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사] 〈241〉민과 군이 합심해 치르는 전쟁 - 〈260〉비겁한 중립과 맹목적 중립
[임용한의 전쟁사] 역사학자 동아일보
2022-12-06
〈241〉민과 군이 합심해 치르는 전쟁

행주대첩은 진주성 전투,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행주대첩에서 총통, 비격진천뢰 같은 조선군의 화약무기가 맹활약을 했다. 여기에 특이한 신무기가 등장하는데 변이중이 만든 화차이다.
조선의 전통적인 화차는 현재의 다연장 로켓포처럼 신기전을 연속으로 발사하는 무기였다. 변이중의 화차는 신기전이 아니라 승자총통을 사용한다. 수레 위에 3면으로 장갑판을 세우고 여기에 40자루의 승자총통을 설치했다.
변이중의 화차가 행주 전투에서 몇 대나 배치되었고, 어느 정도 활약을 했는지는 전투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서 분명하지 않다. 권율은 전투 후에 고산현감 신경회를 선조에게 보내 승리한 소식을 전했다. 신경회는 행주 전투의 양상과 호남의 형편을 전하면서 변이중이 만든 화차의 공을 칭찬하기는커녕 선조에게 병력과 물자 징발 임무를 맡고 파견된 소모사 변이중이 민간에서 소를 너무 징발하고 있어서 걱정된다고 고발한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역사가는 물론이고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도 고민에 빠진다. 변이중의 징발령은 정당한 것일까? 전쟁은 백성들에게 어떤 고통을 얼마나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는가?
행주대첩에는 정반대의 미담도 전한다. 여성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라 전투를 도왔다는 전설이다.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이 전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민과 군이 합심해서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곤 한다. 하지만 행주치마의 전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행주산성에 민간인이 들어오거나 이 전투에 민간인이 심지어 여성까지 참가할 정황이 없었다.
모든 전쟁은 민과 군의 합심으로 치러진다. 다만 행주치마 같은 방식은 아름다운 협력 방식이 아니다. 병사는 전선에서, 백성은 삶의 현장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겪고, 함께 이 고통을 이겨내는 나라가 승리한다. 그래서 병사 못지않게 국민정신도 건강하고 고통을 함께하는 의지와 투지가 있어야 한다. 쾌락과 안일함에 굴복한 국민은 전쟁을 이겨낼 수 없다.
〈242〉용감한 실패에 갈채를

1942년 6월 4일 오전 8시경, 미드웨이 근방 태평양 상공에서 상관과 부하 간에 유례없는 말다툼이 벌어졌다. 미 항공모함 호닛에서 출격한 미군 공격기 편대의 지휘관 스탠호프 링 중령을 향해, 휘하에 있는 제8 뇌격기 대대장 존 월드런 소령이 거칠게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 항공기들은 일본 항공모함을 찾고 있었는데, 월드런은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링 중령은 듣지 않았다. 화가 난 월드런은 대대를 이끌고 이탈해 직접 자신이 생각하는 장소로 향했다. 이건 명백히 항명이고 군법회의감이었다.
하지만 월드런 소령은 법정에 서지 않았다. 그가 제기한 방향이 옳았다. 월드런 편대는 일본 항모전단을 발견하고 즉시 공격에 나섰다. 미군 뇌격기 ‘TBD’는 곧 전장에서 퇴출당할 느리고 형편없는 모델이었다. 미군의 어뢰 성능은 더 형편없었다.
전투기 엄호도 없는 상태에서 월드런의 뇌격기들은 한 덩어리를 이루어 똑바로 항진했다. 일본군 전투기들이 달려와 그들을 두들겼다. 공격 가능 거리까지 다가가 일본 항모에 어뢰를 발사한 미군 기체는 단 한 대였고, 그나마 빗나갔다. 미군 생존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미군 조종사들의 실력은 초보 수준이었다.
보통 전사(戰史)에서는 이 정도로 기록된다. 그런데 제8 뇌격대대 출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도 전쟁 전에 엄청나게 노력했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인디언 혼혈이어서 별명이 추장이던 월드런 소령은 때론 자기 집에서 파티까지 열어 주면서 젊은 신참들을 혼내고 격려하고 달래며 그들을 전사로 키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6월 4일, 그날 이들이 미숙했던 것은 준비할 시간의 부족이었지, 노력의 부족 탓이 아니었다.
비록 단 한 발의 어뢰도 적중시키지 못했지만 그들은 단 한 명이 살아남더라고 끝까지 간다는 각오로 죽음의 항진을 했다. 그들의 실패와 미숙함은 안타까운 일이지 비웃을 일이 아니다. 월드런 편대가 미드웨이 해전의 최고 공로자라고 하는 전사가(戰史家)도 있다. 그들이 일본 함대를 찾았고, 이것이 전투의 향방을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243〉용병 민족과 이집트 대통령

왕정 전복 후 이집트 초대 대통령이 된 모하메드 나기브의 어머니는 수단인이었다. 남수단은 지금도 우리나라 한빛부대가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되어 있을 정도로 험악한 지역인데, 이 지역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이집트의 최정예 용병부대이거나 이집트를 위협하는 제일 무서운 전투 민족이었다.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아시리아의 전쟁 장면을 새긴 부조 중에는 아슈르바니팔 2세가 이집트의 멤피스를 공략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성벽 위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은 이집트인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이다.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는 남수단 출신인 누비아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누비아는 수천 년간 애증의 관계였다. 나기브는 이런 애증 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랜 무인 가문 출신인 이집트군 장교였고, 어머니는 수단인이었다.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태어난 나기브는 수단 총독으로 재직하다가 수단인인 마디 반군에게 살해된 찰스 고든을 기념하는 고든기념대를 나오고, 이집트군 장교가 되었다.
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의 전투는 형편없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문제는 유능한 장교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능한 장교가 이끈다면 이집트군도 달라질 수 있다. 그 실례를 보여준 사람이 나기브였다.
전쟁 영웅이 된 나기브는 쿠데타를 일으킨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 옹립되어 대통령이 되었다가 나세르에게 제거된다. 이런 경력을 보면 우리는 머리를 갸우뚱하게 된다. 나기브는 수단 입장에서 보면 이집트를 정복한 영웅인가, 배신자인가? 재미난 사실은 나세르도 조상을 따지고 올라가면 정통 이집트인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한 세대만 지나면 다민족 국가가 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단일민족 국가로 살아온 탓에 이런 이야기가 낯설고, 주변 국가를 선과 악으로 재단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국제 관계란 다양성과 역동성, 현실적 판단을 요구하는데, 우린 영원한 적과 영원한 친구로 분류하려고 한다. 이런 편견을 고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
2022-12-27
〈244〉황금시대의 종말

“20세기 동안 유럽은 죽다가 살아났다.” 20세기 유럽 100년의 파노라마를 저술한 영국의 역사가 이언 커쇼는 그의 저작 ‘유럽 1914-1949’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20세기 유럽사에서 주목하는 주제 중 하나는 ‘황금시대에 대한 집착’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때 인류의 기대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올 때의 뉴 밀레니엄에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황금시대가 아니라 분화 직전의 시기였다. 전쟁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국제사회, 경제, 계급의 갈등은 이미 폭발하고 있었고, 전쟁을 예언하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19세기 말의 시대를 황금시대로 이해하고 이 황금시대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누구도 이겨낼 수 없었다.
심지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황금시대가 허상이었음을 깨닫기는커녕 황금시대에 대한 추억이 더 강해졌다. 사람들은 왜 세상이 지옥으로 변했는가를 분석하기보다는 지옥 저편의 세상을 아름다운 추억, 이상향으로 남겨두고 싶어 했다. 이 달콤한 추억의 대가는 컸다.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유럽은 다시 한번 세계대전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승자고 패자고 간에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역사를 보면 인류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적이 없다. 뭐든 결국은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니까. 인류사의 재앙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외면한 탓에 발생한다.
2022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아름다웠던 일을 기억하고, 더 아름다운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되고 딱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만큼의 시간을 걸어 우리가 도달한 곳은 황금 동산이 아니라 21세기가 통과해야 할 강철 계곡의 입구이다.
100년 혹은 한 세대마다 직면하는 이런 역사의 시험대는 진실의 입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이비 지식인, 비열한 정치인의 거짓과 선동을 이겨내고 냉정하게 현실에 대응하는 집단만이 벽 저편에서 빨리 웃을 수 있다.
2023.01.03
〈245〉새해 더 큰 ‘전쟁’의 시작

서구 전쟁사를 보면 전쟁 때마다 병사들 사이에 유행어처럼 떠도는 말이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갈 수 있다.” 전황이 조금 호전되거나 전투가 잠잠해지기만 해도 이런 소문이 믿음처럼 퍼진다. 그렇다고 장교들이 쫓아다니며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다. 나중에 병사들이 또 속았다고 투덜거리고, 어떤 지휘관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과학이 아니라 믿음이다. 하지만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이 영혼의 에너지가 되는 건 분명히 과학이다. 하지만 세상은 믿음과 반대로 움직인다. 20세기 전쟁사를 보면 항상 신년 대공세가 제일 무섭다. 규모도 크고, 무모하기도 하다. 왜 전황이 천체의 움직임과 더불어 작동하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독소전쟁, 6·25전쟁에서 신년은 더 무서운 신년이었다.
1941년 모스크바를 향해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독일군은 11월이 되자 힘에 부쳐 주저앉았고, 12월에는 수세로 돌아서야 했다. 전황에 고무된 스탈린은 전 전선에 걸친 대반격을 명령했다. 사령관 주코프는 반대했지만 스탈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반대편에서는 철수해서 방어선을 효율적으로 정비하자는 독일 장군들의 제안을 히틀러가 거부했다.
1942년 1월 러시아 북부 레닌그라드에서 남쪽 크리미아반도까지 전 전선에서 소련군과 독일군이 충돌했다. 전황은 말 그대로 뒤범벅이었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수백만의 생명을 하늘길로 보냈다.
다음 해인 1943년엔 신년 대공세라는 것이 없었는데, 병사들은 줄어들어도 전쟁을 운용하는 능력은 늘어 가서 크리스마스, 신년과 무관하게 연속적인 대공세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신년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 그러나 내 삶을 바꾸고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은 감성적 사고가 아니라 냉철한 분석과 투지이다. 여러 가지 태풍이 기다리고 있는 2023년은 신년에 이런 말을 하기에 적절한 한 해인 듯하다. 적의 대공세는 위대한 승리의 전제조건이다.
〈246〉나폴레옹의 야파 방문

지중해를 바라보는 팔레스타인의 항구도시 야파는 십자군 전쟁 시절부터 중요한 항구이자 군사 거점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때도 야파는 격전지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야파 요새를 함락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고, 그 대가로 함락된 도시에 대해 무자비한 보복과 약탈을 감행했다.
신의 응징이었을까? 야파의 프랑스군에게 재앙이 닥쳤다. 가래톳페스트(선페스트)가 프랑스 병사를 덮쳤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저하하고, 이미 패전을 예감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고민에 빠졌다. 1799년 3월 7일, 절망과 죽음만이 감도는 야파의 페스트 환자 수용소에 나폴레옹이 나타난 것이다. 감동했기 때문이었을까? 원한과 억한 심정 때문이었을까?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사들이 나폴레옹 주변으로 비틀거리며 모여들었고, 누군가는 나폴레옹의 몸에 손을 대거나 옷을 붙잡으려고 했다.
종군 화가 앙투안 장 그로는 이 감동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다 죽어 가는 환자들, 전염이 두려워서 나폴레옹 뒤에 있는 장교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지만 나폴레옹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물론 이 장면은 영화적인 과장이다. 야전병원에서 실제 나폴레옹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집트 원정을 포기하고 철수할 때 나폴레옹은 페스트 환자들을 살해하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1804년 황제 즉위를 앞둔 나폴레옹은 야파의 병문안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주문했다. 자신의 원정 실패를 대중선전으로 메우려는 의도였다. 그의 상징처럼 된 그림,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백마를 타고 “나를 따르라” 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외치고 있는 다비드의 작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도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나폴레옹은 대중선전의 천재였다. 대중의 심리를 읽을 줄 알고, 이런 한 번의 선전전으로 승리에 감동을 더하고, 패전조차도 감동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정치 감각도 나폴레옹을 구하지는 못했다. 선전으로 대중의 눈을 가릴수는 있지만 술수로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다.
〈247〉 드론과 무기의 발전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다들 예상은 하고 있었으면서도 생각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벌어지고 있다. 드론의 맹활약이다. 무인폭격기로 적을 공격하는 실험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시행되었다. 폭탄을 탑재한 폭격기를 원격조종장치로 조종해서 목표물에 자폭시키는 방법이었다. 미사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V1, V2 로켓도 사실은 무인폭격기 개념에서 시작한 것인데, 미사일과 유도무기로 발전 방향이 바뀌었다.
드론이 다시 등장하게 된 배경은 소형화와 로봇 기술의 발달이다. 현재의 전투용 드론으로는 자폭 드론, 킬러 드론 같은 소형화된 드론들이 맹활약 중이지만 크기가 작아 화력과 이용에 제한이 있다. 앞으로 자율주행과 로봇 기술이 발달하면 드론은 영화 ‘로보캅’에서나 보던 살인 병기로 발전할 수 있다. 다양한 무기를 탑재한 채 인간의 원격조종이 아닌 독자적 판단 아래 공격과 방어에 나설 수 있는 전투 로봇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100%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로봇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기계가 오작동으로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그렇기 때문에 전투 로봇은 등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반론이 나온다.
혁신적인 무기 체제란 실은 끔찍한 무기 체제이다. 그래서 새롭고 무서운 무기 체제가 등장할 때마다 그것을 제한해야 한다는 여론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헛된 노력이다. 신무기를 제한하자는 주장은 총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대포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필자도 무기와 살인 기술이 발달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기 개발을 억누른다고 해서 전쟁이 억눌러지지 않는다. 인류는 오랫동안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완벽한 방법은 없다. 감상적인 대안은 현실도피일 뿐이다. 그나마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인간의 야수성과 비합리성을 인정하고, 무기든 전술이든 감상을 배제한 채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248〉 역할 교대

6·25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고, 연합군이 38선 이남으로 후퇴하면서 전쟁의 전망이 절망적인 상황으로 바뀌어 가고 있을 때, 하필 미 8군사령관인 워커 중장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후임으로 급파된 사람이 매슈 리지웨이였다. 리지웨이는 2차 세계대전 중에 82공수사단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했고, 그 이후에는 18공수군단장을 지냈다. 맥아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맥아더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맥아더는 워커의 후임으로 리지웨이를 지목했다. 그의 공격적인 정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리지웨이가 한국에 부임했을 때, 미군의 사기는 최저 수준이었다. 워싱턴에서 사령부의 참모들까지 모두가 철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리지웨이의 전쟁 철학은 주도권이었다. 전쟁은 주도권을 움켜쥔 자가 승리한다. 그는 방어 계획만을 수립하는 참모들을 꾸짖고, 가는 곳마다 ‘공격’을 외쳤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구호만으로 떨어진 사기를 한 번에 복구할 수는 없다. 리지웨이는 사소한 부분까지 개선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 무렵에 그가 내놓은 ‘세밀한 개선책’의 하나가 육군과 해군의 부사관과 병사들이 서로 임무를 바꿔서 해 보게 하는 것이었다. 군대란 특별한 소속감을 요구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소속감이 다른 병종, 다른 부대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사기가 떨어진 부대에는 이런 것도 투지를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예를 들면 육군과 해군 수병들은 서로 자신이 더 고생하고 저들은 편안히 지낸다고 불평했다. 리지웨이는 서로 역할을 교대함으로써 상대의 임무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소중한 것인지 체험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군인들은 서로 간에 존경심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침몰시키는 갈라치기의 수법이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상대의 삶에 대한 존중을 조롱으로 바꾸는 것이다. 교육, 문화, 소셜미디어, 심지어 카페와 택시 안에서도 너는 편하고 나는 고통스럽다라는 어법이 횡행한다. 이런 군대는 승리할 수 없고, 이런 나라는 쇠락할 수밖에 없다.
〈249〉 패전의 기억

최근 이집트 여행을 다녀왔다. 역사학자가 유적 답사를 한다면 그리스, 로마 이전에 제일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이 이집트이다. 이런 곳을 이제야 왔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피라미드, 아부심벨 신전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했던 곳이 고대 이집트 상왕국의 수도였던 멤피스였다. 대영박물관에 가면 수많은 아시리아 역대 황제들의 전쟁 기록을 모아 놓은 부조들이 있다. 이 중에서 제일 완벽하고 훌륭한 컬렉션이 아슈르바니팔 2세의 부조이다. 이 중에 아시리아군이 멤피스 성을 공략하는 장면이 있다.
이중의 성벽, 촘촘히 늘어선 탑, 이 강력한 성을 아시리아군이 무시무시하게 공략한다. 당시 이 성을 지키던 병사는 이집트인이 아니라 지금의 남수단인 누비아의 사람들이었다. 오랫동안 이집트의 속국으로 지내던 누비아가 거꾸로 이집트를 정복하고 파라오로 군림하고 있는데, 아시리아가 쳐들어온 것이다. 누비아는 아시리아에 패함으로써 이집트 통치를 종식한다. 멤피스 성도 함락되어 남자들은 살해되고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다.
멤피스에 가면 이 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볼만한 상태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어느 정도 흔적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일말의 기대는 충격적인 실망으로 끝났다. 멤피스에는 멤피스에서 발굴된 유물을 모아 놓은 작은 야외 박물관이 있는데, 거대한 람세스상과 스핑크스라는 인상적인 석상이 남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유물의 양이 놀랄 정도로 적었다.
성터는 흔적도 없고 언덕에는 양과 염소만 뛰어놀고 있었다. 이집트에 산재한 수많은 유적을 모두 발굴하기란 너무나 힘들고 발굴 후 관리도 보통 일이 아니다. 멤피스는 아직 대대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했어도 관리 문제로 덮어 둔 것 같다.
하지만 만약 멤피스 성이 패전의 장소가 아니라 영광의 장소였더라면 우선적으로 발굴하지 않았을까? 쓰라린 기억은 누구나 싫다. 대부분 나라가 덮거나 왜곡한다. 하지만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패배를 직시하고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다녀 보면 이게 제일 어려운 일 같다.
〈250〉러시아의 대공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이 지났다. 이전에 예측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장기 소모전이었다. 이 전쟁은 서방 주요국과 중국, 이란 등 러시아 우방까지 간접적으로 참전하고 있다. 이 방식의 나쁜 점은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지원국들은 물리적 충격은 받지 않더라도 심한 내상과 후유증으로 고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이런 특징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작년에는 러시아의 전략·전술적 오류가 너무 뻔했기 때문에 예측이 쉬웠다. 역사학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은 인류가 역사의 교훈을 통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은 적이 있냐고 말한다. 우울한 얘기지만 작년의 러시아가 그 정수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그 땅에서 자신들이 벌인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까지 무시했다.
이번 공세는 예측이 쉽지 않다. 우선 양측이 전력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다. 더 어려운 부분은 러시아가 얼마나 변화된 모습을 보이냐는 것이다. 전차를 앞세우고 대병력이 평원을 질주하는 대공세는 공중과 지상, 지원, 병참 능력이 정교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30만 명이 대병력 같지만 30만 명으로는 이런 공격을 하지 못한다. 여기에 전술 목표에 집중하지 않고, 공격이 분산되면 더욱더 효과는 떨어진다. 공세의 효과로 초반에는 승리하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전쟁 지속 능력과 정교함은 빠르게 추락할 것이다.
대공세는 허세고, 특정 전술 목표에 집중한다면 초반에는 우세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전술과 병참 운용 능력은 여전히 미숙할 것이다. 이 능력은 절대 단기간에 끌어올릴 수 없다. 그렇다면 화력과 인해전술로 밀어붙여야 하는데, 이 역시 전쟁 지속 능력을 빠르게 소진시킨다.
제일 오리무중인 것이 러시아의 전략 목표다. 러시아의 일선 지휘관들도 모르는 듯하다. 어쩌면 서방 경제가 주저앉고, 서방 지원이 끊어질 때까지 체력전으로 가겠다는 것이 당장이 목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은 예측이 어렵더라도 공세가 시작되면 다시 전황은 예측이 쉬워질 것이다. 전 세계가 고통으로 한숨을 쉬겠지만.
〈251〉첩보전과 국가의 운명

점으로 여러 지점에 대한 역정보를 흘렸다. 이때 중대한 실수를 할 뻔했는데, 노르망디라는 첩보는 철저히 단속을 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독일 정보부에 진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연합군 측에서는,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던 독일 스파이에게 노르망디라는 첩보를 흘렸다. 독일도 그 스파이의 정체가 노출된 것을 알고 있었고, 영국이 흘리는 역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이 사실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를 통해 상륙 지점이 노르망디라는 첩보가 들어오자 독일 정보부는 이를 속임수로 파악하고 노르망디를 제외했다. 하지만 이것이 연합군의 진짜 노림수였다. 연합군은 독일이 스파이의 정체를 영국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첩보전은 첩보의 수집, 분석과 사실 판단, 기만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이 중 어느 하나가 부실해도 첩보전에서 승리할 수 없고, 한순간에 국가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정보 조직은 철저하게 전문적이며, 정치와 무관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정보 조직과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그래도 해야 하고, 최대한의 선을 지켜야 한다.
〈252〉워털루 전투와 나폴레옹의 실수

나폴레옹은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고 쉴 새 없이 새로운 할 일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폴레옹이 죽기 전까지 두고두고 미련을 보인 전투가 워털루 전투이다. 그는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그 전투를 지휘할 수 있다면’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너무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나폴레옹의 전기 작가들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이 가르친 교훈조차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적이 충분히 대비하고 있고, 자신은 제대로 관측조차 하지 못한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장을 충분히 돌아보지도 못하고, 말 위에서보다 테이블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투를 너무 늦게 시작했고, 전투 중에는 미셸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기고 너무 뒤에 머물렀다. 프로이센군이 워털루 전투에 합세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그들이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역시 아무런 근거 없는 추정이었다.
이전의 그에 비해 굼뜨고, 망설이고, 냉철한 판단이 아니라 믿음에 의지해서 움직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그 원인을 다양하게 추정한다. 위경련, 치질, 비만, 수면 부족…. 그 추정들을 모으면 나폴레옹은 병상에 있어야 할 중환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워털루 전투를 망친 결정적 원인은 근거 없는 확신이었다. “30분이면 우리는 승리한다.” 과거에는 그 말이 거짓말처럼 맞았다. 하지만 워털루에서는 맞는 말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한 번 몰락을 맛보았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이성을 압박했던 것은 아닐까?
나폴레옹이 감정에 휘둘리자 누구도 직언을 하지 못했다.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이 화두인데, 한쪽에 불리한 말을 하면 당장 당신 어느 편이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늘었다. 사회의 모든 이슈에 대해 이념과 대중의 감정에 영합하는 사람도 늘었다. 어떤 분야에서도 이래서는 승리할 수 없다.
〈253〉철학자의 땅

로마인들의 그리스 사랑은 대단했다. 귀족 부호 집안은 그리스인을 가정교사로 두어야 했다. 로마에서 성공하려면 법률가가 되는 것이 최고였는데, 대중을 사로잡는 언변과 논리를 구사하는 유능한 변호사가 되려면 그리스 유학이 필수였다. 카이사르도 그리스 유학을 거쳐 법률가가 되어 정계로 입문했다.
이런 문명과 교양의 땅에 역사적인 전쟁터가 가득하다면 사람들은 믿기 어려워한다. 기원전 168년 아이밀루스 파울루스는 올림포스산 아래 피두스에서 마케도니아 장창보병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 신형 전술 대형의 위력이 증명되었고, 로마군은 세계를 제패할 자신감을 얻었다. 그의 아들인 스키피오 소 아프리카누스는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로마가 제국으로 가는 길에 벌인 두 번의 결정적인 전투,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대결한 파르살루스 전투와 카이사르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 암살자와 벌인 필리페 전투는 이탈리아 땅이 아닌 그리스에서 벌어졌다.
비잔틴 제국 시절, 제1차 세계대전 때도 그리스에서 국제적인 세력이 거듭 충돌했다. 그리스가 전쟁의 땅이 된 이유는 지정학적 요인이다. 지형이 요새 건축에 유리하고, 유럽과 중동, 오스만이 연결되는 교차로였다. 21세기 한국은 어떤가? 미국 일본 러시아와 중국이 대치하는 십자로이다. 냉전 종식 이후로 이런 의미가 좀 약화되나 했는데, 중국이 대만에 대한 위협을 강화하면서 지정학적 위협지수가 대폭 상승했다. 중국의 대만 공격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의 국내 문제가 아니다. 이젠 대놓고 제국주의 국가가 된 중국의 위협이 동남아로 확대되고, 한국과 일본의 생명줄인 해양무역로가 당장 중국의 관할 아래로 들어간다. 경항공모함 정도로는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인도를 잇는 쿼드 연합이 결성되었고, 한국의 외교적 입장을 난처하게 하고 있다.
지정학적 입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생존을 위한 지혜를 요구한다. 먼저 깨닫고 준비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전쟁사의 영원한 진리이다.
〈254〉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다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다.’ 강연이나 방송을 하고 나면 이런 말로 의문을 표시하는 분이 곧잘 있다. 일리는 있는 말이다. 고려사는 조선왕조에서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역사이다. 당연히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과정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생략과 왜곡도 당연히 발생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그래도 조용한 편이다. 역사에는 전쟁에서 패배해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나라, 타국에 병합되어 언어와 문화마저 잃어버린 나라도 많다. 때로 그런 나라와 도시는 파괴자의 전승비에서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페르시아는 거대한 제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에 대한 자신들의 기록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우리는 이 거대 제국의 멸망뿐 아니라 성장 과정도 대부분을 그리스 관찰자들의 기록에 의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 기록, 역사학의 존재, 설명 자체를 회의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다. 역사학이란 그런 왜곡 너머에 있는 진실을 찾는 학문이다. 다른 학문은 그렇지 않은가? 천문학도 승자의 역사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별은 우리 시야에 가깝게 있는 별, 밝은 별, 우리 시야에 먼저 도달해서 저 멀리 있는 빛을 가리는 별들로 시작한다. 그 너머에 있는 빛을 발견하고, 가시적인 세계 너머의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은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불확실성과의 싸움은 모든 학문과 과학의 존재 이유이다.
패자의 기록도 왜곡이 있다. 패배를 변명하고, 상대의 악을 과장한다. 승자든 패자든 왜곡에도 질이 있다. 로멜의 전투일지를 보면 상대의 전력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일이다. 적정을 속속들이 아는 경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로멜의 대담한 승부가 더 대단한 것이다. 반대로 승리가 주는 쾌감, 패자의 울분에 사로잡히면 이길 수 있는 전투도 패한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역사, 정신 승리를 위한 역사. 이것이 진정으로 위험한 승자의 역사이다.
〈255〉히틀러식 선동술

1919년 9월 12일, 독일 뮌헨의 한 맥주 홀에서 독일노동자당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당명은 거창하지만 소그룹에 불과한 집단이었다. 그래도 감시와 동태 파악을 위해 군에서 파견한 스파이가 참석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단순한 스파이가 아니었다. 군 정보대 책임자였던 카를 마이어 대위는 귀동냥 수준의 첩보 수집이 아니라 조직에 들어가 유능하게 활동하고, 대중선동도 할 수 있는 요원들을 양성하려고 했다. 마이어는 선발한 요원을 뮌헨 대학에 보내 기초적인 사회과학 공부와 연설 교육을 시켰다. 그 프로그램에서 우수한 역량을 발휘한 사람이 히틀러였다.
그날 연사는 뮌헨 대학에서 히틀러를 가르쳤던 교수였다. 청중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히틀러는 더 시큰둥했고 답답하다고 느꼈다. 그가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다른 교수가 등장해 이런저런 주장을 폈다. 히틀러는 분노했고, 뛰쳐나가 한바탕 열변을 토했다. 히틀러의 연설을 듣던 노동자당 대표는 즉시 히틀러에게 달려가 당에 가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정치가 히틀러의 삶이 시작된다.
실업중학교 중퇴의 학력뿐인 히틀러는 명연설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맥주 홀 연설은 유명해져서 나중에는 수천 명이 모였다.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얻은 히틀러는 당을 장악하고, 1934년에는 나라를 장악했다. 5년 후에는 유럽과 소련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
히틀러의 연설은 무엇이 특별했던 것일까? 히틀러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대중의 마음속에 있는 소망을 읽고,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해라.’ ‘지도자가 신념에 찬 모습을 보이면 대중은 따른다.’ 이 무서운 이론을 히틀러는 스스로 증명했다. 한 가지 예로 그는 세상을 갈라놓은 두 이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도 모두 유대인이 만든 음모라고 설명했다.
‘유대인만 없어지면 전쟁, 빈부 갈등, 풍기 문란에 파렴치범까지 사라진다.’ 사람들이 이런 말을 믿을까? 수많은 대중이 믿었다. 지금도 믿는다. 유대인 대신 다른 단어를 집어넣으면 즉효가 나타난다. 이런 선동술은 히틀러만의 작품은 아니다. 역사 속에, 전 세계에 있다. 히틀러는 성공 사례의 하나일 뿐이다.
〈256〉독재 국가와 민주 국가의 전쟁

전쟁의 역사에서 오래된 고민이 있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자유로운 민주 국가, 그리고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독재 국가. 두 나라가 전쟁을 하면 어느 나라가 유리할까? 자유와 진보를 추종하는 지식인들에게도 두려운 질문이다. 전쟁은 그 시작부터가 자유, 합리, 상식의 지경에서 벗어나서 벌이는 행동이다. 총탄 앞으로 돌격해야 할 때 토론을 할 여유는 없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가 침공해 왔을 때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의 힘을 주장했다. 전제군주에게 강제로 동원된 노예 같은 군대와 자신의 의지로 가족과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전사의 전투력은 다르다. 하필 아테네가 승리하면서 이 지론은 현대 전쟁에서까지 자유민주주의자들의 바이블이 되었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전제국가인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네를 병합하고 페르시아까지 정복해 버린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부의 키는 자유 시민군과 노예 군대의 대결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최대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력을 갖춘 군대와, 전장에서의 융통성과 적응력을 희생한 경직된 조직을 갖춘 군대의 대결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군대는 경직된 조직이 얼마나 치명적인 비효율을 초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보면 아테네인들이 말한 고향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자유 의지의 힘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 자유 의지란 전쟁의 효율과 적응력을 높이는 종류의 자유여야 한다. 전쟁이라는 특수 사정을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나라와 가족보다 이념이나 정치권력을 지키려는 의지가 앞선다면,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을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즉, 자유 의지에 따른 국가의 분열, 조직력의 분열은 권위주의 국가에서 경직된 조직력이 전쟁 수행에 미치는 해악보다 더 큰 해악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자유 국가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상황을 보면 단점이 위험 수위로 치닫는 것 같다. 모두가 이 문제를 인식하고 노력해야 할 때가 되었다.
〈257〉인간은 실수를 반복한다

미국 보스턴의 찰스타운 지역에는 오벨리스크를 본뜬 67m 높이의 길쭉한 탑이 서 있다. 미국 독립전쟁 최초의 전투였던 벙커힐 전투를 기념하는 탑이다. 1775년 6월 17일 이곳에서 영국 정규군 3000여 명과 당시엔 ‘대륙군’이라 불렀지만 민병대나 다름없었던 미군 2400명이 전투를 벌였다.
지금은 매립 공사로 주변이 많이 변했지만 이때 벙커힐은 육지와 가느다란 병목 형태의 지형으로 연결된 섬 같은 곳이었다. 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곳에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만에는 영국 함대가 있었다. 벙커힐을 미군이 점령하면 영국 입장에서는 보스턴 항구와 함대가 위험했다.
미군은 기습적으로 찰스타운을 내려다보는 벙커힐과 브리즈힐이란 곳을 점거하고 공병대장의 지휘 아래 밤새워 보루를 수축(修築)했다. 뒤늦게 영국군이 이를 발견하고 연대를 상륙시켜 공격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용감하게 버텼지만 탄약이 떨어지면서 보루는 함락되고 부대는 철수했다. 영국군은 승리했지만 결과는 승리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처참했다. 사상자 수는 미군이 450명, 영국군은 무려 1054명이었다.
영국군이 언덕 위 보루를 향해 3열 횡대로 무모한 공격을 한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영국 지휘관은 상대가 민병대라 얕보았고, 정규군의 자존심으로 정정당당하게(?) 본때를 보여주는 승리를 거두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레드 코트’라고 불렸던 눈에 띄는 붉은색 군복을 입고 무릎을 직각이 될 때까지 들었다가 내리며 걷는 프로이센식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영국군 횡대는 좋은 사격 표적이었을 뿐이다. 이날 전투는 ‘대륙인’들에게 전술만 잘 세우고 지형지물만 잘 이용하면 민병대도 정규군을 혼내줄 수 있다는 교훈만 던져주었다. 현장에서 멀리 있는 본토의 정치가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258〉‘부활절 봉기’

유럽의 기독교 문명권에서 부활절은 가장 중요한 절기이다. 작년 교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사자들에게 부활절 휴전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종교도 전쟁을 이기지는 못하나 보다.
1916년 4월 24일 1000여 명의 아일랜드 무장 독립투쟁군이 봉기해서 더블린 시내의 주요 거점들을 점거한다. 이를 부활절 봉기라고 부른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그만큼 끈질기게 저항했다. 1912년에 영국 의회는 아일랜드 자치법을 비준했다. 하지만 곧이어 발발한 1차 세계대전으로 자치 실행이 연기되었다.
이것도 불만이지만 자치 자체에도 불만인 세력이 꽤 있었다. 그들은 자치가 아니라 즉각적인 독립을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치열해지자 영국은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아일랜드인을 징병하려고 했다. 이것도 아일랜드인의 불만에 불을 지폈다. 여기저기서 결성되었던 무장단체나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런 불만을 이용해 무장봉기를 기획한다. 마침 독일과도 연결이 되어서 무기 지원 약속을 받아낸다.
봉기는 초반에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시민들의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 독일이 보낸 무기는 중간에 영국 해군에게 적발되어 전달되지도 않았다. 영국은 즉시 군대를 동원해 반군 진압을 시작했다. 4월 30일 지도부는 거점이던 중앙우체국에서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막겠다는 이유로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봉기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영국은 언제나처럼 아일랜드에 가혹했다. 무고한 시민들을 잡아 가두고, 반란 주동자들을 서둘러 총살해 버렸다. 영국의 과잉 진압으로 부활절 봉기는 정말로 항복한 아일랜드인의 투쟁 정신을 부활시켜 버렸다. 1980년대 거의 90년대까지도 테러집단의 대명사였던 IRA가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탄생하게 된다. IRA가 다 극렬단체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에도 북아일랜드 독립 문제, 영국군의 과잉 진압이 반복되면서 일부가 과격화됐다.
피는 피를 낳고 악은 더 큰 악을 생산한다.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정의는 피 묻은 돗자리에서만 피어난다는 말도 있다. 정말 부활해야 할 것은 순백의 정의이건만.
〈259〉무적의 병기

1522년 4월 27일, 이탈리아 밀라노 북부 비코카라는 평원에서 프랑스군과 합스부르크, 로마 교황령, 스페인 연합군이 맞붙었다. 이날 프랑스군에는 필승을 약속하는 무적의 병기가 있었다. 16세기 유럽 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는 용병대였다. 그중에서 스위스 용병대는 가장 비싸고 승리를 약속하는 보증수표였다. 그들이 창안한 도끼창을 이용한 전투대형은 유럽의 어떤 군대, 심지어 중무장한 기사의 돌격도 처참하게 분쇄하는 무적의 대형이었다.
스위스인들의 전투기술은 다른 나라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전투에 대한 특별한 의지, 대원을 하나로 묶는 프로의식, 수많은 승리가 제공한 확신, 고향의 척박한 삶 등 다양한 요소가 스위스 용병대의 전설을 만들었다.
연합군은 도랑의 흙을 파내서 급조한 언덕을 만들고, 이곳에 포진해서 방어 태세를 굳혔다. 흙더미 위에는 새로 전장에 등장한 신형 무기 대포를 놓았고, 전면에는 화승총 부대를 배치했다. 8000명의 스위스군이 선두에서 연합군을 향해 진격했다. 양군의 간격이 270m에 도달하자 연합군이 대포를 발사했다. 스위스군은 큰 피해를 보았지만, 연합군은 그들의 용기와 진격을 멈출 수 없었다. 전열이 도랑에 도달하자 화승총의 총성과 연기가 전쟁터를 뒤덮었다.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가 전장을 뒤덮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비명과 신음, 피 냄새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스위스군의 밀집대형은 총과 대포의 위력을 극대화시켰다.
총과 대포가 등장한 이유로 무기의 발달 속도는 무섭게 빨라졌다.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 전쟁 때마다 신형 무기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상대적으로 느린 건 인간의 의식과 아집이다. 필자가 대학생 때 크루즈 미사일을 미래의 무기로 소개한 글이 있었다. 결론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걸프전이 터지고, 크루즈 미사일이 맹활약을 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든 세상에 갇혀 산다. 어설픈 지식으로 혹세무민하고,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옳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그날 스위스 병사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04-25
〈260〉비겁한 중립과 맹목적 중립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사자의 심장과 여우의 두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군주는 군주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대표자로서의 군주이다. 따라서 이 명제는 국가의 행동지침으로 치환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마키아벨리의 시대가 아니다.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높아졌고, 법과 제도는 민주화되었다. 높은 정의감은 국제관계와 심지어 전쟁에서도 인권과 도덕의식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은 이상이다. 국제사회는 아직은 정글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테러는 21세기의 신념과 지성의 가면을 벗겨 놓았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서방세계와 러시아, 중국이 세계를 향해 내 편 되기를 강요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하는 국가도 있다. 지정학적 이유로 이해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린 그렇지 못하다.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이 만나는 지점이 한반도이다. 게다가 이 반도는 이념이 다른 두 개의 체제로 나뉘어 있다.
이럴 때 등장하는 용어가 중립이다. 어떤 이는 실리를 거론한다. 참 합리적인 이야기 같다. 그런데 중립이란 무얼까? 두 사람이 바둑을 두다가 다투고 있다. 괜히 훈수를 두거나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가만히 두고 보는 게 현명한 행동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싸우다가 물에 빠졌다. 한 번에 두 사람을 구할 수 없으니 한쪽에 먼저 손을 내밀면 다른 사람과는 원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 이번에도 중립을 지켜 구경만 하면 어떨까? 두 사람과 다 철천지원수가 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중립이란 나의 의지로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립이 실리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중립도 용기가 필요하고, 실리적 행동도 손해를 보지 않는 행동이 아니라 손실을 각오하는 현명한 이익을 선택하는 것이 실리적 행동이다.
중립이란 용기 있는 선택이어야지 현실도피와 비겁함의 대안이어서는 안 된다. 실리가 노력도 고통도 손실도 겪지 않고 이익만 취하겠다는 행동이어서는 안 된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