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1] 1차 대전 ‘크리스마스 휴전’ - [89·끝]17세기 바로크 예술 빛낸 이탈리아 거장 베르니니 (하)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
2022.12.20
[81] 1차 대전 ‘크리스마스 휴전’
“고~요한 밤” 울려퍼진 전쟁터… 10만명은 총을 내려놓았다

▲지난 2014년 영국의 조각가 앤디 에드워즈가 만든 ‘크리스마스 휴전 동상’이 리버풀 세인트 루크 교회 앞에 서 있다. 영국군과 독일군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총을 내려놓고 함께 친선 축구 시합을 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동상 주변에 심은 것은 1차 대전 추모의 상징인 붉은 양귀비꽃 조형물이다. 양귀비꽃은 1차 대전 격전지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남부 들판에 흔하게 피어 있던 꽃으로 이 광경을 묘사한 존 매크래(캐나다군 참전 군의관)의 시 ‘플랑드르 들판에서’를 통해 1차 대전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위키피디아
1914년 12월 24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6개월이 지나 전선이 교착 상태에 들어간 플랑드르 지역. 이곳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이미 전사자가 수십 만 명 발생했다. 매일 양이 엄청난 폭탄이 폭발하고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녔다. 병사들이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밤이 되면 호각 소리와 함께 적 병사들이 돌격해 오고 아군은 기관총 대응 사격을 했다. 그런데 이날 밤은 웬일인지 달빛만 훤한 가운데 기이할 정도의 정적만이 흘렀다. 깊은 밤중에 돌연 상대편 독일군 부대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잘 아는 캐럴 ‘슈틸레 나흐트(Stille Nacht)’였다. 8월에 징병당해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전선에 와 있던 프랑스 병사 프랑수아 길렘은 놀라서 주변 동료들을 보았다. 동료들 모두 그와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길렘은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오귀스틴, 이번 크리스마스이브를 오랫동안 기억할 거요. 밤 10시경, 독일군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프랑스인들이 국가를 부르자 다음에 독일인들이 그들의 국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쳤소. 프랑스 병사들은 출정가를 불러 응답했소. 전선에서 남자 수천 명이 노래를 부르니 마치 동화 같은 분위기였소.”
“도대체 왜 우린 싸우고 있는거요?”
전선 곳곳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이프르(Ypres)시 근처에서는 독일군과 영국군이 고작 수십 미터의 무인 지대(no man’s land)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었다. 밤이 되자 먼저 독일군이 노래를 불렀다. 영국군도 자기들 노래를 했고, 곧 독일군 측에서 잠시 사격을 멈추고 중간 휴식 시간을 두자고 소리 질렀다. 영국군 내 전직 테너와 바리톤 가수가 흉벽 위에 올라가서 열창했고 양측 모두 따라 불렀다.
곧이어 독일군 두 명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에든버러에서 온 분 있소?”
“나요!”
“프린스 스트리트에 있는 이발소 아시오?”
놀랍게도 스코틀랜드 병사는 바로 그 이발소 근처에서 살았었고, 독일 병사들은 전쟁 전에 그곳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이 무슨 기이한 인연인가.
이 근방 남쪽 전선에 자리 잡은 독일군 바이에른 17연대는 전나무를 구해 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촛불로 장식했다. 프랑스에서는 아직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관습이 없었던 터라, 프랑스 병사들은 처음 이 이상한 물체에 총을 쐈지만 곧 그 의미를 이해했다. 곧이어 카를 뮐레그(Carl Mühlegg)라는 이름의 독일 병사가 과감하게 철조망을 넘어 무인 지대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총 대신 전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정답게 인사하고 큰 소리로 ‘즈와이외 노엘(Joyeux Noël·프랑스어로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외쳤다. 프랑스 병사 한 명이 마법에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다. 곧 양측 수백 병사가 무인 지대로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눴다.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의 크리스마스 무렵 독일군 병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당시 전선 곳곳에서 독일군 병사들이 적군인 영국·프랑스 병사들과 담배·초콜릿 등을 교환하며 어울렸다. /위키피디아
도처에서 이런 초현실적인 일이 일어났다. 서로 담배를 권했고, 초콜릿과 술을 교환했다. 영국군의 쇠고기 보급품과 독일의 맥주에 대해 서로 칭찬했다. 일부 병사는 기념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주로 단추나 모자였지만, 심지어 서로 훈장을 바꿔 가진 사람들도 있다. 영국군의 기관총 사수 한 명은 전직 이발사였는데, 독일 병사 하나의 머리가 너무 긴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만난 양측 병사들은 “도대체 왜 우리가 여기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거요?” 하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모두 올드랭사인을 부르고 헤어졌다. 한 영국군 병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몇 시간 전까지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만나 악수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프랑스 병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헤어지기 전에 마치 오랜 친구가 그런 것처럼 기념품을 교환했다. 한 명은 자기 주소를 적어주며 전쟁 끝나면 만나자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끼리라면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병사의 기록대로 “만일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봤다면 거짓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 시기까지는 군인들의 사진기 휴대를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군과 영국군이 찍은 사진 수천 장이 남아 있어서 이때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을 증언한다.
심지어 적군끼리 무인 지대에서 축구 경기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1915년 1월 1일 치 ‘타임스’지는 영국 병사들과 독일 병사들 간 축구 경기가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후일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라는 문인이 더 멋지게 각색해서,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룬 끝에 영국 팀이 독일 팀에 3대2로 승리했다는 소설을 썼다. 전선에서 축구를 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아니면 허구에 불과할까? 일부 연구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수많은 포탄이 터져 울퉁불퉁해진 땅에서 축구 경기를 할 여건이 못 되었으며, 제대로 된 공도 없었으니, 기껏해야 ‘깡통 차기’ 수준의 놀이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지만 당시 많은 사람이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축구 경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비공식 휴전’ 상태를 경험한 사람은 대략 10만명에 이른다. 어떤 곳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해 첫날 아침까지 휴전 상태가 이어졌다. 이런 특이한 사건에 대해 영국 신문들은 크게 보도했지만,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보도를 금지했고, 병사들에게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프랑스 병사들은 개인 서한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면서 자기들이 겪은 일을 상세하게 전하곤 했다.
참혹한 전쟁 속 ‘인간’을 되찾은 순간
사실 군 지휘부로 보면 이 사태는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전쟁 상황에서 적을 죽이는 것이 의무이거늘, 멋대로 무기를 내려놓고 적군과 내통하면 어찌 한단 말인가. 실제로 서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던 군인들은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싶은 마음이 스러진 것 같았다. 심지어 독일군 측에서 “내일 우리 장군이 시찰 나오는데 영국 병사들 잘 숨어 있기 바란다” 하고 소리쳐 주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루이 베르타라는 프랑스 병사는 “오랫동안 비슷한 고통과 위험을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서 돌연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해 인간 본성을 일깨운 것 아닐까” 하고 자기 수첩에 적었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사랑해서는 안 되고 증오를 키워서 서로 싸우고 죽여야 마땅하다. 당시 참전한 젊은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도 병사들이 제멋대로 휴전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군 지휘부는 즉각 사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프랑스군은 비공식 휴전 행사가 일어난 지역에 강력한 포격을 퍼부으라고 지시하고, 그런 일을 벌인 부대는 훨씬 험한 곳으로 보내버렸다. 아직 정신 못 차리고 무기 내리고 다가오는 적병이 있으면 장교가 냉혹하게 사살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 오베른도르프 마을에 있는 ‘고요한 밤 소성당’ 건물. /고요한 밤 소성당 홈페이지
짧았던 기적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것이 원래의 참혹한 현실로 되돌아갔다. 전쟁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다시 인간들을 잔혹하게 갈아버렸다. 온 세상에 죽음이 차고 넘쳤다. 그렇더라도 1914년 겨울, 의미 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하던 병사들이 잠시나마 인간 본래 모습을 되찾는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요한 밤’ 성가의 탄생]
크리스마스 축제 직전 교회 오르간 고장나자 쉽게 연주할 곡 만들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주의 오베른도르프(Oberndorf) 마을에 ‘고요한 밤 소성당(Stille-Nacht-Kapelle)’이 있다. 이름 그대로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 ‘고요한 밤’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이 곡은 원래 같은 자리에 있던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서 1818년 12월 24일 처음 연주했다. 크리스마스 축제 준비를 하던 차에 오르간이 고장 나자 간단하게 기타 반주로도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쉬우면서도 아름다운 노래가 필요했다. 부목사 요제프 모르(Joseph Mohr)가 가사를 쓰고 오르간 반주자 프란츠 그루버(Franz Xaver Gruber)가 작곡한 노래가 바로 ‘슈틸레 나흐트’다.
이 성가는 어느덧 전 세계에 알려졌고, 세계대전 중에도 평화를 갈구하는 병사들이 크리스마스에 많이 부른 노래 중 하나였다. 이 노래가 주는 성스러운 평화 메시지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교회를 지었다. 이 성당에서는 매년 12월 24일 오후 5시에 미사를 드린 후 각국어로 ‘고요한 밤’ 캐럴을 노래한다.
2023.01.03
[82]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불멸 꿈꾼 길가메시의 깨달음… 영원한 건 인간이 아닌 인간의 업적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5.5m 높이의 ‘사자를 압도하는 영웅’(왼쪽) 조각상과 날개를 달고 인간의 머리를 한 황소의 조각상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기원전 8세기 작품이다. 사자를 압도하는 영웅의 주인공은 길가메시, 황소의 정체는 여신 이슈타르가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세계관이 응축된 길가메시 이야기는 계속 변화하면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됐고 풍부한 내용과 뚜렷한 메시지를 담게 됐다. /플리커
약 4500년 전에 기록된 길가메시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다. 석판 12개 위에 기록한 시구 3000행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왕국 우룩(Uruk)의 왕 길가메시의 영웅적 모험을 그린다. 처음에 시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룩의 성곽으로 올라가서 찬란한 도시를 보라. 그리고 삼나무 궤 안에 보관된 청람석 석판 위에 새겨진 길가메시 이야기를 보라.
길가메시는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인 특별한 존재지만 폭군 모습으로 등장한다. 젊은 남자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많은 처녀에게 몸을 바치도록 했다. 압제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하늘에 탄원하자 신들은 길가메시와 싸워서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인간 엔키두를 만들어 지상으로 보냈다. 두 영웅은 온종일 싸움을 벌였으나 끝내 승패를 가리지 못하자, 결국 싸움을 중단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인간의 숙명에 도전한 첫 영웅
어느 날, 길가메시는 엔키두에게 사막 너머 서쪽 세계 끝에 있는 신성한 삼나무 숲으로 가서 나무를 베어오는 모험을 제안했다. 이 숲에는 훔바바라는 괴물이 신들의 나무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훔바바를 죽이고 거대한 삼나무를 베어 왔다. 이런 용맹한 길가메시의 풍모를 보고 사랑에 빠진 여신 이슈타르가 구혼했으나 차갑게 거절당했다. 격분한 여신은 하늘의 황소를 땅으로 보내 이들을 공격하게 만들었지만, 두 주인공은 오히려 소를 죽이고 심지어 고기를 잘라 여신에게 던져 모욕했다. 이 오만방자한 행동이 결국 화를 불렀다. 신들이 모여 재판한 결과 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웬일인지 엔키두에게만 죄를 물어 목숨을 앗았다.
길가메시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영생불사의 비밀을 알아내겠다고 결심했다. 세계의 동쪽 끝에서 우트나피시팀이라는 노인이 죽음을 모르고 영생을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기에 그 노인을 찾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하늘에 닿는 산을 지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난 후 ‘죽음의 강’을 건너니 다시 가없는 바다가 앞을 가로막는다. 길가메시는 다시 용기를 내어 우르사나비라는 뱃사공의 배에 올라타고 힘겨운 항해를 한 끝에 드디어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가서 우트나피시팀과 아내를 만났다. 그렇지만 이 부부가 전해준 영생의 비밀은 길가메시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옛날 노인이 겪은 대홍수 이야기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을 묘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부조 작품. 길가메시의 모험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방황과 고난 끝에 어린이의 불가능한 꿈을 버리고 어른의 현명함을 얻는 성장·성숙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폭군이던 길가메시는 현명한 왕으로 탈바꿈한다. /위키피디아
옛날 언젠가 신들의 왕 엔릴은 수선스럽기만 하고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몰살하고자 대홍수를 일으켰다. 이때 에아 여신이 우트나피시팀에게만 홍수를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여신이 시킨 대로 큰 방주를 만들어 아내와 온갖 가축을 실었다. 7일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으나 우트나피시팀만은 재앙을 피했다. 7일째 되는 날 드디어 폭풍우가 멈추자 그는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은 전부 물에 잠겨 있고 사람들은 모두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 방주 밖으로 나가도 될지 알아보기 위해 차례로 비둘기와 제비, 까마귀를 날려 보냈는데 앞의 두 새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해 돌아왔지만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성경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와 비교하면 새의 종류와 순서가 다르다). 물이 마른 것을 알게 된 우트나피시팀은 아내와 가축을 데리고 땅에 내려와 신께 기도를 올렸다. 엔릴은 살아남은 우트나피시팀에게 세상 끝의 먼 섬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러니 이들이 영생을 누리는 것은 오직 신들의 특별한 은총 덕분일 뿐,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실망한 길가메시는 계속 영생의 비밀을 찾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자 우트나피시팀은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 만일 그가 ‘작은 죽음’, 곧 잠을 피할 수 있다면 진짜 죽음도 피할 수 있으니 해보라고 권했다. 그렇지만 먼 여행 때문에 피곤했던 길가메시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7일 동안이나 곯아떨어졌다. 잠에서 깬 길가메시가 실망하자 아내가 영생은 아니더라도 대신 다른 보상을 해주자고 제안했다.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풀이 바닷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다. 길가메시는 회춘의 풀을 얻어 귀향길에 올랐다. 가는 도중 샘에서 목욕하는데 뱀 한 마리가 나타나 그 풀을 먹고 허물을 벗고는 젊음을 되찾았다. 길가메시는 영생도 회춘도 불가능하게 된 상태로 고향 우룩으로 돌아왔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이 담긴 석판. 고대 바빌로니아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2013년 이라크 남부에서 발견됐다. /위키피디아
빈손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이제 길가메시는 지혜를 얻었고 폭군이 아니라 현명한 왕이 되었다. 그가 깨달은 바가 있으니, 비록 우리가 영원히 살 수는 없더라도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서 그 이야기가 후대에 전해지고 또 그것을 기리는 기념물이 만들어지면 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길가메시는 높은 성벽을 쌓고 뱃사공 우르사나비를 불러서 성벽에 올라가 위대한 도시의 장관을 보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서사시는 원래 시작 지점인 도시 성벽으로 되돌아왔다. 굳건한 성벽이 인류가 이룩한 문명을 지켜주지 않는가. 우리 각자는 다 죽을 운명이지만, 인류 전체로 보면 신에게 영속성을 허락받았다. 이제 신들도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문명을 이루어낸 인간이 세계 질서의 영속성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길가메시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세계를 어떻게 그리는지 보여준다. 세상은 문명과 야만이 대립하고 있다. 우룩이라는 도시 국가를 둘러싼 곳은 사냥꾼과 유목민의 세계이자 괴물, 악마, 귀신, 환상적 동물의 세계다. 서쪽 끝에는 훔바바라는 괴물이 지키는 거대한 숲이 있고, 동쪽 끝에는 ‘전갈 인간’이 지키는 환상적이고도 황량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시간이 가면서 변방은 점차 더 먼 곳까지 확대되었다. 기원전 3000년대 중엽 판본에서는 동쪽 변경이 이란 산맥이었으나, 1000년 후 새 판본에서 세상의 끝은 이란의 산들을 지나고 큰 바다를 건넌 곳에 있다.
기원전 2000년대 중엽에 최종본 완성
길가메시 이야기는 계속 변화·발전하면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했다. 특히 함무라비 대왕 시대(기원전 1792~기원전 1750)에 문예부흥기를 맞아 아카드어로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는데, 이때 다양한 요소가 더해져 더 풍성한 내러티브로 발전했다. 기원전 2000년 대 중엽 ‘최종 완성본’이 형성되었다. 놀랍게도 이 판본을 완성한 저자가 알려져 있다. 고대의 셰익스피어라 할 만한 위대한 지식인 ‘신-레케-운닌니’가 에피소드 순서를 정해 줄거리를 잡고, 서론과 결론 부분을 더해 전체 틀을 만들었다. 2000년에 이르는 기간을 거쳐 서사시의 편집 과정이 마무리되면서 내용이 더 풍성해지고, 보편적이고도 핵심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전에 길가메시 이야기는 단지 흥미진진한 모험담 정도였지만 그의 손을 거치면서 인간의 숙명에 관한 성찰로 승화했다.
고대 이집트 문명과 달리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사후 영혼의 재판이라는 개념이 없다. 사후 세계에 들어가는 죽은 자는 선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하는 점보다는 죽을 때 성년에 달했는가, 결혼했는가, 어떤 상태로 죽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후 세계에서 빛나는 영생을 누리리라는 식의 희망 같은 것도 없다. 불멸은 단지 후세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업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학자들은 이 서사시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이행하는 성숙 이야기로 해석한다. 어린이의 불가능한 꿈을 버리는 대신 현명함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해진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우리 사회가 한층 더 원숙하게 성장하기를 기원해 보자.
[루브르 박물관의 길가메시]
왕궁 지키는 수호신… 높이 5.5m로 보는 사람들 압도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거대한 신상 ‘사자를 압도하는 영웅’은 길가메시상이라고 추측한다. 설화석고(alabaster)로 만든 높이 5.5m의 거대한 상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명품이다. 원래 이 상은 신(新)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 시대(기원전 721~기원전 705)의 작품으로 왕궁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조각상처럼 정면을 보는 상은 아시리아에서 드문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런 형식은 마술적 힘으로 왕궁을 지키는 조각상에 한한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것은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의례용 무기다. 이 상은 그저 장식으로 있는 게 아니었다.
두상을 둥글게 만들었기에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신상의 눈과 마주칠 뿐 아니라, 사람이 움직여도 계속 쳐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지워졌으나 원래는 눈에 밝은 색이 칠해져 있어서 그 눈이 보는 사람에게 최면을 건다. 도시 전체를 굽어보는 위치에 우람한 자세로 서 있던 영웅상은 강력한 국왕권의 상징이다.
[83]해양제국 로마의 시작
‘우물 안 개구리’ 로마, 바다로 눈 돌리면서 세계사 주역이 되다

▲포에니 전쟁에서 병사들을 이끈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카르타고군에 승리를 거두고 인질들을 나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16세기 활동한 바티칸의 궁정화가 줄리오 로마노에 이어 18세기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세치가 완성했다. 해상 패권을 놓고 맞선 로마와 카르타고는 전략적 요충지 시칠리아 등을 놓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23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완승을 거둔 로마는 서부 지중해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고대 로마의 역사는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했다. 기원전 6세기경 이탈리아 중부 라티움 지방에는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고만고만한 작은 부족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로마는 테베레 강과 바다에 가까우면서 이탈리아 반도 중간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누리는 데다가 7개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방어에 유리했다. 점차 이웃 부족들을 누르고 힘을 키워가기는 했으나, 이 시점에서 보면 장차 유럽 대륙 중남부와 아프리카 북부를 포함하는 지중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리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었을 터이다.
기원전 510년경, 로마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에트루리아의 지배자를 누르고 공화정을 설립했다. 이후 200년이 넘는 장기간의 정복 과정 끝에 결국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다음 단계는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일이다. 로마가 종내 거대 제국으로 약진하는 결정적 계기는 바다로 팽창해 나간 데 있다. 바다를 지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로마는 단지 이탈리아 반도 내부 세력으로 제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바다로 나간 로마’는 세계사의 주역으로 비약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바다로 나가 경쟁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때가 무르익어 로마 역시 해상 팽창에 나섰을 때 당장 충돌한 상대는 서지중해 지역의 최강자 카르타고였다. 양측은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기원전 2세기 중엽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전쟁(포에니 전쟁)을 치렀다.
23년간 지속된 1차 포에니 전쟁
포에니 전쟁 이전 시기에도 로마가 바다와 완전히 절연된 것은 아니고, 상당한 정도의 해상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과거에 로마 공화정은 바다에 ‘판자 하나 띄우지 못한다’는 악평을 받았다. 로마에는 아주 작은 배들만 있고 해안을 떠나 먼바다로는 전혀 항해를 하지 못한다는 식의 주장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해양고고학의 연구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해저에서 건져낸 침몰선들을 연구해 보니 로마 공화정은 500~600t급 선박들까지 운용하고 있었다.

▲코르부스를 장착한 로마군 갤리선을 묘사한 자크 그라세 생 소베르의 그림. /게티이미지코리아
다만 해상 교역과 해군은 별개의 문제다. 다른 고대 국가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는 교역이 먼저 발달했으나 해군은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주변 해상 강국들의 눈치를 보고 동맹국들의 선박에 의존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로마가 처음 전함을 건조한 것은 기원전 311년, 그리고 처음 이를 사용한 것은 기원전 282년으로서 마그나그라이키아(고대 남이탈리아 동해안 연안에 건설된 그리스 식민시들을 통칭하는 말) 해안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이때 로마의 해군력은 너무 미약하여 강대한 해양 세력과 맞대결할 수준은 못 되었다. 카르타고라는 강적과 겨루려면 해군력의 도약이 필수다.
로마가 본격적으로 해양 팽창을 시도한 결정적 계기는 시칠리아 문제다. 지중해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시피, 시칠리아는 지정학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지중해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 섬은 한편으로 동지중해와 서지중해를 나누는 경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쪽의 유럽과 남쪽의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지중해 패권을 노린다면 반드시 이 섬을 장악해야 한다. 당시 서지중해 최강의 해양 세력인 카르타고 역시 이 섬을 포기할 수 없으니 두 세력 간 충돌은 정해진 이치다. 카르타고는 수 세기 전 지중해 동부 지역의 페니키아인들이 교역을 하기 위해 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역에 건립한 식민지였는데, 본국은 몰락한 반면 식민지가 오히려 더 융성하여 거대한 해양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해상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 로마와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무대 삼아 결전을 벌였다.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 – 기원전 241)이 발발한 직접적인 계기는 시칠리아 내부의 두 세력인 시라쿠사와 메시나 간의 분쟁이었다. 로마는 메시나를 지원하고, 카르타고는 시라쿠사를 지원하는 형국이다. 로마는 메시나를 압박하는 카르타고군을 몰아내려 했고, 그러려면 이들에게 보급을 제공하는 시칠리아 서부의 카르타고 요새를 제거해야 했고, 또 이를 위해서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막아야 했다. 결국 시칠리아 섬을 둘러싼 해로들의 통제가 관건이다. 장기간 섬 내부에서 육상전이 벌어졌지만, 이 전쟁의 종국적 목표는 해양 패권이고 또 실제로 막판에 승패를 결정지은 것 또한 해전이었다.
기원전 262년, 카르타고는 아그리겐툼(Agrigentum, 현재 아그리젠토) 전투에서 로마 육군의 위력을 경험했다. 육상 전투에서 로마를 당해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카르타고는 그들이 강점을 누리는 바다에서 대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자 로마의 원로원은 전함 건조를 결정했다. 5단 갤리선(quinqueremes) 100척, 3단 갤리선(triremes) 20척을 건조하려 했으나 조선 경험이 일천한 로마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당국은 나포한 카르타고 선박 한 척을 철저히 분석하여 리버스 엔지니어링(제품을 분해해 기술적 원리를 이해하는 것)을 통해 복제에 성공했고, 몇 달 만에 3만 명 이상을 태우는 새로운 선단이 만들어졌다. 선박을 건조하는 동안 미리 선발된 선원들은 먼저 육상에서 노 젓는 훈련을 한 후 배에 올랐다.

▲1차 포에니 전쟁 기간인 기원전 260년 벌어진 밀라조 전투에서 카이오 두일리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카르타고에 승리하는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 16세기 화가 야코보 리판다가 그렸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런 것이 로마의 강점이다. 일단 결정하면 신속하고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더 좋은 선박에 더 유능한 선원들을 보유한 전통의 해양 강국 카르타고의 해군을 이기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리파리(Lipari) 제도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이자마자 로마는 16척의 배를 잃었다. 로마 군은 자신들의 강점은 육상 전투이니, 해전을 육상 전투처럼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우리 쪽 배를 적선에 충돌시킨 후 병사들이 적선으로 넘어 들어가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을 취했다. 로마군은 코르부스(corvus)라는 도구를 개발하여 적선에 뛰어 들어가 칼과 창을 휘두르는 전투를 벌인 결과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14년 동안 양측은 승패를 주고받았다. 최후의 결전은 기원전 241년 에가디(Egadi, 현재 Aegadian Islands) 제도 근해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로마는 카르타고 선단을 공격하여 120척의 배를 빼앗고 1만 명의 포로를 잡으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해전을 육상전투처럼 벌인 로마
23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완승으로 끝났다. 카르타고는 ‘바다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상실했고, 서부 지중해의 통제권은 로마에게 돌아갔다. 왜 전통의 해상 강국 카르타고가 승리하지 못했을까? 돌이켜보건대 카르타고는 교역 위주의 국가이고, 군사력은 교역을 지키는 데 필요한 정도로 유지했다. 반면 로마는 애초에 무력 성향이 강한 국가다. 육상에서 공격적 성격을 키워온 로마는 해상에서도 무력 팽창을 시도했고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강력한 해군력을 양성한 것이다. 1차 포에니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시칠리아는 로마의 첫 속주(Provincia)가 되었다. 속주는 로마의 기존 영토 바깥에 위치한 곳으로서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지역이다. 이후 광대한 지역에 속주들이 잇따라 들어서게 된다.
아직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다. 카르타고를 완전히 눌러 이기기까지는 아직도 두 차례 더 전쟁(2~3차 포에니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분명 로마는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볼 때 한 가지 명료한 점이 눈에 띈다. 자기 영역 내에 갇혀 내분에 빠지면 몰락의 길을 가고, 광대한 바깥 세계에 눈뜨고 도전적으로 나아가면 흥한다는 것이다. 재래식 화장실의 구더기들처럼 서로 싸우고 있지 말고 세계를 향해,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을 찾도록 하자.
[해전의 틀을 깬 코르부스]
11m×1.5m 판에 쇠못… 적함과 연결시킨 로마해군의 비밀병기

1차 포에니 전쟁의 초기 국면에서 로마가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코르부스다. 11m×1.5m 크기의 판자 끝에 쇠못들이 달려 있어서 적선 갑판에 단단히 박아 고정시킨 후 이걸 타고 적선으로 넘어가는 장치다. 기원전 260년 밀라이(Mylae) 근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 장치가 진가를 발휘했다. 그렇지만 코르부스가 늘 유용하지만은 않다. 파도가 거칠게 이는 상황에서는 운용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이런 무거운 장치를 갑판에 장치해 놓으면 무게중심이 높아져 선박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
실제로 로마 선단이 재앙에 가까운 침몰 사고를 자주 겪는 원인 중 하나가 코르부스일 수도 있다. 로마 해군이 선박 조종에 익숙해지면서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기 전에 코르부스 이야기가 사라진다. 로마 해군이 바다에서 육상 전투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격적인 해전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결과다.
[84]로마, 지중해를 장악하다
제해권 쥔 로마… 명장 한니발도 해상보급 끊기자 무릎 꿇었다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에 맞서는 로마군 -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자마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맞서 싸우는 전투 장면을 묘사한 16세기 그림. 이탈리아 화가 줄리오 로마노와 네덜란드 화가 코넬리스 코르트가 그린 그림으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로마군은 제해권 장악에 힘입어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2차 포에니 전쟁의 승기를 잡았고, 결국 카르타고를 완전히 궤멸시키며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게 됐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고대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면서 제국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첫 단계가 서부 지중해의 강국 카르타고와 포에니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둔 일이다. 1차 포에니전쟁 이후 로마와 카르타고는 교역 관계로 되돌아갔다. 그렇지만 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할 수는 없는 법,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두 강대국이 언제까지 모호한 평화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기원전 219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에스파냐 내 로마의 주요 동맹인 사군툼을 정복하면서 2차 포에니전쟁이 발발했다. 한니발이 이끄는 원정군은 육로로 남프랑스를 거쳐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가 기원전 218년부터 로마군을 공격하였다. 한니발은 기습과 기만전술에 능한 명장이었다. 초기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면 대결을 감행한 로마군은 여러 차례 패배했고, 극심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궁지에 몰린 로마군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전략을 구사했다. 파비우스(Quintus Fabius)는 원정군 한니발의 약점이 보급이고 또 시간에 쪼들린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주로 적의 보급선을 공격하거나 유리할 때에만 소규모 전투를 벌일 뿐, 위험을 무릅쓰는 대규모 전투는 회피했다.
이와 같은 지연작전이 한니발을 지치게 만들었고, 로마는 기사회생했다. 파비우스는 ‘비겁함으로 나라를 구한 장군’이 되었다. 그렇지만 자존심에 목맨 지도자가 다시 일을 그르쳤다. 기원전 216년 통령에 선출된 테렌티우스 바로(Terentius Varro)가 나폴리 인근의 칸나에(Cannae)전투에서 전군을 중앙에 집중시켜 적군을 공격하는 무모한 작전을 폈다가 노련한 한니발의 포위 전략에 말려들었고, 로마군 약 5만명이 몰살당했다. 그렇지만 대승을 거둔 한니발 역시 곧 몰락하고 만다. 본국 정부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원정군이 언제까지 계속 버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203년 그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군사력을 재건한 로마군은 스키피오의 지휘하에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했고 인근의 자마(Zama)에서 치른 결전에서 승리했다.

▲알프스를 넘어야 했던 한니발 -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코끼리를 동원해 알프스산맥을 넘는 장면을 묘사한 기록화. 한니발 군대의 알프스 원정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역사적 장면이지만, 제해권을 로마에 빼앗긴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했던 방법이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상에서 살펴본 2차 포에니전쟁에서 눈여겨볼 요소는 제해권이다. 표면적으로는 바다가 아무런 역할을 안 한 것 같지만 사실 이면에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요소는 제해권이다. 한니발은 로마를 공격하려고 육로로 먼 거리를 행군했는데, 마살리아(Massalia·고대 그리스인들이 오늘날 마르세유에 세운 식민 도시)가 로마 편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니발이 알프스산맥을 넘어간 것 또한 천재적인 기습 작전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처럼 힘들게 진군해야 했던 이유는 로마가 이미 해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로 군을 이송할 수 없어서 육상의 험로를 지나야 했기에 출정할 때 6만명이던 전사 중 3만3000명이나 잃었다. 칸나에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도 끝내 로마를 정복하지 못한 이유 또한 해상 보급이 막혀서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해군이 직접 승리를 거두지는 않지만 승리를 거두도록 만들어준다는 말이 이런 의미다.
서지중해의 최강 국가 카르타고를 두 번이나 격파한 후 로마는 여세를 몰아 동지중해 지역의 경쟁자들을 격파해 갔다. 마케도니아를 제압하고 셀레우시드 왕조 또한 몰락시켰으며, 이집트를 곡물과 물자를 보급하는 일종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제 지중해 세계는 거의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로마는 승리를 확고히 굳히기 위해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여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2차 포에니전쟁에서 패배하고 로마에 거액의 배상금을 무는 처지에 몰린 카르타고는 사실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아 보였다. 그런데 대(大)카토(기원전 234~기원전 149)가 직접 그곳을 찾아가 보니 인구와 물자가 풍부하여 조만간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로마에 도전할 위험이 커 보였다. 귀국한 카토는 원로원에서 카르타고를 다시 공격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 카르타고에서 가져온 무화과를 하나 보여주자 여러 의원이 아름답다고 찬탄했다. 카토는 “이 과일이 나는 땅이 로마에서 겨우 사흘밖에 안 되는 곳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카토는 매번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Ceterum censeo, Carthago delenda est)”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결국 그가 원로원을 움직였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 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마 장군 스키피오. /나폴리 국립 인류학박물관
로마는 다시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이려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카르타고 측에 스스로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들 모두 80 스타디온(15~20㎞) 내륙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했다. 카르타고가 이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거부하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두 번 연속 전쟁에 졌다고 해도 카르타고는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쉽게 이길 수는 없었다. 3년의 공격 끝에 기원전 146년 마침내 승리를 거둔 로마는 카르타고 시내에 조직적으로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었고, 살아남은 주민 5만명을 모두 노예로 삼았다. 7세기 이상 번영했던 강력한 해상 세력이 이렇게 종언을 고했다. 이제 지중해 전역에서 로마를 위협할만한 세력은 사라졌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판도를 생각해 보자. 학생들에게 지도상에서 로마 제국 영토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짚어보라고 하면 대개 유럽 대륙을 가리키곤 한다. 사실 로마 제국 영토는 ‘유럽 대륙’이 아니라 ‘남부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로마 제국은 한복판에 바다를 품고 있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 내의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했지만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후 해상으로 나가서 서부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고 이어서 동부 지중해 세계까지 정복했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 전체를 오이쿠메네(oicumene·하나의 세계)로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큰 틀이 제국이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통합된 통치 질서를 조직하고, 강한 군사력으로 평화를 강제했다. 이 체제는 대체로 서기 3세기 중엽까지 작동했고, 이후 서서히 약화해 갔다.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성장하여 북아프리카가 이슬람권이 되었을 때 지중해는 한 문명의 ‘중심’에서 두 문명의 ‘경계’가 되었다. 상호 교역과 문화적 소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북부의 기독교권 유럽과 남부의 이슬람권 아프리카가 대치했다. 지중해 세계 전체가 하나의 안정된 질서하에 있었던 때는 로마 제국 시기가 유일하다.
돌이켜 보건대 바다로 나간 로마는 바다를 통해 팽창해 나갔다. 바다는 인력과 물자가 이동하는 중요한 통로로서 로마 제국의 생명선이었다. 이 바다를 로마인들은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라 불렀다. 로마는 육상 제국이면서 동시에 해양 제국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서 동시대 중국의 한(漢) 제국과 기본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역사가들은 로마 제국과 한 제국은 영토 크기나 정치 체제, 이민족과의 관계(각각 게르만족과 흉노족과 대치하는 상태) 등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평가한다. 그렇지만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중국의 한 제국이 본질적으로 대륙 제국이고 해양 세계와는 간접적으로 연결되었을 뿐이지만, 로마 제국은 대륙 제국과 해양 제국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역사 시기 내내 대륙 전체가 제국 질서하에 조직되지만, 유럽에서는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대륙성’이 강한 독일이나 러시아 같은 국가들과 ‘해양성’이 강한 영국이나 네덜란드 같은 국가들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는 흐름을 보인다. 유라시아 대륙 양쪽 끝에 자리 잡은 거대한 두 문명은 이렇게 상이한 길을 갔다.
폼페이우스, 해적을 퇴치하다
로마가 지중해를 제패한 후에도 여전히 남은 중대한 문제는 사방에 출몰하는 해적이었다. 젊은 시절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해적에게 나포된 적이 있다. 다른 승객들이 겁에 질려 떨고 있을 때 22세의 카이사르는 태연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해적은 신속금(身贖金)으로 20달란트라는 거액을 요구했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이 워낙 중요한 인물이므로 50달란트(금화 1만2000개)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대신 자신이 풀려나면 돌아와서 그들 모두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겠다는 말도 했다. 해적은 젊은이가 농담하는 것으로 알았겠지만, 카이사르는 풀려나자마자 실제로 병사들을 동원하여 해적을 모두 잡아서 처형했다.
해적을 완전히 퇴치한 인물은 폼페이우스다. 기원전 67년, 원로원은 심각한 해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폼페이우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는 선박 500척, 병사 12만, 기병 5000명을 동원하여 지중해 전역을 13개 해역으로 나눈 후 한 곳씩 차례로 근절해 나갔고, 결국 지중해의 모든 해적을 소탕했다. 지중해는 말 그대로 로마인들에게 ‘우리의 바다’가 되었다.
[85]고대 해상무역과 한반도
김해서 출토된 인도 유리구슬… 해양 실크로드, 한반도로 이어졌다

▲한국까지 그려진 17세기 인도양 지도 - 한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이 비교적 뚜렷하게 표시돼있는 인도양과 태평양 지도. 1660년대 서양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베트남 황사자료관이 소장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의 대표적 무역 항로였던 해상 실크로드가 실제로는 한반도까지 연결됐을 가능성이 컸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지도에 나온 아라비아~인도~동남아~한반도를 직·간접으로 연결해주는 무역 루트가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대 한반도 주민들은 외부 세계와 어느 정도 소통하고 있었을까? 최근 진척된 고고학 연구는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 내부에서만 주로 활동했으리라는 이미지를 크게 바꾸어 놓고 있다. 각지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은 일찍이 활발한 해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경상남도 사천시에 있는 늑도(勒島) 유적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번성했던 국제 교역항으로서 고대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작동 방식을 잘 보여준다. 늑도 전체에 걸쳐 패총(貝塚), 매장지, 주거지, 공방 등 고대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다양한 외래 유물들이 발견되어 이 섬이 활발한 국제 교역의 무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폐, 구리거울, 철기, 토기, 구슬 등 중국·낙랑계 유물과 야요이 토기 같은 일본계 유물이 대표적이다. 연구자들은 한반도 남부, 중국·낙랑, 그리고 일본 열도의 교역망들이 늑도에서 중첩되었으리라 해석한다. 또 이 섬에 현지 주민뿐 아니라 외래 주민의 매장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현지인과 외래인이 어우러져 교역 활동을 수행하였다는 증거다.
경남 사천 늑도는 국제무역 중심지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한반도 동남부 지방에서 생산된 철이 낙랑 및 왜로 공급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고고학 발굴 결과 실제로 늑도에서 한반도 남부의 철과 철기를 수출하고 반대로 일본 물품과 쌀을 수입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 섬에 다른 지역과는 다른 쪽구들 양식의 온돌 시설이 보이는 점도 흥미롭다. 아마도 연해주의 온돌 방식이 해상 루트를 통해 이곳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늑도 유적은 고대 한반도의 원거리 해양 네트워크가 물산과 문화를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 외에도 여러 유적지 연구를 통해서 고대 한반도가 동아시아 해양 세계와 활발하게 해상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중동 지역부터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남부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가 앞서 거론한 한반도의 해양 네트워크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아시아 해양 세계를 길게 관통하는 해상 실크로드의 존재는 여러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유럽 쪽 자료로는 ‘홍해주항기(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서기 30년경 당시 로마의 속주인 이집트에 거주하는 무명의 그리스 상인이 동료들을 위해 쓴 일종의 무역 안내서다. 저자 자신이 아프리카 동해안, 아라비아, 인도 남단 지역까지 직접 항해하고 교역을 한 경험을 근거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서기 1세기경 홍해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해역에서 전개되던 해상 교역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한편, 중국 측 자료인 ‘한서(漢書)’에는 판위(番禹),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하여 동남아시아를 거쳐 남인도에 이르는 해상 교역로가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중국 상인과 선원들보다는 동남아시아인들이 교역을 중개했을 것으로 보인다. ‘홍해주항기’와 ‘한서’에 나오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중국 남부~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반도~홍해, 그리고 간접적으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초장거리 해상 교통로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 고고학 발굴 결과 역시 이상의 문헌 자료 내용과 부합한다.
이 해상 실크로드는 중국 남부까지만 도달했을까? 최근 연구들은 이 원거리 교역로가 앞서 이야기한 한반도의 해상 네트워크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해상 실크로드의 동쪽 종점은 중국 남부 지역이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이었다는 점이 고고학 유물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한반도와 소통했을 가능성이 큰 곳으로는 예컨대 중국의 광동·광서 지역과 베트남 북부 지역이 있다. 이 지역에 존재했던 남월국(南越國)은 파르티아(고대 이란 왕국)산 은기(銀器)가 발굴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서쪽의 인도양 세계와 동쪽의 중국 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국제무역 전통이 일찍부터 발전했던 곳이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에 한 제국이 이곳을 정복하고 9군을 설치했다. 그중 특히 교지3군(交趾三郡)으로 통칭하는 세 지역(교지(交趾), 구진(九眞), 일남(日南))이 한(漢)과 동남아시아의 해상 교섭의 요충지가 되었다. 한 제국은 이어서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아마도 교지3군을 통해 유입된 동남아시아산 상품들과 구리거울 같은 한나라의 물품들이 한사군 중 특히 낙랑군으로 전해지고, 다시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확산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구체적 경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인도와 동남아시아 산물들이 한반도 여러 지역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는 명백하다.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이 유리구슬이다.
백제 고분서도 인도·동남아 물품 발견
고대 한반도는 유리구슬의 최대 소비처 중 하나다. 중요한 지역을 예로 들면,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 3만7000점, 마한–백제 권역의 오산 수청동 고분군에서 7만여 점,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에서 3만여 점의 유리구슬이 수습되었다. 유리구슬은 화학 조성을 분석하여 생산지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면 인도와 스리랑카의 코피아, 아리카메두, 기리바와, 베트남의 옥에오, 타일랜드의 카오 삼 케오 등지가 주요 생산지이고, 중국 남부의 허푸(合浦) 등 2차 유통 중심지를 거쳐 한반도의 김해와 일본에까지 간 것으로 정리된다. 유리구슬처럼 오랜 기간 잘 보존되는 물품이 많이 수습되지만 아마도 다른 종류의 해외 물산도 많이 유입되었을 것이다.

▲김해 유리 목걸이와 사천 토기 유물들 - 가야 시대 유적인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돼 보물로 지정된 수정 목걸이(왼쪽)와, 사적으로 지정된 선사 시대 유적지인 사천 늑도에서 발굴된 각종 토기. 이 유물들은 한반도가 고대부터 활발한 문물 교류의 거점이었음을 알려주는 사료로 평가받는다. /문화재청·김해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서기 1세기 이후 해상 실크로드가 한반도에까지 닿아 있고, 한반도 주민들이 원거리 교역 체제에 참여해서 많은 물자와 문화가 유입되었다면, 정치와 사회 부문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혹시 고대에 해상 중개교역을 기반으로 하는 항시국가(港市國家)가 나타나지는 않았을까? 동남아시아에는 중개무역을 주관하는 항구가 발전하고 그 배후에 도시가 성장하는 항시(港市)들이 발전하고, 이런 항시들 여럿이 연합하여 항시국가로 발전하는 양태를 보인다. 참파, 푸난, 랑카수카 같은 국가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중 특히 푸난(扶南)은 3세기 초에 세력을 크게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해상 패권을 장악했다.
고대 한반도, 해상 교류에 적극적
우리 역사에도 이 비슷한 국가의 성립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이들은 특히 김해 지역의 구야국(狗邪國, 후일 금관가야(金官加耶)로 변모한다)을 주목한다. 유리구슬이 다량 출토된 김해 양동리와 대성동의 고분군이 바로 구야국 왕들의 유적지다. 이곳에는 농업보다 해상 교류와 관련된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1세기 전반 9간(九干: 9개 토착 세력 집단의 족장)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구야국)을 세웠다는 수로왕(首露王) 기사가 나온다. 혹시 이러한 지역 연맹체의 수장으로 추대하는 것이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보이는 항시들의 연합, 그리고 그에 이은 항시국가의 성립과 유사한 현상은 아닐까? 만일 그럴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구야국에서 금관국(金官國)으로의 전환은 항시에서 항시국가로 발전하는 결정적 과정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아직 단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고대 국가의 발전 양상과 국가와 사회 성격에 대해 기존 견해와는 다른 해석이 제시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우리 역사의 해양성이 크게 부각될 수도 있다. 우리 민족이 늘 한반도에 갇혀 살지만은 않았으며, 멀리 해양 세계를 향한 큰 조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유념하자.
[인도서 온 왕비 허황옥]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과 인도 공주 결혼 이야기… 김해의 무역 위상 반영

▲허황옥이 그려진 우표 - 한국·인도가 우호 증진을 위해 2019년 공동 발행한 허황후 기념우표. /우정사업본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비인 허황옥(許黃玉), 일명 허황후(許皇后)는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데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가락국으로 찾아와 수로왕의 배필이 되었다고 한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들을 데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다 한다. 왕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고 서기 188년에 죽었을 때 나이 157세였으며,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인도의 왕비가 상제의 명에 따라 한반도에 와서 왕비가 되고 157세까지 살았다는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실질적 내용 없는 허황된 전설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보다는 이 이야기 이면에 숨어 있는 역사적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인도와 중국 남부를 거쳐 한반도 지역까지 해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김해가 국제 교역 네트워크의 중요 마디(node)로 성장해 가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86] 기독교 세계관의 지도 ‘마파 문디’
중세 유럽이 그린 세계지도… 아시아 동쪽 끝엔 ‘에덴동산’
세계지도는 그것을 제작한 사회나 문명권이 세상을 어떻게 파악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다. 중세 유럽에는 마파문디(Mappa Mundi)라고 부르는 독특한 유형의 세계지도가 있었다. 세계(mundi)를 그린 도표(mappa)라는 의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이므로 중세 유럽인들이 생각한 인간 거주 지역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세 대륙이다. 지도상의 위에 아시아, 아래 왼쪽에 유럽, 아래 오른쪽에 아프리카를 배치했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방위와는 차이가 나서, 위가 동쪽이고, 아래가 서쪽, 오른쪽이 남쪽, 왼쪽이 북쪽이 된다. 이처럼 동방(Orient)을 어디에 두느냐가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의 원뜻인데, 중세 지도는 위를 동쪽으로 삼았다(반면 이슬람권의 지도는 흔히 남쪽을 위에 두었다).
마파문디에서는 큰 물길 셋이 대륙을 가른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를 흐르는 돈(Don)강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를 흐르는 나일강이 만나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렇게 세 물길이 T 자를 이루고, 이 전체를 거대한 대양(Ocean)이 O 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이런 지도를 ‘T-O 지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전체 모습이 바퀴 모양이라고 하여 ‘바퀴 지도(Wheel Map)’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 대륙에는 기독교적 신화가 덧칠되었다.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이 각각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살게 되었고, 오늘날 이 대륙의 주민들이 그 후손이라는 것이다.

▲13세기에 만든 유럽의 세계지도 - 13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마파문디인 에프스토르프 지도. 가로세로 각 3.6m의 사각형에 텍스트 1500개와 그림 845개가 들어가 있다. 지도의 구성과 배치 방식을 보면 ‘세상은 그리스도의 일부이며 그리스도가 세계를 온전히 유지하는 근간’이라는 기독교 중심 세계관이 투영돼 있다. 원본은 2차 대전 당시 소실됐다. 에프스토르프는 1830년경 이 지도가 발견된 니더작센주의 수도원 이름이다. /위키피디아
마파문디는 1000점 이상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부분은 서책 내의 삽화 형태고, 독자적 지도 형태는 200여 점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 명품으로 에프스토르프 지도(Ebstorf map)가 있다.
이 지도는 13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이나 더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830년경 니더작센주의 에프스토르프 수도원에서 발견되어 이곳 이름을 따서 에프스토르프 지도라고 부른다. 왜 이런 명품 지도를 수도원 내부에 꽁꽁 숨겨두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종교개혁 이후 그전 가톨릭의 산물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치한 게 아닌가 추측한다. 발견 당시 일부는 쥐가 쏠아 없어졌고 일부는 지워진 상태였으나 이후 기술적으로 잘 복원되었다. 불행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10월 연합군의 하노버 폭격 당시 불에 타서 원본은 사라졌다. 이전에 세밀한 팩시밀리 사본을 마련해 둔 게 불행 중 다행이다. 이 지도는 가로, 세로 3.6m의 사각형 안에 원형으로 그려진 대형 작품으로서 다른 마파문디에 비해 매우 크고, 그 안에 1500개의 텍스트와 845개의 그림(건물 500동, 강·호수·바다 160곳, 섬 60곳, 45민족, 동물 60종 등)이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상세히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지도의 제일 위쪽, 즉 동쪽 끝에 예수의 얼굴, 왼쪽과 오른쪽(남쪽과 북쪽)에 예수의 손이, 아래 서쪽에 예수의 발이 그려져 있고, 중심부 아래쪽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예수의 심장 모양이다. 이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일부이며 그리스도가 세계를 온전히 유지하는 근간이라는 뜻이다. 지도는 단순히 산과 강, 도시와 민족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하는 객관적 지리 정보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구현되는, 의미로 충만한 곳임을 나타낸다. 그런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은 지구의 중심(omphalos, 배꼽) 부분에 예루살렘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상의 텍스트가 설명하듯이 예루살렘은 세계를 굽어보는 최상의 도시이며, 그 안에는 부활한 예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의 중심 사건이 일어난 곳임을 나타낸다.

▲기독교 세계관에 변화를 준 십자군 원정 -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18세기 이탈리아 태피스트리(다채로운 염색 실로 짠 직물) 연작 ‘해방된 예루살렘’ 중 십자군 진군을 묘사한 장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지도 곳곳에는 성경의 모티브들이 있다. 예수의 얼굴 바로 옆에는 에덴동산이 있어서 여기에 아담과 이브, 선악과와 뱀이 그려져 있다. 지도에 에덴동산을 그리는 게 과연 옳은가? 현재 우리는 에덴동산이 지상 어딘가에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장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던 당시에는 “여호와 하느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세기 2장8절)라고 성경에 쓰여 있는 만큼 아시아 동쪽 끝에 에덴동산을 실제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네 강(나일, 갠지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의 원류가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왔다가 땅 밑으로 들어가 복류(伏流)한 다음 각각의 강의 근원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에덴동산은 우리가 사는 이 땅과 관련을 맺는다.
그 외에도 노아의 방주,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인, 시나이산, 바벨탑 같은 구약의 내용과 베들레헴, 나자렛, 가나, 겟세마네 같은 신약상의 장소들도 표현되어 있다. 그다음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이나 십자군 관련 장소들, 카르타고와 같은 중요 역사 사건의 도시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이어서 유럽 지역을 보면 파리, 사라고사, 로마, 아테네, 뤼네부르크 같은 현실 도시들이 그려져 있다.
이 지도를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읽어 내려가면 지상낙원에서 출발하여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내용들, 이어서 역사상 주요 사건을 차례로 볼 수 있고(이슬람 관련 사건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도달점에는 당시 유럽의 국가와 도시들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 지도는 단순히 이 세상 모습을 평면 위에 나타낸 게 아니라 인류의 탄생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온 인류사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세계의 ‘공간’을 표현한 게 아니라 종교적으로 해석한 세계사의 ‘시공간’을 시각화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지도 위가 동쪽 방향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위쪽 방향은 종교적, 도덕적 우월성의 표현이다. 예수의 얼굴과 에덴동산이 위치해 있는 숭고한 곳에서 인류가 아래로 흘러내려 왔다는 것은 역으로 우리가 언젠가는 다시 저 위쪽에 있는 낙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염원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지도상에는 또한 수많은 동물과 괴물 형상도 등장한다. 각지에 코끼리, 기린, 곰, 사자, 말, 사슴, 뱀, 악어, 앵무새, 개미 등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때로 동물에 대한 설명 중에서도 종교적 상징을 띠는 것도 있다. “펠리컨은 이집트의 새인데, 어린 새끼들을 죽이고는 사흘 동안 애통해하다가 자신의 피로 부활시킨다.” 다시 말해 펠리컨은 예수의 상징이다.
반면 흉측한 모양을 한 신화상 인간과 괴물도 있다. 용 같은 상상 동물 그리고 아마조네스의 인간들, 혹은 ‘동굴 거주인(trogodytes)’이나 ‘뱀 먹는 사람들(ophiophagi)’ 같은 저급한 존재들도 보인다. 사람이나 동물의 이런 ‘괴물성’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장식한다. 유럽처럼 신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곳에서는 원래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성격이나 온전한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을 띠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세계를 자신의 사상에 따라 해석하는 것은 꼭 유럽만의 일은 아니다. 조선이나 중국에서 제작한 사해도(四海圖)나 천하도(天下圖) 역시 자국 문명의 중심성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틀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전통적 인식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지켜질 수 없다는 점이다. 아랍 세계에서 발전한 지리 지식이 들어오고, 유럽인들 자신이 여행이나 십자군운동 등의 경험에서 세계를 직접 관찰한 결과가 쌓이면서 이제 기존 세계관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는 없다. 유럽인들이 세계 각지로 확산해 가기 시작한 중세 말기에 이르면 우선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따라서 새로운 내용의 세계지도가 필요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이 만든 세계지도, 천하도

17세기 이후 조선에서 다양한 천하도가 제작되었다. 아마도 중국을 통해 접하게 된 서양의 지리 지식과 지도가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에 충격을 준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천하도는 내대륙-내해-외대륙-외해의 구조로 이루어진 원형 세계를 그린다. 내대륙에는 중국, 조선, 안남(安南), 인도 등 실재하는 나라들이 있고, 내해에는 일본국, 유구국(琉球國) 같은 실재하는 나라들과 일목국(一目國·얼굴 한가운데 눈이 하나만 있다), 삼수국(三首國·사람 머리가 셋이다), 관흉국(貫胸國·사람들 모두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다) 등 중국의 고전인 ‘산해경’에 나오는 가상 국가가 혼재해 있다. 외대륙에는 온갖 가상의 나라들과 함께, 일월이 뜨는 곳의 부상(扶桑), 일월이 지는 곳의 반격송(盤格松) 같은 신목(神木)이 그려져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기존 세계 인식 체계로는 파악할 수 없는 새로운 지리 지식과 정보를 접하게 되자, 전통적 사고와 낯선 지리 개념을 융합한 새로운 ‘세계의 이미지(imago mundi)’를 창안해 낸 듯하다.
[87] 1450년경에 만든 세계지도
“인도 가는 길 있다”… 수도사의 지도가 콜럼버스 내비게이션 됐나
중세 유럽의 세계지도(마파문디·Mappa Mundi)는 기독교적 시각에서 세계를 파악하여 그렸다. 단순히 객관적 지리 정보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자체가 하느님의 뜻이 구현되는 무대라는 의미다.(86화 참조)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런 꿈 같은 세계상을 고집할 수는 없다.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열리던 15세기 중엽이 되면 새로운 세계 인식을 담아내는 혁신적인 지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수사 프라 마우로(Fra Mauro)가 제작한 지도가 대표적이다.
1450년경 베네치아에서 제작된 이 명품 지도는 한 변 223㎝의 사각형 안에 지름 196㎝의 원형 세계지도를 그려 넣었고, 이 안에 3000개가 넘는 캡션과 100여 개의 그림으로 풍부한 정보를 담아냈다. 도시, 사원, 도로, 국경, 특산물, 항해, 교역 등 중요한 사항들이 지도 전면에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뒤집어서 보면… 지금의 세계지도와 놀랍도록 닮은 프라 마우로의 지도 - 기독교 세계관과 결별하지 않으면서도 객관성과 정확성을 추구한 프라 마우로 지도의 가치는 180도 뒤집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지금의 세계지도와 거의 흡사한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 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 주요 국가들의 해안선이 비교적 상세하게 보인다. 지중해·흑해·카스피해 등 주요 바다들의 위치도 지금 세계지도와 큰 차이가 없다. 일본은‘심팡구섬’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돼 있는데, 이는 유럽 지도에 일본이 등장한 첫 사례다. /위키피디아
이 지도는 기존 지도와는 여러 측면에서 다른 면모를 보인다. 우선 이전의 마파문디에서는 에덴동산이 아시아 동쪽 끝에 실재하는 지역인 양 그렸지만, 이 지도에서는 외곽으로 밀려났다. 에덴동산이 이 세상과 ‘영적’으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정말로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실재성’은 완화시킨 것이다. 예루살렘의 위치도 변경했다. 기존 지도에는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지도 정중앙에 그렸으나 마우로는 세계 각 대륙의 실제 비중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예루살렘의 위치를 약간 서쪽으로 옮겼다. “위도 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경도 상으로 보면 더 서쪽에 위치한다. 다만 유럽의 인구가 조밀하기 때문에, 지리적 공간뿐 아니라 인구 수를 고려하면 예루살렘은 경도 상으로도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캡션 내용을 통해 종교적 의미를 살리면서도 아시아 대륙의 실제 크기를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아시아에 관한 정보는 주로 마르코 폴로의 책에서 얻은 것들이다. 예컨대 중국 관련 정보의 90% 정도가 폴로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고, 여기에 더해 니콜로 데 콘티나 오도릭 등 다른 저자들을 부차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이 ‘심팡구 섬(Ixola de Cimpangu)’으로 표기되었는데, 마르코 폴로가 시팡구(Cipangu) 혹은 지팡구(Zipangu)로 표기한 것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본이 유럽의 지도에 처음 등장한 사례다. 주목할 점은 고전 저작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판단하기에 맞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과감하게 수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 시대의 여행기나 지지(地誌)에 많이 나오는 기이한 사항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에 여러 종류의 괴물인간 혹은 괴이한 동물들이 있다고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이 많지 않으므로 나는 그것들을 기록하지 않겠다.” 이런 식의 언급이 자주 보인다. 물론 그 역시 고전 자료에 빈번히 등장하는 괴이한 사항들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지 일부 사례들을 소개한다. 예컨대 금광을 지키는 ‘개만큼 큰 개미’ 이야기는 여러 자료에 등장하므로 그 역시 적기는 하되, “아마 이것은 개미 비슷하게 생긴 다른 동물일 수 있다”는 식으로 그 나름의 합리적 추론을 더하고 있다.

▲쿠빌라이 칸 만나는 마르코 폴로 - ‘동방견문록’을 쓴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프라 마우로 지도에서 아시아는 교역이 발달한 곳으로 그려진다. 아시아에 관한 정보 상당수는 마르코 폴로의 책에서 얻은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말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안다만의 한 섬에 호수가 하나 있는데 이 호수의 물을 쇠에 부으면 금으로 바뀐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여러 사람들이 증언을 하므로 그들을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서이다.” 비슷한 사례로 아일랜드의 어느 섬에 나무를 쇠와 돌로 바꾸는 호수 이야기가 있는데, 마우로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만일 이 이야기를 믿는다면 안다만 섬 이야기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는 신비로운 일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맹신하거나 먼저 경탄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이전의 마파문디와 달리 이 세상은 놀랍고 신비로운 일들이 그득한 경이의 세계가 아니다.
마우로의 강조점은 다른 데 있다. 아시아는 괴물이나 꼬리 달린 인간이 사는 기이한 세계가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풍요롭고 잘사는 지역이며, 교역과 교류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인도양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다양한 교역 활동들을 중점적으로 기록한다. “공간이 부족해서 다 표시하지 못했지만 이 바다에는 매우 많은 섬이 존재하며, 모두 사람이 살고 향신료를 비롯한 상품들이 많이 나는 기름진 곳들이다. 금, 은, 다양한 종류의 보석들도 많다”는 식이다. 중세 말과 근대 초 유럽인들의 꿈은 금과 향신료가 많이 나는 아시아로 가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육상을 통해 아시아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험하다. 그렇다면 바닷길로 그곳에 갈 수 있는가를 탐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지도의 요체는 인도양 항해의 가능성 탐구라 할 수 있다.
이전의 많은 문헌과 지도는 유럽에서 인도양까지 가는 항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남쪽에는 바다가 끓어오를 정도로 더워서 통과가 거의 불가능한 열대지역(Torrid zone)이 있을 뿐 아니라, 혹시 그곳을 지나간다 해도 미지의 대륙(terra incognita)이 막고 있어서 아시아의 바다로 항해해 갈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중세의 여러 지리학자들은 아프리카의 남쪽 끝이 거대한 대륙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대륙은 동쪽으로 길게 뻗어 아시아의 동쪽 지역과 맞닿아 있어서, 말하자면 인도양은 땅으로 둘러싸인 내해(內海)라고 보았다. 결국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항해는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프라 마우로는 이와 다른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과거 문헌 중에도 인도양이 더 큰 대양에 열려 있어서 그곳으로 항해해 가는 게 가능하며, 언젠가 아라비아 해에서 향신료를 실은 배 두 척이 실제 유럽까지 온 적이 있다는 기록을 제시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도를 제작하기 수십 년 전인 1420년경 실제로 인도양에서 대서양으로 항해해 들어온 선박에 관한 정보다. “나는 믿을 만한 사람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인도 배를 타고 가다가 인도양에서 40일 동안 거친 폭풍우로 인해 소팔라 곶과 ‘녹색섬’에서 인도양을 넘어 서남서 방향으로 밀려갔다. 이들은 2000마일이나 항해했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중요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양에서 희망봉을 넘어 대서양으로 항해해 왔다가 되돌아간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마찬가지로 대서양에서 항해하여 인도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만일 이 항로가 열리면 힘겨운 육로 운송 대신 해로를 이용해 더 빨리 아시아로 갈 수 있다. 지중해-대서양에서 출항한 배가 아덴, 호르무즈, 그리고 더 멀리 자바, 일본 혹은 중국까지도 갔다 올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지도는 바르톨로뮤 디아스나 바스쿠 다가마가 실제로 수행하게 될 대양 항해를 수십 년 전에 미리 예측한 셈이다.
프라 마우로 지도는 아시아가 풍요롭고 활기찬 교역이 행해지는 곳이며, 온 세계가 바다를 통해 연결되어 있어서 인도양까지 항해해 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는 단순히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유럽이 세계의 바다로 팽창해 나가기 위해서는 문명적 준비가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려는 정신적 자세와 먼 세계로 직접 탐험해 가고자 하는 용기가 필수적인 요인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프라 마우로 지도가 제작되기 약 50년 전인 1402년 조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가 만들어졌다. 조선 전기의 문신 김사형·이무·이회가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포함하여 당대 알려진 세계 지리를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 당대 세계지도의 정확성을 파악하는 한 가지 기준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그리느냐인데, 이 지도는 아프리카 남단을 상당히 정확한 모양으로 나타냈고, 또 인도양과 대서양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그렸다. 아마도 이 지도를 제작하는 데에는 중국의 고지도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일본 지도를 더하고 여기에 우리나라 지도 내용을 넣어 편집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해 있던 아랍의 지리 지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5세기에는 유라시아 대륙 전반적으로 수준 높은 지식과 정보가 유통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유럽의 일각과 조선에서 걸작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대 세계는 정신적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88] 17세기 바로크 예술 빛낸 이탈리아 거장 베르니니
‘세계 4대강’ 분수, 황홀한 테레사… 로마를 화려하게 조각하다
탁월한 예술가 한 명이 한 도시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드는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는 오늘날 로마의 모습을 거의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처에 장대한 교회와 회화, 조각과 분수가 있는 로마는 도시 공간 전체가 극적이어서, 여행자 자신이 로마라는 거대한 연극에 동참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 분위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이 베르니니다. “로마는 당신을 위해 있고 당신은 로마를 위해 있다”고 한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말 그대로이다.
베르니니는 타고난 천재성과 끊임없는 노력, 게다가 지독할 정도의 열정으로 작품들을 창조했다. 자화상인 <저주받은 영혼>(1619)을 만들 때 절규하는 표정을 생생하게 포착하기 위해 자기 팔을 불태우면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정도다. 일찍이 그의 능력을 알아본 유력 인사들이 많은 작품을 의뢰했다.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보르게세 미술관이 된 자신의 빌라(궁전)를 장식할 작품을 주문하자 20대 초반의 베르니니는 <페르세포네의 납치>, <아폴론과 다프네>, <다비드> 같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길 이 명품들로 인해 그는 이른 나이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었다.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이 조각들을 보면 인간의 손으로 저런 작품을 만들어내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베르니니가 만든 '4대강 분수' - 베르니니는 로마 도처에 멋있는 분수를 만들었다. 1651년 나보나 광장에 설치한 피우미 분수도 그중 하나다. 이 분수는 세계 4대 강(나일강, 갠지스강, 라플라타강, 다뉴브강)을 상징하는 신들과 동물들(유럽의 말, 아프리카의 사자, 남아메리카의 아르마딜로, 아시아의 용)로 장식돼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의 <다비드>(1624) 상과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작품(1504)을 비교해 보자. 미켈란젤로는 골리앗과 싸움을 하기 직전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투석기와 돌을 어깨 너머로 멘 채 형형한 눈으로 적을 노려보는 모습이다. 미켈란젤로가 이처럼 정적(靜的)인 모습을 표현한 데 비해 베르니니는 몸을 틀어 골리앗을 향해 투석기로 돌을 던지는 역동적 장면을 표현했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다비드의 표정은 목숨 걸고 싸우는 전사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실 이 작품은 일종의 자화상으로서,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만들었다고 한다. 조각이 멈추어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작가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담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다.
베르니니는 바로크 예술의 선두에 서 있었다. 바로크 예술은 이 시대 가톨릭 종교개혁의 강렬한 에너지를 표출한다. 16세기에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인해 유럽의 기독교는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로 양분되었다. 가톨릭으로서는 신교의 충격으로 한 세기 정도 휘청거렸다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자체의 개혁(예전에는 ‘반동 종교개혁’이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가톨릭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주로 쓴다)을 추진하여 교리와 조직을 재정비·재확인했다. 그 결과 17세기 들어서서 자신감을 회복한 가톨릭계의 열망이 바로크 예술로 나타났다. 신교라는 ‘이단’이 패배하고 가톨릭 신앙이 승리했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이를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확인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새로 정비한 로마의 성당들이 조각이나 회화, 장식예술을 총동원하여 놀라운 정도로 장대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그런 이유다. 그 가운데 최정상의 활약을 선보인 예술가 중 한 명이 베르니니다.

▲자화상 '저주받은 영혼' - 베르니니의 자화상 ‘저주받은 영혼’은 그의 지독한 열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손색없다. 그는 절규하는 표정을 포착하기 위해 자기 팔을 불태우고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이 작품을 만들었다 /로드니/플리커
그의 많은 작품이 로마를 빛내고 있다. 특히 로마 각지에 멋진 분수를 설치하여 물의 고귀함이 시내에 넘치게 하는 동시에 찌는 듯 더운 날씨에 고생하는 시민들에게 청량감을 안겨준다. 1651년 나보나 광장에 설치한 피우미 분수가 대표적이다. 이 멋진 조형물은 세계의 4대 강(나일강, 갠지스강, 라플라타 강, 다뉴브 강)을 상징하는 신들과 동물들(유럽의 말, 아프리카의 사자, 남아메리카의 아르마딜로, 아시아의 용)로 구성되었다. 유명한 작품에는 흔히 루머가 생겨나곤 한다. 라플라타 강을 상징하는 신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이유가, 분수 앞에 그의 라이벌 보로미니가 건축한 성 아그네스 성당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성당보다 분수가 몇 년 앞서 건설되었다는 사실로 보건대 일종의 도시 괴담 수준에 불과하다.
종교적 열정을 형상화한 가장 멋지고 극적인 작품으로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테레사 성녀의 황홀>(1652)을 들 수 있다. 에스파냐의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가 신비주의 황홀경에 빠진 순간을 묘사한 이 제단 장식은 베르니니의 최고 걸작 중 하나다. 이 작품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조각, 프레스코, 스투코(건축물 벽면에 바르는 미장 재료)와 조명이 함께 어우러져 이 극적인 사건 현장에 관객이 참여하는 듯한 착시 현상을 창조해낸 종합 예술이다. 성녀 테레사(1515-1582)는 영적으로 신과 하나가 되는 신비 경험을 자주 했다. 특징적인 것은 그 신비 경험, 소위 ‘심장의 꿰뚫림(transverbération)’ 현상을 글로 남겼다는 점이다.

▲종교적 열정 형상화한 '테레사 성녀의 황홀' -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테레사 성녀의 황홀'은 베르니니의 종교적 열정을 형상화한 가장 극적인 작품이다. 이 제단 장식은 에스파냐의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가 신비주의적인 황홀경에 빠진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위키피디아
“천사가 들고 있는 황금 창의 끝에는 불이 붙어 있는 듯합니다. 창이 내 심장을 뚫고 내장까지 뚫었는데... 화살을 뽑을 때 내장이 온통 빨려나가는 듯했으며, 나는 신에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신음 소리가 나왔지만, 동시에 큰 고통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이 너무 커서 이 상태가 멈추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이 서술은 에로틱한 느낌을 주기에 논란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베르니니가 표현한 성녀의 모습은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성녀의 머리는 뒤로 젖혀져 있고 눈은 반쯤 감겨 있으며 입은 벌어져 있다. 옷의 구김은 몸부림을 연상시키고, 화살을 든 천사의 표정은 유혹적이다. 베르니니는 정말로 강렬한 신의 사랑을 오르가슴에 비유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聖)과 성(性)을 연관시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몸과 마음이 함께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원래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건만, 타락 이후 낙원에서 쫓겨난 다음 현재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싸우는 고통스러운 상태가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베르니니는 이 장면을 그야말로 연극적으로 표현했다. 성녀가 환희에 빠진 이 순간을 양쪽 박스에 위치한 코르나로 가문 사람들(이 작품의 주문자들)이 지켜보면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들뿐 아니라 이 작품을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성녀의 엑스터시 순간에 직접 참여하면서 신비의 경험을 공유한다. 이 작품을 만든 후 베르니니는 힘든 일이 있으면 테레사 성녀상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베르니니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보로미니다. 베르니니보다 한 살 어린 프란체스코 카스텔리, 일명 보로미니 역시 일찍이 탁월한 작품으로 주목받은 천재 예술가로서 보석같이 아름다운 명품 건축물들을 남겼다. 그렇지만 베드로 성당 정비 작업을 할 때 총감독을 맡은 베르니니가 보로미니를 부하처럼 다루고 그의 지대한 공헌을 이용하면서도 보수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부당한 취급을 했다. 이 정비 작업에 큰 하자가 생겼을 때 보로미니가 자세한 도면까지 곁들여 베르니니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제출한 후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하게 악화했다. 이후 베르니니는 여든 넘은 나이까지 왕성하게 세기의 명작들을 생산하며 최고의 예술가라는 명성을 누렸으나, 보로미니는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급기야 칼로 가슴을 찔러 자살했다. 하필 두 천재가 동시에 등장하여 서로 경쟁하는 통에 한 명의 탁월한 예술가가 더 크게 빛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퀴리날레와 산 카를로
로마에서 꼭 한번 들러보기를 권하고 싶은 성당 둘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하나는 베르니니가 건축한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성당이다. 협소하고 길쭉한 땅에 성당을 지어야 하는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베르니니는 원과 타원 모양을 이용한 단순한 구조로 멋진 건축물을 만들었고, 색도 온화한 톤을 사용하여 최대한 단순미를 살렸다. 이 작은 성당은 지극한 아름다움 속에 평안함을 주는 분위기여서 베르니니 자신도 노년에 이곳에 자주 들러 고요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로미니가 건축한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이 있다. 상당히 복잡한 기하학적 구조를 사용하여 독특한 면모를 보이면서 동시에 형언하기 어려운 우아함을 간직한 이 건축물은 시대를 앞서간 명품으로 간주된다. 로마를 위대하게 만든 두 라이벌 건축가·조각가의 위대한 작품이 이제는 친근한 이웃처럼 마주하고 있다.
2023.04.18
[89·끝]17세기 바로크 예술 빛낸 이탈리아 거장 베르니니 (하)
베드로 광장 빚은 神의 손… 묘비명엔 ‘교황도 조아린 예술의 왕’

▲로마의 상징이 된 베드로 광장 -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거장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1656년 설계해 1667년 완공한 로마 성베드로 광장 모습. 이 광장이 조성되기 전 이곳은 텅 빈 공간이었다. 베르니니는 이 공간에 열주들을 세워 타원형 광장을 만들었다. 위에서 이 광장을 보면 마치 성베드로 성당에서 두 개의 팔이 뻗어나가 세상 사람들을 포용하는 모양새다. /위키피디아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1598~1680) 홀로 근대 로마의 도시 공간 전체를 일신했다고 하면 물론 과장이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가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면모를 갖추는 데 이 천재적 예술가가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베르니니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데에는 예술에 큰 관심을 둔 바로크 시대 교황들의 결정적 후원이 있었다. 그는 평생 교황 6명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일했다. 특히 친한 친구였던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이 1623년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로 즉위하자 그의 지위는 더욱 상승했다. 교황청의 예술 활동을 총괄하는 책무를 맡다가 1629년에는 베드로 성당 건축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때까지 백 년 넘게 지속된 베드로 성당 재건축 사업은 어느 정도 마감되어 몸체는 거의 완성되었고, 비어 있는 내부 공간을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할 작품이 발다키노(baldacchino·天蓋)이다. 로마는 베드로 성인의 순교지이며, 그의 무덤은 교황청 안에 있다. 이 무덤의 표시이자 보호 시설로 덮개를 만드는 과제가 그에게 맡겨졌다. 베르니니는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는 거대한 도금 청동 네 기둥을 만들었다. 여기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청동을 조달하기 위해 고대 로마 유적인 판테온 지붕의 청동 들보를 뜯어내 재활용할 정도의 거대한 일이었다.
‘로마를 세계의 수도로’ 재건축 앞장
총 11년에 달하는 오랜 작업 끝에 완성된 높이 30미터의 거대한 구조물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조각품이자 건축의 일부를 이루는 이런 담대한 구상은 이때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이었다. 청동 기둥들은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가까이에서 보면 표면에 섬세한 장식이 되어 있다(예컨대 교황의 출신 가문인 바르베리니가의 상징인 벌이 많이 조각되어 있다). 이어서 돔을 떠받치는 거대한 네 기둥을 세웠고, 여기에 각각 거대한 조각상을 붙였는데, 그중 특히 ‘성 롱기누스’는 베르니니 자신의 작품이다.

▲성 롱기누스 조각상 -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 돔을 떠받치는 4개의 기둥 중 한 곳에 있는 ‘성 롱기누스’ 조각상. 5m 높이의 이 조각상은 베르니니가 만든 작품이다. /위키피디아
현재 우리에게 이 작품들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묵중해 보인다. 이는 물론 당대의 필요에 따른 결과다. 종교개혁의 충격에 이어 가톨릭 국가들과 신교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30년전쟁(1618~1648)이라는 대학살극은 유럽 전체의 종교적 수장이자 평화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교황의 권위를 크게 잠식했다. 그런 만큼 이 시기에 모든 예술을 동원해 교황청의 위엄을 되찾고 신자들에게 종교적 위안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한 인물이 바로 베르니니였다.
다음 교황 인노첸시오 10세(1644~1655) 역시 그런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전 교황과 그 가문을 싫어했고, 거기에 봉사하던 예술가 베르니니를 좋아하지 않아서 멀리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당대 최고 예술가이며 최고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신앙의 확산이라는 의미로 이때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전문가인 베르니니를 결국 ‘고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특히 1650년에 희년(禧年)을 맞게 되어 베드로 성당 미화 계획을 더 큰 규모로 수행했다. 엄청난 양의 대리석이 베드로 성당에 속속 도착했다. 베르니니는 이 대리석을 재료로 순교한 교황의 메달리온 56점, 천사상 192점, 비둘기 104점을 1년 안에 제작했다.
다음 새 교황 알렉산더 7세(1655~1667)는 한 걸음 더 나가 체계적이고 대담한 도시계획을 통해 로마를 세계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전 시대부터 진행되었던 ‘로마 갱신(renovatio Romae)’ 작업이 재개되었다. 과거 16세기에 식스투스 5세는 주요 순례 성당을 직선 도로로 연결하고 성당 앞에 오벨리스크를 두어서 각지에서 로마로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쉽게 길을 찾도록 했다. 이와 유사한 도시 재생 혹은 재건축 작업을 다시 크게 벌였고, 베르니니가 여기에 활발히 참여했다. 특히 포폴로 성문(Porta del Popolo)을 통해 로마로 들어온 사람들을 시내로 인도하는 대로를 재정비해 환희의 갤러리 같은 느낌이 들도록 계획했다.
무엇보다 최대 공헌은 베드로 성당 전면의 광장을 조성한 작업이다. 이때까지 이곳은 단지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진 베드로 성인의 성소(聖所), 영원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베르니니의 아이디어는 거대한 반원형 열주를 세우는 것이다. 열을 맞춘 흰색 열주 네 줄이 둘러서서 타원형 광장을 만들었는데, 위에서 이 광장을 조감하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치 성당에서 두 팔이 뻗어나가 세상 사람들을 포용하는 모양새다. 이 안에 들어온 순례자들은 베드로 성당 전면의 로지아나 이웃한 바티칸궁의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는 교황을 알현하게 된다. 신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 공간에 들어오면 행복감이 고양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모양은 동시에 베드로 성인이 가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한 도시 공간을 이토록 창의적으로 조성한 예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작업은 후일 다른 많은 유럽 도시에도 큰 영감을 주었다.
82세로 떠나기 2주 전까지도 작업
말년에도 베르니니는 베드로 성당 내외를 장식하는 작업을 지속했다. 지금까지 아무런 특색이 없던 앱스(apse·성당 제일 안쪽의 반원 부분), 곧 베드로좌(Cathedra petri·Chair of Saint Peter)를 재정비했다. 여기에 지극히 화려한 금동 왕관을 설치해 이전에 설치한 발다키노와 조응하도록 만들었다. 또 입구를 장식하는 콘스탄티누스 기마상, 알렉산더 7세 교황의 장례 모뉴먼트를 설치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베드로 성당 모습을 거의 완성시켰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 성당과 바티칸궁을 연결하는 스칼라 레지아(scala regia·왕의 계단)를 만들었다. 단순한 계단 같지만 사실은 교묘한 착시 현상을 이용해 매우 인상적인 장엄함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베드로 무덤 덮개 ‘발다키노’ - 베르니니가 만든 발다키노. 총 11년간의 작업 끝에 완성한 발다키노는 베드로 성인의 무덤 보호 시설로 높이 30m에 달한다. 베르니니는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는 네 개의 도금 청동 기둥을 만들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생의 거의 마지막 시기에 수행한 대규모 프로젝트는 산탄젤로 다리(Ponte Sant’Angelo)를 장식한 천사 상들이다. 강 건너 로마 시내와 교황청을 연결하는 다리이니만큼 상징성이 매우 강할 수밖에 없다. 베르니니는 영원의 도시로 들어가는 순례자들을 인도하고 환영하는 천사상 10점을 구상했다. 천사들은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성물(聖物)들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다만 이 조각 10점 가운데 실제로 그가 완성한 것은 두 점(’I.N.R.I.’라는 글을 들고 있는 천사와 가시관을 들고 있는 천사)이다. 그나마 이 작품을 너무 사랑한 교황 클레멘트 10세가 개인적으로 소장했다가 현재는 로마의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Sant’Andrea delle Fratte) 성당에서 보존하고 있다.
베르니니는 죽기 2주 전까지도 작업을 할 정도로 육체적·정신적으로 기운이 넘쳐났지만, 그 역시 80세가 넘어 이 세상 순례를 마칠 때가 되었다. 1680년 11월 28일 그는 평온한 죽음을 맞았고, 어릴 적 살았던 집 근처의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에 묻혔다. 그곳에서는 이런 묘비명을 볼 수 있다. ‘교황도, 군주도, 수많은 사람도 머리를 조아린 예술의 왕 잔 로렌초 베르니니 여기 살다가 묻히다.’ 우리나라도 위대한 예술가들이 위대한 도시 공간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파리로 간 베르니니]
루이 14세가 홀대하자 “파리 전체 예술가보다 로마 화가 1명이 낫다”
베르니니는 딱 한 번 외국을 방문했다. 1655년 4월 말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강권으로 파리를 방문했다. 당대 최고 예술가를 불러 루브르궁의 보수 확대 작업을 맡기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혁신적 건축안은 루이 14세와 왕실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결국 폐기 처분됐다. 애초에 이탈리아 풍토에 어울리는 베르니니의 디자인은 절대주의 국가의 궁전과는 어울릴 수 없었다. 대신 고전적 스타일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프랑스 건축가 클로드 페로(Claude Perrault)의 안이 채택되었다. 이때 베르니니의 지나치게 오만한 성격이 프랑스 측과 갈등을 일으킨 원인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베르니니는 페로에게 ‘당신은 내 구두를 닦을 자격도 없다’고 했고, ‘카라바초 같은 로마의 화가 한 명이 파리 전체 예술가들보다 낫다’는 말도 했다.
베르니니의 작품이 파리에 들어서지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이탈리아 예술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자신을 초빙한 프랑스 국왕에 대한 예의로 베르니니는 로마로 돌아간 후 장대한 루이 14세 기마상을 만들어 보냈다. 이 작품도 홀대당해 베르사유 정원의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이 기마상은 먼 훗날 빛을 보게 된다.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루브르 박물관의 전면 보수 작업을 할 때 루브르 광장을 장식하는 동상으로 이 기마상이 선택돼 현재 복제 조각이 설치되었다.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연재해주신 주경철 교수님과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