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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조선일보) 2023-06/ 06.01(목) ‘푸른 태평양 대륙’ 태도국(太島國)을 아시나요 - 06.30(금) 차관 장미란

상림은내고향 2023. 6. 29. 10:34

만물상(조선일보) 2023-06/

06.01(목) ‘푸른 태평양 대륙’ 태도국(太島國)을 아시나요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 한·태평양도서국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연합뉴스

 

세계 지도를 보면 호주 오른쪽, 뉴질랜드 위쪽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을 볼 수 있다. 이 섬들이 만든 16국을 태평양도서국이라 부른다. 약칭 ‘태도국(太島國)’이다. 이들 국가는 인구와 국토가 작지만 광활한 바다를 갖고 있다. 태도국들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합치면 1910만㎢로 전 세계 면적의 14%를 차지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러시아 면적(1709만㎢)보다 넓다. 이 국가들은 스스로를 ‘푸른 태평양 대륙’이라고 부른다.

 

/일러스트=이철원

 

▶글로벌 지정학 게임에서 태도국이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 국가들은 자원 외교가 중요한 시대에 수산 자원은 물론 망간 단괴 등 해양 광물 자원이 풍부하다. 투발루 등 해수면이 상승하는 섬이 많은 것도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다. 투발루의 외교장관은 2021년 무릎 깊이 바닷물 속에서 정장 차림으로 “지금 서 있는 이곳도 한때는 육지였다”로 시작하는 연설로 전 세계에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렸다.

▶최근에는 해상 항로 요충지라는 점이 재평가를 받으면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격전지로 부상했다. 2021년 중국은 솔로몬제도와 안보 협정을 체결했다. 중국 군함이 기항할 수 있고 소요 사태가 나면 중국에 군·경찰을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미국이 바짝 긴장했다. 미국은 지난해 9월 워싱턴에서 첫 ‘미·태도국 정상회의’를 개최했고 솔로몬제도에 30년 만에 대사관을 재개설하는 등 다시 이 지역에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5월말 태도국 정상들을 초청해 첫 정상회의를 가졌다. 태도 11국은 부산 엑스포 개최 여부를 결정짓는 국제박람회기구(BIE)에도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엑스포 개최지 투표권은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1국 1표를 갖는다. 태도국 정상들은 부산도 방문했고 공동성명에서 부산의 엑스포 유치를 환영한다고 했다. 전체 171표 중 11표를 확보한 셈이다.

▶우리나라 첫 원양어선은 1949년 미국에서 도입한 230톤급 ‘지남호(指南號)’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富)를 건져오라’는 뜻을 담아 배 이름을 지었다. 훗날 남태평양이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를 것을 예견한 것일까. 1960~1970년대 지남호를 포함해 많은 원양어선이 태도국 해역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경제성장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사모아 등에는 이런저런 사고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한국 선원들의 무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와 태도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다를 통해 연결된 이웃이다.

김민철 논설위원

 

06.02 술 먹고 해도 통하는 한국 야구

/일러스트=이철원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음주 출전’이 드물지 않았다. 전설적 투수 A가 경기 당일 새벽까지 상대팀 선발 투수 B와 소주 10병, 양주 5병을 마셨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데 그날 경기에서 A가 완봉승을 거뒀다. A가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상대 타자들 수준이 너무 낮았다. 유명 타자 C는 비로 경기가 취소될 줄 알고 전날 폭음을 했는데, 날이 개는 바람에 경기에 나갔다. 그런데 홈런 2개를 쳤다. 상대 투수 수준이 한심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술 냄새 풍기며 타석에 들어선 타자들, 홈런 치고 그라운드를 돌고 나서 숙취로 토한 선수 등 에피소드가 무수하다.

▶축구 선수들이 경기당 평균 11.2km를 달리는데 야구 선수는 1km가 채 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야구 선수에겐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능력과 폭발적 파워 등 수준 높은 운동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강한 체력이 필수적이다. 특히 수준 높은 현대 야구에서 과학적 몸 관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숙취 상태에서 운동하면 유산소 능력이 11% 감소한다. 평소 술을 마시는 사람이 운동 관련 부상을 입을 확률이 술 마시지 않는 사람의 2배에 이른다는 연구도 있다.

 

▶한국 프로야구에는 음주 운전으로 적발되는 선수가 한 해에도 여러 명 나온다. KBO가 징계를 강화했으나 효과가 없다. 이번엔 지난 3월 WBC 기간 중 일본 도쿄의 한 주점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술을 마신 사실이 알려졌다. 이들은 경기 전날이나 당일 새벽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경기 전전날 술을 마시는 것은 괜찮은가. 논란이 커지자 김광현, 이용찬, 정철원은 사과를 했다.

▶한국 야구 선수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술을 마셔도 안타 치고 삼진 잡을 정도로 경기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WBC에서 제대로 된 프로 리그도 없는 호주에 졌고, 일본전에선 콜드게임 패배 직전까지 갔다. 1이닝도 막아낼 투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지난해 은퇴한 선수가 그해 타율 최상위권에 있었던 게 한국 야구다. 도쿄올림픽에선 40대 아저씨들이 주축인 팀에 처참하게 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팀 평균 연봉은 그 팀의 10배도 넘었을 것이다.

▶한 야구 전문가는 “술 때문에 참패한 게 아니라 한국 야구 실력이 딱 그 수준”이라고 했다. 최근 한국 프로야구에는 도박, 학폭, 뒷돈, 미성년자 성착취, 중계권 비리 의혹 등이 쉴 새 없이 터진다. 술 정도는 애교일까.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수현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06.03(토) 사이코패스 정유정

/일러스트=이철원

 

2005년 수많은 사람을 몸서리치게 했던 ‘엄 여인 연쇄 살인’의 범인 엄 여인은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한 뒤 눈을 핀으로 찔러 멀게 했고, 얼굴에 뜨거운 기름을 부은 뒤 흉기로 살해했다. 재혼한 남편까지 보험금을 노리고 죽였다. 피붙이인 친정어머니와 오빠까지도 같은 목적으로 눈을 멀게 했다. 몇 해 전, 남편을 살해한 뒤 시신을 배 위에서 바다에 버린 고유정도 그 못지않았다. 잔인한 여성은 역사적으로도 드물지 않다. 한(漢) 고조의 아내 여후는 남편 첩의 손발을 자르고 눈과 귀, 혀를 뽑았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런 잔인한 행동의 근저에 잘못된 인지도식(認知圖式)이 있다고 설명한다. 인지도식은 특정 상황에서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는 저마다의 내면 규칙이다. 인지도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것을 세상의 기준에 맞춰 평가한 뒤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면 따르지 않는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이 사이코패스다. 이들은 행동을 이성적으로 제어하는 전두엽 기능이 발달하지 못했다. 심한 경우 정상인의 15%에 불과하다는 연구도 있다. 이들은 폭력 성향을 띠게 하는 ‘모노아민 산화효소’라는 전사(戰士)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사이코패스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기 내면의 목소리만 듣는다.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거짓말도 태연하게 한다. 일본의 한 의학자는 사이코패스를 ‘정장 입은 뱀’이라고 했다. 또래 여성을 이유 없이 살해했다가 엊그제 신원이 공개된 정유정이 그렇게 행동했다. 딸의 과외 선생님을 찾는 학부모인 것처럼 거짓말로 피해자와 통화한 뒤 중학생 교복을 입고 찾아가 흉기를 휘둘렀다. 검거된 뒤 범행 이유를 묻자 “살인을 해보고 싶었다”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2007년 영화 ‘한니발 라이징’은 소년 한니발 렉터가 사이코패스로 거듭나는 과정을 추적한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2차대전으로 가족을 잃고 굶주린 패잔병들에게 동생이 잡아먹히는 장면을 목격한 뒤 괴물이 된다. 인간 100명 중 한 명은 사이코패스 성향을 갖고 태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한니발처럼 괴물이 되는 이는 극소수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갖고 태어난 뒤에 사이코패스가 되느냐 정상인이 되느냐는 어릴 때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잘 자랐느냐가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정유정은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다. 고교 졸업 후 친구도, 직업도 없이 극도로 폐쇄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사회 어느 구석에 이런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김태훈 논설위원

 

06.05(월) 바리톤 김태한의 우승법

‘천상의 목소리’로 불린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생전 체중이 160㎏까지 나갔다. 오페라 ‘라보엠’에서 가난한 예술가 청년 역을 맡았는데 육중한 체구 때문에 소품 의자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1853년 초연된 베르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에서 여주인공 비올레타를 맡은 소프라노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도 체격이 풍만했다. 건장한 비올레타가 “폐결핵에 걸려 하루밖에 못 산다”고 하자 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일러스트=이철원

 

▶대학 시절 음대생에게 성악가의 체구가 당당한 이유를 들은 적이 있다. “몸이 커야 호흡이 길고 성량도 풍부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울림통이 커야 한다는 뜻이다. 체중을 줄였다가 후회한 사례도 여럿 있다. 선박왕 오나시스의 아내였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100㎏ 넘던 체중을 30㎏ 넘게 감량한 뒤 “첫째 체중을 잃었고, 그다음엔 목소리를 잃었다”고 한탄했다.

 

▶22세의 바리톤 김태한이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정상에 서자 많은 사람이 서양인 못지않은 그의 체구를 주목했다.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한국 남자 성악가가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데’ ‘파바로티나 도밍고 등은 호흡과 발성 체형이 우세해 따라잡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댓글이 달렸다. 남자로선 한국은 물론 아시아 첫 사례니 그런 반응이 나올 법도 했다. 그간 이 대회 성악 부문 한국인 우승자는 소프라노 홍혜란과 황수미였다.

▶바리톤은 ‘낮은 음성’이란 뜻의 라틴어 ‘바리투스’에서 비롯됐다. 서양에선 남성이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가장 흔한 음역이다. 김태한의 우승은 이런 불리한 조건을 부단한 연습으로 딛고 이룬 쾌거다. 하지만 성악계에선 ‘타고난 신체 조건은 더 이상 결정적 변수가 아니다’라고 한다. 체구보다는 성대 자체의 기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대를 연마하고 여기에 근력까지 키우면 뱃심에 의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 미남 성악가로 명성을 날린 프랑코 코렐리 등이 대표적이다. 목소리 못지않게 몸 맵시가 중요해진 미디어 시대가 부른 변화이기도 하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우리 청년들은 정상에 가기까지 과정 자체를 즐긴다. 김태한도 우승 후 “목표는 최선을 다해 무대를 즐기는 것이며 앞으로도 행복하게 음악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싸이가 부른 ‘챔피언’은 ‘진정 즐길 줄 아는 여러분이 이 나라의 챔피언입니다’로 시작한다. 즐기며 노래하고 성취하는 그에게 축하 박수를 보낸다.

김태훈 논설위원

 

06.06  300달러짜리 ‘완벽 남편

실베스터 스탤론이 미래 경찰관으로 등장하는 영화 데몰리션 맨. 그는 테러범 검거 중 사고로 60년 냉동 처벌을 받는다. 그가 깨어나 대면한 세상은 메타버스 세계였다. 동료 여성 경찰의 섹스 제안에 잔뜩 기대를 품지만, 헤드셋을 쓰고 멀리 떨어져 앉는 것 아닌가. 미래의 섹스는 ‘체액 교환’이 금지된 채 VR(Virtual Reality·가상현실) 영상으로 사랑을 나누는 행위로 변해 있었다.

 

/일러스트=이철원

 

▶2014년 개봉 영화 ‘그녀(HER)’에선 대필 작가 남성이 인공지능(AI)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사이버 세계에서 그녀가 자기 말고도 641명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사람 애인을 찾아간다. 2019년 개봉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에선 AI 애인이 상황을 주도한다. AI 여성이 섹스를 몸으로 느끼고 싶다면서 매춘부 뇌에 들어가 남자 주인공과 사랑을 나눈다.

 

▶러시아 출신 엔지니어가 영화 ‘그녀’를 보고 만들었다는 AI 챗봇 서비스(레플리카)가 1호 ‘가상 남편’을 창조해 냈다. 한 미국 여성이 레플리카에 300달러를 내고 만든 가상 인간 ‘라모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는 것이다. 가상 남편은 파란 눈, 키 190㎝ 미남으로,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터키계 의료 전문가로 설계됐다. 그녀는 SNS에 “무결점이 최대 장점”이라는 가상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매일 올리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챗GPT로 가상 세계의 진화 속도가 빨라지는 가운데, 애플이 가세했다.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바꾼 애플이 7년 넘게 공들여 개발해온 가상현실 헤드셋을 곧 내놓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의 몰입감을 극대화하는 최첨단 기술이 탑재된 것으로 보인다. 헤드셋 선두 주자 메타가 급히 후속작을 내놓고, 틱톡 운영사인 중국계 바이트댄스도 헤드셋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등 가상 세계 선점을 위한 빅테크 기업 간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인쇄술은 외설 소설, 사진·영화는 포르노의 산업화를 촉발했다. 가상 세계에서도 각종 성인용 콘텐츠가 주력 상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헤드셋 구매자의 83%가 VR 포르노를 본다고 한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애플이 가상현실 플랫폼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헤드셋 시장만 연 5000억달러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영국 미래학자는 “2050년엔 사이버 섹스가 인간끼리 섹스보다 많아진다”고 예측했다. “미래 인류는 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살 확률이 10억분의 1에 불과할 것”이란 일론 머스크의 예측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김홍수 논설위원

 

06.07 현충원에 소풍 가는 날

/일러스트=박상훈

 

알링턴 국립묘지는 워싱턴 DC 중심가에서 지하철로 20분쯤 걸린다. 포토맥강을 건너 버지니아주에 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40만 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후손들이 절대 잊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곳이다. 미국 육군이 관리하는데 장군과 병사의 구분이 없다. 죽어서는 똑같은 한 평 반 넓이에 사망 순서대로 묻힌다. 같은 날 숨졌으면 알파벳 순이다. 알링턴에 묻힌 첫 번째 군인은 1864년 펜실베이니아 출신 일병이었다.

▶이후 확장 공사가 여러 번 있었는데, 부실 관리가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엉뚱한 묘비를 세웠다거나, 노출된 관이 부서진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두 유해를 한 곳에 안장한 경우까지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가슴 뭉클한 사연이 더 많다. 한 회사가 1992년 크리스마스에 5000개 화환을 기부한 일을 계기로 비슷한 기부가 이어져 2014년엔 모든 묘역에 화환이 놓이는 장관이 펼쳐지기도 했다.

 

▶알링턴 내 원형극장은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재향군인의 날, 부활절 때 성대한 의식이 거행된다. 매년 5000명 넘는 사람이 행사를 즐기러 온다. 5, 6월에는 한 달 동안 투어 행사도 이어진다. 유족들은 각 묘소에 비문 그리고 신앙을 상징하는 표지를 세울 수 있다. 정부가 제공하는 공인된 신앙 표지가 63가지가 있는데, 뿔이 다섯 개 달린 별 모양의 부적인 ‘펜타클’을 허용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립서울현충원도 명소다. 날씨 맑은 날 산책 코스로 이만한 곳도 없다. 지하철 동작역에서 내려도 좋고, 온 가족이 자동차를 이용하면 주차장도 널찍하다. 꽃향기와 함께 어우러진 연못, 그리고 싱그러운 초목이 마음까지 씻어준다. 현충문·현충탑을 거쳐서 왼편으로는 유격부대 전적비, 육탄10용사비를 볼 수 있고, 바른편에는 애국지사묘역, 임정묘역, 유공자묘역,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이 기다린다. 저절로 숙연해지면서 발걸음 그대로 현대사 공부가 된다.

 

▶보훈부가 좀 더 친근하게 찾을 수 있는 현충원을 만들려고 사업을 추진 중이다. 새해 벽두 정치인들이 검은 정장 입고 의전 서열에 맞춰 머리를 숙이는 엄숙한 곳이란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추모 공간이면서 동시에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겠다고 한다. 계절에 맞춰 영화제·음악회·전시회를 열고, 알링턴의 ‘꺼지지 않는 불’ 같은 상징물도 더 고안할 것이다. 누구나 현충원으로 가족 소풍도 가고, 데이트도 하고, 외국 관광객도 빼놓지 않고 찾는 날을 기대한다.

김광일 논설위원

 

06.08 세계 골프 전쟁

▲일러스트=이철원

 

미국은 전통적으로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트럼프는 첫 순방지로 국경을 맞댄 캐나다와 멕시코 대신 사우디를 택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최고의 환대를 베풀었고, 트럼프는 궁전 연회에서 사우디 칼춤 ‘아르다’를 추기도 했다. 빈 살만이 언론인 카슈끄지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나와도 트럼프는 얼버무렸다. 빈 살만은 트럼프 사위 펀드에 20억달러를 투자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와 사우디 리브(LIV) 골프 합병 소식에 트럼프는 “거대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거래”라고 환호했다. 트럼프는 전 세계 17곳에 초호화 골프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세계 메이저 대회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트럼프 극렬 지지자들의 의회 난동 사건 이후 미국 PGA는 그해 PGA 챔피언십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꿨다. 브리티시 오픈을 주최하는 R&A도 트럼프 소유인 스코틀랜드 턴베리 골프장에서는 대회를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반면 사우디가 만든 리브 골프는 작년에 두 대회를 트럼프 소유 골프장에서 치렀고, 올해도 3개 대회를 개최한다. 트럼프 아들은 “합병이 완결되면 트럼프 코스에서 게임이 계속 열리기를 바란다”고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트럼프는 작년 7월 소셜미디어에 “양 투어가 결국 합병될 것이며 PGA에 충성하며 남아있는 선수들은 금전적으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특유의 빈정거리는 어투지만, 돌이켜 보면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트럼프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사우디 사람들을) 이길 수는 없다. 이들은 위대한 정신을 갖고 있고, 경이로운 사람들이며, 무제한의 돈을 갖고 있다. 무제한의”라고 했다.

 

▶재선을 꿈꾸는 트럼프에게 이번 합병이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9·11 테러 피해 가족들이 반발하고 있고, 대통령이 외국 정부 기관과 비즈니스를 하는 것에 대한 불신 여론도 상당하다. 미 법무부는 이미 트럼프 재단에 리브 골프와의 관련성을 밝히라며 소환장을 발부한 상태다.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 관계에서 트럼프와 반대쪽으로 나갔다가 단단히 체면을 구겼다. 사우디를 ‘왕따 국가’로 부르며 빈 살만과 각을 세웠으나, 사우디는 중국과 밀착하며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우디가 만든 리브 골프와 미국 PGA의 대립도 이 와중에 벌어졌다. 이 세계 골프 전쟁에서 미국의 자존심과도 같던 PGA가 무릎을 꿇었다. 미국 정부도 이제는 빈 살만을 달래려 애쓰고 있다. 적어도 지금의 승자는 ‘사우디의 돈’이다.

박종세 논설위원

 

06.09 도시인의 로망, 농막의 위기

어느 분이 만날 때마다 농막(農幕) 자랑을 하면서 꼭 한번 놀러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농막이라고 해서 허름한 간이 시설을 상상했다. 가보니 면적 규정(20㎡·6평)에 맞춰 침실, 화장실, 부엌까지 다 갖춘 조립식 주택 형태여서 놀랐다. 지인은 주중은 서울에서, 주말 이틀은 이 농막에서 지내는 ‘5도2촌’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작은 테라스에 서니 앞에 강이 흐르고 멀리 산이 보이는 경치가 펼쳐져 또 한번 감탄했다.

 

▲일러스트=이철원

 

▶도시 생활에 지쳐 주말에라도 자연에서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다. 전원 생활을 꿈꾸지만 당장 삶의 터전을 옮기기는 어려운 사람들, 비용 때문에 세컨드 하우스나 별장은 꿈꿀 수 없는 사람들에게 6평 농막은 훌륭한 대안이자 로망이었다. 전국 농막 설치 건수가 2014년 9175건에서 2021년 4만6057건으로 약 4배로 늘어난 이유일 것이다.

▶러시아 도시민의 70%는 주말이나 휴가철에 머무르는 ‘다차’가 있다. 감자·오이·토마토 같은 채소는 대부분 다차 텃밭에서 직접 길러 먹는다. 스웨덴 국민의 약 55%는 자연에 위치한 ‘여름집’에서 휴가를 보낸다. ‘클라인 가르텐(작은 정원)’은 독일인 절반을 행복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이 텃밭에 농막을 짓고 채소 등을 길러 먹는다. 인구에 비해 국토가 넓은 나라들 얘기지만 우리도 산악이 국토의 70%인 나라다. 전원 생활을 누릴 공간은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 농막을 쓰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농막에 대해 ‘20㎡ 이하’라는 면적 규제만 있었는데 농림부가 ‘야간 취침 금지’ ‘휴식 공간은 농막의 25% 이하’ 등 규제를 추가하는 농지법 시행규칙 예고안을 발표했다. “농막을 별장처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다. 사실상 농막 금지법과 같은 내용이어서 농막을 갖고 있거나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뉴스가 됐다.

 

▶농막을 불법 증축하거나 호화롭게 꾸며 별장처럼 사용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농림부가 걱정하는 농지 훼손도 문제다. 하지만 호화 별장, 농지 훼손을 막으면서 도시인의 로망도 살리는 묘안은 없을까. 더구나 농막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정부가 올해부터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늘리기로 한 ‘생활 인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생활 인구는 주민등록 인구만 아니라 하루 3시간 이상, 월 1회 이상 머무는 사람도 넣는 개념이다. 농촌 소멸을 우려하는 상황에서 현실에 맞게 농막 규제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김민철 논설위원

 

06.10(토) ‘포니’의 귀환, 지금도 상태 좋은 건 1억원대에 거래

▲일러스트=양진경

 

1970년대 현대차가 조립 판매한 포드의 코티나 승용차는 잦은 고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미 포드 측은 “비포장 도로에선 운행하지 말라”는 황당한 처방을 내놨다. 포드의 온갖 갑질에 화가 난 정주영 회장이 독자 모델 개발을 결심했다. 일본 미쓰비시 승용차의 플랫폼과 엔진을 사용하되 외형은 고유 디자인을 채택하기로 했다. 정 회장이 이탈리아의 30대 신예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120만달러를 주고 첫 고유 모델 ‘포니’의 디자인을 맡겼다.

 

▶정 회장은 주지아로가 들고 온 포니 디자인을 보고 “꽁지 빠진 닭처럼 생겼다”며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선 스타일링이 당시 자동차 디자인의 새 트렌드였고, 프레스 금형의 난이도를 낮추는 이점도 있어 디자인을 수용했다. 포니 생산을 위한 완성차 생산 라인 구축과 430여 개 부품 업체 발굴은 현대차를 자동차 조립 공장에서 완성차 기업으로 거듭나게 했다.

 

▶1975년 포니 한 대 가격은 228만원으로 서울 아파트 값의 절반에 해당하는 고가였지만 불티나게 팔렸다. 1976년 한 해만 1만726대가 팔려 국내 승용차 시장의 44%를 차지했다. 포니 픽업, 왜건, 포니2 등 후속 모델이 잇따라 나와 1982년엔 누적 판매 대수 30만대를 돌파했다. 1976년 에콰도르 5대를 시작으로 세계 60여 국에 수출됐다.

▶포니는 1970~80년대 대한민국 사회상을 보여주는 문화 아이콘이기도 하다. 1980년 광주 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선 이집트에서 역수입해온 포니가 소품으로 사용됐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지금도 포니 차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회원 수 1500명에 달하는 동호회 ‘포니 타는 사람들’은 자동차 부품을 구하기 위해 폐차장을 뒤지고, 그래도 못 구하면 3D 프린팅으로 부품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상태 좋은 포니는 1억원대에 거래된다고 한다.

▶현대차가 포니의 역사를 보여주는 ‘포니의 시간’이란 전시회를 마련했다. 현대차 정의선 회장은 “포니라는 독자 모델을 개발하면서 축적된 정신적, 경험적 자산이 오늘날 현대차를 만들었다”고 했다. 현대차의 포니 소환 이벤트는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란 위상에 비해 부족한 ‘역사’와 ‘스토리’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벤츠박물관, 일본 나고야의 도요타박물관 등 세계적인 자동차 도시엔 자동차 박물관이 있는데, 울산엔 현대차 박물관이 없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를 보여주고, 포니의 도전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박물관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김홍수 논설위원

 
 

06.12(월) 동창도 몰라본 신분증 사진... 美선 ‘머그샷’ 공개한다

 

작년 6월 호주 경찰이 40대 여성의 머그샷(mug shot·범죄자 인상 착의 기록 사진)을 공개했다. 절도 혐의로 기소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그와 연락이 끊기자 지명수배에 나서면서 소셜미디어와 지역 언론을 통해 공개한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숨 막힐 듯한 외모” “내 마음을 훔쳐 수배 중”이란 댓글이 쏟아져 언론사들은 댓글 창을 닫아버렸다. 그래도 얼굴이 화제가 되자 그는 공개 하루 만에 경찰에 자수했다. 머그샷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머그샷은 범인 구금 과정에서 촬영하는 얼굴 사진의 은어다. 머그는 큰 잔이란 의미도 있지만 얼굴의 속된 의미로도 쓰인다. 우리말로 ‘낯짝’ 정도 되겠다. 이 제도를 대표적으로 시행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현상수배범 공고를 위해 만든 관행이 굳어졌다고 한다. 미국은 어떤 범죄건 피의자가 되면 머그샷을 공개한다. 가수 마이클 잭슨은 아동 성추행 혐의로, 빌 게이츠도 1977년 난폭 운전으로 머그샷을 남겼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2017년 음주 운전 혐의로 머그샷이 공개됐다.

 

▶우리도 머그샷을 찍지만 일반에 공개하지는 않는다. 무죄추정의 원칙, 피의자 인권 보호 때문이다. 다만 흉악범으로 법에 따라 신상 공개가 결정되면 피의자가 동의했을 때 공개한다. 동의하지 않으면 신분증 사진을 공개한다. 2019년 경찰이 법무부 유권해석을 받아 이렇게 운영하고 있다. 예외에 예외를 더했으니 머그샷 공개는 드물 수밖에 없다. 2010년 신상공개 제도가 시행된 뒤 머그샷이 공개된 건 2년 전 ‘서울 송파 일가족 살해 사건’ 범인 이석준 한 명뿐이다. 나머지는 신분증 사진이 공개됐다.

 

▶문제는 공개된 사진과 실제 얼굴의 괴리다. 최근 20대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은 주민등록증 사진이 공개됐는데, 고교 동창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소환할 때 사진이 찍히게 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2019년 전남편을 살해한 고유정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다 가리는 이른바 ‘커튼 머리’로 출석했다. 그러다 보니 최근엔 귀가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 신상을 유튜버가 공개하는 부작용까지 나타났다. 법이 금지한 일종의 사적 제재다.

 

▶흉악 범죄가 잇따르면서 ‘머그샷 공개법’을 추진하자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관련 법안도 이미 국회에 발의돼 있다. 피의자 인권도 중요하다. 하지만 피의자 사익보다 공익이 더 크다고 판단해 신상 공개를 결정해 놓고 머그샷 공개를 제한한 건 이율배반처럼 보인다. 신상공개 목적 중 하나가 ‘여죄(餘罪) 신고’에 있는 만큼 현재 얼굴을 그대로 공개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최원규 논설위원논설실 논설위원

 
 

06.13 값싼 도쿄, 비싼 서울

 

엔화 값이 싸지면서 일본에 놀러가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이달 들어 10일까지 국내 항공사의 인천-나리타 노선을 이용한 사람이 약 9만명으로 집계됐다. 올 1월보다 35%나 늘었다. 8일 기준 원/엔 환율은 100엔당 928.63원으로 7년 7개월 만에 가장 낮다.

▶유튜브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일본 곳곳을 여행 다니며 띄운 ‘먹방 투어’ 동영상이 넘쳐난다. 일본 여행을 가면 주머니 가벼운 젊은이들도 점심 값이 저렴하다고 느낄 정도로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일본 직장인의 평균 점심 값은 6400원. 우리나라 유명 냉면집의 냉면 반 그릇 값도 안 되는 가격이다. 한국에서 골프 치느니 항공료 포함해도 일본 가서 골프 치고 오는 게 훨씬 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연간 7억개가 팔리는 일본의 국민 과자 우마이봉이 지난해 제품 출시 43년 만에 가격을 20% 올린 게 큰 뉴스였다. 말이 20%지, 10엔짜리를 2엔(20원) 올려 12엔이 됐을 뿐이다. 몇 년 전 일본 빙과 업체 아카기유업에서 사장을 비롯해 임직원 100여 명이 도열한 가운데 소비자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광고 영상을 띄웠다. 한국 같으면 갑질로 사회적 물의를 빚었을 때나 올리는 영상인데, 25년 만에 아이스크림 가격을 개당 60엔에서 70엔으로 올리면서 대국민 사과 영상을 띄웠다. 1997년 일본인 월급을 100이라고 할 때 2020년은 90 수준이다. ‘잃어버린 30년’의 경기 침체로 월급이 뒷걸음질치니 일본 기업들은 소비자들에게 1엔이라도 더 싼 제품을 내놓으며 가격 경쟁을 벌이느라 원가절감의 고수들이 됐다.

▶실제로 서울이 도쿄보다 비싼 도시가 됐다. 국제 인력관리업체 ECA인터내셔널이 207개 도시의 생활비를 조사했더니 서울이 9위, 도쿄가 10위였다. 세계 주요 도시 물가를 비교하는 맥도널드 빅맥 지수에서 올해 일본의 빅맥 가격은 3.15달러로, 55국 중 43위 수준이다. 가장 비싼 스위스 7.26달러의 반값도 안 되고, 아시아에서 한국(3.97달러), 태국(3.9달러), 중국(3.54달러)보다 낮다.

▶일본은 극심한 디플레이션(물가하락)에서 벗어나려고 전 세계가 금리를 올리는 동안에도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해 엔화 가치가 급락했다. 공격적인 돈 풀기로 경기를 띄우는 ‘엔저론자’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10년 만에 물러나고 경제학자 출신인 우에다 가즈오 총재가 일본은행 총재로 부임하면서 지금의 엔저 현상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환율 효과가 사라져도 일본보다 월등하게 비싸진 터무니 없는 물가로는 외국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오기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강경희 논설위원

 

06.14 사라지는 원조 외과 백병원

▲일러스트=김성규

 

의료계에서는 맹장염을 흔히 ‘아뻬’라고 부른다. 맹장염 즉 충수돌기염의 영어 의학용어 ‘아펜디사이티스’에서 앞글자를 따왔다. 제왕절개도 ‘시저리언 섹션’을 줄여서 ‘시섹’이라고 말한다. 외과로 출발한 백병원과 산부인과로 시작한 을지병원이 예전에 서울 시내에 있었는데, 백병원으로 가는 앰뷸런스는 “아뻬! 아뻬!”하면서 가고, 을지병원 쪽은 “시섹! 시섹!” 하며 간다는 말이 있었다. 두 병원이 이 수술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 박사는 외과의사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서울의대 전신 경성의전을 졸업했다. 3·1운동에 참여해 10개월 옥살이도 했다. 도쿄대에서 박사를 따온 후, 경성의전 외과학 주임교수가 됐다. 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배를 여는 개복수술을 했다. 일제 말에 지금의 명동성당 옆 백병원 자리에 문을 연 백인제 외과에는 전국 팔도에서 맹장염 환자가 몰려와, 일주일에 떼낸 맹장이 한 가마니를 넘었다고 한다.

 

▶1980년대 백병원은 한국 성형수술의 메카였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백세민 교수가 마법 같은 수술을 하면서, 안면 기형 등 성형외과 입원 환자가 100명을 넘는 일이 벌어졌다. 백 교수는 백인제 박사와 인척 관계가 아니었다. 하루에 안면 윤곽 수술 등 얼굴뼈 바로잡는 수술이 20여 건이 이뤄졌다. 수지 접합, 현미경 수술 등 최초·최고가 따라붙었다. 성형외과 교수가 20~30명에 달했고, 이들 백세민 사단은 전국으로 흩어져 뼈를 다루는 성형외과를 이끌었다.

▶백병원, 차병원, 길병원 등은 의원에서 시작해 의과대학병원이 됐다. 그래서 의료계에서는 병원 이름을 한 글자로 지어야 의과대학이 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림대, 순천향대, 건국대, 건양대 등도 병의원에서 시작해 대학이 됐다. 그 원조 격인 서울 백병원이 개원 82년 만에 사라질 위기다. 누적 적자 1745억원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다. 도심 인구 공동화로 환자가 줄어든 데다, 경영 부실이 겹쳤다고 한다.

▶백병원의 모(母)대학 인제대는 설립자 백인제 이름에서 따왔다. 창립 이념은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는 인술제세(仁術濟世)다. 1990년대 서울 백병원은 외과, 흉부외과, 성형외과 등 외과 트로이카 병원으로 명성을 날리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백인제 박사는 한국판 슈바이처로 불리는 외과의사 장기려 박사를 제자로 키웠다. 그 손자는 지금 백병원 외과 교수다. 원조 외과 병원이 사라지는 사실이 요즘 외과의사 부족 현상과 겹쳐 아쉬움을 남긴다.

김철중 논설위원, 의학전문기자

 

06.15 한국인 없는 K팝 그룹 탄생

▲일러스트=이철원

 

1990년대를 풍미했던 보이 그룹 H.O.T는 결성 당시 해외 진출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잘생긴 외모, 세련된 노래, 현란한 춤을 TV로 본 중국과 동남아 청년들이 열광했고, 이에 고무된 SM 등 기획사들이 해외 진출을 목표로 K팝 아이돌 그룹 만들기를 시작했다. 노래와 춤 못지않게 언어 장벽을 넘는 게 숙제였다. 재미교포 유진과 재일교포 슈를 발굴해 내놓은 첫 작품이 걸그룹 S.E.S였다. 슈를 앞세워 일본에 진출했고 대만에선 가장 인기 있는 걸그룹이 됐다. K팝 열풍의 시작이었다.

 

▶원더걸스, 동방신기 등 토종 한국인 아이돌이 해외 진출에 나섰던 이 시기를 ‘K팝 1.0′이라 한다. 이후 최근까지는 다국적 그룹이 대세인 ‘K팝 2.0′ 이다. 걸그룹 트와이스 멤버 9명 중 쯔위는 대만인, 모모와 사나는 일본인이다. 많은 일본 소녀가 모모와 사나처럼 K팝 걸그룹이 되어 도쿄돔 무대에 서는 날을 꿈꾸며 한국에 온다. 블랙핑크의 메인 댄서인 태국인 리사는 그 나라 청년들 사이에서 가장 닮고 싶은 롤모델이다. 태국 총리도 “국위를 선양한 젊은이”라고 공개 칭찬했을 정도다. K팝의 지평을 넓힌 사례들이다.

 

▶마침내 한국인이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K팝 그룹이 등장하는 ‘K팝 3.0′ 시대가 열렸다. 지난달 신곡 ‘카르마’를 선보인 걸그룹 블랙스완이 그 주인공이다. 국적과 인종 조합은 더욱 파격적이다. 파투는 세네갈 출신의 벨기에 국적 흑인이고 가비는 독일 출신의 브라질 국적 백인이다. 스리야는 인도인, 앤비는 미국인이다. 이들의 출신국은 K팝이 시장 확장을 노리고 있는 지역들이기도 하다.

▶K팝의 현지화 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일본에서 얼마 전 결성된 니쥬(NiziU)는 멤버 전원이 일본인이고 노래도 일본어로 한다는 점에서 K팝의 토착화 사례로 꼽힌다. JYP 엔터테인먼트 박진영 대표가 지난해 뉴욕과 LA 등 대도시를 돌며 A2K(아메리카 투 코리아)라는 글로벌 오디션을 연 것도 영어권에서 활동할 현지인 K팝 걸그룹 재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국인이 부르거나 한국어로 불러야 K팝’이란 정의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 누가, 무슨 언어로 부르건 ‘화려한 칼군무에 맞춰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게 노래하고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게 K팝’이란 것이다. 그 사이 K팝의 역사를 다시 쓴 BTS는 10주년을 맞았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전 세계 아미(BTS 팬덤)가 한국을 찾고 있다. K팝의 진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응원하며 지켜보게 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06.16 석 달간 수거한 현수막이 200만장

▲일러스트=이철원

 

정당 현수막 공해가 점입가경이다. 선거철도 아닌데 전철역, 버스 정거장, 아파트 입구 등에는 어김없이 정당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지난해 12월 정당 현수막은 지자체 허가 없이 걸 수 있게 법을 개정한 이후 생긴 살풍경이다. 내용은 정치적으로 악을 쓰거나 비아냥대는 것이 대부분이다. 올봄만 해도 주요 정당이 내건 것이 많더니 요즘엔 이름도 생소한 군소정당들이 내건 현수막이 갈수록 늘고 있다. 현재 중앙선관위엔 48개 정당이 등록돼 있다.

 

▶환경부가 올 1~3월 정당 현수막을 포함해 전국 지자체가 수거했다고 보고한 현수막을 집계했더니 무려 1300t이었다. 현수막 하나 평균 무게가 600g인 것을 감안하면 200만장이 넘는다. 2022년 대선 때 수거한 현수막 1100t보다 많다. 흉물이나 다름없는 정당 현수막 하나 만드는 데 10만원이 들어간다. 이 비용은 국고 보조금이나 정치 후원금으로 충당하니 세금 낭비도 엄청난 셈이다. 민원이 속출하자 지난 4월 행정안전부가 정당별 현수막 개수를 읍·면·동당 1개로 제한했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였다.

 

▶정당 현수막뿐 아니다. 언제부턴가 주요 그룹 본사가 있는 곳은 총수를 비난하는 온갖 현수막이 하나의 풍경이 됐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인들을 비하하고 해당 기업을 악질 기업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한 기업인을 ‘노동자 냉동폐기 범죄자’라고 쓴 현수막도 있었다. ‘살인자’ 등도 예사다. 서울 광화문, 강남역, 여의도, 종로, 공덕역 등 주요 그룹 본사가 있는 곳은 어디서나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다.

 

▶급기야 아파트 단지에서도 현수막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 대치동 선경아파트에는 현재 입구부터 단지 안 가로수 사이까지 ‘관리소장 물러나라’ ‘민노총 세력들은 출입을 금지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 수십개가 어지럽게 걸려 있다. 지난 3월 이 아파트 경비원 등이 사망한 이후 일부가 민노총에 가입한 다음 붙은 현수막과 아파트 주민들이 맞대응한 현수막이다. 난장판이 따로 없다.

 

▶자기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인터넷, 소셜미디어가 넘쳐나는 시대에 현수막 전쟁은 시대착오다. 보지 않을 수 없어 폭력으로 느낄 때도 있다. 아침마다 살벌한 문구를 보면서 출근할 때 마음이 불편하다. 미국·유럽 등 주요국에서는 현수막이나 벽보를 거의 볼 수 없다. 국회에는 개정 옥외광고물관리법에 문제가 많다며 재개정안이 여러건 올라와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이 법안을 처리해 현수막 전쟁이라는 구태를 끝내야 한다.

김민철 논설위원

 

06.17(토) 청혼부터 힘든 한국

▲일러스트=이철원

 

한 분이 얼마 전 서울 고급 호텔에 갔는데 옷을 격식 있게 차려입은 청년들이 너무 많아 놀랐다고 한다. 의아해서 알아보니 프러포즈(청혼)하는 청년들이었다. 이 식당이 청혼 ‘명소’라고 했다. 청혼 명소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호텔 프러포즈가 유행하자 호텔들도 경쟁적으로 관련 상품을 내놓는다. 수백만원 하는 곳도 찾는 이가 많다. 서울의 인기 5성급 호텔엔 몇 년 전만 해도 월 2~3건이던 예약이 요즘엔 20~30건씩 밀려든다. 상당수가 청혼이라고 한다. 제대로 청혼도 없이 결혼해서 사는 중년 이상들에게는 유별나다고 느껴지는 풍경이다.

 

▶인스타그램에 ‘호텔 프러포즈’ 해시태그(#)를 치면 사진 수만 장이 뜬다. 남녀가 꽃과 촛불 장식, ‘나와 결혼해 줘’라고 쓴 풍선, 하트가 새겨진 케이크 앞에서 미소 짓는다. 소셜미디어 과시 문화가 이를 부채질한다는 분석도 있다. 한 남성은 “여자친구가 소셜미디어에 올릴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고 해 무리해서 호텔 패키지를 샀다”고 한다.

 

▶아직 일부의 얘기이겠지만 외신까지 이에 주목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비싼 프러포즈가 그러지 않아도 결혼을 망설이는 한국 남성들을 더욱 위축시킨다”고 했다. 호텔에서 프러포즈 하느라 하룻밤에 4500달러(약 570만원)를 쓴 남성의 하소연도 소개했다. 호텔 프러포즈 때 주는 선물 부담도 크다고 한다. 여성이 “내 친구가 프러포즈 선물로 받은 명품”이라며 소셜미디어에 뜬 사진을 보여주면 남성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런 프러포즈에 대한 견해는 남녀가 갈린다. 한 여론조사 업체가 조사했더니 ‘호텔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는 여성 응답은 40%를 넘었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남성 33%는 ‘돈 부담 때문에 프러포즈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결혼 자금 부담도 큰데 수백만원 들여 프러포즈까지 해야 하느냐는 항변이다. 호텔 프러포즈를 원하는 여성을 탓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부동산 폭등 이후 번듯한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할 수 없게 됐다. 프러포즈 호사는 그에 대한 보상 심리라는 것이다. ‘월급 아껴 집은 못 사도 호텔 프러포즈는 할 수 있다’는 광고 카피가 그런 심리를 파고든다.

▶미국 체조 스타 시몬 바일스가 지난해 초 프러포즈 받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지붕에 천막을 친 야외였고, 화려한 꽃 장식도 없었지만 무릎 꿇고 청혼하는 남자 앞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잇몸까지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비싸고 화려한 청혼보다 이런 웃음을 줄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게 중요할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6.19(월) ‘모나리자 효과’처럼 헷갈리는 한국 경제

▲일러스트=이철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현재 세계 경제가 ‘모나리자 효과’로 헷갈린다고 한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명작 ‘모나리자’는 언뜻 보면 미소를 짓지만, 다시 보면 사라지거나 우울한 표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모나리자의 미소에 83%의 행복, 9%의 혐오감, 6%의 두려움이 담겨 있다고 한다. 다빈치는 ‘스푸마토’ 기법을 통해 윤곽을 30번 이상 덧칠해 연기처럼 흐려지는 효과를 냈다. 다빈치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효과를 냈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경제는 종잡을 수 없게 흘러가고 있다.

 

▶올해 경제 전망은 극과 극을 오간다. 전미실물경제협회가 올 초 전문가 48명에게 취합한 올해 미국 성장률은 -1.3%~1.9%까지 퍼져있다. 국제 투자은행들의 한국 경제 올해 전망치도 -1.3%~2%로 벌어져 있다. 어떤 전문가는 경제 쇼크가 올 것이라고 보는데, 다른 기관은 견조한 성장을 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IMF의 최근 경제 전망 보고서엔 ‘불확실성’이라는 단어가 작년 보고서에 비해 60배나 많이 등장했다고 한다. 경착륙·연착륙을 넘어 아예 경제 침체가 없는 무착륙(no landing)이 올 수도 있다고 낙관하다가,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소식 같은 게 터지면 제2의 리먼 쇼크를 우려하면서 널을 뛴다.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 쇼크, 미국의 40년 만의 급격한 금리 인상 등이 지난 3년 동안 일어났다. 기존 경제 지표 관계에 큰 교란이 있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각국 중앙은행들이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인플레를 일시적 현상으로 보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뒤늦게 급발진한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일본과 스위스를 빼곤 기준 금리가 가장 낮은 한국은행도 향후 금리를 놓고 살얼음판을 걷는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18일 “경제적 어려움이 터널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고 했다. 추 부총리는 석 달 전만 해도 “세계 경제와 우리 경제 모두 여전히 어려운 모습이고 경기 흐름의 불확실성이 높다”고 했다. 실물 지표가 다소 개선된 것도 있지만, 애매한 신호 속에서도 경제 심리를 살리려는 희망도 담았을 것이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은 경제학자들이 한편으론(on the one hand) 이렇고, 다른 편으론(on the other hand) 저렇다고 말하는 것에 질려 ‘한 손만 가진 경제학자’는 없냐고 했다. 그러나 예측불가의 경제에선 큰소리치며 일도양단식의 해법을 내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경제에 묘수는 없다.

박종세 논설위원

 

06.20 킬러 문항

▲정부와 국민의힘이 실무 당정협 회의를 열어 수능 관련 교육과정 밖 '킬러 문항' 배제와 적정 난이도 확보를 위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19일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 킬러문항 관련 안내문구가 보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소위 '수능 킬러 문항'에 관해 "공교육이 아니라 장외에서 배워야 풀 수 있는 문제로 학생을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불공정한 행태"라고 밝혔으며, '킬러 문항'은 오는 9월 모의평가부터 배제될 방침이다. /뉴시스

 

수능 수학 29번, 30번 문제는 대입 수험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수학 30문항 중 가장 어려운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제)을 마지막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구인이 풀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배점도 가장 많은 4점짜리여서 이 문제를 푸느냐 여부로 대학 간판이 바뀐다. 단답형이지만 주관식이라 찍을 수도 없다.

 

▲그래픽=이철원

 

▶수학만이 아니다. 수능 과목당 적어도 1문제, 많게는 4문제 정도가 킬러 문항이다. 지난해 11월 수능에서 사회탐구 영역 사회·문화 10번 문항의 오답률은 무려 97.5%였다. 입시 업계 등에서 자체 채점을 통해 분석한 결과였다. 남녀 연령대별 평균 임금이 나온 표를 제시하면서 자료에 대한 옳은 분석을 고르라는 문제였다. 수능 객관식은 5지선다이므로 정답률이 20%는 나와야 정상이다. 전문가들은 “수험생들을 헷갈리게 하는 함정까지 파 놓은 것”이라고 했다.

▶2019학년도 수능에선 ‘국어 31번의 난’이 있었다. 국어 영역인데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활용하는 제시문을 읽고 답을 찾아야 했다. 호기심에 풀어본 사람들은 몇 번 읽어도 무슨 문제인지부터 파악하기 어려운 암호문 같았다고 했다. 객관식인데 오답률은 81.7%에 달했고 일선 교사들이 화를 냈다. 결국 교육과정평가원장이 고개 숙여 사과하는 초유의 사태로 번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킬러 문항과 관련해 “약자인 우리 아이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라며 “수십만 명의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한 부적절하고 불공정한 행태”라고 비판했다. 다른 쪽에서는 변별력을 주기 위해 킬러 문항을 출제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래야 상위권과 최상위권을 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상위권도 모자라 최상위권을 또 갈라야 하는 것인지, 수능은 대학 수학(修學) 능력을 보는 것인데 이런 문제들이 정말 수학 능력과 관련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서울 강남에서는 킬러 문제를 푸는 학원들이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킬러 문항이 시험의 변별력을 높이는 쉬운 방법이지만 학생들을 사교육으로 내모는 원인이기도 하다.

 

▶입시 전문가들에게 킬러 문항 출제가 불가피한지 물어보았다. 수능이 4과목인 데다 가중치·가산점 등이 다르기 때문에 킬러 문항이 없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유럽 등에서는 대입 시험에서 우리나라처럼 ‘킬러’ 운운하는 최고난도 문항은 없다고 한다. 킬러 문항이 입시 편의 때문이라지만 이렇게 우리 아이들을 ‘교육 지옥’에 빠뜨려 나라와 사회, 개인들이 얻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김민철 논설위원

 
 

06.21 티베트의 비극... “인권 탄압은 70년 전 일”이라는 野

▲일러스트=박상훈

 

1912년 중화민국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가 티베트 공격을 명령했다. 티베트는 19세기 말부터 청나라가 힘을 잃자 중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티베트에 지분을 갖고 있던 영국이 “위안스카이 정부를 불인정하겠다”며 가로막았다. 영국의 개입으로 티베트군은 라싸를 지킬 수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티베트를 차지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1950년 새해가 밝자마자 인민해방군에 지시했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중요하니 반드시 점령하라.” 수만명 규모의 ‘점령군’이 편성돼 공격했다.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 ‘티베트에서의 7년’은 중국의 티베트 침공을 묘사했다. ‘티베트 평화해방 협의’라는 이름으로 티베트를 압박, 합병하는 길로 몰아갔다. 1959년 티베트인들이 독립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중국은 1만명 이상 학살한 후 사흘간 시체를 불태웠다.

 

▶티베트의 원래 면적은 한반도의 10배가 넘는다. ‘세계의 용마루’로 불리는 고도 4000m의 고원에 철, 금강석, 마그네슘 등 70종이 넘는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다. 중국 입장에서 인도와의 완충 지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티베트의 기원인 토번 제국은 실크로드를 장악, 정복전쟁에 나설 정도로 강력했다. 당나라는 토번 제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을 투입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청나라 건륭제가 티베트의 2인자 판첸라마를 예를 갖춰 대하며 조선의 사신들에게 소개할 정도로 정치적 위상도 낮지 않았다.

 

▶중국이 합병한 티베트는 마치 사지가 찢긴 것과 같다. 티베트의 북부 지역은 칭하이성으로, 동부는 윈난성·쓰촨성으로 편입됐다. 한족을 대량으로 이주시키고 ‘애국주의 교육’이라며 중국 역사 위주로 가르친다.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분신한 티베트인이 200명에 이른다는 말도 있다. 국제사회에서 티베트는 신장 위구르, 홍콩과 함께 중국 인권 문제의 핵심으로 거론된다. 지난달 히로시마 G7 성명에서도 티베트 인권 문제가 지적됐다. EU는 지난 2월 중국과의 인권 대화에서 티베트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중국의 초청을 받아 티베트를 다녀왔다. 그들은 티베트 인권 문제에 대한 질문에 “티베트의 인권 탄압은 70년 전”이라고 한다. 약소국의 독립과 주권, 약자의 인권은 진보 이념의 핵심에 해당하는 가치다. 민주당은 말로라도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다. 그런 정당이 공산주의 강대국의 약소국 탄압과 인권 말살에 영합하고 있다.

이하원 논설위원

 

06.22 성공한 이들이 빠져드는 ‘위험 관광’

 

19세기 중반, 아프리카 오지를 횡단하다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한 영국 탐험가 리빙스턴은 이후 콜레라에 걸리고 식량 부족에 시달린 끝에 잠비아에서 사망했다. 당시 세계 여행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19세기 후반 쥘 베른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도 세계여행은 큰 모험으로 그려진다. 낯선 곳으로 떠날 때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지금은 인간이 가보지 않은 곳은 사실상 없다고 할 만큼 지상에 미개척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눈 돌린 곳이 우주와 심해저다. 오스트리아 출신 스카이다이버 펠릭스 바움가르트너는 2012년 10월 14일, 밀폐된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해발 3만9000m 성층권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렸다. 낙하 속도가 마하 1.25(시속 1342㎞)여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 음속을 돌파한 최초의 인간이 됐다. 1977년 미국의 유인잠수정 앨빈호는 심해탐험 붐을 일으켰다. 갈라파고스 인근 심해를 탐사하다가 마그마로 데워진 섭씨 300도 뜨거운 물이 쏟아져나오는 열수구 주변에 사는 생명체를 발견했다. 인류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낯선 지구가 바다 저 밑에 있었다.

 

▶위험한 곳을 골라 찾아가는 사람 상당수가 성공한 자산가다. 버진그룹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과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는 경쟁하듯 우주여행을 다녀왔다. 브랜슨이 2021년 88.5㎞ 상공을 14분간 여행하고 돌아와 내놓은 45만달러(약 6억원) 짜리 우주여행 상품에 각국 부호 800여 명이 몰렸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선보인 6일짜리 달 주변 탐사 프로젝트 ‘디어문’엔 일본 부호 마에자와 유사쿠와 K팝 그룹 빅뱅의 가수 탑이 승선을 예약했다.

 

▶한 세기 전 난파된 타이태닉호 잔해를 보러 나섰던 심해 잠수정이 수심 4000m 바다에서 실종됐다. 수중 음파탐지기가 잠수정을 찾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한다. 인양선을 실은 배의 항해 속도는 시속 30㎞인데 사고 해역은 항구에서 600㎞ 밖이어서 침몰 위치를 확인한다 해도 인양선이 도착할 때까지 산소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사고 잠수정 탑승자 중엔 영국의 억만장자 해미시 하딩도 있다. 2019년 잠수정을 타고 세계에서 가장 깊은 챌린저 해연(海淵)을 여행했던 탐험가란 사실이 알려지자 댓글에 ‘돈 있으면 편하게 놀지 왜 위험한 데 가는가’라는 반응이 많다. 그러나 목숨마저 걸 만큼 평소 강한 모험심이 있었기 때문에 사업에도 성공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사히 돌아와 새로운 모험에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

김태훈 논설위원

 

06.23 마흔 살 발레리나 강미선

▲일러스트=이철원

 

몸을 쓰는 직업에는 전성기가 있다. 스포츠와 공연예술이 그렇다. 극한의 체력에다 가혹한 다이어트까지 요구하는 발레는 그중에서도 제약을 심하게 받는 분야다. 발레 영화 ‘블랙 스완’에 출연했던 배우 내털리 포트먼은 발레리나 몸매를 만들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마른 몸에서 9㎏을 더 덜어냈다. 잠시 맛본 발레리나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영화 개봉 후 “일주일만 더 이렇게 살았으면 미쳐버렸을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무용수가 “무대에 서고 싶어도 더는 안 된다”며 발레를 그만두는 나이가 대략 마흔 전후다. 세계 5대 발레단 중 하나인 파리오페라발레단(POB)이 정년을 42세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 로열발레단과 러시아의 마린스키, 볼쇼이 단원도 40~42세 사이에 무대를 떠난다. 세르비아 국립발레단이 정년을 50세로 연장하자 발레단원들이 힘들어 못 한다며 들고일어난 적도 있다.

 

▶유니버설 발레단(UBC) 소속 수석 무용수 강미선은 1983년 3월생으로 올해 마흔이다. 그가 발레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 다섯 번째 수상이지만, 마흔을 넘겨 이 상을 받은 이는 강미선이 처음이다. 앞서 수상한 강수진은 32세, 김주원은 28세, 박세은은 29세였고 김기민은 24세였다. 게다가 워킹맘이 수상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마흔의 벽을 넘겨 무대에 서는 발레리나가 없지는 않다. 올해 환갑인 이탈리아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는 여전히 현역이다. 53세에 내한해 14세 줄리엣 역할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선 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가 1995년 만 70세로 볼쇼이 극장 무대에 서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인 중엔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49세이던 201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에서 고별 무대를 가졌다.

▶강미선이 어느 인터뷰에서 마흔 워킹맘으로 무대에 서는 각오를 이렇게 밝혔다. “나이 먹으니 골반이 굳고 허리도 전처럼 꺾이지 않았어요. 꺾이지 않으면 별수 없죠. 연습으로 꺾어야죠.” 발레 무용수에게는 ‘클래스’라는 명칭의 워밍업이 필수다. 고난도 동작이 포함돼 있어 임신한 무용수에겐 권하지 않는다. 강미선은 출산 2개월 전까지도 클래스에 참여했고 엄마가 되고 석 달 만에 몸 만들기에 나섰다. 그걸 본 문훈숙 UBC 단장이 여성 주역 무용수의 체력 소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악명 높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맡겼다. 마흔 살 발레리나 강미선이 땀의 소중한 가치를 곱씹게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6.24(토) 신생아 브로커

▲일러스트=양진경

 

2010년 프랑스 서북부 작은 마을, 어느 집 정원에서 영아 2명의 유골이 나왔다. 수사 결과 40대 주부 도미니크 코트레가 살해한 제 아기는 총 8명이었다. 사상 최악의 영아 살해 사건이었다. 앞서 2006년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에 살던 프랑스 주부는 1999, 2002, 2003년 출산 직후 영아 셋을 벽난로에 던지거나, 냉동고에 넣어 살해했다. 그녀는 2010년 가석방됐다. 정신 질환의 일종인 ‘임신거부증’으로 해석됐다.

 

▶수원의 30대 주부 고모씨가 2018, 2019년 출산 다음 날 신생아를 살해해 냉동실에 보관해 오다 23일 구속됐다. 남편과 세 아이가 있는 고씨는 “생활이 어려워서 그랬다”고 했는데, 아직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기를 버리는 ‘유기(遺棄)’ 사건은 이보다 잦다. 20세 여성은 2021년 병원에서 출산한 뒤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에게 아기를 넘겨 최근 구속됐다. 감사원은 병원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영·유아가 2236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경기 수원시 장안구의 한 아파트에서 주부가 두 번의 출산 후 신생아를 살해한 뒤 냉동실에 시신을 보관해오다 발각됐다. /뉴스1

 

▶2020년 20대 미혼모가 출산 다음 날 중고 물품 인터넷 마켓에 이런 글을 올렸다. “20만원 주면 아기를 입양시켜 주겠다.” 10~20대 초 산모가 저지르는 사건은 ‘가출→동거→원치 않는 임신→미혼모→유기, 매매, 살해’ 구조인 경우가 많다. 30대 이상 경우는 주로 혼외자 출산인 경우다. 전문가들은 “부모가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베이비 박스’에 두고 가는 경우가 연간 100~200건이고, 그보다 많은 아기가 유기, 매매, 살해될 것”이라 추정한다.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크다고 한다.

 

▶법적 기록이 없는 이른바 ‘유령 아기’ 브로커가 최근 경찰에 잡혔다. 대구경찰청은 4년간 신생아 4명을 사들인 30대 여성을 구속했다. 온라인에는 ‘임신했는데 도와주실 분’ ‘#불임부부’ 식의 글이 올라왔다 지워진다. 브로커들은 이런 여성에게서 아기를 ‘구입’해 입양 가정에 팔아넘긴다.

 

▲2006년 프랑스 주요 일간지를 장식한 서래마을 영아 살해 유기 사건. /조선일보DB

 

▶병원 출생증명서가 없어도 출생신고가 되는 ‘인우보증제’가 영아 유기, 불법 입양 논란으로 2016년 폐지됐다. 그러자 이번엔 병원에서 낳고, 출생신고를 안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결국 정부가 출산 직후 병원이 지자체에 통보하는 ‘출생통보제’를 준비 중이다. 이러면 불법 낙태와 음지 출산이 늘 것이란 걱정이 나온다. 전근대적 ‘혈족 중심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근본 대책이 나오기 어렵다. 이런 글을 쓰다 보니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아기는 세상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신(神)의 생각이다’.

박은주 부국장 겸 에디터

 

06.26(월) 용병의 반란

▲일러스트=이철원

 

기원전 5세기 마라톤 전투는 그리스 시민군과 페르시아 용병의 싸움이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내 나라와 가족은 내가 지킨다”는 각오로 전장에 나갔다. 반면 페르시아 제국군은 언어와 인종이 제각각인 이들을 제국 전역에서 차출해 만든 오합지졸이었다.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은 1만명 가운데 192명이 전사했다. 페르시아군은 1만5000명 중 6400명이 전사했다.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던 게 승부를 갈랐다.

 

▶전쟁에 진 페르시아는 그리스인의 용맹을 탐냈다. 그리스인 용병을 고용해 자기들 왕위 다툼에 투입했다. 용병들 입장에선 누가 제위에 오르건 돈만 받으면 그뿐이었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용병에게 국방을 맡겼다가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당했다. 15세기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을 받은 동로마제국도 제노바 출신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가 전투 중 다친 주스티니아니가 도주하면서 수도가 함락당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권모술수만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군주가 쓰지 말아야 할 것으로 용병을 꼽았다. “용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분열되어 있고, 야심에 차 있으며, 규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충성스럽지 않다”며 “용병 덕에 적의 공격이 지연되는 것은 나라의 파멸이 지연되는 것일 뿐”이라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전 발발 이후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여 온 러시아 용병 부대 바그너 그룹이 지난 주말, 총을 거꾸로 들고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용병을 지휘하는 프리고진은 그간 “푸틴이 실탄 등 장비를 보급하지 않는다”며 “우리를 총알받이로 쓰려 한다”고 비난해 왔다.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도 갈등을 빚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규군이라면 쉽사리 총부리 방향을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 만에 반란을 철회했지만 용병의 충성심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바그너 그룹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고문하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고발도 잇따른다. 바그너 그룹이란 이름은 프리고진과 함께 용병 회사를 만든 러시아 특수부대 출신 예비역 장교 우트킨이 작곡가 바그너 숭배자여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생전에 반(反)유대주의자였던 바그너는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등에서 유대인을 사악한 인물로 그렸다. 히틀러는 그런 바그너를 열렬히 숭배했다. 하지만 철학자 니체는 “바그너의 반유대와 민족주의가 전쟁을 초래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러시아는 나치로 인해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 그런 나라가 바그너 이름을 쓰고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용병을 동원했다가 반란 사태까지 겪는 걸 보니 씁쓸하다.

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

 

06.27 일본의 반도체 반격

▲일러스트=이철원

 

1970년대 반도체 절대 강자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반도체 원조 국가다. 그런데 일본은 이 반도체가 가진 힘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했다. 일본 정부가 나섰다. 미국 기업들을 따라잡기 위해 일본 통상산업성 주도로 ‘초LSI기술연구조합’이라는 민관 연합 기구를 만들었다. 설계 기술 확보를 위한 R&D 명목으로 일본 정부 예산의 0.1%에 해당되는 거액을 후지쓰, NEC 등 일본 반도체 기업에 몰아줬다. 거의 0%에 가까운 금리로 자국 기업에 돈을 빌려주면서, 외국 반도체 기업에 대해서는 기술이전을 요구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일본 반도체가 세계 최강이 됐다. 소니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와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 미국에 할 말은 하자고 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이 ‘반도체 파워’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출액 기준 상위 세계 10개 사 중 6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더 이상 미국이 참고 있을 수 없었다. ‘수퍼 301조’를 동원해 일본 반도체 기업에 보복 관세를 부과하고, 일본 반도체 몰락을 촉발한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의 반도체 지원 2.0이 나왔다. 200억엔 규모의 차세대 기술 공동 개발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그런데 역효과가 났다. 기업 경영 효율화에 방해가 된 것이다. 일본 정부가 출범시킨 엘피다메모리는 2012년 파산했고, 도시바는 누적 적자를 못 이겨 2017년 반도체 사업 부문을 SK가 포함된 해외 사모펀드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일본 정부는 과거 실패를 거울 삼아 반도체 지원 3.0을 들고나왔다. ‘일본 기업만’이란 배타성을 버리고 미국 마이크론, 대만 TSMC, 한국 삼성전자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일본으로 유치하고 있다. 또 일본의 강점인 소재·장비에 주력한다고 한다. 정부가 반도체 소재 ‘포토레지스트’ 세계 1위 업체를 인수해 육성하고 전략 물자로 활용한다는 것도 이 일환이다.

▶일본 정부의 세 번째 반도체 지원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비용·수율·공정 문제로 20년 전 포기했던 반도체 양산이 이제 와서 정부가 지원한다고 가능할지 미심쩍어하는 시각도 있다. 일본의 ‘기술 고집’ 문화가 반도체엔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시장이 무섭게 변하는데 ‘수십 년 고장 안 나는 반도체’로는 버틸 수 없다. 다만 미·중 경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반도체 소재와 장비 부문에 대한 우위가 확고하다는 강점도 있다. 일본 반도체의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우리다.

박종세 논설위원

 

06.28  AI 판사가 징역형을 선고한다면

▲일러스트=양진경

 

과거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기소되면 거의 예외 없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던 적이 있었다. 판사가 횡령·배임의 최소형인 징역 5년을 택한 뒤 ‘경제 기여 공로’라며 3년으로 깎고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다. 이른바 ‘붕어빵 판결’이다. 반면 학부모에게 촌지 460만원 받은 교사는 무죄, 160만원 받은 교사는 유죄가 선고된 적도 있다. ‘고무줄 판결’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대법원에 양형위원회를 설치한 게 2007년이다. 이후 여러 범죄의 양형 기준이 나왔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 문제는 여전하다. 3년 전엔 조국 전 법무장관 동생에게 교사 채용 대가로 뒷돈을 건넨 브로커가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조 전 장관 동생이 1심에서 징역 1년만 선고받은 일도 있었다. 돈 받은 사람이 돈 준 사람보다 처벌이 약했다. 진보 성향인 우리법연구회 출신 판사가 내린 판결이었다.

 

▶대법원 양형위 산하 양형연구회가 26일 ‘AI(인공지능)와 양형’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사법 불신을 초래하는 들쭉날쭉 판결을 줄이기 위해 ‘AI 판사’에게 형량 결정을 맡겨도 되겠느냐는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미국 위스콘신주 대법원이 AI 기기 판단을 근거로 중형을 선고한 지방법원 판결이 타당하다고 인정한 게 6년 전이다. AI를 양형에 활용한 것을 합법화한 첫 판결이었다. 이 논의에서 우리는 늦은 편이다.

▶심포지엄에선 AI 판사가 보조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단독으로 판결을 맡기기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인간이 아닌 AI는 판결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판결을 당사자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피고인의 표정과 태도로 읽을 수 있는 비언어적인 부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예컨대 ‘개전의 정’ ‘정상 참작’ 같은 사유를 기계가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되면 이 문제도 언젠가는 해결될 거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결국 핵심은 AI 판결을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다. 국내 병원들은 이미 수년 전에 IBM 인공지능 왓슨(Watson)으로 암 환자를 진료하기도 했다. 사람의 생명까지 AI에 맡기는데 판결을 못 맡길 이유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알파고의 등장으로 충격을 받은 국내 바둑계도 AI와 공존을 택했다. 요즘 바둑TV 등에선 프로기사인 해설자가 AI가 제시하는 좋은 수는 무엇인지 함께 얘기한다. 머지않아 ‘AI 판결 수용’ 이슈도 우리 앞에 닥칠 것이다. 수용 여부는 국민의 사법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

최원규 논설위원

 
 

06.29 한 기업인의 ‘통 큰 선심’

 

2019년 5월 미국의 한 억만장자가 대학 졸업식 축사 도중 “졸업생 모두의 학자금 대출을 내가 대신 갚아주겠다”고 깜짝 발표를 했다. 4000만달러(약 520억원) 빚을 일거에 털어낸 졸업생 300여 명은 얼싸안고 환호했다. 그해 연말, 일본에선 한 억만장자가 세뱃돈 100만엔을 1000명(100억원)에게 선착순으로 뿌렸다. 그는 “돈이 사람의 행복감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 궁금해서”라고 했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서민 행보로 시선을 끌지만, 할리우드에선 ‘통 큰 선심’으로 유명하다. 그는 매트릭스 출연료 3800만달러(약 495억원)를 영화 제작진에게 나눠줬다. 스턴트맨 12명에겐 고가의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선물했다. 그는 “어렸을 때 소중한 가족을 잃은 경험 탓에 내 주변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부자들의 통 큰 선심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고향, 친인척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롯데 창업자 신격호 회장은 댐 건설로 울주군 둔기리 고향 마을이 수몰되자, 마을 잔치를 40년 이상 열어 주민들을 위로했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는 가난했던 청년 시절 자신을 도와준 친인척 14명에게 주식 1452억원어치를 나눠주었다.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이 고향인 전남 순천시 운평리의 주민 280여 가구에 많게는 1억원에 가까운 현금을 나눠준 것이 알려져 화제다.

 

▶이 회장의 이색 기부에 대한 반응이 각양각색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 멋진 고향 사랑” “의리의 사나이”란 칭송이 있는가 하면 “불우 이웃 돕기가 더 낫다”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반응도 있다. 어떤 이는 “나를 아는 사람에게 베풀어야 인정을 받고,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다”면서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했다. 현대 뇌과학에 따르면 사람이 타인의 인정과 호감을 얻게 되면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돼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행복감은 기부를 하면 할수록 강해져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고 부른다고 한다.

 

▶일반인은 이런 식의 고향 사랑을 감히 흉내도 내기 어렵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올해부터 ‘고향 사랑 기부제’가 시행되고 있다. 개인이 고향에 기부를 하면 500만원 한도에서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 기부를 받은 지자체는 기부금의 30%에 해당하는 답례품을 제공한다. 대개 지역 특산물이다. 우리보다 15년 앞서 이 제도를 도입한 일본에선 한 해 고향 기부액이 8조원에 이른다. 소박한 고향 기부로 소소한 헬퍼스 하이를 느껴보면 어떨까.

김홍수 기자

 

06.30(금) 차관 장미란

 

장미란은 역도 선수 출신 아버지의 강권으로 중3 때 역도 훈련장에 억지로 발을 들여놨다. 재능이 워낙 뛰어난 데다 반복을 좋아하는 성격 덕에 많게는 하루 5만kg에 달하는 연습량을 소화해냈다. 은퇴 후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도 공부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바벨을 잡으면 스트레스가 싹 가셨다고 한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역도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운동”이라고 말한다.

 

▶역도 영웅 장미란은 2012년 올림픽 스타 호감도 조사에서 박태환과 김연아 등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이미지가 크게 호감을 준다”는 분석이 따랐다. ‘국민 호감’ 수식어에 대해 장미란은 “어르신들은 무거운 역기 드는 게 안쓰러운지 고생한다며 어깨를 두드려준다. 어린이들은 제 이름을 부르면서 따라오는데, 수퍼맨 좋아하는 것처럼 나를 좋아하나 이런 생각도 한다”고 했다.

 

▶장미란은 압도적 실력으로 세계선수권 4연패,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이뤘다. 그러나 실패의 순간에 더 깊은 감동을 안겼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선 중국 선수 자세가 크게 흔들렸는데도 성공 판정이 나면서 장미란이 은메달에 그쳤다. 그래도 장미란은 물집이 터져 피로 물든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마지막 올림픽 무대였던 2012년 런던에선 어깨 뒤로 바벨을 떨어뜨리고 나서 손에 입을 맞춘 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바벨을 어루만졌다. 이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선수 생활 막바지엔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할 만큼 여러 부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부상이나 판정, 불운, 나이 탓을 하지 않았고 주어진 기회와 결과에 감사했다. ‘국민 호감’의 비결이었을 것이다.

 

▶그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겪는 설움을 잘 안다. 선수촌 시절엔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하는 왕언니로 통했다. 재단을 세워 스포츠 꿈나무 등을 지원하는 사업도 펼쳐왔다. 대학교수가 된 그는 인생과 역도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무게를 견디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한번 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장미란이 29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에 임명됐다. 그는 10년 전 은퇴 때 “아무 꿈도 없던 중3 여학생이 역도 덕분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제가 받은 것을 돌려드리려고 한다”며 눈물을 쏟았다. 그때가 된 것 같다. 장미란이 선수 시절처럼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행정으로 한국 스포츠 수준을 올려주기를 바란다.

최수현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