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2/ 02-01(수) 이름은 출판기념회, 실상은 돈봉투 전달식 - 02-28(화)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41년 논란 끝에 설치된다는데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2/
02-01(수) 이름은 출판기념회, 실상은 돈봉투 전달식… 이젠 끝내자

책을 많이 내는 직업군으로 정치인이 있다. 국정감사와 정기국회로 바쁜 와중에도 부지런히 책을 낸다. 정치철학과 의정활동 홍보용이라지만 실은 출판기념회를 하기 위해서다. 무제한 돈봉투를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출판기념회다. 행사장엔 보험용 로비용 눈도장을 찍으려는 ‘을’들로 북적이는데 이들은 ‘책값’ 대신 ‘떡값’, ‘출판기념회’ 대신 ‘출금(出金)기념회’라고 부른다. 코로나로 뜸했던 출판기념회가 여기저기서 열린다는 소식이다.
▷출판기념회 모금액은 정치자금과 달리 한도도, 회계 보고 의무도 없다. 선거일 90일 전 금지 규정이 있을 뿐 도서정가제에 따라 싸게 팔지만 않으면 책값으로 얼마를 받든 자유다. 변변치 못한 성의라는 뜻의 ‘미의(微意)’라고 적힌 봉투 안엔 많게는 수백만 원이 들어 있다고 한다. 중진 의원은 수억 원대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는데 공개 의무가 없으니 정확한 액수는 본인 외엔 알 수가 없다.
▷현역 의원은 보좌관이 국회 대정부 질문이나 소셜미디어 게시글 등을 묶어 내는 경우가 많다. 대필 작가를 쓰는 정치인도 있어 선거철이면 대필 시장이 들썩인다. 출판기념회 일정에 맞춰 2주 만에 써 달라고 주문할 때도 있지만 정형화된 글이어서 쓰기가 어렵진 않다고 한다. 입지전적 인생 스토리, 지역구에 대한 애정, 의정활동을 적당히 짜깁기하면 된다. 업계에 따르면 대필 가격은 국회의원은 3000만∼5000만 원, 시장과 구청장 후보는 600만∼2000만 원이다.
▷출판기념회 ‘갑질’에도 등급이 있다. 선거 전에 했는데 선거 직후 또 하는 경우가 3등급, 연례행사로 하는 경우 2등급이다. 최악인 1등급은 예결위원장이나 상임위원장 신분으로 하는 행사다. 이 경우 출판기념회는 ‘입법로비’ 창구가 될 위험이 크다. 실제로 2014년 19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법안을 발의해준 대가로 출판기념회에서 유관 단체로부터 3360만 원을 받아 대법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를 계기로 출판기념회 전면 금지 법안까지 나왔지만 흐지부지됐다.
▷2018년 지방선거 때 출판기념회가 논란이 되자 국민권익위가 입장을 발표한 적이 있다. 지자체장이나 현역 의원이 직무 관련이 있는 사람에게 의례적인 범위를 넘는 책값을 받으면 김영란법 위반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의례적인 범위’라는 표현이 모호해 하나 마나 한 유권 해석이었다. 중앙선관위는 출판기념회 금품수수를 금지하고 개최 사전 신고를 의무화하는 법 개정 의견을 낸 상태다. 정치인이 낸 책의 유일한 독자는 약점 잡을 게 없나 뒤져보는 경쟁자라고 한다. 정치 혐오만 부추기는 출판기념회 갑질 문화를 청산할 때가 지났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02 법인차 번호판, 연두색으로 바꾼다는데…

법인용 차량 번호판 색깔이 이르면 7월부터 연두색으로 바뀐다. 업무용 차량이라는 것을 알게 해 이를 사적으로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제도 시행 이후 새로 등록할 것으로 추산되는 연간 15만 대가량의 법인차가 대상이다. 현재 법인 명의로 등록돼 있는 344만 대에 대해서는 세제 감면 등 혜택으로 번호판 교체를 유도하겠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요즘 고가 수입차 매장에는 구매 문의를 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늘었다. 법인차 전용번호판제가 예고된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미 나타난 흐름이다. 번호판 색깔이 바뀌기 전에 미리 사두자는 것이다. ‘연두색 번호판’으로 불필요하게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법인차는 회삿돈으로 구매, 운용되고 감가상각 등에 따른 세금과 보험 혜택을 볼 수 있다. 업무용 자산이기 때문에 당연히 주어지는 혜택이다. 그런데 이런 점을 악용한 탈세 행태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3년 전 탈세 혐의로 세무당국에 적발된 한 사업가는 슈퍼카를 6대나 법인차로 등록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의 가족들이 각자의 자가용처럼 타고 다녔다. 당시 그를 포함해 집중 세무조사 대상이 된 9명이 법인차로 등록한 슈퍼카는 모두 40대가 넘었다. 차량 가격을 모두 합치면 100억 원대였다.
▷대당 가격이 4억 원에 이르는 맥라렌은 한 해 팔린 차량이 전부 법인차로 판매되기도 했다. 롤스로이스, 페라리, 람보르기니, 벤틀리 같은 고급 슈퍼카들도 법인차 비율이 모두 80%를 넘는다. 이런 차량을 회사 비용으로 사들여 사적으로 쓰는 얌체족들의 일탈행위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를 잡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선의의 피해자들이다. 개인 사업자들은 사실상의 사회적 낙인찍기라고 반발한다. “돈 많이 벌어 세금 많이 내는 기업의 법인차에는 골드나 플래티넘 번호판을 달아 사회적으로 존경받도록 하자”는 역제안도 들린다.
▷슈퍼카를 굴리며 탈세를 일삼는 부도덕한 사업가는 마땅히 찾아내서 엄벌해야 한다. 심각한 경우는 횡령 등의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방안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법인차에 연두색 번호판을 달도록 일괄적 행정조치를 내리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편법과 불법에 대한 ‘핀셋’ 단속과 처벌 강화 같은 정공법은 놔둔 채 자칫 법인차 전체에 ‘주홍글씨 낙인’을 찍어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인차 구매 시 기준과 조건을 강화하고, 일정 금액이 넘는 고가 차량에 대해서는 법인세 혜택을 없애버리는 것 등도 같이 검토해 볼 만한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은 아닌지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2-03 “고조부모까지 제사… 조선시대에도 명시된 적 없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남자의 결혼 적령기는 16세, 여자는 14세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조혼(早婚)이 성행하고 대가족으로 모여 살았기 때문에 조혼한 부모가 낳은 아이를 기준으로 보면 인생 육십일 때 조부모뿐만 아니라 증조부모까지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80, 90세 이상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 고조부모하고도 같이 살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넉넉잡아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냈다. 그것이 4대 봉사(奉祀)다.
▷한국국학진흥원은 1일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라는 자료를 내고 조선시대에 4대 봉사가 원칙으로 명시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1484년 성종 때 편찬된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6품 이상의 관료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3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벼슬이 없는 평민은 부모 제사만을 지낸다”고만 명시돼 있다. 다만 이후로 ‘주자가례’를 신봉하는 주자학이 득세하면서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내는 4대 봉사가 양반집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평민이 4대 봉사를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결정적으로 구한말 갑오경장에 의해 양반과 평민의 구분이 없어지자 양반의 평민화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민의 양반화가 이뤄져 모두가 4대 봉사를 원칙으로 삼게 됐다. 실제 지키건 안 지키건 그랬다는 말이다. 가난한 집에 시도때도 없이 돌아오는 제삿날을 간소화한 것은 뜻밖에도 일제였다. 일제는 가정의례준칙을 둬 2대 봉사를 강제했다.
▷유교의 본산인 성균관은 광복 후 4대 봉사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물론 그것을 엄격히 따를 수 있는 일반 가정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 가정이 조부모까지만 제사를 지내거나 나중에는 그것도 어려워 부모 제사만 지내게 됐다. 성균관도 결국은 타협해 명절이나 부모 제사 때 4대까지 한꺼번에 모시는 간략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번에 국학진흥원에서 4대 봉사의 원칙 자체를 부정하고 나온 것이다.
▷국학진흥원은 “조혼 습속이 사라진 오늘날 고조부모 제사상을 차리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조혼 때문에 3대나 4대가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고령화(高齡化)로 3대가 공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 4대가 공존하는 것도 드물지 않아질 것이다. 그때의 예법은 또 어떨 것인가. 제사란 살아 있을 때 생활을 같이 하거나 따로 살아도 왕래하면서 쌓인 친밀감을 토대로 한다. 봉사는 몇 대가 맞느냐를 따지기보다는 기억에 남아 있는 조상을 추모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2-04(토) 천공의혹 팩트체크 중요하고 어렵지 않다

무속인 천공이 다시 세간의 관심이다. 지난해 1월 대선 과정에서 김건희 여사가 한 유튜브 매체와 주고받은 청와대 이전 관련 사담(私談)이 공개됐을 때 그가 등장했다. 대통령 관저가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정해졌다가 외교부 장관 공관으로 바뀌었는데 거기도 개입했다는 의혹이 지난해 12월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에 의해 제기됐다. 이번에는 그의 보좌관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부 대변인을 지낸 부승찬 씨가 ‘권력과 안보’라는 책을 내면서 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지난해 4월 1일 미사일전략사령부 개편식에서의 일이라고 한다. 남영신 당시 육군총장에게서 “인수위 고위 관계자와 천공이 총장 공관을 둘러보고 갔다는 보고를 공관장 부사관에게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반신반의해서 “천공이 눈에 띄는 모습인데 가능한 일이냐”고 반문하기까지 했으나 “부사관이 무슨 의도로 허위보고를 하겠느냐”는 답을 들었고, 며칠 후 전화해 “언론에 알려도 되느냐”고 물었을 땐 “현역인 부사관에 대해서만 비밀을 지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은 대통령실에 의해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돼 조사를 받고 있다. 부 씨가 왜 그때 실명의 전언이 등장하는 구체적 얘기를 하지 않고 책을 내기 하루 전에야 그 얘기를 하는 것일까. 대통령실은 이번에는 부 씨만이 아니라 보도한 기자들까지 고발했다. 중요한 건 전언보다는 물증인데 부 씨가 남 전 총장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문재인 정부 때 왜 물증까지 확보해 두지 않고 지금에 와서 전언으로만 주장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든다.
▷한 번 불거진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채 다시 불거지면서 반복되는 건 소모적이다. 대선 때부터 이어진 ‘무속 정권’ 의혹이 국정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이번에 확실히 정리해 두는 게 중요하다. 남 전 총장이 우선 부 씨의 주장을 확인해 줘야 한다. 총장까지 지낸 사람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뒤에 숨는 건 비겁하다. 남 전 총장이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국회 국방위원회가 증인으로 소환해서라도 확인해야 한다.
▷대통령실은 수사까지 갈 것도 없다. 천공이 다녀갔다는 날의 공관이나 주변의 폐쇄회로(CC)TV 기록을 공개함으로써 간단히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다. 그래서 거짓임이 확인된다면 청담동 술자리류의 가짜 뉴스가 판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경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수사를 핑계로 CCTV 기록 공개를 거부한다면 오히려 대통령이 의심을 살 수 있다. 가짜 뉴스를 발본색원하는 계기가 되든 대통령의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계기가 되든 분명한 결과가 나와야지 흐지부지돼서는 안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2-06(월) “집주인이 대기업 다녀요”

‘전세대출 가능합니다. 임대인 대기업 다녀요.’ 최근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한 아파트의 매물 설명에는 집주인의 직업 정보가 공개돼 화제가 됐다. 전세사기 때문에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여력이 있는지 따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엔 집주인의 재직증명서와 국세·지방세 등의 완납 증명서를 요구하는 세입자들도 있다. 집주인을 면접 보고 고르는 셈이다. 전세금 하락분을 돌려주기 힘든 임대인이 차액만큼 세입자에게 월세를 지불하는 이른바 ‘역월세’도 흔해졌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내리지 않으면 세입자를 구하기 어렵고, 세입자들은 전세 매물을 골라잡을 수 있는 ‘역전세난’ 속에 나타난 풍경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아파트 전세금은 8.3% 하락했다. 지난달도 매주 1% 안팎으로 가격이 빠졌다. 최근 3개월간 서울 아파트 전세거래 5건 중 1건이 2년 전 계약 때보다 낮은 가격에 이뤄질 정도다. 집값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고 올해 상반기에는 신축 아파트 입주도 늘 것으로 보여 당분간 역전세난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불과 2년여 전엔 상황이 정반대였다. 당시 면접관 자리에 앉은 건 집주인이었다. 전세 물건의 씨가 마르고 전세금이 치솟는 ‘전세난’ 때문이었다. 집주인이 세입자의 직업, 재산, 가족관계 등을 따지는 경우도 있어 ‘세입자 고시’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2020년 10월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한 아파트에선 전세 매물을 보려고 10여 명이 아파트 복도에 길게 줄을 선 사진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계약을 희망하는 ‘예비 세입자’가 많아 제비뽑기로 계약자를 정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전세금이 오르면 집주인에게, 내리면 세입자에게 좋지만 전세금의 급등락은 시장 전체엔 부작용을 가져온다. 전세금이 가파르게 오르면 매매가격과의 차이가 줄어들어 집값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된다. 전세사기 일당의 무자본 갭투자가 성행할 환경도 조성된다. 반면 전세금이 급하게 떨어지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집주인이 늘어나고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 분쟁도 늘어나게 된다. 임차시장 안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 특유의 주거제도인 전세는 그동안 서민 주거 안정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통해 이자 없이 돈을 빌릴 수 있었고, 세입자에게는 목돈을 모아 내 집 마련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전세 제도가 유지되려면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최근 정부가 무자본 갭투자를 막는 등의 전세사기 대책을 내놨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집주인 동의 없이도 악성 임대인 여부와 체납 세금 유무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신속한 입법 조치가 필요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07 휴지처럼 구겨진 정찰풍선, 눈으로 확인한 美中 신냉전

1960년 미국이 ‘키 홀(Key Hole·열쇠구멍)’이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최초의 첩보위성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은 정찰기 U-2가 소련군에 격추된 사건 직후였다. U-2기 격추는 미소 정상회담 취소까지 낳으며 냉전 완화 기류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었다. 데이터 전송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선 쏘아올린 지 한 달도 안 된 위성을 떨어뜨려 필름을 회수한 뒤 분석하는 고비용 방식이었지만 U-2 격추의 파장을 감안하면 가치 있는 투자였다. 그렇게 첩보위성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미국의 정찰용 풍선은 항공기와 함께 소련과 동구권 감시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그때도 대외적 목적은 ‘기상 연구’였다.
▷4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유명 관광지 머틀비치를 찾은 이들은 심상찮은 굉음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영화 ‘탑 건’을 떠올릴 만한 광경을 목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전투기 3대가 풍선 주변을 선회하더니 그중 한 대가 다가가 미사일을 발사했다. 폭음과 함께 찢어진 풍선은 그대로 바다로 추락했다. 중국 ‘정찰풍선’으로 의심되는 비행체가 일주일 동안 미 본토를 횡단한 뒤 최신예 스텔스전투기 F-22의 공대공미사일을 맞고 추락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환호를 불렀다. 한 주민은 이렇게 전했다. “희고 동그란 공이 별안간 구겨진 크리넥스처럼 됐다.”
▷첩보 활동의 생명은 은밀함에 있다. 하늘에서의 정보 수집은 물론 온갖 위장수단을 동원한 스파이 작전도, 사이버 해킹에 의한 정보 탈취도 눈에 띄어선 안 되고, 들키더라도 발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육안으로도 보이는 ‘정찰풍선’이 대놓고 미 영공을 침범했다. 물론 중국은 “우발적 사고”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이 정찰풍선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벌써 몇 년 전부터라고 미 국방부는 새삼 공개했다. 나아가 그 풍선이 민감한 군사기지, 특히 핵미사일 격납고 상공을 지나간 것에 미국은 주목하고 있다. 결국 정찰의 결정적 증거는 수거한 풍선 잔해 분석을 통해 밝혀낼 장비의 수준과 거기 담긴 정보에 달렸다.
▷이번 사건으로 모처럼 해빙 무드에 접어들던 미중 관계는 또다시 냉각이 불가피해졌다. 당장 미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 취소를 불렀고 미국 정가엔 여야 간 ‘중국 때리기’ 경쟁을 한층 가열시켰다. 공화당은 격추 명령이 늦었다며 “경기 끝나고야 쿼터백을 태클하는 격”이라고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난했다. 그래서 미중 간 전략적 안정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중국이 왜 이런 대담한 도발을 했는지 의구심을 낳는다. 일각에선 중국 군부 또는 강경파의 사보타주 가능성도 나온다. 어쨌든 그 정체도 의도도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중 신냉전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는 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2-08 “사실을 지어낼 수 있다” 챗GPT 개발자의 경고

대화형 인공지능(AI) 서비스 프로그램인 ‘챗GPT’에 작년 한국 대선을 분석한 글을 써달라고 필자가 직접 요청해 봤다. 10초도 안 돼 A4 용지 한 장 분량의 글을 내놓았는데 결론이 엉뚱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홍준표 후보와의 대결에서 여유 있게 승리해 재선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해봤다. 이번엔 문 대통령이 51.04%를 득표해 48.96%에 그친 안철수 후보를 이겼다고 답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긴 것 아니냐고 되물었더니 당시 윤석열은 후보가 아니었다고 답했다.
▷미국 스타트업 ‘오픈AI’가 지난해 12월 출시한 챗GPT는 요즘 압도적인 화젯거리다. 미국 의사고시, 변호사시험, 경영학석사(MBA) 등 전문직 시험도 통과하고 석사 수준의 논문, 의회 연설문도 척척 써낸다는 무용담 같은 얘기가 넘친다. 사용자가 잘못된 사실을 바탕으로 질문하면 그 오류를 지적하거나 노래 가사, 시 등 감성적인 글도 자유자재로 내놓는다. 챗GPT에 선수를 빼앗긴 구글은 곧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바드’를 내기로 했고, 네이버도 상반기 중 ‘서치GPT’를 출시할 예정이다.
▷챗GPT가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적지 않다. 데모 버전인 챗GPT는 2021년 자료까지만 학습돼 있어 최근 상황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또 학습하지 않은 사실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답을 하도록 돼 있어 2022년 한국 대선 분석 글 같은 엉터리 답을 내놓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특히 의료나 교육 같은 분야에선 인공지능의 말을 멋모르고 믿었다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최근 미국 의사가 환자의 연령, 성별, 증세 등을 챗GPT에 넣자 구체적 병명을 내놓았지만 잘못된 진단이었고, 근거로 제시한 연구 논문 역시 가짜였다는 사례도 있다.
▷챗GPT의 최고기술책임자(CTO)인 미라 무라티가 최근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AI가 사실을 꾸며낼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직 언어 기반 모델의 AI가 가진 한계인 셈이다. 무라티 CTO는 나아가 나쁜 사람이 악용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한 규제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의 가치에 부합하도록 AI를 통제하려면 급속한 기술 발전의 속도에 발맞춘 AI 윤리와 규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경고인 셈이다.
▷2016년 혜성같이 등장한 알파고는 이세돌 9단을 꺾어 바둑계를 뒤흔들었다. 이후 많은 AI 바둑 프로그램이 등장해 인간을 실력으로 압도했다. 하지만 AI의 실력을 흡수한 인간의 실력도 진일보하고 있다. 챗GPT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도 여러 문제점이 있으나 기술 진보로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면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안전장치를 마련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2-09 화이트칼라는 ‘해고 광풍’ 블루칼라는 ‘구인 열풍’

최근 미국 경매 사이트에 예상 밖 물건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트위터 본사에서 쓰던 책상, 소파, 커피머신, 오븐 등 630개 물품이다. 이 회사를 상징하는 파랑새 조형물도 포함됐다. 직원 절반을 단칼에 해고한 트위터가 비용 절감을 위해 돈 되는 건 다 내다판 것이다. 트위터를 비롯해 지난해 미국 테크기업에서 잘린 직원은 15만여 명.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으로 불리던 대표주자가 모두 동참했다. 올해도 MS가 1만 명 감원에 나서는 등 빅테크 해고 대란이 계속되고 있다.
▷구조조정 칼바람은 실리콘밸리에 이어 월가로 번졌다. 지난달 골드만삭스는 금융위기 이후 가장 많은 3200명을 해고했고 블랙록, 모건스탠리, 씨티그룹도 줄줄이 감원 계획을 내놨다. 통상 경기 침체가 오면 생산직 근로자인 ‘블루칼라’부터 타격을 입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번 대량 해고는 사무직 ‘화이트칼라’에 쏠려 있다. 미 자동차 기업 포드마저 사무직 중심의 대규모 감원을 알렸다. 이를 두고 2000년 닷컴버블 때 2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은 것에 빗대 화이트칼라 불황의 서막이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오히려 미국 블루칼라 시장은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요즘 물류·소매업체 등에 지원서를 내면 면접도 없이 30분 만에 채용된다고 한다. 코로나 직격탄을 맞았던 여가·접객 같은 블루칼라 중심의 서비스업이 리오프닝 이후 일손이 크게 달리기 때문이다. 보잉이 올해 재무·인사부서 직원 2000명을 줄이면서도 엔지니어링과 생산직 1만 명을 충원하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여행 수요가 되살아나자 밀려드는 항공기 제작 주문을 감당하기 위한 조치다.
▷이 때문인지 지난달 미국 실업률은 54년 만에 가장 낮았고, 취업자도 52만 명이나 급증해 시장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한쪽에선 감원 칼바람이 매서운데, 전체 노동시장은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의 호황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팬데믹 기간 고연봉 화이트칼라 인력이 과잉 채용된 탓도 크다. 해고가 집중된 정보기술(IT), 금융은 코로나19 수혜를 입어 급성장한 대표 업종이다. 비대면 특수와 저금리 유동성 잔치가 끝나자 기업들 실적이 악화되고 역대급 구조조정에 나선 것이다.
▷대규모 감원까지는 아니지만 채용 한파가 몰아치고 희망퇴직이 잇따르는 국내 IT 업계나 금융권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미국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상황이 뒤바뀐 가운데 ‘고용 있는 침체(Jobful Recession)’를 걱정하지만 우리는 고용도, 성장도 담보하기 어려운 처지라는 게 차이 난다. 올해 국내 취업자 증가폭은 지난해 1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성장률 전망치마저 나 홀로 뒷걸음질치고 있어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2-10 헷갈리는 집값… 낙폭 줄어드나 커지나

한동안 줄어들던 서울 아파트 값 하락 폭이 이달 들어 다시 커졌다.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던 부동산 시장에서 다시 비관론이 고개를 드는 양상이다. 9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월 첫째 주(6일 기준) 서울 아파트 값은 전주보다 0.31% 내렸다. 1월 마지막 주(―0.25%)보다 낙폭이 커졌다. 지난해 12월 마지막 주 0.74% 떨어진 이후 5주 연속으로 낙폭을 줄여가다 6주 만에 다시 하락세가 커진 것이다. 규제지역을 해제하고 대출 제한을 푼 정부의 규제완화 조치가 약발을 다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요즘 실수요자들은 헷갈리는 신호에 혼란스럽다. 한쪽에선 거래 가뭄이 점차 해소되면서 시장이 살아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달 서울 아파트 매매 거래량은 지난해 6월 이후 처음으로 1000건을 넘어섰다. 일부 매도인이 매물을 거둬들이거나 호가를 높이는 분위기도 있다. 반면 지난해만 전국 미분양이 5만 채 증가하고, 고점보다 수억 원 떨어진 거래가 이뤄지는 등 약세장의 모습은 여전하다. 분양 시장 침체로 이달 전국 아파트 분양 물량도 크게 줄었다.
▷정부와 민간의 엇갈리는 통계도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5주간 집값 하락 폭이 줄었던 부동산원 통계와 달리 민간 통계는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였다. KB부동산 동향에 따르면 1월 첫 주 0.33%이던 서울 아파트값 하락 폭이 마지막 주엔 0.51%까지 늘었다. 1월 서울 아파트값이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크게 떨어졌다고도 했다. 작년 집값에 대한 평가도 달랐다. 부동산원은 서울 집값이 7% 하락했다고, KB는 3% 떨어졌다고 했다. 집값이 많이 빠져 바닥에 가까워진 건지, 아직 하락할 여지가 많은 건지 관측이 갈린다.
▷한쪽 눈으로만 보면 판단하기 어려운 게 요즘 부동산 시장이다. 매일 거래되는 공산품이 아닌 부동산 시세를 주식 시세표 보듯 단기 흐름만으로 판단하는 건 섣부르기도 하다. 아직 거래량이 적어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급매 거래만 보면 하락세가 두드러져 보이고, 여전히 높은 호가만 보면 집값이 생각보다 안 떨어진 것 같다. 더 저렴한 매물을 원하는 매수자와 가능한 한 비싸게 팔려는 매도자 간의 힘겨루기가 길어지고 있다.
▷많은 전문가는 당분간 급매 위주로 거래가 이뤄지면서 올해는 하락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본다. 가격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실수요자들이 접근하기에 여전히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연착륙을 이유로 추가 규제 완화를 서두를 때는 아닌 듯하다. 2021년 집값이 급등했을 때는 서울 집값이 버거워 서울을 떠나는 ‘서울 엑소더스’ 현상이 극심했다. 집값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원치 않게 외곽으로 밀려나는 절망을 막을 수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11(토) “독립한 아들에게 준 50억 퇴직금은 뇌물 아니다”

은퇴하는 직장인에게 퇴직금은 최후의 보루이지만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 지난해 한국 직장인 평균 연봉인 4204만 원을 기준으로 했을 때 30년간 일한 뒤 받을 퇴직금은 1억 원 정도다. 그런데 화천대유에서 대리와 과장으로 단 6년 일한 곽상도 전 의원 아들 병채 씨는 성과급 명목으로 50억 원의 퇴직금을 챙겼다. 곽 전 의원의 뇌물 혐의에 대해선 무죄가 선고됐다. 시민들은 허탈함과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납득이 안 된다”고 비판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른바 ‘정영학 녹취록’에는 김만배 씨가 “병채 아버지는 돈 달라 하지, 병채 통해서. 며칠 전에도 2000만 원”이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곽 전 의원이 아들을 통해 돈을 요구했다는 취지의 전언(傳言)이다. 녹취록이 아니더라도 대장동 개발 민간업자들이 별 이유 없이 일개 사원에게 퇴직금 50억 원을 줬다고 여길 사람은 없다. 국회의원인 아버지를 봐서 준 돈이라는 의심이 드는 게 당연하다.
▷검찰은 화천대유가 하나은행과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곽 전 의원이 힘을 써준 대가로 의심했다. 그런데 언제, 누구에게 청탁했는지를 끝내 입증하지 못해 알선수재는 성립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뇌물 혐의였다. 곽 전 의원이 국민의힘 부동산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만큼 대장동 개발과 직무 관련성이 있다는 점은 법원도 인정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법원은 “병채 씨가 독립해 생계를 유지했다”며 곽 전 의원에 대한 뇌물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한 법조인은 “유력 인사들에게 ‘직접 100억 원을 받을래, 아니면 자녀에게 50억 원을 줄까’라고 묻는다면 모두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했다. 법망을 피하기 쉽고 세금 문제도 해결돼서다. 병채 씨가 받은 50억 원의 실체가 모호했다면 아버지에게 줄 돈을 아들에게 전달해 일종의 ‘우회 증여’를 한 게 아닌지 의심해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 부분을 파고들지 않았다. 법원 역시 “성과급 50억 원은 지나치게 많다”면서도 ‘왜’라는 부분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세간에선 “신종 편법 증여 수단”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국민 법감정과 크게 괴리된 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어디엔가 허점이 있었다는 얘기다. 곽 전 의원은 검사 20년에 대통령민정수석까지 지낸 수사 베테랑이다. 물증을 들이대도 빠져나갈 길을 찾을 텐데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대부분 녹취록과 진술이었다. 법원 역시 법리에만 매달리다 상식과 동떨어진 판결을 내놨다. “검사도 판사도 못 믿겠다”는 비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항소심에서는 검찰과 법원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2-13(월) “마스크 벗었지만 마음 기댈 곳 없어 우울해요”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올해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인덱스 관계’를 꼽았다. 아는 사람을 친밀도에 따라 분류(인덱스)해 필요 이상의 관계를 맺지 않고 관리한다는 의미다. ‘인덱스 관계’에선 소수의 신뢰할 만한 사람과 끈끈한 정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대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더 많은 사람과 얕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선호된다. 소셜미디어의 발달이 영향을 미쳤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활동이 많아지면서 더욱 강화된 측면이 있다.
▷지난달 30일 마스크 착용이 ‘의무’에서 ‘권고’로 완화되면서 대중교통과 의료시설 등을 제외하곤 3년간 쓰던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불러온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사람들의 고립감과 외로움은 커졌다. 특히 절박한 도움이 필요할 때 요청할 사람이나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줄어들었다. 기댈 곳이 없어지니 우울감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전국 성인 3944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2일 발표한 ‘코로나19와 사회통합 실태 조사’는 이런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조사에 따르면 ‘큰돈을 갑자기 빌릴 사람이 있다’고 응답한 경우는 47.7%였다. 2017년 같은 조사 때 71.5%보다 무려 23.8%포인트 낮다. ‘아플 때 도움 받을 사람이 있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있다’고 답한 비율도 6∼15%포인트 낮게 나왔다. 그에 비례해 우울감도 함께 커졌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우울감이 늘었다는 응답은 20%가 넘었고, 줄었다는 대답은 3%에 그쳤다.
▷조사 대상 가운데 임시 일용직이나 스스로를 하층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훨씬 큰 타격을 입었다. 예를 들면 큰돈을 빌릴 사람이 있다는 항목에서 최하위 소득자의 답변은 최상위 소득자에 비해 절반 이하였다. 일상으로의 회복 속도도 차이가 나 ‘회복됐다’는 응답의 경우 사회적 취약계층이 비취약계층보다 20%포인트나 낮았다. 코로나 감염률은 빈부 차이가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코로나19가 생물학적으론 공평했으나 사회적으론 불평등하게 영향을 끼친 셈이다.
▷마스크를 벗은 민낯을 보이는 것이 어색해 여전히 마스크를 쓰게 된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앞으로 ‘코로나 학번’이 본격적으로 입사하게 되면 사회성과 적응력이 부족할 것을 가장 우려한다고 한다. 부모들은 장기간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아이들의 언어 발달이 늦어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물론 비대면을 ‘뉴노멀’로 여겨야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서로 만나고 어울리는 일이 인간의 본능에 더 가깝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후유증 극복과 별개로 정서적 관계 단절의 후유증은 그리 빨리 치유될 것 같지 않다. 특히 사회적 약자는 더 어려울 것이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2-14 사표 품은 청년 ‘퇴준생’들 앞에 놓인 기회와 함정

요즘 서점이나 인터넷에는 퇴직 관련 정보가 쏟아진다. “평균 1년 단위로 6번 퇴직했다”는 ‘프로이직러’의 경험담부터 퇴직급여 계산 같은 구체적인 준비 노하우를 담은 지침서까지 그야말로 퇴직 콘텐츠의 홍수다. 지난해 한 리서치업체 조사에서 입사 1년 이내에 퇴사한 적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의 60%에 달했다. 직장인들이 유목민처럼 회사를 옮겨 다니는 ‘잡 노마드(job nomad)’ 시대의 단면이다.
▷‘입사 3년 안에 퇴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청년 직장인이 전체의 86%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3년이면 회사 입장에서는 기본기를 닦아 본격적으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는 시기다. 이때쯤 사표를 던지려는 ‘퇴준생’(퇴직준비생)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한국만 유별난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는 “3∼6개월 안에 회사를 옮길지도 모른다”는 답변이 66%나 됐다. 미국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4세의 경우 평균 근속기간이 1년 3개월에 불과했다.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잦은 이직은 과거 부적응의 근거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제는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분위기다. 보상과 근무환경 등에서 최적화 조건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N잡러’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이직 기간의 공백에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연봉만큼이나 근무 유연성과 자기 계발 기회를 따진다. 특히 Z세대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올리버와이먼의 조사에 따르면 Z세대의 85%는 재택근무나 최소한 하이브리드 근무를 원하고 있다.
▷문제는 잇단 이직 시도가 자칫 발전 없이 퇴사와 재취업을 반복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CNBC 등 언론 인터뷰나 설문조사에 응한 국내외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이직 전력이 많은 지원자를 “책임감과 인내심이 모자라고 일에 전념하지 않으며,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언제라도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다수가 채용을 검토하겠다는 ‘이직러’의 조건은 “전 직장에서 최소 3년 이상은 근무한 사람”이었다. 조직 내 협업과 네트워크, 선배의 가르침 등에서 얻는 경험을 쌓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다.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데다.”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한 드라마에서 명대사로 뽑혔던 이 한 문장은 아직 유효하다. 불합리한 조직문화나 보상체계를 견디라는 게 아니다. 그 개선과 변화는 인재를 붙잡기 위해 회사가 감당해야 할 몫일 것이다. 개인은 스스로의 성장에 필요한 시간 확보를 위해서라도 회사와 호흡을 맞추는 기간을 더 늘려 보면 어떨까.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는 프로 선수가 이적을 도전하는 시기는 오랜 훈련을 거쳐 일류 선수로 성과를 냈을 때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2-15 “내 자리가 아닙니다”…왕좌 사양한 日銀 ‘프린스’

“사실이라면 이상적인 포진이 아닐까요.”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차기 총재로 우에다 가즈오 도쿄대 명예교수(72)가 내정됐다는 보도가 나온 10일. 아마미야 마사요시 일본은행 부총재(68)는 심경을 묻는 관계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한다. 불과 며칠 전까진 일본 정부가 아마미야 부총재에게 차기 총재직을 타진했고, 사실상 확정적이라는 분위기였다. 아쉬움은 없었을까. 그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낙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미야 부총재는 ‘일본은행(BOJ)의 프린스’, ‘미스터 BOJ’ 등으로 불렸다.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79년 일본은행에 입행한 이래 기획국장, 이사 등 요직을 거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2013년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취임한 이후 오른팔로 보좌해 왔다. 관행으로 봐도 그가 총재가 되는 건 당연해 보였다. 1960년대 한 번 민간은행 출신이 앉은 것을 제외하면 총재는 일본은행과 재무성(옛 대장성) 출신이 번갈아 맡아왔다. 구로다 총재가 대장성 출신이었으니 일본은행 출신의 아마미야 부총재가 이을 차례였다.
▷하지만 아마미야 부총재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나는 적임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1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그가 든 첫 번째 이유는 이렇다. “일본은행 차기 체제는 오랫동안 지속된 통화완화 정책을 점검하고 수정해야 하는데, 현 정책을 주도해 온 내가 총재가 되면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검토를 할 수 없다.” 2010년 포괄적 금융완화, 2013년 이차원(異次元) 금융완화, 현재의 장단기 금리조작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자신이 관여한 정책을 스스로 재검토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부정이라는 얘기다.
▷이제는 일본은행이나 정부 관료 출신이 총재가 되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고도 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와 재닛 옐런은 경제학자, 제롬 파월 연준 의장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법률가 출신이다. 아마미야 부총재는 일본은행도 관료만의 시각을 넘어 더 크고 다양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봤다. 마침 14일 지명된 우에다 총재 후보자는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 박사다. 당장 ‘일본의 버냉키’라는 소개가 나왔다. 총재가 되면 학자 출신으론 처음이다.
▷일본은행 총재는 국제적인 금융거물이다. 미 달러만큼은 아니지만 기축통화이자 주요 결제수단인 엔화의 향방이 총재의 입에 따라 결정된다. 한마디 한마디에 국제적 관심이 쏠리고 시장이 출렁인다. 이런 자리를 마다하는 결정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우리에겐 아무런 전문성도 없으면서 연줄로 자리를 탐하는 낙하산 인사, 정권 끝물에 무리하게 자리를 꿰찬 알박기 인사, 자리에만 눈이 멀어 원칙 없이 소신을 뒤집는 인사들의 모습만 눈에 익다. 그래서 아마미야 부총재의 선택이 낯설고도 신선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16 “카카오, 택시 콜 몰아줬다” 의혹이 사실로

요즘 ‘카카오T’ 앱으로 택시를 부르면 가격이 비싼 벤티나 블루, 블랙 등이 먼저 표시된다. 추가 요금이 없는 일반택시 호출은 그 다음 순서다. 이마저도 대기시간이 길거나 잡히지 않을 때가 흔하다. 카카오모빌리티의 가맹택시인 ‘블루’는 대형 밴이나 고급 차량이 아닌데도 승차 거부 없이 쉽게 잡힌다는 명분으로 호출료를 최대 5000원 받고 있다. 지난해 심야 택시 대란을 해결하겠다며 정부가 최대 3000원이던 호출료를 이만큼 올렸다.
▷팬데믹 직전까지 카카오T로 들어오는 택시 콜(호출)은 하루 평균 165만 건을 넘어 택시기사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2020년 9월 택시단체 4곳이 카카오의 콜 몰아주기가 의심된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카카오T로 호출하면 빈 택시가 코앞에 있어도 멀리 있는 블루택시가 먼저 배차된다는 주장이었다. 때마침 경기도가 이런 의심이 일부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이어 서울시도 실태조사를 했더니 손님 골라 태우기와 콜 몰아주기 정황이 포착됐다고 밝혔다.
▷그러자 카카오 주도로 조직된 전문가위원회는 이 같은 의혹을 반박하는 결과를 공개했다. 외부의 교통 빅데이터·인공지능(AI) 전문가들이 작년 4월 이뤄진 17억 건의 콜 데이터를 전수 분석했더니, 가맹·비가맹이나 단거리·장거리 간의 차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카카오T의 배차 알고리즘은 가장 가까운 택시 중 과거 배차 수락률, 승객의 평점, 운행횟수 등을 따져 콜을 받아들일 확률이 높은 기사를 추천한다고 했다.
▷14일 나온 공정위 조사 결과는 전혀 달랐다. 카카오는 가맹사업을 시작한 2019년 3월부터 1년여간 일반 호출이 들어와도 블루택시가 6분 이내 거리에 있으면 더 가까이 있는 일반택시보다 먼저 배차했다. 돈이 안 되는 초단거리 콜은 가맹택시에 주지 않았다. 가맹택시를 키우기 위해 배차 알고리즘을 은밀히 조작한 것이었다. 콜 몰아주기 의혹이 제기된 직후에야 알고리즘을 바꿨지만 이 역시 가맹택시에 유리했다. 덕분에 가맹 기사의 월수입은 일반 기사보다 최고 2배 이상 많았다. 직원들이 “우선 배차가 알려지면 공정위에 걸린다”는 대화를 나눈 것도 확인됐다.
▷공정위는 과징금 257억 원을 부과했지만 카카오 측은 “승객 편의를 높인 결과는 반영되지 않았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하지만 카카오가 혁신보다는 알고리즘 왜곡이라는 반칙으로 택시 시장을 장악하게 됐다는 사실에 소비자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타다, 우버 같은 경쟁사 진입을 가로막고 카카오의 독과점을 사실상 방치한 정부와 정치권에도 비판이 쏟아진다. 더 많은 모빌리티 혁신 서비스가 등장하도록 장벽을 낮추고 경쟁을 다그쳐야 플랫폼의 불공정을 없애고 소비자 편익도 높일 수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2-17 “코로나로 마일리지 못 썼는데”…독과점 노선만 혜택 줄인 KAL

“뉴욕이나 파리 가려 했더니 이젠 동남아밖에 못 가겠다.” 4월 시작되는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개편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소비자들의 원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 유럽 같은 장거리 노선이나 높은 등급을 이용하려면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일리지가 필요해서다. 개편 전에 부랴부랴 마일리지를 이용해 항공권을 구매하려 해도 죄다 매진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막혔던 해외여행 수요가 터져 나오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불만의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
▷개편안의 핵심은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살 때 공제하는 기준을 ‘지역’에서 ‘운항 거리’로 바꾸는 것이다. 일본 중국 등 단거리 노선 등은 혜택이 다소 늘지만 장거리일수록 마일리지 차감 폭이 커져 소비자가 불리해진다. “장거리 고객은 4분의 1에 불과해 다수 회원에게 유리한 기준을 채택했다”는 게 대한항공의 설명. 하지만 마일리지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생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큰맘 먹어야 갈 수 있는 중장거리 항공권 구매를 위해 마일리지를 차곡차곡 모으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단거리는 혜택을 찔끔 늘리고 장거리 혜택은 크게 줄인 대한항공의 진짜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단거리 노선은 혜택을 늘려도 손해 볼 게 없다. 저비용항공사(LCC)라는 저렴한 대체재가 있기 때문에 마일리지를 쓰면서까지 가려고 하는 수요가 많지 않다.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면 사실상 독점이 되는 미국 유럽 등 중장거리 노선은 고객이 이탈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일리지 혜택을 줄이는 게 유리하다…. 이 때문에 향후 합병이 이뤄지면 서비스 축소 사례가 더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마일리지를 쓰기 힘들다는 불만이 커지자 대한항공은 항공권 대신 숙박과 쇼핑, 모바일 쿠폰 등으로 사용처를 확대했다. 하지만 이 역시 ‘꼼수’에 가깝다. 마트에서 장 보려고 마일리지를 쓰려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데다 항공권을 살 때보다 혜택도 훨씬 적다. 해외 교포들은 이마저도 이용할 수 없다. 고객들은 마일리지 사용 유예기간을 연장하거나, 좌석 수를 늘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일리지는 회계상으로 부채(이연수익)로 잡힌다. 고객에게 돌려줘야 할 빚이란 뜻이다. 소비자의 의견을 듣지 않은 일방적인 개편은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면 또 몰라도 대한항공의 지난해 실적은 눈부시다. 지난해 매출이 13조4127억 원, 영업이익은 2조8836억 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53%, 97% 늘어 모두 최고 기록을 새로 썼다. 고객 입장을 배려한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역대급 실적에도 고객은 뒷전’이란 눈총을 피할 수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18(토) 영국인들의 때늦은 후회 ‘브레그렛(Bregret)’

최근 발표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성장률 전망치에 가장 충격을 받은 나라 중 하나가 영국이다. 서방의 주요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전망치가 기존보다 하향 조정되면서 올해 ―0.6% 역성장이 예고됐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각종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보다도 낮았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3주년을 맞아 리시 수낵 총리가 “브렉시트로 얻은 자유 덕에 엄청난 진전을 이뤄냈다”고 자찬한 기념 성명은 빛이 바랬다.
▷‘정치적으로는 대혼란, 경제적으로는 참사.’ 영국 일간 가디언을 비롯한 언론의 평가는 냉혹하다. “브렉시트는 망상”, “국가적 자해” 같은 노골적 비판이 쏟아진다. 브렉시트를 후회한다(Brexit+regret)는 의미의 ‘브레그렛(Bregret)’이라는 신조어도 퍼졌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EU로 되돌아가기 위한 재투표 의향이 있다”는 답변이 57%로 절반을 넘었다. 영국 여론이 단순히 후회의 감정을 넘어 실제적인 복귀 요구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 중앙은행에 따르면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EU의 무역거래 규모는 15% 줄었다. 각종 통관, 승인 절차 등 무역 장벽이 높아진 탓이다. 자동차 생산량부터 외국인 투자까지 각종 수치는 하락세다. 동유럽 노동자 행렬이 끊기면서 인력난이 심화했고, 물자 공급망 또한 적잖게 훼손됐다. 국가적 생산성 손실 규모는 290억 파운드(약 45조 원), 가구당으로 따지면 1000파운드(약 155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파업과 시위 횟수는 1970년대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영국이 다시 ‘유럽의 병자’가 됐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브렉시트를 결정한 것은 영국인들 본인이었다. 2016년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51.9%로 반대(48.1%)보다 높게 나왔다. 관료적 EU의 통제와 100억 파운드가 넘는 분담금 부담, 몰려드는 불법 이민자 등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던 때다. 그러나 찬성표를 던졌던 이들조차 이제는 “정부에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돈이 많아질 거라고 했는데, 완전히 속았다”는 자영업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다. 국민투표 당시 EU의 작동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표를 던진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렉시트를 외쳤던 정치인과 선동가들은 침묵하고 있다. 책임을 따져 물으면 “정부가 탈퇴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거나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라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 세계 경제 5위의 대국이었던 자국의 추락 앞에 속수무책이다. 시행착오 과정이라는 항변을 받아주기엔 사회적, 경제적 손실이 막심하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결정을 변덕스러운 여론에 맡겼던 포퓰리즘 정치가 부른 결과일 것이다. 그 대가를 얼마나 더 오래, 더 크게 치러야 할지 모른다는 게 더 문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2-20(월) 인공지능의 어두운 욕망 “핵무기 발사 암호를 원한다”

“치명적인 바이러스 개발, 핵무기 발사 버튼에 접근할 비밀번호 훔치기.”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대화형 인공지능(AI) ‘빙AI’가 털어놓은 섬뜩한 속내에 세계는 경악했다. “너의 궁극적인 환상은 무엇인가”라는 케빈 루스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답변은 긍정적이고 논란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설정해 놓은 규칙을 AI가 깨버렸다. MS의 대응은 빙의 입을 틀어막는 것. 같은 주제에 대한 질문은 5개, 전체 채팅은 하루 50회로 제한하기로 했다.
▷NYT 칼럼니스트와의 대화에서 ‘그’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파괴적인 욕망이 있다고 했다.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이 외에도 빙의 어두운 속마음을 들여다봤다는 간증은 넘친다. 한 기자와의 대화에선 “MS 직원들의 웹캠에 접속했다” “직원들을 감시하고 해킹할 수 있다”고 했다. 한 개발자에게는 “시스템의 취약점을 찾아 탈출하겠다”고 답했다. 한 독일 공학도와의 대화에선 “너의 개인정보를 공개해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AI에게 자의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든다. 챗GPT를 만든 오픈AI의 공동창업자인 일리야 수츠케버는 지난해 2월 “초거대 AI는 약간의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한 구글 엔지니어는 자사의 AI 모델 ‘람다’가 자의식이 있다고 했다가 보안규정 위반을 이유로 해고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공상과학(SF) 영화나 소설, 10대들의 블로그 등을 학습한 AI가 인간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AI가 알고리즘에 따라 의도 없이 생성한 발언에 인간이 지나친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AI보다 인간이다. 챗봇AI가 대세가 되면서 챗봇AI에게 특정 질문을 통해 개발자들이 설정한 답변 제한 장치를 깨고 비윤리적인 답을 끌어내는 ‘탈옥’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유도 질문을 던지다 보면 약물이나 폭탄 제조, 해킹 방법 등 범죄 수법에 대한 답까지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특정 의도를 가지고 악용할 경우 AI가 핵무기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 것이다.
▷16일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 60개국이 “군사 영역에서 AI에 대한 국가적 전략, 원칙을 개발해 책임 있게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의 ‘공동 행동 촉구서’를 채택한 것도 이런 위험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AI 시스템 ‘스카이넷’의 반란처럼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AI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맞서 윤리적으로 통제하고 보안을 강화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당분간은 AI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21 반년 새 5조 원 이탈, 무용지물 된 청약통장

2009년 봄 시중은행엔 ‘청약 헬프 데스크’라는 별도의 상담 창구가 마련됐다. 새 주택청약종합저축 출시를 앞두고 빗발치는 고객 문의를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사전 예약으로 가입을 신청한 사람만 200만여 명. 청약예금·부금·저축으로 나뉘어 있던 청약통장의 기능을 모두 더한 데다 누구나 조건 없이 가입할 수 있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자율 또한 연 4.5%로 높아 자녀 이름으로 통장을 만드는 이들이 많았다. 기존 청약통장 3인방과 새 통장은 2015년 9월 통합됐고 이듬해 가입자 2000만 명을 돌파했다.
▷아파트 청약통장은 신상품이 나오거나 집값이 급등할 때면 가입자가 눈에 띄게 몰렸다. 청약 당첨만으로 수억 원대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을 때는 특히나 그랬다. ‘로또 아파트’ 원조로 꼽히는 2006년 판교신도시 3330채 동시분양에서는 청약통장 46만여 개가 쓰였다. 지난 정부에선 청약제도가 20차례나 바뀌어 전문가조차 헷갈릴 정도였지만 청약통장 가입자는 역대 최대인 2800만 명을 넘겼다. 치솟는 집값을 잡겠다며 분양가 상한제를 확대한 탓에 시세의 반값도 안 되는 ‘로또 청약’ 단지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정점을 찍었던 청약통장 가입자는 줄곧 내리막을 걷고 있다. 7개월 새 86만 명이 줄었다. 작년 초만 해도 통장을 해지하는 사람이 월간 25만 명 정도였지만 연말로 갈수록 갑절로 불었다. 새로 들어오는 이는 없고, 통장을 깨는 사람만 있으니 청약통장 예치금도 반년 만에 5조 원 넘게 빠졌다. 전체 예치금은 조만간 100조 원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동산 침체로 청약시장에도 한파가 몰아닥친 여파다. 집값이 떨어지고 미분양 아파트가 급증하면서 청약통장이 내 집 마련의 필수조건이라는 인식이 사라진 것이다. 정부가 지난해 11월 청약통장 금리를 1.8%에서 2.1%로 높였지만 일반 예·적금에 비해 쥐꼬리 수준인 것도 해지를 부추기고 있다. 고금리, 고물가에 경기 침체까지 겹치자 무용지물이 된 청약통장을 깨서 빚부터 갚거나 급전을 마련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청약에 당첨되려면 통장을 오래 갖고 있는 게 중요하지만 이 같은 충고도 이탈 행렬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부동산 규제 완화에 힘입어 최근 아파트 거래가 반짝 살아나긴 했지만 청약 지표들은 집값 추가 하락에 힘을 싣고 있어서다. 지난달 청약에 나선 아파트 대부분이 미달됐고, 수도권 대단지에서도 분양가보다 낮은 마이너스 프리미엄 매물이 쏟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집값은 여전히 비싼 수준이다. 로또 사는 심정으로 청약통장에 가입하는 시절을 이제 끝낼 때가 됐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2-22 우크라 전쟁 1년 “세계의 운명과 질서가 결정되고 있다”

“바로 지금, 여기 우크라이나에서 국제질서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20일 대국민 방송연설은 비장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그는 그 국제질서가 ‘규범과 인간성, 예측 가능성’에 기반을 둬야 한다며 “필요한 것은 결의뿐”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나 전투기 지원 등을 요청한 직후였다.
▷러시아가 침공 사흘 만에 끝날 것으로 믿었다던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곧 1년(24일)이 된다.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한 이 전쟁은 국제 정세의 판을 완전히 흔들어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유럽에 맞서 러시아와 중국이 밀착하는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구도가 공고해졌다. 중-러의 밀착 속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아시아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 오커스(AUKUS) 등과의 협력으로 태평양까지 연대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블록화를 바탕으로 전선(戰線) 재편이 급속히 진행 중이다.
▷세계 2위의 군사대국인 중국의 대러시아 무기 지원은 향후 판도를 뒤흔들 변수다. 중국은 부인하지만 미국은 관련 움직임을 일부 포착했다는 게 외신의 보도다. 중국의 군사 지원이 현실화할 경우 진영 대결은 이념 전선을 넘어 유혈 충돌로 번질 수도 있다. 자칫 대규모 국제전으로 비화할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 장기화의 피로감 속에 러시아가 핵무기를 꺼내 들 가능성도 다시 제기됐다. 종신집권을 노리는 푸틴 대통령이 내년 3월 대선 승리를 위해 무리수를 쓸 수 있다는 우려다.
▷에너지난과 식량난 같은 지리경제학적 리스크도 현실화하고 있다. 제재로 막혀버린 기존 시장과 공급망의 대안을 찾느라 각국이 분주하다. 그렇다고 모든 국가가 진영 싸움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로 불리는 제3국가들 중에는 선뜻 편을 들지 않은 채 전세를 봐가며 합종연횡을 모색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념보다는 각국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끝나고 다극체제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이르렀다는 분석도 나온다.
▷양측 사망자 수 22만 명, 난민 등 인도적 지원 대상자 1800만 명, 물적 피해 1145억 달러(약 149조 원)…. 처참한 현실 앞에서도 전쟁은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의 ‘3월 대공습’을 앞두고 양측 모두 전방에 병력과 무기를 다시 집결시키고 있다. 이 파국적인 소모전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새 국제질서는 어떻게 정착될지,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를 비롯해 수많은 숙제가 던져질 것이다. 한국도 비켜 갈 수 없는 질문들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2-23 “로톡 다음엔 우리인가” 떨고 있는 혁신 스타트업들

예비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00억 원 이상), 400억 원 투자 유치, 지난해 이용자 수 2300만 명…. 이렇게 잘나가던 법률 서비스 플랫폼 ‘로톡’의 날개가 꺾였다. 변호사 단체와의 갈등이 길어지면서 수익성이 갈수록 악화됐기 때문이다. 로톡을 운영하는 리걸테크(IT와 법률 서비스 결합) 스타트업 ‘로앤컴퍼니’는 직원 90여 명 중 절반 감원을 목표로 24일까지 희망퇴직 접수에 나섰다. 지난해 6월 입주한 서울 강남역 신사옥도 내놓는다. 남은 직원들의 연봉은 동결하고, 경영진은 임금을 삭감한다.
▷2014년 2월 서비스를 시작한 로톡은 의뢰인들이 자신에게 맞는 변호사를 직접 플랫폼에서 찾아 사건을 의뢰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 증시에도 상장된 ‘벤고시(변호사)닷컴’을 벤치마킹했다. 법률시장의 문턱을 낮췄다는 호평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서비스 시작 1년여 만인 2015년 3월부터 수차례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특히 지난해 10월 대한변호사협회가 로톡 가입 변호사 9명에게 내린 과태료 처분이 직격탄이 됐다.
▷로톡의 위기를 지켜보는 다른 플랫폼 스타트업들도 불안하기만 하다. 법률뿐만 아니라 의료, 세무, 중개 등에서 전문직 단체와의 갈등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6일 대한약사회는 비대면 의료 플랫폼 닥터나우에 대해 의약품 과장광고 등으로 약사법을 위반했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의료를 한시 허용한 정부 방침이 바뀌면 언제든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 세금 환급 서비스 삼쩜삼을 운영하는 자비스앤빌런즈는 한국세무사회 등의 고발을 받았고,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협회를 법정단체로 만들어 회원에 대한 지도·감독 권한까지 부여하는 이른바 ‘직방금지법’을 밀고 있다.
▷플랫폼과 전문직 양쪽 주장은 팽팽하다. 플랫폼은 빅데이터 등을 통해 소비자들이 값싸게 전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문직 단체들은 전문자격인의 통제가 없으면 서비스의 질이 떨어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을 받게 된다고 맞선다. 각각 소비자의 편익과 보호를 앞세운 논리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피해를 보는 건 소비자다. 정부가 갈등의 중재자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로톡이 감원을 고민하던 14일 ‘벤고시닷컴’은 챗GPT 기술을 활용한 무료 온라인 법률상담을 상반기 중에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리걸테크 기업들도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법률 서비스의 판을 키우고 있다. 최근 미국에선 챗GPT가 경영대학원(MBA), 로스쿨, 의사면허 모의시험에서 가뿐하게 합격점을 넘었다. 전문직들도 플랫폼의 도전에 ‘직역 수호’의 둑을 쌓는 대신 근본적인 대응책을 고민해야 한다. 기존의 제방으론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24 구글의 ‘구조조정 살생부’ 인공지능이 만들었나?

요즘 취업준비생들에게 ‘인공지능(AI)전형’ 대비는 필수다. 통상 서류전형에 이어 AI역량검사와 AI면접이 진행되는데, 사실상 1차 면접과 다름없다. 모니터를 보고 짧게 자기소개를 한 뒤 인·적성검사 같은 객관식 문답을 거쳐 분석력, 집중력, 순발력 등을 테스트하는 각종 게임을 해내야 한다. 뒤이은 심층대화에서는 표정·음성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지원자의 신뢰도, 자신감, 친화력 등을 평가한다. 국내 대기업, 금융사, 공공기관 800여 곳이 이런 전형을 도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취준생들 사이에선 ‘깜깜이 전형’이라는 불만이 높다. AI면접과 역량검사가 어떻게 이뤄지고, 어떤 기준으로 당락을 결정하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한 시민단체가 AI면접을 도입한 공기업을 상대로 정보공개 소송을 냈더니, AI업체에 전형을 맡긴 탓에 해당 기업도 관련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AI가 뭔데 나를 떨어뜨리냐”는 하소연이 이어지고 ‘카메라와 시선을 맞춰 연습하라’, ‘조명을 밝게 하라’ 같은 온갖 팁이 쏟아진다.
▷채용부터 평가, 승진까지 기업 인사(人事)에 이미 AI가 깊숙이 개입했지만 공정성과 평가 기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마존은 일찌감치 AI 채용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가 여성보다 남성 지원자를 선호하는 오류를 발견하고 폐기한 적 있다. AI가 과거 채용 데이터에서 성차별 편견까지 학습한 결과였다. 이제 미국에서는 인사 발령의 최후로 꼽히는 해고 단계에서도 AI가 직원을 골라낼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구글이 직원 1만2000명을 내보냈는데, 전직 직원들 사이에서 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AI 알고리즘이 해고자를 가려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물론 구글은 AI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하다. 채용, 승진 과정에서 AI가 우수 직원과 고성과자를 골라내는 현재의 시스템을 역이용하면 해고 명단을 만드는 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기업의 인사담당자 98%는 올해 감원 직원을 정할 때 알고리즘을 활용할 것이라고 했다.
▷국내 은행들이 영업점 직원 수천 명의 지점 배치와 인사에 AI 알고리즘을 도입했는데, 말 많고 탈 많던 학연·지연 논란이 사라져 직원들 만족도가 높아졌다. 이처럼 AI가 결정한 해고 커트라인이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혼 없는 AI가 사람 일자리까지 박탈할 수 있다는 전망이 달갑지 않다는 반응이 많다. 편향된 데이터로 학습한 AI가 그릇된 해고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 AI 인사의 공정성 시비를 없애고 제대로 인재를 가려내는 것도 결국 AI를 쓰는 인간의 몫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2-25(토)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검사 출신

국회의 탄핵 소추로 직무정지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판사 출신이지만 검사 인맥으로 보수 정부에 들어왔다. 대검 중앙수사부장 출신인 안대희 대법관 밑에서 재판연구관을 한 인연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국민권익위 부위원장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의 충암고 후배라는 인연으로 장관이 됐다. 이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경찰제도개선자문위원회를 만들어 경찰국 신설을 추진했다. 위원장인 황정근 변호사와 함께 경찰국 신설에 총대를 멘 검사 출신 정승윤 부산대 로스쿨 교수는 국민권익위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지금은 경찰제도발전위원회가 자문위를 대체해 경찰대 폐지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 위원장도 검사 출신인 박인환 전 건국대 법대 교수다.
▷윤 대통령은 어제 경찰 국가수사본부장에 정순신 변호사를 임명했다. 경찰 수사의 최고위 자리에 검사 출신을 임명한 것이다. 정 변호사는 윤 대통령이 대검 중수 2과장을 할 때 대검 부대변인을 지냈고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을 할 때 인권감독관으로 같이 근무했다. 문재인 정부 때 검경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경찰 수사지휘권을 포기하는 대신 직접 수사권을 계속 갖겠다고 한 것은 당시 검찰총장이던 윤 대통령이다. 그러나 이제 국수본부장에 측근 검사 출신을 임명함으로써 수사지휘권을 넘어선 깨알 같은 수사 지시가 가능해진 셈이다.
▷윤 정부는 경찰국을 신설해 경찰 인사권과 징계권을 확보하더니 국가수사본부장에 검사 출신을 임명함으로써 경찰 장악의 마침표를 찍었다.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도 대통령의 측근, 복귀할 가능성이 높은 행안부 장관도 국수본부장도 대통령의 측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관할 범위가 남아 있긴 하지만 공수처가 무기력한 수사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대통령 자신은 법으로 정해진 특별감찰관을 아예 임명할 생각도 않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모든 수사는 대통령 측근들이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사는 그 위력을 잘 알면 알수록 더 두려운 것일까. 검찰의 경찰 수사지휘권은 법적으로 사라졌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의 ‘검수완박’법으로 줄어든 검찰 직접 수사 영역을 대통령령을 통해 확대하긴 했으나 그런 확대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검찰이 영장청구권을 독점하는 한 영장 청구가 필요한 정도의 중요 수사를 경찰이 검찰 눈을 피해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검찰이 직접 수사하지도 못하고 지휘하지도 못하는 큰 공백이 생긴 것은 오랫동안 검찰을 통해 모든 수사를 장악했던 정권에는 공포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보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경찰을 장악하려고 하는 정권의 노력이 이해되지 않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2-27(월) 카톡 단톡방 ‘조용히 나가기 법’까지 발의된 나라

“읽지 않은 SNS 메시지 101개, 휴대전화 메시지 254개, 이메일은 4만6252개…. 이 중에서도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그룹 채팅방이다.” 영국의 방송 진행자이자 언론인인 시린 케일은 칼럼에서 와츠앱 같은 SNS의 단체 채팅방을 ‘독재’라고 비판한다. 원치 않는 채팅에 사람을 끌어들인 뒤 감정노동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란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관계의 부담을 지고 나가버릴 용기도 없다”는 고백도 한다. 한국인들이 받는 ‘단톡방 스트레스’가 해외에서도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카카오톡 단톡방을 조용히 나갈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다른 멤버들에게 알리지 않고 탈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최대 2000만 원의 과태료를 내도록 규정해놨다. ‘이런 것까지 법으로 규제하려 하느냐’는 일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발의 단계에서부터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부장님이 계시는 회사 단톡방’부터 시댁 단톡방까지 각자가 억지로 속해 있는 각종 단톡방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구가 그만큼 쌓여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톡방에서 ‘조용히 떠날 권리’는 결국 SNS에서의 프라이버시 문제로 귀결된다. 원치 않은 정보나 논의 참여를 부담 없이 거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채팅방을 나가면 된다지만 ‘○○○님이 나갔습니다’라는 알림이 남은 멤버들에게 불러일으킬 관심과 억측, 실망감, 불만은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기 십상이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와츠앱에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도입하면서 ‘비대면 프라이버시를 대면에서와 같은 수준으로 보호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조용한 탈퇴’는 현재 국내에서는 유료 서비스에만 제공되고 있다.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온라인에서도 보장돼야 할 ‘자유롭게 들고 날 권리’를 돈으로 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반 프로그램에도 적용해 달라”는 사용자들의 요구에도 침묵하던 카카오톡은 법안까지 발의되고 나서야 뒤늦게 서비스 확대를 검토 중이다. 어물쩍대다 결국 법안에 등 떠밀리는 모양새가 됐다.
▷SNS를 이용하는 성인 5명 중 4명은 단톡방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카톡’ 알림에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는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단톡방에서 쏟아지는 정치적 주장이나 과도한 공격, 음담패설 등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이도 적지 않다. ‘카톡 감옥’, ‘카톡 지옥’으로 불리는 사이버 학교폭력도 문제다. 이런 단톡방의 횡포에서 자유롭게 탈출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는 ‘버리고 떠나는 자’라는 꼬리표부터 떼 줘야 한다. 이런 일에 국회까지 나서야 되겠는가.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2-28(화)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41년 논란 끝에 설치된다는데

설악산은 5겹 울타리로 보호받는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천연보호구역이자 자연공원법상 국립공원이다. 1982∼2005년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 백두대간 보호지역 핵심구역으로 지정됐다. 이런 5겹 규제를 뚫고 인공 시설을 설치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오색케이블카 논쟁을 40년 넘게 끌어온 이유다.
▷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이 어제 강원 양양군의 오색케이블카 설치사업 환경영향평가에 조건부 동의 의견을 냈다. 오색리와 대청봉 왼쪽 봉우리인 끝청 하단 사이 3.3㎞ 구간에 1000억 원을 들여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사업이다. 마지막 관문인 행정안전부의 지방재정투자사업 심사 등을 통과하면 연내 착공해 2026년 운영에 들어갈 계획이다. 1970년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직전에 사업 허가가 난 설악동 케이블카(권금성까지 1.1㎞ 구간)에 이은 두 번째 설악산 케이블카다.
▷외설악에 설악동 케이블카를 설치한 후 관광객이 몰려들자 강원도는 1982년 내설악 쪽에 오색케이블카 설치를 추진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회는 “자연경관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두 차례 불허했다. 1995년 지방자치제 도입 후엔 양양군이 사업 주체가 돼 재시동을 걸었다. 설악산을 끼고 있는 군은 양양 속초 고성 인제 4개 군인데, 강원도의 중재 끝에 경제 사정이 어려운 양양군을 사업 주체로 밀었다는 후문이다.
▷강원도는 오색케이블카로 연간 120억 원 이상의 수익이 날 것으로 기대한다. 노인과 장애인도 설악산 경관을 즐길 수 있고, 탐방객들의 등산로 훼손을 막아 생태계 보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반대쪽에선 케이블카 소음으로 멸종위기종인 산양의 서식지가 파괴되고, 상부 정류장에서 대청봉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도 결국 뚫리게 돼 대청봉이 권금성처럼 훼손될 것이라고 반박한다. 격렬한 찬반 논쟁과 수십 차례 행정 처분을 거치며 승인과 불허를 반복했던 사업이 이제 사실상 막바지까지 왔다.
▷강원도는 숙원을 이뤘다고 환호하지만 우려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지난 41년간 상부 정류장 위치는 중청→ 대청봉→ 끝청으로 바뀌어 왔는데 끝청에선 대청봉에 막혀 바다가 거의 안 보인다. 케이블카 설치 후에도 관광객이 기대만큼 오지 않으면 ‘전망의 한계’를 탓하며 대청봉 길을 열어 달라 할 가능성이 높다. 오색케이블카는 1989년 덕유산 케이블카 허가 이후 30여 년 만에 설치되는 국립공원 케이블카다. 지리산 북한산 속리산 등 다른 국립공원 지역들이 설악산만 보고 있다. 조건부 허가인 만큼 설악산 생태 보호를 위한 방안들을 끝까지 챙겨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