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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雜事(한국사)2023-1/ 01.06 신분제 조롱한 붓끝, 끝내 못다 핀 ‘하늘이 내린 괴물’ - 04.29 국내 소개된 최초의 안익태 곡 ‘애국가’

상림은내고향 2023. 4. 30. 21:39

역사속의 雜事(한국사) 2023-1/

01.06 신분제 조롱한 붓끝, 끝내 못다 핀 ‘하늘이 내린 괴물’

‘홍길동전’ 허균 집안의 비극

“나와 내 누이의 글을 챙겨 훗날을 도모해다오!” 역적 누명을 쓰고 형장으로 가는 허균(1569~1618)이 딸과 사위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이다. 허균은 역사에 다시 없는 ‘괴물’로 목이 잘리고 몸이 찢어진 주검이 되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을 딸에게 못다 한 꿈을 맡겼다. 아비가 역모 죄인이라 하더라도 시집간 딸의 경우는 목숨까지 내놓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이니만큼 그 죽음 또한 혁명과 반역을 넘나들며 소설 같은 여운을 남겼다.

 

가족은 날개인가, 굴레인가

조선시대는 개인의 흥망성쇠가 가족과 연동되고 부모와 조상을 통해 내 존재가 설명되는, 모든 길은 가족으로 통하는 사회였다. 물론 그 내부는 적서(嫡庶) 차별로 인해 가족이 날개인 사람과 가족이 굴레인 사람으로 나뉜다. 허균은 양반의 적자이지만 서자의 설움을 알았고, 신분의 족쇄에 걸린 유능한 인재를 안타깝게 여겼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이록(利祿)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는’ 선현들을 붓끝으로 조롱하면서 특권의식에 도취된 양반을 비웃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적 특권을 누리기보다 넘어서고자 했던 그를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괴물(天生一怪物)’이라 했다.

▲조선시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허균의 표준 영정. 유교국가 조선에서 허균 집안은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이러한 허균의 자신감은 가족이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누나 허난설헌(1563~1589)은 중국의 문사들도 열광한 천재 시인 아니던가. 가족에서 얻는 행복과 가족이기에 받는 고통이 오늘날의 상황과 오버랩되는 그의 가족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으며 연재를 시작한다.

양반 적자임에도 특권층 비웃어
역모 혐의로 숨진 시대의 반항아

누이 난설헌 등 ‘허씨 5문장’ 명성
유·불·선 넘나드는 자유로운 가풍

붕당정치·임란에 일가 모두 희생
음모·조작의 연속극, 지금 우리는?

 어린 기억 속의 그는 세상의 버릇없는 막내들과 다를 바 없는 부모와 형제자매의 사랑을 독차지한 응석받이였다. 아버지 허엽(1517~1580)이 53세에 낳은 늦둥이에 형들과의 나이 차는 무려 스무살이 넘었다. “열두 살 때 엄친을 여의었는데, 어머니나 형님들은 나를 어여삐 여기고 사랑만 하여 공부를 재촉하지 않았어요. 좀 더 자라서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그들을 따라 육경(六經)과 역사서를 두루 읽기 시작했지요.”(‘답이생서, 答李生書’)

 

유성룡·이순신 집안과 교류

 ▲강원도 강릉 경포호수 남쪽에 조성된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아버지 허엽은 두 번의 결혼으로 3남 3녀의 자녀를 얻는다. 전처 청주한씨와의 사이에 박순원의 아내가 된 장녀와 우성전의 아내가 된 차녀 그리고 아들 허성을 두었고, 후처 강릉김씨와의 사이에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두었다. 전처 아들 ‘성’과 후처 아들 ‘봉’이 세 살 터울인 것을 보면 3년 사이에 출산과 사별, 재혼과 출산이 이루어졌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가정사와는 별개로 당시 허엽은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맡아 정사(政事)에 몰두하는데, 바깥일 하는 양반은 집안일에 무심해야 하는 것이 남녀유별의 정신이고 내외지분의 법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허균 일가의 무덤.

 

허엽과 김씨의 혼인은 당시 예조참판이던 김광철이 전도유망한 젊은 동료를 사위로 낙점함으로써 성사되었을 것이다. 정승인 그가 아이 셋 달린 자리에 딸을 시집보낸 것은 양반관료 사회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즉 혼인은 가문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어린 사윗감의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이미 급제하여 보장된 재취 자리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실제로 초혼에서는 별 볼 일 없다가 재혼을 통해 더 왕성해진 가문이 셀 수도 없이 많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의 묘. 아들 균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묘표가 부러지는 화를 당했다. 묘표 뒷면에는 균의 이름이 지워져 있다. 오른쪽 묘표는 허엽의 후실이자 허균 남매의 생모 강릉김씨의 것인데 봉분이 없다.

 

허엽의 본가는 한성 건천동(현재 인현동)에 있었다. 두 아들 허성과 허봉의 동네 형으로 류성룡과 이순신이 살았다. 특히 류성룡은 허씨 가족들과 각별했는데, 그 집 사위 우성전은 벗이었고, 그 집 막내 허균은 제자였다. 훗날 류성룡은 허균이 들고 온 『난설헌시고』와 우성전의 아내 허씨가 보내 온 『계갑일록』, 그리고 허봉의 『하곡집』 등 허씨 가족들의 문집에 추천사를 쓴다. 생활 공간 건천동이 허씨 가족들에게는 역사적 무대가 된 셈이다.

 

아버지 허엽의 폭넓은 세계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표준 영정. 허난설헌 또한 빼어난 문인이었다.

 

한편 김씨 소생의 세 남매는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서울 본가에서 자랐다. 훗날 전라도를 여행하던 허균은 고부(古阜)에서 이우(李瑀)를 만나는데,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씨 어른은 율곡 선생의 아우이시다. 내게는 고향의 어른이 되는데 시와 그림과 글씨를 모두 잘하여 존경하는 분이다.”(‘조관기행, 漕官紀行’) 외가 강릉을 고향으로 여긴 것은 동성 촌락이 형성되기 전의 정서이다.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에서 나왔다”고 한 허균의 말을 보면 가족이 곧 교학(敎學)의 공간이었다. 유교는 물론 불교·도교와도 왕래한 허엽의 폭넓은 지식 세계는 아들과 딸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난설헌이 선계(仙界)에서 노니는 자유 정신을 그린 것이나 허봉과 허균이 불교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은 것에서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허균은 “중형(仲兄)이 적소(謫所)로부터 돌아와서 비로소 고문(古文)을 가르쳐 주셨고” “젊었을 때 중형의 명으로 손곡 옹에게 시를 물어 방향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

 

허봉은 당시(唐詩)의 대가 손곡 이달(李達)을 교사로 모셔올 만큼 두 동생의 교육에 지성이었다. 그는 또 시집간 누이가 시작(詩作)에 게으를까 수시로 격려하며 “두보의 명성이 내 누이에게서 다시 일어나기를” 염원한다. 세상은 그들을 ‘허씨 5문장’이라 불렀는데, 허엽과 그 자녀 성·봉·난설헌·균을 가리킨다. 게다가 두 사위 우성전과 김성립까지 여섯이 문사로 조정에 올라 서로의 수준을 높였는데, 세상에서는 허씨 파를 가장 치성한 가문으로 쳤다. (『선조수정실록』 13년(1580) 2월 1일)

 

즐거움도 고통도 공유한 형제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 허씨 가족은 서로가 겪는 수난과 고통도 자기 일인 양 아파했다. 허봉은 네댓 살 먹은 누이의 아들이 죽자 극진한 슬픔을 기록으로 남겼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아이는 희윤이다. 희윤의 아버지는 성립인데, 나의 매부다. 희윤의 할아버지는 첨(瞻)인데, 내 친구다.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짓는다. 해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희윤묘지, 喜胤墓誌’)

 

허씨 가족은 동서 분당의 정치적 갈등과 임진왜란의 직격탄을 맞으며 쇠락해간다. 동인에 속한 허봉은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살아 돌아오는 자가 드물다는 갑산 유배에 처해졌다. 여동생 난설헌은 그 안타까움을 시에 담아 “멀리 갑산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를 위로하고, “변방의 소식 뜸하니 이 시름 풀 길이 없는” 극한의 슬픔에 빠진다. 허봉은 2년여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38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듬해에는 난설헌이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죽이고, 또 죽이는 역사의 질곡

 ▲허균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홍길동전’의 19세기 판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가족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허균은 피난길에 아내를 잃었고, 의병 간 두 자형 우성전과 김성립도 세상을 떴다. 이즈음 허균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과격한 언사를 남발하여 구설에 오르기도 하는데, 맏형 허성이 정서적 언덕이 되어 주었다. 허균은 “헤어진 지 3년 만에 형님을 만나 너무 기뻤고 한 이불을 덮고 잤다”며 자랑하는가 하면, “형님이 내 생일상을 차려주었다”며 좋아한다. 각자가 남긴 기록의 조각을 모아보면 허균의 형제자매들은 적어도 장유유서의 엄격함이나 가문의 외형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족애를 바탕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지만 역적이 된 허균으로 인해 아버지는 무덤이 훼손되고 형과 누이는 역사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조작과 음모로 죄가 만들어지고 상하좌우 모든 가족을 죽이고 다시 죽이는, 이런 형태는 물리고 싶은 역사이다.

 

공초(供招) 기록을 보면, 허균 사건은 영의정 기자헌이 폐모 문제로 위기에 몰리자 그 아들 기준격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이 임금을 해칠 모의를 한다”는 고변에서 시작된다. 허균에게 글을 배울 때 역모의 조짐을 보았다는 것이다. 치열한 공방 끝에 허균 가족은 결국 역적의 씨를 배태한 “본래 패려궂은 집안”으로 단죄된다. 그런데 승리한 기씨 부자가 “본디 흉악하고 음흉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이숙인=성균관대 동양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중국 고대 유교경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했다. 근래에는 여성과 가족으로 조선시대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또 하나의 조선』 『정절의 역사』 『동아시아고대의 여성사상』 등을 냈다.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02.10 [단독] “안중근 모친의 ‘편지’는 일본인 승려의 조작이었다”

도진순 교수, 미발표 논문 ‘조마리아 편지 조작과 실체’에서 밝힌 내용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의거를 다룬 최근 개봉 영화 ‘영웅’에서 관객을 크게 감동케 한 대목은 결말에서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1862~1927) 여사가 등장하는 장면일 것입니다. 조 여사는 감옥에 있는 아들 안중근에게 한글로 쓴 편지를 전하면서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를 위해 죽으라”고 격려하며 수의(壽衣)를 전해 줍니다. 배우 나문희의 열연과 ‘내 아들 나의 사랑하는 도마야’로 시작하는 뮤지컬 넘버(삽입곡)가 이 장면을 더욱 비장하게 만듭니다.

 

 영화 '영웅'에서 사형수 아들의 배냇저고리를 끌어안고 노래하는 조마리아 여사. 나문희의 열연으로 최고 명장면이 됐다. /CJ ENM

 

문장 순서와 일부 표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편지의 내용은 그 동안 여러 서적과 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진 것입니다. 바로 아래의 ⓐ죠.(이제부터 자료를 ‘ⓐ’와 ‘ⓑ’로 나눠 구분하겠습니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은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수의를 지어 보내내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현재 대다수 한국인들은 안중근의 모친이 사형을 앞둔 아들에게 이런 감동적인 말을 전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 다른 자료에서 본 조마리아의 전언(傳言)은 상당히 결이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는 이후 신묘(神妙)하게 형(刑)을 받아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다시 나오너라. 너가 형을 받을 때 빌렘 신부님이 너를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가서 너 대신 참회를 올릴 것이니, 너는 그때 신부님의 인도 아래 우리 교회 법도에 따라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거라.”

 

ⓑ는 ⓐ의 맨 끝부분 문장으로 시작하면서도 ⓐ에 나왔던 그 전까지의 모든 얘기가 빠져 있는 반면, 상당히 읽기 불편한 뜻밖의 내용이 추가돼 있습니다. ⓐ는 ‘너는 대의에 따라 장한 일을 했으니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죽으라’는 내용이지만, ⓑ는 ‘너는 현세에서 살인이라는 죄를 지었으니 신부님이 너 대신 참회할 것이고 너는 그에 따라 합당한 형벌을 받고 죽은 뒤 죄를 씻고 다시 태어나라’고 꾸짖는 내용입니다. 특히 ‘죄악’이라는 단어를 보고 눈을 의심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두 자료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며 진실은 무엇일까요.

2016년 3월 20일 KBS2 '1박 2일'에서 소개된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KBS

 

우선 ‘편지’라고 알려진 ⓐ의 실체와 출처는 무척 모호했습니다. 2016년 이 편지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실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언제 어느 경로로 전해진 것인지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9년 3월 7일 인터넷 매체 ‘뉴스톱’에 뜻밖의 글이 올라옵니다. 이슬람 전문가인 김동문씨가 쓴 기사입니다. 편지 ⓐ가 처음 등장한 자료는 일본 다이린지(大林寺)의 주지인 사이토 다이켄(齋藤泰彦)이 써서 1994년 1월 출간한 책 ‘내 마음의 안중근(わが心の安重根)’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온라인과 일상에서 회람되는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는, 일본인 사이토 타이켄 주지스님을 통해 유일하게 전해지는 구설(口說)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이토는 무슨 근거로 그런 ‘편지’의 내용을 책에 쓴 것일까. 얼마 전 김훈 소설 ‘하얼빈’이 안중근을 왜곡했다며 논문을 써서 비판한(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11/14/DQTJVQ5LINAB5E5Q25B2BHCFAA/) 학계의 안중근 전문가이자 한국근현대사학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는 마침 영화 ‘영웅’을 본 뒤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 ‘조마리아의 편지’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역사비평’에 투고했다고 했습니다.

 

논문 제목은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와 <전언>, 조작과 실체’입니다. 조마리아 ‘편지’의 진위 문제에 대한 학계의 첫 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미발표 논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석해 보겠습니다.

 

도진순 창원대 교수.

 

◇조마리아 세 차례 ‘전언(傳言)’의 실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일은 1909년 10월 26일이었습니다.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안중근을 처음으로 면회한 날짜는 12월 23일이었고, 여기서 어머니 조마리아의 ‘전언’을 전달했습니다. 이 면회 광경은 12월 24일자 오사카매일신보가 처음 보도했고, 이 일본어 기사를 번역해 28일 황성신문, 29일 대한매일신보가 같은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형제간에 대면할 때 막내 안공근이 실성통곡하니, 담대한 형 안중근도 돌연 피가 가슴 가득 차오르는 듯 상기된 표정을 보였으나, 조금 지나 삼형제가 억지로 정신을 수습하였다. 두 동생이 어머니가 보낸 십자가를 꺼내 형 안중근의 눈 위에 받들어 모시고는 어머님의 <전언>이라며…”

 

두 동생은 분명 어머니가 쓴 ‘편지’를 들고 가지 않았습니다. 전언, 즉 어머니 조마리아의 말을 형 안중근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조마리아의 전언은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의 내용이었습니다. 현세에서 다시 만나길 원하지 않으니, 너는 형을 받아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다음 세상에선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돼 세상에 다시 나오라는. 그리고 신부님이 대신 참회를 올릴 것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 /국가보훈처

 

이 말을 들은 안중근이 놀라거나 실망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맹세코 교회의 법도에 의거하여 신도(信徒)의 자격과 신자(臣子)의 도리에 추태를 보이지 않고 최후를 마칠 터이니, 어머님은 안심하옵소서”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조마리아의 두 번째 ‘전언’은 해가 바뀐 1910년 2월 1일에 있었다는 것이 미주 신한민보의 같은 해 3월 10일자 보도입니다. 도진순 교수가 최근 찾아낸 것이죠.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은 뤼순지방법원으로부터 공판의 변호를 거부당한 뒤 안중근을 면회해 조마리아의 이런 말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국가를 위하야 이 지경에 이르렀슨즉 죽더라도 영광이어니와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하겠으니 정리(定離·헤어지기로 정해져 있음)에야 어찌할까.” 첫 번째 전언에서 말했듯 아들이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일이 나라를 위한 것이었음은 이해하고 있고,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고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세 번째 전언은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기 하루 전인 2월 13일 다시 면회를 온 두 동생이 전한 어머니의 말로, 같은 날 만주일일신문에 실렸습니다. “결국 사형 언도를 받는다면 깨끗이 죽어서 명문(名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빨리 천국의 하느님 곁으로 가도록 하라.” 기사는 ‘당찬 부모의 마음에 검찰관도 암루(暗淚)에 목이 메었다’고 썼습니다. 여기서 ‘명문’이란 전통적인 양반 명문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황해도 일대의 천주교 신자를 급격히 늘리는 데 공헌한 ‘가톨릭 명문’이라는 의미라고 도진순 교수는 해석합니다. 역시 처음의 전언과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속죄하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1910년 3월10일 안중근 의사가 면회 온 안정근과 안공근 두 동생(왼쪽)과 빌렘 신부(등을 보이는 사람)를 만나고 있다.

 

조마리아의 ‘전언’은 이 세 가지가 전부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편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졌다’ ‘대의에 죽는 것이 효도다’ ‘옳은 일’ ‘웃음거리’ ‘불효’ 등의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효(孝)’나 ‘의(義)’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조마리아가 아들에게 보냈다는 ‘편지’는?

네, 어디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전언’만 있었을 뿐 ‘편지’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편지가 있었다’는 얘기는 언제 출현하게 되는 것일까요.

 

사이토 다이켄 저 '내 마음의 안중근'(1994).

 

◇1차 조작: 사이토 다이켄 ‘내 마음의 안중근’

도진순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안중근 의거 당시부터 조마리아에 대한 애국적 추앙이 있었으나 위에서 언급된 ‘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 2010년 전후다. 그 원조를 추적해 올라가면…”

앞서 말했던 책, 바로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다이린지의 주지인 사이토 다이켄의 그 저서, 1994년 출간한 ‘내 마음의 안중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이토는 도호쿠(東北)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아사히신문 기자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가 쓴 ‘내 마음의 안중근’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일본인 간수였다는 지바 도시치(千葉十七·1885~1934)와 안중근의 인연을 중심으로 쓴 책입니다. 그러나 사이토 주지는 1935년생이니 지바와 만나 증언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책의 신빙성에는 당연히 의문이 있습니다. 더구나 조마리아의 전언이 안중근 사형 선고 ‘이후’에 이뤄진 것이라는 잘못된 서술과 함께 이 전언을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공소 같은 것 하지 말고 바로 형을 받아라. 너는 한국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의거를 행한 것이다. 공소를 하면 생명은 길어지겠지만 큰 수치가 된다. 만약 네가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해서 공소하려 한다면, 이 어미의 교육은 대체 뭐였는가 하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 내용은 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어떤 자료에서도 볼 수 없던 것입니다. ‘의거’ ‘불효’ ‘웃음거리’처럼 원래 조마리아의 전언에는 없고 더 나중에 나온 ‘편지’ⓐ에만 있는 말들이 여기서 비로소 등장합니다. ‘빨리 형을 받으라’는 것의 이유가 처음 전언처럼 ‘현세의 죄를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거를 행한 것이기 때문’으로 의미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내 마음의 안중근' 저자인 일본 다이린지 주지 사이토 다이켄. /연합뉴스

 

이것은 분명 조작이었다고 도진순 교수는 평가합니다. 도 교수는 2010년 5월 22일 일본 다이린지에서 사이토를 만나 책 내용의 의문점에 대해 물어봤는데, 사이토는 한참 침묵한 뒤 자리를 떠서 담배를 피우고 돌아와 책 내용 일부를 자신이 조작했음을 시인한 뒤 서둘러 인터뷰를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전언’ 부분에 대한 해명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이토가 조작을 한 것이 맞는다면, 그는 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요? 도진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이토는 다이린지에 안중근 휘호 ‘위국헌신’ 유묵비를 세웠습니다. 책을 발간한 직후 다이린지는 안중근과 한일 교류의 상징으로 부상했죠. 한국인의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안중근 책을 쓰면서 이야기를 과장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조작·윤색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에 쓴 유묵(遺墨)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2차 윤색: 한국어판 ‘내 마음의 안중근’

그런데 이 책이 2002년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원문에는 없는 내용들이 추가됐습니다. 해당 부분의 한국어 번역을 보죠. 번호는 도 교수가 달아놓은 것입니다.

“①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된다. ②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은즉 죽는 것이 영광이나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이렇다 말할 수 있으리…”

 

사이토의 책을 번역하며 ①에서는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원문에 없는 내용이 추가됐습니다. 여기에 1910년 2월 1일 신한민보에 실린 두 번째 전언의 내용인 ②를 새로 삽입해 ‘국가를 위한 일을 한 것이니 공소(항소)하지 말라’는 문맥을 만들었습니다.

 

2002년 한국어로 첫 번역된 '내 마음의 안중근'. 사진은 지난해 출간된 개정판의 표지다.

 

◇'편지’ⓐ의 최종분석

이제 다시 현재 널리 유포된 ‘편지’ⓐ의 실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도진순 교수의 논문을 토대로 제가 다시 번호를 매겨 분석한 것입니다. 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이 1994년 이후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①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③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은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수의를 지어 보내내 이 옷을 입고 가거라.

 

⑤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여기서 조마리아의 세 차례 전언 중에 실제로 있었다고 여길 근거가 있는 말은 ③(1910년 2월 1일 2차 전언)과 ⑤(1909년 12월 23일 1차 전언) 뿐입니다. 그중 ⑤에서는 ‘형을 받고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으라’ ‘신부님이 대신 참회할 것이다’라는 말이 삭제됐습니다. 나머지 ①②④는 실제로 조마리아가 한 말이 아니라 모두 1994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①은 1994년 사이토의 책에서 처음 나온 내용, ②는 2002년 한국어 번역본에서 처음 나온 내용, ④는 그 이후에 누군가에 의해 추가된 내용입니다.

 

이렇게 허구와 실제의 자료를 뒤섞고 짜깁기한 자료, 조작과 윤색으로 만들어진 말이 실제 있었던 전언의 날짜(1909년 12월 23일, 1910년 2월 1일과 2월 13일)를 모두 뛰어넘어 안중근의 사형 선고일인 1910년 2월 14일 이후에 어머니가 보낸 ‘편지’의 내용인 것처럼 둔갑했던 것입니다.

 

사형 직전 흰색 수의(壽衣)를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

 

◇'수의’는 과연 어머니가 지었는가?

이 조작된 ‘편지’에는 “여기에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라는 말이 삽입됩니다. 뮤지컬과 영화 ‘영웅’에선 어머니가 지어 준 수의를 입고 형장으로 향하는 안중근의 모습이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실제와는 달랐습니다. 안중근의 순국일은 1910년 3월 26일이었는데, 안중근은 3월 8~11일 빌렘 신부를 만나고 난 뒤에야 ‘내 의복은 피가 묻어 더러워졌으니 조선풍의 흰 옷으로 빨리 바꿔 입고 싶다’며 수의를 요청했습니다. 2월 14일 이전 어머니의 ‘전언’에서 ‘수의를 지어 보낸다’는 말은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안중근은 수의를 어떻게 구했던 것일까요. 3월 24일자 만주일일신보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안중근이 주문한 흰색 한복은 2~3일 전 뤼순의 객잔에 머물고 있는 두 동생 앞으로 보내져 온 가격이 56원으로 매우 훌륭한 것이라 한다.”

 

어머니 조마리아가 수의를 지어 준 것이 아니라, 아들의 요청에 따라 56원을 들여 옷가게에서 수의를 주문 구입한 뒤 안중근에게 전달했던 것입니다.

 

뮤지컬 '영웅' 중 안중근(양준모)이 순국을 앞두고 있는 모습. /에이콤

 

◇조마리아는 아들에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이후 숱한 한국인들에게 의사(義士)로 칭송된 아들에게 정작 어머니 조마리아는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했던 것일까요.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다시 나오너라”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어머니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조마리아 역시 몹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첫 번째 전언이 안중근 앞에서 십자고상을 앞세운 엄숙한 의례를 통해 전달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천주교 교리상 남을 죽여 십계명을 위반한 자는 자신도 죽어야 한다는 성경 원리에 따라 죽음으로 속죄해야 한다는 종교적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마리아의 입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것이며, 결코 일제의 판결이나 식민 정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고 도진순 교수는 말합니다. 조마리아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했으며, 아들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한국의 수십만 생명을 장차 무엇으로 대신하려느냐”고 일본 재판정을 향해 분노했습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의 후원자이자 대모(代母)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됩니다.

 

‘조마리아 편지’의 조작은 사실의 왜곡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 조마리아와 아들 안중근의 중대한 입장 차이를 가리는 역할을 한다고 도진순 교수는 지적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문제는 항일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쟁점이었으며, 조마리아의 입장은 결국 안중근이 감옥에서 도달한 내면의 최종 지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자의 중요한 이견(異見)을 직시해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이해하고 계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작된 ‘조마리아 편지’의 영향은...

이렇게 왜곡된 ‘조마리아 편지’가 미친 영향은 컸습니다. 최근 TV프로그램에서 이 ‘편지’가 진짜인 것처럼 소개된 예를 몇 가지 들어보죠.

2013년 5월 11일 MBC ‘무한도전’.

2014년 2월 13일 JTBC ‘썰전’.

2015년 11월 17일 EBS컬처 ‘책밖역사: 안중근의 수의’.

2016년 3월 20일 KBS2 ‘해피선데이-1박 2일’.

2019년 2월 25일 tvN ‘문제적 남자’.

2019년 3월 1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

 

(2023년 1월 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조작된 ‘편지’ⓐ 대신 조마리아의 첫 번째 전언 내용, 즉 전언ⓑ의 앞부분을 잘 소개했지만, 여전히 이것이 ‘편지’였다는 오류에선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꼬꼬무’의 제작진은 최소한 ⓐ가 믿을 만한 자료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23년 1월 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조마리아의 편지'를 소개하는 장면. 지금까지 여러 매체에 나왔던 '편지'가 아니라 1909년 12월 23일의 '전언' 내용을 출연자가 낭독하게 했으나, 여전히 이것이 '편지'라는 오류는 남겼다. /SBS

 

도진순 교수는 “사료의 조작이나 창작이 지극한 호의에 의한 선양이나 선의에 의해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1994년경 뿌려진 조작의 씨앗이 21세기에 들어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윤색되고 전방위로 확대되어, 이제는 일정한 병리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씨를 뿌린 사람과 더불어 대중들의 광범위한 ‘애국주의’가 배양의 온상이 되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논문을 끝맺습니다. “조작된 허구가 ‘장엄한 역사’로 편입되는 것을 들어내고 바로잡기 위해서 호의를 지닌 주제일수록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엄정성, 애국적 주제일수록 비판적 사유가 허용되는 학문적 개방성이 견실하게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안중근 관련 단체의 한 인사가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미화하지 않아도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다.”

 

‘내 마음의 안중근’이 출간된 1994년 이전에도 대한민국에서 안중근은 의사(義士)였습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월간조선 03월 호

6·29 당시 김용갑 민정수석의 메모 단독 입수

 “6·29 이끌어낸 전두환 결단이 지금의 대한민국 만들었다”

6·29 직전 2주간 전두환·노태우 비롯해 청와대와 민정당 인물들 행동과 발언 기록한 메모 단독 입수

⊙ 6월 민주화운동 당시 서울시청, 명동성당 시위 현장에서 민심 체감
⊙ 6월 14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하고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연구하자”고 건의
⊙ 1987년 6월 18일 전두환 대통령을 40분간 독대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 건의
⊙ 흔들리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지도자의 노선이 중요하냐”고 진언
⊙ “6월 14일 녹지원 회의에서 거의 계엄령으로 결정”
⊙ “6·29 이후 보안사에서 쿠데타 모의”

金容甲
1936년생. 육사 17기 /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총무처 장관, 국회의원(15·16·17대) 역임. 現 국민의힘 상임고문

 ▲김용갑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1987년 6·29 당시 작성했던 메모.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과 6월의 일지 두 가지다.

 

한국 정치에서 개헌(改憲)은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제기되는 이슈다. 1987년 6·29 선언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은 36년간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 그동안 수없이 개헌 논의가 이뤄졌지만 개헌이 성공하지 못한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국민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현행 헌법에 심각한 허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6·29를 계기로 탄생한 현행 6공화국 헌법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단연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다. 6·29가 1980년대 민주화 항쟁의 종착점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987년 4·13 호헌(護憲)조치 이후 6월 민주화 항쟁이 격화되면서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盧泰愚) 대표는 6월 2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건의한다며 직선제 개헌과 시국사범 석방, 언론자유 등 8개 항을 제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바로 다음 날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후 여야 합의로 마련된 직선제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그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평화민주당 김대중(金大中), 신민주공화당 김종필(金鐘泌)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용갑 전 수석은 1987년 6월 청와대 내부의 급박한 상황을 일지 형식으로 적었다.

 

6·29 선언의 내막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증언이 있었지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6·29 선언은 전두환 연출-노태우 주연이라고 정리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김용갑(金容甲·87)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이다.

김용갑 전 수석은 최근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을 제안하며 보고한 A4 3장 분량의 메모(이하 메모1), 그리고 6·29 직전 약 2주간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후보)를 수차례 직접 만나며 긴박하게 돌아갔던 상황을 일지(日誌)식으로 기록한 A5용지 5장 분량의 메모(이하 메모2)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증에 앞서 《월간조선》에 제공했다. 이 자료들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김 전 수석은 “6·29 선언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맞물리면서 수십 년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며 진실을 상세하게 기록해달라고 당부했다. 6·29 막전막후의 긴박한 정황을 담은 해당 메모와 당시 정황을 김 전 수석의 설명과 함께 시간순으로 소개한다.


“현장 보고 나니 민심 진정시킬 수 없다는 생각 들어”

1987년 이뤄진 6·29와 개헌의 화두는 1986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1년 반 앞두고 여야는 대통령 간선제 헌법 개헌 여부와 관련해 격론을 벌이는 상태였다. 여당인 민정당은 내각제를,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했다. 민정당은 내각제로 민주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여론 형성에 앞장섰다. 전두환 대통령도 내각제에 적극적이었고, 1986년 4월 내각제 국가들(영국, 서독, 프랑스, 벨기에 4개국)을 순방하면서 내각제와 관련한 정국 구상을 하기도 했다. 1986년 1월 민정수석이 된 김용갑 전 수석의 얘기다.

“전두환 대통령의 최대 정치적 관심은 ‘평화적인 권력 이양’이었다.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말로를 보았기 때문에 자신만은 그런 길을 걷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권력을 넘겨주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길 원했다. 대통령 임기가 2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민정수석이 되면서 대통령의 그런 뜻을 알게 됐고, 그 뜻을 이뤄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김 전 수석은 청와대에 들어오자마자 여야가 거세게 맞붙는 정국 혼란을 목격하게 된다. 대통령과 여당이 내각제를 외치는 동안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외쳤다. 제1야당 신한민주당(신민당)은 1986년 2월 김영삼, 김대중이 주도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공동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추진운동을 시작했다.

3월 7일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와 김영삼 상임고문,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은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1986년 가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7년 대통령 선거 실시를 제의했다. 이후 전국에서 4~6월에 걸쳐 헌법개정 추진운동 지방 지부 현판식이 줄줄이 열렸다. 김 전 수석은 4월 19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현판식에 행정관 한 명과 함께 참석했다. 이날은 민추협 회직자 및 신민당 당직자, 대학생 등 1000여 명이 가두시위를 하고 9명이 구속된 날이었다.

“전국에서 시·도별로 직선제 개헌운동 현판식이 열리고 있다고 해서 직접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주변에서는 반대했지만 내가 직접 보고 분위기를 실감한 후 대통령께 현실을 보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체육관으로 들어가면서 집사람에게는 내가 30분 이상 안 나오면 경찰에 알리라고 했다. 일반 시민인 것처럼 행동하며 들어가 보니 군중의 열기와 분노가 심상치 않았다. 나중에 신문을 보니 2만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현장을 보고 나니 민심을 이대로는 진정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국 혼란은 더 심해질 것이고 정부가 막는 것도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바로 대통령한테 보고를 했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말씀드렸고, 개헌 논의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시청 앞 집회 등 지켜봐

 ▲1987년 6월 서울 명동 거리. 도로 전체가 거대한 시위장으로 변했다. 사진=조선DB

 

이후 전두환 대통령은 4월 30일 청와대 3당 대표회담에서 “국회서 여야가 합의하면 임기 중 개헌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개헌 논의를 공론화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30일에는 민정당과 신민당의 합의로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후 1년여간 여야는 개헌에 대해 토론을 이어갔고,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오지 않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개헌논의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게 정부·여당의 입장이었다.

호헌조치 이후 정국은 급격히 혼란해졌다. 호헌조치에 앞서 1987년 1월 박종철군 사망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4·13 조치는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격한 시위가 이어졌으며, 특히 6월 들어 혼란은 극심해졌다. 서울 연세대에서 시위가 열린 6월 9일에는 이한열군이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경(死境)에 이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6월 10일에는 서울시 전역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100만여 명이 모인, 이른바 6·10 항쟁이다. 청와대도 상황을 보고받았지만 내부 갑론을박만 이어지는 상태였다. 서울시내 시위가 이어지던 6월 12일, 김 전 수석은 서울시청 앞으로 나갔다.

“최루탄이 계속 터지니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인파에 밀려다니다 시위 주도자들을 따라 명동성당에 갔다. 3000여 명이 명동성당에 모였고 출입구를 봉쇄해서 나갈 수도 없었는데, 신분이 드러났다가는 당장 잡힐 분위기였다. 해산 후에 겨우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안기부장 안무혁(安武赫), 민정당 사무총장 이춘구(李春九)와 저녁을 먹었다. 그들에게 현장에 가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다, 민심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 얘기했더니 그들도 동의했다. 내가 대통령 직선제도 고려를 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그때 청와대와 여당에서 직선제는 입에 담기도 힘든 금지 단어였다.”


“나라가 어떻게 될지가 문제 아니냐”

 ▲5공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김용갑 전 수석은 6공에서 총무처 장관을 지냈고, 15~17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사진=조선DB

 

 김 전 수석은 다음 날 현장 방문에 대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 역시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다음 날인 6월 14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전두환 대통령, 총리, 군 수뇌부, 경찰 등이 모여 회의를 했다. 사실상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한 회의였다.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은 경찰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했지만 다들 계엄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날은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 후 다시 참석자들과 청와대 비서실장, 수석 몇 명이 모여 티타임을 가졌고 김 전 수석이 직선제 얘기를 꺼냈다.

“내가 ‘지금 계엄령 선포가 문제가 아니다. 계엄령으로 당장의 혼란은 수습한다 해도 앞으로 정국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나라가 어떻게 될지가 문제 아니냐’고 강하게 말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고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연구하자고 했다. 다들 깜짝 놀랐다. 당시 상황에선 상상도 못 할 얘기였다.”

다음 날인 6월 15일은 민방위 훈련의 날로, 민방위의 날 대통령은 청와대 지하 벙커에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날은 대통령이 벙커에서 나와 수석들과 회의를 했다. 이날 청와대 수석들은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김 전 수석은 이날 김윤환(金潤煥) 정무수석비서관과 시국 수습에 대해 논의했다.

“개헌과 대야(對野) 관계 등 정치적인 분야는 원래 정무수석의 역할이다. 그래서 김윤환에게 물어보니 88올림픽 이후 선택적 국민투표 같은 ‘한가한’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내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 직선제에 대해 설명했다. 김윤환도 쭉 듣더니 동의했다. 일단 정무수석 김윤환이 동의하면 여당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인 16일 김 전 수석은 민정당 국회의원인 현홍주(玄鴻柱), 김학준(金學俊), 유흥수(柳興洙)와 식사를 하며 직선제 얘기를 꺼냈다. “여당을 설득하려 한 건데, 정치인들이라 그런지 잘 알아듣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웬만큼 분위기가 잡혔다고 판단해 17일에 대통령께 직선제 개헌을 해야 한다고 보고하려고 준비를 했다.” 이 준비 내용이 [메모1]이다. 실제 보고는 6월 18일이다. (메모에서 한자로 표기된 부분은 대부분 한글로 바꾸었고, 판독이 어려운 부분은 ○으로 표시했다-편집자 주)


(메모1)

報告 1987. 6.18
6/18(09:00) 각하
6/19(10:10) 盧 代表
6.19 報告 요약
밖에서는 각하의 통치 방향 대변, 설명, 이해 오늘 보고: 각하 구상에 한 방법. 참고
각하께는 사실 정확히 보고. 끝까지 들어주시기 바람

1. 현 시국 인식
ㆍ민심 회복 불능
ㆍ민정당의 정치일정 추진 불가능
ㆍ단기적 불을 끄더라도 (설사 되어도 지탱 곤란, 각하의 용기와 결단력 필요)
ㆍ4·13 재검토 없이 근본해결 불능(이슈집약)
ㆍ일거에 만회,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획기적인 구상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역발상법 의한 대응

2. 몇 가지 방법
ㆍ올림픽 직후 직선제나 선택적 국민투표
ㆍ13대 국회의원 선거결과 -직선제, 내각제 개헌
ㆍ4·13 조치에 국민투표 부의
※이 3가지 나름대로 약점. 일부의 반대 계속, 학원 불안
일거에 민심을 회복 불가. 승산도 희박
ㆍ마지막 각하의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오는 결단으로 직선제 대통령 선출 개헌 주장할 것임

3. 승산가능성 있을까
ㆍ각하께서 우리 민족사에 문자 그대로 평화○ 위대한 대통령 기록 기회
ㆍ생즉필사, 사즉필생(이순신)
ㆍ솔로몬의 명재판
ㆍ개헌공방으로 국가안위까지 운위될 때 여당이 과감하게 야당의 안을 수용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진정한 우국정당이 어느 쪽인가를 인식시켜줄 계기 마련
ㆍ중산층(3/4) 동향○○
-안정 희구, 야당의 수권 능력 의심(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되면 걱정)
-야당을 좋아하기보다 감정적으로 여당 미워함
-각하 결단으로 (민심이) 여당으로 돌아옴
ㆍ많은 지식인들이 우리 편(성명○차)
ㆍ정부의 입장이 일거에 ○○(수세 → 공세)
ㆍ정권욕에 사로잡혀 방심, 폭력으로라도 정권 잡으려는 야의 허를 찌르는 일격
ㆍ잃었던 민심 일거에 회복
ㆍ해외 비판 호전, ○○○ 사기 진작, 단결

4. 타이밍 선택 중요
ㆍ진정으로 야당 할 각오. 국민이 느껴야 함
ㆍ각하의 우국충정에서 내려진 결단으로서보다 상황의 공명정대(각하 지켜봄, 여야 경쟁)
※민정당도 국민의 지지 못 → 야당 각오
※누가 정권을 잡든 경제 국가발전 지속
ㆍ최종 결단 내리시기 전에 야당 대표 외 국가원로 의견 청취, 여론 수렴 형식(각하께서 지방회의)
ㆍ시기 (환자 수술 가능성) (다소 상승 고지)

5. 선행조건
ㆍ정치적 보복 원천적 봉쇄(법, 국민 앞에 공표 보장)
ㆍ김대중 해제(야당 내 투쟁)
ㆍ선거 과열 방지(합동연설 → TV연설)
ㆍ좌경운동권(반체제) 구별, 국민의 지지로 강력 단속

6. 결론
ㆍ각하는 40년 헌정사, 민주화 개혁, 우리 민족사에 위대한 대통령 기록
ㆍ내년 2월 이후 혼란기 시 각하 보호(100%)
ㆍKT, 완전 패배 안겨줄 기회 (정리) (단기적 4·13 포함 협상 제거)
총동원하면 승산이 있음

6월 18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40분간 독대 보고

 ▲1986년 4월부터 여야는 내각제와 대통령 직선제 공방을 이어갔다. 야당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했지만, 6·29 선언으로 개헌 주도권은 여당으로 넘어갔다. 사진=조선DB

 

 1987년 6월 18일 오전 9시, 김용갑 수석은 대통령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끝까지 들어달라”는 당부를 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급한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밖에서는 대통령의 통치 방향을 대변하고 설명하며 이해시키고 있으며 사실을 정확히 보고하려 하니 끝까지 들어달라”고 했다. 현시점에서 평범한 방법으로는 민심을 회복하기 어려운 만큼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역발상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대통령의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가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현재 시점에서는 민심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야당(민주당)도 정권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도 (나라가) 곤란해진다. 각하의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하다. 상대방(야당)의 허를 찌르는 획기적인 구상으로 상황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역발상을 실천해야 한다.”

그가 말한 ‘역발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는 여권 내에서는 누구도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단어였다. 야당이 직선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대선을 반년 앞두고 민심이 악화된 상태에서 직선제란 곧 정부·여당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청와대와 여당은 정국 타개 방안으로 1988년 올림픽 후 국민투표를 통한 개헌, 내각제 개헌 등을 제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김용갑 수석의 제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올림픽 이후 국민투표 등의 방안은 약점이 있고, 일거에 민심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하의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오는 결단으로 직선제 개헌을 결심해야 한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이순신의 말과 ‘솔로몬의 명재판’을 생각해보라. 개헌 논의에서 여당이 과감하게 직선제를 수용해 국민들에게 진정한 우국정당이 어느 쪽인가를 확인시켜줄 수 있다. 국민은 야당의 수권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걱정이 크다는 것이다. 국민은 야당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감정적으로 여당을 미워할 뿐이다. 각하가 결단하면 민심이 여당으로 돌아온다. 많은 지식인이 우리 편이다. 야당은 정권욕에 사로잡혀 방심하고 있고, 폭력으로라도 정권을 잡으려 한다. 직선제 제안은 이런 야당의 허를 찌르는 일격으로 잃었던 민심을 일거에 회복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중산층 동향’에 대한 부분이다. “3/4에 달하는 중산층은 안정을 희구하고 야당의 수권 능력을 의심하고 있으며, 야당을 좋아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여당을 미워하는 것”이라는 김 수석의 보고는 전두환 정권 시절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형성된 중산층이 민주화로 가는 길에 안전판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대선 결과로 입증됐다.


“나라 망친다”는 말까지 나와

김 수석은 이어 직선제 제안은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보고했다.

“진정으로 야당 할 각오를 해야 하고, 그런 각오를 국민이 느껴야 한다. 각하의 우국충정에서 내려진 결단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와 야당 인사 사면 등 정치적 선행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김 전 수석은 또 “직선제로 선거를 해도 여당이 이길 수 있다”고 보고했다.

“직선제 제안으로 민심이 여당으로 돌아올 것이며, 야권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단일화를 할 수 없을 것이고, 노태우 후보의 고향인 TK(대구경북) 표 등을 생각하면 직선제로도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

전두환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 함께 김 수석은 민주화운동 세력과는 다른 반체제적인 좌경운동권을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단속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후일 김 수석은 총무처 장관 재직 시절이나 의정 활동을 하는 동안 ‘좌경 세력 척결’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김 전 수석은 보고 말미에 “이렇게 하면 각하는 우리 민족사에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끝까지 경청한 전두환 대통령의 반응은 놀랍게도 “동의한다”였다. 김 전 수석의 설명이다.

“18일 오전 9시20분에 들어가서 40분 동안 보고했다. 대통령이 바로 민정당사에 가서 노태우 대표한테 보고하라고 하더라. 당사가 종로구라 가까웠다. 그래서 바로 가서 얘기를 하는데 노태우 대표가 편한 얼굴이 아닌 거다. 노태우 대표가 이렇게 말하더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160만 당원에게 내각제만이 우리가 살길이라고 외치고 다녔는데, 내가 어떻게 직선제를 하자고 할 수 있냐’고. 그래서 내가 당대표의 말을 끊을 수도 없어서 더 연구하자고 여지를 남기고 돌아왔다. 다시 청와대로 오니 11시쯤이었는데 경호실장이 바로 내가 한 보고에 대해 얘길 하더라. 전두환 대통령이 원래 성질이 급하다. 대통령이 안기부장과 당 사무총장 불러서 민정수석이 직선제 제안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했다는 거다.”

김용갑 수석은 청와대 옆 안가(安家)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당 사무총장과 만났다.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그들에게 전하자 두 사람은 반대의 뜻을 보였다. “나라 망친다”는 말이 나왔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노태우 측의 직선제 불가 통보

 ▲1987년 7월 1일 시민들이 6·29선언의 전폭 수용을 밝히는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선DB

 

 다음 날인 6월 19일, 전두환 대통령은 김용갑 수석을 불러 “노태우가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김 수석은 “검토하겠다고 했다”며 “얘기는 했지만 각하가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차마 반대한다고 직접 보고는 할 수 없었고, 두 사람이 직접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김 전 수석은 술회했다.

“노태우 대표 입장에선 누가 얘기해도 안 들을 상황이었다. 내가 나가고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날(19일) 오후 5시반에 안기부장이 전화해서 ‘노태우 대표와 회의를 했는데 직선제는 못 한다고 결론을 냈다’고 했다. 당 사무총장을 포함해 노 대표 참모진과 논의를 했는데, 일단 노 대표의 반대 입장이 강했고 당에서 대선 후보 말을 안 들어줄 수 있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이 중차대한 문제를 대통령도 동의했는데 왜 당신들끼리 결정을 하느냐’고 쏘아붙였다.”

이날 저녁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후보는 회동을 가졌다. 김 전 수석에 따르면 상황은 이렇다.

“20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대통령이 나를 불러 노태우와 만난 결과를 말해줬다. 대통령 말씀으로는 대통령이 노태우를 만나자마자 ‘태우야, 직선제밖에 답이 없다’고 했는데, 노태우 대표가 ‘정치지도자의 노선이 그렇게 왔다 갔다 해서야 되겠느냐’고 강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당론을 내각제로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바꿀 수 있냐는 것이었다. 대통령도 조금 흔들리는 듯해서 내가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지도자의 노선이 중요하냐’고 주장했다.”

6월 20일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 수석은 노태우 대표를 어떻게 설득할지를 두고 분주하게 고민했다.

“6월 20일엔 내가 민정당 사무차장 현홍주 의원을 불러 ‘노태우 좀 설득해달라’고 다시 한 번 부탁을 했고, 21일에는 안현태 경호실장에게도 협조를 요청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이들을 만나 조언을 들어야 한다는 얘기도 계속했는데, 20일에는 노태우 대표가 이민우 신민당 총재, 이만섭(李萬燮) 총재,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을 만났다고 했다.”

김 전 수석이 다시 대통령과 독대한 날은 6월 25일.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와 얘기를 마쳤다”고 했다. 이후 노태우 후보 측은 6·29 선언문 초안을 만들고 6월 29일에 발표했다.


(메모2)

6.5 직선제 가능성 보고
6.12 롯데호텔에서 안기부, 민정당 사무총장(19:00)에게 직선제 주장

※반대에 부딪혔음
6.14 청와대에서 일요일 녹지원에서 계엄에 대비한 주요 ○○ 회의 후 시국대책에 대한 수석비서관 간담회에서 직선제 주장
동의자 없음
6.15 정무수석에게 시국수습 의견 청취

정무1: 몇 가지 있지만 88 서울올림픽 이후 선택적 국민투표나 바로 직선제 주장
민정: 직선제 주장 설득 성공, 단 15일께 민정이 보고 허락도록 약속


6.16 (12:50) 대화식당에서 현홍주·김학준·유흥수 의원에게 의견 청취. 긍정적인 반응, 보안 특별 강조. 김 비서관에게 보고서 작성 지시
6.17 각하 보고 ○○ 하루종일 기다리다 보고 못 하였음
6.18 (09:20) 각하께 보고(각하께서도 동의)
지시: 노 대표를 만나서 설득도록
※ 노 대표가 건의하는 형식으로
(10:10) 노 대표께 민정당사에서 보고
○○ 등 걱정하시면서 안기부장, 사무총장, 박철언과 같이 토의토록
(11:00) 경호실장에게 각하께 보고 사정 설명

경호실장: 각하께서 안기부장에게 검토토록 지시 전달 하명
(11:20) 청운동 안가에서 안기부장, 이춘구 사무총장에게 각하께 보고 사항 구두로 설명
-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음
- 다시 검토해서 의논하기로 하였음
- 만약 4·13이 무너지면 그대로 직(職)을 그만둬야 한다고 함
6.19 (14:20) 각하께 2번째로 직선제 건의. 계엄령 적극 반대
※각하께서 노 대표 반응 하문: 아직 검토 중이라고 보고
(17:30경) 안기부장 전화, 노 대표께서 각하께 직선제는 불가하다 결정되었으니 더 이상 이야기 없길 바람
- 사전에 협의 못 해 미안
- 그 엄청난 일을 하루밤새 뒤집는 것은 경솔하다고 ○○○ 전달
6.20 (09:30경) 각하께서 등청하시자마자 민정 찾으셨음

각하 말씀: 노 대표가 어제 보고하였음. 직선제는 안 하겠다는 것임. 대통령의 정치적 노선이 문제된다는 것임
곧이어 수석비서관과 동석(실장, 경호실장, 정무1,2, 공보. 후에 사정수석)
각하께서 지나가는 말씀으로 직선제도 고려될 수 있었으나 문제가 많아서라고 전했음
6.21 (09부터 2시간) 경호실장에게 가서 협조요청
-하루 만에 결론짓는 것은 안 된다고 했음
-끝까지 주장할 것 양해 요청
6.20 (12:00) ○○식당에서 현홍주 의원에게 윤곽 설명(특히 각하 보고문에서)
만일 노 대표께서 의견 요청 시는 분위기 ○○○ 밀어나가자고 약속

6.23 or 24: 현홍주 의원 노 대표 불러서 자신감 갖고 조언(초안 작성)
6.25 (14:30) 각하께 3차 건의. 각하께서 결심
※노 대표 6/25 저녁 6/27 결정

민정당 노태우 대선 후보는 결국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1988년 2월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양한다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도록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한다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포함하여 시국사범 등을 석방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해 새 헌법은 기본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정한다 ▲언론 관련 제도와 관행을 개선, 언론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사회 각 부문의 자치/자율을 최대한 보장하고, 이를 위해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를 실시하고, 대학도 자율화한다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보장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 풍토를 조성한다 ▲밝고 맑은 사회 건설을 위해 사회정화 조치를 강구한다.

노태우 후보는 선언과 함께 “이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인정했다. 전두환 대통령도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6·29 선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일각에서는 쿠데타 모의도"

 ▲1987년 6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청와대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김 전 수석은 청와대 내부 공격에 시달리기도 했다.

“직선제가 되면 (여당의) 대선 성공을 어떻게 보장할 거냐, 이길 수 있다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나라 망하면 어떻게 할 거냐 등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대선 선거 기간 중 선거대책본부장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6·29 정신을 전국에 전파하겠다는 각오였다. 대통령에게는 미리 ‘선거운동을 하면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으니 그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대통령에게 그렇게 당부를 해놓았기 때문에 노태우 후보도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었고,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6·29가 아닌 계엄령 또는 쿠데타로 끝날 뻔한 위기도 있었다.

“6월 14일 녹지원 회의 때만 해도 계엄령으로 거의 결정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현장에서 최루탄 가스를 맞아가며 민심을 직접 보고 온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계엄령으로 당장 시국을 수습한다 한들 그 후 어떻게 통치를 해나갈 것이며 그렇게 뜨거운 국민들의 바람을 어떻게 외면할 것인가. 계엄령만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 더욱 직선제만이 살길이라고 대통령께 목숨 걸고 호소했다.”

 

6·29 이후 쿠데타 시도도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북한의 김일성에게 나라를 뺏긴다는 여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안사 등을 중심으로 쿠데타 음모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부하였던 모씨가 나에게 알려온 얘기다. 쿠데타 모의 세력의 논리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북한에 기회를 주는 것이고, 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북한을 막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이 다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전두환 대통령을 체포해 선거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계획도 나왔다고 했다. 그는 보안사 내부에서 쿠데타 음모가 감지됐지만 윗선에 보고를 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보안사령관과 대통령에게 들어가면 엄청난 혼란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통령은 뿌리를 뽑겠다고 나서지 않겠나. 민정수석 선에서 처리해달라고 얘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외부로, 가능하면 해외로 나가라’라고 하고 노태우 후보에게는 군 관계자들을 격려해주라고 조언했다. 다행히 쿠데타 음모는 내부적으로 불발됐다고 한다.”


“전두환, 쓴소리 들을 줄 아는 분”

김 전 수석은 5공을 폄하하고 6·29를 외면하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6·29가 아니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공도 많다. 그러나 인정은커녕 갖은 고초를 당했다. 돌아가신 지 1년 넘게 유해가 묻히지도 못하고 집에 그대로 있으면서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국민들과 정치권도 그렇다. 5공이 공과(功過)가 있는데 과는 엄청나게 이야기하면서 공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5공 때 경제성장을 거듭하며 수출이 크게 늘었고, 매년 10% 이상 경제성장을 했다. 물가는 0%까지 잡았다. 취업도 잘되고 살림도 풍요로웠다. 그런데 그런 대통령을 과소평가하고 이 사람한테는 (매장할) 땅 한 평도 안 된다니 우리 국민들이 너무하는 것 아닌가.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면복권하면서 그에게는 왜 그리 가혹한가. 언론도 마찬가지다. 북한 김정은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라고 표기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왜 전두환씨인가.”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 “쓴소리를 들을 줄 알고 옳은 얘기는 받아들일 줄 아는 분”이라고 했다.

“민정수석은 민심의 동향을 보고하는 역할이라 당시 대통령에게는 듣기 싫은 보고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호실장 말로는 대통령이 ‘민정수석이 보고를 하는 날은 잠이 안 온다’고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심기가 불편할 때는 나에게 ‘당분간 보고 좀 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그래도 민정수석을 교체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쓴소리하는 참모를 계속 곁에 뒀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가 있지 않은가. 그 후의 대통령들은 나처럼 직언하는 사람을 계속 곁에 두는 사례가 드물었다.”

김 전 수석은 전두환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민정수석 자리를 지켰다. 김용갑 전 수석은 “6·29를 이끌어낸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결단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직선제 수용은 전두환 대통령의 구국의 결단이었다. 정부와 여권에서는 6월 항쟁의 대응책으로 계엄령을 주장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결국 대통령의 결단이 대한민국을 살려낸 것이다.”⊙

 

04.04 성군에서 혼군으로… 인조는 언제 무엇을 놓쳤나?

광해군 몰아내고 “盛世 다시 왔다”는 환호 받으며 즉위한 인조
개혁 포기하고, 친족에 사사로운 조처 내리며 4년만에 민심 잃어
대기근에 왕족 재산 축소한 세종처럼 모범 보였다면 어땠을까

‘하·은·주 삼대(三代)를 만회할 뜻이 있었으나, 숱한 재난으로 뜻대로 정치를 펼치지 못한 임금’. 조선 16대 국왕 인조에 대한 최종 평가이다. 실제로 인조는 즉위 직후 일어난 ‘이괄의 난’을 비롯해 정묘·병자호란 등 가장 많은 내우외환에 시달린 왕이다. “어짊[仁]을 자기 소임으로 삼았다[仁爲己任·인위기임]는 백헌 이경석의 말과 달리, 그는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까지 유배 보냈다.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죄 없는 백성을 다른 나라 포로가 되게 해, 아비가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가 지어미를 지키지 못하게” 한 군주가 바로 그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623년 3월 12일(양력 4월 1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백성들은 “오늘날 성세(盛世)를 다시 볼 줄 몰랐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불과 4년 뒤인 1627년, 후금이 침입했을 때 백성들은 “성 안에서 내응”하거나 “창 뿌리를 거꾸로 하며 반역”했다. 즉위 후 정묘호란까지 실록을 되읽으면서 발견한 인조의 첫 번째 실수는 개혁의 중도 포기였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국정 목표로 민생 안정[安民], 인재 등용[用人], 군제 개혁[詰戎]을 내걸었다. 민생 안정의 대표 법안 대동법은 영의정 이원익의 주도로 1623년 9월 충청·전라·강원도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 법은 반대 여론에 밀려 다음 해 가을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 시대 주민증이라 할 수 있는 호패(號牌) 제도는 군제 개혁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최명길과 이귀 등이 추진한 이 제도 역시 군 복무를 꺼리는 사족(士族)들의 반대로 중도 폐지되었다. 시행한 지 1년 만에 226만여 백성이 호패를 착용했지만 “민심 동요가 적국(敵國)의 변란보다 더 참혹하다”며 반발하는 언관들의 반대를 인조는 넘어서지 못했다.

 

 

민심의 동요는 왕의 사사로운 조처에 의해 악화됐다. 정묘호란 발발 일 년 전인 1625년 1월, 왕의 생모 계운궁이 사망했다. 인조는 예법에 안 맞는다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장급 장례를 치렀다. 인정(人情)을 내세워 왕 자신이 상주가 되어 3년 복을 입겠다고 고집하는 왕과 예법을 내세워 반대하는 신하들의 대립 속에 거의 두 달간이나 국정이 마비됐다. 그뿐 아니었다. 상중(喪中)에 있어서 급여를 받을 수 없는 친동생에게 인조는 ‘측은하다’면서 국가 창고를 열어 쌀을 내려주게 했다. 고모 정명공주 집을 수리해주라고 호조에 지시해서 반발을 사기도 했다. 왕이 이처럼 즉위 초 내건 국정 목표와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여헌 장현광은 “천하의 일은 날마다 나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날마다 퇴보한다”며 떠나갔다. 원자의 교육을 이유로 잠시 조정에 나아갔던 사계 김장생 역시 “근래 전하께서 다스리기를 도모하시는 정성을 보건대 점점 처음만 못하다”면서 사직했다.

 

인조의 사사로운 모습은 그보다 190여 년 전 세종이 취했던 조치와 대조를 이룬다. 연이은 대기근으로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자 세종은 1437년 1월에 국왕 가족의 재산을 축소하라고 지시했다. “하늘의 재앙과 땅의 이변이 있고 없는 것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지만, 배포 조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할 수 있다”면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왕의 친아들과 친손자가 보유한 토지에서 받아갈 연봉[年俸=科田]을 크게 줄이라고 했다.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세종은 수양대군 등 대군들의 연봉은 각각 50결씩, 부마는 30결씩 줄인 다음 아예 법제화시켰다(세종실록 19년 1월 12일).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옳은 정치[正]로 되돌려 놓는다[反]’며 정권을 잡은 인조는 불과 4년 만에 역대 최악의 군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숱한 재난으로 정치를 뜻대로 펼치지 못했다고 개탄했지만, 왕 자신이 사사로움에 붙잡혀 인심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그가 비록 삼대를 꿈꾸었을지 모르나 하나라의 우(禹)와 은나라의 탕(湯), 그리고 주나라의 문왕·무왕의 정치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우임금처럼, 치수(治水) 사업을 위해 9년 동안이나 밖에 있으면서 자신의 집 앞을 세 번 지나갔으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책임지는 자세로 대동법과 호패법을 추진했더라면 그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선일보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04-10 “임란사 공백 채워준 사료”…선조가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 처음 국역돼

“왜적의 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하는데, 매우 걱정스럽다. 현재 군사들 중에는 지금 주둔한 곳에서 뽑아 보낼 군사가 따로 없으니, 다만 전진할 것을 권하는 하나의 방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경은 관병과 의병을 규합해 방어하도록 조치하라.”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1593년 3월 15일, 선조가 영의정이자 도체찰사(都體察使·조선시대 의정·議政이 맡은 전시 최고 군직)였던 서애 류성룡(1542~1607)에게 내린 유지(有旨·임금의 분부를 전하는 문서)에 적힌 내용이다. 불과 한 달 전, 전라도 관찰사였던 권율(1537~1599)이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쳤지만 주변에서 그를 돕겠다고 나선 장수들은 없었다. 아군은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는데, 왜적의 세력은 더 불어나던 풍전등화 같은 상황. 선조는 도체찰사 류성룡에게 “의병을 규합하라”는 명을 내렸다.

 

‘유성룡 종가 문적-유지’ 2책의 표지. 문화재청 제공

 

 임진왜란 직후인 1592년 7월 14일부터 1607년까지 선조가 류성룡에게 내린 유지 총 76건과 유서(諭書·국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린 명령서) 1건을 엮은 보물 ‘유성룡 종가 문적-유지’ 2책이 처음으로 국역됐다. 문화재청과 성균관대 유학대학(학장 김동민)이 2018년부터 ‘중요기록유산 국역 사업’을 실시해 보물로 지정된 고문헌30종(총 1075책 186만9374자)를 국역하면서 종가가 대대로 소장해 접근하기 어려웠던 이 사료가 처음 우리말로 옮겨진 것이다.

공정권 성균관대 유학대학 책임연구원은 “임란 발발 직후 3개월 이후부터 일자별로 전시 상황이 정리된 유일무이한 사료”라며 “급변하는 변란 상황은 물론 적에 대한 조정의 군사전략 등이 생생하게 담겼다”고 설명했다. 유지에는 1592년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에 있을 때 류성룡에게 ‘군량을 보급하고 선박을 마련하라’고 내린 지시를 시작으로 △군량 보급 대책 △명나라 구원병 요청 △포로 송환 논의 등이 기록돼 있다.

 

 1593년 3월 12일 선조가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에는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뜻밖의 칼날에 맞아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떠돌며 굶주림에 허덕이다 구렁텅이에서 나란히 죽어간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매우 슬프다”고 쓰여 있다. 문화재청 제공

 

 1593년 4월 18일 선조가 도체찰사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에는 부산 일대 출몰하는 왜선에 대한 조정의 대응 전략이 상세히 담겼다. 이는 그간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 ‘징비록’과 중앙 관찰 사료 ‘조선왕조실록’ 등에선 확인되지 않았던 내용이다. 문화재청 제공

 

특히 이 유지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조정의 대응책이 상세하게 담겨 있어 임란사의 공백을 채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례로 1593년 4월 18일 유지에는 “부산과 동래 사이에 많은 수의 왜선이 정박해 있어 분명 군사를 증가시킬 형세라고 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적의 동태를 명나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송응창과 상의해 신속히 군사를 진격시킬 계책으로 삼으라. 경은 장수들을 지휘하여 관병과 의병을 별도로 정돈해 두었다가 적들이 아직 상륙하지 않았다면 수군을 데리고 건너 온 적선을 쳐부수고, 적들이 이미 상륙하였다면 정예병을 거느리고 협력하여 요격하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이는 이전까지 사료에선 파악되지 않은 조정의 대응이다.

하루 전인 1593년 4월 17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왜적이 금년 봄에 병력을 증파하는 일에 대해 누구인들 염려하지 않겠는가. 비변사(備邊司·조선시대 군사회의기구)에 일러 조처를 강구하게 하라”고만 기록돼 있다. 이후 어떤 대책이 마련됐는지는 류성룡이 1592~1598년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 ‘징비록(懲毖錄)’과 그가 남긴 문집 ‘서애집’에도 설명되지 않았다. 공 책임연구원은 “그동안 급증하는 왜선에 대해 조정이 정확히 어떤 대응책을 내놨는지 알 수 없었던 역사의 공백을 이 사료가 채워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애 류성룡 영정. 사진 출처 전통문화포털

 

‘선조실록’을 포함한 중앙 관찬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선조의 감정도 유지 속에 드러난다. 1593년 3월 25일 선조가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에는 “명나라 장수가 왜적과 강화를 이미 결정했다고 하니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선조실록에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1597)이 왜장과 강화를 맺어 4월 8일까지 군사를 물리겠다고 했다’고만 적혀 있다.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 속에는 명나라군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던 전략이 실패하자 선조가 울분을 토로하는 대목이 생생하게 담긴 것이다.

정제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문화재 전문위원은 “이번 사업으로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어 전문가들도 접근하기 어려웠던 유지와 일지 등 중요기록문화재 30종이 국역됐다”며 “당대 사회상을 가장 진솔하게 담고 있는 기록물에 대한 후속 연구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기록유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사료 원문과 국역본을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에 무료로 공개할 예정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04.12 인조와 한국은행

조선 건국의 발단이 된 위화도 회군은 쿠데타였다. 쿠데타로 세운 조선에서 네 번 더 쿠데타가 있었다.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그리고 인조반정이다.

쿠데타 네 번 중 인조반정이 가장 잔인했다. 40여 명이 참수당하고, 200명 이상이 귀양 갔다. 유몽인은 일찌감치 관직의 뜻을 접고 전국을 여행하며 글 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가 명나라 사정에 밝은 외교 전문가라서 ‘어쩐지 거북하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자식들까지 함께 죽임을 당했다. 당시 쿠데타 세력은 통제 불능이었다. 논공행상 끝에 기분이 상하면 반란(이괄의 난)을 일으키거나, 자기들끼리 물고 뜯었다. 어제의 동지를 제거할 때는 극악한 처형도 서슴지 않았다. 인조 자신이 그 처형을 지휘했다.

 

인(仁)이 부족했던 인조는, 명분에 집착해 외교와 내치 모두 실패했다. 기이하게도 화폐 문제에서는 명분보다 실용을 추구했다. 조선 초 발행한 조선통보는 액면 가치(1전)가 내재 가치(3.75그램)에 충실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재정이 고갈되자 정직한 화폐 발행이 중단되고, 시중에는 동전 품귀 현상이 나타났다. 민가에서 살았던 인조가 그 불편함을 잘 알았다. 그래서 물가 조절을 맡은 상평창(常平倉)에 화폐 주조를 명령했다. 내재 가치를 액면 가치보다 살짝 낮춘 법정화폐였다.

 

두 호란으로 화폐 주조가 또 멈췄다. 숙종이 화폐를 다시 발행하면서 무게를 더욱 낮추고 상평통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부했다. 유통을 위해서 종로 상인들에게 무이자로 대출해야 했다.

 

액면 가치와 내재 가치가 다른 법정화폐의 시작은 인조가 했다. 인조는 왕이 되기 전에 능양군이라 했다. 1623년 4월 12일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켰다. 그는 남대문 옆 민가(저경궁)에서 태어났다. 지금 그 자리에 물가를 관리하고 법정화폐를 발행하는 한국은행이 있다. 묘한 우연이다.

조선일보 차현진 예금보험공사 이사

 

월간조선 04월 호  04.29

국내 소개된 최초의 안익태 곡 ‘애국가’

최초 ‘애국가’보다 54일 빨라… 1942년 7월 6일 방송

⊙ ‘태극기와 애국가는 불문의 관습헌법성이 인정되어야 마땅’
⊙ 인재근·강창일·소병훈·오영훈 등 민주당 의원들, 새로운 國歌 제정 추진
⊙ 북미 대한인국민회중앙집행위원회가 임시정부에 ‘안익태 애국가’ 허가… 1941년 ‘임시정부 공보 제69호’로 고시
⊙ 애국가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國歌… 임시정부, ‘애국가’를 국가로 사용

金亨錫
1955년생. 건국대 역사학과, 경희대 대학원 졸업(역사학 박사) / 총신대 교수, 고신대 석좌교수 역임. 現 재단법인 대한민국 역사와 미래 이사장 / 저서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끝나야 할 역사 전쟁》 등 

▲1955년 4월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축제를 위한 특별초청으로 귀국한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이 대통령은 그에게 한국 최초의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사진=조선DB

 

지난 1월 26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학예연구관 김권정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필자와 이름이 같은 KBS의 김형석 PD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 & Records Administration·NARA)에서 발견한 이승만의 육성 테이프를 갖고 왔는데, 그 테이프에 1942년에 만들어진 ‘애국가’가 수록되었다는 얘기였다.

“이것이 국내 소개된 최초의 안익태 곡 ‘애국가’가 아닌가? 추측이 된다”면서 필자의 의견을 물었다. 몇 해 전에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을 지내며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를 저술한 바 있는 필자로서는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 우리는 자료를 주고받으며 그 ‘애국가’에 대해 추적을 이어갔다. 그 결과 우리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우리가 예측한 대로 그 ‘애국가’가 국내에 소개된 최초의 안익태 곡 ‘애국가’라는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국내에 알려진 최초의 ‘애국가’는 2012년 8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하여 공개한 ‘애국가’ 음반이었다.


“나는 이승만이오. 대한 임시정부 대표원으로…”

이 음반에는 미주 동포들이 부른 2종의 ‘애국가’와 ‘무궁화가’가 수록되어 있다. 2종의 ‘애국가’는 안익태 작곡 ‘애국가’와 ‘구(舊) 애국가’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춰 부른 것이다. 이 음반은 1942년 8월 29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그동안 거행하던 국치일 행사를 폐지하고, 로스앤젤레스(LA) 시청에 태극기 현기식을 거행하는 역사적인 날에 맞춰 발표한 것으로 당시 1달러에 판매하면서 보급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한 ‘애국가’는 1942년 7월 6일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 단파방송으로 한국어와 영어로 된 이승만의 육성 연설 시작과 끝부분에 실려 있다. 이 내용은 1942년 8월 6일 자 《신한민보》에 “이승만 박사의 우 래코드”라는 제하에 연설문을 소개하면서 “이 글은 이승만 박사의 영어와 한국어 우 래코드이오. 1942년 7월 6일 동양과 남미주(south California)에 방송한 것임. 나는 이승만이오. 대한 임시정부 대표원으로 미국 경성 워싱턴에서 말합니다.(하략)”라고 보도하였다. 이로 미루어 이 ‘애국가’는 지금까지 최초의 ‘애국가’로 알려진 것보다 54일이 빠른 것으로 확증할 수 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영어 테이프 영상에 ‘애국가’를 소개하면서 ‘National Anthem of Korea(한국의 국가)’라고 표기했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Patriotic Hymn(애국가)’으로 표기하던 것과는 다른 영역으로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인가?”의 뜨거운 논쟁에 새로운 흥미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이 테이프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 수록된 KBS현대사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에 기초하여 ‘애국가’가 왜, 대한민국 국가(國歌)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애국가’를 폐기하려던 민주당 국회의원들

▲2022년 6월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과 이집트의 평가전을 앞두고 애국가가 흘러 나오면서 태극기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조선DB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친일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하에 ‘애국가’ 교체를 주장하였고, 국회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발단은 2019년 1월 19일 ‘광주 3·1혁명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출범식에서 애국가 제창 거부운동을 펼치기로 한 결정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친일 적폐 청산’ 작업은 소위 친일 작곡가 9인(김동진·김성태·김재훈·안익태·이종태·이흥렬·조두남·현제명·홍난파)이 작곡한 노래가 대상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애국가를 폐기하고 새 국가를 제정하는 것이었다.

그해 7월 19일 ‘몽양 여운형 선생 72주기 추모식’에서 “‘애국가’ 제창을 거부하고 애국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에서 공청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어 8월 8일 국회에서는 안민석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의 주최로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라는 주제의 공청회를 열고 애국가 폐기를 주장하였다.

뒤이어 11월 1일 국회에서는 인재근·강창일·소병훈·오영훈 국회의원이 공동 주최하고 ‘국가 만들기 시민모임’이 주관하는 ‘안익태 애국가, 국가(國歌)란 무엇인가?’란 주제의 세미나를 갖고 새로운 국가를 제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눈여겨볼 점은 그때까지 이들이 현행 ‘애국가’를 대체할 새 국가로 내세우던 ‘임을 위한 행진곡’과 ‘아리랑’ 등이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자, 차선책으로 새로운 국가를 공모한다는 입장 변경이다.

당시 이들이 내세우던 명분은 “애국가는 대한민국의 국가가 아니다”라는 것과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애국가를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애국가가 국가인 것은 ‘애국가의 역사성’ ‘국민적 공감대’ ‘헌법재판소 판결’ 등의 세 가지 관점에서 입증되기 때문이다.


구한말 애국가

사진 위쪽은 프란츠 에케르트의 〈대한제국 애국가〉(1902). 아래쪽은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1907). 사진=뉴시스

 

우리 역사에 애국가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구한말이다. 1896년 독립협회는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부르는 국민의례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독립신문》을 통해 32편의 애국가가 소개되었는데, 제목이 애국가인 것만 11편이었다. 이들에게 애국가는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각기 개인의 서정적 목소리를 담은 노래였다. 이 중에 주목되는 것은 1897년 8월 13일 ‘조선 개국 505년 기원절 축하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합창한 ‘무궁화 노래’다. 윤치호(尹致昊·1865~1945년)가 작사한 이 노래의 후렴 가사는 현행 ‘애국가’의 후렴 가사와 같다. 그리고 1907년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가 편찬되었는데, 제14장 ‘Patriotic Hymn(애국가)’의 가사가 현행 ‘애국가’ 가사와 사실상 동일하다.

한편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 국가가 제정되었다. 독립협회가 국가 제정운동을 전개한 지 7년 만에 맺은 결실로서 고종(高宗)이 ‘일본 국가’를 작곡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 Eckert)를 군악교사로 초빙하여 의뢰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국가’는 곡조의 음역대가 넓어 일반인이 따라 부르기 아주 어려운 데다가, 애초에 군악으로 만들어진 탓에 민중과 호흡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다가 한일합방으로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國歌 역할

1935년 12월 28일 안익태는 새로 작곡한 ‘애국가’를 시카고한인교회에서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시카고 지방회(회장 한장호)는 1936년 3·1절 기념식부터 새 애국가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북미 대한인국민회중앙집행위원회는 “애국가 곡조는 안익태 곡을 사용하되 임시정부에 품청하여 인허를 얻은 후에 실시할 것”을 결의하고, 중경 임시정부에 “기존의 올드 랭 사인 곡조 대신 안익태 곡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2월 20일 대체 허가를 결의하고, 임시정부 비서처가 1941년 2월 1일 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69호’로 고시했다.

이리하여 1941년 10월 제33회 의정원회의부터 공식적으로 불린 ‘애국가’가 2년 후에는 광복군 지대에까지 확산되어 명실공히 임정의 국가로서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편 1945년 11월 12일 환국을 앞둔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한국 애국가〉 악보를 발간했다. 이 악보에는 “안익태 곡의 ‘애국가’가 한국의 광복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기술돼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안익태 곡의 ‘애국가’를 국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으로, 헌법 전문(前文)에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규정한 점에 비추어 역사적으로 ‘애국가’가 대한민국 국가로 정통성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

해방이 되자 다양한 정치 세력이 정국 주도권을 잡고 자기들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한 정부를 수립하려고 대립하였다. 당시 국가 수립 노선과 관련된 최초의 ‘국호(國號) 논쟁’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임정의 법통 승계를 주장한 민족진영 간에 전개되었다. 이때 민족진영에서는 ‘올드 랭 사인’ 곡의 ‘애국가’를 불렀고, 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임화(林和)가 노랫말을 짓고 김순남이 작곡한 ‘해방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제헌국회, “통일 시까지 國歌 제정 보류”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1906~1965) 선생

 

이에 임정은 귀국 직후 ‘조선’을 내세워 법통을 부인하는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익희 내무부장 명의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태극기’를 국기로, ‘애국가’를 국가로 사용할 것을 발표했다. 이렇게 대립하던 국가 상징 논쟁은 국내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한 미군정에 의해 좌익이 배제되면서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이에 1948년 5월 30일 열린 대한민국 국회 개원식에서는 ‘애국가’ 봉창과 국기를 향한 경례를 국가 상징에 대한 의식으로 받아들였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극기와 ‘애국가’를 국가 상징으로 간직했기 때문에, 이 같은 국가 의례는 곧 국가의 상징이라는 생각이었다.

한편 새로운 국가를 완성해놓고도 통일전술 차원에서 새 국가 사용을 보류하고 있던 북한은 정권 수립 1주년을 맞아 1949년 9월 9일부터 정식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국회에서는 ‘국기와 국가 제정에 대한 건의안’이 상정되었다. 그러나 그날 개최된 국회 제61차 회의는 국기와 국가의 제정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과거 독립을 얻으려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족의식을 진작시켜주던 애국가가 이제는 어느 정도 국가화해진 감도 있고, 북한이 국가를 새로 제정했다고 우리도 황급히 제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국기와 국가를 새로 제정하는 것은 결국 통일에 지장을 주어 분단을 영구히 할 우려가 있으므로, 미소 양군이 철퇴한 후 적당한 시기에 남북 전 민족의 의사로 제정하자는 의미에서 논의를 통일될 때까지 보류하기로 결의하였다.〉

-《국회 속기록》 (제61차 본회의, 1948.9.9.), 10~14쪽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통일이 될 때까지 국가에 대한 논쟁을 보류하고 기존의 ‘애국가’를 공식 국가로 사용하기로 확정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애국가’는 1945년 중경 임시정부가 채택한 ‘국가’이고, 1936년 ‘애국가’가 출판된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 어떠한 단절도 없다는 중요한 역사성을 보여준다.
 

 

‘애국가’ 부인하는 좌파 세력들

지난 2월 7일 KBS는 미국 내셔널아카이브에서 1942년 ‘미국의 소리(VOA)’ 전파를 탄 이승만의 육성을 발굴, 보도했다. 이 자료는 미국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독립을 갈망하던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전한 방송인데, 시작과 끝 부분을 ‘애국가’로 장식했다.

이렇듯 애국가는 광복군이 부르던 군가였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눈물짓던 국외 동포들의 망향가였다. 또 국제적인 운동경기가 열릴 때는 온 국민이 열광하며 부르던 승전가였다. 그만큼 지나온 80여 년간 ‘애국가’만큼 대한인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고 정체성을 일깨워준 것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애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애국가’ 교체를 주장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거론하던 것이 법적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2010년 7월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국민의례 규정〉에는 ‘국민의례 때 애국가를 애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법률은 아니기 때문에 국가(國歌)로서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다. 2012년 ‘통합진보당 해산’ 문제를 놓고 법적 분쟁이 진행될 때도 이석기 의원은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그냥 나라 사랑하는 여러 노래 중 하나일 뿐이다”라며 국가로서의 ‘애국가’의 상징성을 부정했다.


“애국가는 관습헌법”

 헌법재판소 김승대 선임연구관은 2004년 《헌법논총》에서 ‘국기로서 태극기와 국가로서 애국가는 불문의 관습헌법성이 인정되어야 마땅하다’고 밝혔다.

 

 헌법 전문가들은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헌법에 대한 몰지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확인 결정’을 소개한 보도자료에 “대한민국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은 관습헌법에 해당하며 태극기·무궁화·한글·애국가도 관습헌법으로 국기·국화·국어·국가의 지위를 갖는다고 판정했다”고 적시했다. 그런데 결정문 전문에 이런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지 않은 탓에 많은 국민이 ‘애국가’와 관습법의 관련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헌법재판소는 그해 12월에 발행한 《헌법논총》 제15집에 판결의 배경이 된 〈헌법관습의 법규범성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게재하여 구체적인 이유를 밝혔다.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헌법소원이 제기됐을 때 전담연구반 팀장이던 김승대 연구부장(헌법재판소 선임연구관)이 집필한 논문에는 국기로서의 태극기와 국가로서의 애국가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 공용어가 한국어인 점은 헌법의 조항에 설치가 필요 없는 자명한 사실로 관습헌법에 해당하여 헌법규범의 일부를 이룬다. 국기와 국가는 가장 전형적인 국가 상징이다. 판단컨대 태극기와 애국가에 관한 사항은 건국 당시는 물론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를 상징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고, 그 상징성과 대표성이 인정된 것으로서 이제는 어떠한 명문의 근거가 없이도 국민들이 법적으로 공통된 견해에 도달한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사항에 대하여서는 불문의 관습헌법성이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김승대, 〈헌법관습의 법규범성에 대한 고찰〉, 《헌법논총》 15, (헌법재판소, 2004), 159~161쪽

이처럼 헌법재판소가 판단하는 대한민국 국가로서의 ‘애국가’는 관습헌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애국가’가 대한민국 국가라는 지위는 정당하다.


안익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였나?

《친일인명사전》은 안익태의 ‘친일 행적’에 대하여 세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1938년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越天樂)〉를 작곡하고 지휘한 것. 둘째, 1942년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년)가 작곡한 〈일본축전곡〉을 지휘한 것. 셋째,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국축전곡〉을 작곡하고 지휘한 것이다.

이같이 안익태를 친일파라고 공격하는 내용은 모두 그의 음악세계에 관한 것이다. 물론 안익태의 음악 활동을 친일 행위로 보는 것에 대해서도 잘못을 지적하는 의견이 많지만, 무엇보다 음악가의 음악성을 법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잘못된 판단이다. 이 밖에 안익태를 ‘친 나치’ ‘친 독재’라고 비방하는 주장도 등장했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런 주장은 모두 사실성이 결여된 역사의 왜곡이자,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프로파간다였다.
 


문재인의 ‘건국 100년’과 역사전쟁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이들의 잘못을 시정조치하기보다는 오히려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하에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프로파간다로, 그 대상의 정점에 ‘애국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선언하고,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라고 선포했다. 역대 대통령이 하나같이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1948년 건국’을 천명해온 것을 뒤엎은 ‘역사의 쿠데타’였다.

왜 그랬을까? 문재인 정권은 ‘건국 100년’을 계기로 적폐 청산을 통한 대한민국의 주류 세력 교체를 완성하고,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질서인 ‘신한반도 체제’를 구축하여 장기 집권하려는 구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문재인의 ‘건국 100년’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역사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애국가’ 바꾸기는 이 같은 구상을 실현하는 데 유용한 희생양이었을 따름이다.⊙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