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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3/ 03-01(수) 가해자들의 ‘학폭’ 승리 공식 - 03-31(금) “젊어봤으니 이젠 늙고 싶다”

상림은내고향 2023. 3. 28. 20:27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3/

03-01(수) 가해자들의 ‘학폭’ 승리 공식

 

내 아이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됐다면? 상식적인 부모라면 피해 학생이 얼마나 다쳤는지부터 묻고, 가해 사실이 확인되면 아이와 함께 피해 학생과 부모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하며 선처를 호소할 것이다. 더러는 피해 학생 탓을 하거나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정당화하는 몰상식한 부모들이 있다. 요즘은 변호사를 앞세워 법적 대응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법 기술자’들은 가해자의 손해를 최소화하는 데만 집중한다. 우선 피해 학생 쪽에 연락하지 말라는 조언부터 한다. 섣불리 사과하거나 합의를 시도하면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면 9단계 징계 조치 중 생활기록부에 기록이 남지 않는 ‘3호(학교 봉사)’ 이하 처분이 나오도록 한다. 그 이상의 징계 처분이 나오면 재심을 청구하고, 그래도 안 되면 징계 처분 취소 소송으로 시간을 끈다. 그래야 특목고든 대학이든 입시 전형이 끝날 때까지 학폭 전과 기재를 미룰 수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지 하루 만에 물러난 정순신 변호사도 이 공식을 따랐다. 정 변호사 아들은 고1이던 2017년 5월부터 동급생을 언어폭력으로 괴롭히다 2018년 3월 학폭위 심의를 받게 됐다. 당시 현직 검사였던 아버지는 “학교의 선도 노력을 많이 막았고”, 진술서 작성을 지도했으며, 전학 처분이 나오자 재심 청구, 가처분신청, 징계처분 취소 소송으로 1년 가까이 전학을 미뤘다. 결국 아들은 수능 성적만으로 서울대에 합격했고, 피해 학생은 징계 처분이 지연되면서 몸도 학교 생활도 만신창이가 됐다.

 

▷대구 중학생이 학폭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후 2012년 학폭 징계 기록을 생기부에 남기는 제도가 도입됐는데 이를 계기로 학폭 전과 세탁을 위한 소송 수요가 생겨났다. 증거가 남는 신체폭력에서 언어폭력이나 은근한 괴롭힘으로 학폭이 ‘진화’하면서 법 기술이 개입할 여지도 커졌다. 서울행정법원엔 학폭 사건 전담 재판부가 신설됐으며 학폭 전문 변호사 17명이 활동 중이다. 간혹 억울한 가해자도 있지만 많게는 1000만 원이 넘는 소송비를 감당할 수 있는 소수가 시간을 끌며 징계를 피하는 동안 피해자는 2차 가해까지 감수해야 하는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학폭이 소송전이 되는 순간 ‘선도’ ‘회복’ ‘화해’ 같은 교육적 가치에서 멀어진다. 정 변호사가 법 지식이 아닌 상식으로 대응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합당한 책임을 지게 했더라면 피해 학생은 일상을 회복하고, 아들은 훨씬 나은 사람이 됐을 것이다. 법 기술자 아버지의 그릇된 자식 사랑이 남의 아이와 제 자식과 스스로가 달리 살아갈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2 서울 아파트 전세가율 50% 붕괴 직전, 꺼지는 갭투자 거품

 

요즘 집주인들은 “계약갱신요구권을 사용한 세입자가 제일 무섭다”고들 한다. 임대차 3법에 따라 전세계약을 갱신한 세입자는 언제라도 계약 해지를 통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셋값은 갈수록 떨어져 제값 내고 들어올 사람을 찾기 힘드니 세입자의 변심이 두렵다. 반대로 세입자들은 흉흉한 전세사기 소식에 ‘우리 집주인은 전세금을 돌려줄 여력이 있나’ 걱정이 앞선다. 부동산 시장엔 불신이 커지고 있다.


▷매매가격보다 전세가격이 가파르게 떨어지며 불신의 ‘역전세난’은 심화되고 있다. 서울 아파트의 전세가율(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은 50%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KB부동산에 따르면 2월 서울 아파트 전세가율은 51.23%로 3개월 연속 하락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아파트 가격조사 방식을 바꿔 이전 통계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단순 수치만 놓고 보면 2012년 2월(51.16%) 이후 11년 만에 가장 낮다. 규제지역인 강남 3구와 용산구는 이미 전세가율이 50% 밑으로 내려간 상태다.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의 동반 하락, 그것도 전세가격이 더 떨어지는 현상은 보기 드물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에나 잠시 나타났었다. 일반적으론 매매가격이 하락하면 더 떨어질 것이란 기대감으로 매매 대신 전세를 선택하는 수요가 늘면서 전세가격이 오른다. 그러다가 전세가율이 일정 수준으로 상승하면 전세 수요가 매매 수요로 바뀌면서 집값을 끌어올리곤 했다.

▷전세가격이 급락하며 매매가격을 끌어내리는 최근의 현상은 지난 몇 년간 집값만큼이나 전세금이 많이 올랐던 데 따른 역작용이기도 하다. 전세시장은 2020년 임대차 3법 도입 이후 크게 요동쳤다. 계약 기간이 2년에서 최장 4년까지 늘어나면서 집주인은 나중에 못 올릴 것을 생각해 한꺼번에 많이 받겠다고 나섰다. 재계약이 늘면서 전세매물도 줄었다. 이 때문에 2021년 전셋값이 고점을 찍었고 거품이 끼었다. 집값과 전세금 차이가 줄며 ‘갭투자’가 기승을 부린 것도 이때다. 임차인을 위한다며 전세자금 대출을 확대한 것도 결과적으로 전세금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집값과 전세금은 오른다’는 ‘갭투자’ 불패의 믿음은 깨졌다. 문제는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도 흔들리면서 주택시장의 리스크가 커졌다는 점이다. 2021년 고점에서 체결한 전세 계약의 만기가 도래하는 올해에 본격적으로 역전세 대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토연구원은 매매가격이 20% 하락하면 전세 끼고 구입한 주택 중 40%가 보증금 미반환 위험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했다. 집값 거품은 빼면서도 전세금 급락이 자칫 중산층 주거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모니터링이 필요해 보인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03 “딱 2분만 보려 했는데 2시간…” 마약 같은 ‘숏폼’ 중독

 

“딱 2분만 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2시간이 지나 있다.” 짧은 동영상 ‘숏폼(short form)’에 중독된 것 같다는 한 사용자가 인터넷에 올린 하소연이다. 숏폼을 시청하다 며칠 연속 밤을 꼴딱 새웠다는 어느 대학생은 “귀신에 씐 것 같았다”며 혀를 내두른다.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또 반복하는 나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집중력이 점점 짧아져 이젠 책 반 권도 못 읽어 낸다” 등의 고백이 이어진다.


▷숏폼은 10분 이내의 짧은 영상을 의미하지만 대다수 콘텐츠의 길이는 15∼60초에 불과하다. 툭툭 끊어지는 자투리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짧고 굵은’ 콘텐츠다. 화제가 된 드라마나 영화의 명장면부터 메이크업, 패션, 요리법 등이 요약 편집돼 있다. 빵 터지는 개그와 아이돌 스타, 반려동물은 빠지지 않는 킬러 콘텐츠다. 시청이 끝나면 자동으로 다음 영상이 연결되는데, 알고리즘이 관심 주제를 알아서 찾아주니 선택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젊은 세대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휙휙 넘기는 손가락질로 무한 재생되는 숏폼은 ‘디지털 마약’ 같은 중독성을 발휘한다. 해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숏폼이 어린이 발달에 미치는 영향’ 같은 유해성 관련 연구가 본격화하고 있다. 기억력과 집중력, 독서력 저하는 물론 강렬한 영상에 반복 노출된 이후 느끼는 일상의 지루함과 삶의 질 하락 같은 문제들에 대한 위기의식이 커진 결과다. ‘팝콘 브레인’ 증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두뇌가 즉각적인 자극에 반복 노출될 경우 팝콘이 터지듯 더 큰 자극만 계속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글로벌 숏폼 플랫폼인 ‘틱톡’은 18세 미만 청소년의 사용 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1일 발표했다. 틱톡의 원조 국가인 중국은 ‘어린이들의 짧은 동영상 중독’ 방지를 위한 관리 강화 방침을 밝혔다. 서울아산병원 정희원 교수 같은 국내 전문가들은 “합성마약이나 다름없는 숏폼의 시청 시간을 줄이기는 어려울 테니 아예 끊어라”는 단호한 조언도 서슴지 않는다. 실제로 중독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10, 20대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우려와 경계 속에서도 숏폼은 대세다. 페이스북이 ‘릴스’, 유튜브가 ‘쇼츠’를 선보였고 국내 SNS 업체들도 속속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쇼츠는 출시 1년도 되지 않아 일간 접속 수가 150억 뷰를 넘어섰다. 영상제작 강의가 넘쳐나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더 자극적인 영상들이 쏟아진다. 사용 시간을 정해두는 등의 자율적 규제가 병행되지 않으면 ‘디지털 좀비’가 될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숏폼이 주는 재미와 정보에는 결국 대가가 따른다는 말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3-04(토) 작년 80조 날린 국민연금… 이래서 노후 믿고 맡기겠나

 

국민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지난해 79조6000억 원, 수익률로는 8.2%의 손실을 냈다.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2020∼2022년 3년간 연금으로 받은 돈이 88조 원이니 거의 3년 치 수령액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작년에 글로벌 주식·채권시장이 모두 좋지 않은 탓이 컸다. 연금 같은 장기투자에서 1년 수익률만 보고 평가할 순 없다. 하지만 최근 10년 연평균 수익률도 4.7%로 썩 좋지 않다는 게 문제다. 수익률 1위 캐나다(9.6%)는 물론이고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일본 공적연금(5.3%)보다도 낮다. 국민연금 고갈 시점은 점점 앞당겨지는데 곳간이 더 빠르게 비워질까 우려가 크다.


▷국민연금 수익률이 저조한 데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낮은 것도 한몫한다. 중기 자산 배분, 연도별 운용계획, 기금 운용지침 등을 심의·의결하는 컨트롤타워이지만 정작 투자 전문가는 찾아볼 수 없다.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해 정부 관계자 6명, 사용자 대표·근로자 대표 각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 등 20명으로 구성돼 있다. 회의록을 보면 황당한 발언도 많다. “돈 굴리는 문제는 이해하기 어렵다” “파생상품 투자하겠다니 겁이 난다”고도 한다.

▷우수한 운용 인력을 확보하기 힘든 구조도 문제다. 민간 금융회사에 비해 처우가 좋지 않아 인력 유출이 심각하다. 지난해 네 차례 100명 이상 채용을 했는데도 정원 380명을 채우지 못했다. 경험이 풍부한 팀장급이 빠져나가면 신입으로 메우는 식으로 운용업계의 ‘인력 양성소’로 전락한 지 오래다. 자산군별 칸막이를 낮추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선진 연기금과 달리 주식, 채권, 대체투자 등 전통적 자산 배분 전략에 갇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벌 수익률 1위인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다르다. 정부와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운 투자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1997년 연금 개혁 과정에서 연금 운용의 목적으로 ‘캐나다 사회에 기여한다’와 같은 말은 뺐다. ‘위험 대비 수익 극대화’만 유일한 법적 책무로 남겼다. 대체투자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 약세장에서 손실을 줄여 준 대체투자 비중이 캐나다의 경우 59%에 달해 우리 국민연금의 16.4%보다 훨씬 높았다.

▷국민연금에 대해 국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평생 꼬박꼬박 낸 연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느냐다. ‘집사’인 국민연금의 최우선 목표는 주인인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수익률이 1%포인트 오르면 기금 소진을 5년, 길게는 8년까지 늦출 수 있다고 한다. 정부와 정치권 입김을 차단하고 수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운용체계를 개혁해야 하는 이유다. 2230만 명의 가입자가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06(월) 출산율 하락에 놀란 日中 “난자를 냉동하자”

 

코로나 이후 주요 선진국들의 출산율이 일제히 반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감염병 위기로 출산율이 하락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 회원국 중 미국 영국 독일을 포함한 27개국의 출산율이 올랐다. 일하느라 임신을 미뤘던 여성들이 재택근무에 힘입어 출산에 나선 덕분이다. 반면 대표적인 저출산 국가인 한중일의 출산율은 더 떨어졌다. 다급해진 일본과 중국이 동시에 꺼내든 대책이 ‘난자 냉동’이다.


▷일본은 저출산 극복에 연간 105조 원을 넘게 쓰고도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1.27명으로 하락하자 비상이 걸렸다. 도쿄도는 난자 동결 시술을 받는 여성에게 보조금 30만 엔(약 290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올해 시범사업을 거쳐 내년부터 본격화한다는 계획이다. 출산율이 1.18명으로 집계된 중국에서도 온갖 제안이 나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난자 냉동이다. 중국은 미혼 남성의 정자 냉동은 가능하지만 미혼 여성의 난자 냉동을 포함한 불임시술은 불법이다. 이참에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난자 동결은 허용하자는 것이다.

▷여성은 생식 기간 동안 400∼500개 난자가 배란된다. 이 중 일부를 채취·동결한 후 질소탱크에 보관했다 해동해 쓰는 기술이 1980년대 개발됐다. 원래 항암치료 등을 앞둔 환자들이 불임에 대비해 얼려두었는데 요즘은 일하는 여성들이 미래 출산을 위해 시술받는다. 미국 뉴욕대 연구팀에 따르면 출산 성공률은 약 39%, 난자 채취 당시 38세 이하이면서 동결 난자가 20개 이상이면 성공률이 70%까지 높아진다. 냉동 보관 연한은 따로 없다. 국내에선 백혈병 환자가 9년간 냉동 보관한 난자로 2011년 출산한 사례가 있다.

▷난자 채취부터 보관까지 한국은 300만∼350만 원, 미국은 1만 달러(약 1300만 원) 넘게 든다. 비용 부담이 커 고소득 여성들이 주로 활용한다. 코로나 시기 선진국에선 출산 붐과 함께 난자 냉동 붐이 일었다. 미국은 냉동용 난자 채취량이 코로나 이전보다 40%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재택근무로 상담과 시술을 받기가 쉬워진 덕분이다. 출산율 증가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배경엔 냉동 난자의 증가도 있다.

▷한중일 3국도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늘었는데 출산 붐이 일지 않은 이유가 뭘까. 한국은 남편의 재택근무에 아이까지 재택수업을 하면서 ‘독박 육아’ 부담이 오히려 커졌다. 일본의 독박 육아인 ‘완오페(원 오퍼레이션) 육아’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선 남성의 육아휴직을 허용하는 곳이 드물다. 서구가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라고 지목한 성별 가사와 돌봄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 한 난자를 얼려둔 여성도 쉽게 해동할 엄두를 못 낼 것 같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7 ‘비운의 2인자’ 리커창 퇴장, ‘시진핑 예스맨’ 리창 등장

 

 2012년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리커창이 권력서열 1위 시진핑에 이어 2인자에 오르고 이듬해 국무원 총리가 됐을 때 외신은 중국을 이끌 쌍두마차로서 ‘시진핑-리커창 투톱 체제’를 전망했다. 이전까지 총리는 서열 3위였는데, 리커창이 총리에 오르면서 2위가 됐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 후진타오의 후원 아래 승승장구하던 리커창이다. 하지만 혁명원로의 자제들인 태자당과 장쩌민의 상하이방이 연합해 시진핑을 밀어주면서 1인자 자리를 내줘야 했다.


▷비정한 권력투쟁에선 한번 밀리면 계속 밀릴 뿐이다. 리커창은 시진핑 체제에서 끊임없이 견제를 받는 ‘비운의 2인자’ ‘실권 없는 총리’로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리커창은 합리적 개혁가로서 과도기의 중국 경제를 조용히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일찍이 국내총생산(GDP) 같은 지표는 조작이 가능해 믿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그 발언이 알려지면서 그가 대신 살펴본다는 △철도 물동량 △전력 소비량 △은행 신규 대출 등 3가지 지표를 재구성한 ‘커창지수’는 외부에서 중국 경제를 예측하는 바로미터가 됐다.

▷리커창은 시진핑에게 반기를 드는 듯한 발언으로 갈등설을 낳기도 했다. 2020년 외신 기자회견에선 “중국인 6억 명의 월 수입이 1000위안(약 19만 원)에 불과하다”고 말해 절대빈곤 해결을 약속한 시진핑의 실패를 겨눈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불렀다. 이후 리커창이 진흙투성이 장화를 신고 수해 현장을 누비는 모습이 관영매체로부터 외면당했고, 작년 8월엔 덩샤오핑 동상 앞에서 개혁개방을 칭송한 장면마저 당국의 검열 대상이 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렇게 잊혀진 총리가 된 리커창이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식 업무보고를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다. 그의 흔적은 벌써 지워지고 있다. 리커창이 지난주 정부 부처를 돌며 따뜻한 환대와 작별 인사를 받는 영상이 일제히 삭제되고 있다고 한다. ‘리커창 지우기’는 작년 20차 당대회 폐막식 때 시진핑 옆자리에 있던 후진타오가 사실상 쫓겨나듯 퇴장하면서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후진타오는 직계 후배인 리커창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갔는데, 이후 발표된 새 지도부에서 공청단파는 전멸했다.

▷새 총리는 시진핑 측근 그룹 ‘시자쥔(習家軍)’의 리창 상무위원이 예약한 상태다. 리창은 20년 전 시진핑이 저장성 성장과 당서기를 지낼 때 비서실장으로 보좌한 이래 시진핑의 집사로 불리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상하이 당서기 시절엔 코로나19 봉쇄 사태로 문책론이 비등했지만 그는 오히려 2인자로 올라섰다. 일각에선 리창이 시진핑의 두터운 신뢰 아래 실권을 쥘 것이란 얘기도 있지만 그가 과연 ‘예스맨’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3-08 죄를 죄로 덮으려다… 美 법조 명문가의 몰락

 

“법정에 걸린 초상화부터 치우세요.”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앨릭스 머독 변호사에 대한 공판 절차가 시작되기 전 판사가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앨릭스의 할아버지인 랜돌프 머독 주니어였다. 100년 이상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남부 일대에서 법조계의 왕처럼 군림해온 머독 가문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법원의 상징적 조치였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3일 앨릭스에게 종신형이 선고됐다.


▷“이 동네에선 머독 일가가 법이었고 때로는 법 위에 있었다.” 햄프턴 카운티의 한 주민이 방송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머독 가문은 앨릭스의 증조부부터 아버지까지 3대에 걸쳐 86년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카운티 5개를 관할하는 검사장을 맡았다. 선출직인 미국의 검사장은 해당 지역 범죄의 기소 여부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머독 가문은 오랫동안 검사장직을 세습하며 법원과 경찰까지 좌지우지했다. 미국 한복판에 ‘머독 왕국’을 건설한 셈이다.

▷대형 로펌을 운영하는 데다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은 앨릭스 역시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컸다. 2019년 아들 폴은 술을 마신 채 보트를 몰다 다리와 충돌해 동승한 여성을 숨지게 했는데도 체포되지 않았다. 폴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앨릭스가 동승자들을 회유하고 경찰을 압박했다는 의혹이 무성했다. 2018년 앨릭스의 집에서 가정부가 갑자기 숨진 사건은 부검도 없이 단순 실족사로 마무리됐고, 유족에게 돌아가야 할 보험금까지 앨릭스가 챙겼다. 법 기술과 권력을 동원해 사법 시스템을 무력화시켰다는 비판이 들끓었지만 그의 위상은 건재했다.

▷2021년 6월 아내와 폴을 살해할 때에도 앨릭스는 법망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법률과 수사 절차에 해박한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범행에 사용된 총기 등은 발견되지 않았고, 목격자도 없었다. ‘사건 당시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도 제시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폴이 찍은 동영상에 앨릭스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이 확인됐다. 그의 거짓말이 들통나면서 유죄 판결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팩트 앞에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던 것이다.

▷검찰은 앨릭스가 거액의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르자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런 끔찍한 일을 벌였다고 밝혔다. 당초 그가 회삿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마약성 진통제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범죄를 다른 범죄로 계속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죗값을 치를 수밖에 없다. 철옹성 같았던 법조계 명문가의 몰락이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09 “안에 사람이”… 30살 소방관은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1000도의 열기 속 치솟는 화염과 매캐한 유독가스, 한 치 앞까지 가리는 시커먼 연기…. 언제 어디가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는 위험천만한 화재 현장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소방 공무원이다. 남들은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아비규환 속을 정반대로 뚫고 들어간다. 소방관들은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인다”고 말한다. 생사를 오가는 다급한 상황에서 본인의 안전 여부는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6일 전북 김제의 주택 화재 현장에 출동한 성공일 소방교도 그랬다. “안에 할아버지가 있다”며 소매를 붙잡은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임용된 지 이제 겨우 10개월. 30세 새내기 소방관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4번의 도전 끝에 이룬 소방관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화마에 스러져간 젊은이의 희생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아빠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내 생일 16일인 거 알지. 같이 맛난 거 먹게 알아서 예약 좀 해줘요”였다고 한다.

▷소방관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각오하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다. 언제 출동 사이렌이 울릴지 몰라 야근조는 소방복을 입은 채 쪽잠을 잔다. 한 해 발생하는 화재 사건은 전국적으로 3만∼4만 건. 하루 평균 100건 정도의 화재가 발생한다. 지난해 경기 평택시 냉동물류창고 화재 사건에서는 소방관 3명이 순직했다. 한 해 평균 5명씩 순직하는 소방관 중에는 20대가 가장 많다. “살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은 물과 땀에 절어 돌아온 동료에게 전하는 서로의 인사이자 격려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소방관의 임무는 화마 대응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에 빠진 피서객을 구하다 급류에 휩쓸려 순직하고, 높은 곳에서 구조 활동을 하다 추락사하고, 현장에 접근하다 배나 자동차가 뒤집혀 목숨을 잃기도 한다. 부상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 10년간 보고된 크고 작은 부상은 7000건에 육박한다. 사지 마비나 3도 화상 같은 중증 부상을 극복하는 과정은 길고도 고통스럽다. 그래도 이들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킬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한다.

▷119종합상황실에 걸려오는 신고 전화는 지난해 1250만 건을 넘어섰다. 2.6초에 한 번씩 울려대는 전화 속에 어떤 위험 상황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 복잡해지는 대도시의 구조와 기후변화 등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신종 재해가 늘어나고 피해 규모도 커지는 추세다. 더 위태로워진 사선(死線)을 앞에 두고도 소방관들은 묵묵히 방수화와 장비를 챙기고 있다.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드는 살신성인의 실천자들이다. 아무리 예우를 다해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3-10 ‘철밥통보단 공정한 보상’ 31년만의 최저 9급 공무원 경쟁률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9급 공무원 봉급에 대한 논란이 종종 일어난다. 올해 초 한 9급 초임 공무원이 실수령액 170만 원대인 월급 명세서를 올리면서 올해 월 201만 원의 최저임금에 못 미친다고 자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팩트 체크의 결론은 수당 상여 명절휴가비 등을 모두 합산하면 월평균으로는 236만 원이어서 최저임금보다는 높다는 것이었다. 최저임금이 5년여간 크게 오른 것에 비해 공무원 월급은 올해 1.7% 등 찔끔 올랐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표출된 것이다.


▷올해 국가직 9급 공무원 경쟁률은 22.8 대 1. 1992년 이후 31년 만에 최저치다. 가장 정점에 달했던 때가 2011년 93.3 대 1이었다. 올해 5300여 명을 뽑는 데 12만 명이 지원했으니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인기도가 떨어지는 추세는 분명하다. 가장 선호하는 직업 1위가 2006년 이후 계속 공무원이었으나 2021년엔 대기업에 자리를 내준 것과 같은 흐름이다. 취업난에 시달리던 명문대생이 9급 공무원에 합격한 것이 화제였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법하다.

▷하위직이어도 공무원의 가장 큰 매력은 안정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신분의 안정성이 법으로 보장돼 명예퇴직 등의 위험이 없다. 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자신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더 중시한다. 이것을 월급으로 수치화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MZ세대가 선호하는 ‘괜찮은 일자리’ 기준에서 정년 보장 같은 안정성은 공정한 보상 등에 밀려 5위에 그쳤다. 여기에다 공무원연금이 2016년 ‘더 내고 덜 받는’ 식으로 바뀐 것도 선호도를 감소시켰다.

▷관공서의 조직 문화와 일하는 방식도 공무원에 대한 선호를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워라밸과 수평적 관계가 몸에 밴 젊은 공무원들은 과도한 의전, 수직적 의사결정, 불필요한 야근 등을 불합리한 문화 1∼3위로 꼽았다. 쓸모없는 보고서 작성,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윗선의 지시 등을 직접 겪은 젊은 공무원들은 공직에 대한 흥미를 잃고 이직을 고민한다. 5년 차 이하 공무원의 조기 퇴직은 2021년 1만 명을 넘어 2017년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취업 시 공무원 쏠림 현상이 줄어든 건 긍정적이다. 수십만 명의 인재가 경제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몇 년씩 공무원 시험을 준비함으로써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연간 17조 원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곧 신설될 ‘우주항공청’에는 연봉 10억 원짜리 공무원이 나오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보면서 젊은 공무원들은 혁신 사례가 될지 지켜볼 것 같다. 일자리에 대한 시각이 바뀐 젊은 세대들을 끌어들이려면 공직사회의 성과주의 도입과 파격적 승진, 조직문화의 개선 등 사기 진작책이 필요하다. 공직에 보람을 느끼는 공무원이 나와야 대국민 서비스가 좋아진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3-11(토) 촘스키 ‘챗GPT는 절대 인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 사과가 떨어진다’는 건 묘사(description)다. ‘그 사과를 놓으면 떨어질 것이다’는 건 예측(prediction)이다. 챗GPT를 포함한 인공지능(AI)은 묘사와 예측은 잘한다. 그러나 설명(explanation)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모든 물체는 떨어진다’와 같이 통계로 수집 가능한 사례를 넘어 보편성을 주장하는 추정이라든가, ‘모든 물체는 중력의 힘 때문에 떨어진다’는 인과적 설명은 AI가 만들어낼 수 없다.


▷95세의 노장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8일 챗GPT 출시 100일을 맞아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AI가 지닌 지능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아이의 언어 습득 과정은 신비로우며 인간은 언어의 활용을 통해 동물과 구별되는 도약을 했다고 본다. 그럼 기계는? 그에 따르면 인간 지능의 운영체계(OS)는 적은 정보로도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반해 AI의 OS는 수백 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가지고 패턴과 통계에 따른 답변을 만들어낼 뿐이다.

▷인간의 추정이나 설명은 틀릴 수 있다. 그러나 틀릴 수 있다는 점이 사고(thinking)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사고는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하고 그 설명의 잘못을 수정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챗GPT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을 수정해가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결론에 이르는 방식이 아니라 어느 주장이 더 많이 거론되고 있느냐는 개연성을 따져 결론에 이를 뿐이다.

▷촘스키는 과학철학자 칼 포퍼를 소환했다. 포퍼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가장 그럴듯한 이론이 아니라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이론’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 바 있다. 사과의 낙하는 사과가 자연스러운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도 당시로는 그럴듯했다. 그러나 ‘왜 하필 지구가 자연스러운 위치냐’는 의문이 따랐다. 사과의 낙하는 질량이 시공(時空)을 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설명은 여전히 그럴듯해 보이지 않지만 사실이다. 지능은 그럴듯해 보이지 않지만 통찰력 있는 것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이다.

▷인간 지능의 또 하나의 능력은 도덕적 사고다. 도덕적 사고는 인간 지능의 창의성을 제한해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한다. 그것은 창의성과 윤리적 원칙 간의 균형을 맞추는 능력이다. 챗GPT는 겉보기에는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도덕적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촘스키는 이를 해나 아렌트가 나치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인 아이히만을 가리켜 썼던 ‘악의 평범성’에 비유한다. 어쩐지 인간 지능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적용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같은 느낌이 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3-13(월) 貧者의 희망 세금, 저소득층 복권 구매 더 늘었다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10단지 상가 앞은 일요일을 빼고 매일같이 수십, 수백 명이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대기 줄이 길 땐 아파트 단지를 에워쌀 정도라 한다. 상가 1층의 편의점이 로또 1등 당첨자를 49명이나 배출한 국내 1위 ‘로또 명당’이기 때문이다. 2002년 첫선을 보인 로또는 작년에만 5조4000억 원가량 팔렸다. 숫자 1부터 45 중 6개를 맞히는 1등 당첨 확률은 814만분의 1. 벼락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지만, 전국의 로또 명당들은 대박의 기운을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문전성시다.


▷로또를 포함해 전체 복권 판매액은 코로나19가 확산된 2020년 처음 5조 원을 돌파했다. 주식·코인 투자 열기만큼이나 인생 한 방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이어 작년에는 6조 원도 가뿐히 넘었다. 지난해 설문조사에서 성인 절반 정도가 복권을 산 적 있고, 4명 중 1명은 매주 복권을 산다고 했다. 전체 성인 인구를 대입하면 600만 명 가까이가 인생 역전을 꿈꾸며 한 주도 빠짐없이 ‘행복 티켓’을 사는 데 지갑을 연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소득 하위 20%에 속한 저소득층의 월평균 복권 구매 비용이 30% 가까이 급증했다. 상위 20% 고소득층의 복권 구매가 7% 늘어나는 데 그친 것과 비교된다. 치솟는 물가와 금리로 허리가 휘는 와중에도 저소득층이 복권을 사는 데 기꺼이 돈을 썼다는 얘기다. 그만큼 서민들이 기댈 데라곤 복권의 요행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복권은 술·담배처럼 경제가 어려울수록 잘 팔리는 불황형 상품으로 꼽히는데, 금융위기 직후에 그랬고 이번에도 속설이 입증됐다.

▷흔히 ‘빈자의 세금’, ‘희망 세금’이라고 하지만 복권만큼 손쉬운 세수 확보 수단도 없다. 정부가 헛된 희망을 부추겨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복권 당첨금은 기타소득으로 잡혀 5만 원이 넘으면 22%를, 3억 원을 초과하면 33%를 세금으로 거둬 간다. 당첨금을 지급하는 NH농협은행 복권 담당자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 놈의 세금을 이렇게 많이 떼느냐”는 것이다. 당첨금이 20억 원이라면 실제 통장에 찍히는 돈은 13억7300만 원 정도다.

▷복권 판매액의 절반은 당첨금으로 나가고, 40% 정도는 복권기금으로 적립돼 취약계층 복지 사업 등에 쓰인다. 그래서 혹자는 당첨되면 큰돈이 생겨서 좋지만 당첨이 안 되더라도 생활 속 작은 기부를 실천한 셈 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팍팍해지고 일자리는 위태로워진 서민들이 지갑 속 로또 한 장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현실은 위태롭다. 복권이 희망인 사회는 미래가 어둡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14 하루만에 420억불 인출… 은행 무너뜨린 스마트폰

 

버스에 오르니 모두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없었다. 사무용 메신저 슬랙을 보곤 황급히 은행 앱을 켜고 회사 자금을 이체하고 있었다. 미국 실리콘밸리 곳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 같은 풍경에 9일 하루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빠진 돈이 420억 달러(약 56조 원). 미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한 조용하고도 신속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의 현장이었다.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이뤄진 ‘디지털 뱅크런’에 40년 역사의 SVB는 채 이틀도 안 돼 무너졌다.


▷전통적인 뱅크런은 은행 창구나 현금인출기(ATM)를 통해 이뤄졌다. 문자 그대로 은행으로 달려가야 했다. 1997년 외환위기,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때 예금을 인출하려는 고객들이 한꺼번에 은행으로 몰려 북새통을 이뤘던 장면이 기억에 선하다. 번호표를 받기 위해 지점 앞에 줄을 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뱅크런은 이 같은 예금자들의 동요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은행과 금융당국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침묵의 암살자처럼 은행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고객들이 신속하게 돈을 빼기로 결심한 데는 소셜미디어도 한몫했다. SVB의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 창업자와 투자자들은 온라인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슬랙, 와츠앱 등의 메신저를 통해 “SVB가 불안하다” “나는 돈을 뺐다”는 공포의 메시지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주가 하락 뉴스에도 설마 하던 사람들은 동료들의 재촉에 탈출을 결심했다. 신속한 정보전달과 빠른 실행을 가능케 했던 실리콘밸리의 기술이 오히려 파국을 앞당긴 셈이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한 한국으로선 남 일 같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국내 은행의 모바일뱅킹을 포함한 인터넷뱅킹 등록 고객 수는 2억704만 명이나 된다. 인터넷뱅킹을 통한 자금이체·대출신청은 하루 평균 1971만 건, 이용금액은 76조3000억 원에 이른다. 전체 입출금·자금이체 중 인터넷뱅킹의 비중은 78%에 달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정보공유도 어느 나라보다 활발하다. 만약 한국에서 은행에 위기가 닥친다면 디지털 뱅크런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뱅크런을 연구한 학자들이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는 수상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금융위기는 사람들이 금융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고 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불안의 전염이 어느 때보다 빠른 시대다. 위기의 전개방식도 예측 불가능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국채가 뱅크런의 방아쇠 역할을 할지 누가 알았으랴. 과거의 위기 극복 백서만 들춰봐서는 정답을 찾을 수 없게 됐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15 ‘일본의 양심’ 오에 겐자부로 잠들다

 

1960년대 일본 문학계에서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작가가 나타나서 작가 지망생들이 붓을 꺾었다’는 말이 돌았다. 그 주인공이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다. 1950년대 후반 등단해 ‘만연원년(万延元年·1860년)의 풋볼’ 등 세계적 명작들을 남긴 그가 타계했다고 일본 언론이 13일 전했다. 오에를 추모하는 이들은 대문호로서의 명성 못지않게 ‘일본의 양심’으로 그를 기억한다.


▷“일왕이 사람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에 놀랐고 실망했다.” 오에는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로 일왕의 항복 선언 연설을 들었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1935년 태어나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던 그는 어릴 적 “일왕은 신비한 하얀 새와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왕 역시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느꼈던 충격과 미 군정 체제에서 경험한 민주주의가 오에의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58년 소설 ‘사육’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최연소 수상하며 필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3년 아들이 중증 장애를 안고 태어나면서 그의 삶은 크게 바뀐다. 낙담한 오에는 생후 한 달 된 아들을 병원에 놔둔 채 히로시마로 떠났다. 하지만 원폭 피해자들을 돌보던 의사에게서 ‘아픈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말을 듣고선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미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도쿄로 돌아와 아들을 돌보며 쓴 소설 ‘개인적 체험’ 등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그는 “아들과 공동 집필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오에는 평소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한국인들이 자택으로 찾아온다고 하면 문패 위에 한글로 이름을 써서 붙여놨을 정도였다고 윤상인 전 서울대 교수는 전했다. 하지만 폭력, 특히 국가의 폭력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에세이에서 “권력이 쌓아올리는 사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적으로 저항하는 목소리를 한결같이 계속 내는 길밖에 없다”고 썼다. 그리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오에는 “일본은 아무리 사죄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며 지속적으로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했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일왕이 주는 문화훈장을 거부했다는 이유 등으로 극우세력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협박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지인들과는 전화 대신 팩스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노년까지 집회에 참여해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 일본의 지식인이 또 한 명 귀천했다는 소식이 안타깝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16 ‘주 69시간’ 열흘도 안돼 ‘발표→재검토→보완’

 

gapjil(갑질), mukbang(먹방)처럼 외신이 한국어 발음 그대로 옮겨 쓰는 단어가 꽤 있다. 영어로 풀어 쓰면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서다. 로이터통신이 2020년 택배노동자 사망 사건을 전하면서 처음 쓴 kwarosa(과로사)도 마찬가지다. ‘death from overwork’라고 하면 불안정한 고용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오래 일해야 하는 한국의 근로문화를 담을 수 없다는 거다. 그제 호주 ABC방송이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보도하며 kwarosa를 또 언급했다.


▷고용노동부가 6일 발표한 근로시간 개편안은 현행 주 52시간 근무를 유연화해 일이 몰릴 때는 주당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다. 1주일 단위의 근로시간 산정 기준을 월 단위 이상으로 확대해, 일이 많으면 몰아서 일하고 그만큼을 더 쉬게 한다는 것이다. 초과 근무시간을 적립해 한 달씩 장기휴가를 쓸 수 있고, 노사에 근로시간 선택권을 넓혀줬다고 정부는 홍보했다.

▷하지만 직장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있는 휴가도 못 쓰는데 장기휴가가 웬 말이냐” “사실상 주 69시간 근무가 굳어질 거다” “공짜 야근이 더 심해질 거다”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MZ세대 노조인 ‘새로고침’도 “역사적 발전에 역행한다. 장시간 노동과 과로 탈피를 위한 제도적 기반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어 시기상조”라며 반대를 공식화했다. 한국인의 평균 근로시간은 연 1915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199시간이나 많다. 주 38시간제가 도입된 호주의 언론이 kwarosa를 꺼낼 만하다.

▷예상보다 거센 반발에 MZ세대를 노동개혁의 우군으로 삼았던 정부는 화들짝 놀란 모양이다. 그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재검토를 지시했다. “근로자들의 다양한 의견, 특히 MZ세대 의견을 면밀히 청취해 법안 내용을 보완하라”고 하자, 고용부 장관이 하루 만에 새로고침 관계자들을 만났다. 정부는 결국 69시간 근무를 백지화하고 여론조사 등을 거쳐 주당 최장 근로시간을 다시 정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개편안은 불쑥 나온 게 아니다. 대선 때부터 대통령이 진두지휘해 온 노동개혁 1호 정책이며, 정부는 지난해 6월부터 주 69시간 도입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동안 현장의 제도 보완 목소리가 많았는데, 지금까지 뭐하다가 이제야 의견을 청취하고 여론조사를 하겠다는 건지 의아할 뿐이다. 업종과 산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경직적으로 운영돼 온 주 52시간제에 노사 가릴 것 없이 불만이 컸다. 근로시간 유연화를 두고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노동개혁의 시계가 멈춰 설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들린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17 예금자보호 한도액 23년째 5000만 원

 

“미국인과 미국 기업은 필요할 때 예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10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폐쇄의 불길이 은행 줄파산으로 이어지지 않은 데는 이틀 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성명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은 예금 전액 보증 카드까지 꺼냈다. 유럽까지 불똥이 튄 SVB 파산 쇼크는 여전하지만 초고속 ‘디지털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만큼이나 전격적인 미국의 조치는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예금자보호 수준은 두텁지 않다. 예금자보호법에 따르면 금융기관이 파산하면 예·적금 원금과 이자를 합쳐 1인당 최대 5000만 원까지만 돌려받을 수 있다. 2001년 2000만 원에서 5000만 원으로 오른 이후 23년째 그대로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001년 대비 2.9배로 커졌으니 말이 동결이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미국은 25만 달러(약 3억3000만 원), 영국 8만5000파운드(약 1억3000만 원), 일본은 1000만 엔(약 9700만 원)인 것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낮다.

▷일각에선 한도를 올리면 금융회사가 내는 예금보험료가 올라 대출 금리 인상 등으로 소비자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한도를 높여봐야 소수의 고액 자산가만 혜택을 본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소득·자산과 물가 상승을 감안할 때 20년 넘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지나치다. 한도는 그대론데 예금만 늘다 보니 유사시 보호받지 못하는 예금 규모가 1152조7000억 원에 이른다. 원금과 이자를 보장받으려고 예금을 5000만 원 미만으로 쪼개 여러 은행으로 분산해야 하는 고객들의 불편도 무시할 수 없다.

▷예금자들의 대량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보호한도의 상향은 필요하다. SVB 사태에서 보듯 클릭 몇 번의 ‘디지털 뱅크런’으로 은행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온라인에서 돈의 쏠림이 얼마나 무서운지 한국도 경험한 바 있다. 지난해 말 일부 상호금융기관에서 고금리 특판 예금을 실수로 온라인에 공개했다가 순식간에 수천억 원이 몰려 ‘예금을 해지해 달라’고 읍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돈의 방향이 바뀌면 뱅크런이 된다. 밀물이 빨랐던 것처럼 썰물도 순식간이다.

▷평소 같으면 쉽게 넘어갈 악재도 공포로 번질 수 있는 위기의 시대다. 금융 소비자들이 소문에 동요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은 내 예금은 안전하다는 신뢰다. 국회에는 예금자 보호한도를 1억 원으로 상향하는 법안도 다수 발의돼 있다. 금융당국도 비상사태 발생 시 예금을 전액 보증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고 한다. 경제 규모에 걸맞게 금융 소비자를 두텁게 보호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때가 된 것 아닌가.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18(토) 코로나 팬데믹 3년… 한국 부부 이혼 줄었다

 

“더 이상 같이 못 살겠어요. 세끼 밥 챙기는 것도 힘든데 반찬 투정만 하고,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보기 싫고….” 코로나19가 발병한 2020년 이후 이혼 증가는 세계적인 현상인 듯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 등에서도 유사한 통계 변화가 나타났다. 전례 없는 격리 조치 속에 한집에 붙어 있게 된 부부간 충돌이 잦아진 탓이다. “부부야말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한탄 속에 ‘코비드(covid)’와 ‘이혼(divorce)’을 합친 ‘코비디보스(covidivorce)’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팬데믹 초기만 해도 유사한 그래프를 그리는 듯했던 한국의 이혼율은 다르다. 코로나 발병 이후 3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인구 1000명당 이혼 건수는 1.8건으로 25년 만에 가장 적다. 전반적인 인구 감소 추세 속에 코로나 기간 결혼 자체가 감소한 것 등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게 통계청의 분석이다. 경기 불황으로 경제적 부담이 커지면서 이혼을 미루려는 경향 탓도 있다고 한다. 아파트값, 주가 급락 등으로 재산분할의 몫이 적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나왔다.

▷감염병과 테러, 대형 재난 같은 외부 충격이 결혼 등 가족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양면적이다. 코로나의 경우 재택근무 등으로 부부가 붙어 있는 시간이 늘면서 관계가 되레 돈독해진 사례도 많았다. 피임약과 콘돔 주문량이 증가했고, 출산율이 높아지면서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코로나 베이비붐’이라는 말이 생겼다. 다만 이는 정부가 쏟아낸 대규모 실업급여 등 다른 상황 변수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충격파를 받아내는 주변 환경이 어떤지에 따라 사람들의 선택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경제적 어려움 또한 과거에는 주로 이혼 사유였다. 실직과 파산, 빈곤 등으로 벼랑 끝에 선 이들이 극심한 불화 끝에 이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이혼율은 OECD 국가 중에 최상위권에 속했다. 최근의 경기 불황은 치솟는 물가 속에 생활고를 서서히 압박해 온다는 점에서 다르다. 주거와 생계 등 해결을 위해 힘든 결혼생활을 감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60세 이상의 ‘황혼 이혼’이 눈에 띄는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게 또 다른 방증이다.

▷3년간 이어진 이혼율 하락세가 얼마나 더 갈지는 알 수 없다. 팬데믹 기간에 미뤄놨던 이혼 소송이 앞으로 본격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접수된 6만여 건의 이혼상담 사유 중에서는 ‘경제 갈등’과 ‘빚’의 비중이 전년보다 늘어났다. 가정을 꾸리기도, 유지하기도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이다. 삶의 풍파를 단단한 가족 간 결속의 계기로 만들어 나가는 지혜와 노력이 더 절실해졌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3-20(월) 은행 파산 사태로 ‘민간 연준’ 다시 맡은 JP모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미국이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로 부상하던 시대의 세 부자가 존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J. P. 모건이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록펠러는 전 세계 정유량의 90%를 통제했고, 카네기는 영국보다 많은 철강을 생산했으며, 모건은 미국을 두 번의 파산 위기에서 구했다.”


▷록펠러와 카네기는 자수성가했지만 모건은 그렇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국제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금융 거래를 한 사람으로 재력을 가졌다. 그 자신은 독일이 학계의 중심이던 때 괴팅겐대에서 수학을 공부할 정도로 지적이었다. 석유왕 록펠러나 철강왕 카네기가 한 분야에서 기업을 키웠다면 은행가 모건은 금융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기업을 합병하고 이사회를 통해 장악했다. 미국에 연준이 없던 1895년과 1907년에 모건이 ‘1인 연준’ 역할을 한 것은 은행의 파산과 연이은 기업의 파산을 막는 것이 누구보다 자신에게 절실했기 때문이다.

▷모건은 1912년 하원 위원회에 불려나왔다. 그와 동업자들의 금융조합이 112개 기업의 341개 이사직을 차지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는 이듬해 사망했는데 이유가 하원 위원회에서 공개적인 비방을 당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사망한 해 미국에서 연준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에 따라 12개의 연준 은행이 만들어져 모건 같은 민간 은행가가 하던 역할을 맡게 됐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을 전화로 찾아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여파로 돈이 빠져나가고 있는 퍼스트리퍼블릭은행 등 중소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다이먼 회장은 요청을 수락한 뒤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시티 등 다른 은행 CEO와 일일이 연락해 협조 지원을 끌어냈다. 1907년 모건이 월가의 은행가들을 모아 협조 지원을 끌어낸 일을 떠올리게 한다.

▷은행의 파산을 막는 데 세금이 쓰이는 것은 맞지 않다. 116년 전이나 지금이나 궁극적으로 은행만이 은행을 도울 수 있다. 물론 뱅크런을 막아 은행권 전체에 이익이 될 때의 얘기지만 은행의 민간 소유권이 확고하고 은행이 자율성을 갖는 나라에서는 그렇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보면 정부가 은행장들을 한데 모아놓고 몇 마디 윽박지르는 것만으로 협조 지원 정도는 간단히 될 것 같은 나라다. JP모건의 되살아난 민간 연준 역할은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없었던 은행의 한 중요한 측면을 생각해보게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3.21 ‘늦으면 어때’…20대 초반보다 많아진 40대 초반 신부

 

한국에도 꽤 알려진 일본 작가 다카기 나오코의 책 ‘서로 40대에 결혼’은 출판 당시 화제가 됐다. ‘혼자 살아보니 괜찮아’, ‘독신의 날들’ 같은 책을 연달아 냈던 그의 갑작스러운 결혼에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안 해 봤다고 후회할 것 같으면 일단 저질러 보자!”며 결혼에 이어 임신, 출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세계적 현상이라는 만혼(晩婚) 트렌드가 보수적인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국내 40대 초반 여성의 지난해 혼인 건수가 20대 초반 여성보다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혼인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90년 이후 처음으로 40대 초 혼인이 20대 초를 추월한 2021년부터 2년째다. 40대 여성의 혼인 건수는 해마다 늘어나는 반면 20대 여성의 혼인은 줄어든 결과다. 한국에서도 여성들의 결혼이 그만큼 늦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40대 결혼은 절반 이상이 초혼이다. 여성이 연상인 부부 비중 또한 역대 가장 높다. ‘누난 내 여자니까∼’라는 노래 가사가 낯설지 않은 시대다.

▷‘노처녀, 노총각 히스테리’라는 말은 사라지는 분위기다. 이제는 늦은 나이까지 싱글 라이프를 여유롭게 즐기는 사례가 더 많다. 초혼 연령은 남성(33.7세)과 여성(31.3세) 모두 역대 최고다. 주택 마련의 어려움 등 주변 여건 탓도 있지만 결혼을 ‘필수 아닌 선택’으로 여기는 인식의 확산도 영향을 미쳤다. 만혼의 장점을 앞세우는 이들은 역으로 ‘젊을 때 결혼하면 안 되는 10가지 이유’ 같은 논거를 들이대기도 한다. 결혼 실패 확률이 더 높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며, 아직 자기계발이 진행 중인 만큼 기회비용이 크고,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압박이 더 심하다는 등의 이유다.

▷온라인 데이팅 앱의 발달로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서로의 관심사와 배경을 맞춰 만나기가 쉬워지고 있다. 고령화 추세 속에 짝을 찾을 수 있는 모집단 자체도 늘었다. 40, 50대의 만남은 웨딩 문화도 바꿔놓고 있다. 성숙미와 세련미를 강조한 ‘작은 결혼식’이 열리고, 순백이 아닌 다채로운 색깔과 무늬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등장한다. 꼭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지만 늦결혼에 대비해 난자를 냉동하는 여성들도 많아졌다.

▷저출산 대책 마련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정부 관계자들은 만혼 현상에 한숨이 나올 법도 하다. 결혼이 늦어지는 만큼 출산을 늦추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적잖다. 그렇다고 100세 시대의 인생 반려자를 찾는 데 적령기를 따질 일은 아니다. 독신이었던 제임스 매티스 전 미국 국방장관은 72세였던 지난해 50대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사랑에 나이가 어디 있으랴. “결혼, 미룬다고 아예 안 하는 게 아니다”라는 싱글들의 외침이 울린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3-22 코로나 팬데믹에도 인류는 불행해지지 않았다

 

코로나가 창궐한 3년은 21세기 인류가 맞은 최악의 시기였다. 6억8000만 명이 감염돼 680만 명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 인명 피해다. 경제는 뒷걸음질치고 기대수명은 짧아졌다. 그런데도 인류는 불행해지지 않았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는 20일 ‘세계 행복의 날’을 맞아 코로나 3년간 137개국 사람들의 행복도가 코로나 이전보다 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의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했다.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이 조사는 국가별 1인당 국내총생산(GDP), 기대 건강수명, 사회적 연대, 기부나 봉사활동 같은 자선행위, 정부에 대한 신뢰도, 원하는 삶을 선택할 자유도 등 6가지 항목을 종합해 산출한다. 그 결과 코로나 시기 1인당 GDP와 기대수명 부문의 감소를 사회적 연대와 선행활동으로 상쇄한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8명이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 있었다”고 했고, 자선활동이 코로나 이전보다 25% 늘었다. 코로나 봉쇄 상황에서도 서로 안부를 물어가며 고립감을 이겨낸 것이다.

▷기부하고 헌혈하고 낯선 이를 돕는 이타적 행위는 수혜자를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도움을 준 사람과 선행을 목격한 3자 모두의 행복도를 높이는 것으로 분석됐다. 팬데믹 기간 웃고, 즐겁고, 재미있는 감정을 느꼈다는 응답이 걱정되고 슬프고 화났다는 응답의 두 배나 됐다. 초유의 감염병 사태를 계기로 경제적 성공보다 이웃과의 유대를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의 변화도 행복도에 영향을 주었다. 연령별로는 60대 이상의 행복도가 젊은 세대보다 높게 나왔다. 치사율이 높은 만큼 생존의 기쁨도 컸을 것이다.

▷가장 행복한 국가는 6년 연속 1위를 차지한 핀란드다. 한국은 코로나 3년간 행복도가 코로나 이전 3년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상대적 순위는 57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한국보다 낮은 곳은 그리스 콜롬비아 튀르키예 등 세 나라뿐이다. 경제력이 상위권인 데다 기대수명은 세계 최고 수준임을 감안하면 나머지 4개 항목의 낮은 점수가 행복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보인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는 ‘아플 때 도움 받을 사람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코로나 전보다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왔다. 헌혈 참여율과 기부금품 모금 실적도 작게나마 코로나 타격을 받았다. 낯선 사람을 돕거나 시간 내어 봉사하는 일에는 금전적 기부보다 더 인색한 편이다. 위기가 닥치면 사회 역량을 한데 모으는 정부 리더십, 남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용기, 그리고 추울 때 더 추운 사람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마음이 있으면 세기적 위기 속에서도 우린 더 행복할 수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23 “인류는 살얼음판 위에 서 있다”

 

프랑스 서남부의 지롱드 숲은 ‘최고의 숲’이라는 애칭을 얻을 만큼 아름다운 수목이 울창했다. 하지만 작년 여름 ‘괴물 산불’로 불리는 대규모 산불이 이 숲을 덮쳐 잿더미가 된 상태다. 화마에 할퀸 면적이 파리의 2배에 이른다. 화재의 원인이 된 이상고온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 유럽이 40도가 넘는 무더위로 몸살을 앓았다.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미국은 한겨울 ‘폭탄 사이클론’으로 홍역을 치렀다. 아프리카 동부에서는 5년째 심각한 가뭄이 이어지고 있지만 파키스탄에서는 역대급 홍수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지구온난화가 불러온 기상이변이라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지구온난화는 이미 일상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구의 온도가 더 올라가면 해수면 상승, 전염병 확산, 농작물 재배 급감 등으로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200여 개국은 파리협정을 맺고 1850∼1900년 대비 지표면 온도 상승 폭을 1.5도 이내로 줄이기로 하고 국가별로 2030년에 도달할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설정한 뒤 탄소 배출을 줄여왔다.

▷하지만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20일 만장일치로 승인한 제6차 종합보고서를 보면 인류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은 온난화의 심각성에 비춰 볼 때 크게 미흡한 수준이다. 이번 세기 내 온도 상승 폭이 1.5도를 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NDC를 높여 잡지 않으면 2100년에는 지표면 온도 상승 폭이 최고 3.4도까지 높아질 것이란 예상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인류는 살얼음판 위에 서 있고, 그 얼음판은 빨리 녹고 있다”고 절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정부가 21일 발표한 탄소중립 로드맵에는 이 같은 위기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전 정부가 설정한 대로 2030년까지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줄이되 산업 부문 감축목표는 14.5%에서 11.4%로 줄여 부담을 줄여주고 나머지는 미래 기술과 국제 협력에 의존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눈길이 가는 대목은 감축 시간표다. 이번 정부 내에는 전체 목표량의 25%만 감축하고 나머지 75%는 다음 정부의 숙제로 넘겼다.

▷지난 정부가 원래 감축 목표였던 26.3%를 갑자기 40%로 끌어올린 것도 무책임하지만, 정책의 연속성을 고려하지 않고 감축 의무를 다음 정부로 떠넘긴 정부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실현 가능성을 충분히 숙고하지 않고 무리한 목표를 덜커덕 국제사회에 제시한 전 정부나, 다음 정부에 ‘폭탄’을 떠넘긴 현 정부나 온난화의 심각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24 1000원의 행복

 

요즘 1000원으로는 붕어빵도 못 사 먹는다. 두세 개에 2000원, 네댓 개에 3000원 달라 하지 1000원어치는 팔지 않는다. 편의점에 가도 크림빵이 1200원, 흰 우유 1100원, 삼각김밥이 1500원이다. 1000원으로 살 수 있는 건 껌 한 통, 로또 복권 한 장 정도다. 그래서 요즘 대학가에선 든든한 한 끼를 단돈 1000원에 먹을 수 있는 학식이 인기라고 한다.


▷매일 아침 전국 곳곳의 대학교 구내식당은 1000원에 아침을 해결하려는 학생들로 붐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천원의 아침밥’ 사진들을 보면 잡곡밥과 계란국에 돼지불고기 묵무침 콩나물 김치까지 집밥보다 낫다 싶다. 학생이 1000원을 내면 정부가 1000원을 보태고 나머지는 학교가 부담한다. 정부 보조 없이 교수와 직원들이 모은 장학금으로 1000원에 아침밥을 주는 대학도 있다. 밥 한 끼 먹으려고 긴 줄을 선 학생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다.

▷‘1000원의 행복’ 행정도 유행이다. 광주 서구는 양동시장에 고령자들이 시간제로 일하는 ‘천원 국시’집을 열었다. 노인 일자리 만들고 시장도 살려 보려는 시도다. 국수 한 그릇에 3000원이지만 시장에서 장을 본 사람들에겐 1000원만 받는다. 경북 영천시와 경주시는 교통이 불편한 지역 주민을 위해 ‘천원 행복택시’를 운영하고 있다. 영천시 임산부는 출산 후 1년까지는 택시 요금이 1000원이다.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1000원에 감상할 수 있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천원의 행복’ 프로그램은 올해로 16년째를 맞았다.

▷1000원 행정에 대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물가로 힘겨운 이들은 “생활 밀착형 행정”이라며 반긴다.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많다 보니 1000걸음 걷고 퀴즈 풀 때마다 10원씩 포인트가 쌓이는 앱을 깔아 ‘앱테크’를 하고, 신규 발급 혜택을 노리고 수시로 새로운 카드를 신청하는 ‘카테크’를 하며, 개비당 10원을 주는 구청 담배꽁초 줍기 알바 뛰면서 끝 모를 불황을 견디고 있다. 10원도 아쉬운데 1000원은 오죽 크게 느껴질까.

▷“바람이 불 때는 그것이 곧 지나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라. 비가 올 때도 마찬가지다. 구름이 걷히면 곧 해가 나는 법이다.” 장석주 시인이 성인이 돼 독립하는 딸에게 쓴 편지 구절이다. 언젠가 찬 바람 지나고 비가 그치면 알게 될 게다. 가난한 나를 위해 많은 이들이 수고로움으로 따뜻한 아침밥을 짓고, 아름다운 공연으로 영혼의 허기를 달래 주었음을. 우리는 1000원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임을 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25(토) “헌법은 검사의 수사권에 침묵한다”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헌법 12조 3항의 내용이다. 그런데 검사가 영장을 신청하기 위해 수사까지 할 수 있는지는 헌법에 명시돼 있지 않다. 그래서 영장청구권과 수사권이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별개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져 왔다.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이 헌법에 어긋나는지에 대한 판단도 여기서 갈렸다.


▷헌법재판소가 23일 결정한 검수완박법 관련 권한쟁의심판 사건은 두 가지다. 먼저 국민의힘 의원들이 낸 소송에 대해선 ‘기각’ 결정을 내렸다. 민사소송에 견주면 원고 패소라는 뜻이다. 반면 법무부 장관과 검사들이 낸 심판은 ‘각하’됐다. 청구 내용을 아예 심리하지 않고 재판을 끝냈다는 의미다. ‘권한이 침해됐고 이와 관련성이 있는 기관’만 소송을 낼 수 있는데, 법무부 장관과 검사들은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대입 시험에 응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헌재가 각하를 한 이유에도 차이가 있다. 법무부 장관의 경우는 검수완박법에 따라 권한에 영향을 받지 않아 아예 ‘관련성’이 없다고 봤다. 검사들은 관련성은 있으나 권한이 침해되지 않아 소송을 낼 수 없다는 취지다. 검사가 직접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범죄가 6개에서 2개로 줄었는데 헌재는 왜 검사의 권한이 침해되지 않았다는 것일까. 쟁점은 검사의 수사권이 법률상 권한인지, 헌법상 권한인지 여부였다.

▷검사의 수사권이 헌법상 권한이라는 주장의 핵심은 검사가 영장을 청구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헌재는 인정하지 않았다. 영장을 검사가 청구하도록 한 것은 강제 수사의 남용을 막아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지, 수사권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헌법은 검사의 수사권에 대해 침묵하므로”, 즉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률상의 권한이라는 것이 헌재의 논리다. 따라서 국회가 법률로 기관 간의 수사권 배분을 조정한 것을 검사의 권한 침해로 볼 수는 없다고 헌재는 결론 내렸다.

▷지난 정부에서부터 수사기관 간에 수사권을 어떻게 나눌지를 놓고 정치·사회적 갈등이 벌어져왔다. 수사권 조정에 찬성하는 측이나 반대하는 측 모두 ‘국민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헌재의 결정으로 일단락이 됐고, ‘누가’ 범죄를 수사하는지가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문제도 아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수사의 효율성을 높이고 억울한 피해자를 줄일지에 형사사법체계 개선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27(월) ‘아이 셋 아버지 군 면제’ 황당 아이디어 소동

 

대학마다 봄방학 신설해 연애 장려, 정자 기증받아 난임 여성들에게 제공, 아이 셋 낳으면 대출금 전액 탕감,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상교육…. 저출산 현상으로 고민이 깊은 나라들이 생애주기별로 내놓은 각종 출산 장려 대책들이다. 정부는 16년간 280조 원을 쓰고도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자 새로운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인데 최근 여당이 내놓은 대책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30세 전에 아이 셋을 낳은 아빠의 병역을 면제하자는 아이디어는 국민의힘 정책위원회에서 나왔다. 이번 주 대대적인 저출산 고령화 대책 발표를 앞두고 대통령이 “과감한 대책”을 주문하자 자녀 1인당 2억 원이 넘는 수당을 지급하는 방안과 함께 문제의 대책을 대통령실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 안팎에서 비판이 제기된 후 국민의힘은 “공식 제안한 바 없으며 추진할 계획도 없다”고 수습에 나섰지만 여진은 이어지고 있다.

▷우선 현실성의 문제다. 서른 전에 아이 셋을 낳으려면 20대 초반에 결혼해야 한다. 한국 남성이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는 평균 입직(入職) 나이는 26세가 넘고, 초혼 나이는 33.7세다. 20대 초에 결혼해 아이 셋을 키울 정도의 경제력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금수저 병역 면제법’이라는 조롱이 나온다. 군 복무 기간이 1년 6개월로 짧아져 셋 낳는 조건으로 면제받으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설사 서둘러 결혼해 부지런히 낳아도 셋째를 보기 전에 서른이 되면 아이 둘을 남겨두고 뒤늦게 입대해야 하는 황당한 일이 생긴다.

▷출산을 병역 문제와 연계하자 남녀 간 논쟁도 달아올랐다. “애는 여자가 낳는데 왜 혜택은 남자가 보느냐”는 주장에 “아이 셋을 둔 아빠가 군에 안 가고 일하면 가족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냐”는 반박이 이어졌다. 여성에게도 병역 의무를 지운 뒤 첫째를 낳으면 엄마, 둘째를 낳으면 아빠의 병역 의무를 면제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기쁘게 감당해야 할 출산의 의무를 군 면제를 위한 도구쯤으로 여기는 발상이 불편하다는 지적에는 의견이 모아진다.

▷예전에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이 휴학이나 연수로 늦게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채용 시 불이익을 주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불필요하게 스펙 쌓으면서 결혼 시장에 늦게 들어오는 현상을 막자”는 취지였다. 모 국회의원은 “여성이 출산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몸매 변화에 대한 우려”라며 출산한 여성의 유방 수술에 세제 혜택을 주는 법안을 추진했다가 중단하기도 했다. 아님 말고 식 황당한 저출산 대책은 “이런 나라에서 애 낳고 싶겠나”라는 냉소주의만 부추기게 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28 한꺼번에 핀 봄꽃,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

 

서울에서 아직 꽃망울 못 터뜨린 목련도 적지 않은데 벌써 벚꽃이 폈다. 진달래는 아직 펴 있고 개나리는 여전히 무성해지고 있다. 봄꽃은 대개 매화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순으로 핀다. 서울 벚꽃 개화의 기준인 종로구 서울기상관측소의 벚꽃은 25일 폈다. 친구가 전남 구례 화엄사를 찾아 멋진 홍매화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준 것은 19일이다. 매화에서 벚꽃까지 한 달에 나눠 피던 꽃들이 전국에서 일주일 사이에 다 피었다.


▷꽃피는 시기가 빨라지면서 지자체는 봄꽃 축제를 앞당기고 있다. 산수유는 매화와 더불어 봄철에 가장 먼저 피는 꽃 중 하나다. 경기 이천시는 백사 산수유 축제를 2006년까지 4월 7일에 시작했으나 2007년에는 3월 30일로 1주일 앞당겼다. 이천시는 올해 다시 축제를 3월 23일로 1주일 앞당겼다. 7년 사이에 2주일 앞당겼다는 사실에서 점점 더 빨라지는 기후변화의 속도를 실감할 수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에서 40만 종 이상 꽃의 평균 개화 시기가 1753∼1986년에 비해 1987∼2019년에 30일 더 빨라졌다. 영국에서 이런 과학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과학자 박물학자 정원사 등의 관찰기록을 모아놓은 ‘자연의 달력(Nature’s Calender)’이라는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서다. 우리도 훌륭한 기록문화를 가진 나라인 만큼 비슷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개화 시기의 정확한 변화 추이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가 겨울에 예전보다 덜 식었다가 빨리 데워지기 때문에 봄꽃 피는 시기가 빨라질 뿐만 아니라 압착되고 있다. 다양하고 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니 보기는 좋다. 진달래의 분홍은 은은하기는 하지만 잿빛 산야를 물들이기에는 역부족이고, 개나리의 노랑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지만 너무 노랗기만 해서 귀해 보이지 않았는데, 목련의 송이송이 탐스럽고 벚나무의 팝콘 터지는 듯한 흰 꽃과 함께 피어 있어 한데 잘 어울린다.

▷아름다운 외관 너머에는 심각한 생태학적 미스매치(mismatch)가 발생하고 있다. 꽃이 너무 일찍 피었다가 져버리면 그 꽃에 의존해 살아가는 곤충의 활동 시기와 어긋나 곤충이 살 수 없고 그 곤충을 먹고 사는 새도 살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꿀벌 폐사 현상이 양봉업자의 애를 태웠고 근래로 올수록 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꿀벌이나 새가 없으면 자연수분이 이뤄지지 않아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생태계에 큰 혼란이 초래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봄꽃을 구경하는 게 기쁘지만은 않은 이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3-29 사표 던지는 중앙부처 공무원 1년에 3000명

 

“우리가 국가의 산업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국뽕’에 취해 살았던 시절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근무하는 20년 차 공무원 A 씨는 초임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정책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밥 먹듯이 야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나라 살림살이부터 일자리, 복지, 안보 등 부처별로 대한민국을 끌고 간다는 긍지와 사명감이 각 부처 공무원들에겐 넘쳤다.


▷요즘 관가 분위기는 달라졌다. 18개 중앙부처 소속 일반직 공무원 중 사표를 던지는 이가 한 해 3000명에 육박한다. 인사혁신처와 국회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일을 그만둔 공무원이 2995명으로 2017년에 비해 57% 늘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법무부, 고용노동부 순으로 많았다. 과기정통부는 산하 우정사업본부의 우정직, 법무부는 교정직 공무원들이 그만둔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다. 그외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사표 행렬도 부쩍 늘고 있는 추세다.

▷중앙부처의 허리급이라고 할 수 있는 과장급 이상의 탈(脫)공직이 특히 눈에 띈다. 국토교통부는 2021년 한 해에만 3급과 4급 공무원 26명이, 산업통상자원부는 21명이 사표를 쓰고 기업, 연구소 등으로 옮겼다. 민간 분야의 인력 수요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기회를 붙잡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다고 한다. 공직이 과거만큼 안정적이지 않고 보상 등 유인책도 떨어진다며 공무원들은 한숨이다. 고위공무원단으로 승진해 봤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코드 인사’에 휘둘리거나 인사 유탄을 맞을 것이란 불안감도 적지 않다.

▷스스로 떠나는 공무원들 앞에서 ‘철밥통’은 옛말이다. MZ세대를 비롯한 청년 공무원들의 조기 퇴직도 두드러진다. 연공서열을 비롯한 구시대적 조직문화와 낮은 처우, 미래에 대한 회의감과 비전 부재 등 문제들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탓이다. 외무직 공무원 중에서는 시험에 수석 합격했던 30대 외교관이 구글로 가겠다며 돌연 사표를 냈다. “시험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면서도 이에 매달리지는 않는 게 요즘 젊은이들이다. 공무원시험 응시율도 계속 떨어져 9급 공무원 경쟁률은 31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공직사회의 인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해외에서는 인공지능(AI) 도입, 자동화 등을 통한 시스템 효율화 작업을 시도하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딜로이트컨설팅은 공무에 AI 기술을 도입할 경우 미국에서만 연간 업무시간은 12억 시간, 예산은 411억 달러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놓기도 했다. 기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게 국민을 위하는 공복(公僕)들의 헌신과 피땀이다. 이런 인재 양성에 많은 국가 예산과 노력이 투입된다. 한 명씩 떠날 때마다 국가적 손실이 쌓여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3-30 ‘갭투자’ 하다 ‘갭거지’ 됐다

 

“1000만 원만 있어도 아파트 산다.” 집값이 한창 오르던 시절 이런 솔깃한 말들이 책과 유튜브,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퍼져 나갔다. 집값 떨어지기만 기다리지 말고 당장 투자해라. 돈 없어도 걱정 마라. 전세 끼고 남의 돈으로 사면 된다. 그래도 부족하면 금리 낮으니 대출받아라. 대출은 은행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거다. 집값과 전세금의 차액만으로 집 한 채, 전세금 오르면 그 돈 활용해 또 한 채…. 소액으로 시작해 부동산 부자를 만든다는 마법의 단어 ‘갭투자’ 성공담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집값과 전세금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갭투자는 재앙으로 돌아오고 있다. 집값 상승기에 ‘벼락 거지’를 면하겠다고 갭투자에 나섰던 사람들이 오히려 ‘갭거지’가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2020년 임대차 3법 이후 전세금이 크게 올랐을 때 달려든 사람들, 특히 무리하게 대출을 받은 20, 30대 영끌족의 타격이 크다. 금융자산, 대출에 더해 집까지 팔아야 겨우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는 임대인은 최대 21만3000가구, 집을 팔아도 반환이 어려운 임대인은 최대 1만3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국토연구원은 추정한다.

▷갭투자는 집값과 전세금은 항상 오른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집값과 전세금 둘 중 적어도 하나만 오르면 된다.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다 해도 집값이 오르면 집을 팔아 차익을 실현하면 된다. 집값이 떨어져도 전세금만 받쳐 주면 버틸 수 있다. 전세금은 이자 한 푼 안 내는 무이자 대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매가와 전세가가 함께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게 갭투자족의 계산 착오였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아파트 매매 및 전세가격지수는 지난해 2월부터 줄곧 동반 하락세다. 지난달엔 전국 아파트값이 1.62%, 전세금은 2.62% 떨어졌다.

▷무리한 대출에 따른 고통은 안타깝지만 투자자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하지만 전세 끼고 집을 산 갭투자의 실패는 본인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전세는 뒤에 들어올 세입자에게서 돈을 받아 기존 세입자에게 돌려주는 구조다. 전세금 하락으로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고 집주인이 상환할 능력도 없으면 일종의 ‘폰지 사기’가 된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의 고통은 어떻게 보상하나.

▷집값 하락으로 갭투자에 대한 경고음이 커진 요즘에도 집값 상승에 베팅하며 무리한 갭투자에 나서는 이들이 있다. 집값보다 전세금이 더 높은 ‘마이너스 갭투자’ 사례까지 나타난다. 그들은 역발상의 똑똑한 투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세 만기 때까지 가격 반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깡통전세’의 후폭풍을 피할 수 없다. 갭투자는 자칫 쪽박 찰 수 있는 위험천만한 투기이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기가 될 수도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31(금) “젊어봤으니 이젠 늙고 싶다”

 

서른이 넘은 여배우에겐 ‘동안’ 수식어가 붙기 마련이다. 문근영(36)은 ‘절대 동안’, 송혜교(42)는 ‘동안의 정석’, 고현정(52)은 ‘명품 동안’, 장미희(66)는 ‘미친 동안’이다. 의사들은 ‘여배우 주사’라며 샤넬주사와 한방 동안침을 홍보한다. 노화를 예방한다는 ‘안티에이징’에 이어 아예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주장하는 ‘디에이징’ 제품까지 나왔다. 모두가 기를 쓰고 젊어지려는 ‘동안 강박’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늙고 싶다”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선언이 신선하다.

▷영화 ‘타이타닉’(1998년)의 케이트 윈즐릿(48)은 사진 보정을 하지 않는다. 잔주름을 싹 지운 홍보 포스터는 “내 눈가의 주름을 전부 돌려 달라”며 반려하고, 늘어진 뱃살을 후보정으로 잘라내겠다는 제안에 “절대 자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변하고 달라지는 얼굴이 아름답다”며 “젊은 세대는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을 왜 포기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에마 톰슨(64), 레이철 바이스(53)와 ‘영국 성형 반대모임’을 꾸려 활동 중이다.

▷미국에선 메릴 스트립(74)이 얼굴에 칼 대지 않는 배우로 유명하다. 그는 “나이 먹는 건 억울하지만 성형으로 얼굴을 굳히는 건 우스운 일”이라며 “성형은 사람 간 소통을 가로막는 방해꾼”이라고 했다. 제인 폰다(86)는 “나이가 들어도 삶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가득 찬 왕국”이라며 시술을 거부하고, 드루 배리모어(47)는 두 딸이 외모 강박을 갖게 될까 봐 성형하지 않는다. 아역 배우 출신 저스틴 베이트먼(57)은 “폭삭 늙었다”는 악플에 “모든 나이엔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내가 멋지다”고 반박했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년)에서 숱 많은 갈색 곱슬머리가 아름다웠던 앤디 맥다월(65)은 요즘 반백의 머리로 다닌다. 예순이 넘어서도 “세월이 비켜간 미모”라며 찬사를 늘어놓던 사람들이 이제는 “왜 염색 안 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젊어 보이려면 많은 노력이 든다. 이제 그러기엔 지쳤다”고 했다. “늙어가는 일에 왜 그렇게 수치심을 느껴야 하나. 우린 끝을 향해 가는데 수치심을 느끼느라 낭비할 시간이 없다.”

▷그래도 대세는 안티에이징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젊어지기 위해 아기 오줌 받아 목욕했듯, 샌드라 불럭과 케이트 블란쳇은 신생아의 포경 수술에서 나온 음경 꺼풀 추출물로 피부 재생 시술을 받는다. 전 세계 안티에이징 시장이 매년 5%씩 성장해 2027년엔 75조 원이 될 전망이다. 코코 샤넬은 “어려 보이려고 기를 쓸수록 나이 들어 보인다”며 “스타일은 애티튜드”라고 했다. 많이 웃고 살았다는 증표인 주름을 싹 지운 ‘충격 동안’보다 “젊어 봤으니 이젠 늙고 싶다”는 당당함이 아름다워 보인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