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조선일보) 2023-09/ 09.01(금) ‘슈퍼문’ 보며 소원 빌기 - 09.28(목) 한식 패권 시대
만물상(조선일보) 2023-09/
09.01(금) ‘슈퍼문’ 보며 소원 빌기

▲일러스트=이철원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골 할머니 댁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밤이 내려앉은 집 밖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그러다 달이 뜨면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달 그림자가 그렇게 뚜렷할 수 없었다. 달의 밝기는 보름달 기준 0.25럭스다. 3~5럭스인 보안등보다는 어두웠지만 그래도 ‘천연 보안등’이라 할 만했다. 윤석중은 동요 ‘둥근달’에서 ‘보름달 둥근 달 동산 위로 떠올라/ 어둡던 마을이 대낮처럼 환해요~’라고 했다.
▶달에 대한 동서양의 시각은 정반대다. ‘미치광이’라는 뜻의 영어 루나틱(lunatic)은 ‘달의’라는 뜻의 루나(luna)에서 왔다. 특히 보름달은 불길함의 상징이다. 1976년 국내 개봉돼 그해 최고 흥행작이 된 아르헨티나 영화 ‘나자리노’는 사랑에 빠진 늑대 인간이 보름달 뜰 때마다 괴물로 변하는 이야기다. 가수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스릴러’ 뮤직 비디오도 스릴(전율) 효과를 내기 위해 잭슨을 달빛 받아 늑대가 되는 괴물로 표현했다.
▶반면 동양 전통 사회에서 달은 행운과 풍요의 상징이다. 우리 조상은 초승달이 보름달로 차는 과정에서 곡식이 익어가는 모습을 떠올리고 풍작을 기원했다. 우리나라 세시 풍속이 연간 190건 정도인데 50건 내외가 정월 대보름 관련이고 추석 보름달 관련 풍속까지 합하면 70~80건에 이른다. 한국인의 유난한 보름달 사랑이 반영된 현상이다.
▶달과 지구의 평균 거리는 38만1586㎞다. 멀 때는 40만㎞, 가까울 때는 36만㎞쯤 된다. 36만㎞ 안쪽으로 들어오는 보름달을 ‘수퍼문’이라고 한다. 어젯밤 하늘에 수퍼문이 떴다. 평소 보름달보다 15% 더 컸고 30% 더 밝아 올해 뜬 보름달 중에 가장 크고 밝았다. 지구에 35만7344㎞까지 근접한 덕분이다. 그런데 하필 8월에 수퍼문이 지난 1일에 이어 어제까지 두 번 떴다. 서양에선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면 불길한 징조라며 ‘블루문’이라 한다.
▶영어의 ‘블루(blue)’도 달처럼 불길한 어휘다. ‘코로나 블루’도 그런 사례다. 그러나 우리에겐 행운을 빌 기회가 두 배인 ‘러키 문’이다. 심리학자인 서은국 연세대 교수는 “행복하려면 가족, 친구와 산책 나가고 수다 떠는 경험을 매일 하라”고 했다. 산책 나가 크고 밝은 달 구경하는 것도 행복이다. 달이 처음 지구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달과 지구의 거리는 지금의 10분의 1도 안 됐다. 이후 해마다 3.8㎝씩 멀어지고 있다. 더 멀어지기 전에 더 자주 달을 보고 행복도 빌자.
09.02(토) KAL기 격추 40주기

▲일러스트=이철원
요즘 유럽이나 북미행 비행기를 타면 종전보다 2~3시간이 더 걸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전 세계 항공사들이 러시아 영공을 우회하기 때문이다. 최단 노선을 택해 유류비와 운항비를 아끼는 데 익숙한 항공사들엔 난감하고 낯선 상황이다. 전쟁의 불똥이 하늘로 튄 것이다. 반면 중국 항공사들은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는 종전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냉전이 한창이던 20세기로 돌아간 느낌이다.
▶1983년 8월 31일 대한항공 KAL 007기가 뉴욕 JFK공항을 이륙했다. 연료 보급차 앵커리지를 거쳐 베링해, 쿠릴열도 남쪽, 일본 상공을 지나 다음 날 오전 김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소련 영공을 우회하는 항로였다. 하지만 007기는 무슨 이유에서 그랬는지 소련 캄차카반도와 사할린 인근 상공을 잇따라 통과했다. 첫 번째 영공 침범을 놓친 소련이 부랴부랴 전투기를 발진시켜 미사일을 쐈다.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전원 사망했다.
▶여러 음모론이 제기됐다. 미 CIA가 소련의 방공망을 시험하고자 벌인 일이란 설도 그중 하나다. 소련은 007기를 미국의 RC135 정찰기로 오인했다고 주장했다. 사할린과 캄차카반도 주변이 미국 정찰기들의 주요 작전 지역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007기는 등화관제에 철저한 군용기와 달리 항법등(燈)과 충돌 방지등을 켜고 있었다. 칠흑 같은 시간대였다 해도 민항기를 구별 못 했다는 변명은 믿기질 않는다.
▶그보다 5년 전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1978년 4월 20일 파리 오를리 공항을 이륙해 김포공항으로 가던 KAL 902기가 경유지인 앵커리지를 향하다 돌연 기수를 돌려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 긴급 발진한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했다. 다행히 인근 호수에 비상 착륙했지만 이 과정에서 승객 2명이 숨졌다. 그때도 소련은 902기가 미 RC135인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오인 격추는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미 해군 순양함은 1988년 7월 호르무즈 해협 상공을 지나던 이란 민항기를 대공 미사일로 격추했다. 290명이 숨졌다. 이란 공군 F14 전투기로 오인했다고 한다. 2020년 1월엔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테헤란 공항 이륙 직후 이란 혁명수비대의 대공 미사일을 맞고 추락했다. 176명이 사망했다. 미국의 순항미사일로 오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투기가 근접 거리에서 민항기를 두 번이나 격추한 사례는 소련이 유일하다. 지금 푸틴은 그런 소련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침략 전쟁 중이다. 40년 전 비극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
09.04(월) 짐만 걸머졌던 대통령 양자 이인수

▲일러스트=이철원
이인수 박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4·19로 하야해 하와이에 체류할 때 양자로 입적됐다. 1960년 11월 전주 이씨 문중의 결정이었다. 대학 졸업자에 프란체스카 여사를 생각해 영어를 할 줄 알고 미혼이었으면 하는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이인수 박사가 양녕대군 17대손이어서 16대손인 이 대통령과 계대(系代)도 맞았다. 이인수 박사는 독일 유학의 꿈을 접고 이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의 나이 서른 때였다.
▶이 대통령은 본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일곱 살 때 잃었고 프란체스카 여사와 사이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1957년 83세 생일에 당시 이기붕 국회의장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했으나 이강석은 4·19 직후 부모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대통령은 6대 독자인 자신 때문에 고생한 아버지, 임종을 못한 어머니 얘기를 종종 하면서 후사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런 이 대통령이라 1960년 12월 인수씨가 도착하자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바를 모르며 좋아했다.
▶이후 이인수 박사는 이 대통령의 공과를 제대로 평가받는 데 삶 전체를 바쳤다. 그는 이 대통령이 만든 체제에 살면서 건국 대통령을 폄훼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그분의 공적은 독립운동은 물론 자유민주주의 노선 선택, 60만 국군을 양성, 한미방위조약을 체결 등 다 열거하기엔 지면이 모자랄 것”이라고 했다. ‘공구과일(功九過一)’이라는 학자의 평을 소개하기도 했다. 2006년 KBS 드라마가 이 대통령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하는 등 고소고발한 것도 여러 건이다. 대통령 양자로서 볕은 못 쫴 보고 음지에서 짐만 걸머졌던 인생이었다.
▶이인수 박사가 4·19가 일어난 지 63년 만에 4·19 민주묘지를 찾아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위로와 사과를 전했다. 이제 92세 고령인 이 박사 마음도 급했을 것이다. 그는 12년 전인 2011년 4월에도 참배하려다 4·19 단체들이 “갑작스럽다”고 저지해 발길을 돌린 적이 있었다. 이 박사는 “오늘 참배와 사과에 대해 선친도 ‘참 잘하였노라’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이념과 진영으로 갈려 반목하고 있지만 정파와 진영을 초월하는 일도 적지 않다. 지난 3월 4·19혁명 주도 인사 50여 명이 국립서울현충원의 이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것도 그런 예일 것이다. 올해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14주기 추도식에는 박정희·김영삼·노태우·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들도 함께했다. 이런 식으로 한 발씩 통합과 화해의 길로 나가야 할 것이다.
09.05 책 3권 값 1억6500만원

▲일러스트=이철원
15세기 프랑스 땅 3분의 1을 소유했던 베리 공작은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애장품인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양 200마리 가죽으로 만들었다. 책에 실린 세밀화 130여 장도 값비싼 청금석 안료로 그렸다. 삽화라기보다 작품이다. 9세기 아일랜드 켈스 수도원이 만든 ‘켈스의 서’도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하얀 양피지에 수놓은 정교한 문양과 화려한 채색을 보려고 연간 50만명이 이 나라를 찾는다.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으로 값싼 책이 나오기 전까지 책은 웬만한 부자 아니면 만들 수도 가질 수도 없었다. 고급 양피지로 2000쪽짜리 성경 한 권 만들려면 오늘날 가치로 2억원쯤 들었다. 포도밭을 팔아서 책 한 권 샀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 희귀서를 찾아내 필사해서 파는 ‘책 사냥꾼’은 중세 지식인 사이에 인기 직업이었다.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연 인문학자 페트라르카도 당대 유명한 책 사냥꾼이었다.
▶우리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편에 ‘대학과 중용은 면포 3~4필을 줘야 살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쌀 30말 가격인데 논 2~3마지기의 1년 생산량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책 한 권에 500만원으로, 1만원 조금 넘는 요즘 책값보다 400배 넘게 비쌌던 셈이다.
▶더 비싼 책도 얼마든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경제적 가치는 8000억원을 넘는다고 한다. 사실상 값을 따질 수 없다는 의미다. 절판된 책 중에 뒤늦게 몸값이 귀해지는 사례도 있다. 2001년 발간된 인기 소설가 이영도의 장편 판타지 ‘폴라리스랩소디’의 저자 사인이 들어간 한정판 정가는 7만원이었다. 지금은 중고 서점에서 50만~100만원에 거래된다.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이 대장동 업자 김만배씨와 허위 인터뷰를 한 뒤 1억65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신씨는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혼맥지도’라는 자신의 3권짜리 저서를 김씨에게 팔고 받은 책값이라고 했다. 국내 현대문학 서적 중 경매로 가장 비싸게 팔린 책은 1926년 출간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초판본으로, 지난 2월 1억5100만원에 팔렸다. 신씨의 책이 이 책보다 가치 있다고 믿을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 서점에서 ‘혼맥’이라고 쳐보니 ‘한국 최고 부자들의 금맥과 혼맥’이란 책이 1만7820원에 팔리고 있다. 신씨의 책은 이보다 1만배쯤 비싼데 정작 서점 검색에선 나오지도 않았다. ‘김만배’라서 책값도 만 배로 쳐줬느냐는 우스개까지 나온다.
09.06 ‘술 사절’ 팔찌

▲일러스트=박상훈
개강 맞은 대학가에 ‘술 팔찌’가 등장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알코올 귀요미 팔찌’ ‘술 강권 금지 팔찌’라고 불리는 이 실리콘 팔찌는 몇 년 전 서울의 한 대학 총학생회가 자신의 주량을 색깔로 표시하는 팔찌를 만들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나눠주면서 확산됐다.
▶신입생 주량을 세 단계로 나눠 술을 못 마시거나 마시고 싶지 않은 경우에는 노란색 팔찌를, 얼굴이 살짝 붉어질 때까지만 마시겠다면 분홍색을, 끝까지 마실 수 있다면 검정색 팔찌를 고르게 했다. 또 다른 종류로는 겉면에 ‘술만 받아요’라고 쓰고, 안쪽 면에 ‘마음만 받아요’라고 써서 필요한 대로 뒤집어 사용할 수 있게 한 양면 팔찌도 있다.
▶팔찌나 브로치 같은 작은 액세서리도 때로는 사회적 소통 수단이나 강력한 언어가 될 수 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여성들의 옷 장신구인 브로치를 외교적 상징으로 활용한 ‘브로치 외교’로 유명했다. 이라크 언론이 그를 “사악한 뱀 같다”고 비난하자 유엔 회의장에 뱀 모양 브로치를 하고 나왔다. 열 마디 반박보다 강한 분노의 메시지였다. 러시아 외교 장관을 만날 때는 미사일 모양 작은 브로치를 달고 나갔다. 러시아 장관이 “미사일 모양 브로치냐” 물으니 올브라이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맞아요. 요격 미사일이죠. 우리는 이렇게 작게 만들 수 있으니 허튼 생각 마세요.”
▶1990년대 초 미국의 화장품 그룹 에스티 로더 가문의 에벌린 로더 여사가 유방암을 겪고 나서 핑크 리본을 만들고 유방암 캠페인을 시작했다. 여성의 가슴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던 때였다. 유방암에 대한 인식 개선과 조기 진단의 중요성을 알리는 이 캠페인을 계기로 핑크 리본은 유방암 퇴치의 상징이 됐다. 에이즈 퇴치를 위한 빨간 리본, 동성애자 인권 보호를 위한 무지개색 리본 등도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액세서리다. 국내에서는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노란 리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후원 팔찌 등으로 이런 액세서리 문화가 젊은 층에 확산됐다.
▶술 팔찌 얘기가 나오자 기성세대는 “그냥 말로 하지, 번거롭게 팔찌까지 만드느냐”는 반응이다. 하지만 ‘의식 팔찌’ ‘기부 팔찌’ 등으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는 익숙한 세태다. 음주 회식 문화가 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젊은 세대에게는 부담스럽고 거북한 경우도 많다. 아직 낯선 자리여서 대놓고 거부 의사를 밝히기 곤란할 때도 있다. 술 팔찌는 이런 음주 문화에 대한 신세대식 저항 화법인 셈이다.
09.07 외유 의원 맞는 외교관들

▲일러스트=이철원
5공 시절 국회 운영위 의원들이 프랑스를 방문했다. 프랑스 선진 의회 제도 시찰 명목이었다. 주프랑스 대사관의 참사관은 운영위 전문위원을 드골 공항에서 태워오는 임무를 맡았다. 전문위원이 차 안에서 프랑스 의회 제도를 “각색해야 한다”고 말하자 화가 났다. 전두환 정권이 프랑스 의회 제도를 왜곡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운 그가 “공무원이 국민을 속이기 위해 파리까지 왔느냐”며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호텔도 싸구려 호텔로 잡아줬다.
▶알고 보니 전문위원은 당시 위세 높던 보안사 대령 출신. 현역 의원들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운영위 의원들이 대사와의 점심을 거부하고 참사관 파면을 요구했다. 그와 동향(同鄕) 의원이 “국회의원쯤 되면 장관이나 공관장 문책을 논의해야지 실무진 파면을 논의하면 되겠느냐”고 해서 겨우 살아났다. 참사관은 회고록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그 반대 케이스도 많다.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외교부가 의전비서관으로 추천한 외교관을 거부했다. 그 대신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시절 중국 방문 시 브리핑과 의전으로 좋은 인상을 준 사람을 발탁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9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특사로 유럽을 방문했을 때 현지 공관장을 인상 깊게 보았다. 대통령 취임 후 그를 정무수석으로 기용했다. 희귀한 외교관 출신 정무수석이었다. 대통령 형을 외국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대사가 나중에 장관이 되기도 했다.
▶외교관들이 재외공관 근무 시 만난 정치인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다 보니, 의원 의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하루에 공항을 세 차례 왔다 갔다 한 외교관도 봤다. 능력은 부족한데 승진하고 싶은 일부 외교관은 대놓고 의원들에 대해 과잉 의전에 나선다. 골프장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를 개인 비서처럼 안내하며 점수를 딴다. 현지에 유학한 정치인의 자녀 관리를 해주는 외교관도 본 적이 있다.
▶해외여행 시 재외공관에 의전을 요구하는 정치인들도 급수가 있다. 공문을 통해 흔적을 남겨가며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이들은 하수다. ‘베테랑’들은 외교부 간부들을 통해 자신의 여행 계획을 넌지시 전해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한다. 주일 대사관이 조총련 행사에 참석한 윤미향 의원에게 차량 등 의전을 제공한 문제로 논란이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 돌연 귀족이 된 것으로 착각하는 정치인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잘못된 행태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09.08 93세 박사 도전

▲일러스트=이철원
조선 중기 대사헌을 지낸 양연(梁淵)은 젊은 시절 책을 멀리하다 불혹(40세)에야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대가(大家)가 되기 전엔 절대 손을 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훗날 과거에 급제한 양연이 손을 펴보니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조갑천장(爪甲穿掌)’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효종 때 김득신은 조선의 대표적 만학도로 회갑이 다 된 59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그는 80세로 죽을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기(史記)는 몇 번 읽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고 한다. 충북 증평군엔 그의 만학 정신을 기리는 문학관이 있다.
▶대만의 자우무허씨는 85세에 손자와 함께 공부를 시작해 대학생이 됐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해 91세에 학사모를 썼다. 98세엔 철학과 대학원을 졸업, 세계 최고령 석사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105세 때는 중문학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은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도 70~90대의 만학도가 적잖다. 못 배운 아쉬움에, 배움의 기쁨을 찾아 학교 문을 두드린다. 여성 기업인 이상숙씨는 올해 나이 92세에 성공회대에서 박사가 됐다. 2년 전 석사에 이어 국내 최고령 박사다. 5년 전 ‘쉴 새 없이 일만 한 나를 위해 쉬는 시간을 갖겠다’며 내린 결정이었다.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공부했고 공부방도 따로 얻었다. “알아가는 즐거움에 계속 공부할 것”이라고 했다.
▶권노갑(93) 민주당 고문이 한국외국어대 영문학과 박사에 도전한다. 10년 전 83세 때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달부터 영시와 영문학, 셰익스피어 등 세 과목을 수강한다. 매일 영자 신문과 시사 영어도 읽는다. 하루 6시간씩 공부해도 힘든 줄 모른다고 한다. “영어만 보면 흥미가 생겨 단번에 외게 된다”고 했다. 그는 6·25 때 유엔군 통역관으로 일했고 목포여고에서 3년간 영어 교사를 했다. 정계 은퇴 후에도 동시통역 대학원에 다니며 영어 개인 교습을 받았고 하와이대에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몇 년 뒤 박사 학위를 받으면 세계기록일 것도 같다.
▶지인이 “건강은 괜찮냐”고 묻자 그는 “걱정이 있다. 골프 티샷이 200m가 안 나간다”며 웃었다. 라운딩 나가면 30~40세 아래 후배들보다 더 멀리 칠 때가 많다. 수시로 달리기와 자전거, 역기 운동도 한다. 그는 “공부에 열중하면 피곤함이 사라지고 건강해진다”며 “배움은 즐거우니 평생 벗을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09.09(토) 한강에도 오는 레드불

▲일러스트=양진경
에너지 음료 ‘레드불’을 창업한 오스트리아 기업가 디트리히 마테시츠는 1980년대 초 태국에 출장 가서 마신 현지 카페인 음료에 반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카페인과 탄산을 혼합한 음료를 내놨지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탄산음료는 코카콜라가 장악했고, 카페인 음료는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일부 유럽 국가는 지금도 청소년 건강을 이유로 카페인 음료 광고를 규제한다. 돌파구를 찾던 마테시츠의 눈에 익스트림 스포츠가 들어왔다.
▶유튜브에 레드불을 치면 회사명 뒤에 ‘공중곡예’ ‘암벽등반’ ‘F1′ 등 다양한 익스트림 스포츠 이름이 자동 완성으로 따라붙는다. 모두 이 회사가 지원하거나 팀을 만들어 운영하는 분야다. 그 분야 중엔 후원이란 말만 나와도 다른 기업들은 “사고 나면 회사 이미지만 나빠진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도 있다. 날다람쥐의 다리 사이 피막처럼 생긴 옷을 입고 낙하하는 ‘윙슈트’가 대표적이다. 사망 사고 잦기로 악명 높다. 그런데 마테시츠는 ‘레드불 에어포스’라는 스카이다이빙 팀까지 만들었다.
▶2021년 윙슈트를 입은 스카이다이버가 칠레의 비야리카 활화산 연기 속을 시속 280㎞로 뚫고 지나가며 분화구 속 용암이 끓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찍었다. 유튜브로 볼 때마다 손에 땀을 쥐게 한다. 2012년 스카이다이버 펠릭스 바움가르트너가 지상 39㎞ 성층권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린 모험도 이 회사가 후원했다. 바움가르트너는 마하 1.25(시속 1342㎞)로 낙하해 비행기를 타지 않고 음속을 돌파한 최초의 인간이 됐다. 이 장면의 유튜브 누적 조회 수는 4600만건을 넘는다.
▶서울시와 레드불이 이달 중 한강 양화대교에서 클리프(절벽) 다이빙 대회를 연다고 한다. 건물 7층 높이인 27m를 시속 85㎞로 낙하해 입수한다. 부상 위험이 커서 어지간히 훈련받은 다이버도 뛰어내리길 망설인다. 그런데도 각국에서 대회가 열릴 때마다 수만명이 현장을 찾아 환호하고 평균 30만명이 중계를 시청한다. 개최지가 된 도시들도 반긴다. 프랑스 파리의 센강, 일본 규슈의 다카치호 협곡, 호주 시드니항 등을 돌며 연 7회 대회를 연다.
▶모험을 후원하는 레드불 방식의 마케팅을 ‘스토리 두잉(story doing)’이라고 한다. 제품에 이야기를 입히는 스토리텔링을 넘어 제품 이미지를 스토리로 만들어 행동으로 옮긴다는 뜻에서다. 칠레 활화산 비행에 성공한 다이버는 착지 후 “나를 100% 집중하게 해 주는 두려움이 좋다”고 했다. 기업이 못 하고, 안 하는 것이 없는 세상이다.
09.11(월) 조선 시대 北서 여왕?

▲일러스트=이철원
지난주 함경남도 신포조선소에서 열린 북한의 신형 잠수함 진수식에 뜻밖 인물이 등장했다. 군사와 무관한 최선희 외무상이 잠수함 갑판에 오르더니 샴페인 병을 선체에 부딪쳐 깨뜨렸다. 함정의 무사 운항을 기원하는 이런 의식은 통상 선주의 아내가 맡고 주요 함정은 여왕이나 퍼스트레이디 몫이다. 김정은이 참석한 ‘1호 행사’였으니 아내 리설주가 맡는 게 자연스러운데 최선희가 나섰다.
▶최선희 옆에선 현송월이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인기 가수 출신으로 김정은 집권 이후 출세가도를 달린다.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 시절 깊이 사귄 인연 덕분이라고 한다. 모란봉악단 단장, 당중앙위 후보위원, 삼지연 관현악단장을 거쳐 지금은 1호 행사 의전을 총괄하는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다. 2인자 소리까지 듣는 김정은 여동생 김여정과 같은 직위다. 주요 당 행사 때 두 사람은 항상 나란히 앉는다. 리설주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최선희·현송월·김여정은 김정은이 치욕으로 여기는 ‘하노이 노 딜’에 직간접 책임이 있는데도 건재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여정은 친동생이니 그렇다 쳐도 수많은 남자 간부가 이보다 경미한 사안으로도 수시로 숙청당하는 것과 대비된다. 극도로 가부장적이고 뿌리 깊은 북한의 남존여비 풍조를 생각하면 다소 생경한 광경이다. 북한 내부에서도 ‘남녀 역차별’ ‘여인 천하’란 말이 나온다고 한다.
▶그 정점은 김정은 딸 김주애다. 작년 가을부터 ICBM 발사장 등에 등장한 김주애는 지난 주말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심야 열병식에서도 돋보였다. 김정은 손을 잡고 나란히 입장해 4명만 허락받은 귀빈석 1열에서도 김정은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군 서열 1위인 박정천 원수가 무릎을 꿇고 귓속말을 하기도 했다. 호칭은 ‘사랑하는’ ‘존귀하신’을 거쳐 ‘존경하는 자제분’으로 격상됐다. 노골적 우상화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북은 남성 중심의 백두 혈통에 대한 집착이 강해 김주애를 후계자로 판단하는 건 성급하다”는 입장이다. 조선 시대를 능가하는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에다 왕조 세습 문제까지 걸려 있어 ‘여성 수령’이 나오기 어렵다는 취지다. 김정은 스스로도 2년 전 국제부녀절 기념 서한에서 “여성들은 남편 뒷바라지를 해주고 시부모를 잘 모셔야 한다”며 “자식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을 애국으로 여겨야 한다”고 했다. 몇몇 여성을 중용한다고 해서 시대착오적 여성관이 달라질 리 없다. 후계자가 아들인지 딸인지보다 중요한 건 김정은의 ‘꺾이지 않는’ 4대 세습 의지일 것이다.
09.12 월터 아이작슨

미국 전기(傳記) 작가 월터 아이작슨이 쓴 ‘일론 머스크’ 평전이 연일 화제다. 머스크의 큰아들이 지난해 여성으로 성전환 했고 엄마 성(姓)으로 바꿨다는 사실, 머스크가 “아들이 공산주의자가 됐다”고 한탄한 개인사가 공개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스타링크(인공위성 통신망)를 제공해 서방을 도왔던 머스크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공격을 막기 위해 스타링크를 한때 끊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머스크는 왜 이런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작가에게 털어놓는 걸까. 앞서 아이작슨에게 평전 집필을 의뢰했던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아이작슨은 사람들이 털어놓게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감탄한 바 있다. 잡스는 2004년 암 판정을 받은 뒤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다”면서 아이작슨에게 전기 집필을 의뢰했다. 작가는 잡스를 50차례 인터뷰한 뒤 “잡스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카타르시스를 얻는 병적인 자기중심주의자”라고 썼다. 잡스가 23살에 얻은 딸을 평생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실도 그대로 썼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타임지 편집장을 지낸 아이작슨은 총 9권의 전기를 썼다. 이 중 6권이 헨리 키신저,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일론 머스크 같은 천재들 이야기다. 그는 “다빈치처럼 예술, 과학, 인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접점을 찾는 능력이 창의성의 열쇠”라고 말한다. 그의 전기 집필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천재’ 인증이니, 민낯 노출의 위험을 무릅쓸 만도 하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정치 분야에서 걸출한 전기 작가로 활약 중이다. 닉슨 이후 9명의 미국 대통령을 직접 인터뷰한 뒤, 빌 클린턴, 조지 W부시, 버락 오바마, 트럼프 평전을 집필했다. 트럼프 취재 과정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친서 27통을 입수, 보도한 바 있다. 우드워드는 트럼프를 18차례 만난 뒤 “트럼프는 대통령직에 부적합한 사람”이라고 썼다.
▶한 인물의 총체적 면모를 보여주는 전기를 잘 쓰려면 인터뷰, 자료 조사와 함께 통찰력까지 필요하다. 유럽에서 인물 평전은 앙드레 모루아(바이런·발자크 평전), 장 폴 사르트르(보들레르·플로베르 평전) 같은 당대 최고 작가들이 도전하는 영역이었다. 하버드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한 아이작슨은 “내가 직접 인터뷰하고 자료를 찾지 않으면 어떻게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겠느냐”면서 모든 작업을 본인이 직접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평전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은 문화적인 차이도 크지만 도전하는 작가도 적기 때문인 것 같다.
09.13 아! 아틀라스

▲일러스트=박상훈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시작해 알제리를 거쳐 튀니지에 이르는 아틀라스 산맥의 역사는 3억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처럼 여러 대륙으로 쪼개지기 전, 하나였던 대륙 판게아를 관통하던 대산맥이었다. 북미 대륙을 종단하는 애팔래치아도 원래는 아틀라스 산맥의 일부였다. 3000m 넘는 고봉이 줄지어 달리며 2500㎞에 걸쳐 펼쳐지는 아틀라스를 넘으면 척박한 사막 사하라다. 유럽 고대인들이 아틀라스를 ‘세상의 끝’이라 여긴 이유였다.
▶풍요와 불모를 가르는 산맥의 마법이 옛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만들어진 게 아틀라스 신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아틀라스는 원래 ‘지상에서 가장 먼 땅’을 지배하는 자였다. 그 땅은 가축과 과일이 풍성했다. 메두사의 목을 벤 영웅 페르세우스가 그곳을 지나다 잠잘 곳을 청하지만 아틀라스는 그가 땅을 탐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거절한다. 분노한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들어 올려 아틀라스를 거대한 돌산으로 변하게 했다.
▶산이 된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쳐준 덕에 도시가 번성했다. 그중에도 베르베르어로 ‘신의 땅’이라는 뜻의 마라케시는 12세기부터 여러 왕조의 수도였다. ‘모로코’라는 국명도 이 도시 이름에서 유래했다. 지금의 수도 라바트가 정치 중심지, 해변 도시 카사블랑카가 경제 중심지라면, 아틀라스가 병풍처럼 에워싼 마라케시는 문화 중심지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로그 네이션’ 편을 이 도시에서 찍었다. 도시 이름을 딴 유명 국제영화제도 열린다. 산화철을 함유한 흙으로 지은 마라케시는 ‘붉은 도시’로도 불린다. 붉은색 고대 로마와 아랍 유적이 아틀라스의 만년설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만드는 세계적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아틀라스 산맥의 축복을 받으며 번영하던 마라케시 일대가 지진 피해로 신음하고 있다. 쿠투비아 모스크의 첨탑과 마라케시를 상징하는 성벽이 훼손됐고, “이것 하나 보러 마라케시에 간다”는 말을 낳을 만큼 아름다운 리아드(전통 가옥)의 화려한 문양 타일도 사람들과 함께 흙더미 아래 묻혔다.
▶모로코 국가 ‘샤리프의 찬가’에 ‘형제들이여 가자/ 위엄을 향하여/ 세상에 보여주자/ 우리는 여기에 계속 살아왔다고’라는 구절이 있다. 사막 전사 후예들의 용맹한 기상을 드러내는 가사다. 지난 카타르 월드컵 때 아프리카 국가로는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하는 저력도 과시했다. 신화에 따르면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친 뒤 비로소 세상의 혼돈이 사라졌다고 한다. 모로코가 지금의 혼돈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를 빈다.
09.14 ‘자유시’ 스보보드니

▲일러스트=이철원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1912년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면서 아무르주 내륙에 ‘알렉세옙스크’라는 도시를 세웠다. 황태자 알렉세이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후 이곳을 점령한 볼셰비키는 도시 이름을 ‘스보보드니’로 바꿨다. 러시아어로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 우리 독립군은 이곳을 ‘자유시’라고 불렀다.
▶하지만 스보보드니의 역사는 자유와 거리가 멀었다. 1921년 이곳에서 독립군이 소련 붉은 군대에 집단 학살되는 참변이 벌어졌다. 청산리·봉오동 전투 승리 후 일제의 강한 압박에 밀리던 독립군은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자유시에 총집결했다. 하지만 소련은 독립군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자 소련은 독립군 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함께 장갑차와 기관총을 앞세워 기습 공격했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최대 500명에 달했고 포로로 잡혀 붉은 군대에 끌려간 이도 1000명에 가까웠다.
▶스보보드니 외곽에는 2017년 시 당국과 고려공산당 후손들이 세운 추모비가 있다.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들이 잠들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독립군 내부 갈등이 있었지만 우리끼리 싸운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의 연해주 철군을 바랐던 소련이 일본과 밀약해 독립군을 유인해 학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스탈린 통치 시절 스보보드니 인근엔 정치범 강제수용소인 굴라크가 들어섰다. 독립군 출신과 고려인들도 끌려갔다고 한다. 이곳에선 비인간적인 처우와 가혹 행위가 난무했다. 1935년엔 수용자가 19만3000명에 달해 소련 최대 규모였다. 냉전 시대엔 스보보드니에 ‘보스토치니’라는 전략로켓군 기지가 들어섰고 핵미사일이 배치됐다. 세계에서 가장 긴 5100m짜리 활주로도 건설됐다. 이곳은 다시 2015년 러시아의 차세대 우주기지로 개발됐다. 우리 나로우주센터 면적의 110배다. 푸틴은 보스토치니 기지 건설에 한국 투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여기서 위성을 실은 소유스 로켓을 처음 쏘아 올리고 지난달엔 무인 달 탐사선도 발사했다.
▶북한 김정은이 13일 보스토치니 기지에서 푸틴 대통령을 만나 “반제 자주 전선에서 언제나 러시아와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과거 소련이 고려공산당과 손잡고 우리 독립군을 말살했던 바로 그곳에서 이번에는 조선노동당이 러시아와 협력을 선언한 것이다. 김정은은 러시아로부터 첨단 군사 기술을 얻어내 우리를 위협하려 한다. 100년 전 스보보드니의 악몽이 재연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09.15 ‘100세 기부왕’의 못 이룬 노벨상 꿈

▲故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 /조선일보 DB
13일 별세한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이 임종 직전 남긴 말이 “관정 장학생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걸 보지 못해 아쉽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평생 모은 재산 1조7000억원을 자신이 설립한 장학재단에 출연한 ‘기부왕’이었다.
▶1923년 경남 의령군 태생의 이 회장은 마산중학교 시절 일본인 학생들 틈에서 일제 지배를 경험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호기롭게 일본 메이지대 유학길에 올랐지만 일본 유학은 순탄치 않았다. 1944년 대학 2년을 수료하자마자 학병으로 끌려가 사선(死線)을 넘었다. 귀국 후 사업차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나라의 흥망성쇠가 과학기술에 달렸음을 절감했다.
▶이 회장이 사재를 털어 2000년 설립한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은 아시아 최대 규모 장학재단이다. 장학생의 80%를 과학 분야 인재 선발에 집중했다. 이 회장은 자서전에서 “의대, 법대, 상경대학생을 외면하고 이공계 학생 중심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이유는 개인의 명예와 이익,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보다는 우리나라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과학 기술을 연구하는 이공계가 더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일본보다 노벨상을 더 많이 받는 나라가 될 때 가슴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겠나”라고도 했다. 지금까지 배출된 장학생이 1만2000명, 박사 학위를 받은 장학생이 750여 명이다.
▲일러스트=이철원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과학 분야 노벨상(생리의학상·물리학상·화학상) 수상자 79명을 분석했더니 이들이 노벨상 연구 업적을 쌓는 데까지 평균 19.1년 걸렸다. 수상자 연령은 평균 69.1세였다. 201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배리 배리시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는 61세 때 시작한 연구로 81세에 상을 받았다. 2019년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인 존 구디너프 미국 텍사스대 교수는 97세에 사상 최고령자로 수상했다. 과학 분야 노벨상은 시간이 충분히 지나 검증된 연구 업적에 주어진다. 그래서 2000년 이후 수상자 대부분이 1990년대 이전의 성과를 기초로 한다. 그만큼 기초과학 연구에는 축적의 시간도 필요하다.
▶우리가 기초과학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20년 남짓하다. 관정 장학생이 배출된 역사도 비슷하다. “관정 장학생이 노벨상 수상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100세 기부왕’의 꿈이 그의 생전에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그의 뜻을 꾸준히 이어갈 수만 있다면 언젠가 실현될 날도 올 것이다.
09.16(토) 아동 학대와 훈육

▲한국교총, 교사노조, 전교조 등 교원단체·교원노조 관계자들이 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국회 입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황선미 작가의 동화 ‘나쁜 어린이 표’는 담임에게 ‘착한 어린이 표’ 스티커를 받으려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나쁜 어린이 표’를 받는 아이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1999년 나온 이 책을 읽고 ‘스티커를 받을 때 아이들이 이렇게 느끼는구나’ 하고 놀라서 스티커를 쓰지 않는다는 교사가 많다. 하지만 요즘도 으쓱 카드, 머쓱 카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 카드를 쓰는 것은 아동 학대일까, 교육 지도일까. 전문가들도 사안별로 다르다며 확답을 못 했다.

▲일러스트=양진경
▶교육부가 ‘길이 60㎝ 이하, 지름 1.5㎝ 이내 매끄러운 회초리로 체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가 거센 비판을 받은 것이 2002년의 일이다. 2011년 3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으로 우리 교실에서 체벌이 사라졌다. 불과 12년 전 일인데 이번에는 교사들이 아동 학대로 신고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며 교권 회복 운동을 펼치는 반전이 일어났다.
▶요즘 교사들 사이에 도는 자조적인 문제가 있다. ‘수업 중 말다툼하다 영수가 철수를 때릴 때 아동 학대법에 걸리지 않고 철수를 구하는 방법은?’ 답은 ‘없다’이다. 때리지 못하도록 영수 팔을 잡으면 아동 신체 구속, 강한 어조로 말리거나 꾸짖으면 정서적 아동 학대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할 수 있지만 영수가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아동 학대 방임으로 신고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예시가 아니라 비슷한 일이 현실에서 생기고 있다. 2021년 초등 2학년 교실에서 한 학생이 떠들자 담임은 학생 이름표를 칠판 ‘레드카드’ 구역에 붙이고 방과 후 10여 분 교실 청소를 시켰다. 학부모는 항의하며 담임 교체를 요구하고 아동 학대로 교사를 고소했다. 2심 재판부는 “학생 이름을 공개하고 강제로 청소까지 시키는 건 아동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학부모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은 14일 학부모가 지속적으로 담임 교체를 요구하는 건 교권 침해라고 했지만 벌 청소 등 개별 사안에 대해서는 직접 판단하지 않았다. 아동 학대와 교육 지도의 선긋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고 있다.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는 아동 학대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의 ‘교권 회복 4법’이 15일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과했다. 교사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아동복지법 등에도 같은 내용을 담고 더욱 구체적인 교육부 지침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래전 일상화된 체벌, 우열반 편성, 복도에 성적 순위표 게시 등을 당연한 듯 보고 겪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로선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09.18(월) 80대 대통령 불가론

▲일러스트=이철원
중국의 태평성대를 연 요(堯)임금은 16세에 왕위에 올라 89세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선정(善政)으로 백성의 칭송을 받았지만 재위 70년을 넘기자 국정을 돌보기가 힘겨워졌다. 위기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신하들도 무사안일에 빠졌다. 후계를 찾은 요임금은 젊고 능력과 덕망이 있는 순(舜)에게 섭정을 맡겼다. 순 임금은 100세 넘게까지 왕위에 있다 우(禹)에게 선위했다. 세 임금 모두 100세 안팎까지 재위했다. 물론 신화 시대 얘기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작년 96세로 사망할 때까지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71년간 왕위에 있었다. 태국 푸미폰 국왕도 2016년 사망 때 89세였다. 무가베 짐바브웨 전 대통령은 93세, 카무즈 반다 전 말라위 대통령은 96세까지 집권했다.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70대 후반 퇴임했다가 2018년 94세에 다시 총리에 올랐다.
▶현재 최고령 국가원수는 카메룬의 폴 비야 대통령으로 90세다. 올해 80세인 바이든 대통령은 187국 지도자 중 아홉째로 나이가 많다. 지도자 평균 나이는 62세인데 80대는 전체의 5%다. 흥미로운 건 권위주의 국가일수록 지도자의 나이가 많고(평균 69세), 자유민주 국가일수록 적다(58세)고 한다.
▶내년 재선에 도전하는 바이든 대통령을 두고 미 정가에서 ‘80대 대통령 불가론’이 커지고 있다. 바이든이 엉뚱한 말실수를 하거나 자주 넘어지는 등 건강 이상설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재선에 성공하면 86세까지 집권한다.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6%는 ‘대통령 나이를 75세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고 답했다. 백악관은 “요즘 여든은 예전의 마흔 살과 같다”고 반박했다. 과거 나이에 0.7을 곱해야 요즘 나이라더니 이젠 반 토막 내자는 주장까지 나온 것이다.
▶미국 9대 해리슨 대통령은 당시 최고령인 68세에 취임했는데 급성 폐렴으로 한 달 만에 사망했다. 12대 테일러 대통령도 66세에 식중독으로 급사했다. 19세기 때 얘기다. 최근엔 미국 정가에 80대 리더가 늘고 있다. 낸시 펠로시 전 하원 의장과 스테니 호이어 전 민주당 원내대표 등 상당수다. 미국에선 80대에도 은퇴하지 않고 일하는 ‘옥토제너리언(Octogenarian)’이 40년 전 11만여 명에서 작년 69만명으로 6배 이상으로 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청년 못지 않은 인지·판단력을 가진 80대도 적잖다. 다만 국가 안보와 정책을 결정하는 대통령은 다를 수 있다. 미 국민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 지 주목된다.
09-19 슈링크플레이션

▲일러스트=이철원
최근 프랑스 전역에 있는 대형마트 카르푸 진열대에 ‘#슈링크플레이션’이라고 제목을 단 이색 안내문이 등장했다. 펩시, 네슬레, 유니레버 같은 세계적 식품기업의 26개 제품을 사러 온 소비자들 누구든지 알 수 있게 ‘공급업자가 이 제품의 용량을 줄여서 사실상 가격을 올렸다’고 큼직하게 써 붙인 것이다. 이 명단에 든 펩시의 립톤 아이스티 복숭아맛의 경우, 가격은 그대로인데 용량이 1.5L에서 1.25L로 줄어 가격 인상 효과가 20%다.
▶슈링크플레이션이란 영어 단어 슈링크(shrink·줄어들다)와 인플레이션(inflation·물가상승)을 합한 용어로, 10여 년 전 여성 경제학자 피파 맘그렌이 도입했다. 제품 가격은 그대로 둔 채 크기와 중량을 줄여 가격 인상 효과를 내는 것을 말한다. 용어는 새롭지만 사실 기업들이 오랫동안 써온 기법이다. 2010년 미국 크래프트사는 톱니처럼 생긴 초콜릿 바 토블론을 개당 200g에서 170g으로 줄이면서 톱니 간격이 약간씩 더 벌어지게 초콜릿을 살짝 덜어냈다.
▶인플레이션이 덮친 지난해부터 슈링크플레이션이 나라마다 기승을 부린다. 미국에서 프리토스 감자칩은 봉지당 감자칩을 5개씩 덜어냈다. 선메이드 건포도는 봉지당 70알이 줄어 640g이던 한 봉지가 567g이 됐다. 116g이던 크레스트 치약은 소비자가 알아채지 못하게 양치질 15번 할 만큼의 8g을 줄여 제품을 내놨다. 도브 비누도 10% 작아졌다.
▶소비자들에게 ‘눈 가리고 아웅’ 격의 또다른 ‘숨은 인플레이션’으로는 스킴플레이션(skimflation)이란 것도 있다. 크기나 용량은 그대로 두는 대신, 값싼 원료로 대체해 원가 부담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인색하게 굴다’는 영어 단어 스킴프(skimp)에서 유래했다. 영국 수퍼마켓에서는 계란노른자 9% 함량의 마요네즈 대신 6%와 1.5% 함량을 판다. 이탈리아 식품기업 베르톨리는 올리브유 함량 21% 대신 10%로 낮춘 스프레이 제품을 내놨다. 소비자가 원료 성분이나 함량을 일일이 따지지 못하니 같은 값에 질 떨어지는 제품을 팔아 소비자에게 가격 인상 부담을 떠넘긴다.
▶인플레이션 시대에는 내 소득보다 물가가 더 빨리 뛰니 가만 앉아 돈이 줄고 가난해진다. 프랑스 대형 유통업체가 ‘슈링크플레이션’ 기업 명단까지 공개하는 것은 원가 상승 핑계로 터무니없이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기업에 가격을 낮추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슈링크플레이션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소비자는 알기 어렵다.
09.20 명품 조연

▲일러스트=박상훈
스무 살 청년 변희봉의 첫 직업은 배우가 아니었다. 지방에서 법대를 중퇴하고 상경해 제약 회사에 다니며 방송국 문을 두드렸지만 거푸 낙방했다. 겨우 서게 된 무대에선 악역만 맡았다.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에서도 최불암에게 쫓기는 범인이었다. 그래도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고 마침내 ‘조선왕조 500년’에서 간신 유자광 역으로 떴다. ‘00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대사는 유행어가 됐다. ‘감기 몸살은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제약 회사 광고도 찍었다.
▶1990년대 들어 긴 침체를 겪었다. 사극이 시들해지고 시트콤이 각광 받으며 설 자리를 잃었다. IMF 외환 위기 때는 수입이 끊겨 낙향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플란다스의 개’에 경비원 역을 맡아 달라고 했다. 시시한 배역으로 보였지만 봉 감독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조연이라고 했다. 수십 년 변희봉이 출연했던 작품을 줄줄 꿰며 하는 설득에 감복해 출연하겠다고 했다. 조연 변희봉의 두 번째 전성기가 그렇게 시작됐다.
▶변희봉은 조연으로는 드물게 소설 제목에도 나온다. 이장욱의 단편 ‘변희봉’에서다. 소설 속 변희봉은 주인공 ‘만기’만 그의 존재를 알 뿐, 인터넷 검색에도 나오지 않는 무명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만기 아버지가 진한 부산 사투리로 묻는다. “니, 밴히봉이라고 아나?” 아들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아들은 자기 말고도 ‘대배우 변희봉’ 팬이 있다는 게 반가웠다.
▶명품 조연 변희봉의 대표작이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다. ‘살인의...’에서 형사 변희봉은 엉뚱한 이를 범인이라며 잡고 한껏 들뜬 표정으로 기념사진까지 찍는다. ‘실수를 반복하며 사는 게 인생’이란 메시지를 그 표정에 담았다. 많은 이가 그 연기에 위로받았다고 했다. ‘괴물’에선 괴물에게 최후의 일격을 당하기 직전, 가족을 향해 “어여 가!”라며 손을 흔드는 연기로 객석을 울렸다. 훗날 그를 만난 더스틴 호프먼이 반색하며 눈앞에서 재연해 보였다던 명연기다.
▶변희봉은 일흔다섯을 넘긴 2017년 봉준호 영화 ‘옥자’로 칸 영화제 레드카펫 위에 섰다.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70도로 기운 고목에 꽃이 핀 기분”이라며 감격에 겨워했다. “죽는 날까지 연기할 준비가 돼 있다”던 그가 영면에 들었다. 소셜미디어엔 아쉬운 작별 인사가 줄을 잇는다. 소설 속 변희봉은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둘밖에 없었지만, 현실의 변희봉은 수많은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연기자는 그렇게 불멸을 얻는다.
09.21 외교 궤변

▲일러스트=이철원
군복 차림에 둥근 안경을 쓴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가 1941년 12월 마이크 앞에 섰다. 미국, 영국을 상대로 개전(開戰) 연설을 했다. “적의 도전을 받아 결연하게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진주만 기습 선제 공격을 하는 순간인데도 ‘방어 전쟁’으로 포장했다. 궤변으로 시작한 태평양 전쟁은 궤변으로 막을 내린다. 1945년 8월 일왕 히로히토는 “일찍이 미·영 2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처럼 교묘하게 꾸며내고 명분 없는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궤변과 선동의 기술자였다. 그는 “인종적으로 우월한 강자만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데 우리가 그 과업을 떠맡아야 하는 것이 세계사적 사명”이라며 2차 세계 대전에 불을 댕겼다.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는 유대인들이 미국을 움직여 유럽의 반(反)유대주의자들을 절멸시키려 하기에 전쟁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시진핑은 부주석 시절부터 6·25의 진실을 왜곡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말 자체가 진실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시진핑은 “중국인민지원군이 (6·25 때)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항거하는 정의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고 했다. 우리를 침략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짓밟은 나라의 지도자가 사과는커녕 궤변을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거짓도 계속하면 진실이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지만 이 정도면 생각을 제대로 하는 사람인지 의심케 한다.
▶최근 가장 놀라운 외교적 궤변을 하는 나라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략을 ‘특별군사작전’으로 부른다. 러시아 외교장관은 지난 4월 “특별군사작전은 우크라이나 정권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수만 명의 우크라이나 어린이를 납치한 뒤 “전쟁터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조치”라고 한다. 아이들은 아직도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러시아 외교장관의 17일 궤변은 웃을 수도 없다. 러시아가 북한과 무기 거래로 유엔 대북 제재를 어긴다는 국제사회 비판이 커지자 “러시아가 북한에 제재를 내린 적이 없다. 유엔 안보리가 제재한 것”이라고 했다. “항의는 안보리에 하라”고도 했다. 러시아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10차례가 넘는 유엔 대북 제재 결의는 러시아가 찬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을 포함해 모두가 아는데도 자신들은 관계없는 일이라고 한다. ‘유체 이탈’이라고 해야 할지, ‘제정신이냐’고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09.22 머스크의 ‘뇌 임플란트’ 실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뇌신경과학 스타트업 뉴럴링크(Neuralink)가 FDA로부터 인간의 뇌에 칩을 이식하는 임상시험에 대한 허가를 받았다./Neuralink
미소 냉전 시절부터 과학자들은 ‘V2K’라는 기술을 연구해왔다. 음성을 두개골에 직접 송신하는 장치로, 특정한 파장의 전파를 쏘면 귀에는 안 들리고 상대방 두개골 속 뇌신경에 공명한다. 소리가 없는데 뇌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인지하게 된다. ‘신의 목소리 무기’로 불린 이 기술은 이라크 전쟁에서도 미군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라크군을 향해 ‘무기를 버려라’ ‘나는 알라다’ 등의 음성 메시지를 특수 전파 발생 장치로 쐈다. 전의를 상실케 하려는 의도였다.

▲만물상
▶감각기관을 통하지 않고 뇌와 직접 소통하려는 인류의 시도는 ‘뇌 임플란트(이식)’로 이어졌다. 인간의 두개골을 열고 뇌에 전극을 이식해 뇌 속에서 발생하는 생체 전기 신호를 컴퓨터로 해석하는 기술이다. 뇌 임플란트가 사람에게 처음 시도된 것은 1998년이다. 미국 에머리대에서 전신마비 환자의 머리에 전극을 삽입해 간단한 단어를 입력하는 데 성공했다. 2015년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에서 루게릭병 환자 뇌에 전기장치를 연결해 환자가 글자를 떠올리면 컴퓨터가 이를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알파벳 한 글자를 표현하는 데 수십 초가 걸렸다.
▶지난해 말, 뇌에 임플란트 칩을 심은 ‘사케’라는 이름의 원숭이는 컴퓨터 화면에 뜬 자판기에 반전되는 알파벳을 머리로만 따라가며 눌러 글자를 만들어냈다. ‘텔레파시 타이핑’이다. 일론 머스크가 만든 뇌 과학 스타트업 ‘뉴럴링크’도 2021년 원숭이 뇌에 칩을 심어 머리만으로 컴퓨터 ‘핑퐁’ 게임을 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시연회 마이크를 잡은 머스크 뒤로는 영화 ‘매트릭스’ 화면에 나오는 것 같은 검은 배경에 초록색 줄이 흘러갔다. 머스크는 “실제 신경 시그널의 모습”이라고 했다.
▶머스크의 뉴럴링크가 자신의 뇌에 실제 컴퓨터 칩을 심을 첫 임상 시험 참가자 모집에 나섰다. 경추 척수 부상이나 루게릭병 등으로 인한 사지 마비 환자를 대상으로 6년에 걸쳐 시험한다고 한다.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지만 얼마나 참가자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뇌 임플란트 관련 기술들이 현재까진 대부분 일회성이거나 동물에게만 실험돼 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860억개의 신경세포가 복잡하게 연결돼 있어 가장 큰 미지의 분야로 남아있다. 뇌 임플란트가 인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까진 아직 멀고 험한 길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 머스크도 논란은 있지만 ‘제대로 미친’ 이 범주에 드는 인물이다.
09.23(토) 국회 표결 무효표의 심리학

▲일러스트=이철원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개표에 참여한 의원들과 의사국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국회 표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무효표가 7장 나온 것이다. 한글로 ‘기권’이라고 쓴 표, 찬성과 반대를 의미하는 ‘가부’를 동시에 쓴 표 등 다양했다. 탄핵 찬성을 의미하는 ‘가’ 위에 동그라미를 쳐서 ㉮로 표기하거나 점을 찍어 무효표가 된 것도 있었다. 학력이 높고 정치 전문가들인 의원들이 규정을 몰라서 무효표를 만들었을 리는 없다.
▶새누리당 송광호 의원의 2014년 체포 동의안이 부결될 때는 이례적인 기록이 세워졌다. 국회의원 223명이 표결에 참여했는데, 무효표가 무려 24명 나왔다. 10명 중 한 명꼴로 무효표를 던진 것이다. 야당 원내대표를 지낸 한 정치인은 “실수로 무효표를 만드는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한다. 전 국회 고위 관계자도 “프로 정치인들의 무효표는 전부 계산된 것”이라고 했다.
▶국회 의사국장은 표결 전에 투표용지의 ‘가·부’란에 ‘가·부·可·否’ 4개 이외의 문자나 기호를 표기하면 무효로 처리된다고 공지한다. 기표소 벽에도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붙어 있다. 그렇기에 국회의원들의 표결에서 무효표가 나오는 것은 나름 많은 고민 끝에 나온 모종의 의사표시라고 봐야 한다. 국회 관계자들은 아예 수기(手記) 무기명 표결을 할 때 국회의원들의 선택지를 찬·반·기권에 무효표를 더해 총 4가지로 보고 있다.
▶한 의원은 “백지를 내는 기권이 소극적인 의미의 저항이라면, 무효표는 자신이 표결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대한 불만을 적극 표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의원들은 ‘가’ 대신 ‘개’를 써서 표결 자체를 희롱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반대를 뜻하는 ‘否’의 경우, ‘不'를 써서 무효가 되는 표는 거의 매번 나오는데, 이 역시 실수가 아니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회에선 기표소에 오래 머무는 의원들일수록 심경이 복잡해 무효표를 찍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21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체포 동의안 표결에도 ㉮로 표기된 표 등 4표가 국회법에 따라 무효가 됐다. 체포안에 찬성하고 싶지만, 민주당 소속 의원으로서의 부담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의원들이 던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표결에선 지난 2월 같은 표결 때보다 무효가 7표 줄어들었다. 무효표가 줄어든 것은 민주당이 ‘이재명 사당’으로 바뀌는 데 대한 반감과 위기감이 야당 내에서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09.25(월) 뉴질랜드도 영국도 ‘담배 퇴출’

▲일러스트=이철원
17세기 조선 실학자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지적한 흡연의 폐해는 오늘 기준으로 봐도 정확하다. ‘안으로 정신을, 밖으로 눈과 귀를 해친다. 머리카락이 세고 얼굴이 창백해진다. 이가 빠지며 살이 깎이고 노쇠해진다’ 등 10대 해악을 꼽았다. ‘냄새가 독해 신명과 통할 수 없고, 재물을 축내며, 종일 담배 구하기에 급급해 잠시도 쉬지 못한다’고도 했다. 사회생활과 재산 형성에 문제를 일으키고 니코틴 중독에 빠진다는 뜻이다.
▶흡연의 해악은 더 이상 논란 여지가 없다. 다만 일부에서 ‘세금 많이 내는 애국자’ 논리로 흡연을 합리화한다. 4500원짜리 담배 한 갑에 세금이 3300원을 넘고, 2021년 기준 연 3조5500억원이 담배 소비세로 걷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흡연이 세수 이상의 비용을 발생시킨다고 반박한다. 세계보건기구는 흡연에 따른 전 세계 사망자가 2030년엔 800만명에 이르고, 질병 치료와 화재 등에 따른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 1조달러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각국 정부가 걷는 담배 관련 세금은 2013~14년 기준 2690억달러에 불과해 수지 타산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연 캠페인을 넘는 더욱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그래서 힘을 얻는다. 뉴질랜드가 먼저 칼을 빼 들었다. 2027년에 성인이 되는 2009년 1월 1일 출생자부터 담배 판매를 영구 금지하는 법안을 작년 말 통과시켰다. 위반하면 우리 돈 1억원이 넘는 벌금을 맞는다. 영국도 같은 내용의 법안 도입을 검토하고 나섰다. 성공하면 두 나라는 30년 뒤 환갑 넘은 노인 일부만 담배를 피우는 사실상 담배 청정국이 된다.
▶금연법이 미국 금주법(禁酒法) 전철을 밟으리라는 비관론도 있다. 1919년 미국이 도입한 금주법은 밀주 제조 성행, 밀주업자와 단속 공무원의 뇌물 결탁 같은 부작용 때문에 폐지됐다. 금연법도 담배 암시장만 키운다는 전망이다. 하지만 이는 두 나라의 금연법이 금연 대상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담배는 일단 중독되면 끊기가 매우 어렵다. 필자도 담배를 끊을 때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시작도 하지 말걸” 하는 후회를 몇 번이나 했다. 두 나라 법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기존 흡연자 금연보다는 청소년들이 흡연으로 들어서는 길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흡연율은 15.9%로 OECD 평균(16%)과 비슷하다. 뉴질랜드는 8%로 우리의 절반 수준인데도 장기적이지만 확실한 금연의 길을 가겠다고 천명했다. 우리도 이 방식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면 한다.
09.26 기적의 빅토리호

▲일러스트=이철원
영국의 명장 넬슨 제독은 해전마다 승리를 거듭해 기함의 이름도 빅토리호였다. 그는 전투 때 맨 앞에 섰고 직접 하는 백병전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와 맞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도 빅토리호로 적 기함에 돌진했다가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빅토리호는 아직 퇴역하지 않은 채 영국 포츠머스항을 지키고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군용 상선을 대량 건조했다. 그 배 이름도 ‘빅토리’였다. 길이 140m, 폭 20m 안팎에 모양새도 비슷했다. 빅토리 앞에 ‘SS(Steam Ship·증기선)’와 배를 건조한 지역이나 대학 이름을 붙였다. 이런 빅토리 형제들이 600척에 달했다. 빅토리호는 위험한 대서양 항로나 태평양을 오가며 활약했다. 독일 잠수함과 일본 잠수함, 폭격기의 공격으로 침몰된 경우가 허다했다.
▶6·25가 나자 빅토리호는 다시 전장에 투입됐다. 가장 눈부신 활약은 1950년 흥남 철수 때였다. 메러디스와 레인, 아메리칸, 버지니아 등 여러 빅토리호가 미군·무기·장비뿐 아니라 피난민 7000~1만4000명씩을 태웠다. 특히 메러디스는 무기와 물자를 모두 내려놓은 뒤 피난민을 맨 밑층부터 차례로 태우고 그 위에 강판을 덮은 뒤 또 태우기를 반복했다. 14시간에 걸친 작업 끝에 1만4500명을 태워 맨 마지막으로 흥남항을 떠났다.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에 기록됐다. 12월 25일 아무 사고 없이 거제에 도착한 메러디스 안에서 5명, 레인에서 1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메러디스의 라루 선장은 “하나님이 배의 키를 잡았다”고 했다.
▶미 의회는 그 업적을 기려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갤런트십(gallant ship·용감한 배)’으로 지정했다. 라루 선장은 한·미 양국에서 최고 명예훈장과 무공훈장을 받았다. 메러디스는 6·25 후 베트남전에도 투입됐다. 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퇴역 후 총구를 마주했던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지금 미국에 남은 빅토리호는 레인과 아메리칸 등 3척뿐이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 정부와 지자체 등은 빅토리호를 국내로 들여오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보훈처는 캘리포니아의 레인을, 거제시는 버지니아의 아메리칸을 인수하려 했다. 하지만 이송 비용과 미 정부 허가 문제 등으로 무산됐다. 그러다 레인 빅토리호를 들여오겠다며 투자·후원금을 받아 챙긴 일당까지 나타났다. 10만명의 목숨을 살린 빅토리호가 어쩌다 사기의 수단이 됐는지 안타깝다.
09.27 황혼 재혼

▲일러스트=김성규
92세 재미 동포 조모씨는 국내 한 결혼 정보 업체를 통해 여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찾고 있다. 손자·손녀가 15명이 넘고 무공훈장을 받은 그이지만 5년 전 아내와 사별한 이후 외로움은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캘리포니아 40만달러 아파트에서 연금을 받으며 혼자 살고 있는데 사후 이 아파트를 새 반려자에게 물려줄 생각이라고 한다.
▶옛말에 효자불여악처(孝子不如惡妻)라는 말이 있다. 효성이 지극한 자식이라도 못된 아내만 못하다는 말이다. 요즘은 아내들에게도 통하는 말일 수 있다. 커플닷넷 이웅진 대표는 “사람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로버트 레드퍼드와 제인 폰다가 주연한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2017)을 보면 각자 아내,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두 노년은 밤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젊은이들 사이에 CC(캠퍼스 커플)가 있다면 요즘 신노년 사이엔 BC(복지관 커플)가 유행이다. 노인복지관에서 만나 교제하다 결혼에도 이르는 사이를 말한다. 이른바 ‘황혼 재혼’이다. 먹고 살만한 경제력은 남녀 모두에게 기본이고 남자는 매너 있는 분들이, 여자는 건강한 외모를 가진 분들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신노년들은 본인들 사랑을 ‘끝사랑’이라 부른다. 황혼 재혼한 배우 윤문식(80)은 “끝사랑도 첫사랑 못지않게 아름답고 설렌다”고 말했다.
▶황혼 재혼은 현실적 한계도 많다. 무엇보다 자녀들의 동의, 사전 재산 정리가 필요하다. 재산 문제를 정리하지 않고 혼인 신고까지 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이미 숱하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노년 커플의 90%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같이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경우다. 50대 중반 자영업자 김모씨도 그런 케이스다. 혼인 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지인들에게 아내라고 소개하고 각자 집을 따로 두고 두 집을 옮겨다니며 살고 있다. 김씨는 “어떤 때는 어머니, 어떤 때는 육감적 여인, 어떤 때는 딸 같은 역할을 해주는 아내와 같이 사는 것이 너무 좋다”고 했다.
▶어제 통계청이 발표한 ‘2023 고령자 통계’를 보면 지난해 기준 6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재혼한 건수는 5308건이었다. 2017년 3886건에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나이 먹었다고 사랑하는 감정도 늙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외로움은 더 커진다. 노년층이 정서적·심리적 안정을 위해 가장 피해야 할 것이 고립이다. 이미 100세 시대라고 한다. 황혼 재혼 증가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 같다.
09.28(목) 한식 패권 시대

▲일러스트=이철원
‘미쉐린가이드 뉴욕’에서 별을 한 개 이상 받은 식당은 72곳이다. 한식당 9곳, 프랑스 식당 7곳이다. 뉴욕타임스는 “한국 음식이 ‘프렌치’ 요리의 패권을 끝냈다”고 했다. 전 세계적 현상이다. 뉴욕의 고급 식당 꽃(Cote), 샌프란시스코의 쌀(Ssal), 베를린의 고추가루(Kochu Karu), 벨기에의 마루(Maru)...며칠 전 레스토랑 ‘쌀’에서 식사했다는 20대 여성은 “두 명이 코스 주문하고, 와인 한 병 먹었더니 1000달러가 넘게 나왔다”고 했다.
▶1982년 개봉한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이 배경이다. 일본 브랜드와 일식당이 가득한 로스앤젤레스를 그렸는데, 당시에는 ‘기발한 상상력’이라 평가받았다. 촬영 장소를 섭외하는 ‘로케이션 매니저’들은 2, 3년 후 가장 인기 있을 장소를 섭외하는 게 능력이다. 3, 4년 전부터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드라마에 한식당이 슬쩍 슬쩍 지나갔다. 한인 타운의 토속적 한식당은 물론 ‘정식’ ‘꽃’ 같은 고급 한식당의 매력을 눈 밝은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알아챘다.
▲미국 뉴욕에 이어 마이애미에서 고급 레스토랑의 성공담을 쓰고 있는 레스토랑 '꽃(Core)'.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한국쌀가공식품협회가 8억원을 들여 ‘떡볶이 R&D센터’를 열고 ‘떡볶이 세계화’를 선언했다. ‘떡볶이 대학은 안 만드냐’는 비아냥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절대 못 한다. 떡의 끈적한 식감을 외국인은 혐오한다. 한식 자체가 어렵다”고 했다. BTS가 떡볶이를 먹는 영상을 올리며 분위기가 반전됐다. 지난 3월 NBC뉴스는 ‘떡볶이(Tteokbokki)가 미국 시장을 점령했다’고 썼다. MB가 헛짚은 게 아니었다.
▲미국 대형마트 '트레이드조'가 출시한 냉동식품 김밥. /트레이드조
▶냉동 김밥까지 가세했다. 올 9월 중순까지 쌀가공식품 수출액이 1억4500만달러로 전년비 두 자리 상승세다. 경북 구미 중소기업이 생산하는 230g짜리 냉동 김밥은 3.99달러짜리 초도물량 250t이 미국에서 순식간에 매진됐다. 요즘 공장을 풀가동 중이다. 채식주의자들이 열광하며 “10점 만점에 15점”이라고 극찬한다.
▶2013년 타이거 우즈와 경쟁하던 스페인 골퍼가 “내가 마스터즈에서 우승하면 우즈에게 치킨을 대접하겠다”고 말했다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욕을 먹었다. 치킨이 ‘노예제’를 상징하는 음식이라는 걸 몰랐던 탓이다. 솔 푸드란 말처럼, 음식은 집단의 마음과 연결된다. ‘혀로 느끼는 정체성’이다. “마늘 냄새 난다”고 타박받던 한국인이 세계에서 음식 성공담을 연일 만들어내고 있다. 70년 전, 미군 부대 뒷구멍으로 나온 재료로 부대찌개를 끓여 먹던 그 민족이 쓰고 있는 음식 신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