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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수출 한국의 길을 열다] 중앙일보 2023/ ① 서른세 살 초대 경제수석 - ⑦ 친환경 미래산업 육성 꿈 〈끝〉

상림은내고향 2023. 10. 14. 20:21

[신동식, 수출 한국의 길을 열다]  중앙일보  2023  정리:김창우 기자

 

신동식. 1932년생.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졸업. 박정희 정부에서 대통령 정무비서관, 초대 경제수석 비서관, 대통령 직속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은탑산업훈장, 대통령 표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해사기술 회장, 카본코리아 회장 등을 맡고 있다.

 

2023.08.26 

① 서른세 살 초대 경제수석

박정희는 왜 '경제 모르는' 엔지니어를 경제수석 임명했나

 

한국전쟁의 폐허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으로 일어서기까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일등공신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선입국 의지를 실천에 옮겨 한국을 세계 제1의 조선 국가로 만든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KOMAC) 회장도 그 반열에 들 인물이다. 신 회장에게는 ‘조선업의 아버지’란 수식어 외에도 국가건설기획자 (nation building architect) 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에 임명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고, 과학기술 발전 계획을 수립 집행하여 한국기술연구원(KIST) 설립과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 경제발전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중앙SUNDAY는 한국 경제사의 산 증인을 인터뷰해 묻혔거나 잊힌 비화를 발굴하고 교훈을 탐색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92세인 지금까지 경영 일선을 지키며 새로운 기술과 미래 먹거리 창출에 도전하고 있는 현역 최고령 조선인 신동식 회장의 구술사로 첫회를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지 않소. 바다에서 살 길을 찾아야지요. 고기를 잡든지, 배를 만들든지, 짐을 나르든지, 청와대에 들어와 나와 함께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힘써주시오. 마침 존슨 대통령이 내준 전용기에 자리가 많이 남으니 나하고 같이 돌아갑시다.”

 

1965년 5월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린든 존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미국 체류중이던 조선 전문가 신동식을 불러 독대했다. 그는 서른 세 살의 젊은 엔지니어에게 “함께 대한민국 조선을 키우고 나아가 한국 경제를 살리자”고 설득했다. 신 회장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선급협회(ABS)에서 검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5·16 직후 대한조선공사 기술고문과 경제기획원 장관 고문으로 2년간 일하다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지 2년이 지난 때였다.

 

담당 부처·기업들 중화학공업에 회의적

1969년 서울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에서 셋째)과 신동식 회장(오른쪽에서 넷째). 박정희 정부의 첫 경제 2수석비서관으로 실물경제를 담당한 신 회장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해외에서 돈과 기술을 끌어오는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 신동식]

 

박 대통령의 간곡한 설득은 신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조선산업을 일으키려면 설계나 건조 기술 뿐 아니라 어떤 난관을 무릅쓰더라도 일으켜 세우고야 말겠다는 통치자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조선은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이던 한국이 쉽게 손댈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해보자”며 결의를 보였다. 밤새 파크 애버뉴를 걸으며 고민한 신 회장은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넉 달 뒤인 65년 9월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포공항에 내리니 청와대 의전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특별히 데려온 사람이니 1급 정무비서관으로 발령내라”고 지시했다. 이 실장은 집무실로 내려오자마자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 등을 거론하며 “당신 ‘빽’이 누구야?”라고 다그쳤다. 신 회장은 “조선 기술자이고 해사 전문가인 저를 대통령이 어찌 알고 찾아 이 자리에 왔다”며 “저의 상관은 대통령과 비서실장 두 분뿐”이라고 답했다. 그제야 이 실장은 얼굴을 폈다.

 

첫 업무는 정일권 총리를 수행해 지방을 초도순시하는 것이었다. 외국 생활을 오래했기에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실정을 확인하라는 배려였다. 저녁마다 정 총리와 얼굴을 맞대고 발전 방향을 논의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런데 한 달 간의 초도순시를 마치고 청와대로 복귀하니 책상이 없어졌다. 원래 회의실로 쓰던 방에 사무실을 만들었는데 자리를 비운 사이 기존 비서관들이 책상을 들어낸 것이었다. 신 회장은 “사극에서나 보던 일을 직접 겪어보니 권력이란게 참 무섭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해프닝이 있고 한달쯤 지났을까. 이 실장이 신 회장을 불러 “자네, 경제수석을 해야겠어”라고 말을 던졌다. 처음으로 수석비서관 직제를 도입하는 비서실 조직 개편이 이뤄졌다. 경제 1·2수석, 정무수석, 민정수석 등을 신설하고 그 밑에 비서관 5~6명씩을 배치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대통령실의 조직 뼈대가 그 때 만들어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예산과 외환을 담당하는 제1 경제수석에 김학렬, 실물경제를 담당하는 제2 경제수석에 신 회장을 각각 낙점했다. 당황한 신 회장이 “경제학자도, 관료도 아니고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맞지 않다”고 고사하자 “대통령에게 따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라는 고민에 대통령을 찾았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국민이 굶지 말고 살아보자고, 경제 한번 살려보자고 온갖 전문가들을 만나고 다녔다. 다들 물가부터 잡아야 한다, 쌀을 증산해야 한다, 환율을 안정시켜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고언을 쏟아냈다. 뭐 하나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더라. 그런데 당장 일자리를 만들어야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죽는 국민이 없어질테고, 나무와 유리가 있어야 부서진 집을 고치고, 정유회사를 세워야 휘발유를 뽑아내 자동차와 공장을 돌릴텐데, 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외국에 나가서 돈과 기술을 끌어오려면 영어를 잘해야 하고,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산업 노하우를 알아볼 전문 지식이 있어야 해. 그게 바로 임자 같은 사람 아닌가. ”

 

경제를 모르는 경제수석, 그것도 신설된 대한민국의 초대 경제수석 자리는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탄생했다. 외자 유치를 통한 산업화가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지상 과제로 믿었던 박 대통령의 결단이었다. 66년 경제수석 임명장을 받은 신 회장은 중장기 과제를 고민했다. 당시의 1차산업과 경공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는 장기적 발전이 어렵다고 봤다. 고용과 기술 축적, 수출 증진 등의 시너지를 달성하려면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재편이 필요했다. 당시 내수용 경공업은 처음부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신 회장은 중화학공업 중에서도 조선을 주목했다. 자신의 전문분야이기도 했지만, 초기 투자비용을 감수하고 한 번 궤도에 올려놓으면 수많은 고용과 후방 연관산업을 책임질 수 있다는 장점에 착목한 것이다.

 

한국, 고부가가치 선박 점유율 세계 1위

1965년 미국에서 귀국한 신동식 회장을 환영하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 신동식]

 

그의 구상은 처음부터 맹반발에 부딪혔다. 담당 부처와 한국은행, 기업들은 물론 정치권에서 “가능성 없는 탁상공론이다, 제 정신이냐, 대통령을 현혹하지 말라”는 등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신 회장은 ‘세계 조선공업 변천과 한국 조선공업의 좌표 설정’이라는 한 장짜리 도표를 들고 박 대통령을 다시 찾았다. 세계 경제가 발전할수록 해운 물동량이 늘고, 그만큼 일본과 유럽의 조선 능력을 초과하는 수요가 발행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신 회장은 “수많은 사람이 사사건건 반대하고 간섭하는 것에 굴하지 않고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해주면 이 한 몸 불살라 우리나라 조선을 일으켜보겠다”고 호소했다. 그를 ‘신 국보’라 부르며 아꼈던 박 대통령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 결실이 조선·해운·수산·항만을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인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창설이었다. 대통령이 9월 25일 검토 지시를 내린지 2주만에 정식으로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위원회의 첫 개가는 대만에 참치 어선 20척을 수출한 것이다. 신 회장은 67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경제 협력자금 614만달러를 대만에 지원해 국제입찰로 어선을 건조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적자가 나도 좋으니 선박 수출의 물꼬를 트라”고 지시했다. 청와대와 상공부, 대한조선공사 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 회장이 미국 체류 당시 쌓은 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68년 5월1일 타이베이에서 진행한 입찰에서 척당 30만4000달러의 최저가격을 써냈다. 서울에서 준비한 예정 가격(36만달러)을 썼다면 2위인 서독(34만2575달러)에게 넘겨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입찰에는 성공했지만 납품까지는 먼 길이었다. 제대로 만들 수 있겠느냐는 대만 선주들의 불신과 외국산 기자재 도입의 어려움, 69년 8월1일 시작한 조선소의 총파업까지 첩첩산중이었다. 하지만 기자재를 설치하면서 배를 조립하고, 4개 팀을 구성해 5척씩 건조하고 먼저 마치는 팀이 다른 팀에 합류하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돌관공사 끝에 12월30일 마지막 배를 인도할 수 있었다. 어선 수출이 성공한 덕에 수출 총액 7억281만달러를 기록하며 그 해 정부의 수출 목표(7억달러)를 간신히 달성할 수 있었다.

 

현재 바다에 떠다니는 5만t 이상 선박의 85% 이상이 ‘메이드 인 코리아’ 다. 지난해 전세계 발주량의 37%인 1559만CGT(표준화물선 환산 톤수)를 수주했고, 특히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컨테이너선, 초대형 원유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에서는 압도적 세계 1위다. 세계 최고의 조선국가로서 우뚝 서게된 밑거름은 바로 이 때 뿌려진 것이었다. 신 회장은 “대만 선박 수출은 단기적으로는 10억원의 적자를 낸 실속없는 장사였지만, 불가능에 도전해 성과를 거둔 투지와 경험, 기술은 향후 조선이 우리나라의 수출 효자로 떠오르는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했다. 〈계속〉

 

②한국인 첫 로이드 검사관

말뫼 조선소서 2년간 지옥훈련, ‘조선보국’ 기틀 다졌다

 

1957년 코쿰스 조선소에서 유일한 동양인 설계 엔지니어로 일하던 신동식 회장이 견학을 온 스웨덴 여고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신동식]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1950년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벌어진 지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당시 춘천중학교 5학년(현재 춘천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신동식 회장은 맨몸으로 남하했다. 서울에서 자랐지만, 중학교부터 춘천에서 다녔다. 대전에서 극적으로 가족과 만나 부산까지 내려온 신 회장은 부두에서 하역노동자로 일했다. 그나마 영어가 통했던 덕이다. 부두 일은 부산에서 손꼽히는 좋은 직장으로 통했다. 하루 1달러의 임금도 쏠쏠했지만 일하는 동안 도넛과 커피를 무제한 제공하는 점도 좋았다. 신 회장은 “커피에 분유를 잔뜩 섞어서 만든 ‘커피죽’을 만들어 도넛과 함께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고 회상했다.

 

조선업 중심, 유럽서 아시아로 넘어와

부두에는 미군해양수송서비스(MSTS) 소속 화물선이 하루에도 수십척씩 들어와 군수물자를 내려놓았다. 신 회장은 그렇게 큰 배를 처음 봤다. 3000t급 전차상륙함(LST)과 1만5000t급 고속수송선에서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 식량이 끝없이 쏟아졌다. 신 회장은 “어렸을 때 책에서 본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구절이 현실로 눈앞에 나타난 셈”이라며 “가슴 속에 ‘나도 저런 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뜻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이듬해 입시에서 신 회장은 서울대 조선항공공학과(현재 조선해양공학과)를 지망한다. 신 회장의 본가는 경북 봉화였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까지 장날이면 한복 차림이 드물지 않았던 보수적인 지역이다. 그의 조부는 구한말 법관을 지낸 신언집이고, 부친은 서울고등법원장 출신의 신도순 변호사였다. 게다가 그는 종손이었다.

“그 시절에는 부자간에 대화가 별로 없잖아. 대학교 시험 칠 때쯤 날 보고 아버지께서 ‘공부는 하고 있겠지’, 그게 전부야. 당연히 법과 공부하는 줄 아셨겠지. 그리고 합격자 발표하니까 ‘합격했겠지’ 하시는 거야. ‘네’ 하고 대답하니 ‘이제 사법고시 준비를 빨리해야지’라고 하시네. 아들이 공대를 지망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셨던 거지. 문중에서 난리가 나고, 결국 집에서 쫓겨났어요.”

 

전쟁 중 공부는 힘겨웠다. 구덕산 비탈의 풀밭에 둘러앉아 영어와 일본어 교재를 교수와 학생이 함께 세미나식으로 토론하며 유체역학과 구조·재료를 공부했다. 46년 설립한 서울대에서 첫 졸업생을 배출한 무렵이다. 조선 분야는 석사 이상 학위를 받은 전문가도 없었다. 이 분야 명문으로 꼽히는 미국 MIT, 일본 도쿄대, 영국 킹스칼리지의 교재를 구해 돌려봤다. 광주보병학교에서 10주간 장교 훈련도 받아야 했다. 전황이 나빠지면 언제든 전선으로 투입할 일종의 대기조였다. 전쟁이 끝난 후 겨우 서울로 돌아왔지만 멀쩡한 건물이 없어 동숭동 일대에 학과별로 뿔뿔이 흩어졌다.

신동식 회장(가운데 아이)이 부모, 조모(사진 오른쪽)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사진 신동식]

 

55년 간신히 졸업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전기과를 나오면 한전으로 가고, 섬유과는 방직공장, 화공과는 화장품업체라도 있었지만, 조선소라고는 부산의 대한조선공사 하나뿐이었는데 그나마 개점휴업 상태였다. 결국 숙명여고에서 수학과 물리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즐거웠지만, 배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단념하기는 어려웠다. 전세계 주요 조선업체에 수십통의 편지를 썼다. 뜻밖에도 당시 유럽 최고로 꼽히던 스웨덴 코쿰스 조선소에서 답장이 왔다. 항공편과 숙소를 제공하는 조건에 설계 엔지니어로 채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듬해 말, 2년간의 교사 생활을 뒤로하고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홍콩과 방콕, 로마를 경유해 스웨덴까지 가는 기나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신 회장은 “이 먼 길을 돌아 고향 땅을 다시 밟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행기 안에서 많이 울었다”고 회상했다.

 

코쿰스 조선소는 스웨덴의 항구도시 말뫼에 자리 잡고 있다. 좁은 바다 건너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과 마주 보는 곳이다. 워낙 위도가 높아 오전 10시나 돼야 해가 뜨고 오후 3시면 어두컴컴해진다. 하지만 제공한 숙소는 침대방에 개인 욕실이 딸려있었다. 부드러운 화장지에 귀한 소금·후추·버터가 지천이었다. 전쟁의 폐허에서 온 이방인에게는 아방궁이나 다름없었다. 사무실에 가니 응접실만한 방을 혼자 쓰라고 줬다. 조선소에서는 3만t급 배를 만들고 있었다. 부산에서 본 것보다 10배는 컸다. 하지만 고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지금 만드는 배의 도면이라며 설계도를 책상 하나 가득 주는데 읽을 수가 없어요. 이론적으로 수치 계산하라면 하겠는데 도면 읽는 공부는 못했거든. 일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고민했지. 이런 일도 못한다고 돌아가라면 내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데. 결국 기술 책임자에게 자수했어요. 쫓아내려면 쫓아내고, 죽이려면 죽여라, 이런 심정이었지. 그 사람도 기가 막힌 모양이야. 그래서 기능공 기초 실무교육에 넣어달라고 요청했지.”

 

코쿰스에서는 기술고등학교를 나온 신입을 대상으로 한 12주짜리 교육과정이 있었다. 낮에는 현장에서 실습하고, 저녁에는 오후 11시까지 이론을 가르쳐 시험을 치렀다. 신 회장은 “지옥 훈련이 따로 없었지만, 도면 읽는 것부터 조립까지 평생 뼈와 살이 되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교육을 마치고 설계실에 돌아오니 그제야 도면이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웨덴에서 조선과는 7년 과정으로 이론과 실무를 모두 가르쳤다. 대학을 나오면 라이센스를 받고, 당연히 책임자급으로 조선소에 가는 구조였다. 서울대에서 수학과 역학 중심의 이론 교육만 받은 신 회장이 처음부터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버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낮에는 회사 일을 하고 밤에는 찰머스 공대에서 수업을 듣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나마 회사와 학교에서는 영어라도 통했지, 시내에 가면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한번은 이발소에 갔는데 이발사가 머리를 깎은 후 손뼉을 한번 치더니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해 쳐다보니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신 회장은 “못 보던 동양인이라고 차별하냐는 생각에 사무실로 돌아와 동료에게 울분을 토했더니 박장대소를 하더라”며 “알고 보니 얼굴에 바를 로션을 고르라고 향을 맡게 해준 것인데 말이 통하지 않아 오해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현대중, 1달러에 크레인 구입 ‘말뫼의 눈물’

1973년 코쿰스 조선소에 설치한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은 말뫼의 상징으로 꼽혔다. 이 크레인은 코쿰스가 파산한 후인 2002년 현대중공업이 1달러에 사들여 울산에 설치했다. [사진 코쿰스]

 

초반의 위기를 넘기고 2년간 코쿰스에서 실력을 다진 그는 58년 영국 런던에 자리한 조선기술용역업체인 하디&토빈을 거쳐 로이드선급(LR)의 검사관으로 옮겼다. 당시 조선기술이 리벳으로 철판을 접합하는 방식에서 용접으로 붙이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이론부터 설계, 현장까지 거친 경력이 큰 도움이 됐다. 신 회장은 로이드의 첫 한국인 검사관이었다. 선급(Classification) 검사관은 보험회사와 선주를 대신해 선박의 최초 설계부터 건조 완료까지 도면 승인 및 점검 등을 총괄하는 직책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조선소에서 배를 안전하게 만드는지 확인한다. 검사관의 승인 없이는 배를 만드는 과정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권한이 크다. 1760년 영국에서 설립한 로이드가 첫 선급 업체다.

 

먼 훗날의 얘기지만 신 회장에게 도약의 기회를 준 코쿰스도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했다. 7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 조선소들이 무섭게 성장하면서 경쟁력을 잃고 87년 파산했다. 스웨덴 정부의 지원에도 부활하지 못하고 2002년 조선소 부지와 장비를 모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73년 설치한 이후에 말뫼의 상징이던 높이 140m, 중량 7000t의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을 현대중공업이 1달러에 사들여 울산으로 가져왔다. 철거·운송·재조립 비용 220억원은 현대에서 부담했지만, 크레인을 철거해 배에 실리는 과정을 지켜본 수많은 말뫼 시민은 눈물을 흘렸다. 이 사건을 스웨덴 국영방송이 레퀴엠과 함께 중계하면서 세계 조선업의 중심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간 것을 상징하는 ‘말뫼의 눈물’로 남았다.

 

말뫼를 떠나 런던에 자리 잡은 신 회장은 로이드에서 월급으로 150파운드를 받았다. 아침을 주는 숙소가 주 3파운드 하던 시절이다. 신 회장은 “이공계 대학원생이 받는 장학금이 월 30파운드였으니 주머니가 얼마나 두둑해졌는지 감이 올 것”이라며 “이 돈으로 런던 교외에 이층집을 마련했다”고 회상했다. 이 집은 곧 ‘소사관(小使館)’이라 불리며 젊은 한국인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아지트가 됐다. 대사관 직원들이 면세로 술과 담배를 사서 가져오고, 교환 교수와 유학생들이 1인당 10실링(당시 돈으로 0.5파운드)씩 걷어서 장만한 음식으로 파티를 열었다. 김유택 당시 주영대사 부부도 종종 참석했다. 이때의 인연이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계속〉

 

③ 박정희와의 첫 만남

두 쪽 난 화물선 독자 기술로 수리…“조선업 발전 토대 됐다”

 

1967년 대한조선공사 영도조선소를 시찰하고 있는 신동식 경제수석, 박종규 경호실장, 박정희 대통령 (사진 왼쪽부터, 직함은 당시 기준). [사진 신동식], [중앙포토]

 

1961년 11월 11일 도쿄. 로이드선급이 일본에 파견한 검사관으로 일하던 신동식 회장은 주일 대표부(현재 대사관) 직원의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저녁에 열리는 리셉션에 꼭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 방문길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도쿄에 온 것이다.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때 신 회장은 은밀하게 응접실로 안내됐다. 별이 번쩍번쩍 달린 군복을 입은 ‘혁명 실세’들이 가득했다. 얼떨떨한 신 회장에게 박 의장이 대뜸 악수를 청했다. 손이 저릿저릿했다.

대뜸 군인 한 명이 반말로 소리쳤다. “당신이 신동식이야? 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영화를 많이 누렸으니 이제 조국에 와서 애국해야지.” 울컥했다. 칵테일 몇잔 마신 취기에 스웨덴으로 출국하는 과정에서 여권을 받지 못해 발을 굴렀던 설움이 북받쳤다. “총 들고 휴전선 지키는 것만 애국입니까? 정작 국내에서 발버둥 칠 때나 외국에서 밤잠 못자고 고생할 때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애국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싸한 분위기에 “어이쿠, 실수했구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박 의장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는 “초면인데 대뜸 명령부터 해대서 미안합니다”라며 신 회장에게 자리를 권했다.

 

큰소리를 친 사람은 정래혁 상공부 장관이었다. 이외에도 박태준 최고회의 상공분과 위원장, 이영진 조선공사 사장 등이 모여있었다. 몇몇은 박 의장과 함께 다음날 미국으로 떠나고, 또 몇몇은 차관과 기술이전 교섭을 위해 서독으로 갈 예정이었다. 신 회장은 “의욕과 정열만 가지고 기술을 달라, 돈을 달라 한다고 덥석 내주겠느냐”며 서독 방문을 연기하고 일본의 산업 기반을 둘러볼 것을 권했다. 조선과 철강 등 중화학공업 분야에서 막 도약을 준비하는 모습이 우리의 롤 모델이 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박 의장은 서독 일정을 늦추고 일본 산업현장을 둘러보라고 지시한 뒤 이튿날 미국으로 출발했다.

 

박 의장, 케네디 초청 방미 길에 일본 들러

1962년 수리를 마친 대포리호. [사진 신동식], [중앙포토]

 

신 회장은 도쿄의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요코하마의 NKK, 고베의 히타치 등의 조선소를 비롯해 2주간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남쪽의 규슈까지 주요 조선소와 제철소, 공작기계 공장을 방문하는 일정을 급히 마련했다. 배를 만들 때 필요한 자재에서 건조 과정까지 감독하는 로이드 검사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서독 차관단을 만나기로 한 호텔 앞에 검은색 세단이 주르륵 도열했어요. 그걸 보더니 ‘영 사기꾼은 아닌가보다’는 눈빛으로 보더군. 처음에 홋카이도에 갔을 때는 ‘신 군, 담배 좀 사와’라고 하던 양반들이 도쿄쯤 내려오니까 ‘신 상, 오늘은 어디로 가지요’라고 하더니, 규슈까지 내려가서는 ‘신 선생, 이번엔 뭘 중점적으로 보면 됩니까’ 그래요. 공장 건물만 대충 보여주는게 아니라 내부까지 상세히 보여주고, 깍듯이 대하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 거지. 며칠 겪어보니 이들도 단순무식한 군인들이 아니더라고. 겉으로는 거칠고 투박했지만, 진심으로 나라 발전을 고민하는 열정을 품고 있었어요. 몸은 고됐지만, 나중에는 친형제 이상 가까워졌지.”

 

사실 60년대에는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군인들이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엘리트였다. 특히 고급장교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국 국방대학원(War College)에서 전문 리더십과 경영을 배웠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막대한 군수물자를 효율적으로 대서양과 태평양 건너 유럽과 아시아로 보내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군대 특유의 ‘계획하고, 실천하고, 평가하라(Plan, Do, See)’는 시스템을 확립했다. 이것이 하버드를 비롯한 명문대로 전파되면서 오늘날의 MBA 코스로 발전했다. 신 회장은 “이런 교육을 받은 혁명 세력은 의사 결정 과정이 나름 합리적이었고, 군대 특유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통해 선진국을 빠르게 추격할 수 있었다”며 “물론 지금 보기에는 다양성이나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이들의 열정과 추진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 회장을 박 의장에게 추천한 사람이 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초대 경제기획원장을 맡은 김유택 부총리였다. 주영대사 시절 런던의 ‘10실링 클럽’에서 만난 패기 넘치는 젊은이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구체적인 중화학공업 발전 계획을 세우고 현실을 옮기기 위해 국내외에서 발로 뛸 적임자로 낙점한 셈이다. 일본 산업현장을 돌아보던 교섭단도 박 의장에게 “꼭 필요한 인재”라고 보고했다. 김 부총리는 여러차례 전화를 걸어 “귀국해 나라에 힘이 돼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서독에서 빈손으로 돌아오던 교섭단도 “함께 하자”며 옷깃을 당겼다. 결국 신 회장은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 도착 후 집에도 못 가고 영도조선소로

1961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맨 왼쪽)이 존 F 케네디 대통령(맨 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다. [사진 신동식], [중앙포토]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 선으로 아프리카의 가봉에도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다. 미국(3000달러)이나 일본(500달러)은 언감생심, 필리핀(250달러)도 박 의장이 “그만큼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롤모델’로 삼을만큼 격차가 컸다. 조선 산업의 바탕인 기계나 철강은 고사하고, 볼트·너트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박 의장을 만난 동갑의 케네디 대통령이 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을 위해 요청한 23억달러의 차관을 “환상적(fantastic)인 계획”이라며 거절할 정도였다. 엄청나게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한 셈이다.

 

김포공항에 내리니 헌병과 지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길로 최고회의 건물로 향했다. 박 의장은 “반갑고 고맙다”며 “당장 조선공사로 내려가 살펴보고 어찌하면 좋을지 알려달라”며 대한조선공사 고문으로 임명했다. 몇년만의 귀국이었지만 본가에도 들리지 못하고 부산 영도로 출발했다. 조국에 돌아왔다는 설렘이 가시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조선소지만 잡초가 무성한 폐허였다. 국영인데도 7개월째 월급을 주지 못해 몇몇 기술자들이 여기저기 널린 고철과 안 쓰는 기계를 국제시장에 팔아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조선 전문가가 처음 한 일은 낫을 들고 풀을 베는 것이었다.

 

미국의 원조로 들여온 전기로에 전기를 끌어오고, 일본에서 변전 설비를 들여와 겨우 조선소의 구색을 갖추는 것으로 62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선박 수요가 없어 학교용 주물 조개탄 난로와 가정에서 많이 찾던 재봉틀 머리를 만들었다. 겨우 밀린 월급을 주는 수준이었지만 기계가 돌아가는 모습에 직원들에게 생기가 돌았다. 내친김에 한국전쟁 중 동해안에 좌초해 두 동강 난 4000t급 화물선 대포리호 수리에 도전했다. 신 회장은 “일본에 의뢰해 건져서 수리하자는 의견이 나오길래 최고회의에서 ‘이런 기회를 외국에 넘겨줘서는 독자 기술과 고급 인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주장해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수리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미국선급협회(ABS)에 등록된 선박이라 수리 과정과 결과에 대해 국제 기준에 맞춰야 했다. 주먹구구식으로 땜질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전기용접이라는 신공법을 적용하기 위해 새로 용접기를 도입하고 기술을 익혀가며 수리를 진행했다. 불행한 인명사고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국에서 모인 기술자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결국 성공할 수 있었다. 박 의장은 송요찬 내각 수반, 김유택 경제기획원장 등을 대동하고 진수식에 참석해 “혁명의 성과”라고 치하했다. 조선공사는 이후 3500t급 신양호·동양호를 건조하며 궤도에 안착했다. 신 회장은 “대포리호 수리를 통해 확보한 인력과 기술이 우리나라 조선산업 발전의 토대가 됐다”며 “60년만에 이런 결과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조선공사가 안정을 찾으면서 신 회장은 경제기획원장 고문(1급)으로 1차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힘을 보탰다. 이와 함께 맨손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이런 식이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원양어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이탈리아·프랑스 정부에 차관을 요청했다. 원양어선 200척을 만들어주면 고기를 잡아 갚는다는 것이다. 선원 확보를 위해 국제 훈련 센터를 만들어달라고 FAO에 제안했다. 식량 증진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FAO는 부산 영도에 국제 원양어업훈련센터를 세웠다. 남의 돈으로 배와 인력을 마련한 우리나라는 알래스카, 사모아, 라스팔마스, 시에라리온 등에 원양어업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신 회장에게 ‘봉이 신선달’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하지만 이런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신 회장은 다시 한번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 새로운 지식을 배우자고 결심했다. 63년 도미해 ABS에서 첫 한국인 검사관으로 일했다. 2년 후 재회한 박 대통령의 설득으로 귀국을 결심할 때까지 뉴욕 생활이 이어졌다. 〈계속〉

 

④ 전자·중화학공업 육성

"경공업으론 경제 발전 힘들다" 조선·유화·반도체 밀어붙여

1969년 대륙붕 자원개발협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걸프 오일 경영진과 만난 김정렴 상공부 장관(왼쪽 둘째)과 신동식 경제수석(왼쪽 셋째). [사진 신동식]

 

1965년 귀국한 신동식 회장은 청와대 비서실 정무비서관(1급)을 거쳐 이듬해 경제수석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조국 근대화’는 멀기만 했다. 가발용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것이 수출의 큰 부분을 차지했고, 일본에 수출하는 도미나 광어회를 먹으면 처벌하는 시절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국내외 전문가들은 경공업 중심의 수입대체산업 육성을 권고했다. 신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방식으로는 한국 경제 재건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발상을 했지요. 조선 분야는 유럽과 미국 등 조선 선진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추가 투자를 하지 않아서 조선소 독(dock)의 규모가 작았어요.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초대형 독을 만들면 경쟁력 확보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석유화학은 공해산업이라는 인식 때문에 미국 뉴저지, 캘리포니아에서 밀려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를 고려할때 미래 지향적인 틈새를 찾으면 어쩌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종의 도박이었지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아니겠어요.”

 

고심 끝에 만든 보고서를 들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찾았다. 사범학교 출신에 사관학교를 나온 박 대통령은 대충 훑어보거나 검토해보겠다며 시간을 끄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계획이 성공하면 2단계, 3단계로 추진할 사항은 무엇인지 꼼꼼히 챙겼다. 박 대통령은 “나보다 더 많이 공부했고, 더 많이 아는 당신이 연구 검토한 결과라면 타당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며 “국익을 위해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늘 그 하나만을 기준으로 삼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여보, 내가 뭘 해주면 되겠어?”라고 반문했다. 신 회장은 “걸프오일 회장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신동식은 대통령을 대신하는 사람이니 믿고 일을 추진해달라’는 일종의 신임장이었다. 1968년 4월 이 편지 한장을 들고 윌리엄 화이트포드 걸프오일 회장을 만나러 갔다.

 

경제수석 때 365일 중 200일 넘게 외국 다녀

이병철 삼성 회장의 ‘전자공업 ’ 칼럼이 실린 1969년 6월 26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포토]

 

우리나라는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원유를 정제할 정유공장이 없어 휘발유와 등유를 수입하는 처지였다. 중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자본과 기술을 투입해 정유공장을 짓고, 최소한 10~20년 동안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해 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이런 힘을 가진 곳은 걸프, 엑손 모빌, BP, 쉘 등 메이저 오일 컴퍼니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걸프는 63년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이노베이션) 지분 일부를 인수하는 제휴를 맺고, 나중에 7광구 대륙붕 개발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에 관심이 컸다. 화이트포드 회장은 “걸프에서 채굴한 원유를, 걸프 공장에서 정유해, 걸프 배로 실어나른 뒤 한국에 판매만 하는 것은 너무 일방적으로 걸프에만 유리한 거래가 아닌가”라는 신 회장의 설득에 귀를 기울여줬다. 결국 걸프에서 발주한 30만t급 유조선 4척을 무상으로 인수해, 돈도 없고 기술도 없는 상황에서 막대한 양의 원유 수송이 가능하게 된 기적같은 결과를 얻어냈다.

 

전자와 반도체 산업 진흥에 나선 것도 이맘때다.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반도체라는 말 자체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미국 반도체 육성위원회 자문을 맡고 있던 김완희 컬럼비아대 교수가 이 분야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67년 경제수석이던 신 회장은 컬럼비아대로 찾아가 김 교수로부터 “앞으로 세상은 반도체가 좌우할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며 귀국을 요청했다. 그해 9월 서울에 도착한 김 교수를 그날 저녁 청와대로 안내했다.

 

“해외에 오래 머물러서인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도 그다지 격식을 찾지 않았어요. 밤새도록 박 대통령과 이야기꽃을 피우더니 다음날 대통령 집무실에 한국 전자공업을 육성할 방안을 담은 건의서를 가져왔어요. 이를 바탕으로 1년 후 김 박사는 ‘어떻게든 선진 기술을 도입해 수출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고, 다음날 박 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한 ‘전자공업 진흥 5개년 계획’을 재가했어요.”

 

박 대통령은 부서 간의 권한 다툼을 우려해 전자공업진흥회를 만들고 김 교수에게 전권을 줬다. 재계 인사들을 설득하는 것은 신 회장의 몫이었다. 58년 구인회 락희화학 사장이 창업해 66년 국내 최초로 흑백 TV를 만든 금성사, 나중에 가전 부문을 대우전자로 넘긴 대한전선, 이병철 회장이 전자산업 진출을 모색하던 삼성 등에 반도체 투자를 권유했다. 모두 난색을 보이는 것을 “대통령의 지시”라고 밀어붙였다. 일본 재계에 지인이 많던 이병철 회장이 상황을 파악해 보더니 “어이쿠, 이건 해야겠다”며 69년 삼성전자를 창업했다.

1968년 ‘대형 유조선단 확충 대책 ’ 보고서.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좋은 착상이니 적극 추진하라”는 지시를 남겼다. [사진 신동식]

 

70년대 이후 전자산업은 성장의 날개를 달았다. 74년 아남산업이 일본 내쇼날과 합작해 만든 한국내쇼날이 컬러TV를 국내 처음 생산해 수출하기 시작했다. 77년 삼성과 금성도 컬러TV 생산대열에 합류했다. 74년 미국 업체와 합작으로 한국반도체가 닻을 올리면서 반도체 칩 생산도 시작했다. 한국반도체는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삼성그룹에 인수되며 삼성반도체로 새로 태어났고, 80년에는 삼성전자가 흡수합병해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1962년 불과 50만달러던 우리나라의 전자 수출은 72년 1억달러, 76년 10억달러를 넘어섰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반도체 신화가 시작됐다.

 

조선소 건설에도 박차를 가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전국을 누빈 끝에 점찍은 부지가 거제도였다. 수심이 깊은 데다 태풍이 자주 오는 길목에서도 벗어난 천혜의 환경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에 통제영을 세운 이순신 장군이 수군 기지로 활용했던 옥포에 대한조선공사(현 한화오션) 조선소를 짓기로 결정했다. 69년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독이 길이 300m, 폭 50m 였어요. 그 정도는 돼야 250m를 넘나드는 30만t급 유조선을 만들 수 있었거든. 옥포도 처음에는 그 정도 규모로 설계도를 가져왔더라고. 그래서 ‘길이 600m, 폭 150m는 돼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밀어붙였지.”

 

옥포조선소, 한때 ‘세계 최대 독’ 기네스북에

옥포조선소 제1 독은 길이 530m, 폭 135m 규모에 한번에 1000t 이상을 들어올릴 수 있는 독일 크루프산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이 설치됐다. 73년 완공한 이 독은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79년, 640m), 현대중공업(현 HD현대) 울산조선소(82년, 642m), 군산조선소(2008년, 700m) 등이 차례로 기록을 경신했지만 한때 세계 최대 단일 독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신 회장은 “원래 옥포 외에도 지세포에 삼성, 장승포에 현대 조선소를 추가할 계획이었는데 삼성은 지세포 대신 장평동에 자리잡았고, 현대는 울산으로 갔다”고 말했다.

71년 청와대를 나와 대한조선공사의 해외사업담당 사장으로 옮긴 신 회장은 세계를 누비며 세일즈에 나섰다. 하지만 조선소 완공과 제1차 오일쇼크가 겹치는 불운이 찾아왔다. 애초부터 신 회장의 초대형 독 계획에 회의적이던 관료와 전문가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비아냥은 양반이고, ‘죽일 ×’이나 ‘매국노’라는 험한 소리를 듣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런 조롱은 몇 년 후 글로벌 경기 회복으로 본격적인 수주가 시작된 후에야 사라졌다.

 

옥포조선소는 척당 1억2000만달러짜리인 30만t급 유조선을 한꺼번에 4척씩 건조할 수 있다. 10척 주문만 받으면 20%인 계약금만 2억4000만달러에 달한다. 70년에야 수출액 10억달러를 넘어선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70년대 중후반에는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가장 큰 업무 중 하나가 조선 수주와 계약금, 중도금, 잔금 입금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신 회장은 “굴곡이 많았지만 조선소를 지으면서 중간재 공급업체만 국내에 700여개가 생겼고, 금융·보험·해운 등 연관산업도 성장했다”며 “대덕연구단지 최초의 국책 연구기관인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와 36개 대학의 조선학과 등 고급인력 양성에도 큰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팔자에 없는 경제수석 노릇을 하느라 일년 365일 중 200일 이상을 외국에 다니면서 돈 꾸고, 기술 꾸고, 원료 꾸고 그랬어요. 외국 나가기도 쉽지 않은 시설이라 남들이 보면 비행기 타고 해외유람 다닌다고 했지. 그런데 정말 문전박대 많이 당했어요. 대한민국 대표 거지 노릇하고 다닌 셈인데. 돌이켜보면 나라 운도 좋았고, 박정희 대통령 운도 좋았고, 내 정성이 통해서 동냥처럼 얻어 온 수백 건의 외자가 비료공장·정유공장이 되고, 제철소·조선소가 됐던 거지. 그게 오늘날 한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하면 뿌듯해요.” 〈계속〉

 

 

09.23 

⑤ 파란만장 청와대 시절

영부인 대신 여고생 박근혜 방일, '해운 한국' 첫걸음 떼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신동식 회장이 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걸프오일 경영진을 만난 결과 걸프에서 발주한 30만t급 유조선 4척을 무상으로 받아냈다. 당시 5만~6만t급 유조선을 주로 운영하던 걸프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원유 수송량이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일본에 발주한 초대형 유조선이었다. 이듬해 명명식을 앞두고 일본 정부와 걸프오일로부터 “영부인이 일본을 방문해 인수해갔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국교 정상화 초기 한일 양국간 우호 관계를 다지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와 이왕 유조선을 제공하는 김에 한국 정부의 호의를 재확인하려는 걸프 측의 속내가 일치한 결과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퍼스트 레이디’가 일본을 방문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의 영애인 박근혜 양이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박근혜가 ‘아저씨’라 부르며 잘 따라

▲1969년 6월 유조선 명명식 참석차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대통령 영애 박근혜(사진 왼쪽)양과 신동식(왼쪽에서 둘째) 회장. [사진 신동식]

 

“당시 청와대에는 1층에 집무실, 2층에 관저가 있었지요. 하루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층으로 내려오시며 ‘아직 고등학생인 근혜가 해외에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잘 돌보고, 외삼촌인 육인수 의원의 동갑내기 딸과 함께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설득했지요. 결국 육 여사 대신 근혜 양이 명명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어요.”

 

군인 출신 정치인과 관료가 대부분이던 당시 청와대에서 젊고 해외 경험이 많은 민간 출신 전문가인 신 회장은 독특한 캐릭터였다. 덕분에 박 대통령 가족과 편하게 지냈다. 박근혜 양이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을 정도였다. 69년 6월 신 회장은 명명식 참석을 위해 박근혜 양과 도쿄로 출발했다. 선박 건조 후 최초로 물에 띄울때 주빈이 이름을 붙이고 배를 묶은 밧줄을 도끼로 자른다. 19세기 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후 주빈은 여성이 맡는 것이 관례다. 명명식 후에는 인도 서류에 서명해 소유권이 선주에게 넘어간다.

 

도쿄에 도착한 신 회장은 엄민영 주일대사의 부인에게 명명식 준비를 부탁했다. 긴자를 방문해 구두와 옷을 사서 단장하고, 미용실에서 머리와 화장을 했다. 신 회장이 “굽이 있는 구두를 처음 신어본다는 근혜 양에게 명명식에서 영어 연설까지 맡기려니 내심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숙소인 오쿠라 호텔에는 일본 경시청이 특별 경비본부를 세우고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조총련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6월 21일 미쓰비시 중공업 요코하마 조선소에서 열린 유조선 ‘유니버스 코리아’ 명명식은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됐다. 박근혜 양은 짧은 영어 연설을 모두 외워서 무난히 진행했다. 작은 배조차 없던 우리나라가 대형 유조선단을 운용하게 된 순간이었다.

 

“자칫 영부인 방일을 둘러싼 갈등으로 번질뻔한 일이 ‘해운 한국’의 초석을 세우는 계기가 된 셈이지요. 명명식 후 근혜 양은 소니 박물관에서 휴대용 라디오와 막 개발한 컬러 TV 같은 최첨단 전자기기를 관람했어요. 그때 받은 인상이 깊었는지 대학 진학할 때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선택하더군. 44년 뒤인 2013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 해군 잠수함 김좌진함 명명식에 참석했어요.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직접 밧줄을 자른 것은 처음이라고 기사가 났지요.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생애 두번째 명명식인 셈이지요.”

 

신 회장의 청와대 생활은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숨가쁘게 돌아갔다. 바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일이 터져서 전쟁을 치르듯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68년 1월 21일 일요일 오후, 당직 비서관으로 청와대를 지키던 신 회장은 총성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에 크게 놀랐다. 난데없이 청와대 코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지자 경호실과 수도경비사령부에 비상연락을 했지만, 총격전이 벌어진 장소와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틀 전 북한 무장 침투조와 우연히 마주친 나무꾼 형제의 신고로 군이 비상 대응에 나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오전 “전방부터 서울 외곽까지 수십 겹의 방어선을 치고 순조롭게 공비들을 소탕하고 있다”는 국방부 장관의 보고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경호실장, 국방장관, 내무장관, 보안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한 시간 이상 닿지 않았다. 오후 늦게야 책임자들이 한명씩 청와대에 나타났다. 뒤늦게 나타난 이들을 보자 원망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신 회장은 “당신 뭐 하는 사람이요? 지금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합니까?”라고 호통을 쳤다. 훗날 “미국물 먹고 오더니 육군 대장들한테도 무서운 줄 모르고 큰소리를 치더라”는 악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면서 청와대를 나섰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서울에는 군 작전 차량과 특수지 근무 차량만 드문드문 다니고 있었다. 요소요소를 지키는 헌병과 경찰은 ‘수상한 자는 신분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한일·한중 열차 페리, 박근혜 대선 공약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중앙포토]

 

1·21 사태는 청와대를 기습하려던 31명의 북한 침투조가 세검정에서 정체가 발각되자 시가전을 벌인 것이다. 이들 중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투항했다. 우리도 민간인 7명을 포함해 32명이 숨지는 피해를 입었다. 신 회장은 “청와대에서 300m 떨어진 자하문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며 “이들이 북악산을 타고 공격했다면 대통령이 어이없이 당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기도 양주에서 서울 우이동을 잇는 ‘김신조 루트’는 41년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였다. 예비군과 주민등록제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도입했다.

 

이 사건은 신 회장에게 개인적인 아픔도 남겼다. 자하문 초소에서 “특수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방첩부대(CIC) 소속”이라고 버티던 북한 무장공비를 막아섰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가슴에 총을 맞고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최 서장은 신 회장과 춘천고등학교 동창으로 어릴 때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나중에 ‘최구식 경무관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맡아 동상을 세우고 일대기를 조명한 『한알의 밀알이 되어』를 냈다. 신 회장은 “지금도 자하문 앞 최 서장의 동상 앞을 지날 때마다 친구의 희생정신과 당시의 아찔한 순간이 다시 떠오른다”고 말했다.

 

71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해사기술 대표 등으로 민간 조선산업 분야에서 활약하던 신 회장은 79년 10월 27일 오전 4시에 가까이 지내던 신문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청와대에 변고가 나서 박 대통령이 사망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부랴부랴 어두운 길을 달렸다. 문득 5년 전 육 여사가 세상을 떠난 날이 생각났다. 미국 출장길에 뉴욕 호텔에서 TV를 보다가 비보를 접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귀국해 묘를 참배한 일이 생생한데 비극이 되풀이되는 상황에 기가 막혔다.

▲2013년 8월 13일 한국 해군 잠수함 김좌진함 명명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중앙포토]

 

청와대에 도착해 길을 막는 헌병 장교에게 신분을 밝히니 뜻밖에 문을 열어줬다. 본관에 들어서니 낯익은 경호관이 달려 나와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대통령, 경호실장, 경호처장이 모두 죽고 명령을 내릴 사람도, 지켜야 할 사람도 없어진 공백 상태였다. 청와대 소속이 아니기에 지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빈소 준비를 도왔다. 시신도 없이 사진과 꽃만 겨우 준비한 엉성한 빈소를 마련하자 소복 차림의 박근혜가 내려왔다. 부모를 모두 잃은 모습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얼싸안고 오열했다. 이 모습이 우연히 카메라에 잡혀 신문에 보도됐다.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정·재계 거물들이 잇따라 전화를 걸어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왜 쓸모없어진 사람을 붙들고 우느냐”고 다그쳤다.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혜택을 본 사람일수록 더 매몰차게 돌아섰다. 이후 치열한 권력다툼을 지켜보면서 신 회장은 정치인들에게 깊은 실망과 환멸을 느꼈다.

 

“원래 골프를 좋아했는데 한동안 끊었어요. 그 사람들과 같이 밥 먹고 목욕탕에 들어가기 싫어서.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과 대화한 것이 73년 옥포조선소 착공식 때입니다. 당시 조선공사 해외담당사장이던 제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훌륭한 일을 시작했으니 잘해달라’고 격려했지요. 내 기억 속의 박 대통령은 희망과 신념을 가득 담고 미소 짓는 모습이었는데….”

 

이후 박근혜와의 특별한 접점은 없었다. 신 회장은 98년 한일터널, 한중터널을 통해 암스테르담까지 철도를 연결하는 구상을 내놓았다. 당장 터널 건설이 어려우면 한일·한중 열차 페리를 통한 물류 혁신 방안을 제안했다. 박근혜 캠프에서 이 구상을 접했는지 박 후보가 대련~천진 열차 페리를 타보고 공약으로 내놨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2014년 편지를 보냈더니 비서실을 통해 경제수석과 국토교통부 장관 면담 일정을 잡아줬다. 아쉽게도 열차 페리에 큰 열정은 없었는지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

 

⑥ 과학기술연구원 설립

"100년 걸려도 과학기술 토양 다져야" 박정희 설득, KIST 세워

▲1969년 10월 23일 KIST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 KIST는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초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 신동식]

 

1966년 10월 초, 청와대 비서실에 소동이 벌어졌다. 3주 후 한국을 방문하는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깜짝 선물’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65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규모를 4만명으로 늘리는 것을 포함한 까다로운 협상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자 존슨 대통령이 “원하는 것 한 가지를 추가로 지원해주겠다”고 통 크게 인심을 쓴 것이다. 무엇을 요청할지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여의도에 존슨 타워를 세우자’ ‘한강에 존슨 브릿지를 놓자’는 등 대부분 빌딩이나 교량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원했다. 당시 경제수석이던 신동식 회장은 “기초과학 기술의 토대가 될 연구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장 “과학자 데려다 연구 시켜서 어느 세월에 실용화하고 산업을 키우겠나”는 반대가 쏟아졌다. 하지만 회의를 주재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유를 물었다. 신 회장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돈을 빌리고 기술을 도입했지만, 이대로 그들의 손발 노릇만 하면 우리 손에 남는 것이 없다”며 “100년이 걸리더라도 과학 기술의 토양을 다져야 할 때”라고 설득했다.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연구소를 세우자”고 용단을 내렸다.

 

미 존슨 대통령, 66년 한국 추가 지원

▲1969년 오하이오 바텔연구소에 모인 재미 과학기술인들. 적지 않은 이들이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해 달라”는 박정희 정부의 설득에 응해 미국에서의 보장된 삶을 박차고 귀국했다. [사진 신동식]

 

“존슨 대통령 방한까지 시간이 없었어요. 박 대통령과 지프차를 타고 연구소를 쓸만한 땅을 찾아 서울 근교와 경기도 일대를 헤집고 다녔지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토요일 청량리 근처를 지나는데 나무가 우거진 곳이 눈에 들어왔어요. 대통령도 마음에 들었는지 ‘가 보자’고 하시더군요. 도착해보니 임업시험장(현 국립삼림과학원)이었어요. 경비가 ‘못들어간다’고 제지하다가 뒷좌석에 탄 대통령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문을 열어주던 생각이 납니다. 임학과 교수들은 ‘몇십년 걸려 키운 숲을 다 뺏긴다’고 읍소하는데 박 대통령이 ‘최대한 숲을 살려서 건물을 세우겠다’고 설득했지요. 이렇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자리가 정해졌어요.”

 

연구소 부지는 구했지만 들어올 과학자가 없었다. 해외에 있는 고급 두뇌를 모셔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유타대에서 교수로 있던 저명한 화학자 이태규 박사와 미국과 캐나다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최형섭 박사 등이 발벗고 나섰다. 포드재단에서 2만9000달러, 바텔기념연구소에서 9000달러를 지원받아 순회설명회를 열었다. 오하이오주 컬럼비아의 바텔연구소 열린 설명회에는 수백명의 재미과학자가 모였다. 신 회장은 박 대통령의 의지와 지원 방안을 설명하며 귀국을 호소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67년 ‘기술 혁신’, 69년 ‘생활의 과학화’를 신년 휘호로 냈을 만큼 이 무렵 과학기술 진흥에 관심이 컸다. 다행히도 30여명의 인재들이 미국에서의 안락한 생활과 보장된 지위를 버리고 선뜻 한국행에 응했다. 이후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이어진 설명회를 통해 100여명의 과학자를 서울에 모을 수 있었다. 69년 연구소가 완공되면서 KIST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연구소로 발돋움했다. 초대 원장을 맡았던 최형섭 박사는 71년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최장수 장관(7년 6개월 재임) 기록을 세웠다. KIST 중앙 강당은 ‘존슨 강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KIST 설립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됐습니다. 독일분원, ‘한·베 과학기술연구원’(VKIST)을 포함해 박사급 연구원만 2800명, 73년 조성에 들어간 대덕연구개발특구까지 합치면 수만명에 달하는 인재들이 모여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KIST 내 인력양성을 위해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해 대부분의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소들은 KIST의 부설기관이나 연구 파트가 성장해 분리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지요. 해외에서도 효과적인 개발도상국의 연구 역량 강화 방안으로 관심이 큽니다. 다음달에는 대덕 50년 기념 행사를 대규모로 열 계획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남미나 아시아의 독재국가와는 좀 결이 달랐다. 군사 쿠테타로 집권했지만 신 회장 같은 유능한 전문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를 발탁해 힘을 실어줬다. 이 전문가 그룹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했다.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생색만 내려는 계획이 아니었다. 통치권자 개인이나 가족,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60년대 초대 경제수석으로 이 과정에 참여한 신 회장은 “행정부 장관이나 청와대 비서관, 군인 출신이나 민간인 출신 할것 없이 ‘이 나라가 잘 된다면 나 하나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일했다”고 회상했다. KIST 설립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하기 일쑤였다. 논리를 세우고 근거를 마련해 반대파를 설득하는 작업은 일상다반사였다.

 

KIST 내에 박 대통령 동상·존슨 강당

▲서울 하월곡동 KIST 안에 위치한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찾은 신동식 회장. [사진 신동식]

 

민간 출신 테크노크라트들이 청사진을 내놓으면, 군인 출신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현실화하는 것이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그 결과를 평가하는데 능했다. 그저 “잘 했다”고 자화자찬하는데 그치치 않고, 꼭 제삼자의 검토를 거쳤다. 대표적인 싱크탱크가 평가 교수단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전문가들을 모으라”고 지시했다. 교수단은 한달에 한번씩 중앙청 회의실서 칼국수를 먹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냈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대통령 지시사항과 진행상황, 평가를 취합해 공개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던 남덕우 부총리가 교수단 회의 출신 스타였다. 남 부총리는 69년 재무부 장관을 거쳐 74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돼 4년간 재직하며 70년대 한국 경제를 이끌었다. 남 부총리는 “박 대통령이 재무부 장관 임명장을 주면서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고 말을 건넸다”며 “내 딴에는 정부 시책에 온건하고 건설적인 비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고 회고했다. 신 회장은 탁상공론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한국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매달 경제동향보고를 직접 챙겼어요. 그래서 장관들이 참여하는 경제정책회의가 끝나면 수석비서관회의를 열어서 보고 내용을 정리했지요. 그냥 숫자만 확인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안되면 왜 안됐냐를 따졌어요. 수출 확대에 제동이 걸릴 경우 돈이 문제라면 은행과 협의하고, 규제 때문이라면 관계부처와 개선책을 논의했지요.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지시와 다른 결론이 나와도 박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신 회장은 “4000만명이 먹고 살려면 제조업밖에 없다, 제조업을 하려면 국내가 아니라 세계를 대상으로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힌 적이 없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몽상이었지만 ‘수출 한국’의 가능성을 믿는 리더가 있고, 구체적인 청사진을 마련할 관료가 있고, 현장에서 뛰는 기업인이 있었기에 꿈을 현실로 이뤄낼 수 있었다. 2010년 서울대로부터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은 신 회장은 후배들 앞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경제수석이 상대가 아니라 공대 출신이었기에 이렇게 성공했다”고 연설했다.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60년대, 70년대에 전세계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한강의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양철조각 하나 못 만들던 나라가 30만t 배를 만들고, 최근에는 대만까지 무인운전선박 시험운행에 성공했어요. 우리나라가 2003년 처음으로 조선 건조량, 수주량, 수주잔량 모두 세계 1위를 달성하면서 국내외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박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려웠을 일이지요. 상장을 들고 동작동 현충원에 찾아가 ‘대장님이 그리도 원하시던 미래, 오늘 조선이 세계 1위 하는데 제가 요만큼이라도 기여했습니다’라고 보고했어요. 개인적인 유대감도 있지만 나라 발전을 놓고 볼 때 국가원수로서 높이 평가해야 될 부분이 너무나 많아. 내가 그분을 못 만났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도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오늘날에 한국 과학기술이나 조선 산업이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었을까 싶어요.”

 

신 회장은 박정희 기념관에 동상 하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서울 시내에는 유일하게 KIST 안에 있다. 국가주요시설이라 일반인은 들어가지 못한다. 신 회장은 최근 KIST를 방문해 박 대통령 동상의 손을 잡았다.

 

“동상에 손이 닿으면 차가워야 되잖아. 그런데 내게는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베토벤이 운명 교향곡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긴 데는 후원한 귀족들, 악보를 멋지게 연주한 음악가들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지요.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초석을 다졌기에 조선, 전자를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목표를 정하면 신동식이 작곡하고, 정주영·이병철 회장이 연주하는 삼박자가 잘 맞았던 덕이지요. 장기집권, 인권 문제나 소위 ‘떡고물’을 챙겼다는 측근들의 부패 등 정치적인 과오가 없지는 않겠지만 먹을 것, 입을 것조차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의 미래 좌표를 정하고 추진한 박 대통령의 공로는 재조명이 필요합니다.” 〈계속〉

 

 

10.14

⑦ 친환경 미래산업 육성 꿈 〈끝〉

탄소 포집·재활용 기술, 91세 엔지니어의 끝없는 도전

1971년 신동식 회장이 공직에서 물러나자 여러 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서 “함께 일하자”는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신 회장은 33㎡(10평) 사무실에서 고투하던 민간 조선기술 전문업체인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했다. 그로부터 50여년간 컨테이너선·유조선 같은 기본 선박뿐 아니라 쇄빙선, 심해 탐사선, 핵폐기물 운반선 등 특수선을 비롯한 2000여종의 선박을 설계했다. 대우 옥포조선소, 삼성 거제조선소를 위시해 국내외 35개국에 첨단 설비와 생산 시스템을 갖춘 초대형 조선소 25곳의 건설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운영에 조언했다.

 

2019년 중소벤처기업부는 KOMAC을 ‘명문 장수기업’으로 선정했다. 현재는 가스운반선 처럼 첨단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부가가치 선박과 암모니아·메탄올·수소·원자력 등 친환경 미래 에너지 동력 선박 관련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요즘 조선이 사양산업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현재 바다에 떠다니는 5만t 이상 선박의 85%가 ‘메이드 인 코리아’입니다. 설비와 기술, 인력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요. 가격이 1000억원을 넘나드는 30만t 짜리 배를 만드는데 중국은 24~30개월, 일본은 12~18개월이 걸리지만 우리나라는 6~8개월이면 완성해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은 3000억원, 원유 시추에 쓰는 드릴쉽이나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 같은 특수선은 1조원을 넘나듭니다. 조선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춘 제조업은 반드시 보호하고 육성해야 합니다. 반도체·조선·철강·자동차·석유화학 제품을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가 제조업을 포기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청정연료 메탄올 대량 생산 방안도 구상

▲올해 91세인 신동식 카본코리아 회장은 요즘도 아침마다 사무실에 출근해 첨단기술 관련 논문과 보고서를 꼼꼼히 연구하는 현역 엔지니어다. [사진 이은봉]

 

 

2021년 구순을 앞둔 현역 엔지니어는 카본코리아를 설립했다. 세계 최고의 이산화탄소 포집·저장·활용(CCUS) 기술을 갖춘 노르웨이 카본(Kabon)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신 회장은 본격적인 친환경 산업 진출을 위해 한국법인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신 회장의 목표는 단순히 탄소를 포집해 기후변화에 대응하자는 수준이 아니다.

 

“30만t급 선박을 기름으로 움직이면 중형차 2000대 분량의 이산화탄소가 나옵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큰 화가 닥쳐요. 20년 전부터 처리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국내에서는 관심이 없어 노르웨이 사람들과 회사를 만들었어요. 우리나라에서 1년에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6억8000만t에 달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2030년까지 40%를 줄이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어요. 막대한 돈이 들고, 포집해도 국내 해양 지반에는 묻을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하면 어떨까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운반하고, 재활용하는 어마어마한 시장이 열릴 겁니다. 당장은 탄소가 골치덩이로 보이겠지만 제대로 활용하면 자원이 될 수 있어요.”

 

신 회장이 구상하는 이산화탄소 활용 방안은 이렇다. 현재 기술로 유전에서 원유의 20%밖에 뽑아내지 못한다. 나머지는 사암에 스며든 셰일가스다. 여기에 이산화탄소 1t을 넣으면 5배럴의 원유를 추가로 뽑아낼 수 있다. 100달러를 들이면 500달러가 나오는 것이다. 카본은 워런 버핏이 투자한 미국 석유업체 옥시덴털을 비롯해 지멘스·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과 함께 텍사스에서 2027년 가동을 목표로 이산화탄소 재활용 공정을 만들고 있다. 앞으로 20년간 인근 석탄발전소 5곳에서 연 4780만t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유전에 파이프라인으로 공급할 예정이다.

▲2015년 방한한 나렌드라 모디(사진 왼쪽) 인도 총리와 해양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신동식 회장(오른쪽). [사진 신동식]

 

 

“현재 t당 100달러 수준인 이산화탄소 공급가격은 카본의 기술을 활용하면 t당 30달러 수준으로 낮아질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연 15억달러씩 총 300억달러의 수입이 생기지요. 여기에 미국 정부가 주기로 한 t당 85달러의 보조금을 고려하면 총수입은 1000억달러를 넘어갑니다. 포집시설과 파이프라인 건설비 70억달러는 문제도 아니지요. 이런 시장이 앞으로 더 커진다고 상상해보세요. 우리나라의 탄소 감축 목표인 연 2억8000만t에 대한 포집시설을 갖추는데 550억달러 정도 들 겁니다. 10만t급 전용 운반선이 매년 10번씩 왕복한다고 보면 280척이 필요합니다. 건조비용을 280억달러로 잡으면 800억달러 가까운 투자가 필요하지요. 반면 2억8000만t을 포집비용 t당 40달러, 운송비용 20달러에 공급하면 20년간 3360억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어요. 문제는 민간 기업이 이런 규모의 장기 투자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정부가 나서야 하는데….”

 

신 회장의 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조선기술을 활용해 이산화탄소 전용 운반선 시장을 주도하고,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산유국에 판매하자는 것이다. 선박용 청정연료로 떠오르고 있는 메탄올을 국내에서 대량 생산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이산화탄소에 수소를 결합하면 메탄올을 만들 수 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까지 국제 해운 분야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미 싱가포르에서 메탄올을 선박용 연료로 공급할 준비를 시작했다. HD한국조선해양 등 우리 조선업계는 전 세계에서 발주된 메탄올 추진선 87척 가운데 절반을 수주했다.

 

“기후변화로 빙하가 녹고 있는 북극 항로를 통해 유럽으로 가면 16일이 단축됩니다. 부산 앞바다에 700만평의 부유 도시를 만들어 가덕도 공항, 항구, 레저시설과 함께 메탄올 공급소를 세우면 우리도 세계적인 물류 허브를 갖춘 에너지 수출국이 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가 이산화탄소를 대량으로 저렴하게 포집하고, 이를 수소와 결합해 부산 앞바다에서 전세계 선박에 공급하는 거예요. 지금의 조선업과는 비교도 안되는 큰 산업이 될 겁니다. 이산화탄소 포집으로 지구 온난화에 기여는 당연하고요.”

 

“탈탄소화·전산화·다각화 3D가 미래 주도”

▲한국해사 기술에서 제안한 이산화탄소 운반선 조감도. [사진 신동식]

 

 

과거 우리나라는 기술, 자본, 시장을 모두 외국에 의지하며 남이 이미 개발한 제품을 더 많이, 더 빨리, 더 잘 만들면서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외풍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어, 더는 이런 방식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신산업 개발제안 품목들은 세계 경제·기술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환경에서 친환경 CCUS 분야는 우리의 기술과 능력으로 세계 시장을 선점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이 하는 것만 따라 하고 과감히 새로운 도전에 나서지 못하는 태도로는 국가의 미래는 없습니다. 게임 체인저가 될 가능성이 큰 CCUS는 우리가 패스트 팔로워를 벗어나 퍼스트 무버로 자리매김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일각에서는 탄소 포집과 활용 방안을 몽상이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60년 전 조선산업을 시작할 때도 국내외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어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이산화탄소 관련 산업을 포스코가 하겠습니까, 현대차가 하겠습니까. 대통령을 비롯한 리더가 책임지고 이끌고 가야 할 겁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91세의 신 회장은 요즘도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에 자리한 카본코리아 사무실에서 환경 관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수많은 해외 논문에 둘러싸여 지낸다. 젊은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한국의 발전을 본받으려는 인도, 아프리카 등의 개발도상국 지도자를 위한 자문으로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의 신조는 ‘중단하는 자는 성공하지 못하고, 성공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황무지 같던 나라에서 애국심과 불굴의 의지만으로 개척자의 길을 걸은 신 회장의 삶이 겹쳐 보이는듯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늘 그를 바라보고 있다.

 

“국민이 굶지 않는 나라, 자유롭게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박 대통령과 나의 소원이었는데 이제 굶는 사람도 없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니 내 소임은 다 한 것 같아요.”

 

히라야마 마사토시. 1932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신 회장은 소학교(현 초등학교) 시절까지 이 이름으로 살았다. 10대 시절에는 전쟁을 겪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조국뿐이었다. 스웨덴으로, 영국으로, 또 미국으로 떠돌며 20대를 보냈다. 개인적으로는 영국 로이드와 미국 선급협회(ABS)의 한국인 첫 검사관으로 명성을 쌓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빈 듯한 공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조국 근대화에 힘을 보태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에 선뜻 서울행 여객기에 몸을 싣게 된 이유다. 서른 세살의 초대 경제수석으로 신 회장은 우리나라 조선과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보릿고개를 넘어 한강의 기적을 담고 있는 그의 생애는 우리의 근대사 그 자체다.

 

“앞으로의 세상은 3D가 주도할 겁니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다는 3D가 아니라 탈탄소화(Decarbonization), 전산화(Digitalization), 다각화(Diversification)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저력이 있잖아요. 디지털에 익숙하고, 융합·복합에 거부감이 없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이런 유산을 바탕으로 미래를 잘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