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5/ 05-01(월) 정상회담 선물 달항아리 - 05-31(수) 잠수교의 변신
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5/
05-01(월) 정상회담 선물 달항아리

박민 논설위원
달항아리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반 만들어진 조선백자로 보통 높이가 40㎝를 넘어 백자대호(大壺)로 불렸다. 고려 귀족이나 조선 사대부를 위한 청자나 백자와 달리 서민의 일상생활에 사용됐다고 한다. 온화한 백색에 유려한 곡선, 넉넉하고 꾸밈없는 형태를 갖춘 이 백자에 달항아리란 문학적 이름을 지어준 것은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와 그의 절친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알려져 있다. 김환기는 달항아리와 보름달이 조화를 이룬 그림을 자주 그렸고 관련 시와 수필을 남겼다. 1963년 신문 칼럼을 통해 달항아리란 단어를 지면에 처음 등장시킨 최순우는 “폭넓은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는 한국민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할 수 없다”고 극찬했다.
지난 2000년 한국실을 개관한 대영박물관은 주요 유물로 백자대호를 소개하면서 ‘Moon Jar(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2021년 새 단장을 한 국립중앙박물관은 백자실에 13.5㎡의 달항아리 전용 공간을 마련했다. 주인공은 높이 41㎝, 몸통 지름 40㎝의 보물 제1437호로 뒤 벽면에는 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문인화 4점을 재구성한 영상이 흐른다.
도자기 원료인 태토는 구의 형태로 빚기가 어렵다. 흙 자체의 무게 때문에 넓고 둥글게 빚어 올리면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 도공들은 먼저 큰 대접 2개를 빚은 뒤 그중 하나를 엎어 이어붙였다. 그러나 원래 하나의 몸통이 아니다 보니 불가마에서 변형이 일어나 허리선이 살짝 찌그러진 경우가 있다. 그러나 도공들은 이 결점을 자연의 현상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려는 여유와 해학으로 받아들였다.
지난주 미국을 국빈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달항아리를 선물했다. 달항아리는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조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발전시켰던 영·정조 진경시대(眞景時代)가 빚어낸 걸작이다. 특히, 달항아리의 세계적 작가 박영숙은 “아래·위 사발이 깨지지 않고 서로를 꽉 껴안은 걸 보면 흡사 부부 같다. 자기를 허물고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미·중 대립이 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 적합한 선물인 것 같다.
05-02 ‘현대적 나이’ 계산법

이미숙 논설위원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게일 콜린스는 최근 ‘90대는 어떻게 새로운 60대가 됐나’는 칼럼에서 90대 현역의 활동상을 전했다. 뮤지컬 ‘시카고’ ‘거미 여인의 키스’ 등을 작곡한 존 캔더(96)는 신작 ‘뉴욕, 뉴욕’의 브로드웨이 공연을 준비 중이고,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90대 진입을 앞두고 아프리카 잠비아로 여행을 떠났다. 여성운동가 뮤리얼 폭스는 95세 생일 오찬에서 “90은 새로운 60”이라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2060년 85세 이상 인구는 2017년의 3배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100세 이상 인구도 5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2022년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기대수명은 77.28세다. 100년 전 47세였던 것에 비해 배 가까이로 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대수명은 83.43세로 미국보다 5년가량 길다. 1970년 62.3세였는데 반세기 만에 21년 늘었다. 90대가 새로운 60대라는 주장은 미국보다 우리나라에 더 맞는 듯하다.
미 공영라디오 NPR에서는 얼마 전 ‘60은 새로운 50(60 is the new 50)’이라는 토크쇼를 선보였다. NPR 보스턴 지국의 프로그램인 ‘온 포인트(On Point)’에서 방송된 것인데, 60세 때 신학자의 길로 들어선 전직 뉴햄프셔 보건 검시관 등 60대에 새 분야에서 일을 시작한 인사들의 경험담이 소개됐다. “60대는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건강과 에너지, 지적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새로운 50대”라는 게 결론이다. 하버드대 교육대학원의 세라 로런스 라이트풋 교수는 이 토크쇼에서 “50세 이후 75세까지가 인생의 제3 챕터”라면서 “제3기에는 상상력과 지혜, 협동심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이 새삼스레 ‘현대적 나이’라는 식으로 나이 축소 시도에 나선 이유는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출마 때문일 것이다. 바이든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재선 도전 선언을 했고, 감옥이냐 백악관이냐 기로에 선 트럼프도 일찌감치 출마 선언을 했다. 1942년 11월생 바이든이 재선되면 82세 때 2기 집권을 시작해, 86세에 퇴임한다. 1946년 6월생인 트럼프가 재선되면 78세에 백악관에 재입성한다. 누가 승자가 되든 90이 새로운 60인 시대의 대통령으로서 여전히 젊다고 해야 할까.
05-03 대통령 노래의 진정성

이현종 논설위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재임 때 가장 인상적인 명장면은 무반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불렀을 때일 것이다. 201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21세 백인 남성이 흑인들이 주로 다니는 한 교회에 총기를 난사해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를 비롯해 9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흑인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을 때 6월 17일 핑크니 목사의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하던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잠시 침묵하더니 ‘어메∼이징 그레이스, 하우 스위트’라며 노래를 불렀다. 추모객들이 하나둘 따라 불렀고, 긴장감이 흐르던 장례식장은 한순간 분위기가 반전됐다. 어느 연설보다 노래가 가지는 힘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지난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선거 광고에서 직접 통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다. 투박하지만, 그 정서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달됐다. 1997년 대선 때도 김대중·김종필·박태준 3명의 노(老)정치인이 DJ DOC의 ‘DOC와 춤을’을 개사한 노래를 율동과 함께 부르는 파격을 보였다. 이 캠페인 한 장면으로 꼰대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큰 효과를 봤다. 이처럼 정치에서 수백 마디 말보다 노래 한 곡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때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 때 만찬장에서 부른 돈 매클레인의 ‘아메리칸 파이’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백악관 측이 ‘윤 대통령이 좋아하는 곡을 만찬 배경음악으로 하겠다’고 해서 알려줬는데, 즉석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노래를 권유해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 장면이 이번 국빈방문의 최고 화제로 떠올랐다. 회담 전 인기 걸그룹 ‘블랙핑크’ 공연이 추진되다가 윤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가 안 돼 무산되면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경질되는 등 파문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유명 가수의 공연보다 윤 대통령의 노래 한 소절이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노래는 잘하는 것보다 진정성이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준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지만, 윤 대통령이 국내 정치에서도 이런 진정성 있는 파격을 보인다면 지지율 걱정은 별로 없을 것이다.
05-04(목) 주가조작의 배후

이철호 논설고문
“이 더러운 싸움판에서 깨끗하게 이기는 방법은 없어요.” 주가조작을 다룬 영화 ‘작전’ 속의 대사다. 이번 소시에테제네랄(SG) 증권 사태도 통정매매·시세조종 등 온갖 탈법이 동원됐다. 13년 전 영화보다 작전 기간이 2∼3년으로 길어졌고, 판돈은 600억 원에서 1조 원으로 커졌다. 등장인물 중 큰 그림을 설계하는 ‘기술자’, 행동대원 ‘딸깍이’는 그대로다. ‘딸깍이’는 매수·매도 주문 때 컴퓨터 마우스 소리를 상징하는 은어다. 다만, 미등록 투자자문사가 다단계로 ‘쩐주’(큰손)를 끌어모았고, 판을 키우기 위해 차익결제거래(CFD)를 이용한 게 차이점이다.
증시엔 “교도소 1∼2년 갔다 오면 50억 원 챙긴다”는 소문이 나돈다. 지난해 적발된 주가조작 105건 중 불기소가 55.8%였고, 기소되더라도 40.6%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자본시장법엔 ‘부당이득액을 산정하기 곤란한 경우 벌금액 상한을 5억 원으로 한다’고 돼 있다. 최근 260억 원을 챙긴 개미 주가조작범에게 그 3배인 780억 원 벌금을 때린 중국과 비교된다.
‘무관용 원칙’이 가장 확고한 나라는 미국이다. 주식 폰지 사기의 주범 70세의 버나드 메이도프는 150년형을 받고 옥중 사망했다. 엔론 사건의 케네스 레이도 재판 중 죽었다. 미국은 개별 범죄마다 형을 매긴 후 합산하는 병과주의를 채택한다. 반면, 한국은 가장 큰 형량에 2분의 1을 더하는 가중주의가 원칙이다. 이를테면 주가조작 수익이 5억 원을 넘으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적용을 받고, 50억 원 이상이면 무기징역이 가능하다. 하지만 1억 원씩 1만 명에게 1조 원 피해를 줘도 가중주의에 따라 형이 훨씬 가벼워진다. “감옥 가도 남는 장사”라는 게 빈말이 아니다.
SG 사태에는 연예인·의사·전 대통령실 행정관 등 돈을 잃었다는 ‘피해 호소인’만 넘쳐난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엔 수상한 냄새를 지울 수 없다. 우선, 두 곳의 대주주가 주가 폭락 직전에 각각 605억 원, 456억 원어치의 주식을 판 것이다. 증시에는 “대주주가 모르는 주가조작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또 하나 의심스러운 대목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2020년 1월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폐지한 점이다. 바로 그 시점에 첫 작전 종목인 대성홀딩스의 매집이 시작됐다.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05-08(월) 전두환 손자와 연좌제

김세동 논설위원
미국에 거주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가 지난 3월 중순부터 유튜브 등으로 일가의 비리를 폭로하다 귀국해 광주 5·18 묘역을 참배하고, 할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죄했다. 1996년생으로 올해 27세인 우원 씨는 광주 묘역에서 자신의 외투를 벗어 비석의 먼지를 닦아 내고, 유가족들은 “역사적으로 큰일을 한다”며 따뜻이 안아줬다.
우원 씨는 “저의 할아버지, 전두환 씨는, 5·18 앞에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이다” “죽어 마땅한 저에게 사죄를 드릴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드린다”는 등의 말을 했는데, 듣기 괴이하고 불편했다. 아들도 아닌 손자가 이미 사망한 할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죄하는 모습도 억지스럽고, 1980년 광주사태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이 어떻게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 연좌제(緣坐制)가 폐지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왕조 시대에나 있음 직한 시대착오적인 모습에 환호하는 사람도 상당수였고, 일부 좌파 언론은 훈훈하게 보도했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제13조 3항)’고 규정해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다. 반역자의 부모와 자식, 형제까지 처벌하던 야만적인 연좌제는 근대형법상의 형사책임 개별화의 원칙이 확립되기 이전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행됐다. 우리나라에선 갑오개혁 때이던 1894년 7월 칙령(罪人自己外緣坐之律一切勿施事·범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시행하지 마라)으로 폐지됐다.
하지만 광복 후까지도 연좌제에 따른 처형·처벌이 있었고, 형사책임 이외 사상범 가족이 육군사관학교 입학 및 공무원 임용 제한 등을 당하는 일이 이어져 오다 제5공화국 헌법에서 불이익 처우 금지 규정이 신설됐다.
전두환의 둘째 아들인 전재용 씨의 아들 우원 씨는 어릴 때 이혼한 아버지 및 새엄마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우울증을 앓고 마약에도 손을 댄 것 같다. 조부 대리 사죄는 부친에 대한 복수심에서 발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모가 자식의 죄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자인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 면은 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의 잘못에 대해 책임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물며 할아버지의 잘못을 손자가 사죄하겠다는 건 자의식 과잉이고, 엽기적이다.
05-09 원계홍 화백

김종호 논설고문
‘끈질기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겸허하고 탈속(脫俗)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최대 위험은 성공이라는 것이다.’ 세속을 등지고 평생 작업에만 매달린 원계홍(1923∼1980) 화백의 작가 노트 글이다. 이렇게도 썼다. ‘참다운 회화(繪畵)는 사랑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인간의 유일한 자유이며, 구제(救濟)이지 않을 수 없다. 영원히 환희인 객관적 아름다움이어야 한다. 감상(感傷)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존재의 과정을 강조하는 것, 인간 숙명의 의미를 단호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있는 것은 다만 허무주의다. 다양한 형식의 자기기만(自己欺瞞)일 뿐이다. 모조품이다.’
그는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中央)대 경제학과에서 유학했으나, 원래 하고 싶었던 미술을 사설 미술아카데미에서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서울로 돌아온 그는 홀로 아틀리에에 파묻혀 자신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기 위한 고독한 작업에 매진했다. 첫 개인전을 가진 것이 55세이던 1978년이었다. 두 번째 개인전도 같은 장소인 공간 화랑에서 그 이듬해에 열었다. 그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개인전이다. 198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지 20일 만에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고(故) 이경성은 저술 ‘원계홍, 그 우수(憂愁)의 미학’에서 ‘그에게 그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가 늘 인간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아름답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았었다. 정신이 병들지 않고, 기술이 숙련에 때 묻지 않고, 소박하며 원시적인 건강함에 빛나고 있었다’ 하고.
원 화백의 진가(眞價)를 일찍이 알아본 미술 애호가 김태섭과 윤영주는 작품을 수집·보존해왔다. 뿔뿔이 흩어져 잊힐 뻔한 그의 작품과 족적(足跡)을 재조명할 수 있게 된 배경이다.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 ‘그 너머(Beyond)’가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 성곡미술관에서 지난 3월 16일 개막했다. 은지화(銀紙畵)를 포함한 회화와 드로잉 등 100여 점을 모은 자리로, 오는 21일 끝난다. 그를 두고 ‘야생적이고 도도한 예술가’ ‘순간이 아닌 영원과 대화하려던 화가’ 등으로 일컫는 이유도 알게 해준다.
05-10 ‘북한式 총화’ 논란

이미숙 논설위원
“매일 하루 총화, 토요일 밤에 주 총화, 월말에 한 달 총화, 우리는 이미 참회 전문가야… 이젠 완전히 소재 고갈이야. ‘세상에 태어나서 미안합니다’라고 쓰고 싶어.” 재일 조선인 2세 양영희(58) 작가의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에 나오는 대화로, 주인공 박미영의 기숙사 룸메이트는 학교의 총화 교육 방침에 이렇게 불만을 털어놓는다. 박미영은 조선대 입학식 날 매일 밤 11시 하루 총화가 명시된 ‘대학 생활 규칙’을 받아들고 경악한다. 나아가 “모든 신입생은 (초·중·고) 12년간 총화를 원고지 20장에 담아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고 “두드러기가 돋을 것 같은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고 썼다.
도쿄 조선대는 일본 속의 ‘작은 북한’으로 불린다. 오사카 출신인 양 작가는 실제 이 학교 1983년 입학생으로, 소설엔 당시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김일성 저작 선집’ ‘주체적 문화예술론’, 제목만 봐도 흥이 가시는 책은 책장에 두기도 싫은데 필독서로 지정됐다”는 대목이나, “모든 강의실에 걸린 김일성·김정일 부자 사진” 등의 묘사에선 학교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양 작가는 이 대학 졸업 후 조선 고급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그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서 활동하며 세 아들을 북한으로 보낼 정도로 김일성 체제에 충성한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2004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녹취록 논란 책임을 지고 10일 최고위원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녹취록과 관련해 여의도 정가에선 태 의원실의 회의 문화 때문일 것이란 분석이 나돈다. 태 의원은 보좌진과 자기반성을 하는 식의 회의를 정기적으로 했는데, 이런 문화가 회의 녹취록 유출로 이어졌을 것이란 관측이다. 태 의원은 회고록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북한식 총화와 관련해 ‘정치 조직 생활의 기본인 자기비판과 호상 비판도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고 했다. 그런 만큼 그가 ‘북한식 총화’를 고집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러나 평양식으로 의원실을 운영했다면 보좌진과 충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60 평생 몸에 굳은 스타일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정치를 계속할 생각이라면 이번 사건을 약으로 삼아야 한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05-11 진관사 수륙재

박민 논설위원
지난 7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방한한 유코 여사는 김건희 여사와 서울 진관사(津寬寺)를 방문, 수륙재(水陸齋) 중 법고무를 관람했다. 수륙재는 물과 뭍을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유코 여사가 원폭 투하로 많은 사상자를 낸 히로시마 출신임을 감안한 일정이었다.
수륙재는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 시작됐다. 불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내생(來生)을 받지 못하고 떠도는 고혼을 구제하는 것이 제일가는 공덕이라는 신승의 계시를 받아 직접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짓고 금산사에서 재를 베풀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수륙재가 행해졌는데, 광종 21년 갈양사에 개설된 수륙도량이 최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때 시작됐는데, 명칭이 보여주듯 정치적 목적이 투영됐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전쟁으로 죽은 귀족과 장군들의 넋을 달래는 한편,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고 했다. 많은 유생이 국행으로 거행하는 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수륙재는 중종 10년까지 100여 년간 지속됐다.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민 통합을 앞세운 유연함을 발휘한 것이다.
왕의 생명을 구한 사찰이라는 진관사의 역사도 태조의 선택에 한몫했다. 진관사는 고려 초 승려 진관(津寬)이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라는 암자였다. 그런데 고려 태조의 왕자인 왕욱과 태조의 손녀이자 경종의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순이 왕실 내 권력투쟁으로 신혈사에 연금된다. 동성애자인 목종에게 후손이 없자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해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 왕순을 암살하려 했다. 이에 진관은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 왕순을 피신시켰다. 3년 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천추태후가 실각하면서 왕순은 왕위(현종)에 오르게 된다. 이에 왕순은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대규모로 증축하고 진관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중단됐다가 1977년 복원되면서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된 진관사 국행수륙재에서는 지금도 각 단에 조선 태조와 진관, 역대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해 국태민안과 국운융성을 기원하고 있다.
05-12(금) 활짝 열린 민간 우주시대

문희수 논설위원
최근 일본의 달 착륙 도전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민간 스타트업 아이스페이스가 지난달 26일 달 착륙선을 독자 발사한 것이다. 통신 두절로 실패했지만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이제까지 달 착륙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중국·러시아 3국뿐이고, 그것도 정부 주도였다. 일본이 민간의 힘으로 네 번째 도전을 했으니 반향이 컸다. 아이스페이스는 2024년과 2025년에 한 차례씩 재도전할 계획이라고 한다.
민간 우주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네이처는 최근 2026년까지 이번 일본 업체를 포함해 6개 기업이 10여 차례의 달 착륙을 준비 중이라며 “달 탐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시작점”이라고 평가했다. 향후 10년간 달에서만 70여 회의 상업 탐사가 이뤄질 전망이라고 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지난해 우주 궤도 진입에 성공한 178회 중 90회를 민간 기업이 수행했다. 미국 스페이스X가 압도적이지만, 스타트업도 급증하는 추세다. 미국 인튜이티브머신은 오는 6월, 애스트로보틱이란 우주기업은 올 6∼7월쯤 각각 달 착륙선을 발사할 계획이다. 2019년 민간 업체로는 처음으로 달 착륙에 나섰다가 실패한 이스라엘 스페이스IL도 2025년 다시 도전한다. 국내 업체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현재 달 궤도를 도는 다누리호에는 이미 40여 개 기업이 참여했다. 한화·SK·KAI 등 대기업 외에 중견·중소·스타트업체도 많다. 오는 24일 예정인 누리호 3차 발사에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발사체 제작 총괄 관리 등 중책을 맡고, 전문 부품업체들도 큐브위성을 제작해 참여한다. 현대차는 2027년까지 달 표면 탐사 로봇을 완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달에는 희토류와 희귀 금속이 대량 묻혀 있다. 세계적인 현안인 공급망 재편에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한국은 2030년에나 달 착륙선을 발사할 예정이다. 달 선점 경쟁에서 뒤졌지만, 그래도 참여해야 한다. 우주산업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한미 정상이 지난 4·26 회담을 통해 우주 협력 강화에 합의하고, 한일 간에도 경협을 확대키로 한 것은 희소식이다. 한국은 나사(미 항공우주국)의 아르테미스 계획에 10번째 국가로 참여해 달은 물론 장차 화성 가는 길에도 동참한다. 우주항공청 설립도 임박했다. 한국의 우주산업 생태계가 더욱 커지고 활성화할 것이 기대된다.
05-15(월) ‘知의 거인’의 진짜 유산

오승훈 논설위원
일본의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1940∼2021)는 3만 권의 책을 읽고 100여 권의 책을 쓴 ‘지(知)의 거인’이다. 얼마 전 도쿄에 간 김에 옛 취재 수첩을 뒤적여 네코빌(猫ビル), 고양이 빌딩을 다시 찾았다. 지난 2002년 문화일보 ‘다시 책이다’ 캠페인 때 인터뷰를 했던 곳으로 책상과 침대를 뺀 연 700m 길이 서가엔 죄다 책이었다. 별세한 지 2년, 골목 모퉁이의 땅 6평에 세운 지상 3·지하 1층의 협소 건물 출입문은 굳게 닫혔고 인기척이 없었다. 외벽에 그려진 고양이 얼굴도 많이 빛바랬다. 그는 21년 전 “나머지 인생 후회하느니 무리해서라도 책에 파묻혀 사는 게 낫다”고 했었다. 건축비로 많은 돈을 빌렸던 터라 “80세까지 월 50만 엔(약 500만 원)씩 갚아야 한다”고 한숨을 쉬었는데, 딱 81세에 세상을 떴다.
그 많던 책은 어디로 갔을까. 사후 1년 즈음 단행본 5만 권, 신문·잡지·자료 등 방대한 분량을 추려 도서관도 기념관도 아닌 고서점에 양도했다고 한다. ‘내가 들고 있던 책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 내용 자체에 흥미가 있는 사람’에게 넘겨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란다. 그는 생전에 고서점에서 취재 자료를 많이 구했다. “나의 이름을 내건 문고나 기념관 설립은 절대 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다운 성정이 직감된다. 어쩌면 그가 남긴 진짜 유산은 책이 아닐지 모른다. 세인의 관심은 그가 남긴 골판지 상자 100개 분량의 미공개 취재 기록에 쏠려 있다.
다치바나는 1974년 문예춘추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연구-그 금맥과 인맥’ 기사를 연재했다.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의 금권정치를 파헤쳐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록히드 사건’도 들춰냈다. 일본 정치의 물줄기가 바뀌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때 보도된 것은 ‘확인된 일부’였다. 유족은 취재 기록을 고인의 고향인 이바라키현에 기증하려 하지만 미동의 자료 공개의 법적 문제가 걸려 있다. 익명 취재한 녹음테이프 등이 추가 공개되면 새로운 스캔들이 될 수도 있어서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60여 상자를 보관 중인 NHK도 신중하다고 한다. 전례가 없는 저널리스트의 자료 공개 논란을 보면, 최근 우리 정치권의 돈과 정치부패 문제가 떠오른다. 아무리 입은 모른다고 해도 기록이 말해준다.
05-16 김남국의 조국 존경

이현종 논설위원
100억 원대 가상화폐 투자 의혹으로 14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은 조국 전 법무장관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중앙대 행정학과와 전남대 로스쿨을 졸업한 김 의원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행정법 박사과정을 다니면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조 전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늘 조 전 장관을 ‘교수님’이라고 호칭하며 존경을 표했다.
그의 정치 입문도 조 전 장관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2019년 12월 자신의 유튜브 채널 ‘김남국TV’에서 “조국 교수님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기도하면서 잔다”고 말할 정도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조 전 장관이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개싸움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조국 수호 집회에 사회자로 나섰다. 조 전 장관을 옹호하는 ‘조국 백서’의 공동 필진이기도 했던 그는 당시 민주당 강서갑 현역 의원이었던 금태섭 전 의원이 조 전 장관 행태를 비판하자 민주당에 입당, 맞짱을 뜨겠다며 강서갑 출마를 선언했다. 조 전 장관을 대신해 금 전 의원과 싸워보겠다는 것인데 입당 기자회견엔 박주민, 이재정 의원이 배석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조국 프레임에 말려들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김 의원을 강서갑 대신 민주당 우세 지역인 안산 단원을에 전략 공천했다. 30대 변호사에겐 파격적인 공천 특혜였다. 조국 수호 활동이 크게 고려됐다.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한 언론사가 주최한 30대 청년 정치인 토론회 때 조 전 장관이 이슈가 되자 토론장을 나가 버리기도 했다. 김 의원은 “복잡한 심경에 스튜디오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더 이상 촬영을 계속 진행할 수 없었다”고 했다. 정경심 교수가 구속됐을 때는 새벽 시간대별로 메시지를 올리며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그러나 김 의원의 가상화폐 투자 행태를 보면 코인 투자 때문에 잠을 못 이룬 것으로 보인다. 탈당하면서도 정치 탄압 운운하며 결백을 위해 싸우겠다는 것 역시 조 전 장관 행태와 많이 닮았다. 1심에서 징역 2년이 선고됐는데 아무런 반성이 없는 조 전 장관 행태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스승의 뻔뻔함과 후안무치를 많이 배운 모양이다. 김 의원은 사법 처리되더라도 ‘역사의 법정에서 무죄’라며 전국 투어를 하지 않을까. 청출어람이다.
05-17 미국 고금리 수수께끼

이철호 논설고문
한국은 금리 인상으로 집값이 급락하고 역전세까지 나타나는 등 난리법석이다. 반면, 미국은 일부 지방 은행에만 뱅크런이 일어났을 뿐이다. 지난 1년 3개월간 한국 기준금리는 2.25%포인트(1.25%→3.5%) 올랐다. 미국이 무려 5%포인트(0.25%→5.25%)나 가파르게 끌어올린 것치고는 너무 잠잠하다. 수수께끼다. 기준금리 인상은 시중 금리 상승→은행 여수신 금리 상승 등 단기간에 차례로 파급된다. 반면, 경제성장이나 물가 같은 실물 변수엔 상당한 시간을 두고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금리 정책 외부 시차는 3개월∼1년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이번엔 이런 전통적 전파 경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가 미국의 고금리 여파가 언제 본격화할지 숨죽이고 지켜보는 이유다.
한·미 간 금리 민감도가 크게 차이 나는 데는 두 가지 비밀이 숨어 있다. 우선, 한국의 가계대출은 80%가 변동금리다. 반면, 미국 주택 모기지(잔액 기준)는 90% 이상이 30년 고정금리 상품이다. 기존 주택 소유자의 원리금 상환 부담에 별 변화가 없어 급매물이 쏟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미 당국의 걱정은 상업용 부동산이다. 5년 안에 만기가 도래하는 상업용 부동산 담보대출이 2조5000억 달러에 이르고, 그중 절반이 지방 중소은행 대출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미국 가계와 기업의 유동성이다. 팬데믹 기간에 엄청난 보조금 살포로 가계는 1조7000억 달러의 현금을 쌓았고, 기업도 기업공개(IPO) 열풍을 타고 유동성이 풍부하다. 투기등급 회사채는 2025년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물량이 8%에 불과하다. 금리 인상에도 버티는 힘이다. 그 단면이 드러난 게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이다. 금리 급등으로 은행이 보유한 국채 가치는 곤두박질한 반면, 그동안 막대한 현금을 맡겼던 스타트업들이 갑자기 돈을 빼내면서 사달이 났다.
고금리 앞에 장사 없다. 미국 가계·기업의 유동성은 고갈돼 가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상업용 부동산부터 붕괴 위기를 맞고 있다”고 경고했다. 위기는 해결된 게 아니라 늦게 찾아올 뿐,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미국도 연말부터 본격적인 고금리 후유증을 맞을 것이란 관측이 대세다. 한국이 상저하고(上低下高) 낙관론만 믿고 있을 때가 아니다.
05-18 포크 가수 김세화

김종호 논설고문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예쁜 소녀 하나가/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러 가다가/ 꽃잎 속에 숨어 있는 나비한테 반해서/ 나물 담을 바구니엔 예쁜 나비가 가득’. 포크 가수 김세화(67)가 1977년 발표한 ‘나비 소녀’ 첫 부분이다. 거의 무명(無名)이던 그는 송창식 작사·작곡의 이 노래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깨끗한 음색, 애틋한 창법, 따뜻한 인간적 품성 등이 돋보이는 그가 ‘만년(萬年) 소녀’로 불리는 출발점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대표곡은 조해일 작사, 정성조 작곡의 ‘눈물로 쓴 편지’다. ‘눈물로 쓴 편지는 읽을 수가 없어요/ 눈물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눈물로 쓴 편지는 고칠 수가 없어요/ 눈물을 지우지 못하니까요’ 하고 시작하는 그 노래는 김호선 감독의 1977년 영화 ‘겨울 여자’ 주제곡이다. 영화 OST 앨범에 담았으나, 정작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다.
김승옥 작사, 정성조 작곡으로 김세화가 부른 ‘겨울 사랑’도 그 OST에 담겼다. ‘지난겨울은 추웠지/ 우리들 사랑은 뜨거웠지/ 얼어붙은 강 위에 반짝이던 별빛들’ 하고 시작한다. 그 영화에 실제로 나온 노래는 김세화가 이영식과 함께 부른 ‘겨울 이야기’다. ‘봄에도 우린 겨울을 말했죠/ 우리들의 겨울은 봄 속에도 남아 있다고/여름에도 우린 말했죠/ 우리들의 겨울은 한여름에도 눈을 내리죠’ 한다. 본명이 김홍진인 김세화의 명곡에는 박종민 작사, 백영규 작곡의 ‘아그네스’도 있다. ‘울다 지쳐 잠든 여름새 전설을 들었나요/ 목각 인형의 외로운 마음을 아시나요/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아픔을 아시나요’ 한다. 외국곡을 김중순이 개사한 1980년 김세화 노래 ‘야생화’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난 한적한 들에 핀 꽃/ 밤이슬을 머금었네/ 나를 돌보는 사람 없지만/ 나 웃으며 피었다네’ 하는.
더 알려진 그의 명곡은 1979년 권태수와 듀엣으로 부른 ‘작은 연인들’이다. 걸출한 문인·작사가 양인자가 작곡가 김희갑과 1987년 결혼하기 전에, 처음 함께 만든 노래다. ‘언제 우리가 만났던가/ 언제 우리가 헤어졌던가/ 만남도 헤어짐도 아픔이었지/ 가던 길 돌아서면/ 들리는 듯 들리는 듯 너의 목소리/ 말없이 돌아보면/ 방울방울 눈물이 흐르는 /너와 나는 작은 연인들’. 그런 노래들을 듣고 싶게 하는 선선한 바람이 자주 분다.
05-19(금) 김남국 사태와 ‘처럼회’

김세동 논설위원
돈이 없어 라면만 먹고, 구멍 난 운동화를 신는다는 등 거지 행세로 후원금 모금 1위를 했던 김남국 의원이 가상화폐를 최고 100억 원대까지 보유했고, 국회 회의 도중에도 코인 거래를 한 것으로 드러나자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논란을 뒤덮을 정도로 사건이 커지자 김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을 떠났는데, 친이재명 강경 그룹이 ‘김남국 지키기’에 나서 당의 수습 스텝이 꼬이고 있다. 특히, 김 의원과 초선 강경파 모임 ‘처럼회’를 함께했던 의원들이 비상식적인 주장으로 김 의원을 두둔해 제2의 조국 사태를 또 만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당 안팎에서 나온다.
김남국과 이미지가 엮여 ‘덤앤더머’로 불렸던 김용민 의원은 지난 9일 ‘민주당은 서민이 계속 서민으로 남길 바라는 당이 아닙니다. 서민도 누구나, 얼마든지 부유해질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정당입니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김남국이 열심히 코인 투자를 해 부자가 된 게 당의 노선과 정체성에 부합한다는 것으로, ‘돌쇠의 의리’를 보여줬다. 장경태 최고위원은 하루 앞서 “가진 것은 죄가 안 되는데, 검소하게 사는 것은 죄가 되나”라며 핀트가 안 맞는 엉뚱한 얘기를 했다.
문제의 핵심인 초기 투자 자금의 불명확한 출처, 불법 자금의 은닉·세탁 가능성 등엔 눈감고 무조건 감싸고 도는 ‘뒷골목 의리’ 과시가 이후 속출했다. 황운하 의원은 “검찰이 사냥감을 정한 후 특정 언론과 협잡해 짠 프레임”이라고 물타기를 시도했고,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출당됐던 양이원영 의원은 “우리 당은 너무 도덕주의가 강하다.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 없다”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 코인 사태 이전에 이미 위선과 내로남불의 상징인 조국 옹호, 수많은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이재명 대표 선출, 전대 돈 봉투 사건 등으로 도덕이 땅에 떨어진 당에서 차마 할 소리냐는 비판이 나왔다.
처럼회는 2019년 말 조국 수호에 앞장섰던 의원들이 주축이 돼 2020년 6월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만들었고, 최강욱·민형배·김의겸 등 20여 의원이 가입돼 있다. ‘4·5’ 전주을 재선거로 당선된 경기동부연합 출신 진보당 강성희 의원이 최근 합류한 처럼회는 더욱 강경한 노선으로 폭주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05-22(월) 파리올림픽 누빌 ‘하늘 차’

문희수 논설위원
내년 7월 열리는 프랑스 파리 하계올림픽에서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첫선을 보일 것이라고 한다. 파리공항그룹(ADP)은 최근 파리올림픽 기간(2024년 7월 26일∼8월 11일)에 맞춰 파리 근교를 운행하는 ‘에어 택시’ 티켓을 수천 장 판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ADP 최고경영자는 가격은 일반 택시 요금의 2배 정도인 110유로(약 16만 원) 안팎이어서 큰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에어 택시’를 포함한 전체 수직이착륙기 세계 시장이 2028년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며 파리올림픽이 이 택시의 경제성을 살펴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침내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등장했던 ‘하늘차’가 현실로 다가왔다.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에어 택시’는 ‘드론 택시’로도 불린다. 통칭해서 도심항공교통(UAM)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글로벌 시장이 2030년 3220억 달러, 2040년 1조4740억 달러(약 1924조 원)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영국·일본 등의 수많은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이유다. 업계에선 2025년부터 상용 서비스가 본격화할 것으로 본다.
한국도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열심히 뛰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최근 UAM 상용화를 위한 실증 노선을 정했다. 서울은 김포공항∼여의도공원(18㎞)과 잠실 헬기장∼수서역(8㎞), 경기도는 고양 킨텍스∼김포공항(14㎞), 인천은 드론시험인증센터∼계양신도시(14㎞) 등이다. 1단계로 오는 8월 전남 고흥에서 기체 안전성과 관제시스템, 통신망 등을 면밀하게 살핀 뒤 내년 7월부터는 2단계로 실제 UAM을 띄워 한강, 아라뱃길, 탄천 등 도심 물길 위를 비행하게 된다.
고양 킨텍스∼김포공항 구간은 평소 대중교통으로는 1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UAM은 3분이면 된다. 교통·물류의 혁명인 셈이다. 아직 한국은 자율비행기술·모터·관제 등 주요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70%에 그친다는 평가다. 특히, 시속 300㎞로 달리는 수직이착륙 기체 제작 능력에서 뒤진다. 초기에 비싼 가격을 낮추는 대책은 물론, 소음·사생활 침해·비행제한구역 문제 등의 제도적 정비도 시급하다. 하지만 시간도 가능성도 충분하다. 미래 준비가 늦어서는 안 된다.
05.23 ‘멍 때리기’와 피로사회

박민 논설위원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값지고 되돌릴 수 없는 자원”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나태하게 시간을 보내면 죄의식을 느낀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항상 뭔가를 한다면 놀라울 만큼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토머스 제퍼슨의 잔소리를 뒷받침하는 분석도 있다. 하루 15분을 활용하면 1년에 책 한 권을 쓸 수 있고, 3년이면 악기 연주나 외국어에서 중급의 실력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틈새 시간에도 무언가를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기’ 경쟁을 하는 대회가 지난 21일 한강 잠수교 인근에서 열렸다. 올해로 6회를 맞은 ‘멍 때리기 대회’에는 3160개 팀이 지원해 70개 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대회 규칙은 간단하다. 90분 동안 말도,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멍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확인하거나 졸거나, 웃거나 잡담을 하면 바로 탈락한다. 우승자는 관전자 투표(예술점수)와 15분마다 이뤄지는 심박체크(기술점수)를 합산해 선정된다. 1등에게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양 황금색 트로피와 상장, 배지 등을 주는데 올해는 배우 정성인 씨가 차지했다.
2014년 처음 대회를 개최한 시각예술가 ‘웁쓰양’은 “벌어놓은 돈으로 근사한 옷을 사는 사치를 누리듯, 시간의 사치도 부릴 수 있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낭비라는 통념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회가, 불철주야 근검절약을 통해 최빈국을 세계 10위권 강국으로 끌어올린 기적의 현장 한강에서 열린 것은 상징적이다.
독일 베를린대 한병철 교수는 20세기 후반을 ‘피로사회’로 규정했다.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사회에서 ‘할 수 있다’는 성과사회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면서 능력과 성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대안으로 영감을 주는 무위(無爲)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했다. 이를 통해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면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된다. 양극화된 사회의 통합,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기 위한 창의성의 고양 등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번 대회를 다시 주목하게 된다.
05-24 ‘에머슨 콰르텟’의 퇴장

이미숙 논설위원
이스라엘계 미국인 감독 야론 질버먼의 ‘마지막 4중주(2012)’는 푸가라는 이름의 세계 정상급 현악 4중주단 멤버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과정에서 겪는 사랑과 갈등을 담은 영화다. 팀 리더인 첼리스트 피터는 오래전부터 앓아온 파킨슨병을 숨길 수 없게 되자 은퇴를 선언한 후 고별무대를 준비한다. 그가 선택한 곡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 베토벤은 교향곡 9번을 작곡한 뒤 건강이 악화하자 관현악곡 대신 현악 4중주에 집중하는데, 14번엔 병마에 시달리면서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희열이 드러나 있다.
영화의 푸가 4중주단처럼 창단 멤버의 은퇴로 위기를 맞거나 해체된 실내악단은 꽤 많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음악인들이 1947년 런던에서 결성한 아마데우스 콰르텟은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전곡 녹음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40년간 연주를 이어온 뒤 해산했다. 197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결성된 알반 베르크 콰르텟은 세계 최정상급 실내악단으로 이름 높았다. ‘실내악 연주의 전범(典範)’이란 평을 들었지만, 2007년 고별 음악회 후 해산했다. 과르네리 스트링 콰르텟은 1964년 뉴욕에서 결성됐는데 우아하고 미묘한 실내악의 묘미를 잘 살린 연주로 유명했다. 그러나 2009년 “아직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지만, 이제 우리 시대는 갔다”며 해체했다. 러시아의 보로딘 콰르텟은 1945년 창단 후 70년 넘게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데 멤버 교체를 통해 전통을 유지해온 게 비결이다.
이제 또 하나의 전설적 실내악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결성된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이 해체 선언 후 세계 각국에서 고별공연을 갖고 있다. 미국 철학자이자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의 이름을 딴 이 실내악단은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들이 결성해 지난 47년간 최고의 연주를 들려줬다. 뛰어난 통찰력과 응집력이 담긴 음반으로 그래미상을 9번 수상해 ‘실내악의 전설’이란 명성을 얻었다. 에머슨 콰르텟은 25일 광주를 시작으로, 29일 대전, 27일 서울, 28일 경기 부천에서 고별무대를 갖는다. 연주곡은 베토벤과 모차르트·하이든 작품 등이다. “은퇴라기보다 삶이 다음 단계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에머슨 네 멤버의 표정에선 애잔함이 느껴진다.
05-25 국립중앙박물관 외경(外景)

오승훈 논설위원
박물관은 보물창고다. 서울 용산구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을 때마다 ‘오늘은 작정하고 보물들에 흠뻑 빠져보자’고 의욕을 다진다. 국보급 유물만 33만여 점. 하지만 번번이 방대한 보물 더미에 쉬 지친다. 세상에 보기만 해서 되는 공부란 없다. 그 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보물은 따로 있다. 전시관을 나서자마자 발길을 붙잡는 박물관 외경(外景)들이다. 중앙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카메라에 담기 바쁜 곳은 정문 쪽에 펼쳐진 호수, ‘거울못’이다. 사계절 따라 특색 있는 풍경을 뽐내는데, 캔버스 같은 수면 위에 박물관의 모습이 비쳐 데칼코마니를 이룰 때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산책로 숲속에 숨듯이 흐르는 ‘미르폭포’도 즐겨 찾게 된다. 작은 규모의 인공 폭포라서 지나치기 쉬운데, 숨 고르며 ‘물멍’하기 딱이다.
사실 최고의 외경은 상설전시관과 특별전시관 사이, 넓은 대청마루 같은 광장 ‘열린마당’에서 바라보는 북쪽 풍경이다. 지붕의 밑단(처마)과 양쪽 전시관의 벽, 그리고 1층 높이 계단이 아래를 받쳐 만들어낸 거대한 직사각형의 탁 트인 공간. 마치 영화관 스크린 같은 그 속에 남산타워가 보인다.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르면 스크린엔 잠시 하늘만 보이다가, 마지막 계단을 밟을 때쯤 다시 남산 꼭대기부터 저 멀리 북한산, 가까이는 대통령실 청사와 국방부, 주한미군 용산기지까지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본 사람들은 그 파노라마에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실을 옮긴 이후 서울의 주요 상징들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공개된 사진 포인트는 여기뿐이다.
그 풍경을 첫손에 꼽은 것은 아쉬움과 기대가 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물관 북측에서 잰걸음 10분 거리도 안 되는 대통령실 청사까진 아직 이동로가 없다. 용산기지와 경계 짓는 담장이 있다. 그 너머에는 드래곤힐 호텔, 야구장 등의 옛 흔적들이 보인다. 차량도 인적도 없다. 중앙박물관은 건물 북측에도 정면성을 부여해 광장과 진입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서울의 중심축이 될 용산공원 완성에 대비해 복합박물관단지의 첫 출발지라는 의미를 주고자 했단다. 지난 4일 용산 대통령실 앞쪽 반환 부지에 새로 조성된 ‘어린이 정원’이 공개됐다. 언제쯤, 또 어떻게 중앙박물관이 그려 놓은 청사진이 실현될 수 있을까.
05-26(금) 신순범의 귀거래사

이현종 논설위원
정치 일선에서 떠난 지 오래됐지만, 신순범(91) 전 의원의 특별한 재능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제11대 국회(1981년)부터 14대(1992년)까지 내리 4선을 하며 전남 여수가 지역구였던 신 전 의원은 ‘암기의 달인’ 얘기를 들었다. 여수 지역 300여 개 섬 이름은 물론 원주율, 국회 주요 전화 번호, 언론사, 관공서, 그리고 에베레스트 14개 봉의 높이도 줄줄 외웠다. 당시 출입기자를 만나 명함을 받으면 이름과 소속사는 물론 전화 번호까지 외워 다음에 만날 때 이름과 전화 번호까지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감탄하기도 했다.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전 의원도 수첩을 들고 다니지 않고 모든 전화 번호를 외우고 다녔다. 군사독재 시절 탄압을 피하기 위해선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고 그래서 외우는 것이 습관이 됐다고 한다.
또 하나의 장기는 웅변 실력이다. 당시만 해도 TV토론 같은 것이 없었고 유세 실력으로 평가받을 때인데 전국 영어웅변대회, 우리말 웅변대회 등에 출전해 대통령상을 탈 정도로 탁월한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신 전 의원의 정계 진출은 고난의 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졸업한 뒤 정치에 뜻을 두고 9, 10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연거푸 낙선한 뒤 서울 서대문에서 라면 장사를 했던 신 전 의원은 11대 총선 합동 유세 때 군소정당인 안민당 후보로 나서 여수 앞바다 섬 300개를 모조리 외워 청중을 압도, 당시 신군부 여당을 물리치는 기적을 만들었다.
가난의 뼈저린 경험을 한 신 전 의원은 아들 결혼식 축의금 1억 원 전액으로 만광장학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1200여 명이 혜택을 봤다. 정계 은퇴한 뒤에도 신 전 의원은 자신의 성공 경험담을 5가지 ‘ㄲ’이 들어가는 ‘꿈 깡 꾀 끼 끈’으로 정리해 책도 내고 강연도 하고 있다. 최근까지 아코디언을 메고 지하도 등에서 공연을 하며 학생들의 장학금을 모금했다. 이제 구순을 넘은 신 전 의원은 자신이 나고 국회의원을 했던 여수로 귀향, 작은 집을 얻어 여생을 마무리하겠다고 한다.
초선의 무소속 김남국 의원이 가난한 척 쇼를 하면서 뒤로는 100억 원대의 가상화폐를 보유한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때 ‘진짜 가난’을 꿈과 용기로 승화시켰던 신 전 의원의 귀거래사가 여운을 남긴다.
05-30(화) 비주류의 기적 ‘엔비디아’

이철호 논설고문
온통 엔비디아 이야기다. 지난 25일 놀라운 실적으로 주가가 하루에 24.37% 치솟아 시가총액이 9631억 달러에 달한다. 애플·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에 이은 나스닥 4위로, 경쟁업체 AMD(1938억 달러)·인텔(1142억 달러)을 압도한다.
엔비디아는 1993년 AMD에서 뛰쳐나온 젠슨 황 주도로 설립됐다. 처음엔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생산을 꿈꿨으나 공룡인 인텔과 AMD에 지레 겁먹고 포기했다. 대신 눈 돌린 곳이 값싸고 낮은 기술의 그래픽처리장치(GPU). 게임 시장이 커진 데 이어 데이터 센터 붐 덕분에 비주류에서 벗어났다. 병렬용 서버 컴퓨터에 가성비 뛰어난 GPU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2016년엔 가상화폐 열풍까지 가세했다. GPU는 가상화폐 채굴용 컴퓨터 시장도 휩쓸었다. 엔비디아 주가는 올 들어 160% 이상 치솟았다. 챗GPT 등장과 함께 인공지능(AI)용 GPU 매출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비주류의 기적’이다.
더 이상 빅 테크는 빌 게이츠·스티브 잡스·제프 베이조스 같은 백인 전유물이 아니다. 소프트웨어는 인도계, 하드웨어는 중국계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구글(순다르 피차이)·MS(사티아 나델라)·트위터(퍼라그 아그라왈)·IBM(아르빈드 크리슈나)·어도비(샨터누 너라연)의 공통분모는 CEO가 인도계라는 점이다. 모두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인도 공과대학에서 치열한 수학·과학 경쟁에 단련된 인물이다.
하드웨어 쪽은 TSMC의 모리스 창, 엔비디아의 젠슨 황, AMD의 주가를 1300%나 끌어올린 리사 수 등 중국계가 판치고 있다. 특히, 대만의 타이난에서 태어난 젠슨 황과 리사 수는 모두 모리스 창을 멘토로 받드는 ‘대만 마피아’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6일 미 애리조나주 TSMC 피닉스 공장 기념식에 모여 조 바이든 대통령, 애플의 팀 쿡과 함께 위세를 뽐냈다. 미국 팹리스 시장을 장악한 중국계가 위탁생산(파운드리)은 TSMC에 맡기는 배타적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다.
얼마 전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젠슨 황과 초밥집에서 회동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삼성과 하이닉스가 외로운 신세다. 마치 비주류처럼 보인다. 한국계 스타 CEO는 눈에 안 띄고 글로벌 네트워크도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K-반도체의 숨겨진 약한 고리다.
05-31(수) 잠수교의 변신

김세동 논설위원
지난달 29일 오후 8시 서울 잠수교에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 사상 첫 프리폴(Prefall) 컬렉션을 개최했다. 서울의 휘황찬란한 야경을 배경으로 열린 패션쇼에서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주인공이자 모델인 정호연을 비롯해 외국 톱 모델 50여 명이 잠수교 1개 차로에 795m 길이로 마련된 런웨이를 걸었다. 미국 가수 제이든 스미스, 영화배우 클로이 머레츠, 루이비통 CEO 피에트로 베카리 등 VIP와 고객 1700여 명이 나머지 잠수교 차로에 마련된 관람석에서 패션쇼를 지켜봤다.
이달 7일에는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가 시작돼 나들이객들이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즐겼다. 21일엔 시민들이 서울시가 100여 개 마련한 빈백(Bean Bag)에 누워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했고, 제6회 ‘한강 멍 때리기 대회’도 열려 70팀이 실력을 겨뤘다. 반포대교 아래 잠수교는 높이가 낮아 흘러가는 강물을 자세히 볼 수 있고, 강 위를 걷는 듯한 착각도 들게 한다. 서울시는 매주 일요일에 차량을 통제하고 시민들이 벼룩시장, 거리공연 등을 즐길 수 있는 축제를 7월 9일까지 진행한다. 2026년 하반기부터 차량 통행을 완전히 금지하는 전면 보행화가 시행될 예정이다. 지난해 10월 시민 의견조사에 참여한 1057명 중 83.3%가 전면 보행화에 찬성했다고 한다.
용산구 서빙고동과 서초구 반포동을 잇는 잠수교는 1976년 왕복 4차선으로 개통됐다. 강남권 개발 당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을 반포에 신축 이전하면서 건설됐다. 홍수로 인한 차량 출입 통제가 잦아지자 1982년 잠수교 상부에 반포대교가 건설·개통되면서 도로의 기능은 많이 상실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첫 당선 2년 뒤인 2008년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반포대교에 분수를 만들면서 잠수교 4개 차로 가운데 2개 차로를 보행로와 자전거도로로 변경했다.
잠수교는 북쪽으로 주한미군 용산기지와 국방부·합참 등과 근접하면서, 지붕처럼 덮고 있는 반포대교 덕에 폭격에도 안전하며 인공위성이나 항공사진에 보이지 않고, 교각 간격이 촘촘해 폭파돼도 빠르게 복구될 수 있는 특징 때문에 ‘안보교’라고도 불렸다. 유사시 전차나 장갑차와 같은 기갑부대가 신속히 도하할 수 있게 높이를 낮게 설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