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雜事(한국사) 2023-2/ 월간조선 07월 호 제헌국회 회의록으로 본 건국 - 08.29 한국의 독립 첫 선언…일본이 점령한 동남아는 왜 빠졌나
역사속의 雜事(한국사) 2023-2/
월간조선 07월 호
《오늘이 온다 - 제헌국회 회의록 속의 건국》 펴낸 권기돈 박사
“나라의 길을 만드시느라 애쓰신 제헌의원들… 눈물을 흘렸다”
⊙ 이승만, “필리핀은 헌법 만드는 데 사흘밖에 안 걸렸다”며 재촉
⊙ “‘조그마한 행위까지 전부 다 친일 행위라고 하면 우리 어여쁜 고운 소녀들도 친일파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던 신익희의 말에 가슴 찡해”
⊙ “건국 초에는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의 운명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 계속… 6·25 거치면서 반석에 올라”
⊙ “학자들, 속기록만 읽었어도 저지르지 않았을 오류 너무 많아”
▲권기돈 박사
조작(操作)이 진실을 대체하고 나아가 진실처럼 유통되는 사회는 희망이 부재하다. 사회 전체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기 때문이다. 링컨이 말하지 않았는가. ‘대중을 단기간 속일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조작된 진실’은 국경을 넘는 순간 힘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진실의 순간’은 언젠가는 온다. 반드시 온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 그동안의 역사적 부채(負債)를 이자까지 쳐서 모두 갚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왜곡을 막는 일은 그래서 우리가 치러야 할 정신적·사회적 빚을 없애는 일과 마찬가지다. 진실을 밝히려면 디테일이 중요하다. 디테일이 깃든 진실로 반박하면, 거짓과 소문이 진실의 자리를 대치하는 사고는 일어나지 못한다. 제헌절을 앞두고 권기돈(權奇敦·60) 박사를 만난 것은 그래서이다.
●제헌국회 회의록으로 본 건국
권 박사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위스콘신메디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실 선임행정관,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원장 등 공직 경험도 있다. 최근에 《오늘이 온다 - 제헌국회 회의록 속의 건국》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제헌의원(制憲議員)들의 목소리가 원음 그대로 담겨 있고, 당대의 상황을 해설하는 저자의 목소리와 논평이 병진하는 책이다. 자료 읽기와 숙성의 기간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웅변하는 역작이다.
―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제헌국회 속기록을 읽는 모임이 있었는데요, 거기에 제가 객원으로 참여를 하게 됐습니다. 한 4~5년 전 이야기입니다.”
― 굉장히 디테일한 접근을 했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이전의 역사책, 학자들의 저술은 말하자면 큰 붓으로 굵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구조죠. 저는 이야기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세부 묘사도 있어야 하니까 디테일을 살린 겁니다. 속기록을 알리자는 목적도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제헌국회 의원들의 발언을 많이 소개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주 세밀하게 이야기를 하면 당시 역사를 재미있게 살펴볼 수 있거든요.”
― 책을 쓰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어떤 겁니까.
“발언을 그대로 옮긴 부분이 꽤 됩니다. 그런데 맥락이 공유가 안 돼 그 발언이 왜 나왔는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종종 나왔어요. 그래서 어떤 때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 추측해야 했습니다. 도저히 이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럴 때는 영어로 하면 ‘베스트 게스(best guess)’죠. ‘베스트 게스’로 발언을 추측하고 재구성해 하나의 스토리로 엮었습니다. 이런 과정은 아주 재미있지만, 시간이 꽤 걸렸어요. 발언 자체만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당시 신문기사 등 주변 자료를 참조하면서 읽어나갔기 때문에 제 짐작이 거의 맞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확신합니다. 특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발언 가운데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았습니다.”
이승만의 고민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했다. 최고령자인 이승만 박사가 임시 의장을 거쳐 초대 국회의장이 됐다. 사진=조선DB
― 무슨 뜻입니까.
“1948년에서 50년의 시기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정부는 세웠지만 남로당의 사회 파괴 활동은 일상이었고, 삼팔선에서는 매일같이 교전이 일어났죠. 이것만이 아닙니다.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일본도 호의적이 아니었고요. 그러니까 하루하루가 대한민국의 생존이 걸려 있는 만성적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니까,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해결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하루가 모자랐을 겁니다.”
― 우남(雩南)은 스스로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등 업무량이 살인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죠.
“그렇습니다. 본인이 끊임없이 영어로 글을 써야 했고, 외신과의 인터뷰며 온갖 걸 다 하고 있는데, 국회에서는 자기가 보기에 아주 사소한 일 가지고 자꾸 장관들 오라고 하고 어떤 때는 대통령보고도 오라고 하고 자주 시비를 거니까 어느 날 국회에 나와서 살짝 우물쭈물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제 생각에는, ‘나라의 생존이 달려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런 작은 일 가지고 왜 이렇게 장시간 논의를 하느냐’, 이런 의미인 것 같은데….”
― 국사책을 보면, 1948년 5·10 총선 이후 국회에서 7월 17일 헌법이 만들어지고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렇게 간략하게 묘사돼 있는데, 《오늘이 온다》를 읽어보면 그사이에 파란만장(波瀾萬丈) 우여곡절(迂餘曲折)이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당시 가장 시급했던 것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죠. 정부를 빨리 구성해 유엔총회에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됐다는 걸 알리고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건국 결정을 했으니까요. 승인 신청을 한 시점은 9월 20~21일경입니다.”
― 시간이 부족했겠네요.
“네. 먼저 헌법을 만든 뒤 그 헌법에 따라서 대통령을 뽑고 내각을 구성하고 사법부를 구성하고 그다음에 한미행정협정을 통해서 미군정(美軍政)으로부터 행정권을 공식적으로 이양받아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하는 거였죠. 그래야 유엔에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알릴 수도 있었고요. 5월 10일 총선거부터 기산하면, 불과 넉 달 사이에 이 모든 절차를 다 마쳐야 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제헌국회 의원들은 나름 청사에 길이 빛날 좋은 헌법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원칙에 대해 토론하고 조문을 검토하고 심의하는 데 시간을 꽤 썼어요. 이승만 대통령이나 당시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던 신익희(申翼熙), 김성수(金性洙) 이런 분들 입장에서는 빨리 헌법을 만들고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무한정 토론만 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당시 국회의장이 ‘이럴 틈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매일 합니다. 심지어는 ‘필리핀은 헌법 만드는 데 사흘밖에 안 걸렸다. 우리도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한다’ 등의 이야기도 하죠.”
― 대통령 선출 이전엔 우남이 국회의장이었죠?
“네. 당시 연세가 73세로 최고령 제헌국회 의원이었는데, 그 연세에 국회의장으로서 하루 종일 사회를 보기가 너무 힘들잖아요.”
― 그렇죠.
“그래서 당시 부의장이던 신익희나 김동원(金東元) 같은 분들에게 사회를 맡기다가 조금 지체가 된다 싶으면 우남 본인이 직접 의장으로서 사회를 보면서 빨리 의사 진행을 했던 겁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
▲김약수
―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제헌의원 가운데 제 개인적으로는 세 사람 정도가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 저희는 1948년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알기 때문에 발언록을 읽으며 ‘이 사람이 이때 이래서 이렇게 발언했구나’라는 추측이 가능한데요, 김약수(金若水) 의원, 최태규 의원은 훗날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됩니다. 특히 최태규 의원은 6·25 때 탈옥해 자진 월북(越北)까지 하죠.
“이 사람들의 발언을 보면 좀 묘한 데가 있습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핵심은 노일환, 그다음에 이문원 이 두 의원입니다. 남로당 출신 간첩과 접촉해, 노일환은 돈 받은 사실까지 다 실토합니다. 의원 10여 명 정도가 더 연루돼 있었는데 다 경중에 맞게 처벌을 받습니다.”
― 이문원, 노일환 의원은 소장파 아니었나요?
“그렇죠. 30대 중반, 40대 초반이었습니다. 김약수 의원을 말씀하셨는데, 김 의원 같은 경우는 일제(日帝) 시대 때 좌익 쪽에 속해 있었죠. 이 사람은 지명도는 높았지만 대단한 간첩은 아니고 나이도 많았어요. 제가 아는 한 교수님의 판단에 따르면, 이 사람은 개인적인 야심이 커서 소장파의 리더로 활동했다더군요. ‘자기의 정치적 중량감을 불리기 위해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을까?’라는 해석이죠. 6·25 당시 인민군이 파옥(破獄)했을 때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금됐던 의원 중 서용길 의원 한 사람 빼곤 다 북한으로 올라갑니다.”
― 이념에 따른 선택을 한 거네요.
“글쎄요. 하지만 북한으로 자진해서 올라간 건 팩트죠. 남쪽에 계속 있으면 어떤 위험에 처할 거라는 판단 때문에 월북한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한데, 어쨌든 서용길 의원은 남한에 남아서 전후(戰後)에 재심 요청을 합니다. 자기는 무죄라고. 그런데 기록이 다 없어져서 재심이 불가능했어요. 이분은 나중에 고려대학교인가 어느 대학교 교수로 일합니다.”
― 국회 프락치 사건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이문원과 노일환이 핵심이고, 나머지는 이 둘이 주도하는 모임에 몇 번 나간 게 화근이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최태규는 북한에 가서 1999년인가 자서전 비슷한 책을 썼는데 거짓말과 과장을 많이 섞어 이승만을 맹비난했더군요.”
소장파 리더 노일환
― 노일환 같은 경우에는 국회 개원 초부터 매우 적극적으로 발언을 하고, 특히 이승만 박사를 노골적으로 비난한 대목도 여럿 있더군요.
“네. 이 사람이 《동아일보》 기자 출신입니다. 당시에 34세인가 35세 정도였는데 4·3사건을 직접 취재해 생생한 기사를 남기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한 판단도 참 다릅니다. 이 사람이 남로당과 만나서 거금을 받기도 하지만, 남로당 지하당 임시 최고지도자도 하고 1957년 북한을 탈출, 일본으로 망명한 박갑동(朴甲東)이 쓴 책을 보면 ‘노일환은 빨갱이가 아니었다’라는 대목이 있어요. 아무튼 노일환은 개원 초기부터 과격한 발언을 많이 합니다. 엄청나게 똑똑한 건 사실인 것 같아요. 발언이 논리 정연하고, 거의 할아버지 격인 이승만 대통령이 출석해 있는데도 우남을 천황에 비유하면서 당당하게 발언합니다.”
노일환이 이 발언을 할 때 플로어의 분위기는 격앙 그 자체였다. ‘저 자식 끌어내려라!’ 등의 발언이 많이 나왔다. 이승만은 의연했다.
‘왜들 그러느냐, 말을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해야지 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느냐’라면서 분위기를 수습한다. 젊은 의원의 결기도 대단하고, 그걸 받아주는 이승만의 풍모도 대단하다.
“노일환이 남로당 측하고 직접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때는 1949년 2월 들어서입니다. 그때부터 상당히 강경한 발언이 이어집니다. 나중에 프락치 사건하고 연관 지어 생각하면, 이때부터는 사전 모의를 하고 강경 발언을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
▲조헌영 의원
처음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가 어떤 계기로 돌아서는 의원이 있다. 조헌영(趙憲永) 의원이다.
“조헌영 의원은 굉장히 놀라운 분입니다. 이분 아드님이 청록파(靑鹿派) 시인이자 절창(絶唱) ‘승무(僧舞)’로 유명한 조지훈 시인입니다. 조헌영 의원은 경북 영양에서 출마했죠.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또 한의학도 전공했습니다. 6·25 중에 납북되어서 북한에서는 조평통 위원장까지 지냈습니다. 역량이 아주 탁월한 한민당 중진 중 한 명이었는데, 제헌국회 시절에는 원내 교섭단체 제도가 없어서 의원들이 무제한으로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의 법조문을 두고 무한정 토론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논의가 방향을 잃고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조헌영 의원이 나타나서 엉킨 실타래 풀어내듯이 쾌도난마(快刀亂麻)로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중도에 가까운 리버럴이었습니다.”
― 그 점이 발언에서 드러납니까.
“그렇죠.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노선에 따르지만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간다든지 이런 점이 보이면 태클을 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분은 좀 불행한 정치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대 자체가 중도의 입장을 잘 허용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이분의 주장은 맥없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國父)의 입장에서 특정 정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승만이 국회에 나와 “나는 정파를 초월하려고 한다”라고 발언하자 조헌영은 “당신도 독촉 그러니까 대한독립촉성중앙회(大韓獨立促成中央會)라는 당파의 수령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당파 소속”이라고 반박한다. 조헌영은 1950년 1월 한민당을 탈당한다. ‘파당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이 탈당의 변이다.
“조헌영 의원은 진정한 ‘무소속’의 효시입니다. 이승만 노선에 무작정 찬성하지도, 그렇다고 소장파 노선에 무조건 찬성한 것도 아닌 뚜렷한 정치적 신념을 보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조헌영 의원 탈당 후 몇 달이 지나 무소속 그룹이 형성되었는데, 곽상훈 의원의 탈당 성명이 조 의원 성명과 내용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제헌국회 시기에 대한민국이 잃었던 분들 중에 아까운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닙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조헌영 의원과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을 꼽습니다.”
“반민특위는 세계관의 충돌”
― 저는 이 책이 대한민국 건국사를 그린 매우 세밀한 벽화이자 기록화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권 박사께서 조금 자제를 했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든 대목이 반민특위(反民特委)를 기술한 대목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반민특위는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도 워낙 뜨거운 감자 아닙니까? 그래서 제 가치 판단을 많이 집어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민특위는 두 가지 양립하는 세계관의 충돌이죠. 일제 시대가 끝났으니 민족정기를 세워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고, 또 건국이라는,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정의감을 앞세우다가는 생존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말도 옳으니까요. 지금도 판단이 쉽지 않은데, 당대 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 그래도 개인적인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 이 가치관이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습니까? 각자 명분이 확실하니까요. 반민특위도 이런 가치관의 대립인데 저는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반민특위가 다소 많이 나갔다는 생각을 합니다.”
권기돈 박사가 공감한 의견은 신익희 국회의장의 발언이다.
“신 의장의 판단과 논리가 가장 설득력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 ‘민족정기를 세우는 작업은 언젠간 반드시 해야 한다. 언젠간 꼭 해야 하고, 이것을 미루면 미룰수록 이 나라에 더 해롭다. 하지만 일제는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다. 이것을 조그마한 행위까지 전부 다 친일 행위라고 하면 우리 어여쁜 고운 소녀들도 친일파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대표적이고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던 일부를 처단하는 데 그쳐야 한다.’ 이 발언을 접하며 가슴이 찡했습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
― 가슴이 찡했다고요?
“인간이란 존재는 굉장히 약한 존재입니다. 외부에서 압도적인 물리력이 강제하면 비겁해지기 쉽습니다. 이건 사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가 있죠. 물론 목숨을 걸고 버티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정말 예외적인 일부에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압도적인 물리력 앞에서 움츠러들고 어느 정도 비겁해지기 마련인데,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곤란하죠. 후세 사람들이 마치 자기는 저항할 수 있을 것처럼, 최대한 정의(正義)를 펼칠 수 있을 것처럼 가정하고 앞 시대 사람들을 재단(裁斷)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는 것이 제가 이해한 신익희 선생 말씀의 핵심입니다.”
복거일(卜鉅一)의 역저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도 반민특위 이야기가 나온다. ‘반민특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혐의 혹은 무죄로 풀려난 것은 정의의 미실현이 아니고 오히려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의 놀라운 성취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법적 절차에 따라 단죄했고, 둘째 심증은 가지만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는 죄를 줄 수 없다는 판결이 속출했다는 이유에서다. 법치국가의 형식과 절차가 현대적 의미에서 지켜졌다는 뜻이다.
법의 논리 vs 정치 논리
▲1948년 9월 22일 발효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체포된 친일파들이 포승에 묶여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조선DB
“과거사 청산, 친일 청산이라는 건 근본적으로 정치적 행위입니다. 하지만 처벌을 하고 형(刑)을 주고 이런 것은 실정법에 기반해야 하는 법적인 행위죠. 그러니까 정치 논리와 법의 논리가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과거사 청산이나 친일파 청산은 그래서 법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야말로 마녀사냥으로 진행하기 십상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반민특위 내에서도 그것 가지고 그러니까 특별검사와 특별재판소 사이에 논란이 일어납니다. 두 기관이 판단이 달랐던 겁니다. 특별재판부의 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선생이었고 특별검사장은 당시 권승열(權承烈) 검찰총장이었는데, 문제는 방금 이야기했던 노일환 의원이 특검 차장을 했다는 점입니다. 화신백화점 대표 박흥식이 친일파 1호로 구속이 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는데, 그것 가지고 특재와 특검이 국회에 나와서 또 논쟁을 하죠.”
반민특위 내에서도 견해가 달랐다는 뜻이다. 노일환 같은 경우는 정치 논리를, 김병로 같은 경우는 법의 논리를 앞세운 경우다.
“소장파 김옥주 의원 등이 ‘지금 친일파 청산하는데 특재가 뭐 하고 있느냐!’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니까 가인(街人·김병로의 호)이 ‘그러면 법을 새로 만들어라. 그래야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처벌이 가능하다. 지금 법은 그렇게 만들어놓고 실정법 어겨가면서 처벌하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맞부딪칩니다. 반민법과 반민특위 조직법을 만들고 법에 따라서 친일파 재판을 하다 보니까, 정치의 논리에 따라서는 당연히 처벌돼야 될 사람들이 법의 논리에 따라서는 석방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건국 초 대한민국은 진정한 자주독립국이 아니었다”
▲1948년 5·10 총선 포스터. ‘총선거로 독립문은 열린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 사회학 박사이고 해방 공간의 역사를 초미시적(超微視的)으로 연구하셨는데 6·25의 의미는 어떻게 보십니까.
“당시 제헌의원 가운데 상당수는 남북한 사이에 전쟁은 불가피하지 않겠는가라고 많이들 느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정도로 풀스케일의 국제전이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죠. 미국조차도 그렇게는 생각 안 했으니까요. 6·25는 어떤 면에서 보면 거의 필연입니다.”
―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분단된 상태였고, 남이나 북이나 통일을 일종의 지상 과제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이승만 대통령도 대화나 협상에 의한 해결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었고….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무력 사용을 통해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남북한 지도자들이 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전쟁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가 있죠. 당시 제헌국회 의원들, 예를 들어 지청천 같은 사람도 국회 발언에서 ‘곧 전쟁 난다’라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거든요.”
― 휴전협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지만, 6·25 전쟁이 있었기에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지금의 경제대국 반석에 오르는 계기가 마련된 것 아닌가요? 남한 내부의 반체제 세력이 거의 정리가 된 점도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신생 대한민국이 1949년에 유엔의 승인을 받았지만, 제대로 된 승인까지는 아니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떤 의미냐?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다고 봅니다. 진정한 자주독립국이 아니고 여전히 유엔 관할하에 있는 자주독립국….”
권 박사는 당시의 상황을 ‘언제든지 독립을 원천 무효로 돌릴 수 있는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6·25전쟁 당시 국군의 북진(北進)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38선을 넘어갈 때 유엔군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 평양 시민들은 환영대회를 열고 이승만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대우했지만, 법적으로 이승만의 평양행은 개인 자격의 방문이었다.
“그러니까 38선 이남의 관할권은 가졌지만, 한반도 전체에 대해서는 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겁니다. 우리의 헌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다음에 1951년 봄부터 정전협정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이승만이 ‘죽어도 못 한다’고 버티니까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 제거 계획을 짜지 않습니까?”
― 에버레디 계획 말씀입니까.
“에버레디 계획 이전에,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기 전에 노골적으로 이승만 제거 작전을 펼칩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는 유엔총회 같은 데서 이승만 대통령을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차라리 유엔 신탁 통치를 하는 게 낫겠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1948년에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이 되었어도 사실은 여전히 유엔 관할하에 있는, 언제든지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는 그런 나라였던 거죠. 그런데 6·25가 일어나고 정전협정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끊임없이 유엔이든 미국이든 ‘내정 간섭하지 마라’며 피 터지게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6·25는 유엔총회건 미국이건 다시 신탁 통치로 간다든지 이런 구상을 할 수 없도록 만든 그런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좀 제 나름대로의 독단적인 해석입니다.”
―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 거듭났다는 말씀이네요.
“네. 한미동맹, 군사동맹이 장착돼 비로소 번영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거죠. 여기에 우리 국민 특유의 근면 성실함이 더해져 오늘날처럼 좋은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고요.”
“이승만, 한미동맹을 이중의 보호막으로 생각”
― 방금 한미동맹을 얘기하셨는데 한미동맹은 어떻게 보십니까.
“대한민국 생존의 주춧돌이죠. 어쨌든 사람이 일단 살아야 생존이든 번영이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북한군은 우리를 완전히 압도하는 물리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6·25 휴전 이후 미군 철수 시 북한의 재침략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죠. 그래서 북, 소련, 중공의 재침략을 막고 우리의 생존을 확보했다는 면에서 한미동맹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도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 뭡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일본의 재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는 것으로도 보았습니다. 이중(二重)의 보호막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일본의 재침략이 공산주의 침략 못지않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여겨졌어요. 그래서 미국과의 동맹이 없으면 일본이 언젠가 다시 들어온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기준에서 그런 견해를 100% 받아들이기는 힘들죠. 왜냐? 당시 일본은 완전히 미국 관할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한반도를 재침략한다든지 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싶지만 그런 위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권기돈 박사는 ‘문화전(文化戰)’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본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다시 침략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자기들의 경제적·문화적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작업이었다고 했다. 미국 국무부도 일본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려고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승만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발췌(拔萃) 개헌,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은 역사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시의 기준으로나 오늘의 기준으로 탈(脫)헌법적 행위인 건 맞습니다. 헌정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비난받아야 마땅한 행위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사오입 개헌 같은 경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만, 발췌 개헌 같은 경우는 단순히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연장만을 위해서 일으킨 사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 좀 더 설명을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아까 말씀하셨던 이승만 제거 계획, 미국이 실제로 에버레디 작전을 가동하기 시작했죠. 발췌 개헌을 앞두고 그러니까 부산 정치 파동을 앞두고 미국 국무부에서는 무초 대사를 시켜서 혹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 당시 한국군 일부 인사에게 공공연하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도 용인하겠다는 이야기였죠. 또 무초 대사도 김성수라든지, 야권 지도자에게 ‘우리는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반(半)공개적으로 했습니다. 어떤 비헌법적 수단에 의한 이승만 정부 전복을 부추기고 있었던 거죠. 이승만이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정전협정이 진행 중인데 말을 안 들으니까 그래서 부추긴 측면이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당시에 어떤 심정이었느냐, 이대로 가다가는 통일도 못 하고 우리 국민들이 그동안 흘린 핏값도 얻질 못한다, 영원히 분단이 될 것이다, 이렇게 느낀 겁니다. 이승만 서한집을 보면 당시 미국이 이승만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사람들이 조병옥(趙炳玉)하고 장면(張勉)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장면이나 조병옥이 집권하면 미국의 입장을 무조건 수용할 것’이라고 염려한 겁니다. 자신이 집권을 연장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운명은 위태로울 터이다, 이렇게 판단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의 생존을 자기 나름대로 확보하는 차원….”
― 사사오입 개헌에는 변명거리가 없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거의 없죠. 그래도 의미를 둔다면 제헌 헌법 이후 남아 있던 사회주의적 조항들을 제거한 사실이 있습니다. 근로자의 이익 균점권(均霑權)이라든가 그런 것을 삭제했는데, 경제 혁명까지는 아닙니다. 개헌 전에, 사회주의적인 귀속재산불하법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서 상당히 완화를 합니다. 의원들이 법조항에 의거해서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시장경제 정책에 태클을 많이 거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시행령 등을 통해서 우회하죠. 이미 자유시장경제 정책은 헌법이 아니더라도 실제 시행령을 통해서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이 문제는 제가 회의록 속기록을 더 자세히 읽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보학자들, 브루스 커밍스의 오류 그대로 재생산”
권 박사는 2차 문헌과 속기록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했다. 학술 저작 중에서도 오류를 많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 단순한 해석의 오류인가요? 아니면 인용 자체의 오류입니까.
“둘 다입니다. 예를 들면, 대한정치공작대 사건(1950)을 보죠. 미국 수정주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의 최종 배후는 이승만 혹은 최고 권력 상층부였다. 이 사건은 정권 차원의 기획으로, 목적은 김효석(金孝錫) 장관을 백성욱(白性郁) 장관으로 바꾸고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을 이범석(李範奭)으로 바꾸고…’ 뭐 이런 식으로 썼어요. 그런데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은 1950년 4월 초에 세상에 드러나거든요. 김효석 내무장관은 이미 2월 6일에 경질되었습니다. 한민당 입장에서 경찰 인사를 한다고 이승만 대통령이 백성욱 장관으로 교체하죠. 그리고 이범석 국무총리는 3월 말에 이미 사표를 낸 상태였어요. 그러니까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하는 바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거죠. 시기가 완전히 어긋나는데도 그렇게 주장합니다. 자료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우리나라 진보 쪽 학자들이 브루스 커밍스의 오류를 그대로 재생산해서 지금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학자들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에도 틀린 정보가 부지기수입니다. 속기록만 읽었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오류가 너무 많아요. 이런 식으로 학계에서 1차 사료를 보지 않고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면, 그 왜곡되거나 과장된 정보를 다른 사람이 인용하면서 정설로 굳어집니다.”
“집권 전략이 전부 개헌하고 연결”
― 제헌 과정을 정밀 관찰하신 분으로서 현행 헌법, 그러니까 1987년 체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5년 단임이 본질적으로는 임시 조치였다, 여야 타협의 산물이었다라는 분도 계시고 어쨌거나 당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는 분도 계시는데 벌써 30년 가까이 됐습니다.
“87년 체제에 대해 요즘은 부정적으로 많이 보지만 저는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1950년대에는 집권 전략이 전부 개헌하고 연결이 되더라고요. 여당이든 야당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처음에 간선제 대통령제로 시작했다가 재임하려고 직선제로 개헌하죠. 3선을 하려고 다시 개헌을 시도하고요. 민주당은 자기들이 집권하기 위해,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인기를 가진 이승만 대통령을 이기기는 어렵고, 그러니까 총리밖에 할 수 없고, 그래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계속 요구하죠. 또 자유당도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 ‘이승만 이후’를 대비해야 하니까 이기붕(李起鵬) 같은 경우는 의원내각제 개헌을 구상합니다. 그러니까 1950년대에는 집권이 곧 개헌으로 연결되는, 그러니까 개헌이 일상화한 불안정한 체제였어요. 박정희(朴正熙) 정부에서도 삼선 개헌과 유신헌법 개헌이 있었죠. 1980년대 초에는 일단 유신헌법하에서 대통령에 뽑힌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5공화국 헌법으로 개헌하고 7년 단임 시대를 시작합니다.”
― 헌정 중단이 꽤 많았네요.
“87년 이후로는 헌정 중단이 없었죠. 30년 동안 중간에 개헌하자는 목소리는 많았지만, 어쨌든 헌정적으로 안정을 이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5년 단임제는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개인적으로는 4년 중임제 개헌이 필요하지 않을까… 덧붙여 표의 등가성(等價性), 비례성 등을 고려하면 대통령 중임제에다가 비례 대표성을 좀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각제 개헌은 거의 불가능”
― 내각책임제 개헌은 어떻습니까.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미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제에 많이 익숙해졌거든요. 브라질도 내각책임제로 갔다가 국민들이 요청해서 다시 대통령제를 채택한 케이스입니다. 우리 헌정사도 이제 70년인데 내각제로 간다는 건 너무 큰 변화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을 고치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 알겠습니다. 마무리 질문입니다. 국회 속기록을 통해서 《오늘이 온다: 제헌국회 회의록 속에 건국》을 내셨는데 원사료(原史料)를 읽으시면서 혹은 집필하시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달까 울컥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어떤 대목입니까.
“맨 마지막 문장을 쓸 때 조금 울컥했습니다. 진짜로 나라의 길을 만드시느라고 애쓰신 전(全) 의원께 감사드립니다. 이건 정말 진심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프락치 의원이라든지, 예의 없이 막 나가는 소장파들도 있었죠. 아주 집요하게 정부를 물고 늘어지면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데, 정말 미웠습니다. ‘2년 후에 북한에서 쳐들어오는데 어떻게 저렇게 철없이 행동했을까?’ 이 생각을 하면서도, 어쨌든 그야말로 적수공권(赤手空拳),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물론 현행법이라는 게 존재했지만, 어쨌든 모든 법을 새로 써나가야 했고 모든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다 있는 상황에서 제도를 만들어 나가야 했으니까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뿌듯했습니다. 길을 내는 거잖습니까. 나라의 길을.”⊙
글 : 장원재 ㈜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스포츠의 역사
월간조선 07월 호
스포츠로 보는 전후 70년
‘서민의 청량제’ 프로 레슬링, ‘향토 축제’ 고교 야구
⊙ 프로 복싱은 개인적 차원에서 세계 정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선언적 스포츠’
⊙ ‘박스컵’ 축구대회는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와 어깨를 견주게 되었다는 대내외적 선언
⊙ 올림픽은 체제경쟁의 무대… 박정희, 한국체대 설립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헐러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한국 체육(體育)의 출발점은 구한말의 선교사 학교다. 체육은 전(前)근대적 백성이 근대적 국민으로 거듭나는 근대화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문학, 신극(新劇), 동요, 잡지, 신문 등과 마찬가지로, 체육은 계몽주의를 바탕에 깔고 ‘정신과 신체의 단련과 통제’라는 개념을 이 땅에 들여왔다. ‘엄정한 규칙과 규칙 내의 질서 있는 경쟁’이라는 화두(話頭)도 신선했다. 운동회라는 제도, 운동회의 운영 방식, 맨손 체조(體操), 각종 경기와 경기 도구는 그래서 전근대적 백성을 근대적 시민으로 변모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체육이 근대문명(近代文明)과 동의어였던 이유다.
근대는 서양 문명이 전 세계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다. 유럽과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타(他) 대륙을 압도했다. 무기의 발명과 산업혁명이 타 문화권 나라들을 식민화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 둘을 가능하도록 만든 저변(低邊)은 과학기술이다. 그렇다. 근대는 ‘자연과학의 시대’였다. ‘과학’이 다른 모든 방법론보다 우월하다고 모두가 믿던 시대다. 체육과 스포츠는 인간 신체를 단련하는 과학적 방법론이자 그 성취도를 계량하는 과학적 측정법이기도 했다. 의학과 더불어, ‘인간의 몸’을 중심에 놓고 펼치는 실체적 과학이었다. 그래서 체육은 곧 근대였다.
손기정이 안겨준 충격

▲손기정의 마라톤 세계 제패를 알린 《조선일보》 호외. 손 선수의 우승은 일제 하 한국인들에게 ‘한국인의 가능성’을 알려준 쾌거였다. 사진=조선DB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손기정의 우승과 남승룡의 동메달 획득은 민족사적 사건이다. 베를린올림픽은 이전까지 박람회의 일부처럼 열리던 올림픽 행사를 본격적인 스포츠 제전(祭典)으로 격상시킨 사실상의 첫 대회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나치 체제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개최, 홍보, 운영에 전력을 기울였다.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성화(聖火) 채화 등을 통해 상징성을 더했다. 이전까지 개인의 기량 대결이라는 성격이 더 강했던 올림픽은 1936년 베를린 대회 이후 지구 최대의 평화적 국가 대항전이라는 암묵적 의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베를린올림픽은 대회 이전부터 세계적 주목의 대상이었고, 가장 장거리를 달리는, 그래서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로 불리던 마라톤에서 식민지 조선 청년이 우승했다는 사실은 민족적 열패감(劣敗感)을 걷어내는 신호탄이기에 충분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권위 있는 대회, 세계 최고의 건각(健脚)들이 우승을 다툰 대회에서 우리가 1등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전 조선이 흥분했다. 《동아일보》 앞 광장에 모여 있던 군중은 ‘실황중계 속보’ 걸개가 내걸릴 때마다 환호작약(歡呼雀躍)했다. 가히 길거리 응원의 효시(嚆矢)라 할 만하다. 심훈(沈熏)이 우승 축시(祝詩)에서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族屬)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포효한 한마디가 당시의 정서를 웅변한다.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식민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군사력·경제력이 세계와 격차가 상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마라톤처럼, 그것도 세계 신기록으로 최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손기정과 남승룡의 성취는 장기적으로 실력을 기르면 우리도 세계 열강(列强)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또렷한 증거였다. 모두 다 납득하고 인정할 수 있는 업적이었다. 그래서 파장이 컸다. 우리 민족의 마인드 셋(mind set)이 대중적 차원에서 가장 극적으로, 가장 단기간에 바뀐 변곡점(變曲點)이다. 단순한 ‘올림픽 금메달, 동메달 각 1개’가 아니라는 말이다. 전후(戰後) 70년 동안의 한국 스포츠사는 바로 심훈이 손기정과 남승룡에게서 보았던 ‘한국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미제의 심장을 겨눈다는 심정으로…”
전후 70년의 스포츠를 이야기하자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시대는 스포츠를 육성하는 ‘정책’ 개념이 들어온 최초의 시대다. 제도, 법률 등을 만들고 체육학교, 선수촌 등을 세웠으며 국제대회 입상을 연금과 연계해 금전적 보상도 확실하게 했다. 계기는 올림픽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런던올림픽부터 선수단을 파견했다. 1964년 인스브루크동계올림픽에 사상 최초로 출전한 북한은 이후 참가하지 않다가 우여곡절 끝에 1972년 뮌헨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한다. 사격 이호준은 금메달 획득 후 호전적(好戰的) 수상 소감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수령님이 말씀하신 대로, 미제 털북숭이 심장을 겨눈다는 심정으로…” 운운. 명백한 스포츠 정신 위반이었다. IOC가 메달 박탈까지 고려했지만, 북한은 “통역 과정에서 오역(誤譯)이 있었다” “이호준이 현역 군인이라는 점을 감안해달라” “세계 신기록을 세운 나머지 흥분해서 그랬다”라고 스포츠 외교전을 펼치며 금메달을 지켰다.
남북이 직접 대결한 복싱 경기와 여자배구 3·4위전에서 대한민국이 모두 지고, 은메달(유도 오승립, 재일동포) 1개에 머물며 메달 레이스에서도 패하자 국민 사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국제 스포츠대회 성적이 체제 경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국가 주도의 체육 진흥 정책을 마련하게 된 배경이다.
체제 경쟁

▲1976년 8월 3일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양정모 선수와 정동구 코치. 양정모 선수는 건국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사진=조선DB
정책의 성과는 확실했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우리는 북한을 간발의 차로 제치며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는 건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민족적 여망을 실현했다. 한민족으로 범위를 넓히면 손기정, 새미 리(다이빙/미국), 이호준, 넬리 킴(체조/소련)에 이은 다섯 번째 금메달리스트다.
올림픽이 끝난 후 청와대를 예방한 자리에서 “동독(東獨)과 같은 작은 국가도 금메달을 많이 따는데 대한민국은 왜 금메달을 못 따느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질문이 나왔다. “그들은 국립체육대학이 있어서 과학적인 훈련을 합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정동구 코치다. 1972년 정부가 예산 절감을 이유로 ‘소수정예’의 파견을 결정한 탓에 양정모의 뮌헨행은 무위로 돌아갔다. 은퇴하겠다는 양정모를 “4년 후에는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올림픽에 보내주마”라고 설득, 다시 매트로 불러낸 사람이 바로 정동구 코치다. 정동구가 없었다면 양정모도, 금메달도 없었다. 그래서 정동구는 대통령 앞에서 당당하게 소신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국립체육대학 설립을 지시했고, 그해 12월 30일 대통령령 제8322호에 따라 한국체육대학교를 설립했다. 한체대는 1977년 3월 19일 개교, 14개 종목 120명을 전원 체육특기자로 선발하며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렸다. 설립 목적은 ‘심신이 조화를 이루는 전문 체육인과 국위(國威) 선양을 위한 우수선수 양성’이었다. 이후 한국체대는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수많은 금메달을 획득하며 전 세계 스포츠의 지형을 바꾼다.
대한민국은 1980년대 들어 더욱 북한과 격차를 벌렸고, 1990년대 이후로는 경쟁의 층위 자체를 바꿨다. 북한은 이제 더 이상 한국과 비슷한 레벨에서 경쟁하는 상대가 아니다. 남북의 경제력 차이가 벌어지던 시점과 국제 스포츠대회 성적 사이에는 의미 있는 비례관계가 있는 것이다.
스포츠는 산업이다
현대사회에서 스포츠는, 축구 한 종목만을 보더라도 보험 산업과 자동차 산업 사이에 자리한 11번째 규모의 거대 산업이다. 2023년 현재 한국은 야구, 축구, 농구, 배구 등 여러 종목의 프로 스포츠 리그를 운영하는 선진국이다. 단, 산업화의 측면에서 보자면, 발아기를 거쳐 부흥기를 지나 성숙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이다. 프로 스포츠 창립 40주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는 영업이익을 내고 흑자를 달성한 구단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는 한 사회가 ‘전문 기능 체육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야 비로소 성립한다. 이 점은 왜 중요한가. 다양한 재능을 다양하게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복지사회이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어도 재능을 발휘할 무대가 없는 사회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만약 펠레나 메시가 조선 시대 이 땅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들은 ‘몸이 날랜 일꾼’ 정도로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박세리가 1950년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녀의 재능은 가부장적 분위기와 골프의 존재가 희미했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며 아예 능력과 재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아시아권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가장 오래전부터 열렸고 정기성(定期性)을 훼손하지 않은 대회가 있다. 1959년부터 시작, 2년마다 열리는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다. 요즘에는 U-20 아시안컵으로 불린다. 20세 이하라면 그래도 당사자가 직접 생계를 해결하지 않고 살아가는 나이다. 연령대를 속이면 경기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기에, 실력 이상의 상위 입상도 가능하다. 이 두 점이 맞물린 결과가 아시아 청소년 축구의 번성이다. 성인이 운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아무리 빛나는 재능도 쓸모가 없다. 그래서 프로 스포츠가 발전한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복지가 발달한 사회다. 1970년대의 한국은 프로 스포츠를 유지할 사회·경제적 토대를 아직은 마련하지 못한 나라였다. 그래도 씨앗은 뿌렸다.
‘엽전의식’ 날려버린 프로 복싱

▲한국 최초의 프로 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 프로 복싱을 통해 개발연대 한국인들은 ‘엽전의식’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사진=조선DB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세계에 널리 알린 종목은 프로 복싱이다. ‘엽전’이라며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던 시절, 김기수(金基洙), 홍수환(洪秀煥), 유제두(柳濟斗) 등이 대표한 프로 복싱은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도 얼마든지 세계 정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선언적 스포츠’였다. 민족적 패배감을 희석시키는 제의(祭儀)였다. 함경도 태생으로 1·4후퇴 때 월남(越南)해 전라남도에 터를 잡은 김기수는 아마추어 전적이 87승 1패다. 그 1패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홈링의 니노 벤베누티에게 당한 것이다.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WBA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매치는 국내에서 벌어진 사상 최초의 세계 선수권전이다. 챔피언을 불러올 파이트머니가 모자라 정부가 지급보증하며 경기를 성사시켰다. 링사이드에 임석한 박 대통령 내외 앞에서 김기수는 15회 판정으로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 이 경기는 아마추어, 프로를 통틀어 벤베누티가 당한 첫 패배다. 명동에 있던 한국권투위원회에서 계체량을 마치고 벤베누티는 인근 이탈리아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스파게티가 아주 맛있다”가 챔피언의 소감이었다. 이렇게 사소한 발언 하나하나가 다 언론에 나올 만큼 이 이벤트는 범(汎)국민적 관심사였다. 이 경기 실황을 담은 기록 영화가 만들어져 전국 영화관에서 개봉했다. 15라운드 경기 실황을 거의 그대로 담은 필름이다.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률이 높지 않았기에 몇 달의 시차를 두고 상영해도 대중이 생중계에 준하는 실황중계(實況中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다.
기록 영화가 있다면 기록 연극도 있다. 1936년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동양극장에서 극단 청춘좌(靑春座)가 공연한 〈마라손왕 손기정(孫基禎)군 만세〉다. 8월 9일 손기정이 우승했으니, 당대 감각으로는 초스피드로 작품을 만들어 무대에 올린 셈이다.
8월 9일은 한국 스포츠가 잊지 못하는 날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56년 만에 우리 민족 두 번째로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건 황영조(黃永祚)가 몬주익 언덕을 내달리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날도 8월 9일이기 때문이다.
역도산과 김일
프로 복싱이 민족적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기제였다면, 한일(韓日) 사이의 민족적 콤플렉스를 씻는 종목은 프로 레슬링이었다. 첫판은 가벼운 승리. 둘째 판은 실력에 밀린 일본 선수가 반칙으로 우리 선수를 제압하며 부당하게 승리. 우리에겐 억울한 패배지만 심판은 일본 선수의 반칙을 모른 채 지나치고, 세 번째 판에서도 상황은 계속된다. 울분이 쌓일 대로 쌓여갈 무렵 관중이 목놓아 외치는 ‘박치기!’ 한마디에 불현듯 각성한 김일(金一)은 악당을 연이어 메다꽂으며 마침내 정의(正義)를 실현하기 시작한다. 관중과 전국의 시청자가 미친 듯이 열광했다.
김일은 본디 호남을 평정한 씨름꾼이었다. 1등상 황소를 휩쓸던 장사였다. 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더 큰 물에서 재능을 발휘하면 돈과 명예를 얻을 것만 같았다. 늘 전승(全勝)하다 16세 소년 장사에게 한판을 내주고 2대 1로 우승한 것도 도일(渡日)의 계기였다. 소년 장사의 이름은 김기수. 훗날의 복싱 세계챔피언, 바로 그 사람이다.
김일은 1956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러고 불법이민자 수용소에서 편지를 썼다. 수취인의 본명은 함경남도 홍원군이 고향인 김신락(金信洛). 역도산(力道山·1925~1963년)으로 알려진 남자다. 역도산(일본식 발음으로는 ‘리키도산’)은 스모 은퇴 후 일본 레슬링을 평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에 프로 레슬링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인기 흥행물로 만든 인물이다. 일본 프로 레슬링의 흥행은, 일정 부분 ‘미국에 대한 일본인의 민족적 콤플렉스’ 해소 기제로 볼 수 있다.
역도산은 미국 인맥을 활용, 당시 미국 및 여러 나라 레슬러를 일본으로 초청할 수 있는 유일한 프로모터였다. 인기몰이의 시발점은 1953년 설립한 일본프로레슬링협회다. 역도산은 불법이민자 수용소에 갇혀 있던 김일의 보증인이 된다. ‘스승 역도산과 제자 김일’의 시작이다.
1959년 데뷔한 김일의 일본 링네임은 오오키 킨타로(大木金太郞). 역도산의 3대 제자가 아이누족 자이언트 바바, 한반도의 김일, 그리고 브라질 일본 이민자의 후손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이노키’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대통령과 박치기왕
역도산 사후(死後), 1965년 김일의 귀국은 국내파 장영철과의 불가피한 주도권 다툼을 부른다. 그리고 장영철 사단의 천규덕이 김일 휘하로 이적한 사건은 뜻하지 않은 사회적 파장을 부른다. 장영철이 “프로 레슬링은 쇼다”라고 발언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얘기다. 천규덕의 이적 발표 이후 “그럼 제대로, 사전 약속 없이 붙자” 비슷한 말을 한 사실은 있다. 그래서 ‘그럼 그동안은 사전 약속이 있었다는 말이냐’라는 의문이 일었고, 여기서 ‘프로 레슬링은 쇼’라는 인식이 생겼다.
프로 레슬링은 처음엔 프로 복싱처럼 진지한 스포츠였다. 세계적 권위지 《링 매거진》이 복싱 랭킹 이외에 프로 레슬링 세계 랭킹을 발표할 정도였다. 미국 암흑가의 개입 이후 프로 레슬링의 담합 경기가 생겼고, 말을 안 듣는 선수들을 실력 있는 레슬러를 고용해 제압한 뒤 다시 타이틀을 인기인으로 밀어주는 선수에게 넘기는 과정을 거쳐 ‘사전 약속에 따라 진행하는 드라마’로 진화했다.
하지만 사전 약속 없이 진행되던 시절에도 치명적 부상을 부르는 기술은 절대 금기의 반칙이었다. ‘허용되는 반칙’과 ‘절대 금기의 반칙’이 있었던 것이다. 사전 약속에 따라 진행하는 경우에도, 그에 상응하는 신체적 단련이 없이는 다이내믹한 동작 구현이 불가능하다.
아무튼, 장영철과 천규덕의 실전 대결은 ‘스승을 차마 공격할 수 없었던’ 천규덕이 링에 올라 장영철의 당수 공격을 허용한 뒤, 링을 내려와 경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경기 전부터 분에 못 이겨 천규덕이 입장할 때까지 식식거리며 링을 돌던 장영철의 화난 표정은 올드팬들이 추억하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일본과 연계해 미국, 남미의 레슬러까지 초청하는 김일의 섭외력은 순식간에 그를 한국 프로 레슬링의 일인자로 만들었다. 장충체육관은 매주 인파로 미어터졌고, 텔레비전 생중계를 보던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의 명예를 빛내줘서 고맙소”라고 전화하면 “아닙니다, 각하! 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박치기왕의 화답이 이어졌다.
프로 복싱 경기장에 전화한 전두환
프로 레슬링은 당대 서민들의 고단한 일상을 위로하는 청량제였다. 열혈 정기 관람 관중 가운데는 유명인도 많았다. 당대의 톱스타 엄앵란은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체육관 출입이 잦았다. 그냥 본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면서 열정적으로 한국 선수들을 응원했다. 장내 아나운서가 “엄앵란씨, 조용히 좀 하세요”라고 조크성 멘트를 날릴 정도였다. 톱스타들은 레슬링 이외에 복싱 경기장 출입도 많이 했다. 해방 후 최고의 복서 강세철(康世哲)의 아들 허버트 강은 도금봉과 함께 살았고, 밴텀급 세계 2위 이원석(李元錫)의 후원회장은 최무룡 아니면 신성일이었다. 영화인들이 복서들을 후원하던 할리우드의 유행을 수입한 결과다.
어쩌면 이 현상은 근대 이행기의 풍경인지도 모른다. 당대 최고의 남성성(男性性)을 씨름판 장사로부터 구하던, 그래서 우승자의 샅바가 튼튼한 아들을 낳는 부적처럼 고가에 거래되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 이후엔 남성성의 상징이 복싱과 프로 레슬링으로 옮겨온 것이다. 레슬러는 장대했고 복서들은 견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격투기 관람에 취미가 있었다는 건 사실인 듯하다. 다만, 경호실에 근무하던 전두환(全斗煥)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과 TV 권투 중계를 같이 보며 “각하, 저 친구는 폼이 글렀습니다”라고 해설을 했다는 전설은 확인이 필요하다. 필자는 사실이라고 믿는다.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권투를 보다 현장으로 전화를 걸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81년 7월 19일 대구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챔피언 페드로 플로레스(멕시코) 대 김환진의 WBA 주니어 플라이급 타이틀매치. 10라운드가 끝나고 장내 아나운서가 “지금 대통령께서 청와대에서 이 경기를 보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고 방송했다. 관중은 함성으로 호응했고, 김환진은 13회 TKO로 세계 정상에 올라 국민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챔피언의 일성(一聲)은 “이 승리를 동생에게 바칩니다”! 반포 어디의 지하상가였던가, 서울에서 떡볶이집을 하며 자기를 뒷바라지한 여동생을 세계챔피언 오빠는 결정적인 순간에 잊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발전과 함께 성장한 대통령배축구대회

▲1971년 5월 2일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시축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스컵’은 한국의 성장을 세계에 알리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사진=조선DB
흔히 ‘박스컵’이라고 불렸던, 1971년에 처음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도 올드팬들의 머릿속에 선명한 기억을 남긴 행사다. 이 대회는 우리가 주빈(主賓)이 되어 다른 나라를 초대한 사상 첫 정기 국제스포츠 이벤트다. 이전까지, 우리가 중심이 되어 다른 나라를 정기적으로 초대하고 대접하며 이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참여를 권유한 행사는 없었다. 그래서 이 대회는 대한민국이 전화(戰禍)를 딛고 일어섰으며 생계 문제를 해결했고 따라서 당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나라와 어깨를 견주게 되었다는 대외(對外)·대내적(對內的) 선언이었다.
당시 아시아 각국은 프로 축구를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미비했다. 그래도 국가대표팀은 프로팀 수준으로 유지할 실력은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 태국의 킹스컵, 일본의 기린컵,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대회 등은 아시아 각국이 운영하던 순회 서키트 축구대회다.
‘박스컵’은 1975년부터 동남아팀 이외에 중동팀(이란, 바레인, 레바논 등), 1976년 브라질(상파울루주 선발), 뉴질랜드, 1977~1979년엔 영국 아마추어팀, 미국(북미프로리그 팀), 모로코 등 탈(脫) 아시아로 초대 손님을 늘린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특히 중화학 공업의 육성과 대통령배의 세계화가 시기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79년 9월 8일 한국에 8대 0으로 패한 기록은 아직까지도 수단 대표팀의 최다 점수 차 패배 기록이다. 전반에만 6대 0으로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지자 열혈 자칭 응원단장이 벌떡 일어나 관중석 앞으로 나왔다. “손님 대접이 이래서는 곤란하니 우리라도 수단을 응원합시다!” 수단 선수들도 우리의 의도를 알아야 하니 우리말 응원은 별무소용(別無所用). 그래서 즉석 회의 끝에 관중 일부가 연호한 구호가 “플레이 플레이 수단(Play Play Sudan)!”이다.
1981년엔 몰타, 리히텐슈타인 등 유럽 소국도 한국에 왔다. 당초 대한축구협회가 접촉한 나라는 스위스였으나 스위스는 자국 일정상 참가가 곤란하다며 리히텐슈타인을 추천했다. 축구협회는 있었지만 대표팀은 없었던 리히텐슈타인은 왕복 항공료 및 체재비 전액을 제공하는 제의에 감격, 대표팀을 결성해 한국으로 보냈다. 7월 14일 몰타와의 데뷔전은 1대 1 무승부, 다음 경기 태국에는 0대 2로 졌지만 22일 인도네시아를 3대 2로 물리치며 A매치 사상 첫 승리를 신고한다. 유럽의 소국이 대표팀의 역사를 제3국 대한민국에서 시작한 특별한 경우다. 이후 리히텐슈타인은 각종 유럽 대항전에 개근하며 나름대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의 인기 순정만화 〈유리(琉璃)의 성(城)〉의 주인공이 리히텐슈타인 공(公)이었다는 사실도 살짝 말씀드린다.
최고의 축제 고교 야구

▲1981년 제36회 청룡기대회 선린상고와 중앙고의 경기. 고교 야구는 이촌향도 시대에 고향과 현실을 이어주는 최고의 축제였다. 사진=조선DB
축제성(祝祭性)을 가장 잘 드러낸 종목은 고교 야구다. 지방 명문교마다 야구팀을 만들어서 고교 야구는 마치 지역 대항전의 성격을 획득했다. 고교 야구 전국대회(조선일보 청룡기, 중앙일보 대통령배, 한국일보 봉황기, 동아일보 황금사자기)는 매 경기 3만 이상의 관중을 동원하는 최고의 이벤트였다.
그 학교 졸업생이 아니더라도, 출신 도시 고교팀이 지역 예선을 통과, 서울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르는 날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출향인사(出鄕人士)들이 총집결했다. 동창회와 향우회, 각종 소모임이 야구 경기를 중심으로 가지를 쳤다. 상승(常勝) 경북고, 역전(逆戰)의 명수(名手) 군산상고, 최동원의 경남고, 장효조·이만수의 대구상고, 선동열의 광주일고, 충남의 기수 천안북일, 서울의 강자 선린상고와 신일고, 열혈응원의 덕수상고 등이 당대의 인기팀이었다. 이촌향도(離村向都)의 1970년대, 고교 야구는 고향과 현실을 이어주는 심리안정 기제이자 축제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이 남북 체제 경쟁의 우위를 확인하고 한국의 발전을 세계에 알리는 이벤트였다면, 프로 레슬링은 서민의 애환을 달래준 피로회복제였다. 프로 복싱과 축구는 우리 국민들에게 관중으로서의 체험을 통해 해외를 보여주는 창(窓)이었고, 고교 야구는 국내의 정서를 대변하고 대표하는 신나는 축제였다.
1980년대 프로 스포츠 시대의 도래 이전에도 이 땅의 스포츠는 번영의 기반을 착실하게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도약(跳躍)과 번영(繁榮)도 없었다. 스포츠 스타는 ‘민족의 별’이자 영웅(英雄)이었다.⊙
07.21 권력·치정에 눈먼 인조 “자식 죽이는 것도 왕의 권한”
공포영화 뺨치는 궁궐 잔혹사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총명한 자질의 소현세자가 34세 나이로 급서하자 나라는 온통 충격에 휩싸인다. 청나라 볼모로 심양에 억류된 지 8년 만에 풀려나 귀국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1645년 4월 26일) 많은 이들이 기억하기로 소현은 인질이 되어 가면서도 자신을 모시는 신하들에게 마음과 예를 다했고, 도중에서 병이 난 사람을 지나치지 못했다. 심양에서는 조선과 청국의 관계를 조율하느라 두 나라 모두에게 견제를 받는 등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중국서 돌아온 소현세자 의문사
세자빈도 역모로 몰아 사약 내려
자리 불안감, 애첩의 사주 겹쳐
“개새끼 같은 게 임금의 자식인가”
소현의 어린 아들 둘 제주서 병사
무능한 리더십이 낳은 핏빛 비극
소현세자와 대신의 접촉도 막아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를 합장한 장릉의 정자각. 경기도 파주시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무엇보다 그는 독일인 신부 아담 샬과의 친교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하고 조선에 전하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차기 왕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하던 연도의 백성들과 달리 아버지 인조의 반응은 차가웠다. 왕은 으레 치러야 할 세자와 대신들의 공식 접촉을 막았고, 세자가 북경에서 가져온 서적과 문물에 노여워했다. 무슨 일인지 세자와 세자빈 강씨를 보는 왕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세자가 죽었으니 그를 대체할 국가적 의례가 있기 마련이다. “원손(元孫)은 옥 같은 자질이 어려서부터 드러났고 청사(廳舍)를 설치하여 학문을 연구한 지도 이제 3년이나 되었습니다.”(1645년 5월 27일) 차차기 왕으로의 수업을 받아 온 소현의 장남 이석철의 위호(位號)를 정하자는 대신들의 요청에 왕은 이유 없이 화를 낸다.
다시 한 달 후 왕은 이경석·김육·이덕형 등 대신들을 불러놓고 차기 왕을 새로 정하겠다고 통고한다. 원손은 자질이 밝지 못해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라는 것이다.(1645년 윤6월 2일) 놀란 대신들은 진강(進講)을 통해 원손이 재기와 자질을 갖춘 소년임을 확인했으며, 왕위 계승이 정도(正道)를 이탈할 경우 난(亂)의 복병이 될 수 있다며 강하게 대응한다. 하지만 왕은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 채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다”고 선언한다. 이 사건 또한 소현의 죽음만큼이나 많은 갈등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무고한 세자빈 친정 일가도 희생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안에 있는 소경원. 인조의 맏아들 소현 세자가 잠든 곳이다. [사진 문화재청]
세자가 죽은 지 4개월 남짓 강빈의 궁인 애란이 무당과 통했다는 이유로 국문을 당하고 귀양을 갔다.(1645년 7월 22일) 이어서 강문성 등 강빈의 친정 형제 4명이 한꺼번에 먼 고을로 유배되더니 다시 절도(絶島)에 이배되었다. 드러난 죄상도 없는 강씨 형제들을 유배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들에게 왕은 “무식하고 오만하기(無識泛濫)” 때문이라 한다.(인조실록 23년 8월 26일)
그야말로 어이없는 죄목이다. 보름 후에는 강빈의 궁녀 계향과 계환이 저주(詛呪, 특정한 사람에게 재앙과 불행이 닥치기를 기원하는 행위)를 벌인 혐의로 내옥(內獄, 궁중 내부의 일을 처리하는 기관)에서 국문을 받다가 죽는데,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1645년 9월 10일) 과부가 된 며느리를 대하는 왕의 태도는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 궁궐 안팎의 사람들은 이 사건의 배후로 임금의 총희(寵姬) 소용 조씨를 의심했다. 유사한 패턴의 사건이 2년 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용 조씨를 저주한 혐의로 세 여성이 각각 거열형(車裂刑)과 참형(斬刑), 사사(賜死)에 처해졌는데, 왕은 총희를 위해 역적을 처단하는 수준의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사관의 논평은 왕의 승은을 입은 후궁 이씨를 제거하기 위한 소용 조씨의 자작극으로 기록하고 있다.(인조실록 21년 4월 17일)
인조 사로잡은 소용 조씨의 간계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이 묻힌 영회원. 경기도 광명시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소용 조씨는 14살에 궁녀로 입궁하여 스무 살에 옹주를 생산하고 두 살 터울로 왕자 둘을 낳는다. 당시 인조는 심양에 억류된 자식들과의 생이별에 역위(逆位)의 두려움까지 겹쳐 심신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왕의 영혼을 장악한 소용 조씨의 무대가 펼쳐진 것이다. 이에 앞서 25년 부부로 산 인열왕후와의 사별로 전란이 끝나자 새 왕비를 맞이하는데, 곧 장렬왕후다. 16세에 44세 인조의 계비가 된 그녀는 막 아이를 낳기 시작한 소용 조씨의 타깃이 된 것이다.

▲2019년 국보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적상산사고본 중 『인조실록』. [사진 문화재청, 중앙포토]
조씨의 간계로 소생은 고사하고 왕과의 대면도 쉽지 않았던 장렬왕후는 7년 만에 별거를 당하게 된다. 왕비를 별궁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 영의정과 우의정 등 모든 대신이 한 달간이나 적극적인 반대를 했지만 장렬왕후는 경덕궁(이후 경희궁)으로 옮겨졌다.
드디어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 대군이 왕세자로, 그 부인 장씨는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1645년 9월 27일) 이어서 28세의 소용 조씨는 정2품 소의(昭儀)로 승급되었다. 그런데도 소현세자빈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임금의 수라상 전복구이에서 독이 나왔다며 강빈의 궁인 5명 등을 내옥에 가두어 형장을 가했다. 밝혀진 것은 없었다.(1646년 1월 3일)
천륜도 저버린 ‘망나니’의 칼춤

▲제주에서 숨진 소현세자의 두 아들 무덤. 아버지가 잠든 서삼릉 소경원 옆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이로부터 한 달 후 왕은 “군부(君父)를 해치려 한 강씨”를 “천지 사이에 둘 수 없다”는 비망록을 내린다. 죽이겠다는 말이다. 왕이 지목한 강빈의 죄는 비단으로 적의(翟衣, 왕비 옷)를 준비했고 왕에게 분한 마음을 드러내며 문안의 예를 없앴으며 수라에 독을 넣은, 반역과 불효를 동시에 저질렀다는 것이다.(1646년 2월 3일)
이에 이경석과 최명길 등의 정승들은 “시역의 큰 죄는 의혹과 짐작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아버지와 자식 간의 타고난 자애심은 어디에나 존재해 왔다”고 한다. 군주 권력이 망나니 칼춤을 추듯 해서는 안 되고, 인간이라면 부모와 자식 간의 천륜(天倫)을 해칠 수 없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화내고 의심하는 게 능사인 왕은 대신들을 향해 “시아비의 뺨을 때리는 일이 있다 해도 며느리를 옹호할 야만과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하고, 또 “개새끼(狗雛) 같은 것을 임금의 자식이라고 우기니 모욕을 느낀다”고 한다.(인조실록 24년 2월 9일) 조씨에게 영혼을 빼앗긴 인조의 무도함에 신하로서의 한계를 느낀 대신들은 하나둘 조정을 떠난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심양일기』. [사진 문화재청, 중앙포토]
인조는 강빈의 친정 형제들을 유배지에서 끌어올려 형장을 가하여 죽인다.(1646년 2월 29일) 대신들이 며느리의 친속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옛 제왕 중에는 골육의 변을 잘못 처리하여 후세의 기롱거리가 된 자가 있다고 하자, 왕은 “자식을 죽이고 신하를 죽이는 것은 군부(君父)가 본디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맞선다. 대신들이 “소현이 죽고 여러 고아들의 나이가 어린데 또 그 어미를 죽이면 울어대는 소리를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왕이 말한다. “악독한 반역자를 그 울어대는 자식을 위해 용서할 수 있겠는가. 유모가 있는데 죽기야 하겠는가.”(1646년 3월 13일)
1646년 3월 15일, 강빈은 사사되었다. 종묘에는 “강이 역모를 자행하여 그 악이 가득 차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노했고, 나라 사람들이 죽여야 한다고 하여 의리로써 처단한다”고 보고했다.(인조실록 24년 3월 19일) 또한 일흔에 이른 강빈의 모친 신예옥(申禮玉)을 형장으로 끌어내어 수차례 심문한 후 사형에 처했고, 강빈의 부친 우의정 강석기는 부관참시에 처했다.
어린 손자들을 사지로 내몰아

▲소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소재로 한 영화 ‘올빼미’(2022)에서 각각 인조와 소현 세자로 나온 배우 유해진(왼쪽)과 김성철. [사진 NEW]
이듬해에는 소현의 세 아들 석철(12세)·석린(8세)·석견(4세)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섬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한 첫째와 둘째가 연달아 죽자 할아버지 인조는 “너무도 흉측하고 참담하다”는 논평을 내고 보양의 책임을 물어 나인들을 잡아다 엄히 국문하라는 전교를 내린다.(인조실록 26년 12월 24일) 어린 손자들을 사지로 내몰고 그 어미를 죽인 장본인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왕이 상식을 벗어난 심리와 행위를 보일 때마다 기록자들은 소용 조씨(최종 품계는 정1품 귀인)를 언급했다. 인조를 둘러싼 가족의 비극은 권력을 향한 조씨와 그 사돈 김자점의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씨는 대비(장렬왕후)와 왕(효종)에 대한 새로운 저주가 발각되면서 결국 사사되었다. 그녀의 나이 34세였다.
인조 이종(李倧)의 가족 경영은 필부(匹夫)도 비웃을 만큼 초라했고, 폭군도 주저할 잔인한 짓이었다. 스스로 “자식을 죽이고 신하를 죽이는 것은 군부(君父)의 권한”이라고 한 인조, 그는 무능과 왜곡으로 점철된 권력으로 자식을 죽이는 비극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07-31 레슬링 양정모, 한국 첫 올림픽 金…캐나다서 날아든 승전보
“국민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한국 레슬링 양정모 선수가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1976년 8월 1일 일요일, 건국 이래 첫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폭염과 가뭄이 이어지던 때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날아든 단비와도 같은 승전보였다.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마지막 날이었던 이날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결승리그가 열렸다. 양정모와 세계선수권 챔피언이었던 몽골의 오이도프, 미국의 진 데이비스가 결승에 올랐다. 당시에는 리그를 치러 승패에 따른 벌점을 가장 적게 받는 선수가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폴(fall·상대의 양쪽 어깨가 모두 바닥에 닿는 것)로 이기면 무벌점, 판정승은 1점, 판정패는 3점, 폴패하면 4점이 된다.
양정모는 데이비스에 폴승하고, 오이도프는 데이비스에게 판정패해 각각 벌점이 0점과 3점이었다. 두 사람의 마지막 경기 결과에 따라 메달 색깔이 정해지게 됐다. 1·2회전에서 밀리던 양정모는 3회전에서 8대7로 역전했으나 끝내8대 10으로 패했다. 하지만 최종 벌점이 1점 높은 오이도프는 고개를 떨궜고 양정모는 환호했다. 양정모가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1936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한 지 40년 만에 민족의 한을 풀어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48년 정부를 수립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올림픽에 출전한 후로는 28년 만이었다. 온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 이룬 쾌거였다.
양정모의 부친이 국제전화로 “정모야, 욕봤다”고 한 말은 한동안 유행어가 됐다. 금의환향한 그는 선수단과 함께 김포공항에서 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했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 최고 등급인 청룡장을 1호로 받았다.
부산 방앗간 집 아들이었던 양정모는 중학교 시절 체육관에 구경 갔다가 레슬링에 입문했다. 양쪽 귀가 뭉개질 만큼 매트에서 살았던 훈련의 결실로 올림픽을 제패할 수 있었다. 그의 금메달은 47년 전 우리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줬다. 당시 ‘체력은 국력’이라는 기치 아래 이뤄낸 그의 기적 같은 성과는 오늘날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양정모는 올림픽 2연속 제패를 노렸으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으로 도전이 무산되자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조폐공사 감독을 맡았다가 팀 해체 후 레슬링계를 떠나 고향 부산으로 내려갔다. 올해 70세인 그는 재능기부 공동체인 ‘희망나무 커뮤니티’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08-14 영국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박영효 태극기’ 모사본

▲독립기념관 제공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태극기’는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가던 배 안에서 처음 고안했다. 1882년 9월 25일 고베에 도착한 박영효는 니시무라야(西村屋) 숙소 지붕에 새로 만든 국기를 달았다. ‘사화기략’에 실린 ‘송기무처서(送機務處書)’의 10월 3일자 기사에는 그가 선장 제임스(James)에게 자문해 국기 양식을 만드는 과정과 국기의 활용 및 중요성을 보고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고베를 떠나 교토·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한 박영효 일행은 10월 23일과 24일 주일영국공사 해리 파크스(Harry Parkes)를 만났다. 박영효는 일본에 머물면서 각종 행사 때 국기를 게양해 국제적으로 알리고자 했는데, 일본에 주재하던 각국의 외교기관은 박영효 일행에 조선국기를 그려 달라고 요청했다. 파크스 공사도 조선국기의 모사를 부탁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국왕의 재가 없이는 그려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파크스는 일본 외무성에 조선국기 사본을 요청했고, 일본 외무대보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는 11월 1일자로 파크스에게 모사본을 보냈다. 해당 모사본이 현재 영국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에 소장돼 있는 ‘박영효 태극기’다(문서번호 FO 228/871). 태극기의 크기를 적은 제원(諸元)에 따르면, 가로 142.41㎝, 세로 115.14㎝, 태극의 지름은 81.81㎝이다. 모사본은 연한 노란색 종이에 그린 것으로, 태극 문양인 음양은 홍색이 위로 가고 청색이 아래에 있으며, 현재의 태극기보다 회오리 모양으로 더 휘어 감은 형태다. 4괘는 현재와 같으나 태극과 같은 청색이다. 박영효가 제작한 실물 태극기가 아니고 일본 정부에서 모사해 주일영국공사에게 준 것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당시 박영효가 고안한 국기의 원형일 것이라고 볼 수 있기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
문화일보
08-14 조국 땅에서 103년만의 해후…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부부 합장

▲제78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 앞에서 ‘백년만의 해후, 꿈에 그리던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과 최엘레나 여사의 부부 합동봉송식이 거행되고 있다. 백동현 기자
현충원에 위패-유해 함께 묻혀
보훈부 “영웅 대접받는 나라로”
제78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와 국립서울현충원에 합장됐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날 열린 봉송식에서 “독립 유공자 서훈 체계를 개선해 대한민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영웅들이 제대로 예우받고 국가 정체성이 바로 선 제대로 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이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봉송식 추모사에서 “최 선생과 같은 분들의 유산인 애국정신과 민족정기를 보훈부가 이어받아 바로잡고 또 계승·발전시켜 나가겠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박 장관은 “최 선생과 같이 일신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그 곁에서 내조하며 독립운동을 함께하신 분들이 있어 치열한 대일항쟁 끝에 광복을 쟁취할 수 있었고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 엘레나 여사는 1897년쯤 최 선생과 결혼해 슬하에 3남 5녀를 뒀다. 최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뒤 동포들을 외면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러시아어로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로 불렸다. 조선인 학교를 세우고 의병부대를 창설해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원했다. 최 엘레나 여사는 최 선생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내조한 숨은 공로자로 평가된다. 최 선생의 유해조차 찾을 수 없는 고통 속에 키르기스스탄에서 숨을 거뒀다.
이날 봉송식을 거쳐 최 선생의 위패와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가 100여 년 만에 함께 묻히게 됐다. 합장묘에는 러시아 현지로부터 채취해 온 흙이 쓰였다.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은 지난 12일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강원 동해시로 향하는 카페리 이스턴드림호 편으로 최 선생 순국 추정지인 우수리스크에서 채취한 흙 3㎏을 한국에 보냈다. 합장된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는 이달 7일 키르기스스탄에서 국내로 봉환된 것이다. 앞서 보훈부는 시신이 없는 순국선열도 그 위패와 배우자 유해를 합장할 수 있도록 국립묘지법을 고쳤다.
전날에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출신인 100세의 오성규 지사가 일본에서 국내로 영구 귀국했다. 박 장관은 “오 지사님의 바람대로 조국에서 여생을 편안하고 명예롭게 보내실 수 있도록 의료·복지 등 모든 측면에서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유진 기자 klug@munhwa.com
08-21 가장 오래된 실물 태극기 ‘주이 태극기’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우리나라의 국기는 1882년에 탄생한 ‘태극기’이다. 국기의 중앙에 태극 문양이 있기 때문에 ‘태극기’라고 부른다. 실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미국 워싱턴DC의 스미스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에 소장된 ‘주이 태극기’이다. 주한미국공사관의 서기관이었던 피에르 주이(Pierre L. Jouy·1856∼1894)가 수집해 그렇게 부른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정식으로 국교를 맺고,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양국의 외교사절이 상주하게 되었다. 1883년 5월 13일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는 스미스소니언의 박물학자였던 피에르 주이를 서기관으로 데리고 왔다. 일본에서 동식물을 연구·수집하던 주이는 주한미국공사관에서도 박물학자로서 한국의 동물자료를 수집했지만, 그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고대 토기 등 한국의 민속유물이었다. 주이는 한국의 전역을 다니면서 토기와 조각상·구슬·철기 등 많은 유물을 수집했으며, 그가 모은 자료는 1890년 스미스소니언에 소장되었다. 주이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도 수집하였고, 이는 현재 다른 유물들과 함께 스미스소니언의 인류학분과에 소장돼 있다(소장번호:E151638).
‘주이 태극기’는 흰색 비단에 가운데 청색과 홍색의 태극 문양이 있고, 네 귀퉁이에 검은색의 4괘가 있다. 태극 문양은 청색이 오른쪽에, 홍색이 왼쪽에 있으며, 음양의 넓은 부분이 좌우로 굽혀져 있다. ‘주이 태극기’는 태극 문양이 현행 태극기보다 훨씬 크고, 색깔도 짙은 청색과 엷은 홍색이다. 스미스소니언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태극기는 1884년 경기도 지역에서 수집되었고, 크기는 36×53㎝다. 모사본이 아닌 실물 태극기로는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문화일보
08.25 ‘대한민국’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생겨난 국호일까
1920년 4월 10일 신석우 “옛 나라 이름을 잇는 백성의 나라”
우리가 일상에서 대단히 자주 쓰는 고유명사 중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말처럼 그 빈도에 비해 유래가 잘 알려지지 않은 말도 드물 것입니다. 때로 그 단어가 들어간 문장은 가슴 벅차거나 감격적인 순간이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경우가 많은데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국호(國號)인데,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유래된 것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기억도 없는 듯합니다.
이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선 104년 전인 1919년 4월 10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3·1 운동 한 달 뒤에 중국 상하이에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중대한 일을 벌입니다. 곧바로 독립 만세 운동의 후속 조치를 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임시정부 수립’이었죠. 독립 만세 운동을 했으니 새로 독립할 나라의 정부를 세워야 했던 겁니다. 모임의 이름은 ‘임시의정원’으로 정했으나 그들은 시급하게 결정해야 할 일 하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나라 이름이 없다……!
국호부터 정해야 무슨무슨 나라의 임시정부라는 정부 이름을 지을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당시 회의록인 ‘임시의정원 기사록’을 보면, 독립운동가 29명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국호를 정하는 토의에 들어간 뒤 ‘먼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부르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이영근의 제창이 가결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나라 이름 ‘대한민국’을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우창 신석우(1894~1953)가 처음 제의했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신석우.
좀 생소한 인물이라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신석우는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약하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임정 교통총장을 지냈고, 1924년 귀국해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부사장과 사장을 맡으며 민족언론 운동과 신간회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931년에는 일제의 압박을 피해 조선일보 사장직을 독립운동가인 민세 안재홍에게 물려주고 상하이로 망명했고, 광복 후에는 초대 중화민국(대만) 대사를 지냈습니다. 1995년 독립훈장 건국장이 추서됐습니다.
신석우는 왜 ‘대한민국’이란 생소한 이름을 제안했던 것일까요. 그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이 ‘대한’이란 이름으로 망했으니 새로 독립할 나라 역시 ‘대한’이란 이름으로 일어서야 한다.”
당장 회의석상에서 반박이 나왔습니다. “대한이 뭡니까.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국호잖아요? 그걸 그대로 부른다는 건 감정상으로도 용납할 수 없어요.”
“아니, 일본에 빼앗긴 이름이니 일본으로부터 다시 찾아오자는 건데 무엇이 문제라는 말입니까?”
“그보다는 ‘조선공화국’이 더 낫지 않을까요?”
“‘고려공화국’은 어떨까요?”
그런데 사실 국호의 핵심 의미는 ‘민국(民國)’에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이 망한 지 단 9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독립 후 새로 건설할 정부는 군주제가 아니라 백성의 나라인 민국, 즉 공화제로 한다’는 데 기본적으로 의견을 모았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다시 군주국으로 복벽해야 한다는 의견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전의 본래 우리나라 이름인 ‘대한’에 새로운 국가 시스템을 뜻하는 ‘민국’이 결합됐던 것이죠.
결국 그다음 날인 4월 11일, ‘대한민국’은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같은 이름을 제치고 새 독립국의 국호로 제정됩니다. 이와 함께 임시헌장이 제정되고 내각이 구성된 이날을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라 부릅니다. 대한민국 국호는 광복 후인 1948년 6월 7일 헌법기초위원회의 심의에서 그대로 계승됐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 줄여서 ‘한국’이 돼 온 것인데, 그렇다면 ‘대한’이란 이름은 언제 누가 지었던 것일까요?
‘대한’이란 국호는 1897년에 출범한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시작됐습니다. 한(韓)이란 고대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나라의 이름, 즉 마한·진한·변한을 통틀어 불렀던 ‘삼한(三韓)’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나중엔 의미가 좀 달라져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三國)을 ‘삼한’이라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경운궁(덕수궁)에서 촬영된 고종과 둘째아들 영친왕 이은. 1907년 황제위에서 강제로 퇴위된 뒤 영친왕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 국호를 제안한 사람은 황제로 즉위한 고종이었습니다. 고려가 삼한의 옛 땅을 통합한 것을 바탕으로 삼은 조선 왕조가 그 뒤 영토를 더 넓혔으니 ‘대한’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는 이유였습니다. 나라가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 격상하는 마당에, 중국이 이름을 내리는 형식을 통해 지어졌던 ‘조선’이란 이름을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다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민국’이란 이름은 이보다 8년 전인 1912년에 세워진 ‘중화민국(中華民國)’을 본뜬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수립된 지 18년 뒤인 1915년 중국의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는데 나라 이름이 ‘중화제국(中華帝國)’이었다는 사실을 따질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3개월 만에 원세개가 퇴위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말입니다. 누가 원조고 누가 본떴는지 따지기보다는, ‘민국’이란 개념 자체가 이제까지 없었던 ‘백성의 나라’라는 점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네, 백성의 나라, 국민의 나라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08.29 한국의 독립 첫 선언…일본이 점령한 동남아는 왜 빠졌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카이로선언 80주년을 맞으며
올해 역사학계와 정치학계의 화두는 정전협정 70주년, 한미동맹 70주년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계속되고,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시점에서 1953년에 있었던 정전협정과 한미상호조약은 그 현재적 의미가 절대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다. 80년 전인 1943년 12월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이다.
루스벨트·처칠·장제스, 군국주의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 합의
한국의 ‘노예 상태’ 적시 주목, 신탁통치 논란의 씨앗 되기도
동남아 등의 독립 구체적 언급 없어…다시 유럽 영향권으로
영원한 원칙은 허구…이해관계로 움직이는 국제질서 직시해야
‘적절한 과정’ 통해 독립이 남긴 것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을 주도한 지도자들. 왼쪽부터 중국 장제스 총통,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 [중앙포토]
카이로 선언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만나서 군국주의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의 원칙을 결정한 선언이었다. 카이로 회의는 얄타회담·포츠담회담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루어진 한국과 관련된 3대 전중(戰中) 회담의 하나로 중·고교 국사 문제의 하나로 자주 출제됐었다.
카이로 선언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됐다. 하나는 열강들이 한국에 대한 독립을 선언한 첫 번째 선언이었으며,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의 독립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둘째로 한국을 독립시키되 ‘적절한 과정(in due course)’을 거쳐서 독립시킨다는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신탁통치 논쟁을 불러일으킨 기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식민지 한국 상황 열강에 전달
어느샌가 카이로 선언을 비롯한 전중회담은 잊힌 역사가 되었다. 냉전의 시발점이 되었던 얄타회담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재확인하고 전후 영토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전후처리 문제와 전범재판을 규정했던 포츠담 선언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한눈팔 새 없이 변해가는 국제질서 속에서 카이로 선언의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카이로 선언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 중의 하나는 한국을 독립시켜야 하는 이유를 적시했다는 점이다. ‘노예 상태에 유의(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한다는 대목이다. 3·1운동을 비롯해 끊임없이 진행된 한국의 독립운동은 식민지 한국의 상황을 열강들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당연히 이 주장을 일축했다. 일본은 1943년 대동아회의를 개최했다. 주로 일본 점령 국가들(필리핀·베트남·미얀마·만주)의 괴뢰정부 수뇌들을 초청했다. 일본이 점령하고 싶었던 인도 괴뢰 망명정부 지도자도 초청했다. 일본은 유럽과 미국 등 서양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아시아적 발전, 그리고 아시아인의 자주권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동아공영권의 허상 확인

▲한국의 독립을 처음 적시한 카이로 선언 문건. [중앙포토]
한국과 타이완은 아예 초청받지 못했다. 괴뢰정부 대신 일본총독부가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원자재 공급기지로서 동남아 점령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미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았던 미얀마와 필리핀에는 ‘당근’ 정책으로 멀지 않은 시기에 독립을 약속했던 반면, 한국과 타이완에 대해서는 독립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세에 몰리자 중립국을 통해 두 가지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일본은 정전 또는 종전을 하는 조건으로 덴노 시스템의 유지, 그리고 조선과 타이완의 식민지 유지를 제시했다. 조선과 타이완을 영구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군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 ‘한국인의 노예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카이로와 포츠담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던 연합국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에 대한 영구적 식민지 정책은 아시아인의 자립을 주장했던 대동아공영권이 얼마나 허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허상은 이후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연결되었기에, ‘노예상태’라는 언급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연합군 서유럽에 대한 배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과 타이완, 그리고 만주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단지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결과 및 일본의 탐욕에 의해 점령된 지역이라고 통칭했다. 여기에는 1차 대전 패전국 독일로부터 일본이 넘겨받은 중국의 일부 지역과 북마리아나 제도, 그리고 1937년 제2차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점령한 동남아시아 지역들이 포함된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속하는 핵심 지역이었다.
만주 침략 이후 국제연맹으로부터 탈퇴한 일본은 진주만 습격 직후 미국의 경제봉쇄 위기로부터 벗어나고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산유지역에 진출했다. 이 지역은 고무가 생산되는 말레이시아와 함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생명줄이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연합국이었던 서유럽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
독일의 점령하에 있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연합국 핵심이었던 영국은 모두 아시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2차대전을 통해 일본에 의해 인도를 제외한 식민지 지역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일본이 패망한다면, 이 지역은 어떻게 될 것인가. 독립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패전국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과거 유럽 제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는 서로 다른 8월 15일을 맞이해야 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귀환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 자리에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다시 복귀하였다. 1945년 8월 15일은 한국에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날이었지만,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는 또 다른 제국을 향한 독립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독일의 점령으로 큰 피해를 본 프랑스와 네덜란드에는 재건이 필요했다. 이들은 식민지를 재건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세력들에게는 황당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카이로 선언에 포함되었던 타이완도 당황했다. 일본 점령자들에 반대했던 타이완 원주민들에게는 청이 나가자 일본이 들어왔고, 일본이 나가자 국민당이 들어왔다. 청과 국민당 공권력을 비교하다 보니 일본이 더 나았다고 판단하게 된 타이완 사람들의 생각이 이해되기도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불안한 요소가 있었다. 독립을 약속해준 것은 감사했지만 ‘적절한 과정’이 문제였다. 1945년 이전 위임통치를 했던 지역들이 적지 않았다. 패전국의 식민지는 제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독립한 지역도 있었고, 다시 위임통치 지역으로 들어간 지역도 있었다.
독일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일본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남태평양 지역, 오토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리되거나 그 영향권 아래에 들어간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모습은 독립운동가들이 원했던 미래가 아니었다. 이들은 미래가 불확실한 위임통치나 신탁통치에 민족의 장래를 의지할 수 없었다.
철저하지 못했던 일본 전범 처벌
결과적으로 본다면 일본 패망 이후의 처리 과정은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의 내용대로 진행되었다.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과 식민지로부터 일본의 공권력이 철수했고, 연합국에 항복했다. 한반도 분할점령을 규정했던 일반명령 1호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항복을 받기 위한 과정이었다.
일본에서는 도쿄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뉘른베르크 재판이 그랬듯이 철저한 전범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처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나 전쟁에 동조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기회라도 부여되어야 했다. 이를 통해 더 이상 비참한 전쟁이 발발하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카이로와 포츠담 정신의 굴절
물론 일본에 대한 민주화 개혁과 전쟁을 재개할 수 없도록 하는 산업구조 재편, 재무장 금지 등의 정책이 초기에 실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도래하면서 일본과 독일을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으로 부활시키는 정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가장 큰 피해국이었던 한국과 중국이 참여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독일은 냉전으로 인해 평화조약도 맺지 못했다.
냉전과 탈냉전을 거쳤지만, 동아시아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냉전 하에서 혁명과 열전을 경험했기에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의 내용과 체제가 그대로 계승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정신은 지금도 계속돼야 한다. 카이로 선언과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동거하고 있다고 할까.
강대국들이 아시아보다 유럽을 더 우선시했던 상황이 카이로 선언을 만들어냈다면, 냉전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배경이 되었다. 탈냉전 시대를 지나 21세기 동아시아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카이로 선언은 모든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으로 한다는 국제정치 현실, 그리고 그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교훈으로 주고 있다.
중앙일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