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3/ 03-02(목) 행복 후진국 - 03-31(금) 한동훈과 투키디데스
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3/
03-02(목) 행복 후진국

박민 논설위원
행복만큼 주관적인 개념도 드물다. ‘파랑새’의 작가 마테를링크는 “행복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말했지만, ‘행복은 부질없는 소문’이라는 유럽 격언도 있다. ‘탄생보다 죽음을 축복하라’는 탈무드 교훈은 ‘강보에 싸인 채 죽는 것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집시 속담으로 이어진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행복이란 쇼윈도 속의 물건처럼 좋아하는 것을 골라 값을 치르고 돌아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했지만,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의 행복은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스릴과 현금이든 할부든 그가 살 수 있는 것을 사는 데 있다”고 반박했다.
동양과 서양은 인식의 출발부터 다르다. 서양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최고의 선’으로 규정한 이후 행복 추구는 인생의 주요 목적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불행해지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에 더 관심을 가졌다. 행복과 불행이 번갈아 오고 행복도 시간이 지나면 불행이 되는 만큼 행복만 추구하면 절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도 다양하다. 행복 연구 권위자 에드 디너에 따르면 돈, 건강, 학력, 지능, 종교 등 환경 변수는 개인 간 행복의 차이를 15%만 설명해주는 반면, 유전 요인이나 성격은 50%를 설명해준다. 진화심리학은 ‘이기적 유전자’처럼 행복을 동물의 본질적 욕구인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할 때 느껴지는 동기부여로 본다.
지난달 26일 공개된 갤럽 월드 폴의 국가별 행복 수준에 따르면 ‘행복점수를 0∼10점인 사다리로 가정할 때 어느 단계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국은 6.11점을 기록했다. 2021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38개국 중 32위다. 한국보다 낮은 나라는 그리스(6.10), 일본(6.09), 튀르키예(4.37) 등이다. 1위 핀란드는 7.79점이었고 미국 6.96점, 독일 6.75점, 프랑스는 6.66점이었다. 나름 객관적 기준을 적용한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의 결과도 시원치 않다. 국내총생산, 사회적 지지, 건강 기대수명, 자유, 관용, 부정부패에 대한 인식 등 6개 항목을 기준으로 산출한 2012∼2022년의 평균 순위를 보면 한국은 146개국 중 59위에 그쳤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세계 10위권을 자임하는 국가의 국민으로서는 씁쓸할 수밖에 없는 결과다.
03-03(금) 공인의 마지막 메시지

이미숙 논설위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나는 내 인생 황혼기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1994년 11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서신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알츠하이머 투병 사실을 이렇게 공개했다. 백악관을 떠난 지 5년 만의 일로, 레이건은 이후 10년간 투병 후 2004년 별세했다. 당시만 해도 공인의 질병에 대해 알리지 않으려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는데 레이건은 스스로 공개 결심을 하고 직접 대국민 고별 편지를 썼다. 알츠하이머로 고생하는 미국인들을 응원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다이하드’ 등에 출연한 미 액션 스타 브루스 윌리스(67)가 전두측두엽 치매(FTD)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최근 SNS에 공개했다. 그의 부인 에마 헤밍과 전 부인 데미 무어, 그리고 다섯 딸은 서신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리면서 “FTD 치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기 바란다”고 했다. 윌리스는 지난해 실어증이 심해져 영화계에서 은퇴했기에 레이건처럼 직접 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어 등은 서신에서 “브루스는 항상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며 타인을 도왔고, 만약 지금도 그럴 수 있다면 심신이 쇠락하는 FTD 투병 중인 모든 사람과 연대해 대응하고 싶어 할 것”이라면서 미국의 FTD 환자와 가족들에 대한 응원도 잊지 않았다.
레이건의 딸 패티 데이비스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브루스 가족의 용기를 보면서 알츠하이머 발병을 공개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편지를 읽으며 이 잔인한 질병에 걸린 이들이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레이건은 83세가 되던 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마지막 여행을 시작한다’는 식으로 여유를 보이며 담담하게 작별 인사를 한 의연함이 놀랍다. 레이건이 공개 의지를 밝히자 낸시 레이건 여사는 그런 남편을 자랑스러워했다고 데이비스는 회고했다.
지미 카터(98) 전 미 대통령이 자택에서 호스피스 완화 치료에 들어갔다고 카터센터가 지난달 18일 발표했다. 카터는 2015년 간암 발병 후 7개월 만에 완치를 선언했는데 다시 피부암이 발병, 다른 장기로 전이되자 이를 택한 듯하다. 다정다감한 카터가 레이건처럼 메시지를 직접 내지 못한 것을 보면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03-06(월) ‘사람을 안다’ 사법의 잣대

이현종 논설위원
어떤 사람을 안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계량화하기는 불가능하다. 보통 정치인들은 옷깃만 스쳐도 안다고 하지만, 일반인들은 만나서 차나 밥을 함께 할 정도는 돼야 안다는 기준에 들어간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 사람의 언어, 행동, 습관, 생각, 가족관계까지 알아야 안다고 할 수도 있다. 학자들은 개념과 체험이 있어야 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상대방의 존재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직접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안다는 기준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일반적으로 안다는 기준이 넓다. 작고한 후농 김상현은 자타가 공인하는 마당발이다. 생전에 비법을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의 노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당 총재 선거 등에 입후보하면 지역구를 돌아다니는데 사전에 그 지역의 주요 인물의 사진과 경력 등을 담은 자료를 가지고 다니며 외워 버린다. 만나자마자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면 감동해서 자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3일 첫 재판에서 고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1처장을 “모른다”고 한 것이 허위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성남시에 김문기 씨와 같은 직급인 팀장만 600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대표가 성남시장이 되기 전인 2009년에 김 처장의 전화에 이 대표의 이름이 저장돼 있고, 대장동 사업이 진행되기 직전인 2015년 1월 이 대표와 김 처장, 성남시 공무원 등 10여 명이 함께 9박 11일 호주·뉴질랜드 출장을 간 사실을 들었다. 출장 때 이 대표, 유동규, 김문기 세 사람만 골프를 함께 친 사실을 ‘안다’의 유력한 증거로 제시했다. 이후 김 처장이 당시 이 시장에게 대장동 사업과 관련해 단독 보고도 수차례 했다고 한다.
이 대표의 논리대로라면 성남시의 수많은 공무원 중에 그 정도로 개념과 체험을 공유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김 처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바로 다음 날 이 대표는 방송에 나와 그를 모른다고 했다.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모르고 싶은 것일까. 상식의 눈높이에서 볼 때, 열흘 해외여행 함께하고 골프까지 쳤는데, 정말 모른다면 기억력이나 정신건강부터 점검해야 할지 모른다.
03-07 NTT와 KT

이철호 논설고문
일본의 낙하산 인사는 뿌리 깊다. 흔히 ‘아마쿠다리(天下り)’라고 말한다. 하지만 2007년 ‘관료의 재취업에 관한 법률’ 제정 이후 달라졌다. 2011년 후쿠시마원전 사태의 주범 도쿄전력. 당연히 적폐 중의 적폐이자 개혁 대상 1호다. 그런데도 니시자와 도시오(西澤俊夫)·히로세 나오미(廣瀨直己)·고바야카와 도모아키(小早川智明) 등 내부 출신 CEO가 줄줄이 나왔다. 도쿄전력은 일본 정부 지분이 50.1%나 된다. 원전 사고 배상을 위해 35조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런 공기업에도 ‘아마쿠다리’는 없다.
일본 NTT는 아직 정부 지분이 33.72%나 된다. ‘무늬만 민영화’라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역대 9명의 CEO 가운데 낙하산 인사는 없다. 모두 내부 전문가 출신이다. NTT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주식 사기인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됐고, 일본 우정성과 후임 CEO 갈등을 빚기도 했다. 총무성(옛 우정성) 간부를 고액 접대한 스캔들까지 터졌다. 그 와중에도 파문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내부 CEO 선임을 1년 늦췄을 뿐이다. 난제 해결에는 내부 전문가밖에 없다는 오래된 지혜 때문이다.
KT에는 정부 지분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내부 출신 4명의 CEO 후보에 대해 국민의힘과 대통령실은 ‘그들만의 리그’ ‘이권 카르텔’ ‘사장 돌려막기’라며 비난한다. 섬뜩한 정치적 난도질이다. KT와 NTT는 CEO 선정 기준이 똑같다. KT가 지분 5%를 가졌던 자매 관계 NTT를 세밀하게 벤치마킹했다. 지원자들의 전문성·비전·리더십·윤리성을 두루 따지는데,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기업 경영 경험’이다. 대선 캠프나 정치인·관료 출신은 자동으로 나가떨어지게 마련이다. 여권이 자기 사람 꽂으려고 ‘개혁이 중요하다’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며 정관에도 없는 우격다짐을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KT 주가가 곤두박질하고 있다. 시장의 판단은 냉정하다. 돌아보면 ‘낙하산 인사는 없다’는 공약(空約) 때문에 민심은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렸다. 윤석열 대통령도 “제가 집권하면, 그냥 놓겠습니다. 캠프에서 일하던 사람을 시킨다? 저 그런 거 안 할 겁니다”라고 했다. 그런 윤 대통령마저 KT에 캠프 출신을 내리꽂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공기업까지 내부 출신 CEO를 믿는 일본이 부럽다.
03-08 소방관의 기도

박민 논설위원
신이시여/제가 부름을 받았을 때는/아무리 강력한 화염 속에서도/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거대한 두려움이 밀려와도/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그리하여 너무 늦지 않게/어린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1958년 미국의 소방관 앨빈 윌리엄 빈이 화재에서 세 어린이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쓴 것으로 알려진 ‘어느 소방관의 기도’라는 시다. 지난 6일 전북 김제시 금산면 화재 현장에서 ‘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려던 새내기 소방관이 목숨을 잃었다. 4번의 도전 끝에 합격해 지난 5월 임용된 서른 살의 이 소방관은 구출된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아직 안에 있다”고 외치자 불길에 휩싸인 주택으로 뛰어들었지만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고, 할아버지와 함께 쓰러진 채 발견됐다.
2019년 8월 전북 정읍시 농소 119안전센터에 근무하던 정모 소방장은 울산의 한 저수지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하루 뒤 그의 사물함을 연 동료들은 오열했다. 3년 전 경북 울주군에서 정 소방장과 함께 집중호우에 고립된 주민을 구하다 사망한 강모 소방사의 근무복이 영정처럼 걸려 있고 쪽지 한 장이 발견됐다. ‘…너무 괴롭다. 정신과 치료도 약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버텨왔다. 같이 살고 같이 죽었어야만 했다…’. 남겨진 정 소방장의 휴대전화에는 강 소방사와 함께 당한 사고 내용과 이후 힘들었던 순간이 A4용지 24장 분량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2011년부터 10년간 순직 심의를 신청한 소방관은 117명에 달한다. 화재 진압 작업과 동료의 희생에 따른 트라우마 등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소방관도 64명이나 된다. 한 해 평균 16명의 소방관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군인과 경찰 공무원들의 숭고한 희생도 소방관에 뒤지지 않는다.
국가보훈부 승격을 계기로 보훈에 대한 인식과 대상도 업그레이드돼야 한다. 보훈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와 그 후손에 대한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금 일상에서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분들도 부족함 없이 예우하는 ‘생활 보훈’ ‘현재형 보훈’이 돼야 한다. ‘제복을 입은 분들에 대한 인식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꼽은 박민식 보훈처장이 초심을 잃지 않길 기대한다.
03-09 이필원의 뚜아에무아

김종호 논설고문
하늘이 파란 맑은 날의 햇살을 받은 바다에서 반짝이는 윤슬의 속삭임을 듣는 듯하고, 벌판에 흐드러진 들꽃의 향기를 실어오는 봄바람 소리를 듣는 듯하기도 한 화음. ‘음유시인’ 이필원(77)이 박인희와 함께 1969년 결성해 1970년 데뷔 앨범을 낸 혼성 포크 듀엣 뚜아에무아(Toi et Moi) 노래가 그렇다. 듀엣 이름은 ‘너와 나’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그 음반에 담긴 명곡 중의 하나가 박인희 작사, 이필원 작곡인 ‘약속’이다. ‘약속 약속 그 언젠가 만나자던 너와 나의 약속/ 약속 약속 너와 나의 약속/ 잊지 말고 살자던 우리들의 약속’ 하고 시작한다. ‘하늘처럼 푸르르게 살자 하던 약속’으로, ‘모든 슬픔 잊자 하던 우리들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이필원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가서 살았다. 고교 졸업 후 1968년 귀국해, 록 밴드를 잇달아 결성해 활동했다. 록 밴드 타이거즈를 이끌고 당시 ‘록 음악 메카’이던 서울 충무로 미도파살롱에도 출연했다. 그곳의 MC로 명성을 떨치던 박인희를 만나, 한국 포크 듀엣의 새 지평을 열었다. 1972년 해체하기까지 1기 뚜아에무아가 남긴 명곡만 해도 ‘그리운 사람끼리’ ‘임이 오는 소리’ 등 적지 않다. 뚜아에무아는 여성 멤버가 한인경, 김은영 등으로 바뀌어도 여전히 환상적인 화음이었다. 티 없이 청초한 여성 보컬에 차분하면서 우수(憂愁)에 잠긴 이필원의 깊고 감성적인 음색이 조화를 이뤄, 원초적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는 평가도 변함없었다.
여러 버전의 ‘추억’도 뚜아에무아 명곡이다. 1971년 제3집에 담긴 박인희 작사, 이필원 작곡인 ‘추억’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이름/지나간 추억 속에 당신의 얼굴’ 하고 시작한다. 1974년 ‘추억’은 번안곡이다. 폴 사이먼 작곡인 원곡에, 한인경이 ‘그리던 그날은 가슴에 담으리/ 우리의 진실한 사랑 얘기를’ 하고 시작하는 가사를 붙였다. 1970년 뚜아에무아는 원곡대로 영어로 불렀었다. 이필원이 작사·작곡해 1976년 솔로로 발표한 또 다른 ‘추억’의 시작은 이렇다. ‘추억이 흘러내려 내 맘에 젖어드네/ 쌓여진 옛이야기 잊을 수 없다네/ 바람이 나부끼면 나뭇잎 떨어져서/ 내 님에게 날아가 소식 전하지’. 이필원은 ‘바람꽃’ ‘내 영혼이’ 등 시집도 냈다. 이필원의 뚜아에무아 노래가 생각나는 봄이다.
03-10(금) 체포동의 거부의 모순

김세동 논설위원
지난달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장동·성남FC 사건과 관련한 체포동의안이 가결됐었어도 그가 곧바로 구속되거나 체포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체포동의 찬성(139명)과 같은 정치적 입장으로 보이는 기권(9명)과 무효(11명) 중에서 10표만 제대로 기표 됐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설혹 체포동의안이 가결됐어도 이 대표는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앞에 나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을 뿐이다.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돼야 구치소에 수감된다.
헌법 제44조에 규정된 불체포특권(국회의원은 현행범인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한다)에 따라 의원은 검사가 신청한 구속영장을 판사가 받아 정부를 거쳐 국회로 넘긴 체포동의안이 가결되지 않으면 영장심사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현행 제도는 법원의 사법적 판단에 앞서 입법부가 정치적 단죄를 먼저 한다는 문제도 발생한다. 역으로 여야의 정치 쟁투 끝에 가까스로 특정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됐는데, 정작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허탈한 경우도 발생한다. 2012년 8월 공천헌금 3억 원 제공 혐의를 받은 현영희 새누리당 의원(비례대표)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선 압도적 다수(266명 중 찬성 200, 반대 47, 기권·무효 19)로 가결됐지만, 정작 부산지법 심사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이 때문에 김기현 의원이 법원의 영장 발부 이후 체포동의안을 표결토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2013년 발의했지만 흐지부지됐다.
‘없는 죄를 만든 검찰의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는 이 대표는 쌍방울 대북송금이나 백현동 특혜 개발 의혹 사건으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가 또 이뤄지면 구차하게 불체포특권 뒤에 다시 숨지 말고 법원의 판단을 자청하기를 권한다. ‘깨끗한’ 이 대표가 판사와 만나서 검찰의 ‘증거 조작’을 밝히면 외려 전화위복 아닌가. 괜한 여야 대치에 따른 국민 피로도 덜고, 무엇보다 본안 재판에 유리하지 않겠나. 불체포특권 포기를 거부하는 이 대표나, 다음 체포동의안은 당론 반대를 하자거나 아예 민주당 의원 169명이 표결에 불참해 투표 불성립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친명계·개딸부터 ‘이재명 무죄’를 믿지 않는 듯하다.
03-13(월) 적폐 오명 벗은 자원개발

문희수 논설위원
최근 윤석열 정부가 해외 핵심광물 개발 재개를 발표했다. 반도체 배터리 등에 필수인 리튬·니켈·코발트·희토류 등 10대 전략 광물에 대한 해외 의존도를 낮춘다는 것이다. 특히, 많게는 90%를 넘는 중국 의존도를 2030년까지 50%대로 줄인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를 위해 해외자원개발 기업에 대한 투자세액 공제를 10년 만에 부활시키고, 실패 가능성이 커서 민간이 하기 어려운 해외 자원탐사는 전문 공기업인 광해광업공단이 수행토록 했다.
만시지탄이다. 이제야 자원 개발은 ‘적폐’ 오명을 벗게 됐다. 문재인 전 정부는 임기 내내 해외자원 개발을 적폐로 몰아 원천봉쇄하다시피 했다. 광해광업공단의 신규 투자를 막는 법까지 만들고, 이미 확보한 해외광업권조차 팔아 버렸다. 어이없는 역주행이었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이런저런 소동이 없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자원 부족국인 우리에겐 자원 개발·확보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실패와 시행착오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이를 피하겠다며 자원 개발을 아예 중단하는 것은 스스로 명줄을 끊는 것과 다름없다.
그동안 포스코·LG·SK 등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세계를 뛰며 핵심 원자재 확보를 모색해 왔다. 그렇지만 한계가 너무 명확하다. 자원 부국들은 국가 차원에서 자국 자원 유출을 기피하는 추세다. 앞으로 더 강화될 게 분명하다. 정부가 국가 간 협약 등으로 물꼬를 트고 주도하는 방식이어야 그나마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핵심 자원의 탈중국화는 절실한 국가적 과제다. K-배터리 원료 등을 중국에 지금같이 과도하게 의존하는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국익에 어긋난다. 더구나 미·중 간 자원 전쟁이 치열하다. 중국의 자원 무기화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미 마늘 파동, 요소수 파동을 겪었기에 더욱 그렇다. 미래산업은 향후 20∼30년 먹거리가 걸린 중대 과업이다. 미국·중국·유럽 등이 예외 없이 정부가 주도하는 이유다. 미국과 EU는 따로 핵심광물 클럽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다. 정부 주도를 지양하던 기존 정책은 새 시대엔 안 맞는다. 자원 경쟁은 민관이 똘똘 뭉쳐도 될까 말까다. 시한폭탄 같은 모래주머니를 놔둔 채 기업들 보고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면 결과는 보나 마나다.
03-14 중국의 ‘땅 알박기’ 전략

이미숙 논설위원
충남 태안군 안흥항에서 55㎞ 거리에 있는 격렬비열도는 한국의 최서단에 위치해 ‘서해의 독도’로도 불린다. 무협지에나 나올 듯한 범상치 않은 명칭은 동·서·북에 포진한 섬이 마치 세 마리 새가 날아가는 형상 같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중 서격렬비도는 박근혜 정부 때 중국에 팔려나갈 뻔한 역사를 갖고 있다. 2014년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방한했던 무렵, 한 조선족 동포가 이 섬을 매입하려 했다. 20억 원을 16억 원으로 깎으려다 흥정이 틀어지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됐고, 국토교통부는 부랴부랴 외국인토지거래제한조치를 내렸다. 최악의 경우 중국이 자국민 재산 보호를 내세워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한 블라디미르 푸틴을 모방한 작전에 나설 수 있는 분쟁의 불씨를 제공할 뻔했다.
지난 1월 일본에선 30대 중국 여성이 오키나와현 북쪽의 무인도를 매입한 사실이 공개돼 논란이 됐다. NHK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산둥성 출신의 외식업 경영자로 알려진 이 여성은 오키나와현 북쪽의 무인도 야나하 섬의 절반 수준인 38만㎡를 약 1억4000만 원에 사들였다. 최근 이 여성이 틱톡에 “이 작은 섬을 2020년 샀다”는 영상을 올리자 일본 네티즌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야나하 섬은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불과 50㎞ 거리다. 대만 유사시 발진기지인 오키나와 주변 섬이 중국인에게 넘어간 것이 안보 불안을 극대화했다.
미국에서도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며 적대 국가 기관 및 인사의 토지 매입 제한 조치가 마련 중이다. 노스다코타주에서 중국 기업인이 그랜드포크스 공군기지 부근의 농지 300에이커(1.21㎢)를 사들여 논란이 된 데 이어 텍사스주에서도 중국 장성 출신이 라플린 공군기지 인근의 땅 13만 에이커(526㎢)를 매입해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그러자 텍사스주 의회는 중국·러시아·북한·이란 관련 기업 및 시민권자들이 부동산을 취득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지난 1월 발의했고 플로리다주도 관련 입법을 준비 중이다.
일본이 섬을 판 뒤 땅을 치며 후회하고, 미국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나선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서격렬비도 매각을 막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한·미·일 공조는 ‘푸틴식(式) 땅 장악 전술’을 모방한 중국의 한·미·일 땅 장악 음모를 막는 데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 같다.
03-15 측근 죽음과 조상 묘 훼손

이현종 논설위원
대선 후보나 주요 정치인들이 겪는 수난 중의 하나가 조상 묘지의 훼손이다. 자신에 대한 비난은 참을 수 있어도 부모와 조상들에 대한 공격은 참기 힘들 뿐 아니라 섬뜩하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지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 있는 조상 묘소 7기에 1∼2개의 쇠막대기가 박혀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전 총재의 친족들이 흩어져 있는 조상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길이 1m 정도 되는 쇠막대기가 봉분 중앙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상의 음덕이 후대에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미신으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남 창녕군에 있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묘도 지난 2021년 9월 훼손된 채 발견됐다. 최대 30㎝와 50㎝에 이르는 구멍이 2개나 나 있었는데, 경찰은 분묘를 훼손한 남성을 붙잡았고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바 있다.
가깝게는 윤석열 대통령의 조상 묘도 훼손된 적이 있다. 검찰총장을 퇴임하고 난 뒤 2021년 6월 대선 출마설이 나올 때 세종시의 한 공원묘지에 모신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등의 잔디가 훼손되고, 식칼과 부적, 머리카락 등을 묻어놓은 사실이 밝혀졌다. 풍수 전문가들은 누군가 윤 대통령의 조상 묘를 훼손해 지맥(地脈)을 끊으려 했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당시 윤 대통령은 경찰 수사 의뢰를 하지 않고 문제 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가 한창일 때는 ‘윤석열 저주 인형 사진’이 SNS에 나돌기도 했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북 봉화에 있는 부모의 묘소가 훼손되고, ‘생명기(生明氣)’로 추정되는 한자가 적힌 돌을 발견했다고 SNS에 사진을 올렸다. 이 대표는 “저로 인해 저승의 부모님까지 능욕을 당하시니 죄송할 따름”이라고 했다. 경찰도 즉각 수사에 들어갔다. 반면, 글씨로 보아 저주가 아닌 기를 넣어주기 위한 지지자들의 행동일 가능성도 추정되고 있다. 이 대표는 자신과 함께 일했던 이들의 극단적 선택에 대해 “어쨌든 명복을 빈다” “모르는 사람”이라며 조문조차 하지 않았다. 비서실장을 지냈던 전형수 씨의 죽음에도 자신의 책임은 없고 검찰 탓만 했던 이 대표가 부모 묘 훼손에 대해선 즉각 분노를 표출했다. 조상들을 추모해야 하지만, 산 자를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정치인의 제1 책무다.
03-16 스위스 은행 신화의 몰락

이철호 논설고문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다음으로 글로벌 금융 불안의 진앙이 된 크레디트스위스(CS)은행. 세계 26위의 CS는 운용자산이 1780조 원으로 SVB의 7배다. CS가 무너지면 제2의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맞는다는 악몽의 시나리오가 퍼지고 있다. CS의 비극은 불가리아 마약상의 비자금을 세탁해준 게 들통나면서 시작됐다. 국제 블랙 리스트에 올랐다. 2019년엔 영국의 공급망 금융업체, 속칭 ‘어음깡’ 전문인 그린실 캐피털에 투자했다가 27억 달러를 날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어음 연쇄 부도 때문이다.
진짜 날벼락은 2021년 한국계 빌 황의 아케고스 파산이었다. 아케고스는 10년 만에 종잣돈의 150배인 300억 달러를 챙긴 전설적 헤지펀드. 하지만 원금 5배를 ‘몰빵’한 파생상품이 공매도 공격으로 마진 콜에 몰려 단 이틀 만에 파산했다. 아케고스에 돈을 태운 CS는 70억 달러를 날렸다. CS가 치명상을 입자 지난해 예금 120조 원이 빠져나갔고, 순손실은 10조 원(72억9300만 스위스프랑)에 달했다. 시가총액은 2007년 고점 대비 95% 증발했다. 20년간 최대 주주였던 해리스 어소시에이츠(지분 10%)도 손절매하고 떠났다.
CS가 믿을 구석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이자 ‘미스터 에브리싱’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다. 지난해 11월 사우디국립은행(SNB)은 CS의 지분 9.9%를 인수했다. SNB의 최대 주주는 빈 살만이 이끄는 사우디 국부펀드(PIF). 또 CS가 구원 투수로 영입한 마이클 클라인은 아람코 상장의 1등 공신이어서 빈 살만과 아주 가깝다. 지난해 12월 카타르 투자청 등이 CS에 약 5조 원을 긴급 수혈해 준 비밀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 증권거래소가 CS의 재무보고서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퇴짜를 놓았다. 어제는 “CS를 계속 지원하느냐”는 블룸버그 기자의 질문에 SNB 회장이 “절대 아니다”고 선을 그으면서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오일머니의 신기루가 걷히자 주가는 장중 한때 30% 폭락했다. UBS와 함께 167년간 스위스 양대 은행으로 군림해온 CS. 로마 바티칸의 스위스 용병처럼 절대 배신하지 않고 비밀을 지키는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런 스위스 은행의 안전 신화가 CS의 마지막 비명과 함께 몰락하고 있다.
03-17(금) 수치 모르면 사람 아니다

김세동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성남시장과 경기지사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측근이 ‘이 대표님, 이제 정치를 내려놓으십시오’ ‘본인 책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등의 유서를 써놓고 극단적 선택을 한 뒤에도 최소한의 사과나 유감 표명 없이 책임 회피성 발언만 내놓자 그의 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당 안에서조차 터져 나왔다. 성남시 행정기획국장, 경기주택도시공사 사장직무대행 등을 거친 전형수 씨가 사망한 뒤 “검찰의 과도한 압박·조작 수사 때문에 생긴 일이지 이재명 때문이냐”고 변명부터 하자 윤영찬 민주당 의원은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게 인간이고 그게 사람이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김해영 전 최고위원은 ‘이 대표와 같은 인물이 민주당의 대표라는 사실에 한없는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느낀다’고 썼다.
이 대표 사건과 관련해 지금까지 5명이 숨졌지만, 그는 사과나 책임 비슷한 말이나마 한 적이 없다. 성남도시개발공사 유한기 전 개발사업본부장이 2021년 12월 10일 주변인 중 처음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때 “수사라고 하는 게 진짜 큰 혐의점은 놔두고 자꾸 주변만 문제 삼다가 이런 사고가 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사돈 남 말 하듯 한 뒤 “어쨌든 뭐 명복을 빈다”고 했다. 호주에서 유동규 씨와 셋이서 카트를 같이 타며 4∼5시간 골프를 쳤던 김문기 전 개발사업1처장이 그해 11월 21일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땐 “모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부인 김혜경 씨의 경기도청 법인카드 유용 관련인이 지난해 7월 26일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때도 “이재명과 무슨 상관이 있나”라며 되레 화를 냈다.
이 대표가 대장동·성남FC 사건 등에 얽힌 주요 인물의 잇단 사망으로 자신에게 쏠릴 비난 여론이나 의구심을 막아내려는 마음에 그러는 것이겠지만, 먼저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부터 언급하고 변명을 해도 하는 게 인간의 기본 도리이고 예의다. 맹자는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임기응변의 간교를 잘 부리는 자는 자신의 행위를 두고 남들은 모두 부끄러운 일이라 해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남과 같지 않다면, 똑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맹자’ 진심장구(盡心章句) 편에 나오는 말로, 이 대표를 콕 집은 예언 같다.
03-20(월) 이응노 ‘뉴 스타일’

김종호 논설고문
“우리가 어떻게 과거의 자랑만으로 그친단 말이오. 선대의 유산만을 팔아먹고 사는 탕아(蕩兒)로 그친단 말이오. 우리 스스로 유산을 창작해야지. 고려자기(磁器)와 조선 자기 걸작이 어찌 그 겉모양으로써 재생된다는 말이오. 눈에 안 보이는 그 장인(匠人)들의 정신을 배워야지. 묵화(墨畵), 콜라주, 판화, 조각 등 나의 모든 작품은 그 정신에서 배워, 세계에 현대적으로 들춰 보여주려는 노력의 산물이오.” 고암(顧菴) 이응노(1904∼1989) 화백이 생전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국화를 서양화와 접목해, ‘문자(文字) 추상’ ‘서예 추상’ 등 새 장르도 창출한 그는 현대 미술사의 거장(巨匠)이다.
그의 삶은 파란곡절이 많았다. 수묵화로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 입상한 그는 10여 년 동안 ‘간판장이’로 지냈다. 1938년 일본으로 서양화 유학을 갔다가 1945년 귀국했지만, 또 다른 도전을 위해 1960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6·25전쟁 때 납북된 아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북한 공작원에게 속아 동베를린에 갔던 일로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베를린 사건에도 연루됐다. 국내로 강제 송환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그는 1969년 특별사면을 받아 다시 파리로 갔다. 1983년엔 프랑스에 귀화했다. 서울 호암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린 날 파리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을 거둔 그는 평생에 걸쳐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작품으로 끊임없이 독창성을 키우며 예술의 지평을 더 넓혔다. 항상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해서 ‘뉴 스타일’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는 사실화·반추상화·추상화 등을 넘나들었다. 무명천, 합성섬유, 비닐, 알루미늄판, 전통 한지(韓紙) 등에 다채로운 색의 물감을 칠하고 가위로 잘라서 만든 입체적 추상 작품도 내놓았다. 문자로 형상화한 사람이 무리를 이뤄 춤추며 서로 어울리는 모습의 그림 ‘인간 군상(群像)’, 머리와 팔과 다리를 각각 점과 획으로 표현한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의 조각 ‘군상’ 등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연작이다.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에 있는 이응노미술관이 ‘뉴 스타일, 이응노’전(展)을 지난 1월 17일 시작했다. 오는 4월 2일까지다. 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대표적 작품 62점이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한다.
03-21 AI가 일자리 없앤다는 괴담

문희수 논설위원
최근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내놓은 인공지능(AI) 영향 보고서가 흥미롭다. AI로 인해 사라지는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내용이다. 생산성이 전반적으로 높아져 부가가치가 더 커지면서 일자리가 더 늘고, 새 영역에서 직업들이 탄생해 플러스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국무총리 산하 직능원의 데이터 기반 미래숙련 전망체계 구축 연구진은 872개 직업과 이들 직업의 1만7900개 업무에 대해 AI와 이를 탑재한 로봇에 의한 대체 가능성을 분석했다. 그 결과, 2030년에는 전체 일자리의 9.5%가 AI에 대체될 가능성이 있지만 48.6%는 유지된 채 사람의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적으로 AI가 못할 직업은 하나도 없었지만, 실제 대체 여부에는 변화에 대한 저항, 신기술 도입의 경제성 같은 사회적·경제적 요인들도 크게 작용한다. 이런 측면까지 고려하면 AI에 대체될 확률이 70%를 넘는 직업은 전체의 17.5%인 153개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은행이 분류한 우리나라 32개 산업 중 일자리 수가 줄어드는 산업은 한 곳도 없고, 오히려 전체 일자리 수가 221만 개 이상 늘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도·소매 및 상품 중개 서비스업, 금융·보험업, 보건·사회복지서비스업 등의 일자리 증가 효과가 클 것이라고 한다.
한때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휩쓸 것이란 공포론이 흉흉하던 것과는 극히 대조된다. 2017년 다보스포럼에서 5년 내 선진국에서 일자리 500만 개가 사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 뒤 온갖 비관론이 쏟아졌었다. 2030년까지 무려 20억 개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그러나 5년여 뒤인 지금 오류로 드러나고 있다. 사라지는 일자리가 분명 있다. 그렇지만 없어지는 것은 보이나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안 보인다. 안 보인다고 해서 없다고 한다면 왜곡에 불과하다. 2016년 이세돌 9단은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에서 1승 4패로 참패했지만, 프로 바둑기사는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히 맹활동 중이다.
AI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최근엔 과속 경계론도 나온다. 올바르게 대처하려면 사실(팩트)에 입각해 긍정·부정 측면을 객관적으로 다 봐야 한다. 무엇보다 괴담을 거부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03-22 ‘모르쇠’ 이화영

박민 논설위원
쌍방울 법인카드를 통한 뇌물 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는 ‘정치자금 관리의 달인’으로도 불린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화영은 노무현 후보 후원회장인 이상수 의원의 보좌관으로 캠프의 자금 집행 실무 책임자를 맡았다. 대선 이후 이 의원은 불법 자금 모금 혐의로 기소됐지만, 이화영은 기소를 면했다. 2012년에는 배임·횡령 혐의로 기소된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선처 청탁과 함께 1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영장이 청구됐다. 그러나 영장은 기각됐고 1·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이화영은 쌍방울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지만, 과거 경험을 활용하고 있다. 우선 물증이 뚜렷한 법인카드와 관련해 ‘전면 부인’ 대신 측근을 앞세운 ‘액수 줄이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화영의 변호인은 지난 14일 공판에서 전체 법인카드 사용 2972건 중 측근인 A 씨가 자신을 위해 직접 결제한 것이 2860건, 이화영 또는 이화영 가족을 위해 결제한 것이 73건으로 전체 사용의 98.7%에 달하고 이화영이 직접 결제한 것은 39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구체적 물증이 없는 경기도 대북사업비 쌍방울 대납 의혹 사건의 경우, 이화영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김성태 쌍방울 전 회장 등이 이화영의 부탁을 받고 북한에 스마트 팜 사업비용 등을 전달했다고 자백했다. 구체적 정황과 관련 사진도 나왔다. 그러나 이화영은 “경기도와 무관하다”는 진술을 고수하고 있다. 3차례 대질신문에서 김 전 회장이 “20년 동안 봐온 형이 내게 이럴 수 있나”고 하소연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물귀신’ 작전이라는 해석도 있다. 대납 혐의의 경우, 물증은 없지만 정황 증거가 뚜렷해 법원도 인정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이 대표와 이화영 간에 지시와 보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구체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다. 따라서 이 대표를 보호하는 방법은 이화영 자신이 대납을 주도했으며, 이 대표는 무관하다고 스스로 꼬리를 자르는 것이다. 그러나 전면 부인으로 검찰도 이화영 선에서 수사를 멈출 수 없게 됐다. 실제로 검찰은 22일 관련 혐의로 이화영을 추가 기소한 데 이어 이 대표에 대한 수사를 계속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03-23 시-푸 브로맨스 종말

이미숙 논설위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13년 주석 취임 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40여 차례 정상회담을 하며 서로 생일 선물까지 챙겨주는 단짝 친구가 됐다. 종신 집권에 들어선 시진핑이 3연임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20∼22일 모스크바를 찾은 것은 푸틴과 우의를 내외에 과시하는 행보다. 양 정상은 2022년 2월 베이징(北京) 회담 때 “무한대의 협력”을 선언했고, 이번 회담에서도 “중·러 관계는 바위와 같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관계를 “전략적 브로맨스”라고 했다.
때로는 한 컷 만평이 복잡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만평에 나타난 시진핑-푸틴의 사이는 겉으로 얘기되는 우호적 관계와 달리 미묘한 긴장감이 드러난다. 시진핑은 늘 주저하는 듯한 표정이다. 지난해 2월 베이징 회담 후엔 푸틴과 포옹하면서 시계를 보는 시진핑이 그려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3주 후 푸틴이 중국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을 때 만평은 더 냉기가 흐른다. 온몸에 피를 묻힌 푸틴이 양손을 벌리며 다가오자 시진핑은 기겁한 표정으로 몸을 뺀다. 이번 모스크바 회동 만평은 테이블 귀퉁이에서 손에 피를 묻힌 푸틴이 뭔가를 설명하고, 시진핑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푸틴의 무기 요청을 놓고 고민하는 시진핑을 그린 듯하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17일 푸틴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했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21일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했다. 시진핑이 이웃 국가를 침공하고 시민을 학살한 전범과 함께 있을 때 기시다는 자유 투쟁의 영웅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만난 것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시진핑에게 ICC는 재를 뿌리고, 일본은 망신을 준 격이다. 푸틴은 이제 러시아 밖을 자유로이 다닐 수 없는 처지다.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퇴임 후 디스크 치료차 영국을 방문했다가 전격 체포됐던 것과 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 당시 칠레 정부는 국가원수의 재임 시절 행위는 외교 면제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지만, 영국 재판부는 피노체트의 면책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주사(朱砂)를 가까이하면 붉게 된다(近朱者赤)’는 사자성어가 있다. 시진핑이 권력에 취한 독재자와 친하게 지내며 비슷한 행동을 하다간 푸틴처럼 전범이 될지 모른다.
03-24(금) 명품시계 뇌물

김세동 논설위원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 수사에 관한 회고록을 내면서 ‘논두렁 시계’가 다시 나돌고 있다. 이 전 부장이 ‘노 전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에 따라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했지만, 부인과 아들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40만 달러와 2억550만 원 상당의 스위스 명품 시계 피아제 남녀 세트 2개를 받았다는 건 사실’이라고 밝혀 야권이 발칵 뒤집혔다. 더불어민주당은 “어디 감히 고인을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며 발끈했고, 이재명 대표는 “우리는 허망하게 노 전 대통령을 보내야 했던 논두렁 시계 공작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당의 주장은 ‘검찰의 정치보복 수사로 노 전 대통령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인데, 노 전 대통령도 2009년 3월 수사 당시 640만 달러를 받은 사실은 부인하지 않고, 가족들이 돈을 받은 줄 자신은 몰랐다는 것으로 일관한 것에 비쳐 보면 억지스럽다. 그리고 1개에 1억 원이 넘는 고가의 시계를 받은 사실도 부인하지 못하고 ‘처가 밖에 내다 버렸다’고 노 전 대통령이 진술했는데, ‘논두렁에 버렸다’고 보도된 게 공작이라고 주장하면서 시계 수수 자체가 없었다는 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비싼 건 웬만한 집 한 채 값도 넘는 명품 시계가 뇌물로 사용되는 모습은 영화는 물론 현실에서도 종종 나온다. 2015년 민영진 전 KT&G 사장은 러시아에서 담배유통업자로부터 4500만 원 상당의 스위스 명품 ‘파텍 필립’ 등을 받아 구속됐다. 2015년 박기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분양대행업자로부터 ‘해리윈스턴’ ‘위블로’ ‘브라이틀링’ 등 개당 3000만∼4000만 원에 달하는 명품 시계 9개를 받아 구속됐다. 전군표 국세청장은 CJ그룹으로부터 2006년 하반기 세무조사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30만 달러와 4200만 원 상당의 ‘프랭크 뮬러’ 시계도 받았다가 2013년 구속됐다.
명품 시계는 그 자체로도 비싸지만, 다이아몬드를 박는 방식으로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릴 수 있어 뇌물로 쓰기에 제격이다. 운반과 은닉도 쉽다. 628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엑스칼리버 더블플라잉 투르비용 스켈레톤’ 시계는 4억 원에 달하고, 파텍 필립 중에는 20억∼30억 원 나가는 모델도 있다.
03-27(월) 최고 금리 패러독스

이철호 논설고문
지난 22일 서민금융진흥원의 전국 50개 센터는 걸려오는 전화로 ‘불’이 났다. 서버 대기는 2시간이 넘었고 일주일 치 6200명 상담 예약이 하루 만에 마감됐다. 정부가 15.9% 금리로 100만 원(첫 대출은 50만 원)을 빌려주는 ‘소액생계비대출’ 현장이다. 모두 15.9%의 고금리에 놀라고, 수중에 50만 원도 없는 사람들 숫자에 또 한 번 놀랐다. 소셜미디어엔 “없는 사람에겐 50만 원도 죽고 사는 문제다. 제발 살아가게 해 달라”는 하소연과 “앱과 전화를 같이 돌려야 예약 상담이 쉽다”는 응원이 넘쳐난다.
그만큼 민생이 힘겹다. 여기에다 급전을 빌릴 제3금융권이 개점휴업 상태다. 대부업법은 2020년 개정돼 최고 금리가 20%로 제한됐다. 하지만 당시 0.5%였던 기준금리는 지금 3.5%까지 올랐다. 수익성 악화로 대부업체 12곳이 문을 닫았고 업계 1위는 신규 대출을 중단했다.
절박한 서민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끔찍하다. 우선 내구제대출(나를 스스로 구제하는 대출)의 ‘휴대폰깡’. 200만 원 정도 빌려주면서 휴대전화 2∼4개를 개설해 넘겨받는 수법이다. 피해자들 부담은 고액의 통신비 등 500만∼600만 원이 훌쩍 넘는다. 형사처벌 대상인 대포폰 때문에 피해 신고도 쉽지 않다. 공식 대부중개 플랫폼 주변에도 불법 사금융 업체들이 어슬렁거린다. 이들은 급전을 빌려주면서 비상연락망을 이유로 지인 연락처를 요구한다. 하지만 원리금 상환이 늦어지면 “지인들에게 사채 이용 사실을 알리겠다”는 협박이 날아온다. 금융감독 당국이 최근 ‘휴대폰깡’ 주의보와 ‘대부 플랫폼 개인정보 열람’ 금지령을 발동한 이유다.
금융 약자를 돕는다며 도입한 규제가 부메랑이 되고 있다. 고금리로 대출 심사가 깐깐해지면서 서민들만 더 괴롭히는 것이다. 제3금융권에 최소한의 시장 원리가 작동해야 하는 이유다. 금융위원회도 최근 법정 최고 금리를 유연하게 조정하는 시장연동형 금리제도를 제안했다. 문제는 국회다. “원리금 상환이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최고 금리까지 손대면 총선 때 서민들 표가 날아간다”며 팔짱을 끼고 있다. 여야가 함께 서민금융진흥센터를 가 보았으면 한다. 좋은 의도의 최고 금리 20%가 현장에서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생생하게 체험해 보길 기대한다.
03-28 개딸과 잼파파

이현종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간신히 부결된 이후 이 대표 지지 그룹인 ‘개딸(개혁의 딸)’의 행동은 정치테러 수준이다. 국회 본관 앞에서 비명계 의원이 나오면 한 명씩 찾아가 “왜 찬성표를 던졌느냐”는 질문을 하다가 급기야 욕설을 퍼붓고, 이런 장면을 유튜브로 생중계한다. 비명계인 이원욱·박용진 의원 지구당 사무실 앞에서는 피켓 시위를 하고 집 앞에서도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더욱이 이 의원 규탄 집회를 알리는 공지에 이 의원의 증명사진을 조작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하기도 한다. 그동안 문자 폭탄이나 팩스 보내기, 18원 후원금 등 비교적 소극적인 활동을 보였지만, 이젠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개딸의 패악질이 도를 넘자 이 대표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진짜 우리 지지자들일까, 민주당원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라고 밝혔다. “이젠 나도 변절했다며 공격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호소는 별 효과가 없다. 이 대표는 취임과 함께 당사 1층을 ‘당원 존’으로 만들어 아예 이들에게 내줬다. 이 대표 최측근인 김남국 의원은 “‘너희들하고 절교야’ 이렇게 할 것인지, 저는 불가능할 거라고 보인다”라고 친명계 내 분위기를 솔직하게 말했다.
이 대표를 아버지(잼파파)로 받드는 개딸의 정체는 ‘2030 여성’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 집회에 나오거나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은 ‘4050 여성’이 많다고 한다. 개딸이 아닌 ‘개아주머니’가 정확하다. 이들은 왜 이렇게 극렬 정치 지지층이 됐을까. 1980년대 후반∼199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은 당시 학생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다. 반미주의와 민족주의에 과도하게 경도돼 있다. 사회적 참여 의식은 높지만, 여건상 그에 맞는 사회 진출을 이뤄내지 못하면서 이런 불만이 정치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차별을 이재명이라는 흙수저 출신의 자수성가한 정치인과 일체화하면서 이 대표의 각종 부패 사건에도 불구하고 지지세가 강하다.
친노·친문과 달리 개딸은 매우 과격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또 개딸, 개이모, 잼파파 등 가족을 상징하는 용어처럼 이들은 ‘유사 가족 공동체’ 의식도 나타나고 있다. ‘땃벌떼’ ‘용팔이’의 계보를 잇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03-29 김세환 노래들

김종호 논설고문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걸/ 사랑의 눈길보다 정다운 건 없을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걸/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쁨’. 항상 미소 짓는 밝은 표정에, 순수하면서 포근한 음색으로 노래하는 가수 김세환(75)의 대표곡 중 하나인 ‘사랑하는 마음’ 시작 부분이다. 송창식 작사·작곡이다. 1974년 발표된 후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방송 등에서 들려준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젊음을 유지하는 ‘영원한 통기타 소년’ 김세환은 성품도 따뜻해 가까이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고 한다.
김세환은 한국 최초의 대중음악감상실로 서울 무교동에서 1953년 문을 연 쎄시봉 무대에서 직접 노래하진 않았으나, 1960년대 후반의 쎄시봉 절정기를 이끈 송창식·윤형주·이장희 등과 함께 ‘쎄시봉 출신’으로 분류된다. 그들과 친형제처럼 어울리며 음악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장희가 작사·작곡한 노래로, 김세환이 불러 1972년 첫 앨범에 담았던 명곡 ‘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처음 만난 날/ 비가 몹시 내렸지/ 쏟아지는 빗속을/ 둘이 마냥 걸었네/ 흠뻑 젖은 머리에/ 물방울이 돋았던/ 그대 모습 아련히/ 내 가슴에 남아 있네/ 먹구름아 모여라/ 하늘 가득 모여라/ 소낙비야 내려라/ 천둥아 울리렴’. 그를 가수 데뷔로 이끈 인물은 윤형주다. 경희대를 같이 다니며 김세환을 만난 윤형주는 1971년 이종환이 진행하던 MBC라디오 심야 음악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하면서 김세환을 데리고 나갔다. 그 자리에서 김세환이 부른 노래는 영국 출신으로서 호주로 이민 간 3인조 밴드 비지스(Bee Gees)가 1969년 발표한 ‘Don’t Forget To Remember’였다. 당대 최고의 DJ 이종환도 감탄했다. ‘잊지 못할 내 사랑’으로 번안한 김세환의 그 노래도 그의 대표곡이 됐다.
윤형주 작사·작곡인 김세환의 또 다른 명곡은 1974년 앨범에 담긴 ‘길가에 앉아서’다. ‘가방을 둘러멘 그 어깨가 아름다워/ 옆모습 보면서 정신없이 걷는데/ 활짝 핀 웃음이 내 발걸음 가벼웁게/ 온종일 걸어 다녀도 즐겁기만 하네’ 하고 시작한다. 자전거 타기의 고수이기도 한 김세환과 자전거 하이킹을 하면 기분이 더 좋을 것 같은 따스한 봄이다.
03-30 세종시와 인도네시아 천도(遷都)

문희수 논설위원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부터 수도 이전에 많은 공을 들였다.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에서 개국했지만, 새 왕조는 새 도읍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무학대사가 당시 남경으로 불리던 한양을 권해 천도(遷都)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후보지가 많았고 반전도 거듭했다. 태조는 재위 3년(1394) 한양으로 천도했지만, 정종은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던 한양을 싫어해 재위 2년(1399) 개경으로 다시 옮겼고, 3대 태종은 재위 6년(1405) 한양으로 다시 이전했다. 한양 천도가 완료되기까지 13년이나 걸린 것이다.
당초 태조는 재위 1년(1392) 한양 천도를 명령했지만, 개경을 선호한 대신들의 반대에 막혔다. 지금의 세종시 인근 계룡산 일대가 후보지로 거론됐던 것도 이때쯤이다. 태조는 이듬해 2월 직접 시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략가로 풍수지리에도 밝았던 하륜이 계룡산은 너무 남쪽이고 곧 쇠퇴할 땅이라면서 대신 무악(지금의 서대문구 안산) 남쪽을 추천하며 제동을 걸어, 태조는 결국 포기했다. 그래도 세종시 입지가 평가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세종시 건설은 올해로 18년이 됐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2004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행정수도 아닌 행정도시로 대체된 게 결정적이었다. 오는 2027년까지 국회 분원과 대통령 집무실을 설치하는 등 아직도 보완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 공무원들이 서울과 너무 떨어져 글로벌 트렌드에 뒤진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인도네시아가 수도를 이전하면서 이런 세종시를 벤치마킹해 관심을 끈다. 인니는 현 수도인 자와 섬의 자카르타에서 1200여 ㎞ 떨어진 보르네오 섬에 새 수도(누산타라)를 건설하고 있다. 오는 2045년까지 40조 원 상당을 투자하는 초대형 역사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연임 마지막 해인 2024년부터 공공기관 이전이 시작될 예정이다. 인니는 2019년부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과 교류해 왔고, 지난해 7월엔 한국과 정상회담도 가졌다.
외국의 세종시 벤치마킹은 의외라는 시선도 있지만, 세계가 한국의 신도시 건설 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 신도시에도 참여한다. 말 많던 신도시가 좋은 기회를 만든다. 그야말로 새옹지마(塞翁之馬)다.
03-31(금) 한동훈과 투키디데스

박민 논설위원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황금기를 맞은 아테네와 이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가 벌인 전쟁의 기록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그리스의 문명과 흐름을 바꾸었다면 이 책은 역사 서술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투키디데스는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든 남에게 들은 것이든 최대한 엄밀히 검토한 다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가 L 랑케는 그를 과학적·객관적 역사가의 이상형으로 추앙했다.
이 책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시초로도 불린다.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다”고 밝혔는데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강대국이 약화하고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 두 세력 사이의 패권 교체는 전쟁을 포함한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제1·2차 세계대전, 미소 냉전 체제 등이 대표적 예다. 미·중 패권 경쟁을 다룬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는 ‘예정된 전쟁’에서 이를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 명명했다.
영웅들의 연설을 백미로 꼽는 경우도 있다. 페리클레스의 추모사는 아테네 찬양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보다 본보기가 되고 있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정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나라를 지키는 일이 숭고한 사명임을 역설한다. “여러분은 이분들(전사자)을 본받아,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 있음을 명심하고, 전쟁의 위험 앞에 망설이지 말라…자긍심을 가진 사람들은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보다 비겁함으로 인해 굴욕을 당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이 추모사의 내용과 구조, 수사와 어휘는 유명한 명연설의 모태가 됐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이 추모사를 압축한 것이라고 한다. “가난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구절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사의 “두려움 그 자체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최근 한동훈 법무부 장관 정치권 차출론이 다시 나오고 있다. 한 장관은 유럽 출장 때 이 책을 갖고 갔다. 정치인의 명연설과 국제정세를 보는 지혜가 담긴 이 책을 읽으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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