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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이야기 2023/ 07.09 미국 국채 많이 보유한 국가 톱5는? - 08-28 부동산에 의존한 中 성장 전략의 종언

상림은내고향 2023. 8. 30. 13:49

 

지구촌 이야기 2023/

07.09 미국 국채 많이 보유한 국가 톱5는?

대표적인 안전 자산인 미국 국채는 기관·개인 투자자에게 모두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미국 국채는 미 정부 보유분을 제외하고도 24조4000억달러어치(약 3경2000조원)에 달한다. 그중 30%를 해외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다.

▲그래픽=김의균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는 일본이다. 작년 말 기준으로 일본 투자자들은 1조763억달러어치를 갖고 있다. 작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64%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일본은 지난해 순(純)대외금융자산이 3조1655억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많았을 정도로 해외 금융자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일본 다음으로 미국 국채를 많이 보유한 나라는 중국(8671억달러)이다. 2013년 1조3000억달러어치 보유하기도 했었던 중국은 이후 보유량을 줄여왔다. CNBC는 “중국이 해외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구성하면서 미국 국채 비중을 줄였다”고 했다.

 

3위 영국(6545억달러)은 2018년(2880억달러)과 비교하면 미국 국채 투자 규모가 크게 늘었다. 브렉시트(Brexit)와 코로나 사태 영향으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자 안전한 미국 국채를 늘렸다는 분석이 많다. 국제예탁결제기관인 유로클리어가 있는 벨기에(3543억달러)가 4위, ‘조세피난처’로 여겨지는 룩셈부르크(3294억달러)가 5위였다.

조선일보 홍준기 기자

 
 

월간조선 07월 호 

대만의 역사와 대만인의 정체성

대만인’ ‘중국인’ 사이에 갈등하는 중화민국

 ⊙ 1992년 여론조사 시 ‘대만인’이란 응답은 17.6%… 작년 조사에선 63.7%로 늘어
⊙ ‘남천녹지(藍天綠地)’… 북부는 국민당, 남부는 민진당 지지 강해
⊙ 말레이계 선주민, 淸나라 때 건너온 本省人, 1945년 이후 건너온 外省人
⊙ 일제 패망 후 2·28사건으로 2만8000명 피살
⊙ 내년 대선, 강경 독립파(민진당 라이칭더)와 ‘국부군 군인의 아들(국민당 허우유이)’ 대결

崔彰根
1983년생.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대만 국립정치대 석사, 한국외대 행정학 박사 수료 / 《월간중앙》 주타이베이 통신원 역임. 現 《에포크타임스코리아》 국내뉴스 에디터, 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위원 / 저서 《가희 덩리쥔 : 아시아의 밤을 노래하다》 《타이베이 :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 《대만 :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 《대만 : 우리가 잠시 잊은 가까운 이웃》 등

▲2018년 10월 20일 타이베이에서는 대만 독립 지지 대회가 열렸다. 사진=AP/뉴시스

 

‘지구상에서 가장 비슷한 두 나라.’

비교정치학자들은 한국(대한민국)과 대만(중화민국)을 가리켜 이런 표현을 쓴다.

우선 국호(國號)부터 유사하다. 한국의 공식 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Republic of Korea)’이다. 대만의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Republic of China)’이다. 정치제도 면에서는 민주공화정을 채택하고 있으며 경제 부문에서는 시장경제제도를 근간으로 한다.

역사 궤적도 유사하다. 1894년 발발한 청일(淸日)전쟁을 종식 지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으로 대만은 일본 식민지(1895~ 1945년)가 됐다.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다시금 승리했다. 그 결과 조선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고, 1910년 강제합병되어 식민지가 됐다.

1945년 일제 패망 후에는 각각 국공내전(國共內戰)과 6·25전쟁을 겪었다. 그 결과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권위주의 통치기를 경험했지만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한강의 기적’ ‘대만의 경험’이라 불리는 경제 기적을 일궈 홍콩·싱가포르와 더불어 ‘아시아 4마리 용(龍)’으로 꼽혔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로 이행하여 오늘날 대표적인 민주국가로 거듭났다. 요약하자면 한국과 대만은 식민통치, 내전,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행한 개발도상국의 모범사례다.


정치 지형… 한국은 동서, 대만은 남북

정치 사정도 비슷하다. 보수·진보 정당 간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치열하다. 치열함이 지나쳐 ‘의회 폭력’으로 오명(汚名)을 얻기도 했다.

정치 지형도 묘하게 닮은꼴이다. 매번 선거 때마다 한반도는 동서로 양분된다. 영남(嶺南)을 중심으로 한 동쪽 지역에서는 보수정당이 호남(湖南)을 위시한 서쪽에서는 진보정당이 우세를 보인다. 반면 대만은 남북으로 나눠진다. 선거 개표 때마다 제1 항구도시 가오슝(高雄)을 중심으로 한 남쪽 지역은 녹색으로 타이베이(臺北)를 비롯한 북부는 파란색으로 물든다. 녹색은 현 집권당인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민진당), 파란색은 제1야당인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상징색이다. 이를 대만의 푸른 하늘과 녹색 대지에 빗대 ‘남천녹지(藍天綠地)’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북쪽에서는 국민당을 위시한 범람(泛藍·pan-blue) 계열 정당이, 남쪽에서는 민진당을 비롯한 범록(泛綠·pan-green) 계열 정당이 우세하다.

대만을 파란색과 녹색으로 나누는 ‘기준점’은 정체성(正體性), 족군(族群·ethenic group)과 더불어 통독(統獨·‘통일’ ‘독립’) 문제이다.

‘이민자의 섬’

대만 사회에서 정체성은 복잡 미묘한 문제이다. 대만인의 정체성은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 문제는 중첩적이고 다원적이다. 이는 대만 역사와 맥이 닿아 있다.

대만은 ‘이민자의 섬’이다. 오늘날 대만 국민의 97%를 차지하는 한족(漢族)계 주민이 이주하기 전 대만에는 남도어족(南島語族)이라 불리는 말레이계 선주민(先住民)이 거주했다. 대만을 중심으로 이들은 남태평양 도서(島嶼),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폴리네시아 일대까지 이주했다. 오늘날 ‘대만 원주민’이라 불리는 대만의 원주인이다.

다수를 이루는 한족계 이민자도 시대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1590년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여 세력을 아시아로 확장해 가던 포르투갈이 대만을 발견했다. 그들은 녹색 대지의 대만을 보고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으로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라고 불렀다. 이후 포르모자(Formosa·美麗島)는 대만의 미칭(美稱)으로 남았다.

 포르투갈의 ‘지리적 발견’ 이후 대만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서구인은 홍모인(紅毛人)이라 불리던 네덜란드인이다. 162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오늘날 타이난(臺南)에 질란디아성(熱蘭遮城)이라 불리는 요새를 구축하고 남부 대만을 식민통치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필리핀에 거점을 두고 있던 스페인은 대만 북부 지역에 식민 거점을 세웠다.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대만을 분점(分占)하던 시기 중국 본토로부터 본격적인 한족 이주가 시작됐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쌀, 설탕 플랜테이션 경작을 위해 푸젠(福建)성 일대 주민을 이주시켜 개간을 실시했다.

명(明)-청(淸) 정권 교체기이던 1661년 또 한 무리의 한인(漢人)이 대만에 발을 디뎠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농민반란군이 수도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1356년 주원장(朱元璋)이 건국한 명은 멸망했다. 황족, 유신(遺臣)들은 난징(南京) 등 동남부로 도주하여 남명(南明)왕조를 세웠다. 명 부흥 운동은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만주족(滿洲族)의 청(淸)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남명 유신 정성공(鄭成功)은 대륙에서 명 부흥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만을 반공대륙(反攻大陸·본토 무력 수복)의 기지로 삼고자 했다. 1661년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동녕왕국(東寧王國)을 건립했다. ‘정씨(鄭氏)’ 왕국은 정성공의 아들 정경(鄭經), 손자 정극상(鄭克塽)까지 3대 22년간 이어진다.

청 강희제(康熙帝) 재위기인 1683년 동녕왕국 3대 국왕 정극상이 항복함으로써 대만은 공식적으로 청의 영토로 편입된다. 청 정부는 푸젠성(福建省) 산하 ‘대만부(臺灣府)’를 설치하여 공식 행정구역에 편입시켰다.

대만이 공식적으로 ‘중국의 일부’로 편입된 후 본토로부터 이주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원적(原籍)은 인근 푸젠성, 광둥성(廣東省)이 주를 이뤘다. 이들은 오늘날 ‘본성인(本省人)’이라 부르는 대만 주민 다수의 선조이다.


“일본 개가 떠나니 중국 돼지가 왔다”

1894년 한반도를 전장(戰場)으로 벌어진 청일전쟁은 대만 운명의 전기가 됐다. 신흥 열강 일본에 패한 노(老)제국 청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서 대만과 펑후(澎湖)제도를 일본에 영구 할양했다.

일본은 대만총독부(臺灣總督府)를 설치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은 첫 식민지여서인진 몰라도 대만을 조선과 달리 온건한 방식으로 통치했다. 헌병이 아닌 경찰을 주 통치 수단으로 삼았다. 총독도 해군제독이나 문관(文官) 출신으로 임명했다. 제3·5대 총독을 역임한 해군 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제외하고는 전원 거친 육군 대장으로 임명된 조선총독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1895~1945년 일제강점기 동안 대만은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에 성공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식민통치와 더불어 대만인이 일본에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이유로 작용했다.

1945년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해 10월 25일,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대만총독이 중화민국 국민혁명군(국부군)에 공식 항복했고, 대만과 펑후제도는 전승국 중화민국으로 반환됐다.

그 무렵 본토에서는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긴장이 다시금 고조됐다. 이 속에서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대만을 통치할 관료나 군인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일반 행정단위인 성(省)을 대신해 대만행정장관공서(臺灣行政長官公署)를 설치했다. 푸젠성 정부 주석을 역임한 천이(陳儀)를 초대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에 임명했다. 육군 상장(3성 장군) 천이는 대만에 당도해 일종의 계엄통치를 실시했다.

50년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대만인들은 ‘조국으로 회귀한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천이의 통치는 기대를 저버렸다. 국민혁명군과 함께 건너온 소수 외성인(外省人)들이 행정장관공서 최고위직을 독점했다. 등용된 소수 본성인들도 임금·대우에서 차별받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군기(軍紀) 문란 문제도 있었다. 군인들이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은 예사였고 ‘적산(敵産) 접수’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강탈하기도 했다. 이 속에서 “일본 개가 떠나니 중국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라는 말이 세간에 퍼졌다.

2·28사건

▲2·28사건 당시 국민당군의 만행을 그린 판화 〈공포의 검사(檢査)〉.

 

 

1949년 미국 국무부가 발간한 《중국백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임장관 천이는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중략)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자연 대만인(본성인)과 중국인(외성인) 간 긴장은 고조됐다.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에서 무허가 담배를 판매하던 한 여성이 대만성전매국(臺灣省專賣局) 단속요원에게 폭행을 당했다. 술·담배는 주요 세원(稅源)으로 정부 전매품목이었다. 과잉 단속에 시민들은 항의했고 진압 과정에서 청년 천원시(陳文溪)가 경찰 발포로 사망했다. 사건은 누적된 본성인의 불만을 폭발하게 하는 ‘방아쇠’로 작용했다. 2월 28일, 타이베이 전역에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했고, 격앙된 시민들은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하고 ‘대만 전 주민 궐기’를 방송으로 호소했다. 시위는 대만 전역으로 번졌다.

천이 행정장관은 온건 처리를 약속했으나 비밀리에 본토에 진압군 증파를 요청했다. 증원군이 도착한 3월 8일부터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대만 전역은 초토화됐고 인명 피해도 줄을 이었다. 사태는 3월 17일 장제스(蔣介石)의 심복 바이충시(白崇禧)가 군정장관으로 부임하여 과잉 진압에 제동을 걸고, 5월 16일 장제스 총통이 ‘사태 종료’를 선언한 후 일단락됐다. 5월 20일 대만 전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

2·28사건으로 기록된 사건의 희생자는 중화민국 정부 공식 사망자 수만 2만8000명에 달했다. 대만 현대사 최대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은 외성인과 본성인 간 갈등의 씨앗으로 자리했다.


‘미려도 사건’과 민진당 창당

1949년 12월, 제2차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은 패했다. 장제스는 반공대륙 기지로 대만을 택했다. 장제스와 함께 군인, 경찰, 공무원과 그 가족 등 약 90만 명이 대만으로 이주했다. 국부천대(國府遷臺·국민정부 대만 파천)다.

대만으로 이주한 중화민국 정부는 피란 정부 처지였다. 헌정(憲政)은 중단되고 1949년 2·28사건 후 선포된 ‘대만지구 계엄령’과 1948년 제정·시행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에 기반하여 국민당 일당독재가 지속됐다. 당금(黨禁·정당 설립 규제) 조치 속에서 국민당 외 정당 설립은 금지됐다. 보금(報禁·언론사 설립 규제)으로 인하여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中央日報)》, 양대 민영지인 《중국시보(中國時報)》 《연합보(聯合報)》 외 신문은 사실상 발행이 금지됐다. 양대 민영지 발행인도 국민당 중앙상무위원을 겸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계엄령하 국민당 독재체제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열망도 분출했다. 1979년 ‘미려도 사건’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규제 속에서 재야(在野) 인사들은 대만의 별칭에서 유래한 《미려도(美麗島·Formosa)》 잡지를 발행하고 정부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1979년 12월, 《미려도》사는 남부 최대 도시 가오슝에서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맞춰 야간 집회 허가를 신청했다. 정부는 이를 불허했고 《미려도》 측은 집회를 강행했다. ‘불법집회’로 규정한 경찰은 강경 진압했고 《미려도》 관계자들은 구속되어 군사재판에서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대만의 대표적인 시국 사건으로 민주화의 분수령이 됐다.

1986년 《미려도》 관련자들이 주축이 된 당외(黨外·국민당 밖 재야) 인사들이 모여 대만 첫 야당 민주진보당 결성을 선언했다. ‘당금’ 조치하에서 불법단체였지만 장징궈(蔣經國) 총통은 이를 묵인했다.


장징궈, ‘위로부터의 민주화’ 추진

▲1984년 당시의 장징궈 총통(오른쪽)과 리덩후이 부총통. 리덩후이는 장징궈 사후 최초의 본성인 출신 총통이 되었다. 사진=대만 총통부

 

1975년 아버지 장제스 사망 후 행정원장(국무총리 해당)을 거쳐 1978년부터 총통으로 재임 중이던 장징궈는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적극 추진했다. 야당 설립을 묵인하고 1987년에는 《기네스북》에 세계 최장(最長) 계엄령으로 기록된 대만지구 계엄령을 38년 만에 해제했다. 계엄령 해제와 더불어 정당·언론 규제도 풀렸다. 그러다 이듬해인 1988년 1월 장징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장제스-장징궈 부자(父子) 총통 시대도 종식됐다.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여 농업경제학자 출신의 리덩후이(李登輝) 부총통이 총통에 취임했다.

첫 본성인 총통 리덩후이는 1988~ 2000년 재임 기간 동안 민주화를 본격 추진했다. 1991년 초헌법 조항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폐지하여 헌정을 정상화했다. 총통 직선제도 복원하여 1996년 사상 첫 직선 총통에 당선됐다.

2000년 3월 대선에서 민주진보당 소속 천수이볜(陳水扁)이 당선되어 사상 첫 여야(與野) 간 정권 수평 교체가 이뤄졌다. 이후 2008년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정권 탈환에 성공하여 다시 한 번 정권 교체를 이뤘다. 이로써 민주주의 공고(鞏固)화를 가늠하는 ‘두 번의 정권 교체 테스트(two turnover test·일명 헌팅턴 테스트)’도 통과하여 대만은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국가 반열에 올랐다. 그러다 2016년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이 당선되어 선거라는 민주주의 제도에 의하여 여야 간 정권 교체가 다시 한 번 이뤄졌다.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 강화

400년 동안 다층적으로 형성된 대만인의 정체성은 복잡하다. 역사를 기반으로 ‘대만인’을 범주화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중화민국 국적 보유자 ▲국민당 정부와 같이 이주한 외성인을 제외한 본성인 ▲한인이 아닌 원주민.

지난날 대만 사회에서는 외성인과 본성인(원거주 한인+원주민) 간 갈등이 두드러졌다. 국민당 일당독재하에서 특권은 소수 외성인에게 집중됐고 본성인은 소외된 경험 때문이다. 다만 계엄령 해제, 민주화 진전 속에서 외성인-본성인 갈등은 점차 완화되는 추세이다. 더하여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외성인 2·3세들은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으로 정체성이 강화되고 있다.

 

 대만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또 다른 주제는 독립과 통일 문제이다. 민주진보당을 중심으로 한 범록계 정당은 ‘중화민국’과 구분되는 ‘대만’ 정체성을 강조하며 궁극적으로 대만 독립을 추구한다. 독립 시기와 방법에 있어 급진적이냐 덜 급진적이냐 차이만 있을 뿐이다. 중국 본토에 연원(淵源)을 둔 중국국민당을 비롯한 범람계 정당은 ‘하나의 중국(一個中國·One China Policy)’ 원칙을 존중하며 양안(兩岸) 재통일을 추구한다.

대만의 가장 권위 있는 여론조사 기관 국립정치대 선거여론조사센터는 1992년부터 매년 대만 국민 정체성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1992년 첫 조사 시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6.4%는 자신을 ‘대만인이자 중국인’이라고 규정했다. 통일을 염두에 둔 ‘이중 정체성’이었다. ‘중국인’이란 응답이 25.5%였고, ‘대만인’이란 응답은 17.6%에 그쳤다. 반면 작년 조사에선 응답자의 63.7%가 자신의 정체성을 ‘대만인’으로 규정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인 셈이다.

이 속에서 매번 선거 때마다 독립과 통일 문제는 유권자의 향방을 결정하는 핵심 이슈이다. 각 정당별로 후보별로 입장이 다르다.


三人三色인 대선 후보들

 ▲내년 대만 대선에 나설 민진당 후보 라이칭더 부총통.

 

 내년 1월 13일 치러질 총통·입법원 동시 선거를 앞두고 여야 3당 간 대진표가 확정됐다. 후보들의 성장 배경, 독립과 통일에 대한 입장도 각각 다르다.

집권 민주진보당 후보 라이칭더(賴淸德) 부총통은 본성인이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 국립대만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공위생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종합병원 내과 의사를 거쳐 정계에 입문했고 국민대회(國民大會) 대표, 입법위원, 민선 타이난(臺南) 시장을 역임했다. 2016년 차이잉원 1기 정부에서 행정원장으로 입각했고 2기 정부 부총통을 맡고 있다. 라이칭더는 ‘대만의 중화민국은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별개의 실질적인 독립국’이라고 주장하며 급진 독립노선을 지양하는 이른바 화독(華獨·중화민국 독립)파로 분류되는 차이잉원 현 총통보다 강경한 입장이다. 대독(臺獨·대만 독립)파라 할 수 있다.

 

 ▲내년 대만 대선에 나설 국민당 후보 허우유이. 사진=AP/뉴시스

 

제1야당 국민당 총통 후보 허우유이(侯友宜) 신베이(新北) 시장은 외성인 2세다. 아버지는 국민혁명군 군인으로 국부천대 시 대만으로 이주했다. 중앙경찰대학 졸업 후 경찰에 투신하여 형사·수사 분야 요직을 역임했다. 천수이볜 집권기인 2006년 49세로 최연소 내정부 경정서장(警政署長·경찰청장)에 올랐고 2008~2010년 중앙경찰대 교장을 역임한 후 퇴직했다. 이후 주리룬(朱立倫) 현 국민당 주석에게 발탁되어 신베이 부시장이 됐고, 2018년, 2022년 시장에 당선됐다. 양안 문제에 있어서는 화독파에 가까운 스탠스를 보이고 있다.

제3후보 커원저(柯文哲) 대만민중당(臺灣民衆黨) 주석은 외과 의사 출신 정치인이다. 본성인 태생으로 국립대만대 의과대학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국립대만대병원 응급의학센터장을 지냈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타이베이 시장 도전을 선언했고 ‘무소속 열풍’을 일으키며 국민당 후보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2018년 재선에 성공했고 2019년 대만민중당을 창당했다. 그는 “당선될 경우 중국과 문화·정치적 교류를 추진하겠다”며 기존 대만 독립 노선에서 중도로 선회한 입장을 밝혔다.

중국의 대선 개입이 관건

6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총통 선거에서 ‘중국 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오는 나뉠 수 없으며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전(全) 중국 유일 합법 중국 정부이다’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둘러싼 세 후보 간 논쟁도 치열하다. 이들은 자신과 소속 정당의 기본 정체성을 지키며 양안 현상 유지(status quo)를 희망하는 중도층의 표를 얻으려 경쟁한다.

초한전(超限戰·무제한 전쟁)을 전개하는 중국의 인지·심리전도 관건이다. 지난 2020년 대선에서 중국공산당은 친중 성향 후보를 집중 지원했다. 대만 정보 당국은 이번 선거에서도 가짜 뉴스 살포, 여론 조작 등을 통한 선거 개입을 경고했다.

이 속에서 내년 1월 치러지는 대선은 향후 4년간 대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물론, 동아시아 역내(域內) 안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이정표가 될 예정이다.⊙

 

07월 호

시진핑·푸틴·탈레반의 反정권 인사 3人

“손발에 쇠사슬 묶인 학생들… 매주 月엔 정체불명 약 강제 복용”(신장 재교육 캠프 前 교사 칼비누르 시딕)

 세계인권선언 75주년을 맞아 《월간조선》은 지난 5월 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제네바 정상회의(The Geneva Summit for Human Rights and Democracy)’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는 러시아, 신장, 홍콩, 북한, 이란 등에서 인권 탄압을 받은 인사들이 연단에 올라 독재 정권의 인권 실태를 증언했다. 주최 측에 협조를 구해 이 중 세 명을 어렵게 따로 만날 수 있었다.

⊙ 신장 재교육 캠프 前 교사, “수감자, 100만 명 아닌 300만 명 이상”
⊙ 재교육 캠프 내 中 경찰관, 수감자 강간 후 자랑… 4~5명이 한 소녀 윤간도
⊙ 中, 산아제한 명목 18~59세 위구르 여성 강제 불임 수술
⊙ 러시아 양심수, “푸틴 종신 집권 필히 막을 것… 자유 위해 싸운 韓 경험 공유해달라”
⊙ 러시아 고아원으로 흩어진 수많은 우크라 아이들… 신분 세탁된 채 살아가
⊙ 러시아 내 반체제 인사 수천만 명 추산… “종전 후엔 내전 예상”
⊙ 하자라족 여대생, “탈레반 소유물 된 아프간 여성들… 암적 존재 막아야”

▲사진=박지현 기자

 

신장 ‘재교육 캠프’ 교사 출신, 칼비누르 시딕(Kalbinur Sidik)

“中, 산아제한 정책 명목 18~59세 위구르 여성 강제 불임 수술”

 

대량 학살. “지금 신장(新疆)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 한 단어로 묘사하자면 이것밖에 없다”고 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재교육 캠프’에서 중국어 교사로 일했던 칼비누르 시딕(Kalbinur Sidik) 씨는 그 내부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우루무치에서 태어난 그는 1990년 일반 학교의 중국어 교사가 됐다. 25년간 존경받는 교사로 살다, 2016년 어느 날 재교육 캠프에서 일하도록 강요받았다. 참담한 시간의 시작이었다.

“중국 당국은 재교육 캠프를 ‘직업 훈련 프로그램’이라고 밝혔지만, 그곳에서는 각종 인권 유린이 자행됐습니다. 동료 위구르인들의 만연한 학대, 고문, 성폭력을 목격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동투르키스탄(신장)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고문하고, 살균하고, 노예로 만들고, 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로 이주한 상태지만, 여전히 중공(중국공산정권)의 협박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자행되는 잔혹 행위와 위구르인에 대한 광범위한 박해 사실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있다. 대런 바일러의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도 시딕 씨의 증언을 토대로 쓰였다.

― 국제 인권단체들과 유엔 인종차별위원회 등에 따르면 재교육 캠프에 구금된 사람들이 1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더군요.
“그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2017년 이후 이 캠프에 구금된 사람들은 위구르인을 비롯해 튀르키예인 등 300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죠. 사회에서 가장 먼저 표적이 된 학자 등 지식인들은 물론 예술가, 사업가, 배우, 운동선수 등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수많은 사람이 수감돼 있습니다.”

“보고 들은 것 아무에게도 발설 마라”

▲중국은 신장 지역 위구르족을 광범위하게 감시하고 있다. 사진은 2017년 11월 4일 중국 신장 위구르 카슈가르의 모스크(이슬람사원) 앞을 지나는 위구르 보안 순찰대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중국 정부에 위구르족은 티베트인과 함께 가장 큰 눈엣가시다. 한족과 외양·언어·풍속·종교까지 모두 달라 ‘하나의 중국’ 정책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 어떤 이유로 수감되는 겁니까. 그들에게 예컨대 “시진핑의 ‘하나의 중국’에 반(反)했다”와 같이 구체적으로 적시되는 명목이 있습니까.
“하나의 중국 정책뿐만 아니라 시진핑의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캠프에 보내지는 건 물론이고, 해외에 친척이 있거나, 해외를 다녀온 것조차도 캠프로 보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야간습격도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 일반 학교 교사였다가 재교육 캠프로 가게 된 배경은 뭡니까.
“2016년 2월 28일, 학교 교장이 저를 불러 회의를 위해 정부 기관인 당 사무실에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 사무실에 가서 들어보니, 문맹자들을 위한 학교가 있다고 했고, 2017년 3월 1일부터 그곳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겠군요.
“의문이 들었지만, 되묻기도 전에 ‘선생님 따님이 네덜란드에 있다죠? 네덜란드와 중국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협박이었죠.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재교육 캠프에서의 첫날은 어땠습니까.
“경찰을 대동한 운전사가 교사들을 그곳으로 데려갔습니다. 회색 건물의 벽과 울타리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정문에는 전기 장치가 달려 있었어요. 수업이 시작되자 손과 발에 쇠사슬이 묶인 나이 든 어른들이 들어왔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어요. 교실에는 카메라 8대가 돌아가고 있었고, 저는 무장경찰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까요. 오래 보고 있으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그저 얼른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교사 인생 통틀어 가장 길고, 무서운 4시간이었어요.”

“매주 月, 정체불명의 약… 이후 월경 멈춰”

2017년 3월부터 9월까지 6개월간은 남성수용소에 있었다. 몇 주 단위로 새로운 죄수들이 끊임없이 유입됐다고 했다. 시딕 씨는 “추산해보면 그곳에만 8000명의 수감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하루 6~7시간씩 다른 그룹을 가르쳤는데, 같은 수감자를 두 번 가르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계속되는 인원 유입에 더해, 중간에 사망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아서였다. 신장 지역에는 총 300개 이상의 수용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6개월 근무 이후 2017년 9월부터 11월까지는 여성수용소로 배치됐다.

“수용자들은 모두 삭발 상태였고, 시멘트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모두 회색에 주황색 숫자가 적힌 유니폼을 입었고요. 여성수용소는 6층짜리 건물에, 1만여 명이 억류된 곳이었습니다. 그들 중 90%는 8~40세였고, 10%는 40~90세였습니다.”

― 수용소 내부에서 목격한 인권 유린을 좀 더 상세히 말해줄 수 있습니까.
“이들은 고문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학대를 받았는데, 심문을 명목으로 강간과 고문적인 성적 학대도 당했습니다. 중국 경찰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강간했는지 자랑했습니다. 4~5명의 경찰이 한 소녀를 윤간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봉을 몸속에 꽂아 고문한 뒤, 다시 강간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여성들 모두 정체불명의 약을 강제로 투여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모두 월경이 멈췄습니다.”

그는 원래 2018년 3월까지 여성 캠프에서 일하기로 돼 있었는데, 2017년 11월, 생리가 멈추지 않아 병원에 실려가면서 일을 일찍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고 악몽이 끝난 건 아니었다.

“위구르 박해, 시진핑 집권 후 본격화”

▲지난 2022년 3월 4일(현지시각) 강제 노동 반대 시위 글로벌 시민단체 ‘섬오브어스(SumOfUs)’가 미국 워싱턴DC의 애플 매장 앞에서 ‘애플은 강제 노동에 내몰린 위구르족을 고용하지 마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모습. 사진=연합

 

“퇴직 두 달 후, 한 젊은 여성이 전화를 걸어와 ‘자궁 내 장치(IUD) 시술을 받으려면 경찰서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해 저는 50세였던 터라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그녀는 정책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18세에서 59세 사이의 모든 여성은 산아제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만약 거부한다면 당신과 가족까지 처벌을 받게 될 거라면서요.”

2018년 IUD 시술에 이어 2019년 난관 결찰술까지 강요받은 시딕 씨는 결국 때마다 극심한 합병증으로 입원 신세에 놓였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결국 2019년 치료 목적의 네덜란드행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네덜란드에 체류 중인 시딕 씨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중국의 위구르 박해는 2001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진핑 집권 이후에 더 심각해진 겁니까.
“2001년경 동투르키스탄 지역 위구르인들에 대한 억압이 확대되긴 했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본격화됐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박해 관련 정책이 늘어났고 이러한 정책들은 특히 억압적인 방식으로 추진됐으며, 이윽고 체계적인 재교육 캠프 설치로 이어졌으니까요. 수용소뿐만 아니라 수용소 밖에도 자유는 없습니다. 시진핑은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 노동 계획도 수립했고, 현재 여러 기업이 이러한 강제 노동으로 이익을 얻는 형국입니다.”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에 따르면 위구르인들은 철저한 감시 속에서 살아간다. DNA와 생체인식 샘플을 중국 당국에 제출해야 하며, 모스크·학교·시장 심지어 버스와 택시에도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지역 전체가 창살 없는 거대한 감옥인 셈이다.


“네덜란드 이주 후 中 비밀경찰 협박”

― 건강은 어떻습니까. 네덜란드에서 치료는 잘 받았나요.
“네덜란드에 온 뒤 4개월간 병원에 있었고, 지금은 많이 호전됐습니다.”

― 중국 정부는 해외로 이주한 반체제 인사들도 끊임없이 추적, 감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중국 정부의 협박은 없습니까.
“중국 정부로부터 여전히 괴롭힘과 협박을 받고 있습니다. (사진을 보여주며) 중국 비밀경찰이 위챗으로 대화를 걸었을 때 캡처한 스크린샷입니다. 2020년 2월, 제가 CNN, 《가디언》, BBC와 인터뷰를 한 직후였습니다. 중국 정부가 발설을 금지한 ‘재교육 캠프에서의 경험’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순간이었죠. 처음에는 당국에 협조해달라고 부탁하더니, 요청을 거부하자 매우 공격적으로 돌변했습니다. 협박과 위협은 물론이고 중국에 남은 가족들을 포섭하고, 인질로 삼았습니다. 지난 2021년 6월 영국 런던의 위구르 법정(Uyghur Tribunal)에서 증언하기 하루 전에는 중국 외교부장이 비디오 하나를 배포했습니다. 남편이 출연했더군요. 저의 명예를 훼손하고, 제 행동을 멈추기 위해 끔찍한 말을 했어요. 모두 강요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지난 4월 11일, 독감으로 입원해 있던 제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이렇듯 한 개인의 삶을 망칠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를 노립니다.”

지난 2022년 1월, 인권 운동과 관련해 프랑스를 다녀왔을 때 네덜란드 집 앞에 수많은 중국 남성이 서 있었던 적도 있다. 시딕 씨는 현재 네덜란드 경찰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한 상태다.

한국 정부는 지난 2022년 10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신장 위구르족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한 토론회 개최를 요구하는 투표에서 미국·유럽연합(EU) 국가들과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위구르 인권 문제에 소극적이던 문재인 정부와는 다른 행보였다. 앞서 지난 2019년 문재인 청와대는 한중정상회담 결과 브리핑을 하면서 홍콩·신장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는 결과 발표문을 통해 문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며 “한국 측은 홍콩 일이든 신장에 관련된 문제든, 모두 중국의 내정(內政)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 정권 교체 이후 한국 정부 또한 위구르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위구르족 인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요.
“먼저 한국 정부의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국 정부가 유럽연합,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 인권 탄압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위구르인들이 강제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모든 제품을 보이콧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는 위구르 사람들을 구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韓 정부 지지에 감사… 위구르 강제 노동 제품 보이콧 부탁”

위구르족은 과거 두 차례 독립국을 세운 적이 있다. 1933년과 1944년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공화국을 만들었지만, 각각 이듬해와 5년 후 멸망했다. 위구르가 다시 독립국이 될 수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시딕 씨는 “위구르인은 문화, 역사적으로도 세계 문명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면서 “언젠간 독립할 것이라 믿으며, 대부분의 위구르인 또한 독립을 염원한다”고 했다.

― 중국 정부가 한족을 신장 지역으로 대거 이주시켜 한족의 비율을 높이고, 이 지역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면 독립의지가 꺾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위구르 법정에 제출된 ‘신장 지역 안보와 인구 통제’ 관련 극비문서에는 “중국은 2022년까지 한족 30만 명을 신장 남부로 이주시켜 한족 비율을 늘릴 계획”이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저는 그것이 위구르족의 독립이나 자기결정권 추구를 막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그저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위구르뿐만 아니라 곤충, 동물, 초목까지도 모두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중국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거나, 어떤 계략을 펼치더라도 위구르족의 독립의지를 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 양심수, 아나스타샤 셰브첸코(Anastasia Shevchenko)

“푸틴 종신 집권 반드시 막을 것… 자유 위해 싸운 韓 경험 공유해달라”

 

그의 딸이 죽었을 때 러시아 내부에서는 시위의 물결이 일었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로스토프나도누, 예카테린부르크를 포함한 몇몇 도시에서다. 아나스타샤 셰브첸코(Anastasia Shevchenko)는 러시아의 정치범이다. 정치 조직 ‘열린 러시아(Open russia)’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2년 1개월간 가택연금에 처해졌었다. 적용법은 ‘바람직하지 않은 조직법(undesirable organizations law)’. 그는 러시아에서 이 법으로 형사 기소된 최초의 인물이다. 그사이 투병하던 첫째 딸이 쓸쓸히 눈을 감았다. 아픈 딸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그는 인터뷰 도중 이따금씩 눈시울을 붉혔다.

― 바람직하지 않은 조직법. 푸틴이 2015년 제정한 법이더군요. 어떤 내용입니까.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겁니다. 푸틴 정권에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포함이고요. 더 간단히 말하면, 만일 나라가 민주적이길 바란다면, 당신은 이미 바람직하지 않은 겁니다. ‘열린 러시아’는 러시아 최초로 바람직하지 않은 조직으로 지정됐는데, 이후 수많은 여러 단체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저는 시작에 불과한 거죠.”

‘열린 러시아’는 푸틴의 최대 정적(政敵) 중 하나로, 추방된 러시아 사업가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가 그의 회사 주주들과 함께 설립한 조직이다. 러시아 당국은 2017년 ‘열린 러시아’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규정한 데 이어 최근인 지난 3월 6일에는 반부패 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도 ‘바람직하지 않은 조직’으로 분류했다.

언론인이었던 셰브첸코 씨는 부패한 러시아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푸틴의 또 다른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를 공개 지지하며 여러 번 벌금형과 구금에 처해지다, 2019년 1월 집을 급습한 경찰에게 체포됐다. 체포 이후 러시아 당국이 그의 침실 에어컨에 카메라를 설치해놨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재판을 기다리며 이틀간 구치소에 있었다. 그사이 첫째 딸이 기관지염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날 때부터 뇌염(腦炎)을 앓았던 큰 딸은 혼자서는 걷고, 말하고, 먹지 못했다. 작은 감염도 치명적이었다. 판사에게 딸을 보러 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딸의 심장이 두 번이나 멈춘 후에야 병원행이 허락됐다. 그러나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선 뒤였다. 가택연금 선고는 바로 다음 날 떨어졌다. 집에 갇힌 채 딸을 애도해야 했다. 그는 “첫 한 달간은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고 했다.

 

 러시아 고아원으로 흩어진 우크라 아이들

▲2022년 6월 5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부차의 민간인 고문 매장지 인근 성당에 당시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진=뉴시스

 

 

― 단지 푸틴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2년간 가택연금에 처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 그 2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차라리 감옥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적어도 바깥 구경은 하니까요. 2년간 40㎡(12평) 아파트에 갇혀 있었습니다. 경찰을 대동해 법정에 갈 때 빼고요. 무엇보다 힘든 점은 인터넷, 전화, 문자메시지 등 세상과,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법정에 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내 아이들이 무엇을 입고, 먹는지, 밖이 추운지 더운지도 몰랐어요. 24시간 원격으로 감시되는 그 공간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2021년 2월 18일. 러시아 법원은 그에게 4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2022년 8월 그는 남은 자녀 둘과 함께 리투아니아로 떠났다. 크렘린궁은 그를 ‘도망자’로 선언했다.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당시에는 러시아에 있었겠군요. 무엇을 보았습니까.
“국경 근처 고아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친구가 있습니다. 전쟁 후 하루 500명이 넘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유입됐다고 하더군요. 그 다음 주 그 아이들은 러시아 전역의 고아원으로 흩어졌습니다. 러시아 성(姓)으로 바뀌고, 신분이 지워진 채 살게 되는 겁니다. 한편 러시아 아이들은 선전의 도구가 됐습니다. 교사들은 제 아이들에게 러시아군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편지를 쓰도록 강요했죠.”


“러시아 반체제 인사 수천만 명 추산”

▲지난 2022년 2월 서울에서 체한(滯韓) 러시아인 주최로 열린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집회. 사진=조선DB

 

― 러시아 내부에서 푸틴 정권에 반대하는 인구나 단체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이와 관련 러시아에서 나오는 공식 통계는 믿을 게 못 됩니다.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거든요. 모든 독재 정권이 마찬가지죠. 자체적으로 추산하면, 수천만 명에 달할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대부분은 침묵하죠. 잃을 게 있거나, 겁이 나기 때문에요. 실제로 지난해에만 반정권 인사 수천 명이 체포됐고, 이들이 체포되지 않은 날은 365일 중 18일에 불과하며, 그들이 지불한 벌금만 5억 루블(약 80억3500만원)에 달합니다.”

― 푸틴 집권(2000년) 이전 러시아에서의 삶은 어땠습니까.
“1990년대 러시아는 가난했지만, 자유가 있었죠.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TV쇼도 많았고요. 푸틴은 집권 이후 우리에게 안정된 삶을 약속했지만, 지금 보세요. 이것이 푸틴이 약속한 ‘안정’입니다. 현재 러시아에서 빈곤층이 2000만 명 이상입니다. 지금 전선에 뛰어든 남성들 또한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애국심이 아닙니다.”

― 정치 활동가 입장에서 국가 지도자로서의 푸틴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혹자는 그를 ‘악마’라고 하더군요.
“우선 굳이 깎아내리려는 시도 없이 말씀드리면, 굉장히 똑똑한 사람입니다. 이번 전쟁을 얼마만큼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는지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민족주의자들이고, 그들의 독립은 없다.’ 지난 20년간 국민들이 미디어를 통해 푸틴에게 들은 말입니다. 20년 전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떨까요. 평생 푸틴의 말만 듣고 살았습니다. 일생을 ‘미국은 우리의 주적이고, 우크라이나인들은 민족주의자다’라고 배우며 살았죠. 그의 선전은 굉장히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습니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일부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선전의 영향을 받았죠.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심지어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러시아 TV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잘못된 방향으로 똑똑하다 보니, 현실성이 떨어지고 점점 더 미쳐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작태를 보면 그저 범죄자에다 테러리스트일 뿐이죠. 요즘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러시아 군대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이를 역사에 남기고 싶어 하지만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죠. 이러한 선전이 없다면 본인이 그저 악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러시아 정부는 이번 전쟁을 방어권 차원이었다고 하죠. 대규모 돈바스 공격을 선제적으로 막아 더 많은 희생을 방지했다고요. 부차에서 일어난 학살 또한 연출됐다고 주장하고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죠. 뭘 어떻게 더 말하겠습니까. 저의 어머니 또한 선전에 세뇌돼 모든 것이 가짜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노인이라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 히코브(hikov)에 이모가 살고 있습니다. 전쟁 발발 당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러시아가 침공했다’고 했는데, 엄마는 저에게 ‘러시아군이 그럴 리 없는데, 이모가 너무 순진하다’고 했습니다.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선전)는 상상 이상입니다. 그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막힘없는 답을 내놓습니다. 이미 정해진 답이죠. 만일 반대 의견을 내면, 또 정해진 답으로 응수합니다. 논쟁 자체가 이뤄질 수 없는 구조인데 그게 굉장히 능숙합니다. 지난 8년간 돈바스에서 수십만 명을 학살했음에도 그 기간 동안 단 7명만이 죽었다고 하는 이들입니다. 상당히 기술적이고 교묘하죠.”

― 어머니는 여전히 선동당한 상태입니까.
“엄마는 작년 가을 러시아를 떠났는데, 러시아TV 없이 두 달을 지내자, 그제야 러시아의 침공 사실을 깨닫더군요. 선전 매체를 끄자 점점 현실을 보기 시작했고,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고 봅니다.”

“韓의 대러시아 제재, 러 정부엔 타격 없어”

― 지난 2021년 대통령 선거법 개정안 통과로 푸틴은 2036년까지 장기 집권을 할 수 있게 됐죠.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이 열린 건데요.
“헌법 개정 논의를 시작했을 때 다들 그저 웃었어요. 불가능하다면서요. 한데 결국 해내더군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에는 선거라는 게 없어요. 국민투표는 모두 가짜입니다. 독재는 이미 오래전 시작됐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푸틴은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건 꼭 이뤄내는 사람입니다. 매우 위험한 일이죠. 그 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요. 철저히 처벌받아야 할 일입니다. 부디 국제사회가 이를 허락하지 않길 바랍니다. 저도 정치인이자, 운동가로서 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 러시아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푸틴의 통치가 끝나야 비로소 모두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건부 무기 공급 가능성’을 내비쳤고요. 어떻게 봅니까.
“내부 사정을 보면 우크라이나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적 중 하나와 싸우며 생존 중입니다. 무기뿐만 아니라 음식, 난방 등 모든 물자가 필요합니다.”

― 한편 북한은 이미 러시아에 몇 차례에 걸쳐 무기 공급을 한 상태인데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푸틴은 러시아의 친구가 중국, 북한, 이란 및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임을 누누이 보여줬습니다. 독재자들은 독재자들끼리 붙어 지내기 마련입니다. 서로가 유일한 지지세인 것을 알고 있고, 법개정, 억압, 탄압의 방식을 똑같이 모방하죠.”

― 한국은 러시아와 인접국가로 여러 외교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앞서 제1차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는데요, 한국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습니까.
“대러시아 제재는 상당히 복잡한 사안입니다. 사실상 러시아 정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러시아 국민만 타격을 받기 때문이죠. 제 바람으로는, 러시아 정부가 이 전쟁을 위해 많은 자금을 획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러시아 국민들이 돈을 다른 국가로 이체하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함께 모색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한국 정부에 바라는 점은, 한국이 어떻게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했는지, 그 경험을 좀 더 적극적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줬으면 합니다. 러시아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나라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 외에 다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한국과 같은 나라가 어떻게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됐는지, 한국인들이 자유를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 국제사회에 더 많이 알려서 귀감이 되게 하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종전 후 러시아 내 또 다른 전쟁 예상”

지난 2019년 국제앰네스티는 셰브첸코를 양심수로 선언했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나스타샤〉는 2022년 9월 토론토 국제영화제(TIFF)에서 초연했다.

― 러시아로 돌아가면 바로 체포되는 겁니까.
“수배자 신분이니까요. 리투아니아로 떠나고 2주 만에 수배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발견 즉시 3년형에 처한다더군요.”

―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겁니까.
“언젠가 꼭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길 희망합니다. 제 고향인걸요. 친구들도 많고요. 그중 몇몇은 블라디미르 카라-무르자(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25년형을 선고받은 러시아 기자)처럼 수감 생활 중이죠. 그 친구들이 옥중에서 서신을 보내 말합니다. ‘언젠가 돌아와서 꼭 함께 일하자’고요. 언젠가 반드시 그들과 함께 그 일을 할 겁니다. 그래야만 해요. 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겁니다. 러시아의 행동은 돌이킬 수 없지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도 대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용서가 불가능하더라도, 러시아군에게 파괴된 우크라이나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무릎을 꿇을 준비도 돼 있습니다.”

―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에 평화가 올까요.
“러-우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 내부에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전 선동에 당했던 수많은 이들이 자국의 ‘전쟁 범죄’를 인지한 상태이고, 이를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정부에 억압받았던 소수민족과 반정권 인사들까지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또 다른 끔찍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죠. 러시아는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될 테지만, 이는 반드시 겪어야 할 절차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에게 자유를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하자라족 대학생, 수마야 자바디(Soomaya Javadi)

“탈레반 재집권 후 가장 먼저 책 불태워… 현실판 《시녀이야기》”

 

히잡을 벗은 그는 영락없는 여대생이었다. 카불대 치의대 학생이던 수마야 자바디(Soomaya Javadi·25)는 탈레반 재집권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떠난 하자라족 여성이다.

아프가니스탄 총 인구 3800만 명의 약 10%를 차지하는 튀르크-몽골계인 하자라족은 지구상 가장 박해받는 민족 중 하나로 꼽힌다. 현지인과 다르게 동양인 이목구비를 가진 이들은 수백 년 동안 최다수 민족인 파슈툰족에게 착취, 조직적 박해, 학살을 당했다. “타지크족은 타지키스탄으로, 우즈베크족은 우즈베키스탄으로, 하자라족은 무덤으로”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도 하자라족의 처참한 실상이 나온다. 자바디 씨는 “99% 파슈툰족으로 구성된 탈레반은 하자라족을 이단자나 동물, 심지어 그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고 했다.

― 탈레반의 하자라족 탄압을 얘기하려면,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죠?
“1880년 무렵으로 올라가면, 당시 국왕이었던 압두르 라흐만 칸(Abdur Rahman Khan)을 만나게 됩니다. 종교적, 인종적 차이를 위협으로 인지하고 군대를 동원, 모든 하자라민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편 인물이죠. 강제이주, 노예화, 학살 등으로 인해 당시 하자라족 인구의 62%(240만여 명)가 희생됐습니다. 라흐만 칸이 그때 남긴 아주 유명한 말이 있죠. ‘하자라족의 머리통은 내 것이고, 그들의 땅과 아내, 자식들은 당신(파슈툰족)의 것이다.’”

이후 100년 가까이 억압과 차별은 지속됐다. 1970년대까지 대부분의 하자라족은 고등교육을 받거나, 군대에 가거나, 공무원이 될 수 없었다. 1996년. 파슈툰족이 이끄는 초강경 수니파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한 뒤 하자라족은 더 잔혹하게 인종청소를 당했다.

“1998년 탈레반은 하자라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인 마자르-에-샤리프를 공격했고, 광란적인 살인을 지휘했습니다. 3일 동안 최대 8000명의 사람들을 죽였죠. 움직이는 건 뭐든 쐈습니다. 탈레반은 본인과 다른 사람들의 배제를 목표로 움직이는 하나의 사이비집단입니다.”

자바디 씨는 그 무렵 태어났다.

― 2001년 미군 공습으로 탈레반 정권이 무너졌을 땐 아주 어렸겠군요. 탈레반 재집권까지 20년간, 미군 주둔 당시의 삶은 어땠습니까.
“지난 20년도 하자라족에게는 녹록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미국이 자유를 위해 싸워줬기 때문에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일종의 기회는 있었습니다. 공부도 할 수 있었고, 가족들과 휴가도 갈 수 있었어요. 그러나 2021년 5월 시작한 탈레반의 공격으로 그해 8월 카불이 함락되면서 또다시 악몽이 시작됐죠.”


“아프간 여성, 탈레반의 소유물 취급”

▲지난 2022년 12월 카불에서 여학생 대학 교육 금지에 반대 시위 벌이는 아프간 여학생들. 사진=연합

 

 

― 지난 20년간은 여성들이 교육에 대한 차별을 안 받았습니까. 카불대 치의대에 다닐 정도면 공부를 잘했겠는데요.
“차별이 있긴 했습니다. 치대 재학 당시 교수님이 ‘여자들은 결혼하고 아이 낳아 잘 기르면 된다’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어려웠지만, 그때는 적어도 공부가 가능하긴 했죠. 지금은 완전히 불가능해졌습니다. 흔히 아프간 여성이라고 하면 고정관념을 많이 가지는데, 이들은 교육에 대한 열의가 굉장히 뛰어납니다. 책도 많이 읽고요. 아프가니스탄에는 여성의사, 여성변호사 등도 많습니다. 지금은 탈레반에 의해 모두 일자리를 빼앗겼지만요.”

― 탈레반이 재집권하던 날(2021년 8월 15일) 뭘 하고 있었습니까. 심경은 어땠나요.
“살면서 쌓았던 모든 것을 박탈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앞으로는 악몽만이 있겠구나. 그날 저녁.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탈레반의 카불 점령 소식을 들었죠. 탈레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고, 가니 대통령은 도망친 상태였습니다. 가장 먼저 15세 동생과 방에 있던 책들을 가방에 넣어 뒤뜰에 묻었습니다. 하자라어로 된 책과 잡지는 모두 태웠고, 몸 전체에 길고 검은 스카프(부르카)를 두른 채, 스스로를 잃어야 했죠.”

― 현재 아프가니스탄 내 여성의 삶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요.
“‘소유물(Property)’ 혹은 ‘아무것도 아닌(nothing)’입니다. 탈레반 정권 아래 여성들은 그야말로 물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공부도, 일도 못 하고, 남성 보호자 없이는 집 밖을 못 나갑니다. 남성 보호자와 같이 나가더라도,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는 건 금지입니다. 생각하는 인간, 독립적인 존재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5세 안팎의 어린 소녀들은 어떨 거 같나요. 걸음마를 배우자마자 탈레반 정권하에 놓였습니다. 그 아이들은 ‘여자는 원래 집 밖에 못 나가는 존재’로 알고 자라고 있습니다.”

 

 그는 “아프간에서는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 속 이야기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면서 알리아 아지지(Alia Azizi)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헤라트(Herat) 지역 교도소장이었던 아지지는 지난 2021년 10월 탈레반에 납치당한 여성이다.

“1년 반 동안 행방을 알 수 없다가, 몇 주 전 탈레반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아지지가 탈레반 남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녀에겐 이미 남편과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프간에서 실존하는 ‘준 오스본(《시녀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거죠. 진짜 남편과 아이를 둔 채 탈레반의 시녀로 살아야 하지만, 이제 아프간에서는 아무도 아지지를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아프간 여성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죠. 만연한 성차별과 민족주의의 결과입니다.”


“비(非)파슈툰족은 모두 탄압 대상”

▲지난 2022년 8월 7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시아파 하자라족 거주지인 다시트-에-바르치에서 탈레반 병사가 경비를 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 아프간 남성들은 살 만한 겁니까. 아프간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남장을 한다는 뉴스를 본 일이 있습니다.
“남장 여성은 인권 문제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탈레반의 탄압 대상은 여성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즉 모든 비(非)파슈툰족입니다.”

자바디 씨는 탈레반 재집권 두 달 후 가족과 함께 파키스탄을 거쳐 캐나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국제사회를 향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지난 2022년 5월 캐나다 오타와를 방문한 영국 찰스 3세는 자바디 씨를 초청해 “용기와 적극성을 높이 산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 캐나다로 건너가기까지의 여정이 상당히 험난했을 것 같습니다.
“탈출구를 찾기 위해 한 달간 아프가니스탄을 횡단했습니다. 마자르-에-샤리프에서 국제네트워크 조직인 ‘30버즈 재단(30 Birds Foundation)’을 알게 됐고, 이 재단을 통해 미국행 비행기를 예약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내 제재를 받아 좌초됐고, 저는 다시 카불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한데 카불행 버스는 산길 한가운데서 고장 났고, 허허벌판 산길을 며칠 동안 걸어야 했습니다. 그사이 총을 가진 탈레반이 차를 타고 지나가기도 했죠. 몸을 숨겨 간신히 피했고, 가까스로 다시 카불에 도착한 뒤 30버즈 재단 측으로부터 새로운 탈출 경로를 전달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파키스탄 접경지인 토캄으로 이동했고, 재단이 마련해놓은 통행증을 이용해 파키스탄으로 건너간 뒤 캐나다행 비행기를 탔다.

“아프가니스탄은 산이 많은 지형입니다. 버스 고장으로 며칠 동안 걸을 때,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오더군요. 산 뒤에 뭐가 있을지는 전혀 모르죠. 마치 삶에 대한 메타포(은유) 같았습니다. 반면 캐나다는 평화로운 대초원이 많습니다. 그 너머엔 지평선이 보이고, 저는 그곳에서 미래를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6년 과정의 치의대를 5년 반 동안 다녔지만, 탈레반 재집권 탓에 졸업을 못 했다. 지금은 캐나다 서스캐처원대학으로 적을 옮겨 생물의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유아교육 자격증도 땄다.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 수단 등에서 온 난민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서다. 그는 “이 아이들이 희망을 가지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그저 생존할 뿐, 사는 게 아니다”

― 캐나다에서 내다보는 미래는 어떤 겁니까.
“생물의학 학위를 딴 후 치과의사가 되는 겁니다. 뭇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너는 여자라서 안 된다.’ ‘하자라족이라서 안 된다.’ 저는 반드시 치과의사가 될 겁니다. 이는 비단 제 개인의 꿈이라서가 아닙니다. 아프간 여성의, 하자라족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도 ‘내가 바라는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겁니다. 그건 자유의 땅에 있는 제가, 그들을 대신해서 이뤄야 할 소명이기도 합니다.”

―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친구들과 연락이 닿습니까.
“그쪽 인터넷이 불안정해 원활하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소통할 수는 있습니다.”

― 친구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생활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희망이 없다고 해요. 그저 생존(alive)하고 있는 것이지 사는 것(live)은 아니라고 합니다.”

― 언젠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있습니까.
“그거 아세요. 요즘도 구글 지도를 열어 살던 집과 골목을 한참 동안 봐요. 그런데 당장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교육의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의 교육도 절실하지만, 교육이 가장 필요한 건 탈레반이라고 생각해요. 충분한 교육을 못 받아서 타락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선진 교육을 받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날이 오면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여성과 남성, 파슈툰족과 비파슈툰족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함께 사는 날 말입니다.”

―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마저 두 손 두 발 들고 나간 아프가니스탄에 그런 날이 올까요.
“적어도, 최소한, 시도는 해야죠. 아프간 여성들은 강합니다. 무척 강하고 용감해서 아직도 그 악몽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삶에 익숙해지지 않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잊히지 않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대신 그들의 목소리가 돼줘야 합니다. 저는 목소리를 잃은 아프간 여성들을 대신해 계속 싸울 겁니다. 국제사회의 도움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탈레반과 탈레반주의는 암과 같습니다. 막지 않으면 점차 확산합니다. 향후 국제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릅니다. 세계 각국의 힘과 영향력이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지도자들에게 촉구합니다. 탈레반에게 멈추라고 요구해주십시오. 저는 매일 아프간의 어린 소녀들을 생각합니다. 당차고, 똑똑한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번영의 미래를 꿈꾸고, 교육받고, 일하며,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국제사회가 이를 함께 바라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07.13 두 팔과 눈 잃고 돌아온 남편, 꼭 껴안은 아내… 전세계 울린 사진 한 장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한 병원에서 아내 알리나가 중상을 입은 남편 안드리이를 끌어안고 있다./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두 팔을 잃고 돌아온 남편을 끌어안은 아내의 모습이 전 세계를 울리고 있다.

 

안톤 게라셴코 우크라이나 내무장관은 12일(현지 시각) 트위터에 “천 마디의 말 대신에”라며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 한 장을 게시했다. 사진에는 한 남성이 두 팔을 잃고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있으며, 연인으로 보이는 여성은 눈을 감고 다친 남성의 어깨에 기댄 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이 사진은 지난 10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한 병원에서 촬영된 장면이다. 남성은 팔 뿐만 아니라 얼굴도 크게 다쳤으며, 촬영 시점까지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게라셴코 장관은 “우크라이나 방어군 안드리이는 최전선에서 중상을 입었다”며 “그는 양쪽 팔과 두 눈, 그리고 청각 일부를 잃었다”고 전했다. 이어 “안드리이의 아내 알리나는 병원에 머무르며 그를 돌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게라셴코 장관이 공유한 이 사진은 98만회 넘게 조회되고, 4600여회 리트윗됐다. 또 다른 사진에서 알리나는 두 팔을 잃은 남편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다. 남성은 부상 탓인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10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한 병원에서 알리나가 전쟁 중 부상을 당한 남편 안드리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다./AP연합뉴스

 

 ▲자포리자 전투에서 다치기 전 안드리이와 알리나. /인스타그램

 

AP통신 등에 따르면, 안드리이는 지난 5월말 육군 제47여단 항공 정찰 장교로 복무하다 남부 자포리자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포리자주는 루한스크, 도네츠크, 2014년 병합한 크름반도와 함께 러시아가 점령한 도시 중 하나다. 이곳에는 단일시설로는 유럽최대 규모의 원전이 있어, 원전 주변에선 개전 직후 끊임없이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달 초부터 대반격을 시작하면서 자포리자와 도네츠크에서 전투를 이어가고 있다.

이외에도 안드리이는 폐 타박상을 입었으나 알리나의 간호 덕분에 호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알리나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안드리이의 증세를 전하며 모금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일보 최혜승 기자

 

08-04 지구, 1200년 역사이래 가장 더운 날씨…스위스 연구진 밝혀

▲연합뉴스

 

소나무 나이테 세포벽 분석…"중세 온난기보다 지금 기온이 더 높아"

지구 역사 이래 1200년 만에 지금이 가장 더운 날씨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분석이다.

3일(현지 시간) 스위스 연방 연구기관인 숲·눈·경관 연구소(WSL)가 최근 국제학술지인 네이처에 게재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온실가스 배출 등으로 인해 온난화한 지구 온도는 중세 이후로 전례가 없게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 1200년간 지표면이 비정상적으로 따뜻해진 시기와 비교해도 가장 덥다는 연구 결과다.

연구진은 스칸디나비아반도 일대와 핀란드, 스코틀랜드 등지에 퍼져 있는 소나무 188그루를 분석해 지구 기온을 추적했다. 수명이 길게는 1200년 가까이 된 소나무들로, 연구진은 나무들의 나이테에 있는 세포 5000만 개에서 세포벽 두께 등을 측정했다. 나무 나이테에 있는 세포에는 형성 당시의 온도와 그 변화폭을 가늠할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는 것에 착안한 연구다. 연구진은 단순히 나이테 밀도만을 기준으로 삼으면 온도 이외에 다른 변수의 영향까지 받게 되기 때문에 탄소 안정 동위원소 분석 등 다각적인 연구방법을 적용해 온도 정보를 과학적으로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연구 결과, 추출된 나이테 온도 정보를 바탕으로 나무가 서식한 지역의 오늘날 기온이 지난 1200년간의 자연적 온도 범위를 벗어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현재 기온이 이전 시기보다 큰 격차를 두고 높아졌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나이테 속 온도 정보에 비춰 지구 온난화의 시기로 불리는 현재와 종종 비교되는 중세 온난기(MWP)에 지금보다 기온이 낮았다고 설명했다.

중세 온난기는 950년부터 1250년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 평균 기온이 섭씨 2도 정도 높아진 기간을 말한다. 다만, 전 지구적 현상인지를 두고는 논란이 있다.

연구진은 "중세 온난기가 이전에 생각했던 만큼 따뜻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이번 연구에 담겨 있다"며 "적어도 지난 1000여 년간 현재의 온난화가 전례가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문화일보 임대환 기자
 

 

08.05 푸틴 위협에도 콧방귀…35조원어치 韓무기 산 이 나라의 원한

"사각형 모양과 비슷한 이곳은 어디일까요?"

▲신재민 기자

 

추가 정보를 드리자면

힌트

①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년)의 나라
②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 '동유럽의 파리' 바르샤바는 폐허가 됨
③ 대우차(1993년)·LG전자(2005년)·삼성전자(2010년) 등 韓기업 300여개 진출

주변 지도를 살펴볼까요.

 

정답은 중부 유럽에 있는 폴란드입니다. 무려 7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입니다. 북쪽으로는 발트해와 러시아의 역외영토인 칼리닌그라드, 동쪽으로는 리투아니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남쪽으로는 슬로바키아·체코, 서쪽으로는 독일과 접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위치 때문에 강대국의 패권 경쟁에 희생양이 된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가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정치학과 석좌교수는 '전 세계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나라'로 한국과 함께 폴란드를 꼽았다고 합니다.

 

강대국에 지배당한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 폴란드는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1989년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후, 친(親)서방 노선을 선택했죠.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2004년 유럽연합(EU)에 차례로 가입했고요. 지정학적 이점과 저렴한 인건비·양질의 노동력을 내세워 유럽 생산·물류 허브로 자리매김하고 고속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김영희 디자이너

 

러·벨라루스, 폴란드 위협 고조

정치·경제 자유화를 이루고 30년 넘게 성장해온 폴란드에 최근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지난달 무장 반란에 실패한 러시아 민간 용병기업 바그너 용병들이 러시아 최대 우방국인 벨라루스로 거점을 옮겼는데요. 러시아·벨라루스가 폴란드에 '발톱'을 드러내고 있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러시아 북서부 카렐리야 공화국에 있는 라도가 호수의 발람 섬에 있는 발람 수도원을 방문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1일 블라디미르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폴란드가 벨라루스 영토에 대해 야망을 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벨라루스에 대한 공격은 러시아 연방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며, 러시아는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할 것"이라고 했죠. 그러자 알렉산드르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바그너 용병은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적극 도운) 폴란드에 원한을 품고 있다"며 "바르샤바(폴란드 수도)와 제슈프(폴란드 국경 인근 도시)를 보고 싶어한다"고 말했습니다.

 

긴장한 폴란드는 벨라루스와의 국경 지대를 주시하고 있는데, 벨라루스 측의 도발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1일에는 국경 근처에서 훈련 중이던 벨라루스 군용헬기가 폴란드 영공을 침범했습니다. 앞서 지난달 29일엔 바그너 용병 100여명이 폴란드 국경과 리투아니아 사이의 약 100㎞ 길이 국경지대 '수왈키 회랑(Suwalki Gap)' 인근으로 이동한 게 확인됐죠.

 

 ▲김은교 기자

 

수왈키 회랑은 '나토의 아킬레스건'으로 불립니다. 벨라루스·러시아군이 이곳을 점령하면 러시아 본토~벨라루스~칼리닌그라드를 잇는 육지 회랑이 만들어지면서, 나토 가입국인 발트 3국(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과 폴란드 사이가 차단됩니다.

 

우크라이나 지원 줄이려는 의도

사실 바그너 용병과 벨라루스군이 보내는 이런 위협 신호는 "공허한 협박"이란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나토국인 폴란드를 공격하면 나토 헌장 5조가 발동돼 미국 등 다른 나토 회원국들이 공동방어에 나서기 때문이죠. 자칫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어 러시아나 벨라루스도 원치 않는 상황이죠.

그런데도 푸틴 대통령이 바그너 용병과 벨라루스를 이용해 폴란드를 위협하는 건 우크라이나에 대한 폴란드의 각종 지원을 줄이게 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어요. 폴란드는 다가오는 가을 총선을 치릅니다. 리호르 니즈니카우 핀란드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푸틴이 폴란드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해 3차 세계대전을 막으려면 우크라이나 지원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오른쪽)과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지난달 9일 우크라이나 북서부 루츠크에 있는 대성당에서2차 세계대전 희생자를 추모한 후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건, 그만큼 폴란드 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 규모가 크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지원 추적기'에 따르면 폴란드 정부는 지난해 1월 말부터 올해 5월 말까지 우크라이나에 약 43억 유로(약 6조1000억원)의 군사·재정·인도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아울러 다른 서방 동맹국이 꺼리는 전차·전투기까지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우크라이나의 최우방국을 자처하고 있어요.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반 넘게 이어지고 있는데도 폴란드인 10명 중 6명은 우크라이나인을 계속 돕겠다고 합니다.

 

200년 넘게 러에 당한 역사 새겨

푸틴 대통령이 폴란드에 공포 전략을 쓰려 하지만 폴란드 국민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듯합니다. 이들은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우크라이나가 무너지면, 러시아의 바로 다음 목표는 폴란드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박경민 기자

 

폴란드는 18세기 이후 200년 이상을 러시아의 침략으로 고통받았습니다. 1772∼1795년 3차에 걸쳐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 삼국에 의한 영토 분할 끝에 결국 123년 간(1795~1918) 나라를 잃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폴란드 공화국을 세웠지만 20여년 만에 또 분할 지배당합니다. 1939년엔 2차 세계대전의 전쟁터가 됩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양국이 폴란드를 분할 지배한다는 비밀 약정을 맺었습니다. 이어 두 강대국이 차례로 침공해 폴란드를 폐허로 만들었죠.

 

당시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독립국으로 일어설 수 없도록 '폴란드 엘리트'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대학살을 저지릅니다. 소련 비밀경찰은 러시아 남부 스몰렌스크에 있는 카틴 숲에서 폴란드 장교·경찰·교사·의사 등 2만2000명을 총살하고 매장했죠.

폴란드인에게 카틴 숲 학살은 러시아에 대한 원한의 상징이 됐죠.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945년 다시 독립했지만, 소련의 통제를 받는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한국 무기로 '유럽 최고 지상군'

카틴 숲의 학살을 기억하는 폴란드가 러시아군의 침공을 받게 된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겠죠. 폴란드는 군사력 증강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국방비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하고, 신무기 구입과 병력 보충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산 무기를 대거 구입해 화제가 됐습니다. 지난해 7월 K2 전차 1000대, K9 자주포 672문, FA-50 경공격기 48대, 천무 288문 등 35조원 규모의 무기를 사들이는 기본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병력도 2배 이상 늘릴 계획입니다. 폴란드군은 현재 약 12만명 정도인데, 2035년까지 30만명으로 늘릴 계획입니다. 지난해 1만4000여명의 신병이 입대했는데, 이는 지난 2008년 징병제가 폐지된 후 가장 많은 수였답니다. 민간인을 위한 단기 군사훈련 과정도 인기가 높습니다. 총·수류탄 등 무기 사용법을 배우는데 하루 정원 10명에 1500명이 몰리는 등 엄청난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하네요.

 

 ▲김영옥 기자

 

폴란드의 최우선 목표는 지상군 전력의 확충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전차·포병·보병 등 재래식 전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차·자주포 등을 대거 사들인 거죠. 제이미 셰어 전 나토 대변인은 "한국에서 구입한 전차(1000대)를 전부 인수하면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의 전차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차를 갖게 될 것"이라면서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상군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지난해 11월 독립기념일에 "폴란드군은 싸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힘이 있는 강력한 군대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죠. 물론, 군사비 지출이 커져 국가 예산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맞아 '역사 전쟁'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세계 2위의 군사 대국 러시아의 위협에도 '콧방귀'를 뀔 정도로 당당해졌습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지난해 독일 매체 빌트와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을 독일 나치 독재자였던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에게 체면을 살려줘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나?" 푸틴 대통령과 대화를 시도하는 독일·프랑스 정상을 정면 비판한 겁니다.

지난달엔 푸틴 대통령이 "폴란드는 자신들의 서부 영토가 스탈린의 선물임을 잊고 있다"고 발언하자, 폴란드 정부는 곧바로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습니다. 파벨 야블론스키 폴란드 외교차관은 “(과거 스탈린에 비견되는) 푸틴이라는 현대의 전범이 옛 전범 스탈린의 무죄를 주장하려는 시도”라고 푸틴의 주장을 반박했고요.

 

푸틴의 발언은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과정을 언급한 건데, 당시 미국·영국·소련 등 3대 연합국이 패망한 독일 영토 일부를 폴란드에 넘기고 폴란드 동쪽 영토는 소련이 가져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푸틴의 주장은 억지에 가깝습니다. 독일 영토 일부를 폴란드에 넘기도록 한 조치는 스탈린 혼자 결정한 게 아니고 미국·영국·소련의 합의 사안이었을 뿐더러, 대신 폴란드는 동쪽 땅 일부를 소련에 빼앗긴 거니까요.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전엔 성소수자 정책, 사법권 독립 문제 등으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나라'로 꼽히며 EU·미국과 자주 마찰을 빚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국으로 떠올랐죠. 폴란드의 소망처럼 자주국방 노력이 결실을 거둬 러시아의 서진을 막는 '유럽의 방패'가 될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08.08 중국을 가지 않는 이유

▲지난달 30일 비 내리는 베이징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자금성 입구 앞에 서 있다. 중국은 올해 초 코로나로 닫았던 국경을 다시 열었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외면 당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최근 중국 정부가 발표한 관광객 통계를 보면 ‘외국인의 중국 기피 현상’이 뚜렷하다. 올해 1분기 여행사를 통해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5만2000명으로 코로나 전인 2019년 1분기(370만명)의 1.4% 수준이다. 이 시기에 중국 비자 발급과 항공편 예약이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해도 극단적인 감소 폭이다. 베이징의 자금성·만리장성에선 금발 벽안 관광객들이 보이지 않고, 외국인을 겨냥한 식당·술집에선 영문 메뉴판이 사라지고 있다.

중국이 코로나로 닫았던 국경을 3년 만에 열었는데도 외국인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수선한 자국의 안정을 위해 중국 내 외국인들을 강도 높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베이징 환잉니(당신을 환영한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외국인들을 ‘외부 세력’으로 규정하고 경계하는 인상을 준다.

 

한국·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중국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상세 개인 정보를 제출하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중국에서 외국인이 머물 수 있는 호텔은 정해져 있고, 신분 인증 문제로 온라인에서 기차표를 사기도 어렵다. 미 국무부는 지난 6월 자국민에게 “중국 정부는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 없이 현지 법을 자의적으로 집행하고 있다”면서 중국 본토와 홍콩·마카오 여행을 재고할 것을 권고했다.

 

중국에서 애국주의가 퍼지면서 외국인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다. 외신 기자는 중국을 왜곡하는 선동가로, 외국 기업인은 중국의 고혈을 빼먹는 자본가로 보는 시각이 만연하다. 오래 알고 지낸 중국인 사업 파트너나 학자가 갑자기 만남을 거부했다는 외국인의 경험담은 흔하다. 이 와중에 지난달 1일 ‘간첩 행위’의 범위를 크게 확대한 개정 반(反)간첩법이 시행되면서 일부 중국인 사이에서 ‘외국인=간첩’이란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베이징의 한 일본인 이코노미스트는 “잠재적 간첩 취급을 받게 되면서 예정했던 미국 출장을 취소했다”고 했다.

중국이 외국인들을 통제하고 애국주의를 고취할수록 중국은 세계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국가 간의 교류와 협력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외국인 투자자와 글로벌 기업, 연구자들은 중국을 과거보다 낯설게 여기고 있고, 이로 인한 탈중국이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 리서치 회사 로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중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는 200억달러로 전년 동기의 20% 수준으로 급감했다. 국내 대기업들도 중국 베이징 주재원을 뽑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게다가 지금 교류 확대가 아쉬운 쪽은 중국이다. 세계 각국은 중국이 코로나로 문 닫은 지난 3년 동안 최소한으로 중국과 교류하는 법을 익혔다. 중국이 바뀌지 않으면 외국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08.09 34년 걸린 재개발… 日 330m 랜드마크 완공

도쿄 아자부다이힐스 11월 개장

 ▲오는 11월 24일 정식 개장을 앞둔 일본 도쿄의 초고층 복합단지 아자부다이힐스의 조감도. 다른 복합단지와는 다르게 건물과 건물 사이에 넓은 녹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하철 2개 노선과 직접 연결되고 도쿄의 관광 명소 롯폰기힐스, 도쿄타워와도 도보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다. /모리빌딩

 

낡은 일본 도쿄 도심을 바꾸는 초고층 첨단 복합단지로 주목받아 온 아자부다이힐스가 11월 24일 정식 개장을 앞두고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아자부다이힐스 개발 사업을 총괄해온 모리빌딩이 8일 모리JP타워 33층에서 사업 완공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아자부다이힐스의 핵심인 모리JP타워는 높이 330m 초고층 빌딩으로 정식 개관할 경우 2014년 만들어진 오사카의 아베노하루카스(300m)를 제치고 일본 최고의 마천루(摩天樓)가 된다.

모리빌딩은 2003년 일본에 도심 재개발 붐을 일으킨 효시로 꼽히는 롯폰기힐스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한 회사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쓰치 신고(辻慎吾) 대표는 “아자부다이힐스는 미래형 도시의 모습을 추구한 프로젝트이며, 여기서부터 도쿄는 크게 바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아자부다이힐스의 특징으로 내세운 것은 ‘녹지’다. “330m 초고층 빌딩을 지은 이유도 녹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며 “녹지와 나무, 새·곤충이 함께 모이는 녹색 도시가 미래형 도시”라고 했다.

 

아자부다이힐스가 자리 잡은 도쿄도 미나토구는 대기업 본사와 외국계 기업의 일본 본부, 외교 공관들이 몰려 있는 도심 지역이다. 주민 다수는 고소득자다. 이런 금싸라기 땅에 모리빌딩은 대규모 녹지를 만들었다. 전체 면적 8만1000㎡ 가운데 녹지가 2만4000㎡다. 정중앙에 6000㎡ 규모 공원이 있고, 주변에 64층 빌딩 세 개를 세웠다. 건물 10여 동 주변으로 인공 숲을 조성하면서 심은 나무 종류만 320종이다. 롯폰기힐스 등 지금까지 진행된 도쿄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와 다른 점이다.

 

녹지 말고도 차별화되는 점은 또 있다. 일본의 주요 벤처캐피털 70곳을 한곳에 모은 ‘도쿄벤처캐피털허브’를 들인 것이다. 쓰치 대표는 “도쿄가 전 세계 주요 도시들과 경쟁해 이기지 못하면 일본의 미래는 없다”며 “글로벌 인재와 기업들에 선택받을 수 있는 도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기업이 입주하는 빌딩이 아닌, 스타트업과 같은 신생 기업을 돕는 역할까지 하겠다는 것이다. 모리 빌딩은 아자부다이힐스를 일본판 샌드힐로드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도로인 샌드힐로드는 주변에 150여 곳의 벤처캐피털이 밀집해 있어 스타트업의 성지로 불리는 지역이다.

 

‘콤팩트 시티(도시 속 도시)’를 추구한다는 점은 앞서 도쿄에서 진행된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와 동일하다. 아자부다이힐스는 호텔·병원·학교·미술관·쇼핑거리·상가 등을 모두 갖췄다. 일본의 명문 게이오대학과 함께 ‘게이오대 예방의학센터’를 만들었다. 영국계 국제 학교인 ‘잉글리시스쿨 인 도쿄’도 문을 연다. 쇼핑몰에는 에르메스, 까르띠에, 불가리 등 명품 업체 10곳을 포함해 150개 상점의 입점이 확정됐다.

 

▲그래픽=양인성

 

약 6400억엔(약 5조9000억원)이 투자된 아자부다이힐스는 1989년 재개발 조합이 설립 후 34년 동안 진행된 초장기 프로젝트로도 주목받았다. 일본에서 재개발은 토지주의 3분의 2가 동의하면 추진할 수 있지만 모리빌딩은 90%의 동의를 받으려고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모리빌딩 관계자는 “하나의 마을을 만드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완성된 이후에 다 같이 돕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판단”이라고 말했다. 당시 64세였던 재개발 추진위원장은 지금껏 바뀌지 않았고 98세에 준공식에 참석하게 됐다.

동의를 받는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이후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2017년 일본 정부의 국가전략특구 프로젝트로 지정돼 6년 만에 완공했다. 전략특구 프로젝트는 국가와 도쿄도, 미나토구, 모리빌딩이 개발 스케줄을 공유하기 때문에 중간에 예상치 못한 규제로 건설이 지체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아자부다이힐스가 공식 개관과 함께 단숨에 내외국인들이 몰려드는 신흥 관광명소로 떠오를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온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데다가 지하철 2개 노선과 직접 연결된다. 이미 외국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도쿄타워 및 롯폰기힐스와는 걸어서 각각 10분, 20분 거리에 있다. 모리빌딩은 연간 방문객을 3000만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조선일보 도쿄=성호철 특파원 

 

08.12 ‘하와이 왕국의 수도’ 80% 불타... 바다 뛰어든 사람 대부분 숨져

‘불바다’ 하와이 최소 55명 사망… 바이든 ‘중대 재난’ 선포

 ▲대피하던 차들까지… - 8일 새벽(현지 시각) 미국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산불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10일, 섬 서북쪽 해안의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 있다. 해안과 인접한 도로에 서 있는 자동차 상당수도 화재에 훼손돼 있다. 이번 산불로 인한 사망자는 11일 오전 2시 기준 55명까지 늘어났으며, 화재 피해를 입은 건물도 최소 1700여 채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AFP 연합뉴스

 

8일 새벽(현지 시각) 미국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시작된 산불로 인한 사망자가 55명(11일 오전 2시 기준)까지 늘어났다. 현재 진화 작업에 큰 진척이 없는 데다가 생사가 파악되지 않은 실종자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사망자는 최소 60명을 넘길 것이라고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들은 전했다. 이에 따라 이번 산불은 하와이주의 미국 편입 이듬해인 1960년 5월 몰아닥친 쓰나미로 61명이 희생된 이래 최악의 자연재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불길 속에서 끝내 구조되지 못한 희생자들의 시신이 방파제 주변 바닷가를 떠다니고 있다는 등 참상의 목격담도 잇따르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10일 하와이 산불을 ‘중대 재난’으로 선포했다.

 

이번 화재로 옛 하와이 왕국의 수도이자 대표적 관광지였던 마우이섬의 라하이나는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됐다. 리처드 비센 시장은 10일(현지 시각) 언론 브리핑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It’s all gone)”고 말했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산불이 하와이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빼어난 자연 절경과 유서 깊은 문화재가 곳곳에 있는 마우이섬은 하와이 제도의 여러 섬 중에서도 반드시 들러야 할 관광지로 꼽혔다. 그런 곳이 아비규환이 되면서 필사의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관광객들 상당수는 주도(州都)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섬으로 대피했다. 하와이주 당국은 마우이섬에서 탈출한 관광객들을 위해 호놀룰루 시내 컨벤션센터에 긴급 수용 시설을 마련했다.

 

 ▲그래픽=김성규

 

하와이 말로 ‘잔인한 태양’이라는 뜻을 가진 라하이나는 마우이섬 서북쪽 해안에 있는 인구 1만2000여 명의 해안 도시다. 19세기 초까지 하와이 왕국의 수도였고, 소설 ‘모비딕’의 배경지로 유명하다. 매년 200만명 이상의 여행객이 찾는 관광 명소다. 하지만 강풍과 함께 몰아닥친 불길은 아름다운 도시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번 화재 희생자 대부분이 라하이나에서 나왔다. 조시 그린 하와이 주지사는 10일 언론 브리핑에서 “구조 대원들이 라하이나 지역을 중심으로 주택과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해 사망자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희생자가 63년 전 쓰나미 때를 넘어설 것 같다”고 했다. 현지 언론은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불길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닷가로 뛰어든 사람들 중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라하이나의 한 주민은 현지 언론인 ‘하와이 뉴스 나우’에 “바닷가에 있는 방파제에 여전히 시신들이 둥둥 떠 있다”고 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 일부가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불길을 피해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라하이나 주민 브라이스 바라오이단은 온라인 매체 ‘뉴스네이션’에 “물 위에 떠 있던 배들이 화재로 폭발했고 기름이 흘러 나와 물에 떠 있던 사람들을 덮쳤다”고 전했다. 불길에 휩싸인 주택 옆 길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사람 등을 담은 영상과 사진이 온라인과 소셜미디어에 퍼지고 있다. 그린 주지사는 이번 화재에 대해 ‘폭탄이 터졌다(a bomb went off)’고 했다.

 

물적 피해도 막심하다. 라하이나는 오래된 목조건물인 경우가 많아 전체 건물의 80%가 전소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화재 피해를 입은 건물은 최소 1700여 채로 추산되고 있다. 유서 깊은 문화재들도 갑작스레 덮친 불길에 잿더미가 됐다. 마우이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으로 1835년에 선교사가 지은 ‘볼드윈 홈 박물관’과 1873년 인도에서 들여온 미국 최대의 반얀나무가 이번 화재로 소실됐다. 1900년대 초반에 지어져 선원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던 여관 ‘파이어니어 인’과 와이올라 교회 등도 불길에 사라졌다. 화재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하와이 산불을 중대 재난으로 선포하고 연방 정부 차원의 복구 지원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주방위군 병력 134명과 해군 3함대 등이 현장에 투입됐다. 주방위군의 헬기는 화재 현장에 15만 갤런(약 56만8000L)의 물을 투하했다.

 

군경이 소방과 구조에 투입되는 사이 민간 항공사들이 주축이 된 ‘여행객 탈출 작전’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 주요 항공사들이 마우이의 관광객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항공편을 긴급 편성하면서 마우이섬의 항공 관문인 카훌루이 공항은 전시를 방불케 했다. 하와이안 항공은 호놀룰루를 오가는 6개의 추가 비행편을 운항했다. 알래스카와 델타 항공 등도 마우이에 고립되어 있는 여행객들을 나르기 위해 비행편 지원에 나섰다. 그럼에도 표를 구하지 못한 여행객 1400여 명은 공항 청사에서 밤새 머물며 추가 항공편을 기다렸다. 공항 인근 와일루쿠 등에 마련된 대피소 5곳에서도 약 1350명이 밤새 대기했다. 현지 언론들은 “대피소마저 자리가 부족해 대피소 밖 차 안에서 자는 사람들도 허다했다”고 전했다. 하와이 관광청에 따르면 수요일에는 1만4000명, 목요일에 1만4500명이 마우이를 떠났다.

조선일보 뉴욕=윤주헌 특파원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08.12 "전멸됐다" 재난지역 선포 하와이, 최악 산불로 최소 67명 사망

미국 하와이의 마우이 섬에서 발생한 산불로 인한 사망자 수가 11일(현지시간) 최소 67명으로 늘어났다. 화재 발생 나흘이 지났지만 아직 완전히 진압되지 않아 피해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다. 조시 그린 하와이 주지사는 "사망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 외교부는 현지 한인 피해는 아직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

 

▲10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 마우이 라하이나에서 발생한 산불로 마을 대부분이 불탔다. 로이터=연합뉴스

 

현재 일부 지역엔 통신이 끊겨 실종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마우이 경찰은 “전기가 없어 인터넷이 끊겼고 라디오도 안 된다”면서 광범위한 통신 두절로 현장 대원들이 구조가 필요한 주민들과 접촉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난 8일(현지시간) 대형 산불이 발생한 하와이 마우이 섬. 수천 명의 주민들이 집을 버리고 대피했다. AP=연합뉴스 

 

재산 피해도 크다. 이번 산불로 약 1700여 채의 집이 불탔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나왔다. 리처드 비센 주니어 마우이 시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라면서 특히 마우이 섬 북서부의 라하이나 지역에 대해 “전멸됐다”고 표현했다.

이번 산불은 지난 8일 마우이 섬 중부 쿨라 지역에서 처음으로 신고됐다. 이어 서부 해변 마을 라하이나 인근에서 또 다른 산불이 보고됐다. 라하이나의 불은 한때 진압됐다가 허리케인 도라가 몰고 온 강풍을 타고 잔불이 되살아났다. 쿨라 지역 산불은 키헤이 등 중서부 해안 지역으로 퍼졌고 빅 아일랜드 섬(하와이섬)으로도 옮겨붙었다. 기상 당국은 도라의 강풍을 타고 불길이 섬 전역에 옮겨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산불 피해가 집중됐던 마우이 섬의 라하이나 지역. 건물이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탔다. 로이터=연합뉴스

 

한인 인명 피해는 아직 없어…집·가게 등 10여 채 불타

한국 외교부는 11일 현재까지 하와이 산불과 관련해 "우리 국민의 인명 피해가 접수된 건 없다고 밝혔다. 호놀룰루 영사관 측도 “아직 교민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통신이 끊긴 지역까지 한 번 더 확인 중이다”고 전했다.

 

 ▲하와이 와일루루의 한 대피센터에서 한 여성이 친척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마우이 섬에 거주하는 한인 교민은 약 500명, 여행객은 수백 명 정도로 외교부는 추산한다. 산불 피해가 집중된 라하이나 지역엔 교민 10명 정도가 거주하거나 기념품 사업 등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집과 사업장은 이번 화재로 전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 피해 지원을 돕고 있는 마우이 순복음교회의 한 교민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라하이나 지역에만 30명 정도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면서 “일부는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카훌루이 공항에 대피했다”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이어 “구호 물품을 전달하러 피해 지역 인근에 갔는데 곳곳에 전신주가 넘어지고 전선이 뒤엉킨 모습”이라면서 “합선 문제로 더는 접근할 수 없는 상태로, 추가 피해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전했다.

 

 ▲1823년 하와이 마우이 섬에 세워진 역사적인 선교지 와이올라 교회가 불에 타고 있다. AP=연합뉴스

 

백악관, 하와이 ‘재난 지역’ 선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0일 하와이를 재난 지역으로 승인했다. 백악관은 하와이 지역 복구에 연방정부의 지원이 따를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하와이 화재 피해자들은 임시 주거 시설, 주택 수리, 저금리 융자 등을 지원 받을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유타주에서 참전용사 관련 행사에서 하와이 산불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원조를 제공할 것이다”라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집이 파손되거나 파괴된 사람에게 즉시 도움을 주겠다”고 강조했다.

 

 ▲마우이섬 인근 카훌루이 공항에 대피한 사람들. 이들은 구급차가 된 학교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AP=연합뉴스

문상혁 기자 moon.sanghyeok@joongang.co.kr

 

08.24 ‘무장 반란’ 수장 프리고진, 비행기 추락 사망…바그너측 “격추됐다”

러시아 항공당국 “프리고진, 사고 비행기 탑승”

 ▲23일(현지 시각) 러시아 트베리 지역 쿠젠키노 마을 인근에 떨어진 비행기 잔해가 불타고 있다.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은 "이 비행기에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탑승했다가 숨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AFP 연합뉴스

 

지난 6월 무장 반란을 일으켰던 러시아 민간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프게니 프리고진이 23일(현지시각)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진 것으로 보인다고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이어 러시아 당국도 프리고진이 전용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이날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이륙, 상트페테르부르그로 향하던 개인 항공기가 서부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마을 근처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승무원 3명과 승객 7명 등 탑승자 10명이 전원 사망했다. 추락 항공기는 엠브라에르사(社)의 ‘레거시’ 기종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항공당국은 이 사고와 관련해 “프리고진과 드미트리 우트킨(바그너그룹 공동 창립자) 해당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밝혔다.

타스 통신은 러시아 연방 항공 운송국(로사비아치아)를 인용, “탑승자 명단에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이름이 포함된 것이 확인됐다”며 “지금까지 4명의 시신이 발견됐으며, 프리고진 역시 (이번 사고의) 희생자인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다만 프리고진이 사망했다는 물적 증거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바그너그룹이 운영하는 소셜미디어(텔레그램) 채널 ‘그레이존’도 이날 “(프리고진이 탑승한) 엠브라에르 항공기가 모스크바 북쪽의 트베르 지역에서 러시아 방공망에 의해 격추됐다”고 주장했다. 그레이존측은 목격자의 말을 빌어 “이 비행기는 이륙 30분만에 연기를 내뿜으며 지상으로 추락, 화염에 휩싸였다”고 전했다.

 

 ▲러시아 민간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21일(현지시간) 아프리카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소셜미디어에 게재했다. /연합뉴스

 

프리고진은 지난 6월 23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 장관 등 러시아 군 수뇌부 처벌을 요구하며 무장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서남부 로스토프나노두를 점령하고 모스크바 턱밑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24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중재로 만 하룻만에 반란을 중단하고 회군했다.

 

그는 반란 중단 대가로 처벌을 면하고 벨라루스로 근거지를 옮긴 뒤 러시아와 벨라루스 사이를 오가며 지냈다. 군부와 푸틴 대통령 충성파에 의한 신변 위협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됐으나, 프리고진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지난달 27일 러시아·아프리카 국가 정상회의가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나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표단을 만나는가 하면, 지난 21일에는 아프리카로 추정되는 한 사막에서 위장복 차림에 소총을 들고 서있는 모습을 공개하는 등 건재를 과시해 왔다.

조선일보 파리=정철환 특파원

 

‘푸틴의 요리사’에서 ‘반란의 수장’으로… 의문사한 프리고진은 누구?

23일(현지 시각)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진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최근 무장 반란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반역자’로 규정됐던 인물이다.

196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 출신인 프리고진은 스무 살이었던 1981년 강도와 사기 등 범죄로 9년간 복역했다. 소련 붕괴 무렵이었던 1990년 출소한 뒤 핫도그 장사로 요식업에 뛰어들었고 러시아 각지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이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료였던 푸틴을 만났다. 이 인연을 계기로 고위직에 오른 푸틴을 따라 크렘린궁에 입성, 각종 만찬과 연회를 도맡으며 ‘푸틴의 요리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그가 푸틴의 신임을 얻기 시작한 것은 2014년 민간 용병기업인 바그너 그룹을 창설하면서다. 프리고진이 이끄는 바그너 그룹은 같은 해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 과정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시리아·리비아·수단 등 각국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러시아군을 대신해 개입했다. 세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등 잔학한 행위로 악명이 높았으나 프리고진은 이를 부인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전쟁이 한창이던 작년 9월 프리고진은 성명을 내고 바그너 그룹을 창설한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바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 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동부 바흐무트에서 러시아의 공격을 주도했다. 바그너 그룹 용병 5만명가량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됐고, 이 중 4만명이 러시아 교도소로부터 모집된 죄수들이라고 서방 정보 당국자들은 추정했다.

 

올 들어 프리고진은 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바그너 그룹의 활약을 과시하는 한편 러시아 측 군부 인사들의 무능과 비협조적인 태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엔 군 수뇌부를 겨냥해 ‘인간말종’ ‘지옥에서 불탈 것’이라는 등의 강도 높은 발언을 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논란을 진압하려 6월 10일 모든 비정규군을 상대로 “러시아 국방부와 정식 계약을 체결하라”고 지시했지만, 프리고진은 계약을 거부하고 같은 달 23일 오히려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러시아 군부가 우리의 후방 캠프를 폭격했고 많은 와그너 동지들이 죽었다”는 주장과 함께였다.

 

러시아 본토로까지 진격하며 반란의 수위를 높인 프리고진을 두고 푸틴 대통령은 “가혹하게 대응하겠다”며 반역 행위로 규정했다. 반란 사태는 푸틴의 우군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로 프리고진이 벨라루스로 철군하는 조건으로 그와 병사들의 처벌을 면해줄 것을 합의하면서 약 36시간 만에 일단락됐다. 신변 보장 약속을 받은 프리고진은 무장 반란 약 닷새 뒤에 푸틴과 면담했고, 7월 말에는 러시아와 아프리카 간 정상회담이 열렸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집권 기간 정적과 배신자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해 온 푸틴이 결국엔 프리고진까지 제거할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 국영 로시야1방송은 지난달 경찰 특수부대가 프리고진이 소유한 사업체의 사무실, 저택을 급습하는 모습을 보도하면서 “프리고진에 대한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전한 바 있다. 결국 프리고진은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단죄받기 전 목숨을 잃었고 푸틴과의 인연을 끝맺게 됐다.

조선일보 김동현 기자

 

08-24 ‘의문의 죽음’ 프리고진은 누구?…푸틴의 칼잡이→반역자 ‘굴곡진 인연’

요식업하며 하급 관료던 푸틴과 첫 인연
바그너그룹 이끌며 우크라 전쟁 선봉장
군 수뇌부와 갈등 끝에 반란 수괴로 전락

24일(현지 시간) 의문의 전용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한때 푸틴의 칼잡이로 불릴 만큼 충성스러운 인물이었지만, 무장 반란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반역자”로 규정한 인물이다. 그의 죽음을 초래한 비행기 추락사고의 원인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서방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푸틴이 연루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올해로 62세인 프리고진은 푸틴의 고향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다. 1981년 강도·사기 등의 범죄로 9년간 복역했다. 1990년 소련 붕괴 시기에 출소한 그는 핫도그 장사로 밑천을 마련해 러시아 각지에 고급 레스토랑을 열었다. 당시 프리고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료이던 푸틴 대통령을 손님으로 만나 친분을 쌓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인연을 계기로 프리고진은 크렘린궁에서 열리는 각종 만찬과 연회를 도맡으면서 일명 ‘푸틴의 요리사’로 불리게 된다.

프리고진이 본격적으로 푸틴의 신임을 얻기 시작한 것은 2014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을 창설하면서다. 바그너그룹은 크림반도 강제 병합을 위한 전쟁을 비롯해 시리아, 리비아, 수단 등 세계 곳곳의 분쟁에 러시아군 대신 개입하면서 세력을 키워왔다. 바그너그룹은 민간인 학살 등 잔혹한 행위로 악명이 높았지만, 프리고진은 이를 부인했다.

오랜 기간 음지에서 활동하던 프리고진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9월 전면에 나섰다. 당시 성명을 내고 바그너그룹 창설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면서다. 프리고진과 바그너그룹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바흐무트에서 러시아의 공격을 주도했다. 서방 관계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바그너그룹 용병 5만 명이 투입됐으며, 이중 러시아 교도소에서 모집한 죄수들이 4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요리사 시절인 2011년 11월 11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에 있던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러시아 총리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는 모습. AP·뉴시스

 

프리고진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바그너그룹의 활약을 과시하는 한편, 군부 인사들이 무능하고 비협조적이라고 비난해 군 수뇌부와 갈등을 빚었다. 특히 지난 5월 군 수뇌부를 겨냥해 ‘인간 말종’, ‘지옥에서 불탈 것’ 등의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은 6월 10일 모든 비정규군에 국방부와 정식 계약을 체결하도록 지시했으나,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킨 꼴이 됐다.

재계약을 거부한 프리고진은 이후 6월 23일 무장반란을 일으키며 러시아 본토로 진격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를 반역 행위로 규정하고 “가혹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장반란은 러시아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를 통해 프리고진이 벨라루스로 철군하는 조건으로 그와 병사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합의하면서 36시간 만에 일단락되는 듯했다.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신변 보장 약속을 받아낸 프리고진은 무장반란 닷새 뒤 푸틴과 만나 면담했고, 7월 말에는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담이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푸틴이 끝내 프리고진을 제거할 것이라는 전망은 지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러시아 국영 로시야1 방송은 7월 5일 경찰 특수부대가 프리고진 소유 사업체의 사무실과 저택을 급습하는 장면을 내보내며 수사가 여전히 진행중임을 알렸다. 하지만, 푸틴과 척진 반대자들 가운데 다수와 마찬가지로 프리고진 역시 수사와 재판을 통해 단죄받기 전에 목숨을 잃었고 이로써 푸틴과 맺었던 굴곡진 인연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문화일보 곽선미 기자

 

08.24 인도, 세계 최초 ‘달의 남극’ 갔다… ‘찬드라얀 3호’ 착륙 성공

▲인도의 무인 달 탐사선 찬드라얀 3호가 23일 오후 6시 3분(현지 시각) 달 남극 착륙에 성공하는 모습이 생중계되고있다./ISRO 

 

인도의 무인 달 탐사선 찬드라얀 3호가 달 남극 착륙에 성공했다. 이로써 인도는 구소련, 미국, 중국에 이어 넷째로 달 착륙에 성공한 국가인 동시에 인류 최초로 달 남극에 착륙한 국가가 됐다.

 스리드하라 파니커 소마나스 인도우주연구기구(ISRO) 최고책임자는 23일 오후 6시 3분(현지 시각) 찬드라얀 3호가 달의 남극 부근에 착륙했다고 밝혔다. 찬드라얀 3호는 추진 모듈과 착륙선인 ‘비크람’으로 구성돼 있다. 이날 성공적으로 착륙한 비크람에서 출동한 무인탐사차량은 앞으로 14일간 달 남극의 물·얼음·헬륨3 등 자원을 탐사하게 된다.

 

인도 이전에 달에 착륙한 나라는 구소련, 미국, 중국뿐이다. 이들 국가는 모두 비교적 평평한 달의 북반구에 착륙했다. 미국과 함께 양대 우주 강국이었던 러시아의 ‘루나 25′는 지난 21일 달 남극 착륙을 시도했지만 궤도 이탈로 달에 충돌하면서 실패했다. 달의 남극은 운석 충돌 때문에 울퉁불퉁한 지형이 많고, 지구와 직접 교신이 불가능해 착륙이 극도로 어려운 것으로 꼽힌다.

 

인도는 우주 선진국들의 경쟁이 치열한 달의 남극에 먼저 깃발을 꽂았다. 이 지역은 얼음 형태의 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켓 연료 조달 등 우주 개발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 중인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착륙 직후 영상 회견에서 “14억 인도인의 자부심이 담긴 순간”이라며 “이 성공은 인도만의 것이 아니며, 앞으로 다른 나라의 우주 탐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김효인 기자

 

08.25 소달구지에 위성 싣던 인도…30년 만에 달나라까지 간 비결

달의 남극 안착… 우주강국 비결

 ▲23일(현지시간) 인도 무인 달 탐사선 찬드라얀 3호의 달 남극 착륙 준비 과정에서 보이는 달의 표면. 찬드라얀 3호가 이날 오후 6시 4분경 달 남극에 안착하면서 인도는 세계 최초로 달 남극 착륙에 성공한 국가가 됐다./인도우주연구기구(ISRO)

 

23일 인도 무인(無人) 우주선 찬드라얀 3호가 세계 최초로 달의 남극에 착륙하자 현지 매체들은 “우마차에서 시작한 인도 우주 산업이 마침내 달까지 갔다”고 보도했다. 1990년대 초까지 예산·인력이 부족해 전용 운반 차량 대신 우마차로 통신위성을 옮겼는데, 30여 년 만에 미국·러시아·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우주 강국이 됐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달 남극은 물과 희귀 자원 확보를 위해 세계 각국이 도전장을 내민 우주 탐사 요충지다. 달 남극에 물이 든 얼음 덩어리가 존재하는 걸 처음 확인한 나라도 인도(2009년 찬드라얀 1호)였다.

 

우주 변방에 가까웠던 인도가 어떻게 전 세계 우주 산업을 이끄는 ‘퀀텀 점프(비약적 도약)’에 성공하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두꺼운 첨단 공학 엔지니어 저변과 과감한 여성 인력 등용,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 가성비 전략 등을 비결로 꼽는다. 안형준 국가우주정책연구센터 팀장은 “인도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위성을 만들었을 정도로 탄탄한 저력이 있다”면서 “향후 화성 개척 등 심(深)우주 개발을 위한 중요한 관문이자 베이스캠프인 달의 남극에 인도가 미국, 일본보다 먼저 깃발을 꽂았다”고 말했다.

 

인도에서 우주 산업은 큰 인기가 없었다. 젊은 이공계 인재들은 경제적 성공을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로 건너갔다. 미국·러시아가 초대형 로켓을 쏘아 올리고, 국제우주정거장을 만드는 동안 인도는 천문학적 돈이 들어가는 우주 탐사 대신 소형 위성을 대신 발사해주는 대행 사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인도 경제가 급성장하자 우주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지난 2014년에는 무인 탐사선을 화성 궤도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탐사선은 예정된 임무 기간을 넘겨 지난해까지 8년 동안 화성 주위를 돌며 표면을 촬영해 지구로 전송했다. 첫 발사 시도에 화성 궤도 진입까지 성공시킨 건 인도가 처음이었다.

 

 ▲23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에서 시민들이 무인 달 탐사선 찬드라얀 3호의 달 남극 착륙에 기뻐하고 있다. 찬드라얀 3호는 이날 오후 6시 4분께 달 남극에 착륙했다. 달 남극에 착륙하기는 인도가 처음이다./AFP 연합뉴스

 

인도 우주 기술의 빠른 발전에는 풍부한 이공계 인력이 있다. 현재 인도에서 항공 우주 연구직은 인공지능(AI), 컴퓨터공학 분야보다 연봉이 높다. 인도우주연구기구(ISRO) 인력은 1만7000여 명으로 미 항공우주국(NASA·1만7396명)과 맞먹는다. 전통의 우주 강국 독일(8444명)이나 프랑스(2400명)보다 많고, 한국(1039명)의 16배 수준이다. NASA에 소속된 우주 엔지니어의 30%가 인도계라는 분석도 있다. 인도 IIT(인도공과대), 로욜라대학 등 이공계 대학들은 미국 아이비리그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스트 신분제가 여전히 엄격하지만 우주 산업에선 신분, 성별 차별이 없다. 무조건 최고 실력을 가진 인재를 등용하는 식이다. 찬드라얀 3호 발사와 착륙 등 인도의 달 탐사 사업을 이끈 최고 책임자는 여성인 리투 카리드할 ISRO 우주개발국장이다. 카리드할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교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다. 독학으로 학업을 마치고 항공우주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주선 궤도 비행과 위성 교신 분야 전문가로 인도 현지에선 ‘로켓 우먼’으로 불리는 국민적 영웅이다. 인디아타임스는 “카리드할 박사는 인도 여성을 이공계로 이끄는 최고의 롤 모델”이라고 했다. 지난 2019년 달 탐사선 찬드라얀 2호 발사 사업도 여성 연구원이 책임자였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한 개발자의 3분의 1이 여성이었다.

 

▲카리드할 ISRO 국장

 

◇우주 영화보다 적은 예산으로 발사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면서 고품질의 위성·발사체를 만드는 제조 노하우를 갖고 있다. 이번에 달 남극 착륙에 성공한 찬드라얀 3호의 개발 비용은 7500만달러(약 900억원)였다. 우주를 배경으로 제작한 할리우드 영화 ‘인터스텔라’(2014년 개봉)의 제작비(1억6500만달러·약 2180억원)의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이다. 미국은 최근 달 탐사선을 쏘아 올릴 로켓 실험 발사에만 5000억원이 넘는 돈을 썼다. 인도판 ‘가성비 전략’인 ‘주가드(Jugaad) 정신’이 우주 강국으로 오르는 데 한몫한 것이다. 주가드는 힌디어로 ‘예기치 못한 위기 속에서 즉흥적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항공우주연구원 관계자는 “한번 사용한 로켓을 다시 사용하는 미국 스페이스X의 재사용 로켓 기술도 원조는 인도”라며 “한국에서는 한번 발사에 실패하면 재정적 부담이 크지만 인도에서는 1년에도 40~50번 로켓 발사가 이뤄져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강하다”라고 말했다.

한정된 개발 예산 내에서 세계적 수준의 탐사선을 개발한 배경에는 인도 특유의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된 기질적 요인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최대 인구(14억), 상수도·도로 등 사회 인프라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니 자연스레 생존력과 적응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경쟁이 인도인들을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자로 만든 셈이다. 교육을 통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열망이 커 자녀 교육열도 높고 공학은 성공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진로로 꼽힌다.

 

◇우주 산업에서 美와 손 잡아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반사이익도 얻고 있다. 지난 6월 NASA와 미국의 유인 달 탐사 사업인 아르테미스에 참여하는 협약을 맺었고, 러시아에 의존하던 우주비행사 훈련을 미국에 의뢰하기로 했다. 한 우주 산업 전문가는 “인도는 최근 미국과 우주 기술 동맹을 맺어 강력한 우군을 확보했다”며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인구 보유국이 되면서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중국과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최인준 기자

 

08-28 부동산에 의존한 中 성장 전략의 종언

문희수 논설위원

지방정부·기업 심각한 빚더미
빚 늘려 빚 갚는 구조조정 악순환
가계는 소비 줄여 저축 ‘디플레’

“40년 성장 모델 한계” 평가 일색
중국 떠나는 글로벌 업체 줄 이어
시진핑 리스크, 저무는 G2 시대

중국의 부동산 위기가 확대일로다. 2021년 헝다를 필두로 완다, 비구이위안 등 1∼3위 부동산 개발업체가 모두 유동성 위기다. 금융 쪽으로도 번지는 양상이다. 이번 위기는 그동안 누적돼 왔던 중국 경제의 고질적인 병폐들을 환기시킨다. 무엇보다 부동산에 너무 의존하고 있는 경제 자체가 문제다. 부동산이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0%나 차지한다. 특히, 지방정부는 세수의 40%를 의존하고 있다. 집값이 급락하면 거품이 터질 수밖에 없다.

실제 지방정부·기업 모두 부채가 심각하다. 지방정부는 산하 페이퍼컴퍼니의 자금 조달까지 합친 총부채가 지난해 명목 GDP 대비 130%를 넘는다는 게 골드만삭스의 분석이다. 중앙정부 부채까지 합치면 GDP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GDP 대비 기업 부채 비율은 지난해 3분기 158%다. 2020년 사상 최고치인 162%에서 2021년 152%로 떨어졌지만, 부동산 개발업체 중심으로 은행 대출이 다시 늘면서 악화했다. 가계 부채는 올 6월 63% 수준이지만 자산의 70%인 부동산이 급락한 만큼 나빠질 가능성이 짙다. 특히 가계가 경기 침체 속에서 소비를 줄여 저축을 늘린 결과, 소비자물가가 마이너스로까지 추락해 일본식 장기 디플레이션 우려를 사는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런민은행은 기업과 지방정부에 유동성을 더 늘려 주려고 기준금리를 낮추고, 지방채 발행량을 확대했다. 빚을 더 내 빚을 갚으라는 식이다. 중국은 2008년 글로벌 위기에 대응해 유동성을 너무 풀어 지금 같은 빚더미에 오른 것인데, 또 부채를 늘리는 구조조정을 반복하며 오히려 화를 더 키울 태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중국의 40년 호황은 끝났다고 평가했다. 부동산 개발과 사회간접자본 투자로 성장해 왔던 전략은 이제 안 통한다는 지적이다. 미국과 유럽 석학들도 대부분 한계가 왔다고 동감한다. 실제 이미 중국 대도시 주택 공급 물량의 20%는 비어 있고, 지방 중소도시에도 집 지을 곳이 없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3%대로 둔화된 성장률이 2030년엔 2%로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제기되는 정도다.

글로벌 기업이 줄줄이 중국을 떠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본 미쓰비시·마쓰다, 영국 반도체 기업 ARM, 미국 보잉 등이 철수를 결정했거나 추진하고 있다. 현대차 역시 해외 생산기지의 중심축을 중국에서 인도로 옮기기 위해 중국 공장 매각에 착수했다. 롯데케미칼 등 다른 업종의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들도 철수 작업을 마쳤거나 짐을 쌀 준비를 하고 있다. 업계에선 “중국 탈출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중국은 사면초가다. 대내적으로는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이른바 ‘공동부유’로 기업과 자산가를 억압한다. 투자·수출 부진에 직격탄이다. 대외적으로도 올해로 10년째인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경우 투자 자금을 지원받은 아시아·아프리카 등 저개발국가에 부채만 늘려 중국의 부실 채권이 급증하는 등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도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 특성상, 부동산 위기가 글로벌 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업이 부도 나도 국영기업에 인수시키면 그만인 경제다. 그렇지만 중국이 경제 대란을 피하더라도, 글로벌 신인도와 위상 추락은 불가피하다. 중국이 우주항공, 양자, 드론, 전기차 및 배터리 등을 비롯한 산업 경쟁력을 키운 것은 분명하다. 일부 미래산업에선 미국을 앞설 정도다. 그러나 미국이 공급망 개편 과정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첨단기술과 돈줄을 통제하는 현실에서 중국의 산업 업그레이드는 더 진전하기 어렵다. 대만의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인 TSMC의 창립자인 모리스 창 전 회장이 부동산 위기 전부터 중국은 반도체 전쟁에서 미국을 못 이긴다고 단언했던 게 단적인 사례다. 중국이 미래 성장성에 대한 국제적 불신과 우려감을 해소하지 못하면 시진핑 체제의 리스크는 점점 커지고, 기업들의 탈중국은 가속화할 것이다. 미·중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세계 경제를 이끄는 G2 시대가 이제 저물어 간다는 인상도 준다. 글로벌 패러다임의 대전환에 대응해야 한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