 전사했고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릎 꿇린 전쟁 영웅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때문에 2000년간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딱 맞지 않는다. 용맹한 블레셋인은 기원전 4세기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더에게 저항하다가 패퇴한 뒤 역사에서 사라졌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민족은 블레셋의 후예가 아니란 뜻이다. 그 땅에 팔레스타인이란 이름을 붙인 이는 2세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였다. 유대인 반란을 평정한 뒤 징벌로 그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팔레스타인(블레셋의 땅이란 뜻)이라 부르게 한 게 시초다.
▶가자 분쟁의 불씨는 1948년 신생국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1차 중동전쟁에서 다시 타올랐다. 이 전쟁으로 서안 지구(West Bank)는 요르단 차지가 됐고 가자는 이집트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 두 곳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여기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인 인티파다(봉기)가 불붙었다.
▶하지만 가자와 서안 지구는 그 후 다른 길을 갔다. 인티파다로 자치권을 갖게 된 팔레스타인은 파타와 하마스로 분열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무장 정파 하마스가 승리하고 파타가 불복하면서 가자는 하마스가 지배하고 서안 지구는 파타가 통치하는 이중 권력 상태에 들어갔다. 이스라엘도 하마스 수중에 떨어진 가자에서 정착촌을 철수하고 물과 전기를 제외한 모든 물품 공급을 중단하는 봉쇄를 시작했다. 가로 5~8㎞, 세로 50㎞인 거제도 크기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란 별명을 갖게 됐다.
▶팔레스타인은 자기 나라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다.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등 이민족의 지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유대인이 새 운명을 개척하겠다며 팔레스타인에 처음 돌아온 해가 1882년이다. 이후 유대인이 텔아비브처럼 현대적 도시를 세우는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구경만 했다. 일부는 유대인들이 땅을 팔라고 하면 비싼 값 받을 궁리만 했다. 이제는 가자에서마저 내쫓길 처지가 되고 말았다.
10.13 ‘수도승’ 억만장자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1895~1971· 오른쪽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선생.
엊그제 세상을 떠난 면세점(DFS) 거부 찰스 척 피니는 ‘자선사업계의 제임스 본드’라 불렸다. 그는 직원들에게 이면지 사용을 강요하고, 변호사 수임료를 무자비하게 깎고, 모임에선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먼저 자리를 뜨는 등 욕심 많은 구두쇠로 비쳤다. 그러다 1997년 루이뷔통 그룹과의 법적 분쟁 과정에서 대반전이 일어났다. 법정에서 공개된 그의 회계장부에서 그가 15년간 40억달러를 대학과 사회단체 등에 기부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3년 전 남은 재산까지 모두 기부한 뒤, 자신은 10달러짜리 전자시계를 차고, 방 두 칸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일러스트=이철원
▶친환경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를 만든 창업주 이본 쉬나드 회장도 무소유를 실천한 수도사형 기업가다. 그는 작년에 “소수의 부자와 수많은 빈자로 귀결되는 자본주의가 아닌 새 자본주의 형성을 바란다”면서 30억달러가 넘는 회사 지분을 환경 단체에 통째로 넘겼다. 파타고니아는 이 소식을 알리면서 “이제는 지구가 우리의 유일한 주주”라고 밝혔다. 쉬나드 회장은 낡은 옷을 입고, 컴퓨터와 휴대폰도 사용하지 않는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일본 교세라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경천애인’을 사시로 삼고, 도를 닦듯 기업을 경영했다. 27세에 창업해 연매출 70조원, 종업원 13만명의 초우량 기업으로 키운 뒤, 회사 지분을 사회에 기부하고 은퇴했다. 퇴직금 6억엔도 전액 대학에 기부했다. 그가 손님을 접대할 때 애용한 식당은 한 끼에 500엔 이하의 저가 프랜차이즈 식당이었다.
▶얼마 전 방한한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은 “내게 필요한 것은 점심·저녁 먹을 흰 쌀밥 두 그릇뿐”이라면서 1조원에 달하는 재산 99%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배우 키아누 리브스도 무욕의 삶으로 유명하다. 수천억원대 재산을 기부하고, 집도 없이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며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우리나라에도 무소유와 박애주의를 실천한 기업가가 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는 경영을 돕던 외아들도 사표를 내게 하고 기업을 종업원 지주회사로 만들었다. 그는 유언장에 “손녀 대학 학비 1만달러만 남기고, 전 재산을 교육, 사회사업에 기부하라”고 썼다. 미국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현재 가치 3000억달러가 넘는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며 박애주의를 실천했다. 아낌없이 나눠주고 빈손으로 가는 괴짜 억만장자를 더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10.14(토) 장진호의 카투사

▲일러스트=이철원
23세 청년 박진호가 1950년 8월 징집돼 훈련받으러 간 곳은 대한민국 영토 밖에 있었다. 그를 포함한 300여 명이 카투사(KATUSA·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1기생이다. 이들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에 주둔하던 미 제7사단에 배속돼 3주간 훈련받았다. 박진호는 이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미군 장병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이후 여러 전장(戰場)을 거친 뒤, 같은 해 11월 장진호(長津(湖) 전투에 투입됐다가 거기서 전사했다.
▶장진호 전투는 참혹했다. 중공군 12만명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와 3만명의 유엔군을 포위하는 작전을 벌였다.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는 또 다른 적이었다. 아군 사망자 중 동사자가 더 많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퓰리처상을 받은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책을 내면서 제목을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로 정했다.
▶장진호 전투 초기엔 미군이 중공군의 작전에 말려 고전했지만, 전세를 만회해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모두가 절망했지만 장병들의 불굴의 투혼이 세계 전사에 남을 기적적 반전을 만들어 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3만명 이상 사망했고 미군도 3000여 명이 전사했다. 이 장진호 전투에서 카투사도 큰 활약을 했다. 이철훈 카투사연합회 부회장은 “6·25 당시 카투사가 1만명 이상 전사했는데 상당수가 장진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카투사는 6·25 당시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 미군들에게는 귀중한 존재였다. 전투에 유리한 지형지물을 찾아내고, 피란민에 섞여 있는 북한군을 가려냈다. 박격포, 기관총 수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다. 카투사는 흥남 철수 작전의 숨은 주역이기도 하다. 카투사로 장진호 전투에 이어 흥남 철수에 참가했던 류영봉씨는 “카투사들이 10군단장 앨먼드 소장에게 피란민 후송을 요청해서 배 안의 대포, 탱크 등을 모두 내려놓고 10만 명의 피란민을 배에 태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우애 덕분에 지난해 조성된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추모의 벽에는 전사한 카투사 7174명의 이름이 미군 3만6634명과 함께 새겨져 있다.
▶12일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장진호 전투 7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장진호에서 전사한 카투사 김동성 일병의 증손자인 김하랑 공군병장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낭독했다. 고(故) 김석주 일병의 외증손녀인 김혜수 육군 중위는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현직 대통령도 처음 참석한 이 행사를 계기로 카투사의 활약이 좀 더 알려졌으면 한다.
10.16(월) 은행 열매와의 전쟁

▲일러스트=이철원
한반도 가로수에 대한 공식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나온다. 1453년 단종 1년에 의정부 대신들이 ‘큰길 양편에 소나무 잣나무 배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 나무를 많이 심고 벌목을 금지할 것’을 논의했다고 썼다. 가로수는 심는 이유가 뚜렷한 나무다. 예전엔 이정표 기능이 컸다. 그 흔적이 나무 이름에도 남았다. 5리마다 한 그루씩 심은 나무를 오리나무라 했고, 20리마다 심는 나무는 스무나무였다가 지금은 시무나무로 바뀌었다는 견해도 있다.
▶일제강점기엔 빠르게 자라는 미루나무와 수양버들을 집중적으로 심었다. 광복 후 급속한 경제성장 여파로 오염 문제가 불거지며 플라타너스가 주목받았다. 넓은 잎 표면에 잔털이 돋아 있어 매연과 먼지 흡착 효율이 높아 1980년대 초까지 서울 가로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나뭇가지와 잎이 교통 신호와 간판을 가린다며 점차 외면당했다. 거리에 차가 늘고 도시가 번화해지면서 가로수에 대한 취향이 바뀐 것이다.
▶서울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도시 미관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며 노란 단풍이 아름다운 은행나무가 주목받았다. 당시 시민 대상 설문조사에서 1위로 꼽혔다. 그 후 대대적으로 심었고 지금도 서울에서 가장 많은 게 은행나무다. 2020년 기준, 서울 가로수 30만 그루 중 은행나무가 10만 그루 이상이다. 이어 플라타너스가 6만 그루, 느티나무 3만6000 그루 순이다.
▶은행나무는 열매에서 나는 악취가 치명적 약점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가을만 되면 풍기던 악취가 많이 줄었다. 서울의 각 구청이 9~10월이면 은행 열매를 대거 털어내며 수거해가는 덕분이다. 열매를 맺는 암나무를 캐내고 수나무로 교체해가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은행나무는 20년쯤 자라 열매를 맺어야 비로소 암수가 구별되지만 국립산림과학원이 2011년 DNA 성감별 법을 개발한 이후 수나무만 골라 심을 수 있게 됐다.
▶서울의 은행나무 가로수는 지난 10년 사이 1만 그루 이상 사라졌다. 대신 악취 없고 꽃이 예쁜 이팝나무와 회화나무가 증가 추세다. 은행나무가 가로수 왕좌를 내줄 날이 올 수 있다. 은행나무는 악취뿐 아니라 독성이 강해 새도 다람쥐도 얼씬 못한다. 수억 년 전엔 은행 독성에 내성을 지닌 짐승이 여럿 있어 씨를 먹고 퍼뜨렸지만 모두 멸종했다. 지금은 인간을 제외하면 어떤 동물도 은행 열매를 먹지 않기 때문에 인류가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면 함께 사라질 운명이라고 한다. 노란 가을빛을 후손들도 즐길 수 있도록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
10.17 41년 만에 착공될 설악산 케이블카

▲일러스트=이철원
7~8월 설악산 중청에서 대청봉 오르는 길에 피는 바람꽃은 정말 장관이다. 공룡능선을 배경으로 담으면 스마트폰으로 찍어도 바로 작품 사진이다. 대청봉에서 최단 하산 코스가 오색지구로 내려오는 길이다. 약 5㎞지만 3~4시간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내리막길이다. 이 길을 내려올 때마다 코스 선택을 후회하면서 케이블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픽=김성규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강원도 양양군의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설치 사업에 대해 시행 허가를 내주었다. 사업에 필요한 최종 허가여서 이제 착공만 남았다. 강원도가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처음 추진한 것이 1982년이니 41년 만에 허가 절차가 끝난 것이다. 양양군이 작성해 보관 중인 관련 서류만 캐비닛 4~5개 분량이라고 한다. 거의 모든 정부 부처의 허가를 받았지만 환경부의 환경영향평가를 받는 데만 8년 걸렸다. 산양(山羊)을 상징으로 내건 환경 단체 반대 때문이었다.
▶양양군은 당장 올해 안에 착공식을 열고 2025년 말까지 완공하겠다는 입장이다.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구간은 오색지구에서 해발 1600m 봉우리인 끝청 부근까지 약 3.3㎞다. 8인승 케이블카 53대가 시간당 최대 825명을 15분 만에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설계했다. 단풍철에 하루 10시간 운행하면 매일 8250명까지 이용할 수 있다. 험한 산을 오를 엄두를 못 내는 노약자들도 설악산 비경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유럽의 알프스에만 케이블카가 6000대 운행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2600대를 운행 중이라 케이블카 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6%를 차지할 정도다. 스위스도 450대 운행하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에서도 알프스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일본도 31개의 국립공원 중 29곳에 40여 대의 케이블카를 운영하고 있다. 환경을 보전하면서 동시에 케이블카를 관광을 살리는 동력으로 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설악산 케이블카를 제대로 만드는 일이다. 기왕 만드는 김에 올라가면 설악산 비경과 동해 바다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지게 설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작 지점인 오색지구는 좁고 정상부인 끝청도 기본적으로 대청봉이 동해 전망을 가리는 곳이라 지금의 코스와 설계가 최선인지 논란이 여전하다. 우리나라 최고 명산인 설악산에 만드는 만큼 작은 지자체인 양양군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가 개입해 환경도 지키면서 국가적인 명소로 손색없도록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10.18 甲 같은 乙 기업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IDRA 그룹 공장. 2023.1.25/로이터
세계 자동차 메이커들이 대기 번호표를 뽑고 납품을 기다리는 기업이 있다. 최근 현대차도 대기줄에 가세했다. 9000t급 초대형 프레스기를 만드는 이탈리아 이드라(IDRA)사다. 일론 머스크는 이드라의 프레스기 덕분에 금속판 수십 개를 용접하는 대신 대형 알루미늄 합금판을 프레스로 눌러 붕어빵처럼 테슬라 차체를 찍어내는 혁신을 완성했다. 차 제작비를 40%나 줄였다. 이 프레스기를 한 해 10대 정도만 생산하는 이드라를 2008년 중국 자본이 인수했다. 중국의 전기차 굴기 전략이다.

▲일러스트=이철원
▶반면 중국 반도체 굴기는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에 발목이 잡혀 있다. 10나노(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를 만들려면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기가 있어야 하는데, 미국이 EUV 노광기 중국 수출을 막고 있다. 한 대 가격이 5000억원에 이르는 EUV 노광기는 한 해 40여 대밖에 생산이 안 돼 고객 대기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영국 기업 ARM은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독보적이다. 컴퓨터, 스마트폰의 핵심 반도체엔 모두 ARM 설계도가 깔려 있다. 2016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바둑으로 치면 50수 앞을 내다본 인생 최대의 베팅”이라면서 ARM을 인수했다. 손 회장이 ARM을 엔비디아에 팔려고 하자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그러면 엔비디아가 그냥 갑이 아니라 ‘수퍼 갑’이 된다”는 반발 탓에 매각이 좌절됐다.
▶국내 조선업계에선 “재주는 우리가 넘고 돈은 프랑스 GTT가 번다”는 말이 있다. 한국 조선사들이 세계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수주를 싹쓸이하지만 LNG 탱크 설계는 프랑스 GTT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GTT는 1척당 100억원 이상 로열티를 챙겨간다. 조선 3사가 공동으로 한국형 LNG 탱크를 개발했지만 탱크 외벽에 결빙이 생기는 치명적 하자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2019년 일본은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품목 수출 규제로 한국을 골탕 먹였다. 정부가 소부장 독립을 외쳤지만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제조 업계에선 완성품을 만드는 기업이 갑이고 부품이나 장비를 납품하는 기업은 을이다. 이 갑을 관계는 주종 관계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을 중에는 독보적 기술로 납품을 받는 완성품 기업을 쥐락펴락하는 ‘수퍼 을’ 기업들도 있다. ASML은 1980년대부터 30년간 연구해 EUV 기술을 완성했다. 탄탄한 기초과학, 산학 장기 협력, 지원하는 정부의 인내심이 수퍼 을 기업 탄생의 조건이다.
10.19 재판에 지각할 수 있는 피고인

▲일러스트=이철원
미국·유럽의 법정은 엄격하다. 우리처럼 판사가 법정에 들어서면 방청객 전원이 기립한다. 법관 개인이 아니라 사법부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있다. 10여 년 전 미국에 연수 갔을 때 일이다. 어느 민사 재판에서 사건 당사자인 할머니가 하품하면서 작은 소리를 내자 판사가 바로 경고했다. “Don’t add your own sound.” 거칠게 해석하면 “잡소리 내지 말라”쯤 될 것이다. 하물며 형사 재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재판에 피고인이 지각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행법상 피고인은 재판 출석 의무가 있다. 여기엔 정해진 시각에 나와 성실하게 재판받아야 한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불가피한 사정까지 감안해서 일찍 나오라는 의미다. 그래서 변호사들은 보통 불구속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에게 “재판 시작 20~30분 전까지 법정으로 오라”고 한다. 굳이 안 그래도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알아서 일찍 나온다. 자기가 지각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판사를 기다리게 만든다는 건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2006년 7월 어느 형사 재판에서 구속된 피고인 3명이 동시에 지각한 일이 있긴 했다. 사정이 있었다. 피고인들이 구치소에서 증거 인멸을 시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검찰이 재판 며칠 전에 이들을 다른 구치소로 이송했는데, 구치소 간에 재판 일정 인수인계가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구치소에선 난리가 났고, 이들을 급히 법정으로 호송해 재판을 1시간 뒤에 시작했다.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오전 10시 30분으로 예정된 대장동 사건 2차 공판에 7분 지각했다. 이 대표가 도착하고 나서 재판부가 법정에 들어와 재판은 16분 늦게 시작됐다. 이 대표가 왜 늦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판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재판장은 이 대표에게 “(앞으로는) 10분 정도 먼저 와서 재판 준비를 해 달라”고 했다. 점잖게 말했다지만 재판장 입장에선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 대표는 앞서 열린 자신의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 때는 ‘국정감사 때문에 불출석한다’는 의견서를 내고는 정작 국정감사장엔 가지도 않았다. 재판부를 무시하고 농락한 것이다. 이 대표가 이러는 것은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 담당 판사가 심리적으로 위축돼 기각 결정을 내렸고, 다른 판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여유’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재판에 지각할 수 있는 피고인’. 이 대표가 새로 쓰는 사법 흑역사의 한 페이지다.
10.20 “모든 것은 생쥐 한 마리에게서 시작됐다”

▲일러스트=이철원
20여 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 디즈니랜드에 간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로 옆에서 지나가는 백설공주와 피터팬, 영화 속으로 빠져들 것 같은 놀이 기구와 솜사탕, 음악에 둘러싸여 꿈을 꾸는 듯했다. 1955년 디즈니랜드 개장 때 창업자 월트 디즈니가 내세운 ‘꿈이 이뤄지는 곳(where dreams come true)’은 세월이 지나도 작동했다. 디즈니랜드는 거대한 연극 무대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매표원부터 청소원까지 모두가 배우와도 같다. 이들은 400여 가지 매뉴얼을 암기한다고 한다. 연극 한 편을 공연하듯 고객에게 꿈과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가난해 신문 배달을 한 월트 디즈니의 유일한 즐거움은 그림 그리기였다. 신문에 연재 만화를 그리고 싶었으나 광고용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에 취직했다. 20세기 초에 생겨난 애니메이션은 체계적 교육기관이 없었다. 그는 미술 학원에서 야간 강좌를 듣고, 집 뒷마당에 스튜디오를 만들어놓고 카메라를 돌렸다. 1분짜리 풍자 만화영화 등을 만들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1927년 미키 마우스를 만들어냈다. 그는 “모든 것이 생쥐 한 마리에게서 시작됐다”고 했다.
▶미키 마우스를 주인공으로 최초 무성 애니메이션 ‘미친 비행기’를 만들고, 1년 뒤엔 첫 유성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를 탄생시켰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에서 소리가 나오고,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를 가진 만화 주인공에게 열광했다. 팬레터가 쏟아지고, 인형에서 칫솔까지 캐릭터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1930년대 미키 마우스는 ‘만화의 찰리 채플린’ 소리를 들었다. 미키마우스는 매년 세계에서 6조원 이상을 벌어들인다. 전 세계 아이들은 아기 곰 푸가 그려진 기저귀를 차고, 아기 돼지 피글렛이 그려진 그릇에 밥을 먹고, 미키 마우스 티셔츠를 입고 자란다.
▶디즈니는 만화·영화·캐릭터·출판·음반·놀이공원·OTT를 아우르는 세계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성장했다. 픽사·마블·ABC방송· ESPN 등을 소유하고 있다. 픽사를 인수했던 밥 아이거 CEO는 자서전에서 “스티브 잡스가 살아 있다면 애플과 디즈니가 합쳤을 수도 있다”고 했다.
▶디즈니가 창업 100년을 맞았다. 지금은 시련기다. OTT에서 큰 폭 적자가 나 CEO가 교체됐고,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로 정치권과 소비자의 비난을 받고 있다. 세계 기업사를 보면 100년 기업이 그다음 100년에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어른의 추억과 아이의 판타지를 같은 캐릭터로 연결하는 디즈니의 꿈만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10.21(토) 참전 영웅의 신발

▲일러스트=이철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왕자 이아손의 별명은 ‘한쪽 샌들만 신은 사람’이란 뜻의 ‘모노 산달로스’다. 노파로 변신한 헤라 여신을 이아손이 업어 강을 건네주자 헤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의 신발 한 짝을 강에 흘려보냈다. 신발은 이아손이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삼촌에게 빼앗겼던 나라로 흘러갔다. 이아손은 신발이 멈춘 곳을 찾아가 자기 신분을 되찾고 왕위에 오른다. 이아손 신화는 신발을 그 주인의 분신으로 보는 데서 비롯된 이야기다.
▶군인은 신발을 오래 신는 직군이다. 2차 대전 배경의 미국 드라마 ‘더 퍼시픽’엔 상륙작전을 끝낸 해병대원이 젖은 전투화를 말리려고 잠시 벗었다가 지휘관에게 “적이 기습하면 맨발로 싸울 거냐”며 “당장 다시 신으라”고 질책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필자도 군에서 24시간 군화를 벗지 않는 훈련을 받았다.
▶군화의 시초는 로마제국 때 신은 ‘칼리가에’다. 발을 다치면 전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보통 신발과 달리 가죽을 썼다. 가죽으로 발목까지 보호하는 반(半)장화 형태의 군화를 모든 장병에게 보급한 것은 2차 대전 때 미군이 시작했다. 베트콩이 미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면 군화부터 빼앗았을 만큼 인기였다. 하지만 전투력 유지에만 집중하느라 위생과 편의성을 외면한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다. 참호전으로 치러졌던 1차 대전 때는 젖은 군화 속에서 발이 썩는 ‘참호족’으로 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남자들도 군화 기억은 좋지 않다. 모두 딱딱한 저질 군화로 고생했다. 민원이 수도 없이 제기됐지만 군납 업체와의 유착 때문인지 바뀌지 않았다. 2010년대 들어서야 나일론과 고어텍스 재질의 신형 전투화가 보급됐다.
▶미국에선 전몰 장병을 기릴 때도 군화를 쓴다. 2014년부터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 전몰 용사 추모식을 여는 미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브래그란 도시는 군화 7500개에 성조기와 전몰 장병 사진을 꽂는 방식으로 희생을 기린다. 늘 전쟁 상태인 이스라엘은 군인 인식표를 두 개 쓴다. 하나는 목에 걸고 또 하나는 군화에 꽂는다. 어떤 경우든 군화는 남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6·25 당시 동상을 입거나 불편한 군화를 오래 신어 발이 변형된 참전 노병의 발에 맞는 신발을 만들어 헌정하는 ‘6·25 참전 영웅맞이 신발 증정식’이 그제 서울 현충원에서 열렸다. 3D 스캔으로 발 모양을 파악해서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이다. 국가보훈부 차관이 참전 노병들 앞에 무릎을 꿇고 신겨 드렸다.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무릎 꿇는다.
10.23(월) 칭다오 ‘오줌 맥주’

▲일러스트=김성규
중국 칭다오 맥주 공장에서 직원이 맥주 원료에 소변을 보는 장면이 소셜미디어 웨이보(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전 세계에 퍼져 난리가 났다. 칭다오 맥주는 한국인들도 양꼬치와 함께 즐기는 중국 대표 맥주. 수입사 측은 “문제가 된 공장은 수출용 맥주를 만드는 곳이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다.
▶칭다오 사건은 2년 전 ‘알몸 김치’ 소동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에서 배추를 대량으로 절이는 방법’이란 제목의 영상에선 녹슨 굴착기로 절인 배추를 퍼 올리는 장면과 알몸 작업자가 배추 다발 속에 몸을 담근 채 절인 배추를 휘젓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 소비자들은 위생 개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장면에 경악했다. 당시 중국은 한국 정부 실사단까지 불러들여 지금은 그런 사례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과연 그럴까.
▶지난해 3월 중국 관영 CCTV는 한 식품 공장에서 배추를 소금에 절인 ‘쏸차이’(酸菜)를 만들면서 작업자가 침을 뱉고, 담배꽁초까지 버리는 장면을 공개했다. 최근 중국의 유치원에선 한 여성이 아이들 식판을 소변기에 올려 놓고 물을 뿌려 헹구는 모습이 발각됐다. 몇 달 전 중국의 한 대학 식당 생선 요리에서 구더기가 수십 마리 나왔다. 또 다른 대학 음식에서는 쥐 머리가 나왔는데, ‘오리 고기’라고 우기다 결국 들통나 대학 당국이 사과하는 사건도 있었다.
▶중국에선 위생 개념 상실을 넘어 가짜 식품을 만드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2008년엔 유해 화학물질인 멜라민을 넣은 분유가 유통돼 영유아 8명이 숨지고, 30만명이 병원 치료를 받았다. 2007년엔 100% 화학약품으로 만든 가짜 계란이 시장에 돌아 중국인들도 경악했다. 사기꾼들은 알긴산나트륨으로 흰자위를 만들고, 인공 색소와 염화칼슘으로 노른 자위를 만든 다음 탄산칼슘으로 만든 계란 껍데기에 넣어 가짜 계란을 완성했다.
▶유해 가짜 식품 목록엔 두부, 당면, 만두, 꿀, 쇠고기가 자주 등장하고, 심지어 가짜 쌀도 있다. 몇 년 전 감자 전분에 합성수지를 섞어 만든 가짜 쌀을 나이지리아에 수출했다가 적발된 바 있다. 상해에선 독성 물질이 든 가짜 고량주를 마신 사람이 실명한 사건도 있었다. 중국 사기꾼들은 프랑스 와인까지 가짜를 만들어 유통한다. 프랑스 고급 와인 샤토 라피트 로쉴드는 연간 24만병이 생산되는데 중국에서 파는 이 와인만 200만병을 웃돈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러니 중국 CCTV에서조차 “중국 식품은 항상 문제다” “믿고 먹을 음식이 없다”고 개탄하고 있다.
10.24 빈 살만의 전통 의상

▲사우디아라비아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2일(현지 시각) 리야드의 야마마궁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왕세자 겸 총리와 함께 걸으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2일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난 사진이 각 신문에 크게 실렸다. 여기서도 빈 살만은 흰색 바탕에 빨간 격자무늬의 긴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2019년과 지난해 방한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빈 살만이 한 사우디 남성의 전통 의상은 4가지가 필수 요소다. 머리에 쓴 흰색·빨간색 스카프는 흔히 터번으로 불리지만, ‘슈마그’가 정확한 명칭이다. 길이가 1m가 넘는다. 슈마그를 머리에 고정하는 링 모양의 틀이 ‘이칼’이다. 셔츠 모양의 긴 원피스는 ‘쇼브’이고, 그 위에 걸쳐 입는 외투가 ‘바시트’로 주로 공식 석상에서 착용한다. 슈마그는 모자, 스카프 또는 목도리 기능을 갖고 있는데 중동에서 각 지역에 따라 다르게 발전해 머리에 두르는 것을 보면 국적이나 주거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쿠웨이트와 UAE 국민은 사우디와 비슷한 차림을 한다. 아라비아반도 북부의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은 조금 달라 정사각형 모양인 경우가 많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고(故) 아라파트 의장은 한쪽 어깨를 덮는 스타일을 즐겨 입으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미국 등 서구의 특수부대도 중동에서 활동하면서 현지의 관습을 수용해 머리에 이를 두르기 시작했다. 이는 대부분 수니파의 전통이다.
▶시아파 성직자들은 머리를 튤립 모양으로 둘둘 감는 터번을 착용한다. 이란에서 검은 터번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들만 맬 수 있다. 파란색 터번은 최고위 성직자를 나타낸다. 터번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발전한 시크교 신자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들은 터번을 신성한 의상으로 간주한다. 어디서든 착용을 고수해 미국에 이민 간 시크교도들이 터번을 쓰고 경찰 복무를 하려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중동과 인도에서 머리를 감싸는 복장이 전통이 된 것은 변덕스러운 사막 기후와 종교 때문이다. 슈마그는 태양과 모래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기 시작했다. 예배를 드릴 때 단정한 머리카락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응급 시에 지혈을 하거나 압박붕대로 쓰인다고 한다.
▶빈 살만은 2018년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의 텍사스주 휴스턴 자택을 방문할 때 슈마그를 벗어던지고 현대식 양복 차림을 한 적이 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을 흰색 와이셔츠에 노타이 차림으로 만난 사진도 있다. 빈 살만은 한국인을 만날 때는 대체로 슈마그 차림의 전통 복장을 고수한다. 아직 한국과는 머리를 드러내고 만날 만큼 친숙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일까. 양국 관계가 앞으로도 더 발전하기를 바란다.
10.25 푸른 눈의 한국 정치인

▲일러스트=박상훈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1882년 조선에 왔다. 조선은 강화도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했지만 조약문을 쓸 줄 아는 사람도, 외무부도, 세관도 없던 시절이다. 이런 일을 맡기려고 조선이 청나라 이홍장의 추천을 받아 고용한 사람이 묄렌도르프였다. 고종은 그를 통리아문(외무부) 참의(정3품)로 초빙한 지 한 달 만에 협판(차관)으로 승진시키고 목인덕(穆麟德)이란 이름을 내렸다. 외국어학교, 조폐공사 등을 세운 목인덕은 1885년 3월 1일 영국 군함이 점령한 거문도로 달려가 영국 측에 항의하기도 했다.
▶1905년 고종 특사로 미국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연 사람은 미국인 헐버트였다. 1886년 조선에 선교사로 와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그는 한글을 익히고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된 이준·이상설·이위종의 활동도 도왔다. 일제는 이를 트집 잡아 고종을 퇴위시켰다. 이때 미국으로 쫓겨 간 헐버트는 42년 뒤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가 잠든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비석 글귀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다.
▶명왕성을 최초로 발견한 미국 로웰 천문대 설립자 퍼시벌 로웰도 한때 조선 정부를 위해 일했다. 하버드대 졸업 후 일본 주재 외교관으로 있다가 1883년 한국 최초의 대미 외교 사절인 민영익의 미국행에 통역관으로 고용됐다. 유길준이 미국에서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 되도록 주선한 사람도 로웰이었다. 근대화의 폭풍이 몰아치던 구한말 선교·의료·교육을 넘어 정·관계까지 진출한 서양인이 적지 않았다.
▶국민의힘이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를 당 혁신위원장으로 발탁했다. 인 교수는 4대째 한국에서 선교·의료 봉사를 해온 미국 린턴가 자손이다.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교사 유진 벨의 사위가 인 위원장의 조부 윌리엄 린턴이다. 48년간 의료·교육·선교 활동을 한 그는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 강제 출국당했지만 광복 후 한국에 돌아왔다. 군산에서 태어난 부친 휴 린턴은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인 위원장은 영어보다 호남 사투리를 먼저 배운 자칭 ‘순천 촌놈’이다. 저서 제목도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이다. 1987년 외국인 최초로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다. 2012년 특별귀화자로 선정됐지만 미국 국적을 버리진 않았다. 미국 선교사 집안의 의사가 한국 집권 여당의 쇄신 작업에 메스를 댄다. 의원 출마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가 ‘푸른 눈의 한국 정치인’ 역사를 써나갈 것 같다.
10.26 목선과 목탄차의 나라

▲북한 주민 4명이 강원도 속초 인근 해상을 통해 귀순한 24일 해경 선박이 이들이 타고온 소형 목선을 인근 군부대로 예인하고 있다. 2023.10.24/뉴스1 ⓒ News1 윤왕근 기자
2019년 12월 일본 니가타현 사도(佐渡)섬 해안에 선수(船首)만 남은 북한 배가 떠내려왔다. 거무튀튀한 형체에 북한식 한글이 쓰여 있는 뱃머리 안에선 북한 주민 시신 7구가 발견됐다. 일부는 백골(白骨)화가 진행 중이었다. 오랫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굶어 죽은 것이다. 일본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매년 이 같은 ‘백골선(白骨船)’이 끊임없이 발견돼 보도되고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 24일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 목선도 풍랑을 만났거나 해류를 잘못 탔다면 백골선이 됐을지도 모른다. 북한에서 굶주린 일가족 4명을 태우고 사선(死線)을 넘은 배는 길이 7.5m에 불과했다. 경운기에 쓰는 작은 엔진을 달고 있을 뿐, 아무런 항법 장치도 없었다. 사실상 뗏목과 다를 바 없는 나뭇조각에 운명을 맡긴 것이다. 이 배에 타고 있던 북한 여성은 우리 어민의 배를 보고 “한국 배는 참 좋다”고 했다 한다.
▶북한이 과거 시대에 머무는 것은 목선뿐만 아니다. 북한은 1990년대 후반부터 연료난이 심각해지자 기존 화물차량을 목탄차로 개조해 쓰고 있다. 주로 지방에서 군인 및 주민 수송용으로 많이 사용한다. 나무를 태워서 생기는 가스를 이용해 움직이는 목탄차는 최고 속도가 시속 50~60km. 한 탈북자는 “언덕길이 나타나면 탑승자들이 내려서 민다”고 했다. 북한의 산 대부분이 민둥산이 된 이유 중 하나가 목탄차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의 도로는 도로라고 부르기도 힘들다. 북한 도로 총연장은 한국의 약 4분의 1 수준이라고 하나 대부분 왕복 2차선이고, 무엇보다 포장률이 10%도 안 된다. 한국 사람은 차를 타도 그 길을 30분도 못 갈 것이라고 한다. 철도와 도로가 엉망이어서 200km 가는 데 3~4일이 걸린다. 여행자유도 없어 먼 지역에 사는 부모, 자식은 사실상 이산가족과 다름없다. 부모 사망 소식을 듣고 집에 도착하면 장례식이 끝났다고 한다. 고속도로는 특수 계층만 이용한다. ‘평양의 영어 선생님’의 저자 수키 김은 평양과 묘향산 간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를 한 대도 보지 못했다고 썼다.
▶뗏목 같은 목선과 목탄차는 이제 아프리카에서도 보기 쉽지 않다. 북한 체제가 뒤를 향해 달리는 것은 김정은이 핵·미사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를 고발한 뮤지컬 ‘요덕 스토리’에 기독교의 주기도문을 패러디해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남조선에만 가지 마시고 이곳 공화국(북한)에도 찾아오소서.” 김정은 일가를 제외한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10.27 反美 표적된 ‘황금 아치’ 맥도널드

▲일러스트=이철원
이슬람권에서 맥도널드 불매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스라엘 맥도널드가 이스라엘군에게 햄버거를 무료 공급한다고 발표했다가 이슬람권 소비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 있는 맥도널드 매장에는 군중이 한밤중에 찾아가 유리창을 부쉈고, 다른 아랍권 국가의 맥도널드 매장 앞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맥도널드를 미국의 상징으로 보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분풀이도 하는 것이다.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맥도널드 형제는 미국에서 자동차가 확산될 무렵 드라이브 인 식당을 차렸다. 메뉴를 햄버거와 감자 칩, 음료수로 간소화하고, 조리 과정도 포드 자동차의 조립 공장처럼 분업화했다. 주문 후 30초 안에 손님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세계 최초의 패스트푸드였다. 문전성시를 이루자 50대의 방문판매업자 레이 크록이 동업을 제안했다. 그가 맥도널드 형제를 따돌리고 미국 전역에 프랜차이즈 점포를 확산시켜 오늘의 ‘햄버거 제국’을 일구었다.
▶1990년 1월 31일 모스크바의 푸시킨 광장에 문을 연 맥도널드 소련 1호점은 ‘맥도널드=미국’ 이미지를 굳히는 데 기여했다. 당시 개점을 앞두고 모스크바 시민들이 수백m나 줄을 선 모습이 외신을 탔다. 미국에서는 빅맥 하나를 사려면 노동자들이 평균 20분만 일하면 되지만 소련에서는 2시간 30분 일해야 할 만큼 소련 구매력에 비싼 음식이었는데도 인파가 엄청나게 몰렸다. 지난해 러시아 철수를 결정하면서 크리스 켐프친스키 맥도널드 최고경영자는 “푸시킨 광장에서 빛나는 황금 아치는 철의 장막 양쪽 많은 이들에게 새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며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을 정도다.
▶맥도널드 로고인 황금 아치에 빗대 경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맥도널드가 있는 나라끼리는 전쟁하지 않는다”는 ‘황금 아치 이론’을 주장했다. 맥도널드가 진출한 나라는 그만큼 개방됐고 중산층이 형성된 안정된 나라여서 전쟁 대신 평화와 경제 발전을 추구한다는 논리다. 현재 맥도널드가 진출하지 않은 나라는 아프가니스탄, 부탄, 이란, 이라크, 리비아, 북한 등 123국이다.
▶‘맥도널드 평화이론’은 국제적 긴장이 높아진 시기에는 별로 들어맞지 않아 보인다. 되레 반미(反美) 감정의 분풀이 대상이다. 맥도널드 매장이 공격받자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집트, 레바논 등의 맥도널드 운영사들이 “이스라엘 맥도널드는 우리와 별개”라고 성명까지 냈다. ‘맥도널드=미국’이 아니라 ‘맥도널드=그냥 햄버거’로 봐달라는 것이다.
10.28(토) 비운의 2인자 리커창
지난 늦여름 중국에서 현직 총리 리창보다 더 화제가 된 인물은 리커창 전 총리였다. 그가 8월 말 간쑤성 둔황을 방문한 모습이 X(옛 트위터)에 올라왔다. 퇴임 후 5개월 만에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 나온 그를 많은 관광객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했다. 중국 경제가 날로 악화하는 상황에서 경제와 민생을 우선시한 그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준 것이었다. 중국이 통제하는 SNS에서는 더 이상 이 영상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퇴임하면서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며 시진핑 주석을 견제한 듯한 영상도 삭제됐다.

▲일러스트=이철원
▶공산주의 청년단 수장 출신의 리커창이 2013년 총리를 맡을 때만 해도 실세 총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시진핑과 투 톱 체제를 뜻하는 ‘시리쭈허(習李組合)’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진핑이 그를 견제하면서 활동이 갈수록 위축돼갔다. 시진핑이 집권 2기 들어 본격적으로 경제 정책까지 독점하자 그는 “튀지 않고 앞서가지 않는다”는 2인자의 철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1인자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에서 2인자가 살아남기 위해선 고도의 처세술을 요구한다. 권력욕과 의심이 많은 마오쩌둥 주석 옆에서 30년 가까이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는 늘 마오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며 신임을 얻었다. 장쩌민 주석 시절 말기인 2002년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 부주석은 중국 언론에 그의 방미 동정이 처리되지 않거나 단신 기사로 처리되도록 했다. 이토록 조심스레 주석의 심기를 살핀 덕에 1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시진핑 1인 독재 체제가 본격화된 후, 중국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친강 외교부장과 리샹푸 국방부장은 갑자기 사라진 후 해임됐다. 리커창을 육성한 후진타오 전 주석은 당 대회에서 시진핑에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끌려나갔다. 최근 반(反)간첩법을 강화하면서 과거 죽(竹)의 장막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비판이 많이 나온다.
▶중국 관영 매체가 리커창이 27일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중국 내부 상황이 심상찮다 보니 그의 부고(訃告)가 느닷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국내 네티즌들은 근거 없는 음모론을 제기하며 웅성거렸다. 일부 중국 전문가들은 그가 2인자 생활을 오래하면서 화병이나 우울증을 앓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실리와 민생을 중시하는 그가 2인자 대신 당 총서기가 됐다면 미·중 갈등이 약화되거나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명복을 빈다.
10.30(월) 메달리스트의 추락

▲일러스트=양진경
전 국가대표 펜싱 선수 남현희 씨가 15세 연하의 재벌 3세 사업가 전청조 씨와 재혼한다고 발표했는데 남자 친구가 알고 보니 여성이었고 사기 전과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남씨는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6개, 올림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땄고 이후 방송에도 출연하면서 얼굴이 알려진 스포츠 스타다.
▶이 희대의 결혼 사기극은 남씨가 재혼을 발표한 지 불과 며칠 만에 폭로가 쏟아지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남씨는 “악몽을 꾸고 있는 느낌”이라고 피해를 호소했지만 속인 쪽 못지않게 속은 남씨 또한 황당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경호원을 대동하고 최고급 주택에 사는 재벌 3세 혼외자를 사칭한 화려한 배경에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모른다. 만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고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 수술했다는 특이한 경력에도 선뜻 재혼을 결심한 남씨의 심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사생활 관리에 실패해 이미지가 망가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는 쇼트트랙 선수 출신 김동성 씨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포함해 공인 국제대회에서 딴 금메달만 60개가 넘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빙판을 떠난 후의 삶은 메달리스트 답지 않았다. 불륜 등이 드러났고 이혼 후 자녀 양육비도 지급하지 않아 비난을 샀다. 김씨는 얼마 전 유튜브 채널을 열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배달 알바를 다니며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띄우며 이미지 회복에 나섰다. 유튜브 계정 이름이 ‘빙신 김동성’이다.
▶메달리스트는 피나는 훈련을 견디고 각고의 노력 끝에 세계 무대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룬 만큼 남다른 정신력의 소유자일 수밖에 없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이후에도 자기 관리에 철저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종종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올 초 중국에서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딴 탁구 영웅 장지커가 추문에 휘말렸다. 장지커는 2016년 중국 스포츠 선수 재산 순위에서 2위에 올랐을 정도로 광고 스타로 각광받으며 부와 인기를 쌓았다. 하지만 도박에 빠져 거액의 빚을 지고는 이 빚을 못 갚아 전 여자친구의 사생활 동영상을 유출했다는 폭로가 나오면서 광고계에서 퇴출당했다.
▶동독 출신의 피겨 금메달리스트 카타리나 비트는 “금메달이 평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꾸준히 걸어가야 더 많은 걸 성취한다”고 했다. 메달리스트도 인생에서 이 교훈을 잊으면 힘들게 일군 명예를 순식간에 잃는다. 스포츠 경기에서 메달 따기도 어렵지만, 인생의 금메달리스트가 되기는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10.31(화) 땅굴 작전

▲일러스트=양진경
당 태종은 고구려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성 앞에 거대한 토산을 쌓았다. 완공을 코앞에 두고 토산이 갑자기 무너졌다. 고구려가 토산 밑에 굴을 판 뒤 지하수를 흘려 기반을 허물었다는 설이다. 땅굴은 고대부터 공성전(攻城戰)에 등장했다. 굴을 파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몰래 성안으로 침투했다. 투석기와 불화살 공격을 피해 성안에도 땅굴을 팠다. 땅굴을 막으려고 지하수를 흘려 넣고 불과 연기를 지폈다. 독일군도 2차 대전 때 지하에 숨은 레지스탕스를 소탕하려고 굴에 대량의 물을 퍼부었다.
▶태평양 전쟁 때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땅굴에 매복한 일본군에 발목이 잡혔다. 굴마다 수류탄을 던져 넣고 화염방사기를 쏘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끝까지 저항해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6·25 때 중공군은 휴전선 일대에 총길이 5000㎞의 땅굴을 팠다. 공습을 피하고 병력을 이동시키는 지하 만리장성이었다. 미군은 밤낮으로 폭격했지만 끝내 파괴하지 못했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도 땅굴에 고전했다. 초대형 폭탄을 투하해도 밀림 깊숙이 자리 잡은 땅굴은 무사했다. 당시 한국군은 땅굴 주변 주민과 베트콩을 분리시켜 보급로를 끊었다. 땅굴 입구에 연막탄을 피워 연기가 오르는 곳마다 철판으로 틀어막았다. 결국 베트콩들은 연기와 허기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산악 동굴에 애를 먹은 미국은 땅굴 전투 교범과 유·무인 복합 부대를 만들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정찰 드론과 소형 로봇이 땅굴에 먼저 진입한다. 땅굴 구조와 부비 트랩, 매복병의 위치를 파악하면 자폭 드론이나 특수부대가 이를 제거한다. 특수 재머(전파 방해 장치)로 상대 자폭 장치를 무력화하고 섬광탄으로 시각을 마비시킨다.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에 가장 큰 복병은 가자지구에 미로처럼 얽힌 500㎞ 땅굴이다. 이스라엘은 야할롬·사예렛 매트칼 등 땅굴 부대를 투입했다. 이들은 수십 개의 입구와 적 지휘부(개미집)를 발견하기 위해 휴민트·위성·감청 정보를 총가동한다. 입구가 발견되면 연막을 불어 넣고 연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개미집엔 벙커버스터를 꽂아 넣는다. 지상 출입구는 녹색 거품 폭탄으로 틀어막는다. 땅굴 내부를 진공화하는 방법도 있다. 산소를 일시에 빨아들이는 폭발물로 지속적 발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최루가스 등 화학물질도 투입한다. 보급로를 차단한 뒤 물·음식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고사 작전도 쓴다. 그래도 완전 공략은 어렵다. 21세기에도 땅굴이 유효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