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6/ 06-01(목) ‘촌장’ 김성수 주교 - 06-30(금) ‘호모 픽토르’ 이건희
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6/
06-01(목) ‘촌장’ 김성수 주교

김종호 논설고문
“성직자로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치면서도 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는지를 하루하루 돌아보며 살고 있다.” 김성수(93) 대한성공회 은퇴 주교가 한 말이다. 그를 지켜보며 존경해온 각계각층 저명인사 93명이 지난해 12월 헌정한 문집 ‘우리 마음의 촌장님’을 펴내고 북 콘서트를 연 추운 날의 자리였다. 배우 윤여정이 코트를 벗고 스웨터 차림인 것을 본 김 주교는 주변에 “코트를 좀 입혀 주세요. 감기 들면 안 돼요”라고도 했다. 행사 시작 때부터 펑펑 울던 윤여정은 그 말에 “주교님 늙은 것도, 제가 늙은 것도 속상해요. 오래 살아 주세요” 하며 울음을 그쳤다. 김 주교는 “너나 오래 살아라” 하고 웃으며 농담도 건넸다. 그 자리에 있던 이정호 신부는 이런 일화도 전했다. “군 복무를 해병대에서 한 제가 신학생 시절에 ‘교단이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해병대 복장으로 유인물을 돌렸다가 김 주교에게 불려가 들은 꾸지람이 ‘이 길은 그렇게 가는 길이 아니다’는 말이었다.” 그 뒤로 이 신부는 김 주교가 발령낸 경기도 마석의 한센인 마을에서 23년 동안 한센인들과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대한성공회 초대 교구장·관구장을 지낸 김 주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재산을 몽땅 털어, 인천 강화도에 발달장애인들의 일터인 ‘우리 마을’을 2000년 설립·운영해 오고 있다. 그 마을 ‘촌장’이다. 그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나눔의 성자(聖者)’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대명사’ ‘어떤 이유로든지 한 번도 불평한 적 없는 진정한 성직자’ 등으로 일컬어진다. 현재 서울교구장인 이경호 주교도 “김 주교님의 삶은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항상 기억하며 본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김 주교 책상 위에는 예쁜 디자인의 연필이 쌓여 있다. 발달장애인들이 커피 찌꺼기로 생산한 ‘커피 연필’이다. 판매 수익금 전액은 그들을 위해 사용된다. 김 주교는 그들의 자립을 더 도우려고 “우리가 평소 마시는 커피 두 잔의 찌꺼기로 한 자루씩 만드는 ‘커피 연필’을 많이 팔아야 한다”고 한다. 오는 6월 12일이 성인(聖人)에 가까운 김 주교 생신이다. “‘우리 마을’ 안에 발달장애 노인 전문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남은 사명”이라는 김 주교 소망이 빨리 이뤄졌으면 좋겠다.
06-02(금) 가면 벗은 中 ‘치팅 바둑’

문희수 논설위원
얼마 전 끝난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대표 재선발전 결과가 화제다. 인공지능(AI) 치팅(부정행위) 논란을 피하려고 와이파이를 차단한 채 간판 프로기사 10명이 대면 대국으로 치른 결과는 중국 바둑계에 충격이었다. 중국 1위 커제 9단이 부진 끝에 엔트리(6명)에 간신히 든 것보다도 지난해 12월 말 AI 치팅 의혹의 주인공인 리쉬안하오 9단(중국 3위)이 꼴찌로 탈락한 것에 더 관심이 쏠렸다. 그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코로나 때문에 올 9월로 1년 연기되기 전 열렸던 지난해 1차 선발전에선 1위였고, 지난해 12월 중국 춘란배에선 AI처럼 만점짜리 수를 잇달아 구사하며 중국 기사들에겐 철벽인 신진서 9단에게 압승을 거뒀기에 더욱 그렇다. 의혹을 제기했던 양딩신 9단이 그에게 쾌승을 거두며 압도적인 성적으로 1위로 선발된 것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중국 바둑계는 선발전 이후 치팅 의혹을 재평가하며 “양 9단이 리 9단의 가면을 벗겼다” “결국 양 9단이 옳았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등 양 9단을 편드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의혹 제기 당시 커제 등 일부 기사를 제외하고는 비판 일색이던 것과는 정반대다. 양 9단으로선 그야말로 격세지감일 게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리 9단에게 프로기사 생명을 걸고, 전파가 차단된 가운데 화장실에도 가지 말고 20번기를 둬 진실을 가리자는 제안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근거 없이 의혹을 제기해 축제 분위기를 망쳤다는 괘씸죄를 사 중국기원으로부터 6개월 출장금지라는 엄벌을 받았었다. 여론이란 게 참으로 무상하다.
리 9단은 코로나 시기 비(非)대면 바둑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는 지난달 31일 LG배 세계바둑대회 16강전에서도 신진서 9단에게 불계패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 대회도 대면 대국이다. 그의 몰락으로 AI 치팅 리스크는 더욱 부상했다. 현행 국내법으로는 세계 대회라도 대국장 주변에 전파 차단기를 설치하지 못한다고 한다. 비대면 대국을 금지하지 않는 이상, 공정한 승부를 위해 제도적 보완이 절실하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바둑 경기는 오는 9월 24∼28일 남녀 개인전, 9월 29일∼10월 3일 남녀 단체전이 예정돼 있다. 치열한 한·중 대결이 예상된다. 치팅이 불가능하게 원천 차단해야 한다.
06-05(월) 혐오 정치

박민 논설위원
1954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는 유명한 실험이 진행됐다. 심리학자들은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 22명을 뽑아 A, B팀으로 나눠 각각 야영을 하게 했다. 그들은 모르는 사이였지만 모두 백인 개신교 신도에 중산층 자녀였고, 성적은 중위권인 매우 비슷한 학생들이었다. 1주일 후 야구 시합을 하기로 했는데 첫 번째 경기가 열리기도 전에 두 팀의 갈등이 시작됐다. A팀이 B팀 깃발을 태우자 B팀은 A팀 주장 바지를 훔쳐 깃발로 사용했다. 복수에 나선 A팀은 B팀의 침대에 오물을 뿌렸고, 급기야 두 팀이 주먹 싸움까지 벌였을 때 실험은 중단됐다. 불과 일주일 만에 22명의 소년은 2개의 ‘부족’을 만들었다. ‘개인’은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우리’와 ‘그들’만이 중요했다.
양극화로 인한 균열이 전 세계를 관통하면서 어떤 존재도 ‘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오클라호마 실험이 보여주듯 혐오는 공감이 특정 집단에 편향될 때 생겨난다. (‘헤이트-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등) 특히, 우리 사회는 혐오 확산에 적합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부정적 감정에 빠지기 쉬운 사회·경제적 분위기, 음모론이 빠르게 퍼지는 미디어 환경, 혐오를 저지할 건강한 민주 정치세력의 부재, 집단을 구분해 희생양으로 삼는 사회 분위기 등이 그것이다. 일부 정치인은 ‘혐오 감정 표출의 자유도 보호해야 한다’는 궤변으로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고 했다.
‘디 차이트’ 편집장 바스티안 베르브너는 저서 ‘혐오 없는 삶’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제안한다. 부족에서 빠져나와 비정치적 상황에서 사적으로 만나면 편견과 혐오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혐오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연대를 형성하거나, 공공기관이 혐오 표현에 맞서 대항 표현을 주도하며 공존의 가치를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네이버가 지난 1일부터 ‘혐오 표현’을 세분해 규정하고 해당 게시물을 비공개 또는 삭제 처리하거나 게재를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미 노출된 혐오 표현의 경우 삭제 조치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게재 거부 또는 삭제한 게시물이 어떤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대항 표현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등 보다 책임 있는 대책이 요구된다.
06-07(수) 테너 신영조와 ‘여왕 3부작’

이미숙 논설위원
클래식 음악계에서 ‘여왕 3부작’이란 애칭으로 통하는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정통 벨칸토 오페라로 난도가 높다. 대영제국의 발판을 닦은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와 관련됐다는 점에서 여왕 3부작으로 불린다. 안나 볼레나는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엘리자베스와 메리는 혈족 관계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이복 누나가 메리의 할머니다. 로베르토는 엘리자베스 1세가 말년에 사랑한 백작이다. 오페라 제목이 된 세 인물은 모두 교수형을 당했다.
여왕 3부작은 음악적 심리극에 가까울 정도로 내면 묘사가 많아 섣불리 공연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로 방출한 여왕 3부작 공연이 특히 주목을 끌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최고 성악가들이 등장한 여왕 3부작은 공개될 때마다 화제를 낳았다. 한국에서 여왕 3부작이 첫선을 보인 것은 2015년이다. 2007년 창단된 라벨라오페라단이 그해 ‘안나 볼레나’를 무대에 올리며 3부작 도전에 나섰다. 이후 라벨라는 2019년 ‘마리아 스투아르다’에 이어, 지난달 26∼28일 ‘로베르토 데브뢰’ 공연을 마쳤다. 국립·시립 오페라단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여왕 3부작을 민간 오페라단이 8년에 걸쳐 마무리 지은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민간 오페라단의 집념과 성악가들의 저력을 보여준다.
‘로베르토 데브뢰’ 공연 시작 전엔 이색 장면이 연출됐다. “이 오페라를 지난 4월 14일 하늘의 별이 되신 영혼의 목소리 테너 신영조 선생님께 헌정합니다”라는 문구가 고인의 사진과 함께 무대에 등장했다. 향년 80세에 지병으로 별세한 신영조 선생을 추모하는 메시지다. 신 선생은 모교인 한양대 음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오페라계의 주역으로 활동해온 성악가다. 이 작품을 만든 라벨라 예술 총감독인 테너 이강호와 연출가 김숙영, 엘리자베타 역의 소프라노 박연주, 코러스를 맡은 메트오페라합창단 이우진 단장도 한양대 출신이다. 오페라에 대한 신 선생의 헌신과 열정이 ‘로베르토 데브뢰’ 등 여왕 3부작 초연을 이끈 힘이 된 셈이다.
06-08 만해의 오도송(悟道頌)

오승훈 논설위원
툇마루에 앉으니 아직은 시원한 바람이 6월 한낮 따가운 볕을 막아주는 듯했다. 좁은 비탈길을 오르느라 차올랐던 숨도 잦아든다. 한양 도성의 북쪽,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의 고택 심우장(尋牛莊)이다. 수행을 소 찾는 일에 비유해 붙인 이름이다. 안방과 사랑방 등이 일자로 배치된 정면 4칸의 단출하고 너무 소박한 한옥. 만해는 3·1 독립선언식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전전하다 1933년 벽산 스님과 방응모, 박광 등 지인들이 마련해준 이 집에서 입적할 때까지 지냈다.
그 시절엔 인가가 드문 골짜기였을 게다.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함석 챙을 단 것으로 보아 북촌 등에 개축 바람이 불었던 1930년대 조선집과 크게 다를 바는 없으나, 그 모습만으로 신산(辛酸)했을 만해의 여생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일제는 더 목을 조여오고, 동지들은 하나둘씩 제 갈 길로 가고.
안방 자리에 걸린 목판을 보니 심란이 더했다. 만해가 출가한 지 10년이 되던 1917년 겨울에 백담사 오세암에서 견성한 뒤에 읊은 친필 시, 오도송(悟道頌)을 새겨넣었다. 男兒到處是故鄕(남아가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나그네 수심에 오래 잠긴 이가 몇이던가) / 一聲喝破三千界(한 소리 질러 삼천 세계 깨뜨리니)/ 雪裡桃花片片飛(눈 속에 복사꽃이 흩어져 날리네). ‘진리는 눈보라 몰아치는 현실 속에서 피는 꽃과 같은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는 뜻이란다. 이후 만해는 독립운동과 창작에 열정을 쏟아냈다는데, 그 깨달음의 시가 예견이나 한 듯이 모진 현실이 그를 쉬 놓아주지 않았다.
오도송은 선승이 득도한 뒤 적는 선시(禪詩)다. 불교의 가르침을 시로 나타내는 것을 게송(偈頌)이라 하는데, 오도송도 그중 하나다. 고승들이 남긴 오도송들은 대체로 선문답 같지만, 몸으로 부딪친 수행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깨달음의 경지와 해석은 제각각이어도, 고투의 육필이란 점에선 한결같다는 말이다.
그 이치라면 사부대중이 아닌 속인에게도 저마다 오도송이 있을 법하다. 지쳐 쓰러진 날에 절로 나오는 한숨도, 시원한 바람이 오랜 고민을 날려줄 때 “하~” 하는 날숨도 일상의 오도송이 되지 않을까. 오는 6월 29일은 만해가 해방을 못보고 세상을 뜬 지 79년째 기일이다.
06-09(금) 성주 참외와 오염수 괴담

김세동 논설위원
성주 참외의 지난해 매출액이 5763억 원을 달성, 1970년 시설 재배에 성공한 이후 5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북 성주는 전국 참외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생산지인데, 2016년 주한미군 사드 기지 배치 결정 후 민주당과 진보 단체들이 ‘전자파 참외’ 괴담을 퍼트리면서 2015년 4020억 원이었던 매출이 2016년에 3710억 원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허무맹랑한 괴담이 큰 힘을 못 써 2017년에 5003억 원으로 다시 늘었고,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워 먹으면 암에 걸린다는 것과 같은 헛소리가 먹히지 않은 것이다.
해발 680m 고지에 설치된 사드 레이더가 전방 상공을 향해 전자파를 쏘기 때문에 주민이나 농작물에 피해를 줄 것이란 우려 자체가 허구였지만, 처음부터 과학적 진실은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민주당 등은 ‘전자레인지·사드 참외’를 먹으면 암에 걸릴 것처럼 선동했다. 그해 8월 손혜원·표창원 의원 등은 성주군청 앞에서 열린 사드 반대 집회에서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쓰고 “전자파에 내 몸이 튀겨질 것 같아”라고 노래하며 춤까지 추었다.
박근혜 정부와 한미동맹을 흔드는 게 중요했던 민주당 등은 막무가내로 전자파 위험을 과장하면서 참외 농가에 줄 피해는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후쿠시마 오염수 괴담 선동도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 다핵종제거설비(ALPS)로 세슘, 스트론튬 등 방사능 핵종을 처리한 오염수에 남은 삼중수소는 바닷물로 희석해 기준치의 40분의 1 이하로 낮춰 방류하겠다는데, 이재명 대표는 “핵폐기물” “우물에 독극물 퍼넣기” 등 자극적이고 수준 낮은 발언으로 국민 불안감에 불을 지른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무책임한 선동으로 극심한 피해를 볼 어민, 수산시장 상인, 횟집 주인 등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다.
이 대표가 지난 주말 부산에서 민주당이 주최한 규탄대회에 참석해 ‘우리 어민 다 죽는다’는 손팻말을 들고, 앞서 자갈치시장을 찾아가 “안 그래도 생물을 파는 게 어렵다는데, 힘들지 않게 더 노력하겠다”고 상인들을 위로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병 주고 약 주고’다. 7년 전 성주 참외 농가에 피해를 준 것도, 이번에 나라 전체 수산업계에 치명적 타격을 주는 것도 민주당과 이 대표다.
06-12(월) 북한과 가상화폐

이철호 논설고문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보다 가상화폐에 더 신경 쓰는 인물이 있다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일 것이다. 2021년 2월 18일 미국 법무부는 북한 정찰총국 해커 박진혁(36)·전창혁(31)·김일(27)을 기소하면서 ‘13억 달러(약 1조6800억 원)의 현금 및 가상화폐를 탈취했다’고 공소장에 기록했다. 비트코인은 딱 그 사흘 뒤 5만8352달러로 역사상 최고점을 찍었다. 지금은 2만6000달러로 반 토막 나 김 위원장에게 뼈아픈 손실을 안겼다. 국제 제재와 코로나 봉쇄로 해킹은 북한 최대 돈줄이다. 로이터는 “가상화폐 시장이 무너지면 북한 무기 프로그램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북한 최고의 해커 그룹은 라자루스. 묘한 점은 두 가지다. 우선 라자루스(Lazarus)란 이름이 성서의 ‘라자로’에서 나왔다. 그는 예수가 기적을 행하면서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라며 죽은 자에서 살려낸 유일한 인물이다. 또 하나는 그 핵심을 한국이 키웠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삼성은 대북 협력에 동참하라는 청와대 압박에 못 이겨 중국 베이징(北京)에 ‘소프트웨어 공동 개발센터’를 세우고 북한 컴퓨터 영재들을 교육시켜 주었다. 일부는 한국 측이 돈을 댄 ‘기술인재 양성 자금’으로 인도에 유학 가 최첨단 기술을 익혔다. 이들이 해킹 에이스로 자라났다.
미국은 북한 해킹 제보 포상금을 500만 달러에서 1000만 달러로 올렸다. 한국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제 공조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 상징적 장면이 지난 7일 김건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체이널리시스의 에린 플란테 부사장을 만난 것이다. 이 회사는 북한이 탈취한 가상화폐의 58%가 이더리움이고, 아직 상당 부분 현금화하지 못한 사실을 밝혀낸 가상화폐 분석업체다. 그 계좌를 추적하고 압류하는 게 중요하다.
지난달 25일 바이낸스는 북한이 배후로 의심되는 440만 달러의 계좌를 동결시켰다고 밝혔다. 지난 2월에도 140만 달러가 든 의심 계좌를 동결했다. 김 위원장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질 것 같다. 다만, 걱정은 북한 해커들이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은 가상화폐를 빼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 CNN은 6일 “에스토니아의 가상화폐 지갑에서 지난 3일 최소 3500만 달러가 탈취당했다”고 보도했다.
06-13 수박은 무죄다

이현종 논설위원
더위가 일찍 찾아오면서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인 수박의 출하도 빨라졌다고 한다. 본래 7∼8월이 제철이지만 최근에는 5월로 앞당겨졌다. 특히,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5㎏ 미만 소형 품종의 매출이 62.9%나 급증했다. 예전엔 가족들이 다 모여서 큰 수박을 잘라 먹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는데, 이젠 수박도 혼자 먹는 과일이 된 셈이다. 수분이 90%인 수박은 여름철에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것은 물론 비타민과 칼륨이 들어 있어 피로감, 우울감을 해소하고 노폐물을 배출하는 데 제격이다.
인간에게 유익한 과일인 수박이 언제부터 정치권에선 척결·혐오의 대상에게 쓰는 말이 돼버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극렬 지지그룹인 ‘개딸(개혁의 딸)’이 이 대표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겉은 파란색(민주당 상징색)인데 속은 빨간색(국민의힘 상징색)이라며 공격할 때 수박으로 지칭한다. 지난 9일 성남 중원구 모란역 앞에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서명운동’ 부스 2곳이 나란히 설치됐는데 한 곳은 이 지역 현역인 윤영찬 의원, 다른 곳은 같은 당 이 대표의 측근이자 도전장을 내민 현근택 변호사가 운영했다. 이 대표의 지지층인 ‘잼잼자원봉사단’이 함께하는 현 변호사 부스에는 서명한 주민들에게 수박을 건넸다. 또, 현 변호사가 지지자들과 수박을 먹는 사진을 SNS에 올렸는데 ‘수박을 잘근잘근 씹어먹는 것만 봐도 속이 시원하다’ ‘수박씨를 말려야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친이낙연계인 윤 의원을 ‘수박’으로 규정하고 사실상 반대 운동을 벌인 것이다.
친명계인 양문석 전 통영고성위원장도 전해철 의원 지역구(경기 안산상록갑) 출마를 선언하며 “반개혁 세력인 수박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고 했다. 앞서 개딸은 수박 깨기 퍼포먼스도 하고, SNS에 ‘수박 7적’ 명단을 올렸다. 이 대표가 농촌 봉사활동을 마치고 수박을 먹는 장면이 공개되자 개딸은 ‘수박 척결 신호가 떨어졌다’고 해석하는 황당한 일도 벌어진다.
수박 공격에 조응천 의원은 “식당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수박을 먹으려다 놀라서 내려놓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민주당은 달고 맛있는 성주 참외도 사드 전자파에 튀긴 것이라고 했다가 매출을 절반가량 급감시키더니, 이젠 죄 없는 수박마저 혐오 단어화하고 있다.
06-14 소명 마친 ‘차 개별소비세’

문희수 논설위원
개별소비세는 옛 특별소비세로 1977년 7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사치품 소비 억제를 위해 도입됐지만, 부가가치세(10%)와 별도로 부과돼 이중과세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보석, 고급 시계·가방 등과 함께 자동차도 크기와 관계없이 5%가 부과된다.
기획재정부는 내수 진작을 위해 3.5%로 낮췄던 개소세를 내달부터 다시 5%로 환원한다. 기재부는 정책 목표를 달성한 만큼 부족한 세수를 늘리기 위해 정상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내달부터 출고되는 국산차 개소세 과세표준을 18% 내렸다. 외국차와의 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소비자가격을 기준으로 부과하던 것을 이보다 낮은 출고가 기준으로 바꿔 세금을 내린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개소세는 늘어나게 된다. 현대 그랜저의 경우 과세표준이 4200만 원에서 3444만 원으로 낮아져 세금이 54만 원 줄지만, 5% 세율 복귀로 인해 90만 원(교육세·부가세 포함)이 증가해 세금이 36만 원 늘게 된다. 자동차 개소세는 2018년 7월부터 소비 진작을 위해 인하돼 이제까지 총 5회나 연장을 거듭했다. 한시적인 조치였던 만큼 종료될 수밖에 없지만, 자동차 예약 대기자들을 중심으로 반발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고무줄 세금’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지난해 말 2550만3000대에 달한다. 1인당 0.5대꼴이다. 승용차만 해도 전년보다 2.4% 더 늘어 2095만3000대다. 통계청이 집계한 전국 총가구수 2073만 가구(2020년 기준)보다 많다. 가구당 한 대를 넘는다. 1인 가구가 늘어도 자동차는 계속 증가한다. 두 대 이상 보유한 가정도 흔하다.
내연기관차보다 훨씬 비싼 8500만 원 이하 전기 승용차엔 정부와 지자체가 구매 장려용으로 최대 1000만 원 안팎의 보조금을 지원한다. 그러면서 필수품이 된 자동차에 사치품 소비 억제 세금을 계속 부과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란 위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세수 부족은 시급한 과제다. 그렇지만 자동차 개소세는 올해로 46년이나 됐다.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게다가 그동안 수시로 인하·환원을 반복하며 상당한 혼선과 불만을 빚어왔다. 최소한 전기차 보조금 기준에 맞춰 8500만 원 이하 자동차엔 개소세를 폐지해야 옳다.
06-15 하덕규의 시인과 촌장

김종호 논설고문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청춘들이 겪는 고뇌와 아픔 등을 노래로 만들어 온 싱어송라이터 하덕규(65)의 명곡 중 하나는 ‘사랑 일기’다. 그가 자신처럼 맑고 순수한 함춘호와 함께 활동한 듀엣 시인(市人)과 촌장의 1986년 제2집 앨범에 담았다. 시작은 이렇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나는 새들의 날갯죽지 위에/ 첫차를 타고 일터로 가는 인부들의 힘센 팔뚝 위에/ 광장을 차고 오르는 비둘기들의 높은 노래 위에/ 바람 속을 달려나가는 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사랑해요라고 쓴다’. 추계예술대 회화과를 중퇴하고 화실을 운영하며,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창작하던 20대 때의 그가 “어느 날 창문을 열었는데 유난히 아침이 아름다웠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수록된 11곡 모두 그가 작사·작곡한 그 앨범은 2007년 전문가들이 뽑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14위에 올랐을 만큼 명곡이 가득하다. ‘너무 많은 바람이 불었나 봐/ 엉겅퀴 꽃씨가 저리도 날리니/ 우린 너무 숨차게 살아왔어/ 아무래도 친구/ 푸른 돛을 올려야 할까봐’ 하는 ‘푸른 돛’도 그중 하나다. ‘나 다시 진달래로 피어/ 그대 가슴으로 스몄으면/ 나 다시 진달래로 피어/ 그대 타는 가슴으로 스몄으면’ 하는 ‘진달래’도,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하는 ‘풍경’도 있다. 그는 서울 명동의 라이브 음악감상실 쉘부르에 드나들던 1980년에 트리오 바람개비를 결성했다. 1981년 한 사람이 빠지면서 서영은 소설 ‘시인(詩人)과 촌장’을 패러디한 이름의 듀엣으로 전환했다. 시인과 촌장 제1집 멤버는 오종수였다.
하덕규가 솔로 활동을 본격화하며 1988년 발표한 앨범 ‘숲’의 타이틀 곡 ‘가시나무’도 명곡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한다. 그 이듬해에 그는 시집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를 내며 시인 등단도 했다.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 ‘찔레꽃 피면’ 등도 그가 만든 노래다. 미국에서 선교학을 전공한 목사로 2010년 귀국해 백석예술대 교회실용음악과 교수인 그의 노래를 찾아 듣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 요즘 새삼 늘고 있다고 한다.
06-16(금) 까마귀의 습격

박민 논설위원
까마귀는 인간 다음으로 지능이 높은 동물이다. 훈련을 하면 6∼7세 아이의 지능을 보인다고 한다. 도구 제작이나 문제 해결 능력에서는 돌고래나 침팬지를 능가한다. 영국에서 병 속의 물 위에 떠 있는 곤충을 먹게 하는 실험을 했는데 까마귀는 주변 돌을 병에 넣어 수위를 높인 다음 곤충을 먹었다. 크기가 같은 석고 블록과 스티로폼 블록을 제공하자 물에 뜨는 스티로폼 블록은 무시하고 석고 블록만 병에 집어넣었다. ‘베티’라는 뉴칼레도니아까마귀는 철사를 구부려 갈고리를 만든 뒤 통 속의 먹이를 꺼내 먹는다고 한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큰부리까마귀도 대단히 영리하다. 껍데기가 단단한 호두가 생기면 건널목에 정차한 자동차 바퀴 앞에 호두를 놓아두었다가 자동차가 지나간 후에 부서진 껍데기 사이의 알맹이를 먹는다. 특히, 신호등이 빨간불이면 파란불로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려와 먹는다.
머리가 좋다 보니 도움을 받으면 보답을 한다. 다친 까마귀를 치료해준 사람에게 날아와 애교를 부리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반짝이를 선물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 공격 받는 것으로 알고 주변 사람을 공격한다. 반면, 위협을 느끼거나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보복을 한다. 수잔 매카시의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동물의 세계’에는 까마귀에게 테러를 당한 조류학자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 오리건에서 절벽에 있는 까마귀 둥지 속 새끼를 관찰하고 내려오던 조류학자에게 까마귀들이 골프공 크기의 돌을 7개나 던져 결국 다리를 맞혔다고 한다.
최근 도심에서 사람들이 까마귀의 습격을 받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서울 노원구에서 지난달 23일 행인이 까마귀에게 머리를 쪼여 119구급대에 실려 갔다. 부산에서는 쓰레기를 버리러 간 아파트 주민이 까마귀 3마리의 공격을 받고 도망가다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으로 착각했을 수 있다. 까마귀들이 도심의 쓰레기 수거장에서 먹이를 찾는 경우가 많은 점을 감안하면 서식지 경쟁 대상자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까마귀는 높은 사회성과 협동성을 보여 웬만한 맹금류들도 맞서지 않고 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5∼6월은 새끼를 기르는 시기로 공격성이 높아지는 만큼 자극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
06-19(월) 조국 ‘양산갑’ 출마설

이현종 논설위원
지난 2010년 조국 전 장관과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는 ‘진보 집권 플랜’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김대중·노무현 10년 집권 이후 정권이 이명박 대통령으로 넘어가자 2012년 대선을 겨냥한 집권 전략을 담았다. 이 책의 기본 구상은 민주당과 진보당의 연정이다. 민주당이 1당이 되고, 진보당이 원내 교섭단체가 된 후 대선에서 연대하는 것인데, 구상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13년이 지난 지금 ‘진보 집권 플랜’의 중고 가격은 300원대로 떨어졌다. 값이 떨어져도 이 책을 구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이 책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조 전 장관은 최근 새로운 책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아직 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책 제목은 아마 ‘조국 당선 플랜’쯤 될 것 같다. 지난 10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경남 양산 평산마을을 방문한 조 전 장관은 페이스북에 사진과 글을 올리면서 ‘길 없는 길을 가겠다’고 했다. 중국 작가 루쉰(魯迅)의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
조 전 장관이 출마한다면 유력하게 거론되는 곳이 문 전 대통령이 거주하고 있는 경남 양산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양산을은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이 현역이고 양산갑은 국민의힘 윤영석 의원의 지역인 만큼 도전해 볼 만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문 전 대통령이 평산책방을 열고, 문 정권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이 ‘사의재’라는 포럼을 만들어 윤석열 정부에서 폄훼되고 있는 문 정부 업적을 재평가받겠다는 기류가 강하다. 부산의 위성도시인 양산과 김해를 봉건영주가 지배하는 ‘봉토(封土)’나 친노·친문의 성지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관측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김해는 2개 지역구(민홍철·김정호) 모두 민주당 소속이다.
그러나 조 전 장관은 1심에서 징역 2년이 선고돼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형이 확정되면 당선돼도 국회의원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리하게 출마설을 띄우는 이유가 뭘까. 서울대 교수직도 파면된 마당에 ‘관종’인 자신의 살길인 총선 출마로 또 한번 윤 정권과 각을 세워 보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길 없는 길’ 대신 ‘있는 길’이라도 가면 어떨까.
06-20 이순재의 마지막 리어왕

오승훈 논설위원
백발 산발의 노인은 인사를 마치자 몸을 돌려 무대 뒤편으로 더벅더벅 걸어갔다. 얇은 흰옷 하나 걸친 행색에 구부정해진 등이 애잔했다. 그제야 왕이 아닌 배우가 보였다. 저 걸음은 이제 마지막이겠구나. 눈시울이 시큰해지는데 노인이 돌아서서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기립했던 객석의 박수는 환호가 됐다. 지난 주말,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이순재의 리어왕’은 그렇게 종연했다. 더는 그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왕의 커튼콜도 이젠 없다.
그가 연기한 리어왕은 위세와 탐욕, 오만이 가득한 원작의 권력자와는 결이 달랐다. 세 딸의 효심을 시험하던 중 가장 총애했던 막내딸이 언니들과 달리 “아무 할 말이 없다”고 하자 “할 말이 없다는 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다그쳤으나 권력자의 불호령이 아닌 그저 늙은 아버지의 진노로 전해졌다. 왕국을 나눠준 두 딸의 배신에 미쳐서 폭풍 속을 헤매는 왕은 이미 권력 무상을 넘어선 듯했다. 자신의 잘못을 파고들며 자학하는 왕, 셋째 딸까지 잃은 파국 앞에 “쥐 같은 것도 생명이 있는데, 너는 왜 숨이 없느냐”고 탄식하는 왕은 인간 본성에 관한 성찰이 끝나 있었다. 89세의 아버지, 이순재였다. 극의 파토스를 더하면서 비극의 서사가 장엄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대배우, 이순재였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대사의 세례 속에서 200분의 연극이 언제 끝났나 싶었다. 이순재는 “자다가도 대사가 튀어나올 수 있을 정도로 준비했다”고 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이름을 줄줄이 외우는 암기력도 그렇거니와 중도에 막을 내린 적이 없는 건 그 연습 덕분일 게다. “나이가 많다는 것,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
극단은 이순재를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네스북 등재를 신청한다. 여태껏 최고령은 80세 정도란다. 그게 아니어도 그는 연기 인생 68년의 ‘최고 현역 배우’다. 연극이 끝나는 날 서울고 동창회가 90세를 앞둔 그에게 명아주 줄기를 말려 만든 지팡이, 청려장을 전달했다. 리어왕은 “우린 울면서 세상에 태어났지. 바보들만 득실거리는 이 거대한 무대에 떠밀려 나온 게 슬퍼서 울지”라고 하는데, 이순재는 그 무대를 떠날 생각이 없다. 이 여름에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90세 전성기다.
06-21 제보자와 기자의 품격

이미숙 논설위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더 포스트(The Post)’는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기폭제가 된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 관련 국방부 기밀문서 보도를 둘러싼 리처드 닉슨 행정부와 언론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뉴욕타임스는 1971년 6월 13일 6개 면에 걸쳐 통킹만 사건 관련 국방부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를 특종 보도했다. 닉슨 행정부는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라며 후속 보도 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다. 경쟁지에 물을 먹은 워싱턴포스트도 사활을 걸고 펜타곤 페이퍼 일부를 입수한 뒤 보도를 시작하자 닉슨 행정부는 또 소송을 냈다. 이후 두 신문은 연대해 대정부 법정 투쟁을 벌였는데, 연방 대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에 근거해 언론사의 손을 들어줬다.
영화에서는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할 경우 워싱턴포스트의 경영이 위기에 빠질 수 있다며 주저하는 메릴 스트리프(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역), 언론의 역할을 강조하는 톰 행크스(벤 브래들리 편집국장 역)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이 벌어진다. 결국, 그레이엄 발행인은 “언론은 보도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걸 포기하는 건 언론이 아니다”며 보도를 결정, 신문사 경영보다 언론의 사명을 우선하는 결단을 한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은 그레이엄과 브래들리지만, 역사의 주역은 랜드연구소 재직 중 펜타곤 페이퍼 작성에 관여한 뒤 이를 언론에 알린 대니얼 엘스버그와 이를 처음 보도한 닐 시핸 뉴욕타임스 기자다.
엘스버그는 통킹만 사건 일부가 조작됐다는 내용의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함으로써 베트남전 반전 운동에 불을 붙였다. 미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내부 제보자로 꼽혔던 그는 간첩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지만, 닉슨 행정부 측의 불법 행위 등이 드러나며 법원에서 기각됐다. 이후 반핵 운동가로 활동해온 그는 췌장암 진단 사실을 공개한 지 3개월 만에 지난 16일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펜타곤 페이퍼를 특종 보도한 시핸은 2년 전 파킨슨병으로 별세했다. 그는 ‘사후 공개’ 조건으로 뉴욕타임스에 보낸 글에서 “엘스버그는 펜타곤 페이퍼를 보여준 뒤 메모만 허용했지만, 그가 자택을 비웠을 때 복사해 보도했다”고 털어놨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언론 자유가 확장되고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다.
06-22 민주당의 중국몽 DNA

이철호 논설고문
티베트를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중국몽(夢)에 들러리 선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들은 “티베트 인권 탄압은 70년 전의 일”이라 우겼다. 민주당의 중국 사랑은 놀랄 일은 아니다. 지난해 문재인 전 대통령은 SNS에 “오랜만에 책을 추천한다”며 ‘짱깨주의의 탄생’을 소개했다. 한마디로 반중(反中) 정서는 미국과 보수 세력의 정치적 음모라는 내용이다. ‘중국발 미세먼지’ ‘우한 코로나’ 등도 모두 ‘중국이 문제다’는 편견을 심기 위한 공작으로 본다.
한국 좌파의 친중 DNA는 뿌리가 깊다. 1970년대 말 리영희 교수는 ‘8억 인과의 대화’로 마오쩌둥(毛澤東)을 미화했다. 문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로 꼽은 신영복은 소련이 무너지자 중국을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했다. “현대 중국은 거대한 대륙적 소화력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하고 있다. 21세기에 새로운 문명이 창조된다면 그건 중국에서 나올 것이다.” 전혀 터무니없는 몽상은 아니다. 외교잡지 ‘포린 어페어스’도 중국의 경제 도약을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2012년 시진핑(習近平) 주석 집권 이후 거대한 역풍이 불고 있다. 중국이 권위주의적으로 돌아서면서 미국의 대중 봉쇄가 시작됐다. 특히, 한국은 동북공정·사드 보복의 피해를 본 데다 중국발 미세먼지와 코로나 사태까지 겹쳤다. 지난해 글로벌 설문조사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비율은 81%로 세계 최고였다. 2015년 미국 퓨리서치 조사(37%)와 비교하면 중국에 완전히 감정이 상한 셈이다.
이런데도 시 주석은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고 내뱉고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는 “중국 패배에 베팅하면 후회할 것”이라고 압박한다. 민주당은 악화하는 국민 정서에 아랑곳없이 중국 구애에 목을 매고 있다. 군부 독재에 맞서 반미에 몰입하다 스스로 중국을 숭배하는 괴물이 된 게 아닌지 의문이다. “앞으로 중국이 이기니 한국은 줄 잘 서라”는 싱 대사의 설레발부터 미심쩍다. 인공지능과 소프트웨어가 대세인 시대에 과연 권위주의 체제에서 창조적 경쟁력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까. 민주당은 시대착오적 친중 DNA를 고민해봐야 할 듯하다.
06-23(금) 우주항공청과 산업 생태계

문희수 논설위원
지난해부터 방산을 포함한 항공우주 분야는 깜짝 놀랄 성과를 내고 있다. 독자 기술로 다누리호와 누리호 2차·3차를 쏘아 올려 세계 7번째 위성발사국 위상을 굳혔고, 방산 수출은 올해까지 2년 연속 사상 최대 행진이다. 괄목할 만한 도약이다.
그렇지만 정작 소재·부품·장비(소부장)를 망라한 산업 생태계는 유지조차 우려되는 지경이다. 맏형 격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도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는 방산 덕에 먹고 사는 실정이다. 매출액은 코로나 종료로 올해 3조8000억 원으로 커질 전망이지만, 방산 등 국내 사업 비중이 64%(2022년 기준)나 되는 반면 위성은 불과 4%다. 민수 기체 분야(27%)도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금에 많이 의존한다. 소부장 중소업체들은 더 심각하다. 보잉·에어버스 등 글로벌 업체에 납품하는 기업도 적자 탈피가 힘겹다. 전진기지 격인 경남 사천시 소재 A사는 신용평가등급이 은행의 대출 기준을 못 넘는 탓에 정부가 특별자금을 지원해 봐야 ‘그림의 떡’이라고 하소연한다.
항공우주산업은 다품종·소량생산이 불가피하다. 항공기의 부품 수는 30만 개로, 자동차(3만 개)보다 10배나 많지만, 같은 기종이라도 제작 대수가 한정된 만큼 대량생산을 할 수가 없다. 일감 부족에도 생산을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방 업체여서 인력난은 갈수록 심해진다. 정부가 추진 중인 우주항공청 설립에 대한 산업계의 기대가 절박한 이유다.
일감 확보가 최우선인 만큼 우주항공청은 방위사업청처럼 정부 구매·조달 등을 직접 수행하는 실무형 집행부서가 돼야 한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달 착륙선·화성 탐사선 같은 국가 전략은 기존 항공우주연구원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맡으면 된다. 국회에선 장관급인 우주항공위원회로 격상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위기감이 확산하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실무형 기구가 돼도 윤석열 대통령이 우주항공위원장인 만큼 정책 역량을 가질 수 있다. 산업 생태계를 키우는 게 핵심이다. 2031년 달 착륙선을 준비하는 계획 정도로는 일감 부족을 피할 수 없다. 사각지대 없이 초고속·대용량 통신이 가능한 통신위성 확대, 상용화가 임박한 도심항공교통(UAM) 등 국가적 과제를 활용해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06-26(월) 이태준의 ‘수연산방’

김종호 논설고문
책에서 고아(高雅)하고 멋있는 묘사를 접하면, 밑줄을 긋고 싶어진다. ‘한국 산문의 정수(精髓)’로 알려진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의 1941년 산문집 ‘무서록(無序錄)’은 그런 표현으로 가득하다. 경북 경주 토함산 석굴암을 동틀 무렵에 오른 일을 그린 수필 ‘여명(黎明)’ 한 대목은 이렇다. ‘이윽고 공단(貢緞) 같은 짙은 어둠 위에 뿌연 환영(幻影)의 드러나심, 그 부드러운 돌 빛, 그 부드러우면서도 육중하신 어깨와 팔과 손길 놓으심, 쳐다보는 순간마다 분명히 알리시는 미소, 전신이 여명에 쪼여지실 때는 이제 막 하강하신 듯, 자리 잡는 옷자락 소리 아직 풍기시는 듯.’ 그러고 잇는다. ‘어둠은 둘레둘레 빠져나간다. 보살들의 드리운 옷 주름이 그어지고, 도틈도틈 뺨과 손등들이 드러나고, 멀리 앞산 기슭에서는 산새들이 둥지를 떠나 날아 나간다. 산등성이들이 생선 가시 같다. 동해는 아직 첩첩한 구름 갈피 속이다.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여명의 영주(領主)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또 다른 수필 ‘가을꽃’에선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다’ 한다. ‘흙 속에서 스며 나와 흙 위에 흐르는 물, 그러나 흙물이 아니요 정(淨)한 유리 그릇에 담긴 듯 진공 같은 물, 그런 물이 풀잎을 스치며 조각 돌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푸른 하늘 아래에 즐겁게 노래하며 흘러가고 있다’ 하는 수필 ‘물’도 있다. ‘고완품(古玩品)과 생활’에선 ‘빈 접시요 빈 병이다. 담긴 것은 떡이나 물이 아니라, 정적(靜寂)과 허무다. 그것은 이미 그릇이라기보다 한 천지요 우주다’라고 한다.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 말도 듣던 그는 1946년 월북했으나. 그 전의 우(右) 성향 활동을 이유로 숙청됐다가 사망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글쓰기의 교범 격인 ‘문장강화’도 1940년 펴낸 그가 1933∼1946년에 살던 집이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1호인 성북구 성북동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이다. 걸출한 산문들과 함께, 단편 소설집 ‘달밤’ ‘가마귀’와 장편 ‘구원의 여상’ ‘화관’ 등도 집필한 공간이다. 그의 손녀가 전통차와 인절미 등을 파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녹음 짙은 나무에서 새소리도 들리는 계절에는 이태준 문향(文香)이 더 느껴진다.
06-27 日 오염수 마시라는 혹세무민

김세동 논설위원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 오염처리수 방류 반대에 ‘올인’하는 이재명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이 비과학적인 괴담을 퍼트리면서,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안전하다면 식수로 마시라”고 윽박지른다. 이 대표는 “함께 쓰는 우물에 독극물을 퍼 넣으면서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안전하다면 농업용수든 공업용수든 재활용하라고 (일본에)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도 했다. 민주당의 의원들도 정부 당국자나 과학자들에게 식수로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한마디로 코미디 같은 질문이다. 후쿠시마 오염수는 원전의 녹아내린 핵연료봉을 냉각하기 위해 투입된 냉각수와 유입된 지하수, 빗물 등이 합쳐진 것이다. 원전 냉각수는 바닷물을 사용한다. 원전은 엄청난 양의 냉각수가 필요해 대부분 바닷가에 건설한다. 게다가 다핵종제거설비(ALPS)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처리한 뒤 남은 삼중수소를 기준치 이하로 희석하기 위해 또 많은 바닷물을 섞는다. 염도 높은 소금물이라 마실 수 없는 것은 물론, 농업용수로도 쓰지 못한다는 말이다.
과학자들이 “많이 마셔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 처리를 거친 오염수의 방사능 수치가 기준치 이하여서 인체에 무해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서울의 아리수가 식수로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많은 사람이 정수기를 사용하거나 생수를 구입해 마시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 대표는 방사능 물질과 관련된 수치만 기준치 이하면 바닷물을 ‘매일 1ℓ, 10ℓ씩’ 마실 수 있겠나.
이 대표와 민주당은 장외 규탄대회를 열고 서명운동도 하면서 “핵 폐수 방류를 왜 막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특히, 수산업계를 찾아 애로 사항을 듣고 지원책을 강조하는 것은 유체이탈 화법이고 이중 플레이다. 일본 ‘핵 폐수’가 한반도 바다와 수산물을 모두 핵 오염에 노출시키는 것처럼 주장한 것이 문제의 핵심인데, 그런 일을 벌이면서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수산업계를 위로한다. 이 대표가 일본 오염수 방류를 반대할 수 있다. 국격과 국익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감수하면 그만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주장만은 해야 한다. “일본이 방류하든 않든 한국 수산물은 절대 안전하다.” 그리고 “한강에 × 덩어리 하나 빠졌다고 한강 물이 ×물이냐”라는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06-28 기부 천사

박민 논설위원
“네 것을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왜냐 하면 모두 함께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을 네가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기부에 관한 성(聖) 암브로시오 주교의 이 같은 정의를 잘 따르고 있는 사람으로 빌 게이츠가 꼽힌다. 그는 지난해 7월 자신이 설립한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에 200억 달러(당시 26조여 원)를 추가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재단 자금은 700억 달러(91조 원)로 늘어났다. 그는 “고통을 줄이고 삶을 개선하도록 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전 재산을 재단에 기부해 언젠가 세계 부자 순위에서 빠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재산이 1137억 달러에 달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별세한 이건희 삼성 회장은 어린이 암 환자 치료 등을 위해 미술품을 포함, 4조 원대의 기부 계획을 밝혔고 유족들은 이를 실천하고 있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도 2021년 10조 원이 넘던 재산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철가방 천사 (김)우수 씨’는 기부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는 2세 때 버려져 7세에 보육원에 들어갔고 12세 때 가출해 거리를 전전했다. 처지를 비관해 자살을 시도하다 방화범으로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소년 소녀 가장들의 글을 묶은 ‘사과나무’를 보고 이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출소 후 서울 은평구의 한 중국집에서 배달일을 하며 받은 월급 70만 원 중 25만 원을 월세로 내고 매달 5만∼10만 원을 어린이재단에 후원했다. 4000만 원의 종신 보험금 수령자도 어린이재단으로 지정하고 장기 기증 서약까지 했다. 그러나 2011년 9월 배달 나갔다 승용차와 정면 충돌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 익명의 기부가 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26일 고려대는 익명의 개인 기부자가 630억 원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1905년 개교 이후 단일 기부로는 최고 액수다. 앞서 지난 19일에는 익명의 한 스님이 동국대 와이즈캠퍼스에 장학기금 3억 원을 기부했고 14일에도 익명의 한 비구니 스님이 발전기금 1억 원을 기부했다.
사족.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은 연설에 뛰어난 암브로시오 주교의 어록 중 하나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학 때 세례명이 암브로시오다.
06-29 한국의 베르디 사랑

이미숙 논설위원
우리나라 오페라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해인 1948년 시작된다. 처음 공연된 오페라는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인데, 당시엔 ‘춘희’란 명칭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그해 서울에서 1월 16일부터 5일 동안 하루 두 차례씩 공연이 이뤄졌는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연일 티켓이 매진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해방 후 모든 것이 부족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첫선을 보인 서양 오페라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어서 4월 재공연이 이뤄졌을 정도다. 주인공 비올레타 역엔 소프라노 마금희·김자경, 알프레도 역엔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 테너 이인선이 캐스팅됐다. 당시 공연으로 김자경은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라노로 자리매김하면서 성악계의 대모가 됐다. 이인선은 ‘춘희’ 대본 우리말 번역에서 기획·제작 역할까지 하면서 스타가 됐다.
한국의 베르디 사랑은 올해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폐막작이 모두 그의 오페라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개막작은 ‘라 트라비아타’로, 양수화 단장이 이끄는 글로리아오페라단이 5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다. 양 단장은 “대한민국에서 공연된 첫 작품을 오페라 탄생 75주년 기념작으로 무대에 올려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비올레타 역에 소프라노 홍혜란·김은경, 알프레도 역에 테너 신상근·최원휘가 열연했다. 폐막작 ‘일 트로바토레’는 국립오페라단이 지난 22일부터 4일간 공연했는데 시대 배경을 중세에서 현대로 옮기고 무대도 미국 뉴욕 할렘가처럼 꾸며 뮤지컬 같은 느낌을 줬다. 루나 백작 역에 바리톤 이동환·강주원, 레오노라 역에 소프라노 서선영, 만리코 역에 테너 국윤종·이범주가 출연했다.
올해 오페라 페스티벌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글로리아오페라단과 국립오페라단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 높은 공연을 선보였다. 1948년 처음 공연된 오페라가 세계정상급 수준으로 올라선 것은 뛰어난 성악가와 연주 오케스트라, 그리고 오페라단의 기획력 덕분이다. 페스티벌 기간 중 전해진 테너 김성호와 바리톤 김태한의 국제 콩쿠르 우승 소식도 K-오페라의 미래를 밝게 해준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오페라계를 키울 비즈니스 마인드와 75년 전 첫 공연 때와 같은 관객의 열정적인 참여다.
06-30(금) ‘호모 픽토르’ 이건희

오승훈 논설위원
이재용(55)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3일 베트남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보 반 트엉 국가주석의 생일 축하 케이크를 받았다는 소식에, 하노이 인근 삼성전자 스마트폰 공장이 떠올랐다. 박닌성 1공장과 타이응우옌성 2공장은 평원 한복판에 들어선 거대 도시였다. 두 공장 근로자가 11만 명, 1차 협력사만 합쳐도 20만 명. 아침마다 통근버스 800대, 오토바이 2만3000대가 움직이고 하루 식사에 쌀 20t, 수박 5000통, 돼지 100마리가 소비됐다. 그게 6년 전 풍경이다. 당시 삼성이 베트남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1%였는데 지난해 25%로 늘었고, 베트남은 한국의 최우선 경협 파트너가 됐으니 두 정상이 마련한 깜짝 파티는 과한 게 아니었다.
그 시원에 이건희(1942∼2020) 선대회장이 있다. 그가 베트남에서 사업을 발굴한 건 정부 수교보다 3년 앞선 1989년이다. 시장경제 체제 전환 후 고도성장, 교육, 근면성에 주목했다. 2008년 스마트폰 공장 투자가 결정적이었다. 아이폰을 잡기 위해 글로벌 생산기지 건설을 결단했다. 하노이 공장들이 연이어 세워졌고, 2013년 글로벌 스마트폰 1위 자리에 올랐다. 그가 남긴 유일한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년)에는 지난 6월 7일로 30주년을 맞은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나온 과정이 들어 있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하니 막막했다. 세계는 저성장, 국내는 3저 호황의 그늘이 드리우는데 삼성은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 속에 있었다.” 그 시절 하루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체중이 10㎏ 이상 줄었다. 1993년 로스앤젤레스, 도쿄에서 회의를 열어 세계 일류제품과 삼성 제품을 비교하도록 했다. 우리가 얼마나 미미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변명하는 임원은 퇴장시켰다.
“삼성 TV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보고, 직원과 주주, 국민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로 생각했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 결심이 삼성 신경영을 출범시켰다. 이어령(1933∼2022) 선생이 쓴 평은 지금 봐도 인상 깊다. “기업인이 아니라 외롭고 깊은 침묵 속에서 끝없이 무엇인가를 창조해가는 과학자나 예술가의 단면을 봤다. 이건희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적 인간)가 아니라 호모 픽토르(homo pictor·그림 그리는 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