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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본 한국/ 2023. 3월호 ① 세네갈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 7월호 〈마지막 회〉 대한민국의 대(對)아프리카 외교에 관해 생각해볼 것들

상림은내고향 2023. 7. 15. 20:10

아프리카에서 본 한국 글 : 최필영 예비역 육군 소령 월간조선 2023

 

03월 호

① 세네갈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불편하다고 해서 역사의 일부를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와드 전 대통령)

⊙ 식민지 시절 프랑스 위해 복무했던 ‘티라이외르’ 부대를 自國軍의 뿌리라고 공인
⊙ 2017년 문을 연 신공항에는 세네갈인들을 프랑스군으로 징집했던 블레즈 디아뉴의 이름 붙여
⊙ 식민지 시절 총독관저를 대통령궁으로 그대로 사용
⊙ 초대 대통령 상고르,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인 같았던’ 知性… 식민지 시절 차관·국회의원·시장 역임
⊙ 대통령실 공식 홈페이지, “상고르는 지지자들에게 프랑스와 舊식민지들 간 협력의 상징이지만,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프랑스의 신식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

[편집자 주]
필자인 최필영(崔必暎·48)씨는 육군사관학교(54기)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한국군 건설공병지원단(서희부대) 통역장교로서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2003~2004) 그리고 유엔수단임무단(2006~2008)에서 근무했다. 육군사관학교 외국어학과 강사(2010~2012)와 한미연합군사령부 정보참모부(2014~2016)를 거쳐 국방대학교 국제평화활동센터를 끝으로 육군 소령으로 퇴역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세네갈 사무소에서 1년간 근무하다가 작년 12월 귀국 후 현재 민간 기업에 재직 중이다. 역서(譯書)로 《이런 전쟁》(공역) 《수단내전》 《카르툼》 《디데이》 등이 있다. 세네갈에서 일하는 동안 보고 느낀 바를 3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세네갈 수도 다카르의 다카르역 앞에 있는 ‘전사자 기념비 뎀바와 뒤퐁’. 사진=프랑스 국방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연합국들의 전후(戰後) 처리 결정과 당시 국제 질서의 변화에 따라 아시아에서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했다. 10여 년 뒤인 1950년대 후반부터는 아프리카의 식민지들도 독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1956년 1월 1일 수단이 첫 독립국가가 되었다. 프랑스령(領) 서아프리카는 1958년 10월 2일, 기니를 시작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독립한 뒤에도 행정, 교육, 언론 등 전 분야에서는 프랑스어를 공용어(公用語)로 사용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프랑스와 정치, 경제, 교육 등 전 분야에서 긴밀하게 협력하는 관계를 이어왔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중국이 공격적으로 다방면에 걸쳐 아프리카에 진출하면서 서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는 하지만 언어와 문화는 물론 정치와 경제 그리고 이미 100년 넘는 기간 동안 형성된 인적 연결을 감안할 때에 이곳에서 프랑스를 배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세네갈은 더욱 그렇다. 역사적 배경 때문에 서아프리카에는 프랑스인들이 많이 거주하지만, 이 점에서도 세네갈은 제일이다.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제외하면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국가이다. 2020년 기준으로 2만2000명이 넘는 프랑스인이 주세네갈 프랑스대사관에 재외국민 등록을 하고 거주하고 있다. 세네갈은 프랑스군이 주둔하는 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이다. 반면 2021년 하반기 이후로 모든 분야에서 말리와 마찰을 겪은 프랑스는 2022년 2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말리에서 전면 철수를 결정하고 이를 시행에 옮겼다. 세네갈 최초의 고속도로는 2010년대 후반 프랑스가 건설했다. 세네갈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표준궤 전기철도 사업을 추진한 곳은 프랑스 기업인 알스톰이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프랑스의 존재가 두드러지다 보니 세네갈의 정치인과 젊은이들 사이에는 오늘날 세네갈이 겪는 주요 문제들의 원인을 프랑스로부터 찾거나 프랑스에 책임을 돌리며 비난하는 경향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빈도(頻度)와 정도가 과거에 비해 높아졌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세네갈 티라이외르’

 ▲프랑스를 위해 복무했던 세네갈 티라이외르 부대. 세네갈은 이들을 세네갈군의 뿌리로 인정하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렇다면 세네갈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식민 시절을 포함하여 프랑스와 얽힌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세네갈은 100년도 훨씬 전부터 식민 모국인 프랑스와 프랑스의 서아프리카 식민지들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에 군사적으로 협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57년, 당시 총독이던 루이 페데르브는 본토에서 파견된 병력으로는 서아프리카의 치안을 유지하기에 부족했던 현실을 감안하여 세네갈 출신을 주(主)구성원으로 부대들을 창설했다. 이렇게 복무하는 병사들은 나폴레옹 전쟁 때 소규모로 접전(接戰)하는 경보병(輕步兵)을 뜻하는 티라이외르(tirailleur)라고 불리었다. 최초의 식민지 부대가 세네갈에서 창설되었기 때문에 세네갈 티라이외르(tirailleurs sénégalais)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식민지 부대들이 세네갈인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 프랑스가 창설한 세네갈 티라이외르는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들에 진출하며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복무했다.

1895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Afrique-Occidentale française·A.O.F.)가 출범하기 약 50년 전인 1848년부터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세네갈의 4개 코뮌(commune), 즉 1902년까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수도였던 생루이, 1902년에 수도로 지정되어 독립하고 현재까지도 세네갈의 수도로 남아 있는 다카르, 15세기부터 유럽인들이 드나들던 다카르 앞바다의 작은 섬 고레 그리고 다카르가 수도로서 부상하기 이전에 중심지였던 뤼피스크는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1848년 이후 4개 코뮌에 시민권을 부여했다 폐지하기를 반복했던 프랑스는 1916년, 이 4개 코뮌에서 출생한 아프리카인, 즉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법률에 따른 보호와 투표권을 포함하는 완전한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는 프랑스의 자발적인 결정이 아니라 여느 국가들처럼 큰 전쟁을 치르며 나온 결과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출신자들을 프랑스 육군에 징집(徵集)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서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에 배치되어 있던 수십여 개의 세네갈 대대(大隊)들은 개전(開戰)과 함께 프랑스 전선으로 배속되어 프랑스를 위해 이미 싸우고 있었다.


세네갈 출신 佛하원의원 블레즈 디아뉴

▲세네갈 출신의 정치인 블레즈 디아뉴

 

대한민국은 국방을 위해 징병제(徵兵制)를 시행하다 보니 한국인이라면 징집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징(徵)’ 자의 강제성에 주목할 수 있다. 실제로 병력 충원이 절실했던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에서 강제력을 동원해서 남자 토착민들을 군대로 끌고 갔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징집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기만 했을까? 당시 10만 명 이상의 세네갈인을 포함해 20만 명의 서아프리카 흑인들을 프랑스 육군으로 데려갔던 이 징집에는 프랑스와 서아프리카, 특히 프랑스와 세네갈 사이의 거래가 들어 있다.

프랑스가 세네갈의 4개 코뮌에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한 데에는 블레즈 디아뉴(Blaise Diagne)가 주도한 징집 운동이 있었다. 블레즈 디아뉴는 고레 섬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이미 프랑스 식민지 관리를 지낸 뒤 흑인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1914년에 프랑스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6년 9월, 프랑스 의회는 세네갈의 4개 코뮌 거주민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블레즈 디아뉴 법(Loi Blaise Diagne)’을 제정했다. 프랑스가 부여했다는 온전한 시민권은 지리적으로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디아뉴는 1934년에 사망할 때까지 하원의원을 역임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흑인 병사 징집을 담당하는 고등판무관과 식민부 차관을 지냈고 1920년부터는 다카르 시장을 겸직했다.

서아프리카 출신의 군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프랑스가 점령한 독일 땅(라인란트)에 주둔한 것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물론 전후 프랑스가 식민지의 독립을 막기 위해 치렀던 여러 전쟁, 즉 인도차이나, 마다가스카르, 알제리 등의 전역(戰役)에 참전해 역시 프랑스를 위해 싸웠다.


세네갈軍의 기원은 식민지 부대임을 인정

▲인촌 김성수

 

시간이 한참 흐른 21세기, 세네갈은 이런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까? 우선 세네갈군은 자신의 뿌리를 프랑스 식민정부가 조직했으며 세네갈인이 아니라 식민 본국인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나섰던 세네갈 티라이외르 부대에 두고 있다. 세네갈은 식민 본국인 프랑스를 위한 징병을 독려하는 것도 모자라 그와 관련한 공식 직책을 맡았던 블레즈 디아뉴의 이름을 도로나 학교 등에 남겨 기념한다.

가장 최근의 이러한 예는 2017년 12월에 개항한 신(新)공항이다. 다카르 도심에 있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공항을 대체할 목적으로 다카르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평지에 신설된 이 공항은 블레즈-디아뉴 국제공항으로 명명되며 국제적으로 세네갈의 관문(關門) 역할을 하고 있다.

세네갈이 블레즈 디아뉴를 기려 신공항을 명명하던 2017년 4월 13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가 “1942~1944년 전국 일간지에 징병과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고, 징병제도실시감사축하대회와 학도출진좌담회 등에 참석해 발언한 행위 등은 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선동한 행위”이고 “일제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 단체에서 장이나 간부로서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며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못 박아버리는 판결을 내렸다.

이를 근거로 2018년 2월 13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1962년에 수여된 공로훈장 복장(複章)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마치 훈장 박탈 결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같은 해 4월에는 고려대 앞을 달리는 인촌로(仁村路)를 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결국 인촌로는 2019년 2월에 고려대로(高麗大路)로 바뀌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인촌과 그의 시대를 한 번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후대(後代)는 2010년대 말에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규정해버렸다. 반면 인촌을 알고 그와 시대를 함께 살았던 이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던 당대(當代)는 1955년 2월 18일 인촌이 사망하자 국민장(國民葬)으로써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뎀바와 뒤퐁

다카르역(驛) 앞에는 만들어진 지 100년도 넘은 동상(銅像)이 하나 서 있다. 동상의 공식 명칭은 ‘전몰자 기념비 뎀바와 뒤퐁(Le monument aux morts Demba et Dupont)’이다. 뒤퐁은 당시 프랑스의 흔한 남자 이름, 뎀바 또한 당시 흔한 아프리카의 이름이다. 이 동상의 모양 그리고 이 동상이 겪은 몇 건의 사건을 자세히 뜯어보다 보면 오늘날 세네갈이 자국의 역사, 특히 식민의 경험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동상의 외형(外形)을 차근히 뜯어보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식민 모국 프랑스가 서아프리카에 가졌던 인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뒤퐁은 당대 전형적인 프랑스인들처럼 콧수염을 기르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육군 철모를 썼다. 승리를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를 든 오른손을 치켜든 뒤퐁은 곁에 선 티라이외르, 즉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 병사인 뎀바의 어깨에 왼손을 올렸다. 나란히 선 듯 보이는 둘이지만 실제로는 뒤퐁이 살짝 뒤에 있으면서 뎀바를 도와 인도한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동생을 챙기는 큰형이 연상된다.

동상을 밑에서 올려다보면 이런 느낌을 더욱 확실하게 받는다. 뎀바와 뒤퐁은 상방 15도쯤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뒤퐁의 시선이 아주 살짝 더 높아 보인다. 시선의 높이보다는 뎀바와 뒤퐁의 눈을 포함한 표정이 앞에 언급된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든다. 멀리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이 분명하게 표현되고 수염이 안정감을 더하는 뒤퐁의 표정에서는 진중함과 결의가 느껴지는 반면 상대적으로 분명치 않아 보이는 눈과 무표정해 보이는 뎀바의 얼굴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둘은 전쟁을 함께 치른 전우(戰友)이다. 뎀바와 뒤퐁은 무공(武功)훈장을 가슴에 패용(佩用)하고서 발을 맞추고 있다. 각자 어깨에 멘 소총 총구가 가상(假想)의 연장선에서 꼭짓점을 이루면서 동상 뒤에 만들어지는 가상의 삼각형은 안정감을 더한다.

반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진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프랑스 육군의 코트를 입은 뒤퐁이 맨 위 단추를 풀고 있는 반면, 허리 살짝 아래에서 끝나는 세네갈 부대원 군복을 입은 뎀바는 목까지 단추를 단정하게 잠그고 있다.


역사기념물이 된 식민 시대 유적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년 뒤인 1923년 12월 30일, ‘흑인 부대의 영광 그리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를 창설한 고인들을 위해서(À la gloire des troupes noires et aux créateurs disparus de l’Afrique-Occidentale française)’라는 이름으로 동상, 즉 ‘뎀바와 뒤퐁’은 오늘날 서 있는 다카르역 앞이 아니라 현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건립된 뒤 제막(除幕)되었다.

제막 당시 기단부(基壇部)에는 동상의 원(原)이름처럼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를 만들거나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다섯 인물의 얼굴 부조(浮彫) 동판(銅版)들도 함께 부착되었다. 5대 인물들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총독을 지낸 루이 페데르브, 윌리엄 메를로-퐁티, 프랑소와 조세프 클로젤, 유스트 반 볼렌호벤과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를 탐험하고 학술적 업적을 남긴 마리-테오필 그리퐁 뒤 벨래이다. 이들은 모두 군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60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동상은 제2대 아브두 디우프(Abdou Diouf) 대통령 재임 중인 1983년 8월 13일 밤, 다카르 동쪽의 벨-에르 묘지로 이전되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2004년 8월 23일, ‘티라이외르의 날’ 제정 당시 대통령이던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는 ‘뎀바와 뒤퐁’을 다카르역 앞으로 옮겨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동상은 다카르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왔다. 단, 제막 당시 설치된 5대 인물의 부조는 빠져 있다.

2013년 11월, 와데 전 대통령은 프랑스 일간지인 《르몽드(Le Monde)》와의 인터뷰에서 동상을 굳이 수도 다카르 중심부로 되가져 온 이유를 설명했다.

“동상은 묘지에 처박혀 있었다. 대통령이 된 뒤 나는 동상을 찾아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동상은 우리 역사의 중요한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간에 역사는 받아들여야 한다. 불편하다고 해서 역사의 일부를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2007년 11월, 세네갈 문화부는 이 동상을 포함한 식민 시대 유적과 유물 3개를 역사기념물로 지정했다. 뎀바와 뒤퐁은 앞으로도 다카르역 앞에 오래도록 서 있을 것이다.
 

 

총독관저를 여전히 대통령궁으로 사용

 ▲세네갈 대통령궁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총독관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세네갈 대통령실

 

동상 ‘뎀바와 뒤퐁’은 블레즈 디아뉴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징집 지지 운동을 하기 이전에도 ‘세네갈 티라이외르’ 대대들이 프랑스 육군에 존재했지만 징집이 시작되며 세네갈은 프랑스를 상대로 일종의 거래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즉 식민 본국인 프랑스에 대한 기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대가로서, 지리적으로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속마음이야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프랑스는 모두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상징적인 조형물을 다카르에 설치함으로써 어려운 시절 세네갈을 포함한 서아프리카 식민지들의 기여를 분명하게 확인시켰다. 세네갈군의 자신의 기원을 세네갈 티라이외르 부대에서 찾는다는 설명은 이 점에서 분명히 다시 확인된다. 세네갈 군대는 전쟁에서 용맹한 군인으로 인정받으면서 승리한 자신의 선조(先祖)들이 남긴 업적에 초점을 두며 뎀바는 그런 선조를 상징한다.

‘뎀바와 뒤퐁’을 그대로 남겨두었듯이 세네갈은 식민 시절에 프랑스가 세운 많은 건축물도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대통령궁이다.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수도가 생루이(Saint-Louis)에서 다카르로 이전함에 따라 총독관저로서 1907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19세기 파리에 건축된 트로카데로궁을 본떠서 만들어졌고 세네갈 독립 이후로도 현재까지 꾸준한 보수와 관리를 통해 대통령궁으로서 잘 사용되고 있다. 다카르역, 다카르 시청, 외교부 청사 등도 이런 예이다.

식민지 시절에 세워진 건물들을 독립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하는 데는 여러 설명이 있을 수 있다. 그중 정치적으로 독립은 했지만 이제껏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세네갈 사람들이 이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적어도 독립 이후로 현재까지 대통령들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들은 세네갈이라는 나라에는 프랑스 식민의 역사가 한 부분, 그것도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세네갈의 국부(國父)라 할 상고르 초대(初代)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들은 대통령궁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를 지배하는 총독의 관저였지만 독립 이후로는 자국 대통령들이 사용하면서 자국의 역사를 담은 현장으로서 의의가 더 커져간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중앙청 때려 부순 대한민국

이는 ‘민족 정기’ 혹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체성이 불분명한 구호를 내세우며 일본 식민 지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숴버린 대한민국과 대조된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정기(日政期)에는 조선총독부가 건축해 사용했지만,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조선에 진주해 통치한 미(美)군정청이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건국은 물론 건국을 위한 주요 사건과 행사들이 있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서 대한민국의 건국과 떼려 해도 떼어낼 수 없는 공간이자 상징이었다.

또한 ‘중앙청(中央廳)’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후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을 북한의 침공으로부터 되살려낸 1950년 9월의 서울 수복이라는 중요 사건이 있었던 곳이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환되기까지 역대 정부의 주요 활동의 장(場)이었다.

그럼에도 중앙청이 ‘일본 식민 지배의 상징’이라며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우고 부숴버린 지 30여 년이 되어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 인식은 세네갈의 그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검은 피부의 프랑스인’ 상고르

▲상고르 초대 대통령. 사진=세네갈 대통령실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Léopold Sédar Senghor·1906~2001년) 세네갈 초대 대통령은 세네갈을 세운 국부지만 동시에 친(親)프랑스를 넘어 ‘검은 피부의 프랑스인’을 꿈꾸며 평생을 산 인물이었다.

출생지인 조알(Joal)에 가톨릭 선교회가 세운 학교에 다닐 때부터 프랑스어를 포함해 학업에 두각을 드러냈던 상고르는 평생 ‘프랑스인보다 더 정확한 프랑스어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22세에 프랑스로 건너가 명문(名門)인 루이대왕고등학교(lycée Louis-le-Grand)와 소르본대학에서 공부한 상고르는 프랑스어 문법의 최고 전문가였고 프랑스 교육부가 발급한 공식 자격을 바탕으로 유수의 학교들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세네갈이 독립할 때까지 상고르는 프랑스 해외도(海外道·France d’outre-mer) 국립학교의 언어학부 학장을 지냈다.

또한 상고르는 평생 프랑스어로 시(詩)를 쓰는 시인이자 작가였고,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상용하게 된 국가들을 규합하는 프랑코포니(La Francophonie)의 창설을 주도했다. 참고로 상고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을 지낸 디우프는 퇴임 후 2003년부터 2014년까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들이 회원으로 있는 국제기구인 프랑코포니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대통령 퇴임 후인 1983년, 상고르는 프랑스어 최고의 심의 및 결정 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L’Academie Française)의 16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역사상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회원이다. 상고르 사후 16번 회원이 된 이가 1974년부터 1981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라는 점을 본다면 단 40명에 불과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상고르, ‘프랑스 연방 안의 세네갈’ 주장

상고르는 1932년에는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고, 1939년에는 프랑스 육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1940년에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어 1942년까지 포로 생활 후에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관여하며 ‘조국’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프랑스 제4공화국 시절에는 앞서 말한 4개 코뮌을 지역구로 하는 프랑스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1955년 3월부터 1956년 2월까지 에드가 포르(Edgar Faure) 정부에서 국무회의 의장실 정무차관을 맡았으며 1956년 11월에는 티에스 시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1956년 7월부터 1961년 5월까지는 미셸 드브레 정부에서 공사참사관으로 근무했다.

이처럼 프랑스인으로서 정체성(正體性)을 보유했지만 상고르는 프랑스를 접하면서 배척과 차별의 경험을 한 뒤 아프리카 특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네그리튀드(négritude)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독립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그는 아프리카인들의 단결을 주장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프랑스라는 제국의 틀이 유지되고 세네갈이 그 안에 머무는 것을 전제로 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초안(草案)위원회에 참여했을 때에도 상고르는 프랑스 연방의 존속을 전제로 프랑스 시민권을 프랑스 식민지 전체로 확대해야 하며 그 일원인 아프리카 각 지역은 내부 사안을 자치(自治)로 해결하되 외교, 국방 그리고 개발에 관한 정책은 프랑스 연방이 관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고르는 아프리카가 프랑스 연방에 남아 식민 모국의 경험과 자산을 활용하면서 고유의 흑(黑)아프리카적 성격을 유지할 때에 더 잘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서아프리카 프랑스령의 독립이 결정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주장을 바꾸지 않았다.


상고르에 대한 상반된 평가 모두 기술

반면 독립 후 상고르는 세네갈 국가인 ‘붉은 사자(le Lion rouge)’를 작사했고, ‘하나의 국민, 하나의 목표, 하나의 신념’을 뜻하는 ‘UN PEUPLE, UN BUT, UNE FOI’를 국가의 표어로 제정했다. 이 문구는 세네갈의 국장(國章)에 남아 모든 공공기관 입구나 공문서에 늘 사용된다.

그는 무슬림이 절대다수인 국가임에도 헌법에 세네갈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규정한 세속(世俗)국가로 규정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세네갈은 상고르라는 국부의 흔적이 늘 느껴지는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상고르는 재임 중 프랑스인을 정치 고문으로 두고 조언을 받았다.

상고르는 1960년 9월 6일, 5년 임기로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연속으로 5선까지 성공하였으나 임기 중인 1980년 12월 초 급작스럽게 사임 의사를 발표하고 12월 31일에 사임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부인인 콜렛 위베르(1925~2019년)의 고향 노르망디의 베르종(Verson)에서 기거했다.

상고르는 두 번 혼인하는데 1946년 결혼한 첫 부인 지넷 에부에(1923~1992년)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으로서 최초로 고위 공직자가 되어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총독을 역임하고 사후(死後) 역시 식민지 출신 최초로 팡테옹에 안장된 펠릭스 에부에의 딸이었다. 지넷은 프랑스 해외 영토 장관실의 국회 담당을 지냈다. 두 번째 부인 콜렛은 백인이었다.
 

2001년, 상고르가 사망하자 당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시는 명인(名人)을, 세네갈은 위대한 정치가를, 아프리카는 선구자를, 그리고 프랑스는 친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역대 대통령들을 소개하는 세네갈 대통령실 공식 홈페이지는 상고르에 대해서 “지지자들에게 그는 프랑스와 구(舊)식민지들 간 협력의 상징이지만,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신식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라며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모두 적어 두었다.

또한 대통령실은 상고르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사실도 밝히고 있다. 물론 상고르는 공산주의의 급진성을 인식한 뒤 공산주의를 버렸고 대통령 재임 중에는 비록 사회주의를 시행했으나 외교적으로는 친(親)서방 입장을 유지했다.

상고르는 대한민국과 북한 모두와 인연을 맺은 인물이기도 하다. 상고르는 1974년 4월 22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국빈 자격으로 방한했다. 1962년 수교 이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반면 북한은 1972년에 세네갈과 수교하면서 바로 상고르를 평양으로 초대했다.


세네갈 정치의 명암

상고르를 소개한 대통령실 홈페이지의 마지막에 있는 문구는 상고르의 업적을 아래와 같이 함축한다.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의 재임 동안 세네갈은 경쟁력 있는 교육 제도는 물론 다당제(多黨制)를 확립했다.”

이는 사실이나 몇 가지 함정이 있다.

첫째, 상고르가 다당제를 시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0년 이상은 1당 독재체제였다. 1962년 12월, 자신의 정치적 동지이자 초대 국무총리였던 마마두 디아(Mamadou Dia)가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되어 종신형(終身刑)을 선고받은 뒤 상고르는 1963년에 세네갈사회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며 1당 체제를 확립했다.

1956년에 상고르와 함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프랑스 국회에 진출했고 그 전에는 프랑스 상원의원을 지냈던 마마두 디아는 신생국 세네갈의 경제 정책을 두고서 상고르와 다른 이념을 드러냈다. 상고르가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규정하며 친프랑스적이고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한 반면 디아는 1954년에 출간한 《흑아프리카 경제에 대한 견해》에 제시했던 반(反)프랑스 정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친상고르 국회의원들은 디아 내각을 상대로 불신임 결의를 추진했고, 디아는 불신임 결의가 표결되기 직전에 국무총리의 권한으로써 군대를 동원해 국회의사당을 봉쇄했다. 이를 쿠데타로 규정한 상고르는 절대다수가 자신에게 충성하던 군을 동원하여 디아를 포함한 장관들을 체포하고 반역죄로 재판에 넘겼다. 마마두 디아는 1974년 사면될 때까지 세네갈 동쪽 끝의 오지(奧地)라 할 수 있는 케두구 감옥에 12년 동안 투옥된다. 현재도 1번 국도를 따라 다카르에서 케두구로 가려면 쉼 없이 10시간 이상을 운전해야 한다.

사회당만 허락되던 세네갈에서 다당제가 다시 부활한 것은 1977년이다. 다당제라고는 하지만 집권당인 사회당, 공산당 그리고 민주당 3개만이 승인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다당제는 제2대 대통령인 아브두 디우프가 1983년에 14개 정당의 설립을 승인하면서 복원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상고르가 사임하자 1970년부터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아브두 디우프가 1981년 1월 1일 보궐(補闕)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2000년 4월 1일까지 2대 대통령을 지냈다. 1983년의 다당제 승인은 참정권 보장보다는 디우프 대통령 재선을 위한 야권 분열 유도 수단이라는 시각이 적절하다. 실제로 1983년 대선에서 디우프는 지리멸렬한 야권을 상대로 83.5%를 득표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쿠데타 없었던 거의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

세네갈은 아프리카 독립국가 중 쿠데타를 경험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국가로서 오랫동안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다. 이에 대해서도 상고르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여기에도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세네갈은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0년 이상 사회당만 허락된, 사실상 독재 국가였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쿠데타가 벌어지지 않은 것은 상고르의 지도력에도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세네갈이 갖는 종교 및 문화적인 구조도 이유에서 배제할 수 없다. 상고르는 현재도 무슬림이 절대다수를 이루는 세네갈에서 절대소수인 가톨릭 신자였으며 인구 수로도 최대 다수를 점하는 월로프족이 아니라 소수에 속하는 세레르족 출신이었기에 종교나 혈연을 기반으로 한 정치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상고르는 자신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혈연과 종교가 아닌 대화와 설득, 즉 서로 성향이 다른 집단 사이 연합을 결성하는 방식으로 집권하여 이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상고르는 무슬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슬람 종교지도자인 마라부(marabout)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무리드(Mourides)와 티디안(Tidianes) 등 세네갈 특유의 이슬람 종파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결국에는 최대 다수를 점하는 월로프족과 이슬람 사이의 결합을 통한 권력 구조가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이는 세네갈 정치의 장점이자 큰 약점이 되고 있다.


‘교육에 힘쓴 지도자’라지만…

 ▲필자가 출장길에 찍은 사진. 차를 잠시 멈추자 아이들이 돈을 달라며 왔다. 사진=최필영

 

교육자의 경험을 살려 의무교육을 시행하는 등 교육에 힘쓴 지도자로 인정받는 상고르의 두 번째 업적 또한 외부의 시각, 특히 대한민국의 경험을 대입해보면 큰 약점이 존재한다.

교육 제도를 정비했다고는 하지만 1971년부터 시작된 세계은행의 초등학교 등록률 집계를 기준으로 세네갈의 초등학교 입학률은 1971년 38.8%에서 1980년 43.1%로 고작 5%p 올라갔을 뿐이다. 세네갈의 초등학교 입학률은 2011년까지 꾸준히 상승하여 87%를 찍었으나 그 이후로 다시 감소하여 2021년에는 81%를 기록했다. 실질 입학률을 기준으로 하면 이 수치는 더 내려간다. 실질 입학률은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78년에 31%였고 2017년에도 75%에 불과하다. 다만 동일 시기 주변 국가에 비해 세네갈의 수치가 훨씬 높기 때문에 상고르 치하의 세네갈의 성취가 인정을 받는 것이다.

참고로 1971년 초등학교 등록률은 부르키나파소가 12%, 말리가 23%였고 1980년에는 17%와 28%를 각각 기록하면서 세네갈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반면 독립 당시에도 세네갈과 비할 수 없이 유수한 경제력을 자랑했던 코트디부아르는 같은 시기 초등학교 등록률이 59%에서 77%로 상승하면서 세네갈의 이것을 일관되게 압도했다.


탈리베 문제

세네갈은 비교적 경쟁력 있는 교육 제도를 도입했고 대통령이 나서 교육을 직접 챙기지만, 이 나라에는 근대 교육을 거부한 채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가르치는 코란 학교들이 여전히 다수 존재한다. 코란 학교는 한국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인식되는 근대적인 초등교육의 구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넘어 주요 문제로 세네갈 정부와 사회에 부담을 주고 있다.

다라(Daara)라고 불리는 이 학교들은 다카르에만 2000개 이상이 있으며 여기에는 탈리베(talibé·아랍어로 학생을 뜻하는 탈리브에서 유래)라 불리는 재학생이 20만 명 이상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도 짐작만 할 뿐, 세네갈 정부는 현재까지 다라와 학생의 수를 정확하게 집계하지 못하고 있다.

탈리베들은 집을 떠나 기숙과 급식 여건이 불비한 다라에 기거하며 강제 구걸을 비롯한 아동 인권 침해 논란을 빚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이 때문에 다라는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고 세네갈 정부는 국제사회에 이를 종식시키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다.

가장 최근인 2022년 11월 30일, 마키 살 대통령이 다라와 탈리베의 전수조사를 포함해 다라를 국가 관리 체계로 끌어들이는 통제책과 지원책을 언급했고, 2022년 12월 12일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가 〈지금은 행동할 때 : 세네갈의 탈리베 아동을 더 폭넓게 보호하기 위하여〉라는 29쪽짜리 보고서를 발간하며 이러한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세네갈 초등교육의 현실을 방증한다.


공항·거리 이름에 ‘상고르’ 이름 붙여

 ▲세네갈 대통령궁 앞을 지나는 도로의 이름은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로(Avenue LEOPOLD SEDAR SENGHOR)’이다. 사진=최필영 

 

이러한 이면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상고르는 세네갈에서 건국 대통령으로서, 민주주의를 실천한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프랑스어와 프랑스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 지성으로서 인정받는다. 세네갈은, 비록 2017년 12월 이후 군 공항으로 완전히 전환되기는 했지만, 다카르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국제공항과 대통령궁 앞을 달리는 ‘상고르 대로’ 등에 상고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국부인 그를 기린다.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또한 상고르의 이름을 자국 도로에 붙이며 그를 기억한다.

상고르의 치적을 판단할 때에 참고할 만한 지표가 있다. 상고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60년 10억 달러였던 세네갈의 GDP는 상고르가 퇴임할 당시라 할 1980년에는 45억1000만 달러로 약 4.5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대한민국의 GDP는 39억6000만 달러에서 654억 달러로 약 16배 증가했다. 2020년, 인구가 약 1700만 명인 세네갈의 1인당 GDP는 1487달러다. 다음 페이지의 표는 1960년과 1980년 각 국가 또는 지역의 1인당 GDP를 보여준다.

 

 

 상고르의 인생, 그의 업적 그리고 그에 대한 세네갈인들의 태도와 입장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그리고 경제성장의 초석을 놓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현 대한민국의 태도와 매우 대조적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했으며 건국 이전부터 재임 내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의 근본 지향점으로 규정하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생 독립국들이 마치 전염병에라도 걸린 듯이 모두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추구할 때에 홀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예기치 못한 6·25전쟁을 맞아 주저하는 미국을 호통치며 설득해 대한민국을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강력한 한미동맹 체제를 출범시킴으로써 오늘날까지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전후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제헌헌법을 자유시장경제 중심으로 전환한 것도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근대화와 경제 발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 시기 “그게 되겠어?”라는 비웃음을 사며 시작했던 경제개발 정책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산업을 육성했다. 그 덕에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은 혜택을 입고 있고 개발도상국들은 이 비결이 무엇인지 배우고자 한다. 그러나 현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모두 그저 “흠만 많은 독재자”라는 꼬리표만 붙어 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운 좋게 대한민국에, 그것도 경제 성장의 열매를 누리게 된 시대에 태어난 내가 세네갈을 포함해 해외에서 근무할 때면 국적(國籍)을 막론하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외국인 중 많은 수는 한국의 성취를 놀라워하고 궁금해하며 그 비결을 묻거나 자신이 생각한 판단에 대한 평가를 구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는 한국인들이 독재자라고 손가락질 대상으로 삼기에 여념이 없는 박정희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상고르 대통령이 세네갈의 국부인지 아니면 식민의 잔재인지에 관한 판단 역시 독자들에게 맡긴다.⊙

 

04월 호

②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물게 안정된 나라 세네갈

새로 지은 국립경기장에 政敵인 전임 대통령 이름 붙여

⊙ 부정부패 등 논란이 따르지만 政敵이라도 존중하는 전통 정착
⊙ 마키 살 대통령, 전임자 와드 대통령의 아들을 부패 혐의로 감옥에 보내면서도 정책 계승
⊙ 말리·부르키나파소 군사정권, 적대적·폐쇄적 민족주의 내세우며 프랑스 등 서구 배척하면서 혼란 가중

▲지방 도로 개통 행사에 참석한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 사진=세네갈 대통령실 인스타그램

 

이번 호에서는 세네갈에서 정치적 안정이 가능한 이유를 알아보고, 세네갈을 비롯한 서아프리카에서 이는 반(反)프랑스 정서와 이를 이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한국과 비교해보려 한다.

2021년 12월 28일 알자지라는 “2021년, 아프리카로 쿠데타가 복귀한 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은 2021년 한 해 동안 아프리카 4개 국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군(軍)이 통치하는 과도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2021년 4월 차드, 5월 말리, 9월 기니, 10월 수단에서 차례대로 쿠데타가 일어나 성공했다. 니제르, 마다가스카르 그리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과거에 비해 쿠데타가 급격하게 줄고 선거를 통해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대세로 자리 잡는 듯 보였던 상황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변화였다.

정정(政情)이 안정된 국가의 국민은 자국 정치에 대한 불만이 대화의 소재일 뿐이지만 정정 불안 국가의 국민은 불만을 말하기 이전에 일단 안전을 확보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집중하기 마련이다. 2021년 2월, 다카르에서 임차할 주택을 찾기 위해 동행했던 말리 출신의 중개업자 무함마드는 이런 예이다. 무함마드는 2012년 이후로 알카에다 그리고 이슬람국가(IS)와 연계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으로 고국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세네갈로 이주했다. 세네갈과 말리는 1960년 6월 독립 후 두 달 뒤인 8월에 세네갈과 말리로 각각 분리되었지만 이웃 국가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정치·경제적으로도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회원국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이동과 취업이 자유롭다. 집을 구하러 다니던 중 무함마드는 자신이 잘 아는 시리아인들이 운영하는 케밥 식당에서 저녁을 들자며 나를 초대했다. 우연이지만 시리아 또한 IS의 준동으로 시작된 내전(內戰)과 국제전이 뒤섞여 있는 나라이다.


말리의 문제는 군대

무함마드는 차에 실어둔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술로 칵테일을 만들고 부드러운 바게트에 스페인식 소시지인 초리초와 프랑스식 간 고기인 파테, 그리고 숯불에 구운 케밥을 함께 권했다. 웬만큼 배를 채운 뒤 무함마드에게 물었다. “말리의 문제가 뭐냐”는 나의 물음에 무함마드는 바로 “군대”라고 답했다.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권력을 잡은 이들이 보인 행태가 또 다른 쿠데타를 불러왔고 거기에 알카에다를 비롯한 외부의 이슬람 원리주의 급진 세력이 개입하면서 한마디로 말리는 난장판이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물었다.

“프랑스가 주도하는 바르칸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함마드는 즉각 답했다.

“말리가 무너지면 세네갈도 기니도 다 무너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이웃인 세네갈도 말리에 병력을 보내고 있다.”

실제로 세네갈은 병력 약 1000명을 유엔말리안정화통합임무단(MINUSMA)에 파견하고 있으며 접경국인 말리로부터 유입될 수 있는 이슬람 무장단체들을 막기 위해 군사력과 그에 따른 예산을 늘리고 있다.


혼돈 속의 말리

▲두 차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말리의 아시미 고이타(가운데). 사진=AP/뉴시스

 

이로부터 두 달쯤 뒤인 2021년 5월 24일, 무함마드의 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말리에서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를 주도한 이는 2020년 8월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한 달 만에 권력을 민정에 이양했던 아시미 고이타 대령이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동일 인물이 쿠데타를 두 번이나 주도해 모두 성공한 것이다.

2012년부터 시작된 말리의 정정 불안은 리비아의 붕괴로부터 비롯되었다. 2011년에 리비아가 붕괴하며 알카에다 세력이 말리로 넘어 들어왔다. 알카에다 세력이 북부에서 확산하면서 말리에서는 다양한 무장 세력들이 준동했고 말리 정부, 더 정확히 말리 군대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말리 정부는 2012년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MINUSMA(유엔말리안정화통합임무단)를 출범시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여기에 2015년부터는 IS까지 얽히면서 말리의 안보 상황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말리 국민들 사이에는 반외세 정서가 퍼지면서 말리의 정정은 쉽게 나아지지 못했다.

2020년 8월 쿠데타는 민주적인 선거로 집권했다는 이브라힘 부바카 케이타 대통령 정부의 부정과 악화되는 안보 상황을 비판하는 대규모 항의 집회가 이어지는 와중에 벌어졌다. 단적으로 MINUSMA는 유엔의 평화유지활동 단체 중 가장 위험한 곳이다. 2023년 1월 현재 MINUSMA의 사상자는 298명으로 유엔레바논임시군(UNIFIL)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UNIFIL이 1978년에 출범했고 MINUSMA는 2013년 7월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MINUSMA가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말리 반군은 물론 MINUSMA에 참여한 여타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화력, 압도적인 첨단 정보력, 그리고 든든한 방호력을 갖추었다는 프랑스군도 말리에서 10년 동안 58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장 세력의 손에 말리 국민이 목숨을 잃는 일은 오래전부터 일상이다.


말리로 진출한 러시아 용병그룹 바그너

사태가 더욱 악화되는 것은 말리 과도정부가 자폐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기존 외교안보 정책의 대강을 뒤집은 데에도 원인이 있다. 2021년 5월 쿠데타 이후 출범한 말리 과도정부는 민정 이양을 요구하는 서방과 불화하며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을 상대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말리는 프랑스를 대체할 협력 대상으로서 러시아를 선택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한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한 러시아 용병 집단 바그너(Wagner)는 말리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러시아 세력이다.

2021년 하반기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연합 회원국들과 말리 사이에 불화가 본격화하자 외교장관들도 상대를 향해 원색적이고 도발적인 언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2022년 1월, 말리에서 프랑스가 주도하는 대테러 작전인 바르칸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말리에 특수부대를 파견한 덴마크는 불과 사흘 만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덴마크는 말리의 초대로 파병했다는 입장이었고 말리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받아쳤다. 덴마크 외교장관은 “더러운 장난”이라는, 외교가에서는 나오기 힘든 표현으로 말리를 비난하며 자국군 철수를 발표했다. 프랑스는 국방장관과 외교장관이 모두 나서며 말리와 설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말리 과도정부는 주말리 프랑스 대사에게 72시간 내 추방 명령을 내렸다.
 

 
 

1년 동안 두 차례 쿠데타 겪은 부르키나파소

▲2023년 1월 24일 부르키나파소에서는 프랑스 외무장관의 방문을 앞두고 군사정권의 조종 아래 ‘프랑스의 내정간섭’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AP/뉴시스 

 

결국 2022년 2월 17일, 유럽연합·아프리카연합 정상회의 직전에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연합 회원국들과 캐나다는 그간 말리에서 시행해온 바르칸 대테러 작전을 중단하고 자국 병력들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2022년 8월, 프랑스는 말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MINUSMA에 꼭 필요한 군용 수송기를 포함해 병력과 장비를 지원함에도 말리 과도정부로부터 계속적인 비난과 괴롭힘을 받은 독일 또한 2022년 11월, 자국 병력을 2024년 5월까지 철수하겠다고 공표했다.

표적은 서방 국가만이 아니다. 말리군은 2022년 7월, MINUSMA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코트디부아르 군인 49명을 ‘국가 안보 사범’으로 규정하며 체포해 구금했다. 유엔과 코트디부아르를 포함한 여러 국가와 지역기구들이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말리는 오히려 2022년 12월 말에 이들에게 국가전복죄로 20년 이상의 형(刑)을 선고했다.

올해 1월 초에 과도정부가 이들을 사면하고 추방하는 형식으로 문제를 봉합하기는 했지만 코트디부아르는 2022년 11월에 MINUSMA에서 병력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말리의 외교적 고립은 점점 더해가는 형국이다.

이런 움직임은 2022년에 쿠데타가 두 번 벌어진 부르키나파소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말리 남쪽으로 접경한 부르키나파소 역시 이슬람 무장 극단주의자들의 준동으로 안보가 불안하다. 2022년 1월에 쿠데타가 발생해 성공한 부르키나파소에서는 과도정부가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의 준동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면서 8개월 만인 9월에 또 다른 쿠데타가 발생해 1년 사이에 과도정부가 두 번 출범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신(新) 과도정부는 2023년 1월, 프랑스에 방위조약의 파기를 통보하면서 자국에 주둔하는 프랑스군을 한 달 안에 철수하라고 요구한 상태이다.


적대적 민족주의

말리와 부르키나파소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세력의 준동과 연속된 쿠데타로 치안과 정정이 모두 불안한 반면 구체적인 해결책이 보이지 않다 보니 장래 안보 및 경제 전망 또한 불안하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국 집권자들이 당장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은 민족주의에 기반한 감정적 대응과 선전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렇다. 얼마 전인 2월 21일, 말리에서는 급조폭발물이 터지면서 유엔평화유지군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날 유럽각료이사회 의장은 ‘말리가 붕괴하고 있으며 무장 세력들이 더 많은 지역을 점령해나가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말리 과도정부는 자국이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한 이후로 무장 세력에 대해 점점 더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어느 안보 전문가도 말리의 안보 상황을 낙관하지 않는다. 말리를 비롯한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사례는 20세기 후반 국제사회에서 국가안보의 영역이 국내와 국외로 뚜렷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모호한 지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위협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안보 상황이 어디까지 악화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적대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상 정책이라고 부르기도 적절치 않지만 이런 ‘외교안보 정책’이 실현되면 국가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는지도 엿볼 수 있다. 이런 말리가 앞으로 안정을 회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현 서아프리카 주변국들의 고질적인 안보 불안 요인으로 자리 잡을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평화적 정권교체 전통 확립된 세네갈

▲세네갈의 역대 대통령들. 왼쪽부터 상고르, 디우프, 와드. 사진=세네갈 대통령실 

 

말리나 부르키나파소와 달리 세네갈은 1960년 독립 이후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쿠데타를 겪지 않은 채 정권이 3번 교체되며 4명의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이는 서아프리카 주변국은 물론 아프리카 전체를 통틀어 매우 예외적이다. 이 특이성은 세네갈에 토착화된 이슬람 정치 문화와 최대 다수 종족인 월로프족을 기반으로 하는 세네갈의 정치 문화에서 유래한 바가 크지만 이와 별개로 정적(政敵)이라도 존중하는 관행을 정치인들 사이에서 지켜온 데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세네갈에서도 정치인들 사이의 경쟁과 갈등은 일상이다. 세네갈 초대(初代) 대통령인 상고르 대통령이 1980년에 사임하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아브두 디우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를 제외하면 세네갈 대통령들은 후임 대통령에 취임하는 인물들과 단순 대립을 넘어 치열하게 반목하는 정적 관계였다. 또한 정권 이양이 이루어진 대선에서 승리해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보들은 1차 투표에서는 2위에 오르지만, 1차 투표에서 과반을 획득한 후보가 없어 다수 득표자 1, 2순위 후보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결선(決選)투표를 통해 1차 투표에서 1위를 했던 전임 대통령을 물리치고 당선된 공통점을 보인다.

제3대 대통령 아브둘라이 와드는 1978년 대선에서 상고르에게 대적한 것을 시작으로 1983년, 1988년, 1993년에 출마하면서 상고르는 물론 디우프와도 대적했다. 그 과정에서 몇 차례 투옥 또는 구금되었다. 우스갯소리로 ‘대통령 후보가 직업’이라는 평가를 받던 아브둘라이 와드는 2000년 대선 1차 투표에서 2위에 올랐고 디우프 대통령을 상대로 치른 결선투표에서 약 58%를 득표하여 마침내 세네갈의 제3대 대통령이 되었다. 1차 투표에서 1위를 했지만 결선투표에서 와드에게 패한 당시 디우프 대통령은 결선투표 결과를 수용하며 조용히 대통령궁을 떠났고 와드는 그런 디우프를 높이 평가했다.


전임자의 아들을 감옥으로 보낸 마키 살

▲와드 대통령 시절 북한 만수대 창작사에 의뢰해 제작한 ‘아프리카 르네상스’ 동상. 

 

제4대 대통령인 현 마키 살 대통령 또한 2012년 대선에서 3선에 도전하던 아브둘라이 와드 대통령을 상대로 역시 1차 투표에서 2위에 올라 결선투표에서 약 65%를 얻어 승리함으로써 대통령에 취임했다. 와드를 지지했던 마키 살은 와드 정부에서 광산부 장관 등 다수의 공직을 맡았으며 2007년 대선 당시 와드 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되며 재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마키 살이 국회의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와드 대통령의 아들인 카림 와드의 부패 혐의 조사를 결정, 이를 빌미로 와드와 살 사이에 정치적 불화가 불거졌다.

살은 와드와 결별한 뒤 세네갈민주당을 탈당하여 공화국회의(APR)라는 신당을 창당, 2012년 대선에 출마해 와드를 꺾고 당선되었다. 살과 와드의 악연은 살이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년 뒤, 카림 와드가 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최종적으로 6년 형과 2억2800만 달러 상당의 벌금을 선고받는 데까지 이어졌다. 카림 와드는 마키 살 대통령이 사면하기 전까지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처럼 깊은 살과 와드 사이의 불화는 마키 살 대통령이 2019년 발간한 자서전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 실제로 와드와 와드 부자의 부패, 과대망상적인 행동과 세습 시도는 2010년 12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주세네갈 미국 대사관 전문(電文)을 통해서 확인되기도 한다.

와드의 과대망상적인 행동은 아프리카 최대의 동상으로 알려진 ‘아프리카 르네상스’ 동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담이지만, 북한 정권의 외화벌이에 앞장선 만수대 창작사가 이 동상을 건설한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 동상은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촘촘하고 정교한 대북(對北)제재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실례가 되었다. 또한 아브둘라이 와드는 아들 카림 와드에게 다수의 공직을 맡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통령직을 세습하기 위해 상당 부분 노력했다.


政敵인 전임자의 정책 계승

마키 살은 와드와의 불화를 자서전에 실었을지언정 전 대통령으로서 와드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와드를 전 대통령으로 배려하는 모습을 공식 석상에서 보여주었다.

2022년 2월 22일, 살 대통령은 자신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는 세네갈부흥계획(PSE)의 일환으로 신축한 세네갈 경기장의 개장식을 주관하며 이 경기장을 ‘아브둘라이 와드 스타디움’이라고 명명했다. 와드가 당수(黨首)로 있는 세네갈민주당은 보도자료를 통해 살 대통령의 호의에 사의(謝意)로 답했다. 이미 살 대통령은 세네갈부흥계획의 일환으로 신축된 국제회의장에는 제2대 대통령 아브두 디우프의 이름을 따 ‘아브두 디우프 국제회의장’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경기장은 살이 입안한 것이라 예외지만, 살 대통령이 완성했거나 추진 중인 대형 국책 사업들은 와드 행정 부에서 계획되어 시작된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3월호에 소개한 세네갈인 징병을 주도했던 블레즈 디아뉴의 이름을 따 2017년 개항한 블레즈 디아뉴 국제공항, A1 고속도로 등이 대표적이다. 전국적으로 병원과 보건소를 증설하는 사업 또한 와드의 계획을 계승했다.

물론 발전을 추구하는 개발도상국이라는 특성상 위의 국책 사업들은 당연히 추진해야 할 것들이기에 전 정부가 입안했다 하여 막무가내로 없앨 수는 없었을 수도 있다. 또한 살 대통령이 신축 국립 경기장에 와드 전 대통령의 이름을 붙인 데는 정치적으로 복잡한 계산, 특히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대한 셈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임 대통령에 대한 악연이나 정적 관계를 뛰어넘어 전임자를 세네갈 역사에 자리매김하도록 만든 전통을 세운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는 수많은 논란을 낳은 와드가 프랑스 식민 정책의 앞잡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세네갈 티라이외르를 기리는 날을 제정하고 식민의 잔재라는 평가를 받는 ‘뎀바와 뒤퐁’ 동상을 다카르역 앞으로 옮기며 역사 인식의 균형을 강조하는 족적을 남긴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업적이다. 부정부패를 비롯한 논란이 따르지만 정적이라도 존중하며 안정된 정정과 정치 문화를 쌓아온 세네갈의 현대 정치사는 이런 점에서 아프리카에서 흔치 않은 사례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고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05월 호

③ 세네갈 정치 흔드는 젊은 정치인 우스만 송코

부패청산·식민지배 청산 내걸고 승승장구…사법리스크 직면

⊙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포퓰리스트’라는 비판도 받아
⊙ 독립 60년 지나면서 식민 경험 못 한 젊은 층 중심으로 배타적 민족주의 확산
⊙ 세네갈 여성단체, 송코 고발한 여성 외면
⊙ 송코의 출두 둘러싼 폭력 시위로 총 14명 사망, 600명 이상 부상

▲세네갈 야당 파스테프의 지도자 우스만 송코. 사진=AP/뉴시스

 

여느 식민지들처럼 아프리카 또한 독립 이전부터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발현했다. 20세기 중반 아프리카에서 민족주의란 넓게는 범(汎)아프리카주의부터 좁게는 종족 중심의 단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출범을 기점으로 60년이 넘게 흐르는 동안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서는 독립 이전에 출생해 식민을 경험한 국민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든 반면 독립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식민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민으로서 정체성(正體性)을 가지고 성장한 국민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중위(中位)연령이 18세인 아프리카에서는 어느 나라고 간에 인구의 절반이 20세 이하이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 아프리카가 보여주는 역동적인 발전상은 비록 저개발을 극복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20세기 후반 아프리카 전역에 만연했던 극빈(極貧), 정치적 불안정, 부패 등으로 얼룩진 음울함을 씻어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사람으로 치면 독립 후 환갑에 접어드는 즈음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자국이 외형적으로는 독립국이나 실제로는 여전히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목소리는 인터넷과 휴대전화 보급의 혜택을 받아 기성(旣成)세대보다 불평과 불공정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견해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청년층에서 두드러진다.


유럽이 주목하는 우스만 송코

정도를 막론하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대상에 비난을 집중하여 세를 불리는 선동법은 시대를 불문하고 많은 정치인이 이용해왔다. 서아프리카에서는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청년층을 등에 업고 세(勢)를 불리려는 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말리나 부르키나파소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세네갈은 아직 말리나 부르키나파소 수준의 상황은 아니지만 반(反)프랑스주의를 내걸며 중앙정치에 화려하게 등장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야당 정치인의 사례를 통해 이런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2021년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세네갈에서는 흔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야당 정치인 지지자들 중심으로 청년층이 대거 시위에 참여하면서 소요가 발생하여 14명이 사망하고 600명 이상이 부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는 결국 3월 8일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2021년 1월 6일부터 시행한 야간 통행금지 시각을 21시 시작에서 24시 시작으로 바꾸며 사실상 해제하는 무마책 등을 제시하고서야 누그러졌다.

이 사태의 중심 인물은 야당 국회의원인 우스만 송코(Ousmane Sonko· 1974~). 얼마 전인 올해 2월 17일에도 법원에 출두하는 송코를 지지하며 모인 군중이 소요를 일으키자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충돌이 발생했다. 세네갈에서 송코로 인한 소요를 직접 목격한 필자는 주재 기간 내내 송코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태에 관심을 가지고서 복수(複數)의 언론보도를 탐독했으며 송코를 주제로 현지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송코는 어떤 인물인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그를 주목한다. 단적인 예로 프랑스와 독일이 합작해 만든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 ‘아르테(Arte)’는 〈우스만 송코에 대해 알아야 할 다섯 가지〉라는 제목의 영상을 2022년 11월 19일 유튜브에 올렸다.

필자가 보기에 송코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이라는 세네갈의 정계를 아프리카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으로써 뒤흔들고 있으며 당장은 내년 1월 대통령 선거까지,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세네갈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요즘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유행어가 된 내로남불의 전형이기도 하다.


부패와 싸우는 젊은 정치인

▲지난 3월 16일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서는 송코의 법원 출두에 항의하는 폭력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AP/뉴시스 

 

1974년생으로 엘리트 교육을 거쳐 공무원이 되어 세무 분야에서 15년을 근무한 송코는 2014년 1월, 젊은 공무원, 기업가, 사업가들을 모아 정당 파스테프(PASTEF)를 창당했다. 파스테프는 ‘일, 윤리 그리고 동지애를 위한 아프리카 세네갈 애국자들’을 뜻하는 단어들의 머리글자를 모은 약어이다.

참고로 세네갈 법률은 공무원의 공직 겸직과 정당 가입을 허용한다. 장관 겸 국회의원, 장관 겸 지방자치단체장 또는 국회의원 겸 지방자치단체장 등의 조합이 가능하기 때문에 장관이나 국회의원 중 다수는 이런 조합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송코는 2016년 5월 한 방송에 출연하여 세네갈 엘리트들의 부패 관행을 폭로한 뒤 ‘공무원의 자제 의무’ 위반이라는 사유로 해임되었다. 참고로 프랑스 제도에서 ‘자제 의무’란 의견 내용을 문제 삼거나 의견을 표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의견 표출 방식을 문제 삼는다.

부패 관행을 고발한 뒤에 해임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송코는 여세를 몰아서 2017년 5월, 《세네갈의 석유와 가스: 약탈의 연대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송코는 살 대통령을 거명하며 대통령과 측근들이 세네갈의 천연자원을 착복한다고 비난했다.

전국적인 지명도를 확보한 송코는 7월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했다. 이듬해 2월, 송코는 영국의 석유 재벌인 페트로-팀(Petro-Tim)이 “해상 광구 2곳의 개발권을 부정하게 확보했음을 알면서도 대통령이 서명했다”면서 살 대통령의 추문 연루를 주장했다. 이는 2019년 BBC가 방송으로 다루면서 세네갈을 뒤흔드는 사건으로 되돌아온다.


송코, 첫 대선 출마에서 3위 기록

2018년 9월, 송코는 두 번째 저서 《해결책: 새로운 세네갈을 위하여》를 출간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세네갈의 문제점과 해결 대안을 제시했다. 송코는 이미 이때 2019년 2월에 실시될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책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당시 무역중소기업부의 무역국장이자 2019년 대선 이후 내부 승진으로 장관에 취임하게 되는 아미나타 아솜 디아타로부터 나왔다. 상무 관료로서 잔뼈가 굵은 디아타는 송코의 주장에 대해 “시대착오적이며 부정확하다”면서 “1980년대라면 통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지식은 부분적이며 그중 일부는 틀리기까지 하다”고 비판했다.

송코의 저서와 인터뷰를 찾아 읽으면서 그를 연구한 필자 또한 이런 비판에 동의한다. 디아타의 지적처럼 송코의 주장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서는 통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그러나 송코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밀고 나가면서 2019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선 1차 투표에서 15%를 득표하며 3위를 기록했다. 낙선했지만 생애 최초로 대선에 출마한 후보, 그것도 45세밖에 안 되는 신인이 15%를 득표했다는 파격적인 사실 덕에 송코는 공무원과 고위층의 부정부패 관행을 고발한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이미지에 ‘세네갈의 총체적 문제를 해결할 기대주(期待株)’라는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갖는, 특히 청년층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정치인으로서 공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대통령 동생의 부패 스캔들

2019년 대선이 끝나고 오래지 않아 송코의 입지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2019년 6월 3일, 영국의 BBC가 송코의 첫 번째 책, 즉 《세네갈의 석유와 가스》에 담긴 내용을 〈세네갈: 100억 달러짜리 추문〉이라는 제목으로 방송하며 세네갈이 발칵 뒤집어졌다.

BBC는 자국 석유회사인 BP(British Petroleum)가 세네갈 해저 가스전 개발 과정에서 부정을 저질렀으며 여기에 살 대통령의 동생인 알리우 살이 연루되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BBC에 따르면 알리우 살은 5년 동안 페트로-팀의 모(母)회사인 티미스(Timis)에 고용되어 달마다 2만5000달러, 총 150만 달러를 수령했다. 2016년에 가스가 발견되자 BP는 이 관계를 알고 있음에도 40년에 걸쳐 최소 90억 달러, 최대 120억 달러를 티미스에 지급하는 계약을 맺었고, 2017년에는 티미스가 알리우 살 소유의 회사에 25만 달러를 비밀리에 지급했다고 한다.

살 대통령은 BBC 보도가 세네갈을 불안하게 만들려 한다면서 즉각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그의 동생은 이익 충돌의 비판이 제기되자 2018년 10월에 티미스에서 사직했다고 밝혔다. BP 또한 계약 체결 전에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고, BBC 보도 수치가 부정확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티미스도 BBC 보도는 전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자사는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보도는 세네갈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다카르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야당 정치인들과 시민단체들은 석유 및 가스 개발 계약의 투명성을 요구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알리우 살은 2017년 9월부터 맡아오던 국립투자기금 수장(首長)직을 2019년 6월 24일 사임했다. 법무부 장관은 부정 혐의 조사를 개시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2020년 12월 19일, 법원이 알리우 살의 부정 혐의를 기각(棄却)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사법부 결론과 별개로 정치적인 파장은 넓고 길게 이어졌다.


‘정치인답지 않은 신선한 정치인’

우선 송코는 이전부터 쌓아온 대로 부정부패와 싸우는, ‘부패한 기존 정치인과 다른, 정치인답지 않은 신선한 정치인’이라는 인상이, 반대로 대통령을 비롯한 기성 여당 관료들과 정치인들에게는 ‘부패한 정치인’라는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다.

필자는 세네갈에서 택시나 러시아판 우버인 양고(Yango)를 이용하며 새로운 운전자들을 만날 때마다 “송코의 인기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기존 정치인들과 다르다” “기존 정치인들은 부패해서 믿을 수 없다”였다.

하지만 송코가 제시한 정책을 평가하는 경우는 볼 수 없었다. 택시기사들과 비교해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개인 차량을 이용하여 서비스에 나서는 양고 운전자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송코를 지지하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바로 “그렇다”고 대답하는 운전자도 많았다. 기존 정치인들과는 달라 보이는 새로운 정치인을 갈구하기란 세네갈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책의 적절성에 대해 잘 모르거나 무관심한 채 이미지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도 거의 유사해 보였다.

‘부패를 일소할 정치 신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송코의 지명도는 결국 작년 1월 2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그리고 같은 해 7월 30일 시행된 총선에서 크게 영향을 미쳤다. 물론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역병(疫病)으로 인해 경제가 급작스럽게 위축된 여파도 있었을 것이다.

2018년 송코의 저서 《해결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디아타 상무장관은 겸직하던 쾨르 마사르 시장에서 낙선했다. 살 대통령의 동생 알리우 살은 게자와이 시장 선거에서 낙선했다. 이 두 선거구는 다카르 광역도에 속하는 곳으로 인구수, 특히 청년층의 비중을 고려할 때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곳이었다. 또한 지방선거에 출마했던 대통령의 최측근 20여 명이 거의 다 낙선하면서 살 대통령의 정치적 패배라는 평가로 볼 수 있었다.

세네갈 여권은 2014년 지방선거 때도 성과가 안 좋았지만 2017년 총선에서 대승했다며 자위했다. 그러나 작년 7월 3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 165석 중 여권이 82석 그리고 야권이 83석을 차지하며 사상 처음으로 여권이 과반을 상실했다. 작년 1월 지방선거는 일시적인 바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결국 작년 9월에 개각(改閣)을 단행했고 교체된 장관들에는 2019년 송코의 책을 비판했던 상무장관인 아미나타 디아타도 포함되어 있었다.
 

 

송코의 법원 출두 문제로 폭동 발생

▲2021년 3월 송코의 법정 출두 때문에 일어난 소요사태로 14명이 사망하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사진=AP/뉴시스 

 

송코가 이끄는 야권이 연달아 전국 단위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며 세를 불려 나가는 가운데, 정작 송코는 요즘 한국 뉴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법(司法) 리스크’를 안고 있다.

2021년 2월 2일, 세네갈 정계와 국민이 깜짝 놀란 일이 벌어졌다. ‘달콤한 미녀’를 뜻하는 ‘스위트 보테’라는 마사지 업소의 20세짜리 마사지사인 아지 사르가 기자회견을 열고 송코를 고소한다고 공표했다. 고소 사유는 성(性)폭행과 살해 위협. 이는 불이익을 무릅쓰고 부패 관행을 용감하게 폭로한 내부 고발자이자 부패를 소탕할 대안으로써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신선한 정치인으로 알려진 송코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세네갈 정국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송코는 이 고소가 자신을 두려워한 대통령과 여당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고 국회의원 면책특권(免責特權)을 주장하며 헌병군(군과 경찰의 중간에 해당하는 사법기관)의 출석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여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국회는 2021년 2월 26일 표결로 송코의 면책특권을 무효화했다.

송코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항의 시위가 연속되는 가운데 송코의 출석 여부를 두고서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2021년 3월 3일, 조사를 받으러 출두하는 송코의 주변으로 지지자들이 집결하며 시위로 발전하자 헌병군은 송코를 무허가 시위에 참여하여 공공 안녕을 저해한 혐의로 체포했고 이는 결국 다카르를 포함한 전국적인 폭력 소요 사태로 번졌다. 닷새 동안 지속된 폭력 시위로 총 14명이 사망하고 전국적으로 600명 이상이 부상했다.


송코, 내년 대선 출마 선언

이 소요는 2021년 3월 8일 20시, 마키 살 대통령이 TV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야간 통행금지 단축을 포함한 민심 무마책, 특히 불만을 가감 없이 표출하며 정부에 냉소를 보내던 청년층을 염두에 둔 대책을 약속하자 바로 사그라졌다.

세네갈은 강화된 코로나19 대책으로서 최다 인구 거주 지역인 다카르 광역도와 티에스 광역도에서 2021년 1월 6일 21시부터 다음 날 05시까지 매일 밤 야간 통행금지를 적용하고 있었다. 이는 다카르와 티에스는 물론 국민 경제 활동 전반에 큰 타격을 가져오며 사회적 불만을 유발했다.

민심 무마 차원에서 대통령은 야간 통행금지를 24시부터 05시까지로 종전보다 3시간 단축했다. 이는 사실상 폐지나 마찬가지였고 단축된 야간 통행금지도 3월 19일부터 해제했다. 필자는 시위를 가까이서 목격했고 대통령 특별담화를 시청하고 난 뒤 어떤 반응인지를 알기 위해 일부러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연일 폭력성을 높여가던 소요는 대통령 담화가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결국 송코는 출국금지와 금요일마다 법원에 출두하여 신병(身柄)을 확인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주요 야당 정치인이라는 정치적 비중은 아직까지도 이 사건의 결론이 미뤄지는 데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연이긴 하지만 송코를 조사하던 예심판사가 전국적인 소요 사태 직후 사망한 뒤로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이 자리는 무려 7개월 동안 공석이었다. 고발 후 2년이 넘었지만 이 사건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세네갈에서는 송코를 중심으로 야권 연합이 결성되었고 결국 야권 연합이 작년 1월 지방선거와 7월 총선에서 크게 약진하며 정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이와 더불어 송코는 세네갈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지갱쇼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키울 수 있었다.

이후 송코는 내년 1월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사실상 야권 대선 후보로서 입지를 굳힌 상태이다. 대선까지 1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송코의 성폭행 및 살해 위협 혐의가 어떤 결론으로 끝날지는 예단할 수 없다. 그리고 사법부가 내릴 결론이 어떤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지는 더더욱 예단하기 어렵다.


여성단체들의 위선

외부인으로서 송코 사태를 관찰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고발자인 아지 사르의 말이 사실임을 전제로 할 때, 그녀는 이 사건에서 사회적 약자(弱者)다. 성별, 학력, 나이, 직업, 가문 등 어느 것 하나 변변하지 못하다. 반면 송코는 불체포특권을 포함하여 각종 특혜를 누리는 국회의원이자 지방자치단체장에 선출된 유력한 정치인이다.

그런데 세네갈의 인권단체들, 특히 여성의 권익을 옹호한다던 여성단체들은 사회적 약자라 할 아지 사르의 고발에 한결같이 침묵했다. 2021년 3월 소요 사태 후 1년 뒤인 작년 3월, 프랑스의 국제 전문 언론인 ‘라디오 프랑스 앵테르나시오날’은 아지 사르와 독점 인터뷰를 갖고 이를 기사화했다. 인터뷰에서 아지 사르는 “세네갈에서는 여자가 여자를 상대로 싸운다. 나는 어떤 여자도 내가 겪은 일을 다시 겪지 않기를 바란다”며 여성단체들의 위선(僞善)을 꼬집었다.

실제로 송코의 당인 파스테프 대변인은 아지 사르의 인터뷰 기사 이후 입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이 사건을 뒤로 제쳐놨다. 7월 총선과 2024년 대선이라는 핵심에 집중하고 있다”며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필자가 거주하던 아파트의 경비원인 말릭은 송코에 대한 뒷이야기를 몇 개 해주었다. 성폭행 등으로 고발되자 송코의 두 번째 아내는 화가 나서 송코를 떠나 친정으로 가버렸다고 했다. 필자가 물었다.

“송코 반대자들은 왜 그를 싫어하는가?”

말릭이 열을 내며 답했다.

“송코는 오직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포퓰리스트이다.”

말릭은 송코의 시장 선거운동 중 교통사고가 일어나 당원 3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음에도 송코는 선거운동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며 그가 이중적인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한국에서도 많이 봤던 상황을 세네갈에서도 보게 되면서 개혁을 외치는 이들이 가진 위선의 유사성이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송코의 ‘과거사 청산’

▲지난 3월 16일 법정에 출두했다 나온 송코는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귀가했다. 사진=AP/뉴시스

 

마키 살 대통령이 정적(政敵)이었지만 자신의 전임자인 와드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명칭을 국립경기장에 헌정하고 있을 때 청년층으로부터 받는 선풍적인 인기를 근거로 가장 영향력 있는 야당 정치인이 된 우스만 송코는 시장으로 취임한 지갱쇼시의 주요 도로명을 바꾸는 결정에 서명하고 있었다. 대선을 염두에 두고 펴낸 두 번째 저서인 《해결책: 새로운 세네갈을 위하여》에서 송코는 오늘날 세네갈이 겪는 문제의 원인에는 프랑스가 있다며 프랑스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적인 정치·경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갱쇼 시장으로 취임한 송코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식민 시대에 프랑스인들의 이름을 따 명명된 도로 5개의 명칭을 개명해야 한다고 시 의회에 제안한 것이다. 지갱쇼 시의회는 이를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지갱쇼는 물론 프랑스 식민지였던 곳에는 하나 이상씩은 남아 있을 ‘드골 장군 길’은 ‘평화 길’로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르무완 중위를 기리는 ‘르무완 중위 길’은 1944년에 급여 지급을 요구하는 세네갈 티라이외르들을 프랑스군이 무력으로 진압하며 학살한 지점의 이름을 딴 ‘티아로이 44길’로 바뀌었다. ‘자블리에 대위 대로’는 프랑스 육군에서 복무하며 제1·2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아프리카 출신 병사들을 부르는 명칭인 티라이외르를 써 ‘아프리카 티라이외르 대로’로 결정되었다. 도로명 변경을 결정하면서 송코는 “식민 역사가 부정적으로 담겨 있는 도로명을 변경한다. 독립 후 60년이 더 지났는데도 이런 호칭을 쓰는 것은 우리의 국가적 존엄에 상처이다”라고 변경의 이유를 설명했다.


사법부 판결도 무시

이 결정은 세네갈은 물론 프랑스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로부터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는 2019년 대선 당시 범아프리카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반프랑스 및 반제국주의를 강하게 주장했고 세네갈의 유력 정치인인 우스만 송코가 내린 결정이기에 더 그러했다. 세네갈에서는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작년 12월 8일, 세네갈 대법원은 지갱쇼 광역도가 지갱쇼 시의회와 송코의 도로명 변경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 소에서 동(同) 결정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12월 9일, 우스만 송코는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트위터에 “아프리카 티라이외르 대로, 티아로이 44길, 평화 길은 탈식민화된 상태로 새로운 명칭을 유지할 것”이라는 문구를 새로운 현판을 제막하는 자신의 사진과 함께 게재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 흔히 봤던 상황을 아프리카에서도 보면서, 그리고 말로만 나오리라 생각했던 주장들이 2017년 이후 현실이 되는 것을 본 필자로서는 동일한 주장과 행동이 세네갈에서 대통령을 꿈꾸는 유력 야권 정치인으로부터 나오고 시행되는 것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세네갈, 정치 안정 무너지나?

송코에 대한 성폭행 및 살해위협 혐의가 어떻게 처리될지는 알 수 없다. 반면 내년 1월로 예정된 세네갈 대선까지는 이제 9개월쯤 남았다. 송코는 이미 두 번의 전국 단위 선거에서 강력하고 지명도 있는 야권 유력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경쟁력을 재차 확인한 데 이어 대선 출마를 공식화한 뒤 선거운동으로 볼 수 있는 행보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런 유력 정치인을 성폭행과 살해위협을 이유로 기소하거나 또는 법원이 유죄를 선고하면 정치적으로 큰 후폭풍을 불러올 것이다. 반대로 기소하지 않거나 또는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하는 것 또한 만만찮은 후폭풍을 불러올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마키 살 대통령이 3선을 위해서 정적을 탄압한다는 주장을, 후자는 정부가 유력 야권 정치인의 눈치를 보며 사건을 무마했다는 주장을 각각 신빙성 있게 만듦으로써 국론이 확연하게 양분되고 이에 따라 그간 안정적인 정정(政情)을 유지하던 세네갈이 혼란스러워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내년 1월, 세네갈은 그간 이어온 정치적 안정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06월 호

④ 아프리카로 번진 美中 냉전

“아프리카는 지정학의 주요 동력”(블링컨 미 국무장관)

⊙ 中, 차관·무역 통해 세네갈 정치·경제에 영향력 행사
⊙ “지난 10년 동안 세울 수 있었던 사회기반시설 중 절반이 중국 재정지원받아”(주중 세네갈 대사)
⊙ 세네갈 최대 대학인 셰이크 안타 디옵 대학, 공자학원 운영 중
⊙ 블링컨 미 국무장관, “감당할 수 없는 빚 지우지 않겠다”며 중국 견제
⊙ “아프리카, 중국인들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실망하기 시작”(프랑스 외교장관)

▲2022년 6월 29일,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서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스타디움 재건축 행사가 열렸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금융지원으로 진행된다. 사진=신화/뉴시스

 

 

일대일로(一帶一路)는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겠다며 시진핑(習近平)이 2013년에 내세운 매우 야심 찬 기반시설 투자 계획이다. 일대일로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는 육상 교통로와 남중국해에서 믈라카 해협을 통과해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스리랑카의 함반토타, 파키스탄의 과다르 그리고 예멘의 아덴을 거쳐 홍해를 통과해 그리스까지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로 대표된다. 일대일로의 거점 분포를 보면 아프리카는 지부티, 케냐, 탄자니아 정도를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지며, 특히 서아프리카는 비중이 없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국제질서에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중국의 존재감은 일대일로와 무관하게 서아프리카에서도 퍼지고 있다. 세네갈은 그런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親中 국가 세네갈

2012년에 출범한 현 마키 살 대통령 정부는 친중(親中) 입장을 지속적으로 보여왔다. 중국도 2016년 9월에 자국이 개최한 G20에 세네갈의 살 대통령을 초청하고 정상회담을 거쳐 세네갈을 전면적 전략 동반자 관계(Partenariat stratégique global)로 격상시키며 호응했다. 양국의 긴밀한 관계는 정상 간 방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살 대통령이 3회(2014, 2016, 2018년) 방중한 반면 시진핑은 세네갈을 한 번(2018년 국빈 방문) 방문했다.

세네갈은 시진핑의 이 국빈 방문을 계기로 서아프리카 국가 중 최초로 일대일로에 합류했다. 당시 살 대통령은 중국을 “현대의 위대한 경제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현 세네갈 정부는 2035년까지 중(中) 소득 국가로 도약한다는 목표 달성에서 중국을 핵심 파트너로 간주한다. 살이 추진하는 세네갈 부흥계획의 주요 과제 중 하나인 ‘격오지 해소(désenclavement)’와 ‘탈중앙화(Décentralisation)’를 실현하는 데 결정적이라 할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중국의 지원은 절대적이다. 작년 10월 초, 주중(駐中) 세네갈 대사가 자국 언론인 《Le Soleil》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 동안 세네갈이 세울 수 있었던 사회기반시설 중 절반이 중국의 재정지원을 받았다”는 발언은 이런 평가를 뒷받침한다. 중국의 대(對) 세네갈 기반시설 투자는 15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본다. 작년 1월 16일, 대서양으로 흐르는 살룸(Saloum)강 하구에 개통된 푼듄대교(Pont à péage de Foundiougne)는 1.3km짜리 왕복 2차선 교량으로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긴 다리이다.

푼듄대교는 내륙 수운이 가능하도록 다리 중앙이 아치처럼 높게 올라간 형태를 하고 있다. 푼듄대교는 살룸강 때문에 중앙이 끊어진 파틱(Fatick) 광역도(廣域道)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것은 물론 감비아를 거쳐 카자망스로 이어지는 간선 교통망 역할을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세네갈 중앙에 집중되는 교통량을 줄여 물류 이동을 원활하게 만드는 효과가 기대된다. 여기까지는 세네갈의 경제 개발과 성장은 물론 서아프리카 지역에 긍정적이다. 그러나 세네갈도 그리고 중국도 밖에 대놓고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려는 이면의 현실을 살펴보면 이 교량이 세네갈에 큰 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푼듄대교

 ▲서아프리카 최장 다리인 푼듄대교. 중국의 차관으로 건설되었다.

 

 

2018년 2월, 푼듄대교 기공식 당시 공개된 바에 따르면 건설비는 약 7100만 달러(한화 약 955억원 상당)였다. 건설비를 중국수출입은행의 차관(借款)과 세네갈 정부 예산으로 충당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확한 부담 비율은 분명하게 공개된 적이 없다.

푼듄대교는 일대일로 사업 방식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세네갈과 중국이 푼듄대교 발주에 동의하면서 건설비 중 상당액을 중국이 수출입은행을 통해 차관으로 제공했다. 건설 사업은 사실상 중국 공산당의 통제에 따라 재정부(財政部)가 투자를 결정하는 국영기업인 중국중철고분유한공사(中國中鐵股份有限公司·China Railway Group Limited)의 자회사인 중철칠국집단유한공사(中鐵七局集團有限公司·China Railway Seventh Group Co., Ltd.)가 담당했다.

과거에 비해 중국이 자제는 하지만 교량 건설을 위해 기술자, 설비, 자재 등을 중국에서 많이 도입했다. 세네갈 정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푼듄대교 건설로 만들어진 일자리는 2000개 안팎인데 주로 단순 노무가 주를 이룬다. 사업이 끝난 뒤 중국은 자국 수출입은행을 통해 세네갈 정부의 채권을 보유하게 됐고, 중철칠국집단유한공사는 사업 실적과 함께 수익을 올렸다. 중국 입장에서는 차관의 거의 대부분이 국영기업의 매출로 전환되는 효과를 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세네갈은 상징성이 매우 큰 기반시설인 푼듄대교와 함께 중국에 갚아야 할 빚이 생겼다.

필자는 2021년에 건설이 중단된 현장까지 직접 차를 몰고 와 건설 현장을 본 적이 있고 개통 이후에는 두 차례 이용했다. 교량까지 이어지는 지방도를 개선하는 공사가 교량 북쪽에서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추후에는 통행량이 어느 정도는 증가할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통행량이 거의 없어 교량은 한산했다. 징수되는 통행료로 징수원 급여나 충당할 수 있을까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중국, 각종 인프라 건설 지원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 지어진 전통씨름경기장. 건물 입구에 중국 원조로 지어졌음을 밝혀놓았다. 사진=신화/뉴시스

 

 

고속도로 건설에도 중국의 기여는 절대적이다. 현재 세네갈의 고속도로 총연장은 약 210km이다. 이 중 중국이 자본을 댄 고속도로는 약 160km이다. 《월간조선》 2023년 3월호에서 다룬, 세네갈이 독립 국가가 되기 전 아프리카 출신으로서 최초로 프랑스 하원의원이 된 블레즈 디아뉴의 이름을 딴 블레즈 디아뉴 국제공항부터 세네갈 제2의 도시인 티에스를 거쳐 무리드(Mouride) 무슬림의 성지인 투바(Touba)까지 이어지는 A2 고속도로 130km는 중국으로부터 7억 달러를 지원받아 중국로교공정유한책임공사(中國路橋工程有限責任公司)가 시공해 2018년 12월에 개통했다. A1 고속도로를 음부르(Mbour)부터 카올락(Kaolack)까지 약 100km 연장하는 공사도 중국수출입은행 차관으로서 2025년 8월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살 대통령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잠냐죠(Diamniadio) 신도시에 들어선 산업단지, 일자리 부족에 불만을 품는 청년층을 포용하고 이들에게 여가 공간을 제공할 목표로 추진 중인 스포츠 시설 활성화 차원의 전국 12개 경기장 신설 및 보수, 국립극장과 문화박물관 신설, 데이터 센터 개설 등은 중국의 지원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2018년 7월 22일 국빈 방문한 시진핑은 중국이 320억 프랑(한화 약 700억원)을 지원해 2만 석 규모로 완공된 세네갈 전통씨름경기장의 열쇠를 살 대통령에게 건네며 살에게 큰 선물을 안기기도 했다. 다카르 도심 교통을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목표로 건설 중인 BRT(Bus Rapid Transit)는 세계은행 등이 건설비를 대지만, 건설은 중국 업체가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자금을 대는 사업들의 거의 대부분은 상환을 전제로 한 유상(有償) 원조이다. 위에 언급한 사업들은 현재는 물론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적자가 예상된다. A2 고속도로는 통행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잠냐죠 산업단지는 2019년에 개장하고도 아직까지 제대로 입주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추후 세네갈이 적시에 중국에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지 못한다면 최근 스리랑카를 비롯해 일대일로에 참여했다가 빚잔치의 홍역을 앓으며 혼란에 빠졌던 여러 국가처럼 중국발 ‘빚의 덫’에 걸리면서 내분이 발생하는 정치적 혼란을 겪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치적 지렛대가 된 ‘땅콩 수입’

세네갈의 무역에서도 중국의 비중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중국은 프랑스 다음으로 세네갈에 중요한 제2의 무역국이다.

흥미롭게도 중국을 상대로 한 세네갈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는 땅콩이다. 세네갈은 2014년부터 땅콩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현재 세네갈이 수출하는 땅콩의 80%가 중국으로 팔려 나간다. 앞서 언급했던 주중(駐中) 세네갈 대사 인터뷰에 따르면 세네갈은 조만간 수산품과 땅콩 기름을 짜내고 남은 잔여물, 즉 땅콩묵도 중국에 수출할 예정이다. 땅콩묵의 가치보다도 운송비가 더 나올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이런 수출이 논의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의도가 명시적으로 노출된 것은 아니지만, 차관 지원을 통해서 이미 세네갈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국이 영향력을 더 키우려 한다고 답을 추정할 수 있다. 별것 아니라 볼 수 있는 땅콩 수출은 세네갈 무역수지뿐 아니라 세네갈 정치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평가되고 있다.

세네갈 특유의 이슬람 종파 중 하나인 무리드의 지도자인 칼리파 제네랄(khalifa général)은 종교 영역을 넘어 정치적으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정치인은 칼리파 제네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지지를 구한다. 식민 시절 이후로 세네갈의 땅콩 재배를 무리드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세네갈 정치인들과 무리드의 칼리파 제네랄 사이에는 정치적 지지와 경제적 이익을 교환한다는 암묵적인 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세네갈 입장에서 땅콩 판로를 안정되게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2014년 이후 세네갈 땅콩을 매년 대량으로 수입하는 중국은 알게 또는 모르게 막후에서 마키 살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보장하며 이로써 세네갈 정치에 영향을 끼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A2 고속도로는 통행량이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쳐 향후에도 계속 적자를 낼 것이 뻔하지만 경제적으로 더 중요한 다른 구간, 특히 절대적으로 물동량이 많은 음부르~카올락 구간보다 훨씬 먼저 만들어졌다. A2 고속도로의 종착지가 무리드의 성지인 투바임을 떠올리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일리 있게 설명하고 납득할 수 있다.


중국 투자회사에서 발생한 노사분규

세네갈에서는 점차 증가하는 중국의 투자도 매우 중요하다. 콩고민주공화국만큼은 아니지만 세네갈에서도 중국어가 크게 적혀 있는 건물들을 보는 게 드물지 않다. 2020년 7월에 개장한 세네갈 최초의 타일 생산 공장인 중국 Twyford(영국의 욕실 도기 회사 Twyford와 이름은 같으나 다른 회사임)의 개장식에는 살 대통령이 참석해 축사로써 외국인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화웨이는 세네갈 최초의 데이터 센터 신설을 비롯한 사업들을 위해 대규모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세네갈 제1의 대학인 셰이크 안타 디옵 대학(L’Université Cheikh Anta Diop)에는 공자학원(孔子學院)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도 이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 또한 현실이다.

2020년 7월에 개장한 Twyford 타일회사는 불과 열 달 만인 2021년 4월 노사(勞使) 갈등이 악화되며 도로를 점거하는 시위로까지 번졌다. 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동 노사 분규의 원만한 해결을 노동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중국이 세네갈에서 어업권을 싹쓸이하듯 구매해 바닥까지 긁어가는 무차별 어로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어민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불만이 높아가는 상황이다.
 

 

애물단지가 된 시노팜

2021년 2월 17일 밤, 살 대통령은 자국에 최초로 도입되는 코로나19 백신 20만 도즈를 맞으러 공항으로 나갔다. 그 자리에는 주(駐)세네갈 중국 대사도 함께 있었다. 중국 대사가 동행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20만 도즈는 중국 제약사인 시노팜 제품으로서 중국이 세네갈에 ‘제공’한 것이었다. 세네갈은 보건복지부 장관을 필두로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주요 관료들이 이 백신 접종에 참여했다.

흥미롭게도, 정부가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Le Soleil》는 세네갈 정부가 2021년 2월까지 백신을 반드시 도입하려고 중국에 22억 프랑(한화 약 48억원, 1도즈당 1만1000프랑으로서 한화 약 2만4000원)을 지불했다고 보도했다.

필자는 세네갈에 거주하는 동안 코로나19 백신 접종과 관련된 내용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2021년 7~8월, 델타 변이가 기승을 부리면서 일시적으로 주당 백신 접종이 2만 건을 넘어서는 등 백신 수요가 폭발한 적도 있었지만 세네갈 국민들 사이에 자리 잡은 백신에 대한 반감 또는 막연한 걱정을 배경으로 델타 변이가 수그러들고 서방 국가들이 무료로 제공하는 코로나19 백신의 공급량이 늘면서 결국 시노팜은 세네갈 국민들의 선호에서 밀리면서 남아돌게 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방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백신도 남아도는 상황에서 세네갈의 첫 코로나19 백신으로서 환대받으며 들어왔던 시노팜은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

2021년 11월 19일부터 20일까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세네갈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미국 국무장관의 첫 아프리카 순방으로서 블링컨은 케냐를 시작으로 나이지리아를 거쳐 세네갈로 들어왔다. 아프리카 외교에서 일반적으로 케냐는 동아프리카 국가들을, 나이지리아는 중서부 아프리카 국가들을 그리고 세네갈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을 각각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블링컨, 중국 우회 비판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2021년 11월 20일 마키 살 상고르 대통령과 만나 양국 간 협력을 강조했다. 사진=미 국무부

 

 

세네갈로 들어오기 전인 2021년 11월 19일, 블링컨은 나이지리아에 본부를 둔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ECOWAS)에 들러 ‘21세기 파트너십 건설(Building a 21st Century Partnership)’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바이든 정부의 대(對)아프리카 정책 기조를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설의 핵심은 “미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존중하고 공동 이익을 추구하며 상호 관계를 강화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이다. 블링컨은 “그간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제껏 동등한 상대라기보다는 하급 사원처럼 취급되었다”면서 모든 문제에서 아프리카의 협력과 참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주요 세력들(major powers)’ 간 경쟁이 첨예해지는 세상에서 미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누군가를 선택하게끔 만들 의도가 없으며 아프리카 국가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공통 이해관계라 할 수 있는 ① 전 지구적인 보건(global health) ② 기후 위기(the climate crisis) ③ 포용적 경제 성장(inclusive economic growth) ④ 민주주의(democracy) ⑤ 평화 및 안보(peace and security)를 두고 효과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내비쳤다.

블링컨은 포용적 성장이 “전 세계적인 기반시설의 차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는 ‘더 나은 세계 재건(Build Back Better World)’, 통상 ‘미국판 일대일로’라 불리는 구상에 기초한다고 설명하면서 미국의 방식은 지속가능하고, 투명하며,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협력 대상국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협력국 지도자들과 국민들은 미국과 하는 협력이 자국에 정말로 가치가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블링컨이 중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청자(聽者)는 이 연설이 중국을 염두에 뒀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 대한 견제구 던진 미국

다음 날인 11월 20일 세네갈을 방문해 외교장관과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블링컨은 위 연설의 기조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이어갔다. “우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우지 않겠다” “기반시설을 짓는 노동자들은 해당 국가와 해당 공동체에서 올 것이다” “우리는 부패가 이 계획의 특징이 아니라고 확언한다” 등은 사실상 중국을 염두에 둔 돌직구 발언이었다.

그러면서 블링컨은 마키 살 대통령을 예방하여 미국과 세네갈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확인하고 양국 협력, 특히 경제와 에너지 전환 분야의 협력을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 미국은 세네갈에 개발협력으로 10억 달러(약 5800억 프랑, 한화 약 1조2000억원)를 지원하는 4개 협정을 체결했다. 4개 분야는 다카르에 신호등 375개 설치 및 교통체증 감소를 위한 추적 기술, 지갱쇼(Ziguinchor)~토보르(Tobor) 간 교량 2개 건설, 다카르~생루이 간 고속도로 건설, 통신망 구축처럼 세네갈이 꼭 필요로 하는 사회기반시설 구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동시에 블링컨은 다카르 파스퇴르 연구소를 방문하며 이미 지원 결정이 내려져 있던, 파스퇴르 연구소를 아프리카의 백신 생산 거점으로 만든다는 마디바 사업(Le Projet Madiba)에 대한 지원 의사를 재확인했다. 교량이나 고속도로 같은 기반시설 건설은 이미 중국도 손을 대고 있는 분야지만 교통체증 감소 기술이나 통신망 구축, 특히 백신 생산 지원 등은 중국과 분명한 차별성을 보이는 지원 분야이다.

블링컨이 다카르를 방문한 날로부터 꼭 아흐레 뒤인 2021년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세네갈은 제8차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을 주관했다. 즉 블링컨은 그간 중국의 독무대 같던 아프리카, 그것도 중국의 존재감을 아프리카 전체에 명시적으로 드러낼 양자 협력 포럼 개최 직전에 마치 적진 한가운데라고 할 만한 곳에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내면서 중국의 귀에 거슬릴 만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낸 후, 세네갈에서만 10억 달러의 원조를 풀고 간 것이다.

미국은 이미 인도-태평양에서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이라는 구호 아래로 호주와 영국을 규합해 오커스(AUKUS)를 만들고 이미 중국에 장군을 날린 상태였다. 그런 미국이 이번에는 20년가량 휩쓸다시피 터를 다졌고 특히 일대일로를 내세우며 주도권을 확보했다고 생각하며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을 아프리카에서 준비 중이던 중국에 자국의 외교 수장을 보내 또 한 차례 장군을 외친 격이었다.


프랑스 외교장관의 중국 비판

블링컨 국무장관이 세네갈을 방문하던 2021년 11월 19일, 당시 프랑스 외교장관인 장-이브 르 드리앙(Jean-Yves Le Drian)은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와 인터뷰를 가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블링컨은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대상의 연설에서 중국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비판 주제를 상세히 언급함으로써 청자가 블링컨의 비판 대상이 중국임을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반면 르 드리앙 외교장관은 중국과 러시아를 꼭 짚고, ‘약탈적(prédateur)’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며 두 나라를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르몽드》가 뽑은 기사 제목은 “장-이브 르 드리앙: 우리의 경쟁자들은 금기도 제한도 없다”였다. 비록 짧지만 이 문장은 전 세계에 닥친 위기와 국제정세를 정확하고 날카롭게 설명했다. 르 드리앙 장관의 발언을 몇 개 챙겨보면 아래와 같다.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모습이 있는데 이는 중국인들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실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관리들은 (중국과 맺은) 시장이 기만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아프리카인들은 명시된 개발 목적을 위해 자신들의 돈으로 중국이 건설한 사회기반시설, 때로는 장관(壯觀)을 이루는 이 기반시설들로부터 즉시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사회기반시설에 돈을 대기 위해 계약을 맺어야만 했고 이로 인한 부채 때문에 아프리카인들은 결국 자기 나라들이 감독을 받는 상태로 밀어 넣었다.”

 

이 인터뷰 기사가 나오고 약 1주 뒤인 2021년 11월 25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 자오리젠(趙立堅)은 “프랑스 외교장관의 논평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아프리카 국가들은 모두 중-아 투자와 재정 협력을 높이 평가한다. 이것은 아프리카 측의 의지를 존중하고, 아프리카의 실질적 필요로부터 진행하며, 집중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의 철학을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자오리젠은 작년 7월 27일 정례기자회견 때 문재인 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비공개로 약속했다고 알려진 “일명 사드(THAAD) 3불(不) 정책은 중국과 약속이나 합의가 아니다”라는 박진 외교부 장관 발언에 논평을 요구받자 “어느 나라든, 어느 당이 집권하든, 대내적으로 어떤 정치적 수요가 있든 대외 정책은 기본적인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역사 존중이자 자기 존중이며 이웃 간 소통에서 응당 있어야 할 도리임을 강조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대한민국이 “사드 3불 정책”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써 출범한 지 갓 두 달 지난 윤석열 정부를 압박한 것이다.


오스틴, “중국은 투명하지 못하다”

블링컨의 연설이 있고 1년이 조금 더 지난 작년 12월 13일, 바이든 정부는 아프리카 49개 국가수반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사흘 일정으로 ‘미국-아프리카 지도자 정상회의(U.S.-Africa Leaders Summit)’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리카의 성공이 세계의 성공”이라며 상호 존중과 이익 및 가치 공유라는 원칙 아래 향후 3년에 걸쳐 550억 달러 이상을 아프리카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블링컨 국무장관은 “아프리카는 지정학(地政學)의 주요 동력”이라면서 “아프리카는 우리의 과거를 만들었고, 우리의 현재를 만들고 있으며, 우리의 미래를 만들 동력”이라고 말했다. 오스틴 국방장관은 “아프리카에서 중국이 확대되는 경제적 영향력을 통해 매일 영역을 확장 중이며, 중국은 투명하지 못하고 이것이 결국 아프리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문제를 야기한다”면서 중국을 대놓고 비판했다. 오스틴 장관은 “동시에 러시아가 값싼 무기들을 아프리카에 계속해서 판매하고 용병을 투입한다며 이 또한 아프리카를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앞서 보았던, 전 프랑스 외교장관이 중국과 러시아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모습이 1년 뒤 미국의 국방장관으로부터 재현된 것이다.


원조액수, 중국이 미국보다 훨씬 많아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은 작년 11월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다. 사진=신화/뉴시스

 

 

그사이 블링컨이나 르 드리앙의 주장에 힘을 싣는, 아프리카 개발협력에서 중국의 불투명성을 방증하는 일이 있었다.

시진핑은 제8회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에서 9대 사업 분야를 발표했는데 그중 하나는 아프리카 최빈국들을 대상으로 2021년 말에 만기가 도래하는 무이자 대출의 채무를 면제하는 것이었다. 2022년 8월 18일, 중국 외교부는 협력 포럼 후속 조치로써 아프리카 17개 국가 대상으로 2021년 만기 차관 23건의 상환을 면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대상국가와 국가별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다.

추정에 따르면 중국은 2000년부터 2019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약 34억 달러의 채무를 면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에 대한 정보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는 대(對)아프리카 차관을 둘러싼 프랑스나 일본과는 대조적이다. 2021년 5월 주(駐)세네갈 일본 대사는 약 1870만 엔, 즉 한화 약 1억9000만원의 채무를, 그리고 같은 해 6월 25일 주(駐)세네갈 프랑스 대사는 137억 프랑의 채무 상환 유예를 자국이 양해한다는 각서나 협약을 세네갈과 각각 체결했다. 이는 언론에 공개되었다.

지난 1년 사이에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상황들은 단순히 주요 강대국들이 아프리카만을 대상으로 한 전략이라기보다는 냉전 시기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대립과 유사해 보이는 지구적인 질서 변화가 아프리카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간 상대적으로 관심이 소원했던 아프리카에서조차 미국과 중국 간 힘 겨루기가 본격화할 정도로 세계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비록 미국이 아프리카를 중요시하겠다고 천명하며 3년간 550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원조나 지원은 중국이 그간 쌓아온 바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다.

2021년 11월에 열린 제8차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 당시 시진핑은 향후 3년(2021~2024년)간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400억 달러(한화 약 47조2000억원)를 유상원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2018년 협력 포럼 당시 발표했던 2018~2020년에 600억 달러 유상원조 규모보다는 3분의 1이 감소한 금액이다. 하지만 한 푼이 아쉬운 아프리카 국가들의 입장에서, 특히 복잡한 조건을 요구하거나 따지지 않는 중국이 주는 원조는 여전히 크고 중요하다.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지만…

반면 이런 중국의 지원이 아프리카 국가들에 아직까지는 절대적이지만 그렇다고 아프리카 입장에서는, 의도되었든 아니면 우연이든, 중국의 지원이 가져오는 ‘빚의 덫’을 경계하지 않을 수도 없다. 중국 중앙은행은 개발도상국 지원에서 IMF와 세계은행을 제치고 최대 채권은행이 된 지 오래다. ‘기여 없이 단물만 빼먹는다’며 중국에 대해 점점 커져가는 대중의 반감 또한 아프리카 정치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상수(常數)이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아프리카 국가들에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국과의 협력을 “인정하고 지지한다”고 말했다.

현실을 냉정하게 읽을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위정자(爲政者)라면 미국과 중국이 각각 공식적으로 내놓는 외교 수사(修辭) 뒤에 담긴 냉혹한 국제 정세를 파악할 것이다. 두 사람의 발언을 두고 자기들에게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국이 우선 선택되지 못하는 냉정한 현실을 실감하는 동시에 국제 정치 무대에서 개발과 번영을 추구하려면 더 신중히 처신하고 동시에 더 치열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어찌 보면 기존보다 선택의 폭이 더 좁아지는 씁쓸한 상황이 닥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美中 냉전을 보며

아프리카를 무대로 벌어지고 있는 미중 신냉전을 보면서, 꼭 70년 전, 코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던 시절에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골치 아픈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떠나려는 미국의 멱살을 잡고, 발목을 걸어 넘어뜨려 협박하다시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만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1953년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상대로 상호 방위가 가당키나 했겠나! 당대 어느 누구도 넘을 수 없던 외교 천재가 세상 모든 이로부터 “고집불통 노인네” 소리를 들어가며 남긴 유산은 그 이후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해양 세력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을 분명히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 후 연설 중에 밝혔듯이 “미래 세대들에게도 무한한 기회를 안겨줄” 가치와 번영의 동맹으로서 그 존재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국제 정세가 냉전 붕괴 이전의 모습으로 회귀(回歸)하는 경향을 보이는 현실에서 한국인들은 ‘음수사원(飮水思源)’ 네 글자를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07월 호

〈마지막 회〉 대한민국의 대(對)아프리카 외교에 관해 생각해볼 것들

외교관은 물론 KOICA에도 아프리카는 냉탕

⊙ 아프리카는 일본이 제창하고 미국이 수용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의 주요 요소
⊙ 중국, 아프리카 국가들의 채무 면제… 일본, ‘도쿄 아프리카 개발 국제회의(TICAD)’ 개최
⊙ 2021년 5년 만에 외교부 차관이 아프리카 순방했지만, 알맹이 없어

▲박진 외교부 장관은 6월 8일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초청으로 방한 중인 레소토의 레조니 음포조아니 외교국제관계부 장관 및 네오 맛짜토 모티아네 공공사업교통부 장관과 만났다. 사진=외교부

 

 

지난 호에서는 세네갈과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중국 및 러시아 사이의 대립을 살펴보았다. 국제사회에서 진영이 형성되는 현실을 보다 잘 보여주는 구체적이며 흥미로운 사례가 두 개 있다. 이 두 사례는 블링컨 장관이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 개최 직전에 아프리카와 세네갈을 방문하여 정책을 선언하고 대규모 원조 계획을 공표한 것과 유사한 성격이다. 이 점에서도 한국은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의 사례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일본과 중국의 경쟁

중국처럼 일본도 아프리카를 상대로 개발협력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이 회의는 ‘도쿄 아프리카 개발 국제회의(Tokyo International Conference on African Development)’로서 TICAD라는 약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駐)세네갈 일본 대사관은 제8회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 개회 당일인 2021년 11월 29일, 세네갈 최대 일간지인 《Le Soleil》 마지막 면에 2022년 TICAD 8(제8차 도쿄 아프리카 개발 국제회의)이 개최된다는 사실, TICAD 원칙과 목표, TICAD 8이 세네갈에 거는 기대 등을 상세하게 기재한 전면 광고를 게재했다.

 

 일본 대사관이 게재한 이 광고는 전적으로 자국의 정책을 홍보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중국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 개회일에 개최국의 최대 일간지에 일본이 낸 전면 광고가 실린 것을 우연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일본은 자국의 대(對)아프리카 개발협력 원칙과 성과만 상세히 언급하며 TICAD를 홍보했지만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중국의 그것과 자연스럽게 대조되면서 중국을 간접적으로 비판 및 견제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제시한 중국의 아프리카 채무 탕감 결정 시점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면 흥미로운 추정이 가능하다. 일본이 튀니지와 공동으로 TICAD 8을 개최한 시점은 2022년 8월 28일이며 이 회의에는 아프리카 49개 국가가 대표를 파견했다. 중국의 채무 면제 결정은 이보다 열흘 전인 8월 18일이다. 즉 중국은 TICAD 8 개최 열흘 전에 17개 아프리카 국가를 대상으로 채무 면제라는 실질적인 이익을 제공한 것이다.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의 후속 조치를 점검하고 논의할 목적의 협조회의를 연 2회 개최하는 것은 원칙이지만 회의 시점은 변경이 가능하다. 즉 중국도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국가 간 경쟁을 인식하고 있으며, 특히 실질적인 이익을 TICAD 8 개최 직전에 아프리카 국가들에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대아프리카 외교 노력에 대응하려 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중국은 아프리카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지 못하게끔 TICAD의 김을 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베,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제창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6년 8월 27일 케냐에서 열린 TICAD 회의에서 아프리카 발전을 위한 일본의 역할을 강조했다. 사진=AP/뉴시스 

 

 

2021년과 2022년에 걸친 위의 두 사례는 일본과 중국 양자 간 경쟁심에서 나온 단순한 에피소드일까? 인도·태평양 전략을 기준으로 상호 대치가 분명해진 자유주의 진영과 중국 사이의 대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석하면 지나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보는 것은 한국에도 도움이 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6년 8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개최한 TICAD 6 기조연설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최초로 천명했다. 아프리카를 주제로 만난 회의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니? 뜬금없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이 일화는 국가의 외교는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베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아시아와 잠재력이 풍부한 아프리카를 중요 지역으로 규정하면서 인도양과 태평양 이 두 지역 전체에 걸쳐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자유무역과 기반시설 투자를 촉진하여 경제권을 확대한다는 것이지만 안전보장을 위한 협력도 목표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 특히 ‘법의 지배를 기초로 하는 자유로운 해양’을 주장한 일본은 남중국해에 군사 거점을 구축하며 사실상 내해화(內海化)하는 중국을 견제한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아베의 전략은 2017년 외무성 《외교청서(外交靑書)》 특집인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FOIP: Free and Open Indo·Pacific Strategy)”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전략은 자유민주주의, 법의 지배, 시장경제처럼 여느 자유주의 시장경제 국가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원칙을 기본 가치로 내세우며 지지한다. 참고로 아프리카를 상대로 일본은 정치와 행정은 물론 경제 개발을 총체적으로 지원하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자결권(自決權)을 존중,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 평화와 안정을 위한 새로운 접근’

세네갈에서 열리는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 개회일에 일본의 TICAD 홍보 광고가 나가고 며칠 뒤인 2021년 12월 6일, 세네갈이 개최하는 제6회 다카르 국제 포럼(Forum International de Dakar sur la Paix et Scurit en Afrique)에 일본 외무부대신(外務副大臣) 스즈키 다카코는 화상으로 참여하여 개회연설을 했다.

스즈키 부대신은 2019년 TICAD 7에서 제시된 ‘아프리카 평화와 안정을 위한 새로운 접근’을 상기시키면서 아프리카의 평화와 안보에서 일본의 기여와 노력을 강조했다. 스즈키 부대신은 ‘아프리카에서 법치와 민주주의 강화’ 외에도 ‘민간 영역의 역동성’ 그리고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제시하며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의 무역과 연결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고로 2022년 제7회 다카르 국제 포럼에 참석해 개회연설을 한 야마다 겐지 외무부대신도 일본은 기반시설 개발 등을 통한 아프리카 국가 간 연결과 지역 통합을 지원할 것이라면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부로서 법치에 기반을 둔 해양 질서를 강화하여 평화와 안보에 기여할 것이라는 동일한 입장을 재차 천명했다.

 

英佛도 미국 입장 지지

아베 총리가 인도·태평양 전략을 언급하고 1년쯤 뒤인 2017년 12월, 미국은 《2018 국가안보전략(2018 National Security Strategy)》을 발간하며 인도·태평양 구상을 공식화했다. 2018 국가안보전략은 ‘지역 차원의 전략(The Strategy in a Regional Context)’으로서 인도·태평양 지역을 미국 국익에 가장 중요한 최우선 지역으로 강조하고,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이 가장 큰 도전자라고 규정했다. 2019년 6월, 미국 국방부는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Indo·Pacific Strategy Report: Preparedness, Partnerships, and Promoting a Networked Region)》를 발간하면서 그리고 미국 국무부는 같은 해 11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A Free and Open Indo·Pacific: Advancing a Shared Vision)》을 발간하며 이러한 구상을 보다 상세한 정책으로 공식화했다.

이 두 문서 이전인 2018년 5월 30일, 미국은 태평양 사령부(The Pacific Command)의 명칭을 인도·태평양 사령부(The Indo·Pacific Command)로 변경했다. 이 개명은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을 보다 강력하게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하는 분기점으로 볼 수 있다.

이어 2020년에는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 호주, 그리고 인도가 참여하는 4개국 안보 협력체인 쿼드(Quad)가 출범한다. 이 4개 국가 정상들은 2021년 9월 24일 백악관에 모여 첫 쿼드 정상회의를 개최하며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 FOIP)’에 대한 의지를 천명했고 중국을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식견을 가진 독자라면 충분히 중국이라고 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이라는 개념과 이를 중심으로 사실상 대(對)중국 포위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프랑스와 영국이 적극 지지하고 협력했다는 점이다.

 

국제질서는 권력의 眞空 용인 않는다

2021년 11월 블링컨 국무장관의 아프리카 순방과 곧이어 개최된 제8회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 그리고 사소해 보이지만 동 포럼 개회일에 주(駐)세네갈 일본 대사관이 게재한 TICAD 8 홍보 광고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속한 2021년 11월은 위에 나온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이 구체화되어 시행되는 선상에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국가는 대외적으로 독자적인 외교를 수행할 수 있지만 ‘독자적인 판단과 결정에 따른 외교라는 것이 국제사회의 질서와 구조를 완전히 배제한 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 영원한 질문이다.

아프리카가 거리로든 정서적으로든 멀게 존재하는 곳이다 보니 한국인들은 한국이 주변 4강을 대상으로 한 외교보다는 비교적 독자적인 입장에서 아프리카에 대한 외교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국제질서는 권력의 진공(眞空)이나 권력의 빈틈을 용인하지 않는다.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현재 대한민국은 그간 어떤 입장이었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입장이어야 할지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만약 아프리카가 지리적으로 멀고 우리와 직접 경쟁하는 영역이 없기 때문에 한국이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이것은 철없는 생각이다.

 

라한 ‘한-아프리카 포럼’
한국에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에 한국은 어떤 존재인가?

독립 이후 해외 투자 유치와 국제 무역을 축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과 이후 발전 과정상 태생적으로 그리고 기정사실이 된 현 국제 규범과 질서상 앞으로도 전 세계와 교역하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나라일 수밖에 없다. 그간 한국에 생소했던 아프리카는 이런 차원에서 협력과 교류를 확대해야 할 대상이다. 내용이야 어떻든, 지난 20여 년 사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아프리카를 상대로 협력과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해 왔다. 이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예는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아프리카를 순방하며 발표한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근거로 한국과 아프리카 간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시작되어 3~5년 주기로 한국과 아프리카연합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한-아프리카 포럼이다. 본 포럼은 2006년 11월 8일에 처음 개최되었으며 이를 소개한 외교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각 포럼의 참가국은 아래 표와 같다.

이 포럼이 장관급 회의이고 아프리카연합과 함께 주최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래 표가 제시하는 참가국 숫자는 동 포럼이 시간이 흐를수록 출범 명분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실망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게 만든다.

대한민국은 2021년 12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 동안 서울에서 제5차 한국-아프리카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예정 시기에 오미크론 변이가 창궐하면서 정부는 포럼 개최를 연기했다. 제5차 한국-아프리카 포럼은 결국 문재인 정부가 끝나기 두 달 전인 2022년 3월 3일 개최되었다. 당시 외교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아프리카연합의 원칙에 따라 AU 의장단 4개 국가인 세네갈, 민주콩고, 앙골라, 리비아와 5개 지역공동체 의장국인 가나, 말라위, 케냐, 이집트, 차드, 그리고 아프리카연합 개발청 의장국인 르완다 등 총 10개 아프리카 국가만이 참석했다. 전 세계적인 역병(疫病)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초라한 규모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韓-阿 포럼, 아프리카연합과 공동 개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8년 9월 3일 베이징에서 남아공, 이집트, 케냐 등 아프리카 국가정상들이 참석하는 중국-아프리카협력회의(FOCAC)를 주재했다. 사진=AP/뉴시스

 

 

이런 인상은 앞서 언급한 2021년 11월의 제8회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 및 2022년 8월 일본과 튀니지가 공동 개최한 TICAD 8과 비교할 때에 더 강해진다. 중국-아프리카 포럼은 한-아프리카 포럼과 마찬가지로 장관급 회의임에도 참가국의 수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이다. TICAD 8 또한 48개 아프리카 국가와 20개 아프리카 국가 정상은 물론 유수의 국제기구 및 NGO 그리고 협력국들이 참가하면서 한국의 포럼을 압도했다.

회의 참가 규모를 차치하더라도 한-아프리카 포럼은 형식과 내용에서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본 외무성이 운영하는 TICAD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1993년부터 시작된 TICAD는 일본이 유엔, 유엔개발계획(UNDP), 세계은행 그리고 아프리카연합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다자(多者) 회의이다. 따라서 회의에는 각국 대표단과 국제기구는 물론 관련 협력국, 기업, NGO는 물론 희망하는 이들이 참가할 수 있다. 일본을 비롯한 참가국들이 정부 간 외교를 TICAD 기간 중 양자 혹은 다자 정상회담과 장관회담 등으로 진행하며 사전에 준비한 투자협정 또는 원조 관련 협정이나 각서를 체결하면서 대아프리카 외교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반면 한국-아프리카 포럼은 중국의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처럼 장관급 회의이다. 정부가 전적으로 주도하는 회의이지만, 아프리카연합과 공동 개최한다는 특성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가별 참석을 제한하는 요인일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은 포럼을 개최하고도 이를 아프리카 개별 국가들 대상의 정부 간 외교의 기회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회의 주도국인 한국이 지원 또는 협력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면 앞의 표 한-아프리카 포럼 개최 및 참가 현황이 보여주듯 갈수록 참가국 수가 줄고 동시에 장관급 이상 참가자의 수도 감소하는, 구색 맞추기 회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나 일본이 주관하는 포럼이나 회의에 참가하는 국가 수와 비교해 보면 이는 더 분명해진다


구체적 내용 없이 추상적 용어뿐

지난 16년 동안 원대한 목표를 내세우며 한-아프리카 포럼을 다섯 번이나 개최했지만 이를 관장하는 외교부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한-아프리카 포럼 소개는 형식적이다. 2021년 초에 개최된 포럼에 대한 안내는 A4 1장에 일시와 장소, 주제, 참석국, 주요 일정, 회의에서 채택한 ‘서울선언 2022’와 ‘협력프레임워크 2022~2026’이라는 제목이 적힌 문서 한 장이 전부이다. 제4회 포럼 이후 이행 보고서, 서울선언문 그리고 협력프레임워크라는 문서가 더 있지만 보고서와 프레임워크는 문장이 아닌 단어 위주의 선언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포럼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논의했는지, 참가자들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아프리카 개별 국가들을 대상으로는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그나마 제5회 포럼에 대한 정보는 제1~4회 포럼을 소개하는 자료들과 비교하면 풍부한 편이다.

한국과 일본 간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들 중 하나는 구체적인 기여에 관한 청사진을 소개한 문서이다. TICAD 홈페이지에는 기시다 일본 총리의 연설문과 튀니지 선언은 물론 기시다 총리와 아프리카 각 국가 정상 간 정상회담, 외교장관 회담, 주제별 토론 내용 등 회의 및 회담 내용이 사진과 함께 게재되어 있어 한국과 비교해 아주 풍부하다. 이는 TICAD 1부터 적용했기 때문에 개발협력이나 아프리카 외교를 연구하는 이들이 자료로서 이용하기에도 용이하다. 그리고 10개가 넘는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을 배려하여 TICAD 홈페이지는 물론 TICAD에 대한 자료와 정보 중 많은 수를 프랑스어로 제공한다.

한국의 협력프레임워크 2022~ 2026은 향후 5년간 협력 우선순위를 제시하는 문서라는 설명과 함께 협력 분야를 제시하는데 구체적인 수치는 전혀 없이 대부분 “확대” “강화” “제공” “증진” “지원” 같은 단어들로 끝난다. 반면 일본의 TICAD 8: Japan’s Contributions for Africa는 “상호 성장의 동반자”라는 문구와 함께 일본의 민관이 함께 향후 3년에 걸쳐 일본-아프리카 관계를 신속하게 발전시키기 위하여 300억 달러를 지원할 것이라고 공식화하면서 분야별로 비용과 인력을 수치로 제시하는 구체성을 띠고 있다. 참고로 ‘미-아프리카 지도자 정상회담(U.S.-Africa Leaders Summit)’을 개최하는 미국 국무부가 개설한 홈페이지는 한국과는 비교 불가할 정도로 회의 일정, 주제, 각종 연설과 발언, 결론을 모두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5년 만의 외교부 차관 방문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고위 관료가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일 자체가 드물다는 점에서 한국은 아프리카 국가들과 양자외교에서도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내방하더라도 현지 사정을 바탕으로 주제나 논점을 분명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후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2021년과 2022년 2년 사이에 한국 고위 인사의 세네갈 내방은 3건이 있었다. 2021년 8월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 2022년 9월 장성민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 그리고 2022년 11월 국회의원 4명(박덕흠, 이양수, 박용진, 인재근)의 방문이다.

2021년 8월, 당시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은 모로코, 세네갈, 나이지리아 등 3개국을 순방했다. 외교차관의 아프리카 내방은 2016년 임성남 전 제1차관 방문 이후 5년 만의 일이었다. 외교부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최종건 제1차관의 순방은 “중견 선진국으로서 아프리카로의 외교 다변화 구현 및 아프리카 국가들의 협력 확대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며 “보건·교육·기반시설·제조업 등 우리 강점 분야에서 방문국들과의 코로나19 이후의 상생 협력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최 차관 내방 시 일정을 바탕으로 2021년 8월 18일 외교부가 작성해 배포한 보도자료와 세네갈 현지 언론 보도를 비교해 살펴보면 외교부가 제시한 명분과 현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최 차관은 순방 전 언론에 공지한 바대로 2022년 아프리카연합 의장국인 세네갈이 제5회 한-아프리카 포럼에 참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아프리카 포럼이 예정된 12월 초는 살 대통령이 취임 이후 출범시킨 다카르 평화-안보 포럼이 개최되는 기간으로서 세네갈에서는 대통령과 외교장관은 물론 국방장관까지 사전에 일정이 정해져 있던 상태였다. 한데 우연히도 오미크론 변이 확산에 따라 포럼이 2022년 3월로 연기되면서 세네갈은 한-아프리카 포럼에 외교장관을 파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정대로 포럼이 진행되었다면 세네갈은 아프리카연합 의장국임에도 외교장관이 불참했을 것이 분명했다.


알맹이 없는 아프리카 순방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5월 아프리카를 순방했다. 사진은 박 대통령이 우간다 엔테베 국제공항에 도착, 쿠테사 외교장관의 영접을 받는 모습. 사진=뉴시스 

 

 

또한 최 차관이 살 대통령을 예방했지만 세네갈 최대 일간지인 《Le Soleil》는 최종건이라는 이름의 알파벳 표기를 오기한 채 뚜렷한 내용은 없이 방문 사실만 건조하게 보도했다. 세네갈 대통령실 트위터에 따르면 이날 의제는 “코로나19 관리에서 한국의 경험과 양국 관계 강화를 위한 노력 약속”이었다.

다른 주요 국가들의 유사 사례를 감안하면 수교 60주년을 맞아 공적개발원조 중점협력국에 내방한 고위 외교 관료, 그것도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방문을 한 최 차관은 세네갈 일간지들과 인터뷰를 갖고 내방 의의 및 향후 양국 관계 강화에 관한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는 기회를 가질 만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외교부가 내세웠던 “보건·교육·기반시설·제조업 등 우리 강점 분야에서 방문국들과의 코로나19 이후의 상생 협력방안”을 주제로 세네갈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의하고 결론을 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세네갈 언론의 보도나 대통령실 트위터를 읽어봐도, 몇 년 만에 한 번 대한민국 외교차관이 내방했다고 해서 세네갈 국민이 대한민국의 존재와 세네갈에 대한 우의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지도 않았다.

2022년 9월, 장성민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은 2030년 부산 엑스포 유치 목적으로 서아프리카 국가들을 순방하는 일정 중 세네갈을 방문했다. 개최지 선정 투표를 앞두고서 지지를 호소하는 행동은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네갈을 상대로 한 고위급 관료의 방문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고, 수교 60주년을 맞아 방문했다는 외교부 차관도 별다른 협력방안을 가져오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급작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이 방문을 세네갈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리는 만무하다. 엑스포를 두고 유치 경쟁을 벌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세네갈을 상대로 다년에 걸쳐 대규모 원조를 시행하고 세네갈이 주최하는 2022년 다카르 포럼에 자국 외교장관을 참석시켜 세네갈을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상대로 양자외교와 다자외교를 동시에 펼치는 노력을 보이는 점과 크게 비견된다.


정권 말기에 열리는 한-아프리카 포럼

제5회 한-아프리카 포럼은 제6회 포럼의 개최연도를 2026년으로 설정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불분명하지만 제2회 포럼(2009년)을 제외하면 한-아프리카 포럼은 정권 말기에 개최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재임 중에 두 번의 포럼을 실시하면서 대아프리카 정책을 마련하고 평가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중임이 불가하다 보니 임기 중반을 넘어서면 일반적으로 국정 운영 동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아프리카를 주제로 협력과 교류를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3~4년 주기의 양자외교를 정례화했지만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모두 거리가 먼 아프리카를 상대로 임기 후반에 뚜렷한 정책이 나오기도 어렵고 정책이 나온다 한들 의욕적으로 추진하기란 더 쉽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더욱이 정권이 바뀐 경우라면 전 정부 말기에 실시한 포럼을 바탕으로 한 대아프리카 정책의 실행 여부와 지속 가능성 등에 있어 의문 부호를 떼어 내기란 쉽지 않다. 또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관료의 방문이나 협의가 흔치 않다 보니 아프리카에 대해 대한민국이 갖는 그리고 아프리카가 한국에 대해 갖는 정서적 거리 또한 좁히기 쉽지 않다.


日, 다카르 포럼 등 지원

2022년 10월 24일, 세네갈은 제8회 다카르 아프리카 평화 안보 포럼(이하 다카르 포럼)을 개최했다. 이 포럼은 살 대통령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해 2014년부터 시작되었다. 다카르 포럼은 세네갈이 창안하고 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태동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관여가 절대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은 2014년 제1회 포럼부터 2022년 제8회 포럼까지 매회 개최비용을 지원해 왔다. 2021년에 9억 프랑(한화 약 18억원), 2022년에 5억5000만 프랑을 지원했다. 일본은 단순히 개최비용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카르 포럼에 적극 참석하며 주최국인 세네갈의 위상을 살리고 자국의 대아프리카 외교 기회로 삼았다. 앞서 적었듯이 2021년에는 스즈키 다카코 외무부대신이, 2022년에는 야마다 겐지 외무부대신이 각각 참여해 개회연설을 했다.

또한 일본은 세네갈이 3월 22일 개최한 제9회 세계 물 포럼에 개최비용 5억6000만 프랑을 지원함과 동시에 나루히토 천황이 화상으로 개회식에 등장하여 아프리카에서의 수력 발전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며 세네갈과 아프리카의 입장을 배려했다.

 

2022년 10월 야마다 외무부대신의 세네갈 방문은 잘 계획된 다자 및 양자 외교의 전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야마다는 다카르 포럼 참석과 개회연설 외에도 일본이 약 230억 프랑을 들여 공사한 다카르항 제3부두 개선사업 완공식에 참석하며 세네갈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확인했다.

더 중요한 것은 야마다 외무부대신이 살 대통령을 예방하고 나눈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야마다는 TICAD 8에 아프리카연합 의장 자격으로서 참석해준 데 대하여 살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살 대통령 또한 다카르 포럼을 개최할 수 있도록 일본이 오랫동안 지원한 것과 자국에 대한 일본의 개발협력 지원에 감사 인사를 했다.

2022년 12월 17일부터 20일에는 살 대통령이 일본을 실무 방문했다. 주(駐)세네갈 일본 대사관은 방일 전 홈페이지를 통해 살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와 정상회담에 이어 오찬을 갖고 세네갈과 일본은 TICAD 8의 결과를 바탕으로 양국 관계 강화, 아프리카가 주장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개혁을 포함한 유엔 역할 강화,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공지했다. 일본 대사관은 살 대통령의 이번 일본 방문은 다섯 번째로 마지막은 2019년 일본에서 개최된 TICAD 7 참석임을 덧붙였다. 참고로 살 대통령은 10년 넘게 재임하는 동안 한국은 딱 한 번 방문했다.


아프리카는 ‘냉탕’

▲코이카는 2021년 4월 탄자니아의 한 중학교에 태양광 라디오 충전시설과 태양광 라디오를 전달했다. 사진=뉴시스

 

 

이런 질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데에는 외교 인력 운용 원칙상 구조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5년뿐인 대통령 임기 중에 교체되는 장관이 다수라는 점은 차치하고도 해외 근무가 필연인 외교부에서 ‘냉탕’은 소위 저개발국을, ‘온탕’은 선진국을 뜻한다. 3년 임기를 기본으로 하는 대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직원들에게 냉탕 임기는 2년이고, 온탕 임기는 3년이다. 한국 외교관에게 냉탕이란 공평을 전제로 한 해외 임지 부임 경력 관리상 반드시 한 번은 거쳐야 할 곳이지만 냉탕을 중심으로 경력을 쌓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이런 경향은 정부가 편성한 무상 원조 예산을 전문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한국국제협력단, 즉 코이카(KOICA)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설립 목적상 코이카 사무소가 주재하는 40여 개 국가들이 대부분 냉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시아 국가들, 특히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소위 온탕으로서 선호되는 반면 아프리카 국가들, 특히 서아프리카 국가들은 냉탕 중의 냉탕으로 선호가 매우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소장은 임기가 3년이 원칙이지만 부소장은 임기가 2년이다. 여기에 실제 분야별 업무를 수행하는 ‘코디네이터’는 최초 1년 계약에 11개월 계약 연장 1회 만을 전제로 최대 23개월까지만 근무할 수 있는 임시직이다.

한국과 대조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은 철저하게 언어와 지역을 바탕으로 한 인원 선발과 경력 관리가 이루어진다. 서아프리카에 부임하는 일본과 중국 직원은 영어는 못하더라도 프랑스어는 유창하게 구사한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10년쯤 경력을 쌓은 직원이라면 이미 서아프리카 근무 경험이 두 번 이상이게 마련이다.

이러한 인적 자산의 축적 덕에 비록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정책은 큰 틀이 유지될 수 있고 이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쌓고 유지하는 단단한 기반이 된다. 모든 분야에서 빠르게 성장해 국제사회에서 과거와 달라진 위상을 실감하는 한국이지만 일본이 보여주는 이런 모습은 한국으로서는 단시간에 축적하거나 따라잡기가 불가능한 무형(無形)의 자산이다.


대한민국 외교의 본질에서 출발해야

앞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를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위상과 현실적인 필요성에 비추어 볼 때 아프리카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과 관심은 상대적으로 불분명하거나 부족한 게 현실이다. 또한 앞서 살펴보았듯 모든 것이 복잡하게 연결된 현 국제관계에서 아프리카를 단독으로 떼어서 생각하고 대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아프리카를 상대로 한 대한민국의 대외 정책 또한 외교의 목적,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 그리고 생존과 번영 차원에서 무역국가라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답일 수밖에 없으며 본질을 추구하는 이런 자세야말로 현시점에 필요한 출발점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