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조선일보) 2023-04/ 04.01(토) 금 1g짜리 돌 반지 - 04.29(토) 영어 울렁증과 작별하는 한국
만물상(조선일보) 2023-04/
04.01(토) 금 1g짜리 돌 반지

베스트셀러 ‘화폐 전쟁’의 저자 제임스 리카즈는 ‘금의 귀환’이란 또 다른 저서에서 금을 “궁극의 화폐”라고 썼다. 주기율표의 고체 원소에서 독성이 있거나 녹슬고 부식되는 것, 너무 약해 동전으로 만들 수 없거나 너무 단단해 제련하기 어려운 것을 추려내면 금속 8개가 남는다. 그중 실제 통화량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을 보유한 것은 금과 은인데, 은은 변색하기 쉬워 단연 금이 최고라는 것이다. 전 세계에 17만t의 금이 있고, 이 중 3만5000t을 각국 중앙은행이나 재무부, 국부 펀드가 갖고 있다.
▶강대국들은 금을 확보해 패권 경쟁의 우위에 서려 했다. 영국은 1931년까지 파운드화를 금과 교환해줬고, 미국은 금 1온스를 35달러에 고정하는 금환본위제를 1970년대 초반까지 유지했다. 달러는 더 이상 금으로 바꿔주지 않지만 패권 화폐인 달러를 견제하려는 러시아와 중국은 금을 부지런히 사 모으고 있다. 2020년 기준 러시아는 세계 5위 금 보유국으로 올라섰고, 중국도 비공식 수량까지 합치면 러시아보다 2~3배 많은 금을 보유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최고 가격을 찍었던 금값은 지난해 약세였지만 올해 들어 세계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서 다시 급등하고 있다. 인터넷 맘카페엔 “애들 돌 반지 지금 팔면 어떨까요” “금값이 너무 좋아 황금 열쇠 처분했어요” 등의 사연이 올라온다. 20년 전 사뒀던 100g 골드바를 팔아 3배로 돈을 불린 재테크 성공담이 일본 미디어에 소개될 정도다.
▶돌잔치엔 한 돈짜리 금반지를 들고 가는 것이 오랜 풍습이었다. 그런데 하도 금값이 뛰자 금 1g 돌반지가 나왔다고 한다. 금 1돈(3.75g) 가격이 35만원에 육박하자, 금 무게를 거의 4분의 1로 줄여 반지를 만든 것이다. 그래도 시세가 10만원을 웃돈다. ‘1g 금반지’는 12년 전에도 있었다. 귀금속에 미터법 도량형을 확산시키려는 정부 의도와 줄어드는 돌 반지 수요를 붙잡으려는 업계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당시 1g 금반지는 6만원 선이었다. 그사이 가격이 두 배로 뛴 셈이다.
▶지갑은 얇은데 금값이 치솟자 심지어 0.5g 돌 반지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반지 대신 현금 봉투를 건네는 풍속도 자리 잡고 있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금값에 돌잔치 찾는 하객들도, 초대하는 아기 부모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래도 출산율이 높아져 금은방 진열장마다 돌 선물용 ‘1g 금반지’가 넘친다면 이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04.03(월) 냉면값 1만6000원... 北이 이재용 면박줬던 말 떠오른다

최근 서울의 유명 냉면집 봉피양이 냉면 값을 1만5000원에서 1만6000원으로 올렸다. 우래옥에 이어 ‘1만6000원 냉면’이 또 등장했다. 또 다른 냉면집 을밀대의 경우, 지난달에 물냉면과 비빔냉면 가격을 1만5000원으로 올렸고 회냉면은 1만8000원이나 한다. 냉면 값이 2만원 될 날도 머지않은 듯싶다.
▶냉면은 실향민들의 그리움을 달래주는 ‘영혼의 음식’이었다. 맵고 짠 강한 맛이 아닌, 담백한 맛에 ‘배우고 익혀야 맛을 알게 되는 음식’이라는 표현도 붙어 있다. 그런 맛에 별로 익숙하지 않던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양냉면 인기가 확산했다. 미국에서 자라나 평양냉면 맛을 모르다 최근에 그 맛에 푹 빠졌다는 가수 존 박은 ‘냉면꼰대 존박이 추천하는 인생 냉면 맛집’이라는 영상을 찍어 올리고는 “자극 없는 슴슴함에 가득 취해보세요”라고 권한다. 평양냉면 맛집을 찾아다니며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평뽕족’(마약처럼 평양냉면에 중독된 사람들), ‘옥동자’( ‘옥’으로 끝나는 평양냉면집을 즐겨찾는 젊은이), ‘완냉족’(평양냉면 완전 정복) 같은 유행어도 등장했다.
▶인기가 높아진 바람에 냉면이 ‘누들플레이션’(누들·국수+인플레이션)을 주도하고 있다. 1만원대 중반에 팔리는 냉면 재료비는 많아야 3000~4000원대로 추산된다. 냉면집 주인들은 재료비, 인건비, 가스료, 전기료 등이 다 올라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지만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2월 기준 서울의 냉면 값 평균은 1만692원으로, 자장면(6723원), 칼국수(8731원) 등 면류 중에 단연 비싸다.
▶‘시월 관서에 한 자 눈이 쌓이면 푹신한 담요에 이중 휘장 둘러쳐 손님을 잡아두고는 갓 모양 냄비에서 노루 고기 익히고 길게 뽑은 냉면 가락에 송채무침 곁들인다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시에도 냉면이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메밀 껍질을 벗겨 가루로 만들고, 귀한 고기를 삶아서 만드는 냉면은 겨울철 별미요, 아무나 못 먹는 ‘반가의 음식’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정착하면서 여름철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아니,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 2018년 평양 옥류관 오찬에서 리선권 북한 조평통 위원장이 평양냉면 먹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재계 총수들을 향해 면박을 줬다. 한국서 냉면 먹을 때 그런 타박 줄 사람은 없지만, 치솟은 냉면 값 때문에 목구멍에 술술 넘어가기 힘든 음식이 되어간다. 단숨에 후루룩 먹다가는 사레 들릴 판이다.
04.04 살인 낳은 코인 광풍, 끝 아닐 것

▲미국 컴퓨터 엔지니어들이 장난삼아 개발한 도지 코인. 세계적인 코인 광풍과 더불어 한때 하루거래액이 17조원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공식 홈페이지 캡처
비트코인의 ‘검은돈’ 기능이 처음 부각된 곳은 키프로스였다. 러시아 재벌의 조세 피난처였던 키프로스가 2013년 금융 위기로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EU는 10만유로 이상 예금에 대해 40%의 세금을 물릴 것을 요구했다. 놀란 러시아 재벌들이 비트코인으로 갈아탔다. 개당 40달러이던 비트코인 가격이 한 달 새 150달러로 폭등했다. 비트코인에 ‘디지털 금(金)’이란 별칭이 붙었다.

▶2021년 비트코인이 개당 6만8790달러(약 9000만원)를 찍으며 최고가 행진을 이어가자 세계적으로 코인 광풍이 불었다. 미국 컴퓨터 엔지니어들이 장난삼아 만든 도지코인의 하루 거래 금액(17조원)이 한국 증시 총거래액(15조원)을 웃도는 일까지 등장했다. 한국산 토종 코인, 김치 코인도 우후죽순 생겼다. 종류가 600종이 넘고, 시가총액은 23조원에 달했다. 김치 코인 투자자가 690만명까지 불어났다.
▶코인 사기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사기 수법은 러그 풀(rug pull), 돼지 도살(pig butchering) 등 크게 2가지다. 가상화폐를 개발한다면서 투자금을 모은 뒤, 야반도주하는 수법이 러그 풀이다. 양탄자(rug)를 확 잡아당겨 사람을 넘어트린다는 뜻이다. 진돗개 이미지를 활용한 ‘진도지 코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착안해 만든 ‘스퀴드 코인’이 러그 풀에 속한다. 돼지 도살은 처음엔 소액 투자금을 돌려주며 안심시킨 뒤 판을 키워 거액을 가로채는 수법이다.
▶최근 5년간 우리나라에서 가상화폐 범죄로 인한 피해액이 4조7000억원에 이른다. 대표적 금융 사기 보이스피싱 피해액보다 70% 이상 더 많다. 5년간 경찰이 잡은 코인 사기꾼이 1976명에 이른다. 블록체인에 기반한 코인은 거래 기록이 모두 남아 있어 사기꾼 추적이 어렵진 않다. 그래서 요즘 코인 사기꾼들은 비트코인 대신 거래 내역 정보를 비공개하는 코인인 ‘프라이버시 코인’을 요구한다고 한다. 또 디지털 범죄 세상에선 거래 대상 가상화폐가 수사기관의 추적 대상인지 아닌지를 수수료를 받고 분석해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서울 강남 3인조 납치·살인의 범행 동기가 가상화폐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코인 투자 피해자가 자기 인생을 구렁텅이로 내몬 가상화폐 관련자를 해친 사건으로 보인다. 욕망의 용광로 같던 코인 광풍이 우리 사회에 범죄의 씨앗도 뿌려 놓았다. 코인 사기 피해자가 수십만 명에 이를 것이다. 언제 어디서 유사 사건이 발생할지 몰라 조마조마하다.
04.05(수) ‘woke’는 또 뭐지?

/일러스트=박상훈
2000년대 후반 뉴욕 특파원일 때 뉴저지 초등학교를 다니던 딸은 필자가 “메리 크리스마스” 하면, “아냐. 해피 홀리데이스(Happy Holidays)”라고 고쳐주곤 했다. 유대인 기념일인 하누카, 흑인의 기념일인 콴자 등도 12월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 명절인 성탄절 축하만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학교에서 배웠다고 했다.
▶2012년 뉴욕시 교육청은 ‘공룡’ ‘생일’ ‘수영장을 갖춘 집’ 같은 용어를 시가 주관하는 시험 문제에 쓰지 말도록 했다. 공룡은 창조론을 확신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를 불편하게 하고, 생일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기념하지 않으며, 수영장 있는 집은 가난한 아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미네소타대학은 성(性)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이유로 여학생들의 치어리더 활동을 금지시켰다. 당사자인 여학생들이 반발했지만 대학은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생된다”며 묵살했다.
▶'트럼프 열광’의 배후엔 도를 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에 대한 보수층의 반감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생각만 하고 입 밖에 꺼내지 못하던 것을 트럼프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겠다”며 PC 반대 공격수로 나섰고, 지지자들은 열광했다. 트럼프 대신 등장한 민주당 바이든은 다시 PC로 갔다. 사우디 빈 살만이 언론인 살해에 연루됐다고 비난해 80년 가까운 미-사우디 동맹에 균열이 갔다.
▶미 월스트리트저널 조사 결과, 대학이 PC에 집착하는 진보·좌파에 점령됐다는 인식 탓에 대학 졸업장의 가치가 없다는 응답이 처음으로 절반을 넘었다고 한다. 과도한 ‘PC주의’에 염증이 난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워키즘(wokeism·깨어있는 척 하기)’이라고 조롱한다. 원래는 깨어있다(wake)의 과거분사(woken)를 도시에 사는 흑인들이 ‘워크(woke)’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했다.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깨어 있자는 뜻으로 썼다. 하지만 PC가 도를 넘자 이는 비아냥거리는 용어로 변질됐다. 보수층에선 아예 ‘awake, not woke’라는 문구를 만들어 보수 집회에서 쓰고 있다. 깨어 있되 좌파 정치 운동과는 거리를 둔다는 뜻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미디어 혁명이 파괴한 위선의 제도화’란 논문에서 과잉 PC의 문제점을 “사람들이 PC를 심리적 면죄부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 행동은 하지 않고 좋은 말만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이든 시민단체든 그들이 “정말 깨어 있나”를 보려면 말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봐야 한다.
04.06 어느 댓글 “양곡법 강행 의원들 월급은 쌀로”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매일 도시락 검사를 했는데 보리 섞인 밥이 아니라 쌀밥 위에 깨를 뿌린 ‘가짜 혼식’ 도시락을 내놨다가 혼이 났다. 1970년대 정부가 대대적인 혼·분식 장려정책을 펼 때였다.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거치면서 반찬 없어도 쌀밥 한 그릇이면 진수성찬이라는 게 할머니 소원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흰 쌀밥만 먹었다. 그 대가로 학교에서 혼·분식 단골 위반자가 돼야만 했다.
▶쌀은 반만년 넘게 한국인의 주식이라고 하지만 실제 우리가 쌀밥을 풍족하게 먹게 된 건 40~50년밖에 안 된다. 1960년대부터 쌀 생산이 크게 늘었지만 보리밥 대신 쌀밥을 마음껏 먹겠다는 국민들 수요가 급증하면서 여전히 쌀 부족에 시달렸다. 쌀을 덜 먹게 하려고 정부가 온갖 조치를 내놨다. 작은 크기의 밥공기를 보급해 고봉밥 대신 ‘공기밥’ 시대가 열렸다. 정부가 식당들 조리법까지 관여했다. 탕반류에 쌀 함량을 반으로 줄이고, 잡곡 4분의 1, 국수 4분의 1을 내도록 했다. 설렁탕에 소면 넣어 먹는 식습관도 이때 생겼다. 1969년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는 무미일(無米日)까지 등장했다.
▶다른 먹거리가 풍성해지면서 한국인의 열렬한 쌀밥 사랑도 빠르게 식어갔다. 지난해 쌀 생산은 376만t. 1977년의 600만t에 비하면 3분의 2도 안 되는데도 쌀이 남아돌아 걱정이다. 1인당 쌀 소비량이 계속 줄어 30년 전에 비하면 절반도 안 먹기 때문이다. 쌀 소비량이 하루 평균 한 공기 반꼴이다.
▶남아도는 쌀을 국민 세금으로 몽땅 사들여야 한다는 거대 야당의 입법에 대통령이 취임 후 첫 거부권을 행사했다. 쌀 수급 관리 및 농업 발전에 도움 안 되는 생색내기용 포퓰리즘 입법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양곡관리법’ 개정안 기사 밑에, 한 시민이 이런 촌철살인의 댓글을 달았다. “그 의원들한테는 세비를 쌀로 지급하자.” 조선 시대에는 국민들이 세금을 쌀로 내기도 했다.
▶작년 기준 국회의원 세비(월급)가 월 1285만원이다. 최근 여야 청년 정치인들이 “받는 돈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일도 그만큼 하느냐”고 반성했다. 그러지 말고 남아도는 쌀로 세비를 받아가는 건 어떻겠나. 마트에서 10㎏들이 쌀 한 포대가 3만원 안팎이니 매달 428포대이다. 그렇게 농민을 위한다니 국민 세금 퍼주기에 앞서 농민 사랑을 직접 실천해보라는 것이다.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무책임한 선심 입법을 보며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04.07 ‘꼬부랑’은 사라지고 ‘선진국 할머니들’로

한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남자 동창생이 최근 손자 본 60대 여자 동창에게 “이제 할머니 됐네”라고 불렀다가 호되게 타박을 맞았다. “나를 할머니라 부를 자격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야. 내 손자.” 실제 요즘 초등생 할머니들 중에는 도저히 할머니로 볼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들이 많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학부모를 “ΟΟ 어머니” 또는 “ΟΟ 할머니”로 부르는 것 자체가 금기라고 한다. 학부모회에 참석한 여성이 늦둥이를 낳은 엄마인지, 손자를 일찍 얻은 젊은 할머니인지 판단하기 힘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할머니라는 호칭이 어색한 ‘새로운 할머니’들이 부쩍 늘어났다. 자전거 타는 여성의 날씬한 뒷모습만 보고 젊은 여성인 줄 알았는데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사람도 많다.
▶고령의 한국 여성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와 이미지가 ‘꼬부랑 할머니’였다. 동요로도 불렸고 동화책의 단골 소재였다. ‘머리는 하얗고, 주름은 자글자글하고, 허리는 꼬부라지고, 나처럼 꼬부랑꼬부랑 걷고 말이야.’ 동화 ‘꼬부랑 할머니는 어디 갔을까’를 쓴 작가 유영소는 “늙고 구부러진 꼬부랑 할머니는 얼마 후의 제 모습이기도 할 테니까요”라고 했다. 그 말은 틀린 것 같다.
▶국가기술표준원이 70~84세 고령인구를 측정했더니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2.8%에 불과했다. 칠순 넘어도 10명 중 8명(83.4%)은 허리도 굽지 않고 꼿꼿한 체형이었다. 그 덕에 20년 새 고령층의 평균 키가 3㎝ 가까이 커졌다. 꼬부랑 할머니의 굽은 허리는 밭일하느라 쪼그려 앉고, 허리 구부려 무리한 자세로 오랫동안 일하고 생활한 것 때문에 생긴 척추 질환이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흔했는데, 도시에서 침대나 소파 생활을 하고 소득 수준이 높아져 운동과 건강관리를 잘하며 의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꼬부랑 할머니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할머니가 되는 앞으로는 변화가 더 클 것이다. 베이비부머 712만명은 75%가 고등학교 이상 교육을 받았다. 한국에서 여자도 대학에 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 첫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 중 많은 여성이 취직해 사회 생활을 했다. 본인 유학이든, 남편을 따라서든 해외 경험을 한 여성도 매우 많다. 재산도 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이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미국, 유럽 여행할 때 본 멋진 선진국 할머니들이 한국에도 흔해지게 된다는 얘기다.
04.08(토) 엑스포 실사단 홀린 ‘어메이징 부산’

▲(부산=연합뉴스)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단이 부산 현지 실사를 마친 7일 오전 부산 김해국제공항 계류장에서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부산을 떠나고 있다.
부산역에 엑스포 실사단이 도착하던 날, 역 광장은 5500명이 넘는 시민들로 후끈 달아올랐다. KTX에서 내린 실사단이 전통 복장을 한 취타대를 따라 대합실을 빠져나오자 광장은 땅바닥을 구르며 튀어 오르는 시민들의 발 구름과 환호성, 노랫소리로 뒤덮였다. “아~ 미래 부산, 아~ 엑스포~” 노래를 부르며 실사단 위원 나라의 국기를 흔들었다. 위원들이 꽃다발을 든 채 휴대폰으로 부산 시민을 찍기 시작했다. “마치 팝스타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세계 유일의 부산 유엔군 묘지에 갔을 때는 ‘소녀 외교관’으로 이름난 에이시아양(16)이 공원 안내를 맡았다. 캐나다인·한국인 부모를 둔 이 부산 토박이 소녀는 그동안 참전 용사들과 편지를 주고받아 온 사연으로 유명하다. 실사단 위원 여덟 중 넷이 6·25 참전국 출신이다. 이들은 엔젤피스 합창단의 노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들으며 자기네 나라 용사들의 이름을 찾았다. 엑스포 덕분에 70여 년 세월을 점프하듯이 “모두 뭉클해졌다”고 했다.

▶국제박람회기구(BIE)가 후보 도시들을 놓고 고를 때 평가 기준에 딱 맞아야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평가 항목은 14분야, 61항목으로 짜여 있다. 첫째가 ‘박람회 주제에 맞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박람회 신청 이유’다. 이것이야 유치 실무자들이 계획서 제출과 4차례의 PT로 어련히 잘했을까 싶다. 핵심은 셋째, 넷째 평가 항목인 ‘시민의 태도’와 ‘매력도’이다. 그중 9가지 세부 항목으로 들여다본다는 ‘매력도’ 점수가 결정적이다.
▶어제 통화한 부산시 담당자는 “광장을 메운 시민들을 뵙는 순간 오히려 제가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혹시 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자원봉사를 조직했던 한 대학생은 “신청자가 몰려 수백 명을 돌려보냈다”고 했다. 한 택시 기사는 “실사단이 걸어만 가도 시민들이 난리였다”고 했다. 마지막 만찬 때는 실사단 한 사람 한 사람의 방문 사진 수십 장을 담은 자개 앨범이 테이블마다 놓였는데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실사단이 떠난 뒤 박형준 시장이 시청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혼이 쑥 빠지셨지요? 며칠간 정신없이 뛰어다닌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갓 들어온 신입 직원부터 시장까지 혼이 빠질 만큼 정신없었던 것, 시민을 독려하려다 외려 시청 직원이 눈물 글썽이며 가슴 벌렁였던 것, 실사단은 분명 그것을 보고 갔을 것이다. ‘어메이징 부산!’을 연발하면서 말이다.
/김광일 논설위원
04.10(월) 변호인의 재판 결석... ‘사회정의 실현’ 내팽개쳤나
2006년 어느 시민이 재산세 부과를 취소해달라며 서울 광진구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그런데 구청이 선임한 변호사는 세 차례 변론 기일에 나오지 않았고 증거자료를 내라는 법원 요청도 따르지 않았다. 법원은 구청에 패소 판결을 내렸고, 판결문 두 쪽에 걸쳐 변호사의 ‘불성실 변론’을 비판했다. “행정청의 대리인이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판사도 이랬을까 싶었다.

▶5년 전쯤 어느 기업 임원이 대학 친구인 변호사에게 자기 회사 관련 사건을 맡겼다.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변호사는 재판에 두 번이나 불출석했고, 결국 회사가 소송에서 완패했다. 변호사의 해명이 가관이었다. “전날 과음해서.” 이 임원은 회사에서 잘릴 뻔할 위기를 겨우 넘겼다.
▶형사소송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다. 2010년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1년간 형사재판을 본 뒤 보고서를 만들었다. ‘판사는 피해자 아픔에 냉담했고, 검사는 불성실했으며, 변호사는 지각하기 일쑤였다’는 데 대체로 일치했다. 그런데 판·검사와 달리 변호사를 긍정 평가한 보고서는 단 한 장도 없었다. “지각은 예사이고 재판에 불출석해 피해자를 헛걸음시키기도 했다”는 비판 일색이었다. 지난해엔 영장실질심사에 불참하고 해임된 이후에도 수임료 반환을 거부한 변호사가 대한변협에서 정직 3개월 징계를 받기도 했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 극단 선택을 한 학생의 유족이 가해 학생들을 상대로 낸 소송을 대리하면서 재판에 불출석해 소송이 취하되게 만든 권경애 변호사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다. 1심에서 일부 승소했는데 권 변호사가 세 차례 항소심 변론기일에 나가지 않아 이런 황당한 일이 생겼다. 민사소송법상 소송 당사자가 연이어 3번 출석하지 않으면 소송을 취하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권 변호사는 “불찰”이라고 했다지만 유족 입장에선 땅을 칠 노릇이다. 대한변협은 징계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사건 당사자 입장에선 변호사의 불성실한 변론도 참기 어려운데 재판 불출석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여느 전문직과 달리 변호사법은 ‘사회정의 실현’을 첫머리에 내걸고 있다. 변호사가 그저 돈만 좇는 ‘법률 기능공’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대한변협 변호사 윤리장전엔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성실해야 한다는 성실 의무 규정도 있다. 변호사의 재판 불출석은 그런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변호사들은 2008년부터 ‘법관 평가’를 하고 있다. 머지않아 ‘변호사 평가’를 하자는 말이 나올 것이다.
04.11 탁신 일가의 부활

유명한 형제 정치인들은 역사에 많다. 포에니 전쟁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인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 공화정 때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끝은 좋지 않았다. 형은 자영농 토지 분배를 밀어붙이다 암살당했다. 뒤이어 호민관이 된 동생도 귀족들의 반발을 사 최후를 맞았다. 미국의 케네디가(家) 삼 형제도 대중의 환호 속에 지도자로 떠올랐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암살당했다. 막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대선 도전에 실패했다.
▶태국의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일가는 벌써 세 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2001년 탁신에 이어 2008년 매제인 솜차이 웡사왓, 2011년엔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로 선출됐다. 유례가 드문 일이다. 탁신의 인기가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세 명 모두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탁신은 수사를 받고 해외로 떠돌아 다니는 처지다.
▶그런데 탁신의 막내딸 패롱탄 친나왓이 제1 야당의 총리 후보로 지명됐다.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선두라고 한다. 잉락이 2014년 실각한 지 9년 만에 다시 탁신가(家)의 총리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36세로 곧 출산을 앞둔 패롱탄은 아버지 명예 회복 의지가 강하다고 한다. 탁신의 정책 노선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탁신 가문이 오뚝이처럼 되살아나는 이유는 농민·서민층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탁신은 화교 출신이다. 증조부는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아버지는 국회의원을 지냈다. 탁신은 경찰로 일하다 미국 유학 중 사업가로 변신했다. 태국 경제 호황기 때 이동통신 사업 등에 진출해 10년 만에 재벌로 성장했다. 정계에 입문한 그는 대중에게 “우리도 잘살 수 있다”고 외쳤다. 농민·서민·지방에 대한 지원을 통한 빈곤 탈출 정책을 폈다. 수도 방콕에만 집중된 예산을 지방으로 돌리고 농가 부채 상환을 연기했다. 또 전 국민에게 월 30바트(1100원) 의료보험료를 지원했다. 그런 탁신에게 농민·서민들은 몰표를 던졌다.
▶하지만 탁신의 정책은 포퓰리즘이란 비판도 받았다. 잉락은 국제가보다 높게 쌀을 의무 수매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가 10조원 가까운 국고를 낭비한 혐의로 기소됐다. 쿠데타 정권은 탁신을 탈세와 비리의 상징으로 낙인찍으려 했다. 탁신은 “재임 전후 내 재산은 오히려 줄었다”고 주장한다. 탁신에 대한 태국 국민의 호불호는 명확히 갈린다. 탁신 일가에서 4명째 총리가 나와 태국의 구원 투수가 될지, 또 다른 실패가 될지 관심이다.
04.12 마약 천국 된 네덜란드와 마약 배달

/일러스트=김성규
1800년까지 미국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는 19세기 내내 미국 산업화의 중추였다. 1876년 유럽 밖에서 처음으로 세계박람회가 열린 곳도 필라델피아였다. 그때 전화기가 첫선을 보였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의 어둠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도심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도시를 빠져나간 백인 중산층의 자리를 남부에서 올라온 흑인들이 채웠다. 흑인 대이동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쇠락한 도심을 파고든 건 마약이었다. 지금도 필라델피아 켄싱턴가(街) 풍경은 영락없는 ‘좀비 영화’다. 마약에 취한 노숙인들이 허리, 팔다리를 심하게 꺾은 채 약 3㎞에 달하는 거리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좀비 랜드’란 오명까지 붙었다. 경찰도 사실상 마약 거래 단속은 포기하고, 범죄가 일어나야 개입할 정도라고 한다. 이곳을 좀먹은 마약은 펜타닐. 말기암 환자를 위한 진통제로 개발됐는데 2~3달러만 주면 약국에서 구할 수 있어 ‘악마의 마약’으로 불린다. 규제 사각지대에 있다 보니 급속도로 번진 것이다.
▶네덜란드는 1976년 이래 마약에 대해 이른바 ‘관용 정책’을 펴왔다. 헤로인·코카인 등 중독성 강한 마약 유통은 금지하되, 대마 등 연성 마약을 제한적으로 합법화한 것이다. 마약 가격을 대폭 낮춰 마약 조직의 수익률을 낮추고 마약 중독자들이 더 위험한 약물에 손대는 걸 막겠다는 독창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2년 전 이 정책이 네덜란드를 ‘마약에 찌든 국가’로 만들었다고 했다.
▶실제 세계 마약 조직들이 네덜란드로 모여들었고, 북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마약을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에 유통시키는 것에 주력하던 마약 조직은 2010년대부터 코카인 제조까지 시작했다. 유럽의 마약 범죄 전문가는 “마약 유통이 허용되면 유통업자들은 결국 제조에도 손을 댄다”고 했다. 2017년 기준 네덜란드의 합법적 마약 시장 규모만 259조원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10대 청소년으로 가장한 본지 기자가 텔레그램을 통해 마약 운반책을 모집하는 마약상들에게 연락했다가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교복 입고 운반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더 낫다”고 했다는 것이다. 마약상들은 “적어도 월 1000만원 이상을 보장한다”며 운반책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마약 유통이 쉬워지니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까지 학생을 상대로 ‘마약 시음회’를 벌이는 세상이다. 여기에 마약 배달로 큰돈 벌 수 있다는 인식까지 생기면 정말 큰일이다. 마약은 유통이 쉬워지면 막기 어렵다. 미국과 네덜란드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04.13 라면 원조국 일본이 베낀 한국 컵라면

1972년 일본 나가노현 아사마 산장에서 일본 극좌 적군파 일당이 산장 관리인 부부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극을 벌였다. TV가 ‘아사마 산장 사건’을 연일 생중계했다. 중무장 특공대원들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이 자주 포착됐다. 인스턴트 라면을 발명한 기업 일본 닛신(日淸)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컵누들’이었다. 비싼 가격 탓에 외면받던 컵라면이 이 사건 이후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라면기업 삼양이 1973년 일본 컵누들을 베껴 ‘컵라면’을 선보였다. 생소하고 값도 비싸 곧 퇴출당했다. 1981년 농심이 국사발 모양 ‘사발면’을 다시 선보였다. 상에 놓고 먹을 수 있는 ‘사발’ 모양이 소비자의 관심을 끌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사발면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추면 외국인들이 사발면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클로즈업되곤 했다. 세계 각국에서 사발면 주문이 쏟아졌다.
▶한국 컵라면의 진화는 계속됐다. 팔도가 1986년 세계 최초로 사각 컵라면 ‘도시락’을 선보였다. 뜨거운 물을 부을 때 더 안전하고, 휴대도 간편했다. 부산항에 들락거리던 러시아 선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보따리상을 거쳐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30년간 44억개 이상 팔리며 러시아 ‘국민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형 컵라면의 원조 격인 농심 ‘육개장 사발면’은 출시 후 41년간 52억개가 판매됐다. 지금도 한 해 2억개 이상 팔린다. 봉지면 매출은 제자리걸음이지만, 컵라면은 매년 20~30%씩 고속 성장하고 있다. 1인 가구 급증과 편의점에서 간단히 한 끼 때우는 10~20대들의 컵라면 사랑 덕이다. 예전엔 봉지면이 먼저 나오고 컵라면이 나중에 출시됐지만 요즘엔 순서가 바뀌어 컵라면을 먼저 출시하는 추세다.
▶2012년 출시된 삼양 ‘불닭볶음면’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매운 라면에 도전하는 ‘파이어 누들 챌린지’를 세계적 문화 이벤트로 만들었다. 관련 유튜브 영상만 100만개 이상 제작됐다. 불닭볶음면은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같이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변형해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드는 ‘모디슈머(modify+consumer)’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치즈·짜장·커리·김치·야키소바 불닭볶음면 시리즈로 이어지며 40억개 이상 판매됐다. 라면 원조 일본 닛신이 한국 불닭볶음면을 베낀 ‘야키소바 볶음면’을 내놨다. 포장지에 한글로 ‘볶음면’이라 쓰고, ‘고추장과 치즈의 감칠맛’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K라면의 끊임없는 혁신이 일구어낸 역전극이다.
04.14 눈이 추적 가능한 한계속도였다... 유망주가 던진 160㎞ 투구
눈 한 번 깜빡이는 데 0.3~0.4초가 걸린다. 투수가 시속 100마일로 던진 직구가 타석에 도달하기까지도 그와 비슷한 0.375~0.4초가 걸린다. 공의 속도가 시속 100마일에 가까워지면 사람 눈이 순간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한다고 신경과학자들은 분석한다. 뇌가 처음 물체를 인식하는 데 0.1초, 스윙하는 데 0.1~0.15초가 필요하다. ‘인식’과 ‘스윙’ 사이 대략 0.15초 안에 타자가 공의 종류와 방향을 식별하고 스윙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데, 공의 궤적을 보고 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시속 100마일은 야구 본고장 미국에서 ‘꿈의 구속’으로 통하는 상징적 숫자다. 한국에선 미터법으로 환산해 시속 약 160㎞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미국 메이저리그를 중심으로 ‘투구 혁명’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구속이 급상승했다. 2022시즌 메이저리그에서 시속 100마일 이상 투구 수는 3356개로 역대 최다였다. 2016시즌엔 1948개였다. 그에 따라 2022시즌 타율은 1968년 이후 가장 낮은 0.243으로 내려앉았다. 메이저리그에서 역대 가장 빠른 투구 기록은 어롤디스 채프먼이 세운 시속 105.8마일(170.2㎞)이다. 일본 출신 수퍼스타 오타니 쇼헤이도 고등학생 때 이미 시속 160㎞ 강속구를 던졌다.
▶프로야구 한화의 스무 살 특급 유망주 문동주가 12일 국내 투수 최초로 시속 160㎞을 돌파(160.1㎞)했다. 종전 최고 시속은 롯데 최대성의 158.7㎞였다.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위원은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라고 했다. 키 188㎝, 체중 98㎏의 당당한 체격을 갖춘 문동주는 지난해 한화에 입단하며 기대를 모았다.
▶‘강속구 혁명’이 가능해진 것은 과학적 분석 기술 덕이 크다. 선천적 능력과 체격 조건도 중요하지만, 선수마다 투구 시스템과 신체적 특징을 면밀히 측정·분석해 맞춤형으로 보완하는 훈련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에서도 은퇴한 프로 선수가 운영하는 아카데미들이 성업 중이다. 고가 첨단 장비를 갖추고 일대일 레슨으로 기량을 끌어올린다.
▶문동주뿐 아니라 안우진, 김서현, 장재영 등 젊은 강속구 투수들이 속속 등장해 침체에 빠진 한국 야구에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빠른 공이 성공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제구력은 기본이고, 류현진의 체인지업처럼 자신만의 확실한 주무기를 갖춰야 좋은 투수로 롱런할 수 있다. 이들의 성장에 한국 야구의 미래가 달려 있다.
04.15(토) ‘파이브 아이스’

미국과 영국은 1940년대부터 모스크바에서 캄차카반도에 이르기까지 소련 전역의 통신을 거의 완벽하게 엿들었다. 2차 대전 때 독일군 암호 해독을 위해 뭉쳤던 두 나라가 1946년 미·영 안보협정(UKUSA)을 맺고 구축한 대(對)공산권 도청망이었다. 여기에 1948년 캐나다가, 1956년 호주와 뉴질랜드가 동참했다. 모두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앵글로색슨 국가였다. 이들이 생산한 기밀문서 상·하단엔 전파 대상으로 ‘Five Eyes Only’란 문구를 적었다. 미국의 1급 정보동맹 ‘파이브 아이스’(Five Eyes)의 시작이었다.
▶영국 BBC는 1999년 11월 전 세계 전화, 팩스, 이메일 등 유무선 통신을 엿듣는 감청 네트워크 에셜론(Echelon)의 존재를 폭로했다. 에셜론은 파이브 아이스 국가들의 정보기관과 세계 각지의 미국 감청기지를 인공위성 등으로 연결한 것으로 고성능 음성 인식 컴퓨터를 활용해 시간당 최대 200만건의 통신 내용을 감청했다. 원래 공산 진영을 도청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냉전 붕괴 이후 테러 대응을 위해 민간인까지 대상으로 했다. 유럽의회 등의 특별조사를 통해 실체가 확인됐는데도 미국, 영국 등은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2013년 6월 영국 가디언은 미 NSA(국가안보국)가 한국·일본을 비롯해 워싱턴 주재 38국 대사관을 도청해 왔다고 보도했다. 전직 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빼돌린 비밀 문건들에 담긴 내용이었다. NSA가 ‘프리즘’이란 도·감청 프로그램으로 구글·페이스북 등의 서버에 접속해 가입자 개인 정보를 수집해왔다는 폭로도 이어졌다. 당시 도·감청의 주체도 ‘파이브 아이스’였다. NSA가 감청한 38국 대사관 중에 파이브 아이스 국가들은 당연히 없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13일 “파이브 아이스에 맞먹는 수준으로 한미의 정보 공유를 확대하는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달 말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다뤄진다고 한다. 최근 미국 정보기관들이 한국 등 동맹국을 감청한 정황이 담긴 문서들이 유출돼 논란이 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파이브 아이스 가입 문제는 2021년 미 하원에서 논의된 적이 있다. 파이브 아이스에 한국, 일본 등을 포함시키는 법안을 추진했으나 최종안에서 제외됐다. 미국 내에서 시기상조라는 여론이 많았고, 당시 문재인 정부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파이브 아이스 참여는 득실이 갈리는 사안이다. 대북 감청 능력은 대폭 보강되겠지만 중국·러시아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국익 최대화 묘안을 찾아야 한다.
04.17(월) 과시 욕구가 부채질하는 음식값
서울 방배동의 한 일식집 스시 오마카세(맡김차림) 가격은 평일 저녁 1인당 37만5000원이다. 평범한 인테리어의 구석진 곳이지만,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에도 예약이 쉽지 않다. 이곳의 손님은 주로 20~30대 젊은층이라고 한다. 암호화폐·유튜브·스타트업 등으로 큰돈을 번 사람들이 별로 어렵지 않게 음식 값을 낸다고 한다.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부유층의 과소비 현상을 비판했다. 과시욕이 있는 비합리적인 소비자들 때문에 비싸야 더 잘 팔리는 ‘베블런 효과’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특정 제품을 소비하면 그 제품을 소비하는 소비자 집단과 같아진다는 환상(파노플리 효과)때문에 명품 소비에 올라탄다고 했다. 그러다 명품이나 고가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자신이 더 이상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흥미를 잃고 중단하는 스노브 효과(snob effect·속물 효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명품 매장이나 위스키, 베이글 등 한정 상품을 파는 곳엔 개장 전부터 줄을 섰다가 달려가는 ‘오픈 런’이 일어난다. 이렇게 물건을 확보하는 능력을 ‘득템력’이라고 한다. 은근히 부(富)를 과시하는 세태는 16세기 정물화에도 들어있다. 미국 코넬대 연구팀이 미국과 유럽 유명 미술관에 소장된 식탁을 클로즈업한 그림 140점을 분석했더니 과일이 76%였는데, 그 중 레몬이 제일 많았다. 사과나 포도에 비해 귀했기 때문이다. 신선한 생선이나 굴, 가오리가 단골 소재로 등장한 것도 같은 이유다.
▶한국의 비싼 외식 물가에 세계적 여행 사이트 리뷰마다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맛과 서비스가 표준화된 프랜차이즈 식당마저 다른 나라보다 20~30% 비싸다고 한다. 일본 언론은 “소셜 미디어에 사진과 영상을 업로드해 타인에게 자랑하는 것까지 세트”라고 한국의 사치 문화를 소개한다. 한국 특유의 법카(법인카드) 문화와 비싼 식재료도 문제이지만, 남에게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과시 문화가 외식 물가 인플레의 주범으로 꼽힌다.
▶ MZ세대는 한 끼 10만원이 넘어도 과감히 투자하고 이 경험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던 윗세대와 달리 국가적 풍요로움의 결과물을 향유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과시 욕구가 터무니없이 비싼 집 값 탓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해진 현실을 하루 저녁 소비로라도 위로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건전한 소비 문화 정착을 위해서라도 집 값이 좀 더 내려야 한다.
04.18 민주당 전대 돈봉투 의혹과 통화녹음 3만건
과거 기자들의 취재 방법 중 하나가 ‘귀 대기’였다. 중요한 회의나 모임이 있는 현장의 닫힌 문틈에 귀를 바짝 붙여 모깃소리처럼 흘러나오는 얘기를 듣는 것이다. 원시적이지만 들리기만 하면 이렇게 확실한 취재가 없다. 실제 정당, 검찰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전설처럼 전해지는 ‘귀 대기 특종’ 사례가 적지 않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는 처벌 가능성은 낮지만 위법 소지가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때문이다. 이 법에 따르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가 몰래 대화를 녹음하거나 청취하면 불법이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 중 한 명이라면 그가 몰래 녹음을 했다 해도 합법이다. 지난 정권 때 정권에 찍힌 판사가 김명수 대법원장과의 대화를 녹음해 공표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통화 녹음의 위력은 크다. 김 대법원장도 애초 관련 사실을 부인하다 판사의 대화 녹음 공개로 거짓말이 들통났다. 녹음이 없었다면 그는 끝까지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대장동 사건도 대장동 일당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파장이 커졌다. 녹음은 통화나 대화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직장 내 갑질, 폭언 등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자기방어적’ 목적도 있다. 그래서 소송의 필수 증거자료가 됐고 이젠 의뢰인들에게 녹음을 권하는 변호사도 있다. ‘녹취 전성시대’다.
▶민주당의 2021년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정근 민주당 전 사무부총장의 휴대전화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검찰이 압수한 그의 휴대전화에 담긴 녹음 파일 3만여 개 중 일부에 금품 살포 단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전화엔 자동 녹음 기능이 설정돼 있었다고 한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사팀으로선 그 녹음을 듣는 것만으로 수사가 저절로 된 셈이다.
▶이씨 전화는 국산폰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 아이폰은 통화 녹음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다. 애플 본사가 있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미국 10여 주(州)에선 상대방 동의 없는 통화 녹음이 불법이기 때문이다. 반면 삼성은 일본·중국·인도 등 통화 녹음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37국에서 팔리는 제품에 통화 녹음 기능을 넣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통화 녹음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가 철회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의 방어 수단을 빼앗는다는 반발이 거셌다고 한다. ‘상대가 대화를 녹음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04.19 마약과의 전쟁과 마리화나

▲대마초
1960년대 미국에서 히피 문화가 유행했을 때 핵심 중 하나가 마리화나였다. 반전(反戰)과 함께 마리화나가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도 마리화나는 엄연히 불법이었다. 히피 세대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1992년 대선 과정에서 마리화나 흡입 경험이 폭로되자 “피우기는 했지만 연기를 마시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
▶마리화나는 대마의 꽃과 잎, 이삭을 말린 것이다. 대마는 삼베를 만드는 삼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삼베를 만들기 위해 삼을 재배하고 있다. 하지만 재배 면적과 생산 현황·수량을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고조선 시대부터 삼베옷을 입었다는데 마약으로 사용한 흔적은 없는 것이 신기하다. 우리나라에서 대마초 흡연은 베트남 전쟁 즈음부터 문제가 됐다.
▶마리화나는 다른 마약에 비해 중독성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마 중에서 환각성을 가지는 THC 성분이 0.3% 미만인 헴프(HEMP)는 소아 뇌전증 치료에 쓰이고 있다. 기호용 대마초를 합법화하는 나라와 지역도 늘고 있다. 다른 마약에 비해 사회적 해악이 덜하고 해악이 더 심각한 다른 마약 수요를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다. 2014년 콜로라도주를 시작으로 미국 50주 가운데 뉴욕주 등 21주가 기호용 대마초를 합법화했다. 우루과이·캐나다와 남아공, 유럽 일부 국가, 태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대학생들이 파티를 하는 곳엔 거의 항상 대마초가 있다고 한다. 지난해 미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성인(16%)이 담배 흡연자(11%)보다 많아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올 정도다.
▶이런 문화에 젖어 있다가 귀국한 유학생 중에서 마약 단속에 걸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얼마 전 재벌가 자제들이 잇따라 대마초를 피우거나 반입하다 처벌을 받았다. 한 재벌가 3세는 변종 대마가 위법인지 모르고 짐에 넣어 입국하다 공항 단속에 걸렸다. 그는 “유전병과 사고로 다리에 통증이 있어서 쓴다”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뉴욕주가 지난해 말부터 대마초를 공식 판매한 이후 다른 불법 마약 거래까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마약 사범이 급속히 늘어나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다. 대마초는 연성 마약이라고 하지만 필로폰 등 중독성이 강한 마약으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경각심을 갖고 강력 단속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 견해다. 지금 마약 확산을 철저히 막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04.20 한국 부자 순위 바꿨다...사모펀드 부자
2003년 외환 거래의 절대 강자이던 외환은행이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팔렸다. 국내 매수자를 찾을 수 없어 넘긴 것이었지만 헐값 매각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당시만 해도 국내엔 사모펀드란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토종 펀드를 키워야 외국 자본에 또 당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커지자 정부는 법을 만들어 한국형 사모펀드 육성에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사모펀드 시장이 2021년 116조원 규모로 커졌고, 운용사만 394개가 됐다. 작년 인수합병된 상위 20개 거래 중 17개가 사모펀드에 의한 것이었다.
▶사모펀드란 공모(公募) 펀드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일반인 상대의 공모 방식과 달리 비공개로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받아 돈을 굴린 뒤 수익을 배분한다. 주식·채권·부동산에서 금·자원 같은 현물까지 돈 되는 투자처라면 가리지 않지만 특히 주목받는 것이 구조조정 펀드다. 경영이 악화된 부실기업을 싼값에 사서 기업 가치를 올린 뒤 비싸게 파는 방식이다. 최근엔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진을 교체시키는 등 상장 기업의 약점을 공격해 주가를 올리는 행동주의 사모펀드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형 구조조정 펀드 중 가장 큰 것이 MBK파트너스다. 약 34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MBK는 두산공작기계, 홈플러스, KT렌탈, 네파 등 굵직한 기업들을 인수했다. MBK가 투자한 기업들의 매출 합계는 약 59조원, 고용 인원은 37만명에 달한다. 재계 서열로 따지면 20위권 순위다.
▶MBK의 설립자이자 대주주인 김병주 회장이 포브스지(誌)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부자 순위에서 국내 1위에 올랐다. 미국계 칼라일에서 일하다 2005년 독립해 펀드를 세운 지 18년 만에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 등을 제치고 최고 부자에 등극했다. 사모펀드는 보통 투자 차익의 20%를 성공 보수로 받는데, 김 회장은 대형 투자를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개인 자산을 12조원으로 불렸다. 오렌지라이프와 코웨이 투자로만 1조~2조원의 차익을 낸 것으로 알려진다.
▶과거 한국 부자는 제조업 중심의 재벌 기업 대주주 일색이었다. 2011년의 경우 1위에 이건희 삼성 회장, 2위에 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 톱 10중 9명이 재벌 오너였다. 신산업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근래 들어선 자수성가형 사업가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지난해 1위는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었고, 재작년엔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톱에 올랐다. 바이오·IT·게임 등 성장 산업 리스트에 사모펀드가 추가돼 새로운 유형의 부자가 속속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04.21 사기 대국, 대한민국
100년 전 한 사기꾼이 프랑스에서 에펠탑을 팔아먹었다. 그는 1차 대전 여파로 재정난에 빠진 파리시가 에펠탑 수리비도 대기 어려운 처지라는 뉴스를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정부 고위 관료를 사칭하며 철물상 6명을 최고급 호텔로 불렀다. “에펠탑을 고철로 팔기로 했다”면서 경매는 비밀리에 진행할 것이라고 입단속을 시켰다. 낙찰 욕심에 눈이 먼 한 명을 집중 공략, 선수금과 뇌물을 챙겨 외국으로 달아났다.

▶같은 시기 대서양 건너 미국에선 찰스 폰지라는 인물이 세상에 없던 사기 수법을 개발했다. 그는 국제 우편에 답장용으로 동봉하는 우표에 투자하면 국가 간 우표 시세 차를 활용해 3개월에 100% 수익을 낸다며 투자자를 모았다. 후발 투자자의 돈으로 앞선 투자자들에게 수익금을 지급하는 사기였다. ‘폰지 사기’는 사기 수법의 고전이 됐다.
▶'사기꾼의 전당’이 있다면 한국 사기꾼들도 수두룩하게 이름을 올릴 것이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신화 속 인물 봉이 김선달부터, 의료기 대여 사업에 투자하면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속여 4조원대 피해를 끼친 조희팔, 코인 사기로 월드 클래스급 수배자가 된 테라 창업자 권도형 등 끊이지 않는다. 최근 전세 사기 주범인 인천 건축왕 남씨도 충격적이다. 무려 2800채로 사기를 쳤다. ‘한국식 갭투자 사기’라는 새 장르를 열었다.
▶세계 각국에선 범죄 건수 1위가 ‘절도’인데, 유독 한국에선 ‘사기’가 1위를 차지한다. 매년 급증세다. 사기 범죄 건수가 2011년 22만건에서 2020년 35만건으로 10년 새 60% 늘었다. OECD 회원국 중 한국이 사기 범죄율 1위이며, 14세 이상 국민 100명당 1명꼴로 매년 사기를 당한다는 통계도 있다. 사기죄 고소가 너무 쉬워 실태가 과장됐다는 설명도 있지만, 남을 속이고 거짓말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문화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도 많다.
▶세계 각국 가치관 조사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믿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한 한국인 비율이 27%에 불과했다. 스웨덴(62%)의 절반도 안되고, 일본(39%)과도 큰 차이가 난다. ‘범죄 대가로 10억원을 받는다면 1년간 감옥에 가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한국 고교생 55%가 ‘그렇다’고 답했다. 정치인들은 대놓고 국민을 속이고, 스포츠 선수는 승패 조작까지 한다. 입시에선 스펙 속이기가 판친다. 17세기 조선을 경험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조선인들은 남을 속이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잘한 일로 여긴다”고 했다. 지금은 다른가.
04.22(토) 잡스도 빌게이츠도 못 쓰게 했다... 아이 뇌에 해로운 스마트폰

사람 많은 공간에서 떠들고 산만한 아이들을 손쉽게 조용히 시키는 방법이 스마트폰을 쥐여주는 것이다. 우는 아이 뚝 그치게 하는 현대판 곶감이다. 만 3~5세 유치원생 절반 이상이 만 두 살이 되기 전에 디지털 기기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심지어 만 한 살이 되기 전에 스마트폰을 접했다는 유치원생도 8명당 1명이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고 AI(인공지능) 등 디지털 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한 시대에 태어나는 2010~2025년생을 ‘알파 세대’라고 부른다. 유치원 가기 전부터 AI 스피커가 읽어주는 동화를 듣고 영상에 맞춰 노래와 춤도 따라 하는 ‘랜선(lan 線) 유치원’에 먼저 친숙해지는 세대다. 사람보다 기계와 소통하는데 능하고, 글보다 영상에 익숙한 이 ‘신인류’가 디지털 기기에서 습득하는 정보량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뇌과학자들은 바로 이 사실을 걱정한다. 신생아는 성인만큼이나 많은 1000억개 가까운 뇌 뉴런을 갖고 태어난다. 어른들 뇌와 다른 점은 뉴런 사이의 연결 정도다. 뉴런 사이의 연결망인 시냅스는 아기들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통해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독일 뇌과학자는 두 살배기를 ‘인간 스펀지’라고 표현했다. 걷고 움직이고 손 사용 능력이 향상되는 이 시기부터 주위 자극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면서 뇌의 정보 처리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한다. 그래서 숲이나 해변에서 하루 내내 온몸을 움직이고 오감을 자극해 능동적으로 놀게 하는 것이 뇌 발달에 최고로 좋다고 얘기한다. 이에 비해 TV나 스마트폰이 전달하는 시각 정보를 보는 것은 수동적 경험에 불과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자녀들이 14세가 되기 전까지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했다. 14세 넘어서도 저녁 식사 시간부터 잠잘 때까지 스마트폰을 못 쓰게 했다. 스티브 잡스도 생전에 “우리 아이들은 아이패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2007년 미국에서 매일 책을 읽어준 아이와 날마다 어린이 방송이나 DVD를 시청한 아이들을 비교했다. 스크린 미디어를 날마다 본 아이들의 언어 발달이 책을 읽어준 아이보다 두 배나 늦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뇌 발달이 중요한 시기에 강한 시각적 자극만 지속적으로 받으면 집중력·논리력과 관련 있는 전두엽은 덜 발달하고, 시각적 자극을 처리하는 뇌 부위만 활성화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청소년은 말할 것도 없고 유아·어린이까지 스마트폰을 지나치게 접하는 위험군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부모가 이 문제를 심각히 여겨야 한다.
04.24(월) 수단의 눈물

/일러스트=양진경
북아프리카 이집트 바로 아래 있는 수단이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찰턴 헤스턴 주연 영화 ‘하르툼’이 1967년 국내 개봉됐을 때다. 찰스 고든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지금의 수단 수도인 하르툼에서 이슬람 민족 지도자 마흐디와 맞붙었다가 모두 전사한다. 이후 오래 잊혔다가 수단에서 의료·선교 봉사를 하다가 선종한 이태석 신부를 통해 다시 주목받았다.
▶번영 조건을 갖추고도 절망의 늪에 빠진 나라가 적지 않다. 수단은 그중에서도 최악이다. 청나일강과 백나일강이 만나 나일강 본류가 형성되는 지점에 자리 잡은 하르툼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무역도시로 번영했다. 그러나 수단인들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의지가 부족했다. 19세기까지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 20세기 중반까지 영국 식민지였다.
▶하르툼은 9·11 비극을 잉태한 도시이기도 하다. 1955년 영국에서 독립한 수단을 통치한 이슬람 지도자 알투라비는 유럽의 선진 문명과 기술을 따라잡기보다는 ‘반외세 반이교도’ 탄압에 몰두했다. 오사마 빈라덴을 불러들여 테러 조직 알카에다 결성도 도왔다. 또 다른 독재자 알바시르는 수단 석유 자원이 70% 넘게 매장된 남수단 지역의 분리 독립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다르푸르에서 30만명을 학살했다. 1994년 퓰리처상 사진 부문 수상작은 굶주림으로 쓰러진 수단 소녀와, 소녀가 죽으면 잡아먹으려고 기다리며 지켜보던 독수리를 함께 찍었다. 내전으로 신음하는 수단의 비극을 고발한 사진이었다.
▶2019년 독재자 알바시르가 쿠데타로 쫓겨난 뒤 비교적 안정을 찾아가던 수단에서 이달 들어 다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알바시르를 축출한 반군에 가담했던 무장 세력 신속지원군(RSF)이 신정부군의 민병대 해산 추진에 반발해 수도 하르툼을 공격했다. 30년 내전 끝에 2011년 수단에서 독립한 남수단 사정도 다르지 않다. 독립 후 거듭된 내전으로 이웃한 소말리아와 함께 ’파탄 국가’로 분류된다.
▶한국과 수단은 식민과 전쟁의 어두운 역사를 공유한다. 수단 국화(國花) 히비스커스도 무궁화속(屬)이다. 그러나 수단인들은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새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이태석 신부는 생전에 수단에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브라스밴드를 결성해 슬픔에 빠진 아이들 손에 악기를 쥐여주고 희망을 연주하게도 했다. 그 눈물겨운 활동이 ‘울지 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심금을 울렸다. 히비스커스는 차로 우려내면 우울증에 좋다고 한다. 수단이 역사의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04.25 반도체가 어려우면 자동차가 있다
1980년대 일본 미쓰비시 엔진을 받아쓰던 현대차가 국산 엔진 개발에 나섰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전투기 ‘제로센’ 엔진을 개발했던 구보 도미오 미쓰비시 회장이 정주영 현대 회장을 찾아왔다. “엔진 개발을 포기하면 로열티를 50% 깎아주겠다”. 매년 영업이익 절반을 로열티로 내던 처지에서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정 회장은 거절했다. ‘엔진 개발 능력을 가져야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단이 오늘의 한국 자동차 산업을 만들었다.

▲전기차 아이오닉5에 기대 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현대차그룹
▶현대차가 4기통 휘발유 엔진 개발에 성공하자 구보 회장이 현대차 연구소를 찾아와 “가장 어려웠던 게 뭐냐”고 물었다. 개발팀장은 “엔진 열변형을 잡는 게 어려웠다”면서 엔진에 온도계 200여 개를 꽂아 열변형을 측정한 시제품을 보여주였다. 구보 회장은 귀국하자마자 기술진을 불러 모았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10년 내에 현대차에 역전당할 것”이라고 호통쳤다.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미쓰비시는 2005년부터 현대차에 로열티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현대차가 1986년 엑셀을 앞세워 미국 수출 시장 문을 두드렸다. 고장이 잦아 조롱거리가 됐다. 미국 TV 토크쇼에선 “출발할 때 뒤에서 밀어야 하고, 내리막길에서만 달리는 1인용 썰매가 뭔지 아세요? ‘현대’랍니다”라고 놀렸다. 영국 BBC방송은 현대차 엑센트를 ‘엑시던트(사고)’라고 조롱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10년·10만마일 보증수리’ 승부수를 던졌다. 3년 만에 대미 수출이 3배로 늘어났다.
▶미쓰비시는 망해서 닛산에 인수됐지만, 현대차는 글로벌 5대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지난해 684만대를 생산한 현대차그룹 덕에 한국 자동차 산업은 874억달러(부품 포함)를 수출해 반도체(1292억달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올 1분기 중에는 자동차가 반도체를 제치고 수출 1위(171억달러)로 올라섰다. 130억달러 흑자를 내며 반도체 대신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70년 전 미군 지프를 개조한 ‘시발자동차’로 시작한 한국 자동차 산업이 미래차 분야에선 선두 그룹이다. 1회 충전에 524㎞를 달리는 현대 아이오닉5는 ‘2022년 세계 올해의 차’, 3.5초 만에 시속 100㎞를 찍는 기아 EV6는 ‘2022년 유럽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전기차 황제 일론 머스크도 찬사를 보내고 있다. 현대차는 내연기관개발센터를 배터리개발센터로 대체하며 전기차에 올인하고 있다. 국산 엔진 개발, 10만마일 무상 수리에 이어 한국 자동차 산업사에서 제3의 변곡점으로 기록됐으면 한다.
04.26 ‘캐시미어 입은 늑대’의 명품 제국
루이 비통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명품 그룹 LVMH의 주가가 주당 902유로로 사상 최고를 기록하면서 유럽에서 처음 시가총액 5000억달러(약 668조원)를 돌파했다. 세계 시가총액 10위도 됐다. 주가가 급락한 테슬라 추월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미 개인 자산으로는 LVMH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를 제치고 올해 포브스 선정 세계 1위 부자에 등극했다.

/일러스트=박상훈
▶아르노 회장의 명품 제국은 1984년 단돈 1프랑(약 200원)에 ‘디올’의 모기업을 인수한 데서 시작했다. 디올은 프랑스의 천재적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1947년 사업가 마르셀 부삭의 투자를 받아 만든 패션 브랜드다. 1957년 디오르 사망 후에도 브랜드는 유지됐지만 1978년 모기업 부삭 그룹이 파산하면서 매물로 나왔다. 프랑스 명문 에콜 폴리테크닉을 졸업하고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아 1980년대 초 미국에서 부동산 개발업을 하던 청년 사업가 아르노가 인수에 나섰다. “뉴욕 택시 운전사가 프랑스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디올’은 알더라”며 브랜드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유럽 사치재의 잠재력을 간파한 사람은 아르노 회장이 처음은 아니다. 패션 브랜드 루이 비통과 샴페인 회사 모엣헤네시를 합병한 LVMH의 창업자는 앙리 라카미에 전 회장이다. 철강 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루이 비통의 증손녀 남편이라는 인연으로 1977년 65세에 루이 비통에 영입됐다. 라카미에 회장이 브랜드를 해외로 확장하고 증시 상장도 했다. 더 나아가 1987년 모엣헤네시와 합병해 LVMH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명품 산업에 뛰어든 서른아홉 젊은 사업가를 동업자로 끌어들인 게 화근이었다. ‘굴러온 돌’ 아르노가 지분을 확보하고 LVMH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박힌 돌’을 밀어냈다. 아르노의 별명이 ‘캐시미어를 두른 늑대’가 됐다.
▶부의 양극화, 소비의 양극화 속에 세계 사치재 산업은 20년 만에 3배 넘게 성장했다. 특히 중국 부자들이 아낌없이 지갑을 열면서 400조원 넘는 규모로 커졌다. 무려 75개 브랜드를 거느린 LVMH가 절대 강자이지만 ‘구찌’를 소유한 프랑스 케링 그룹, ‘까르티에’를 소유한 스위스 리치몬드 그룹도 주도적 기업들이다.
▶코로나 보복 소비 덕에 지난해 LVMH 매출이 사상 최고였다. 중국의 ‘제로 코로나’가 해제되면서 올해도 호황을 누린다. 한국 소비자의 명품 소비도 한몫한 듯싶다. LVMH의 이익 급증으로 주가가 펄펄 날고 있다. 명품 백 살 돈으로 명품 기업 주식에 투자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인 듯싶다.
04.27 0교시 아침운동

/일러스트=양진경
1977년 등장한 ‘국민체조’는 당시 여러 학교의 아침 풍경을 바꿨다. 필자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오전 6시 운동장에서 국민체조 음악을 크게 틀었다. 많은 학생이 모여 체조로 하루를 시작했다. 체조 후 다시 집에 가 아침 먹고 등교했다. 책가방을 메도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학교에선 체육 시간과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철봉에 매달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학생들 운동하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입시 경쟁으로 학교 체육이 쪼그라든 것이다.
▶인간은 뛰어난 던지기 선수로 태어난다. 영장류 중에서도 최고다. 침팬지의 악력은 인간의 3배를 넘지만 공 던지는 구속은 시속 30㎞에 불과하다. 온몸을 활용해 탄성을 응축했다 일시에 풀면서 멀리 던지는 능력은 오직 인간만 지녔다. 그런데 요즘 공 던지는 법도 모르는 학생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한 체육교사는 “학생들이 운동을 너무 안 해 몸 쓰는 법을 모른다”고 했다.
▶과학자들은 공부를 잘하려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운동 시간을 확보하라고 한다. 공부 잘하려면 몰입을 해야 하는데 운동이 주는 몰입 경험이 공부에도 도움 된다는 것이다. ‘몰입 전문가’로 알려진 황농문 전 서울대 교수는 저서 ‘몰입, 인생을 바꾸는 자기 혁명’에서 운동이 두뇌 활동과 직결된다고 설명한다. 산책 같은 저강도 운동은 몰입 효과를 내지 못한다. 테니스나 달리기, 샌드백 치기처럼 땀 흘리는 강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부산 지역 초·중·고교에서 올 초 시작된 ‘0교시 아침운동’ 열기가 뜨겁다고 한다. 부산 지역 600여 학교 중 벌써 300곳을 넘었다. 아침에 몸을 움직여 땀 흘린 학생들은 “체력과 공부 집중력뿐 아니라 교우관계까지 좋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학부모들도 반색한다. 밤늦도록 스마트폰이나 만지던 아이들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활기차게 등교하니 반기지 않을 수 없다.
▶몇 해 전 호주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는데 쉬는 시간에 교실에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담임 교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학생은 수업 시간 외에는 나가서 뛰어놀아야지 교실에 남아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영국 이튼스쿨 교과 과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체육 시간이다. 체육 시간 비중이 전 교과의 25%인 학교도 있다. 미국 사립 명문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세계 꼴찌 수준이다. 부산에서 시작된 ‘0교시 체육’이 변화의 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기왕이면 선진국 학교들처럼 샤워장과 탈의실도 갖춰졌으면 한다.
04.28 북한과 담배

비흡연자에게 중국은 지옥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모자라 유모차에 있는 아기에게 “귀엽다”며 담배 연기를 내뿜어 경악했다는 한국 엄마들 사연이 요즘도 맘카페에 올라온다. 중국의 축소판이 북한이다. 식당, 상점, 호텔 등 실내 흡연을 당연시한다. 워낙 만연해 담배가 신분의 척도로 쓰인다. ‘건설’ ‘7·27′ 같은 고급 담배는 당·정·군 간부쯤 돼야 태운다. 최고로 치는 건 로스만, 던힐 같은 영국 담배다.
▶김정은은 지독한 골초다. 병원, 학교, 유치원뿐 아니라 각종 총포 등 인화물질 천지인 무기고에서도 불붙은 담배를 쥔 채 지시를 내린다. 10대 때 이미 골초였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일본인은 “2000년 어느 날 정은이가 검지와 중지를 세워 입에 댄 채 나를 향해 ‘이거 하러 가자’고 해 이브생로랑 담배를 나눠 피운 적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 담배를 쥔 김정은 옆에 딸 김주애가 성냥갑을 들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4년 전 김정은이 하노이행 기차에서 잠시 내려 담배를 피울 때 김여정이 재떨이를 들고 서있던 모습을 연상시켰다. 정보 당국자는 “담배꽁초에 묻어 있는 김정은 생체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고 했다. 김정은의 흡연은 정보기관의 관심사다. 담배가 식별되면 타르·니코틴 함량을 알 수 있고, 축적된 정보 자산을 통해 하루 흡연량을 추산한다. 다른 정보들과 융합하면 건강 상태와 잔여 수명을 예측할 수 있다.
▶한때 짝퉁 양담배는 짝퉁 양주, 위조지폐, 마약, 무기류와 함께 북한의 주요 외화벌이 품목이었다. 인민군 산하 회사 등 정권 차원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다 보니 품질이 괜찮았다. 가격은 저렴해 전 세계 범죄 집단이 앞다퉈 찾았다. 현지 판매처 역할을 한 것이 북의 해외 공관이다. 많게는 매년 10억 달러를 벌었다. 이것이 핵·미사일 개발과 김정은 통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국 법무부가 던힐 담배로 유명한 BAT에 대북 제재 위반 혐의로 벌금 6억2900만달러를 부과했다고 밝혔다. BAT가 자회사를 통해 2007~2017년 북에 담배 재료를 4억2800만달러어치 판매해 북한군 소유 담배회사에 7억 달러의 이익을 안겼다는 것이다. 북은 ‘짝퉁 던힐’ 등을 만들어 해외에 판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범행 시기가 2017년까지인 것은 그해부터 전방위 대북 제재가 본격 가동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북의 돈줄은 가상화폐 탈취 등 사이버 해킹이 됐다. 이것까지 틀어막는다면 핵 폭주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04.29(토) 영어 울렁증과 작별하는 한국
한국인은 영어 울렁증이 심했다. 영어만 나오면 주눅이 들고 말문이 막힌다. 국제 행사에서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이들이 많았다. 한마디도 않고(silent) 어색하게 미소 짓다(smile) 존다고(sleep) 해서 ‘3S’라 불렸다. 국제 행사 구석 자리로 피해서 보면 일본인이 와 있었다고 한다.
/일러스트=양진경
▶역대 대통령들도 영어 기피증이 있었다.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How are you?”를 잘못 발음해 미국 대통령에게 “Who are you?”라고 묻는 결례도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영어를 쓰지 않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국제 회의 때 외국 정상들과 어울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정상들만의 의전 행사에도 수차례 불참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통역에게 “저 사람이 내 말을 못 알아들으니 빨리 통역하라”고 하는데도 웃고만 있었다.
▶프린스턴대 박사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영어에 가장 능통했다. 배재학당 학생 때 외국 손님들 앞에서 영어 웅변을 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 혼자서 영어 사전을 썼다. 미 의회에서 한국 대통령 최초로 영어로 연설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공개 연설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실전 영어로 정상들과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늦게 영어를 배워 수시로 영어 연설을 했지만 미국 청중은 잘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외국어 소질이 있던 박근혜 전 대통령도 미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했다.
▶국제 무대 영어 울렁증을 깬 건 한류 스타들이었다. BTS는 2018년 유엔 총회에 초대받아 각국 정상들 앞에서 연설했다. 유창한 영어로 “러브 마이셀프(Love myself)”를 외쳤다. 이는 블랙핑크와 에스파로 이어졌다. 배우 윤여정씨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순하면서도 쉬운 영어로 좌중을 쥐락펴락했다. 이제 우리 기업 CEO들도 국제 무대 영어 대화가 자연스럽다. 청년층은 유학을 가지 않아도 영어에 큰 문제가 없는 나라가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 연설에서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좋은 발음뿐 아니라 적절한 농담과 즉석 발언까지 담겼다. 연설 전후 미 의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셀카를 찍었다. 정상 만찬에선 바이든 대통령 아들의 애창곡 ‘아메리칸 파이’ 노래도 불렀다. 한국 대통령이 미 의회와 백악관 행사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고 당당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경제 발전의 결과일 것이다. 이젠 국제무대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던 한국인’의 시대와는 작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