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6/ 06-01(목) 美 대학진학률 ‘뚝’… - 06-30(금) TV홈쇼핑의 상습 거짓말 “이번이 마지막 방송”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6/
06-01(목) 美 대학진학률 ‘뚝’… “일자리 많은데 뭐 하러 가?”

‘지성의 전당’으로 불리는 대학의 진학률이 미국에서 최고점에 달했던 때는 2009년이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이 속속 가세하면서 20년간 꾸준히 늘어온 입학생 수는 이때 1800만 명(진학률 70.1%)에 육박했다. 대학 졸업장은 중산층 이상의 삶을 보장하는 티켓으로 통했다.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MIT…. 해마다 발표되는 ‘톱 100’ 대학의 입시 정보를 얻으려고 고교생과 학부모들은 애를 태웠다.
▷그랬던 미국 대학의 몸값이 예전 같지 않다.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졸업장 한 장 받으려고 그 많은 등록금과 시간을 써야 하느냐”며 시큰둥해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하락세였던 진학률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더 가팔라지면서 지난해 62%까지 떨어졌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대학은 들이는 돈만큼의 가치가 없다’는 응답이 56%까지 치솟았다. 출산율 하락, 억대 학자금 대출 부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학위 없이도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아진 게 주된 이유로 꼽힌다.
▷팬데믹 기간에 심해진 미국 내 노동력 부족 현상은 인력의 수요와 임금을 동시에 밀어 올리는 결정적 요인이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 기조에 따라 대규모 생산시설이 들어서고 있는 지역들은 특히 블루칼라 일손 부족으로 아우성이다. 구글, 델타항공, IBM과 같은 기업들도 일부 분야에서 대졸 여부를 따지지 않는 채용을 시작했다. 미국 언론들은 “대졸자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대학을 거부하는 새 세대의 출현” 같은 제목의 분석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대학을 외면하는 청년들의 선택이 마냥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닌 듯하다. 미국 경제학자들은 “대학 위기를 넘어 사회, 경제적으로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고졸자들의 연간 평균 수입은 대졸자보다 2만4900달러 적고, 실직 확률은 40% 높으며, 수명은 더 짧고 이혼율은 더 높다는 통계 수치들이 여전히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청년들이 매년 4500만 명씩 대학에 들어가고 있다는 점도 미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 대학들은 “고등교육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며 해법을 고심 중이다.
▷문화, 인식, 교육, 경제 환경이 나라마다 다르니 미국 대학가의 변화가 당장 해외로도 확산될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학 간판보다는 능력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실용주의와 이들을 기꺼이 모셔가는 기업들의 선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 가능케 하는 미국의 견고한 노동시장 또한 이런 유연한 접근에 바탕을 둔 기술, 경제 혁신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일 것이다. 너도나도 대학 입시에 목을 매고 있는 한국이 깊이 들여다볼 움직임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02 현역의원은 거들떠도 안 본 與 최고위원 보궐선거

국민의힘 태영호 전 최고위원이 사퇴한 빈자리를 채울 보궐선거에 현역 의원은 한 명도 출마하지 않았다. 9일 전국위원회 경선에 나설 최종 후보는 ‘0선’의 원외 인사 3명뿐이다. ‘0선’의 당 대표였던 이준석 정도의 중앙정치 이력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초 재선의 현역 의원들이 출마를 저울질했지만 막판에 모두 손사래를 쳤다. 일반 당직도 아니고, 집권여당 지도부를 뽑는 선거 아닌가. 당내에선 그 배경을 놓고 뒷말이 무성하다.
▷최고위원 하마평에 올랐던 이용호 의원은 “정치는 소신도 필요하지만 눈치도 있어야 된다”며 “그런데 눈치를 살펴보니까 소위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가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당내 분위기를 의식해 불출마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당내 핵심 의제 결정은 최고위원회의가 아닌 다른 데서 한다”며 당내 ‘5인회’를 지목했다. 5인회 면면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김기현 대표를 포함한 전략회의 멤버라는 관측이 나왔다. 이 의원이 최고위원이 ‘들러리’라면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하자 김 대표는 “5인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여당 최고위원의 무게감도 많이 낮아졌다. 잇단 실언 논란 때문에 김재원 전 최고위원은 ‘당원권 1년 정지’ 중징계를 받고 내년 총선 공천 대상에서 탈락했다. 태 전 최고위원은 자진 사퇴로 겨우 낙천의 위기만 모면했다. 선출직 최고위원 4명 중 절반이 징계를 받은 것은 이례적이다. 그나마 남은 최고위원들은 0선의 원외 인사와 초선이다. 지난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후보군 정리에 개입한 대통령실의 ‘입김’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역 의원들은 이런 상황이라면 최고위원이 되더라도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공천 시즌이 되면 여야 모두 쇄신 공천 경쟁에 나선다. 역대 선거를 앞두고 다선 중진이나 정권 핵심들의 자의 반 타의 반 불출마가 나온 배경이다. 섣불리 예단하기는 이르지만 쇄신 공천의 타깃은 지도부의 거취에 모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당 지도부의 선도적인 공천 희생을 정치적 동력 삼아 과감한 공천 물갈이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남권 등 여당 강세 지역에선 이런 희생양이 될 수 없다는 우려가 더 컸다고 한다.
▷내년 총선은 윤석열 정부 국정 운영에 대한 중간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 성적표도 중요하겠지만 선거는 결국 대통령실이 아닌 여당이 주도해 치러야 한다. 이를 위해선 여당이 국정 의제나 정책을 주도하면서 존재감을 보여줘야 한다. 현역 의원들이 지나치게 공천에 목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문제지만 당 운영이 특정 세력에 치우친 건 아닌지도 살펴봐야 한다. 당 지도부가 이번 최고위원 대진표에 담긴 경고음을 새겨야 할 때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6-03(토) “혁신은 죄가 없다”… ‘타다’ 4년 만에 무죄 확정

2018년 10월 출시된 ‘타다 베이직’은 스마트폰 앱에 출발지와 도착지, 시간을 입력하면 11인승 카니발을 이용할 수 있는 차량 호출 서비스였다. 얼핏 보면 택시 호출 앱과 비슷하지만 회사가 배차를 정해 기사가 딸린 렌터카를 보내주는 방식이 달랐다. 당시 관련법에서 11인승 이상은 기사와 차량을 함께 빌리는 걸 허용했는데, 이 틈새를 파고든 신개념 사업 모델이었다. 일반 택시보다 비쌌지만 승차 거부가 없는 데다 친절한 서비스, 넓고 쾌적한 공간이 입소문 나 1년여 만에 이용자 170만 명을 끌어모았다.
▷타다의 흥행은 즉각 택시업계의 반발을 불렀다. ‘타다 퇴출’을 외치며 택시 기사가 분신했다. 택시조합 등이 2019년 “타다가 불법 콜택시 영업을 한다”며 회사와 경영진을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택시업계 손을 들어 그해 10월 경영진을 재판에 넘겼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 설 수밖에 없는 신산업을 기존 법률로 무리하게 기소한다는 비판이 거셌지만, 앞서 80여 개국에서 성업 중인 차량공유 서비스 ‘우버’를 불법 영업으로 기소했던 검찰이었다.
▷1·2심에 이어 대법원은 그제 타다의 불법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타다는 콜택시가 아니라 당시 법령에서 예외를 인정한 렌터카 서비스였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하지만 4년 만에 ‘불법 꼬리표’를 뗐어도 예전의 혁신 서비스를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1심 무죄 판결이 나온 다음 달인 2020년 3월, 여야 정치권이 일명 ‘타다 금지법’을 통과시키며 대못을 박아버렸기 때문이다. 총선을 앞두고 택시 기사 25만 표, 가족까지 포함해 100만 표를 의식한 결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해야 할 정부는 보이지 않았다. 정부와 국회는 오히려 개정법이 ‘타다 진흥법’이라는 주장을 폈지만, 현재 택시를 제외한 모빌리티 서비스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 사이 국민에게 돌아온 건 지독한 택시 대란과 요금 인상이었고, 남은 건 택시 호출 시장을 장악한 대기업 카카오의 독점이다. 혁신의 싹을 자르면서 보호하려고 했던 택시 산업은 요즘 택시 기사조차 이탈하는 황무지가 됐다.
▷더 큰 문제는 제2, 제3의 타다가 속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법률 서비스, 세금 환급, 원격 의료, 부동산 중개 등 각종 분야에서 새로운 플랫폼을 선보인 스타트업들이 기존 사업자의 반발에 가로막혀 고전하고 있어서다. 대법원 판결 직후 타다 모델을 만든 이재웅 전 대표가 “혁신을 만들어내는 기업가를 저주하고, 기소하고, 법을 바꿔 혁신을 막고, 기득권의 이익을 지켜내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다. 제2의 타다가 현실화된다면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할 자격이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6-05(월) 총선 공천 앞두고 불거진 작년 地選 ‘與 공천헌금’ 의혹

정치권에선 선거철만 되면 으레 나도는 ‘공천 괴담’이 있다. 공천을 받기 위한 후보자 간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공천에서 떨어진 후보자들을 중심으로 “공천이 불공정했다”는 의혹 제기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공천 대가로 불법적인 금품을 받고서도 탈락시켰다는 공천헌금 의혹이 대표적이다. 지금 국민의힘이 공천헌금 의혹의 한복판에 서 있다.
▷국민의힘 황보승희 의원은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구 의원 후보자에게서 공천 대가로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과 관련해 두 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다. 비슷한 혐의로 같은 당 박순자 전 의원과 하영제 의원은 이미 기소된 상태다. 검찰에 송치된 김현아 전 의원까지 포함하면 공천헌금 의혹에 연루된 국민의힘 전·현 의원이 4명이나 된다. 여당에서 지방선거 공천헌금 의혹이 집중된 배경을 둘러싸고 지방선거가 대선 승리 직후 실시됐으니 여당이 이길 가능성이 높아서 공천 경쟁이 과열된 탓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엔 공천을 매개로 당 지도부-국회의원-지방의원이 얽힌 상하관계의 먹이사슬이 있었다. 국회의원 출마자는 중앙당 핵심인사들에게 금품 로비를 하고,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로비 표적이 되는 식이다. 공천 잡음이 불거지면 낙천한 후보자에게서 받은 금품을 돌려주고 입막음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황보 의원과 김 전 의원은 혐의를 강력 부인하고 있어 검경 수사는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민의는 외면한 채 아직도 윗선의 ‘의중’이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실상이 드러난 것 같아 씁쓸하다.
▷여야는 2004년 정치개혁 차원에서 지구당을 폐지했다. 지구당이 ‘돈 먹는 하마’로 불릴 정도로 불법 정치자금의 음성적 창구였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 정당 지구당은 돈이 내려간 만큼 움직인다고 해서 ‘공중전화 지구당’이라는 조롱까지 들었다. 하지만 선거공영제 덕분에 지금 선거비용 대부분은 국민 세금으로 지원하고 있다. 현역 의원의 후원금 한도가 연간 1억5000만 원이고, 선거가 있는 해에는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런데도 음성적인 돈거래는 아직도 근절되지 않은 모양이다.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최근 지구당 부활을 논의하다가 멈춘 것도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의식했기 때문 아닐까.
▷더불어민주당이 자기 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에 대해선 진상조사도 못 하면서 국민의힘 공천헌금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겠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힘이 속속 불거지는 공천헌금 의혹에 대해 “검경이 수사하지 않겠나”라며 손을 놓고만 있을 일은 아니다. 자체적으로 진상조사를 해서라도 혐의가 있다면 선제적으로 수사 의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내로남불’이라는 지적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6-06 톈안먼 사태 34주년… 中 ‘역사 지우기’

홍콩의 공공도서관에서 책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알려진 건 지난달 중순쯤이었다. 없어진 수백 권의 책은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와 민주화 시위 등 중국 당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잡지와 영상자료도 예외가 아니었다. 홍콩 당국은 “불온한 사상을 담은 불법 자료들이 유포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도서관의 당연한 임무”라고 했다.
▷양초, 꽃다발, 노란색 티셔츠…. 톈안먼 사태 34주년을 맞은 이달 4일에는 금지 품목이 책 외에도 많아졌다. 톈안먼 사태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에 쓰일 것으로 의심되는 물건이나 홍콩 ‘우산혁명’의 상징이었던 노란색 의류 같은 것들이 모두 문제가 됐다. 빅토리아 공원에 깔린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 속에 행인들의 소지품을 검색했고 일부는 연행, 체포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건만, 해마다 최대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참가했던 톈안먼 사태 추모 집회의 열기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1989년 톈안먼 사태는 중국 본토에서는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역사다. 수많은 대학생의 목숨을 앗아간 중국군의 유혈진압은 “반사회주의 폭도 진압을 위한 단호한 조치”로 포장돼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조차 되지 않게 통제돼 온 이 민주화 시위의 기억은 이제 유일한 추모 공간으로 열려 있던 홍콩에서마저 지워질 위기에 처했다. 2020년 제정된 홍콩 국가보안법, 더 크게는 중국 당국의 통제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비판할 홍콩 언론사들은 지난 3년간 벌써 12곳이 문을 닫은 상태다.
▷중국의 ‘역사 지우기’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을 계기로 점차 강화되는 분위기다. 중국 당국은 공산당의 역사를 수정한 내용을 새롭게 학습하도록 하는 전국 단위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교육기관에 배포된 자료에는 대약진운동이 최대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냈다는 사실은 빠져 있고, 문화대혁명도 ‘부패에 맞선 조치’로 평가했을 뿐 그 폐해에 대한 설명은 없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중국 당국이 ‘모든 공작의 생명선’으로 여기며 지속적으로 시도해 온 사상·정치 공작의 일환일 것이다.
▷중국과 홍콩이 닫힌 대신 대만, 호주, 캐나다, 유럽 등 10여 곳의 다른 도시에서 톈안먼 사태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작은 집회들이 열렸다. “우리도 34년 전과 똑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우리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베이징에 전달해야 한다”는 해외 주재 중국 청년들의 결기는 비장하다. 해외 소셜미디어에서는 톈안먼 해시태그를 달고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는 글도 이어졌다. 중국의 검열이 닿지 않는 온라인 공간은 훨씬 넓고 깊다. 억지로 바꿔 쓰려 한다고 해서 바뀌거나 지워지지 않는 게 역사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07 또 넘어진 바이든… 재선 변수 된 잦은 낙상

나이 들면 낙상을 조심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매년 65세 이상 노인 4명 중 1명이 넘어져 300만 명이 응급실을 찾는다. 미국 최고령 대통령인 조 바이든(80)도 자주 넘어지는 편이다. 취임 첫해인 2021년 전용기 에어포스원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뎠고, 이듬해엔 자전거 페달 클립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얼마 전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프롬프터를 지지하던 바닥의 모래주머니에 걸려 꽈당 했다.
▷대통령의 낙상이 드물진 않다. 대학 미식축구 선수였던 제럴드 포드는 에어포스원 계단을 내려오다 고꾸라져 슬랩스틱 코미디 단골 소재가 됐다. 조지 W 부시는 전동 킥보드를 타다 넘어졌고, 골프광인 빌 클린턴은 프로골퍼 그레그 노먼에게 레슨을 받고 나오다 발을 헛디뎌 무릎힘줄이 끊어졌다. 도널드 트럼프는 202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축사 후 “하이힐을 처음 신은 소녀처럼” 연단을 엉금엉금 내려와 건강 이상설에 시달렸다.
▷그래도 재선 도전을 선언한 최고령 대통령의 잦은 낙상은 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4일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손주가 몇 명인지 헷갈리고, 말더듬이 증세가 재발되기도 하며, 연설할 땐 “시선이 멍하다. 사고의 맥락을 잃어버린 듯하다”는 평가가 나온다는 것이다. 오후 6시 이후 공식 일정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절반 수준이고, 언론 인터뷰는 오바마의 5분의 1, 트럼프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한다.
▷참모들은 바이든이 젊었을 때도 ‘실언 제조기’라 불릴 정도로 원래 말실수가 잦았고, 해외 순방은 오바마보다 더 많이 다니고 있다고 반박한다. 트럼프가 운동도 않고 치즈버거 위주의 식사를 한 반면 바이든은 주 5회 운동하고 건강식을 챙겨 먹는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그래도 “대통령직을 수행할 만큼 건강하다”는 여론은 33%로 트럼프의 절반밖에 안 된다. 당내에선 러닝메이트라도 건장해야 한다는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59)은 여성이자 흑인이라는 이중 소수자인 데다 ‘남한’을 ‘북한’이라 하는 등 잦은 말실수로 지지율이 낮은 상태다.
▷미 대통령은 재임 기간 일반인보다 두 배 빨리 늙는다는 연구가 있다. 하버드대 의대 연구진이 1722∼2015년 미국을 포함한 서방 17개국 대통령과 총리 279명의 수명을 계산한 결과 낙선자보다 2년 8개월 이상 짧았다. 반면 자연사한 미 대통령으로 한정하면 평균 수명이 일반인보다 길다는 반박도 있다. 자주 넘어졌던 포드는 93세, 일본 방문 도중 총리 바지에 토하며 졸도했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94세를 누렸다. 넘어졌다가도 곧장 일어서는 바이든이 역대 최고령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기록을 경신할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08 ‘팔라’ 0.1% ‘사라’ 일색인 증권사 리포트… 이 정도면 사기

“위대한 기업이지만 현재 좋은 주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4월 이차전지 관련주에 대해 한 증권사가 내놓은 리포트에 주식시장이 발칵 뒤집혔다. 리포트가 나온 직후 이틀 동안 해당 기업의 주가는 20% 넘게 빠졌다. 개인투자자들은 “애널리스트가 공매도 세력과 결탁한 것 아니냐”며 거센 항의를 쏟아냈다. 일부에선 해당 애널리스트를 ‘용자(勇者)’라고 불렀다. 화제가 된 이유는 명확했다. ‘매도’ 의견을 담은 리포트를 찾는 게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국내 10대 증권사가 발간한 기업분석 보고서 가운데 ‘매수’ 의견은 88.6%에 달했다. ‘중립(보유)’이 10.3%였고, ‘매도’ 의견은 0.1%에 불과했다. 10곳 중 9곳은 매도 리포트를 한 번도 내지 않았다. 매도 의견 비중이 높은 노무라금융투자(18.1%), 모건스탠리(17.9%) 등 외국계 증권사와 대조적이다. 국내 증권사 리포트의 매수 편향은 고질적이다. 주가가 오르면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주가가 빠지면 “낙폭이 과하다”며 무조건 사라고 한다.
▷SG증권발(發) 주가 폭락 사태와 관련된 8개 종목에 대해서도 증권사들은 작전이 진행되던 3년 동안 매수 의견을 내거나, 분석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한 증권사는 삼천리를 ‘중장기 투자 유망 종목’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과열을 우려하는 리포트는 소수에 그쳤다. 증권사가 적극 매수를 추천했던 종목들이 상장 폐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한 바이오기업은 지난해 말 ‘좋다. 주목해야 한다’는 리포트가 나온 지 3개월 만인 올해 3월에 감사의견 거절로 거래가 정지됐다.
▷증권사 리포트가 무조건 ‘사라’고 외치는 것은 수익구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주식을 많이 사서 거래가 늘어야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 기업은 분석 대상이자 기업금융의 고객이기도 하니 부정적 언급은 가급적 피한다. 독자적으로 분석하기보다 기업들이 주는 자료에 의존하는 것도 문제다. 영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작은 기업들은 제대로 분석하지 않는다. ‘길바닥에 떨어진 10원짜리보다 못한 보고서’라는 자조가 업계 내부에서 나올 정도다.
▷이렇다 보니 증권사 리포트의 숨은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중립이나 목표 주가 하향은 사실상 팔라는 신호다. ‘이제 날개를 달았다’는 말은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아예 ‘보고서가 나오면 매도 타이밍’이란 인식까지 있다. ‘닥치고 매수’ 리포트는 전문가들이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기업을 분석했을 것이란 투자자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다. 사기나 다름없다. 증권사가 공신력 있는 투자 길잡이 역할을 하지 못하니 거짓 정보와 작전이 판치기 쉬운 토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6-09 “다시 취업 안 하겠다”… ‘번아웃 청년’ 29만 명

인생에는 세 번의 고독기가 찾아온다는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교수팀의 연구 결과가 있다. 죽음이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80대, 체력과 수입이 함께 꺾이는 50대, 그리고 뜻밖의 시기가 20대다. 인생의 봄날 같은 20대에 취업과 진로, 결혼 같은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외로움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불안한 청춘인데, 한국의 청년들은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비관과 좌절, 분노를 일상으로 품고 지낸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숫자가 니트(NEET)족 청년 39만 명이다. 지난해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15∼29세 청년 백수들이 국내에 이만큼 된다는 얘기다. 이들은 구직 활동도 포기하고 그냥 쉬고 있어 실업자에도 잡히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니트족이 증가했다지만, 한국의 니트족 비율은 북유럽 국가의 7배가 넘는 것으로 분석될 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니트족 39만 명 가운데 직장 경험이 있는 사람이 29만2000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 관문을 뚫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한 뒤 다시 취직할 생각도 않는 청년들이 이렇게나 많은 것이다. 일을 그만둔 뒤 1년 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는 청년도 6만 명에 육박한다. 짧은 직장생활과 오랜 취업 준비 과정에서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쳐 무기력해진 ‘번아웃 청년’이라고 지칭할 만하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만난 ‘번아웃 청년’들은 “취업 준비만 3년 했지만 입사한 중소기업은 힘들고 나와 맞지 않았다”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신입 생활에 지쳤다”고 호소했다. 무기력한 청년들이 쌓이는 것은 그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가 빈약한 탓이 크다.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지만, 이에 걸맞은 질 좋고 지속 가능한 일자리는 갈수록 줄고 있다. 얼마 전 현대차가 10년 만에 실시한 생산직 공채에 수만 명이 몰려 채용 사이트가 마비된 건 양질의 일자리를 원하는 청년들의 기대가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준다.
▷이런 청년들에게 ‘의지만 있다면 못 할 일이 없다’라거나 ‘계속해서 걸어가라’ 같은 자기계발서식 조언을 하는 건 번아웃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름없다. 일본에서는 장기 불황이 시작된 1990년대 초 취업 적기를 놓친 청년들이 집에 틀어박히면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됐다. 이들이 현재 60만 명이 넘는 중장년 히키코모리가 돼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의 번아웃 청년들이 ‘잃어버린 세대’가 되지 않도록 전방위 노력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청년들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구직 대열에서 이탈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6-10(토) 포털뉴스 댓글 폐지·제한… ‘좌표 찍기’ ‘악플 테러’ 사라질까

포털의 연예와 스포츠면 기사에는 댓글 기능이 없다. 2019년 배우 설리 씨, 2020년 프로배구 선수 고유민 씨가 숨진 이후 생겨난 변화다. 대다수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 그리고 팬들은 댓글 폐지를 반겼다. ‘악플러’들의 무차별적인 혐오와 악의를 오랫동안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치와 사회, 특히 유명 사건·사고 관련자들을 겨냥한 악성 댓글 문제는 그대로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어머니는 방송에서 ‘가장 힘든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악성 댓글이 제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고 답했다.
▷포털은 ‘인터넷의 양방향성’ 등을 앞세워 댓글 규제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수익과도 연관이 있다. 이용자들이 댓글을 쓰거나 읽게 되면 포털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이는 다른 콘텐츠로의 유입과 새로운 광고 수익 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 댓글 폐지 여론에 따라 카카오가 연예·스포츠 기사에 이어 정치·사회 등 일반 뉴스 기사에서도 댓글 기능을 없앴다. 댓글 창을 만 하루가 지나면 내용이 사라지는 실시간 채팅 방식의 대화방으로 바꿨다. 네이버는 댓글 창 자체를 없애진 않고, 악플러들의 프로필에 ‘이용 제한’ 꼬리표를 붙여 다른 이용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포털의 댓글이 여론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다. 포털이 뉴스 전달의 주요 매개체가 되면서 각 언론사의 기사는 댓글과 함께 소비되기 시작했다. 댓글 창 상단에 노출된 ‘베스트 댓글’은 여론의 수렴을 거친 다수의 의견이며, 이 같은 댓글 시스템이 시민의 ‘참여’를 확대하는 숙의의 장을 열었다는 섣부른 주장과 함께 ‘댓글 저널리즘’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성균관대 이재국 교수팀이 2021년 8월 1일부터 2022년 3월 8일까지 대선 관련 뉴스 댓글 3639만 건을 분석한 결과, 댓글 80%를 유권자의 0.25%가 작성했다. 앞서 왜곡을 넘어 조작도 적발됐다. 조직적인 ‘좌표 찍기’도 공론의 장을 오염시켰다. 2012년과 2017년 대선을 앞두고 특정 세력들은 조직과 매크로 프로그램을 은밀히 가동해 댓글 창 상단에 노출되는 ‘베스트 댓글’의 순위와 내용을 만들어냈다. 관련자들은 선거 이후 형사 처벌을 받았다.
▷BBC방송 등 글로벌 언론은 뉴스 댓글에 대한 헛된 기대를 버린 지 오래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이용자가 올린 댓글을 바로 공개하지 않고 커뮤니티팀이 비방, 사적 공격, 비속어 등이 담긴 댓글을 걸러낸 뒤 게시한다. 구글은 아웃링크 방식을 통해 뉴스 댓글 관리를 각 언론사에 일임한다. 포털의 댓글이 무차별적인 혐오 확산과 정치 양극화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게도 악성 댓글의 확산을 막는 더 높은 ‘방파제’가 필요한 때가 됐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06-12(월) “중·국·산·고·기는 인기 없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의 자조

“중·국·산·고·기는 인기가 없다.” 최근 기획재정부 내부 익명 게시판에서 한 직원이 부처의 현실을 한탄하며 올린 글이다. 음식 얘기가 아니라 중소벤처기업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기재부의 앞 글자를 딴 약어다. 저연차 사무관들과 고시생들 사이에서 ‘기피 부서’를 통칭하는 말이다. 일은 고되고 보상은 적고 승진도 늦어 메리트가 없다는 것이다. 한때 최고의 엘리트들이 몰렸던 경제 부처들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지난달 기재부 내부 익명 게시판엔 ‘부총리님, 전출을 막지 말아주세요’라는 제목의 글도 올라왔다. 다른 부처로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1 대 1 교류가 원칙인데 기재부로 오겠다는 사람은 없고 가겠다는 사람만 넘친다. 해당 글에는 전출 문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업무 환경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며 성토장이 됐다. 지난해에도 내부망에서 “우리의 직업은 (승진 비전이 안 보이는) 사무관”이라며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이 들끓었다.
▷과거엔 행정고시 성적 최상위권이 기재부 등 주요 경제 부처를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요즘엔 선호 부처가 많이 바뀌었다. 지난해엔 행정고시 67기 5급 공개채용에서 일반행정직 수석이 해양수산부에, 차석은 농림축산식품부에 지원해 화제가 됐다. 경제 정책과 예산을 총괄하는 기재부는 물론이고 노동개혁에 드라이브를 거는 고용부, 국민들의 관심이 몰리는 부동산 정책을 담당하는 국토부 등 경제 부처의 업무량은 상당하지만 금전적 보상이나 승진, 유학 등의 메리트는 적다. 지난해 정부 18개 부처 중 연차휴가를 가장 못 쓴 부서는 고용부다. 중기부(2위), 국토부(3위), 산업부(5위) 등 경제 부처가 뒤를 이었다.
▷소신껏 일하기 어려운 분위기도 한몫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폐 청산’이 반복되고 정책 기조는 손바닥처럼 뒤집히기 일쑤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랐다가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사례도 생기면서 미래가 불안하다. 오해를 살 만하거나 민감한 결정은 피하고, 핵심 부서보다는 뒤탈 없는 부서를 선호한다. 오래 버텨 봐야 퇴직 이후 갈 곳도 마땅찮으니 빨리 탈출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다.
▷“경제기획원은 명예롭고(honorable) 재무부는 막강하고(powerful) 상공부는 화려하다(colorful).” 세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는 개발경제 시대 경제 부처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했다. 각각 경제 개발의 밑그림을 그리고, 나라의 돈줄을 쥐고, 산업과 기업을 주물렀다. 관료들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예전처럼 돌아가서야 안 되겠지만, 공무원들이 나라 경제를 이끈다는 자부심과 보람으로 신명 나게 뛸 수 있게 해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6-13 옥중서 최후 맞은 ‘수학 천재’ 폭탄테러범

잔인한 폭탄테러범인가, 기술 문명의 위험을 경고한 선지자일까.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81세 남성이 10일 사망하며 남긴 질문이다. 1978∼1995년 과학기술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과학자를 포함한 다수에게 16차례 폭발물 소포를 보내 26명의 사상자를 낸 시어도어 카진스키. 암호명 ‘유너보머’로 불리는 그는 1996년 체포될 때까지 17년간 미국인들이 우편물을 받을 때마다 공포에 떨게 했던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의 악명을 드높인 건 천재적 두뇌다. 평범한 폴란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지능지수(IQ) 167로 태어난 카진스키는 16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하고 25세에 미시간대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최연소 교수로 부임한다. 대학원 시절 동료 학생들은 “우리가 간신히 문법을 배우는 동안 카진스키는 시를 쓰는 식이었다”고 회고했고, 박사 논문을 심사한 교수들은 “이 논문을 이해할 수 있는 수학자는 10명 정도일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2년 후 교수직을 내던지고 몬태나주 외딴곳에 오두막을 지어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카진스키는 살인을 상상하고 폭발물을 만들며 모든 과정을 암호화된 숫자로 일기장에 남겼는데 이를 분석한 심리학자들은 그에게 조현병 증세와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젖먹이 시절 병원에 장기 입원하면서 어머니와의 유대를 형성하지 못해 도덕 기준과 공감 능력을 상실했다는 분석이다. 천재성도 소외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는 “너무 외롭다. 아무도 날 아껴주지 않는다”고 썼고, 뉴욕타임스는 그가 거쳐 갔던 7개 주를 취재했는데 그의 친구를 한 명도 찾지 못했다.
▷카진스키가 현대문명을 거부한 예지자로 부각된 건 1995년 검거 직전 신문에 선언문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게재하면서다. 그는 ‘환경 파괴와 기술로 인한 소외가 극에 달했으니 현대 생활의 사회적 산업적 토대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국내에도 번역본으로 출간됐고, 2018년 두 번째 책 ‘반기술 혁명’이 나왔다. 출판사의 홍보 문구는 이렇다. ‘박사학위를 받은 수학 천재가 광기 어린 테러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기후위기가 가속화하고 인터넷의 폐해가 커지면서 카진스키를 ‘사상가’로 추앙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그의 사망 소식에 “그가 옳았을지 모른다”는 트윗을 남겼다. 하지만 카진스키 스스로도 “난 인류를 위해 행동하는 이타주의자가 아니다. 그저 개인적 복수심에서 행동할 뿐”이라고 했다. 천재로 태어나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연쇄 살인을 하고 ‘기술은 인류의 재앙’이라 썼던 그의 다면적 삶은 현대 사회가 갖게 될 병적인 징후들을 앞서 보여주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14 “지금 움직입시다”

고령에 근육질을 자랑하는 ‘몸짱 어르신’의 상당수는 건강이 크게 나빠져 고생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통증을 줄이려 시작한 운동이 회복을 넘어 건강미까지 얻게 해준 사례들이다. 각종 매체를 통해 소개된 79세 임종소, 72세 강현숙 할머니도 그랬다. 허리협착증으로 고생하던 임 할머니는 일주일에 5번씩 헬스장을 찾는 노력 끝에 세계 피트니스 대회에서 우승한 보디빌더가 됐다.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관리하지 않으면 어느 한순간에 망가질 수 있는 게 건강이다. 특히 3년간의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 몸에는 보이지 않는 경고등이 여기저기 켜진 상태다. 비만 상태인 한국인의 비중이 늘어났고 당뇨병, 고콜레스테롤혈증 같은 만성질환 유병률도 높아진 게 실태조사 수치로 확인된다. 일상생활의 움직임이 줄어든 데다 운동 습관까지 무너진 영향이 컸다. 앉아있는 시간은 하루 평균 8.9시간까지 늘어난 반면 하루 30분 이상씩 걷는 사람의 수는 감소했다.
▷최근 몸을 소재로 한 이른바 ‘피지컬 예능’들은 코로나가 잠재웠던 운동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헬스장 문의와 등록이 늘어났다고 한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운동은 작심삼일의 악순환을 끊기 어려운 도전이다. 결심이 필요한 단계를 넘어 운동을 일상의 습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해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소셜미디어에서 열풍이 불었던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챌린지처럼 여럿이 함께 만들어가는 게 좀 더 쉽다.
▷운동 루틴을 돕는 디지털 기기의 역할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정해진 운동시간을 알려주는 기능부터 운동량 기록, 심박수와 혈당 측정, 3D 체형 분석 같은 기능들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모니터 속 헬스 강사의 일대일 지도와 격려의 외침, 인터넷으로 연결된 다른 회원들과의 운동 목표 공유가 도움이 됐다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기능을 장착한 미국 운동용 자전거 업체의 매출 증가세는 폭발적이었다. 업체 이름을 따서 ‘펠로톤 효과’라는 조어까지 나왔다. 건강을 챙기려는 사람들의 의지와 ICT가 접목되면서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의 성장을 이끈 사례다.
▷인터넷에는 ‘일주일 만에 뱃살 폭파’ ‘한 달 만에 올챙이배 없애기’ 같은 콘텐츠가 넘쳐난다. 운동의 효과를 그렇게 단기간에 보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게 답이다. 꼭 초콜릿 복근을 만들 필요도 없다. 건강한 땀으로 군살을 빼 나가면서 일상의 탄력과 에너지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차고 넘칠 것이다. 집에서 혼자 하는 ‘홈트’부터 테니스, 수영, 요가까지 다양한 운동은 고령화시대 안티에이징의 비법이기도 하다. 지금, 움직입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15 40만 원이 1년 새 7억으로… 사채 조폭의 ‘살인 이자’

30만, 40만 원. 누군가에겐 근사한 한 끼 식사비용 정도일 돈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죽어야만 끝나는” 불법 사채의 지옥문을 여는 입장권 가격이었다. 50대 A 씨는 25만 원을 빌려 며칠 후 44만 원을 갚기로 했는데, 3개월 만에 1억5000만 원으로 불었다. 40대 B 씨가 빌린 40만 원은 1년 뒤에 6억9000만 원이 됐다.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잔혹했다. 강원경찰청은 일명 ‘강 실장 조직’으로 불리는 불법 사금융 범죄조직 123명을 붙잡아 주요 조직원 10명을 구속했다고 13일 밝혔다.
▷이 조직은 2021년 4월부터 최근까지 전국을 무대로 인터넷 대부 중계플랫폼을 통해 가정주부나 취업준비생, 영세상인 등에게 소액 단기 대출을 미끼로 연 5000% 이상의 이자를 뜯어냈다. 법정 최고이율인 연 20%의 250배가 넘는데, 여기에 매일 추가되는 연체료까지 붙였다. 총책인 실장을 중심으로 자금관리, 대출상담, 수익금 인출 등 역할을 나눠 맡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피해자는 현재까지 확인된 131명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액은 최소 500억 원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처음엔 수십만 원에서 시작한다. 잘 갚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 빌려줄 수 있다고 한다. 30만 원을 빌리고 일주일 뒤 50만 원을 갚는 ‘30·50’ 대출이 사채시장에서 흔히 쓰는 수법이다. 돈을 제때 못 갚으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마법이 진행된다. 연체금이 발생하면 이를 원금으로 돌리고 여기에 이자를 더 붙인다. 일명 ‘꺾기’다. 다른 사채업자를 소개해줘 다중 채무자로 만들기도 하는데 알고 보면 한 팀이다. ‘한 바퀴 감는다’고 한다.
▷입금이 늦어지면 저승사자 같은 추심이 시작됐다. 처음에 절차상 필요하다고 가족, 지인의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데 이게 덫이었다. ‘사기꾼 현상수배’라는 전단지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는 아기 사진을 보내면서 살해 위협을 했다. 피해자들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유산한 여성도 있고, 가정파탄 위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반면 범죄자들은 서울에서 월세 1800만 원 아파트에 살면서 고가 스포츠카를 타고 명품으로 치장하는 등 호화 생활을 누렸다.
▷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급전이 필요한 경제적 취약계층을 노린 불법 사금융 피해가 늘고 있다. 제도권 금융의 마지막 보루인 대부업체들마저 대출을 걸어 잠그면서 지난해 최대 7만1000명이 불법 사채 시장으로 내몰렸다는 분석도 있다. 불법 사채업자들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흉악범 수준으로 강화하는 한편 금융 취약계층을 위한 대출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 단돈 몇십만 원 때문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6-16 5종목 무더기 하한가… ‘천국의 계단株’ 아닌 ‘주가조작’?

모든 주식 투자자들은 자신이 산 종목이 ‘천국의 계단주(株)’가 되어주길 꿈꾼다. 우(右)상향 곡선에 올라타 멈추는 일 없이 장기간 고공 행진하는 종목을 증권가에선 이렇게 부른다. 2020년 초부터 3년 넘게 코스피 상장사인 방림·동일산업·만호제강·대한방직과 코스닥 상장사인 동일금속은 이런 주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 수요일 정오를 전후해 이들 5개 종목은 별다른 이유 없이 동시에 하한가까지 곤두박질쳐 50일 전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의 악몽을 되살렸다.
▷동반 폭락하기 전까지 만호제강은 2020년 초에 비해 315%, 동일산업이 285% 오르는 등 5종목 주가는 3년 반 전에 비해 평균 252% 상승했다. 회사가 보유한 자산의 규모에 비해 주가가 낮다는 점, 실적 개선 등 뚜렷한 호재가 없는데도 장기간 상승한 중소형주라는 점, 시장에서 거래되는 양이 적다는 점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를 주도한 라덕연 H투자자문 대표 일당이 주가 조작의 표적으로 삼았던 종목들과 여러모로 흡사하다.
▷5개 종목 중 몇몇은 온라인 주식 커뮤니티 B투자연구소가 집중 추천해온 종목이어서 이곳 운영자 강모 씨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과거 소액주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강 씨는 해당 주식들이 저평가됐다는 글을 지속적으로 올려 왔다. 강 씨는 “나와 가족도 깡통계좌가 됐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은 어제 그의 출국을 금지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이들 회사의 주가 흐름 이상을 포착한 증권사들이 신용대출 연장을 거절하자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서면서 주가가 폭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 씨는 시세 조종 등의 혐의로 지난해 12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4억 원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1년 한 해 증시 불공정 거래 행위로 기소된 사건 중 61.5%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재범률도 28%나 됐다. 10명 중 6명은 실형을 피하고, 3명 중 1명은 다시 주가 조작에 나선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주가 조작으로 들통난 이익의 3∼4배에 불과한 ‘솜방망이 벌금’의 영향도 있다. 당국에 걸리지 않은 이익을 생각하면 ‘한 번 감옥에 갔다 와도 남는 장사’란 말이 나온다.
▷그제 불과 28분 만에 증발한 5개 종목의 시가총액이 5066억 원이다. 이런 후진국형 사고가 반복될 때마다 외국 투자가들의 한국증시에 대한 불신은 커지고, 투자 의지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주가 조작 범죄자를 시장에서 장기간 격리시키고, 한 번만 걸려도 패가망신하도록 이익을 환수하는 법안들이 국회에 이미 발의돼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천국의 계단에 오르는 대신에 날개를 잃고 절망 속으로 추락하는 개미 투자자만 더 늘어나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6-17(토) 무더기 가짜회사로 공공택지 싹쓸이한 ‘벌떼 입찰’

인천 청라국제도시에서 2016년 5월 공급된 공동주택 용지는 600 대 1 이 넘는 입찰 경쟁률로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추첨을 통해 이 땅을 가져간 곳은 한 증권사가 만든 페이퍼컴퍼니였다. 당시 중견 건설사들이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수십 곳의 위장 계열사를 동원해 공공택지 입찰에 중복 참여했는데, 이 증권사가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해당 증권사는 30개의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전국 곳곳의 택지 입찰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 같은 입찰 방식이 ‘벌떼 입찰’이라고 불리며 문제가 되자 얼마 후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일정 수준의 주택건설 실적과 시공능력을 갖춘 업체만 참여할 수 있도록 청약 자격을 제한했다. 이를 통해 금융사가 세운 위장 건설사는 퇴출될 수 있었지만 건설사들이 만든 위장 계열사들은 걸러내지 못했다. 도심 재개발·재건축에 비해 저렴하게 공급되는 공공택지는 당첨만 되면 수백억 원의 차익을 낼 수 있는 ‘슈퍼 로또’로 인식되다 보니, 벌떼 입찰이 건설업계의 관행으로 굳어졌다.
▷결국 정부는 지난해 9월 ‘벌떼 입찰 근절 방안’을 내놨다. 추첨에 참여할 수 있는 모기업과 계열사 수를 1필지에 1개로 제한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맞춰 국세청도 벌떼 입찰로 공공택지를 분양받은 건설사들에 대해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정부 5년 동안 호반·대방·중흥·우미·제일 등 5개 건설사가 LH가 분양한 공공택지의 37%를 가져갔다는 문제 제기가 나오면서다. 이 중 호반건설은 LH 택지의 10분의 1을 싹쓸이했다.
▷작년만 해도 벌떼 입찰에 “검토가 필요하다”며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공정거래위원회가 그제 호반건설을 대상으로 과징금 608억 원을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호반건설이 유령회사에 가까운 계열사를 만들고 협력사까지 동원해 공공택지 23개를 낙찰 받은 뒤, 회장의 두 아들이 소유한 회사들에 넘겼다는 것이다. 이 덕에 2세 회사들은 6조 원에 가까운 분양 매출을 올린 것으로 공정위는 판단했다. 부당 지원과 일감 몰아주기로 2세 회사들은 단기간 급성장했고, 이 과정에서 경영권 승계도 쉽게 이뤄졌다.
▷문제는 편법으로 공공택지를 독과점한 건설사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벌떼 입찰이 암암리에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두 달 전에도 벌떼 입찰에 나선 건설사 19곳을 추가 적발했는데, 서류상으로만 사무실을 운영하는 곳이 수두룩했다. 시장이 공정하게 운영되지 않으면 권력과의 유착이나 탈세 같은 비리가 생겨나고,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개발 이익을 독식하는 벌떼 입찰을 서둘러 뿌리 뽑아야 하는 이유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6-19(월) 경찰-지자체공무원 몸싸움… 처음 보는 ‘공권력 亂場’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경찰과 지방자치단체는 ‘원팀’처럼 움직일 때가 많다. 집회 주최 측에서 허가받지 않은 시설물을 설치하려고 하면 지자체 소속 공무원들이 철거에 나서고, 경찰이 도와주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집회 참가자와 경찰·공무원이 충돌하기도 한다. 그런데 17일 대구퀴어문화축제 현장에서는 전례 없는 광경이 펄쳐졌다. 도로 한복판에서 경찰과 지자체 공무원들 간에 집단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날 오전 7시경부터 대구 중구 반월당 네거리 대중교통전용지구에 약 500명의 시청·구청 소속 공무원들이 모여들었다. 퀴어축제 무대 설치를 막기 위해서다. 오전 9시 반경 행사 장비를 실은 트럭이 현장에 도착하자 공무원들이 가로막았다. 이에 경찰은 “밀어”라며 공무원들 해산에 나섰고, 공무원들은 “막아”라고 소리치며 버텼다. 행사 관계자들은 “경찰 파이팅”을 외쳤고, 반면 주변의 일부 상인들은 공무원을 응원했다. 40여 분간 이어진 난장판 끝에 대구시 측이 철수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대구시와 경찰 간에 갈등이 빚어진 것은 집회 주최 측이 주변 도로까지 사용할 수 있느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도로법상 도로점용 허가권은 대구시에 있고, 통행 및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의 적치물을 치울 수 있다는 게 대구시의 입장이다. 시민의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행사 트럭 진입을 막으려 했다는 취지다. 반면 경찰은 집회의 자유는 헌법상 권리이고, 합법적 집회에선 별도로 허가를 받지 않아도 주변 도로 이용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한 전문가는 “집회의 자유와 통행권이 부딪히는 지점인데, 법원 판례는 집회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행사는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었고 상인 등이 낸 집회금지 가처분 신청도 법원이 15일 기각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만큼 기관 간에 이견이 있다면 밤샘 토론을 해서라도 조용히 해결했어야 했다. 그런데 사전 조율을 못 한 채 시민들 앞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충돌 이후에도 두 기관은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쁘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대구경찰청장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대구경찰청 측은 “누구보다 법을 잘 아는 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홍 시장을 비판했다.
▷시민들의 시각에선 경찰과 대구시 모두 막강한 공권력을 가진 기관들이다. 양측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권력을 행사한다면 시민들로서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질서를 어지럽히고 시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야 되겠나. 경찰과 대구시는 “어리둥절하다” “무슨 코미디냐”는 시민들의 질책을 아프게 새겨들어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20 ‘하한가 사태’ 카페 운영자, 1만회 시세조종에도 작년 執猶

한국에서 자본시장 범죄는 ‘남는 장사’다. 수백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겨도 기껏해야 몇 년 징역형을 살면 되고, 벌금도 푼돈에 그친다. 모범수가 되면 가석방까지 돼 빼돌린 돈으로 호의호식하면 된다. 회계사 출신의 한 기업사냥꾼 사례는 증권가에서 유명하다. 6년간 7건의 증권 범죄에 가담해 수백억 원을 챙겼지만 여태 확정된 처벌은 800만 원 벌금형에 불과하다. 그는 심지어 코스닥 상장사의 부정거래, 배임 등에 연루돼 재판을 받는 도중 쌍용차 매각 과정에 뛰어들어 주가를 띄우고 ‘먹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본시장 범죄의 다수를 차지하는 3대 불공정거래(시세조종, 부정거래, 미공개정보 이용)에 대해 현재 형사 처벌만 가능하고 별도의 금전적·행정적 제재 수단이 없는 탓이 크다. 형사 처벌마저도 불공정거래 혐의가 적발돼 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기까지 평균 2∼3년씩 걸리는 데다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비중이 40%가 넘는다. 이렇다 보니 주가 조작범이 자본시장으로 돌아와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허다하다.
▷SG증권발 주가 폭락과 비슷한 5개 종목 무더기 하한가 사태가 며칠 전 발생했는데, 배후로 지목된 온라인 주식투자 카페 운영자 강모 씨도 ‘전력’이 있다. 그는 2014년 2월부터 카페 회원 등과 함께 거래량이 적은 4개 종목을 찍은 뒤 1년 반 동안 무려 1만111차례 사고팔며 주가를 조작했다. 4개 종목엔 이번에 폭락한 대한방직도 있었는데, 당시 주가는 3만 원대에서 15만 원대로 치솟았다. 이 같은 시세조종으로 강 씨는 지난해 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벌금 4억 원을 확정받았다.
▷‘솜방망이’ 형사 처벌과 별개로 증권 범죄자의 주식 거래를 차단하는 장치가 있었다면 강 씨의 재등장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이미 선진국들은 법적 판단이 나오기 전에 금융당국의 제재만으로 불공정거래 혐의자의 금융 거래를 막고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하고 있다. 미국에선 실리콘밸리 최대 사기극으로 꼽히는 바이오기업 ‘테라노스’ 창업자에 대한 형사 재판이 작년 1월 끝났지만, 앞서 2018년 금융당국이 50만 달러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10년간 상장사 취업 제한 조치까지 내렸다.
▷한국 금융당국도 지난해 불공정거래를 한 사람의 금융투자 거래를 최대 10년간 제한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관련 법안은 국회 정무위원회 소위에서 잠자고 있다. 불공정거래로 얻은 부당이득에 대해 최대 2배의 과징금을 물리는 법안도 2년 넘게 계류돼 있다가 4월에야 국회 정무위 전체회의 문턱을 넘었다. 증권 범죄는 개미들을 약탈하고 자본시장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범죄다. 한 번이라도 적발되면 패가망신할 정도로 일벌백계하는 법안들이 서둘러 도입돼야 한다. 불공정거래가 더 이상 남는 장사가 돼선 안 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6-21 물 새는 거북선, 밥 태우는 가마솥… 애물단지 된 랜드마크

충남 금산군에는 16m 높이의 금산인삼이, 인천 소래포구에는 높이 20m의 새우 전망대가 있다. 강원 횡성군엔 한우, 강원 소양강 변엔 소양강 처녀상이 랜드마크 자리를 노린다.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공공 조형물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지만 “예산 낭비”라는 비판 속에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세계 최고’를 내세운 조형물들은 대개 실패로 끝난다. 충북 괴산군은 5억 원을 들여 지름 5.7m의 초대형 가마솥을 만들어 신기록에 도전했다가 더 큰 호주 질그릇에 밀렸다. 군민 4만 명이 한솥밥을 먹자고 만들었는데 아래는 타고 위는 설익는 3층밥이 됐다.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해도 이송 비용만 2억 원이 들어 포기한 상태. 광주 광산구에는 높이 7m의 세계 최대 우체통이 있지만 미국에 더 큰 우체통이 생기면서 타이틀을 잃고 사용도 중단됐다.
▷지역 특산물이나 유명인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방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충북 음성군이 고추 조형물을 설치하자 괴산군은 임꺽정이 ‘청결고추’를 들고 엄지척을 하는 조형물을 만들었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생가가 괴산이다. 경북 군위군엔 대추 모양의 7억 원짜리 대형 화장실이 있다. 원래 조형물을 만들려다 화장실로 바꿨는데 한적한 도로변이라 이용객이 없다. 강원 인제군 소양강 변엔 환풍구에 치마가 날리는 메릴린 먼로 동상이 생뚱맞다. 먼로가 6·25전쟁 직후 이곳에서 미군 위문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대형 조형물이 보기도 안 좋고 안전에 방해만 된다는 민원이 쏟아지자 국민권익위원회가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다. 2019년 기준 전국의 공공 조형물은 6287점, 추정 제작비는 1조1254억 원. 상당수 지자체가 공공물 건립이나 관리에 관한 규정도, 주민 의견 수렴 절차도 없이 만들고 있었다. 비리 의혹이 제기된 사례도 있다. 경남도가 16억 원을 들인 거북선은 미국산 소나무를 국내산으로 속여 쓴 사실이 드러나 ‘짝퉁 거북선’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바닥에 물이 새 쓰지도 못하고 방치돼 있던 거북선은 최근 일반인에게 154만 원에 낙찰됐다.
▷성공적인 공공 조형물로 영국 소도시 게이츠헤드에 설치된 ‘북방의 천사’가 꼽힌다. 탄광산업과 제철공업으로 융성했다 쇠락한 이곳에 철을 이용해 키 20m에 양쪽 날개 길이가 50m인 단순한 디자인의 천사상을 세웠다. “쇳덩어리에 16억 원이나 쓰느냐”는 주민들을 설득하느라 1998년 완공하기까지 13년이 걸렸다. 시장이 아닌 주민 모두의 프로젝트로 지역의 역사와 미래의 희망을 담은 천사상이 명물이 되면서 지역경제도 살아났다. 임기 내 업적 하나 남기겠다는 욕심만으론 오래도록 사랑받는 랜드마크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22 엘리엇에 1400억 원 배상, 누굴 탓해야 하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불법이었는지 여부는 재판 중에 있다. 검찰이 소집한 수사심의위원회는 불기소를 권유했지만 현재 금융감독원장인 이복현 당시 수사검사가 기소를 고집해 결국 기소가 됐다. 다만 정부가 합병 승인 과정에 압력을 행사해 삼성에 도움을 줬는지는 합병이 불법이었는지와는 상관없다.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승인 과정에서 정부가 합병 투표 찬성 압력을 행사해 7억7000만 달러(약 1조300억 원)의 손해를 봤다며 정부를 상대로 2018년 7월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다. 그제 결과가 나왔다. 정부는 엘리엇에 손해배상금 690억 원에 소송 비용과 지연이자 등을 포함해 1400억 원을 지불하게 됐다.
▷대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때 삼성이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약 16억 원을 후원한 사실에 대해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는 승계 작업이라는 현안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묵시적 청탁이 인정된다고 보고 제3자 뇌물죄를 인정했다. 삼성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낸 출연금 204억 원에는 제3자 뇌물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출연금으로 삼성을 처벌하면 다른 대기업도 처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억 원 후원은 처벌하지 않으면 합병 승인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처벌받은 안종범 전 경제수석비서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유죄 선고와 모순이 빚어진다.
▷안 전 수석이 형을 살고 나와 ‘안종범의 수첩’이란 책을 썼다. 안 전 수석에게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받아쓴 63권의 수첩이 있어서 수사에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정작 그 많은 수첩에 ‘삼성 합병’이란 말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검찰은 그에게 삼성 합병과 관련한 대통령의 지시를 진술하도록 별건 수사로 갖은 압력을 넣었으나 그는 세모를 네모로 만들 수 없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고육지책으로 묵시적 청탁이 인정됐다. 그러나 대기업에 현안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묵시적 청탁을 인정하는 건 청탁의 범위를 너무 넓힌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 엘리엇만이 아니다. 또 다른 미국계 사모펀드 메이슨 캐피털도 2억 달러(약 2700억 원)의 ISD를 제기해 놓은 상태다. 국내 소액주주들은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그러나 엘리엇의 승소는 항소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부가 배상해야 할 액수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가 벌이고 정부가 바로잡는다고 한 그 일로 인해 세금으로 엄청난 손해배상을 하게 됐다. 우릴 자책할 수밖에 없긴 한데 정확히 누굴 탓해야 하나.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6-23 남녀평등지수, 한국이 세계 146개국 중 105위?

‘우간다보다 못하다.’ 한때 한국 금융의 후진성을 질타할 때 쓰였던 말이다. 다보스포럼으로 알려진 세계경제포럼(WEF)이 2015년 발표한 국가경쟁력 금융 부문에서 한국이 87위, 우간다가 81위에 오르면서다. 당시 WEF의 평가가 기업인 설문조사 위주로 진행돼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결과를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금융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후 WEF가 통계지표 반영 비중을 높이면서 한국의 금융 경쟁력은 껑충 뛰었다.
▷국가경쟁력 외에도 WEF가 매년 국가별로 순위를 매기는 것 중 ‘성 격차(Gender Gap) 지수’라는 게 있다. 경제 참여·기회, 교육 수준, 건강, 정치 권한 등 4가지 항목에서 남녀평등 정도를 평가해 지수화한 것이다. 그런데 WEF가 그제 발표한 성 격차 지수에서 한국은 146개국 중 105위에 그쳤다. 지난해보다 여섯 계단 하락한 것이자 아프리카 세네갈(104위)보다 낮은 수준이다. 심지어 르완다가 12위였다.
▷여성의 지위와 권한 자체가 아니라 ‘성별 격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남녀 모두 수치가 낮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남녀 차이가 큰 한국이 뒤로 밀린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107위), 일본(125위) 등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대체로 하위권에 몰렸다. 반면 ‘육아 천국’, ‘복지 천국’으로 꼽히는 북유럽의 아이슬란드·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과 뉴질랜드는 1∼5위를 휩쓸었다. 이들 국가가 90% 안팎 수준으로 남녀평등을 실현했다면 한국은 68% 수준으로 평가됐다.
▷여성 인권의 절대 수준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WEF 평가를 깎아내릴 게 아니라 자성할 대목들도 적지 않다. 항목별로 보면 경제 참여·기회가 114위로 종합 순위보다 낮았고, 더 세부적으로는 근로소득(119위), 고위직 비율(128위)이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남녀 임금 격차가 크고, 여성의 승진이 힘들다는 뜻이다. 한국 남성이 100만 원의 임금을 받을 때 여성은 69만 원을 받고, 여성 10명 중 4명은 출산과 육아, 자녀 교육으로 경력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민간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11.5%에 불과하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이 ‘만년 꼴찌’인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을 자랑하고, K컬처로 문화 강국 반열에 오른 한국의 부끄러운 현주소다. 최악의 저출산은 물론이고 고용, 복지, 교육 문제까지 어느 것 하나 성평등 정책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해결 방안을 찾기보다 극단적 혐오의 충돌로 젠더 갈등의 골만 깊어져 우려스럽다. 성평등을 통해 여성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 정부를 포함한 한국 사회 전체의 과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6-24(토) “모디 총리에 레드 카펫을… ” 印 향한 美의 구애

“그때 나는 할 수 없었으나 당신은 반복해서 물었던 것, 그렇게 열망했던 바람을 오늘 제가 채워드리죠.” 22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백악관 국빈만찬에서 내놓은 발언에 만찬장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9년 전 워싱턴 방문 땐 힌두교 금식 기간이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이번 만찬에서는 기꺼이 포식하겠다는 뜻의 농담이었다. 인도산 실크 위에 오른 사프란 리소토와 포토벨로 버섯 요리는 채식주의자인 그를 위해 백악관이 특별히 공들인 메뉴였다.
▷제3세계 국가들의 맹주를 자처하는 인도는 비동맹 외교 정책을 고수해온 나라다. 쿼드(Quad) 회원국으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정책에 적극 올라타면서도 러시아로부터는 싼값에 원유를 4배 넘게 사들이며 미국의 대(對)러 제재망에 구멍을 뚫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깰 수 없는 우정”을 강조했다. 이런 인도를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은 모디 총리를 국빈으로 초청해 초특급으로 환대했다.
▷미국과 인도를 ‘베프’ 관계로 만든 공통분모는 중국이다. 중국과의 국경 분쟁 등으로 잔뜩 날이 서 있는 인도, 중국 견제를 위해 우군이 필요한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양국이 협력 강화를 다짐한 분야는 인공지능(AI) 개발과 글로벌 공급망 확보, 방산 등 첨단 기술과 안보다. 미국이 대중 견제의 고삐를 죄는 분야들이다. 중국에서 제재받은 마이크론은 인도에 8억 달러 넘게 투자한다. 양국 정부와 기업 모두 중국 보란 듯 밀착하고 있는 것이다. CNN은 모디 총리의 국빈 방문 기간에 “(중국이라는) 초대받지 않은 유령 손님이 워싱턴을 맴돌았다”고 썼다.
▷“두 위대한 국가, 두 위대한 친구, 두 위대한 파워를 위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국빈만찬 건배사는 의미심장하다. 주요 2개국(G2)으로 불렸던 미중 관계 대신 인도와 손잡고 세계질서를 재편해 나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인도가 어디까지 호응할지가 관건이지만, 이번 회담만으로도 기존의 지정학 구도를 흔들 “역사를 썼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은 이를 위해 인도의 인권 탄압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모디 총리는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두 민주주의 국가 간의 연대”를 외쳤다.
▷14억 인구를 둔 세계 최대 시장, 첨단기술 수준과 젊은 정보기술(IT) 인력들, 6%대 경제성장률을 이끄는 중산층 파워로 인도의 몸값은 한껏 높아져 있기도 하다. 미중 갈등 속에서의 ‘어부지리’ 수혜로 신흥 거대 시장 인도의 성장세는 더 가팔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원칙과 국익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주요국들의 합종연횡이 끌어내는 변화 속도가 숨 가쁘다. 대외적 역할 확대와 수출시장의 다변화를 노리는 한국이 놓치지 말고 따라가야 할 흐름임이 분명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26(월) “10억 달러 흥행될 것” 머스크-저커버그 진짜 혈투?

온라인으로 게임을 하다 마찰이 생긴 게이머들이 현실에서 직접 만나 주먹다짐을 벌이는 걸 게임계 은어로 ‘현피’라고 한다. 지난주 미국에선 세계 1위 부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52)와 9위 부자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39)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설전이 현피 직전까지 갔다. 어머니가 “말로만 싸워라. 더 웃기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라며 뜯어말리는데도 머스크는 “대결이 아마도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각각 전기차, SNS가 주력 사업이어서 부딪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둘의 다툼은 머스크가 작년 10월 트위터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공화당을 공개 지지하는 머스크가 인수한 트위터는 광고주가 떨어져 나가고, 주가도 급락하면서 머스크의 ‘아픈 손가락’이 됐다. 한편에선 틱톡 등에 페이스북이 밀리는 상황을 타개하려고 저커버그가 트위터와 비슷한 텍스트 중심 SNS ‘스레즈(Threads)’를 내놓기로 하면서 충돌이 예고됐다.
▷스레즈에 대해 평가해달라는 트위터 이용자에게 머스크는 “무서워 죽겠네. 전 지구가 저커버그 손가락에 지배당하겠다”고 조롱했다. “저커버그는 (브라질 무술) 주짓수를 한다”는 말에는 “철창 싸움을 할 준비가 됐다”고 응수했다. 지켜보던 저커버그가 “(싸울) 위치를 보내라”는 글을 올리자 호사가들은 열광했다. 둘과 통화한 종합격투기 단체 UFC의 회장은 “역사상 가장 큰 싸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흥행수입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짜리 빅게임이 될 거란 평가까지 나왔다.
▷미국 정보기술(IT) 업계 거물 간 말다툼의 원조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다. 독선적 성격으로 정평이 난 잡스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를 향해 “상상력이 부족하고 발명한 게 없다”는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MS 윈도에 대해선 “뻔뻔스럽게 (애플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비판했다. 게이츠가 ‘애플이 다른 데서 훔친 걸 나도 가져다 쓴 것’이란 취지로 유머를 섞어 받아넘기지 않았으면 큰 싸움이 났을 것이다. 둘의 진정한 화해는 2011년 잡스가 타계한 뒤에야 이뤄졌다.
▷최근엔 팀 쿡 애플 CEO가 공개한 혼합현실(MR) 헤드셋 ‘비전프로’를 놓고 저커버그가 “값만 비싸고 혁신은 없다”고 비판했다. 회사 이름까지 메타로 바꾸면서 메타버스에 투자했지만 성과가 나쁜 저커버그에게 애플의 도전은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시가총액이 웬만한 나라 국내총생산(GDP)급인 미국 IT 공룡 CEO들의 입씨름은 유치해 보인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챔피언 트로피를 들 가능성이 높은 최강자들이 벌이는 싸움이란 점에서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6-27 미로 탈출하기보다 어려운 아마존 서비스 해지하기

‘당신은 아마존을 로그아웃할 수 있지만 떠날 순 없다.’ 노르웨이 소비자협의회(NCC)가 2021년 ‘아마존 프라임’ 이용 회원 1000명을 조사한 뒤 낸 보고서의 제목이다. 유료 서비스인 아마존 프라임에 가입한 뒤 해지하는 과정이 무척 어렵다는 의미다. 보고서는 “아마존을 떠나려면 수수께끼 풀듯 헷갈리는 선택과 반복되는 장애물을 통과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아마존 프라임은 가입자가 2억 명으로 지난해 45조 원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한두 번 클릭으로 가능한 가입과는 달리 해지는 매우 까다로워 늘 비판의 대상이 됐다. 최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드디어 ‘칼’을 뽑아 들었다. FTC는 “아마존이 사용자를 기만했으며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게 했다”며 시애틀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FTC에 따르면 아마존 프라임을 해지하기 위해 4개의 화면 바뀜과 6번의 클릭, 15가지의 옵션 취소를 거쳐야 한다. 한 누리꾼은 본인의 해지 과정을 보여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수준”이라고 표현했다.
▷아마존은 “(혐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펄쩍 뛰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유출된 아마존 내부 문서에선 의도적으로 해지를 어렵게 만들어 해지율을 14% 감소시켰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내부에선 해지 과정을 ‘일리아드 흐름’이라고 불렀다. 장장 9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다룬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처럼 구독 해지가 길고 힘겹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FTC가 아마존 소송에 나선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정기구독이 급신장을 한 만큼 구독 해지와 관련된 불만도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연간 수만 건의 소비자 불만을 접수한 FTC는 아마존에 대한 소송 외에 통신사, 피트니스 업체 등도 조사 중이다. 지난해엔 한 인터넷 기반 전화 서비스 업체가 구독 해지를 방해했다며 이용자에게 1억 달러를 배상하도록 했다. 3월엔 가입과 동일한 방식으로 간편하게 해지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제 방안도 내놓았다. 소비자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해 주겠다는 것이다.
▷미로보다 복잡한 구독 해지를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요금이 결제돼 황당했던 경험은 온라인 서비스 이용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상거래 업체가 숨기고 비트는 설계로 고의적인 함정을 만들면 아마추어 이용자가 걸려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국내에서도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제 움직임이 막 시작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4월 온라인 거래 시 어려운 해지나 사용자 동의 없는 유료 갱신 등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를 금지할 수 있도록 전자상거래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섰다. 국회에도 관련 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빠른 법 개정으로 속는 줄도 모른 채 당했던 소비자들의 억울한 불이익을 해소해 주기 바란다.
06-28 100세 과학자가 남긴 조언 “너무 이른 은퇴 말라”

“죽기 전에 고속도로에서 배기가스가 사라지는 걸 보고 싶소. 나는 지금 96세이니 아직 시간이 있어요.” ‘전기차 배터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구디너프 미국 텍사스대 교수의 과거 인터뷰들에는 나이를 잊은 열정과 여유가 가득하다. 2019년 97세 나이로 최고령 노벨상 수상자 기록을 쓴 그는 25일 100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슈퍼 배터리’ 연구를 계속했다. “오랜 연구의 비결을 공유해 달라”는 요청에 그가 내놨던 답변은 “너무 일찍 은퇴하지 말라”였다.
▷80대, 90대에도 일을 계속하는 현역들은 고령화에 접어드는 현대사회에서 주목받는다. 올해 3월 타임지는 ‘왜 그만둬요?’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95세 변호사, 85세 엔지니어를 조명했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유명인들에겐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 배우 해리슨 포드는 81세 나이에 액션 연기를 선보였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93세 나이에 최고령 감독이자 배우로 여전히 활동 중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인공지능(AI)을 연구해 책을 썼다.
▷일본 언론에 소개된 한 90대 스시집 셰프는 “아침마다 생선과 쌀, 물, 직원, 손님들에게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일본에서 히트 친 게임을 개발한 87세 프로그래머가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60세에 은행을 은퇴한 뒤였다고 한다. 초고령화사회인 일본에서는 90세 이상 취업자가 5000명에 이른다. 고령에도 “일을 즐긴다”는 이들은 “배우고 일하는 데 늦은 나이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일이 주는 일상의 긴장감과 자극 덕분에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구(老軀)의 한계를 극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최근 96세 연방판사가 “일을 그만두라”는 동료의 소송에 맞서 법정싸움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업무 역량과 처리 속도, 기억력 등이 모두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한 이 종신직 판사는 “아직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며 완강히 버티고 있다. 정반대로, 일을 내려놓고 싶어도 경제적 이유로 은퇴를 미뤄야 하는 생계형 현역들도 적잖다. 직종과 분야, 근무 환경에 따라 정년에도 차이가 있다.
▷정년은커녕 ‘파이어(FIRE)족’을 꿈꾸며 조기 은퇴를 준비하는 젊은이들도 속출하는 세상이다. 젊은 날의 고단한 근무를 황혼기 이후까지 계속한다는 게 어쩌면 막막하다. 그래도 자아실현과 삶의 의미를 찾는 데는 일만 한 것도 없다고 앞서 걸어간 사람들은 증언한다. 국내에도 95세까지 마이크를 잡았던 MC 송해부터 91세에 말춤을 춘 현직 대학총장까지 수많은 사례가 있다. 진정 하고픈 일이라면 못 할 것도 없다. 직장, 직업을 넘어 천직을 찾아나갈 때 가능한 일들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29 아들에게 성·본 물려주는 ‘양주 박씨’ 베트남 엄마

청양 오씨, 용인 라씨, 태국 태씨…. 낯선 느낌의 이들 성(姓)과 본(本)은 귀화한 외국인들이 새로 만든 것이다. 청양 오씨는 2020 도쿄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출전한 케냐 출신 오주한 씨가 만들었다. 오주한은 오직 한국을 위해 달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용인 라씨 역시 2012년부터 한국 프로농구에서 뛰는 미국 출신 라건아가 만들었다.
▷양주 박씨의 시조인 박화연 씨도 같은 경우다. 베트남 출신으로 2017년 한국인 남편 박규정 씨와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아내 박 씨는 2021년 국적을 취득하면서 ‘양주 박씨’를 만들었다. 아들은 남편 성본을 물려받아 밀양 박씨였는데 이 부부가 아들의 성본을 양주 박씨로 바꿔 달라며 소송을 냈다. 이들은 성본 변경 허가 청구서에 “베트남 이주민의 한국인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고, 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도 이겨내고 싶다”고 썼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부부 협의 아래 엄마 성본을 따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아빠 성본을 따랐다가 바꾸는 것은 이혼, 사별 등 제한적 경우에만 허용됐다. 법원은 최근 이 관례를 깨고 박 씨 부부의 청구를 허가했다. 가족 사이의 정서적 통합에 도움을 주고, 양성평등이라는 헌법상 이익에 부합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주 여성의 자녀가 엄마의 성본으로 변경한 것은 처음이다.
▷현대 사회에서 혈통보다는 학교, 직장 등 사회적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본관의 의미가 많이 옅어지긴 했다. 2005년 동성동본 금혼이 없어지면서 법률적 의미보단 관습적 의미가 더 커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본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종중은 여전히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종중의 일원으로 여성을 포함시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는 등 종중의 실체나 개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있다. 귀화인들이 성본을 새로 만드는 건 한국 전통을 따름으로써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하겠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건너와 가락국 김수로왕과 혼인한 허황후의 후손이 만든 성본이 양천, 김해 허씨라고 한다. 이들 허씨가 인도계라면 양주 박씨는 베트남계가 된다. 이들의 성본은 부계가 아닌 모계에서 출발했다. 법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아버지의 성본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편견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이는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했다. 세계적으로 저출산이 문제가 되면서 이민에 대해 문호를 활짝 여는 나라가 늘고 있다. 한국은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아직은 이민에 대해 문을 활짝 열기에는 사회적 합의가 충분치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개방성을 좀 더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6-30(금) TV홈쇼핑의 상습 거짓말 “이번이 마지막 방송”

“해외 원료 수급 비상으로 인해 ‘영원히’ 마지막 생방송입니다.” 지난해 한 TV홈쇼핑 방송에서 건강식품을 판매하던 쇼호스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더는 볼 수 없다던 이 제품은 한 달 뒤 오히려 원료 함량을 높여 같은 방송에서 재판매됐다. 또 다른 홈쇼핑에선 방송 중에 구매해야만 냉동고를 사은품으로 준다고 했다. 쇼호스트는 “20분 지나면 저 냉동고 사라진다”며 시청자들을 재촉했다. 하지만 방송이 끝난 뒤 방송사 온라인몰에서 똑같은 구성으로 살 수 있었다.
▷TV홈쇼핑에서 시청자들을 기만하는 과장·허위 광고가 지난해부터 다시 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26일 내놓은 ‘2022 방송통신심의연감’을 보면 지난해 상품판매방송 제재건수는 총 86건으로, 전년의 62건보다 39% 늘었다. 올해 들어서도 5월까지 55건이 제재를 받아 지난해 수준을 웃돌고 있다. 허위·기만·오인 표현 등으로 시청자들을 속인 경우가 가장 많았다.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거나 허위 또는 기만적인 내용을 방송하는 경우 소비자에게 피해를 유발한다. 한 홈쇼핑 방송에선 내장지방에 따른 체형 차이를 보여준다며 두 명의 모델을 비교했다. ‘같은 키, 같은 몸무게. 하지만 라인은 이렇게 다르다’며 지방을 제거해준다는 건강식품을 홍보했다. 하지만 실제론 두 모델의 신장과 체중은 달랐다. 한 의류 판매 방송에선 “리넨 함량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리넨 100%예요”라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알고 보니 리넨 함량은 22%에 그쳤다.
▷수량에 제한이 없음에도 ‘한정 판매’라고 광고하거나 ‘처음’ ‘단 한 번’ ‘1위’ 등을 강조한 경우도 많다. “얼마나 애착 있게 만들었으면 이게 세계에서 지금 부동의 1위입니다”라고 했던 그 삼푸. 알고 보니 특정 브랜드의 판매 라인 내에서만 1위였다. 원산지를 속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침대 판매 방송에선 제품에 사용된 원단을 설명하며 “원단 자체를 프랑스에서 가져온다” “이 원단은 프랑스에서 짜야 이 색깔이 나온다”고 했지만 실제론 중국에서 가공·수입됐다.
▷구매를 유도하는 홈쇼핑의 목소리가 다급해진 것은 경기 침체, 온라인 채널의 확산 등으로 소비자들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경쟁에 쇼호스트가 방송 중에 욕설을 하고, 제품을 강조하기 위해 불행한 일로 고인이 된 모 연예인을 언급하는 지경까지 됐다. 소비자를 기만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에 대해 엄격한 관리·감독과 제재가 필요하다. 소비자들이 홈쇼핑을 찾는 것은 방송사를 믿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사랑받고 중소기업에 힘이 되겠다’는 한국TV홈쇼핑협회의 캐치프레이즈가 민망하게 느껴져서야 되겠나.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