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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3/ 2023-01/ 01월 호 ⑬ 지렁이 울음소리 - 06월 호 ⑰ 한국인 얼굴과 내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상림은내고향 2023. 7. 3. 20:10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3/ 월간조선 2023-1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01월 호

⑬ 지렁이 울음소리 

밟히고 또 밟히면서 흙·생명 만드는 지렁이 

⊙ 왜 우리 농촌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었을까?
⊙ 날 키운 흙 떠나는 건 슬픈 게 아냐… 우리 씨가 퍼져야
⊙ 흙은 국토의 개념이고 내 생명의 개념, 민족의 개념
⊙ 흙에 누워서 별을 봤을 때 듣던 소리… 지렁이가 우는 소리
⊙ 역사는 ‘밟은 자’의 역사가 아니라 ‘밟힌 자’의 역사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1년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어령 선생의 저술활동 50년을 기념하는 ‘만남 50년’ 행사가 2009년 11월 27일 오후 5시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렸다. 펜을 쥔 자신의 손 모양을 담은 기념조각을 증정받은 이어령 선생이 활짝 웃고 있다. 사진=조선DB 

 

# 지렁이 울음소리

여러분은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2015년 무렵 강연을 할 때, 지렁이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들려주고 무슨 소리 같으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지요. 풀벌레 울음소리 같다는 사람, 바람소리 같다고 하는 사람, 귀뚜라미 소리라고 하는 사람, 또는 전자기기의 전파음 같다고 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답이 있었지만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뭐라고 딱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윙윙~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잉~잉~ 하는 것 같기도 한 소리거든요. 나이가 아주 많은 시골 어르신에게 들려주었으면 “지렁이 울음소리야”라고 답을 했을지도 모르죠.

옛날 사람들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그 소리를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땅강아지가 우는 소리예요. 과학적으로 발성기관도 조음기관도 없는 지렁이는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지렁이 생김새를 보세요. 어느 한구석이라도 소리 낼 수 있게 생겼나? 그런데도 옛날 사람들은 깊은 땅속에서 지렁이가 운다고 생각했어요. 지렁이는 울지도 않고 소리 낼 방법도 없는데 왜 우리 농촌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었을까요?

▲“저 알 수 없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싶은 간절함… 깊은 땅속 흙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사진=게티이미지

 

저 알 수 없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싶은 간절함… 깊은 땅속 흙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농촌의 저 땅, 혹은 흙 아래에서 울려오는 소리. 숲에서 울려오는 것도,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도 아닌, 땅속에서 나오는 저 소리, 그게 지렁이 울음소리예요.

그런데 땅속에서 소리가 울려 나오려면 사실은 지진밖에 없어요. 땅강아지도 땅 위에서 울었지 땅속에서 울지는 않았을 거거든요. 그런데도 옛날 사람들은 그 땅강아지 소리를 굳이 지렁이의 울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흙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말이죠. 지렁이가 있는 땅은 살아 있는 땅이죠. 그러니까 지렁이가 우는 소리는 흙을 만드는 소리예요.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라는 게 있어요. 그 많은 벌레 중에 왜 하필 지렁이였을까요? 우리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지네도 있고, 흔히 보는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귀뚜라미… 농촌에 가면 벌레가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그 속담에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렁이예요. 이유가 뭘까요?

먹이사슬의 제일 밑바닥이 지렁이예요. 지렁이는 눈도 없어요. 그래도 몸으로, 피부로 빛을 느껴서 그 감각으로 빛을 피해 땅속으로 들어가죠. 지렁이는 암컷, 수컷도 없어요. 한 몸에 암수가 다 있어요. 그리고 지렁이는 모든 동물의 밥이에요. 하늘을 나는 새부터 물속 물고기까지. 우리가 낚시할 때 낚싯밥으로 지렁이를 쓰잖아요. 그러니까 먹이사슬의 제일 하층에 있죠.


아낌없이 주는 지렁이

▲옛날에 멍석 펴놓고 말이야, 흙에 누워서 별을 볼 때 듣던 소리야. 지렁이가 우는 소리야. 저것은 땅강아지 소리 아니야. 내가 들었어. 저 지층(地層) 깊숙한 곳에서 지렁이가 울었다고.” 사진=게티이미지

 

두더지는 땅속에 살아요. 두더지가 왜 굳이 땅속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눈이 보이지 않아서 땅속으로 들어간 건지, 땅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두더지는 영영 땅 위로 못 올라와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약하니까.

땅 위에서 살지 못하는 약한 것들이 새가 되어 하늘 위로 도망쳤어요. 하늘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땅 위에서 살 만큼 강하지도 못한 것들은 땅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땅속 동물은 가장 약한 생명체예요. 그런데 실은 이게 역설적으로 생명력이 가장 센 생명체이기도 해요. 가장 약한 존재지만 가장 생명력이 강한 존재인 거죠.

땅속에 사는 두더지는 지렁이가 없으면 죽습니다. 그 깜깜한 땅속에서 지렁이밖에 먹을 게 없잖아요. 눈이 안 보여서 땅 위로 나갈 수도 없는 두더지가 땅을 파봐야 지렁이 말고 나올 게 뭐가 있어요. 그 두더지가 땅을 파서 지렁이가 나오면 그걸 먹는데 한번에 다 먹지 않아요. 두더지가 지렁이 목장을 운영하는 거죠. 반쯤 먹고 그 목장에 던져두는 거예요. 그러면 지렁이는 알아서 먹힌 부분을 재생해내며 살아나거든요. 세상에 이런 생명력 강한 동물이 또 있을까요? 놀라운 거죠.

지렁이가 동물 먹이로서만 이렇게 이로운가요? 아니에요. 식물들도 지렁이가 없이는 못 삽니다. 가랑잎이 땅으로 떨어졌는데 지렁이가 없으면 그건 그냥 마른 가랑잎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지렁이들은 구멍을 파서 땅 위로 나와 떨어진 가랑잎을 먹어요. 그리고 소화해서 하루에 자기 몸만큼의 배설물을 내놔요. 그게 흙을 만드는 겁니다. 가랑잎을 먹어서 흙을 만들고, 그 흙에서 식물이 자라요.


# 박완서 소설 〈지렁이 울음소리〉

▲등단 40주년이 되던 2010년 1월 박완서 소설가. 사진=조선DB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1973년 《신동아》에 발표한 단편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작품이 있어요. 이 작품은 그 얼마 후 잡지 《문학과 지성》에 재수록됐어요. 비로소 ‘작가’로서 대접받기 시작한 소설인 셈이지요.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욕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승과의 추억이 있습니다. 광복 후 미군정 시절, 국어를 가르친 이태우 선생은 ‘내’가 다니던 여학교 선생이었는데 아니꼬운 것도 부정도 못 보던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수시로 분통(憤痛)을 터트리며 욕을 했어요. 그 시절, 욕할 일이 좀 많았겠어요?

항상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세상사에 참견을 하고 비분강개를 터트리는 사람’이었죠. 그때는 일제가 끝난 직후였으니,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본말을 쓰는 경우가 많았을 거 아니에요. 강점기 때는 조선어 사용을 완전히 금지했으니 일본어가 입에 배었을 테죠. 무의식 중에 일본말을 쓰면 국어선생다운 결벽성으로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어요.

“이 자식들아, 그래 너희는 밸도 없나. 그 지긋지긋한 왜놈의 말을 또 입에 담아봐. 노예근성이 뼛속까지 박힌 놈으로 알고 회초리로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 줄 테니까.”

이렇게 쌍욕을 했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윤동주의 시를 젖은 목소리로 정성스레 낭송해 들려줄 줄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여학생들이 너무너무 존경하는 선생님이었죠. ‘아, 저 사람은 분노가 있구나’ ‘불의(不義) 앞에 막 소리를 치는 용기가 있구나’ 하면서요.


남편이 하는 딱 두 가지

‘나’와 결혼한 남편은 좋은 대학 상대(商大)를 나와 은행 중역을 거쳐 지금은 지점장입니다. 제 시각에 퇴근할 뿐 아니라 술·담배도 못 해요. 대신 단팥이 잔뜩 든 생과자나 찹쌀떡, 시골에서 고아온 눅진한 조청 따위를 즐깁니다. TV 연속극과 쇼를 재미나 합니다. 삶의 모험이나 불굴의 투쟁정신이니 하는 남성성은 먼 나라 이야기죠.

게다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작은 상가건물에서 적지 않은 월세까지 받으니 경제적으로 얼마나 윤택하겠어요. 알토란 같은 삼 남매와 아름답고 순종적인 부인까지 두고 있으니 남부러울 게 없죠.

남편은 안정된 생활을 누리면서 딱 두 가지, 텔레비전 보는 것과 정력제 사는 것만 해요. 이 남편은 텔레비전 볼 때 TV 채널을 돌리는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있대요. 이 소설을 쓴 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리모컨이 없어서 채널을 바꿀 때는 TV 본체 옆에 붙은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바꿔야 했거든요. 작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7에서 9로, 9에서 11로, 이 매혹적인 홀수에서 홀수로 옮아가는 길에 아무리 바빠도 거쳐야 하는 8이나 10이란 공허한 짝수를 용케도 냉큼냉큼 건너뛰어 곧장 7에서 9로, 9에서 11로, 또 11에서 9로, 9에서 7로 전광석화처럼 채널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남편의 기술에 대한 칭찬 같지는 않죠? 심지어 남편은 TV를 보면서 군것질을 즐기죠. 소설에선 이렇게 묘사합니다.

〈맛있게 맛있게 먹으며 입술 언저리를 야금야금 핥으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줄기차게 연속극과 쇼에 재미나 했다. 아니 연속극도 맛있어하더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그가 흡사 연속극도 단팥과 함께 먹고 있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실상 두뇌나 심장이 전연 가담하지 않은 즐거움의 표정이란 음식을 맛있어하는 표정과 얼마나 닮은 것일까.〉


‘그럴 수는 없어. 그것만은 참을 수 없어’

‘나’는 남편과 함께 다디단 간식, TV 연속극을 즐기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TV 연속극도 단것도 안 좋아했다. 나는 단것이 위장에 해롭다고 믿고 있었고, TV는 바보상자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고, 연속극이 퇴폐적 단세포적 어쩌고 저쩌고 하며, 자못 고상하고도 혹독하게 매도되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즐겼다.〉

그러니, 남편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는 짐작할 수 있겠죠? ‘나’를 더욱 외롭고 슬프게 만드는 건 이 현대에 욕을 할 줄 모르는, 아니 욕할 생각이 없는 남편이었죠. 타성에 젖어 자신의 행과 불행을 굳이 따져볼 일이 없었던 화자를 깨운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맏아들이에요. 느닷없이 이 아들이 미술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어처구니없어합니다. 아들에게 안정된 생활의 행복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며 아들을 타이릅니다.

〈“서울상대를 가야 해. 뭐니뭐니 해도 생활 안정이 제일이니라. 봐라 지금의 네 애비를. 뭬 그릴 게 있나. 뭬 걱정인가.”〉

이 말을 할 때 남편 입가에 떠오르는 득의와 회심의 미소가 싫고 징그러워 아들이 남편의 그 말에 반기를 들어주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뜻밖에도 다소곳이 아버지의 말을 듣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화자의 내부에서 별안간 힘찬 반란이 일어요. ‘아니지, 당신은 그렇게 살아도 좋지만 내 아들은 당신처럼 살아서는 안 돼, 그건 안 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럴 수는 없어. 그것만은 참을 수 없어’ 하는 격렬한 외침이, 심한 딸꾹질처럼 오장육부에 경련을 일으키며 치솟아요. 부유하고 평화로운 현재의 생활에 감사하고 속물처럼 살아가지만 화자가 여학생 시절에 생각했던 생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으니까요.
 

 

여학생 시절의 우상, ‘욕쟁이’ 이 선생

▲“국어를 가르친 이태우 선생은 여학교 선생이었는데 아니꼬운 것도 부정도 못 보던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50여 년 전 교복 차림에 단정한 머리를 한 여중생들 모습이다. 사진=조선DB

 

겉으로만 볼 때 ‘나’는 특별한 고민도 없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고 하니 취미로 조화(造花) 만들기를 익혀요. 이 조화를 만들어 남편에게 자랑하니 남편이 “와! 당신 이런 재주가 있었어? 이제 꽃 안 사 와도 되겠네. 비싼 생화를 왜 사 오냐? 시드는 거. 이거 갖다 놓으면 좋은데”라고 말해요. 남편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남대문 꽃시장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시드는 꽃, 살아 있는 꽃, 흙에서 생성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는 꽃을 가지고 싶은 거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행복이라는 것은 화자가 만든 것과 같은 조화예요. 아무런 변화도 없이 항상 행복하지만, 화자는 시들어버릴지언정 살아 있는 생명의 흙에서 나온 꽃과 같은 행복을 가지고 싶은 거죠.

이런 와중에 화자는 우연히 여학생 시절의 ‘욕쟁이’ 이 선생을 다방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는 ‘몰라보게 늙었을 뿐 아니라 몰라보게 점잖아지기까지’ 했어요. 심지어 ‘탁하고 처진 소리로 길길길길길 오래 웃기’까지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가 가슴속에 여전히 분통(憤痛)을, 욕을 간직하고 있을 터라고 기대해요.

이 조화와 같은 현대의 행복에 대해 그가 퍼부어주는 욕을 들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생각하죠. 그래서 화자는 그가 욕쟁이의 본색을 감추고 있을 뿐, 자극하면 다시 그 본색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지만 ‘쉬 개발될 것 같지 않은 변두리의 복덕방 영감 같아’ 보이는 그는 쉬이 욕쟁이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렇게도 혐오했던 일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에 섞어 쓰는 모습까지도 보여요. 때문에 ‘나’는 구정물을 뒤집어쓴 듯이 불쾌해집니다. 비단 ‘길길길’ 하는 웃음소리만이 아니라 ‘오야지’니 ‘요오시’니 ‘기마에’니 ‘앗싸리’니 ‘쇼부’니 하는 소리를 이 선생의 입에서 듣다니 기가 막히는 거죠.


비명이라도, 신음이라도…

그래서 ‘나’는 ‘그를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며 진저리를 치면서도 며칠 뒤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어떻게든 그를 다시 욕쟁이로 만들고 말 테다’ 하는 결심으로요.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알아갑니다. 욕쟁이였던 이 선생은 이제 현대사회의 평범하면서도 비열한 소시민이 되었어요. 이전에 그가 그렇게도 욕했던 그런 사람이 된 거죠. ‘나’는 차츰 그에게서 욕을 짜내기는 건포도에서 포도즙을 짜내기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 선생으로부터 욕은 단념했지만 비명이라도, 신음이라도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기름 안 친 기계의 운동처럼 고단하고 힘들고 쇳소리가 나게 지긋지긋한’ 사귐이 이어지던 어느 날, 이 선생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다방에는 이 선생 대신 편지 한 장이 남겨져 있습니다.

편지에는 뜻밖에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요. ‘제자였던 숙이를 만난 이후, 사기성을 띤 일을 해야만 하는데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한탄한다’고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 선생은 아마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자의 도장을 이용해 사기를 쳤을 텐데, ‘옛 스승의 기개(氣槪)를 기대하는 제자의 눈빛 때문에 더는 그 일이 하기 싫어졌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예전의 그 욕쟁이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요새는 그와 같은 고전적 욕쟁이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는 것이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선생은 숙이에 대해 은근한 복수심마저 내비쳐요. ‘유부녀가 아무리 선생이라도 찾아다니는 건 아니야. 나는 너와 고궁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어. 그 사진을 가지고 나는 여관방에서 연탄불을 피우든지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버릴 거야. 그러면 숙이는 난처해지겠지, 내가 난처했던 것처럼. 내 죽음이 신문에 나면 너의 남편과 함께하는 편안한 생활도 끝장이 날 거야.’ 그 편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니 나를 내버려 둬. 나를 숙이의 기대로부터 풀어줘. 나에게 욕을 조르지 말아줘. 날 그만 쥐어짜. 제발 날 살려줘.’

 

“날 놔줘” “제발 날 살려줘”

편지를 받은 ‘나’는 실제로 그가 죽었든 아니든 어차피 ‘나’에게 있어 그는 죽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허탈해지는 거예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도시의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그 욕쟁이는 변함없이 생존해서 시원하게 세상을 향해 욕을 내뱉는 것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도시의 그 많은 사람과 똑같아지려다가 ‘나’를 보고 갈등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떼어놓는 편지만을 남기고 도망쳐 버린 겁니다.

일요일 아침, 화자는 남편이 신문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이 선생의 협박대로 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남편을 그렇게도 지겨워했던 ‘나’는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낍니다. 자유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뜻밖에 남편은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던 것이 아니라 웃느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요. 메릴린 먼로가 시도 썼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그렇게도 웃긴 일이었던 거죠.

“그렇지만 먼로가 시를 썼다니 사람 웃기는군. 그렇게나 몸뚱이가 기막히게 좋은 여자가 뭬 답답해 시를 썼겠어.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협잡이 뻔하지.”

남편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내를 봅니다. ‘마치 그 여자의 몸뚱이를 구석구석 싫도록 주물러댄 경험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방면에 도통한 듯한 음탕하고 권태롭고 느글느글한 웃음을 흘리면서’요. 그런 남편에 대해 ‘나’는 이 선생의 비명을 생각합니다. 소설 속 한 구절입니다.

〈“날 놔줘” “제발 날 살려줘” 그건 어떤 소리 빛깔을 하고 있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 같았을까 몰라. 그 신음을 육성으로 들어두지 못한 건 참 분하다.〉

여기에서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게 뭐였을까요. 생태계 피라미드의 제일 하위에 있지만 거기에서 생명이 나오는 거잖아요. 먹이사슬의 제일 밑바닥에 있는 지렁이. 그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해석’해낼 수 있다면 그건 이 선생의 “살려줘”라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을까요?


흙이 운다, 죽어가는 흙이 운다…

‘나’는 그 소리, 지렁이 울음소리를 못 들은 것이 한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이,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내가 행복하다, 이 문명이라는 것은 참 편한 것이구나, 이것이 내가 추구하던 삶’이라며 맹목적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밤 그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는 겁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이놈한테 뜯기고 저놈한테 뜯기면서도 열심히 생명의 흙을 빚는 어둠의 영웅들의 소리를요.

마치 고장 난 전자제품에서 들리는 지잉~, 윙윙~ 하는 것 같은 그 소리, 실상은 땅강아지의 울음소리일 뿐인데 사람들은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인지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흙이 운다, 죽어가는 흙이 운다, 살아 있는 흙의 생명이 운다…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참 한국 사람들 대단하지요. 지렁이는 한자어 지룡(地龍)에서 파생된 말이에요. 그 하찮아 보이는 지렁이를, 햇빛 나면 그냥 말라비틀어질 뿐인 그 약한 지렁이를 저것은 지룡이다, 땅속의 용(龍)이다 생각했어요. 용이라는 게 뭐예요. 중국에서는 황제를 상징할 만큼 신령스러운 동물, 하늘을 날아다니고 자연현상을 관장하는 존재 아닙니까. 자연현상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예요. 그러니까 용은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도 소중한 존재지요. 결국 지렁이를 알아주는 사람은 한국인, 그중에서도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이에요.


# 지구의 사과껍질에 사는 우리와 지렁이

처음에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단층을 보면 그 가장 표면에 흙이 있어요. 사과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그 사과껍질 위에서 사는 거예요. 전체 지구에서 흙은 그 사과의 껍질만 한 두께와 무게밖에 차지하지 않습니다. 이 껍질, 바이오 스피어(Biosphere·생태계로서의 지구)라고 해서 모든 생물이 다 살고 있는데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지구 전체 무게의 10억 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지구 무게 중에 생물의 무게는 흙먼지만큼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현재 밝혀진 바로는 이 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있는 행성은 지구밖에 없고, 그 지구 전체의 10억 분의 1도 안 되는 게 생명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하나는 얼마나 놀라운 존재입니까. 각기 다 다르고 가치 있는 생명이에요. 우스운 것 같지만 우주에서 하나하나 들어가 보세요. 우주의 지구, 지구의 10억 분의 1, 그 어마어마한 확률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확률의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누가 만들어요? 바로 지렁이입니다. 지렁이가 흙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어요. 모든 생명체는 먹이사슬에 묶여 나고 또 죽어요. 흙에서 생물이 나와 살아가다 다시 죽으면 지렁이가 나서서 우리를 분해시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지요. 흙으로 분해시켜야 거기서 또 생명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흙이란 무엇인가. 바이오 스피어가 무엇인가. ‘신토불이(身土不二)’예요. 몸이 바로 흙입니다. 흙은 나와 같아요. 내가 농협에 만들어준 말이 하나 있어요. ‘농도불이(農都不二)’. 신토불이만 하면 도시 사람들은 전부 흙이 뭔지도 모르는데 공허한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농도가 불이. ‘농촌과 도시가 하나’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줘야죠. 이 아스팔트와 돌멩이로 흙을 끝없이 질식시키고 죽이는 도시 사람도 구해달라는 거죠. 신토불이는 본래 불교용어고요.


세계에서 채소를 가장 많이 먹는 한국인

이유가 있어요. 전 세계에서 한국 사람들이 채소를 가장 많이 먹습니다. 참 놀라운 거예요. 김치니 뭐니 우리 밑반찬이 전부 채소거든요. 최근 신문을 보니 미국 뉴욕의 동네마트 신선식품 진열대에 ‘KIMCHI’라고 쓰인 제품들이 진열돼 있더군요. 코로나19가 몰고 온 발효식품 재평가로 ‘진짜 한국식 김치’를 맛보고 싶어 하는 현지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고 해요.

연간 대미(對美) 김치 수출액이 지난 2011년 280만 달러에서 2018년 900만 달러, 2020년 2300만 달러, 2021년 2820만 달러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요. 김치 수출 대상 국가도 10년 전인 2012년 기준 62개국에서 2022년 89개국으로 확대됐다고 하지요.

미국 캘리포니아, 버지니아, 뉴욕, 워싱턴DC 등은 11월 22일을 ‘김치의 날(kimchi day)’로 제정했어요. 그날은 모든 주민이 김치를 의무적으로 먹는 날일까요? 그렇지 않을 테지만 신기해요. 또 미시간, 메릴랜드 등 5개 주에서도 ‘김치의 날’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김치가 한류(韓流) 덕을 보는지, 한류가 김치 덕을 보는지 모르겠지만, 김치는 더는 한국만의 전통음식이 아닙니다. 세계인의 음식이 되었어요.


# 디아스포라, 전 세계로 우리 씨를 파종하는 것

▲진주 남강과 촉석루. 198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조선DB

 

여러분이 도시에 살든 어촌에 살든, 사는 곳이 어디라 해도 흙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흙의 생명을 키워야 해요. 외세의 침략에 쫓기면서도 의연하게 길을 걸어갔던 할머니의 뒷모습, 그걸 내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를 쓰고도 한 10년 뒤에 알게 되었어요. 그 앎이 《생명 자본주의》(2014)를 쓰게 만들었죠.

한국인, 참 지지리도 못났어요. 오죽했으면 중국 한번 쳐들어가지 못하고 원(元)나라에, 청(淸)나라에 그렇게 시달렸을까요? 허구한 날, 왜구에게 시달려 어쩜 이리 지지리도 못났나 했는데, 광복 후 70여 년 동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서구의 자유시장·민주주의 모델을 가지고 이룩한 부(富)에 흙의 마음, 그 흙의 의미를 깨달으면 서양 사람이 못해낸 것, 우리 조상이 이룩하지 못한 것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내 민족만 앞세우고, “난 흙을 떠나선 살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 붙박이로 남아야 해”라고 말해선 곤란해요. 흙의 마음이 글로벌해져야죠.

“내 고향 난 못 떠나!”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천리길이 뭐 그렇게 멀다고요. 고작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거리예요. 그 정도 가지고 “내 어이 왔던고~”가 뭡니까.

남들은 조랑말 타고 전 세계를 누볐어요. 칭기즈칸 보세요. 몽골 초원에서 시작해 대륙을 건너 유럽까지 쳐들어가는데 우리는 겨우 진주 정도 가서 고향 떠났다고 “내 어이 왔던고~” 하고 노래하는 식이죠. 칭기즈칸처럼 정복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 땅을 정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 땅에 뿌리내릴 수 있어요.

나를 키운 고향 흙을 떠나야 하는 디아스포라가 슬픈 게 아닙니다. 우리 씨가 퍼져야 해요. 전 세계로 파종을 하는 것이 디아스포라입니다. 생명을 뿌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씨는 흙이 있어야 싹이 납니다. 콘크리트에선 씨가 나지 않아요. ‘붉은 산’을 간직해야 합니다.
 

 

대중가요 ‘진주라 천리길’

경남 진주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 ‘진주라 천리길’은 1941년에 발표되었다. 조명암(趙鳴岩) 작사, 이면상(李冕相) 작곡, 이규남(李圭南)이 노래했다.

대중음악 평론가 이동순에 따르면, 충남 연기 출신의 이규남은 식민지 시절 일본 유학비를 벌기 위해 진주의 재래시장에서 유성기 음반과 바늘을 팔았다고 한다. 작곡가 이면상이 진주에 갔다가 이 광경을 보았고, 서울에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작사가 조명암에게 들려주었다. 깊은 감동을 느낀 조명암은 즉시 노랫말을 지었고, 이면상이 곡을 붙였다. 이 곡을 들어보면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군국주의 체제의 시달림 속에서 허덕이는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눈물을 느낄 수 있다.

이면상은 ‘사랑도 팔자’ ‘네가 좋더라’와 같은 대중가요도 여러 곡 남겼다. 1946년 초 월북해 북한 음악가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북한 최고의 작곡가가 되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조명암 역시 대중가요 ‘신라의 달밤’ ‘서귀포 칠십리’ ‘낙화유수’ 등을 작사했는데 그 역시 월북해 북한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문예총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가수 이규남(본명 임헌익)은 성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꾼 인물이다. 처음엔 그 역시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족들의 증언과 당시 정황에 의해 납북으로 밝혀졌다. 이 곡은 분단 이후 줄곧 금지곡 목록에 들었다가 훗날 해금되었다. ‘진주라 천리길’의 노랫말은 이렇다.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서장대에 찬바람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느냐.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달도 밝은 남강가에/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아~ 불러보던 옛 노래는/ 지금 어데 사라졌나.’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장소, 찜질방

요즘은 시들시들해졌지만 몇 해 전만 해도 다들 황토방이나 찜질방을 찾아갔어요. 중년 주부들이 우스갯소리로 “남편 없이는 사는데 찜질방 없으면 못 산다”고 했을 정도예요.

왜 우리가 전 세계에 없는 찜질방, 황토방을 만들었을까요?

왜 ‘방 문화’를 만들었어요? 공(公)도 아니고 사(私)도 아니고 참 특이한 공간이거든요. 다방, 요즘엔 커피숍, 모두 길거리와 마찬가지인 공적 장소예요. 호텔 이런 곳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사적 공간이죠. 그런데 그 중간 지점이 찜질방입니다.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장소예요.

찜질방에선 연인이 이마를 맞대고 잠을 자도 아무렇지 않아요. 손을 잡고 있어도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이가 없지요. 엄마가 딸이 밤늦도록 집에 오지 않자 전화를 겁니다.

“너 어디야!”

소리치다가도 “나, 찜질방인데…” 하면 “응, 알았어” 하고 전화를 끊어요. 그 황토방, 찜질방이 참 묘한 문화예요. 공도 아니고 사도 아닌 중간 문화인데, 뭔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수 있는 곳이죠. 중간 영역이에요.

그러니까 뭔가 고민이 있고 맘속에 맺힌 게 있어 풀고 싶을 때 황토방을 갑니다. 아스팔트에 갇혀 고향을 잃어버렸을 때 흙의 생명력, 자연의 치유력을 얻는 곳이 황토방입니다. 이런 공간을 가진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지금은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한국인이 해외에서 찜질방을 많이 만들었지만 말이에요.


# 에티오피아 왕 이야기

▲1968년 5월 18일 오전 11시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내한했다. 사진은 김포공항 터미널 2층 로비에 마련된 환영식장에서 에티오피아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경례를 하고 있는 셀라시에 황제. 사진=조선DB

 

한 발 한 발 흙을 디디며 살아가는 삶에, 우리 국토, 우리 땅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가 유럽의 식민지가 될 때 유일하게 자주성을 지킨 나라입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가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해 종단하고 횡단하며 유린할 때, 그들 중 누군가는 에티오피아에도 갔어요. 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땅을 재고 항구를 측량할 때 에티오피아의 국민과 왕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둡니다. 아니, 내버려 둔 정도가 아니라 환대를 해요. 먹을 것도 주고, 측량도 도와주고. 심지어 그들이 측량을 마치고 떠날 때엔 잔치를 열어주고 국왕의 근위병을 호위로 붙여 항구까지 데려다줍니다. 그런데 그 유럽 사람들이 막 배에 타려고 하는데 뒤따라온 근위병들이 신고 있던 구두를 벗겨 구두에 묻은 흙을 조심스럽게 털고 깨끗이 닦아낸 후 다시 건네주었습니다. 영문을 몰라하는 서양의 탐험가들에게 근위병들은 황제의 말이라며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대들은 멀리 떨어진 강한 나라에서 왔다. 그대들은 에티오피아가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대들의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땅의 흙은 우리에게 소중하다. 우리는 그 흙에 씨앗을 심고 우리의 죽은 자들을 묻는다. 우리는 피곤할 때 그 위에 누워 쉬고 들판에서 우리의 소 떼에게 풀을 먹인다. 그대들이 계곡에서 산으로, 평야에서 숲으로 걸어 다녔던 바로 그 오솔길들은 우리 조상의 발과 우리 어린이들의 발로 만들어진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흙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그대들을 환대했으며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흙을 단 한 알갱이도 줄 수 없다.”

이것이 에티오피아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있었기에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에 의해 아프리카 대륙이 유린될 때 유일하게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흙은 국토의 개념이고 내 생명의 개념이고 민족의 개념입니다. 여러분은 이 흙의 의미를, 앞으로 우주만큼 넓어지는 보편적 인류의 꿈과 접목시켜야 합니다.


# 역사는 밟힌 자의 역사

누군가 여러분에게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렁이처럼 한 번 살아볼래”라고 말해보세요. 사실, 지렁이처럼 살면 밟힙니다.

우리 역사는 ‘밟은 자’의 역사가 아니라 ‘밟힌 자’의 역사예요.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밟힌 지렁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초목이 나오고 어떻게 나뭇잎이 다시 되살아나는 봄이 옵니까? 우리의 모든 역사는 ‘밟힌 자들의 역사’이기에 영웅이 생겨나고 지도자가 있어온 것이 아니겠어요? 그게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많은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암흑의 영웅, 무명의 영웅, 밟히면 꿈틀 한다는 먹이사슬 최하위에 있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어야 합니다. 저 땅속에서 들리는, 사실은 울지도 못하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었다고 고집해야 해요. 실제로는 땅강아지의 울음이라고 해도 그걸 지렁이 울음이라고 해야 합니다.

 

도시 사람들은 그걸 들을 기회가 없으니 녹음해서 가끔 들으세요. 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찜질방에 지렁이 울음소리를 기증해 사람들이 거기 멍석에 누워 쉬고 있을 때 들려주는 거죠.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아, 이게 무슨 소리지?” 하지 않겠어요? 그럼 나이 든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옛날에 멍석 펴놓고 말이야, 흙에 누워서 별을 볼 때 듣던 소리야. 지렁이가 우는 소리야. 저것은 땅강아지 소리 아니야. 내가 들었어. 저 지층(地層) 깊숙한 곳에서 지렁이가 울었다고. 과학자들은 지렁이가 무슨 소리를 내느냐고 역정을 내겠지만 지렁이는 분명히 울어. 내가 들었어.”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이렇게만 말할 수 있어도 이 ‘한국인 이야기’가 헛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걱정을 안 해도 돼요. 지렁이는 ‘밟히더라도’ 무기물을 유기물로 만드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러니까 흙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억하면서 미래를 만드는 세대가 될 수 있어요.


恨을 푸는 지렁이 울음소리

생명, 생명력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물론 부모로부터 오지요. 그런데 그 부모의 생명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흙에서 왔지요. 지렁이가 애쓴 결과로, 우리는 죽더라도 우리의 몸이 썩어 흙으로 돌아가 다시 꽃이 되고 작은 이파리가 되어 자자손손 순환하는 것을 생각하면 죽음도 별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고, 그래서 도망치고 싶을 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사방에 퍼진 겁니다. 그건 쫓겨난 것이 아니에요. 파종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쁜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애국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속도 편하고 여러분도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껏 추구해왔고 또 끝없이 추구해가야 할 것은 지렁이 울음 같은 삶이에요. 밟히고 또 밟히면서 흙을 만들고 생명을 만드는, 그래서 먹이사슬의 최하위가 최상의 것으로 올라가 한을 푸는 지렁이 울음 말입니다.

어떤 색깔인지 몰라도 소설 속 ‘이태우 선생’처럼, 그땐 욕하던 이유를 몰랐지만, 욕쟁이가 한을 풀어서는 안 되던 그때가 어쩌면 우리가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요? 욕쟁이의 한이야말로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지렁이 울음소리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다시 말합니다. 한밤에 눈 뜨거든 귀를 기울여보세요. 지렁이 울음소리가 들릴 겁니다. 그건 분명 아파트 층간 소음이 아닐 겁니다.

“눈도 다리도 없고 소리 낼 목청도 없다는데 어떻게 지렁이가 울음소리를 낸다고 합니까?”라고 따지지 마세요. 그 소리는 우리 할머니가 밭에서 묻혀온 흙냄새, 혹은 어머니의 친정집 시골 뒷마당에 묻어둔 어린 시절 우리의 생명 소리입니다.⊙
 

 

02월 호 

이어령의 아내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

“이어령은 시인과 수학자가 동거하는 희귀한 인물”

⊙ “‘善終’이란 말이 참 좋아. 집에서 통증이 잦아든 시간에 考終命을 하셔서 참 다행”
⊙ “《이어령전집》 1차분 24권 1주기 안에 나와… 이어령 서재는 가을에나 공개할 수 있을 듯”
⊙ “이 선생이 그렇게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간 딸과 손주) 영향”
⊙ “《문학사상》 주간실은 정말로 아늑한 사랑방… 《문학사상》을 시작하니 집에 오는 손님이 없어지더라”
⊙ “할 수 있다면 죽어 재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고 싶어”
⊙ “神이, 절대 神이 필요가 꼭 있을까? ‘착한 섭리’는 있다고 믿고 늘 감사해”
⊙ “남편 위해 비각 세워드리고 싶어”

姜仁淑
1933년생. 서울대 국문과·숙명여대 대학원 졸업(국문학 박사) / 1965년 《현대문학》 통해 평론가로 등단. 건국대 교수 역임 / 저서로 《한국현대작가론》(1971), 《자연주의 문학론I·II》(1987, 1991), 《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2006), 에세이집으로 《아버지와의 만남》(2004), 《민아이야기》(2016), 《어느 인문학자의 6·25》(2017), 옮긴 책으로는 게오르규의 《25시》(1975), 《키랄렛의 학살》(1974)과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1977) 등 다수다. 現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영인문학관 관장

▲사진=조준우

 

2월 26일이면 ‘우리 시대의 지성(知性)’으로 불리던 이어령(李御寧·1933~2022년) 선생이 영면(永眠)한 지 1년이 된다. 아내 강인숙(姜仁淑·90) 영인문학관 관장(건국대 명예교수)이 《글로 지은 집》(열림원)이라는 책을 최근 펴냈다.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이 최근 에세이집 《글로 지은 집》(열림원)을 펴냈다.

 

책의 부제가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다. 집 이야기이기도 하고 서재 이야기이기도 하다. 살아오며 두 사람은 각자의 서재가 필요했다. 두 분 다 대학교수이고 평생 글을 써왔으니 말이다.

서재를 마련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정성, 돈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지금의 ‘영인문학관’(서울 평창동)이 완성되었다. ‘영인’은 이어령과 강인숙에서 한 자씩 가져온 말이다.

1년 전 선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서재를 정리했다고 전한다. 남겨진 책들에 대한 마지막 인사라고 할까. 기자는 지난 1월 3일 이어령 선생의 서재(영인문학관 위층)에서 강인숙 관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 관장의 말이다.

“우리 부부에게 집을 마련하기 위해 보낸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나만을 위한 방’ ‘나만이 있을 수 있는 방’을 얻는 과정이었어요. 보통 작가들은 창작촌 같은 데서 글을 쓰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됐어요. 강의 준비, 평론, 논문 등은 책을 많이 펼쳐놓고 써야 하는 글이잖아요. 그러니 밖에서 쓰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는 날마다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 있고, 난 나대로 아이들을 기르며 짬짬이 글을 써야 했기에 더 집 밖에 나가 쓸 수 없었죠.”


서재, 차곡차곡 쌓인 知的 연대기

 ▲서울 종로구 평창동 이어령 선생의 서재. 가을쯤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사진=조준우 기자

 

 이어령 선생은 논문이나 평론을 쓸 때 방바닥에 참고문헌을 일목요연하게 세워놓고 쓰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서재가 작으면 안 되었다. 서재는 작업장이기 때문에 작업량이 증가하면서 공간도 커져야 했다. 부부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 가장 중요한 과업이 글 쓰는 방, 서재를 갖는 일이었고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두 사람의 지적(知的)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내 집 마련을 위해 살잖아요. 일본에서는 한 남자가 집을 사고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집을 마련하느라 자기 인생이 다 지나가버렸으니까….”

― 우리도 그렇잖아요.
“거기(일본)는 우리보다 한결 더 어렵거든요. 정착할 장소를 찾는 문제, 그 문제가 모든 이의 문제이면서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니까….”

― 선생이 돌아가신 지 1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이 선생의 자료를 정리하기도 하고, 내 자료를 정리하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6개월간 사람이 와서 ‘이어령 자료 아카이빙’을 만들고 있었고요.

3년은 걸려야 정리가 다 될 것 같아요. 3년이란 시한이 있으니 그 안에 빨리 정리를 해야죠.”

 

― 강 관장님의 건강은 어떠세요.
“일하다 앓다 쉬다 하면서 지내요. 이 선생을 위해 무언가 할 일이 많았고, 그 일들이 위로가 되었어요. 무언가 해줄 일이 있다는 게 고마웠죠.

아직은 ‘콤퓨타(컴퓨터)’를 할 수 있습니다. 걸을 수도 있으니 감사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그걸 못 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 언론 보도를 보니, 이어령 서재가 일반인에게 공개된다던데 언제쯤입니까.
“가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방에 있는 책 정리하는 데만 1년이 걸렸어요. 녹음해놓은 자료가 많고, ‘콤퓨타’ 내용물도 채록해야 하고, 쓰다 만 원고도 많아서 정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메모한 것도 끝없이 많고요. 아직 디지털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업을 했죠. 디지털은 아들들이 하기로 하고 나는 아날로그만 하기로요. 다 정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이어령전집》과 《강인숙전집》 출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강인숙 관장. 뒷 배경으로 이어령 선생의 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가 보인다. 사진=조선DB

 

만약 ‘영혼의 집’이 책이라면 선생의 영혼이 전집(全集)이란 새집으로 단장돼 조만간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7년 전부터 준비해온 것이라고 한다.

“《이어령전집》은 1차분 24권이 1주기(周忌) 안에 나옵니다.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준비한 것이어서 거의 마무리됐습니다.”

강인숙 관장의 전집도 차례로 출간될 예정이다. 1차로 《강인숙평론전집》(전 6권)은 이미 세상에 나왔다. 6권을 열거하자면 《김동인과 자연주의》 《염상섭과 자연주의》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 《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 《한국 근대소설 연구》 《여류문학, 유럽문학 산고》 등 모두 한국 현대문학 연구서들이다.

“앞으로 기행문집 3권을 따로 내고, 그다음에 자전적인 에세이를 내고…. 다 절판이 됐으니까…. (내 전집은) 전체 12권쯤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젠 눈이 안 보여서 교정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나씩 정리해서 올해 안에 내야겠죠. 그리고 이어령 선생에 대한 것도 좀 더 써야겠고….”

강인숙 관장의 연구는 서구 문학, 특히 프랑스 문학을 그 연원으로 두고 일본 근대문학을 하나의 전신자(傳信者)로 삼는 폭넓은 비교문학적 시각과 지평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가 연구한 자연주의의 한국적 양상이나 일본 모더니즘에 대한 연구는 꼭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거예요. 힘만 들고 생색은 나지 않는 분야거든요. 불어와 일본어를 알아야 하고, 세 나라의 문학작품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죠.

일어를 학교에서 배운 우리 세대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연구라서 한 겁니다. 그래서 나는 (각)주에 원문을 넣었어요. 후학들을 도우려고요. 절판이 되면 누가 또 나 같은 수고를 다시 해야 지금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 전집을 준비하면서 평론집부터 냈어요.

그렇지만 에세이는 계속 쓰고 있습니다. 보들레르가 신에게 빈 것처럼 인간의 육체와 심성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다가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에세이는 통이 넓어서 아무 이야기나 다 쓸 수 있는 가장 근대적인 양식이죠. 그래서 좋아요. 자유롭고요.”


“‘콤퓨타’를 칠 수 있는 날까지…”

강 관장은 “써놓은 글이 두 책 분이 더 있다. 그걸 다듬어서 낼 것이다. ‘콤퓨타’를 칠 수 있는 날까지 계속 글을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책이 팔리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내 목소리니까 내 소리를 지키는 겁니다.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해요.”

― 이어령 선생의 서재는 자주 찾았지만, ‘강인숙 서재’가 궁금해지네요.
“내 서재는 3평입니다. 요즘 와서 사람의 크기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웃음)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는 이어령 선생처럼 큰 인물이 못 되니까 지금 그대로 치수가 작은 내 서재가 좋아요. 그게 내 한계니까 큰 방을 원하지 않았어요. 내 방이 커지려면 영인문학관이 작아져야 했기에 그건 내 선택이었습니다. 3평짜리 서재는 영인문학관을 위한 내 양보였고 크기에 대한 자기 인식의 결과였습니다.

그 방에서 나는 원하는 글을 쓰고 있어요. 지금 나는 혼자 살잖아요. 주로 식탁에서 일을 합니다. 6인용이라 커서 자유로워요.”

이어령 선생은 2015년에 대장암에 걸렸다. 7년간의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강 관장에 따르면 선생은 자기 생명에 시한이 생기자 조급해졌다고 한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쓰다가 끝내지 못한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혼자 글 쓸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무척이나 갈망했다”고 한다.

― 항암 치료를 마다했는데 그걸 곁에서 감내하기가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 같아요.
“연세가 있으니 항암 치료를 거부한 건 이해가 됩니다. 몸이 약해져서 수술이 큰 부담이고 그걸 감당하기도 어렵고요. 나도 그럴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암이 (온몸에) 퍼지는 걸 지켜보는 과정이잖아요. 7년 동안이나…. 힘든 일이죠. 식사량은 나날이 떨어져 가고요. 안 먹으면 죽는 게 육체의 조건인데 안 먹으니까 자꾸 다투게 돼요. 실은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라는 걸 아니까 그렇게 안달을 하게 되는데, 마지막에는 마음이라도 편하라고 동의한 거죠. 하지만 지켜보는 일은 당신이나 가족이나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앓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지도 몰라요. 나날이 죽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잖아요. 도울 힘이 하나도 없으니 그거라도 해야죠. 먼저 가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 번으로 끝나니까요.”

“못 움직이면서 장수한다면 그건 저주”

― 이어령 선생이 우리 사회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죽음을 되돌아보게 했고, ‘메멘토 모리’라는 단어를 마주 보게 했어요.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것이니까요. 인간은 모탈(mortal·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잖아요? 우리가 임모탈리티(immortality·불멸)를 동경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좋게 죽는 사람을 보면 모두 관심을 가집니다. ‘선종(善終)’이란 말이 참 좋아요. 집에서 통증이 잦아든 시간에 고종명(考終命)을 하셔서 참 다행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그건 다리가 꺾어진 인간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죠. 한 생명이 끝나는데 차임벨만 울릴 순 없어요. 오랜 아픔과 고독과 슬픔과….”

― 이어령 선생도,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도 찾은 답입니다만, 신은 왜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는 걸까요.
“죽음에 관한 한 이의(異議)가 없습니다. 나와 제 친구들은 사방이 아픈 몸으로 너무 오래 살게 될까 봐 겁을 먹고 있어요. 자유가 좋아서 가끔 고양이처럼 혼자들 살고 있는데 못 움직이면서 장수한다면 그건 저주일 것 같아요. 인간은 유기체잖아요? 고장은 나게 마련이고 시간이 가면 못 쓰게 되기 마련이죠.

다 망가지면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엘리옷(T.S. 엘리엇)의 작품[〈황무지〉] 첫머리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무녀(巫女) 이야기가 나와요. ‘소원이 무어냐’고 물으니까 ‘죽는 것’이라고 하는 대목이 생각납니다.

그녀는 죽지 못하는 벌을 받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나는 주어지는 날까지 열심히 살 겁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살아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죠.”

― 삶의 고통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는 참 신통찮은 몸을 가지고 태어나서 남보다 많이 앓았어요. 그래서 고통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예전엔 그게 억울했는데, 요즘은 받아들여요. 유기물은 고장 나기 마련이니까….”


“神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 죽음을 경험하면서 신(神)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전능(全能)한 신은 없다고 생각해요. 굳이 전능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공물(供物)을 기억하고 좋은 응답을 내리는 건 좋은 신이 아니죠.

하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제가 교인(敎人)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사도신경은 ‘전능’부터 내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신이 전능하다면 적어도 어린 아이들은 앓거나 죽게 하지 말아야죠.

우리 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대학을 막 나온 아들을 잃었잖아요? 겨우 출발점에 섰는데, 살아갈 준비를 방금 끝냈는데, 죽은 겁니다. 살아보지도 못하고요.

그 아이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 어미는 11시간을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등을 조용히 쓸어주면서 ‘나도 아들을 잃었어. 그 애도 젊었어’라고 슬프게 말하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다고 그 애는 믿고 있었어요. 그거면 된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같이 아파해주는 그런 사랑이잖아요?

그래도 ‘착한 섭리’는 있다고 믿고 늘 감사해요. 딸네집이 해안가에 있었는데 아침에 찰랑이며 밀물이 차 올라오는 것이 너무 신비했어요. 봄이 되면 마른 가지에 물이 올라오는 것 또한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어령 선생은 딸(故 이민아)과 24세 손주를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냈다.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지성(知性)에서 영성(靈性)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강 관장도 기막힌 아픔을 같이 겪었다. 여기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며 기꺼이 죽음과 마주한 남편과 이별했다. 그 슬픔의 깊이를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이 선생이 그렇게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딸과 손주의 죽음) 영향이죠. 어른이 아니라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먼저 보낸다는 건, 참 충격이죠.”

모태신앙… 열두 살 때 동생 죽음에 충격

강인숙 관장의 말에 기자는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1947)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만 ‘아이들까지 주리를 트는 그 불행이, 만약에 인간의 잘못이라면, 잘못이라 한다면, 나는 그런 신이 필요가 없다’는 대사가 나오거든요.

사실 제 (친정)어머니가 크리스천이어서 난 모태신앙이에요. 그런데 내가 열두 살 때 동생이 죽었어요. 함경도에서 피란 와가지고, 두 주일 폐렴 앓다가 죽더라고요. 38선 넘어 그 추운 겨울도 넘겼는데 그만 4월에 죽었어요.

나보다 어린 사람이 죽는다는 것…. 노인의 죽음은 다들 준비하고 있으니 덜 충격을 주는데, 동생의 죽음은 참 충격이더라고요. 내가 그걸 극복하는 데 3~4년이 걸렸어요. 혼자 무덤가에 앉아 있기도 하고, 학교를 빠져보기도 하고, 별짓 다 했는데, 충격이 없어지질 않았어요.

또 지난 10년 동안 이 선생하고 딸하고 손자하고 (떠난 이가) 셋이잖아요.”

강 관장은 “어린 손자가 떠났을 때 가장 아팠다”고 고백했다.

“그 아이를 기르느라 딸하고 나하고 고생이 많았거든요. 방학이 되면 여기 데려다 놓고, 개학하면 데려다 줘야 하고…. 그러면서 24년을 키워 겨우 독립할 나이가 되니까 그냥 죽더라고요. 그것까지 하나님 탓을 한다면, 그런 신은 믿을 수가 없는 거죠.

내 생각에는 신이, 절대 신이 필요가 꼭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 관장의 음성은 낮고 단호했으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신은) 굉장히 ‘파워풀(powerful)’하지만, ‘올마이티(almighty·전지전능)’는 아니다 하는…. 물론 신이 없으면 세상이 안 돌아가죠. 질서의 관리자는 있는 게 확실한데 계절 바뀌는 것도 그렇고, 그게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무슨 재주로 천지를 덥혀가지고 꽃을 다 피우겠어요?

그러니까 선(善)한 섭리가 있다는 거는 확실한 거고, 그런데 꼭 어떻게 완벽할 수가 있겠는가? 너무 크고 너무 방대한데 그걸 어떻게 다 챙기겠냐는 거예요.

우리 딸이 (아프면서도) 병원에 안 갈 때 내가 야단치면서 ‘왜 네 몸을 네가 관리해야지 하나님한테 고쳐달라고 떼를 쓰느냐. 하나님이 바쁜데, (챙기셔야 할)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얘기한 일이 있어요. (신이) 다 챙기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교회만 가면 천국에 가는 줄 알고…”

 ▲10년 전인 2013년 12월 이어령 선생의 팔순 잔치가 서울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다. 당시 이어령 선생은 “화환과 축의금, 얼음 조각, 내빈 소개, 축사가 없는 5무(無)잔치”라며 “나는 잘난 사람이 아니고 그저 그동안 즐거워서 열심히 산 것뿐인데 이렇게 챙겨주니 송구스럽다”고 밝혔다. 사진=조선DB

 

그는 “불완전한 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잠시 헷갈렸다. 신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나는 ‘괜찮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기독교인들은 그걸 용서 안 하거든요. 기독교가 제일 나쁜 게 독선이에요. 교회만 가면 뭐가 되는 줄 알고 그러는데, 참 기독교인이 몇 명 없거든요. 그런데 교회만 가면 천국에 가는 줄 알고 천국에 예금하듯 헌금을 하고….

안 믿는 사람은 괜찮은데 복권 사듯 헌금하고 그걸로 천당을 간다고 여기는, 그런 생각 같은 것이 문제예요.”

― 관장님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건가요.
“내가 그(기독교) 안에서 자랐으니까. 내가 죽으면 기독교식으로 매장될 거예요. 이 외에 다른 장례 방법을 본 일이 없으니까.”

― 영혼의 존재는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맑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가다듬으며 살아야죠.”

―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것은 믿나요.
“나는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개의치도 않아요. 천국에 가려고 착한 일을 한다면 그것도 거래(去來)죠. 옳게 살려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인간의 몫이니, 판결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어요.

교회에 안 나간다는 이유로 지옥행을 선고받으면 받아들일 거예요. 거짓 신앙을 고백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재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 없어져 버리고 싶어요. 죽음이 그냥 종말이면 좋겠다는 겁니다. 불평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몸이 약해서 사는 일이 늘 버거웠거든요.”


“신앙은 세속적 영화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 생이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영화(榮華)라는 게 애초부터 ‘카이자[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에서 나옴]의 것’이잖아요? 그 질서대로 가는 거겠죠, 뭐. 신앙은 세속적 영화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상승하고자 하는 내적 욕망이니까 초월적이어야겠죠.

하지만 세속적인 면에서 인간이 할 일은 해야겠지요? 사도 바울(바오로)이 텐트 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세속에 몸의 절반은 담그고 사는 ‘모탈(죽을 운명)’이니까요.”


― 천국 가기 위해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시나요.
“천당 가려 착한 일을 하는 건 일종의 거래죠. 그건 안 되죠. 가기 위해 착하게 굴어라? 그런 거는 안 되는 얘기고, 정말 순수한 신앙은 그런 것이어선 안 된다 생각해요.

‘내가 안 쓰고 모아서 집을 산다는 것과 내가 안 쓰고 모아 천당 간다’는 것은 다른 얘기거든요. 그게 같아서는 안 되죠. 그러니까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안 된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거지. (신이) 가라는 대로 가야죠. 만약 지옥이 있다면 지옥에 가래도 가야 하는데, 6·25전쟁 같은 게 지옥이죠, 뭐.

이만큼이나 넓은 한탄강 철교를, 밤에 12세짜리 애가, 기어서 건넜거든요. 뒤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후퇴가 안 되는 거예요. 머무를 수도 없고 후퇴도 안 돼. 안 나가면 남이 죽으니까 그런 것이 지옥이죠. 그러니까 지옥에 갈 각오가 돼 있어요. 그러나 그건 내가 선택할 문제는 아니니까, 생각 안 하기로 했고….”

― 잠깐만요. 무신론자는 아니신 거죠?
“그렇진 않습니다. 제 (친정)어머니가 굉장히 괜찮은 크리스천이셨어요. 동네 한 이웃이 전염병에 걸렸는데 그 집에다 주먹밥을 해가지고 매일같이 던져줘서 굶어 죽지 않게 한 적극적인 크리스천이셨어요.

교회에 너무 많이 갖다 줘서 내가 맨날 잔소리를 하고 그랬는데…. 무슨 보상을 바라시고 한 일이 아니셨어요. 어머니는 당신 자녀들이 교회에 안 가는 걸 끌고 가지 않으셨어요. 안 가는 애는 놔두셨죠.”


“혼자 글을 쓴다는 거는 상당한 에고이스트 아니면 못 해”

이어령 선생의 서재에서 강인숙 관장. 사진=조선DB

 

― 교회에 다녔나요.
“나는 다니다 말았거든요. 세례 받을 단계가 돼서 그만뒀어요. 세례는 안 받겠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확고했어요. 그런데 나하고 이 선생하고 비교해보면 이 선생은 나보다 훨씬 감성적이거든요. 감성적인 사람이 종교와 가까워질 가능성이 많죠.

이 선생은 크리스천 집안도 아니고, 시어머니가 불교를 믿으셨는데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외경심…, 외경심이 항상 있었어요. 그게 크리스천이 된 소지가 되었겠죠.

난 산속 외딴집에서 자랐거든요. 해가 지면 막 무서워서 울었어요. 엄마가 오실 때까지 우는 거야. 그런데 제 어머니가 샤머니즘적인 두려움이 거의 없으셨어요. 내가 감수성 면에서 이 선생보다 약하니까 크리스천이 될 소질이 적은 거죠.”

― 어떻게 보면 좀 냉철하신 면이 있으시군요. 그러면 외람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어령 선생님이 천국에 가셨을까요.
“글쎄요.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요. 혼자 글을 쓴다는 거는 상당한 에고이스트(egoist·자기 본위의 사람)가 아니면 못 해요, 글쓰기는…, 글쓰기는 ‘에고’가 응집돼서 세상이 그야말로, 저 강태공처럼 비바람에 다 떠내려가도 모를 정도로 자기 안에 빠져야 됩니다. 세상을 떠나 있는 거죠.

그것도 죄라면 죄죠. 그러니까 그걸 죄로 보느냐 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겠죠. 누가 (천국에) 갔을까 그런 생각은 안 해요.

박완서 선생의 말씀처럼, 그러면 형체(形體)의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천당에) 가면 뭘로 내 자식을 알아보겠어요?

내가 천당에 가면 영혼밖에 없는데, 셰이프(shape·형체)가 없는데 내가 뭘로 내 자식을 알아보겠느냐는 겁니다. 박완서 선생도 상당히 지적인 분이거든요. 그분이 이모셔널(emotional·감성적인)한 데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박경리(朴景利·1926~2008년) 선생은 교인이 될 소질이 있어도, 박완서(朴婉緖·1931~2011년) 선생은 그게 없는 분인데 훗날 크리스천이 되더라고요.”


“슬픔에 공감하는 면에서 마음 약해”

― 그러셨구나.
“그런데 그게(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과) 연애, 사랑과 같은 커패서티(capacity·용량)거든요. 둘 다 감성적이잖아요.”

― 관장님 이야기를 들으니까 왜 말랑말랑한 소설 대신 문학평론을 택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꼭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가 내 이름을 지었는데, 어질 인(仁)자가 들어 있어 참 좋았어요. 난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이 뭐가 괴롭겠구나, 얼마나 힘들까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런 면에서 마음이 상당히 약한 편이고 남의 잘못에도 관대합니다. 그 편에선 점수가 꽤 나가요. 그런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베르테르 같은 면은 약하거든요.

우리 어머니가 잘 안 우시는 분인데 엄마가 눈물을 흘릴 때는 내가 꼭 옆에 있었거든요. 내가 언니들보다 더 어린데도 그런 슬픔에 공감하는 것…, 그런 면에선 마음이 상당히 약해요. 남과 잘 안 부딪히는 것도 아마 그가 불쌍해서, 상대방이 불쌍해서 화를 못 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문학사상》은 기적의 문예지”

― 우리 시대에 이어령 선생이 어떤 흔적을 남겼나요.
“지적인 다양성과 전문성이 합쳐져서 하나의 종합성을 이뤘다고 봅니다. 지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이 섞인 셈이지요.

예술사로 보면 시대가 각각이 하나씩 도래했어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그랬는데 다만 르네상스와 비잔티움 때만 (지성과 감성이) 듀얼로 왔어요. 그래서 이어령 선생은 르네상스적인 양면성을 공유했다고 볼 수 있어요.

또 외국에 대한 지식과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이 모두 깊었는데 그래서 새로운 이론이 겉돌지 않았어요. 또 한국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유리한 자리에 있었어요. 이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충청도가 전통을 아는 고장이잖아요. 또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관심과 예술의 형식에 대한 관심도 깊었어요.”

― 그런 양면성이 《문학사상》을 꽃피우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정말 《문학사상》은 기적의 문예지예요. 이 선생이 하던 12년간 적자가 안 났거든요. 독자들의 지적 수준이 그만큼 높았던 거죠. 그리고 이 선생이 잡지를 워낙 잘 만들었어요. 해외에서 발표되는 신작을 바로 들여다가 연재하는 식인 데다가 이 선생은 한국 전통에 밝잖아요?

고전도 새로운 방법론으로 접근하면서 신구(新舊)의 밸런스를 맞추었지요. 지적인 글과 감성적인 글도 조화를 이루었고, 새로운 작가 발굴도 활발했고요.

다른 사람은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잡지를 만든 겁니다. 원동력은 작품을 보는 이 선생의 미적 안목의 탁월함이었어요. 필자도 독자도 잡지사도 모두 신명이 났던 시절입니다.”


“희랍 신전 양식의 비각 하나 세워드리고 싶어”

이상문학상은 스폰서가 없이 시작해서 성공한 유일한 상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작품만 잘 고르면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것만은 이어령 선생이 직접 챙겼거든요. 후보작을 함께 엮어서 수상작품집을 만드는 것도 이 선생 아이디어였습니다. 누군가가 이 선생을 돈키호테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그는 남에게 안 보이는 것을 미리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자기가 기획한 일에 실패한 일이 거의 없어요. 시인과 수학자가 동거하는 희귀한 인물이기 때문일 겁니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이어령 선생에게 비각(碑閣)을 하나 세워드리고 싶어요. 어머니 무덤이 있는 고향 언덕에 희랍 신전 양식의 작은 비각을 세우고 어록비가 드문드문 서 있는 숲을 만드는 게 현재 내 꿈입니다.

이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이 선생이 지금은 공원묘지에 묻혀 있어서 비석이 하나도 없거든요.”⊙
 

 

사랑방이던 《문학사상》 주간실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 500호(2014년 6월)와 600호(2022년 10월). 사진=조선DB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 《문학사상》이 있었다. 한옥은 주간실로 쓰고, 옆 건물인 양옥은 편집실로 썼다고 한다.

당시 많은 문인에게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다. 또 이상(李箱·1910~1937년)의 미공개 사진, 김안서(金岸曙·훗날 金億으로 개명·1895~?)의 시고(詩稿) 등 발굴 특종을 쏟아냈다. 강인숙 관장의 말이다.

“《문학사상》 주간실은 정말로 아늑한 사랑방이었어요. 주간실이 한옥인 데다가 편집실과 딴채여서 마음대로 떠들 수 있었거든요. 경복궁 바로 옆에 있어서 교통도 편했고요. 문인들이 모여서 지적 담화만 하는 희한한 곳이기도 했죠.

《문학사상》을 시작하니 집에 오는 손님이 없어지더라고요. 선생은 거기에 자료실을 따로 두었어요. 서지 전문가를 모셔다가 전문적으로 자료를 찾게 했죠. 1970년대 초에 말입니다.

이상의 육필 원고와 사진 앨범, 김안서의 시 원고 같은 것을 그렇게 찾아냈죠. 그리고 해외에 전문적인 특파원을 각국에 두었습니다. 현지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을 섭외해서 만든 지적 네트워크입니다.

김성곤, 최월희, 김도희, 이숙희 같은 놀라운 분들이 성심껏 도와주셨죠. 아직 공개하지 않은 특파원 원고가 영인문학관에 쌓여 있습니다. 그 모든 분이 합심해서 만든 게 《문학사상》이었어요. 장욱진, 변종화, 서세옥, 오수환 같은 화가들이 다달이 표지화를 그려주시는 호사도 누렸고요. 문학과 미술의 아름다운 제휴였다고 생각합니다.”

 

03월 호

⑭ 한국인의 얼굴

얼굴은 개인과 인류 역사의 이력서이자 지도

⊙ 아프리카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대략 6만~7만 년 전
⊙ 산맥, 고원, 동토 지나 계속 걸어간 인종이 몽골로이드(黃人)
⊙ 4만 년 전 바이칼湖 근처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딘 이가 북방계 ‘新몽골로이드’
⊙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눈 작고, 털 없으며, 두상과 치아가 제일 커

인물연구소가 제작한 한국인의 얼굴.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북경 원인(猿人), 황석리인(2300년 전 우랄 알타이에서 이주한 원인으로 1962년 충북 제천 청풍면 황석리 고인돌에서 발견된 유골을 토대로 복원했다), 늑도인 여자(2000년 전 경남 사천 앞바다 지역에 거주), 한국형 미인, 신라 처용, 김대건 신부, 연대도인(6000년 전 경남 통영 지방 거주)의 모습이다. 사진=조선DB

 

내 얼굴’을 찾는 행군은 생물학적인 나, 문화적인 나, 그리고 역사 속의 나를 찾는 과정입니다.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의 역사보다도 광활한, 단군신화보다 훨씬 더 요원한 몇만 년 전 우리의 선조가 이 땅에 오기 훨씬 이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힘든 대장정(大長程)을 마치고 나면 내 얼굴에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 한국인의 숨결을 읽을 수 있어요. 과거 국토 최남단에서 휴전선에 이르는 ‘국토대장정’ 행사가 매년 열린 적이 있어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참가자들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지요. 왜 우는지를 물어보면 딱히 정확한 답이 없어요. 그냥 웁니다. 그 눈물에는 분명한 의미와 감동이 있어요.

자기 나라의 땅을 본인의 발로 하나하나 밟고 완주했을 때의 성취감일 수도 있어요. 선조들이 지나가고 수많은 생명이 태어난 땅, 또 그만큼의 많은 생명체의 흙이 된 땅, 그 땅을 밟고 지나와 마지막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 자기도 모르는 감동이 있는 것이죠. 거기에 북받치는 눈물이 쏟아지는 겁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시작할 이야기는 국토대장정이 아닌 우리의 얼굴을 찾아 떠나는 ‘얼굴의 대장정’입니다. 국토대장정의 길이가 500km 조금 넘는다면 우리가 함께 떠나게 될 얼굴의 대장정은 2000km를 훨씬 넘어섭니다(서울에서 울란바토르까지가 약 2000km-편집자 주). 국토대장정의 기간이 40일 동안이라면 우리는 2만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찾아가야 해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 누구의 친구라는 것, 이 모두가 바로 우리 얼굴이 있기에 알 수 있는 겁니다. 얼굴에 의해 우리는 ‘나’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죠.

내가 내 얼굴을 찾는 것, 우리가 함께 우리 각자의 얼굴 찾기를 한다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얼굴 찾기가 될 것이며 지금부터 그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1. 피부색이 뭐기에…

이어령 선생의 생전 모습이다. 2019년 11월 서울 영인문학관에서 촬영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반죽을 오븐에 구워 빵을 만들 듯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너무 오래 구워서 새까맣게 탄 것이 니그로이드(Negroid), 흑인입니다. 이른바 ‘너무 구운 인간’이죠.

두 번째는 너무 태우지 않으려고 오븐에 넣자마자 얼마 안 되어 꺼낸 것이 코카소이드(Caucasoid), 백인입니다. 이른바 ‘설익은 인간’이에요.

이번에야말로 실패하지 않으려고 온갖 신경을 써서 때맞게 꺼내어 잘 구워진 것이 바로 몽골로이드(Mongoloid), 황인종입니다. 이른바 ‘잘 익은 노란 인간’이지요.

물론 이 이야기는 아마도 황인종에 의해 만들어진 농담일 테지만 일종의 인종차별주의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어요. 인종 이야기는 얼마든지 ‘손이 안으로 굽는’ 이야기의 창조가 가능해요. 얼굴 이야기를 할 때 시각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피부색입니다. 피부색에 의해 우리는 인종을 구별하고, 사람도 구별할 수 있어요. 문제는 이 피부색이 ‘구별’을 넘어 ‘차별’의 잣대가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노랗고, 흑인의 얼굴은 검다는 이유만으로 코카소이드가 지배하던 근대(近代)에는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어요.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에 의해 노예 해방이 선언되기까지 약 300년 동안 유럽의 상인에 의해 신세계에 운송된 흑인 노예만 1500만 명에 달했다고 하지요. 노예무역의 아픈 과거만큼은 아니더라도 해외에서 사는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황인종에 대한 백인 우월주의를 경험했을 겁니다.

일본은 탈(脫)아시아 정책을 쓴 국가예요. 일본인 중에 자신을 아시아인이 아닌 ‘바나나’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에 스스로를 비유한 것이죠. 서양인들도 그들을 특별 대우해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곳에선 일본인들을 명예 백인으로 대우하기도 했어요. 백인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카페와 같은 곳들도 일본인들만은 예외로 입장할 수 있었죠. 물론 이런 일본인에게 수치심을 느끼고 이러한 문화를 부끄러워하는 일본인도 많았다고 해요. 얼굴색으로 남을 판단하고 무시하는 인종주의의 비극적 단면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에게도 부지불식(不知不識)중에 옐로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이러한 콤플렉스는 백인 추종주의의 또 다른 면으로 흑인에 대한 멸시와 천대로 드러나기도 했어요. 1992년 LA폭동이 일어났을 때 유독 한국인들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자신들을 무시했던 흑인들의 보복심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LA에 사는 한국인 중 일부는 흑인들을 깜둥이, 연탄장수, 깜시 등으로 불렀다고 하니 흑인들이 한국인에 대해 가졌던 적대감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죠.


코카소이드는 유대 그리스도교의 인종적 우월주의

인종주의적 발상은 학자들이 인종을 칭하는 명명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현생인류(現生人類)를 코카소이드·몽골로이드·니그로이드로 분류하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으로 보급되어 있으나, 인류학자 가운데는 이 분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세 분류의 명칭 역시 가장 객관적이어야 하는 학문의 영역에서마저 인종주의적 차별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두 개의 큰 축이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입니다. 이 중 우리가 이야기 나눌 주제와 관련 있는 것이 바로 헤브라이즘이에요.

‘헤브라이즘’은 헤브라이 민족의 사람들, 즉 유대인의 문화 전통이 서구화된 것을 지칭하는 말로 헤브라이즘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유일신(唯一神) 사상이죠.

오직 ‘야훼’만이 신이고 그 밖의 어느 것도 신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어요. 이러한 헤브라이즘은 창세기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태초의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선악(善惡)의 열매를 따 먹은 죄로 쫓겨나고 그 후 신을 잊은 채 살아가던 인간들에게 대홍수의 형벌이 내려지며, 노아의 방주를 타고 있던 노아의 가족만이 살아남습니다. 그들이 현재의 인류에게 유일 선조인 셈이죠. 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방주가 도달한 곳, 방주 안의 비둘기가 날아가 간난잎(올리브잎)을 따 온 곳이 바로 튀르키예(터키) 코카서스 산맥의 아라랏산입니다.

아라랏산은 튀르키예의 제일 동쪽 끝에 있는 산이에요. 크게 두 개의 산이 있는데 그 가운데 골짜기에서 고대인의 백골이 출토되었고 출토된 백골의 골격 구조가 지금의 유럽인들과 똑같았어요.

‘코카소이드’를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코카서스 산맥까지 이른 사람들’이라는 뜻이에요. 이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오늘날 코카소이드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인류는 노아의 자손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에 기반한 백인 우월주의적 명명이라 할 수 있지요.

백인이라는 것 역시 흰색에 대한 우월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상 신=백인이라고 하는 말과 같아요.


# 피부색 이전의 민낯을 바라봐야

몽골로이드라는 명칭 역시 그 유래가 과학적이지는 않아요. 어째서 하필 아시아 중에서 몽골이라는 특정 지역이 동양인 민족을 칭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되었을까요. 이 역시 서구 중심적인 해석입니다. 칭기즈칸(1162~1227년)의 후예인 쿠빌라이 칸(Khubilai Khan·1215~1294년)이 유럽을 지배할 때 유럽 사람들이 이 말을 만든 것이죠. 그리고 당시 아시아를 왕래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년)와 같은 사람들 역시 쿠빌라이 칸이 중국을 지배했을 때 중국을 다녀왔기 때문에 몽골은 아시아를 상징하는 단어이자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어요.

‘몽골병’이라는 것이 있어요. 영국의 다운(John Langdon Down·1828~1896년)이 1886년 특수 정신지체를 보이는 병을 발견하고 이를 ‘몽고인형(型) 백치(白痴)’라고 보고했으나 1959년 J. 레장(Je′ro^me Lejeune·1926~1994년) 등에 의해 병의 원인이 염색체 이상에 있다는 것이 밝혀져 다운증후군이라 불리게 되었지요.

이 병에 걸리면 지진아가 되거나 심장에 이상이 생깁니다. 후천적인 병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유전자에 의해서 걸린 병인데 옛날에는 이 병에 걸린 아이들이 눈도 튀어나오고 꼭 몽골인처럼 생겼다고 해서 몽골병, 혹은 몽골인병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피부색처럼 코카소이드니 몽골로이드니 하는 말부터가 이미 과학으로부터 거리가 먼 것들이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피부색도 벗겨내야 해요. 인류가 가진 피부색 이전의 민얼굴, 민낯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의 첫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요.


2. 아웃 오브 아프리카

영국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네안데르탈인(오른쪽)과 호모 사피엔스(왼쪽) 모형.

 

오늘날 우리 조상의 시작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인류의 기원을 두고 몇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이 ‘아프리카 기원설(Out of Africa)’입니다. 현생인류의 직계 조상이 약 1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갑자기 출현했으며 그때부터 5만 년 전까지 그전에 이미 정착해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모든 인종을 대체했다는 것이죠.

‘제노그래픽 프로젝트(Genographic Project)’를 이끈 스펜서 웰스(Spencer Wells·1969~) 박사팀은 지난 1987년 DNA 연구를 통해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했어요.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mtDNA)가 모계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사실로부터 출발, 현 인류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현대인의 근원지는 아프리카 대륙이었고, ‘미토콘드리아 이브’인 어느 한 여성이 인류의 공통 조상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주장에 신빙성을 제공하는 근거들 역시 제시되었어요. 인류의 오랜 화석이 아프리카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1974년 에티오피아의 하다르 계곡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라고 불리는 원인(猿人)의 화석 골격이 발견되었어요.

250만 년 전의 직립원인 화석으로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여겨지고 있으며 ‘루시’라고 불립니다. 발견 당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라는 비틀스 노래가 흘러나와 ‘루시’라고 붙여졌다고 하지요. 이 곡은 비틀스 명반으로 꼽히는 1967년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수록곡입니다.

이 외 탄자니아 올드바이(Tanzania Olduvai Valley) 유적에서도 여러 점의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프리카였을까요? 왜 그것도 에티오피아였을까요? 이 역시도 많은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과 같은 대형 유인원들을 포함한 영장류가 점차 진화하고 발전하여 현생의 인류에 이르렀다는 것이 우리가 가장 광범위하게 인류의 기원으로 믿고 있는 진화론이죠. 이 중에서 인류의 조상이 된 유인원은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정글과 숲의 나무에서 내려와 너른 평지에서 삶의 터전을 잡게 된 유인원들입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는 사막지대도 정글도 아닌 사바나 지역이에요. 즉 숲에서 나와 초원에서 생활하게 된 유인원들이 인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숲속 나무 위에서 내려올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머무른 유인원들과 달리 스스로에게 던져진 도전과 과제들을 풀어가며 진화해왔어요. 이렇듯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평지로 내려와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간 인종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원숭이 사람)로 지칭해요. 학계에서는 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출현을 인류의 탄생으로 여기고 있어요.

네발로 나무를 타던 숲속 생활과 달리 평지의 생활은 두 발을 요구했어요. 직립보행(直立步行)입니다. 초원과 같은 평지에서 생활을 하던 ‘루시’의 형제들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일부가 새롭게 걷는 방식을 시작했어요.

이렇게 시작된 직립보행은 인간의 이동을 보다 용이하게 했을 겁니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했기 때문에 멀리 이동할 수 있었겠죠. 그래서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기 이전에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였어요. 영어로 일렉트(erect)는 ‘똑바로 서다(straight)’ ‘세우다’는 뜻입니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인류는 아프리카를 떠나 대장정을 시작했지요.


벅찬 감격의 아름다운 말, 나그네

아시아 인종의 이동 경로 추정도. 그래픽=조선DB

 

‘나그네’라는 한국말은 아름답습니다. 어원은 더욱 아름답죠. ‘나간 사람’이라는 뜻인데, 문지방을 넘어 방에서 뜰로 나가고, 뜰에서 빗장을 풀고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조금씩 낯익은 것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죠. 사방의 벽에서 벗어나 무수한 문밖, 그 문과 문 사이의 길을 걷는 보행자가 되는 겁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말하죠.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도 많이 걷는데 그 특성이 있다”고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나 고릴라는 하루에 기껏 걸어봐야 3km 이상을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나 수렵·채집 시대의 원인들은 하루의 보행거리가 30km를 넘었다고 합니다. 원숭이 손은 인간과 똑같이 물건을 잡을 수가 있지만 발의 구조는 달라요. 원숭이는 다리로도 나뭇가지를 잡을 수가 있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잡는 능력보다는 오히려 걷는 능력에서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가 생겨나요. 한마디로 걸어서 ‘나그네’가 된 원숭이만이 인간이 된 겁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와 만년 이상 공존했다고 해요. 옷을 입혀 모든 인종이 섞여 있는 뉴욕 지하철에 갖다 놓아도 조금도 이상하게 바라볼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네안데르탈인이었지만, 몸집도, 두뇌의 크기도, 심지어 장례식을 치르고 꽃을 좋아한 것까지 인간과 닮은 네안데르탈인이었지만, 끝내 그들은 인간이 되지 못하고 빙하기와 함께 절멸하고 말았다고 해요.

그들과 호모 사피엔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유적을 파보면 100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석재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고 해요. 그러나 네안데르탈인들에게서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인류가 탄생한 곳은 아프리카입니다.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살아온 인종이 니그로이드(흑인)이고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대륙까지 걸어 나온 인종이 코카소이드(백인), 그 한계선마저 돌파하여 산맥과 고원과 동토(凍土)대를 지나 계속 걸어 나간 인종이 바로 몽골로이드(황인)입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아프리카 탈출)’에서 인간이 형성되고 그 모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인류학자들은 그것을 ‘그레이트 저니(Great Journey)’라고 불러요. 무엇 때문에 인간은 편안한 열대의 정글과 초원을 떠나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녘 설원을 횡단해야만 했을까요?

걷는다는 것, 나그네라는 것, 밖으로 나가는 보행의 의지와 그 자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걷지 않고 무엇인가를 탑니다. 말을 타고 배를 타고 자동차와 기차와 비행기를 탑니다. 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보병이 걸어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듯이 궁극적으로 ‘타는’ 문화는 ‘걷는’ 문화에 의해서 종결되죠. 어떤 이동수단[乘用物]도 보행의 의지와 자유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실려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가고 싶으면 갑니다. 길이 없어도 걷습니다. 중력을 거슬러 등뼈를 똑바로 세우는 오기를 두 발로 증명하죠. 어느 짐승이 이렇게 걸을 수가 있나요.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갈수록 새로운 지평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걷는 것만큼의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요. 그때 비로소 굴러가는 바퀴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여행의 참된 신체성(身體性)을 발견하죠. 보행을 통해서 나는 수송된 여객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됩니다. 아주 천천히 나는 ‘나그네’가 되는 것이죠. 나그네의 그 리듬을 상실할 때 모든 승용물의 의미도 함께 사라져요.

몽골로이드의 길고 긴 보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국경 없는 세계화이든, 사이버 스페이스이든, 위험과 희망이 도사린 벤처의 길이든 인류의 그레이트 저니는 중단될 수 없지요.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이 아닙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경주(競走)에서 가장 멀리 온 호모 사피엔스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이동은 어떻게

아프리카 대륙은 대부분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곳을 벗어나기 힘든 지형이지만, 홍해 유역을 통해 아프리카는 아시아와 만날 수 있다. 현생인류가 최초로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대략 6만~7만 년 전이라고 한다. 오늘의 우리의 눈으로 보면 1만 년의 시간은 거의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이다.

처음에는 소수가 아프리카를 떠나 아시아 남동부로 이주를 했을 것이다. 일부는 유럽 쪽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지금보다 해수면이 낮았던 5만~6만 년 전, 당시에는 육지였던 곳이 지금은 바다로 변한 곳이 많다. 따라서 당시 현생인류의 이동경로를 정확히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아시아 남동쪽으로 이동한 무리 가운데 일부는 해안을 따라서 지금의 동남아시아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5만 년이나 된 그들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은 이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다만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수수께끼다. 아시아 본토와 인도네시아가 ‘육교’로 연결되던 시기에 이들이 이동했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여기서 육교란 지구의 물이 대부분 빙하로 동결되어 해면 수위가 낮았던 빙하기에 얕은 바다 위로 등성이를 드러내던 육지를 가리킨다. 또한 인도네시아에서 보트나 갈대를 묶어서 만든 뗏목을 타고 뉴기니 섬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뉴기니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려면 100km나 항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위험한 일을 기도한 이유는 찾기 힘들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폭풍에 밀려 마지못해 바다를 건넜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자손을 아보리진(Aborigines)이라 부른다. 의미는 ‘시초(始初)’라는 뜻이다.

어떤 자료에는 약 2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진화하여 아시아로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 유적인 북한 평안남도 상원군 모루동굴 유적과 충북 단양군 금굴 유적 등이 이들 직립원인인 호모 에렉투스의 주거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대략 10만 년 전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에 넓게 존재했으나 그 뒤 멸종했다.

이들이 사라지기 앞서 이미 우리와 같은 종(種)이 등장했는데 이들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 즉 지능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가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직립원인(에렉투스)에 비해 두개골이 둥글고 그 안에 큰 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은 약 15만 년 전으로 보고 있다. 현생인류는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처음 등장해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6만~7만 년 전에는 서아시아 지역으로, 약 5만 년 전에는 동아시아, 약 4만 년 전에는 유럽 지역으로 이동해 빙하가 없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살았다. 또한 이들은 2만5000년 전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여 북쪽 지역에서 살았다.

(임영태의 《스토리 세계사1》, 제임스 데이비스의 《쉽고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인용)


3. 인종의 3가지 분류… 코카소이드, 몽골로이드, 니그로이드

 위는 몽골로이드와 코카소이드의 안면과 두개골 차이점. 아래는 북방계와 남방계 남녀 모습이다.

 

 짐승과 달리 인간은 정해진 영역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나아갑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아프리카에서 끝없이 밖으로 나간 것이죠. 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 경로는 두 개의 길로 나뉩니다. 하나는 유럽으로, 또 다른 하나는 인도로 해서 남쪽으로 갔습니다.

코카소이드, 몽골로이드, 니그로이드라는 인종의 분류는 이렇게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 대장정의 루트에 근거해요.

코카소이드는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유럽대륙의 코카서스 산맥에까지 이른 인류로 지금의 서양인들입니다. 코카소이드의 이동 경로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추위를 모릅니다. 지금의 러시아 사람들 역시 이 부류에 속하지만, 처음부터 이 지역에 다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이 생기고 난 이후에 정착한 사람들이죠. 난방시설이 되어 있고, 모피 코트로 몸을 감싼 후에 추위를 경험한 사람들과 알몸으로 추위를 견딘 사람들은 당연히 다르겠지요?

 위쪽부터 바이칼 호수 동쪽에서 내려온 퉁구스 북방계, 그리고 두 번째는 바이칼 호수 서쪽에서 내려온 알타이 북방계, 세 번째는 통일신라 이후 남방계와 북방계의 혼혈로 출현한 중간계, 네 번째는 인도네시아 순다 열도에서 올라온 남방계 한국인 여성의 전형적인 얼굴. 특정 인물의 사진이 아니라, 각 집단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얼굴을 합성해서 만든 사진이다. 사진=조선DB

 

 두 번째 몽골로이드는 코카소이드보다 더 먼 길의 여정을 택한 인류입니다. 결국 가장 긴 거리를 걸어 몽골까지 도착한 인류지요. 한국인 역시 이 분류에 속합니다. 몽골로이드는 두 갈래로 나뉩니다. 7만 년 전부터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현재의 중국을 거쳐 남방 루트를 택해 일본까지 간 몽골로이드를 ‘고(古)몽골로이드(남방계)’라 불러요. 또 한 갈래의 몽골로이드는 남쪽에서 시작해 4만 년 전 시베리아 북쪽으로 북상(北上), 신빙하기에 바이칼호(湖) 근처에 갇힌 채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신(新)몽골로이드(북방계)’입니다.

지금의 호주인 남쪽으로 이동한 몽골로이드는 남방계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일본의 오키나와 지역과 같은 곳으로 퍼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중 추위를 겪어 지금 우리와 같은 몸의 형태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 ‘신몽골로이드’라고 해요.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사람들을 우리는 니그로이드라 부릅니다.

코카소이드, 몽골로이드, 니그로이드는 얼굴에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안면과 두개골 구조와 형태 역시 다릅니다. 우리는 흔히 인종을 피부색으로 구별하지만 인종이라는 것은 피부색 이전의 문제입니다. 피부색은 우리 스스로가 정해놓은 하나의 틀일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리의 직접적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신몽골로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볼까요? 몽골로이드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택한 인류의 조상 중에서도 가장 긴 여정을 택한 인류입니다. 그들은 시베리아 쪽 추운 지대로 들어가 인류의 마지막 빙하기인 신빙하기가 도래한 후 얼음 속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나가질 못한 것이죠. 그들이 갇힌 곳, 그곳이 바이칼 호수입니다.

같은 몽골로이드라 할지라도 바이칼 호수의 혹독한 추위를 경험했는가, 경험하지 못했는가에 따라 많은 차이가 발생합니다. 한국인의 얼굴에는 바이칼호의 추위가 서려 있어요. 오염되지 않은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맑은 바이칼 호수. 그 신비한 호수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면 우리 선조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겁니다.


4. 추위를 이겨낸 한국인의 얼굴

 조용진 인물연구소장. 사진=조선DB

 

 광복 이래 70여 년 동안 무엇이 제일 많이 바뀌었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각자 대답이 다를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얼굴’이에요. 몇십 년 전의 사진을 꺼내보면 바로 이 말에 수긍할 겁니다. “이게 한국인인가?” 할 정도니까요. 성형수술을 해서가 아니라 얼굴 그 자체가 많이 바뀌었어요. 이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병탄(倂呑) 이듬해인 1911년 조선총독부는 전국 128개 군의 남녀에 대해 4~8명씩 정면과 측면을 촬영하여 사진마다 고유번호를 붙이게 했어요.

지금과 달리 카메라가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유리에 감광액을 칠하여 만든 흑백사진입니다. 유리원판인지라 몇 장이라 해도 무게가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약 90년 전의 우리 선조들의 얼굴을 보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요.

두 번째 자료는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이 1986년부터 촬영 수집한 한국인의 약 3000명 분의 얼굴 사진입니다. 얼굴연구소는 3차 곡면인 얼굴의 형상을 기록하기 위해 지도책과 같이 등고선을 그어 기록해놓은 자료들도 보관하고 있어요.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얼굴을 연구하려면 과학적인 분석이 중요합니다. 문화적인 껍질을 다 벗겨내고 온전한 민얼굴의 과학적 연구야말로 우리의 얼굴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죠.

조용진 선생은 홍익대와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후 가톨릭 의과대학에서 7년간 인체해부학을 연구했다고 해요. 일본 동경예술대학에서 미술해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서울교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남대 미술대학 객원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그는 ‘미술해부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셨어요. 험난한 히말라야 정상을 향해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에게 현지에 능통한 셀파들이 필요하듯, 몇십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우리의 ‘얼굴 찾기’에 중요한 가이드를 해주신 분입니다.


한국인만의 용모적 특성

1400여 년 전 백제인의 얼굴.

 

 문화의 껍데기를 벗고 과학으로 우리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과학자가 아닌 문화학자인 나 혼자의 힘으로 ‘얼굴 찾기’는 힘들어요. 제대로 얼굴을 알려면 이렇게 문화와 과학이 결합된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제3의 길에서만이 우리 얼굴 찾기가 가능합니다.

조용진 선생 덕분에 귀중한 자료 하나를 얻을 수 있었는데 충청남도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옆과 앞 얼굴 등을 전부 사진으로 찍어서 데이터화한 것입니다. 이게 옛날 한국 사람들의 얼굴이에요. 이 사진은 불과 50년밖에 지나지 않은 과거지만 지금의 한국인들과는 많이 달라요.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며 하나하나 얼굴을 자로 재고 당시의 얼굴과 현재의 얼굴을 비교 분석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빅데이터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얼굴 찾기’의 근거자료로 많이 활용되었어요.

그렇다면 2000~3000년 전에 한반도에 정착을 한 우리 선조들의 얼굴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얼굴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또 그들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얼굴은 조상님이 주신 것이요, 결국 유전자를 통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수천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한국인의 얼굴,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어요.

세계인의 용모에 대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이 획득하고 있는 용모적인 특성이 있다고 해요. 이 통계자료는 대략적인 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해부학에 근거하여 전 세계인의 표본을 대상으로 방대한 자료의 조사는 물론 엄격한 분석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통계입니다. 이 통계에 의한 한국인이 1등인 특성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세계에서 눈이 가장 작고 털이 없기로 1등 민족은…

 한국인 용모의 특징.

 

 첫째가 눈이 세계 1등으로 작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털이 없기로 세계 1등입니다. 여기서 잠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자면, 우리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하잖아요. 인간 모두가 어릴 적 원숭이라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털이 많고 적음의 정도가 진화의 정도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즉 털이 많은 서양인과 비교해 털이 적은 우리가 더 진화했다는 것이죠. 이게 네오테니(Neoteny)라는 것입니다. 네오테니 혹은 유형성숙(幼形成熟)이라는 용어는 ‘유아화’를 뜻하는 말로 생물이 나이를 먹었는데도 어릴 적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는 경우 적용됩니다.

침팬지가 사람 얼굴하고는 전혀 다르지만 갓 태어난 침팬지 새끼와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얼굴은 어떠한가요. 서로 비슷합니다. 안면각도 그렇고, 털이 없다는 것도 그렇죠. 동양인들이 서양인에 비해 동안인 이유에 대해 서양인에 비해 동양인이 네오테니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셋째로 우리가 1등인 것은 귀에서 머리까지의 길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두상이 크다는 이야기죠. 뇌와 머리가 무엇이 먼저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뇌가 생기고 뇌를 감싸기 위해 머리가 생겨났을 겁니다. 이런 특징을 갖는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당연히 뇌도 다를 것이 아니겠어요?

마지막으로 골상학 등을 이용해 실제 과학적으로 하나하나 계측하고 통계를 낸 객관적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치아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해요. 이가 크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문화적 특성과 연계되어 있어요. 어금니가 크니 뒤로 밀려들어 가고, 사랑니 같은 것은 나오지도 못한 채 저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발음 체계라든가, 먹는 식문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어요.

이 이야기는 뒷부분에서 좀 더 나누도록 해요. 한국인이라는 민족이 원래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 비해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유별난 것은 사실입니다. 용모에서 봐도 이미 금메달 몇 개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바이칼 호수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 1966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 면적의 3분의 1 크기에 1500여 종의 생물이 산다.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발원지다.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차가우며, 가장 크고(남한 면적의 약 1/3), 가장 깊은 담수호이다.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호수로, 전 세계 담수 총량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1500여 종의 다양하고 고유한 생물들이 살고 있는, 살아 있는 진화박물관이자 원시생명체 연구소이기도 하다. 약 1만3000년 전에 빙하가 녹으면서 홍수가 일자 북부 아시아인들이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추정한다. 

 

바이칼호에 살던 新몽골로이드

이런 한국인의 특성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 얼굴 대장정의 시작은 바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우리 조상들의 1만km가 넘는 대장정이 지금의 우리 얼굴의 모양과 무관하지 않아요.

신(新)몽골로이드만이 바이칼 호수에서 영하 70도의 추위를 견뎌낸 사람들입니다. 얼굴 중에서 추위에 가장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부위가 코와 눈이에요. 혹독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코는 더 낮아지고, 눈두덩은 두꺼워지게 됩니다. 또 얼굴 광대뼈는 튀어나오게 되었어요. 쌍꺼풀 없이 두툼해진 눈, 튀어나온 광대뼈, 납작한 코.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겪어보지 못한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남아 한 발 한 발 내디뎌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그래서 결국 한반도에까지 이른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얼굴입니다. 혹한이 만들어낸 바이칼 호수가 만들어낸 조각이고 예술품이고 상징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과학의 표처럼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 역시 부인하기 힘들어요. 바이칼 호수에서 산 사람들을 우리는 부리야트(가장 북쪽에 사는 신몽골리안)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얼굴과 안압 3호분에서 발견된 벽화를 보면 비슷합니다.

요즘 젊은 분들 중에는 신몽골로이드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요. 어찌 보면 왜 그리 험난한 길을 걸어온 걸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유럽 쪽으로 가서 코카서스 쪽으로 갔더라면 지금의 선진국에서 태어나 얼굴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도 오뚝한 코와 멋진 쌍꺼풀의 눈을 가졌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내가 모르는 그 이전의 역사, 이 추위를 견뎌내며 이 땅에 도달한 바이칼호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뜁니다.

“내가 해냈구나. 우리가 해냈구나. 그래서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겪어낸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구나.

그 어떤 짐승도 못 하고, 그 어떤 인간도 해내지 못한 영하 70도의 추위를 이겨냈구나.”

우리 얼굴이 바로 자랑스러운 훈장이고 서사이고 조각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시베리아의 그 추위가 남아 있고, 우리 안에는 추위에 맞서 한 발 한 발 내디딘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모르는 인간들과는 게임도 안 되는 것이죠. 참고 견디며 그 추위를 뚫고 나온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장정을 뚫고 나온 덕분에 우리는 이 얼굴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인의 얼굴이고 내 얼굴입니다. 이 얼굴은 단 몇 년 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년, 수만 년을 거쳐 지금의 얼굴이 된 것이에요. 그렇기에 얼굴을 보기 위해 거울을 보지만, 지금 당장 거울을 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역사의 거울, 문화의 거울을 보아야 비로소 내 얼굴이 드러나니까요.⊙

 

04월 호

⑮ 한국인의 문화적 얼굴 

인간의 얼굴은 문화의 얼굴!

⊙ 얼굴은 생물학적 유전자의 증명서가 아니라 문화… 文身 역시 문화의 산물
⊙ 이름은 내 것이지만 남이 나를 부르기 위해 존재. 얼굴도 마찬가지
⊙ ‘한국적 무표정’이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표정이 많지 않아… ‘化粧’도 문화이자 표정
⊙ 한국인의 생존력은 남하고 싸워서 이기는 생존력 아니라 척박함 견뎌내는 생존력… 소나무와 같아
⊙ 문화인들은 단것보다 쓴 걸 먹어… 씀바귀, 칡 등 한국인은 쓴 음식 좋아하는 가장 문화화된 민족

▲야구장 관중석에서 만난 한국인의 얼굴. 저마다의 표정이 살아 있다. 사진=조선DB

 

얼굴은 생물학적 유전자의 증명서가 아닙니다. 얼굴은 문화입니다. 저는 문화를 알려면 얼굴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태어난 대로 살지 않습니다. 태어난 얼굴대로도 살지 않는 세상이죠. 성형수술이 성행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타고 태어났지만 우리는 교육에 의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태어난 얼굴에 문화라는 옷을 입힙니다.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들이 그렇습니다. 인간이기에 창조적으로 삽니다. 주어진 얼굴을 원하는 대로 고칩니다. 다만 그것을 기계의 힘을 빌려 고치느냐, 영혼과 마음의 교양으로 고치느냐의 문제가 따르지만 말이죠.

링컨은 “사람의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민얼굴은 유전자 탓을 할 수 있지만 마흔이 지나고 나면 타고난 얼굴, 부모님이 주신 얼굴, 유전자의 얼굴이 아니라 문화의 얼굴, 역사의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해볼까요? 세상에서 제일 못 생긴 사람은 문헌기록상으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를 모함하는 적들은 소크라테스 제자들에게 이렇게 조롱했다고 하죠.

“얼굴은 인간의 마음이 투영되는데 너희 선생님의 얼굴을 봐라. 그는 분명 범죄자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그들과 싸우고 나서 소크라테스를 찾아가니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그래. 내가 타고 태어난 얼굴은 범죄자의 얼굴이야. 그런데 수없이 많은 노력을 통해 나는 그 얼굴을 극복했다. 그래서 너희에게 교육을 하고 철학을 연구하는 거다. 맞다. 난 범죄자의 얼굴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그걸 완전히 극복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더 자랑스러운 것이다.”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피부색은 3가지 색으로 분류되는데, 이 기본의 바탕에 ‘문화’의 문(文)이 결합되게 됩니다. 민낯인 자연에 인간의 다양한 문화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문자가 그러하듯 문신(文身) 역시 그 문화의 산물입니다. 문화의 ‘문’이라는 말은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 페이스페인팅처럼 얼굴에 칠하는 것을 뜻해요. 문신에는 고통이 따라요. 문화의 뜻 이전에 아픔이 있었다는 것이죠. 옛날 인디언들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과 몸에 무언가를 붙이고 그리고 칠하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바로 문화입니다.

〈‘바탕이 외양을 능가하면 야해지고(野), 외양이 바탕을 능가하여 문이 질을 이기면 사(史)해진다. 문질이 잘 조화를 이룬 다음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子曰 質勝文則野,勝質文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공자, 《논어》 옹야편(論語雍也) 제68

자연의 얼굴인 민얼굴은 ‘질’, 화장한 얼굴은 ‘문’, 그래서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이 말은 무늬와 바탕이 빛나다라는 뜻으로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우러져 조화로운 글이나 성품과 몸가짐이 바른 사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질’로 가려는 마음과 ‘문’으로 가려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내 얼굴이 생겼고 한국인의 얼굴이 생기는 것입니다.


유전적 얼굴이 아닌 문화의 얼굴

▲한국인의 얼굴, 하회탈. 사진=안동시

 

 유전자라는 것은 우리에게 새겨진 하나의 도장과도 같습니다. 유전적인 우리의 얼굴에는 DNA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전적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의 얼굴도 있습니다. 그래서 생물학적인 유전자만이 아니라 수십, 수백 년을 거쳐 오면서 생성된 문화의 얼굴을 알아야 해요. 얼굴을 문화적으로 해석한다고 할 때 그 시작은 아마도 아프리카의 가면(假面)이 아닐까 싶어요.

얼굴이라는 것은 내가 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남이 보라고 주어진 겁니다. 내 얼굴이지만 내가 볼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가면을 쓴다면 남 역시도 내 얼굴을 볼 수 없어요. 내 표정이 수시로 바뀌지만 가면의 표정은 바뀌지 않습니다.

가면이 등장했던 것은 신(神)을 향한 종교의식에서였어요. 성(聖)스러운 의식에서 인간 본연의 얼굴은 가려집니다. 또 춤을 출 때 가면을 사용했어요.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얼굴을 봅니다. 얼굴에 집중하다 보면 사람의 몸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가면을 쓰면 어떤가요? 춤을 출 때 얼굴을 가리면 얼굴이 아닌 몸으로 소통을 하게 되죠. 발레리나들이 춤을 출 때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는 것과 같아요.

가면을 쓰지는 않지만 얼굴의 모든 표정을 지워 중립적인 얼굴을 함으로써 몸으로의 집중을 유인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끝나고, 감성이 끝나고, 표정이 끝났을 때는 가면을 안 써도 가면 쓴 것과 같아지는 것이죠. 몸으로 모든 것을 말하게 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안면몰수’하고 살아간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이때 나의 인격(人格)은 사라집니다.

우리나라에 ‘말에 얽어도 장에 가고 굶어도 떡 해 먹는다’는 말이 있어요. 얽어도 상관없이 장에 가는데 평등한 얼굴이라는 게 가면을 쓰면 다 평등해지는 것입니다.


이름으로서의 얼굴

이름은 내 것이지만 남이 나를 부르기 위해 존재합니다. 남을 위한 것이죠.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어요. 인간은 거울을 통해 제3자의 시선을 빌려 자아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요? 바로 나 자신의 것이죠.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은 못 보는 것, 주인은 나지만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인 것, 그것이 얼굴입니다. 외국으로 여행을 떠날 때 여권 속 이름과 사진이 나를 증명하듯 내가 나를 증명하는 것은 내 얼굴과 내 이름입니다. 이름하고 얼굴은 같은 것이죠.

이름이라는 것이 내가 부르라 붙여진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부르라 붙여진 것이듯, 얼굴 역시 내가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보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얼굴이나 이름은 모두 나 자신의 것이지만 남을 위해 존재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항상 남들에게 비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장 오래된 거울은 수면(水面)입니다.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자기 인식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이 거울에 의해 처음으로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수단을 얻었어요. 정체성의 형성은 ‘거울효과(Mirror Effect)’와 연관이 있습니다.

거울효과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어요. 사회과학자 아서 비먼의 연구팀이 핼러윈데이에 실시한 실험인데, 한 실험조교가 아이들에게 막대사탕을 하나씩만 가져가라고 말하고 자리를 피합니다.

그 결과, 조교의 말을 어기고 사탕 2개 이상을 가져간 아이의 비율이 33.7%였다고 해요. 다음에는 사탕 바구니 앞에 큰 거울을 설치하고 똑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2개 이상을 가져간 아이들의 비율이 8.9%로 줄었다고 하지요.

휴지를 버릴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46%가 휴지를 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 이미지를 본 경우 24%만이 버렸다고 해요. 벽에 단순히 눈(目) 그림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놀랍지 않나요?


동서양 문화와 얼굴

▲동서양 아이들의 우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아이가 콧물, 눈물, 침까지 흘리며 가장 화끈하게 운다.

 

 우는 아이들을 살펴봅시다. 누가 제일 화끈하게 우나요? 누가 봐도 콧물, 눈물, 침까지 흘리며 우는 아이들은 우리나라 아이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황하론’은 황색인종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죠.

그러나 한국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6·25전쟁의 폐허더미 위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고, 눈부신 근대화의 경제발전과 함께 지금 전 세계 안 퍼진 데가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밟히고 밟히며 가장 치열하게 격렬하게 살아온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 선조들은 또 누굽니까? 영하 70도의 추위를 알몸으로 격파한 ‘신(新)몽골로이드’입니다.

서양은 대체로 어릴 때부터 대부분 소프트한 유동식을 먹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딱딱한 걸 먹죠. 딱딱한 걸 먹기 때문에 세계에서 이빨이 가장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드라큘라 이야기가 서양의 대표 공포물이 되는 것은 서양인의 이빨의 특징은 뾰족하고 송곳니가 발달했기 때문이죠. 이와 반대로 우리는 어금니가 발달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씹기보다는 갑니다. ‘그라인딩’입니다. 서양의 ‘츄잉’과는 반대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추위를 견뎌온 것 때문만이 아니라 이렇게 맷돌처럼 그라인딩 하는 식(食)문화 때문에 턱이 발달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의 설(說)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는 대부분 옆얼굴을 그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옆얼굴을 거의 그리지 않고 정면에서 바라보는 얼굴을 그립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 선조들의 초상화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어요.

 
 

▲18세기 윤두서의 〈자화상〉(종이담채, 38.5x20.5cm, 개인 소장, 국보 240호)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

 

 윤두서(尹斗緖·1668~1715년)의 자화상을 보더라도 분명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굴은 대칭적이라 좌우가 같아요. 그런데 〈모나리자〉를 비롯해 서양인의 얼굴은 좌우가 다릅니다.

〈모나리자〉의 얼굴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쪽 눈이 약간 위로 올라가 있어요. 그런데 보통의 경우 우리는 양쪽 눈이 똑같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좌우대칭형에 가깝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서양 사람들은 얼굴이 좌우 짝짝이인 경우가 많지만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좌우가 똑같아요. 이것은 유전적 요인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요인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한국 사람들은 한쪽 눈을 찡그리는 윙크에 익숙하지 않지만 서양 문화에서 윙크는 하나의 상징적 문화코드입니다. 또한 서양인들의 얼굴 표정은 그들의 감정표현만큼 다양하죠.

그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국적 무표정’이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표정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희로애락을 겉으로 드러내는 문화가 아니었던 것이죠. 웃어도 박장대소의 웃음보다는 멋쩍어 웃는 웃음이 많아요. ‘오리엔탈 스마일’이라는 것이 그런 웃음입니다.

 

얼굴의 문화적 삭제

▲우리나라 옛 여성들은 바깥 출입을 할 때 쓰개로 얼굴을 가렸다. 이슬람에서는 베일을 쓴다. 또 중국 여성은 결혼 후 전족(纏足)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가면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영웅적인 탈입니다.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가면이 아마 대표적 사례일 겁니다. 둘째, 억압적인 탈입니다. 과거 일본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아내의 눈썹을 깎았다고 해요.

“너는 내 여자이고, 너의 얼굴은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억압의 발현이었어요. 변형 가능한 것,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얼굴에서는 머리칼과 눈썹이며 타인에 의한 강제적, 문화적인 삭제가 일어날 수 있죠.

동양인에게 눈썹은 쉽게 내줄 수 있는 것인 반면 코는 얼굴의 중심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코가 납작해졌다” “코가 삐뚤어져라 마신다” “코 베어 가는 곳”이라는 표현들은 얼굴 중에서 그만큼 코가 중요하다는 해석도 됩니다. 그래서 한자로 ‘자기(自己)’를 표현할 때의 ‘스스로 자’는 원래 ‘코 자’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어린아이가 울며 보챌 때 “호랑이 온다”고 겁을 주었다고 하죠. 또 떼쓰는 아이에게 “에비~”라고 혼을 냈다고 합니다. ‘에비’의 어원을 두고 몇몇 학자는 ‘귀 이(耳)’와 ‘코 비(鼻)’자를 합성한 ‘이비’에서 유래됐다는 겁니다. ‘이비’가 ‘에비’ ‘어비’ ‘에비야’ 등으로 변형됐다고 해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전공을 부풀리려고 우리 백성들의 코와 귀를 잘라 ‘귀무덤’ ‘코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본 교토 인근에는 지금도 12만여 명의 ‘귀무덤’이 있는데 처음의 이름은 ‘코무덤’이었다고 하죠. 스스로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귀무덤’으로 바꿔 불렀다고 해요.

코뿐만 아니라 이[齒]도 중요한데 일본의 옛 그림 중에 남편이 아내의 얼굴에 도구를 들이대고 이를 뽑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인들은 결혼을 하면 아내의 눈썹을 미는 데 그치지 않고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이를 뽑고 남은 이를 새까맣게 만들었다고 해요.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드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여자들은 밖에 나갈 때 항상 ‘너울’ ‘장옷’ ‘쓰개치마’ 등을 쓰고 얼굴을 가렸어요. 대비나 대왕대비 역시 남자 신하들을 대할 때 발을 드리워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이슬람권 여성들은 ‘베일’을 씁니다. 이슬람 국가마다 ‘히잡’ ‘차도르’ ‘아바야’ ‘부르카’ 등 그 이름은 다르지만 한마디로 ‘얼굴 가리개’입니다.


종교에서의 얼굴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의 모습이다.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종교적인 요인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얼굴 역시 서양 문화의 발현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머리칼은 금발입니다. 그러나 당대 살았던 사람들의 시체를 발굴해보면 골격 등이 지금의 예수님 모습과 아주 다르다고 해요.

불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불상(佛像)은 희랍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불상 얼굴에 서구적인 문화가 스며 있어요. ‘십일면관음상’이나 뒤에 서 있는 보살상들을 보면 전부 서구 미(美)의 기준인 팔등신(八等身)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살은 여자지만 인도에서 보살은 원래 남자였다고 해요. 문화적 틀에 의해 새롭게 탄생된 것이죠. 이 모든 것이 유전적 요인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에 의해 변형되었어요.

안정복(安鼎福·1712~1791년)이 쓴 《여용국전(女容國傳)》에 ‘여자가 화장을 할 때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자가 화장을 게을리하면 머리는 이로 뒤덮이고, 얼굴에서는 때가 나오고, 이빨은 누렇게 되어 입에선 냄새가 나고 얼굴의 모든 곳이 일그러진다는 겁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다는 일종의 우화(寓話)예요. 왕이 나라 다스리기를 게을리하자 대야장군(얼굴을 씻는 ‘대야’를 의인화시킨 장군) 등 화장품(장군)들이 전부 일어나 물리치니 여용국(여자의 얼굴)이 평화를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화장(化粧)’도 문화입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것처럼 깨끗하게 가꾸고 잘 다스려야 한다는 유교적인 문화 특성이 반영되어 있어요.

동양에서는 아름다운 여자를 자연의 ‘꽃’으로 비유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해요.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은 양귀비(楊貴妃)를 ‘해어화(解語花)’라 불렀습니다. 현종과 양귀비의 행렬이 연꽃을 감상하기 위해 태액지에 이르렀어요. 현종이 주위를 돌아보면서 말합니다.

“여기 있는 연꽃도 해어화보다는 아름답지 않구나.”

연꽃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말을 못 하는데 양귀비는 꽃은 꽃이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입니다. 단지 화장을 해서 나타나는 자연적 미의 기준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간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것이죠.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으로 후에는 미인(美人)을 뜻하게 되었어요.

서양의 철학자 볼테르는 “처음에 미인을 꽃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지만, 두 번째로 같은 말을 한 인간은 바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의 얼굴은 역사 속에서, 사회 속에서 역사성, 사회성이 반영됨으로써 변형되고 달라진다는 겁니다.

가령 전쟁이 일었을 때 화장하지 못하게 하는 문화가 있어요. 일본에서는 ‘칠칠금언’이라 해서 7월 7일에는 얼굴에 절대로 화장을 못 하게 하는 문화도 존재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동서양 문화의 차이입니다. 문화를 억압하는 쪽과 인간의 본성을 북돋우는 쪽으로 나뉩니다. 억제하고 금욕함으로써 사회적인 힘을 만들려는 문화와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고 격려하며 발전해온 문화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문화가 다르니 화장하는 방법 역시도 달랐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의 화장을 좋지 않게 보고 사치로 보는 시선도 있어요. 다만, 옛 문인 정철(鄭澈·1536~1593년) 선생은 여자들의 화장에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은 남자들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여자들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이야기했어요.

한국 남자들은 대체로 여자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표정이 많지 않다고 했는데 화장도 일종의 표정이라면 그 표정은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것을 선호한 듯해요. 자신이 보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남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싫은 게 대체적인 남자들의 심리인 것 같아요.


폼페이 부부의 초상화

▲AD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는 잿더미가 되었다. 훗날 빵가게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한 어느 부부의 초상화다.

 

 폼페이는 AD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18시간 만에 증발된 도시입니다. 화산으로 인해 순식간에 도시는 잿더미에 파묻히고 산 사람도 그대로 매몰되었어요. 그곳에서 빵가게라고 생각되는 집에서 부부의 초상이 발굴되었습니다. 눈이나 얼굴의 생김새가 동양인에 참 가까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실제 그리스 사람들은 동방 쪽에 가까웠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인들을 서양인이라고 인식하게 된 데에는 르네상스 이후 문명의 중심이라 여겨졌던 그리스·로마인들을 백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식적 작용이 있었다고 보여요.

그림의 표정을 보면 영웅적인 권력자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활한 장사꾼의 얼굴도 아닙니다. 여자의 오른손에는 펜이 들려 있고, 왼손에는 석판이 있어요. 남자는 종이를 들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임이 분명해요. 발굴된 곳이 빵가게여서인지 이들은 빵가게 주인 부부라고 알려졌지만 최근에 다시 논의된 바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당대의 지식인이었을 겁니다. 눈을 보세요. 눈빛 안에 내면에서 우러나는 깊이가 있어요.

한국인의 얼굴들을 보면 이런 비슷한 눈빛들을 볼 수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모두 무관(武官)이 아닌 문관(文官)이 지배하던 나라입니다. 칼을 쥐는 무의 지배와 펜과 종이를 쥔 문의 지배하에서의 얼굴은 그 표정부터 달라요. 그 문화가 그 시대 사람의 얼굴과 눈빛에서 드러납니다.

한국인이 갖는 문화적 특성 중의 하나는 평화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경쟁력은 약하지만 생존력은 강합니다. 비근한 예로 소나무를 들 수 있어요. 소나무는 떡갈나무, 활엽수하고 싸우면 쫓겨납니다. 죽는 것이죠. 그러나 활엽수가 절대 갈 수 없는 곳, 황토지이고 낭떠러지와 같은 곳에서 소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살아요. 낙락장송(落落長松)이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겁니다. 활엽수가 살지 못하는 땅에서 소나무가 살 수 있는 것은 그 생명력 덕분입니다.


한국인, 경쟁력은 약하나 생존력은 강해

한국 사람들은 사막에 떨어져도 산다고 하죠.

“너희는 좋은 데 가서 살아라. 나는 너희가 못 사는 곳에서 너희가 없는 새로운 터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나무를 보면 눈물이 납니다. 우리 조상들을 보는 것 같아서요. 독하게 싸우고 버티고 살아남은…. 왜 양보를 해서 남들 못 사는 그 척박한 땅에 가서 사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평화주의자는 좋은 것을 가지고 경쟁하지 않고 스스로 남이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삶을 일구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이 그렇습니다. 경쟁력은 약하지만 생존력은 강하죠.

지구상에 가장 오래 살아남은 바퀴벌레를 봐요. 몇 달을 굶어도 끄떡없습니다. 죽는 순간에도 그냥 죽지 않고 알을 퍼뜨립니다. 죽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것이죠. 생긴 것도 납작하게 생겨서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방사능에도 끄떡없다고 하죠.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곤충이 바퀴벌레입니다. 먹을 게 없는 우주에서도 살 수 있는 게 바퀴벌레예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에서도 바퀴벌레를 기르더군요.

 모든 동물이 추워지면 따뜻한 남쪽을 향해 떠나는데 펭귄은 반대로 가장 추운 북극으로 갑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혹독한 추위를 향해 새끼를 낳으러 가는 것이죠. 아무것도 생존할 수 없는 그곳이, 알을 낳아도 훔쳐 먹는 경쟁자가 없는 그곳이 새끼를 낳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펭귄의 어미는 그 추위를 버텨냅니다.

풍뎅이는 또 어떠한가요? 산불이 나는 것을 10리 밖, 20리 밖에서도 알아차리는 곤충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기계에서도 잡을 수 없는 산불을 감지해냅니다. 가장 먼저 산불을 인지한다고 하죠. 더욱 신기한 것은 모든 동물이 산불이 나면 산불을 피해 도망가는데 풍뎅이는 산불이 난 곳으로 들어가 거기에 알을 낳습니다.

한국인의 생존력은 남하고 싸워서 뺏고 이기는 경쟁에서 오는 생존력이 아닙니다. 싸우지 않고 남이 못 사는 데 척박함 속으로 들어가서 견뎌내는 생존력이죠.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호기심, 싸우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력이 강한 민족. 혹독한 영하 70도의 추위를 이겨내고 이곳까지 내려온 우리 선조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혹독한 땅 시베리아에서 왔지만 일본과 같이 무를 숭상한 무의 나라는 아니었어요. 날카롭고 무서워 보이며 표독한 느낌의 얼굴이 아니라 유순하고 뭔가 깊이 생각하는 내면적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리’자 돌림의 한국, 머리 허리 다리

우리의 얼굴은 조상님이 주신 것이요, 결국 유전자를 통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몸을 이야기할 때 머리, 그다음 허리, 그다음에 다리로 모두 두 음절로 된 ‘리’자 돌림이죠. 영어로 하면 헤드(Head), 웨이스트(Waist), 레그(Leg)로 모두 다릅니다. 머리, 허리, 다리라는 말 속에 이미 내 몸은 상중하 3부분으로 나뉘어 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상부에 있는 머리, 바로 얼굴입니다. 우리가 왜 하고 많은 신체 부위 중에 얼굴 찾기를 시작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이 얼굴 안에는 우리의 생물학적 DNA가 담겨 있고, 문화와 역사가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인들은 단것보다 쓴 걸 먹죠. 증거를 하나 대볼까요? 어린아이들은 쓴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짐승들도 쓴 거를 못 먹기 때문에 나무 이파리들이 짐승들의 식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성장과 함께 문화화되면 쓴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문명인들이 먹는 기호식품들의 대부분은 쓴 것들입니다. 커피, 홍차, 맥주, 초콜릿….

개인적인 기억이 하나 있어요. 옛날 다방에 가보면 시골에서 온 사람들은 커피에 설탕을 넣어 먹습니다. 그것도 설탕이 공짜였던 때라 아예 비벼 먹는다고 할 만큼 막 넣어 마십니다. 하지만 서울 사람들은 쓴 커피를 그냥 마시죠. 설탕을 넣으려고 하면 “노 슈거, 노 밀크(No Sugar, No milk)”라며 손사래를 칩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세련되고 고상하여 부러웠던 기억이 있어요.

이게 문화라는 겁니다. 쓴 것을 좋아하는 민족은 반은 농담 삼아 DNA로부터 영향을 덜 받은 교육받은 민족입니다. 짐승은 DNA의 영향을 100% 받지만 DNA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그 영향으로부터 좀 더 멀어질 수 있는 것이 문화인입니다. 우리의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쓰디쓴 쑥과 마늘을 먹는 것은 짐승에서 인간이 되는 문화화의 과정에 대한 상징적 은유일 수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쓴 걸 참 좋아하는 민족 중 하나입니다. 모든 요리의 기본이 되는 마늘은 물론이고 씀바귀, 칡, 갓김치, 쑥갓, 냉이, 고들빼기, 도라지, 더덕…. 먹는 것으로 보자면 한국인이 가장 문화화된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05월 호

⑯ 화장과 성형의 한국인 얼굴

눈빛이 죽으면 내 존재가 죽고, 그 나라가 망해

⊙ 진짜 내 얼굴 아니라 아이콘 표정으로 대신하는 시대
⊙ 셀카 속에서 우리는 웃거나 울고, 아름답거나 우스꽝스럽다
⊙ 호탕한 영웅이 되지 못할 바에야 여인의 얼굴에 눈썹을 그리며…
⊙ 성형수술로 新몽골로이드 얼굴 버리고 서양인의 얼굴 닮아가
⊙ 일본 사람들의 눈빛이 사라지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 겪어

▲셀카를 찍는 대학생들. 작년 8월 이화여대 학위수여식 후 모습이다. 사진=조선DB

 

드디어 우리는 정보 시대에 도달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얼굴을 찾는 대장정의 마지막 단계이다.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이메일, 카카오톡 등 많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이용하고 있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사실을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이지만, 반면 감정을 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러한 도구와 함께 발전하는 것이 이모티콘(emoticon)이다. 이모티콘은 감정을 뜻하는 이모션(emotion)과 그림을 뜻하는 아이콘(icon)의 합성어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정보화 시대의 디지털 소통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인 셈이다. 디지털 소통에 있어 미묘한 감정이나 상태 등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정보화 시대에 우리의 얼굴은 아이콘인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표정을 감춘 채 아이콘을 통해서 울거나, 웃으며 상대방에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진짜 내 얼굴이 아니라 아이콘의 표정으로 얼굴을 대신한다. 마치 옛날 사람들이 가면을 쓴 것처럼 현대의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가면을 언제든 쓰고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콘은 이 시대의 가면이다.

반면 가면과 아이콘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식의 현실감이다. 가면은 누가 보더라도 ‘아, 저 사람이 가면으로 자신의 진짜 얼굴을 가리고 있구나’라는 것을 안다. 즉 진짜 얼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콘은 인간의 뇌가 이것을 진짜 사람의 얼굴로 인식하게 된다. 모바일 메신저에서 스마일 아이콘을 보내면 타인의 뇌는 내가 정말 웃는 것으로 생각하고 인식한다.

재미있는 것은 문화에 따라 이모티콘 역시 달라진다는 것이다. 서양은 옆얼굴로 표현하고 일본은 아직도 종서(縱書·세로로 글을 쓰는 것)의 문화이니 이모티콘 역시 세로 방향으로 만들어진다. 문화에 의해 똑같은 이모티콘이라도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얼굴은 사라지고 문화 속에서 문화를 반영하는 이모티콘들이 나타난다.

앞서 우리는 한국인의 특성 중 무표정함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표정은 꾸밀 수 있지만 안색은 꾸밀 수 없다. 서양 사람들은 표정은 보지만 안색은 보지 못한다. 표정이라는 말과 안색이라는 말이 영어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표정 이면에 숨겨진 안색을 본다. 정철(鄭澈·1536~1593년)이 쓴 시 한 구절을 보자.

 

‘반기시는 낯빛이 예와 어이 다르신고….’
-정철의 장편가사 〈속미인곡(續美人曲)〉 중


정철은 시에서 표정은 똑같이 반기고 있는데 낯빛, 안색이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와 나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 숨길 수 없는 낯빛에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눈치가 굉장히 빠른 것은 사실인가 보다. 웃고 있는데도 안색이 별로 안 좋으면 그건 화내는 것임을 알아챈다. 그러니 한국인은 비록 무표정한 국민이지만, 표정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민족이 아니라 그 안에 진정으로 숨겨진 안색이라는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소통하는 민족인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보화 시대에는 이러한 낯빛의 문화가 사라졌다. 감정의 전달에 아이콘이 자리하여 나를 대신해주고 있지만, 아이콘에는 낯빛이나 안색을 전달할 방법이 없다.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아이콘이라는 가면을 쓰고 현대인은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다.


또 하나의 얼굴, 셀카

또 하나의 문화는 바로 셀카다. 자기 자신을 촬영하는 것을 한국식 표현으로 셀카(셀프카메라·self camera)라고 부르는데 영어로는 셀피(selfie)라고 한다. 2013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은 ‘셀피(셀카)’를 올해의 단어로 뽑았고, 몇 해 전 미국 《타임》지는 ‘셀카봉(selfie stick)’을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원래 얼굴은 남이 보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사진 역시 남이 찍어줘야 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찍는다. 지금까지의 얼굴은 내 몸에 있지만 숨어 있는 것이었다. 남이 봐주는 것. 그러나 지금은 내 얼굴을 내가 본다. 남이 나를 보듯이 내가 나를 본다. 심지어 아무도 없는 우주선 안에서도 셀카를 찍는다.

세계 최초의 셀카 사진은 네덜란드 출신 미국 사진작가 로버트 코넬리우스(Robert Cornelius)로 알려져 있다. 이 사진은 1839년 10월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그의 집 뒷마당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해당 사진이 최초 셀카라 평가받는 이유는 인물 포즈에 있다. 초창기 사진들 속 인물들이 경직된 포즈를 하고 있다면 코넬리우스는 표정이나 각도 등이 현재 통용되는 셀카와 유사하다.
 

정보화 시대의 셀카는 이모티콘과 함께 나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얼굴이 되었다. 셀카 속에서 우리는 웃거나 울고, 아름답거나 우스꽝스럽다. 촬영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찍고 지우기를 반복할 수 있으며, 그중 선택된 이미지의 표정을 누군가에게 전달하여 상대방에게 그 얼굴을 진실처럼 믿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셀카는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발전하였지만, 당시의 장비는 중장비에 가까웠다. 진정한 의미의 셀카는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특히 휴대전화 카메라의 보급에 따라 더욱 가속화되었다. 현대인은 수많은 셀카를 촬영하고, 선택하고, 지우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얼굴 중 가장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취사선택하여 공개한다. 촬영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동안(童顔)으로 보이게 할 수 있으며, 눈은 크게, 턱은 갸름하게, 피부 톤도 조절 가능하고, 촬영 배경까지 교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이 현실을 기록하는 도구이냐를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질문이 된 지 오래다. 오히려 이 시대에 사진은 가장 허구적인 매체에 가까워졌다.

또 하나 셀카의 범람은 소셜미디어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한다. 라캉이 거울 이론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고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타인 속에 있을 때’이다. 스스로의 욕망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시대에 수많은 셀카를 찍는 것은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소셜미디어를 통해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어떤 욕망을 손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달된 이미지는 타인에게 ‘멋지다’ ‘아름답다’ ‘좋아요’ ‘대단해요’ 등의 피드백을 통해 완성되며, 허구적 셀카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아름다워지려는 욕망

▲서울 시내 한 백화점 화장품 매장을 찾은 손님이 립스틱을 발라보고 있다. 사진=조선DB 

 

박가분(朴家粉)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상표 등록되어 판매된 화장품이다. 여자들이 함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없었던 시대에 집 안에서 자신의 피부색을 바꾸고 아름다움을 가꿀 수 있게 한 제품이다.

당시의 어머니들에게 이 박가분은 최고의 사치였다. 화장품의 유통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던 약장수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시대였는데 대부분 이 약장수들은 사기성이 농후해서 시골에 가서는 가짜 화장품을 팔기도 했다. 그런 화장품을 남편과 시어머니 몰래 퍼온 쌀과 바꿔가던 때였다.

당시 박가분은 피부와 백분의 부착력을 높이기 위하여 납 성분을 넣었다. 이른바 납분 또는 염분이었다. 당연히 피부에 좋을 리가 없었다. 유해성분 때문에 몸에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화장을 해서 화장독 오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목숨을 걸고 화장을 한 셈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는 사람들에게 더 예뻐 보이고, 아름다워지려고 한 것이다.

물론 화장에 대한 관심은 그 이전 역사에서도 많이 찾을 수 있다. 일반인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왕의 간택을 받기 위해 궁녀들 사이에서는 화장이 매우 절실했다. 왕이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따라 하는 유행이 되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당(唐) 현종(玄宗) 시기 여인들의 눈썹 형태는 매우 다채로웠다. 원앙미(鴛鴦眉), 소산미(小山眉), 오미(五眉), 삼봉미(三峰眉), 수주미(垂珠眉), 월미(月眉), 분초미(分梢眉), 함연미(涵煙眉), 불연미(拂煙眉), 도운미(倒暈眉) 등 12가지 방식이 있었다고 한다. 여인들은 매일 일어나면 눈썹부터 그리는 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여자들이 몇십 년에 걸쳐 하루도 안 빠지고 화장하는 걸 보자면, 어떻게 훌륭한 미술가 중에 여자들이 많지 않은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어떤 미술품이 얼굴 전체의 이미지를 바꾸는 눈썹만 한 게 있느냐는 말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떠한 예술품도 여성의 아름다움만큼 사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없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있듯 당 현종은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취해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았는가. 나라 하나와 바꾼 아름다움이다. 이태백은 당 현종을 멋쟁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중국의 고사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채신이라는 남자가 어느 날 부인의 눈썹을 그려줬는데 이 소문을 들은 중국의 관료들이 왕에게 여자의 눈썹이나 그려주는 채신을 파직(罷職)하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왕은 채신을 딱히 여겨 벌주지 않는다. 이를 보고 중국의 시인이 쓴 시가 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세상을 호령하는 호탕한 영웅이 되지 못할 바에야 아름다운 달빛을 벗 삼아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눈썹을 그리는 것 또한 아름답고 좋은 게 아니겠느냐.’

얼굴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하지만 문화적인 분석은 논쟁도 많고 그만큼 어렵다. 과학이야 자로 재는 숫자의 세계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객관성의 세계이지만 문화의 세계는 가치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진다. 채신의 일화에서처럼 눈썹을 그리는 행동이 파직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영웅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행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칼을 들고 세상을 호령하는 무(武)의 얼굴보다 책에 파묻혀 자연을 사랑하는 온화한 선비의 얼굴, 그 문(文)의 얼굴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문화적인 얼굴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화장품과 성형 산업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의 성형외과 간판들. 사진=조선DB

 

정보화 시대 우리 얼굴은 하나하나의 아이콘으로 대체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깥출입마저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한국 여성들이 보자면 황홀한 세상이다. 시대와 역사가 바뀌어 이제 억압된 사회에서 벗어나 자기를 표현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은 곧바로 자기중심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산업화의 과정에서 여성들의 바깥출입은 자유를 맞았으며 화장품 산업 또한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시골에서 화장품을 파는 약장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약장수들이 소규모로 팔던 화장품 산업은 엄청난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야기할 때 대개 군사력, 경제력을 이야기하지만 지금은 ‘알력’ ‘페이스 파워’ ‘얼굴력’도 존재한다. 화장품 산업과 성형 산업의 규모가 그것을 대변한다. 이미 한국은 대중가요에 의한 한류 못지않게 화장품과 성형수술에 있어서도 대표적인 국가가 되었다.

화장품 산업은 지난 10년간 폭발적 성장세로 수출 규모를 키우고 있다. 세계 수출 3위라고 하며 대한민국 무역흑자 효자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화장품 수출 규모는 10년 전인 2012년 10억6700만 달러에서 2021년 91억8457만 달러로 8.6배 성장했다. 화장품 수출액에서 수입액을 뺀 무역수지는 2012년 8926만 달러 흑자에서 2021년 78억7883만 달러 흑자로 무려 88.3배 이상 늘어 수출 효자산업이 되었다.

몇 해 전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9명이 ‘인생에서 외모가 중요하다’고 답해 한국인의 외모 관심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2020년 2월부터 2주간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500명에게 물으니 89%가 인생에서 외모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성형수술 경험을 묻는 말에는 남성 2%, 여성 18%가 ‘성형수술을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여성 화장 산업의 발전은 여성들의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에 비례한다.

근래 아이를 보고 “얘는 한국 애처럼 안 생겼어요”라는 말이 의미심장한 칭찬으로 자리한 적이 있었다. 코는 오뚝하고, 눈은 쌍꺼풀이 진 아이를 보고 아이가 참 서양 애 같다고 하면 엄마들은 속으로 뿌듯해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성형수술이 신(新)몽골로이드의 얼굴을 버리고 서양인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던 것이다.

우리가 1등을 한 얼굴의 특성들을 모두 버리고 다른 얼굴로 가고 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중국이나 대만 등 아시아 지역 여자들의 성형 모델은 한국의 스타들이다. 바이칼 호수에서 벗어나 몇천 년을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내 문화와 내 역사, 내 유전자들이 종합되어 형성된 우리의 얼굴이 지금은 아시아의 미의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화장은 가면일까? 문화일까?

▲한반도에 정착한 한국인의 선조가 되어 살아온 이래 지난 100년만큼 한국인의 얼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적은 없다. 사진은 영국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네안데르탈인(오른쪽)과 호모 사피엔스(왼쪽) 모형. 사진=조선DB 

 

한국의 화장품이 중국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중국 여성들에게 한국 여배우처럼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전에 프랑스 랑콤과 일본 시세이도에 열광하던 때가 생각난다.

2010년 스페인에서 발견된 조개껍데기가 연구 결과 5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사용했던 화장 용기로 밝혀졌다. 그들은 이미 5만 년 전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색소를 생산, 얼굴과 몸에 화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화장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기원전 7500년 이집트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먹으로 눈 주위를 칠해 눈을 크게 만드는 화장을 했는데 이는 신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를 나타냄과 동시에 건조한 사막지대에서 눈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이처럼 초기의 화장은 종교적인 이유나 주로 신체를 보호할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화장품을 영어로 코스메틱(cosme tics)이라고 한다. 코스모스(cosmos)는 우주를 뜻한다. 왜 화장품이 우주를 뜻하는 cosmos에서 유래가 됐을까? 인간의 타고난 얼굴은 완전하지가 않다. 일종의 카오스(caos·무질서)의 세계다. 거기에 질서를 부여하여 카오스를 코스모스의 세계로 바꾸는 것이다. 인간은 타고 태어난 것, 주어진 것만으로는 부족한 존재다.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름다움’이요, ‘조화’다. 화장을 한다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 자신의 민얼굴의 약점을 보완하고 조화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바로 우주의 질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것이 올바른 화장관이다.

나를 위장하고 가면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진실한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서 화장을 하는 것이다. 화장을 하는 것이 가면을 쓰듯 나의 민얼굴을 가려 거짓된 얼굴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냐에 따라 화장 문화 역시 달라질 것이다.


모험 유전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가. 왜 우리의 선조들은 그 머나먼 여정을 자처했을까. 과연 그들의 장정은 그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탐험의 길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에 쫓겨 어쩔 수 없이 행해진 도피의 행로였을까.

쫓긴다는 것은 쫓기도록 운명 지워진 것이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쫓아가서 잡아먹으려 하는 짐승들의 눈은 전부 앞에 달려 있다. 늑대, 사자, 호랑이가 그러하다. 그런데 초식동물들의 눈은 전부 옆에 붙어 있다. 포식동물은 목표물을 겨냥한 채 정확히 그 목표물만을 바라보며 쫓는다. 그렇기 때문에 눈이 앞쪽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쫓기는 초식동물들은 앞만 보고 달릴 수 없다. 어디서 무엇이 자신을 덮칠지 모른다. 그러니 여기저기 살 곳을 찾아 도망칠 수 있도록 눈이 옆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역시나 강한 동물이다. 눈이 앞에 달려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초식동물 중에서도 가장 슬픈 짐승이 토끼다. 360도 모두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토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토끼는 도망가는 것이 전공이다. 심지어 토끼는 길고 큰 귀까지 가지고 있다. 앞발이 작고 짧기 때문에 언덕을 이용해 쉽게 포식자들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다. 사슴도 그렇고, 말도 그렇다. 쫓겨 도망 다니는 숙명으로 태어난 동물에게 신은 360도 모두를 볼 수 있는 재능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인간은 쫓기긴 했으나 두발이 있고 지능이 있고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절대로 쫓기도록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격용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바로 인간에게는 쫓기느냐, 쫓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신 거다.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머나먼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난 인간의 대장정…. 단지 지금 우리는 얼굴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선택지를 가진 인간이 안주하는 것이 아닌 탐험의 선택을 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뜻한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머나먼 시베리아까지 온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왜 이러한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왜냐면 그들 하나하나가 각각의 선택지를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먹이를 가지고 싸우기 싫어서, 어떤 사람은 싸움에 져서 어쩔 수 없이 쫓겨 왔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호기심에 새로운 곳을 보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리 중에는 모험심을 가슴 가득 품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자들 역시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단행한 인류의 동기에 대해 왈가불가 많은 논쟁을 벌인다. 감히 내가 단정해보자면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험하고자 하는 유전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탐험하는 자의 눈빛

많은 사람이 등산을 한다.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란 참 묘한 동물이다. 아마 최초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단행한 인류 역시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신들에게 다가올 미래가 희망만 가득하다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도 분명 존재했으리라. 자신이 확신할 수 없고, 알지 못하는 미지의 땅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딘 네오필리아(neophilia). 다른 짐승과는 전혀 다른 유전자, 위험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탐험심으로 가득한 유전자가 인간의 몸에 흐르고 있다. 모험하고자 하는 유전자다.

달나라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쫓겨서 달나라를 탐험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최초로 우주를 탐험한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귀찮은데 그냥 여기서 살자”라고 머무른 니그로이드에 대한 인종 차별이 아니다. 그냥 살아간 사람도 있지만 끝없이, 끝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바다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바다에서 튀어 올라 육지로 나온 물고기는 어떤 물고기일까. 처음의 육지에는 아무런 생물도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뭍으로 나왔지만 삶이 고달파 다시 바다로 들어간 물고기도 있다. 고래가 그렇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인류 중에도 다시 아프리카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 떠났다가 다시 돌아간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을 포함한 모든 생물에게는 기본적으로 머무르기보다는 번지고 확대하려는 경향이 있다. 민들레를 보라. 우리가 무엇을 택하느냐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지만, 위험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끝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동물 중에 인간의 눈을 가장 닮은 동물은 사자와 독수리다. 멀리 바라보기 때문이다. 멀리 바라보고 탐험하는 자의 눈빛, 그 눈빛은 살아 있다.


눈빛 살리기

인간이 화장이나 성형으로도 손댈 수 없는 얼굴의 마지막 영역은 어디일까? 아무리 가면을 써도 가릴 수 없는 그것, 바로 눈동자다. 그런데 참으로 아쉽게도 이 눈동자마저 이젠 변형이 가능하다. 색을 넣은 서클렌즈(circle lens)로. 우리도 서양인처럼 검은 눈동자를 버리고 파란색의 눈동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머리카락을 염색해 금발로 바꾸듯 이젠 눈동자도 염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면으로도 못 가렸던, 복면으로도 못 가렸던 그리고 성형수술로도 불가능했던 마지막 내 얼굴을 꾸미는 장치가 서클렌즈인 것이다. 우리가 1등을 했던 눈이 작다는 얼굴의 특징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서클렌즈를 끼면 눈이 커지는 효과까지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섣부르게 이것이 좋으냐 나쁘냐라는 판단을 할 수는 없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민주주의에서 쓰이는 한자 ‘민(民)’은 백성 민이다. 백성 민자는 눈을 쇠꼬챙이로 찔러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이렇게 눈을 멀게 해서 노예를 만들었다. 백성이라는 것이 바로 노예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바로 이 눈인데 이 눈을 찔러 짐승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아이 콘택트(Eye Contact)라는 표현이 있듯 사람과 사람이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도 이 눈은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의 매개체이다. 진실한 사람의 눈은 흔들림 없이 상대를 똑바로 볼 수가 있다. 그래서 눈을 마주치는 것은 최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낯선 사람과는 눈을 마주치는 걸 꺼린다. 남녀 간에 ‘눈 맞았다’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눈과 눈의 교감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눈을 그릴 때는 꼭 얼굴과 같이 그리는 습성이 있다. 옆을 그리든 앞을 그리든. 그런데 우리는 눈을 잘 안 그린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올라갔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윤연선이 1975년에 부른 노래 ‘얼굴’ 가사 중


우리가 좌뇌와 우뇌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은 기하학적인 수학이니까 좌뇌에 속한다. 그런데 ‘무심코’는 우뇌의 영역이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빛나는 눈동자’다. 한국 사람들은 눈을 잘 그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만화에서는 반드시 눈빛을 그린다.

눈 안의 하얀 부분을 강조하고 어떤 만화에서는 여기에 다이아몬드를 그려 넣는다. 눈빛을 더욱 강조하려는 것이다.


내 얼굴 찾기 대장정

우리가 갖는 우리 얼굴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고 문화적, 유전자적인 모든 면에서 눈빛이 죽으면 나의 존재가 죽고 눈빛이 죽으면 회사가 죽고 눈빛이 죽으면 그 나라가 망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 얼굴은 많이 바뀌었다. 바이칼호에서 벗어난 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하며 한국인의 선조가 되어 살아온 이래 지난 70년만큼 한국인의 얼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적은 없다. 한국인들이 아무리 전쟁을 겪고 굶주림에 죽어가고 배고픔과 싸워왔어도 우리는 눈빛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풍요해지고 삶이 윤택해질수록 눈빛이 사라져 가고 있다. 한국인의 초롱초롱하던 눈빛, 그 눈빛을 살리는 것이 바로 내 얼굴을 살리는 길이다.

이 글을 읽기 전과 이 글을 읽은 후에 여러분의 눈빛이 달라진다면 여러분의 얼굴이 달라질 것이고 아마도 여러분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이토록 사라져 가는 우리의 눈빛을 어떻게 살리느냐가 내 얼굴 찾기 대장정의 방향이다. 우리가 가꿔온 얼굴의 최후의 결전이 이 눈빛에 달려 있다.

소니가 워크맨을 시작으로 전 세계 전자시장의 패권자로 군림했던 때가 있다. 그런데 소니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소니를 힘들게 한 것일까. 일본인들에게 물었더니 그들의 답이 이렇다.

“옛날 소니가 처음 시작했을 때 사원들의 눈빛이 빛났는데 지금은 신입사원이나 누구나 오타쿠처럼 전부 처졌어요.”

일본 사람들의 눈빛이 사라지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의 세월을 겪었다.

정보화 시대의 이모티콘은 눈빛이 없는 죽은 도형이다.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 공업사회에서 산업사회, 정보사회를 겪으며 우린 서서히 우리의 눈빛을 잃어버린 채 눈빛 없는 도형들로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06월 호 

⑰ 한국인 얼굴과 내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의 눈빛 ‘생명의 순간’ 맛보았을 때 내 얼굴 완성

⊙ 지배를 받을망정 긴 수염 기르고 당당한 팔자걸음의 어르신들 어디에
⊙ 열정적일 때의 눈빛은 결코 만들어내지 못해… 산업화, 민주화 거치며 눈빛 잃어
⊙ 삶의 가운데에서 맛보는 따뜻한 눈빛은 우리를 울게 만들어
⊙ 눈물 때문에 빛나는 얼굴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없어

식민지일망정 수염을 기른 어르신들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다. 사진은 1991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전례학술 토론회에 참가한 갓 쓴 어르신 모습이다. 사진=조선DB

 

# 오후 다섯 시의 그림자와 〈돌의 초상〉

오후 다섯 시의 그림자(5 o’clock shadow)라는 말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자들은 모두 수염을 깎는다. 아침마다 얼굴에 비누 거품을 바르고 면도기로 싹싹 밀어낸다. 그러고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직장으로 출근한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죽어라 일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 또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퇴근 시각이 가까워질수록 그토록 빡빡 밀었던 수염은 조금씩 자라, 오후 5시가 되면 뾰족이 길어진다. 수염의 자리에 파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것이 5시의 그림자다.

한국 사람들이 만든 말이 아니라 외국의 샐러리맨들의 비애를 표현하는 말이다. 오후 5시, 퇴근 직전 하루에 지친 샐러리맨의 얼굴에 드리워진 파란 그림자, 현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갑자기 수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나라에서 사라져 버린 수염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참으로 지질하게도 못 살던 시절, 그래도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찬탄하는 것이 있었다. 남자들의 수염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수염이 길면 그 사람의 신분(身分)이나 부(富)의 정도와 상관없이 ‘어르신’이라 높여주었다. 그래서 갈수록 수염은 길어졌다.

긴 수염을 어루만지며 당당했던 한국 사람들을 클라우스 만[Klaus Mann·독일 산문문학의 최고봉 토마스 만(Thomas Mann·1875~1955년)의 아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조선을 통치하는 일본 사람들은 앞을 보고 반듯하게 걸어 다니는데 조선인들은 지배를 받는 민족이면서도 가난하든 말든 긴 수염을 기르고 당당하게 팔자걸음으로 걸어 다닌다.”

그 어르신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의 그 당당하던 걸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작가 최인호(崔仁浩·1945~2013년)의 단편 〈돌의 초상〉(1978)에 우리를 떠나간 어르신이 등장한다.

소설 속 노망(老妄) 든 최순돌은 이름 석 자만 기억할 뿐 집이 어디며 가족이 누구인지 모른다. 몇 살이냐고 물으면 열두 살이라고 답하고 “배가 고픕니다. 밥을 좀 주세요”라는 말만 반복한다.

프리랜서 사진기자인 ‘나’는 고궁에서 사진을 찍다가 노인을 만난다. 미아보호소에 노인을 맡기려다가 집으로 데려온다. 동거녀인 간호사 경희가 노인을 정성껏 대하지만 그런 모습이 ‘나’는 못마땅하다. 경희가 똥을 싼 노인을 목욕시키고 ‘내’ 옷을 입히는 것도 싫다.

“도로 창경원에 데려다 놓든지 경찰서에 맡기든지 해야지, 난 못 참겠어. 이 집은 양로원이 아니야.”

 

〈돌의 초상〉 속 한국의 어르신

1982년 KBS TV문학관을 통해 방영된 최인호 소설 원작의 〈돌의 초상〉. 프리랜서 사진기자 ‘나’와 경희, 최순돌 노인이 식탁에 앉아 있다. 노인은 연신 “배가 고프다”고 했다. 

 

경희가 출근하고 없는 사이 ‘나’는 노인을 어디다 버릴지 고민한다. ‘처음부터 노인은 버려져 있었지 아니한가. 나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다짐하듯 되뇐다. 그때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돌은 캐어냈던 자리에 도로 갖다 두는 게 원칙이야.”

공연한 객기로 무거운 돌을 제천 선술집까지 지고 갔다가 술김에 선술집 화단 속에 부려놓고 나올 때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노인을 다시 처음 만난 고궁에 버릴 생각을 하다가 이내 무서운 복수의 감정이 고개를 든다.

한강변 모래사장에 버릴 생각을 하다가 마음을 돌린다. ‘아무에게도 구원될 수 없는 사각지대 속에 던져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한복판인 명동에 버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급히 택시를 타고 명동에 도착한 뒤 명동성당에 다다랐다. 그리고 노인을 버리며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난 가겠습니다. 날 원망하지 마세요.”

노인: “미, 미안합니다. 난 배, 배가 고픕니다. 밥을 주십시오.”

나: “좀 기다리세요. 저 사람들이 줄 겁니다.”

‘나’는 불 밝힌 성당의 첨탑을 가리켰다. 그곳엔 십자가가 우뚝 서 있었다. 헤어지려는데 노인이 악수를 청한다. 생각보다는 따뜻한 손이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져 손을 뺀다. 노인은 연신 천진하게 웃고 있다. 노인은 어쩌면 분명한 이성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을 버린 뒤 도망쳐 집으로 돌아오지만, 퇴근한 경희가 노인을 어디에 버렸냐고 다그쳐 다시 명동성당으로 온다. 그러나 그곳에 노인은 없었다.

‘나’는 분명히 버려진 노인을 다시 돌려보냈을 뿐이다. 애초에 노인을 보호할 책임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무책임한 인간이 되었다. 결국 인간은 자기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운명은 결국엔 신(神)이 아닌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 눈을 잘 안 맞추는 한국인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月下情人)〉 

 

한국 사람들은 눈을 잘 맞추지 않는다. 눈을 맞추면 째려본다고 오히려 상대로부터 오해받기 십상이다. 곧바로 “눈 깔아”라는 호통이 돌아온다. 아마도 이래서 한국에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초상화가 그리 없나 보다. 얼굴이든 눈이든 똑바로 보는 게 힘든 문화이니까.

김홍도(金弘道·1745~?), 신윤복(申潤福·1758~?), 김득신(金得臣·1754~1822년)의 풍속화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단원의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에는 차이가 없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똑같다.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도 안 된다. 심지어 옷을 보지 않고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도통 구분이 안 된다.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은 벌판에서 몰래 만나는 청춘남녀를 담은 작품이다. 여자는 쓰개를 쓰고 있다. 이슬람의 히잡만큼은 아니었지만 조선 시대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바깥출입을 할 때 꼭 쓰개로 얼굴을 가렸다. 작품 속 여성의 눈을 보라. 거의 까맣게 일직선으로만 표현이 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단춧구멍 눈이다. 외국 사람들이 보면 이게 무슨 눈이냐 할 정도다.


조선 민화 속 단춧구멍 눈

 김득신의 그림 〈파적도(破寂圖)〉 

 

김득신의 〈파적도(破寂圖)〉를 보자. 병아리를 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고양이와 새끼를 살리기 위해 날갯짓하는 암탉, 그리고 주인장으로 보이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 나온다. 고양이의 동선과 닭의 움직임, 사람의 손짓이 모두 바깥을 향한 한 점으로 모인다. 눈을 그리지 않아도 누가 봐도 제일 급한 건 암탉이다. 시선(視線)을 그리지 않아도 몸짓으로 우리는 시선을 볼 수 있고, 긴장감과 긴박감, 역동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김홍도의 그림 〈타작(打作)〉 

 

김홍도의 〈타작(打作)〉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똑같다. 한때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도 눈이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유행했던 작품의 특징이었다.

 

일본 만화 〈피구왕 통키〉. 주인공 눈이 코보다 훨씬 크다. 

 

〈피구왕 통키〉라는 유명한 일본의 만화는 이와 확연히 다르다. 통키의 눈이 어찌나 큰지 거의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얀색을 이용해 눈빛이 살아 있는 효과까지 표현했다. 가사에 ‘반짝이는 눈동자’가 들어 있는 걸로 보아 이 같은 예상은 확실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화장을 하고, 가면을 쓰고, 복면을 써도, 눈빛만은 가릴 수가 없다. 서클렌즈를 껴 눈동자의 색깔을 인공적으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되었어도 눈빛만큼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거나, 무언가를 위해 열정적일 때의 눈빛…. 불행히도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가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눈빛이다.

삶의 기쁨을 노래하는 환희의 눈빛,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맛보는 아름다움의 눈빛,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열정의 눈빛을 잃어버렸다. 최인호의 소설 〈돌의 초상〉에서 우리가 내다 버린 ‘어르신’이 우리의 얼굴, 우리의 잃어버린 눈빛일지 모른다.


# 서로의 눈 들여다보기

여러분에게 세르비아의 여성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1946~)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고슬라비아의 유명한 독립투사이자 종교가였다. 그녀는 아버지처럼 부당한 압력과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해왔는데 다른 그 어떠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통해 예술적 창조를 이뤄내는 작가다. 면도칼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관객들에게 자신의 몸에 폭력을 행사하도록 해서 만신창이가 되기도 한다. 그 과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교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뉴욕현대미술관 모마(MoMA)에서 2010년 3월 14일부터 5월 31일까지 약 736시간 동안 펼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Marina Abramovic: The Artist is Present)〉 퍼포먼스는 새로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작가 외에 미술관의 텅 빈 공간에 존재하는 건 테이블과 의자뿐이다. 그 어떠한 퍼포먼스와 화려한 연출도 없다. 마리나는 그저 평범한 의자에 앉아 있다. 사람들은 마리나의 맞은편 의자에 와서 앉는다. 그러고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시간제한도 없다. 서로 마주 보다가 적당한 시간이 되면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앉는다. 〈더 아티스트 이즈 프레전트〉라는 제목의 이 퍼포먼스는 하루 6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참여를 기다렸다. 퍼포먼스가 끝날 무렵 남자 한 명이 의자에 앉는다. 살짝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마리나의 눈빛이 흔들린다. 마주한 남자는 30년 만에 재회한 그녀의 옛 연인이자 동료였던 울라이(Ulay·본명 Frank Uwe Laysiepen·1943~2020년)였다. 30년 만에 재회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눈으로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잠시 후 눈물을 흘리는 마리나와 말없이 위로의 눈빛을 건네는 울라이. 그 두 사람은 90일 동안을 걸어 만리장성에서 만난 후 한 번의 포옹 후 헤어졌던 연인이었다. 관람객들은 30년 만에 만난 그들의 재회를 목도한다. 짧은 눈빛의 대화는 셰익스피어의 그 어떤 대사보다도 감동스럽다. 망각, 오랜만의 재회가 주는 반가움, 다시 만날 수 없었던 절망감, 한없이 보고 싶었던 그리움…. 그 모든 것이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았을 때 그 공간에 퍼진다. 우리는 눈과 눈이 마주친다는 의미를, 그 감동을 몇천 년 동안 잊고 살았다. 이 작품을 보면 ‘사람과 사람이, 눈과 눈을 마주 본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라는 새로운 감동을 체험할 수 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
규칙 깬 단 한 번의 눈물

▲마리나와 울라이가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퍼포먼스였다.

 

“당신은 단지 다른 방문객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삶이었습니다.(You were not just another visitor. You were my life.)”

함께 같은 길을 걷던 행위예술가이자 한때 커플이었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는 오랜 이별 후 만났을 때의 역사적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2010년 〈더 아티스트 이즈 프레전트〉 퍼포먼스에서 이뤄진 만남은 큰 감동을 주었고, 대중 역시 같은 감정을 느꼈다. 당시 영상이 유튜브로 공개된 후 조회수가 2000만 클릭을 넘었고 이후 두 사람이 걸어온 예술적 흔적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마리나는 훗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그것은 훌륭했고, 어려웠고, 지옥이었고, 사랑이었고, 증오였고, 모든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규칙을 어겼을 때의 그 순간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 절대, 절대, 절대로 규칙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규칙’이란 작가와 관객이 아무 말 없이 침묵 속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소통하기로 한 약속을 말한다. 예고 없이 울라이가 등장하자 마리나는 ‘규칙’을 깨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 울라이의 손을 잡았다.

울라이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그 퍼포먼스에 대한 개념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리허설 역시 없었습니다. 예측된 결말은 없었어요.”

독일 출신의 울라이는 1960년대 후반부터 폴라로이드를 중심으로 한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1976년부터 1988년까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함께 공연예술가로 활동했다.

두 사람이 1980년 진행한 퍼포먼스 〈정지 에너지(Rest Energy)〉는 지금도 자주 회자(膾炙)된다. 이 퍼포먼스는 살상용 실제 활과 화살을 사용했는데 마리나는 활대를, 맞은편 울라이는 화살깃을 손끝으로만 잡았다. 두 사람은 몸을 서로의 반대편으로 기울이며 팽팽히 시위를 당겼다. 자칫 힘의 균형이 깨지면 곧장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대단히 위험한 퍼포먼스였다.

퍼포먼스가 시작되면서 의문의 쿵쿵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것은 실시간 녹음된 두 사람의 심박 소리였다. 서로에 대한 악의 없이, 오로지 전적인 믿음으로 그 위험천만한 행위를 진행했고 무사히 마쳤다.

마리나는 “4분10초라는 짧은 시간이 내게는 영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정말이지 완전한 신뢰에 따른 공연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1977년에는 두 사람이 서로 키스를 하며 숨을 나누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러나 17분 만에 이산화탄소 과다로 퍼포먼스는 중단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1988년 만리장성 양 끝에서 걷는다. 결국 중간에서 마주치는데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와 포옹을 한 뒤 각자의 길로 다시 걸어갔다. 헤어짐은 진짜 이별로 이어졌는데 자신의 이별마저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것이 2010년 〈더 아티스트…〉 퍼포먼스였다.
 

 

마주 앉아 바라본 경험이 없는 우리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가운데 사진은 마리나와 옛 연인 울라이가 손을 잡고 있는 모습. 아래 사진은 울라이를 보고 마리나가 울고 있는 모습. 사진=조선DB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순간들은 흔치 않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순간! 어렴풋이 스쳐 지나가는 바라봄이 아니라 눈을 마주치고 응시하는 순간! 아무런 장애 없이 온전히 누군가를 바라본 경험! 부모의 얼굴도, 애인의 얼굴도, 그리고 늘 만나는 친구의 얼굴도 마리나처럼 마주 앉아 바라본 경험이 없다.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나 스스로의 얼굴도 응시하지 않는다. 타인의 얼굴을 바라볼 때, 타인의 눈을 응시할 때 우리는 그들의 까만 눈동자 안에 비친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누군가와 이렇게 눈을 응시하고 있을라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게 된다. 우린 모두가 외로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면서 누가 나를 이렇게 봐준 적이 있던가. 타인을 이토록 바라본 적이 있던가. 늘 싸우고, 경쟁하고, 의심하면서 살아왔다. 그 삶의 가운데에서 맛보는 따뜻한 눈빛이 우리를 울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 너 얼마나 혼자 고생했니….”

그 눈빛에서 위로받고 또 위로를 전한다. 눈을 마주치는 것은 삶을 공유하는 것이다. 타인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마주쳐 그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화장, 가면, 성형수술로 감출 수 없는 것

인간은 살면서 수없이 타인과 이웃,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람과 나의 얼굴이 마주쳐 삶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마리나와 울라이는 사랑하면서도 헤어진 연인이며 예술적 파트너였다. 언젠가는 사랑이 변질되고 서로 미워하고 지긋지긋해하며 헤어지는 보통의 헤어짐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 중 헤어짐을 결심하고 중국 만리장성에서의 짧은 포옹을 마지막으로 헤어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다른 상처를 입고, 문득문득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파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서로를 만나 눈물을 흘린다. 연인이 아니더라도 어머니와 헤어진 자식이 다시 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그 반가움이 어떻겠는가. 주변에 사람이 아무리 많든, 누군가 나를 보든 말든 내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이다. 눈물 때문에 빛나는 얼굴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없다. 나 자신을 위해서 울든, 남을 위해서 울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을 잊어버렸다.

사람과 경쟁하며 살아남기 위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던 삶 속에서 어느 날 문득 내가 바라본 내 모습이 아니라 타인의 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화장을 하고 가면을 쓰고 성형수술을 한다고 해서 감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얼굴을 찾는 순간은, 내 얼굴을 만지는 순간이 아니라 타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쳐 그 안에서 삶의 어떤 순간들, 행복한 순간이었든 슬픈 순간이었든, 생명의 어떤 순간들을 맛보았을 때, 비로소 내 얼굴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게 내 얼굴, 인간의 얼굴, 내 나라 얼굴’

내 이웃의 눈을 들여다보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도,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들 개개인도 절로 눈물이 흐른다. 개개인이 고생한 순간들과 영광스러운 감격….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뜨거운 무언가가 있다.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서럽게 견디어온 우리의 역사…. 정말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것이 애국자다.

그 눈 안에는 시베리아로부터 추위를 견디며 이곳까지 걸어온 한민족이 보인다. 만주 벌판으로 간도로 쫓겨 다니던 우리 조상들이 보인다. ‘나’라는 개체와 수천 년 내려오는 우리 DNA 속의 한국인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이다.

이제 우리가 서로 눈을
마주할 때가 왔구나.
가면도 벗고 복면도 찢고
별과 별이 몇억 광년 떨어져 있어도
서로 마주 보듯이

어찌 흐르는 눈물을
성형하랴.
어찌 빛나는 그 눈빛을
화장하랴.

그게 내 얼굴이다.
그게 인간의 얼굴이다.
그게 내 나라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