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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중앙일보) 2023-07/ 07.03(월) K바가지 - 07.31(월) 악수의 전제

상림은내고향 2023. 7. 27. 11:33

분수대(중앙일보) 2023-07/ 

07.03(월) K바가지

바가지요금(Overcharge)은 일반적으로 정해진 요금보다 비싼 요금을 뜻한다. ‘무언가를 퍼내는’ 그릇인 바가지에 ‘요금을 비싸게 내 손해를 본다’는 의미가 담긴 것은 조선 시대 말부터다.

바가지 같은 그릇 여러 개를 엎어놓고 이리저리 섞은 후 속에 넣어둔 숫자를 맞추는 도박이 유행했다. 숫자가 틀리면 걸었던 판돈을 잃었는데 이때부터 ‘바가지 썼다’는 관용구가 생겼다.

 

바가지요금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시기는 산업화가 본격화한 1960년대부터다. 다른 지역에서 온 고객이나 외국인을 대상으로 일부러 택시비를 비싸게 받았는데, ‘조폭 택시’까지 등장했다. 택시회사 직원들이 조직폭력배처럼 특정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자사 택시만 운용하도록 다른 택시회사 기사나 고객을 위협했다.

 

이들은 요금이 더 많이 나오도록 미터기를 조작하거나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갔다. 공항이나 역에 터를 잡고 이런 택시로 영업하던 이들이 폭력·협박 등으로 줄줄이 구속되는 일까지 빚어졌다.

 

버스 요금 바가지 논란도 있었다. 수도권 특정 노선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한 버스회사가 통상 요금의 두 배나 받아 시민의 불만을 사던 때도 있었다. 자전거·컴퓨터·자동차같이 전문지식이 필요한 업종은 바가지 쓰기 좋은 업종으로 꼽힌다.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 바가지 요금을 받으며 장사하는 상인을 일컫는 ‘용팔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코로나19 규제가 풀린 후 사실상 3년 만에 맞은 휴가철을 앞두고 바가지요금이 도마 위에 올랐다. 지역 축제나 유명 관광지를 찾은 후 ‘바가지를 썼다’는 글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작은 접시에 담긴 4만원짜리 통돼지 바비큐, 1만원짜리 어묵, 지름 10㎝에 2만500원짜리 감자전(3장) 등. 골프장 바가지에 지친 골퍼들은 코로나가 풀리면서 해외로 나가고 있다.

 

그간 힘들었던 상인들의 초조함도 알겠다. 그런데 그들이 텅 빈 가게에서 한숨 쉬는 3년간 소상공인 지원사업에 64조원이 투입됐다. 국민이 낸 세금이다. 코로나19로 모두 힘든 시기였지만, 사실상 개점휴업해야 했던 상인들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에 가능했던 지원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내뱉었던 탄성이 바가지요금 때문에 탄식으로 바뀌어서야 되겠나. 외국인 관광객 커뮤니티에서 ‘K바가지’라는 조롱 어린 신조어가 하루빨리 사라졌으면 한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7.04 그림자 아이와 애장터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는 되지 않은 아동을 ‘그림자 아이’라 한다. 옛날엔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가 차이 나는 사례가 흔했다. 영아사망률이 높았기에 아이가 삼칠일· 백일·돌 등의 고비를 무사히 넘기는지 지켜보다 출생신고를 하는 일이 빈번해서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출생아 1000명당 영아사망률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232.4명으로 정점을 찍고 1955년에 비로소 세계 평균보다 낮은 수치를 기록하는 등 매년 줄어들었다. 1960년 82.9명, 1970년 48.3명을 거쳐 1994년부터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예방접종과 산전검사 등 의학 발달과 경제성장에 힘입어서다.

경북 안동지역 사례를 연구한 변윤희의 2018년 논문에 따르면 영아사망이 흔했던 시기 어린아이는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출산 직후 여자아이임을 확인하면 의도적으로 방치해 죽이는 관행도 있었다. 장례나 작별인사 같은 의례도 없었다. 아이가 죽으면 집안의 남성이 시신을 낡은 옷이나 천으로 둘둘 싸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산에 묻었다. 애장터·애촉·애처구덩이·아장단지·애기장 등 이름은 지역별로 달랐지만, 1970년대까지는 마을마다 죽은 아이를 묻는 암묵적인 장소가 있었다. 무덤을 꾸준히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 시대 아이의 죽음은 별것 아닌 일이어야 했다. 살아있는 아이들과 목구멍에 풀칠하는 게 우선이었다.

 

소설가 구효서의 단편 ‘명두’에서도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주인공은 제 아이를 셋이나 죽여 굴참나무 밑에 묻었다. 굴참나무는 원래 깊은 산중에 있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먹고살 만한 세월이 되어 산 중턱까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자 뿌리째 뽑힐 처지가 된다. 한때는 생존 방식이었던 영아살해 역시 숨길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범죄가 되어 맨몸을 드러낸다.

 

2022년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2.3명이다. 첨단 의학 시대에 ‘그림자 아이’가 2000여 명에 달한다. 전수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연일 사망 소식이 이어진다. 냉동실에 영아 시신을 넣어둔 채 살아있는 아이들을 키운 엄마는 남편은 출산한 것도 몰랐다며 홀로 죄를 뒤집어쓴다. 아이를 죽인 엄마들만 엄벌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오죽하면 냉장고가 애장터가 되도록 우리 사회가 방치한 건 아닐까.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7.05 6·25 참전용사

미국 골프선수 채드 파이퍼는 이라크 전쟁 참전용사 출신이다. 2001년 9·11 테러에 충격을 받은 그는 입대를 결심하고, 2006년 이라크에 파병됐다. 이듬해 10월 그는 동료들과 순찰을 나갔다가 인생이 바뀐다. 순찰 중 적군을 조우한 파이퍼는 트럭 방향을 바꿨는데, 그때 급조폭발물(IED)을 들이받았다. 폭발로 트럭이 뒤집어지며 파이퍼는 정신을 잃었다. 왼쪽 다리는 더이상 쓸 수 없었다. 미국 워싱턴DC의 군 병원으로 돌아와 오랜 시간 수술과 재활 치료를 받았다. 현재 그의 왼쪽 다리는 의족이 대신한다.

파이퍼는 미국에선 꽤 유명한 선수다. 지난 5월엔 미국 장애인 오픈에서 우승했다. 이 대회 두 번째 트로피다. 그가 골프선수로 빠르게 재기할 수 있었던 건 미국 제대군인부(VA)의 각종 지원 때문이다. 장애보상금, 연금, 취업지원, 주택자금대출 등 전방위적으로 지원한다. 제대군인은 연금으로만 올해 기준으로 연간 3만1714달러(약 4100만원)에서 소득을 뺀 금액을 받는다. 장애 정도에 따라 장애수당이 추가되고, 의족 등 보철구도 지원된다.

 

한국의 참전 노병들은 서글플 수밖에 없다. 부산의 80대 6·25전쟁 참전용사 A씨는 지난 4월부터 한 달 동안 마트에서 7차례에 걸쳐 참기름·젓갈 등 8만원 상당의 식료품을 훔친 혐의로 경찰에 잡혔다. A씨는 이가 안 좋아 미역국을 끓이려 했는데 참기름이 없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그가 받은 정부의 참전명예수당은 월 39만원이다. A씨에게 후원하겠다는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훈훈한’ 뉴스도 나왔다.

 

국가보훈부는 6·25전쟁에 참전한 국군과 유엔군 용사를 위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3일 밝혔다. 전투 중 입은 부상과 동상 등으로 발 모양이 변형돼 기성화가 맞지 않는 참전 유공자 300명에게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주는 프로젝트다. 6·25 전쟁이 정전된 지 70년 됐다. 300명은 70년 동안 맞지도 않은 신발을 신었던 것일까. 왜 아직까지 치료받지 못했을까. 6·25전쟁 참전유공자 평균 연령이 91세라고 하는데 이제서야 제 발에 맞는 신발을 찾게 되는 것과 A씨의 생활고를 해결할 방법이 민간의 ‘온정’밖에 없다는 것이 마치 훈훈한 일처럼 다뤄지는 게 이상하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7.06 김민재 시대

축구대표팀 핵심 수비수 김민재(27)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소속팀 나폴리(이탈리아)를 떠나 독일 분데스리가 최강 바이에른 뮌헨 입단을 눈앞에 두고 있다. 김민재는 3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이수하고 6일 논산 육군훈련소를 퇴소한다. 이후 메디컬 테스트, 세부 조건 조율, 계약서 서명 등 팀을 옮기기 위한 막바지 작업이 일사천리로 이뤄질 예정이다.

자국 리그 우승을 밥 먹듯 하는 뮌헨이 김민재를 영입하는 건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위해 꼭 필요한 선수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뮌헨이 김민재를 위해 향후 5년간 투자할 총액은 연봉(매년 256억원·세전)과 이적료(712억원), 각종 수수료(210억원) 등을 합쳐 2000억원이 넘는다. 계약 체결과 동시에 김민재는 올해 164억원의 연봉을 받는 손흥민(31·토트넘)을 제치고 한국 축구선수 역대 최고 연봉자로 올라선다. 차범근(70)을 필두로 박지성(42), 손흥민까지 공격수 중심으로 이어진 한국 축구 월드 스타 계보를 수비수가 물려받게 돼 더욱 반갑고 흥미롭다.

 

그런데 스포츠계가 주목하는 김민재가 둘이나 더 있다. ‘모래판 몬스터’로 통하는 씨름 김민재(21·영암군 민속씨름단)는 민속씨름 부흥을 이끌 견인차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지난해 대학생 신분으로 천하장사씨름대회를 제패하더니 성인 무대에 데뷔한 올해는 씨름판을 ‘김민재의 무대’로 만들었다. 5번의 대회 중 4개 대회 백두급(140㎏ 이하)을 평정했다. ‘이만기의 재림’으로 평가받는 그는 지난 1월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개한 ‘K씨름 진흥 프로젝트’를 이끌어 갈 간판스타로 제격이다.

 

배구 김민재(20·대한항공)도 걸출하다. 지난 시즌 프로배구 V리그에서 속공 3위(63.67%), 블로킹 7위(세트당 0.521개)를 기록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신예 미들블로커다. 지난 5월 배구대표팀에 발탁돼 국제무대에 나설 기회도 잡았다. 배구인들은 20년 넘게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한 남자 배구의 숙원을 해결할 기대주로 주목한다.

 

종목과 역할은 서로 다르지만 세 김민재는 한국 스포츠의 문화·산업적 가치와 국제 경쟁력을 한 차원 끌어올릴 만한 재능을 갖췄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민재 보유국’ 국민이 느낄 즐거움과 자부심은 덤이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7.07(금) 유니버스

우주·만물’이라는 뜻의 유니버스(universe)는 라틴어 명사 universum

에서 유래했다. ‘하나’를 뜻하는 수사 uni와 동사 verto(돌다)의 과거분사 형태인 versus가 결합한 단어다. 돌고 돌아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유니버스와 ‘초월’을 의미하는 meta가 결합한 신조어가 메타버스(metaverse)다.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세계다. 미국의 공상과학(SF) 작가 닐 스티븐슨이 1992년 출간한 소설 『스노 크래시』에서 처음 사용했다.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불행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접속하는 세계가 메타버스다.

 

미국 만화산업계의 양대 산맥인 마블 코믹스와 DC코믹스가 선보인 수퍼히어로 캐릭터가 히트를 치면서 유니버스는 ‘세계관’이라는 의미로도 확장됐다. 마블스튜디오가 제작하는 수퍼히어로 시리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의 앞 자를 따서 MCU라고 부른다. 등장인물은 아이언맨, 캡틴아메리카, 토르, 헐크, 블랙위도우, 스파이더맨 등이다. MCU는 개별 영웅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서로의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한 ‘어벤져스’ 시리즈로 흥행몰이를 한다. DC코믹스의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등은 ‘저스티스 리그’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축한다. SF영화계의 대가인 제임스 캐머런 감독 같은 사람은 마블과 DC의 주인공들이 천편일률적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팬들은 “주인공의 결점과 약점에도 매력을 느낀다”고 옹호한다.

 

요즘 한국에선 또 다른 의미의 MCU가 형성되고 있다. 영화 ‘범죄도시’에서 주인공인 형사 마석도 역을 연기하는 배우 마동석의 이름을 딴 ‘마동석 시네마틱 유니버스’다. 맨주먹으로 나쁜 놈들을 응징하는 한국형 히어로인 마석도를 다룬 범죄도시는 2편에 이어 3편이 관객 1000만명을 모으면서 쌍천만 시리즈로 등극했다. 전작의 빌런을 차기작의 빌런이 넘어섰고, 마석도 역시 이들과 맞서는 마석도를 뛰어넘은 것이 인기 비결이다. 범죄액션 영화 프랜차이즈를 만드는 것이 꿈인 마동석의 MCU는 이제 시작이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마동석이 형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8편까지 예정돼있다고 한다.

 

우리 주변의 소소한 ‘우주’ 하나가 인생의 ‘세계관’을 확장해나가는 재미를 부여하고 있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7.10(월) 스레드와 트위터

페이스북 모기업 메타가 새 소셜미디어 스레드(Threads·실, 타래)를 선보이고 하루 만에 가입자 7000만 명을 확보했다. 역대 애플리케이션 중 가장 빠른 증가세다. 스레드의 1차 목표는 ‘트위터 죽이기’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인수한 뒤 소송과 구조조정으로 난항을 겪는 트위터의 자리를 대신할 참이다.

초기 버전이긴 하지만 스레드의 핵심 기능(짧은 텍스트 기반 실시간 소식 공유)은 트위터의 판박이다. ‘복제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월간활성이용자(MAU) 20억 명에 달하는 인스타그램에 연동돼 있어 트위터(MAU 3억6000만 명)를 무난하게 따라잡을 전망이다. 출시 전 머스크와 설전을 벌이며 신상품 홍보를 톡톡히 한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10억 명이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눌 앱이 필요하다”며 스레드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한국에선 트위터의 인기가 많이 떨어졌지만, 미국에선 여론 주도층이 사용하면서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지난해 머스크가 가져간 뒤 사용자 불만이 폭발한 트위터를 보면 메타가 이 시장까지 손에 넣을 기회를 노릴 만한 상황이었다. 초반 흥행에 고무된 저커버그가 ‘스레드는 잡음 적은 사회 공론의 장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일반 사용자도 스레드의 효용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미 깔아둔 소셜미디어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하니 하나 더 추가할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 스레드 출시 3일째인 9일 현재, 가장 뜨거운 주제는 저커버그와 머스크, 두 거물의 격투 가능성이 만들어낸 다양한 밈(짤방)이다.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 웬디스는 “그(머스크)를 진짜 열받게 하려면 우주에 가면 된다”는 스레드 멘션으로 ‘좋아요’ 6만여개를 받아냈다. 머스크의 우주 탐사 계획을 비꼰 것이다. 저커버그까지 눈물 흘리며 웃는 이모지로 화답했다. 한국에서도 유명인들이 가세해 ‘쓰팔로우언스’(스레드 인플루언서)와 같은 조어 양산이 한창이다.

 

이쯤에선 트위터의 최대 단점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단문에서 단문으로 이어지는 소통은 싸우거나 농담할 때 잘 맞는다. 하지만 이견을 좁히는 덴 거의 쓸모가 없다. 복잡한 문제를 압축하면서, 최대한 독해야 멀리 가기 때문이다. 스레드는 아무래도 이 약점까지 복제한 것 같다.

전영선 K엔터팀장

 

07.11 새마을금고와 가브리엘라 수녀

1926년 메리 가브리엘라 뮬헤린 수녀가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의 스물여섯 살 젊은 수녀가 도착한 평안도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시골 곳곳을 다니며 일제에 시달리던 가난한 농민을 도왔다. 10년 넘게 이어진 봉사는 일본의 추방 명령으로 중단해야 했다. 극한으로 치달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였다.

그는 발음이 어려운 가브리엘라 대신 ‘가별 수녀’라고 자신을 부르던 조선의 아이들을 잊지 못했다. 1952년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 땅을 다시 찾았다.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전쟁미망인 등 피난민을 돕는 일을 했다.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것으론 부족했다. 전후 한국엔 돈이 모자랐고, 금융 시스템이랄 것도 없었다.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수녀가 되기 전 전 허드슨 탄광회사에서 일했던 가브리엘라 수녀는 회계 전문가로서의 특기를 발휘했다. 1930년대 캐나다를 경제 대공황에서 건져낸 신용협동조합 ‘안티고니시 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1960년 5월 국내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인 ‘성가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재건국민운동본부와 손잡고 전국을 다니며 협동조합 지도자 강습회도 열었다. 강습회에 참여한 청년들이 마을로 돌아가 금고 설립에 나섰다. 1963년 5월과 6월 사이 경남 하둔·월곡·정암·외시·마산 5곳에 마을금고가 세워졌다. ‘근검·절약해 저축하고 상부상조하면서 잘살아 보자’. 소박하지만 절실한 구호는 통했다. 불과 1년 후인 1964년 5월 말까지 경남에서만 169개 마을금고가 생겨났다. 새마을금고의 시작이었다.

 

60년이 지나 새마을금고는 총자산 284조원(지난해 말 기준)에 이르는 금융사로 자라났다. 대형 시중은행에 버금가는 규모다. 그러나 일부 지역 금고의 부실 대출과 연체율 급등으로 새마을금고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금융당국의 ‘급한 불 끄기’로 도미노식 예금 인출 사태는 막았지만 불안이 다 가신 건 아니다.

 

“성장이란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넓어지는 가지를 뿌리가 감당할 수 없으면 나무는 쓰러진다.” 수십 년 전 가브리엘라 수녀는 협동조합의 미래를 이렇게 고민했다고 한다. 지금 새마을금고에 필요한 말이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7.12 전문용어의 범람

1930년대 연극 ‘가스등’에서 유래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정신적 지배를 강화하는 행위를 말한다. 연극에서 남편은 오락가락하는 가스등 불빛과 소음을 아내의 착시와 환청이라고 주장한다. 절도 행각을 숨기기 위해서다. 처음엔 아내도 반신반의하지만 결국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점점 남편에게 의존하며 자아를 잃어간다.

대단한 학술용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단어가 심리학이나 사회학 논문에 등장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일상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연구 주제가 된 경우다. 전문용어가 일상에 뿌리내린 사례는 의외로 흔하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소시오패스 등이 그렇다. 주로 심각한 상태나 부정적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려운 의미를 담은 만큼 복잡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지만, 일상에서 쉽게 쓰다 보니 오남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가스라이팅만 해도 거짓말·사기·세뇌 등과는 구분돼야 하나 묘하게 비틀어 쓴다.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부쩍 눈에 띄는 ‘가스라이팅 당했다’는 문장엔 ‘나는 당했을 뿐, 내 과실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자신의 피해를 강조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의도다. 최근 한 축구선수의 사생활을 폭로한 이가 그랬다. 의학적 판단이 필요한 병증(病症)인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역시 언젠가부터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습관적으로 쓰는 범상한 용어가 됐다. 실제 증상과는 무관하게 ‘내 상태가 이 정도다’ 또는 ‘나를 좀 이해해달라’는 속뜻이 담긴 듯하다.

 

전문용어의 일상화가 꼭 나쁜 건 아니다. 우울증이란 단어를 자주 접하다 보면 예방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색안경을 벗고 환자를 이해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재미있는 표현을 만들어내는 건 언어 사용자의 욕구이기도 한데, 경우에 따라 전문용어가 말맛을 살리는 역할도 한다. 충격적인 경기 결과에 대해 ‘PTSD 제대로 오네’ 같이 표현하는 식이다. 이런 게 요즘 스타일 유머이기도 하다.

 

다만 결코 가벼이 여겨선 안 될 단어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건 문제다. ‘웃자고 한 말’이라고 넘어갈 수도 없다. 정확한 뜻을 알고 있는지 사용하기 전 한 번 고민해보면 될 일이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7.13 프랑스의 교육불평등

프랑스는 유치원부터 고교까지 공교육이 무료다.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를 치르면 파리 1대학, 2대학처럼 번호로만 구별되는 평준화된 대학에서 저렴한 학비로 공부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랑스는 ‘학비·학벌 없는 사회’로 알려졌다.

실상은 다르다. 부유층 자녀는 값비싼 사립학교에 다니며 질 좋은 교육을 받고, 빈곤층 자녀가 울며 겨자 먹기로 다니는 곳이 공립학교다. 학급당 학생 수가 많고, 예산은 바닥났으며, 교사가 부족해 과학·수학 등 주요 과목조차 개설되지 못한다. “부모에게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는 학생들이 다니는 곳”(유로뉴스)으로 불린다.

학령이 올라갈수록 가난한 이들은 차근차근 배제된다. 초교를 마친 뒤 직업과정(2년제)과 바칼로레아 준비과정(3년제) 중 택일하는 데, 대다수 이민자 자녀들은 직업과정에 쏠린다. 이들은 육체노동, 저임금, 실직 위험에 내몰리며 사회적 신분이 굳어진다.

 

바칼로레아를 치른 뒤엔 일반대학과 그랑제꼴로 또 갈린다. ‘대학 위의 대학’이라 불리는 그랑제꼴은 소수 정예로 최고 수준의 교육을 하는 엘리트 양성소다. 프랑스의 각 분야 고위직은 그랑제꼴 출신이 대다수다. 1959년 이후 프랑스 전·현직 대통령 7명 중 니콜라 사르코지를 제외한 전원이 그랑제꼴 출신이다.

 

문턱도 높다. 바칼로레아 고득점자에 한해 2년 준비를 마쳐야 입시 자격이 주어진다. 한번 떨어지면 재응시 기회조차 없다. 학비는 일반 대학의 60배다. 온갖 특권을 거머쥘 수 있는 그랑제꼴의 문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만 열려 있는 셈이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프랑스는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 간 학습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학교가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작동하지 못하자, 프랑스는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가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가장 작은 나라’(가디언)가 됐다.

 

지난달 27일, 이민자 출신 나엘 메르즈쿠(17)가 경찰 총격에 사망했다. 10대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자동차에 불을 질렀다. 외신들은 “이들이 직면한 가장 큰 불의는 교육이며, 학교는 희망이 아닌 굴욕”이라 분석했다. “틱톡 등 SNS가 시위 격화의 원흉”이라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지적이 허망하게 들리는 이유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7.14(금) 반려돌

반려(伴侶)돌이라는 게 있다. Doll(인형)이 아니라 돌멩이 돌이다. 반려동물·식물을 키우듯 돌에 이름을 붙여 애지중지 키우는 문화다. 반려돌 주인끼리 서로를 ‘석주(石主)’로 부르고, 각자 취향에 따라 모자·종이집·방석 등으로 돌을 꾸민다. 검색창에 반려돌을 치면 6000~1만원가량 하는 입양키트 쇼핑몰이 여러 곳 뜬다. 예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젊은이들 때문인지 달걀처럼 둥글고 반들반들한 원예용 ‘에그스톤’이 인기다.

반려돌은 관상용 자연석을 모으는 수석(壽石) 문화와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르다. 눈으로 보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리적 안정을 위해 돌을 찾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반려돌 설명서에는 이런 사용법이 적혀 있다. ①반려돌에게 당신의 일과를 들려주세요. ②듣고 싶었던 위로, 응원의 말을 반려돌에게 건네주세요. ③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이야기를 돌과 나눠보세요. ④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반려돌을 아껴주고 사랑으로 돌봐주세요.

 

돌을 친구 삼아 말하고, 칭찬하고, 사랑하라는 거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 석주들이 모인 온라인 공간에는 “우울증이 사라진 것 같다” “심리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후기가 많다. 1975년 미국에서 시작된 반려돌 문화는 당시 ‘펫 락(Pet-rock)’ 붐을 일으킬 정도로 화제였다. 국내에서는 코로나19 때 고립감을 느낀 MZ세대 사이에 ‘애완돌’ ‘펫스톤’ ‘맹구돌’(만화 ‘짱구는 못말려’에서 맹구가 키운 돌) 등 이름으로 확산했다.

 

이런 세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인 가구와 비혼이 급증하는 추세 속에서 누군가로부터 위안을 받고 싶은 심리의 반영일 것이다. 더욱이 돌은 사람을 속썩이지도, 귀찮게 하지도 않고, 별다른 관리도 필요 없다. 그냥 감정을 털어놓으면 된다. 사람 간에 주고받아야 할 마음의 교류가 동·식물을 넘어 아예 무생물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세상이 됐다.

 

사실 몇 년째 이어지는 소통·힐링 같은 단어의 유행은 불통과 소외가 만연한 사회상의 방증이다. 무인도에 갇혀 배구공 ‘윌슨’에 얼굴을 그려 넣고 대화해야 했던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고립 속에서 돌멩이와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7.17(월) 일본의 ‘해저드 맵’

지난해 8월 초였다. 지하철 강남역이 침수됐다는 소식에 광화문에서 경기도 분당 집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겨우 진입했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빗물이 순식간에 승용차 바퀴의 절반까지 차올랐다. 공포가 엄습했다. 기어가듯 운전해 4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 그날 이후 비 오는 날에는 운전하지 않는다.

지난해 같은 날, 서울 관악구 반지하에 살던 장애인 가족 3명과 동작구 반지하에 살던 50대 여성이 침수로 목숨을 잃었다. 올여름에도 ‘물폭탄’은 예외가 없었다. 며칠째 계속된 집중호우에 충청·경북 일대 하천이 범람하고 산·제방이 무너졌다. 실종·사망 등 벌써 50명 가까운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방재 부족에 따른 후진국형 수재이라는 비판도 이제 낯설지 않다.

 

지난해 뭇매를 맞았던 당국도 다시 비판대에 올랐다. 예컨대 서울시를 보자. 1조3000억원 예산이 필요한 대심도 빗물 배수터널은 1년이 지나도록 계획 단계다. 빗물받이를 막는다며 담배꽁초 무단투기 과태료를 5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올리는 방안을 논의하는 정도다. 전체 반지하(23만 가구)의 65%를 10년 안에 없애고, 세금으로 임대주택을 매입해 반지하 거주자에게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현재 이주 가구는 전체 1% 수준이다. 지난해와 거의 달라진 게 없다.

 

일본은 어떤가. 2020년 8월부터 부동산 매매·임대계약 때 ‘해저드 맵’(Hazard map) 첨부를 의무화했다. 해당 주택의 홍수·지진 위험 수준은 물론 기존의 피해 여부, 피난 대피소 위치까지 표시된 지도다. “집값 떨어진다”는 반발이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법제화를 밀어 붙었다. 국민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담배꽁초 덜 버리기에 호소하는 우리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문제는 시스템 정비다. 빗물받이 추가·확대 등을 포함한 도시 배수관 정비가 우선이다. 반지하 거주민 이주 대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현관문이 안쪽으로 열리도록 보수해 침수에 따른 인명피해를 막는 게 화급하다. 집을 신축할 때 내진설계처럼 호우설계를 의무화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이제 면피성 처방은 그만 듣고 싶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올해의 ‘인재’가 과연 내년엔 줄어들 수 있을까. 지난해에도 똑같은 기대를 품었었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7.18 악귀와 민속학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 제5권 '만물문(萬物門)'에는 ‘염매(魘魅)’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어린아이를 납치해 죽기 직전까지 굶긴 뒤 대나무통에 맛난 반찬을 담아 유혹하고, 아이가 대나무통에 들어가려 발버둥 치는 순간 찔러 죽여 혼을 가두어 맘대로 부리면서 영험한 무당이 돼 돈을 벌었다는 전설이다. 요즘 화제인 SBS 드라마 ‘악귀’에선 비슷한 방식으로 살해당해 '태자귀(어린아이 귀신)'가 된 악귀를 막기 위해 민속학과 교수인 주인공이 동분서주한다.

민속학은 민간에 전승된 생활문화와 관습, 정신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드라마 주인공에겐 귀신을 보는 능력이 있다. 장승에 피로 글씨를 쓰는 등의 주술도 행한다. 이는 민속학이라기보다는 초경험적 힘이나 현상을 믿고 연구해 활용하려는 마술·점성술·심령술 등의 오컬티즘에 가까워 보인다.

 

오컬티즘이 조선인의 신앙을 지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1891~1968)은 일본강점기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부임해 서민 생활과 신앙·전통놀이 등을 연구하고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가 1929년 낸 『조선의 귀신』에선 양구법, 즉 귀신퇴치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병귀를 물리치는 비방이 많았다. 의술과 과학이 발달하기 전, 귀신이 질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풍습이 남아서였다. 무라야마 지준은 조선인을 귀신이 해코지할까 전전긍긍하며 미신에 의존하는 존재로 묘사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 덕에 당시 민중의 일상이 기록으로 남았다는 건 무시 못 할 업적이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전통유산과 민속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는 듯하다. 드라마에 등장한 충북 무형문화재 '오티 별신제'의 '허재비 놀이', 천연기념물 '의령 성황리 소나무'까지 덩달아 화제가 됐다. ‘악귀’ 첫 방송 이후 열흘간 ‘민속학' 네이버 검색량은 전년 동기 대비 100배 이상 치솟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대학 학부에 민속학과는 없다. 중앙대 비교민속학과는 2013년 폐과됐고, 정원 미달로 고전하던 안동대 민속학과는 올해부터 문화유산학과로 이름을 바꿨다. 민속학이 막 떴는데, 석박사 과정으로만 명맥을 잇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7.19 제인 버킨과 버킨백

지난 16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한 제인 버킨은 1960~1970년대 자유와 관능의 상징이었지만, 1980년대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버킨백’을 탄생시킨 조연이기도 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1984년 비행기에서 우연히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 회장 옆자리에 앉은 버킨은 “더 많은 짐을 담을 수 있는 가방을 왜 안 만드냐”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뒤마 회장은 바로 자리 앞에 꽂혀 있던 구토 주머니에 가방 디자인을 스케치했고, 이후 대형 사이즈의 버킨백을 제작했다.

국내 버킨 부고 기사 제목엔 ‘버킨백에 영감을 준’ 등의 수식이 같이 달렸다. 누군가는 이런 제목이 불편했나 보다. 기사 댓글과 페이스북엔 명품 가방만으로 버킨을 설명하는 것이 아쉽다는 얌전한 반응부터 국내 언론을 향해 “한심하다”는 과격한 반응도 적지 않다. 가수이자 배우였던 버킨의 부고 기사 제목에 명품 가방 이름을 올리는 건 속물적이라는 지적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버킨은 1966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욕망’에서 나체 출연으로 데뷔했다. 당시 남편 존 배리에게 “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어”라고 시위하기 위해서였다. 버킨의 그런 자유분방함에 60년대는 매혹됐다. 태도는 스타일이다. 그의 헐렁한 티셔츠, 컷오프 청바지 등은 미국에서 프렌치 시크로 받아들여졌다. 버킨백에도 그런 태도가 반영돼 있다. 당시까지 가장 유명했던 에르메스 가방은 배우이자 모나코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리의 이름을 딴 켈리백이었다. 공주가 들 법한 가방이었다. 그런데 버킨은 우연한 비행기 내 만남으로 공주가 아닌 일반 여성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명품 가방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가방을 버킨이 싫어했다는 얘기도 있다. 아니다. 그는 에르메스의 마케팅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게다가 버킨백을 아꼈다. 가방에 아웅산 수지 사진을 붙여 미얀마 민주화 운동 지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2011년엔 그 가방을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올려 16만 달러(약 2억원)에 팔아 동일본 대지진 피해를 지원했다. 버킨백은 그의 태도였으며, 사회운동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이자 누군가의 어려움 앞에서 기꺼이 내줄 수 있는 무언가였다. 이 정도라면 버킨의 삶을 설명하며 버킨백을 일부러 빼놓는 게 속물적인 게 아닐까.

윤성민 정치에디터

  

07.20 이도류

‘이도류(二刀流)’라는 표현은 일본 검술에서 양손에 무기를 하나씩 들고 싸우는 방식 또는 유파를 일컫는다. 최근에는 스포츠계 전체에서 두루 쓰이는 용어가 됐다. ‘두 가지 포지션을 우수하게 소화하는 선수’ 또는 ‘서로 다른 두 종목에서 뛰는 선수’라는 의미다.

이도류 스포츠 스타의 간판은 메이저리그야구(MLB) 무대에서 활약 중인 일본인 오타니 쇼헤이(29·LA에인절스)다. 투수와 타자 중 한쪽만 매진해도 성공 확률이 희박한 메이저리그에서 두 역할을 모두 수준급으로 해내며 새로운 길을 개척 중이다.

 

오타니는 지난 2018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자마자 아메리칸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2021년에는 아메리칸리그 MVP와 함께 올스타전에서 선발투수 겸 1번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이색 이력을 추가했다. 오타니의 활약 덕분에 이도류의 영어식 표현인 ‘투 웨이(two way)’는 물론이고 일본어 발음인 ‘니토오류’도 메이저리그 팬들 사이에서 익숙해졌다.

올 시즌의 오타니는 타자로서 더욱 주목 받는다. 19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 95경기 만에 시즌 35호포를 신고했다. 현재 추세를 유지하면 산술적으로 정규시즌(162경기) 59.7개의 홈런이 가능하다. 지난 1927년의 베이브 루스(60개)와 1961년 로저 매리스(61개), 지난해 애런 저지(62개)까지 한 시대를 빛낸 여러 강타자들의 기록을 넘볼 수 있는 페이스다.

오타니의 성공을 이끈 요인은 타고난 재능을 뛰어넘는 성실한 자기 관리와 계획적인 삶에 있다. 고교 시절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인생 계획표는 ▶19세 영어 정복 ▶20세 메이저리그 진출 ▶22세 사이영상 수상 ▶26세 월드시리즈 우승 ▶27세 리그 MVP 등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들로 가득하다. 제때 실현하지 못한 게 대부분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한 걸음씩 꿈에 다가가고 있다. 그의 계획표는 ▶40세 마지막 경기 노히트 노런으로 끝난다.

 

살다 보면 오타니처럼 두 개 이상의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이들을 간혹 본다. 행정고시와 외무고시에 동시 합격했다거나,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들이 휘두르는 여러 개의 칼날 이면엔 또 어떤 남모를 노력이 숨어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이도류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송지훈 스포츠팀 기자

  

07.21(금) 기후와 날씨

“잔혹하고 매서운 추위가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이던 2018년 11월 미국 동부의 기록적인 한파 소식을 전하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지구 온난화가 허구라는 주장을 하려던 트럼프였지만, “기후(지구 온난화)와 날씨(한파)를 혼동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았다.

날씨(weather)는 ‘특정 지역에서 지구 대기의 변화에 의한 결과’를 뜻한다. 반면 기후(climate)는 ‘특정 지역에서 오랜 기간 나타나는 날씨의 평균 상태’를 가리킨다. 영국 기상청이 2015년 지구 온도가 산업화시대(1850~1900년) 평균치보다 1.02도 상승했다고 분석했으니 지구온난화는 기후변화(climate change)로 봐야 한다. 같은 해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도로 제한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 바로 파리기후변화협약(파리협정)이다.

트럼프의 기후변화에 대한 불신은 행정부 일 처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는 취임 5개월만인 2017년 7월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직원들에게 ‘기후변화’ 대신 ‘극단적 날씨(weather extremes)’라는 용어를 사용해달라고 당부했다. 최고, 최저, 최대 같은 단어를 빼고 날씨를 전할 수 없는 세상을 예측한 것 같아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지난 11일 서울 동남부 일부에 ‘극한호우’ 긴급 재난문자가 처음 발송됐다. 지난해 8월 중부지방 집중호우를 계기로 올해 6월 수도권을 대상으로 시범 도입됐는데 바로 사례가 나왔다. 호우 경보 기준(3시간 강우량 90㎜)을 충족하면서 시간당 50㎜ 이상의 극한호우가 내리면 재난문자가 발송된다. 외국에선 극한호우(extreme rainfall)의 주요 원인으로 기후변화를 꼽고 있다. 기온이 오르면서 대기가 과거보다 더 많은 수증기를 머금게 되고 이로 인해 더한 강도의 비가 오랫동안 쏟아진다는 것이다.

 

한국이 자랑하는 사계절도 예전 같지 않다. 찌는 듯한 더위와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갈수록 극성을 부린다. 봄·가을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다. 계절의 시계인 24절기도 뒤죽박죽이다. 올여름 장마는 수해만 남긴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에 대한 고민까지 안겨줬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7.24(월) 넷플릭스 파업

미국작가조합의 파업이 두 달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14일엔 미국배우조합도 파업을 시작했다. 할리우드 양대 노동조합이 ‘듀얼 파업’에 나선 것은 1960년 이후 처음이다. 1960년 할리우드의 첫 대규모 파업은 22주간 계속됐다. 할리우드 8대 메이저 영화사와 협상 끝에 재상영에 대한 보상이 확립됐다. 작가 연금기금과 의료보험 제도도 도입됐다.

이후 콘텐트 제작, 소비 환경 변화가 올 때마다 할리우드는 파업을 경험했다. 1981년엔 케이블 시대를 맞아 유료채널재상영권, 1988년엔 홈비디오 수익 분배, 2007~2008년엔 뉴미디어와 DVD 출현 대응을 위한 단체 행동이 이어졌다.

올해 할리우드 파업의 가장 큰 쟁점은 넷플릭스로 상징되는 온라인 동영상서비스(OTT) 환경에서 공정한 수익 분배다. 가히 ‘넷플릭스 파업’으로 기록할 만하다. 작가나 배우가 지상파·케이블 등에서 받던 영화·방송 콘텐트 재상영 수익은 점점 줄어든다. 반면 재상영 개념이 없는 스트리밍에선 추가 수입을 기대할 수 없다.

작가의 경우 스트리밍 시대의 업무 환경 악화를 걱정한다. 미국 언론은 글쓰기가 제작에서 분리되는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예전엔 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1년은 같은 일을 했지만 최근엔 계약 기간이 20주 정도로 짧아졌다. 작가들은 프로젝트 초반 투입돼 할당 업무를 다 하면 계약은 종료된다. 소수만 프로젝트 전 기간 계약을 유지하기 때문에 나머지는 더 자주, 더 많은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배우들도 사라지는 공개 오디션,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내는 조연이 걱정이다.

 

할리우드 상황은 남의 일이 아니다. 기술의 발전은 화이트칼라 업무 중 상당 부분을 줄여준다. 잡무에서 해방된 인간은 앞으로 중요한 업무만 하면 된다는 말은 우선은 달콤하다. 당장 기자 직종에서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많이 생겼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인터뷰 등을 녹음해 이를 다시 들으면서 글로 푸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 이젠 스마트폰에 녹음한 뒤 텍스트 변환 애플리케이션에 넣으면 1분 안에 글로 풀어준다. 편리하지만 그만큼 필요한 기자의 수도 줄었다. 주인공, 핵심 인력이 될 자신이 없는 인간의 고민은 이제 시작인 것 같다.

전영선 K엔터팀장

 

07.25 스승의 은혜

옛날 스승의 권위는 대단했다. 어원부터 남다르다. 여성 무당이나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모두 고대 사회에서 큰 권위가 있는 자리였다. 영어 ‘티처(teacher)’는 손으로 지시한다는 고대 영어에서 비롯했다. 13세기엔 무엇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검지란 뜻으로도 함께 쓰였다.

한국에서의 스승은 서양과 달랐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다’는 노래 구절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나는 가르친다. 넌 듣기만 하라’는 식의 강압적 모습을 떠올려선 안 된다. 운동장에 줄 서서 하는 경례, 학생보다 교사가 높은 곳에 설 수 있도록 한 교단, 두발·복장 검사에 단체체벌까지. 칼을 찬 교장, 군복 입은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던 일본강점기 잔재다.

 

조선시대 스승의 진짜 권위는 율곡 이이가 쓴 『학교모범(學校模範)』에 잘 나타나 있다. 선조 15년(1582년) 율곡은 왕명을 받들어 학교생활 전반에 지켜야 할 원칙 16가지를 저술했다. 지금의 교육기본법 격이다. 이 책에선 제자가 스승을 대하는 법을 엄히 정하고 있다. “임금·스승·아버지 덕에 태어나고 살고 배우니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평상시 존경을 다하라”고 말한다. 무조건적인 숭상을 강요한 건 아니다. “스승의 말씀과 행하는 일에 의심나는 점이 있다면 조용히 질문해 그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 스승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스승의 자격도 엄격했다. “스승이 알맞은 사람이 아니면 선비의 기풍이 날로 쇠퇴해진다”는 이유에서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규칙을 지키지 않고 부모와 스승을 업신여긴다면 학당에서 쫓겨난다. 자격이 없으면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라는 경고다.

지난 18일 스물넷 젊은 교사가 세상을 등졌다. 추측이 난무하지만 학부모의 괴롭힘이 원인이란 쪽에 무게가 실린다. 체벌·폭언이 만연했던 교육 현장은 학생인권조례 등으로 몰라볼 만큼 나아졌지만, 교권 침해는 여전히 사각지대다. 학생과 학부모의 폭력에서 교사를 막아주는 실질적 장치가 없다시피 한다.

 

율곡은 『학교모범』 말미 “스승·제자·학우는 서로 권면(勸勉)하고 경계하고 명심하라”고 이른다. 스승 아래 제자 없고, 제자 아래 스승 없다. 율곡이 400여 년 전 남긴 가르침이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7.26 아니면 말고

영화 ‘더 헌트’의 주인공 루카스는 친구의 유치원생 딸 클라라가 뽀뽀를 하자 “그건 엄마, 아빠와만 해야 한다”고 타이른다. 하지만 상처받은 클라라는 루카스가 성기를 보여줬다고 거짓말을 한다. 루카스는 추악한 아동 성범죄자로 전락하고, 동네 사람은 물론 오랜 친구들마저 등을 돌린다. 그의 삶이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진실이 밝혀진다.

5년 전 한 맘카페엔 김포의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를 밀쳤다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원생의 이모가 학대를 단정하는 글을 재차 올리면서 사태는 확산했다. 교사 신상이 순식간에 퍼졌고, 감당하기 힘든 비난이 쏟아졌다. 폭행까지 당한 교사는 이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사 결과 학대는 없었다. 시발점이 된 이모의 글엔 이런 부분이 있다. “봤느냐고요? 아니요. 10여 명의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혼자 생각한 걸, 그저 들은 걸 진짜처럼 말하는 세상이다.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게 때때로 그 결과가 심각해서다. 최근 한기호 의원이 치른 고초가 그렇다. 그는 한 초등학교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았다. “인터넷에 도는 이야기를 모아서 쓴 건데 이리 퍼질 줄이야”라며 올린 거짓 글은 단 몇 시간 만에 그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렸다. 힘깨나 쓴다는 국회의원도 거짓의 폭풍 앞에선 힘없는 피해자일 뿐이었다. 진실만큼 거짓도 힘이 세다.

그래서일까. 그 힘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야당의 한 청년 정치인은 김건희 여사가 든 에코백 속에 ‘샤넬 파우치’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사흘 뒤 글은 삭제했으나 사과는 없었다. 한 의원 사건을 두고 김어준은 “국민의힘 3선인데 전혀 보도가 없다. 대단한 파장이 있을 사안”이라고 말했다.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다는 뉘앙스다. 이내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역시 사과는 없었다.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클라라와 달리 이들의 거짓말엔 상대방이 법적·도덕적 책임의 대상이 되길 바라는 분명한 저의가 있다. 더 악의적이다. 정작 본인들은 ‘아니면 말고’ 뒤에 숨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러니 반복 또 반복이다. 의도했든 아니든 거짓이 쌓이면 불신의 총량도 증가하고,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위험천만하다. ‘아니면 말고’의 싹을 서둘러 잘라야 한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7.27 아스파탐의 진실

1965년 미국 제약회사 시얼(Searle)의 화학자 제임스 슐래터는 위궤양 치료제를 개발하다 우연히 손가락을 핥았다. 순간 온몸이 짜릿할 정도의 강한 단맛을 느낀 그는 손에 묻은 물질을 분석했다. 설탕보다 200배 달콤한 인공 감미료 아스파탐의 탄생 순간이다. 시얼은 이내 돈방석에 앉았다.

아스파탐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인공 감미료다. 탄산음료·아이스크림·시리얼·껌·사탕은 물론 어린이 비타민 등 무려 6000여 식품에 들어간다. ‘당뇨·비만을 일으키지 않는 건강한 단맛’을 내세워 연 118억 달러(2023년 예상) 규모의 대체 감미료 시장에서 절대 강자가 됐다.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식품 첨가물’로도 불린다. 1975년 미국 FDA 승인 이래, 아스파탐의 안전성에 대해 상충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어서다.

아스파탐은 메탄올에 아미노산인 페닐알라닌과 아스파르트산이 결합한 합성 화학물질이다. 페닐알라닌은 뇌와 신경세포 사이 신경전달물질로, 체내 농도가 올라가면 두통·발작·기억 상실 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메탄올은 체내 대사 작용을 거쳐 포름산(개미독)과 포름알데히드(방부액)로 분해된다. 포름알데히드는 알려진 발암 성분이다.

 

2005년 이탈리아 볼로냐 암센터에서 실험쥐 1800마리를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에만 아스파탐을 먹인 결과, 다른 그룹보다 림프종과 백혈병에 훨씬 많이 발현됐다. 어린이·청소년의 뇌종양·편두통의 원인이 아스파탐이라는 논문도 적지 않다.

 

아스파탐 옹호론자들은 “과일 등 자연식품에도 메탄올·페닐알라닌은 들어 있다”며 “아스파탐의 유독성이 걱정된다면 과일부터 끊으라”고 반박한다. 또 “아스파탐과 암 발병 사이 연관성은 태양이 암을 유발한다는 주장만큼 비약적”이라고 강변한다.

 

14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아스파탐을 ‘발암 가능 물질’군에 포함하자 ‘아스파탐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뉴욕타임스는 “아스파탐 연구 결과는 누가 연구비를 지원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1980~85년 의학저널에 발표된 관련 논문 166편 중 업계 지원을 받은 74편은 모두 ‘안전성’만을 강조했다면서다. 범용 감미료의 진실마저 과학이 아닌 자본의 힘에 따라 설명되는 세상이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7.28(금) 호신용품과 생존가방

사람들이 또 호신용품을 찾고 있다. 강력범죄 사건 직후마다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한 21일부터 일주일간 호신용품이 네이버 쇼핑 트렌드(관심도) 전체 1위고 호신용 스프레이, 전기충격기, 삼단봉 등이 뒤를 이었다. 대낮 신림동 길거리에서 건장한 20~30대 남성이 무차별 희생당한 이후 남성들의 관심이 특히 급증했다고 한다. 운만 나쁘면 나도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호신용품 붐의 실체다.

전문가들은 위급 상황이 오면 반드시 ‘제압할 생각 말고 최대한 빨리 도망가는’ 데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상대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운 삼단봉이나 전기충격기보다 2만~5만원대에 팔리는 호신용 스프레이가 좀 더 인기인 이유다. 캡사이신·고추냉이 등을 담은 최루액을 상대의 얼굴에 분사하면 순간적으로 시야를 마비시켜 시간을 벌 수 있다. 다만 평소 분사가 제대로 되는지 확인이 필수다. 경찰기자였던 2011년 6월 서울 광진구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 취재를 계기로 가방에 호신용 스프레이를 넣고 다닌 적이 있는데 한참 뒤 꺼내보니 입구가 굳어 있었다.

불의의 비극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자구책이 퍼진 일은 그전에도 있었다. 5월 31일 북한 도발에 따른 서울시 경보 오발령 뒤, 온라인 쇼핑몰을 중심으로 한때 ‘생존가방’ 품귀 사태가 빚어졌다. 전쟁 등 대규모 재앙에 대비해 생존에 꼭 필요한 비상대피용품을 미리 꾸려두는 게 생존가방이다. 영어로는 ‘벅아웃백(Bug-out-bag)’이나 ‘고우 백(Go bag)’, 국내에선 ‘72시간 가방’ ‘생존배낭’ 등으로 부르는데 식수와 비상식량을 비롯해 담요·의약품·안전장비·플래시 등이 담겨 있다. 당시 맘카페 등에 “조난용 담요 재고가 없다” “북한이 언제 또 발사할지 모르는데 생존가방 물품 리스트 좀 봐 달라”는 글이 쇄도했다.

 

범죄와 전쟁에 대비하는 시민의식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생존가방에 이어 호신용품까지 유행하는 걸 보고 있자니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절대 오지 말아야 할, 최악의 상황을 연달아 대비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자꾸 씁쓸하게 느껴진다. 호신과 생존 우려에서 좀 더 자유로운 사회를 기대하는 건 욕심일까.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7.31(월) 악수의 전제

악수는 신뢰를 담은 행위다. 두 사람이 서로 한 손을 맞잡는 행위인데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하는 인사법이다. 엄지를 위로 세우고 손을 비스듬히 내민 다음 상대방 손을 잡고 2~3회 위아래로 살짝 흔들어주면 된다.

악수의 역사는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벽화에는 사람들이 악수하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전쟁이 빈번했던 중세 시대 악수는 “너와 싸울 의도가 없다”고 알려주는 행위였다. 칼 같은 무기를 쥐는 오른쪽 손을 내밀고 무기가 없음을 증명했다. 여기에 맞잡은 손을 흔드는 행위가 더해졌는데, 소매 속에 단도·권총 같은 무기를 숨기지 않았다는 표시라고 한다. 19세기 들어 상인들이 악수를 인사법으로 사용하면서 널리 퍼졌다.

동물도 악수와 비슷한 뜻을 담은 표현법이 있다. 고릴라는 가만히 서서 머리를 앞뒤로 흔들고, 침팬지는 서로 손을 두드린다. 야생 거미원숭이는 상대방을 껴안아 적대감이 없음을 알린다.

 

대개 악수를 할 때 상대방 눈을 보며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기본예절로 본다. 리더십 연구자인 미국 로버트 E 브라운은 악수에 성격이 드러난다고 봤다. 적당히 힘을 줘 상대방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짓는 사람은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성격이란다. 악수하지 않는 다른 손을 상대방 손·어깨에 얹는 사람은 빨리 친해지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봤다. 악수하면서 상대방 손을 꽉 쥐거나 내 몸쪽으로 당기는 사람은 지배욕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그는 재임 기간 세계 각국 정상을 만날 때 수십 초간 손을 놓지 않거나(일본), 세게 쥐고 당기거나(프랑스), 아예 악수를 외면하는(독일) 등 악수 기행으로 구설에 올랐다.

 

2023 펜싱 세계 선수권 대회가 악수 때문에 시끄럽다. 경기가 끝나고 악수하려는 러시아 출신 선수에게 손 대신 검을 내민 채 거리를 둔 우크라이나 선수가 승리하고도 실격 처리당했다. 국제펜싱연맹(FIE)의 ‘경기 후 악수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겨서였다고 한다. 논란이 커지자 FIE는 해당 선수의 2024년 파리 올림픽 출전을 보장하겠다며 수습에 나섰다. 펜싱은 ‘매너 운동’으로 불린다. 하지만, 매너를 따지기 전에 조국을 침공해 당장 내 가족·이웃을 위협하는 상대국 선수에게 신뢰를 보이라는 요구가 맞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