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풍경7/八道의 風景4/ 경남(거제도 - 합천). 부산(이기대 - 해운대 마린시티)
아름다운 풍경7/八道의 風景 4 - 경남(거제도 - 합천). 부산(이기대 - 해운대 마린시티)
◇경남
○거제도
http://www.youtube.com/watch?v=_7CIFr4vsR8&feature=player_embedded - 외도
○거창
▲건흥산의 거열산성
▲건계정
▲전망대에서 본 거창의 전경
▲북상의 분설담 -
물이 바위에 부딪혀 흩날리는 모습이 눈보라와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
▲사선대 -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곳
▲수승대
▲거창 위천 수승대 구연서원 적외선 촬영
▲거창 고재면 남덕유산 빼재고개
○남해
▲다초지
▲가친 다랭이마을
▲지족해협 죽방렴
○밀양
▲사례호박소
○울산
▲과학기술대학(UNIST)
▲태화강에 모여든 연어떼
▲연어와 검은 누치
▲수출의 전초지
▲간절곶의 아침 풍경
▲대왕암
▲억새와 연 -신불산 간월재
○의령
▲鳳凰臺(봉황대)
▲사람의 얼굴 모습을 닮았다.
○창녕
▲우포늪
▲우포늪의 일출 풍경 - 김용
○창원
▲아름다운 주남저수지
▲마산의 야경
▲진해 벚꽃축제 17.3.31
▲진해 = 덕주봉에서 바라 본 전경
○통영
▲바다 풍경
▲통영시 전경
▲ 연화도
▲소매물도 등대섬의 아름다운 전경
▲매물도 해품길
▲한려해상
▲비진도
▲사량도 분재바위
▲다도해
○하동
▲섬진강
▲평사리 풍경
○함양
★인공조림 함양 상림… 천연기념물 제154호
글 Garden
지금으로부터 약 1,100년 전 신라 진성여왕 때 당시 천령(지금의 함양)으로 불리던 군수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읍 시가지 중앙을 흐르던 위천이 자주 범람하자 물길을 돌리고 둑을 쌓은 뒤 둑을 따라 조성한 숲이 바로 함양 대관림(大館林)이다. 조성 초기엔 길이가 6㎞에 이르고, 면적이 1,000,000㎡이상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가지의 확장으로 중간 부분이 끊겨 상, 하림으로 나누었다가, 하림마저 비행장(지금의 군부대)이 들어서면서 소멸되어 상림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함양 상림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호안림으로 낙엽 활엽수림이며, 숲내 배수와 수분 공급의 통로가 되는 생태하천을 함께 조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종도 다양하고 풍부해 때죽나무, 쪽동백나무, 나도밤나무, 당단풍, 참나무, 느티나무 등 120종 2만여 그루가 서식하고 있다.
생태적으로 안정된 관목과 교목의 다층구조 유형의 숲으로, 평지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잘 보여주며, 청딱따구리, 직박구리, 오목눈이, 멧새 등 17종의 텃새와 다람쥐도 함께 살고 있다.
숲 주변엔 함양이 시조로 알려진 물레방아와 연꽃나무 습지도 있어, 연꽃 필 무렵엔 장관을 이룬다.
함양 8경 중의 제1경이 상림사계(上林四季)다. 2경이 금대지리, 3경이 용추비경, 4경이 화림풍류, 5림이 칠선시류, 6림이 서암석불, 7림이 덕유운해, 8림이 계관철쭉이다.
최치원 선생이 “후일 이 숲에 뱀, 개구리, 개미 같은 추물이 생기고, 송죽이 자생하면 내가 이 세상을 떠난 줄을 알라”고 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1962년 12월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됐다. 지리산에 가면 꼭 한번 둘러볼 만한 곳이다.
▲상림에 들어서면 산책로 주변에 생태하천과 탐방로를 잘 꾸며 놓았다
▲바로 위 설명되어 있는 그 석불이다.
▲최치원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
▲공적비에 대한 설명.
▲아직 단풍이 떨어지기 전의 모습이다.
▲당단풍나무도 많아 가을 단풍도 아름답다
▲상림숲 바로 옆에 연꽃습지가 있다. 연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장관을 이룬다.
▲이 하천 때문에 상림이 만들어졌다. 하천은 위천이다.
▲꽃무릇나무 군락지도 있다. 사계절 아름다운 곳이 상림이다.
▲물레방아가 돌고 있다.
▲연꽃과 어울린 물속의 다양한 난들도 습지에 서식하고 있다.
▲겨울에 피는 꽃이다. 이름은 모르겠다.
▲상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군청과 초등학교 사이 천연목 느터나무가 있다. 성인 열 사람 정도가 마주잡아야 할 정도의 나무둘레다.
천년목 학사루 느티나무에 대한 설명. 바로 이 앞에 최치원 선생이 자주 왔었다는 학사루가 있다.
My name is Garden
★천년의 숲 '상림공원'
글 신영민 기자
경상남도 함양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고장으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어찌나 오지였던지 과거 함양으로 발령된 벼슬아치들이 '울고 왔다 울고 간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함양은 경상도의 유학을 대표하는 선비고장으로 산수가 수려해 누각과 정자가 산재해 있다.
지난 주말 함양에 다녀왔다. 겨울이 문턱을 넘어온 이 시점에 아직 남아 있는 가을을 만나기 위해서다. 목적지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이자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천년의 숲. 바로 '상림공원'이다.
▲ 11월의 중순이 지났지만 아직 상림공원은 가을을 머금고 있다.
#상림공원
상림공원은 1100여년 전 신라 진성여왕(887~897년) 때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시 최치원 선생은 백성들과 함께 물길을 시내 외곽으로 돌리고 그 자리에 둑을 쌓았다. 그리고 둑 안쪽에는 나무를 심어 '대관림'이라 이름 짓고 숲을 가꿨다.
사람들의 안식처 역할을 해오던 숲은 세월의 풍파 속에 훼손되면서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졌다. 이후 그 가운데에 마을이 생겨나면서 하림은 없어지고 잊혔다. 하지만 남겨진 상림은 대관림의 대를 이으며 지역주민들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한 공원이 됐다.
▲ 상림공원에는 아직 오색빛깔로 물들지 않은 단풍들이 군데군데 있다.
현재 상림공원의 단풍은 대부분 낙엽이 되어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낙엽이 발걸음에 '바스락'거리며 아직 가을이 남아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공원 중앙으로 나 있는 숲길을 걸으면 낙엽의 소리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또 숲길 양쪽으로 하늘 높이 뻗은 나무들 사이로 거니노라면 마치 자연과 하나 된 기분이 든다. 더불어 숲에는 문창후 최선생신도비, 함화루, 척화비, 이은리 석불, 사운정 등 역사만큼 문화재도 많다.
▲ '바스락'거리며 가을이 남아있음을 알려주는 낙엽(왼쪽), 그리고 숲에 있는 문화재들(오른쪽).
숲 가운데에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나무도 있다. 바로 다른 나무끼리 결합해 한몸이 되어 자라고 있는 연리목이다.
연리목은 사랑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귀물로 알려졌다. 특히 상림공원의 연리목은 100여년 된 느티나무와 서어나무가 한몸이 돼 자라고 있는데 같은 수종끼리는 결합이 쉽지만 다른 수종이 결합한 것이라 희귀종 중의 희귀종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연리목 앞에서 사랑을 기원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있으니 이곳에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프러포즈 해보는 것도 좋겠다.
▲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가 되어 자라고 있는 상림공원의 연리목.
상림공원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 연못을 가득 메우는 연꽃이다. 현재는 잎이 다 지고 뿌리만 남았지만 겨울과 봄을
보내고 여름철 상림공원을 방문한다면 연잎과 연꽃의 장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림공원
대관림이 훼손되면서 없어지고 잊힌 하림은 최근 그 명성을 이으며 지난 2009년 숲과 이벤트 광장, 어린이 놀이터 등 30여종의 시설을 갖춘 현대식 공원으로 재개장했다.
▲ 현재 상림공원의 연꽃밭은 잎이 다지고 뿌리만 남아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가재 모양을 한 토속어류생태관이다. 생태관으로 들어서면 우리나라 깨끗한 민물에 서식하는 보호종과 천연기념물인 납자루, 황쏘가리 등을 한눈에 보고 관찰할 수 있다. 또 2층에는 민물고기에 대한 영상을 3D로 만나볼 수 있다.
생태관 바로 옆에는 철갑상어양어장이 있다. 철갑상어 양어장에서는 긴 관모양의 수족관에서 철갑상어가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참고로 철갑상어는 상어와는 전혀 관련 없는 어류다. 철갑상어는 일반 물고기와 같이 등뼈가 있지만, 상어는 뼈가 아닌 연골로 골격이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 토속어류생태관(왼쪽)과 철갑상어양어장(오른쪽)의 모습.
봄에는 파릇파릇 돋아나는 신록과 겨울에는 녹음과 연꽃, 가을에는 단풍과 꽃무릇으로 겨울에는 설경으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상림공원'. 그리고 상림과 분리되면서 잊혔다가 다시 개장한 '하림공원'. 이번 주말 함양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 관련정보
▶ 상림공원
- 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필봉산길 49
- 문의 : 055-960-5756
▶ 하림공원
- 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용평리 85-5
- 문의 : 055-960-5171
조선닷컴 미디어취재팀 신영민 기자
★咸陽의 산세와 金剛酒
'함(咸)'자 들어간 지명이 몇 군데 있다. 함열(咸悅), 함평(咸平), 함안(咸安). 경남 함양(咸陽)은 그 지명이 '모두가 양기(陽氣)다'는 뜻이다. 그래서 조선시대까지 전국에서 많은 도사가 함양에 집결했다. 여기에 머물면서 장래 어느 산에 터를 잡을 것인가를 궁리했다고 한다. 함양은 뒷산이 남덕유산(南德裕山)이고, 앞으로 보이는 객산(客山)이 지리산이다. 뒤에 있는 주산(主山)보다 앞에 있는 객산이 더 높은 형국이다. 그래서 함양은 외부에서 큰 인물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고, 토박이의 텃세가 별로 없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함양에 벼슬하면서 머물렀던 신라 최치원, 조선 전기 김종직, 조선 후기 박지원 등이 그런 외부 인물이다.
함양 주변에는 기운 좋은 명산이 널려 있다. 삼봉산(三峰山), 오봉산(五峰山), 황석산(黃石山), 백운산(白雲山) 등이다. 특히 삼봉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지리산 전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천왕봉부터 반야봉에 이르는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삼봉산 밑에는 죽염(竹鹽)으로 유명한 인산가(仁山家)가 자리 잡고 있다. 죽염은 중국·일본에는 없는 '한류 명품'에 속한다. 인산 선생 뒤를 이어 가업을 계승한 장남 김윤세 대표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함양과 지리산 일대의 산세, 지명, 고사(故事), 도사들 족보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중국 함양 주변에도 함곡관(函谷關)과 위수(渭水)가 있듯이 한국 함양 주변에도 병곡면(甁谷面)과 위천(渭川)이 있다. 병곡면에는 60대 초반 '노(盧) 도사'가 살고 있다. 노 도사는 함양양조장을 운영하던 집안이다. 조부 때부터 인산 김일훈(金一勳·1909~1992) 선생과 교류를 하면서 약주(藥酒)에 대해 연구했다. 인산이 남긴 '신약'(神藥)에 보면 어혈(瘀血)을 푸는 방법으로 깊은 산 속에서 나는 측백나무 잎사귀를 술에 담가뒀다가 시루에 쪄서 고(膏)를 만들어 먹으면 좋다고 나온다. 노 도사는 이 과정에서 부산물로 술을 만들었다. 금강주(金剛酒)다. 80도에 가깝다. 측백향이 강하게 밴 금강주를 먹어보니 어지간한 양주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조용헌
★경남 함양의 조망 명소
▲지난 2003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됐다가 이태 전에야 복원된 경남 함양의 농월정. 정자는 월연암이라 이름 붙여진 거대한 바위를 딛고 서 있는데, 바위에는 물살이 씻고 깎아 만든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가득하다.
지리산은 ‘몸으로 만나야 하는’ 산입니다. 지리산의 능선으로 들어가 안개로 휘감긴 이른 새벽, 혹은 은하수가 쏟아지는 여름밤에 두 발로 산을 딛고 서봐야 지리산을 비로소 알 수 있지요. 지리산을 보려면 산이 드러내는 경관뿐만 아니라, 그 산 안에 든 스스로의 모습까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이며 고된 종주로 딱딱해진 근육, 길고 짙은 숲에서의 청량한 들숨과 날숨을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지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그럴 수는 없는 일. 지리 능선은 길고, 종주는 이른바 ‘산꾼’들에게도 힘겹습니다. 지리산이야말로 의지와 결심을 바쳐야만 오를 수 있는 산이니 말입니다. 마음이야 누구나 낼 수 있지만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한 발 뒤로 물러서 지리산을 보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그곳이 지리산이라면 동의할 수 없지만, 때로 한 발쯤 뒤로 물러서 바라보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다니까요.
LIFE&Style은 이번 주에 남으로는 지리산을, 북으로는 남덕유산을 바라보고 있는 경남 함양 땅에서 ‘보는 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지리산의 주 능선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암자에 새로 놓인 화룡점정의 조망처를 찾았고, 남덕유에서 흘러내린 금천의 물길이 그려낸 풍경을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는 정자도 찾았습니다.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소실된 이후 10년 넘게 복원이 미뤄져 아쉬웠던 화림동 계곡의 농월정이 이태 전에 새로 지어졌더군요.
이제 장마가 가면 폭염의 한여름이 시작됩니다. 휴가의 긴 행렬이 곧 시작되겠지요. 더위를 식히자면 바다나 강, 계곡을 찾아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이렇게 뒤로 물러서 쥘 부채 하나 챙겨 들고 느긋하게 풍경 속을 소요하는 풍류는 어떨까 싶었습니다.
깊은 산중 암자에서 독경 소리를 들으며 지리의 능선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지는 자리에 걸터앉거나, 물길을 끼고 있는 정자 마루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가면서 처마와 기둥이 만든 사각 틀 안에 풍경을 담아보는 것도 썩 괜찮은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정 덥다면 물가에서 탁족이나 등목을 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한옥마을의 고택 대청마루에서 소나기 쏟아지는 날 마당의 흙냄새를 맡는 것도 좋겠고, 거기서 목침을 베고 혼곤한 낮잠을 자도 좋겠습니다. 고택 툇마루에서 은은한 솔향이 감도는 영남지역의 이름난 전통주 ‘솔송주’ 한 잔, 또는 지난봄 첫 잎을 덖어 만든 우전차 한 잔을 앞에 둔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겠습니까. 아, 이건 슬쩍 알려드리는 건데 문재인 대통령도 평소 솔송주를 증류해 만든 술을 즐겨 마신답니다.
▲지리산 주 능선을 바라보는 최고의 조망처로 꼽히는 경남 함양 금대산 자락의 금대암. 암자 안에 새로 지은 나한전 옆의 큰 바위 위가 금대암에서도 최고의 명당이다. 여기 올라앉으면 천왕봉은 물론이고 하봉부터 칠선봉까지 지리산의 긴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 지리산을 보는 최고의 자리
지리산의 주 능선을 조망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 경남 함양 땅에 있다. 함양의 마천면에는 기세 좋게 지리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금대산(852m)이 있다. 그 산자락에 놓인 ‘갈 지(之)’ 자의 가파른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암자 금대암이다. 금대암이야말로 지리산의 거대한 능선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서는 최고의 조망처다.
금대암의 중심이 되는 본전인 무량수각 앞마당. 시선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지리 능선을 마주하고 서면 다른 설명이 없어도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우뚝 일어선 산의 능선이 하늘에 금을 그어놓은 듯하다.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 연하봉, 촛대봉, 세석, 영신봉, 칠선봉…. 봉우리를 세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정도다. 모르긴 해도 1300여 년 전쯤 여기다 암자를 처음 세운 이도 이런 경관 때문에 이 자리를 택했을 것이었다.
무량수각 앞마당뿐만 아니라 금대암으로 드는 길 어느 자리에 서도 뒤를 돌면 거대한 지리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암자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따로 있다. 이른바 ‘화룡점정’이라 부를 만한 조망의 명당인데 근래에 무량수각 뒤쪽에다 나한전을 새로 들이면서 저절로 만들어진 자리다.
새로 지은 나한전 옆에는 전각과 딱 붙어 있다시피 한 집채만 한 바위가 있다. 바위는 예전에도 그곳에 있었지만, 워낙 바위가 커서 나한전을 세우기 전에는 그 위로 올라설 수 없었다. 나한전을 놓는 과정에서 바닥을 높이면서 바위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 바위 위가 바로 지리산을 바라보는 최고의 자리다. 지리산과 마주한 바위 위에 앉으면 저절로 ‘산을 보는 자세’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앉아서 지리산을 대하는 느낌은, 법당 아래서 서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르다. 평안하게 앉은 몸이 마음을 이완시키고,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느긋하다. 무언가 자연에 한 발 더 나아간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런지 여기 앉으면 시간을 잊는다.
금대암보다 더 쉽게 가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리산 조망 명당이 삼봉산 아래 있다. 함양읍에서 마천면 방향으로 1023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오도재를 넘어 만나는 ‘조망공원 휴게소’다.
지리산 전망이 빼어난 자리에 휴게소를 들여서 이름을 ‘조망’으로 지었을 정도다. 금대암에서보다 뒤로 한참을 물러났으니 눈에 들어오는 능선은 더 길다. 금대암에서 오른쪽 시야의 끝이 칠선봉인데, 여기서는 그 오른쪽으로 덕평봉, 벽소령, 형제봉, 반야봉까지 펼쳐진다. 지리산 주 능선의 전부를 여기서 볼 수 있는 셈이다.
휴게소의 정자에는 ‘지득정(智得亭)’이란 현판을 걸었다. ‘지리산을 얻는 정자’란 뜻인데 여기가 시야의 규모는 크지만, 산이 멀어 지리산이 주는 압도의 느낌은 금대암에서 보는 것에는 못 미친다. 휴게소에서 종일 크게 틀어놓고 있는 트로트 노랫가락도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 물을 보는 자리…농월정
금대암이 ‘산을 보는 자리’라면, 함양에서 ‘물을 보는 자리’는 단연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의 물길을 끼고 있는 ‘화림동’의 정자 농월정이다. 함양 안의면에서 육십령으로 이어진 26번 국도, 그 도로를 끼고 흐르는 금천의 물길 주변은 예로부터 절경으로 알려져 화림동이라 불렸다. 물가의 경관이 아름답다면 풍류를 누리는 정자가 없을 수 없다. 화림동 계곡에는 ‘8담(潭) 8정(亭)’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제법 규모가 큰 누정(樓亭)만 꼽아도 농월정을 비롯해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등이 있다.
이들 정자 중에서 가장 규모가 당당하고 풍류가 넘치는 게 농월정이다. 농월(弄月). 그대로 풀면 ‘달을 희롱한다’는 뜻이지만, 본디 ‘음풍농월(吟風弄月)’에서 온 말일 테니 ‘맑은 달 아래 풍류’쯤으로 해독하게 된다. 이름뿐만 아니라 물가의 흰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는 정자는 실제로 물과 함께 달빛을 감상하기에 더없는 자리다. 그러나 농월정이 품고 있는 달의 의미는 이보다 더 깊다. 정자는 풍류를 넘어 정자 주인의 상처와 내면을 드러낸다.
농월정의 주인은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병자호란의 시기를 건너간 선비 박명부다. 예조참판을 지내던 중 병자호란을 겪으며 강화를 반대하고 끝까지 청에 맞서 싸우고자 했으나 인조가 결국 항복하고 무릎을 꿇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서 은거한 곳이 바로 여기 농월정이다.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물러났던 그가 과연 여기서 단지 산수의 아름다움에만 취해 ‘달을 희롱’하려 했던 것일까.
그 해답이 농월정 중수기에 있다. 중수기에는 하나같이 ‘농월’이란 이름을 설명하면서 이태백이 시 ‘고풍 10수’에서 ‘밝은 달(明月)’에 빗댄 중국 제나라의 노중련이 등장한다. 노중련은 과연 누구일까. 그는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의 책략가였다. 진나라가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전멸시키고 조나라 도읍을 포위했을 때 기막힌 계략으로 풍전등화의 조나라를 구해냈다. 병자호란을 뼈저리게 겪었던 박명부는 진나라를 청나라로, 풍전등화의 조나라를 조선에 대입했을 것이고, 최고의 책략으로 조나라를 구해냈다는 노중련의 지혜를 갖지 못한 것을 자책했을 것이었다. 이태백의 시 구절을 따다 이름으로 삼은 ‘농월’에는 추앙과 부러움이 함께 깃들어 있을 것이었다.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린 금천의 물길이 흘러가는 화림동에 세운 정자 거연정 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본 모습. 기둥과 들보가 만들어낸 액자 안에 초록이 그득하다.
#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자리
농월정은 근래 다시 지어진 것이다. 400년 내력의 정자는 지난 2003년 10월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전소된 뒤에 곧 다시 지어지지 못하고 10년이 넘도록 빈터로 남아 있다가 2015년에야 다시 세워졌다. 희고 너른 암반 위에 돌기둥을 받치고 있는 농월정은 시간의 묵은 맛은 없지만 우선 규모가 당당하고 앉아 있는 자리도 예사롭지 않다.
정자 앞의 마당 삼아도 될 만큼 거대한 너럭바위에는 ‘월연암(月淵岩)’이란 글씨가 뚜렷하다. 월연암에는 물이 깎아내 만든 부드러운 곡선이 여기저기 있다. 물살이 씻고 깎아 만든 기기묘묘한 문양이다. ‘월연’이라면 ‘달의 연못’을 뜻하는데 바위 아래 수면에 달빛이 비친다면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으리라. 유독 흰빛의 바위가 초록의 숲, 옥색의 물빛과 강렬한 대비를 이뤘다.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자리에 서 있는 정자가 거연정이다. 거연정은 금천의 물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자리에 들어서 있다. 계곡 한가운데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있어 정자로 가려면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다리 아래로는 연못처럼 고요한 물이 담겨 있다. 이 물을 일러 옛 선비들은 ‘방화수류천(訪花隨柳川)’이라 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바위에 부딪히며 흐르는 물소리가 휘감고 있는 정자의 정취는 이런 풍류 넘치는 이름에 능히 값하고 남는다. 거연정은 정자 안에서의 풍류도 좋지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자연과 함께 감상하는 게 더욱 멋지다. 정자가 계곡과 바위 그리고 여윈 소나무와 어우러져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거연정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었다는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선비 전오륜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자의 빼어난 경관 속에는 세속을 버리고 물러나 자연과 벗 삼았던 지조 있는 선비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 정자에 앉아 자연을 보는 자리
▲ 화림동 계곡의 군자정. 규모는 작지만 단청 없는 소박한 정자가 단아하다.
거연정에서 26번 국도로 2㎞쯤 내려가면 물길을 끼고 동호정이 서 있다. 동호정은 경쾌하게 들어 올린 팔작지붕의 처마가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는 정자다. 처마와 기둥, 대들보에 선명한 단청을 입혀서 화려한 맛도 풍긴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하던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수십 리를 달린 공로를 인정받아 충신으로 추앙된 장만리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업고 달린’ 공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 계곡에서 낚시를 즐기면서 소일했다고 전해진다.
동호정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정자의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통나무를 비스듬히 놓고 홈을 파서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솜씨가 간결하면서도 미감이 느껴진다. 더 유심히 봐야 할 것은 정자의 기둥이다. 통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썼다. 기둥에는 나무 옹이 문양이며 비틀린 흔적들이 뚜렷하다.
동호정에서는 선비들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닐었는데 그 풍류가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비들이 술을 마시며 즐겼던 공간이 바로 동호정 앞의 천변에 있는 거대한 바위다.
해를 가리는 천막과 비슷한 모양이라고 해서 차일암(遮日岩)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바위에는 물살이 깎아놓은 바위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술을 부어놓고는 주연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차일암 한쪽에는 금적암(琴笛岩)과 영가대(詠歌臺)란 글씨도 새겨져 있다. 금적암이란 ‘악기를 연주하는 바위’란 뜻이고 영가대는 ‘노래를 부르는 곳’이란 의미다. 선비들이 여기서 술만 마신 게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풍류를 한껏 즐겼다는 얘기다.
거연정과 동호정 사이에는 군자정도 있다. 다른 정자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인 이 정자는 함양을 대표하는 선비 일두 정여창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단청으로 장식하지 않아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소박한 정자에서는 묵은 시간의 맛이 물씬 풍긴다. 기초석을 세우지 않고 바위 위에 나무기둥을 박아 세운 모양도 독특하다. 편액 가득한 단아한 정자 안으로 들어 계곡의 물길을 바라보는 맛이 그윽하다.
정자가 즐비한 화림동 계곡을 소요하던 옛 선비들은 무더운 한여름에는 바지를 걷어붙이고 탁족을 즐겼다. 옛 선비들에게 탁족은 그저 더위를 식히기 위한 피서만은 아니었다. 찬물에 발을 씻는다는 건 자신을 반성하고 수양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탁족이란 말은 본래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의 ‘어부사’에 등장하는 ‘탁영탁족(濯纓濯足)’에서 온 말이다. 풍류를 즐기되 자연 속에서 늘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던 옛 선비들. 한여름에 쥘 부채 하나 들고서 옛 선비들의 시선과 풍류를 따라가 볼 수 있는 자리가 함양 땅 곳곳에 있다.
여행 정보
함양 가는 길=수도권에서 가자면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로 대전까지 가서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가깝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함양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로 남원 방면으로 가다가 함양IC에서 내려서면 된다.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는 금대암은 함양읍에서 24번 국도로 인월 쪽으로 가다 지리산·백무·칠선·오도재·마천 방면으로 좌회전해 1023번 지방도로를 탄다. 지안재를 넘어 마천면사무소를 지난 뒤 안국사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해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금대암이다. 비포장 구간이 있지만 승용차로도 쉽게 갈 수 있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한여름철 함양의 숙소라면 한신계곡 인근 콘도형 숙소 한일리조트(055-964-0097)를 권한다. 시설이 깔끔하고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물놀이도 할 수 있다. 용추계곡의 용추자연휴양림(055-944-5555)도 좋지만 성수기 주말에는 예약이 어렵다. 함양의 명소로 꼽히는 일두 정여창 고택이 있는 개평마을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한옥펜션 스타일의 정일품농원(1577-9958)도 추천할 만하다.
개평마을에는 전통주 양조장 명가원이 운영하는 솔송주 문화관이 있다. 솔송주는 하동 정씨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530년 전통의 가양주. 문화관에서는 술 빚는 과정을 설명 듣고 시음도 하고 술을 구입할 수도 있다.
함양의 맛집으로는 단연 안의면의 갈비찜이 손꼽힌다. 한옥을 개조해 식당으로 쓰는 안의 원조갈비집(055-962-0666)이 가장 잘 알려진 곳. 간장에 조려 오이, 당근, 양파 등을 올려서 내온다. 갈비찜을 주문하면 작은 국그릇에 갈비탕 국물을 함께 낸다. 칠선계곡 초입의 칠선산장식당(055-962-5630)은 지리산에서 캔 산나물을 푸짐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열두 가지가 넘는 산나물의 종류도 훌륭하지만, 나물을 무쳐내는 솜씨도 좋다.
함양=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7년 7월 12일 수요일
★ 지리산 이야기 - 도포 입고 짚신 신고… 왜 그리 높은 산 올랐을까?
함양에서 올라 천왕봉 두 번이나 밟아… 이상향 ‘청학동’ 찾아 헤맨 듯
‘아, 두류산은 숭고하고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嵩山(중악)이나 대산岱山(동악 태산)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봉선을 하고, 옥첩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이산이나 형악(남악)에 비유해야 할 것이다.
창려韓昌黎·주회암朱晦菴·채서산蔡西山 같이 학식이 넓고 단아한 사람이나 손흥공孫興公·여동빈呂洞賓·백옥섬白玉蟾 같이 연단술을 수련하던 사람들이 옷깃을 나란히 하고 뒤따르며, 그 속에서 배회하며 살았을 것이다.’ — 강정화 교수 <지리산 유산록> ‘김종직 유두류록’ 발췌
조선 4대 사화 가운데 최초로 발생한 무오사화로 부관참시 수모를 당한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인 1472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5일 일정으로 지리산을 유람했다. 나이 42세 때 그가 유람했던 코스는 첫날 함양군 관아→엄천→화암→지장사→환희대→선열암→신열암→고열암(1박), 둘째 날은 고열암→쑥밭재→청이당淸伊堂→영랑재永郞岾(두류봉)→해유령→중봉→마암馬巖→천왕봉→성모사(1박), 셋째 날은 성모사→통천문→향적사(1박), 넷째 날은 향적사→통천문→천왕봉→중산中山(제석봉)→저여분沮洳原(세석 추정)→창불대→영신사(1박), 마지막 날은 영신사→영신봉→한신계곡→백무동→실택리→등구재를 거쳐 함양군 관아로 돌아왔다.
그가 유람한 코스의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보다 흔적 없이 사라진 곳이 더 많아서 정확한 코스를 알 수 없다. 최대한 그의 자취를 밟기 위해 촌로들로부터 함양의 옛 지명을 들어본 적이 있을 법한 토박이 중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이하 공단) 직원으로 있는 선득영씨와 윤봉호씨를 소개받았다. 또한 김종직이 첫날 방문한 화암부터 둘째 날 중봉까지는 현재 (원시림)특별보호구역으로 등산객 출입통제구역이라 공단의 사전 허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토박이는 역시 달랐다. 인적이 드문 지리산 북쪽 자락도 손바닥 들여 보듯 파악하고 있어 무사히 답사를 마쳤다.
두류봉 코스는 지리산 주능선 보여
이들을 오전 5시50분 금계마을 의탄교에서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적조암으로 향했다. 오후 7시까지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려면 최대한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김종직이 이틀 걸려 간 산길을 하루 만에 도착하기엔 너무 멀고 험하다는 것이다. 차량으로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가자고 했다. 응암마을 제일 윗집에 양해를 구하고 주차했다. 오전 6시40분쯤 출발.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은 길이라 나무와 풀이 무성하다. 등산로를 제대로 찾을 수 없다. 간혹 불법 등산객들의 리본이 눈에 띄기도 한다. 출발부터 숲속 가파른 길이 시작됐다. <유두류록>에는 ‘화암을 지나 지장사 터에 당도했다’고 나온다. 지장사 터는 올라가는 코스와는 조금 서쪽으로 떨어져 있다고 한다. 지리99에서 오랫동안 <유두류록> 코스를 수십 차례 답사했다는 유정자씨도 “지장사는 지금 어렴풋이 난 등산로와는 또 다르다”며 “옆길로 빠져 지장사를 거쳐 다시 신열암·고열암·선열암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시간관계상 지장사 터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직행했다.
큼직한 반석이 하나 나온다. “환희대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출입금지구역이라 유적지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유산록에는 ‘환희대 주변 묘정암·지장암에 왕래했다’고 돼 있다. 온통 절이나 암자뿐이다.
우뚝 솟은 바위가 잇따라 등장한다. 김종직이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 바위다. “지금은 함양독바위라 부른다”고 선·윤씨가 설명한다. 주변엔 여러 암벽들이 우뚝 솟은 형국이다. 짙은 안개 때문에 시야가 매우 흐리다. 주변 지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왜 독녀암이라 불렀는지에 대해선 유산록에 ‘전하는 말에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바위를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자세히 나온다.
바위 틈새에 여자 혼자 살 만한 공간이 있는지 가까이서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찾을 수 없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자 바위 틈새로 난 길을 지난다. 입구에 ‘安樂門안락문’이라 글씨를 새겨놓았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석각인 듯하다. 유산록에 없는 내용이다. 지날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영락없는 여성음부를 닮았다. 독녀암과 안락문이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이다. 여자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하는데, 여성과 안락문을 연결시키는 건 혼자만의 상상일까.
1km 남짓마다 절이나 암자로 동선 연결
신열암·고열암·선열암 중에 고열암 터를 윤씨가 안내했다. 그것도 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다. 절터라고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이다. 김종직은 고열암에서 1박을 했다고 했으나 당시 절 규모를 전혀 가늠할 수 없다. 당시 지리산 자락에만 절이 400여 개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1km 남짓 지나면 절이 하나씩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시대의 유산이나 유람의 동선은 거의 절과 절을 연결시켜 움직였다. 이는 조난이나 호랑이·늑대로부터의 위협에 대피하는 기능도 동시에 했을 법하다.
김종직은 고열암에 도착해서 ‘나는 처음으로 험난한 길을 거의 20리(8km)나 걸었다. 매우 피곤해 일찍 곯아떨어졌다가 한밤중에 깨었다. 달빛이 여러 봉우리를 삼킬 듯 뱉을 듯하고, 운무가 용솟음치며 솟아오르고 있었다’고 유산록에 기록하고 있다.
지리산 북쪽 능선은 정말 가파르다. 출발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났지만 오르막의 연속이다. 땀이 비 오듯 솟아진다. 청이당淸伊堂 터에 도착할 즈음에 마침내 비가 쏟아진다. 출발 이래 계속 후텁지근한 날씨에 짙은 안개로 애를 먹었다. 차라리 비가 내리니 일순 안개는 걷힐 것 같다.
청이당 터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 밑자리를 찾아 점심을 해결했다. 청이당은 없고 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벌써 6시간 이상 걸어 낮 12시가 한참 지났다. 청이당 터 옆 계곡에 흐르는 물을 그대로 마셨다.
그런데 청이당은 또 뭘까? 김종직은 ‘판자로 지은 집이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고 했다. 의미만으로 보자면 맑은 집이다. 무속인의 집이지 않을까 싶다. 유정자씨도 “마을 서낭당일 것 같다”고 추정했다. 이 깊은 골짜기에 서낭당 한 채만 달랑 있었는지 아니면 마을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화랑·최치원·이인로 등 고대 인물 전부 등장
계속해서 ‘이곳에서 영랑재(두류봉으로 추정)까지는 길이 매우 가팔라 <봉선의기>에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만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본다고 한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고서 겨우 오를 수 있었다’고 김종직은 밝혔다. 정말 나무뿌리를 잡고 올라간다. 가도 가도 오르막이다. 서서히 체력이 떨어졌다. 비도 내린다. 짙은 안개로 시야는 확보가 안 된다. 최악의 상황이다.
안간힘을 다해서 두류봉으로 올라섰다. 완전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잠시 비가 멈추고 바람이 안개를 몰고 가더니 운무에 덮인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선경이 따로 없다. 지리산 주능선이 긴 자태를 드러났다. 여태 숱하게 종주를 했지만 지리산 주능선을 옆에서 바라보기는 처음이다. 흔치 않은 풍광과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만으로 천만다행이다. 비 오는 날의 산행은 이런 쾌감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할 것 같다.
‘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영랑재)가 가장 우뚝했는데, 이곳에 올라보니 다시 천왕봉이 우러러 보였다. 영랑은 신라시대 화랑의 우두머리였다.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 산수 사이를 찾아다녔는데,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에 이름이 생긴 것이다.’
김종직이 설마 이 높고 험한 곳에 화랑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상상과 더불어 진한 감동의 여운을 지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특별보호구역답게 원시림의 비경을 만끽한다. 관리되지 않은 산길이라 더욱 힘이 든다. 영랑재, 아니 두류봉부터 지리산 주능선을 저만치 앞에 보면서 걷는다. 물론 안개가 살짝 걷히는 순간만 볼 뿐이지만 한껏 기대에 부풀게 한다.
해유령蟹踰嶺이 등장한다. 게가 넘어가는 고개라는 말이다. 아니, 이 깊은 산골에 웬 게란 말인가. 선·윤씨는 “골짜기 아래 마을에 민물 게가 많이 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설명은 이해가 되지만 그 게가 이 높은 고개까지 올라오려면 죽을 때까지 기어도 안 될 것 같다. 어쨌든 지명은 해유령이다.
힘들게 중봉中峰에 도착했다. 해발 1,875m로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유산록에는 ‘이 산 속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모두 돌로 되었는데, 이 봉우리만은 흙으로 덮여 중후했다’고 돼 있다. 중봉부터는 등산객이 출입 가능한 등산로다. 길이 한결 수월하다.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그나마 가볍게 느껴진다.
‘저녁 무렵 천왕봉에 올랐다. 운무가 자욱하고 산천이 모두 어둑어둑하여 중봉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에 들어가 작은 부처를 받들고 날씨가 개이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나는 갓을 쓰고 띠를 매고 손을 씻은 뒤 돌층계를 잡고 사당에 들어가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성모에게 고유했다.’
그 당시 한복차림으로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종직은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출발한 지 꼬박 12시간 걸려서 천왕봉에 도착했다. 아직 장터목대피소까지 한 시간여 더 가야 한다. 온몸에 힘은 하나도 없지만 간혹 바람이 구름을 걷어가는 그 순간의 비경에 감탄을 자아내는 감동의 힘으로 걷고 있다.
그런데 김종직이 왜 이리 힘들고 험하고 높은 곳에 산행을 했을까? 도포 입고 짚신 신고 산행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당시 분명한 사실은 13~14세기부터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을 중심으로 자연을 찾아 풍월을 읊는 유람과 유산이 유행처럼 퍼졌다. 도교와 무위자연사상의 영향을 이미 상당히 받은 듯하다. 특히 13세기 이인로 이후 청학동을 찾는 선비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김종직도 청학동을 찾아 올랐다. 그가 찾은 청학동은 피아골이었다. 피아골도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하게 연상된다.
지리산 산신과 마야부인·위숙왕후도 언급
김종직의 성모에 대한 묘사는 자세하다.
‘성모는 석상인데, 눈과 눈썹 그리고 머리 부분에 모두 색칠을 해놓았다. 목에 갈라진 금이 있어 그 까닭을 물으니 “태조(이성계)께서 인월에서 왜구를 물리치던 해에 왜구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칼로 석상을 쪼개고 갔는데, 후세 사람들이 다시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사당 건물은 세 칸뿐이라 했는데, 김종직은 성모사에서 다시 1박을 했다. 우린 장터목까지 더 가야 한다. 살짝 밀어도 넘어질 것 같다. 저녁 7시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무려 13시간을 더 걸었다. 총 18.5km쯤 됐다. 등산화도 물에 빠져 철퍽거린다. 훨씬 무거워졌다.
김종직은 정상에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한다. 천왕봉을 두 번이나 밟고 통천문을 거쳐 영신사로 향한다. 동선은 전부 절과 암자다. 향적사에서 다음날 잠을 잤다고 밝히고 있다. 향적사는 장터목에서 천왕봉 쪽 고사목이 있는 지점 아래에 있었다고 전한다. 역시 절터만 남아 있다. 지금까지 있었으면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이 되겠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높은 절은 해발 1,650m 높이에 있는 지리산 법계사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엔 그보다 더 높은 절이 수두룩한 듯하다.
김종직이 지금은 없어진 향적사와 영신사에서 각각 하룻밤을 지내면서 천왕봉을 두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한 길을 무시하고 우리는 다음날 영신사로 직행했다. 그는 중산(지금 제석봉)과 저여분(지금 세석으로 추정)을 거쳐 영신사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저야원沮洳原에 대한 설명이 눈길을 끈다.
‘시루봉을 지나 습한 평원에 다다랐다.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쯤 펼쳐져 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샘물이 주위를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했다. 물가의 초막 두어 칸을 살펴보니, 울타리를 둘러쳤고 흙으로 만든 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바로 내상內廂(조선시대 병마절도사가 주둔한 병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에서 매를 잡는 초막이구나.’
옛날 세석 그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돼 농사를 짓고, 마을 사람들이 매를 잡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김종직은 청학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살짝 밝힌다.
‘창불대를 지나가는 길에 악양현의 북쪽을 가리키며 “저 곳이 청학사가 있는 동네입니다”라고 해공이 말했다. 나는 “아! 이곳이 옛 사람이 이른바 신선이 놀던 곳이라는 데인가? 이곳은 속세와 그리 멀지 않은데 미수 이공李公(이인로를 지칭)이 어째서 찾다가 못 찾았을까? 아마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 아닐까?”라고 상상했다.’
우리는 세석대피소 직원의 안내로 다음날 영신사 터로 향했다. 세석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출입통제구역에 터만 남아 있다. 한때 한국 최고의 명당이자 무속인들이 기도 터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지금 그 자취는 온데 간 데 없고 바위와 돌멩이 몇 개만 남아 전한다. 영신사 이름 자체도 예사롭지 않다. 영험스런 신을 부른다는 뜻이다. 그 자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려 본다. 샘물이 두 군데서나 솟아난다. 명당을 알아보는지 멧돼지인지 노루인지 둥지를 튼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물 많고 평지 있고 바위 있는 곳이라 사람이 터전을 잡기 딱 좋은 곳이다.
이제부터 하산길로 접어든다. 김종직은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 내려가니 길이 더욱 가파르고 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산기 해석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난다. 원문은 ‘徑由直旨而下’로 돼 있다. 강정화 교수의 해석대로 ‘지름길로 곧바로 내려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따라 수십 차례 답사했다는 유정자씨는 “백무동계곡 왼쪽 능선을 주변 지역민들은 큰새골 또는 곧은재 능선이라 불렀다”며 “이를 한자화하면 직지直旨라고 하며, 김종직은 그 곧은재 능선으로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곧은재 능선에서 백무동계곡으로 합류해서 실택리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강정화 교수 등 다른 해석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며, 루트도 조금 다르다. 요약하면, 세석에서 지금의 백무동계곡으로 하산했는지와 곧은재 능선으로 하산했는지로 정리된다. 또한 원문 그대로 해석하는 것과 동네사람들의 증인에 따른 것이냐의 차이로 풀이된다.
김종직은 바로 그 뒤 문장에 ‘나무뿌리를 붙잡고 돌 모서리를 밟으면서 수십여 리를 내려왔는데 모두 그런 길이었다’고 적고 있다. 지금 백무동 길에 대한 상세한 묘사 같다. 어느 루트가 맞는지 상상에 맡긴다.
김종직은 4박5일간의 지리산 유산을 마치는 감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이 산에 한 번 올라 유람하며 겨우 평소의 소원을 풀기는 했지만, 청학동을 찾아가고 오대사를 들르는 등 그윽하고 기이한 곳을 두루 유람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 산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런 곳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두자미杜子美(두보)의 방장산이 삼한에 있다는 구절을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진다.’
역시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으려는 심정이 반영된 것 아닌가 여겨진다.
지리산 산신
최고 명산인 만큼 마고·노고·성모천왕·위숙왕후·마야부인 등 다양한 인물 덧씌워져
지리산 산신에 대한 내용은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도 소개된다.
‘“성모는 세상에서 무슨 신을 일컫는 거요?” 하니,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입니다”라고 했다. 아! 이럴 수가 있을까? 서축과 우리나라는 수천 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 세계인데, 가유국의 부인이 어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읽어 보니, “성모가 선사에게 명하였다”라는 구절의 주註에 “지금의 지리산 천왕이다”고 했으니, 바로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가리킨다.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에 관한 전설을 익히 듣고서 자기 나라 임금의 계통을 신성시하고자 하여 이 설을 지어낸 것인데, 이승휴가 그대로 믿고서 <제왕운기>에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증명할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승려들의 허무맹랑한 말에 있어서랴. 또한 마야부인이라고 하면서, 국사國師 이야기로 더럽히고 있다. 업신여기고 불경한 것이 그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이 점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
지리산 산신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모습이다. 지리산에는 거론되는 산신만 해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등장한다. 마고할미·노고할미·천왕할미·반야·선도산신모(중국 여산신인 서왕모의 딸)·성모천왕(박혁거세의 어머니)·위숙왕후(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마야부인(부처의 어머니) 등이다. 한국 최고의 명산인 만큼 원래의 자연신에 덧씌워진 인격신도 많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실질적인 동이족과 한민족의 조상이자 최초의 국가로 간주한다.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가 바로 ‘마고지나麻姑之那’라는 것이다. 마고지나는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2,000년 전에 건국했다고 한다. 신뢰성은 둘째 치고라도 어쨌든 마고할미는 지리산 산신의 원형으로 봐도 무리 없을 것 같다. 원래 신의 세계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명칭을 근거로 추정할 뿐이다.
신라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리산 산신제는 천왕봉이 아닌 노고단에서 지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천왕을 지리산신으로 모시던 곳이 노고단이었다. 노고단은 ‘늙은 시어머니의 제사 터’란 말인데, ‘마고’란 말에 그 어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노고단이나 남악사가 아닌 천왕봉에서 고려시조인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시는 것으로 변모됐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은 왕이 된 뒤 어머니를 상징하는 왕후의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성모사라 했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지리산의 중심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옮겨질 뿐만 아니라 지리산 산신도 마고·노고·선도성모에서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와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인다. 국교인 불교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해석된다.
고려 태조 왕건의 명에 따라 성모사를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두면서 고려 때부터 지리산 산신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천왕봉의 주신인 ‘성모聖母’와 노고단의 주신인 ‘노고老姑’로 대표되는 산신의 형태를 띤다.
조선 <태종실록> 권28편에서 산천의 등제를 나누도록 한 내용은 기존의 산신을 그대로 답습한다.
‘예조에서 산천의 사전제도를 올렸다. 본조에서는 전조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천의 제사는 등제를 나누지 않았는데, 경내의 명산대천과 여러 산천을 점제에 의하며 제등을 나누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옥해독은 중사로 삼고, 여러 산천은 소사로 삼았다. 경성 삼각산의 신·한강의 신, 경기의 송악산·덕진, 충청도의 웅진, 경상도의 가야, 전라도의 지리산·남해, 강원도의 동해, 풍해도의 서해, 영길도의 비자산, 평안도의 압록강·평양강은 모두 중사였다.’
지리산 산신에 대해서 <세종실록>에는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으로, <경상도지리신>에서는 ‘지리산대대천왕천정신보살智異山大大天王天淨神菩薩’이라 하며, 이를 줄여 ‘대대천왕大大天王’이라 기록하고 있다. 천왕은 결국 천왕봉의 신령이라는 의미다.
조선시대에는 이전과 같이 더 이상의 천신화天神化나 신인화神人化된 새로운 산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을산신이라는 새로운 지리산 산신이 등장한다. <동국여지승람>에 ‘태을이 (지리산) 위에 거하니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명찰명찰 편에도 ‘지리산은 태을이 사는 곳으로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을은 천지만물의 출현 또는 성립의 근원인 우주의 본체를 인격화한 천제天帝로, 태을성은 곧 북극성이며, 병란, 재화, 생사 따위를 맡아 다스린다고 하는 신령한 별이다. 이 별을 신격화한 것이 태을성신이다. 조선시대는 불교국가인 고려와 달리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교와 성리학의 이념이 산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출처 | 월간산 574호 글 | 박정원 월간산 부장대우 사진 | 정정현 국장
★사색·풍류·사랑… 함양 3색(色) 테마여행
지리산 천왕봉(1915m)에 오르는 최단경로인 백무동 계곡이 있는 경남 함양군은 지자체 중 유일하게 두 개의 국립공원(지리산, 덕유산)을 품고 있다. 그래서 1000m급 산이 15개에 달하고, 봉우리까지 치면 34개에 이를 정도로 산이 많은 지역이다.
사색과 명상에 빠지게 하는 평지숲 '상림'
조선 선비의 풍류가 느껴지는 화림동 계곡
변강쇠와 옹녀가 사랑을 나누던 오도재
이처럼 산 높고 골 깊은 지역이다 보니 판소리 여섯마당의 하나인 변강쇠타령의 지리적 배경이 됐다. 속세를 떠나 호연지기를 기르며 학문에 전념하기 좋아 항교와 서원이 많이 들어서면서 학자들이 줄이어 배출된 선비의 고장이기도 하다.
신라 말 최치원이 조성한 평지 숲
▲완전히 단풍이 든 함양 상림 모습. [사진 함양군 제공]
함양에는 다른 지자체에 없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국내 최대의 평지 인공 숲인 ‘상림(上林)’이 그것. 신라말 최치원 선생이 조성한 것으로 현재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는데도 21만4500㎡(폭 100m, 길이 1.6km)의 방대한 규모다.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상림은 사색과 명상의 숲이 된다.
이처럼 함양은 서로 다른 독특한 컬러를 갖고 있어 여행의 묘미가 있다. 국내 최대의 평지 숲을 찾아 사색에 잠기고 조선 선비들의 풍류를 느끼며, 해학 넘치는 변강쇠와 옹녀의 흔적을 찾아 쉬엄쉬엄 떠나보자.
국내 최대의 평지 숲 상림(천연기념물 제154호)은 신라 진성왕때 함양태수를 지내던 최치원 선생이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했다. 숲에는 40여종의 낙엽관목 등 116종의 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다. 특히 가을이면 오색단풍이 장관을 이루고 수북이 쌓이는 낙엽들로 인해 사색과 명상의 숲이 된다.
▲상림숲은 활엽수 나무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림북쪽에는 단풍나무가 많다. [사진 김순근]
단풍이 물듦과 동시에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상림에 들어서면 비밀의 숲에 들어서는 듯 신비로움이 감돈다. 발걸음은 자연히 느려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점차 무념무상에 빠져든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으면 맑은 계류소리, 떨어지는 낙엽, 아이들의 웃음소리, 연인들의 속삭임 등이 사색으로 안내하는 명상음이 된다.
이른 아침 안개가 살짝 낄때면 몽환적 분위기가 감돌아 굳이 이른 아침에 찾는 이들도 많다. 숲속에는 계곡처럼 만든 작은 시내와 고풍스런 정자를 비롯해 이은리 석불 등 지방문화재와 조선시대 역대 함양군수들의 찬양비도 숲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유생들이 과거보러 가다 놀아
함양은 조선시대때 공립학교격인 향교와 사립학교인 서원이 많아 안동에 버금갈 정도로 학자가 많이 배출되어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대부 문화가 꽃피웠던 곳이다. 그래서 곳곳에 정자와 누각, 서원, 향교들이 많다.
▲화림동계곡의 거연정. [사진 김순근]
특히 함양읍에서 국도 26호선을 따라 무주로 가는 덕유산 기슭의 화림동 계곡은 옛날 과거보러가는 유생들이 육십령을 넘기위해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계곡을 따라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 등 정자들이 즐비한데 옛 선비들이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며 풍류를 즐겼다. 특히 농월정에서 거연정까지 6km의 계곡길은 경관도 아름다워 선비들의 멋과 정취를 엿볼 수 있는 드라이브 길이다. 가을이면 계곡의 단풍으로 더욱 운치있다.
▲화림동계곡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농월정. [사진 김순근]
이중 농월정은 밤이면 앞에 펼쳐진 넓고 하얀 암반에 반사된 달빛에 주변이 밝아져 선비들이 밤늦게까지 계곡수의 청아한 소리를 반주삼아 시를 읊고 달을 희롱하며 놀았다고 한다. 기암절벽 암반위에 세워진 거연정은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하는데,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와 노송, 기암들과 어우러져 명승지로 지정될만큼 경관이 아름답다.
변강쇠와 옹녀의 발자취
▲오도재 가는길의 변강쇠와 옹녀 묘. [사진 김순근]
판소리 여섯마당중 변강쇠 타령은 변강쇠와 옹녀가 말년에 등구 마천에 정착한 것으로 나온다. 등구마을이 있는 함양군 마천면은 함양읍과 오도재(773m)를 사이에 두고 있다. 변강쇠와 옹녀가 읍내로 가려면 아마도 이 오도재를 넘나들었을 게 뻔하다. 지금은 2차선 도로가 개통되었지만 2001년 이전까지만 해도 험준한 산길이었다. 변강쇠와 옹녀의 발자취는 이 오도재를 중심으로 곳곳에 남아있다.
변강쇠와 옹녀가 정착한 등구마을은 함양읍에서 오도재를 넘어가면 왼쪽에 마을표지석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고 경사진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에는 현재 40여가구가 살고 있다.
등구마을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 칠선계곡 가는 의탄교를 건너면 벽송사가 나온다. 게으른 변강쇠는 옹녀가 땔감을 해오라고 하자 주변의 장승을 뽑아 도끼로 패서 불 태우다 결국 장승들의 저주를 받아 ‘동티’병에 걸려 죽는다. 지리산 둘레길 4구간 초입에 있는 벽송사에 이와 관련된 장승이 있다. 지방문화재인 이곳 목장승 2기중 하나가 머리가 도끼로 찍힌 듯 쪼개져 있고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다. 6.25 전쟁 직후 땔감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장승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도재 정상 아래에 있는 변강쇠공원. [사진 김순근]
오도재 정상에서 함양읍쪽으로 내려가면 변강쇠와 옹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장승들로 변강쇠 공원을 조성해 놓았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계곡변 오도재 주막 뒤편에 누군가 변강쇠와 옹녀묘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 변강쇠와 옹녀 묘 가는 길목에는 보통 남녀보다 월등한 사랑을 과시한 그들의 끈끈한 사랑을 말해주듯 두 나무 밑둥이 붙은 층층나무 연리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처럼 함양읍에서 오도재를 넘어가는 길을 변강쇠와 옹녀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해학의 길이라 할만하다.
함양토박이가 알려주는 ‘함양 100배 즐기기’ 여행팁
“3색테마를 하룻만에 다 둘러보긴 어렵습니다. 함양군청 인근에 있는 상림을 산책한뒤 지리산 가는길을 따라 오도재~벽송사의 변강쇠·옹녀 테마와 상림~화림동 계곡을 연계한 조선 선비들의 풍류테마 코스로 구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함양 3색테마 여행을 제안한 이용기씨(61)는 함양에서 태어나 함양에서 학교를 나온뒤 함양군 휴천면 면서기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등 함양을 떠나본적이 없는 함양토박이다. 2014년 12월 기획감사실장을 끝으로 퇴직한뒤 군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향을 알차게 알릴수 있는 관광관련 스토리텔링 아이템을 개발하고 있다.
이용기씨는 3색 테마여행지외 빼놓아선 안될 명소를 추가로 추천했다. 우선 지리산 가는길의 오도재를 오를땐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에 선정된 구불구불한 길을 배경으로 추억을 담아가라고 말했다. 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포토존도 설치되어 있는데 2006년 ‘드라이빙 이모션’이란 주제로 영화배우 전도연씨가 출연한 한 타이어회사 CF가 이곳에서 촬영됐단다
▲함양읍에서 오도재로 가는 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길이다. [사진 김순근]
오도재 정상을 넘어서면 왼쪽에 휴게소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의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공원도 꼭 들리라고 한다. 이곳은 옛날 선비들이 호연지기를 길렀던 곳이기도 하다. 장쾌하게 펼쳐진 지리능선을 바라보며 옛 선조들이 느꼈던 호연지기를 체험해보라고 말했다.
▲변강쇠로부터 수난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벽송사 목장승. [사진 김순근]
변강쇠에 수모당한 목장승이 있는 벽송사를 둘러본뒤에는 인근 서암정사를 방문하길 권한다. 일반 사찰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서암정사는 불교의 화엄세계를 상징하는 갖가지 마애불과 석굴에 지은 불당 등으로 인해 한국의 돈황으로 불리는 이색지대다.
▲서암정사 전경. [사진 김순근]
화림동 계곡의 선비문화탐방때는 TV드라마 ‘토지’의 촬영지였던 지곡면 개평마을의 고옥촌을 놓치지 말라고 한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정여창 고택을 비롯해 오담고택, 노참판댁 고가 등 100년이 넘은 60여채의 한옥들이 남아있어 선조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엿볼수 있다.
유림들이 많은 지역이어서 아직 거부감이 있는 ‘변강쇠와 옹녀’ 테마에 대해서는 색다른 해석을 내놨다. 변강쇠와 옹녀가 등구 마천에 정착한 것은 함양의 독특한 토양에서 자란 건강식품과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 함양지역의 토양에는 타지역보다 3~6배 많은 게르마늄이 포함돼 있어 산삼축제를 열 정도로 산삼으로 유명한데다 대표적인 강장채소인 양파도 품질 좋기로 정평나 있다.
또 지리산 계곡 엄천강에서 잡힌 물고기들을 재료로한 어탕국수는 이곳의 별미로 통하는데 여기에 향신료인 제피가 반드시 들어간다. 초피나무 열매를 갈아만든 제피는 젠피라고도 하는데 신장기능을 강화시키는 강장식품으로 함양의 지리산자락에서 많이 생산된다. 변강쇠가 건강한 남성의 상징인 만큼 게르마늄이 많은 함양에서 나온 이같은 다양한 건강식품들이 곧 ‘변강쇠’ 원동력이며, 이는 함양의 특산품과 먹거리인 ‘8품(品) 8미(味)’에 담겨있다고 말했다.
▲상림에 있는 연리목. 느티나무와 개어서나무의 몸통이 붙어 있다. [사진 김순근]
상림숲에 연리목 2개가 있는 것을 비롯해 변강쇠와 옹녀 묘 가는 길 초입에 연리목이 있고 최근에 층층나무 연리목 군락이 발견되는 등 함양에 유독 연리목이 많은 것에도 주목한다. 연리지 및 연리목은 부모 자식간의 사랑, 남녀간의 변함없는 사랑을 뜻하는 만큼 함양에 오면 가족애가 돈독해 지고 청춘남녀 및 부부들은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고 말했다.
김순근 여행작가 sk4340s@hanmail.net
[상림에 조성돤 58000여 평방미터의 연꽃단지는 2003년 조성되었고
상림숲은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
▲연꽃단지
▲뱀사골
▲지리산 달궁
▲달궁계곡
▲지안재
▲노고단과 섬진강 줄기
▲칠선계곡
▲황석산성 거북바위
▲황석산성 성터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 월간조선
선비처럼 風流를 느낄 수 있는 곳
▲화림교 너머 바위에 올라앉은 거연정의 모습, 관광객이 기암괴석 위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고 있다.
경남 함양에 가면 일상을 잠시 잊고 더위를 식히던 선비처럼 숲과 계곡, 정자에서 시 한 수 읊으며 유유자적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화림동(花林洞) 계곡에 자리한 함양 선비문화탐방로다.
함양 선비문화탐방로는 전체 10km가 조금 넘는 코스로 화림동 계곡을 따라 정자를 둘러볼 수 있다. 뒷짐 지는 선비걸음으로 데크길을 걸으며, 알싸한 나무냄새와 꽃향기를 맡아 보자.
▲높게 솟아 있는 소나무 밑에 자리한 영귀정으로 가는 데크길, 관광객이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걷고 있다.
선비문화탐방로는 계곡에 있는 농월정(弄月亭)을 중심으로 거연정(居然亭)에서 농월정까지의 6km의 1코스와 농월정에서 광풍루(光風樓)까지 4km의 2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호성마을로 가는 탐방로에 파란 하늘과 논밭이 펄쳐져 있다.
이번에는 도보로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1코스를 찾았다.
이곳을 찾은 한 관광객은 “데크길을 따라 높게 솟아 있는 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시원한 그늘과 코스마다 자리해 있는 고풍스러운 정자에서 더위를 식히며 선비가 된 느낌을 받았다”며 웃었다. 계곡 기암괴석 위에 자리한 정자 위에 올라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면 시 한 수가 절로 나올 듯했다. 탐방로에 넓게 펼쳐진 초록색 논밭과 산은 높은 빌딩숲에 익숙한 우리의 마음을 뻥 뚫리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계곡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 위에 거연정이 자리하고 있다.
▲선비문화탐방로를 나타내는 표지판.
▲동호정 누각에 걸터앉아 차일암을 바라보고 있는 관광객.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에 가장 크고 단청이 화려한 동호정은 자연암반 위에 세워졌다.
▲황암사 주변으로 초록색 산이 펼쳐져 있다.
▲월연암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는 관광객 너머로 농월정의 모습이 보인다.
월간조선 2018.10월 호 글·사진 : 조현호 월간조선 기자
○합천
▲테마마을 산마루
◇부산
▲남구 수영구 이기대 - 해무
▲오륙도
▲해무 속의 진구와 남구 일대
▲유엔공원
▲해파랑길. 오륙도에서 출발 - 해운대 미포 광안리 여러 길이 있다
▲광안리 수영만
▲광안대교
▲광안해변
▲남천동 벚꽃길
▲동래구 충렬사
▲사하구 을숙도 풍경 - 베수비오
▲영도구 일대의 해무 14.7.24
▲중구 용두산공원
▲진구 초읍 = 성지곡수원지
▲해운대구 누리마루
▲누리마루와 광안대교
▲마린시티가 보이는 수영만
▲금련산에서 본 해운대 아이파크와 영도
▲바다안개 낀 해운대 풍경
▲해운대 해수욕장
▲해운대 백사장 - 평균 너비 36m에서 1년만에 72m로 면적도 12만4000평방미터로 넓어졌다
▲해운대 마린시티 아이파크
▲장마 소강 상태의 해운대 해무 풍경 16.7.6
▲헤무로 장관을 이룬 해운대 마린시티 17.4.16
▲송정 해수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