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5/ 05-01(월) 55년간 1만4천쌍에 결혼식… - 05-30 날개 접은 양양공항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5/
05-01(월) 55년간 1만4천쌍에 결혼식… 무료라도 싸구려로 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오복을 누리다가 생을 마감한 호상이니 웃음꽃을 피우며 경사스럽게 맞이하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다. 경남 마산에 위치한 신신예식장 백낙삼 대표. 55년간 1만4000쌍에게 무료 결혼식을 선사한 그가 지난달 28일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변에선 ‘생활은 즐겁게, 임무는 성실하게, 인생은 보람되게’라는 그의 인생 철학대로 살다가 갔다고 한다.
▷말이 1만4000쌍이지 오랜 세월 그가 사회에 끼친 선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는 무료 예식장을 운영한 것에 대해 “나도 너무 가난해서 결혼식을 못 했다”고 했다. 집안이 망해 대학 졸업도 못 하고 길거리 사진사로 연명하던 그는 31세에 지금의 부인과 결혼했으나 식을 올리지 못했다. 뛰어난 사진 실력으로 재산을 모아 1967년 2층 건물을 매입했다. 여기에 신신예식장을 열고 사진 값만 받고 모든 것을 무료로 해줬다. 2019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은 뒤로는 “정부가 나를 채찍질한다 싶어” 사진값도 안 받았다.
▷무료라도 싸구려로 하지 않았다. 그는 신부 드레스와 신랑 턱시도, 화장, 폐백 등이 서울 예식장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신부가 화장하고 드레스 입고 나오면 신랑이 ‘내 신부 어디 갔냐’라고 한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예식에 정성을 쏟았다. 한때는 하루 17건의 식을 치를 정도로 인기였지만 근래엔 무료 예식을 찾는 이가 확실히 줄었다. 직원이 다 나가고 부인 최필순 씨와 함께 주례 사회 청소 들러리 하객까지 1인 다역을 맡아 왔다. 지난해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는 아들 백남문 씨가 그의 역할을 대신했다.
▷다른 사람의 결혼만 행복하게 출발시켜 준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했다. 매년 부부의 날과 결혼기념일에는 꼭 부인에게 손편지를 써 우편으로 부쳤다. 이들 부부의 얘기를 담은 책 ‘신신예식장’의 한승일 작가에 따르면 이들이 평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당신은 좀 쉬어요, 내가 할게요”였다. 백 씨는 사후 묻힐 곳도 부부가 함께 심은 꽃나무 아래로 정하고 자연수목장으로 해 달라고 했다.
▷그의 꿈은 100세까지 예식장을 운영한 뒤 결혼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얼마나 잘 사는지 전국일주를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결혼시켜준 사람들의 행복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일 텐데 아쉽게도 희망사항에 그쳤다. 요즘 서울 강남의 호텔에서 결혼식을 하면 당일 예식 비용만 500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결혼 비용에 치이는 젊은이들이 결혼 자체를 포기하는 세태다. 백 씨가 반세기 넘게 해온, ‘생애 잊지 못할 날’을 선사하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숙제로 남았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5-02 위안화 파워… 中 대외 결제서 달러 첫 추월

“왜 우리는 자국 통화로 무역할 수 없는가. 달러가 세계 무역을 지배하는 상황을 끝내야 한다.” 지난달 중순 중국을 국빈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상하이 신개발은행에서 이같이 말했다. 중국과 브라질의 ‘탈(脫)달러’ 밀착을 보여주는 상징적 연설이었다. 두 나라는 양국 간 교역과 금융 거래에서 달러 대신 위안화와 헤알화를 이용하고, 달러 결제망인 ‘스위프트’ 대신 중국이 만든 금융결제망을 쓰기로 했다.
▷브라질처럼 중국과의 거래에서 위안화를 사용하는 국가가 늘면서 미국의 달러 패권에 맞서 중국이 추진해온 ‘위안화 출해(出海·국제화)’가 가시적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3월 중국의 대외거래에서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48%로 집계됐다고 블룸버그 산하 경제연구소가 분석했다. 2020년 사실상 0%였던 위안화 결제 비중이 급속도로 늘어 사상 처음 달러를 추월한 것이다. 이 기간 달러 결제 비중은 83%에서 47%로 고꾸라졌다.
▷위안화 몸값을 높인 결정적 계기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금융 제재로 고립된 러시아가 달러, 유로 대신 택한 게 위안화였다. 전쟁 이전만 해도 러시아 수출대금에서 위안화 결제 비중은 1%도 안 됐지만 이제 16%에 달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월 중-러 정상회담 직후 “러시아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와의 결제에서도 위안화 사용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인 중국은 특히 중동 국가들과 손잡으며 ‘페트로 위안’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3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은행에 첫 위안화 대출을 내줬고, 아랍에미리트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대금 결제를 처음 위안화로 했다. 반대로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는 중국 룽성석유화학의 지분 인수를 위안화로 결제하기로 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제안한 대로 사우디와 중국 간 석유 거래마저 위안화로 결제된다면 1975년 이후 원유 결제는 달러로만 한다는 ‘페트로 달러’ 체제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는 셈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달러 중심 국제통화 체계에 의문을 제기한 중국은 2009년 위안화 국제화를 국가 정책으로 삼았다. 최근 미중 패권 전쟁이 심화되고 팬데믹 이후 이어진 ‘킹달러’에 신흥국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위안화 국제화가 가속화되는 분위기다. 위안화가 달러를 대체하는 수준으로 지배력을 키우기엔 갈 길이 멀지만 ‘출해’ 속도만큼은 예사롭지 않다. 한국도 말로만 ‘원화의 국제화’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경제와 외교가 일체가 된 종합전략을 세우고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같은 재앙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도 ‘원화’의 힘을 키워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5-03 오지 말라는 檢, 그래도 간 송영길… 정치인들의 자진 출석

검찰에서 출석요구서를 받으면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정치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수사 상황과 여론을 살피기 위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기 일쑤다. 현역 의원의 경우 “국회 일정이 있다”는 게 불출석 사유의 단골 메뉴이고, “수술이 예정돼 있다”거나 “변호인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출석을 미룬 정치인도 있었다. 반면 정치인이 자발적으로 검찰청에 출석하기도 한다. 그 속에는 검찰과의 치열한 수 싸움이 깔려 있다.
▷형사소송법에는 “수사에 필요한 때” 피의자를 불러서 조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출석 조사 절차의 주도권은 검찰에 있다는 얘기다. 피의자가 출석을 미룰 수는 있지만 계속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반복적인 출석 거부는 체포의 사유가 되고, 도주 및 증거 인멸 우려를 높여 구속될 가능성도 커진다. 이런 한계 속에서 피의자들은 최선의 출석 시점을 고민한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손익도 계산해야 한다. 자진 출석은 ‘내 발로 떳떳하게 나갔다’고 말할 명분이 생긴다는 점에서 하나의 선택지가 된다. 2003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내가 감옥에 가겠다”며 자진 출석하고, 2019년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내 목을 쳐라”라며 검찰청에 나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검찰로서는 정치인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수사팀에서 준비가 덜 됐어도 그냥 돌려보내면 ‘조사받겠다고 온 사람을 왜 조사 안 하냐’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진 출석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조사는 받았다. 2018년 ‘미투’ 의혹이 제기된 뒤 잠적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갑자기 검찰청에 나타났을 때 수사팀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일단 조사를 진행했다.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과 관련해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일 검찰에 자진 출석한 것도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한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검찰은 송 전 대표를 아예 조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한 법조인은 “어지간하면 차라도 한잔 내줬을 텐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한창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는 검찰로서는 전 야당 대표를 문전박대했다는 비판을 들을지언정 ‘패’를 보여줄 수 없는 시점이라는 취지다.
▷유·무죄는 증거에 따라 갈리는 것이지 기습 출석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안 전 지사는 유죄가 확정돼 3년 6개월간 복역한 뒤 출소했고, 황 전 대표는 재판이 진행 중이다. 송 전 대표 역시 증거에 따라 처벌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법적인 문제는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통해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다른 길은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5-04 “휴대폰 압수당하면 집 통째로 하세월 내주는 셈”

압수와 수색은 흔히 붙여 쓰기는 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압수는 증거물이나 몰수가 예상되는 물건을 수사기관이 가져가는 것이다. 압수는 물건이 기준이 된다. 그러나 수색은 물건만이 아니라 신체도 대상이 되고 장소도 대상이 된다. 통상 압수와 수색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된다. 압수수색이라고 하지만 수색이 압수에 앞서니 수색압수라고 해야 순서로는 맞다. 물건 신체 장소를 대상으로 수색을 해봐야 압수할 물건을 찾을 수 있다.
▷압수수색에서 회계장부는 통째로 가져가도 상관없지만 전자정보는 그렇지 않다. 회계장부는 기록매체와 기록된 정보가 분리되기 어렵지만 전자정보는 기록매체와 쉽게 분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컴퓨터를 통째로 수사당국이 가져가는 건 통상 허용되지 않는다. 컴퓨터에 담긴 정보를 시간과 주제어를 특정해 검색이란 방식으로 수색한 뒤 관련이 있는 것만 출력해 압수해야 한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스마트폰이 되면서 크기만 작을 뿐 사실상 컴퓨터나 다름없는데도 수사당국이 통째로 가져가는 것이 관행이다. 법원이 이에 제동을 걸고 나왔다.
▷법원행정처는 1일 전국 영장전담 판사들이 참석한 온라인 간담회를 열어 수사기관이 통화 기간이나 내용을 특정하지 않고 휴대전화 단말기 자체를 압수 대상으로 지정해 영장을 청구하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한 판사는 “휴대전화를 압수당하는 건 집을 통째로 내주는 것과 같다”며 “집은 하루 동안 수색하면 끝나지만 휴대전화는 끝없이 집을 뒤지면서 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압수수색 제도에서 휴대전화가 사각지대에 있다는 말이다.
▷대검찰청은 곧장 입장문을 내고 휴대전화 압수수색 범위를 사전에 설정하는 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휴대전화 전체를 먼저 가져가 수색을 해봐야 범죄에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 압수할 수 있다는 말이다. 휴대전화는 개인에 관한 정보를 거의 다 모아놓은 디지털 집과 같은 것이니 이런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컴퓨터는 시간과 주제어를 특정해서 수색하고 있다. 휴대전화는 다소 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오늘날 휴대전화는 범죄증거의 확보에 중요한 물건이다. 휴대전화는 버리거나 태우거나 부수거나 바꾸거나 초기화하면 증거 인멸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하기 위해서는 검찰이 먼저 범죄 혐의와 관련한 내용만 보고 다른 건 곁눈질하지 않는다는 충분한 신뢰를 줘야 한다. 물리적 집 이상의 영혼의 집 같은 것이 압수수색을 당한다고 생각해보라. 검찰은 수사의 편의만 생각하지 말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발전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5-05 월 7만 원에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하는 ‘도이칠란트 티켓’

지난해 독일에서 대박 난 특가 상품이 ‘9유로 티켓’이다. 한 달간 9유로(약 1만3000원)를 내면 독일 내 거의 모든 열차와 버스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상품이다. 독일 시내 대중교통 기본요금이 3유로이니 세 번만 타면 본전 뽑는 셈이다. 지난해 6∼8월 시범적으로 한정 판매됐는데 5000만 장 넘게 나갔다. 9유로 티켓의 흥행에 힘입어 1일에는 정규 상품인 49유로짜리 ‘도이칠란트 티켓’이 등장했다.
▷월 49유로(약 7만2000원)인 이 티켓이 있으면 고속열차(ICE), 도시 간 특급열차(IC), 고속버스를 제외한 모든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탈 수 있다. 지자체별 월 정액권(100유로)의 절반도 안 되는 값에 열차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독일 전국을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는 열차 3번을 갈아타면 8시간 30분 만에 갈 수 있다.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300만 장이 나갔고, 외국인도 구매 가능해 배낭여행족의 필수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선 9유로 티켓이 등장하기 전에도 ‘1일 1유로 티켓’이나 ‘무상교통’ 실험이 이어져 왔다. 대중교통 이용을 늘려 기후위기를 막자는 취지에서다. 1km 이동 시 탄소배출량이 승용차는 210g인 데 비해 버스는 27.7g, 지하철은 1.53g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에너지 위기에 물가가 폭등하자 서민들 교통비 부담을 덜어줄 겸 전국 단위의 월정액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9유로 티켓 시범 운영 결과 물가상승률이 0.7% 감소하고, 대중교통 이용률은 25% 증가했으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80만 t 줄었다고 한다.
▷무상교통을 도입하는 나라는 늘어나고 있다. 룩셈부르크가 2020년 세계 최초로 대중교통 요금을 폐지했다. 미국 캔자스시티, 프랑스 됭케르크, 에스토니아 탈린시는 무상교통을, 오스트리아는 월정액 제도를 부분 시행 중이다. 정책 효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룩셈부르크는 무상교통 시행 후로도 자동차 이용량이 줄지 않았다. 독일 9유로 티켓 도입으로 걷거나 자전거 타던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기존 대중교통 이용자들의 이동 거리가 늘었을 뿐 자동차에서 대중교통으로 갈아탄 수요는 미미하다고 한다. 재정적 지속 가능성도 따져봐야 한다.
▷국내에선 세종시가 처음으로 2025년 무상버스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버스 이용을 장려해 서울의 두 배 수준인 승용차 수송 분담률을 줄인다는 계획이다. 한국은 대중교통 수송 분담률이 33%로 답보 상태이고, 대도시의 경우 교통 혼잡으로 인한 비용이 연간 43조 원으로 증가 추세다. 독일의 49유로 티켓, 세종시의 무상버스 실험이 혼잡도를 줄이고 기후위기도 막을 대안이 될지 주목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06(토) “외로움, 매일 담배 15개비만큼 해롭다”

“외로움,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저서 ‘고립의 시대’에서 외로움을 ‘몸과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질병’으로 정의한다. 고독함은 만성적 염증과 같아서 몸의 면역력을 약화시키고 회복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영미권 의학계에서는 알약 형태의 외로움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감정 상태인 외로움을 병리적 차원에서 연구, 개선하려는 시도다.
▷미국 공중보건서비스단이 최근 “외로움이 하루 담배 15개비만큼 해롭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이에 따르면 외로움과 고립에 시달리는 이들은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29% 더 높고, 뇌졸중은 32%, 치매는 50% 더 크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비벡 머시 단장은 외로움의 문제를 공중보건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주치의’로 불리는 그는 현장에서 다뤄 온 여러 질병의 공통 요인이 외로움이라는 점을 발견한 뒤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내면의 배고픔이라는 외로움은 특히 육체적으로 노쇠하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고령층을 쉽게 무너뜨린다. 고령층을 10년 이상 추적 관찰한 조사에서 외로운 사람들은 노화 속도가 1년 8개월 더 빨랐다. 인지능력은 20% 더 빨리 저하됐다. 하루 종일 찾아오는 이 없이 우두커니 하루를 보내면서 삶의 자극을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일본에서는 2주 동안 한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노인이 15%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말동무가 돼 줄 AI 로봇이 개발됐다지만 기계음에는 온기가 없다.
▷‘21세기의 감염병’인 외로움을 극복하려면 정부와 기업, 의료계, 미디어, 시민단체 등이 모두 함께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이번에 나온 미국 보고서에도 6개 분야별 권고 사항이 빼곡히 담겼다. 머시 단장은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하루 15분씩 전화하라. 캘린더에 적어 놓고 하라”고 조언한다. 자신도 1년 넘게 지독한 고립감에 고통받던 시절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준 부모와 여동생, 정기적으로 연락해준 2명의 친구 덕분에 이를 극복해냈다고 한다.
▷급속한 도시화와 1인 가구의 증가, 저출산, 고령화, 노인 빈곤 등의 문제가 총체적으로 얽혀 있는 한국에도 외로움은 사회적 숙제다. 지금도 누군가는 차마 남들에게 말 못하는 절절한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럴수록 함께하는 따뜻한 밥 한 끼, 서로에게 건네는 다정한 한마디 안부가 강력한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내 옆의 가족과 친구에게 연락 한 번 더 해보는 건 어떨까. 늘 “괜찮다”고만 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가정의 달 5월은 손을 내밀기에 더없이 좋은 때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5-08(월) ‘금값’ 된 카네이션… 마음 담으면 색종이 꽃인들 어떠랴

예전엔 어버이날이면 거리가 붉게 물들곤 했다. 아버지, 어머니들은 저마다 빨간 카네이션을 단 가슴을 한껏 젖히고 걸었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상받는, 어떤 훈장보다 값지고 자랑스러운 꽃이었을 게다. 자녀의 나이에 따라 꽃의 재질은 달랐다.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은 서툰 가위질로 삐뚤빼뚤 오려 붙인 색종이 카네이션을 수줍게 내밀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화에서 생화로 업그레이드 됐다. 요즘은 꽃다발이나 바구니, 화분으로 많이 드리니 거리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은 변함없지만 카네이션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이달 1∼4일 화훼공판장에서 경매로 거래된 카네이션 물량은 4만4930단으로, 2016년 같은 기간 11만883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때 급감했다가 회복하지 못했다. 요즘은 카네이션 없이 선물만 드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나마 시중에 보이는 카네이션도 국산보단 콜롬비아나 중국 등 수입산이 더 많아졌다.
▷카네이션 인기가 시들해진 데는 꽃값이 부담스럽게 많이 오른 것도 한몫했다. 2016년 청탁금지법 시행의 영향으로 화훼농가 재배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카네이션의 경우 어버이날과 함께 대목인 스승의 날 수요가 한풀 꺾인 게 타격이 컸다. 인건비, 유류비 등 꽃 생산비용도 올랐고 바구니 등 재료값도 많이 뛰었다. 온라인에선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구입하려면 5만 원 이상은 줘야 한다. 몇 개를 구입하려면 부담이 만만찮다. 멀리 있는 부모님께 배송하려면 7000원 정도는 더 얹어야 한다.
▷‘신의 꽃’이란 의미의 카네이션은 서양에서 신성하고 고귀한 사랑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버이날과 연을 맺은 건 1908년 미국의 안나 자비스라는 여성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흰 카네이션을 나눠 준 데서 비롯됐다. 이후 1914년 미국에서 어머니날이 제정돼 카네이션을 드리는 풍습이 자리 잡았고,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도 문화가 전파됐다. 꽃 색깔에 따라 의미는 다르다. 빨간색은 ‘건강을 비는 사랑’, 분홍색은 ‘열렬한 사랑’이다. 흰색은 ‘나의 애정은 살아 있다’는 뜻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단지 의례적일 뿐이라고 여겼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 어버이날에 요양원을 찾은 자식들은 면회가 되지 않아 부모님 가슴 대신 유리창에 카네이션을 달며 눈물을 짓기도 했다. 올해 어버이날엔 카네이션을 가슴에 직접 달아드리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면 어떨까. 단 한 송이라도 흡족해하실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09 SKY 10명 중 6명은 ‘A’… 학점 인플레의 함정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수들의 상당수는 ‘A 폭격기’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A 학점을 후하게 뿌려주는 교수나 강사의 과목은 늘 수강 신청이 쇄도한다. 학점에 한 단계 높은 플러스(+)를 몰아주는 ‘쁠몰’ 강의는 학생들의 평가에서 상위권에 올라 있다. 이런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은 새벽부터 인터넷 수강신청 시스템에서 ‘광클 전쟁’을 벌인다. “점수가 사해보다 짜다”는 불만을 듣는 교수들은 설 자리를 찾기도 힘들 정도다.
▷성적표에서 ‘A’의 몸값이 예전 같지 않다. 교육부 대학알리미 등에 따르면 이른바 SKY로 불리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서 지난해 2학기 전공과목 A 학점을 받은 학생의 비율은 57∼59%에 달했다. 재학생 5000명 이상 4년제 대학을 기준으로 A 학점이 가장 많은 이화여대의 경우 그 비율이 60.8%였다. 10명 중 6명 가까이 A 학점을 받은 것이니 융단폭격 수준이다. 온라인 비대면 수업이 이뤄진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평가 시스템이 기존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뀐 영향이 컸다.
▷학점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는 지적에 교수들은 난감한 표정이다. 학점이 장학금과 편입, 취직 등에 직결되는 현실에서 평가의 엄정성만 외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평가 이의신청 기간이면 “내 인생 책임져 주실 거냐”는 학생부터 장학금이 얼마나 절실한지 읍소하는 학생들의 방문과 이메일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0.1점이라도 더 받으려고 신입생들도 고3처럼 공부하는 게 요즘 대학가 풍경이기도 하다. 치열해지는 경쟁이 학점 부풀리기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학점에 민감해지는 건 해외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미국 뉴욕대에서는 화학 분야의 저명한 노교수가 “강의가 어렵고 학점도 낮게 준다”는 수강생들의 집단 항의로 학교에서 해고된 일도 있었다. 당시 350명의 수강생 중 80여 명이 “지나치게 엄격한 평가가 학생들의 배움과 행복을 저해한다”는 내용의 탄원서에 서명했다. 평가 기준과 학점의 문제를 떠나 팬데믹 기간 저하된 교육의 질 문제에서 Z세대를 교육하는 방식까지 간단치 않은 고민거리들을 대학가에 던졌다.
▷평가는 결국 변별력의 문제다. A 학점으로 도배된 성적표만으로 인재 감별이 어려워진 구인 기업이나 기관들은 결국 다른 기준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학생들은 이미 공모전과 자격증, 각종 대외활동 등 또 다른 스펙 쌓기에 한창이다. 성적 줄 세우기를 넘어 활동 분야를 다양화하는 장점이 있다지만 이 또한 경쟁 부담이 작을 리 없다. 상아탑에서 학문 연구에 몰입해보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모든 인플레이션이 그렇듯 학점 또한 결과적으로는 더 큰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5-10 “이 아이들, 버려진 게 아니라 지켜진 겁니다”

결혼한다거나 아이가 생겼다고 주위에 알리면 축하를 받는다. 입양했다고 하면 대개 ‘대단하다’고 한다. 입양 부모들은 이런 칭찬 아닌 칭찬이 오히려 불편하다. 새 가족을 맞는 기쁨을 알렸을 뿐인데 장하고 힘든 결심을 했다니.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우리 아이는 불쌍한 아이인가. ‘배 아파 낳은 자식과 같을 순 없다’는 따가운 시선도 있다. 혈연 중심의 가족 문화는 공고하고 편견은 여전하다.
▷매년 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올해로 18번째다. 가정의 달인 5월에 한(1) 가정이 한(1) 아동을 입양해 새로운 가정(1+1)으로 거듭난다는 취지다. 중심은 아동이어야 한다. 가정을 위한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가정을 찾아주는 게 입양이다. 입양의 날 하루 전인 10일은 ‘한부모 가족의 날’이다. 입양이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친생부모가 스스로 아이를 지키고 양육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다.
▷2021년 국내외로 입양된 아동은 415명으로, 관련 통계가 시작된 1958년 이후 가장 적었다. 2011년 2464명의 6분의 1 수준이다. 2012년 입양 절차가 엄격해진 이후 줄어드는 추세다. 한때 ‘아동 수출국’이란 오명을 썼을 정도로 해외 입양이 다수였지만 2007년부턴 국내 입양이 더 많아졌다. 국내 입양은 여자아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2021년 국내 입양의 65.5%가 여아, 반대로 해외 입양은 70.4%가 남아였다. 입양아 10명 중 9명은 친부모 기억이 적은 3세 미만이었다.
▷입양 부모들은 사회적 편견이 여전하다고 입을 모은다. 고민 끝에 입양을 포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입양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건 상처다. 출생의 비밀, 어두운 유년기 등이 갈등 전개의 소재가 된다. “역시 피는 못 속여” “사랑받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야 했어요” 같은 대사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입양 아동 학대 사건이 언론에 나오면 전체 입양 부모들을 싸잡아 죄인처럼 바라보는 것도 부담이다. 요즘은 반려동물을 받아들일 때도 ‘입양’이란 표현을 쓰는데, 입양 대신 다른 표현을 쓰는 게 어떠냐는 의견도 있다.
▷아이는 낳은 부모가 키우는 게 가장 좋다. 사정상 어려우면 사회가 아이를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데,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입양이다. 입양 부모들은 배 아파 낳은 아이만 내 자식이라는 건 말 그대로 편견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때로는 산통보다 더한 아픔을 겪고, 때론 세상을 다 가진 행복을 느끼며 비로소 가족이 된다. 입양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지우고 아동 보호 체계를 국제 기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입양아들은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만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11 “국정기조 안 맞추고 애매한 태도 취하면 누구든 인사조치”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년을 맞은 9일 국무회의에서 “공무원들이 전 정권의 탈원전이나 이념적 환경정책에 매몰돼 새 국정 기조에 맞추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면 과감히 인사조치하라”고 말했다. 액면으로는 국무회의에 참석한 장관들에게 부서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공무원들을 과감히 인사조치하라는 얘기였으나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일부 장관들을 향한 경고도 겸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원자력발전산업 육성과 한국전력공사 구조조정 책임을 맡은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4대강 보 책임을 맡은 한화진 환경부 장관 등이 경고 대상으로 지목됐다.
▷장관은 대통령을 보좌하지만 대통령실의 수석비서관들과는 달리 부서권을 갖고 대통령을 보좌한다. 부서권은 장관이 서명하지 않으면 대통령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행정부 내에서 대통령의 전횡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장관의 헌법적 권한이다. ‘애매한 태도에는 인사조치로 대응’이라는 말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는 몰라도 국무회의에서는 부적절하다.
▷대통령은 장관 임면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관이 갖는 부서권의 제한을 뛰어넘을 수 있다. 장관이 대통령의 국정 기조에 대해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조용히 바꾸면 될 일이다. 그렇지 않고 공개적으로 공무원 사회 전체를 겨냥한 것은 복지부동 분위기가 심각한 수준이라 다른 장관이 와서 국정 기조에 맞춰 확고히 일해도 비슷한 사태가 반복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애매한 태도에는 인사조치로 대응’은 장관이 아닌 그 아래 공무원들을 향한 말이라고 해도 적절하지 않다. 합리적 근거 없이 정책 결정을 할 경우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로 사법처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원전 월성 1호기의 조기 폐쇄를 위해 경제성 평가를 조작했다는 이유로 백운규 산업부 장관과 그 아래 국장 과장 서기관 등 4명이 기소돼 이미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거나 재판 중이다. 탈원전이 자의적으로 이뤄져 문제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원전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조치도 규칙을 지켜 추진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지휘한 ‘국정농단’과 ‘적폐청산’ 수사를 겪으면서 공무원들은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걸 두려워하게 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공무원들이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로 처벌된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법처리가 두려워 복지부동하지는 않았다. 공무원들로 하여금 위에서 지시한다고 무조건 따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검찰 수사와 처벌이다. 그래서 ‘국정 기조에 맞추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면 과감히 인사조치하라’는 대통령의 말이 더욱 씁쓸하게 들린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5-12 교사 87% “최근 1년 새 학교 그만둘까 고민했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애가 탄 사람의 똥은 매우 쓰다는 뜻에서 유래한 속담으로 한 사람이 여러 학생을 지도해야 하는 선생 노릇이 그만큼 고되다는 의미다. 요즘 교사들도 다양한 이유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안정적이고 처우가 괜찮은 직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62세 정년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나는 교사가 많다.
▷교사노동조합연맹이 스승의 날을 맞아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 교사 1만여 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교사들의 사기 저하가 심각한 수준이다. 10명 중 7명은 교직 생활이 불만족스럽고, 4명 중 1명은 최근 5년 내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최근 1년 새 학교를 그만둘까 고민한 응답자도 87%나 됐다. 실제로 정년퇴임식을 본 지 오래됐다는 교사들이 많다. 중고교 퇴직 교사의 50∼60%는 명예퇴직자들이다.
▷어느 나라든 교사는 스트레스 많은 직업이지만 원인은 다르다. 경제협력개발기구가 48개국 초중고 교사들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교사들은 학부모 민원 응대와 학생의 신체·언어 폭력으로 인한 스트레스 정도가 유독 높다. 요즘 교사들이 담임 맡기를 꺼리는 이유도 업무량과 책임에 비해 담임수당이 턱없이 적은 데다 학생과 학부모의 교권 침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3D’ 직종이라 자조한다. 학생과 학부모 대하기가 힘들고(Difficult), 때로는 폭력이나 소송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위험하며(Dangerous), 근무환경이 일반 회사보다 열악하다(Dirty)는 뜻이다.
▷대부분 선진국에서 교사는 비인기 직종이다. 일본은 교사 연봉이 일반 회사원보다 높지만 학교는 ‘블랙 직장’으로 꼽힌다. 과중한 업무 부담과 극성스러운 ‘몬스터 학부모’ 등쌀에 못 이겨 정신질환을 이유로 휴직한 공립학교 교사가 2021년 5897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교사가 없어 학급당 학생 수를 늘릴 지경이다. 미국에선 만성적 교사 부족난이 코로나로 악화하자 주 4일 수업을 하고, 학사 학위도 없는 퇴역 군인을 교사로 임용하는 주가 생겨나고 있다.
▷독일은 초등 교사 연봉이 1억 원으로 룩셈부르크 다음으로 높은데도 교사 구인난이 심각하다. 승진과 자기계발의 기회가 적어 진취적인 젊은이들이 매력을 못 느낀다고 한다. 한국도 5년 차 이하 교사들이 “늦기 전에 로스쿨 가겠다”며 퇴직하고, 최고 인재들이 몰려들던 교대에서 자퇴생들이 나오고 있다. 교권을 보호하고 잡무를 줄이는 동시에 새로운 시도와 열정이 보상받는 교직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면서도 사람 키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인재가 많아야 공교육이 산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하는 법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13(토) “빚 깎아 줄 테니 갈라파고스 살리라”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200만 년 전부터 살아온 10여 종(種)의 핀치새는 종에 따라 먹이가 다르고 부리 모양도 다르다. 찰스 다윈이 이를 보면서 진화론의 영감을 얻었다고 해서 ‘다윈의 핀치’라고 불린다. 그런데 핀치들 가운데 ‘맹그로브 핀치’라는 종이 멸종 위기를 맞았다. 지구온난화로 갈라파고스가 따뜻하고 습해지면서 늘어난 흡혈 파리가 맹그로브 핀치의 새끼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 주원인이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동쪽으로 약 1000km 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는 약 9000종의 동물이 살고 있는 생물다양성의 보고(寶庫)다. 수백만 년 동안 대륙과 단절돼 있었고 대형 육식동물이 없어 독자적으로 진화한 고유종이 많다. 하지만 갈라파고스의 상징인 자이언트거북, 바다이구아나 등의 개체 수가 근래 급감하고 있다. 바다에서도 갈라파고스 담셀이라고 불리는 작은 어류가 멸종되는 등 생태계 전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
▷바닷물 온도가 높아지는 엘니뇨 현상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 갈라파고스의 동물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지구온난화로 강한 엘니뇨가 발생하면 플랑크톤이 줄면서 먹이사슬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1982년 발생한 갈라파고스 펭귄의 대량 폐사도 엘니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도 갈라파고스를 위협한다. 지난해에만 28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고 3만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들이 버린 쓰레기와 선박에서 유출되는 기름이 육지와 바다를 오염시킨다.
▷9일 크레디트스위스와 에콰도르 정부는 ‘자연보호-부채 교환(debt-for-nature swap)’ 계약을 체결했다. 16억 달러 규모의 에콰도르 국채를 6억5600만 달러 상당의 환경채권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 미국국제개발금융공사(USIDFC), 미주개발은행(IDB) 등 기관들이 참여해 채권자의 부담을 분산한다. 에콰도르로서는 원금과 이자를 합쳐 약 11억 달러의 부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그 대신 앞으로 18년 동안 3억2300만 달러를 갈라파고스 환경 보전에 투입해야 한다. 이로써 갈라파고스 환경 파괴를 막을 최소한의 재원은 마련됐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양한 생물이 사는 저개발 남반구 국가들은 대부분 서방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 독립 이후에도 정치가 불안하고 경제는 낙후해 환경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는 만큼 선진국의 지원이 절실하다. 에콰도르의 경우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0.1%만 배출했지만 지구온난화의 피해는 고스란히 입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생태계가 무너지면 개도국뿐 아니라 연쇄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타격을 입는다. 개발의 혜택을 누려온 선진국들이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 됐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5-15(월) ‘테라’ 권도형 보석…법무부 호언대로 송환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국가연합으로 세르비아공화국과 몬테네그로공화국으로 구성돼 있다. 가상화폐 테라와 루나를 만든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체포된 포드고리차 공항은 몬테네그로에 있고 재판도 그곳에서 받고 있다. 테라와 루나의 가치는 지난해 5월 폭락했다. 권 씨는 폭락 한 달 전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를 거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까지 갔다. 올 3월 24일 아랍에미리트로 다시 떠나려다 체포됐다.
▷테라와 루나는 미국에 본거지를 둔 가상화폐 거래소를 중심으로 거래됐기 때문에 미국이 사건 관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권 씨는 국적이 한국이고 한국인 피해자가 많기 때문에 한국도 당연히 관할권이 있다. 미국과 한국이 앞다퉈 범죄인 인도 요청을 했다. 범죄인 인도 관련 심리는 권 씨가 체포된 다음 날부터 진행됐으나 그는 12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조속한 송환에서 멀어지는 분위기다.
▷폭락 사태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달에 발생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폐지한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재설치하고 이 사건을 1호로 배당했다. 지난해 7월 법무부 장관으로서는 드물게 미국 실무 출장을 떠나 권 씨 사건을 수사하는 뉴욕남부연방검찰청을 찾았다. 올 1월에는 권 씨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도피 사실을 파악하고 단성한 수사단장을 현지로 보냈다. 그가 세르비아 법무부를 찾았지만 몬테네그로 법무부를 찾은 것 같지는 않다. 권 씨는 두 달 뒤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됐다.
▷권 씨가 폭락 직전 테라와 루나를 팔아치워 비트코인으로 바꾼 뒤 스위스 은행에 예치했다가 약 1억 달러(약 1300억 원)를 현금화했다는 사실을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밝혀내 미국 검찰이 우리나라보다 앞서 권 씨를 증권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반면 우리나라 검찰은 권 씨와는 테라폼랩스의 공동 창업자로 국내에 머물던 신현성 씨에 대해 두 차례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하고 지난달에야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다.
▷ 법무부는 수사도 하나 진척시키지 못하면서 송환의 자신감만 내비쳤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권 씨에 대한 송환이 지체되면서 몬테네그로가 사법절차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인지도 알 수 없게 됐다. 실은 권 씨를 국내로 송환해 재판에 넘긴다 해도 미국처럼 엄벌에 처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신 씨 영장이 거듭 기각된 데서 보듯 미국과 달리 가상화폐가 증권으로 인정되지 않아 증권 사기의 적용이 어렵고 적용돼도 형이 미국처럼 중하지 않다. 이제는 어느 나라로든 조속한 송환이 이뤄져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급해졌다.
05-16 태국 왕실과 군부 동시에 심판한 ‘정치적 지진’

2016년 10월 방콕 근처 골프장에서 일본인 20명이 태국군 차량 3대에 실려 군 시설로 연행된 적이 있다.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 국왕의 국상 애도 기간에 먹고 마시며 떠드는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다행히 ‘엄중 주의’를 받고 풀려났다. 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게 왕실모독죄를 처벌하는 나라다. 왕과 왕비, 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협한 사람은 최장 15년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그럼에도 와치랄롱꼰(라마 10세) 현 국왕의 각종 기행과 사생활 논란이 끊이지 않자 그토록 금기시되던 군주제 개혁도 정치적 도마에 올랐다.
▷14일 치러진 태국 총선에서 왕실 개혁과 군부 타도를 내세운 진보정당 전진당(MFP)이 하원 500석 중 152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됐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이 이끄는 프아타이당도 141석으로 선전했지만 2001년부터 유지하던 제1당 자리를 빼앗겼다. 군부 축출을 내건 양대 야당이 60% 가까운 하원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반면 육군참모총장 출신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창당한 룸타이상찻당(UTN)은 36석에 그치는 등 군부 계열의 정당은 모두 80석에 못 미쳤다. 무능한 군부에 대한 철저한 심판, 신뢰 잃은 왕실에 대한 깊은 회의, 나아가 탁신 가문의 포퓰리즘에 대한 실망까지 태국 민심의 현주소를 보여준 결과였다.
▷외신이 ‘정치적 지진을 일으켰다’고 평가한 전진당은 43세의 피타 림짜른랏이 이끄는 신예 정당이다. 피타는 기업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 대학 졸업 후 부친이 경영하던 쌀겨기름회사를 잠시 운영했고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석사를 땄다. 동남아 모빌리티 플랫폼 ‘그랩 타이’의 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태국 선거사에서 처음으로 왕실모독죄 폐지를 공론화한 그는 징병제 폐지와 동성결혼 합법화 같은 급진적 정책까지 내세우며 2030세대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뛰어난 토론과 연설 솜씨로 청년층에서 록스타급 인기를 누리고 있고, 총리 후보 지지도 조사에서도 진작에 1위를 예고했다.
▷피타는 어제 트위터에 “여러분이 동의하든 아니든, 제게 투표했든 아니든 저는 여러분의 총리가 되어 봉사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가 총리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2017년 헌법 개정으로 총리 선출에는 하원 500명 외에 군부가 임명한 거수기 상원 250명도 참여한다. 상하원 합동 투표에서 과반인 376석 이상을 얻어야 하지만 전진당과 프아타이당 두 야당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군부 주도 연립정부에 참여했던 품짜이타이당 등 중도 정당을 끌어와야 한다. 당장 군주제 개혁에 대한 다른 정당들의 경계심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전진당의 최대 숙제가 됐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5-17 불효자도 무조건 상속… 헌재 심판대 오른 유류분 제도

민법상 재산 상속에 있어 ‘유류분’ 제도의 존재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2019년 구하라 씨 사건이었을 것이다. 당시 구 씨가 숨지자 20여 년 전 가출했던 친모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상속분을 달라며 소송을 걸었다. 자식을 버리고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던 친모가 염치없게 재산을 요구한다며 대중은 공분했지만 법적으론 어쩔 수 없었다. 소송 끝에 구 씨가 남긴 재산의 40%는 친모의 몫이 됐다. 유류분을 요청할 수 있는 상속인을 제한하는 ‘구하라법’은 20대 국회에서 자동 폐기됐고, 21대 국회에선 아직 계류 중이다.
▷유류분은 상속인인 배우자와 자녀, 부모, 형제자매에게 법정상속분의 2분의 1∼3분의 1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고인 생전에 상속 포기 각서를 썼더라도 유류분은 인정될 만큼 강력한 제도다. 그러나 재산 형성 기여도, 부양 여부 등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적용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최소한 구 씨의 친모 같은 사례나 불효자는 제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유류분 소송이 급증하는 추세 속에서 현행 법조항만으로 판결 내리는 건 부당하다며 수십 건의 위헌심판제청과 헌법소원이 헌법재판소에 들어가 있다. 헌재는 17일 유류분 관련 첫 공개변론을 갖는다.
▷1977년 생긴 유류분 제도는 유산이 아들, 특히 장남 위주로 분배되는 것을 막고 부인과 딸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여성 권리 향상을 위한 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산업화와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당초 법의 취지와 어긋난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우선 여성이 상속에서 소외되는 일이 많이 사라졌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부모가 숨질 때 자녀가 한창 일할 40∼50대여서 생계 보장용 유산 상속의 필요성이 많이 줄었다. 결혼 안 한 1인 가구 문제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 혼자 생계를 꾸리는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형제자매가 상속을 받는데, 생계가 독립된 형제자매에게 유류분을 줘야 하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서류상 가족이란 이유로 고인과 불화했거나 연락이 없던 이에게 상속이 이뤄지면 가족관계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 공익 목적으로 사회에 유산을 남기고 싶어도 유류분 때문에 온전한 기부가 힘들어지는 것도 폐해다. 영국과 미국은 유류분 없이 유언대로 집행한다. 유류분을 인정하는 나라도 미성년자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상속인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유류분은 한때 시대를 앞서갔으나 이젠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일정 부분 맞지 않는 제도가 됐다. 지금처럼 획일적 비율로 나눠 주지 말고 부양과 양육 기여도, 경제 상황에 따라 합리적으로 분배돼 가족을 나 몰라라 한 불효자가 횡재하는 경우는 없었으면 한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5-18 ‘곤조 저널리즘’의 파산

‘모든 세대는 그 세대만의 저널리즘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소셜미디어 시대는 바이럴(viral)과 곤조(gonzo) 저널리즘의 시대다. 그런데 가볍고 말랑한 기사로 입소문을 유도하는 바이럴의 대명사 ‘버즈피드’가 뉴스 부문을 폐업한 데 이어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의견을 앞세우는 곤조의 ‘바이스 미디어’마저 파산 신청을 했다.
▷전 세계 온라인 방문자 1위였던 버즈피드가 뉴스 사업을 접은 게 지난달 20일.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몰락한 바이스는 버즈피드보다 서너 배 큰 온라인 미디어 그룹이다. 한때 기업 가치가 57억 달러(약 7조6000억 원)였으나 고작 2억2500만 달러에 팔릴 전망이다. 두 회사 모두 소셜미디어 광고에만 매달리다 재정난에 빠졌다. “전통 언론을 읽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를 사로잡은 대성공 사례”라더니 충성도 낮은 뜨내기 독자들만 붙들고 있었던 셈이다.
▷바이스 성공 비결의 핵심이 곤조 저널리즘이었다. 곤조의 어원에 대해선 ‘바보’를 뜻하는 이탈리아어(gónzo)나 ‘미련하다’는 의미의 스페인어(ganso)에서 유래했다는 설까지 분분한데 놀라울 만큼 주관적이고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2013년 북한에 거액을 주고 성사시킨 데니스 로드먼의 방북 보도와 2014년 테러단체 IS 동행 취재기가 대표적이다. 바이스는 “우리의 에토스인 주관성이 북한과 IS의 실체를 드러냈다”고 했지만 위험한 ‘스턴트 저널리즘’으로 극단 세력에 이용만 당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통 언론의 객관적 보도에 도전장을 내미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주관을 배제한 보도는 불가능할뿐더러 문제 해결도 못 한다는 생각에서다. 주의 주장을 앞세우는 ‘주창주의(advocacy)’나 ‘단언적(assertive)’ 저널리즘, 방관자가 아닌 실천자가 되자는 ‘시민(civic)’ 저널리즘이 그런 시도인데 곤조 저널리즘처럼 오래가지는 못했다. 객관주의에 대한 건전한 반성에서 벗어나 사실을 무시하고 정파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줄줄이 외면받았다.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에서 큰 목소리를 내던 폭스뉴스와 CNN 간판 앵커가 얼마 전 나란히 퇴출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0년간의 미디어 연구를 통해 검증된 사실이 있다. 언론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생각거리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미국 언론학자 톰 로젠스틸이 객관주의 보도원칙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객관적 보도는 ‘입장이 없는 관점(view from nowhere)’을 지향한다. 기자 개인의 주관에서 출발하더라도 이를 배제하고 다양한 시각을 담아내며 종착점에 이르자는 것이다. 모든 세대가 새로운 저널리즘 실험으로 반짝 주의를 끌다 사라지는 동안 지금껏 살아남은 건 객관주의 저널리즘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19 다시 확인한 ‘G8’의 높은 문턱

“G7은 죽었다. 현재와 같은 구성으로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유럽의 한 싱크탱크는 2018년 내놓은 보고서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맹폭했다. “오늘날의 G7은 과거의 유물”이라며 더 대표성을 띤 새 멤버들의 가입을 촉구했다. 캐나다 샤를부아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보호무역주의와 관세장벽 등을 놓고 회원국 간 갈등이 여과 없이 노출된 직후였다.
▷기존의 G7에 한국과 인도, 호주, 러시아를 참여시켜 G11으로 키우는 방안이 거론되기 시작한 게 이때였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G7은 낡았다”며 새로 참여할 후보국으로 4개 나라를 콕 찍어 언급했다. 당시 그의 발언은 한때 G8 멤버였다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침공으로 퇴출당한 러시아를 복귀시키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다른 회원국들의 공개 반대로 G7 확대 논의는 흐지부지됐지만, 한국의 가입 가능성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G7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을 회원국으로 둔 비공식 국가 협의체다. 자유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를 공유하는 ‘선진국 클럽’으로 국제 경제 및 외교 규범을 논의하는 리더 그룹이라는 점에서 가입 시 그 상징성은 대단하다. 신흥 경제국들이 포함된 G20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듯 보이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G20는 몸집이 비대하다는 지적과 함께 회원국인 러시아, 중국과의 갈등으로 한계에 봉착해 있다. 유엔마저 무력화한 상태에서 결국 서구 선진국들은 다시 G7 중심으로 뭉치는 분위기다.
▷급변하는 글로벌 지형을 반영해 G7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요구는 커지고 있다. 브라질까지 포함해 G12로 만들자는 식으로 다양한 조합과 후보 국가가 거론된다. 민주주의 국가 10개국을 모은 ‘D10(Democracy10)’ 창설이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다만 소수 결속으로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기존 회원국들의 벽은 여전히 공고하다. 한국의 G7 가입을 놓고는 특히 일본의 견제가 만만찮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 유일 회원국으로서의 영향력이 약화할 것이라는 일본의 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은 19∼21일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옵서버 국가로 초청됐다. 한국 정상으로는 역대 네 번째 참석인 데다 한일 관계의 훈풍까지 더해져 G8로의 확대 기대감이 커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회원국 변화와 관련한 어떤 논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고 선을 그었다. 아직은 높은 국제사회의 문턱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보다 긴 호흡으로 준비 전략을 다시 다듬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단독 드리블보다는 다른 후보국들과 연대해 ‘G 멤버’ 가입의 문을 넓히는 식으로 전략을 다양화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5-20(토) “3차 세계대전 막을 시간 5~10년뿐”… 키신저의 경고

이달 말 100세 생일을 맞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지금까지 중국 방문 횟수가 50회를 넘는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방중 성사를 위한 잠행 등 역사적 행보가 포함된 기록이다. 그는 마오쩌둥이 현안 질문에 대해 “나는 철학자여서 그런 주제는 안 다룬다”며 피하다가도 대만에 대해서는 단호한 화법을 구사하던 순간을 아직 기억한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상하이 공동성명’의 마지막 한 줄을 놓고 밤을 꼴딱 새우며 끙끙대던 때도 잊지 않고 있다.
▷키신저는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며 강 대 강 충돌로 치닫는 미중 갈등을 진단했다. 3차 세계대전 가능성을 경고하며 “이를 막을 시한이 5∼10년에 불과하다”고 전망했다. 미국의 역대 최고령 내각 고위 인사로 한 세기 동안 미중 관계를 지켜봐온 그의 분석은 군사 전문가들이 전쟁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것과는 다른 무게감을 갖는다. 역사의 산증인인 그가 1차 세계대전 상황을 근거로 대는 것에 토를 달 수 있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키신저가 보는 미중 관계의 뇌관은 역시나 대만이다. 대만을 우크라이나처럼 다루다간 결국 전 세계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매섭다. 양국 간 충돌이 이르면 5년 안에 벌어질 수 있다고 보는 근거는 인공지능(AI)이다. 지리적, (타격)정확성 한계 등으로 적군을 궤멸할 능력이 없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AI가 모든 군사적 한계를 빠르게 없애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중 양국이 참여하는 ‘AI 군축’ 논의를 제언한다. 고령에도 ‘AI의 시대’라는 책을 쓰며 첨단기술 공부를 지속해온 키신저다.
▷미중 데탕트 시대를 주도했던 그답게 해법은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우선’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중국 지도자들의 목표는 세계 지배라기보다는 자국의 이익 극대화로, 히틀러의 야욕과는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유교 사상에 바탕을 두고 중국의 대내외 정책을 이해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신뢰 구축과 협력을 강조하는 접근법은 매파 일색인 미국 행정부, 의회와는 결이 다르다.
▷이번 인터뷰는 이틀에 걸쳐 총 8시간 동안 진행됐다고 한다. 키신저는 앞서 CBS방송과도 ‘100세 기념 인터뷰’를 하고 포럼 연사로 나서는 등 대외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중 충돌 외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가져올 악영향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하고 있다. 이젠 거동이 불편하고 말조차 어눌하지만 시대와 영역을 넘나드는 그의 통찰은 울림이 있다. “파괴적 충돌을 막을 방법은 단호한 외교뿐”이라는 키신저의 고언에 백악관과 중난하이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5-22(월) 10대도 40대도 청년… 고무줄 나이 기준

나이가 들어도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믿고들 산다. 그런데 40세가 넘어도 진짜 청춘으로 대접해주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지난달 서울 도봉구는 서울 자치구론 처음으로 청년 연령을 19∼45세로 높였다. 서울시에선 만 40세부터 중장년 일자리 지원 대상이다. 도봉구의 40∼45세는 청년인 동시에 중장년인 셈이다. 옛날에는 열 살 차이까진 친구로 쳐서 내 친구가 아버지 친구인 경우도 간혹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10대 자녀와 40대 부모가 나란히 ‘청년’으로 불리게 됐다.
▷2020년 8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청년기본법’은 청년을 만 19세 이상 34세 이하로 규정한다. 다만 다른 법령과 조례에선 청년 연령을 다르게 적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제각각이다. 연령 기준이 지나치게 경직적이면 행정 편의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이유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상 청년은 15∼29세인데 지방공기업 채용 땐 34세까지 늘려준다. 중소기업인력지원법과 조세특례제한법은 34세, 중소기업창업지원법과 전통시장법에선 39세까지를 청년으로 본다.
▷지자체 단위로 가면 ‘40대 청년’이 흔하다.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조례로 ‘40대 청년’을 규정한 곳이 58곳에 이른다. 전남 고흥군, 경북 봉화군, 충북 괴산군, 경남 창녕군 등은 49세까지 청년이다. 전남 장수군에선 15∼49세가 모두 청년이다. 고령자고용촉진법에서는 만 50세부터 ‘준고령자’이니, 이들 지자체에선 청년이다가 한순간에 고령자가 되는 셈이다. 광역시도에선 지난달 전남도가 처음으로 45세로 올렸다. 전남 강진군은 55세까지 청년으로 규정했다가 지나치다는 지적에 지난해 말 45세로 낮추기도 했다.]
▷지자체들이 청년 연령을 높이는 것은 고령화와 인구 감소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지원할 청년이 없다는 것이다. 취업·주거 등 청년 지원 정책의 대상자를 확대하고 인센티브를 강화해 인구 유입을 유도하겠다는 복안이기도 하다. 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를 반영한 선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중위 연령(총인구를 연령별로 세워 가운데 사람의 나이)은 2003년 33.5세에서 올해 45.6세로 상승했다.
▷하지만 40대까지 모두 청년이라고 규정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막 사회에 진출하려는 20대와, 사회생활을 충분히 한 40대가 원하는 것이 서로 달라 청년정책의 방향성이 불분명해질 수 있다. 한정된 청년예산을 놓고 세대 간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다. 나이 때문에 청년 지원에서 배제된 연령층을 위해서라면 다른 복지 정책을 통해 사각지대를 메우면 된다. 너도나도 지원이 필요하다고 ‘우리 모두 청년’이라고 선언하는 게 맞는 건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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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초중 부모 90% 이과 희망… 문과 위기 어떻게 극복할까

종로학원이 최근 온라인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1395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열 중에 아홉이 자녀의 이과 진학을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학계열 선호도가 공학계열과 순수 자연과학계열 선호도를 합친 것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아무튼 문과 선호도가 10% 안팎으로 낮아진 것은 틀림없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의 개시와도 관련이 큰 듯하다.
▷문과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문사철(文史哲)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文)은 글을 읽고 쓰는 걸 말한다. 대학의 외국어학과들이 문학이 아니라 외국어를 가르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AI가 높은 수준의 번역을 해낸다면 문학과는 글을 읽고 쓰는 문 자체를 가르치는 데 주력할 수 있다. 사회과학도 텍스트를 읽는 데 급급하지 말고 적극적인 글쓰기에 나서야 한다. AI가 회사 말단사원의 허드레 사무일을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말단사원 때부터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고 창의성은 글을 쓰는 훈련에서 비롯된다.
▷AI 시대에 인식론과 윤리학, 즉 철학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해졌다. AI는 종종 아무 대답이나 그럴싸하게 지어낸다. 물론 그럴싸하게 지어내는 것은 인간도 한다. 그러나 AI는 인간과 달리 그럴싸하게 지어낸다는 의식 없이 태연하게 그렇게 한다. 궁극적으로 AI는 윤리 의식이 없다. 윤리 의식을 갖고 기계를 통제하는 건 인간이다. 마블 영화에서 아이언맨의 적수인 무기 생산 업체 최고경영자(CEO) 저스틴 해머처럼 파괴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인문학도에게 과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도에게도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재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AI 시대 전에도 그렇고 후에도 그렇다. 게다가 역사 공부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 카가 말했듯이 어떤 목적을 떠나 그 자체로 흥미로운 시간 여행이다. AI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 준다면 남는 시간은 공간적인 여행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여행에도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
▷법학과 경영학은 본래 문사철에 속하지 않는, 직업을 갖기 위한 학문이다. 법학을 대학원 과정으로 올려보냈듯이 경영학도 대학원 과정으로 올려보낼 필요가 있다. 법대가 전문대학원이 된 뒤 우수한 문과생들을 흡수하는 곳이 경영대다. 경영대까지 전문대학원이 된다면 우수한 문과생들이 문사철로 대학 과정을 이수한 후 법학전문대학원이나 경영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하게 함으로써 인문학적 식견을 갖춘 법률가나 경영가를 키우면서 문사철을 살리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5-24 체납 세금 안내려고 로또 1등 당첨금까지 빼돌린 철면피들

“신도 있고 왕도 있지만 더 무서운 건 세금징수관이다.” 고대 수메르인의 격언 중 하나였다는 이 한 문장은 세금 납부가 얼마나 오래된 인류의 숙제였는지를 보여준다. 세금을 걷으려는 국가와 어떻게든 이를 피해 보려는 납세자들의 숨바꼭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다. 그 과정에서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각종 ‘창의적 능력’이 발현됐다지만, 탈세가 처벌 대상인 범죄라는 사실 또한 역사적으로 예외가 없었다.
▷로또 1등에 당첨되고도 연체된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버티던 체납자가 최근 국세청에 적발됐다. 그는 20억 원이 넘는 당첨금을 받고도 내야 할 수억 원의 연체 세금을 처리하지 않았다. 대신 돈을 가족 계좌로 이체하거나 현금, 수표 등으로 인출하며 빼돌리려 했다고 한다. 이처럼 1등 혹은 2등 거액 로또에 당첨됐는데도 밀린 세금을 내지 않고 있다가 적발된 이는 36명에 달한다. 없던 돈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도 그걸로 세금은 내기 싫다는 심보다.
▷국내 세금 체납자는 현재 132만 명, 밀린 체납액은 100조 원이 넘는다. 내야 할 세금이 1억 원 이상 쌓여있는 사람만 16만 명에 달한다. 사업 실패 등 안타까운 사연도 없지는 않겠으나 체납자 중에는 고의로 재산을 은닉하고 호화 생활을 누리는 사람도 상당수다. 고액 체납자이면서도 개인금고에 현금 4억 원을 숨겨놨거나, 배우자 명의로 재산을 돌려놓고 부촌의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례가 이번 국세청 조사에서 줄줄이 나왔다. 하루 단위로 늘어나는 연체료 따위는 신경 안 써도 되는 부자들이 아니고서야 보이기 힘든 배짱이다.
▷‘유리지갑’ 직장인들이야 고민할 여지조차 없다지만 숨길 구멍이 있는 경우엔 절세와 탈세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올 초에는 유명 웹툰 작가와 프로게이머, 운동선수 등이 줄줄이 세무조사를 받았다. 법인 명의로 산 고가의 슈퍼카를 사적으로 굴리고, 친인척을 직원으로 등록해 허위 인건비를 지급하는 등 각종 수법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헌법에 명시되고 교과서로 가르치는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를 우습게 본다. 탈세범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의 전례들은 이들을 더 대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최근엔 해외 암호화폐 시장 등을 이용해 조세당국의 추적을 빠져나가는 지능범들도 많아지는 추세다. 조세 정의가 무너지면 “성실한 사람들만 세금을 뜯긴다”는 반발이 커질 수밖에 없다. 혈세 징수에 앞서 효율적으로 투명하게 쓰이는지부터 입증하라는 항변은 정부도 한번 더 들여다볼 부분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점들이 악의적 체납이나 탈세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죽음과 세금’이라고 했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누구도 세금을 회피하지 못하는 세상이 돼야 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5-25 美 “SNS도 어린이 안전장치 카시트처럼 의무화해야”

미국 하이테크 업계 거물들의 자녀교육 방식은 ‘로테크(low-tech)’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는 아들의 유튜브 이용 시간을 정해 놓았고,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도 딸이 13세가 될 때까지 페북을 금지하겠다고 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집안은 ‘테크 프리’ 지대였다. 미국 공중보건정책 수장이 모든 미성년자의 소셜미디어(SNS) 사용을 엄격히 규제하자는 권고 보고서를 냈다. 흡연, 에이즈, 마약, 총기에 이어 SNS가 청소년에게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비벡 머시 미 공중보건단장이 어제 발표한 보고서에는 104개 각주와 함께 미성년자의 SNS 이용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주요 연구 결과가 망라돼 있다. SNS는 13세부터 가입할 수 있지만 미국 8∼12세의 40%가 SNS를 사용한다. SNS를 통해 표현력을 기르고 다양한 집단과 교류하는 장점을 소개한 연구도 있지만, 또래집단의 압력에 취약한 성장기에 지나친 SNS 사용은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연구들이 훨씬 많다.
▷SNS 이용 시간이 하루 3시간을 넘어가면 우울이나 불안 증세가 두 배로 늘어나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겪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특히 10대 소녀들이 취약하다. SNS를 쓸수록 자존감이 떨어지고 외모에 대한 불만이 많아지며 섭식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10년 인스타그램 출시 이후 미국 영국을 포함한 17개국 10대 여성의 극단적 선택이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비디오게임에 빠져 있는 10대 남성과 달리 우울감을 유발하는 SNS를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콘텐츠의 유해성도 문제다. 자해하는 모습을 생중계하면 모방 행동을 초래할 위험이 높다. 최근 서울에서도 10대 여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모습을 SNS로 생중계한 후 관련 신고가 30% 늘었다. 머시 단장은 장난감 제조회사나 자동차회사가 신상품 출시 전 안전성 검사를 받고, 어린이 카시트 이용을 의무화하듯 SNS도 미성년자용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이용 규제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유타주는 올 3월 미국에선 처음으로 18세 미만은 SNS 가입 시 부모의 동의를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다.
▷SNS를 쓰는 아이들이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SNS가 인간관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예전엔 관심과 애정이란 가족과 몇 안 되는 친구로부터 받는 것이었으나 SNS 도입 후엔 먼 곳에서 폭넓게 받는 변덕스러운 것으로 바뀌어 정서적 불안감을 느낀다는 설명이다. 자녀가 부모나 가까운 친구와 안정적인 유대관계 속에서 단단한 심지를 갖도록 돕는 것이 SNS 역병 시대 최대 면역이 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26 오복 중 으뜸이라는 ‘이모님 복’…동남아 가사도우미는?

좋은 ‘이모님’ 만나는 건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한 일이다. 워킹맘에겐 ‘이모님 복이 오복 중 으뜸’이라고 한다. 가사도우미 얘기다. 미덥기는 친정엄마 같은 한국인 이모님이 최고지만 조선족 도움을 받는 집이 많다. 싸고, 입맛 비슷하고, 중국어 조기교육이 가능하며, 육아와 살림에 이것저것 ‘조언’을 삼가기 때문에 편하다. 올 하반기에는 서울에서 동남아 출신 이모님들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는 방문취업(H2) 비자로 들어온 중국동포만 가사도우미 일을 할 수 있다. 자녀 영어 교육을 위해 알음알음 필리핀 도우미를 고용하는 집도 있는데 불법이다. 고용노동부와 서울시는 ‘의사소통이 쉽거나’ ‘정서적 거부감이 적은’ 나라 출신을 가사도우미로 시범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월 100만 원 이하” “싱가포르에선 월 38만∼76만 원” 등의 주장이 있지만 최저임금법이 적용되면 급여는 월 210만 원 수준이 된다. 한국인의 경우 주5일 출퇴근 도우미가 250만∼300만 원, 입주는 350만∼400만 원이다.
▷조선족 이모님에겐 익숙해도 동남아 이모님에 대해선 걱정들이 많다. 말도 문화도 달라 서로 불안과 불편을 호소할 가능성이 높다. 근무 여건이 좋은 다른 일자리로 이탈해 불법 체류자가 될 우려도 있다. 정부가 참고하는 나라가 싱가포르 홍콩 대만 일본인데, 제도 시행의 역사가 긴 싱가포르 홍콩 대만은 도우미 인권침해 사건이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4개국 모두 제도 도입 후 출산율에 큰 변화가 없었다.
▷해외 이모님 모시기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돌봄 공백은 심각하다. 워킹맘들은 육아휴직이 끝나면 첫 번째 퇴사 위기를 맞는다. 국공립 어린이집은 1년 넘게 기약 없는 대기 줄을 타야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이 두 번째 위기다. 등하교 시간에 정부의 ‘아이 돌봄 서비스’를 쓸 수 있지만 역시 대기 줄이 길고 맞벌이 부부는 소득 기준에 걸려 신청도 못 한다. 등하교 이모님을 쓰면 월 120만∼150만 원이다. 이렇게 육아와 가사 고비를 못 넘기고 집에 들어앉은 여성이 698만 명이다.
▷돌봄 공백은 정책 한두 개로 메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존 돌봄 체계를 업그레이드하고 선택지도 넓혀야 한다. 조선족 이모님을 더 모셔오거나, 국내 건강한 고령층을 돌봄 인구로 흡수하는 방법도 있다. 필리핀은 해외에 나가 가사도우미 하려면 국가자격증을 따야 한단다. 신뢰할 만한 인력송출제도를 갖춘 나라를 대상으로 가사도우미 도입을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아이 낳고 키우는 일이 남다른 복을 타고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이 됐으면 좋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27(토) 美 대중 정책라인 줄교체… 바이든의 해빙 신호?

1979년 미중 수교 이래 역대 미국 대선은 ‘중국 때리기’의 경쟁장이었다. ‘베이징의 도살자’라고 비난한 빌 클린턴,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한 조지 W 부시 등 역대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한껏 중국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였다. 하지만 당선 뒤엔 그 톤을 누그러뜨리며 중국과의 교류에 집중하곤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이후부턴 ‘선거 때 비판, 재임 중 협력’ 공식마저 깨졌다. 매사 발언에 신중한 조 바이든 대통령도 대선 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민주주의의 뼈가 없는 깡패”라고 했고, 취임 이래 트럼프 시절의 대중국 견제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그랬던 바이든 행정부가 역대 최악이라는 미중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어제 워싱턴에선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 간 회담이 열렸다. 양국이 격화된 경제전쟁에 상호 우려를 표시하는 수준이었다지만 일단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데 의미를 두는 분위기다. 최근엔 미국의 대중국 외교라인이 잇따라 교체됐다. ‘차이나 하우스’로 불리는 중국정책 총괄팀 책임자인 릭 워터스 국무부 부차관보가 다음 달 물러나고, 앞서 중국 외교를 이끌던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이 은퇴를 선언했다. 로라 로젠버거 백악관 중국·대만 담당 선임국장도 대만 주재 미국대사관 격인 미국대만협회(AIT) 회장으로 옮겼다. 중국도 5개월간 비어 있던 주미 대사 자리에 온건파 셰펑 외교부 부부장을 보냈다.
▷이런 움직임이 바이든 대통령의 예고대로 ‘해빙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미국은 그간 중국 견제 노선을 강화하며 대결과 경쟁, 협력을 함께 강조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되 대결은 피해야 하며 충돌 방지를 위한 가드레일을 세우자고 했다. 사실 그런 기조 아래 지난해 말 미중 정상은 인도네시아 발리 회담에서 고위급 대화의 재개를 약속했다. 하지만 올해 초 중국 정찰풍선의 미국 영공 침입과 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미국 방문으로 양국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모든 것이 끊겼다. 결국 6개월 가까이 늦춰진 미중 대화가 이달 초 양국 외교안보 사령탑 간의 오스트리아 빈 회동을 계기로 서서히 재개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향후 미중 관계를 낙관하긴 이르다. 미국은 최근 ‘디커플링(공급망 단절) 아닌 디리스킹(위험 제거)’이라는 유럽연합(EU) 측 접근법을 수용했다. 다만 그런 정책 전환도 어차피 불가한 공급망 분리 대신 첨단기술 접근 차단 같은 핵심과제로 좁혀 정교한 실행전략을 가동하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더욱이 이제 미국은 본격적인 대선전에 들어간다. 공화-민주 양당이 드물게 초당적 합의를 이룬 대중 강경노선에서 벗어나는 어떤 유화 제스처도 국내정치의 제물이 될 수 있다. 이래저래 엇갈리는 신호와 전망 속에서 미중 간 갈등관리 외교가 어떻게 전개될지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요즘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5-29(월) 유명화가 그림과 명품시계 무더기로 사들인 라덕연

세계적 예술 작품이 국내에서는 ‘검은돈’의 창구로 애용된 일이 적지 않다. 각종 비리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화제에 오르내리는 유명 작품이 한둘 아니다. 10년 전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를 압수수색했을 때는 박물관 하나 차릴 정도의 ‘대어’들이 쏟아졌다. 미술품은 누가 얼마에 샀는지 알기 어렵고, 과세 대상에서도 비켜나 있어 범죄 수익 은닉이나 비자금 조성, 편법 증여 등에 안성맞춤으로 여겨져 온 탓이다. 최근엔 고가의 명품이나 시계가 이런 목록에 첨가되는 추세다.
▷SG증권발(發) 주가 폭락 사태의 몸통인 라덕연 H투자컨설팅업체 대표도 이 같은 행태를 흉내 냈다. 보도에 따르면 라덕연 일당은 서울 강남의 한 갤러리에서 투자자들에게 그림을 구매하도록 하고, 실제 그림은 보내지 않는 방식으로 투자 수수료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삼천리·다우데이타 등 8개 상장기업의 주가를 불법 시세 조종으로 띄워 7305억 원의 부당 이득을 벌어들였고, 이 중 수수료 명목으로 1944억 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자금 세탁소’로 활용된 이 갤러리를 압수수색해 라 대표 일당이 소유한 유명 그림 수십 점을 확보했다고 한다.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의 작품부터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앨릭스 카츠의 그림, 영국 출신의 팝아트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이 포함됐다. 호크니는 2018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예술가의 초상’이 생존 작가 작품으로는 최고가(9031만 달러)에 낙찰되며 ‘가장 비싼 화가’ 타이틀을 얻었는데, 검찰이 이번에 압수한 호크니 작품들은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유명 미술품 외에 검찰이 압수한 라 대표의 명품 시계도 여럿이다.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등 시가 2억∼7억 원을 호가하는 스위스 하이엔드 브랜드 시계들이다. 라 대표 회사 직원이 보관하던 에르메스 체스판, 루이비통 테이블, 롤스로이스 차량 등도 함께 압수된 것으로 전해졌다. 라 대표 일당이 수수료 등 범죄 수익으로 고가의 미술품과 사치품을 대거 사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라덕연 일당은 단기간에 주가를 띄워 한탕 하고 튀는 식의 작전이 얼마나 더 교묘해지고 과감해졌는지 보여준다. 일반적 주가 조작 수법에서 진화해 다단계 방식으로 투자 규모를 키웠고 공매도가 안 되는 종목, 차액결제거래(CFD)를 통한 거래 등 법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공개된 용의자나 다름없었던 라 대표는 방송에 나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뻔뻔함을 보이다가 최근에야 구속됐다. 세계 자본시장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일들이다. 민낯을 드러낸 한국 자본시장을 재정화하는 작업이 시급한 이유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5-30 날개 접은 양양공항… 그런데도 지방 신공항 10곳 추진 중

해외에는 유명 정치인이나 자국이 자랑하는 인물의 이름을 내건 공항이 꽤 많다. 한국에는 사람의 이름을 딴 공항은 없다. 다만 공항 유치에 공이 큰 정치인의 이름을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화갑 공항(무안)’ ‘김중권 공항(울진)’ ‘유학성 공항(예천)’ 등이다. 칭송의 의미는 아니다. 수요를 면밀히 따지기보다는 정치 논리를 앞세워 추진했던 공항의 끝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15대 총선을 앞둔 1995년 말 건설 계획이 확정돼 ‘김영삼 공항’으로도 불리는 강원 양양국제공항도 마찬가지다. 유일한 노선이었던 양양∼제주 노선이 20일 중단되면서 여객청사의 불이 꺼졌다. 이 공항을 모(母)기지로 하는 저비용항공사(LCC) 플라이강원은 경영난으로 법원에 기업회생 신청을 했다. 2002년 4월 국비 3500억 원을 투입해 문을 연 양양공항은 여객 수요 부족으로 애를 먹어왔다. 2008년 11월부터 9개월 동안 비행기가 한 대도 뜨지 않아 ‘유령 공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남 무안국제공항 이용객은 2019년 90만 명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지난해 4만6000명까지 급감했다. 국제공항이지만 정기 국제노선은 없다. 빈 활주로에서 고추를 말리는 사진이 있다며 ‘고추 공항’으로도 불렸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수요가 없어 계획이 중단되거나 문을 닫은 공항도 있다. 1300억 원을 들여 지은 경북 울진공항은 취항하려는 항공사가 없어 개항을 못 하다 현재는 비행훈련원으로 쓰고 있다. 2003년 공사가 중단됐다 20년 만인 올해 초 공항 계획이 공식 폐지된 전북 김제공항은 그동안 주민들이 공항 부지를 빌려 배추, 고구마 농사를 지어왔다.
▷2017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김포 김해 제주 대구를 제외한 지방 공항 10곳의 누적 손실은 4823억 원에 이른다. 이 기간 이들 10개 공항의 평균 활주로 이용률은 4.5%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전국 곳곳에서 신공항의 꿈은 날개를 펴고 있다. 가덕도, 대구경북, 새만금, 흑산도, 울릉도, 서산 등 10개의 공항이 추진 중이다. 항공 수요와 지역균형을 고려할 때 필요한 공항도 있다. 하지만 국토가 좁다 보니 한정적 여객 수요를 놓고 인근 공항끼리 다퉈야 하는 상황이라 중복 투자가 우려되는 게 사실이다.
▷프랑스에서는 기차로 2시간 30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구간은 항공기 이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기후와 복원 법안’이 23일 발효됐다.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는 항공기 사용을 줄이자는 취지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그물망처럼 발달한 한국에서 공항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일단 지어놓으면 수요가 생기겠거니 생각할 순 없다. 소중한 인프라인 공항이 ‘유령 공항’이니 ‘배추밭 공항’이니 하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더는 없어야겠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31(수) 해외여행 수요 폭발… 여행수지는 적자 시름

‘대자연의 절경으로 떠나는 여름 힐링여행’, ‘놓치면 후회할 특가, 완판주의’…. 요즘 온·오프라인 매체를 통해 부쩍 노출이 늘어난 해외여행 광고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외국 관광지의 사진과 동영상은 당초 여행계획이 없던 이들까지 설레게 만든다. 올해 초 한 여행사가 내놓은 북유럽 여행 패키지 상품들은 홈쇼핑에서 한 달 동안 1000억 원 가까이 팔려 나갔다.
▷올해 1분기 해외로 나간 한국인 관광객은 498만 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000% 이상 많아졌다. 공항 이용객이 10배 늘었고, 관광객들이 면세점 등에서 쓰는 신용카드 결제액도 급증세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억눌렸던 ‘보복 여행’이 증가한 결과라지만 증가세가 예상보다 폭발적이다.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인 관광객 수도 5배 늘어나기는 했지만(1분기 171만 명),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 증가 폭에는 못 미친다. 여행수지 적자 규모는 그만큼 확대되고 있다. 32억 달러를 넘어서며 3년 반 만에 최대를 기록했다.
▷국내 여행객들을 끌어들이는 주요 관광지는 단연 일본이다. 벌써 200만 명 넘는 한국인이 일본으로 향했다. 가까운 이동 거리와 부담이 적은 저비용항공 인프라, 엔저 효과까지 겹치면서 오사카와 후쿠오카 등지의 관광 명소는 최대 80%까지 한국인들로 채워지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과 태국, 필리핀도 인기 여행지다. 여름 휴가철에는 해외여행객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어 가을 상품으로는 북유럽과 캐나다의 단풍을 즐기는 상품들이 이미 광고를 타고 있다
▷떠나는 이를 붙잡을 일은 아니지만 들어오는 이가 턱없이 적은 상황은 문제가 된다. 여행수지 적자가 서비스수지 적자를 키우면서 경상수지 악화 요인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재정 당국의 근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주요 관광 손님이었던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의 발을 묶어놓은 중국 정부의 조치는 언제 풀릴지 알 수 없다. 중국은 벌써 두 달 전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40개 국가에 대한 단체관광 금지 조치를 풀면서도 한국은 쏙 빼놨다. 금지령이 풀린다고 해도 ‘애국소비’ 바람이 부는 중국에서 방한 여행객이 금방 늘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해외 관광객의 발걸음을 국내로 돌리자니 이미 치솟은 가격에 바가지 상술까지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이 가격이면 차라리 일본이나 동남아를 가겠다”는 사람들 앞에서 국내 대표 관광지 제주도는 울상이다. 한국의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 강점을 키우지 못하는 사이 외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여행객들의 클릭 손길은 더 바빠지고 있다. 지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의 즐거움에 푹 빠지고픈 이들을 붙잡을 우리만의 매력을 더 찾아내야 할 때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