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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7/ 〈61〉 ‘주체’ 라면서 가장 비주체적이고 중국 종속적인 북한 - 〈70〉티베트 라싸가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라는데...

상림은내고향 2023. 3. 24. 17:59

송재윤의 슬픈 중국7/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조선일보 

2023.01.07

〈61〉 ‘주체’ 라면서 가장 비주체적이고 중국 종속적인 북한

▲<스탈린, 김일성,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내걸린 만찬장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1949년 말이나 1950년 초로 추정된다. 사진/공공부문>

 

지난 70여 년 한반도를 배회한 좌익 전체주의의 유령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기초를 닦고, 스탈린이 기둥을 세우고, 마오쩌둥이 지붕을 얹고, 김일성이 서까래를 놓아 만든 죽음의 이념이었다. 이미 시대착오적 망념으로 판명되었음에도 그 낡은 이념은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 선동, 권력 탈취, 사회 교란 및 국가 해체의 전술로서 가공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2023년 신년 벽두부터 그 문제를 “슬픈 중국”의 첫 화두로 잡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북한이 도발할 때마다 한국 정부를 공격하는 선동가들

2023년 1월 1일 새벽 2시 50분경 북한은 동해상으로 단거리탄도미사일 또 한 발을 쏘았다. 2022년 한 해 동안 김정은은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 외치면서 39차례에 걸쳐 70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사상 최대의 군사도발이었다. 올해도 북한의 군사도발이 그치지 않을 듯하다.

 

북한이 군사도발을 감행할 때마다 남한 일각에선 어김없이 한국 정부를 공격하는 정치꾼들과 선동가들이 나타난다. 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언론매체를 점령하게 된 이후로 국기(國基)를 허물고 헌정(憲政)을 파괴하는 거짓 선전과 허위 선동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2006년 노무현 정권 당시 그들은 1987년 115명이 학살당한 대한항공 858 폭탄 테러를 대한민국 정부의 자작극으로 몰고 갔다. 재조사 결과 북한의 소행임이 재확인됐음에도, 그들은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았으며, 테러 주체인 북한에 대해선 한마디 비판도 없었다. 연쇄 살인의 누명을 쓴 엉뚱한 피고가 재판정에서 무죄를 입증했음에도, 패소한 원고는 정작 연쇄 살인의 진범에 대해선 원망도, 분노도 하지 않는 정신 분열적 아이러니다.

 

2010년 46명이 전사한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바로 그 세력이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로 좌초설, 미군 오폭설 등 숱한 음모설을 유포했다. 당시 전체 국민 30% 이상이 음모설에 휘둘려 북한을 감싸고 돌았다. 장장 5년이 지나서야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북한 잠수정의 타격에 의한 폭침’임을 인정했지만, 테러를 저지른 북한에 대해선 비판도, 사과 요구도 없었다.

 

2010년 11월 말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 나는 베이징의 한 학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당시 사석에서 만난 한국 학자들 몇 명은 북한의 군사도발이 이명박 정권 책임이라는 궤변을 펼쳐대고 있었다. 민간인을 살해하는 북한의 군사 테러를 감싸고 돌면서 한국 정부를 공격해대는 그들의 심리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주사파의 미망, 그들은 왜 김일성에게 사로잡혔나?

지난해 10월 한국 국회에서 이른바 “주사파” 논란이 일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자 야당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장에서 그가 과거 SNS 글을 통해 자신들을 “말과 행동으로 수령님께 충성하는” 주사파로 모독했다며 격분했다. 그들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 “견딜 수 없는 모욕감” 운운하며 김문수 위원장을 거세게 몰아세웠다.

 

멀리서 그 뉴스를 보면서 1980년대 대학가를 장악했던 과거 그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이 혹시 “과거 자신들의 행적이 수치스러워서 그 사실을 감추려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그러하다면 젊은 날의 미망(迷妄)과 치기(稚氣)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자기 몫의 반성을 했어야 옳았다. 1980-9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의 운동권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NL파가 장악하고 북한과의 공조 속에서 “남조선 해방”을 위해 “반미 구국 투쟁”에 나섰음은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아는” 공공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통일부 산하 북한자료센터에 비치된 북한의 출판물. 사진/공공부문>

 

동구가 무너지고 구소련이 해체되기 직전, 대한민국의 지식계는 아편 흡입하듯 열광적으로 공산 전체주의 이념에 탐닉했다. 1987년 이후 이른바 “운동의 대중화” 시대가 열리면서 한국 전역의 대학가 서점들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김일성 주체사상을 찬양하고 선전하는 조악한 운동권 서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입시 지옥에서 벗어난 신입생들은 소규모 독서회에 포섭되어 밤낮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들을 달달 외고 금단의 열매를 씹어 삼키듯 김일성 주체사상을 학습했다.

 

전대협 결성 이후 전국 대학의 학생회는 반일 종족주의와 반미의식으로 중무장한 주사파 세력이 장악했다. 그들은 밤마다 단파 라디오로 북한에서 송출하는 “구국의 소리”를 청취하고, 김일성을 반일 혁명의 초인적 수령으로 미화한 북한식 판타지 역사 소설 <<피바다>>, <<봄우뢰>> 등을 열독하고, 김정일이 썼다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강독하며 김일성 수령유일주의를 내면화했다.

 

일례로 제3기 전대협 의장 임종석이 충북대를 방문했을 때 캠퍼스에 붙었던 대자보를 보면, “임종석 전대협 의장님 충북대에 오시다”라는 경어체가 눈길을 끈다. 당시 각 대학 주사파 운동권들은 김일성 수령론에 따라 학생의 수령 “학생회장”에 극존칭을 붙이는 몰상식을 연출했다. 북한식 문화를 흠모해서 널리 유포하려는 웃지 못할 반(反)문화적 망동이었다. 바로 그 주사파가 반성도, 자아비판도 없이 정계에 진출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지난 정권에서 대통령 최측근으로 맹활약했던 바로 그 인물들이다.

 

▲<1989년 제3기 전대협 의장 임종석을 환영하는 충북대 대자보. 사진/유튜브 캡처>

 

주체사상의 뿌리는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김씨 왕조는 “주체”를 최고 이념으로 삼지만, 북한만큼 비주체적이고 종속적인, 비자립적이고 의타적(依他的)인 사회도 없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종속되어 있고, 이념적으로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에 의존하고 있다. 남한 주사파는 북한 정권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칭송하지만, 실제로 김일성은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흠모하고, 추종하고, 흉내 냈던 비주체적 모방자일 뿐이었다. 최소 다섯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1975년 4월 18일,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접견 중인 마오쩌둥과 김일성. 사진/공공부문>

 

첫째, 김일성 주체사상은 개체의 자주성(自主性)을 부정하는 집체주의의 이데올로기다. 주체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집체주의의 산물이다. 철학사에서 “주체”의 정신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유 의지, 자율성, 독립성 및 자립성을 생명으로 한다. 김일성은 개인의 자주성을 송두리째 부정한 후, “민족”이란 집체의 집단주의적 주체성을 강조한다. 개체의 자주성이 상실된 사회에서 독재정권이 외치는 민족의 주체성이란 고작 집권 세력 권력 유지의 술수일 뿐이다. 개인의 자율성을 말살하고 집단의 전체성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주체사상은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복사판이다.

 

둘째, 김일성 주체사상은 정치적 반대와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일당 독재의 이데올로기이다. 스탈린은 공산당 무오류성을 천명한 후, 전 인민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했다. 마오쩌둥 역시 공산당 영도력을 강조한 후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내세워 전 인민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렸다. 김일성주의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한 전체주의적 일당 독재의 이념일 뿐이다.

 

셋째, 김일성 주체사상은 최고 영도자의 절대 권위에 의존하는 일인 지배의 이데올로기이다. 스탈린에서 시작된 공산권의 인격 숭배는 문화혁명 시기 마오쩌둥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선례를 따라서 자신에 대한 인격 숭배를 강요했다.

 

넷째, 현실 정치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은 군사·외교적 반외세주의, 경제적 고립주의, 문화적 쇄국주의로 나타났는데, 이는 1950-60년대 마오쩌둥의 군사·외교 및 경제 노선과 대동소이하다.

 

다섯째, 마르크스는 정신에 대한 물질의 우선성을 강조지만,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물질적 조건을 넘어서는 인간의 ‘주관 능동성’을 강조한다. 인간이 주관적인 의지를 능동적으로 발휘하여 객관적인 물질적 조건을 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정신주의적 발상이다. 실상은 전체 인민을 가혹한 집단 노역으로 내모는 총동원령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사상, 이념, 사회 제도, 경제 정책, 통치 방식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일란성 쌍생아처럼 닮았다. 물론 1912년생 김일성이 19세 연상의 마오쩌둥을 흠모하고 그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다 베껴 쓴 결과이지, 그 역이 아니다. 마오쩌둥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 대규모 “지원군”을 파견하여 만주로 패주한 김일성을 되살려준 생명의 은인이자 이념적 후견인이었다. 남한 주사파는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맞서 백두산 일대의 영토를 사수한 민족 자주의 영웅이라 미화하지만,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이념적 추종자이자 사상적 아류일 뿐이다.

 

물론 마오쩌둥 사상과 김일성주의 사이엔 눈에 띄는 차이점도 있다. 첫째, 마오쩌둥은 청(淸, 1644-1912) 제국이 넓힌 영토를 최대한 국토로 확보하기 위해 56개 민족을 통합하는 다민족 국가를 표방했지만, 김일성은 나치의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민족 제일주의”를 강조했다. 둘째, 김일성의 통치는 마오쩌둥의 통치보다도 더 억압적인 전체주의 신정이었다. 일례로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모두 인민의 태양으로 숭배되었는데, 마오쩌둥은 자신의 생일을 국경일로 삼지는 않았다. 반면 김일성의 생일은 태양절이라는 북한 최대의 국경일이다. 셋째, 김일성은 권력을 세습해서 3대까지 이어지는 전제 왕조를 만들었지만, 마오쩌둥은 당대 스스로 전제 권력을 누릴지언정 권좌를 핏줄에 물려주지는 않았다.

 

▲<1950년 8월 15일 북한의 “해방일보” 제1면. 625남침 이후 포항까지 점령한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우측 상단 “위대한 쏘련 만세!”라는 구호가 보인다. 이미지/공공부문>

 

요컨대 김일성주의는 변종 스탈린주의며, 극단화된 마오쩌둥 사상이다. 김일성은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수입해서 더 극렬하고, 악랄하고, 극단적인 전체주의 이념으로 가공했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비판하기 위해선 그 숙주라 할 수 있는 마오쩌둥 사상과 스탈린주의를 비판해야만 한다. 마오쩌둥 사상이 무너진 세상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은 그 존립의 근거 자체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우상이 부서지는 그날, 북한에서 김일성의 우상 역시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중국 지식계의 마오쩌둥 비판에 관심이 쏠린다.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중국의 지식인들

중국의 대표적 자유주의 사상가 쉬요우위(徐友漁, 1947- )의 증언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개혁개방의 열기 속에서 대망의 1980년대가 열렸을 때, 중국의 지식인들은 본격적인 마오쩌둥 비판을 개시했다. 당시 사회과학원 연구생이었던 쉬요우위는 베이징 중공 중앙의 토론회에 참석했던 교수들에게서 마오쩌둥의 오류와 모순을 비판하는 격렬한 토론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당시 중국의 군부, 관계, 학계에는 마오쩌둥의 사상적·정책적 오류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지적 흐름이 갈수록 크게 형성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10년의 대동란”을 직접 겪었던 홍위병 세대 중에도 마오쩌둥의 실정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인물들이 드물지 않았다.

 

그 결과 1981년 6월 27일 중공 중앙은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후퇴였고, 엄중한 손실을 초래했으며, 그 최종 책임자는 마오쩌둥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중국 지식계의 마오쩌둥 비판은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덩샤오핑은 비판 세력의 목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결국 중국공산당의 영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을 살리는 방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1978-1979년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牆) 운동. 사진/공공부분>

 

특히 중공 중앙에 과감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1978-79년의 민주장(民主牆) 운동이 일어나자 정치적 위기의식을 느낀 덩샤오핑은 1979년 3월 30일 1) 사회주의 노선, 2) 인민민주독재, 3) 공산당 영도, 4) 마르크스-레닌 및 마오쩌둥 사상 등 4항을 굳게 견지한다는 이른바 “4항 기본 원칙”을 천명했다. 그리고 10년 후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공 중앙은 탱크부대를 급파하여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톈안먼 광장의 시민과 학생을 무력으로 갈아엎고 강제로 해산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시진핑 정권의 전체주의적 일인 지배로 나타나고 있다. 시진핑 정권이 암암리에 마오쩌둥 사상의 복원을 추진하면서 오늘날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위상은 다시금 드높여지고 있다. 과연 오늘날 중국의 현명한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계속>

 

〈62〉마오쩌둥 대 쑨원, 중국민들의 선택은?

▲<2001년 10월 10일 대만의 사관생도들이 쑨원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Tao-Chuan/AFP/Getty Image>

 

공화 혁명의 영도자 쑨원을 기리는 난징 시민들

2020년 7월부터 중국 대부분 지역에선 불꽃을 쏘거나 폭죽을 터뜨리는 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지난 12월 31일, 정부의 금지령에도 중국 각지에선 많은 사람이 몰려서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차를 몰고 도심을 달리며 불꽃을 쏘는 이들도 있었다. 허난성에서 저우코우(周口市)시 루(鹿)읍에서는 성난 군중이 힘을 모아 경찰차를 뒤집어버렸다.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막는 공권력에 대항하는 군중의 즉흥적 시위였다.

 

▲<허난성 저코우시에서 불꽃놀이를 금지하는 경찰에 맞서 경찰차를 뒤짚고 그 앞에서 불꽃을 쏘아 올리고 있다. 2022년 12월 31.사진/twitter.com @loyyufeng_ 캡처>

 

2023년 1월 1일 0시 직전이었다. 난징(南京) 신제커우(新街口) 광장에선 수백 명 인파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서 쑨원(孫文, 1866-1925)의 동상을 향해 달려갔다. 이내 동상 주변을 빽빽하게 빙 둘러싼 군중은 손에 쥐고 있던 풍선을 밤하늘 멀리 날려 보냈다. 제로-코비드 정책 폐기 후 감염자가 급등세를 보이는 민감한 시점임에도 자발적으로 모여든 대규모 군중은 민국혁명의 아버지 쑨원 동상 앞에 헌화하고 색색의 풍선을 날리는 장관을 연출했다.

 

3년간 갇혀 지내던 중국 인민으로선 실로 감격의 순간이었다. 실시간 동영상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전 세계 네티즌들은 촌음을 다퉈 감탄의 트윗을 날렸다. 지난해 11월 말의 백지 혁명이 급기야 불꽃 혁명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희망 섞인 전망이 주류였다.

 

난징의 이벤트는 여느 때와 또 다른 중대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중국 인민이 경찰과 격한 몸싸움을 벌이며 항의했다는 점, 참신하고 유쾌한 이벤트를 연출해서 탄압을 일삼는 정부 당국을 조롱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난징의 시민들이 “쑨원”이라는 상징적 인물 아래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이 민감한 시점에 중국 인민은 왜 하필 마오쩌둥 동상 대신 쑨원의 동상 앞에 모여들었을까?

 

▲<2023년 1월 1일 0시, 경찰 저지선을 뚫고 쑨원의 동상 앞에 결집한 난징의 시민들. 사진/ https://twitter.com/TCitizenExpress 캡처>

 

쑨원의 상징적 지위, 마오쩌둥의 권위 위협

쑨원은 2천여 년 지속되던 황제지배체제를 종식한 1911년 민국혁명의 지도자이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쑨원의 가장 큰 업적은 ‘제국(帝國)’을 무너뜨리고 ‘민국(民國)’을 세웠다는 데 있다. 쑨원의 공화 혁명은 황제의 나라가 국민의 나라로 뒤바뀐 위대한 사건이었다.

 

민국혁명 112년째를 맞이하는 오늘날의 중국은 무늬만 민국일 뿐 실제로는 일인 지배의 제국으로 남아 있다. 그 점을 모르지 않기에 난징의 시민들은 110여 년 전 민국혁명의 정신을 기리며 쑨원의 동상 앞에 모여들었고, 길을 막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을 땐, 고지를 탈환하는 병사들처럼 즐겁게 펄쩍펄쩍 뛰면서 중산(中山) 선생의 동상을 에워쌌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에서 쑨원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은 곧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비근한 예로 2021년 10월 10일 홍콩 경찰은 시민들이 기획했던 쌍십절(雙十節) 행사를 국가안전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쌍십절은 신해혁명이 발발한 1911년 10월 10일을 기리는 행사지만, 무엇보다 그날은 “중화민국”을 표방하는 대만의 국경일이기 때문이었다.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 위치한 쑨원 기념관. 이 기념관은 광저우 시민과 화교 단체의 모금으로 1931년 건립되었다. 사진/공공부문>

 

10월 1일을 국경일로 경축하는 중공 정부는 10월 10일을 따로 기리지 않는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전문은 쑨원의 공적을 언급하지만, 중공 정부로선 중화민국과 국민당 정권을 탄생시킨 신해혁명의 의의를 강조할 수가 없다. 쑨원은 1912년 중화민국을 창건된 공화국의 국부이며, 그의 적통을 장제스가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쑨원을 기리는 난징 시민의 이벤트는 영리하고도 대담한 도발이다. “애국심”에 불타는 한 “분노청년”은 트위터에 쑨원에 헌화하는 인민을 향해 “중화민국을 복원하고 싶냐?”고 따지기도 했다. 반면 2023년 1월 1일 차이샤 (蔡霞) 전 중앙당교 교수는 쑨원의 동상 앞에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의 행동을 기리면서 “민심의 향배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쑨원의 지위가 격상될수록, 마오쩌둥의 권위는 그만큼 실추할 수밖에 없다. 마오쩌둥의 권위가 실추되면 중국공산당의 영도력에 금이 가고 만다. 쑨원의 부상은 마오쩌둥의 추락을, 중국공산당의 몰락을 암시할 수도 있다. 지난 세기 중국혁명의 신전에서 마오의 성상(聖像) 위에 안치될 수 있는 유일무이의 인물이 바로 쑨원이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초기 마오쩌둥 비판

마오쩌둥 사후 중공 중앙에선 두 차례에 걸쳐서 본격적인 마오쩌둥 비판이 전개되었다. 그 첫째 계기는 덩샤오핑이 최고 영도자로 추대되어 개혁개방의 시대가 개시된 직후, 1979년 1월 18일부터 4월 3일까지 중공 중앙 제11기 3차 전체 회의에서 진행된 이른바 “전국 이론공작 무허회(務虛會)”였다. 이 대회에는 저명한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해서 마오쩌둥의 사상적 오류와 정책적 착오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그 둘째 계기는 1980년 가을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이하 역사 결의)” 초안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대적인 토론이었다. 중공 당내 중앙과 지방의 고급 간부 4천 명과 중앙당교의 1500명 교원이 참여한 이 대회에선 중국 현대사의 민감한 문제들, 특히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마오쩌둥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논쟁의 핵심 주제였다.

 

▲<전국 이론공작 무허회에서 발표된 연설문 원고. 사진/공공부문>

 

대체로 마오쩌둥의 공로는 평가하되 잘못은 제대로 지적해야한다는 정도의 절충적 주장이 많았지만, “비모화(非毛化)”의 필요성을 강조한 지식인과 관료도 적지 않았다. 비핵화가 핵을 없앤다는 의미이듯, “비모화”란 마오쩌둥을 오류를 밝히고 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의미였다.

 

1979년 1분기의 “전국 이론공작 무허회”는 안타깝게도 용두사미로 끝이 났다.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이 4항 기본원칙을 천명해서 지식계의 마오쩌둥 비판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었다. 4항 기본원칙은 “사회주의, 인민민주독재, 공산당 영도 및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한다는 선언이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덩샤오핑으로선 당대 보수파와 급진적 자유파를 동시에 견제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을 수 있다.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이 발표한 “4항 기본원칙”의 길거리 포스터. 사진/공공부문>

 

4항 기본원칙이 선언됐음에도 1980년 9월에 열린 4천인 대토론에선 마오쩌둥 비판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일어났다. 당시 마오쩌둥 평가는 1) 건국 이후 최초 17년 역사, 2) 마오쩌둥 사상, 3) 마오쩌둥의 공과(功過), 이상 세 가지 주제에 집중되었다.

 

법학자 궈타오후이(郭道暉, 1928- )의 회고문에 따르면, 최초 17년의 역사를 평가할 때 4천 명 간부들은 일반적으로 당의 노선이 옳았으며 큰 성과가 있었다는 데 동의했지만, 1950년대의 숱한 정치 운동, 반우파 운동 및 대기근의 책임을 따지는 과정에선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다. 쟁론의 핵심은 그 엄청난 과오가 당 전체의 책임이냐, 마오쩌둥의 책임이냐였다.

 

두루뭉술 당의 잘못을 강조해서 마오쩌둥의 과오를 덮으려는 경향도 있었으나 다수는 마오쩌둥의 책임을 물었다. 그 중엔 마오의 오랜 혁명 동지들도 있었고, 문혁의 피해자도 있었는데, 모두가 마오의 동시대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을 논할 때, 이들은 마오쩌둥 말년의 착오도 마오쩌둥 사상에 포함해야 하느냐와 마오쩌둥 사상이 당의 지도 이념이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했다. 마오쩌둥 사상은 일개인의 사상이라기보단 마오쩌둥으로 대표되는 중국공산당 전체의 집체적인 이념이므로 모든 착오나 오류가 없는 완전무결한 이념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한 개인의 사상을 논하면서 사상적 오류를 배제하자는 견해는 비논리적이라는 비판도 쏟아졌다.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일개인의 소신이 당의 지도 이념이 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동시대인의 마오쩌둥 비판, 1981 <<역사 결의>>에 반영돼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역임했던 장샹산(張香山, 1914-2009)은 마오쩌둥의 “좌경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소책자를 집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의 오류를 “좌경 수정주의”로 규정함으로써 장샹산은 문혁 시기 무수한 사람을 “수정주의자”로 몰아서 박해했던 마오쩌둥을 조롱했음을 알 수 있다.

 

▲<1951년, 마오쩌둥과 리웨이한(우측). 마오쩌둥과 동향 출신으로 1910년대부터 혁명운동에 투신했던 리웨이한은 1948-62년 중앙 통전부 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혁명 원로로서 중공 중앙의 주요 보직을 맡았다. 사진/공공부문>

 

혁명 원로 리웨이한(李維漢, 1896-1984)의 발언도 눈길을 끈다. 그는 1918년 마오와 함께 후난성 창사에서 신민학회(新民學會)라는 결사체를 조직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리웨이한은 마오의 10대 과오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1. “신민주주의”만 잘 알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잘 몰랐다.

2. 농민과 지주만 잘 알고 산업 노동자와 자본가는 잘 몰랐다.

3. 농업만 잘 알고 공업은 잘 몰랐다.

4. 정치경제학을 이해 못해 만년에야 경제학 교과서를 읽었는데, 스탈린의 <<사회주의 경제 문제>>만 공부했다.

5. 경제 법칙을 연구하지 않고 정치 관점에서 경제 문제를 보았다.

6. 지식분자에 대해선 세계관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고, 문외한이 전문가를 영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지식분자를) 취로구(臭老九, 악취 나는 9등 신분)라 비판했다.

7. 농민 평균주의에 빠져서 1958년 일으킨 대약진은 소자산계급의 광열성(狂熱性)을 보여준다.

8. 외부 문물을 중국이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국제수정주의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는데, 그의 자력갱생은 쇄국·자폐의 길이었다.

9. 1964년 4대 현대화를 내걸고선, 1966년 다시 4대 파괴가 시작됐다.

10. 옛날 책들만 파고들면서 고대를 현대에 적용한다고 떠벌렸다.

 

샤옌(夏衍, 1900-1995)은 반우파 운동 당시 마오쩌둥을 비판하면서 “1958년 마오 주석은 65세였는데, 노인성 의심증에 걸려 있었다”고 발언했다. 극작가 출신인 샤옌은 문학적 기지를 발휘해 그는 마오쩌둥의 오류를 다음의 16자로 정리했다.

 

거간애첨(拒諫愛諂, 직언을 거부하고 아첨을 좋아하고)

다의선변(多疑善變, 의심 많고 변덕스럽고)

언이무신(言而無信, 말에 신뢰가 없고)

면리장침(綿裏藏針, 부드러운 천 속에 바늘을 숨겨두고)

 

이 밖에도 마오쩌둥은 “속은 봉건주의자인데 겉만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으며, “입만 열면 진시황 얘기를 하고,” “마르크스-레닌의 저작이 아니라 중국의 25사(史) 등 옛날 책만 읽어서 봉건 사회의 제왕, 장상의 권모술수를 당내 투쟁에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역사상 최대 폭군을 들라면 반드시 그를 꼽아야 한다”며 “주원장도 마오쩌둥에 못 미쳤다”는 발언도 나왔다.

 

마오쩌둥의 동료들이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에 대해 역사적 총평을 내렸다는 점에서 4천인 대토론회의 중대성은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의 논의는 1981년 6월 27일 그 결과 1981년 6월 27일 발표된 “역사 결의”에 반영되었다.

 

“4천인 대토론회”에 참석해서 이들의 비판을 직접 들은 덩샤오핑은 모두 9차례의 강화를 통해 “마오쩌둥 동지에 대한 폄훼와 모독은 당과 국가에 대한 폄훼이자 모독”이라면서 “마오쩌둥 동지의 착오를 지나치게 기록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동시대 혁명 간부의 마오쩌둥 비판을 덩샤오핑도 다 무시할 순 없었다.

 

▲<1981년 7월 1일 인민일보 제1면에 대서특필된 “역사 결의.” 사진/공공부문>

 

1981년 <<역사 결의>> 최종본에는 문혁의 총책임을 마오쩌둥에게 묻는 대목이 삽입되었다. 바로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끈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이었다”는 문장이다. 당시의 격렬한 마오쩌둥 비판이 완전히 무의미하진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후 중공 중앙은 자본주의 경제를 채택하면서도 마오쩌둥의 절대 권위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갔다. 그 결과 중국 지성계는 마오쩌둥 비판을 밀린 숙제처럼 방치하고 말았다. 중국 지식계는 대체 그 중대한 숙제를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난징의 인민이 쑨원의 동상 앞에 집결한 이 순간이 적기(適期)는 아닐까. 신해혁명 112주기를 맞이하는 오늘날도 민국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63회> “권력은 총에서 나오고, 총은 당이 지휘한다”...시진핑의 군권 장악

▲<2023년 1월 3일 상하이 창하이 병원 복도 풍경. 1월 초 상하이시 지방 관원은 2천6백만 인구의 대략 70%가 감염된 상태라고 발표했다. 급작스러운 방역 해제 이후 무정부 상태에서 중국의 인민은 각자도생의 새로운 “인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사진/AP>

 

푸틴, 시진핑, 바이든, 김정은... 누가 가장 큰 권력을 갖고 있나

1970-80년대 한국 어린이들은 태권브이, 마징가, 짱가, 그랜다이저 등 만화영화 로봇 중에서 누가 가장 강력한가 놓고 언쟁을 벌이곤 했다. 21세기 20년대를 살아가는 중장년 성인들도 비슷한 논쟁에 빠져들 때가 있다. “푸틴, 시진핑, 바이든, 메르켈, 수낵, 모디, 룰라, 김정은 등 세계 여러 나라 지도자 중에서 과연 누가 가장 큰 권력을 갖고 있나?”

 

이 질문은 “어느 나라가 가장 강력한가?”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후자가 경제력, 군사력, 소프트파워(soft power) 등 각 나라 국력에 관한 질문이라면, 전자는 권력자 일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실권(real power)에 관련된다. 한 나라 지도자의 실권은 크게 ‘합법 권력’(legitimate power)과 ‘전제 권력’(despotic power)으로 나눠볼 수 있다. 여기서 합법 권력이란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 나라 헌법에 명시된 적법 절차에 따라 투명하고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공식적 권위’(formal authority)를 말한다. 반면 전제적 권력이란 통치자의 자의적 권한이다.

 

합법 권력만 놓고 본다면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행정력, 경제력, 군사력, 기반 시설, 소프트 파워 등 모든 면에서 현재 미국을 능가하는 국가는 없다. 반면 의회 및 사법부의 견제와 감시 아래 놓인 미국 대통령은 한순간도 자의적으로 권력을 오용하거나 남용할 수가 없다.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뿐만 아니라 감사, 문책, 기소, 탄핵 등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는 법적 장치가 두텁기 때문이다.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독재자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스탈린, 히틀러, 칠레 피노체트, 마오쩌둥, 무솔리니, 김일성. 사진/wikipedia.com>

 

전제 권력 면에서 전 세계 지도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을 들자면, 1등이 김정은, 2등이 시진핑, 3등이 푸틴일 듯하다. 김정은이 단연 1등인 이유는 북한의 “최고 존엄”은 “수령 유일주의”라는 일인 지배의 이념에 따라 국가권력을 제멋대로, 제 맘대로, 무제한 쥐고 흔들며 휘두를 수 있는 종신직 절대 군주인데다 이제 “책상 위에 핵 단추를” 올려놓고 만지작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의 “최고 존엄”은 자의적으로 고모부를 처형하고 친형을 독살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군사 테러를 감행하고, 수십 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서도 보란 듯 멀쩡하게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전체주의 정권의 세습 전제 군주다.

 

전 세계 그 누구도 오늘날 북한의 “최고 존엄”처럼 막강한 대민 지배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일례로 강력한 징집령에 저항하는 수십만 러시아 청년의 국외 탈출에서 보듯, 러시아 최고 영도자 푸틴의 권력 역시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의 시진핑은 어느 정도의 실권을 갖고 있는가? 미국 대통령과 북한 “최고 존엄” 사이에서 시진핑의 권력은 과연 어느 쪽에 가까울까?

 

중국공산당의 권력 기반은 당의 군대 ‘인민해방군’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권력 기반에는 “인민해방군”이 놓여 있다.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이 창설한 당의 군대, 곧 당군(黨軍)이다. 국공내전 당시부터 그 군사 조직은 공군(共軍)이라 불렸다. 국민당의 군대는 국군(國軍)이라 불렸다.

 

1927년 8월 7일 서른네 살의 마오쩌둥은 후베이성 한커우(漢口)에서 열린 중공 중앙 긴급회의에서 전 단계 당의 운동이 실패한 원인 분석하면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일갈했다. 1938년 그는 “전쟁과 전략 문제”라는 글에서 “당이 총을 지휘한다(黨指揮槍)”는 중요한 원칙을 천명했다. 국군의 위초(圍剿, 포위·토벌) 작전에 쫓기며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한 공군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원칙이다. 당이 존립하기 위해선 군대를 일으켜서 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최초에 정치조직으로서의 공산당이 있었고, 당이 내전을 거치면서 군대를 창설했고, 그 군대가 전국을 무력을 점령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한마디로 “당이 군을 일으켜 국(國)을 세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군대를 철통처럼 장악하지 못하면 정치권력이란 고작 허수아비에 달린 빈 깡통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1962년 1월 “7천인 대회”에서 대약진 운동의 책임을 인정하고 행정의 일선에서 물러선 마오쩌둥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절대로 내려놓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으로 정치권력을 되찾는 과정도 보면, 국방부 장관 린뱌오(林彪, 1907-1971)를 측근으로 삼고 이후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군권 장악에 혈안이 돼 있었다.

 

▲<1938년 연설하는 마오쩌둥. 사진/Hulton Archive/Getty Images>

 

문화혁명 관련 재야 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1962년 2, 3월 문혁 발발을 앞두고 우한에 머물던 마오쩌둥은 소련군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수도방위 부대를 몽골 및 소련과의 접경 지역으로 이동시킨 후, 그 틈에 랴오닝성 선양(瀋陽) 군구(軍區)의 정예부대를 움직여서 베이징을 포위하는 대규모 군사 작전을 지휘했다. 베이징 권력 집단을 위협하는 마오쩌둥의 무력 시위였다. 중국 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병변(兵變) 혹은 군사 정변이었다. 문화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마오쩌둥의 정치력 역시 총구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1978년 12월 이후 명실공히 최고 영도자로서 개혁개방을 주도한 덩샤오핑 역시 공산당 총서기나 국가주석 등의 직무 대신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붙잡고 있었다. 1982년 개정 헌법에 따라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를 새로 창설하여 제1기 주석직까지 맡았다. 중국공산당의 “당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군”이 분리된 듯하지만, 양자가 실은 “중앙군사위”로 통합되어 있다.

 

이후 장쩌민 정권에서 후진타오 정권으로의 권력 승계는 공산당 총서기직 (2002년), 국가주석직(2003년), 중국공산당 군사위 주석직(2003년)이 이양되었고, 2004년에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 주석직이 최종적으로 넘어갔다. 그런 이유로 장쩌민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배후에서 태상황처럼 군림했다는 가담항설이 나돌았다. 중공 중앙의 권력 투쟁을 돌아보면, 병권을 장악하면 정권을 잡는다는 정치사의 통설에 들어맞는다.

 

시진핑 정권 출범 직후부터 군권 1인에게 집중시키는 제도 만들어

후진타오 정권에서 시진핑 정권으로 이양될 때는 단계적 승계가 아니라 일시에 모든 권력을 통째로 넘겨주는 전면 승계의 양상을 보였다. 시진핑 정권이 그만큼 강력하게 당과 군과 국가의 권력 기반을 장악했다고 할 수 있다. 시진핑 정권이 제3기로 연임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군사적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시진핑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기민하게 시진핑 일인에게 군권을 더욱 집중시키는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 1982년 개정 헌법에서 도입된 중앙군사위 주석 부책제(負責制=책임제)는 최고 영도자의 일인 지배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중공 중앙이 원칙으로 삼은 집단 지도체제와는 크게 어긋난다. 그 점에서 중앙군사위 책임제란 오랜 군사적 경험과 업적을 쌓은 덩샤오핑의 권력을 보장하는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시진핑은 다시금 중앙군사위 주석 책임제를 강화함으로써 군권 장악에 성공한 사례다.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 과정에서 후진타오 시대 군부의 영도자들이 제거되었다. 단적인 예로 쉬차이허우(徐才厚, 1943-2015)는 2014년 3월 수뢰 혐의로 구속되었고, 6월 출당 조치를 당했다. 궈보슝(郭伯雄, 1942- )은 2015년 7월 당원증을 빼앗기고, 2016년 7월 종신형을 선고받아 현재 복역 중이다. 이 두 사람은 2004년 장쩌민이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후진타오에게 이양해야 하나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장쩌민의 편에 섰던 인물들인데, 후진타오 시대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역임했던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군부의 권력 교체는 시진핑 권력 강화의 신호탄이었다.

 

▲<2017년 7월 30일, 중국 인민해방군 창설 70주년 기념 열병식. 사진/中新社/视觉中国>

 

시진핑은 2014년 10월 말 중국 군부의 기관지들은 중앙군사위 책임제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1) 당이 군을 지휘하며, 2) 인민해방군은 중앙군사위 주석의 명령과 지휘를 따르며, 3) 모든 국방 및 군사 문제는 중앙군사위 주석 일인에 의해 결정되며, 4) 인민해방군은 반드시 중앙군사위 주석의 명령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실행해야 하며, 5) 중앙군사위 주석 책임제가 상기 모든 임무 완수를 지휘, 감사한다는 다섯 원칙이었다.

 

시진핑 정권은 인민해방군을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해서 ‘중공 중앙 국가안전위원회(이하 국안위)’와 ‘국방 및 군대개혁의 심화를 위한 중앙 군위 영도 소조(小組)’를 신설해서 직접 관장했다. 국내외의 복잡다단한 안보 위기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군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실질적 조치였다. 무엇보다 중국의 군사·방위·안보 체제를 당 총서기 일인에게 집중시켜서 인민해방군의 독자적 행동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밖에도 시진핑은 2015-16년에 걸쳐서 인민해방군 30만 병력 감축하고 대대적으로 군부의 명령계통을 개편하는 파격 조치를 감행했다. 당이 실질적으로 군을 지휘하기 위해서 군조직 내부에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절차였다. 군권 장악의 노력은 제도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선전·선동 작업으로 확장되었다.

 

시진핑은 집권 초기 4년에 걸쳐 매월 평균 2회 각 지의 군부대를 직접 방문하고, 당 기관지를 통해서 “인민해방군 최고 통수(統帥)”로서의 위상을 선전했다. 군부대 당 위원회 회의실에는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5명 군사위원회 주석의 인용문이 게시되었다. 군 기관지<<해방군보>>는 시진핑 주석에 대한 군의 무조건적 복종과 충성을 강조하는 선언문이 게재되었다. (더 상세한 내용은 Chien-wen Kou, “Xi Jinping in Command: Solving the Principal-Agent Problem in CCP-PLA Relations?” The China Quarterly 232 [2017]: 866-885 참조)

 

▲<2018년 추정, 탱크 부대를 시찰하는 시진핑. 사진/Xinhua News Agency/REX>

 

요컨대 시진핑은 집권 초기부터 군권 장악에 비상한 노력을 경주했다. 그는 군사위원회 주석 책임제를 강화하여 인민해방군 “최고 통수”로서 일인 지배의 군사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2022년 11월 시진핑 정권 제3기의 출범은 강력한 군권 장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던 극적인 권력 공고화의 과정이었다. 문제는 시진핑 일인 지배가 정치적 반대, 정책적 비판, 사법적 감시, 행정적 견제를 용납하지 않는 전제화된 통치라는 데 있다. 그 폐해를 바로 지금 중국 인민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코로나에 대항하는 ‘인민전쟁’의 실패... 중국 전역서 9억명 감염

2016년 전후하여 군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시진핑은 2020년 초부터 3년에 걸쳐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인민 전쟁”을 펼쳤다. 단순히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중국 전역은 실제로 군사 훈련을 방불케 하는 전투적인 방역 봉쇄령에 시달려야 했다. 전국을 무균지대로 만들려는 비과학적 발상이었지만, 시진핑으로선 권력의 공고화와 집권 연장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집권 연장에 성공한 후에야 경제 문제와 대규모 시위에 놀란 시진핑 정권은 하루아침에 180도 돌변해서 방역 해제를 선언했다. 그 결과 중화 대륙으로 통하는 팬데믹의 지옥문이 일시에 활짝 열렸다.

 

▲<2018년 6월 26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칼럼,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지도 아래 신시대 방역 인민 전쟁의 승리를 쟁취하자” 이미지/공공부문>

 

최근 베이징 대학의 한 연구에 따르면, 2023년 1월 11일 현재 중국 전역에서 9억 명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다. 감염자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을 꼽자면, 간쑤(甘肅)성 91%, 윈난(雲南)성 84%, 칭하이(靑海)성 80%이다. 방역 전문가들은 1월 23일 춘절(春節, 설날) 대이동을 전후해서 감염자 수가 최고조에 달한다고 예고한다. 비교적 의료시설이 좋은 도시 지역의 병원도 이미 포화상태인데, 심각한 문제는 낙후된 농촌 지역이 거의 무방비 상태라는 점이다.

 

날마다 방역 성과를 자랑하며 업적을 자찬(自讚)하던 중공 중앙은 더는 확진자와 사망자 총수를 발표하지 않는다. 중국 인민 모두가 일시에 병균과의 백병전에 투입되어 각개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다. 인큐베이터 속에서 무균상태로 양육되던 영유아들을 바이러스가 득실대는 세상 밖에 일시에 풀어놓은 격이다. 살아남은 자들만 다시 모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자는 얘기인가?

 

▲<2023년 1월 10일 중국 윈난성 시솽반나의 타이족 자치주에서 화장터에 모여 장례를 치르는 촌민들. 사진/NOEL CELIS/AFP>

 

시진핑은 지난 3년간 제로 코비드 “인민 전쟁”의 구호를 외치며 전국을 틀어막고 들쑤시는 “총력전(總力戰)”을 펼쳐왔다. 시진핑의 인민 전쟁은 허망한 실패로 끝이 났으나 그 과정에서 그는 권력의 공고화에는 일단 성공한 듯하다. 불행히도 이제 중국의 인민은 무정부 상태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출로를 찾는 “인민 전쟁”에 내몰려 있다. 정부 통제도, 의료 서비스도 믿을 수 없게 된 인민들 개개인은 위챗 앱 등을 사용해서 의약품 기부를 신속히 받아서 위급 환자에게 직접 전해주는 민간의 자구책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고 있다. 새로운 “인민 전쟁”은 바로 내일 1월 22일 춘절(春節, 설날) 전국적 대이동을 기해 절정에 달할 조짐이다. <계속>

 

〈64개혁개방, 중국공산당이 아니라 중국의 민초(民草)가 주도

▲<1992년 상영된 영화 “지평선 너머”의 한 장면. 집단노동을 거부하는 농민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토지를 분배하고 가구별 개별 영농으로 전환하는 안후이성 농촌 개혁에 근거한 영화다. 사진/공공부문>

 

농촌 개혁을 주도한 산간벽지 빈촌의 농민들

‘(······)1970년대 말 겨울 첩첩산중 외딴 마을 야오거우(窑沟村)촌. 열악한 환경인데다 극좌(極左) 풍조가 만연해서 마을 사람들은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고향을 떠난 사내들은 객지에서 품을 팔고, 굶주린 여인들은 아이들을 내다 판다. 본래 그 마을의 지부(支部) 서기였던 취허우청(屈厚成)은 위급 상황에 대비해서 당원 몇 명과 몰래 산지를 개간했다. 그는 수천 근 양식을 수확해서 창고에 은밀히 비축해 두었는데, 온 마을이 굶주리는 상황이 닥치자 그 양식을 모두에게 나눠주려 했다. 바로 그때 마을에 들이닥친 신임 서기는 “흑지(黑地, 불법 개간지)에서 난 흑냥(黑糧, 불법 식량)”이라며 몰수를 선언한다. “굶주린 사람들이 죽 한 그릇 먹자는데 그게 무슨 자본주의냐?”며 항변했지만, 신임 서기는 양식을 빼앗아 상납한다.

 

다음날 절망에 빠진 마을의 사내들은 모두 산을 떠나는데, 취허우청은 누각에 올라서 큰북을 두드리며 그들의 발길을 돌려세운다. 급기야 18명의 당원 간부는 비장한 마음으로 정부 시책에 정면으로 맞서 극비리에 마을의 농지를 공평히 분배하여 맡은 땅에서 각자 농사를 짓는 이른바 “호별 영농”의 계약서에 나란히 서명하고는 선홍색 지장을 찍는다(······).’

 

1992년 상하이에서 제작하여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지평선 너머(走出地平線)>>의 줄거리다. 시나리오를 쓴 루톈밍(陸天明, 1943- )은 이 작품의 의도가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 후 “농민이 적극성을 발휘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말한다. 이 영화의 모태는 1978년 말 안후이 펑양(鳳陽)현 샤오강(小崗)촌에서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1978년 12월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농민들이 직접 서명한 “호별 영농”의 서약서. 호별로 토지를 나눠서 개별적으로 농사를 짓고, 수확량 중에서 세금을 뺀 나머지 모두를 각자 가져가는 방식이다. 당시 엄격하게 금지된 영농 방식이라 농민들은 비밀을 맹세하고 구속자가 발생하면 그 자식을 18세까지 키워준다는 다짐까지 적었다. 사진/공공부문>

 

개혁개방 시기 중국의 농촌 개혁은 실제로 이 작은 마을에서 농민들이 극비리에 작성한 연명(聯名) 서약서에서 시작됐다. 궁핍에 찌든 농민들이 마오쩌둥의 엉터리 사회주의 정책을 폐기한 후 스스로 제 고장에서 농촌 개혁을 단행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윤 동기를 갖게 되자 농민들은 전통적 지혜를 되살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영농 기법을 발휘했고, 생산량은 전에 비에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소출량이 늘고 민생이 향상됐음에도 중국 각성의 지방정부들은 안후이성 방식의 농촌 개혁에 강하게 비판했다. 공산당은 그 방법이 사회주의에 반한다는 원론을 내세웠지만, 집단 영농으로 궁핍의 나락에 떨어졌던 농민들의 저항을 이길 수는 없었다. 중공 정부는 1982년 1월에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호별 영농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의 농민들은 비로소 불합리하고 강압적인 집단노동의 굴레를 벗고서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이 거둔다”는 자연의 법칙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 망각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은 지도부의 설계도에 따라 단행된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인민의 요구로 아래로부터 시작된 경제적 자유화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이다. 개혁개방의 주체는 과연 누구였나? 정부였나, 인민이었나?

 

“덕분론(德分論)” 대 “불구론(不拘論)” 중국경제에 관한 두 가지 관점

1980-90년대 구소련과 동구의 과거 공산주의 정권이 줄도산하고 시장경제로의 전면적 이행을 시도했지만, 중국처럼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진 못했다.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한 오늘의 중국을 보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덩샤오핑 시대 중국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개혁개방 시기 중국공산당의 역할에 관한 학계의 평가를 보면 크게 “덕분론”과 “불구론”이 있는 듯하다.

 

“덕분론”은 중국공산당 “덕분”에 중국이 급속도의 대규모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국가주의적 설명(statist explanation)이다. “덕분론”에 기운 학자들은 흔히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통치력, 효율적 정치제도, 우수한 당정(黨政) 간부, 적절한 국가 정책, 권위주의 통제에 따른 사회적 안정성 등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독재 정권의 국가 정책이 개발도상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한다는 국가 주도(state-led)의 권위주의 개발독재론이라 할 수 있다.

 

▲<1980-90년대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업적을 전시한 박물관. 사진/CNN/Yong Xiong>

 

“불구론”은 일당독재, 독단주의, 파벌 정치, 권력 부패, 정책 혼선, 인권 유린, 정치 탄압, 사회 통제 등 중국공산당 정부의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중국경제가 성장했다는 이론이다. 1970-80년대 농촌 개혁도 궁핍한 농민들의 자구책에서 시작되었고, 1980년대 경제 성장의 추동력도 중앙 정부 정책이 아니라 지방 촌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이른바 향진(鄕鎭) 기업에서 나왔다. 오늘날도 중국경제의 견인차는 민간 부문이다. 중국경제에서 민간 부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흔히 “60-70-80-90″의 조합을 말한다. 민간 부문이 국내 총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70%의 혁신을 성취하고, 80%의 도시 고용을 창출하고, 90%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또한 중국의 민간 부문은 투자의 70%, 수출의 90%를 담당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개혁개방과 경제 성장의 주체는 민간 부문의 인민이고, 중국공산당은 오히려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덕분론”에 기운 학자들도 민간 기업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고, “불구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국가의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가의 업적과 민간의 성과 중 어느 쪽을 더 강조하고 핵심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양자의 입장은 극명하게 갈린다. “덕분론”에 기운 학자들은 중공 정부의 우수한 영도력과 통제 능력을 강조하면서 중국경제가 일당독재를 통해서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펼친다. “불구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공 일당독재가 지속적 경제 성장을 저해하여 앞으로 중국경제는 “중간 소득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덕분론과 불구론 중에서 과연 어떤 이론이 더 실제 현실에 부합할까? 구체적 사례를 들어 분석할 수밖에 없다.

 

▲<“위대한 변혁.” 베이징 국립박물관 앞. 2018년 11월 개혁개방 4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전람회가 개최되고 있다. 사진/Weibo>

 

향진(鄕鎭) 기업의 약진: 1980년대 “중국 특색 자본주의”의 발아(發芽)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농촌 개혁 외에도 1980년대 향진 기업의 굴기는 개혁개방에서 인민의 역할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중대 사례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경제는 농촌 마을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향(鄕)과 진(鎭)의 소규모 기업들이 담당했음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농촌에 가면 요즘에도 농기계, 화학약품, 장난감 등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공장을 흔히 볼 수 있다. 농촌의 수로를 오염 물질로 뒤덮는 불결한 환경이지만, 그 어둡고 침침한 소규모 작업장에서 개혁개방 시기 경제 성장의 엔진이 굉음을 울리며 돌아갔다.

 

1980년 중국 전역의 향진 기업은 140만 개 정도로 3천만 명만을 고용했었는데, 1996년에는 그 수가 2천 340만 개로 늘어나서 1억 3천 5백만 명을 고용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1995년에 향진 기업은 중국 국내 총생산의 30%를 차지했으며, 그해 전국 산업 생산량의 절반에 달했다. 1978년에서 1995년까지 총생산량의 증가 폭은 평균 21%에 달했다. 1988년 향진 기업의 총수출액은 전체의 16.9%였는데, 1997년에는 무려 46.2%까지 늘어났다.

 

▲<1980년 광둥성 난하이(南海)구의 한 향진 기업. 사진/Xinhua>

 

1980년대 대다수 향진 기업은 형식상 농촌 공동체의 촌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집체 기업이었다. 그 당시 비정부 부문의 기업체는 대다수가 집체 기업으로 등록되었다. 공기업적 외양을 취하고 있었는데, 자본주의라는 비판을 미리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1980년대 사영기업의 합법화는 여러 단계의 행정적, 법적 절차를 거쳐 가야만 험난한 과정이었다.

 

1982년 소규모 자영업이 먼저 합법화되었다. 1988년에야 사영 기업의 법적 지위가 인정되었지만, 수시로 정치 공세와 법적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다. 겉으로만 집체 기업일 뿐, 실제로 소유양식이나 경영방식 면에서 대다수 향진 기업은 사영 기업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개혁개방이 개시된 후 1980년대 중국의 한 단면. 사진/Adrian Bradshw>

 

민간에서 향진 기업이 약진할 때 중국의 국유기업은 점점 쇠락의 길을 갔다. 정부 보조금과 은행 융자로 연명하던 다수 국유기업은 1990년대 적자를 내면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1992년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외치면서 국유기업의 민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98년부터 1,000여 개 대규모 국유기업의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국유기업 고용자 총수는 1978년 6천만 명에서 1992년 8천만으로 증가하지만, 2004년에는 3천만으로 줄었다. 1978년에서 2004년까지 50%의 고용자가 줄어든 셈이었다.

 

거시적 맥락에서 1980-90년대 향진 기업의 약진은 20세기 초 중화 대륙에 이미 뿌려졌던 초기 산업 자본주의의 씨앗이 비로소 꽃을 피운 결과라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초부터 중국에선 개항장 중심으로 초기 산업화가 시작되어 1930년대 무렵까지 견실한 성장세를 보였다. 1930년대 중국은 30만 외국인이 주재하는 국제적으로 “개방된 사회”였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외국의 다양한 지적 전통과 문예 사조를 열광적으로 흡수하며 신중국의 건설에 투신했다. 개혁개방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홍콩, 싱가포르, 대만,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대규모 화교 자본이 대륙으로 유입되었다. 붉은 제국 땅속에 박혀 있던 중국 전통의 상혼(商魂)과 기업가 정신이 다시 꿈틀꿈틀 살아났다고 할까.

 

▲<1980년대 중국, 쿠폰을 들고 줄을 서서 생필품을 구매하는 중국의 인민. 사진/ 공공부문>

 

중국 인민의 성취: 개혁개방의 역사적 의의

중국의 개혁개방은 마르크스주의 명령경제와 마오쩌둥의 혁명사상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채택한 중국공산당의 과감한 정책적 양보(policy concession)에서 비롯됐다. 개혁개방은 무엇인가를 할 수 없게 금지하고 규제하는 “권위적/지시적 개혁(prescriptive reform)”이 아니라 과거에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용인하는 “허용적 개혁(permissive reform)”이었다. 개혁개방은 없던 규제를 새로 만들어서 공산당의 영도력을 강화하는 조치가 아니라 무수한 규제를 철폐해서 국가권력이 축소하는 과정이었다.

 

쉽게 말해서 중국공산당이 뭔가를 특별히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를 특별히 안 했기 때문에 억눌려 있던 중국경제가 비약적 발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중국공산당이 특별히 안 한 그 ‘뭔가’란 무엇인가? 바로 인민의 사유재산과 경제적 자유를 철저히 박탈하는 생산수단의 공유화(公有化), 민간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경제적 집산화(集産化), 사적 공간과 사생활을 불허하는 집단화(集團化), 개별성을 말살하는 집체화(集體化), 인민을 분열시켜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문화의 정치화(政治化), 상명하복의 군대식 질서를 확립하는 군사화(軍事化) 및 병영화(兵營化), 개인의 독창적 사유와 기업가적 상상력을 억압하는 이념의 획일화 등등······. 개혁개방 시기에 접어들면서 1950-70년대 중국공산당의 전체주의적 통제는 극적으로 완화되었다.

 

사유재산권의 보장, 시장경제의 도입, 외자 도입, 기업가 정신의 창달, 사영 기업의 활성화 등으로 민간 부문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중국에서도 급속한 경제 발전이 이뤄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중국공산당이 특별히 무엇인가 잘해서 중국경제가 살아난 게 아니라 엉터리 정책을 폐기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중국의 성장 잠재력이 비로소 발휘될 수 있었다. 중공의 유위(有爲, activism)가 아니라 무위(無爲, non-action)가 압살 직전에 내몰렸던 중국의 경제를 되살릴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지난 40여 년 중국경제의 놀라운 발전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덕분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중국 인민의 성취였다.

 

▲<1986년 안후이성 허페이의 장마당. 당시 중국에 체류했던 영국의 사진작가 브래드쇼(Adrian Bradshaw)는 “농민들은 생산력만 좋으면 돈을 더 벌 수가 있었다. 거기서 새로운 경제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회고한다. 사진/Adrian Bradshaw>

 

덕분론보다 불구론이 설득력 있는 이유

결론적으로 최소 아홉 가지 이유에서 나는 “덕분론”보다 “불구론”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1980년대 이래 개혁개방의 주체는 기층 민중이었고, 오늘날 중국경제의 성장동력은 민간 부문에 있다는 점이다. 둘째, 역사적으로 중국공산당은 30년에 걸쳐서 “좌의 착오”로 경제적 파탄을 낳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바로 그 조직으로서 중국의 경제 발전을 후퇴시킨 중대한 과오를 범했으며, 1980년대 법제 개혁도 민간 부문의 변화를 뒤쫓아 갔다는 점이다.

 

셋째,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반자유적 사상통제와 이념 조작으로 개인의 창의성과 기업가 정신을 억압함으로써 중진국 경제에서 더욱 절실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선진화를 가로막고 있음이다. 넷째, 중공 정부의 부패 구조는 중국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왜곡하고 지체해 왔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다섯째, 지속적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일당독재의 전체주의적 통제는 중국 인민의 삶의 질을 저하하는 요인이다. 일례로 중국은 1인당 GNP로는 세계 65위지만, 인간발달지수(HDI)는 78위에 머물러 있다.

 

여섯째, 현재 시진핑 정권 아래서 중국의 국제적 고립이 심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일본, 독일, 캐나다, 미국 등 전 세계 주요국의 반중 감정은 현재 최고점에 달해 있다. 일곱째, 3년간 지속된 제로-코비드 정책을 하루아침에 180도 뒤집은 사례가 말해주듯, 중공 중앙의 예측불허 돌발 행정은 중국경제의 건전한 성장을 막는 ‘국가 리스크(risk)’로 작용한다.

 

▲<2022년 11월 29일, 뉴욕의 중국 영사관 앞에서 중국계 젊은이들이 모여서 제로-코비드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AP>

 

여덟째, 중국의 국가 브랜드가 조사 대상이 된 세계 60개국 중에서 고작 33위로 폴란드, 브라질, 멕시코, 헝가리보다 낮다는 현실이다. 대외적으로 국가 이미지가 좋지 않기 때문에 세계 시장에서 “Made in China” 마크가 찍힌 상품은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다. 아홉째,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등 중국공산당의 절대 이념이 과도한 빈부 격차를 보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돌아가는 중국의 경제 현실과 근본적 모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를 꼽다 보면, 지난 40여 년 중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이 중국공산당의 탁월한 영도력 덕분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도 불구하고 이뤄진 민간 주도의 경제혁명이라는 해석이 더 타당하게 느껴진다.

 

혹자는 중국공산당이 확립한 정치제도의 효율성과 치리(治理)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정권이 바뀌어 반대 세력이 집정한 역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중국공산당만이 14억 대륙을 다스릴 수 있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만약 국민당 정권이 내전에서 승리해서 대륙을 다스렸다면, 현재의 중국보다 더 못 사는, 더 억압적인, 더 폐쇄적이고, 더 불량한 나라가 됐을까? 역사에서 가정이 무의미하다 해도 그런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다.

 

중국공산당의 통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정권 교체로 반대 세력이 집권해서 중국을 통치하는 날이 와야 한다. 그래야만 사후 비교를 통해서 중국공산당 통치의 명암과 장단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가와 비판을 두려워하기에 중국공산당은 반대자를 숙청하고, 인민의 입을 막고, 통계를 조작하고, 군경을 내세워 영구 집권을 추구한다. “덕분론”은 본질적으로 중공 중앙선전부가 만들어낸 독재 정권의 독재 옹호론이다. 누구든 중국 인민의 편에 서서 개혁개방을 주도한 인민의 역할에 주목한다면, “불구론”을 부정할 순 없을 듯하다. <계속>

 

〈65〉민영 기업이 일자리 90% 만드는 자본주의 나라 중국

▲<“당을 따라서 일제히 창업하라!” 홍색 자본주의를 선양하는 중국공산당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사진/https://libcom.org>;

 

최고 영도자 친인척이 가진 호화 부동산과 수백만달러 자산

시진핑 정권 출범이 확실시되던 2012년 6월 29일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은 홍콩의 호화 부동산과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시진핑 친인척의 자산 규모를 폭로했다. 시진핑 본인의 부패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당시 중국의 매체에선 부패 혐의에 휘말린 충칭의 맹주 보시라이(薄熙來, 1949- ) 친인척의 총자산이 1억3천6백만 달러에 달한다는 기사가 도배되고 있었기에 더더욱 블룸버그 통신의 폭로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권력을 잡고 반부패 운동을 벌였던 시진핑 정권이 출범 직전부터 스스로 부패 혐의에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넉 달 지난 10월 26일 뉴욕타임스는 2003-2013년 국무원 총리를 지낸 원자바오(溫家寶, 1942- )의 모친, 동생, 처남, 아들, 딸, 사위 등 온 집안사람들이 적어도 미화 27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자산을 주무르고 있다는 탐사보도를 발표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원자바오의 가족들은 일가친척, 친구, 동업자 등의 명의로 재산을 은닉했다. 재산 증식은 주로 “차이나 모바일” 같은 대규모 국영 기업의 이권을 따내는 방식이나 중국에 투자하는 아시아 재벌의 지원을 선취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기사에 따르면, 교사 출신인 원자바오의 모친 명의로 1천2백만 달러 규모의 자산이 숨겨져 있었다. 여성 기업가 두안웨이훙(段偉紅, 1966- )이 배후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그는 지질학자로서 “중국 주보(珠寶, 보석) 협회” 부주석을 지낸 원자오바오의 부인 장페이리(張培莉, 1941- )와 매우 긴밀한 관시(關係, 관계)를 유지해 온 인물이었다. 두안웨이훙은 2017년 9월 즈음 베이징에서 갑자기 소리도, 소문도 없이 실종되었다.

 

▲<2003년-2013년 국무원 총무를 역임한 원자바오의 모습. 원자바오의 집안사람들은 거부를 축재한 혐의를 받았지만, 시진핑 정권은 그들에게는 반부패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다. 사진/nytimes.com>

 

영국·미국 등 자본주의 종주국보다 더 불평등한 나라

중국공산당의 통치 권력이 여전히 막강하여 흔히 간과되지만, 개혁개방 직후부터 중국공산당은 사실상 이념적으로 파산했다. 오늘날 중국은 지니계수가 0.47(2020년)로 전 세계에서 “매우 불평등한 나라”가 되어 있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그 수치를 보정한 경제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실제 지니계수는 0.52(2018년)에 달한다. 실제로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영국(0.34, 2020/21년)이나 미국(41.5, 2019년)보다도 불평등한 나라다. 이처럼 불평등이 구조화된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임을 자처하고 있는 현실은 인류 정치사의 최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중국공산당은 오늘날의 중국 체제가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 강변하지만, 미국 MIT 대학의 중국 경제전문가 황야성(黃亞生, 1960- ) 교수는 그 체제를 “중국 특색 자본주의”라 부른다. 오늘날 중국은 민영 기업이 국내 총생산량의 60%를 점하고, 70%의 혁신을 성취하고, 80%의 도시 고용을 창출하고, 90%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나라다. 무덤 속 마르크스가 다시 일어나 오늘날 중국을 보면 사회주의가 아니라 아시아적 전제주의와 자본주의가 합쳐진 권력 독점형 자산계급의 국가라 여길 듯하다.

 

중국은 더는 공산국가가 아님에도 중공이 왜 구태여 공산당이란 당명에 집착하고 있는가? 바로 레닌이 제창한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른 일당독재 시스템을 강화하고, 스탈린이 제창한 “공산당 무오류성의 원칙”에 따라 비판 세력을 탄압하고 반대 여론을 억압하기 위함이다. 레닌과 스탈린은 낙후된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력한 일당독재의 국가조직과 전체주의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오늘날 중국은 사회주의 건설을 미래의 숙제로 미뤄둔 채로 오직 레닌주의 일당독재와 스탈린주의 전체주의만을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정책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스스로 파기했으면서 전체주의적 대민 지배를 위해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중국공산당의 권력은 군경의 물리력을 배타적으로 독점할뿐더러 필요할 때면 군사력을 동원해서 다수 대중을 압살할 수 있다는 전제성에 근거하고 있다. 요컨대 오늘날 중국은 이념으로 인민을 설득하고 교화함으로써 유지되는 연성 독재가 아니라 필요할 때면 언제든 비판 세력을 짓밟고 반대 여론을 억누르는 군경을 앞세운 경성 독재이다.

 

▲<중국 농민공(農民工)의 모습. 일자리를 구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을 이른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이들은 농촌 호구를 가지고 도시에서 살아 있는 불법 체류자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사진/중국 인터넷>

 

 

본래 공산당이란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통해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무산계급의 영도 아래 사회계급을 철폐하기 위해 생겨난 정치조직이다. 공산당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사적 소유를 인정한다면 더는 공산당일 수가 없다. 공산주의는 사적 소유를 모든 악의 근원이라 규정하고 시장경제를 지배계급의 착취 수단이라 간주하는 자본주의 전복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모르지 않기에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사적 소유권을 계속 확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사회주의의 길,” “당의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등 4항 기본원칙을 필히 견지해야 한다고 외쳐왔다.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인정하지만, “자본주의의 노선”은 가지 않는다는 기묘한 변명이다. 문화혁명 시기 “자본주의 수정주의자”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던 트라우마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사회주의 포기 선언은 중국공산당의 해체로 가는 첩경임을 알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경제는 ‘중국 특색 자본주의’인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아홉 가지 특징

1991년 소련연방 해체 후 1993년 12월 12일 채택된 러시아 연방의 헌법은 전문에 명료하게 인권과 자유를 러시아 연방이 추구할 지상의 이념으로 천명했다. 이로써 1977년 소련의 브레즈네프 수정 헌법에 천명된 공산당 일당독재, 자본주의 철폐, 무산계급 독재, 사회주의 혁명 등 공산주의의 기본 가치가 모두 부정되었다. 구소련의 지식인들은 사적 소유의 인정과 시장경제의 채택은 공산주의의 종언이자 사회주의 노선의 폐기라는 범부의 상식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적 소유의 철폐와 시장경제의 폐기가 곧 공산주의의 출발점임을 구소련의 교과서에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구소련의 이론가들은 이론적 부정합과 논리적 부조리를 용인할 수 없었다.

 

구소련과는 달리 중공 중앙의 영도자들과 이론가들은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남겨둔 채 권력 교체 없이 나아가려 했다. 그래서 만들어낸 변명이 바로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구호이다. 진정 중공 중앙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견지한다면 어떻게 사적 소유, 시장경제 및 민영 기업의 활성화를 용인할 수 있는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하는데, 어떻게 경제적 불평등과 지역적 불균형을 방치할 수 있는가?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할 수가 없다. 근본적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중국공산당이 이념적으로 이미 파산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념적으로 파산했다고 해서 중국공산당이 정치적 지배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원초적으로 중국공산당의 권력은 군사력·경찰력 등 강력한 무력 통제를 통해서 지배되기 때문이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최소 아홉 가지 중국 특유의 독특한 특색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중국공산당이 군사력과 정치권력을 독점한 레닌주의 국가의 일당독재 사회주의(socialism of one-party dictatorship)이다. 둘째, 권력의 최상위에 부와 권력을 장악한 홍색 귀족층(Red Aristocracy)이 놓여 있는 과두제 사회주의(oligarchic socialism)이다. 셋째, 남아메리카를 능가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지역적 편차를 보이는 심각하게 불평등한(seriously unequal) 사회주의이다. 넷째, 언론·사상·거주이전의 자유 등 공민의 기본권을 제약할뿐더러 최첨단 장비를 동원해서 인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전체주의적(totalitarian) 사회주의다.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풍자한 반체제 예술가 Badiucao의 작품>

 

 

다섯째, 겉으로는 무산계급의 영도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무산계급의 파업 권리조차 박탈한 “반(反)프롤레타리아(anti-Proletarian) 사회주의다. 여섯째, 언제든 필요할 땐 군경을 앞세워 인민을 억압할 수 있는 군사독재 (military dictatorial) 사회주의다. 일곱째, 무산계급이 아니라 중화민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nationalist) 사회주의이다. 여덟째, 공식적으로 과거 중화 제국의 부흥을 국가의 이상으로 천명하고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세우려 노력하는 제국주의적(imperialist) 사회주의이다. 아홉째, 민간 자본가를 당원으로 포섭하고 민영 기업에 당 조직을 건설하는 홍색 자본가(red capitalist)의 사회주의다.

 

이 아홉 가지 특색을 종합해보면, “중국 특색 사회주의”란 일반적 의미의 사회주의에서 벗어나는 레닌식 일당독재, 스탈린식 공포통치, 오웰식 전체주의를 한 데 합친 일탈적 변종 사회주의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의 정신을 이어받은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은 대동단결하여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사이비(似而非) 사회주의라 불러야 마땅하다. 경제체제로서의 중국은 정실 자본주의의며, 정치체제로서의 중국은 일인 지배 전체주의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를 사회주의 혁명가로 포장하는 중국공산당

자본가(capitalist)란 자본주의 기본원칙에 따라 산업이나 상업에 자본을 투자해서 이윤을 창출하는 혹은 사업가(entrepreneur)를 통칭한다.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제1원칙으로 삼는 사회주의는 자본가를 공적으로 삼고 자본주의 해체를 목표로 삼는다. 이와 정반대로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자본가를 공산당원으로 포섭하는 “자본 중심의 사회주의(capital-centric socialism)”이다.

 

이른바 홍색 자본가 중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자본가로 성공한 후 공산당에 입당한 경우나 정부가 국유기업을 민영화할 때 공산당원을 총수로 임명한 경우가 있는데, 공산주의 기본 강령에 비춰볼 때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다. 대체 자본가가 어떻게 공산당원이 될 수가 있는가? 공산당이 어떻게 자본가를 당원으로 흡수할 수 있는가?

 

이쯤 되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섹스를 하여 “공산 자본주의” 혹은 “자본 공산주의”라는 튀기를 낳았다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이론가들은 구소련의 이론가들처럼 이론과 실천의 괴리에서 오는 이념적 압박감을 받지 않았다. 그저 “중국 특색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같은 억지 논리로 개발 도상의 중국을 윤색하고 치장하면 그만이란 말인가?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한 후에도 최첨단 장비로 전체주의 일당독재를 이어가는 중국공산당의 통치는 논리적 모순과 이념적 역설로 가득 차 있다. 논리적 부정합이 중국 특색의 논리인가? 이념적 부조리가 중국 특색의 이념인가?

 

중국의 지식인들이 그 점을 모를 리 없다. 1990년대 이래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신좌파 지식인들은 “중국 특색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비판해왔고, 서구식 입헌주의를 선양하는 자유파 지식인들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전제성을 신랄하게 물어뜯었다. 물론 지식계의 논쟁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현실에선 기껏 찻잔 속의 태풍이거나 암초에 부딪힌 선박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란 기본적으로 인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억압의 사회주의이기 때문이다. “홍색 자본가”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실은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가 결탁해서 만든 권위주의적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변종임을 드러난다.

 

▲<선둥(沈棟, 1968- Desmond Shum)이 2021년 뉴욕에서 출판한 “레드 룰렛.” 사진/Jonty Davies>

 

 

2021년 두안웨이홍의 전남편 선둥(沈棟, 1968- )은 런던에 은신하면서 중국공산당의 홍색 귀족과 홍색 자본가의 결탁을 낱낱이 폭로한 <<레드 룰렛: 오늘날 중국의 부, 권력, 부패, 보복에 관한 인사이더의 이야기>>를 출판했다. 출판을 앞두고 그의 전처 두안웨이훙은 불쑥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출판을 포기하라 했다. 3년 넘게 행방불명 상태였던 전처에게서 전화를 받고 그는 배후에 중국공산당이 있으며, 스스로 협박당하고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중국공산당에 맞서 책의 출판을 서둘렀다. 그의 폭로에 따르면,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홍색 귀족”과 “홍색 자본가”가 권력과 부귀를 독점한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신분제 국가가 되어 있다. 책의 결론에서 그는 말한다.

 

“실상 중국공산당의 진짜 목적은 혁명가들 자제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그들이 주요한 수혜자들이다. 그들이 경제력과 정치권력의 핵심에 앉아 있다.”

 

이제 선둥이 폭로하는 “레드 룰렛” 판으로 들어가 보자. <계속>

 

〈66회벤처로 성공한 여성 ‘홍색 자본가’의 실종...남편의 선택은?

▲<“레드 룰렛”을 통해 부패하고 타락한 중국 홍색 귀족층을 비판한 선둥의 모습. 사진/Tom Pilston/FT>

 

 

1992년에서 1997년 사이 중국의 경제 규모는 두 배나 급증했고, 1997년부터 2004년 사이 다시 그 두 배가 되었다. 노다지를 캐서 누더기를 벗어 던지는 벼락출세의 성공담이 날마다 들려왔다. 바야흐로 대자본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급기야 2002년 중국공산당 장정(章程)이 수정되어 민간 기업가들도 공산당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4년 중국 헌법 수정안 제22조는 “공민의 합법적 사유재산은 침범받지 않는다”는 조항이 명시했다. 이로써 민간 기업가와 중국공산당 사이의 정략결혼이 시작되었다. 자본가가 진정 공산당원이 될 수 있을까? 공산당이 과연 자본가를 포용할 수 있을까? 공산당에 들어간 자본가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자본가를 끌어안은 공산당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이었나?

 

‘공산당 귀족’의 부패와 비리 폭로한 ‘홍색자본가’ 선둥

선둥(沈棟, Desmond Shum, 1968- )은 2021년 9월 뉴욕에서 <<레드 룰렛: 오늘날 중국의 부, 권력, 부패, 보복에 관한 인사이더의 이야기>>를 출판했다. 중국공산당 내부의 홍색 귀족층의 부패와 비리를 심층적으로 파헤친 이 책은 출판 즉시 서방 유수 언론들에 대서특필되었다. 190cm가 넘는 장신의 이 카리스마 넘치는 중년 사내는 2000년대 베이징에서 건설 붐과 투자 열풍을 타고 억만장자로 성장한 “홍색 자본가”였다. 그는 또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이하 정협)의 대표로 10년간 복무했다. 한때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홍색 기업가의 꿈을 맘껏 펼쳤던 이 사내는 현재 영국 런던에 체류하며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중국공산당 홍색 귀족층의 부패와 비리를 폭로하고 있다.

 

▲<2004년 5월 8일 선둥과 두안웨이훙. 사진/Courtesy of Desmond Shum>

 

 

선둥은 문화혁명이 절정으로 치닫던 1968년 상하이에서 “계급 천민(賤民)”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방” 이전 상하이에서 변호사로 번창했던 그의 조부는 해외로 탈출하는 대신 “계급연대”를 외치는 중국공산당의 선전을 믿고 중국에 머물렀다가 전 재산을 압류당한 채 “인민의 적”으로 몰려 정치 집회에서 처형당했다. 1950-60년대 이른바 흑오류(黑五類)의 집안에서 나고 자라며 갖은 차별과 탄압에 시달렸던 그의 부친은 울분과 원망에 휩싸인 채로 음지에서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어린 시절 선둥은 부친에게 늘 매질을 당하면서 자랐다.

 

1978년 개혁개방의 물꼬가 터진 후 그의 집안은 갖은 노력 끝에 중국의 국경을 통과해서 홍콩으로 이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홍콩에서 사춘기를 보낸 선둥은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경영학 전공으로 학부를 마치고 1990년대 중반 다시 홍콩으로 복귀했다. 선둥은 홍콩의 한 금융회사에 수년간 경력을 쌓아서 1997년 베이징으로 옮겨갔다. 홍콩서 자라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선둥은 빠르게 바뀌며 급히 성장하는 중국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두리번거리며 기회를 엿보는 방외인의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중국 사회를 촘촘히 엮고 있는 당·정·관·군·민의 인적 “관시(關係)”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베이징에서 유능한 여성 사업가 두안웨이훙(段偉紅, 1968- Whitney Duan)을 만나 서로 연인이 되면서야 선둥은 비로소 중국 사회를 지배하는 중국공산당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중국공산당의 국가자본주의를 비꼬는 풍자만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여기는 희망과 기회의 땅이다!” 그림/IWL-FI>

 

벤처 사업 통해 신흥 재벌로 성장한 두안웨이훙과 결혼

산둥의 빈한(貧寒)한 집안에서 태어나 군대가 운영하는 “난징 기술·직업 학원”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두안웨이훙은 졸업 후 대학 공산당에 입당했고, 곧 총장의 비서가 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총장의 소개로 두안웨이훙은 산둥성의 한 현(縣)에서 외자 유치 업무를 맡게 되었다. 발랄한 성격에 사교성이 뛰어난 두안웨이훙은 군대의 이권 사업을 관리하며 사업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1996년 톈진에서 독자적으로 벤처 사업을 시작해서 2000년대부터 유능한 기업가로서 승승장구의 가도를 달렸다. 카이펑(凱風) 공익 기금회, 타이훙(泰鴻) 투자 그룹, 중국 핑안(平安) 보험 주식회사, 항강(航港) 발전 유한공사 등의 회사를 직접 경영하며 그는 신흥 재벌로 성장했다.

 

▲<1990년대 말, 톈안먼 광장에 선 두안웨이훙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곧 결혼한 두 사람은 2000년대를 거치면서 베이징 공항 개발, 최고급 호텔 건설 등등 대규모의 사업을 착착 수주해서 명실공히 대재벌로 성장했다. 특히 두안웨이훙은 원자바오(溫家寶, 1942- ) 국무원 총리의 부인인 장페이리(張培莉, 1941- )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중국공산당 핵심 권력층에 다가갈 수 있었다. 덕분에 선둥은 중공 중앙의 권력자와 혁명원로의 후예들로 구성된 이른바 “홍색 귀족”과 홍색 자본가들이 어울려서 벌인 “레드 룰렛” 판을 목격할 수 있었다.

 

▲<원자바오 총리(오른쪽)와 그의 부인 장페이리 (왼쪽). 사진/SMP>

 

 

선둥의 관찰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은 소수 특권층의 이익에 복무하는 정치조직일 뿐이다. 혁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붉은 귀족은 개혁개방의 봇물이 터진 1980-90년대 이미 갖은 이권을 챙기고 정치적 “관시(關係)”를 팔아서 큰 몫의 재산을 거머쥔 중국 최상위에 앉아 있는 극소수의 특권층이다. 중공 영도층의 후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종(種)을 이루고 있다. 먹는 음식, 입는 옷, 다니는 학교, 진찰받는 병원, 모이는 장소 등등 모든 면에서 그들은 차원이 전혀 다른 세상에서 완전히 다른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운전기사가 모는 리무진을 타고 다닌다. 그들은 정치권력의 지분을 팔아서 막대한 재산을 일군다.

 

일례로 선둥은 친하게 지냈던 구무(谷牧, 1914-2009)의 손자 류스라이를 꼽는다. 1975-1982년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한 구무는 덩샤오핑과 함께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한 핵심 인물이었다. 할아버지의 후광을 받으며 류스라이는 정치적 관시를 팔아 치부했다. 그는 디스코텍에 소방 관련 인가를 내주거나 성형외과 시술소에 의료 허가증을 발급하면서 뒷돈을 챙겼다. 그는 전 세계를 돌며 폴로 대회에 참가했다. 타일랜드 폴로 대회에선 우승했고, 베이징에서는 직접 토너먼트를 열었다.

 

또 선둥과 친했던 홍색 귀족 중엔 볼프강이라 불리던 친구가 있었다. 그의 조부 역시 1930-40년대 중국공산당 최고 영도자 중 한 명이었는데, 1950년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비판한 이후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나서 고초를 겪었다. 덩샤오핑의 발탁으로 복권된 개혁개방 이후 그의 아들은 곧 정부 사업을 수주받으며 거부가 되었다.

 

볼프강 역시 최고의 엘리트 초등학교에 다녔다. 10대에 미국으로 가서 대학 졸업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볼프강은 부친의 사업을 이어서 재산을 불렸다. 이 집안은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팔릴 때나 상하이에서 수백만 달러 맨션이 매매될 때 등 거의 모든 거래에서 소정의 지분을 챙기는 홍색 귀족이었다.

 

뉴욕타임스의 폭로, 원자바오 가족의 검은 자금

2012년 10월 25일 뉴욕타임스는 원자바오 총리의 친인척이 미화로 총 27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쥐고 있다는 특종기사를 내보냈다. 특히 90세 노모의 명의로 중국의 한 투자 금융사에서만 1억 20만달러나 투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원자바오 총리의 아들, 딸, 동생, 처남 등 온 집안 식구들도 한몫씩 큰 재산을 확보하고 있었다. 실소유주의 실명을 감추기 위해 명의를 친구, 동료, 동업자로 돌려놓았지만, 기자들의 취재로 정부와 민간 기업이 결탁한 부패의 연결고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중국공산당 규정은 당정 간부들의 직계가족의 재산 공개를 요구하지만, 친인척의 사업 체결이나 투자 행위를 규제하지는 않는다. 당정 간부가 친인척의 명의를 빌려서 얼마든지 치부할 수가 있도록 법망에 큰 구멍을 뚫어놓은 격이었다.

 

2007년 1억 2천만 달러를 원자바오 모친의 명의로 투자한 주체는 원자바오의 고향 톈진에 등록된 타이훙(泰鴻) 공사였다. 타이훙 공사는 바로 두안웨이훙 소유의 지주회사였다. 형식상 원자바오의 모친과 친척들의 명의로 핑안(平安) 증권에 투자되었지만, 실제 투자자는 바로 타이훙 공사의 두안웨이훙으로 밝혀졌다. 기자의 송곳 질문에 두안웨이훙은 자신의 지분 규모를 감추기 위해 타인의 명의를 빌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자기 친척들에게 명의를 빌려줄 사람들을 찾아보라 했는데, 우연히도 원자바오 총리의 가족들의 명의가 주주로 등록됐다는 황당무계한 변명이었다.

 

▲<두안웨이훙의 모습. 날짜 미상. 사진/공공부문>

 

 

<<레드 룰렛>>에서 선둥은 두안웨이훙과 원자바오의 부인 장페이리의 긴밀하고도 돈독한 관계를 소상하게 밝힌다. 당시 장페이리가 중국의 보석 무역을 쥐락펴락하는 거부라는 점은 중국 상층부에선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두안웨이훙은 그 집안의 모든 경조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과 관련된 작은 일들까지도 챙겨주고 돌봐 주는 집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두안은 중공 중앙 최고위층과의 관시를 얻었다.

 

뉴욕타임스 특종이 보도된 후 원자바오는 이례적으로 변호인을 선임해서 공식적으로 기사 내용을 거짓이라 주장했다. 원자바오의 모친 명의 재산을 모두 부정했는데, 묘하게도 온 가족이 통틀어 27억 달러 자산을 운용한다는 점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했다. 몇 달 후 원자바오는 예정된 그대로 퇴임했고, 뉴욕타임스 탐사 기사는 그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두안웨이훙의 실종과 선둥의 폭로

2017년 9월 5일 두안웨이훙은 베이징에서 사라졌다. 실종 하루 전 두안은 선둥과 함께 지은 25억 달러 가치의 “제네시스 베이징” 빌딩 사무실에 출근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서 두안의 행방을 두고 수많은 추측이 나돌았다. 중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한 명은 중국공산당 당국이 두안의 몸에 약물을 투입하고 구타했을 것이며, 살아온다 해도 좀비 상태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중공 정부는 두안의 실종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주위에선 두안의 실종이 충칭시 당서기를 역임했던 쑨정차이(孫政才, 1963- )와 연관이 있다는 제보가 이어졌다. 2017년까지 승승장구하던 쑨정차이는 국무원 총리 리커창(李克强, 1955- )의 후임으로 예상되던 권력자였는데, 그해 7월 갑자기 충칭 당서기의 직위를 잃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 공항을 증축할 때 두안웨이훙과 선둥은 공항 개발 이권을 따냈는데, 그 당시 쑨정차이는 바로 그 공항 부지가 위치한 현에서 최고위 간부였다. 그 때문에 두안의 실종이 쑨정차이의 파면과 무관하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두안웨이훙은 평소 “무덤에서 내 시신을 꺼내 채찍질해도 먼지 한 터럭 나오지 않으리라”고 말하곤 했다. 구체적인 부패 혐의를 찾지 못해서일까? 두안은 5년 넘는 세월 행방불명 상태로 남아 있다. 전처가 사라진 후 선둥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버렸다.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강하게 중국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했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사람을 잡아가는 중국의 체제는 과연 어떻게 정당한가? 1997년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경찰은 피의자를 37일까지 구금할 수 있다. 그 후엔 풀어주거나 구속해야 한다. 우스운 일이다. 두안웨이훙은 아무 소식 없이 최장 시간 감금된 포로가 되어버렸다.”

 

놀랍게도 책을 출판하기 직전 선둥은 갑자기 두안웨이훙의 전화를 받았다. 두안은 선둥에게 “제발 책을 출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선둥은 그 배후에 중국공산당이 있음을 직감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는 정당한 투쟁의 길을 택했다. 그는 계획대로 <<레드 룰렛>>을 출판했다. 책의 결론에서 그는 말한다.

 

“나와 나의 전처 두안웨이훙 같은 기업가들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밀월은 적을 분열시켜서 분쇄하려는 볼셰비키 혁명에서 생겨난 레닌주의 전술일 뿐이었다. 당과 기업가들 사이의 연대는 일시적이었다. 당의 목적은 전면적 사회 통제였다. 더 이상 경제 건설, 해외 투자, 홍콩의 자유 억압 등의 목적에서 우리가 필요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적이 되었다.”

 

▲<2022년 11월 말 상하이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 병력이 거리를 봉쇄하고 있다. 사진/nzz.ch>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선둥은 선언한다.

“나는 깨달았다. 부와 직업적 성공보다 기본적 존엄과 인권이 삶의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나는 이제 그 이상을 공유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중국 대신 서방 세계를 택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아들을 위해서.”

 

선둥에 의하면, 중국공산당은 민간 기업가를 당원으로 만들거나 당원으로 민간 기업가로 키워서 큰 사업을 벌이게 했고, 충분한 재원을 마련되자 초개처럼 그들을 버렸다. 재주는 민간 자본가가 넘었는데, 돈은 중국공산당의 챙긴 격이었다. 시진핑 정권은 출범과 더불어 “시장의 시대”는 가고, 10년 넘게 “국가의 반격”이 현재 진행 중이다. 붉은 귀족의 룰렛 판은 여전히 돌아간다.<계속>

 

〈67〉시진핑 시대 ‘차이나 모델’은 군국주의 ‘일제 모델’의 복사판

▲<2022년 7월 27일, 대만의 군대가 신베이(新北)시에서 중국 군대의 상륙을 저지하는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대만은 해마다 중국의 상륙작전에 맞서 한쾅(漢光)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AP>

 

중국형 발전 전략의 정체는 1930~40년대 일제의 방식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전 세계 개발도상국을 향해 “차이나 모델(China Model, 中國模式)”을 공격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주의가 아니라 중국 방식의 국가-주도 성장 전략을 써야 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일관된 주장이다.

 

2014년 11월 26일 <<인민일보>> 사설은 “차이나 모델 2.0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오쩌둥 시대 중국은 소련 모델을 따랐을 뿐 중국 고유의 발전 전략이 없었다. 따라서 “차이나 모델 1.0판”은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 시대의 성장 전략을 이른다. 사설은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시진핑 정권은 업그레이드된 “차이나 모델 2.0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덩샤오핑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차이나 모델 2.0판”이란 과연 무엇인가?

 

<2019년 10월 1일 톈안먼 광장. 사진/AFP-JIJI>

 

 

지난 10여 년 시진핑 정권은 시장 지향의 경제개혁을 거부한 채 경제에 대한 정부 간섭을 늘리는 이른바 “국진민퇴(國進民退)”를 추진해왔다. 그 관점에서 보면, “차이나 모델 2.0판”이란 결국 자유화, 민주화, 탈규제 등의 시장주의 개혁 대신 국유 자산의 비중을 늘리고 국유 기업의 덩치를 키우는 강화된 국가주의로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차이나 모델 2.0판”로 재포장했을 뿐, 하나도 새롭지 않다. 학자들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흔히 보이는 정부 주도의 발전 형태를 “권위주의 개발독재,” “민주화 없는 경제성장,” “비민주적 발전 전략” 등 다양한 개념으로 설명해왔다.

 

그 역사적 연원을 추적해 보면,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을 거쳐, 독일제국의 “프로이센 모델(Prussian Model)”로 소급된다. 아래 살펴보겠지만, 덩샤오핑이 썼던 “차이나 모델 1.0판”은 150여 년 전 메이지 시대 일본이 비민주적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전략을 모방했고, 시진핑 시대 “차이나 모델 2.0판”은 1930-40년대 군국주의 일제의 방식을 그대로 빼닮았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는 권위주의적 연성 독재 통해 발전...중국은?

2차대전 이후 냉전 시대, 특히 196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30년간 일본을 위시한 동아시아 신흥산업국(New Industrial Countries, NICs)은 공통적으로 국가가 금융 및 기간산업을 장악하고, 합리적 전문 관료 집단의 경제계획에 따라, 수출 중심의 개방형 발전 전략을 통해서 단기간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급속한 경제 발전을 주도한 동아시아 국가를 흔히 “동아시아 발전국가(East Asian developmental state)”라 부른다.

 

궁핍한 국민을 되레 착취하는 “약탈적 국가(predatory state)”나 시장의 규칙을 제도화하고 법의 지배만을 추구하는 “규제 국가(weak state)”와 달리 “발전국가”는 엘리트 전문 관료들이 직접 산업 정책을 세우고, 민간 경제 주체와의 상호 조율 속에서 효율적으로 자본과 자원을 배분하여 급속한 경제 발전을 달성한다.

 

▲<2차대전 이후 복구에 나선 일본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동아시아 최초의 발전국가로서 일본은 2차대전 이후 다시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뤄서 냉전 시대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전범이 되었다. 일본의 급속한 발전 모델을 따라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발전국가의 궤도에 올라탔다. 제1의 물결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경제 발전이었다. 제2의 물결은 말레이시아와 태국의 성장이었고, 제3의 물결은 1978년 이후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과 뒤따른 베트남의 경제성장이었다.

 

현재 중국은 여전히 비민주적 발전국가로 남아있다. 그 점에서 2차대전 이후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일정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 다만 오늘날 중국의 전체주의적 통치는 지극히 예외적이고, 일탈적이다. 과거 한국과 대만의 독재정권과 오늘날 싱가포르의 통치가 권위주의적 연성 독재라면,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전체주의적 경성 독재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중국의 발전국가는 전후 일본의 발전국가가 아니라 군국주의 일제의 발전국가와 더 비슷해 보인다.

 

▲<“미국 원조 양곡 입하 환영식. 대한민국 농촌부.” 사진/공공부문>

 

독일에 간 이토 히로부미 “저녁에 죽어도 좋을 도를 들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80년대 일본에선 의회 확립, 국민의 기본권 보장, 참정권 확대, 조세 감면 등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의 정치체제는 민주정이 아니라 군주적 과두정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 일본에선 천황을 옹립한 메이지 번벌(藩閥)이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882년 메이지 정부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독일을 방문해서 일본의 헌정 체제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이토는 특히 빈 대학의 사회과학자 슈타인(Lorenz von Stein, 1815-1890)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토의 회고에 따르면, “슈타인을 만난 날 아침 저녁에 죽어도 좋을 듯한 도(道)를 들었다.”

 

▲<1860-62년 일본의 에도를 방문하는 프로이센 사절단. 그림/공공부문>

 

 

슈타인은 이토에게 “국가의 궁극 목적이 소수의 윤리적 엘리트가 열등한 다수 국민을 보살피는 것”이며, 의회주의는 계급 갈등을 일으키고 사회 분열을 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리적 국가만이 사회 분열과 체제 전복을 막을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국가이론이었다. 슈타인은 그러한 국가 체제를 사회적 군주제라 불렀다. 이토는 국가란 국민에 복무하는 계몽된 엘리트의 통치 기구라는 슈타인의 정의에 매료당했다. 독일에서 돌아와서 1885년 수상직에 오른 이토는 당장 1886년 엘리트 관료 집단의 육성을 위해 제국대학을 세운다. 1889년 입헌군주제를 명시한 메이지 헌법이 반포되었다.

 

슈타인의 국가이론은 이토에게 민주주의와 전제주의를 동시에 비껴갈 수 있는 일본식 권위주의 개발독재의 길을 제시했다. 그 길은 민중의 정치 참여가 아니라 소수의 계몽적 정치엘리트가 주도하는 비민주적 근대화의 길이었다. 이후 동아시아 역사에서 여러 나라에서 추진했던 근대화 전략이 대부분 그러했다. 그래서 이른바 “동아시아 발전국가”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이 생겨났다. 지난 15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는 결국 “일본식 비민주적 근대화/산업화”의 전략을 취했다는 얘기다.

 

1930년대 아카마쓰 카나메 교수의 기러기 편대형 이론

이토가 추진했던 비민주적 국가 주도 산업화의 길은 이후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서 동아시아 특유의 발전 모델로 칭송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1930년대 일본 히토쓰바시(一橋) 대학 경제학 교수 아카마쓰 카나메(赤松要, 1896-1974)가 있다. 그는 이른바 “안행(雁行)형태론”을 제창했는데, 여기서 안행이란 우두머리 뒤로 V자로 열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편대의 모습을 가리킨다. 영어로는 “flying-geese paradigm,” 곧 “날아가는 기러기 떼 패러다임”으로 번역된다.

 

1935년 “기러기 편대형 이론”을 제창한 아카마쓰는 1940년 징집되어 싱가포르에 배치되었다. 1942년부터 그는 40여 명의 연구자들을 지휘하며 일제의 명령에 따라 동남아 자원 개발 관련 연구를 했다. 1930년대 아카마쓰는 일제의 만주 점령과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일본의 전체주의적 지배 체제를 긍정했던 인물이다. 진주만 습격 직후에는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그의 “날아가는 기러기 떼” 이론은 일본이 동아시아 경제 발전을 주도한다는 대동아 공영권의 경제학적 논리가 되었다. 일본이 맨 앞에 날고 그 뒤를 따라가는 기러기 떼의 이미지는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을 정당화하는 커다란 선전의 효과를 발휘했다.

 

▲<기러기 편대의 비행 장면. 사진/공공부문>

 

 

1961년 아카마쓰의 영역 논문 “세계경제의 불균형 성장”이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의 “기러기 편대형 이론”이 널리 알려졌다. 특히 1980년대 일본의 비약적 상승세가 이어질 때, 아카마쓰의 “기러기 편대형 이론 이론”은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다섯 마리 작은 용들을 설명하는 유력한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선진 산업국의 기술 혁신이 대외 수출을 통한 국부의 증진으로 이어지면, 미발달 지역은 원자재 수출을 통해서 선진국에서 신상품을 수입하고, 선진국의 혁신 기술이 배워서 스스로 경제성장의 후발 주자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선두 기러기를 뒤따라가는 삼각 편대의 기러기 떼처럼 후발 주자 역시 세계 경제에 통합되어 발전의 길을 갈 수가 있다. 냉전 시대 뒤늦게 세계 시장에 편입된 한국과 대만이 점차 선진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아 최첨단 산업생산국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대표적 실례다.

 

2차 대전 후 일본은 시장의 자율에 맡기기보단, 전문 관료 집단의, 특히 통상산업성(通商産業省)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정부가 직접 경제·산업 정책을 통해 주요 산업을 육성했다. 한국이나 대만의 발전 역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서 이뤘다는 점에서 일본식 발전 모델을 따라갔다. 결국 “동아시아 발전국가론”이란 “프로이센 모델”의 영향 아래서 전개된 “일본식 발전국가론”이다. 그렇다면 “차이나 모델”은 결국 과거 “일본 모델”의 재판이 아닌가? 여기서 전후 “일본식 발전국가론”과 1920-40년대 “쇼와(昭和) 국가주의”의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외인성, 한국은 자생성 자유민주주의...중국은?

일본의 현 체제는 패망 이후 미군정 하에서 소위 “맥아더 헌법”을 제정을 통해 군국적 전체주의를 벗어난 외인성(外因性) 자유민주주의이다. 한국과 대만의 현 체제는 권위주의 개발독재의 단계를 거쳐 산업화를 달성하고 1980년대 후반 민주화를 거쳐 3차례 이상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자생적 자유민주주의이다.

 

반면 오늘날 중국은 당·정·군의 전권을 장악한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에서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채택하지만, 보편적 인권과 공민의 기본권은 극도로 제한하는 전체주의적 국가-주도 자본주의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한 오늘날의 중국을 일본, 한국, 대만과 함께 묶어 똑같은 “동아시아 발전국가”라 본다면 지나친 일반화다.

 

2010년 전후해서 중국 안팎의 친중 성향 이론가들은 이른바 베이징 합의(Beijing Consensus, 北京公識)를 말해왔다. 시장친화적 정책을 추구하는 IMF,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 등의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에 대항하는 중국 방식의 발전 전략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시장친화적 경제성장 대신 국가 개입을 강화하는 자본주의, 정치적 자유화의 부재, 공산당 영도력의 강화, 강력한 대민(對民) 지배를 특징으로 한다.

 

▲<2019년 건국 70주년을 맞아 톈안먼 광장에 벌어진 열병식. 사진/VOA>

 

 

전체주의적 통치 체제와 국가 자본주의를 결합했다는 점에서 시진핑 시대 “차이나 모델”은 전후 일본의 발달국가가 아니라 1920-40년대 군국주의 일제의 “쇼와 국가주의”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쇼와 국가주의”의 다른 이름으로는 “천황제 파시즘,” “쇼와 민족주의,” 혹은 “일본식 파시즘” 등이 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해외 식민지 건설에 나선 일제는 점차 군부의 주도로 반민주적 정치질서와 반시장적 국가 주도의 통제경제(dirigisme)를 추구했다. 1920-30년대 “쇼와 유신(惟新)”은 “텐노(天皇, 일왕)”에게 직접적 독재 권력을 주어 아시아의 절대 군주로 군림하게 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략이었다. “쇼와 국가주의”는 결국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물거품이 되었지만, 전후 일본은 국가-주도의 발전 전략을 폐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진핑 시대 “차이나 모델 2.0판”은 전후 일본의 발전방식이 아니라 1920-40년대 “쇼와 국가주의” 혹은 일본식 파시즘과 비슷해 보인다. 시진핑 시대 들어와서 1) 마오쩌둥의 절대 권위가 되살아났으며, 2) 당·정·군의 총 권력을 독점한 일인 지배가 확립되었다. 3) 공격적인 애국주의가 부상하고, 4) 신장 위구르족에 대한 인권 탄압이 강화되었다. 또한 5) 경제에 대한 국가 간섭이 계속 확대되었고, 6)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등 민족주의가 조장되었다. 7) 홍콩의 인권을 짓밟고 대만을 향해 군사 위협을 서슴지 않는 중국의 모습을 보면, 타이쇼(大正) 민주주의(1912-1926)가 무너진 후 군국화의 일로로 내닫는 일제의 망령이 연상된다. 아울러 8) 미국과 유럽의 질서에 맞서 중국 중심의 글로벌 신체제를 세우려는 무리수는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을 감행한 말기 일제의 판박이가 아닌가.

 

돌고 돌아서 시진핑 시대 중국이 패망한 일본제국의 전철을 밟고 있는가. 중국은 1980년대 초 일본 교과서 논란 때부터 본격적으로 반일 감정을 정치적으로 조장했다. 분출하는 민주화의 열망를 제압하기 위해선 중화 민족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반일주의는 중화 민족주의를 지탱하는 커다란 기둥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중국공산당이 과거 중국을 침략한 군국주의 일제의 전체주의적 사회·경제 통제를 답습하고 있음은 기묘한 아이러니다. <계속>

 

〈68〉‘백발’이 된 홍위병 세대 “노예들아, 일어나라!”... 50년 전 노래 부르며 시위

▲<2023년 2월 15일, 후베이성 우한에 집결해서 지방정부의 의료 지원금 삭감에 항의하는 노인들. 사진/공공부문>

 

‘백지 시위’ 이어 ‘백발 시위’...우한 다롄 등에서 노인들의 격렬한 항의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1970년대 날마다 휴전선 이남 전역에 울려 퍼지던 바로 그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중대한 사건이 최근 중국에서 터졌다. 최근 중국의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 등지에서 정부의 의료보험 정책에 반대하는 격렬한 “백발 항의”가 일어났다. 3년간 지속된 제로-코비드 정책으로 중국 지방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부득이 의료 지원금을 삭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시위는 실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불붙었다. 우한 정부가 2월 1일 새로운 의료정책을 발표하자 2월 8일 격분한 수천 명 노인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첫 시위를 벌였고, 2월 15일 아침 다시 한커우(漢口)의 중산(中山) 광장에 집결해서 대규모 항의 집회를 개최했다. 같은 날, 거의 육로로 거의 2천 킬로미터 떨어진 다롄에서도 수천 명이 인민 광장에 모여서 같은 이유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다롄의 경찰은 노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발길질했다. 몇 명은 현장에서 구속되기도 했다.

 

집회·시위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중국에서는 젊은이도 쉽게 시위에 나설 수가 없다. 과연 상황이 어떻길래 은퇴한 백발노인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는가. 진정 중국은 현재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인가. 반드시 그렇게 볼 수는 없다. 막강한 중국공산당 권력에 비하면 백발노인들의 저항은 아직은 미약하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21일 상하이 근처의 한 마을에서 백신을 맞고 나서 기다리고 있는 중국의 노인들. 노년층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제로-코비드 정책이 맞물려서 의료 지원금이 심각한 부족 상태에 놓여 있다. 사진/ https://www.rfa.org/english/news/china/silver-02162023135955.html>;

 

 

경찰은 현장에서 즉각적인 무력 진압의 방법을 쓰진 않았지만, 사후 조사로 우한의 시위 주동자 다섯 명이 이미 구속된 상태다. 시위에 참여했던 노인들은 좁혀 오는 수사망에 떨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시위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애써 축소할 이유도 없다.

 

지난해 11월 말 중국 전역 최소 20개 도시에서 A4 종이를 손에 쥐고 “공산당 해산, 시진핑 하야”를 부르짖었던 청년들의 “백지 항의”가 올해 2월 우한과 다롄에선 은퇴자들의 “백발 항의”로 면면히 이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나 중국 같은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위를 일으키는 사례는 극히 드물기에 더욱 세계인의 이목이 쏠린다. “백발 항의”를 주도한 우한과 다롄의 노인들,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백발 운동’의 주역은 57년 전 문화대혁명 주도한 10대 홍위병 세대

바로 57년 전 그들은 마오쩌둥의 부름을 받아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10대의 “홍위병”들이었다. 1966년 여름 8개월간 수도를 떠나 남방에서 원격조정으로 문혁의 불씨를 일으킨 마오쩌둥은 베이징에 돌아오기 무섭게 대학 및 중·고교에서 막 들고일어난 젊은이들을 향해 “조반유리(造反有理)”를 외쳤다. “반란을 일으킴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그 한마디 말로 인격신 마오쩌둥은 청소년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마오쩌둥의 인정을 받은 홍위병들은 당·정·관·학(黨·政·官·學) 곳곳에 숨어 있는 주자파(走資派)를 색출해 축출하자며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야만적인 마녀사냥과 집단 린치의 방법으로 전 중국 사회를 갈가리 찢고 부수고, 계급 적인(敵人)을 색출해서 할퀴고 짓밟았다. 그 당시 홍위병 운동은 단순히 정치운동을 서로 죽고 죽이는 대규모 학살극으로 번졌다. 특히 후베이성 우한이 대표적이었다.

 

▲<1967년 7월 20일 우한. 장갑차 등 군용 차량을 타고 진격하는 군중조직 “백만웅사”의 모습. 당시 우한은 분열된 군중 조직이 군용무기로 중무장하고 내전 상황에 돌입했다. / 공공부문>

 

 

“1967년 5월과 6월, 후베이성 우한에서는 군중이 조반파(造反派, 급진파)와 보황파(保皇派, 보수파)로 나뉘어서 대규모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송재윤, <<슬픈 중국: 문화대반란 1964-1976>>, 까치 2022, p. 217). 그 참혹한 내전에서 10대의 불량배들이 돈을 받고 용병처럼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는 기록도 있다(같은 책, 229-230). 좌·우파 무장투쟁의 악순환으로 우한에서만 6만6000여 명이 중·경상을 입고, 600여 명이 학살되었다. 후베이성 전역에선 18만4000여 명이 상해를 입거나 죽임을 당했다(같은 책, 236-237).

 

청춘은 덧없이 흘러가도 젊은 날의 꿈과 이상은 노인의 가슴에 암초처럼 박혀 있다. 젊은 시절 인간은 경험이 얕고 안목이 좁아서 섣불리 움직이다 실수를 거듭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과거의 시행착오를 돌아보면서 지혜와 통찰을 얻는다. 1980년대 중국 문단에 범람했던 상흔 문학의 기록은 혁명의 광열과 변혁의 미망에 사로잡혀 숱한 정치범죄를 저지르고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홍위병 세대의 고해성사다. 바로 그 홍위병 세대가 50여 년 세월을 지나 백발 부대로 되돌아왔다.

 

백발노인들이 부른 혁명가 ”일어나라, 굶주림과 추위에 압박당한 노예들아!”

지난 2월 15일 한커우의 중산 광장에 집결한 노인들은 한목소리로 “국제가(國際歌, L’Internationale)”를 불렀다. 20세기 전 세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혁명 송가(頌歌)다. 1871년 5월 말 파리코뮌 최후의 전투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의 한 주”로 막을 내린 후, 철도 노동자 출신 무정부주의자 외젠 포티에(Eugène Pottier, 1816–1887)가 쓴 시에 목수 출신 드게테르((Pierre De Geyter, 1848–1932)가 곡을 붙였다. 우한의 노인들이 목청껏 부른 중국어 가사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일어나라, 굶주림과 추위에 압박당한 노예들아!

일어나라, 전 세계의 고통받는 사람아!

가슴 가득 뜨거운 피가 벌써 끓어올라

진리를 위해 싸우려 하네!

낡은 세계는 꽃처럼 떨어져 물처럼 흘러가니

노예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중산 광장의 노인들은 또 1943년 산시(陝西)성 산촌에서 만들어져 혁명 가곡으로 널리 애창됐던 “단결은 힘이다(斷結就是力量)”를 함께 불렀다.

 

“단결이 힘이네. 단결이 힘이네.

그 힘은 쇠라네, 그 힘은 철이라네.

쇠보다 굳고, 철보다 세다네.

파시스트를 불태우고, 반민주 제도를 모두 없애네.

태양을 향해 자유를 향해

새로운 중국을 향해,

커다란 빛발을 쏘네!”

 

10대의 홍위병 시절 날마다 불러서 지금도 노인들의 혀끝에 달라붙어 있는 그 노랫말 속엔 1940년대 중국 민중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인들은 어려서 배운 그대로 “파시스트를 불태우고, 반민주 제도를 모두 없애는” 인민의 단결력을 믿고 시진핑 정권에 맞서는 용감한 투쟁을 연출했다.

 

무덤 속 마오쩌둥이 되살아나 노인들의 “백발 항의”를 본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되살아난 마오쩌둥이 여전히 스스로 천명한 “마오쩌둥 사상”을 그대로 굳게 믿는다면, 다시 “조반유리!”를 외칠 수밖에 없다. “격분한 노인들이 들고일어났으니 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그 정당한 이유란 무엇인가?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쥐고 가두 행진하는 홍위병의 모습. 사진/공공부분>

 

톈진서 117층 건물 올리고 8년째 건설 중단...빚더미의 지방정부

2월 27일 영국 시사지 <<이코노미스트>>는 공기(工期)를 훌쩍 지나 수년째 짓다 만 채로 멈춰 서 있는 톈진시의 “중국 117 타워” 건물의 뒷배경을 심층 보도했다. 2008년 공사가 시작되어 2015년 597미터까지 건물을 올렸지만, 2023년 3월까지도 이 건물은 완공되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다. 중국의 여러 지방정부는 거액의 빚을 내서 일단 도로를 깔고 건물을 올리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추진해 왔다. 법망을 피해 거액의 급전을 융통하는 편법으로 중국의 지방정부 관원들은 흔히 “지방정부 융자 평대(平臺, 플랫폼)”라는 금융회사를 설립해왔는데, 그 미상환 채권이 무려 13조 6천억 위안(미화 2조 달러)으로 중국 전체 채권시장의 40%에 달한다.

 

지난 2월 28일 미국 <<블룸버그>>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중국의 31개 성급(省級) 정부에서 최소 17개 성 정부가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해 있다. 중국 정부 통계를 분석해 보면, 2022년 미상환 채무액이 지방정부 소득의 120%를 넘어선 상태다. 중국의 지방정부는 인프라 건설에 거액을 투자해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성장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재정 지출이 수입을 웃돌면서 심각한 정부의 위기가 발생했다. 특히 톈진은 공격적인 과투자로 빚이 소득의 거의 3배에 달하고 있다. 본래 지방정부는 빌린 돈으로 다양한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거기서 환수되는 이익금으로 빌린 돈의 이자를 갚아 정부의 살림을 챙기려는 계획이었지만, 3년간 지속되었던 제로-코비드 정책으로 엎쳐진 경제에 부동산폭락과 면세 확대까지 덮쳐서 지방정부가 빚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에 경제학자들은 중앙정부가 저리로 자금을 조달해서 지방정부에 급전을 싸게 빌려주는 방법으로 채무 부담을 완화해줘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또한 중앙정부가 국가개발은행 등 국책은행을 통해서 재정 지출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중국의 경제가 갈수록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는 상황이다. 중국경제는 2000년대 이래 고성장의 세월을 지나 이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과연 “중공표 중국 주식회사”는 순항할 수 있을까?

 

<톈진에 건설 중인 중국 117 타워. 톈진시의 자금난에 부딪혀 공사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 사진/wikipedia>

 

중국 경제 성장의 양면성 “멈춰도 걱정, 더 커도 걱정”

중국이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이래 세계 여러 나라에선 중국에 관한 두 가지 상반된 우려와 공포가 병존하고 있다. 한 축에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국가 부채가 늘어나면서 중국발 경기 침체가 몰려온다는 불안감이 만연해 있다. 이 불안감은 세계 경제의 대(對)중국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중국경제의 성장 속도가 늦춰진다면, 중국과의 무역에 의존하는 세계 대다수 나라들 역시 심각한 침체 국면에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적 우려다.

 

이와 반대로 다른 한 축에선 중국경제의 성장 질주가 중국공산당의 무단 독주를 강화하여 세계 질서를 교란한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특히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중국 제조 2025″와 같은 국가 주도의 산업 개발 정책으로 중국이 AI를 비롯한 최첨단 산업에서 전 세계적 지배력을 확보할 때 발생하는 국제정치와 군사 방면의 위험을 묵과할 수 없다.

 

<2023년 1월 춘절(春節)을 앞둔 중국 저장성 이우(義烏)의 풍경. 예년에는 인파로 붐비던 이곳은 텅 비어 있다. 사진/Qilai Shen/New York Times>

 

 

중국공산당은 이미 최첨단 장비를 동원해 전국을 감시하는 “1984″의 통제 시스템을 이미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국이 만일 미국, 유럽, 일본, 한국, 대만을 능가하는 최첨단 과학기술력을 갖게 된다면, 세계 질서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어 전면적 재편을 피할 수가 없다.

 

요컨대 중국의 경제성장이 둔화해도 걱정이고, 쾌속 질주해도 걱정인 셈이다. 이러한 진퇴양난의 상황은 결국 이념과 체제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지난 40여 년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나라 중국과 자유, 인권, 시장경제를 축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이념과 철학은 불문하고 경제적 상생 관계를 유지해 왔다. 실제로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세계 경제의 추동력이었다. 문제는 세계 2위의 규모로 팽창한 중국경제가 인류의 보편가치를 거부하고, 국제사회의 규약을 무시하고, 자국민의 인권을 예사로 침해하는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놓여 있는 현실이다.

 

백발 성성한 노인들이 거리에 나와서 “노예들아, 일어나라!” 외쳤다. 마오쩌둥의 말마따나 반란을 일으킴에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계속>

 

〈69〉티베트의 슬픔...몸을 태워 저항하는 사람들

▲<티베트족 아이들. 사진/Erik Törner>

 

2022년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26세 가수, 81세 유목민 마을 주민의 분신

체왕 노르부(Tsewang Norbu, 1996-2022)는 티베트족 가수이다. 티베트 자치구 나그취(Nagqu, 那曲)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2014년 광둥 지방의 위성 TV의 음악 쇼에 출연하여 피아노를 치며 티베트 가요를 불러 큰 인기를 끌었다.

 

2017년에는 텐센트 비디오(Tencent Video)가 주관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전국 9위까지 올랐다. 2021년까지 그는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성공적인 가수 경력을 이어갔는데······. 2022년 2월 25일,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둔 26세의 체왕 노르부는 라싸의 포탈라궁(宮) 앞에서 구호를 외치며 스스로 몸에 불을 질렀다. 라싸의 티베트 자치구 인민 병원으로 옮겨져서 신음하다가 3월 첫째 주 숨을 거두었다.

 

<2019년 뮤직비디오에서 티베트어로 노래하는 체왕 노르부(Twewang Norbu)의 모습. https://www.youtube.com/watch?v=3gv-caAs7MM&ab_channel=YarthokTenzin >

 

 

2022년 3월 27일 81세의 타푼(Taphun)은 쓰촨성 티베트 자치주의 사찰 앞에서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아바(阿壩, Ngawa)티베트족·창족(羌族) 자치주의 한 유목민 마을에서 살던 타푼은 평소 티베트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억압을 규탄했다. 80세 생일 그는 “달라이 라마의 축복으로 행복의 태양이 티베트를 비추리니, 젊은이들은 낙심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지난 14년 줄곧 이어진 티베트인 분신의 긴 행렬에서 두 사람은 각각 157번째, 158번째의 인물이었다. 2000년대 첫 번째 분신은 2009년으로 소급된다.

 

2009년 이래 159명 분신, 티베트족의 처절한 저항

중국 쓰촨성 서북부에 위치한 아바(阿壩, Ngawa)티베트족·창족(羌族)자치주. 8만 3천 제곱킬로미터의 초목 지대엔 대략 92만 티베트족과 창족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1472년에 세워진 키르티(Kirti Compa, 格尔登寺) 사원은 이 지역 티베트 불교의 성지다. 이 사찰에는 거대한 불상과 함께 30미터 높이의 흰색 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2011년 3월까지도 이 사찰엔 25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고 있었는데, 2008년부터 불어닥친 검거 열풍으로 많은 승려가 잡혀가고, 현재는 600여 명만 남았다고 한다.

 

<중국 쓰촨성 아바 자치주 키르티 사원의 사리탑. 사진/wikipedia.org>

 

 

2009년 2월 27일 키르티 사원에서 20대 중반의 승려 타페이(Tapey)가 기름을 부은 몸에 스스로 불을 붙였다. 마지막 순간 그의 손에는 직접 만든 티베트 깃발이 들려 있었다. 깃발의 중앙에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불길이 타오를 때 타페이는 구호를 외쳤지만,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다음 순간 무장 경찰이 타페이를 향해 발포했고, 타페이는 그 자리에서 즉각 쓰러졌다. 경찰은 타페이의 몸에 붙은 불을 끈 후 곧바로 그를 끌고 갔다.

 

2년 후, 2011년 3월 16일 바로 그 키르티 사원의 20세 승려 푼트소그(Phuntsog)가 또 분신했다. 그날은 10명의 티베트 승려가 총격당해 사망한 2008년 키르티 사원 시위 3주기였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경찰이 곧 달려와서 황급히 불을 끄고는 죽기 전까지 푼트소그를 무차별 구타했다.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티베트 승려들이 몰려와서 구타당하는 푼트소그를 사원으로 데려갔는데, 중공 매체는 승려들이 그를 병원에서 빼내 갔다고 모함했다.

 

그 후 충격적인 분신의 행렬이 이어졌다. 2011년에만 12명, 2012년 84명, 2013년 27명, 2014년 11명이 분신했다. 집계하면 2009년 이래 티베트에서는 159명이 분신했다. 그중 남자는 131명, 여자는 28명이다. 26명은 18세 이하의 청소년이다. 아바 자치구의 키르티 사원의 승려들만 25명이 분신을 이어갔다.

 

이상의 내용은 미국 워싱턴 디시에 소재한 “티베트를 위한 국제 운동(International Campaign for Tibet)” 본부의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다. 이 사이트에는 2009년 이래 분신한 158명의 인적 사항, 사건 당일 행적, 논란거리 및 파급 효과를 하나하나 상세하게 정리해 놓았다.

 

[티베트를 위한 국제운동이 밝히는 티베트인의 분신 상황]

분신은 인도의 티베트인들에게로 이어졌다. 2012년 3월 26일,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진타오의 인도 방문을 앞두고, 수도 뉴델리에서 26세의 잠파 예시는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후 몸을 태워 치솟는 불길을 이고 45미터 정도 거리를 달려가며 저항의 절규를 내뿜었다. 생생한 분신의 장면을 찍어서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말 그대로 불타는 인간 성화”라 칭했다.

 

<2012년 3월 26일 인도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 잠파 예시(Jampa Yeshi, 26세)는 뉴델리에서 후진타오의 인도 방문을 규탄하면서 스스로 분신했다. 사진/Manish Swarup/Associated Press, New York Times>

 

티베트인이 분신하는 이유... 강력한 비폭력적 저항 표현

중국 군경의 폭력에 대적할 수 없는 티베트 사람들은 이처럼 극렬한 항의와 장중한 저항의 방법으로 스스로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놓아 통째로 바치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을 선택한다. 분신한 티베트인들은 소신공양이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타인에 대한 비폭력을 실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저항의 의지를 표명하는 최선의 방편(方便)이라 믿는다. 아트만(ātman, 自我)의 윤회전생을 확신하고 아나타(anatta, 無我)의 니르바나(nirvana, 해탈)를 지향하기에 그들은 지고의 가치를 위해 육신을 봉헌할 수 있다.

 

라싸에서 태어나고 쓰촨성 서부에서 자라 유려한 중국어로 작품을 쓰는 티베트 출신 작가 체링 우에세르(Tsering Woeser, 1966- )운 49명의 분신자가 남긴 서면 선언문, 녹음, 가족이나 친지에 남긴 유언 등 49개의 최후 선언문을 채집해서 그 내용을 분석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49명 중 15명(37%)이 티베트인의 궐기를 촉구했고, 12명(30.4%)이 달라이 라마를 위해 기도했다. 12명(28.3%)은 티베트인으로서의 책임과 용기를 언급했고, 11명은 티베트의 민족적 정체성과 연대를 부르짖었다. 열 명(21.7%)은 티베트 독립을 선언했으며, 중국공산당 정부를 규탄하고 변화를 촉구한 사람이 9명(19.6%)이었다. 이 밖에도 “더는 견딜 수 없다”(17.4%)나 “티베트어를 지키자”(13%) 등의 구호도 있었다.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은 3건으로 6.5% 정도였다. (Tsering Woeser, Tibet on Fire, chapter 2).

 

최후 선언문을 분석하여 체링 우에세르는 다음 아홉 가지 결론을 내린다.

 

1. 분신은 저항의 방법이다.

2. 분신은 행동의 수단이다.

3. 분신은 종교적 헌신이면서 동시에 중공 정부에 대한 항의다.

4. 분신은 티베트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와 힘을 표현하려는 의도이다.

5. 그들의 저항은 티베트족의 민족적 정체성과 단결을 강화하려는 의도다.

6. 티베트 독립이 핵심적 주제다.

7. 분신은 단지 절망의 표현이 아니다.

8. 사라지는 티베트어의 보존이 주요한 주제 중 하나다.

9. 티베트의 티베트족은 단지 국제적 지원과 관심을 끌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같은 책, chapter 2).

 

티베트의 슬픈 역사...19세기 후반 실질적 독립 상태서 1951년 점령돼

평균 해발고도 4380미터로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티베트고원은 서쪽으론 히말라야산맥을 끼고 동쪽으로 중국 서남부 내륙까지 펼쳐진 광활한 고산 지대이다. 총면적이 2백 50만 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11배에 달하는 큰 영토이다. 본래 티베트족은 현재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뿐만 아니라 칭하이(靑海) 간쑤(甘肅), 쓰촨(四川), 윈난(雲南) 지역에 널리 흩어져 살았다. 이 두 지역을 합쳐서 “다짱취(大藏區),” 곧 “거대한 티베트족 지구”라 부른다.

 

<전통적으로 티베트족이 거주하던 ‘역사적 티베트(Historical Tibet)’는 현재의 티베트 자치구뿐만 아니라 칭하이(Qinghai), 간쑤(Gansu), 쓰촨(Sichuan), 운남(Yunnan)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였다. 1950년 중국공산당이 이 지역을 점령한 후 티베트를 동서로 나누어 서쪽 절반만 티베트 자치구로 정했다. http://www.skillsphere.org/global-jigyasas/chinas-atrocities-in-tibet/>;

 

 

티베트는 1720년 청(淸) 제국에 복속되었으나 19세기 후반 무렵엔 이미 실질적인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11년 민국(民國)혁명으로 청 제국이 붕괴하자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했다. 1951년 중국공산당에 점령되기까지 거의 40년간 티베트(1912-1951)는 독립적인 불교국으로 남아 있었다. 1950년대 초반 중국공산당이 그 지역을 점령한 후, 서쪽 절반만 잘라서 “티베트 자치구”로 삼고, 동쪽 절반은 칭하이, 간쑤, 쓰촨, 윈난성에 떼어주었다.

 

현재 전 세계에는 670여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다. 그중 630만 명이 중국에 살고 있고, 나머지 40만 명은 인도(18만 2천여 명), 네팔(2~4만여 명), 미국(1만여 명), 캐나다(9천3백여 명), 스위스(8천여 명)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티베트 자치구에 270여만 명, 쓰촨성에 약 150만 명이, 칭하이성에 137만 5천여 명, 간쑤성에 약 49만 명, 윈난성에 14만 2천여 명이 거주한다.

 

670만 티베트인들은 중국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2011년 11월 3일 키르티 사원의 주지승 키르티 린포체(Kirti Rinpoche)는 미국 하원의 탐 랜토스(Tom Lantos) 인권위원회에서 계속 티베트인들이 분신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11년 미국 백악관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강연하는 키르티 린포체(Kirti Rinpoche). 사진/zh.wikipedia.org>

 

 

“중국공산당이 강점하기까지 티베트는 독립국이었습니다. 강점 이후 이미 반세기가 지났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초기 중국이 티베트인들에게 약속했던 소위 민주적 개혁은 무지개처럼 사라지고, 대신 티베트인들을 억압하는 정책만을 시행해 왔습니다. 중국 당국은 초창기 약속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음을 모르는 척하며 어떤 긍정적 정책도 시행하지 않습니다. 지방의 공산당 간부들은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고, 농장과 목축 생산물을 강탈하는 억압적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갖은 악법을 쓰고 있습니다. 법적 처벌은 이제 돈벌이 수단이 되었습니다. 정의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고, 티베트의 젊은이들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티베트는 소위 자치구와 자치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일면 좋게 들리고, 마치 자유로운 정치 체제 같기도 하죠. 그러나 실상 티베트인들은 보통 중국인이 누리는 권리도 갖지 못합니다. 맹목적 한족-애국주의자 혹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은 티베트인들을 궁지로 몰고 갔습니다. 한족은 교육받지 못해도 간부가 될 수 있습니다. 중국 정부 내에서 일하는 극소수의 티베트인들은 최소한의 신뢰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인종 차별을 증명합니다. 만약 중국의 영수들이 달라이 라마가 제시했던 중도 정책을 수용했더라면, 티베트인과 중국인은 지금쯤 과거 티베트의 위대한 법왕(法王)들이 지배하던 시대처럼 상호 동등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1935년대 중국공산당이 아바 지역을 처음 점령한 이후 200년대까지 3세대에 걸쳐 자행해온 폭력과 만행의 역사를 고발했다. <계속>

 

〈70〉티베트 라싸가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라는데...

▲<라싸 포탈라궁(宮) 앞에서 사진을 찍는 티베트 여인들. 사진/ Ellen Ebens>

 

중국 중앙방송, 티베트 수도 라싸를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로 꼽아... 의도는?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는 어디인가? 2006년에서 2012년까지 중국 중앙방송은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를 6년 연속으로 전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로 꼽았다. 2008년만 예외였는데, 그 당시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 사람들이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긴박한 상황에서 라싸를 가장 행복한 도시로 꼽을 수 없었던 중앙방송은 상하이, 베이징에 이어 3등으로 선정했다.

 

중국중앙방송은 도대체 왜, 무슨 근거로 라싸를 “가장 행복한 도시”로 선정했을까? 그 정치적 의도는 무엇일까? 인도 캘커타 대학의 지그미 라마 교수(Jigme Yeshe Lama)는 “아직도 국가 건설이 진행 중인 티베트 지역은 오늘날 중국에서 특별히 중요한 문제”이기에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이 중앙방송을 사주해서 라싸를 인위적으로 가장 행복한 도시로 꼽았다고 분석한다.

 

가령 중국 국무원은 2013년 백서에서 티베트인들은 중국공산당의 영도력 덕분에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이 티베트에 도로를 깔고, 도시를 건설하고, 통신망을 설치하고, 야간 비행을 할 수 있는 공항을 건설하고, 전력망을 확충하는 등, 경제 발전의 기초를 놓았다는 주장이다. 또한 낙후된 농촌과 목초지에 식량, 숙소 및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45세 이상 주민에게 무상 의료보험을 보장했다는 선전도 잊지 않았다.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에서 중국공산당 창당 96주년 기념식에서 중국 국기가 게양되고 있다. 사진/2017 CNS/He Penglei via Reuters>

 

 

그 선전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목초지에서 자유롭게 유목 생활을 영위해 온 티베트 사람들을 협소한 촌락에 묶어놓고 정착시키려는 중국공산당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고산지의 광활한 초원을 오가며 대자연 속에서 신령과 소통하며 목축을 해온 유목민들이 광야와 짐승과 물과 바람을 잃고 비좁은 현대식 촌락에 강제로 갇혀 포로가 되어버렸다.

 

역으로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천연광물을 확보할 수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티베트를 더욱 강력하게 통합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의 라싸를 가장 행복한 도시라 선전하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을 포섭하려는 전략도 없진 않지만, 실제로는 전 중국인, 나아가 중국 밖의 전 세계를 향해 티베트 식민화의 성공을 홍보하는 목적이다. 그러나 티베트 라싸가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라는 중국공산당 매체의 일방적 선언을 곧이곧대로 믿는 중국 인민이 과연 몇 %나 될까?

 

193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티베트족이 겪은 통한(痛恨)의 역사

물론 티베트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의 선전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군사력 앞에서 무력하게 스러지는 유구한 티베트 유목민의 전통과 종교적 세계관과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있다.

 

2011년 11월 3일 미국 하원 탐 랜토스(Tom Lantos) 인권위원회에서 키르티 사원의 주지승 키르티 린포체(Kirti Rinpoche)는 지난 세기 3세대에 걸쳐서 중국공산당이 티베트인들에게 가한 인권유린과 잔혹 행위를 간명하게 정리해서 증언했다. 그의 연설문을 기초로 지난 한 세기 중국공산당의 침략과 식민 지배 아래서 티베트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통한의 역사를 살펴보자.

 

[키르티 린포체의 증언]

#제1세대 티베트인의 상처

1935년 국민당군에 밀려서 대장정에 오른 공산당군(共産黨軍, 당시 공식 명칭은 紅軍)은 티베트고원 암도(Amdo, 安多, 현재 쓰촨성 북동부)의 아바(阿壩, Ngaba)를 지나갔다. 아바 지구를 점령한 공산당군은 2천 명 이상의 승려가 수도하는 라텅(Lhateng) 사원을 파괴했다. 얼마 후 공산당군은 현재 쓰촨성이 서쪽 끝에서 티베트 자치구와 맞닿는 곳에 있는 데르거(Derge, 更慶鎭)의 500년 고찰 데르거 사원(更慶寺)에서 많은 승려와 민간인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공산당군은 군비 및 식량 갹출의 명목으로 그 지역 여러 고찰의 곡창을 약탈했다. 그 결과 티베트에서 최초로 기근을 발생하여 사람들은 나뭇잎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이 지역 티베트인들은 그 지역을 점령한 공산당군에 맞서서 싸웠지만, 수적 열세에 밀려서 패배했다. 이때 키르티 사원의 주지를 포함한 많은 승려가 총살되었다.

 

당시 공산당군 사령관 주더(朱德, 1886-1976)는 키르티 사원의 대웅전을 점령하고는 불상과 보살상을 훼손했다. 이때 티베트 사람들은 공산당군을 반종교적 약탈자라 인식했다. 그 결과 아바 지역 티베트인들의 가슴엔 깊은 생채기가 났다. 지난 회(69회)에서 언급했듯, 2009년 이래 160명 가까지 분신의 행렬을 이어갔는데, 그중 25명이 키르티 사원의 현직 혹은 전직 승려였다.

 

#제2세대 티베트인의 상처

1958년 아바 지역에서 소위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민주·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1950년대 중국공산당이 티베트를 통치하며 부르짖은 “민주”는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처형하는 인민독재였고, “개혁”이란 전통적 삶의 양식을 송두리째 뿌리 뽑고 고유의 문화를 봉건의 잔재라며 일소하는 반달리즘일 뿐이었다. 그 밑바탕엔 티베트족에 대한 한족(漢族)의 우월의식과 종족 차별이 깔려 있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후 2년 지난 시점 아바 지역에서도 홍위병 조직이 생겨났다. 1950-60년대 정치운동은 티베트인 수십만 명이 구속되어 고문당했다. 또한 수많은 정치 집회에서 많은 티베트인이 인민재판식으로 조리돌림당했다. “낡은 생각, 낡은 관습, 낡은 습관, 낡은 문화”를 모두 깨부순다는 이른바 파사구(破四舊)의 구호 아래서 홍위병들은 오랜 세월 고유의 문화 전통을 이어온 티베트인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아바 지역에는 1760년 체왕 키야브(Tsewang Kyab)가 세운 메우(Meu) 왕국이 있었다. 그 왕국의 마지막 왕 펠곤 트린레 랍텐(Pelgon Trinle Rabten, 1916-1966)은 1930~1950년대까지 그 지역을 잘 통치해서 지금까지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그의 통치 아래서 아바 지역은 티베트 고원과 중국 서부를 잇는 상업의 요충지로서 번창했는데······. 문혁의 광풍 속에서 펠곤 트린레 랍텐은 봉건 영주로 몰려서 고문당하다가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 밖에도 많은 티베트인이 사형당했다.

 

키르티 린포체는 당시 중국공산당이 전 티베트인을 절멸시키려는 문화 파괴와 인종 박해를 자행했다고 고발한다. 티베트 전통의 사원과 종교적 유산은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어 장소명과 인명을 모두 중국어로 교체했다. 티베트 언어와 문화에 대한 중국공산당 특유의 말살 정책이었다.

 

또한 천연자원이 풍부한 아바 지역의 환경도 파괴되었다. 무분별한 벌목으로 무성했던 원시의 밀림이 훼손되어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터졌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자연재해가 연거푸 일어나서 더는 복구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제3세대 티베트인의 상처

1998년 이후 “애국주의 교육”이 티베트 전역에 몰아쳤다. 아바 지역의 불교 사원에 예외일 수 없었다. 말이 좋아 애국주의 교육이지 티베트족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종교적 자유를 침탈하는 정치적 박해일 뿐이었다. 그해 4월 27일, 인도의 델리에서 연로한 티베트인 투프텐 너두프(Thupten Ngodup)가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죽었다.

 

그러한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중국 정부는 티베트족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티베트 고유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교육에 개입했다. 2003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서 티베트족의 교육기관은 박해를 당해 문을 닫아야 했다. 예컨대 키르티 사원이 운영해오던 학생 수 1200명의 큰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으며, 티베트족의 사립학교는 압박에 시달리다 결국 정부로 넘어갔다.

 

반면 한족 사원이 운영하는 학교나 한족 사립학교는 간섭받지 않았다. 티베트족이 스스로 티베트 고유의 문화 전통을 전수할 수 없게 하려는 목적이 확연히 보인다.

 

▲<베이징 묘응사(妙應寺)의 백탑 앞에 선 펠곤 트린레 라브텐 (왼쪽)과 티베트 불교 승려들. 연도 미상. 사진/ https://treasuryoflives.org/zh/biographies/view/Pelgon-Trinle-Rabten/13655 >

 

 

2008년 3월 16일, 아바 지역의 키르티 사원을 중심으로 티베트족의 평화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중국 공안은 즉시 시위를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티베트족 23명이 죽임을 당했다. 경찰 부대에 포위된 키르티 사원은 완벽하게 봉쇄된 채로 사실상 감옥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아바 지역엔 5개 군부대가 들어왔다. 뉴욕의 인권감시단(Human Rights Watch)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바 지역에는 5만의 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며, 아바 지역의 치안 비용은 다른 쓰촨 지역의 두 배에 달한다.

 

▲<2008년 4월 5일, 아바 지역에 들어간 군대에 잡혀서 끌려가는 티베트 불교 승려들. 잡혀가는 승려들의 목에 걸린 팻말에는 “군중을 모아서 국가기관을 공격했다(聚衆衝擊國家機關)”는 죄명이 적혀 있다. 사진/wikipedia.org>

 

키르티 린포체는 직접 경험한 참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2008년 3월부터 중공 당국은 키르티 사원의 승려들을 8개 집단으로 나눠서 밤낮으로 애국주의 교육의 수강을 강요했다. 사원에 닥친 공안 부대는 승려들의 숙소를 수색하고, 모든 전자제품을 압수하고, 티베트 불교 성전(聖典)을 난도질했다. 그들은 또 티베트 승려 개개인을 윽박질러서 달라이 라마의 영정을 짓밟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100여 명의 승려가 구속되어서 고문당하며 조사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사원의 수호신께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기(祭器)를 강탈했으며, 사원이 중국 정부와 싸우기 위해서 무기를 숨겨놨다는 누명을 써야만 했다. 또 그런 낭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키르티 사원의 승려 두 명, 동그리 사원의 승려 한 명, 고망 사원의 승려 한 명이 고문을 못 이겨 극심한 공포 속에서 자결했다. 키르티 사원의 70세 승려는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키르티 사원은 겨울에 늘 거행해오던 중요한 종교 행사를 열 수 없게 되었다. 2011년엔 정부는 티베트족이 전통적인 티베트족 천문학적 계산법에 따라 계획되어 있었던 티베트족 설날 행사까지 금지했다.”

 

티베트 승려 잇달아 분신... 박해받는 티베트족의 처절한 저항

2011년 3월 16일, 20세 승려 로프상 푼트소크(Lobsang Phuntsok)가 분신했다. 그 후 공안 부대는 키르티 사원은 포위한 후 7개월간 봉쇄를 이어갔다. 포위 상태의 사원에 800여 명의 정부 관원들이 경내로 들어가선 승려들을 대상으로 정치 재교육과 애국 교육 캠페인을 벌였다. 격리되어 외부와의 교신이 전면 두절된 상태에서 사원 내에서 불의의 기근이 발생하기도 했다.

 

경내엔 온통 도청기와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공안 부대는 아무 때나 승려의 숙소에 들이닥쳐서 창문을 깨고 문을 부수며 수색 작전을 펼쳤다. 목줄 풀린 경찰견이 날뛰며 승려들이 물기도 했다. 사원에 침투해서 좀도둑질하는 공안도 있었다.

 

2011년 4월 21일 대규모 병력이 사원에 들이닥쳐서 300여 명의 승려를 군용 트럭에 싣고 갔다. 끌려간 승려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 구금되었다. 중국 정부는 그 지역에 청소년의 출가를 금지하고, 사원의 승려 수를 제한했다.

 

2011년 8월 15에서 10월 26일까지 9명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비구와 비구니 승려들이 연달아 분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분신이 행렬이 이어지면서 국제 사회의 비판이 들끓자 중공 정부는 분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을 기소해서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2008년 3월 16일부터 2011년 10월 17일까지 아바 지역에서 34명의 티베트인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되거나 분신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미 잡혀간 300여 명 키르티 사원의 승려들을 제외하고도 619명이 구금되었다.

 

▲<2008년 4월 잡혀가는 티베트 승려들의 모습. 문화혁명 시기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모욕주고 처벌할 때 사용하던 팻말을 그대로 사용해서 승려들을 모욕하고 있다. 팻말에 적힌 네 글자는 “분열 국가,” 곧 국가를 분열시켰다는 죄명을 적어 놓았다. 사진/wikipedia.org>

 

 

키르티 린포체는 티베트인들에게 분신(焚身)이란 다른 중국인들에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중국 정부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분신하는 티베트인들은 중국 정부를 향해서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방문을 허락하라! 티베트인의 자유를 보장하라!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친다.

 

키르티 린포체는 말한다.

“티베트 젊은이들이 분신한다는 사실이 티베트족이 고통받고 있다는 증거다. 그들은 세계 지도자들과 인권 단체를 포함해서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의 국가와 인민이 중국 정부를 압박해서 티베트 탄압을 중단하도록 호소하고, 또한 억압이 안정을 보장할 수 없음을 말해달라고 촉구한다. 또한 그들은 티베트 문제의 근본 해법을 찾기 위한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대화를 요구하며 국제단체 및 인권 단체가 여러 티베트 지역 방문을 방문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계속>

 

<2021년 3월 10일, 파리에서 1500여 명의 티베트인과 지지자들이 모여서 중국공산당의 억압을 규탄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aninews.in, “Tibetans”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