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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4/ 04-03(월) ‘파친코’와 전두환 손자 - 04-28(금) 美 IRA 규제와 ‘트로이 목마’

상림은내고향 2023. 4. 29. 15:17

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4/

04-03(월) ‘파친코’와 전두환 손자

이미숙 논설위원

“야쿠자는 일본에서 가장 더러운 인간이죠, 그들은 폭력배에 범죄자라고요. 그런데 제 피가 야쿠자의 피라는 것을 알았어요. 무슨 짓을 해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죠. 차라리 제가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 거예요. 더러운 것에서 어떻게 깨끗한 것을 만들 수 있겠어요.” 재미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에서 주인공 선자의 큰아들 노아는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야쿠자 두목 고한수라는 것을 알고 이렇게 절규한다. 노아는 이후 가족과 연을 끊고 잠적, 조선인임을 숨기고 은둔의 삶을 산다.

“조선인으로 살았던 삶이 노아 가슴속에 새까맣고 묵직한 바위처럼 박혀 있었다. 정체가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작가의 지문에서 더러운 피에 대한 노아의 증오가 묻어난다. 작가가 ‘파친코’를 쓰게 된 계기는 일본에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가 전해준 한국계 일본인 소년의 자살 사건이다. 그 13세 소년은 일본 아이들로부터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가라”는 식의 따돌림을 당하다 생을 마감했다. 노아는 야쿠자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을 저주하며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인간이 되고 싶었다”는 말을 남긴다.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 씨가 뉴욕에서 마약 투약 사실을 공개한 뒤 “우리 가족의 자금력이 어마어마하다. 10억, 100억, 얼마가 있는지 모른다”며 비자금 의혹을 폭로해 화제다. 그는 지난달 28일 입국 때 자신을 ‘죄인’이라고 표현하면서 “5·18 피해자와 유가족께 사과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어 31일 광주를 방문해 “5·18은 다신 있어서는 안 될 학살이고 그 주범은 제 할아버지”라며 “가족 구성원으로서 죄를 인정한다”고 했다.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 자는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독재자’와 동의어로 통한다. 전 씨가 비자금 문제를 꺼낸 것은 가족의 재산 분쟁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국립 5·18 민주 묘지에 참배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마약 투약자라는 점 때문에 그의 진정성이 흐려진 점이 없지 않지만, 전 씨 일가 중 첫 사과이고 첫 방문이다. 더러운 피에 절망하며 목숨을 끊은 노아와 달리, 그는 할아버지의 역사적 부채를 반성하며 살겠다고 했다. 더러운 피를 씻어내겠다는 의지가 굳은 듯하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이다.

 

04-04 서문시장의 정치학

이현종 논설위원

정치인들이 대구를 가면 성지순례처럼 꼭 방문하는 곳이 서문시장이다. 전국적으로 워낙 유명한 곳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조선 중기부터 형성된 시장으로 예전엔 대구장으로 불리다가 1920년대에 대구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서남쪽에 있던 천황당지를 매립, 다시 장을 옮긴 것이 오늘날의 서문시장이다. 1923년 4월 중구 대신동에 자리 잡은 뒤 현재 점포 4000여 개, 상인 2만여 명이 모여 있다. 조선 시대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3대 장터 중의 하나로 전통시장 중에서는 전국적 규모다.

올해로 개장 100주년을 맞이하는 서문시장은 주단 포목 등 섬유 관련 제품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대구 지역에 섬유업체가 밀집돼 있기 때문이다. 한복, 액세서리, 이불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는데 요즘은 수제비와 칼국수, 칼제비, 잔치국수와 가락국수 가게가 많이 있으며, 납작 만두와 호떡 가게도 유명하다. 어릴 적 납작 만두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무래도 중장년층이 많이 찾다 보니 대구·경북(TK)지역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서문시장을 한번 방문하고 나면 입소문이 퍼지고, TK 지역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진다. 지난 2009년 12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서문시장을 찾아 수제비 ‘먹방’을 한 뒤 시장 상인에게 용돈 3만 원을 건네받고 “꼭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2015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후반기 현장 행보로 서문시장에서 한복을 맞춰 입었는데 상인들의 환영 열기가 어마어마했다. 특히,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 정치인들의 방문이 급격히 늘었다. 그러나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9년 3월 서문시장 대신 칠성시장을 찾았다가 역풍을 맞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서문시장 사랑은 남달랐다. 지난해 대선 전후로 세 차례 방문했으며, 특히 투표 바로 전날인 3월 8일에도 방문했다. 그리고 당선 후 4월 12일에도 당선사례차 재방문했다. 또 김건희 여사도 방문했다. 윤 대통령은 1일 서문시장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지난 대선 과정에서 여러 차례 서문시장에서 격려와 응원을 힘껏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특정 시장을 너무 자주 방문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젠 시장 방문보다 장사 잘되게 하는 정치가 급선무 아닐까.

 

04-05 “한국만 때리자”는 일본

이철호 논설고문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나 수산물 수입 금지에 “한 놈만 패자”는 식으로 죽자 살자 한국에 매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검역체계가 엄격하고 환경 기준도 까다롭다. “한국만 잡으면 중국·러시아·대만은 쉽게 넘을 수 있다”는 게 일본의 계산이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는 돈 때문이다. 지하에 묻으면 2431억 엔이 드는 반면, 해양 방류는 34억 엔에 불과하다. 양국은 단어부터 다르다. 한국은 오염수라 부르고, 일본은 ‘처리수’라 고집한다. 다핵종제거설비(ALPS)를 거쳐 위험도를 기준치 이하로 낮췄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국제해양법재판소에 제소하라”고 정부를 다그칠 필요는 없다. 국제법·환경 단체들이 남태평양 한 국가를 설득해 곧 제소할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미국도 일본 입장을 지지하고 있어, 혹 일본에 면죄부를 줄지 모른다.

우리가 칼자루를 쥔 것은 일본 수산물 수입 금지다. 2019년 젊은 사무관들이 똘똘 뭉쳐 세계무역기구(WTO) 소송에서 역전승했기 때문이다. 1심은 “일본 수산물이 위험하지 않다”고 했으나, 최종심인 2심에선 “구제역 발생 시 해당 지역 가축을 살처분하고 유통을 금지하듯, 원전 사고가 난 위험 지역의 수산물 수입 금지는 무역 차별이 아니다”는 한국 측 논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한국이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영원히 수입을 금지시킬 수 있다.

대통령실이 한·일정상회담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늦게나마 오염수 방류에 문재인 정부의 3대 원칙(과학적 근거, 투명한 정보 공유, 국제 검증에 한국 전문가 참여)을 재확인하고, “후쿠시마 수산물이 국내로 들어올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분리 대응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다만, “독도는 우리 땅”이라 선언하는 건 촌스러운 일이다. 뜬금없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워싱턴은 미국 땅”이라 외치는 거나 다름없다. 국수주의 세력이 툭하면 “독도에 경찰 대신 국군을 보내자”고 우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독도를 분쟁지역화하려는 일본 우익의 노림수에 걸려든다. 오히려 독도는 경찰만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평화로운 우리 땅으로 공식화하는 게 훨씬 세련된 외교다.

 

04-06 ‘김정은 계몽군주’ 사기극

김세동 논설위원

정부가 지난달 30일 처음으로 공개한 북한의 인권 침해 사례는 글로 옮기기에도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2016년 제정된 북한인권법에 따라 2018년부터 매년 탈북민을 대면 인터뷰한 북한인권보고서를 만들었지만, 문재인 정부 내내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통일부가 법 제정 7년 만에 처음 공개한, 탈북민 508명의 문답서를 토대로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임신 6개월 여성이 춤을 추다가 손가락으로 김일성 초상화를 가리켰다는 이유로 공개 처형됐고, 중국에서 강제 송환돼 온 여성이 출산한 아기를 ‘중국 아이’라고 계호원이 살해하는 처참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 영상물을 시청하거나 유포했다고, 성경을 소지했다고, 한국 화장품·하이힐을 팔았다고 공개 총살되는 경우도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로 한 생체실험, 장애인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 시행 등 인권 참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데,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은 북한을 감싸기에 바빴다. 2020년 9월 22일 표류하다 발견된 우리나라 해양수산부 공무원을 북한군이 총으로 쏴 죽이고 기름을 뿌려 불태운 만행을 자행한 사흘 뒤 김정은이 ‘미안하다’고 했다고 문 정권의 어용지식인을 자처한 유시민은 “계몽군주 같다”고 했다.

논란이 되자 유시민은 “계몽군주들은 독재자지만 긍정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며 “김정은을 칭송한 게 아니라, 북한 개혁을 고무·선동하기 위해 계몽군주라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따져보면 칭송의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9월 25일 청와대가 공개한 북한의 대남 통지문 끝부분에 ‘김정은 동지는…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하라고 하시었다’는 내용이 나오자 한 토론회에서 유시민은 “우리가 바라던 것이 일정 부분 진전됐다는 점에서 희소식”이라며 “(김 위원장이) 계몽군주 같다”고 평가했다. 함께 출연한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통 큰 측면이 있다”고 추어올렸다.

계몽군주는 18세기 유럽 절대주의 국가 성립 시기에 봉건 귀족세력의 힘을 억누르고 일정한 근대화 개혁을 시도한 전제군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가 대표적이다.

 

04-07(금) 김수근의 ‘고석공간’

김종호 논설고문

“나의 집은 자궁(子宮)이다. 자궁의 집은 어머니다. 어머니의 집은 가옥이며, 집의 집은 환경이다.” 현대 건축의 거장(巨匠) 김수근(1931∼1986)이 197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타임은 그를 ‘서울의 로렌초 메디치’라고 소개했다. 그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로, 국가등록문화재인 서울 종로구 원서동 ‘옛 공간 사옥’도 있다. 현재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Arario Museum in Space)’로 변모한 아름다운 벽돌 건물이다. 김수근이 설립한 건축설계회사 ‘공간’ 사옥에 그치지 않았다. 그 안에 소규모 공연장 ‘공간사랑’도 만들어 ‘김덕수의 사물놀이’ ‘공옥진의 곱사춤’ 등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했다.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詩)”라던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아무리 급해도 벽돌은 한꺼번에 쌓지 못한다. 한 장 한 장 단정히 쌓지 않으면, 무너지거나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벽돌이 지닌 조소성(彫塑性)은 무한히 인간화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를 두고 흔히 ‘테두리는 있되 모든 게 통해야 한다며 건축과 자연의 공생을 추구한 건축가’ ‘인간과 공간의 소통에 주목한 현대 문예 부흥의 선구자’ 등으로도 표현한다. 그가 설계한 벽돌 건물이 즐비한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일대는 ‘살아 있는 김수근 갤러리’로도 불린다.

암 판정을 받은 김수근은 ‘세상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라며, 누이 김순자(1928∼2021) 궁중의상디자이너와 자형 박고석(1917∼2002) 화백 부부의 살림집을 대학로와 가까운 명륜동에 지었다. ‘고석공간(古石空間)’이다. 그 문패 아래에 ‘1983년 11월 김수근 설계 작품’이라고 밝힌 벽돌집으로, 그의 마지막 개인 주택 건축이다. 김수근 건축의 특징이 농축된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고령의 김 여사가 타계 1년 전에 ‘심성 면접’까지 거쳐 팔았다. “박고석·김수근 두 분의 자취를 최대한 간직한 ‘집’으로 사용하려 한다”는 언론인 황정욱 씨와 부인 전정아 씨의 문화·예술 안목과 순박한 마음을 흐뭇해하며 넘겼다. 새 주인은 벽에 걸린 박 화백의 풍경화 ‘울산바위’ 등도 사서 그대로 걸어뒀다. 올해가 ‘고석공간’ 건축 40주년이다. 앞으로도 박고석·김순자·김수근 예술의 향기가 감도는 멋진 집으로 오래 남기를 바란다.

 

04-10(월) K-방산의 진격

문희수 논설위원

한국 방위산업이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지난해 무기 수출이 170억 달러로 사상 최대였고, 수주 잔고는 100조 원을 돌파했다. 주요 방산업체들이 5∼6년 치 일감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올해 전망도 밝다. 현대로템은 폴란드에 K2전차 1차 180대에 이어 2차 820대 수출 계약을 진행 중이고, 페루와는 차륜형장갑차 수출 계약을 앞두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말레이시아와 FA-50 경전투기 46대 수출을 협상 중이다. 중국의 위협이 커진 호주에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보병전투장갑차(레드백) 수출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K-방산의 도약이 놀랍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K-방산의 성능과 가격 경쟁력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무기의 성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폴란드·헝가리·불가리아 등 동유럽에서 가성비가 좋은 한국산에 큰 관심을 보인다. 철저한 납기 준수도 신뢰도를 높인다. 동남아시아에서도 러시아 무기가 빠져나간 공백을 메울 대안으로 K-방산이 유력하게 급부상했다고 한다. 중국이 경쟁국이지만 정작 성과는 뒷걸음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지난달 23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이 최대 승자가 됐다”고 평가하는 정도다.

방산 수출은 국가 정상의 비즈니스다. 국가 안보가 걸린 만큼 정상들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폴란드의 K2 전차 수입에도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개최가 기폭제가 됐다. 아랍에미리트(UAE)도 정상회담 이후 K-방산에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윤 정부가 방산을 새 성장동력으로 삼고, 지원을 강화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국가안보실 주관으로 오는 21일부터 민관협의체를 가동키로 한 것도 바람직하다.

K-방산은 그동안 흑역사만 부각 됐다. 1993년 율곡사업 비리부터 1996년 린다 김 로비 사건, 최근 2014년 통영함 비리까지 좌우 정권 구분 없이 추문이 이어졌다. 50년 전엔 소총도 못 만들던 K-방산이 시련을 거쳐 이룬 대반전이기에 더욱 빛난다. 세계적으로 국가안보가 중요해져 무기시장 규모가 더 커질 전망이다. 그렇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다. 유럽 등에선 경쟁국들의 견제도 한층 심해지는 양상이다.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리지 않도록 정부와 업계 모두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04-11 붉은 망토 여성시위대

이미숙 논설위원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는 원리주의 조직인 길리어드가 장악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여성 잔혹사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길리어드 공화국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 젊은 여성들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아이를 낳도록 강요하는 전체주의 사회다. 영미권 페미니즘 문학의 거장인 애트우드의 이 작품은 1985년 발표된 후 영화 및 오페라,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비견된다는 평도 받았다.

최근 이스라엘의 사법부 무력화 반대 시위 때 ‘시녀 이야기’에 나오는 붉은 의상 차림의 여성들이 거리에 등장해 주목을 받았다. 붉은 망토에 흰 모자를 쓴 여성들은 지난달 11일 텔아비브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벤야민 네타냐후 총리가 추진하는 사법 무력화가 완성될 경우, 이스라엘은 길리어드가 지배하던 전체주의 국가가 될 것임을 시사하는 시위다.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네타냐후 총리는 사법 개혁안 추진 잠정 중단 선언을 해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법관선정위원회에 정부 인사를 과반수로 늘리고,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리더라도 의회가 단순 과반수로 뒤집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언제 다시 강행될지 모른다. 네타냐후 총리는 리쿠드당이 시오니즘 및 정통파 유대교 정당과 연합한 정권을 이끌고 있는데 정통파 유대인들은 길리어드 뺨치는 원리주의 정책을 내놓고 있다.

네타냐후 극우 정권이 끝내 사법부를 무력화한다면 이스라엘은 중동의 대표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헝가리식 권위주의 국가로 퇴행할 것이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다수당 지위를 악용해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 문재인 정부 때에도 사법부 무력화 작업이 자행됐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출신 법관을 배치해 사법부를 ‘코드화’했고, 검찰 개혁이란 미명하에 검수완박을 밀어붙이며 권력층에 대한 수사를 어렵게 했다. 대선에서 0.73%포인트 차로 문 정권 재생산을 막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에서도 길리어드식 사회로 가는 길이 열렸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 여성들이 붉은 망토 시위에 나선 것처럼, 한국에서도 붉은 옷을 입은 시위대가 등장했을지 모른다.

 

04-12 도청(盜聽)의 세계사

이철호 논설고문

‘소리 나지 않는 고속 착공기로 벽을 뚫고 도청장치를 심는다. 순식간에 응고하는 도벽재(塗壁材)로 구멍을 막고 주변 색과 똑같은 페인트칠을 하면 감쪽같다. 옆방은 물론 아래·윗방까지 엿들을 수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출신 빅터 마르체티의 ‘CIA와 정보 숭배’에 나오는 내용이다.

1976년 박동선을 시켜 돈으로 미 의회 의원들을 구워삶았다는 코리아 게이트. 미 CIA가 청와대에 ‘고성능 지향성 전파’를 반사시켜 유리창의 떨림으로 도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도청 방지 필름 개발을 지시하고 청와대 창문을 3중·4중으로 코팅했다. 그래도 못 미더워 중요한 밀담은 산책을 하며 나누거나 필담으로 대신했다.

모스크바의 미국 대사관은 착공 후 무려 15년 만인 2000년에 완공됐다. 콘크리트나 벽돌 사이에서 온갖 도청장치가 발견돼 짓다가 허물기를 반복하며 진저리를 쳤다. 결국, 3000억 원을 들여 모래와 자갈, 건설 인부들까지 전부 미국에서 공수해 갔다. 물만 러시아산이었다. 제임스 콜린스 미국 대사는 “지금까지 건축물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건물”이라 혀를 내둘렀다.

2013년에는 CIA에 필적하는 국가안보국(NSA)이 전 세계 국가원수들까지 무차별로 도청했다는 폭로가 터졌다. 스노든 사건이었다. 놀랍게도 한국은 중국·러시아·북한·이란·이스라엘 등과 ‘절대적으로 중요한 초점 정보 수집 대상국’으로 분류돼 있었다. NSA는 구글·페이스북·유튜브·애플 등의 서버 컴퓨터에 마음대로 접속하는 ‘프리즘’ 시스템도 가동 중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슈퍼컴퓨터와 인공위성까지 동원해 온갖 신호정보(SIGINT)를 수집·분석하는 최첨단 ‘스테이트룸 작전(Operation Stateroom)’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국 대통령실 도청 폭로에 이어 한국산 포탄 33만 발 운송 일정표가 공개됐다. 도청도 문제지만 2급 비밀까지 유출된 건 더 심각하다. 아무리 혈맹이라도 금선이 있다. 대통령실의 “상당수가 위조됐다” “미국이 악의를 갖고 했다는 정황은 없다”는 반응은 너무 성급하다. ‘100쪽 도청 폭탄’의 유탄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적어도 동맹국에 대한 확실한 설명·사과·재발 방지는 요구할 필요가 있다.

 

04-13 문재인·조국 가족 비즈니스

이현종 논설위원

문재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일상을 그린 영화 ‘문재인입니다’가 오는 29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 지난 2017년 이 영화제에서 상영됐던 ‘노무현입니다’의 이창재 감독이 만들었다. 지난해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그린 ‘그대는 조국’도 이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극장 개봉을 위한 텀블벅 후원도 시작했다. 지난 10일 시작돼 19일까지 진행되는 텀블벅 펀딩을 통해 영화 개봉을 응원하는 후원자들에게는 특별 시사회, DVD, 포토북 등이 제공된다. 이틀 만인 11일 기준 1억 원 넘게 모였다.

올해 초 문 전 대통령의 딸 다혜 씨가 추진한 ‘달력 프로젝트’는 1억 원 이상을 모았다. 문 전 대통령이 반려견들과 찍은 사진을 담은 것인데 목표액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얻었다. 문 전 대통령은 8억 원을 들여 양산 평산마을 자택 인근에 책방을 만들어 각종 북 콘서트, 강연 등을 열 계획이다. 지지자들을 상대로 유료 강의를 한다면 꽤 수입이 짭짤할 듯하다.

조 전 장관 가족도 ‘펀딩’엔 귀재다.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을 확정받고 수감 중인 부인 정경심 교수가 지난 2년간 받은 영치금이 2억4000만 원이나 된다고 한다. 전국 교도소 영치금 1위다. 원칙상 재소자는 300만 원 이상 영치금을 소지할 수 없기에 나머지 돈은 자동으로 정 씨의 계좌로 들어간다. 서울구치소 교도관들이 정 씨의 영치금이 월 1000만 원을 넘자 박탈감을 많이 호소했다는 후문이다. 조 전 장관도 자신이 쓴 ‘법 고전 산책’ 북 콘서트를 전국을 돌면서 열고 있고, 딸 조민 씨도 함께하고 있다. 아내의 치료비·변호사비가 걱정된다고 한다.

조민 씨는 거의 매일 식당, 카페, 관광지 등을 다니며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는 등 ‘셀럽’이 됐다. 어머니는 몸이 아파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는데 아버지와 딸은 전국을 돌며 책도 팔고 맛있는 것도 먹는 모습을 알리는 것을 보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지지자들을 상대로 한 ‘진영 비즈니스’는 좌파를 따라가기 어렵다. “잊혀지고 싶다”던 문 전 대통령은 퇴임 1년도 안 돼 활동을 재개하고 있고, 조국 가족이 벌이는 행태도 낯뜨겁다. 영화 포스터엔 문 전 대통령이 반려견 토리에게 다정히 먹이를 주는 장면이 있는데, 얼마 전 파양돼 광주의 한 동물원에 있는 풍산개 곰이와 송강이는 어떤 기분일까.

 

04-14(금) 매운맛 라면과 박정희

박민 논설위원

1961년 어느 날, 훗날 삼양식품 회장이 된 고 전중윤 씨가 서울 태평로 중앙정보부장실로 고 김종필 씨를 찾았다. 그는 일본에서 시판 중인 인스턴트 라면을 꺼내 보이며 “라면은 값싼 영양식입니다. 라면을 들여오면 식량 부족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고 말한 뒤, 라면 제조 설비 수입 자금 5만 달러의 조달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당시 큰돈인 5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일본에 생선을 수출해 달러를 벌어들인 농림부뿐이었다. 김종필이 지원을 요청했지만, 농림부 장관은 오히려 전 회장을 불러 “왜 이런 시원찮은 일로 정보부장을 괴롭혔냐”며 기합을 줬다고 한다. 한참 설득 끝에 겨우 돈을 빌린 전 회장은 일본 묘조(明星)식품에서 기계와 기술을 도입해 1963년 9월 5일 한국 최초의 라면을 출시했다. ‘김종필 증언록’에 수록된 라면 탄생의 뒷이야기다.

김종필은 당시 10원에 출시된 삼양라면이 불티나게 팔렸고 농림부에서 빌린 5만 달러도 금세 갚았다고 회고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최초의 삼양라면은 일본식 치킨 라면이라 약간 느끼한 맛이 나 별로 인기가 없었다. 포기할 수 없었던 김 회장은 우리 입맛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수프 실험실을 만들었고, 종로에서 공개 시식회를 가졌다. 청와대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먹는 행사까지 열었다. 이때 박 대통령이 “한국인은 맵고 짭짤한 맛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언급했는데, 이후 매운맛이 첨가됐다. 더구나 당시 서민들의 생활 수준에서 라면값은 싼 편이 아니었다. 짜장면이 20원, 김치찌개가 30원으로 라면은 고가의 먹거리였다. 콜라처럼 손님이 와야 대접하는 음식이었고 1970년대 말까지도 국수가 훨씬 저렴했다.

그렇게 탄생한 한국 라면을 일본의 최대 라면기업이 모방하는 역전극이 벌어졌다. 삼양식품이 2012년 출시했고, BTS 멤버 지민 등의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불닭볶음면’이 주인공. 닛신푸드는 분홍색의 유사한 포장에 한글로 ‘볶음면’이라고 표기했다. 지난해 국내 4대 라면 제조사의 해외 판매액은 총 2조3215억 원. 이는 만두(1조 원)와 김(9000억 원)의 2배가 넘고 K-푸드 대표로 꼽히는 김치(2000억 원)의 10배가 넘는다. 한국 라면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04-17(월) 임도(林道)의 재발견

김세동 논설위원

지난달 8일 경남 합천에서 발생한 산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급속히 확산했다. 헬기가 뜨지 못해 진화가 더 어려워지는 야간에 임도(산림도로)를 통해 산불진화차를 올려보내 밤샘 진화 작업을 벌인 끝에 다음 날 오전 5시에 진화율을 92%까지 끌어올려 조기 진화할 수 있었다. 반면, 사흘 뒤 하동 지리산 국립공원 자락에서 산불이 발생했을 때는 임도가 없어 일몰 뒤 다음 날 아침 헬기를 띄울 수 있을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지리산 국립공원이 대거 소실됐을 수도 있었다.

지난주 강릉 산불 사태에서 보듯 초속 20m 이상의 강풍이 불거나 일몰 이후에는 위험해서 헬기를 띄우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선 산불진화차가 진입할 수 있는 임도 유무에 따라 산불 진화 속도가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산림청은 이런 임도를 대폭 설치해 나가기로 했다.

우리나라 산림 629만㏊에 설치된 임도는 지난해 말 2만4929㎞에 이르러, 임도 밀도는 1㏊당 3.97m다. 독일(54m/㏊)의 14분의 1, 일본(23.5m/㏊)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산림청의 목표가 달성돼 오는 2027년 임도가 3만6907㎞로 늘어도 임도 밀도는 5.87m/㏊로, 산림선진국에 한참 못 미친다. 임도를 더 늘려야 하지만 기획재정부와 국립공원공단 등에서는 시큰둥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단체들이 산림 훼손을 이유로 임도 확충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적정한 간벌을 통해 숲과 나무가 건강해지는 것처럼 적절한 임도 설치도 산림 보호에 필수적이다. 임도가 산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자연 방화선도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발생해 9박 10일 동안 동해안 일대 산림을 잿더미로 만든 울진 산불은 200∼500년 된 금강소나무 8만5000여 그루가 모여 있는 소광리의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앞에서 멈췄다. 보호구역에서 1.4㎞ 떨어진 곳에 직전 해인 2021년에 개설한 임도를 “낙동강 방어선”(남성현 산림청장) 삼아 사투를 벌여 불이 금강송 군락지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임도는 산림의 효율적 이용과 관리를 위해서 중요하다. 임업 인구가 줄어들수록 더욱 필요하다. 한국은 산림녹화의 기적을 이룬 나라임을 잊어서도 안 된다.

 

04-18 작곡가 손목인

김종호 논설고문

‘부평(浮萍)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他鄕)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한국 대중가요 1세대 작곡가 손목인(1913∼1999)이 1934년 발표할 때 제목은 ‘타향’이던 명곡 ‘타향살이’ 가사 일부다. 그 음반은 1개월 만에 5만 장 넘게 팔렸다. 당시 기준으로는 밀리언셀러와 다름없다.

그는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내가 유학 중이던 일본에서 여름방학을 틈타 일시 귀국했을 때다. OK레코드 사장은 그 회사 문예부장 김능인이 쓴 가사를 들고 와서 곡을 붙여보지 않겠냐고 했다. 내가 대중음악 전공이 아니었지만 겁낼 이유는 없었다. 애수와 한(恨)에 젖은 내 처지와 비슷한 가사를 음미하며 닷새 만에 작곡을 완성했다.” 부를 가수로는 고복수가 선정됐다.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국내 상황이어서, 일본에 가서 녹음한 뒤 감격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노래를 계기로 본격적인 대중가요의 길로 들어선 그의 본명은 손득렬이다. 작곡가, 악단 지휘자, 아코디언 연주자, 재즈가수 등으로 활동하면서 양상포·손안드레·임원 등 다양한 예명을 사용했다. 경남 진주 출신인 그는 세 살 때 부친이 운영하던 한의원(韓醫院)을 서울로 옮기면서, 초·중·고를 서울에서 다녔다.

그가 작곡해 직접 불러서 1937년 내놓은 노래로, ‘등댓불 깜빡거리는 이 한밤도 깊어서/ 무정한 기적 소리 이 내 맘을 울린다’ 하는 김해운 작사 ‘물새 우는 밤’도 있다. 목포 출신인 문일석이 작사하고, 목포가 낳은 걸출한 가수 이난영이 부른 1935년 명곡 ‘목포의 눈물’도 손목인 작곡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데/ 부두에 새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하고 시작한다. 그는 일본 방문 중에 숙소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타계하기까지 평생에 걸쳐 1000곡 넘게 남겼다. ‘휘파람’ ‘청노새 탄식’ ‘짝사랑’ ‘바다의 교향시’ ‘북경의 달밤’ ‘아내의 노래’ ‘슈사인 보이’ ‘모녀 기타’ ‘마도로스 박’ ‘아빠의 청춘’ 등이다. 일본의 유명 가수들이 부른 노래도 적지 않다. 오는 23일이 그의 탄생 110주년인 날이다.

 

04-19 달 뒷면 신비 푸는 다누리호

문희수 논설위원

달은 이제 인류에게 친숙해졌지만, 그 뒷면은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이었다. 달은 자전 속도와 지구를 도는 공전 속도가 같아 지구에서는 앞면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여러 차례 우주선을 보냈지만, 한동안 기술 한계로 달의 뒷면으로 돌아가기 어려워 사진 촬영도 제대로 못 했다.

이런 이유로 달의 뒷면을 놓고 음모론, 괴담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미확인비행물체(UFO) 신봉자 사이에선 달의 뒷면에 우주인 기지가 있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1969년 7월 우주비행사가 최초로 달을 밟았던 아폴로 11호도 여태 음모론 대상이다. 실제 달에 간 게 아니라 지구의 사막에서 연출한 것이라는 등의 의심이 끊이지 않는다. 달에 내린 비행사와 함께 찍힌 성조기 사진을 놓고도 달에는 대기가 없어 바람이 안 부는데 어떻게 펄럭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돼 나사(NASA)가 생동감 있게 보이려고 꿰맨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던 정도였다.

달의 궤도를 도는 다누리호가 최근 달의 뒷면을 촬영해 사진을 전송해왔다. 달을 1000번이나 돈 끝에 이룬 성과여서 더욱 뜻깊다. 세 곳을 촬영했는데, 공개된 사진에는 대형 운석이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엄청난 크기의 분화구(크레이터), 계곡 등의 지형이 생생하게 보인다. 반경이 130∼220㎞나 된다고 한다. 달이 이만한 운석을 받아내지 않았다면 지구가 대형 재해를 당했을 것이다. 달은 역시 둘도 없는 선물이다. 다누리호가 촬영한 달의 뒷면, 남극 등의 영상과 달 궤도를 돌며 실시한 각종 실험자료는 내년에 발사 예정인 미국의 달 탐사선(아르테미스)에 활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은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10국 중 하나다. 한국 우주과학기술의 엄청난 도약이 뿌듯하다.

미국은 아르테미스 프로젝트를 통해 달 착륙을 거쳐 장차 화성 유인 탐사도 계획하고 있다. 이미 공개된 화성 사진들에는 과거 물이 있었던 흔적과 함께 ‘화성의 얼굴’로 불리는 형상, 지구의 피라미드와 흡사한 형상 등이 기묘해 인공 구조물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여지없이 제기된다. 화성 탐사선이 가면 온갖 의문이 풀릴 것이다. 미스터리 한 심(深)우주의 신비가 하나둘씩 벗겨지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미신과 공포가 사라진다.

 

04-20 새빨간 거짓말, 통계

박민 논설위원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일, 민주당 후보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선거 2주 전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 후보에게 5%포인트 이상 뒤지고 있었고, 마지막 카드로 추진했던 전쟁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부통령 후보 영입마저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당시 한 시사잡지는 듀이를 ‘차기 대통령’이라 했고, 정치평론가들은 듀이 행정부의 조각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 트루먼이 듀이를 선거인단 수에서 303 대 189로 눌렀다. 1952년 선거에서도 모든 여론조사가 민주당 후보인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대승을 예측했지만, 결과는 공화당 후보인 아이젠하워가 442 대 89로 스티븐슨을 눌렀다.

2년 후인 1954년 대럴 허프의 ‘새빨간 거짓말, 통계’가 출간된다. 빌 게이츠가 TED 강연을 통해 1950년 이후 출간된 책 중 최고의 책으로 두 차례나 추천한 책이다. 허프는 서문에서 “이 책은 통계를 써서 어떻게 사람을 속일 수 있는지에 관한 입문서와 같다”고 자평했다. 책의 첫 장은 ‘언제나 의심스러운 여론조사’다. 핵심은 모집단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왜곡된 표본이다. ‘1924년도 예일대 졸업생의 연간 평균소득이 2만5111달러’라는 조사 결과가 사례로 제시된다. 졸업생 모두를 추적할 수 없어 표본을 구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주소 불명이나 답변을 거부한 졸업생은 제외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성공하지 못했거나 연봉을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 성공한 졸업생들은 쉽게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표본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표본 숫자를 지나치게 적게 하거나 질문자를 특정 성향으로 구성해도 심각한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8일 근로시간 유연화 정책 관련 여론조사에 대해 “표본 설정 자체가 과학적이고 대표성이 있어야 한다”며 “질문 내용과 방식도 과학적이고 공정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들쭉날쭉한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꼭 점검해야 할 부분들이다. 다만, 정부 정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의 기저에는 부실한 홍보에 따른 오해나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04-21(금) 유대인 구한 美 쉰들러

이미숙 논설위원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대서양을 건너는 사람들(Transatlantic)’ 7부작 드라마에는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과 철학자 발터 베냐민, 정치학자 해나 아렌트 등 나치 독일의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미국 저널리스트 배리언 프라이(1907∼1967)의 도움으로 미국 망명을 시도하는데, 베냐민은 스페인 국경 마을에서 숨을 거두지만 샤갈과 아렌트 등은 미국행에 성공한다. 1935년부터 베를린 특파원을 지내며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을 지켜본 프라이는 1940년 뉴욕에서 긴급구조위원회(ERC)를 결성한 뒤 추방 위기에 처한 유대인 200명의 명단을 갖고 마르세유로 건너간다.

‘대서양을 건너는 사람들’에서는 프라이가 아렌트의 비자를 받아주기 위해 애쓰는 장면(5부)과 샤갈 부부를 자동차에 태워 프랑스 국경을 넘는 장면(7부)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렇게 그가 구출해낸 유대인은 2000명이 넘는다. 그가 ‘미국의 쉰들러’로 불린 이유다. ERC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33년 창립한 국제구호협회(IRA)와 합병되며 국제구조위원회(IRC)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세계 난민을 위한 수호천사 역할은 지속하고 있다. 이 작품 엔딩 크레디트에는 ‘IRC가 구해준 2000여 명이 미국인의 생각을 바꿔놓았고, 이 유럽인들이 20세기 미국을 변화시켰다’는 문구가 나온다. 프라이가 도덕적 소명감으로 했던 유대인 구출이 미국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것이다. IRC 출범 90년을 기념해 제작된 이 작품은 난민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환기시켜 준다.

앞서 19세기 미국에서는 흑인 노예를 구출하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Underground Railroad) 운동이 전개됐다. ‘지하철도’로 번역되는 이 명칭은 노예제를 시행하던 미 남부 주에서 은밀히 노예들을 이동시킨다는 은유적인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퀘이커 신자와 백인 지식인 등 노예제 반대론자들은 이 운동을 통해 3만∼10만 명의 흑인 노예에게 자유를 선사했다. 북한에는 국군포로와 납북자가 수백 명 생존해 있고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이들은 2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탈북 후 중국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이들도 수만 명에 이른다. 이들이 서해를 건너올 수 있도록 하는 한국의 쉰들러, 한반도판 지하철도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04-23(월) 막걸리에서 돈 봉투까지

이현종 논설위원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랄 때 선거 때만 되면 마을 어르신들의 얼굴이 늘 불콰했다. 총선에 출마한 후보자 측이 막걸리를 한 상씩 공짜로 대접했기 때문이다. 또, 부녀자들은 후보자 측이 준 흰색 새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으레 선거 때가 되면 막걸리와 고무신이 뿌려졌다. 유권자들이 “이번엔 뭐 없나”라며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고무신이 30∼50원 할 때인데 검은색보다 흰 고무신이 조금 더 고급이었다.

1960∼70년대엔 막걸리 고무신과 함께 밀가루와 우유 가루도 선거 때 뿌려졌다. 후보자 측의 동 책임자가 주로 밤에 집집이 들고 다니며 나눠줬고, 이를 이용해 밤에 부침개를 해먹던 기억도 생생하다. 끼니 걱정을 했던 농민과 도시 영세민들에게 밀가루 한 포대는 소중한 식량이었다. 이것 외에도 현역 국회의원들은 연초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달력을 돌렸고 집집이 벽에 붙여 놓기도 했다. 지금도 그 국회의원의 이름이 기억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에는 막걸리 대신 소주가 인기를 끌었고, 후보자나 의원 이름이 적힌 보자기도 많이 돌아다녔다. 80년대에는 비누, 수건, 수저, 플라스틱 그릇, 찻잔 등 다양한 물건이 선거 때 뿌려졌지만, 그래도 돈 봉투가 최고였다. 봄·가을이면 꽃 구경·단풍 구경을 위한 여행도 이뤄지면서 향응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그러나 1987년 개헌 이후 선거법이 강화되고, 여야의 감시가 치열해지면서 금권 선거는 크게 줄어들었다. 검찰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하는 사례도 많이 나왔다. 금품 대신에 의원들이 집중한 것은 지역구의 대형 건설 프로젝트다. 지금도 국회 예산심의 막바지 단계에 ‘쪽지 예산’이 횡행한다. 정권 차원에서 재난지원금이 전 국민에게 뿌려져 집권 여당에 유리한 여론이 조성된다.

한때 자취를 감췄던 돈 봉투가 2021년 5월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뿌려진 것으로 드러나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국민과 언론의 감시 사각지대인 당내 선거에서 여전히 돈 봉투가 돌아다닌 것이다. 봉투 하나당 많게는 600만 원에서 50만 원까지 등급별로 나뉘었다. 그동안 암암리에 이뤄져 온 것이 고스란히 녹음되면서 들통이 났다. 선거 민주주의를 30년 이상 퇴보시킨 반민주 행태다.

 

04-25 수단 엑소더스

이철호 논설고문

수단은 아프리카의 젖줄인 청나일과 백나일강이 만나고 홍해에 접해 있어 한때 손꼽히는 곡창지대였다. 지금은 오랜 내전으로 관개 시설이 망가져 식량 대부분을 수입하는 굶주림의 나라가 됐다. 수단은 1956년 독립 이후 1972∼1983년을 빼고는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주로 북부 아랍계의 이슬람 원리주의와 이에 맞선 남부 아프리카계 무장세력의 유혈 분리 투쟁이었다. 남수단에서 발견된 유전도 기름을 부었다.

1·2차 내전 기간 동안 200여만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고, 4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남수단은 2011년에야 분리 독립에 성공했다. 가장 비극적 장면은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수단의 굶주린 소녀’였다. 그 뒤에 아이가 죽으면 뜯어먹으려고 기다리는 독수리가 끔찍함을 더했다. 사진 기자 케빈 카터는 소녀를 먼저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과 어려운 생계에 시달리다 3개월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번 내전은 라이벌 군벌 간의 추악한 권력 투쟁이 원인이다. 압둘팟타흐 알부르한 장군은 정규군의 수장이자 사실상 대통령이고, 그 반대편엔 부통령인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의 신속지원군(RSF)이 맞서고 있다. 다갈로는 30년 독재자 오마르 알바시르 전 대통령의 비호 아래 잔자위드 민병대로 다르푸르 학살을 주도한 잔혹한 인물이다. 지금 RSF는 10만 병력에다 주요 금광을 차지하고 있다. 다갈로는 2019년 알부르한에게 붙어 알바시르 축출 쿠데타에 가세했으나, 3년 만에 다시 알부르한과 골육상쟁을 벌이고 있다. RSF는 주로 수도 하르툼에 포진돼 있어 시가전이 치열하다.

내전은 전방과 후방이 구분되지 않아 더 위험하다. 민족·이념·종교 갈등으로 적대감이 극도로 증폭돼 민간인 학살과 무차별 약탈 등 잔혹 행위가 난무한다. 나라 전체가 무정부 상태여서 국제사회가 손 쓰기도 어렵다. 주요국들이 긴급 철수 작전에 돌입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국은 치누크 헬기와 특수부대 100여 명을 투입했고 영국·프랑스도 공수부대 등을 보냈다. 우리도 ‘프로미스(약속)’란 작전명으로 최정예인 707 특임대와 공군 급유 수송기를 투입해 교민 28명 전원을 무사히 구출했다. 2년 전 카불의 ‘미라클 아프간’에 이어 두 번 연속 엑소더스 작전 성공이다. 다행이다.

 

04-26 북태평양 해류와 오염수

김세동 논설위원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방류하면 곧바로 우리나라 해역으로 유입돼 물고기들이 대거 방사능에 오염돼 국민 건강을 해칠 것으로 더불어민주당과 환경단체 등이 우려하는 것 같은데, 기본적인 과학적 지식만 있어도 말이 안 되는 괴담이다. 일본은 다핵종제거장치(ALPS)로 62종의 방사능 핵종을 걸러내고, 삼중수소는 바닷물로 희석해 배출기준(6만㏃/ℓ)의 40분의 1 이하로 방류할 예정인데, 그마저도 북태평양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우리 해역에 도달할 때는 최소 4년 정도 뒤다.

후쿠시마는 도쿄에서 북쪽으로 200㎞ 떨어져 일본의 동해(우리 동해가 아니다)에 면해 있어, 오염수를 방류해도 우리나라 쪽이 아니라 일본의 동북쪽으로 흘러 북태평양 해류에 합류한다. 국립해양조사원이 발간한 ‘우리나라 주변 해류모식도’에 따르면, 후쿠시마 앞바다에 방류될 오염수는 구로시오해류를 타고 북태평양으로 흘러간 뒤 캘리포니아해류를 거쳐 북적도해류를 따라 다시 구로시오해류와 합류한다. 오염수는 필리핀해와 대만해를 거쳐 다시 후쿠시마 앞바다로 흘러가고, 일부는 대마난류를 통해 우리 근해에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

자연상태의 삼중수소 농도를 기껏 10만 분의 1 정도 증가시키는 데 불과한 후쿠시마 방류수가 7000조 t의 태평양 바닷물에 들어가 또 희석된 뒤 적도 이북 태평양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 4∼5년 뒤에 한국 해역에 일부 도달한다고 해도 도대체 얼마만큼의 삼중수소가 남아 있을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정말로 위험하다면 가장 먼저, 제일 큰 피해를 보는 곳은 러시아다. 그다음이 캐나다, 미국, 필리핀, 대만, 한국 순으로 피해를 본다. 민주당 말대로 하면 피해를 크게 볼 나라들은 조용하다. 우리 야권이 괴담을 퍼트리는 건가, 그 나라들이 무신경한 건가.

삼중수소가 방출하는 베타선은 에너지가 낮아 사람 피부도 뚫지 못할 정도여서 다른 핵종에 비해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위험성이 적다. 더구나 삼중수소는 반감기가 상대적으로 짧아 12.3년이 지나면 방사선량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132만 t의 오염수를 한꺼번에 버리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30년 동안 하루에 120t의 오염수를 처리·희석해서 방류한다.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04-27 영화배우 강수연

김종호 논설고문

“그의 입김이 닿는 순간, 악하고 비천하고 암담한 현실도 발랄하고 매력적이 된다. 튀는 물고기처럼 생생하고 낙천적인 우주로 변한다.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인 ‘강수연풍 씨받이’ ‘강수연풍 조선 시대 새댁’ 등 모든 것이 현대성을 짙게 뿜어낸다. 배역을 철저히 자기 것으로 소화할 줄 아는 그의 매혹적 능력 일부다.” 길지 않은 생애에도 연기력으로 당대를 풍미한 영화배우 강수연(1966∼2022)에 대해, 소설가 전혜성이 한 말이다.

1987년 파격적인 영화 ‘씨받이’ 주연으로 강수연을 발탁한 임권택 감독은 “엄청난 체험을 두루 하고 났을 때라야 소화할 수 있는 연기를 나이와 상관없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기량을 가진 배우는 그가 거의 유일하다”고도 했다. 봉건적인 가부장제에 희생된 인물 역할부터 당찬 현대 여성 배역까지 다 잘한다는 취지다. ‘씨받이’로 강수연은 제44회 이탈리아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 최초의 세계 영화제 본상 수상이었다. ‘월드 스타’가 된 그는 삭발(削髮) 투혼까지 발휘한, 한승원 소설이 원작인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1989년 제16회 러시아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도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3세 때인 1969년 연기를 시작한 그는 독보적 재능, 아름다움, 완벽주의에 가까운 프로 근성 등을 갖춰 ‘완전체 배우’로도 불렸다. 성품도 따뜻하고 호탕했다. 형편이 어려운 주변 영화인들을 각별히 챙기며 자긍심을 세워주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하는 그의 말은 류승완 감독의 2015년 영화 ‘베테랑’에서 남자 배우 황정민이 부패한 경찰을 향해 그대로 내뱉어 명대사가 된 뒤로, 사회적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의 1주기(周忌)를 맞아 주요 출연작을 재상영하는 행사 ‘강수연, 영화롭게 오랫동안’이 5월 6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7∼9일 메가박스 성수에서 잇달아 열린다. 상영 영화는 그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사후(死後) 개봉된 ‘정이’를 포함해,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경마장 가는 길’ ‘그대 안의 블루’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처녀들의 저녁 식사’ ‘송어’ ‘달빛 길어 올리기’ 등 11편이다. “영화는 내게 끝없이 답을 주지 않는 짝사랑 같은 것”이라던 그를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면 새삼 가슴이 뭉클해질 것이 분명하다.

 

04-28(금) 美 IRA 규제와 ‘트로이 목마’

문희수 논설위원

여전히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논란이 분분하다. 보조금을 받는 전기차가 기존 39개 차종에서 22종으로 크게 줄었을 뿐만 아니라, 모두 미국산이다. 현대차가 미국에서 생산하는 제네시스 GV70조차 배터리의 광물·부품 요건을 못 맞춰 보조금을 못 받게 됐다. 현대차 그룹은 2025년 완공 예정이던 미 조지아주 신공장을 1년 앞당기는 등 초비상이다.

그렇지만 K-배터리엔 오히려 기회다. 22종 중 17종에 LG·삼성·SK 등 빅3의 배터리가 들어간다. 중국산 배터리를 공급망에서 빼려는 IRA 규제의 덕을 보고 있다. 빅3는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고 있어 앞으로도 주요 완성차업체들의 러브콜이 잇따를 전망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 의회가 자국의 테슬라·포드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1위인 중국 CATL과 미국에 합작공장을 세워 IRA의 배터리 규제를 우회하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 테슬라는 텍사스주, 포드는 미시간주에 합작공장을 추진하고 있다.

공화당 소속 제이슨 스미스 미 하원 세입위원장은 최근 포드의 짐 팔리 최고경영자(CEO)에게 서한을 보내 “CATL과의 합작은 미국 기업과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IRA를 악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외신이 전한다. 글렌 영킨 버지니아 주지사는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트로이 목마’라고 더 강하게 비판했다. 공화당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중국 기업과의 합작공장 생산품에 대한 IRA 보조금 지급을 차단하는 법안까지 이미 발의했다고 한다. IRA는 미국 기업이 중국 등 ‘외국의 우려되는 기관’과 미국에 합작공장을 설립할 때는 명시적 규정이 없다. 테슬라와 포드는 이 허점을 파고들어 규제를 무력화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IRA의 최대 수혜자인 테슬라는 주요 광물을 직접 구매해 CATL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피했다고 한다.

IRA가 논란 끝에 확정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공급망을 재편해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하려는 미국 우선주의의 산물인 IRA가 바로 미국 기업에 의해 구멍이 뚫리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미래산업을 둘러싼 환경이 변화무쌍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변수가 등장할지 예측불허다. 한국으로선 미리미리 대응하는 게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