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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04/ [31] 네덜란드의 견제, 1632년 유대인의 길드 가입을 금지시키다 - [38]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다

상림은내고향 2023. 9. 16. 18:54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04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2023.06.18

[31] 네덜란드의 견제, 1632년 유대인의 길드 가입을 금지시키다

◇유대인의 상업조합 가입을 금지시키다

네덜란드 정부는 유대인들이 급격히 성장하자 자국민들의 상업적 경쟁력을 보호할 필요를 느꼈다. 1632년에 법령으로 유대인의 길드 가입을 금지시켰다. 유대 상인의 입지를 제한한 것이다. 당시 길드는 관련 업종의 독과점을 위한 기구였다. 따라서 작업시간이나 작업의 종류, 상품의 질 등을 세세하게 규제했다. 길드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물건을 만들지도 팔지도 못했다. 이후 유대인은 내국인과 충돌하거나 경쟁할 우려가 적은 대외무역과 금융 분야에 진력하거나 개인 직업으로는 약사나 의사, 히브리서 출판 등에 종사했다.

그 결과 조합이 없었던 직물업과 다이아몬드 세공업과 수출입업에 유대인이 몰렸다. 현대에도 네덜란드가 벨기에와 더불어 다이아몬드 무역 강국인 이유이다. 또 그들이 히브리서 출판업에 참여한 것은 유대 경전인 ‘토라’와 ‘탈무드’를 인쇄해 자손들에게 유대교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 길드 가입 금지 조치는 특히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에게는 타격이었다. 세파라디계 유대인들은 이미 덩치가 커져 조합 밖의 도매상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상업에서 배제된 아쉬케나지 유대인, 금융산업을 주도하다

네덜란드 정부의 이러한 제약이 오히려 아쉬케나지 유대인에게 보약이 되었다. 산업과 무역업의 규모가 커진 상태에서 상업에서 배제된 유대인들은 이들 실물경제를 뒷받침해 줄 금융산업에 힘을 쏟았다. 당연히 금융계와 증권계를 그들이 선도했다. 이후 금융산업이 실물경제를 리드하면서 유대인의 자본축적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유대인들의 재력은 당시 암스테르담 중앙에 세워진 웅대한 시나고그와 그들 집들의 호화로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부가 외부로 노출되자 유대인들에게 돈이 많다는 소문이 돌면서 항상 강탈과 납치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췄다.

이런 제약이 무기명채권이라는 금융상품을 개발하는 동기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중세 베네치아 이래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거래를 할 때 문서에 기독교식 이름을 사용했다. 또는 합자회사를 만들어 경영은 기독교인에게 맡기고 뒤에서 자본을 대는 자본가가 되어 유대인 리스크를 줄였다. 그러다가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루면서 전쟁채권 시장이 발달하자 가명도 쓰지 않는 채권을 개발했는데 그것이 무기명채권이다. 그들은 항상 위협 속에 살았기 때문에 언제든 추방될 경우 환어음이든 무기명채권을 들고 피난 갈 필요가 있었다.

 

◇유대인, 길드를 와해시키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반전이 일어났다. 길드가 유대인들을 상업에서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 막강한 길드를 와해시켜 버린 것이다. 18세기에 유대인이 벌인 폭넓은 상업과 금융 활동은 괄목할 만했다. “그것이 주된 원동력이 되어 근대 자본주의가 성립했다.”고 생각하는 경제사학자가 바로 베르너 좀바르트이다. 일생에 걸쳐 자본주의의 기원과 진화에 대해 연구한 좀바르트는 1911년 <유대인과 경제생활>을 출간했다. 거기서 그는 유대인들이 길드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길드 체제를 와해시킬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중세 상업은 길드가 정한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정액의 임금과 가격 그리고 ‘공평한 제도’의 추구였다. 여기서 말하는 공평한 제도란, 합의에 의해 시장에서의 일정 분배율이 결정되고, 이익이 보장되며, 생산 한도가 설정되는 것 같은 제도를 가리킨다. 유대인은 이런 제도에서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파괴하고 대신에 근대 자본주의를 채택했다는 것이 좀바르트의 설명이다.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경쟁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이런 길드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오로지 ‘고객 만족’으로 승부를 보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고객을 유일한 법으로 생각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씨앗으로 작용했다. 길드에서 배제된 유대인들이 ‘의로운’ 가격, ‘착한’ 가격으로 중세 상업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유대인들은 길드가 정한 가격과 이익체계를 해체시켜 버리고, 고객 중심의 자유 경쟁체제를 도입했다.

 

<유대인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은 그의 책에서 길드에서 배제당한 유대인들이 이룬 혁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중세 상업의 기반인 고정된 봉급과 가격이라는 체제를 뒤흔들어 놓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곧 관습적으로 이어지던 상품가격과 판매 이익을 근본적으로 해체시켜 버렸다. 상품을 보다 잘 진열하는 방식으로 고객을 확보했고, 상품광고를 고안해내어 물건 살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갔다. 또 유대인들은 경제 규모가 지닌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낮은 가격으로 많이 팔아 큰 이익을 남기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이 늘 혁신적이었다. 주식시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경제적인 혁신은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은 상업 정보를 수집하고 사용하는데 능통했다. 시장이 모든 유형의 상거래에서 주도적인 요소가 되어가고 동시에 일련의 세계적인 체제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정보는 최고의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유럽 각처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네트워크가 무역과 금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들은 기존 경제체제보다 낫고, 보다 용이하며, 보다 저렴하고, 보다 신속한 방식들을 만들어내는 합리주의자들이었다. 현대사회에서도 유대인 출신 경제인들이 놀라운 부를 축적한 배경에는 이처럼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았던 역사적인 배경이 바탕이 되어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국 동인도회사를 압도하다

그 무렵 영국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해상권 장악과 해상무역의 지배를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육지와 바다에서 두 강대국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영국은 유대인이 버티고 있는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다. 더구나 17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상인 세력을 견제하려는 귀족과의 갈등으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권한에 제한이 가해졌다. 반면 무제한의 권한을 위임받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해외시장에서 영국을 압도했다. 이로써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한때 존폐 위기에 몰릴 때도 있었다. 게다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해적행위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배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기도 했다.

 

◇네덜란드, 대서양 횡단을 장악하다

1620년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출범하자 대서양 무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시 선박은 해조류나 따개비를 제거하는 바닥 청소를 주기적으로 해주어야 했다. 당시에는 목조선박이라 배 무게가 그렇게 무겁지 않아 도크와 설비가 있으면 배를 뒤집어서 따개비를 긁어냈고, 도크가 없다면 아예 배를 해안가 모래까지 끌어와서 기울여서 청소하기도 했다. 이런 청소 때문에 바다를 항해하는 시간이 제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개 함선은 대서양을 네 번 정도 건너면 수명을 다했다. 따라서 대서양 해상무역 물동량이 늘어나자 선박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여러 사람이 배의 소유권을 나누어 갖는 네덜란드식 관행은 투자를 쉽게 하여 배의 공급을 늘렸다. 이는 대량 건조로 제작 비용을 더욱 낮추었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에 의해 네덜란드 조선업 경쟁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 앞서 나갔다. 네덜란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조선업을 국책산업으로 지정하여 육성했다.

17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네덜란드를 포함해 포르투갈․프랑스․덴마크․영국․스웨덴 등 6대국의 해양 진출이 두드러졌다. 이들이 경쟁적으로 인도 및 신대륙과 교역하는 과정에서 상선이 크게 발달했다. 상선에는 해적의 습격에 대비해 마치 군함처럼 장비가 갖추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호위용으로 작고 빠른 전함이 개발되었다. 배의 밑 부분에는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거나 바다 동식물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구리판을 씌웠다. 그 결과 순항속도도 매우 빨라졌다.

 

◇네덜란드 선박의 대형화로 스페인 상선 쇠퇴하다

▲네덜란드 선박의 대형화. /위키피디아

 

나중에 암스테르담 선단은 규모가 커져 주로 승무원 800명의 2000t(톤)급 대형선박들로 선단이 구성되었다. 그러자 운임 단가는 더 내려갔다. 그 결과 거의 모든 화물들이 네덜란드 선박으로 운송되었고, 거의 모든 화물이 중계 기지인 암스테르담으로 집결했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곡물과 금속의 유통기지이자 창고가 되었다. 이러한 월등한 대형선박 제조 및 운용 기술로 당시 세계 선박의 반 이상이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기술은 네덜란드 해군을 발트해에서 남아메리카에 이르는 해상의 지배자로 부상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는 아메리카에서 들여오는 스페인 세비야의 무역까지도 통제했다. 1640년경 스페인 항구에 들어오는 상품의 4분의 3이 네덜란드 선박에 실려 왔다. 당시 스페인은 그들과 독립전쟁 중이었던 적에게 이익을 주었던 셈이다. 그만큼 네덜란드 선박의 경쟁력이 탁월했다. 그 뒤 경쟁력에 밀린 스페인 상선은 급격히 쇠퇴했다. 당시 대서양 횡단용으로 등록된 스페인의 선박이 1620년에는 1363척이었으나 20년 뒤 1640년대에는 722척으로 줄어들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증권거래소, 은행들은 이러한 해상 권력을 금융․무역․산업 분야에서 우위로 전환시켰다. 수도 암스테르담은 해상무역과 더불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네덜란드, 물류 중심지로 급성장하다

네덜란드 정부는 출범 이래로 무역을 적극 권장하고 지원했다. 이에 힘입어 유대인들은 대규모 해외무역을 손쉽게 장악해 나가면서 네덜란드의 모든 항구에 상업거점을 확보했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을 포함한 유럽 내 모든 무역망은 물론 그들이 사용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시절의 무역망을 계승 확대하여, 멀리 오스만터키 제국과 남아메리카 등지로 진출했다. 그리고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오히려 네덜란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신대륙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점령되었지만, 신대륙에서 가져오는 물자를 유럽 지역으로 운송하여 전파하는 일은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주로 맡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무역은 무역량에 있어서나 다양성에 있어서나 사상 유례없는 번영을 거듭했다. 네덜란드 선박은 당시 전 세계 상품의 대부분을 맡아 운송했다. 서유럽의 목재 및 조선재료, 철, 납 이외에도 북유럽 지방의 곡물을 운송했다. 그리고 또 중유럽 상품의 유통도 맡았다. 한 마디로 전 유럽의 물품을 운송했다. 이렇게 왕성한 해운업과 내륙으로 통하는 운하 덕분에 물류 유통업도 당연히 같이 발달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게다가 북쪽의 발트해는 늦가을과 겨울철에 결빙되어 이 기간에 네덜란드는 북쪽으로 향하는 사치품과 남쪽으로 향하는 곡물 등 부피가 큰 상품을 대량으로 모아 둠으로써 거대한 창고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의 창고는 세계 곳곳에서 모인 상품들이 가득했다.

 

이러한 창고업의 발달과 더불어 두 도시는 바다와 라인강을 잇는 운하 덕분에 내륙 운송망도 발달되어 물류 중심지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창고마다 곡물을 필두로 스페인의 양모, 지중해산의 포도주, 올리브유, 벌꿀은 물론 멀리 말레이제도의 향료 및 후추, 실론의 진주 및 계피, 인도의 면화, 설탕, 유리, 아편, 중국과 일본의 비단, 도자기, 구리, 차, 샴의 수피 및 염료용 목재, 아연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 이토록 손쉽게 편리한 물품들과 진기한 물품들을 만날 수 있으랴.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 이토록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1631년 암스테르담에 머물던 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교역과 물류뿐 아니라 생산과 소비를 연결시키는 유통업 그리고 배 만드는 일과 관련된 조선업, 해운업, 어업 등 연관 산업에서도 경쟁력을 획득했다. 그 뒤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해외로 뻗어나갔다. 신대륙 각 거점마다 교역로를 개설하고, 공장을 세우고,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은행을 설립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해외투자는 국민 총생산의 2배가 넘었다.

 

◇20만명 대도시로 급성장한 암스테르담, 3분의 2가 외국인들

이에 힘입어 암스테르담 인구도 급격히 불어나 1620년에 10만명이 1670년에 20만명의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1650년 통계에 의하면,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사람의 3분의 2가 외국계 혈통으로 네덜란드는 진정한 인종의 용광로가 되었다. 그 무렵 암스테르담 인구의 11~12%가 유대인이었다. 그간 암스테르담에 유대인이 크게 불어난 시기가 5번 있었다.

 

첫 번째는 1576년 앤트워프에서 반란을 일으킨 용병들에 의해 시민 7000여 명이 살해당하자 유대인들은 앤트워프를 탈출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는 1568년에 시작된 스페인 왕국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두 번째는 1609년 앤트워프에서 스페인과 네덜란드 간의 12년간 휴전조약 체결로 인해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 무역 거래가 재개되었을 때였다. 당시 스페인이 지배하던 플랑드르 지역 등에 살던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가 선언된 네덜란드 특히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등 항구도시로 이동해 다시 스페인과의 무역에 뛰어들었다.

 

세 번째는 1640년 말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을 때였다. 따라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사이에 외교 관계가 시작되어 1641년 7월 무역 협정을 맺고 무역이 재개되었다. ‘12년 휴전’ 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이 기회를 잽싸게 잡았다. 이때 포르투갈과의 무역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네 번째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일어났다. 1630년 전후로 네덜란드가 브라질 일부를 점령해 식민지를 삼았다. 지금의 헤시피 주변 지역이다. 그리고 식민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식민지로 몰려들었다. 몇 년 후 포르투갈이 네덜란드 세력을 내쫓고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다시 가톨릭의 박해를 받게 된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다섯 번째는 1648년 독일 뮌스터에서 일어났다.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제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당당하게 스페인과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 이베리아반도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스페인에 있는 동족들 곧 개종 유대인들과 무역을 시작했다.([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201~202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조진서 옮김)

 

그 뒤 동인도회사의 배는 1670년대 150척의 상선, 40척의 군함, 5만 명의 직원과 1만 명 규모의 군대를 거느린 거대 조직이 되었다. 그 뒤 배가 대형화되자 선박의 톤수가 두 배로 늘었다. 이후 동인도회사 전성기에는 대형선박이 1500척까지 불어났다.

 

[32] 청교도와 유대인의 신대륙 이주

◇청교도와 유대인, 미국의 건국 정신 만들다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온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들보다 늦은 1654년부터 이주해 온 유대인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맞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계 이주민들은 유럽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오랜 방랑 생활에서 본능적으로 익혀온 장사 재능과 자본 증식의 노하우를 마음껏 발휘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일구어갔다.

 

신대륙은 청교도(Puritan)와 유대인에 의해 실용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건국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개인의 능력과 지식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용주의 문화는 프로테스탄트보다 오히려 유대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대인들은 물질적인 성공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임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믿었다. 다시 말해 재산을 모으는 일은 고귀한 일이었다. 오히려 가난이야말로 삶에 대한 성실성의 결여로 간주 되어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 개척 당시의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이 미국 사회에 급속하게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 정신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어 유대주의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는 구약성서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로서 구약성서에서 신을 찾았다. 때문에 청교도가 영국에서 ‘유대교의 신파’라고 불렸다. 칼뱅주의 신교의 일파인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에 대해 극단적인 개혁을 주장했었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구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하며 도덕적 선을 추구했다.

 

청교도는 그들의 영국 탈출을 유대인의 애굽 탈출에 견주며 매사추세츠만 연안의 식민지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며 유대인들과의 정신적 유대감을 공고히 했다. 이들의 정착 과정을 살펴보자

 

◇신대륙 초기 이민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 이미 북미 대륙에는 인디언들이 약 200만명 정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조가비 구슬을 장신구 겸 화폐로 쓰고 있었다. 인디언들은 북미보다 중남미에 훨씬 많았다. 그곳에는 약 6000만명 이상이 있었다. 그 뒤 아메리카 대륙은 열강의 각축장이 된다. 중남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분할 정복했다. 북미 역시 최초의 이민 집단은 1513년 플로리다에 상륙한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522년 멕시코 지역까지 정복함으로써 주로 미 대륙 남부와 멕시코에 살았다. 지금도 미국 남부는 스페인계 영향이 다분히 남아 있다.

 

이렇게 스페인 사람들이 개척한 신대륙에 초기 대량이민이 17세기를 전후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인과 프랑스인들이 정착해 영토에 선을 그었다. 특히 미시시피강 유역에 프랑스계 이민이 많았다.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늦게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회사를 통해 이민이 이루어졌다.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이유로 이민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생존을 위해 이민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초기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위키피디아

 

1585년 영국인 106명이 처음으로 민간 회사와 계약을 맺고 신대륙에 왔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민자들이 도착한 곳이 처녀지이고 그녀 자신이 처녀였기 때문에 그곳을 ‘버지니아’(Virginia-처녀)라고 이름 짓게 했다. 그러나 4년 후 다시 찾아가니 초기 이민자들은 모두 병들어 죽고 이후 새로운 이민자들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을 북미 최초의 정착지로 만들었다. 이민자들은 주로 엔클로우저 운동으로 쫓겨난 농민과 부랑자들, 도시 빈민들로 생계를 찾아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연초 재배로 자립 기반 닦아

1607년 제임스타운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 이주자들은 초기에 인디언의 도움으로 연명했다. 인디언들은 그들에게 호박, 콩, 옥수수 등 토착 식물의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후 그들은 인디언들과 평화협정을 맺고 먹고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연초 재배. /위키피디아

 

그 무렵 카리브해 연안과 인근 섬들이 주요한 담배 경작지였다. 1612년에 존 롤프가 그 곳에서 가지고 온 연초 씨앗을 심어 토착 식물과 교배하기 시작하여 유럽인의 취향에 맞는 신품종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연초의 첫 출하 상품이 1614년 런던에 도착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그로부터 연초는 버지니아의 주 수입원이 되었다. 이로써 자립경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뒤 1619년 네덜란드 선박 한 척이 영국 이주자들이 운영하는 담배농장에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싣고 왔다. 이들이 처음부터 노예는 아니었다. 그들은 계약노동자였다.

 

당시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유럽에 소개된 담배는 처음에 치료제로 소개되었으나 그 중독성으로 인해 삽시간에 인기를 얻었다. 담배 수입이 이익이 많이 남자 1600년 이래로 영국 황실의 전매사업이 되어 귀족과 부자들의 고급 사치품으로 자리 잡았다. 황실이 재정수입 확대를 위해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일종의 교양으로 흡연을 권장하고 예법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담배를 피우면 머리가 명석해지고 인내심이 배양되며, 흡연은 기품 있는 신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배워 두어야 할 교양이라는 식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12년 맨해튼에 전초 기지 만들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헨리 허드슨은 1609년 맨해튼섬을 발견했다. 161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곳에 전초 기지를 만들었다. 그곳이 지금의 뉴욕이다. 이곳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정착했다. 그 뒤 북아메리카와 교류가 활발해지자 아메리카 항로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서인도회사’가 1619년에 공모되어 1621년에 인가를 받았다. 유대인들은 동인도회사 때와 마찬가지로 서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서인도회사는 신대륙 무역과 식민지 활동을 독점 수행하는 특권회사이자 동시에 은을 싣고 가는 스페인 상선대를 습격하는 해적질도 서슴지 않는 사실상의 전쟁기업이었다. 이 회사는 브라질 북부와 베네수엘라 연안 군도와 기아나를 지배하여 무역기지로 삼으면서 원주민과 모피거래ㆍ노예무역ㆍ사탕수수 등 열대작물 거래에 중점을 두었다.

 

◇1620년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

▲1620년 12월, 플리머스록에 상륙하고 있는 최초의 청교도 이주민들. /위키피디아

 

최초의 청교도 이주자들(Pilgrims)은 포도주 운반 배인 메이플라워호를 빌려 타고 1620년에 신대륙에 왔는데 이들의 애초 목적지는 버지니아였다. 하지만 폭풍을 만나 그보다 훨씬 북쪽인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게 된다.

 

어느 정부의 관할 구역 안에도 들지 않는 곳에 왔다고 믿은 그들은 그들이 지켜야 할 정식 합의서인 “정당하고 동등한 법”을 그들이 선정한 지도자들로 하여금 기초케 했다. 이것이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청교도 일행이 겨울에 아무도 없는 매사추세츠에 도착해 먹을 것도 없고 추위 속에 병에 걸려 반이 죽고 50여 명만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1년 후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전부 신대륙에 남아 공동체를 지켰다. 인디언들은 옥수수 재배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가을에는 이들은 풍족한 옥수수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피와 목재의 교역이 늘어났다. 그 뒤 정착민들은 버지니아에서 담배 재배를 통해 소중한 현금을 마련했다. 이들은 불과 5년 만에 자립경제를 이루었다.

 

◇담배가 법정통화로 지정되다

 ▲담배. /위키피디아

 

당시 신대륙에는 고유의 화폐제도가 없을 때라 버지니아에서는 담배가 화폐 구실을 했다. 그 무렵 모국인 영국이 식민지로의 금화 반출을 금지해 통화 부족이 발생했다. 그러자 버지니아 의회는 1642년 아예 담배를 법정통화로 지정했다. 담배만이 유일한 화폐였다. 금화나 은화로 지불하는 행위는 되레 위법이었다. 당시 담배는 연초를 둘둘 말은 잎담배였다.

 

당시 젊은 여자들이 버지니아 총각들의 배우자로 많이 수입되었다. 처음에 담배 100파운드 가격이었던 여성들은 수요가 급증하자 150파운드로 껑충 뛰었다. 어느 작가는 담배 화폐로 아내를 맞아들이는 남성들의 흥분된 광경을 기록으로 남겼다. “기적소리를 내며 런던으로부터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배에는 아름답고 정결한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을 기다리던 젊은 남성들은 팔에 최상품 담배를 한 다발씩 들고 급히 배 쪽으로 뛰어갔다.”

 

법정화폐인 담배 인기가 치솟자 ‘돈’을 심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집집마다 담배를 재배한 탓에 시중에 돈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시중에 담배가 많아지자 담배 구매력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과잉 공급을 우려한 버지니아, 메릴랜드, 캐롤라이나 3개 주는 1년간 담배 생산을 중단하자는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담배 폭락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성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담배공장을 파괴했다. (출처 담배의 전성시대, 배연국의 돈 블러그)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다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지도층을 이룬 계층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이 사람들이었다.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가난하거나 비천한 계급을 극복하고자 신대륙으로 이민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잘 교육받은 중산층으로 교회 개혁을 선도하던 당시 영국의 개혁 주도 세력이었다. 때문에 신대륙 정착 목적을 그들이 믿는 신앙에 기초한 유토피아 건설에 두고 신세계 건설에 매진했다. 따라서 이들이 영국 식민지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청교도들은 의무교육을 제도화하여 모든 신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안식일은 반드시 준수하도록 했다. 또한 합리적인 사고와 노력에 대한 보상을 확신하는 종교적 믿음을 갖고 인내, 근면, 정직, 성실, 검소하게 살아가는 생활 태도를 견지했다. 그리고 건설적이지 못한 사고나 행동을 죄악시했다.

 

그러나 청교도의 엄격한 통치를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도층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로저 윌리엄스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는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인디언의 땅을 빼앗는 것과 그리고 영국교회와의 관계를 반대했다. 그는 결국 매사추세츠만(灣) 식민지로부터 추방당해, 1636년에 지금의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덴스에 사는 인디언들로부터 땅을 사 그곳에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된 아메리카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1650년 무렵에는 영국 이주자들이 대서양 연안 지역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유대인, 서인도제도에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에는 포르투갈에 살았던 개종 유대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들은 서인도회사와 손잡고 대규모로 브라질과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사탕수수 농장과 원목 벌채사업에 뛰어들었다. 브라질의 유대인들은 1630년 레시페에서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645년 포르투갈이 다시 브라질 식민지의 주도권을 잡자 네덜란드는 1654년 1월 레시페를 포르투갈에 양도했다. 그러자 그곳에 살던 유대인 1500명은 서인도제도로 옮겨갔고 일부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이로써 서인도제도에서 유대인들의 사탕수수 농장이 대규모로 시작되었다.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가 잘 자라고 이윤을 꽤 남길 수 있는 산업적 전망이 보이자, 유대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실어다 이 지역에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었다. 노예, 담배, 설탕의 삼각무역을 통해 유럽으로 실려 가는 설탕과 럼주의 원료인 당밀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대인, 1654년 뉴암스테르담 상륙

1624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지금의 뉴욕주 올버니에 ‘뉴네덜란드’를, 그리고 이듬해 맨해튼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로 인디언들로부터 모피를 구입해 이를 수입했다.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땅에 발을 디딘 때는 1654년이었다. 브라질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다 북미로 올라온 23명의 유대인들이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처음 도착한 곳이 뉴암스테르담, 지금의 뉴욕이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맨해튼 총독이 상륙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유대인 이사들에게 연락해, 맨해튼 총독은 본사의 훈령을 받고 나서야 상륙을 허가했다.

 

당시 뉴암스테르담은 750가구의 조그마한 어촌으로, 유대인들은 맨해튼 땅 가운데도 가장 쓸모없이 내팽개쳐진 습지에 자리 잡았다. 이듬해에는 네덜란드에서 유대인 25명이 곧장 뉴 암스테르담으로 건너와 유대인 숫자는 조금 더 불어났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최대의 유대인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는 뉴욕의 유대인 사회의 시발점이다.

 

[33] 유대인, 대구잡이와 비버 모피 수출에 가담하다

◇청교도가 세운 목사 양성소가 하버드 대학 되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던 프로테스탄트들이 미국에 도착하여 올린 기도는 탈애굽을 연상케 한다.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지만 그 배라도 주심을 감사하며, 평균 시속 2마일로 항해했으나 117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을 감사했다. 그러면서 비록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하였고,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또 여자들 몇 명이 파도에 휩쓸렸지만 모두 구출됨을 감사하였다.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할 곳을 찾지 못해 한 달 동안 바다에서 표류했지만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이 사는 곳에 상륙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한 고통스러운 3개월 반의 항해 도중 단 한 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음을 감사했다.”

 

 ▲하버드 대학. /위키피디아

 

그 뒤 청교도들이 후손들 종교교육을 위해 만든 목사 양성소가 바로 하버드 대학이다. 1636년에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하버드대학이 창설되었을 때 라틴어, 그리스어와 함께 히브리어를 교육했다. 실제로 식민지의 공용어를 히브리어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안까지 나온 일이 있었다. 저명한 청교도 존 코튼 목사도 모세 율법을 매사추세츠 법의 바탕이 되게 하자고 생각했다. 이러한 청교도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 헌법에는 모세 법전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게 되었다.

 

◇플러싱 항의 서한

뉴암스테르담의 총독 페트루스 스토이베산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로 유대인들과 퀘이커 교도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추방하려 했다. 그 무렵 퀘이커교는 17세기 영국 청교도 운동의 극좌파에 해당하는 종교로 유대교와 많은 면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플러싱 항의서’라고 알려진 서신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에 보내 종교의 자유와 장사를 핍박하는 총독을 파면시킬 것을 탄원했다.

 

서인도회사는 곧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 유대인들의 종교와 장사를 훼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스토이베산트는 결국 파면당한 다음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플러싱 항의서는 미국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탄원한 문서였다. 이를 계기로 뉴암스테르담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었다. 이렇게 미국의 종교적 자유는 유대인들이 기여한 바가 컸다.

 

◇유대인, 대구잡이와 비버 모피 수출에 가담하다

 ▲보스톤 남동쪽 케이프 코드

 

뉴암스테르담에 이주한 초기 유대인들은 생업으로 맨해튼 어촌에서 네덜란드에서 하던 대구 잡이와 간단한 일용잡화 행상부터 시작했다. 가장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맨해튼 앞 바다에도 대구가 있지만 가까운 매사추세츠 동남부 반도에 ‘코드곶’(Cape Cod Bay)에 더 많았다. ‘코드’(Cod)라는 단어 자체가 생선 대구를 뜻한다. 그 앞바다는 대구 산란철이 되면 말 그대로 ‘물 반, 대구 반’이었다. 지금도 그곳은 세계 4대 어장의 하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말린 대구와 절임 대구는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먹거리였다. 특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불을 지피거나 요리를 할 수 없어 그 전날 대구 튀김을 해놓았다가 먹는 것으로 유명하며, 상업적으로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서 대구와 청어잡이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유대인들은 비버 모피 수집과 대구잡이를 위해 뉴암스테르담과 케이프 코드 연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키보다도 큰 대구

 

대서양 대구는 크다. 보통 1미터가 넘는 크고 못생긴 물고기 대구는 입이 커서 대구(大口)라 불린다. 대서양 대구는 무게도 보통 30Kg이 넘는 대형 고기로 살이 많아 사람들이 좋아했다. 대구는 커다란 입을 쫙 벌린 채 물속을 돌아다니며 입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삼켜 버린다. 대구는 그 큰 입만큼이나 엄청난 대식가이다. 닥치는 대로 먹는데 새우와 오징어, 청어, 꽁치 같은 맛있는 생선을 주로 먹는다. 대구 살이 맛있는 이유이다. 이런 엄청난 식욕 때문에 대구는 잡기가 쉬웠다.

 

먼바다의 대구가 산란철인 12월에서 3월 사이 연안으로 알을 낳으러 몰려든다. 대구가 번식기에 알을 낳고 정액을 뿌리기 시작하면 바다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대구가 너무 많아 어선들이 항해하기 힘들 정도였고, 낚시 없이도 뱃전에서 양동이를 내려 대구를 퍼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낙으로 길이 180Cm, 무게 1백 Kg의 거대한 대구가 낚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이때 잡은 대구를 햇볕에 말려 두고두고 먹었으며 대구철이 지나면 청어나 다른 생선을 잡았다.

 

네덜란드 시절부터 대구 잡이와 소금 절임은 유대인들의 주특기였다. 그들에게 말린 대구는 바다의 빵으로 유대인들이 거의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특히 금식일이나 종교 절기에 육류와 누룩 든 빵을 금해 유대인들은 대구를 먹었다.

 

 

뉴암스테르담과 케이프 코드 연안 유대인들은 잡은 대구를 해변에서 말리는 동안 조개나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해안가를 찾아온 인디언들과 만나게 되고, 양측 간에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인디언들은 그들이 필요한 칼, 도끼, 솥, 술 등을 받고 그 대가로 비버 가죽을 주었다.

 

당시 뉴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인디언들로부터 사들인 비버 가죽을 유럽에 수출했다. 시베리아에서 잡히던 담비와 비버가 남획으로 고갈되어 북아메리카 비버가 최고 인기 상품으로 떠올랐다. 대구잡이 유대인들은 인디언들로부터 비버 가죽을 사들여 서인도회사에 비싼 값에 되팔았다. 대구잡이 어부들로서는 힘들게 조업하는 것보다 인디언과 교환하여 얻은 모피를 서인도회사에 되파는 것이 수익 면에서 훨씬 좋았다. 그래서 오로지 모피 거래에만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655년 영국군의 침략에 대비해 맨해튼 남부에 통나무 외벽(Wall)을 쌓기 위해 시민들로부터 모금을 했다. 그때 맨해튼에 처음 도착했던 유대인 23명 중 다섯 명이 네덜란드 은화 1천 플로린을 기부했다. 그 외벽을 쌓은 곳이 지금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다. 무일푼이었던 유대인들이 1년 새 그런 거액을 기부할 정도였다. 그들이 얼마나 돈을 잘 벌었는지 알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에 제2의 유대인 정착촌을 개척하다

 

유대인들은 인디언들이 갖다주는 모피가 양이 차지 않자 모피 수집을 위해 유대인들은 강을 거 슬러 올라가 인디언들이 사는 펜실베이니아로 진출했다. 1655년 초 델라웨어강 주변 인디언들과 모피 교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뉴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도착 이듬해인 1655년에 펜실베이니아에도 두 번째 유대인 정착촌이 들어섰다.

 

이후 모피 수집을 위해 유대인들이 인디언들이 사는 펜실베이니아로 모여들었다. 그 뒤 펜실베이니아 거주 유대인들의 생업은 대부분 모피 수집과 행상이었다. 나중에는 비버를 잡으러 유대인들이 직접 숲으로 들어갔다. 비버 가죽이 돈이 되자 너나 할 거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그 과정에 길을 내고 작은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유대인뿐 아니라 당시 북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러시아 사람들 모두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유대인을 쫓아 펜실베이니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퀘이커 교도들이었다. 돈 많은 퀘이커 교도이자 영국 해군제독의 아들인 윌리엄 펜이 영국 왕 촬스 2세에게 돈을 빌려주고 상환금 대신 1681년 델라웨어강 강변의 땅을 하사받아 이를 개척했다. 펜실베이니아는 ‘펜의 숲이 있는 지방’이란 뜻이다.

 

그 뒤 펜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특히 퀘이커 교도들이 몰려들면서 급속하게 발전하여 1685년경에는 인구가 9천 명으로 불어났다. 그 중심지는 “형제애의 도시”라는 뜻의 필라델피아로 당시 식민지의 최대도시가 되었다. 펜실베이니아는 윌리엄 펜 덕분에 식민지 가운데 가장 먼저 번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펜 자신은 이민자들이 땅을 탐내 인디언을 몰살하는 등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그가 꿈꾸었던 이상이 실현되지 않자 실망해 1701년 영국으로 돌아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3의 유대인 정착촌 뉴포트

이후 북동부 연안의 대구잡이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뉴욕 롱아일랜드와 가까운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는 대구잡이 어항이 번성하여 1658년에 유대인들의 세 번째 정착촌이 생겼다. 더구나 그곳은 로저 윌리엄스 목사가 종교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해 주고 있는 곳이었다. 로드아일랜드는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로 1636년 로저 윌리엄스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

 

윌리엄스는 그가 신봉하는 민주주의 사상으로 인해 매사추세츠주에서 추방당하자, 로드아일랜드로 가서 정교(政敎)분리와 신앙 자유를 표방한 식민지를 세웠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1644년에 정식 인가를 받아 스스로 최초의 로드아일랜드 총독이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했다. 이것이 유대인들아 모여든 이유였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로드아일랜드 중심 도시인 ‘뉴포트’와 ‘프로비던스’로 몰려와 정착했다.

 

또 다른 이유는 뉴포트가 눈에 띄는 어항으로 케이프 코드와 가까운 대구잡이 기지로 적지였기 때문이다. 소문이 나자 1658년 네덜란드로부터 많은 유대인이 뉴포트로 건너왔다. 그 뒤 남미와 포르투갈에서도 유대인들이 많이 건너와 뉴포트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유대인 커뮤니티를 이루었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생존을 위한 이주다 보니 유대인들의 신대륙 정착 속도가 빨랐다. 그 무렵 뉴포트는 미국에서 가장 큰 유대인 커뮤니티를 이루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에서 그랬듯이 대구 처리와 소금 절임을 고도로 분업화하고 표준화했다. 그리고 철저한 품질 관리와 서비스로 전국적인 유통을 장악하여 이를 기업화했다. 네덜란드에서 그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였다. 당시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절임 대구는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이로써 유대인 부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 뒤 유대인 부자들은 높은 교육열로 대학 설립에 재정 지원을 많이 했다. 1769년에 설립된 로드아일랜드대학은 모든 학생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고, 기독교 종교행사에 유대 학생들의 강제 참여를 면제해 주었다.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와 교육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때부터 유대인 부호들의 명문대학 설립과 재정 지원은 유대인 사회에서 일종의 전통처럼 관례가 된다.

 

◇북동부에 조선업이 발달하다

로드아일랜드 위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영국 이민자들도 대구잡이에 뛰어들었다. 대구 덕분에 돈이 넘치고 사람이 모이면서 보스턴 같은 대도시가 생겨났다. 대구는 보스턴 항구 인근에서 햇볕에 말려진 뒤 선적되어 스페인 빌바오 항을 거쳐 유럽 내륙에 팔려나갔다.

 

어업이 발달하면 고기잡이배를 만들기 위한 조선업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뉴포트 인근을 비롯한 매사추세츠 만에는 조선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위 삼림에 배 만들기 좋은 목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의 선체 부분을 만드는 참나무(오크), 돛대용 긴 소나무, 배의 이음매를 위한 송진이 동북부 삼림에 지천이었다.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조선소도 생겨 대구잡이 어선에서부터 대형 무역선까지 만들었다. 원래 조선업도 베네치아와 네덜란드 이래로 유대인의 주특기 가운데 하나였다. 매사추세츠 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배를 직접 만들어 유럽 항구에 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연결해 해운업과 무역업의 토대를 쌓았다.

 

게다가 양질의 풍부하고 값싼 목재와 유대인들의 분업 및 경영합리화로 북동부지역 조선 경쟁력이 높아져 조선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식민지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영국 선박의 1/3이 아메리카 동북부 뉴잉글랜드에서 건조되었다.

 

[34]좀바르트와 베버의 논쟁, 자본주의 정신의 유래

◇청교도와 유대교의 궁합

 ▲베르너 좀바르트. /위키피디아

‘근대 자본주의’를 저술한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는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들이 재산을 정리하여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암스테르담에 정착할 때 자본주의도 따라왔다”고 주장한다. 이런 좀바르트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방방곡곡에 유대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미국의 혼’이라는 부르는 것은 순수한 유대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 아메리카의 정신은 퓨리턴(청교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면을 쓴 유대교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이며 퓨리턴은 인공적인 유대이다.” ‘반유대교’적일 만큼 과격한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크롬웰에 의한 영국의 청교도혁명 이후 영국이 서서히 유대화되었고 드디어는 대영제국의 정책, 나아가서는 세계정책에 유대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뜻이다. 그러한 청교도 무리와 유대인들이 아메리카에 건너가 미국을 건설했다는 의미이다.

 

당시 유대인은 물 만난 고기였다. 그 이유는 청교도와 유대교 사이에 커다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부를 부정하고 탐욕을 억제하라고 가르친다. 탐욕에 의한 혼란과 약탈을 방지하고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가톨릭은 돈과 부귀를 탐하지 말고 청빈하라고 가르친다. 불교는 모든 물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도록 ‘무소유’를 설파한다. 힌두교는 아예 아무것도 소유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슬람교도 물욕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종교가 한결같이 물욕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돈 버는 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데 딱 두 개의 종교가 부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부는 신의 축복이라는 교리를 강조한다. 이 두 종교가 바로 유대교와 청교도이다. 칼뱅은 ‘깨끗한 부자’를 강조했고 유대교도 부자가 축복받은 사람임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는 돈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사람을 해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근심 말다툼 그리고 빈 지갑이다.’ ‘몸의 모든 부분은 마음에 의존하고, 마음은 돈지갑에 의존한다. 부는 요새이고 가난은 폐허이다’

 

◇뉴암스테르담, 영국의 점령으로 뉴욕으로 개칭

뉴암스테르담은 다양한 국가와 인종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특히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는 바로 네덜란드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북미에 식민지를 세운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게 된다. 항해조례란 영국과 영국 식민지와 교역하려면 영국 선박이거나 영국 식민지 선박으로만 상품을 운송해야 한다는 조례이다. 이는 당시 해운업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붕괴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네덜란드는 브라질 일부 지역에 갖고 있던 식민지를 포르투갈에 빼앗겼고, 1664년 뉴암스테르담도 영국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새 영토의 주인이 된 영국 왕 찰스 2세는 왕위계승자인 동생 요크에게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 사이에 있는 모든 땅을 선물로 주었다. 요크 공작의 소유가 된 뉴암스테르담은 곧 새 주인 요크(York) 공작을 기리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 ‘뉴욕(New York)이 되었다. 요크 공작은 뒤에 형의 뒤를 이어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된다.

 

뉴욕 최초의 영국 총독 리차드 니콜슨은 1665년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며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강조했다. “그 누구도 기독교 신자와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 문제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벌금을 낼 수 없다.” 영국인들이 원했던 식민개척자들은 상업적 재능과 우수한 무역망을 가진 이들이었다. 식민지에서는 과거 유럽과 달리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종교적 제약도 없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과거에는 결코 지니지 못했던 안전의 영속성을 식민지에서 획득했다.

 

유대인들은 타고난 근면성과 검소함으로 청교도들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 뉴욕의 유대인들은 대구잡이와 행상을 하는 한편 인근 매사추세츠 유대인 조선소에서 직접 배를 만든 선장들은 유럽의 유대인 커뮤니티와 손잡고 해상무역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뻗어나가는 신대륙 건설과 늘어나는 일감에 일손이 부족해지자 유대인들은 유럽에 사는 친지들을 부지런히 불러들였다. 친척이 없는 유대인들도 건너왔다. 그들 대부분의 초기 이민은 농장에서 일하기로 계약을 맺고 건너왔지만, 곧 상업과 중개업, 여관업, 그밖에 도시형 산업에 종사한다. 조가비 염주 알을 제조하는 공방도 생겨났다. 유대인다운 발상이었다.

 

마침내 뉴욕은 유럽에서 몰려오는 유대인들의 처음 기착지가 되었다. 이후 뉴욕은 유대인에 의해 주도되어 성장 가도를 달렸다. 한때 뉴욕 인구의 3분의 1이 유대인이었으며 뉴욕 소재 대학교 학생의 반이 유대인이었다. 오늘날의 뉴욕을 만든 이들이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곳곳에 그들의 정착촌을 이루어 나갔다. 유럽에서 이주한 어느 민족보다도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영국의 식민지 13개 주에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었다.

 

◇비버 사냥

1720년까지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죽임을 당한 비버의 숫자는 200만마리가 넘었다. 비버 모자는 19세기 초까지 인기를 누렸는데, 이때쯤 미시시피 강 동쪽에서는 비버가 사실상 멸종되다시피 했다. 이 시기에 모피 동물 사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졌다. 18세기 말의 통계를 보면 한 해 평균 비버 26만마리, 너구리 23만마리, 여우 2만마리, 곰 2만5000마리 등을 합쳐 모두 90만마리 이상의 동물을 사냥했다. 19세기가 되면 이 수는 더욱 커져서 한 해 평균 포획 동물 수가 170만마리가 되었다.

모피동물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비버였다. 비버는 비교적 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반면 번식률이 낮기 때문에 사냥꾼들이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잡고 나면 거의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비버를 주로 식량으로 삼았던 현지 인디언들은 비버를 멸종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남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럽의 모피 수요와 연결되자 한 지역에서 비버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1640년쯤 허드슨강에서 비버가 사라졌다. 그러자 사냥꾼들은 세인트로렌스강 주변 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18세기 말에는 이 지역도 끝나자 미시시피 서쪽과 태평양 연안 지역만이 마지막 남은 비버의 서식지였다.

 

그 뒤 북아메리카의 모피 무역은 최후의 미개척지인 미시시피 서쪽 땅으로 옮겨갔다. 이 지역을 처음으로 탐험한 루이스와 클락은 1805년에 로키산맥을 넘어 태평양 해안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이곳에 지구상 그 어느 곳보다 많은 비버와 수달이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곧 덫 사냥꾼들이 몰려와 비버와 수달을 잡기 시작했다. 이 동물들이 거의 사라진 뒤에는 더 이상 개척할 곳이 없어 값이 덜 나가는 동물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하여 사향뒤쥐와 담비 모피가 몇 년 동안 모피 무역을 지탱했다. 하지만 이 동물들마저 거의 사라졌다. 해달과 바다표범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들의 모피는 주로 북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18세기엔 북해의 해달과 물개가 대신 모피의 소재로 유행했고, 이후엔 검은 여우가 쓰였다. 이때부터 야생동물이 귀해지자 모피용 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해 은여우가 우리에 갇혀 길러졌다.

 

◇유대인들의 삼각무역으로 부흥한 뉴욕

뉴욕으로 건너온 유대인들은 미국이 독립하기 이전의 초기 13개 주로 골고루 퍼져 나갔다. 17세기 후반에 뉴욕이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와 교역하였던 3대 상품은 ‘모피와 노예, 밀’이었다. 밀은 허드슨강 주변에서 경작되었다. 또한 뉴욕은 서인도제도에서 당밀(糖蜜)이나 럼주를 수입하여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는데 썼다. 당밀은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가공할 때 부수적으로 나오는 찐득한 시럽을 말하는데 이를 이용해 럼주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미국은 영국에서 기계 장비를 수입하고 고래기름과 담배 등을 수출했다.

미국에 흑인이 처음 들어온 것은 1619년 네덜란드 국적 선박이 버지니아 식민지에 20여 명의 흑인을 내려놓으면서부터다. 미국에 흑인들이 청교도들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노예는 아니었다. 그들은 계약노동자였다. 그때에는 비슷한 처지의 백인 계약노동자가 있었다. 대부분 가난 때문에 계약을 맺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리고 운임 대신 약 7년 동안 일을 해주고 자유를 얻었다.

 

정작 흑인이 노예가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흑인이 많아지면서부터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대규모 흑인들이 유입되었고, 이들이 인구의 20%를 넘어가자 통제를 위해 노예제도가 본격화되었다. 이후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농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인의 식민지가 확장됨에 따라 흑인 노예의 수요가 급증하여 노예무역은 점점 번성했다. 특히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브라질에 진출하여 사탕수수농장과 농장에서 일할 인력 공급을 위해 노예무역을 주도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영국령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 섬이 브라질을 대신하여 사탕수수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자 영국은 1672년에 노예무역 독점회사로 왕립 아프리카회사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영국․ 아프리카․ 서인도를 연결하는 이른바 삼각무역을 경영하여 네덜란드를 압도했다.

 

 ▲당시 흑인 노예 모습. /위키피디아

노예무역에서 삼각무역의 내용을 살펴보면, 본국에서 노예를 사는 데 필요한 럼주와 총포 그리고 화약 등을 싣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러 흑인 노예와 바꾸었다. 그 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노예를 팔고 그 대금으로 식민지 물품과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액즙과 당밀을 사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더욱이 17세기 후반 이래 북아메리카 남부의 담배와 쌀, 곡물, 인디고 생산의 대농장에서도 흑인 노예를 사용하여 그 수요는 크게 늘었다.

 

당시 뉴욕항은 수출로는 농산물, 수입으로는 공업제품과 노예가 주요 상품이었는데 1690년부터 근 60년간 영국·스페인 전쟁 등 각종 전쟁으로 군수품 무역항으로 성장한다. 군수품 무역 또한 솔로몬 왕 이래로 유대인들의 주특기였다. 1690년도 북아메리카 인구는 모두 25만명 정도였으나 그 뒤 인구는 25년마다 두 배로 늘어났다.

 

◇좀바르트와 베버의 논쟁,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위키피디아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곧 청교도 정신의 금욕이 자본주의 정신을 잉태했다고 주장한 반면에 베르너 좀바르트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사치가 자본주의 탄생의 원동력이었다고 강조했다. 1902년 독일의 국민 경제학자 좀바르트는 ‘근대 자본주의’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활동의 특징이 영리주의와 합리주의라고 보았다. 특히 자본주의의 영리주의 측면을 강조한 좀바르트는 경제에서의 무한 추구 정신은 무한의 화폐 추구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는 청교도로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건전한 직업정신’과 ‘정당한 이윤추구’라는 ‘윤리적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는 노동이 신성하다면 돈도 신성하다면서 돈은 철저하게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책임감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윤리적 자본주의 정신이란 노동을 통해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했다.

 

베버에 따르면 자본주의 정신은 탐욕과 무한한 이윤추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른바 금욕주의 정신에 충실한 자본가들은 자신의 직무를 엄격하게 수행하면서 윤리적으로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잘못된 자본주의 정신과 건전한 자본주의 정신과의 차이점을 유대교와 청교도 정신(Puritanism)의 예를 비교로 들어 설명했다. 유대교의 경제적 지향은 정치나 투기에 의존해서라도 돈을 버는 모험적 자본주의 태도다. 한마디로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베버는 이런 유대교 자본주의 행태를 천민자본주의라고 말했다. 청교도적 논리였다.

 

당시 좀바르트는 베버에 맞선 강력한 라이벌로 두 사람은 거의 20년에 걸쳐 논쟁을 이어갔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논점 하나는 ‘금욕이냐 사치이냐’였다. 좀바르트는 ‘사치와 자본주의’라는 책에서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사회에서 어떻게 사치가 뿌리내리게 되는지를 다양한 수치와 문헌의 조사를 통해 추적했다. 초기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행해졌던 사치를 귀족이나 졸부들이 모방하게 되면서 이러한 사치 수요가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교역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는 것이다.

 

좀바르트는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을 함께 엮어내어 ‘사치와 자본주의’를 썼다. 그는 경제학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가치판단의 문제를 담고 있는 ‘규범경제학’, 오늘날 주류 경제학이 된 수치적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실증경제학’, 그리고 인문과학적 방법론을 담는 ‘이해경제학’의 세 부류로 나누고, 이해경제학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 이해경제학을 ‘사치와 자본주의’를 쓰면서 이 책을 통해 사회·경제·역사를 아우르고, 또한 그 속에 인문학적 성찰까지도 담아내고자 했다.

 

좀바르트가 제시하는 명제와 베버가 제시하는 명제는 명백히 상충된다. 한쪽은 사치가 자본주의의 원인이라 하고, 다른 한쪽은 노동윤리와 검약이 자본주의 초기의 특성임을 주장한다. 이 둘의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묘하게도 학문적으로는 이러한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둘은 절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잡지’를 간행하기도 했다. 마치 두 사람에게서 유대교와 청교도 관계를 보는 듯하다.

 

[35] 자본주의 최초의 버블, 튤립 투기

▲튤립. /위키피디아

자본주의 역사에서 발전만 있을 뿐 퇴보나 재앙이 없었던 자본주의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에서 금융산업이 발전하면서 자본축적이 커지고 유동성이 증가하자 가장 먼저 나타난 부작용이 투기적 거래였다. 163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적 상황은 투기하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30년 전쟁으로 강력한 경쟁 산업이었던 동유럽의 직물산업이 붕괴되어 네덜란드 직물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었다. 자카르타 지역을 차지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가는 최고의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 무렵 유럽 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앞다투어 교외에 대저택을 짓는 등 호황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부동산 가격도 급등했다. 요새 말로 자산소득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

 

늘어난 부에 취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머리에선 검약정신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소비지향적인 국민이 되어 있었다. 풍요와 오만에 젖은 네덜란드인은 과시욕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더 큰 부를 안겨줄 대상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튤립이었다. 튤립처럼 부드럽고 예쁜 꽃이 유동성 장세의 속성인 ‘붐’을 불러오고 그리고 그 투기의 끝은 ‘공황’이었다. 이 이야기는 신출내기 주식투자자는 물론 투자상담가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다. 이 꽃은 17세기 네덜란드 경제를 거의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 내막을 살펴보자.

 

◇아시아의 야생화 유럽을 사로잡다

튤립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의 파미르고원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한다. 이때만 해도 튤립은 그다지 화려한 꽃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붉은 빛과 자생적으로 번져나가는 강인한 생명력 덕분에 페르시아 사람들 집 안팎에 자라고 있었던 꽃이었을 뿐이다. 이 꽃이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오스만투르크 사람들이 정원에서 키우면서부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이 꽃의 존재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1573년 터키 술레이만에 파견된 네덜란드 대사 오기에르 부스베크가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식물학자였던 카롤루스 크루시우스에게 튤립 한 뿌리를 선물했다. 크루시우스는 이 구근을 번식시켜 다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식물도감’에 등재했다.

 

터키인들이 투르반이라고 부르는 이 꽃은 번식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름이 튤립으로 바뀌었다. 식물학자들은 꽃의 연약한 꽃대를 북유럽의 거친 기후에 적응하도록 강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사람들은 정원에 피어난 튤립을 보고 감탄했다. 초기 튤립은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꽃의 색깔에 따라 튤립을 다양하게 분류했다.

 

몇 년이 흐르자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꽃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사실 튤립은 집에서 기르는 평범한 꽃이었으나 부자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차차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변해 갔다.

 

귀족 부인들은 화장실의 타일 색과 가장 잘 어울리는 튤립을 골랐고 화려한 튤립 장식은 비싼 아라비아산 카펫의 화려함을 능가했다. 사람들은 튤립으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산책하곤 했다. 시중에선 거의 매일 튤립 축제가 열려 어느 가문의 튤립이 더 우아한지를 겨루었다. 이웃이 가지고 있지 않은 희귀한 튤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했다.

 

사람들이 튤립에 열광한 이유는 당시의 네덜란드 사회가 대단히 개방적이고 누구든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고귀한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는 변화가 많은 사회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일부 갑부들이 현대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부와 교양미를 과시하는 것처럼 튤립은 당시 네덜란드 사람에게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집 한 채 값의 튤립 등장

이렇듯 1600년대 초의 네덜란드는 튤립 투기의 열풍에 휩싸이고 있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진 품종 튤립을 열심히 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튤립 가격은 점차 급등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튤립을 이용해 사회적 지위를 올리려 했다. 그러자 귀족을 닮고 싶어 했던 서민들도 이 행동을 따라 했다. 결국 신중하기로 소문난 네덜란드 사람들도 튤립 재배에 자신들의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원이 튤립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는 동안 가격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 자국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는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웠다. 천천히 가격은 계속 올랐다. 튤립 뿌리가 거래되는 8~9월에는 값이 절정에 달했다. 계산이 빠르고 돈 있는 사람들은 튤립 뿌리 구매에 돈을 투자했다. 시장은 이제 버블 국면에 진입했다. 그때까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서 주로 주식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이 대거 튤립 시장에 몰려들어 튤립 뿌리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비쌌던 황제튤립 정물화. /위키피디아

1624년 일명 ‘황제튤립’은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 값인 1200플로린에 거래되었다. 1633년에는 5500플로린까지 값이 올랐다.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튤립 투기의 우연성을 극대화해 주었다. 하나의 뿌리가 황제 튤립을 터트릴 수도 있었고 평범한 꽃을 피울 수도 있었다. 당시 400여종의 튤립이 개발되면서 튤립마다 황제, 총독, 영주, 대장 등 군대 계급과 비슷한 이름이 붙었다. 뿌리는 상대적으로 쉽게 재배할 수 있었다. 땅 한 뙤기만 있으면 족했다. 그리고 거래를 막을 길드도 없었다. 당시 고가주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에 투자할 돈이 없었던 가난한 서민들은 ‘꿩 대신 닭’이라는 말 그대로 튤립 한 뿌리에 모든 것을 걸었다.

 

튤립 시장은 뿌리가 채취되는 여름에 열렸다. 하지만 튤립의 인기가 올라가자 1년 내내 거래할 수 있는 매매 방법이 고안되었다. 재배 농가는 뿌리를 심은 두렁에 표시를 하고 각 뿌리마다 무게와 어떤 변종인지를 알 수 있는 번호표를 붙였다. 또 거래일지를 만들어 뿌리마다 그동안 체결된 거래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값비싼 뿌리는 쪼개어 아스(20분의 1g) 단위로 거래되었고, 평범한 뿌리들은 두렁 단위로 거래되었다. 튤립뿌리는 표준화 되었고, 네덜란드 중앙은행의 은행권이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식과 같이 취급되었다.

 

◇선물시장 발달이 투기 부추겨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뒤늦게 시장에 뛰어든 사람들은 농사꾼 등 서민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폭발적인 튤립 재배 붐이 일어나면서 선물시장도 발달하게 되었다. 1936년 ‘바’나 ‘타베르나’라 불리는 카페와 선술집 같은 곳에서 확립된 ‘금융선물시장’은 투자자들이 튤립의 현물 가격을 다 지불할 필요가 없이 계약가격과 결제가격의 차액만을 지불하면 됐다. 이로써 투자자들은 적은 돈으로 많은 양의 튤립을 거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투자자들이 광란적 투기와 수 없는 전매가 일어났다. 대부분의 거래는 어음결제로 이루어졌고 어음의 만기는 대부분 튤립 뿌리를 캐는 이듬해 봄이었다. 투기열풍이 끝나갈 무렵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튤립 뿌리는 돌고 돌아 실체가 없는 거래가 되어 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선물거래’의 특성상 직접 눈으로 보지도 못한 튤립을 매매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이 네덜란드 회화의 전성시대를 다시 열어주었다. 아직 피지도 않은 튤립 꽃을 매수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매도자가 화가를 통해 그 튤립의 꽃을 아름답게 그려서 보여준 것이다. 튤립 투기에 그림까지 이용되었다. 대부분의 투기꾼들은 만기에도 튤립 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현물을 인도할 수가 없었고 돈조차 없어 결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튤립의 적정가격이 얼마인지를 밝히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투기꾼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튤립을 전매하는 데 열을 올렸을 뿐이다. 1636년 12월에서 1637년 1월 한 달 사이에 수천 길더가 뛰어오르는가 하면 심지어는 1만길더를 호가했다. 살찐 황소 4마리 값이 480길더이던 시절이었다. 한 달 사이에 2600%나 뛰어오르자 사람들은 집과 땅을 팔아 튤립 알뿌리를 샀다. 현금보다는 주로 어음으로 거래되었다.

 

◇투기의 종말

 ▲꽃과 바보들의 수레. /위키피디아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투기의 종말이 찾아왔다. 튤립거래의 중심지였던 하를렘에는 더 이상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제로 다음날 싼값에 내놓은 튤립조차 전혀 팔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동안 튤립을 신용으로 매집해놓고 있었던 업자들은 일단 가격이 하락세로 접어들자 불과 한두 달 전에 금보다 더욱 가치 있었던 튤립이 하나의 양파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37년 2월 마침내 풍선은 터져 버렸다.

한때 8000달러를 넘던 튤립이 70달러까지 폭락했다. 그래도 양파치고는 비싼 가격이었다. 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도가 줄지어 발생했다. 꽃 상인들은 채권 투기꾼들에게 보유 어음을 넘겨 일부나마 회수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매매가격의 3.5%만을 지급하는 것으로 모든 채권, 채무를 정리하도록 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자 튤립뿌리 수집가들이 다시 시장으로 모여들어 아주 헐값에 튤립 뿌리를 사들였다. 그리고 2~3년이 지나자 황제튤립의 값은 투기 발생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하지만 서민들이 한몫 보기 위해 투기를 벌였던 낮은 등급의 튤립 값은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튤립 투기의 실체였다.

 

◇렘브란트의 원숙미는 투자 실패로부터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 /위키피디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도 이때 ‘상투’를 잡았다. 재능은 물론 부귀와 명예를 함께 가지고 있던 그가 대출받아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린 것이다. 집과 미술품을 모두 경매로 넘기고 파산한 렘브란트는 평생 빚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재기해보려고 미술품 경매회사를 세웠다. 예술품을 일반 경매시장에 내놓은 최초의 사례다. 렘브란트의 경매회사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영국의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회사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원숙한 정신과 위대한 예술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회화사에서 렘브란트만큼 그림의 깊이가 심오하고 그만큼 불안과 고뇌가 깊었고 인간과 세계, 순간과 영원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 화가는 없었다. “글쎄 내가 채권자들에게 빚 독촉 받는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는 몰라도 젊은 날의 야망을 꿈꾸던 내가 아니오. 외부적인 경제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의 정신적 성숙과 표현의 힘은 날로 더해지는 것 같소.” 렘브란트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쓴 편지다.

 

◇투기의 원조, 7세기 당나라 모란꽃

투기의 전형으로 불리는 튤립 광풍의 원조는 놀랍게도 중국의 당나라다. 7세기 초 이세민이 천하를 통일하고 평화와 변영의 시기가 열리자 장안의 귀족들은 그들의 정원을 장식할 아름다운 모란꽃 투기에 몰입했다. 늦은 봄이면 화려한 모란꽃 경연대회가 열렸고 1등을 한 모란 가격은 집 한 채 가격을 훌쩍 뛰어넘었다. 농부들이 농사 대신 모란재배에 미쳐갔다.

경제학자인 슘페터는 새로운 산업이나 기술이 만들어낼 장래 수익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퍼지면서 과도한 자본이 집중될 때 ‘투기’가 주로 발생한다고 했다. 발전 과정상 한번은 넘어야 할 고비로 본 말이다. 투자 시장이나 혹은 투기 시장에서 비이성적 게임이 벌어지는 것은 예나제나 큰 차이가 없다. 예전 코스닥 시장의 IT(정보기술) 거품에서 보았듯이 오버슈팅된 상승장에서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려는 욕심이 앞서 믿을 수 없이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튤립 투기 사례는 우리가 지나간 과거의 우스개 이야기로 단순히 흘려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투기는 필연적으로 버블을 수반하고 버블의 종착역은 붕괴와 파멸이다.

 

하지만 투기의 심각한 후유증 속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긍정적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골드러시는 금을 캐낸 경제효과보다 그 과정에서 도로와 도시가 생겨나고 마차, 연장 등 관련 산업과 음식·숙박업 등 서비스업이 활성화되면서 경제가 부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는 변종, 희귀종 등의 교배와 재배 기술을 화훼산업에 적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결국 투기적 수요에 의해 기술 개발이 촉진되어 네덜란드는 이후 400년간 화훼산업의 종주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연간 700억달러 규모의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100억달러 이상이 화훼 수출이다. 화훼류는 전 세계 무역에서 네덜란드가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그야말로 꽃의 나라다. 튤립 투기가 남긴 공(功)이다.

 

[36]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보석산업

상업적 의미에서 보석의 출생지는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유대인이다. 한낱 장신구에 지나지 않았던 보석에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석을 보석답게 재탄생시켰다. 이 과정을 살펴보자.

유대인들은 항상 그들이 살던 곳에서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아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추방될 때 손쉽게 들고 갈 수 있는 재화였다. 무거운 귀금속보다는 작고 값진 재화나 보석들이 제격이었다. 유대인의 오랜 방랑과 시련이 남겨준 지혜였다. 주화는 편리하고 쓰기도 쉬웠지만 언제 어느 나라로 쫓겨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각 나라에서 사용하는 주화를 다 모으기는 힘든 실정이었다. 게다가 무겁고 강탈의 위험에 노출되기 쉬웠다. 그러나 보석이란 어느 나라에서나 통하는 만국 공통의 화폐 구실을 했다.

 

◇보석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유대인

유대인들이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나올 때 한 웅큼씩 숨겨 가지고 나온 것이 보석이었다. 아예 추방령에 돈이나 금괴를 가져 나오다 걸리면 사형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보석을 이처럼 중요한 재화의 대용으로 사용하기 이전에는 보석은 그리 값이 일정하지도 않았고 귀족이나 성직자 예복의 장식품에 불과했다. 유대인들이 보석을 중요한 교환가치의 하나로 승격시키면서 보석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이로써 유대인과 보석은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이후 보석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꾸준히 개발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로 발전했다.

15세기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들이 쫓겨나 앤트워프로 피신해 와서 제일 먼저 한 장사가 그들이 탈출할 때 몸에 숨겨 지니고 온 보석 거래였다. 이후 자리를 잡자 그들이 가장 먼저 일으킨 산업이 바로 다이아몬드 가공 및 수출산업이었다. 당시 유일한 다이아몬드 산출국이었던 인도에서 원석을 들여와 이를 가공해 수출했다. 오늘날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앤트워프는 유럽 최대의 다이아몬드 유통지이다. 18세기 초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기까지는 인도가 유일한 산출국이었다. 중세에는 유럽에 수입되는 다이아몬드는 극소량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법률로 왕족과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규제했었다.

다이아몬드는 물질 가운데에서 가장 단단하다. 곧 경도가 가장 높아 ‘10′이다. 이는 영원불멸의 강력함과 깨지지 않는 사랑을 상징한다. 그래서 결혼반지로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이아몬드가 보석으로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17세기 말 베네치아의 유대인 페루지에 의하여 다이아몬드 컷팅 기술의 정수인 ‘브릴리언트 컷’의 연마 방법이 발명된 뒤의 일이다.

 

◇로스차일드 자금 투입 및 세실 로즈 드비어스 설립

본격적인 다이아몬드 생산은 1866년 남아공에서 21캐럿짜리 ‘유레카’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나서부터다. 이어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근대적 채굴법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다이아몬드는 대중화되었다. 그 뒤 남아공에 다이아몬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일찍이 영국인 세실 로즈가 로스차일드 가의 자금을 받아 1888년 ‘드비어스(De Beers)사’를 설립해 아프리카 남부를 지배했다. 드비어스란 원래 남아공 촌부인 원주민 형제의 이름이다. 평범한 농사꾼이었던 형제는 남아공의 어느 농장을 50파운드에 매입했는데 우연히 그 농장에서 키운 농작물 밑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871년의 일이었다. 드비어스 형제는 이 뜻하지 않은 복덩어리 농장을 매입가의 무려 126배인 6300파운드에 팔았다. 더욱이 형제는 이 농장을 팔면서 농장의 명칭을 자기들의 이름인 ‘드비어스 광산’으로 영구히 붙여줄 것을 요구했다. 오늘날 다이아몬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드비어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드비어스 형제로부터 다이아몬드 농장을 사들인 사람이 유명한 세실 로즈(Cecil Rhodes)다. 로즈는 농장 밑에 묻혀있었던 엄청난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큰돈을 벌어 재력가가 되었다.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1890년 남아공 케이프주 식민지 총독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각종 정책과 법을 영국인과 드비어스사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인근 지방에 대한 무력 정복도 서슴지 않았다. 로즈는 군대를 동원해 보어 원주민들과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였다. 그는 아프리카 남부 일대에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가 정복한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라고 불렸다. 로즈의 땅이란 뜻이다. 이 지역이 1980년 독립한 ‘짐바브웨’다. 로즈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따 ‘로즈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비롯한 많은 영재들이 받은 ‘로즈 장학금’이 바로 로즈 재단에서 지급한 장학금이다.

 

◇오펜하이머, 금과 다이아몬드 함께 장악하다

세실 로즈 사후인 1916년에 어니스트 오펜하이머가 ‘앵글로아메리칸’이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지배했다. 이때부터 세계의 금 업계도 오펜하이머 일가가 움직여 왔다. 이후 독일계 유대인인 이 오펜하이머 가문이 다이아몬드 시장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1880년 유대계 담배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영국 보석상의 대리인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킴벌리에 파견되면서 다이아몬드와 인연을 맺었다. 1916년 JP모건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해 광산회사 ‘앵글로아메리카’사를 설립한 후 앙골라, 콩고, 남아공 등지로 사업을 확장해 갔다. 그러면서 꾸준히 드비어스의 주식을 사들여 1929년 마침내 드비어스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곧 대공황이 들이닥쳤다. 오펜하이머는 유대인답게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다이아몬드를 헐값에 사들였다. 동시에 파산한 광산회사들을 사들여 독점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이아몬드의 공업용 수요가 급증해 사세는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런던에 자회사인 중앙판매기구(CSO)라는 신디케이트를 만들어 전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생산, 유통, 판매를 통제함으로써 드비어스 신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아공에 본사를 두고 영국 런던에 판매 본사를 두었다. 오펜하이머는 킴벌리 시장과 남아공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가이도 했다. 그는 정계와 경제계를 오가며 인맥을 넓히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자체 정보기관을 운영했고, 일종의 외교 담당 부서를 두어 각국의 정권과도 직접 접촉했다. 적대적 인수합병, 주가조작, 가격 조정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사업을 키웠다. 그가 사망할 무렵 드비어스는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80~90%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에 들어와 드비어스 카르텔이 남아공, 보츠와나, 나미비아에서의 생산과 기타 국가에서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독점 매집하면서 드비어스는 거의 100여 년간 전 세계의 다이아몬드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여 주물러왔다. 나미비아는 아프리카 남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나라로 세계 제3위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이다. 아프리카 최고 갑부인 오펜하이머 일가는 전 세계 다이아몬드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드비어스사의 최대 주주다. 그와 그가 설립한 앵글로아메리카 회사가 드비어스 주식을 각각 45%씩 가지고 있다. 드비어스는 사실상의 그의 개인회사나 진배없다.

 

◇다이아몬드, 공급이 자유시장에 맡겨지면 돌 값으로 폭락할 수 있어

보석산업의 특징은 생산과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유통구조가 대부분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마디로 독과점 체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야 수급 조절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급을 조절할 수 있어야 고가 정책을 유지하여 마진폭을 키울 수 있다. 만약 이들 유통 조직이 갖고 있는 다이아몬드가 모두 시장에 풀리면 다이아몬드 가격은 하루아침에 돌 값으로 폭락한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류는 상상 이상의 마진이 붙는다. 다이아몬드 원석에는 정확한 값이란 게 없다. 원석 채취 비용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드비어스의 사이트홀더들은 큰 원석을 절단도 하지 않고 그냥 한 번 살펴본 뒤 입찰에 참여한다. 도박 같은 다이아몬드 사업에 한 가지 법칙은 있다. 다이아몬드 가격은 채굴업자에서 사이트홀더와 소매업자를 거쳐 소비자까지 이르는 사이 단계별로 껑충 뛴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다이아몬드 원석은 품질과 유형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남아공에서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을 채취해 채굴업자는 캐럿 당 15달러 곧 150달러 내외에 이 원석을 드비어스에게 넘겼다고 치자. 드비어스는 품질이 좋을 경우 이것에 100배의 가격을 매겨 사이트홀더에 넘긴다. 사이트홀더는 1만5천 달러를 지불한다. 원석을 깎은 뒤 외면상 생각했던 것보다 품질이 나쁘거나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본전치기에 바쁘다. 하지만 이것이 운이 좋아 비교적 흠집 없는 3.5캐럿짜리 보석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면 소매업자는 이것을 7만5천 달러에 사 최종 소비자에게 12만5천 달러에 판다. 그것도 30% 폭탄 세일이라는 가격으로 말이다.

 

역사적으로 보석산업은 유대인이 주도하여 왔다. 15세기 말 앤트워프에서 보석산업이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유대계 신디케이트인 ‘드비어스’는 다이아몬드의 대명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이아몬드 생산은 전 세계에 걸쳐 있지만 주로 남아공과 러시아가 주산지였다. 그러나 현재는 호주, 자이레, 카나다 등이 새로운 공급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가공 지역은 값싼 것은 저임금의 인도에서, 고급품은 주로 벨기에의 앤트워프와 뉴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유대인의 본거지인 이스라엘을 합하여 4대 가공지이다.

 

중국과 인도 시장은 현재 매우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특히 인도의 경우 다이아몬드 유통 시장을 쥐게 된 건 값싼 임금 탓이다. 1990년대 호주산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공급받아,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를 깎았다. 이를 통해 기술과 자본을 축적했다. 여기에 금을 좋아하던 인도 중산층이 다이아몬드로 시선을 돌린 게 추가적인 산업 성장동력이 됐다. 최근에는 인도의 유통업 진출이 눈에 띤다. 앤트워프의 다이아몬드 전문점 1500개 중 많은 상점을 인도인이 운영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뉴욕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다이아몬드 시장이 주목받고 있는 것도 인도와 같은 논리다. 중국은 지난 2000년 상하이 푸둥지구에 다이아몬드 거래소를 열어 산업을 키우기 시작했다. 중국은 최근 들어 부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선호하여 해마다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드비어스가 장악한 다이아몬드 유통업계

드비어스는 188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을 때는 다이아몬드 시장의 90%까지 장악하기도 했다. 그 누구도 이 아성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그런 조짐이 보이면 이 ‘다이아몬드의 제왕’은 가차 없는 공격을 퍼부으며 다이아몬드 왕국의 명예를 지켜왔다. 어쩌면 드비어스의 이런 마케팅 전략은 영국의 못된 식민지 정책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의 눈물’이라고 굳게 믿었던 탄소 결정체 다이아몬드는 이제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이 보석이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8세기 인도 드라비다족이었다. 그 뒤 로마 시대에는 오직 왕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186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어 본격적인 채굴법이 도입되면서 비로소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오랜 세월 ‘사랑’과 ‘헌신’으로 각인된 ‘다이아몬드’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이 업계는 모순투성이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드비어스가 전 세계 다이아몬드 공급의 80% 이상을 장악했었다. 이 회사는 가격결정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원산지를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사들여 수급을 조절했다. 창고에 엄청난 원석이 쌓여 있지만 전 세계 물량 조절을 위해 계속 사들인 것이다. 당연히 무리가 뒤따랐다.

다이아몬드 원석 거래방식도 비합리성 그 자체다. 드비어스는 다이아몬드 광석을 등급별로 분류해 가공 직전 단계의 원석을 파는 회사다. 그런데 이 거래방식이 매우 희한하다. 일 년에 딱 열 번만 이뤄지는 판매 기회는 세계적으로 150여 ‘고정 지정 고객’에게만 구매 권한이 주어진다. 이들을 ‘사이트홀더(sightholder)’라 부른다. 유대인이 주류를 이루고 다음으로 인도계가 많다. 독점이다 보니 완전히 공급자 시장이다. 지정 고객들은 다이아몬드 원석에 대한 선택권이 전혀 없다. 회사 측에서 가격과 물량을 제시하면 불만 없이 ‘현금’으로 구입해야 했다. 가격에 불만을 나타내면 다음부터 초청되지 않는다. 완전히 ‘횡폭한 셀러 마켓’인 것이다. 그럼에도 지정 고객이 못 되어 안달이었다. 마진이 큰 중간 도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정 고객이 되기 위한 물밑 경쟁은 항상 치열했다. 드비어스는 영국의 독점자본으로 출발해 남아공, 중앙아프리카, 앙골라, 보츠와나 등 과거 영국의 식민지에서 착취 형태로 발전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 150여 개의 보석 가공회사에 마치 비밀결사 조직을 방불케 하는 공급 시스템을 갖추고 가격이 내려가면 유통량을 줄이고 가격이 올라가면 유통량을 늘리는 등 가격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다이아몬드에 관한 한 절대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러시아가 변수로 등장

그런데 이런 아성과 권력에도 누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뜻하지 않게도 1991년 구소련의 해체로부터 비롯되었다. 러시아는 1954년 레나강 지류에서 처음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어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생산했다. 현재 주 생산지인 사하공화국 야크츠크에서 연간 20억달러어치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캐내고 있다. 광산이 위치한 사하공화국이 전체 생산량의 10%를, 러시아 국영기업인 알로사가 90%의 유통을 관장하고 있다. 구소련은 붕괴되기 전까지 보츠와나에 이어 세계 2위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이었다. 시베리아에서 원석을 채굴하기 시작하자 당시 드비어스의 회장이었던 해리 오펜하이머가 공산당과 밀약을 맺고 전량 수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1년 공산정권이 붕괴되면서 러시아는 드비어스 외에 다른 회사에도 다이아몬드 원석을 공급했다. 즉 구소련의 절대권력 해체가 드비어스의 절대 독점을 무너뜨리는 아이러니를 불러왔다.

다이아몬드는 속성상 비즈니스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처럼 철저하게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 비즈니스처럼 피고용자의 입장에서는 다이아몬드 거래를 하기가 어렵다. 곧 원석이나 가공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과정에서 한순간의 실수가 쉽게 수만달러에서 심지어 수십만달러까지의 이익과 손실이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비즈니스는 유대인의 가족 사업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은 드비어스를 비롯해 도소매업도 유대인들이 이끌고 있다. 비록 드비어스의 다이아몬드 영향력이 과거에 견주어 크게 위축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많은 양을 생산하고 있다.

 

◇강력한 라이벌 등장, 레브 레비브

비합리적인 독점거래는 언젠가는 무너지는 법이다. 캐나다, 호주, 러시아 등지에서 연달아 드비어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됐다. 캐나다는 지난 1998년부터 다이아몬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망하고 고속 성장하는 다이아몬드 원산지이다. 이 보다 드비어스의 독점체제가 도전받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강력한 라이벌 레브 레비브(Lev Leviev)의 등장이다. 최근 들어 다이아몬드 시장에서 유대인들 간의 싸움은 치열하다. 드비어스를 상대로 1990년대 말부터 급부상하고 있는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거상 레브 레비브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유대인으로 현재 국적도 이스라엘인이다. 그는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 최대생산국인 러시아와 앙골라에서 이미 드비어스 시장을 많이 잠식했다. 그는 원래 드비어스의 ‘150명 지정 고객’ 가운데 한 명이었다. 레비브는 사이트홀더를 다루는 드비어스의 고압적 태도에 격분했다. 드비어스는 사이트홀더 (지정 고객)들에게 몇 상자의 원석을 제멋대로 정한 값에 떠넘겼다. 드비어스의 심기를 거스르면 거래는 영원히 중단됐다. 하지만 이러한 드비어스의 횡포가 계속되자 다이아몬드 가공업체 사장인 그는 드비어스의 사업 분야인 원석 개발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레비브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자랐다. 가족은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았지만 유대교를 믿었다. 남자들은 비밀 할례의식도 치뤘다. 레비브의 아버지는 성공한 직물상이었다. 그의 가족은 7년을 기다린 끝에 1971년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재산을 100만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바꿨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건너간 가족들은 다이아몬드의 질이 낮아 20만달러밖에 안 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15세였던 레비브는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학교를 중퇴하고 다이아몬드 커팅을 배우기 시작했다. 1997년 레비브는 다이아몬드 커팅 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막 꿈틀대던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시장의 투기 바람은 대단했다. 커팅업자 대다수는 가격이 계속 치솟으리라는 예상에 재고를 많이 확보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시장이 붕괴되자 은행들은 대출을 더 이상 연장해주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커팅업체가 파산했다. 재정 상태가 양호했던 그는 이후 5년에 걸쳐 12개 소규모 공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원석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런던, 앤트워프, 남아공, 러시아로 뛰어다녔다.

 

게다가 레이저 기술과 당시 혁명적이었던 커팅 소프트웨어를 도입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냈다. 1987년 드비어스는 레비브에게 사이트홀더 자격을 부여했다. 당시 레비브는 이스라엘에서 내노라 하는 다이아몬드 세공업자로 성장해 있었다. 2년 뒤 레비브는 러시아 국영 다이아몬드 채굴 ·판매 업체 곧 현재의 ‘알로사’로부터 커팅 공장 설립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원석 생산에서 세공까지 마무리하는 최초의 합작회사 ‘루이스’(Ruis)는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거래를 인연으로 레비브는 러시아 원석 공급량의 일부를 확보하게 됐다. 드비어스가 발끈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1995년 사업에 탄력이 붙으면서 레비브는 사이트홀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레비브는 루이스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그와 푸틴의 관계는 1992년 시작됐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이었던 푸틴은 시장이 주저하던 유대교 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레비브가 자금을 지원한 유대교 학교는 50년 만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그는 이런 인연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알게 되었다. 러시아 전 푸틴 대통령과 앙골라 산토스 대통령은 매우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앙골라 내전 당시 다이아몬드 광산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반군으로부터 12억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밀반출시킨 드비어스에 대한 앙골라 정부의 반감이 높았다. 이것이 레비브에게는 다이아몬드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레비브는 1996년 앙골라에 6000만달러를 투자해 현지 최대 다이아몬드 광산의 지분 16%를 받아냈다. 앙골라와 콩고, 시에라리온과 같은 아프리카 중서부의 소위 ‘피 묻은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국가들은 향후 정치만 안정이 되면 캐나다, 러시아를 능가할 만큼의 잠재성이 무궁한 나라들이다. 다행히도 반군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최근 들어 다이아몬드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레비브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LLG(Lev Leviev Group) 그룹은 요즘 러시아, 앙골라, 나미비아, 보츠나와 등의 광산개발 주도권을 쥠으로써 드비어스 위상을 위협하고 있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해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외교관계 강화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는 현재 그룹 홀딩사인 ‘아프리카 이스라엘 인베스트먼트’의 대주주로서 국내외 부동산개발, 미국 유통업체, 이스라엘 현지 러시아어 TV 방송국 등의 다방면에 걸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최대 비즈니스맨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이들 나라 대통령에게 환심을 사는 방법은 ‘일자리 창출과 다이아몬드 산업 부흥’이다. 그는 “원석을 캐내자마자 영국의 본부로 가져가 그곳에서 비밀리에 거래하는 드비어스의 사업방식은 원산지 국가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각국 정부를 설득했다. 생산지에서 원석 가공도 해서 부가가치를 높이고 일자리도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먹혀들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선 푸틴과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며 국영이던 알로사(Alrosa) 민영화에 참여해 대주주가 됐다. 러시아는 생산시장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알로사는 드비어스에 이어 세계 2위다. 이제 러시아의 다이아몬드는 굳이 드비어스 유통시스템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앙골라에서는 반란군의 다이아몬드를 구입해줌으로써 자금줄 구실을 했던 드비어스가 쫓겨났다. 레비브는 이 틈을 이용해 앙골라의 다이아몬드 광산개발에도 안착했다. 나미비아에서는 새로 지은 다이아몬드 공장에 대통령을 초청하여 500여명의 젊은 직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세공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내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이미지를 심었다. (참고; 2004.7 매경이코노미, 정선욱 자유기고가)

 

◇제3의 변수들

드비어스에게 러시아의 배신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호주의 아질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리오 틴토는 레비브가 드비어스에 맞서는 것을 보고 자극받았다. 그는 1996년에 사상 처음으로 다이아몬드 4200만캐럿을 드비어스를 거치지 않고 벨기에 앤트워프의 한 세공업체에 직접 판매했다. 대규모 중저가 다이아몬드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던 아질 광산이 직접 판매를 선언하고 드비어스의 그늘을 벗어난 것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호주가 전 세계 생산량의 40%를 차지하여 최대 생산지로 등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캐나다 북서부 지방인 에카티·다이빅·윈스피어 등 3곳에서 대규모 광산이 발견되면서 캐나다가 제3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으로 등장하여 드비어스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이다. 이런 위기는 미국과 EU의 반독점법 규제와 맞물려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프리카의 내전이 대부분 마약과 다이아몬드가 그 원인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이아몬드 산업 자체에 큰 부담을 안기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악재가 겹쳐 드비어스의 시장 지배력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산업 자체는 지금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후 중국 정부가 다이아몬드 원석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이 아프리카 각국 정부를 상대로 도로 등 인프라 개발을 약속하면서 현지 다이아몬드 원석을 대량 확보하자 인도 정부가 화들짝 놀랐다. 중국은 아프리카 앙골라, 콩고 등 국가에 수십억달러 규모의 인프라를 지원하는 대신 이에 상응하는 자원을 받기로 합의한 것이다. 인도는 다이아몬드 원석 절단 및 세공 부문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60%를 자랑하는데, 이런 기세를 몰아 해외시장 개척도 활발하다. 유대인의 본거지였던 앤트워프도 인도인의 공략 앞에 속절없이 주인들이 바뀌고 있는 판국이다. 이러한 인도 다이아몬드 업계도 중국이 원석 물량 확보에 나서자 바짝 긴장하고 있다.

 

다이아몬드가 결혼반지로 첫선을 보이게 된 것은 1477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맥시밀리언에 의해서다. 이후 왕과 여왕의 결혼에는 반드시 다이아몬드 반지가 등장하게 되었다. 다이아몬드만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무적의 힘과 둥근 반지의 상징성이 함께 어울려 다이아몬드 반지는 결혼의 조화를 나타내는 완벽한 상징물이 되었다. 무릇 이 세상에 여자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랑하는 연인들이 있는 한, 다이아몬드 산업의 발전도 끊임이 없을 듯하다. 드비어스의 브랜드 ‘FOREVER’처럼.

 

[37]영국, 1290년 세계 최초로 유대인을 추방하다

네덜란드가 중상주의의 꽃을 피우고 자본주의의 싹을 키울 때 영국은 후진국이었다. 수출품이라곤 양털과 모직물이 전부였다. 그나마 모험상인이라 불리었던 유대인들이 이 수출을 대행해주었다. 그 다음의 수익원이 해적질이었다. 해적질의 생명은 기동성과 함포 사격술이었다. 이를 통해 길러진 해상 전투력으로 점차 해상권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과 네덜란드는 합심해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게 된다. 하지만 해양의 주인이 두 나라일 수는 없었다. 1651년 크롬웰의 항해조례를 계기로 영국과 네덜란드 간에 3차례에 걸친 영란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바이킹 출신 정복왕 윌리엄, 영국의 봉건 왕조를 열다

 ▲정복왕 윌리엄. /위키피디아

섬나라 영국의 초기 역사는 식민지 역사였다. 영국에서 유대인들이 살았다는 첫 기록은 노르만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금 생산과 노략질을 위해 스칸디나비아에서 프랑스 북부로 내려와 노르만 지역을 점령해 살던 바이킹 출신의 노르만족이 1066년 영국마저 정복했다. 당시 노르만 7대 공작인 윌리엄은 영국을 정복하면 땅을 나누어주겠다고 신하들과 프랑스 귀족들을 회유해서 귀족들로부터 많은 병사와 700여 척의 배를 모으게 된다. 이때 북부 프랑스 루앙(Rouen) 지방에 있던 유대인 상인들과 의사들이 윌리엄을 따라 해협을 건넜다. 이때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가 영국 왕조의 시조이다.

 

윌리엄 1세는 영국을 정복한 후 4000여명의 영국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그의 180명이 채 안 되는 노르만족 신하들과 프랑스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써 영국에 처음으로 강력한 봉건제를 도입하여 왕권 강화에 주력했다.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왕조 이전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색슨족이 이주해 와 세운 왕국이 여럿 있었지만, 이 왕조로부터 영국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주의 국가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때를 기준으로 ‘왕조 이전 시대’와 ‘왕조 시대’로 구분한다.

 

◇윌리엄 왕, 유대인을 영국으로 불러들이다

이때부터 영국(잉글랜드)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는 프랑스의 신하가 아니지만 노르망디 공작의 지위는 잉글랜드 왕위와는 별개로 프랑스의 봉신이기 때문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또한 이때부터 런던이 본격적으로 영국의 수도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런던탑. /위키피디아

윌리엄 왕은 다른 바이킹족 등 외적의 침입과 내부 반란을 막기 위해 런던을 관통하는 테임즈강 요충지에 가장 높고 튼튼한 거대한 요새 겸 성을 짓게 되는데 이 성이 바로 런던탑이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성채가 영국에서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윌리엄은 이러한 노르만식 요새를 영국 곳곳에 지으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는 프랑스에 살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뛰어난 상업과 금융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자본과 상업 기술을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는 이를 위해 프랑스 루앙에 남아 있던 나머지 유대인 커뮤니티 전체를 영국으로 초청하여 살도록 했다. 이를 필두로 노르망디와 북부 프랑스에 살던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대거 이주하여 정착촌을 이루며 살았다. 물론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에도 일부 유대인들이 영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 무렵까지 아직 정착촌을 형성할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영국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대부업에 종사했다. 대부업은 당시에 그들이 영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업종이었다. 장원 중심의 봉건적 경제체제가 정착되어가고 있던 영국에서 유대인들은 감히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도시의 길드 체제나 농촌의 장원 체제 모두 유대인들에게 조그마한 활동공간조차 제공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 그리하여 토지를 보유할 수도, 기존의 경제체제에 편입될 수도 없었던 그들은 자연히 교회가 기독교도들에게 금지한 업종, 곧 대부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시 영국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분투하는 국왕들과 사치스런 귀족들이 금전을 빌릴 수 있는 대상을 항상 필요로 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자본을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대부업이 더없이 좋은 업종이기도 했다.

 

 ▲유대 자본으로 건설된 윈저성, 1087년 정복왕 윌리엄이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 목조 성채를 쌓는 데서 시작하여 조지 4세 때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단일성으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위키피디아

유대인은 이후 노르만족의 역대 왕들과 영주의 보호 아래 번창했다. 그들은 독자적인 유대교 회당과 공동묘지가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를 영국 도시 곳곳에 짓고 살았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어김없이 상업이 발전하고 경제가 힘차게 살아 움직였다. 또한 대부 때마다 매번 세금을 내고 왕이나 영주의 채무보증을 얻어야 하는 유대인의 대부업은 영국 국가재정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무렵 지배계급들은 전국에 성을 지어 워릭성, 윈저성 등 100여 개의 큰 성들이 이때 건설되었다. 유대 자본으로 건설된 것이다.

 

이후 1085년 토지대장이 완성되어 세금 징수의 토대가 되었다. 제대로 된 나라 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자료를 보면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에 즉위한 1066년과 자료가 출간된 1086년의 두 시기를 기준으로 그때와 지금 누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언제 어떻게 주인이 바뀌었는지가 정리되어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의 토지 주인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새로운 영주와 교회가 차지했다.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문화가 영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지배층의 언어가 노르만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노르만어는 노르망디 지방에서 통용되는 프랑스어 방언이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노르만어는 영국 지배층의 언어가 되었고, 수많은 흔적을 영어단어에 남겼다.

 

 ▲영국 국회의사당. /위키피디아

또 하나의 변화는 성이었다. 처음에는 주위에 해자를 파고, 가운데는 탑 모양의 요새를 설치한 형태에서, 나중에는 돌로 축성한 성이 수도 없이 영국 전역에 세워져 영국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의 영국 국회의사당도 정복왕 윌리엄 시대인 1090년에 완성되어 궁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헨리 8세가 화이트홀로 거처를 옮긴 1532년부터 영국의 국회의사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상인은 유대인을 의미

헨리 2세 때 유대인의 대부업은 나라의 통화량을 조정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했다. 1185년 아론이라는 유대인 대부업자는 1만5000파운드를 430명에게 빌려주었는데, 이것은 영국 연간 국고 수입의 4분의 3이었다고 하니 유대인 대부업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 유대인들이 누렸던 이러한 번영은 전적으로 국왕의 보호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들은 국왕의 막중한 돈줄이자 수지맞는 과세 대상이었기 때문에 왕실은 그들을 과도하리만큼 후원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이같이 전적으로 국왕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 취하는 각종 조처에 대해 거의 무력한 처지였다. 실제로 헨리 2세 때에 이르면 유대인들은 아예 국왕의 소유물, 곧 재산 그 자체였다. 1180년경의 법령에는 이 점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왕국의 어느 곳에 거주하든지 모든 유대인은 왕의 신하의 감시와 보호를 받아야 한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은 국왕의 것이므로, 어느 유력자를 막론하고 왕의 허가 없이 유대인들을 자신에게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 또한 만약 어느 유력자가 유대인들이나 그들의 금전을 억류했을 경우, 만약 왕이 원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왕은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그 억류 대상을 마땅히 회수할 수 있다.”

이런 형편이라 국왕은 유대인들에 대한 거의 모든 조치를 내릴 수 있었다. 예컨대 유대인들이 돈을 빌려줄 때마다 왕의 관리들은 구체적인 액수와 대상을 문서에 기록했고, 그 대금을 회수할 때는 채무액의 1할을 징수했다. 또 만약 유대인 대금업자가 죽게 되면 왕은 그의 사채권을 모조리 왕의 재무관 수중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실례로 1185년에 영국 최고 거부로 알려진 유대인 ‘링컨의 아론’(Aaron of Lincoln)이 죽었을 때, 헨리 2세는 그의 전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 당시 그는 대륙에서 프랑스 왕 필립 2세와 교전 중이라 전쟁 경비 마련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이때 마침 아론이 죽자 왕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법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아론의 모든 유산을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헨리 2세는 또한 자신이 죽기 한 해 전인 1188년에 자신의 십자군 참전계획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소위 ‘살라딘 십일조’를 징수하기도 했다. 이 세금 징수의 직접적 대상은 사실상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는 이때 유대인들의 재산을 실사하여 총보유액 중 4분의 1을 납부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에게 거둔 금액은 모두 6만파운드에 달했는데, 당시 유대인들을 제외하고 영국 전체에서 징수한 총액이 7만파운드였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 금액이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왕은 1191년에는 런던 상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당시 상인은 유대인을 의미했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중세에 글을 아는 유대인들이 상권을 장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유대인들의 위세는 지나치게 커져갔다.

 

◇유대인 박해가 추방과 학살로 치달아

 ▲중세 유대인들이 써야 했던 특별한 고깔모자. /위키피디아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 살인자’라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영국 사회에도 반유대 정서가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고리대금업에 휘둘리는 서민들이 유대인을 미워했다. 3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면서 유대인 박해는 추방으로 연결되었으며 더 나아가 학살로 치달았다. 유대인이 추방되거나 죽으면 채무가 탕감될 뿐 아니라 그 재산은 영주에게 귀속되었다.

실제로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이끌었던 제3차 십자군 출정에 앞서 1189~1190년 런던과 요크에서 발생한 유대인 학살에 채무자들이 대거 가담했다. 그 뒤 폭정과 무능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존 왕이 유대인 탄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206년에 프랑스왕 필립 2세에게 노르망디를 빼앗긴 그는 그곳을 탈환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1210년에 영국 내 모든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실사하여 총 6만6000마르크에 이르는 거액을 세금으로 징수했다. 이제 유대인들에게 영국은 더 이상 안전과 번영을 약속하는 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헨리 3세(1216~1272년) 때에 이르면 유대인들은 아예 국왕의 목초지에서 방목되는 젖소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헨리는 통치기간 동안 별의별 명목들과 강압적 수단들을 동원해 유대인들에게 막중한 세금을 징수했다. 그의 치세에서 유대인들은 철저한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1257~1267년에는 영국의 주요 도시에서 유대인들이 연달아 추방당했다. 그리하여 런던, 캔터배리, 노샘프턴, 링컨, 캠브리지 등에서 유대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같은 대중의 반유대 감정이 점차 국가정책에도 반영되어 1275년에는 아예 유대인의 대부업을 불법화시켰다. 그 무렵 영국에서 유대인의 대금업이 전성기를 이루고 있을 당시 영국 왕은 특별한 권한을 갖고 유대인의 재산을 자기 것처럼 처분할 수 있었다. 마치 봉건영주가 농노들에 대해 갖고 있었던 권한과 비슷했다.

 

사자 왕 리처드가 집권하면서 유대인들의 수난이 시작됐다. 리처드 왕은 재정 확보 수단으로 유대인들을 파산시켰다. 뒤에는 신성 모독죄로 몰아 유대인 300명을 교수형 시켰다. 그들의 재산은 전부 왕의 것이 되었다. 왕으로서는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민심을 달래면서 왕의 돈주머니도 늘어났다.

 

◇1290년에 세계 최초로 유대인을 추방했던 영국

사회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대부업조차 차단당한 유대인들은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그때 추방령이 떨어졌다. 1290년 7월 18일, 영국 내 모든 유대인은 11월 1일까지 국가를 떠나라는 통첩이 내려졌다. 정해진 기한 이후에 영국에서 발견되는 유대인은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추방되는 첫 사례였다.

 

 ▲플랑드르 지역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유대인들은 몸에 지니고 갈 수 없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영국에서 집단 추방되었다. 당시 약 1만6000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도버 해협 바로 건너 플랑드르(오늘날 북부 벨기에)로 쫓겨 갔다. 영국은 스페인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유대인을 모두 나라 밖으로 추방한 것이다. 그 뒤 영국에 숨어 사는 개종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몰래 숨어 살았다. 이후 플랑드르는 북부 유럽의 상업과 금융 중심지로 탈바꿈한다.

이런 사례는 그 뒤 프랑스에서도 나타났다. 미려왕 필립의 확장정책과 반유대주의로 인해 1306년 유대인들에게 빌린 그간의 채무 관계를 백지화하고 프랑스 내 모든 유대인 1만 명을 추방했다. 부유한 유대인도 예외 없이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한 달 내 빈털터리로 떠나야 했다. 이러한 사례는 이후 유럽 곳곳에서 발생했다.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이들이 플랑드르와 북부 이탈리아로 나누어 정착하자 이 두 곳이 유럽의 최대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38]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다

◇유대 상인에 목매고 있었던 영국

유럽의 작은 섬나라 영국은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스페인 제국은 물론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에게도 밀리는 변방국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그로부터 200년 후 5대륙 45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세계의 통치자가 된다. 사실 영국은 세계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양모와 모직물 수출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산업이 없었다. 그나마 모직물도 14~15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해인 1336년에 에드워드 3세가 모직업을 발전시키려고 플랑드르에서 유대인 직조기술자를 데려온 후에 양모 수출은 쇠퇴하고 모직물 수출이 증가했다. 그 뒤 백년전쟁 중에는 영국이 양모의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플랑드르의 모직물 산업이 타격을 입었다. 그때 전란을 피해 다수의 플랑드르 직조공들이 영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모직물 생산의 중심이 플랑드르에서 영국의 요크셔로 이동했다.

이후 플랑드르에서 온 유대 상인들이 영국의 양모와 모직물 수출을 주도했다. 그래서 원래 영어에서 ‘상인’(merchant)이라는 말은 주로 해외무역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는 유대인을 가리켰다. 당시 영국에서 상인과 유대인은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서서히 영국인 모험상인조합이 성장했다.

 

영국 경제의 최대 취약점은 양모와 모직물이라는 단일 수출상품과 앤트워프라는 단일 수출시장에 목을 매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단일성이 한순간에 붕괴된다면 영국 경제는 큰 불황으로 치달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영국은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왕실에서 묵인하는 해적 활동이 극성을 부렸다.

 

◇영국의 자급자족 정책, 철 대포를 개발하다

16세기 영국 왕 헨리 8세 때 해적질에 필요한 대포도 모두 대륙에서 수입해 쓰고 있었다. 그들은 수입 대포를 주로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해적질에 썼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스페인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유대인 경제권인 플랑드르 공업지대의 영국 수출 금지를 단행해 영국은 더 이상 청동 대포를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자급자족 정책을 서둘러 대포의 자체 제작에 나서야 했다. 당시 청동 가격은 철의 4배에 달해 청동 대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철 대포 개발에 나섰다. 왕은 먼저 철광석 광맥이 있는 서식스 숲의 제철업자들에게 거액을 지원해 품질 좋은 철을 생산케 했다. 그 결과 1540년대 서식스 지역에 50개가 넘는 제철 공장이 들어섰으며 마침내 균질한 철 생산에 성공했다. 이는 훗날 산업혁명의 토대가 된다.

 

당시 영국은 해적질을 위해서 사거리가 긴 함포가 절실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륙의 청동 대포보다 포신이 긴 장거리 철 대포 개발이었다. 왕은 장인들을 끌어모아 마침내 장거리용 철 대포 개발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운도 따랐다. 서식스 지역 철광석에 포함된 인(燐)이 대포의 내구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철 대포 생산 원가는 청동 대포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이후 영국은 연간 400t(톤)이 넘는 철 대포를 생산했다. 이는 유럽 전체 대포 생산량의 70%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갤리언선의 포문과 평저선이 역사를 바꾸다

그런데 어렵게 개발한 장거리 함포의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함포 발사 때 배가 너무 흔들려 조준 사격이 소용없었다. 이를 극복한 게 평저선 개발이었다. 이는 영국의 운명을 바꾸었다. 함포 발사 시의 반동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선박의 밑바닥을 비교적 크고 편평하게 만들라는 아이디어는 당시 헨리 8세가 직접 냈다고 한다. 무엇보다 평저선은 보급에 유리했다. 밑바닥이 평편해 해안 어느 곳이나 쉽게 접안할 수 있어 보급품 운반이 용이했다.

 

 평저선(위)과 첨저선의 모습. /위키피디아

 

◇밑바닥 편평한 평저선, 회전 좋고 반동 줄여 함포 명중 높여… 임진왜란 때도 위력 발휘

우리나라 배는 고대부터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다. 중국, 일본 배들은 물살을 쉽게 가르기 위해 배 아래가 뾰족한 역삼각형인 첨저선이다. 유선형이기 때문에 평저선에 비해 속도가 빨라 다른 나라의 배는 첨저선이다. 우리나라에서 평저선 같은 독특한 배가 탄생한 이유는 갯벌이 많다는 점이다. 배 밑이 역삼각형인 V자형 첨저선은 썰물이 나가면 갯벌에 쓰러진다. 그래서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고려 때 최무선 장군은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 먼저 제조 방법이 유실되었던 화약 제조 기술을 복원했다. 그리고 대포를 만들어 평저선 위에 설치했다. 이로써 1380년 금강 하구 진포에 상륙한 왜선 500척을 섬멸하여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칼레 해전에 비해 200년 이상 앞선 이 진포 대첩이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이다. 그 뒤 왜구들도 대포를 만들어 배 위에 장착했지만 우리 한선을 당해낼 수 없었다.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배 위에서 대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다. 반면 왜구의 배는 첨저선이라 흔들림이 심해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평저선은 안정감이 있어 파도에 강하고 선회력이 좋았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반면 첨저선은 파도나 물살이 강한 곳에서 무리한 선회를 하다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신 장군이 물살이 빠른 곳을 주로 활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평저선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일등 공신이었다.

 

◇아래 갑판에 포문을 설치하다

헨리 8세의 공은 또 있었다. 그는 철 대포 개발 이전에 이미 상선을 차용해 급조한 무장상선이 아닌 본격적인 전투를 위한 전함을 제작해 아래 갑판에 ‘포문’을 설치했다. 그 전에는 상층 갑판에 함포를 적재함으로써 선박의 무게중심이 위로 쏠려 전복될 위험성이 있었다. 때문에 많은 함포를 적재할 수 없었다. 헨리 8세는 그러한 문제를 이레 갑판에 ‘포문’을 설치해 해결했다. 수면 바로 위에 위치한 아래 갑판에 경첩식 나무 창문을 만들어 이 포문을 통해 함포를 발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대포 밑바닥에 4개의 바퀴를 달아 이동이 쉽고 병사들이 포탄 적재와 발사 조작을 간편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후발국 영국이 이후 당대 최강 스페인 무적함대를 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갤리언선과 평저선에 장거리 철 대포를 장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의 갤리언선 포문 설치와 평저선 개발은 이후 세계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영란은행을 탄생시키는 시발점이 될 줄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설계도의 출현 및 대형 범선으로 진화

그 뒤 갤리언선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 것이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존 호킨스였다. 존 호킨스는 새로운 배를 개발하면서 그때까지의 전통적 선박 건조방식이 아니라 선박의 설계도를 그린 것이다. 현재 캠브리지 대학에 남아 있는 호킨스의 설계도를 보면 주먹구구식 함선 설계방식을 버리고 기하학에 입각해 완전히 새로운 배를 설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중을 낮추고 길고 날렵했다. 영국 전함은 스페인 전함보다 훨씬 더 많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으면서도 기동성이 좋았다.

 

1573년 새로운 설계에 기반한 첫 번째 전함이 건조된 이후 1588년까지 영국은 총 18척의 ‘레이스 빌트 갤리언선’을 보유하게 되었고, 16척의 왕실 갤리언선도 성능이 개선되었다. 스페인 함선으로는 도저히 쫓아올 수 없는 혁신적 함대가 영국에 등장한 것이다.

 

◇세계사를 바꾼 칼레 해전

그 뒤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휘한 1588년 칼레 해상 전투 때 영국은 갤리언 전투선 34척, 상선을 무장 시킨 163척 이외에도 평저선 30척으로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와 맞섰다. 그 무렵 해전은 백병전을 위주로 하는 근접 전투였다. 보통 배와 배끼리 강하게 들이받은 후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를 상대 배에 내려 보병들이 건너가 싸우는 백병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영국 함대의 해군 선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반면 스페인 무적함대는 해상 백병전을 위해 해군 선원 8500명, 보병 2만명을 태운 엄청난 군사력으로 무장해 있었다. 무적함대 선박은 한 배에 보병만 350명씩 타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칼레 항구에서 스페인 육군 3만명을 더 태워 영국 본토에 상륙시킬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포의 수와 성능은 영국이 월등히 앞섰다. 스페인은 장거리 철포인 컬버린 포를 21문밖에 확보하지 못한 반면, 영국은 153문이나 보유했다. 중거리 포도 스페인이 151문, 영국은 344문이나 보유했다.

 

대포를 많이 장착한 영국 군함의 전투 대형(隊形)도 변했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종전 방식대로 군함이 뱃머리를 적진으로 향하는 종렬진을 사용했다. 그러나 철 대포를 많이 장착한 영국 함선들은 배의 측면 대포들이 적진을 향하는 횡렬진으로 대항했다.

 

해상 백병전에서 세계 최강이던 스페인 무적함대는 속도와 회전력의 우위를 활용해 사거리가 길고 명중률 높은 철 대포로 공격해오는 영국 해군 갤리언선과 평저선 함대의 원거리 함포전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칼레 해전. 교황과 스페인 왕실 깃발을 단 맨 앞 가운데 함선은 무적함대 기함 ‘산 마르틴’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배는 영국 해군의 기함 ‘아크 로열’이며, 왼쪽은 전설적 해적이자 탐험가, 해군 제독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 함대의 부사령관 기함 ‘리벤지’인 것으로 보인다. 뒤편으로는 공격당한 스페인 함선들이 침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자 미상의 16세기 영국 유화. 영국 해군과 스페인 무적함대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해전 ‘그레벨링엔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런던 그리니치 국립 해양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이에 비해 영국의 갤리언 전투선은 무게중심이 낮고 길고 날렵해 철 대포가 많이 실려있음에도 무적함대 배보다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게다가 무게중심이 낮아 안정되다 보니 대포의 명중률도 스페인 함대보다 높았다.

 

영국의 평저선 역시 함포 명중률이 스페인 무적함대의 첨저선보다 월등히 높았다. 더구나 평저선은 수심이 얕은 연안에 정박이 가능하여 인근 해안에서 보급품 나르기도 수월해 영국 함선들에 탄약과 식량 등의 보급이 원활해졌다. 특히 당시 칼레 항구는 수심이 낮아 흘수가 깊은 대형 선박이 안심하고 정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는데, 이런 조건에서 평저선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당시 영국 철 대포의 사거리는 평균 100m(미터)였고, 스페인 무적함대 청동 대포의 사거리는 보통 60m 내외였다. 영국 함선들은 근접 전투를 하지 않고 장거리 함포 덕분에 80m 밖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괴롭혔다. 게다가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방향을 바꾸는 회전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영국 평저선은 단지 밧줄과 도르레를 이용해 돛들을 재빨리 돌려 배를 회전시키면서 초승달 대형을 이루어 쳐들어오는 적선들을 향해 함포 공격을 자유자재로 하여 스페인 무적함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회전력이었다. 이로 인해 무적함대는 그들이 원하는 해상 백병전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네덜란드 독립군 ‘바다의 거지 떼’들의 활약

스페인 함대는 저지대에 주둔하고 있는 파르마 공의 병력을 태우려고 칼레보다 조금 더 북동쪽에 위치한 덩케르크 해안에 정박하고자 했다. 네덜란드 근해는 대형 갯벌로 수심이 얕아 스페인 함선이 정박할 수 없었다. 스페인 함선이 정박할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은 지점은 ‘바다의 거지 떼’라고 스스로 칭한 네덜란드 해군이 선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안지형 뒤에 매복해있다가 스페인 대형 선박이 포착되면 바람같이 튀어나와서 사방에서 공격해 배를 불태운 뒤 도주하곤 했다.

 

게다가 파르마 공은 제때 병력을 이끌고 덩케르크 해안에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쫓고 쫓기는 일주일간의 전투 끝에 지친 무적함대가 밤에 항구가 아닌 칼레 해협 한가운데 닻을 내리고 정박한 상태로 막연히 파르마 공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영국은 8척의 화공선을 기습적으로 상대방 진영에 투입해서 폭발시키는 화공 작전을 폈다. 이에 놀란 무적함대 선박들이 밧줄을 끊고 달아나면서 아수라장이 됐을 때 함포 사격 총공세를 펼쳐 칼레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로 이어져

마침내 영국과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것이다. 이는 세계 권력의 이동이자 해상권 장악을 뜻했다. 그간 스페인 제국의 기세에 눌려 살았던 영국이 이를 계기로 중상주의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그들 영해에서만 스페인 배를 몰아낸 게 아니라 미국과 인도 항구에서도 스페인 상선을 공격해 쫓아내 버렸다. 이로써 이들은 북미에 식민지를 많이 건설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세계사의 분수령이었다. 스페인 제국이 지고 영국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항해조례를 통해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영란은행 탄생 그리고 훗날 영란은행을 본떠 만든 미국 연준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