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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8/ 〈71〉2008년, 베이징 올림픽보다 중요했던 두 사건 - 〈80〉위기의 중국 경제, 시진핑의 돌발 행정

상림은내고향 2023. 7. 8. 13:39

송재윤의 슬픈 중국8/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조선일보 2023

대륙의 자유인들

04.20

<71회> 2008년, 베이징 올림픽보다 중요했던 두 사건

▲2008년 3월 10일,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티베트족 활동가들이 티베트족 나름의 올림픽 성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그해 8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의 티베트족 탄압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다. /Manan Vatsysyana/AFP

 

역사 기술에선 특정 연도가 때론 역사의 분기점으로 기록되곤 한다. 1976년은 27년의 마오쩌둥 시대가 끝나고 개혁개방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는 중국 현대사의 변곡점이었다. 톈안먼 민주화 운동이 대학살로 종결된 1989년도 역사의 기로였음을 부인할 자 많지 않다. 흔히 간과하지만, 2008년 역시 중국 헌정사의 전환점으로 기억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그 해의 의미는 그 자체가 아니라 미래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 서술은 사건의 기계적 나열이 아니라 전후 사건의 유의미한 연관성을 밝히는 인과론적 설명이기 때문이다.

 

2008년의 주요 사건 일지

14억 인구의 방대한 대륙인데 어찌 어느 해인들 무사, 무난, 무탈하랴만, 2008년은 특히 더 많은 사건, 사고가 터졌던 격동의 한 해였다. 많은 이는 2008년 중국이라 하면 베이징 올림픽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을 테지만, 그해 중국에선 베이징 올림픽보다 더 의미 깊은 역사의 중대사가 발생했었다. 그해 중대사만 잠시 짚어보자.

2008년 1~2월 중국에서는 133명이 눈보라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다. 3월 10일 티베트 자치구 라싸에서 시작된 티베트족의 시위는 곧 중국 내 범 티베트 지역으로 퍼져서 4월까지 2300여 명이 구속되었다. 5월 쓰촨성 원촨(汶川)에선 대략 6만 9천 명이 사망하고, 37만 이상이 부상당하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7월 17일엔 한 회사의 분유가 아기 몸에서 신장결석을 일으켰다는 보도가 터지면서 30만명의 영유아가 조사받아서 그중 5만4000명이 집단 입원하는 사태도 터졌다.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 개막식. 사진/Ezra Shaw

 

7월 21일엔 중국 남부에서 통근 버스를 노리는 테러가 발생했다. 8월 4일엔 신장 서부 카슈가르에서 위구르족 두 명이 트럭을 몰고 경찰을 습격하여 16명이 사망했다. 나흘 뒤 개최된 베이징 하계 올림픽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잘 치러졌지만, 불의의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10월 20일 상하이 외국어대학에선 일본인 유학생들과 중국인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격돌했다. 그 밖에도 광둥성 선전(深圳)과 동관(東莞), 구이저우성의 웡안(瓮安), 간쑤성의 롱난(龍南)에서도 대규모 소요가 계속 발생했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10일 중국 민주화 세력은 “08 헌장”을 반포했다. 형식 및 서술 양식 면에서 “08헌장”은 1977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반(反)소련 운동가들이 발표한 “77 헌장”을 원형으로 삼았지만, “08 헌장”의 집필자들은 2008년이 청(淸) 제국 말기의 <<헌법대강(憲法大綱)>> 반포 100주년이며, 유엔의 보편적 인권 선언 60주년이자 민주장 운동 30주년임을 강조했다. 지난 100년 중국의 헌정사는 물론, 보편적 인권의 역사에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와 정치적 억압은 일탈이자 퇴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008년 체포되기 전 류샤오보(劉曉波)와 그의 부인인 시인 류샤(劉霞, 1961- )의 모습. 류샤오보는 “08 헌장”을 제정해서 발표하기 이틀 전인 2008년 12월 8일 구속되었다. 사진/Reuters 2009

 

물론 중국공산당은 “08 헌장”의 의의를 축소하고, 부정하고, 무시한다. 암묵적으로 “08 헌장”은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가 100년 중국 헌정사의 반민주적, 반자유적, 반인권적 일탈이라 비판하는 까닭이다. 반면 중국의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08 헌장”은 중국 헌정사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인식된다. “08 헌장”은 인류사 보편가치에 따라 입헌 민주주의의 원칙을 새로운 중국의 헌법적 기초라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요 사건을 열거하고 보면, 베이징 올림픽은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려난다. 대신 티베트족 시위와 “08 헌장”의 반포가 2008년의 최대 중대사로 부상한다.

 

2008년, 티베트족의 저항

2008년 3월 10일은 1959년 티베트 기의(起義) 49주년 기념일이었다. 해마다 3월 10일이면,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는 빼놓지 않고 티베트 독립 투쟁의 현황에 관한 연설을 한다. 이날 달라이 라마는 갈수록 심해지는 티베트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야만적 억압을 규탄하면서 전 세계 티베트족의 자율과 단결을 촉구했다.

그날 저녁 티베트 승려들이 무리 지어 라싸 중앙으로 몰려갔다. 중도에서 경찰이 막아서자 바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시위를 시작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티베트 독립을 외치고 금지된 티베트기를 꺼내서 흔들기도 했다. 그 현장에서 15명이 체포되었다. 라싸에서 시위가 진행될 때, 놀랍게도 동시다발적으로 티베트고원 동부의 암도(칭하이성과 간쑤성)과 캄(쓰촨성)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2008년 3월 10일, 인도 뉴델리에서 티베트 활동가들이 가짜 피를 묻히고 오륜기를 목에 끼고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의 티베트족 탄압을 규탄하는 의도가 보인다. 사진/Pedro Ugarte/AFP

 

티베트 고원 지대에서 다수 티베트족은 1959년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를 일으켰다. 티베트 망명 정부에 따르면, 그해 3월 220명의 티베트인이 학살당하고, 5600명이 구속되거나 수감당했으며, 1294명이 부상을 입었고, 290명이 형벌을 선고받았으며, 1000명이 실종되었다.[Tsering Topgyal, “Insecurity Dilemma and the Tibetan Uprising in 2008,” Journal of Contemporary China (2011), 20(69): 183.]

 

당시 국제사회는 베이징 하계 올림픽 개최를 다섯 달 앞두고 발생한 격렬한 티베트족의 시위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티베트족 시위에 대한 중국 정부의 폭력 진압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중국 밖의 세계 여러 나라 대도시에서도 중국 내 티베트족의 시위를 지지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올림픽을 앞둔 민감한 상황에서 애국심 강한 해외 중국인들은 서방 미디어의 반중국적 편향을 규탄하는 맞불 집회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해 티베트족의 시위는 과연 왜 일어났을까? 중공 중앙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달라이 라마 집단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티베트족을 세뇌하고, 선동하고, 교사한 결과라고 선전했다. 반면 티베트족은 수십 년 지속된 중국의 억압적 정책을 근본적 원인으로 꼽았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티베트 지역에 대규모 한족 인구를 이주시키는 공격적인 사민(徙民) 정책을 펼쳤고, 강력한 동화 정책으로 티베트족의 문화적, 종족적, 종교적 정체성에 큰 생채기를 냈다.

 

▲2008년 3월 10일 인디아 다람살라에서 1959년 티베트 기의 49주년을 맞아 중국 정부의 티베트 탄압을 규탄하며 시위하는 티베트족 승려들. 사진/Manan Vatsyayana/AFP

 

티베트족의 저항과 “08 헌장”의 관계

얼핏 2008년 티베트족의 저항과 같은 해 12월 “08 헌장”의 반포는 별개의 독립적 사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전자는 중공 중앙의 동화 정책과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한 티베트족의 저항이었던 반면, 후자는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 인권탄압, 정치적 억압 및 사회적 통제를 종식하려는 자유파 입헌 민주주의자들의 반발이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더 깊이 보면, 두 사건의 긴밀한 연관성이 확연히 보인다.

첫째, “08헌장”은 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하며, 헌법의 전면 개정, 권력분립, 입법의 민주화, 사법 독립, 인권 보장, 자유 선거, 호구제 폐지와 거주이전의 자유, 결사·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자유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의 보호, 환경 보호, 연방 공화국의 건설, 과거사에 관한 진실·화해의 해법 등을 요구한다. 그중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연방 공화국 건설 및 과거사에 대한 진실·화해의 해법은 중국공산당의 통치에 저항하는 티베트족의 일반적 요구와 부합한다.

 

▲2008년 3월 14일, 티베트 자치구 라싸. 티베트족 시위자들이 땅에 누운 소방수를 공격하고 있다. 사진/EPA

 

둘째, 티베트족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던 2008년 3월 22일 중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던 민주 운동가 및 인권 활동가 29명은 중앙정부를 향해 티베트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12개 조항”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들 29명 중에서 24인은 12월 10일 “08헌장”이 발표될 때 연명(聯名)으로 지지를 선언한 303인에 속해 있었다. 나머지 5인 중 4명은 차후 08 헌장에 서명했다. 29명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 “08 헌장”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그의 이름은 왕리슝(王力雄·1953)이었다.

 

왕리슝은 류샤오보(劉曉波·1955~2017)와 함께 “12개 조항”을 직접 작성하고 서명을 주도했다. 그는 티베트와 신장 문제를 심층 취재해서 중국 정부를 압박해 온 저명한 작가이자 민주 활동가이다. 또한 그의 부인은 가장 치열하게 티베트족의 울분과 염원을 대변해 온 티베트족 작가 체링 우어세르(Tsering Woeser·1965~)이다.

 

▲2014년 8월, 티베트 문제를 작품화한 대표적인 티베트족 작가 체링 우어세르(Tsering Woeser·왼쪽)와 부군 왕리슝(王力雄)의 모습. 사진/Chinafile.com

 

체링 우어세르는 류샤오보와 함께 “08 헌장”의 작성에 참여하고 서명한 최초의 9인 중 한 명이다. 아내가 “08 헌장”에 서명한 최초 9인 중 한 명이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선지 왕리슝의 이름은 서명자의 명단에 올라 있지 않지만, 그가 직접 티베트 문제 관련해서 “08 헌장”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12개 조항”을 작성했다는 사실은 이미 그가 “08 헌장”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셋째, 12개 조항의 내용을 보면 더더욱 2008년 티베트족의 저항과 “08 헌장” 사이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 12개 조항을 통해서 중국 지식인 29명은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원칙에 분명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평화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중국 정부가 근본적으로 소수민족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중국 정부를 향해 소수민족의 원한을 부추기는 관방 매체의 일방적 선전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폭력적 시위 진압을 멈추라 요구했다. 아울러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티베트 지역에 유엔 조사단을 파견하여 철저히 진상을 조사하고, 국내외 유수 언론의 심층 취재를 허용하고, 구속자 모두가 공정하고 투명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몇몇 조항을 살펴보자.

 

제4항. “우리는 티베트 지역에서 중공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달라이는 가사를 두른 표랑(豹狼)이며 인면수심의 악마”와 같은 문혁의 언어는 사태의 진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중국 정부의 이미지도 나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국제사회에 융화되려 노력하는 중국 정부는 반드시 현대 문명에 부합하는 집정의 풍모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8년 3월 14일 중국 간쑤성 티베트 자치주에서 누군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티베트족은 이 지역을 라브랑(Labrang)이라 부른다. 사진/ Indian Branch of Students for a Free Tibet/AP

 

제9항. “우리는 중국 민중과 해외 화교가 냉정과 관용을 지키면서 심사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격렬한 민족주의의 자태는 국제사회의 반감을 살 수 있어 중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다.”

 

제10항. “1980년대 티베트의 소요는 라싸에 국한됐지만, 이번에는 범 티베트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의 악화는 티베트 정책의 엄중한 실패를 반영한다. 관련 부서는 통렬하게 반성하고 실패한 민족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제11항. “유사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정부는 반드시 중국 헌법에 명시된 종교와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티베트족 민중이 충분히 그들의 불만과 희망을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울러 각 민족과 국민이 자유롭게 정부의 민족 정책에 대해서 비평하고 건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제12항. “우리는 민족의 분노와 원한을 해소해야만 민족의 화해를 해결할 수 있으며, 민족 간의 분열이 계속 커가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의 영도자가 직접 달라이 라마와 대화할 것을 호소한다······.”

 

“08 헌장”의 정신, 티베트족의 권리를 보장

2008년 3월 티베트족의 대규모 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갈 때, “08 헌장”을 입안하던 중국의 자유파 활동가들은 “12개 조항”으로 발표해서 “종교·신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 중국 정부를 압박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티베트족의 편에 서서 중국공산당의 종교 탄압과 무력 진압을 규탄했다. 인류의 보편가치를 외치면서 그들은 중국 정부에 맞서는 티베트족과 연대했다. 중국공산당에 맞서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외쳤다는 점에서 티베트족의 시위와 “08 헌장”은 일맥상통한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근대 입헌주의 전통에서 헌법이란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여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성적 차이를 넘어 보편적 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지켜주는 합법의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08 헌장을 지지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류샤오보의 석방을 외치며 시위하는 사람들. 2010년대 홍콩 추정. 사진/twitter.com

 

다시 묻는 2008년의 역사적 의의

2035년쯤 역사가들은 좌우 막론하고 2008년을 중국 현대사의 중대한 한 해로 기록할 듯하다. 그때도 중국공산당 일당독재가 현 상태(status quo)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면, 애국심 강한 중국의 역사가들은 2008년을 중국공산당이 그해 8월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서 중화 문명의 위력을 전 세계에 과시했던 “민족 부흥”의 원년(元年)으로 기록할 것이다. 반면 그때쯤 중국에서 민주화의 돌풍이 일어나 공산당 일당독재가 흔들리게 된다면, 2008년의 역사적 의의는 중국 “헌정 민주”의 분기점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이미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53회>에서 소개했지만, 재미 중국 전문가 민신 페이(Minxin Pei) 교수는 2035년 중국이 정치적 급변을 거쳐 민주주의 체제로 진화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는 일인 지배의 정치적 위험, 권력 승계의 갈등, 인구 고령화 및 서방과의 탈동조화(decoupling)에 따른 경제성장률 저하 등을 중국이 민주주의 체제로 변화할 수 있는 주요 이유로 꼽고 있다.

 

페이 교수와는 달리 중국 안팎의 다수 전문가는 권위주의의 회복력(authoritarian resilience)을 강조하며, 앞으로도 장기간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유지된다는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물론 학자들의 예측은 다반사로 빗나간다. 1989년 이래 중국의 민주화 가능성에 관해선 비관론이 낙관론보다 현실에 부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페이 교수의 예측이 적중한다는 가정 위에서 2008년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던 티베트족의 시위와 “08 헌장”의 관계를 되짚어 보았다. 2035년이 되어도 중국이 지금 이대로 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로 유지되는 상황을 국제사회가 속수무책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

 

<72회>中의 장기 적출 ‘제노사이드’, 미 하원의 정면 대응

▲2022년 7월 31일 영국 런던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위구르족과 영국의 무슬림 조직이 모여서 중국 정부를 향해 제노사이드를 멈추라며 시위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2000년 이후 중국의 의료계는 장기이식 분야에서 실로 눈부신 발전을 성취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중국은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장기이식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중국 밖 전문가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에선 매년 6만에서 10만 명의 장기가 적출되고 있다. 과연 중국에선 그 수많은 장기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조달되고 있는가?

 

장기 조달 방법에 관해 중국 정부는 최소 세 번 입장을 수정했다. 2005년까지 중국 정부는 중국에선 자발적 기증자의 장기 적출만 허용된다고 주장했지만, 2006년 이후 10년간은 사형수의 장기를 적출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랬던 중국 정부가 2015년 이후로는 죄수를 전면 제외한 사망한 기증자의 장기만을 이식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국제사회는 중국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다. 미국, 영국, 캐나다의 정부는 물론, 유럽연합의 의회까지도 중국에서 자행되는 대규모 장기 적출이 반인류적 범죄를 넘어 종족이나 신념의 이유로 특정 집단을 학살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 종족 학살)에 해당한다며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있다.

 

2021년 1월 29일 미국 국무부는 중국 정부가 신장 북서부에서 위구르족과 무슬림 종족들에 대해서 제노사이드와 반인류적 범죄를 자행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 지난 3월 27일 미 하원 민주·공화 양당의 415명은 단 두 명을 제외한 99.5%의 찬성률로 중국의 강제적 장기 적출을 중단시키기 위한 특별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체 미국 정부는 어떤 근거에서 중국이 제노사이드를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장기 기증이 수요를 훨씬 못 미치는 상황에서 불법적 장기 매매가 전 세계 음지에서 산업을 이루고 있다. 그 결과 세계의 빈곤층이 장기 적출의 희생자가 되고 장기이식을 위해 해외여행에 나서는 부자들이 늘고 있다. /AP통신

 

중국의 개도국 지위를 박탈하려는 미국

최근 미국 하원은 중국과 관련된 2개의 중대한 법안을 양당의 합의로 (거의) 만장일치 통과시켰다. 우선 중국의 개발도상국 지위를 박탈하는 첫 번째 법안은 지난 3월 27일 양당 의원 415명 전원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이 법안은 중국이 누려온 개도국으로서의 특혜를 박탈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2010년 이미 중국은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경제 규모를 자랑해 왔지만, 지금도 유엔은 1992년에 ‘개도국’이라 분류한 중국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전 세계에서 이산화탄소(CO₂)와 메탄 등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임에도 중국은 단지 개도국이라는 이유로 온난화 대책 및 손실 보상을 위한 유엔 펀드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2023년 2월 미 하원에서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영 킴(Young Kim) 의원이 중국의 개도국 지위를 박탈하는 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인간계발지수나 복지 수준을 볼 때 중국이 아직 중진국에 머문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지만, 그 경제 규모가 이미 전 세계 경제의 18%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그 규모의 경제가 중국을 미국에 맞서는 G-2의 대국으로 만든 힘이다. 문제는 그러한 중국이 개도국이란 이유로 대국에 걸맞은 국제적 책임과 임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국 하원은 중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 중국의 개도국 지위를 박탈했다. 이제 미국 국무부 장관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중국의 지위를 상위의 중간 소득 국가 이상으로 바꾸도록 노력할 의무를 진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기구는 이제 중국에 경제 규모에 부합하는 책임을 물을 예정이다.

 

중국의 장기 적출 실태를 고발하고 규탄하는 미 하원

두 번째 법안은 3월 29일 통과된 “강제 장기 수확 중지법”(Stop Forced Organ Harvesting Act of 2023)이다. 이 법안에는 단 두 명을 제외한 민주·공화 양당의 413명(찬성률 99.5%) 의원이 찬성했다. 여기서 “장기 수확(organ harvesting)”은 단순 장기 적출이 아니라 농사를 지어 곡물을 거둬들이듯 조직적으로 다수 인간의 신체에서 대량의 장기를 생산하는 반인류적 범죄 행위를 의미한다.

이 법안을 제출한 크리스 스미스(Chris Smith, 1953- ) 의원의 발언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조직적으로 장기를 수확하기 위해서 매년 6만에서 10만 명의 청년층(평균연령 28세)을 대량 학살하고 있으며, 그 희생자 중에는 위구르족과 파룬궁(法輪功) 수행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미 하원 공화당 스미스(Chris Smith) 의원이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은 매년 6만에서 10만 명의 젊은이를 장기를 훔치기 위해서 학살하고 있다”는 팻말을 내걸고 연설하고 있다. /C-SPAN 캡처

 

이 법안의 제정에 앞서 미 하원은 2022년 5월 12일 탐 랜토스(Tom Lantos) 인권위원회에서 “중국의 강제 장기 수확” 실태를 조사하고 증거를 검증하는 청문회를 열었다. 이 청문회에선 중국이 강압적으로 대량의 장기를 획득하고 거래하고 있다는 증거를 점검했다. 2015년 이래 중국 정부는 자발적 기증자의 장기만을 이식해왔다고 주장했지만, 관련 자료는 중국 병원에서 이식한 장기의 숫자가 기증자를 몇 배나 웃돌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 청문회는 중국에서 강제적 장기 적출이 자행돼왔으며, 파룬공 수행자, 위구르족 등이 희생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청문회에서 제시된 증거물 중에는 장기이식 관련해선 세계 최고의 저널인 ‘미국 장기이식 저널(The American Journal of Transplantation)’에 실릴 예정이었던 한 편의 논문, “장기 획득에 의한 처형: 기증자 사망의 규칙이 깨진 중국(Execution by Organ Procurement: Breaching the Dead Donor Rule in China)”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논문은 중국어 의학 논문 데이터베이스의 12만4,770개 논문 중에서 장기 획득의 과정을 보여주는 2,838개 논문을 법의학적으로 점검하여 중국에서는 외과의가 메스를 들고 살아 있는 사형수의 신체에서 장기를 빼내는 방법으로 실질적인 처형자의 역할을 담당해왔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장기 적출에서 “기증자 사망의 규칙”이란, 기증자가 사망한 후 의학적으로 사망 선고가 내려진 후에만 장기 적출이 시작될 수 있다는 의료 윤리의 철칙이다.

 

이 논문은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71개 보고서를 면밀하게 분석해서 뇌사 이전에 장기가 적출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미 사망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 심장, 간, 신장, 안구 등을 도려내서 그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얘기다. 수술대에 올라 장기를 적출당하는 사람이 사형수라는 추정 아래서 이 논문은 중국의 외과의가 장기 제거에 의한 처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쉽게 말해, 중국에서는 사형의 방법으로 총살, 교살, 전기살(電氣殺) 등의 알려진 방법 외에 장기 적출의 방법을 널리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독립 법정”의 판결, 중국의 장기 수확은 제노사이드

이 논문의 저자인 매슈 로버트슨(Matthew P. Robertson) 박사는 이미 2020년 3월 10일 미국 워싱턴 DC 소재 “공산주의 희생자 기념 재단(VOC, Victims of Communism Memorial Foundation)”에서 발표한 “중국의 장기 획득과 탈사법적 처형: 증거 검증 보고서(Organ Procurement and Extrajudicial Execution in China: A Review of the Evidence)”를 집필했다. 당일 청문회에서는 이 보고서도 검토되었다.

 

▲중국을 향해 강제적 장기 적출을 금지하라며 시위하는 파룬공 집단. 미국 뉴욕시, 2019년 3월 16일. /에포크타임스

 

이 보고서에서 로버트슨 박사는 중국의 장기이식의 현황과 실태를 보여주는 중국 의학계의 1차 연구 자료, 의료 보고서, 내부 문건, 병원 웹사이트, 관련 당 간부의 발언록 등 대량의 자료를 수집해서 분석하고, 중국의 사형제도에 관한 기존 연구와 결합한 후,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장기 적출의 방법과 실태에 관해서 가장 과학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로버트슨 박사는 중국 정부가 파룬공 수행자와 위구르족 두 집단에 대한 의료 정보를 집적해 왔다는 사실이 중국에서 이식되고 있는 수많은 장기가 탈법적으로 획득된 결정적 단서라고 파악한다.

 

 ▲2010년 3월 10일,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중국의 강제적 장기 적출 관련 포럼에 참석한 매슈 로버트슨(Matthew Robertson) 박사. /minghui.org

 

이 밖에도 이 청문회에선 2014년 결성된 세계 시민의 자발적 재판소, “중국 양심수의 강제 장기 수확 관련 독립 법정(The Independent Tribunal into Forced Organ Harvesting from Prisoners of Conscience in China)”이 판결문이 소개되었다. 방대한 증빙 자료가 첨부된 560여 쪽의 판결문은 중국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의 범죄를 예시하는 물리적 행위가 저질러져 왔다”고 판시했다. 국제 범죄 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의 로마 규정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란 특정 집단 구성원의 조직적 학살을 의미한다. 법정은 판결문에서 장기 적출의 구체적 사례를 적시하여 그동안 중국이 파룬공 수행자, 위구르족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자행해왔다는 판결에 도달했다.

 

위구르족, 장기 적출의 희생양이 되다!

2017년 봄부터 중국의 신장 지역에 대규모 집단수용소가 건설 중이라는 외신 보도가 잇따르자, 2018년 2월 카자키스탄의 중국 총영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그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영문판 ‘환구시보(Global Times)’는 신장 남부에서 100만 명이 정부의 빈곤 퇴치 정책에 따라 직업 교육을 이수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중국 정부의 발표를 신뢰할 수 없었던 독일의 인류학자 아드리안 젠쯔(Adrian Zenz, 1974- )는 중국 정부의 입찰 문서, 예산안, 공식 웹사이트, 관영 매체의 보도 등을 1년 넘게 파고들어서 결국 중국 정부가 2017년 이래 신장 지역에 대규모 강제수용소를 설치하여 100만에 달하는 위구르족을 격리·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2019년 9월 그의 기념비적 논문이 발표된 후, 젠쯔는 미국 및 캐나다 의회에서 그 사실을 증언했다. 그는 신장 지역의 정치적 재교육 시설이 다수의 위구르족을 감금해서 이슬람교도를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개조하기 위한 초법적인 세뇌 공작의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젠쯔의 논문이 발표된 후 위구르족 실상에 관한 탐구는 중국 정부의 문서 분석에서 심층 인터뷰로 옮아갔다. 이후 중국 정부가 민감한 정부 정보의 외부 유출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2022년 5월 22일 미 하원 청문회에 초빙된 “공산주의 희생자 기념 재단”의 에탄 구트만(Ethan Gutmann) 선임연구원은 중국 신장 지역의 위구르족에 가해진 제노사이드의 실례에 관해 보고했다. 당일 그의 보고는 그가 직접 수행한 위구르족 난민들과의 심층 인터뷰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2017년 이래 신장 지역 20여 개 집단수용소에서 탈출해서 유럽, 터키, 키르기스탄, 카자키스탄 등지로 옮겨간 많은 위구르족을 인터뷰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캠프에 수감된 위구르 포로 중에서 특히 28~29세의 청년들이 장기 적출의 표적이 된다. 장기 적출의 최적기라 여겨지는 바로 그 연령대다. 중국어 교사 사이라굴(Sayragul)은 수감자 전체의 피검사 결과가 인쇄된 문건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특정인의 이름 옆에 분홍색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일부 목격자는 캠프의 간수가 특정 개인에게 강제로 색깔이 있는 팔찌를 채우거나 조끼를 입혔다고 증언했다. 탈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검사를 받고 나서 한 주 내에 색깔이 찍힌 바로 그 사람들은 한밤중 어디론가 사라졌다. 20개 캠프에 억류돼 있던 목격자들에 따르면, 매해 대략 28세의 청년 중에서 2.5~5% 정도가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구트만 선임위원은 미국 하원의 의원들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장기 조달 혐의에 휩싸인 수용소, 인근에 병원, 화장터, 비행장을 갖춰

“2017년 이후 상시(常時) 대략 100만 명의 위구르족, 카자크족, 키르기스족, 후이족이 캠프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매해 2만5,000명에서 5만명에 달하는 포로들이 장기를 적출당했습니다. 2016년 우리가 보고서에서 밝혔듯, 중국은 매해 6만에서 10만 개의 장기를 이식합니다. 이론상 신장 지역 캠프에 갇힌 28세 청년들의 몸에서 1인당 2개나 3개의 장기가 적출된다면, 최소 5만에서 최대 15만 개의 장기가 수확될 수 있습니다. 장기 산업의 요구에 따라서 그 숫자는 얼마든지 조절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구트만은 2017년 저장성 항저우시의 제1 인민병원에서 간 이식 수술 건수가 90% 증가하고, 신장 이식은 200%나 증가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위구르족 강제수용소의 규모가 급팽창하던 바로 그 시점이다. 2020년 3월 1일, 이 병원은 세계 최초로 코비드-19 바이러스 감염자에 대한 이중 폐(double lung) 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중공의 기관지는 그 사실을 대서특필했는데, 결국 정부가 나서서 전 세계를 향해 팬데믹 와중에도 중국 병원에선 이식 수술이 진행됨을 홍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구트만은 신장의 아크쑤(Aksu, 阿克苏)에 있는 두 수용소에 주목한다. 각각 1만6,000명과 3만3,000명을 수용하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캠프인데, 불과 500미터 떨어져 있다. 수용소 외곽 경계선 북쪽 끝에는 아크쑤 감염 병원이 있다. 두 캠프에서 불과 900미터 떨어진 곳에 거대한 화장터가 있고, 비행장은 차로 25분 거리에 떨어져 있다. 구트만은 바로 이곳에서 적출된 장기가 비행기로 공수되어 항저우의 제1 인민병원에 조달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계속>

 

▲아크쑤 수용소 위성 사진. 좌우 양편 두 개의 캠프가 있다. 오른쪽 캠프 위에는 감염 병원이 있고, 북쪽 위에는 대규모 화장터가 있다. /Gulchehra Hoja

 

<73회>긴 머리 거칠게 잘린 소녀들… 中 위구르족 제노사이드의 실상

포로의 얼굴들, 홀로코스트의 증거물

2009년 늦봄 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답사했다. 폴란드 남부의 고도(古都) 크라쿠프(Krakow)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국도로 달려가면, 초록빛 넓은 평원 어딘가에서 돌연 큰 짐승을 통째로 삼키는 늪처럼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가 나타난다. 그 수용소의 정문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나치 시대의 구호가 걸려 있다. (송재윤, “아우슈비츠의 얼굴들”)

지금은 역사박물관이 되어 있는 그곳에 들어서면, 한쪽 벽에 전시된 증명사진들이 눈길을 끈다. 멀리서 기차에 실려 짐짝처럼 운반되어 온 유대인들이 가스실에 들어가기 직전, 나치 간수들은 일일이 한 명씩 포로들의 증명사진을 찍었다. 그 결과 수용소의 포로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포로 1인당 정면, 측면, 반(半) 측면의 얼굴 사진이 3장씩 남겨졌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온 유태인 포로들은 가스실에 들어가기 직전 측면, 정면, 반측면의 얼굴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https://facesofauschwitz.com

 

겁에 질린 저 나약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죽지 않는 그 넋의 심장이 아직도 쿵쿵 뛰고 있는 듯했다. “얼굴”의 어원이 “얼의 꼴”이라 했던가? “얼의 꼴”이란 “영혼의 모습”이란 말인가?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독가스를 마시고 잿더미로 타버릴 운명임에도 마지막 순간 그 “얼의 꼴”을 보면, 근엄한 표정이 생생히 살아있다. 인간의 자존심일까? 영혼의 에너지일까? 지금도 세상에는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를 모두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저 얼굴들을 보여주면 무슨 말을 할까? 저 사진들보다 더 강력한 증거물이 또 있을까?

 

<슬픈 중국>에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를 언급하는 이유는 최근 중국의 신장 지역에서 억류당한 수많은 위구르족의 실제 사진이 중국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새어 나와 백일하에 공개됐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 속 인물들은 2018년 신장에서 구금된 10대의 위구르 소녀들이다. 이 소녀들을 잘 보면, 모두가 단발머리란 점이 눈에 띈다.

 

“신장 경찰 파일”에 들어 있는 위구르 소녀들의 증명사진. 왼쪽 위가 15세로 가장 연하이고, 오른쪽 아래 인물은 19세이다./ The Victims of Communism Memorial Foundation, xinjiangpolicefiles.org.

 

2017년 여름, 신장의 강제 수용소에 2년 넘게 감금돼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위구르 여성 아나르 사비트(Anar Sabit)의 증언에 따르면, 구치소에 들어가면 간수가 큰 가위로 여성의 긴 머리를 싹둑싹둑 거칠게 잘라버린다. 위구르와 카자크 문화에선 여성의 긴 머리는 행운을 상징한다. 어려서부터 계속 길러서 긴 머리를 풀면 발끝까지 닿는 여성도 드물지 않다. 감금되어 머리를 잘릴 때, 여성들은 간수에게 조금만 더 남겨 달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여성들은 머리를 깎이고 나면, 스스로 죄수가 된 듯하여 수치감에 휩싸인다.

 

“신장 경찰 파일,” 인권유린의 실상을 폭로

2022년 5월 말 독일의 인류학자 아드리안 젠쯔(Adrian N. Zenz, 1974- )는 신장 지역 중국 경찰이 직접 제작한 극비 자료를 폭로했다. 젠쯔에게 “신장 경찰 파일”을 전달한 익명의 제3자는 위구르족이 밀집한 신장 지역 두 경찰서의 컴퓨터를 직접 해킹하여 이 자료를 구했다고 밝혔다.

젠쯔는 그 모든 자료를 공산주의 희생자 기념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신장 경찰 파일(Xinjiang Police Files)”에 전부 공개했다. “신장 경찰 파일”에는 연설문, 정책 지시문, 현장 사진들, 관련 자료 및 통계 수치 등 신장 지역 수용소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국 경찰 내부의 자료가 대량 포함되어 있다.

 

국제 연구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2017년 이래 중국 정부는 최소 8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의 위구르족, 카자크족, 우즈베크족 등 신장의 이슬람 종족들을 강제로 구금(拘禁)해 왔다. 한사코 수용소의 존재를 부정하던 중국 정부는 위성사진이 공개되자 그 시설들은 “직업·기능 교육·훈련 센터”라는 말만 되풀이해왔다.

 

▲“신장 경찰 파일”에 포함된 이 이미지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2018년 테케스 구치소에서 실시된 치안 훈련의 한 장면이다./ The Victims of Communism Memorial Foundation, xinjiangpolicefiles.org.

 

위구르족에게 직업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여 낙후된 신장 지역의 경제를 살리려는 중국공산당의 깊은 배려라는 판에 박힌 답변이었다. 2019년 12월 신장의 지방정부는 “수감자는 모두 다 졸업했다”고 발표했는데, 2020년 호주전략정책 연구소(ASPI)는 위성사진을 분석해서 재교육 캠프, 구치소·감옥 등으로 보이는 시설 380개를 찾아냈다.

 

▲2020년 9월 현재 신장 지역에 들어선 201개의 재교육 캠프와 179개의 구치소나 감옥 등으로 추정되는 시설 /호주전략정책연구소(Australian Strategic Policy Institute)

 

지금껏 위구르 문제 전문가들은 보통 위성사진, 공개된 정부 문서나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해 왔지만, “신장 경찰 파일”의 공개로 이제 그 시설 내부의 실상을 보여주는 생생한 1차 자료를 얻게 되었다. 파일 속에 포함된 이미지들을 보면, 중국 정부가 말하는 “직업훈련소”란 게 실상은 신장의 위구르, 카자크, 우즈베크족 등을 억류하고 세뇌하고 중노동을 시키는 강제수용소임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위구르 수용소의 실상: 그들을 잡아간 이유

현재 “신장 경찰 파일” 사이트에는 2,884명 위구르족 억류자들의 증명사진이 올라와 있다. 그 증명사진들은 2018년 상반기에 위구르족 밀집 지역인 신장 남서부 카쉬가르 주(州) 코나셰헤르(Konasheher) 현의 경찰서와 구금소에서 촬영되었다. 파일 속 사진 옆에는 나이, 성별, 구금 상태, 형기, 혈액형, 구금 사유 등등 개인정보가 기재돼 있다. 구금자의 연령대는 남녀 모두 1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하다. 이미 언급했듯 사진 속의 여자들은 모두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남자들은 짧은 머리에 수염을 깎은 얼굴이다.

 

▲“신장 경찰 파일”에 포함된 30~60대 남자들의 증명사진. 구치소에 들어갈 때 포로들은 빡빡머리로 삭발당하고 수염을 깨끗이 밀어야 한다. 증명사진 중에는 깎은 지 시간이 꽤 흘러서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란 얼굴도 있지만, 긴 수염을 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The Victims of Communism Memorial Foundation, xinjiangpolicefiles.org

 

사진 옆에 적힌 수용소 포로들의 신상 정보는 충격적이다. 우선 10대의 남자 수감자를 살펴보면, 19세 시렐리 메메트(Shireli Memet)는 “자유문(自由門) 조직” 두목의 죄명을 쓰고 “제4류”로 분류되어 투옥되었다. 18세의 야르메메트 압두케림(Yarmemet Abdukerim)은 그 부친이 사회 불만 세력이라서 잡혀 왔다. 18세의 이브라힘 투르순(Ibrahim Tursun)은 핸드폰을 끄고 있었다는 이유로 끌려왔다. 18세의 메흐무트 압두케림(Mehmut Abdukerim)은 “사상이 완고하며, 그의 모친에게 이슬람 경전을 배웠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그 밖에도 테러활동을 준비하거나 부모를 위협하거나 위험인물과 동행했다는 이유로 연행된 경우도 보인다.

 

30~40대 남성 수감자를 보면, 31세의 아딜 아리프(Adil Alip)는 2016년 7월 불법적으로 이슬람 경전을 공부하고, 이슬람 사원에서 이틀 정도 예배를 보고, 또 이슬람 경전을 외었다는 죄목으로 10년 형에 처해졌다.

36세의 하심 투르순(Hashim Tursun)은 정당한 사유 없이 마을 조직의 강연대회에 불참했으며, 사법 기관에 의해 핸드폰 사용이 중지된 데다 1992년 1~2월 이스마일리 압둘라(Ismaili Abdullah)에게서 종교적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40세의 하무트 야씬(Hamut Yasin)은 2014년 9월 7일 부인이 임신 중에 “종교적 극단주의의 영향 아래서” 처제와 재혼했다. 그의 부인은 20일 후 이혼했음에도 “종교적 극단주의의 영향 아래 아기를 낳았다.” 또한 하무트는 “2012~2014년 그의 부인이 이슬람 스타일의 의상을 입을 수 있도록 허락했고, 2012년 2월 1~20일 그의 아들을 사촌에게 소개하여 이슬람 경전을 읽게 했으며, 1984년부터 1986년까지 2년간 메흐메트 카지(Mehmet Kaji)와 함께 경전을 공부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는데, 그의 구체적 형량은 명시되지 않았다.

 

50세의 파크란드 카스우드(Parkland Casswood)는 “고의 상해죄”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받았다.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직접 테러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테러 행위를 준비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그의 종교활동도 구속 사유로 열거되어 있다. 2010년에서 2011년 사이 그는 여러 차례 이슬람 사원에서 이맘 유마이에르(Imam Yumaier)의 설교를 들었다. 그 설교 내용은 “이슬람 교도들은 매일 다섯 차례 기도를 올려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하며, 정기적으로 금식해야 하고, 종교세를 내야 하며, 음주와 흡연을 삼가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 밖에도 극단적 종교 지식을 갖고 있고, 싸움을 걸고 혼란을 일으키고, 이슬람 특유의 하랄(Halal) 식단을 지키고, 히잡을 쓰고, 수염을 기른다는 이유 등으로 구금되어 재교육을 강요받고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도 수두룩하다.

 

신장 지역에서 감시, 통제 등 경찰업무에 활용되는 핸드폰 앱(APP)의 이름은 “일체화 연합 작전”이다. 이 앱을 통해서 신장 경찰은 은행거래, 전화 통화, 불법 행위 등 개개인의 모든 행동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신장 경찰은 불량행위를 저지르는 36개 유형의 인간형을 제시한다.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 집의 정문 대신 뒷문으로 드나드는 사람, 전기 사용량이 유달리 많은 사람, 수염을 기른 사람, 사회 활동이 적은 사람, 사회관계가 복잡한 사람, 가족 중에 불순 분자가 있는 사람, 민감한 국가로 국외 여행을 다녀온 사람 등…. 이 모든 사람이 잠정적 테러 성향을 보인다고 의심받는다.

 

국제 인권단체는 신장 지역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모스크에 갔다가 끌려가고, 사상·신념의 이유로 잡혀가고, 코란을 낭송해서 붙잡히고, 특정 종족이라서 구금되고, 가족이라 연좌되고, 친구라서 연루되고, 때론 원인도 모르게 돌연히 어디론가 실종되어 버린다고 고발해 왔다. “신장 경찰 파일”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 모든 지적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대체 몇 명이나 감금되었나?

지금껏 위구르 제노사이드를 파헤쳐온 연구자들은 신장의 재교육 시설, 구금소, 강제수용소 등 여러 감금 시설에 억류당하고 있는 사람의 총수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왔다. 지방 경찰관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단서를 끌어내거나 누설된 정부 통계를 분석하거나 재교육 캠프에 지급된 식비 등으로 추산하는 방법 등이었다. 그 결과 현재까지 발표된 연구를 종합해보면, 그 숫자는 최소 100만에서 최대 300만에 이른다. 다만 중국 정부의 공식 발표가 없는 상황에서 그 어떤 추측도 정확할 수는 없다.

 

“신장 경찰 파일”에는 전 공안부 장관 자오커즈(趙克志, 1953- )의 2018년 6월 15일 기밀 연설문, “신장 자치구 공안과 안정 공작 관련 보고 관련 강화”가 포함돼 있다. 이 기밀문서에는 이른바 “신장 직업·기능 교육·배훈(培訓) 센터 (재교육 시설)”에 감금해야 할 구체적인 인원수를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장에선 200만 정도가 신장의 독립과 범(泛)이슬람주의와 범(泛) 터키적 사유에 영향을 받아왔다. 신장 남부에는 종교적 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은 세력이 200만 이상 존재한다.”

 

“신장 경찰 파일”을 공개한 젠쯔는 바로 이 대목을 예의주시한다. 자오커즈가 말하는 첫 번째 “200만 정도”는 위구르, 카자크, 키르기스족 등 신장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터키계 종족 중에서 신장의 독립과 분리주의에 동조하는 세력의 명수를 가리킨다. 두 번째 “200만 이상”은 신장 남부에 거주하는 보다 구체적인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신장 경찰 파일” 속에 들어 있는 2017년 테케스 현 소재 한 구치소의 사진. 중앙 상단의 텔레비전에서는 신장 인민정치협상회의 의장 누얼란 압두만진(Nu’erlan Abudumanjin)의 연설이 방송되고 있다. 왼쪽 벽의 검은 종이에는 중국어와 위구르어로 “신장 감관”이라 적혀 있고, 오른쪽 노란 포스터에는 “극단주의 배격 ”세 가지 악“과의 투쟁이라고 적혀 있다. 이상은 젠쯔(Adrian Zenz)의 해설. / The Victims of Communism Memorial Foundation, xinjiangpolicefiles.org

 

 

오늘날 중국에서 극단주의란 개념은 사실상 코란을 읽거나 금식하거나 기도를 올리는 등 일상적 종교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현령비현령의 개념이다. 이미 살펴보았듯, “신장 경찰 파일”에 따르면, 수염을 기르고, 히잡을 쓰고, 경전을 공부하고, 심지어는 이혼한 여성이 낙태를 거부하고 아이를 낳는 결정까지도 종교적 극단주의의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상 이슬람교도라면 누구나, 언제든, 자의적으로 극단주의자의 혐의를 씌워 체포, 연행, 구속, 구금, 처벌할 수 있다.

 

2018년 6월 기밀 강화에서 자오커즈는 과연 왜 200만 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언급했을까. 공안부 장관이 기밀문서에서 발설한 그 숫자가 근거 없이 만들어진 가상의 숫자일 순 없다. 그는 그 강화에서 2017년에서 2021년까지 다섯 해에 걸쳐서 “종교적 극단주의에 오염된” 위구르족을 위시한 모든 터키계 종족들을 “엄하고 매섭게 타격하는” 신장 지역 “극단화 제거 투쟁”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포괄적 안정”을 이룬다는 5개년 계획까지 제시했다. 중국 관료행정의 선례에 비춰보면, “200만 이상”이란 수치는 베이징의 중앙 정부에서 신장의 지방정부에 하달한 구체적인 목표치일 수 있다.

 

실제로 2017년 4월부터 신장에선 대규모 체포령이 내려졌다. 6월 19일부터는 단 한 주 동안 4개 주에서 1만6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5500명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 결과 2017년 한 해 동안 전체 중국 인구의 불과 2%가 거주하는 신장에서 전국 구속자의 20%가 나왔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자오커즈가 말한 “200만 이상”이란 신장에서 실제로 200만 명 이상을 잡아넣고, 그들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개조하라는 구체적 요구로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신장 지역 “일체화 연합 작전”의 목표 수치가 200만 이상이라는 얘기다. 설혹 200만 이상이라 해도 위에서 보았듯 종교적 극단주의의 혐의만 걸면 누구나 구속할 수 있었을 터이기에 신장 경찰은 어렵지 않게 그 수치를 달성했으리라 짐작된다. <계속>

 

74회 없다

<75회>강화되는 반중 연대, 세계는 지금 제2차 냉전인가

 ▲1985년 11월 21일, 제네바 회담. 왼쪽 소련 고르바초프 총서기, 오른쪽 미국 레이건 대통령. /Bettmann Archive

 

세계는 지금 제2차 냉전 중인가?

미·중 갈등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2020년 여름 트럼프 정권의 장관급 핵심 인사 네 명은 돌아가면서 차례로 “스탈린의 후예인 시진핑”의 중국은 국제질서의 규범을 파괴하면서 초강국이 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쓰는 독재국가라 규탄한 바 있다. 내전 같은 선거를 치르고 가까스로 정권이 교체되었음에도 바이든 행정부는 전 정권의 대중국 강경 노선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미국 헌정사에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국익과 직결된 중대 사안에선 당리당략과 노선 차이를 넘어 대타협을 이루는 양당 정책(bipartisan policy)의 오랜 전통이 있다. 최근 미국 의회는 적어도 중국 문제에서만큼은 만장일치의 양당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 하원은 지난 3월 중국의 개도국 지위 박탈 법안과 위구르족 제노사이드를 막는 장기 적출 중지법에 대해선 99.5% 이상의 찬성률을 보였다. 중국 문제에서만큼은 미국의 여야와 조야가 대동단결한 형국이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호주, 한국, 일본 등 전 세계 반중 정서가 갈수록 강화되는 추세다. 최근 EU 집행부는 러시아의 무기 생산에 협조한 7개 중국 회사에 대한 제재 법안을 제출했다. 캐나다는 위구르족 제노사이드 제재 법안을 주도한 국회의원에 대한 중국 측의 보복성 압력에 거세게 항의하며 중국 대사를 추방했다. 이탈리아는 ‘일대일로’ 탈퇴 의사를 내비쳤다. 세계 각국은 단순히 정서적 반중(反中)에 머물지 않고, 중국 체제를 비판하는 비중(批中)의 이념 공조, 군사·외교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억중(抑中)의 국제 연대를 이루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 일본, 호주, 인도의 4자 안보 회담(쿼드, Quad)은 일례에 불과하다. 최근 캐나다 정부는 미국과 영국이 호주의 핵잠수함 건조를 지원하는 목적으로 결성한 오커스(AUKUS) 동맹에 가입하려 하고 있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2001년 “반테러”의 명분으로 결성된 “상하이 협력 기구(SCO)”의 핵심 축은 시작부터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협력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2022년 2월 초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 나타난 푸틴은 시진핑과의 “전략적 브로맨스(bromance)”를 전 세계에 과시했다.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배경 삼아서 러시아가 국제적 고립을 감수하면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음은 이미 국제사회의 상식이다. 이제 세계는 앞으로 수년 내 중국이 실제로 대만 침공을 감행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지 않는다 해도 군사 위협만으로 이미 싸늘한 전운이 세계를 감싸고 돈다.

 

여러 분석가가 지적하듯, 지구는 지금 제2차 냉전(Cold War 2)을 치르고 있는가? 실제로 신냉전이 진행 중이라면, 앞으로 세계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까? 40년에 걸친 미국의 집요한 봉쇄 전략으로 1990년대 초 구소련이 극적으로 해체되었듯 중국 역시 국제적 고립, 경제적 쇠락, 정치적 해체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라면, 중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가 나타나고 있는가?

 

▲2021년 11월 15일 백악관에서 중국의 시진핑 총서기와 화상으로 회담하고 있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 /Alex Wong/Getty Images

 

오웰이 예측했던 냉전, 결국 자유 진영의 승리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2개월 후, 1945년 10월 19일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당신과 원자폭탄”이란 제목의 시론에서 인류 최초로 “냉전”의 도래를 예측했다. 절대무기를 갖고 있어 침략당하지 않는 강력한 전체주의 국가가 주변국과 영원한 “냉전” 상태에서 평화 아닌 평화가 영구히 지속된다는 주장이었다. 오웰이 최초로 “냉전”이란 개념을 제시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통찰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한국전쟁 발발 한 해 전인 1949년 소련은 자체적으로 핵무장에 성공했다. 핵을 거머쥔 스탈린은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뤘다는 확신 아래 마오쩌둥의 참전 약속을 받아낸 후 38세 김일성의 남침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국전쟁은 초강국 사이의 갈등이 제3차 세계대전을 대신해 양대 진영 사이의 참혹한 국지적 대리전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 중대한 사건이었다. 오웰의 예측대로 그 후 40년 세계는 양대 진영으로 갈라져서 냉전을 치러야만 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왼쪽부터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소련의 스탈린(Joseph Stalin). /공공부문

 

 

냉전 시대 미·소 경쟁은 민생 경제, 과학기술, 정치이념, 문화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전면적으로 일어난 명실공히 체제 전쟁이었다. 냉전 시기 미국이 지속적인 과학기술의 발달, 대학의 성장, 경제 발전의 결과 소련을 따돌리고 압도적인 세계 최강의 부국으로 성장했지만, 1970년대까지도 미국 지식계와 정부의 많은 전문가는 소련의 지속적 발전과 미국의 쇠락을 예언하고 있었다.

 

학계의 비관적 전망과는 달리 1980년대 들어서자 레이건 행정부의 유화책에 부응하여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했다. 그 결과 소련 내부에서 정치 개혁과 경제 개방의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고, 동구에서 시작된 자유화의 열풍은 70년 공산당 일당 독재에 짓눌려온 소련 인민을 일깨웠다. 급기야 러시아, 우크라이나 및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에서 일어난 민주화 물결이 1991년 12월 26일 구소련 제국을 해체했다.

 

제1차 냉전의 시대는 그렇게 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공산주의 대 자유주의의 충돌, 명령경제 대 시장경제의 경쟁,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의 투쟁, “닫힌 사회” 대 “열린 사회”의 대결은 그렇게 후자의 대승리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 때문에 붕괴하고 사회주의로 진화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개인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입헌적 자유주의와 선거 민주주의가 인간 사회 제도적 진화의 종결점이라는 장밋빛 낙관론이 널리 퍼져나갔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이 대학살로 막을 내렸을 때, 중국 밖의 많은 분석가는 머지않아 중국도 민주화를 거부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그러한 예상과는 정반대로 중국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면서도 경제성장을 지속해서 급기야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하는 이변을 이어갔다. 그 결과 세계는 지금 중국 문제로 시름하고 있다.

 

제2차 냉전의 장기화, 중국의 점진적 쇠락 전망

구소련과 달리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전 세계 대다수 나라들과 경제적 공조 관계를 확대해왔다. 소련의 경제력은 최고조일 때에도 미국의 절반에 못 미쳤지만, 중국은 이미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해 있다. 최첨단의 과학기술 측면에서도 중국은 미국을 바싹 뒤쫓고 있다. 구매력 평가 지수(PPP)로 보면, 중국의 국내 총생산량은 2014년 이후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팬데믹이 터진 이후에도 미국의 여러 논객은 미·중 갈등을 제2차 냉전으로 보는 매파적 시각을 비판했다. 중국 문제가 심각할 순 있지만, 오늘날의 중국을 과거의 소련제국과 동일시할 수는 없는 데다 지금에 와서 중국과의 공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론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이미 7, 8년 전부터 제2차 냉전이 진행 중이었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세계 여러 나라가 현 상태로 중국과의 공조를 계속 이어갈 수 없음을 인지했다 할까. 구소련처럼 오늘날 중국은 일당 독재의 레닌주의 국가이며, 핵무기로 전 인류를 파괴할 수 있는 군사적 초강국이다. 대내적으로 중국은 최첨단의 감시 장비로 전 인민을 통제하는 반자유적 전체주의 국가이며, 대외적으로 자유민주적 질서에 맞서는 팽창주의적 제국이다. 또한 중국은 반인류적 정치 범죄, 심지어는 제노사이드를 자행한다고 의심받고 있으며, 홍콩의 자유를 억압하고, 대만에 대한 흡수 통일을 공공연히 선언하면서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작금의 국제정세가 제2차 냉전이라면, 과연 중국은 승리할 수 있을까? 중국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여 과거 역대 중화 제국의 조공 체제와 같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을까?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첫째, 중국 경제가 계속 밝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세계 제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 경제의 실상은 이렇다. 인구절벽으로 경제활동 인구가 급감 추세에 있고, 천문학적 빈부격차로 전국적으로 인구 40%에 달하는 6억명의 빈곤층을 떠안고 있으며, 도농 및 지역 격차는 줄어들지 않는다. 또한 탈공조화(decoupling)에 맞물려 외국 기업은 날로 떠나가는데,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경제 개혁을 거부하고서 “국진민퇴(國進民退)”의 낡은 길로 퇴행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순 없다.

 

둘째, 현재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의 전체주의 체제라는 점이다. 헌법에는 자유, 인권, 민주, 법치가 명시되어 있지만, 중국은 당정 분리도 이루지 못한 반자유적 인권 탄압국이다. 중국공산당이 선전하는 중국 모델은 군국주의 일제, 나치독일의 제3제국, 스탈린 시대 구소련의 선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식 디지털 전체주의는 일당 독재를 유지하는 미봉책일 순 있어도 중국 중심의 국제화 전략으로선 실패를 면할 수 없다.

 

셋째, 중국은 세계 질서를 이끌 수 있는 인류적 보편 이념을 창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중국공산당이 창당 100년 만에 “초심을 잊지 말자, 사명을 되새기자”며 내세운 구호는 놀랍게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었다.

 

계급 정당이 민족 정당으로 둔갑한 이 기묘한 현실은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자가당착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계급투쟁의 창을 들고 민족 부흥의 방패를 찌르는 격이다. 이는 중국이 세계를 향해 건설적 비전과 보편적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중국 밖의 사람들은 시진핑의 “중국몽”을 위협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비대한 대륙 국가 중국은 현재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진(秦)나라의 단명이 증명하듯, 인류적 보편 이념을 창출하지 못하는 제국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신장 테케스 현 구치소에서 삭발당한 위구르인들이 간수의 감시 아래 열을 맞춰 노래를 제창하고 있다. “공산주의 희생자 기념재단(The Victims of Communism Memorial Foundation),” 2022년 5월 24일 공개. /https://victimsofcommunism.org

 

 

구소련이 냉전에서 패배한 이유는 정치체제, 경제구조 한계 등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 원인은 “공산주의”라는 잘못된 이념에 있었다. 개인의 재산권을 박탈한 후 무산계급 독재로 공산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발상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짓밟는 무지막지한 폭력이었다. 중국은 여전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전면에 내걸고 공산당 일당 독재로 운영되는 레닌주의 국가다. 그런 나라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며 일대일로(一帶一路)의 미명 아래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모색하는데, 과연 전 지구에서 몇 나라나 과거의 조공국처럼 오늘날의 중국을 종주국으로 떠받들겠는가?

 

 ▲2021년 6월 28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두고 갈라쇼에서 시진핑 총서기가 최고위 간부들과 함께 당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Ng Han Guan/AP/File

 

 

20세기 인류사를 돌아보면, “열린 사회”의 민주주의가 혼란스럽고, 비효율적이고, 불안정한 면모를 끊임없이 보여왔지만, “닫힌 사회”의 독재 권력보다 더 질기고 탄력적인 생명력을 발휘해 왔다. 그러한 시각에서 보면, 제2차 냉전의 결말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이 현재의 미국을 대신해서 중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울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문제는 이미 경제적·군사적 초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구소련보다 더 완강하게 버티면서, 더 집요하고 저돌적으로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교란하고 위협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제2차 냉전은 제1차 냉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하고, 소모적인 지구전일 수도 있다. <계속>

 

<76회> 한미일 공조에 긴장하는 한중의 ‘수구 좌파’

지금도 한국에는 중국의 계속되는 성장을 예측하며 미국 주식의 보유 비중을 낮추라 조언하는 주식 전문가가 활약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민주화 제3 물결”은 이미 지나갔다며 앞으로는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같은 강력한 독재자(strongman)의 시대가 계속 펼쳐진다고 단언하는 “중국통” 정치학자도 있다. 친중파의 섣부른 예측과는 달리 시진핑 정권은 현재 국제적 고립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겉으로는 큰 근육을 자랑하지만, 속으로는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며 날마다 한 줌씩 약을 먹어야 하는 병든 중년이랄까.

 

 ▲2022년 6월 29일 윤석열 대통령이 마드리드 이페마(IFEMA)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미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뉴시스

 

한미일 공조 강화로 국제외교의 구석에 몰린 중국

지난 17일 주펑 중국 난징대 교수는 동아일보에 실린 칼럼에서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는 윤석열 정권을 향해 “친미원중(親美遠中)의 ‘숭미주의 정책’은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객관적이며 이성적으로’ 옛 한중 관계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의 탈세계화 전략으로 인해 삼성전자의 이윤이 폭락했다는 나이브(naïve)한 분석을 제시하며 그는 한국이 사는 길은 중국과의 “협력 확대”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만 문제를 함부로 논하면 중국이 북한 문제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기관지의 논조를 빼다 박은 주펑의 칼럼은 현재 시진핑 정권의 외교적 고립감과 불안증을 반영한다.

 

실제로 한미일 공조의 강화는 중국에 가장 아프고도 두려운 외교 시나리오다. 한미일의 군사·외교적 연대는 세 나라 관계에 머물지 않고 미국·일본·호주·인도 4자 안보 협의체 쿼드(QUAD), 미국·영국·호주 3국의 최상위 군사동맹 오커스(AUKUS)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쿼드, 오커스, 한미일 공조는 ‘불침의 항모’ 대만, ‘반중의 공산국가’ 베트남까지 포섭하여 더욱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의 시대를 여는 자유 진영의 기본적 군사·외교 전략이다.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중국이라는 비대한 대륙을 일본, 한국, 필리핀, 인도차이나, 인도 등의 해상 제국(諸國)이 완전히 포위한 형국이다. 중국으로선 대만을 삼켜야만 태평양으로 펑 뚫리는 해상의 출로가 열리지만, 그 점을 잘 알기에 대만을 보위(保衛)하는 국제 연대가 그만큼 강화될 수밖에 없다.

 

중국으로선 한국에 친중 정권이 들어서서 일본과 충돌하고 미국에 거리를 두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반도가 통째로 중국의 영향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미일 공조가 강화되는 만큼 중국 외교의 숨통은 조여든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중국 외교부, 중국 학계의 공산당원들까지 총동원되어 한국 정부를 위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17년 12월 14일 오전 문재인 전 대통령 국빈방문 행사를 취재하던 한 기자가 중국 측 경호 관계자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해 쓰러져 있는 장면. /한국사진기자협회

 

 

미국과 거리를 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 격찬하면서 외교의 프로토콜을 벗어나는 과공비례(過恭非禮·지나친 공손은 예의가 아니다)를 어색하게 연출했음에도 본인 스스로 여덟 끼니나 ‘혼밥’을 먹고, 따라간 기자단은 폭행까지 당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분리되는 순간 한국은 끈 떨어진 연이 되어 중국식 전랑 외교의 먹잇감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한미 동맹을 강화했기에 윤석열 대통령은 당당하게 국제사회와 함께 대만의 현상 유지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미국을 너무나 잘 아는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라는 인류적 가치를 강조하며 미국을 직접 압박해 절멸의 위기에서 한미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당당한 군사 외교적 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반면 리영희 같은 구시대 반미친중파 지식인의 저서를 탐독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은 외교의 바다에 나가면 어김없이 좌충우돌, 좌고우면, 갈팡질팡, 아슬아슬 암초 사이로 표류하면서 난파 직전까지 가야만 했다. 그들은 한미일 공조가 단순히 국익을 위한 전략적 결탁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이 선양하는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기초한 이념적 연대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낡은 가치에 집착하는 중국의 “수구 좌파”

개혁개방기 중국의 정치 투쟁사를 깊이 탐구한 비판적 지식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의 분류법에 따르면, 마오쩌둥을 되살리는 시진핑 총서기는 당내 ‘보수파’의 영수이며, 경제적 자유화에 역행하는 그의 정책은 ‘좌파’ 노선이다. “좌파인데 어떻게 보수적이란 말이냐?”고 반문하겠지만, 널리 통용되는 개혁개방 시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의 분류법이다.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 1980년대 당내 보수 좌파에 대립했던 집단은 자유파, 개혁파라 불렸으며, 그들의 정치·경제 정책은 우파 노선으로 인식되었다. 개혁개방 시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는 ‘보수 좌파’와 ‘개혁 우파’ 사이의 시소게임이었다.

 

여기서 ‘보수’란 자유주의 국가에서 흔히 말하듯 오랜 경험과 전통의 지혜를 살려서 급변하는 현실에 대응하는 신중하고도 실용적인 정치적 태도나 정책적 입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에서 ‘보수’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같은 실패한 이념에 집착하는 이념적 교조주의와 정신적 퇴행성을 가리킨다. 그 점에서 중국의 ‘보수’는 한국어로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라 번역해야 의미가 통한다.

 

마오쩌둥식 대약진의 몽상으로 파산 직전까지 갔던 중국의 경제는 지난 40여년간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생명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의 교역을 통해서 성장했다. 그 점을 망각한 시진핑 정권은 자유주의 논의 자체를 금기시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면서 마오쩌둥 시대로의 회귀를 추진하고 있다. 마오쩌둥식 인격 숭배가 그리운지 최첨단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에 시진핑 사상을 선전하며 전 인민을 세뇌하려 한다.

 

놀랍게도 중국 헌법 서언 및 중국공산당 장정에 명기된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 사상”, 줄여서 “시진핑 사상”의 내용을 뜯어보면 고작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장기 집권 전략에 불과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행동 지침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전 세계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를 강조한 국제주의자였다. 이념적으로 계급 해방과 민족 부흥은 서로 모순되며,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는 상충한다. 시진핑 사상은 이론적 정합성, 논리적 설득력, 지적인 창의성, 국제적 호소력, 사상적 진보성 그 어느 것도 전혀 없는 공산당 일당독재, 나아가 최고 영도자 일인 지배의 구시대적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티베트 라싸에서 시진핑 사상 관련 책자를 탐독하는 젊은이들의 모습. 티베트의 젊은이들 역시 취업하기 위해선 시진핑 사상을 암송해야 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tibet.net

 

 

수천 년 축적된 중국 문명이 2020년대에도 고작 마르크스주의, 마오쩌둥 사상, 시진핑 사상에 머물 수 있는가? 중국의 지식인들이 과연 그 정도로 허술할 수 있겠는가? 중국공산당이 이념적 강압을 통해 비판적 지식인의 입을 막고 있을 뿐이다. 중국공산당의 ‘수구 좌파’가 물리력을 장악한 채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해서 인민의 귀와 입을 제약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통치는 개혁개방 초기 자유파의 유연성과 개방성을 상실한 ‘수구 좌파’의 일방적 질주다. 반대 세력도, 비판 여론도 허용하지 않는 낡은 집단의 낡은 이념이 중국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중국의 ‘수구 좌파’를 빼닮은 한국의 ‘수구 좌파’

한국의 정치 현실을 분석할 때도 중국식 분류법이 흔히 사용하는 ‘진보 대 보수’의 이분법보다 정확하다. 대내적으로 ‘탈원전’, ‘소주성’, 4대강 보 해체를 추진하면서 대외적으로 중국에 아부하며 북한에 대해선 무한 유화책을 펼쳤던 문재인 정권이 진보적이었나? 언어적 착란은 민주주의를 교란하는 좌파의 선동술이다. 중국의 현 정권처럼 한국의 전 정권은 ‘수구 좌파’라 해야 옳다.

 

최근 4대강 사업 전후 10년간 16개 보에서 81%의 강물이 훨씬 맑아졌다는 서울대와 국립환경과학원의 공동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보를 건설하고 하천을 준설하여 수량이 대폭 늘어나면 강물의 수질이 개선된다는 사실은 유럽과 미주에서 수백만 개 댐 건설로 익히 확인된 수문학의 기초 상식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진보’ 세력은 4대강 사업이 환경을 파괴하고 나라를 망치는 ‘삽질’이라는 맹신 위에서 온갖 허위 정보와 가짜 뉴스를 퍼뜨려서 ‘4대강 살리기’를 ‘죽이기’로 바꿔 치는 정치적 야바위에 성공했다.

 

 ▲2018년 8월 14일 상시 개방으로 드러난 세종보 주변 금강 바닥. /조선일보 DB

 

 

그 결과 정권을 잡고 나선 진짜로 4대강 보의 해체를 결정하고 대량의 물을 방출하는 실정을 이어갔다. 그뿐인가? ‘탈원전’ 정책으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한국의 원전 산업을 위기로 몰고 가는 기상천외한 난정(亂政)을 펼쳤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 엉터리 정책엔 급제동이 걸렸지만, 같은 오류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선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한다. 대체 지난 정권은 왜 그토록 무모하게 국익에 반하는 비상식적인 정책을 추진했는가?

 

무덤 속 마오쩌둥이 되살아나 그 사태를 본다면 아마도 “득의망형(得意忘形)하여 ‘좌(左)의 오류’를 범했다” 할 듯하다. 정권을 잡자 득의양양해져 제 분수를 망각하고, 변혁의 열정으로 머리까지 더워져서 극단적인 정책을 밀어붙였다는 공산당식 변명이다.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한 후 마오쩌둥은 “공산주의는 절대 진리”라는 스탈린주의의 대전제 위에서 “혁명은 무죄”라는 소전제를 유추한 후, 목적과 동기는 순선했건만 넘치는 혁명적 열정으로 실수를 범했다고 둘러댔다. 동기마저 불순한 ‘우(右)의 오류’와는 달리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목적에서 생겨난 ‘좌의 오류’였으므로 도덕적 잘못은 없다는 말장난이었다.

 

▲2008년 5월 14일 서울시청 앞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umamwiki.org

 

 

얼마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새 정권 출범 후 지난 5년간 이룬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졌다며 한탄했다. 대체 그는 무슨 근거로 스스로 남발했던 그 무모한 정책들이 성취였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소위 ‘진보’ 세력이 차고 있는 진보의 완장 때문이다. 누구든 ‘진보’의 완장을 차면 정치적 선민의식과 도덕적 우월감에 취하게 된다. 대체 누가 그들을 진보라 명명했는가? 그들은 역사의 발전 방향에 역행하는 ‘수구 좌파’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면 새 정권의 첫째 사명은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지난 정권의 과오를 철저히 규명해 교정하는 데 있다. 문재인 정권은 그 중대한 사명을 “적폐 청산”이란 선동적 구호로 표출했다. 그 결과 전 정권의 실세들을 줄줄이 감옥에 보내며 한동안 대중적 인기를 구가했지만, 1987년 이래 최초로 5년 만에 막을 내린 용두사미의 정권이 되었다. 윤석열 정권의 첫 1년은 심히 미약해 보이지만, 지난 정권의 실정을 거울삼아서 조심조심 난국을 헤쳐 나간다면 대기만성의 정권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에 포진한 ‘수구 좌파’가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음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는 이념적 결단과 정치적 용기가 필요하다. <계속>

 

〈77〉“원자력 강국” 토대 닦은 이승만, “탈원전” 몽니 부린 문재인

▲1954년 7월 28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이 연설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선양하며, 공산 침략을 막아준 미국에 진정한 감사를 표하고, 또 미국을 향한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조하여 33차례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인터넷 이승만 기념관 자료실

 

식민 지배를 겪고 침략 전쟁의 폐허를 딛고 “대한민국”이라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기초를 닦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도 하나 없는 나라는 결단코 제대로 된 나라라 할 수가 없다. 세계 모든 문명국에서 국가 지도자의 기념관을 세우는 목적은 누군가를 미화하고 신격화하려는 게 아니라 앞선 세대의 고충과 한계, 노력과 업적, 시행착오와 위기 극복의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효과적으로 전수하기 위함이다.

 

호모 사피엔스, 역사를 학습하여 생존하는 존재

DNA 정보체계 속에 이미 정교하게 집을 짜는 기술이 들어 있는 거미와 달리 커다란 뇌를 가진 인간은 앞선 세대의 경험을 물려받을 수 있는 학습 능력만을 갖추고 이 땅에 태어난다. 호모 사피엔스는 유전자에 본능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최소화하고, 대신 뇌의 용량을 최대화하는 진화 전략을 택했기에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인간의 뇌는 최고의 프로세서를 갖추고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하나도 안 깔린 첨단의 컴퓨터와 같다. 컴퓨터에 소프트웨어가 깔리지 않으면 깡통에 불과하듯 오랜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인간 두뇌는 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인간의 진화는 학습을 생존의 기본 전제로 깔고서 장시간 전개된 신비로운 과정이다.

 

원시의 수렵인은 자식들에게 독버섯을 알아보고, 뼛조각으로 미늘을 만들고, 별자리를 보고서 방향을 찾아가는 생존의 지혜를 전수했다. 그처럼 우리도 선대의 지혜를 물려받아서 다음 세대에게 전수해야 한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기에 체계적인 역사 수업을 받지 않고선 제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체계적인 역사 수업이 이뤄지려면, 전국이 통째로 박물관이 되어도 모자란다.

 

구미 국가는 어느 지방, 어느 소도시를 가봐도 골목골목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영국 옥스퍼드에 가면 사람들이 천 년 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수백 년 된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신다.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산산이 조각난 독일 드레스덴 사람들은 전후 퍼즐 맞추듯 깨진 돌들을 다시 붙여서 유적을 하나하나 재건했다. 과거를 부정하고, 선대를 혐오하고, 전통을 무시하고, 역사를 조롱하는 뿌리 모르는 경박자(輕薄子)의 어리석음을 꿰뚫어 보고 경계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모르는 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재앙이 닥친다. 역사의 험난하고도 복잡다단한 과정을 한 번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에 그들은 앞선 세대가 모두 부패하고, 무능하고, 탐욕스럽고, 타락했다고 단정하는 무학자의 만용을 부린다. 만용의 추태를 일삼으면서도 스스로 얼마나 무지한지, 얼마나 몽매한지 깨닫지도 못한다. 며칠 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향해 “내란 목적 살인죄의 수괴”라며 험구를 놀린 그 신출내기 국회의원은 일례에 불과하다. 더 황당한 사건사례는 바로 1년 전까지 정권을 쥐고 흔들던 “586″ 세력이 이미 5년간 쉴 새 없이 연출했다. 단적인 사례를 하나만 들어보자.

 

▲1954년 8월 2일, 방미 중인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는 뉴욕시의 풍경. /인터넷 이승만 기념관 자료실

 

이승만이 시작한 원전 사업, 586이 파괴!

1954년 참혹한 3년의 전쟁을 치르고 잿더미가 된 신생 국가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원자력 발전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면밀하게 원전 건설을 추진했다. 원자력법 제정, 원자력연구소 설립, 원자력협정 체결,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 한양대,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신설, 연구용 원자로 도입 등등, 다수 국민이 헐벗고 굶주리던 1950년대 이승만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숱한 도전과 난관을 묵묵히 뚫고 나갔다. 그 결과 1978년 대한민국은 최초의 상업 원전 고리 1호기를 건설했고, 2009년에는 한국형 원전 4기를 해외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부터 60년 넘게 꾸준히 단계적으로 쌓아 올린 한국 원자력의 금자탑을 문재인 정권은 “탈원전”의 깃발을 들고 일시에 무너뜨리려 했다. 정권이 교체되어 전 정권의 탈원전 정책엔 급제동이 걸렸지만, 서울대 원자력 정책센터 조사에 따르면, 그 잘못된 정책의 비용은 2030년까지 무려 47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승만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원자력의 큰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문재인은 세계 10대 부국의 통치자가 된 후 국가의 주력 산업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려 했다.

 

지식도, 정보도, 자본도, 인력도 태부족이었던 1950년대의 이승만은 백년대계의 원전 사업을 관철했다. 정반대로 넘치는 지식과 정보, 풍부한 자본과 물자, 최고의 인력과 넓은 해외시장까지 두루 다 갖춘 2010년대의 문재인은 다짜고짜 원자력 산업 기반을 파괴하려 했다. 이승만과 문재인, 두 사람의 리더십엔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최초 원자력 연구소 건물 착공식에서 첫 삽을 뜨고 있다. /인터넷 이승만 기념관

 

성실한 관리자 대신 경박한 선동가가 권력을 잡는 현실

중국 문화대혁명(1966-1976)을 탐구한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맥파쿼(Roderick MacFarquahar, 1930-2019) 교수는 지도자의 유형을 크게 관리자(managers)와 투사(militants)로 나눈다. 어느 나라, 어떤 조직에나 묵묵히 맡은 자리에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임무를 실행하는 관리자들이 있고, 누군가 힘겹게 쌓아 올린 업적을 경박하게 헐뜯고, 교묘하게 왜곡하고, 무도하게 깨부수는 투사와 선동가들도 있다.

 

마오쩌둥은 수억 인민을 쥐락펴락 움직이며 국정을 농단하고 국사를 어지럽힌 희대의 선동가였다. 반면 마오쩌둥이 망친 경제를 뒷수습하다 두 번이나 정치적으로 숙청당하고, 다시 일어나 개혁개방의 시대를 연 덩샤오핑은 전형적인 관리자였다. 물론 대중을 사로잡는 관리자도 있고, 관리 능력이 탁월한 투사도 있겠지만, 대체로 지도자들을 편의상 이념형(ideal type)으로 양분해보면 덩샤오핑 같은 관리자형과 마오쩌둥 같은 투사형으로 나눠볼 수가 있다.

 

정치의 가장 큰 딜레마는 실력 있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관리자들보다, 영악, 교묘, 사특, 무도한 선동가들이 대중적으로 더 큰 인기를 누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다수 대중이 관리자의 신중한 통치력보다 선동가의 부박한 정치술에 현혹되는 현대 민주주의의 부조리한 현실은 사실 새롭지도 않다. 고대 그리스의 소규모 도시국가에서도 민주정은 데마고그(demagogue)의 선동술에 놀아나는 최악의 제도라 여겨졌다.

 

1950년대 이승만이 일으킨 원자력 사업을 2010년대 문재인이 파괴하는 아이러니는 나라를 다스릴 준비도 안 된 자가 인기몰이로 권력을 잡는 선거 민주주의의 치명적 허점을 드러낸다. 관리자는 선전에 약하고, 선동가는 관리 능력이 없다는 현실, 바로 그 점이 현대 민주주의의 최대 약점이다.

 

관리자형 지도자가 쌓아 놓은 업적을 무책임한 선동가들이 무너뜨릴 때, 우리는 과연 무슨 수단으로, 어떤 방법을 써서 그러한 몰상식과 부조리를 막을 수 있는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를 해결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공정한 선거로 정권을 교체한 후 실정을 일삼은 전 정권의 위헌성과 불법성을 철저히 규명해 책임자를 엄정하게 처벌하는 것.

 

물론 그래봐야 무도한 파괴가 초래한 기회비용을 되찾을 수도 없고, 국고 손실도 만회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도자를 뽑을 땐,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선택해야만 하는데, 민주주의 사회에선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무책임한 인간이 대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잡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2017년 6월 19일 고리 원전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연설하는 문재인 전 대통령./연합뉴스

 

마오쩌둥, 김일성을 존경하고 이승만을 혐오하는 좌파의 미망

국가가 전 인민에게 일양적인 역사해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달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다양한 가치관과 역사관을 용인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일수록 더더욱 체계적인 역사 교육이 절실하다. 그래야만 앞선 세대의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차세대에 효과적으로 전수할 수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큰 집의 기둥을 세우듯 자유민주주의 기본 제도를 건립한 인물이었다. 건국 후 2년이 못 돼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 준비한 대규모 침략 전쟁을 당해 절멸의 위기에 빠졌음에도 건국 최초 4년 동안 이승만 정권은 토지 개혁을 완수하고, 선거권을 모든 성인에게 확대하고, 최초 4번의 민주 선거에서 투표율 90%의 국민 참여를 이끌고,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따라 양원제를 도입했다. 전후 초·중·고에선 대대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가르쳤다.

 

그 결과 3·15 부정 선거가 터졌을 땐, 4·19 정치 혁명의 드라마가 연출될 수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자유 진영 신생 국가와 비교해 보라. 대한민국보다 더 극적인 자유화, 민주화의 사례가 있는가? 완강한 신념의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이 한평생 독립운동을 하면서 오매불망 기원했던 바로 그 나라가 오늘날 대한민국이다.

 

돌이켜 보면, 김일성 추종주의자든, 마오쩌둥 숭배자든, 주사파든, 민중파든, 누구나 제멋대로, 함부로 무도하게 “이승만”을 향해 쌍욕을 하고, 증오를 퍼붓고, 돌팔매질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 무절제의 방종이 헌법으로 보장되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야말로 자유와 민주를 확신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위대함을 웅변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초를 닦은 이승만은 기묘하게도 오늘날 민주주의를 망친 주범처럼 무차별 군중 폭력에 짓밟히고 있다. 반면 그와 동시대에 중국과 북한에서 인격신으로 군림하며 전 인민을 노예 삼았던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지금도 화려한 신전에 안치되어 있다.

 

▲“마오쩌둥 기념관”에 안치된 마오쩌둥의 시신. “위대한 영수, 위대한 도사(導師, 스승) 마오쩌둥 주석께서 불후(不朽) 영면하시다.”/공공부문

 

 

바로 그 점에서 지금껏 한국 정부가 초대 대통령 기념관 하나 짓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리어 “이승만 독립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오늘도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신전에는 죽은 그들의 시신이 썩지도 않은 채 전시되어 있음을 상기해 보라. 동아시아 정치사의 웃지 못할 부조리극이다. <계속>

 

〈78〉톈안먼 대학살 34주기, “국가안전”을 외치는 시진핑

▲1989년 5월 14일, 톈안먼 광장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들고 시위하는 청년들. /공공부문

 

인권의 열망은 인종과 민족의 차이를 초월하며, 자유의 가치는 국경과 문화의 장벽을 넘는다. 1989년 4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톈안먼 광장에서 이른바 “베이징의 봄”을 맞은 중국 인민은 전 세계를 향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외쳤다. 세월은 급물살로 흘러 당시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자유와 민주를 외치던 청년들은 이미 중장년에 접어들었다. 시간이 약처럼 상처를 치료해준다지만,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없는 과거사의 기억은 갈수록 더 날카로운 창끝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찌른다.

 

국가의 수도에 탱크 부대를 투입하여 평화롭게 시위하는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바로 그 정권이 30년이 지나서도 한 마디 사과도, 해명도 없이 전체주의적 통제력을 과시하며 오로지 정권 보위를 위해 “국가안전”만을 외치고 있다. 우리는 그런 나라에 대해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정치학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권위주의 정권은 결국 무너지지만,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전체주의 정권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써야만 하나?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중국 밖의 친중주의자들은 과연 또 어떤 억지 논리로 중국공산당의 통치 능력을 칭송할까?

 

묘하게도 자유 진영 국가들의 역사적 과오에는 현미경을 들이대는 자들이 1989년 톈안먼 대학살에 대해선 단 한 마디 비판도 없다. 미국을 비판할 땐 자유, 인권, 민주, 법치 등 보편적 가치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자들이 중국 앞에선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한 채 덮어주고 감싸기에 바쁘다. 자유와 인권은 서구에서 나온 서구적 가치라서 서방 세계를 비판할 때만 유효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의 실상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 실상을 알려주면 과연 그들은 또 어떤 독재 옹호의 궤변을 펼칠까?

 

1989년 6월 3일 밤 톈안먼 대학살의 시작

34년 전 오늘, 중국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베이징 도심에 진입한 소위 “인민 해방군”은 탱크 부대를 앞세우고 시민과 학생들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1989년 6월 4일 아침, 서울 시내버스 라디오 뉴스에서도 톈안먼 대학살의 총성이 울렸다. 톈안먼 현장인 듯 기자는 국제전화로 그 소식을 알렸다. “여러분은 지금 베이징 시내에서 발포된 총성을 듣고 계십니다.”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탕, 탕, 탕!” 1초 정도 간격을 두고 울리는 날카로운 총성이었다. 벌써 34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날 등굣길 붐비는 버스 안에서 들었던 총성은 지금도 문득문득 악몽처럼 떠오른다.

 

▲1989년 6월 3일 인민대회당 앞에서 군인들에 둘러싸인 채 저항하는 시민들. 한 여인의 손목을 잡아끄는 군인을 한 시민이 막아서고 있다. /Jeff Widener/AP

 

 

·····최초의 발포는 1989년 6월 3일 밤 11시쯤 톈안먼 광장에서 서쪽으로 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무시디(木樨地) 다리 부근에서 발생했다. 그날 저녁 8시부터 노동자, 대학생, 시민들은 두 대의 버스로 길을 막고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향해 곤봉을 휘두르며 최루탄을 쏘아댔다. 10시경 버스에 불어 붙어 가스통이 폭발했다.

 

밤 11시쯤, 군인들은 군중을 향해 최초의 실탄 사격을 개시했다. 낮게 다리를 향해 발사된 총알은 여러 시위 군중의 다리와 복부에 맞았다. 순식간에 거리엔 매캐한 화약 내음에 뒤섞인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자정을 기해 장갑차가 버스를 들이받았고, 군인들은 시위대를 무차별 난사했다. 주변 건물 12층에서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보던 청소부가 유탄(流彈)을 맞고 즉사했다. 8층 건물 발코니에 있던 한 여인도 총탄을 맞았다.

 

새벽 다섯시쯤엔 한 사내가 작은 트럭을 몰고 탱크에 부딪히며 폭사했다. 사람들은 달아나는 군인들을 향해 “주구(走狗·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아!”하고 소리쳤다.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했고, 군인들은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격해진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타며 저항했으나 곧 수백 대의 군용 트럭이 마구 몰려들면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1989년 6월 5일, 미국 엘에이 타임스(LA Times) 존 팜프렛 (John Pomfret) 기자 보도 요약).

 

1989년 6월 3일 늦은 밤에서 다음 날 이른 새벽까지 중국의 수도 베이징 톈안먼 광장 부근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군인들이 쏘아대는 AK-47의 총탄에 맞아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탱크에 깔려서 압사하거나 회복 불능으로 다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텐안먼 대학살은 중국공산당의 폭력성과 악마성을 전 세계에 드러내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인민 해방”의 군대가 어떻게 비무장 상태로 평화적 시위를 이어가는 수많은 인민을 전시의 군사 무기로 학살할 수 있는가? 개혁·개방에 나선 지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는 중국공산당이 과연 왜, 어떻게, 무엇을 바라고 그런 무참한 대학살을 자행해야만 했는가?

 

▲1989년 6월 3일 베이징 도심에 투입된 군부대가 학살을 감행하기 직전, 탱크 위에 올라서 시위하는 청년들. /Jeff Widener/AP

 

과연 몇 명이나 죽고, 몇 명이나 다쳤나?

1989년 6월 6일, 국무원 대변인 위안무(袁木, 1927~2018)는 기자회견에서 군대 사상자가 5000명, 군중 사상자 2000명이며, 총사망자는 300명을 넘지 않고, 학생 사망자는 불과 23명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현장 기자들은 그 발표를 믿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은 “괴벨스네, 괴벨스야!”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6월 30일 베이징 시장 천시통(陳希同, 1930~2013)은 학생 36명을 포함한 2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여 명의 “비(非)군인”이 상해를 입었고, 경찰과 군인 부상자는 6000명 이상이라 발표했다. 그때부터 중국 정부는 시위대가 먼저 군인들에게 폭행을 가했고, 수세에 몰린 군인들의 발포는 정당방위였고, 그 결과 군경의 사상자가 민간인 사상자보다 많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중국 정부의 통계수치는 전혀 미덥지 못하다. 요즘도 중국 정부의 발표는 국제적 공신력이 없다. 1989년 톈안먼 광장의 사상자에 관한 중국 측 통계는 절대로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1989년 6월 5일 베이징 시내에 집결한 탱크 부대의 모습. /Jeff Widener/AP

 

 

6월 4일 아침 중국 적십자가 외국 기자단에 발표한 사망자의 수는 2600여 명에 달한다. 베이징의 병원들을 직접 돌며 사망자를 확인한 스위스 대사는 사망자 수를 2700명이라 증언했다. 소련 기자들은 그 수치를 1만명 정도로 파악했다.

 

캐나다의 저명한 역사학자 티모시 브루크(Timothy Brook)가 1990년대 초 현장답사, 목격자 증언, 병원 기록 등을 조사해서 추산한 사상자의 규모는 사망자가 최소 2800여 명, 부상자가 최소 7400여 명이었다. 2017년 10월 기밀 해제된 주중 영국대사 앨런 도널드(Alan Donald)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1989년 베이징의 민간인 희생자가 최소 1만명에 달했다.

 

 ▲2017년 12월 20일 보도된 도널드 주중 영국대사의 극비 보고서. 홍콩 언론 “홍콩(香港) 01” 기자가 영국의 기록보관소에서 이 문서를 찾아내서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hk01.com

 

 

요컨대 톈안먼 대학살의 인명 피해에 관해 지금껏 나온 추측을 보면 최소 300여 명에서 최대 1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중에서 남겨진 병원 기록으로 추산해 봐도 일단 사망자가 3000명이 넘는다고 봐야 타당할 듯하다.

문제는 그 역시 정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당시 상황에서 베이징의 실제 사상자 중에서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처벌이 무서워서 유가족이 몰래 시신을 지방으로 옮겨가서 화장하는 사례도 적잖았고, 정부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해 희생자의 장례를 늦추는 사례도 있었다. 부상자의 경우 수술이나 응급치료가 필요하지 않으면 상처를 입은 채로 숨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병원 기록 자체가 부정확했을 수 있다. 의료진은 경찰에 체포되지 않게 부상자의 신원을 숨겨주려 했으며, 또 정부의 요구에 따라 X-레이 등 의료 정보를 파괴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아울러 위에 제시된 수치들은 모두 사상자를 베이징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 역시 큰 문제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의 중심은 베이징의 톈안먼이었지만, 당시 지방의 대도시에서도 베이징과 연동되어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일례로 쓰촨성 청두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잇따랐다. 베이징과는 며칠 시차를 두고 전개됐던 청두(成都)의 시위는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의 소식이 전해지자 거세게 들불처럼 타올랐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터져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당시 청두에서는 8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미국 외교관들은 10명에서 30명까지라 말하며,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수십 명에서 100명에 달한다. 그 현장에 있었던 미국 미시간대학 인류학자 칼 허터러(Karl Hutterer)는 1989년 6월 23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청두 나름의 톈안먼 학살”이라는 투고문에서 비무장한 시위 군중에 대한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 과정을 고발하고, 300명에서 400명이 곤봉과 칼에 맞아 죽었다고 증언했다. 1989년 6월에 벌어진 “청두 나름의 톈안먼 학살”은 1989년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수도에 국한된 협소한 시각을 넘어서는 대륙적 시각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망각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Amnesia)’의 저자 루이자 림(Louisa Lim)의 탄식처럼 “중국만큼 큰 나라에서 이 말고도 잊힌 희생자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국가안전”을 내걸고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중국공산당

최근 시진핑 정부는 “국가안전”을 더욱 강조하며 감시와 통제의 고삐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지난 5월 30일 시진핑 총서기는 국가안전 회의에서 특히 “정치 안전”의 보위 강화와 인터넷 정보망 및 인공지능의 체계적 통제를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5월 3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면에 그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시진핑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중앙국가안전위원회의 주석직도 겸하고 있다. 중국의 중앙국가안전위원회를 한국의 산업안전공단쯤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중국의 독특한 정치적 맥락에서 “국가안전”의 의미는 전국 전역 전 분야를 망라하는 총체적 안보 및 치안 유지와 직결된다.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정치 안전”, “국토 안전”, “군사 안전”, “경제 안전”, “문화 안전”, “사회 안전”, “인터넷 안전”, “과학기술 안전”, “생태 안전”, “자원 안전”, “핵 안전” 등 전국 전역 전 분야를 망라한다.

 

2015년 국가안전법이 통과된 이래 시진핑 정권은 매해 4월 15일을 “국가안전 교육일”로 선포하고 전 인민에 대한 “안전 교육”을 강화해오고 있다. 국가안전법의 명시적 목적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안전을 유지하고, 인민민주독재의 정권과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보위하고, 인민의 근본 권익을 보호하는” 데에 있다. 결국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유지 및 강화를 위해 전국 전 분야에서 정권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개인, 집단, 세력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감시하고 탄압하겠다는 공공연한 선언이나 다름없다.

 

▲1989년 6월 4일 새벽 탱크 부대가 지나가는 베이징 시내 시창안(西長安)가 류부커우(六部口)에 널브러져 있는 희생자 시신들. /1989년 6월 19일 타임(Time)지 게재.

 

 

시진핑 정권으로선 정부 비판에 대해 중국의 “정치 안전”을 해친다는 죄목을 걸어 금지할 수 있으며, 문화·예술계와 지식계의 자유로운 창작 및 비평 활동은 중국의 “문화 안전”을 해친다는 명분으로 억압할 수가 있다. 국가안전이 결국은 독재 강화 및 전일적 사회 통제의 법적·정치적 명분으로 작용한다.

 

상식적으로 정부가 도덕 재무장을 부르짖는 사회는 도덕이 무너진 사회이고, 정부가 전면에 나서 “국가안전”을 강조하는 사회는 심각하게 안전하지 못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출산율 저하, 청년 실업률 증가, 고령화 가속에 3년간 지속되었던 제로-코비드 정책의 부작용으로 5%의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내놓은 시진핑 정부는 결국 군경에 의한 감시와 통제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다.

 

톈안먼 대학살은 34년 전의 과거가 되었지만, 자유와 인권과 민주의 측면에서 중국공산당은 조금도 진화하지 않았다. 34년 전 “국가안전”을 내걸고 평화롭게 시위하는 인민을 짓밟은 바로 그 정권이 지금도 “국가안전”을 외치며 전체주의적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중국 인민이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작금의 상황에선 중국 밖의 세계시민이 힘을 합쳐서 중국 정부를 규탄하고, 비판하고, 압박해서 견인하는 방법밖엔 달리 묘수가 없을 듯하다. <계속>

 

〈79〉이승만의 ‘독립정신,’ 주사파의 ‘좀비 정신’

▲동유럽에 간 북한의 전쟁고아들.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의 한 장면. /김덕영 감독 제공

 

무도한 정치가들의 비위와 일탈로 정치 혐오증이 커져만 가지만, 정치의 중요성을 부인할 순 없다. 정치는 한 나라의 기본 제도를 짜고, 주요 정책을 세우고, 공공재를 마련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고, 모순과 갈등을 풀고, 미래의 변화에 대비하는 한 사회의 가장 중대한 의사 결정의 과정이다.

 

정치가 잘되면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적 활력이 솟고, 문화가 번창하며, 개인의 삶이 윤택해진다. 정치가 망가지면,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가 죽고, 문화는 비루해지며, 개인의 삶은 비참해진다. 수천 년 경험해 온 인류 역사의 진실이다.

 

지난 70여 년 남북한의 역사는 정치의 중대성을 보여주는 가장 드라마틱한 세계사적 실험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 평론가 자카리아(Fareed Zakaria)가 지적하듯, 남한은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모범 국가이고, 북한은 전 세계에서 가장 처참하게 실패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아이들,” 북한은 과연 왜 실패했나?

지난주 토요일 캐나다 토론토의 한 교회에서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상영회가 열렸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 전쟁”의 촬영을 위해 현재 미주를 순회 중인 김덕영 감독이 상영 후 직접 교민들과 열띤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땅속에 파묻힌 유물처럼 긴 세월 어딘가에 숨어 있던 생생한 삶의 흔적들을 스크린을 통해 직접 확인한 교민들은 예리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 모든 질문을 하나로 묶는 가장 큰 질문은 바로 “북한은 왜 아직도 저 모양 저 꼴인가?”라는 탄식이었다.

 

▲지난 20일, 캐나다 북한인권협의회가 주최한 “김일성의 아이들” 상영회 선전 포스터.

 

 

1950년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최소 5000명에서 최대 1만명에 달하는 전쟁 고아들을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등 동유럽 공산국가들에 위탁 교육의 명목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동구에서 자유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김일성 정권은 7, 8년간 그곳에 살던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을 갑작스럽게 모두 북한으로 다시 소환했다. 동구 현지에서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히고 동유럽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던 아이들은 졸지에 가족 같은 친구들을 잃고서 또 한 번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는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가리아의 시골 노인들은 아직도 어린 시절 북한 아이들과 함께 놀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 기록영화 속에는 한 노인이 카메라 앞에서 북한 아이들에게 배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직접 부르는 장면이 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분이지만, 그 노래를 부를 때 멜로디, 리듬, 가사 모두 녹음처럼 정확하고 또렷하다. 전쟁 고아들이 그 노래를 얼마나 불러댔기에 거의 70년이 지난 오늘도 불가리아 시골 노인의 입에서 그 노랫소리가 흘러나왔을까?

 

지금도 북한에서 국가처럼 널리 불리는 이 노래의 제작 연도는 1947년이다. 그때부터 이미 김일성 정권이 개인 숭배를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고작 만 서른다섯이었다. 3년 후 서른여덟 살 김일성은 스탈린의 허락을 받아 마오쩌둥과 참전 밀약을 맺은 후 6·25전쟁을 일으켰다. 1956년 무렵, 스탈린을 정면으로 비판한 흐루쇼프는 김일성을 불러서 전체주의 노선의 수정을 요구했다. 소련의 압박에 당황한 김일성은 이념적 출구를 찾아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방문했다.

 

“김일성의 아이들”엔 폴란드에 간 김일성이 북한 전쟁 고아들을 찾아가는 장면도 나온다. 아이들이 환영의 뜻으로 미리 쳐놓은 수십 개 종이테이프를 그 퉁퉁한 뱃살로 툭툭 끊으며 거만하게 실실 걸어가는 마흔네 살 김일성의 얼굴엔 속내를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이 가득하다.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전쟁 고아들의 환호성에 들뜬 독재자의 우쭐함인가? 전쟁 고아들을 타국에 떠넘긴 독재자의 계면쩍음인가?

 

▲1956년 동유럽을 방문한 김일성이 북한 전쟁고아들과 현지 어린이들에 둘러싸여 있다. /김덕영 감독 제공

 

 

바로 그해 8월 북한에선 이른바 “종파사건”이 발생했다. 당내의 소련파, 연안파가 개인숭배와 교조주의를 비판하자 김일성 친위 세력이 그들을 숙청한 사건이다. 이후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만들고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북한은 왜 아직도 저 모양 저 꼴일까? 바로 김일성 주체사상이라는 모순투성이 전체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체사상, “노예의 길”

북한의 실패는 주체사상이라는 잘못된 국가 철학에서 비롯됐다. 주체사상은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전제 위에서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갖는다고 설파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 이념일 뿐이다. 주체사상에서 사람이란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집체로서의 인민대중이다. 거기에 개인은 없다. 오로지 전체만 있으며, 그 전체를 이끄는 김일성의 절대권력만 강조된다.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제창한 “영생불멸의 혁명사상”이라고 선전하지만, 주체사상이 엉터리 이론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는 바로 극빈과 억압의 늪에 빠진 오늘날 북한의 현실이다. 게다가 주체사상은 자력갱생과 인민의 의지를 강조한 마오쩌둥 사상의 아류작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마오쩌둥 사상이 27년에 걸친 경제적 실패와 정치적 억압을 불러왔듯, 북한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은 완벽한 경제적 실패와 정치적 억압을 낳았다.

 

▲"모주석은 우리 마음 속의 홍태양!" 인격숭배에서도 김일성은 모택동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서 흉내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공부문

 

이승만 독립정신, “자유의 길”

3.1운동 이후 같은 해 4월 11일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열흘 정도 지난 4월 23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24인이 모여 임시정부 선포문을 발표함으로써 수립된 한성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국체로 삼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같은 해 9월 11일 두 정부가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을 때,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정부를 세운 주체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유, 민주, 공화, 인권, 법치 등 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했다는 점에 있다. 바로 그들이 천하대세를 제대로 내다보고 인류적 보편가치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역할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승만의 정치철학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독립정신이다.

 

독립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자유와 민주, 자립과 개방의 철학이다. 20대의 청년 이승만이 망해가는 나라의 감옥에서 5년 7개월을 갇혀 살며 깊은 사색을 통해 독립정신을 깨달았고, 바로 그 정신이 이후 대한민국 건국의 이념적 뿌리가 되었다.

 

감옥에서 1904년 2월 7일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은 이승만은 그해 2월 19일부터 넉 달 동안 비장한 심정으로 <<독립정신>>을 집필했다. “중등 이상 사람이나 한문깨나 안다는 사람은” 대부분 다 부패하고 타락하여 “대한의 장래가 맨 아래 인민들에게 달려” 있기에 이승만은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을 향해서 순 한글로 이 책을 집필했다. 서문에서 그는 집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지금 우리나라에 독립이 있다 없다 함은 외국이 침범함을 두려워 함도 아니요, 정부에서 보호하지 못함을 염려함도 아니요, 다만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 두 글자가 있지 아니함이 참 걱정이라······”

 

외국의 침범이나 정부의 무능보다 더 큰 문제는 백성이 독립심을 갖지 못하는 상태, 곧 인민의 심성에 뿌리내린 노예근성이라는 지적이다. 인민이 독립심을 갖기 위해선 스스로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강렬한 믿음 위에서만 백성은 권리를 가진 근대적 자유인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청년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근대 구미 문명의 기초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계몽된 개인(enlightened individual)이 놓여 있음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 모두가 계몽된 개인으로 거듭나지 않고선 제대로 된 근대국가가 세워질 수 없음을 내다보았다.

 

▲1899년 한성 감옥에 수감된 이승만 (맨 왼쪽). 중죄수였던 이승만의 몸은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결박당한 상태다. /공공부문

 

 

조선은 한때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30~40%를 넘어섰던 신분제 사회였다.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기층 민중은 신분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정신적 노예근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의지를 발휘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모두 스스로 하늘이 준 인권을 갖고 태어난 자유인임을 자각해야만 국가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몰락한 왕족의 후예로 태어나 유교 경전을 익히며 과거시험을 준비했던 인물이다. 그런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간절한 기도 속에서 내면의 절대자와 직면하고 스스로 독립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인간 이승만이 전통 문명을 넘어서 새로운 인류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극적인 전향(conversion)의 순간이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전향의 체험은 단순한 개인사에 머물 수 없다. 이따금 한 사람의 온전한 전향은 역사적 큰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본질적인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오늘날 남북한의 차이는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1945년 분단 이래 북한의 지도부는 공산주의 명령경제, 폐쇄적인 고립주의, 반민주적 집단주의, 일인 지배 수령유일주의, 공격적 종족주의를 채택해왔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가난한 전체주의 세습 전제 정권으로 남아 있다. 정반대로 남한의 지도부는 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아래 개방적 시장 경제,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 창의적 개인주의, 경쟁적 다원주의, 범인류적 국제 연대를 추구했기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계 10위권의 경제 부국으로 성장해 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오늘날 북한을 만든 악마적 이념이었고,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건전한 국가 철학이었다.

 

▲1953년 3월 9일 미국 타임(Time)지 표지에 실린 이승만. /공공부문

 

 

“슬픈 중국”에서 왜 이승만을 거론하는가 의아해할 수 있겠지만,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서 살고 있는 중국의 인민들이야말로 <<독립정신>>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인간이 독립정신을 상실하면 정신적 좀비로 전락하고 만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이라는 인격신의 정신적 노예가 되어 좀비 떼처럼 날뛰었다.

 

마찬가지로 1980-90년대 대한민국에도 김일성의 홍위병을 자처했던 주사파가 있었다. 중국의 홍위병과 한국의 주사파는 과연 왜 그토록 어리석은 개인숭배의 노예가 되고 말았나? 독립정신을 버린 채 좀비 정신에 빠져 스스로 생각하길 멈췄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독립심을 잃은 개인은 자유와 인권을 빼앗긴 채 전체주의 정권의 노예가 되고 만다. 청년 이승만이 6년 감옥살이에서 깨달은 진리다.

 

베이징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 칭송했던 전직 대통령이 새로 책방을 열었다던데, 그 책방 맨 앞 진열대에 이승만 <<독립정신>>을 쌓아두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반값만 받고 많이 팔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계속>

 

〈80〉위기의 중국 경제, 시진핑의 돌발 행정

▲중국의 구직난. 항저우의 젊은이들이 취업 정보를 보고 있다. /더와이어차이나(thewirechina.com)

 

위기의 중국 경제, “소비자-주도 성장”을 외치는 중공 중앙

얼마 전까지 중국이 머잖아 미국을 제치고 국민총생산량 세계 제1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다는 낙관적 전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지난 몇 년 사이 중국이 중간 소득 함정(middle-income trap)에서 쉽게 탈출할 수 없다는 비관적 예측이 우세해졌다. 최근 이코노미스트를 비롯한 세계 유수 언론에선 이미 중국 경제가 더블딥에 빠졌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방역 봉쇄가 해제된 연초에는 경제적 반등 조짐이 감지됐지만, 4, 5월 들어와선 소매 판매, 투자 총량, 자산 매매 등의 지표가 기대치를 밑돌면서 비관론이 퍼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2분기 중국 경제가 성장률이 제로에 머문다고 예측한다. 무엇보다 도시 청년 실업률이 20%를 넘었다는 사실은 중국 경제의 미래에 깔린 짙은 먹구름을 보여준다. 2018년 대학 졸업생의 75%가 취직을 했는데, 2021년에는 그 수치가 63%로 줄었고, 2023년 봄엔 50%까지 급감했다.

 

그동안 중국의 경제성장은 가계 소비 대신 정부 투자가 이끌었다. 일례로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중국 정부는 4조 위안을 투자해서 경제 성장세를 견지했다. 그때부터 중국 안팎의 경제학자들은 가계 소비를 늘려야만 중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투자 중심의 발전 전략 대신 소비자-주도 발전(consumer-driven development) 모델로 바뀌어야만 중국의 경제성장이 지속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 후 1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중국은 여전히 투자 주도의 성장 모델에 갇혀 있다. 중국 총생산량에서 소비의 비중은 고작 38%로 세계 평균보다 30%나 낮은 상태다. 반면 투자의 비중은 국민총생산의 무려 43%에 달한다. 특히 시진핑 정권은 정부 지출을 더욱 확대하는 성장 전략을 취해 왔다.

 

그렇게 투자 중심의 발전 전략을 추구해왔던 시진핑 정권이 2022년 12월 “소비-주도 성장(consumption-led growth)”을 향후 12년 경제 개발의 핵심 의제로 천명했다. 중국공산당으로선 가계 부문 소비 확대를 확대하겠다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중국 안팎 전문가들 사이에선 중국이 중진국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선 결코 피할 수 없는 최선의 방책이란 평가가 자자했지만, 시진핑 정권이 과연 이 정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 정책 또한 국영기업, 지방정부 등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좌초한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중국 인민은 정부가 제시하는 여러 유인책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중국 인민으로선 시진핑 정권의 정책을 크게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Zongyuan Zoe Liu and Benn Steil, “Xi’s Plan for China’s Economy is Doomed to Fail,” Foreign Affairs, 2023/06/29 참조).

 

180도 정책 전환, 시진핑의 돌발 행정

시진핑 정권은 강력하게 추진하던 주요 정책들을 순식간에 180도 획 뒤집는 기묘한 돌발 행정을 반복해왔다. 일례로 작년 11월 말까지도 시진핑 정권은 “제로-코비드”라는 전대미문의 강력한 방역 봉쇄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중공 기관지들은 날마다 “제로-코비드” 정책을 칭송하면서 강력하게 “인민 전쟁,” “총체전(總體戰),” “”조격전(阻擊战, 저지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다 2022년 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일어나자 시진핑 정권은 3년간 강력하게 추진하던 제로-코비드 정책을 일시에 폐기해버렸다.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급격한 180도 정책 전환이었다.

 

▲2021년 1월 제로-코비드 정책이 실시되던 상하이의 풍경. /포린폴리시인포커스(fpif.org)

 

또 한 사례를 들자면, 2020년부터 시진핑 정권은 “공동부유”의 구호 아래 계속 벌어지는 빈부 격차를 당장 해소하겠다는 듯 중앙 기관지들을 총동원하여 민간의 ‘빅테크’를 조준한 반독점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2021년 가을 중공 중앙위원회 회의에선 여덟 차례나 “공동부유”를 강조했다. 중국 기관지들은 날마다 “공동부유”의 당위성을 선전하고, 그 실현 방법을 논하기에 여념 없었다. 당시 세계 언론들은 청년층과 빈곤층의 저항에 부딪힌 중국공산당이 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을 버리고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 특색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2022년 중반에 이르면, “공동부유”의 구호가 관영매체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국무원 총리 리커창이 2022년 3월 발표한 장문의 보고서를 보면, “공동부유”라는 단어가 단 한 번 등장할 뿐이다. 두 달 후부터 시진핑 정권은 “공동부유” 대신 민간경제의 활성화를 부르짖고 있었다.

 

시진핑 정권은 지금 갈팡질팡 갈지자 행보를 보이는가? “공동부유”를 부르짖다 “소비자-주도 성장”을 외치는 모습을 보면, 좌우 양쪽 끝을 마구 오가는 모양새다. 중국처럼 거대한 나라에서 전 매체를 동원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던 정책들을 하루아침에 설명도 없이 돌연 폐기해버린다면, 정부 정책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유지될 수 없다. 그 점을 모를 리 없음에도 시진핑 정권은 왜 그토록 예측불허의 돌발 행정을 연출하고 있는가?

 

2021년 시진핑이 공동부유를 강조할 때, 해외 언론은 그가 마오쩌둥 노선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경제신문(日本經濟新聞)

 

 

관점에 따라 여러 방식의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일인 지배”의 모순이라는 지적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시진핑 일인의 의지를 빼놓고선, 중국 정부가 3년간 무리하게 제로-코비드 정책을 추진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공동부유”를 외치며 반시장적 정책을 추진하다가 갑자기 180도 방향을 틀어서 “소비자-주도 성장”을 외치는 까닭도 밝힐 수가 없다. 만약 중공 중앙의 돌발 행정이 시진핑 일인의 독단적 결정이었다면, 중국공산당 통치의 시스템적 합리성이 이미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중공 중앙은 현재 경제 관리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일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생명선(生命線)”이라 부르는 대민 선전에서도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프로파간다(propaganda), 중국공산당의 양대축

오늘날 중국공산당 통치는 1) 고도의 경제성장, 2) 강력한 프로파간다, 3) 막강한 물리력을 통해서 유지된다. 중국공산당 권력이 군경의 물리력에 기초하고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군대와 경찰에만 의존해선 중국처럼 큰 나라를 장시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 경제가 무너지고 민심이 떠나가면, 군경 조직 내부에서도 균열이 생겨난다. 정부가 군경의 물리력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면, 지속적 경제성장과 강력한 프로파간다가 필수적이다.

 

경제성장 없이 프로파간다만으로 중국공산당의 지배력은 유지될 수 없다. 프로파간다 없이 경제성장만으로 공산당의 정당성은 확보될 수 없다. 경제성장과 프로파간다는 중국공산당 통치를 유지하는 큰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의 통찰대로 물적 토대로서의 경제력이 한 사회의 기초라면 상부구조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전 건물을 덮어씌운 시멘트에 해당한다.

 

개혁개방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은 중국에서 최소 6억 명 이상을 극빈의 늪에서 구출했다. 경제적으로 그렇게 큰 성과를 냈기에 지난 40여 년간 중국공산당의 통치는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가 있었지만,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이유만으로 일당 독재가 정당화될 순 없다. 그 점에서 중국공산당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중앙선전부의 강력한 선전전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72년 2월 21일, 중국을 방문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차량 행렬을 지켜보는 중국 인민들. 뒤의 표어에는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올바른 중국공산당 만세!'라고 적혀 있다. /공공부분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 중공 중앙의 지도부가 교체되고 경제정책이 변화하자 중국 경제는 비약적 성장세를 이어갔다. 마오쩌둥 시대와 대조되는 개혁·개방 시기의 경제성장은 결국 중국공산당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 점에서 1980년대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30년에 걸친 중국공산당의 인권 유린, 정책 실패 및 부정부패에 대한 역사적 비판이자 정치적 항의였다.

 

1979년 덩샤오핑은 민주장(民主牆) 운동을 진압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 노선,” “인민민주독재,” “중국공산당 영도력,”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한다는 “4항 기본원칙”을 천명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중국공산당이 시작부터 공산당 일당 독재와 마오쩌둥 사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면, 정치적 자기모순이며 이념적 자가당착이다. 그렇게 타협 불가능한 현실과 이념의 모순과 괴리가 있었기에 1980년대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점점 고조되었고, 결국 1989년 덩샤오핑은 탱크 부대를 보내서 톈안먼의 학생과 시민들을 짓밟아야만 했다.

 

그 이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인민의 의식을 전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선전·선동을 더욱 강화했다. 중공 중앙이 “선전과 사상 공작”을 강조하는 근본 이유는 오늘날 중국이 겉으로는 공산주의 이념을 내걸고서 실제로는 시장경제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취하는 자기모순의 일당 독재 국가라는 점에 있다. 그런 모순을 떠안고도 지난 40년 중국공산당이 선전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도의 경제성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늘어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체감 경제의 현실보다 더 강력한 선전은 있을 수가 없다.

 

문제는 갈수록 중국 경제의 성장세가 꺾이면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이다. 만약 시진핑 정권이 작금의 경제위기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중앙선전부의 선전전에 성공하긴 어렵다. 프로파간다로 정권을 허물고 권력을 탈취할 순 있지만, 프로파간다로 무너지는 경제를 되살린 순 없는 이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