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9/ 09-01(금) 실수하면 뒤통수 오싹… 중년도 무서운 키오스크 - 09-28(목) ‘위헌 결정

상림은내고향 2023. 9. 22. 19:48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9/

09-01(금) 실수하면 뒤통수 오싹… 중년도 무서운 키오스크

 

카페나 식당 문을 열었을 때 ‘어서 오세요’ 대신 키오스크를 마주하면 움찔하게 된다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디지털 문맹 여부를 판정해주는 심판관인 양 서 있는 키오스크 앞에서 손가락이 머뭇거린다. 주문부터 결제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아이스라떼 톨 사이즈 샷 추가 테이크아웃요.” 점원 앞에선 3초면 끝날 한 문장을 위해 단계마다 씨름해야 한다. 어르신이라면 나이 탓이라도 할 텐데, 솔직히 중년들 역시 키오스크가 조금은 두렵다.

▷키오스크는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하게 늘었다. 최저임금 급등에 따른 인건비 부담도 키오스크 보급이 빨라지는 데 한몫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국내 키오스크 운영 대수는 2019년 18만9951대에서 2022년 45만4741대로 늘었다. 같은 기간 요식업에선 5479대에서 8만7341대로 3년 만에 약 16배로 급증했다. 요즘엔 키오스크뿐 아니라 자리에 앉아 태블릿PC로 주문하는 테이블 오더, QR 결제, 테이블링(모바일을 이용한 원격 줄서기) 등 비대면 서비스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많이 접해 익숙해졌다지만 키오스크 기기마다 사용자환경(UI)이 표준화되지 않아 처음 가는 가게에선 여전히 부담이다. 직원에게 물어볼 수 없어 메뉴 이름을 꿰고 있지 않으면 주문조차 안 된다. 낯선 이름에 주문을 포기했던 아이스크림 체인점의 ‘MSGR’이 알고 보니 미숫가루임을 알고는 허탈해진다. 디저트인지 기타 음료인지 가게가 설정한 분류 기준을 모르면 메뉴를 찾기도 어렵다. 화면 속 그림과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도 많다. 시간을 끌다간 초기화될 수도 있다. 결국 뒤통수가 따가워 뒷사람에게 주문을 양보하게 된다.

▷이런 당혹감이 연세 많은 어르신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해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해 보니 키오스크를 이용하다 주문을 포기한 사람이 40대에선 17.3%였지만 50대는 50.5%로 확 올라갔다. 한 빅데이터 업체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프라인 매장에서 주문할 때 30대 이하는 키오스크를 이용하는 비대면 방식을, 40대 이상은 직원을 통하는 대면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키오스크를 비롯한 디지털 기기의 확산은 거부할 수 없는 물결이다. 다만 기술 발전의 목표가 인간의 편리를 위한 것이라면, 자괴감이 들지 않도록 좀 더 친절해져야 한다. 쉬운 말을 쓰고 글씨 크기를 키우고 화면 구성과 조작 방식을 단순화하는 등의 배려가 필요하다. 어르신들도, 중년들도 한때는 ‘얼리어답터’였다. 인공지능(AI) 등 숨 가쁜 기술의 발전 앞에 지금의 젊은 세대도 버벅거릴 날이 머지않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9-02(토) ‘거짓말’ 트럼프는 지지율 1위, 믿었던 지지자는 징역 17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한 2020년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TV토론이 열렸다. 사회자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백인 우월주의 단체나 무장단체를 향해 폭력 시위를 중단하라고 당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느 단체를 거론하라는 말인가”라고 운을 뗀 뒤 “프라우드 보이스여. 몇 걸음 물러나 기다리고 있으라(Proud Boys. Stand back and stand by)”고 말했다. 질문도 이례적이었고, 그런 질문에 단체 이름을 댄 답변도 매우 낯설었다.

▷미국 법원이 바로 그 트럼프 지지 그룹 ‘프라우드 보이스’의 지도부 2인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모두 30대 후반인 피고인 조 비그스, 재커리 렐은 2년 전 이 단체 소속원들의 의사당 난입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각각 징역 17년, 15년을 선고받았다. 난입 며칠 전 트럼프는 과격 지지자들을 향해 “1월 6일 워싱턴 시위에 오라. 매우 거칠(wild) 것이다”라고 선동했고, ‘프라우드 보이스’ 회원들은 “자유 미국인으로 살자. 네 무기를 갖고 와라”는 글을 돌렸다.

▷사건 수사와 재판이 2년을 넘기면서 미국 방송의 의사당 현장 촬영 영상, 경찰의 채증 촬영물, 두 피고인이 트위터에 올린 영상물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검색할 수 있다. 영상 속 두 사람은 확신범이었다. 바이든 당선을 의회가 선포하는 날에 맞춘 습격을 제2의 독립전쟁으로 불렀다. 난입 전날에는 “복면을 쓰고 가자. 트럼프는 역시 최고의 지도자다”라며 선동했다. 카메라에 찍힌 렐은 경찰 여럿의 얼굴에 화학물질 스프레이를 뿌렸다.

▷트럼프를 폭력적으로 지지했던 두 사람은 법정에서 후회한다며 흐느꼈다. 비그스는 “그날 군중심리에 휩쓸렸다. 평생 후회하면서 살겠다”며 선처를 호소했고 “나는 테러범이 아니니 딸아이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렐 역시 “정치에 질려버렸다. 나 따위는 관심도 두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 거짓을 퍼뜨리는 것도 이젠 마지막”이라고 쓴 최후 진술문을 읽었다. 읽는 도중 번번이 눈물을 훔쳤다. 1심 법원은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의사당 폭력엔 여러 트럼프 지지 단체가 개입했다. 전국에서 1100명이 체포됐고 630명이 기소됐으며 110명이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았다. 최악의 민주주의 파괴 범죄였지만 이들을 이용한 트럼프는 건재하다. 4차례 기소되면서 머그샷을 찍는 굴욕을 겪었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공화당 대선 후보 1위를 지키고 있다. 판결 보도가 나온 뒤 하루가 지나는 동안 트럼프는 일절 반응이 없다. 이런 역설을 트럼프는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선동하는 정치인, 휩쓸려 추종하나 위기의 순간은 홀로 견뎌내야 하는 극렬 지지자. 이런 관계가 만드는 비극은 동서고금 어디서건 반복되지만 교훈은 잘 전파되지 않고 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9-04(월) ‘조용한 사직’과 ‘조용한 해고’

 

“나는 지금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중이다. 실제로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어진 일 이상의 노동과 열정을 바라는 ‘허슬(hustle) 문화’를 그만두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틱톡에 올라온 17초 분량의 짧은 영상이 전 세계로 퍼지며 삽시간에 유행이 됐다. 정해진 시간, 업무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업무만 하는 ‘조용한 사직’은 열정을 강요하던 기존 직장 문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조용히, 티 나지 않게 한다고 상사와 회사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조용한 사직’에 대한 기업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조용한 해고(quiet cutting)’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미국 등 글로벌 기업에서 공식적인 구조조정 대신 업무 재배치, 직무평가 강화 등을 통해 직원 스스로 퇴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글로벌 스포츠용품 업체 아디다스, 소프트웨어 기업 어도비, 클라우드컴퓨팅 기업 세일즈포스, IBM 등이 이 전략을 택했다. 해당 직원에게 박한 평가를 주고 승진 기회를 박탈하고 회의에서 배제하고 중요한 업무를 맡기지 않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코로나19는 전 세계 노동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다. 일에 대한 회의감으로 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나는 ‘대퇴사(The Great Resignation)’와 함께 ‘조용한 사직’이 유행이 됐다. 재택근무, 원격근무의 확산도 한몫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진정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은 생산성 저하, 조직문화 저해, 인력 유출 등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나서기 시작했다. 포브스는 “조용한 해고는 기업이 구조조정 효과를 보면서도 대량 감원을 피하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조용한 해직과 함께 ‘조용한 고용(quiet hiring)’도 서구 사회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하고 있다. 새로 풀타임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기존 근로자의 역할을 전환해 업무를 맡기는 식이다. 정규직 대신 단기 계약직을 뽑아 대응하기도 한다. 태업하지 않는 로봇이나 인공지능(AI)을 대신 고용하는 방법도 조용히 일자리를 앗아간다. 나가는 사람이 많아져도 신규 일자리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용한 사직’에 기업들이 ‘조용한 해고’로 대응하면 앞으로 노사 간에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직원은 회사를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회사는 직원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바라보는 조직에는 미래가 없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일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조용한 사직’도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젠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일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된 것 같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9-05 다이아몬드 원석값 40% 하락… 원인은 ‘랩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A Diamond is Forever)”라는 카피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광고 문구 중 하나다. 다국적 보석기업 드비어스는 1947년 내놓은 이 광고로 ‘결혼반지=다이아몬드’란 인식을 심는 데 성공했다. 이 회사는 생산량을 줄여서라도 가격을 유지하는 고가 전략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드비어스가 고집을 꺾고 다이아몬드값을 낮추고 있다.

▷드비어스는 상품 가치가 높은 ‘셀렉트 등급’ 다이아몬드 원석 값을 최근 1년 새 40% 내렸다. 작년 7월 캐럿당 1400달러였던 원석이 올해 7월 850달러로 떨어졌다. 연구실에서 만드는 보석인 ‘랩 그론 다이아몬드(Lab Grown Diamond·LGD)’ 공급이 늘어난 게 주요 원인이다. LGD의 생산원가는 천연 다이아몬드의 3분의 1 수준이다.

▷LGD는 흑연에 고압·고열을 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2∼4주 만에 만들어진다. 성분이 자연산과 동일해 전문가가 아니면 감별조차 어렵다. 예전엔 ‘인조 다이아몬드’라 불리며 가짜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성비가 높아 청년층 사이에서 인기다. 명품업체인 루이뷔통 모에에네시(LVMH)가 LGD 벤처기업에 투자했고, 드비어스도 직접 제조에 뛰어들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소환된 ‘블러드 다이아몬드’ 논란도 LGD 확산의 원인이다. 원래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 등 아프리카 분쟁 지역에서 민간인을 착취해 생산하는 다이아몬드에 붙던 이름이다. 지금은 다이아몬드 광석 매장량 세계 1위로 매년 5조 원어치의 원석을 수출하는 러시아가 논쟁의 중심이다. 주요 7개국(G7)은 푸틴의 전쟁 자금줄로 쓰이는 러시아 다이아몬드 수출을 차단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6월 미국을 방문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에게 7.5캐럿짜리 LGD를 선물했다. “인도 연구실에서 태양열·풍력 에너지를 사용해 친환경적으로 만든 것”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인도는 해외에서 사들인 원석으로 세계에서 팔리는 다이아몬드의 90%를 가공해 파는 나라다. 러시아산 원석 수입이 끊기면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는다. 이 때문에 논란을 피할 수 있는 LGD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LGD를 개발한 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공급 확대로 등급이 낮은 1캐럿대 다이아몬드 가격은 100만 원 밑으로 떨어졌다. 합리적, 윤리적 소비를 원하는 청년들의 취향과 잘 맞는다. 작년 글로벌 다이아몬드 주얼리 시장에서 LGD 비중은 처음으로 10%를 넘어섰다. 결혼반지가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게 의미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9-06 기술 제재 뚫고 나온 화웨이 5G폰… “中이 美 뺨 때렸다”

 

3일 오후 중국 주요 도시의 화웨이 매장 앞에는 신형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를 사려는 사전 예약자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미국의 대중 규제를 뚫고 3년 만에 내놓은 5세대(5G) 스마트폰이자, 자체 제작한 첨단 반도체를 탑재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공식 판매를 시작한 3일은 공교롭게도 중국의 78주년 ‘항일(抗日)전쟁 승리 기념일(전승절)’이었다. 제품을 처음 공개한 지난달 29일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항미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미국 기술 분석업체 테크인사이츠는 스마트폰을 분해해 보니 7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공정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들어 있었다고 4일 밝혔다.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하고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가 생산한 ‘기린 9000s’였다. 화웨이는 2020년 10월 내놓은 메이트 40 시리즈에 대만 TSMC의 5나노급 ‘기린 9000’을 탑재했지만 이후로는 미국의 제재로 TSMC 칩을 쓸 수 없었다.

▷화웨이는 미국의 대중국 제재를 상징한다. 2019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화웨이에 대한 미국 기업의 수출 금지를 단행했다. 2021년 조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산 장비로 부품을 만드는 외국 기업에까지 수출 규제를 확대했다. 지난해부턴 14나노 이하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장비의 수출도 막았다. 그런데도 규제 기준을 뛰어넘는 반도체를 들고 나온 것이다. 미국 언론에선 “중국이 미국의 뺨을 때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물론 7나노는 최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있다. 2018년에 나온 애플 아이폰 12세대에 들어간 칩에 쓰였다. 현재 TSMC와 삼성전자가 3나노 제품을 양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4, 5년가량 뒤졌다. 하지만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등 첨단 생산 장비의 수입이 막힌 상황에서 초미세 공정의 반도체를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간과 비용은 더 들지만 낮은 수준의 장비로 반도체 회로를 여러 번 그리는 ‘멀티 패터닝’ 기술로 극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반도체 자립 선언이 실제인지 허장성세인지는 아직 확인하기 어렵다. 스마트폰이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는 점에서 대량 생산은 힘들 수준이란 관측도 있다. 미국 제재 이전에 비축된 대만 TSMC의 칩을 사용했을 것이란 가능성도 제기된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순 없다. 1일 독일에서 개막한 유럽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IFA 2023’ 부스의 절반 이상을 중국 기업이 차지할 정도로 ‘테크 굴기’는 위협적이다. 한국으로선 초격차 기술을 갈고닦아 더 달아날 수밖에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9-07 12년 만에… 가습기 살균제 ‘폐암 유발’ 이제야 인정

 

발암물질의 피해를 입증하기는 어렵다. 급성 독성물질과 달리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돼야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 회사를 상대로 낸 1심 소송에서 패소한 원인도 흡연과 암 발병 간 인과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의 폐암 유발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발생한 지 12년 만이다.

▷환경부는 5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위원회를 열어 가습기 살균제 성분 물질 중 하나인 PHMG에 노출된 후 폐암으로 숨진 1명의 피해를 인정하기로 의결했다. 피해자는 30대 남성으로 비흡연자였다. 이번 결정은 고려대 안산병원 가습기 살균제 보건센터의 독성실험 결과를 근거로 내려졌는데, PHMG에 쥐의 기도를 노출시켰더니 40주 지나자 폐에 악성 종양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피해자 유족은 약 1억1700만 원의 특별유족조위금과 장의비를 받는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암 진단자는 206명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인정받는 질환은 몇 가지 안 된다. 처음엔 폐섬유증만 인정받았고, 천식과 태아 피해는 참사 발생 6년 후인 2017년에야 피해 질환에 포함됐다. 정부는 2020년 피해 질환을 특정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인정하겠다고 했지만 인과성 입증의 장벽이 높다. 독성물질의 인체 시험은 금지돼 있어 동물 실험으로 인과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과 동물은 생리 구조가 달라 동물에게 나타나지 않는 증상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이번 결정으로 폐암 진단자 전원이 구제받는 것은 아니다. 다른 요인으로 발병했을 수도 있으니 개별적으로 구제 여부를 검토한다는 것이다. 고령자와 흡연자의 경우 구제가 어려울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피해자 개개인의 인과성을 따지기보다 피해자 전체를 정밀 진단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에 대해서는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보상했어야 한다고 아쉬워한다. 중증 피해자들은 이미 사망한 상태다. 신고된 사망자만 1700명이 넘는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신고되지 않은 사례까지 포함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95만 명, 사망자는 2만 명이 넘는다. 업체는 치명적인 제품을 인체 무해성을 강조하며 내놓았고, 정부는 ‘세계 최초의 창의적 제품’이라며 KC마크까지 달아줬다.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환경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정부가 가해 기업들에서 거둬들여 조성한 피해구제기금을 나눠주는 일에도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참사 12년이 지났지만 피해 구제 신청자는 7862명, 이 중 2686명이 아직 구제를 받지 못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08 중국 대체할 亞 14개국, 알타시아의 시대

 

1위 중국 1798개, 2위 독일 668개, 3위 미국 479개. 한국무역협회가 국가별로 세계 수출시장 1위에 올라있는 품목들을 분석해 지난해 발표한 결과다. 5204개 품목 중 35%를 차지한 중국이 1등이었다. 한국은 77개로 10위다. 개혁개방 후 수십 년간 명실상부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던 중국이 미중 경제패권 전쟁, 내부의 부동산시장 문제 등으로 성장의 벽에 부딪혔다. 주요 2개국(G2)의 고래 싸움에 끼인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을 대신할 아시아’를 찾고 있다.

▷알타시아(Altasia)는 ‘대안’ ‘대체’란 뜻의 얼터너티브(alternative)와 아시아를 합성한 조어다. 올해 3월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미중의 지정학적 균열 후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중국을 대신해 생산기지로 삼을 만한 아시아 14개국을 선정해 이렇게 이름 붙였다. 경제 수준이 높은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인구 대국인 인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아세안(ASEAN) 회원국인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라오스 브루나이가 포함됐다.

▷14개국에 흩어져 있는 기술 및 자본력, 값싼 노동력, 풍부한 자원이 합종연횡으로 시너지를 내면 중국을 대신할 생산기지로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재작년 10월부터 작년 9월까지 알타시아 14개국의 대미 수출 규모는 6340억 달러(약 847조 원)다. 같은 기간 중국의 대미 수출 6140억 달러를 웃돈다. 이 중 다수는 아세안,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참여하고 있어 역내 무역질서도 잡혀 있다. 미국의 애플 등은 이미 중국에 몰렸던 생산기지를 알타시아 국가로 나누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빠르게 추진 중이다.

▷중국을 제치고 올해 인구수 세계 1위에 오른 인도, 4위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알타시아의 15∼64세 생산가능인구는 14억 명. 9억5000만 명인 중국을 뛰어넘는다.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의 제조업 인건비는 중국의 절반에서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10년간 갑절로 오른 중국의 임금이 부담스러운 기업들엔 매력적이다. 다만 노동력의 질이 고르지 않다는 게 약점이다.

▷미국, 유럽연합(EU)이 대체 생산기지를 찾는 과정에서 나온 알타시아 개념은 다분히 서구 중심적이다. 그렇다 해도 알타시아 내의 긴밀한 협력은 희토류를 앞세운 중국의 자원 압박, 자국에 생산시설을 세우라는 미국의 요구에 한국이 대항할 지렛대가 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에도 중국발 경제 위험이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 30여 년간 중국이란 하나의 바구니에 담아뒀던 계란을 알타시아로 나눠 옮길 시간 여유가 많지 않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9-09(토) SK하이닉스칩 몰래 심은 中 화웨이 ‘7나노’ 최신폰

 

요즘 중국의 소셜미디어에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을 화웨이 대변인 혹은 홍보대사로 묘사하는 밈(meme)이 넘쳐난다. 그가 화웨이 최신폰인 ‘메이트 60 프로’를 손에 들고 홍보하는 것처럼 사진을 합성하거나 브리핑 동영상에 끼워넣은 콘텐츠들이다. 중국 누리꾼들은 자국 기업이 미국의 고강도 제재에도 불구하고 첨단 7nm(나노미터) 반도체를 탑재한 스마트폰을 생산해냈다는 자부심을 한껏 표출하는 듯하다. 화웨이가 보란 듯이 이 제품을 선보인 것은 지난주 러몬도 장관의 방중 기간이었다.

▷‘중국 기술의 승리’로 치켜세워진 화웨이 최신폰에서 한국 기업의 부품이 나왔다. 반도체 조사업체인 테크인사이트가 제품을 해체해 본 결과 SK하이닉스의 D램과 낸드플래시가 들어 있었다. 휴대전화의 두뇌에 해당하는 AP인 7나노 반도체를 비롯해 부품의 90%가 중국산으로 채워진 제품에서 예외적으로 나온 해외 기업 제품이다. SK하이닉스는 “화웨이와 거래한 사실이 없다”며 경위 파악에 들어간 상태다. 미국 상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화웨이는 어떻게 이 칩을 확보했는지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화웨이가 2020년 전후 미국의 수출통제 강화에 앞서 반도체를 미리 대량으로 매입해놨던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중국 안팎의 중개업체들을 통해 여러 단계를 거친 뒤 화웨이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인공지능(AI) 개발 경쟁이 불붙으면서 중동 등지에선 “반도체값이 금값보다 비싸졌다”고 할 정도로 사재기 현상이 벌어진 시점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한미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이간질하기 위해 일부러 넣었다”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화웨이는 휴대전화 판매 목표량을 최근 4000만 대까지 늘려 잡았다. 9월 10일부터 오프라인 판매가 시작되는 ‘메이트 60 프로’는 중국의 ‘애국 소비’ 열풍이 가세하면서 온라인에서는 벌써 80만 대가 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수요는 급증하는데 미국의 수출통제를 따르는 해외기업들의 제품을 공급받을 길은 막혀 있는 상황이다. 한국 제품만 썼겠느냐는 의구심과 함께 외신들은 미국 마이크론 등 다른 이름들을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 제재가 실패한 게 아니냐”는 워싱턴 정치권의 질타 속에 미국 정부는 더 강력한 수출통제를 벼르는 중이다. 화웨이 휴대전화에 내장된 7나노 반도체의 생산 공정 조사에도 착수했다. 미중 간 충돌 속에 반도체 기술 견제와 공급망 확보전이 더 치열해질 것임을 예고하는 움직임들이다. 그 과정에서 튀는 불똥에 애꿎은 한국 기업이 피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제재를 뚫었다고 큰소리치면서 판매가 금지된 남의 회사 부품을 몰래 쓰는 것부터가 민망한 일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11(월) ‘바이든 휘청’에 점증하는 ‘트럼프 시즌2’ 시나리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50년 넘는 정치 역정을 통해 선거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정치인이다. 부통령 8년, 상원의원 36년을 지냈다. 그런 그가 대통령 재선 도전을 선언했지만 위기에 처했다. 지난주 CNN 여론조사는 오히려 유권자들이 바이든을 ‘약체 후보’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줬다. 응답자의 48%는 “공화당에서 누가 나와도 바이든을 이긴다”고 답했다. 소속 정당인 민주당 지지층의 67%는 내년 11월 대선 때 바이든이 아닌 제3자를 후보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는데도 이런 응답이 나왔다.

▷갈 길 바쁜 바이든을 괴롭히는 것은 80세라는 고령과 건강이다. CNN은 전화 조사에서 “바이든이 체력(stamina)과 정교한 판단력(sharpness)을 갖췄는가”라는 질문을 넣었다. 3월 처음 등장했는데, 굴욕적 질문이다. “갖췄다”가 26%, “못 갖췄다”가 74%라는 답변도 놀랍다. 올여름 상원 공화당 1인자인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81)가 회견 중에 30초간 멍하게 굳어버린 일이 건강 위기론에 불을 지른 셈이다.

▷공화당에선 트럼프가 과반 지지를 얻으며 1위를 달리고 있다. 플로리다 주지사, 30대 억만장자 사업가가 당내에서 10%대 지지로 2위권을 형성했지만 “트럼프는 좋은 대통령”이란 평가를 내놓는 ‘트럼프 아류’에 가깝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미국 경제는 성장률, 물가, 일자리 지표가 좋아졌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는 오를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미국 대선은 2차대전 이후 경제가 승부를 갈랐는데, 내년에는 다를 수 있다는 전망도 생겨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50%를 오르내리는 시점에 미 대통령 기념재단·센터 13곳은 전에 없던 공동성명을 냈다. 1930년 전후 대공황기에 대통령을 지낸 허버트 후버 기념도서관부터 오바마 대통령 센터까지 참여해 “미국은 민주주의와 법치에 기반한 나라”라며 “정치에서 예의와 존중은 필수”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출된 공직자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름만 안 썼을 뿐 트럼프의 일방주의적이고 무례한 정치를 비판한 것이었다.

▷바이든의 위기는 트럼프에겐 기회다. 트럼프는 대통령 시절 미국이 왜 미국의 세금을 써가며 남의 나라 안보를 지켜줘야 하느냐고 질문해 왔다. 그런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국을 포함하는 동맹·우방국들의 대외정책은 큰 혼선을 빚을 수 있다. 중국과 막 시작한 신냉전과 러시아의 침략전쟁은 어떻게 전개될지 점치기 어렵다. 4년 전 실패했던 북핵 ‘외교 리얼리티 쇼’를 시도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정례화한 한미일 3국 협의체와 미국의 핵협의그룹(NCG)은 기획한 대로 가동될 거란 보장이 없다. 우리 정부에는 바이든 외교에 집중하는 동시에 트럼프 ‘시즌2’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할 이중과제가 주어졌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9-12 원수에서 핵심 파트너로… 손잡은 美-베트남

 

“고통스러운 (과거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지난 수십 년간 애를 써왔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베트남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진행한 지난주 브리핑에서 베트남전의 상흔 치유와 화해 노력을 강조했다. 베트남전 영웅이었던 고(故) 존 매케인 전 공화당 상원의원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우정도 거론했다. 같은 날 백악관에서는 참전용사 래리 테일러 예비역 대위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열렸다.

▷미국과 베트남이 10일 하노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외교관계를 최상위 단계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높였다. 10년 전 맺은 ‘포괄적 동반자’ 관계에서 한꺼번에 두 단계를 높인 파격적 격상이다. 베트남은 미군 철수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을 초청했고, 미국은 대규모 투자와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지원 방안이 담긴 선물 보따리를 풀며 화답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미국의 금수 조치에 묶여 있던 공산주의 국가 베트남에 애플과 인텔, 보잉 같은 기업들이 몰려가는 격세지감의 변화다.

▷양국 밀착의 공통분모는 중국이다. 동맹과 파트너 국가들을 규합하며 대중 전선 구축에 공을 들여온 미국은 베트남을 그 마지막 고리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대미 수출 규모가 146조 원에 달하는 베트남은 탈중국에 나선 미국 기업들의 제조 시설을 옮길 매력적인 대안 국가이기도 하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으로 중국과 날을 세우고 있는 베트남으로서도 미국과 손잡을 이유는 충분하다. 중국이 일방적으로 그은 해상경계선인 구단선(九段線)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바비’를 비롯한 영화들과 넷플릭스 드라마 상영을 금지한 나라가 베트남이다.

▷베트남이 미국 편에 완전히 붙어버릴 것으로 예상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 악화 속에서도 팜민찐 총리가 6월 베이징을 찾아 리창 총리와 회담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이 확정된 이후에는 베트남이 가장 먼저 정상 간 축하 전화를 했다. 그런가 하면 냉전 시대의 맹방이었던 러시아와는 무기 거래를 지속하고 있다. “단단한 뿌리 위에서 유연하게 가지가 휘는” 대나무처럼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이른바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베트남 당국자들은 말한다.

▷전쟁에서 총을 겨누던 적이 친구가 되고, 실리 앞에서는 숭고한 이념도 한순간에 팽개치는 게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한때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불렀던 미국과 베트남이 손을 맞잡으며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의 핵심 파트너”라고 강조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어디 이 두 나라뿐일까. 국익이라는 대전제 앞에서는 그 어느 국가도 예외가 없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13 체납 1억 이상 24,890명 10억 이상도 1,090명… 간 큰 세금 도둑들

 

역대 최악의 ‘세수 흉년’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 정부 예상보다 덜 걷히는 세금은 50조∼6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수십조 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일이라도 없다면 나라 살림은 악화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면 주목받는 게 ‘체납 세수’다. 오랜 체납액은 털어내면서 작년 말까지 남아 있는 누적 세금 체납액은 102조5000억 원. 절반만 걷혀도 올해 세수 부족 대부분을 충당할 수 있는 규모다.

▷총액만 증가한 게 아니라 체납 규모가 큰 세금 대도(大盜)가 급증하고 있다. 양기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받은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10억 원 이상 체납자 수는 작년 말 1090명으로 1년 전의 740명보다 47.3% 늘었다. 1억 원 이상∼10억 원 미만도 2만3800명으로 46.9%, 5000만 원 이상∼1억 원 미만은 3만100여 명으로 31.6% 증가했다. 어쩌다 실수로 단 몇만 원 세금을 누락해도 큰일 날까 벌벌 떠는 일반 납세자에게 박탈감을 주는 간 큰 사람들이다.

▷체납세액 가운데 비중이 제일 큰 건 부가가치세다. 전체 체납액의 27%인 27조9000억 원이 부가가치세 체납액이고, 2위는 23조8500억 원인 소득세, 3위는 12조 원인 양도소득세다. 부가가치세는 음식점에서 밥값 낼 때도 10%씩 꼬박꼬박 붙는다. 사업자가 거래 상대에게 세금을 포함한 대금을 받고도 내지 않고 떼어먹은 세금이란 점에서 죄질이 나쁘다.

▷매년 12월 공개되는 고액·상습 체납자 명단에는 유명인이 포함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작년엔 수년 전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화려한 집과 여러 대의 슈퍼카를 ‘플렉스’했던 래퍼 도끼, 배우 장근석의 어머니인 전혜경 트리제이컴퍼니 대표 등이 포함됐다. 개인 체납자 1, 2위는 각각 1739억 원, 708억 원의 종합소득세를 체납한 ‘불법 토토’ 운영자들이었다.

▷작년에 국세청이 고소득 사업자 615명을 대상으로 벌인 세무조사를 통해 추가 징수한 세금은 총 2329억 원이다. 2018년 4185억 원, 2019년 3807억 원, 2020년 2595억 원, 2021년 2670억 원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세무조사 횟수와 강도를 낮춘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불법 체납액 환수의 고삐가 느슨해져선 곤란하다.

▷‘정직하게 세금을 내지 않는 데 대한 사회적 지탄·처벌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나’를 묻는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설문에 성인 남녀 응답자의 75.5%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얌체 체납자들이 떼어먹은 세금은 고스란히 성실한 납세자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세금 도둑에 대한 사회적 제재와 압박의 강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9-14 레지던스 10만 채, 수천만 원씩 벌금 폭탄 맞나

 

고강도 부동산 대책이 쉴 새 없이 쏟아지던 2018년 무렵부터 틈새형 주거상품의 인기가 치솟았다. 주택시장에 집중된 규제 장애물을 피해 오피스텔, 도시형생활주택 등으로 돈이 몰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웠던 건 생활숙박시설(생숙)이다. 강릉, 속초, 제주 등에서 세컨드하우스로 각광받던 생숙이 수도권에 상륙하며 청약 열풍을 몰고 왔다. 2021년 서울 마곡지구에서 분양한 생숙은 고분양가 논란에도 최고 6049 대 1, 평균 657 대 1의 경쟁률로 시장을 놀라게 했다.

▷흔히 레지던스라고 불리는 생숙은 원래 취사와 세탁 등이 가능한 숙박시설이다. 주택법이 아니라 건축법과 공중위생관리법의 적용을 받는다. 하지만 전입신고가 가능하고 거주에 불편함이 없는 데다 건축법상 특별한 규제도 없어 주거용으로 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특히 청약통장이 필요 없고 전매 제한, 대출, 거주 의무 등 각종 규제에서 자유로워 실수요자는 물론이고 시세 차익을 노린 투자자까지 몰려들었다. 이에 힘입어 2018년부터 매년 아파트를 빼닮은 1만 채 이상의 생숙이 들어섰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벌이던 지난 정부는 생숙마저 과열 조짐을 보이자 칼을 빼들었다. 2021년 5월 건축법 시행령을 고쳐 생숙의 숙박업 신고를 의무화하고 용도 변경 없이는 주거용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오피스텔로 변경하도록 2년의 유예기간을 줬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매년 건물 시가표준액의 10%를 이행강제금으로 물리기로 했다. 유예기간이 끝나는 다음 달 15일부터 오피스텔로 용도 변경을 하지 않고 지금처럼 거주하면 수천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건축법 개정 이전에 이미 분양했거나 준공된 생숙까지 이를 소급 적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전국 592개 단지, 10만여 채의 생숙 집주인들은 그야말로 날벼락이다. 오피스텔로 용도 변경을 하려면 복도 폭을 넓히고 주차 대수를 늘리고 통신·소방시설 등을 강화해야 하는데, 다 지어놓은 건물은 이 요건을 충족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지금까지 오피스텔로 바뀐 생숙은 1%뿐이다.

▷생숙 집주인들은 정부가 지키기 어려운 잣대를 들이대며 입주자를 거리로 내몰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특히 분양부터 입주까지 정부와 지자체 누구도 문제 삼지 않다가 투기를 막겠다며 급하게 법 개정을 밀어붙여 혼란을 키웠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10만여 채의 불법 건축물을 양산하는 규제 시한이 코앞인데 정부가 손놓고 있어선 안 된다. 주거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주거와 숙박 기능을 담은 ‘하이브리드형 시설’로 생숙을 양성화하자는 전문가 의견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9-15 1년 넘게 발령 중인 독감 주의보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코로나로 고생하는 사람은 많아도 독감 유행은 없었다. 코로나 첫해의 경우 감기 환자는 전년도의 절반으로, 독감 환자는 2%로 뚝 떨어졌다. 코로나 무서워 마스크 쓰고 손 자주 씻은 결과 예방 효과를 본 것이다. 독감 백신 업체들이 재고가 쌓여 경영난을 호소하던 시절이다. 코로나 유행이 끝나자 이번에는 1년 내내 독감이 떨어지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개 독감 유행주의보는 늦가을에 발령돼 이듬해 5월이면 해제된다. 그런데 이례적인 여름 독감으로 지난해 9월 발령된 주의보가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질병관리청이 15일부로 새로운 주의보를 내렸다. 1년 넘게 주의보가 이어진 건 처음이다. 코로나 거리 두기로 호흡기 감염이 줄어들자 감염으로 얻는 자연 면역력까지 약해져 계절성 독감이 사계절 독감이 됐다. 코로나 3년간 쌓인 ‘면역 빚(immune debt)’이 무섭다.

▷감기 증세가 오면 이게 코로나인지 독감인지 헷갈린다. 코로나와 독감의 가장 큰 차이는 발열이다. 코로나는 열부터 나고 기침 인후통 근육통 구토와 설사가 뒤따른다. 독감은 기침과 근육통이 몸살처럼 나타나다 열이 나기 시작한다. 요즘 독감에 걸리면 코로나보다 더 아프고 오래간다는 이들이 많다. A형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가 B형 바이러스에 또 감염되는 경우로 보인다. 올겨울엔 코로나, 독감, RSV(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까지 동시에 유행하는 ‘트리플데믹’이 닥칠 수 있다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전망했다.

▷RSV는 대표적인 감기 바이러스다. 콧물 발열 기침 인후통 등 증상은 일반 감기와 비슷하지만 하부 호흡기 쪽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영유아나 고령자들의 경우 폐렴으로 악화될 수 있다. 대개는 대증요법으로 치료하는데 최근 미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RSV 백신이 개발돼 식품의약국(FDA)의 사용 승인을 받았다. 미국 전문가 집단에서는 코로나, 독감, RSV 세 가지 백신을 동시에 맞아도 되는지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국내 전문가들은 RSV의 낮은 치명률을 감안하면 아직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새로운 백신까지 맞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트리플데믹이 닥쳐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독감은 백신이 있고 치료제인 타미플루도 1000만 명분 넘게 비축돼 있다. 코로나 위험도는 이미 독감 수준으로 낮아졌다. 코로나 이전 11년간 발생한 독감 환자 수는 한 해 21만∼303만 명으로 변동이 크다. 전체 환자의 65%는 20세 미만이지만 사망자의 80%는 60세 이상이다. 나이 들면 면역력도 늙는다. 고령자들은 독감과 코로나 백신을 꼭 맞는 것이 좋다. 두 백신은 동시에 맞아도 된다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16(토) 美中日보다 韓서 더 비싼 아이폰… 또 불거진 ‘호구’ 논란

 

한국에서는 아직 출시되지도 않은 애플 아이폰15의 국내 판매가를 놓고 벌써부터 ‘가격 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애플이 최근 신제품 발표 행사에서 선보인 아이폰15 기본형의 미국 내 가격은 799달러, 한국에서 책정된 가격은 125만 원이다. 현재 환율로 계산하고(106만 원), 여기에 10%의 부가가치세를 붙여도 한국이 더 비싸다. 중국(109만 원), 일본(112만 원)과 비교해도 차이가 난다. “우리를 호구로 보냐”는 국내 소비자들이 불만이 터져 나온다.

▷‘한국만 더 비싼 아이폰’은 앞서 여러 차례 지적돼 온 문제다. 2017년 아이폰X 때부터 지난해 아이폰14까지 신형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가격 논란이 반복됐지만 애플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한국 소비자들의 충성도가 높아 가격을 비싸게 책정해도 구매층이 이탈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에서는 비싸야 잘 팔린다”는 인식도 작용하고 있다는 게 시장 분석가들의 설명이다. 테슬라와 다이슨, 샤넬 등의 프리미엄급 브랜드 제품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각 기업 본사가 결정하는 해외 판매가는 각 나라의 시장 규모와 소비자 특성, 구매력, 환율, 세금 등을 고려해 결정되는 가격이다. 한국의 경우 가격과 상관없이 신형 제품이 나올 때면 ‘오픈런’ 행렬이 이어지는 현상 등까지 가격 책정의 변수로 반영했을 것이다. 아이폰만 해도 ‘한국 소비자를 봉으로 여긴다’는 비판이 구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아이폰을 ‘젊고 폼나는’ 제품으로 여기는 젊은 세대에서는 인기가 식지 않는다. 10, 20대의 60% 이상이 아이폰을 사용해 갤럭시의 두 배 수준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있다.

▷‘가격 갑질’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애플의 자신감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알 수 없다. 화웨이가 7나노 칩을 탑재한 신형 휴대폰을 내놓으면서 애플은 해외 매출의 20%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 내 입지가 흔들릴 처지다. 중국은 보안을 이유로 자국 공무원들의 아이폰 사용도 금지했다. 미국의 수출통제 조치에 맞서 다분히 보복성으로 보이는 이 조치까지 더해지면서 애플의 시가총액은 이틀 만에 250조 원이 증발했다.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이 가열되면서 이런 유탄은 더 많아지고 세질 가능성이 크다.

▷애플은 막상 미국 현지에서는 신제품의 가격을 이전 모델 때와 똑같이 동결했다. 가격 매력도를 높여 중국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승부수라는데, 그만큼 높아져 있는 회사 내부의 위기감이 반영된 결정이기도 할 것이다. 이럴 때 우군이 되어줄 충성 고객을 소홀히 여기는 게 위기돌파 전략이 될 수 없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시장 규모가 작다고 해서 한국 소비자들의 목소리까지 작은 게 아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18(월) ‘10전 무패’ 바이든 ‘불출마 압박’ 돌파할까

 

상원의원 선거 7전 7승, 부통령 선거 2전 2승, 대통령 선거 1전 1승. 화려한 정치 역정을 만들어 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80)이 궁지에 빠졌다. 고령과 건강 문제로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고 악재들도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주 1주 동안에만 불출마 압박이 2곳에서 공론화됐고, 둘째 아들이 기소됐고,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공화당은 탄핵 절차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바이든의 불출마를 공개 요구한 이는 ‘40년 지기(知己)’인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다. 그는 지난주 “3년 전 도널드 트럼프(77)의 재선 저지가 바이든의 큰 업적인데, 출마했다가 지면 물거품이 된다”는 취지의 칼럼을 썼다. 사석에서 수군거릴 이야기를 워싱턴 정치에서 공론화한 순간이다. 바이든 지지를 사설로 밝혀 온 뉴욕타임스도 향후 기후변화 정책을 다루면서 “두 번째 임기가 있다면(if he gets one)”이란 표현을 큰 제목에 넣었다. 100% 출마할 것으로 본다면 쓰지 않았을 표현이다.

▷밋 롬니 상원의원(76)의 불출마 선언도 나왔다.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맞붙은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그는 바이든과 트럼프 후보에게 자신과 함께 정치를 떠나자며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주문했다. “(우리 같은) 80대 정치인은 인공지능 기후변화를 정확히 이해 못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젊은 나라다. 미국인 3억4000만 명을 한 줄로 세울 때 중간에 해당하는 나이는 39세로, 한국(43세) 일본(49세)보다 젊다. 하지만 유독 정치에는 고령자가 많아 유권자의 불만이 나오곤 한다. 미국 상원의원 평균 나이는 64세로 한국 국회의원 58세보다 높다.

▷아들 헌터 바이든이 특별검사 손에 기소된 것도 지난주다. 5년 전 마약중독 사실을 숨기고 총기를 매입한 혐의다. 총기 규제를 강화하며 트럼프를 비판해온 바이든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 아버지로서 타격을 받았다. 헌터가 사업 상대방과 식사하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바꿔주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키운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미 하원이 대통령 탄핵조사를 시작한 것도 그가 아버지의 재임기간 동안 외국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이 사유가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겉으론 재선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내년 대선자금 모금행사에 참석하고, 트럼프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누가 그 속마음을 알까. ‘나는 트럼프를 이길까, 내가 불출마하면 누가 민주당 후보일까. 그는 트럼프를 꺾을까….’ 현직 대통령이 존재하는 민주당에선 대선 도전의 뜻을 밝힌 유력 정치인이 사실상 전무하다. 바이든이 불출마를 선언한다면 경선 일정을 고려할 때 연말 이전일 수밖에 없다. 미국 정치는 바이든의 결심이 최대 관심거리가 되는 길로 이미 접어들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9-19 100년 만의 노다지?… ‘꿈의 비만약’ 위고비

 

지난달 31일 덴마크 정부는 올해 연간 경제성장률(GDP) 전망치를 0.6%에서 1.2%로 올렸다. 이례적으로 전망치를 올린 근거는 이랬다. 제약사 ‘노보노디스크’, 그리고 그들이 만든 비만치료제 ‘위고비’. 15일 기준 노보노디스크의 시가총액은 4284억 달러(약 570조 원)로, 지난해 덴마크 국내총생산(GDP) 4060억 달러보다 크다. 이달 초 명품기업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를 제치고 유럽 증시 시총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 나라의 경제 전망까지 바꿔 놓을 정도로 위고비는 역대 가장 효능이 좋은 비만치료제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10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13kg을 감량한 비결로 단식과 함께 위고비를 꼽았고, 이후 유명인들의 ‘간증’이 잇따랐다. 임상시험 결과 참가자들은 68주간 체중을 평균 15% 감량한 것으로 나타났다. 1주일에 한 번 스스로 주사를 놓는 방식인데, 주사기 4개 1세트의 가격이 1350달러(약 180만 원)로 비싸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는 내년 상반기(1∼6월)에 출시될 전망이다.

▷위고비는 100년 동안 당뇨병에만 집중한 노보노디스크가 우연히 발견한 행운이다. 당뇨병 임상시험 도중 참가자들의 체중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당뇨병 약이 체내 호르몬인 GLP-1의 역할을 해 포만감을 늘리고 식욕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심장병 치료제로 개발되던 비아그라가 발기부전 치료제가 된 것과 비슷하다. 2014년 이 회사는 매일 주사하는 방식의 비만치료제 ‘삭센다’를 내놨고, 이어 1주일에 한 번으로 투약 주기를 늘린 당뇨치료제를 ‘위고비’로 바꿔 2021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최근 전 세계 제약·바이오 업계의 화두는 ‘해피 드러그’다. 비만, 탈모, 성기능 장애, 우울증 등을 치료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약이다.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질병이라 시장성이 높다. 비만치료제 시장은 2030년 70조 원, 탈모치료제는 2028년 15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앞다퉈 비만치료제 개발에 뛰어들고 있는데, 주사약 대신 먹는 약이 싼 가격으로 나오면 시장이 뒤집어질 것이다.

▷하지만 맹신해선 안 된다. 메스꺼움, 구토, 복통, 설사, 우울증 등의 부작용이 보고되고 있다. 투약한 뒤 사용을 중단하면 1년 이내에 빠진 체중의 대부분이 되돌아온다는 연구도 있다. 영국 의료 당국은 위고비 처방을 최대 2년으로 제한하도록 권고한다. 평생 약을 입에 달고 살 수도 없으니 결국은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한다. 안전성과 효과가 검증된 유일한 다이어트 방법은 아직까지는 식이요법과 규칙적인 운동뿐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9-20 美 웨스팅하우스에 승소… 독자수출 날개 다는 ‘K 원전’

 

1880년대 미국에서 전기가 처음 보급될 때 송전 방식으로 교류가 옳은가, 직류가 맞냐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직류파(派)’ 거두였고, 반대편 ‘교류파’엔 요즘 전기차 브랜드로 이름이 유명해진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가 있었다. 테슬라를 고용해 에디슨을 패배시키고, 전기시장을 교류로 평정해 ‘커런트 워(current war·전류 전쟁)’의 승자가 된 기업이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창업한 전기회사 ‘웨스팅하우스’였다.

▷발전소, 가전, 방위사업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던 웨스팅하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원자력 발전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개발 원조까지 받아 한국 정부가 1968년 처음 발주한 원전 입찰에서 웨스팅하우스는 제너럴일렉트릭(GE) 및 영국, 캐나다 기업과 경합했다. 이듬해 1월 웨스팅하우스의 가압경수로형 원전이 최종 낙점됐다.

▷이렇게 ‘고리 1호기’ 사업이 시작됐고, 1971년 첫 삽을 뜬 원전 건설은 7년이 걸렸다. 10·26사태 한 해 전인 1978년 원전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다. 당시로선 한반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업이었고, 한국은 세계 22번째 원전 보유국이 됐다. 한국 원자력 산업에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된 이유다.

▷좋은 인연에서 출발한 웨스팅하우스와 한국의 관계가 복잡해진 건 최근 일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이 폴란드 체코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수출을 시도하고 있는 한국형 원전(APR1400)을 작년 10월 웨스팅하우스 측이 문제 삼았다. 미국 원자력에너지법에 따라 수출 통제 대상인 웨스팅하우스의 원전 기술이 한국형 원전에 포함돼 있다며,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 한수원이 수출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소송을 낸 것이다.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은 그제 웨스팅하우스가 제기한 소송을 각하했다. 미 원자력에너지법이 수출 통제 권한을 법무부 장관에게 위임했을 뿐, 민간기업에 권리를 준 것은 아니라는 한수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한수원은 한국형 원전을 수출할 때 웨스팅하우스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돼 독자 수출의 길이 열렸다. 다만 지식재산권 분쟁은 별도 사안이라 갈등이 모두 해소된 건 아니다.

▷이미 여러 번 주인이 바뀐 웨스팅하우스는 2005년에도 매물로 나왔다. 한국의 두산중공업 등이 관심을 보였지만 결국 일본 도시바가 인수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1위 우라늄 채굴 기업인 캐나다 카메코로 대주주가 바뀌었다. 한국도 언제까지 선진국 기업의 지식재산권 횡포에 시달리기만 할 순 없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답게 원천기술을 보유한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9-21 비례대표 초선의 구태 뺨치는 갈 之자 정치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정치판을 기웃거린 것은 2016년부터다. 그는 그해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에 인재 영입 대상으로 입당했다. 비례대표 출마를 원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했다. 4년 뒤인 2020년 총선을 앞두고는 시대전환을 창당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위성정당이 만들어지자 이를 비판하던 그는 6일 만에 시대전환을 탈당해 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에 입당했다. 시민당에서 비례대표 6번을 공천받고 의원이 됐다. 그의 의원으로서의 첫 출발은 꼼수인 위성정당을 통해서였다.

▷조 의원은 국회 입성 후 예상대로 시대전환으로 복귀했다. 민주당은 시민당의 친(親)조국 이미지를 탈색시키기 위해 시민단체 몫이라는 구실로 시대전환의 조정훈 후보와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후보를 공천했고 두 사람 다 총선 후 민주당과 시민당의 합당에 불복한다는 이유(정확히는 구실)로 출당당해 원래 정당으로 돌아갔다. 총선 전 시대전환 탈당은 위성정당 입당과 결부된 또 다른 꼼수인 위장 탈당이었다.

▷조 의원은 이듬해인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조 의원은 “완주할 마음이 아니라면 출마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결국 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단일화를 하며 후보직을 내려놓았다. 본래부터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대신 자기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었고 막판에 후보직을 내려놓고 의원직을 유지해 실속은 실속대로 챙겼다.

▷조 의원은 이번 국회 전반기까지만 해도 친민주당 성향을 보여 왔으나 문재인 정부 말기와 윤석열 정부 초기를 거치면서 급속히 친국민의힘 쪽으로 돌아섰다. 결국 그제 국민의힘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그를 1호 인재로 영입한다고 밝혔다. 조 의원의 당적은 ‘더불어민주당-시대전환-더불어시민당-시대전환’으로 바뀌었고 다시 국민의힘을 더하게 됐다.

▷그는 본인 입으로 대학(연세대 경영학과)과 대학원(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은 재수해서 들어갔고 세계은행은 삼수해서 들어갔다고 강조한다. 목표를 세우면 달성을 위해 집요하게 추구하는 스타일인 듯하다. 내년 총선에 지역구 당선에 도전하면서는 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정당의 조직력에 의탁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국민의힘은 그를 서울 마포갑 지역구에 공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은 민주당 강세 지역이고 특히 서울 서북권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세력이 강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속한 정당에서 출마하면 떨어져도 갈 자리가 많다. 한번 거대 정당에 몸담을 기회가 있었으면 거기서 개혁을 추구해야지, 권력의 향방에 따라 거대 정당 사이를 오가는 갈지자 행보의 초선 정치인에게 어떤 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9-22 미국판 전랑외교? 백악관 경고 받은 주일대사

 

정치인 출신인 람 이매뉴얼 주일 미국대사의 별명은 람보(Rhambo)다. 영화 ‘람보’ 시리즈의 주인공과 그의 이름을 합친 것으로, 워싱턴 정가를 휘어잡던 그의 거침없는 입담과 기질을 보여 준다.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늦게 전달한 조사 담당자에게 죽은 생선이 담긴 상자를 보내 경고한 일화는 지금도 종종 회자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첫 비서실장이었던 그를 ‘무서운 악동(enfant terrible)’이라고 불렀다.

▷이매뉴얼 대사가 최근 백악관에서 소셜미디어(SNS) 활동을 자제해 달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그가 리상푸 중국 국방부장의 신변이상설 등 중국 관련 내용을 잇달아 올리는 것이 미중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매뉴얼 대사는 친강 중국 외교부장에 이어 리 부장까지 공개석상에서 사라진 사실을 언급하면서 “시(진핑) 주석의 내각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해졌다”고 썼다. 주인공들이 하나씩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살인 미스터리에 빗댄 것이다.

▷‘미국판 전랑(wolf warrior) 외교’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매뉴얼 대사의 호전적 언사는 원조인 중국의 외교관들만큼이나 거칠다. 중국 청년들의 실업 등 내부 문제를 거론한 글들에는 조롱하는 뉘앙스가 섞여 있다. 그는 시 주석을 언급하며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인간의 비극을 이용한다” 등의 비판도 서슴지 않고 내놓는다. 외국 정상을 직접 겨냥하는, 외교관으로서는 금기시되는 언사다. 미국 언론들이 ‘전랑외교’의 상징이었던 친강 등을 향해 “무례하다”고 비판하던 언행을 그대로 중국에 돌려주는 듯한 모양새다.

 

▷이매뉴얼 대사의 ‘비외교적’ 행보는 특유의 싸움닭 스타일에 더해 미국 민주당 유력 인사로서의 자신감이 뒷받침된 결과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견제라는 공동의 목표 앞에서 급속히 밀착하는 미일 관계를 보여 주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그는 주재국인 일본에서는 횟집을 찾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을 지지하고 지하철 출퇴근, 후지산 등산 등을 통해 일본인들과의 스킨십도 늘려 가고 있다.

▷대사의 역할은 본국과 주재국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양국 관계를 관리하고 소통, 우호를 증진하는 것이다. 이를 흔들 수 있는 과도한 공격이나 비판, 개입은 불필요한 논란을 키우고 외교적 갈등을 부를 우려가 있다. 이매뉴얼 대사의 경우 제3국인 중국을 향한 것이라지만 미중 정상회담을 통한 관계 관리를 추진하는 미국 행정부로서는 적잖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국내에서도 싱하이밍 중국대사가 이른바 ‘베팅 발언’으로 거센 질타를 당한 사례가 있다. 지나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23(토) “공포심 일으키면 유죄”… 40년 만에 바뀐 강제추행 기준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강제추행죄는 세 차례의 전환점이 되는 대법원 판례를 통해 처벌 범위를 넓혀왔다. ‘선 폭행 후 추행’이 아니라 폭행 자체가 추행이 되는 ‘기습추행’을 인정한 판례, 성욕을 채우려는 동기가 없어도 추행이 성립한다는 판례, 그리고 흉기로 위협하며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신체 접촉 없이도 강제추행이 가능하다는 판례다. 대법원이 21일 강제추행죄의 인정 범위를 확대하는 또 한 차례의 전환점이 될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추행죄로 기소된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 씨는 현역 군인이던 2014년 사촌 여동생 B 양을 침대에 쓰러뜨리고 신체를 만진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사건의 쟁점은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느냐는 것. 군사법원에서 열린 1심에선 징역 3년을 선고했지만 2심 재판부는 폭력의 정도가 저항을 어렵게 할 수준이 아니라며 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을 무죄로 판단했다. B 양이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하지만 대법원은 “강제추행에서 폭행 또는 협박에 의해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일 것을 요구하는 종례의 판례 법리를 폐기한다”며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경우에도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강제추행죄는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가 목적이므로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을 당했다면 폭행·협박이 반드시 항거 곤란 수준일 필요는 없고, 피해자에게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형평과 정의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이번에 대법원이 폐기한 ‘항거 곤란’이라는 법리가 등장했던 1983년은 폭행과 협박이 선행되지 않아도 강제추행이 성립한다는 전향적인 결정이 내려진 해이기도 하다. 당시 대법원은 피해자를 힘껏 껴안고 강제로 키스한 사건에서 ‘추행 그 자체로도 폭행이 될 수 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이른바 기습추행의 경우 폭행의 정도는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정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후 직장 상사가 여직원 어깨를 주무르고, 찜질방 수면실에서 자는 사람을 만지고, 남의 옷 위로 엉덩이를 만지는 행위는 모두 기습추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강제추행에서 ‘강제’의 기준을 완화하면 단순추행이나 비동의 추행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법 규정을 확장 또는 유추 해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법원 판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의 해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더 안전하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25(월) 시험감독 ‘꿀 알바’ 직원 가족에게 몰아준 산업인력공단

 

국가 자격증 시험장의 시험감독은 취업준비생들에게 ‘꿀 알바’로 통한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힘들지 않으며, 감독하는 짬짬이 개인적인 일도 볼 수 있다. 모집공고가 올라오기 무섭게 마감되는데 알고 보니 신청자가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시험을 주관하는 한국산업인력공단 직원 가족들이 감독 알바 자리의 상당수를 선점하고 있었다.

▷공단이 위탁 관리하는 국가 자격시험은 변리사 세무사 공인중개사 시험 등 500개가 넘는다. 시험감독은 규정상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 취준생이나 경단녀 같은 근로취약계층이 맡는다. 그러나 감사원이 최근 발표한 감사 결과에 따르면 2018년 1월∼2022년 8월 공단 직원 가족 373명이 시험감독을 맡아 40억 원 넘는 수당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지역은 시험감독 173명 중 49%가 직원의 배우자였다. A부장 배우자는 422회 시험감독으로 1억107만 원, B국장 배우자는 7200만 원을 받았다. 1000만 원 이상 챙긴 배우자가 100명, 심지어 중학생 아들에게 시험감독을 맡긴 경우도 있었다.

▷이런 지적은 처음이 아니었다. 2020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공단이 감독 알바를 직원 가족에게 몰아주는 행태가 문제가 되자 공단은 시험감독 위촉순번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시험감독 인력 풀을 만든 뒤 추첨으로 위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우수그룹’으로 분류된 인력은 순번제 적용 없이 우선 위촉한다는 규정을 만드는 꼼수를 부렸다. 서울지역 우수그룹의 76%가 직원 배우자이니 사실상 특혜를 준 것이다. 연간 시험감독을 278회 하는 등 사실상 ‘상용직’ 시험감독이 된 직원 가족이 생긴 배경이다.

▷산업인력공단은 올 4월 기사·산업기사 시험에 응시한 613명의 답안지를 채점하기도 전에 파쇄하는 초유의 사고를 냈다. 고용노동부 감사에서는 2020년 이후에만 최소 7차례 답안지 누락 사고가 발생하는 등 시험 관리 전반에 총체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0년간 검정시험 관련 소송만 152건이다. 이번에 시험감독 알바 실태까지 드러나면서 연평균 450만 명이 치르는 국가 자격시험의 신뢰도는 더 추락하게 됐다.

▷감사원 감사에서는 산업인력공단 외에도 여러 공공기관의 방만 경영과 기강 해이 실태가 확인됐다. 퇴직자가 설립한 회사와 계약하면서 인건비 71억 원을 초과 지출하고, 예상 수입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성과급 156억 원을 챙기고, 273억 원어치 일감을 몰아주는 대가로 퇴직자 71명을 재취업시켰다. 그동안 감시를 잘 받지 않은 155개 기관 중 18개 기관만 조사했는데도 확인된 비위만 162건이다. 다 털었으면 734쪽 감사보고서가 수천 쪽이 되지 않았을까.

이진영 논설위원 ecclee@donga.com

 

09-26 이번엔 ‘청와대 재단’?… 오리무중 청와대 활용법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왜 이사를 갔나요?” 지난달 초 청와대를 찾은 영국 스카우트 대원들은 해설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한국 대통령이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설명에 대한 물음이었다. 대통령만의 공간이었지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국민에게 개방됐다는 설명에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 국민들 중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많다. 개방된 청와대가 향후 어떤 공간이어야 할지 제대로 된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와대를 관리·활용하는 조직은 수시로 바뀌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가칭 ‘청와대 재단’을 설립해 내년부터 업무를 위탁할 계획이라고 25일 밝혔다. 지난해 5월 개방 이후에는 문화재청 청와대 국민개방추진단이 맡아왔다가 올해 3월 문체부로 관리 주체가 이관돼 청와대 관리활용추진단이 신설됐다. 하지만 실무는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에 위탁했는데, 내년부터는 다시 문체부 산하에 별도 법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개방된 청와대의 정체성도 오락가락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인 지난해 1월 “역사관을 만들거나 공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여러 전문가와 국민 의견을 듣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7월 문체부는 돌연 ‘프리미엄 근현대 미술 전시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베르사유 궁전처럼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후엔 의견을 수렴한다며 대통령실에 청와대 관리활용자문단을 만들었지만 정작 활용 로드맵은 공개하지 않고 올해 1월 활동을 종료했다. 뚜렷한 방향이 없으니 4월 문체부가 발표한 활용 방안은 ‘역사 문화 예술 자연이 공존하는 복합 공간이자 관광 랜드마크’ 같은 온갖 말을 갖다 붙였다.

▷국민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온 것도 아니다. 지난해 12월 이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통령 주재 행사가 열린 것만 50차례가 넘는다. 대통령이 국격에 맞는 공간에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당분간 이용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국빈 행사보단 국정과제 점검회의, 부처 업무보고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달 13일 영빈관에서 열린 행사도 굳이 청와대일 필요 없는 ‘제20차 비상경제민생회의’였다. 대통령 행사는 보안 사항이라 방문객들은 당일에야 영빈관을 볼 수 없단 사실을 알고 발길을 돌리곤 했다.

▷권력의 정점이자 구중궁궐을 상징하던 청와대의 문이 활짝 열렸을 때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초반에 월 50만 명에 이르던 관람객이 최근엔 월 10만 명대로 떨어질 정도로 열기는 식은 상태다. 이제부터는 이 역사적 공간을 장기적으로 어떻게 활용할지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정부 내에서만 뚝딱 처리할 게 아니다. ‘국민에게 돌려드린다’는 말에서 중요한 건 공간이 아니다.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마음이 핵심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9-27 “가장 혐오스러운 세금”… 英 상속세 폐지하나

 

영국에서 지난해 납부된 상속세는 71억 파운드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영국인들이 보유한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커지면서 상속세 부과 대상자가 늘어난 결과였다. “세금 당국이 중산층을 착취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큰 부자들만 겨냥한 것으로 여겨졌던 상속세 부담의 범위가 중산층으로 점차 넓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론조사에서는 상속세가 ‘영국인이 가장 혐오하는 세금’ 1위에 올랐다.

▷영국 정부가 상속세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더타임스가 보도했다. 리시 수낵 정부가 다음 달 보수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지지층의 표심을 잡기 위해 이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치권이 ‘부자 감세’ 반대 여론을 의식해온 것과 방향은 다르지만 또 다른 정치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영국의 상속세 부과 기준은 32만5000파운드(약 5억3500만 원). 이를 넘는 유산에 적용되는 40%의 단일세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일본, 한국, 프랑스 다음으로 높다.

▷내각 인사들은 과도한 상속세율의 문제점을 공개 직격하고 있다. 최근 부친상을 치르고 상속세 고지서를 받아든 그랜트 섑스 국방장관은 “사람들이 왜 이걸 징벌적으로 여기는지 이해하게 됐다”며 “매우 불공정하다”고 했다. “평생 열심히 일한 이들이 자녀에게 유산을 남겨주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이라는 레이철 매클레인 주택장관 발언도 나왔다. 보수당 소속 의원 50여 명은 “자본의 재할당을 막아 경제를 훼손한다”, “이미 각종 세금을 낸 자산에 이중과세하는 것”이라는 등의 비판과 함께 폐지 논의에 힘을 실었다.

▷유럽에서는 2000년대 들어 이미 스웨덴과 체코,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등이 상속세를 폐지했다. 스웨덴의 경우 70%에 이르는 상속세율의 부담으로 대표 기업인 이케아가 모국을 떠나고,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의 전신 기업이 상속 과정에서 결국 경영권까지 해외에 넘긴 이후의 만시지탄이었다. 상속세를 유지하고 있는 OECD 국가 중 상속세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일본인데, 가업 상속 시 각종 면제와 혜택을 따져보면 실효세율은 11% 정도로 내려간다. 미국은 1200만 달러(약 160억 원) 선까지는 상속세를 내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베이비붐 세대의 사망률은 2026∼2030년 정점을 찍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피땀 흘려 축적해 놓은 부가 자녀 세대로 흘러내리는 과정에서 상속세가 가져올 경제적, 사회적 논란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반발을 감수하고 상속 세제 개편에 나서고 있는 나라들은 그 득보다 실이 더 커지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속세율이 50%,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합치면 최대 60%에 이르는 한국이 마냥 손놓고 있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28(목) ‘위헌 결정’ 대북전단금지법 만든 책임자들

 

대북전단금지법은 2020년 6월 4일 북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향해 “원래 못된 짓을 하는 놈보다 그걸 못 본 척하는 놈이 더 밉다”고 비난하면서 입법화되기 시작됐다. 통일부는 4시간 반 만에 예정에 없던 브리핑을 열어 “대북전단금지법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통일부 장관은 김연철이다. 그런데도 그는 13일 뒤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사무소를 폭파하면서 함께 자리에서 날아갔다.


▷헌법재판소는 그제 ‘대북전단금지법(개정 남북관계발전법)’을 위헌 결정했다. 의원 입법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정부가 주도해 만든 법률이 이렇게 빨리 그리고 쉽게 위헌 결정이 나는 걸 보지 못했다. 판사 옷을 벗은 뒤 바로 법무비서관이 된 당시 김형연 법제처장과 여성운동가 출신의 당시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위헌 법률이 만들어지는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문 정부의 청부 입법을 국회에서 주도한 것은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당시 외교통일위원장이다. 그는 대북전단금지법안의 대표 발의자로 나섰고 이 법안을 외통위에서 민주당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국민의힘은 본회의에서 필리버스터까지 하면서 저지에 나섰으나 민주당은 송 위원장이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포 사격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한 뒤 필리버스터 종결 동의안을 처리하고 통과시켰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흔히 표현의 자유 옹호자로 거론된다. 다만 그는 ‘위해 원칙(harm principle)’을 내세워 의견조차도 그것이 표현되는 상황이 해악 행위를 적극적으로 부추긴다면 가벌성이 면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세기 후반 이래 헌법은 밀이 언급한 ‘위해’의 범위를 축소해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앨런 더쇼위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쓴 책 ‘불이야(Shouting Fire)’를 보면 위해의 범위에 대한 연방 대법원의 입장은 올리버 홈스 대법관이 주장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서 더 협소한 ‘즉각적인 폭력의 위험’으로 이어졌다.

▷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포 사격으로 살포 지역 주민이 받을 위험은 ‘즉각적인 폭력의 위험’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단이 비판한 대상(김정은)이 받는 위험이 아니라 비판받는 쪽이 비판한 당사자도 아니고 제3자(주민)를 볼모로 잡고 가하는 위험이다. 게다가 김정은은 표현의 자유로 보호할 가치가 없는 독재자다. 따라서 그 위험은 표현의 자유의 오용에 따른 위험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 자체를 침해하는 위험이다. 명색이 법률가인데도 두 위험의 본질적 차이를 구별 못 하고 대북전단금지법을 강행한 문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