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02/ [11]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꾼 플류트선 - [20] 궁정 유대인은 재무 장관의 원형이었다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02/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2023.01.29
[11]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꾼 플류트선
적재량도 많고 빨라 ‘바다의 마부’라고 불려

▲1538년의 암스테르담 항구 모습.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원래 ‘암스텔강의 둑’이란 뜻이다. 13세기에 어민들이 암스텔강에 둑을 설치하고 정착한 데서 유래했다. 그 뒤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함부르크의 맥주 수출항으로 번창했다. 16세기 중엽부터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앤트워프나 브뤼헤보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네덜란드의 유대인 수용정책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들하고 결혼하거나 국교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원하는 바였다.
◇ 간척사업에 풍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다
‘수면보다 낮은 땅’이라는 뜻의 네덜란드는 전 국토의 25%가 바다보다 낮은 탓에 수시로 바닷물이 들어왔고, 비가 내릴 때마다 강물이 넘쳤다. 비가 오고 나면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사람들은 나무 신발을 신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범람하는 물과 싸우며 살아야 했기에 물을 다스리는 치수 시설이 발달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 물을 퍼내는 풍차가 그중 하나이다.
네덜란드는 산이 거의 없고 전 국토가 평평했기 때문에 일 년 내내 북해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의 나라였다. 이 바람을 이용해 풍차를 돌렸다. 풍차 날개의 최대 회전속도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분에 평균 24회 정도 회전한다. 이를 이용해 바닷가에 뚝을 쌓고 풍차로 바닷물을 빼내어 간척지를 개발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중계무역이 늘어나자 16세기 말에 암스테르담 항구 기능을 확대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른바 ‘새로운 항구도시 건설 프로젝트’였다. 이는 부채꼴 형태의 운하 체계를 이용하여 습지의 물을 빼내고, 군데군데 늪지를 매립하여 항구를 확장하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이 간척사업에 풍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 풍차 동력 활용해 목재업과 조선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다

▲풍차. /위키피디아
그런데 풍차가 물 빼내는 용도 이외에도 유용한 용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594년 네덜란드의 한 발명가는 풍차 날개의 움직임에 맞추어 수직으로 톱질을 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최초의 풍력 활용 제재소를 발명했다. 네덜란드에서 16세기 말 목재 제재소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때맞추어 풍차 동력을 활용한 ‘목재 제재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풍차는 증기기관 등장 이전 좋은 동력원이었다.
덕분에 목재 제재업과 조선업에 표준화와 분업화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잔(Zaan) 강 유역에 600개가 넘는 풍차가 세워져 최초의 공업단지가 만들어졌다. 풍차 제재소들이 생산한 목재는 네덜란드 내부 수요뿐 아니라 여러 국가로 수출되었다. 그 뒤 풍차의 동력을 활용해 방직 등 직물업도 발전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영국과 스페인에서 양모를 들여와 직조하고 염색까지 해서 이를 유럽 전역에 팔았다. 대표적 직물업 중심지 레이덴은 17세기 유럽 최대 직물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풍차 동력으로 제당업, 염료가공, 제지, 도자기 제조 등 제조업과 출판, 운송, 상업 등 서비스산업까지 다양한 분야가 균형 있게 발전했다.
◇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꾼 플류트선

▲플류트선. /위키피디아
목재업이 발전하자 이는 즉시 조선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95년 홀란트 주 암스테르담 북부 호흔(Hoorn)의 조선소에서 갑판이 좁고 선복이 큰 형태의 배가 개발되었다. 이른바 플류트(Fluyt)선이다. 배불뚝이 배 또는 뚱보선이라 불릴 만큼 앞뒤가 둥글둥글하고 갑판은 좁고 상품 싣는 선복이 넓은 배다.
이 배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자. 16세기 중반 베네치아에 게토가 생기자 그곳에서 해상무역과 조선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히지 않으려고 대거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왔다. 그 뒤 목재 가격이 올라 선박 건조 비용이 상승했을 때, 베네치아는 16세기 식 표준을 고수한 반면,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기존의 갤리온선보다도 좀 더 가볍고 조종하기 쉬운 배를 개발했다. 이것이 베네치아와 네덜란드 간 조선업과 해운업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게다가 이탈리아와 그 인근 나라들에는 배 만들 큰 나무들이 대부분 벌채되어 희귀해졌다. 반면 네덜란드는 핀란드 등에서 배 만드는 큰 원목을 얼마든지 수입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업과 해운업은 네덜란드의 독보적인 산업이 되었다.
영국도 이에 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네덜란드 유대인의 과감한 모험정신 앞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발트해를 지나려면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통행세 부과 기준이 갑판의 넓이였다. 당시는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하여 대부분 배에는 양옆으로 수많은 대포를 장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굵은 목재를 써서 갑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대포를 장착하지 않거나 12~15문 정도의 대포만 설치하여 무장을 최소화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값싼 나무로 화물칸을 배불뚝이로 만들고 갑판은 좁게 만들어, 제작 경비와 함께 통행세도 절감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곧 플류트선은 흘수선(waterline)에서 갑판으로 올라갈수록 선폭이 좁아졌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박은 양옆은 통통하고 둥글지만, 갑판은 매우 좁았다.
오늘날의 컨테이너선인 셈이다. 이 배는 갑판이 좁고 긴 대신 선창이 넓어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돛이 매우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선박이 가벼워 속도도 빨랐다. 플류트선의 설계는 초기 갤리온선의 설계와 유사해 그리 크지 않았다. 보통 플류트선 한 척의 적재 용량은 약 250t~500t에 길이는 25미터 내외였다. 게다가 배불뚝이 저중심 설계라 출발 및 정지가 쉽고 폭풍우 같은 악천후에도 잘 견뎠다.
발트해의 통관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플류트선이 통행료를 줄이기 위해 갑판을 좁게 개발했다는 것은 끈질긴 신화라는 이야기이다. 1562년부터 1632년까지 70년 동안 통행료 기록부에 의하면, 징수관이 선하증권을 사용하여 선박의 선적 용량 곧 배의 너비, 길이, 깊이를 평가한 다음 이에 따라 통행세를 매겼다는 것이다.
◇ 플류트선 건조비가 적게 든 이유

▲세계 5대 갯벌.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앞 바덴 갯벌은 우리 서해 갯벌과 함께 세계 5대 갯벌의 하나이다. 곧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큰 갯벌에서는 썰물 시에도 배가 안정적으로 정박해 있으려면 밑바닥이 뾰족한 유선형의 배 곧 ‘첨저선’이 아닌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야 한다.
즉 플류트선은 용골(선박 바닥의 중앙을 받치는 길고 큰 재목)을 먼저 만들어 그 속에서 제작하는 첨저선과는 달리 배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 땅 위에서 직접 건조할 수 있어 선박 건조비가 싸게 먹혔다. 영국에 비해 60% 수준이면 족했다.

▲평저선 및 첨저선 차이. /위키피디아
게다가 배의 크기도 마음대로 키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의 용적이 최대치가 되도록 설계되어 적재 화물도 첨저선에 비해 두 배 이상 실을 수 있었다.
◇ 네덜란드 해상운임, 다른 나라의 1/3
이런 이점 이외에도 발트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1번 왕복할 동안, 항해 속도가 빠른 플류트선은 2번 왕복할 수 있었다. 플류트선은 2-3개의 마스트(돛을 달기 위하여 배 바닥에 세운 기둥)에 가로돛을 달았고, 마스트 높이는 갤리온의 마스트 높이보다는 높았는데 이는 빠른 속도를 위한 것이었다.

▲플류트선 모습. /위키피디아
또한 돛 줄을 조작하는 복합 도르래(block and tackle)를 돛대에 최대한 많이 달아 승선 인원이 보통 9~10명으로 영국 동급선박의 30명에 비해 저렴하게 운행할 수 있었다.
플류트선은 보통 12문의 대포를 장착했는데 때로는 더 많은 화물을 운반하기 위해 대포를 떼어내어 해변에 남겨두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화물 운송비를 1/3까지 낮추었다. 이로써 네덜란드가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했다. 그런데 대포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가벼워 해적선으로부터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인은 “바다의 마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상운송 물량이 폭증하자 이런 장점을 가진 배를 대량 건조했다. 이를 위해 조선소의 설비와 자재, 계측장비 등을 표준화했다. ‘표준화’ 또한 유대인 장기였다. 청어 산업에 이은 표준화가 조선업에서도 위력을 발했다. 이로써 배를 저렴하고 빠르게 건조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중엽에 이미 북방무역의 70%를 장악했다. 보유 상선 수도 나머지 전 유럽의 상선 수보다도 많은 1800척이나 되었다. 1602년 동인도회사 출범 이후 상선 건조는 대폭 늘어났으며 특히 1625년부터는 약 1만 명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매년 400~500척의 선박을 건조해 네덜란드 상선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497년부터 1660년까지 외레순 해협을 통과한 선박이 약 40만 척이었는데 이 중 60%가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1670년 네덜란드 상선은 총 56만8000톤의 운송량을 기록했으며 이는 유럽 전체의 절반 이상이었다.
[12] 목숨보다 신용...17세기 네덜란드가 번영한 이유

▲라인강 하류에 위치한 네덜란드 저지대. /위키피디아
네덜란드는 라인강과 마스강, 발강 하류에 걸쳐 있어 중세부터 내륙 수로를 이용한 물류가 발달했다. 플류트선은 배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 얕은 수심의 바다나 강에서도 운용할 수 있어 수로를 이용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 화물을 배달했다. 플류트선이 더 이상 못 올라가는 수심이 얕은 강에서는 선상에서 작은 배를 내려 가능한 한 고객 가까이에 화물을 배달해주었다. 이러한 서비스에 고객들은 감동했다.

▲플류트선. /위키피디아
중세 이래로 라인강 유역 나루터와 상업 도시에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상권을 주도하고 있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 때 가장 많은 학살을 당한 사람들이 라인강 변의 유대인들이었다. 이때 동구와 러시아로 피란 간 유대인 후예들이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뜻의 ‘아슈퀴나지’이다. 16세기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라인강 주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과 협동해 내륙 물류 산업을 장악했다. 또한 당시 유럽의 주요 항구인 앤트워프, 세비야, 런던 등이 얕은 바다를 끼고 있거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플류트선은 화물선으로 가장 효율적인 배였다.
◇네덜란드 포경 산업의 발전

▲북극해의 스발바르제도. /위키피디아
1596년 네덜란드 항해가 빌렘 바렌츠가 북극해의 스발바르 제도를 발견했다. 그 인근에 고래와 물개, 바다코끼리가 많았다. 포경은 기원전 6000년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 인근이 최초 포경지의 하나였다.
초기 포경업은 주로 해안가에서 이뤄졌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몰려 나가 고래가 지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뒤를 쫓아가 호흡이 가빠진 고래가 물 위로 떠오를 때 고래에게 집단으로 작살을 던져 잡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연해에서 고래가 사라지면서 먼바다로 나가게 된다. 먼바다에서 큰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고래를 발견하면, 선상의 작은 배를 내려 노를 저어 가서 작살을 던져 사냥하는 방법이었다.

▲긴수염고래 사냥. /위키피디아
그런데 대형 고래인 긴수염고래만은 사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고래들은 헤엄치는 속도가 빨라 범선이나 노를 젓는 배로는 따라잡기 어려웠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포를 이용한 작살로 고래 잡는 기술을 발명하여 그곳을 장악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1610년경부터 고래잡이 분야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대량의 고래기름과 고래수염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고래기름은 오랫동안 밤거리 가로등에 사용되었다. 게다가 고래 고기는 찬 음식으로 분류되어 육식이 금지된 금식일에도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선으로 알려져 오랜 기간 서구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 무렵 네덜란드 포경선단은 약 150척에서 250척으로 이루어졌으며 한 해에 잡은 고래 수만 750~ 1250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경선단은 240여 년간 독점적 포경으로 북극해 일대의 고래를 거의 멸종 단계로 몰아넣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신용
16세기 전후 포르투갈이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열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개척한 해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야 했고, 1521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일주한 해로는 남아메리카 남단을 지나야 했다. 네덜란드는 더 빠른 길을 찾고 있었다. 북극 바다를 지나면 아프리카의 희망봉이나 남아메리카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지 않고 빠르게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뱃길을 거치면 1만2000㎞이지만 아프리카를 돌아가면 2만4000㎞이다. 운항 거리와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스페인 왕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면서도 네덜란드는 끊임없이 북동항로를 찾는 배를 내보냈다. 그 선두에 빌렘 바렌츠 선장이 있었다.

▲백야현상. /위키피디아
빌렘 바렌츠 선장은 북쪽으로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최단 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모험에 나섰다. 그는 1594년 1차 항해에서 이미 노바야젬라 섬에 도달하고 주변 섬들을 발견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듬해 2차 항해에 실패하는 통에 한 푼의 보조금도 받지 못했지만 굴하지 않고 1596년 3차 항해길에 올랐다.
바렌츠 선장은 화물을 싣고 새로운 북극 항로를 찾아 한여름에 3차 항해길에 올랐다. 그들은 여름철이면 24시간 낮이 지속되는 ‘백야 현상’으로 얼지 않은 바다에서 최단 북극 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배는 빙하에 갇히게 된다. 선원들은 닻을 내리고 빙하 위에 올라 갑판을 뜯어 움막을 짓고 불을 지폈다. 그들은 8개월 동안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지냈다. 배의 갑판을 뜯어 불을 피우고, 최소한의 음식으로 버티다 그 식량마저 떨어지자 북극곰과 여우를 사냥해 허기를 채웠다. 그사이 네 명이 죽었다.

▲바렌츠 선장의 죽음. /위키피디아
선장과 선원들은 1597년 6월 작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항해에 나섰지만, 일주일 뒤 쇠약해진 바렌츠 선장은 숨을 거두었다. 결국 선장을 포함해 8명이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죽어가면서도 위탁받은 화물에 있는 식량과 의복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오십여 일 뒤, 얼음이 풀리면서 생존자 12명이 러시아 상선에 구조되었다.
구조된 선원들이 그해 11월 돌아왔을 때 네덜란드는 감동에 젖었다. 위탁화물인 옷과 식량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얼어 죽고 굶어 죽으면서도 화물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경쟁국에 비해 값싼 운송료와 더불어 네덜란드가 해상운송을 장악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신용’이었다. 냉엄한 도덕률과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명예 의식과 상도의에서 17세기 네덜란드의 번영이 꽃피었다.
사람들은 감동했다. 목숨 바쳐 지킨 ‘상도의’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자부심이 되어,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영원한 기록이 되었다. 유대인의 상업적 재능에 더해진 ‘신뢰’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원양 항해의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그의 <트러스트: 사회도덕과 번영의 창조> 저서에서 ‘신뢰’가 국가 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바로 ‘신뢰’였다.

▲네덜란드 10유로 동전. /위키피디아
노르웨이와 러시아 북서부 앞에 있는 바렌츠해는 빌렘 바렌츠 선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게다가 바렌츠 선장이 죽기 전해인 1596년에 발견한 스발바르 제도에서 대량의 석탄이 발견되어 네덜란드에 큰 부를 안겨다 주었다. 그는 죽어서도 애국자였다. 47년 짧은 생을 보낸 바렌츠는 네덜란드 10유로짜리 동전의 주인공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청어가 발전시킨 네덜란드 경제
162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어선은 2000척이 넘었는데 대부분 70톤에서 100톤에 이르는 청어잡이 배였다. 선원들이 한 척당 15명 정도 승선했으니 단순 계산으로도 3만 명 이상의 어부가 조업했다. 1630~1640년대에는 연간 약 3만2500톤의 청어를 처리해 당시 유럽 전체 청어 포획량 6만 톤의 절반을 넘겼다. 이렇게 네덜란드의 부는 청어로부터 시작되었다.
청어잡이와 청어의 가공 처리, 통 제작, 망, 어선 건조 등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합하면 그 수가 약 45만 명에 달했다. 당시 국내 노동인구의 태반이 청어와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수산업에서 촉발된 활황은 배 만드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또 목재업·무역업·금융업의 발전을 낳았다. 청어 어업이 네덜란드 경제와 해운 그리고 무역과 금융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대부업이 유대인 몫이 된 이유
고대로부터 이자는 금기시되어 왔다.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자 불임설”을 주장했다. 돈은 그 자체로 이윤을 낳을 수 없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자 받는 행위를 맹렬히 비난했다. “고리대금업은 가장 미움을 받는다. 그것이 미움을 받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 왜냐하면 화폐란 교환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지 이자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자는 고대로부터 비난 받아 왔다.
기독교 또한 이자를 금했다. 이자는 돈을 빌려준 시간에 대해 받는 반대급부인데 시간은 신께 속한 영역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인간이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융’이라 부르지 않고 ‘고리대금’으로 불렀다. 중세는 아무리 값싼 이자라도 어쨌든 이자를 받고 돈을 꿔주면 고리대금이라고 칭했다. 기독교는 교회법인 카논 법률에 이자놀이를 불법으로 명시해 1179년부터 이자 받는 사람들을 아예 파문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교황 니콜라스 5세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처형한, 영원히 저주받을 족속인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순결한 기독교인들을 죄악으로부터 지키도록 했다. 가톨릭이 유대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허용한 것은 어차피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들이니까 이런 역할을 맡겨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대부 활동으로 경제 부흥을 촉진시킬 필요도 있었다.
반면 유대교에서는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는 받을 수 있되 너의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구약성경의 구절을 근거로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탈무드도 이자를 많이 받는 고리대금은 엄격히 금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고리대금업자를 살인자와 동일시했다. 기독교도들은 대부업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이를 기피했고 자연히 대부업은 유대인의 몫이 되었다. 그 때문에 중세 기독교 국가의 왕실과 귀족들은 국고 관리를 주로 유대인에게 맡겼다. 유대인의 대부업은 이자를 원천적으로 부정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자 제한 폐지로 채권 시장이 활성화되다
117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대금업자는 파문한다”고 선언하자 각국 군주가 돈 빌리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후 기독교 사회에서는 과연 대금업이 무엇이냐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이어졌다. 한편 국제 무역이 증가하면서, 어음 거래 또한 늘어났다. 어음 거래를 막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아 어음 거래는 금융 거래가 아닌 매매의 연장이므로 대금업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자 자금 융통을 위해 어음을 발행하면서도 마치 실제 거래가 있었던 것처럼 꾸몄다. 이런 어음을 ‘건식 어음’이라 했다.
상업상의 실제 어음과 건식 어음을 구분해 가려내는 일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16세기 초 프랑스 신학자 장 거송(Jean Gerson)이 “차입자를 가혹하게 옥죌 목적으로 대출할 때”만 대금업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독일의 에크(Eck)는 『5% 계약에 관한 연구』(1515년)라는 책을 통해 5% 이자야말로 하느님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합리적 상한선이라고 거들었다. 푸거 가문에서 뒷돈을 댄 결과였다. 그러자 교황 레오 10세가 같은 해 『가난한 사람을 위한 대출법』을 통해 5%의 이자 수취를 합법화했다. 레오 10세는 다름 아닌 메디치 은행 대표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위대한 로렌초(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이었다.
그 무렵 광산업을 통해 큰돈을 번 북부 독일의 유대 푸거가에 빚 지지 않은 통치자들은 별로 없었다. 당시 푸거가는 바티칸 교황청의 최대 채권자였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대부업 금지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1517년 ‘라테라노 공의회’는 이자 받는 대부업에 대한 대부분의 금지 조항을 폐지했다. 금융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이때부터 유럽 금융의 중심은 북부 독일 한자 도시들에서 유대인이 금융을 주도하는 앤트워프로 이동했다.
1545년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칼뱅이 레오 10세의 결정에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왜 이자가 꼭 5%이어야 하는가? 칼뱅이 히브리 성경을 오래 연구한 결과 대금업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는 두 가지였다. “깨문다”는 뜻의 네섹(neshek)과 “늘린다”는 뜻의 타빗(tarbit)이었다. 이 중 성경에서 명백히 금지하는 것은 네섹뿐이라는 것이 칼뱅의 결론이었다. 갚을 능력이 없는 불쌍한 자는 깨물지 말고 대가 없이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얼마든지 이자를 받고 대출해줄 수 있는 것이다. 칼뱅은 대금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가톨릭의 경제관을 뒤집었다.
이는 사회적으로 금융업이 공인되고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자금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이자가 결정되었다. 곧 빌리려는 돈보다 빌려주려고 하는 돈이 적으면 이자는 올라가지만, 그 반대 현상 곧 빌리려는 돈보다 빌려주는 돈이 더 많으면 이자는 내려갔다. 이로써 수급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채권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저지대 채권시장의 탄생
앤트워프 유대인들은 상업과 무역에 환어음과 차용증 제도를 정착시켜 신용사회를 구축했다. 당시 저지대에서는 ‘부채증서의 양도에 관한 법률’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토대로 유대 상인들은 환어음을 통해 빠르게 자본을 모으고 순환시킬 수 있어 은행 등 금융업이 발달해 신용거래 기초를 마련했다.
이러한 신용을 바탕으로 1550년대 유대 금융인들은 채권시장을 활성화시켜 정부도 강제 공채제도 대신 채권시장을 통해 공채를 발행해 대부받는 관행을 정착시켰다. 당시에는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평소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전쟁 공채를 사서 전쟁 자금을 지원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 전통은 강제화되었다.
저지대 주 정부와 도시들은 세 종류의 공채를 발행했다. ‘오블리가티엔(Obligatien: 단기채권)’은 ‘무기명 채권’으로 이를 소지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은행에서 현금으로 매각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중세 베네치아 이래로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무기명 유가증권을 선호했다.
장기 채권으로는 ‘로스렌텐(Losrenten)’이 있었다. 이는 종신연금으로 무기명 채권과 달리 공적 원장에 자기 이름을 등록하고 정기 이자를 받았다. 이 증권은 시장에서 매매될 수 있었고, 소지자가 죽으면 상속되었다. 마지막으로 ‘레이프렌텐(Lijfrenten)’이 있는데 이는 소지자가 죽으면 지급이 중단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로스렌텐과 비슷했다. 곧 사망하면 지급이 중단되는 종신형 연금과 후손에게 대물림이 가능한 상속형 연금의 차이였다. 이러한 채권시장이 가장 발달한 곳은 유대인이 많이 모여든 앤트워프였다. 영국 왕실도 큰돈이 필요한 경우 앤트워프에서 융통해 썼다.
[13] 유대인들, 종교의 자유 찾아 암스테르담에 몰려들다
간척지 인센티브가 암스테르담을 탄생시키다
험난한 자연환경을 극복한 저지대 간척의 역사가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저지대는 빙하기를 거치면서 해수면과 지반의 침강과 융기를 통해 현재의 지형을 형성했다. 저지대는 해수면보다도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그 흔한 언덕조차 보기 힘든 평평한 늪지대와 갯벌이 대부분이었다.
◇간척지 인센티브가 암스테르담을 탄생시키다
네덜란드 텍설(Texel)섬에서 덴마크 남부 해안까지 이어지는 바던해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에서도 가장 큰 갯벌이다. 밀물과 썰물의 조수 간만 차가 3m가 넘고, 길이는 약 500㎞, 넓이는 약 1만㎢에 달한다. 라인강, 마스강, 스헬더강 등 북부 유럽의 3대 강이 만드는 삼각주를 중심으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바덴해 갯벌. /위키피디아
그러다 보니 저지대 해안가가 모두 강 하구에 쌓인 침적토와 갯벌과 늪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홀란트주는 늪지대 간척사업을 독려하기 위해 주민들이 간척한 땅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그러자 1270년경 어민들이 암스텔(Amastel)강에 둑[Dam]을 쌓고 다리를 놓아 늪지대를 간척하여 정주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 이름이 그대로 암스테르담(Amastel+dam=Amasterdam)이 되었다.
▲해수면보다 낮은 늪지대. /위키피디아
◇발트해 무역과 라인강 무역이 만나다
저지대 앞 바다 북해는 북위 60도 중위도 저기압대에 걸친 까닭에 기상 악화가 잦고 바람이 많이 분다. 심할 경우 폭풍해일이 들이치는데, 이 폭풍해일이 북해 연안선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도 있다.
▲텍셀섬과 무너진 모랫둑. /위키피디아
1282년 발생한 해일이 북해에 있는 텍설섬 부근 모랫둑을 무너뜨리면서 바닷물이 들어와 자위더르해가 만들어졌다. 이 재해가 암스테르담을 항구도시로 만드는 운명의 첫 신호탄이었다. 침적토가 쌓인 암스테르담 부근까지 큰 배가 들어오면서 해상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들어온 발트해 상선들에 의해 작은 마을이었던 암스테르담이 항구로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라인강과 연결되는 강 하구에 위치한 마을의 특성을 살려 라인강을 타고 올라가 내륙 수로 교역망을 넓혀나갔다. 이때 라인강 주변에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이들이 라인강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항구 기능이 커지자 이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은 1367년 한자동맹의 하나인 ‘쾰른동맹’에 참가하여 라인강 내륙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은 위도에 따라 기후 차이가 크다. 북부 유럽은 숲이 울창하고 농사짓는 데 적합했고, 남부 유럽은 포도주 등 술과 소금을 얻는 데 유리했다. 이렇게 남북의 생산품이 달랐기 때문에 무역이 필요했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발트해 상선들에게 남부 유럽의 술과 소금을 팔았고, 남부 유럽에는 발트해 상선들이 가져온 목재와 곡물을 팔았다.
1421년 11월 대규모 홍수로 북부 저지대 10개 도시가 물에 잠겼다. 이후 사람들은 해안에 방조제를 쌓기 시작해 간척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땅을 ‘폴더’라 불렀다. 이렇게 저지대 사람들은 간척사업을 통해 땅을 넓혀갔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 물을 빼내는 풍차는 간척사업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도구였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저지대에 모여든 것은 15세기 말부터였다. 곧 1492년 스페인에서의 추방, 1497년 포르투갈에서의 추방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저지대에 몰려왔을 때 대부분은 플랑드르 항구도시에 정착했고, 일부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는 수천명에 불과했다.
▲네덜란드 나막신. /위키피디아
북부 저지대 사람들은 쓸 만한 땅을 만들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수로를 팠다. 그러면 물기는 빠지지만 땅이 주저앉는 지반침하 현상이 발생했다. 땅이 꺼지면 바닷물이 밀려든다. 그러면 제방을 더 높이 쌓고 풍차로 물도 계속 퍼내야 했다. 그래서 그곳 늪지대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둑을 쌓고 바닷물을 빼낸 후 생긴 땅은 소금기가 있어 농경지로 바로 쓰지 못했다. 소금기를 빼내기 위해 땅을 말려 소금을 얻은 뒤, 하천으로부터 담수를 끌어와 민물 호수를 만든 후 나중에 민물을 빼내면 농경지로 쓸 수 있었다. 둑을 쌓고 바닷물을 빼내고 다시 하천의 민물을 끌어오다 보면 자연히 생기는 것이 운하였다.
이렇게 간척에 성공해 생긴 땅은 다른 유럽 나라들과 달리 군주나 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는 절대 봉건주의 곧 군주나 주교의 통치권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들이 마을의 주인이라는 의미였다.
그 무렵의 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시민들이 땅을 자유로이 사고팔 수 있었으며,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이 군주나 영주로부터 도시의 자치권을 사들였다. 이는 훗날 ‘네덜란드 공화국’ 탄생의 토대가 된다. 그러다 보니 저지대는 특정 종교나 사상에 대해 제약이 없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다.
◇유대인들이 키운 항구도시, 암스테르담
유대인들도 나서서 간척사업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을 베네치아와 비슷한 항구도시로 만들기 위해 ‘항구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항구에는 상업지역과 늪지대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늪지대의 토탄을 채취해 팔면 돈이 되었다. 토탄은 식물류가 오랜 기간 땅속에 퇴적돼 생성된 석탄 초기 과정의 물질로 연료로 쓰였다.
이렇게 늪지대의 토탄을 파내면 드러나는 모래 자갈층 밑바닥에, 물에 잘 썩지 않는 참나무 말뚝들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돌과 흙을 덮어 인공섬을 만들어 집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땅과 집을 획득했다. 지금의 암스테르담은 70%가 간척지로 약 90개의 인공섬이 1500여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1538년 암스테르담.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모여드는 유대인 덕분에 1514년에 이르러서야 인구가 1만1000명에 도달했다. 당시 북부 저지대 인구 백만명 중 20%가 1만명 이상 규모 도시에 살았다. 이렇게 도시화율이 높다는 것은 농업 환경이 좋지 않아 장원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항구도시에 어업 관련 종사자들과 유대인과 같은 상인층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그 뒤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이 소금 상권을 장악하고 청어 산업을 주도하면서 저지대는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다지게 된다. 이후 유럽 곳곳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이 무렵 안트베르펜 유대인들도 암스테르담으로 건너오면서 1541년 이후 안트베르펜 경제가 후퇴하면서 상대적으로 암스테르담이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 뒤 암스테르담 인구는 1557년 2만2000명을 넘어섰고 1564년 3만명을 돌파했다.
◇유대인들, 네덜란드 독립전쟁 자금을 적극 지원하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결혼동맹을 통해 저지대와 스페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스페인 왕국은 저지대에 군인을 주둔시켜 이단심문을 통해 가톨릭을 강요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과 칼뱅파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을 추방해 세수가 급감한 스페인 왕국은 재정 파탄에 시달리자 저지대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해 스페인 왕국 국세의 40%를 저지대에서 뜯어갔다. 이러한 종교재판과 중과세 정책에 항거하는 상인들이 반란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때 1566년 칼뱅주의자들이 ‘성상 파괴 운동’을 벌여 저지대 성당들을 모두 파괴했다. 이를 반역으로 간주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만명의 군대와 함께 악명 높은 알바 공작을 파견했다. 이 일로 8000명이 처형당하고 10만명이 국외로 탈출했다.
이에 반발해 저지대 17주는 1568년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이른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중 스페인 왕국의 재정 파산으로 인해 안트베르펜에 주둔한 용병들에게 2년 치 월급이 밀리자, 1576년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 통에 시민 7000명이 학살당했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안트베르펜을 탈출해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저지대 북부 7개 주. /위키피디아
1578년 지금의 벨기에 지역 남부 10주는 스페인 군대에 굴복해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대인과 칼뱅파가 많이 사는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 등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해 항전을 계속했다. 이와 동시에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로써 종교의 자유를 찾아 더 많은 유대인과 프랑스의 위그노(칼뱅주의를 추종하는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러던 차에 1580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합병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합병하면서 암스테르담 유대 상인의 동방물산 유통 참여를 배제하고 독일 함부르크 유대 상인들에게 이 권리를 넘겼다. 유통 거점이 암스테르담에서 함부르크로 바뀐 것이다. 이때 부상한 가문이 독일의 유대 가문 푸거(Fugger)가였다.
게다가 이듬해인 1581년 7월에는 북부 저지대 7주가 주도하여 더 이상 왕정이 아닌 의회를 통해 각 주가 권한을 행사하는 세계 최초의 연방제 국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탄생시켜 독립을 선언했다. 유대교와 영국에서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칼뱅파 청교도와 프랑스의 칼뱅파 위그노는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과 교리가 일맥상통하여 궁합이 잘 맞았다. 특히 상업과 금융에 대한 시각과 부의 축적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에 독립전쟁이 격화되자, 유대인들은 이제 네덜란드마저 스페인에 정복당하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더 이상 피란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가 연방분담금 곧 국방비의 대부분을 부담했다. 홀란트가 65%, 제일란트가 15%로 두 주가 80%를 담당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주 정부가 발행하는 전쟁채권을 열심히 사주었다. 7주 중에서 홀란트가 가장 넓고 조세 부담률도 높아 네덜란드를 아예 ‘홀란트’라고도 불렀다.
◇소매금융의 출현, 개인에게 직접 채권을 팔다
암스테르담의 금융혁명은 16세기 중엽 유대 대상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인들은 은행 대부를 받던 방식에서 탈피해 부자들에게 직접 채권을 팔았다. 곧 기존 은행가에 채권을 팔던 것과는 달리, 개인 부호들에게 직접 채권을 팔기 시작했다. 자금 조달에서 ‘소매금융’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영국보다 100년, 미국의 남북전쟁 시 채권보다 300년 앞선 것이었다. 이러한 기법이 유대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이후 런던을 거쳐 300년 뒤 미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때 제임스 쿡은 북부 연합채권을 은행권을 통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팔아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유대인, 전쟁 채권시장을 활성화하다
1568년 시작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초기에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정부가 발행하는 장기 공채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용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 유대 징수 청부인들이 발행하는 단기채권 ‘오블리가티엔’은 정부의 자금 융통에 도움을 주었다. 징세 청부 제도란 나라에서 세금을 거둘 때, 민간 청부인에게 도급을 주어 그 사람이 먼저 할당된 세금을 납부하고, 그 뒤 청부인이 자기 수익을 보태 세금을 거두던 제도이다. 이렇게 급한 불을 끈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해외 디아스포라 자본을 장기 채권시장에 끌어들여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
◇자영농에 의해 농업혁명이 이루어지다
16세기 들어 저지대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영주에게 속박되어 있는 장원 제도 아래 농노들과 달리 저지대는 간척지 개발로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자영농이 많았다. 이런 사회 시스템 덕분에 농업에서도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은 기후 여건상 밀과 보리 같은 밭작물이 주요 곡물이다. 그간의 삼포제는 경작지의 3분의 1을 휴경지로 정해 생산에서 제외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목축과 퇴비 생산을 위해 목초지가 따로 있어야 했다. 그런데 휴경 대신 땅을 네 부분으로 나눠 계절에 따라 ‘귀리나 보리, 클로버, 밀, 순무’ 순으로 돌려짓기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중세부터 600년간 이어진 삼포제 농법을 극복하고 ‘4포제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토양에 질소를 공급해 지력을 회복시키는 클로버와 파종 후 2~3개월이면 수확이 가능한 순무는 가축 사료로도 이용되었으며, 퇴비를 사용할 때보다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했다. 결과적으로 경작 면적이 3분의 1 이상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게다가 잎이 풍성한 순무를 저장했다가 겨울 동안 가축 사료로 사용하여, 예전처럼 가축 먹이를 구할 수 없는 겨울이 오면 대부분 가축을 도축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일년 내내 가축을 사육하여 고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이는 네덜란드가 낙농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꼭두서니 염색. /위키피디아
◇자영농에 의해 농업혁명이 이루어지다
유대인들은 당시 이미 시장경제 원리에 정통했다. 수출과 산업에 필요한 고부가 가치 작물을 재배하고 값싼 식량은 대부분 수입했다. 고부가 가치 작물 중 하나가 직물 염색 원료로 쓰는 작물의 재배였다. 유대인들은 아마와 삼 그리고 자주색 염료 식물 ‘꼭두서니’와 남색 염료 식물 ‘판람근’(대청)을 재배했다. 직물 산업과 염색 산업에 꼭 필요한 작물들이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자주색 염색 기술을 비기에 부쳐 비밀로 간직해왔던 민족이다. 고대의 자색은 가나안 해안가 뿔고둥 내장에서 추출한 체액으로 만들어 무척 귀했다. 이 염료로 염색한 최상품 옷감 1파운드는 로마 은화 5만 데나리온으로 같은 무게의 금값에 해당했다. 그래서 자주색을 ‘황제의 색상’ 또는 ‘추기경의 색상’이라 하여 중세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입을 수 없는 고급 색깔이었다.
대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청이라는 관목식물 잎을 거두어 퇴비처럼 식히면 노란 즙이 흘러나오는데 공기 중에 놓아두면 진한 쪽빛을 띤다. 쪽빛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인기가 좋았던 대청 염료는 심지어 파란색의 금이라고 해서 ‘블루 골드’로 불릴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영국산 생모직물을 수입해 이를 자주색과 남색으로 염색해 비싼 값에 수출했다.
자주색과 남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염색이 아니었다. 염색할 때 쓰는 매염제의 구성 성분과 정확한 함량은 오랫동안 유대 공동체 안에서만 전수되는 비밀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직물에 아무리 색을 들이려 해도 세탁 과정에서 색이 바랬다. 따라서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천연염색 기술로 큰돈을 벌었다.
1540년 최초의 염색 서적이 보세티에 의해 기술되어 이후 다른 나라들은 인도로부터 아열대 작물인 남색 천연염료 인디고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쟁력 면에서 네덜란드를 따라올 수 없었다. 이후 레이던이 유럽 최대의 직물과 염색산업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레이던에서 그들의 경전 탈무드를 인쇄하기 위해 출판업도 발전시켰다. 값비싼 천연염료가 인공 합성염료로 대체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이다.
저지대 사람들은 1570년대부터 자연환경에 맞춘 전문 농업을 발전시켰다. 점토 지역에는 곡물을 재배하고, 경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목축업을 하고, 도시 근교에서는 튤립 같은 원예작물을 재배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고부가 가치 경제작물, 유제품, 과일, 원예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고, 맥주의 향료인 홉은 맥주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위그노들이 합류하다
▲1572년 8월 파리에서 발생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칼뱅파인 위그노들이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옮겨온 것은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수천명의 위그노가 살해당한 뒤였다. 이후 5년에 걸쳐 전쟁과 학살이 거듭되면서 위그노들이 저지대로 많이 피란 왔다. 위그노들은 유대인보다 80년 늦게 암스테르담에 발을 들였다.
[14] 인도 항로에 진출한 네덜란드 상인들
앤트워프 봉쇄로 암스테르담이 떠오르다
스페인과 독립 전쟁 와중에 발생한 1576년 앤트워프 학살사건으로 많은 유대인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왔다. 이후 1581년에 네덜란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584년 스페인이 앤트워프를 공격하면서 스페인 해군은 앤트워프 앞의 스헬트강과 플랑드르 해안을 봉쇄했다. 특히 32척의 선단을 사슬로 연결해 아예 스헬트강을 막아버렸다. 이제 앤트워프 항구와 대서양의 통로는 완전히 막혀버렸다. 항구 도시의 상업적 패권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단자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린 알렉산더 파르네제 총독. /위키피디아
앤트워프 시민들은 절망감에 빠졌다. 치열한 공격에도 포위망은 뚫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구원군 대신 인근 도시 브뤼셀, 브뤼헤, 메켈렌의 함락 소식이었다. 1년 이상 저항했던 앤트워프는 결국 1585년 8월 15일 항복했다. 스페인 펠리페 2세는 이단자들을 모두 숙청하기를 원했지만, 파르네제 총독은 상당히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그는 가톨릭교도 이외의 사람들에게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게다가 스페인군이 점령한 이 항구에 대해 네덜란드 해군의 봉쇄가 이어져 앤트워프의 경제는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10만 명이 넘었던 앤트워프는 급속도로 쇠락하여 4만 명의 중소 도시로 전락했다.
그 결과 앤트워프 무역상과 금융인 6만여 명이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등 네덜란드 저지대 7개 항구도시로 이주했다. 그중 태반이 유대인이었다. 이때 암스테르담 인구가 4만 명을 돌파했고 상인 자본 규모가 50%가량 증가했다. 이들이 채권시장 활성화와 동인도 회사 자본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로 인해 채권시장이 살아나자 공화국 정부는 일반 장기 공채와 영구 공채뿐 아니라 복권식 채권도 발행했다. 이렇게 장기 채권이 잘 팔린다는 뜻은 그만큼 채권시장에 자금이 몰린다는 의미였다.
이때부터 앤트워프는 급격히 저물고 암스테르담이 뜨기 시작한다. 먼저 설탕 정제산업이 앤트워프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왔다. 이어 직물업, 무역업, 금융업 등 유대인 주력 산업들도 북부 저지대로 옮겨왔다. 레이던에는 방직공업이, 하를럼에는 리넨 제조업이 활발했다. 곡물이나 후추 등 현물을 거래하는 주요 도시의 상품 거래소에서 현물거래뿐 아니라 선물거래가 발전했다. 내년에 잡힐 청어를 올해 정해진 가격에 미리 거래하는 것이다.
◇칼레 해전이 바다의 주인을 바꾸다

▲칼레. /위키피디아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범선 시대의 도래는 신항로의 개척과 신대륙 발견, 식민지 개척을 가능하게 했다. 범선 시대의 해양력은 연안에서 대양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유럽 각국은 해상무역권의 확보와 해양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해군’이라는 전문적인 군대를 창설해 국가의 가장 핵심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가장 앞서 나간 나라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 해군은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제국을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무적함대’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런데 1588년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칼레 해전 곧 도버 해협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천하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것이다. 이로써 해상권을 영국과 네덜란드가 쥐게 되어 네덜란드 무역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의 합류

▲아시케나지 유대인. /위키피디아
유대인들이 대거 옮겨온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가 가졌던 통상의 흐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경제적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 이러한 흐름은 동구에 사는 ‘아시케나지(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들도 1590년대를 전후해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아시케나지란 히브리어로 ‘독일’(Ashkenazi)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아시케나지는 오랜 세월 게르만과 슬라브 민족들 속에 살다 보니 그들과 피가 섞여 백인화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뿌리는 셈족이다. 셈어와 게르만어의 혼용에 뿌리를 둔 그들의 언어 ‘이디시’어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시케나지 유대인의 근본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독일 라인강 유역에 살다가 11~13세기 십자군 전쟁 때 러시아 등 동구로 이주한 유대인을 일컫는 말이다. 중세 시대 라인강은 중요한 상업 교통로였다. 당시 마인츠·쾰른 등 라인강 주변 지역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마을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이 십자군 전쟁 때 박해와 학살에 시달리다 동구로 피난 간 것이다. 그 뒤 15세기 말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추방, 17세기 30년 전쟁으로 독일 지역에서의 유대인 피난 등으로 많은 유대인이 동구권으로’몰려들었다. 그 무렵 폴란드 등 동구권은 경제발전을 위해 유대인 유치에 열을 올릴 때였다.
오늘날 아시케나지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1520만 명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러시아, 유럽, 중남미 등에서는 스페인·포르투갈계인 세파르디 유대인보다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이 훨씬 많다. 반면 유대인의 조국 이스라엘에는 아시케나지와 세파르디 유대인의 수가 엇비슷한 55:45 비율이다.
세파르디와 아시케나지는 네덜란드에서 큰 차이가 나는 삶을 살았다. 이 둘은 사회 문화적으로 통합이 잘 안 되는 가운데 회당인 시나고그도 따로 지어 살았다. 17세기 말 세파르디는 재력이나 문화적으로 상류 소수층을 이룬 반면, 아시케나지는 하류 다수층을 이루었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이베리아 반도에 살았던 세파르디계 유대인들은 이슬람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폭넓은 저술을 남겼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유대식 스페인어인 ‘라디노’ 곧 히브리어와 스페인어가 혼합된 방언을 썼다. 학식 있고 부유한 데다 혈통에 대한 긍지를 지닌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재주가 많았다. 그들은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고 자유로운 종교적 분파를 따랐다. 유대인들은 아랍문화 속에 라틴 세계를,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고전 과학과 철학의 전달자 노릇을 했다. 이것이 두 세계의 학문을 소개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고대와 중세를 연결하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세파르디계 유대인이 없었으면 고전의 세계를 부활시킨 르네상스도 없었다.
세파르디는 훌륭한 귀금속 장인, 상인, 수학자, 정확한 지도와 항해도 제작자이기도 했다. 그 무렵 일등 항해사와 지도 제작자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항해는 그들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 각국의 세파르디계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세계 곳곳에서 설탕, 목재, 담배, 다이아몬드 등을 교역하는 상인들과 국제적 연결망을 가진 은행가들이었다. 반면 부유한 세파르디와 달리 아시케나지는 영세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행상들로 1635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세파르디와 아시케나지가 잘 어울리지 못했던 이유는 서로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며, 생활 수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훗날 이들은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언어를 히브리어로 통일하게 된다.
◇플류트선이 바꾼 암스테르담 운명

▲암스테르담. /위키피디아
1595년 개발된 플류트선이 경쟁국 대비 1/3 가격으로 유럽의 화물을 실어 나르자 암스테르담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암스테르담은 유럽 내 화물이 몰려드는 물류 도시가 되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발트해가 얼어붙어 그쪽으로 향하는 포도주 등 기호품들과 남쪽으로 향하는 곡물 등 부피가 큰 상품을 대량으로 모아 둠으로써 암스테르담이 거대한 물류창고가 되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물류를 감당하기 어려워 운하를 늘려 창고를 더 만들어야 했다. 암스테르담 운하의 반경을 800미터 넓히는 공사가 추진되었다. 물류 산업이 발달하자 자연스레 중계무역이 발전했다. 이는 또 무역을 지원하는 금융과 보험을 발달시켰다.
◇지중해 무역이 지고 대서양 시대가 열리다
저지대에 유대인 주도 경제가 뿌리를 내리자 1590년대 러시아와 동구로부터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이 몰려들어 암스테르담 인구는 6만 명에 육박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 무역이 급팽창했다. 이때 네덜란드 선단이 본격적으로 지중해로 진출해 지중해 교역을 늘리게 된다. 이는 유럽 경제사에 한 획을 긋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은 베네치아 공국을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였다.
그런데 네덜란드 선단이 발트해 무역을 주도하고 폴란드 곡물과 스칸디나비아 목재 등 원자재, 북유럽의 공산품을 이탈리아까지 직접 가서 공급하게 되자, 네덜란드가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게 된다. 유럽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와 마침내 대서양 시대가 열리게 된다.
◇전화위복으로 아시아 항로에 진출한 네덜란드 상인들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단절했다. 다시 한번 해상교역에 종사하는 네덜란드 유대인들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항상 그렇듯 유대인들은 이러한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살려낸다. 1580년 스페인의 포르투갈 병합 이후 후추 유통 경로를 바꾸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유대 상인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에 네덜란드는 아시아로 직접 가서 후추를 구해오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몰랐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 무렵 동양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린쇼텐’이라는 사람이 1592년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와 <인도항로 항해지남서>라는 책을 출판했다. 책은 1596년에 출판됐지만 이미 그 이전에 그의 조언으로 네덜란드 상인들도 인도 항로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게다가 스페인의 한 귀족이 포르투갈의 국가기밀인 25개의 포르투갈 항해도를 반출해, 네덜란드 출판업자에게 큰돈을 받고 넘겨줬다. 그는 입수한 지도를 자비를 들여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펴냈다.

▲코르넬리스 하우트만. /위키피디아
이즈음 몇몇 네덜란드 상인들과 해도 제작자가 항해 경험이 많은 코르넬리스 하우트만이라는 사람을 2년간 리스본으로 파견해 인도 항로 기밀에 대해 자세히 정탐해 오도록 했다. 1594년 그가 돌아오자 9명의 상인과 한 명의 해도(海圖) 제작자는 29만 길더를 출자해 ‘원국회사’(遠國會社)를 설립했다. 네덜란드어 회사명은 ‘먼 곳의 나라에 대한 회사’라는 뜻의 ‘콤파녜 판 페레’이다.
원국회사는 향신료를 현지에서 직접 사들이기 위해 1595년 8월 배 4척에 선원 249명으로 구성된 하우트만이 지휘하는 첫 번째 상선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무역풍을 이용해 마다가스카르 동해안을 거쳐 몰디브 군도를 지나 수마트라 순다 해협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다시 메단으로 이동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을 피하고자 먼 길을 돌아 항해했던 것이다. 중간에 괴혈병으로 많은 선원을 잃었다. 인도네시아 자바 해안을 돌다 발리의 왕을 만나 후추 몇 단지를 사들여 2년 남짓 만에 배 3척에 선원 87명과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후추만으로도 모든 손해를 보전하고도 남으면서 아시아로의 항해 열기를 촉발했다.
하우트만이 아시아 항로를 발견한 이후, 네덜란드는 아시아 열기에 휩싸였다. 1598년 3월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상인들이 힘을 합쳐 출자금을 모아 선단을 조직했다. 선단은 인도에 진출해 향료의 주산지인 몰루카 제도까지 교역을 확장했다. 이렇게 해서 찾아온 후추 교역선을 몰루카 섬 주민들이 환영했다. 그간 기독교 선교에 열을 올렸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주민들이 반감을 지닌 덕분이었다. 이듬해 7월 선박 4척이 물건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대박이었다. 단 한 번의 항해로 선박 건조 비용을 모두 뽑고도 수익이 남았다.
그렇게 시작된 후추 교역은 이윤이 엄청나다 보니 1599년 한 해에만 배 22척을 보내 14척이 후추를 싣고 돌아왔다. 귀향하기만 하면 400% 이상의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 뒤 비슷한 회사가 6개나 생겼다. 1595년부터 1601년 사이에 네덜란드 탐험대는 희망봉 또는 마젤란 해협을 우회하여 인도 또는 말레이제도와 교역을 했다. 이 시기에 20% 이상의 배가 돌아오지 못했음에도 네덜란드는 5년 동안 15개 선단 65척의 상선을 보낼 정도였다.
[15]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 /위키피디아
원양 회사들이 수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나 지나친 경쟁이 문제가 되었다. 선단 이익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영국 등 열강과 경쟁하려면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공업이 가장 발달한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 총독인 오라녀공 마우리츠와 네덜란드 연합 전국 회의 의장 요한 반 올덴바르네벌트가 나서서 상인들과 협상하며 회사 통합을 유도했다. 한 회사로 합치면 후추 무역 독점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의회 역시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자”며 상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공화정을 표방한 네덜란드에서는 전국 회의가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전국 회의와 주 정부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대부분 상인 가문 사람이었다. 그 무렵 주요 상인 가문 200여 곳이 북부 저지대를 다스렸다.
◇1602년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 설립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위키피디아
그 결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탄생했다. VOC는 네덜란드어로 ‘하나로 통합된 동인도회사’라는 뜻의 이니셜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은 영국보다 2년 늦은 1602년이었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6개 항구도시 무역상들과 시민들의 투자로 충당했다. 선주나 상인뿐 아니라 중산층도 아시아 무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약 650만길더가 모였다. 당시 총 1143명이 투자했는데, 그중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81명이 투자 자본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다. 과거 중세 베네치아에서도 상인들이 합자회사 형태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른 점은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를 정식으로 했다는 점이다.
기업의 전반적인 경영 내용을 알리는 기업공개(IPO)와 주식회사를 통해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에게서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이들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상상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일컫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유대인, 동인도회사를 장악하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위키피디아
당시 투자자 81명의 반 이상이 유대인이었다. 특히 1585년 이후 앤트워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온 유대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주축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투자 지분이 많은 81명 가운데 일부와 기존 원양 상사(프리컴퍼니)14곳의 이사 60인으로 처음 ‘주주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 그 수를 점점 줄여 나중에는 ‘17인 주주 위원회’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내렸다.
지역별로는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자본이 57.4%를 차지하여 17인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배정받아야 했으나 다른 도시 5곳의 견제로 8인 자리만을 배정받았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회사를 좌지우지 못 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둘째로 많은 4인 자리를 배정받은 로테르담에도 유대인들이 있어 지분이 많은 유대인들의 발언권이 가장 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자금 조달자는 유대인 ‘이사크 르메르(Isaac le Maire)’이고 경영진의 대다수는 유대인이다.”
동인도회사가 주력으로 진출했던 인도네시아 유대인 공동체 서류에 있는 말이다.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또 다른 이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장세에 따른 경영진 인센티브 제도가 법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 동인도회사 이사들은 주주로서의 수익뿐 아니라, 경영자 인센티브로 총수익의 1%을 추가로 받게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의회는 VOC의 설립을 승인하면서 면허장에 경영진에 대한 보상 제도를 만들어 선박의 운항 횟수를 늘리도록 유도했다. 운항 횟수가 늘면 세입이 많아져 정부로서도 무역 증가와 세수 확보라는 1석2조의 효과를 얻는 셈이었다.
◇동인도회사의 특권
향후 또 나타날지 모를 출혈경쟁을 방지하려 동인도회사에 동양 무역 독점권과 식민지 개척 권한을 부여했다. 또 동양으로 떠난 배와 교신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현지에서 판단해 조치할 수 있도록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식민 정착지 건설, 화폐 주조권, 사법권, 전쟁 발동권’을 주어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하게 해주었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이러한 각종 특권에 대한 조건으로 2만5000길더를 지불했다. 의회는 이 돈을 한 푼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재투자했다. 곧 의회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짜리 특허장을 발급했는데, 그 뒤 10년마다 1번씩 자산 평가를 해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해적질로 동인도회사 자본금을 50% 늘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한 것은 첫째, 상선대를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함이 호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먼 거리 항해에 필요한 중간 보급항을 지키기 위한 요새에도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무역을 금지하는 나라에 함포 위협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넷째,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 통치하는 데 군대는 필수였다.

▲말라카 해협. /위키피디아
그런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보유한 군대로 처음으로 한 일은 해적질이었다. 설립 이듬해인 1603년 2월, 그들은 말라카 해협에서 포르투갈 상선 ‘산타카타리나’호를 공격해 나포했다. 배 안에는 엄청난 화물이 실려 있었다. 포르투갈은 불법을 이유로 약탈 물품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네덜란드는 양국이 교전 상태에 있었음을 들어 거부했다.
약탈된 물품들은 경매에 부쳐졌다. 중국 비단 등 고급 직물 60톤과 청화백자 16톤 등 각종 장식품, 설탕, 향신료, 면화 등이었다. 경매에는 유럽의 부호와 귀족 그리고 상인들이 대거 참여해 대단한 호응을 보였다. 당시 포르투갈 상선이 운반하던 이 물품들은 아시아 역내 교역품이었기 때문에 유럽인이 처음 보는 상품이 많았다. 도자기는 동일한 무게의 은 가격 이상의 고가에 낙찰되었다. 나포선에서 약탈한 재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본금을 50%나 불렸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들은 포르투갈 선박 나포에 혈안이 되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해상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동양의 도자기가 유럽인들의 식사 문화를 바꾸다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의 도자기 방. /위키피디아
그때까지 유럽에서 생산하는 도기 그릇들은 저온에서 만들어져 강도가 약했을 뿐 아니라 표면에 바른 유약도 뜨거운 물에 닿으면 녹아내리기 일쑤였다. 이후 중국 도자기는 유럽인의 최고 기호품이 되어 유럽 귀족과 부호들의 생활 방식을 바꾼다. 곧 유럽인들이 쇠 그릇 등에 음식을 담아 손으로 먹던 야만적 방식에서 도자기 식기를 갖추고 품위 있는 식사를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럽 왕족과 귀족들은 중국 도자기를 경쟁적으로 수집해 궁전이나 집을 장식했다. 오늘날 유럽 궁전에 가면 도자기 방이 있는 이유다.
당시 중국 고급 도자기 가격이 계속 치솟았다. 흑인 노예 7명 또는 중산층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에도 거래되었다. 유럽에선 중국 도자기가 단순한 식기가 아니라 부유함과 교양의 척도가 되었다. 유럽 내 도자기 열풍의 영향으로 17~18세기 유럽에선 바로크·로코코 양식에 중국풍 예술이 결합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미술 사조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조선 도자기 수입 위해 코레아호를 만들다

▲17세기 동인도회사가 회사 로고를 가운데 집어넣어 수입한 청화백자. /위키피디아
그 무렵 유럽은 700~800도에서 굽는 토기와 800~1000도에서 굽는 도기까지는 생산할 수 있었지만 1300도 이상으로 열을 끌어올리는 가마를 만드는 기술은 없어 자기는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1300도가 넘는 고온의 가마를 만들어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이 유일했다. 도자기 재료인 고령토 또한 구하기 힘들어 한동안 동양 도자기에 의존해야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년에 10만점 넘는 중국 도자기를 수입했다. 이후 중국이 해금령을 내려 도자기 수출이 중단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의 자기를 직수입하려고 ‘코레아’라는 상선을 건조했으나 일본의 결사반대로 조선 자기 수입은 불발되었다.
대신 일본이 임진왜란 때 납치한 조선 도공들이 1616년 아리타 자기를 개발하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를 대량 수입해 일본은 큰 부를 쌓는다. 70년 동안 아리타 자기 700만점이 유럽으로 팔려 나갔고, 찻잔 받침과 찻주전자를 만든 것은 아리타 자기가 처음으로, 유럽 귀족들의 차 문화가 아리타 자기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까지 도자기 2천만점이 수출되었다.
[16]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2)
이익의 재투자로 해외 무역관 설립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회사 설립을 위해 준비했던 자금을 그대로 투입해 꾸민 선단을 아시아로 보내는 데 썼다. 이 선단은 성공리에 귀환하여 265%의 이익을 냈다. 첫 번째 항해는 이전과 같은 ‘모험 사업’ 방식을 택했다. 투자자들은 1회 출항을 위해 자금을 투자했고, 배가 귀환하자 정산 과정을 거쳐서 모임을 해산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위키피디아
그런데 다음 항해부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조직했다. 일회성 항해가 아닌 여러 항해의 장기적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배당금 개념의 주식을 도입했다. 투자자들이 투자한 금액을 1항차 이후 곧바로 찾지 못하고 10년 후 정산하기로 했다.
따라서 자본이 보존되므로 회사가 해체되지 않고 항구적으로 존립하게 된 것이다. 10년 단위로 1612년과 1622년에 각각 정산하기로 했다. 그것도 10년을 다 기다린 다음에 배당하는 것이 아니고 5% 이익이 날 때마다 배당하는 것으로 규정을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낯선 제도였다. 이처럼 초기 동인도회사의 제도는 이전 방식과 새로운 방식이 혼재해 있었다. 그럼에도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할 만한 새로운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대항해시대] 91쪽, 주경철)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영구 자본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경영과 투자가 분리된 분업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주식회사는 많은 주주에게서 출자받기 때문에 위험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어 그만큼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신료 무역으로 얻은 이익 대부분을 해외 무역 네트워크 건설과 해외 무역관 설립에 재투자했다.
◇정향과 육두구 향신료를 독점해 가격을 대폭 올리다

▲정향과 육두구. /위키피디아
당시 수입 향신료는 후추, 정향(clove), 육두구(nutmeg)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향(丁香)나무는 분홍 꽃이 피는데, 꽃이 피기 직전에 따서 말린 꽃봉오리가 못[丁]을 닮았다고 해서 정향이라 불렸다. 이를 그대로 또는 가루 형태로 파는데,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특징이다. 육두구(肉荳蔲)는 ‘사향 냄새가 나는 호두’라는 뜻으로 씨를 말려 가루 낸 향신료이다. 정향이나 후추보다 향이 자극적이지 않지만 묘하게 고급스러운 향미가 있다. 육두구는 씨앗을 감싼 붉은 껍질 역시 향신료로 사용한다. 이를 따로 메이스(mace)라고 부르는데, 처음 서구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오히려 육두구보다 인기가 많았다.
후추는 자바섬 이외에 말레이반도, 인도 등에서 생산되었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인도네시아 몰루카 열도에서만 자랐다. 네덜란드 모험 상인들이 일찍이 1599년 포르투갈 상인들을 몰아내고 몰루카 향신료를 독점하게 되자 가격을 3배 이상 올렸다. 이로써 정향과 육두구는 후추보다 10배 정도 비싸졌다. 이 고급 향신료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독점한 것이다. 초창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교역품 절반 이상이 향신료였다.
◇향신료 시장을 독점하다
유대인들의 사업 특징 중 하나가 유통의 독점화이다. 이윤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향신료 시장을 독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영구 기지를 아시아에 세울 필요가 있었다. 1606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믈라카의 포르투갈 기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동쪽의 향신료 재배지인 몰루카 열도와 자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무렵 마닐라에 진출한 스페인 세력은 1606년 몰루카 열도의 테르나테섬을 공격했다. 당시 테르나테섬의 술탄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도움을 요청하자 군대를 파견해 보호해주었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몰루카 열도의 반다 제도를 장악하고 아시아 교역의 교두보로 삼았다. 반다 제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육두구가 자라는 섬이었다. 유대인들은 반다 제도의 육두구와 북부 인접 지역의 정향을 3200㎞ 떨어진 믈라카로 운반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무역의 세계사] 350쪽, 윌리엄 번스타인)

▲암스테르담 운하를 본떠 만든 바타비아. /위키피디아
이후 161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9척의 전함을 이끌고 자바를 점령해 도시 이름을 네덜란드 도시 이름인 ‘바타비아’로 바꾸고 본부를 이주시켰다. 바타비아가 지금의 자카르타이다. 그리고 원거리 항해 중간 거점인 페르시아, 스리랑카, 믈라카에 상관(무역관)을 세우고, 일본 나가사키(데지마), 타이완, 중국 광저우로 무역관 설립을 넓혀나갔다. 특히 일본에서는 은과 구리가 많이 나서 네덜란드의 무역 적자 상당 부분을 해소해 주었다. 그 무렵 동인도회사가 보급항으로 건설한 아프리카 남단의 무역관은 인도양 항로를 보호하기 위해 케이프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이후에 이 식민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출항 자금 모금 위해 주식을 발행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설립 뒤에도 선박들을 출항시킬 막대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주식을 발행했다. 여기에 누구나 투자할 수 있었다. 일반 평민과 외국인도 투자할 수 있었다. 주 정부도 주주로 참여하여 회사의 신뢰도를 높여 주었다. 이미 상인들이 귀족과 영주들로부터 조세권을 사들여 도시의 자치권을 확보한 상태여서 모든 시민도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상인들과 정부가 주도적으로 투자에 나섰으며, 일반 시민들까지 너도나도 주식에 투자했다. 현재 가치로 4억 6000만달러에 해당하는 거대 자금이 모였다.
이렇게 당초 주식투자란 유럽인들이 멀리 아시아로 교역을 떠나면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등장한 제도이다. 머나먼 미지의 세계인 동양으로 떠나는 데 필요한 자본이 선주나 선장에게 있을 리 없었다. 그 때문에 항해 경비를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주식투자의 시초가 되었다. 이때 돈을 투자한 사람들은 몇 년을 기다려 상선이 돌아와야 비로소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가 돌아오기 전에 개별적인 사정으로 이 투자 지분을 환불받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동인도회사는 1605년 주식의 환불은 안 되며 필요한 경우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라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증서. /위키피디아
그러자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양도의 기회를 주기 위해 부둣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몇몇 브로커가 중개 기능을 맡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주식시장의 효시이다. 그러자 동인도회사 주식이 최초의 증권투자 대상이 되었다. 손바뀜도 활발했다. 실제로 1607년 무렵 동인도회사 주식 1/3의 주인이 바뀌었다. 이때 내부 정보에 밝은 기존 유대인 대주주들이 이 주식들을 대거 사들여 지분을 늘렸다.
이렇듯 주식 투자는 동양의 진귀한 후추와 보물을 위험한 항해를 통해 배에 싣고 와서 물자가 귀한 서양에 팔아 막대한 부를 얻는 데서 출발했다. 항해 중의 태풍과 각종 질병, 해적선의 약탈 등을 극복하고 귀항에 성공하면 엄청난 부가 보장되었다. 주주에게는 고율의 현금과 채권이 배당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후추와 계피가 배분되기도 했다. 그러지 못하고 해적선에 약탈당하거나 파선된 경우에는 투자한 돈을 한 푼도 건질 수 없었다.
◇유대인 네트워크 무역을 활용하여 동인도회사 지분율을 높여가다

▲네덜란드 교역 네트워크. /위키피디아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중상주의 물결에 힘입어 해외 유대인 공동체 디아스포라들과 무역 네트워크를 만들어 해상무역을 활성화했다. 그들이 살았던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에는 많은 개종 유대인(콘베르소)들이 남아 있었고, 유럽 각국과 북아프리카·오스만제국·인도·신대륙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공동체들이 퍼져 있었다. 각 지역에 퍼져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종교, 동일한 전통 등 민족적 동질성을 공유하면서 상업과 금융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은 무역 경쟁력 면에서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월등한 비교우위를 갖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 사회의 문맹률이 98% 이상이었을 때 유대인 남자들은 모두 의무교육을 받아 글을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상업과 무역, 대부업은 글을 알고 정보를 교환해야 수행할 수 있는 분야였다. 게다가 그들의 경전 ‘탈무드’는 멀리 떨어진 디아스포라 간 유대 상인들을 규율하는 상법과 국제법 역할을 하여 신뢰와 신용이 필요한 먼 거리 교역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여기에 무역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주식 형태로 거래할 수 있게 된 것은 유대인에게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이를테면, 암스테르담 유대인이 프랑스 향신료 유대 상인으로부터 상품 주문을 받으면, 그는 인도의 유대 상인에게 현지 시세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다른 도시 유대 상인들로부터 상품 일부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투자받거나, 암스테르담에서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해당 거래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민족 상인들의 신용 확인이 어려웠던 당시 환경에서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유대 상인들 간의 네트워크는 엄청난 경제적 자산이었다. 유대인이 디아스포라 간 거래에서 신용을 잃는다는 것은 공동체로부터 퇴출을 의미했으며 이는 곧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각지의 유대인 네트워크는 신용을 토대로 무역과 금융 네트워크가 빠르게 형성되었고 증권화 덕분에 유대인 네트워크 간 무역 효용성은 더욱 빛을 발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점을 토대로 동인도회사 지분율을 빠르게 높여갔다.
◇중상주의와 금융 시스템으로 성공한 네덜란드
1600년대 들어 모든 교역은 네덜란드로 통했다. 네덜란드는 국토가 포르투갈보다 작고 인구는 150만명 남짓으로 약간 더 많았으나 최초로 세계 무역 체계를 갖춘 나라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독립전쟁 중이었다.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 지원을 위해 막대한 전쟁 채권을 사들여, 채권시장의 유동성이 풍부해짐으로써 시중 금리를 낮추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경제 사학자들에 의하면, 1600년경 네덜란드의 1인당 GDP는 오늘날 가치로 $2175인 반면 영국 $1440, 스페인 $1370, 포르투갈 $1175였다고 한다. 이는 중상주의와 식민지 경쟁이 시작된 이래 네덜란드와 여타국의 상업적 격차와 금융 시스템 차이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신용 좋은 채무자 이자율이 10%인 데 비해 네덜란드는 4%에 불과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보다 더 싼 이자율로 자금을 융통했다. 반면 영국 왕실은 채무 이행을 거부하기 일쑤여서 채권자들은 왕실에 일반인들보다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실정이었다. ([무역의 세계사] 345쪽, 윌리엄 번스타인)
[17] 근대 최초의 증권거래소 탄생하다
네덜란드의 이순신 ‘야콥 제독’ 휴전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내다

▲야콥 제독. /위키피디아
1607년 무렵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거의 40년 동안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양국은 지쳐갔다. 1588년 칼레 해전과 1602년 도버해협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전쟁은 교착 상태에 접어들었다. 오랜 전쟁으로 스페인은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였다. 양국의 휴전 논의가 시작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네덜란드는 휴전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이 임무를 ‘야콥 반 힘스커스’ 제독에게 맡겼다. 야콥(야곱) 제독은 원래는 유능한 선장이자 탐험가이자 상인이었다.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유대인으로 추정된다.

▲야콥이 바렌츠와 함께 북극 탐험 경로를 협의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야콥 선장은 1596년 바렌츠와 함께 북극 항로를 개척하다 바렌츠해의 곰 섬을 발견한 뒤 유빙에 갇혔다가 생환한 인물로 당시 네덜란드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그가 발견한 북극의 곰 섬 주변은 뜻밖에도 고래 무리가 번성한 바다였다. 이후 바렌츠해의 곰 섬은 네덜란드 포경산업의 전초기지로 이어져 오랫동안 네덜란드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 뒤 그는 1598년 아시아로 가는 항해를 지휘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섬에 교역소를 세웠다. 당시 아시아 왕복 항해에 정확히 2년 걸렸다. 그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장이 되어 1603년 상선단 3척을 지휘하여 아시아로 향하다 싱가포르 동부 해안에서 1,500톤급 포르투갈 대형상선 산타 카타리나호를 나포하여 동인도회사 자본금 확충에 크게 기여했다.
야콥은 나중에 해군 제독으로 근무하며 중국과 ‘네덜란드 동인도령’(인도네시아)으로 항해하는 동인도회사 상선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 그에게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줄을 끊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분수령, 1607년 지브롤터 해전

▲1607년 지브롤터 해전, 암스테르담미술관. /위키피디아
당시까지 스페인과 네덜란드 해전은 도버해협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네덜란드는 수세적 입장에서 싸웠다. 하지만 야콥은 작전을 바꾸어 이번에는 무적함대의 본거지를 초토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이끄는 26척의 함대가 1607년 4월 25일 스페인의 최남단 지브롤터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스페인의 안 마당까지 치고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지브롤터 만에 정박하고 있던 24척의 스페인 함대를 공격했다. 스페인 함대는 500톤 규모의 유선형 첨저선인데 비해 네덜란드 함선은 200~300톤 규모로 경량화한 날렵한 전함으로 배 밑바닥이 비교적 평편한 평저선이었다. 네덜란드 앞 바다는 드넓은 바덴 갯벌이 펼쳐져 있어 평저선이라야 했다. 네덜란드 함선은 스페인 함선에 비해 크기는 작았으나 기동성과 빠른 물살에서 회전력이 뛰어났다.

▲지브롤터 해협. /위키피디아
지브롤터 해협은 폭이 14㎞에 불과하고, 지중해의 증발량이 많아, 대서양에서 지중해 쪽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해류가 특징이다. 고대 지중해 사람들은 지중해의 유일한 관문인 지브롤터 해협을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이라 부르며 세상의 끝이라 생각했다.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그 물살을 거스르고 열린 바다로 나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야콥 제독 기념 메달. /위키피디아
이렇게 물살이 빠른 지브롤터 해협에서 양국은 4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네덜란드 함대는 스페인 함대 대부분을 격멸하고 스페인 해군 4000명을 수장시켰다. 율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명랑해전을 연상시키는 해전이었다. 네덜란드 해군은 100명 미만의 사상자에 불과해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야콥 제독은 이 전투를 지휘하던 중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결국 이 해전에서 치명상을 입은 스페인 왕실은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607년 11월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게 된다.
◇스페인과 12년간 휴전, 사실상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가
이 전투에서 네덜란드가 승리하면서 재해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해외 곳곳에서 부딪히는 양국 간의 갈등에서 네덜란드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양국은 12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해외 개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 협정으로 네덜란드는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네덜란드는 휴전 기간에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며 식민제국을 세웠고, 암스테르담은 국제적인 상업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스페인령 플랑드르 지역 곧 지금의 벨기에에서는 개신교가, 북부 저지대 곧 지금의 네덜란드에선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휴전 기간에 플랑드르 개신교 신자는 네덜란드로, 북부 저지대 가톨릭 신자는 플랑드르 지역으로 대거 이동했다.
◇유대인, 대규모 자본 조달 위해 증권거래소를 설립하다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 /위키피디아
설립 후 10년 동안 동인도회사는 이익금을 선박 건조와 아시아 거점 확보 등에 투자하느라 전혀 배당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인도 항로는 워낙 장거리 항로인데다 위험 요소도 많아 막대한 선투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사세를 확장할 투자금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이때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또다시 획기적인 발상을 하게 된다. 동인도회사의 주식이 거래가 잘 되자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여 대규모의 자본을 끌어들일 구상을 했다. 그러려면 주식 거래를 길거리 카페에 맡겨둘 게 아니라 아예 본격적인 주식거래를 위해 ‘상설’ 증권거래소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원래 증권거래소의 모태는 중세 유럽의 견본시에서 유대인들 간에 지불명령서․환어음 등의 신용이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했던 개념이다. 이로써 이 주식을 거래할 근대적 의미의 증권거래소인 ‘암스테르담 보르스’(Amsterdam Bourse)가 1608년에 설립되었다. 본격적인 자본주의의 자금 조달시장이 선을 보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가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최초 증권거래소의 거래 방식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쓴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로데베이크 페트람에 따르면, 최초의 증권거래소는 현재 주식 제도와는 몇 가지 면에서 달랐다.
첫째,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에서는 주식증권이란 개념이 없었다. 주주들의 이름과 지분을 기록한 장부가 있었을 뿐이다. 주식의 소유권을 이전할 때도 종이로 된 증서를 주고받은 게 아니라 회계담당자가 보유하고 있는 장부를 고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증권이라는 종이 형태의 물건이 나타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둘째, 주식회사의 초창기에는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동인도회사의 어떤 주주도 경영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주주는 몇 년에 한 번씩 배당금을 받는 투자자에 불과했다.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이다.
셋째, 초기 주식투자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현물이 아닌 선물, 곧 파생상품 거래가 주를 이루었다. 흔히 파생상품 거래는 현대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일찍이 선물, 옵션, 공매도와 같은 복잡한 금융기법의 거래들이 최초의 증권거래소 시절부터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거래를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전문 투자자는 물론 소량의 주식을 모아 거래가 가능한 규모로 만들어 사고파는 시장조성자(마켓메이커)도 등장했다.
넷째, 증권 거래는 법이 아니라 상인들 간의 신뢰에 기초해 이루어졌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현물을 담보로 하지 않는 선물 거래는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상인들은 현물 없이 자신들의 신용을 바탕으로 선물 거래를 계속했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15~16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저, 조진서 옮김)
윗글은 이 책을 번역한 조진서씨가 ‘책 소개글’에서 쓴 내용이다. 이러한 거래 형태는 ‘계약의 민족’이라 불리는 유대 상인들 사이에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계약의 민족답게 상업적 계약도 목숨 바쳐 지켰다. 이를 어길 경우, 그들은 공동체에서 축출되었다. 또 그들이 이슬람 사회와 중세 유럽에서 오랜 기간 발전시켜온 금융기법들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네덜란드 증권거래소가 설립 초기부터 파생상품 거래를 활발히 중계할 수 있었다.
[18] 근대 최초의 증권거래소와 유료 정보지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투자자가 줄을 이었다. 이익을 내지 못했음에도 증권거래소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신대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미래의 부를 보고 주가는 올랐다. 영국인과 프랑스인 등 외국인들도 투자했다. 유럽의 자금이 네덜란드로 모여들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투자 자금이 몰려 들어오자 아시아로 운행하는 배는 50척이나 되었다. 이 배들이 10년 뒤부터는 진귀한 향신료, 도자기, 비단 등을 가득 싣고 암스테르담 항으로 돌아오곤 했다. 동인도회사는 이를 팔아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 1620년 동인도회사는 주주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유대인의 재능과 상술 그리고 현지 유대인 커뮤니티를 통한 정보력이 다른 경쟁국들을 압도한 결과였다. 암스테르담에는 신흥 부자의 수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당시 이 도시의 1인당 소득은 유럽 최고였다. 이러한 역동적인 시장은 모든 방면에 영향을 끼쳐 경제는 물론 문화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심지어 투기도 활발해졌다. 튤립 투기가 그 대표적 예이다.
◇투기적 모험의 주식시장이 해상무역을 빠르게 키워내다
이렇듯 주식투자는 큰 위험과 엄청난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는 투기적 모험에서 출발했다. 투기가 위험을 이겨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증권투자의 역사는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세계 경제사에 한 획을 긋는 대규모 발전에는 늘 많은 위험 부담이 따랐다. 은행의 대출만으로는 그렇게 빠른 발전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위험 부담이 너무 커 대출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업가 또한 리스크가 큰 사업에서 거액의 빚을 지기를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주식투자자들이 부푼 기대감으로 많은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투기적 모험의 주식시장이 해상무역을 급속도로 키워냈다. 자본주의는 이렇듯 리스크 감수를 속성으로 태동했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사전을 보면, 투자는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떤 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으로 정의된다. 반면 투기는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투자와 투기를 무 자르듯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투기를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인 효율적 시장론자들은 투기가 기업에게 자본을 공급하고,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경제성장과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촉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샤프는 “1990년대 미국인들이 주식시장의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경제가 다이내믹한 성장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연준의 그린스펀 역시 “위험을 감수하려는 태도가 자유시장경제의 성장 원동력이다”라는 데 동의했다. 이들의 위험 감수론은 21세기 들어 금융위기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위험 감수를 불사하는 투기가 경제사에서 결과론적으로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례는 많았다.
◇주식회사의 유래
사실 인류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는 기원전 2세기경 로마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는 국가기능 가운데 조세 징수에서 신전 건립까지 상당 부분을 ‘퍼블리카니’(Publicani)라는 조직에 대행시켰다. 퍼블리카니는 단순히 징수업무를 대행한 것이 아니라 조세를 징수하여 이윤을 남기는 사업자로, 로마 의회에서 입찰을 통해 조세징수권을 부여받았으며 수시로 재무제표를 공개해야 했다.
퍼블리카니는 현재의 주식회사처럼 ‘파르테스’(partes)라는 주식을 발행했으며 이를 통해 소유권이 다수에게 분산된 개념의 법인체였다. 주식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당대의 부자들로 구성된 대주주 임원들 몫(socii)과 일반인들로 구성된 소액주주 몫(particules)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개인 간 양도가 가능하여 가격이 형성되고 투자의 대상이 되었다. 임원들이 조직의 업무를 수행했으며 주주총회도 정기적으로 열었다. 키케로는 자신의 기록에 ‘고가주’라는 단어를 쓰면서 “부실한 퍼블리카니의 주식을 사는 것은 보수적인 사람이면 피하는 도박과 같다.”고 말했다. 이를 주식회사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증권거래소의 유래
13세기 중반 이탈리아 도시국가 시대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채권 발행과 유통시장이 등장했다. 이후 14~15세기 플로렌스, 피사, 베로나, 제노바까지 확산되어, 도시국가 중심으로 채권과 주식이 발행되어 중세 상업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후 15세기 독일 라이프치히 장외시장에서 광산 주식이 거래되었다.

▲토머스 그레셤 경.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의 원형은 앤트워프 거래소였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앤트워프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주식과 채권이 거래되었었다. 이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을 남긴 토머스 그레셤 당시 네덜란드 주재 영국 대사가 앤트워프 거래소를 유심히 관찰했다. 부유한 포목상 겸 무역 상인이며 런던 시장을 지낸 리처드 그레셤 경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니면서 삼촌 밑에서 무역업을 배웠다. 그레셤은 젊은 시절부터 가업인 왕실 자금관리까지 맡았다.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재무관이었던 그는 유대인들이 주도하던 앤트워프의 금융시장에 관심이 많았다. 앤트워프에서 주식과 채권이 활발하게 매매되는 광경을 지켜본 그레셤은 귀국 후 개인 돈으로 1565년 런던에 증권거래소를 세웠다. 이렇게 외교관이자 무역상, 왕실 재산관리인으로 일하며 영국 최고 갑부로 올라선 그레셤이 만든 거래소의 원형은 앤트워프 거래소였다. 1571년 1월, 엘리자베스 1세가 증권거래소를 방문해 국왕의 허가증을 내려줬다. 런던 왕립증권거래소(Royal Exchange)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그럼에도 경제사에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 증권거래소를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의 효시로 보는 것은 이때를 기준으로 ‘자본조달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나 증권거래소가 네덜란드보다 더 일찍 시작되었음에도 제대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다가, 크롬웰의 항해조례 이후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건너가서야 활성화되었다.
◇유료 정보지가 발간 되다

▲17세기 당시 활발했던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내부 모습.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증권거래소는 주요 도시마다 설립되었다. 각 도시에서 실물 상품과 주식뿐 아니라 외환, 해상보험까지 거래되었다. 그 무렵 해상보험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큰돈을 번 상인들이 늙으면 직접 상거래를 하는 수고를 피해 보험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증권거래소가 설립 초기부터 자본조달 시장으로써 활발하게 운용될 수 있었던 것은 상품 가격과 무역 정보 등이 상인들에게 상세히 공개되고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유대인들이 강한 것이 정보의 수집과 교환이었다. 1585년부터 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가격 정보가 출판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205개 상품 가격이 그 대상이었다. 상인들은 이 정보지를 정기 구독할 수 있었다. 정보가 워낙 귀중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네덜란드] 228쪽, 주경철)
게다가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끔 거래소가 운영되었다. 우선 거래소 건물 한가운데는 커다란 중정이 있고, 그 가장자리에 42개의 기둥이 건물을 받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둥에 1부터 42까지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 숫자는 각 상품을 의미했다. 소금 상인들이 모이는 기둥, 가죽 상인들이 모이는 기둥, 동인도회사 지분 거래 기둥 등으로 나누어져 있어 해당 거래를 하는 상인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리고 거래시간도 처음에는 오전에 한 시간, 오후에 1시간 반으로 제한을 두어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이도록 했다.([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171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높은 주주 배당률, 시중금리보다 2~3배 높아
증권거래소의 활황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공로가 컸다. 그 무렵 동인도회사 주식은 선망의 대상으로 주식 붐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초기 10년 재투자하느라 배당을 안했음에도 주가는 올랐다. 그만큼 미래 가치가 컸기 때문이다. 동인도회사는 1610년 4월 첫 배당을 시행했다. 각 주주에게 명목 지분가치의 약 75%에 해당하는 메이스가 현물로 지급됐다. 주주들은 오래 기다려온 배당을 환영했다.([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95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이때부터 현물 또는 현금 배당을 시작한 동인도회사는 이익 대부분을 주주들에게 환원시켰다. 1632년의 경우, 주주 배당률을 12.5%로 정하면서 주주 만족도를 높였다. 이는 당시 채권 수익률이나 동인도회사의 차입 이자율보다 2~3배 이상 높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수익률이 좋아지자 주가는 뛰기 시작했다. 1633년 6월 186이었던 주가가 10년 후인 1964년 3월엔 470까지 올랐다. 250% 이상의 상승률이었다.([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179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이후 동인도회사의 흑자 폭이 커지자 덩달아 배당률도 더 높아졌다. 1650년까지 총배당금은 원 투자금의 8배 곧 800%에 달했고, 연수익률은 27%나 되었다. 동인도회사의 총운영 기간 중 평균 배당률은 약 16.5%였다. 같은 기간 동인도회사의 주가 역시 8배로 뛰었다. 그 무렵은 인플레이션이 거의 없던 시기로 배당률 800%와 순수한 주가 차익 800%의 수익은 대단한 것이었다.
◇동인도회사, 증자 대신 채권 발행을 택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채권. /위키피디아
이렇게 동인도회사의 주가가 꾸준히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금이 필요한 경우 증자를 하지 않고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이다. 곧 주식 수를 희석시키지 않았다. 놀랍게도 동인도회사 운영기간 동안 자본금에 본질적인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주가를 항상 높게 떠받칠 수 있었다. 기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동인도회사에 대한 자기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증권거래소가 생긴 이후에도 네덜란드 경제는 연이어 터지는 호재들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19] 중앙은행의 모태,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되다
15세기 후반 금괴 기근 현상으로 무역 대금이 모자라자 무역량이 급감하면서 장기간 경기 불황이 지속되어 유럽 전역에서 은행 파산이 늘어났다. 당시 일반 상거래에는 주로 은괴가 쓰였고 무역 거래에는 금괴가 사용되었다.
◇오만가지 불량 주화가 난무하다
게다가 16세기 중엽 네덜란드는 발트해, 북해, 지중해 등과 연결되는 교통과 통상요충지에 위치하여 유럽 화물의 집산지 역할을 하면서 경제가 발달하고 교역이 급증하자 거래되는 돈의 유통량이 많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렵 저지대 각 주에서 유통되던 다양한 통화가 상인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당시 북부 저지대에는 오늘날 조폐국 격인 서로 다른 주조업체만 14개였다. 그리고 외국 주화도 많이 유통되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 흘러 들어온 각종 유럽의 주화들은 800~1000종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유럽의 각 왕실별, 공국별로 발행하는 주화의 무게도 함량도 제각각이었다. 한마디로 백가쟁명식 주화가 난무했다.
특히 저질 주화와 위조 화폐의 범람이 큰 문제였다. 금화의 주변을 살짝 깎아내는 클리핑(clipping)과 금화를 가죽 부대에 넣고 마구 비벼대어 금가루를 얻는 땀내기(sweating)를 통해 금을 얻어내려는 시도가 기승을 부렸다. 게다가 네덜란드 지역에서 환전업자와 은행과 비슷한 역할을 하던 민간 금융업자와 금 세공인들은 주화 변조를 묵인하고 주조차익을 나누어 가지는 등 주화 유통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 같은 화폐 시스템의 혼란은 국제금융 중심지로서 암스테르담의 지위에 심각한 위협 요인으로 작용했다.

▲암스테르담 은행의 설립 초기 모습/위키피디아
◇ 암스테르담 은행의 설립, ‘은행화폐’의 개념을 도입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암스테르담시 의회는 상인들을 보호할 필요를 느꼈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표준 통화를 만들어 교환가치를 통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독립전쟁 중으로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한 채권시장 등 금융시장은 효율적인 통화 제도를 필요로 했다. 이로써 공공 기능을 가진 ‘공적’ 은행이라는 기관이 설립된다. 국책은행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당연히 민간 기업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시의회가 지급보증을 했을 뿐 아니라 여러 규정을 통해 지급결제업무에서 독점권을 갖는 등 암스테르담 은행의 영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이로써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이듬해인 1609년 시의회의 지급보증과 지급결제 업무에 독점권을 갖는 암스테르담 은행이 탄생했다. 당시 은행들의 파산이 빈번했는데 암스테르담 시의회의 지급보증이야말로 암스테르담 은행이 공신력 있는 세계 일류 은행으로 빠르게 발전하는 데 일등 공신이었다.
게다가 암스테르담 은행에서는 계좌를 가진 상인으로부터 금은을 예치 받고 이를 근거로 계좌 주인이 금은을 주고받지 않고도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계좌이체 방식의 결제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른바 ‘은행화폐’라는 개념으로 오늘날의 수표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이는 거래에 있어서 효율성뿐 아니라 도둑과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에 은행은 더욱 빠르게 발전했다.
사실 이러한 계좌이체 방식 은행업의 효시는 12~13세기 무렵 이탈리아 주요 상업 도시에서 활동하던 환전업자들이다. 그들은 주화를 예치 받고 계좌이체 방식의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당시 환전업자 또는 초기 은행은 계좌를 보유한 예금주들에게 장부상 소유권 이전(book transfer) 방식으로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주화를 이용하지 않고도 효율적인 대금결제가 가능해졌다. 이후 1587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유대인이 세운 리알토 은행이 이러한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공하여 프랑스 상파뉴 정기시장과 이슬람권과 무역하던 유대 무역상들을 지원했다.
◇ 암스테르담 은행, 국제금융거래를 장악하다

▲피렌체 금화 플로린/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 은행이 그들과 다른 점은, 600플로린(길더) 이상의 거래는 반드시 은행화폐를 통해 거래하도록 하는 의무 규정이 도입되면서, 대규모 상인들은 반드시 암스테르담 은행에 계좌를 개설해야만 했다. 이는 암스테르담 은행의 발달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참고로 길더라는 이름의 유래는 신성로마제국이 발행한 금화로 피렌체에서 최초로 발행된 플로린(Florin)을 말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길더는 플로린과 동의어로 통용되었다.
지급결제 업무에 독점권을 갖는 암스테르담 은행은 상인들이 암스테르담 은행화폐로만 예금 계좌를 개설토록 함으로써 화폐가 신뢰를 얻고, 난해한 환전으로 인한 비효율을 제거했다. 사실 근대적 은행업 출현 이전부터 만성적인 주화 부족과 주화 결제의 번거로움 등을 피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대부분의 상거래는 신용거래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발행된 약속어음과 제3자 채무승계를 통한 상계 결제가 가능한 환어음이 지급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에 의해 통화가 표준화되자 환어음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주화의 적정 여부나 함량 검사 등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상인들끼리 거래할 때는 실물 주화의 거래 없이도 서로 계좌 간 결제를 통해 쉽게 거래할 수 있었다. 이는 수표와 자동이체 시스템 등 오늘날 당연시되는 제도의 선구자인 셈이었다. 이로써 금융이 선진화되었고 국제화되었다. 이 배경에는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오면서 그들의 금융기법도 같이 따라온 영향도 컸다.
은행이 처음 생긴 곳은 11세기 이탈리아였으나 금융업에서 중요한 개척자 역할을 한 곳이 암스테르담 은행이라는 점에서는 모든 역사가의 의견이 일치한다. 베네치아 은행을 본떠 만든 암스테르담 은행은 이후 독일 등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본보기 은행이 되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나중에 영란은행의 모델이 되고 이는 훗날 미국 연방은행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 암스테르담 은행이 성공한 이유, 수수료 없이 주화를 만들어주다

▲가게 안의 금세공인/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암스테르담 은행이 성공한 이유의 하나는 고객들이 가져온 금괴와 은괴를 수수료 없이 전액 동등한 무게의 길더 주화로 바꾸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무렵 일반인들은 은괴를 잘라내어 주화 대신 지불하거나, 국영 주조기관이나 금세공인에게 은괴를 가져가 주화로 주조해 사용했다. 그들은 은괴를 은화로 주조를 해주는 대신 비용을 챙겼다. 예를 들어 10킬로그램짜리 은괴를 갖다주면 9.5 킬로그램을 은화로 만들어 주고 0.5 킬로그램은 수수료로 그들이 갖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은괴를 수수료 없이 양질의 은화로 바꾸어 주다 보니 네덜란드 인근의 거의 모든 은괴와 금괴들이 암스테르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고객들은 일부만 주화로 바꾸어 가고 나머지는 은행화폐로 받아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써보니 무거운 주화보다 은행화폐가 훨씬 편했다. 그 뒤에는 보유하고 있는 주화도 가져 와 은행에 맡기고 편리한 은행화폐로 바꾸어 갔다. 이렇게 해서 은행화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 근대 최초의 기축통화 탄생
그 뒤부터 암스테르담 은행은 당시 화폐인 경화 예금자들에게 무게를 재고 함량을 분석해 그에 따라 ‘은행화폐’를 지급해 경화의 예금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해 주었다. 이로써 신뢰가 쌓이자 은행화폐가 경화에 비해 오히려 프리미엄을 누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함량이 부족한 악화의 폐습을 종결시켰다. 아담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암스테르담 은행의 성공 사례를 극찬했다.
암스테르담 시의회는 1621년 민간 금융업자들을 허가하면서 이들이 예금을 수취하며 받은 주화를 24시간 내 암스테르담 은행에 예치할 의무를 부여했디. 이후 암스테르담 은행으로 물밀듯이 밀려드는 유입 자금은 특히 30년 전쟁 기간 중인 163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전쟁 중에 무겁고 위험한 경화를 갖고 다니는 것보다는 은행권이 안전하고 편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돈을 은행에 맡기면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관 수수료를 물어야 했음에도 예금은 날로 늘어갔다.
이후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과 금융에서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구 최초로 은행화폐를 대량 유통시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길더가 근대 최초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 신용창조의 시작
암스테르담 은행은 초기에는 예금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암스테르담시와 동인도회사에만 대출해 주었다. 초기 은행들은 대출을 본업이 아닌 예금수취와 지급결제의 부수 업무로 취급
이렇게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해주는 과정에서 대출로 이자 수입이 생겼다. 게다가 예금으로 받은 주화는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도 화폐라는 ‘신용’이 창조되었다. 이리하여 화폐 창조는 매우 이윤이 높은 업무가 되었다. 이후 로테르담 등 네덜란드 다른 도시들과 독일로 은행이 급격히 퍼져나갔다. 이 무렵 대부분 은행들은 유대인이 주도했다.
◇ 주식시장의 신용거래 시작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 전역에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들어섰다. 느슨한 연방구조 아래 독립된 8개 주마다 은행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행은 동인도회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해 주기 시작했다. 이로써 은행과 주식시장의 신용 공급의 유대 관계가 맺어졌다. 그다음 단계로는 거래 실적과 능력을 지켜보고 선별된 사람들에게 주식을 신용 구매할 수 있도록 은행이 담보 없이 신용만 믿고 대출해 주었다. 주식시장 신용거래의 시작이었다.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 그리고 은행, 이 세 곳을 축으로 새로운 경제 형태가 등장했다. 그 뒤 은행에서는 “신용거래”의 개념을 처음 도입하여, 신용도에 따라 이자율을 달리 적용했다. 그 결과 신용 있는 사람이나 회사들이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었다.
◇ 저금리가 대규모의 투자와 무역을 가능케 하다
그 무렵 네덜란드 금리가 경쟁국의 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금융산업의 발전은 네덜란드의 경쟁력을 한층 더 높여줬다. 이런 저금리 자금은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상인들에 비해 유리하게 작용하여 대규모의 투자와 무역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신용이 좋은 사람이래야 이자율이 연10%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자금이 많다 보니 4%면 족했다. 결국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외환 거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후 자본 조달시장인 주식시장에 몰려드는 자금과 채권시장의 저금리 대출을 활용해 해외시장 개척과 해외투자에 나서 세계적인 무역 네트워크를 완성할 수 있었다.
◇ 시뇨리지 효과
은행은 외환 관리와 환어음 결제 기능을 맡았다. 암스테르담시는 600 플로린이 넘는 환어음의 지불은 반드시 은행을 통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암스테르담 은행은 환은행으로 알려졌다. 은행은 나중에 예금액이 증가함에 따라 대출도 늘어남으로써 유동성이 확대되었다. 암스테르담은 외환과 금, 은 거래에서 유럽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대출받은 사람이 이 가운데 일부만 쓰고 나머지를 다시 은행에 맡겨 놓으면 이를 기초로 또 대출이 늘어났다. 이러한 신용창조로 별다른 노력 없이 그저 대출만 해주어도 이자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른바 ‘시뇨리지 효과’였다.
◇ ‘누가 화폐 발행권을 갖느냐’에 대한 치열한 암투가 시작되다
이처럼 훌륭한 돈벌이에 정부가 유혹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고대부터 소금 등 독점적 이익이 발생하는 사업은 곧바로 국가가 독점해서 ‘전매사업’으로 운영했다. 이러한 유혹 때문에 생겨난 곳이 바로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은 은행권 발행 독점권 등 다양한 특권을 가지고 태어났다. 중앙은행이 경화를 획득하면 이를 국고에 보관하고 이를 담보로 지폐를 발행했다. 그리고 국가는 전쟁 등 필요시에는 증세로 재정을 맞추어 나가기보다는 금 보유 등 담보가액보다 많은 지폐를 발행하여 부족액을 메우려는 유혹이 늘 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지폐 발행이 담보가액을 크게 웃돌았다. 이후 서구 역사는 정부와 금융권 사이의 화폐발행권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와 대립의 길을 걷게 된다.
04.02
[20] 궁정 유대인은 재무 장관의 원형이었다
1609년 한 해에 네덜란드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사건 4가지가 함께 발생했다. 이해에 독립 전쟁 중인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휴전협정을 맺어 유대인들이 맘 놓고 해외시장 개척에 매진할 수 있었다. 또 같은 해 네덜란드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 결과 주변국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항구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같은 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북극 항로 탐사 중에 맨해튼섬을 발견해 뉴암스테르담(뉴욕) 건설과 신대륙 진출의 계기를 잡았다. 또한 이해에 중앙은행의 모태인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되었다. 1609년은 네덜란드가 ‘주식회사, 주식거래소, 중앙은행의 모태 암스테르담 은행’ 등 자본주의의 기틀을 완성하고 해외 무역 네트워크 완성을 향한 도약을 시작한 해이다.
◇암스테르담 은행의 공개시장 조작, 궁정 유대인의 토대를 마련하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유럽 전체의 유대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암스테르담 은행에 유럽의 금괴와 은괴가 몰리다 보니 유럽 내 독보적인 자금 시장의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 무렵 일반 상업 거래에는 은이 사용되고 큰돈이 오가는 무역 거래에는 금이 사용되었다. 당시 유럽의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대12 내외였다. 곧 금 1㎏을 은 12㎏과 바꿀 수 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무역에 쓰이는 금이 많이 유통되었다. 게다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중국에서 금을 많이 들여왔다. 중국은 1581년 ‘일조편법’ 이후 조세의 근본이 은이라 서구보다 금이 많이 저평가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암스테르담에서는 다른 유럽 도시들보다 금 유통이 많아 금이 저평가되고 은이 고평가되었다.
공적 은행 기능을 하는 암스테르담 은행은 플로린(길더)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시중의 은 가격이 너무 오르면 보유하고 있는 은을 팔아 은 가격을 안정시키고 시중 은 가격이 너무 낮으면 이를 사들여 적정한 은 가격을 유지하는 이른바 ‘공개시장 조작’을 시행하곤 했다. 이런 연유로 암스테르담 은행은 금에 비해 고평가된 은 가격 안정을 위해 때때로 은을 시중가 보다 싸게 매도했다. 여기에 참여하는 금융인들이 주로 유대인이었다. 이렇게 은을 싸게 사들이는 유럽 각국의 유대 금융인들이 궁정 유대인으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다.
◇궁정 유대인(Court Jew) 시대의 도래
더구나 당시 네덜란드는 주식시장과 독립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한 채권시장 등의 자본 시장이 발달해 시중금리가 여타국보다 현저하게 낮았다. 영국의 연이율이 10%였을 때 네덜란드는 4%면 족했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저리의 금융 환경은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 각국 왕실과 공국은 네덜란드 유대 금융인과 줄이 닿아야 저리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각국 재무 담당 장관은 모두 유대인의 몫이 되었다. 이른바 ‘궁정 유대인’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후 유럽 각국은 유대 금융인을 궁정 유대인으로 고용하는 게 일반적 관행이 되었다. 이들은 금융뿐 아니라 각국의 유대 디아스포라 네트워크를 통해 군수품과 섬유, 곡물 등 정부 조달업자로서의 경쟁력도 높았다. 독일 지방의 경우, 궁정 유대인은 게토 밖에서 살 권리 등 사회적 보장을 얻는다. 그들 중 일부는 점차 특권을 누리며 거대한 재력을 토대로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30년 전쟁
30년 전쟁(1618~1648)은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이자 네덜란드와 스페인 왕국 간의 휴전 기간이 끝나고 재개된 독립 전쟁의 연장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는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년)를 무시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삼으려 했다.
이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가 반발했고 주변 국가들이 개입했다. 가톨릭을 지지하는 합스부르크 측에 스페인, 헝가리가 가담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반(反)합스부르크 측에 덴마크, 사보이 공국,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이 개입한 국제전이 되었다. 처음엔 종교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날이 갈수록 영토 확보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신성로마제국 /자료=위키피디아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북부, 보헤미아, 스위스 칸톤 등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나라들과 360여 자유도시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력은 갈수록 약해지는 반면에 제국을 구성하는 나라와 제후국들의 힘은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종교 문제로 시작된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을 유지하려는 나라들과 독립을 추구하는 나라들 사이의 싸움으로 번졌다.
전쟁은 참혹했다. 특히 독일 지역은 초토화되었다. 인구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심한 곳은 3분의 2가 줄었다. 그리고 종교 개혁 이전에는 왕의 권력이 귀족들에 의해 지탱되었지만 이후에는 상인과 중산층에 의해 지탱되다 보니 3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가 개념이 형성되어 종교보다는 국가에 더 충성했다. 이를 기점으로 교회보다 국가가 우위에 서게 되어 근대 국가 체제를 형성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가들은 30년 전쟁을 종교 중심의 봉건 국가에서 영토 중심의 근대 국민 국가로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주보상인(酒保商人)의 존재
중세 시대의 정규군이라 할 수 있는 기사 계급이 몰락하면서, 그 무렵 남부 독일 지역 군대들은 여러 용병 부대의 연합체로 구성되었다. 상비군이 아닌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용병 부대에 전쟁을 외주 준 것이다. 그들에 지급되는 식량과 보급품 역시 외주로 해결했다. 곧 보급을 군대가 직접 챙기지 않고 대신 이를 하청 업자들에게 맡기는 형태였다. 그리하여 식량 조달은 민간 업자인 주보상인들이 맡았다. 주보상인은 식량 보급뿐 아니라 무기, 탄약, 갑옷 등 군수품과 함께 생활 잡화도 취급했다. 그리고 각종 약탈품을 싸게 매입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전쟁터는 절호의 비즈니스 장소였다.
전투가 끝나면 죽음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에게 주점이나 도박장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요리, 세탁, 제봉, 간호를 담당할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필요시는 병사들에게 위안부까지 제공했다. 먹거리가 모자라 생존 자체가 절박했던 시절이라 위험한 전쟁터 일거리에 사람들이 몰렸다. 일종의 병참 부대인 이 주보상인들과 그들에게 딸린 일꾼과 여자, 예능인 등의 숫자는 군인 숫자와 거의 같았다고 한다. 그 규모가 커져 30년 전쟁 당시는 군대의 1.5배 규모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군대의 조직적인 병참 지급은 근대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유용원의 군사세계, 15세기 독일 군대와 란츠크네히트, 2011).
◇30년 전쟁, 유대인들에게는 도약의 기회
유대인은 새로운 상황과 기회를 활용하는 데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30년 전쟁은 프로이센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유럽 경제의 중심으로 올라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쟁 내내 대규모의 군대가 몇 년씩이나 전장에 주둔해야 했기 때문에 전장의 군대에 음식과 보급품을 공급하는 일을 대부분 유대인들이 도맡아 했다. 그들이 위험한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일하는 이유는 위험에 비례해 그만큼 이윤이 크기 때문이다.
전쟁이 길어지자 그들은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공급망을 만들어 식량과 식기 등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이를 위해 방앗간과 주물 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군대를 찾아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다. 유대인들은 그들 디아스포라 간의 정보 수송망을 통해 유럽과 멀리 동방까지 가서 무기를 사 모아 부족한 군수 물자를 각 전장에 공급하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 뒤 그들이 직접 무기와 화약 제조 공장을 세웠다. 이것이 근대 군수 산업의 효시이다.
유대인들은 전쟁 당사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떠올랐다. 전쟁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자 전 유럽의 유대인들이 보급품과 군수품 공급에 참여했다. 전쟁 기간 독일 지역 영주들은 군수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주고 나라의 살림도 챙겨 줄 유대인을 궁중에 채용하기 시작했다. 30년 전쟁 동안 유대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에서 다른 주민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궁정 유대인의 발흥
30년 전쟁 중에 보인 유대인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유대인들이 아주 유용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 독일 지역 영주들은 귀족과 상류 계급에 의존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절대 주권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나라 경제가 부강해져 재정 자립을 꾀해야 귀족들의 경제력에 휘둘리지 않고 중앙 집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상주의가 추진되었고, 상업과 제조업의 장려가 국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당시 유럽은 중세 길드 제도로 인해 너무 폐쇄적이고 봉건적이었기 때문에 경제 회생 능력을 상실했다. 네덜란드만이 구태를 벗어나 나라의 부를 증대시키고 있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위키피디아
이 시기에 프로이센 공작이자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경제 개혁을 가로막는 길드 제도를 없애고 새롭게 경제를 개혁할 필요성을 느꼈다. ‘선제후’란 신성로마제국의 작위 중 최고 지위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투표로 선출되었는데 황제 선거권을 가진 영주가 선제후였다.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에서 교육받았던 프리드리히는 네덜란드 발전상을 직접 목격하면서 유대인의 활동상과 능력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종교적 관용과 국가 권력의 상업적 기반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브란덴부르크 공국의 경제 개혁 방법 중 하나로 유대인을 이용키로 했다. 그는 이제까지 유대인에게 가해졌던 규제를 풀고 그들에게 상권을 허용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방안이었다. 이로써 17세기 후반 독일 유대인들은 경제 재건에 공헌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빌헬름은 사무엘 오펜하이머라는 비엔나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을 기용하여 재정 관리를, 유대인 레이만 곰페르츠와 솔로몬 엘리아스를 기용해 대포와 화약을 조달하는 등 유대인들을 경제 재건과 군사력 강화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 유대 금융인들 도움으로 거액의 현금을 조달해서 나라 살림을 운용하는 데 남다른 경쟁력이 있었다.
이들은 재정을 맡아 군주가 경제적으로 귀족들에게 휘둘리지 않게 해주었고 상비군을 조직해 절대군주제의 발판을 만들었다. 1685년에는 프랑스에서 탄압받아 쫓겨난 위그노들을 받아들여 독일 베를린 인구가 6천명에서 2만명으로 늘어났다. 위그노 중에는 상공업자가 많아 국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독일 지역 다른 영주들도 유대인을 유능한 납세자이자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 주요 도시에서 받아들여졌다. 유대인들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여러 분야에 투자하며 양모, 가죽, 비단, 장식품 등의 유통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그들은 수입 식료품, 보석 거래와 같이 길드나 조합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유대인들은 제후들에게 유대 금융 조직을 활용해 상당한 재원을 마련해 주어 제후들은 도시 건설 계획을 주도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비엔나의 카를 성당과 합스부르크가의 쇤브룬 궁전이 이런 식으로 완성되었다. 유대인들은 독일 제후의 수석 장관으로 활동하면서 그들에게 정치·경제적인 권력이 집중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신들도 혜택을 누렸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궁정 유대인과 함께 국가 기틀을 확고히 다진 덕분에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는 공국을 왕국으로 승격시켜 프로이센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그 뒤 유럽 각국의 왕과 제후들이 유대인들에게 재정을 맡기는 게 일종의 관습처럼 되었다. 이를 ‘궁정 유대인’이라 부르는데, 유럽 각국에서 약 150년 동안 성행했다. 이것이 19~20세기 초의 독일을 유럽 최강의 나라로 만든 기초였다.
궁정 유대인은 오늘날 재무 장관의 원형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군대의 보급, 왕의 재정 대리인, 조폐소의 책임자. 재원 확보, 차관 교섭, 채권 발행, 새로운 세제의 고안 등이었다. 곧 궁정 유대인은 근대적 재정 수단으로 통치자를 귀족들의 올가미에서 해방시키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30년 전쟁 뒤 신성로마제국의 200개나 되는 주요 공국과 영주들 대부분이 궁정 유대인을 거느렸다.
◇궁정 유대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책 ‘유대인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은 그의 책에서 궁정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30년 전쟁 막바지까지 궁정 유대인들은 군에 식량을 공급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전시뿐 아니라 평시에도 유용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들은 제후들에게 상당한 재원을 마련해 주어 도시 건설을 가능케 해주었으며 중상주의 정책에 돛을 달아주었다. 비엔나의 카를 성당, 합스부르크가의 쇤브룬 궁전 등이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들은 독일 공국들의 수석 장관으로 대를 이어 봉직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대인들이 스칸디나비아 왕실과 폴란드에서도 활동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도 궁정 유대인들이 요직을 맡았다. 큰 자금을 마련하고 이를 배분할 줄 알았던 유대인들은 17세기 후반 유럽을 휩쓸었던 군사적 대치 상황 곧 유럽을 공략한 오스만제국에 대한 합스부르크가의 성공적인 저항과 역공 그리고 프랑스 루이 14세의 야망을 실패로 만든 연합국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왕실의 궁정 유대인 사무엘 오펜하이머가 두 사건 모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궁정 유대인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는데, 왕실 유대인, 궁정 중개인, 왕실 조달자, 왕실 대리인, 상공업 고문관 등으로 불렸다.
▲베르너 좀바르트. /위키피디아
베르너 좀바르트는 그의 책 ‘유대인과 근대 자본주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대 국가의 통치자에 대해 말할 때는 유대인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과 통치자는 손을 맞잡고 역사가들이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살아왔다. 그들의 관심은 일치되고 공명했다. 유대인은 근대 자본주의의 실현자이다. 통치자는 이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고 유지했다. (중략) 나는 유대인이 두각을 나타낸 국가에 대해 그 국가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물질적인 수단과 군대를 그들이 지원하고 있었던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새 국가의 토대는 군대라는 보루에 있었다.
◇유대 대상인의 2차 시기
이 과정에서 유대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과 손잡고 무역과 금융 네트워크를 완성하여 네덜란드를 세계 무역과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 30년 전쟁과 겹치는 이 시기 곧 1621년에서 1650년 사이의 30년간이 이른바 ‘유대 대상인의 2차 시기’라 불린다. 네덜란드는 1648년 스페인에서 독립하여 군사적 위협도 사라지고, 직물과 염색 산업도 ‘30년 전쟁’의 여파로 보헤미아와 체코 등 경쟁국들의 직물 산업이 붕괴되어 독점 속에 호황을 구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