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341. 근대로 가는 길목⑥/끝: 을사조약과 김구 이상설 이승만 - 350. 끝·공화국 대한민국⑩ 대덕연구특구 50주년과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일보 선임기자
2023. 04.26
341. 근대로 가는 길목⑥/끝: 을사조약과 김구 이상설 이승만
조선, 500년 봉건시대를 종언하고 거친 근대로 가다

▲왼쪽부터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주역들인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김홍집, 어윤중. 오른쪽 아래는 1898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사람들. 왼쪽 위부터 이승만, 이승인(이상재 아들), 유동근, 김린, 안국선, 아버지를 대신한 소년수. 아래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이정식. 이들 가운데 홍영식과 김옥균, 김홍집, 어윤중은 고종 정권에 의해 암살됐거나 처형됐다. 갑신정변에서 독립협회에 이르는 30년 세월 동안 결국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했고 500년 조선왕조는 참담하게 멸망했다. 대한민국은 그 500년 폐허에서 핀 꽃이다.
풍경1: 1904년까지 집행된 참수형
1898년 7월 8일 2대 동학교주 최시형이 처형됐다. 처형된 장소는 서울 서소문감옥서였고 처형 방식은 교수형이었다.(윤석산, ‘해월 최시형의 서소문 옥중 생활과 처형 과정’, 동학학보 38호, 동학학회, 2016)
6개월 뒤인 1899년 1월 9일 입헌군주정을 주장한 만민공동회 사건에 연루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돼 서소문감옥서에 수감됐다. 그 가운데에는 고종 퇴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돌린 혐의로 체포된 이승만도 끼여 있었다. 며칠 뒤 이승만은 공범들과 함께 탈옥했다가 체포돼 재수감됐다. 종로에 신설된 한성감옥서로 이감된 이승만은 7월 10일 탈옥 및 상해죄로 태형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평리원 재판장은 김옥균 암살범 홍종우였다. 이승만에 따르면 “정적(政敵)인 홍종우가 7개월 동안 쓰고 있던 형틀을 제거해 주고 생명을 살리려고 온갖 힘을 써줬다. 야릇한 인생의 역전이었다.”(이정식,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부록, ‘청년 이승만 자서전’, 권기붕 역, 동아일보사, 2002, p263)
그가 한성감옥에 수감돼 있던 1904년 3월 15일 오후 10시 대한제국 마지막 참형(斬刑)이 집행됐다. 이날 참수된 죄인은 1895년 을미사변에 연루된 유동근이라는 인물이었다.(1904년 3월 15일 ‘고종실록’, ‘사법품보(司法稟報)’ 乙43) 참형은 ‘몸과 머리를 분리하는 형(身首異處·신수이처)’이다.(‘대명률강해’ 오형지도) 그 잔혹함 때문에 1895년 1월 갑오개혁 정부는 참형을 폐지했다. 하지만 1898년 11월 22일 고종은 자기 권력에 대한 도전이 잇따르자 갑오개혁을 무효화하고 역모죄를 저지른 죄인에 대해 참형을 부활시켰다.
이러저러한 죄목으로 죄수 목을 베고 장대에 걸어 백성에게 보이는 조치를 ‘효수경중(梟首警衆)’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효수경중은 모두 142회 실시됐다. 이 가운데 53회가 1873년 고종 친정 이후 벌어졌다. 518년 조선왕조에서 벌어진 공개 참수형의 37%가 친정 33년 동안 집행된 것이다.
마지막 참수형 집행 5개월 뒤인 1904년 8월 7일, 그 무시무시한 야만의 시대 끝 무렵에 이승만이 특사로 풀려났다. 이승만은 그때까지 받았던 거친 수형 생활을 ‘황제로부터 받은 전화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승만은 고종을 “4200년 한국의 왕통계승사상 가장 허약하고 겁이 많았던 임금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1부2권, 나남, 2008, p234)

▲조선 26대 국왕 겸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1852~1919). 그가 통치한 43년은 500년 조선사상 가장 중요한 시대였다. 고종은 여흥민씨 척족과 함께 권력 유지를 위해 근대화를 거부하고 결국 나라를 외세에 내줬다. /사진 제공=국립중앙박물관
풍경2: 매국 혹은 망국 군주 고종
독립협회 간부들이 여전히 수감 중이던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터졌다. 2월 17일 고종은 일본군 요청에 따라 창덕궁을 일본군 12사단 병영으로 사용하도록 칙허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23, 2.(144)창덕궁 일병 병사 사용칙허건)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제국 정부와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제국 영토 어디든 임의로 일본군이 군사용지로 수용할 수 있게 된 협정이다. 2월 28일 고종은 본인과 순종, 영친왕 이름으로 백동화 18만원을 일본군 군자금으로 기부했다.(일본 외무성 ‘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73, ‘한국황제 내탕금 아군 군수 지원’)
3월 18일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천황 친서를 들고 고종을 알현했다. 3월 22일 이토는 “군자금을 받은 답례”라며 일본화 30만엔이 입금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예금 통장을 고종에게 헌납했다. 고종은 “거절은 예의에 어긋난다”며 이를 수납했다.(영국외무성, Jordan to Lansdowne, 1904.3.31., FO/17/1659; 일본외무성, 앞 책, p297~298, ‘황실 금원 기증 시말’) 그해 5월 6일 일본군은 창덕궁 후원에서 러일전쟁 구련성 전투 승전 기념 파티를 열었다.(1904년 음력 3월 21일 ‘승정원일기’) 한 해 전인 1903년 8월 15일 이 황제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었다. ‘전쟁이 터지면 응당 사람을 시켜 일본 군사 숫자와 거동을 정밀하게 밝혀내 귀국 군대 세력을 돕겠다.’(‘러시아문서 번역집’4(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자료총서), 24.국왕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 선인, 2011, p63) 이 모순된 상황을 두고, 일본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 정세에 해박했던 지식인 윤치호는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의 실정이 수치스럽게도 이 나라를 붕괴시켰다.’(1904년 5월 6일 ‘윤치호일기’)
1905년 5월 대마도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격침시켰다. 전쟁은 일본 승리로 끝났다. 그해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일본 손으로 넘어갔다. 강화조약을 주선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두 달이 지난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체결 1주일 전인 11월 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궁중 내탕금이 궁핍한’ 고종에게 이토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을 상납했다. 상납 형식은 무기명예금증서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 11.1~3(195) 임시 기밀비 지불 잔액 반납의 건) 11월 29일 이토 히로부미가 득의양양하게 귀국했다. 전날 귀국 인사차 입궐한 이토에게 고종이 말했다. “경은 지금 수염이 반백이다. 이는 오직 국사에 매진한 결과가 아닌가. 이제 일본 정치는 후임 정치가에게 맡기고, 남아 있는 검은 수염으로 힘써 짐을 보필해 달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25, 7.(2)한국파견대사 이토의 복명서)
풍경3: 그날 이상설, 김구, 이승만
협상 실무를 담당한 대신들을 처단하고 조약을 취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체결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하며 민간에 조약 파기 운동을 요구했다. 11월 23일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상소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 차라리 폐하가 사직을 위해 죽어(決志殉社·결지순사) 중임(重任)을 저버리지 말라.”(1905년 11월 23일 ‘대한매일신보’) 이토가 귀국하던 11월 29일 위정척사파 거두 최익현이 “자살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의리를 듣지 못했는가”라고 상소했다. 고종은 숱한 상소에 “번거롭게 굴지 말라”고 답했다.(1905년 11월 다수일 ‘고종실록’)
다음날 민영환이 자결했다. 그날, 김구는 종로에 있었다. 서울 상동교회 청년회 구국기도회가 한창이던 11월 27일 김구와 다른 기독교인들은 집단 상소 투쟁을 결의하고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으로 몰려갔다. 그때 대안문은 현 태평로 한가운데에 있었다. 상소문은 이준(李儁)이 지었다.(김구, ‘백범일지’ 영인본, 한국교과서주식회사, 2016, p180) 상소 투쟁 나흘째인 11월 30일 김구 일행은 공개 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종로로 이동했다.
그때 종로에서 김구가 이상설을 보았다. ‘(민영환 상가에) 조상을 하고 큰길에 나서니 웬 사십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상투 바람으로 피 묻은 흰 명지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 즉 참찬 이상설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김구, 앞 책, pp. 181, 182)
민영환의 비극적 부고(訃告)에 이상설 또한 거리에 나와 연설을 한 뒤 바위에 머리를 던진 것이다. 연설은 이러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백성이 깨닫지 못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민영환이 자결한 오늘이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하는 날이다.”(윤병석, ‘증보 이상설전’, 일조각, 1998, pp.45, 46)
김구가 남긴 기록에서 이상설에 대한 특별한 소회는 읽히지 않는다. 이상설과 민영환은 황실과 종묘와 사직을 지키던 근황파요 김구는 기독교를 통해 근대(近代)에 눈을 뜨고 있던 새로운 인격이었다. 김구가 살던 황해도를 포함해 조선왕조 내내 차별받던 서북 지역은 기독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다.(손세일, 앞 책, p263) 그렇게 1905년 11월 30일 서울 종로 거리 한복판에서 봉건과 근대가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1904년 10월 9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상동청년학원’ 개교식이 열렸다. 배재학당 출신 주시경이 학원 설립을 주도했다. 교장에는 두 달 전 출옥한 동문 이승만이 선출됐다. 이승만은 개교 3주 만인 11월 4일 미국으로 떠났다. 이승만에 따르면 “민영환, 한규설 제씨(諸氏)가 상의해 미국에 지원을 청하기로 했다.”(이승만, ‘독립정신(1945)’, 독립정신 중간에 붙이는 말씀’, 정동출판사, 1993, p298) 수중에는 황제 고종이 아니라 민영환과 한규설 편지가 들어 있었다. 공식 사절이 아니라는 뜻이다.(손세일, 앞 책, p235)
1905년 8월 5일 이승만은 뉴욕에서 미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났다.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작성해준 청원서를 대통령에게 주고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힘을 동반하지 않은 외교 투쟁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루스벨트 정권은 철저하게 일본과 이해관계를 같이했다.
면담 3개월 뒤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조약 체결 11일 뒤인 11월 28일 주대한제국 미국공사 에드윈 모건이 대한제국에 공사관 철수를 통보했다. 외국 공관 가운데 첫 번째였다.(‘사료 고종시대사’ 28, 1905년 11월 28일 미국 공사 모건의 통지)
장구한 500년 세월을 버텼던 조선의 중세(中世)가 그렇게 멸망했다. 이승만은 이후 대학에서 공부와 외교 활동을 병행했다. 상하이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까지 김구는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몰두했다.(김구, 앞 책, p182) 이상설은 북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설립했다. 이어 1907년 대안문 앞 상소 투쟁을 벌였던 이준과 함께 고종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됐다. 이후 이상설은 연해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5년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당수는 광무제 고종을 추대했다.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 고종은 1919년 죽었다. 홍영식과 김옥균과 김홍집과 어윤중 같은, 새 시대를 열망하던 인물들은 거칠게 닥쳐오는 근대를 보지 못하고 처형됐다. 이제 전혀 새로운 주인공이 새로운 나라, 근대 대한민국 이야기를 시작할 참이다.<’근대로 가는 길목’ 끝>

▲홍영식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갑오개혁정부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국사편찬위

▲갑오개혁정부 탁지부대신 어윤중 /국사편찬위

▲1898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사람들. 왼쪽 위부터 이승만, 이승인(이상재 아들), 유동근, 김린, 안국선, 아버지를 대신한 소년수. 아래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이정식. /이승만기념관
342. 공화국 대한민국① 봉건 조선에 없던 대한민국 풍경들
우리는 조선을 뛰어넘은 대한민국이다

▲식민시대인 1926년 경복궁 앞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 후 건국을 선포한 중앙청으로 사용됐다. 전쟁으로 파괴됐던 중앙청은 훗날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철거됐다. 그 사이 이 땅에는 봉건 왕조와 식민시대가 지나고 공화국시대가 도래했다. 경복궁에는 대한민국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시간을 즐긴다. 부국와 강병으로 부활한 근대 공화국, 대한민국시대다./박종인기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민주공화국입니다. 국민 행복을 위해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을 정책적으로 실천하는 근대 공화국입니다. 백성을 통치 대상으로 삼고 부국강병을 등한시했던 봉건 조선과는 ‘전혀’ 다른 국가입니다. 조선에서 혹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정통성을 찾겠다는 시도는 허황됩니다. 삼일운동 때, 임시정부 때는 물론 해방 후 건국의 아버지들은 근대(近代)라는 시대정신에 따라 조선을 폐기하고 공화국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조선과 대한민국은 무엇이 다를까요. 왜 조선은 가난했고 약했고 백성은 주인이 되지 못했을까요. 대한민국은 그 조선과 무엇이 다르기에 21세기 지구촌 주역으로 성장했을까요. ‘근대 공화국 대한민국’이 모든 금기(禁忌)를 깨고 그 답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 하멜과 흑표전차
1653년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지금 있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옆 나라 폴란드가 최신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해놨는데, 그것들이 “전 세계에 나라가 12개밖에 없다”고 그에게 단언했던(헨드릭 하멜, ‘하멜 표류기’, 김태진 역, 서해문집, 2003, p133) 그 조선인 작품이 아닌가. 자기들 소총과 대포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세상에 무지했던 그 조선이. 2022년 대한민국은 폴란드에 모두 124억달러어치 무기를 판매했다.
예컨대 K2흑표전차(현대로템), K9자주포(국방과학연구소, 한화에어로스페이스), K239천무다연장로켓포(한화디펜스) 등등. 이들을 생산하고 판매한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기업’이다. 화차(火車), 신기전(神機箭) 같은 첨단 무기를 개발해놓고도 사용법마저 망각한 조선과 달랐다. 조선에는 없던 주체들이다.

▲1653년 조선, 돌 줍는 하멜

▲2023년 대한민국, 흑표전차 수출./현대로템 제공
# 엔지니어와 상놈, 누리호
2022년 6월 21일 오후 4시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누리호가 발사됐다. 1조9527억원이 투입되고 300군데가 넘는 기업이 참가한 초대규모 프로젝트가 성공했다. 이 또한 주역은 정부와 항공우주연구원과 기업들이었다. 1696년 관요(官窯) 도공 39명이 굶어죽고(1697년 윤3월 6일 ‘승정원일기’) 차별 속에 천대받던 최하층, 나라가 사라질 때까지 무명(無名)으로 살았던 엔지니어들이 이제 국가와 공동체 미래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저 ‘상놈’ 취급을 받았던 상인들이 지금은 엔지니어들이 생산해낸 상품을 팔아서 국부(國富)를 창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오는 5월 24일 그 누리호가 또 한 번 발사될 예정이다.

▲2022년 대한민국, 누리호 발사./조선일보db
# 이루어진 박제가 꿈, 길
2021년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포장도로 총 길이는 11만3405㎞다. 이 가운데 4866㎞가 고속도로다.(국토교통 통계누리,’도로현황’) 정조시대 북학파(北學派) 박제가가 “사람과 말이 서로 부딪쳐 다닐 수가 없다”고 한탄했던 18세기 좁은 흙길이 아니다.(박제가, ‘북학의’, 안대회 역, 내편 ‘도로’, 돌베개, 2013, p111) 김옥균은 “부강하려면 도로 건설이 우선”이라고 했다.(김옥균, ‘치도약론’, 1884년 7월 3일 ‘한성순보’) 하지만 구한말 조선을 찾은 외국인 가운데 길을 비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1968년 1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기자회견에서 선언했다. “경부 간 고속도 도로 계획 같은 이런 것은 과거 우리 민족의 하나의 꿈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꿈을 우리들의 기술과 우리들의 자본과 우리들의 노력으로써 한번 이뤄보자.”(박정희, 1968년 1월 15일 연두기자회견) 엔지니어들이 만든 상품을 상인들이 그 길 위로 실어 나른다. 박제가와 김옥균의 꿈은 대한민국이 이뤘다.
# 동력, 노비에서 원자력으로
1956년 3월 문교부에 원자력과라는 부서가 대통령령으로 신설됐다. 1958년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원(原子力院)’이 설립됐다. 1959년 7월 14일 당시 경기도 양주 불암산 아래 당시 서울공대 캠퍼스에서 연구용 원자로1호 기공식이 열렸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을 포함해 3부 요인과 외교 사절이 모두 기공식에 참석했다.(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 2019, p16, 17) 전쟁이 끝나고 6년밖에 안 됐지만 대한민국은 미래의 에너지원과 과학기술의 원천에 돈을 쏟아부었다. 원자력원은 지금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개편돼 대전 대덕단지에 있다.
근대를 만든 동력원은 석탄(石炭)이었다. 그런데 500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석탄’에 대한 언급이 단 네 번 나온다. ‘노비(奴婢)’라는 단어는 4467번 나온다. 조선의 동력원은 노비(奴婢)였다. 많게는 40%에 이르는 노비가 제조와 용역을 맡았다. 에너지원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굳이 필요없었다. 화력이 필요하면 노비가 산에서 땔감을 구해왔다. 산은 민둥산이었다. 대한민국에 노비는 없다. 민둥산도 없다. 미래 동력을 연구하는 인재가 있다.
▲1953년 대한민국은 ‘문맹국민 완전퇴치 계획’을 선언했다. 해방 직후 78%였던 문맹률은 1958년 4%로 떨어졌다. 사진은 1953년 1월 1일 국무회의 회의자료./국가기록원
# 문맹에서 각성으로, 한글
현대 한글 체계를 완성시킨 구한말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반상 제도를 고착시키는 한문을 버리고 한글 창제 직후부터 한글을 받아들였다면 한민족에게 무한한 축복이 있었으리라.”(H. 헐버트, ‘The Korean Alphabet’, Korean Repository 1896년 6월호)
성리학적 모순을 타파하고 근대화를 당길 가장 강력한 백신이 한글이었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500년 동안 한글을 외면했다.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은 이후 세상을 변혁시킬 그 어떤 고급 정보도 백성에게 유통하지 못했다. 구한말 조선 문맹률은 90%에 달했다.
전쟁 와중인 1953년 1월 1일 대한민국 국무회의 안건은 ‘문맹 국민 완전 퇴치 계획’이었다. 문교부가 국무회의에 제출한 계획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민주 국가의 건전한 진전을 기함에는 그나라 국민 전체의 지적 수준 여하가 절대적인 근본 요소임은 재론을 불요한다.’(문교부, 1953년 1월 1일 국무회의부의사항 ‘문맹국민완전퇴치계획’, 국가기록원)
해방 직후 78%였던 대한민국 문맹률은 미군정에 의해 1948년까지 41.3%로 낮아졌다. 그 문맹률이, 전쟁이 끝나던 1953년 11월 이후 5차례 실시된 문맹 완전 퇴치 계획 결과 4.1%로 급감했다.(한국교육개발원, ‘한국 성인 문해 교육의 발전과정과 성과’, 2011, p36) 2023년 현재 문맹률 개념은 무의미하다. 대한민국은 문맹률 조사를 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가 거부했던 공동체의 각성은 대한민국이 완성했다. 조선과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다.
# 새로운 시대 정신, 근대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지금 역사를 쓰는 중이다. 공동체가 신분제에 갇혔을 때는 존재할 수 없었던 고급 인력이 나라를 설계하고 국가를 운영한다. 천대받던 장인(匠人)과 상놈들이 국부(國富)와 강병(强兵)을 창조한다. 좋든 싫든 식민 시대 35년이 남긴 자산을 활용한 실용주의와 조선스러운 폐쇄주의를 누르고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손을 잡은 개방주의 리더십, 그리고 각성한 대중이 대한민국을 건설했다. 그 근대를 이야기해보자.
05.16 운명의 1543년… 그해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박종인의 대한민국 징비록 인터랙티브 보기 →
운명의 1543년, 세계사 속에서 조선을 바라본다.
인류 역사를 진행시키는 원동력은 지성(知性)이다. 한 공동체가 소유한 지성은 외부 공동체와 교류를 통해 규모가 커지고 질적으로 진화한다. 교류 없는 지성은 없다.
서기 1543년 유럽과 조선과 일본에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유럽에서는 그해 3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발표로 인간 탐험시대가 시작됐다. 그해 9월 일본은 가고시마번에 있는 작은 섬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으로부터 조총 2자루를 구입해 ‘칼의 시대’에서 ‘총의 시대’로 전환했다. 이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보다 100년 전 시작된 ‘대항해시대’ 물결을 타고 극동에 도착한 사람들이다. 총의 전래는 이후 상업적인 교류로 확대됐다. 조선에서는 풍기군수 주세붕이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다. 본격적인 성리학 문치(文治) 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명나라는 조선에 은과 금을 조공으로 요구했다. 조선은 은광 폐쇄로 조공요구에 대처했다. 1503년 연산군 때 평민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이 획기적인 은 제련법을 발명했다. 정부에는 보고를 받는 데 그쳤다. 그런데 1533년 일본은 이 은 제련법을 수입해 당시 매장량이 세계 2위인 이와미 은광 개발에 사용했다. 일본은 그 은으로 유럽제 조총을 개량하고 대량 생산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일본으로 간 조선 도공이 일본 요업 산업을 일으켰다. 300년 뒤 이들이 일궈낸 기술과 자본이 일본 근대화 메이지유신의 토대가 됐다. 19세기 말 파리에서 열린 세계무역박람회에서 조선 도공 후손 심수관 회사가 만든 도자기가 선풍을 일으켰다.
조선은 18세기 이후 학문의 자유를 ‘사문난적’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했다.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첨단 학문을 수용했다. 이를 ‘난학’이라 한다. 일본 의사들은 ‘중국사람과 일본사람이 몸 구조가 다른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읽고 해부를 한 결과 모든 것이 잘못됐음을 알게 됐다. 학문의 자유와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인 지침이었다. 이게 바로 1543년 유럽제 소총을 수입한 이래 유럽 지성과의 교류가 누적된 결과다.
고종과 천황 메이지는 1852년 동갑내기에 군주 등극 시기도 비슷했던 두 군주였다. 조선에게는 불행하게도, 간 길은 달랐다. 그때까지 축적된 권력층의 세계관과 지성의 누적 정도 차이가 컸다. 일본 지식층과 권력층은 그때까지 쌓아놓은 자본과 군사력과 유럽에서 수입해 토착화한 학문으로 근대화를 준비했다. 메이지유신이다. 메이지유신에 경제적으로 기반이 된 산업은 조선 도공을 끌고 와 토착화시킨 요업산업이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누적된 역량을 근대화에 집중해 메이지유신에 성공했다. 조선은 조총을 버리고, 은을 버리고 성리학을 받아들였고 이후 역사 진행 과정에서 여러 발전 기회를 상실하고 근대화에 뒤처져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방당하고, 침략 당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그 조선과 결별하고 찬란한 문명국가를 만들었다. 어찌보면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500년의 기적이다. 그 조선 500년은 무엇이 잘못됐고, 세계사적 맥락에서 무엇이 결여돼 있었을까. 듣기 싫고 보기 싫은, 하지만 미래를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지성사에 대한 반성을 위해, 운명의 1543년으로 가보자.
343. 공화국 대한민국② 김일성을 조종한 소련 군사위원 스티코프의 일기
소련 꼭두각시 김일성이 농락한 대한민국 건국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미국측 수석대표는 하지 중장(앞줄 맨 왼쪽), 소련측 수석대표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군사위원 스티코프 중장(하지 오른쪽 외투).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설계도는 김일성이 아니라 스티코프가 만들었다. 스티코프가 쓴 일기에 따르면 소련군 대위 김일성은 일거수일투족을 스티코프로부터 지시받았다. 김일성은 완벽한 꼭두각시였다. /국사편찬위
1945년 8월 15일 35년 식민 시대가 끝났다.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벌어졌다. 미국에서 외교투쟁을 벌이던 이승만이 귀국했다. 중국에서 투쟁하던 임정요원들이 귀국했다. 국내파 독립운동가들도 저마다 비전을 내세우며 건국 주체임을 주장했다. 거기에 소련군 소속 조선인 장교 하나도 끼어 있었다. 소련 제88정찰여단 대대장 김일성이다.
서른셋 먹은 이 소련군 대위가 건국 주도 대열에 포함되면서 건국을 향하던 대한민국 진로는 험로(險路)로 변했다. 그런데 이 김일성이 한 일들은 스스로 계획한 일들이 아니었다. 테렌티 스티코프라는 당시 북한 진주 소련군 군사위원이 갓난애기 이유식 떠먹여주듯 했던 명령을 꼭두각시처럼 따라 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꼭두각시짓이 만든 역사는 지금도 대한민국 공화국을 독뱀처럼 죄고 있지 않은가.
소련군 군사위원 스티코프의 일기
‘1000명 정원 사범대학 2개소와 320명 정원 의과대, 5400명 정원 기술학교 11개소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교재를 검토했다.’(1946년 9월 7일) ‘누구를 공산당 지도자로 지명할 것인가에 대해 레베데프 사령관, 로마넨코 부사령관과 토의해야 한다.’(같은 해 9월 11일) ‘선거 규정을 9월 20~25일에 발표해 각 단위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다.’ ‘최승희 무용학교 정원은 100명으로 한다.’(같은 해 9월 11일)
이상은 ‘빨치산 출신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내린 지시가 아니다. 이는 소련군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이자 군사위원인 소련 육군 중장 테렌티 스티코프가 내린 지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스티코프가 남긴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김일성은 이 지시를 남김없이 그대로 이행했다.
‘스티코프 일기’라고 통칭되는 이 기록은 1995년 러시아 동박학연구소 박사과정에 있던 전현수와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해 소개했다. 이 일기에는 김일성 정권이 ‘괴뢰(꼭두각시) 정권’이고, 그 정권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단독 정부를 수립한 과정이 세밀하게 적혀 있다.
지도자로 낙점된 소련 대위 김일성
일본이 항복하기 7일 전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은 8월 9일 함경북도 경흥을 시작으로 8월 25일 평양에 진주했다. 그날 소련 극동방면군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에 의해 ‘북조선 주둔 최고사령부’가 설치됐다. 그리고 9월 19일 소련 군함 푸카조프 호가 강원도 원산항에 입항했다. 배에는 김일성을 포함해 고려인으로 구성된 제88정찰여단 소속 병력이 탑승해 있었다. 며칠 뒤 김일성이 평양 최고사령부를 방문해 부사령관인 레베데프와 면담했다.
김일성: “나는 88정찰여단 대위 김일성이다. 공산당 조직을 도와 달라.”
레베데프: “좋다. 모스크바와 상의하겠다.”
김일성: “부탁이 있다. 내 빨치산부대도 대(對)일본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달라.”
레베데프: “총 한 번 안 쏜 부대가? 역사를 바꿀 수 없다.”(김국후, 1991년 6월 11일 레베데프 인터뷰,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2008, p77)
김일성은 88정찰여단에서 적기훈장을 받은 장교였다. 북한 접수가 임박하자 소련 지도부는 이 김일성부대를 활용할 계획을 세웠고, 그 지도자로 김일성을 낙점했다.(앞 책, p73) 스탈린에 의해 미래 지도자로 선택됐지만 김일성은 앞 대화처럼 소련군 소속으로 항일투쟁 경력이 전무했다.
▲1945년 10월 13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환영대회 사진첩. 소련 적군훈장을 달고 있는 김일성 뒤로 스티코프 모습(뒷줄 가운데)이 보인다. 사진첩 여백에는 한복 입은 사람이 태극기를 들고 소련군을 환영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일성으로 인해 대한민국 건국은 혼돈 속에 이뤄졌다./국사편찬위
꼭두각시 김일성, 평양 입성
10월 14일 마침내 김일성이 평양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일성은 양복과 넥타이와 적기훈장을 착용하고 평양공설운동장 연단에 올랐다. 뒤에는 군사위원 스티코프, 최고사령부 정·부사령관 등 소련군이 배석했다. 김일성은 전날 밤 양복 차림으로 레베데프를 찾아와 “이렇게 입고서 내일 인민들이 영원히 기억할 명연설을 하겠다”고 으쓱거렸다. 부사령관 레베데프 회고에 따르면 “이날 김일성이 읽은 연설 원고는 우리 사령부에서 작성했고 양복과 구두는 사령부 정치국 소속 고려인 2세 강미하일 소좌 것”이었다.(1991년 6월 11일 레베데프 인터뷰,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1992, p88)
문제는 김일성이 차고 있던 적기훈장이었다. 레베데프가 “소련 훈장은 군중에게 나쁜 인상을 준다”며 떼라고 지시했지만 김일성은 연단에 올라서도 훈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소련군 장교 신분으로 무장투쟁 경력이 없는 본인 콤플렉스를 훈장 착용으로 만회하려 한 것이다.
스티코프가 기록한 반(反)건국 행동들
1946년 1월 16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계획에 따라 1차 미소공동위원회 예비 회담이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그리고 2월 8일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주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됐다. 인민위원회는 중앙정부 조직이다. 김일성은 “민주주의적 제당과 기타 사회단체들의 지도자들이 발기부를 조직”하여 그 의견을 소련군 사령관에게 제출해 승인받았다.(김일성, ‘목전 조선 정치형세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조직문제에 관한 보고’. 정해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북조선인민위원회 연구’, 국사관논총 54, 국사편찬위, 1994, 재인용)
분단의 징조가 북쪽에서 내려온 것이다. 3월 20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에서 열렸다. 스티코프가 수석대표인 소련 측은 신탁통치 반대 세력은 통일 정부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3개월 뒤인 6월 3일 이승만은 이에 맞서 전북 정읍에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1946년 6월 5일 ‘자유신문’)
북한 단독 정부 수립까지 김일성을 포함한 남북 공산 세력은 스티코프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9월 11일 스티코프는 남쪽 공산 지도자 박헌영에게 ‘反압제 항의집회 조직’을 지시했다. 9월 26일 자 스티코프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김일성에게 훈시를 주다. 김두봉에게도 모든 문제에 대해 훈시를 줬다.’ 9월 28일 스티코프는 박헌영에게 ‘요구 관철 때까지 총파업’을 지시했다. 10월 1일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달 22일 스티코프는 입북한 박헌영, 김일성과 함께 남로당 결성에 합의했다. 12월 19일 스티코프는 정식 발족할 북조선인민위원회 정당 비율을 결정했다. 1947년 1월 4일 김일성은 스티코프가 제시한 북조선 인민위원회 대의원 선거 일정에 동의했다. 이후 남과 북은 분단으로 치달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8월 25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이틀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구성원이 결정됐다. 내각 명단은 스티코프가 일기에 기록한 그대로였다.
이상은 국사편찬위가 번역한 ‘쉬띄꼬프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이 번역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 전문이 공개돼 있다.
▲초대 북한 내각 기념사진. 1948년 8월 27일 스티코프가 일기에 기록한 명단 가운데 ‘미정’인 인물을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일치한다./위키피디아
꼭두각시에서 조작된 ‘주체’로
1947년 여름 레베데프는 모스크바에 새로운 국기 제작을 의뢰했다. 1948년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는 모스크바에서 보내온 인공기를 새 국기로 제정했다.(이휘성, ‘태극기 삭제와 인공기 제정을 통해 본 북한의 역사 왜곡’, 2014년 6월 17일 ‘데일리NK’).
2013년 8월 8일 북한 ‘노동신문’은 ‘김일성이 국기를 완성시키며 애국자의 붉은 피와 단일민족과 조선 인민의 정신을 뜻한다고 설명했다’고 보도했다. 김일성이 인공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2018년 ‘조선중앙통신’은 1945년 평양 환영대회 김일성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해 공개했다. 이 사진에는 김일성 가슴에 있던 소련군 적기훈장이 지워져 있다. 옷부터 연설까지 꼭두각시였던 김일성을 그 후예들이 ‘주체’와 ‘자주’의 민족 지도자로 상징조작한 것이다. 건국을 방해하고 완벽하게 전(前)근대 조선으로 회귀해 버린 해방 정국 북조선 풍경이었다.
▲2018년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김일성 환영식 사진. 가슴에 달렸던 소련 훈장이 지워져 있다. ‘소련 꼭두각시’ ‘괴뢰정권’이라는 이미지를 없애고 ‘주체’를 강조한 조작이다.
344. 공화국 대한민국③ 까막눈 조선인이 문화를 창조하기까지
문맹률 90%의 나라에서 문화 강국 대한민국으로

▲언문 즉 한글을 멸시하고 한문에 집착한 지식인들 탓에 조선 백성은 500년 내내 까막눈 신세를 면치 못했다. 10명 중 9명은 까막눈이었던 조선은 식민시대 종료 후 문맹률 80%에 이르는 문맹국으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치러진 선거는 까막눈을 위해 이름과 함께 ‘작대기’로 입후보자 이름을 표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문맹국민 완전퇴치 계획’을 세우고 5년 동안 민관합동으로 성인 한글교육을 실시했다. 1958년 말 대한민국 문맹률은 4.1%로 급감했다. 교육은 문화적 각성을 촉발시켰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문화(文化)를 찾는 문화 강국이 됐다. 사진은 2021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BTS 공연 장면. /연합뉴스
문맹에서 문화로,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1000년 문맹(文盲)에서 해방됐다. 금속활자와 훈민정음의 나라 백성이 비로소 글을 깨치고 이를 통해 각성(覺醒)을 했다. 미몽과 주술에서 깨어난 것이다. 각성한 대한민국은 이후 문화 강국이 됐다. 한국을 알기 위해 세계인이 한국어와 한글을 공부하는 시대가 왔다. 문화 강국 대한민국 시대다. 그 시대가 오기까지 꼭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근대 한국인 서재필과 윤치호, 미국인 호머 헐버트 그리고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다.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하며 최초로 국한문혼용체를 주장한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위키피디아
첫 신문을 만든 이노우에 가쿠고로
1882년 음력 11월 27일 오후 2시 넉 달 전 일본으로 갔던 수신사 박영효가 제물포로 귀국했다. 동행한 일본인이 일곱명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郎)라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박영효, ‘사화기략’, 1882년 11월 27일) 한 달 뒤 박영효는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한성판윤 박영효가 한 첫 번째 작업은 박문국(博文局) 설립이었다. 박문국은 납활자 인쇄기를 이용한 출판 기관이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박문국 설립을 책임질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선 개화파와 교류하던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 제자였다.
1883년 음력 7월 15일 조선 정부 내에 박문국이 설립됐다. 그해 10월 1일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했다. 열흘에 한 번 발행되는 공식적인 첫 번째 근대 신문이다. 박문국 사무실은 저동(苧洞)에 있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사는 서울 집이다.(경성부, 국역 ‘경성부사1′(1934), 서울역사편찬원, 2012, p538) 인쇄기도 이 집에 있었다. 조선 첫 신문은 그렇게 일본인 집에서, 일본인 손으로 발행됐다.
우편으로 신문을 받아본 후쿠자와가 제자에게 편지를 썼다. ‘조선의 가나문자(한글)로 쉬운 이학(理學), 의학의 도리를 알리면 좋다. 아무튼 빨리 한글을 쓰게 되기 바란다.’(1883년 12월 15일 후쿠자와의 편지. 박천홍, ‘활자와 근대’, 너머북스, 2018, p262, 재인용) 답장을 받은 이노우에는 개화파 지식인 강위(姜瑋)를 개인 교사로 모시고 언문을 연구했다. 그 결과 순한문인 한성순보에 이어 1886년 나온 주간지 ‘한성주보’는 ‘한언복합문체(漢諺複合文體)’, 국한문혼용체로 발간됐다. 순한문과 순한글도 병기됐다. 그 이노우에가 1885년 박문국을 관리하던 김윤식에게 편지를 썼다. ‘혼용체를 써서 오늘날 국가 영원의 토대를 세우고 세종대왕이 정음을 제정한 성의를 받들게 되기를 바랍니다.’(이노우에 가쿠고로, ‘후쿠자와 선생의 조선경영과 현대조선 문화에 관하여’. 박천홍, 앞 책, p340)
1886년 순한문인 한성순보에 이어 나온 주간지 ‘한성주보’는 ‘한언복합문체(漢諺複合文體)’, 국한문혼용체로 발간됐다. 이후 박문국에서 출간된 서적들은 모두 국한문혼용체였다. 1894년 국한문혼용체는 갑오개혁정부에 의해 왕명을 비롯한 공문서 공식 문자로 채택됐다.
▲한문을 버리고 한글 사용을 주장한 미국인 헐버트.
문맹률 90%의 나라와 헐버트
외국 지식인이 마주친 조선은 문맹국이었다. 조선이 문맹인 원인은 달리 있지 않았다. 원인은 문자였다. 세종이 창제한 과학적이고 쉬운 문자는 외면받고, 지식인은 고급 지식을 한문으로 습득하고 유통했다. 훈민정음은 세상을 변혁시킬 그 어떤 고급 정보도 백성에게 유통하지 못했다. 19세기 조선은 ‘교묘함이 서양 알파벳을 능가하는 문자의 편리함을 모르는’ 문맹률 90%짜리 나라로 변해 있었다.(혼마 규스케, ‘조선잡기’, 최혜주 역, 김영사, 2008, p19)
1886년 조선에 온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비난과 조롱에 그치지 않았다. 입국 5년 만에 헐버트는 순한글 세계지리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출간했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훨씬 편리하지만 도리어 언문을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깝다. 이에 특별히 언문으로 세계 각국 지리와 풍속을 기록하려 한다.’(헐버트, ‘사민필지’ 서문, 1891) 그리고 그가 책임을 맡은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이렇게 썼다. ‘신분제와 특권의식을 고착시키고 게으름을 낳게 하는 중국 글자를 내던지고 이 새로운 표음문자를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인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허물을 고치는 데 너무 늦었다는 법은 없다.’(헐버트, ‘조선 문자(Korean Alphabet), 코리안 리포지터리 1896년 6월호) 헐버트는 이 잡지에 수시로 조선어 문자와 문법에 대해 논문을 실으며 한글 보급과 이를 통한 대중의 각성을 유도했다. 이 미국인 한글학자는 “웨스트민스터사원 대신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에 묻혀 있다.
근대 한글의 보급, 윤치호와 서재필
1896년 1월 바로 그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T.H.Y’라는 필자가 영문으로 글을 기고했다. 제목은 ‘쉼표 혹은 띄어쓰기(Commas or Spacing)’.
‘평균적인 조선인은 소설 ‘삼국지’를 보다가 ‘장비가 말을 타고’를 ‘장비 가말을 타고’라고 읽는 실수를 한다. 이는 쉼표와 띄어쓰기를 도입해 단어들을 분리시키면 없앨 수 있다. 선교사들이 쓴 책은 필연적으로 단어와 숙어와 문장이 낯설다. 아무 띄우기 없이 조선어로 번역하면 조선인은 전혀 읽을 수 없다. 시험 삼아 해보라.’
이 필자 ‘T.H.Y’ 본명은 ‘Yun Tchi-Ho’, 당시 조선 외부 협판(외교부 차관) 윤치호(尹致昊)다. 미국 에머리대 졸업생인 윤치호는 영문법에서 띄어쓰기를 차용해 한글에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서재필에 앞서 띄어쓰기를 제안한 윤치호.
그리고 그해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해 만든 신문이다. 서재필은 신문 체제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순한글’과 ‘띄어쓰기’다. ‘모두 언문으로 쓰는 것은 남녀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한문으로 보낸 투고는 당초에 상관 아니함(취급하지 않음)’. 한문으로 쓴 글은 아예 기고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오직 한글만을’ ‘떼어쓰는(띄어쓰는)’ 목적은 단순명쾌했다. ‘새 지각과 새 학문이 생기리라’.(이상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 새로운 각성과 학문, 곧 근대를 뜻한다. 한글 근대화에 간여한 이 선각자들 없이 21세기 대한민국은 설명될 수 없다.
‘▲대중의 각성을 위해’ 순한글 띄어쓰기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까막눈으로 맞은 해방
식민시대도 개선은 없었다. 1930년 한글 문맹률은 84.6%였고, 일본어와 한글을 모두 못 쓰는 문맹률은 77.7%였다.(조선총독부, ‘조선국세조사보고’(1930). 노영택, ‘일제시기의 문맹률 추이’, 국사관논총 51집, 국사편찬위, 1994, 재인용)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정 조사 결과 조선 문맹률은 78%였다. 건국을 두고 우익과 좌익이 갈려 있는 사이, 군정은 각 시군에 국문강습소를 설치하고 문맹 퇴치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1948년 미군 철수 때 문맹률은 41%까지 낮아졌다.(1959년 3월 31일 ‘조선일보’)
이미 1946년 2월 실질적 단독정부인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 북한은 “지금 싸움은 선전적 말의 싸움과 글의 싸움”(김일성, 1946년 5월 19일)이라며 맹렬하게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이주환, ‘1945~1949년 북한에서의 문맹퇴치운동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5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북한은 1949년 3월 문맹 퇴치 완수를 선언했다.(교육부, ‘한국 성인 문해 교육의 발전과정과 성과’, 2012, p30) 그리고 이듬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다.
▲1950년대 조선일보 문맹퇴치운동 기사. ‘작대기 선거는 수치’(1950년 5월 10일), ‘이번엔 기어이 (문맹 퇴치) 성공을’(1954년 3월 21일), ‘그래도 남은 4%‘(1959년 3월 31일)./조선일보db
문맹 퇴치에서 블랙핑크까지, 대서사극
전쟁 와중인 1953년 1월 1일 대한민국 문교부가 ‘문맹 국민 완전 퇴치 계획’을 국무회의에 제출했다. ‘민주 국가의 건전한 진전을 기함에는 그 나라 국민 전체의 지적 수준 여하가 절대적인 근본 요소이다.’(문교부, 1953년 1월 1일 국무회의부의사항 ‘문맹국민완전퇴치계획’, 국가기록원)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그해 2월 전국에 국문강습소가 설치되고 한글교재 84만부가 배포됐다. 5차례 실시된 퇴치계획 동안 문교부, 내무부, 국방부, 농림부, 보건복지부, 공보실부터 통·반장, 다시 말해서 전(全) 대한민국 정부가 총출동해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58년 말, 대한민국은 공식 문맹률 4.1%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교육부, 앞 책, p36) 이름 대신 작대기 개수로 선거 입후보자를 분별했던 까막눈 조선이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
그래서 어찌됐는가. 글을 통해 신문물을 습득한 대한민국인들이 각성을 하더니 500년 동안 묶여 있던 문화 창조력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스스로 즐기던 그 문화가 흘러넘쳐 BTS, 블랙핑크로 상징되는 한류(韓流) 문화를 생산하는 문화 강국이 된 것이다. 그 틈에 2692명이었던 1997년 제1회 한국어능력시험 지원자는 2022년 35만6665명으로 늘었다.(교육부, 국제교육원 통계) 문득 보니 500년 문자 감옥을 목격한 숱한 선각자들이 내건 목표, ‘대중의 각성과 신문물 습득’이 예정했던 기적 아닌가.
▲1948년 첫 총선은 ‘작대기’ 선거로 치러졌다. 입후보자 이름을 못 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국사편찬위
▲2022년 미국 타임지가 ‘올해의 엔터테이너’로 선정한 블랙핑크.
345. 공화국 대한민국④ 공동체의 에너지원, 인력(人力)에서 핵융합으로
석탄도 모르던 나라, 지금 인공태양을 띄우다

▲대한민국은 석탄조차 외면하고 인력에 의존했던 조선과 차원이 다른 국가다. 사진은 대전광역시 대덕연구개발특구 핵융합에너지연구원이 운영 중인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 태양과 같이 핵융합을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장치다. 핵융합발전에는 1억도라는 초고온 플라즈마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술이 관건이다. 연구원에 따르면 이 기술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다.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력발전에 이어 핵융합발전이 상용화되면 대한민국은 또 한번 변신한다. /박종인 기자
21세기 공화국 대한민국은 원자력을 세계에 수출하는가 하면 인공태양, 핵융합에너지 개발로 세계를 주도한다. 석탄도 활용하지 못했던 나라, 오로지 인력(人力)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땔감을 확보하고 생활용품을 이용하며 삶을 영위하던 조선과 다른 나라다.
망가졌던 에너지 독립의 꿈과 인공 태양
“우리가 발전소를 충분히 설치해서 생활 제도나 공업 발전을 하루 바삐 진전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안다. 남북을 통하여 수력과 천연 물자가 상당하므로 우리 국민의 행복과 세계에 자랑할 것을 함께 목적 삼고 주야로 노력 매진함이 우리의 광활한 전도에 첫 걸음이요 부강전진에 호시가 될 것이다.”(1949년 6월 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전남 목포중유발전소 준공식 치사’, 대통령기록관)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치러졌다. 이미 정부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통해 38선 이북을 지배하던 김일성 정권은 나흘 뒤인 5월 14일 대남 송전(送電)을 중단했다. 식민 시대 건설된 수·화력발전소는 80%가 북한에 집중돼 있었다. 송전 중단으로 대한민국은 ‘공장은 맥을 잃고 거리는 실명의 어둠에서 헤매니 문화생활의 진전에 치명상’이었다.(1949년 6월 29일 ‘서울신문’) 이듬해 6월 민간기업인 남선전기주식회사가 원조 자금으로 5000kw급 발전소를 지었다. 1949년 6월 27일 준공된 목포중유발전소는 대한민국이 만든 최초의 발전소였다.
이승만은 그 준공식 치사에서 남북통일에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이틀이 모자란 만 1년 만에 김일성은 6·25를 일으켰고 개전 한 달 만인 7월 24일 목포발전소는 폭격으로 파괴됐다. 대한민국 전역 발전시설도 20%가 파괴됐다. 대한민국 미래를 책임져야 할 에너지원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21년 11월 22일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이라는 어려운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 연구소가 ‘1억도 초고온 플라스마 상태를 30초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억도 플라스마’는 태양이 열에너지를 내는 핵융합 방식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환경이다. 그 환경을 인위적으로 30초라는 ‘초장기간’ 유지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한 것이다. 바닷물을 연료로 쓰는 핵융합 에너지는 꿈의 에너지라고도 한다. ‘인공 태양’이라고도 불리는 이 핵융합 에너지 발전은 핵분열 에너지를 이용하는 원자력발전보다 더 저렴한 전력 이용이 가능해진다.
에너지 독립의 전사(前史), 조선
‘청나라는 철을 석탄을 사용해 제련한다. 석탄은 화력이 세서 단단한 쇠도 제련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병기(兵器)와 농기구는 우리보다 곱절이나 견고하고 예리하다. 중국에서 사들여 온 철제품이 손상되기라도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단련하지 못한다.’(박제가, ‘철(鐵)’, 북학의 내편(1778), 안대회 역, 돌베개, 2013, p143)
석탄을 동력원으로 산업혁명이 유럽에서 한창일 때, 조선 지식인 박제가는 조선에는 없고 청나라에는 있는 동력원 석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때가 1778년이다. 박제가는 정조에게 올리는 ‘북학의’를 따로 만들어 이렇게 덧붙였다. ‘단천과 양근에서 석탄이 난다고 하니, 석탄을 도입해 농기구나 수레바퀴를 제조할 때 사용해야 한다.’(박제가, ‘철’, ‘진상본 북학의’)
그런데 이를 조선 정부가 수용해 정책화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7년 뒤인 1795년 정조 총애를 받은 또 다른 학자 이가환(李家煥·1742~1801)은 자기 문집 ‘정헌쇄록(貞軒鎖錄)’에 이렇게 기록했다. ‘연경(북경) 시장에서 들여온 칼과 가위는 한번 부서지면 다시 벼릴 수 없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모르는데, 이는 석탄으로 벼려 제련한 것이라서 그렇다. 석탄으로 제련한 쇠는 숯으로는 다시 제련할 수 없다.’(이가환, ‘정헌쇄록’, 안대회, 앞 책, 재인용) 87년이 지난 1882년 양진화라는 선비가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다. “석탄이라는 것은 싸고 용도가 넓다. 중국, 서양에서는 석탄으로 물건을 만든다.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은 석탄이다. 평양에서 석탄이 나니 하늘과 땅이 준 복이다. 이름은 탄(炭)이지만 이용 가치는 금은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1882년 음력 11월 19일 ‘고종실록’)

▲1907년 3월 조선을 방문했던 주일독일대사관 무관 헤르만 산더 일행이 촬영한 사진. 사진에는 ‘세 사람이 집을 짓는데 지키는 사람이 두 명이다’라고 적혀 있다. 조선 지하에는 화석연료인 석탄이 대량 매장돼 있었지만 일상에 투입된 동력원은 인력(人力)이었다. 생산성은 극도로 열악했다./국립민속박물관
1907년 3월 주일 독일 영사관 무관 헤르만 산더는 대한제국을 여행하며 많은 사진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한 장에는 집을 짓는 사람 다섯 명이 촬영돼 있다. 산더는 이렇게 기록했다. ‘세 사람이 집을 짓는데 지키는 사람이 두 명이다.’(‘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여행’ 국립민속박물관, 2006, p205) 조선에는 인력을 능가하는 동력원이 없었다. 따라서 생산성은 극도로 낮았고 가난했다.
“태평양에 빠져 죽더라도!”
전쟁이 끝났다. 통일을 희구했던 꿈은 일장춘몽이 됐다. 만신창이가 된 신생 공화국 대한민국은 파괴된 발전소 재건과 함께 원자력에 미래를 걸었다. 1955년 7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과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간 협력을 위한 협정’에 가조인했다. 협정은 이듬해 2월 3일 정식 체결됐다. 그리고 3월 9일 대통령령으로 문교부에 원자력과가 신설됐다.
1958년 2월 22일 원자력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 4일 대통령 이승만은 연구로 1호기 구입을 승인했다. 이미 일본과 중국은 몇 달 새에 연구용 원자로를 완공하고 점화한 상태였다. 1959년 2월 3일 대한민국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됐다. 장소는 서울 공릉동 서울공대 캠퍼스였다.

▲1959년 7월 14일 미국산 연구용원자로 1호기 기공식.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직접 삽을 들었다. 1955년 12월 대한민국은 미국과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원자력시대를 준비했다./한국원자력연구원 제공
그리고 1959년 그해 7월 5일 미국에서 구입해온 연구용 원자로 기자재가 인천에 도착했다. 진행 속도는 빨랐다. 자재 도착 9일 뒤인 7월 14일 연구로 1호기 기공식이 열렸다. 기공식에는 대통령 이승만이 직접 참석해 삽을 들었다. 1호기는 1962년 3월 19일 오전 10시 50분 핵연료를 장전해 3월 23일 정상 가동이 확인됐다.
1978년 첫 상업발전소인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가 준공됐다. 그런데 이보다 2년 전인 1976년 3월 원자력연구소는 2000년까지 대한민국 전력 50%를 원자력이 담당하고 이를 국산화한다는 계획을 정부에 제출했다. 핵심 목표 가운데 원자로 설계기술과 연료 국산화가 포함돼 있었다.(이상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 2019)
1986년 12월 4일이었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세계 원전이 움츠러들었던 겨울날이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기술 국산화를 위한 출정식이 있었다. 원자로 계통설계 연구원 44명이 미국 동부 코네티컷에 있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설계센터’로 유학을 떠나는 날이었다. 당시 연구소장 한필순이 특별히 마련한 이 출정식에서 연구원들은 이렇게 세 번 외쳤다. “필(必) 설계기술 자립!” 이는 소장 한필순이 가진 평소 지론이었다. ‘에너지 자립 없이는 진정한 독립이 없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전 원자력연구소장 한필순(1933~2015) 묘. 한필순이 원자력연구소장이던 시절 대한민국은 한국형 원자로를 개발했고 중·경수로용 핵연료 국산화에 성공했다. 묘비 기단에는 평소 지론이 새겨져 있다. ‘에너지 자립 없는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은 없다.’ /박종인 기자
기계부장이던 김병구는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는 설계기술 자립에 성공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였다. 그래서 선진국들이 장기간 기술정지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한국은 원자력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총 200명이 넘는 연구원들 가운데 낙오되거나 이탈한 사람은 없었다.’(김병구, 2019년 4월 4일 ‘대덕넷’ 기고문) 결국 설계는 물론 핵연료 제조 국산화는 물론 원자로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원자력에서 핵융합으로
그사이 대한민국은 핵분열에너지에서 한발짝 나가 태양에너지와 원리가 같은 핵융합에너지에 도전했다. 핵융합은 바닷물에 풍부한 중수소와 리튬을 이용한 에너지다.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결합할 때 헬륨이 생산되고 에너지가 나온다. 이는 1억도라는 초고온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핵융합에너지 연구를 위해 설립된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대덕연구소에는 핵융합을 위한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가 있다. 1995년 개발을 시작해 2007년에 완공된 장치다. 초전도자석을 이용해 1억도를 유지하는 장치다.

1995년 개발이 시작된 이래 2011년 이후 세운 기록은 모두 ‘세계 최초’며 ‘세계 최고’다. 2018년에는 1.5초, 2020년에는 20초 동안 안정적으로 1억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2021년에는 ‘자그마치’ 30초 유지에 성공했다. 올해 7월은 50초가 목표고 2026년에는 300초가 목표다. 연구원에 따르면 ‘300초가 지나면 안정되고 지속적인 핵융합이 가능해지고’ 이는 ‘24시간 정상 가동 기술이 확보됐음’을 뜻한다.
KSTAR가 있는 구역 벽면에는 70여 개 참여기업 로고가 붙어 있다. 연구원장 유석재는 “저 이름들을 볼 때마다 울컥한다”고 했다. 울컥할 만하지 않은가. 이게 성공하면 국토 3면을 포위한 바닷물이 순식간에 미래 에너지원이 된다. 바닷물 45리터가 가지고 있는 열량이 석탄 40톤이 내는 에너지로 변하는 것이다.(‘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자료’, 2023년 5월 12일, p13) 석탄도 모르고 살다가 식민시대를 겪고 전쟁을 겪은 신생 공화국 과학자들이 만들고 있는 미래다.
346. 공화국 대한민국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초대 소장 최형섭
과학기술을 통해 부국강병의 발을 내딛다

▲1970년 1월 9일 서울 홍릉 시절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멤버 기념사진. 모두 미국 유수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최형섭(앞줄 왼쪽에서 세번째)의 설득으로 한국에 돌아온 박사들이다. 1967년 KIST를 방문한 미국 부통령 험프리는 “역두뇌유출(counter brain drain)”이라고 부르며 놀라워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나보다 봉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들은 미국에서 받던 연봉의 4분의1밖에 안 되는 대우를 받으며 과학을 연구했고 기술을 개발했다. 박근혜 정부 과학기술비서관이었던 현 한국기술경영교육연구원 원장 김주한이 말했다. “조선을 정체시켰던 사농공상(士農工商) 질서를 무너뜨리고 과학자와 기술자를 국가가 육성한 사건이었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
‘1965년 4월, 박 대통령이 방미(訪美)하기 직전에 연구소장들을 모아놓고 리셉션을 연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스웨터를 2천만달러어치나 수출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듣던 나는 이렇게 역설했다. “그것 참 기특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것만 하겠습니까? 일본은 이미 10억달러어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런 힘이 어디서 생겼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술개발입니다. 이제 우리도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최형섭,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조선일보사 출판국, 1996, p52)
갈 곳 없는 인재들
식민 시대가 끝나고 전쟁이 끝났다. 작게는 빵집에서 크게는 전력회사까지, 총독부와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남긴 귀속 재산은 막대했다. 당장 신생국 대한민국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를 운영할 기술과 인력이 없었다. 전쟁 후 많은 인재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한민국에는 이들이 배워온 그 기술과 과학을 계속 연구할 공간이 없었다. 많은 유학생들은 대한민국 대신 미국을 택했다.
최형섭도 그랬다. 식민 시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채광야금학을 전공하고 전쟁 직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화학야금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 그런데 최형섭은 자동차용 스프링 제조업체인 국산자동차주식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했다. 국산자동차 전신은 식민 시대 일본인이 설립한 조선국산자동차주식회사다.
그 무렵 ‘시발자동차 주식회사’가 군용 지프를 개조해 자동차를 만들고 있었다. 최형섭은 이 시발자동차 기술 책임자를 공장장으로 스카우트했다. 훗날 박정희 정부 경제수석이 된 이 공장장 이름은 오원철이다.(최형섭, 앞 책, p21) 오원철은 1961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이 됐다. 최형섭은 1962년 4월 4대 원자력연구소 소장이 됐다. 박정희가 ‘국보’라고 불렀던 기술 관료 오원철과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일으킨 최형섭은 그렇게 공장에서 만났다. 이제부터 이들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부국강병의 나라 대한민국을 만든 과정 이야기다.
과학기술을 국가정책으로
1962년 1월 중앙청 옆 옛 부흥부(復興部) 청사 2층 회의실에서 경제기획원 업무보고가 있었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보고를 받았다. 한 시간에 걸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고가 끝났다. 박정희가 물었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 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새로운 공장 건설이 가능한가?”
당시 기술관리과장인 전상근은 이렇게 회상했다. ‘경제기획원 사람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지만 ‘기술’은 노동력의 일부분이라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술은 경제개발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차관 송정범이 답했다. “‘기술수급(技術需給)’에 대해 별도로 계획을 수립해 보고하겠다.”(전상근,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정우사, 1982, pp.9,10)
임기응변으로 대답한 ‘기술수급’이었다. 그런데 그 임기응변이 이후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는 절대명제로 변했다.
1964년 9월 미국 요청으로 비전투병력 베트남 파병이 이뤄지고 이듬해 2월 전투병력이 파병됐다. 1965년 5월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추가 파병을 요청하기 위해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백악관에서 존슨이 박정희에게 물었다. “몇 시간이나 걸렸나?” “17시간 걸렸다.”(박정희) “앞으로 16시간 정도로 단축시킬 비행기를 보내드리겠다.”(존슨)(1965년 5월 18일 ‘경향신문’) 박정희가 타고 간 비행기는 미국대통령 전용 보잉707이었다. 대한민국에는 장거리 운항용 비행기가 없었다.
남의 나라 비행기를 얻어 타고 간 박정희는 추가 파병을 약속했다. 5월 20일 백악관에서 발표한 양국 공동성명서에는 원안에 없던 조항 하나가 삽입됐다. ‘공업 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치를 위한 과학 고문 파견’. ‘공과대학 설립’이라는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 도널드 호닉 제의에 박정희가 ‘공업기술연구소 설립’을 요청해 미국이 받아들인 결과였다.(최형섭, 앞 책, p53) 5·16 직후 가졌던 의문과 방미 직전 국내 연구소장들에게 스웨터만 팔 거냐고 핀잔받으며 재확인한 과학기술 우선 정책이 그렇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65년 5월 18일 미국을 방문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이 백악관 앞뜰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지원’이라는 항목이 맨 끝에 포함돼 있었다. /조선일보DB
과학기술의 집현전
1965년 현재 대한민국에는 크고 작은 국공립 연구소 79개가 있었다. 그해 대한민국 예산은 848억원인데 이들 79개 연구소에 배정된 총예산은 19억원에 불과했다. 1959년 설립된 원자력연구소를 제외하고는 정부 행정 지원이 주된 업무였고 자율적인 연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해 7월 미대통령 고문 호닉 일행이 방한해 최형섭이 책임을 맡고 있던 원자력연구소와 금속연료종합연구소를 둘러봤다. 호닉은 미국 측 파트너로 기초과학 연구소인 벨연구소를 추천했다. 최형섭은 “바로 제조업에 연결할 수 있는 응용연구가 필요하다”며 응용과학 연구기관인 배텔연구소를 추천했다.(최형섭, 앞 책, p54)

▲대통령 박정희가 개인 자격으로 KIST 설립을 신청하고 허가받은 허가장. 박정희는 KIST는 물론 국방과학연구소(ADD),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여타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 개인 돈을 출연하했다. 전 과학기술 비서관 김주한은 이렇게 말한다. “굳이 개인 돈을 출연할 이유는 없었다. 이는 과학 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를 표시한 것.”/김주한 제공
1966년 2월 22일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발족했다. “대통령이 나서면 진척이 빨라진다”는 기술관리국장 전상근이 낸 아이디어대로, 대통령 박정희가 자연인 박정희 자격으로 100만원을 출연하고 본인이 설립자로 법인 등록을 신청했다. 다음 날 청와대에서 초대 소장 임명식이 있었다. 초대 소장은 최형섭이었다. 경제기획원 차관 김학렬과 전상근에게 박정희가 말했다. “세종대왕이 학자들을 모아 집현전에서 한글을 만드셨다. 대한민국은 KIST에 과학자를 모아 기술을 개발하자.”(전상근, 앞 책, pp.81, 89)
1966년 서울 홍릉에 KIST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해 KIST에 배정된 예산은 2억5000만원이었다. 완공되는 1968년까지 KIST에 배정된 예산은 총 27억7000만원이었다.(과학기술처, ‘과학기술연감(1967년)’, p10)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 최형섭.
초대 소장 최형섭과 ‘역두뇌유출’
이후 ‘연구할 공간이 없어서’ 미국을 택했던 두뇌들 유치 작업이 벌어졌다. 초대 소장 최형섭은 배텔연구소를 통해 지원을 받았던 후보 과학자 78명을 모두 만났다.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개인 면담에서 최형섭이 내건 조건은 이러했다. “노벨상을 희망하는 사람은 응모하지 마라. 논문 쓸 생각도 마라. 연구 외에 돈 벌 생각도 마라.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기초과학 연구는 꿈도 꾸지 말고, 당장 기업에서 써먹을 기술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 결과 모두 18명이 1차 유치 과학자로 선정됐다. 월급은 6만~9만원이었다. 미국에서 받던 연봉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보다는 많았다. 1967년 9월 KIST를 찾은 미국 부통령 험프리는 “이건 역두뇌유출(counter brain drain)”이라고 규정했다. ‘며칠 붙어 있지 못할 것이라는 사람들 추측과 달리 이들은 국내에서 확고한 기반을 잡았다. 이들을 보고 다른 재외 과학자들도 하나둘씩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KIST의 두뇌 유치는 성공이었다.’(최형섭, 앞 책, p98)
사농공상의 철폐와 과학 입국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이후 연구원으로 확대 개편됐다. KIST에서 개발한 과학기술은 에어컨 냉매 대체물질과 반도체 절연체, 포항제철 기술개발과 광섬유 통신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부국과 강병의 시작이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싹틔운 최형섭은 2004년 죽었다. 지금 최형섭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박근혜 정부 과학기술 비서관이었던 현 한국기술경영교육연구원 원장 김주한이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은 조선을 정체시켰던 사농공상(士農工商) 질서를 무너뜨리고 과학자와 기술자를 국가가 육성한 사건이었다.” 1991년 대한민국은 해외 두뇌 유치 사업을 중단했다. 필요가 없었다. 1970년 대한민국 국내 이공계 박사 학위 취득자는 14명이었다. 2022년 한 해 대한민국 이공계 국내 박사 학위 취득자는 7578명이다.(국사편찬위, ‘한국문화사’. 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 최형섭 묘. 비석 기단에는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라고 새겨져 있다. /박종인기자
347. 공화국 대한민국⑥ 정동(貞洞) 시대 과학기술처와 원자력병원
그들은 정동 뒷골목에서 과학과 기술 혁명을 꿈꿨다

▲서울 한복판 세종로사거리 뒷골목에 있는 사무실건물 ‘사조빌딩’(왼쪽 흰 건물)은 대한민국 과학기술 혁명이 태동한 역사적인 장소다. 1959년 이승만 정부가 만든 원자력연구소는 4년이 지난 1963년 뒤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고 방사선의학연구소를 개설했다. 그리고 또 4년이 지난 1967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첫 사무실이 이 병원 건물에 입주했다. 1970년 과기처가 종합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이 건물에서 이승만 정부가 만든 과학기술의 산실과 박정희 정부가 신설한 과학기술 근대화 작업실이 공생하며 대한민국을 이끌었다./박종인 기자
정동 2번지 수상한 건물 하나
1963년 9월 13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 뒷골목에 정체 모를 건물이 들어섰다. 주소는 중구 정동 2번지였다. 완성된 외곽 생김새는 여느 고층건물과 달랐다. 니은 자 형태로 지은 건물은 골목길 쪽으로 창문마다 사방이 시멘트 격벽으로 가려져 있었다. 골목길 쪽 건물은 3층이고 뒤쪽 건물은 4층이었다. 널찍한 주차장이 뒤편에 있었는데, 당시 차량 대수가 그런 넓은 주차장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석 달이 지난 그해 12월 17일 건물 용도가 밝혀졌는데, 현관에 걸린 현판을 보니 ‘방사선의학연구소’였다. 그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에서 나오는 그 방사선으로 사람을 치료한다는, 원자력병원의 전신이다.
그리고 3년 4개월이 지난 1967년 4월 21일 더 무시무시한 일이 이 건물에서 벌어졌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이 좁은 골목에 찾아와 삼엄한 경비 속에 건물 입구에 또 다른 기관 현판을 직접 내거는 게 아닌가. 현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과-학-기-술-처’.
1959년 이승만 정부가 씨앗을 뿌린 원자력과 박정희 정부가 야심 차게 시작한 과학 근대화 작업 합동 아지트가 탄생한 날이었다.

▲1970년대 서울 정동에 있던 한국원자력병원 현관과 외관 모습(왼쪽). 오른쪽은 1967년 4월 21일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원자력병원(당시 방사선의학연구소)에 입주한 과학기술처 현판식에 참석한 장면이다. 박정희 앞은 초대 과기처장관 김기형./한국원자력연구원, 국가기록원
돈이 되는 과학
1965년 5월 18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베트남 파병과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이라는 약속이 담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 열린 교민 환영회에 참석했다. 교민 가운데 김기형이라는 사람과 악수를 하며 박정희가 물었다. “하는 일이?” “박사를 따고 전자산업 연구개발실에서 전자 부품 개발 연구 중이다.” 김기형은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박사를 딴 마흔 살 된 사내였다. 대통령이 떠나기 전 김기형이 말을 이었다. “전자 부품을 따발총 쏘듯 생산하고 불량품은 자동 선별하고 합격품은 자동 포장해 판매한다. 단가는 1달러 정도다.” “다시 만나기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대통령은 자리를 떴다.
그리고 1966년 7월 김기형에게 전보 한 통이 도착했다. ‘조국 근대화에 동참하시라.’ 김기형은 바로 귀국했다. 그리고 1967년 4월 13일 김기형은 대한민국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에 임명됐다. 첫 만남 후 7년이 지난 1972년 덕수궁에서 제1회 전자 부품 전시회가 열렸다.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있던 박정희가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인 김기형을 부르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때 1달러라고 했지?”(김기형, ‘과학기술처 출범과 박 대통령’,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 MSD미디어, 2010. pp.267~271)
정치, 권력 그리고 과학
1967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박정희 후보는 ‘조국 근대화’를 선거 구호로 내세웠다. 투표일을 열흘 정도 앞두고 박정희 정부는 과학기술처 설치를 전격 결정했다. 과학기술처는 선거운동 기간인 그해 4월 21일 개청됐다. 박정희는 선거 유세 동안 이렇게 공격적으로 야당에 독설을 날리곤 했다. “몸은 20세기에 살고 있는데 머리는 19세기에 살고 있다.”(김근배 등, ‘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 역사비평사, 2018, pp.35~36)
박정희가 과학기술을 권력 유지와 재창출에 활용했다는 비판이 없지 않다. 이들은 ‘과학기술은 최고 통치자의 열정보다 정치적 의도와 맞물리며 추진되곤 했다’고 비판한다.(김근배, 앞 책, p38) 정치인이니 순수 열정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로지 정치적 의도만으로 과학기술 육성을 주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에게 과학기술은 경제 자립을 위한 도구였다. 그래서 ‘단가 1달러’를 주장한 40대 사내를 장관에 앉혔고 6년 뒤에도 그 ‘1달러’를 기억한 정치인이었다. 초대 KIST 소장 최형섭이 장기 연구 대신 단기 응용기술 연구를 위한 연구소를 주장한 이유도 동일했다. 과학기술을 통해 빨리 부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1986년 12월 4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 44명 출정식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병구(유체계통설계실장) 김덕승(기획부장) 이상수(환경관리센터장) 임창생(원자력사업본부장) 한필순(소장) 김동훈(부소장) 이창건(원자력연수원장) 전풍일(원자력정책연구부장) 김시환(경수로핵연료사업부장) 유성겸(행정부장). 그 뒤편으로 태평양을 건널 젊은 연구원들이 서 있다. 현 원장인 주한규(위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안경 낀 사람)도 그 가운데 끼여 있다.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하나하나 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들이다. 이들은 소장 한필순과 함께 “필(必) 설계기술 자립!”을 외치고 미국으로 떠났다./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자력, 발전에서 치유까지
1959년 이승만 정부가 설립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전력 생산만 연구하지 않았다. 1963년 연구소는 방사선의학연구소를 신설했다. 1963년 9월 서울 정동 2번지에 건물을 짓고 12월 17일 연구소가 출범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0일 연구소에 암 병원이 개설됐다.
지금은 유수 의료기관에서 암을 치유하고 있지만 의료환경이 열악했던 1960년대 원자력병원은 획기적인 암 전문 의료기관이었다. 정동 건물은 그 의료 활동에 최적화된 건물이었다. 지금도 사대문 안에서 보기 드문 주차장도 병원용이었고 격벽으로 서로 차단된 사무실 창문도 목적이 동일했다.
국내 암환자가 급증하면서 원자력병원은 1973년 2월 17일 원자력연구소 직속 병원으로 개편됐다. 건물 입구에는 ‘원자력연구소 원자력병원’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영문명은 ‘Korea Cancer Center Hospital’, 말 그대로 암병원이다.
정동에 모여든 과학기술
“거, 쟁이들이 모여 귀찮기는 하지만 그들을 통해 과학기술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1966년 경제기획원 차관 김학렬)(전상근,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정우사, 1982, p102) 대한민국 정부 과학기술정책이 가속이 붙으면서 정통 ‘문과’ 관료들도 과학기술의 가치를 조금씩 깨달아갔다. 그리하여 해방 후 대한민국 과학기술자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과학기술 전담 부서, 과학기술처가 탄생했다. 물론 재선을 노리는 정치인 박정희 야심도 한몫을 했다. 장관은 국무위원 서열이 24명 가운데 23번이었다.
선거가 임박한 1967년 4월 21일, 정동 원자력병원 건물 절반을 빌려 과기처가 문을 열었다. 이듬해 한 층을 증축할 정도로 직원도 늘었다. 골목 맞은편은 다방이고 바깥쪽은 대폿집과 식당이 늘어서 있었다. 바로 이날 4월 21일이 ‘과학의 날’로 지정됐다.
‘쟁이들을 이해하게 된’ 관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아니었다. 일반 국민까지 기술을 천시하는 유교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과기처는 기술진흥과 함께 그 전근대 시대정신을 타파해야 하는 책임을 맡아야 했다.(이응선 등, ‘과학기술 선진국을 이룬 숨겨진 이야기들’, 한국기술경영연구원, 2012, p16)
정동 2번지는 대한민국 과학입국의 둥지였다. 정권이 숱하게 바뀌고 과기처 명칭도 바뀌었어도 ‘과학’과 ‘기술’은 변함이 없다.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이 ‘칼국수’를 상시로 내놓자 식품공학 전공 과학기술부 자문위원이 “콩국수가 건강에 좋다”고 하자 곧 메뉴가 콩국수로 바뀌기도 했다. 당시 장관은 “대통령이 ‘과학자 말은 무조건 믿는다’더라”라고 전했다.(이응선, 앞 책, p51)
정동 2번지에서 공생했던 과학기술처는 1970년 정부종합청사 완공과 함께 둥지를 떠났다. 원자력병원은 1972년까지 연인원 48만명을 원자력 즉 방사선으로 치료했다.(‘한국원자력연구원60년사’, p20) 원자력병원은 1984년 서울 노원구 공릉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훗날 원자력 가운데 의학 부문은 한국원자력의학원으로 독립했다. 2년 뒤 1986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젊은 연구원 44명을 미국으로 보냈다. 당시 소장 한필순이 그들에게 던진 화두는 ‘필(必) 설계기술 자립!’이었다. 1967년 과기처 개청식 때 대통령 축사도 동일했다. “과학기술 진흥은 경제 자립을 가능케 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김근배, 앞 책, p36)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첫 둥지 정동 2번지 건물은 민간에게 매각돼 지금 맥줏집과 식당과 각종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2023.07.05
348. 공화국 대한민국⑦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와 과학기술처
1959년 7월 15일 ‘공돌이들’, 반란을 시작하다

▲1959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 과학계에 큰 획을 그은 날이었다. 문교부와 학술원이 후원한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가 서울 동숭동 서울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다. 제목은 원자력이지만 이 학술회의는 과학기술계 다양한 분야 학자 600여 명이 참석한 종합학술회의였고 공화국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최대 규모 과학기술 학술회의였다. 전날인 7월 14일 당시 양주 공릉리 서울공대에서 열린 연구용 원자로 1호기 기공식을 계기로 열린 이 학술회의에서 과학-기술학계는 원자력 종합개발정책과 과학기술진흥법 제정을 정부에 요구했다. 이들 과학자의 요구는 7년 뒤인 1966년 12월 과학기술진흥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서울기록원
500년 중인(中人)의 반란
역사는 그냥 움직이지 않는다. 방향을 정확하게 읽는 지도자, 방향에 동의하는 인력(人力) 그리고 이들과 함께 현장에서 움직이는 노동력이 결합할 때 역사가 이뤄진다. 조선 500년 동안 과학자와 기술자는 사대부들 멸시 속에 중인(中人) 내지 천민 취급 받으며 살았다. 국부(國富)와 민생(民生)을 위한 혁신도 찬사는커녕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왕이 탈 가마를 불량품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역사에서 사라진 세종 시대 기술자 장영실이 대표적인 예다.(1422년 4월 27일 ‘세종실록’)
그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국가에 의해 지원을 받고 그 국가정책에 개입하게 된 날이 있다.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가 열렸던 1959년 7월 15일이다. 대한민국 과학사는 이날 전과 후로 나뉜다. 500년 중인(中人)이었던 과학기술자들이 반란을 일으킨 날이다.
반란의 전사(前史), 대남송전 중단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대남송전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해방 직후 식민 일본이 운영하던 전력 생산 시설은 발전 설비는 87.6%, 발전량으로는 96%가 북한 지역에 몰려 있었다. 평균 생산 전력은 38선 북쪽 시설 평균 생산 전력은 94만2000KW였고 남쪽 생산 전력은 4만2512KW에 불과했다.(전성현, ‘한국전쟁 전후 전력 위기와 발전선의 역할’, 인문사회과학연구 23권1호,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22) 1948년 미군정이 급히 들여온 2만KW급 발전선 자코나(Jacona)와 6900KW급 엘렉트라(Electra)가 각각 1월과 3월 부산과 인천에 입항했다. 엘렉트라호가 가동되고 한 달 뒤인 5월 14일 북한은 송전을 중단했다. 곧이어 6·25전쟁이 터졌다. 인천에 있던 엘렉트라 발전선은 적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폭했다. 정부는 추가로 투입된 소규모 발전선 4척과 응급 복구된 발전소로 전국에 전력을 공급했다. 이들 발전선이 본국으로 귀환한 때는 1955년 9월이다. 그때까지 대한민국 필요 전력 가운데 3분의 1은 이들 발전선이 생산했다.
2년 틀린 예언, 시슬러와 이승만
1954년 8월 미국이 원자력법을 개편했다. 소련과 냉전 체제가 공고화되자 원자력 독점 정책을 폐기하고 민간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고 ‘평화적 이용’을 조건으로 우방에도 기술을 개방했다. 1956년 2월 대한민국은 미국과 ‘원자력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이승만 정부는 3월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신설했다.
그해 7월 미국 국제협조처 전력고문 워커 시슬러(Cisler)가 대통령 이승만을 찾았다.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 이창건(전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장)이 당시 대화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
“원자력이 만성적 전력난을 해결할 수 있을까?”
시슬러가 가방에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이만한 상자 정도 우라늄이면 화물 트럭 100대분의 석탄이 만들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무게로 따지면 화석연료의 300만 배쯤 되는 전력 생산이 가능하다.”
이승만이 감탄하며 되물었다. “대한민국도 가능한가?”
시슬러가 이렇게 답했다.
“이 동력원은 석탄이나 석유처럼 쉽사리 땅에서 채굴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는 사람 머리(Human Brain)에서 캐내는 것이다. 고급 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하면 대한민국도 가능하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호기심 가득한 이 프린스턴 철학박사 출신 대통령에게 시슬러가 답했다. “20년?”(이창건, ‘한국 원자력 과거 현재와 미래’, 21st century science & technology, 21st Century Science Associates, 2007-2008 겨울 호)
1958년 제정된 원자력법에 따라 이듬해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됐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미국 지원 속에 1969년까지 국비 131명을 포함해 과학자 모두 322명을 미국에 보냈다.(‘한국원자력연구소30년사’, 1990, p66) 1978년 4월 29일 양산 고리 1호 원자로가 상업 발전을 시작했다. 1956년에서 22년이 지났다. 훗날 한국을 다시 찾은 시슬러는 “2년은 오차 범위 내이니 내 예언이 맞았다”고 우겼다.(‘한국원자력연구소30년사’, p85)

▲대한민국 원자력 및 과학기술의 초석을 다진 윤일선(1896~1987)./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미래에서 온 과학자들
윤일선(1896~1987)은 과학자며 의학자다. 대한제국 학부국장 윤치오의 아들이다. 개화기 지식인 윤치호가 5촌 당숙이고 윤보선이 4촌이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어릴 적 조선에 돌아온 뒤 교토제국대 의대를 졸업했다. 1929년 경성제대 병리학교실 조교수로 있으면서 교토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많은 조선인 제자를 길렀다. 그 가운데에는 훗날 정읍 구마모토농장 주치의로 일하다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선구자가 된 ‘조선인이 가르친 조선인 박사 1호’ 이영춘도 있었다.
1937년 윤일선은 윤치호가 준 돈 5000원과 세브란스 예산 3000원으로 미국과 유럽 병리학계를 견학했다. 윤일선은 미국 버클리에 있는 ‘어네스트-로렌스 연구실’ 풍경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중성자가속장치 사이클로트론 앞에서 윤일선은 ‘이 방사선 가속기가 의학 발전에 기여하겠다’라고 생각했다.(윤일선, ‘나의 학문편력’, 1987년 5월 4일 ‘매일경제’)
윤일선은 해방 후 서울대 총장과 원자력원장과 학술원 회장과 원자력병원장을 두루 맡으며 대한민국 원자력계를 설계했다. 1948년에는 미국 프린스턴대 원자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기도 했다.(1948년 6월 16일 ‘조선일보’) 윤일선이 아쉬워했던 중성자가속기의 꿈은 근 50년이 지난 1986년 당시 원자력병원장인 아들 윤택구가 스웨덴제 사이클로트론 가속기를 도입하며 이뤄졌다. 윤일선은 그 이듬해 죽었다.
윤일선처럼, 국가가 없거나 국가 지원이 없었음에도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해방 후 가난한 시대, 이들은 ‘토요일마다 군복을 입고 적선동 문교부 가건물에서 세미나를 하는’ 원자력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1955년 만들어진 이 스터디 그룹 멤버 하나하나가 대한민국 원자력과 과학기술의 아버지들이다. 서울대 교수를 때려치우고 원자력과 과장이 된 윤세원이 가져온 서적 ‘연구용 원자로’가 첫 교재였다.
6·25전쟁 중 대북첩보부대인 켈로부대에서 활동했던 서울공대 졸업생 이창건도 멤버였다. 경무대로 배달된 미국 원자력 관련 많은 문건은 ‘타자 실력과 영문 작성 능력이 뛰어난’ 이창건이 맡아서 처리했다.(‘한국원자력연구소30년사’, p86)

▲1959년 7월 14일 당시 양주 공릉리 서울공대에서 거행된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 투’ 기공식 뒷 장면. 대통령은 물론 민의원의장(국회의장)과 주요 주한외교사절이 기공식에 참석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사진 오른쪽 백발)과 초대 원자력원장 김법린(이승만 왼쪽 안경 쓴 사람)이 식을 마치고 걸어가고 있다. /국가기록원
반란의 그날
그렇게 냉전이 만든 미국 원조와 원자력을 알아본 리더 이승만과 미래를 준비 중이던 과학기술자들이 이뤄낸 성과가 연구용 원자로였다. 1959년 원자력연구소 설립과 함께 미국에서 들여온 1호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2′ 기공식이 양주 공릉리 서울공대에서 열렸다. 부지는 당시 서울대 총장 윤일선이 확보해 줬다. 1959년 7월 14일이었다. 문명의 씨앗을 발아시킬 ‘제3의 불’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원자로 기공을 기념해 ‘제1차 원자력 학술회의’가 서울 동숭동 서울대 대강당에서 열렸다. 대한민국 과학계와 기술계가 총출동했다. 갓 출범한 원자력원이 주최하고 윤일선이 회장인 대한민국 학술원이 후원했다. 한국물리학회장 최규남이 선언했다. “한나라 흥망은 그 나라 과학력에 있다.” 대통령 이승만 축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나라 장래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끝 문장은 이러했다. “이 회의가 우리들이 옳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으로 생각한다.”(1959년 7월 16일 ‘조선일보’) 당시 서울의대 교수 이문희는 이렇게 평가했다. ‘기술자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과학계의 나갈 길을 마련할 토대를 만들었다.’(1959년 7월 22일, 23일 ‘조선일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나라 흥망을 떠맡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원자력 종합개발 5개년계획’과 ‘과학기술진흥법 제정’을 정부에 건의하고 회의를 끝냈다.
4·19와 5·16 이후 경제기획원에서 맡았던 과학기술 정책은 7년 뒤 결실을 맺었다. 1966년 12월 김대중과 이만섭을 포함한 의원 13명 발의로 ‘과학기술진흥법’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1967년 1월 16일 박정희 정부는 ‘과학기술진흥법’을 공포했다. 석 달이 지난 4월 21일 서울 정동에서 과학기술처가 현판식을 가졌다. 선비가 500년 지배하던 땅에서 마침내 중인(中人)들 반란이 시작됐다.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 개최를 알리는 1959년 7월 3일 ‘조선일보’ 기사. ‘원자로 도입을 계기로 학계, 기술진 총동원’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대한민국 과학기술사의 전과 후를 가르는 초대규모 ‘쟁이’들의 모임이었다./조선일보db
349. 공화국 대한민국⑨ 켈로부대 출신 94세 원자력 아버지 이창건
“이승만은 애국자요, 82세에 20년 뒤 보고 원자력 준비시켰으니까”

▲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 이창건이 대한민국 1호 원자로 트리가 마크2(TRIGA MARK II) 앞에 섰다. 1929년생인 이창건은 30년 뒤인 1959년 대한민국이 도입한 이 원자로를 운전하며 대한민국 미래를 설계했다. 먹고살 일도 막막했던 1950년대부터 이들을 길러낸 지도자, 그리고 이들 전문가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아버지들이다. 서울 공릉동에 있는 트리가 마크2는 핵심은 다 해체되고 외형은 근대유산으로 지정됐다. /박종인 기자
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 이창건 박사를 만났다. 1929년생으로 올해 94세다. 식민시대에서 해방, 근대화 시기와 21세기를 다 살아낸 역사다. 평안도 선천에서 내려와 배재고와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미군 특수부대인 켈로(KLO)부대에 근무한 뒤 평생을 원자력 개발에 바쳤다. 90을 4년 넘긴 전 원자력학회장, 현 원자력문화진흥원장은 겸손했다. 대화는 활기찼고 유머가 넘쳤다. 딱 두 차례 이 역사를 품은 과학자가 정색을 했다. 이승만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후쿠시마 처리수를 이야기할 때.
켈로부대의 추억
- 어떻게 현충일 기념식 때 한동훈 법무부장관한테 쪽지를 줄 생각을 하셨죠?
“내가 켈로부대원 자격으로 청와대에 갔었어. 사열을 받는데 가슴이 뭉클했어. 그런데 군악대 밴드 소리가 우리 대원들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생각나더라고. 님이 73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 가지고 ‘너 안다’고…. 북한에 가서 희생당한 우리 대원들 덕분에 내가 대통령한테 밥 얻어먹고 장관 옆에 앉은 거 아니오. 막 가슴 뭉클했지.”
- 켈로부대 입소한 이유는요?
“고향 선배가 있었어. 우리가 존경하는. 그런데 그 형 하숙집에 가면 이 사람이 막 뭘 감춰. 서울대에서 석산가 박산가 학위하던 형이야. 6·25 직전에 우리가 갔지, 저 형이면 이게 뭔지 알 거다 싶어서. 그랬더니 형이 하는 말이, 자기가 학비 벌려고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문서 번역 일을 한대. 그러면서 우리더러 전쟁 나면 뭐 할 거녜. 그 형이라면 우리가 껌벅 죽어. 그래서 전쟁 터지고 대구까지 찾아가서 입대했지.”
- 임무가 뭐였나요?
“주 임무는 기획장교였어. 대원들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그런데 휴전 직전에 대원들을 침투시켰는데 못 돌아왔어. 그게 가슴 아파. 집에서 샤워할 때 물줄기 소리가 걔들 울음소리처럼 들려. 통역도 했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했는데, 한국에서 영어 제일 잘하는 미국 사람 언더우드가 국회 연설을 통역했어. 그런데 이러는 거야. ‘북한 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셔서 남한을 정복하시려고 할 때.’ 높은 사람 왔다고 몽땅 존댓말을 써. 이래서 안 되겠다 해서 우리가 통역을 맡았지.”
켈로(KLO)부대는 미군이 운영을 맡은 대북 첩보와 공작 부대였다. 전후 켈로부대는 국군으로 상당수 흡수됐지만 그 실체를 미국도 한국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창건은 지난 현충일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정부 초청으로 기념식에 참석해 옆자리에 있는 법무장관 한동훈에게 감사 메모를 남겼다.

▲지난 6월 6일 현충일 기념식에서 한동훈 법무부장관에게 쪽지를 건네던 이창건 박사./조선일보db
창고에서 시작된 원자력
- 왜 군에 남지 않았습니까?
“소령 줬으면 모르겠는데 나더러 대위 주겠대. 뭐 별로…. 그래서 그냥 복학했어. 졸업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공부는 영 못했어. 입학하자마자 전쟁 나고 대전, 부산에서 그냥 막 학교 다녔으니까. 누가 시험 있다고 해서 가보면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나는 현역 장교니까 권총 꺼내서 답안지에 그려놓고 ‘난 배운 거 없습니다’라고 썼어. 몽땅 D야. 등록금이 너무 밀려서 돈 마련하느라 겨우 졸업했어.
- ‘원자력 스터디 그룹’은 어떻게 들어가게 되셨나요?
“현경호라고 우리 2년 선배가 계셨어. 전쟁 때 공군에 있었는데 서울공대, 문리대 우수 인력을 공군이 좍 끌어갔었어. 전쟁 끝나고 이 형을 길에서 만났어. 나더러 이래. ‘요새 뭐 하나?’ 일자리 찾는 중이라고 했더니 ‘자네 공부 좀 할래?’ 그러면서 언제까지 중앙청 옆 문교부 창고로 오래. 가봤더니 이미 (서울대 교수 출신 문교부 원자력과장) 윤세원 선생이랑 스터디 패거리를 만들어놨더라고. 그게 원자력 스터디 그룹이야. 공군 있을 때 미군이랑 원자력 세미나를 했었대. ‘원자력공학 입문’이라는 책이랑 ‘연구용 원자로’라는 책.” 현경호는 훗날 원자력학회장까지 지냈다.
- 전기공학 전공인데 낯설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12명인데 책이 한 권밖에 없잖아. 이걸 복사해야지? 그런데 다 내 선배들이야. 그래서 내가 해보겠다고 했지. 이걸 그냥~” 이창건은 기관총 소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타자를 쳤다고 했다. 다들 “다음부터 자네가 다 맡아!” 하더라고 했다. “다들 장교였으니까 부하들 시킨 거지. 나는 특수부대라 혼자 다 했거든. 영어도 그래. 밤에 북한에 침투한 대원들이 전문 보내는 거 기다리면서 영어책을 50권 읽었어. 그 실력으로 보고서를 쓰니까 또 나한테 다 시켜. 스터디그룹 할 때도 경무대에서 오는 서류들 다 내가 맡아서 했어. 그걸 몽땅 으다다다 하고 타자 쳐서, 하하하”
- 군에 남았거나 길에서 선배 안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무슨 큰일 날 소리. 내 선배들이 전부 다 나보다 우수한 사람들이에요. 우리 원자력 1세대는 한국에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고. 우리가 그걸 스터디 그룹이라고 그러는데 그 좌장이 윤세원 선생이에요. 스터디 세미나 끝나면 막 이래. ‘우리도 원자력법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어?’ 그러면서 미국 거, 영국 거, 일본 거 갖다 던져주고 작업하래. 또 ‘장기 계획을 세워야 되지 않겠어?’ ‘인력 양성은?’ 윤 선생이 다 준비한 거야.”
이창건이 말한 원자력 스터디 그룹 12명이 훗날 원자력연구소 창립 멤버가 됐다. 검게 물들인 군복을 입고 관공서 창고에서 시작한 자발적 연구 집단이 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윤세원은 원자력연구소 만들려고 이리저리 다니느라 빚을 져서 집까지 팔았다.
배고팠던 식민 시대, 그러나
이창건 고향은 평안도 선천이다. 6·25 전에 가족이 월남해 서울 상도동에 살면서 이건창은 배재고등학교, 서울공대를 다녔다.
- 식민지 기억은 어떠십니까.
“배고팠어. 내 키가 작잖아? 누님 셋은 커요. 나랑 아래 두 동생은 성장기 때 못 먹었어. 작아. 일본 친구들은 친했었어. 선천에서 우리 반에 1진이 있었어. 전학 오면 무조건 패는 전통이 있었지. ‘후쿠로 다다키’라 그러던가? 일본 애 하나가 전학 왔는데 자기가 유도 1단이라면서 안 맞겠다네? 이게 싸움이 돼서 경찰이 왔어. 그런데 우리를 사상범이라고 붙잡아 가는 거야. 어느 날 우리가 방공호를 파고 있는데 천황이 항복했대. 일본 애들이 다 도망갔어. 그러니까 애들이 그 유도 1단 죽이겠다고 작전을 짜는 거야. 그랬더니 우리가 정말 존경하는 김영철 선생님이 와서는 딱 한마디 낮은 소리로 이래. ‘넘어진 자는 밟는 거 아니야.’ 그 선생님 한국말하는 거 처음 들었어. 애들이 다 쫄아서 도망갔어.” 그러더니 이창건은 한참 침묵하더니 눈물을 흘렸다. “그 김영철 선생님이, 러시아군한테 잡혀서, 시베리아에서….”
- 집안도 고생하였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한때 상해 임정에서 일했어. 일본이라면 이를 갈았어. 전쟁 때 파편 맞아서 반신불수가 됐는데, 악화가 되니 링겔을 맞아야 했어. 그런데 링겔 바늘이 일제야. 바로 뽑아버리셨어. 그러고 돌아가셨다."
- 일본이 미우시겠네요.
“그렇지 않아. 그때 그런 거 어떡하라고. 글로벌하게 살아야 살아지는 건데 지금 반일(反日)해서 어떻게 살자는 거지? 과거는 묻지 말자고. 이제부터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켈로부대 맷집으로 버틴 원자력
‘싸고 품질 좋은 전기’는 산업 발전의 근본이다. 이창건에 따르면 1년 중 정전 시간이 한국은 14분, 일본은 35분, 미국은 98분이다. 무엇보다 전기값이 물값의 70%다. 이창건은 이게 다 원자력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 1978년에 고리 1호기 발전소를 처음 만드셨잖아요?
“부지를 내가 선정했지. 그런데 답사 다니다가 동해안에서 해병대한테 걸렸어. 원자력연구소 출장증명서랑 신분증 보여줘도 부대로 끌고 가. 내가 아직도 평안도 사투리를 쓰잖아? 엄청 맞았어, 간첩이라고. 그렇게 경찰이랑 군인한테 네 번 맞았어. 그런데 내가 누구야? 켈로부대 장교야. 맷집으로 버틴 거지. 지금도 앞니랑 코가 내려앉아 있긴 해.”
- 고리 1호기가 가동될 때까지 별일 다 있었겠습니다.
“문교부에 원자력과가 생겼어. 1956년이야. 전쟁 끝나고 3년 뒤야. 그때 워커 시슬러라고,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이 왔어. 이승만 대통령께서 ‘8군에 시슬러라는 분이 오셨대지? 한번 경무대 오라고 그래’ 했어. 오니까 ‘여보, 전기가 없어서 죽겠는데 무슨 묘안이 없겠어?’ 그러니까 시슬러가 석탄이 든 나무 상자를 꺼내더래. ‘이건 석탄이고, 이 막대기는 우라늄이요. 이것이 타면 큰 오일 탱커 하나, 화차 30량 석탄에서 나오는 에너지만큼 전기가 나는 묘책이 있는데 한국에서 할 수 있겠어요?’ 했다지. 그러니까, 시슬러가 정치가를 가지고 논 거예요. 이승만이 ‘여보 살려주세요, 그럼 그걸 어떻게 하는 거요?’ 한 거야. 시슬러가 이랬어. ‘석탄은 땅에서 캐내는 자원 에너지라 유한하다. 그러나 이것은 두뇌에서 개발하는 기술 에너지요. 캐면 캘수록 더 농도가 짙은 고급 에너지가 나온다. 내 보기에 한국 사람 머리가 좋으니까….’ 자꾸 꼬신단 말이야? 그랬더니 이승만이 물었어. ‘그러니까 언제쯤 원자력 전기는 볼 수 있겠어?’ ‘글쎄요, 한 20년 후?’”
이후 이승만 정부는 국민소득 100불일 때 1인당 국비로 훈련비 6000달러씩 지출해 가며 미국으로 전문가 유학을 보냈다. 모두 238명이었다. 이창건도 그중 하나였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갑자기 이창건이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이승만이가 82살이거든? 82살 때 20년 후를 위해서 우리를 훈련시켰어. 그 영감은 자기 당대에 덕 보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애국자예요. 그래서 2009년 말에 UAE에 원자로 수출했을 때 내가 국립묘지에 아들 데리고 갔잖아. 이승만 묘소 앞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할아버지, 그때 저희들 10년 동안에 238명을 훈련시킨 결과니까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십시오. 20년 후에 된다고 그랬는데 꼭 20년 만에 고리에서 원자력 발전이 나왔습니다.”
그러고 박정희 대통령 묘에 갔어. “각하, 우리가 중동 사막에 무궁화 나무 4그루(원자로 4기)를 심었습니다 신고합니다”, 턱 그랬다고.
그 밑에 가면 김대중 대통령이 있어요. 그때 원전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 당에서 물고 늘어지니까. 근데 목포에서 김 대통령이 그랬어. ‘원자력을 안 할 수 없어, 부득이해.’ 그 얘기 한마디 때문에 원자력을 할 수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원자력이 지금 세계적으로 되고 있고 또 수출까지 했다고요.”

▲1962년 트리가 마크2 원자로 가동 기념 우표
금 선생이 똥 선생으로
“1961년 미국에 출장 중이었는데 경제사절단이 왔다. 단장이 고향 선배인 재무부차관 이한빈이었다. 갑자기 내 방으로 오더니 “서울을 빨갱이들이 뒤집은 모양이다, 망명 준비하자”고 하더라. 그런데 몇 시간 뒤에 “그게 아니라 혁명이란다”면서 가방을 풀었다. 5·16이었다. 이후에도 원자력은 변함없이 추진됐다.”
1959년 이승만이 도입한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2는 박정희 때인 1962년 가동됐다. 이창건은 “이승만 때 황무지를 개간해서 씨를 심고 박정희가 물을 뿌려서 열매를 맺게 했으며 이후 이를 강력히 밀고 나갔다”고 했다.
“원자력연구소 월급은 다른 부서 3배였다. 그래서 우리처럼 어수룩한 사람도 자랑스럽게 훈련을 받았지.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더러 ‘금(金) 선생’이랬어. 몸무게만큼 금값 받는다고. 그런데 그 금 선생을 말이야, X 선생이 똥 선생으로 만들었거든? 나는 떠났지만 우리 후배들, 최소한 동(銅) 선생 대접은 받아야지. 기자 양반, 이거 제목으로 꼭 써주소.”

▲서울 공릉동 옛 원자력연구원이자 현 한전인재개발원에 남아 있는 트리가마크2 건물./박종인 기자
후쿠시마 괴담과 이창건
이승만이 시슬러를 만난 1956년부터 1978년 고리 1호기 상업 가동까지 별의별 일이 다 벌어졌으나, 이를 다 쓸 여유는 없다. 그사이 대한민국은 초능력을 발휘해 오늘날까지 왔다. 대한민국을 떠받친 그 아버지들은 많은 이들이 하늘로 갔다. 이제 이창건도 역사가 되려고 한다.
그 역사가 말했다.
“그 요새 신문마다 후쿠시마 물 방출하는 것 때문에 말이 많은데, IAEA가 이런 문제가 나면 세계 최고 권위자들을 모셔다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요. IAEA 직원이 아니라 세계 최고 전문가들을 소집한다는 말이오. 그러니까 IAEA의 결정은 세계 최고의 결정이에요. 나도 IAEA 전문가로서 한번 아프리카에 간 일이 있어요. 자기 몸에 동위원소를 주입해 실험한 론도라는 동위원소 박사와 나. 론도는 아프리카 어딜 가도 다 알아. 나는 왜 갔냐. 이창건이는 세계적인 학자가 아니야. 그런대 대한민국은 최빈국에서 최고가 된 최우수 국가거든. 그 노하우를 가지고 간 거야. IAEA는 그렇게 사람을 뽑아서 한단 말이오. 직원을 보내는 게 아니라고. 근데 그걸 못 믿겠다니, 누구 말을 믿겠다는 거요?”
▲이창건(1929~ )
2023.08.09
350. 끝·공화국 대한민국⑩ 대덕연구특구 50주년과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
“대한민국 기초과학을 가능케 해준 선배들께 감사드립니다”

▲대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에 있는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 수소(H), 헬륨(He) 같은 가벼운 원자를 발사해 충돌시켜 다양한 동위원소를 만드는 장비다. 이들 가운데 ‘극도로 짧은 순간만 존재하는’ 희귀동위원소가 연구 대상이다. 거대하게는 우주 탄생의 비밀 규명부터 2차전지 생산까지 이 장비를 통해 연구할 수 있다. 지금껏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돈 되는’ 응용과학이 아니라 성과가 언제 나올지 불확실한 기초과학에 대한민국이 눈을 돌리고 있는 물증이다. 기초과학연구원 산하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소장 홍승우가 말했다. “대한민국과 선배 과학기술자들에게 무한히 감사하다”고./박종인 기자
대전의 탄생과 대전발 0시 50분
대전(大田)은 조선 후기 고지도에 드문드문 나오던 지명이었다. 공주와 충주, 청주 그리고 회덕과 진잠, 연산, 옥천 등지가 사람이 살던 도시였다. 러일전쟁이 임박한 1903년 12월 28일 일본 정부는 ‘경부철도 속성 명령(京釜鐵道速成命令)’을 공포하고 군사철도 경부선을 대전천(大田川) 옆을 지나는 노선으로 확정했다. 인구가 밀집한 공주로 우회하는 노선은 경제적으로는 이득이 예상됐지만 토지 매입 비용이나 군수물자 신속 운송을 위한 건설 기간 단축을 기준으로는 ‘텅 빈’ 대전천변이 유리했다. 기관차 증기엔진 공급용 용수도 대전천이 풍부했다.(고윤수, ‘식민도시 대전의 기원과 도시 공간의 형성’, 도시연구 27호, 도시사학회, 2021)
1904년 ‘갈대가 무성하고 황량한 한촌’에 일본인 철도 노무원 188명이 들어왔다. 1914년 대전에 사는 일본인은 3435명으로 급증했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수십 가구에 불과했던 조선인 또한 1556명으로 급증했다. 대전은 명백한 식민도시였다.(송규진, ‘일제강점 초기 식민도시 대전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아세아연구 통권 108호,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2002) 1913년 10월 대전역을 분기점으로 한 삼남선(三南線·호남선)이 완공됐다. 분기점 원안은 조치원이었으나 대전 거류 일본인들 로비에 의해 대전으로 변경됐다.
지금은 호남선이 대전 북쪽에서 분지하지만, 그때 경성에서 목포로 가려면 대전에서 멈췄다가 열차 기관차 방향을 바꿔 달아야 했다. 소요 시간은 10분이었다. 0시 40분에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하면 승객들은 10분 동안 구내 국숫집에서 가락국수를 먹고 객차에 오르곤 했다. 목포행 열차는 0시 50분에 출발했다.
대덕의 탄생
허허벌판에 탄생한 대전이 지금 도시 전역이 비행금지구역이다. 인근에 군사도시 계룡대가 있어서가 아니다. 유성구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때문이다. 원자력연구원은 국가주요시설이다. 1985년 서울 공릉동에서 대덕으로 이전이 완료된 이래 대전 하늘은 이 국가주요시설을 지키는 방호막이 됐다.
대덕단지는 1973년 첫 삽을 떴다. 올해가 50주년이다. 단지 설립 목적은 명쾌했다. ‘각지에 분산돼 있는 연구기관의 협동체.’ 기기와 시설 공동 이용과 연구원 상호 교류를 통한 지적 공동체가 목표였다.(최형섭, 앞 책, p143)
50년 전인 1973년 9월 4일 과학기술처장관 자문기구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추진위원회’가 설치됐다. 1974년 3월 충남 대덕군 유성과 탄동, 구즉면 일대에 도로가 건설되고 한국표준연구소를 시작으로 정부 출연 연구소들이 속속 건설되고 입주했다. 800만평짜리 땅에 5만 인구가 생활할 자립도시로 예정됐지만 1973년 1차 석유 파동 탓에 자립도시에서 전문연구단지로 목적이 변경됐다. 하지만 국가기간산업을 떠받칠 전문연구소 집합체로서 정체성은 바뀌지 않았다. 1978년 4월 7일 대한민국 모든 것의 표준을 정하는 한국표준연구소가 개소했다. 9월 2일 럭키중앙연구소(LG화학기술연구원)이 첫 민간연구소 기공식을 가졌다.
1979년 10월 25일 오후 1시 20분, 단지 구축을 총괄하는 대덕단지관리사무소에 대통령 박정희가 불시 방문했다. 종합상황실에는 박정희가 쓴 휘호 ‘과학입국 기술자립’이 걸려 있었다. 박정희는 비서실장, 경호실장과 함께 단지 건설 현황을 보고받고 떠났다. 다음 날 박정희는 죽었다.(’대덕연구개발특구 40년사’,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2013, pp.64, 65)
이 광활하고 넓은 땅은 정부 출연 기관과 민간 연구기관이 가득하다. 2023년 현재 대덕연구개발특구는 2000만평 넘는 부지에 30여 개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295개 기업 연구소, 1000여 벤처·중견기업과 대학이 모여 있는 국내 최대 원천 기술 공급지가 됐다. 식민지 본국 일본인들이 건설한 도시가 과학도시로 변한 것이다.
대덕 과학기술자들의 성과
1986년 전기통신기술연구소(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전전자교환기(TDX)를 개발했다. 대한민국이 수동식 시외전화에서 해방됐다. 1989년 4메가 D램이 개발됐다. 지금 반도체 왕국은 그때 시작됐다. 1987년 원자력연구소에서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에 성공했다. 1988년 경수로 핵연료 양산 기술을 개발해 핵연료 자립에 성공했다. 1995년 한국형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개발됐다. 1997년 국방과학연구소는 K9 자주포를 완성했다.
1992년 3년 전 대덕에 입주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에서 대한민국 첫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우주로 보냈다. 2008년 핵융합에너지연구원이 실험용 핵융합발전기 KSTAR를 개발했다. 2013년 항공우주연구원에 의해 대한민국 우주 발사체 1호 나로호가 발사됐다. 2023년 역시 항공우주연구원이 개발한 누리호가 발사됐다.
이 모든 일이 대덕연구단지에 둥지를 튼 연구소들이 민간기업과 합작해 해낸 일들이다. 언론인으로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취재하고 지금 대전 경제과학 부시장으로 일하는 이석봉이 말했다. “연구단지라는 물리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능했지 수도권에서 출퇴근하는 연구원은 이루지 못할 성과들이다.” 미래라는 것이 불확실하던 1970년대, 미래를 연구한 저 두뇌들은 무엇이며 그 두뇌들이 모일 수 있도록 저 광활한 땅을 마련하고 키운 리더는 도대체 무엇인가.
▲지난 8월 7일 대전 한국원자력연구원을 방문한 원자력1세대 이창건(가운데 모자 쓴 사람). 젊은 연구원들이 도열해 원로를 맞이했다. 이창건 왼쪽은 현 연구원장 주한규, 오른쪽은 국산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설계자 류건중.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장면이다./박종인 기자
대한민국, 기초과학에 발을 딛다
1966년 해외 두뇌 유치 작업을 벌이고 있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대 소장 최형섭이 미국에서 교수로 일하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자기도 KIST에 동참하고 싶다는 편지였다. 최형섭이 답장을 보냈다. “지금은 기초연구를 할 단계가 아니니 박사님처럼 노벨 물리학상에 거론되는 분은 계속 미국에 머물러 연구하시라.” 이휘소가 답장을 보냈다. “동의한다. 하지만 언젠가 기초연구를 할 수준이 되면 제일 먼저 불러주시라.” 최형섭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젊은이였다”고 회상했다. 이휘소는 1977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1977년 최형섭은 이휘소에게 훈장을 상신했다. 훈장은 어머니가 대신 받았다. 이휘소가 일하고 있던 미국 양전닝연구소 소장 양전닝(楊振寧)이 방한해 기념 강연을 했다.(최형섭, ‘최형섭 회고록’, 조선일보사출판국, 1995, pp.96, 97)
그런 시대였다. 노벨상은커녕 감히 기초과학 연구를 위해 국가에 손을 내밀 엄두도 못 낼 때였고, 그런 손에 연구비를 쥐여줄 수 없는 가난한 대한민국이었다. 최형섭과 함께 활동했던 원자력 1세대 이창건은 기억한다. “확고한 기술 입국이라는 신념 덕분에 대한민국이 부강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기초과학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라고.
▲대덕특구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있는 국산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내부 모습. 가동중인 원자로 노심 수중에서 전자기파가 방출되면서 푸르게 빛나는 ‘체렌코프 블루(Cenrenkov Blue)’ 현상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이휘소가 강력하게 주장했던, 그 기초과학의 시대가 왔다. 2011년 5월 대덕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에 한국기초과학연구원이 설립됐다. 대덕 40년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기초과학연구원은 ‘빅사이언스’가 주연구분야다. 실패를 감수한 모험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도 포용한다.’(p.259) 대한민국이 드디어 기초과학으로 시야를 넓힌 것이다. 2018년 라온(RAON) 중이온가속기 설치가 시작됐다. 설비와 장비, 건물과 부지까지 1조5000억원짜리 초대형 프로젝트다. 중이온가속기는 우주 탄생의 비밀을 풀 수 있는 희귀 동위원소를 탐색하는 장비다. 물론 이 과정에서 2차전지와 신물질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당장 돈이 되는’ 응용과학 기술과 거리가 멀다.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소장 홍승우가 말했다. “언제 성과가 나올지 모를 연구를 위해 이 연구소 예산을 대한민국이 댔다. 대한민국 연구원들이 설계했다. 대한민국 산업체가 대한민국 기술로 만들었다. 선배 과학자들에게 무한히 감사하고 대한민국에 감사하다. 이제 없는 것은 경험뿐이다.” 식민도시 대전은 과학도시로 변신했다. 가난한 신생 공화국은 웅장한 대한민국이 됐다. 그 공화국이 미래를 준비한다. ◎
<’박종인의 땅의 역사’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